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강의를 하면 16주 동안 시간이 구속된다. 겨우 60만~70만원의 급여를 받는 한 과목만 담당할지라도 거의 반년은 운신의 폭이 제한되기에 다른 스케줄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다음 학기에도 강의가 지속되는지를 제때라도 알려주면 좋겠지만, 12년간 12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그런 시스템을 경험한 적은 없다. 강사는 일방적인 통보를 마냥 기다린다. 왜? 대학은 강사를 그렇게 대해도 괜찮기 때문이다.

이제 비루한 강사 인생이 달라진다. 강사법이 드디어 국회를 통과했다. 원래부터 교원의 역할을 했던 사람에게 교원의 지위를 최소한으로 인정하는 법이니 그간 강사들이 무슨 신세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동네북 신세의 역사가 긴 만큼, 강사법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 빈민구제 수준에 불과하다. 6개월마다의 고민이 1년 단위로 바뀐다고 불안이 사라지겠는가. 두 과목을 배정받아 고작 연봉 1000만원이 보장된다고 삶이 안정적으로 변하겠는가. 게다가 공개채용이라니, 귀찮아질 일만 생겼다. 교원 신분인 만큼 구속은 얼마나 심할까. 각종 행사나 회의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있을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하지만 거적때기 입장에서는 천지개벽 수준이다. 다른 세상 이야기인 줄 알았던 퇴직금이라니! 12년 전부터 보장되었다면 나는 얼마를 더 벌었을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웃음꽃 가득이다. 건강보험 보장은 꿈이 현실이 되는 느낌이랄까. 지금껏 지역가입자로 분류되어 매달 20만원 넘게 납부하며 살았는데, 12년 전부터 보장되었다면 얼마나 아꼈을까 하는 억울함도 든다. 그러니 강사법은 진전이다. 그 보폭이 크진 않았지만, 그 한걸음이 가능하기까지도 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다. 이를 이해한다면 결실이 미약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이후에 발생할 이상한 일을 억지로 상상하는 건 무례다. 강사법은 투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현재의 지옥을 어떻게든 뒤틀어보겠다는 시도만으로도 의의는 크다.

하지만 사람을 사람답게 하자는 제안을 대학은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나 보다. 강사에게 나가는 돈을 가장 아깝다고 생각한 대학의 역사답다. 강사를 줄이고 대형 강의를 늘리는 건 자본의 논리에 진격하는 대학에서 이미 있었던 일이니 놀랍지 않다. 우려스러운 건 일부 교수들의 강사법 반대 논리다. 교수의 강의시수가 늘어나는 걸 우려해서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다만 자신들 소싯적 무용담의 소재로 시간강사 경험을 말하기 좋아한 사람들 딱 그 수준이다. 강의기간을 1년 이상 보장하고 공개채용으로 강사를 선발하면 경력이 없는 이들이 가르칠 기회를 얻지 못한단다. 이제야 학문 후속세대의 앞길을 걱정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차치하고 그 안타까움이 왜 누군가의 기본권 문제와 함께 다뤄져야 하는지 의아하다. 노동자의 해고가 경직되면 청년의 취업기회가 박탈된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학문생태계 타령은 진짜 너무했다. 강사들의 현재 상황이 생태계의 수준인데, 강사를 ‘교수가 되기 전에 몇년 가볍게 하는’ 수준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문제의 본질을 알 턱이 있겠는가.

쓸데없는 걱정 말고 교수들은 자신들이 공개채용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길 바란다. 강사들로부터 늘 문안인사를 받는 자라면 스스로가 어떤 분위기를 만들고 살았는지를 성찰하고 채용에 개입하지 마라. 공동체 운운하면서 강사들에게 학과 MT에 오라고 권한 바가 있는 자, “강의 줄 터이니”라는 말을 하면서 다른 의무를 강요한 적 있는 자들은 고개를 숙여라. 당신은 ‘두 과목을 일년 보장해 준다면서’ 노예를 선발하지 않겠는가. 어이쿠, 과연 어떤 교수가 이런 기준에서 자유로울까? 그냥 최저기준만 정하고 추첨으로 선발하는 것이 교수들이 그토록 걱정하는 학문생태계가 파괴되지 않을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

<오찬호 | <진격의 대학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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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회장 본인은 항상 직원들을 ‘가족’이라 불렀다.” 불법촬영 영상 유통 혐의 등으로 구속된 한국미래기술 회장 양진호의 폭력과 엽기 행각을 두고 전직 직원이 뉴스타파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양진호 말에 드러난 ‘기업가족’은 한국 사회 고질이다. 이런 가족 은유를 일찌감치 맥패밀리라는 경영전략에 도입한 맥도날드 한국지사는 여전히 직원을 채용하면서 ‘가족을 구합니다’나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즐겁게 일할 분을 구합니다’라는 공고를 낸다.

