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된 고정관념이 일상에 얼마나 만연한지를 확인하는 글쓰기 강의를 대학에서 하고 있다. 만연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로서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만큼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상한 문화를 쉽사리 거부하지 못한 채 관성에 젖어 저지르는 자신의 과오를 ‘모름지기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다. 나는 학생들이 사회학을 현미경 삼아 자신의 순간순간을 관찰하여 차별과 혐오의 씨앗을 발견하고 성찰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학력차별에 둔감한, 성별 차이를 분류하는 데 익숙한, 거대 자본의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한국 사람들’에 자신이 예외일 리 있겠는가.

솔직한 자기 고백을 글로 표현하는, 방향성이 비교적 명료한 수업이지만 도무지 적응이 어렵다는 ‘요즘’ 학생들이 많다. 대면 첨삭을 하는데 이렇게 토로하는 취업준비생이 있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그런 글쓰기를 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런 글이란 무엇이냐고 묻자 사회적 의미를 듬뿍 담은 답이 돌아온다. “스스로가 보잘것없다고 말해야 하잖아요. 이 수업의 글쓰기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경쟁하는 식인데, 그건 우리 세대에 금기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긍정의 기운’이 넘실거리도록 한쪽의 방향으로만 글쓰기를 해서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하는 요즘의 취업 준비를 생각하면 얼토당토않다고 할 수 없는 하소연이었다. 이들에게 부족함은 극복했을 때나 혹은 극복 중일 때만 스토리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를 거부하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순진한 자기소개서는 없다. 언제나 자신의 장점만을 도드라지게 다뤄야 한다. 단점을 나열한다는 건 ‘귀사에 입사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요구하는 장점이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면 애써 자신을 포장하는 게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렇게라도 모범상이 만들어지고 모두가 이를 좇는다면 인류는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소개서에서 다루어야 할 장점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과 무관하다. 경쟁과 승자독식을 인정하고 학력차별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소신을 지녔다는 문장만이 공백을 채우는 데 허락된다. 협력의 정신은 내부고발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서 강조되어야 하며, 성차별은 반대는 하지만 전통을 존중하기에 예민하게 굴지 않겠다는 각오를 드러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사회 탓은 하지 않고 열정으로 도전하겠다는 그릇된 ‘외향성’ 신화와 결합하여 바른 가치로 둔갑한다.

취업이야 언제나 기득권의 눈치 보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굴욕을 겪는 시기가 너무 빨라졌다. 대학입시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진학에도 지켜지지도 않을 학업계획서와 자기부정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러니 고등학생들이 전문 컨설턴트에게 상담을 받고 이를 인터넷에서 공유한다. 이제는 학생들끼리도 이런 분류가 익숙해져서인지 학생회나 동아리 가입에 자기소개서가 요구되는 지경이다. 중학교에서도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라고 해서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이들이 자신을 허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고뇌에 빠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포장지로 자신을 덮을 수밖에 없는 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팔자일지도 모르나 그 허무를 이른 나이에 마주한다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다. 어른들조차 자신들의 장점이라고 포장하면서 떠벌리던 ‘버티기’를 하려다가 이리저리 치여서 힘들어한다. 그래서 산골짜기 묵언 수행자들이나 실천할 수 있는 삶에 득달할 방법을 찾으면서 무너진 자존감을 애써 끌어올리려고 발버둥인데, 이 모순을 사회로 들어오기 전부터 뼈저리게 느끼는 자들이 남은 생애 동안 기성세대와 공동체를 불신하고 나아가 자신조차 혐오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성찰의 자기소개서가 아닌 패기의 기운만이 지배하는 자기소‘설’서 과잉의 시대가 만든 끔찍한 결과다.

<오찬호 |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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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강원 속초에서 함께 자라난 친구들은 34년이 흐른 후 중년이 되어 부부동반으로 집들이 모임을 갖는다. 친구들은 모두 좋은 대학을 나와 성형외과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선생님이 되고 사업가가 되었다. 어릴 때 함께 보았던 월식이 일어나는 어느 날 저녁. 이들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거리낄 것이 없고 비밀도 없다”며 정말 친한 관계를 과시하다가 저녁을 먹는 동안 서로의 전화 통화와 문자, 카톡, e메일까지 고스란히 공유하는 게임을 시작한다.

