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강물 위를 나는 물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바이칼호의 새 떼들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


다 늙어 꿈이 이루어져

바이칼호에 가서 찬 호수에 손도 담가보고

사하라에 가서 모래 속에 발도 묻어보고

파리의 외진 카페에서 포도주에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행복했다, 밤마다 꿈속에서는

친구네 퀴퀴한 주막집 뒷방에서 몰래 취하거나

아니면 도랑을 쳐 얼개미로 민물새우를 건지면서


창밖엔 눈발이 치고

모래바람 부는 사하라와 고추잠자리 떼 빨간 동구 앞 길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금 나는

병상에서 행복하다 

-신경림(1935~)


일러스트_김상민 화백

한때 바람을 쐬러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자유롭게 높이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카사블랑카와 바이칼 호수로의 유랑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뤘다. 이국의 큰 호수와 아득한 모래사막과 번화한 거리를 다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옛 마을의 뒷방과 좁은 개울에서 보냈던, 소중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오늘은 눈발이 유리창에 하얗게 치고, 시인은 타국의 막막하게 펼쳐진 사막과 옛 마을의 어귀를 번갈아가며 생각한다. 꿈이 있었던 시간과 방황했던 시간은 행복했다. 그리고 꿈을 이룬 시간도 행복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화관(花冠)을 쓴 것처럼 눈부신 순간들이다. 밤하늘에 뽈록거리는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일반 칼럼 > 경향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겨울밤  (0) 2019.01.14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0) 2019.01.07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0) 2018.12.31
고랑 몰라  (0) 2018.12.26
달의 뒤편  (0) 2018.12.17
화살  (0) 2018.12.1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새해에는 어떤 꿈들을 꾸셨는지. 좋은 꿈을 꾸고 나면 복권 당첨보다도 더 근사한 일이 있기를 바라는 분들도 많을 텐데, 가족의 건강, 좋은 사람과의 행복한 시간, 꿈꾸고 있던 것들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망이 그러할 것이다. 물론 큰돈도 생기고, 바라던 소망도 이루어지게 하는 꿈을 꾼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꿈이라는 말이 소망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니 좋은 꿈을 꾼다는 말이 바로 소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꿈이 크다는 말은 미래에 대한 포부를 말하고, 꿈도 크다는 말은 헛되게 품는 몽상을 말한다. 조사 하나에 따라 꿈의 질이 달라진다. 

꿈을 꾸고 나서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도 있다. 19세기의 화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케쿨레는 꿈속에서 벤젠의 원자구조를 알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연구를 하던 중 선잠에 빠져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뱀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원의 형태로 결합하는 것을 보았고, 그게 바로 벤젠의 원자구조를 밝히는 열쇠였다는 것이다. 그가 꾼 꿈을 뱀꿈이라고 해야 할지, 원자꿈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그 꿈을 통해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화학적 난제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화학의 역사를 바꾸었다. 그리고 인류는 새로운 선물을 얻었다. 현대화학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러시아의 과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도 꿈을 꾸고 난 후 원소의 주기율표를 완성했다고 한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그동안 공백을 메울 수 없던 주기율표가 완전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에게는 원자와 원소가 등장하는 꿈이 황금돼지꿈보다 더 복된 꿈이었으리라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이 두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그 후 인류의 역사에도 그렇다. 

꿈이 창작의 영감이 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과학자들의 꿈과 관련된 위와 같은 일화들은 그야말로 소설처럼 여겨진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교훈을 남긴다. 꿈은 그냥 바란다고 해서 꿔지는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꿈을 꿀 정도로 지독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연구하다 보니 그게 꿈에까지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이 그토록 정밀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밤에 꾸는 좋은 꿈 역시 그 꿈의 바탕이 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돼지꿈 같은 것은 없는 듯하다. 그렇더라도, 좋은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잠드는 일이 기대에 찰 터이니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기는 하겠다. 

꿈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쓴 과학자도 있다.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그 행성들의 운동은 타원형으로 이루어진다는 학설을 최초로 발표해 우리에게 친숙한, 우리에게 새로운 우주를 열어준 요하네스 케플러가 그렇다. 그가 1608년에 쓴 <Somnium>이란 소설은 라틴어로 꿈이라는 뜻이다. 지독한 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노력으로 하늘을 관측하는 데 평생을 바쳤던 이 학자는 과학이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 적어도 당시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을 소설로 채웠다. 이 소설은 우주선을 타고 달을 여행하는 내용이다. 비록 우주선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고, 마술적인 장치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주여행과 달에 관한 어떤 묘사는 실제와 매우 유사하다고 알려져있다. 평생의 연구와 무한한 상상력으로 결합된 이 소설은 역사상 최초의 에스에프 소설로 평가받기도 한다. 케플러는 최초의 초신성을 관측하기도 했다. 2009년에 우주로 발사되었고 지난해에 그 수명을 다한 ‘케플러우주망원경’은 그의 이름을 기린 외계행성 관측용 우주망원경이다. 이 우주망원경은 달보다 더 먼 것들, 태양계보다 더 아득한 것들을 관측했고, 50만개가 넘는 외계항성과 행성들을 발견했다. 

