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아이가 우주공학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미국이나 중국처럼 강대국이면 모를까. 한국에서 전망이 있나?

-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우리 애 말 들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우주공학도 분야가 여러 가지인데, 20세기에 미국하고 소련이 체제 경쟁을 하느라고 돈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붓는 바람에 아주 비싼 거대 장치산업이라는 선입견이 생겼다는 거야.

- 그거야 미국이 먼저 아폴로 11호를 달에 보내면서 끝난 얘기지. 소련의 완패지.

- 그래. 그런데 나사(NASA·미국 항공우주국)는 예산 펑펑 쓰다가 그 뒤로는 점점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존재감도 줄어들었다는 거야. 예정됐던 아폴로 달착륙 계획도 원래 20호까지였는데 17호 이후로는 다 취소되고. 나사는 자기 밥그릇 줄어드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우주왕복선이나 우주정거장처럼 돈 먹는 하마 같은 프로젝트를 자꾸 벌인 거지. 그래서 우주개발이란 돈 많이 드는 산업이라는 선입견이 굳어진 거고.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 에이,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우주선은 아무 나라나 못 만들잖아.

- 만들기야 많이들 했지. 인도도 만들었고 북한도 만들었고 뉴질랜드도…. 우리나라도 성공했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선 만드는 걸로는 수지타산 맞추기가 어렵다는 거지.

- 그래, 바로 그거야. 만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산업으로 지속가능해야 일자리도 계속 생겨나지.

- 그런데 우주개발이라고 해서 꼭 우주선 만드는 것만 생각하는 게 잘못된 거야. 우주선이야 발사체니까 인공위성이든 사람이든 우주까지 운반해주는 일만 하면 되는 거고, 사실 그다음부터 파생되는 여러 가지 기술이 진짜 전망이 좋다는 거야.

- 그래? 우주에 나가서 뭘 하는데?

- 달에 헬륨3라는 물질이 아주 많은데 이게 에너지 자원으로 아주 유용하대. 소행성들을 탐사해보면 지구에서는 귀한 희토류 광물들도 많다 그러고.

- 우주광산 개발이라…. 그런 기술이라고 쉬울까?

- 그것 말고도 많아. 무중력 상태에서 공장을 돌리면 지구에서 돌리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라고 하는군. 중력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중공업 분야도 에너지 절약이 많이 되지. 볼베어링 같은 걸 깎을 때도 쇳물이 표면장력 때문에 저절로 동그란 모양이 되니까 연마하는 데 훨씬 비용이 적게 들고.

- 그러니까 우주선 만드는 것보다 우주에서 뭐든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게 전망이 좋다는 거구먼?

- 그렇지! 인공위성이 좋은 예야. 우리나라가 인공위성 수출국인 거 알고 있나?

- 그래?

- 우리나라 인공위성 제작기술이 축적된 지 30년 가까이 된다고. 아무튼 광산이든 공장이든 바이오든 뭐든 간에 무중력이나 미소중력 환경에서 구현시키는 기술들은 아직 세계적으로 시작 단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이미 이 분야의 벤처기업들도 많이 생겼다고 하더군. 제작비와 유지비를 최소화하는 적정기술 개념으로 다들 접근한대. 딸아이가 아주 꼼꼼하게 많이 알아봤더라고. 어릴 때부터 SF를 너무 좋아해 좀 걱정할 정도였는데, 오히려 잘했구나 싶어.

- 흠…. 얘길 듣고 보니 좀 감이 잡히네. 사람들은 우주라 그러면 아직도 옛날 아폴로 시절만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이거지.

- 아폴로 시절 타령은 우리 같은 꼰대들 얘기야. 요즘 젊은 친구들은 뭔지도 몰라. 그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 얘기잖아. 요즘은 <그래비티> <마션> <인터스텔라> 같은 우주 SF들에 더 익숙하지. 20세기 냉전시대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비장하게 우주개발에 나서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하게 우주를 향한 원초적인 동경을 지니고 그걸 실현시킬 수 있는 세대가 등장한 거야.

이달 말이면 한국형 로켓 엔진을 단 우주선이 처음으로 시험 발사된다. 앞서 세 번 만에 성공했던 2013년의 나로호는 러시아 엔진을 단 것이었지만, 이번에 시험 발사되는 누리호는 100% 국산 기술로 만들어진 발사체이다.

누리호가 성공하고 계속 기술 개발이 이루어져도 사실 세계 우주발사체 시장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러시아나 유럽, 미국 등의 검증된 많은 로켓들이 안정된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론 머스크의 우주개발기업인 스페이스X에서 개발한 로켓은 재사용이 가능해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우주개발 분야에서 활로를 개척하려면 우주발사체 개발 못지않게 우주공간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무중력 응용공학 분야에 투자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발사체 개발에 비하면 실험설비 등 구축에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드는 반면 응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달에 마지막으로 인간이 다녀온 지 46년이 지났다. 공백이 꽤 길었지만, 결국 인류는 금세기 중에 다시 우주로 진출할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우주시대는 20세기와 비교하면 과학기술 수준은 물론이고 대중들의 정서적 태도도 많이 다를 것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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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작가가 <회색인간>이라는 문제적인 소설집을 출간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원래는 ‘복날은간다’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단편소설을 쓰던 작가였다. 1년 반 동안 무려 300편 넘게 썼다. 그의 독자이자 팬이었던 나는 출판사에 그를 소개했고, 요청을 받아 단행본의 기획에도 참여했다. 그래서 요즘에도 나에게 “김동식 작가 강의 요청 좀 드리려고 하는데, 매니저 맞으시죠?” 하는 연락이 종종 온다. 나름대로 즐거운 오해다. 그는 요즘 중·고등학교에서 초대를 많이 받고 있다. 그의 책을 읽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토론을 하고 “다음 책은 어디 있나요?” 하고 교사와 부모에게 묻는다고 한다.

얼마 전 만난 김동식 작가에게 학교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니까, 그는 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청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꿈이 참 없는데요, 학생들이 꿈을 가질 수 있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는 한 사람이, 그저 댓글을 받는 게 좋다는 이유로 소설을 썼고, 그것이 책으로 출간되어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오를 만큼 2018년 상반기 내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3일에 한 편씩 신작을 쓰면서 전업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어쩌면 모두의 꿈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겠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에 답한 김동식 작가를, 어느 중학생이 올린 인스타그램 동영상에서 본 일이 있다. 영상 속의 그는 학생들을 향해 “꿈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고 말한다. 잠시 조용해졌던 강당은, 곧 모든 중학생들의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 찬다.

나는 사실 “꿈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꿈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훈육받아 왔고, 누군가 꿈을 물었을 때 멋진 대답을 하지 못하면 죄인이 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없다고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무어라도 준비해야 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어느 친구가 “꿈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난 없지만 언젠간 생길 거라고 믿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그가 괜찮은 걸까 걱정이 되었는데, 그가 정말 용기 있고 멋있는 사람임을 많은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았다. 정작 용기가 없는 사람은 나였다.

물론 꿈을 갖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김동식 작가 역시 꿈을 가지는 건 중요하다고 이어 말한다. 그러나 그에 더해, “제가 뭐라고 타인의 꿈에 개입하겠어요, 그건 강요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포기하지는 마세요. 저는 여러분이 나중이 아니라 지금 즐거우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인다. 나는 같이 간 강연에서 이렇게 답하는 것을 정말로 들었는데, 이 답에 그를 바라보던 교사들이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는 것을 보았다.