그러나 게임과 함께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의 속사정이 하나하나 드러난다. 정신과 전문의 아내를 두고도 남몰래 정신과 치료를 받는 성형외과 의사, 자신의 성 정체성을 말하지 못하는 전직 교사, 잘난 친구들 사이에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온 바람둥이 레스토랑 사장,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않은 변호사…. 한강이 보이는 멋진 고급빌라에서 홍게와 물곰탕 등 내내 푸짐한 음식들로 속을 채우지만 모두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

지난주 개봉한 영화 <완벽한 타인>의 이야기다. 2016년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가 원작인 이 영화는 개봉 4일 만에 1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심리 코미디물로 의외의 흥행가도에 들어섰다.

영화 ‘완벽한 타인’ 공식포스터,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한 공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화장실을 같이 쓰는 부부와 부모자식 사이, 어릴 적부터 흉허물 없이 자라나 우리집 숟가락 젓가락 숫자까지 알고 있을 법한 절친 사이에서도 서로 말하지 못한 비밀이 존재한다. 그 비밀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때론 성장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누군가 타인에게 공개하면 더 큰 상처가 돼 돌아오는 것들이다. “말을 하지….” (영화 속) 친구는 왜 말하지 않았느냐며 서운해하고 화를 내지만 말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조롱과 비아냥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비밀은 그대로 비밀로 남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도 넉 달째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0년 넘게 기분부전장애(경도의 우울증)와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저자가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병행하며 나눈 상담 내용을 환자 시각에서 써내려간 책이다.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한 적이 있는 저자는 별일 없이 사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 공간에 대해서 털어놓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울적한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고 그 때문에 힘들어하는 과정을 찌질한 것까지 하나하나 보여주며 치료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내 얘기라는 생각에 많이 공감했고 울고 싶어졌다” “나도 고백하고 위로받고 싶다” 등등 독자들은 공감을 표시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4일 기준 출간 넉 달 만에 25만부를 기록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에 힘입어 내년 1~2월 2권까지 출간할 예정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드러내지 않을까? 너무 힘들어서 알릴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걸까? 난 늘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꼈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의 공감이 필요했다.” 작가의 자문자답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 공적인 나, 개인적인 나, 그리고 비밀의 나.”(<완벽한 타인>의 마지막 자막) 사람들에게 보이는 공적인 나의 모습, 친구나 지인들에게만 보여주는 사적인 나의 모습,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나의 모습이 있다는 얘기다. 그 비밀은 불륜일 수도 있고 동성애일 수도 있고, 낮은 나의 자존감일 수도 있다.

소셜네트워크 시대에 점점 더 많은 관계와 정보 속에 살면서도 항상 외로움을 호소하는 현대인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생판 모르는 사람이 어제 저녁 누구와 익선동 레스토랑에서 토마토가 아닌 크림 소스로 만든 해물파스타를 무슨 와인과 곁들여 먹었는지도 훤히 알며 공유하는 시대의 서글프고 불편한 아이러니다. 아픈 상처들은 누구보다도 가까운 이에게 위로받으며 치유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정작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그 비밀스러운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는 별것 아닌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스스로 아파하고 말하지 못하며 누군가에게는 위로받고 싶어 하고, 때론 가식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상처받는다. 결국 모두가 이런 상태의 사회적 우울증에 놓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쇼비즈니스의 선구자인 미국의 서커스단장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1810~1891)은 서커스 시작 때 항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있다”란 말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마음의 여유와 공감처럼 나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더 연다면 우울하고 고독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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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태권도는 체계와 수련 방법이 흡사하지만 다른 점도 꽤 있다. 우선 용어가 다르다. 한국에서 ‘품새’라고 부르는 기본동작을 북한에서는 ‘틀’이라고 한다. 한국의 ‘겨루기’도 북한에서는 ‘맞서기’라고 한다.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겨루기에서는 공격이 완전히 몸에 닿아야 포인트가 인정되지만, 맞서기 규칙은 몸에 닿기 직전 공격을 멈추도록 하고 있다. 한국에선 손으로 얼굴을 가격하는 것이 금지되는 반면 북한에서는 얼굴 공격이 가능한 것도 다르다. 북한 태권도에서는 보호대가 없고, 가격을 위해 장갑과 신발을 착용한다. 한국 태권도가 발 기술 위주로 화려한 반면 북한은 실전을 방불케 한다. 한국 태권도가 스포츠에 가깝다면 북한 태권도는 격투기 성격이 짙다.

