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3명 중 2명은 대체 형벌이 마련될 경우 사형제 폐지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일 ‘세계 사형 폐지의 날’을 맞아 국가인권위원회가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다. 단순히 사형제 찬반을 물었을 때는 폐지 찬성 비율이 20.3%에 그쳤으나, 대체 형벌 도입을 전제로 할 경우는 폐지에 동의하는 비율이 66.9%로 치솟았다. 한국은 1997년 12월30일 이후 2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이미 실질적 사형폐지국이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16회 세계사형폐지의날 기념식이 열려 인혁당재건위 조작사건 사형수 유족 이영교씨가 발언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유엔에 따르면 약 160개국이 법률적·실질적으로 사형을 폐지한 상태이다. 유럽연합(EU)은 사형제를 유지하는 나라를 회원국으로 받지 않는다. 사형제 폐지가 문명국·인권국 여부를 가르는 핵심 지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여년간 사형제 폐지를 촉구해온 우리는 또 한번 이 반문명적·반인권적 제도의 철폐를 요구한다. 한국은 그동안 수차례 사형제 폐지 입법화를 추진했으나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연쇄살인 등 강력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형 찬성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 형벌이 도입된다면 사형제를 폐지해도 좋다는 의견이 다수로 나온 만큼, 여건이 성숙됐다고 본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체 형벌로는 가석방 없이 평생 복역하는 ‘절대적 종신형’과 일정기간 복역 후 가석방될 수 있는 ‘상대적 종신형’이 있다. 여론조사에서는 절대적 종신형 또는 ‘절대적 종신형에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부과’하는 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인권위 토론회에서 발표한 이덕인 부산과학기술대 교수는 “절대적 종신형은 자유를 회복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형태의 ‘사형’으로 평가된다”며 “사형을 폐지한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상대적 종신형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상대적 종신형을 도입하되, 최소한의 수감기간을 30년으로 설정하고 범죄피해자나 유가족에 대한 추가 보상방안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인권위는 지난달 사형 집행을 금지하고 사형 폐지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자유권규약 제2선택의정서’ 가입을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이 의정서에는 85개국이 가입했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에선 한국과 미국, 일본, 이스라엘만 미가입 상태다. 한국이 가입하면 국제사회를 향해 사형제 폐지를 사실상 공식 선언하는 의미를 갖게 된다. 정부가 결단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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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구들이 모였다. 한데 어울려 몰려다니던 어린 시절, 야구장도 함께 가고 그랬다. 그때 야구장에는 소주가 흔했다. 3회가 지나기 전, 불콰해진 아저씨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때였다.

이후 다들 사느라 바빴다. 야구가 멀어졌다. 한때 ‘야구가 없으면 어떻게 사냐’던 친구들은 나이와 함께 ‘야구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는구나’를 깨달았다. 가끔 일본을 이겼을 때, 금메달을 땄을 때 한 번쯤 아, 야구가 잘했구나. 그 정도.

한 친구가 묻는다. “근데 말야, 유격수가 실책이 많으면 문제 있는 거 아냐?”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나름 전문가라고 불리는 적도 있으니, 설명을 시작한다. “실책이라는 기록은 말야, 심판이 아니라 기록원이 판단하는 거거든. 정상적인 수비로 처리할 수 있었던 타구인지 여부를 판단해서 결정하는데, 실책은 포구와 송구를 모두 따져봐야 해. 무엇보다 실책은 종종 어려운 타구를 처리할 때 벌어지거든. 정작 수비능력이 떨어지는 내야수는 건드리지도 못할 타구를 쫓아가서 잡아낸 뒤 1루에 던지다가 실책이 기록되는 경우도 많아. 실책 숫자는 되레 수비를 잘한다는 뜻이기도 해. 그거 알아? 데릭 지터라는 메이저리그 유명 유격수는 마이너리그 첫해 실책을 56개나 저질렀어. 구단이 외야수로 전향시키려고 하다가 실책을 분석했지. 절반 정도는 사실상 1루수 실책이었어. 송구가 일단 바운드가 되면, 쉬운 바운드였다 하더라도 무조건 송구한 선수의 실책이거든. 실책 숫자만 보고 그 선수를 외야로 돌렸다면, 메이저리그는 역대 최고 선수를 잃었겠지.”

