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적으로 정당한 판결이라도 때를 놓치면 그 의미는 반감된다. 민사소송법 제199조가 종국판결의 선고기간을 5개월 이내로 규정하고 있지만, 재판의 지체는 불가피하다.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27조 제3항의 존재 이유는 이런 지체가 과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연된 재판과 관련해서 강구할 수 있는 구제수단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가배상책임의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헌법소원심판청구의 차원에서 강구할 수 있다. 그러나 재판지연에 따른 국가배상책임의 가능성을 제시한 독일과 같은 특별규정(민법 제839조 제2항 제2문)이 없는 이상, 일반적인 국가배상책임의 법리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국가배상책임의 인정은 이론상의 가능성에 그치고 기대할 수 없다. 헌법소원심판의 경우에도 “헌법 제27조 제3항 제1문에 의거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실현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입법형성이 필요하다”고 판시한 헌재 1999.9.16. 98헌마75에서 볼 수 있듯이, 인용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유럽과 독일은 우리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유럽인권협약 제6조 제1항은 ‘상당한 기간 내에 심리를 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고, 유럽기본권헌장 역시 행정적 처리 및 재판이 상당한 기간 내에 행해질 것을 요구한다(제41조, 제47조). 유럽최고재판소는 상당한 절차기간의 원칙을 이미 오래전부터 인정하여, 비단 행정절차만이 아니라 재판절차에서도 인정하였다. 나아가 유럽인권재판소는 상당한 기간 내에 판결을 받을 권리가 침해될 때에는 효과적인 권리구제가 회원국 국내법에 존재해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유럽인권재판소는 2006년 6월 재판지연에 대한 유효한 권리구제가 독일법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인하였고, 2010년 9월 독일 연방정부에 대해 늦어도 1년 내에 재판지연에 대한 권리구제제도를 도입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독일 연방정부는 2011년 11월 ‘재판지연보상법’을 제정, 동법이 같은 해 12월3일부터 헌법재판을 비롯한 모든 재판에 통용되고 있다. 실례로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는 2015년에 처음으로 헌법소원심판절차의 과도한 지속을 이유로 심판청구인에게 손실보상을 해주라고 판시하였다. 재판부의 소관 문제가 불분명하고 사건배당도 되지 않아 소요된 약 30개월의 재판지연은 상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법 시행 2년의 중간평가에 의하면, 손실보상소송의 홍수는 일어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재판의 신속화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재판의 실효성은 시간적 요소에 좌우된다.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입법적으로 구현되지 않아 그 권리가 사실상 말뿐인 것은 재판청구권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상황이다. 연방 헌법(기본법)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독일과 달리 우리는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기에, 그것을 입법으로 구체화할 요청은 그들보다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입법의 부재상황을 입법형성의 여지(입법재량)를 내세워 정당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재판지연보상법은 효과적인 권리보호의 요청과 법관의 독립성 요청 간의 충돌에서 나름의 조화로운 해결책의 산물이다. 언제까지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에 머물 수는 없다. 정의의 지체가 문제되지 않을 사전의 방책 역시 요구된다. 따라서 행정소송에서 독일처럼 집행정지의 원칙이 채택되어야 한다.

<김중권 | 중앙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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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헤딩’을 하는 게 늘 두려웠다. 성인남자 평균 신장에 조금 못 미치고 일찍 안경까지 쓰는 바람에, 마음 같아서는 98 프랑스 월드컵 때 ‘헤딩’으로만 브라질 골문을 두 번이나 흔들어버린 지단처럼 해보고 싶었지만, 동네축구에서는 조금 한가로운 좌우 외곽에서 ‘센터링’을 올리는 데 집중했다.

