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4년 가을, 라인강 원전 밀집지역에 있는 칼스루에대학(KIT)의 젊은 연구원 마틴 브란다우어는 대형 실험실의 육중한 대문을 열고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원격장치가 대형 금속체의 껍질을 얇게 벗겨내기 시작한다. “원전 해체 시 표면에 집중되어 있는 방사능을 잘 벗기면 고준위폐기물을 소량화할 수 있지요.”

주임교수인 사샤 겐테스는 이 연구실에서 기업도 공동연구와 훈련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안전공학 엔지니어 출신으로, 과거 대만에 가서 고속철도가 지진에 견디는 안전장치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독일은 안전공학 기술자가 원전 해체에서도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3년 전 지진 이야기를, 지난 7월 생명·탈핵실크로드(생명로드) 대만 순례 때 실감했다. 대만은 1999년 진도 7.6의 큰 지진으로 수천명이 희생됐고, 작년에도 진도 6.4의 지진이 발생해 14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이런 지진 때문에 대만의 탈원전 결정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다. 올해 5월에도 진도 5.0의 큰 지진이 있었던 남부지역을 걸으면서 겐테스 교수를 떠올렸다. 우리도 지난해 진도 5.8의 경주 지진 위력을 온 국민이 체험한 터이다.

지난달 라오스에서 만난 학생들 질문에 답한 기억이 난다. “핵무기는 사람이 통제할 수 있지만, 핵발전소는 통제할 수 없다”고. ‘지진이나 테러에 속수무책’이라고. 더 이상 짓지 말고, 해체하고 폐기하는 일은 이제 지상명령이다. 그리고 엄청난 블루오션이기도 하다. 세계적 회계법인 딜로이트는 재작년에 “현재 전 세계 588개 원전 중 영구정지된 것은 150기다. 이 중 19기만 해체가 완료되었고, 2020년대 183기, 2030년대 이후 216기 등 해체 수요가 크게 증가하는데, 해체에 소요되는 비용은 총 440조원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원전 해체 기술은 안전과 안심을 견인하는 사회적 부가가치가 큰 기술이다. 기술의 촘촘한 이행에 대한 관심은 클 수밖에 없다.

2013년 불교와 원불교가 공동주최한 ‘세계원전안전해체학회 준비세미나’에 왔던 KIT의 얀 브레머 박사는 “첫째, 완전 해체까지는 오래 걸린다. 당장 해체하는 경우와 20년 후 하는 경우 두 가지가 있는데, 둘 다 해체 후에도 핵폐기물의 보관이라는 근본 문제가 남는다. 둘째, 방사능 가득한 현장에서는 로봇공학기술이 중요하다. 셋째, 공정을 세분하고 각 단계마다 숙련 기술자의 처리작업이 진행되어야 하고 뒷받침하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

이에 지난 정부가 큰돈 들여서 원전해체센터를 설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예비타당성을 따지다가 의사결정을 제때 못하는 바람에 예산 미집행 룰에 걸려서 작년에 무산되었다. 안전 문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셈할 수 없는 법인데, 숫자를 따지는 ‘타당성’을 관료적 면피의 근거로 삼다보니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방향부터 잘못 잡았다. 해체는 경험이 중요한데 우리는 가르칠 사람이 없다. 원전 해체와 폐기를 제대로 해 본 나라는 미국, 독일에 불과하다. 제대로 하자면 기술자를 모셔와야 한다. 그리고 가르쳐야 한다. ‘사람’이 먼저다.

국내 원자력 관련 학과는 안전과 해체 부문이 미약하다. 9개 대학 모두 전공교수도 없고 교과과정도 빈약하다. 바꾸어야 한다. KIT는 본보기 교사다. 매년 배출되는 500여명의 원전공학도는 자산이다. 원전산업 종사자 3만5000명과 관련 업종 종사자까지. 탈원전은 이들 고용구조 전환까지 포함한다.

국가 원전 해체 기본계획도 수립해야 한다. 시나리오를 세워야 노후원전에 대한 안심도 확보할 수 있다. 계획은 전후방 경제효과나 안보정책과 직결된다. 세계시장에서 통하려면 장기 프로그램이 가동되어야 한다. 반도체와 정보기술(IT)처럼.

라오스 학생들에게 말했다. “시작은 우리가 하지만 마무리는 여러분 일이다. 100년 동안 해 나가야 할 일이니까.”

<이원영 수원대 교수·국토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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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하고 비인간적이고 지나친 학대.’ 지난달 27일 한 신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법적 구금 및 인권유린에 관련하여 유엔과 국제사회가 공동조사 착수한다>는 제목의 광고가 실렸다. 그런데 광고에서 제시한 인권유린의 증거란 게 좀 우스웠다. ‘수면부족과 수갑착용으로 인한 손목 타박상, 모욕적이고 강압적인 심문.’ 특기할 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박 대통령’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정적으로 정권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낸 광고라는 점을 보여준다. 광고 하단에는 로드니 딕슨이란 외국인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어 궁금증을 불렀다.

그런데 엊그제 미국 CNN방송의 보도로 이런 의문이 풀렸다. ‘박 전 대통령의 국제법무팀 MH그룹’이란 곳에서 그의 인권침해 문제를 유엔 등 국제사회에 호소할 것이라는 보도였다. 방송에서 MH그룹은 박 전 대통령이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서 지내는 것을 심각한 인권침해 사례로 꼽았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박 전 대통령이 바닥 난방시설과 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된 방에서 지낸다는 서울구치소의 반박에 의해 즉각 허위로 드러났다. 도리어 그가 일반 재소자의 6배에 해당하는 공간에서 월 3회 구치소장 면담, MRI촬영을 비롯한 충분한 치료 등 ‘황제수용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언들이 이어졌다.

딕슨은 MH그룹이 박 전 대통령 담당 변호사로 임명한 사람이었다. 미국 내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MH그룹에 인권침해 사건 담당 변호를 의뢰하고 MH가 딕슨을 고용한 것이다. 그런데 딕슨의 경력을 보면 입이 벌어진다. 정의당 노회찬 의원에 따르면 그는 세계적인 민간인 학살범과 전쟁범죄자들을 전문적으로 변호했다. 국제형사재판소(ICC) 추산 최소 3만5000명을 학살한, 수단 내전의 장본인 오마르 알 바시르와 나치 홀로코스트 이래 최악의 학살로 악명 높은 르완다 정부가 그의 고객이었다. 그 외에도 대선 불복 시위 진압으로 1100명을 숨지게 한 케냐 정부, 세르비아 민간인 학살 의혹을 받은 라무시 하라디나이 전 코소보 총리도 변호했다. 그는, ‘악마들의 변호사’였다.

MH그룹은 리비아 독재자 차남을 변호해 석방시켰다고 자랑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을 이들이 변호하는 인물과 동격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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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참으로 역사적인 날이다. 지난 7월24일 출범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시민참여단의 최종 의견을 담은 대정부 권고안을 정부에 전달하고 3개월간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치는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3개월간 진행된 공론화 과정은 에너지정책의 역사를 새로 쓴,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이제껏 소수의 전문가와 기술관료들에게 맡겨져 있던 원전정책 결정 과정에 일반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창을 열었다.

오리엔테이션 95.6%, 합숙토론회 98.5%란 높은 참석률은 시민참여단의 높은 사명의식과 참여의지를 보여준다. 언론은 공론조사의 ‘후폭풍’을 우려하지만, 참여자들은 숙의 과정에 상당히 만족하면서 어떤 결론이 나든 치열한 학습과 토론의 결과인 만큼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시민으로서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느낀 것이리라. 참여와 숙의 과정으로 민주의식도 한층 자랐다. 이 공론화 과정은 시민참여단 선발과 숙의, 공론조사를 통해 원전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한 세계 최초 사례라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다.

나는 이 역사적인 사건, 역사적인 과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9월30일에 열렸던 미래세대 토론회에서 고등학생 106명을 대상으로 건설 중단 측 전문가로 강의하고 질문에 답했다. 신고리 5·6호기는 설계수명이 무려 60년이고 사용후핵연료를 10만년 이상 관리해야 하지만 공론화 과정에서는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는 물론, 현재를 살고 있는 만 19세 미만 청소년에게조차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닫혀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공론화위는 미래세대 토론회를 열어 숙의 과정을 진행하고 의견을 물은 후 시민참여단에 전하기로 했다.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다는 열망으로 학생들의 눈빛은 반짝였고 누구보다 신중하고 치열했다.