또 다른 친구가 묻는다. “야, 아무리 홈런 많이 치는 타자라도 삼진이 많으면 문제 있는 거 아냐?” 답은 의무감이다. “홈런과 삼진은 비례하는 기록이야. 홈런을 때리려면 풀스윙을 해야 하니 삼진을 각오해야 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게 세상 이치야.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에서 타격 트리플크라운이 81년째 안 나왔어. 올해 크리스티안 옐리치라는 선수가 가까이 갔다가 실패했지. 아, 트리플크라운은 말야, 한 선수가 홈런, 타점, 타율에서 모두 1위를 하는 거거든. 홈런과 타율에서 동시에 잘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

“그래도 득점권 타율이 낮은 건 문제 맞지?”

“득점권이라는 게 그렇게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니라서, 한 시즌의 샘플로 그 선수의 능력을 평가하기는 어렵지. 3할3푼 타자가 꼬박꼬박 3타석마다 안타를 때리는 건 아니잖아. 평소에도 잘 치는 타자가 결국 기회가 왔을 때 잘 친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야. 선수의 능력을 평가할 때 해당 스탯이 연도별 연관성을 얼마나 갖고….”

옆에 있던 또 다른 친구가 “야, 너 그거 TMI야. 너네 TMI가 뭔지는 아냐”면서 낄낄거리고 잘라 들어온다. 고애신이 떠올랐다. 분명 내 T를 배우기는 했는데.

‘투 머치 인포메이션’의 약자란다. 처음 뜻과 달리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낼 때 쓰인다. TMI는 ‘호오(好惡)’의 영역에 대한 설명을 거부한다. 나는 이게 싫은데, ‘네가 그걸 싫어하면 안돼’라고 설명하는 순간 TMI 경고다. 거꾸로, 나는 이게 좋은데, ‘너는 그걸 좋아하면 안돼’라고 설명하는 것 역시 TMI다. ‘선비질’이고 ‘설명충’이 된다.

자, 그러면 여기서 추석 전후 최고의 유행어. ‘기자란 무엇인가.’ 가짜뉴스가 파고드는 곳은 ‘호오’의 영역이다. 공감을 핑계로, 원하고 바라는 답을 뉴스로 꾸며 뿌린다. 혹시라는 음모에 거짓 팩트를 얹어 ‘역시 그렇군’이라는 반응을 이끈다. ‘가짜뉴스’는 결국 공감이 아니라 증오를 부추긴다. 기자에게 TMI는 의무다. 잘못된 정보는 고치는 게 맞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 누군가 물어보면 또 설명한다.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해당 스탯의 연도별 연관성이 말야….”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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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밑으로 내려가면 지평선이 펼쳐진 동네. 수평선을 보며 살았는데 이처럼 들녘 끝을 보며 살게 될 줄이야. 대지를 달려온 세찬 바람은 태극기에 닿자 몽돌 해변처럼 찰파닥 소리를 낸다. 만국기가 펄럭이던 가을운동회를 기억하는가. 학교 운동장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모래바람이 불어 무르춤하였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높이 걸린 태극기는 K팝 아이돌만큼 신이 나서 혼자 춤춘다. 퇴근하고 돌아온 사오정에게 부인이 그랬다지. “퇴근길 힘들었나요?” 사오정이 깜짝 놀란 얼굴로 “태극기 흔들지 않았는뎅. 나 태극기 부대 아니영.” 사오정에게 귀팝 파라고 귀이개를 꼭 선물해주어야지.