그럼에도, 나의 ‘센터링’이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골문으로 집중되고 동료 선수가 온몸을 뒤틀어 ‘헤딩 슛’을 터트리는 광경! 아름다웠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용어들은 ‘헤더’와 ‘크로스’로 변했다. 머리로 패스를 하거나 슛을 하는 것은 이제 헤딩(heading)이 아니라 헤더(header)다. 오랫동안 사용되던 센터링이나 핸들링도 ‘잘못된 일본식 영어’(재플리시)로 간주되어 크로스나 핸드볼 파울로 변했다. 문법적으로 좀 더 예민한 사람은 헤딩 패스 대신 헤디드(headed) 패스가 맞다고 강조한다. 솔직히 ‘느낌적 느낌’으로는 헤더가 헤딩 같지는 않다. ‘자장면’은 ‘짜장면’이어야 하는 것처럼, 헤딩은 거칠고 메마른 운동장에서 온몸을 던지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헤더는 세련된 기술처럼 들린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럼에도 가능하다면 용어의 ‘새로 고침’은 앞으로도 꾸준히 진행되어야 한다. ‘오렌지’를 ‘어륀지’라고 부르자는 ‘발음 사대주의’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하고 무시해도 좋지만, 스포츠는 일정한 제도와 규칙의 ‘세계적 약속’이다. 세대 간의 언어 감각도 다를 수 있다. 컴퓨터로 축구 게임을 하며 유럽 축구에 몰두한 세대가 벌써 30~40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에게 ‘헤더’나 ‘크로스’는 낯선 용어가 아니다.

각 종목의 전술 변화에 의해 새 용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요즘 축구 중계에서 흔히 듣는 용어가 ‘빌드업’이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차범근 해설위원은 ‘공격 작업’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한동안 이 용어가 정착되는 듯하다가 요즘은 ‘빌드업’으로 통일되고 있다. 이는 ‘공격 작업’의 원어가 ‘빌드업’에 가까운 면도 있지만, 몇 해 사이에 펩 과르디올라와 위르겐 클롭으로 대표되는 ‘점유율과 빌드업’의 전술 관계에 의하여 ‘빌드업’이 의미 있는 용어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골키퍼를 포함한 최후방에서 골을 넣을 수 있는 최전방까지 의미 있게 연결되는 복잡한 공격 과정을 가리킬 때, ‘빌드업’을 쓰는 게 맞다.

11월26일, 한국체육기자연맹이 주관한 ‘바람직한 스포츠 용어 정착을 위한 스포츠미디어 포럼’에서도 이와 관련한 주장이 의미 있게 제기되었다. ‘파이팅’ 같은 말이 일제 군국주의의 잔재라는 점을 들어 ‘아자’ ‘힘내자’ 같은 말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시합’ ‘계주’ ‘기라성’ 같은 일본식 조어도 ‘경기’ ‘이어달리기’ ‘쟁쟁한’ 등으로 바꾸자는 의견이다.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고쳐 쓸 수 있다면 고쳐야 한다.

그러나 ‘파이팅’이 비록 일제 시대 용어이기는 해도,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그 말에 다른 의미를 충분히 덧붙여 집합적 감수성을 녹아낸 것이라면 그 나름의 무게가 있다. 문법으로도 틀리다고 하면, 영어 쓰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런 의미로 ‘파이팅’을 외친다고 하면 될 일이다. 선수들이나 일반 회사에서나 ‘파이팅’을 ‘적군 섬멸’의 뜻으로 쓰는 사람은 없다. 이를 ‘아자’ 혹은 ‘으랏차차’라고 부르면 좋겠으나 언어 행위는 시간의 적층 위에서 생성/공유되는 것이다.

‘기라성’처럼 단지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뜻하는 ‘일본식 조어’라는 의미에서 바꿔야 한다면, 근대 이후 우리 학문과 일상에 녹아 있는 거의 모든 생활 언어를 조선시대로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고유한 우리말’ 중의 어떤 것은 생활 조건의 측면에서 ‘농업 봉건’의 산물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일제강점기가 아니더라도 사멸했거나 변화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 제기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끝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토론과 활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좀 더 알맞은 용어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날의 심포지엄과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일제 잔재의 청산은 ‘일본식 조어’를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랜 식민 피지배와 그 이후의 독재 과정에서 내면화된 사회의 작동 방식 자체를 문제 삼는 일이다. 약육강식과 기회주의가 거의 유일한 생존 방식 아니었던가. 이 점에 있어 스포츠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폭력과 위계질서가 내면화된 일상 말이다.