미래세대 토론회 11개 조 가운데 5개 조가 중단, 또 5개 조가 기타의견, 나머지 1개 조만 재개로, 다수가 중단을 원했다. 기타의견에도 건설 중단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핵폐기물 처리 방법이 없고 한 번의 사고로도 치명적인 인명과 재산 피해가 우려된다고 했다. 이제까지 일방적으로 제공되어 온 원전 정보는 신뢰하기 어렵고, 원전 대신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더 현명하다는 의견도 상당히 많았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은 위험에 위험을 더할 뿐 아니라 입지지역 주민의 건강과 재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면서 차별을 심화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시민참여단에 보여준 5분짜리 영상에는 건설 중단, 재개, 기타의견이 하나씩 소개되었다. 미래세대 의견이 시민참여단 결정에 반영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미래세대가 건설 중단을 더 원한다는 사실은 전달되지 않았다. 공론화위의 기계적 중립이 못내 안타까웠다.

이 칼럼을 쓰는 지금, 나는 시민참여단의 결정을 알지 못한다. 두렵고 겸허한 마음으로 시민참여단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다.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관계없이 말이다. 건설 중단 측은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우리의 선택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자고, 생각의 틀을 바꾸자고, 한국을 넘어 세계적 흐름을 보자고. 중단 측 발표자와 토론자들은 원자핵공학, 경제학, 정책학 분야의 교수와 의사, 국내외 NGO 활동가, 국내외 민간연구소 연구원, 지역주민, 애널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연령도 30대부터 60대에 이르렀고 여성도 여럿 있었다. 건설 재개 측이 의사 한 명 외에 대부분 원자력 학계와 업계에 소속된 원전 이해당사자들로 남자 일색이었던 것과 사뭇 달랐다. 건설 중단 측의 구성은 다양했지만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건설 중단 선택이 변화를 가져올 출발점이자 씨앗이 될 거라고. 내려진 결론과 상관없이, 공론화 그 자체가 이미 변화의 시작이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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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바게뜨 불법파견의 끝은 어디일까. 지난 9월 고용노동부는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불법파견을 확인하고 시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한 달도 안되어 물류센터와 배송기사 불법파견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다. 파리바게뜨 문제의 본질은 바로 ‘프랜차이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프랜차이즈는 20세기 중반 이후 각종 서비스업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사업양식으로 발전했다. 프랜차이즈는 1950년 밀크셰이크 판매원 레이 크록(Ray Kroc)이 맥도널드 형제에 의해 운영되던 캘리포니아의 한 레스토랑 권리를 받아 영업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출처:경향신문DB)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자료를 보면 가맹본부의 프랜차이즈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13년 2973개의 브랜드가 2016년 4267개로 2배나 증가했다. 가맹점 수만도 10만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바게뜨를 소유한 SPC그룹은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 파스쿠찌, 빚은 등 30여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이 분야 1위 기업이다. 프랜차이즈의 특징은 브랜드 구축과 가맹점 의존 방식에 있다. 프랜차이즈는 기업으로 하여금 강력한 브랜드 혜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용은 절감해주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경쟁적인 시장조건과 이윤 창출 압박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아웃소싱을 선택한다.

프랜차이즈 운영 과정에서 각종 규정을 침해할 위험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전산자료를 조작하여 연장·휴일근로 수당을 주지 않는 소위 ‘임금 꺾기’와 같은 형태가 대표적이다. 파리바게뜨 사건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비정규직 휴가비나 수당 등 미지급 금액 110억원의 임금체불 문제는 그 단면이다. 

그간 SPC그룹은 자사 브랜드에서 일하는 홀서빙이나 조리사는 물론 제빵기사들에게 비인권적 인식을 보여왔었다. “그나마 에어컨 등이 나오는 곳에서 일하게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최저시급 이상을 주고, 식사 때 빵이라도 주잖아!” 등의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프랜차이즈라는 기업 경영은 일자리의 가장 나쁜 모델(bad job)이다. 현재 프랜차이즈 사업은 자본과 기업의 비즈니스 핵심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자사 브랜드 구축과 충성고객 유치에는 과감하게 투자한다. 반면 상품과 서비스 제공을 담당하는 직접적인 고용주 역할은 애써 외면한다. 

바로 ‘고용 털어버리기’(shedding employment) 전략이다. 본사가 아닌 다른 고용주 밑으로 옮겨진 일자리들은 대개 낮은 임금에 복지혜택은 거의 없다. 고용 안정성도 훨씬 떨어진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수지를 흑자로 돌리려면 인건비 하향 압력이 발생, 구조상 규정위반 편향성이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사실 파리바게뜨 불법파견 시정명령의 취지는 헌법적 질서에서 만들어진 대법원 판례와 법률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파견법은 1998년 자본과 기업이 고용유연성을 이유로 정부에 요구해 제정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영계 요구로 만들어진 법질서조차 현실을 이유로 수용할 수 없다는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영미권과 달리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운영하더라도 파견업체를 통해 고용을 하는 곳은 드물다. 왜 우리나라에서만 기업들은 고용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공동소유, 공동경영이라는 허구적 슬로건에 숨겨진 프랜차이즈 이면을 되짚어 봐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구조와 광범위한 아웃소싱에서 비롯된 경쟁상황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초점은 서비스 시장의 부상, 프랜차이징 영업방식, 총수입에서 과도한 본사 수수료 지불 문제 등이다. 특히 프랜차이즈 기업의 막강한 영향력은 재고되어야 한다. 왜 본사의 ‘갑질’에 대한 횡포를 감내하면서도 돈벌이가 되지 않는 프랜차이즈는 지속·확대되는 것일까. 아마도 지난 20년 사이 우리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고용 구조조정의 결과일지 모른다. 

지속가능한 경제와 사회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프랜차이즈 모델이라는 ‘괴물’에 대한 개입과 재규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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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을 통합하자는 논의가 급부상하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주호영 바른정당 대표권한대행 겸 원내대표가 지난 15일 만난 데 이어 그제는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와 주 대표대행이 다시 회동했다. 주 대행은 통합 논의를 했다고 시인했고,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은 “국민의당이 햇볕정책을 버리면 통합이 가능하다”며 합당의 조건까지 거론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오른쪽)가 11일 오전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도통합론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유권자에 의해 선택된 다당체제가 보수통합으로 양당체제로 되돌아가려는 것에 제동을 걸자는 의견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 두 당의 통합하자는 논리와 동기, 추진 방법이 영 이상하다. 우선 통합론의 출발점이 여론조사 결과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통합하면 정당지지율이 19.7%로 자유한국당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서는 것으로 나온 게 결정적 동인이라고 한다.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참고만 해야 할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정당 간 통합을 추진한다니 세계 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당민주주의의 기본을 무시한 처사다. 추진 시점도 문제다. 국감을 통해 문재인 정부를 견제하겠다고 하다가 갑자기 당 통합론으로 의원들의 김을 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른정당과 통합을 유도하고, 호남지역 의원들이 더불어민주당으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한 안 대표 측의 작전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에서 두 당의 통합에 대한 시너지 효과가 크고, 호남에서 양당의 통합에 대한 지지 여론이 의외로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론은 변한다. 중도를 지향하는 두 당의 이념과 노선 차이도 크다. 햇볕정책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국민의당이 케케묵은 안보관에 갇혀 있는 바른정당과 합친다면 어떤 논리로 설명할지 궁금하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낮은 것은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당은 이 점부터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통합하고자 한다면 당의 정체성과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의 정강·정책이 어느 정당과 잘 맞는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 국민의당이 모든 정당을 상대로 통합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는 것은 누구와도 합칠 수 있다는 발상이나 마찬가지다. 내년 지방선거에 대비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정치공학적 접근으로 시민의 지지를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통합론에 대한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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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합니다!”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군 적이 딱히 없던 것 같은데 학기말만 되면 누군가에게 모진 사람이 되곤 한다. 학기말 성적이 공시되면 억울함을 호소하는 학생들을 달래야 할 일이 생긴다. 자신은 결석도 한 적 없고, 과제도 제날짜에 냈고, 시험도 열심히 치렀는데 왜 성적이 이것밖에 나오지 않는지에 대한 억울함이다. 미안하기 짝이 없어서 쭈뼛거리며 답신을 보낸다. 당신의 최선을 알고 있노라. 분명 당신은 A학점을 받고도 남을 만하지만, 난들 어쩌랴. 이 모든 것이 상대평가 때문이라며 제도 탓을 한 뒤에 숨는다. 상대평가란 일종의 줄 세우기다. 평가 대상자가 아무리 노력했다 하더라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후순위로 밀려나는 평가 방법이다. 문제는 평가 대상자는 자신의 노력이 어느 정도의 선에 위치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질 때 지더라도 내가 왜 졌는지는 알고 싶어도 왜인지는 평가자만이 안다. 그래서 마지막엔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차안대를 한 경주마처럼 일단 앞만 보고 달려본다. 너도나도 노력을 경주하니 대체로 한 집단의 능력이 평균적으로 올라가고 그만큼 사회의 능력 총량도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순진한 계산도 깔려 있다. 상대평가의 비겁한 변명이다.