하지만 남북 태권도의 이런 차이가 본질적이라고 할 것은 아니다. 태권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수박희(택견)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택견에 무예와 스포츠 두 가지 성격이 모두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려사는 “이의민이 맨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움직였고, 두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고 적고 있다. 무신정권을 이끌었던 두 사람이 모두 택견의 고수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의민이 택견을 잘해 승진했다거나, 문신과 무신이 단체로 겨루기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승부를 가리기 위한 규칙이 있었다는 말이다. 택견은 화약 발명 후 신무기가 등장하는 고려말에 이르면 무술로서의 가치가 쇠퇴한다. 결국 택견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무예도, 스포츠도 되었던 셈이다. 지금 남북 태권도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남북 태권도가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육군 소장 출신으로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한 고 최홍희씨의 캐나다 망명 이후다. 망명한 최씨가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자 박정희 정권은 고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앞세워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설립했고, 이후 두 단체가 세계 태권도계를 양분해왔다. 지난 2일 두 단체의 대표자들이 평양에서 만나 통합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민족의 무예인 태권도가 통일을 선도한다니 의미가 각별하다. 남북이 동질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 태권도뿐이 아니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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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끝내자마자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창 바깥을 쳐다보았다

백색의 햇살 너머 북한산을 보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지 묻는 그에게 나는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버스에 그를 태워 보내고 나는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책을 얼굴에 덮고 잠이 들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우정을 나눌 차례가 왔고 아침이 왔다

주워온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마주했다 돌이 말을 할 때까지

김소연(196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미묘한 움직임들이 생활을 만든다. 모래알들이 모여 모래사장을 이루듯이. 미묘한 움직임에는 마음의 율동이 일어난다. 높고 낮은 파도가 바다에 일어나듯이. 대개는 이러한 움직임들에 무심하지만 이 시는 그렇지 않다. 가만히 움직이는 것을 바라본다. 원경(遠景)과 근경(近景)을 모두 바라본다.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옛사람에게 가기도 한다. 그리고 침묵하는 돌에게까지도. 별것 아닌 듯한 데서 모든 게 생겨난다. “백색의 햇살”에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는 것이, 속마음의 능선과 골짜기를 바라보는 것이 썩 잘 어울리는 요즘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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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거주시설의 거주인들과 함께하는 워크숍을 얼마 전 마무리했다. 시설에 도착하자마자 날카롭게 들려오는 한마디. “앞으론 간식 사올 때 미리 이야기해 주세요. 간식 먹고 계속 토했어요!” 교육 담당자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난주에 참여자 중 몇 분이 간식을 드시고 아프셨단 이야기다. 관리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말의 내용에 화가 나서 “정해진 음식과 양이 아니라 오랜만에 자유롭게 드시다 그랬던 거 같네요”라고 받아칠 뻔했다. 그러다가도 많이 아프셨을 거주인 곁에서 같이 애썼을 생활재활교사(‘생활을 재활하는 선생님’이란 뜻으로 거주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관리하는 권한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의 생활이 ‘재활’의 대상이 된다는 것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현장에서 폭넓게 쓰이는 개념을 통해 현장 상황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한다)에게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건강에 대한 책임과 관리가 사회복지노동자의 몫이니 날카로울 법도 하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적으면서도 나는 석연치 않다.

사회복지노동자의 위치를 이해하는 이런 방식은 적절한 걸까? 왜 건강에 대한 책임과 관리의 몫에서 당사자는 빠지고 노동자의 몫이 되었을까? 아팠던 거주인을 지원했던 생활재활교사는 단지 ‘일’만 했던 걸까? 시설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이는 거주인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것보다 이미 나누어진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이 더 클 것이다. 나는 거주인과 노동자를 각기 만나 확인하고 싶은 궁금증들을 거주시설의 구조적 조건으로 이해하려 했지만, 사회복지노동자의 노동권만으로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다. 문득 사회에서 인정하는 ‘노동’이란 폭이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든다.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가장 좋은 자세를 찾기 위해 거주인과 노동자가 나누었을 수많은 대화 같은 것들은 사회복지 지원체계, 그것도 거주시설이라는 공간 안에서 의미있는 노동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때로는 친밀함이 쌓인 관계에서 서로를 위해 “다른 방법은 어떨까”라고 조언할 수도 있다. 조언의 방향이 늘 일방적인 것은 문제지만 상호적일 수만 있다면 동료로 만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와 과정 속에서 지원을 주고받는 이들의 평등한 관계를 상상해 볼 수 있지만, 관리를 강조하는 ‘시설 안’에선 불가능한 꿈이다. 장애인 인권도, 사회복지노동자 권리도 함께 시설이라는 구조에서 잊혀져 왔다. 돌봄노동에 대한 낮은 사회적 평가도 한몫 거든다.

