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한 연예인에 대한 협박 사건 때문이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 사이의 기념물일 수도 있었던 동영상을 상대에 대한 협박이나 강요, 복수의 칼로 사용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촬영이나 제작에 당사자가 동의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최근 불거진 사건처럼, 명시적 협박이나 폭언이 수반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벤지(복수)’의 효과는 발생한다. 특히 상대방이 유명 연예인이라면 그 효과의 크기는 상상하기 어렵다.

전 남자친구와 폭행여부를 두고 공방을 벌이고 있는 아이돌 그룹 카라 출신의 구하라(27)가 9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석,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구 씨는 지난 13일 새벽 전 남자친구 A씨 폭행 논란에 대해 쌍방폭행을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리벤지 포르노의 역사는 길지만 논쟁의 중심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30여년 전 미국의 한 포르노 잡지가 일반인들의 음란 사진을 투고받아 실은 것이 원조라 한다. 이 ‘일반인 사진’의 상당수가 사진 속 여성의 동의 없이 보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리벤지 포르노가 공공연하게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트위터나 구글 등이 자체적으로 필터링을 시작한 것은 겨우 3년 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처음으로 유명 연예인의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어 사회적 파장이 일었던 때가 20년 전이었지만 당시에는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는 회자되지 않았다. 도리어 유출 범죄자인 영상 속 남성이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사회가 많이 바뀐 듯도 하다. 이번 사건의 경우, 연인 간의 폭력 문제로 보도될 때만 하더라도 여론의 비난은 남녀 두 명에게 비슷하게 나뉘거나 여성 연예인에게 더 쏠리는 듯했지만 리벤지 포르노의 존재가 드러나자마자 대부분의 누리꾼들은 남자 쪽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댓글이 셀 수 없을 만큼 달렸고, 리벤지 포르노에 대한 처벌 규정이 미진한 현실을 개탄하는 의견도 성별과 상관없이 강하게 터져 나왔다.

그런데 진짜 많이 바뀐 걸까? 신문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모두들 협박의 주체인 남성에게 분노하는 듯 보이지만, 남성 유저가 대부분인 온라인 커뮤니티의 온도는 조금 다르다. 문제의 동영상을 보고 싶다는 글들이 빼곡하다. 우스개처럼 쓰인 글이 대부분이라지만, 이 글들조차 어떤 이들에게는 칼이 되어 꽂힌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런 동영상을 찍은 여자가 잘못했다거나, 남성을 할퀸 여성 연예인도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몇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리벤지 포르노’는 현상을 잘 표현해 주는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관객을 상정하며 그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연출된 영상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는 작년 이맘때 ‘리벤지 포르노’ 용어를 퇴출시키겠다고 공언한 바 있고, 한 서양 학자는 ‘성 착취 이미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동영상 그 자체는 죄가 없다. ‘텍스트’를 무어라 칭하든, 이를 유출하고 유포하고 시청하는 ‘행위’에 흉악한 이름을 붙여야 한다.

성에 대한 교육이 어려서부터 필요하다는 점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단순한 피임법 이야기가 아니다. 생물학적 성(sexuality)에 대한 교육과 성(gender)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에 대한 교육은 분리될 수 없다. <쇼미더머니 777>에 출연 중인 15세 소년 래퍼 디아크가 여자친구와의 성관계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알려진 정보로만 추정하자면, 그 과정의 폭력성 정도는 걱정스러운 수준이었다. 여성을 행위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는 부실한 교육의 결과이다. 가정과 학교만 책임을 질 일은 아니다. 이 사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마지막 하나. 이번 사건을 남녀 대결의 문제로 확대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있지만, ‘리벤지 포르노’는 필연적으로 남녀 문제일 수밖에 없다. 남녀의 은밀한 모습이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될 때 한국 사회에서 누가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몰카’를 걱정하거나 불쾌해하지만 여성들은 두려워한다. 이 분명한 차이를 외면하고 애써 ‘범죄’의 문제로만 치환하는 것도 현실 개선에 장애물이 된다. 만들고, 유통하고, 즐기는 이들의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은 설령 여성을 군대에 보내도 바뀌지 않는다. 억울해할 일이 아니라 바꿔나갈 일이다.

