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에는 대형 문학행사가 둘이나 잇따라 펼쳐지고 있다. 하나는 작고 50주기를 맞은 시인 김수영의 삶을 회상하고 그의 문학을 다시 들여다보는 행사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베트남·몽골·팔레스타인 등 10개국의 문인과 한국 문인들이 참가하는 ‘제2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11월6~9일)이다. 나는 두 행사에 조금씩 관여가 되어 있는 데다, 지난 10월19일에는 충남 부여에서 진행된 신동엽문학제에서도 특별강연이라는 걸 했다. 그러다 보니 이 행사들 전체를 꿰뚫는 주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고, 특히 내 경우 젊은 날 김수영·신동엽 두 시인과 짧지만 날카롭게 맺어졌던 인연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알다시피 김수영 시인은 6·25전쟁 때 부득이하게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포로수용소를 거쳐 석방되었다. 이런 끔찍한 경험에다 유난히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으니 김수영에게 1950년대의 냉전반공체제는 숨막히는 질곡이자 견디기 힘든 억압이었다. 따라서 우리 나이 마흔에 맞이한 4·19혁명은 당연히 그에게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자신의 억눌린 인격에 주어진 해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무렵 그의 시들이 모두 혁명의 추이에 관련되어 있지만, 산문 중에서도 ‘책형대에 걸린 시’(경향신문 1960년 5월20일자) 같은 글은 김수영의 생애에서 4·19가 결정적 분기점이었음을 실감 있게 증언한다. 이로부터 작고하기까지 7, 8년 동안 그의 시적 사유와 창작활동은 우리 문학사상 유례없이 치열한 심화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문학행사들은 그가 이룩한 미학적·사상적·인간적 성취를 분석하고 그것을 변화된 현실 속에서 계승하려는 후배들의 새로운 모색이라 평가하고 싶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김수영보다 아홉 살 아래인 신동엽에게도 분단과 전쟁의 시련은 비켜 가지 않았다. 다니던 사범학교에서는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을 당했고 전쟁이 나자 악명 높은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병든 몸으로 귀향하다 배가 고파 생으로 잡아먹은 민물게 때문에 간디스토마에 걸려 결국 요절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병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겪은 고난의 아픔 너머를 상상했고 그것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했다. 명작 ‘껍데기는 가라’는 50여년 세월을 건너뛰어 이제 남과 북의 온 겨레가 함께 애송할 날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신동엽 시의 진가를 공식석상에서 맨 처음 인정한 사람은 김수영이었다. 월평 같은 글에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신동엽을 거론했고 평론 ‘참여시의 정리’에서는 “소위 참여파의 다른 어떤 시인보다도 확고부동한” 업적을 내놓는 시인으로서 신동엽의 작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내게는 두 분의 관계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도 있다. 계간 ‘창작과비평’은 창간 3년째 되던 1968년 봄호부터 시를 게재하기 시작했는데, 김수영이 잡지의 자문에 응해 추천한 시인은 원로로서 김현승·김광섭과 신진으로서 신동엽이었다. 나는 그 무렵부터 주간인 백낙청 교수의 요청으로 편집을 거들게 되었다. 1968년 봄 창덕궁 돈화문 건너편 2층 다방에서 백 교수와 함께 신동엽의 신작시 5편을 건네받던 일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중의 한 편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은 올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진 문재인·김정은 두 정상의 세 차례 회담을 예견하고 쓴 듯이 생생하다. 말을 꺼낸 김에 한두 대목 읽어보자.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제1~3연)

“꽃 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히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제7연)

술을 마시고 잔 어젯밤의 꿈,이라고 둘러댄 것은 그 시절 군사정권의 검열을 의식한 한갓 둔사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시의 형식으로 위장한 중립화통일론으로만 보는 것은 편협한 도식주의에 가깝다. 물론 신동엽의 문학에 정치적 이상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50년 전 놋쇠하늘 밑에서 시인들이 갈망해 마지 않던 표현의 자유는 민주화 이후 시대인 오늘날에도 국가보안법의 통제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동엽이 꾸었던 꿈이 이제 실제상황 속에서 불가능의 철조망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며칠 전 판문점 비무장화 합의에 따라 남과 북의 경비병력이 철수한 것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지난 9월19일 능라도 5·1경기장에서 15만 평양 시민을 앞에 두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 연설의 다음 대목을 떠올리면 시인이야말로 바로 시대의 예언자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오늘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와 무력충돌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합의했습니다. 또한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칼럼이 신문에 나가는 오늘부터 나흘간 광주에서 열리는 아시아문학페스티벌을 각별한 눈으로 보게 된다. 페스티벌 참가 작가들의 소속국가는 대부분 한국과 험악한 수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식민지, 전쟁, 분열, 독재, 가난은 우리만 겪은 고통이 아니었다. 어떤 나라, 어떤 지역에서는 제국주의 강대국의 침략과 수탈이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다. 그 제국주의의 타도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 없는 세상’을 가져오기 위해서, 모든 부문에서의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실현을 위한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 아시아의 작가들이 입을 열기로 한 것이다. 이번 문학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 행사가 단지 문학인끼리만 즐기는 지역축제가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를 향한 새로운 문명전환의 호소임을 깨닫게 한다.

“아직도 세계문학은 구미 중심이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은 옳지 않다. 아시아 문학인들끼리는 모이는 것이 의미가 큰 이유다.”

<염무웅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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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5일 나렌드라 모디 총리 예방에 이어 6일 아요디아에서 개최되는 ‘허왕후(許王后) 기념공원’ 착공식에 참석한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김 여사를 수행하고 있다. 일개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주제로 벌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일에 일국의 대통령 부인과 장관이 국가를 대표한 외교사절로 참가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초청으로 인도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5일 오후(현지시간) 뉴델리 총리 관저에서 모디 총리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가락(일명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허왕후가 됐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기이’란 말 그대로 기이한 설화이다. 우선 허황옥이 142세에 사망했다는 것부터 실재성이 없다. 아유타국 공주라고 하는데 아유타국은 인도의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허왕후 기념공원이 만들어지는 ‘아요디아(Ayodhya)’는 네팔에 인접한 인도 북부의 인구 6만명인 소도시이다. 이곳 사람들이 일부 한국인의 아요디아설을 근거로 한국과의 친선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한국의 고사에 나오는 허황옥의 모태가 자기 지역이라고 주장하면서 기념공원까지 만들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설화 속의 허황옥은 오늘날 한국·인도의 역사적인 유대의 상징처럼 되었다.

