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롱패딩을 처음 본 것은 지지난 주 일요일이었다. 올해 첫 추위가 찾아왔을 때였다.

모처럼 진만도 정용도 아르바이트 비번이어서 오후 시간에 함께 대형 마트에 나갔다. 자취방 창문에 붙일 방풍 테이프도 사고, 스타킹도 사고, 라면도 한 박스 사놓을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월동 준비를 하러 간 셈이었다. 무더위에 헉헉거리며 연신 찬물을 끼얹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무슨 폐기된 삼각김밥처럼 가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난 말이야, 나중에 동남아 같은 곳에서 살면서 알바하고 싶어.”

“동남아?”

“거긴 그냥 다 똑같이 덥잖아. 추운 거보다야 그게 낫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거기라고 어디 다 똑같이 덥겠냐, 한 소리 하려다가 정용은 그만 두었다. 하긴 더운 게 낫지. 자취생이나 알바생에게나 여름은 고통이지만, 겨울은 그냥 공포다. 더워서 잠 못 이루는 것과 추위에 덜덜 떠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 생활비 자체가 다르게 드는 일이니까.

쇼핑 카트에 방풍 테이프를 담고 라면도 담고, 다시 스타킹을 사려고 일층에 올라왔을 때였다.

“이거 봐. 이거 엄청 싸게 나왔는데.”

진만이 마트 일층 정중앙에 마련된 특판 코너에서 검은색 롱패딩을 보며 말했다. 정용이 슬쩍 그 옆으로 다가갔다. 작년에 사람들에게 꽤 인기를 끌던 롱패딩인데, 그 역시 폐기된 도시락처럼 특판 코너에 나와 있었다. 가격표를 힐끔 보니 38만 원이 찍혀 있었다.

“이게 원래 58만 원짜리거든.”

진만은 무슨 은밀한 거래를 하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려니 하고 다시 양말 코너 쪽으로 가려 했는데, 진만이 겉옷을 벗고 롱패딩을 걸쳐 보았다.

“정말 간지나지 않니? 이건 뭐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데.”

사람이 달라 보이기는 했다. 무슨 애벌레 한 마리가 검은색 잉크를 뒤집어 쓴 채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이거 살까 봐.”

애벌레가 점점 간뎅이가 부어가는구나. 정용은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진만은 거울 앞에서 도통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괜한 말 말고 빨리 스타킹이나 사러 가자.”

정용은 재촉했다. 그들은 작년 겨울부터 찬바람이 불면 꼭 팬티스타킹을 사 입었다. 그게 내복보다 더 따뜻했고 또 활동하기에도 좋았다. 자취방에서도 진만과 정용은 팬티스타킹만 입은 채 생활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 배달 온 중국집 배달원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던 적도 있었다. 하긴, 진만과 정용 또한 서로를 보고 가끔씩 놀라기도 했으니까.

“나 진짜 이거 사려고. 이거 사면 20만 원 버는 거잖아.”

20만 원을 버는 게 아니고 그 회사 재고떨이에 네 돈 38만 원을 보태주는 거겠지. 정용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또 한 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지 못할 테니까. 38만 원은커녕 3만 원도 없을 테니까.

정용은 진만을 거울 앞에 놔둔 채 양말 코너 쪽으로 카트를 밀고 갔다. 예상대로 진만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터덜터덜 정용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보풀이 많이 일고 남루한 코트를 걸친 채.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용은 커피색 팬티스타킹을 골랐다.

그렇게 끝난 거라고 생각한 진만의 롱패딩 타령은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난 정말 이해 못하겠는 게… 나랑 같이 알바하는 22살짜리 남자애가 하나 있거든. 근데 퇴근할 때 보니까 걔도 비싼 롱패딩을 입고 있는 거야. 그게 60만 원이 넘는다던데…. 버스 타면 나만 빼고 다 롱패딩이야. 나만 빼고 다 부자인가 봐.”

그러기에 아예 입어보질 말지. 그런 거 한 번 입어보면 나에게 있는 모든 옷들이 한순간 다 낡고 허름해 보이는 마법에 걸리는데. 그러니까 매장 점원들이 그렇게 한 번만 입어보라고 권하는 건데. 정용은 진만의 말을 계속 못 들은 척했다.

“나 그냥 할부로라도 살까 봐. 이젠 막 꿈에도 나와. 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에 나왔는데, 할머니가 롱패딩을 이렇게 입고 나를 쳐다보시는데…”

아아, 그냥 사라, 사. 정용은 이불을 휙 뒤집어썼다. 이건 뭐 중2병 아이와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줄 것도 아닌데. 정용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계속 롱패딩을 입은 할머니가 떠올라서 잠을 설쳤다. 나는 롱패딩이 싫다고요! 정용은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할머니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진만이 정말 롱패딩을 산 것은 지난주 토요일이었다. 알바 끝나고 돌아와 보니 진만이 자취방에서 롱패딩을 걸쳐 입은 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대형 마트에서 봤던 38만 원짜리 그 롱패딩은 아니었다. 색깔은 똑같은 검은색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실해 보였고 또 얄팍해 보였다.

“내가 지난주에 봤던 그 롱패딩을 사려고 갔거든. 그런데 그게 마침 사이즈가 다 빠지고 없다는 거야. 그래서 그냥 오려고 했는데 마침 그 옆에서 이걸 17만 원에 팔고 있는 거야. 이거 봐봐. 지난주에 봤던  것과 디자인도 비슷하잖아? 이거 완전 득템한 거지, 득템.”

진만은 그렇게 말했지만, 정용은 전혀 다른 짐작을 했다. 아마도 진만은 지난번에 봤던 그 롱패딩 앞에서 많이 망설였으리라. 다시 입어보고 거울 앞에 설 때마다 계속 가격표만 생각났으리라. 그러다가 결국 다시 벗어놓고 돌아 나오다가 마음에 들진 않으나 훨씬 싼 저 롱패딩을 보았으리라. 정용은 그렇게 짐작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대신 싸게 잘 샀네, 지나가듯 툭 그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진만은 팬티스타킹에 롱패딩을 걸친 채 ‘엄청 따뜻해. 이제 보일러 안 켜고 이거 입고 자면 되겠어’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그럼 나는? 정용은 묻고 싶었지만 그 말 역시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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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늘로 오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철거민들이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고 올라가서 농성을 하는 건 지상에서는 용역들의 폭력에 쫓기고 대화조차 한 번도 못한 채 자신이 살던 집터와 일터에서 쫓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2009년 용산참사는 마지막으로 망루를 짓고 올라가서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던 철거민들을 공권력을 동원해 불에 태워 죽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국민으로 대우받지 못한, 비국민(非國民)이었다. 그들은 진압의 대상이었을 뿐, 권리를 가진 국민이 아니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국가는 또 그렇게 대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노동권은 헌법에 국가가 보호할 기본권으로 명문화되어 있음에도 휴지조각일 뿐이었다. 정권과 기업은 한 몸이 되어 노동조합은 깨버려야 할 적으로 삼았다. 노동조합은 인정할 수 없다는 철저한 인식은 경찰도, 검찰도, 사법부마저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 최근에 드러난 것처럼 재판 결과를 거래하면서까지 노동자들의 권리를 철저하게 빼앗았다. 그런 때에 어디 호소할 곳 없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죽었다. 또는 기약할 수 없는 단식에 돌입하기도 했고, 삼보일배, 오체투지로 땅바닥을 기었다. 그런 것도 아무런 호소력을 갖지 못하자 노동자들은 굴뚝이나 전광판과 같은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는 둥지를 찾아 올라갔다.

12일 서울 한강대교 북단 한강변에 위치한 높이 40m 철탑에서 LG유플러스비정규직지부 김충태 수석부지부장과 고진복 서산지회 조직차장이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고공농성을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2014년 구미의 스타케미칼 노동자 차광호는 공장 굴뚝에 올라가 408일 동안 버텼다. 한국합섬 회사가 넘어갈 때 노동자의 고용 승계를 약속받기까지 5년을 텅 빈 공장에서 버티며 싸웠다. 그 고용 승계 약속은 다시 배신당했고, 그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며 차광호는 굴뚝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중에 집을 짓고 농성에 들어간 노동자의 말을 듣는 사회가 아니었다. 희망버스가 내려가기를 여러 차례 하는 등 사회적 압력이 생겨나자 그때서야 회사는 고용 승계, 노동조합 승계, 단체협상 승계를 약속했다. 굴뚝에 올라갔던 차광호는 그런 회사의 약속을 믿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 약속은 사기였다. 충남 아산의 파인텍 공장에 내려갔을 때 노동자들은 철저하게 속임을 당했음을 알았다. 스타플렉스는 파인텍 공장을 제대로 가동할 생각이 없었고, 단체협약 승계 약속도 물거품이 되었다. 스타플렉스의 김세권 회장은 차광호의 굴뚝농성으로 사회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무마하려고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해버렸던 것이다.