꿈, 열정, 노력. 이러한 단어들은 주로 기성세대로부터 청년세대에게 전달된다. 이제 서른이 넘은 나는 이제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돌려줄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그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이 조금은 자신을 덜 아파할 수 있게 이 사회의 문화나 제도를 바꾸는 데 한 줄을 보태고 싶다. 사실 꿈을 가져야 하고 열정이나 노력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 중,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꿈이 있었고 그것을 이룬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거의 없다고 믿는다. 대신 꿈을 이룬 사람일수록 타인의 꿈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를 응원하며 지켜보는 일이 더 많다. 내 주변의 존경할 만한 이들이 대개 그렇다.

다섯 살이 된 나의 아이는 벌써부터 온갖 체험을 나간다. 입학을 앞두고 주변의 유치원에서 보내온 커리큘럼을 보면, 숲 체험·농장 체험·소방관 체험 등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도 직업체험 수행평가를 위해 여러 직업군을 찾아 인터뷰나 일일 아르바이트를 한다. 카페를 겸하는 모 문화공간의 대표는 초·중등 학생들이 직업체험을 위해 찾아오는 일이 너무 많아졌다고, 와서 커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데 사실 조금은 번거롭다고 나에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 미래를 상상하고 거기에 힘을 쏟기를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꿈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는 김동식 작가의 말에 쏟아져 나온 환호성은, 그들이 얼마나 꿈에 짓눌려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미래를 체험할 시간에 차라리 현재에 충실할 수 있으면 한다.

현재를 포기하고 미래에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은 없는 법이다. 현재에 행복할 수 있는 한 인간은 언제든 행복할 수 있고, 미래에만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은 미래에도 행복해질 수 없다. 서른이 넘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모 작가처럼, 모두가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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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잡기 게임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스트레스 해소용 게임이다. 신나는 음악과 함께 구멍에서 갑자기 툭 튀어오른 두더지의 머리를 망치로 때린다. 이 구멍 저 구멍에서 두더지가 머리를 내민다. 불이 켜진 두더지의 머리를 정확히, 빨리, 많이 때려야만 점수가 올라간다.

두더지 잡기 게임을 끝내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통쾌함과 함께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만약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 머리를 때리는 게임을 만들었다면 동물보호단체의 항의가 빗발치지 않았을까? 두더지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게임을 사람들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더지는 지하에서 살고 밤에만 가끔 땅 위에 나타난다. 일상에서 거의 볼 수 없을뿐더러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반려동물이 될 수도 없고 사람에게 득도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일종의 혐오 동물이다.

비행청소년들의 범죄가 뉴스에 나올 때마다 언론은 두더지 잡기 게임을 시작하고 여론은 망치를 집어 든다. 두더지가 왜 땅 위로 고개를 내미는지는 상관없다. 주어진 시간에 두더지의 머리를 많이 때리는 게 중요하다. 두더지의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행위의 목적은 두더지를 원래 살고 있는 땅속으로 밀어넣는 데 있다. 스트레스를 풀고 잠시 억눌린 감정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경향신문과 비영리 공공조사 네트워크 ‘공공의창’ 주최로 지난 15일 서울 마포청소년문화의집에서 열린 시민토론에서 참가자들이 청소년 범죄 처벌을 강화하고 형사미성년자 연령을 낮추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창길 기자

10대들의 범죄에 관해 대다수 언론은 일부 소년범죄의 흉악성과 엄벌 여부에만 초점을 맞춘 자극적인 보도로 일관하고 있다. 여론은 대안 없는 엄벌만을 요구한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에 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에 형사미성년자 연령을 낮춰야 한다.” “요즘 애들은 영악해서 소년법을 악용한다. 소년법을 폐지해서 성인들과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 “사회방위를 위해 사회와 격리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전체 소년범죄 중 흉악범죄는 1%이다. 소년법을 악용한다는 촉법소년의 범죄도 1%다. 실제 흉악범죄를 저지른 소년범은 형사재판에서 대부분 실형을 선고받는다. 최대 20년까지도 선고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조차 국민의 법 감정을 충족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니, 소년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해서 소년범죄에 대한 전반적인 처벌을 강화하자는 여론이다.

‘소년범죄 처벌 강화’를 주제로 한 토론 프로그램에서 한 고교생은 이렇게 말했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조성한 사회를 보며 자랍니다. 이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쳐서 청소년들이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른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조금만 바꿔보면 청소년 범죄도 줄어들지 않을까요?”

물론 어른들은 말한다.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해서 누구나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두더지가 사는 컴컴하고 낯선 땅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 두더지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순 없다. 어쩌면 어른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게임이 끝난 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로 돌아와서도 두더지와 마주쳐야 한다는 삶의 냉혹함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이 냉혹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지 않기를, 소통과 공감을 통한 혁신적인 토론이 계속되기를 기대해본다.

<최원훈 법무부 보호직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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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개를 묻은 단감나무는 통째 새들에게 주기로 했다. 봄날 슬펐던 수목장은 가을에 접어들자 조장이 되었구나. 감은 우리 개의 볼따구처럼 뽀얗고 발개서 내 마음은 더욱 아프다.

치아가 부실한 할매들 누구도 감을 따먹지 못한다. 자녀들도 참기름이나 고춧가루면 모르지만 눈독을 들이지 않아. 새로 이사 들어온 이들이 거창하게 농사를 벌이는 걸 보면 저걸 다 어떻게 뒤처리를 하려나 염려가 생긴다. 고추나무 서너 대, 배추밭 한 고랑이면 여름 내내 먹고도 남을 단출한 식구에 말이다.

스쳐 지나가면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다가서면 고된 노동의 현장. 논밭이며 과수농장이 그렇다. 감을 따는 일도 고생이 막심인 일터다. 새들이 파먹기 전에 어서 수확을 서둘러야 하는데. 사람을 데려다 쓰는 일은 돈도 돈이려니와 노동력을 구하기가 일단 어렵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누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손해는 눈덩이. 단감은 5일장에 가져가보아야 누가 사가지도 않는다. 이런 소읍에서는 아그닥아그닥 단감을 씹어 삼킬 장정이 드물지.

차라리 밭에다 맨드라미꽃을 심은 정자지기 촌로는 마음부터 가벼워 보였다. 그런데 여쭤보니까 고개를 젓는다. “빈 땅 놀리기가 뭐햐서 심은 꽃일 뿐이재. 꼽사(꼽추) 맹키로 꾸부러진 양반들도 추수떨이를 하는디 영 미안해가꼬잉.” 마치 갠지스 강가에서 우아하게 요가를 하다가 들킨 것처럼 나도 마음이 저어했다.

“그의 인생은 부조리 수업을 위한 노트가 아니다. 메모 쪼가리가 아니다. 그의 인생은 똥을 치우는 것이다. 빨래하는 것이다. 바위에 빨래를 패대기친다. 물먹은 운명을 패대기친다. 어린 바라문들이 아름다운 요가를 하는 새벽 갠지스 강가에서. 그는 홀로.” 최승호 시인의 ‘불가촉천민’이라는 시. 인도 여행길에서 나도 똑같은 걸 보았다. 서양 여인이 섞인 요가 수련생들이 강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핏기 없는 화장터 노동자들, 숨을 꼴깍이던 풍경. 그래도 꽃이 피면 어디나 아름답다. 한가로운 농땡이 양반들도 있어야 마을이 조화롭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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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는 우주 생성 원리의 열쇠를 쥔 ‘힉스 입자’를 발견한 곳으로 유명하다. 세계 최대 입자물리학연구소인 이곳에선 유럽 22개국 과학자들이 공동연구를 벌이고 있다. CERN이 배출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만 8명에 이른다.