생풀 냄새가 올라오는 들길엔 코스모스가 한들거린다. 신중현의 노래 ‘미련’은 가을날 레퍼토리. “코스모스 길을 따라서 끝이 없이 생각할 때에, 보고 싶어 가고 싶어서 슬퍼지는 내 마음이여.” 코스모스 길을 따라 늘어선 마을엔 굴뚝마다 노래만큼 하얀 연기도 흘러나온다. 세상엔 연기를 쿨룩쿨룩 내뱉는 굴뚝만 있는 게 아니더라. 나 바람을 삼키는 굴뚝도 보았다. 중동 사막땅 이란에 가면 ‘버드기르’라고 있다. 집집마다 ‘바람 탑’이 하나씩 높다랗다. 뜨거운 사막 바람을 잡아다가 물 저장소에 식히는 원리. 이렇게 시원해진 공기를 집안 곳곳으로 들인다. 이젠 우리나라 굴뚝도 폭염이 기승일 때는 이란의 바람 탑처럼 에어컨 역할까지 했으면 좋겠어.

코스모스가 춤추고 태극기가 춤추고 굴뚝엔 연기가 춤추는 가을. 의자나 평상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던 영감님들은 대부분 하직. 찡등그리며 쏘아보던 교회 댕기는 아짐씨들, 이제 제 앞가림도 벅찬 세월이렷다. 골목을 주름잡던 영감탱이의 담배연기가 그립다. 연기가 피어나는 곳엔 어김없이 사람이 살고 있지. 사람이 집에 머문다는 게 얼마나 온기 있는 노릇인지. 수십 채 건물이 있대도 진실한 사랑을 나눌 ‘내 님’이 없다면 인간은 대체 어디서 위로와 온기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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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자석이다. 편리성과 부, 사교라는 킬러 콘텐츠에 이끌려 도시로의 유입은 끊이지 않는다. 도시는 영역을 넓혀왔고 쾌적한 정주여건을 갖추기 위해 시설과 기능을 확장했다. 그리고 자연발생적인 도시에서 점차 계획된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스 시민들은 민주주의 토론의 장인 아고라를 만들었고, 로마시대에는 포럼이 그 기능을 이어받았다. 식민지 개척에 나선 로마인들은 정치·군사·상업활동에 맞게 도시를 구획하고 시설을 배치했다. 그렇게 해서 식민도시 콜로니아, 병영도시 카스트라, 상업도시인 키비타스가 만들어졌다. 교통의 요지에 건설된 키비타스는 유럽 도시의 기원이 됐다.

산업혁명 이후 런던은 사람이 몰려오면서 도시기능이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꿈꾸고 도시에 왔지만 열악한 위생, 불편한 교통에 누울 공간조차 비좁은 단칸방 생활은 디스토피아였다. 인구집중은 주택, 교통, 환경, 범죄, 난개발 등의 문제를 한꺼번에 초래했다. 20세기 초 영국의 도시계획가인 에버니저 하워드(Ebenezer Howard)는 도시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원도시’ 구상을 내놓았다. 근대적 의미의 도시계획의 시작이다. 당시 런던을 비롯한 산업도시에는 인구가 과도하게 몰렸지만 나머지 지역은 인구가 줄고 쇠퇴했다. 인구 과밀과 유출이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그는 대도시로의 인구이동에 초점을 두고 대도시의 매력과 농촌의 장점을 혼합해 인간을 위한 사회적 공간을 창안했다. 그것이 전원도시였다. 그의 구상은 런던 북쪽지역에 세운 레치워스(Letchworth)라는 최초의 전원도시로 구체화되었다.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주변 지역과 그린벨트로 분리돼 있으며 주거와 공업, 농업이 균형을 이룬 계획도시였다. 그린벨트의 개념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정부는 지난달 서울에 살 집이 부족하다면서 30만가구의 공공택지 개발계획을 내놓았다.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를 담기 위한 3기 신도시 대책이다. 정부는 서울·수도권 지역 17곳을 공공택지로 개발해 3만5000가구를 공급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서울 근처에 330만㎡ 이상의 대규모 택지 4~5곳을 조성해 20만가구를 공급하고, 추가로 도심 안의 유휴부지를 이용해 6만5000가구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당장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발표된 옛 성동구치소 부지를 포함해 경기 광명 등의 지역민들은 반대에 나섰다.