국내 학자들은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이 <삼국유사> ‘기이’편에 가락국기를 쓸 때 시조 김수로왕의 출생과 성장에 불교적인 설화를 가탁(假託)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연 스님은 ‘기이’편에 “수로가 알에서 깨어나 10여일 만(踰十餘晨昏)에 키가 9척 크기로 자라서 같은 달 보름에 왕위에 올라 가락국 시조가 됐다”고 신비롭게 묘사하였다. 6세의 김수로가 아유타국에서 3개월 동안 배를 타고 온 16세의 여자와 결혼한다는 내용도 현실성이 희박하다. 일부는 아유타국을 인도의 아요디아라고 주장하는데 아요디아라는 지명도 여러 곳에 있다고 한다. 또 설사 인도 북부의 아요디아가 아유타국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기원 48년에 네팔 접경에 가까운 인도의 최북단에서 한반도의 최남단인 김해까지 배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여정이다.

일개 가탁된 설화를 갖고 국가 간의 혈연관계를 주장하고 일국의 수장이 이를 역사적 사실로 긍정하고 지지하여 외국의 정체불명 행사에 대통령 부인이 정부의 장관을 대동하고 참석하는 것은 신중치 못한 행동이다. ‘허황옥 도래설’은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 김씨들이 긍정적으로 믿고 있다. 근세에도 일부 정치인들이 호사하고 있다. 김해 김씨 중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후예라고 자처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가 원수 신분으로 김수로왕과 허왕후 제전에 참배하였고, 김종필씨는 현직 국무총리 신분으로 김수로왕과 허왕후 제전에 제관으로 참배하였다. 국가 수장 신분으로 제복을 갖추고 씨족의 문중제사에 참배한 사실은 다시금 되새겨 볼 일이다.

일부가 김수로왕 설화를 실제 있었던 일처럼 주장하는 것을 가지고 국가가 나서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면 마땅히 같은 <삼국유사> ‘기이’편에 나오는 단군왕검도 국가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여 지난 10월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의 단군릉에 가서 참배했어야 하지 않는가? 학문적 합의 없이 몇 사람의 가설을 가지고 국가의 원수가 나서서 노골적으로 국가적인 외교행사로 비화하는 것은 엄연한 역사의 왜곡이다.

<이형구 | 동양고고학연구소장·전 선문대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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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도모할 때, 그 일의 가치와 명분이 우선 중요하지만, 과연 그 일을 실현해 낼 수 있는 현실적 역량이 충분한가, 이 점 또한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지난 10여년 동안 아쉬웠던 것은, 한국 스포츠문화의 전반적인 개혁, 특히 학교 체육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여러 모임이나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정작 책임 있는 당국의 핵심에서는 이에 관하여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그나마 어떤 사건에 의하여 그들로서도 불가피하게 참석하게 될 때조차 대단히 방어적이었다. 나름의 노력과 시간들은 또 하나의 ‘잃어버린 10년’이 되고 말았다. 이른바 ‘국위선양’의 깃발만이 펄럭이는 분위기 속에서 스포츠문화의 폐습들은 더 많이 생산되고 확산되어 어느덧 어디서부터 누가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적폐’가 되고 말았다.

그랬는데, 이제는 조금 기대를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범위를 학교 체육 정상화로 좁혀 보면, 적폐에 따른 비극적 사건들과 파탄의 양상들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잠시 검색해보니 최근까지도 현장 지도자들의 폭행 및 성폭력은 지속되고 있다. 체육교과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상태고 그런 대로 유지되는 교과의 실제 내용, 그러니까 체육이 무엇이며 몸이 무엇이며 건강한 신체 활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20세기의 개발주의식 신체관이 지배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런 상황에서 최근 ‘학교체육진흥회’가 출범했다. 지난 10월26일 창립 총회를 가졌으며 연말까지 조직 구성을 완료해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 면면이 중요하다. 창립 총회에는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안민석 국회 문체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의 관심과 영향력 아래에 교육부 추천 2명, 시·도교육청 추천 3명, 문체부(대한체육회 포함) 추천 3명, 외부 2명 등의 실무적 이사진이 구성된다.

위 언급한 인사들은 그간 한국의 스포츠, 좁게는 학교의 체육문화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보여왔다. 엘리트 체육 위주의 성적 지상주의가 아니라 보다 많은 학생들의, 보다 다양한 관점의, 보다 일상화된 건강한 체육 문화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유은혜 장관은 “학생·학부모·학교 관계자들의 다양한 요구 충족을 통해 참여 학생들의 교육적 경험을 확대하는 등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정권에서 ‘참 나쁜 사람’으로 찍혀 고초를 겪었던 노태강 차관은 체육국장 시절부터 학교 체육의 ‘정상화’에 관심이 많았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부터 ‘국위선양’ 일변도의 체육정책에 이의를 제기했던 안민석 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를 대표하는 조희연 교육감 역시 억압과 통제에 따른 훈육적 신체관 대신 자율적이고 다양한 신체의 자유와 문화를 강조해온 학자였다. 조 교육감의 저서 <동원된 근대화>는 사회통제로서의 반공 규율과 개발주의 담론으로서 국가주의적 동원체제가 어떻게 한국 사회의 집합적 심성을 구성했는지를 밝힌 책이다. 조 교육감은 ‘학교체육진흥회’를 최고 수준에서 책임질 이사장으로 추대된다고 한다.

간략히 살폈듯이, 당장은 학교 교육 문제지만 장차는 한국 사회의 가까운 미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의제가 되는 ‘학교 체육 정상화’에 있어 이른바 ‘책임 있는 당국자’들의 면면은 지난 ‘잃어버린 10년’과는 확연히 다르다. 단순히 ‘스포츠를 사랑하는’ 개인적 관심이 아니라 장관, 국회의원, 교육감 등의 무게로 참여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 또한 정책적으로 막중하며 역사적으로 중대하다.