내친김에 덧붙이자면, 천편일률적인 묘사나 동시대의 감수성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기사가 일본식 조어보다 더 문제적이다.

‘자로 잰 듯한 패스’나 ‘전광석화 같은 중거리슛’은 복잡하고 미묘한 경기를 딱 그 정도로만 보았음을 말해주며 ‘국위선양’이나 ‘태극전사’ 혹은 ‘맏형 리더십’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여전히 스포츠 미디어가 ‘독재의 잔재’인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준다. ‘비치발리볼’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라. ‘섹시 화끈한 비치발리볼 경기’ ‘뜨겁게 달군 노출 패션 비치 발리볼’ ‘눈요기 여름스포츠 비치발리볼’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줄줄이 나온다. 전반적으로 보면, 급변하는 인터넷 언론 환경 때문인지, 스포츠계의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탐사 기사나 심층 진단 시리즈가 줄고 개인 블로그를 쓰는 듯한 ‘팬심 기사’가 넘쳐나는 것도 큰 문제다.

어쩌면 문제의 핵심은, 오래전에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이나 그 잔재 용어들이 아닐 수도 있다. 21세기의 중엽을 향해가는 지금에도, 일제와 독재가 강제한 생존 조건을 벗어나지 못한 스포츠 현실에서 국가주의적, 남성적, 신체적 우월성의 신화에 갇혀 틀에 박힌 시선과 진부한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 스포츠언론의 현 상태가 더 문제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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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인천 서구의 미혼모시설에서 2년여 동안 강의했다. 강의 중 이따금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를 했더니 읽을 책이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궁리 끝에 ‘페친’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적게는 열아홉살, 많아야 스물다섯살밖에 안된 앳된 얼굴의 미혼모와 그들의 아기들이 읽을 책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불과 열흘 만에 무려 5000여권의 책이 답지했다. 원장 수녀님과 사회복지사는 깜짝 놀랐고, 그 놀람은 곧 한숨으로 이어졌다. 책을 곳이 마땅치 않고, 또 정리해둘 책장도 없다는 거였다.

또다시 천사들이 나타났다. 상인들로 구성된 수유시장도서관의 목공팀이 나서서 자재값도 안 받고 책장을 짜주었다. 공동체실은 순식간에 작은 도서관이 되었다.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강의 때마다 빔 프로젝터의 부재가 아쉬웠던 나는 다시 페친들에게 호소했다. ‘1만원의 기적’이 필요하다고. 순식간에 144만원이 모였다. 거기에 약간의 돈을 더 보태 빔 프로젝터를 설치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아이들은 좋아했다.

그러나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주위의 시선이나 편견, 외로움 따위의 감상적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2년여간 강의하면서 아이들과 소풍 한번 가지 못했다. 이따금 계획을 세워보긴 했다.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자거나, 호프집에서 회식 한번 하자거나, 등산 한번 해보자거나, 큰맘 먹고 1박2일로 동해안에 가보자는 둥. 그러나 단 한번도 실행하지 못했다. 매번 꿈만 꾸다 말았고 그럴 때마다 놀림과 힐난이 쏟아졌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샌드백이 되어 주었다. 바보처럼 나는 그게 참 좋았다.

2주에 한 번 인문학 강의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강의 때 원장 수녀님과 사회복지사들은 시쳇말로 슈퍼맨이 되어야 했다. 스무 명의 엄마들을 대신해서 스무 명의 아기들을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원장 수녀님이 참 대단하셨다. 조그만 체구였지만 아기 서넛은 거뜬히 돌보셨다. 업고 안고 먹이고, 얼르고, 기저귀 갈아주고…. 그 수녀님이 시설을 떠날 때 아이들은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나도 울었다.