신도시의 도시계획은 토지나 교통, 공원녹지, 편의시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바람직한 미래를 구현하기 위한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 그 주체는 지역 주민과 지방자치단체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신도시 건설에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됐는지 의문이다. 주민들의 반대를 뚫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구태의 재현이다. 둘째 경제활동이나 교통·주거·교육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이어야 한다. 정부는 주택공급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 경기 광명은 교통난을 호소하고 있지만 대책은 난망이다. 마지막으로 자연환경과 역사적 가치의 보전과 활용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린벨트는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방안인 동시에 미래세대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정부는 서울시의 반대에 직권으로 그린벨트를 해제하겠다고 한다. 이에 덧붙여 정부는 공급대책을 내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공급을 차단하고 있다. 정부는 장기 임대주택사업자 등록을 유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동산 매물이 줄어든다. 공급을 늘리겠다면서 오히려 반대되는 정책이 동시에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하워드는 도시와 농촌의 장점을 살린 전원도시의 조건으로 6가지를 제시했다. 도시의 인구를 제한(3만~5만명)할 것, 주변에 농업지대(그린벨트)를 보유할 것, 산업을 확보할 것, 도시의 번영에 따른 이익을 지역사회를 위해 보유할 것, 토지를 공유할 것, 주민들의 권리를 최대한 향유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이다. 영국의 전원도시를 한국에 재현하자는 게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다만 정부가 추진하는 신도시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공간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정부는 신도시 개발지구 지정작업을 2019년까지 마무리하고 2021년부터 공급하겠다는 계획이다. 군사작전을 하듯 주택공급계획을 밀어붙일 기세다. 이미 2기 신도시는 많은 곳이 미분양 상태다. 교통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아침마다 출근전쟁을 하는 곳이 부지기수다. 인구는 감소 추세다. 현재의 눈으로 5년, 10년, 20년 뒤의 부동산시장을 보는 게 옳은지 의문이다. 일본은 도쿄 주변에 70만채가 넘는 신도시의 빈집 문제로 골치다. 3기 신도시의 도시계획은 무엇인가. 오늘의 결정이 내일의 짐이 될 수 있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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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페터 슈나이더의 <에두아르트의 귀향>이라는 소설이 있다. 동·서독 통일 얼마 후, 에두아르트는 얼굴도 모르던 조부로부터 동베를린에 있는 거대한 저택을 상속받았다는 연락을 받는다. 당시 미국에서 살고 있던 그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통일된 고국으로 돌아간다. 통일 덕분에 뜻밖의 한재산을 거머쥐게 되고, 몰랐던 친척들을 다시 만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 같던 에두아르트의 귀향은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게 진행된다. 동베를린으로 간 에두아르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이제 그의 소유가 된 저택을 점유하고 살고 있는 거주민들의 총탄세례였다. 게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세금도 함께. 이야기는 이제 달콤한 상상이 아니라 복잡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다. 에두아르트가 만나야 할 그 현실이란 것은 단순히 한 저택의 소유권 분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과 서가 서로 갈라져 살았던 세월 동안 각자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삶이며, 그 근저의 역사였다. 그것은 이념이나 체제의 문제 너머의 것이었고, 국가를 넘어 개인의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산가족도 아니고, 북쪽에 어떤 식으로도 연고가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러니 난데없는 상속을 기대할 수도 없지만,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이런 상황이 우리와 아주 멀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삶끼리의 조우 말이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에 발표된 이 작가의 인상적인 책이 또 하나 있다.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으로, 아직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이던 시절에 장벽을 뛰어넘어 동서를 오고갔던 일종의 국경 침범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동쪽에서는 국경이라고 주장하던 장벽을 서쪽에서는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국경을 침범한 사람들이란 말이 딱히 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그 장벽을 월경하다가 총을 맞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숱하게 있었으니, 어느 쪽에서 보거나 장벽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경계를 뛰어넘는 일이었을 것이다. 동에서 서로만 뛰어넘은 것이 아니다. 서쪽에서 동으로 넘어가기를 수차례 한 끝에 동쪽에 정착을 해버린 사람이 있고, 서쪽으로 10여차례나 건너왔다가 역시 10여차례 꼬박꼬박 동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 이 책은 이 월경자들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0여차례나 서쪽으로 건너왔던 동베를린의 형제 이야기는 특히나 흥미롭다.

