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에서 내려오던 밧줄은 그들에게는 생명줄이었다. 그 밧줄로 아침과 저녁 밥을 올리고 물을 올렸다. 그런 밧줄을 내리지 않는다는 건, 물도 소금도 없이 고공에서 단식을 한다는 것이고, 그건 지상에서 단식을 하는 일과는 다른 의미다. 곧 생명을 걸겠다는 것,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로 423일, 75m 굴뚝에서 농성을 하는 파인텍 노동자들이 있다. 박준호, 홍기탁은 한국합섬 노동자들이었고, 스타케미칼 노동자였고, 파인텍 노동자였다. 한국합섬을 헐값에 인수한 스타플렉스 사장 김세권씨는 1년8개월간 공장을 가동하다가 이른바 강성노조가 들어서자 갑작스럽게 폐업을 결정했다. 이미 한국합섬 시절에 빈 공장을 5년 동안 지키며 싸웠던 노동자들은 다시 조업을 재개하라며 투쟁에 돌입했고, 그런 가운데 차광호 조합원은 408일 동안 구미 공장의 굴뚝에 올라가 농성을 했다. 김세권씨는 사회적 압력에 못 이겨서 합의를 했다. 노동자들은 그 합의서에 따라 신설된 파인텍이라는 회사로 출근을 했다. 하지만 그 합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8개월 만에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는 생산 설비를 모두 빼버리고 공장마저 없앴다. 이 노동자들은 돌아갈 곳조차 없어졌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게 박준호, 홍기탁 두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간 배경이다. 한국합섬부터 스타케미칼, 파인텍에 이르는 20년의 세월 동안 그들에게 노동조합은 생명이었다. 노동조합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배웠다. 1000명이 넘던 조합원들은 그 세월 동안 모두 흩어져서 이제는 겨우 다섯 명이 남았다. 그들이 보기에 이 세상은 잘못돼도 너무 잘못돼 있다. 노동자만 희생당하는 이건 정의가 아니다. 자신들이 강성노조라고 하지만, 자본은 더욱 강성 아닌가. 자본에는 법과 제도가 있고, 관행이 있고, 사법부의 판례가 있고, 공권력이 있다. 노동자들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박노자 교수는 노르웨이의 사회복지를 소개한 책에서 노르웨이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 한국에서 벌어져서 아들을 현장에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게 2011년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에 반대해서 김진숙씨가 크레인에 올라가 있던 때였다. 그는 노르웨이 사회복지 모델은 “노동운동이 만들어낸 ‘사회적 책임’과 ‘평등’의 담론”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선망해 마지않는 북유럽의 사회복지국가는 모두 강성노조의 힘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강성노조가 없으면 사회복지국가도 어렵다는 걸 언제 사람들이 인정하게 될까? 강성노조는커녕 노동조합을 할 권리마저 고단한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을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굴뚝 위에서 밧줄을 내리지 않으며 한 말은 “청춘을 다 바쳤다. 민주노조 사수하자!”이다. 민주노조가 목숨을 걸어야 지킬 수 있는 현실은 비참하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노동조합만 원하는 사회가 이런 참극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김세권씨는 스타케미칼을 폐업할 때도 강성노조 핑계를 댔다. 고분고분 말 잘 듣던 노조와 짜고 고용 문제를 유연화하려고 했는데, 원칙을 강조하는 강성노조가 들어선 뒤 태도가 돌변했다. 노동자 권리를 지키려는 노조는 인정할 수 없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용주는 김세권씨만 아니라 대다수 사용자들이지 않을까?

책임을 져야 할 김세권씨는 이 상황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불법을 저지르고 굴뚝에 올라가면 영웅이 되는가”라고. 또한 “평생 제조업을 했지만, 제조업 하면 언론에서 악덕한 기업인으로 몬다”고도 항변했다. 그럴 수도 있다.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기업인이 자신만이 아닌데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저버렸다. 합의만 제대로 이행했어도 그는 협상장에 불려나오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는 4차 협상이 결렬된 지금까지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책임을 면할까에만 골몰한 것 같고, 그게 굴뚝 농성하는 노동자들이 단식까지 결심하게 만들었다. 

김세권씨가 다섯 명 남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만큼의 여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파인텍의 모기업인 스타플렉스는 지난해 7월까지 적립한 사내유보금이 774억원이 넘는다. 그가 지난해 3분기까지 받은 보수 총액은 6억원이 넘는다. 상여금도 7000만원 이상이다. 그가 받는 보수만으로도 5명의 고용은 넉넉히 해낼 텐데도 죽는 소리만 한다. 사실 경제위기라고 하는 지난해에도 재벌과 대기업들은 수백조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이 돈은 재벌과 대기업으로 들어가기만 하고, 사회로 풀리지 않는다. 결국 경제위기는 분배가 되지 않는 분배의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언제까지 노동자들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묶어두고 안정적으로 착취하면서 기업을 운영하려고 하는가. 이게 정상인 나라는 단연코 부정의한 나라다. 

