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연재를 끝내며 작별 인사를 할 때 누구는 ‘감사합니다’, 누구는 ‘고맙습니다’라고 한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항간에 떠도는 ‘감사하다’는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일본식 표현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감사하다’는 <조선왕조실록>(1434) 등 옛 문헌에서 ‘感謝’나 ‘감샤’의 형태로 활발하게 쓰인 말이다.

‘감사하다’와 ‘고맙다’는 쓰임새나 그 뜻에서 별 차이가 없다. 한데 많은 이들이 ‘감사하다’를 ‘고맙다’보다 격식을 갖춘 말로 인식한다. 해서 공적인 자리에선 ‘고맙다’보다 ‘감사하다’를 더 잘 어울리는 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반면 ‘고맙다’는 가깝고 허물없는 사적인 자리에서 고마움을 나타낼 때 쓰는 말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윗사람에게 ‘고맙습니다’ 하면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예의가 없어 보인다고 느끼는 이가 적잖다. 하지만 ‘고맙다’가 ‘존귀’ ‘공경’을 뜻하는 우리말 ‘고마’에서 온 말임을 이해한다면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정서적 친근감으로 봐도 한자말 ‘감사하다’보다 고유어 ‘고맙다’가 훨씬 정겨움을 더해주는 말이다. ‘감사하다’와 ‘고맙다’는 단어 선택의 문제일 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는 점에서 한뜻이다. 상황에 따라 구분해 쓸 이유가 없다. 이번 회로 ‘알고 쓰는 말글’ 연재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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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주간이던 지난 한 주간 트위터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 키워드 언급량이 많아지며, 모처럼 성탄절의 기쁨을 나누는 멘션들이 눈에 띄었다. 트위터코리아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함께 지난 19일부터 25일까지 트위터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들 중 주목할 만한 단어를 분석해 27일 발표했다.

지난주 트위터 내 언급량 1위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오랜만에 즐거운 축하의 메시지가 트위터상에서 전달됐다. 24일에는 크리스마스 관련 키워드가 17만건 이상 발생했고 선물·고백·이벤트 등 다양한 연관 키워드와 함께 가족, 연인에게 사랑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새누리당 내 친박계와 비박계가 ‘비대위원장’ 인선 문제로 팽팽하게 대립하며 ‘비대위원장’ 키워드도 주목을 받았다. 비박계는 마지막 카드로 ‘유승민 비상대책위원장’을 제안했지만 친박계의 반대에 막히자 집단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택했다. 친박계는 인명진 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비대위원장에 임명했다.

대한항공 기내에서 한 승객이 4시간 동안 난동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한항공’ 키워드가 주목받았다. 술취한 난동 승객이 승무원에게 침을 뱉고, 승무원을 폭행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은 트위터를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 특히 같은 비행기에 탑승한 미국 유명 팝스타 리처드 막스가 트위터에 사건 현장 사진을 상세히 올려 더 주목받았다.

시사저널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23만달러를 받은 의혹이 있다고 보도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반 총장 측은 “완전히 근거 없는 허위”라며 반박했지만 논란이 계속되며 트위터에서는 ‘박연차’ 키워드의 언급량이 급증했다.

네티즌 수사대 ‘자로’가 세월호 침몰 원인을 다룬 다큐 ‘세월 X’를 25일 공개할 예정이라고 트위터를 통해 밝히면서 ‘네티즌 수사대’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자로는 영상을 통해 세월호는 잠수함 충돌에 의해 침몰했다는 외부 충격설을 주장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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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촛불 아래 펼쳐보는 한 폭의 그림이 있다.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가 그것이다. 오랫동안 화집의 복제본으로만 감상했는데, 지난해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원본을 확인했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누더기 옷에 거지꼴이고, 아버지는 움푹 팬 두 뺨에 백발이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는 몸을 숙여 두 팔로 아들의 두 어깨를 감싸 안고 있다. 그림에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폭을 양분하자면, 왼편에는 재회하는 부자의 모습이, 오른편에는 이들을 지켜보는 증인들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촛불에 의지해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부분은 바스러질 듯 늙은 아버지의 얼굴과 그 앞에 꿇어앉은 아들의 두 발이다. 아들의 한쪽 발은 신발이 신겨져 있고, 다른 한쪽은 벗겨져 있다. 나는 이 장면에서 두 마음을 헤아려 본다. 아들은 먼 곳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저 왔어요!’라고 외칠 수 없다. 문 밖에서 서성이다가 아버지의 모습과 마주치자 와락 달려들어 무릎 꿇는다. 그는 아버지의 상속을 챙겨 부모 형제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모든 것을 날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오래전 집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왔다. 부랑아 같기도 하고, 죄수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남루한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아들아!’ 부르며 달려가 끌어안는다. 이들의 재회 장면을 그린 것이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이다. 서로를 향해 누가 먼저 달려갔는지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아들의 참회도 아버지의 용서도 이심전심, 사랑 앞에서는 하나가 될 뿐이다.

매년 12월이면 함께하는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 옆에, 올해에는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산’을 펼쳐놓았다. 최근 영화의 전당에서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을 본 여파이다. 영화는 독학으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바탕으로 화풍을 개척한 폴 세잔과 그의 친구 에밀 졸라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한 사람은 그림으로, 또 한 사람은 소설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세상의 부조리와 싸워 빛을 밝힌 우직한 존재들이다. 이들의 출발점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를 만날 수 있듯이, 엑상프로방스에 가면 세잔의 아틀리에와 그의 지난한 고투의 현장인 ‘생트 빅투아르산’을 눈앞에서 경험할 수 있다.