자신만의 꿈이 타인의 악몽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실은 아주 많다. 새해 벽두부터 한 늙은 사람의 흉언을 듣기도 했다. 누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건데, 내가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은 그 이름은 나의, 우리 모두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의 끔찍한 악몽이었다. 그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흘린 피와 바친 목숨이 얼마나 많은지. 귀를 씻고, 아예 후벼 파고, 다시 새해를 생각해야겠다.

새해가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러면 어떤가. 한달이 지나도 여전히 새해다. 좋은 꿈을 꿀 기회는 아직도 많다. 좋은 꿈을 꾸려고 노력하는 시간과 기회가 부족한 것이, 그 시간과 기회에 내줄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일 수는 있겠다. 아무리 좋은 꿈을 꿔도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더 큰 문제겠다. 노력으로 안되는 사회는 자꾸 꿈만 꾸게 한다. 그리고 헛된 꿈은 나쁜 노력과 나쁜 시도를 낳는다.

그래도 새해다. 새해니 악착같이 좋은 꿈을 꿔야겠다. 오늘은 다만 어제보다는 좋은 꿈을 꾸게 해달라는, 거창하지 못해 부끄럽지만, 아니 혹시 많이 거창한가 싶은, 낯간지러운 나의 새해 꿈이다.

<김인숙 | 소설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군에 하나밖에 없는 응급실이 문을 닫았다. 면사무소 앞에는 새하동병원의 휴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고, 마을마다 새해 첫 아침에 병원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가 방송으로 나왔다. 어? 예전 낡은 건물 옆에다가 으리으리하게 건물 새로 올려서 진료를 시작한 게 작년 8월이지 않았나? 새 건물에서 진료를 시작한 지 다섯 달도 안되었는데 휴업이라니? 

병원이 새로 문을 열고 난 다음, 응급실에 간 적이 있다.고열과 몸살이었는데, 읍내에 야간진료하는 의원은 거의 없으니까, 이런 일로도 응급실에 가게 된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좋았다. 환자가 얼마나 와야 이만한 병원이 운영되려나. 예전 건물에서 운영할 때도 응급실 간호사를 제대로 채용하지 못해서, 군 보건소에서 인력을 지원한 전력이 있는 병원이었다. 시골이라 새 건물을 지었으니 한동안은 다른 병원에 다니던 환자들이 한 번씩 와 보겠지만, 뻔한 인구에 환자가 갑자기 늘어날 리도 없고,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건물을 지었나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병원 건물 바깥에 있던 약국이 얼마 안 있어 병원 건물 안으로 옮긴 것이나, 병원을 오랫동안 지켜온 의사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들도 간간이 들려왔었다.

병원이 휴업하게 된 것은 수십억원의 부채와 3개월 밀린 임금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 건물을 짓고 4개월 병원을 운영하는 동안 3개월치 월급이 밀렸다. 그리고 수십억 부채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음 만기일은 꽤나 한참 남았다는 것을 두고도 사람들은 안타까운 소리를 했다. 회사가 어음을 막지 못해서 부도가 난다고 하면, 하루 이틀 코앞까지 어떻게든 어음을 돌려 막으려고 하다가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하고 부도를 ‘맞아 버리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새하동병원이 ‘갚지 못할 것 같은’ 어음은 만기일이 5월30일이라고 했다. 아무리 시골병원이라고는 해도 군에 하나밖에 없는 응급의료기관이고 가장 규모가 큰 병원인데. 하지만 만기일이 다섯 달이나 남은 어음 때문에 병원은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병원 문을 닫는 날에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보좌관이 현장에 나와 있었다고 했다. 병원 직원들, 보건소 공무원들과 함께 입원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휴업을 위한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봤다고. 직원들은 3개월이나 월급을 못 받았지만, 차분하게  동요 없이 일을 마무리해서 놀라웠다고도 했다. 다행인 것은 아마도 3개월간 밀린 임금은 보증을 통해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군 보건소에서는 병원이 이렇게 갑자기 문을 닫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지역 응급의료기관으로 지정을 받고, 지원을 받아 운영을 하는 병원이기는 하지만, 병원의 운영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지자체에서 병원 운영을 두고 관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새하동병원이 문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의 운영에 대해 군의회에서도 한참 논의가 있었다. 군 보건소장이 군의원들과 함께 2018년에 병원에 지급되는 지원금이 전년도에 비해서 몇 배나 늘었다는 것이나, 새로 병원을 신축한 이후로 환자 수가 얼마나 변했는지 하는 것까지 짚었다. 응급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고, 보건소장은 그러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병원은 건물을 새로 올린 다음, 한두 달 임금을 지급하고, 석 달 임금을 밀리고, 다섯 달 후에 돌아온다는 어음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이 병원이 문을 닫으면, 하동군에는 응급실이 없다. 감염병 격리 병실도 새하동병원을 쓰도록 되어 있다. 읍내에서는 가까운 도시로 가는 것이 30~40분이면 되지만, 다른 면 지역은 읍내까지 가는 데에만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곳도 수두룩하다. 지금 병원은 ‘채무 탕감 후 계속 병원 경영’을 목적으로 법원에 회생신청을 진행 중이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2016년 5월28일 구의역 승강장에서 김모군(19)이 안전문에 끼여 숨졌다. 구의역 사고 이후 정치권에선 노동자 안전사고에 기업 책임을 묻는 법안을 잇따라 발의했다. 2007년 영국에서 제정된 ‘기업 과실치사 및 살인법’을 본뜬 ‘기업살인법’을 추진하겠다는 정치인도 나왔다. 2017년 11월 현장실습생 이민호군(18)이 컨베이어벨트가 역주행하는 바람에 압착기에 눌려 숨졌다. 여야 국회의원이 ‘직업교육훈련 촉진법 개정안’을 냈다.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24)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죽은 뒤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이 추진됐다.