지난 9월 순천도서관 강의 때 그 미혼모시설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떠올라 강의하다 말고 펑펑 울었다. 시설에서 2년을 지내고 나면 의무적으로 나가야 한다. 월세보증금을 지원받아 나간 아이들은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문제는 아기를 맡길 데가 없다는 것.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결국 구직을 포기하고 다시 시설에 들어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린다.

‘한부모 아이 돌봄 서비스’라는 게 생겼다기에 무척 반가웠다. 진작 그런 게 있었더라면 원장 수녀님 허리가 휘지도 않았을 테고, 1년에 한번이라도 아이들과 소풍 수업을 할 수 있었을 테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엊그제 모 국회의원이 그 예산, 바로 그 돌봄 서비스 예산 61억원을 전액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단다.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떠올랐다. 사람공동체의 무수한 가치와 덕목 중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아기를 낳는 건 한 엄마지만 그 아이를 온전히 기르는 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의무다.

도대체 정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건가. 정치인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최준영 | 거리의 인문학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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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의 달 12월, 한해 한두 번 보는 옛 동기, 살짝 서먹한 한 순배 돌고 나면 뭐 하고 사는지 요즘 사는 게 어때 같은 말들이 오갈 테지요. 그럭저럭 산다거나 죽 쑤고 있다, 뻔한 걸 뭘 묻냐며 쭈뼛거리다가 술 두어 순배 돌면 슬슬 헤실헤실해집니다. 어디 가서도 말 못할 부부 잠자리 문제나 배우자의 외도, 이혼 절차 중이라거나 자녀 뒷문으로 넣은 무용담에 뒤로 애인 둔 얘기까지 털어놓기도 하지요. 술은 동고동락의 옛날로 돌아가게도 하니까요. 말하면서 아차 싶지만 ‘에이 뭐, 우리 사인데’ 하며 허심탄회합니다.

그런데 그때 거기서 끄덕끄덕 들어주던 친구 중에는 간혹 다른 술자리에서 “걔가 그러면서 어땠는지 알아?!” 하며 들은 얘기를 자기만 아는 토픽으로 삼는 이도 있습니다. 들은 대로 본 대로 이러저러하게 아무렇게나 말을 늘어놓는다는 말, ‘주워섬기다’ 그대로인 친구, 어디 가나 꼭 있습니다. 그 너스레에 다들 박장대소하지만,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심각한 가정사나 개인사를 그의 농지거리로 전락시키는 셈이지요. 사랑과 증오가 종이 한 장 차이이듯 벗도 말 놀림 하나에 바람 휑하니 돌아서기도 합니다.

영화 <올드보이>는 놀린 혓바닥으로 시작해 잘린 혓바닥으로 멀리 이사 가기 전에 본 걸 무심코 흘렸는데 15년 뒤 참혹한 복수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죠. 가위로 자신의 혀까지 잘라내지만 끝내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속담 ‘들은 말은 들은 데서 버리고 본 말은 본 데서 버려라’는 누군가의 삶을 안줏거리나 화젯거리로 삼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걔 요즘…’이 친구에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고 긴 앙심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친구의 사정을 제대로 공감한다면 절대로 가십거리로 여기진 않을 겁니다. 설령 이목이 끌리고 머리에 떠올랐더라도 딱 거기까지입니다. 친구는 안주가 아니니까요. 입 궁금하면 안주를 더 시켜야죠.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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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나이 든 동네인 줄 알았던 을지로에 다시 시간이 흐른다. 색 바랜 골목길 사이로 청년들이 스며들면서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셔터가 내려진 빈집에 청년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들의 아지트 옆으로 카페들도 생겨났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묘하게 뒤섞인 을지로는 지금 가장 ‘뜨는’ 동네다.

을지로의 옛 이름은 구릿빛 진흙이 많은 땅, ‘구리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황금정(黃金町)으로 부르다가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 때 지금의 을지로란 이름이 붙여졌다. 1930년대 이 일대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 일제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촌, 남쪽은 남촌이라 불렀다.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은 일본을 거쳐 온 서양의 신문화가 조선에 등장하는 주 무대였다. 양복을 입고 ‘딴스홀’을 출입하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은 ‘퇴폐의 상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의 근대 문학이 싹튼 곳도 바로 여기다. 당시 ‘오갑빠’(앞머리를 일직선으로 자른 머리) 스타일의 구보 박태원이 막역한 사이였던 봉두난발의 이상과 함께 황금정 일대를 활보하곤 했다. 이상이 신혼살림을 차린 허름한 셋집도 이곳에 있었다.