이에 다시 두 명의 노동자가 스타플렉스 본사가 보이는 목동의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올라갔다. 굴뚝에 올라간 지 12월24일로 408일이 된다.

408일, 4년 전 차광호가 기록했던 고공농성 최장기 기록이다. 이날만은 넘기지 말고 두 노동자가 땅을 밟게 하자고 지난 12월6일부터 10일까지 청와대에서 목동 굴뚝까지 혹한의 아스팔트를 차광호와 동료들이 오체투지로 기었다. 그리고 차광호는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10여년의 세월 동안 힘겨운 싸움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대부분 떠나고 이제 5명의 노동자만 남았다. 사회적 합의는 언제나 지켜지지 않았고, 노동자들에게 철저한 배신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책임질 사람 대신 바지 사장이 나와서 지키지도 않을 단협을 기피하는 동안 정부와 정치권은 뒷짐 지고 있었다.

이번에 올라간 굴뚝은 지상에서 75m이다. 거기에 폭 1m 정도 되는 공간이 있고, 거기서 두 노동자는 겨울을 보냈고, 봄, 여름, 가을을 보냈고, 다시 겨울을 맞았다. 건강도 좋을 리 없다. 총체적인 무권리 상태에 놓인 그들의 인권을 찾아주는 일은 “인권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겠다”는 대통령의 세계인권선언 기념일 약속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시금석이 되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동안 통신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한강대교 통신탑에 올랐고, 태안에서는 만 24세의 비정규직 발전노동자 김용균이 컨베이어벨트에 말려들어가 죽었다.

언제까지 이런 죽음과 이런 고공농성을 보아야 하는가.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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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층에서 유행하는 ‘9988234’라는 말이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아프고 죽자는 일종의 덕담이다. 하지만 요즘은 뜻이 조금 바뀌었다고 한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면서 재산은 죽기 2~3일 전까지 갖고 있다가 물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식들에게 신세 질 일도 없고, 자식들도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계획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기초연금이다.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소득인정액 기준 하위 70% 어르신에게 정부가 매월 25만원을 지급하는 제도다. 노인들에게는 적지 않은 금액을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한다. 이미 재산 명의를 자식으로 돌려놓은 경우 자식이 아무리 부자라도 기초연금 수급을 받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는 용돈을 정부와 자식한테 양쪽에서 받을 수 있다며 재산을 자식 명의로 해놓는 경우가 발생한다. 노인들은 얼마 안되는 재산이지만 죽기 전까지 지니고 싶은데 정부에서 주는 혜택을 포기하자니 아깝고, 남들이 편법으로 혜택을 받는 것을 보니 억울하기도 하다.

어르신들이 이런 고민에 빠지게 하지 말자. 기초연금 소득인정액에 자식의 재산도 포함시켜 산정하자. 그것이 어려우면 수급대상을 아동수당처럼 전 계층에게 일괄 지급하도록 하자. 물론 부자들에게 왜 세금을 낭비하느냐는 지적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에 비해 재산이 많은 만큼 자신이 받는 25만원 그 이상의 세금을 내기 마련이다. 지금이라도 제도를 고쳐 노인세대들이 죽기 2~3일 전까지 자기 재산을 지킬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장진호 농협안성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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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원자력주의자들에게 탈원전, 에너지전환은 재앙이다. 그들 자신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재앙이다. 탈원전은 한국 경제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재앙, 태양광은 중금속 범벅의 처치 곤란 폐기물 더미만 남기는 재앙, 풍력발전은 산과 들과 어장을 망치는 재앙일 뿐이다. 이들에게 재앙이 미치는 범위는 대단히 좁다. 남한이라는 공간, 현재라는 시간, 돈이라는 물적 가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지구와 미래라는 시공간, 행복한 삶이라는 가치는 일고의 고려 대상도 되지 못한다. 전 지구와 인류의 미래가 걸린 기후변화는 저 멀리 남의 이야기일 뿐이고, 핵폐기물을 떠안을 후손들의 행복은 더더욱 관심 밖이다. 자기 이익을 지킬 수만 있다면 필요한 자료와 수치를 부풀려 에너지전환을 공격하는 것만이 이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기득권 수호에만 매달리는 한국의 원자력주의자들과 달리 인류의 미래와 다음 세대의 행복을 위해 원자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지금 인류에게 닥치고 있는 가장 큰 재앙은 기후변화이다. 이들이 보기에 기후변화는 지금 지구와 인류사회를 종종 비상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고, 미래세대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들은 탈원전, 에너지전환에 대해 한국의 원자력주의자들과는 정반대로 지구라는 공간, 미래라는 시간, 행복한 삶의 추구라는 시각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은 제임스 핸슨이다. 그는 1988년 미국 의회에서 기후변화의 위험에 대해 최초로 경고했고, 수많은 기후변화 관련 연구논문을 발표한 과학자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는 미국 나사에서 보낸 50년 가까운 과학자 생애의 대부분을 기후변화와 맞서는 데 바쳐왔다. 몇해 전에는 백악관 앞에서 오일샌드 파이프라인 건설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재생가능에너지의 효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악의적으로 부작용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으로는 기후변화를 막기에 역부족이라고 본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탄소세를 점진적으로 올리고 안전이 확보된 원자력발전소를 크게 늘리자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손녀딸과 함께 미국 연방정부를 상대로 기후변화로 침해되는 손녀의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권리를 보장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항공우주국 고다드우주연구소 제임스 핸슨 소장이 기후 변화에 관한 이론을 나타내는 주사위를 들어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기후변화 해결을 위한 원자력 확대라는 핸슨의 주장에 대해 급진적이고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제기되지만, 그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일은 없다. 원자력계의 로비와 그의 원자력 옹호 활동이 연관돼 있다고 보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은 주목받고 진지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한국의 원자력주의자들 중에서는 기후변화의 위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최근 독일의 에너지전환 정책을 비판하는 책을 출간해 원자력주의자들에게서 크게 환영받은 국회의원도 독일의 에너지전환이 기후변화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점에 대해선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책에는 오직 에너지전환과 재생에너지 정책이 독일에서 막대한 비용을 초래했고, ‘대한민국 블랙아웃’이라는 재앙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만 있다.

지금 폴란드 카토비체에서는 세계 기후변화회의가 열리고 있다. 수십년 전부터 해마다 열리지만 결과는 초라하기에 크게 주목받지 못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국 언론과 정치권의 무관심은 놀랄 만하다. 원자력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전환 진영에서도 한마디 들을 수 없다. 이미 평균기온 1.5도 상승으로 기후변화의 영향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원자력이 살길인지 에너지전환이 올바른 길인지 조금이라도 언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원자력주의자들이 오직 남한이라는 좁은 공간에서의 부자 되는 삶이라는 구시대적 시야에 갇혀 있다면 그들의 주장은 지지를 넓히지 못하고 원자력 수호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필렬 방송대 교수 문화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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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를 알게 된 건 멕시코 다큐멘터리 <나디에>(2005)를 통해서다. 2006년 여름 EBS가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DIF)에서 소개했으니 벌써 12년이 지났다. 입술을 깨문 채 애써 담담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 두려움, 막막함, 절망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연이 표정 뒤에 감춰져 있는 걸까.

‘나디에’는 스페인어로 ‘하찮은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뜻한다. 다큐에서는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중미 3국에서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가려는 불법 이민자를 가리킨다. 마리아는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제작진이 마리아를 만난 곳은 멕시코 남동부 베라크루스주 내륙 도시 오리자바에 있는 불법 이민자 캠프였다. 4000㎞에 이르는 미국행의 4분의 1 지점이다. 마리아는 오는 동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강도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동료들이 있었지만 총으로 무장한 강도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감행한 미국행이지만 미국에 가기도 전에 꿈을 짓밟혀버린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북쪽으로 이동하던 어느 날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다. 마리아는 미국으로 갔을까.

다큐멘터리 <나디에> 포스터

<나디에> 속 불법 이민자들이 겪는 고초는 말로 헤아릴 수 없다. 돈을 강탈당하기 일쑤다. 마리아처럼 성폭행당하는 여성도 흔하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악명 높은 갱단 ‘마라 살바트루차(MS-13)’는 이들의 길목을 노린다. 경찰과 이민국 직원도 한통속이다. 약자의 고통을 어루만지기는커녕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일 뿐이다. 불법 이민자들은 당해도 하소연도 못한다. 그 순간 본국으로 송환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참는 수밖에 없다. 단지 나디에라는 이유로 이 모든 걸 감수해야 하는 건 정당한가.