맥도날드만의 일이 아니다. 기업의 채용 공고를 보면, 도처에서 ‘가족’을 찾는다. 중소기업이건 대기업이건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회장님의 한 말씀에 ‘가족 여러분’이 빠지지 않는다.

이 가족 은유의 허상은 쉽게 드러난다. ‘가족’인데도 최저임금도 아까워하고, ‘가족’인데도 해고해버리고 만다. ‘가족주의’엔 기업(인)의 ‘가족’을 위한 희생과 배려는 없다. 그 반대의 경우만 존재한다. 양진호 회사 직원의 말엔 기업(인)의 가족 은유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들어 있다. 착취와 억압, 학대. 가족(family)의 어원인 파밀리아(familia)는 로마에서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부부와 자녀 중심의 가족 공동체라고 이상적인가? 최근 노예가 필요한 여러 가족의 사례가 확인됐다. ‘주님의 종이라는…목사 가족에게 우린 노예였습니다.’ 경기 하남의 한 교회에서 하루 15~19시간 일하면서도 둘이 합쳐 월 100만원 안팎을 받은 집사 부부의 폭로를 다룬 한겨레 보도 제목이다.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이사 가족 운전기사는 그 가족 여러 명에게 폭언과 질타를 듣고 해고됐다.

경북체육회 여자컬링 ‘팀킴’의 김은정은 전 대한컬링연맹 부회장 김경두와 감독 김민정에게 받은 부당한 처우를 전하면서 “예전에는 그들과 가족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지나오면서 답을 찾았다. 결국 그 가족만 한다(챙긴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고 했다. 혈연가족도 권력을 손에 쥐면 ‘기업가족’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억압하며 그들 가족의 결속과 이익을 유지한다.

법조도 ‘또 하나의 가족’이다. “법원 가족 여러분.” 대법원장 김명수가 법원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릴 때 빼놓지 않는 표현이다. 전 대법원장 양승태도 가족 여러분을 곧잘 찾았다. ‘검찰 가족’도 공공연하다. 헌법재판관들도 이 표현을 쓴다. 다른 공공기관 기관장들도 공무원들을 종종 가족이라 부르지만, 법조의 가족 표현 사용 빈도는 유별나다. 법원과 검찰을 떠나서도 ‘가족의 연’이 이어진다. 전관예우가 대표적이다. 

법학자 김두식은 <불멸의 신성가족-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창비)에서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신을 닮았으며 자기만족적이고 절대적인’(마르크스-엥겔스) 신성가족을 떠올린다고 했다.      

이들 가족(주의)의 기원은 무엇일까. 김두식은 사회학자 최재석의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인용하며 “한국의 파벌과 인맥이 부자(父子) 관계를 원형으로 하고 있어서 아버지 역할을 맡은 사람은 권위를 가지고 아랫사람을 보살필 의무를 지고, 아들 역할을 맡은 사람은 절대적인 복종을 미덕으로 한다는 사실도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히 지적되었다”고 했다.

‘양승태 사법농단’에서 양승태에 아버지를 대입하면, ‘양승태 패밀리’의 일사불란한 위헌 행위의 근원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들 간의 ‘보살핌’과 ‘절대적 복종’은 그 가족 밖의 시민과 사회를 희생시킨 대가라는 점에서 반사회적이다.

혈연가족이나 기업, 국가로 연장된 가족이나 이들 가족의 문제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된다. 이 가족주의는 서로 맞물려서 악순환한다. 양진호 회사의 직원은 “직원들 모두 누군가의 아빠고, 남편이고, 아들이고, 딸인데 그런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참고 다니는 분위기였다”고도 했다. ‘아버지 양진호’가 또 다른 아버지를 억압하고, 억압당한 아버지는 가족 부양의 의무를 지려고 폭압에 순종하고, 불법에 침묵한다.