며칠 전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재벌로 등극한 하림그룹 김홍국 회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러들였다. 추궁받은 사안은 살처분 보상금 선취 의혹(병아리와 사료의 소유주가 본사이기 때문에 보상금을 농가와 나눈다), 불평등한 농가 계약 문제, 그리고 상대평가 방식의 사육평가 방식이다. 김홍국 회장은 국정감사의 단골손님이다. 그래서인지 맷집이 점점 더 세어진다. “불평등하다는 사례가 나오면 책임지겠다” “상대평가는 농가를 위한 제도다. 오히려 본사가 더 손해다”라며 큰소리를 치고 국감장을 여유롭게 떠났다.

가축들이 생명이 아닌 공장 제품 찍듯이 대량 생산된다 하여 ‘공장식 축산’이란 말을 요즘 많이 쓴다. 현재 닭과 오리의 기업계열화 비율은 94%에 이른다.  기업과 계약을 맺은 농가가 병아리와 사료를 받아 닭으로 길러낸 뒤 수수료를 받는 방식이다. 계약 농가는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닭을 길러내고 본사의 평가를 받는다. 누가 사료를 더 적게 먹이고 잘 길렀는지를 따져 성적을 매기는데 이를 사료요구율이라 부른다. 문제는 평가방식이 상대평가라는 점이다. 농가는 병아리와 사료를 갖다 주는 대로 열심히 사육하지만 막상 수수료를 정산받을 때는 갸우뚱하다. 잘 길렀다 여겼는데 당신보다 더 잘 기른 계약농가가 있으니, 당신이 받을 수수료는 이 정도라고 통보받는 셈이다. 농가는 다른 농가의 사육성적을 확인할 길도 없고 의구심만 키울 뿐이다. 어떤 농가는 본사와 사이가 좋아 더 좋은 병아리를 받았다더라, 나한테 온 병아리는 처음부터 비실비실해서 많이 죽어나갔다는 원망이 터져 나오곤 한다. 그러나 비밀은 평가자인 본사만이 안다. 표면적으로야 갑과 을이 아닌 계열주체와 사육주체 간의 자유로운 계약관계지만 현실에서는 철저한 갑을, 아니 갑병 정도의 관계다. 사육주체인 농가는 본사에 목매달아야 하는 이유가 너무나 많다. 대출받아 시설은 만들어 놓았는데 병아리와 사료가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개점휴업 상태가 되어 손해가 난다. 병아리 못 받았다고 은행이 사정 봐주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작업등 켜진 공장의 미싱은 돌고 돌아야만 한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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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오늘 원전의 건설 여부를 가를 공론조사 결과를 담은 대정부 권고안을 발표한다. 정부는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안을 바탕으로 최종결정을 내릴 방침이다. 공론화 과정에서 종종 혼선과 잡음이 일기도 했지만 이번 권고안은 사회적인 갈등사안을 두고 전체 시민을 대표한 471명의 참여단이 숙의하고 토론한 뒤에 끌어낸 첫 번째 결과물이다. 어떤 경우든 시민참여단의 권고안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번 공론조사의 목적은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재개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탈원전이냐, 원전 유지냐와 같이 한 나라의 원전 정책 일반을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정이 있는 구체적인 사안을 따지는 일이다. 신고리 5·6호기의 경우 공사진척률이 29%에 이르렀고, 비용도 1조6000억원이나 투입됐기 때문에 경제논리가 더 부각될 수 있는 사안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신고리 5·6호기의 운명과 탈원전 정책은 별개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따지고 보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로드맵은 ‘너무 느린’ 정책이다. 신고리 5·6호기 문제는 차치하고 이번 정부 임기 내에 신규 가동되는 원전이 3기나 된다. 신규 원전의 용량은 고리 1호기의 7배에 이를 정도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완성되는 시점은 2019년 신규 가동 예정인 신한울 2호기의 수명이 끝나는 2079년이다. 2022~2023년 예정대로 신고리 5·6호기가 가동된다면 ‘원전 0’ 시대는 지금부터 65년이나 뒤인 2082년의 일이 된다. 현 로드맵으로도 탈원전은 요원한 이야기이다. 신고리 5·6호기 공사가 중단되면 원전산업이 당장 몰락할 것처럼 과장하는 원전세력의 억지주장도 문제지만 정부도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미 원전은 채산성도, 안전도 담보할 수 없는 사양산업이 됐다. 최근 일본 오이(大飯) 원전 1, 2호기의 폐로가 결정됐는데, 그 이유가 채산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경우 신재생에너지의 단가가 건설 중인 신규 원전의 60% 수준으로 떨어졌고, 미국에서도 1년 사이 태양에너지 공급가격이 30%나 급감했다. 지난해 가동 중인 원전(디아블로)의 폐쇄를 결정한 미국 캘리포니아의 전력회사 피지앤이(PG&E)는 “원자력은 미래의 역동적인 캘리포니아 전력망과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미 구글, 애플, 페이스북, 나이키 등 글로벌 기업은 제품생산과 판매에 필요한 에너지를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더 이상 싸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구시대의 산물이 된 원전산업에 발목 잡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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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19일 재판에 불출석했다. 건강 이유를 들었지만 사실상 재판을 보이콧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또 미국의 보도 채널 CNN을 통해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 갇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다”며 구치소에서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국제 법률팀은 이 같은 내용을 유엔 인권위원회에도 알릴 예정이라고 한다. 시민 앞에 석고대죄를 해도 부족한 박 전 대통령이 사법 절차를 부정하고 양심수 흉내를 내고 있으니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고 최순실씨도 재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감내하며 재판에 임하고 있다”면서 자신을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직후 사망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에 비교했다.

재판 불출석으로 박 전 대통령이 노리는 것은 뻔하다. 법원의 구속기간 연장 결정으로 판결이 불리하게 나올 것으로 확실시되자 국면 전환으로 처벌을 면해보겠다는 속셈이다. 박 전 대통령의 구치소 인권 침해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박 전 대통령은 일반 재소자 6명이 쓰는 공간을 혼자 사용하고 있다. 내부에서 치료는 물론이고 외부 치료도 2번이나 받았다. 변호인 접견과 교도소장 면담도 거의 원하는 대로 했다. 변호인 7명 전원 사퇴에 이어 재판 거부, 국제 여론전 등 최근 박 전 대통령이 보여준 일련의 행태는 치밀하게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오는 주말에는 친박·극우 보수 성향 단체들의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박 전 대통령이 조만간 단식을 할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국가정보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 조사와 검찰 수사로 드러났듯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18대 대선은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등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한 상황에서 치러졌다. 그만큼 정통성도 약한 박 전 대통령이 재임 동안 나라와 민생을 도탄에 빠뜨려놓고도 정치보복과 인권을 운운하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박 전 대통령이 아무리 수를 쓴다해도 촛불혁명의 의미와 정당성은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유엔 인권위원회에도 박 전 대통령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설명하는 등 그의 국제 여론조작에 철저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법원은 박 전 대통령의 행태에 개의치 말고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절차대로 재판을 진행해 사법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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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공무원 모금으로 민주화운동을 폄훼·왜곡하는 잡지와 책을 구입해 군 장병 및 의무경찰, 의무소방원 등에게 위문도서로 대량 배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국가보훈처에서 국감자료로 받은 ‘2012~2017년 위문도서 현황’을 보면 지난해 위문도서 12종 중 9권이 안보·보훈 관련 잡지였다. 또 이 중 일부가 촛불집회, 5·18민주화운동 등을 비난하는 내용을 실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방부가 정부 정책을 비판하거나 유신정권과 국가안전기획부 활동 등을 부정적으로 기술한 서적까지 반입 금지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반사회적 행위가 다시 드러난 것이다. 묵과할 수 없는 반민주적 행위이다.

