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기 유럽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30세 전후였다고 한다. 반대로 새롭게 세상의 주인이 된 자본가, 즉 부르주아들은 결혼에 앞서 양가의 가계도를 펼쳐놓고 장애인이나 병자가 없는지를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들의 ‘선천적’ 우월성을 증명해줄 계급의 육체와 건강을 만드느라 애썼다. 죽음 앞의 평등이라는 이야기가 무색해지는 것은,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이 평등한 시간이란 심장이 멎는 찰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마저도 못 견디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안간힘을 쓰며 그것에 맞서려고 노력한다. 해프닝이 일어나고, 어느 굴지의 대기업 회장은 의식 없이 의료기기들에 의존해 ‘안정적으로 생존’해 있는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차명계좌와 탈세 혐의가 발견되고 있다. 이들도 모두 결국에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24세 하청 노동자가 맞이한 죽음이나, 안전설비 없는 낡은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 또는 환불을 해주지 않고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남성에게 살해당한 성매매 여성의 죽음 같은 것과 비교해 평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위험과 죽음의 분배는 돈과 권력이 그렇듯 불평등하다. 어떤 이들은 부자들이 위험을 감수했기에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에 투자를 할지 고르는 위험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작업환경이 주는 위험 사이에는 엄청난 사회적 거리가 놓여 있다. 그 어떤 호전적인 투자자도 자신의 최후를 발전소의 하청노동자로서 랜턴도 없이 위험천만한 안전점검 업무를 하다가 맞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며 기업의 비용절감과 더 많은 배당에 기꺼이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더 많은 구조조정과 아웃소싱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불만에 차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물론 위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완전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의 운명론적인 성격을 이야기하기에는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한 것들이 여전히 많다. 이것은 단순히 안전규정과 장비의 유무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위험이다. 그곳에서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비용보다, ‘위험수당’을 얹어주고,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해 누군가 다치고 죽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비용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처럼 가장 위험한 업무도 가장 적은 권한만을 갖고 있는 불안정한 하청노동자에게 떠맡기는 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보다도 ‘경제적’이고자 하는 자본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단지 산업재해 문제만이 아니다. 고급 거주구역에 설치된 방범시설과 CCTV는 범죄를 낙후된 지역으로 밀어낸다. 대도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기를 위한 설비들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져 그곳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한다. 위험과 죽음은 결국 가장 힘없는 이들에게로 향한다. 김낙년 교수의 <한국의 학력별 사망률 격차, 1985~2015>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사망률이 낮아지는 가운데 그 효과는 학력에 따라 차등화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특히 60세 이상에서 격차가 크게 벌어졌는데,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세월을 맞은 이들에게로 죽음이 몰려간 탓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사람의 가격’은 돈으로도, 사회적 가치로서도 너무 저렴하다. 만약 안전사고가 났을 때 기업에 철저한 징벌이 내려졌다면, 자본가들은 안정규칙을 귀찮아하는 노동자들을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수많은 연구자금을 안전을 위한 대책마련에 쏟아부었을 터다. 그러나 현실은 누더기로 통과된 산안법에 대해 기업의 부담을 준다며 발악하는 보수언론과 재계의 목소리다.

위험과 죽음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비하고, 책임을 분담함으로써 그것에 맞설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을 우리는 ‘사회’라고 부른다.

<최태섭 | 문화비평가·<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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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새해가 밝았다. 모든 것은 처음이 있다. ‘옆집물리학’은 오늘이 처음이고, 우주는 138억년 전에 처음 시작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만 나아간다. 비가역성이 있어, 되짚어 거꾸로 돌릴 수 없다. 누군가의 모든 처음은 다시 올 수 없는 우주적 사건이다.