뿌리 깊은 가부장적 사고는 판결에서도 나타난다. 중학생과 성관계를 가진 학원장에겐 “구금이 계속되면 가족을 부양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한 80대 남성이 성폭력을 저지르고 내놓은 말이란 게 “손녀 같아 그랬다”이다. 폭력과 착취를 저지르고도 가족 운운하는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국 사회는 가족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은 시민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이 나온 게 1976년이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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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들여다본다.

눈으로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

발을 내밀어 디뎌본다.

그런데 너를 이렇게 들여다보는 것을

누가 보지 않을까?

 

길 아닌 곳으로 방향을 잡아

파고든다. 풀숲을 헤쳐나간다.

나무 뒤에도 숨고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멀리 내다본다.

 

마음을 밟고 있는 몸 끝으로

삶의 비밀보다 더 깊은 곳에서

끄집어낸 것들을 떨어뜨린다.

너는 중얼거림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 깨어난다.

채호기(195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마음의 영토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곳은 우거진 곳이며, 길이 나 있지 않은 곳이며, 어지럽게 갈래가 져 있는 곳이다. 또한 깊고, 불분명하고, 변하며, 덮여 있다. 이 시는 이러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끄집어내 떨어뜨린 것이 ‘중얼거림’이라고 말한다. 숨겨져 있던 것이, 알려져 있지 않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바깥으로 드러나는 경우 가운데 하나가 ‘중얼거림’이라고 말한다. 예부터 하루 세 번 자신을 관조(觀照)하라고 가르쳤다. 열고, 살피고, 먼지를 걷어내는 일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주인으로, 귀의처로 삼으라고 했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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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의 생애를 기록하는 전기는 사실성과 객관성이 생명이다. 이 때문에 전기 작가가 자료와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쓰는 게 관례이다. 그러나 자료 수집과 취재를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인물의 전체를 온전히 복원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쓰거나 가족 또는 측근이 일대기를 남기기도 한다. 이는 객관성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지만, 제3자가 알지 못하는 내밀한 사실들을 담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전기나 회고록 가운데 <나의 아버지 박지원> <나의 아버지 등소평> <나의 아버지 여운형>처럼 아들이나 딸이 작가로 등장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들 책은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인물에 대한 묘사가 도드라진다. 또한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담아내 가족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들 전기는 역사인물에 대한 기록이면서 가족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미국 41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H W 부시는 생전에 두 권의 전기를 헌정받았다. 2006년 막내딸 도로 부시 코크가 쓴 <나의 아버지, 나의 대통령>과 2014년 큰아들 조지 W 부시가 펴낸 <나의 아버지 부시 41>이 그것이다. 자녀가 아버지의 전기를 두 권이나 내는 일은 흔치 않다. 그만큼 존경심과 자부심이 컸다는 증거다. 아들 부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43대 대통령을 지냈다. 퇴임 후 그는 회고록 <결정의 순간>을 낸 데 이어 아버지 전기를 썼다. 아들 부시는 책에서 아버지 부시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면서 훌륭한 대통령에 앞서 더 훌륭한 아버지인 이유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아버지 부시가 세상을 떴다. 부시는 가정의 가장으로서뿐 아니라 대통령으로서도 미국인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는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과  냉전 종식을 이끌어냈다. 이후 베를린장벽과 소련 붕괴에 따른 구체제 해체기의 혼란 수습에 앞장섰다. 앞서 2차 세계대전에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러나 걸프전 개입과 파나마 침공 등 미국의 패권주의를 강화시켰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제 가족이 헌정한 전기가 아닌, 그의 공과를 따지는 평전을 써야 할 때가 됐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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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우리 곁 어디에나 있는 흔한 이름이 2018년 지금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위상을 얻었다. 2016년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덕분이다. <82년생 김지영>은 2년 만에 100만부 판매를 돌파했다. 2007년 김훈의 <칼의 노래>(2001), 2009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 이후 9년 만이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이순신 장군,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엄마가 아닌 평범한 여성의 이야기, 그것도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상당한 한국에서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다. 이런 기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페미니즘 책이 눈에 띄게 팔리기 시작한 것은 2016년이다. 출판계도 깜짝 놀랄 정도의 판매량은 20대를 위시한 여성들이 주도했다.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를 온라인에 국한된 것으로 애써 부정하던 여성들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통해 ‘말이 칼이 되는 순간’을 목도했다. 범인은 남녀공용 화장실에 숨어서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내고, 일곱 번째이자 첫 번째로 들어온 여성을 죽였다. 게다가 범인은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고 밝혔다. 명확한 증거와 자백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하여 여성혐오 사건임을 부정했다. 자발적으로 강남역에 모인 여성들은 “살女주세요” “살아男았다”라고 쓴 포스트잇을 붙이며 슬픔과 분노를 표출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매대에 놓인 <82년생 김지영>. 이 책은 2008년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 이후 첫 밀리언셀러 소설이다. 김창길기자 cut@kyunghyang.com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차별을 해석할 언어를 갖기 위해 페미니즘 책을 찾기 시작했고, 이때 <82년생 김지영>이 나왔다. 82년생뿐 아니라 세대를 초월해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경험을 담은 이 책은 ‘나를 이해해주고 설명해주는 내 이야기’였다. 여성들은 김지영에 깊이 공감했지만, 김지영과는 달랐다. 김지영은 고립돼 목소리를 잃었지만,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말했고, 소통하고, 연대하고, 실천했다. 또한 주위의 남성들에게 자신의 ‘자서전’ 같은 이 책을 선물했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으로 여성혐오의 심각성을 비로소 인지한 남성들은 책을 통해 일상화된 여성혐오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lt;82년생 김지영&gt;의 대중성은 자신을 설명하고 주위의 남성들과 소통하려는 여성들에 의해 지지받고 확산됐다.

