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相係)’ 신고는 혼인신고와 다릅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담당변호사가 보낸 서류는 완벽하지만 그것만으론 통과할 수가 없어요.”

선화는 다소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상계신고 담당 공무원의 얼굴이 아니라 화면 우측 위를 주시했다. 지금 화면에 등장해서 신고과정을 진행하는 사람이 진짜 공무원이라는 신분 인증 아이콘이 천천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선화와 함께 민원채팅을 하고 있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자고 약속한 주희가 불만을 드러냈다.

“누구와 함께 살고 헤어질지 허가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답답해서 그래요.”

선화는 뻔한 대답이 나올 거라 예상하고 뇌파동조기의 신호에 맞춰 주희에게 생각을 보냈다.

‘그런 말까지 할 필요 없어. 규정이라 어쩔 수 없다면서 변명을 늘어놓을 거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시간이라도 단축되겠지.’

머릿속으로 주희와 채현의 투덜거림이 전달되었다. 선화는 웃음을 참고 담당공무원의 변명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말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상계관계는 결혼보다 더 강력한 결합입니다. 살면서 여러 가지 계약을 하시죠? 기존 부부는 계약 시 각자 동등한 주체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계관계는 뇌파동조로 생각을 공유하잖습니까. 그래서 법적으로 단일 주체가 됩니다. 법률적 문제만이 아니라, 상계관계의 의미가 그렇잖습니까? 따라서 다수신청자가 기술적으로 상계주체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선화는 딱히 허점을 찾을 수 없는 의외의 답변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는 첫 상담에서 선화와 주희와 채현에게 상계관계의 법적 의미를 설명하려고 여섯 시간을 고생했다. 적어도 사전 교육은 제대로 받은 공무원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반나절은 비우고 오시라고 말씀드렸던 겁니다. 지금부터 신고자 세 분께 다소 복잡한 상황을 제시하겠습니다. 특히 여러분은 사적인 사고영역까지 모두 공유하는 상계3단계를 신청하셨기 때문에, 계약뿐만 아니라 인생의 전 영역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질문은 가상현실 속 체험 형태로 진행됩니다. 끝나고 나면 상계자로 함께 3년 정도를 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만 그 기억은 소거됩니다. 구체적인 체험 내용은 저를 포함해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정부에서 기록하는 건 동조율뿐이니까요. 준비되셨나요?”

선화와 주희와 채현은 뇌파동조기를 통해 마음을 모으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제 세 사람은 현실 시뮬레이션 속에서 온갖 갈등 상황을 겪을 것이다. 사고동조 능력이 충분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그렇게 바라던 상계자가 되어 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은 머릿속으로 서로를 다독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최근 신경과학자들이 일명 ‘브레인넷(BrainNet)’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브레인넷이란 둘 이상의 두뇌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이름이다. 뇌파전위기록(EEG)과 경두개자기자극(TMS) 기술을 결합한 인터페이스로, 간단히 말하면 뇌에서 오가는 신호를 기록하고 전달한다. ‘전달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보낼 뿐 아니라 받아서 그 의미를 인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뇌 신호 전달이라면 피험자가 둘인 실험을 떠올리기 쉬우나 이번 실험은 세 사람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송신자 두 사람은 테트리스 게임 화면을 보고 블록을 좌우 어느 쪽으로 돌릴지 판단한 다음 주파수가 서로 다른 두 불빛 중 하나를 쳐다본다. 수신자는 송신자가 어느 불빛을 쳐다보았는지 정보를 수신하고, 회전 방향을 마지막으로 결정한다. 여기서 피험자가 셋이라는 사실이 의미를 갖는다. 뇌파 기록과 전달을 통해 다수결에 따른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물론 아직은 양자택일 상태만 전달하는 실험일 뿐이다.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1비트라는 뜻이다. 하지만 뇌의 각 영역이 담당하는 기능과 그 신호를 모조리 파악하기 위해 뇌지도 작성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니, 복잡한 생각이나 여러 개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상황까지 유·무선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 기술이 실현될 때쯤 우리는 ‘관계’에 대해 재정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 한계 때문에 보호할 수 있었던 내면을 공개해도 좋을 만큼 누군가를 믿고 사랑할 수 있을까? 과학 덕분에 진정한 이해와 이상적인 합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아직 철저하게 각자의 인생관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머지않아 우리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얻을지도 모른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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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따끈한 국 한 사발이 간절한 계절이다. 국자, 탕자 돌림 음식과 한국인의 식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닌가. 더구나 쌀쌀해지는 데에야. 세상에 자식을 낸 모든 어머니와 세상에 온 모든 아들딸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미역국, 일상생활의 푸근한 벗 콩나물국, 젖산 발효의 미덕을 쥐고 따듯함을 더한 김칫국, 농민과 노동자의 한여름을 위로한 추어탕, 국물 내기의 기본기를 환기하는 곰탕과 설렁탕, 바닷바람과 바다의 날빛을 아우른 북엇국, 해안 주민의 오랜 친구인 김국과 매생이국, 채소와 고기가 손잡은 미각이 한 사발 비우는 내내 상승하는 소고기뭇국과 육개장 등등 국탕 한 그릇과 맞물린 추억 한 조각 없는 한국인은 드물리라. 이쯤만 나열하고도 미안하다. 이루 다 손꼽기 어려운 채소, 나물, 고기, 수산물이 다 국탕으로 변한다. 주재료와 부재료의 갈마듦도 다채롭다.

국탕이 제대로 되려면 국물을 제대로 내야 한다. 그리고 ‘간’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간의 출발은 소금의 짠맛이다. 소금, 한마디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조미료이다. 어떤 재료든 재료가 쥔 원물의 맛을 사람이 충분히 감각하도록 증폭해주기 때문이다. 

방금 내가 막 뱉은 말이 아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20대에 쓴 산문 <민옹전(閔翁傳)>에서 소금은 맛 자체를 나게 하니, 소금이 없이는 맛도 없고(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소금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맛난 것이라고 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다시 소금에다 만주 원산의 콩을 더해, 단순한 짠맛을 더 맛난 맛으로 발전시켰다.

한나라 때의 일상 기록인 <풍속통의(風俗通義)>는 이렇게 썼다. “장(醬)은 소금으로 만들지만 그 짜기가 소금보다 더하다(醬成於鹽, 而鹹於鹽)”라고. 속뜻은 장은 소금의 짠맛보다 한층 증폭된 맛난 짠맛을 낸다는 뜻이다. 아득한 옛날, 동아시아 사람들은 고기에 소금을 더해 발효시킨 육장(肉醬)을 가지고 장(醬)을 만들었다. 그 장으로 단순한 짠맛에 동물성 단백질의 풍미를 더해서 한층 만난 짠맛을 얻었다. 

고기뿐인가. 어류를 이용해서도 젓갈을 얻었다.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등은 그 원형을 잘 보여주는데, 이런 계통은 ‘해(해)’라고 불렀다. 그러다 콩 또는 콩으로 쑨 메주에 소금을 더한 두장(豆醬)을 담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고기와 생선의 동물성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해(해)’로, 콩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장(醬)’으로 구분하는 데 이른다.

동물의 살코기와 내장과 뼈를, 생선이라면 살 및 대가리와 뼈의 인지질을 뽀얗게 우려낸 ‘곰’은 소금간만 해서도 맛나게 먹을 수 있다. 이와 함께 고기, 생선 등의 동물성 단백질이 내는 감칠맛 또는 채소의 풍미를 ‘소금보다 맛있게 짠’ 간장으로 증폭시키려는 시도는 장을 점점 더 맛나게 담그면서 끝없이 발전했다. 

맑은장국이 그 예다. 장으로 간해 적절히 올라오는 감칠맛은 담백하면서도 개운하기 이를 데 없고, 그 빛깔까지 운치를 더한다. 양지, 민어, 토란, 송이, 쑥 등 맑은장국에 어울리는 재료를 떠올리면 오랜 세월 전해진 맛의 설계의 밑절미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 소면을 말면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음식의 극치인 국수장국이 된다. 

못잖은 간으로 젓갈간이 있다. 두장 못잖은 맛난 짠맛을 쥔 새우젓간을 한 달걀국, 콩나물국, 젓국갈비 등도 재료의 감칠맛을 두장과는 다른 방향에서 끌어올린 진미이다. 명란젓으로 맛을 더하는 방식도 있었다. 일본식으로 맑게 끓여내는 ‘지리’에 견주어 새우젓간이나 명란젓간의 개운하면서도 무게 있는 맛의 설계를 다시 생각할 여지가 더욱 자랄 듯하다. 

된장은 된장대로 채소 또는 나물의 풍미와 잘 어울린다. 배추된장국·시금치된장국 등의 예에서 보듯 구수함이 감도는 깊은 맛은 이 자체로 하나의 계통이 될 수 있겠다. 그 풍미와 질감이 앞서 든 예의 간과는 전혀 다르니 말이다.