세밑에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마리아를 불러낸 건 두 장의 사진이었다. 하나는 올해 중반 미국에 입국한 엄마가 국경수비대원으로부터 몸수색을 당하는 걸 보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리는 여자아이다. 생후 22개월 된 아이의 이름은 야넬라다. 당시 이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불법 이민자에 대한 무관용 정책인 가족 격리 때문에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책은 많은 비난을 샀다.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19세기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슨이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묘사했듯 새 빈민구제법 실시라는 미명하에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아이들을 고아원에 수용했던 가족 격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야넬라 사진은 트럼프의 가족 격리 정책 철회의 일등공신이 됐다. 다른 하나는 지난달 국경수비대가 쏜 최루탄에 혼비백산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기저귀를 찬 아이에게 최루탄을 쏜 행위에 세계는 경악했다. 국경수비대가 불법 이민자에게 최루탄을 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3년에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목표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최루탄을 쏘는 행위는 불길하다. 국경에서의 최루탄 발사가 일상화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나디에>에는 미국-멕시코 국경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국경은 불법 이민자들이 결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어서일까. <나디에> 이후 12년이 지났지만 국경의 살벌한 풍경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야넬라와 최루탄이 명백한 증거다. 오히려 장벽은 높아지고, 길어지고, 견고해졌다. 불법 이민자들의 대응 방식 또한 크게 달라졌다. 바로 ‘나디에’가 ‘캐러밴’이 된 것이다. 나디에가 보잘것없는 개인을 상징한다면 캐러밴은 연대의 힘을 상징한다. 캐러밴은 더 이상 나디에가 아님을 보여주는 불법 이민자들의 행동이다. 야넬라나 최루탄 세례를 받은 아이들도 캐러밴의 일원이다. 캐러밴은 무지막지한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을 줄이고, 안전하게 국경까지 인솔하는 ‘코이요테’를 고용하는 데 드는 1만달러를 아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1750년대 몰려드는 독일 이주민을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존재”라고 했다. 초대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존 제이는 가톨릭 신자들을 배제하기 위한 장벽 설치를 제안했다.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건국 이전부터 존재할 정도로 뿌리 깊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트럼프도 이민자 후손이다. 그의 무관용 정책이 새해 들어 수그러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나디에가 캐러밴이 됐다고 해서 미국 국경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캐러밴의 강고한 연대만이 뿌리 깊은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것 또한 분명하다. 캐러밴의 행진을 응원한다.

<조찬제 국제·기획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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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7세 소년 라이언은 2017년 6월부터 1년간 2200만달러(247억원)를 벌어들였다. 포브스 집계에 따르면 라이언은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유튜브 스타다. 그는 유튜브에서 새 장난감 포장을 뜯어 갖고 놀며 느낌을 들려주는 채널 ‘라이언 토이스리뷰’를 운영한다. 라이언의 채널은 구독자 수가 1747만명(13일 오후 4시 현재)에 이른다. 동영상을 본 아이들은 라이언이 산 장난감을 사고, 행동까지 따라한다. 아마도 라이언은 세계 최연소 인플루언서(influencer·영향력 있는 개인)일 것이다.

지난달 한국에서는 ‘커버송의 신’으로 불리는 유튜버 제이플라(김정화)가 시선을 모았다. 그가 운영하는 채널 제이플라뮤직 구독자가 1000만명을 돌파하면서다. 국내 1인 크리에이터 가운데 최초 기록이다. 제이플라는 유명 팝음악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해 부르면서 인기를 얻었다. 그의 영상 중 에드 시런의 ‘셰이프 오브 유’는 2억뷰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는 ‘없는 게 없다’고 해서 ‘갓튜브(God+Youtube)’로 불린다. 매달 로그인하는 사용자 수가 19억명,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다. 일정 기준을 달성한 유튜브 영상에는 광고가 붙고, 영상 조회 수에 따라 광고 수익이 발생한다. 유명 유튜버들이 억대 수익을 올리는 배경이다. ‘셀럽’으로 뜬 이들은 거대 방송사까지 접수할 태세다. JTBC는 인기 유튜버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랜선라이프>를 방송 중이고, 게임 크리에이터 대도서관(나동현)은 CBS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활약했다. 대도서관은 연 소득이 17억원 정도라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유튜브의 인기는 세대를 넘어서지만 특히 초등학생들의 사랑은 압도적이다. 이들에게 유튜브는 TV(방송)·네이버(검색)·페이스북(사회관계망서비스)을 모두 합친 존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전국 초등학교 6학년 8597명을 대상으로 희망직업을 조사한 결과 유튜버가 운동선수·교사·의사·요리사에 이어 5위에 올랐다고 한다. 초등학생 희망직업 10위 안에 유튜버가 든 것은 처음이다. 시대의 변화를 체감케 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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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전반에 걸친 일대 개혁을 단행해 나갈 것입니다.” “새로운 정치를 정열적으로 추구 … 국가사회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하려는 개혁의 의지를 … 모아가야 하겠습니다.”

어제오늘 누군가가 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말들이죠. 앞은 1972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박정희가 유신을 강조한 대목이고 뒤는 전두환의 취임사 한 구절입니다. 2012년 대선후보로, 촛불대통령으로 문재인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개혁은 늘 되풀이되는 화두입니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만큼 갈 길이 멀다는 현실의 방증일 테죠. 그 까닭은 개혁결과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의 부재에 있습니다. 정치개혁은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일 수는 없죠.

정치개혁이 이루어지면 깜깜이 예산 심사를 통해 자기 뱃속을 채우고 공공이익은 가볍게 토스해 버리는 추태가 사라질까요? 치열한 정쟁, 끝없는 거짓말, 부끄럼 없는 부패가 끝날까요? 정치 선진국이라고 생각되는 서구를 봐도 그렇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미국 공화당은 총기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총을 보급해야 한다, 기후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등 뻔뻔한 거짓말로 정쟁을 부추깁니다. 영국 보수당은 브렉시트가 쉽고 긍정적 변화를 줄 것이란 사탕발림으로 국민을 속였죠. 인종혐오로 권력을 잡은 정당이 유럽에 한둘이 아닙니다.

정치개혁은 막연히 생각하듯 반듯하고 온전한 정치로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염치없고 강도 같은 정치인이 거들먹거리는 꼴은 뉴스에서 끊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정치개혁은 더 멀고 깊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20세기 한국 정치는 배척을 기반으로 했죠. 남과 북은 전쟁을 벌였고 영남 정권은 호남을 배척했습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짓눌렀고 대기업은 동네가게마저 거덜 냈습니다. 남자는 여자 위에, 이성애자는 동성애자 위에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찍어누르며 달려온 사회는 지옥철, 입시지옥, 헬조선으로 조롱당하는 지옥이 됐죠. 올라선 자는 더는 올라가기 힘들고 깔린 이도 힘들어 무너지는 아비규환 형국입니다. 다 같이 망하지 않으려면 새 길이 필요합니다. 정치개혁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21세기 한국 정치는 포용을 지향해야 합니다. 포용은 통합이 아닙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남자와 여자가 통합될 수 없습니다. 유치원 원장과 학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통합이란 말은 애초에 억지 환상일 뿐이죠. 하지만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는 있습니다. 조금은 참아주고 조금씩 양보할 수는 있죠. 그러나 정치적 포용은 일방적 선의나 영웅에 기대서는 안됩니다. 힘과 권력을 나눠 가졌을 때,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야 가능합니다. 정치개혁은 힘과 권력을 나누어 진정하고 지속 가능한 정치적 포용이 가능케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선거법 개정은 그 시작입니다. 현 제도에서는 선거구에 1등한 후보만 승자가 됩니다. 지난 총선 성동 을구에서 새누리당 후보는 불과 38% 득표율로 2등(36%), 3등(24%)을 물리치고 당선됐습니다. 사실 6할이 넘는 유권자가 반대하는 이가 당선된 겁니다. 6할의 표가 사표가 된 셈이죠. 이런 제도 덕분에 새누리당은 33.5%의 전국 득표율로 40.7%의 의석을, 더불어민주당은 25.5%의 득표율로 41%의 의석을 가져갔습니다. 두 거대정당이 전체 표의 56%로 82%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공정하지도, 민의를 반영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민의를 반영하려면 이 지역구에 다섯 석을 배정해서 새누리당 두 석(전체 의석수의 40%), 민주당도 두 석(40%), 국민의당에 한 석(20%)을 주는 게 맞습니다. 그래야 공정하고, 유권자도 작은 정당에 사표 걱정 없이 표를 던질 수 있습니다. 이런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작은 정당이 생기고 커갈 수 있죠. 그래야 배척당했던 이들이 힘을 키우고 당당하게 포용의 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정당이 이미 공감을 표시한 사안입니다. 이마저도 개혁의 걸음을 못 뗀다면 정치지도자로서 내가 뭘 하고 있나 물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궁색한 변명일 뿐임은 본인이 잘 알 테죠.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일갈이 저 멀리 맴도는 차가운 계절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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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중이 이용하는 시설의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통신구 화재, KTX 철도 탈선, 난방용 열수송관 폭발까지 사회기반시설이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다. 지난 4일 일산 백석역에서 열수송관이 폭발해 다수의 사상자를 낸 데 이어 그제 경기 안산시에서는 열수송관이 파열됐다. 부산의 온천수 관로 누수, 서울 목동 아파트 단지의 열수송관 파열에 이어 네 번째다. 열수송관이 지나가는 인근 주민들은 폭탄을 깔고 사는 것처럼 불안에 떨고 있다. 이것뿐인가. 통신구 화재는 인근 상권을 마비시킨 것은 물론 통신이 꺼지면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빈발하던 열차사고는 급기야 탈선으로 이어졌다.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의 정책목표로 내세웠던 정부가 맞나 싶을 정도다.