이렇게 탄생한 수많은 김지영들은 한국 사회에 젠더 문제를 이슈화시키고 견인했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자신들이 경험한 성폭력, 성차별을 지속적으로 공론화해 올해 미투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다양한 젠더폭력으로 의제를 확대해 디지털성범죄, 데이트폭력 등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심각한 범죄들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페미니즘 교육 초·중·고 의무화와 낙태죄 폐지 청원을 올려 정부의 답변을 받아냈고, 혜화역에 수차례 수만명이 모여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했다. 또한 독박육아,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인 성별 임금격차 등 노동 이슈를 제기해 아이돌봄지원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비롯한 ‘김지영법’이 발의됐다.

페미니즘이 대중화, 세력화되는 동안 줄곧 여성들의 곁에 있었던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의 대명사가 되었다. 따라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도 이 책에 집중되고 있다. 책에 대한 폄하, 여성들의 보편적 경험이 아닌 과장이라는 반응, 책을 언급하거나 영화에 출연하는 여성연예인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백래시로 페미니즘의 대중화, 세력화를 막기는 버거워 보인다. 책이 논란이 될 때마다 판매량은 급증했다.

<82년생 김지영> 100만부 판매는 폭력과 차별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용기’,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도전’, 여성혐오에 방관하거나 공모했던 자신에 대한 ‘성찰’, 세력화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까지 다양한 씨실과 날실이 엮인 결과물이다. 이 씨실과 날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교차되어 한국 사회의 성차별을 공론화하고 논쟁을 만들고 결국 이길 것이다. 김지영들이 아래로부터 성평등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고 있다.

<김고연주 | 여성학자·서울시 젠더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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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특별감찰반의 비위 파문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비위에 연루된 직원이 여러 명이라거나 평일 근무시간 골프설에 이어 현직 장관이 문제의 특감반원에게 자리를 약속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청와대는 특별감찰반 전원을 교체한 뒤 검찰·경찰의 조사결과를 기다려 보자고 했으나 파문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청와대의 태도다. 청와대는 쏟아지는 의혹에 속시원히 해명하기는커녕 함구에 급급하고 있다. 조국 민정수석은 “민정수석실 업무 원칙상, 확인해드릴 수 없다”고 하고, 김의겸 대변인은 “비위로 보도된 사안은 감찰사안으로 확인해드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청와대 특별감찰반은 공직자들의 비위를 감시하고 감찰하는 곳이다. 그런 특감반원 전체가 교체되고, 온갖 부패 소문이 떠도는데도 가타부타 충분한 설명이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권력 핵심부에서 비위가 일어났다면 시민들은 당연히 알 권리가 있다. 그런데 조 수석은 “비위와 무관한 특감반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며 넘어갔다. 국민적 의혹을 밝히는 게 왜 비위와 무관한 사람이 피해를 보게 한다는 건지 설득력이 없지만,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기보다 특감반원 보호를 앞세우는 안이한 인식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정부는 취임 후 줄곧 과거 정권의 적폐청산에 주력해왔다. 그런 정부에서 부패를 감시하는 직원들이 되레 부패에 휘말려 들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청와대는 특감반원의 비위 사실을 파악하고도 쉬쉬하다가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뒤에야 뒷북 대응을 했다. 최근 청와대 직원들의 음주운전, 폭행사건 등 기강 해이 사건이 잇따른 것도 이런 온정적인 ‘제 식구 감싸기’ 태도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청와대 지휘선상의 비서관부터 민정수석, 비서실장까지 그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2일 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페이스북에 “국내에서 많은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며 “믿어주시기 바란다. 정의로운 나라, 국민들의 염원을 꼭 이뤄내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고 썼다. 잘못은 드러내고 일벌백계해야만 되풀이되지 않는 법이다. 여당 내에서도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청와대 참모들을 전면 교체해 분위기를 쇄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 대통령은 귀국 후 특단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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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유·초·중등교육 부문은 늘 시끄럽다. 지난해부터 올해 중반까지는 대입제도 개편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더니 요즈음은 사립유치원 문제로 분주하다. 그 외에도 늘 자잘한 문제들이 벌어져서 교육현실이 참 절망스럽다는 비판의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유·초·중등교육 부문은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으니 회복 가능성이 큰 환자라고 할 수도 있다. 울퉁불퉁 불만을 제기하는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치유력이 있는 거라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환자이다. 내가 보기엔 고등교육이야말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환자이다.