위문도서의 내용을 보면 어떻게 이런 책을 장병들에게 읽힐 생각을 했는지 그 양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월간 ‘자유마당’은 지난해 6월호에서 “ ‘님을 위한 행진곡’(노래)은 북한에 의해 남한 혁명을 선동하는 혁명가요”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는 “(촛불집회는) 민중봉기로 대통령을 축출한 후 체제를 변혁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비판한 단체에 대해서도 친북성향 운동가들이 이끌고 있다며 색깔론을 폈다. 또 월간 ‘자유’는 “(검인정 역사교과서가) 북한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독재세습을 옹호했다”고 썼다. 아무리 보수정권이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사실 왜곡이다. 2009년 국방부가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광주항쟁 등 정치색이 강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며 유명 문학상을 수상한 시집과 우수도서로 선정된 책을 반입 금지한 것과 똑같은 무지한 행위다. 더구나 이들 잡지는 모두 극우성향의 단체들이 발행하고 있다. ‘북한’을 발행하는 북한연구소 소장은 국정원 댓글부대로 활동한 국정원 퇴직자 친목단체 양지회 회장이고, ‘자유’는 예비역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산하조직이 만들고 있다. 결국 공무원 성금으로 관변단체들을 먹여 살린 셈이다.

장병들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러 간 시민들이다. 군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이유로 민주주의나 시민교육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사실 왜곡과 궤변으로 장병을 오도한 세력이 노린 것은 뻔하다. 대한민국을 영원히 극우보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당국은 진상을 조사해서 박승춘 전 보훈처장 등 관련자들에게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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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지의 무밭과 배추밭, 그리고 향신료며 젓갈 생산과 유통의 일선은 김장 식료 준비로 이미 분주하다. 사전에 따르면 김장은 “겨우내 먹기 위하여 김치를 한꺼번에 많이 담그는 일. 또는 그렇게 담근 김치”이다. 또한 “김장거리로 무, 배추 따위를 심음. 또는 그 배추나 무”를 아우른다. 지상 어느 곳이든 겨울을 지나야 하는 지역에서는 반드시 겨우내 먹을 음식을 따로 준비하게 마련이다. 목축이 성한 곳에서는 양, 사슴, 소, 돼지의 고기, 내장, 선지를 총동원해 겨울 넘기는 동안 먹을 소시지, 햄을 만든다. 어업이 성한 곳에서는 염장이나 훈연으로 생선을 갈무리한다. 물도 마르고, 식물도 동물도 그 모습을 감추는 겨울을 나기 위해, 사람은 내가 사는 데서 주어진 자원으로 음식을 해 어떻게든 새봄까지 간수하고 먹어치워야 했다.

한국인의 김장도 그와 한 동아리다. 이때 김장은 김치라는 특별한 음식과 손을 잡고 있다. 김치는 그냥 염장 채소만도 아니어서, 채소의 소금 절임에다 젓갈 등 동물성 단백질까지 더해 발효를 기다린다. 그러고는 산미가 치고 올라오는 김치 특유의 풍미를 얻는다. 김치는 그저 소금이나 장에 절인 채소, 짭짤하면서도 향미가 강한 국물을 끼얹은 데 그친 음식이 아니다. 짠지나 샐러드하고는 그 속성이 다르다. 김치는 저온에서 숙성돼 어느 한 시점에서 맛의 정점을 찍고, 맛의 정점을 찍은 뒤로도 상당 기간 상하지 않고 버텨주어야 한다.

김치는 홑으로도 자립한 일품요리인가 하면, 흰쌀밥의 으뜸 반찬이고, 국과 찌개와 부침개의 부재료이다. 분식을 대표하는 국수와 만두하고도 김치는 최고의 짝꿍이다. 소든 고명이든 김치의 변신은 자유롭다. 홀로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밥과 동반해 밥상의 방점이 된다. 다른 음식 안에서는 빛나는 조연이 되는 음식이 바로 김치다. 부재료가 되어 섞일 때에도 제 줏대를 잃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다른 재료와 조화를 이루는 음식이 또한 김치다. 한국인의 김장은 김치로 이룬 음식 문화사상의 일대장관이다.

오늘날과 같은 김치가 태어난 때는 대략 18세기 즈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추가 껴들고 등장한, 짠지나 절임과 확연히 구분되는, 우리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바로 그 ‘김치’ 말이다. 19세기에 이르면 김치와 손잡은 김장 기록도 폭발한다.

정학유(丁學遊, 1786~1855)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이렇게 노래했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앞 냇물에 정히 씻어 염담을 맞게 하소/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홍석모(洪錫謨, 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이렇게 기록했다. “서울 풍속에 무, 배추, 마늘, 고추, 소금 등으로 장독에 김치(沈菹)를 담근다. 여름의 장담그기(夏醬)와 겨울의 김장(冬菹)은 민가에서 한 해를 보내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도 김치와 김장이 확실히 손을 잡고 있다. 김치를 “침저”라 하고, 김장을 “동저”라 했다. 맥락으로 보아 오늘날의 김장김치이다. 이 앞 문단에는 “저채만두(菹菜饅頭)” 곧 “김치만두”까지 언급하고, 김치만두를 가장 괜찮은 시절음식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1890년대에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통배추김치가 확립돼 있다. 오늘날의 배추김치와도 흡사하다. 통배추와 동물 단백질과 젓갈과 고추 및 마늘 양념이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좋은 통배추를 절이고 고추, 총백, 마늘, 생강, 생률, 배를 채치고 조기는 저며 놓고 청각, 미나리, 파, 소라, 낙지를 채에 섞어서 담고 삼일 만에 조기젓국을 달여 물에 타 국물을” 부어 담근 김치이다.

이 흐름은 20세기를 거쳐 오늘에 이어졌다. 한국 음식 문화사 연구의 선구자 방신영 선생은 ‘여성(女性)’(1939년 11월호)에 “김장교과서”를 소제호로 해 김장김치 담그는 방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배추김치, 젓국지, 섞박지, 짠지, 동치미, 깍두기, 채김치, 보쌈김치에 이르는, 이름만 봐도 침이 고이는 김치 잔치이다. 아삭아삭 씹는 데서 후룩 마시는 데 이르는 김치, 그리고 일품요리에 접근하는 별미 김치까지, 참 면면히도 이어졌다.

이어졌다고 감탄하는데, 지난 음식 문헌이 내게 말을 건다. 지난 김치의 역사에 이어, 너는 당대에 어떤 김치를 이루고, 먹고, 감각할래? 응답하고 싶다. 이어진 것은 이어진 것대로 고맙게 받고, 그 안에서 당대가 반짝반짝하는 갱신을 이루어, 다음 세대에 유산이 될 만한 김치를 이루고 싶다. 눈으로는 김치 기록을 찾고, 발걸음은 생산지로 향한다. 아, 침이 고인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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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인지신경과 의사인 최민철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환자 서연수를 바라보았다. 서연수는 시술용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서연수는 어깨 근육이 팽팽해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민철에게 그 긴장은 오히려 좋은 신호였다. 환자의 의식이 현재에 머물러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서연수는 심호흡을 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환자께서는 지금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을 하기 위해 미래병원 신경외과 수술실에 와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시면 그렇다고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서연수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저는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을 하기 위해 와 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을 받으면 부작용으로 성격이나 사고방식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알고 계십니까?”

“부작용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나노머신들이 환자분 머릿속으로 흘러들어갈 겁니다. 이 머신들은 주로 단기 기억을 관장하는 뇌 부위를 보조하게 됩니다. 기억은 그 자체로 우리 의식의 일부를 담당하기 때문에 동영상을 촬영하듯 기계적으로 기록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늘 기억을 분석하고 가려내는 인공지능이 필요하죠. 나노머신이 자리를 잡는 동안 환자분은 자신의 옛 기억을 타인의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그 후에도 의식의 통일성을 획득하려면 적응이 필요하고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서연수는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끔찍한 충격이 몰려오지 않을까 겁을 먹었다. 하지만 고통스럽다해도 견뎌야 할 과정이었다. 마흔셋에 알코올성 치매가 발병한 뒤로 서연수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무너졌다. 잦은 건망증으로 시작해 제 집조차 못 찾아가는 지경에 이르는 동안 연수는 일자리를 잃었고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졌다. 가끔씩 제정신이 돌아올 때면 그사이에 벌어진 일들 때문에 좌절하고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의사의 말대로 나노머신들이 머릿속에서 제자리를 잡아가는 중인지 연수는 다시 돌이키기 싫은 옛 모습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한 번 더 경험했다.