여기에 결정적인 인사는 대한체육회다. 진흥회의 구조라는 면에서는 문체부 옆에 의자 하나를 더 놓는 정도지만, 대한체육회는 다른 모든 기구의 책임과 역할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무겁다. 우리 스포츠의 일상 문화가 전근대적이고 학교 체육 또한 붕괴되기 일보 직전인 작금의 사태에 있어 대한체육회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거꾸로 얘기하면 대한체육회가 어떤 가치와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의해 오랜 ‘적폐’가 하나둘씩 해결될 수도 있다.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은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날 무렵 어느 인터뷰에서 “소수 정예를 키워서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이제 우선 학교 체육이 정상화돼야 한다. 그래야 저변이 확충되고 아이들도 스포츠를 통해 민주시민으로 양성된다”고 말했다. 이제 그 말의 긍정적인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비영리법인이라는 조직의 성격상, ‘학교체육진흥회’가 수많은 이해관계가 뒤엉켜 있어 그야말로 ‘고르디아스의 매듭’이 되고 만 지금의 (학교) 스포츠 현실을 일시에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관심’과 ‘영향력’을 언급했다. 위의 인사들 모두 학교 체육 정상화에 오랫동안 ‘관심’을 표명해왔고 이제는 그것을 실천할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조직의 입장에 따라 약간의 이견과 불가피한 조절이 있을 수는 있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한국 사회의 다른 뜨거운 의제들과 같이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충돌할 정도는 아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현재의 인적 구성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말 참담한 현실이 아니고 무엇인가.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문재인 대통령도 “학교 체육이 제대로 서야 우리 학생들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고 강조하면서 “운동부 중심의 학교 체육을 전면 개편하고 일반 학생들의 학교 체육 활동을 강화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에서 실무 장관과 국회의원, 체육회장, 각 시·도 교육감까지 의견 일치가 되기도 드문 일이다. 학교 체육을 정상화해 우리의 미래를 실질적으로 건강하게 경쾌하게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게다가 ‘국론 분열’도 없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역사적 과제 아닌가.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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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을 하려는데, 오디세이학교 학생 몇몇이 출판사에 남아 있다. 일본 대안학교 탐방을 준비하는 팀이다. 필수수업은 빠지면서 자기들 하고픈 일은 저렇게 열심이라고 길잡이 교사가 웃으며 눈을 흘긴다. 때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은 중요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누가 어째서 이것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았단 말인가.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이 질문들은 주체적인 판단, 선택과 책임을 연습하는 과정이다.

오디세이학교는 민들레출판사에서 파생된 대안학교 ‘공간민들레’가 협력하고 있는 서울시교육청의 정책이다. 고1 학생들이 1년 동안 지정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후 원래 학교로 돌아가면 학력이 인정되어 2학년으로 진급한다. 4년 전 고교자유학년제로 시작해 지금은 각종학교로 분류된 오디세이학교는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다른 시·도교육청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오디세이학교를 다니면서 뭐가 제일 좋은지를 묻자 한 학생이 답했다. “제 생각이 뭐냐고 묻는 거요.” 여행이나 프로젝트수업 등 공교육에서 접해보지 못한 특정 교육과정을 손꼽을 거라는 예상을 빗나가는 답이었다. 그동안의 학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고. “왜”냐고 묻는 행위는 대드는 것, 버릇없는 것, 되바라진 것, 당돌한 것으로 취급되어 질문을 거세당하는 경험만 하다 이곳에서 들은 “넌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은 신선했다. 존중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고도 했다.

오디세이학교에서 제일 힘든 점은 무엇이었는지 묻자 학생은 같은 답을 내놓았다. “제 생각이 뭐냐고 묻는 거요” 어떤 사안에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덧붙여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피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고. 슬쩍 친구들 사이에 묻혀서 잘 수도 있고, 멍하니 딴 생각하며 앉아 있기만 해도 되는 공교육 교실이 그립기도 했단다.

“그냥, 뭐 하라고 정해주면 안돼요?” 많은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대안학교 학생들이 종종 하는 말이다. 사뭇 복에 겨운 투정이라고도 할 수도 있지만 그 심정도 이해가 가는 것이, 주체적 삶은 피곤하다. 선택에는 적극적 의지가 필요하며, 반드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1년의 오디세이학교를 마친 후 대부분의 학생들은 원래 학교로 돌아간다. 두 주먹 불끈 쥔 투사가 되기도 하고, 무기력한 친구들을 리드하는 적극적인 학생이 되기도 한다. 더러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학교 밖에도 다른 길이 있다는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수업보다는 생활로 접근하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들이다. 살아 있는 학교가 되려면 삶이 스며들어야 한다. 삶이란 먹고 자고 놀고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것의 다른 말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오디세이학교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그 시도는 가능하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고 선택의 권리를 아이들에게로 돌려주면 된다.

12년의 학제 틈에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정책적으로 이런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삶의 전환과 탐색’을 사회적으로 허용하고 응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생은 숱한 갈림길 위에 선다. 잘 알지 못하는 길을 선택하는 일은 늘 두렵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선택의 여지없는 인생’은 단조롭고 불행하다는 사실이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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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3일. 학생의날을 맞이하여 교사들의 교내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해결 및 예방책 마련을 촉구하는 ‘스쿨미투’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고 외쳤다.

2015년 이후 대중 페미니즘 운동은 대체로 익명의 청년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자 운동의 형태였다. 얼굴과 이름을 내놓고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현했을 때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와 2차 가해, 무고죄 고발, 그리고 조리돌림이었으므로 이는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미투에 이르러 여성들은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내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스쿨미투도 마찬가지다. 교사의 권력형 성폭력을 고발한 이후에 학생들은 진학과 취업 등을 빌미로 2차 가해를 당해왔다. 그들의 싸움은 이런 현실적 위협을 감수하고 있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페미니즘을 그저 ‘배부른 투정’이라고 생각하는 기성세대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지금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을 그저 낯선 존재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전국청소년행동연대 ‘날다’ 등이 주최한 ‘스쿨미투’ 집회에 참가한 학생과 시민들이 교육 당국의 책임있는 자세와 대책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역의 한 진보단체에 강의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강의가 끝나고 한 여성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중학생 딸이 최근 혜화역에서 열렸던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딸의 정치적 행동을 존중하는 어머니로서 그 서울행을 막지는 않았지만, 시위 다음날부터 그분이 즐겨듣는 한 뉴스 방송이 혜화역 시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걱정은 심해졌다.