최근 이 연구소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28일 ‘고에너지이론과 젠더’를 주제로 열린 워크숍에서 초청 강연자인 알레산드로 스트루미아 이탈리아 피사대학 교수가 성차별적 발언을 한 것이다.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그는 “물리학은 여성에게 차별적이지 않다”며 “외려 여성 연구자들이 논문 인용횟수가 더 높은 남성 연구자들을 제치고 취업에 성공해왔다”고 주장했다. 강연에 활용한 슬라이드 자료에는 ‘물리학은 남성에 의해 발명되고 창조되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CERN은 스트루미아 교수의 강연이 “매우 모욕적”이었다며 강연자료를 웹사이트에서 삭제하고,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CERN 관련 활동을 정지시킨다고 발표했다.

문제의 강연 나흘 뒤, 세계 물리학계가 다시 ‘여성’ 이슈로 뒤덮였다. 여성에게 인색하기로 악명높은 노벨 물리학상이 여성인 도나 스트리클런드 캐나다 워털루대학 교수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마리 퀴리(1903년·프랑스)와 마리아 거트루드 메이어(1963년·미국)에 이어 역대 세 번째 여성 수상자다. 첫 수상자가 나오고 60년 만에 한 명, 다시 55년 만에 또 한 명. 스트리클런드 교수 본인도 “여성 수상자가 이보다는 더 많을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실 최초의 여성 수상자인 마리 퀴리도 상을 받지 못할 뻔했다. 남편 피에르 퀴리가 부인이자 동료인 마리의 역할을 강조하며 공동 수상을 요구한 끝에 가까스로 노벨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물리학계에서 남성이 역차별당한다고 주장한 스트루미아는 역사의 기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김현철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가 페이스북에서 스트루미아를 향해 일갈했다. “성차별이든, 인종차별이든 그 차별 속에 들어있는 역사적 맥락을 살피지 않으면, 저 사람처럼 헛소리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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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직장 체류시간이 줄어든 반면 여가활동을 위한 소비는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KT가 지난 8월1일~9월16일 유동인구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대기업이 밀집한 광화문 일대 직장인의 직장 체류시간은 전년 동기 대비 하루 평균 55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정보기술·게임 업체가 모여 있는 경기 판교는 11.6분 감소했다. 반면 300인 이하 사업장이 많은 서울 가산디지털단지는 근무시간이 되레 5.6분 늘었다. 직장인의 소비 행태에도 변화가 있었다. BC카드가 지난 8~9월의 서울 시내 가맹점 매출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서점·헬스클럽·영화관 같은 여가활동 관련 업종의 매출이 9.2% 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의 긍정적 신호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해간다고 말하기에는 이르다. 시행이 3개월밖에 되지 않은 데다 적용 대상이 3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기관에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50~299인 사업장은 2020년 1월부터, 5~49인 사업장은 2021년 7월1일부터 적용된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 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도입됐다. 아직 일자리 창출 효과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는 52시간제가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활동을 늘리는 등 긍정적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300인 이상 사업장은 탄력근무제나 자유근로제 도입 등으로 주 52시간제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편이다. 이들 직장인은 대부분 안정적인 보수로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추가 경제활동이 필요하지 않다. 상업시설에서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경제능력도 갖추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 혜택이 이들에게 그쳐서는 안된다. 중소 사업장의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하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52시간 근무제에 맞춰 체육관·도서관 등 주민 생활밀착형 시설을 확대할 방침이다. 그러나 하드웨어와 함께 일상에서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갖추는 일도 중요하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보자. 지역·마을 단위로 취미나 여가활동을 위한 프로그램도 강구해야 한다. 인문학 공부 모임을 마련하는 것도 고려해봄 직하다. 퇴근을 재촉하는 52시간 근무제는 여가를 누리는 삶, 저녁이 있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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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최대 2492조원의 손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경향신문이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 이훈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한국전력의 ‘균등화 발전원가 해외사례 조사 및 시사점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중대 사고 발생 시 고리 원전의 총 손해비용이 2492조4000억원으로 추산됐다. 월성과 영광, 울진의 원전도 각각 1420조원, 907조원, 865조원의 손해비용이 발생한다고 나왔다. 국내 원전부지별로 사고 시 발생할 손해비용을 추산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런 비용을 적용하니 원전의 발전원가는 지금보다 2배로 높아졌다.

생활적용형 태양광 신기술과 신제품 160여종을 선보이는 ‘2018 서울 태양광 엑스포’가 열리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관람객들이 국민대의 태양광 전기차‘태극’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상훈 기자

이번 연구는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의 사고비용치를 내놓은 일본의 싱크탱크 일본경제연구소(JCER)의 분석 방식을 따랐다. 그 결과 국내 원전 사고 발생 시 예상 피해액은 일본보다 훨씬 컸다. 부산 고리 원전 반경 30㎞에 거주하는 인구는 344만명으로 후쿠시마(14만명)보다 24배 많은 것이 주요인이었다. 이런 환경오염·사고비 등 외부비용을 반영(균등화 발전비용)했더니 원가가 79.80~89.51원(kWh당, 2017년 기준)으로 추산됐다. 방폐처리 비용(kWh당 23.1원)까지 감안하면 발전단가는 현재 66원대에서 122.5원으로 2배 가까이 올라갔다. 원전 단가가 싸다는 근거가 이번 연구로 크게 약화됐다. 보고서가 2020년 중반부터 원자력과 태양광의 발전비용이 역전될 수 있다고 전망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대규모 태양광은 2020년대 중·후반, 중소 규모는 2030년대에 비용이 역전된다는 것이다. 이러니 보고서가 설계수명이 60년에 이르는 새 원전을 짓는 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권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2022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 이후 새 원전은 지을 이유가 없다.

원전 지지자들은 반대론자들이 원전 사고 가능성을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도 후쿠시마 사고 전까지는 어떤 사고에도 안전하다고 자신했다. 한국이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원전은 그 비용도 문제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원전 사고에 대한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하다. 한계에 다다른 방사능폐기물 처리도 해결이 난망인 상태다. 그런 차에 원가가 싸다는 주장까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원전 지지자들은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연구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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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최저임금 인상과 공공 일자리를 앞세운 소득주도성장의 부작용이 표출되면서 국가발전전략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른바 경로 의존을 추구하는 성장지상주의 명제가 경기침체가 길어지면서 부활을 모색하는 것이다. 정책오류를 치유하는 점진적 정책 환류는 필요하지만 정부 때리기에 굴복하는 급진적 정책변화는 일관성과 시의성 측면에서 득보다 실이 많다.

포용국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의 발전전략은 적정한 정부의 선도하에 성장과 분배 또는 경제와 사회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남미가 아니라 북유럽의 발전전략과 유사하다. 남미는 지리상의 발견 이후 이베리아가 자행한 잔혹한 수탈을 경험했다. 19세기 중반 정치적으로 독립했지만 경제적 종속상태가 지속됐다. 이에 종속이론이 제안한 고립주의 발전전략인 수입대체산업화를 채택하였다. 경제적 성과는 저조했으나 농축수산물이나 지하자원을 대체하는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기반의 신성장동력을 찾기 어려웠던 남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노르딕 국가와 우리는 자원과 내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교육강국을 표방하면서 제조업을 육성했다. 핀란드의 노키아나 스웨덴의 볼보, 한국의 반도체나 자동차가 대표적 사례이다. 하지만 전략산업의 비교우위를 위해 대기업에 올인한 수출지향산업화가 한계에 다다르자 스타트업이 선호하는 온라인 게임이나 생활 디자인으로 전환했다. 핀란드의 앵그리버드, 스웨덴의 이케아, 한국의 인터넷포털과 의약·바이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20세기 중반 남미는 세계대전과 같은 구대륙의 혼란이 가중되자 반사이익을 누렸다. 노동과 자본이 유입되고 전쟁특수도 찾아왔다. 하지만 호황기에 축적한 부를 새로운 도약의 원천으로 부상한 기술이 아니라 탱고와 삼바 같은 예술에 소비하고 말았다. 짧았던 호황이 지나고 위기가 닥치자 국부 유출과 계층 간 대립이 심화됐다.