5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역 근처에서 전날 밤 발생한 온수관 파열 사고 현장에서 복구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열수송관 폭발사고는 안이한 안전대책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전국에는 열수송관 총 3956㎞가 매설돼 있다. 그런데 관리주체는 제각각이다. 절반 정도인 2164㎞만 지역난방공사가 관리하고, 나머지는 지방자치단체나 민간이 운영하고 있다. 통합적인 관리를 바라기 힘든 구조다. 그렇다고 열수송관을 안전하게 운영관리할 체계적인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역난방공사 사장이 “객관화된 관리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열수송관이 설치된 지 30년 이상 되면서 각종 사고가 빈발했다. 그렇다면 노후화에 따른 대비책을 만들었어야 하지만 수수방관해왔다. 폭발로 인명피해까지 발생하자 대책을 만든다면서 허둥대는 상황이다.

정부는 13일 사회기반시설안전관리대책 회의를 열었다. 정부는 연이은 사고가 더 큰 사고의 예고일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차제에 사회기반시설 전반에 대한 안전점검을 벌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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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신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2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을 보고하면서 “최저임금 인상이나 주 52시간 근로 등에 관해 시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속도조절이 필요하면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전날에는 기자들에게 “내년 3월까지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고용노동부 업무보고에서 최저임금이 고용 악화에 미친 영향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을 앞두고 대통령과 경제정책 수장이 한목소리로 속도조절론을 꺼내든 게 심상치 않다. 정부는 지난 7월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사실상 접었다. 이번에는 최저임금 인상의 속도를 늦추려 한다. 재계와 소상공인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3일 충남 아산에 있는 자동차 부품업체 서진캠을 방문해 회사 관계자로부터 부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재계는 고용 악화의 책임을 최저임금에 돌리며 노동자들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전문가들은 경기 침체나 고용 악화는 최저임금 인상보다 조선·철강 산업 등 산업기반 약화와 신흥국의 추격 등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경제정책은 재계의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가 대표적 사례다. 정부와 국회는 지난달 현행 3개월인 탄력근로 단위시간을 6개월로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유연한 근로시간 활용으로 근무 집중도를 높여야 한다는 재계의 요구를 수용한 셈이다. 노동자 건강권이 우선이라는 노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6개월 확대’는 굳어져 가는 분위기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사회’를 앞세우고 출범했다. 그러나 집권 1년 반을 지나면서 노동정책은 후퇴하는 양상이다. 이행되지 못한 공약이나 약속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일정부분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하청 및 외주업체의 비정규직 문제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대선공약인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은 재계의 반발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노동정책이 우회전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노동의 양보 없이 경제활성화는 어려운 일일까. 고용 악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고육지책으로 최저임금 속도조절론을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양보를 요구하기에 앞서 이것이 경제활성화를 위한 최선의 방법인지 묻고 싶다. 노동계의 고충에 귀기울이는 자세가 ‘노동 존중’ 아닌가 싶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노동현안을 대화로 풀어가자는 취지는 좋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빠진 경사노위에서 첨예한 현안이 풀릴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오산이다. 민주노총이 참여하도록 재삼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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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록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가 뜨면 으레 원고 청탁이 새로 들어올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청소년용 SF소설을 쓰시는 정현추 작가님 맞습니까?”

‘맞습니까?’라는 종결어미가 다소 불편했지만 그저 말버릇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렇다고 확인해주었다. 상대는 곧장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문화부 산하 텍스트 교정권고위원회 소속 최선민입니다. 작가님께 상의드릴 것이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텍스트 교정권고위원회? 처음 듣는 기관 이름이었지만 ‘교정’이란 단어가 즉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지금까지 펴냈던 책 여섯 권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이키며 출판사와 먼저 얘기해봤느냐고 물었다.

“저희가 담당하는 업무의 성격상 출판사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사후심의 절차 때문이라면 그게 맞습니다만, 저희는 다릅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최선민이라는 사람의 말을 꼼꼼히 복기해보았다. 사전심의제가 부활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다.

“요점을 말씀해주시죠.”

“작가님께서 내년 출판을 목표로 출판사와 함께 기획하고 계신 작품 때문입니다. 가제가 아마… <소행성의 아이들>이죠?”

팔에 소름이 돋았다. <소행성의 아이들>은 한 달 전에 계약한 이래 편집자와 함께 아직 틀을 잡아가고 있는, 세상에 선보이지 않은 이야기였다. 편집자와 나는,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늘 협업용 메신저를 통해 회의를 했다.

“저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 작품은 주인공인 청소년들이 폭력적인 쿠데타를 모의하는 이야기입니다. 소행성대에서 노동력과 지능을 착취당하며 광물을 캐는 주인공들이… 그중 한 명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작업용 기계를 개조해서 무기를 만들죠. 지금까지 결정된 줄거리는 이 폭력집단이 우주 자원관리청의 경비대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고…”

“메신저 회의 내용을 도청했군요.”

“글 쓰는 분답지 않게 단어를 잘못 사용하시는군요. 도청은 법적인 용어도 아니고,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국회에서 통과한 실법령에 따르는 합법 감청입니다.”

작년인가, 선거 결과 보수 우파 성향을 자랑스럽게 내걸던 정당이 행정부와 국회를 전부 장악했을 때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 우리는 유명한 디스토피아 작품들을 거론했다. 설마 그렇게 되진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텍스트 교정권고위원회라는 곳의 직원은 창작물의 내용을, 완성되기도 전에 사전 검열하고 지금처럼 연락해서 압박을 가하는 게 일입니까?”

“아닙니다. 합법 감청은 전적으로 인공지능이 맡습니다. 메신저 감청 인공지능에 따르면 정현추 작가님께서 앞으로 쓰실 글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묘사 때문에 반정부 행위를 조장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란 원래 그런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 아닙니까. 청소년 소설의 주제가 반항인 것도 당연히…”

“저는 인공지능이 분석한 결과를 통보할 뿐입니다. 창작자의 견해를 밝히시려면 직접 방문하셔야 합니다. 전문가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습니다. 통화가 끝나면 휴대전화로 방문 일시를 안내하는 메시지가 갈 겁니다.”

전화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겼다. 나는 ‘미방문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음’이라는 글자를 멍하니 내려다보면서, 초당 수백만 건씩 오가는 메시지의 암호를 뚫고 모조리 감청하고 있는 인공지능과 그 뒤에서 웃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호주 의회는 국가 기관이 IT 서비스 업체에 요청할 경우 업체가 메신저 전송 내용의 암호화를 풀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페이스북 메신저, 왓츠앱, 애플 메시지 앱 등은 어떤 식으로든 오가는 메시지 내용을 암호화해 전송한다. 도중에 가로채서 내용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송신과 수신이 이뤄지기 전까지 그 누구도 내용을 알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은 인터넷 통신 속 신뢰의 기본이다. 이는 사생활을 침해당하지 않을 보편적 권리와 직결된다.

하지만 호주 의회는 상하원을 막론하고 모두 이 권리에 예외가 있을 수 있음을 찬성한 셈이다.

호주는 다섯 개의 눈 연맹(Five Eyes Alliance)의 일원이다. 이 연맹은 통신 신호 정보에 관해 상호 협조하는 첩보 동맹으로 호주 외에 미국,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가 참가국이다. 호주는 동맹국 가운데 처음으로 암호화를 해제할 수 있는 강제력을 명문화했다.

물론 그들도 내세우는 명분은 있다. 암호화된 메시지를 통신 수단으로 삼는 테러범을 사전에 검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전방위 감청을 허가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악용될 소지가 너무나 많고, 그 허가 자체가 가지는 의미 또한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로 사회적 합의 과정을 생략해서는 안 될 문제다.

인터넷이 주요한 소통의 수단이 되어버린 지금, 어느 나라 누구든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언제까지고 미뤄둘 수는 없을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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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척 들어서서 ‘밥 한 그릇 주’ 하고는 목로 걸상에 걸터앉으면 1분이 못 되어 기름기가 둥둥 뜬 뚝배기 하나와 깍두기 접시가 앞에 놓여진다. 파양념과 고춧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무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으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없다.”