미증유의 국정농단 사태 속에 가을도 겨울도 도둑맞았다. 도둑맞은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과 인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빼앗긴 자존감을 회복해줄 지혜와 위로가 절실하다. 행복은 본능의 영역이다. 나 자신과 가족, 친구들을 위한 따뜻하고 강인한 이야기, ‘탕아 돌아오다’이든, ‘생트 빅투아르산’이든 사랑에 관한 긴 이야기가 간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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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 한 주 주말마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커다란 마음의 파도를 넘고 있다. 내게는 그사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몇 주 동안의 기억이 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멀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침대 옆에는 인공호흡기가 있었고, 혈압과 맥박 따위가 나오는 손바닥만 한 모니터가 머리맡에 있었다. 꼼짝하지 못한 채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눈도 뜨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뇌출혈이었다. 아직 예순이 되지 않은 나이였으니, 아무도 마음의 준비가 없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지병으로 두통을 달고 지냈다. 최고로 꼽힌다는 병원을 찾아다녔고, 온갖 정밀검사를 했으나 의사는 한결같이 ‘이상 없음’이라는 결과를 통보했다. 극심한 통증으로 몇 달을 입원해야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알 수 없음’이 아니고 ‘이상 없음’. 별다른 이상은 없고, 그저 ‘신경성’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느 병원에서도 뇌혈관질환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적이 없었다. 고통스럽고 건강하지 않은 환자에게, 며칠을 두고 온갖 검사를 한 뒤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진료 결과를 내놓는 일은 그리 낯설지 않다. 환자는 결과지를 받아들고, 갑갑한 마음인 채로 입을 닫고 병원을 나선다. 무언가 처치할 수 있는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는 한 ‘이상’은 없다. 환자는 건강하지 않은 삶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 의사는 드러난 질병을 처리하는 데에 골몰한다. 어째서 아프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의사는 만나기 어렵다.

어머니를 진료했던 의사는 ‘이상 없음’의 환자에게 한 움큼의 약을 처방했다. 이상은 없으나 약은 많이 필요한 상태. 이게 앞뒤가 맞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가장 단순한 과학의 논리에서도 벗어난 것 아닌가. 왜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의사들이 이렇게 많을까. 한 움큼의 약은 부작용도 여럿이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밥 먹는 습관을 엉망으로 뒤틀어 버린 것이었다. 스스로 밥 먹는 것을 조절하기가 어려워졌고, 단것을 자꾸 찾게 되어서 혈당이 높아졌다. 물론 이런 상태에 대해서도 의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게 약해진 몸에 얼마나 무리가 되는지, 특히나 혈관 같은 것에.

수술을 한 담당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환자가 겪게 될 아픔이나, 앞으로 예상할 수 있는 환자와 보호자의 삶에 관한 것, 건강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최선을 다해, 사진에 나타난 희뿌연 흔적의 부피, 혈액 검사에서 나오는 수치의 변화, 각각의 조직이 정상인 상태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했다. 돌이켜보면, 그 의사 또한 환자나 보호자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수술을 해서 머리에 고인 피를 뽑아내고, 검사 결과에 따라 출력된 숫자에 맞춰 약물을 투여하고, 환자를 처치하는 일에는 능숙할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의사는 “내가 더 이상 말할 것은 없다. 이번 혈액 검사에서 어떤 수치가 유의미하게 좋아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말할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삶과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의견을 구하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는 아니었다. 아픈 환자의 몸이 앞으로 어떤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에 대해서, 환자와 보호자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금세 접게 되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다른 모든 것들을 잠시 멈추게 하면서 들이닥쳤던 이 일들은, 첫 책 <스스로 몸을 돌보다>를 내면서 그 책에서 분명하게 다뤘던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문제들이었다. 눈앞에 빤히 있었고, 머릿속에는 제 딴에 그려 놓은 답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몸에 10여개에 이르는 수액 주사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혹시나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여기에서 지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뇌어 물었다.

전광진 | 상추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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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엔 다양한 경향이 존재했다. 실추된 보수의 명예를 고민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자본주의 극복을 꿈꾸는 사람들까지. 그러나 가장 주요한 경향은 역시 그 중간쯤에 있는 사람들, 국가의 정상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국가의 정상화는 흔히 대한민국 헌법 1조를 되새기는 일로 표현되곤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많은 사람들을 가슴 뛰게 하지만 사실 헌법 제1조는 그 자체로 특별하진 않다. 가령 박정희의 유신헌법 제1조는 이렇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한국 헌법 제1조는 20세기 헌법의 기초라 일컬어지는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따른 것이다. “독일제국은 공화국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은 나치 집권의 빌미가 되었고 2차 대전 후 독일 헌법 제1조는 바뀌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책무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공허함은 정치 언어의 속성이자, 정확하게는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하고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과 노동과정을 통제하고 잉여 생산물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주요한 두 계급을 구성한다. 그러나 노예제나 봉건제에 비해 계급 관계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 이른바 민주주의 정치라는 외피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투표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정치적 독재를 물리쳐도 실제 삶은 달라지지 않는 미심쩍은 경험조차도 믿음을 쉽게 흐트러트리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의 정상화를 말하기 전에, 국가의 정상화란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의 정상화는 단지 정치적 민주주의의 회복인가? 아니면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 자유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시장 자유를 통제하거나 관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립한다.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에 관련해서도 둘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 한국에서라면 둘은 꽤 행복하게 합작할 수 있다. 모두 재벌 덕이다.

재벌 문제는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은 물론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제다. 재벌이 자유 시장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정권을 막론하고 독점적 성격을 강화해온 한국 재벌의 매출은 근래 국내총생산(GDP)의 85%를 넘어서게 되었다. 중소기업은 거의 대부분 재벌에 하청 계열화되어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차이가 갈수록 커지고 청년들 앞에 비정규직 노동만 존재하는 현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재벌의 독점 상태를 유지 강화해주는 게 국가이기에 공무원과 공기업 노동자는 대기업 수준의 임금과 복지를 누린다.