을지로가 일제 때 금융과 쇼핑의 중심지였다면, 1970~1980년대는 철공소와 인쇄소 등이 밀집한 ‘제조업의 메카’였다. 하지만 1990년대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활력을 잃었다. 을지로가 도시의 주변부로 숨어든 것도 이 무렵부터다. 쇠퇴해가던 을지로는 2~3년 전 청년 예술가들이 들어오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허름하지만 비밀 같은 공간을 찾아 저녁이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잊혀진 공간 을지로를 사람들이 다시 찾는 이유는 뭘까? <다시, 을지로>의 저자 김미경은 ‘공존’을 꼽는다. 과거와 현재, 새로 골목에 입성한 청년들과 오랫동안 이 골목을 지켜온 가게 사장님들과의 공존. 청년 예술가들에게 빈집을 내어주고 임차료를 지원하는 중구청의 정책도 한몫했다. 또 다른 이유는 공간이 주는 이점 때문이다. 이곳엔 한때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어준다’는 업체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어쩌면 을지로가 보여주는 공존이야말로 구도심을 살리는 도시재생의 모범답안에 근접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 도시학자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자신들이 실제로 살지 않는 공간에 대한 계획과 개발은 ‘도시 재건축이 아니라 도시 약탈’이라고 말한다. 그가 소개한 일화는 이를 잘 설명한다. 뉴욕 이스트할렘 새로 정비된 저소득층 주택단지에 자리를 크게 차지한 잔디밭이 있었다. 지역 관계자들은 “이제 가난한 사람들도 누릴 거 다 누린다”며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정작 주민은 자신들의 집을 헐어 버리고 만든 잔디밭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가 저게 필요하대요?”

그는 시 당국과 개발 관계자들이 지역 주민의 삶에 대해서 실제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개발’이나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엄청난 폭력을 휘둘렀다고 말한다. 그는 수십억달러를 들여 수립한 도시계획이 오히려 도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된다. 이는 도시재생 사업이 곳곳에서 진행 중인 서울에도 유효하다. 종로구 옥인동, 사직동 등은 재개발을 두고 여전히 찬반이 갈리는 곳들이다.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남기자는 건 아니다. 도시는 지자체, 도시계획가들이 아닌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제이콥스는 자신이 살았던 뉴욕 허드슨가의 일상을 발레에 비유했다. 도시는 무질서하지만 발레 공연처럼 각자 역할을 맡은 거리의 무용수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의미다. 만약 도시의 거리를 걸어다닐 때 날마다 바뀌는 즉흥 발레를 볼 수 있다면 그 도시는 일상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서울도 다시 발레를 추어야 할 때이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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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면 늘 좋지만 그게 천마산이라면 더더욱 아니 좋을 수가 없다. 꽃에 입문하고 처음으로 찾은 산. 길지 않은 나의 꽃이력을 따져보면 천마산의 한 골짜기로 나의 반질반질한 등산화는 미끄러져 들어간다. 늘그막에 우연히 나의 전부를 투신케 한 취미의 처음이자 바탕 같은 곳이겠다. 그 천마산의 정상 바로 아래의 돌핀샘에 앉아 쑥떡과 커피를 먹는다. 얼마 전 다녀간 첫눈의 흔적 사이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저만치 수피가 울퉁불퉁 발달한 황벽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도 벌써 12월이네, 탄식을 여러 번 들었던 뒤끝인가. 문득 생의 질서가 어수선해지고 삶의 갈피가 헛갈릴 때 나의 근원이 어디일까를 궁리해 보기도 한다. 연말이고 겨울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찬 기운에 편승하여 코끝을 싸늘하게 두드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라서 겨울산에 드니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당장 저 황벽나무의 잎은 뿌리를 찾아서 흙으로 녹아들고, 이 돌핀샘의 물은 빗방울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바다를 찾아 한강으로 내려가는 중!

