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6일 한국경제 오형규 논설위원은 ‘청년의 삶을 저당 잡은 나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내용은 귀족노조, 직능단체, 시민단체 등이 신규고용창출을 할 수 있는 구조조정과 노동개혁을 막고 있는지라, 청년들의 취업과 삶이 어려워졌다는 그야말로 흔한 사랑노래 같은 것이다.

경제지들이 엄청난 비리가 있는 것처럼 연일 맹공을 퍼부었지만 대다수가 과장이었던 고용세습 문제를 시작으로, 승차공유 서비스에 반대하는 택시기사들과 영리병원에 반대하는 의료계와 ‘좌파 시민단체’ 등이 취업준비생들의 헬조선을 만들어낸 주범들로 지목되었다.

여기까지도 익숙한 논리다. 하지만 이 칼럼의 마지막 문단에서 나는 아연실색했다. “문화연구가 최태섭이 언급했듯 ‘우리편이라는 괴물’에 끌려가선 답이 없다. ‘우리편’도 개혁할 수 있어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것이다”라니? 여기서, 갑자기, 내가, 왜?

내가 ‘우리편이라는 괴물’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쓴 것은 2011년의 일이다. 그리고 내가 괴물이라 지칭한 것은 오 논설위원의 이야기에 오히려 반대되는 이야기다. 반MB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며 진보진영 내의 다른 목소리들을 억압하던 이들, 나꼼수에 대한 비판을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이던 지지자들, 민주노총을 비롯한 ‘구’진보에게 ‘노동’ 같은 낡은 개념으로 재를 뿌리지 말라고 윽박지르던 ‘깨어 있는 시민’과 그들의 ‘단결된 힘’에 대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편이라는 괴물은 그 ‘구’진보가 자신의 가치로 삼았던 ‘사소한 것’들은 무시하는 한편, 그들이 가진 얼마 안되는 자원과 도덕성은 재물로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지금도 트위터의 민주노총 계정으로 가면 비슷한 결의 무례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이 계속해서 쏟아진다. 심지어는 며칠 전 민주노총 계정에 올라온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소속인 21년차 식당조리원의 기고문을 공유했더니, 대뜸 “민주노총 너네들 하는 짓을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고 싶지 않다”라는 메시지가 나에게까지 배달되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조합원도 아닌 저에게 그런 말씀 하셔도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이렇게 답변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한편, 오 논설위원은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청년을 주워섬기지만, 선거 때뿐이다. 청년수당으로 입막음할 뿐, 청년 일자리를 위한 구조조정, 노동개혁 등 난제들은 죄다 외면한다”라고 썼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전 정부가 청년을 팔아서 대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했던 대표적인 사례들이 바로 저것이었다. ‘장그래를 위해 노동개혁을 해서 2년 만에 잘리던 비정규직을 4년 만에 잘리게 바꾸겠습니다’ 같은 말장난을 기억한다면 할 수 없을 이야기다.

청년이 빈곤해지는 것이 걱정이면 청년임대주택과 대학생기숙사를 반대하는 건물주들에게 따져볼 일이다. 청년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진 것이 안타깝다면 청년의 정치진입을 막고 있는 기성정치제도에 날을 세워야 한다. 저런 것들이 10% 남짓의 조직률을 가진 노조보다 몇 배는 더 청년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노조는 무조건 선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심지어 민주노조 내부에도 자리 지키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왜 없겠는가? 성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소수자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왜 없겠는가? 이것들에 맞서서 더 정의롭고, 더 포용적이고, 더 서로 돕는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외부의 요구들이 왜 없겠는가?

애초에 세상에 절대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있지 않다. 자신을 돌아보길 거부하고, 약하고 작은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우리편’의 부정의에 눈감으면서, 남의 허물에는 민감한 그 모든 곳에 괴물이 있다.

하지만 그 괴물과 맞서려면 일없이 청년들을 불러다가 노조와 싸움이나 붙이려고 하는 것보다는 더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그게 우리편이라는 괴물에 대한 원작자의 생각이다. 