나는 그들 곁에서 동조단식을 한 지 오늘로 22일이다. 배고프고, 기운이 빠진다. 조금 무리하면 부정맥 증상도 재발하고는 한다. 나와 같이 단식 중인 나승구 신부나 박승렬 목사, 그리고 송경동 시인도 마찬가지다. 하루빨리 굴뚝에서 그들이 살아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창간한 ‘인권운동’ 담론지에서 류은숙씨는 “각각의 고통에는 인간의 지문과도 같은 ‘고유함’이 있는데, 그것을 지우고 편리한 관용구에 그 고통을 가두려 할 때, 고유한 고통들은 박제돼버리고는 한다”고 말했다. 굴뚝 위의 둘과 굴뚝 아래의 세 사람은 민주노조를 사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고유의 고통을 견디는 중이다. 인권은 그 고유한 고통을 겪는 이의 곁을 지켜주는 일이고, 그들의 고통을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는 일이다. 우리의 단식은 그런 인권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두 노동자는 지금 굴뚝 위, 한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단식을 한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절규하고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권리를 찾는 중이다. 그런 그들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일은 민주공화국 시민의 의무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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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한 친구의 집에는 당시 중산층 가정에서는 볼 수 없던 소니 VCR이나 워크맨, 고급 전축이 갖춰져 있었다. 친구는 이들 기기를 통해 최신의 콘텐츠들을 향유했는데, 주로 해외 영화와 록이나 헤비메탈 등의 팝송, 특히 다양한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된 음악들이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작년 한해 우리 대중문화계에는 굵직한 이슈들이 많았다.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차트 1위 수상을 포함한 전 지구적인 인기, 남북 예술단의 평양과 서울 공연, 미투운동 등이 그중 일부이다. 이와 더불어 영화 한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 문화계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록밴드 퀸의 일대기였다. 특히 그룹의 리더였던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다룬 이 영화는 한동안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뮤지션을 대중문화의 전면으로 불러내었다.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록밴드 ‘퀸’의 메인 보컬 프레디 머큐리 역을 맡아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라미 말렉(가운데)이 ‘퀸’의 실제 멤버인 브라이언 메이(왼쪽, 기타), 로저 테일러(오른쪽, 드럼)와 함께 백스테이지에서 수상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로이터 _ 연합뉴스

과거의 아티스트와 음악이 영화를 통해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일례로 요절한 미국의 로큰롤 가수 리치 밸런스의 짧은 생애와 음악을 다룬 영화 <라밤바>나 아바의 동명의 곡을 소재로 한 <맘마미아> 등이 그랬다. 다만 퀸 열풍은 이들과는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면을 보여준다. 우선 이전의 영화들이 전 지구적으로 큰 인기를 구가했던 것과 달리, <보헤미안 랩소디>는 퀸의 본고장 영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높은 누적 매출액을 기록하며 전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흥행을 기록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단순히 스타의 탄생과 몰락이라는 클리셰를 활용해 한 인간의 굴곡진 삶을 그린 드라마적 감동이나 음악적 완성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퀸은 3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전혀 올드하지 않고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70~80년대는 퀸만큼이나 뛰어난 록 그룹과 아티스트들이 군웅할거한 시절이기도 했다. 가령 시카고와 이글스, 스모키와 에어서플라이 등 기라성 같은 그룹이 활동했고 이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칼리지 록(College Rock)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REM, 일리노이대학 재학생들이 주축이 된 REO Speedwagon 등도 국내외에서 견고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퀸 현상은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페르시아계 인도인이었던 프레디 머큐리가 주류 영국사회의 냉소를 실력과 노력으로 이겨낸 감동적 휴먼스토리, 또한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그의 양성애자로서의 사생활과 불우한 말년 등 극적인 삶에 대중의 동일시와 공감이 확장된 지점에서 생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영화 속 “우리는 모두 아웃사이더들이고 세상의 모든 아웃사이더들을 위해 노래하죠. 마음이 쉴 곳 없는 세상에서 외면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퀸은 바로 그들을 위해 존재합니다”라는 프레디의 대사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공항에서 수하물 노동자로 일하며 음악에의 꿈을 키우던 이민자 출신의 아웃사이더 파록버사라(프레디의 본명)의 삶은 24세 비정규직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는 일이 그리 특별하지 않게 일어나는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줬을까. 오늘날 다수의 청년들은 결혼과 출산, 내집 마련의 꿈조차 꿀 수 없고, 자본과 정보, AI와 네트워크가 많은 것들을 대체하는 생존주의의 차가운 삶과 사회의 작동방식에 무방비로 내던져졌다. 영화는 이렇듯 헬조선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자기 연민과 공감, 다른 삶과 사회에 대한 상상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는 아프고도 무겁다.