재벌 독점 지배로 한국 사회는 1:9:90의 구조를 보인다. 1%와 그 체제를 지탱하는 9%, 그리고 나머지 90%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 가계부채 증가율 1위, 남녀 임금격차 1위, 노인 빈곤율 1위, 저임금계층 비율 1위 등등 끝없이 나열되는 이른바 ‘헬조선’의 지표들은 이런 극단적 독점 상태에 기인한다. 최순실 게이트 혹은 박근혜의 국정농단도 독점 상태가 길러낸 독버섯이다. 최순실은 충분히 처벌받아야 하고 박근혜는 퇴진해야 하며 새누리당의 재집권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다 이루어진다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특정한 개인이나 윤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 있고, 최순실과 박근혜, 새누리당은 물론 야당 역시 국가 독점 재벌 체제의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맥락이 무엇이든 재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두고 여러 견해가 제출된 바 있다. 경제민주화론은 재벌과 국가의 유착이 문제이니 시장에 맡기자는, 이름과는 달리 경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그게 재벌을 국가 대신 국제 투기자본에 넘기자는 거라 비판하며 재벌과 사회적 대타협을 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한국 재벌은 그런 타협이 가능할 정도로 합리적이거나 유연하지 않다.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가 타협적 방식으로 개선하려 해도 격한 충돌이 불가피하듯 한국 재벌이 그렇다. 연기금을 통한, 혹은 국영화 방식의 재벌 사회화는 원론적으론 급진적인 방법이지만, 한국 재벌에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재벌의 사회화가 정말 가능할까?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음을 확인한 건 광장의 가장 큰 소득이다. 박근혜 퇴진을 외친 200만명이 재벌 사회화를 외친다면 단박에 구체적 상황으로 진척될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서 이재용의, 무중력 상태의 유영 같은 태도 또한 그걸 염려해서다.

일단 상황은 물 건너간 듯하다. 청문회 이틀 후 삼성전자 주가는 179만원으로 최고가를 기록했다. 사람들은 우병우를 골려준 의원에게 환호하거나 야당의 대선후보들을 비교하는 일에 열중이다. 긴 변화를 위한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두 번째 걸음을 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문할 필요는 있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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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나머지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갑자기 벌어지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흔히 ‘엉겁결’이란 말을 쓴다. 한데 마지막 음절 ‘결’의 영향 때문인지 ‘엉겁결’을 ‘엉겹결’로 쓰는 사람이 적잖다. ‘엉겹결’은 틀린 말이니 주의해야 한다.

‘엉겁결’은 ‘엉겁’과 ‘결’이 만나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엉겁’은 끈끈한 물건이 마구 귀찮게 달라붙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발이 진흙으로 엉겁이 되었다’처럼 쓰는 그 ‘엉겁’이다. ‘결’은 ‘때’ ‘지나가는 사이’ ‘도중’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귓결’ ‘꿈결’ ‘말말결’(이런 말 저런 말 하는 사이) ‘아침결’ ‘잠결’의 ‘결’과 같다. 이처럼 ‘결’이 붙은 말들은 뒤에 ‘에’라는 조사를 붙여 ‘귓결에, 아침결에, 엉겁결에’ 등과 같은 부사로 사용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원치 않는 끈끈한 물질이 몸에 달라붙으면 정신 줄을 놓기 쉽다. 여기서 ‘엉겁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엉겁결’은 정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점에서 ‘얼떨결’과 의미가 상통한다. ‘얼떨결’은 ‘얼결’과 한뜻이다. ‘얼결’도 ‘얼결에’ 꼴로 주로 쓰인다.

글쓴이가 엉겁결에 쓰겠다고 해 시작한 ‘알고 쓰는 말글’이 5년이 되었다. 어줍은 우리말 실력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넘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제 종착역이 보인다. 마지막 ‘작별 인사’만 남았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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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실책, 비위 관련 정황들이 끊임없이 드러나면서 ‘다이빙벨’, ‘살인사건’ 등이 지난주 트위터상 화제의 키워드로 선정됐다.

트위터코리아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함께 지난 12일부터 18일까지 트위터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들 중 주목할 만한 단어를 분석해 20일 발표했다.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는 ‘다이빙벨’이었다. 지난 13일 국내 방송사 최초로 tbs 교통방송이 영화 <다이빙벨>을 방송하면서 언급량이 크게 증가했다. <다이빙벨>은 세월호 참사 당시 다이빙벨이 투입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로 지난해 4월 개봉했다. 방송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 트위터 사용자들은 지상파에도 해당 영화를 편성해줄 것을 요청하자며 각 방송사의 대표번호 등을 공유하기도 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박근혜 대통령 5촌 간 살인사건을 다루면서 ‘살인사건’도 큰 주목을 받았다. 방송은 2011년 9월6일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대표의 5촌 박용철·용수씨 살인사건을 다루며, 사건에 제3자가 개입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 배정훈 PD가 방송 직전 편집본이 누군가에 의해 삭제됐다고 밝히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대권후보로 급부상한 이재명 성남시장이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향해 공동체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반문연대’도 화제의 키워드가 됐다. 안 지사가 연대 참여 거부의사를 밝히며 논란이 증폭되자 이 시장은 “정치는 팀플레이고 문재인 대표도 민주당의 팀원인데 팀플레이하자는 걸 반문연대하자로 오해하시니 어안이 벙벙합니다”라며 해명했다. 국회의 탄핵 가결 이후 새누리당이 새 원내대표 선출에 나섰지만, 친박계 정우택 의원이 당선되며 ‘원내대표’ 언급량도 크게 늘었다.

SBS의 인기 드라마 <푸른바다의 전설>도 트위터에서 화제가 됐다. 지난주 방송분 중 허준재(이민호)가 심청(전지현)이 인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장면은 22.24%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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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민주화가 잘되어간다고 그러네/ 어떻게 잘되어가느냐고/ 구체적으로 좀 말해달라고 그러면/ 하나같이 입을 열어 대답해주네// 청와대도 개방하고/ 각하란 호칭도 없애고/ 장관 임명장도 서면만으로 하고/ 국무회의 같은 것도 원탁에서 하고// … 벗이여. 닫힌 사회의 대중은 열린 사회의 대중을 모른다네/ 그들이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지배자들이 연출하는 텔레비전 속의 연극뿐이라네/ 그들이 알고 있는 자유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이 각색한 연극 대본뿐이라네.”

