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서울지법 판사실에는 일본 법학자 와가쓰마 사카에(我妻榮)의 민법 교과서가 어김없이 꽂혀 있었다. 대법원이 최고재판소 판례는 물론이고 고등재판소 판결까지 베끼던 시절이다. 일선 판사들은 와가쓰마 이론에 기대 최고재판소 판례를 이해하고 분석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일본 민법을 쓰던 우리는 1960년에야 민법을 만들었는데 일본이 세운 만주국 민법을 참고했다. 이 만주국 민법 제정에 관여한 사람이 도쿄제국대학 교수 와가쓰마다. 우리나라 민법 245조 부동산 점유취득 시효도 그의 이론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서소문 서울지법 판사실에 일본 법률서적을 복사·제본해 파는 사람들이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한국 법조계는 일본 법학계의 식민지였다.

정신적으로 계속되던 식민지를 끝내기 위해 학자들은 안간힘을 썼다. 양창수 전 대법관이 1970년대 서울대 재학 시절 법학과에서 국사학과로 전과하려 김철준 교수를 찾아갔다가 들었다는 얘기다. “나처럼 일제 때 공부한 사람은 일본 학자들의 관점이나 의식을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어 후학에게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우선 한문을 배우고, 데이트도 고궁이나 박물관 같은 데서 해서 일체를 ‘우리 것’의 이해에 집중하라. 일본 사람들 생각에 은연중 물들지 않도록 일본말로 된 책은 절대로 읽지 말라.” 양창수는 아버지의 반대로 전과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이후 일본 법학을 넘어서 자기 세계를 구축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

일본 영향력을 벗어나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송상현 서울대 교수는 1976년 펴낸 민사소송법 교과서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법원 판결이나 국내 논문들이 일본의 그것을 제록스 복사한 듯한 것을 발견하였고 성문법의 해석 운용에 관한 주류적 발상과 관점이 오늘날까지도 일본 법학의 것을 일방통행으로 면세수입한 것임을 자꾸만 느끼게 되어 우월한 인방 법률문화의 정신적 외판원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각성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내용은 극일이지만 문장은 친일이었다. 처음 ‘경우에 따라서’부터 ‘강요당하게 되었다’는 마지막까지 일본어투다.

하지만 이런 치열함도 몇몇 학자 얘기였다. 다수는 게으르고 무책임했다. 대법원 판례를 제대로 챙겨 공부하는 교수가 적었고, 이를 바탕으로 판결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학자는 더 적었다. 한국인 첫 서울대 교수인 김증한이 1950년대 한 말이 여전히 유효했다. “대학교수들은 지식의 행상에 바쁘고, 법조인들은 그날그날의 사무 처리에만 골몰하고 있다. 대학교수들은 법생활의 실태와 거리가 먼 이론을 희롱하고, 법조인들은 모든 문제를 레디 메이드의 싼 이론으로 처리해 버리고 그 이상으로 깊은 이론적 검토를 할 여유를 못 가진다.” 이렇게 무능한 학계를 등에 업고 법원은 조금씩 타락해갔다.

타락의 정점에 양승태 대법원 시절 과거사 3대 판결이 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 위헌으로 선언된 박정희 정부 긴급조치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패소시킨 대법원 판결, 군사정부의 고문·조작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권 소멸시효를 3년에서 6개월로 줄인 대법원 판결,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받은 사람은 국가와 화해한 것이라며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한 대법원 판결이다. 지난여름 헌재는 이 판결들이 헌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세 가지 대법원 판결은 모두 문제가 있다. 대법원은 스스로 재심 사유를 만들지는 못한다. 헌재는 대법원에 재판을 바로잡을 기회를 준 것”이라고 이 결정을 주도한 김이수 전 재판관은 말했다.

헌재가 열성으로 사건을 심리하고 위헌을 선고한 배경에 윤진수 서울대 교수의 법학논문이 있다. ‘과거사 정리와 소멸시효’(2015)와 ‘위헌인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이 불법행위를 구성하는지 여부’(2017)다. 윤진수는 논문에서 대법원 판례들을 불러내 충돌시키고, 독일과 일본의 판례를 해체한다. “(대법원의) 이러한 판시는 일본 판례를 참고한 것이고, 또 일본의 판례는 독일의 판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이나 독일의 판례 자체에 문제가 있다.” 가만히 읽다가 성실함이 만든 디테일의 힘에 전율하게 된다. “쓰려면 그 10배를 읽는다. 그게 글쓰기 윤리다.” 법대생 윤진수에게 교양국어를 가르친 문학자 김윤식의 말이고, 그 시절 김윤식보다 나이가 많아진 법학자 윤진수는 그 윤리를 실천 중이다.

윤진수는 논문 마지막에 적었다. “이러한 이론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과연 국가의 조직적이고 고의적인 불법행위에 대하여 저항하지 못했던 피해자들을 법원이 이처럼 각박하게 대하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러한 판례가 혹시 국가의 재정 부담을 고려한 것이라면 매우 실망스럽다.” 이분법 세계로 불러내자면 그는 보수이다. 법조계 엘리트 모임 민사판례연구회 회장이다. 이런 윤진수는 진보 인사들이 대법원을 찾아가 항의하고 시민에게 호소하는 동안, 묵묵히 읽었다. 7평짜리 어두운 연구실을 지키며 읽었다. 그리고 썼다. 후배 교수에게 보이고 고쳐 썼다. 이렇게 해서 부정의가 가라앉고 정의가 드러났다. 이것이 보수의 힘이고 학자의 사명이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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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또다시 국회에서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한 유은혜 후보자를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현 정부 들어 이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강경화 외교·송영무 국방·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도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으나 임명했다. 처음부터 일방적인 임명을 하고자 했다면 불필요한 인사청문회는 왜 했는지 그 속내가 궁금하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위장전입, 논문 표절’ 등 5대 인사 배제 원칙을 제시하고 이에 관련된 인사는 각료로 임명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공약한 바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기 내각 조각을 모두 마치고 5대 인사 배제 원칙에 ‘음주 운전’과 ‘성범죄’ 항목을 추가했다. 결과적으로 인사 배제 7대 원칙이 된 것이다.

‘인사청문회법’은 대통령이 행정부의 고위 공직자를 임명할 때 국회의 검증 절차를 밟도록 함으로써, 대통령의 인사권을 통제하고 견제하고자 2000년 만들어졌다. 그런데 국무총리 등 일부를 제외하고 장관 등의 인사청문회는 구속력이 없다. 청문회 결과, 국회에서 부적격 보고서를 내도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거부하면 그만이다. 청문회는 통과의례일 뿐, 국회 청문회나 국민의 잣대가 아니라, 대통령이 가진 고유의 기준에 의해 임명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이 같은 사례는 10건을 넘었다. 문재인 정부 인사도 과거 정부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통령 자신이 후보 시절 공약한 인사 배제 원칙마저 무시한 채, 이런저런 군색한 변명과 함께 이번까지 6번째 임명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사청문회 무용론도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의 인사청문회는 우리와 달리 인사청문특별위원회에서의 청문 절차를 거쳐 본회의에서 토론 없이 표결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미국 인사청문회의 핵심은 바로 소요 기간이다. 보통 대통령의 사전 인선에 평균 270여일, 행정부 인준 준비에 평균 28일, 상원 인준에 50일 등 총 350일 정도가 소요된다. 즉 1년 가까이 선정된 후보자를 검증한 후 인준을 한다.

반면에 우리는 청문회 기간이 하루, 길어야 이틀이다. 제대로 된 검증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정치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도 이제는 인사청문회의 검증 기간을 충분히 늘리고, 도덕성과 능력 위주의 검증제도로 바꿔야 한다. 사실 현재와 같은 인사청문회 제도라면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 시간, 세금, 전파 낭비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범법행위를 한 인사가 국무총리나 장관이 된다면 정상적인 나라라고 할 수 없다. 특히 박근혜 정권과 별반 다름없는 정부 탄생을 염원하며, 국민들이 엄동설한에 촛불을 든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국민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에도 스스로 국민과 한 약속을 여러 차례 식언(食言)한 바 있다. 이런 까닭에 대통령의 많은 선거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윤배 | 조선대 명예교수 컴퓨터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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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친구가 살던 동네가 사라졌다. 가팔막에 붉은 벽돌로 똑같이 지은 연립주택과 양옥이라고 불리는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동네는 자취도 없었다. 이리저리 굽이진 좁은 골목길과 길갓집 틈새에 끼워 놓은 것 같았던 구멍가게도, 옥상에 너풀대던 빨래도, 낙서를 어설프게 지운 담벼락도 사라졌다. 동네 아랫자리에 있던 장터도, 무싯날이면 길섶에 좌판을 깔고 앉아 있던 할머니들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해거름이 되면 데꾼한 눈으로 찬거리며 과일 몇 알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종종걸음을 치던 이들도 떠나버렸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멀끔한 가게들이 즐비하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없는 반듯한 길을 보면서 그를 떠올렸다. 그는 길눈이 밝아 한 번 온 길은 못 찾는 법이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홀림길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던 골목길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우리는 자꾸 길을 헛짚어 어둑어둑해진 길을 한참이나 헤매면서도 뭐가 재미있는지 자꾸 깔깔댔다. 그렇게 그날 함께 길을 헤맨 그는 오랫동안 삶의 길을 함께했다. 같은 회사에 다녔고, 같은 동네에 살았다. 내가 걷는 길에는 늘 그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몇 해 전 가을날 혼자서 훌쩍 먼 길을 떠나버렸다.