한 연예인의 사생활을 굳이 꺼내 글의 소재로 삼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스타의 상품화에 익숙한 것이 현실이라면, 이왕이면 이 사례가 교훈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sexuality)과 성(gender) 문화가 조금이라도 정상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국회 사법개혁특위가 지난 7월26일 국회 본회의에서 구성 결의안을 의결한 지 70여일이 지났지만 아직 출범도 못하고 휴업 중이다. 여야는 지난 4일 8(더불어민주당) 대 6(자유한국당) 대 2(바른미래당) 대 2(비교섭단체)로 특위 위원 배분에는 가까스로 합의했지만, 한국당은 아직 특위 위원 명단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개특위는 올해 말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가동한다고 해도 2개월밖에 시간이 없다. 이달 내내 진행될 국정감사 기간을 빼면 매일 밤을 새워도 모자랄 판이다.  

사개특위는 법원과 검찰 개혁,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등 사법 전반에 걸친 개혁방안을 마련하고 관련 법안을 심의·의결한다. 모두 권력기관을 제자리로 돌려놓거나 시민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중요 사안들이다. 앞서 20대 국회 전반기에 출범한 사개특위는 회의다운 회의 한번 하지 못한 채 지난 6월 빈손으로 끝났다. 당시 시민단체에선 무능과 무성의, 무기력으로 점철된 ‘3무(無) 특위’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래서 활동기한을 6개월 연장하고 새롭게 구성한 게 지금의 사개특위다. 이마저 앞의 전철을 그대로 되밟고 있으니 한숨만 나온다. 한국당 지도부는 시간 끌기로 사법개혁을 좌초시키려는 전략이 아니라면 하루속히 정상 가동에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법원은 지금 사법농단 의혹으로 정의의 최후 보루이기는커녕 불신의 대상이 돼 있는 상태다. 검찰은 시민의 개혁 대상 1호로 꼽힌 지 오래다. 만약 법관과 검사를 수사 대상으로 삼는 공수처가 진작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의 사법·검찰개혁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사개특위에 거는 기대 또한 크다. 이는 당리당략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과제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더는 우물쭈물할 여유가 없다. 한국당의 맹성을 촉구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수년 전 후배의 군에 간 아들이 탈영을 했다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 소동은 하루 뒤 부대에서 좀 떨어진 PC방에서 인터넷에 골몰하고 있는 친구 아들을 발견함으로써 다행히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닌 걸로 끝이 났다. 참 그 녀석 특이하군 하는데 후배의 말이 요즈음 군대에선 그렇게 부대를 이탈한 병사가 PC방 같은 데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골몰하다가 붙잡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참 시대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세대가 군부대 안에서 생활하며 주로 느낀 것은 그것이 육체적인 원인에서 오든 정신적인 원인에서 오든 몸으로 느끼는 배고픔이었다. 그래서 외박이나 휴가 나갈 땐 늘 빵과 과자, 짜장면, 불고기 등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봐야지 단단히 벼르며 부대 정문을 나서곤 했다. 지금 젊은 세대에겐 문화적 결핍이 우리 세대의 배고픔과 같은 모양이다. 하기는 먹고사는 문제가 기초적으로는 해결이 되고 지적 네트워크가 삶의 핵심적 필수요소가 된 인지자본주의 시대가 아닌가?

젊은 세대에게 문화적 결핍이 우리 세대의 굶주림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면 학교교육은 우리 세대보다 젊은 세대에게 더 근본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일정 수준의 학교교육과 그를 통해 습득한 기초학습능력이란 못 갖춰도 살아가는 데 결정적 지장은 없는 것이었지만, 젊은 세대에겐 굶주림이 우리 세대에게 그러했듯이 정상적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장애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교육은 과연 이러한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변화해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양적으로만 본다면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고 대다수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있고, 매년 엄청난 숫자의 박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우리의 학교교육은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외양을 갖추고 있는 듯싶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무분별하게 양적 팽창에만 몰두하던 산업화 시대의 교육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 있지 않다.