냉전시절 중개무역에 의존한 북유럽 국가들은 구소련이 붕괴하자 경제위기에 직면했다. 전후 고도성장기에 축적한 부를 복지에 투자한 북유럽은 사회민주주의에 신자유주의를 절충한 ‘유연안정성(flexicurity)’과 국가적 난제에 직면해 노사정이 고통을 분담한 ‘사회협약’을 앞세워 위기를 극복했다. 또 공동체를 중시하는 북유럽에서는 양성평등, 워라밸, 친환경 등이 제도화된 상태이다.

하지만 복지마인드보다 안보마인드에 충실했던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이하여 사회협약보다 구조조정을 중시했다. 단기적으로 경제는 살아났지만 계층 간 격차확대와 산업생태계 파괴라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우리의 산업현장에는 독선과 불통의 갑질 문화가 온존한 상태이다. 수직적 하청구조를 악용한 단가 후려치기나 벤처기업의 신기술을 가로채는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발전전략은 포용국가의 비전하에 성장(시장), 복지(사회), 제도(정부)라는 균형 잡힌 3가지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최근의 논란을 극복하는 미래의 국정관리는 활기찬 시장(혁신성장, 고용주도성장, 공정경제 등), 안정된 사회(근로장려, 주거안정, 양성평등 등), 적정한 정부(공공서비스, 규제개혁, 정부 간 협력 등)를 추구해야 한다.

<김정렬 | 대구대 교수 도시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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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피도 끓어오르는 때가 있었을 것이다. 거선의 기관처럼 뛰노는 심장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청춘도 뜨거웠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청춘을 일에 바쳤다고 했다. 일찌감치 사업을 시작했다는 그는 남들처럼만 먹고사는 게 꿈이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예순셋에 사업을 접으면서도 크게 미련이 남지 않았다. 할 만큼 했다고 여겼으니까. 그는 장성한 자식들을 앉혀 놓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자신의 삶이 궁색하지 않았음을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올 추석에 손녀들에게 밑도 끝도 없이 이리 말했다. “집이고 돈이고 얽매여 살 필요 없다. 캠핑카 하나 사서 세상 곳곳을 돌아다녀라.”

그는 시간을 되돌린다면, 다시 피 끓는 청춘이 된다면 그리 살았을 거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꿈을 이뤘다고 여긴 건 허상이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공무원이었던 노인도 올해 추석에는 손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지. 늘 그렇게 말했는데, 죽어라 공부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더라고.”

그의 두 아들은 남들만큼 뒷바라지하지 않아도 공부를 잘해서 자랑거리였다. 그는 두 아들이 하루하루 새로울 게 없는 자신보다 빛나는 삶을 살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르지 않더라고. 내 아들도 제 자식들 성적에 일희일비하면서 살더라고. 그게 다더라고.”

올해 여든 살이 된 그는 누군가는 돈에, 누군가는 공부에 청춘을 바치는 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거냐고 했다.

한때는 청춘이었던 이들의 회한은 쓸쓸했다. 찾아주는 이도, 불러주는 이도 드물어 우두커니 텔레비전 앞에 앉아 지난 과거를 되짚어봤을 그들의 쓸쓸한 시간이 서글펐다. 아마도 그들은 기억이 흐릿해져 잊었겠지만, 그들의 청춘이 허망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으로든 빛났을 것이며, 무엇으로든 뜨거웠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새파란 청춘에서 시든 것이 아니라 붉게 물든 것일 뿐이다. 이 가을처럼.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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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은 영어로 폴라리스(polaris)다. 한반도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별자리 중간쯤에 있다고 알려진 북극성은 길 잃은 사람의 길라잡이 역할도 하는 붙박이별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포라는 집을 구성하는 가재도구 중 하나인 섬모를 연구하던 10여 년 전 내가 관심을 기울였던 단백질의 이름도 폴라리스였다. 이 단백질에 문제가 있으면 발생 과정에서 몸통의 좌·우측 배치가 달라진다니 세포 안에서도 폴라리스가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는 모양이다. 세포생물학에서 우리들은 특정한 단백질이나 혹은 세포 내 소기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할 때 극성(polar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체의 바깥쪽 표면인 피부나 몸통 내부를 관통하는 소화기관의 표면을 구성하는 상피세포들은 빈틈없이 닫혀 있어야 한다. 상처가 나면 아프기도 하지만 세균이나 곰팡이가 침범하기도 쉽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세포들끼리 서로 밀착하여 닫혀 있기 때문에 세포의 위쪽 면과 아래쪽 그리고 측면의 환경이 서로 각기 달라진다. 피부 세포의 바깥막은 공기와 맞닿아 있지만 측면은 이웃하는 세포의 측면과 바짝 달라붙는다. 점액을 밖으로 밀어내는 먼지떨이 모양의 섬모는 기도 상피세포의 바깥 면에만 분포되어 있다. 거기가 아니면 섬모의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피세포의 바깥쪽 막에 섬모가 존재할 때 극성이 잘 유지되고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화학자들은 물을 대표적인 극성 물질이라고 말해왔다. 수소 2개와 산소 1개로 이루어진 물 분자 안에서 전자를 갈구하는 산소 부근에 전자가 밀집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소 쪽에는 전자의 밀도가 적고 따라서 두 원소 간의 전기적 성질이 달라진다. 물의 바로 이런 극성 때문에 소금쟁이가 수면 위에 떠 움직이고 100m에 이르는 미국 삼나무 꼭대기까지 물이 공급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살아있는 생명체에서나 그 생명체 안을 채우고 있는 화학물질 모두에게서 극성은 무척 중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극성은 언제 깨지게 될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이른바 ‘상피진피 전이’일 것이다. 이 용어는 대열을 벗어난 상피세포가 노마드 진피세포로 변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웃하는 세포와 오롱이조롱이 붙어 해독작용을 담당하던 6각형 모양의 간세포가 외씨버선 모양의 진피세포로 날렵하게 탈바꿈한 뒤 혈관을 타고 폐에 둥지를 틀게 되면 간세포로서 자신의 정체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암 생물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암세포가 폐에 전이되었다고 말한다. 세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간에서 붙박이로 해독작용을 하던 간세포의 극성이 깨졌다는 표현을 선호한다.