장애인 거주시설 로비와 복도에서는 활동을 전시하는 사진들이 종종 눈에 띈다. 거주인들의 소풍, 생일잔치, 명절 행사 등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거주시설 노동자들도 함께 서 있다. 중앙엔 주로 원장이나 대표가 자리한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로 사진이 전시되듯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사회복지노동자도 한쪽에 놓이는 현실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벨 훅스는 책 <올 어바웃 러브>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 소외와 분리에 저항한다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 타자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의지”라고 했다. 돌봄을 주고받으며 살았던 경험들도 이처럼 사진 속 상징과 같은 사랑과 희생이 아닌 방식으로 다시 쓰여질 수는 없을까? 반성과 갈등을 포함한 이야기들이 어쩌면 돌봄을 주고받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모두에게 성찰적인 지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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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 기자를 하던 10여년 전 나에게 일을 가르쳐준 사수가 있다. 편집주간이던 그분 밑에서 많은 일을 배웠다. 그를 얼마 전에 만났다. 몇 명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심리학 잡지를 곧 창간할 예정이라고 했다. 국내 유명 심리학 교수들로 편집위원회가 꾸려졌고 글을 쓰고 다듬을 박사급 진용도 갖춰져 있었다.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격월간으로 나오는 잡지는 심리학의 주요 이슈를 상당히 깊이 있게 다룰 예정이다. 특집의 메인 기사는 원고지 50장이 넘는다. 요즘 젊은층에서 유행으로 번지는 ‘자해’ 문화를 심리적으로 읽어내고 처방하는 것이 특집의 주제가 될 수 있겠다. 뇌과학 발전에 연동된 심리과학의 소개가 한쪽 진영을 이룬다면 실제 현장에서 이뤄지는 상담심리의 동향과 ‘How To’식의 정보 전달이 다른 한 진영을 이룬다. 상담심리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영역으로 자라고 있다. 요즘 학교마다 직장마다 전문 상담사가 속속 갖춰진다. 그만큼 현장의 수요가 폭발 중이다.

그날 모임에서 표지 디자인 시안을 함께 보면서 의견을 나누었다. 잡지 운영은 사회적 수요가 큰 만큼 잘될 가능성도 높지만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난관도 몇 가지 있는 듯했다. 잡지라는 것, 성공하기 그렇게 쉬운 아이템이 아니니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나에게도 상당한 자극 요소가 되었다. 꽤 심하게 공황장애를 겪었던 나는 출판사를 시작하며 심리학을 한 축으로 삼았었다. 미국에서 클리닉을 연 사이코테라피스트의 책을 두 권 연속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개인적 상황도 많이 좋아지고 사회적으로 심리에 대한 책이 쏟아져 나오는 데 압도돼 발을 빼고 말았다. 비슷한 사례의 무한 나열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수의 잡지 창간을 목전에 두고 보니 단행본 출판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갈래가 넓은, 정보가 많고 논의를 깊게 진행한 책들을 갖춰 나가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란 판단이다.

최근 들어 이해하기 힘든 잔혹한 폭력범죄가 하루 건너 하나씩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국내 뉴스에선 칼과 손발이 사용되고, 해외 뉴스에선 주로 총이 사용된다. 모두 납득하기 힘든 증오와 살인 충동에 따른 잔혹 범죄였다. 이에 대한 대중적 분노도 엄청났다. 애꿎은 법원까지 ‘심신미약’이라는 면죄부를 발행해주는 교단이 된 듯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이런 대중의 도덕적 분노 반대편에서는 공격적 범죄에 대한 학습과 전염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기성세대는 과거보다 먹고살 만해진 요즘 왜 사람들이 과도하게 고통스러워하고 심지어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지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여기엔 모든 건 상대적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인간은 현 시점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존재다. 현재에 만족할 수 없고 미래조차 나아질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면 그 ‘걱정’은 벌레가 되어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은 개인의 분노 게이지를 높이는 대표적 주범이다. 우리가 곧 펴낼 엘리자베스 워런의 <이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다>라는 책에는 월마트에 근무하는 지나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녀는 회사가 최대 이익을 달성했던 연도에 경영진이 근로자들의 최저임금을 올려준다고 하자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회사가 고작 시간당 21센트를 올리자, 그녀는 “누군가 내 얼굴에 침을 뱉은” 기분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경쟁 격화와 고용 불안, 저임금의 불평등을 견디다보면 ‘육체적 건강’까지 악화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심리적 문제가 육체적 징후로 드러나는 것이다.