우선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의 학교교육이 문맹에 가까운 학생도 등록금을 내고 출석만 잘 하면 무난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참 신기한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들의 기초학습능력에 대해 국가 수준에서 한 번도 평가하는 일이 없고, 9년간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국가가 학생들의 기초학습능력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최소한 10년간의 국민 공통교육과정이 끝나는 고1 말에 국민 공통교육과정에 대한 국가 수준의 졸업자격 고사라도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통과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고2, 3에서 별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졸업자격 고사 응시 기회를 1~2회 더 주어 최대한 기초학습능력을 갖추도록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국가가 자기 할 일을 확실히 하면 대입제도를 둘러싼 혼란과 갈등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고1 말의 졸업자격 고사를 대학입학자격 고사를 겸하도록 하여 ‘수능 1’로 하고, 고3 말에 고2, 3의 진로선택 교육과정에 대해 ‘수능 2’를 보도록 하고, ‘수능 2’는 미래 역량을 물을 수 있는 서술형, 논술형 문항을 도입하되 학생이 응시할 수도 있고 응시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형으로 하면, 대학 학생 선발을 대학 본고사를 금지하는 선에서 대학 자율에 맡겨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5~6년 전 혼자서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신문에 심리상담사 자격증 시험 광고가 나왔기에 흥미가 생겨 시험을 보았다. 시험 교재를 사서 한 달간 공부해 보았는데 2급 심리상담사와 아동심리상담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가 왔다. 나는 이건 1차 시험이고 이제 교육도 받고 장기간 실습도 한 후 테스트를 해서 자격증을 주겠거니 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우편으로 자격증 두 장이 배달되어 왔다. 허망하게도 그것이 끝이었다. 사기당한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국가가 이렇게 자격증에 대한 질 관리를 안 하면 심리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당연히 상담자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학벌을 따질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심리상담사 자격증보다는 유수한 대학의 졸업장에 대한 신뢰도가 훨씬 높을 테니까. 국가의 각종 자격증에 대한 질 관리의 허술함이 우리 사회가 실력 위주의 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학벌사회에 머물게 되는 한 이유가 아닌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이것은 직업계고와 관련된 자격증도 마찬가지다. 정말 고졸자 취업을 늘리고 싶다면 그 자격증들이 현장에서의 실력 발휘를 담보할 수 있도록 질을 관리하고 직업계고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

그렇다고 이른바 일류 대학이라고 교육의 질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일류 대학의 국학 전공 대학원에서 교수가 되려면 미국 유학을 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박사학위에 대한 신뢰도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대학교육의 질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웅변한다.

흔히 미래사회에 대비한 융합적이고 창조적인 교육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어떤 새롭고 기발한 정책이나 제도에 의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생겨날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개혁이란 것은 그렇게 단절적인 게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가 오랜 반복적 훈련을 통한 숙련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자기만의 창조적 연주를 해내듯이 우선은 기왕의 것에서 질적으로 최선의 것을 만들어내는 매우 지루하고 고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개혁을 원한다면 가장 먼저 현재 있는 자격증들의 자격부터 물어야 한다.

<김진경 | 시인>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하철역의 모든 상업 광고를 없애겠다는 구상을 내놨다는 보도가 나왔다. 광고를 모두 없애고 예술작품을 전시해 ‘예술 역’으로 바꾸려는 것이 이유라 했다. 무분별한 성형 광고의 피로감을 발단으로 꼽았다.

지하철은 한 도시의 문화 수준을 엿볼 수 있는 공공공간이고 그곳에 걸리는 광고는 상업적 목적을 표방하면서도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이 그와 거리가 멀다면? 박 시장이 특단의 작심을 하기에 충분한 계기다. 문화예술 분야 전문가로서 ‘서울문화예술철도’를 위한 논의를 이끌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무분별한 상업 광고’에 과감한 혁신의 칼을 빼들겠다는 박 시장의 의지는 환영할 만하다. 그런데 이런 시 차원의 개입을 “지하철역 광고 다 빼라”는 한마디로 몰아가는 것은 잘못됐다.