실제 산업재해를 제때 제대로 막는 입법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김군 사망 이후 기업살인법이 추진됐다면 김씨의 죽음은 없었을지 모른다. 당시 발의되거나 추진이 발표된 법안들은 2년 넘게 국회에 묶여 있었다. 이군이 죽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직업교육훈련 촉진법 개정안’을 냈지만 일부 개정되는 데 그쳤다. 그마저 노동단체로부터는 이전 정책의 재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충남 태안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중 숨진 고 김용균씨의 빈소가 마련된 태안의료원 상례원 장례식장에서 어머니인 김미숙씨가 지난달 30일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며 아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이야기 하며 복받치는 눈물을 애써 참고 있다. 김기남 기자

연말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한 산안법 개정안이 불충분했던 것도 전례로 봐서 이상한 게 아니었다. 28년 만의 개정과 일보 전진에 의미를 두는 평가도 나왔지만, ‘김용균법’이라 이름 붙은 이 법은 정작 ‘김용균’을 보호하지 못한다. 도금, 수은·납·카드뮴 등을 사용하는 작업의 사내 도급을 원천 금지했지만, 김씨가 담당했던 발전소 운영이나 정비 등은 여전히 도급계약이 가능하다. 노동자 사망 때 업주를 처벌하는 하한선(징역 1년) 신설 조항도 국무회의를 거치면서 없어졌다. 정부와 국회의 이 문제에 대처하는 ‘노동자의 죽음-법안 발의 추진-법안 축소·폐기’의 도식은 정식처럼 굳어졌다. ‘위험의 외주화’ ‘죽음의 외주화’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입법은 요원하다. 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와 김군의 동료 박창수씨가 지난 4일에도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 주최 추모제에 나와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정규직화를 촉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군과 이군, 김씨의 죽음은 예외적인가? 지난 10년간 태안화력에서만 12명이 사고로 죽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산업재해 사망률 1위 국가다. 통계가 제공된 1994년 이후 2016년까지 23년 동안 두 차례(2006, 2011년)만 빼고 1위를 차지했다.

노동계는 끊임없이 노동자의 죽음과 소외 문제를 제기했다. 김씨 사망 한 달 전부터 ‘비정규직 100인 대표단’은 노동존중 입법 촉구 투쟁을 벌였다. 김씨도 안전모와 방진모를 쓴 채 지난해 12월1일 태안화력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들 목소리에 즉각적인 응답은 없었다. 이들의 투쟁은 국가 경제 발전을 망각한 ‘노동 기득권’의 ‘촛불 청구서’로 폄훼됐다. 여권 일부 정치인들도 보수 언론의 ‘기득권’ ‘청구서’ 프레임에 올라탔다. 사망자가 10~20대가 아니었다면, 공분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면, 유족이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 일부 수정의 산안법 개정조차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죽음과 희생을 국가와 기업 발전의 과정에서 파생된 ‘부수적 피해’로 취급한다. 공장을 돌려 이윤을 내 경제적 부를 축적해야 국가도 발전한다는 ‘기업이 살아야 근로자가 산다’는 논리는 ‘노동자가 죽어도 기업은 살아야겠다’는 불의와 다름없다.

지금의 대의제는 위기 징후가 나타나도, 죽음이 도처에 만연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수십번 관련법을 개정하고, 수십개의 관련법을 제정해도 모자랄 판에 사람이 죽어나야 시늉만 내는 게 지금 대의제의 작동 방식이다. 일련의 죽음에서 ‘대의 불충분’과 ‘대의 불가능’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 불충분과 불가능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자본과 노동 문제를 전 정권보다 더 선의로 대한다 해도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것 같지 않다. 선의와 진정성만으로 체제 문제, 구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경제 활력’이란 말이 나온다. 헌법 전문에 나온 ‘근로’ 용어를 ‘노동’으로 수정하겠다던 이 정부에서 ‘노동자’ 대신 ‘근로자’ 용어를 사용하는 비율이 다시 높아진다. 경제와 이윤을 최우선하는 이데올로기는 2018년 역대 최고의 수출액을 달성하고도 멈추지 않는다.