고등학교 수학시간. 이차함수 문제가 나오면 그림부터 먼저 그렸다. 이른바 x축과 y축을 긋고 0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땐 그래도 꿈과 더불어 연습장에 허술하게 표시한 원점이라도 있었다. 오늘 내가 오른 산도 말하자면 엎어놓은 포물선이고 한발한발 이동한 자취를 연결하면 점근선일 테다. 그렇다면 나도 항상 그 어디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는 중!

황벽나무는 엄청 큰 나무이다. 그 앞에서 나는 너무나 작아서 여름에 피는 노란 꽃이나 가을에 여무는 열매를 지나치기가 일쑤다. 다만 언제나 폭신폭신한 코르크의 탄력을 확인하고 즐기기 위해서 수피를 쿵쿵 쥐어박으며 황벽나무를 구별해 왔다. 오늘은 때도 때이고 이제 나이도 나이니만큼 나무 앞에서 오로지 이 생각만 하기로 했다. 겨울을 알몸으로 앓는 나무 앞에 서면 나무를 木으로 표기하는 연유가 저절로 짐작되는바, 이 나무들 밑으로 들어가 똥막대기(一)처럼 눕게 되는 곳에 나의 근본이 있지 않을까. 그러한 궁리와 함께 황벽나무 아래에서 손가락으로 ‘本’이라는 글자를 허공에 적어본다. 황벽나무, 운향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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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소선거구제를 근간으로 하는 현행 제도에 문제가 많다는 데 대해서는 모든 정치 진영이 공감한다. 하지만 이 제도를 어떤 제도로 대체할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크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대안이라는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비교적 쉽게 풀리나 했더니,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정치적 계산을 하면서 한 발 빼는 듯한 모습을 보여 혼란스럽다. 지난 대선에서 모든 정당이 개헌을 하겠다고 공약해 놓고는 제대로 논의도 않고 기회를 날려 버렸는데, 이러다간 선거법 개정도 물 건너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민주당은 머뭇거릴 어떤 정당한 이유도 갖고 있지 못하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했고 그 계승자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등장했던 여러 정부들과는 다른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다. 두 보수정부를 거치면서 자칫 다시 권위주의화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우리 민주주의의 근간을 손봐서 좀 더 성숙하고 정의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적폐청산도 좋고 한반도 평화체제도 더없이 소중한 성취이지만, 그 모두는 결국 우리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과제로 이어져야 한다. 선거제도의 개혁이야말로 그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이 일은 어쩌면 개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정치적 대표자를 선출할 때 모든 유권자들의 의사가 공평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정의’의 문제다. 승자독식의 원리에 따르는 현행 소선거구제는 표의 등가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낙선자를 지지한 많은 유권자들의 정치적 의사를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불의한 제도다.

게다가 이 제도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지역주의라는 망국적인 정치적 병리를 낳은 주범이다. 사표(死票)가 없도록 하고 유권자들의 지지 정도와 국회 내 정당들의 의석 수를 최대한 일치하도록 하여 그러한 불의를 교정하고 병리를 치유해야 한다.

물론 민주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합의를 해도 장애물이 많다. 자유한국당의 반대부터 넘어서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이 제도에서 소수당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서인지 중대선거구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이 제도는 국회의원 정족수 300명을 그대로 두고서는 도입하기 쉽지 않은데, 여론은 의원 수 확대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 제도가 대통령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선거제도 개혁, 과연 가능할까?