<류웅재 한양대학교 교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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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에 전단을 붙이며 돌아다니던 날이 있다.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적어놓은 전단이었다. 교사를 소개하는 난에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와 경력을 적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잡지사에서 근무했고 작은 문학상에서 작은 상을 탄 사실을 적었으나 미더운 글쓰기 교사로 보이기엔 충분치 않았다. 사실 이제 막 스물세 살이 된 참이었고 카페 알바만으로는 월세를 감당하기가 벅찰 뿐이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이야기를 듣거나 글을 읽는 것이 좋았다. 뭐라고 어필해야 할지 몰라 글쓰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아이도 글쓰기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적었다. 내가 썼지만 믿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나야말로 글쓰기가 싫고 두려울 때가 잦았기 때문이다. 

영등포와 목동 일대에 전단을 돌리자 가뭄에 콩 나듯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한 학부모는 어느 대학을 다녔냐고 물었다. 내가 대학의 이름을 대답하자 그는 심드렁하게 전화를 끊었다. 출신 대학을 딱히 궁금해하지 않는 학부모도 있었다. 그런 이의 자녀들이 내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수업준비물을 챙겨서 가정에 방문하면 엄마들은 나 보고 고등학생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수업에 대한 궁금증도 염려도 섞인 말이었다. 별다른 경력 없는 학부생에게 아이를 믿고 맡긴 고용주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잘하고 싶었다. 

무언가에 대해 쓰고 싶은 대로 쓰자고 제안하면 아이들은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고 했다. 혹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기억은 나는데 쓰기가 싫다고도 말했다. 좋은 이야기는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내가 먼저 무언가를 내주어야만 그들도 소중한 것을 나에게 내주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먼저 털어놓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거짓말’이라는 글감에 관해, 또는 ‘방귀’나 ‘눈물’이나 ‘도둑질’이나 ‘질투’나 ‘어떤 냄새’라는 글감에 관해. 어리석은 경험을 한두 개 말하다 보면 그 자리에서 가장 우스꽝스럽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아이들은 날 보며 웃었다. 그때 질문을 건네야 했다. 너희는 어떠냐고. 그럼 그들은 연필을 들고 회심의 미소 같은 것을 지었다. 재미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의 표정은 호기롭기 마련이었다. 어리석고 우스운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아이들은 원고지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들 중 하나였던 열 살의 최가희는 이런 문장을 썼다.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 방으로 가니까 왠지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찡했다. 뭔가 엄마한테 안기고 싶었다. 자다가 밝은 곳으로 가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온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언니랑 동생이 옆에 있어도 그리운 마음이 든다.” 

옆에 있어도 그리운 마음이 든다니, 나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또 다른 하나인 열세 살의 이형원은 이런 문장을 썼다.

“우리는 함께 뒤섞여 놀다가 서로의 여름 냄새에 대해 다 알게 되었다. 우리의 두피에서는 찌든 걸레 냄새가 났다. 우리의 옷에선 중학생 남자 옆을 지나가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났다. 우리의 발에서는 가죽에 물을 묻히고 한동안 방치해둔 냄새가 났다. 웃음거리가 되던 우리의 여름 냄새들이었다.”

이런 글을 읽다보면 내 후각까지 생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여름 냄새’ 묘사는 탁월했다. 또 다른 하나인 열세 살 오승린은 이런 문장을 썼다.

“가끔씩 영화 찍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주로 절벽에서 서로의 손을 놓쳐 떨어지고 마는 시나리오였다. 왜 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꼭 마지막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영화를 찍으며 즐거움을 느꼈다.”

그가 쓴 것 덕분에 나는 이야기의 속성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란 우리를 몇 번이고 다시 살게 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볼 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엄두도 안 날 스릴을 잠깐 체험해볼 수도 있고, 가짜로 비극을 겪으며 마음 근육을 키울 수도 있었다. 그사이에 우리는 어쩌면 더 강해지기도 했다. 

그런 문장들을 읽으며 오년간 글쓰기 교사로 지냈다. 서울의 영등포와 목동과 판교와 전라남도의 여수 등을 돌며 보따리장수처럼 글쓰기 수업을 했다. 선생님이라고 불리면서도 가장 많이 배우는 건 나였다.