집이 허물어지면 새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없어지면 새 길이 놓인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겨울 연탄재를 뿌려 놓은 비탈진 골목길을 오르내리고, 여름에는 구멍가게에서 쭈쭈바를 사 먹던 이들의 이야기가 향수 어린 옛이야기가 되었듯이 높은 아파트에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고, 햄버거 가게에 앉아 있는 이들의 이야기도 그들에게는 그리운 추억이 될 것이다.

‘사라지다’에는 ‘살다’와 ‘사르다’의 뜻이 담겨 있다. ‘사라진다’는 ‘살다’의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말이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사라지지도, 사르러 들지도 않는다.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사르렀던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날, 그를 생각한다. 기억한다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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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회로(CC) TV 속의 남성이 여성 쪽으로 걸어간다. 남성이 지나가자마자 여성은 남성을 불러 세우고 격하게 항의한다. 그 남성이 자기 엉덩이를 만졌다는 것이다. 소위 ‘곰탕집 성추행 사건’이다. 이 사건이 화제가 된 것은 해당 남성-A씨-의 아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뒤였다. 그 글에 따르면 A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며, 높은 분을 모시는 자리여서 성추행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해당 여성, 즉 피해자가 사건 직후 합의금 1000만원을 요구했다는 것도 수상쩍다. 그럼에도 판사가 피해자의 말만 믿고 징역 6개월을 선고했으니 억울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남성들이 이런 판결을 내린 판사를, 그리고 피해자를 욕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해당 CCTV로는 성추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그게 곧 피해자를 안 만졌다는 얘기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흥분했고, A씨에게 공감했다. 심지어 A씨를 위해 모금운동을 하자는 의견도 제법 있었다. 요즘 놀이터로 전락한 청와대 청원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 번째로 공개된 CCTV는 성추행 여부에 대한 판단을 보다 잘 내릴 수 있게 돕는다. A씨가 현관 쪽에 서 있는데, 피해자 여성이 걸어와 복도 쪽 방문을 열려고 한다. A씨가 그 여성을 돌아보더니 그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손을 바깥쪽으로 뻗는다. 곧바로 A씨가 항의하고, 그 뒤 양쪽 진영 간에 대치가 이어진다. 이 와중에 A씨는 도망친다. A씨 아내가 쓴 글에도 문제점이 발견됐다. 피해자는 합의금을 요구한 적이 없었고, 먼저 합의금 얘기를 꺼낸 쪽은 오히려 A씨였다. 어려운 자리였다는 아내의 글과 달리 A씨는 폭탄주 15잔을 마셨다고 했다. 게다가 A씨는 진술이 일관되지 않았고, 거짓말탐지기 결과도 ‘거짓’이었다. 남성들의 분노를 촉발한 첫 글에 A씨에게 불리한 대목은 들어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판단을 달리할 법도 하지만, 남성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만졌다는 증거는 있어요?” “증거 없이 징역을 때린 게 문제다.” “판사는 각성하라!”

사실 성추행은 증거가 남지 않는 범죄다. ‘슴만튀’ ‘엉만튀’라는 말처럼 슬쩍 만지고 도망치는데 진술 말고 무슨 증거가 남겠는가? 대부분의 성추행과 달리 곰탕집 사건은 오히려 증거가 많은 사건이다. 그럼에도 ‘증거’ 운운하는 이들은 성공한 성추행은 처벌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음주운전, 살인, 사기 등등 범죄와 관련된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올 때마다 남성이 주를 이루는 네티즌들은 일단 가해자를 욕하고, 다음으로 ‘처벌이 약하다’며 판사를 비난한다. 하지만 성범죄의 경우 남성들이 가해자에게 동조하며 그편을 드는 일이 꽤 자주 일어난다. ‘그랩’으로 유명한 윤창중이 박근혜 정부의 대변인이 아니었다면, 그의 편에 서서 피해자를 국제꽃뱀으로 몰았을 남성이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실수로 여자의 신체부위를 만져서 성범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고의와 실수를 구분할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어쩌면 성범죄의 90% 이상이 남성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통계가 이유일 수 있겠다. 같은 남성으로서 만지고픈 네 마음을 이해한다,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인데 어찌 너를 욕할 수 있겠느냐, 이걸 문제 삼는 여성이 나쁜 거야, 라는 게 그들이 가해자에 빙의하는 이유가 아닐까?

‘성전카페’라는 곳이 있다. 성범죄 전문 상담 카페의 준말로, 4000명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 중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가관이었다. 한 남성이 성범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하면 형을 덜 받을 수 있는지 묻는 글을 올리면 경험자와 법률가들이 댓글로 방법을 알려준다. “미성년자인지 몰랐다고 잡아떼세요.” “합의하에 즐겼다고 하세요.” “쪽지 보내주시면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성범죄자가 결국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는 글을 올리면 축하세례가 이어진다.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오늘부터 발 뻗고 주무세요.” “부럽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카페 덕분에 무혐의를 받았다고 고마워한다. 성범죄의 재범률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카페는 더 많은 성범죄가 저질러지는 세상을 위해 애쓰는 중이다. 이런 카페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카페에 가입을 안 한 이들도 인터넷 댓글로 성범죄자를 응원함으로써 피해여성의 싸우고자 하는 의욕을 짓밟는다. 이렇게 남성들이 가해자를 위해 연대하는 반면, 여성들은 대부분 피해자를 위해 연대한다.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가 됐을 때, 수많은 여성들이 강남역에 모였다. 피해자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고, 자신이 살아남은 게 단지 운이 좋아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규탄시위 역시 몰카범이 남성인 경우도 엄하게 처벌해 달라는 것일 뿐, 가해 여성을 편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정부가 혜화역에 모인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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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공공의료 활성화를 위해 국립공공의료대학원(이하 공공의료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국가 정책수립과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원칙과 타당성 확보이다. 요구도(need assessment)를 파악하고 그간 추진된 정책이 실패한 이유를 성찰하고, 이를 토대로 여러 대안을 실현가능성, 소요재정과 구체적 확보방안, 운영과 결과평가 등의 측면을 고려하여 검토해야 한다. 또한 정책수립과 실행과정에서 영향을 받는 이해 당사자와의 긴밀하고 심도 있는 논의가 매우 중요하다. 교육부 주관의 국가 특수법인 대학설립 심의위를 거쳤지만, 이번 발표가 의학교육을 비롯한 의료계와의 사전 논의도 없이 복지부와 일부 학자에 의해 작성된 정책이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정부는 지역의료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일본의 자치의과대학 사례를 제시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전문과목에 특화된 교육보다는 종합진료 능력을 배양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공공기관 의사 부족, 특정 의료분야 기피로 인한 인력수급 문제, 전염병 관리 등을 위한 공공보건의료 전문가 양성이 목적인 우리의 공공의료대학 설립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호주는 취약지역 공공의료인력 확보를 위해 기존 의과대학에 일정 정원을 배정, 장학금을 지급하고 일정 기간 지정된 기관에서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하는 MRBS(Medical Rural Bonded Scholarship) 제도를 2001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공공보건의료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 차원에서 공공보건의료 교육을 강화하여 학생들에게 공공보건의료의 현실과 문제점을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관심을 유도해야 한다. 공공의료 전문가 양성을 위해서는 기존 의과대학에 일정 입학정원을 배정하여 선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양성하거나, 기존 의과대학 졸업 후 희망에 따라서 보건학 석사과정을 마치도록 장학금을 주는 방법도 있다. 또 정년을 마친 교수나 진료에서 은퇴한 시니어 의사들을 교육해 특정 의료분야 또는 취약지 공공기관에서 활용할 수도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의학교육기관 신설에 비해 적은 비용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

복지부는 공공의료대학을 졸업하면 졸업생들이 당장 전문가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나, 졸업생들이 일하게 될 공공의료기관에 대한 시설지원과 의료전달체계 등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공공보건의료의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실습교육병원으로 이용될 지방 의료원을 비롯한 보건의료기관의 교육여건을 감안할 때 과연 제대로 된 교육효과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최근에 부실교육으로 인한 서남의대의 폐과로부터 얻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공공의료대학 설립이 공공보건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탄환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의료계 의견을 수렴하여 공공보건의료 강화를 위한 저비용 고효율적인 정책과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김영창 | 한국의학교육평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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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1도의 차이는 하찮은 수준이다. 하지만 지구 평균온도 1도의 오르내림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2만년 전에 닥친 마지막 최대 빙하기 때 지구 평균온도는 오늘날보다 불과 5도 낮았을 뿐이다. 지난 500만년 동안 지구 평균온도는 산업혁명 직전보다 2도 이상 따뜻한 적이 없다. 인류는 2도 이상 온난화된 상태에서 생존해 본 경험이 없다. 산업혁명 이래 150년 동안 화석연료를 흥청망청 써댄 결과 지구 온도는 약 1도가 올랐다. 수십만~수백만 년에 걸쳐 일어난 기온변화가 불과 150년 사이에 발생한 셈이다. 그 후폭은 세계 도처에서 확인되고 있다. 지난여름 북반구를 휩쓴 극심한 폭염을 필두로 집중호우, 가뭄, 혹한과 폭설, 해수면 상승, 태풍 활성화 등의 변화를 불러왔다.