디지털 성범죄 편파수사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집회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그 방송은 3차 시위 직후 3일 연속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에서 혜화역 시위에 대해 언급했다. “문재인 재기해”라는 구호를 비롯하여 진행자 자신이 워마드 사이트에서 관찰한 몇 가지 정황을 바탕으로 극우 단체가 혜화역 시위에 개입되어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토로했던 것이다.

깜짝 놀란 그분은 딸에게 방송을 들어보라고 권했지만, 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모녀 사이의 갈등이 심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던 와중에 우연히 페미니즘 강의를 듣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분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강의를 들어보니 딸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갑질 폭력의 최고치를 갱신하면서 연일 충격을 주고 있는 한국미래기술의 양진호 회장은 디지털 성범죄와 전쟁을 벌여온 청년 여성들이 끊임없이 지적했던 웹하드 카르텔의 중심에 있는 자였다. 그는 웹하드 ‘위디스크’와 ‘파일노리’의 실소유주로 ‘몰카 헤비 업로더’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여 돈을 벌었고, 디지털 장의업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물을 올려서 돈을 벌고, 지워주면서 또 돈을 벌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번 돈이 1000억원이다. 갑질을 할 수 있는 위력은 그렇게 번 돈으로부터 나왔다.

지난 7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이 내용을 방송한 후에도 한국사회는 침묵했다. 찍은 사람, 올린 사람, 받아본 사람, 그렇게 번 돈을 나눠 먹은 사람, 모두가 공범이기 때문일 터다. 지금 여당에서도 ‘갑질 폭력’만 언급할 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물로 벌어들인 돈이 도대체 어디까지 흘러들어간 것일까?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단 폭력과 차별에 맞서 싸우고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 말하는 청년 여성들에 대해 기성세대는 너무 쉽게 겁을 먹는다. 어쩌면 그들이 적폐청산의 핵심을 찌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양진호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성적폐야말로 한국사회 적폐의 설정값이다. 디지털 성범죄는 그대로 두면서 갑질만 해결할 수는 없다. 그 갑질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로부터, 그렇게 여성의 존엄을 가볍게 여겨온 문화로부터 가능해지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겁을 먹어야 할 것은 청년 여성들의 날것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들의 성적폐 카르텔을 가려온 그들의 세련된 언어일지도 모르겠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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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놔도 돌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겹고 힘들고 까마득한 군생활이지만 견디다 보면 끝날 때가 오긴 꼭 온다는 위로이자 다짐이죠. 옛날 괘종시계는 추가 진자운동 해야 태엽 풀리며 작동된다지만, 아무리 시계 거꾸로 매단들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지납니다. 또한 소속 집단이나 인터넷 게시판 등에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과 비난들이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 아니라고 핏대 세워봤자 되레 반동(反動)으로 트집거리만 되니 마주서지 말고 비껴서야 할 때도 있겠지요.

살다보면 너나없이 한두 번은 참기 힘든 시기를 겪습니다. 그때 간혹 어떤 이들은 도저히 못 견뎌 귀 막고 틀어박히거나, 살아 뭐하나 싶은 자포자기에 목숨까지 버리려 듭니다. 하지만 힘들고 사나운 시절도 시간 지나면 수그러들고, 무성한 입방아도 그러라 놔두면 제풀에 사그라집니다. 속담에서는 이를 스쳐가는 바람에 빗대 ‘바람이 불다 불다 그친다’고 하지요.

바람은 머무르지 않습니다. 폭풍이 잦아들고 태풍이 소멸하듯, 가만가만 참다보면 ‘그런 때가 있었지’ 돌아보는 어느 한때로 지나 있습니다. 지금이 힘겹다면 종잇장 꺼내 무엇 때문에 이토록 곤비한지 한번 낱낱이 적어보십시오. 머릿속에선 온갖 미친바람이 휭휭 회오리쳐도, 막상 적어 놓은 걸 내려다보면 돌개바람 하나에 나머지는 먼지바람 건들바람 소슬바람들이기도 할 겁니다. 비바람 맞서 우산 붙들고 악전고투하다가 ‘케세라세라’로 시원하게 젖어버리는 것이 외려 해방감을 줄지도 모릅니다. 어디서 누가 내 욕 하나 귀 한번 후비적해버리고요. 어찌어찌 하다보니 한 해가 지나고 별거 아니었습니다. 풍문과 풍파도 시간의 바람결에 흐리마리 흩어집니다. 힘겨운 오늘을 무심한 노래로 흘려버립시다.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렇게, 이 또한 지나가리니.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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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권력자 대통령의 비서실장 위상은 여전히 유별하다. 낡은 비유를 빌리면, ‘권부의 꽃’이기도 하고 ‘행정부의 최악의 직책’이기도 하다. 시대와 정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불변의 롤 모델이 서기도 어렵다. 이후락, 김정렴, 노재봉, 박관용, 한승수, 김중권, 박지원, 문희상, 문재인, 임태희 등. 40여명의 역대 비서실장 중 ‘비서실장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한 인물은 누구일까. 한국행정연구원이 2013년 가을 대통령 비서실 연구의 일환으로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심층조사를 실시했다. 내로라하는 인사들을 제치고 노무현 대통령의 문재인 비서실장이 맨 윗줄에 올랐다. ‘위임 권한을 적절히 수행하며 권력비리와 멀었던 점’ ‘충성심’ ‘직언’ 등이 이유로 지목됐으나, 최다 의견은 ‘시민사회 등과 원활한 소통을 통해 여론을 수렴하며 대통령에게 잘 전달하고, 대통령의 의중을 각 부처 및 비서실에 정직하게 전달’에 두어졌다. 다음 순위의 박지원 비서실장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한승수는 ‘전문성과 정책적 역량’, 이후락은 ‘충성심과 강한 리더십’, 최장수 비서실장 김정렴은 ‘대통령 국정철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지목됐다. ‘문재인 비서실장’의 차별점이 확연하다.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10월 17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육군 5사단 비무장지대 GP초소 앞에서 군 관계자로부터 브리핑을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묵은 비서실장 연구를 꺼낸 것은 어느 유형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참으로 낯선 임종석 비서실장의 행보 때문이다. 임 실장이 대통령 유럽 순방 기간 중 정부의 외교·안보 참모들을 대동하고 DMZ를 시찰한 광경은 강렬하다 못해 자극적이다. 국가 의전서열이 더 높은 국정원장, 국방부 장관과 통일부 장관 등을 거느리고 “군을 격려하기 위한 방문”을 실시했다. 임 실장의 내레이션을 입힌 DMZ 방문 영상은 청와대 홈페이지 첫 장을 장식했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비서실장의 동선이다. ‘그림자 보좌’의 역할과 당위에 익숙한 시선으로 보면 ‘임종석 비서실장’은 분명 특별하다. DMZ 시찰도 ‘자기 정치’라기보다는 위임된 권한을 창의적으로 수행한 결과다. 그만큼 통일, 외교, 안보, 행정, 대국회 등 전방면에서 직접 ‘무대’에 올라 활약하는 대통령 비서실장은 없었다. 특히 남북 문제에서는 대통령 다음의 ‘주인공’이다. 판문점 회담 당시 수행단의 맨 앞에 선 비서실장, 북한 김여정 특사단의 환송만찬을 직접 주재하는 비서실장이 상징하는 바다. 권력의 지표라 할 ‘인사’에서도 임 실장의 비중은 강력하다.