올해의 처음이 꼭 사흘 전이어야 할 물리학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달이 기준인 음력으로는 새해까지 아직 한 달도 더 남았다. 지구는 365일을 주기로 태양 주위를 돌아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다. 사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이나 추분, 낮이 가장 긴 하지, 밤이 가장 긴 동지를 새해의 첫날로 삼는 것이 누가 봐도 결과가 같은 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적절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월1일 올해의 첫날, 주변의 자연을 아무리 봐도 전날과 다른 것은 딱히 없다. 하지만 춘분날에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 시계를 보며 해의 위치를 잘 살피면, 아, 오늘이 춘분이구나, 누구나 알 수 있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인 낮의 길이가 하루의 딱 절반인 12시간이다. 춘분이 지나면서 낮이 밤보다 길어지니, 빛이 어둠을 이기기 시작한다는 비유도 가능하다. 기독교의 부활절이 지금도 춘분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이유다. 성탄절이 12월25일로 정해진 것도 빛이 어둠을 이기기 시작하는 춘분날이 마리아의 예수 잉태일로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달력의 재밌는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정모의 책 &lt;달력과 권력&gt;을 추천한다). 수태 기간인 40주를 춘분날에 더하면 12월25일 무렵이 된다. 이처럼 특별하다 보니, 여러 문명에서 춘분을 새해의 첫날로 삼았다.

우리가 지금 이용하는 달력에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9월, 10월, 11월, 12월은 영어로는 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인데 이는 라틴어 숫자 7, 8, 9, 10에 해당한다. 즉 지금의 12월은 과거에 10월이었고, 마찬가지로 춘분이 들어있는 지금의 3월이 먼 과거에는 한 해의 첫 달이었다. 현재의 달력에서 2월이 다른 달보다 유달리 짧고 하필이면 2월에 윤년의 하루를 넣는 것도 마찬가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65일을 열두 달에 30일, 31일로 적절히 나눠 넣고는 세부적인 날짜의 조정을 마지막 달이던 2월에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용하는 달력에는 과거 흔적이 화석으로 남아있다.

시간(時間)은 말 그대로 때(時)의 사이(間)다. ‘사이’를 재려면 먼저 한 점을 찍어야 그곳을 기준으로 다음 점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화살 위 어디에 점을 찍어 한 해의 처음으로 정할지는, 결국 우리 앞에 살았던 사람들의 약속에 불과하다. 한 해의 처음 날짜가 임의적이라 해서 처음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에서도 그렇다. 돌멩이를 손에 들고 있다가 가만히 놓으면 땅에 떨어진다. 땅에 닿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쉽게 계산할 수 있다. 그런데 돌멩이를 처음에 아래로 던지면 더 빨리 땅에 닿고, 돌멩이를 놓은 처음 높이가 달라지면 땅에 닿는 시간은 또 달라진다.

이처럼, 땅이라는 목표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의 시간은 돌멩이의 처음 높이뿐 아니라 돌멩이의 처음 속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물리학에서는 물체의 처음 위치와 처음 속도를 합해 초기 조건 혹은 처음 조건이라 부른다. 같은 물체가 같은 물리법칙을 따라 움직여도, 나중에 어디 있을지는 처음 조건이 결정한다. 우주의 모든 입자의 미래를 결정론적으로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상의 절대지성을, 처음 이를 상상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라플라스의 악마라도, 처음 조건을 모르면 평범한 우리와 마찬가지다.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다.

올해의 첫날 새해 결심을 한 사람이 많을 거다. 나도 그랬다. 뱃살도 줄일 겸, 건강도 위할 겸, 운동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피아노나 기타를 배우겠다는 (매년 반복하는) 다짐, 그리고 아내와 함께할 취미를 찾겠다는 결심도 했다. 첫날 다짐한 올해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처음 조건이 중요하다. 처음 위치뿐 아니라 처음 속도도 함께 들어있는 물리학의 처음 조건처럼, 올해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처음 속도가 중요한 것은 아닐까. 다짐을 실천하는 첫날 처음 속도를 갖는 방법이 있다. 내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새 다짐이 있다면 하루 전인 오늘 당장 시작하는 거다. 하루에 조금이라도 책을 읽겠다는 다짐을 오늘 했다면, 내일부터가 아니라 오늘 당장 시작하자. 체중 감량 다이어트도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부터 말이다. 첫날인 내일, 이미 0이 아닌 처음 속도를 갖게 된다.

