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촛불 아래 펼쳐보는 한 폭의 그림이 있다.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가 그것이다. 오랫동안 화집의 복제본으로만 감상했는데, 지난해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원본을 확인했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누더기 옷에 거지꼴이고, 아버지는 움푹 팬 두 뺨에 백발이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는 몸을 숙여 두 팔로 아들의 두 어깨를 감싸 안고 있다. 그림에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폭을 양분하자면, 왼편에는 재회하는 부자의 모습이, 오른편에는 이들을 지켜보는 증인들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촛불에 의지해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부분은 바스러질 듯 늙은 아버지의 얼굴과 그 앞에 꿇어앉은 아들의 두 발이다. 아들의 한쪽 발은 신발이 신겨져 있고, 다른 한쪽은 벗겨져 있다. 나는 이 장면에서 두 마음을 헤아려 본다. 아들은 먼 곳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저 왔어요!’라고 외칠 수 없다. 문 밖에서 서성이다가 아버지의 모습과 마주치자 와락 달려들어 무릎 꿇는다. 그는 아버지의 상속을 챙겨 부모 형제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모든 것을 날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오래전 집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왔다. 부랑아 같기도 하고, 죄수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남루한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아들아!’ 부르며 달려가 끌어안는다. 이들의 재회 장면을 그린 것이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이다. 서로를 향해 누가 먼저 달려갔는지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아들의 참회도 아버지의 용서도 이심전심, 사랑 앞에서는 하나가 될 뿐이다.

매년 12월이면 함께하는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 옆에, 올해에는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산’을 펼쳐놓았다. 최근 영화의 전당에서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을 본 여파이다. 영화는 독학으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바탕으로 화풍을 개척한 폴 세잔과 그의 친구 에밀 졸라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한 사람은 그림으로, 또 한 사람은 소설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세상의 부조리와 싸워 빛을 밝힌 우직한 존재들이다. 이들의 출발점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를 만날 수 있듯이, 엑상프로방스에 가면 세잔의 아틀리에와 그의 지난한 고투의 현장인 ‘생트 빅투아르산’을 눈앞에서 경험할 수 있다.

미증유의 국정농단 사태 속에 가을도 겨울도 도둑맞았다. 도둑맞은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과 인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빼앗긴 자존감을 회복해줄 지혜와 위로가 절실하다. 행복은 본능의 영역이다. 나 자신과 가족, 친구들을 위한 따뜻하고 강인한 이야기, ‘탕아 돌아오다’이든, ‘생트 빅투아르산’이든 사랑에 관한 긴 이야기가 간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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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선례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한다. ‘시민혁명’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지만, 과연 사태가 이런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지 논의를 아껴둘 필요가 있다. 김수영의 시 구절처럼,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불현듯 오는 것이고 가시적인 힘들을 통해 항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혁명은 “밤에 지나간 배”처럼 조용히 온다. 혁명은 평소에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규정된 것들이 무한하게 분출하는 정황이기도 하다. 이런 혁명의 모양새에 비추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당장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방만 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분명 세계의 논리에 기입되어 있던 ‘혁명적 상황’이 귀환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한때 집회가 너무 비폭력에 집착해서 문제라는 이야기가 오르내렸지만, 비폭력이라고 해서 폭력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간디의 비폭력이 스탈린의 폭력보다 더 폭력적이라는 철학적 탐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200만명이 넘게 모인 집회가 비폭력으로 일관할 수 있었다는 것도 대단한 에너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후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민주주의의 논리를 구성하고 있는 ‘87년체제의 합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합의가 물질적 토대로 전환된 것이 ‘대통령 직선제’이다. 군사독재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 상징적으로 지목하자면 ‘넥타이 부대’가 연일 거리를 누비면서 외쳤던 구호가 바로 대통령 직선제였다. 말하자면 지금 상황은 87년체제의 합의를 번복하려는 극우의 반동을 밀어내는 ‘체제의 반발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로 표상되는 ‘평화적 정권교체’는 87년체제의 합의를 이행한 결과였지만, 이른바 ‘산업화세대’에 속하던 일부 극우세력은 이런 합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립되어 있었다면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이들에게 ‘합법적 권력’을 부여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적 선거절차였다. 여기에 박근혜라는 ‘미스터리한 존재’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 속았다고 보수 정치인들이 입을 모으고 있지만, 당시 그들에게 이 미스터리한 존재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선동을 종결 지을 ‘능력자’로 보였을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을 품을 수 있는 포퓰리즘의 아이콘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이 미스터리한 존재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박근혜라는 이름은 말라죽어가던 극우의 뿌리를 되살려낸 구세주의 그것이었다. 여기에 태만한 보수의 포퓰리즘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지난 4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후진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태는 극우조차도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 ‘합법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극단적 민주주의의 유물론을 보여준다. 경제만 살린다면 ‘독재자의 딸’도 국가수반에 임명할 수 있다는 이런 ‘포용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이 포용성은 그 반대에 있는 이들, 다시 말해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상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일반 노동자를 구분하고, 정치적인 유가족과 그렇지 않은 일반 유가족을 나누고, 운동권과 일반 시민을 갈라치는 태도가 극우 보수 연합의 경우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편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편향성을 극복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오히려 그에 반대하는 집단에 합법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은 증명한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집권 역시 이런 민주주의의 편향성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똑똑히 보여준다. 트럼프 같은 ‘백인 쓰레기’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민주주의일까. 이 질문은 2012년 우리에게 던져졌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백인들처럼 그때 우리도 이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분명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베 정권이 평화헌법을 개정하고자 했을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일본의 청년들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당시 그 청년들의 행동에 십분 찬동하더라도 냉정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과연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그 자유민주주의에 ‘자이니치’는 포함돼 있는가. 전후 일본이 보여온 태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행동에 나서는 이들이 명징한 신념과 대의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 자체가 이념적 방향을 공고하게 만드는 쪽이라고 봐야 한다.

 

탄핵이라는 명백한 목표가 있는 지금이 지나고 나면 현재 벌어진 상황은 다시 봉합될 것이다. 그때 우리에게 어떤 목표가 남게 될지 질문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잃어버린 10년’을 거론하면서 태평천하를 약속했던 보수의 의제가 10년도 가지 못하고 몰락했다. 이 칼럼 연재는 그 보수의 의제를 분석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제 또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동안 부족한 칼럼을 읽어주신 독자 제현에게 감사드린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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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들 중 한 곳에 살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지구별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이 되고 있는 중이다. 가장 불행한 나라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은 지금 ‘인류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권했던’ 무지의 길을 가고 있다.

무지의 길은 ‘파괴적인 힘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하려고 그 힘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힘을 키우겠다는 발상’을 버리는 용기의 길이다. 헌법과 국정과 공직을 사유화해서 나라의 살림과 국민의 안녕을 파괴한 권력 엘리트 집단에 대해 국민은 오직 평화의 힘으로 질서 있게 응징하려고 어떤 괴물을 만날지 모르는 무지의 길을 밝히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고 있다.

이 무지의 길에 들어선 국민은 지난 6일 국회 청문회 증인석에 앉아 모르쇠로 일관하는 재벌 총수 9명을 지켜봤고 기업 조직과 기업인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기업의 정신은 애정을 알지 못하고, 탐욕이 아닌 욕구를 알지 못하고, 지역이나 개인에 대한 헌신을 알지 못하고, 공감이나 존경이나 감사를 알지 못하고, 중용이나 검약이나 자제를 알지 못한다’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웬델 베리의 경고가 옳다면, 돈으로 무한 권력을 행사하는 재벌은 ‘개인의 정신에서 탐욕과 노예근성 따위의 가장 나쁜 점과 약한 점을 정당화하고 부추기면서도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추호도 걱정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유령이다.

권력 엘리트 집단과 그 너머의 유령을 직면한 국민은 ‘파괴가 자행되는 진짜 이유’, 즉 ‘우리가 경제학의 두 가지 거짓말을 믿고 그에 맞춰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같이 직면하고 있다.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다.’ ‘우리 지역의 경제를 대기업에 넘겨주어도 괜찮다.’ 이 두 가지 거짓말 속에서 삶을 잃어버리고 나라를 도둑맞은 국민은 삶과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무지의 길을 걷고 있다. 이 무지의 길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겸손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과, 무제한의 욕망과 끝없는 결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형식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촛불과 함께 거듭 확인되는 점은 2016년 겨울의 ‘형식’이 1960년 4월 봄은 물론 1987년 6월 여름의 형식을 넘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현재 진행형으로서 결코 탄핵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작금의 이 형식은 바람이 불면 꺼질 것 같은 촛불을 함께 살리면서 가장 불행한 나라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제전이다.

이 경험을 통해 국민은 최종적으로 ‘우리의 존재 전체에 대한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된다. 국민이 직접 국가를 통치할 수 있고 선출되지 않은 모든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존재 전체’라는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담담하게 수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무지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다음의 이행이 일어난다. ‘소수가 소유한 나라’에서 ‘다수가 소유한 나라’로, ‘경제적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정부’로, ‘인간의 경제활동과 자연 세계의 조화’를 이루는 평화의 질서로 이행할 수 있다. 국민이 청와대와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거쳐 다시금 선거 투표소로 향한다면 그 단 하나의 이유는 국민 스스로 자신에 대한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다. 관건은 그런 이행을 제도화하고 내면화할 수 있는 결정적 형식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도 ‘거창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정직함에서 출발한다.