우리 사회는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 6호기 건설 재개 여부 문제 같은 첨예한 갈등 사안을 이른바 ‘시민참여단’을 통한 공론화 과정으로 해결해본 경험이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표본적 대표 시민들을 추첨의 방식으로 선발하여 공정하고 심도 있는 숙의를 하게 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시민배심(원)제’의 한국적 버전인데, 사실 선거제도 개혁이야말로 이런 방식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정당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결국 당리당략부터 앞세우기 마련인지라, 직접 이해당사자가 아닌 시민배심원들이 가장 공정하게 우리 정치공동체 전체를 위해 제일 좋은 안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진행된 공론화 과정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그런 문제해결 방식을 정부가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했다는 문제제기는 급소를 찌른다. 또 그 과정이 원자력 발전 문제는 어쨌든 비교적 수긍할 만하게 풀었지만, 대입제도와 관련해서는 시민참여단에 선택지들을 제시하며 해답을 요구한 사안이 적절한 공론화 대상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그런 비판들은 시민배심을 통한 문제해결 방식의 민주적 정당성과 합리성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라기보다는 보완할 지점들에 대한 지적이라고 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의 중대선거구제를 포함하여 각 정당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안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그 안들을 중심으로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 된다. 그러면 정치적 책임성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절성에 대한 시비도 생기지 않게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에는 공론화 과정을 좀 더 합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 비교적 충분한 시간적 여유도 있다.

시민참여단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선택할지, 그런다고 해도 어떤 비율로 그렇게 할지, 아니면 아예 다른 제도를 선택할지, 의원정족수 확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은 문제는 그에 따른 최종적인 정치적 결정을 어떻게 내릴지에 대한 정치권의 최소 합의뿐이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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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농단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서울중앙지검은 3일 “이 사건(사법농단)은 특정인의 개인적 일탈이 아닌, 업무상 상하관계에 의한 지시·감독으로 이뤄진 범죄행위”라며 “두 전직 대법관은 이미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직속 상급자로서 더 큰 결정권한을 행사한 만큼 영장 청구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전직 대법관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 12월 4일 (출처:경향신문DB)

두 전직 대법관은 임 전 차장이 법원행정처 기조실장과 차장으로 근무할 당시 상관인 법원행정처장을 역임했다. 박 전 대법관은 2014년 2월부터 2년간 행정처장으로 재직하며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대선개입 사건,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지방의원 소송 등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박 전 대법관 후임으로 행정처장을 지낸 고 전 대법관은 ‘최유정 전관로비 사건’ 당시 법관들에 대한 수사 확대를 차단하기 위해 일선 법원으로부터 검찰 수사기록을 빼낸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검찰은 장기간 조직적으로 자행된 법관사찰 등에는 박·고 전 대법관 모두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두 전직 대법관 수사 과정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사건 가해자 측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를 만난 정황도 포착했다고 한다.

대법관은 사법 정의의 상징이며 인권 수호의 최후 보루다. 개별 법관들로서는 일생을 걸고 도달하고픈 목표이기도 하다. 지금 구속의 기로에 놓인 전직 대법관 2인을 보며, 법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통렬히 자성해야 마땅하나, 혹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전히 검찰이 과잉수사를 한다고 생각하거나 ‘징계사유에 해당할지는 몰라도 형사적 범죄는 안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혹여 그런 법관들이 다수라면, 법원에 더 이상의 희망을 걸기는 어렵다.

