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새로운 것이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통해 일어난다 할지라도, 혹은 과거가 멸종하고 파괴된 자리에서 새로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기실 그 새로움은 익숙한 것을 대신하지 않는다. 가령, 가솔린 엔진은 증기기관을 대신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1890년 즈음 벤츠와 다임러가 가솔린 엔진을 개발했을 때도 증기기관은 압도적으로 훌륭했다. 누구도 이에 대해 반론하지 않았다. 시장과 소비자도 그렇게 여겼고, 증기기관을 선택했다. 심지어는 벤츠와 다임러조차 증기기관차를 탔다.

이것은 당연하다. 증기기관과 증기자동차는 열효율이 좋고, 최고 속도가 빨랐으며, 소음과 진동도 적었다. 시장 점유율이 압도적이었고 산업 규모가 커 일자리도 많았다. 반면 당시 가솔린 엔진은 연속운전해서 12시간을 못 버텼고, 언덕을 오를 때면 뒤에서 밀어야만 했다. 최고 속도는 시속 16㎞를 넘지 못해 마차보다 느렸다. 또 연료로서 가솔린은 자주 불이 나거나 폭발했다. 소비자는 외면했다.

그러나 당시의 비밀을 털어놓자면, 내연기관 엔진은 비행기를 날리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훗날의 여객선과 잠수함을 위해서, 우주여행을 위해서 태어났다. 철로 없이도 이동하려고, 그래서 철로를 벗어난 곳을 찾아가는 여행산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도심의 비싼 땅값을 피해 외곽에 집을 짓고 시내로 출퇴근하기 위해서, 공장을 교외로 보내고 그 자리에 광장과 극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컨베이어 벨트로 돌아가는 대량생산 시스템을 위해서, 대부분의 근로자를 중산층으로 만들기 위해서, 창업과 창직을 위해서였다. 가솔린 엔진이 태어난 이유 중 단 한 개도 증기기관이 밉거나, 대신하거나 없애려던 것이 아니었다.

태양광도 그렇다. 태양광이 화력발전과 원자력발전을 미워하거나 대신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아니다. 태양광은 전선 없이도 문명을 비추기 위해 만들어졌다. 외진 곳의 가로등을 위해서, 태풍과 지진의 강력한 파괴를 극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심지어는 인공위성과 우주여행 비용을 값싸게 만들기 위해서 태어났다. 발전기와 전선 없이도 원하는 모든 것, 모든 이와 연결할 수 있기 위해서다. 미세먼지 없는 하늘을 위해서, 풍요로운 에너지 삶을 위해서다. 온실가스와의 전쟁을 끝내고, 에너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루고 동북아에 평화공동체가 구현된다면 이도 태양광이 부양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땅의 태양광은 아직도 혼란 속에 있을까? 그것은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농지와 임야는 막혀 있으며, 물과 건물도 녹록지 않다. 그런데 공공건물과 정부기관마저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으니 정부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재생에너지 확대 의지가 진심인지를. 진정이라면 이제라도 기업과 시장에 그린 라이트를 켜줘야 한다. 유휴부지 활용 도시형 태양광은 그린 라이트로 제격이다.

특히 공공기관 태양광이 중요한 축이다. 국민생활과 밀접한 공공기관에 태양광 보급을 확산하면 국민 수용성을 향상시키고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기업과 시장에 보여줄 수 있다. 우선 소방서, 경찰서, 우체국, 고속도로 등 공공건물 유휴부지부터 태양광 설치를 적극적으로 시작해야 하며, 나아가 지자체와 마트·백화점·주유소 등의 민간시설로도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정도로 에너지 전환의 앞길을 환하게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제시한 청사진을 실제로 이룰 수 있다는 신호등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구가 집중된 도심 시설에 설치하면 태양광의 상징성을 각인시키고 수용성을 향상시키는 효과도 높을 것이다. 공공기관 태양광 사업은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재생에너지 3020 정책 추진의 강력한 의지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홍준희 가천대학교 에너지IT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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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지내고 남은 대추를 가져온다. 대개 닭 삶아 먹을 때 몇 알 던져 넣는 용도다. 없으면 아쉽지만 일부러 사러 나갈 일은 드문 대추. 햇대추를 맛볼 때가 지금이다. 풋대추에 가깝지만 대체로 추석 차례에 올릴 용도로 나온다. 요즘은 ‘사과대추’라 하여 아기 주먹만 한 대추가 과일용으로 나온다. 그래도 여전히 일상에서 많이 찾는 과일은 아니다. 

대추는 분류상 농산물이 아니라 임산물이다. 임산물의 대표적인 품목은 목재이고, 단기소득 임산물 중에는 버섯과 산나물 등이 있다. 그중 밤, 감, 잣, 호두, 대추가 수실류 임산물의 대표선수다. 뜻 그대로 단기로 소득을 올리는 과실이다. 산림청 주도로 임업 및 산촌진흥촉진을 목적으로 단기소득임산물의 경우 작목반을 꾸리거나 저장, 가공시설과 유통을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체계가 잘 갖춰져 있는 것 같진 않다. 산이 많은 한국에서는 농촌과 산촌의 구분이 뚜렷하다기보다는 ‘산골’에 살면서 농사도 짓고, 철 따라 나물이나 버섯도 따고 밤나무나 대추나무도 몇 주 가꾼다. 전업화가 이루어진 영역은 아니다.

명절을 맞아 대추경락가가 궁금해서 농산물유통정보 사이트에 접속해도 찾아지지 않아 의아해서 보니 임산물가격정보에 접속해서 따로 알아봐야 하는데 가격 추이가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는다. 이유를 찾아보니 임산물이란 것이 워낙 철에 따라 수요가 몰리기도 하고 유통체계가 잡히지 않아서다. 따라서 농산물 경매 단계까지도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다. 대추 최대 주산지인 충북 보은군과 경북 경산시 같은 몇몇 주산지에서만 계통출하가 이루어지는 정도이고 알음알음 알아서 팔고 있는 셈이다. 오픈마켓에 들어가서 햇대추 가격을 찾아보니 값도 제각각이다. 농가에 문의해 보니 해걸이로 적게 나오면 비싸고 많이 나오면 싸다며 소득에 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신다.

통계로 보아도 지난 몇 년 대추 생산량이 많이 줄었는데도 가격은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대추를 소비할 사람이 많이 줄어서이다. 제상에 ‘조율이시’로 소환되고 떡집이나 가공식품에 웃기로 올라가는 것은 죄다 외국산이다. 하긴 차례상 물리고 햇대추라고 몇 알 씹어보는 건 나뿐이고 아이들에게 먹어보라 하니 도리질이다. 건대추면 닭 삶을 때라도 써먹을 텐데 풋대추는 몇 알 먹고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볼품없이 메말라 음식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곤 한다.

명절 풍경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차례나 제사도 많이 사라지는 추세다. 차례상도 생전에 고인이 즐겼던 음식을 간소하게 차려 기리는 마음이 더 중하다고 하는데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면 대추의 운명은 어찌 될까. ‘제사 없으면 과수 농가는 망한다’는 농민들의 농담 같은 푸념도 영 근거가 없진 않다. 명절 전후로 과일 수요가 몰려 억지로 크게 키우느라 부작용도 있지만 또 그나마도 아니면 제값 받고 팔아볼 기회마저 잃는다.

아파트 정원수로 심어 놓은 대추나무를 신기한 듯 바라보니 경비 아저씨가 외려 신기한 듯 날 쳐다본다. 대추가 열리든 말든 노인들 말고는 새댁들은 거들떠도 안 본다며 말이다. 정원수 소독을 했으니 절대 먹지 말라는 식품안전지도를 받는 동안에도 난 진심 대추나무 걱정을 했다. 우리 아이들은 저 대추나무를 알아볼 수 있을까. 대추를 먹어본 기억이 있어야 훗날에도 먹을 텐데. 이유 없이 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소멸의 이유가 서글플 뿐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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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대추

우리 사회 에너지전환은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더디기만 하다. 거대 발전시설 입지가 야기했던 사회갈등이 최근엔 태양광시설 설치 예정지역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환경보건영향을 이유로 지역 주민이 태양광 패널 설치를 반대하는 해외사례를 듣지 못했기에 당혹스럽다. 일부 산림 훼손이 심한 경우는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최근엔 잘못된 정보로 혐오시설인 양 반대하는 일도 없지 않다.

대표적 사례가 서울대공원 주차장에 들어설 태양광 시설에 대한 반대다. 서울에너지공사는 서울대공원 정문 주차장 부지에 약 10㎿ 규모의 태양광을 ‘제2호 태양광 시민펀드’ 방식으로 설치할 계획이다. 그런데 얼마 전 사업설명회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일부 과천시민들의 반대 때문이다. 해당시설이 도시미관을 해치고 카드뮴과 납 같은 유해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데다 서울시 소유 태양광 시설을 과천시민 돈으로 과천에 설치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주차장에 설치하는 태양광 패널이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주장은 처음 듣는다. 주민 거주 지역으로부터 300m 이상 떨어져 있고 이미 콘크리트로 포장된 곳인데 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주차장 태양광 설치 사례는 부지기수다. 생각해보라. 넓은 공간에 햇빛을 가리는 방해물이 없으니 다른 데보다 전기 생산에 유리하다. 여름엔 주차 차량 내부가 뙤약볕으로 데워지는 걸 막을 수 있고 패널이 차양막이 되어 보행자들에겐 그늘이 된다. 비가 올 땐 승하차 시 비를 피할 수 있고 겨울엔 폭설이나 바람막이 구실도 한다. 그래서 주차장 태양광 발전소가 쑥쑥 들어서고 있다. 다른 나라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대형마트나 고속도로 휴게소, 야구장, 구청, 공장 등의 주차장에 태양광 발전 시설이 여럿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설치 예정 장소에 직접 가보았다. 그곳에 태양광 패널이 설치되면 앞서 말한 편익에 더해, 규모가 커서 방문객인 아이와 시민들에게 생생한 에너지전환 교육 현장이 될 법했다.