그들이 줄을 타고 장벽을 건너 서쪽으로 와서 한 일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 영화가 끝나면 또 줄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이 일이 발각되어 그들이 불법월경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그들의 변호사는 그들이 꼬박꼬박 동으로 돌아온 이유가 동에 대한 충성심을 웅변하는 게 아니겠냐고 변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집이니까’ 돌아갔을 것이다.별로 길지 않고, 가독성도 좋은 이 책을 나는 한줄 한줄 시간을 들여 읽는다. 통일 후에 저쪽에서 살던 얼굴도 모르는 조부에게 유산을 상속받는 상상보다 지금 장벽을 뛰어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내게는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탈북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탈북자들이 북의 국경을 넘어 여기까지 오게 된 참혹한 사연들과, 여기, 남쪽에서 정착하는 동안의 뼈아픈 사연들이 있다. 그 사연들은 기획기사로, 특집 르포로, 다큐멘터리 방송으로 소개된다. 그 사연들은 그렇게 소비되면서 시의성을 잃고, 충격도 사라진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하고, 이미 믿고 있는 것에 보태지는 정보를 선별하여 받아들인다. 가장 사실적인 것을 전달하는 정보 앞에서 기실 그 정보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가장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나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믿고 싶은 것이 있고,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문학은 아마도 약간은 다른 쪽에 있을 것이다. 문학은 사실을 전달하기보다는 사실의 이면을, 그것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시도하는 행위라고 나는 믿는데, 페터 슈나이더의 이 작품을 보면서 더욱 그랬다. 이 작품에서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은 그들 개인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 장벽과 시대와 역사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전한다. 완전히 다른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 옳다 그르다를 떠나 그것이 그냥 삶이어서 살게 되었던 삶, 이쪽에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저쪽의 삶, 저쪽에서는 이쪽이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지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삶, 그것은 정치나 힘이나 경제로 해석되는 문제는 결코 아닐 것이다. 책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난 도무지 이 서쪽 멍청이들과 이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도대체 너희들 어떻게 사는 거야? 지금과 똑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 너희들은 나치를 방관했잖아.’

독일과 우리는 다르다. 아마도 많이 다를 것이다. 역사도, 세월도 다르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참 비슷하다. 우리에게도 방관했던 것이 있고, 그로 인해, 앞으로 싸워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다.

책의 또 한 대목을 인용한다.

‘서쪽에 사는 독일인 대부분이 오래전부터 분단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정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들이 느끼는 분단의 고통이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 느꼈던 강렬한 감정을 애통해하는 연인과 같다. 독일에서 시간은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고통의 느낌을 없애버리는 것 같다.’

얇은 책 한 권을 천천히 읽으며 오늘 우리의 자리를 돌아본다. 저쪽뿐만 아니라 이쪽의 삶까지 포함해, 이해하기 힘든 것을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간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고통의 느낌마저 사라져버리기 전에.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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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아폴로 17호가 달에 착륙했다. 1966년 시작된 아폴로 프로그램의 마지막 비행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유인 달 탐사였다.