얼마 전 한편으론 흥미롭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끔찍하기도 한 통계를 보았다. 교육개발원에서 2016년 기준으로 대학원, 전문대, 4년제 대학의 학과명이 몇 개나 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는 대학원 9664개, 전문대학 6884개, 4년제 대학 1만2359개였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은 200개 정도 된다. 4년제 대학 200개 중 서로 이름이 다른 학과가 1만2359개나 된다니 참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이 과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학과를 개설할 만큼 발전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교육개발원 조사에 의하면 1만2359개 학과를 가르치는 내용으로 분류해보면 약 121개로 압축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한 학과에 100개 이상의 다른 이름을 붙여놓은 셈이다. 예컨대 어느 대학에선 국문과가 다른 대학들에선 문화콘텐츠학과, 디지털콘텐츠학과, 스토리텔링학과 등으로 불리는 식이다. 대학들은 왜 똑같은 내용의 학과에 이렇게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는 고등교육 문제의 아픔과 비밀이 숨어 있다.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학령인구의 감소로 학생 모집이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상위권 대학이야 학과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학생들이 오니까 국문과라고 붙여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학생 모집에 곤란을 겪는 대학은 국문과보다는 문화콘텐츠학과, 스토리텔링학과 같은 이름이 트렌드에도 맞고,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 것도 같아 학생을 끌어들이기가 쉽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작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는 1만2359개의 학과명은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른 중요한 이유는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서다. 예컨대 문화콘텐츠를 강조하는 예산지원이 있으면 그 평가기준에 맞추기 위해 국문과의 이름을 곧장 문화콘텐츠학과로 바꾸고 학과의 목적을 프로젝트에 맞게 만들어 서류를 낸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단기적이다. 예산 지원 담당자가 바뀌어 이번엔 디지털 시대를 강조하는 프로젝트 예산지원을 내면 또 문화콘텐츠학과를 디지털콘텐츠학과로 바꾸어 서류를 낸다. 이러한 대학의 모습은 상아탑, 학문의 전당, 자율과 자치의 원리 등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참으로 비참해 보인다. 도대체 왜 대학은 이런 수모를 감수하면서 예산지원에 목을 매는 것일까?

반값 등록금 정책은 교육 불평등을 완화하고 대학교육의 공공적 성격을 높이려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반값 등록금으로 발생한 재정결손을 메워주는 지난 정부의 예산지원 방식에 있었다.  이 방식은 대학이 종합적인 자기계획을 수립하여 통으로 심사를 받고 적절한 수준에서 통으로 지원하는 방식이 합당할 것이다. 그래야만 대학의 자율과 자치가 산다. 그런데 지난 정부는 그러지 않고 수많은 목적사업으로 잘게 쪼개어 예산지원을 하고 사업 하나하나마다 심사기준을 엄격하게 제시해 대학을 평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대학은 이 예산지원을 받지 않으면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그 평가기준에 맞추기 위해 학과 명칭을 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예산지원을 위한 평가기준의 기본적 원칙은 아마도 기획재정부가 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평가기준을 구체화하는 건 교육부에서 했을 것이다. 기재부가 세우는 기본 원칙은 아무래도 경제적 효율성에 치우칠 수밖에 없고 대학사회의 특성에 잘 안 맞을 가능성이 크다. 대학사회의 특성을 충분히 변론·옹호하지 못한 교육 관료의 책임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취업률을 기본원칙으로 강조하면 예체능계나 인문사회계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고, 그런 식으로 대학사회는 조금씩 무너져 왔다. 이제는 전 정부의 예산지원 방식, 그와 연동된 대학평가 관행이 새 정부에서도 지속되고 있는데 그런 관행에 너무 익숙해져 이제는 비명을 지를 줄도 모른다.           