소화기관에서 몸통 안으로 들어온 포도당은 총길이 12만㎞인 인간의 혈관을 따라 돌면서 영양소가 필요한 세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포 해부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말은 혈액과 맞닿은 혈관내피 세포 표면에 포도당 운반 단백질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원래 있어야 할 장소를 벗어나면 포도당을 운반해야 할 이 단백질의 쓰임새가 가뭇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세포나 단백질만이 아니다. 가령 가장 따뜻할 때조차 평균 기온이 10도도 되지 않는 툰드라 지대에 사는 모기들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 생길까? 이곳 물웅덩이 모기 유충들은 썩은 이끼를 분해하는 청소동물이자 물고기들의 먹잇감이다. 성충 모기들은 순록의 피를 빨아 먹는다. 극성스러운 모기떼를 피해 순록은 바람을 거슬러 움직인다. 그러므로 모기가 사라지면 순록의 이동 경로가 달라질 것이고 이들을 쫓는 늑대들의 생존 전략도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기 유충을 먹이로 삼던 물고기들이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찾아오리란 것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한때 병목 단계를 지나올 정도로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다던 인류는 현재 75억 명을 넘어섰다. 그 결과 마천루가 늘어선 대도시들이 남북반구 온대 지방을 따라 난립하고 있다. 특히 북위 30~50도 지역은 그야말로 인간과 그들의 콘크리트 안식처로 가득 찼다. 그 덕택에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잃은 말 못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고통을 겪는다. 대전의 동물원을 탈출했던 퓨마 ‘호롱이’는 네 시간 동안 자신이 의당 누려야 했을 ‘극성’의 안온함을 온전히 만끽했을까? 닷새 동안 100㎞를 이동해 한사코 김천의 한 산을 고집했던 지리산 반달곰은 자신이 있어야 할 최적의 장소를 찾아낸 것일까? 추운 날 도심으로 내려오는 멧돼지들과 인간이 함께 사는 일은 가능할까?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 인간은 단순히 ‘지구이웃’을 제거하는 가장 손쉽고 이기적인 전략을 자주 선택했다. 구제역에 시달리는 사육 돼지들과 A4 종이 한 장 정도의 공간에서 살던 병든 닭을 그저 땅에 묻어왔을 뿐이다. 다른 모든 생명체의 정당한 서식처를 파괴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만큼 인간의 ‘극성’은 정말 그리도 고귀한 것일까?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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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달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의 책임규명 권고에 대한 이행계획을 발표한 후, 문화예술계에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블랙리스트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은 예술인의 매서운 비판은 충분히 이해된다. 문체부도 블랙리스트 문제를 헌법에서 보장하는 자유로운 창작환경을 지키지 못한 매우 엄중한 사안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 등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실장 직위 3개를 폐지하고 실장급 3명을 국장급으로 강등하는 조치를 취했다. 감사원 감사로 9명에게 징계·주의 조치를 했고, 감사원이 경징계를 요구한 공무원에 대한 중징계를 요청한 바 있다.

진상조사위의 책임규명 권고에 대해서는 감사원 감사 및 검찰 수사 경험 전문가의 자문 등 법리 검토를 거쳤다. 수사 의뢰와 징계는 정서적 판단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체부는 지난해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라 중징계를 받은 고위공무원이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패소했다. 징계 재량권을 남용한 게 패소 원인이다.

책임규명 권고 대상 131명 중 징계가 0명이라는 주장이 있다. 131명 중 문체부 소속은 모두 56명(수사 의뢰 12명, 징계 권고 44명)인데, 수사의뢰 대상자 중 5명이 검찰에 수사가 의뢰되었다. 검찰이 기소할 경우 직위해제할 수 있고, 재판에서 금고 이상 선고유예나 실형을 선고받으면 당연 퇴직하게 된다. 공무원으로서는 가장 가혹한 처벌이 될 수 있는 조치다.

문체부가 법적 징계권을 갖고 있는 대상자는 44명이었지만 과장급 이상 22명은 이미 감사원 감사로 주의 처분을 받았거나, 퇴직해 징계를 할 수 없거나 징계시효 경과 등의 사유로 징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문체부는 과장급 이상 12명(수사 의뢰 권고자 2명 포함)에 대해 주의 조치를 했다. 지난해부터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21명이 징계·주의 조치를 받은 셈이다. 사무관급 이하 하위직 공무원들도 책임을 물어 관련 업무에서 배제하는 인사 조치를 했으며, 3명의 재외 한국문화원장도 해당 부처에 조기 복귀하도록 조치했다.

블랙리스트가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 블랙리스트 관련 공무원들은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블랙리스트 작성 과정을 소상하게 밝혔다. 통렬한 반성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백서이다. 백서는 10월 중 출간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블랙리스트 지시·작성·이용 시 5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는 ‘예술인 권리보장법’ 제정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포함해 진상조사위가 권고한 제도 개선 85개 세부과제가 조속히 추진되도록 예술인들도 동참해 주실 것을 요청 드린다. 앞으로 이러한 법·제도 개선이 이뤄지면 누구도 블랙리스트를 만들거나 시행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우성 |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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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28일부터 개정 도로교통법이 시행됐다. 이제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 모든 좌석에서 안전띠를 매야 하고, 자전거를 탈 때 어린이 어른 가릴 것 없이 인명보호장구(안전모)를 착용해야 한다. 만 6세 미만의 영유아를 자동차에 태울 때에는 유아보호용장구(카시트)를 장착해야 한다. 안전띠를 매지 않거나 카시트를 장착하지 않으면 운전자는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현재로서는 안전모 없이 자전거를 타도 처벌규정이 없어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겠지만 일정한 계도기간을 거친 후에는 안전모 착용 의무화에도 처벌규정이 도입될 것이다.

당장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서울시가 온라인 공론장 ‘민주주의 서울’을 통해 실시하고 있는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 안전모 착용 의무화’ 설문조사에서 반대 여론은 90%에 달했다. 법대로라면 영유아를 데리고 버스나 택시를 탈 때 카시트를 들고 다니게 생긴 부모들의 불만이 들끓자 경찰은 황급히 법 시행 하루 만에 단속을 유예하고 계도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죽하면 소관부처인 행정안전부 김부겸 장관이 진작 인터넷에 글을 올려 “국회가 조만간 법을 좀 손봐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며 곤혹스러운 심경을 내비쳤을까.

개정 도로교통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단순히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개정법에 따르면 택시운전사가 승객에게 안전띠를 착용하라고 안내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이 착용하지 않은 경우 택시운전사는 처벌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승객은 처벌받을까? 그것도 아니다. 처벌의 공백이 발생하는 것이다. 졸속입법의 결과다. 일각에서는 자전거 안전모 착용 의무화는 별도의 처벌규정이 없으니 안전문화 정착을 위한 계도적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은 채 자전거를 운전하다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이 규정으로 인해 자전거 운전자가 받을 수 있는 손해배상액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전거 안전모 착용 의무화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개정 도로교통법에 숨겨져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국가만능주의다.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보호라는 입법목적에 토를 달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국가가 하나부터 열까지 국민의 일상에 개입하는 것마저 당연히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헌법재판소는 안전띠를 매지 않을 자유가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에서 나오는 일반적 행동자유권의 보호영역에 속하며, 자동차 운전자에게 안전띠를 매야 할 의무를 지우고 이를 위반했을 때 범칙금을 부과하는 도로교통법 규정들은 국민의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제한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 비록 합헌 결정이 내려지긴 했지만 국민에게 안전띠 착용을 강제하는 도로교통법 규정들이 개인의 자유로운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자전거 안전모 착용 의무화와 카시트 장착 의무화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민은 국가가 돌봐줘야 할 연약한 존재가 아니다. 국민은 완전하지는 않아도 저마다의 개성과 인격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을 바탕으로 사회 안에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책임 아래 결정하고 형성하는 나라의 주권자다. 국가가 국민의 후견인을 자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입법목적이 정당하고 그 목적을 실효성 있게 달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일상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된다. 형사처벌로 국민을 윽박지르고 계도라는 명목으로 국민을 가르치려고 들어서도 안된다. 향후 국회나 정부가 공익을 위해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입법을 할 때 국민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며 국가의 역할은 보충적이고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되새긴다면 적어도 이번 개정 도로교통법이 초래한 것과 같은 사회적 혼란은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개정 도로교통법은 지난 2월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찬성 196명, 반대 0명, 기권 4명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가결됐다. 그보다 앞서 이루어진 2월2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 회의록을 뒤져봤다. 몇몇 의원들이 시기상조론을 내놓거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제기를 한 것 외에 국가가 이렇게까지 국민의 삶을 세밀하게 규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2018년 우리 현실에서 아직 국가는 너무도 당연하게 국민에게 맡겨둬야 할 많은 것들을 국민을 대신해서 한다. 국가 입장에서는 국민이 그만큼의 역할을 요구해놓고는 이제 와서 딴소리냐며 발끈할지 모르겠다. 우리 솔직해지자. 국가도 국민에 대한 통제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닌가.