주차장 옆에는 카드뮴과 납이 들어 있는 죽음의 시설이라며 해골을 그려 놓은 현수막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보급된 태양광 패널엔 정부 규제로 카드뮴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셀과 전선 연결을 위해 납이 소량 사용되긴 하지만 회수해서 재사용하는 데다 납은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컴퓨터에도 들어 있다. 문제가 될 수 없다.

시민펀드 방식을, 과천시민 돈으로 전기를 만들어 과천시민에게 팔겠다는 발상으로 오해하고 수익률이 낮아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사실은 이렇다. 사업방식으로 제안된 시민펀드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 국민 대상이다. 과천시민으로 제한할 수 없다. 태양광 생산전력은 20년간 정부가 장기고정가격으로 구매해주기에 수익률이 시중금리보다 높아 과천시민을 배려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미 2015년 서울시는 지하철 기지 4개소에 총 4.24㎿ 규모 태양광 설비를 전 국민 대상의 제1호 태양광 시민펀드사업으로 추진해서 4.18%의 수익을 가입시민에게 돌려준 경험이 있다.

과천시는 과천시민이 소비하는 전력량의 0.1%도 생산하지 않고 있다. 전기 소비량 거의 전부를 다른 지역에서 가져오고 있다. 과천시의 매월 가구당 평균 전력소비량은 234.9kWh로 전국 평균(221kWh)은 물론 서울시 평균(228kWh)보다 높다. 석탄이나 원자력 발전은 미세먼지나 사고위험이 수반되어 해당 지역주민은 어려움을 겪는다.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전기를 쓰는 과천시민들이 이런 문제에 무감각해서는 곤란하다. 과천시민들도 이제 내 앞마당에서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해야 할 때다. 서울대공원 주차장에 태양광 발전소가 세워지면 과천시 전력 자급률은 3.3%로 높아진다. 서울대공원 주차장이 그 출발이 되면 어떨까?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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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만년필이 가장 주목받은 장면은 1945년 9월2일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이다. 이날 도쿄만에 떠 있는 미 해군 미주리 함상의 녹색 테이블 위에서는 만년필의 향연이 펼쳐졌다. 먼저 일본 측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우메즈 요시지로 사령관이 서명에 나섰다. 두 사람은 데스크 펜을 외면하고 만년필로 서명했다. 이어 연합군 대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한 움큼 꺼내더니 두 권의 항복문서에 사인해나갔다. 처음 사용한 두 자루는 뒤에 서 있던 미군과 영국군 장군에게 건넸다. 이어 두 개의 펜으로 추가 서명한 뒤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파커사의 듀오폴드 오렌지 만년필을 집어들었다. 작가인 아내 진 맥아더가 20년 동안 사용한 펜을 빌려와 서명식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선글라스와 파이프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 줄 알았던 맥아더다운 연출이었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왼쪽 책상에 앉은 이가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이고, 오른쪽 책상에 앉은 이가 북한.중국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만년필이 조인식에 쓰인 것은 편의성 덕분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인 서명에 쓰이다보니 펜에 상징성이 부여됐다. 시게미쓰 외상은 항복문서에 미제 만년필로 서명했는데 직후에 불태웠다고 한다. 항복에 대한 일본인들의 정서가 투영된 미확인 전언이다. 파커사가 태평양전쟁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맥아더의 듀오필드 만년필을 복제한 것도 이런 상징성에 기댄 흥행술이다. 1997년 임창렬 부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때 몽블랑으로 서명했다가 구설에 오른 것도 마찬가지다. 2016년 콜롬비아 내전 종식 서명식에 총알과 탄피를 녹여 만든 펜이 쓰인 것처럼 지금도 특별한 의미를 담은 펜들이 제작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조인식에 사용한 펜을 두고 말이 많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몽블랑으로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했는데 문 대통령은 문구점에서 파는 네임펜을 썼다는 것이다. 엊그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자유무역협정에 흔하디흔한 유성펜으로 서명한 뒤 이를 문 대통령에게 건넨 것을 두고는 외교결례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디지털시대에 펜 종류를 가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 서명에 특별한 의미를 담은 펜을 써 길이 남길 필요는 있다. 남북통일 협정문을 평범한 펜으로 서명한다면 허전할 것 같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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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 동안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 회의록을 국회 홈페이지에서 내려 받아 읽어봤다. 유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에 대한 야당의 추궁은 공직 후보자의 자질과 자격을 철저하게 검증하기 위해 불가피했다. 그러나 교육 현안에 대한 식견의 폭과 깊이를 따짐으로써 후보자의 경륜과 역량을 저울질하는 작업은 미흡했다. 현 정부 첫 교육부 장관이 대학입시를 둘러싼 논란 등으로 좌절한 틈을 활용한 정치 공세가 두드러진 형국이었다.

한 사람의 교육부 장관이 난마처럼 뒤엉킨 교육 문제를 모두 풀어갈 수는 없다. 국회 역시 장관 못지않게 책임 있는 자세로 제 역할을 해야 옳다. 물론 국회의원들이 청문회장에서 내놓은 정책 제안 중에는 차기 장관이 구체화해야 할 좋은 것들이 많다. 그러나 초·중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다양한 과제를 하나로 꿰는 긴 호흡의 일관된 개혁에 맞는 큰 그림을 정부와 국회, 그리고 국회의 여야가 함께 만드는 일에는 크게 못 미쳤다. 대학입시 개편을 놓고도 정책의 혼선을 꾸짖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개혁의 장기적 방향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은 뒷전이었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가 19일 국회 교육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야당 위원의 의사진행 발언 도중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다. 권호욱 기자

교육부 개혁이라는 절실한 과제에 대해 여당의 박용진 의원은 교육부가 국민권익위원회의 종합청렴도 조사에서 2015년, 2016년에 연속 꼴찌, 2017년은 밑에서 5위, 국가공무원 부처별 범죄도 2015년 5위, 2016년 2위, 2017년 3위임을 지적했다. 박 의원은 시·도 교육청부터 개별 대학과 초·중·고교까지 광범위하고 막강한 감사 권한을 가진 교육부를 뜯어고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감독원처럼 외부 전문가를 감사 인력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제안했다.

하지만 유은혜 후보자의 답변은 청문회라는 어려운 자리임을 감안해도 밋밋한 원칙적 입장 표명에 그쳤다. 이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교육부의 감사 역량은 전문성도 부족하고 비리를 막기 힘들어 변호사, 회계사 등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상시 감사체제를 갖추자고 주장해왔다. ‘촛불정부’의 사회부총리 후보자라면 이러한 감사체제를 확약하는 정도의 소신은 있어야 했다.

외부 전문가의 상시 감사제 도입으로 사학비리 척결이 본격화되지 않으면, 예를 들어 고등교육 주요 대선공약인 공영형 사립대는 성공하기 어렵다. 학령인구가 급감하는 터에 비리와 부실로 멍든 학교에 국민 세금을 쓰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공영형 사립대의 시범 사업 예산 약 800억원은 전액 삭감되고 말았다. 한국 대학의 80%에 가까운 사학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핵심 공약이 첫걸음도 떼기 전에 좌초 위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예산이 국회 심의 과정에서 살아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를 염려한 탓인지 야당인 자유한국당 이군현 의원은 공영형 사립대라는 발상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나며, 정권이 공익 이사를 통해 사학 운영에 간섭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엿보인다는 판에 박힌 공격을 되풀이했다. 사학에 만연한 비리와 부패에 애써 눈을 감는 수구정당의 면모는 한 치도 변하지 않고 있다.

공영형 사립대 시범 사업의 선정 기준은 첫째,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 아닌 지방대학, 둘째, 대학 민주화를 위해 싸운 역사와 성과, 셋째, 이사회·평의원회·교수회 등의 정상화라는 세 가지가 되어야 옳다. 특히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교수진이 단결하여 자신의 급여를 깎는 희생까지 있었다면 자격이 충분하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내년에 몇몇 대학이 공영형 사립대로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학에서도 대학 민주화의 물결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교육부 감사 제도의 혁신은 이러한 시대적 대세에 부응하는 마중물이 된다. 공영형 사립대 사업이 순항하며 확대되면 대학 구조조정도 원만하게 진행될 길이 열린다.

유은혜 후보자는 교육현장 경험이 없고, 교육개혁의 깊이 있는 청사진을 감당할 의정활동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청문회에서 나왔다. 그러나 유망한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다음 총선 출마 시한까지만 자리를 지킬 장관이라는 비아냥도 나왔지만, 현안의 경중을 가려서 원칙 있게 대처를 한다면 1년여 기간도 짧지 않다. 물론 관료들의 무능과 훼방을 뚫고 현장의 여론에 다가가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소신있는 자세로 턱없이 부족한 고등교육 예산 증액을 공언하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다면, 누가 장관을 이어받더라도 퇴행하지 않을 개혁의 토대를 세울 수 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에서 분리되어 새로 생긴 교육위가 제 역할을 해야 이런 성공이 가능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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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차원을 여는 이야기>. 청년의 삶을 바꾸려는 서울시 청년의회 슬로건이다. 청년의회는 서울에 거주하는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한 정책 제안의 공간이다. 올해로 벌써 4번째였다. 그동안 서울지역 청년들은 청년의회를 통해 활동공간이나 청년수당 그리고 주거와 일자리 정책 등을 제안했다.