꺼낸 말은 수다하지만, 역시 생각하면서, 비교하면서 맛을 보아야 그 차이도 섬세하게 가릴 수 있으리라. 여기 온도를 달리해 냉국이라든지 겨울 동치미까지 계통과 체계를 잡아 보면 어떨까. 국탕. 훌훌 마시기 좋은 데서, 식은 밥 한 덩이 풍덩 빠뜨리기에 좋은 데서 그칠 것만은 아니다. 간장간, 젓갈간, 된장간의 국탕 그리고 냉국 및 동치미 등 저마다 다른 풍미와 질감이 제 개성대로 계통과 체제를 이루자면, ‘따끈한 국 사발이 간절한 계절’을 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리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기획이 있어야 하리라.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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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외환위기 이후 ‘생계형 자영업’이 늘어났다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상식에 가까웠다. 회사에서 명예퇴직해 치킨집을 차렸다 망하고 편의점을 부부 맞교대로 운영하다가 병에 걸리고 빚이 생겼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최저임금 인상의 반론 중 하나는 자영업자들에게 지대한 타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역경을 딛고 일어난 ‘흙수저’ 청년 창업가의 신화가 있다. 그런데 논의를 위한 기초적인 질문은 누락되어 있는 것 같다. 자영업자의 수는 얼마나 될까? 누가 어떻게 성공하고 실패하는가?

자영업자의 비중과 숫자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비슷한 소득 수준의 국가 대비 자영업 비중이 높기 때문에 아직도 구조적으로 더 줄어들 여지가 많다. 최병천 전 국회의원 보좌관이 공개한 국회 토론회 자료를 살펴봤다. 먼저 자영업자 비중은 40년에 걸쳐 추세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자영업자 비중은 1975년 35%에서 2017년 21.3%가 됐고, 올해는 21.1%가량으로 추산된다. 자영업자의 숫자도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반짝 자영업자가 증가해 600만명을 돌파했지만, 그 이후 십수년째 내리막길을 걸었고 현재는 570만명 내외다. 주진형의 언급에 따르면 70%는 자기 말고 고용하는 사람이 없다.

자영업자와 무급 가족종사자를 합친 비임금 근로자의 비중은 여전히 25.4%에 달한다. OECD 국가 비임금 근로자의 비중은 14.8%다. 한국에서는 비슷한 경제규모 국가들보다 10% 더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을 하거나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무급으로 일하는 중이다. 자영업의 영세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일본의 비임금 근로자 비중이 더 높을 것이라고 추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심야식당’으로 잘 알려진 1인 식당, 부부가 운영하는 가정식 식당, 또는 노포(몇 대에 이어 운영하는 식당) 등을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일본의 자영업자 비중은 10.4%에 그친다. 일본의 식당도 주로 자영업보다는 중소기업으로서 운영되는 셈이다.

자영업의 어려움에 대한 합당한 분석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손님이 줄었다는 것이다. 전단지 가득 할인쿠폰을 담아 주택가에 뿌리는 슈퍼마켓 정도를 제외하면, 적정 규모 확보와 경영 혁신이 지체된 작은 ‘구멍가게’들은 문을 닫고 있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동네는 낙후된 풍경으로 묘사될 지경이다. 대단지 아파트에서 자란 젊은 아파트 키드들은 장을 보러 대형마트에 가고, 4500원짜리 담배와 4캔에 1만 원 하는 수입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들른다. 직장인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번개 배송’으로 생수와 전자용품을 사고, ‘기프티콘’으로 친구에게 생일선물을 보낸다. 매출과 이윤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대규모 유통을 최적화하는 기업들에 발생할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 앱으로 치킨, 피자, 보쌈을 시켜 먹는 ‘배달’은 하나의 문화적 코드가 됐다. 소비자가 민감하게 느끼는 자영업의 변화는 단골 치킨집이 망해 다른 곳에 시키는 것 정도다.

먹는 행위도 세분화됐다.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30대 이하를 살펴보면 대개 아침은 거르고 점심과 저녁은 사먹기 일쑤다. 특별한 일로 외식을 하는 게 아니라 밖에서 먹는 게 일상이다. 한끼 때우는 것도 라면에 삼각김밥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편의점 도시락은 한때 부실한 식사의 전형이었으나 이제는 양질의 재료를 갖춘 5000원대 프리미엄 도시락도 나왔다. 간단히 덥히기만 하면 되는 간편식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한식 메뉴를 제공한다. 새로 등장한 외식은 유통기업들의 영역이 됐다. 대형 케이터링 업체가 제공하는 학교와 회사 구내식당, 편의점 도시락과 간편식 모두 그렇다. 저렴한 동네 밥집의 경쟁 상대는 젊은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프랜차이즈 식당이 아니라 편의점 도시락과 즉석식품이다. 마케팅 분석을 감으로 따라잡기는 힘들다. 소수의 맛집을 제외한 밥집 등 ‘서민식당’은 생활양식의 변화와 유통 혁신 속에서 재구조화 압박을 받는 셈이다.

그런데 자영업 이야기는 늘 비슷하게 흘러간다. 골목상권을 침범하는 유통 대기업의 마수. 대형마트 이야기다. 격주 일요일에 대형마트가 쉬게 됐다. 골목상권에는 대형 프랜차이즈가 입점하지 못한다. 편의점 때문에 슈퍼마켓이 망한다고 한다. 사실 편의점 점주도 자영업자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자영업자가 망하게 생겼다고 한다. 자영업자 중 70%는 자기 말고 고용하는 사람이 없다. 알바 임금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식당 아니면 중소기업이다. 기획재정부는 지역별 차등 적용을 검토했다. 그러나 자영업자의 억울함이 풀릴지는 모르겠다. 자영업 자체로 확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가 자영업자 달래기에 나서는 동안 여론의 장에서 사실관계와 논점은 묘하게 비틀리고, 비평은 공분만 유도하며 건강한 논의를 막는다.

백종원이 국정감사에서 했던 말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자영업 시장이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은 “충분히 준비 안됐으면 하지 말라”고 방송한다고 한다. 정부가 지원할 것은 금융보다 준비 단계란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퇴직자들이 하강하는 자영업에 진입해, 요동치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춰 탄력적으로 업을 운영하긴 힘들다. 이들에게 한 번의 실패는 치명적이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안정적인 소득이지 ‘사장님’ 대우가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것은 퇴직자의 ‘경력’ 활용이다. 제도가 힘을 주어야 하는 부분은 ‘퇴직자 창업’이 아니다.

창업자의 구성은 바뀔 수밖에 없고 바뀌어야 한다. 자영업체 모두를 살리겠다며 제도를 개선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다. 시장의 조정은 불가피하다. 청년들이 스스로 변화하는 시장의 소비자이자 사업가로서 잘 준비해 도전하고 건실한 사업을 키울 수 있게 지원하는 게 자영업과 중소기업 정책 방향으로 맞다. 공증된 창업 교육을 제공하고, 인증을 브랜드 가치로 살릴 수 있게 돕고, 실패해도 자기평가만 정확하다면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사실 정부의 자원은 한정적이라, 창업 실패 경험이 노동시장에서 온전히 경력이 되게 돕는 것조차 쉽지 않다. 기존 자영업자 달래기보다, 공무원 말고 다른 대안을 상상하지 못하며 도전을 회피하는 청년들에게 “다른 일을 해도 괜찮아” 하고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훨씬 절실한 상황이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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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향수’를 쓴 정지용 시인은 충청북도 옥천군 출생으로 고향의 아름다움을 그리면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시인의 고향에 ‘향수 100리길’이 조성되어 있고, 자전거로도 돌아볼 수 있다.

그런 금강은 아쉽게도 지난 6년간 마음껏 휘돌아 나가지 못했다. 보(洑) 3개가 문턱이었다. 그동안 보의 물을 가뭄에 요긴하게 쓰기도 했으나 녹조, 생태계 훼손 등에 대한 문제제기도 지속되어 왔다. 이에, 정부는 작년부터 4대강 16개 보의 자연성 회복 방안을 찾고 있다. 물 이용에 문제없는 범위 내에서 실제로 보를 열어 보고, 그 영향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있다. 설익은 대책을 덜컥 내놓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보를 개방하고 그 영향을 과학적으로 평가한 뒤, 각계의 의견을 모으는 합의 과정을 거쳐야만 사회적 수용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보를 일시적으로 열어볼 때에도 준비를 세심하게 해야 한다. 개방을 하더라도 생활용수를 취수하는 수위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농사짓는 시기와 양수장 가동 시기도 감안해야 한다. 어선·어구 손실도 방지해야 하고, 돛배나 계류장 등 친수시설 이용도 고려해야 한다. 수위를 내릴 때 물고기나 조개류가 고립되면 신속하게 구제해야 한다. 또 지하수도 고려해야 한다. 준설로 인해 지하수위가 올라갔고, 늘어난 지하수는 수막재배 등 인근의 농업에 쓰이고 있다.

이러한 준비를 거쳐 금강은 지금 문턱 없이 마음껏 흐르고 있다. 지난 9월11일 지역농민과 관계기관이 백제보 완전 개방을 위한 ‘업무협력 협약서’를 체결했다. 지하수 부족이 일부 제기되었지만, 지역주민과 관계기관이 합동으로 지하수 펌프 교체, 관정 설치 등의 해결책을 모색했다. 금강이 자연의 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지역사회의 공감대가 만들어진 덕분이다.