도시철도 이용객은 하루 700만명이 넘는다. 1000만 서울시민의 70% 이상이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을 향유하게 되면 시민 문화 수준 향상은 물론 도시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는 발상에서 ‘문화예술철도’의 구상이 시작됐다. 내외부 전문가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약 8개월간 논의 끝에 4년2개월에 걸쳐 시행할 ‘사전설계안’이 마련되었다. 그중 광고와 관련한 부분만을 요약하자면, ‘엄청난 문화 콘텐츠인 광고의 매체 방식을 기술 진보에 맞춰 혁신하고 콘텐츠 수준을 높여 사용자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문화예술적 경험을 창출하자’는 것이 구상의 핵심이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빼앗겨 광고 수입이 줄고 있는 상황에서 수준 높은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유통되는 도시 차원의 창의적 생태계를 구축해, 지하철을 문화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고, 광고와 연계한 먹거리를 창출하는 허브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광고란 꼭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 안에 숨어 있는 유휴공간을 발굴해 미술관이나 전시장으로 활용하는 과정에 민간 기업의 메세나 활동을 접목시키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민간자본이 참여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운영 모델 도출을 위해 공간·매체·운영의 혁신도 계획 중이다.

문화예술철도 마스터플랜은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일시에 계획을 완성하고 무조건 실행에 옮기는 방식이 아니다. 단계별로 지속적으로 보완해 혁신을 위한 진화 과정을 사용자와 더불어 겪어가며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런던이나 브뤼셀, 나폴리, 스톡홀름 같은 ‘예술 역’을 만들겠다는 시장의 포부가 담긴 이번 발언이 오랜 시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고민한 내용을 온전히 전하기에 부족했을 수 있다. ‘사전설계안’에 대한 예정된 숙의 절차를 마치는 대로 시민과 이해관계자에게 상세하게 설명하는 공식적인 자리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서울시 취지를 이해하고 이해관계자들의 입장과 관점을 아울러 서울 도시철도의 미래에 지속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건 전문가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건 사용자인 시민의 몫이다. 시장의 생각이라도 지나치거나 부족한 부분은 지적하고 설득하여 시민과 도시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해야 하는 전문가의 책임이 더욱 무거워진다.

<이나미 | 홍익대 디자인콘텐츠 대학원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나는 11년간 책을 만들고 있다. 예전에 한문을 잘하시는 선생님으로부터 한문 공부는 10년쯤 하면 문리가 트이고 다시 10년을 더 하면 ‘속 문리’가 트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한문이라는 건 참으로 어려운 것이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속 문리라는 말이 좋았다.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는데 사람이 번개를 맞고 살아나면 번개의 길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번개를 맞아도 그 길을 따라 전기가 땅으로 빠져나간다. 그런 사람들이 ‘번개를 맞기 위한 벙개’를 하는 김영하의 소설이 있다. 속 문리라는 것은 그런 번개의 길 같은 것이 아닐까. 일단 그런 길이 생기면 어떤 어려운 한자와 만나도 그 길에 태워서 흘려보내다보면 해석과 조우하게 되는 그런 길.

내 안에 그런 길이 있느냐 질문을 던져보니, 돌멩이 하나 떨어져서 텅텅 튀는 소리만 되돌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표지의뢰서를 작성하다 번개에 맞는 듯했다. 의뢰서엔 기본적으로 책 내용과 저자에 대해 쓰고 타이포 중심으로 가달라든지, 색감을 부드럽고 연하게 해달라든지 등 편집자가 원하는 방향을 쓴다. 그 외에 ‘예상 독자층’을 적는 항목이 있다. 그걸 쓸 때마다 나는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때는 ‘40~60대 남성’이라고 쓰기도 하고, 어떨 땐 ‘대학 강사 이상’이라고 쓰기도 한다. 책의 주제에 따라, 난이도에 따라 막연하게 떠오르는 특정 연령층이나 집단을 적는 것이다.

책이란 것도 상품이기 때문에 좋아할 만한 층을 타기팅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과학적 조사와 분석에 따라 타깃 층을 도출해내고 그에 맞게 제목을 뽑고 디자인을 하는 일이 이상할 것은 없다. 문제는 조사와 분석이 늘 자의적이고 게으르다는 점이다. 그러니 타깃 층은 바다처럼 한없이 넓어진다. 우리나라에 ‘40~60대 남성’이 얼마나 될까? 아마 1000만명쯤 되지 않을까? 고작 몇 천 부 판매할 책을 1000만명 대상으로 타기팅한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알면서도 반복하는 잘못이다.