부디 착오 없으시길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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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나 SF를 많이 다루는 매체 ‘기즈모도’의 카슈미르 힐과 수리야 마투 기자는 최근 미국언론재단에서 주는 ‘저널리즘 속 테크놀로지’ 분야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들이 올해 2월에 쓴 ‘스마트홈’에 대한 기사가 취재와 보도에 테크놀로지를 창의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선발된 것이다.

힐과 마투가 취재한 ‘스마트홈’은 상상 속 미래가 아니라 지금 실현 가능한 현재의 공간이었다. 이들이 체험한 ‘스마트홈’은 그다지 멋지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힐과 마투는 힐이 사는 샌프란시스코 아파트를 ‘스마트홈’으로 만들기로 했다. 텔레비전, 진공청소기, 인공지능 스피커 등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커피메이커, 장난감, 칫솔, 침대까지 최대한 많은 물건을 인터넷에 연결하고 이 기기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도록 한 것이다. 힐이 스마트하게 변한 자기 집에서 사는 동안 마투는 직접 설치한 라우터를 통해 힐의 ‘스마트홈’이 작동하는 상황을 관찰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래된 집을 ‘스마트홈’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1970년대에 지은 힐의 아파트에는 준비한 스마트 기기를 모두 연결할 만큼 전기 콘센트가 많지 않았다. 한 콘센트에 플러그 여러 개를 꽂을 수 있도록 연결 장치를 여기저기 달고서야 겨우 스마트 기기들을 모두 설치할 수 있었다. 힐은 이러다가 집에 불이 나는 게 아닐까 걱정할 정도로 많은 플러그를 꽂았다.

스마트 기기는 종류도 제조사도 모두 달랐다. 인터넷으로 정보만 주고받으면 할 일을 끝내는 기기도 있지만, 집안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기기도 있고, 사람 몸에 닿아서 작동해야 하는 기기도 있었다. 이 기기들을 관리하기 위해 힐은 스마트폰에 앱 14개를 내려받고 각각에 접속하기 위한 계정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연결이 끝난 다음에는 인공지능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로 ‘스마트홈’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 기기들은 마치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채 우연히 만난 사람들처럼 소통에 어려움을 겪곤 했다.

아침에 눈을 떠 침대에 누운 채로 인공지능 스피커를 향해 “커피 내려 줘”라고 말하면 종종 “알아듣지 못했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공지능 스피커와 커피메이커는 제조사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결은 매끄럽지 못했다. 여러 차례의 명령 혹은 부탁이 실패하고 나면 결국은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커피메이커의 버튼을 직접 눌러야 했다. 잘 소통하지 않는 스마트 기기들을 다루어야 하는 ‘스마트홈’ 관리자는 매우 부지런하거나 인내심이 깊어야 했다.

힐의 ‘스마트홈’에서 밖으로 내보내는 모든 통신을 들여다본 마투는 ‘스마트홈’이 매우 수다스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마트홈’의 모든 기기는 수집한 정보를 집 밖에 있는 서버로 쉬지 않고 보고했다. 그로부터 마투는 힐 부부의 생활에 대해 놀랄 만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모든 정보의 수집, 그것이 바로 ‘스마트홈’의 본질이었다.

마투는 스마트TV가 내보내는 정보를 통해 힐 가족이 2017년 마지막 날 밤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새해를 맞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음악 스트리밍 앱 작동 정보로부터 힐 부부가 아침 몇 시쯤 잠에서 깨는지도 유추할 수 있었다. 스마트 칫솔은 힐이 언제 양치질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마투는 스마트 칫솔로 양치질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보험료를 깎아주는 방식의 새로운 보험 상품이 나올 수 있겠다고 예상했다. 마투는 힐 가족이 언제 집을 비웠는지도 알 수 있었다. 주인이 없는 집에서 스마트 기기의 데이터 사용량은 대폭 줄어들더라도 바깥 서버와 연결하는 통신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 집에는 지금 사람이 없어요”라는 신호를 내보내는 셈이다.