이미 완전 개방된 세종보와 공주보 사례에서 금강이 자연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체류시간은 줄고 유속은 빨라졌다. 클로로필a가 개방 전 예년 같은 기간에 비해 약 40% 줄었다. 멸종위기Ⅱ급인 독수리가 세종보 상류를 찾기도 했다. 세종보는 모래톱이 4배 이상 늘어나기도 했다. 모래톱은 뭇 생명이 살아갈 터전이고, 수질 정화에도 한몫한다.

금강이 막힘없이 흐르는 약 보름간은 천금 같은 시간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금강 수계 전체의 보 개방 영향을 종합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평가할 수 있다. 수질, 수생태, 육상생태, 퇴적물, 경관, 수리·수문, 지하수, 물 이용, 하천의 각종 구조물에 미치는 영향을 보다 세밀하게 모니터링하여, 종합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보 개방이 전 수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증 데이터를 확보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연말에 금강 보 처리방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시골 출신의 60대 이상 연령이라면 어린 시절 여름에 강에서 미역을 감고, 겨울엔 얼음 지치며 놀았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강은 우리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지금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방식으로 강을 누릴 수는 없을까? 미래세대에게 지속가능한 공존의 강을 물려주기 위한 진지한 모색과 꾸준한 실천이 절실한 때이다.

<박천규 환경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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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ings we touch have no permanence…. There is nothing we can hold onto in this world. Only by letting go can we truly possess what is real.”

2000년 개봉해 세계적 찬사를 받은 영화 <와호장룡>의 대사다. 무당파의 고수 리무바이가 가지고 있던 청명검을 둘러싼 얘기다. 청명검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는 스토리다. 누군가에게 ‘청명검’은 권력, 명예일 수도 있고, 또 많은 이들에겐 떼돈일 거다.

리무바이가 후학들에게 전하려던 바는 아마도 위 대사일 테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쥐고 있을 수 있는 영원한 건 없다. 내려놓아야만 참된 것을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다.’

리무바이 역을 맡은 홍콩 영화계의 거목 저우룬파(주윤발·63)가 최근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약 8100억원대 재산이라니…. 싱가포르 갑부의 딸이란 그의 아내도 뜻을 같이했다고 한다. 어쩌면 저우룬파는 리무바이의 현신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와호장룡>의 주윤발.

사람이 떵떵거리며 살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 집은 적어도 서울 강남에 30평대 아파트가 있고, 고급 수입차를 굴리며, 물 건너온 명품으로 몸을 감싸야 할까.

누구도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려울 텐데, 혹자는 ‘적어도 현금 20억원 남짓이면 더 이상의 돈은 별 의미가 없다’고도 한다. 혹시 너무 많은 재산이 지금 자신에게 모여 있다면 왜, 무엇을 위해서인지 이번 기회에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럼 왜 우리는 놓지 못하는가. 일단 인생의 업보인 자식새끼 때문이다. 저우룬파에게 자녀가 없는 점도 결단에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수년 전 역시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한 다른 유명배우는 얼마 전 말을 뒤집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아들 때문이라고도 하니 씁쓸하다.

우리가 아등바등하는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노후 걱정이다. 여기서 S·K·Y로 대표되는 학벌이 불거지고, 강남 집값 타령을 비롯한 부동산 문제가 얽히고설킨다. 우리 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상태’에 가까운 정글이다.

이런 실타래를 끊을 진짜 ‘청명검’은 뭔가. 사실 답은 웬만큼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후 걱정을 덜어주는 복지체계가 모범답안에 가깝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살면 늙어서 호강은 못해도 폐지를 주워야 하는 걱정은 떨치게 해야 한다. 공부머리가 안되는데 굳이 학원 뺑뺑이를 돌리거나, 빚내가며 ‘엉터리 학종’을 억지로 채울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악연이 끊길 것이다.

독일형 마이스터고 어쩌고저쩌고 백날 떠들어봐야 안 먹힌다. 자기가 좋아하는 기술을 배워 사회에 나왔다가 협력업체나 프랜차이즈 본사에 갑질을 당할 수 있어서다. 부동산 투자인지, 투기인지 광풍이 부는 이유도 비슷하다. 근본 원인은 노후 걱정에 임대료라도 받겠다는 불안감이 커서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옛말이 있다. 만약에 재벌 총수가 자식에게 최소한 삶을 보장할 만큼만 빼고 전 재산을 환원했다고 치자. 그래도 그의 아들, 손자까지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아닐 공산이 크다. 누구든 한두 번 미끄러지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대한민국 사회다.

지분 일부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며 모두 자신의 것인 양 행세하는 총수일가들 모습에선 깃털 같은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리무바이가 극중 대나무를 타는 모습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말했다. “돈은 내 것이 아니고 잠시 보관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 영원한 건? 혹자에겐 사랑이고 다른 누구에겐 아름다운 이름일 것이다. 리무바이처럼 살아도 되는 날을 꿈꾼다.

<전병역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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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아이들은 이름도 참 예뻐. 내 또래만 해도 나온 순서대로 일식이 이식이 삼식이. 어디 몸뚱이에 점만 보이면 점만이 점택이 점순이 점례. 이름이 진짜 점순이였던 누나 친구가 있었어. 점순이 누나는 하필 얼굴에 큰 점이 있어가지고 온갖 놀림을 받고 자랐어. 그동안 고산 오지만을 수십 차례 오르내리며 직사광선 자외선 마사지를 너무 많이 받고 다녔다. 눈 밑에 기미가 생기고 보이지 않던 점들이 우수수. 집에 틀어박혀 연속극이나 보면서 산다면 모르겠지만 사람들도 두루 만나고 해야 하는 처지라 병원에 한번 가봤다. 기미, 주근깨, 점을 레이저로 지지자고 한다. 일주일 꼬박 뭘 바르고 붙이고 하면서 치료를 했는데 깨끗한 얼굴로 돌아왔다. 구절초에 감국이며 쑥부쟁이가 피어나는 계절에 햇빛 구경도 못하고 책만 슬슬 읽으면서 추석 명절 앞뒤를 그렇게 보냈다.

남북 이산가족을 찾을 때, 해외입양아가 친부모를 수소문할 때, 몸에 특징이 될 만한 점이 하나 있으면 ‘왓따’다. 문어가 멸치에게 퇴짜를 맞은 이유는 뼈대 없는 가문이라서. 복점이 있는 여인은 콧대가 높고 기운도 알차서 어지간한 문어는 눈에 차지도 뵈지도 않아. 뼈대가 없으면 복점이라도 한두 개 박혀 있어야 한다. 잘생긴 부처님 ‘부처 핸썸’도 이마에 점을 하나 붙이고 계시지 않던가.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점 공방전’.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점 얘기. 싸리비를 들고 잠자리나 쫓던 스님이 내게 전화를 해서 다 물어본다. 나랑 같이 목욕탕에도 몇 번 간 사이. 그때 자기 점을 안 봤냐 하시는데 아니 사우나하면서 누가 남의 거시기를 쳐다보나. 게다가 스님 거시기를…. 돌았냐고 하면서 웃다가 전화를 끊으니 밤하늘에 별점이 한가득이나 우르르 떴어라. 병들어 일찍 죽었다는 점순이 누나도 하늘에 별점이 되어 나를 쳐다보는 듯해. 나도 이 별의 한 개 점 같은 존재. 고단하고 뻐근한 세월에도 복점이 하나씩 있으니 부디 견디라고, 견뎌보자며 그렁그렁해진 별빛들. 엎드려 웅크린 자리마다 꽃이 피듯 좋은 날 반드시 있을 거니까.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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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불교 포럼에 참석했다. 후배의 권유를 받고, 법문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일찌감치 참가를 약속한 터였다. 그보다는 포럼의 주제가 더 끌렸다. 주제는 ‘다시 돌아보다, 종교’. 개인적으로 이 포럼이 아니더라도 지금이 ‘이 땅의 종교’를 말할 때라고 생각해 왔다. 불교 조계종 고위스님의 파계 의혹, 대형 교회의 세습, 일부 개신교 목사의 세월호 왜곡 등, 가짜 종교가 판치는 속에서 어찌 종교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있을까. 최근 <종교 없는 삶>이나 <세속성자> 같은 신간을 찾아 읽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왠지 이날의 포럼에서는 해답을 얻을 것만 같았다.