차라리 책을 만들 때 단 한 명의 독자를 상정하면 어떨까? 어느 날 표지의뢰서를 쓰면서 번개에 맞은 듯했다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한 명의 취향과 한 명의 욕구를 완벽하게 맞추는 책을 상상해본다. 그 사람의 성별을 선택하고, 연령대, 직업, 가치관, 취향 등등으로 좁혀나간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상상의 인물을 머릿속에 넣고 교정을 보기 시작한다. 문장을 다듬을 때, 단어를 정리해줄 때 일관성을 갖고 임한다. 이 사람은 스타카토식의 짧은 문장을 좋아할 거야, 나 나름으로 확신하고 거기에 맞춰서 속도감을 낸다. 양장본을 좋아해도 무거운 건 싫어할 경우 거기에 맞게 종이를 쓰고, 딱 끊어지는 제목보다 문장형의 제목을 선호한다면 거기에 맞게 여러 가지 문장을 뽑아본다. 의뢰서엔 이렇게 쓴다. “한 달에 해외출장을 3번 이상 다녀오고 블루스 음악을 좋아하는 다독형 펀드매니저.” 그렇게 만든 책은 항상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아마 독자도 그런 세심한 설계와 배려를 느낄지 모른다. 책은 형식적으로 볼 때 저자보다는 편집자의 작품에 더 가깝다. 그럴 때 책은 만든 이를 닮게 된다. 사실 책을 만드는 많은 편집자가 단 한 명의 독자로 상정하는 이가 누구겠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을 만족시키는 게 편집자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만족할 만한 책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만족할 만한 책을 만들었다. 많이 팔 욕심 때문이다. 그 불특정 다수는 실체가 없고 숫자로만 존재한다. 즉 허상이다. 며칠 전 한 인터넷서점 MD는 강연에서 1000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자사의 데이터베이스는 모집단이 너무 넓어서 활용하기가 난망하다고 발표했다. 바로 그것이다.

한 명의 독자를 타기팅한다는 건 일종의 제유법이다. 어떤 사물의 부분을 들어 그 사물의 전체를 비유하는 것인데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와 같은 표현이다. 한 명의 독자를 염두에 둔 책 만들기는 결코 협소하거나 외골수의 노선을 타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형상을 빚어내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손은 남자, 발은 여자, 배는 40대, 코는 유럽인과 같은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책의 요소요소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책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나 읽기감이나 그립감 등 모든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올가을에는 원고 교정을 많이 보려고 한다. 연초부터 외부 행사가 많아 부산스러웠는데 10월이 되니 이제 여유가 생긴다. 한 책에 한 명의 독자를 짝 지운다는 건 꽤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그동안 방치해둔 나 스스로도 한 명의 독자로 살려내서 책 만들기에 참여시킬 예정이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말 여자에게는 남자와는 다른 촉이 있다니까요!” 부부 사이의 고충을 말하는 예능 방송에서 남자, 여자 그리고 좀 다른 말을 하라고 앉아 있는 전문가들까지 ‘여자만의 무엇’이 있다면서 맞장구다. 여자들은 자신의 ‘감’이 맞아떨어진 사례를 말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남자는 ‘여자의 신통한 재주’를 인정하는 듯 머리를 긁적거린다. 얼핏 그 장면만을 보면 남자라는 존재는 여자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꼴이다. 방송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성만의 직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여자를 무능력하게 묘사한 기존의 경우와는 다른 성별 특성 구분이기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이 ‘슬프고도 위험한’ 말을 종종 내뱉기도 한다.

여자만의 촉은 지독한 성차별의 ‘결과’이기 때문에 슬프다. 이 신화를 가능케 한 일상의 사연들은 철저히 시간과 공간이 제한된, 그러니까 여자가 사회적 활동이 자유로운 반대편을, 그러니까 남자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의심하는 형태다. 육아와 집안일을 책임지는 사람이 평일 저녁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 남자는 애초에 의심의 안테나를 펼칠 이유가 없다. “당신 지금 어디야!” “누구와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라는 불신의 눈초리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리한 쪽에 있는 사람의 불안일 뿐이다.