눈은 언제 뜨면 될까. 내 머릿속에 들어온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걸까? 의사가 따로 신호할 때까지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걸까? 혹시 걱정하던 대로 부작용이 생겨서 식물인간이라도 되는 건 아닐까? 그동안 시간이 흐르고 흘렀지만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안락사에 이르는 건 아닐까?

연수가 온갖 불길한 상황을 상상하고 있을 때 무언가 부드러운 물체가 뺨을 두드렸다. 연수는 눈을 떴다. 간호사가 얼굴에 잔뜩 흐른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최민철이 연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뇌파 측정과 피드백 확인까지 전부 끝났습니다.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불시에 퇴행이 찾아오지 않을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는 시술이 성공이라고 했지만 연수는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두뇌에 나노머신이 삽입되었다는 사실, 자신이 병원 수술실에 있다는 사실이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당분간 냉정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실 겁니다. 무서워하실 것 없습니다. 그거야말로 결합 시술이 성공했다는 증거니까요. 앞으로 인공지능을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통합훈련을 받게 될 겁니다. 통합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나려면 인생의 목표를 하나 정하는 게 좋은데요. 혹시 계획하신 것 있습니까?”

연수는 치매가 발병한 이후 자신을 떠나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두뇌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해도 과거는 이미 삭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수는 수술을 받기로 결정한 날부터 세워두었던 목표를 말했다.

“화성 개척지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고요.”

****************************************

우리 삶을 구성하는 환경이 달라지고,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고, 수명이 늘어나면서 인간의 장단점과 한계를 직시하는 계기가 늘어나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때를 같이해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과학계와 산업계를 두루 휘젓는 중이다. 인공지능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공포를 눈앞에 끌어내었다. 우리가 만든 창작품에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 가깝게는 일자리와 노동력부터 멀게는 인간 고유의 영역 전부를 인공지능이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첨단 사업을 이끄는 유명 CEO들도 인공지능을 논할 때면 두 파로 나뉜다.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측과 낙관론을 펴는 측이다. 물론 양측 모두 자신이 벌이는 사업에 이익이 되는 주장을 내세우는 게 현실일 것이다. 이 중 스페이스X와 테슬라를 대표하는 일론 머스크는 경고파에 속한다. 그는 ‘인공지능에게 밀려나지 않으려면 인간이 인공지능과 결합해 공진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본인의 사업적인 비전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론 진지하게 고민해 볼 여지가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과학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태어난 학문이고, 기술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탄생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인간이 불변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없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의식을 확장시켜주는 건 물론이고 의식이 담긴 그릇, 즉 육체를 보완하고 확장시키는 역할까지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전적인 의미의 인간 본인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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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밀양 송전탑 경과지 마을인 상동면 여수마을에 사는 61세 김영자입니다. 저는 평생 농사를 지은 농사꾼입니다. 저는 데모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저를 보고 데모꾼이라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서명 받는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앞선 사람들이 물러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제가 맨 앞에 서서 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반대 주민 150가구는 지난 12년 사이에 두 사람이 목숨을 끊고, 수백명이 경찰서, 검찰청, 법원을 드나들고 철탑도 다 섰지만,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지금도 합의하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막는 일입니다.

왜냐고 물으면 저는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한국전력 사장님이 ‘신고리 5·6호기가 없으면 밀양에 765㎸ 송전탑은 필요 없다’고 했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더 이상 핵발전소를 지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공약과 달리 공론화로 결정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답답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미 국민들이 선택을 했는데, 또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밀양 주민들은 제일 먼저 7월6일 버스 타고 울산시청까지 가서 ‘탈핵탈송전탑 원정대’를 만들어 3개월 동안 열심히 뛰겠다고, 탈핵 사회로 가는 길에 우리 밀양 할매·할배들이 앞장서겠다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70을 넘긴 노인들이 지난 몇 달간 전국을 다니며 정말 고생했습니다. 저도 행사 때마다 연단 위에서 말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다 알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이웃 나라 일본이 후쿠시마 사고를 겪고 수백조원을 들여도 수습을 못하고 있는 것을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에 전기가 남아도는 사정을 봐도 그렇고, 대한민국이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나라도 아닌데, 지진대 위에 월성 고리 핵발전소들이 늘어서 있고,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10만년이나 보관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이제는 상식이 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신고리 5·6호기 문제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워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식한 농사꾼이어서 다른 건 잘 모릅니다. 병원에 가니까 전문가인 의사 선생님이 병에 대한 모든 것을 제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할지, 안 할지는 제가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 이치가 아닙니까.

이번 공론화위원회를 보니 저쪽 보수언론이나 공사 재개를 주장하는 측은 매번 “전문가들이 전문성을 갖고 하는 이야기니 그 말을 믿고 따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밀양 송전탑 경과지 주민이고,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신고리 5·6호기 문제의 당사자 중 한 사람입니다. 저희들은 신고리 1호기부터 반대해왔습니다. 2012년 6월에는 신고리 5·6호기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러 서생면까지 갔다가 한수원이 고용한 것 같은 청년들과 몸이 부서져라 싸웠습니다.

10월20일 오전 10시에 어떤 결정이 날 것인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쿵쿵 뜁니다. 저희가 12년간 해온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의 승패가 이 일로 결정나는 것만 같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이낙연 국무총리님,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님, 국회의원님들, 신고리 5·6호기 백지화로 대한민국의 탈핵 시대를 활짝 열어주세요.

밀양 주민들, 12년 싸움에서 비록 철탑은 다 섰지만, 신고리 5·6호기는 막아냈다는 그 자부심을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데모꾼이 아니라 농사꾼으로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간곡히 호소합니다.

<김영자 밀양시 상동면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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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닐 때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오래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배경은 뉴욕시,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아 재판에 회부된 소년에 대한 배심원 합의가 진행 중이다. 12명의 배심원들이 만장일치 합의를 끌어내서 그 결과를 판사에게 알려주면 된다. 배심원들은 유죄냐 아니냐만 결정할 수 있다.

판사는 만약 유죄 합의를 이끌어낼 경우 소년에 대해 사형을 언도하겠다고 귀띔한다. 배심원들은 최종 합의를 이끌어낼 때까지 밀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첫 배심원 투표 결과는 무죄 1 대 유죄 11. 모든 배심원이 유죄를 생각하는 가운데 무죄라고 손을 든 배심원은 끊임없이 사건의 면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것을 주장한다. 어떤 배심원은 야구 보러 빨리 경기장에 가고 싶어 평결을 빨리 끝내자고 하고, 또 누군가는 생떼를 쓰고 악만 지른다. 주인공은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도 생각해 봅시다” 하고 설득을 멈추지 않는다.

배심원들은 처음의 대세를 뒤집고 무죄 12명으로 합의를 해낸다. 개개인들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의견을 내지만, 누군가는 대세가 기울기 때문에 편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듣고, 의견을 내고 ‘합리적 의심’을 통해 합의를 해낸다. 영화는 우리의 통념들에 대해서 반문한다. “딱 보면 뻔하다”는 말 대신 미묘하게 어그러진 사실의 맥락과 조각들을 끊임없이 맞추려는 시도가 억울한 사형집행을 막아낸 것이다.

최근 특정인에 대한 ‘폭로’와 폭로에 뒤따르는 SNS상의 ‘공론화’, 공론화에 이은 ‘인신공격’이 유행병이 됐다. 지난달 건대입구역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에서 엄마와 같이 탑승했던 7살 어린이가 엄마 없이 먼저 내리고 버스가 떠나가버렸다. 엄마는 300m 떨어진 곳에서 내려서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기사는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승객을 내릴 수 없었다는 원칙을 지켰다. 사건 직후 누리꾼 한 명이 본인이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사건을 폭로한다. ‘공감한’ 누리꾼들은 사건을 SNS를 통해 ‘공론화’했고, 사실관계 확인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론의 ‘단죄’가 버스기사에게 쏟아졌다. “중년 남성 기사가 여성의 목소리를 무시했다”는 호소가 진실을 덮었다. 적지 않은 미디어가 SNS와 폭로자들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전달하는 이른바 ‘팝콘 튀기기’를 했다.