문명의 결과인지 자연의 결과인지 모를 이 거대한 리스크를 우리 모두 개선해 나가야겠지만 또한 매일 매일 사건이 되어 나타나는 그 리스크를 누군가가 받아내야 한다면 거기서 심리학의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심리학은 자기 심리를 파악하고 수련하는 도구이자, 사회의 건강도와 위험 수위를 측정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는 종교 기능의 약화와 정비례 관계를 보이고 있다. 사회적 모순을 가리고 불평등한 삶을 받아들이게 해주는 종교적 신성함이 녹아 사라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느님과 부처님은 더 이상 현대인의 상처를 치료해주지 못한다. 아니, 치료는 해주지만 상처는 자주 재발한다. 현대인은 마치 잘 듣지 않는 항생제를 과다 투여하듯 광신의 레토릭으로 스스로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는 셀프 치료의 시대다. 심리학은 이런 셀프 치료 시대의 작은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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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들은 대체로 돈 계산이나 그런 걸 위한 서류 작성과는 참 거리가 먼 족속이다. 수년 전 어린이 문학 작가들이 내는 월간지 ‘어린이와 문학’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무려 2000만원의 지원금을 받은 적이 있었다. 첫해는 존경과 찬탄을 한 몸에 받는 능력자가 있어서 이게 ‘어린이와 문학’에 내린 하늘의 은총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다음 해 무슨 이유인가 우리 사회 평균 수준의 돈 계산 능력을 갖춘 능력자가 빠져나가자 졸지에 하늘의 은총이 재앙으로 돌변했다. 요구하는 은행거래와 서류와 영수증이 그렇게 많은지 그런 일에는 무지몽매하기 그지없는 글쟁이들이 1년 내내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글쟁이들은 절대 정부 지원은 받지 말고 차라리 주머니를 털어서 적자를 메꾸자는 결정을 거의 만장일치로 내리고 정부 복식부기 회계의 압제에서 해방된 기념으로 거하게 한잔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나 역시 무지몽매한 글쟁이 중 하나라 처음 세무서에서 사업자이고 복식부기로 장부를 만들어 종합소득세 신고를 해야 한다고 연락이 왔을 때 확인 전화를 여러번 했었다. 저 가게 같은 거 하는 사업자 아닌데 잘못 연락하신 거죠? 회사도 아니고 받는 건 책 인세밖에 없어서 무슨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같은 거 만들 거리가 애초에 없는데요? 골치 썩이기 싫어서 신고를 안 했더니 추징 세금 300만~400만원에 벌금 100만원이 나왔다. 이렇게 정부 지원금을 타먹는 일이 어렵고, 우리나라 세무서가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며칠 전 유아교육 전문가가 나한테 와서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사립유치원들은 복식부기로 회계처리를 하지 않고 단식부기로 회계처리를 할 수 있도록 법률에서 예외를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률개정을 해서 이 조항을 바꾸지 않으면 에듀파인 같은 국가 회계시스템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식부기는 말하자면 현금출납부만 작성하는 것이어서 그걸 가지고는 재무상태도 파악하기 어렵고, 회계부정을 찾아내기도 어렵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거지나 다름없는 글쟁이들에게서도 고문에 가까운 복식부기 회계 규정을 들이대 주머니 동전까지 꺼내가는 실력자들이 어떻게 적어도 매출 10억원은 되고 정부 지원도 1억원 내외는 받을 사립유치원에 현금출납부만 기록하면 되도록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거지? 이건 거의 부정을 저지를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해준 꼴인데? 이걸 가능하게 하려면 거의 무소불위의 신적 능력이 필요했을 텐데?     

사립유치원들이 회계감사와 국가 회계시스템 에듀파인 적용 방침에 반발하여 학부모들에게 폐원을 통보하는 일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진짜 폐원을 하는 것은 법령상 문제가 되지만 폐원을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것은 법령상 문제가 안된다고 연합회 간부가 총회에서 권장을 한 모양이다. 이렇게 유아와 학부모에게 겁주는 행위를 당당하게 하는 배후에는 유치원교육을 ‘교육수요자-교육공급자’ 모델로 보는 관점이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교육수요자가 있어서 교육공급자가 생긴 거고, 교육공급자는 원하는 수익이 생기지 않으면 수요자가 있어도 공급을 중단할 수 있는 건데 웬 간섭이냐는 투다. 이런 점에선 근래 20여년간 형성된 사회 교육적 흐름이 사립유치원 사태를 부추긴 측면이 없지 않다.