이 역사의 장구함 덕택인지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에서는 남편이 수상할 때 던져야 하는 ‘예리한 질문’ 목록들이 집단지성의 힘으로 완성된 상태다. 이를 실천하다 보면 남자의 사소한 행동과 흔적들에서 중요(?) 증거를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결과를 보면서 여자든 남자든 ‘역시 여자에겐 촉이 있어’라는 담론을 주변에 퍼트리니 성별 고정관념은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여자들이 남자와 다르게 화장실의 평범한 구멍 하나에도 예민한 이유는, 본능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이상한 사람들(주로 남자), 또 그 영상을 보는 사람들(주로 남자)이 많은 사회에서 보호받지 않는 존재로 살고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게다가 여자 ‘촉’ 우월성 긍정 논리는 성차별의 ‘원인’이 되기에 위험하다. ‘감’에 대한 찬사는 여자를 ‘섬세하고 감정적인’ 이미지로 포장하는 수순으로 이어져 바로 그 특징 때문에 일터에서 차별을 정당화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은 차별의 원인이 차별의 ‘극복’ 소재로 회자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조직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오른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경쟁력을 ‘엄마의 자상함과 여성의 섬세함’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엄마처럼 주변 사람들을 보듬어주고,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불가능은 없다나 뭐라나.조직사회는 자상함과 섬세함을 지닌 이들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감정보다는 논리를 우선시하며, 작은 것보다는 전체를 조망할 줄 아는 능력을 우대한다. 결국 여자만의 촉이 있다는 말들이 모이고 모일수록 남자들이 ‘더’ 일터의 적임자로 대우를 받게 된다. 여자는 직장의 어머니 혹은 꽃으로서 존재는 하겠지만 유리천장의 틈새를 통과한 자는 언제나 소수다. 누군가가 천장의 가운데를 깨려고 하면, 그렇게 칭찬받던 감정과 섬세함이라는 특징은 ‘여자들은 작은 것에 트집 잡다가 중요한 것을 놓친다’는 말로 둔갑하여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기만적인 이유를 등장시킨다.

그 차이는 자연스레 여자가 육아의 적임자라는 케케묵은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 아이, 특히 갓난아기를 돌본다는 것은 종일 사소한 것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고 이 지루한 시간을 감정의 충만함으로 버티는 것 아닌가. 결국 경력단절은 일하는 것으로도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여자만의 선택이 되고 기울어진 운동장의 한편으로 밀려난 이들은 늘 남자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자신의 ‘촉’을 발휘하기 바쁘다.

<오찬호 |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저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그대들이 왜 막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그대들의 어조는 쓸데없이 높고, 발언 내용은 맥락없이 자극적이다. 아마 이렇게라도 관심받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계속되면 곤란하다. 당장 주의를 끌지언정 격조없는 언어들이 반복되면 결국 외톨이가 된다는 것이 삶의 진리다. 종국에는 그대들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게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국면에 대한 그대들의 독설을 보면서 ‘막말의 악순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남북정상회담=위장평화쇼’라는 홍준표 전 대표의 아무말 대잔치가 6·13 지방선거 참패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게 불과 넉달 전이다. 하지만 홍준표만 물러났을 뿐 고장난 위장평화쇼 공세에 대한 집착은 그대로다. ‘9월 평양공동선언=속빈 강정’ ‘군사분야 합의=무장해제’. 홍준표를 대신한다는 김성태 원내대표는 그 못지않은 막말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지난 1일 국회 외교·통일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그대들의 저열한 인식을 접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일부 의원들은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당시 태극기가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가,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한복판에 인공기를 휘날릴 수 있겠느냐”(이낙연 국무총리)는 되치기를 당했다. “김정은은 극악무도해서 고모부도 처형하고 회의에서 졸았다고 처형하는 사람인데 이런 극악무도한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이 협의하는 게 맞느냐”는 분풀이성 발언도 들었다. 같은 보수야당인 바른미래당의 “보수도 새 시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하태경 의원)는 주장과도 대조가 됐다.