87년 항쟁을 거치고, 김영삼 문민정부까지를 보며 김남주 시인이 썼던 ‘연극’이라는 시의 한 부분이다. 탄핵 가결 이후 계속 생각나는 시였다. 탄핵 가결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박근혜와 청와대는 탄핵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변하고, 친박은 다시 원내대표 선거에서 승리했다. 최순실은 혐의 내용 전부를 부인하고, 국회 청문회 출석조차 거부했다. 검찰·법원 사유화의 몸통이었던 황교안이 버젓이 제2의 박근혜로 행세한다. 각종 ‘박근혜표 정책’들을 중단 없이 이어 가겠다고 한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이제 그만 촛불을 끄고 차분하게 헌재 결정을 기다리라고 한다.

‘항쟁’ 내내 광장의 뒤편에서 정략적 사고로 헛발질만 하던 야권 역시 탄핵 가결 이후 광장의 역동성을 다시 부정하고 의심하며 재빠르게 다시 ‘질서 있는 퇴진’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간 수고들 했으니 촛불을 끄고 광장을 비우라고 한다. 의회와 기존 법 질서에 모든 걸 맡기고 다시 TV 시청자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여·야·정 협의체를 꾸려 대표적인 공범부역자 집단인 황교안 직무대행 체제와 내각을 인정하자 한다. 국정조사는 맥없이 진행되고, 가장 급선무인 ‘적폐청산 특위’를 통해 박근혜표 정책들과 악행들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갈 생각은 없이 정세의 교란 요인일 수밖에 없는 ‘개헌특위’를 만들고, 위원장을 새누리당에 주었다.

그렇다면 광장은 어떠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얼굴과 당만 바뀌는 가면극 놀이의 위선과 허위를 찢어내야 한다. 구태와 부정, 불의가 다시는 발붙일 수 없는 새로운 윤리와 가치관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향한 ‘항쟁’과 ‘혁명’은 아직 채 시작도 못했다는 긴장과 직접 행동을 유지해야 한다. 주권자들의 직접 민주주의가 검찰 법원 헌법 위의 유일한 상위법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박근혜와 비선 실세들에 대한 즉자적 분노로 열렸던 광장이, 박근혜 이후 새로운 한국사회 구성이라는 대안의 혁명으로 진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87년 항쟁의 뒤가 다시 노태우로 귀결되는 역사의 암흑이 재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결의들이 필요하다.

4·19혁명 이후의 김수영 시인은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했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87년 항쟁 이후 국민의정부 출범까지 보며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냐’는 김남주의 한탄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도 안되지 않겠는가.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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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이 틀림없어. 평일 아침에 흙 묻은 등산화를 신고, 허름한 배낭을 멨다. 게다가 버스비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분명 간첩이야. 저걸 어떻게 신고하지? 가다가 파출소 앞에 차를 세워야겠다.’

 

1970년대가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6년이었다. 나는 초등학생도 아니었다. 군대까지 다녀온 스물아홉 먹은 멀쩡한(?) 청년, 게다가 버스 운전사였다. 그런데 아침에 내가 모는 삼화교통 333번 버스에, 어릴 적 반공 세뇌 교육으로 배운 그런 간첩 행색의 남자가 탔다. 나는 룸미러로 그자를 훔쳐보면서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파출소에 버스를 대고 얼른 뛰어가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이 와서 조사해 보니 간첩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요즘 ‘박근혜를사랑하는모임’(박사모)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때문이다. ‘북한지령 망국촛불’이라고 쓴 팻말을 보면 내가 버스 운전할 때 간첩 신고한 것과 너무 흡사하다.

 

“도대체 대통령이 탄핵당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다. 내가 그 당시, 집회하는 대학생·시민들을 보고 ‘도대체 왜 집회하는 거야?’라고 궁금해했던 것보다 더 세상을 모르고 있다.

 

사실 박사모 같은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가끔 본다. 얼마 전에 방송대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도 그런 사람을 만났다. 일흔 정도 돼 보이는 방송대 학생이 내 가슴에 달린 백남기 농민 추모 리본을 보더니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난 백남기 그 사람, 살아온 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

 

지하철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내가 달고 다니는 세월호 배지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아니, 다 끝났는데 아직도 달고 다니세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는 지난주에도 있었다. “아니, 대통령 7시간이 왜 그렇게 중요하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박사모들은 어릴 때 나처럼 반공교육에 세뇌된 사람들이다. 나는 다행히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리영희의 <반세기의 신화> 등 다양한 책을 보면서 세상을 배웠다. 그런데 박사모들은 그때 세뇌된 상태로, 주로 텔레비전을 보고 세상을 판단한다. 전엔 박정희, 요즘은 박근혜에게 장악돼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는 공중파 방송만 보니 그 의식은 변하지 않는다.

 

하긴 TV조선 같은 종편은 더 심하다. 2011년 12월 조선일보 기자 박은주가 TV조선 방송에 나와 박근혜를 향해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고 했다. 다른 진보언론이나 인문학 책을 보지 않고 그런 방송만 보니 세상이 제대로 보일 리 없고, 꼴통 보수의식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보수언론이 박사모 같은 단체를 만든 주범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근혜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난 건 진보·보수언론의 합작품이었다. 박근혜 불통 정권을 일관되게 비판해온 매체는 경향신문, 한겨레이지만, 2016년 7월26일 ‘청(와대) 안종범 수석, 500억 모금 개입 의혹’ 기사로 K스포츠·미르 재단 의혹을 처음 보도한 매체는 TV조선이었다. 그리고 다시 진보언론이 국정농단한 최순실을 수면 위로 끌어내고, JTBC, 조선일보가 가세하면서 박근혜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끝까지 침묵하던 공영방송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박근혜 게이트를 다뤘다.