앞에서 나는 유·초·중등교육이 늘 시끄럽지만 그래도 내부 동력이 살아있어 회복 가능성이 높은 환자와도 같다고 했다. 아마도 유·초·중등교육이 갖는 이러한 힘은 부족하나마 그간에 진전된 교육자치 분권에 힘입은 것이다. 진정 창조적인 동력은 자율과 자치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열어갈 창조적 동력을 얻고 싶다면 반값 등록금으로 인한 재정결손을 보전하기 위한 정부 예산지원과 평가 방식을 대학의 자율과 자치가 가능한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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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세계보건기구는 1986년 캐나다 오타와 헌장에서 “세계 보건의료 패러다임이 치료 중심에서 예방 및 만성질환 관리로 전환하고 있다. 이제 세계 각국은 보건정책을 건강 증진 중심으로 전환할 것을 권고한다”고 했다. 만성질환 관리에 역학적 특성, 생활양식, 다양한 건강결정요인을 고려하되, 의학 위주의 건강수준 향상 전략을 탈피하고, 사회제도 및 정책의 개입과 지역사회 역량 강화 및 참여를 보다 강조했다. 이에 선진국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의료서비스 제공 시스템을 건강증진체계로 전환했다.

우리나라도 질병 양상이 급성질환에서 만성질환의 증가로 변함에 따라 법·재정·행정의 지원체계 구성을 변화시켰다. 1992년 보건정책에 ‘암·성인병 등 만성질환 예방을 위한 바른 건강생활의 정착’이 주요 정책으로 추가된 것을 시작으로, 1995년 국민건강증진법의 제정, 1997년 국민건강증진기금 조성, 1998년 보건복지부 내 건강증진과의 신설이 이어졌다. 2015년에는 의료법 개정으로 간호사가 ‘간호 요구자에 대한 교육·상담 및 건강 증진을 위한 활동의 기획과 수행’을 담당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보건의료정책은 여전히 질병 치료 중심으로 효율적이지 못한 의료 이용을 보이고 있다.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의사 외래진료는 평균 17회(OECD 평균 7.4회), 평균 재원일수는 18.1일(OECD 평균 8.3일)로 OECD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이에 더해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노인 의료비 증가로 건강보험재정의 지속가능성이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보건의료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 효율적으로 의료자원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보건의료체계를 치료 중심에서 질병예방과 만성질환 관리 중심으로 전환하고, 사람과 지역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나라도 간호사가 지역사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국민의 건강을 관리했다. 1960년대부터 결핵관리와 모자보건활동, 1980년대부터 의료취약지의 보건진료원은 주민의 1차 건강관리를 담당했다. 그러나 이후 우리나라는 치료 중심의 보건의료체계로 인해 병상과 의료장비는 급증하고 있는 반면, 의사를 비롯한 활동보건의료인력는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미국, 영국, 스웨덴 등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병원 치료 중심에서 지역사회의 통합적 건강돌봄서비스로 체계를 전환하면서 간호사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역사회의 간호사는 환자의 집을 방문해 환자의 건강 상태 및 환경, 상황을 확인·판단하여 환자에게 필요한 간호를 하거나 교육 및 상담, 투약관리 등을 하고, 식사준비나 청소 등의 생활지원서비스도 기획·관리하면서 가정에서 노인이 건강한 생활을 지속하도록 도왔다. 또한 의사나 사회복지사와 연계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의료와 요양 사이에 가교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의료비 절감과 양질의 보건의료 서비스 제공에 기여했다.

정부는 지난달 20일 ‘지역사회 중심 통합 돌봄서비스(커뮤니티케어)’를 발표했는데, 이 제도의 성공적 실현을 위해서는 선진국과 같이 국민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건강관리를 하는 간호사와 돌봄인력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직종과 연계한 종합적 건강돌봄서비스 체계를 구축해야 지역사회 중심 통합 돌봄서비스 사업이 성공할 것이다.

<신경림 | 대한간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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