<이슬아  작가·‘일간 이슬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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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해전 장면을 보면 갑판 아래서 북소리에 맞춰 노꾼들이 팔이 빠져라 노를 젓습니다. 둥당둥당 빠르기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고, 둥둥둥 당당당 소리에 맞춰 어느 한쪽 더 저어서 배를 돌립니다. 격군(格軍) 여럿이라도 고수(敲手)는 하나여야 전선(戰船)을 민활하게 움직이지요. 너나없이 고수이고 엇박자면 배는 산으로 갑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누구나 아는 속담입니다. “에이, 설마 배가 산으로 가겠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웃어넘기지만, 배에서 내리기 힘든 곳이면 거기가 바로 산입니다. 사공(沙工)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모래톱같이 경사가 거의 없는 곳이어야 뱃머리나 뱃전을 대고 정박과 승하선하기 쉽습니다. 뱃전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둔치면 배가 출렁거려 타고 내리기 어렵지요. 그런데 어린이용 속담 책을 보면 죄다 여럿이 우왕좌왕 노 젓느라 배가 산으로 오르는 모습으로 그려놨더군요. 그건 사공이 아니라 노꾼입니다. 사공은 삿대로 강바닥을 밀거나, 노를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지국총지국총 저어야 하니 고물(선미)에 서야 옳습니다. 물의 저항을 적게 받으려 배 폭까지 좁으니 사공은 많아야 둘이서 노를 맞잡게 되지요.

그럼에도 사공이 많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그건 입만 산 ‘입사공’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에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리 하는 게 아니지.” “거참, 이렇게 이렇게 좀 해보라고.” 듣다듣다 열 뻗친 사공은 젓던 거 팽개치고 뱃머리 가서 삿대질합니다. “그럼 잘나신 댁들이 해보시든가!” 입사공들이 막상 해보니 자신이 알던 그 물살, 그 노, 그 배가 아닙니다. 우왕좌왕 떠내려가던 배는 결국 어느 둔치, 못 내릴 산에 닿고 맙니다. 일단 맡겼으면 실무자가 사공입니다. 한배 탔다, 서툴다, 못 미덥다, 바로 관여하고 나서면 ‘입사공 존문가’라며 실무진이 삿대 던집니다. 기다림은 미덕입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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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 이후, 유전자는 기다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돌연변이는 단지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 유전학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여성 생물학자였던 바버라 매클린톡은 오랜 옥수수 관찰 끝에 유전자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튕겨져 나와 서로 자리를 바꾼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은 현대 유전학의 지도를 바꿔놓았고 그는 1983년 생리의학 분야의 노벨상을 받았다. 

매클린톡은 옥수수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고 말을 걸었으며 옥수수들이 자신의 숨은 비밀을 말해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염색체는 점점 더 크게 보였고 어느 순간 자신이 염색체 밖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 물질이 당신에게 건네는 말을 이해하려는 인내심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스스로 당신에게 다가오도록 자신을 개방해야 합니다.”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점점 그것 자체가 되어가는 사랑의 과정이라는 것, 이것이 그가 유전자의 비밀을 알 수 있었던 비결이다.

아이들이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와 긴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어떻게 하면 겨울방학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따뜻한 성장의 시간이 될 수 있을까? 문제는 우리가 매클린톡처럼 자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들이 건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기다릴 인내심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이라는 괴물이 쉬지 않고 우리를 쫓아오고 있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내달리게 된다. 괴물은 뒤에서 계속 부모들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네 아이가 이름도 없는 대학에 가게 되면 어떡할래? 네 아이가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면 어떡할래? 네가 그것을 다 감당할 수 없으면 어떡할래?’ 이제 부모들이 괴물이 되어서 아이들을 쫓는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면서 아이들을 통제하고 불안한 마음에 때로는 협박도 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점핑하는 유전자’처럼 부모로부터 튕겨 나가 자기 방식대로 삶의 공간을 찾아든다. 그 공간에서 부모를 욕하고 사살하는 패드립 놀이를 하다가 학폭(학교폭력)으로 신고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또다시 아이들을 훈계해야 할까? 

안타까운 점은 아이를 다그치고 고쳐놓으려 할수록 아이의 내면은 계속 망가져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두려움의 타이머를 잠시 꺼두는 것이다. 조금 떨어져서 그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서로에게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허용해보면 어떨까? 아이가 말을 할 때마다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주면서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호응해보자. 매클린톡처럼 이제 어른들의 말하기를 멈추고 그 대신 아이가 말할 수 있도록 시간을 양보해보자.