이 글을 마무리할 때 다시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입사 7개월밖에 안된 20대 노동자가 한 금속가공공장에서 고소 작업대(리프트)에 올라 자동문 설치작업을 하다 문틀과 작업대 사이에 끼여 숨졌다. 이 죽음의 행렬은 언제 멈출 수 있을까?

<김종목 사회부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책장 구석에서 찾아냈다. 고수차. 3년 전인가, 친구가 보내준 중국 발효차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보이차나 철관음, 우롱차는 귀에 익은데 고수차라니. 낯설었다. 운남 지역 고산 지대에서 자생하는 오래된 차나무(古樹)에서 채취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친구가 폐와 기관지에 좋다는 말까지 덧붙였는데도 3년 가까이 손이 가지 않았다.

대만 차 덕분에 고수차를 되찾았다. 지난 연말, 역사학을 전공한 친구가 대만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왔다며 차를 한 통 건넸다. 포장이 단아하고 색깔도 보기 좋아 한 잔 우려냈다. 향은 약간 강하고 맛은 순한 편이었다. 내성적인 차였다. 몇 잔 마시다가 문득 고수차가 생각났다. 해발 1500m 이상 고지대에서 50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해온 차나무에서 딴 것이라니 마시는 법이 남다를 것 같았다. 검색을 하다가 놀라운 표현과 마주쳤다. “첫 잔은 차를 깨우는 것입니다.”

중국 발효차는 우리 녹차와 달리 끓는 물에 우려내는데 첫 잔(초탕)은 버린다. 오래 묵은 차일수록 먼지가 많아 씻어내야 한다. 일종의 소독이어서 첫 잔을 우려낼 때마다 개운치 않았다. 그런데 ‘차를 깨우는 것’이라니. 바짝 말라 있는 찻잎은 뜨거운 물을 빨아들이며 천천히 원래 형태를 회복한다. 저 순간을 찻잎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인터넷에서 마주친 저 한 문장이 차와 나 사이의 거리를 무화시켰다. 차가 대뜸 의인화를 이뤄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말이 바뀌면 생각이 바뀐다. 그 역도 성립한다. 생각과 태도가 바뀌면 이야기가 바뀐다. 찻잎에 쌓인 불순물을 제거한다고 하지 않고 찻잎을 깨운다고 하는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일 것이다. 찾아보면 기왕의 의미를 바꾸거나 키우는 시적 언어가 제법 있다. 그중 하나가 ‘마중물’이다. 마중물은 펌프가 물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할 때 펌프 안으로 집어넣는 소량의 물이다. 지하의 물은 마중물의 도움을 받고 힘차게 지상으로 올라온다. ‘와락’도 있다. 와락은 심리치유 활동과 만나 그 뜻이 번져나갔다. 해고 노동자나 세월호 유가족처럼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분들이 ‘와락치유단’과 만나 다시 일어선 바 있다.

찻잎 깨우기, 마중물, 와락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셋이 하나의 체계를 이룰 수 있다. 다름 아닌 교육체계다. 교육(敎育)은 ‘가르치다’와 ‘기르다’의 합성어다. 영어 education의 라틴어 어원은 educare로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다. 페다고지(pedagogy)의 뜻도 다르지 않다. ‘어린이를 이끈다’는 말이다. 오래 잠들어 있던 찻잎을 깨우는 일, 지하에 잠겨 있는 물을 마중하는 일, 그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 힘껏 껴안는 일. 이 모두가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가치이자 필수 과정이다.

최근 대학에 불고 있는 새 바람 중 하나를 압축하는 슬로건이 ‘교육에서 학습으로!’이다. 기존의 교육방식이 교수자가 일방적으로 지식과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앞으로는 학생들의 학습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에서 학습으로’의 전환은 서 있는 사람(교수자)과 앉아 있는 사람(학습자)의 역할을 재조정하라고 권고한다. 강의실을 선생과 학생이 ‘함께 서서’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해나가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산실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찻잎 깨우기, 마중물, 와락도 달라져야 한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1 대 다수에서 다수 대 다수로 - 이처럼 교육에서 학습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고 또 다양하다. 가장 큰 이유는 (나이 많은) 교수자의 지식과 경험이 미래세대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교수자들이 여전히 고전물리학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있다. ‘19세기 학교, 20세기 교수, 21세기 학생.’ 최근 대학의 현주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문구다. 대학, 교수, 학생 사이를 가로막는 현격한 시차를 좁히지 않는 한 학생들의 미래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곧 폐기될지도 모른다. 학교가 19세기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교수자가 20세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21세기 학생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다. 갈수록 작아지는 미래 앞에서 청년들은 위축되고 있다. 며칠 전 신년교례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스웨덴의 한 여학생이 수업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훔쳐가고 있다. 어른들이 돈만 좇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