외부의 영향이 없다면 현재의 운동 상태를 지속하려는 경향을 물리학에서는 관성이라고 부른다. 외부에서 건드리지 않으면(외부의 힘이 없다면), 가만히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고, 일정한 속도로 직선을 따라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직선을 따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하루,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이어지는 다짐의 실천으로 생긴 관성은 습관이 되고, 몸에 밴 습관은 더 큰 관성을 가질 수도 있겠다. 아주 큰 관성을 가진 물체는 웬만한 외부의 충격이 있어도 지금까지의 운동 상태를 유지한다. 큰 관성을 갖게 된 습관은 하루나 이틀쯤의 주변의 영향으로 흔들려도 이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어쩌다 외부의 효과로 잠시 영향을 받으면 그다음 날에 앞으로의 궤적을 약간 보정하면 될 일이다.

아침에 눈을 떠 시계를 보라. 오늘은 남아있는 내 삶의 처음이다. 내일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 내가 한 모든 것은, 반복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하루 전의 과거가 된다. 시간의 화살 위에 구체적 행위로 점 찍힌 모든 처음은 소중하다. 되짚을 수 없어 더욱.

<김범준 | 성균관대학교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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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고구마를 간식 삼아 자주 먹는다. 난롯불에 구운 고구마는 혀에 닿자마자 녹는다. 나도 먹고 강아지도 먹이고 하면서 둘이 볼살이 통통 올랐다. 고구마를 먹으면서 창문 밖을 똑같이 바라본다. 하루 일과의 꽤 많은 시간을 창문 밖 구경에다 쓴다. 신문 방송에서 보는 다사다난한 바깥 세계와는 다른 ‘내면과 자연의 세계’를 마주하는 유리창. 나란한 신발과 얼멍얼멍 자란 수풀과 아물거리는 별빛이 내다보이는 창가는 어쩌면 문명과 다른 세계와의 조우다.

한 기자가 수도자에게 찾아와 물었다. “무슨 기도를 바치시나요?” “저는 주로 말하기보다는 듣습니다.” “정말이오? 그럼 하느님은 무슨 말씀을 들려주시나요?” “그런데 그분도 듣는 걸 좋아하셔서 별로 말씀이 없으세요.” 이 동네 분들은 사투리가 입에 붙어서 하늘에 ‘동시통역사’가 있어야지 안 그러면 말이 안 통해서라도 피차 침묵. 사투리 덕분에 손주들 맡아보는 수고도 덜게 되니 더욱 사투리를 쓰는 듯싶다. 손주들 맡기 싫으면 무조건 사투리로 말을 하고, 밥을 씹어서 입에다 넣어주고, 말도 못 배운 아이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방바닥 닦는 걸레로 입이나 얼굴을 닦아주면 애 엄마 아빠가 펄쩍 뛰면서 아이를 냉큼 데리고 가버린다지. 그러면 이제 나름 재미나고 고요한 여생을 마음껏 즐기면 된다. 고구마를 삶는 집집마다 연기가 송송 올라온다. 주민들은 고구마를 먹으면서 나처럼 창문 밖을 오래도록 구경하고 계실 것이다.

나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많은 숙소를 옮겨 다녔다. 카운터에서 똑같은 부탁을 반복하는데, 바깥 풍경이 좋은 방을 달라는 말. 커튼을 열었을 때 햇볕이 드는 방이었으면 좋겠고 나무 한 그루쯤 보이길 바란다. 요새 가난한 청춘들은 집이 아니라 방을 전전하고, 그 단칸방도 월세가 지독하여 좁아터진 방만큼 숨 막히는 세월이라지. 사람에게는 창문이 필요하고, 마당이 필요하고, 나무와 새와 별과 구름과 햇살과 바람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으로 완성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은 당장 바꿔내야 한다. 모든 이들이 근사한 창문을 한 개씩 가지는 세상. 오버 더 레인보, 창문 너머 무지개가 뜨고 행복은 거기 있으니까.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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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8년 2월25일 봉하마을 귀향 연설에서 유일하게 언급하면서 각별한 마음을 표한 사람이 당시 무소속 유시민 의원이다. 노 전 대통령은 연설 도중 “오늘은 제 얘기만 해야 되는데요”라면서 “차마 제 얘기만 하고 그냥 못 가겠다”고 운을 뗐다. 이어 “노무현식 정치를 얘기했는데, 제가 보기엔 노무현과에 속하는 정치인이 하나 있다”며 유시민을 지목했다. 인사말을 마친 유시민이 단상에서 내려간 뒤 노 전 대통령은 “제가 그렇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던 것은 (유 의원이) 가장 어려울 때 저를 지켜줬다”고 술회했다. 정치인 유시민이 왜 ‘노무현 호위무사’ ‘정치적 경호실장’ ‘영혼의 쌍둥이’ 같은 말을 들었는지 웅변하는 장면이다.