<류제화 | 여민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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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모이는 추석연휴에, <노인과 바다>를 읽기 시작한 것은 나로서도 뜬금없는 일이었다.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쿠바에 가 본 적이 없으며, 그 앞바다를 헤엄쳐 다닌다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청새치를, 하다못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조차 본 일이 없다. 수십년 전 소년소녀 세계명작선집에서 <노인과 바다>를 읽었고, ‘이 소설이 주는 교훈은?’ ‘인간 불굴의 의지’라는 판에 박힌 문답식 교육의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추석 명절의 노동을 ‘인간 불굴의 의지’로 견디기 위해 <노인과 바다>를 펼쳐들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는 어쩌면 노인의 ‘홀로 있음’이 필요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 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소설의 첫 두 문장을 읽은 뒤,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헤밍웨이가 삶에 대해 말하려던 것은 여기 이 두 문장에 다 들어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거대한 고기를 사투를 벌여 잡았고, 그 고기를 다시 상어떼에 다 빼앗겨 앙상하게 뼈만 남겨 돌아오는 이야기는, 노인이 소설의 마지막에 자기 자신에게 외치듯이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열두서너 살쯤의 나였더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문장과 단어, 상황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불러 세웠기에, 덮어두었다가 다시 펴서 읽기를 반복하느라 짧은 분량의 소설을 읽는 데 연휴를 훌쩍 넘겨 버렸다.

일을 위한 독서를 꾸준히 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이 허기져 바닥까지 박박 긁어도 더 이상 내 안에서 퍼낼 것이 없다고 느낄 때, 내가 찾아갈 곳은 두 손 펼칠 공간만큼만 있으면 되는 책이다. 지상의 어느 날이 너무 아득할 때는 <코스모스>를 펼쳐본다. 우주를 바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그것도 이제야 발목을 물에 적신 수준일 뿐이라는 사실을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다정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외계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사실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개의 방편일 뿐이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라는 것. 그러니 심연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고.   

2018년 책의해를 맞아 독자개발 연구를 해오고 있는 2018 책의해 조직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주 ‘읽는 사람, 읽지 않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중간결과 발표회를 가졌다. 이순영 고려대 교수팀이 설문조사와 포커스그룹 인터뷰를 통해 연구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1200명) 중 23%는 ‘일 년 동안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답했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인터넷으로 찾으면 원하는 정보를 바로 그 부분만 빠르게 찾을 수 있으니까’였다. 

맞는 말이다. 책은 원하는 정보를 입맛에 맞게 즉시 내주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 차려진 밥상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생쌀 한 줌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휴대전화기에 도서관 하나 분량의 정보를 저장해 다닐 수 있다 해도, 우리의 사유는 클릭으로 불러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피부 아래에 있던 것들이 숨 쉬듯 토해져 나오는 것이다. 내 마음의 근육에 부지불식간에 밑줄 그어진 문장들이 나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예술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IT든, 처세술이든 책은 결국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는 두텁고 매혹적이며 웅숭깊고, 어떤 이야기는 얄팍하고 시시하며 겉발림이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든 나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고, 그것은 결국 내게로 돌아오는 길이 된다. 여행의 전과 후의 나는 같지 않다.

“거대한 바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지”라고 노인은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채팅창의 친구들이, 술자리의 벗들이, 때론 영화와 드라마의 대사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듯이 책 속의 이야기꾼들도 내 마음을 그들의 방식으로 다독여준다. 그 이야기는 힘이 세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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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국무총리가 2일 국무회의에서 “유튜브,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등 온라인에서 악의적인 가짜뉴스가 급속히 번지고 있다”며 범정부 차원의 대응을 지시했다. 이 총리는 “가짜뉴스는 표현의 자유 뒤에 숨은 사회의 공적, 개인의 인격을 침해하고 사회의 불신과 혼란을 야기하는 공동체 파괴범”이라며 “검찰과 경찰은 유관기관 공동대응체계를 구축해서 가짜뉴스를 신속히 수사하고, 불법은 엄정히 처벌하시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가짜뉴스와 이를 제작해 유포하는 사람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2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 도중 의원들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가짜뉴스는 통상 인터넷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담은 콘텐츠를 말한다. 이들은 허위사실을 기반으로 억지 논리로 자기 주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과학적 사고나 보편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성소수자를 공격하거나 증오를 조장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이들 가짜뉴스에서 언론 보도의 필수 요소인 당사자 사실 확인이나 반론 제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정보를 전달한다는 언론의 명제를 외면한 채 정보와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가짜뉴스는 민주사회의 적이 분명하다. 외형적으로는 방송의 뉴스 전달 형식과 비슷해 새로운 기술에 익숙지 않은 노년층 등에서 이를 정규 방송으로 오인하는 사례도 많다.

문제는 이런 가짜뉴스가 개인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을 넘어 국가안보와 같은 국가 정책에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적 식견이 없는 시민을 가짜뉴스로 흔들면 공동체의 견해가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는 특정 종교의 일부세력과 결부되었다는 의심까지 제기됐다. 가짜뉴스의 주요 출처가 보수 지지층이었던 터에 이런 사실까지 드러났으니 불법성 여부에 대한 수사는 불가피하다. 가짜뉴스를 방치해서는 건강한 여론이 형성될 수 없다.

가짜뉴스는 시장의 선택에 의해 자율적으로 축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기성 언론의 오보처럼 규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관련 규정이 미흡하다. 가짜뉴스 자체에 대한 엄단은 물론 유통 경로인 매체에 대한 대응책도 필요하다. 하지만 가짜뉴스에 대한 대응이 언론자유를 위축시키지 않도록 하는것도 중요하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그 자체다. 자정을 통한 여론의 자율규제는 포기하면 안된다. 가짜뉴스를 솎아내는 시민사회의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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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2일 야당이 반대해온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를 임명했다. 그동안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은 “유 후보 임명을 강행하는 것은 반의회적 폭거”라며 강하게 반대해왔다. 유 장관은 여느 장관 후보자들에 비해 의혹과 흠결의 건수가 많고 종류도 다양했던 게 사실이다. 이는 야당 말마따나 장관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문제들일 수 있고, 한편으로 과거 장관 후보자들에 비해 결정적인 하자라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었다. 청와대의 임명 강행은 찬반 양론이 맞서 있는 상황에서 교육부 수장의 공백 사태를 더 두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4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청와대의 인식이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현재 인사청문 절차에 반대하는 야당의 뜻을 일반 국민의 여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유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여론이 국민 다수의 여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권력자가 시민을 앞세워 국회를 공격하고 나설 경우 자칫하면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反)정치주의로 흐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박근혜 정부의 치명적인 잘못은 야당과 반대 시민을 적으로 몬 것이었다. 여론조사기관 알앤써치가 지난달 초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유 장관은 ‘적합(40.7%)’, ‘부적합(39.0%)’ 여론이 팽팽했다. 청와대는 무엇을 근거로 ‘다수 여론’을 거론했는지 모르나 최소한 임명에 앞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후보를 청문회에 올린 데 대해 먼저 사과라도 했어야 한다. 야당이 반대하든 말든 임명할 거면 인사청문회는 뭐하러 하느냐는 것이 정확한 민심이다.