새해 아침, 북유럽 소녀의 뼈아픈 성토를 듣는 순간 10여년 전 내가 한 문학계간지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 생각났다. ‘미래를 미래에게 돌려주자.’ 일찍이 북미 원주민들이 말해왔거니와 천지자연은 미래세대에게서 빌려 쓰는 것이다. 우리 기성세대는 ‘개발과 성장 제일주의’라는 중독에 걸려 미래를 너무 많이 훔쳐왔다. 지금 기성세대가 누리는 지나친 풍요와 건강이 다 미래에서 빼앗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또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조심스레 찻잎을 깨우고, 마중물을 붓고, 마침내 청년들을 ‘와락’ 껴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미래세대와 머리를 맞대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원전을 가진 나라라면 어디서나 직면하는 과제가 있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이다. 원자력 발전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이라는 사용후핵연료를 남기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든 처분해야 한다. 한국에도 사용후핵연료 1만5000t이 쌓여 있다. 현 정부의 탈원전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된다 해도 월성원전은 2021년이면 임시 저장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르는데 막상 처분할 곳이 없다. 

한국에서 원자력은 1962년 제3의 불로 등장했으나 56년이 지난 지금은 고준위 방폐장 문제를 남기며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발등의 불이 됐다. 우리는 중저준위 방폐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분쟁에 직면했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이 가져올 파장은 가히 국가적 난제라 할 만하다. 이미 2016년 마련된 고준위 방폐물 관리 기본계획을 현 정부가 굳이 재검토하기로 결정한 이유도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일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고준위 방폐장 건설로 향하는 여정이 좌초될 수 있다는 현실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합의의 기술은 제도 설계도 포함한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의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제도 설계 원칙은 뭘까? 우선 세 가지를 짚어볼 수 있다.

첫째, 공론화는 정부 정책에 대한 찬반 논란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데 집중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이해당사자 간 합의를 통한 정확하고 균형 있는 정보 공개가 필수다. 원전의 위험성을 축소해서도 안되지만 원전의 위험성만을 과장해서도 안된다. ‘길들였다고 믿은 야수, 고질라’ ‘페라리 엔진을 장착한 두발 자전거’ ‘속도 제한 시속 60마일에 묶여 있는 고속도로에서 시속 600마일로 달리는 고성능 슈퍼카’ 등의 은유는 원자력의 양면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균형 잡힌 인식을 대변한다. ‘불과 같아서 하인일 때는 한없이 충직하지만 주인이 되면 한없이 나쁜 존재’가 원자력이라는 비유는 또 어떤가. 원자력에 대한 찬반 입장과 무관하게 원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는 확증편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둘째, 가치논쟁으로 비화하지 않고 다양한 선택지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과 선호를 최대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용후핵연료 관리방안을 최대한 다양하게 펼쳐놓고 그 장단점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제시하며 AHP, CVM, DEA 등의 다양한 과학적 조사 기법을 활용해 참여자들의 상대화된 인식을 측정해야 한다. 이렇게 정교한 조사방법이 동원되면 공론화위원회가 결과를 재해석하거나 공론화 과정에서 논의되지 않은 사항들을 추가로 언급할 필요가 없어져 공론화의 정당성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된다. 

셋째, 공론 형성과 파악은 이해당사자 간 이해 조정과 다른 차원의 활동임을 인식하고 전자는 공론화위원회가, 후자는 정부가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가 공론화 결과를 존중해 문제를 파악하고 정책 결정과 정책 형성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정책 결정의 유일한 근거로 공론화 결과를 이용해서도 안되며 그 과정에서 섣부른 이해 조정을 시도해서도 안된다.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이해를 조정하고 다수와 소수 사이에 합의를 구축하는 것은 공론화 후에 이어지는 긴 정책과정에서 정부가 책임지고 진행해야 할 국가사무이다.