2018년 청년의회에서는 어떤 정책들이 제시되는지 궁금했다. “여러분들은 버스 안의 휠체어를 본 적이 있나요?” “우리가 독립할 수 있는 집은 없다!” “안심을 넘어 평등으로” “진학하지 않아도 괜찮아” “인서울과 탈서울” 등과 같은 10가지 정책을 제안했다. 청년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과거의 주택 공급정책에 안타까움을 표현했고, 청년자치 공간을 마구마구 홍보해달라고 한다.

하나같이 현실적이고 필요한 정책이었다. 대부분 법제도를 고칠 필요가 없었다. 정책의지만으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애인 저상버스 이용 문제는 공감을 이끌기 충분했다. 우리는 일반버스와 저상버스를 구분해서 탄 적이 있을까. 그러나 장애인에게는 중요한 이동권이다. 규칙적이지 않은 배차 시스템, 마지막 저상버스를 놓칠 경우 일반버스 접근 불가, 장애인 승차 의사표시(알림시스템) 등 꼼꼼히 살피지 않으면 체념하기 쉬운 내용들이다.

이러한 정책을 만들기 위해 13개 분과별로 4개월 동안 80여차례 회의를 했다고 한다. 무엇이 이러한 열정과 관심을 만들게 했을까. 한 청년에게 물어보니, “바로 자신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많이 전달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안전한 공간’이라는 말에는 미안함이 들었다. 기성세대들에게 청년들의 주장은 ‘불평불만’의 목소리였고, 치기어린 애들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런데 청년의회와 같은 곳에서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고, 존중받고 있다는 경험이 그들에게 열정을 불러온 것이다.

혹자는 예전과 달리 우리 사회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이와 서열의 권위주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획일성은 서울의 2030청년들이 가치관 갈등으로 꼽은 세 가지다. 권위주의가 가치관 갈등의 1위(5점 만점 4.4점)라고 하니 마음이 씁쓸하다. 같은 청년이라도 여성과 남성은 가치관 충돌이 두 배 이상 차이가 있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청년들은 앞으로 인권, 다양성, 탈권위, 공정, 성평등, 신뢰, 안전, 환경들을 우리 사회가 핵심적 가치로 추구해야 할 의제로 꼽았다.

4년의 시간 동안 청년들은 서울시라는 지방정부 내에 ‘자치정부’라는 실행력을 갖춘 집행기구를 만들기까지 노력한 것 같다. 서울시는 청년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2019년부터 정책수립과 예산집행에 청년이 직접 참여하는 모델을 실현한다. 우선 시장 직속으로 청년청을 신설하고, 상설 거버넌스 조직으로 청년의회는 확대될 것 같다. 연 500억원 규모의 예산과 사업도 청년자율예산제를 통해 집행할 예정이다. 특히 서울시 각종 조례 위원회에 청년들이 15%까지 참여하도록 한 것은 세대 불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청년들은 하나같이 행정조직의 느림을 지적한다. ‘나도 고발한다’(#MeToo)나 ‘디지털 성범죄’ 등 새로운 사회 이슈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제도와 규칙 때문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함도 토로한다. 국가기구나 행정의 ‘지체된 적응’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치정부 준비단은 앞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조응하는 의제와 사업을 위해 다양한 청년들을 만난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청년의 삶은 청년들이 가장 잘 알기에 의미 있는 정책들을 기대해본다.

2002년 독일에서는 전 세계 최연소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 당시 19세의 독일 녹색당 당원인 안나 뤼어만은 재선에 성공한 이후 한국에도 다녀간 적이 있다. 대학 강연에서의 발언은 아직도 인상적이다. 그대 변화의 꿈에 참여하라! 청년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이제 서울만이 아니라 경기, 광주, 대구, 부산, 제주 등에서도 다른 차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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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의 비공개 예산정보 무단 유출 의혹을 둘러싼 공방이 점입가경이다. 무단 유출 논란에 더해 해당 자료 공개의 불법 여부를 놓고 기획재정부와 심 의원, 심 의원과 청와대, 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 사이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다. 기재부는 지난 17일 심 의원 보좌진이 한국재정정보원의 재정분석시스템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열람하고 청와대 등 37개 기관의 예산정보 수십만건을 내려받아 불법 유출했다며, 정보통신망법·전자정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예산정보 반환’도 요청했다. 이에 심 의원은 “기재부가 승인해준 아이디로 정상적 방법을 통해 재정정보를 내려받았다”며 김동연 부총리 등을 무고 혐의로 맞고소했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27일 국회에서 진행된 긴급 의원총회에서 눈을 감고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기재부와 심 의원의 주장이 상반되는 만큼 수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번 공방은 국회의원 보좌진이 해킹 등의 불법 수단을 동원해 재정정보를 빼돌린 것인지, 정부 시스템이 허술한 보안 속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것인지 그 여부를 가리면 정리될 일이다. 검찰이 철저한 수사로 조속히 진실을 밝혀내길 바란다.

심 의원은 27일 청와대의 업무추진비 내역을 공개하며 유용 의혹을 제기했다. 심야 및 주말 등 업무추진비를 사용할 수 없는 시간에 2억4500만원가량을 부적절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추측성 주장”이라고 반박했고, 기재부는 비공개 예산정보를 제3자에게 공개했다며 심 의원을 검찰에 추가 고발했다. 무엇보다 예산정보 유출에 대한 불법 여부가 판명되지 않는 상황에서 심 의원이 자료 반환을 거부한 채 일방적으로 자료를 공개하며 정치적 공세에 활용한 것은 유감이다. 한국당과 민주당이 이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검찰이 신속한 수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는 게 급선무이고, 그 이후 책임을 따져도 늦지 않다.

이와 별개로 업무추진비 유용 등 편법적인 예산 사용 의혹에 대해서는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 이참에 업무추진비 집행 실태를 정밀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기재부는 이날 전체 부처의 업무추진비 집행 실태 일체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요청하고, 문제가 있으면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장 청와대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둘러싸고 심 의원과 청와대가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는 만큼, 이것부터 감사를 통해서라도 사실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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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등 삼성의 전·현 임직원들이 자회사 삼성전자서비스의 노동조합 와해 공작에 개입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서울중앙지검은 27일 이 의장과 박상범 전 삼성전자서비스 대표 등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앞서 구속 기소된 전 삼성전자 임원 등을 합치면 노조 와해 의혹과 관련해 법정에 서게 된 인사는 30여명에 이른다. 검찰은 그룹 미래전략실을 컨트롤타워로 해 일사불란하게 실행된 노조 와해 공작을 ‘전사적 역량이 동원된 조직범죄’로 규정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기업이 노조를 탄압하겠다고 ‘전사적 역량’을 끌어모았다니 참담하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9월28일 (출처:경향신문DB)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삼성은 2013년 삼성전자서비스에 노조가 설립되자 일명 ‘그린화작업’으로 불리는 와해 전략을 세워 시행했다고 한다. 공작에 동원한 수법은 전방위적이었다. 노조활동이 활발한 협력업체는 ‘위장폐업’을 유도하고 조합원들의 재취업을 방해했다. ‘심성 관리’를 빙자한 조합원 개별 면담을 통해 탈퇴를 종용하고, 채무관계와 임신 여부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토대로 회유 작업을 벌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합원 염호석씨의 장례가 노동조합장으로 치러지는 일을 막기 위해 염씨 아버지에게 6억8000만원을 건네기도 했다. 삼성은 협력업체뿐 아니라 한국경영자총협회와 경찰 등 외부세력까지 동원했다.

삼성은 지난 4월 90여개 협력업체 직원들을 직접고용하고 노조활동도 보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80년간 고수해온 ‘무노조 경영’의 사실상 폐기 선언이었다. 그러나 거대기업의 체질이 ‘선언’만으로 바뀔 리 없다.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이 기소됐는데도 공식 입장 표명조차 없는 걸 보면 삼성이 과연 구태와 결별할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노동기본권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할 곳은 삼성만이 아니다. 포스코에서도 최근 출범한 새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포스코지회)를 무력화하려 한 내부 문건이 발견돼 파장이 커지고 있다. 헌법은 노동자가 노동조건 향상을 위해 자주적으로 노조를 만들어 단체교섭·단체행동을 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모든 사용자가 노조를 파괴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대착오적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와 검경 등 수사기관의 철저한 감독·감시가 절실함은 더 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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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가 추석연휴 직전인 지난 20일 예정에 없던 보도자료를 내놨다. 전시인 양 제목부터 비장하다. ‘40~50대 가장의 마지막 피난처 건설현장 강력단속 - 불법 체류·취업 외국인 대책 발표.’

법무부는 자료에서 “건설업 노동시장에 불법체류자들의 취업이 증가함에 따라 40~50대 국민의 단순노무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며 “내국인 건설업 근로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단계까지 이르러 특별대책을 발표하게 됐다”고 밝혔다. “건설업 불법취업자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적용해 첫 적발 시에도 바로 출국조치하겠다”며 “(소극적) 고용창출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지난달 취업자 수가 전년 동기 대비 3000명 증가하는 데 그치며 ‘고용대란’ 비판이 이어지고 이번 달엔 마이너스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법무부도 덩달아 ‘일자리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 대책이 ‘불법체류 외국인 강제추방’이라니. 난국을 이방인 탓으로 돌리는 편협한 당국의 인식에서 사회 불안기면 슬며시 고개를 들던 파시즘이 엿보이는 건 망상일까?