언제부턴가 학교교육을 이야기할 때 교육수요자와 교육공급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김영삼 정부 5·31 교육개혁 이후부터일 것이다. 물론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와 교육기관이 절대적 갑이었던 군사정권 시절에 비하면 학생·학부모의 학교 교육에서의 지위를 높이려 한다는 점에서 교육수요자-교육공급자 개념은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공교육의 주권자인 국민을 졸지에 공교육의 수요자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또 교육 주권자인 국민과 공적 봉사자인 국가기구 위에 이 모두를 규정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시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느낌을 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공교육을 교육수요자-교육공급자 모델로 보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원산지인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토론회에서 한 교육 전문가가 미국의 수월성 교육은 하버드, 스탠퍼드 같은 사립학교가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이사회가 있다고 해서 하버드, 스탠퍼드를 사립학교로 보면 안돼. 그 대학들은 그 출발에서 보면 카운티 주민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건립한 국공립학교야. 미국의 학교 대부분이 그래. 그래서 카운티의 경제 사정에 따라 교육환경의 차이가 크다는 문제점이 있어.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런 문제점을 알면서도 감수해. 왜냐하면 카운티의 주민들이 학교를 건립한 주권행위가 공교육의 중심을 지키는 가장 신성한 가치이기 때문이지. 이런 신성한 가치가 없다면 그건 공교육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지.”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회계를 투명하게 하는 등 기능적인 개선을 하는 게 아니라 지역주민을, 국민을 공교육을 건립한 주권자로서, 그 주권행위를 신성한 가치로서 교육의 중심에 세우는 것이다. 지역주민이, 국민이 을인 수요자로 인질이 되는 곳에는 어떠한 상상적 공동체도, 국가도, 공교육도 없는 것이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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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법률에 따르면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이란 정부가 자금을 대고,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다. 정부의 지원금은 출연연 전체 평균 예산의 40% 수준이다. 기관의 정상적 운영을 위해선 정부 사업이건 민간사업이건 가릴 것 없이 외부로부터 돈을 가져와야 하는 구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임, 책임 연구원 할 것 없이 연구원 모두가 외부 연구비 수주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핵심 연구인력이 본업인 연구에 집중하기보다는, 연구원 살림과 자기를 대신해 연구할 아바타의 인건비를 따러 다니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최근 언론을 통해 출연연 종사자들의 참여 과제 수가 도마에 올랐다. 연구과제중심제도가 빚어낸 앵벌이 현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핵심 어젠다를 수행해야 할 출연연은 마땅히 국가의 과학기술 청사진과 로드맵을 따라야 하나, 반드시 지켜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논문이나 특허를 쉽게 낼 수 있는 개인 취향 연구가 주가 되기도 한다. 이는 연구자와 연구기관 둘 다 성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업적 평가는 연구원 개개인의 성과급과 연결되어 연봉에 영향을 미친다. 기관평가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는 기관별 고유임무를 토대로 서로 다른 평가 기준을 약속했지만, 아직도 연구논문은 연구자 개인은 물론 기관평가 항목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장롱특허를 왈가왈부하는 건 사치다. 어떻게든 정량화된 성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가 와셋이니 오믹스니 하는 유사학회나 논문에 현혹되었던 건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든 이런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출연연 문제를 푸는 해법이 당사자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정부는 돈줄을 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출연연을 자신들의 하부조직 정도로 간주한다. 정부 스스로가 출연연의 고유임무를 자기 입맛에 맞게 요리한다. 경상비 예산은 늘지 않는데 청년실업 보완 정책으로 연구 인원을 늘리라는 정부의 요구가 들어온다. 한편으론 중소기업이 어려우니 모든 출연연이 중소기업과 손을 잡고 성과를 내라 한다. 출연연 고유의 비전과 임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정부 출연연이 독일의 프라운호퍼연구소처럼 중소기업 문제 해결형으로 갈 수는 없다. 생산기술연구원처럼 기업 밀착형 정부 출연연이 있는가 하면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이나 천문연구원 같은 기초를 다져야 하는 연구원도 있어야 한다. 정부 출연연은 대학이 할 수 없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해결해야 할 대형, 미래, 원천적 과제를 수행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러면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며, 연구원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힘을 모아야 할 연구원들이 실적과 평가와 연봉으로 분열되면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출연연 연구원들은 처벌에서만 공무원이지, 정작 공무원이 받는 혜택은 누리지 못한다고 불편해한다. 출연연 방만경영이니 하는 문제도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감사 선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의 발언처럼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통합 관리하는 방안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제 정부는 출연연이 그들의 고유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출연연 자신도 자정 노력과 더불어 국가와 사회를 위한 책무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다.