 

박사모는 헷갈린다. 박정희, 박근혜를 칭송하던 보수언론이 갑자기 박근혜가 최순실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고, 탄핵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니 헷갈릴 수밖에. 그들은 정말로 대통령이 탄핵당해야 하는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언론은 쓰레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보수언론이 갑자기 내부자에서 심판자로 바뀐 걸까? 두고 봐야 한다. 보수언론이 이전처럼 진실을 왜곡하고 감추고, 전쟁을 조장하고, 진보를 비방한다면 ‘역시 보수언론은 쓰레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박사모한테 “언론은 쓰레기”라는 칭찬을 늘 받을 수 있는 언론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이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박사모들은 경향신문이나 월간 작은책 같은 진보적인 매체도 좀 읽어보시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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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선례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한다. ‘시민혁명’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지만, 과연 사태가 이런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지 논의를 아껴둘 필요가 있다. 김수영의 시 구절처럼,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불현듯 오는 것이고 가시적인 힘들을 통해 항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혁명은 “밤에 지나간 배”처럼 조용히 온다. 혁명은 평소에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규정된 것들이 무한하게 분출하는 정황이기도 하다. 이런 혁명의 모양새에 비추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당장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방만 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분명 세계의 논리에 기입되어 있던 ‘혁명적 상황’이 귀환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한때 집회가 너무 비폭력에 집착해서 문제라는 이야기가 오르내렸지만, 비폭력이라고 해서 폭력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간디의 비폭력이 스탈린의 폭력보다 더 폭력적이라는 철학적 탐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200만명이 넘게 모인 집회가 비폭력으로 일관할 수 있었다는 것도 대단한 에너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후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민주주의의 논리를 구성하고 있는 ‘87년체제의 합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합의가 물질적 토대로 전환된 것이 ‘대통령 직선제’이다. 군사독재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 상징적으로 지목하자면 ‘넥타이 부대’가 연일 거리를 누비면서 외쳤던 구호가 바로 대통령 직선제였다. 말하자면 지금 상황은 87년체제의 합의를 번복하려는 극우의 반동을 밀어내는 ‘체제의 반발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로 표상되는 ‘평화적 정권교체’는 87년체제의 합의를 이행한 결과였지만, 이른바 ‘산업화세대’에 속하던 일부 극우세력은 이런 합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립되어 있었다면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이들에게 ‘합법적 권력’을 부여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적 선거절차였다. 여기에 박근혜라는 ‘미스터리한 존재’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 속았다고 보수 정치인들이 입을 모으고 있지만, 당시 그들에게 이 미스터리한 존재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선동을 종결 지을 ‘능력자’로 보였을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을 품을 수 있는 포퓰리즘의 아이콘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이 미스터리한 존재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박근혜라는 이름은 말라죽어가던 극우의 뿌리를 되살려낸 구세주의 그것이었다. 여기에 태만한 보수의 포퓰리즘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지난 4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후진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태는 극우조차도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 ‘합법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극단적 민주주의의 유물론을 보여준다. 경제만 살린다면 ‘독재자의 딸’도 국가수반에 임명할 수 있다는 이런 ‘포용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이 포용성은 그 반대에 있는 이들, 다시 말해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상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일반 노동자를 구분하고, 정치적인 유가족과 그렇지 않은 일반 유가족을 나누고, 운동권과 일반 시민을 갈라치는 태도가 극우 보수 연합의 경우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편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편향성을 극복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오히려 그에 반대하는 집단에 합법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은 증명한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집권 역시 이런 민주주의의 편향성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똑똑히 보여준다. 트럼프 같은 ‘백인 쓰레기’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민주주의일까. 이 질문은 2012년 우리에게 던져졌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백인들처럼 그때 우리도 이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분명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베 정권이 평화헌법을 개정하고자 했을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일본의 청년들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당시 그 청년들의 행동에 십분 찬동하더라도 냉정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과연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그 자유민주주의에 ‘자이니치’는 포함돼 있는가. 전후 일본이 보여온 태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행동에 나서는 이들이 명징한 신념과 대의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 자체가 이념적 방향을 공고하게 만드는 쪽이라고 봐야 한다.

 

탄핵이라는 명백한 목표가 있는 지금이 지나고 나면 현재 벌어진 상황은 다시 봉합될 것이다. 그때 우리에게 어떤 목표가 남게 될지 질문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잃어버린 10년’을 거론하면서 태평천하를 약속했던 보수의 의제가 10년도 가지 못하고 몰락했다. 이 칼럼 연재는 그 보수의 의제를 분석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제 또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동안 부족한 칼럼을 읽어주신 독자 제현에게 감사드린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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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중 ‘하릴없이’라는 표현이 있다. 발음이 비슷해서인지 이 ‘하릴없이’를 ‘할 일 없이’와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릴없이’는 ‘하릴없다’에서 나온 부사다. ‘하릴없다’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다. 그런데도 ‘해야 하는 일 없이’ 또는 ‘하고자 하는 일 없이’라는 뜻으로 많이들 쓴다.

 

물론 ‘하릴없다’에는 ‘일이 없어서 한가하게 지내다’란 의미가 없다. ‘하릴없다’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으니 꾸중을 들어도 하릴없는 일이다”에서 보듯 어쩔 수 없거나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나타낼 때 흔히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릴없다’에는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의미도 있다. 이 경우 ‘하릴없다’는 ‘영락없다’ ‘간데없다’와 의미가 상통한다. 반면 ‘하릴없다’와 소리가 비슷한 ‘할 일 없다’는 글자 그대로 일이 없어서 한가하다는 말이다. 정말 해야 할 일이 없어 한가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딱 들어맞는 말이다.

 

간혹 ‘할일없다’처럼 붙여 쓰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틀린 말이 된다. ‘할일없다’는 하나의 낱말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할 일 없다’처럼 세 단어로 띄어 써야 한다. 국어사전은 ‘할일없다’처럼 붙여 쓴 말은 ‘하릴없다’의 북한어라고 밝혀 놓았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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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들 중 한 곳에 살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지구별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이 되고 있는 중이다. 가장 불행한 나라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은 지금 ‘인류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권했던’ 무지의 길을 가고 있다.

무지의 길은 ‘파괴적인 힘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하려고 그 힘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힘을 키우겠다는 발상’을 버리는 용기의 길이다. 헌법과 국정과 공직을 사유화해서 나라의 살림과 국민의 안녕을 파괴한 권력 엘리트 집단에 대해 국민은 오직 평화의 힘으로 질서 있게 응징하려고 어떤 괴물을 만날지 모르는 무지의 길을 밝히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고 있다.