지켜본 결과, 그대들의 생각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북한 비핵화 의지를 믿을 수 없고, 형과 고모부를 죽인 김정은과 마주앉는 것은 말이 안된다’ ‘김정은을 무릎 꿇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대화도 하지 말라’. 하지만 협상 상대를 굴복시키라는 주장은 막무가내로 들린다. 북한이 망할 때까지 사실상 방치하자는 주장은 한가하다. 지난해 한반도에 드리웠던 전쟁의 그림자를 생각하면 지금은 테이블에 앉아서 평화적 해법을 모색하는 게 우선이다.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어긴다면 그때 테이블을 박차고, 문재인 대통령 말대로 “제재를 다시 강화하면 그만”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올 한해 동안 이미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치러졌다. 연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제2차 북·미 정상회담 등 아직도 굵직한 이벤트가 남아 있다. 경향신문 창간 여론조사 결과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에 85.6%가 찬성했다. 한국당이 그토록 신뢰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현 국면을 이끄는 주요 당사자다. 남·북·미 정상 간에 쌓이는 신뢰, 그간의 합의 등을 지켜보면 긴장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던 한반도의 기운이 변화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전 세계가 한반도를 주목한다.

안다. 그대들은 춥고 배고프고 고단하고, 또 외로울 것이다. 부동산 폭등, 고용악화 등에서 떨어질 떡고물을 기대했건만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지지율은 여전히 10% 안팎을 맴돈다. 그사이 집안은 거덜나고 있다. 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 등 조상 대대로 배불리 먹고살게 해줬던 ‘색깔론·반공’ 곳간은 텅 비었다. 위장평화쇼를 준엄하게 심판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미국 대통령님’은 동아줄을 내려주지 않았다. 어렵사리 모셔온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의 ‘국가주의’ 논쟁도 온데간데없다. 뒷배인 조선일보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고, 그대들이 잘나갈 때 간이라도 빼줄 듯했던 일부 보수신문과 방송은 언제 그랬냐는 듯 슬금슬금 등을 돌린다.

너무 오랫동안 부잣집 철부지로 살았으니 상실감은 더 클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 1번지가 평양이 될 지경” “11시 넘어서 야근하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사 먹으면 된다” 등 상식의 궤도를 벗어나 안드로메다로 향한 발언들은 이판사판에서 나온 절규일 것이다. 단숨에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로또라도 긁고 싶겠지만 그런 확률은 천만분의 일도 안된다. 로또를 긁는 행운도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그대들은 부잣집 게으른 자식들이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탕진하는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기둥뿌리라도 보존하고 싶다면 막말의 악순환에서 일단 발을 뺄 것을 권한다. ‘지금은 평화를 이야기할 때’라는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라. 한반도 이슈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야 할 것이며, 비판은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한다. 내키지 않는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라. 그나마 가산 탕진 속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용욱 정치부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잠에서 깨어나 하루 치의 인상과 마주할 때

반반한 거울 너머 주름투성이 저 얼굴은

어디서 이목구비를 꾸어왔을까?

오래 돌아서 온 길이라며 수심 가득 찬

표정을 풀어 새날의 기분을 구겨놓는다

 

얼굴은, 왜 화가 나느냐며

상전벽해도 시시로는 안 바뀐다며 어른 위에

어린아이를 덮어씌우지만

턱수염까지 쉬어선 믿을 수 없다

증명하면서 항변하면서 그물처럼 촘촘해지지만

걸려드는 건 속이 터진 심술뿐,

 

누군가의 저녁을 닫으려고 혼잣말로 얼굴은

중얼거린다, 한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인데

왜 이리 요철이 많담, 타일이라면

이어 붙여도 똑같을 텐데!

김명인(1946~)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침에 거울 속에서 자신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만난 사람이 있다. 거울은 울퉁불퉁한 데가 없이 반듯하지만, 거울 속 한 사람의 얼굴 인상은 주름투성이에 근심이 가득하다. 그런 표정이 새날 아침의 싱그러운 분위기와 잘 어울릴 리가 없다.