정직은 우리에게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알려주고 그 문제를 정확한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정직해야 ‘거창한 문제는 수없이 많은 작은 해답이 필요하다’는 것과 ‘해결책은 한 번에 농장 하나, 숲 하나, 땅 한 마지기를 치유하는 방식’ 외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 형식은 정치와 경제의 중앙 집중화 대신 지역 공동체와 지역 경제의 자립을 이루는 것, 새롭고 충격적일 정도의 지방자치와 주민자치를 실행하는 것이다. ‘적절한 규모라는 개념’과 ‘한계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국민이 직접 국가를 통치하고 민주주의로 삶을 영위하는 이 길을 가기 위해서 국민은 이 난국의 어느 끝에 선거 투표소로 가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다.

괴물과 유령의 파괴를 이기는 평화의 길은 무지의 길이자 정직의 길이다. 이 길에서 ‘우리는 책임질 수 있는 것 이상의 권력을 가져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국민은 누구일까.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쉽게 기뻐하지 않는 복잡한 사람이며 영웅도 백만장자도 아닐 것’이다. 바로 이 도시의 시민이고 우리 동네의 주민이다. 대통령과 전문가와 예술가는 그 일원일 뿐이다. 이상 모든 인용문은 웬델 베리의 <지식의 역습>에서 왔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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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세 살의 카뮈는 ‘티파사에서의 결혼’에 이렇게 썼다.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들판이 캄캄해진다.”

카뮈는 정오라는 시간을 문학사에 새롭게 등재시킨 작가로 통한다. 신들이 내려와 살았다던 지중해안의 고대 페허, 그 위에 내리는 정오의 햇빛, 폭발하는 색채의 꽃들, 꽃들이 뿜어내는 현기증 나는 향기들, 그리고 사방에 펼쳐진 짙푸른 하늘과 바다.

여기에서 정오란 시간적인 의미인 동시에 공간적인 의미로 읽어야 한다. 시공간적인 자연현상인 동시에 감각들의 혼융, 또는 결혼으로 읽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그것을 말해준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알베르 카뮈, <결혼>, 김화영 옮김)

살아가면서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실내에 있다가 정오의 눈부신 햇빛 속으로 나아갈 때, 또는 영화관 로비의 환한 조명 아래에서 휘장을 제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 두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있지만 앞을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눈앞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뮈가 쓴 저 한 문장은 인류가 끊임없이 반복해온 익숙한 한 문장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눈앞을 가려온 낡은 커튼을 시원하게 찢어버리는 칼날 같은 경구가 된다.

카뮈가 스물 세 살 때 쓴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들판이 캄캄해진다”는 문장은 단편소설의 미학 원리인 현현(顯現·Epiphany·이피퍼니)과 맞닿아 있다. 이피퍼니는 프랑스처럼 가톨릭 국가에서 주현절(1월6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기리는 날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신성, 또는 찰나 속에 맞닥뜨리는 영원성을 뜻한다. 이것이 소설에 와서는, 어떤 복잡한 사태 앞에서 주인공이 겪는 극심한 갈등이 해소되는 지점, 혼란을 뚫고 본질과 마주치는 순간을 의미한다.

소설의 주인공 앞에는 언제나 쉽지 않은 길이 놓여 있게 마련이다. 주인공은 이런저런 함정과 우회로를 겪으며 나아가는데, 이때 주어지는 시련과 혼란의 강도에 따라 이피퍼니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혼란의 정점에서 보고야 마는 사태의 진실, 거기에 이피퍼니의 원리가 거울처럼 작동한다.

혁명과 사랑은 완성되는 순간, 변질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에 깃드는 방심이다. 지난가을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토요일마다 광장에 나가 탄핵안을 가결시킨 촛불집회가 끝이 아닌 시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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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겨울이 되었다. 토요일의 삶을 잃어버린 지 한 달 하고도 열흘, 그사이, 가을 산야는 속절없이 불타올랐고, 광장에는 진눈깨비 첫눈이 내렸다. 광장을 다시 찾았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낯모르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촛불을 들고 걸었으며,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어제 정오 수업에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들과 김탁환의 최근 소설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가 있었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장르적으로 ‘소설’로 분류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과 원전 사고를 겪은 구소련권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지역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200명의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 김관홍 민간 잠수사의 탄원서 내용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에 접근해간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소설은 픽션, 곧 지어낸 허구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지어낸다 해도, 현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당해낼 수 없는 경우, 곧 현실이 픽션을 압도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재난 참사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이것은 소설인가’,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이것이 인간인가’ 끊임없이 자문한다. 수많은 밤 이러한 질문들과 맞서며 혼신의 힘으로 써온 것이기에, 학생들의 발표는 뜨겁고, 감동적이다. 그들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온 사건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 한가운데로 육박해 들어오는 경험을 하고, 눈앞에 벌어진 사실 뒤에 은폐된 진실을 직시하고,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주시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절규하는 목소리들을 온몸으로 겪고 온 날 밤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가 추스르듯 촛불 하나 켜놓고 플로베르의 소설을 펼친다. 펠리시테라는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단순한 마음>이다. 단순한 마음이란, 삶에 바치는 소박한 마음, 인간을 대하는 순박한 마음이다. 소설사에서 대가로 추앙받는 플로베르가 말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주인공은 펠리시테라는 프랑스 북부 작은 포구 마을에 사는 가정부이다. 플로베르는 이 여성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녀는 착한 마음씨와 옳은 일에 헌신하는 뜨거운 정신의 소유자일 뿐, 털끝만큼도 사심(私心)을 거느리지 않은 견결한 여성이다. 그녀의 일생을 둘러싸고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음에도 읽어갈수록 인간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경험해서인지 깊은 여운이 남는다.

다시 토요일은 돌아오고, 올곧은 마음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나 가능한 걸까.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물러서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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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민심과 국민 여론은 거듭 대통령의 하야다. 하지만 대통령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헌법을 무기로 대통령이 국민을 이기겠다고 작정했다는 뜻이다. 선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마지막 가능성으로 남았던 대통령의 정치는 완료됐으며 명예혁명과 망명을 운운했던 일각의 로망은 소멸했다. 남은 것은 국회의 정치와 시민의 정치다. 국회의 정치는 이제 외길로 보인다. 탄핵을 가결하고 헌법재판소로 가는 길, 대통령의 헌법과 국회의 헌법이 맞붙는 막다른 길이다. 반면 시민의 정치는 이 길과 함께 또 다른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사문화된 원칙을 되살려 엘리트 독과점 정치의 대의 민주제를 넘어서겠다는 국민혁명의 길이다.

날마다 특종과 속보와 가십성 뉴스가 홍수를 이루지만 국민은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지 않는다. 대통령의 하야를 마땅하게 여기는 민심은 하야한들 지난한 탄핵으로 간들 그다음이 마땅치 못한 이 난국을 냉정하고 차분하게 직시하고 있다. 국민은 마음속에서 대통령을 지웠기 때문이다. 진상 규명과 처벌은 응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무엇을 위해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들 것인가이다. 초겨울의 주말문화이자 저녁문화가 된 광장 행렬이 100만 촛불을 켜면 때맞춰 청와대 실내등이 꺼지고 경복궁과 북악산이 깜깜해지는 광경은 우연이 아니다. 낮과 밤, 평일과 주말을 교차하는 이 빛과 어둠의 대비는 국민 저마다의 간절한 ‘보디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거대한 ‘미디어 아트’다.

이 ‘국민예술’이 열망하는 국회의 정치는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의 4대 국정과제를 사사로운 먹잇감으로 갈취한 ‘비선 실세’의 공범들과 이들을 공권력으로 뒷바라지한 국가 시스템의 적폐를 대청소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 대표성이 현저히 떨어진 국회를 정당득표 연동 비례대표제를 통해 일신하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탄핵 정국을 경과하는 동안 국회의 정치가 보여줘야 할 기본이다. 이것을 실천하지 않고 대통령 선거로 가서 차기정부가 하겠노라 공약한들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민심은 안다. 51%로 당선된 대통령을 95%가 마음에서 버리게 된 국민의 자괴감은 더 이상 무력감이나 패배감이 아니라 새 판 짜기를 시작해야겠다는 집단지성의 장기전으로 가고 있다.

이 점에서 민심의 향배를 요약하면 이렇지 않을까 한다. 못 볼 것의 끝을 끝내 보았다, 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데까지 왔다, 그리고 이 몹쓸 사태를 단숨에 정리할 방법을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국회는 죄인의 심정으로 탄핵의 외길에서 입법, 행정, 사법, 헌법재판, 선거관리에 이르는 헌법기관 전체의 정상화를 위한 대장정에 그 어떤 지름길도 샛길도 없음을 직시하고 국가 대개조의 가시밭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라고 말이다. 이렇게 국민과 소통하며 탄핵 정국이 일단락되어야 대통령 선거가 의미를 갖는다.