불법체류자로 이득을 얻는 사람은 따로 있다. 노동시장에선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 원청부터 하청에 재하청을 수차례 거쳐 일용직 노동자까지 철저히 수직구조화한 건설업에서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착취 구조의 말단인 건설 노동자를 조금이라도 값싸게 부리길 원한다. 중국동포가 선호되다가 최근엔 동남아시아 출신 불법체류자가 각광받는다. 한국인 절반값이면 부릴 수 있고, 산업재해나 임금체불 등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신분상 약점 때문이다. 건설업계에서는 “외국인 없으면 현장이 안 돌아간다”며 아우성이다.

정부가 건설현장의 불법 하도급과 산재·임금체불 문제를 원청에까지 책임을 묻는 등 강력한 조치에 나선다면 불법체류자를 고용하려는 기업이 나올까? 법무부 본연의 임무는 ‘고용창출’보다는 건설현장의 불법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2013~2017년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연보에 나타난 ‘출입국 사범 처리현황’을 대륙별로 보면, 아시아주 출신의 강제퇴거(강제출국)율이 17~20%로 통계 집계 이후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반면 미국, 캐나다 등 북미와 오세아니아주 출신은 매년 1% 안팎에 그쳤다. 정부가 법을 어긴 모든 외국인에게 똑같이 ‘강력대응’하지는 않는다는 합리적 의심을 해봐도 좋을 듯하다.

<정대연 | 사회부 ho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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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품격>을 썼지만 행복한 사람이군요?” 스태프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패널로 출연 중인 한 방송사 프로그램의 그날 주제는 ‘행복’이었다. 사전에 패널들의 행복지수를 알아봤고 내 점수는 꽤 높은 편이었는데, 그게 뜻밖이었나 보다. ‘불만’이라는 단어가 행복과 거리 먼 말맛을 가졌음을 새삼 곱씹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 역시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갈 사람이다. 인생이라는 시간을 떠올리면 숱한 추억들이 방울방울 여물어 바구니 같은 것에 소복이 쌓여있는 모양을 상상하게 된다. 그 ‘추억방울’들이 아름다운 색채이길 바라며 이를 위해 힘쓴다. 노을 지는 풍경, 향기로운 바람, 부드러운 촉감, 신선한 재료로 만든 식감 좋은 음식 등 좋은 기분을 갖게 해주는 것과 접촉하고, 안전하게 외부와 분리된 감각을 주며 먹고 씻고 잘 수 있는 ‘나만의 방’을 확보하고, 반복적 스트레스와 고통의 요인은 치워버리려 노력한다. 즐거운 순간을 함께하고, 때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지인과 친구의 존재도 소중하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행복을 지키기 어렵다. 사회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직 생존경쟁만이 있는 곳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논리와 이성,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여유, 윤리적 성찰 따위는 사치로 느껴지고, 오직 살아남는 데 온 정신과 역량이 집중되기에 서로에게 잔인하게, 또는 무신경하게 상처 입히는 순간이 잦다. 어떻게든 피하고자 노력해봤자 도처에 널렸기에 지뢰 밟듯 폭탄을 터뜨리거나 그 파편에 상처입기 십상이다. 너무나 사회에 불만이 없고 문제의식을 갖지 못할 경우, 오히려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보자.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학습한 규범이나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추석을 비롯한 명절은 전국적으로 이런 일이 창궐하는 때다. 주로 결혼, 출산, 육아와 관련해 “그 나이에는 당연히 뭐뭐 해야 하지 않냐”는 압력들이다. 나이뿐 아니라 성별, 학력,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과 억압도 횡행한다. 각자 성장환경과 삶의 조건이 다르고 형성된 정체성과 지향성도 다른데, 자기답게 사는 게 제일 속 편하고 좋을 텐데 왜 하나의 사회규범을 들이대는 걸까?

하나의 기준만 있다 생각하고, 모두가 그 기준을 따라야 한다 믿으며 스스로와 타인을 그 기준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 대화의 뒷맛을 쓰게 한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속성이었다. 나란 존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묻는 게 아닌, 규정하고 ‘평가’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음을 열심히 답해준 뒤에야 알게 될 때가 많았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하나로 줄 세워 급 따지며 차별하고, 몇 가지 단어로 사람을 납작하게 규정해 떠들어대는 이들에게 많은 정보를 줬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꺼림칙한 느낌을 남겼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느낌을 준 것은 아닐지 돌아보게 했다.

서열 매기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 중 몇몇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기본 권리가 주어지는 일에 내심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보편적 복지를 한사코 거부하는 정책 입안자나 행정가들도 혹시 그럴까봐 걱정이다.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이탈한 이들은 불안감과 모멸감을 견디는 일상을 갖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까봐.

그렇게나 서열을 좋아하시니 그와 같은 결로 말해보자. 한국 정도 경제규모의 ‘선진국’에서 개인이 연거푸 불운을 겪으면 홈리스가 되기 쉽다는 것, 가정 내 중증 환자가 있으면 풍비박산을 불러오는 경제적 위기를 겪는다는 것은 부끄러울 일이다. 자원이 불합리하게 나뉘고 있는 지금 현실은 분명 개선될 여지가 있다.

올해도 추석연휴가 끝나자 ‘시달린 자’들의 증언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문화, 정책, 일상의 정치까지 아우르는 사회적 불만이다. 이런 불만들이 사회를 개선하는 자료가 되기를, 변화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일상을 불안 없이 지킬 수 있기를.

또한 불만 있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혹시라도 있었다면 이제 거둬주시길 바란다. 사회에 불만을 제기하는 실천과 개인의 행복을 챙기는 일상은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다.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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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지도예찬: 조선지도 500년, 공간·시간·인간의 이야기’ 특별전을 관람했다. 박물관에 따르면 조선왕조 500년을 풍미했던 조선지도는 오늘날 동아시아의 지리학 연구와 지도 제작 분야에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특별전에는 ‘동국대지도’ ‘대동여지도’ 등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요 소장품 외에도 국내 20여개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중요 지도와 지리지가 전시돼 있다.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는 공간을 주제로 한 지도를 만날 수 있다. 태종 2년(1402년) 5월 제작해 동아시아 최초의 세계지도로 평가받고, 역사학자 제리 브로턴 영국 퀸메리대학교 교수가 쓴 <욕망하는 지도: 12개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의 한 장을 당당히 차지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다만, 원본을 소실하고 사본조차 일본이 보관하고 있는 탓에 복제본의 일부만 전시실이 아닌 도록에 수록한 점은 아쉽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조선 후기 화가 윤두서가 1710년경 만든 우리나라 전국지도인 ‘동국여지지도’는 대폭 증가한 지리 정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다양한 기호를 사용했고, 지도의 우측 여백에 범례를 두어 기호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제작했다. 범례는 현대식 지도에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중요한 도구인데, 이 지도는 현존 지도 중 범례를 적용한 가장 이른 사례이다.

시간을 주제로 한 전시실에서 흥미로운 지도는 김수홍이 현종 14년(1673년)에 만든 ‘조선팔도고금총람도’이다. 우리나라 전국의 지리 정보에 더하여 각지의 주요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병기한 한 장짜리 목판본 소축척 전국지도다. 서울을 축척과 무관하게 강조하여 상세 지리 정보를 부각시킨 지도로, 중요 정보를 기준으로 변형시킨 현대식 카토그램과 매우 비슷하다. 중요한 자연지명이나 인문지명을 기재하던 당시 관행에서 벗어나 해당 지역의 중요 인물을 선택해 기재했다. 예를 들어 한산도에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곳이라는 설명을 담았다.

특별전의 하이라이트는 김정호가 제작한 전통 지도의 결정판 ‘대동여지도’ 원본 전체를 가로 4m와 세로 7m의 평면에 구현한 것이다. 이전 지도가 행정과 국방 정보에 치중했다면, ‘대동여지도’는 경제와 교통 등 다양한 정보를 수록했고, 특히 도로에는 10리마다 점을 찍어 사용자가 직접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했다.

특별전에는 소매에 넣을 수 있도록 작게 만든 지도책인 ‘수진본 지도’, 서울에서 충청도 음성까지의 노정을 그린 지도인 ‘설성이정표’, 전라도에 속한 고을 간 거리 정보를 수록한 표와 지도인 ‘호남도리표’ 등을 전시해 지도의 근대적 발전과 활용을 알려주고 있다. 제2전시실은 현대적 지도 제작 방법과 앞으로 개발될 새로운 지도에 대한 소개와 함께, 증강현실을 지원하는 앱을 다운로드해 관람객이 인터랙티브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만들었다.

미래 지도는 과거 지도와 어떻게 다를까? 먼저 제작 방식이 획기적으로 바뀔 것이다. 현재는 정밀한 항공 사진을 바탕으로 지리 정보를 정리하고 지역을 탐방해 정보를 수정하여 컴퓨터에 입력해 완성하는 방식이다. 해상도가 높은 항공 사진이라도 항공기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나 고층 건물 내부나 지하 시설 등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 구글은 스트리트뷰를 촬영하는 차량에 미세먼지 측정 장비를 장착해 미세먼지 농도 지도를 제작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특정 지역의 경우 사용자가 드론을 띄워 실시간으로 지도를 제작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라이브드론맵도 이미 등장했다.