이 무지의 길에 들어선 국민은 지난 6일 국회 청문회 증인석에 앉아 모르쇠로 일관하는 재벌 총수 9명을 지켜봤고 기업 조직과 기업인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기업의 정신은 애정을 알지 못하고, 탐욕이 아닌 욕구를 알지 못하고, 지역이나 개인에 대한 헌신을 알지 못하고, 공감이나 존경이나 감사를 알지 못하고, 중용이나 검약이나 자제를 알지 못한다’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웬델 베리의 경고가 옳다면, 돈으로 무한 권력을 행사하는 재벌은 ‘개인의 정신에서 탐욕과 노예근성 따위의 가장 나쁜 점과 약한 점을 정당화하고 부추기면서도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추호도 걱정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유령이다.

권력 엘리트 집단과 그 너머의 유령을 직면한 국민은 ‘파괴가 자행되는 진짜 이유’, 즉 ‘우리가 경제학의 두 가지 거짓말을 믿고 그에 맞춰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같이 직면하고 있다.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다.’ ‘우리 지역의 경제를 대기업에 넘겨주어도 괜찮다.’ 이 두 가지 거짓말 속에서 삶을 잃어버리고 나라를 도둑맞은 국민은 삶과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무지의 길을 걷고 있다. 이 무지의 길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겸손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과, 무제한의 욕망과 끝없는 결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형식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촛불과 함께 거듭 확인되는 점은 2016년 겨울의 ‘형식’이 1960년 4월 봄은 물론 1987년 6월 여름의 형식을 넘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현재 진행형으로서 결코 탄핵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작금의 이 형식은 바람이 불면 꺼질 것 같은 촛불을 함께 살리면서 가장 불행한 나라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제전이다.

이 경험을 통해 국민은 최종적으로 ‘우리의 존재 전체에 대한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된다. 국민이 직접 국가를 통치할 수 있고 선출되지 않은 모든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존재 전체’라는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담담하게 수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무지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다음의 이행이 일어난다. ‘소수가 소유한 나라’에서 ‘다수가 소유한 나라’로, ‘경제적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정부’로, ‘인간의 경제활동과 자연 세계의 조화’를 이루는 평화의 질서로 이행할 수 있다. 국민이 청와대와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거쳐 다시금 선거 투표소로 향한다면 그 단 하나의 이유는 국민 스스로 자신에 대한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다. 관건은 그런 이행을 제도화하고 내면화할 수 있는 결정적 형식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도 ‘거창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정직함에서 출발한다.

정직은 우리에게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알려주고 그 문제를 정확한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정직해야 ‘거창한 문제는 수없이 많은 작은 해답이 필요하다’는 것과 ‘해결책은 한 번에 농장 하나, 숲 하나, 땅 한 마지기를 치유하는 방식’ 외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 형식은 정치와 경제의 중앙 집중화 대신 지역 공동체와 지역 경제의 자립을 이루는 것, 새롭고 충격적일 정도의 지방자치와 주민자치를 실행하는 것이다. ‘적절한 규모라는 개념’과 ‘한계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국민이 직접 국가를 통치하고 민주주의로 삶을 영위하는 이 길을 가기 위해서 국민은 이 난국의 어느 끝에 선거 투표소로 가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다.

괴물과 유령의 파괴를 이기는 평화의 길은 무지의 길이자 정직의 길이다. 이 길에서 ‘우리는 책임질 수 있는 것 이상의 권력을 가져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국민은 누구일까.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쉽게 기뻐하지 않는 복잡한 사람이며 영웅도 백만장자도 아닐 것’이다. 바로 이 도시의 시민이고 우리 동네의 주민이다. 대통령과 전문가와 예술가는 그 일원일 뿐이다. 이상 모든 인용문은 웬델 베리의 <지식의 역습>에서 왔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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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세 살의 카뮈는 ‘티파사에서의 결혼’에 이렇게 썼다.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들판이 캄캄해진다.”

카뮈는 정오라는 시간을 문학사에 새롭게 등재시킨 작가로 통한다. 신들이 내려와 살았다던 지중해안의 고대 페허, 그 위에 내리는 정오의 햇빛, 폭발하는 색채의 꽃들, 꽃들이 뿜어내는 현기증 나는 향기들, 그리고 사방에 펼쳐진 짙푸른 하늘과 바다.

여기에서 정오란 시간적인 의미인 동시에 공간적인 의미로 읽어야 한다. 시공간적인 자연현상인 동시에 감각들의 혼융, 또는 결혼으로 읽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그것을 말해준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알베르 카뮈, <결혼>, 김화영 옮김)

살아가면서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실내에 있다가 정오의 눈부신 햇빛 속으로 나아갈 때, 또는 영화관 로비의 환한 조명 아래에서 휘장을 제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 두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있지만 앞을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눈앞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뮈가 쓴 저 한 문장은 인류가 끊임없이 반복해온 익숙한 한 문장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눈앞을 가려온 낡은 커튼을 시원하게 찢어버리는 칼날 같은 경구가 된다.

카뮈가 스물 세 살 때 쓴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들판이 캄캄해진다”는 문장은 단편소설의 미학 원리인 현현(顯現·Epiphany·이피퍼니)과 맞닿아 있다. 이피퍼니는 프랑스처럼 가톨릭 국가에서 주현절(1월6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기리는 날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신성, 또는 찰나 속에 맞닥뜨리는 영원성을 뜻한다. 이것이 소설에 와서는, 어떤 복잡한 사태 앞에서 주인공이 겪는 극심한 갈등이 해소되는 지점, 혼란을 뚫고 본질과 마주치는 순간을 의미한다.

소설의 주인공 앞에는 언제나 쉽지 않은 길이 놓여 있게 마련이다. 주인공은 이런저런 함정과 우회로를 겪으며 나아가는데, 이때 주어지는 시련과 혼란의 강도에 따라 이피퍼니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혼란의 정점에서 보고야 마는 사태의 진실, 거기에 이피퍼니의 원리가 거울처럼 작동한다.