시민의 정치는 국회의 정치를 견인하되 따로 가야 할 길이 있다. 그것은 100만 촛불이 부른 그 노래의 후렴구 그대로다. “후회 없이 꿈을 꾸겠다 말해요”이고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이다. 이 꿈을 계속 꾸고 싶어서 소설가 부희령은 “오래오래 광장을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거”라 믿지만 그러기 위해선 “촛불이 꺼지면 언제든지 옆 사람에게 붙여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강풍이 불고 한파가 와도 모일 수 있는 공간을 국민과 함께 만들 공적 주체는 누구일까. 이 난국에도 국민의 일상과 안전을 책임지는 최후의 헌법기관, 바로 전국 17개 광역 지방정부와 의회이며 228개 기초 지방정부와 의회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국민은 경험했다. 중앙권력의 갑질 횡포에 위축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지만 주민자치를 위해 깨알같이 많은 일을 해 왔으며 특히 위기 때 국민이 믿고 의지할 언덕이 되었던 공공이 누구였는지 말이다. 그 지방정부와 의회가 전국 각지에 한겨울의 촛불 민심을 환대하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시민의 정치는 겨울밤 내내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천일야화를 이어갈 것이다. 이 천일야화를 통해 헌법을 공부하고 민주주의 교과서를 집필하며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행복한 나라를 후회 없이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대중문화 평론가 황진미의 통찰대로 “허깨비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꿈꾸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정치가 갖는 힘이자 국민혁명을 만들어가는 길이다.

새로운 민주공화국이라면 국회의 정치와 시민의 정치를 연결하는 플랫폼은 대통령이나 중앙정부가 아니라 충분한 권력을 가진 지방자치의 각양각색 정치여야 할 것이다.

내년이면 6월 국민항쟁 30년이다. 그 사이에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까지 여섯 명의 대통령을 뽑았다. 국민이 원하는 바는 일곱번째 대통령을 뽑기 전에 헌법 제1조의 원칙이 살아 숨 쉬는 민주공화국을 맘껏 꿈꾸는 일이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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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현실이 호락호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통령에게 쏠려 있는 시선 덕분에 정작 중요한 문제가 부각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사태의 원인은 대통령 자신이다. 그러나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지금까지 대통령의 문제를 까맣게 몰랐다는 듯이 구는 보수 언론들이다. 반추해보면, 이상 징후는 취임 초기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인수위 시절부터 엇박자가 빈번했고, 외교 분야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세월호 정국에서 드러난 무능이나 대북정책에서 보여준 모순은 이 정부에 문제가 있고, 그 원인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이 대통령을 독대한 적이 없다는 발언은 충격적이라기보다 어이없는 일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이 정부를 구성했던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인지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침묵했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직접적으로 몰랐다고 하더라도 어렴풋이 짐작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만일 지금 앞다투어 고백하듯이 진짜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면 그 또한 책임 방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방치한 셈이다.

한때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면서 ‘좌파정부’가 망친 대한민국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보수들이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결코 망각의 강을 건널 수 없다. 말하자면, 지금 이 위기는 단순히 대통령 하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보수정권 재창출이라는 명분으로 대통령과 관련한 문제를 축소 또는 억압했다는 사실이 더욱 심각한 것이라고 하겠다.

대통령 일인의 권력에 국정이 좌우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개헌 논의가 나오는 배경도 이 때문이다. 대통령이 국민을 대표하고 의회가 경제적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기이한 제도는 87년 체제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국 정치 발전의 질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사태를 보고 있으면, 과연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역설적으로 대통령 일인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만들어온 주역이 정치인들 자신이 아닌지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순실이라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농락당했다는 억울함이 압도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조차 독대할 수 없는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이 침묵을 유지했던 배경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임명한 각료들과 국정을 논하지 않는 대통령의 행태가 ‘독특한 국정 스타일’로 여겨졌던 것일까. 오히려 그렇게 대통령이 무엇을 하든 자신들의 자리만 보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복지부동이 지금 사태를 만들어낸 복합적인 원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은 보수 정치 자체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유발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바꾸고, 대한민국 경제를 발전시키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보수 정치인들이 사실상 최순실 게이트를 막지 못했거나 오히려 방조했다는 사실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퇴진에 미온적이었던 야당 정치인들 역시 책임을 벗어나긴 어렵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기보다 정치공학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답답함은 여전하다는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혁명’이니 ‘봉기’를 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생각이다. 물론 새로운 정치세력은 쉽게 출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 필요한 것은 대통령 퇴진과 집권전략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전망이다.

이 전망은 그냥 얻어진다기보다, 사태를 사태 그대로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통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우화가 떠오른다. 서로 권력에 아부하던 그 신하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한 어린이의 솔직함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정치인의 권위는 진실에 대한 솔직한 태도에서 발생한다. 지금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대통령도 한때는 진솔한 태도로 인해 카리스마를 얻기도 했다.

분출하고 있는 시민의 요구가 또 다른 권력엘리트의 자리이동에 머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자유민주주의’라는 표상으로 굳어져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더욱 발본적으로 주장할 필요가 있다. 급진화된 시민의 주장만이 보수 정치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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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잠든 밤 영화에 빠진 내게 아내는 불쑥 노트북을 내밀었다. 뭐야, 했는데 아내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동영상에선 “해방이화, 총장퇴진”의 앳된 함성이 울려퍼졌다. 학생은 죄 얼굴을 가렸는데 옷차림은 발랄했고 합창곡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다른 동영상에선 녹색 머플러를 두른 교수와 복면을 쓴 학생이 이산가족처럼 포옹하고 있었다. 그들 중 보라색 염색을 하고 눈가를 닦는 교수를 가리키며 아내는 울먹였다. “저분이 내 은사야.” 86일간의 이대 본관 점거농성은 그렇게 꼬리로 몸통을 흔들었다. “최순실 딸 부정입학 및 학사특혜 규탄”은 최순실 게이트의 뇌관으로 전 국민의 공분을 깨웠다.

아울러 이대 학생 시위는 ‘느린 민주주의’라는 쟁점을 남겼다. 이 작명은 시위대가 학교나 기자와 소통할 때 지도부나 대변인 없이 참여자의 전체 토론인 ‘만민공동회’의 서면 문답을 고수하면서 비롯됐다. 이 때문에 주류 언론과 일부 전문가는 ‘느린 민주주의’를 “지도부 부재 난맥상”과 “타협점 못 찾고 표류”로 표현하며 사태 해결의 걸림돌로 비판했다.

하나 ‘느린 민주주의’는 그 어떤 대의제도 못했던 ‘민주주의의 빠른 해결’을 경험했다. 미래라이프대학 추진은 폐지됐고 총장은 사퇴했으며 최순실은 국민 앞에 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 시위대의 ‘외부세력 배제’가 사회적 연대의 포기냐 새로운 운동 전략의 성공이냐라는 논쟁이 뒤따랐다. 나는 이런 양도일단의 해석이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시민 시위를 ‘불순분자의 사주’로 몰아 탄압하고 민형사 소송을 남발하는 공권력에 맞서 어떤 방어 수단을 선택할지가 이대 학생 시위의 고민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위자의 개인 신상이 털리지 않게 보호하여 다수의 참여를 유지하려는 선택과, 희생을 감수하는 소수의 선도적 행동으로 저만치 대오 앞으로 나아가는 제의(祭儀)적 선택은 다른 방식을 낳는다. 뒤의 선택이 각성된 정치적 주체에 의해 사회적 구조를 한꺼번에 문제로 삼는 선동의 언어이자 외부적 목표 지향이라면, 앞의 선택은 시위 참여자의 집단 무의식을 사회심리적 구조로 묶어내는 공감의 언어이자 내부적 응집 지향이다.

이 점에서 이대 사태는 정당성의 문제로 촉발됐지만 학생 시위의 조직화는 동기상의 문제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즉 이대 사태의 구조적 해법을 찾는 변증법적 사고와 이대 학생 시위대가 선택한 자급자족의 심리는 연결돼 있지만 따로 읽어야 한다. 후자에 주목한다면 이대 학생 시위가 던진 질문은 다른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로 선출된 대표가 도리어 선출한 국민을 무시하는 실태에 대한 부정이다. 51%가 49%를 배제하는 현실에 대한 반대다. 또한 그 민주주의가 위촉한 전문가의 위선에 대한 불신이다. 4대강과 가습기살균제와 농민 백남기 사망진단서까지 엄청난 결과를 불러내고도 그 폐해와 무관하게 고결한 전문가로 사는 그들에 대한 거부다.

이것이 우리가 물려준 대의 민주주의라면 이대 학생 시위는 무엇을 포기했거나 어떤 전략을 성공시켰기보다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과 착오로 되풀이하면서 미완의 질문을 남긴 것이다. 이 질문은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기’라고 할 수 있다.

이진순 선생의 신간 <듣도 보도 못한 정치>가 소개한 직접 민주주의의 사례들에 86일간의 이대 학생 시위를 추가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우리의 생활 민주주의를 탐구하고 실험해야 할 때다. 특히나 이대 학생 시위는 ‘경쟁을 내면화한 각자도생의 수저 세대’로 대상화됐던 청년의 몸부림이었기에 여기에 응답하는 일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영욕을 누리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부채이자 의무다.

그날 밤 나는 영화 <아수라>를 보고 있었다. 정치인과 검찰과 경찰과 조폭과 용병이 서로 물고 뜯다가 장례식장에 모여 모두가 죽는 결말을 보긴 했지만 중간에 아내가 들이민 동영상을 보느라 나중에 다시 봤다. 작금의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나기 시작한 그들의 물고 뜯는 아수라장을 보면서 영화보다 더 소름이 끼쳤지만, ‘기승전검찰’로 귀결되는 이 나라의 대의 민주주의가 또 얼마나 허망할지를 지켜보는 시청자 국민의 노릇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스란히 숙제로 남는다. 이제라도 ‘민주화’ 훈장부터 떼고 ‘산업화’ 훈장도 마저 떼놓고 ‘듣도 보도 못한 민주주의’에 착수해야 내 앞에 놓인 그 숙제를 비로소 풀 수 있을 것 같다.