‘스마트홈’에서 프라이버시의 개념은 이상하게 뒤엉킨다. 힐의 집에 잠시 놀러 온 친구는 거기서 자신이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정보가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아기방에 설치해 놓은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잠시나마 영상을 저장해 둔다는 사실도 모를 수 있다. ‘스마트홈’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정보 제공 동의를 받는다고 다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스마트 침대는 수면 정보 수집에 대한 동의를 받을 수 있도록 힐에게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람의 e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한 동의 절차를 거치려면 힐은 자기가 누구와 같이 누워 있는지 스마트 침대에 알려주어야만 한다.

‘스마트홈’은 ‘관찰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온종일 카메라가 따라다니면서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먹는지 공개하는 관찰 예능 속 연예인처럼, ‘스마트홈’에 사는 사람의 일상은 정기적으로 서비스 공급자와 마케팅 회사로 보고된다. 방송 제작자의 편리를 위해 전화를 걸고 받을 때 스피커폰 기능을 사용하기로 동의한 관찰 예능 속 연예인처럼, ‘스마트홈’ 주인은 자신이 어떤 스마트 생활을 하는지 널리 알리는 데에 동의한 사람이다. 일상을 공개한 대가로 인기를 얻는 연예인처럼 ‘스마트홈’ 주인은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편리를 얻고자 한다.

힐과 마투의 기사가 보여주는 것은 그 편리를 온전히 즐기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재 수준에서 구현 가능한 ‘스마트홈’을 강렬하게 체험해 본 그들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프라이버시 문제보다 더 구체적인 ‘짜증’의 문제를 강조했다. 스마트 기기가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나는 짜증도 있지만, 열심히 일할 때 나는 짜증도 만만치 않다. 스마트 기기들은 자기들끼리 얌전하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집주인을 호출하고 닦달한다. 집주인의 스마트폰에는 로봇 청소기가 장애물에 걸렸으니 빼달라는 메시지, 일을 잘 마쳤다는 메시지, 혹은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는 메시지가 속속 도착한다. 집주인은 스마트 기기의 부름에 부지런히 응답해야 한다. 스마트 기기의 시중을 들다가 짜증이 난 집주인은 ‘스마트홈’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스마트홈’의 주인은 누구인가.

<전치형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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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 어쩔 줄을 모르던 기억이 지워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겨울의 초입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아직도 해를 즐기기 좋고, 단풍과 은행잎도 아름답고, 떨어진 낙엽도 괜히 밟아볼 만하다. 그러나 밤은 춥고, 새벽은 많이 시리다. 겨울 오기 전부터 망설이던 이불 장만을 마침내 하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되었다. 털이 뽑힌 거위의 사진인데, 거위 털이 산 채로 채집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거니와, 산 채로 털이 뽑히면 어떤 지경일지 짐작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뉴스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고, 사진이 보이면 얼른 외면해버리는 식이다. 보고 나면 내 마음도 다칠 터인데, 그 다친 마음을 어찌해보자면 결심도 하고 뭔가 행동도 해야 할 터인데, 그 모든 게 자신이 없어서이다.

거위털뿐이겠나. 모피도 그렇고, 가죽도 그렇고, 고기를 먹는 일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뉴스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또 책을 읽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치사하게도 안 보고 싶어서이다. 안 보면 내 마음이라도 안 다칠 터이니.

또, 뭐 동물뿐이겠나. <나쁜 초콜릿>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캐럴 오프는 초콜릿이 만들어지기 위해 행해지는 카카오 농장의 어린이 노예노동을 고발했다. 같은 내용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한 어린 카카오 농장 노동자가 “사람들이 초콜릿을 먹는 건 제 살을 먹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방송되었다고도 한다. 초콜릿을 ‘어린이의 눈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이다. 초콜릿뿐만 아니라 청바지도 그렇고, 커피도 그렇다. 그 이외의 많은 것들이 그럴 것이다. 추위를 많이 타고, 고기를 좋아하고, 초콜릿과 커피도 엄청 좋아하는 나로서는 눈을 가리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홀로 내 마음도 다쳤다고 엄살을 떨거나 아무튼 고작 그뿐이다. 거위털 이불은 그렇잖아도 비싸서 못 살 것 같았는데 안 살 이유가 생겨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몇개 있지도 않은 가죽 제품은 굳이 이미 있는 걸 안 입고 안 써야 하나 생각해보기도 하고, 공정무역 초콜릿은 편의점에서 살 수가 없으니 포기하고, 살충제 파문 후 먹기 시작했던 복지란은 이거 좀 비싼 게 아닌가 슬슬 궁리하기 시작하는 식이다.