박·고 전 대법관의 구속 여부는 이번주 중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거쳐 결정된다. 영장심사를 맡을 법관은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법과 원칙, 사실과 증거에 따라 판단하면 그뿐이다. 법원이 이번 기회마저 놓친다면 사법 신뢰를 회복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사법권은 법관의 것이 아닌, 주권자의 것임을 새겨야 한다. 검찰도 수사의 고삐를 죄어 사법농단의 정점인 양 전 대법원장을 조속히 소환조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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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기후변화협정의 세부 이행규칙을 마련하기 위한 제24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2일(현지시간)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개막했다. 총회에 참가한 197개국은 오는 14일까지 협정이행에 필요한 세부 이행규칙을 마련하고, 나라별 감축행동과 검증방식을 정하게 된다. 교토의정서가 만료되는 2020년 이후의 새 기후변화 체제를 규정한 파리협정은 협정 이행을 위한 세부 이행규칙을 올해 안까지 마련하도록 돼 있어 이번 회의가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파리협정은 그간 선진국들에만 부여됐던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중국, 인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으로 확대하고, 5년마다 온실가스 감축 이행 여부를 점검하는 동시에 상향된 목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2100년까지 지구의 기온 상승폭을 2도 이내로 유지하고, 결과적으로 1.5도까지 제한하도록 노력하는 목표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기한 안에 합의가 도출될지는 불투명하다. 지난해 6월 협정 탈퇴를 선언한 미국은 이번 회의에 불참했다. 미국은 주요 20개국(G20) 정상이 지난 2일 발표한 공동성명에 “파리협정을 탈퇴하고 모든 에너지원을 활용하겠다”는 자국의 입장을 끼워 넣었다. 공동성명의 기조는 “파리협정의 불가역성을 재확인하고 완전한 이행을 약속한다”는 것이지만, 딴지라도 거는 듯한 미국의 입장이 담기면서 김이 샜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가 지구촌의 공통과제를 달성하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극우파인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당선인도 유세과정에서 협정 탈퇴를 예고한 바 있고, 호주 등 일부 국가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참가국 내에서도 모든 국가에 단일 이행규칙을 도출해야 한다는 선진국과 개도국에는 유연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개도국 간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이날 개막회의도 일부 회원국이 협정이행 서류를 내지 않아 3시간 지연되는 등 출발부터 어수선했다. 파리협정의 위태로운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구촌 곳곳에서 가뭄과 산불, 이상기후 등 지구온난화의 부작용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소규모 섬나라 등 기후변화 취약국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위기에 처한 지 오래다. 파리협정체제가 붕괴한다면 지구온난화를 멈출 해법은 사실상 사라지고 만다. 인류가 경각심을 갖고 조금씩 양보해 타결안을 도출해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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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올해도 국회가 내년도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12월2일)을 넘겼다. 여야는 당초 지난달 30일 본회의를 열어 예산안을 통과시키려 했지만 예산 심사가 완료되지 않아 처리하지 못했다. 헌법 54조 2항은 예산안 처리 시한에 대해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의결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헌법을 존중한다면 응당 12월2일을 넘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당연히 예산 심사는 그 전에 완료돼야 한다. 국회법은 예산안과 부수 법률안 심사를 11월30일까지 마쳐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매번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국회의 악습이 되풀이되고 있다. 예산안 자동부의제도를 규정한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에도 4년 연속 법정시한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올해는 예결특위가 감액 심사조차 마무리하지 못한 채 예산안 심사 시한이 종료되었다. 국회의 직무유기가 더는 용납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법정시한을 넘긴 예산안 처리는 필시 밀실에서의 ‘깜깜이 심사’ ‘졸속 심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된다. 여야는 예결위 예산소위 활동이 지난달 30일 종료되자 시간이 촉박하다는 핑계로 여야 3당의 예결위 간사 등으로 구성된 비공식 회의체인 ‘소소위’를 가동해 예산안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소소위’는 예산소위와 달리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며 속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감시의 사각지대인 밀실에서 여야의 정치적 흥정으로 예산이 조정되고, 날림 심사가 이뤄지는 걸 막을 방도가 없다. 밀실 논의 과정에서 민원성 ‘쪽지 예산’이 난무하는 구태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야는 법정시한 내 예산안 처리 불발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있지만, 손쉬운 예산 담합과 지역구 예산 챙기기를 위해 고의로 예산심의를 지연시켜 ‘소소위’를 가동하는 꼼수를 부린다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원내대표 등의 고위 채널도 마찬가지다. 매번 예산안이 체계적으로 심의되지 않고, 지도부 차원의 담판 성격으로 결정되면서 예산안이 정치적 거래물로 취급되는 고약한 관행이 고착되었다. “깜깜이, 밀실 예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소소위 내용도 공개하는 방안을 고민하겠다”는 여야 원내대표의 다짐대로 해야 한다. 소소위 등에서의 예산 심의 내용을 모두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필수다. 이번 기회에 예산 심의의 투명성을 강화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추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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