사실관계가 파악된 직후 SNS와 언론 등에서 태세전환이 벌어졌다. 버스기사를 비난하던 분위기는 뒤바뀌어 아이 엄마를 ‘맘충’이라며 비난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처음 폭로를 한 누리꾼은 사과를 약속했지만 곧 조용히 사라졌다. 버스기사와 아이 엄마의 가슴에만 멍이 들었다. 모두의 확신은 근거가 부족했지만 단정은 무차별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영화 <김광석> 개봉 후에 벌어지는 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영화가 가해자로 의심하는 서해순이 법의학자들의 판단처럼 무죄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책임을 묻고 사건을 정리할까?

모든 사람들은 일정한 편견을 갖고 있고, 온전한 정보도 갖고 있기 어렵다. 영화 속 배심원들이 효율적인 다수결 투표가 아닌 지루한 만장일치 합의를 하는 것은, 서로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꺼내 토론하면서 불완전한 개인의 한계를 넘자는 취지에서 출발한다. 답답한 것은 어떤 이슈가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푸는 실력이다. 시민들이 납득하는 공론을 만드는 기제가 미흡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함께 모여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합의해 해결해본 적이 별로 없다. 초등학교부터 ‘모둠 수업’은 합의하기보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 말한 대로 흘러간다.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무임승차’만을 비난할 뿐이다. 교육학자들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모습을 “개성 있지만 무난한” 사람이라고 정리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싸우면 시시비비를 가려주기보다는 “형(언니)이니까 양보하라”며 혹은 “동생은 형(언니) 말 듣는 거야” 하고 혼을 낸다. 직장의 회의에서도 결론이 정해지면 맞춰 따르는 데에 익숙하다. ‘송곳’ 같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대지 말라”는 경고를 듣거나, 경고를 무시하면 왕따를 당한다. 조정과 협상의 경험이 부족하고 절차는 겉돈다.

한국에서 억울한 사람들의 선택지는 개인적 보복이 아닌 이상 두 가지다. 단체행동으로 몰아치거나, “법대로” 해결하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소비자운동 등은 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단체협상을 통해 엇갈리는 의견을 검토하며 문제를 푸는 과정을 가졌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흐름은 검증과 합의의 단계, 협상의 언어를 생략한다. 혹여 폭로 대상인 개인이 코너에 몰려 실언이라도 하면 실언은 ‘팩트’가 되어 온라인 공격의 빌미가 된다. 상황의 맥락, 당사자의 처지 등 현실의 미묘함은 해석 대상에서 제외된다. 개인들은 온라인 공론장에서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명예훼손과 무고죄 등의 법적 구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익명성에 기댄 공격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교실에서 왕따 주동자를 찾아 처벌하는 것처럼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공론화’라는 단어는 공론을 모아내는 것보다 온라인 부족들이 특정 목표물을 폭격하자는 신호이기 일쑤다. 무리의 확증편향이 극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론화의 대의가 옳다 한들 이는 문제해결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판단을 정지한 채, 영화 속 배심원들처럼 적절한 절차를 통해 충분히 의견을 교류하고 합의해야 ‘공론’이 안착한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토론회처럼 이해당사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교류해야 합의를 만들어낼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 내용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한다. 이런 판국에 지식인까지 나서 온라인의 ‘단죄’라는 광란의 ‘도가니’에 단편적인 판단으로 기름을 끼얹으며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시민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 공론을 모으는 합의의 경험이 누적된 게 민주주의 사회의 실력이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도 생각해 봅시다”라는 말을 하는 의인들의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고 싶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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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다다 탈곡기 소리에 벌떡 깼다. 평야엔 농부들과 볏섬, 참새 떼가 일찍부터 내려앉았고 달과 별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어라. 그 둥글고 크던 얼굴. “모두가 낮잠을 자는 이유구려. 저 둥근 달.” 언젠가 읽었던 하이쿠 한 소절. 풀벌레 소리에 잠 못 들고 환한 달빛에 잠 설치고 부지런한 농부들 땜시 아침잠도 빼앗겼다. 낮잠으로 보충하면 되지 뭐. 꼭 밤에만 자라는 법도 없다. 수도원 규칙이 암만 엄해도 성덕이 깊은 수도원장은 “사람이 먼저다!” 팁을 살짝 뿌린다. “규칙은 사랑 앞에서 허물어뜨리라고 있는 거라네. 그걸 잊어버리면 자네들은 수도원에 있는 기계밖에 더 되겠어.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그 다음에 규칙이네.” 여행과 사랑과 잠의 세월. 그리고 기나긴 단잠, 사후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옥에 계신 그분이 언젠가 잠이 보약이라고 했다지. 보약 맞다. 하지만 건강한 삶을 산 뒤의 단잠이어야 맞다. 북미 원주민들은 ‘자연 모든 곳에 있다’라는 뜻의 ‘음페손’을 약을 칭하는 낱말로 썼다. 그중에 최고는 ‘에그트지 음페손’. 바깥 땅 위에서 약을 구함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혼돈과 불안, 슬픈 억눌림, 옹졸한 생각들을 몰아내야만 진정한 건강을 누릴 수 있다는 거다.

약을 한 봉다리씩 입에 물고 사시는 동네 할머니들. 다리가 풀려 그만 넘어져서 다치신 분들도 간간이 보인다. 하체를 튼튼하게 다지려면 자주 걸어야 한다. 누워 버릇하면 영원히 눕는 수가 있다. 잠은 가장 나중에, 마지막 순서다. 눕기 전에 명약을 구해다 달여 먹고, 세상에 두루 약이 되는 삶을 또한 살아야 한다.

촛불 시민혁명 1주년. 이모저모 국민들은 마음의 상처, 내상이 크고도 깊다. 적폐 청산이야말로 가장 큰 치유이고 명약이 아니겠는가. 축구대표든 태극기 집회 어르신들이든 태극전사 말고는 다시는 이전의 시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앞으로 난 길. 우리가 모두 살길. 사람이 먼저인 세상.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위해서는 에그트지 음페손을 어서 손에 쥐어야 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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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출범 6개월을 맞고 있다. 장미 대선으로 집권한 정부가 어느덧 단풍시즌을 맞고 있다. 정부는 시민들의 기대가 큰 만큼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정부의 성공 여부는 임기 초에 상당부분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 정부에 대한 평가를 보면 더욱 그렇다. 노무현 정부는 보수언론을 비롯한 언론에 각을 세우다 집권 초기를 보냈고,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 파동과 4대강으로,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로 시간이 지났다. 이명박 정부의 747공약, 박근혜 정부의 474공약 가운데 하나도 지켜진 것이 없다. 그렇게 외환위기 이후 20년이 흘러간 것이다.