사단법인 ‘고요한소리’ 주최로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중도포럼’은 만석이었다. 자리 250석은 물론 통로까지 메웠다. 고요한소리의 회주 활성 스님이 법문을 했다. 스님은 자신의 법명을 ‘살려내는(活) 소리(聲)’라고 소개하며 “항상 부처님의 소리를 얼마나 되살려 전하고 있는지 자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문의 요지는 중도(中道), 곧 사성제와 팔정도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 개념이다. 그러나 담마와 아비담마 등 근본불교 용어를 들어 설명하는 스님의 법문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에 파고든 말씀은 있었다. 생(生)과 멸(滅)을 함께 얘기하는 불교가 ‘다다익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종교는 신과 인간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신뿐 아니라 인간, 자연까지도 살려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법문이 끝나고 토론이 시작됐다. 불교학자, 종교학자, 목사로 구성된 발제자들은 4차 산업시대 종교의 역할을 얘기했다. 최종석 금강대 교수는 정보기술시대에 불교가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현대 심리학의 방법론을 차용해 불성이나 영성을 감성지능(EQ)처럼 지수화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김재영 서강대 교수는 우리 사회에 종교 간 벽이 너무 높다며 신학대나 불교대학에서 타 종교인을 교수로 임용할 것을 제안했다. 내심 기대했던 조계종 사태나 명성교회의 세습 등 구체적 현실은 거론되지 않았다. ‘불교계의 무기력증’ ‘개신교의 적폐’ 등으로 우회 언급하는 정도였다. 그나마 이정배 목사의 “우리 사회의 갈릴리는 노동자들이 고공농성하는 현장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현실감이 있었다. 이날 종교 현장에 대한 비판이나 토론은 없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 땅의 종교 현실과 앞날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듯 보였다. 토론장의 분위기가 말해주었다. 4시간 넘게 진행된 포럼에서 200여명이 자리를 지켰다.

포럼에서 ‘고요한소리’를 알게 됐다. 이 단체는 불교 신자들이 1987년 활성 스님을 모시고 출범했다. 늦은 나이에 출가한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의 원형을 알기 위해 근본불교인 팔리어 경전의 번역 사업을 발원했고, 신자들이 뜻을 모았다고 한다. 고요한소리는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연구하고 실천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를 위해 초기불교경전 번역과 스리랑카불자협회가 펴낸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번역출간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이곳에서 펴낸 불교 서적은 120만부가 넘는다. 이 모든 일을 회원들이 맡아 하고 있다. 지금은 불교계에 팔리어 경전이 꽤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번역의 물꼬를 튼 곳이 ‘고요한소리’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는 종교 위기의 시대이다. 신자 등 종교인의 감소는 세계적인 추세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경우 1950년대 5%였던 무종교인의 수가 지금은 30%로 늘었다. 한국은 절반 이상이 종교 없이 살아간다. 탈종교화 현상은 종교의 가르침이 현대정신과 맞지 않는 데서 나타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덕과 윤리, 영성, 초월감, 명상 등은 종교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종교 밖에서도 충족할 수 있다. 게다가 성소수자, 난민, 낙태 등에 폐쇄적인 보수 종교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와 충돌하고 있다. 교회와 사찰이 물신화되고 종교인이 타락상을 보이는 한국 종교의 상황은 더욱 절박하다.

종교가 종교답지 못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째는 무종교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필 주커먼의 <종교 없는 삶>은 종교 없이 도덕적·영적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두번째는 제도권 종교 밖에서 대안의 종교를 찾아가는 길이다. 양희송의 <세속성자>가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세속성자들은 타락한 교회나 성직자를 비판하지만 종교를 부정하지 않는다. 세번째는 ‘고요한소리’의 길이다. 현실 종교의 흐름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종교 근본의 길을 가는 방안이다. 이는 속도와 효율로 대표되는 현대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종교 근본에 대한 탐구는 더디지만 울림이 크다. ‘고요한소리’는 묵묵히 31년째 이 길을 걷고 있다. 이날의 포럼은 울림이 있는 회향이었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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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이 17일 제주로 집단 입국해 난민 신청한 예멘인 난민 신청자 458명 중 339명에 대해 인도적 체류를 허가했다. 또 나머지 34명에 대해서는 난민 불인정 조치를 내렸고, 85명은 결정을 보류했다. 지난달 14일 먼저 체류를 허가받은 23명을 포함하면 모두 362명이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것이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으면 1년간 국내에 머물 수 있다. 제주도 바깥으로 나가 취업도 할 수 있다. 이번에도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없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자국으로 돌아갈 경우 생명의 위협을 받을 예멘인들이 강제출국을 면하게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체류가 허용된 사람들은 영·유아 동반 가족과 임신부, 미성년자, 부상자 등 인도적 보호 필요성이 충분히 인정된 경우이다. 제3국에 안정적으로 정착이 가능하거나 범죄혐의자, 마약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온 사람들은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철저한 조사를 진행한 뒤 마약과 테러 혐의가 전혀 없는 사람에 대해서만 한시적으로 체류를 허가한 것이다. 제주도 바깥으로 이주하게 되면 즉각 체류지를 신고하도록 하는 등 사후 관리 대책도 마련했다. 시민들의 가짜난민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고 사후 대비책까지 마련한 만큼 이들의 체류를 허용한 것은 온당하다. 특히 300명이 넘는 난민 신청자에게 한꺼번에 인도적 체류를 허가한 것은 처음이어서 의의가 크다.

이번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난민법이 계속 시행되는 데다 국제 관광객의 증가로 무사증 제도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1994년부터 지난 8월 말까지 국내 난민신청자는 4만4471명이다. 이 중 2만1064명에 대한 심사가 결정됐으나 861명만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인도적 체류 허가자도 1554명에 지나지 않는다. 교역규모 세계 10위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은 야박한 조치이다. 국제인권 기준에 맞춰 더욱 폭넓게 난민을 인정해야 한다. 이번 미결정자 85명 중에는 난민으로 인정할 만한 사례도 있다니 우선 이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인도적 체류자에 대한 보호 조치와 난민을 국내에 취업시키는 등 보완책도 마련해야 한다. 상당수 시민이 난민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지만 근거 없는 외국인 혐오는 중지해야 한다. 정부의 단호하고 결기 있는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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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인적 쇄신과 당 혁신에는 반보도 내딛지 못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이 이제는 아예 반동으로 회귀할 분위기다.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이념과 정책, 인물 등 모든 영역을 밑동부터 갈아엎는다는 각오로 임해도 폐허가 된 보수의 재건까지는 갈 길이 멀다. ‘김병준 비대위’가 출범했지만 3개월이 넘도록 습관처럼 정부·여당을 공격하고, 행동 없는 구호로만 ‘보수 가치 재정립’을 외쳐댄 것 빼고는 한 일이 없다. ‘좌표·가치 재정립위원회’가 제시한 자유·민주·공정·포용 등 ‘4대 가치’라는 것도 당의 지향으로 실천이 담보되지 않기에 아무런 울림이 없다.

[시사 2판4판]들꽃 (출처: 경향신문DB)

비대위체제로 바꾸고도 침체와 무기력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낮은 지지율에서 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국당이 ‘보수통합’을 들고나섰다. 턱도 없어 보이는 보수 ‘대통합’의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 “문재인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뭉쳐야 한다”(김용태 사무총장)는 통합의 명분부터가 문제다. 이념이고 노선이고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세력만 불리고 나뉜 보수야당만 합치면 문재인 정부에 대항할 힘이 생기고, 잃어버린 지지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러니 바른미래당을 향해 연대와 합당을 손짓하다가, 소위 ‘태극기부대’와의 통합을 공공연히 꺼냈을 터이다. 인적 쇄신의 권한을 위임받은 전원책 조직강화특별위원은 “태극기부대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로 극우라는 표현을 써선 안된다”면서 태극기부대도 통합 대상이라고 했다. 대체 박 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한테 극우라는 표현을 써서는 안된다고 하는 발상부터가 황당하다. 박근혜 탄핵이라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고 냉전수구의 ‘구체제’를 청산하지 않고는 한국당의 출로는 열리지 않는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문재인 빨갱이”와 “박근혜 구출”을 외쳐대는 태극기부대가 보수통합의 상대라면, 더는 ‘보수 혁신’이나 ‘보수 재건’을 운위하지 말아야 한다. 판문점선언과 북·미 정상이 만나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는 대전환의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채 “위장평화쇼” 운운하며 낡은 이념에 매몰되어 있다가 지난 선거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한 교훈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더욱이 태극기부대와 통합하는 마당에 바른미래당이 동참하라는 건, 정치 도리도 저버린 뻔뻔스러운 발상이다. 애초 지지율 10%대에 고착된 ‘늙은 공룡’이 구심이 되어 보수통합을 이뤄내겠다는 것 자체가 몽상에 불과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실패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한 줌 기득권을 붙잡고 문재인 정부의 실정만 고대하는 정당에 지지를 돌려줄 합리적 보수 유권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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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과 면세점의 판매직 노동자들이 근무 중 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면서 5명 중 1명이 방광염에 시달린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김승섭 고려대 교수 연구팀이 백화점·면세점의 화장품·명품점에서 일하는 노동자 280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다. 조사 결과 ‘근무 중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노동자는 59.8%로, 절반을 넘었다. 그 이유로 ‘매장에 인력이 없어서’(62.4%)가 가장 많았다. 심지어 ‘지난 6개월 동안 생리대 교체를 못한 경험이 있다’는 노동자도 39.9%나 됐다. 이렇게 화장실 이용이 어렵다 보니 방광염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노동자는 20.6%에 달했다. 일반 노동자들 방광염 유병률(6.5%)의 3배를 넘는다. 화려한 매장에서 값비싼 명품을 다루고 있지만 판매직 노동자들은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DB

판매 노동자들은 장시간 서서 일하다 보니 하지정맥류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응답자도 15.3%에 달했다. 일반 노동자의 25배를 넘는다. 이들은 휴게 시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조사 대상 중 절반이 넘는 58.1%는 ‘지난 한 달 동안 휴게실 사용을 못했다’고 답했다. 그 이유(복수응답)로 ‘휴게실 의자가 부족해서’(65.7%), ‘휴게실이 좁아서’(47.5%), ‘휴게실이 멀어서’(26.3%) 등이 지적돼 대형매장의 노동자 휴게실이 얼마나 열악한지 보여주고 있다.