내 청춘의 한때 ‘한 사람의 열 걸음’과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놓고 친구들과 갑론을박을 벌였던 적이 있다. 어느샌가 ‘한 사람의 열 걸음’은 선한 의지든 악한 음모든 그것이 돈으로든 권력으로든 명예로든 기어코 나쁜 세상을 만든다고 알게 됐지만, 나는 여전히 착한 대표자와 봉사하는 전문가가 그래도 세상을 좋게 만든다고 여겼던 편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게 아니었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위한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도 착오도 해본 적 없이 ‘한 사람의 열 걸음’에 기대 묻어가려는 심보로는 이 아수라장을 벗어날 수 없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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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를 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 케냐에 있는 나크루 호수에 갔을 때이다. 그곳은 세계 홍학 서식지로 유명했다. 마사이 마라 초원에 사는 뭇 동물들을 만나고 나이로비로 향하던 길이었다.

홍학들이 고즈넉한 호숫가를 띠를 두른 듯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깃털들로 자욱한 호숫가를 걷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호수 저편, 초원 한가운데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코뿔소 가족이었다.

코뿔소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이오네스코의 연극 <코뿔소> 이후 20여년 만이었다. 나크루 호숫가 초원에서 본 코뿔소는 콧등에 한 줄로 뿔이 두 개 솟아난 아프리카 코뿔소였다. 그때까지 나는 뿔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인도 코뿔소인지 구별할 생각도 못했다. 코에 뿔이 나 있으면 다 같은 것이었다.

과천 서울동물원에서 열린 '먹방베스트 10' 행사에서 흰코뿔소가 과일을 먹고 있다. 연합뉴스

아프리카에서 코뿔소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마사이 청년들이 나무를 깎아 만든 코뿔소들을 구해 왔다. 서재 곳곳에 코뿔소들이 서 있다. 어떤 녀석은 뿔이 하나에다 갈색이고, 또 어떤 녀석은 뿔이 두 개에다 희고, 또 검다. 매일 녀석들과 마주하면서도 나는 이오네스코가 연극에 등장시킨 코뿔소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아시아 코뿔소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오네스코는 단지 현실에서는 맞닥트릴 수 없는 야수(野獸)의 순간적인 출몰에 코뿔소를 등장시킨 것뿐이다.

코뿔소 대신 카프카의 <변신>처럼 등껍질이 딱딱한 풍뎅이로 탈바꿈시키거나, 카뮈의 <페스트>처럼 오랑 사람들의 건강(삶)을 파괴시키는 병균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이오네스코는 단편소설로 <코뿔소>를 쓴 뒤, 연극으로 각색해서 무대에 올렸다. 평온하던 일상에 난데없이 코뿔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그 수가 점차 많아져, 그곳 사람들 수와 거의 같아진다. 인간이기를 끝까지 싸워 지킨,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코뿔소란 사람들의 다른 모습인 것. 카프카가 잠자를 풍뎅이로 변신시킨 것처럼, 이오네스코는 단 한 사람을 남기고 모든 사람들을 코뿔소로 집단 탈바꿈시켰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두렵고 소름끼치는 일이다. <코뿔소>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나치와 파시즘, 전쟁과 이산의 고통을 겪은 이오네스코의 부조리한 세계 인식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코뿔소>는 20세기 중반에 발표된 소설이자 부조리극이지만, 코뿔소적인 상황은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깊어가는 가을, 먼 곳에서 도착한 편지처럼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프랑스 전문 극단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온다는 것이다. 시월의 마지막은 연극 <코뿔소>와 함께 보낼 것이다. 이번엔 뿔이 하나인지 둘인지, 흰지 검은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아시아 코뿔소인지 알게 될까. 아무렴, 가을이 깊어간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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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미국의 가수 밥 딜런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온갖 추측을 일순에 잠재운 놀라운 결론이었다. 1964년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가 공식적으로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것만큼이나 충격이었다. 이번 수상 결정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문학상’을 ‘가수’가 수상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음유시인을 예로 들면서 밥 딜런의 수상을 정당화했지만, 궁색한 논리일 뿐이다. 엄연히 오늘날 ‘문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고대의 시나 글과 다른 근대적인 글쓰기 체계이고, 수상 대상을 결정한 이들조차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문학’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어딘가 어색하다.

의도야 무엇이었든 스웨덴 한림원이 파격을 노렸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사실은 많은 것을 암시해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실 이번에 일어난 사건의 실마리는 이미 1964년 사르트르가 수상을 거부할 때 발표했던 ‘서한’에 감춰져 있다. 사르트르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수상 거부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사르트르는 작가로서 어떤 공식적인 명칭도 부여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표명한다. 작가는 오직 작가의 이름으로 불려야지 “노벨상 수상자 아무개”라는 식으로 불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기관이나 조직을 위해 작가라는 지위를 빌려주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었다. 그다음으로 사르트르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으로서 서방세계에서 주는 대표적인 문학상을 받을 경우,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 삼는 ‘우파들’에게 “잘못된 해석”을 유도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71세 때인 2012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AP연합뉴스

물론 이런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 소감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고, 다분히 당대의 급진적인 정치상황을 반영한 ‘과도한 제스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는 노벨 문학상의 딜레마를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퍼포먼스’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을 거부하는 사르트르의 ‘소감’이라기보다, 그가 제시한 노벨 문학상의 정체성이다.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이라는 것이 ‘세계문학’을 대상으로 ‘자유’라는 가치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방세계가 만들어낸 제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노벨 문학상에 감춰진 정치적 성격을 지적한 것이다. 사르트르도 지적하고 있지만 이 정치적 성격이란 것은 특별한 진영논리를 강화하거나 특정한 이념성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정치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르트르는 ‘세계문학’의 범주로서 노벨 문학상을 거론하고 있다. 말하자면, 기원이야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노벨 문학상은 1960년대 이후에 ‘세계문학’이라는 이상을 공유하는 이들을 통해 명분을 유지해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를 두고 몇 년간 논쟁이 펼쳐졌지만, 유럽이나 북미 문학상과 달리, 노벨 문학상은 특정한 언어권 문학이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언어권 문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분명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 으레 나왔던 푸념이 ‘번역’ 문제였지만 노벨 문학상이 포괄하는 ‘세계문학’은 단순하게 번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노벨 문학상은 기존의 ‘세계문학’,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문학시장’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발굴해서 새롭게 조명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에 딱히 특정 작가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었다고 해서 수상 대상에 오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세계문학’이다. 사르트르가 수상 거부 소감에서 밝히고 있듯이, 노벨 문학상이라는 ‘세계문학발굴제도’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동요하는 세계체제를 통합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이기도 했다. 사르트르도 스웨덴 한림원이 “부르주아적 기관”이기 때문에 이 상을 거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이 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역설적으로 노벨 문학상의 ‘세계성’ 때문이었다. 여전히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이 불타오르던 그 시절 사회주의자 사르트르에게 논란을 일으킬 상을 받느니, 거부하는 것이 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효과적이라고 판단할 법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 노벨 문학상은 ‘세계문학시장’에 들어오지 못한 다양한 ‘문학들’을 포섭하는 기능에 충실했다. 사르트르 같은 ‘사치’를 누릴 수 없었던 제3세계 작가들이 이 ‘발굴제도’를 통해 ‘세계문학시장’에 자신들의 문학을 선보이고 각광을 받는 일들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 밥 딜런의 수상 소식에서 읽히는 상황은 이런 노벨 문학상의 고유성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모종의 위기감을 읽어내는 것은 너무 과한 해석일까. 이미 작년부터 균열이 예감되었지만, 더 이상 노벨 문학상이 ‘세계문학시장’에서 권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조건도 이런 변화에 한몫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나는 이것이야말로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의 안과 밖이 무색해진 현재를 보여주는 장면들 중 하나라고 본다. 에릭 홉스봄이 지적하듯이,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세계체제의 산물이다. 때늦게 밥 딜런이 ‘세계문학의 무대’로 불려 나온 것은 그러므로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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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이제 우리의 생활이 되고 있다. ‘안전지대 한반도’라는 통념은 이미 깨졌다. 올여름부터 집중적이고도 연쇄적으로 겪는 폭염, 지진, 태풍, 원자력, 북핵의 문제는 더 이상 평소와 달랐던 천재나 인재의 경고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이라 불렀던 생활세계의 토대가 수시로 일거에 아수라장이 될 수 있다는 현실감이다. 올해의 남은 날들과 내년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재난의 생활화’라는 오늘보다 더 확실한 내일이다. 세월호,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와 함께 하늘과 바다와 땅의 재난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블랙홀 같은 트라우마로 내면화되고 있다. 더불어 드러난 문제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와 정치만이 아니다.

만약 한반도 전역으로 재난이 파급된다면, 그날을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왔고 어떻게 행동하며 폐허에서 어떤 관계 방식으로 살아갈지에 대해 우리가 무지, 무감하다는 사실이 진짜 문제다. 그날 며칠 전부터 지구촌 어딘가로 이동할 1%를 제외하면 여기 남는 우리는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삶을 진작 바꾸지 않는다면 공멸한다. 대재앙을 거쳐도 살아남았던 인류사의 모든 문명과 공동체의 시금석은 단 하나였다. 위기 속에서 여성과 노인, 장애인과 환자, 어린이와 젊은이부터 구하고 살아남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대한 영웅’이나 ‘모성애 많은 민족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생존과 지속을 위해 저장된 집단지성 덕분이다.