이 기간 국가경제를 끌고 온 동력은 이기심을 버리고 고통을 감내한 시민들의 헌신이었다. 살인적인 구조조정을 바탕으로 기업은 경쟁력을 키워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혁신은 정체됐고 경쟁력은 다시 떨어졌다. 조지프 슘페터가 말한 ‘혁신의 관료화’다. ‘창조적 파괴’의 혁신은 사라지고 현실에 안주해 이를 관리하는 수준에 만족하면서 역동성이 떨어진 것이다. 이에 따른 저성장의 늪이 작금의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새로운 경제성장을 위해 일자리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사람 중심 경제의 3대축’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일자리는 문재인 정부의 1호 공약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 일자리 현황판까지 세워놓았다. 정부의 목표는 소방·사회복지·교사·경찰 등 공공부문 일자리 17만4000개를 포함한 공공일자리 81만개, 민간기업의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50만개 등 131만개이다. 청년백수가 지천인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이라는 점에서 이해도 된다. 그러나 공공일자리 81만개의 지속가능성은 의문이 든다.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공공부문 일자리 비율은 평균 21.8%를 넘는 데 반해 한국은 7.6%에 불과하다”며 “충분이 늘릴 여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국가별 공공부문 일자리 기준과 일자리의 유연성이 다르다. 그리고 많은 국가들은 늘어난 공공인력을 줄이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정부는 플레이어가 아닌 지휘자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는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성장전략으로 ‘소득주도성장’을 꺼냈다. 이는 대기업·수출기업 중심 성장정책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대기업이 돈을 벌면 중소기업 등 아래로 자연스레 흘러갈 것으로 기대했으나 성장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났다. ‘낙수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이에 정부는 가계의 주머니에 많은 돈이 들어가도록 하는 정책을 입안했다. 최저임금 인상, 사회복지예산 증액, 통신요금 인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의 정책들이다. 이를 통해 소득이 늘면 소비가 증가하고 투자가 늘며 이는 다시 소득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기대한 것이다. 성장에서 소외된 계층의 소득을 늘리는 정책은 당연하다. 하나 이는 분배정책에 가깝다. 단기적인 효과는 불분명하다. 그래서 실효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정부가 ‘혁신성장’을 서둘러 들고나온 것은 이 같은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정부는 4차산업을 혁신성장의 새로운 돌파구로 삼겠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유사하다거나, 안철수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가 내놓은 것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한국이 처한 현실에서 꼭 필요한 정책이라면 ‘소유권’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욱이 4차산업을 통한 성장은 지난 대선에서 각당에서 모두 제안한 바 있는 정책이다. 정작 아쉬운 부분은 혁신성장 정책의 구체성과 확장성이다. 정부는 혁신성장을 말했으나 구체적인 로드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또 혁신성장이 4차산업에 국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확장된 혁신성장을 통해 성장의 기반을 넓히고 새로운 일자리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개혁에는 모두의 고통분담과 협조가 필요하다. 많은 혜택을 받았음에도 분배에 기여하지 못한 기업과 기득권의 동참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정부는 노동자의 복지를 위한 대책의 과감한 추진과 함께 고임금 대기업 노조에 대해서도 기득권을 내려놓을 것을 요구해야 한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한 개혁에 성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추진 과정이 일방통행이 되지 않도록 소통채널을 열어두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3개의 바퀴를 돌려 사람 중심의 경제를 일으키겠다고 한다. 정부는 구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결과로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많지 않다. 우왕좌왕하다 정권 초기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헛바퀴만 돌리다 끝난 정권이라는 오명을 쓸 수 있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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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가 13일 댄 베이커 수석편집국장 이름으로 소셜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자사 기자들의 트위터·페이스북 사용 안내다. 핵심 사항 첫째는 다음과 같다. “우리 기자들은 당파적 의견을 표현하거나 정치적 관점을 고취하고,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뉴욕타임스의 명성을 깎아먹는 어떠한 공격적인 코멘트를 해선 안된다. 뉴욕타임스가 객관적으로 다루려는 이슈를 두고 한쪽 편을 드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도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새삼스러운 내용은 아니다. 언론인 E P 데이비스가 “기자들은 개인 의견이나 언론사 의견을 말하는 것이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불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을 한 게 1884년이다. ‘기자 개인’ 의견 표명 자제는 저널리즘의 오랜 원칙 중 하나다.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디지털 저널리즘’에서 기자와 소셜미디어는 논쟁적인 사안이다. 언론사들은 독려하든가 자제시키든가, 또는 둘을 조합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왔다. 뉴욕타임스가 ‘제한 사항’을 늘린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건 왜일까? 가이드라인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우리 기자들과 에디터들의 트윗은, 비록 트럼프 담당이 아니더라도, 뉴욕타임스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썼다. 베이커가 가이드라인 발표 전날 조지워싱턴대 포럼에서 한 발언에선 더 구체적인 이유가 나온다. 폴리티코는 베이커가 “뉴욕타임스 기자는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절대로 소셜미디어에 말해서는 안된다. 신문의 (비판 보도) 동기가 대통령에 대한 ‘벤데타’(vendetta·보복)가 아니라 ‘건전한 저널리즘’이라는 점을 대중에게 분명히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맹렬한 비판 보도’를 이어가는 뉴욕타임스는 몇몇 기자들의 소셜미디어 활동이 팩트에 근거한 비판 보도나 불편부당 원칙에 흠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뉴욕타임스를 ‘가짜뉴스’를 만드는 곳이라고 여러 차례 비난한 트럼프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이드라인은 뉴미디어와 저널리즘, 표현 자유, 독자 소통, 권력 비판, 진보·보수 등 여러 문제가 얽혀 있다. 보수 쪽은 공격했다. 미디어리서치 센터 부회장 댄 게이너는 “트위터가 생긴 지 10년이 되었는데 뉴욕타임스는 이제야 직원들이 멍청하고 좌파적인 것들을 트윗한다는 걸 깨달았나”라고 했다. 보수매체 폭스뉴스가 대표로 지목한 기자는 백악관 담당 글렌 트러시다. 이 매체가 문제 삼은 트윗 하나는 “당신은 인종주의자, 반유태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와 거리 두기를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상관과 계속 일할 것인가”다.

‘편향’과 ‘정치 의견’의 기준이 무엇인지 되묻는 의견이 나온다. 진보 성향의 트위터 이용자는 “기후변화, 편견, 불법이민자 말살에 어떻게 ‘한쪽 편’을 들지 않을 수 있나”라며 비판한다.

나는 KBS·MBC 노조원들의 파업을 지지한다. 차별금지법 제정도 찬성한다. 둘 다 ‘정치 의견’이다. 한국 사회 한쪽에선 ‘편향’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칼럼에 밝히는 것은 괜찮고, SNS에 글을 올리면 안되는 것일까? 한편으론, SNS를 ‘눈팅’만 하고 글을 올리지 않게 된 건 내 의견과 경향신문의 입장을 동일시하는 시선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경향신문 소속이라 팔로한 이들에게 ‘SNS 글은 개인 의견이니 회사 입장과는 무관합니다’라며 무작정 편의를 봐달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소속을 밝히고 공개적으로 SNS를 한다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다.

SNS에 다시 글을 올린다면 뉴욕타임스의 가이드라인의 16가지 핵심 사항 중 다음을 새기려 한다. “소셜미디어 독자들을 항상 존중하라. 독자의 기사·포스트에 관한 질문이나 비판에 응답하려 한다면, 사려 깊게 하라.”

<모바일팀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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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가 특수고용노동자(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노동3권을 보장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20년 가까이 ‘노동권 사각지대’에 내몰렸던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설립 등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늦었지만 당연한 조치다. 특수고용노동자란 택배기사, 학습지 교사, 레미콘 운전자, 보험설계사, 골프장 캐디 등과 같이 사용자와 근로계약 대신 위탁·도급 등의 계약을 맺고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의 노동3권이 보장되면 노조를 설립해 사용자 측과의 단체협상을 통해 업무수행 단가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꾀할 수 있다. 단체교섭이 결렬되면 파업 등 쟁의행위도 가능해진다.

노동계에선 특수고용노동자 규모를 230만명으로 추산한다. 이들은 개인사업자로 등록한 뒤 사용자와 계약을 맺는다. 사용자 입장에선 비용 감소와 고용 유연성 확대 등의 이점 때문에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특수고용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로 분류돼 노동권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저임금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시간 제한 규정이 없는 탓에 하루 평균 12~13시간씩 장시간 노동을 하기 일쑤다. 사업주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면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다.

골프장 캐디, 택배기사 등 9개 직종은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하지만 노조 설립이나 단체교섭 요구, 쟁의행위 등은 일절 금지돼 있다.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문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됐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가 손을 놓고 있던 탓에 지금까지 적절한 대책 마련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은 점차 인정되는 추세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06년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국민권익위원회도 2013년 특수고용노동자 보호에 관한 법률 제정과 노동3권 보장을 촉구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1월 헌법소원 결정문에서 “근로기준법의 테두리 안에서 특수고용노동자를 보호하는 법률 제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기도 하다. 국회와 노동부는 서둘러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거나 특별법을 제정해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3권을 보장해야 한다. 아울러 이들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하고, 최저임금법을 적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노동이 당당한 공정사회’를 만드는 밑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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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호 손님께서 방이 불편하다고 컴플레인 하셨어요?”.

18일 실시간 뉴스 검색은 물론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인권침해’라는 한 단어가 하루종일 ‘핫’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되어 있는 서울 구치소 감방이 화두에 오르면서다.

문제의 발단은 전날 미국 CNN 보도부터였다. CNN은 17일(현지시간)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 중인 박 전 대통령 측의 국제법률팀을 맡고 있는 MH그룹이 ‘박 전 대통령이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어 유엔 인권위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지난 16일 박 전 대통령은 “재판부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한다”며 사실상 재판을 보이콧 했고 유영하 변호사를 포함한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도 전원 사임한 뒤였다.