“너는 어때? 너는 어떤 방학이 되길 원해? 엄마 아빠가 어떨 때 도와주면 좋겠어?”라고 말이다. 아이는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겨우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를 향한 따뜻한 호기심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이는 조금씩 세상 밖으로 자신을 내보여 줄 것이다. 이제 아이는 자신에 대해 말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믿는 힘이 생기게 된다. 방학 동안 그런 힘이 자라나서 개학 날 우리 아이들이 좀 더 든든하고 환한 마음으로 새 학년을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춘애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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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조기 진화될 것 같던 신재민 전 사무관의 폭로를 거의 참사 수준으로 전화시킨 데는 손혜원 의원의 활약(?)이 컸다. 손 의원의 무지막지한 글도 경악스럽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더불어민주당의 방관도 무섭다. 손 의원의 폭주에 제어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어쨌든 그가 ‘우리 편’에서 싸우기 때문일 게다. 청와대 감찰반 사태가 터졌을 때 ‘조국 민정수석 책임론’(조응천 의원)이 불거지자 의원들이 앞다퉈 나서 단숨에 제압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민주 정당에서 분열 못지않게 위해한 것은 다양성이 사라진 획일화와 맹목적 충성이다. 그 유전자가 민주당에 스며들고 있다.

민주당의 불통이 심해지고 있다. ‘강한 여당’을 표방한 이해찬 대표 체제가 등장한 이후 4개월 동안 의원총회가 4번 정도 열렸다. 정기국회 기간 여야 합의사항이나 ‘유치원 3법’ 보고 의총을 빼면, 정국 이슈나 주요 정책을 다루는 의총은 한 차례 열렸다. 그것도 이 대표 취임 전에 이미 잡힌, 은산분리 완화 법안을 다루기 위해 열린 의총(8월29일)이다. 의총이 필요 없을 만큼 만사태평이어서는 아닐 터이다. “의총을 열면 청와대 입장과 다른 말이 나올까 봐서” 그랬을 수 있다. 사실 집권여당에서 이만큼 ‘다른’ 목소리가 없었던 적이 없다. 전당대회 기간에 “당이 청와대를 견제하지 못하고 침묵해서는 안된다”고 목청을 높이던 초선의원들도 조용하다. 결국 주요 정책 변화에 대해 당내 토론과 지지층 설득 과정이 번번이 생략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와 정부를 견인하기는커녕 청와대가 내린 과제와 이슈를 따라가기 급급하니, 여당의 자리가 협소해지는 것이다. 2018년 마지막 날 문재인 대통령이 당 지도부와 오찬을 했다. 오찬에 앞서 문 대통령과 이 대표는 배석자 없이 독대했다. 공히 이해찬 대표 체제에서 공식적으로는 처음이다. 여당 지도부가 이럴진대 일반 의원들이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극히 정상이어야 할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의 만남이 당·청 소통의 신호로 조명받는 현실이다. 소위 ‘민주당 정부’에서 당·청의 불통이 이렇다.

민주당은 무기력했다. ‘위험의 외주화’를 막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처리가 없었다면 집권당 2년차인 민주당의 2018년 결산은 너무 남루했을 것이다. 개혁입법은 2년째 사실상 빈손이다. 야당을 탓하기 전에 말로만 외쳐온 ‘협치’를 돌아볼 때다. 그나마 산안법도 민주당 실력으로 성안된 게 아니다. 하청 노동자 김용균씨의 무참한 죽음, 아들을 잃은 어머니 김미숙씨의 눈물겨운 헌신과 호소가 28년간 잠자던 산안법을 깨웠다. 3년 전 ‘구의역 사고’로 19살 하청 노동자가 사망한 뒤 제1야당인 민주당은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 이름으로 산안법 개정안 등 7개 법안을 패키지로 내놨다. 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되었지만 방치로 일관,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은 김용균씨가 죽고 나서야 세상에 나왔다.

민주당은 태만해졌다. 카풀 정책에 항의하려 택시 종사자 10만명이 운집한 지난달 22일 여의도 집회에 민주당에선 전현희 의원(민주당 택시·카풀TF 위원장)이 참석했다. 한국당에서는 나경원 원내대표가 나왔다. 전 의원 연설 도중 심한 야유가 터져나온 반면, 나 원내대표 연설 때는 환호가 들렸다. 이해집단 집회이긴 하지만, 촛불 이후 민주당과 한국당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엇갈린 것은 드문 일이다. 당시 이 대표는 당 특별위 출범식에, 홍영표 원내대표는 여성가족부 업무보고에 참석했다. 나 원내대표의 흑색선전을 성토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안이함을 돌아봐야 했다. 민주당이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파인텍 노동자들을 찾은 것은 세계 최장기 기록을 세우기 하루 전날(12월24일)이다. 민주당은 현장의 치열함을 잊었다.