그렇더라도 착한 소비나 윤리적인 소비 같은 기사가 보이면 눈여겨보게는 된다. 동물의 잔인한 희생을 통해 생산되는 물건을 거부하는 방식인 윤리적인 소비는 동물보호를 넘어 환경의 유해 여부까지 따지는 적극적인 소비 영역으로까지 넓어진다. 채식을 포함해 비거니즘이라 불리는 삶의 방식에 대한 소개도 있다.

착한 소비가 착한 현실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콜릿 노예농장의 현실이 고발된 후,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한 농장산업이 어려워지자 정작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이 가장 먼저 굶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제적인 압박에 직면한 다국적 회사들이 아동노동 감시기구를 설치하고, 어린이 노예노동에 대한 각종 방지책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카오 최대 생산국인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여전히 어린이 210만여명이 비참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그렇더라도 노동력 착취와 인권침해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두된 공정무역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되었고, 그런 제품들을 구입함으로써 다소나마 그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산 채로 동물의 털이나 가죽을 채집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제정된 나라들도 많아졌고, 윤리적인 채집을 통해 생산되는 제품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평창 동계올림픽 롱패딩에 붙었던 RDS(responsible down standard)는 그런 거위털 제품에 대한 인증마크이다. 물론 단순 구입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노력이 필요하고 수고를 해야 하는 일이다.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윤리적인 소비를 위해 몇배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것이 보통사람들에게 과연 보통 소비이고 또 착한 소비일 수 있겠나 하는 의문도 들게 된다. 비싸지 않은 인공대체물을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 다른 환경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착한 소비를 넘어 착한 경제로까지 이야기가 넓어져야 할 텐데, 나로서는 쉽게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한 소비를 꿈꿔볼 뿐이다.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윤리적인 소비, 크게 수고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착한 소비. 부끄럽지 않고도 따듯하고, 미안하지 않고도 달콤한 맛. 말하자면 따듯하고 마음 편안한 삶. 좋은 제도가, 합리적인 규범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포근한 이불을 덮고 매일 밤 곤히 잠들 듯, 모두가 편안하고 따듯해지기를 바라게 되는 계절이다. 나만 따듯한 게 아니라 두루두루 따듯하고 잠깐잠깐 달콤하기를. 다 같이 따듯해야 더 많이 따듯하니까. 안타깝게도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추워지게 만드는 뉴스는 끊이지 않는다. 자신의 살로 남의 달콤함을 채우며 고통받는 게 먼나라 소년소녀뿐만은 아니다. 또 거위뿐이겠나. 좋은 가정에서 잘 자란 청춘들이, 교육도 잘 받았을 인재들이, 자신의 미래를 이루기 위해 선택한 직장에서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게 모욕과 학대인 경우도 있다. 그게 끔찍할 정도로 엽기적인 폭력인 경우까지 있다. 고령의 경비원들은 이유도 없이 폭행을 당한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 도대체, 왜.

가만히 있어도 툭하면 추운 계절인데 기를 쓰고 춥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방치하는 이도 있고, 조력하는 이도 있고, 그런 제도가 문제없이 굴러가는 사회도 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혼자 미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행히 그들의 온기가 누군가에게는 솜이불 같은 따듯함이 되기도 할 터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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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패션에 관심은 많은데, 정작 입고 다니는 옷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에서 일하다가 지난해 한국에 정착한 어느 프랑스인 패션 디자이너가 최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사 댓글을 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관심은 많다. 다만 내 옷보다 남이 뭐 입었는지 관심이 많을 뿐이다.”