세 번째 우주비행을 하게 된 유진 서넌 사령관은 월면에 3일 동안 머물며 각종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현재까지 달 표면을 밟은 마지막 인간으로 남아 있고, 이 기록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아폴로 17호는 인류의 집단적 기억에 또 하나의 흔적을 남겼다. 우주 공간에서 찍은 지구의 고화질 사진이었다. ‘블루 마블(푸른 구슬)’이라고 알려진 이 이미지는 누구나 한번쯤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사진은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아득한 우주 공간 속에 외롭게 떠 있는 하나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밖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지구가 사실상 닫힌 계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인류에게 주어진 자원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은 1960년대 후반 이후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끝없는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에 균열을 냈다. 이와 같은 사고의 전환은 ‘우주선 지구호’가 지속적으로 순항하기 위해 승객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였다. 아폴로 17호가 추진되고 있던 1972년에 출간된 이 보고서는 현재 인류가 심각한 곤경에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인류가 근대 이래 성취한 과학과 기술의 총아인 우주 개발 프로젝트가 역설적으로 과학과 기술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클럽의 회원들은 무엇을 근거로 인류가 곤경에 빠져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들은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저명한 컴퓨터 엔지니어인 제이 포레스터와 그의 연구진을 섭외했다.

포레스터는 2차 세계대전 중에 고성능 진공관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한 ‘훨윈드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미 해군의 지원을 받은 이 컴퓨터는 폭격기 조종사를 훈련시키는 모의 비행 장치를 구동하는 데 활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포레스터는 복잡한 시스템 내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시스템역학’을 창시했다. 컴퓨터 시스템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역학 이론은 이후 경제 시스템, 도시 시스템, 더 나아가 세계 시스템을 분석하는 데까지 응용되었다. 포레스터는 세계 시스템을 하나의 모델로 구현하면 세계 경제, 인구, 생태계 등의 데이터를 입력값으로 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MIT 연구진은 포레스터의 시스템역학 이론을 바탕으로 ‘월드3’이라는 컴퓨터 모델을 구축했다. 이 모델은 식량, 산업, 인구, 비재생 자원, 공해 등 5개의 주요 서브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2년 당시 알려져 있는 데이터를 입력하면, 고성능 컴퓨터가 서브시스템들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고려해 향후 100년간의 추세를 계산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컴퓨터 모의 시험 결과 지구라는 시스템의 ‘성장의 한계’는 2072년 무렵에 도래할 것이며, 이때 “인구와 산업 능력이 갑작스럽고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급감할” 것으로 나타났다. 즉 당시와 같은 수준의 경제 성장이 지속된다면 인류는 100년 안에 거대한 벽에 부딪히리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여러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대중들의 뇌리에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생생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컴퓨터 모의 시험 또는 ‘시뮬레이션’은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시뮬레이션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시스템이 지나치게 복잡해 그 내부의 작동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MIT 연구진 역시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구축한 모델은, 다른 어떤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과도하게 단순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은 월드3 모델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구라는 복잡계의 작동 방식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모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유용한 모델”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MIT 모델은 그것이 깔고 있는 가정(假定)을 명쾌한 수학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것을 검증하고 비판할 수 있었다. 로마클럽의 대표단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결과와 그에 바탕을 둔 전문가들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지난 9월21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전문이 선조위 홈페이지(www.sic.go.kr)를 통해 공개되었다. 이미 알려져 있듯 이 보고서에는 세월호 침몰 원인을 두 개(‘내인설’과 ‘열린 안’)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위원회의 입장이 두 개로 갈라지게 된 여러 원인 중에는 모의 시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었다.