그 집단지성은 위기 때면 자동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위안의 장소’를 두고 ‘환대의 공간’을 운영하며 ‘격려의 관계’를 증진하는 생활세계의 안전망을 유지하고 있을 때 생사를 다투는 그 순간에도 발휘되는 현상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집단지성의 사례는 근자에도 있었다. 5년 전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 때였다.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 앞에서 정부와 도쿄전력이 진상 은폐와 책임 회피에 긍긍하는 동안 이재민에게 심신의 위안을 준 곳은 동네 편의점이었다. 공공의 구호가 미치지 못하는 그때 편의점에선 식수와 음식은 물론 화장실과 온수를 제공했고 전국 점포망을 통해 피해지역에 상품 공급량을 늘렸다.

편의점이 곧 재난 물류센터라는 집단지성의 기원은 21년 전 고베 대지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정부는 지진 발생 후 6시간 뒤에 대책본부를 꾸렸고 대책 발표엔 하루 넘게 걸렸으며 총리는 TV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반면 한 편의점 본사는 피해지역의 편의점 343개 중 272개 지점이 피해를 입었으나 사장과 직원 360명이 급파돼 별도 본부를 꾸리고 피해 점포를 3시간 만에 영업 재개시켰다. 지진으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 이 편의점은 24시간 영업하며 이재민에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제공했다. 이들은 대재난 앞에서 자신들이 이재민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베 대지진 이후 내각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총리는 사퇴했다. 반면 그 편의점은 도호쿠 대지진 발생 땐 재난 물류센터를 넘어 정보센터 역할까지 했다. 이렇게 일본인에게 편의점은 민간 기업이 만든 사회안전망이자 가장 신뢰받는 공공서비스 체계가 됐다. 편의점은 이제 물품을 사는 곳이자 위안과 환대와 격려를 경험하는 곳이다. 일본 지방정부들은 편의점과 재난 대비 협정을 맺었고 중앙 정부는 ‘재해 시 편의점 정보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역할을 미국 뉴욕에서는 공공도서관이 더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15년 전 9·11테러 때도, 4년 전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강타했을 때도 뉴욕 시민들은 도서관 홈페이지부터 찾고 이재민은 도서관에 가서 숙식을 제공받았다.

9·11테러 때 도서관 홈페이지는 공포를 조장하는 대중매체와 달랐다. 대피소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와 헌혈을 연결했고 소식이 끊긴 사람을 찾게 도와줬다. 또한 이슬람의 역사와 정치를 선입견 없이 이해하게 프로그램을 만들고 트라우마 치료와 상담을 제공했다. 평소에 뉴욕 공공도서관은 보건소이자 취업센터이고 창업교실이며 편의점이자 동주민센터이고 결혼식장이자 예술극장이다. 이러니 테러와 허리케인은 물론 영화 <투모로우>의 한파와 쓰나미에도 마지막 피난처는 공공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두 사람의 기금을 토대로 비영리단체가 시민 기금과 정부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우리는 어떤가. 편의점은 모르겠으나 민간이 만든 공공도서관으로는 수지의 느티나무도서관이 으뜸일 게다. 자치구와 마을이 협력해 만든 공공도서관으로는 은평의 구산동도서관마을이 있다. 자치구가 만든 공공도서관의 혁신 사례로는 성북의 10개 구립도서관이 있다. 이들 도서관의 공통점은 ‘도서관답지 않게’ 주민의 생활과 결합하며 집단지성의 공간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에는 구립 공공도서관만 123개가 있다. 작은 도서관은 905개가 있다. 이는 동주민센터와 투표소에는 못 미치나 그 다음으로 많은 수다. 우리 동네의 민주주의는 지금 이들 도서관에서 생활문화의 혁명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곳이 재난의 그날이 왔을 때 위안과 환대와 격려를 기대하며 찾는 우리 동네의 피난처였으면 좋겠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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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하는 7일 동안, 국내외 작가들과 광화문의 한 숙소에 머물며 대학로를 오갔다. 점심 식사 후에는 국내외 작가 2명이 짝을 지어 독자들 앞에서 대화를 했고, 저녁 에는 자신의 문학작품을 다른 예술 장르로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서울국제작가축제를 통해 다시 확인한 사실은 한 사람의 작가는 하나의 독립된 행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행성을 알아보기 전까지 작동하는 것은 각자의 나라에 대한 선입견과 정체성이다. 시인 T J 제마와 처음으로 인사하면서 그녀의 나라 보츠와나를 상상하고, 소설가 퉁 웨이거와 마주하면서는 익숙한 듯 새로운 대만을 떠올리는 것이다. 콜롬비아, 아프가니스탄, 북아일랜드 등지에서 온 14명의 외국 작가들은 다채로운 상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중 부지불식중에 나를 사로잡곤 했던 작가들은 파리에서 온 알렉시스 베르노와 린다 마리아 바로스, 그리고 금희이다.

한국문학번역원 주최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한 소설가 김숨과 금희가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작가들의 수다' 행사를 함께 하고 있다. 연합뉴스

베르노와 바로스는 파리에서 온 시인들이다. 이들의 국적이 프랑스인데, 지금 나는 이들이 프랑스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파리에서 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베르노는 파리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계속 파리에서 살고 있는 순수 파리지앵이다. 바로스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파리로 건너와 교육을 받았고, 현재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이민자 출신이다. 바로스는 현재 파리 시단(詩壇)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녀는 1981년생의 젊은 시인이지만, 이미 프랑스 최고의 시문학상인 아폴리네르 상을 받았고, 6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베르노는 앙리 미쇼와 앙토냉 아르토를 추종하는 시인이자 영문 번역자로 첫 시집을 출간한 상태이다.

내가 베르노와 바로스를 눈여겨보게 된 것은 이들이 문학예술을 추동시키는 원천인 야생성을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접점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노는 부드러운 음색과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참가 작가들에게 파리지앵의 진면목을 보여주었고, 바로스는 예민한 성정 속에 매우 성실한 태도가 묘하게 공존하는 매혹적인 모습을 선사했다. 나는 바로스를 통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동향인 루마니아 출신의 에밀 시오랑과 미르시아 엘리아데, 외젠 이오네스코를 떠올렸다. 이들은 불가리아의 크리스테바, 아일랜드의 베케트, 러시아의 로맹 가리처럼 태생지를 떠나 파리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이방인들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20세기 파리의 문학예술은 초라했을 것이다.

바로스를 보며 내가 되돌아본 것은 한국 문학의 현주소다. 이번 참가자 중, 중국을 대표한 소설가 금희는 옌볜 출신으로 축제 기간 내내 주로 한국어를 구사했다. 그녀의 존재는 그동안 내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한국 문학의 순혈성, 아니 배타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축제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국 문학에서도 이제 바로스와 금희와 같은 강력한 이방인들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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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같았다. 끝날 줄 모르던 폭염에 감기를 견디며 빌빌대는데 문득 가을이 와 있었고, 회복됐다. 하나 추석 당일 재차 감기에 걸려 일주일을 흐느적댔다. 핑계를 구한 몽롱한 몸은 연휴 내내 TV와 지냈다. 무료 영화를 찾아 160개가 넘는 채널을 돌리는 족족 <집밥 백선생>과 <백종원의 3대천왕>과 <삼시세끼>와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먹방 프로그램이 무한 재방송 중이었다. 두 눈은 보면서 맛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식욕은 몸살로 무감각한, ‘심신분열의 거짓말’ 같은 상태였다. 이렇게 두세 시간을 멍해지다가 뉴스로 눈길을 돌리면 거짓말처럼 수십 년간 똑같은 추석 풍경이 화면에 있었다. 텅 빈 서울, 꽉 막힌 고속도로, 늙은 부모와 시골, 선물 꾸러미와 어린 자식을 양손에 끼고 환하게 웃는 가족이 거기 있었다.

거짓말 같았다. 한반도의 올해 여름은 1973년 관측 이래 최고의 기온과 최장의 폭염 일수를 남기고 물러났다. 4월 미 항공우주국의 발표대로 올해는 인류의 관측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가 됐고 내년이면 다시 ‘가장 뜨거운 해’가 될 것이다. 거짓말처럼 가을이 왔으나 추석을 앞두고 남쪽엔 지진이 일어났다.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인 5.8의 경주 지진을 전한 9월12일 속보 이후에도 일주일간 총 409회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뒤늦게 보도됐다. 역시 늦게 전해졌지만 북쪽은 8월 말부터 겪은 10호 태풍 라이언록의 영향으로 533명의 사망·실종자와 11만8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며 ‘해방 후 처음인 대재앙’을 공개했다.