<엄치용 | 한국기초과학지원 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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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달,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이들을 독자 삼아 쓴 짧은 글들이 꽤 널리 퍼졌다. 현직 교수가 쓴 글들이었다. 잠재적 대학원 지원자들을 격려하거나 상찬하는 글이 아니었다. 그 서너 편의 글은 대학원 진학 결심을 재고하게 만든다. 대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며, 대학원 수학 기간은 결국 시간 낭비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고, 더구나 국내 대학원을 갈 이유는 없다고 냉랭하게 말한다. 굳은 결심 없이는 함부로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지 말라는 메시지에 은유와 반어법을 입힌 것이려니 하지만, 읽는 사람의 입은 쓰고 눈은 커진다.

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작년에 새로 ‘박사’가 된 사람은 1만4300명이다. 석사 취득자는 8만명이 넘는다. 어느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든, 이들이 학위를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 ‘나이롱’ 석·박사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하겠지만, 소수의 예외 때문에 다른 10만명의 노고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동시에, 그 괴로운 시간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갑자기 큰돈을 벌거나 존경을 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매년 이 모습을 보며 느끼는 안타까움이 커지다보면 대학원 진학을 말리게 되는 것이리라.

대학원은 왜 존재하며 누가 다니는가? 많은 사람들이 대학원에 대해 잘 모르고 이야기하곤 한다. 어찌 다 알겠는가. 심지어 (나를 포함한) 교수들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대학원 생활의 전형적인 풍경은 전공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대학의 역사나 문화에 따라서도 크게 다르고, 당연히 옛날과도 다르다. 교수가 담배 심부름 시키는 시대도 아니고, 푼돈 받으며 열정페이 노동과 감정노동을 강요받는 대학원생 사례도 거의 없어졌다(고 믿는다). 모든 석·박사 졸업생이 교직, 연구직으로 진출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연구자 지망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공과 학교, 시기를 불문하고 똑같이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직장인 재교육을 목표로 설립된 특수대학원이나 의학·법학 전문대학원 등을 예외로 한다면, 대학원은 ‘학자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졸업 후 무엇을 하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고 능력이지만, 최소한 대학원에 있는 몇 년 동안은 학자가 되기 위한 트레이닝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박사는 물론 석사과정에도 이 말은 적용된다.

그렇다면 ‘학자’란 무엇이냐는 질문이 이어져야 마땅하지만, 그저 학자가 직업을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라는 정도로 넘어가자. 대학원이 배출한 학자는 전공과 무관한 취업을 할 수도 있고 자기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물론 교수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한 독립 연구자가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학자’가 되기 위해 받았던 훈련이 어떤 방식으로든, 크건 작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그 사람이 선택한 일을 해나가는 데에 기여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안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고, 면밀하게 분석·비판하고, 총체적으로 통찰하고, 끊임없이 자기 성찰하는 학자의 자세는 교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구 수가 줄어들고 문 닫는 대학도 늘어나니 대학 안에서 자리를 잡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안타깝지만 명확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대학원을 가지 말라고 말한다면 대학원 교육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는지. 공부를 더 하고 싶다거나 새로운 분야를 연구하고 싶다거나 ‘학자’가 되고 싶은 이들이 대학원에 가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수’가 되고 싶어 대학원에 가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말려야 하지만 말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전문대학원을 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러니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이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내가 과연 교수가 될 수 있을까’가 아니다. 가려는 대학원이 친구들과의 독서동아리보다 과연 무엇이 나은지 물어야 한다. 다른 금전적, 사회적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진학할 만큼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직업이나 학위 ‘증’이 일차적 목표라면 진학하지 않는 편이 낫고, 정말 실용적 지식을 원한다면 기업의 사내교육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매년 배출되는 석·박사 수가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비판은 유효하다. 많은 대학원들이 부실하게 운영된다는 평가도 반박하기 어렵다. 반대로, 우리나라 교육 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연구자를 양성하기 어렵다는 교수들의 불만에도 동의한다. 역설적이지만,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이들의 냉정함이 ‘대학원의 위기’를 극복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 대학원을 교수 직업 훈련소로 간주하는 이들은 차가운 현실을 인식해서 진학을 포기해야 하고, 진짜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원 대신 동네 백화점 교양강좌를 선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취업도 못 시키고 ‘학자’ 양성에도 소홀한 대학원들은 자연스레 도태될 수 있도록.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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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오는 22일 민주노총이 불참한 채로 닻을 올린다. 경사노위는 4일 민주노총이 빠진 상태에서라도 경사노위를 출범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경사노위는 노사정위원회법이 개정된 지난 6월 이후 노사정 대표자회의 주체들이 모두 참여해 출범을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경사노위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첫발을 떼게 됐다. 대화를 통한 사회개혁을 바라는 국민들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사노위는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 대표가 고용노동을 비롯한 경제·사회정책 등을 협의하기 위해 마련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이다. 이해당사자들의 갈등이 충돌하기에 앞서 협의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자는 대화기구이다. 그러나 노동계의 핵심 축인 민주노총이 참여를 거부하면서 경사노위는 완전체 출발을 하지 못하게 됐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사회적 대화에 적극 나서야 할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내부 강경파들을 설득하지 못하면서 지도력에 한계를 보였다. 민주노총은 경사노위 출범 결정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뒤늦게 문제제기를 하기보다 참여하는 게 백번 옳다.