선조위는 침몰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에 의뢰해 선박의 축소 모형을 제작한 후 사고 당일과 유사한 조건하에서 침몰시키는 시뮬레이션을 수행했다. 이 시험은 월드3 모델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선박에 비해 “불완전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선체의 복잡한 형태와 선체 내외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우리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유용한 모델”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가정을 검증하고 비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선조위 종합보고서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유용한 하나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조위 시뮬레이션은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미래를 위한 선택의 준거점을 되기 때문이다.

<최형섭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서울과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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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SNS를 하던 중 우연히 타임라인에 광고가 하나 흘러들어왔다. 정치스타트업을 표방하는 어느 사이트의 광고였는데,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들을 쇼핑하듯 편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신묘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살펴봤더니, 자신들이 제작한 ‘굿즈’를 구매하면 판매기금을 모아서 옥외광고를 하거나, 관련 상임위의 국회의원에게 입법청원을 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사실 이것이 최초는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진영은 “헌정 사상 최초! 정당 사상 최초!”라는 말과 함께 ‘문재인 1번가’라는 쇼핑몰페이지를 운영한 바 있다. “지역, 세대, 관심사에 따라 필요한 정책 공약을 ‘쇼핑’ ”하라는 말과 함께 후보의 공약들을 쇼핑몰 상품처럼 배치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정책과 공약을 사고파는 쇼핑몰은 아니었고, 캠프의 ‘재기발랄’한 홍보담당자들이 내놓은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이 구상들은 대중이 정치를 어려워하기 때문에 진입장벽을 낮춰서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의사표현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선의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따져볼 문제들이 많다. 우선 더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는 것은 민주적인가? 활발히 가동 중인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를 보자. 20만명이 넘으면 청와대 및 담당부처의 관계자가 해당 청원에 대한 응답을 해준다. 그렇게 20만명을 넘긴 청원들의 면면은 상당히 당혹스럽다. 가장 많은 71만명이 한국에 난민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달라는 청원에 동의를 했고, 그 다음으로 6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국가대표 선수들의 자격을 박탈해 달라는 청원에 동의를 했다. 그 외에도 청소년 범죄에도 성인과 똑같은 처벌을 해달라는 청원, 성범죄 사건에 대한 무고죄를 강화해달라는 청원, 퀴어축제를 금지해달라는 청원 등이 20만명을 넘겼다. 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청원이나 필요한 문제제기들도 있었다곤 하지만, 헌법이나 기본권에 반하는 주장들이 분별없이 노출되고 그것이 국가가 직접 응답해주어야 하는 여론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결국 이 청원 시스템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답변이라는 것이, 언제나 두루뭉술한 원론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 의문을 갖게 된다.

정치적 의사표현을 쇼핑처럼 하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물론 소비는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빈번하게 하는 행위이자, 사회와 관계 맺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다. 모든 것이 시장과 거래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같이 보이는 오늘날 정치가 소비가 된들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이미 그렇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실로 경제학에 기반하여 정치행위를 분석하려는 이론들이 꽤나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하지만 소비는 아주 제한적인 행위다. 소비는 값을 지불해야만 자격을 얻는다. 사지 않는 것과 살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관여할 수 없다. 돈과 자원도, 많은 수의 머릿수도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위한 시장은 열리지조차 않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특정 회사의 유제품을 사지 않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대기업이 만든 도로와 아파트와 반도체와 국가기반시설을 불매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떻게 지지하지 않는 정당과 종교를 불매할 것인가? 자연재해를 구매하거나 불매해서 대처할 수 있을까? 약자들의 권리와 사회정의는 어디에 가면 살 수 있나?

길바닥과 허공에서 세상에 자리를 얻기 위해 발버둥쳤던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민주주의와 편리함의 주객전도가 다소 모욕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처절하게 증언했던 바는 민주주의는 ‘좋아요’와 ‘구매하기’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쉽고 간편한 민주주의는 없다. 우리는 충분히 더 복잡하고 신중해져야 한다.

<최태섭 문화비평가·<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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