지구 평균기온이 현재보다 1도 상승, 즉 산업혁명 이전보다 2도 이상 상승하면 ‘지옥의 묵시록’이 펼쳐진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 따르면 평균기온이 2도 이상 상승하면 여름철 폭염으로 유럽에서만 수만명이 사망하고, 10억~20억명이 물부족에 시달리고, 세계 생물의 3분의 1이 멸종위기에 내몰린다.

지구 온도가 2도 이상 상승하면, 인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들게 된다. 인류 문명과 자연 생태계의 지속성을 가르는 ‘문턱값’이 2도 이상 상승이다. 2015년 파리기후협약에서 ‘금세기말까지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혁명 이전보다 2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하고, 1.5도 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IPCC는 지난주 인천에서 열린 제48차 총회에서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보고서는 1.5도와 2도 상승할 때의 차이를 비교하며 ‘1.5도 목표’ 설정을 제시했다. 0.5도의 차이는 확고하다. 해수면 상승은 10㎝ 낮아져 1000만명이 위험에서 벗어난다. 육지의 동식물이 서식지를 잃을 확률은 2배 줄어든다. 빈곤에 취약한 인구가 수억명 줄어들고, 심각한 물부족에 노출되는 총인구비율이 2도 대비 최대 50% 감소한다.

‘1.5도 목표’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1.5도’를 달성하려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최소 45% 줄여야 한다. ‘뜨거운 지구’의 재앙을 막기 위한 마지막 처방이다. 남은 건, 지금 즉시 행동하는 것이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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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소득주도성장이란 단어에 본능적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수 가치와 상극에 있는 소득재분배 정책으로 보수의 성배인 경제성장을 달성한다고 하니. 게다가 성장이 형평한 소득분배를 가져온다고 그렇게 외쳤었는데 거꾸로 형평이 성장을 촉진시킨다고 하다니. 신성모독에 인과전도까지 가세한 꼴이다. 그래서 보수는 소득재분배가 성장 정책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은 정통 경제학에는 족보도 없는 황당한 좌파 이론이라는 일부 학계와 언론의 주장에 쉽게 현혹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사실 그동안 주류경제학에서 고소득층에서 저소득층으로의 소득재분배는 시장의 효율성과 경제성장을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도덕적 가치라는 인식이 대세였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와 이런 인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 한 축은 소위 ‘포용적 성장론’의 등장이다. 당대 최고의 성장이론가라 할 수 있는 아세모글루는 경제 자원이 소수의 권력층에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를 구축해야 국민의 인적자본과 창의력이 최대로 활용되어 높은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론을 세웠다. 또한 형평한 소득분배와 보건과 교육에 대한 공공지출 확대가 성장친화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실증 연구가 연이어 발표되었고, IMF와 OECD 같은 권위 있는 국제기구가 이러한 연구를 수용함으로써 포용적 성장론은 주류에 편입되었다.

변화의 다른 축은 ‘장기침체론’의 대두다. 크루그먼, 서머스, 스티글리츠와 같은 노벨상급 경제학자들은 소비와 투자 수요의 부족은 일시적 불황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오래된 케인지언 이론을 부활시켰다. 이들은 수요 부족이 많은 선진국에서 지속적 저성장의 배경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원인의 하나로서 소득양극화를 지목했다. 소득이 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층에서 소비성향이 낮은 고소득층으로 이동함으로써 만성 소비 부족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속적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필자는 이러한 경제학자들의 시각이 한국 경제에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혁신이 성장의 엔진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도하게 기울어진 소득분배는 트랜스미션의 성능을 저하시킨다. 자동차의 출력이 엔진의 마력에만 달려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다. 문제는 ‘형평한 소득분배를 어떻게 달성하는가’이다.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최저임금 상승을 통하여 저소득층의 소득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를 재원으로 저소득층의 임금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근로장려세제가 대표적 예다. 셋째는 역시 증세를 재원으로 하여 성장친화적이라 판단되는 보건과 교육 등에 대한 공공지출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바로 포용적 성장론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정책이다.

필자는 정부가 선택한 첫째 정책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기업양극화가 온갖 사회문제의 뿌리가 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정책이 성공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임금 상승을 감당하는 기업주가 양보할 잉여가 있어야 노동수요 감소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한 받는 노동자의 소비성향이 주는 기업주의 소비성향보다 크게 높아야 총소비가 늘어난다. 최저임금 상승의 대부분을 감당해야 하는 소상공인은 나누어 줄 잉여도 부족하고 지출성향도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저임금 상승이 물가상승을 유발하여 임금 상승을 상층부로 확산하고 가계의 부채부담도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도 허망하다. 소상공인들은 임금을 가격에 전가할 시장지배력도 없어 보인다. 오래 기다려도 최저임금 상승 정책이 좋은 결과를 낼 가능성은 희박하다.

반면 다른 정책에는 노동수요 감소라는 부작용이 없다. 임금보조금은 노동공급을 증가시켜 고용을 높일 수 있고, 보건과 교육에 대한 공공지출 증가는 직접적으로 고용을 창출한다. 문제는 재원이다. 야당의 협조가 필요하다. 보수는 처음부터 소득주도성장을 최저임금 상승으로 좁게 정의하고 사냥꾼처럼 최저임금 상승의 부작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득주도성장 정책가들은 최저임금 상승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제 불행하게도 소득재분배 정책이 통째로 코너에 몰려 있다. 다행히 상당수의 보수가 근로장려세제 강화와 포용적 성장에는 우호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세금 좀 올리려 하면 국제 추세에 역행한다고 하고, 공공지출 좀 늘리려 하면 그리스 꼴 난다고 하던 사람들이 많아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의 입장은 정부가 현실적인 성장친화적 소득재분배 정책을 강화해나갈 발판이 될 수 있다. 그 정책을 뭐라고 부르든 말이다.

<송의영 |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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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 대유행, 대박자송(대가리박고자살하자), 초등학생 자살, 줄지 않는 청소년 자살, 이생망, 전쟁터 같은 고등학교, 수포자, 영포자, 무기력에 갇힌 교실….’

이런 현실에 마주하고도 입시제도와 국·영·수에 대한 논의에서 한 치도 빠져나올 줄 모르는 답답하고 가혹한 나라에 과연 어른이 있는가? 어른이란 아이들의 문제를 아이들과 만나서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 아파하는 아이들을 그대로 두고 보면서 도와주지 않는 것은 돌봄의 방임, 즉 학대이다. 대학생보다 더 많이 공부하는 초등학생들이 제발 학습지, 학원, 숙제 없이 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나라. 그 속에서 모든 게 다 너희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니 이 정도의 학대는 견뎌내라는 어른들의 태도가 아이들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집에서 나오지 않거나, 무언가를 부수거나, 게임 중독에 빠지는 남자 아이들. 자신의 몸을 반복적으로 칼로 긋는 여자 아이들. 아이들은 모두 이 세상이 살 만하지 않다고 외치는 중이다. 자해하는 여학생들의 수가 올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자해 관련 사진이 1만장이 넘어섰고, 관련 뉴스도 넘친다. 그러나 국회에서도, 어떤 정당에서도, 학교에서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지 말라’고도 안 한다. 이렇게 전염병처럼 번지는 아이들의 절망에 찬 비명을 듣고, 정신의학자 및 심리학자들, 학교 현장의 상담가들이 사회적 재난에 가까운 현상이라고 1000명 가까이 모여 국가에 요청을 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은 무응답이다.

이명박근혜 시절부터의 눈 귀 막은 관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의 정부에 새로 온 사람들,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재인 정부하의 장관님들은 다른 대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아동과 청소년들이 아닌가?