식민지 시기의 인기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12월호에 실린 ‘문자먹방’ 가운데 하나다. 이 잡지는 조선 기생과 할리우드 배우를 아우른 연예계 이야기, 통속적인 흥미를 살살 긁는 뒷골목 애정 비화, 섹슈얼리티를 자극적인 양념으로 삼은 풍문과 얄궂기 이를 데 없는 괴담과 추문을 적절히 요리할 줄 아는 잡지였다. 먹는 소리, 문자먹방에서도 발군이었다. 음식을 자주 다루었고, 집중력이 있었다. 고릿적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식민지 대도시의 풍경에, 일상의 풍속에, 연애하는 남녀의 산책길에, 밤 산책에, 당대 보통 조선 사람이 일평생 갈 일 없는 나라 이야기에, 어떤 상황에든 곧잘 먹는 이야기를 가져다붙였다. 일상의 음식을, 일상의 감각에 스며들도록 했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음식을 가지고 독자를 홀리려는 것일까? 갈 데 없는 설렁탕 이야기 아닌가. 글쓴이, 필명 우이생(牛耳生, 쇠귀. ‘生’은 남성을 표시하는 접사)의 붓끝을 더 따라가 보자. 그에 따르면 설렁탕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선 구수한 냄새가 코로 물신물신 들어오고 터분한 속이 확 풀리는 것 같다고 한다. 겨울에, 겨울에도 밤-자정이 지난 뒤에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웅숭그리고 설렁탕집을 찾아가면 우선 김이 물씬물씬 나오는 뜨스한 기운과 구수한 냄새가 먼저 회를 동하게 한단다. 우이생이 보기에 설렁탕은 한마디로 “일반 하층계급에서 많이 먹는 것은 사실이나 제 아무리 점잖을 빼는 친구라도 조선 사람으로서는 서울에 사는 이상 설렁탕의 설렁설렁한 맛을 괄시하지 못”할 음식이었다.

‘설렁탕의 설렁설렁한 맛’. 여기 이르러 절로 무릎을 탁 친다. 조선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서 제를 올리고 끓인 선농탕에서 설렁탕이 유래했다는, 이제 음식 문화사 공부하는 사람들은 거론하지 않는 낭설이 다 부질없어지고, 조선 시대 몽골어 학습서인 &lt;몽어유해(蒙語類解)&gt; 속에서 곰탕에 해당하는 몽골어 ‘슈루’의 흔적 더듬기도 보람이 없다. 설렁설렁이랬다. 설렁설렁이란 바람이 가볍게 자꾸 부는 모양과 감각과 분위기를 드러내는 부사다. 커다란 솥에서 탕국이 끓어오르며 가볍게 이리저리 이는 물결을 수식할 때에도 딱이다. 팔이나 꼬리를 가볍게 자꾸 흔들 듯이 가벼운 움직임, 가벼운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을 수식하는 말도 이 말이다. 설렁탕은 설렁설렁 끓고, 사람들은 설렁설렁 밤길을 걸어가, 설렁탕 한 뚝배기 설렁설렁 해치운다. 체면 차릴 것 없고 돌아볼 것 없다. 우이생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음식집이라면 제 소위 점잖다는 사람은 앞뒤를 좀 살펴보느라고 머뭇거리기도 하겠지만 설렁탕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해방적(解放的)이다.” 사람을 해방시키는 음식이니, 그야말로 맛있다는 음식 가득 늘어놓고도 입맛이 없어서 젓가락으로 음식을 ‘끼지럭끼지럭’하는 친구도 “설렁탕만은 그렇게 괄시하지 못한다.”

위 이야기는 진품명품, 천하의 명물이라고 할 만한 조선 팔도의 대표 음식을 예찬한 칼럼 ‘진품·명품·천하명식팔도명식물예찬(珍品·名品·天下名食八道名食物禮讚)’에 할애한 꼭지에 속한다. 여기에 조선 대표 신선로, 전주 탁백이국(콩나물국밥), 진천 메밀묵, 진주 비빔밥, 서울 설렁탕, 개성 편수, 대구 대구탕반(따로국밥), 연백 인절미, 평양 냉면이 나란하다. 신선로 하나를 빼놓고는 모두 누구나 설렁설렁 먹을 만한 음식이다. 100년 전에 막 태어난 문자먹방은 누구나 만만히 대할 음식에다 이야기로, 수사로, 감각의 적극적인 표현과 관능의 구체적인 발현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서민의 음식에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무대예술은 종합예술이라 하지만 잘 조리된 한 가지 음식이나 잘 차려진 한 상 요리라는 것은 역시 훌륭한 한 종합예술”이라며 과감히 의미를 부여했다. 설렁탕, 탁백이국이라면 하층계급 음식이 제 매력으로 상하귀천 모두를 설득하고 아우른 데 박수를 보냈다. 편수가 보쌈김치와 어울릴 때에는 “식도락의 미각은” “황홀경”에 이른다고 했다. 인절미에 부친 말은 ‘사랑의 떡 운치의 떡’이다. 잡지다운 통속성은 그것대로 흐르되 의도 했든 하지 않았든, 음식에서 초보적인 민족주의 과제가 수행되고 있었다. 전에 없던 조선어 통사의 개척과 함께였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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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장애인 인권과 인식 개선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김정숙 여사라 말할 것이다. 평창동계패럴림픽 성공에 김 여사의 공이 크다는 것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둔 반면 장애인올림픽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장애인올림픽에서 김 여사는 특유의 유쾌함으로 매일 열렬한 응원을 펼쳤다. 2개의 태극기를 꽂은 가방을 등에 메고 경기장으로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은 이전 어떤 영부인도 보여주지 못한 진정성이 담겨 감동을 줬다. 그 후에도 김 여사는 장애인의날,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 참석했고, 발달장애인과 부모들을 청와대에 초청, 장애자녀를 키우느라 지친 장애인부모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등 올 한 해 장애인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3월 13일 오후 강릉컬링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 휠체어컬링 예선 7차전, 대한민국과 스위스 경기를 관람하며 응원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사회가 발전하려면 국민 의식이 성숙해야 한다. 고인이 된 영국 다이애나비는 평생 무릎을 꿇지 않았지만 휠체어 장애인을 위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2012년 런던장애인올림픽 때 목격한 멋진 광경이 있다. 폐회식 다음날 영국 선수단의 시내 카퍼레이드가 있었는데 그때 일반올림픽과 장애인올림픽 참가 선수들이 환호하는 시민들을 향해 함께 손을 흔들며 영국에서 개최된 두 개의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자축하는 거리축제를 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 김정숙 여사의 ‘장애인 먼저’ 실천이 이어져 우리 사회에 장애인 포용 분위기가 확산돼 장애인 고용이 확대되기를 소망한다.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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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몇 명이 겨울방학 공기업 인턴십에 참여하고 싶다고 자기소개서를 보여줬다. 대학 입학할 때도 자기소개서를 써보지 않은 학생들의 글은 손댈 곳이 많았다. 지원동기, 자신의 강점과 약점, 인생에서 어려웠던 경험 등을 분량에 맞춰 써내는 일은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몇 가지 조언을 해주니 그런 대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가능하면 대학 입학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주요한 일들을 표로 만들고, 자격증이나 교내 수상 실적이라도 있으면 하나도 잊지 말고 챙겨두라고 했다. 합격한 선배의 조언이 가장 좋지만 접하기 어려우니, 아쉬운 대로 다니다 온 선생이 있으니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모두 원하는 일자리 채용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시험에 상처 입었거나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공채. 공개채용의 약자다. 원래는 1년에 한두 차례 정기적으로 신입사원을 뽑는 것만을 의미했으나, 입사를 전제로 하거나 신입사원 공채 지원 시 가점을 주는 인턴십 프로그램도 공채의 일부로 인정받게 됐다. 공채는 일본에서 1928년 시작되었다. 채용 방식이 중구난방이었던 상황에서, ‘취업준비생’과 기업 모두가 혼란을 벗어나고자 ‘취업협정’을 맺었다. 한국에서는 1957년 삼성물산이 도입했다. 27명 선발에 지원자는 1200명으로 경쟁률이 40대 1을 넘었다. 한국의 채용 방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과 달라졌다. 1000년이 넘게 ‘공정함’을 대표하던 과거제도의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가고, 고시 합격해서 출세하라”는 입신양명이 달성되는 방식은 비단 대학 입시와 고시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괜찮은 일자리’, 즉 ‘선망직장’의 공채에도 해당됐다. 기업들은 수십년 대졸공채를 운영하면서 면접의 횟수를 늘리거나 실무평가를 도입해 왔지만, 필기시험은 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공채의 정점에 있는, 삼성그룹은 2014년 자체 필기시험인 SSAT를 폐기하고 ‘총장 추천 지원’ 등을 도입하려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다시 필기시험인 GSAT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권처럼 채용비리 이야기가 나오면 ‘공정한 전형 평가’가 필요하다며 필기시험이 가장 무난한 해법이 되기 일쑤다.