<은재호 | 한국갈등학회 회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시집 한 권, 소설 한 권, 영화 한 편을 찬찬히 보는 올해의 첫날을 보냈다. 나희덕 시인과 오에 겐자부로 소설가와 후시하라 겐시 감독의 울림을 동시에 얻은 날이 의미 깊었다. 내 인생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클라우드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구름의자에 앉아보십시오./ 당신은 비행기 대신 구름을 타고 여행하게 될 것입니다./ 나일론 섬유로 만들어진 구름은/ 당신을 아주 멀리 데려다줄 것입니다./ 다만, 목적지의 방향과 속력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바람에 달려 있으니까요./ 우리의 운명을 우리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 <파일명 서정시>에 수록된 시 ‘미래의 구름’은 “거대한 구름기둥, 저 구름의 제조권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로 끝났다. 플루토늄, 세슘 등 방사성물질을 방출하는 구름 밑에, 혼탁한 하늘을 바라보는 날들이 앞으로 늘어날 것이다. 방사선 수치가 떨어졌다고 해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다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의 구름 밑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의 가상공간, 클라우드의 세계에서도 나라는 존재는 불확실하다. 가십거리들과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무한 반복되며 증폭되는 세계, 이 가상공간의 제조권은 누가 갖고 있을까. 나희덕 시인의 서정시는 맑은 위로의 세계가 아니라 위험과 재난의 목소리로 삶을 위협하는 것들을 성찰하게 한다. 시집을 덮을 때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라는 시인의 고백을 목격하게 된다. 삶을 실감하게 하지만 그래서 두려운 덫.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첫 장편소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의 개정판은 새해 독서로 적합했다. 개정판으로 새로이 출간된, 오에가 20대 대학생 시절에 쓴 1958년작을 겨울 초에 구입해놓고 들춰보기만 하던 참이었다. 소년 시절 오에가 쓴 시, “빗방울에/ 풍경이 비치고 있다/ 물방울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를 전해 들었을 때 사물과 세상에 대한 관찰력이 미래의 대작가를 예고하는 느낌이었다. 난해하다는 소문이 도는 오에의 소설들과 사뭇 달리 첫 장편소설은 선명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열다섯 명의 소년이 감금된 상황을 캄캄한 숲 이미지로 묘사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겪는 소년들의 공포와 불안은 마침내 그들을 억압하던 어른들에게서 탈출하는 장면에서 돌연 힘차고 용기 넘쳤다. “나는 나에게 다시 내달릴 힘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불현듯 바람이 일고, 다가온 마을 사람들의 발소리를 실어왔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몸을 일으켜 한층 캄캄한 풀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소년이 탈출했으리라 믿게 하는 마지막 문장이다. 그가 뛰어든 건 한층 캄캄한 곳이지만 거기에 새 삶의 기대가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인생은 후르츠”라는 내레이션이 아름다운 운율을 머금은 영화 <인생 후르츠>는 노부부의 슬로라이프에 대한 일본 다큐 영화다. 90세 가까운 건축가 남편 쓰바타 슈이치와 아내 히데코는 일본 아이치현의 고조시 뉴타운에 작은 숲을 꾸미며 살아가고 있다. 숲을 어떻게 꾸리게 되었느냐 하면, 쓰바타가 젊은 시절 참여한 뉴타운 건설 프로젝트가 뜻대로 되지 않자 성냥갑 같은 뉴타운에 활력을 불어넣기로 작정하고 빈 땅에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새 50년 세월이 흘렀다. 젊은 건축가 쓰바타가 설계했던 뉴타운은 자연과 어우러진 집이었으나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는 규모를 강요했다. 상심한 쓰바타 부부는 도시계획과는 거리를 두고 밀어버린 땅을 다시 작은 숲으로 만들자, 녹색 저장소가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이면 마을이 산 일부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고 실험했다. 노부부는 천천히 땅을 일구고 숲을 즐기며 생활하지만, 이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말 그대로 정중동의 삶이다. 조금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것이 농사일 아닌가. 채소와 과일, 나무 열매를 얻기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는 셈이다. 노부부는 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마을과 이웃과 더불어 자연이 주는 선물을 나누는 모습으로 ‘오래 살수록 인생은 아름다워진다’라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말을 입증했다.

제조자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의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려면 닻이고 돛이고 덫인 무엇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힘을 내며 가야 할 삶의 목적지는 종종 나를 고단하게 붙드는 덫 같다. 닻이자 돛이고 덫인 것, 내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새해의 목표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해 1월 청와대가 ‘문재인 정부의 권력기관 개혁방안’을 발표했다. 조국 민정수석은 “민주화시대가 열린 이후에도 권력기관은 각 기관의 조직과 권력의 편의에 따라 국민의 반대편에 서왔다”며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핵심은 검찰의 직접수사 축소,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 자치경찰제 시행 등이었다. 이어 6월에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조 수석, 박상기 법무부·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을 발표했다. 청와대 발표로부터 1년이 흐른 지금, 유감스럽게도 가시적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사법·권력기관의 ‘제자리 찾기’는 2019년의 과제로 넘어왔다.

권력기관 개혁은 ‘촛불 혁명’의 핵심적 요구이자 시대적 과제다. 시민은 검경과 국정원이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특히 최순실 국정농단을 거치며 권력사유화의 도구로 전락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당초 법관 사찰 의혹으로 불거진 ‘양승태 사법농단’의 파장이 재판거래로까지 확대되며 ‘믿었던’ 법원마저 정권과 유착해 사익을 챙겼음을 확인했다. 촛불 시민의 요구는 분명하다. 각 기관 간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을 분산하고, 시민 참여 확대를 통해 이들 기관의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일이다. 권력기관을 현실정치와 절연시키고 본연의 임무에만 전념토록 하자는 것이다.