무엇이 거짓말일까. 기록적인 폭염 뒤의 달콤한 추석 연휴가 누구에게나 있었던 것일까. 폭염 직후의 지진과 태풍은 연휴를 마무리할 무렵에나 삽입된 저들의 불행이었던 것일까. 누군가 이 지경을 두고 하늘이, 땅이, 바다가 진노했다고 한탄한다면 미쳤다고 해야 할까. 옛날이라면 벌써 제를 지냈을 것이고 왕은 속죄하고 백성은 기도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 민은 난을 일으켰고 왕은 변을 겪었다고 역사를 썼다. 극심한 가뭄에도 인디언의 제사가 통했던 까닭이 비가 내릴 때까지 속죄하고 기도하길 계속했기 때문이라는 전근대의 방식이 과연 근대 정부를 가진 우리의 방식보다 비과학적이거나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거짓말일까. 천재와 인재를 분별하는 근대 이후의 우리는 재난 일체에 대해 “나만 아니면 돼” 하는 무심한 시청자로 동일하다. 이런 자세로 남북의 스타일 차이를 쳐다볼 뿐이다. 북한 방식은 세계에 긴급지원을 요청하면서도 삽과 곡괭이와 맨손의 인민군이 붉은 깃발 아래 일사불란한 ‘피해복구 전투’에 임하는 사진 배포와 “김정은 동지가 보내주신 유압식 굴착기가 도착했다”는 TV 방영이다. 북쪽보다 훨씬 복잡한 남쪽은 다를까. 폭염에는 전기요금 ‘폭탄’ 논란과 한전의 막대한 흑자, 에어컨 판매 300만대 육박과 관련 주식 상승이라는 방식이다. 경주 지진에는 밀양 송전탑 사건 때 그랬고 성주 사드 배치 갈등에서 반복하듯 타 지역의 관망과 해당 지역의 반발을 나누어 ‘민생과 동떨어진 여야 정치권 대립’ 뉴스처럼 소비하는 방식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민족대명절에 민족대이동을 거쳐 상봉한 ‘정상가족’은 수십 년간 번번이 화기애애했던 것일까. 아니면 수시로 ‘분노대방출’의 일촉즉발을 간신히 틀어막고 뿔뿔이 흩어졌던 것일까. 이번에도 밥은 누가 짓고 전은 누가 부치고 설거지는 누가 했을까. 성적을 묻고 취직을 묻고 결혼을 묻고 출산을 묻는 일은 누가 했을까. 화투를 치고 술에 취하고 막말을 한 자는 누구였을까. 폭염엔 에어컨을 켜면 되고 지진은 경주와 경남일 뿐이고 태풍은 남쪽을 비켜갔으니 ‘한가위만 같아라’ 하고 방송 진행자처럼 웃는 자는 누구일까. 세월호와 메르스와 옥시의 희생자와 남은 가족에게는, 실업자와 취준생을 오가는 청년과 결혼 및 출산을 유보한 1인가구에게는 ‘똑같은 한가위’란 이미 없는데 나는 누구였을까.

에어컨과 전기요금과 원자력발전소는 결과가 아니라 폭염과 지진과 태풍의 더 큰 원인으로 줄줄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민주주의와 경제정의에 실패해서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대재난의 결과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고도 밀양과 성주와 경주가 아닌 여기에서 내 가족이 무탈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소박한 거짓말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거짓말이다. 그것도 내가 날마다 하는 거짓말이었다.

추석이 있었나 싶게 몽롱·나른했던 감기 몸살기의 연휴 넋두리를 마무리하자. 연휴가 끝나자 바로 회복된 나에게 “당신은 연휴 때만 아프더라” 하는 아내에게 사과하면서 대한민국의 남성 가부장 중년의 어떤 혼합체로 별일 없다는 듯 사는 나에게 그리고 북한의 연속적인 핵 도발과 대통령이 콕 집어 말한 ‘불순분자’에 대해 이제부턴 정신 차리고 살겠다는 뜻에서 옹알거리기만 했던 말을 여기 쓴다. 거짓말이야!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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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지진을 두 번 겪고 나니,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 같다. 멀고 가까움 없이 닥쳐온 지진 공포와 핵 위협에 매일 밤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눈을 감는다. 아침에 일어나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초목을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 일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순간순간 되새긴다. 태어나 겪어본 적 없는 공포와 위협이 삶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다보니, 정작 지금껏 동고동락하며 애면글면 끌어안고 있던 현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하찮아지고, 지나가지 않았음에도 지나가버린 것처럼 망연자실해진다. 체호프가 말했던가. 습관이란 일과 옷과 가구와 식구를 삼키고, 전쟁의 공포까지도 꿀꺽 삼켜버린다고. 예술만이 잃어버린 삶의 감각을 되찾게 해준다고. 예술은 무(無)에서 유(有)를 향한 처절한 작업. 폐허에 피어나는 꽃처럼, 예술은 어떤 형식으로든, 축제처럼, 계속되어야 한다.

경북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한 12일 오후 부산 해운대에 있는 최고 80층짜리 고층 건물이 휘청거리면서 주민들이 불안에 떨며 긴급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연합뉴스

며칠 후면, 전쟁의 포화 속에 의사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작가 모히브 제감을 만난다. 그는 26일부터 7일간 14개국 시인과 작가들이 ‘잊혀진, 잊히지 않는’이라는 주제로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벌이는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해 아프가니스탄의 삶에 대해 한국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체르노빌의 참사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의 역사를 채록한 다큐멘터리 소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처럼, 그 역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포화 속 사람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를 비롯 다양한 글쓰기로 전한다.

한 명의 작가가 쓴 한 편의 소설 작품이 뉴스 미디어를 통해 피상적으로 각인된 그 나라의 피폐한 인상을 깨고 속 깊게 공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모히브 제감과 같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소설가 할레드 호세이니이다. 그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들>을 읽어가다 보면, 폭격과 폭발로 점철된 무시무시한 그곳은 순박한 마음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창공에 힘껏 연을 날리는 소년들이 우정을 나누고 있었고, 초록의 아름다운 초목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환기하게 된다. 호세이니나 제감이 글쓰기로 때로 처절하게, 또 때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우리 앞에 소환하는 진실은 아프가니스탄만의 것이 아니다. 이번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하는 중남미 작가 산티아고 감보아의 콜롬비아도, 릴리 멘도자의 파나마도 있다. 감보아는 슬픈 목소리로 그러나 신랄하게 ‘밤의 기도’를 들려주고, 릴리 멘도자는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목소리로 “미래 따위는 없다, 지금의 연속이다”라고 외친다.

오늘 밤에는 또 어떤 땅울림이 우리를 덮칠 것인가. 무수히 많은 파괴와 균열 속에 ‘잊혀진’, 아니 ‘잊히지 않는’ 것들을 안고 우리를 찾아오는 모히브 제감의 목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친다. “무엇을 잊었는가? 아무것도 잊혀진 건 없다.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아무것도 소홀히 했던 건 없다. 다만 인간다움, 그것 말고는.”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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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없고, 어머니 33세 농업, 할아버지 62세 어업, 삼촌 32세 선원, 재산 정도 하, 건우의 행복하지 못할 가정 환경에 많은 걸 묻진 않았다. 건우네 집은 조마이섬 위쪽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것은 50년 전에 발표된 김정한의 단편소설 <모래톱 이야기>의 일단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K중학생 건우의 담임선생님이다. 소설 속에서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으로 묘사되면서 조마이섬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현재 낙동강 하구 을숙도를 가리킨다. 당시 현지인들은 “강 하구에 모래가 밀려 만들어진 조그만 섬”으로 조마이섬이라 불렀다.

조마이섬뿐만이 아니라 건우 할아버지를 부르는 ‘갈밭새 영감’도 이곳의 생태 지리적인 환경 요소를 담고 있다. 그는 갈밭에서 요란하게 우는 새 같은 존재, 조마이섬 사람들의 터를 위협하는 자본가에 맞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 인물이다. 이 소설이 씌어지지 않았다면, 낙동강 하구의 독특한 모래 지형과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아름다운 삶의 언어를 어떻게 기억하고, 쓸 수 있겠는가.

부산으로 터를 옮겨온 이후, 일주일 중 대부분의 낮을 을숙도가 내려다보이는 승학산 기슭 창가에서 보낸다. 창 아래, 강변로 어름이 <모래톱 이야기>의 소년 건우가 나룻배를 타고 조마이섬에서 통학하던 갈대밭 나루터라는데,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숲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문우가 찾아오면, 을숙도 가까이, 강변로를 따라 하구 끝까지 내처 달려가는데, 그 끝은 다대포, 몰운대이다. 모래 포구가 드넓기로, 몰려오는 구름 형상이 비상하기로, 맑은 날 낙조가 황홀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몰운대 한쪽, 숨은 듯 자리 잡은 단골 횟집 할매집 마당가에 앉아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곤 하는데, 엊그제 주말에는 아미산 기슭 다대도서관으로 올라갔다. 몰운대와 다대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내가 다대도서관에 간 것은 진해 출신 소설가 김탁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최근 세월호 참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장편소설 <거짓말이다>를 출간했다. 지난 2년 반 동안 세월호 이야기는 시와 산문, 다큐멘터리로는 상당히 발표되었다. 그러나 소설은 이번 <거짓말이다>가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대도서관은 전국의 수많은 도서관들 중에서도 전망 좋은 열람실로 손꼽힌다. 주말이었으나, 작가를 만나기 위해 초등학생부터 중고생 그리고 백발의 어르신들까지 강연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 어떤 비극적 상황과 절망도 망각의 힘을 이길 수 없다. 망각과 대적하는 유일한 무기는 붓, 곧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는 소설 작품이다.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가 자취 없이 사라진 조마이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금 이곳으로 끊임없이 실어나르듯, 세월호의 소설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낙동강 하구에, <거짓말이다>를 감싸고 있는 다짐이 메아리친다. “뜨겁게 읽고, 차갑게 분노하라.”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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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대가의 어록과 학계의 연구와 속세의 ‘썰’을 모아보면 대답은 태산보다 거대할 것이다. 난해하거나 자명하고 진중하거나 농담 같고 상투적이거나 발칙한 예술론의 백가쟁명에도 불구하고 바탕엔 ‘예술은 신성하고 고귀하다’는 18세기 부르주아 미학의 고정관념이 깔려 있다.