새로 된 교육부 장관은 임명 후 현장에 달려나가 한 사람의 학생이나 교사라도 만나 보았는지 모르겠다. 학생도, 교사도 만나지 않은 채 영어 교육을 배려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아이들이 그나마 영어 절대평가로 한숨 돌리고 조기유학붐이 줄어들고 있는 이 시점에, 오히려 수학 절대평가를 말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업자를 대변하는 말은 절대 아닐 것으로 믿고 싶다.

두렵다. 초등학생 한 명이 학교에서 자살을 했다. 그러면 교육부도, 보건복지부도, 여성가족부도 달려가서 함께 이 현실을 한탄하며 부모, 아이들, 교사들을 위로하고 애달파하면서 아이들의 삶을 걱정해야 하지 않는가? 어린이들이 자살을 꿈꾸는 노래, ‘대가리 박고 자살하자’라는 노래를 부르며, 삶을 더 살지 못하겠다는 행렬에 몸을 던지는데 도대체 무엇을 보고 어디를 향하여 정치를 하고 정책을 세운단 말인가?

아이들의 자해 행위에 책임 있는 어른들의 무관심과 무응답은 결국 사회적 혐오로 이어진다. ‘어른들이 도와준 적이 없다, 어른들에게 이해받아본 적이 없다’며 차갑게 식은 아이들의 마음이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애정과 의무, 연대감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혐오로 바뀌는 것이다. 혐오가 넘치는 세상이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차별과 박해, 단절과 냉대의 문화에 뿌리를 둔다. 혐오는 종종 약한 자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법으로 선택되기 때문이다.하지만 당대의 손익 계산에 미래를 잊은 지금의 관료와 정부는 그런 사실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 우치다 다쓰루, 가타다 다마미 등 일본의 지식인들은 일본이 어른 없는 나라라고 했다. 1억명 우울사회라고 했다. 우리도 가고 있다. 4000만명 우울사회로. 권력, 자본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80%가 우울한 사회. 혐오와 냉소의 사회. 제발 응답하라! 정부 안에 있는 새로운 어른들이여! 사람이 먼저라는 주장을 외쳤듯이, 학생들의 상처 난 손목, 지치고 허기진 마음을 보고, 교사들의 처절한 목소리를 듣고 어른 노릇을 하라! 그리고 국민을 사랑한다면 대책을 세워라! 학원가대책이 아닌, 학생을 살리는 삶의 대책을! 우리에게 미래를 돌려줄 생명의 대책을!

<김현수 |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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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송유관공사 고양저유소 폭발 사건을 조사 중인 경찰이 9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스리랑카 국적 노동자 1명을 붙잡아 중실화 혐의로 입건했다. 인근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피의자가 날린 풍등이 300m 날아가 저유소 휘발유 탱크 옆 잔디밭에 떨어지면서 화재가 일어나 저유소 폭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런 추론을 뒷받침하는 폐쇄회로(CC)TV 영상도 공개했다. 외국인 노동자가 장난 삼아 날린 풍등 하나로 이런 큰 사고가 났다니 황당하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남는다. 이번 사고가 평소 예상하지 못한 여러 가능성이 잇따라 겹쳐야 발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송유관공사 경인지사가 저유 탱크 내부에 불이 옮겨 붙기 전 최초 18분간의 화재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휘발유 탱크 외부에 화재 감지센서조차 없었기 때문이라는 경찰의 설명은 더욱 참담하다. 이에 대해 공사 측은 탱크 외벽에는 감지센서가 없었지만 저유소 지붕인 ‘플로팅 루프’ 위에는 불꽃 감지장치가 설치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감지장치는 있었지만 화재가 발생한 곳과 불꽃 감지장치 간에 거리가 있다보니 화재를 감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없는 변명이다. 더구나 사고 당시 관제실에는 직원 여럿이 근무 중이었는데 폭발 전까지 화재가 난 것도 몰랐다고 한다. 육안으로 확인할 기회마저 놓친 것이다. 저유소 곳곳에 설치된 46대의 CCTV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18분 동안 관제소에서 잔디가 타고 있는 것을 파악했더라면 폭발은 막을 수 있었다는 가정이 충분히 성립된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인재가 겹쳐 있는지 여부를 밝혀내야 한다.

이번 사고가 난 곳은 7700만ℓ가 저장돼 있는 서울북부저유소의 14개 저장탱크 중 하나였다. 자칫하면 더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대한송유관공사는 국내 유일의 송유관 운영 기업으로 대형 저유소시설을 통해 경질유 소비량의 58%를 수송하고 있다. 이런 중요하고 위험한 시설이 안전관리에 허술하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유증기로 인한 내부 폭발은 물론 어떤 외인에 의한 사고에도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차제에 저유 시설 전체에 대한 정밀점검을 실시해야 한다. 송유관공사 지분을 갖고 있는 정유사들의 책임론도 제기된다. 송유관공사와 주주정유사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만반의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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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농부의 영농정착이나 귀촌·귀농 활성화를 위한 정부지원금이 제멋대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9일 정운천 바른미래당 의원에 따르면 정부가 청년농부에게 주는 지원금이 고급수입차인 벤츠 수리비, 수백만원짜리 명품·가구 구입비 등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더구나 지원금은 현금이 아닌 직불카드로 지급하는데, 카드를 현금화한 ‘카드깡’이 의심되는 실적도 있다고 한다. 이뿐이 아니다. 지난 6일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귀촌·귀농 활성화를 위해 지급한 정부지원금이 기획부동산 투자금이나 애견 사육·분양업체 창업 등 잘못된 곳에 사용됐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1985건(약 676억원)의 귀촌·귀농 관련 정부지원금 위반사항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농촌활성화를 위한 정부지원금이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농촌지원을 위해 혈세를 투입하는 것은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농촌이 고사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인구감소로 30년 안에 84개 기초지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그래서 농촌총각에게 결혼자금을 지원하거나, 귀촌·귀농에 수천만원에 달하는 창업지원금을 주는 지자체도 있다. 청년농부에 대한 영농정착금 지원도 그 일환이다. 정부는 영농 초기에 소득이 불안정한 청년농부에게 월 최대 100만원을 지급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올해 8월 말까지 사용내역을 보니 마트와 편의점, 쇼핑, 음식점이 대부분이고 농업 관련 분야 사용실적은 5억원에 불과했다. 전체 사용금액 44억2000만원 가운데 90% 가까이가 엉뚱한 곳에 쓰인 것이다. 정부의 관리소홀을 틈타 지원금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일이 자행되고 있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귀농·귀촌인들은 영농 경험과 시설자금이 부족하며, 재배작물의 판로 개척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구나 농촌에 정착하겠다고 하는 청년들은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농촌을 살리기 위한 지원은 정부의 마땅한 역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금으로 사익을 챙기는 행위는 도덕적 해이를 넘어 범죄다. 정부는 내년에 청년농부에 대한 지원을 올해보다 3배 가까이 증액한 233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정부는 혈세 지원에 앞서 농촌 지원금이 사업목적에 맞게 쓰이는지 점검해야 한다. 지원금이 줄줄 새는 상황에서 아무리 많은 자금을 투입한다 해도 영농정착이나 농촌활성화는 연목구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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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난 9월19일 오후,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음식점 옥류관을 나선 우리 일행은 평양교원대학을 거쳐 ‘만수대창작사’로 안내를 받았다. 뒤늦게 알았지만, 문재인 대통령도 우리보다 조금 앞서 만수대를 관람하고 있었다. 사실 점심때까지는 모든 촉각이 어제 오후와 오늘 오전에 연속되는 정상회담의 성과 여부에 쏠려 있었으므로 아무리 이름난 옥류관이라 하더라도 ‘랭면’맛 같은 건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좋은 소식과 함께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양 정상이 합의한 ‘9월 평양공동선언’의 문건도 배포되었다. 우리의 가슴은 안도와 희망으로 고양되었고, 안내원을 따라가는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만수대창작사는 조선화(한국화), 유화(서양화), 수예, 공예, 조각, 동상, 벽화, 산업미술 등 10여개 분야의 미술작품 제작을 총괄하는 단체의 명칭이자 그 단체의 구성원들이 작업하는 전체 공간의 이름이다. 7만㎡의 대지에 세워진 연건평 4만㎡의 건물들 속에서 약 1000여명의 미술가와 2000여명의 종사원이 60여개의 창작실에서 10~20명 단위로 모여 집체창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수치는 남쪽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장에서 대충 보기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국가가 제공한 좋은 환경에서 창작에 몰두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 발길은 조선화 창작실에 이르렀다. 전람회를 자주 가본 것은 아니지만, 남쪽 미술에서도 과거 동양화라 불렀고 요즘은 한국화라 더 많이 부르는 그림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점점 더 서양화와 구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점이 감지되었다. 우리들 앞에서는 50대의 중년 화가가 열심히 붓을 들어 화폭에 칠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진짜 창작의 붓질이라기보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 보여주는 시연(試演)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말을 걸자 그는 손을 멈추고 북녘 사투리로 성의껏 대답을 했다.