한국의 절대다수 기성세대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취업 방식은 공채임에 분명하다. 공채로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의 특징을 떠올려 보면 사람들이 목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서류전형부터 필기시험, 면접까지 자체 개발하고 실제 운영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회사라는 것 자체가 그 직장의 건실함을 입증한다. 쉽게 말해 대기업, 중견기업, 공공부문만이 가능하다. 노동자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직장은 나오지 않는 이상 쫓겨나지 않고(높은 평균근속연수나 정년보장), 해가 지나면 연봉이 오른다(호봉제). 공공부문이라면 시작은 미약한 봉급일지 모르나, 끝날 때는 국민연금을 상회하는 연금수익도 얻을 수 있다. 일종의 신분상승도 체감할 수 있다. 직장 내부에서는 ‘인재’로 대접받고 직급별 경력개발 프로그램의 대상이 된다. 협력회사나 하청회사의 ‘을’들을 만날 때는 ‘갑’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체험할 수 있다. 대기업 공채 직원이 되면, 이직 시장에서 비슷한 수준의 회사로 약간의 연봉을 올려 수평이동할 수 있다. 중소기업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점차 큰 규모의 회사로 이직하는 경력개발모델은 한국에서는 주류가 아니다.

당연히 위의 선망직장이 뽑을 수 있는 노동자의 숫자는 적다. 오호영의 논문 <대졸자의 선망직장 취업스펙과 정책과제>에 따르면 2013년 선망직장의 정규직이 된 경우는 4년제 대학 졸업 취업자의 23.8%에 그쳤다. 50.5%는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등 ‘비선망직장’으로 향했다. 공채 시험을 보지 않고 대학이나 고용노동청 취업지원센터, 혹은 지인의 소개로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는 이야기다. 공채 리그는 마치 모두의 것인 양 과대대표된다. 아무래도 Top 5 명문대에서 42.7%,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서 35.4%가 선망직장에 취업하기 때문이리라.

선망직장의 리그 안에 공채를 통해 입성한 이들은 같은 일을 하지만 다른 경로로 입사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준비하느라 한 고생’은 ‘빽’을 써서 입사한 ‘낙하산’을 규탄할 때는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것을 입증해 주지만, ‘열심히 일해서 흘린 땀’의 ‘공로’로 정규직으로 진입하려는 이들 앞에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변하곤 한다. 몇 주, 길게는 몇 년 넘게 오롯이 공을 들여 공채 입사에 최적화되도록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 많은 조건들 덕택일 수 있음에도, 그 조건을 묻는 것은 불쾌해한다. “첫 직장이 중요하다”는 경구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차별을 은연중에 정당화한다. 공정함을 매개로 한 신분제적 차별이다. ‘사농공상’이라는 유교적 신분제 아래에서의 양반의 인식이 아직 남아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고 느낄 지경이다. 명문대-선망직장 리그 안에서 순환하는 정규직-경력직 시장은 이러한 인식의 경제적 토대가 된다.

공채로 한국 사회 전부를 조직할 수는 없다. 모두 같은 방식으로 출세할 수는 없다. 정부가 공공부문 공채를 늘리거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원 전환한다 한들, 대기업이 선심을 써서 신입사원 공채를 늘린다고 한들 선망직장의 정규직 숫자를 다수파로 만들 수는 없다. 정부나 지자체가 어떤 종류의 지원을 하더라도 공개채용을 운영할 수 없는 회사가 절대다수의 기업이다. 중소기업이 아무리 구인공고를 취업 포털에 올려도 마땅한 사람이 지원하지 않는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도 비정규직과 하청노동자는 있었고 이들이 다수였다. 다만 고도로 경제가 성장했기에 노동시장에서 빠르게 흡수됐고 임금이 그럭저럭 인상되어 도드라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고도성장기는 끝났다. 정책의 할 일은 경쟁 바깥에서 일자리를 구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해 보장하고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에 더 가깝다. 사실 공채 합격자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분투하며 건강하게 살아나가고 있다. 이들을 마치 빈민가의 서사처럼 피해자이거나 어딘가 무례한 사람들로만 전달하는 태도는 정당한가. 다수 생활인들의 목소리와 어떻게 만나고 조직할 수 있을까.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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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당정치는 후진적이다. 정당들의 원칙 없는 이합집산, 정치인들의 잦은 탈당과 복당, 주기적인 당명교체는 고질적인 병폐이다. 선거만 지면 반복되는 비상대책위원회도 구태의연하다. 특히 정당의 무책임함은 최악이다. 대통령선거 때는 당선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대통령의 임기 말 지지도가 점점 떨어지면 탈당을 요구한다. 대통령의 인기가 더 심각한 수준으로 나쁠 경우에는 집권당 의원들이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본격적인 선긋기에 나선다. 대통령과 우리는 전혀 다른 정치세력이니, 다시 표를 달라고 구걸한다. 유권자가 바보인가?

정권창출에 실패하면 슬그머니 친정에 복당해 거대정당의 기득권을 놓고 계파 간에 지지고 볶기를 반복한다. 왜 탈당과 복당을 했는지 국민을 설득할 만한 어떠한 대의명분도, 논리적 근거도 없다. 수적 우위만 중요하다. 복당파와 잔류파가 치고받고 싸우며 유력 정치인들의 복당을 화제 삼는 자유한국당에만 국한한 이야기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의 과거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치열한 당내 갈등으로 내홍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의 탈당과 창당을 반복하며 만든 정당이 대통합민주신당이었다.

책임 있는 정당과 정치인이라면, 간판을 유지하고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는 것이 정도이다. 알량하게 책임을 회피하려 당의 간판을 바꾸고, 누구는 남고 누구는 떠나서 세탁을 열심히 하며 유권자들의 매서운 시선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명분이 없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3당 대표의 화려했던 과거 당적은 어떻던가? 탈당이나 당적 변경이 다수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권력의 양지만 쫓아다니며 정파를 막론하고, 항상 여당의 당적만 유지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이러한 기성 정치인들의 모습을 배워 젊은 정치신인들조차도 이당 저당 기웃거리길 예사로 한다.

기회주의적 행태가 정당을 망친다. 정당 지도자들이 당 변경을 쉽게 하는데, 국민과 당원들이 그 정당에 애정과 지지를 지속적으로 보낼 리 만무하다. 기회주의자들이 계속 승리하는 구조에서는 탈당과 복당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바꾸지 않으면 정당정치의 후진성은 나아질 수 없다. 무분별한 당적 변경이 예사인 배경에는 승리지상주의, 원칙 없는 공천, 당권파의 반대파에 대한 숙청, 탈당을 불사해도 당선되는 선례, 집권당 해바라기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자리 잡고 있다. 유권자 뜻과 무관한 공천으로 벌어지는 사례는 논점을 달리하니 일단 논외로 하자. 탈당을 변명하려면 최소한 대의명분이 있어야 한다.

공직선거법을 개정하여 후보자들은 정당 입당과 탈당 이력을 표기하고, 이를 소명하도록 해야 한다. 현재 범죄이력도 공개하고, 소명 기회를 주니 법리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법개정을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당정치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정치인의 기회주의적 행태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기반과 정치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기록으로 남겨야 책임추궁이 가능해진다. 명분 있는 당적 변경이었다면, 떳떳하게 공개하고 국민을 설득하면 된다. 퇴출 여부는 국민이 정한다.

<김정현 전북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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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는 혹독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때 만난 이웃사촌을 평생 잊지 못했다. 시인과 매춘부, 나환자와 수녀, 부두노동자, 무덤 파는 인부, 묘지 경비원, 교수형 집행인, 도둑과 거지, 소매치기 사기꾼, 살인 수배자,  양치기, 열쇠와 시계제조공, 이발사, 마법사, 고물상, 곱사등이, 새장수, 낚시꾼 어부, 재봉사, 결핵환자, 떠돌이 악사들.

공동묘지 파는 인부는 무덤 팔 때도 아코디언을 짊어졌단다. 그는 지옥을 안 믿었다. 의로운 자는 거룩한 곳으로 가고 죄인의 영혼은 육체 속에서 벌레들이 다 파먹을 때까지 남는다 말했다. 그는 죽은 자를 위해 세속 노래를 연주해줬는데 불경스럽다며 신부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고리키는 신부가 아니라 무덤 파는 인부를 성스럽게 여기고 글로 남겼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고생스러운 생애였다. 10대에 고아가 되어 막노동을 전전했다. 어찌 저찌 시인 소리를 들으며 행복도 잠깐. 장남은 콜레라로 병사, 차남은 자살. 큰딸은 정신병원에, 넷째는 병사. 우울증이 깊어진 시인은 추운 겨울 병상에 누워 성탄별을 보았다. “세상은 그래도 사랑하기에 좋은 곳이에요. 이런 곳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새 무시는 쌩으로 묵어도 이상 달어라. 코가 잘래나가도록 추와야 단물이 싹 들지라. 사람도 추와야 잔 사는 거 같어부러. 더와서 쌔(혀) 내놓고 다닐 땐 사람이 아니재. 갱아지재.” 막 파낸 굵은 무를 한소쿠리 안겨주고 간 할매. “짐치 못 담궈묵겄스믄 기냥 깎어서 깍깍 씹어 자셔. 방구 냄시도 맛나고이.”