출처: 경향신문DB

2002년 ‘지식소매상’으로 최고의 자리를 보장받던 유시민이 정계로 나선 것도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서다.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당내에서 후보 교체론으로 흔들자, 유시민은 “바리케이드 앞에서 화염병을 드는 심정”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후 ‘노무현 정치’의 부침에 따라 정치인 유시민의 명운이 끝없이 출렁인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2013년 ‘잔인한 봄’을 앞두고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찾고 싶어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정계를 떠났던 유시민이 돌아왔다. 돌아온 디딤돌이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라는 것도 그답다. 대선에 출마할 일은 절대 없다고 손사래쳐도, 현 여권에서 친노의 정통성을 잇는 그의 위상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새해 각종 여론조사에서 범여권 후보 중 이낙연 총리와 1·2위를 다투고, 진보와 보수 진영을 망라한 대선후보 지지도에서는 전체 1위를 달린 조사(MBC·코리아리서치센터)까지 나왔다. 정두언 전 의원은 ‘2019년 인물’로 단연 유시민을 지목하면서도 “너무 빨리 나왔다”고 했다. 그만큼 오랫동안 검증대에 오를 수밖에 없고, ‘과거의 유시민’이 소환될 수 있다는 지적일 터이다.

‘노무현 정치’의 성취와 참담한 좌절을 지켜본 유시민이 다시 그 험난한 도정에 나설까. 전망은 분분하지만 풍수지탄(風樹之歎·나무는 멈추고자 하나 바람이 자꾸 흔든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돌풍쯤 되어야 가능할 테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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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유시민

걷고 걷고 또 걷는다

기가 막히다. 나원참 정신병원까지 왔다.

퇴원이 기약 없다는 걸 석 달이 다 되어서야 알게 됐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걷고 걷고’의 악보.

언제 나갈 거라는 걸 알기만 해도 희망을 가질 텐데.

바닷속 깊은 곳에 나? 내 존재? 그리고 공허한 재채기. 내가 한 거다.

방향도 없는 절망…. 반성을 했다.

내가 왜? 내가 한 짓….

정신병원에까지 왔다.

누군가의 푸념 “여기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싼 곳이야.”

나와 내 주변을 생각했다. 면회는?

서로 다른 시차, 내가 기다릴 시간…. 그리고 역시 내가 왜?

구두가 안쪽만 다 닳도록 다녔었잖니.

나갈 기약이 없는 이곳.

 

그때 그 부질없던 내 손이 기억난다.

내가 한 잘못, 그것은 여러 번의 마약을 한 거다.

마약이란 가족의 행복과 상관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뼈가 저려서 낭떠러지 같기는 하다.

 

외로움을 동반하고 결국에는 아무도 없다가

힘 없는 선택만 남는 거.

전과가 더해지고 그때마다 점점 더 많은 분들이

예술인에 대해, 예술인은…, 그렇게 말해주고 편들어주기도 했지만

이젠 아니다.

 

그래도 자존심을 버리지는 않았다

빌렸던 돈들도 모두 갚았다.

고마움을 잊은 거 아니다

 

그분들을 배신한 거라는 생각이 정신병원에 가서야….

강금실님, 변호사 시절 변호를 참 멋지게 해주신 그분께

정신병원의 허술함을 편지로 쓰려다, 아… 내가 올 곳이니까 오게 됐겠지….

 

추웠다. 춥다. 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 톰 행크스가 주연한

땅굴 폭파하는 은행털이범 그 영화(레이디킬러) 속

기독교 집회에 참석한 한 흑인 노인이 그 이상 없이 행복감에 취해

고잉홈 고잉홈

이라며 노래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나도 이제 저 노인처럼 되어

집에서 만드는 부침개와 내 가족들…. 

 

그러다 상관없는 여기, 차가운 벽을 보며

벽에다 손으로

고잉홈 고잉홈을

썼다.