지도 제작 기간도 이용자의 편집과 수정이 실시간으로 반영돼 단축될 것이다. 2005년 영국의 비영리기구 오픈스트리트맵재단이 운영하는 오픈 소스 방식의 참여형 지도 서비스인 오픈스트리트맵은 단순 정보 입력은 물론 위성항법장치(GPS)를 통해 사용자의 현재 위치 정보를 기록하고 추가할 수 있다. 오픈스트리트맵은 지진이나 태풍과 같은 재난 현장에서 구조활동에 활용됐고, 한국의 독특한 지도 관련 법률로 인해 포켓몬고나 웨이즈와 같은 앱에서도 채택해 사용 중이다. 2015년 메르스 유행 당시 정부 당국의 부족한 정보 제공에 답답함을 느낀 시민은 온라인 지도를 이용해 발병 지역과 병원을 확인할 수 있는 메르스 확산 지도를 만들어 공개하기도 했다.

지도 제작 내용과 분석도 기술 발전의 속도에 발맞춰 발전할 것이다. 사물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실내 공간과 지하 시설에 대한 지도 작성을 통해 공간 정보가 통합될 것이다. 탐사구조 로봇은 지하 시설이나 재난 시 붕괴된 공간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효과적으로 구조를 수행할 것이다. 대장내시경 로봇은 사람의 소화기관 상태를 3차원으로 정교하게 재현하고 필요한 경우 용종 절제술과 같은 치료를 수행할 것이다. 실시간으로 통합된 막대한 양의 데이터는 빅데이터 처리 기법으로 분석하고 집계해 웹 기반 정보 제공과 협력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1569년 메르카토르는 세계를 하나의 원기둥으로 나타낸 투영 도법으로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메르카토르는 유럽인이었으므로 자신이 제작한 세계지도에서 유럽을 한가운데에 두었다. 이 지도로 지적 연구뿐만 아니라 무역의 기회도 확장되어 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기록할 수 있었다. 2018년 일곱 살 아이는 지도예찬 특별전을 관람하고 기념품으로 사온 지구본과 구글어스 앱을 이용해 세계 어느 곳이나 중심에 두고 지리 정보를 탐색하고 있다. 2069년 서울시민이자 세계시민인 김정호씨는 자율주행차로 도로를 안전하게 이용하고 복잡한 고층 건물의 최종 목적지까지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획득할 것이다. 지도는 소멸하지만 지리 정보는 위치 정보와 통합되어 어디에나 있게 될 것이다.

<황승식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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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도 그렇게 뭘 먹이려 들더니 결국 식당을 차렸구나, 내 이럴 줄 알았다. 식당을 찾아온 친구가 자리를 잡고 앉기도 전에 실내를 한번 쓱 둘러보며 말했다. 말끝에 츳츳 혀 차는 소리가 붙었는데, 수긍인지 질타인지 그 심중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고기 얘기가 좀 나오긴 하지. 딴청을 피우며 자리로 안내했다. 좀이 아니지, 하물며 도망자한테 닭백숙을 차려주잖아, 토종닭. 어디 그뿐이야? 그녀는 머릿속에 막 떠오르는 장면을 몇 개 더 읊었다. 나도 가물가물한 장면 장면들을 많이도 기억해냈다. 이상하게 추궁받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은 그저 과정이었을 뿐, 결국 네가 도달하고 싶었던 곳은 바로 여기가 아니냐고, 지금 내가 대고 있는 게 증거고 근거이니, 인정하라고. 함께 왔던 지인도 가세하고 나니, 들고 있던 메뉴판이 무색할 정도로 많았다. 결국 그녀는 메뉴판을 한쪽으로 밀치며 주문을 넣었다. 그래, 뭐가 맛있어? 내가 뭐 알아야지, 네가 주는 대로 먹을게. 아, 이 요상한 기분은 뭐지?

그녀의 말대로 나는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여왔다. 문신을 마치고 난 다음 핏물이 뚝뚝 흐르는 생고기를 먹였고, 무릎이 아픈 할멈에게는 소뼈와 내장탕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에겐 매운 돼지고기찌개를 먹였다. 첫 몽정을 한 소년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려주고, 빚을 떠안기고 도망가려는 애인에게는 게살죽을 밀어 넣었다. 음식이나 요리를 서사의 중심축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빠짐없이 먹는 장면이 나왔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뭔가를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그녀의 말대로 결국 식당을 차리려고 그렇게 소설 속에서 한풀이를 했던 것일까. 나는 왜 그랬을까. 나도 궁금했다. 무언가를 해 먹이는 일과,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 누군가를 위해 내가 차려낸 밥상과, 나에게 차려준 누군가의 밥상을 생각했다. 어떤 것은 따뜻했고, 어떤 것은 슬펐고, 어떤 것은 풍요로웠다. 그렇게 기억을 거스르다보니, 하나의 기억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미순 언니는 아버지 공장에서 삼년간 일한 고학생이었다. 내게는 좀 특별한 사람이었는데, 여자형제가 없는 나로서는 친자매처럼 좋아라 따르는 언니였고, 한편으로는 나와 대적할 수 있는 공장의 유일한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공장일이라면 여섯 살 때부터 보고 배운 바가 있어 최고의 숙련공이라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드는 빠른 손과 정확성. 하염없이 수다나 떨며 시간만 때우려는 아줌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줌마들은 종종 나와 그녀의 대결을 부추기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미순 언니에게 아슬아슬하게 지곤 했다. 그래서 나를 안달 나게 만드는 상대이기도 했다.

내가 왜 그녀를 이길 수 없었는지는 그녀의 집에 가서 알았다. 초대를 받았다기보다는 막무가내로 쫓아간 것이었다. 조금 난감해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 나이 때 계집애들이 친구 집에 몰려가 노는 일은 흔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비탈길을 오르고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집. 변변한 부엌도 욕실도 없는 허름한 방 한 칸이었지만 정돈이 잘되어 있었고, 언니들의 세계를 훔쳐보는 재미에 흠뻑 젖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저녁 먹고 갈래? 그녀가 묻기 전까지는 배고픈 줄도 몰랐다. 물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아랫목에 넣어 둔 밥그릇과 찬장의 반찬들을 꺼내 상을 차렸다.

반찬들을 다 내놓고서도 허전했는지 선뜻 상을 내밀지 못하던 그녀가 쌀독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계란 두 개. 잠깐 망설이더니 계란 한 개는 다시 쌀독에 넣었다. 계란 프라이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밥상이 완성되었다. 밥상 앞에 앉았을 때 내가 물었다. 계란을 왜 쌀독에 넣어놓는지. 특별할 때만 먹으려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런데 왜 하나만 꺼내? 나는 오늘 아침에 먹었으니 안 먹어도 돼. 계란이 비싼 음식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쌀독에 넣어놓고 아껴 먹는 별식이라는 것. 내가 온 것이 특별한 일이라는 것. 나도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 기분이 썩 괜찮았다. 즐겁게 계란 프라이를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녀가 덧붙인 말에 더 이상 씹을 수가 없었다. 너는 사장 딸이잖아.

맞는 말이었다.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내 아버지이니 아버지가 사장이고, 그 아버지의 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나는 사장 딸 맞다. 내가 그녀에게 특별한 것은 유일한 경쟁상대이거나 친동생 같은 존재여서가 아니었다. 나는 사장 딸이라서 특별했고, 그래서 특별히 계란을 꺼낸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그녀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일을 하긴 했지만, 나는 가끔 일을 도와주고 용돈을 받는 처지이고, 그녀는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작업능률이 좋지 않다고 고용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그녀는 작업능률이 좋은 훌륭한 일꾼이라는 걸 각인시켜야 했다. 나는 대결을 벌이며 즐거워했지만, 그녀는 대결을 벌이며 불안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그녀를 위협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존재.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존재, 내가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특별함이었다. 내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질 수밖에 없었던 비밀이 거기 있었다. 그날 내가 미순 언니 집에서 먹은 계란 프라이의 맛은 좀 복잡했다. 억울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거기에 뒤따라오는 이상한 우월감. 어떤 감정이 먼저이고 어떤 감정이 뒤따라온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종종, 어쩌다 소설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오래전 먹었던 미순 언니의 계란 프라이의 맛을 떠올리곤 한다. 그 맛을 기억하기 위해, 그 복잡한 맛의 비밀에 닿기 위해, 소설이라는 다른 도구를 선택한 것이라고. 또 종종, 어쩌다 식당을 차렸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에는, 그저 누군가에게 밥을 해먹이고 싶다거나, 다른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답하곤 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친구의 말이 왜 질타와 추궁으로 들렸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선언을 했다. 여기까지. 밥은 차릴 만큼 차렸으니 되었다. 근육인지 흉터인지도 여기까지. 돌아간다, 그곳으로. 그 특별하고도 복잡한 계란 프라이 맛의 비밀은 아직 풀지 못했으므로.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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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지방의 사립학교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순종 때 설립된 꽤 오래된 학교라는 점을 빼곤 평범한 여고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사회 활동을 하면서 동문을 만나 본 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고교서열화가 암묵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 기준으로 봤을 때 내세울 만한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창피해 할 학교도 아니었다.

몇 년 전 학교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됐다. 당시 교장 주도로 학교생활기록부 조작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으로 학교는 경찰 수사를 받았으며 해당 교장은 불명예 퇴진을 했다는 것이다.