무지외반증에 걸린 백화점 화장품 판매 노동자의 발.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제공

정부는 2009년 대형매장에 판매 노동자를 위한 의자와 휴게시설을 마련토록 했고, 2011년에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 해당 조항을 넣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지키는 매장은 거의 없다. 이번 조사에서도 의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원할 때 앉을 수 없다는 답변이 64.9%에 달했다. 그러다보니 정부는 최근 의자와 휴게시설 설치와 운영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에서는 정부가 의자 등이 있는지 여부만 확인할 뿐 노동자들이 이를 제대로 이용하는지는 조사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달부터는 일부 대형매장에서 노동자들이 ‘앉을 권리’를 스스로 찾겠다며 일정 시간에 일제히 의자에 앉는 ‘의자 앉기 공동행동’까지 시작했다. 정부는 판매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이 실질적으로 개선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고객들도 판매 노동자들이 인권을 보장받으며 일할 권리에 대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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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수험생들은 자신이 따게 될 대학 간판이 앞으로의 인생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란 점을 이미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전’의 순간 앞에 그들이 느끼고 있을 중압감을 헤아려 보다 문득 지난 4월 대학 입시개편안을 주제로 열린 한 방송사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인상 깊게 남았던 대화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입시제도에는 한 사회의 철학과 지향점이 응축돼 있기에, 입시를 둘러싼 논쟁은 필연적이게도 입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토론에서 수시와 정시를 놓고 설전을 벌이던 패널들도 결국 마지막에는 ‘인생 역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야기를 확장해 갔다.

수시를 옹호하는 쪽 패널로 나온 한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대역전은 고1 때 1~2등급을 못 받다가 나중에 수능 잘 봐서 상위 11개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생 역전은 5~6등급 받고 전문대나 (중하위권) 대학에 가서도 공부를 새롭게 해서 원하는 삶을 살 때, 그것이 인생 역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답률 2%짜리 문제를 맞히기 위해 모두가 올인해야 하는 현실이 바람직한 현상인지 다시 묻고 싶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왕성하게 공유되고 있는 ‘대충 살자’ 시리즈

그러자 정시 확대를 주장하는 쪽의 패널로 나온 대학교수가 교사의 ‘이상주의’를 질타하며 이렇게 반박했다. “인생의 역전은요, 고등학교 시기에도 가능해야 합니다. 대학 가서도 가능해야 하고, 졸업해서도 가능해야 합니다. 저는 선생님 같은 사고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말 걱정됩니다. (학생 여러분) 항상 도전하시고요, 꿈을 잃지 마시고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이 사회가 그런 길을 드릴 겁니다.”

두 패널의 대화는 당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꽤 회자되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대화 내용이 단순히 수시와 정시의 ‘황금비율’ 논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점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자의 주장은 한마디로 “노오력하라, 안되면 더 노오오력하라”로 요약된다. 그는 대학에 가고 졸업을 해도 꿈을 잃지 않고 항상 도전하면 매 순간 ‘인생 역전’이 가능하다고 하면서도, “전문대에 가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 역전”이라는 교사의 사고가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한다. 그러나 ‘노오력지상주의’는 언제나 철저히 승자의 언어로만 쓰여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상위 11개 대학에 합격해 ‘인생 역전’을 이뤄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들 대학의 모집정원이 전체의 11%에 불과하다는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열에 아홉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 역전’에 기어코 실패하고야 만다는 얘기다.

반면 대학 간판 없이도 모두가 각자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전자의 주장은 너무나 맞는 말이지만,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공허하다. 상위 11개 대학을 나와도 예전처럼 좋은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졌다며 일각에서는 ‘학벌붕괴’라고 호들갑을 떠는 상황이니 학벌의 피라미드 아래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원하는 삶’이 무엇이 됐든 그 기본 전제는 안정적으로 먹고살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 이렇다 할 대학 간판이 없는 자들에게 “유일한 인생 역전 기회는 (정답률 2%짜리 수능문제만큼이나 바늘구멍인)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뿐”이란 말이 좌우명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기성세대가 ‘인생 역전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탁상공론을 벌일 때, 아무리 ‘노오력’해도 사회가 길을 열어주지 않고 학벌에 비례하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자본 없이는 ‘원하는 삶’을 살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들은 ‘#대충 살자’에 열광한다. SNS상에서는 ‘대충 살자, 걷기 귀찮아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북극곰처럼’ ‘대충 살자, 평양에서 조는 최현우(마술사)처럼’ 같은 ‘대충 살자’ 시리즈가 유행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란 책은 많은 이의 공감을 자아내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대충 살자’는 “열심히 해봤지만 안되더라”라는 좌절과 허탈 끝에 나온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처럼 보인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자신의 삶을 피할 수 없다면 즐기려는 슬픈 카르페디엠이다. <복학왕의 사회학>을 쓴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충 살자’는 소수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그래서 대다수가 패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청년들이 택한 저항의 한 방법”이라고 분석했다.

‘노오력’하라는 채찍질 아니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서도 이상적인 당위밖에 얘기해주지 못했던 이 사회는 앞으로 이들에게 어떤 대안을 보여줄 수 있을까. 아무도 길을 열어주지 않는 현실 속에 놓여진 청년들, 그리고 몇 년 후 놓여지게 될 지금의 수험생들에게 벌써부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정유진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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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대 설립을 위한 법률안이 국회에 상정되면서 의사협회와 일부 의학계가 반대에 나서고 있다. 공공의대의 경우 없던 의대 정원을 만들어 설립한 것이 아니라 대학 비리와 질 낮은 교육 문제로 폐교된 서남의대의 정원만을 이어받아서 만드는 것이라 의료계의 반대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느 계층, 어느 지역에 살더라도 생명과 건강에 관한 필수보건의료를 평등하게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응급, 외상, 심뇌혈관질환 등으로 인한 예방 가능한 사망에 있어서 지역 간 편차가 너무 크다. 저출산 시대에 아이를 낳는 것이 축복이어야 하는데 많은 지역은 분만할 병원이 없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어린이 재활병원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 발생 등 국가 위기 상황을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할 훈련된 역학조사관이나 공중보건 전문가는 매우 부족하다. 수도권은 병원도 의사도 넘쳐나는데,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 지역은 그렇지 못하다.

대다수 의대 졸업생이 수도권과 대도시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지역의 필수보건의료를 책임지고 헌신할 공공보건의료 전문가 양성을 위해 공공의대는 꼭 추진되어야 한다. 학생 선발부터 지역에서 헌신할 인재를 뽑아야 한다. 기존 의과대학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공공보건의료 교과과정을 공공의대에서 교육해야 한다. 졸업 후 의무복무를 거쳐 지역에서 필수의료를 책임지는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공중보건의사 제도나 공중보건 장학의 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기존의 의과대학 교육이 공공보건의료 전문가의 양성에 관한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이 부실할 뿐 아니라 실제 기존의 의과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정책의 실효성이 매우 미미하다는 증거가 이미 드러난 상태다. 그런데 또다시 그러한 정책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반대를 위한 논리에 불과하다. 지역의 필수보건의료를 책임질 수 있는 공공보건의료 전문가를 직접 교육하고 육성하는 정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문제를 풀어나갈 동력이 생길 수 있다.

의료의 질이 떨어질 거라는 우려와 의대 설치에 막대한 국고가 들어갈 거라는 우려도 있지만, 기우에 불과하다. 국립중앙의료원을 필두로 충분히 교육실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공병원이 있다. 특히 국립중앙의료원은 공공의대가 설립되는 시점에 많은 국가 재정을 투입하여 현대화된 병원으로 이전할 계획인데, 이보다 더 좋은 교육실습 공간은 없을 것이다. 공공의대의 비용 대부분도 임상교수 확보에 들어가기 때문에 국립중앙의료원이 교육병원이 될 경우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의료계가 배제되었다는 주장 역시 일방적이다. 이미 공공의대 설립 필요성은 전 정부에서 추진되어왔던 사안이고 수차례 학술 연구와 공개 토론회 등을 통해 여러 의견이 반영되어왔으며, 현 야당 역시 유사 법률안을 국회에 발의한 바 있다. 가장 핵심적인 이해당사자인 전북 지역의 여론도 공공의대 설립에 찬성하고 있다.