한술 더 떠 김 대변인은 야당의 반발로 민생법안 처리 등에 난항이 예상된다는 지적에 대해 “유 장관을 임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협치가 이뤄지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면서 “현재 상황을 보면 그게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고 했다. 한마디로 유 장관 진퇴에 상관없이 지금 국회 상황을 ‘협치 난망’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들이 민생 살리기를 위한 초당적 협력과 협치를 약속한 게 불과 두 달 전이다. 가뜩이나 정국은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의 ‘예산정보 유출’ 논란으로 꼬여 있는 상황이다. 서로 마주 달리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대통령과 여당은 항상 야당의 올바른 지적과 비판을 수용할 줄 아는 포용성을 요구받는 것이다. 문 대통령과 여당은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삼고 소통하며 협치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김 대변인의 발언은 그런 약속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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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개혁 자문기구인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사법발전위)가 2일 회의를 열어 ‘수요자 중심의 사법접근성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전문위원들이 사전 제출한 보고서에 비춰보면 사법발전위는 일부 재판에만 적용되는 영상재판을 확대하고 온라인재판을 도입하는 방안 등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사법발전위가 대법원장 직속임을 고려할 때, 김명수 대법원장 의중이 실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 대법원은 3054억원의 재원이 소요되는 ‘스마트법원 4.0’ 사업을 추진 중이다. 시민의 사법접근성을 확대하자는 취지이지만 자칫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헌법적 기본권을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또한 대법원이 앞서 외국산 영상·음향 장비를 턱없이 높은 가격에 구매한 사실까지 드러나며 영상재판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영상재판은 1995년 12월 ‘원격영상재판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면서 시행됐다. 그러나 이용 건수는 1998년 778건까지 늘었다가 2000년 400건으로 줄었고, 2001년 4월 이후엔 사실상 중단됐다. 2016년 민사소송법 개정으로 영상재판을 통한 증인·감정인 신문이 가능해졌지만 이후 2년여간 활용 건수는 시범사업을 포함해도 12건에 불과하다. 형사재판에서의 영상 증인신문도 2015년 407건에서 2016년 306건, 2017년 226건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이처럼 실효성이 떨어지는데도 대법원은 온라인재판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스마트법원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예산 낭비가 심하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터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대법원이 개당 225만원에 사들인 미국산 영상·음향 컨트롤러는 미국 아마존 사이트에서 약 17만원에 팔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가의 10배도 넘는 고가에 장비를 사들인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온라인재판 도입·영상재판 확대 등은 기존 재판시스템에 중대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사안이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기존의 저조한 영상재판 활용률 등에 비춰봐도 조급하게 추진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법원 내부는 물론 검찰·변호사 등 관련 직역까지 참여하는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게 우선이다. 혹여 ‘김명수 대법원’의 치적을 남기고자 서두르는 것이라면 더욱 큰일이다. 김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도입이라는 치적을 남기려다 최악의 사법농단을 낳은 전임자를 반면교사로 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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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한국정치를 휩쓸고 지나갔다. 고용 쇼크, 소득 분배 악화, 경제성장 하락, 국정 지지율 추락에 홍역을 앓았다. 겉보기에 지금 한국 정치는 숫자 폭풍을 견디고 멀쩡히 살아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을 감안할 때 정치가 언제 다시 숫자에 휘청거릴지 알 수 없다. 정치는 숫자를 다루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주먹구구의 한국 정치에 숫자가 발언권을 갖게 된 건 분명 좋은 소식이다. 너무 오랫동안 한국 정치는 설명할 수 없는 의견, 근거 없는 주장, 방증할 수 없는 당위론에 사로잡혔다. 이런 정치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숫자의 합리성일 것이다. 숫자는 복잡한 현상이나 잘 드러나지 않는 실체를 눈에 보이는 사실로 압축해주는 힘이 있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고용률과 소득 분배율을 대하는 방식은 합리성과 거리가 있다. 고용률 부진을 알리는 숫자는 정책 재검토든 고용 구조 개선이든 해결책을 요구한다. 그런데 여야는 이런 문제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 여권은 단기 일자리라도 늘려서 숫자를 채우고 싶어 한다. 야당은 물러나라고만 한다. 가계 소득 분배가 악화됐다는 숫자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야는 불평등 완화 방안에 초점을 두고 이 숫자를 다루지 않았다. 여권은 표본 오류 주장, 통계청장 경질이 말해주듯 불평등 문제를 통계기술 및 인사 문제로 대체했다. 이번에도 야당은 물러나라는 소리뿐이었다. 숫자가 권력투쟁의 도구로 동원된 것이다. 한국정치에 내재한 비합리성이 숫자의 합리성을 밀어낸 결과다. 모든 숫자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복잡한 현실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단순한 숫자도 있다. 경제성장률이 좋은 예다. 한국 사회에는 3.0%를 넘으면 국정에 성공한 것이고 2.9% 성장이면 실패했다는 식의 인식이 퍼져 있다. 하지만 양극화된 사회 현실을 고려하면 그것은 현실과 괴리된 채 표류하는 공허한 숫자다. 두 숫자의 차이는 실제 서민의 삶이 어떤지 말해주지 못한다. 숫자는 손에 집히는 게 없는 고도의 추상성을 띨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이다.