‘힘 센’ 비서실장은 여론시장에 곧바로 투영된다. ‘시사저널’이 매년 전문가조사를 통해 발표하는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체 영향력 조사에서 임 실장은 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다음으로 3위에 올랐다. 1989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대통령비서실장으로는 최고 순위다. ‘기춘대원군’ 김기춘 비서실장(2014년 6위)도, ‘소통령’으로 불린 박지원 비서실장(2002년 7위)도 못 올라간 위치다. 비서실장이 총리와 여야 대표, 국회의장보다 ‘한국을 움직이는’ 인사에 꼽혔다. 이게 임 실장의 권력 위상일 터이다.

물론 비서실장의 힘은 결국 대통령이 정한다. ‘임종석 비서실장’의 힘은 문 대통령의 신뢰와 권한 위임에서 나올 터이다. 경계는 위임받은 권한을 넘어 스스로 권력화하는 단계이다. 점점 커지는 야당의 공세와 여권 내 견제 기류는, 한편으로 권력화하는 비서실장의 징후가 움트기 때문일지 모른다. 과거 정부에서 대통령이, 총리가, 장관이 하던 것을 비서실장이 직접 하게 될 경우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미래권력 반열에 오르고, 막강 권한을 위임받았다 하더라도 비서실장에서 ‘비서’를 떼낼 수는 없다. 시민사회 등과 소통을 통해 여론을 ‘제대로’ 수렴하며 대통령에게 ‘잘’ 전달하고 대통령의 의중을 각 부처 및 비서실에 ‘정직하게’ 전달하는 것, 여전히 비서실장 최고 덕목이다.

(문재인처럼) 유연하고 온화한 리더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을 보완할 (임종석처럼) 실력과 정무감각, 열정으로 뭉친 람 이매뉴얼을 초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당시 ‘뉴스위크’가 백악관 비서실장을 두 차례 역임한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에게 신임 비서실장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행정부에서 최악의 직책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두 번째로 막강한 인물일지 모르지만 참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말도 들려줬다. ‘당신은 몸 앞과 뒤에 큰 표적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 누구도 당신을 선출하지 않았으며 당신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사람들은 원치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야권은 물론 슬슬 여권에서도 표적이 되고 있는 ‘임종석’을 ‘당신’ 자리에 놓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숙명을 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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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절에서는 마주치는 이도 있지만 앞서가는 이의 뒷모습이 주로 눈에 들어온다. 마음을 내려놓으려는지 어깨도 유난히 처져 보인다. 멀리 우뚝한 일주문 근처에서는 사람들이 지하로 푹푹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다.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행사에 참석하러 경주 가는 길. 김천의 직지사 사하촌에서 산채정식으로 점심을 때웠다. 교실을 벗어난 이후 처음 보는 친구들과도 어울려 경내를 잠깐 거닐었다. 탑으로 가는 눈길을 빼앗아가는 단풍잎들. 아아, 벌써 40년이라니! 희끗희끗 영감으로 넘어가는 후줄근한 모습들이었지만 이름을 대면 졸업앨범에서의 앳된 얼굴들이 그냥 훅, 튀어나왔다. 흥건한 기분으로 신라의 달밤을 떠들썩하게 건넜다.

ⓒ최영민

골프, 관광 조와 헤어져 삼릉에서 남산 금오봉에 올랐다. 돌아드는 바위마다 심상찮은 기운이더니 실제 바위 바깥으로 외출한 부처들도 있다. 한 가족이 소풍을 나왔는가. 꼬마가 가파른 경사에서 외친다. 고만 집에 가자. 경상도 사투리의 투정을, 이 자슥아 이 길 아니고는 집에 갈 수 없데이, 다독이는 젊은 엄마의 슬기로운 거짓말은 이 지방 특유의 억양이다. 여기가 경주이고, 이곳이 남산이라 그런지 집이라는 말은 졸업과 얽히며 사무치게 귀에 들어왔다. 천년이 퇴적된 경쾌한 풍경을 가리키는 바위에 철쭉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줄기와 가지, 어린 나뭇잎은 희한한 무늬를 연출해낸다. 사람 인(人), 큰 대(大), 마음 심(心)이 함께 어울렸다. 바람에 불어 철쭉이 흔들리면 따라서 일렁이는 오묘한 글자들 속에 철쭉이 전하는 큰 소식이 있는 듯!