공공의대가 지역의 필수보건의료에 헌신할 전문가를 양성하는 명실상부한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의료계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임준 | 서울시립대 도시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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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락 없이 늦는 중학생 딸을 기다리며 서 있던 골목을 얘기했다. 온종일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의 한숨과 무거운 발걸음이 진득거리던 어두운 골목 끝에 딸이 나타났을 때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아이가 사뿐사뿐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걱정이 사라져서 혼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두 자식을 키우면서 크게 소리 내어 혼낸 적이 없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바라볼 뿐. 그는 자신이 한 일이라곤 한눈팔지 않고 잘 바라본 것뿐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크고 더는 자신의 손이 필요 없을 때, 그가 시작한 일은 유적지 문화 해설가였다. 팔각으로 된 외목도리에 서까래를 걸어 지붕을 팔각으로 꾸민 정자에서 봄을 바라보고 돌담을 거닐며 가을을 맞이하던 시절, 그는 바라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얘기하곤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나이 서른이 넘은 아들이 며칠 전 혼례를 올렸다고 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렀다는 그는 신부의 고운 자태를 얘기했다. 며느리가 아들을 데려가 살아준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며느리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말에는 죄다 고개를 내저었다. 며느리가 살아온 행적도, 며느리의 직장도 하물며 며느리의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했다. 아직 딱히 연락할 일이 없으니 알 필요가 없었다는 그는 언젠가 며느리가 초대하면 그때야 신혼집에 가볼 거라고 했다. 둘이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자신은 그저 부를 때만 가주면 된다는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이 시어머니는 시쳇말로 ‘시월드’라 부르는 구태의연한 세상을 구축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의 거리 두기는 무관심이 아니다. 그의 삶을 되돌아볼 때 그의 거리 두기는 ‘멀리서 바라보기’다. 자식들에게 그랬듯이, 고궁을 알아갈 때 그랬듯이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을 응시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며 예쁜 모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그들의 모습 그대로 봐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거리 두기는 따뜻하고 여유롭다. 나도 그처럼 나이 들고 싶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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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시간에 인류가 발명한 가장 놀라운 세 가지 제도는 가족·시장·민주주의라고 말하곤 한다.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고, 먹고살아야 하며, 공동의 의사 결정을 이끌어내야 하는 존재다. 이러한 요구들에 부응해 등장한 사회 제도가 가족·시장·민주주의라는 의미다. 이 세 제도는 사회학·경제학·정치학의 핵심 탐구 대상이기도 하다.

주목할 것은 이 세 제도에서 고정적 모델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가족·시장·민주주의는 끝없이 변화돼 왔고, 여전히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예컨대, 1인 가구의 증가와 금융시장의 지구화는 전후 시대에 가족과 시장 영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다. 이러한 변동이 암시하는 것은, 가족과 시장에 대한 표준화된 모델이 없고,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지속적으로 일궈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경우는 어떨까. 지난 20세기 민주주의의 역사에는 두 가지 ‘결정적 모멘트’가 존재했다. 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파시즘과 싸워 이겼고, 동구사회주의 몰락에서 볼 수 있듯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도도한 물결을 지켜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인류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역사의 종착역에 도달했다는 과감한 주장을 내놓았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제도다. 평생 민주주의를 탐구한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가 전제정치의 방지, 본질적 권리들, 일반적 자유, 자기 결정, 도덕적 자율성, 인간 개발, 개인적 이익의 보호, 정치적 평등과 같은 소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분석했다. 더하여, 그는 현대 민주주의가 평화의 추구 및 번영이라는 결과까지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달이 이러한 견해를 제시한 때가 1990년대 후반이었으니 민주주의에 대한 낙관론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앞세운 정치제도가 정말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을 선사해온 걸까. 21세기가 열린 지 10년이 지난 후, 파커 파머는 우리 시대 정치가 행복이 아니라 비통을 안겨준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정치는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무시한 채 편리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민주주의와 공공선에 기여해야 할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 우리 시대의 정치는 ‘비통한 자들의 정치’라는 게 그의 우울한 진단이었다.

21세기가 열린 지 20년이 가까워지는 현재,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낙관론보다 비관론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비관적 전망의 한가운데는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유럽 극우 정당들의 약진에 이르는 포퓰리즘의 발흥이 놓여 있다.

민주주의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지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올 한 해 민주주의 담론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책의 하나는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다. 원제목은 ‘국민 대 민주주의’(The People Vs. Democracy)다. 뭉크는 최근 서구 정치가 ‘포퓰리즘의 모멘트’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맞이한 세 번째 모멘트인 셈이다.

뭉크는 1990년대 이후 지배적 정치 패러다임으로 군림해온 자유민주주의가 일대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한다. 위기는 두 가지 형태를 띤다.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스트롱맨’이 독재로 나가는 ‘권리 보장 없는 민주주의’가 하나라면,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민주주의 없는 권리 보장’이 다른 하나다. 내 시선을 잡아끈 건 민주주의 붕괴 경향에 대한 뭉크의 관찰이다. 구체적으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넘어선 혐오, 소셜 미디어에서 강화되는 극단적 진영 논리,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가짜 뉴스에 대한 뭉크의 분석은 우리 사회에도 안겨주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흥미로운 건 뭉크가 한국을 직접 다룬다는 점이다. 뭉크는 한국이 촛불집회를 통해 권위주의로의 후퇴를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고 평가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지도자를 거부하고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사수하려는 게 촛불집회의 원동력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내건 20대 국정전략의 첫 번째도 ‘국민주권의 촛불민주주의 실현’이다.

내가 품고 있는 물음은 한국 민주주의가, 뭉크의 표현을 빌리면, 현재 위험하지 않은가의 질문이다. 앞서 말한 정치사회 혐오, 극단적인 이분법, 넘치는 가짜 뉴스가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정직한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쉽게 붕괴할 것이라고 믿진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언제나 전진하는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 2년을 맞이하는 현재,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다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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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견(管見)이라는 말이 있다. 대롱을 통해서 본다는 뜻으로, 주로 자신의 소견이 좁음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 표현은 장자가 하는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의아해하는 공손룡에게 주어진 비유에서 비롯되었다. 공손룡은 논리적 변설에 매우 능해서 수많은 학설들의 허를 찌르며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던 인물이다. 그러나 대롱으로 본 하늘, 송곳으로 짚은 땅만이 전부인 줄 아는 이는 진짜 드넓은 하늘과 땅을 이해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법이라는 말을 듣고 공손룡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늘처럼 전문성이 심화된 시대는 없었다. 같은 학과 내에서도 한두 단계 깊이 들어가면 소통이 힘들 정도로 지식이 세분화되고 있다. 전공 분야 내에서 인정받을 만큼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이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지식이 실용화되거나 대중과 소통되기까지에는 또 간단치 않은 과정이 소요된다. 그러나 오늘처럼 전문성이 무시되는 시대도 없다. 누구나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지식정보의 바다가 언제 어디서든 검색창 앞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출처가 세탁되어 떠돌아다니는 정보와 당의정(糖衣錠) 같은 입문서 몇 권만 읽고도 수십 년 한 우물을 판 전문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다. 소통을 소홀히 한 전문가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지식의 중개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대중의 호응에 취해서 전문가를 가볍게 여기는 탓도 있다.

너도나도 융합을 강조하는 시대다. 그러나 전문성 없이 융합은 있을 수 없다. 적당히 넓고 얕게 연결하고 버무린다고 해서 의미 있는 화학작용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지식의 절대량이 증대할수록 전문성은 더 깊고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남들은 대롱을 가지고 하늘을 보지만 나는 전체를 두루 다 본다고 자부하는 것은 전설의 명의 편작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관건은 태도에 있다. 자신의 지식이 대롱으로 본 하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리고 나와 다른 지점을 짚은 이의 송곳이 얼마나 섬세하게 땅의 진면을 보여주는지를 받아들이는 태도. 수사(修辭)로서의 겸손이 아니라, 서로의 전문성을 열린 마음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융합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지식의 대중화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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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다움을 갈구하는 남성들의 ‘근육질 로망’에 화답한 영화가 한때 유행한 적이 있다. 1980년대 풍미한 홍콩 누아르다. 영화배우 청룽으로 대표되는 코믹 액션물이 유행할 때, 의리와 우정을 진득하게 그린 뒷거리 범죄영화가 출현한 것이다. 시작은 장궈룽, 티렁, 저우룬파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웅본색>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쌍문동5인방 ‘동룡이’가 4720번 보았다고 한 영화다. 동룡이에게 영웅은 저우룬파다. ‘까만 선글라스, 입에 문 성냥개비, 그리고 오버 핏의 바바리코트.’ 당시 남성들의 마음을 훔쳤던 아이템들이다. 영화에 대한 향수는 2008년, 2016년 재개봉으로 이어졌다.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

저우룬파는 경제적으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슬하에 친자도 없다. 그는 홍콩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청소나 채소농장일을 했고 아버지는 석유공장 노동자였다. 집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길거리에서 어머니가 차를 파는 것을 도왔고, 오후에는 농장에 가서 일을 해야 했다. 호텔 벨보이, 우편배달부, 카메라 판매원, 택시운전사를 전전하기도 했다. 인생이 바뀐 것은 그가 출연한 지방 텔레비전 연속극 <상해탄>이 인기를 끌면서다. 그리고 1986년 <영웅본색>에 이어 <첩혈쌍웅> <도신> <가을의 동화> <와호장룡> <커리비언의 해적> 등 히트작을 냈고,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빈손으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스타다.