민주당 지지율은 추세적으로 하락해 30%대에 머물러 있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 조사 기준으로 6·13 지방선거 직후 최고점에 비하면 6개월 만에 20%포인트 정도 떨어졌다. 그간 고공 지지율이 민주당의 자생력에 바탕을 둔 게 아니었으니,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 하락과 동기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주목할 것은 한동안 민주당에서 이탈한 지지가 정의당으로 옮겨 갔으나, 근래에는 민주당과 한국당의 등락이 연동되는 조짐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렇다하게 바뀐 게 없는 한국당이다. 민주당이 싫어서 한국당을 택하는 적극 반대층이 늘었다는 얘기다.

여전히 상대가 ‘한국당’이라는 이유에서 실제 선거에 가면 달라질 것이라며, 막연한 희망을 붙잡고 있기에는 민주당이 ‘해 놓은 것’이 너무 없다. 정치에서 도저히 만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라고 했다. 촛불의 절실한 기대를 안고 출발한 민주당은 실로 황금 같은 ‘집권당 2년’을 허송했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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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그루의 나무를 위해서도 그 나무만큼의 햇빛이 정확하게 드는 법이다. 오늘 내가 찾는 나무는 홀로 우뚝한 교목이 아니라 어울려 사는 관목이다. 그것도 울타리로 심기에 적당해서 일제히 줄을 맞추고 관리당하는 나무이다. 나무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줄기에 날개가 있다. 그 나무를 볼 때면 나는 옛날의 한 시절로 득달같이 달려간다.

@최영민

부산으로 전학 가던 날. 천일여객 낡은 시외버스는 거창 차부를 떠나 합천, 창녕, 밀양, 삼랑진을 거쳐 탈탈거리며 갔다. 차의 진동에 너무 많이 시달렸다. 발등이 조금 부어올랐고 신발은 뻑뻑해졌다. 비슷하게 출발한 해도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세상에서 가장 길다는 구포다리를 건넜다. 여기가 부산의 입구인가. 이리저리 구경거리에 눈을 부라리는데 희한한 광경이 포착되었다. 처음 보는 네온사인 아래 어느 공터에서 둥그런 채를 가지고 하얀 러닝셔츠를 입은 두 사람이 공중에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놀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 백열전등을 저렇게 가지고 놀다니! 역시 도시사람들은 대단해!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배드민턴 공이었다. 산에 입문하고 나무의 특징을 통해 나무를 알아갈 때, 그 나무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 내가 쏜살같이 달려간 곳은 바로 구포다리 근처 어느 공중에 오르락내리락하던 그 신기했던 백열전등이었다. 그 나무 줄기의 날개와 배드민턴 공, 다시 말해 셔틀콕의 날개는 어쩌면 그리도 서로 닮았는지.

시계가 없다고 시간마저 없어지는 건 분명 아니다. 시간이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는 정도의 분별력만 있었더라면! 여러 우회로를 거친 뒤에 나는 오늘 인왕산의 둘레길을 걷고 있다. 멀리 단정한 그 나무가 보인다. 나무가 저곳에 있기 위해선 나무를 띄우는 햇빛만큼이나 시간도 정확히 필요했다. 새해 지나고 벌써 일주일, 고여 있는 시간의 웅덩이인 듯 첫주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이제 기해년도 제 시간의 봉투를 뜯겼으니 셔틀콕처럼 또 빨리 흘러가겠지. 줄기에 날개가 발달한 화살나무 옆을 지나는 오늘은 소한(小寒)이다. 화살나무, 노박덩굴과의 낙엽 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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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아이~ 어떻게 가라는 거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기사는 한숨을 내뱉었다. 기분이 상했지만, 어차피 자정이 지난 시간에 택시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인지라 애써 모른 척했다. 

“반대편에서 타야지. 방향도 안 맞는데….” 기사는 백미러로 힐끔거리며 연신 투덜댔다.

“근데 왜 계속 반말이세요?” 

“내가 언제? 이게 무슨 반말이야.”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 결국, 세종대로 한가운데서 차를 세웠다. 호기를 부렸지만 정작 택시에서 내려서는 행여 뒤따라올까 다급히 걷는 바람에 눈길에 두 번이나 미끄러졌다. 빈 택시를 다시 잡은 건 30여분을 걷다가 집 근방에 다다라서였다.

일진 사나운 날이었다. 갑자기 내린 눈에, 낭만을 핑계로 길어진 술자리를 탓할 수밖에. 다음날 귀가 후일담을 듣던 후배의 “선배, 녹음했어야죠”라는 말에 ‘아차’ 했지만, 차량번호도 모르니 부아가 치밀어도 도리가 없었다.