혁명과 사랑은 완성되는 순간, 변질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에 깃드는 방심이다. 지난가을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토요일마다 광장에 나가 탄핵안을 가결시킨 촛불집회가 끝이 아닌 시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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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올림머리’를 하는 데 시간을 썼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트위터에서는 ‘올림머리’에 대한 언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트위터코리아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함께 5일부터 11일까지 트위터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들 중 주목할 만한 단어를 13일 발표했다.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는 ‘탄핵소추’였다.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9일 하루 동안 ‘탄핵소추안 가결’ 등의 키워드가 포함된 트윗은 약 7만5000건 발생했다. 탄핵안 가결 직후 실시간 트렌드에는 ‘#이화여대_감사합니다’ 해시태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도 했다. 이용자들은 지난 7월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백지화를 주장하며 시작된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촉발했다는 의미에서 해당 해시태그를 달았다.

‘올림머리’는 지난주 두 번째로 많이 언급된 키워드였다. ‘한겨레’는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강남의 유명 미용사를 청와대로 불러 ‘올림머리’를 하는 데 90분을 허비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가 “머리 손질에 소요된 시간은 20여분”이라며 의혹을 사실상 시인하면서 트위터에는 비판 의견이 급증했다.

촛불 민심을 대변할 온라인 국회 구성이 제안되면서 ‘시민의회’도 주요 키워드에 올랐다. ‘시민의회’ 구상은 “대의민주주의에 혼란을 주는 시도”라는 반대 의견에 부딪히며 잠정 중단됐다.

지난 주말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세월호 화물칸에 대한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며 큰 관심을 모았다. 트위터에서는 세월호에 실린 철근 278t이 제주해군기지에 납품됐다는 의혹, 인양 작업 중 한국인 잠수부는 세월호 화물칸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의혹 등이 다수 공유됐다.

tvN의 신작 드라마 <도깨비>가 인기를 끌면서 작중 배우 이동욱씨가 연기하는 배역인 ‘저승사자’도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동욱씨의 연기 장면과 영상·사진 등이 주로 공유됐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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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회,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면서 이 용어에 대해 촛불 현장에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문제가 된 단어는 ‘권력’이었다. 권력이 시민의 손에 있다고 하면 괜찮을까. 우리는 둘 다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를 했다.

대중의 환호를 받고 등장한 권력이 대중의 원망을 사고 몰락해간 역사는 많다. 이는 ‘선한 권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권력 자체의 속성이 스스로를 강화하고 지배권역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권력을 쥐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보면서도 권력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덧없음에 대권행보를 중지하고 물러나는 대권주자는 아직 없다.

권력의 흡인력은 무지막지해 보인다. 이전 권력의 비참한 말로가 뻔히 보이는데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타인에게 미치고자 하는 권력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는다.

지난 10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청와대 인근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현대국가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겹으로 있다. 그러나 권력은 촘촘한 견제장치와 감시망도 뚫고 확대된다. 덜 나쁜 권력은 있어도 좋은 권력은 없는 걸까.

지난 주말에 청와대 100m 앞까지 갔다. 처음 가보는 통인동과 청운동. 오후 5시쯤 되었을까. 행렬이 마지막 진로에 세워진 차벽 앞에서 멈추고 돌아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도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와글와글하는 소란이 한동안 일더니 점차 “박사모는 물러가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군중 사이로 태극기가 언뜻 보였다.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어느새 극우단체의 전유물처럼 된 지는 오래다. 태극기가 안보와 반공과 반북의 이미지로 굳어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가까이 가봤다. 소음 사이로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태극기를 든 분의 첫마디는 “문재인은 간첩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가 해산되어야 한다고 했다.

촛불들의 선동에 놀아난 국회가 돈 한 푼 받은 적이 없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다는 주장은 앞서 오후 2시쯤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천막 앞에서도 들었다. 우리도 며칠 전에 국회 해산을 놓고 설왕설래했던 터라 그들의 국회 해산 구호는 듣기가 묘했다.

박사모 회원 등으로 여겨지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촛불행사를 방해할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낮에 세월호 천막 바로 앞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이렇게 행렬을 따라다니며 반대 구호를 외치는 그들이 놀라웠다.

그런데 내 우려는 문재인이 간첩이라는 황당한 구호 때문이 아니었다. 무모하게도 수천, 수만명의 촛불 행렬 사이로 들어와서 ‘깽판’을 놓고 있는 저분들이 혹시 다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촛불집회에서 폭행사태가 일어나면 안된다는 조바심이라기보다 그들이 어떤 주장을 하든 안위가 위협당해서는 안된다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서너 명 되는 분들이 어찌나 극성스럽게 군중들과 대거리를 하는지 무슨 난리가 난 줄 알고 헬멧을 쓴 경찰들이 일렬로 군중을 헤치고 들어와서 그들을 에워쌌다. 만약의 불상사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인데 꼭 그들만을 보호한다기보다 촛불 군중들을 폭력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는 측면도 있으리라. 이쪽저쪽을 따지지 않고 시민의 안위에 대한 보호조치를 할 정도는 되는 경찰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보수단체 회원들은 경찰이 보호막을 쳐주자 더 기세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때도 나는 군중들이 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경찰들의 머리 위로 뭘 집어던지면 저들이 다칠 거라는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소란이 계속되었지만 군중들은 ‘박사모는 물러가라’는 말 외에는 어떤 위력행위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유인물이나 두꺼운 종이팻말을 던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과 같은 보폭으로 걸으면서 ‘물러가라’는 말 외에는 욕지거리도 위협도 안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권력 또는 힘이라는 것은 견제받고 통제되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제할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전희식 | 농부·‘삶을 일깨우는 시골살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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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신’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져야 할 몸가짐이나 행동을 말한다. ‘채신’은 단독으론 거의 쓰이지 않는다. 주로 ‘없다’나 ‘사납다’와 짝을 이루어 ‘채신없다’ ‘채신사납다’ 형태로 사용되며,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채신없다’는 ‘말이나 행동이 경솔하여 위엄이나 신망이 없다’란 뜻이다.