저우룬파가 지난 15일 전 재산인 56억홍콩달러(약 8100억원) 전액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달 용돈 800홍콩달러(12만원)를 쓰고, 버스를 이용하면서 절약해 모은 돈이다. 기부 이유를 묻자 “그 돈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 영화가 마지막을 향하는 시점에 악당들과의 일전을 벌이기 직전. 생과 사가 엇갈리는 순간이다. 죽을 가능성이 높다.

“신이 있다고 믿는가.”(티렁)

“믿어. 내가 바로 신이니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 바로 신이야.”(저우룬파)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일 수는 있다.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결정을 내린 저우룬파처럼.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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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유리.” 최근 국민연금공단이 시민 홍보자료에 담은 문구이다. 사회복지학계에서 국민연금을 소득재분배 제도라고 평가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정말 그럴까? 본격적인 연금개혁 논의를 앞두고 꼭 점검해야 할 주제이다.

우선, 연금공단의 이야기는 맞다. 보통 국민연금은 소득대체율이 40%라고 소개되지만, 이는 평균소득자 기준이고 계층별로는 누진적이다. 40년을 가입하면 하한소득자(월 30만원)는 자신의 소득 대비 100%를, 상한소득자(월 468만원)는 30%를 받는다.

국민연금의 독특한 급여산식 덕택이다. 국민연금액은 자신의 소득에 연동된 비례급여가 절반, 전체 가입자의 평균소득에 연동된 균등급여가 절반으로 구성된다. 대부분 선진국에선 대체율이 소득에 완전 비례해 계층별로 동일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균등급여로 인해 누진구조를 지닌다. 저소득층일수록 유리한 재분배제도라고 말할 만하다.

이번엔 상반된 이야기. “고소득자일수록 혜택이 크다.” 어제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국정감사 자료로 밝힌 국민연금의 특징이다. 국민연금연구원에 의뢰한 분석을 보면, 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 총액과 받을 연금 총액의 차이, 즉 순혜택은 고소득자일수록 많다. 예를 들어 가입기간이 20년으로 같더라도 100만원 소득자는 6779만원, 국민연금 상한소득자는 8887만원을 더 받는다. 여기에 노동시장의 상황을 감안해 소득별 가입기간을 다르게 가정하면 격차는 훨씬 늘어난다. 10년 가입한 100만원 소득자는 순혜택이 약 3000만원, 40년 가입한 상한소득자는 거의 1억9000만원에 이른다. 국민연금으로 인해 두 사람의 경제적 처지가 노후에 더 벌어진다.

사실 국민연금에서 역진성 문제는 이전부터 제기돼 왔다. 8월에는 한 시민단체가 내놓은 분석자료가 언론에 보도되자 연금공단은 해명자료를 내고 “국민연금 제도에 대한 몰이해”라고 반박했다. 고소득층의 순혜택이 많을 수는 있지만 균등급여가 존재하므로 ‘역진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동문서답이다. 급여산식의 누진성을 부정하는 지적이 아니다. 급여 변수만을 보면 국민연금은 분명 재분배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급여에 기여액을 결합해서 계산하면 소득이 높을수록 순혜택이 많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연금공단은 급여산식의 구조만을 다루고, 다른 쪽은 급여에 보험료까지 조합해 순혜택을 분석한 게 차이이다. 둘 다 객관적 진단이라면, 주목해야 할 건 상반된 평가가 나오게 된 원인이다. 정작 연금공단이 시민들에게 알렸어야 할 내용이다.

낮은 보험료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확정급여형 제도이다. 은퇴 후 받을 연금액이 보험료 수준과 무관하게 정해진다. 아무리 급여산식에 균등급여가 작동하더라도 보험료 수준이 낮으면, 보험료는 완전소득비례이기에 고소득자일수록 납부하는 절대액에서 부담이 줄어들고, 그 결과 순혜택이 커진다. 이에 보험료가 올라야 재정안정화뿐만 아니라 계층 간 순혜택의 격차도 줄어들 수 있다. 

국민연금은 OECD 회원국 연금에서 예외적으로 수지불균형을 지니고 있는 제도이다. 연금수리적으로 40% 대체율에 부응하는 보험료율은 약 16~18%이지만 현재 9%이다. 서구의 나라들이 대부분 공적연금에서 수지균형을 이룬 반면 한국은 이 나라들과 비교해 수급개시연령이 빠르고 수명 연장으로 수급기간마저 더 긴데도 보험료는 급여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일부에서 ‘더 내고 더 받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 다. 지난번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에서 나온 ‘11%/45%’ 방안은 어떨까? 보험료 수준이 관건이다. 여기서 보험료율 인상 2%포인트는 대체율 인상 5%포인트를 충당하는 재정이다. 여전히 기존 40%체제가 지닌 수지불균형을 그대로 방치한다. 현세대 노동시장 중심부 가입자의 이해에 치우친 제안이다.

재분배 제도로 설계되었지만 현실에선 고소득층일수록 유리한 ‘국민연금의 역설’, 어찌해야 할까? 이론적으론 보험료율의 대폭 인상이 해법이다. 하지만 서민 가계가 힘든 상황에서 사실상 실행하기 어렵다. 현행 순혜택 구조에서 대체율 인상이 적절한지, 그에 따른 추가 보험료율 인상을 감당할 수 있을지 냉엄하게 봐야 하는 이유이다.

어려울수록 정공법으로 가자.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국민연금은 지금도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더 벼랑으로 내모는 건 곤란하다. 시야를 넓혀야 한다. 연금개혁은 국민연금을 넘어서야 출구를 찾을 수 있다. 다행히 우리에겐 법정연금으로 기초연금, 퇴직연금이 있다. 연금 삼총사로 우리의 노후보장을 이야기하자.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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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범대학에서 법학과목을 담당하는지라 학생들에게 ‘법 교수님’이라 불린다. 쑥스럽긴 해도 싫지는 않다. 전국 대학교원 가운데 김 교수님 아닌 분의 절반 이상은 이 교수님일 테지만, 법 교수님이란 별칭을 가진 이는 (법학전공 교원이 한 학과에 한 명인) 사회교육과 아니면 드물 테니 말이다. 

부임한 지 얼마 안돼 학과 엠티 지도교수로 따라갔을 때였다. 학생들과 친해지고픈 조바심에 일주일 전부터 밤마다 이불 뒤집어쓰고 혼자 게임을 연마했다. 엠티 당일 난 호기롭게 조별 놀이판으로 뛰어들었고, 그 결과 내가 들어간 조마다 흥이 깨졌다. 경직된 포즈로 놀 줄 아는 시늉하던 신입 선생님이 옆 조로 옮겨가면 그제야 침잠된 분위기가 슬며시 되살아났다. 시무룩해진 나는 쪽방에 웅크리고서 다른 교수님들이 돌아가자 하시기만 기다렸다. 

그리고 몇 계절 지나서였다. 복도를 걷다 저편의 학생들을 향해 “안녕하세요?” 인사하자, 옆에 있던 분이 “아직도 말 안 놓으셨나요?” 물으셨다. 대학원 아닌 학부에서는 학생들이 불편해할 수 있으니 말 놓는 것이 어떻겠느냐 조심스레 조언하셨다. 나 역시 고민하던 문제였기에 그 충고가 마음에 남았다.

어떤 관계에서든 반말을 해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서로 존칭하면서도 얼마든 거리를 좁힐 수 있다. 문제는 내 경우 소신을 지키고자 ‘안’ 놓는 게 아니라 용기 없어 ‘못’ 놓는다는 점이었다. 모종의 교육철학으로 경어를 고수하는 것이라면 일관성을 가져야 맞을진대, ‘~씨’라는 존칭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아동연극 풍의 말투가 되었다: “동환이는 어쩌다 발을 다쳤나요?” “다음 단락은 은희가 읽어볼래요?” “수광이 시험공부 파이팅하세요!”

그리하여 그 학기 중간고사를 기점으로 결심했다. 말 놓기로. 3학년 지도학생 면담 중에 처음 시도했는데, 예상보다 더 어색하여 대화가 툭툭 끊겼다. “이래야 가까워진대서….” 말끝을 흐리며 양해를 구하자 학생은 “그런 측면이 없지 않죠”라고 답했다. 며칠 후 2학년을 면담하면서는 오늘 말 놓을 거라 어색할 거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그러자 학생이 다 안다는 표정을 짓는 것 아닌가? 안 그래도 법 교수님이 드디어 말 놓으시려는 것 같다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단다. 3학년 선배들한테는 이미 하셨다던데 우리한테는 여전히 용기 못 내시니 면담시간에 네가 좀 도와드리라고 동기들에게 임무를 부여받았다 했다. 그러면서 진지하게 덧붙였다. “실수해도 되니까 저한테 연습하세요. 말 놓는 거요.”