개혁의 제1 타깃은 검찰이었고, 여전히 검찰이어야 한다. 수사권과 기소권, 영장청구권을 모두 보유한 무소불위 검찰의 권력을 분산하는 일은 민주주의 심화를 위해 절실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1년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공저한 <검찰을 생각한다>에서 “차기 민주정부의 첫 개혁 과제는 검찰개혁”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개혁의 핵심 표적이던 검찰은 적폐청산 수사에 성과를 내며 외려 다시 힘을 얻는 형국이다. 반면 검찰개혁의 요체로 꼽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문제는 자유한국당의 완강한 반대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법원의 현주소는 더욱 참담하다. 공분을 불러일으킨 사법농단 사태는 마침내 헌정 사상 첫 전직 대법원장(양승태) 소환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법원은 환부를 도려내는 대신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사법농단 수사에는 영장 기각으로 방어하더니, 사법행정 개혁 역시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을 대부분 유지하는 방향의 누더기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 2일 시무식사에서 “사법개혁이라는 시대적 사명의 완수를 위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했으나 공허할 따름이다. 국정원 개혁 역시 대공수사권 이관을 3년간 유예하자는 주장이 일부 야당에서 제기되며 지지부진한 상태다.

권력기관 개혁 표류의 1차적 책임은 개혁에 소극적인 개혁 대상들과 자유한국당에 있다. 권력기관 간의 견제와 균형, 시민의 민주적 통제 강화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에 저항하는 것은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시대착오적 태도일 뿐이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도 여소야대의 정치지형만 탓해서는 곤란하다. 한국당을 최대한 설득하되,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다른 야당과 개혁입법 블록을 구성해 교착 국면을 돌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올해 하반기로 넘어가면 정국은 완연히 총선 분위기로 흐르게 된다. 상반기 내 개혁입법에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또다시 개혁이 물 건너갈 수도 있다. 사법시스템과 권력기관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국방부가 지난 4일 “대체복무제 용어를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을 최소화하고 국민적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양심, 신념, 양심적 등과 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대신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말을 쓰겠다는 것이다. 이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 등은 6일 공동논평을 내고 “국방부의 용어 변경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의미를 왜곡하고 퇴색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선고에 따라 가석방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2018년 11월 30일 대구구치소에서 출소하며 서로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방부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군대 간 나는 비양심적인 것이냐?”라는 시민들이 있어 용어를 바꾼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의 ‘양심’은 시민들이 평상시에 쓰는 ‘선량하다’ ‘올바르다’는 의미와 다르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추구하는 가치적·도덕적 마음가짐’과 함께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고유하게 내린 결정이라는 뜻이 있다고 헌재와 대법원이 인정했다. 언어 대중이 쓰는 용어와 법률 개념의 괴리를 해결한다고 해도 인류가 보편적으로 쓰는 용어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 ‘종교적 신앙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새 용어는 비폭력·평화주의 등 비종교적 양심적 병역거부를 원천 배제하는 오류까지 범하고 있다. 끝내 용어를 바꿀 경우에는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와 충돌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국방부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냈다고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다.

진정한 민주정부라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오해하는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명칭을 바꾸는 편법은 쓰지 않을 것이다. 인권의 정확한 개념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옳다. 대체복무제를 논의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입법예고까지 다 한 뒤에 느닷없이 용어를 바꾸는 것도 치졸하다. 정부는 국방부의 양심적 병역거부 용어 변경 결정을 즉각 거둬들여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3년차를 맞아 청와대 참모진 개편을 금명간 단행할 것이라고 한다. 얼마 전 김수현 정책실장 등 정책라인을 교체한 만큼 이번 개편에는 임종석 비서실장을 포함한 정무·홍보라인이 주축이 되고, 안보라인도 일부 거론된다. 문 대통령이 개편 시기를 앞당긴 것은 국정 지지율이 50% 아래로 떨어지면서 악화일로의 국정 동력을 다잡으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집권 3년차를 맞이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과”라고 천명한 문 대통령이 민생·경제는 물론 개혁에서 성과 중심의 국정운영 의지를 청와대 인사를 통해 내보일 것이란 전망이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14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희의에 앞서 김현철 경제보좌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그러려면 청와대 개편은 규모에서도, 내용적으로도 과감해야 한다. 시늉만 내는 인사로는 쇄신의 효과를 내기 힘들다. 야권의 사퇴 압력이 집중된 조국 민정수석은 사법개혁 과제 때문에 자리를 지킬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에 더더욱 대상에 오른 비서실장과 정무·홍보라인의 혁신적인 개편이 요구된다. 참신하면서도 경륜 있는 인물, 특히 1기 참모진의 약점으로 꼽힌 소통과 ‘협치’ 역할을 배가시킬 인물을 폭넓게 발탁해야 한다. 사실 청와대 특별감찰반원의 비위 사태가 민간인 사찰 논란으로, 기획재정부 전직 사무관의 폭로가 청와대 외압 시비로 확산된 데는 소통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청와대가 야당은 물론 여당과도 대화를 기피하며 독주를 거듭하니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게이트 수준의 참사로 비화되는 것이다. 새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국민소통수석 등은 대통령과의 소통 못지않게 시민사회와의 소통, 국회와의 ‘협치’를 중시하는 인사이길 바란다. 이번 개편을 계기로 청와대가 국정 전반을 틀어쥐고 과도하게 내각을 통제하는 바람에 정부 부처가 청와대만 쳐다보게 만드는 구조도 바로잡아야 한다.