그 교장은 고1 때 나를 가르쳤던 국어 선생님이셨다. 지금의 내 나이 정도 혹은 더 젊었을까. 당시 선생님은 수업에 열의가 있었고 사고방식도 유연한 편이라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생겼을까 잠시 안타까움이 일었지만 사는 게 바빠 그 뒤로 잊고 지냈다.

최근 일 때문에 만난 한 입시전문가로부터 다시 내 모교 이야기를 듣게 됐다. 강남 숙명여고의 시험지 유출 의혹 사건에 대해 언급하던 중이었다. “지방 학교로 입시설명회를 다닐 때 보면 보통 학교장은 얼굴도 안 내비치고 교감이 인사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그런데 몇 년 전 ○○여고를 방문했는데 교장이 직접 나오더니 교장실로 안내하는 게 아니겠어요? 들어가보니 음식이 차려져 있고 다른 교사들도 배석해 있어 놀랐어요. 그러고 나서 몇 달 후 이 학교에서 내신비리 사건이 터졌죠.”

좋은 입시결과를 내보겠다는 교사의 열망이 지나치면 비리에도 쉽게 무뎌지는 걸까. 제자가 아닌 자녀 성적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숙명여고와는 경우가 사뭇 다르지만 두 사건 모두 학교생활기록부라는 내신 때문에 발생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입 전형에서 내신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지면서 내신 경쟁의 불투명성, 불공정성도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신 불신이 심화되면서 수능에 근거한 ‘정시’ 확대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정부도 2022학년도 대입부터 정시 비중을 더 늘리기로 했다. 이 논쟁에서 정시 확대가 강남 8학군, 외고·자사고에 유리하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정시 지지층에선 내신 기반의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야말로 고액 컨설팅 등으로 강남에 더 유리한 전형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에 대해선 교사와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엇갈린다.

더 들여다보면 학종에 대한 반감은 패자부활의 가능성을 줄이는 시스템에 있는 듯하다. “한국은 매우 짧은 기간에 저개발 전통사회에서 선진경제 국가로 성장했다”는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은 한 세기 만에 엄청난 변화를 겪은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나라다. 그 같은 변화는 교육이 이끌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교육지표 2018을 봐도 한국은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의 열망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높다. 그런데 학종의 경우 뒤늦게 철들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지 못하고 있다. 내신으로는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없으니 재수를 하게 되는데 패자부활전 성격의 정시를 줄이고 100% 학종으로 바꾸겠다고 하니 이 사달이 난 게 아닌가 싶다. 평소 학종 지지파였던 지인들의 입에서조차 “(자녀가) 만점에 가까운 수능 성적에도 불구하고 (내신이 안 좋아) 원하는 대학을 못 갔다”, “고2 때부터 공부해 현재 내신 1등급이지만 3년치를 계산해보니 학종으로는 좋은 대학은 어림없더라” 등 볼멘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 번 실패는 영원한 실패’라는 공포가 퍼지고 있다. 대학입시 과정에서 체화된 이 논리는 대학 졸업 후 공시족 등 각종 시험족을 낳는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다.

<문주영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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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했다가 나와도 절대 물에 젖지 않는 건 갈릴리 예수님하고 백두산 천지 산신령 할아버지뿐일 게다. 백두산 천지를 보면 우리는 눈두덩부터 축축이 젖고 만다. 백두산에서 손사랑짓 핑거 하트를 날리던 북쪽나라 위원장은 이번 추석에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나는 뒤늦게 찾아온 몸살기운에 누워 지냈다. 고위급 백수의 3대 필수품이라는 ‘안막 커튼, 국가대표 추리닝, 세줄 그어진 어딜갔스표 슬리퍼’를 가까이했다. 명절 백수의 최고 휴양지는 역시 이집트. ‘이틀’ 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이집트 여행코스. 다단계 피라미드 광고나 쳐다보며 스핑크스처럼 엎드려 있다 보면 연휴쯤 후딱 지나간다. 다음은 동남아. 동네에 남아 있는 아이들과 노는 것인데, 피자라도 한판 시켜줘야 놀아주겠지. 돈이 좀 나가는 휴양지라 패스.

집집마다 여인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눈 화장을 하고서 왜 거기다 선글라스를 끼는 걸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여인네의 속마음이여. 여인들은 이제 더는 ‘집사람’이 아니다. 부인의 요리솜씨로 살아가던 남자들은 멸종위기단계 동물. 여인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집 밖으로 나간 뒤 세상은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어라. 내 이럴 줄 알고 된장국을 아주 잘 끓이는 법을 배웠다. 세상 어디에 떨어뜨려놔도 끼니쯤 때울 줄 알아야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보노라니 텔레비는 역시나 먹방이더군. 이 나라도 모자라 해외로까지 먹방은 이어지고 있더군. 싱싱한 물고기를 보여주자고 칼로 등짝을 째니 파르르 몸을 떠는 장면까지 연출된다. 사내들이 집 밖에 나가 해먹는 요리가 죄다들 무법하고 무례하며 자랑에 급급하다. 뭐가 그리 저들을 배고프게 만들었을꼬.

음식에도 분명 예의가 있을 텐데. 참람한 시대(?)에 촛불을 켜듯 소소한 된장국을 끓여본다. 반찬은 없어도 손사랑짓 핑거 하트를 날릴 수 있는, 마주 앉은 벗 하나 있으면 그만. 된장국에 김치에 밥을 한 그릇. 속이 다 개운해라. 아무리 잘 먹어보아도 이만큼 담백하고 이만큼 순한 맛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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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비유로 삼은 표현들은 많으나 그중 내 마음에 가장 깊숙이 들어와 날마다 피어나는 게 바로 이야기꽃이라는 표현이다. 누군가 웃을 때 그냥 웃는 게 아니라 웃음꽃이 피어났다고 표현하면 혼자 외롭게 피어나는 꽃을 떠올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흔한 들꽃이라 해도 무리지어 피어나면 장관을 이루듯 사람의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꽃은 전염성이 있어서 금세 다른 이의 얼굴에서도 꽃이 피어나게 마련이고 이처럼 함께 마주보거나 둘러앉은 이들이 더불어 웃을 때 웃음꽃이라는 낱말도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야기꽃도 마찬가지다. 이야기꽃은 한 송이 고독한 꽃의 이미지보다는 반딧불이 무리가 낮은 허공에서 끝없이 반짝이듯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난 봉오리들이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툭툭 터지며 피어나는 꽃무리의 이미지에 가깝다.

어린 시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열 살 무렵의 어느 겨울 새벽에 깨어났다가 어머니가 없는 걸 알고 공포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일이야 자주 있었겠지만 유독 그 무렵의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그때를 경계로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달라졌기 때문일 테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공포에 사로잡힌 채 이런저런 생각들, 어머니가 보따리를 싸 도망을 쳤을지도 모른다거나 전래동화처럼 시체를 파내러 갔다거나 혹은 부엌에 칼을 갈러 갔다거나, 지금까지 어머니라 알고 있던 당신이 정말 내 어머니가 맞을까 등등 끔찍한 상상들을 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물론 어머니는 연탄을 갈러 갔거나 볼일을 보러 간 것에 불과할 테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이상하게도 이 불쾌한 상상들, 최악을 가정하는 상상들이 사실은 나를 구원해준 게 아닌가 싶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해보려고 시도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정당성과 인과관계를 부여해 안심하려는 성향은 어쩌면 본능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야기란 본질적으로 그런 속성을 지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상상이 불안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오래도록 불분명했다. 이즈음 들어 깨닫는 건 이야기가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이야기꽃이 될 수 있으려면 그 이야기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점이다. 만약 어머니가 잠시 부재했던 겨울 새벽의 짧은 순간을 나 혼자 이야기로 만들어 간직하는 대신 어머니와 나누었더라면, 수십년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그날을 상기시키면서, 저놈이 어렸을 때 얼마나 겁이 많았는지 몰라, 연탄불 갈려고 새벽에 잠깐 나갔다 왔는데 내 차디찬 발목을 붙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어, 하며 웃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그때 정말 보따리를 싸서 도망가려고 작심했는데 어린 아들의 눈물바람을 보고 마음을 돌려세웠노라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꽃을 피우려면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맞장구를 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고 빠뜨린 부분을 일러줄 사람이 있어야 하며, 그럴 수 있으려면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모두 사연의 당사자여야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연이 생기려면 늘 보던 얼굴도 날마다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하며 매순간 최선과 진심을 다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야기는 실제 삶을 불안에서 건져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불안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는 한다. 만약 이게 최소의 원칙이라면 좋은 문학은 이 최소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의 의미는 그의 내부에 있지 않다. 의미는 그에게 허락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 태어난다. 우리가 서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지난 세월 서로에게 무심했음을, 우리에게 사연이 없다면 우리가 헛되이 함께 살아오기만 했음을 말해준다. 이야기꽃은 남루한 삶 한가운데서 피어나 우리의 사연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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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국민의 반대로 화해치유재단이 정상적 기능을 못하고 고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지혜롭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재단을 해산하겠다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숙소인 미국 뉴욕 파커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화해치유재단은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가 체결한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에 따라 졸속 설립된 대표적 외교 적폐로 꼽힌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당시 합의는 국민적 자존심과 피해 할머니들의 인권까지 짓밟은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정권교체 후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를 지킬 수 없으며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공식입장을 밝힌 바 있다. 재단은 이미 이사진 대부분이 사퇴하고 기능 중단 상태다. 존재 의미가 사라진 마당에 더 무슨 역할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진심으로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법적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는 데서 풀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 무슨 재단이 일본 정부를 대신한다는 것부터 언어도단이다. 한·일관계의 미래를 생각하면 정부 간의 공식합의를 파기한다는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 할머니들에게 고통을 주고 시민의 분노를 자아낸 굴욕 재단의 해산은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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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하다 보면요, 진짜 이상한 사장들, 황당한 점장들 많이 만나잖아요.”