“지금 그리시는 게 상상인가요, 아니면 어떤 대상이 있습니까?”

“당연히 대상이 있습네다. 먼저 현지에 가서 스케치하고 사진도 찍고 합네다.”

“그럼 저 그림은 어디를 그린 건가요?”

“황해도 재령에 만수산이라고 있습네다. 금강산이 동쪽의 왕자라면 만수산은 서쪽 여왕이야요. 금강산처럼 유명하진 않습네다만….”

“실제의 모습 그대로 그립니까?”

“아니디요! 더 효과를 내기 위해선 적절하게 변형을 시킵네다. 창의가 들어가야디요.”

“그렇게 변형을 시키는 까닭이 무업니까?”

“우리 예술가들은 인민대중이 좋아하는 것에 복종합네다!”

그의 단호한 대답이 번쩍 내 머리를 쳤다. 기왕이면 자리에 앉아 이 화가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다음 더 자유로운 토론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런 자유가 그에게 있는지 따져볼 틈도 없이 일행은 벌써 딴 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중요한 화두 하나를 선사받은 데 대해 속으로만 감사하면서 나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보면 그의 발언은 예술가의 사회적 존재방식에 관한 ‘하나의’ 오랜 견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만수대창작사에 소속된 예술가들은, 인민예술가·공훈예술가 등 등급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급여를 보장받는 대신 일정한 분량의 창작을 생산해야 한다.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4·15문학창작단’ 소속의 문인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비슷한 의무를 수행할 것이고, 음악이나 무용 분야의 예술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가 지난 9월19일 북한 만수대창작사 조선화 창작실에서 화폭에 열심히 붓칠을 하는 시연을 하고 있던 50대 중년 화가(오른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사회의 관습에 젖어 살아온 우리의 편견과 달리 역사적으로 결코 예외적이거나 새로운 제도가 아니다. 조선시대 화가들도 도화서(圖畵署)라는 관청에 선발되어 급료를 받는 것이 가장 유력한 생계 보장책이었고, 유럽에서도 근대 초기까지는 다수의 예술가들이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되어야만 생활이 안정될 수 있었다. 극작가 레싱이나 작곡가 모차르트는 그들의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 선입견과 달리 영주나 대주교 등 지배계급의 압력에서 벗어난 시민적 예술가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생의 투쟁을 벌여야 했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극소수의 스타들은 부(富)를 누리는 반면 대부분의 예술노동자들은 생존의 벼랑에 몰리다 못해 자살에 이르기도 하는 사례를 떠올리면 이때의 자유라는 것이 한갓 ‘허울 좋은 이름’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만난 화가는 국가의 예술정책 또는 지도자의 국정철학에 따른다고 하는 대신 “인민대중이 좋아하는 것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예술가라면 으레 입에 올리는 관용적 문구(클리셰)로 그가 대답한 것인지, 아니면 당의 방침을 자기 나름으로 소화하여 개인적 신념의 언어로 표현한 것인지 나로서는 물론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의 발언이 북한 예술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예술관일 것으로 추측된다는 점이고, 또한 그것은 개인주의·자유주의에 젖어 살아온 평범한 남한 사람의 예상범위 안에 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추론을 더 밀고 나가면 그의 발언이 북한체제의 자기규정으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근본성격에도 불가피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자연히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현실적 숙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남과 북이 이념적·현실적으로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겪었던 분리의 고통을 극복해야 하는 ‘지금까지의’ 과제와 함께 앞으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통합의 고통을 예상하고 그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는 ‘지금부터의’ 과제도 안게 되었다. 흔히 독일의 교훈을 떠올리는데, 독일에서 배울 점도 적지 않지만 더 많은 점에서 독일과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해야 한다. 이것은 이 작은 지면이 감당할 주제가 아니기에 여기서 그치고, 다시 북한 화가가 던졌던 화두로 돌아가 보자. “인민대중이 좋아하는 것에 복종한다”는 표현이 남쪽의 언어관습에서 볼 때에는 익숙지 않을뿐더러 매우 살벌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남쪽에서도 작가든 화가든 모든 예술가는 거의 예외 없이 독자 또는 구매자의 취향에 적응하고자 하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하게 마련이다. 다만 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것을 자유경쟁의 형식으로 방임할 뿐인데, 알다시피 자유는 예술가에게 창조의 원천이 될 수도, 타락의 빌미가 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다. 남과 북의 예술가들이 이 위험을 현명하게 피하면서 상호교육을 통해 서로 배우고 접근해 간다면 그 파급효과는 한반도사회 전체의 통합노력에도 긍정적 시금석이 될 것이다.

<염무웅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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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글날이다. 한글날은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우리말인 ‘한국어’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자는 ‘국어사랑’의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글날 전후로는 민관(民官) 할 것 없이 ‘국어사랑’을 강조하고 ‘국어예찬론’을 쏟아낸다. 이렇게 ‘국어사랑’의 주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랑한다’는 고백만 하고 ‘사랑의 실천’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국어’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법률에 사용되는 우리말을 잘 관리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법은 부지불식간에 사회구성원의 삶과 언어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법률에는 오류나 어색한 표현이 적지 않게 들어 있다. 형법 제98조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에서 ‘간첩하다’의 경우 ‘간첩을 하다’가 불가능하므로 어법상 잘못된 표현이다. 조어규칙을 어긴 또 다른 경우가 있는데, 민법 제20조 ‘국내에 주소없는 자에 대하여는 국내에 있는 거소를 주소로 본다’에서 ‘주소없는’은 ‘주소’와 ‘없다’가 잘못 결합된 표현이다. ‘없다’에는 ‘맛’ ‘멋’ ‘재미’와 같은 추상명사가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불필요한 표현을 사용하여 문장을 거추장스럽게 만든 경우도 발견된다. 민법 제153조 제2항 ‘기한의 이익은 이를 포기할 수 있다’에서 ‘이를’은 바로 앞의 ‘기한의 이익’을 대신하기 때문에 굳이 쓸 필요가 없다.

우리의 언어생활에 모범이 되어야 할 법률의 언어에 이런 문제들이 지적되는 이유는 법을 제·개정할 때 우리말을 다듬는 절차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법률은 정부와 국회에서 발의하여 제·개정된다. 정부 발의의 경우에는 법제처 ‘알기쉬운법령팀’에서 법안의 언어를 검토한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부처에서 발의된 법안을 제대로 검토하기에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 발의의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의 경우에는 우리말 표현을 검토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놀랍게도 우리나라 국회에는 한국어 검토팀이 없다. 반면 우리의 법체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독일은 연방정부뿐만 아니라 연방의회에도 법언어팀이 있어서, 이들이 정부와 의회에서 발의된 법안의 문법적인 교정과 가독성 검토를 한다. 독일 연방의회에서는 1960년대 후반 포르츠너 의원의 제안으로 연방의회 규정에 법언어팀의 존재와 역할이 명문화되었다. 그 이후 연방의회에는 ‘독일어학회’가 파견한 독일어 전문가들이 법안의 독일어 표현을 50년 넘게 다듬고 있다.

우리나라 국회에도 법안 검토를 위한 법언어팀을 둬야 한다. 그러면 국회가 법언어팀을 통해 ‘국어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우리는 더 나은 한국어로 쓰인 법률을 갖게 될 것이다. ‘보여주기’식 한글날 행사를 하기보다 꼭 필요한 무언가를 하는 게 진정한 ‘국어사랑’이 아닐까? 한국의 포르츠너 의원은 누가 될까 궁금하다.

<구명철 | 서울대학교 교수 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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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 무려 전체 9권 3800쪽 분량의 <제5공화국 전사>를 확보했다고 해서, 나는 당장이라도 편집국에 찾아가고 싶었다. 혹시 신문사 안에 부탁할 만한 사람이라도 없나 하고 생각도 해봤다. 법정 공방까지 벌여가며 1년5개월 만에 확보한 ‘전사’를, 염치불구하고 복사를 하든지 아니면 밤새워 필사라도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전사(全史)’가 아니라 ‘전사(前史)’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5공화국의 전체사가 아니라 5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의 기록 말이다. 이런 ㅠ.ㅠ

물론 이 자체로 엄청난 기록이다. 10·26 시해 사건과 12·12 사태 그리고 무엇보다 5·18 광주항쟁에 관한 핵심 인물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형사적 죄책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전체사’였다고 하면, 요즘의 내 집중적인 관심사, 즉 88서울올림픽에 대한 5공 수뇌부들의 이데올로기를 실체 그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88올림픽에 대한 핵심 행위자들의 기획과 집행이 중요한 까닭은, 이 엄청난 스포츠 스펙터클에 대한 기존의 이해는 이른바 ‘3s 정책’ 정도이기 때문이다. 각종 프로스포츠와 특히 88올림픽이라는 메가 이벤트는 특정 국면의 타개 전술 정도가 아니다. 국가는 그렇게 수세적이고 방어적이지 않다. 특히 매우 공격적인 독재정권이 권력을 부당하게 찬탈하여 국가의 운전대를 잡게 되면, 그 순간 이후 국가는 폭주한다.