국정 지지율도 삶과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지지율이 80%였다고 삶이 그만큼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40%였다고 더 나빠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권은 오르락내리락하는 변덕스러운 숫자를 끌어올리고, 붙잡아 두는 일에 많은 자원을 투입한다. 지지율은 다른 모든 숫자를 대표하고 압도하는 숫자 중의 숫자, 숫자의 왕이다. 고용률, 소득분배율, 경제성장률 모두 지지율에 종속된다. 지지율에 기여하지 않는 숫자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된다. 집권세력이 원하는 것은 ‘나중에 좋은 숫자’가 아니라 ‘지금 괜찮은 숫자’다. 그런 숫자는 실상이 어떻든 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숫자는 숫자라는 이유만으로도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당장 숫자로 내놓을 수 없는 것도 있다. 고용 개선을 위한 경제 생태계 조성, 불평등 완화를 위한 사회개혁과 같은 중장기 과제가 그런 것이다. 정부가 이런 문제에 집중한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이 또한 숫자의 힘을 믿기에 채택할 수 있는 전략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왜 규제완화, 재벌 의존, 그린벨트 내 주택건설 추진 등 보수정부의 정책을 계승하는지 설명해준다. 과학소설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슈퍼컴퓨터에 ‘인생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컴퓨터는 750만년 동안 계산한 끝에 ‘42’를 출력한다. 알 수 없는 숫자다. 42가 무엇인지 또 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은 곧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숫자로 축약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는 스스로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도 스스로 물어야 할 게 있다. 국가의 행로는 미리 정해져 있어서 정권 교체에도 변경불가인가? 여야가 단기 숫자에 매달리는 동안 국가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오래전부터 가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 집권자가 국가의 고삐를 쥐고 있는 게 아니라, 국가가 집권자의 고삐를 쥐고 있는 것 같다. 정권교체해도 국가의 진로가 크게 바뀌는 일이 드물기는 하다. 문재인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이성론’이 있다. 국가가 자기 생존을 위해 스스로 필요한 일을 하고 집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져 있다는 믿음이 여전하다. 그 믿음에 따르면, 개혁의 필요성을 웅변하는 숫자는 무시하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숫자에는 집착하고,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는 방치하는 현상이 해명되지 않는다. 집권자는 주권자의 의사를 대리하는 존재다. 그런데 국가에 주권자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정치란 과연 무엇인가?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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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교육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교육 정책과 교실 상황은 왜 거꾸로 가는 것인지요.” 엊그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폴 김 교수(스탠퍼드대)가 한국 교육에 던진 일갈이다. 정답 맞히기를 훈련하는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해결해가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필요한데, 우리의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깊이 수긍하면 할수록 점점 더 조여오는 답답함을 어찌할 수 없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답답함은, 이 문제를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매우 잘못된 줄은 알겠는데 이젠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을 만큼 고질이 되어 버렸고 해결의 실마리는 요원해 보인다. 학교도 정부도 대안을 내지 못하는 가운데 부모들은 자녀가 시험 잘 보기만 바랄 뿐이다. 하지만 학창 시절 몇 년 바짝 공부한 밑천으로 평생이 보장되던 때는 이미 지나갔으며,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 본들 정년 이후 몇십 년을 더 살아야 하는 시대다. 더구나 가까운 미래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우리 주변은 급변하고 있다. 이 답답함을 온전히 인정하고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폴 김 교수가 강조한 ‘부모 교육’의 시급성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자녀는 좋은 스승을 찾아 교육시키면서 정작 자신은 스승에게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1200년 전 한유(韓愈)의 말이다. 그가 말한 스승은 일정하지 않고, 배움의 시기 또한 제한이 없다. 나이나 직위와 상관없이 의문을 해소해주고 분야에 따라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이가 있으면 언제든 스승 삼는 것이다. 관건은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지에 있다.

창의적인 질문을 던지며 남들과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교육 시스템과 네트워크를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지 공동의 지혜를 모을 때다. 다만 배움이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 되묻는 일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이 답답함의 사슬을 끊기 어려울 것이다. 결과만 중시하는 교육에서 행복은 결과를 이룬 순간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지속적인 행복은 대상과 시기를 제한하지 않는 배움의 과정에서 누릴 수 있다. 배움에 의한 ‘나’의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눈으로 자녀를, 우리의 교육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 여기에서 실마리를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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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에서는 주로 내가 느끼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마치 제3자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필자라는 용어는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평생 자동차라곤 사본 적도 없고 사실 운전도 하지 않던 내가 최근 자동차를 보러 다녔다. 그것도 이른바 외제차를 보고 다녔다. 훈데르트바서는 ‘집’을 제3의 피부(옷이 제2의 피부)라고 하면서 자기답게 꾸밀 권리, 창문이나마 자기 스타일대로 만들 수 있는 ‘창문권’이라고 한 바 있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에게 자동차도 또 다른 피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차는 내게 삶의 공간으로서 아름다웠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전기 차에 대한 바람도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함). 그런데 예상외로 대부분의 외제차종의 색깔 선택지란 흰색(아이보리), 은색, 회색, 그리고 검은색으로 꽤 잔혹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아마도 더 ‘고급진’ 라인의 자동차라면 선택지가 넓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외제차의 본사가 있는 자국과 미국이나 일본에 수출되고 있는 동종 차들을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보다 훨씬 다양한 색깔의 차가 제공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구매시장이 크지 않아서다.

이상한 것은, 어떤 종류의 수입차들은 인기가 좋아서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주문생산’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주문생산이란 고객의 요청을 받아서 생산한다는 것인데 짧으면 3개월, 길면 거의 1년까지 기다려야 주문 차를 받게 된다. 이렇게 충직한 고객들에게 그리 특별한 요청도 아니고 이미 만들어진 다양한 색깔의 차들을 수출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업무를 수반하는 것일지 의문이다. 게다가 외국에 비해 동종 차의 가격이 한국에서는 의미있게 비싸다. 그것은 세금 및 판매수수료 등에 기인할 것이고 국내 자동차 생산에 대한 보호 장치라고 맞설 수 있으므로, 외국회사에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닌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국내차는 상대적으로 싼 가격으로 보호받고, 외국차는 비싼 가격을 보장받는 셈이다. 반면 한국 소비자들의 입장에선 더 비싼 가격에 더 좁은 선택지의 외제차를 구입해온 것이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개별 소비자 선택권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인 내지 아시아인의 취향에 대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같은 거다. 내가 만난 판매직원들은 한결같이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깔”에 대해 말했고 그것을 권해 주었다. 그것은 흰색과 검은색의 이분법적 색깔 세상의 몇 가지 조합이었다. 심지어 그 몇 색깔 중 여성들이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도 안내해 주었다. 내게는 이 무채색 스펙트럼 자체가 매우 남성적인 것임에도. 왜 한국인들이 그런 색깔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먼저, 무채색으로 가득한 우리의 자동차 거리를 실증적으로 보여주었고, 둘째, 한국인들은 ‘튀는 색깔’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 중고시장에 내놓으려면 무난한 색깔이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어반복적 설명. 나는 그리고 나의 친구들은 한국인이 아니던가. 그보다는, 한국인들은 그런 정도의 색깔이라도 큰 불평 없이 자기네 차를 구매할 것이라는 외부의, 그리고 한국인 내부의 시선이 있는 게 아닐까. 색채에도 인종과 성별의 정치경제학이 있는 듯하다.

칸딘스키가 색채가 정신성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고 색으로 관객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 말에 공감한다. 색채로 영혼을 표현하고 영혼을 저격할 수 있다고나 할까. 마음치료에 색깔치료라는 게 있다. 색깔로 마음과 몸의 부족함을 채우고 자기다움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익한 색깔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무지개처럼 풍요로운 색채 세상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빨강이라고 다 그냥 빨강이 아니고 파랑이라고 다 그냥 파랑이 아니다. 장밋빛 빨강과 노을빛 빨강이 있고 와인빛 빨강과 아기의 입술색 빨강이 있다. 가을 들녁 갈대의 베이지가 있는가 하면, 봄빛 아래 새잎이 돋을 때 잠시 스쳐가는 연둣빛 베이지가 있다. 도시의 무채색 세상에서 자라난 우리들, 거리표지판 하나라도 고민하고 실험하여 정성스레 만들어진 색채 속에서 살지 못한 우리들, 조상들이 사용했던 염료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멋진 색채로써 나를 즐겁게 하고 다른 이를 유혹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오늘날 패션, 인테리어, 가전제품 등 거의 모든 상품이 디자인과 색채 전쟁이 아니던가.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자동차 색깔을 무채색의 네 가지로 말하는 건 심히 우울한 일이다, 아름다움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내 친구들, 그리고 미적 감각이 넘쳐나는 미래 세대들에게 더 이상 그런 강요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모방은 언제나 ‘B급’에 머무니, 디자인과 색채 수재들에게 투자해 한국 차도 색채와 디자인을 새롭게 창조했으면 한다. 한국인의 취향은 이미 한국의 틀을 넘어섰으므로.

<양현아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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