“그야, 그렇죠…. 한데 어디 그게 사장들만 그런가요? 같이 일하는 알바 중에도 이상한 애들이 진짜 많아서….”

“진만씨는 아직… 괜찮죠?”

“네? 뭐가요?”

“아니, 우리 사장한테 이상한 말 안 들었냐고요?” “이상한 말이요? 아니오, 저는 아직….”

“그런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기 나중에 하면 안될까요?”

“잠깐이면 돼요. 이게 진짜 중요한 이야기거든요.”

“제가 버스를 놓치면 걸어가야 하는데….”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 사장이 겉만 보면 진짜 멀쩡하잖아요. 숯불갈비집 사장 같지 않고 카운터에 와이셔츠 입고 앉아서 책이나 보고…. 나는요, 맨 처음에 우리 사장이 부모 잘 만나서 가게 물려받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한데, 알고 보니까 우리 사장이 원래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하던 사람이래요. 몇 년 그렇게 하다가 포기하고 내려와서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나 뭐라나. 암튼 그 돈으로 카페 운영하다가 거기서도 또 돈을 더 벌어서 차린 게 지금 이 숯불갈비집이래요.”

“아니, 진짜 제가 막차를 놓치면….”

“진만씨도 우리 사장이 홀서빙 도와주는 거 한 번도 못 봤죠? 우리 사장은요, 아무리 바빠도 카운터에서 일어나질 않아요. 바쁠 땐 알바들이 불판도 닦다가 다시 그 손으로 반찬도 내가고, 테이블도 정리하고, 그래야 해요. 진만씨도 이제 보름 가까이 되었으니까 알 거 아니에요? 우리 사장은 알바가 해야 할 일, 사장이 해야 할 일, 딱딱 구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손님이 기분 나빠하든 말든 아닌 건 때려죽여도 아닌 사람인 거죠.”

“저기 그러면 버스정류장까지 걸으면서 얘기할까요? 제가 진짜 택시비가 없어서요.”

“사실, 전 여기 딱 한 달만 일하고 그만둘 생각이었거든요. 진만씨도 해봐서 알겠지만 이 알바가 이게 장난이 아니잖아요. 숯불도 만들고 기름때도 벗겨내고 서빙도 하고…. 말이 알바지 무슨 조선시대 노비 같잖아요. 그러고 시급 천 원 더 얹어 받는 건데, 여름 되니까 진짜 못 해먹겠더라고요. 그래서 한 달 월급만 받으면 그다음 날 바로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한 이십 일쯤 됐을 때던가, 사장이 저만 따로 부르더라고요.”

“저기, 걸음 좀 빨리해주셨으면….”

“손님들 뜸해졌을 때 저를 룸으로 부르더니, 대뜸 가족 중에 제 명까지 못 살고 일찍 돌아가신 분이 없냐고 묻는 거예요.”

“사장님이요? 상수씨한테요?”

“네. 그러니까 좀 이상하잖아요. 그전까지는 뭐해라, 뭐해라, 지시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우리 가족 얘기를 묻고, 그것도 일찍 죽은 사람이 있냐 없냐, 물으니까….”

“거, 왜 그랬을까요?”

“기분이 좀 더럽더라고요. 자기가 사장이면 사장이지, 알바한테 별소리를 다 한다고 생각했죠. 우리 집은 아버지가 좀 편찮으셔서 그렇지 부모님 두 분 다 멀쩡하게 살아 계시거든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여든 넘어서까지 사셨고…. 그래서 그냥 대답도 안 하고 멍하니 바라만 봤더니 사장이 더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어떤…?”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옛날부터 귀신을 좀 본다는 거예요. 사람들 어깨에 올라타 있는 귀신을. 사실 자기가 절에 들어간 것도 고시 공부하러 간 게 아니라, 그거 좀 안 보이게 해달라고 부처님한테 빌러 갔다는 거예요. 한데 절에 있으면서도 계속 신도들 어깨에 붙어 있는 귀신들이 보이니까 그냥 그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거예요. 자기가 카운터에만 앉아 있는 이유도 손님들한테 있는 귀신이 자기한테 넘어올까 봐 그러는 건데…. 사장이 그 귀신이 내 어깨에도 한 명 있다는 거예요. 중년 남자 귀신이….”

“네? 아니, 그게 무슨….”

“저도 처음엔 그냥 사장이 놀리려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어요. 괜히 심심하니까 저러나, 하고 말았죠. 한데, 그 말이 자꾸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일할 때도 괜히 어깨가 무거워지는 거 같고. 그래서 막 들고 가던 숯도 쏟을 뻔하고. 그리고 더 결정적인 건 우리 외삼촌 중 한 분이 아파트 공사장 비계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는, 한 십 년 전 어머니가 했던 말을 기억해낸 거예요. 그러니까 더 죽겠는 거예요.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거울도 못 보겠고.”

“어어, 그럼 진짜… 우리 사장이….”

“제가 그렇게 일주일간 계속 잠도 못 자고 고생하다가 우리 사장한테 사정했다는 거 아니에요. 정말 제 어깨에 누가 있는 게 맞냐고? 그럼 이걸 어찌해야 하냐고?”

“그랬더니 사장이, 아니, 사장님이 뭐래요?”

“사장이… 그게 쉽게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시간이 좀 걸린다는 거예요. 자기가 저를 보면서 계속 기도를 드릴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눈앞에 있으라고. 어깨 위 귀신 때문에 네 인생이 지금까지 제대로 풀리지 않은 거라고.”

“좀 무시무시하네요. 그런 얘기는 진짜 어디 영화에나 나오는 건지 알았는데….”

“그래서 제가 여기서 일한 지 벌써 반년이 넘었잖아요.”

“그래, 좀… 괜찮아졌어요? 사장이 진짜 기도도 해주고?”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근데 진만씨, 진짜 더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더, 더 있어요?”

“우리 갈비집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두 분도 다 어깨에 귀신이 있다는 거예요. 사장이 그 아주머니들한테도 그렇게 말해서 아주머니들도 벌써 이 년 넘게 여기서만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만두지도 못하고.”

“네?”

“이게 뭘 뜻하는지 아시겠죠? 세상에 진짜 이상한 사장이 많다니까요. 그러니까 진만씨도 조심하라고요.”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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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앞으로 다가올 평화로운 한반도를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남북한이 협력한다면 우리는 멋진 한반도를 만들 수 있다. 비록 면적은 작지만 한반도에는 우수한 가치를 지닌 지질유산 지역이 많다. 제주도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고 놀라울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은 세계적으로 최고 중의 최고임을 인정받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그랜드캐니언과 나이아가라폭포, 중국의 황산과 장가계 같은 지역이 세계자연유산이라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 내에는 세계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지역이 여러 곳 있다. 2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같이 방문한 백두산, 남한에서 가장 멋진 산악환경을 보여주는 설악산, 그리고 서해안과 남해안의 수많은 섬들 사이에 분포하는 여러 갯벌 지역들이 그렇다.

평양정상회담 사흘째인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남측 공식수행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백두산은 서기 946년에 화산폭발이 일어났으며,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이다. 지난 1000년 내에 폭발한 화산 중에서 가장 강력한 폭발력을 가졌던 화산으로서 전 세계 지질학자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남북한, 그리고 중국 학자들과 함께 백두산을 연구할 수만 있다면, 가까운 장래에 백두산이 지니는 탁월한 가치를 입증할 수 있다. 또한 DMZ 근처에는 북한 평강지역에서 분출되어 한탄강을 따라 110㎞ 이상을 흘러내린 용암지대가 분포한다. 한탄강을 따라 흘러내린 화산지형에 대한 연구를 남북한 학자가 공동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이 지역을 백두산과 함께 세계자연유산으로 추진하는 것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설악산은 전 세계에서 아주 드문 지질·지형학적인 가치를 가지며, 세계자연유산으로 추진할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비슷한 지질학적 특징을 보이는 지역이 북한의 금강산이다. 만일 금강산의 가치를 추가로 발굴할 수 있다면, 남북한 정부는 공동으로 이 두 지역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이 설악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잠정목록으로 포함시킨 것처럼, 북한도 금강산을 잠정목록에 이미 포함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대한 공동추진 전망은 아주 밝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의 해양환경도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특별나다. 높은 조차로 인해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섬들 사이를 하루에 두번씩 방향을 바꾸어가며 빠르게 흐르는 조류는 과거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승을 이루게 한 특별한 바다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섬들 사이에 수천년 동안 두껍고 넓게 쌓인 갯벌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 문화재청은 이 갯벌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서천, 고창, 신안, 순천-보성 갯벌이 강력한 후보지이다. 올해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제주도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지역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해외 전문가들은 강화군과 옹진군에 넓게 분포하는 갯벌을 포함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 넓은 지역은 DMZ를 포함하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추진 중인 지역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만든 후에 DMZ를 포함한 지역을 추가로 신청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갯벌은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의 중요한 사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땅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이 땅이 지닌 뛰어난 가치를 잘 모르고 지내왔다. 올해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만큼, 이제는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 앞으로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최북단의 백두산에서 최남단의 제주도까지 한반도 내 여러 지역을 남북한이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말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금수강산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2032년 남북한 올림픽이 개최될 때, 우리는 너무도 자랑스럽게 한반도를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또 세계 최고 중의 최고만이 등재될 수 있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은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우경식 강원대 교수·지질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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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는 힘이 세다. 그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는 정치권력은 드물다. ‘경제 민심’은 불씨만 대면 화르르 타버리는 바싹 마른 장작처럼 성마르다.