 

추웠고

그곳 사람들, 일하기 싫어한다.

훌쩍 오십대 말이 된 사람들은 병원이 너무 힘들어 모두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러다 자살에 실패하면?도 생각했고 서로 의논도 했다.

(그곳의 사람들은 제정신이다가 갑자기 달라진다. 그리고 진실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만지고 싶은 손이, 좋고 싫은 걸 잘 안다)

 

나는 1년 4개월 17일 만에 퇴원했고

그동안 마약에 취해 못하던 연습을 했다.

기억력이 돌아오고 있었고(내 두뇌의 한 부분을 버렸다. 나는 love of my life의 스펠링도 기억 못했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버린 나머지 뇌는 고스란히 살아서 이 노래 ‘걷고 걷고’를 만들게 됐는데

나는 이 노래가 좋다.

노래할 때마다 내 모든 게 느껴진다

그러나 또 탐내는 인간들,

(제작했다는 이유로 뺏겼다. 뺏긴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걷고 걷고 걷는다

걷는 모양이 이상해도 걸어야 한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전인권 |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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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문재인 정부 탄생이 대한민국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대변혁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고 미래로 가기 위한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산적한 개혁과제는 논란만 무성한 채 성과는 없고, 사회적 갈등은 심화하고 있다. 진보·보수 간 갈등에 더해 이제는 세대, 계층 간 파열음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급기야 그동안 쭈뼛쭈뼛하며 여론의 눈치를 보던 국정농단 비호세력들까지 반발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다. 국내외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감은 여전히 시민들을 짓누르고 있다. 집권 3년차를 맞은 새해는 문재인 정부나 대한민국 미래에 더없이 중요한 시기다. 더 늦기 전에 새 정부가 달려온 지난 1년7개월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국정운영 방식을 총점검해야 할 때가 됐다.

무엇보다 내각의 심기일전이 필요하다. 시민들은 누가 장관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은 “답답하다”고까지 했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진 것도 여러 현안에서 빚어진 실망이 겹쳤기 때문일 것이다. 시민의 소망은 민생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공동체의 활력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시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으면 아무리 옳은 길이라도 의미가 없다. 내각은 공직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책신뢰를 회복하는 게 시급하다. 강력한 추진력과 유연한 실행을 통해 성과를 낼 책임은 각 부처 장관들에게 있다. 시민들은 3년차 정부에 실적으로 능력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내각은 이런 시민의 요구에 답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집권당으로서의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청와대 2중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문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는 민주당 정부이며 책임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다양한 재량을 갖고 정치력을 발휘했다고 보긴 어렵다. 개헌이든, 민생개혁입법이든 뭐 하나 제대로 이뤄낸 게 없다. 모든 정책은 입법으로 실행 근거를 갖춘다. 민주당은 그동안 국정을 주도한 여당으로서 제 역할과 책임을 다했는지 되돌아보고 위상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여당이 중심을 잡고 국정개혁의 주체로 나서야지, 대통령 인기에 의존하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새해에도 여소야대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민주당은 이제 야당이 아니다. 여당이 할 일은 강성투쟁이 아니라 야당과 타협해 국정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성공의 열쇠는 여야 협치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건은 청와대다. 민주정부라면 당과 내각이 대통령의 양 날개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청와대가 모든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여당과 행정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건 정상이 아니다. 청와대 독주는 분권과 협치라는 시대적 요구와도 맞지 않을뿐더러 당과 내각이 청와대의 하청업체 역할을 하는 정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성과로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실패한 정권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정치는 시민들의 뒤를 쫓아 왔을 뿐 앞서 나간 적이 없다. 4·19혁명과 6·10항쟁처럼 시민의 뜨거운 열망이 아스팔트 위에서 멈추는 일이 촛불혁명 이후에도 반복돼선 안된다. 유권자들의 인내심은 길지 않다. 시민들의 시선은 많이 차가워졌다. 문 대통령은 새해를 맞아 “제일 중요한 것은 성과”라며 “국민의 눈높이에 서서 다시 한번 신발 끈을 동여매달라”고 당부했다. 그게 시민의 바람이다. 당·정·청은 시민들의 에너지를 한데 모아 사회 대변혁을 강하게 추동해야 한다.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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