보해소주 잎새주를 마시는 이쪽 동네는 ‘보헤미안’이 아니라 ‘보해미안’ 랩소디. 무국을 마시면 간밤 술이 벌떡 깬다. “마마 저스트 킬 어 맨… 우우우….” 날마다 죽고 또다시 사는 신비로운 겨울나기. 명함도 보잘것없으며 아예 있지도 않은 이들이 눈보라를 견디면서 살아가는 산동네. 앞집에서 들바람을 막아주지 않으면 뒷집이 춥고, 뒷집에서 산바람을 막아주지 않으면 앞집이 추운 골목길.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우쭐거리면서 청기와집 인연을 자랑해댄다. 기와공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기와집을 자랑하는 머저리가 아닌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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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에 책 한 권을 전해 받았다. <키움 수필집>(생각나눔). 이름만 봐서는 학급문고 같다. 편집과 디자인도 세련된 편은 아니다. 출간된 지 3주가 되도록 언론이 다루지 않은 걸 보면 주목받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지나칠 책은 아니다. 13명의 필자는 (사)국어문화운동본부(남영신 대표)가 운영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수요글벗’ 회원들이다. ‘키움’은 수요글벗 글쓰기 프로그램 가운데 기초과정인 ‘띄움’ 다음 단계인 심화반의 이름이다. 회원들은 국어학자인 남영신 대표의 지도로 매월 한차례 서울시청에 모여 써온 글을 발표하고 강평을 듣는 모임을 갖는다.

<키움 수필집>은 직장에서 은퇴한 뒤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들이 낸 생애 최초의 저작이다. 3년 남짓 글쓰기를 배운 뒤 처음 발표한 글들이지만 술술 잘 읽힌다. 눈에 띄는 것은 필자의 연령이다. 거개가 60대 이상이고 80을 넘긴 분들도 있다. 88세로 필자 가운데 최고령인 김창석옹은 ‘버킷 리스트’에 담아둔 ‘글쓰기’를 생의 마지막 과제로 삼았다. 그렇다고 조급해 하지 않는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여유 있게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인생이라는 깊은 샘에서 맑은 글을 길어올린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평신도 신앙활동 중에 만난 김수환 추기경의 인간적인 면모를 추억한다. 또 몇 해 전 떠나보낸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동양화 그리듯 아름답게 풀어낸다.

84세인 황민재옹의 글에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배어 있다. 전남 신안 출신인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0년 11월 영문도 모른 채 형님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2년간의 산중 생활을 하던 중 국군의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붙잡혀 수용소 생활을 했다. 1953년 휴전협정 직후 석방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냉대와 따돌림뿐이었다. 세상은 빨치산이라는 주홍글씨를 붙여 그를 외면했다. 그는 ‘포로수용소’와 ‘하얀나비’에서 젊은 날의 빨치산 체험과 장년 이후의 고단한 삶을 담아냈다. 원고지 30장 안팎의 짧은 글들이지만, 이를 확장시킨다면 장편 역사다큐가 만들어질지 모른다. 황옹은 글쓰기를 통해 가슴속에 묻어온 이야기를 발표할 용기를 냈다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키움 수필집>의 필자들은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있다. 오랫동안 글쓰기와 무관하게 살아왔던 은퇴자나 노인은 더욱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장·노년층 대상의 ‘수요글벗’을 이끌고 있는 남영신 대표는 글쓰기야말로 노인을 위한 축복이라고 말한다. 글쓰기의 최대 자산은 자유와 경험이다. 좋은 글은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온다. 또 이야기가 동반될 때 좋은 글이 된다. 인생 경험이 풍부한 은퇴자와 노인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노인은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져 밀도 있는 문장을 쓸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일본 작가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노인력’으로 충분히 극복가능하다고 말한다. 노인력이란 통찰력이나 지혜, 유연함, 느림의 미학을 말한다.

일본인 쓰노 가이타로가 쓴 <100세까지의 독서술>이 있다. 작가와 주변 인물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70세 이후 100세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 책이다. 일본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도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화로 가고 있다. 은퇴 이후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수요글벗’ 회원들처럼 제2의 삶을 시작하는 은퇴자들이 적지 않다. 100세까지의 독서뿐 아니라 100세까지의 글쓰기도 생각해 볼 때다. 무모한 도전이 아니다. 56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아간 유학자 미수 허목은 <미수기언> 93권을 남겼다. 이 중 상당수는 60~70대에 쓰였다. 88세를 산 허목은 86세에 장편 자서전 ‘자서(自序)’를 완성했고, 죽기 한 달 전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00세를 눈앞에 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왕성한 글쓰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98세인 그는 올해 들어서만 3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100세의 글쓰기는 먼 이상이 아니다.

노년이 존중받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반면 노년의 지혜와 경험은 날이 갈수록 쌓이고 있다. 글쓰기는 ‘노인력’을 사회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좋은 방법이다. 나이 들어 글쓰기를 시작한 노인들은 “힘든 삶을 사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곤 한다. 글쓰기란 자기의 삶을 그리는 기술이다. 노년층의 글쓰기가 서울 탑골공원의 노인들에게 확산됐으면 좋겠다. 탑골의 노인들 역시 모두 수십년의 사회경험을 가진 ‘노인력’의 소유자들이다. 많은 은퇴자와 노인들이 글쓰기를 통해 경험과 지혜를 동시대인들에게 전달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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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군 당국이 12일 최근 철수 및 파괴 작업을 마친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에 대한 상호검증 작업을 실시했다. 남북 각 11개조 154명으로 구성된 현장검증반은 남북 시범철수 GP를 연결하는 오솔길을 통해 이동해 상대방의 GP 철수 현장을 검증했다. 양측은 GP 시설물이 복구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됐는지, 다른 군사시설로 전용할 수 없도록 불능화됐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검증과정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남측이 북측 GP의 지하갱도 등을 확인하기 위해 특수장비를 동원했는데도 북측이 적극 협조했다고 설명했다. 

남북의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 DMZ 내에 설치된 진지를 상호 방문해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반세기 이상 총부리를 겨눠온 남북의 군인들이 군사분계선에서 만나 굳은 악수를 나눈 뒤 상대측 안내를 받으며 평화롭게 이동하는 장면은 감격적이다. ‘군사적 긴장완화’라는 용어를 이처럼 생생하게 체현한 광경이 또 있을까.

9월 남북 평양공동선언의 합의에 따라 남북은 지난달 DMZ 내 GP 시범 철거작업을 완료하고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을 위해 한반도 정중앙인 철원지역에 남북을 관통하는 전술도로를 개설했다. 북측은 지난달 20일 GP를 폭파하는 방식으로 먼저 철거를 완료하는 등 군사합의 이행에 적극적이다. 북·미 협상의 장기교착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이 사실상 무산된 상황임을 감안하면 북한의 군사적 긴장완화 의지는 이채로울 정도로 돋보인다. 북·미 협상이 난관에 빠질 경우 남북관계까지 닫아버리곤 했던 과거 행태와도 확연히 달라졌다.  

물론 북한으로서는 비핵화 협상 본격화를 앞두고 접경지역 군사적 긴장완화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핵·경제 병진 노선을 폐기하고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기로 한 상황에서 군을 경제건설에 동원하기 위한 환경 조성도 시급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건 군사적 긴장완화 실현을 위한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남북 군당국이 이처럼 약속을 착실히 이행하면서 신뢰를 쌓는 과정은 천금 같은 무게를 지닌다. 군사적 긴장완화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기초공사다. 올해 이뤄낸 성과가 판문점선언에서 합의한 ‘단계적 군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남북 군당국이 힘써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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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이 선거제 개혁에 진전된 입장을 제시했다. 민주당은 1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 개혁의 기본 방향에 동의한다’고 결정하고, ‘내년 1월 정치개혁특위에서 선거제 개혁안 합의-2월 임시국회에서 선거법 의결’의 일정을 제시했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예산안 동맹’을 맺기 전 야 3당이 제안했던 합의문 초안에 근접한 내용이다. 야 3당은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집권여당이 한국당과 합의해 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제 선거제 개혁의 성패 관건은 한국당으로 모아진다. 선거제도는 권력의 생성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기에 헌법만큼 고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현역 의원들의 정치생명이 달린 사안이기도 하다. 여당과 제1 야당 중 어느 한쪽이라도 반대하면 선거제도 개편을 이뤄낼 방도가 없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신임 원내대표(왼쪽)가 13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권호욱 선임기자

실제 선거제 개혁의 대의에도 불구, 번번이 불발된 것은 기득권 정당의 반대 탓이었다. 특히 영남 지역의 배타적 대표성을 사수하려는 지금의 한국당이 선거제 개혁을 등져 왔다. 중앙선관위가 20대 총선을 앞두고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안했을 때도 여당인 새누리당 반대로 도입이 무산됐다. 선거 때마다 승자독식 소선거구제의 수혜를 누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지방선거가 이런 구도를 뒤집어 놓았다. 한국당은 선거제 개혁을 외면해 온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일례로 경기도의회 선거에서 25.47%의 정당득표율을 확보하고도 전체 의석 135석 중 4석(2.96%)을 얻는 데 그쳤다. 한국당을 저항하던 선거제 개혁의 입구로 불러낸 배경이다.