민주노총이 노동자의 복지증진과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는 매우 크다. 박근혜 정권 때 촛불혁명을 이끌면서 정치·경제 개혁의 선도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노동자 문제뿐 아니라 성소수자, 청년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도 대변해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새로 가입한 노동자가 10만명이라니 사회적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나 덩치에 걸맞은 책임 의식은 되레 후퇴한 듯하다. 민주노총은 서울교통공사 등 공공기관의 고용세습 의혹에 산하 조합원들이 연루됐다는 비판에는 함구하고 있다. 반면 노사 상생모델로 주목받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구상에도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금강산 남북 민화협 공동행사 참여가 불발되자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집단이기주의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민주노총은 경사노위 출범 전날인 오는 21일 사회적 총파업을 하겠다고 결의한 바 있다. 비정규직 철폐와 적폐청산, 재벌개혁 등을 정부에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일자리 감소와 경기침체로 나라 전체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이런 요구를 내건 민주노총의 파업에 공감하는 시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민주노총이 일부 노동자의 이익단체로 전락하거나 정치세력화만 추구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민주노총은 진정 노동자 복지증진과 사회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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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직원들을 상대로 벌인 만행에 공분이 쏟아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그 말고도 무수한 ‘양진호들’이 버티고 있다. ‘직장갑질119’가 4일 공개한 제보들을 보면 폭행, 준폭행, 악질폭언, 황당한 잡무지시 등 ‘양진호 갑질’이 횡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주유소 경영자는 직원에게 밥을 짓도록 하고 텃밭에서 막노동을 시키는가 하면 휴일에 출근시킨 뒤 3분 늦었다고 폭언을 했다고 한다. 직장 상사가 커터나 소주병으로 위협하거나, 부하 직원의 옷에서 생리대를 꺼내 흔들며 모욕을 주는가 하면 목을 조르는 신체적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대한민국 일터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출처:경향신문DB

직장 내 갑질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고질화된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와 위계질서가 큰 원인일 것이다. 피해를 입더라도 저항이나 폭로를 금기시하는 내부 분위기를 거스르기 어려운 것도 있다. 그러나 갑질을 하더라도 처벌받지 않는 현행 법제도의 미비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투척’ 사건도 결국 무혐의로 종결됐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사용자의 폭언이나 엽기 갑질은 처벌할 수 없다. 피해자가 입원 치료를 받더라도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쉽지 않다. 폭언과 모욕을 못 견디고 그만둘 경우 자발적 퇴사로 분류돼 실업급여도 받을 수 없다. 억울하고 분해도 상사의 갑질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조현민 물컵 갑질’ 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인 근로기준법·산업안전보건법 등 개정안이 발의돼 지난 9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일부 의원이 제동을 걸면서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가 모호해 사업장에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반대 이유라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 노동법이나 캐나다 퀘벡주의 노동기준법 등 외국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이번 법개정안의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더구나 프랑스 노동법과 달리 이번 개정안은 가해자에 대한 벌칙이나 과태료 규정조차 없는데도 처리되지 않고 있다.

갑질사건이 드러날 때마다 여론이 들끓지만 그때뿐이다. 그저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직장 내 괴롭힘을 명확히 규정하고, 대응을 제도화하지 않는 한 ‘양진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대체 언제까지 봉건적 ‘일터 야만’이 횡행하도록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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