5·16이 그랬고 12·12가 그랬다. 권력을 움켜쥔 군부는 의회나 언론 같은 브레이크 장치를 제거해 버리고 순식간에 진격한다. 거의 1년 안팎에 정치와 행정의 중심을 거머쥘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일거에 동원할 수 있을 만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전개하고 거대한 문화 통치 전략을 구사한다.

스펙터클 문화 통치라는 측면에서, 5공화국이라는 진격의 국가는 88올림픽을 기획하고 그것을 ‘범국민적’으로 집행하여 결국 그 책임자가 ‘6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대단원으로 강력하게 자기 조정을 해나갔다. 정치학계에서는 1987년 민주화 운동과 그해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그람시가 말한 ‘수동혁명’이란 관점에서 분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문제 설정이 크게 보아 타당하다면, 나는 88올림픽이야말로 국가권력의 강력한 수동혁명의 엔진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반드시 덧붙여야 할 판단 근거들은, 극단의 정치와 스포츠 스펙터클 신드롬 사이에 넓게 퍼지기 시작한 1980년대의 중산층 문화다. 긴박한 정치 정세와 다소 무관하게, 1980년대는 3저 호황과 내수 소비 활황 속에서 컬러 TV와 마이카와 외식으로 대표되는 중산층 문화의 확산 과정이었다. 그 정점은 물론 아파트다. 이 경제문화의 조건에서, 진격의 국가가 휘날리는 88올림픽이라는 깃발을 따라 ‘범국민적’인 중산층 욕망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이렇게 두루 살필 때, 88올림픽을 ‘3s 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의 극히 작은 부분을 가리킬 뿐이다.

어느덧 88올림픽 30주년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나는 이러한 관심사에 자극을 주는 작업들을 보게 되었다. 스포츠 전문기자 위원석은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전후로 한 박정희 대통령 및 그 무렵의 스포츠 권력자들의 기록을 통하여 88올림픽이 비틀거리는 3공화국의 짙은 한숨 속에서 이미 기획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김운용이나 박세직의 자서전은 물론 전두환과 노태우의 회고록도 참조하고 있는데, 이 기록들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검증은 더 필요하지만, 어쨌거나 1980년대 전후의 혼란 속에서 권력 수뇌부들이 올림픽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권력의 중심이 지향하는 바와 그 언어들을 검토하건대 결코 올림픽은 ‘3s’ 같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다.

위원석이 참조하였듯이, 허진석이나 박재구가 쓴 학위 논문들도 올림픽을 특정한 정치세력이 아니라 국가권력 그 자체의 작동 원리 속에서 접근하고 있어 흥미롭다. 88올림픽을 사회학적 측면에서 연구해온 박해남도 국가권력이 스포츠팬들보다 훨씬 더 스포츠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밝혀왔다. 그가 오랜 연구를 총집하여, 88올림픽의 정치사회적 성격을 학위 논문으로 결산하였다고 하니, 읽고 싶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관심을 어려운 자료나 논문에 기대지 않고, 그저 편하게 57분 정도로 화면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인터넷을 검색하면 된다. KBS 스포츠국의 이태웅 피디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88/18> 말이다. 지난 9월16일에 방영되었는데, 88올림픽도 1988년 9월17일에 개막되었으니, 정확히 30주년이다.

무려 15테라바이트(TB) 분량의 KBS 영상자료를 바탕으로 일단 40시간 분량을 추려내고 이를 다시 약 57분으로 적극적인 편집과 연출을 한 작품이다. <천하장사 만만세> <공간과 압박> <숫자의 게임> 등 독특한 ‘작가주의적’ 관점의 쾌작을 만들었던 이태웅 피디는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올림픽이 관련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판단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TV 다큐의 공식과도 같은 쉼 없는 내레이션이나 과장된 효과음 하나 없이, 오로지 당시의 방송 화면들과 88올림픽에 직접 관여한 사람들의 인터뷰만으로 이어지는데, 그 형식 자체가 흥미롭다.

이 다큐는 허화평으로 시작해서 그의 논평으로 끝난다. 다큐의 끝에서 그는 말한다. “88올림픽이, 전두환 정권으로 하여금, 싫어도, 절대 그런 생각이 없었어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하도록 만들었다.” 글쎄, 여러 각도의 자료와 해석이 더 필요하지만, 최소한 더 이상 ‘3s 정책’ 같은 말로 스포츠 스펙터클을 판단하는 것은 부족하고 게으른 것임을 확증하는 ‘5공 실세’의 증언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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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전 부모님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말도 없고, 시선은 늘 다른 쪽을 향해 있으면서 가끔은 툭툭 던지듯이 비아냥거리는 변명이나 하는, 학교 선생님들도 상대하기 부담스러워하는 학생이라는 사전 정보를 갖고 있던 저는 꽤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하는 질문들을 경청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정답을 찾아보려 노력하는 모습은 성실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반짝이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던 그 학생이 상담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동안 잘 몰랐습니다. 인터넷을 보면 명문대 정보만 가득하고 저같이 중위권 이하의 학생들이 원하는 정보는 별로 없습니다. 또 질문을 올리면 찌질한 놈이 무슨 대학이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답을 듣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굳이 대학에 가는 것보다는 그냥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 능력이나 성격에 맞는 대학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인터넷에 떠다니는 이상한 정보들은 걸러서 보겠습니다.”

이 학생도 나름 많은 정보를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진로 정보들을 대부분 선생님이나 부모님을 통해서 얻었지만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서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에 올라온 진로 정보들 중에서 상당히 많은 내용들이 사실과 다르거나 아예 왜곡된 것입니다. 특히 학생들이 즐겨 찾는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의 정보들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공개한 거라서 사실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위험한 수준으로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정보들을 통해서 학생들이 진로를 찾고자 한다면 혼란스럽거나 분노만 쌓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얼마 전, 한 학생이 상담실로 찾아와 항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학과 최저 합격자의 성적이 내가 알려준 것과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문제의 커뮤니티에 누군가 ‘내가 이 학과에 문 닫고 들어왔다’고 자랑하듯 자신의 성적과 합격증을 공개했는데 그 성적이 무척 높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학과에는 근처 학교의 학생이 더 낮은 성적으로 같은 해에 합격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커뮤니티에 공개된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합격증 사진까지 올라왔으니 해당 학생이 합격한 것은 사실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최저 성적으로 합격했다는 정보는 거짓말이거나 잘 모르고 한 주장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모 국회의원이 한명의 학생이 88개나 되는 교내상을 싹쓸이했다는 정보를 공개하면서 이것이 학생부종합전형의 문제라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이 역시 사실을 기반으로 한 가짜뉴스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상장의 개수로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공지의 사실이기 때문에 학종과 별 상관없는 일을 학교에서 벌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뉴스를 본 학생들은 “선생님, 그렇게 상을 많이 받아야 학종에서 합격할 수 있어요?”라고 질문을 해왔습니다. 가짜뉴스가 학종을 오해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보다는 수상 실적 없이도 합격한 사례를 찾아 “선생님과 함께한 수업으로 합격했어요”라는 보도자료가 나왔으면 학종에 대한 바른 이해와 공교육 발전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짜뉴스가 이제는 청소년들의 미래까지 갉아먹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한왕근 | 교육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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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기독교가 만나는 곳에 ‘가짜뉴스 공장’이 있었다.”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민국 언론사에 남을 만한 문장이다.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차별을 선동하는 가짜뉴스의 레토릭이 보수 기독교의 레토릭과 비슷하다는 점은 페미니스트들도 계속 주목해왔던 문제였다. 한겨레가 이 ‘합리적 의심’이 ‘팩트’임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가짜뉴스에는 올해 초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극적으로 조작된 내용이 퍼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난민에 대한 공포가 갑작스럽게 형성됐고, 그렇게 자라난 반난민 정서는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거짓말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던 사람들 중에는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여성과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을 떠올리게 한다. 마린 르펜은 국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전 총재였던 장마리 르펜의 딸이다. 장마리 르펜은 강고한 남성 가부장의 얼굴을 한 극우였다. 그는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반프랑스 인종학살”이라고 불렀다. 당시 국민전선의 반유대주의와 여성혐오적 성격은 당의 대중적 지지기반 확장에 방해가 됐다. 아버지 르펜 시절 국민전선에는 남성 지지자가 월등히 많았다.