한국식 ‘똑같은’ 패션의 정점인 ‘김밥 패딩’을 입는 겨울이 오고 있다. 기후이변으로 북극 얼음이 많이 녹아 올해도 제트기류가 한반도로 흘러내려올 것이라고 하니 이제 겨울철 롱패딩은 ‘생존템’ 내지 ‘국민복’으로 자리 잡을 듯하다. 롱패딩을 남과 다르게 개성 있게 입기는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혹한에는 그저 애벌레 고치 짓듯 껴입는 게 최고다. 하지만 아주 조금, 남과 똑같은 복장이 ‘몰개성’의 증거가 아닌지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곤 한다.

개인주의는 각각의 고유한 개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남과 똑같은 것은 미덕이 아닌 게으름이므로, 자기만의 특질을 가꿔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가 더 두드러지는 사회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명제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한 장한업 이화여대 교수의 저서 &lt;차별의 언어&gt;에 따르면 한국어에는 유독 ‘우리’라는 표현이 많다. 엄마, 집, 회사 같은 단어 앞에 ‘나’가 아닌 ‘우리’가 붙는다. ‘우리’는 ‘울타리’와 어원이 같다. 나와 같은 울타리 안에서 정체성을 공유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한국인들은 유독 민감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패션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소소한 의식처럼 보인다. ‘개성만점 에지 있는’ 유행 패션을 함께 소비하면서 한 사회 안에 연결된 너와 나를 확인하는 것이다. 쨍한 빛깔 등산재킷 차림의 단체관광객, 체크남방에 뿔테안경 쓴 공대생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직장 여성들이 ‘복제 패션’의 ‘유머짤’로 소비되곤 하는데 사실 다들 크게 다르지 않다.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이다. 김밥 패딩의 경우 허리선을 강조하거나, 라쿤이나 여우 같은 동물의 털을 달거나 하는 정도다.

이렇게 모두가 한꺼번에 소비 축제에 뛰어들면 회사의 명운이 바뀌기도 한다. 스포츠용품 업체 ‘휠라’는 국내 10~20대 소비자들 사이에서 2~3년간 크게 유행하면서 기울던 사세를 한 방에 역전시켰다. 김밥 패딩이 스트리트 패션에 밀려 고전하던 아웃도어 업체들의 둘도 없는 효자가 된 건 잘 알려진 얘기다.

군중의 소비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널리스트 마이클 본드는 &lt;타인의 영향력&gt;에서 ‘군중심리’라고 하면 중심 없이 휩쓸리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보다 순기능을 가질 때도 적잖다고 지적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뇌는 타인과 연결되고 소통해야 제 기능을 하도록 설계돼 있다. 나와 상대방이 같은 취향을 갖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패션은 즉각적인 소속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한국처럼 내수시장이 그리 크지 않은 곳에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의 차별화되는 제품은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비슷비슷하게 입는 게 이득인 셈이다.

다만 똑같이 입더라도 똑같은 사고를 하지는 않는다는 걸 서로 이해할 상상력이 있다면 모두가 사시사철 ‘김밥 패딩’ 같은 옷을 입더라도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애플의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는 검은색 터틀넥에 청바지, 뉴발란스 운동화 패션만 고집했지만 누구보다도 창의적인 인간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은 무궁무진하고 패션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고유한 서로를 마주하기 위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복장을 넘어 나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타인의 삶에 귀기울이는 ‘환대’의 마음만 가지면 된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당신은 지금 입고 있는 옷 이상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머금은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민영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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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뱅이 아저씨가 밤새 퍼마시고 집에 들어오니 곤히 자던 부인이 벌떡 일어나 고함을 내질렀다. “새벽 두시예요. 차라리 더 마시고 곧바로 출근을 하지 그러셨수. 집에는 왜 들어와서 달그락거리고 잠을 깨냐고요. 나도 술을 못 마셔서 이런 줄 아슈?” 그러자 아저씨 대답.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 시간에 문을 열어주는 집이 이 집뿐이라서 들어왔소. 미안해요잉.”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개 꺼내더니만 텁석 식탁 의자에 앉더라는…. 그 말이 우스워서 둘이 그 맥주 한캔을 나눠 마셨다는 훈훈한 결말.