그날 오후에는 학과대표가 무언가 상의하러 찾아왔다. 이야기를 마치고 연구실 문을 나서던 그 친구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런데 말 놓으시니 훨씬 좋습니다” 했다. 하나도 안 어색하다고, 거리감이 줄었다며 싱긋 웃는 것이었다. 비록 어투는 군복학생의 ‘다나까체’였으나 표정만큼은 그간 본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야트막한 벽 하나가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럴 것을 왜 진작 말을 안 놓았을까 싶었다. 그랬더라면 학생들과 더 빨리 가까워졌을 텐데.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만일 내가 첫 학기부터 말을 놓고 엠티 가서 게임도 잘하는 선생님이었더라면 우리 사이에는 허물어질 벽 자체가 부재했을 테다. 벽이 처음부터 아예 없었을 경우, 그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의 기쁨 역시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경직된 경어체를 쓰며 분위기 망쳤다고 의기소침해했던 그 시간들을 아무튼 우리는 함께 보냈다. 우리 사이에 벽을 만들어내었을 어색한 순간들은 ‘관계의 역사’로 차곡차곡 쌓여, 도리어 그 벽을 깨고 서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서는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며 고작 말 놓는 것 갖고 별 생각을 다하는군, 하실지 모르겠다. 수많은 법적 쟁점들이 제기되는 와중에 법 교수님으로서 이런 일화나 끄적거리려니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관계의 벽을 만들었던 바로 그 기억들로써 도리어 벽을 헐어내는 경험은 경이로웠다. 훗날 나의 학생들 또한 사회선생님이 되어 그들의 어린 학생들과 그리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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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는 판단이 선다면 유엔 제재의 완화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촉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이런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단계적 제재 완화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구상은 문 대통령의 그간 발언들에 비해 반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영국 BBC 인터뷰에서 “북한이 진정성 있는 비핵화 조치를 계속 실천하고 되돌릴 수 없는 상태까지 왔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유엔 제재가 완화돼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당시 발언에 비해 이번 구상은 적절한 시기의 제재 완화가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데에 강조점이 찍혀 있다는 점이 다르다.

프랑스를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후(현지시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파리 엘리제궁에서 정상회담을 연 뒤 공동기자회견을 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북·미 비핵화 협상 시나리오를 조금만 진지하게 그려본다면 문 대통령의 구상이 결코 과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한이 비핵화 단계를 밟아 나가는 과정에 대해 철저하게 점수를 매기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핵화의 ‘입구’부터가 아니라 국제사회가 납득할 만한 정도로 비핵화가 진척된 단계에 이르러 ‘당근’을 주자는 구상에 이의를 달 이유는 없다. 비핵화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문 대통령의 능동적인 판단을 지지한다.

문제는 대북 제재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여전히 완고하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상을 앞두고도 대북 제재를 강력하게 고수하고 있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은 지난 4일 “미국은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북한의 비핵화에 깊이 전념하고 있으며 그때까지 제재 이행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북한 관련 제재 대상자 및 법인과 거래할 경우 세컨더리 제재를 받을 수 있다며 주의를 촉구하기도 했다. 미국은 대북 제재가 느슨해질 경우 비핵화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북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단선적인 사고다. 북한은 오랜 제재 속에서도 나름의 체제 내구성을 유지한 채 경제를 성장시켜왔다. 북한이 강력한 대북 제재를 견디지 못해 대화노선으로 전환했다고 보는 것도 오산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오히려 제재를 유지하면 북한이 핵을 버리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낮아질 것으로 본다. 이른바 ‘제재의 역설’이다. 

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에 대해 본격적인 재검토를 해야 할 시기임을 환기시키고 있다. 비핵화의 수단에 불과한 대북 제재를 불변의 목표로 간주하는 듯한 ‘가치전도’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것이다. 문 대통령의 구상은 북·미 비핵화 협상 2라운드를 앞두고 제재 문제에서 현격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는 미국과 북한에 대해 중재안을 내놓은 셈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오는 19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도 이 구상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것으로 보인다. 대북 제재의 오랜 관성에 길들여진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공론화 작업이 쉽지는 않겠지만 북·미 협상의 촉진자를 자임한 문 대통령이 짊어져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의 구상이 국제사회의 ‘비핵화 공론장’에서 진지하게 검토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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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분명 한때 그랬다. 서가에 꽂혀 있기만 해도 아우라를 풍겼다. 소장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부심을 느꼈다. 지금도 그런가? 여전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만큼이나 낯설다.

<백과전서>가 궁금해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엔 어린이는 <컬러 학습대백과>를, 어른은 <두산종합 백과사전>을 들추어보았다. 요즘엔 <백과전서>에 대해 알고 싶다면 누구나 검색한다. 구글에서 <백과전서>를 검색하면 가장 상단에 위키백과의 <백과전서> 항목이 표시된다. <백과전서>가 사실은 <백과전서 혹은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전>이라는 긴 제목임을 나는 위키백과를 통해 처음 알았다.

위키백과가 2001년에 등장하고 난 이후, 2012년 브리태니커는 15판을 끝으로 종이 출판을 포기했다.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176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시작한 <브리태니커>를 집필한다. <브리태니커>에 기고한 사람은 4000명이 넘는데, 그중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11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렇게 막강한 전문가 집단이 모여 만들어내는 <브리태니커>를 위협하는, 아니 이미 압도한 위키백과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들은 익명의 다수이다. 위키백과는 예를 들면 ‘사용자:Jjw’ ‘사용자:거북이’ ‘사용자:Ryuch’ 등의 아이디로만 알려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터넷의 대중이 스마트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익명의 다수인 그들이 궁금했다.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정보 역시 위키백과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위키피디언(Wikipedian)’ 혹은 위키백과 사용자라 부른다. 위키백과 사용자는 “위키백과에 새로운 항목을 만들거나 기존의 정보를 고치는 사람”을 의미한다.

누구나 인터넷을 사용하고 위키백과를 이용하지만, 위키백과의 편집에 참여하는 사람은 전체 인터넷 이용자의 0.25%에 불과한 소수이다. 광고도 없이, 별도의 구독료도 없이 운영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위키백과 사전을 묵묵히 편집하고 또 편집하는 그들의 행동 동기가 궁금했다. 다행히 그들의 이야기를 ‘사용자:Jjw’ ‘사용자:거북이’ ‘사용자:Ryuch’ 혹은 진주완, 정철, 유철이 번갈아 고쳐 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위키백과 사용자가 전문가는 아니다. 그가 전문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실의 전문가이든 아니든 여기서는 모두가 한 명의 위키백과 사용자에 불과하다. 10대 초반부터 위키백과를 알게 되었고 2018년 현재 대학생으로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철도 및 교통과 관련된 문서를 주로 편집하고 있는 어떤 위키백과 사용자는 위키백과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밖에서는 어리다고 의견을 내는 것에 많은 제약을 받았는데, 위키백과에서는 나이를 드러내지 않고 활동할 수 있고 10대부터 80대까지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 평가되니까요. 위키백과의 문서가 언론사나 다른 사람의 책, 블로그 등에 인용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한때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었던 ‘오타쿠’를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시킨 특정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는 이른바 ‘덕후’이기도 하다. 한때 쓸모 없는 ‘잉여질’이라고 취급되던 ‘덕질’이 시간 낭비가 아님을 이들은 위키백과를 통해 증명한다. ‘덕질’에 ‘덕질’이 더해져 만들어진 위키백과의 어떤 항목은 그 어떤 세계적 석학이라도 단독으로 저술할 수 없는 넓고 깊은 지식의 범위로 우리를 이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이들이 위키백과에 글을 쓰는 이유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나는 이 글을 쓰면 원고료 명목으로 글과 돈을 맞바꾼다. 물론 약간의 공명심도 기대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돈과 글을 바꾸지 않으며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이들은 돈이 아니라 명예를 얻기 위해 글을 쓰고, 새로운 항목 편집을 통해 자기 만족을 얻고, 치열한 토론을 통해 위키백과의 항목을 더 풍성하게 만들면서 지식 공유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획득한다. 고작 돈과 바꾸기 위해 끄적이는 나보다 한 단계 위의 경지이다.

이 글을 전적으로 위키백과에 의존해 작성했으니, 원고료를 받으면 위키백과에 기부해야겠다는 겉보기에 착해보이는 심산으로 위키백과의 메인 페이지에 해당되는 대문에 들어가 오른쪽 상단에 있는 위키백과 후원 버튼을 클릭했다. 그랬더니 거기에 이렇게 써 있었다. “금전적 기부가 위키백과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유일한 방법만은 아닙니다.” 돈과 무엇을 바꾸는 오래된 못된 습관에 따라 행동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위키백과를 지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위키백과 편집자가 되어 각자의 능력껏 기여하는 일임을 위키백과를 통해 또 배웠다.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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