한데 한국당이 점점 후진하고 있다. 신임 나경원 원내대표는 “권력구조와 같이 논의해야 한다”며 난망한 조건을 달았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해선 “부정적”이라고 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원칙적으로 동감한다’던 전임 김성태 원내대표보다 후퇴한 발언이다. 당 지지율이 상승기미를 보이자, 기득권 생리가 움트는 모양이다. ‘이대로’ 가면 1당 아니면 2당은 보장되는 판에 경쟁 야당을 만들어주기 싫다는 속셈일 터이다. 좋은 정치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의사나 소망이 현실에 있는 만큼의 비율로 의회에 반영되는 것이다. 국민주권의 행사 결과가 왜곡 없이 의회에서 대표되어야 하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당이 작은 계산에 함몰돼 30년 묵은 낡은 정치구조를 바꿀 이 절호의 기회를 저버리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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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청년 비정규직 하청노동자가 홀로 작업 중 목숨을 잃었다. 지난 11일 새벽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현장운전원 김용균씨(24)가 석탄운송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진 채 발견됐다. 김씨는 발전소 운영을 담당하는 하청 민간회사인 한국발전기술 소속 계약직으로, 입사한 지 3개월밖에 안됐다. 10일 오후 6시30분 근무에 투입돼 11일 오전 7시30분까지 혼자서 4~5㎞를 순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날 청와대 앞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대표 100인과 만납시다’ 기자회견에서는 김씨가 비정규직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찍은 인증샷이 공개돼 안타까움을 더해주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 12월 13일 (출처:경향신문DB)

2010년 이후 태안화력발전소에서만 12명의 하청노동자가 사고로 숨졌다고 한다. 2012~2016년 346건의 사고로 전국의 발전소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죽었는데, 이 중 97%(337건)가 하청노동자 업무에서 발생했다. 하청노동자들의 희생이 많은 것은 발전 공기업들이 최저가로 낙찰된 민간 하청업체에 일을 맡기기 때문이다. 김씨가 속한 회사도 원래는 발전소와 같은 공기업이었지만 2014년 민영화됐다. 김씨가 과거 정규직들이 했던 것처럼 2인1조로 근무했다면 동료가 기계를 멈춰 끔찍한 사고를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발전 공기업들은 하청노동자들의 일이 ‘필수유지업무’가 아니라며 공공부문 정규직화 방침을 거부하고 있다. 그사이 하청노동자들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고, 노동자들은 “정규직 안 해도 좋다. 더 이상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용노동부는 발전소가 안전관리 규정을 지켰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의 생명·안전과 직결되는 발전소 운전·정비 업무의 정규직 전환에 적극 나서야 한다.

11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대표 100인과 만납시다’ 기자회견에서 발전노동자가 이날 새벽 사고로 숨진 하청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한 뒤 울먹이고 있다. 이상훈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취임 후 첫 업무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지만 비정규직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8월 현재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3.0%로 지난해(32.9%)보다 높아졌다. 정규직 임금은 1년 전보다 5.5% 늘어난 반면 비정규직은 4.8% 증가에 그쳐 임금 격차는 더욱 커졌다.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를 총체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정규직 전환도 시급하지만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아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를 없애는 일도 중요하다. 아울러 해고되고 실직한 노동자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사회안전망 구축도 절실하다. 노사와 정부·정치권이 머리를 맞대 ‘죽음의 외주화’ ‘죽음의 비정규직화’를 막을 방도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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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한 시절 스스로 몰아치는 강물이 있다. 한국 정치는 험한 물줄기와 함께 몇번을 굽이쳤을까.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로 한 해 ‘정치의 이면’을 되새겨 본다.    

‘참모정치’가 도드라졌다. 행정관 인사 문제와 대통령 보좌진의 발언이 주요 기사로 등장했다. 참모의 비전이 리더를 통해 투영되는 정치가 참모정치다. 비전이 버겁다면 직언이라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당나라 현종의 참모 한휴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현종은 “한휴 덕분에 나는 야위었다. 그러나 천하는 살찌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참모정치는 선글라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첫눈이 대신했다. ‘참모’만 있고 ‘정치’는 없는 참모정치. 지난 2월 칼럼은 ‘말과 글의 참모, 양정철’을 썼다. 그는 언어 민주주의라는 비전을 꺼냈다. 이후 안부 인사에 “광장에 나오는 이명훈 심정” “허망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답했다. 요즘 ‘양비’ 역할론이 자주 들린다.

‘청와대 정부’는 동반 화두였다. 집권 초반엔 청와대 구심력이 강하게 작동하고,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조직일 뿐, 대통령 통치권을 대신하는 조직이 아님은 반박 불가 원칙이다. 정치평론가 박상훈 박사는 청와대 정부를 ‘대통령이 임의조직(청와대)에 권력을 집중시켜 정부를 운영하는 자의적 통치체제’라고 했다. 비대한 청와대 권력이 책임정치를 무너뜨렸다는 완곡한 해석이다. 지난 1년 당정, 국회에선 ‘정치가 사라졌다’. 8·2 부동산대책은 장관 휴가 중에 발표됐다. 장관들은 정책 보좌관 선정에도 청와대 눈치를 살펴야 했다. 기획재정부 장관과 청와대 정책실장 간 비정상적 갈등이 연일 터져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청와대 내부 기강해이 문제에 대국민사과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에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튿날 민주당은 조국 민정수석 지키기로 태세를 전환했다. ‘광주형 일자리’ 추진 과정에선 역주행도 감지됐다. 대타협이란 참여주체 모두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라는 사회적 압박이다. 그런데도 약자들에게 이만큼만 더 손해 보라 하고, 달라지라고 요구했다. 민주노총에 대한 과도한 적대감까지 보태졌다. 진보정권은 약자 편에 서라고 시민들이 주권을 모아준 결과물 아닌가. 집권여당은 어떤 호소나 충언도 하지 않았다.

정권교체 직후 ‘민주당 정부가 반갑다’는 글을 썼다. 당의 철학과 가치를 국정 중심에 두는 정부를 기대했다. 그러나 한 해 마지막 칼럼을 정리하는 지금까지도 나는 ‘문재인 정부’라 쓰고 있다. 

청와대 정부는 직접 여론을 동원하는 데 공 들였다. 청와대와 여야의 대면 횟수가 줄 수밖에 없다. 정치의 기능 약화는 필연적이다. 20대 총선은 다당제를 낳았고 정국도 사안에 따라 범진보 대 범보수, 자유한국당 대 비자유한국당, 진보·보수 동맹 등으로 다변화됐다. 다수연합을 고려한 전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거대 정당은 양강 체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새해 예산안, 선거제 개편 싸움만 봐도 그렇다.

정치의 권위가 무력해지면 강자의 질서가 사회를 압도한다. 유치원 이슈가 증명한다. 민주당 박용진 의원의 고군분투로, 국회가 주도했던 유일한 의제였다. 국회는 기득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끝내 유치원 개혁입법을 처리하지 못했다.

9월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이해찬에 반(反)하다’를 썼다. 이해찬 대표가 강조했던 최고의 협치를 여야 지분 분배에 한정한다면,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보수야당이 자신들의 지지층을 설득할 만큼 챙겨주는 것이라고, 그런 정치력을 보여달라고 했다. 원내 1·2당 의원들이 지역구 예산 챙긴 것이, 세비 인상에 의기투합한 것이 최고의 협치인가. 청와대가 집권여당의 정치력 부재를 모두 책임질 이유도 없겠지만 정치가 사라진 현실에서 마냥 비켜 서 있기도 머쓱한 상황이다.        

‘오재영 1주기’(3월)와 ‘노회찬의 하늘’(7월)에서 진보정치의 못다한 꿈을 전하려 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깃발만 나부낀다. 소수정당 대표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며 단식 중이다. ‘유령 인간’들을 태우고 달리던 6411번 버스는 동시다발로 멈춰 서고 있다. 서울 마포구 아현2동 재건축 구역의 한 철거민이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며 생을 마감했다. 충남 태안군 한 발전소의 20대 비정규직 노동자가 연료공급용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다. 동료들은 “우리도 국민이다”라고 절규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관객 300만명을 넘길 기세다. 흥행이 가리키는 지점은 분명하다. IMF 때보다 호황이니, 불황이니 하는 논쟁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 공포를 덜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

“누구라도 늘 자기 안에 북쪽을 지니고 간다. 좀 더디지만 북쪽에 쌓인 눈도 때 되면 녹고 꽃은 한꺼번에 붉고 푸른 빛을 몰아터뜨리기도 했다”(이면우, 생의 북쪽).

없는 사람들의 계절은 오로지 겨울뿐이다. 2018년 끝자락에서 ‘한꺼번에 붉고 푸른 빛을 몰아터뜨리는’ 2019년 정치의 봄을 기다린다.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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