화를 품은 얼굴을 만날 때가 있다. 또 괜히 심술이 난 얼굴을 마주할 때도 있다. 그런 얼굴은 구김살이 많고 고르지가 않다. 마치 오목하고 볼록한 요철 같다. 얼굴은 한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 얼굴에는 감정이나 기분이 씌어 있다. 화장을 화사하게 다시 하듯이 얼굴의 표정을 곱게 바꿀 일이다.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로 새날의 아침을 만날 일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일반 칼럼 > 경향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혼(招魂)  (0) 2018.10.22
말 없는 소리  (0) 2018.10.15
얼굴 2  (0) 2018.10.08
고무줄놀이  (0) 2018.10.01
반 다발  (0) 2018.09.17
잘 익은 시  (0) 2018.09.1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울산지방경찰청은 10월1일부터 ‘퇴근 후 이성 하급자에 대한 사적 연락금지법’을 시행했다. 미투(#MeToo) 흐름 속에서 경찰이 솔선수범하여 성폭력 없는 조직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반가운 소식이면서 동시에 ‘이성’이라는 전제가 있어 매우 우려스럽기도 하다. 2017년 6월 기준, 경찰 구성원 중 여성 비율은 10%를 조금 넘는다. 10명 중 1명만 ‘이성’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울산지방경찰청은 사정이 다를 수 있으나 전체 경찰 통계를 기준으로 지침을 적용하면 9명에게는 퇴근 후에도 사적 연락을 해도 되고 오로지 이성인 1명에게만 하지 않으면 된다.

10명 중 1명만을 분리하는 이 지침은 1명의 입장에서 배려일까 배제일까? 나의 우려 지점이다. 물론 ‘초급 여성 경찰 사이에 상급자의 업무시간 외 개인적인 연락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것이 지침의 배경에 있다. 현실적으로 ‘초급’이고 ‘여성’인 경우가 조직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이기에 그에 대해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방식과 의미로 조직 내에서 구성되느냐에 따라 ‘존중과 배려’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차별과 배제, 혐오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더 많은 고민과 질문이 필요하다.

얼마 전 여러 사람이 차량 두 대로 이동할 일이 있었다. 일행 중에 기관장과 기관 직원이 함께 있었다. 기관장과 나를 포함한 몇은 그 직원을 배려한답시고 기관장과 같은 차에 타라고 권했다. 그런데 직원은 다른 차를 선택했다. 순간 의아했으나 직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차를 타서야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기관장과 함께 차를 탔다 겪었던 불편함을 토로했다. 이구동성으로 상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상사가 권위적인지 아닌지, 이성·동성을 떠나 늘 긴장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얘기를 들으며 늘 상사에 대해 오감을 곤두세워야 하는 위치의 사람들이 지니는 감각에 대해 둔감했음을 깨달았다.

계급·지위에 따른 위계질서가 뚜렷한 경찰 조직의 특성상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거부하기 힘든 것이 상사의 요구다. 명령이든 부탁이든 모두 이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동일하다. 위치의 문제이고 조직문화의 문제다. 또한 성별이 교차적으로 작동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문제를 대할 때 ‘초급’ ‘여성’이 말했으니까에 초점을 두기 이전에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국가적으로 적정한 근로시간, 휴식시간을 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저녁이 있는 삶’은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 여성이 아니라 동료 경찰이라는 감각은 왜 중요한지, 현실적 어려움에도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부터 바꿔갈 것인지와 같은 질문 말이다. 질문을 바꾸면 소수 누군가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누가 희생하거나 다수가 불편을 감수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보인다. 그것이 변화의 출발이고 함께 변화해 가는 과정이다.

경찰청은 최근 과거의 과오를 딛고 많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어느 부처보다 가장 선도적으로 성평등정책담당관을 신설하고 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울산지방경찰청의 지침도 이런 긍정적 변화의 과정임을 알고 있다. 경찰청이 성평등한 조직문화라는 결실을 잘 맺어가기를 바란다. 그를 위해 울산지방경찰청 지침이 ‘이성’이라는 전제를 빼고 모두의 ‘저녁 있는 삶’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