보도가 전해지자 국내 여론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먼저 구치소 관리를 총괄하는 법무부 교정본부는 ‘박 전 대통령 인권침해 주장 관련 설명 자료’를 내고 적극 반박에 나섰다.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 갇혀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 측 주장이 “사실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SNS 상에서는 사실관계에 대한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누리꾼들이 먼저 나섰다. 트위터리안 ‘cro****’은 “과거 역대 대통령은 별채에 2배가 넘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 독방에 책상 의자까지 있었다”고 반박했다. ‘ruc****’은 “흉악범도 아니고 도망가지도 못할 67세의 전직 여성 대통령을 구속기간을 연장해 강제로 가두고 하루가 멀다하고 불러내 재판한는 것 자체가 무자비한 인권침해”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 여론은 싸늘했다. 날선 비판이 잇따라 쏟아졌다.

‘khs****’은 “인권침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며 “이 정도의 예우라면 오히려 황제수감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clx2****’은 “재판을 받는 수감자가 다른 재소자들과 다른 대접 받기를 바라나, 이거야 말로 재소자들 입장에서는 인권침해다”라고 비난했다.

자신들의 주거 환경과 비교한 ‘웃픈’(웃기지만 슬픈) 댓글도 눈길을 끌었다. ‘yuku****’은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고시원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며 “서울에서 저 정도 규모의 방에 살려면 월세 40~50만원은 줘야 한다”며 한탄했다. ‘hyu****’은 “어쩌면 내가 생활하는 집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다”며 “난 스스로 인권침해인가 자괴감이 든다”고 비꼬기도 했다.

무엇보다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 넓은 공간을 개조해 사용하는 박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심모씨는 페이스북에 “7인실을 1인용으로 개조해서 혼자 쓰는 것은 죄수로써 가질 수 있는 수감권의 침해”라며 “죄인답게 살 수 있도록 유엔은 허락하라”고 글을 남겼다. ‘ids****’은 “국정원 여직원 농성 때도 감금이라거나 인권침해라고 난리치더니, 독방 수감 생활하면서도 인권 침해됐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남의 인권은 신경도 안 쓰더니 제 인권은 말도 못하게 챙기고 있다.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특권을 인권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라고 비판했다.

이재명 성남 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일반 수용자로선 감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며 “편한 데서 지내고 싶었으면 죄를 짓지 말던가”라고 직격했다.

MH그룹 홈페이지

박 전 대통령 구치소 인권침해 의혹을 제기한 국제 법무법인 ‘MH그룹’에 대한 관심도 쏟아졌다.

MH그룹은 홈페이지(http://www.mhgrpllc.com)에서 자신들을 국제 인권법 변호사들이 포함된 국제 법무팀이라고 소개했다. 대표 변호사로는 영국의 국제인권 변호사인 로드니 딕슨과 인권운동가인 이란계 미국인 미샤나 호세이운 박사가 속해있다고 나와있다. 홈페이지엔 지난 13일과 지난달 20일, 8월15일 등 3차례에 걸쳐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성명서 형식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대부분 박 전 대통령 구속의 부당성과 함께 구치소 처우 문제 등을 제기했다.

앞서 MH그룹은 과거 변호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지만 독재자로 유명했던 리비아 카다피의 둘째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을 변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일부 누리꾼들은 “이 그룹의 정체가 모호하다”면서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분위기도 나오고 있다.

<이진주 기자 jinj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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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곡가 진은숙의 ‘시벨리우스 음악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연주자들의 국제콩쿠르 수상도 반가운 일이지만, 내겐 이 소식이 훨씬 묵직하고 의미 있게 다가왔다. 국제콩쿠르가 세계무대로 나가려는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 구실을 한다면, 이 상은 이미 거장이 된 이에게 부여되는 영예이기 때문이다. 연주가 아닌 작곡의 영역에서 이런 경지에 오르는 일이 쉽지 않음을, 또한 세계무대에서 이를 제대로 인정받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이 소식이 남달리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상의 권위는 수상자들의 면면에서 나온다. ‘시벨리우스 음악상’은 몇 년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당대의 저명 클래식 음악 작곡가에게 주는 상이다. 1953년 핀란드 ‘비후리 재단’이 시벨리우스에게 첫 상을 수여하며 그의 이름을 따 ‘비후리 시벨리우스 상’이라 이름 붙였고, 이후 힌데미트·쇼스타코비치·스트라빈스키·브리튼·메시앙·루토스와프스키·펜데레츠키·리게티·쿠르탁 같은 20세기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작곡가들이 이 상을 받았다. 시벨리우스의 뒤를 잇는 라우타바라·린드베리·사리아호 같은 핀란드 작곡가들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015년 버트휘슬에 이어 올해 스무 번째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진은숙은 최초의 아시아 출신에다 사리아호에 이은 두 번째 여성 작곡가다.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존재 조건에서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확고한 음악세계를 구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은숙의 음악은 유럽인들이 흔히 떠올리는 아시아 작곡가의 표상에서 벗어난다. 1985년 유럽으로 건너간 그녀는 자신을 타자화하는 이런 선입견에 맞서야 했다. 새롭고 대체 불가능하며 유의미한 작품을 쓰는 데 출신 지역의 정체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빈 오선지를 앞에 두고 오롯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숙성시킨 아이디어가 원하는 음악의 형태를 갖추도록 정교하게 세공해나가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벌레로 느껴지고 수없이 지옥을 경험하면서도 진은숙은 음악의 완성도에만 천착했다. 작품 위촉만으로 살아가는 전업 작곡가의 삶을 고수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음악이 훌륭하면 결국 청중이 알아줄 거라는 믿음, 온 힘을 다해 그에 걸맞은 수준의 작품만 세상에 내놓겠다는 의지, 그것이 오늘의 진은숙을 만든 원동력 아니었을까.

국내 청중에게 진은숙의 음악은 아직 낯설다. 하지만 음악회장에서 혹은 음반이나 유튜브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생황 협주곡들을 들어본 이라면 그녀의 음악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명료함 가운데 펼쳐지는 환상적인 음향적 색채에 매료된다.

최근 그녀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나 우주의 생성 같은 묵직한 질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작년 8월 서울에서 초연된 혼성합창·어린이합창·관현악을 위한 <별들의 아이들의 노래>는 클래식 FM과 포털 사이트를 통해 생중계되며 온라인으로도 많은 이들이 들었는데, 공연 후 나온 기사나 소셜미디어에는 현대음악에 대한 편견을 날려준 감동적인 음악이었다는 얘기가 오갔다. 이 작품에서 세월호의 아이들을 떠올린 이들도 있었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 안에 담긴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각자의 방식대로 청중의 마음에 가 닿아 공명했던 것이리라.

문학상을 받으면 작품이 불티나게 팔리지만, 현대 작곡가가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조차 당대의 음악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즐겨 듣는 고전들도 한때 새로운 음악이었다. 낯선 음악이 연주를 거듭하며 점차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고전이 되어온 것이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은 미래의 고전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진은숙의 이번 수상이 그녀의 음악을 접하는 계기가 되길, 나아가 새롭게 창작되는 이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개인의 예술적 성취가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키우는 데 발판이 되는 것. 작곡가가 받은 상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바로 그럴 때이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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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1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 일정이 1박2일로 확정됐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날 백악관의 트럼프 대통령 아시아 순방 일정 발표 때 이미 결정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청와대는 백악관 발표 몇시간 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일정을 공지했을 때도 “한·미 양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확한 도착 및 출발 일정을 계속 협의 중”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트럼프 내셔널 골프 클럽에서 보안 브리핑을 한 후 기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정부는 애초 트럼프 대통령의 일본 방문 일정이 2박3일~3박4일로 예상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도착 시간을 7일 오전에서 6일 저녁으로 앞당겨줄 것을 요구해왔다. 방한 일정이 1박2일에 그치면 일본과 비교된다는 이유였다.

백악관 발표 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숙박 일수를 늘리는 데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모양새나 의전이 외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들르지 않는다면 모를까 한국보다 일본에 더 오래 머무른다고 해서 미국이 한·미동맹에 부여하는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모양새가 좋다고 실질이 좋은 것도 아니다. 의전, 모양새에 신경을 쓰며 귀중한 외교적 자산을 트럼프 숙박 일수 늘리기에 쏟은 정부도 실질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이른 시점인 취임 50일 이전 미국을 방문한 것에 야단스럽게 공고한 한·미동맹 의미를 부여한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당시 외교안보 라인이 ‘신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다자외교 무대(G20)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강하게 주장해 문 대통령은 정책 기조나 전략은 물론, 외교안보 인선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치밀한 준비 없이 정상 방미를 했다. 그 결과 미·일의 의도대로 한·미·일 3각 안보 협력 구도가 강화됐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았던가.

<정치부 | 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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