밤을 새우는 열정. 무어라도 하나 열심히 끈기 있게 하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지.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사교성이면 쉽게 쓰러지진 않을 사람. 연말연시 모임들이 많을 때다. 연말에 한번쯤은 꼭 만나 맑은 술 한잔 나누고 지나가야 섭섭하지 않은 벗들이 있다. 자주 만나진 못해도 소중한 인연은 꼭 지켜가야 한다.

인디언 기우제는 신기하다. 호피족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비가 내릴 때까지 몇날 며칠을, 아니 몇달이라도 계속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 그날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우제를 지내는 정성. 냉정하던 하늘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오기와 끈기. 애타하는 마음들이 모이면 하늘도 움직인다. 

호주 눙가바라 원주민들의 창조 신화는 재미있다. 어느 날 땅이 무지개뱀을 낳았다. 뱀은 이곳저곳 다니며 강줄기를 냈다. 강물 속에 개구리알 보따리가 생겨났고 뱀이 개구리의 옆구리를 간질이자 개구리는 웃음보를 참지 못해 보따리가 터져버렸다. 개구리들이 온 강줄기에 가득 찼다. 이제 개구리떼는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하게 울기 시작했다. 주구장창 울어댔다. 결국 비가 가득 내렸다. 나무와 풀과 꽃들, 캥거루와 코알라, 암사슴과 새들이 강물줄기에 기대어 살게 되었다. 비도 그렇지만 첫눈도 간절한 마음으로 빌 때 ‘펄펄’ 내린다. 첫눈 내리는 날 보자고 약속한 사랑이 세상에 있는 한, 첫눈은 올해도 어김없이 내릴 게다. 간절한 사랑과 소원이 없다면, 더는 비도 눈도 이 세상에 내리지 않으리라.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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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개혁의 숙제로 남아있는 ‘선거연령 18세 하향’ 이슈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가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첫 회의에서 ‘선거연령 18세 하향을 논의하고 대표성과 비례성을 확대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협력한다’고 합의하면서다. 선거연령 하향은 그간 찬성 입장을 보인 다른 4당과 달리 자유한국당이 미온적 태도를 보여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국당이 선거연령 하향 논의에 나서기로 함에 따라 어제 3차 회의가 열린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됐다. 마침 정개특위원장인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이런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심상정 위원장이 7일 국회에서 열린 정개특위 관련 첫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선거연령을 19세로 묶어두는 것은 참정권 확대라는 세계적 흐름에 반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선거연령이 19세인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선거연령을 낮추는 환경은 충분히 조성되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진즉에 선거연령 하향 권고의견을 냈다. 중앙선관위는 2016년 선거법 개정 의견을 내면서 “18세 청소년은 이미 독자적 신념과 정치적 판단에 기초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소양을 갖췄다”고 밝혔다. 정치적 판단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선거연령 하향에 반대하는 척박한 논리를 반박한 것이다. 만 18세는 취업과 혼인, 운전면허 취득, 공무원 시험 응시 등을 할 수 있고 병역 의무자로서 군입대가 가능한 연령이다. 국방, 교육, 납세, 근로 등 국민으로서 주요 의무를 지니고 있음에도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투표할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부당하다. 고령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의 정치적 의견들이 미래의 정책 결정에 더 반영되어야 할 당위성도 커지고 있다. ‘더 넓은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선거연령을 낮추는 게 옳다.

‘선거연령 18세 하향’ 논의에 참여하기로 한 한국당은 더는 목전의 작은 이해에 급급해 시대적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이번 정치개혁특위에서 무엇보다 선거연령 하향 문제를 논의해 입법화의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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