반면 소설가 한창훈에겐 이런 질문 자체가 ‘지랄’ 맞게 커서 문제다. 너무 커서 삶의 한계를 초월하는 질문은 감각과 정신을 헐벗게 만들기 쉬워서다. 하여 “문학 바깥에 있는 비문학이 더 중요하다”고 잘라 말하는 작가에겐 밥과 일과 놀이의 비예술 생활세계에서 빚어지는 희로애락을 경청하고 참여하며 기록하는 실천이 예술이다.

7월에 나온 그의 연작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한겨레출판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는 한 줄의 법조문만 가진 섬나라의 사람들을 그렸다. 이 소설을 읽으며 지랄 맞은 폭염을 견뎠고 지랄 맞지 않은 예술을 상상했다.

5년 전 1월이었다.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를 쪽지에 쓰며 “죄송합니다”를 반복한 32세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고독사했다. 한 해 뒤 정부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턱없이 작은 예산에 권리가 아닌 시혜처럼 주어진 예술인 복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여전한 가운데 ‘창작지원금 사업’ 수령자가 전국 2354명으로 집계됐다(2015년 12월10일 기준).

문제는 이 바늘구멍이 예술인 스스로 자격증명이라는 행정절차를 통과해야 하며 지원 기준도 사회공헌과 창작활동계획, 생계위기, 창작준비금 등으로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박인숙 새누리당 의원이 작년 국정감사에서 ‘창작준비 지원과 생계형 복지 지원 투 트랙 확대’를 주문하고 복잡한 증명 절차를 줄이라며 문화체육관광부와 보건복지부에 당부할 정도였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종사자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겠지만 사정이 이렇다면, 국가정책으로 예술인 복지를 말하는 노릇은 낯 뜨겁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월18일 서울시는 ‘서울예술인플랜’을 발표했다. 대표사업 3가지는 이렇다.

첫째는 예술인 공공임대주택을 현재 50호에서 1000호까지 늘리고, 낡은 아파트를 예술인 주거+창작 공간으로 재생해 낮은 월세로 장기 임대하며, 민간의 창작공간 300곳에 임차료를 지원하고 자치구 유휴공간 100곳을 공유형 창작공간으로 조성하겠다. 둘째는 사회적 예술 일자리 1만5000개를 만들고 예술인 표준 보수지침을 적용하겠다. 셋째는 청년과 신진 예술인을 위한 ‘최초예술지원’ 1000건과 같은 신규 사업들과 기존 사업을 묶어 “장애 없는 창작활동”을 지원하겠다.

서울시는 이외에도 넷째로 예술인 교육 확대 및 해외교류 지원과 다섯째로 대학로 서울연극센터를 ‘예술청’으로 증축해 기능을 전환한다는 것을 아울러 “5대 희망 의제”라고 포부를 밝혔다. 계획대로라면 서울에 사는 예술인의 복지는 한결 나아질 것 같다.

문제는 주거와 작업공간, 일자리, 창작, 교육과 해외교류 등의 지원을 제각기 공급하지 않고 지역이라는 터전에서 통합하는 전략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지원을 바탕으로 예술인들이 지역재생에 참여하며 주민과 공생하는 생태계를 스스로 만들게 하는 방향과 전망도 안 보인다. 이 점에서 ‘서울예술플랜’은 ‘쌀이나 김치를 구하는 예술인’의 지상에는 천착했어도 ‘신성하고 고귀한 예술’의 천상이라는 과거의 미학을 바꾸는 데로는 나가지 못했다.

해서 다시금 질문 앞에 선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지금 이 장소에서 나와 친구와 이웃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정부와 서울시의 예술인 복지정책 및 예술정책은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예술언어와, “정치적 공공성에 기여하는 ‘자기갱신’”의 예술경험과 “삶의 인간화를 실현하는” 예술실천은 일부 문화·예술인이나 소수파의 간절한 염원일 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미덕을 체질화하고 생활화하고 내면화하는 것 자체”의 접근법으로서 예술은 “한국 사회가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이건만 좁고 위태로우며 그 일은 지극히 예외적인 인간”이 걷는 예술의 길로 남아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그래서 기록적 폭염보다 지랄 맞다. ‘천상의 예술’은 이미 추락했는데 ‘예술의 지상’을 위한 서울시와 정부의 정책은 요원하다. 특히 ‘서울예술플랜’에 부족한 결정적 2%인 지역 생태계 구축의 전략 부재를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지랄 맞지 않은 예술이 지역 도처에 있는데도 말이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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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자리>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한 글들을 산문집으로 출간하곤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주제의 같은 제목이 다시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에세이나 칼럼뿐만이 아니라 소설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글쟁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제에 천착한 브룩스와 워렌 같은 연구자들은,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 해도 평생 쓸 수 있는 주제는 둘 또는 셋이 전부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에게 어른에 대한 화두를 새삼 일깨워준 것은 최근 조용하게 회자되고 있는 성우제의 <딸깍 열어주다>이다. 이 책은 독특한 제목에 우선 눈길이 가고, 그 다음 표지 우측 상단 별처럼 박혀 있는 인물 사진들에 눈길이 멈춘다. 작가가 청소년기부터 인연을 맺어온 스승, 도반들인데, 불문학자 김화영, 황현산, 소설가 김훈 등 몇 분은 나도 지근거리에서 뵈어온 어른들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펼치자마자, 마치 함께 걸으며, 또는 마주 앉아서 추억담을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정겹고, 벅차다.

출처: 경향신문 DB


이국땅에서 새 삶을 개척하는 작가에게 아버지의 정으로 보듬어준 스승, 공부와 세상의 법칙과 가치를 일깨워준 스승, 인간에 대한 예의와 품위를 보여준 스승, 도전과 실천을 견인해준 스승, 성우제가 들려주는 ‘아홉 스승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나도 작가처럼 마음에 품고 있는 스승들과 그들을 향해 쓴 글들이 떠올랐다. 이어 문단의 스승이자 대선배인 박완서, 김윤식 선생님을 생각하며 단편소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동행>을 쓴 것, 대학 은사인 김치수 선생님을 생각하며 <프로방스 가는 길>을 쓴 것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내가 쓴 수많은 글들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기리는 추모의 형식,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호모 나랜스들이다. 리베카 솔닛이 <멀고도 가까운>에서 밝힌 대로, 이야기꾼의 재능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이야기의 힘은 쓰는 이든, 읽는 이든, 기본적으로 감정이입에서 나온다. 페르시아의 젊은 왕비 세헤라자데가 살인마 왕으로부터 천하루 동안 목숨을 연장해간 무기는 이야기다.         

누군들 마음에 품은 스승 한두 분, 가슴 찡한 이야기 한두 편 없으랴. 다만 잊고 지냈을 뿐. 인생은 마라토너의 여정과 같다. 나는 인생길에 누리는 행복의 조건으로 고비마다 함께한 친구, 스승, 또는 어른의 있고 없음을 환기하곤 한다. 성우제가 <딸깍 열어주다>에 초대한 아홉 스승 이야기는 서랍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부치지 못한 편지들, 거기에 깃든 마음의 역사와 삶의 행로를 펼쳐보고 싶도록 부추기는 유쾌한 에너지로 충만하다. 긴긴 여름 끝자락, 폭풍우와 뙤약볕을 견뎌낸 붉은 열매 같은 책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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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경력의 34세 연극배우인 그는 프리랜서였다가 2년 전 거리예술을 하는 극단에 들어갔고 1년 전 연극교실의 강사를 맡았다. 이 연극교실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참여 주민의 이야기를 가지고 창작극을 만든다, 주민이 연기를 익히는 것은 동네에서 자기 역할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 강사는 연극 교육이나 연습 시간보다 더 많은 일상을 참여 주민과 같이 보낸다, 강사배우와 주민배우는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 동일한 과제를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의 경계와 연결이 명확해야 한다, 취미 활동과 자신을 변화시키는 실천은 다른 것이다 등등. 과연 이 연극교실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강사인 그는, 두 살 연상의 주민배우와 지난 7월7일 결혼식을 올렸다. 주민배우를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보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에 신청한 배우자는 출판사 직원인 동네 주민이었다. 이 부부의 생업은 다르지만 둘의 인연은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서로의 모습”에 반하면서 비롯됐다. 작년에 시작된 성북구 미아리고개연극교실에서 만난 부부는 강사 13명과 주민 59명이 만나 형성된 간이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올해엔 미아리고개시민극단으로 발돋움했고 부부는 여전히 활약 중이다. 각자 살던 부모 집에서 성북동 신혼집으로 독립한 부부에게 달라진 것은 이뿐이 아닐 것이다. 결혼식 축가로 합창을 불러준 연극교실의 주민배우 동료들과 만들어가는 마을과 예술의 신세계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같은 연극교실의 또 다른 강사였던 경력 15년의 34세 연극배우는 오는 9월24일 결혼한다. 배우자는 여섯 살 연하의 초등학교 교사이며 성북구의 1인 가구였다. 배우자의 고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동선동에 신혼집을 차릴 예정이다. 배우자는 반복되는 생활에 지쳐갈 무렵 현수막을 보고 “저기 가면 뭘 배울까” 궁금해 신청했다.