반전은 마린 르펜이 당권을 잡고 아버지 르펜을 숙청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를 축출함으로써 딸 르펜은 반유대주의 극우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국민전선을 현대화시켰다. 그는 오히려 국민전선이 진보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고 설파하는데, 그때 자신의 ‘여성’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표방하고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옹호하는 딸 르펜은 확실히 세련되고 젊은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국민전선의 약진을 젠더정치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딸 르펜 이후 당의 여성 지지자층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그의 포퓰리스트로서의 진가가 드러난다. 포퓰리스트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신념과 무관하게 무엇이든 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대중이 겪고 있는 위기를 과장하고, 그 원인과 해결책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 자리에 ‘대중 vs 엘리트’라는 전선이 형성된다. 예컨대 ‘진짜 프랑스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기득권의 정치적 올바름 추구가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식이다. (난민 논란 당시 윤서인이 정우성을 비난했던 방식을 복기해보자.) 그렇게 포퓰리스트는 박탈감을 느끼는 대중의 분노와 원한의 감정에 어필한다.

기득권과 싸우고 대중에게 말 건다는 이유에서 포퓰리즘을 ‘정치적 가능성’으로 논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포퓰리스트는 오직 나만이 국민을 대변할 수 있으며, 오직 나를 지지하는 자들만이 국민이라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다원주의를 배격하고 혐오와 배제를 바탕으로 하는 정체성 정치를 추구한다.

르펜의 ‘여성 정치’가 어떻게 포퓰리즘으로 휘어지는지 보자. 그는 “나는 프랑스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는가? 난민이다”라고 선동한다. 그리하여 르펜에게 페미니즘은 정치학이 아니라 수사학이 되어 버린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여성에 대한 진보적 정책 기조를 유지했을까? 문득 극우 정치인의 딸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자가 한국 여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포퓰리스트가 페미니즘을 이용할 때만큼이나 곤란한 것은 페미니스트가 기꺼이 포퓰리스트가 되기를 선택할 때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을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부터 끌어오기로 마음먹기는 쉽고, 그만큼 유혹적이다. 그러나 작가 들개이빨은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인간을 혐오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쉬운 건 결코 위대할 리 없지.” 우리의 운동이 좀 더 위대해지기를 바란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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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무협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젊은 승려 둘이 다친 새를 품에 안고 벌레를 잡아 먹이려 합니다. 주지스님이 이를 보고 어찌 불가에서 살생을 하느냐 나무라죠. 그러자 새와 벌레를 안기고 젊은 승려 둘은 줄행랑을 놓습니다. 다친 새와 잡힌 벌레 사이에서 한참 고민하던 주지스님은 결국 새에게 벌레를 먹입니다. “그래도 큰 걸 살리는 게 낫겠지.” 주지스님의 판단으로 벌레를 죽여 새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만일 새와 벌레 모두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누군가의 인생과 생사여탈을 그 크기와 효용성에 맞춰 결정한다면요.

오랜 편파판결에 분노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 나왔다네요. 편파판정보다 더하다는 거죠. 집단성폭행범들은 미래 창창한 소년들이라며 풀어주고, 성범죄 의대생도 여태 했을 공부가 아까워 봐주고, 이빨 부러지도록 여성을 폭행한 남자는 본인도 반성하고 있으니 심한 처벌은 남은 인생에 가혹하다며 집행유예. 피해여성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졌든 선택받은 종족들만 선처(選處)받는 듯한 이 착각은 뭘까요. 가해남성이 피해여성보다 전도유망하고 가치가 커 보일 거 같은 무의식이 판결에 작용한 건 아마 절대 아니겠죠?

‘검둥개 돼지 편’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부류끼리 끌리고 감싸주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토종돼지(흑돼지)는 털이 검고 크기는 개만 합니다. 그게 돼지란 걸 알지만 검둥개는 왠지 자기랑 비슷해 끌립니다. 남 같지 않아 몸 비비고 핥습니다. 그래서… 에이, 아니겠죠. 힘없는 이를 위한 것이 법의 관용과 사법 재량인걸요. 그런데 왜 자꾸 그 관용과 재량이 편애하는 것 같을까요. 설마 가해남성에 감정이입되어 ‘나는 관대하다’ 이런 건 아니겠죠?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는 법정이 ‘남자가 좀 그럴 수 있지’ 하는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법복 검게 입고 가운데 앉으신 판사님, 남자주인공 날아오르라고 여자 좀 죽이는 건 영화 속 얘기인 거죠?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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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당신이 전 남자친구를 폭행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크게 놀라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명절이면 방송되는 ‘아육대(아이돌스타육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던, 당신의 성(姓)과 우사인 볼트를 합친 별명 ‘○사인 볼트’로 불리던 ‘체육돌’이었으니까요. 이후 당신이 쌍방폭행을 주장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랬겠지, 혼자 때리기야 했겠어’하고 가볍게 넘겼습니다.

아이돌 출신 ○○○씨의 전 남자친구 최모씨가 지난달 17일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두하고 있다.

사연이 숨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전 남자친구 최모씨가 성관계 동영상을 전송하자, 당신은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왜 사건이 터진 뒤 곧바로 털어놓지 않았을까. 왜 ‘전 남친을 폭행한 여성 연예인’이 되는 일을 자청했을까. &lt;피해자 ○○○ 향한 2차 가해 “영상 보고 싶은 사람 손 들어라”&gt;라는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당신과 관련된 기사가 올라오자 “싸우든 말든 관심없고, 영상 보고 싶은 사람 손(들어라)” “얼마나 나쁜지 (영상을) 보고 결정해줄게. 일단 보내봐” 등의 댓글이 달렸다고 합니다. 2차 가해와 조리돌림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엽기적 호명(呼名)’을 당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겠지요.

이 글에선 당신의 이름 석 자는커녕 이니셜조차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 사건이 ‘최○○ 동영상 협박 의혹 사건’으로 명명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최씨의 변호인은 공식 입장문을 통해 “최씨는 사건 당일 입은 상해에 매우 흥분한 상태에서 영상을 전송한 것이다. 유포는 물론 유포 시도조차 된 적이 없다”고 협박 의혹을 부인했습니다. 명확한 사실관계는 경찰 수사를 통해 규명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와 심하게 다투고 난 뒤 이런 영상을 건네받는다면 불안에 떨지 않을 여성이 있을까요. 최씨 측은 또한 동영상 촬영을 당신이 제안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합의하에 영상을 찍는 일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합의하에 찍었다 해도 그 영상물을 수단으로 타인에게 압력을 가할 때 도덕적·법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불법 촬영·유포 범죄와 관련한 여성들의 집회 현장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여성들의 공포와 분노는 상상을 넘어섭니다. 반면 처벌은 초라합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성폭력범죄 처벌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1심 판결 현황’을 보면, 2012~2017년 해당 혐의로 재판받은 피고인 7446명 가운데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사람은 647명(8.7%)뿐입니다. 10명이 법정에 서도 감옥 가는 사람은 1명이 될까 말까 한다는 것이지요. 최근 법무부가 죄질이 불량한 불법촬영·유포 사범에게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는 등 엄정 대처한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판결을 내리는 법원이 달라져야 하고, 관련 법률을 개정해 처벌을 강화하려면 국회도 움직여야 합니다.

당신은 유명 연예인이기에 두려움이 더욱 컸을 거라 짐작합니다. 다시는 방송 활동을 할 수 없지 않을까 절망했을지 모릅니다.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당신을 지지하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리벤지포르노범들 강력 징역해주세요’라는 청원엔 21만8000여명(8일 오후 5시 현재)이 동참했습니다. 청와대는 20만명 이상이 추천한 청원에는 공식 답변을 해오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궁금합니다.

다만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리벤지’는 ‘복수·보복’이란 뜻입니다. 피해자가 뭔가 잘못해 앙갚음당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포르노 역시 ‘외설·음란물’을 의미하는데, 불법촬영물은 디지털 성범죄의 결과물일 뿐 유희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성폭행 미수 의혹을 받는 브렛 캐버노가 연방대법관에 올랐습니다. 미국 상원이 캐버노에 대한 임명동의 투표를 진행하는 동안, 수많은 여성과 남성 시위대가 “Shame(on you)! Shame(on you)! Shame(on you)!”(수치스러운 줄 알라!)이라고 외쳤습니다. 한국에서 수치스러워해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닙니다. 가해자이고, 당신이 무릎 꿇도록 몰고간 이 사회입니다. 당신은, 폭력을 행사한 부분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지면 됩니다.