사실, 택시 승차거부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승차거부 말고도 택시를 타려면 거쳐야 할 난관은 더 있다. 택시 잡기에 성공해도, 말 걸기 좋아하는 기사를 만나면 ‘폭풍 수다’를 꼼짝없이 견뎌야 한다. 괜히 한마디 거들었다간 궁금하지도 않은 인생 풀스토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기사들의 레퍼토리는 세 갈래다. 개인사나 정치 이야기, 오지랖 넓은 기사라도 만나면 어느 직장에 다니냐, 애들은 있느냐, 끝없는 ‘신상 캐기’가 이어진다. 아마도 일본 교토에서 택시기사가 손님에게 먼저 말 걸지 않는 ‘침묵 택시’가 등장한 것도 택시기사에게 맞장구치는 게 귀찮은 손님의 마음을 대변한 것일 게다. 내 돈 내고 취향과는 상관없는 음악을 들어야 하는 일도 고역이다. 진이 빠진 퇴근길엔 제발 좀 조용히 가고 싶지만, 음악 소리를 줄여달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져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 일쑤다.

이를테면 ‘승차거부’ ‘말 걸기’ ‘음악 틀기’는 ‘택시서비스 불만 3종 세트’쯤 된다고 해야겠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불만은 단연 승차거부다. 카카오택시 등장에도 승차거부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급기야 서울시는 승차거부하다 적발된 택시 운행을 두 달 정지하기로 했다. 서울시의 이 같은 강경 방침에도 승차거부는 줄지 않는다. 

승차거부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대중교통이 끊어진 심야시간대 운행하는 택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처우가 열악하니 운전할 사람이 없어 법인택시 절반은 차고지에 세워져 있고, 개인택시 기사들은 고령자가 대부분이라 이 시간에 거리로 나오지 않는다. 기사들은 사납금 때문에 장거리 위주의 승객 골라 태우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정부가 법인택시의 사납금 폐지·완전 월급제를 도입하고, 고령자의 개인택시 면허를 매입해 연금 형태로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택시업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모두 달라 합의점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게 ‘카풀’, 승차공유 서비스다. 택시업계는 거세게 반발한다.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카카오 같은 대기업의 카풀시장 진출은 밥그릇을 뺏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이나 심야에 택시를 잡지 못해 애태운 기억이 한번쯤 있는 시민이라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감사합니다”를 기분 좋게 외치고, 어르신을 위해 오르막길도 마다하지 않는 기사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아름다운 기억보다는 불편한 기억이 조금 더 많을 뿐이다. 이달 내로 서울시내 택시 기본요금이 3800원으로 오른다. 서울시는 서울시택시운송사업조합과 사납금을 동결하기로 합의했다. 택시서비스가 좋아지려면 택시기사의 생계 안정이 필수적이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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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루하루가 신기록이다. ‘고공농성 408일’, 3년 전 사측으로부터 고용, 단체협약과 노동조합 승계를 약속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다시 더 높은 굴뚝으로 올라갔다. 더 이상 동료의 기록이 경신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차디찬 굴뚝에서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는 두 노동자는 이제 매일매일 슬픈 역사를 남기고 있다. 그곳은 날아다니는 새들이 둥지를 틀고 쉬어가는 곳이다. 새들에게는 낙원일지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돌아누울 수조차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풍찬노숙 중이다. 기록적인 폭염을 견뎌내고 칼바람의 혹한과 맞서며 좁디좁은 굴뚝 난간에서 또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누가 이들을 하늘로 오르게 했는가. 이 땅이 노동자를 보듬지 못하고 법과 제도가 자신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자 내몰리듯 높은 곳으로 밀려 오른 것이다. 굴뚝, 타워크레인, 광고 전광판, 이 땅에서 희망을 잃은 노동자들이 오르는 단골 장소다. 2명의 파인텍 노동자들은 3년 전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하늘에 올랐다”는 그의 동료처럼 또 수십미터의 굴뚝으로 올라갔다. 기네스북에 기록을 남겨 영웅이 되려고 75m 상공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노동인권을 살려보려고 올라간 것이다. 그곳에서 소외받고 버려진 약자들이 목숨을 담보로 버티고 있다. 차디찬 겨울을 두 번 맞을 때까지.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약속을 지키라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한뎃잠을 잔 지 400일이 넘자 비로소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정치권과 언론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땅에서는 그들을 살려내기 위한 동조 단식으로 연대하는 이들도 있다. 다행히 노사의 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진전은 없다. 고용주의 인식이 아직도 3년 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노동자들에게 고용주는 “굴뚝에 올라가면 영웅인가?”라는 야만의 언사도 주저하지 않았다. “농성하는 사람들에게만 인권이 있나. 합법적으로 기업 하는 나도 너무 힘들어서 이 나라에서 살고 싶지가 않다. 이 나라가 법치국가가 맞나”라고 항변도 한다. 이들에게는 욕심 이외의 감정은 없는 모양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뼈만 남은 자신의 옛 직원에게 할 소리인지 매정하기만 하다.  