어제부터 내심 떠올리며 공글린 꽃이 있으니 동래엉겅퀴이다. 몇해 전 상주 황금산 입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이름에 특별하게 꽂힌 건 엉겅퀴 앞에 얹힌 두 글자가 바로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 이 엉겅퀴는 동래(東萊)에서 처음 발견되어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마침 부산의 꽃동무가 이기대 해변에 한창이라며 동래엉겅퀴를 보내주었다. 50주년에도 모두들 저 동래엉겅퀴처럼 싱싱하게 모일 수 있을까. 이래저래 동래엉겅퀴와 얽히고설킨 하루였다. 동래엉겅퀴,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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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0월17일 오후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황급히 헬기에 올라 전방 1사단으로 날아갔다. 군 당국이 이날 새벽 2시반쯤 임진강을 통해 침투하려던 북한군 1명을 사살했다며 현장을 공개한 것이다. 사살된 북한군 옆에는 잠수복과 검은색 오리발이 놓여 있었다. 이날은 김영삼 대통령이 유엔본부 방문길에 오른 이튿날이었다. 당국은 북한이 대통령 부재 시 전투준비 태세를 정찰하기 위해 침투조를 내려보냈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당국이 북한군의 침투를 막기 위해 1차 저지선으로 임진강 수중에 철조망을 쳐놓은 사실이 드러났다. 군은 철조망이 떠내려갈 때마다 보수해왔다고 밝혔다. 이 북한군은 수중 철조망을 통과한 뒤 절벽을 타고 오르다 발각됐던 것이다.

한강 하구 지역은 1953년 정전협정에 따라 남북한 민간선박의 자유로운 항행이 허용되는 곳이다. 그러나 남북 대치가 극심해지면서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금단의 구역이 됐다. 군 당국의 입장에서는 군사분계선을 그을 수 없는 해상이라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매우 높아 접근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섞이는 이곳은 얕은 수심에 하루에 두 번씩 조수가 바뀌고 수위 차이가 3~7m에 이르는 데다 유속까지 빠르다. 여기에 해도조차 없으니 출입이 허용된다 해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북한군의 수중 침투가 중단돼 수중 철조망이 무용지물이 되었어도 지금껏 ‘민감수역’으로 관리돼온 것은 이 때문이다.

남북의 군·해양 당국이 5일부터 한강 하구 공동이용수역에 대한 수로조사를 시작했다. 김포반도 동북쪽 끝에서부터 강화도 너머 교동도 서남쪽까지 강과 바다의 수심을 측정한 뒤 해도를 작성해 남북이 함께 이용하자는 것이다. 무장 북한군이 침투해오던 살벌한 장소가 평화수역이 된다니 격세지감이다. 원래 이곳은 황복과 참게로 유명하다. 모래 등 골재가 풍부하고 관광지로 개발할 여지도 높다. 첫날 남북 전문가들이 6척의 선박에 함께 타기로 돼 있었는데 북한 쪽 인원들이 썰물 때문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한다.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데다 해도까지 없으니 헤매는 게 당연하다. 이제 남북이 한배를 탔으니 순풍에 돛단격으로 성과를 내기 바란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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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간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이 참으로 착잡하다. 우리에겐 너무도 간절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성공적 수립을 위해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승리하는 게 낫겠다 싶다가도, 그 승리가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더 가파르게 무너지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 마음이 편치 않다. 반대로 민주당이 이긴다면 미국 민주주의의 급격한 붕괴는 어느 정도 막아내겠지만, 트럼프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에 민주당이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 과정을 방해하고 나서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민주주의 문제 때문에 세계의 우환 거리가 되었을까?

미국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한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은 하나같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더불어 진행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그 근본 배경으로 지목한다. 그동안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미국의 복지국가 체계를 만들었던 뉴딜 이후의 근간적 사회경제 구조를 흔들면서 그 과정에 적응하지 못한 숱한 하층 노동자 및 실업자 계층을 양산해 냈는데, 민주당은 진보를 내세우면서도 그들을 제대로 대변하고 포용하지 못하며 우왕좌왕했고, 그사이 극우 포퓰리즘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포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1일(현지시간) 중간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들을 지지하기 위해 플로리다주 에스테로의 헤르츠 아리나에서 열린 유세집회에 참석해 경례를 하고 있다. 에스테로_AFP연합뉴스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미국만큼이나 불평등의 정도가 심각하고, 그 완화를 위한 노력도 부족하다.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정부 때의 민주주의 파괴 시도를 극복해 내었다고 우리 민주주의가 안전할 거라고 자만해서는 안된다. 지금과 같은 심각한 불평등을 방치한다면 그에 대한 반동으로 더 심각한 민주주의 위기가 올 수도 있다. 불평등은 단순히 사회적 불공정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바로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다.

다행히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우며 광범위한 사회안전망과 복지의 체계를 갖춘 포용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민주당은 그동안 증세나 부동산 보유세 강화같이 복지 확충과 불평등 완화를 위한 결정적 조처들 앞에서 늘 머뭇거리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주의 깊고 실효성 있는 실천이다. 단기적인 지지율 관리를 넘어 긴 호흡으로 우리 민주주의의 운명을 생각하는 정치를 기대한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미국식 민주주의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도 놓쳐서는 안된다. 마이클 샌델은 미국이라는 ‘절차주의적 공화국’이 낳은 ‘민주주의의 불만’을 이야기한다. 그는 진작부터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이 공정한 절차만 강조하며 정치 과정에서 모든 도덕적 지향을 몰아내려 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시장논리가 들어서 지배하고 결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되리라 걱정했다. 샌델이 볼 때 정치가 지향해야 할 도덕적 가치에 대한 관심을 애써 괄호 속에 넣어 두려고만 하는 미국식 자유주의 정치에선 결국 원초적인 민족주의적 언사들만이 대중들을 사로잡게 될 터였다. 백인 우월주의를 조장하고 ‘미국 우선’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대통령이 된 트럼프를 보면, 샌델은 오래전부터 그의 등장을 예견했던 셈이다.