연극교실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알고 지내게 된 것이 신기했던 배우자에게 강사는 “착실하게 살면서도 자기 뜻을 펼쳐나가는 삶”을 발견했고 거리공연 도중 청혼했다. 미아리고개시민극단의 동료이자 예비부부는 요즘 “예술가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사회 부적응자인가” 고민하고 극단 대표는 “가장 자유로우면서 가장 예의 반듯한 존재가 예술가란 생각은 안 해봤어?” 하며 토론을 벌인다.

공동체 예술을 하면서 유목민으로 살아온 45세의 극단 대표는 연극교실의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려 속속 잡히는 결혼 날짜들”을 지켜보다가 오랜 연애 끝에 동료 배우와 지난 5월29일 대학로에서 먼저 결혼식을 올렸다. 송경동 시인의 낭독과 김반장의 공연 속에서 양가와 동료 그리고 연극교실 주민배우들이 어우러진 연회극(宴會劇) 형식의 결혼식에서 이들 모두는 예술과 마을이 서로를 이끄는 어떤 공동체의 비현실을 체감했다.

그러나 5월의 햇살과 흰 차광막 아래 곡성과 제주에서 올라온 양가 어르신들과 젊은 하객들이 일제히 쓴 황금빛 밀짚모자의 물결을 바라보며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집단 실행한 그 거리와 시간은 분명 현실이었다.

물론 같은 연극교실 안에도 결혼과 다른 현실들이 훨씬 많다. 모 주민배우는 “연애가 목적이냐, 연극이 목적이냐” 따지고, 또 가장 먼저 연애를 한 31세 동갑의 강사 커플은 가장 먼저 헤어졌다. 주목할 것은 헤어진 연극배우 한 명이 석관동에서 어린이 연극교실을 진행하며 구립도서관을 마을극장으로 바꾸기 시작한 비현실이다. 그가 협업하는 새 극단 이름은 ‘너다워서 아름답다’인데 연고지가 없다가 월곡동과 석관동에서 ‘예술마을 만들기’에 참여하게 됐다. 성북구에선 정릉, 성북, 삼선, 동선, 돈암, 월곡, 석관동에서 ‘예술마을 만들기’를 진행한다. 여기엔 동 이름을 딴 여러 색깔의 연극교실이 작년 4개(주민 122명)에서 올해 6개(주민 145명)로 확산되고 있다.

‘예술마을 만들기’란 집단 지성과 감성의 기획인데 ‘예술을 통한 마을’과 ‘마을을 통한 예술’을 상상하며 장소와 주민 기반으로 비현실이 현실에 파종되고 비예술이 예술로 전이되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는 성북구 예술인과 기획자들의 개방적 네트워크인 ‘공유성북 원탁회의’에서 추진해왔고 ‘찾아가는 동복지센터’와 ‘협치서울’의 흐름과 결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마을과 예술의 중매를 통한 결혼식이 잇따랐던 것이다. 가난한 연극쟁이와 동네 주민의 결혼식으로 치달은 “이상한 분위기”는 비현실이라고 저만치 치워둔 사랑이 겁도 없이 현실 복판으로 걸어들어온 사건이었다.

올해부터 ‘공유성북 원탁회의’는 ‘우리동네 공동부양’이라 쓰고 ‘우동·공부’로 줄여 부르는 릴레이 학습을 시작했다. 사회적 경제, 도시 재생, 현대미술 등 3탄까지 진행됐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와 같은 꿈을 꾸면서 한편에선 “기도하고 일하고 읽어라”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칙대로 같이 염원하고 행동하고 공부하는 중이다. 수칙은 이어 말한다. “그러면 신께서 지체 없이 함께하시리라.” 아마도 예술의 신은 마을의 신일 것이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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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구두 한 짝을 손에 들고 맨발로 미친 듯이 뛰었다. 다른 한 짝은 광장 어딘가에 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정문 쪽에서 학생들이 밀집한 광장으로 최루탄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학생들은 사방으로 몸을 날려 뛰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최루탄은 태양빛을 받아 까맣게 보였다. 내 눈에 그것은 새처럼 보였다. 까만 새들은 수십마리씩 떼로 날아와 광장에 떨어졌다. 이웃 학교에서는 한 청년이 그 새에 맞아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그를 애도하는 물결이 학교 안팎,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선뜻 광장으로 나서지 못하고 도서관 창가를 서성이던 나 같은 겁쟁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장은 사방으로 길이 통하는, 자유로운 곳이다. 그러나 그날 나는 광장 한가운데에서 두려움이 목까지 차올라 죽을 것 같았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대치 상황에서 까만 새떼들이 광장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순간 공포로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어디로든 뛰어야 했다. 멈추어 보니 후문 밖이었고, 구두 한 짝이 손에 들려 있었다. 왼쪽으로 가면 신촌, 또 다른 광장이 나왔고, 오른쪽으로 가면 광화문, 세상으로 이어지는 터널이 있었다. 나는 어설픈 패잔병처럼 구두 한 짝을 손에 들고 맨발로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터널은 길고, 어두웠다.

그날 이후, 나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무엇인가, 새들처럼, 하늘에서 움직이는 작고 까만 것들을 보면 맥박이 빨라졌고, 어디로 뛸까, 머리를 감싸고 두리번거렸다. 그 증세는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고 광화문에 있는 문예지 기자로 입사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세상에 그럭저럭 적응해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골목길을 느릿느릿 걸어 광화문 네거리로 빠져나오곤 했다. 골목 주점들의 불이 하나둘씩 켜지는 저물녘이면, 퇴근자들 발길만큼이나 가볍게 새들이 가로수 사이로 날아올랐다. 그러다가 그만 나뭇가지를 잘못 짚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새들도 있었다. 어느 날 내 앞에 그런 새가 한 마리 떨어져 죽었다. 그것은 나와는 무관한 듯했지만, 돌이켜보면 내 삶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를 온전히 바라볼 수 없었던 사람이 비단 나만이었을까.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나는 한 마리 새의 죽음을 생각하는 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새의 출발점은 광장이었고, 개인의 훼손된 마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것이 내 생애 첫 소설이자 등단작 <광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제목의 광장은 우리가 그때 불렀던 ‘민주광장’을 뜻했다. 매년 한두 번 모교의 그 광장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다 몇 년 동안 하얗게 잊었다. 까마득한 후배들이 그 광장을 되찾아 주었다. 부끄럽고, 고맙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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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주인공 소년 모모는 평생 양탄자를 팔며 세계를 떠돈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에밀 아자르는 소년의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사람 사이 사랑의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하밀 할아버지는 죽어가면서 니스로 향하는 꿈을 꾼다. 에밀 아자르는 자신의 마지막 소설인 <솔로몬 왕의 고뇌>에서도 주인공의 마지막 행선지로 니스를 지목한다.

‘트럭 테러’가 발생한 프랑스 니스 해변. AFP연합뉴스

니스는 어떤 곳인가. 유럽 여행자라면 한번쯤 꿈꾸는 휴양지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이곳은 북아프리카와 아랍,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흘러들어온 이민자들의 고달픈 삶이 얼룩진 애환의 항구이다. 이들의 신산한 삶과 자유의 꿈은 이곳 출신인 에밀 아자르와 르 클레지오의 소설들에 아로새겨져 있다. 에밀 아자르의 본명은 로만 카제프,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그는 열네 살 때 홀어머니를 따라 폴란드를 거쳐 니스에 정착한 난민 출신이다.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해서 소설을 썼는데,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두 이름으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쿠르상을 두 번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르 클레지오는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다. 그가 스물세 살 때 발표한 첫 소설 <조서>에는 바닷가 언덕의 빈집에 숨어든 아담 폴로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로 세상과 단절된 채, 언덕과 해변(영국인 산책로)을 떠도는 인물로 제시된다. ‘조서(調書)’조사한 사실을 적은 문서이다. 그러나 소설은 마치 폐쇄회로(CC)TV에 찍힌 장면을 기술하듯 아담 폴로라는 청년의 불안한 의식을 파편적으로 따라갈 뿐, 납득할 만한 진실은 밝히지 않는다.

로맹 가리의 자전소설 <새벽의 약속>은 이민자의 열악한 환경에서 아들이 올바르게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헌신한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이다. 어머니는 니스의 아비 없는 러시아 난민 소년에서 정의롭고 당당한 프랑스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성공해야 한다는 다짐을 아들에게 뼛속 깊이 확인시킨다.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들은 어머니의 뜻인 법대에 진학하는 한편, 자신의 꿈인 작가의 업()을 시작했고, 동시에 전쟁에 참전했는가 하면, 이후 세계를 무대로 평생 외교관이자 작가로 살았다.

지난 714일 혁명 기념일 밤의 테러를 기점으로 니스는 잔혹성의 시험대가 되었다. 어디까지가 사람의 영역인가. 아침에 깨어나기가 무섭게, 세계 곳곳에서 청년들이 갈 길을 잃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자폭하고, 파괴한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년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라는 질문이 메아리치는 요즘이다. 르 클레지오나 로맹 가리의 삶과 소설이 아무리 감동적이라 해도, 소설로 아프게 되새겨야 하는 진실은 그들로 족하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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