사측은 3년 전 약속이행으로 책임질 일 없다는 주장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때의 약속이행은 불완전 이행이다. 노사합의는 약속이자 법인데 사측은 이를 이행하는 척만 했다. 현재의 파인텍을 세워 노동자의 일터를 만들어 주었지만 임금협상을 차일피일 미뤘고, 복귀한 노동자들에게는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월급만 주고 수당 등을 받을 수 있는 일감은 거의 주지 않았다. 결국 반발한 노조가 파업하자 사측은 공장을 폐쇄하고 새 사업체를 입주시켰다. 책임을 노조 쪽으로 미뤄버린 것이다. 지난 연말께부터 4차례 노사가 마주 앉았지만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빈손이다. 3년 전 불완전 합의이행을 경험한 노조 측이 기존 합의사항을 지키라며 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법적 책임을 진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사측은 요지부동이다.

이게 우리 노동인권의 현주소다. 위험천만한 굴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바람에 자칫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곳만이 아니다. 발전소 석탄 컨베이어벨트에 위태롭게 누워 있기도 하고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여 있기도 하다. 부당해고, 농성과 단식, 자살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우리의 노동인권의 현주소다. 생명을 걸어야만 겨우 해결되는 수준이어서 노동자의 생명이 존중되지 못하고 수단화되는 현실이다. 작년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이하여 기업들이 너도나도 인권경영을 선언하지만 노동인권은 입에서만 맴돈다. 말과 행동이 각각이고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논다.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경영이 인권경영이다. 노동자를 배려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 노동자와 사용자가 공생하는 것이 바로 기업인권의 핵심이다. 인권 감수성을 가진 기업문화가 정착해야 기업의 경쟁력도 커지고 지속적인 성장도 가능해진다. 기업 활동에서의 인권침해는 기업경영의 리스크다. 파인텍의 모기업인 스타플렉스는 해외 거래처가 많다고 한다. 이들에게 반인권적인 회사 대표의 언행이 알려진다면 기업경영에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작은 것 때문에 더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물론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까지도. 엊그제 굴뚝 위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는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람을 살리고 보는 노사교섭이 절실하다.

<히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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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31년간 지속되어온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 방안을 7일 발표했다. 고용노동부 개편안을 보면 지금까지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일괄 심의·결정했으나 앞으로는 구간설정위원회에서 상·하한 구간을 정한 뒤 결정위원회에서 최종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또 최저임금 결정을 현행 근로자 생계비, 유사근로자 임금, 노동생산성, 소득분배율을 기준으로 했으나 앞으로는 고용·경제상황, 사회보장 급여 현황까지 포함시키기로 했다. 

노동부는 신설되는 최저임금 구간설정전문가위원회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최저임금 상·하한 구간을 설정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결정위원회 공익위원에 청년·여성·비정규직 등을 포함시키고, 정부 대신 국회가 공익위원 추천권을 행사해 공정성을 기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번 개편으로 최저임금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크게 해소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개편안은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다. 전문가들이 최저임금 구간을 설정하는 것은 노·사 대표가 최저임금 결정에 참여하도록 권고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 위배된다. 구간설정 전문가위원이 선정 과정에서부터 논란이 될 것은 자명하다. 정부는 노·사 단체의 추천이나 의견을 들어 전문가를 선정하겠다고 했으나 선정부터 노사가 대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저임금 결정기준은 어떤 항목을 늘리는가가 중요하다. 저임금 노동자는 물가인상률·가계생계비 등을 최저임금 결정기준에 포함시켜야 실질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런데 정부가 결정기준에 추가하겠다고 밝힌 것은 고용수준, 경제상황, 사회보장 급여 현황이다. 개편안대로라면 경기와 고용상황이 나빠지면 최저임금 인상폭은 이와 비례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 개편안을 마련하면서 노동계를 배제한 것도 지적되어야 한다. 정부는 1988년 도입 이래 지켜왔던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개편하면서 최저임금위원회와의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 노동계가 노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개편안이라고 반발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최저임금제 개편으로 경기 불황이나 고용 감소 등을 해소해 보겠다는 정부의 인식이다. 결정기준에 고용·경제 상황을 포함시킨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최저임금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이 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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