물론 우리 민주주의는 미국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우리 민주주의에서는 오랜 성리학적 전통의 영향 탓인지 미국과는 달리 오히려 정치를 온통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재단하는 도덕정치가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도덕은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해야 한다. 법과 공정한 절차도 너무 자주 무시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절차주의의 한계에 대한 샌델의 경고를 약간 초점을 달리해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조밀하게 잘 짜인 견제와 균형의 제도적 체계를 갖추었지만 트럼프 같은 권위주의자를 제대로 걸러내지도, 제어하지도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절차와 제도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적들로부터 지켜내려 하며 삶의 지향 자체를 기꺼이 거기에 맞추어 내려는 시민들의 태도가 사회적 습관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때에만 살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이전에 하나의 가치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개혁만큼이나 더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한 ‘가치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도 절실하다. 우리나라는 촛불혁명을 통해 전 세계에 민주주의의 한 모범을 보였다고 자랑하지만, 예컨대 절대 다수의 시민들, 특히 청년들은 제주도에 온 예멘인들의 난민 신청을 수용하지 말라는 의견을 갖고 있다. 이런 상태를 계속 방치해 둔다면, 언젠가 한국판 트럼프가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교육의 체계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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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가 참여하는 여·야·정 상설협의체가 5일 첫 회의를 열었다. 오찬을 겸한 만남은 2시간30분 넘게 진행됐다. 야당 원내대표들은 할 말을 다 했고, 문 대통령은 이를 경청한 뒤 성의있게 답변했다고 한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경제와 민생상황이 급박하고 엄중하다는 데 정부·여당과 인식을 같이한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성과였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우리 정치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협치”라며 “첫 출발이 좋다”고 했다.

모처럼 발맞춘 국회·정부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들이 5일 여·야·정 협의체 첫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 본관으로 걸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윤소하·바른미래당 김관영·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 문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홍영표·민주평화당 장병완 원내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날 회동 테이블에는 한반도평화, 경제 활성화, 탈원전, 채용비리, 선거제 개편 등 최근 여야 간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국정 현안 대부분이 올랐다. 여야는 회의가 끝난 뒤 “경제·민생 상황이 엄중하다는 공통된 인식 아래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입법과 예산에 초당적으로 협력한다”며 총 12개항의 합의문을 발표했다. 당초 자기 주장만 내세운 채 알맹이 없이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기대 이상이다. 정의당은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과 규제혁신 신속 추진 등 2개항에 반대 의견을 명확히 밝혔다. 이렇게 하면 된다. 시각차가 클수록 대화가 필요하고, 치열한 논쟁을 통해 이견을 좁혀 나가는 것이다. 노동계에서 반대하는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은 향후 국회에서 장단점을 충분히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야당에서 반대하는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에 대해 “꼭 처리됐으면 좋겠지만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다. 모처럼 여야가 시민 눈높이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기조를 잘 이어가면 그동안 말만 무성하고 진척이 없었던 협치의 불씨를 살려나가는 것도 기대할 만하다.

일단 첫 단추는 잘 끼웠다고 본다. 남은 과제는 회동에서 나왔던 말들이 결코 구두선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여야 합의는 구체적으로 실천됐을 때만이 가치가 있다. 이 중 일부는 원론적 합의일 뿐 실무 추진 과정에서 다시 충돌할 수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공감한다면 작은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이날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5당 대표들 간의 두 번째 월례모임도 열렸다. 비록 주요 쟁점에서 의견 일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다. 회동 한 번으로 주요 쟁점들에 대한 여야 간 의견 차가 해소될 리는 만무하다. 문 대통령은 “앞으로 논의할 게 생기면 중간에라도 만나자”고 했다. 대통령이 정치권에 협치의 손을 내미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첫발을 뗀 여·야·정 협의체가 소통과 타협의 정치를 복원하고 국정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구심점으로 자리 잡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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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운수노조와 노동건강연대, 노동당 등 8개 사회·노동단체가 5일 합동기자회견을 열고 CJ대한통운 박근태 사장 등 대표이사 3명을 처벌해달라고 관계 당국에 요구했다. 노동건강연대 등은 또 최근 CJ대한통운 대전물류센터에서 발생한 노동자 사망 사건의 책임을 물어 박 사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8개 단체가 사법기관에 CJ대한통운 대표의 처벌을 강력 요구한 것은 정부의 행정조치만으로는 제대로 사업장 관리감독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우려 때문으로 판단된다. CJ대한통운에서는 최근 3개월 사이 노동자 3명이 잇따라 사망했다. 지난달 30일 대전물류센터에서는 30대 노동자가 트레일러에 치여 중상을 입고 숨졌다. 앞서 8월에는 같은 곳에서 택배 업무를 하던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이 감전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또 옥천터미널에서는 50대 노동자가 쓰러진 후 사망했다. 노동건강연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지금까지 CJ대한통운 물류센터에서 사망한 노동자만 7명이나 된다.

5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전국택배연대 노동조합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다단계 하청을 통한 ‘위험의 외주화’로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며 근절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CJ대한통운은 택배업계 점유율 1위의 물류배송 전문기업이다. 대기업이면서 열악한 작업환경은 물론이거니와 간접고용, 외주화 등으로 위험을 하청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경영 행태를 일삼아왔다. CJ대한통운에서의 노동자 연쇄사망은 ‘안전불감’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 회사는 사망 사건 발생 이후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지난 8월 아르바이트생 사망 사건 때에는 물류센터 노동자들에게 사고 은폐를 종용하고 거짓진술을 강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잇단 사망 사건은 노동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살인 경영’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기업의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당국의 안이한 대응도 큰 문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8월 아르바이트생 감전사 이후 대전물류센터에 대한 특별감독을 벌여 위법 사실을 밝혀내고도 CJ대한통운에 과태료 650만원만 부과하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검찰은 같은 달 이 회사 대표이사 3명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했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사망사고를 낸 기업이 책임을 회피하고 당국이 손을 놓은 사이 노동자들은 죽어가고 있다. 정부와 검찰은 이제라도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기업 이윤을 위해 노동자가 희생당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당장 끊어야 한다. 국회도 계류 중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입법을 서두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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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의료인·언론인·교수·회계사 등 전문직 여성들의 상당수가 직장에서 각종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5일 전문직 여성 10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같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올해 불붙은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은 현직 검사인 서지현 검사가 폭로한 상급자의 성추행 사건에서 시작됐다.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성폭력이 전문직이자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검사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번 조사결과는 이 같은 잘못된 성문화가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킨다.