동료 남성 시민들에게도 부탁합니다. “리벤지 포르노란 없습니다. 불법촬영물만 있습니다. 이런 영상을 보는 일은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폭력이자 범죄입니다. 공범이 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시간에도 ‘○○○ 동영상’을 찾는 남성이 있다면 미국 사례를 벤치마킹하겠습니다. “Shame!”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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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가면 이상하게 받침 없는 지명에 마음이 끌린다. 그중에서도 서귀포는 특히 그렇다. 받침이 하나도 없는 곳, 서귀포. 그 어디로 돌아가기 직전 모든 흔적을 지우며 잠시 머무는 장소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희한한 나무를 보자고 찾아간 서귀포 근처 어느 포구의 한적한 골목 식당. 손바닥 선인장만 한 정원과 주황색 양철지붕이 잘 어울렸다. 이 집의 맛과 향을 보증하겠다는 포즈로 서 있는 배롱나무는 아직도 꽃등이 무성하다. 식당을 닮은 길가의 메뉴판에는 그 이름만으로 혀를 씰룩거리게 하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간장덮밥, 성게문어덮밥, 오징어덮밥, 딱새우덮밥, 보말칼국수, 파전. 한편, 배롱나무 아래 임시 입간판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다. 준비한 재료가 소진되어 오후 5시에 다시 시작합니다. 아마도 그 재료의 8할은 식물들일 것이다.


꽃에 입문하고 꽃에 흠뻑 빠지면서 동물과 식물의 관계를 살펴보는 내 생각이 조금 변했다. 나무를 앞에 두고 움직일 줄도 모르는 저 등신들 좀 보라며 키득거렸던 게 그간의 상투적인 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식물이 동물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 굳이 우열을 다툰다면 누가 더 고등하겠느냐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식물이 자생한다면 동물은 기생한다는 게 엄연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재주 많은 천하의 요리사가 운영하는 식당일지라도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아야 하는 것처럼 음식이 외부에서 공급되지 않으면 몸은 폐허가 된다. 우리는 외부에 멱살이 잡힌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보려고 한 희한한 나무는 참식나무에 기생하는 참나무겨우살이였다. 식당 앞 현무암 돌울타리에 자라는 우람한 참식나무의 가지에 뿌리를 내린 그 나무는 때맞추어 꽃을 제대로 피우고 있다. 기생하는 제 처지를 고려하여 참식나무가 열매 키우기를 기다렸다가 이제야 늦게 꽃을 피우는가 보다.

겨우살이의 이름이 왜 겨우살이인 줄이야 모르겠다. 동서남북에서 왜 하필 그쪽에만 받침이 없을까. 해가 돌아가는 서쪽을 향하여 서서 서귀포의 참나무겨우살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참나무겨우살이, 겨우살이과의 상록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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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예문들에서 잘못된 표현을 찾아보자. ①기타를 치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기 마련이다. ②신약 효과를 증명하기 위한 동물 시험을 마치고 임상 실험을 시작했다. ③이 줄에 노끈을 잇달아 이어라. ④백련사 가는 길에서 나는 다산 선생의 자취를 직접 밟을 수는 없었지만 선생의 자국이 느껴졌다.

①에서 ‘박히기’는 ‘박이기’로 써야 한다. ‘박이다’는 저절로 깊이 배거나 속에 든 경우를 가리키는 자동사다. ‘박히다’는 타동사 ‘박다’의 피동형이다. ②에서는 ‘동물 실험’, ‘임상 시험’이 맞다. ‘실험’은 실제처럼 해보는 것이고, ‘시험’은 직접 시도해 보는 것이다. ③의 ‘잇달다’는 ‘잇따라’로 고쳐야 한다. 하나의 뒤로 여럿이 따르는 경우에는 ‘잇달아’와 ‘잇따라’ 둘 다 쓸 수 있다. 다만 ‘무엇에 이어서 달다’라는 뜻으로는 ‘잇달아’만 쓴다. ④에서 ‘자취’와 ‘자국’은 자리가 바뀌었다. ‘자국’은 물리적인 흔적만을 가리키지만 ‘자취’를 자국을 남기게 된 배경을 말하다.(<보리 국어 바로쓰기 사전> 인용)

우리말에는 혼동하기 쉬운 어휘가 많다. ‘박이다’와 ‘박히다’, ‘실험과 시험’, ‘잇따라’와 ‘잇달아’, ‘자국과 자취’가 그렇다. 모두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어휘들이다. 그러나 사전의 풀이만으로 차이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대비시켜 설명하고 용례를 들어야 쉽게 이해된다. 유사어 사전이나 용례사전, 바로쓰기 사전 등이 그런 기능을 담당한다. 표현의 범위가 좁아서, 또는 정확한 어휘를 찾아내지 못해 글쓰기를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 국어사전은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예컨대 글쓴이가 느끼는 슬픔의 오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전달하고 싶을 때는 우리말 갈래사전이나 분류사전에서 근사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사전을 통해 알게 된 말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사전을 자주 찾으면 기억력의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종이사전을 펼치면 찾는 앞뒤의 항목도 보게 돼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인터넷 포털이나 웹상의 국어사전만으로 언어생활이 풍요로울 수는 없다. 관용어사전, 속담사전 등 특수·전문사전이 다양하게 나와야 한다. 종이 사전이 사라지고 있다. 사전 전문 편찬자나 출판사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생각해 볼 일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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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북·미 간의 비핵화 논의가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이 점점 더 분명하게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다. 이제 한반도에 전쟁이 끝났다는 종전선언을 넘어 평화협정이 체결될 것이고, 우리는 지금껏 가보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역사의 노정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전쟁 없는 상태가 평화는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떤 ‘적극적 평화’(요한 갈퉁)의 상태여야 한다. 다시 말해 분단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폭력마저 제거해서 한반도의 모든 사람에게 존엄한 삶을 가능하게 해 줄 지속적인 삶의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아마도 남과 북이 상호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될 때 가장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가 도래할 조건이 마련될 것이다. 민족통일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가장 자연스러운 지향점이다. 그 당위의 호소력도 커서 남북을 아울러 사람들의 강한 헌신과 열망을 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도 평양 능라도에서 행한 감동적인 연설에서 ‘우수하고 강인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이야기하면서 70년을 적대하며 떨어져 살았던 우리 민족이 함께 살아야 함을 강조했으리라.

그러나 통일은 쉽게 이루어지기도 힘들고 반드시 바람직하기만 할지도 의문이다.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하는 법은 없다. 우리 민족이 단순히 동질성이 약해서 비극적 전쟁을 치르고는 오랫동안 갈라져 살아오지는 않았다. 평화체제를 세우기로 한 지금도, 남북의 이질적인 체제나 현격한 경제적 격차를 생각하면, 통일은 가능하더라도 아주 먼 미래의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1민족 2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적극적인 평화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평화의 이상에는 전쟁의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줄 도덕적 질서를 만들어 내려는 고귀한 열망이 담겨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했지만, 냉정하게 보면 인류 일반이든 우리 민족이든 언제나 평화 지향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평화는 어떤 자연발생적 상태가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고도의 규범적 질서다. 문제는 통일이냐 양국체제냐가 아니라 이러한 평화의 본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이다.

칸트식으로 말한다면, 참된 평화는 인간의 ‘도덕적 이성’이 폭력적 갈등과 전쟁이 빚어내는 참혹한 비극의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인식하고 성찰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관건은 서로 갈등하는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처지와 이해관계를 존중하고 평등한 존엄성을 인정하는 지속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치유하기 힘든 원한과 증오조차도 모두의 공존과 번영에 대한 희망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평화는 남과 북 모두에서 이런 도덕적 진보를 이루어낼 때 하나의 역사적 성취로서만 가능하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로의 관계만이 아니라 각 나라 내부의 삶의 양식이 지닌 도덕적 질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해 나가야 한다.

우리 사회 내부만 보자.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원인과 해법이 분명한데도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때 구조적 관계는 폭력적이 된다.

그 폭력은 무엇보다도 통일을 외치면서도 사실은 분단을 악용하며 강화해 온 분단체제 기생 세력들의 불의와 이어져 있다. 그들은 지금껏 국가보안법이 헌법보다 더 상위에 있는 법이라고 우기며 국민들의 인권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일그러뜨려 왔다. 이러한 불의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던 북한과 미국의 갈등을 중재하여 평화의 길로 이끌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우연은 아니다. 분단의 질곡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상처 입히고 왜곡시켰는지를 잘 알고 있는 우리 시민들의 더 성숙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평화를 추동했다고 보아야 한다. 시민들은 또 그런 열망을 모아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냉전 수구 세력에 대해 분명한 사망선고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 세력은 죽은 줄도 모르고 정치적 좀비가 되어 지금도 평화를 위한 노력 하나하나를 물어뜯고 있다. 그동안 남북 사이의 냉전을 이용하고 부추길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끊임없이 동서갈등을 조장하며 거기에 기생해 온 반평화적 정치 질서 자체가 온존하고 있어서다. 이 질서를 제대로 개혁해 내지 못하면 한반도에 적극적인 평화가 정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한 질서의 혁파는 이제 평화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우선적인 도덕적 의무가 되었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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