 집권 2년차를 지나는 문재인 정부도 ‘시련’을 피해가진 못하고 있다. 고공 지지율을 앞세워 거칠 것 없던 정부는 경제 성적표 앞에서 초라해보일 정도로 왜소하다. 정권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깊은 위기다.

지금 위기의 미묘함은 정치적 논쟁 대상으로서 ‘지지층 정치’의 문제가 그 가운데 놓여 있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론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노동이 고용에 미친 영향이 쟁점이다. 수개월째 내리막이던 고용의 산술적 수치는 두달 연속 ‘재난’에 가깝다. 최저임금 인상이 문재인 정부 공약이고 진보진영 의제라는 점에서 정치적 논쟁이 과학적 검증을 대신하는 양상이다. 야당 등 반대 진영은 ‘최저임금의 저주’를 단정한 채 소득주도성장 패러다임을 무너트리려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에서 두 번째 정례회동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지층’이란 특정 정권을 통해 무언가를 구현하고자 하는 이들을 총칭한다 할 수 있다. ‘묻지마 지지’를 속성으로 하는 ‘팬덤’과는 구분된다. 시민의 정치참여에서 보면 정권은 이처럼 목적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도구일 수 있다.

 “지난해 (최저임금이) 16.4% 오른 것은 생각보다 높았다. 솔직히 저도 깜짝 놀랐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지난 3일 언론 인터뷰 발언이다.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은 도대체 누가 결정한 것인가.

 정권은 ‘공약’의 관성에 안주하고, 그 정권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지지층은 그들 의제에 ‘과속’ 성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특히 5년 단임이란 마감시간을 생각하면 정권과 지지층의 마음은 급해진다. 이 경우 정교한 전략과 세심한 추진은 실종되기 쉽다. 최저임금 인상 과정은 당장의 원전건설 중단은 관철하지 못해도 ‘원전 없는 세상’을 못박는 계기가 된 ‘탈원전’ 정리 방식과는 달랐다.

 실상 역사의 시간 동안 숱한 ‘개혁’ 좌절은 조급함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 전기 대유학자 이황과 기대승은 서신에서 조광조의 개혁 실패를 두고 “현자들이 위태로울 때를 맞아 경계하지 않고 너무 날카롭게 앞으로만 나아갔다”고 탄식했다.

 조급함은 ‘권력의 획득’을 ‘권위의 획득’과 동일시하는 자만과 만날 때 커진다. 이는 그간 진영들의 대결 정치에선 당연시해온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권력 획득이 결코 권위의 획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위의 획득은 ‘권력 행사가 정당할 때’라는 요건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정당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몇가지다. 성과도 권력의 민주적 행사를 의미하는 설득·소통 등과 함께 그중 하나다.

 지지층 정치는 실상 진영 정치의 덫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이다. 반대편 경쟁자들에게도 가장 손쉬운 대응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대’ 깃발만 들면 그들 역시 쉽게 정치적 동력을 얻는다. 무조건에 가까운 반대를 통해 정권의 의제를 좌초시키는 것이 우선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정은 지지층의 바퀴만으론 매끄럽게 굴릴 수 없다. 집권 초 손쉽게 지지층 동원에 나섰던 정권들은 ‘진실의 순간’에 마주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위기라는 난기류를 맞딱뜨려 ‘다른 길’도 기웃거릴 때 이는 지지층과의 불화·균열로 이어지게 된다. “너무 초조하다. 진보진영의 개혁 조급증·경직성 때문에 오히려 실패할 수도 있다”(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고 통증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지지층은 이를 정권의 변심으로 읽는다. 초반 ‘개혁 속도전’으로 정국을 장악할 때 사려깊은 전략에 대한 공유가 없었기에, 그들은 동원 대상으로만 취급받았을 뿐이라고 느낀다.

 진보 지지층이 이해할 것은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이 정권 역시 ‘5년’이 한계라는 점이다. 혁명적 변화를 제도화하길 바라지만, 그 방법은 설득·타협의 더딘 시간이 흐르는 민주적 ‘개혁’일 수밖에 없다. 5년짜리 정권이 감당할 수 있는 건 변혁의 씨앗을 뿌리고 이어갈 힘을 만드는 정도다. 이 때문에 ‘디테일’이 중요해진다. 모든 성공한 혁명은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꾼” 사람이면서, “리얼리스트가 되자”(체 게바라)고 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지층 정치’를 끌어가야 할 정권의 책무는 더 무겁다. 그들은 언제든 동원 가능한 팬덤과 달리 지지와 성찰·비판이 모두 가능한 정치적 시민이기 때문이다.

 지지층 정치의 ‘진실의 시간’에 마주한 정권이 밟을 수 있는 길은 3가지다. 더욱 지지층만 붙들고 가는 길이 하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걸은 경로다. 두번째는 지지층과 불화를 감수하고 ‘국정의 명분’으로 정면돌파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대연정 같은 식 해법이 단적이다.

 마지막 길은 가장 어렵다. 비전과 전략으로 정권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지지층에 설득하면서 국정과의 거리를 좁히는 길이다. 최저임금 무책임에서 보듯 지지층의 과속 성향을 정치 동력으로만 삼으려 해선 안된다. 지지층의 실망감은 그래서다. 지지층은 설명하고 동의를 구할 첫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지층의 이해와 조금이라도 결을 달리할 땐 더더욱 그렇다.

<김광호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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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에서 모처럼 울림이 있는 정책을 내놓았다. 여당에선 “전근대적이고 해괴망측”하다며 비아냥댔지만, 출산주도성장 정책은 우리 사회가 선택해야 할 길을 언어유희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제안의 핵심은 많은 사람이 비난하듯 여성들을 출산 ATM으로 만들어 출산율을 높이자는 게 아니다. 그보다도, 제안자는 몰랐겠지만 아이가 있는 가정에 스웨덴, 독일, 프랑스 같은 유럽 선진국 수준의 지원금을 지급해 선별복지를 넘어 보편복지로 가자는 것이다.

[시사 2판4판]사람이 먼저다 (출처:경향신문DB)

자유한국당의 제안대로 아기를 낳으면 2000만원, 20세 이하의 모든 국민에게 매년 400만원을 지급한다면 1년에 투입되어야 할 예산은 45조원 정도이다. 큰돈처럼 보이지만, 보편복지를 시행하는 유럽 선진국이 아이 양육지원금으로 사용하는 돈에 비하면 얼마 안된다. 독일에서는 아이가 있는 가정을 위해 해마다 250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한다. 프랑스에서도 그에 맞먹는 예산을 사용한다. 여기에 고등학교뿐 아니라 국공립대학의 무상교육을 위해 투입하는 예산까지 더하면 이들 나라에서는 아이 하나가 커가는 동안 우리보다 훨씬 많은 돈을 사용하게 된다. 이에 비하면 45조원은 보편복지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지불해야 하는 통과비용 정도에 불과하다. 이 길목의 통과를 돕겠다는 것이 야당의 출산주도성장이다.

여당에서는 출산주도성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장난으로만 보는 것 같다. 말장난에 현혹돼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일 터인데, 자유한국당에서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출산주도성장은 사실 소득주도성장의 각론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소득주도성장의 대항담론을 내놓았다고 의기양양해할지 모르지만, 조금만 들어가보면 소득주도성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이가 둘 있는 가정에 매달 70만원 가까운 돈이 지급되면 이들 가정의 소득이 크게 늘어나고 이것이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 돈을 확보하기 위해 고소득자와 지대소득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거두면 소득분배 효과도 얻을 수 있으니 출산주도성장이야말로 소득주도성장을 뒷받침하는 각론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여당이 야당 원내대표의 현 정부에 대한 수준 낮은 비아냥으로 가득 찬 연설 중에 튀어나온 출산주도성장을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여당이 야당과의 협치를 모색한다면 진정성이 의심되더라도 출산주도성장을 ‘덜컥’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면 아마 야당도 대통령의 큰 관심사인 판문점선언 비준을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출산율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는다. 출산율은 선진산업국가가 되어 에너지소비가 크게 늘어나면 떨어지기 때문이다. 유럽 선진국 중에서는 프랑스와 스웨덴이 출산율이 높은 나라에 속하는데, 두 나라의 출산율이 양육수당을 많이 주기 때문에 높은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이미 20년 전부터, 스웨덴은 30년 전부터 지금까지 출산율이 1.9 수준에서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일인당 에너지소비도 늘어나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반면에 일인당 소득은 그때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고령사회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일본도 두 나라와 차이가 없다. 30년 전에 비해 소득은 크게 늘었지만 에너지소비는 변동이 거의 없고, 출산율은 1.4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30년 전 1.7 수준이었던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인당 에너지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30년 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났다.

스웨덴, 독일, 프랑스에선 아동 양육지원금을 꾸준히 늘려왔다. 그래도 출산율이 증가하지는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출산주도성장 정책을 펴더라도 출산율이 증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한국당의 제안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것이 보편복지를 본격적으로 열어주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필렬 방송대 교수 문화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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