5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한국여성변호사회 주최로 전문직 여성 직장 내 성폭력 실태조사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조사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541명)이 ‘외모, 옷차림, 몸매 등을 성적으로 희롱·비하·평가받는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당했다고 답했다. 성적인 이야기나 음담패설을 듣거나, 고의로 신체 부위를 건드리거나 몸을 밀착시키는 행위를 당하거나 이성의 옆에 앉기나 러브샷 등을 강요당했다는 응답자도 각각 절반가량 됐다. 대면조사에 응한 전문직 여성들은 직장 상사 등이 회식 중이나 후, 또는 차량을 함께 타고 가면서 강제로 신체접촉을 하거나 모텔 등에 끌고 가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특히 전문직 여성들은 향후 불이익이 클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성폭력을 당해도 제대로 문제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이번 조사에서도 성폭력 피해 이후 문제 제기를 한 328명 중 10%가량인 33명이 ‘업무상 부당 대우를 겪었다’고 답했다. 악의적 소문이나 따돌림에 노출된 사례도 14.6%나 됐다.

조사결과는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엘리트’ 조직이라 불리는 법조계·의료계·언론계·학계 등에도 어김없이 고질화된 남성중심적인 조직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조직에서 근무하는 남성들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그럼에도 상당수 남성들이 여성 동료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잘못된 문화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남성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성폭력 예방과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처벌을 위한 법적·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최근 여성의 사회진출이 크게 늘면서 전문직에서도 새로 진입하는 인력 중 여성이 절반을 넘고 있다. 이제는 단지 ‘소수자’인 여성 배려 차원이 아니라 조직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도 구시대적인 남성중심적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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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대학을 막 졸업하고 처음 취직한 광고회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 거래처 사장과 앞으로의 제작 일정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일정 중 설 명절이 있어서 기한 내 제작의 어려움을 설명하는데 눈앞으로 갑자기 커피 잔이 날아왔다. 내 기억으로 피하지 않았거나 피하지 못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손목을 꺾었는지 잔은 내 등 뒤로 날아가 산산이 깨졌다. 당황한 나에게 그는 핑계처럼 “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라고 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다소 반항적인 인간이었던 탓일까. 어려서부터 누나에게 “너 눈 좀 그렇게 뜨지마”라는 지청구를 듣긴 했었다. 커피 잔이 영화 속 슬로모션으로 내 옆을 스쳐지나간 뒤, 나는 사장을 탓하는 마음에 앞서 ‘내 눈빛이 그렇게 안 좋은가?’란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과연 내 몹쓸 눈빛 탓이었을까, 요즘도 가끔 생각나는 사건이다.

출처:경향신문DB

조현민이 광고사 직원에게 이른바 ‘물컵 갑질’을 했지만,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 사건에 관한 세 가지 혐의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 단순폭행, 둘째 업무방해, 셋째 특수폭행이다. 단순폭행은 피해자랑 합의하면 끝, 업무방해는 그것이 당사자의 업무였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업무를 방해했으니 끝, 남은 것은 특수폭행 하나뿐이지만, 결국 이것도 무혐의가 되었다. 보통 일반인이 유리컵을 던지면 빼도 박도 못하게 특수폭행(특수협박)이 된다고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손목을 꺾었는지 이조차 무혐의로 풀려났다. 사건이 일어난 뒤 이걸 가지고 칼럼을 쓸 수 있을까 궁금했다. 사건이 사건을 덮는 ‘다이내믹 코리아’니까, 이마저도 시일이 조금 지나면 잊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소셜미디어를 통해 또 다른 ‘갑질폭력’ 사건이 알려졌다. 놀랍지도 않았다. 대한민국에선 이런 사건이 해마다, 달마다, 매일 어디선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건 당사자가 단순히 ‘갑질폭력’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일의 웹하드 업체 소유자이며, 웹하드 플랫폼을 통해 사이버성폭력 피해촬영물을 유포하여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는 업체란 사실이다. 2015년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의 웹하드 서비스 음란물 이용현황에 따르면 웹하드 업계 전체 매출액은 약 2000억원, 그중 70~80%를 상위 5개 업체가 차지한다. 수십개의 웹하드 업체가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소유주는 몇 명 되지 않는다. 폭력을 휘두른 사람도 그중 하나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 따르면 웹하드에서 사이버성폭력 피해촬영물은 저작권료 없는 콘텐츠로 매우 수익성 높은 상품이다. 사이버성폭력 피해촬영물은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을 웹하드 업체가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은 유포가해자인 헤비업로더들을 회사 차원에서 관리하고, 경찰 수사에서 보호하는 등 범죄행위에 동참해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부 업체에서는 이와 같은 피해촬영물을 기술적으로 걸러주는 필터링업체와 인터넷에서 삭제해주는 대행업무로 수익을 올리는 디지털장의사 업체까지 직접 소유하거나 관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해촬영물을 유포하여 수익을 얻고, 이를 유포하는 범죄자들을 관리하고 보호해왔으며, 피해자들에게는 돈을 받고 피해촬영물을 삭제해주는 방식으로 다시 수익을 얻는 구조란 것이다.

웹하드 커넥션은 단지 필터링업체, 디지털장의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십수년 동안 사이버성폭력 피해자들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동안 이들이 쌓아온 돈(자본)의 힘은 어느새 정치권, 언론, 법률시장, 모바일결제시장, 통신사 등등 웹하드와 연계하여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곳들과 연계되어 왔다. 그동안 사이버성폭력 피해촬영물 유통 근절이 불가능한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던 까닭은 기술이 부족하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권력과 수익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법이 명백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할 때,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할 때 이것은 결코 진심이 아니며 진실일 수도 없다. 그것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을 정도로, 처벌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권력차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말로 바꿔 읽어야 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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