집권 3년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문재인 정부의 성패가 달려 있다. 선거가 없는 올해가 민생에서도, 개혁에서도 성과를 낼 마지막 기회다. 과감하고도 감동적인 개편을 통해 ‘나라다운 나라’의 희망을 되살리는 2기 청와대 진용이 선보이길 기대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2018년 한 해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투 운동, #불법촬영·편파수사·편파판결 반대 운동, #스쿨미투 운동, #낙태죄 폐지 운동, #탈코르셋 운동 등 새롭고 창의적인 페미니즘 운동이 한국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과 ‘불편한용기’는 각각 여섯 차례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 바 있으며, 낙태죄 폐지를 위한 1인 시위가 지속되었습니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확장된 탈코르셋 운동은 외신의 주목을 크게 받았고, ‘청소년페미니즘모임’은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한 해였지만,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들에게 ‘수치스러움’을 돌려주고, 감추었던 경험을 말하고 지지하고 연대하고 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몰카, 야동, 리벤지포르노라 불리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해 온 남성들의 놀이문화에 제 이름을 찾아 주었고 착취성을 폭로했으며, 불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씨를 품을 밭’이라 여기던 여성의 몸을 주체적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요청했으며, 타인에게 평가받기 위해 가꾸던 행동들을 ‘꾸밈노동’으로 명명하고 ‘외모로 승부해야 하는 존재’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남성중심의 성차별적 사회에서 불법촬영과 사이버 성폭력, 음란물, 성상품화, 성희롱, 성폭력, 성매매는 이음새조차 없이 매끈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붉은 분노는 강렬한 경고음을 발신하며 땅을 뒤덮고 하늘을 물들였습니다. 세계가 한국의 페미니즘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은 지난달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페미니즘을 다시 쓴 인권선언 발표' 기자회견에서 페미니즘으로 쓰는 인권선언 추진단 관계자들이 인권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그럼에도 펜스룰로 시작된 반격은 종래 대학 내 총여학생회 폐지로 이어졌고, 차별의 임계점에서 시작된 저항은 과격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과잉반응으로 독해되더니, 페미니즘이 젠더갈등, 남녀갈등, 남성혐오만 키웠다는 언론과 정치권의 호들갑과 학계의 오역도 확산되었습니다. 깨어있지 않은 자를 깨우려 한 행동들은 애써 깨어있지 않은 척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고 폄훼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성 혐오론자들의 오프라인 침투설’과 ‘패륜적 여자 일베 집단 처단론’까지 들먹이며 가열 찬 반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갈등 유발론자, 혹은 혐오주의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지나침’에 대한 경계는 다시 여성들의 입을 막는 명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실패한 것일까요? 이러한 갈등론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저는 호도되고 있는 역사의 경계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의 이면을 이미 봐버린 사람들이 실현시킬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여성들의 분노의 좌표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부정의한 구조 전반임을 깨닫고 변혁에 동참할 20~30대 남성들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억울함의 원인은 여성들이 제공한 게 아니라 기득권이 공고화한 세상임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저를 비롯한 기성세대입니다. 남자가 벼슬이던 시절에 태어나 온갖 특혜를 누리던 사람들은 자기성찰을 넘어 기꺼이 특권을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생 기생해 살면서 성차별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페미니즘을 비난하던 분들은 그 무지를 더 이상 자랑하지 말아 주세요. 젊은 남성들이 대리전을 치르도록 부추기고 뒤에 숨어 관망하거나 조롱하는 일을 그만두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당신들이 만들고 누려온 누적된 부조리 때문에 다음 세대가 더 이상 멍들지 않게 해 주세요. 세대, 계층,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가 통약불가능한 상수들이 아니라 불평등한 구조를 직조하는 상호 연결된 변수들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분배적 정의와 비분배적 정의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실현되어야 할 긴급한 과제임을 인지해 주세요. 대의명분과 단일대오를 위해 숨죽였던 차이들이, 민주주의의 수사적 도구로만 동원되던 다양성들이 소리치는 아우성에 마음과 귀를 열어 주세요. 일천한 지식과 천박하고 뻔뻔스러운 언행이 아니라, 부디 품위 있되 단호하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주세요.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명심할 점은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개개인이 다 정의로운 것도, 정의 그 자체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사라 아메드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무엇이며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고, 현재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닿으려는 지향점에서 분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수많은 시작의 순간들을 정성스럽게 모으고, 희망의 지향점들을 하나하나 책임감 있게 쌓아 올려 갈 때, 비로소 ‘우리’는 정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보다 공정·평등한 사회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투쟁의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정체감과 연대감으로 모두 버티고 성장하고 행복하게 살아남아 주세요. 언젠가 도래할 오늘을 위해.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