‘채신머리없다’ ‘채신머리사납다’와 같은 표현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채신머리’는 ‘채신’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머리’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비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싹수머리’ ‘안달머리’ ‘인정머리’ ‘주변머리’ ‘주책머리’의 ‘머리’들이 그렇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한데 ‘채신없다’나 ‘채신사납다’를 ‘체신없다’와 ‘체신사납다’로 쓰는 사람이 더러 있다. 이 말을 몸 체(體)에 몸 신(身)이 더해진 ‘체신’(사람의 몸뚱이)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리 쓰는 듯한데, 틀린 표현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채신’은 한자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자말인 ‘처신(處身)’이 세월을 거치면서 고유어처럼 바뀐 말이다. 사전은 ‘채신’을 ‘처신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설명한다. ‘채신없다’ ‘채신사납다’는 ‘처신없다’ ‘처신사납다’와 한뜻인 셈이다. 모두 사전에 있는 말이지만 일상생활에선 ‘채신없다’ ‘채신사납다’가 더 많이 쓰인다. ‘채신’은 고유어처럼 굳어졌으므로 한자 없이 한글로만 쓴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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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금요일, 비로소 제도 정치권이 할 수 있는 최대선인 ‘대통령 탄핵안 표결’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통과에 대한 우려가 저번 주 내내 이어졌지만 지난 3일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에 모인 전국 약 260만명의 물결이 ‘탄핵안 통과’ 이외 어떤 선택도 정치권에 남겨주지 않았다. 범죄자에 다름 아닌 박근혜 대통령은 4차 담화를 통해 ‘국회 합의’와 ‘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명예롭고 질서 있는 퇴진’이라는 마지막 배수진을 쳤지만 분노한 시민들의 부릅뜬 눈을 비켜 갈 수 없었다. 만약 9일 국회에서 국민들의 민의를 어기고 탄핵안이 부결된다면 새누리당 해체와 국회 해산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광장의 목소리다. 박근혜 카드를 버리고 새로운 얼굴과 조합을 통해 재집권 플랜을 짜고자 하는 수구보수재벌 동맹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상황이 더 두렵기에 역사의 반동은 가능치 않으리라는 판단들을 나는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역시 시간 끌기를 하거나, 국민과 국회의 뜻을 어기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오히려 탄핵 가결 이후다. 순리대로라면 박근혜 퇴진은 기정사실화되었지만, 그 이후 상상되는 정치의 모습은 과히 희망적이지 않다. 먼저 황교안 국무총리 권한대행 체제를 어떻게 두고 볼 수 있는지이다. 박근혜 정권의 대표 공범부역자이자, 검찰·법원 사유화의 몸통인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직을 대행한다니 코미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가피하게 ‘내각총사퇴 후 과도 내각’ 구성은 당연한 수순이다. 또 다른 몸통인 새누리당이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새로운 조각의 한 축이 된다는 것도 참 기가 막힌 일이다.

퇴진 운동 내내 민의의 뒤에서 계속 헛발질만 해왔던 야당에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최소한의 진정성이 있으려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발의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책임 있게 답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2의 이명박근혜, 제2의 노무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회의 윤리다. 최소한 1% 재벌독점특혜 금수저 사회를 위해 1100만의 국민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 평생을 일해도 은행빚 없이는 자기 집 하나 가질 수 없는 부동산투기공화국의 폐지. 철도 의료 교육 등 공공부문 사유화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사회. 국가보안법 폐지와 남북평화협정을 통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현. 핵 없는 사회. 입시지옥 서열경쟁이 없는 사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조금은 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이다. 그 대표자가 누가 되든 상관없지만 이런 새로운 시대의 요구가 사장된 채 얼굴 바꾸기 놀음만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있겠는가.

하여 9일은 박근혜 이후 한국사회를 향해 소중한 한 발을 다시 내딛는 날이 될지언정 이 국면의 끝이 되어선 안될 것이다. 이제 비로소 주권자들의 직접 민주주의, 광장의 정치가 시작되는 날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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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낮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한 낱말을 되뇌었다. 모르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 들은 말인 양 계속 중얼거렸다. 머금다, 머금고, 머금으며…. 그러다 그만 턱이 진 길에서 발을 헛디뎠다. 등에 배낭을 멘 채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두 무릎이 얼얼했다.

2014년 4월16일에 딸을 잃은 엄마로부터 “우리는 머금고 사는데…”라는 말을 듣고 헤어진 뒤였다. 그 말이 그렇게 힘들고 아픈 말일 줄 몰랐다.

그이는 ‘빈자리’도 말했다. 딸과 아들, 부부, 해서 늘 네 자리였다. 집에서 마주앉는 식탁에서도, 외식을 할 때도 네 자리. 그러나 그날 이후 다시는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생겼다. 빈자리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자리, 딸 자리, 누나 자리, 친구 자리…. 모든 자리가 사라졌다. 딸아이와 의견이 달라 부딪쳐도 먹는 입맛이 비슷해 금방 풀고, 함께 옷을 사러 가는 일도 즐거웠다는데 이젠 그럴 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딸에게 “네 꿈을 활짝 펼쳐나가라”며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일이 행복했건만 딸 자리를, 엄마 자리를 빼앗겼다.

6차 촛불집회가 열린 3일 청와대에서 100m 떨어진 서울 종로구 효자치안센터 근처 경찰버스 차벽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희생된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진 보자기를 두른 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엄마는 ‘사소한 행복을 꿈꿨던 아이들’이라 말했다. 딸이 단짝과 함께 종이 가득 빽빽하게 적은 버킷리스트를 사람들에게 꼭 알리고 싶다고 했다. 사소한 행복을 꿈꾸던 아이들을 으스러뜨린 한국사회와 이 정부 모두에게.

한 아빠는 ‘가장 슬픈 사진’을 말했다. 스마트폰 대기화면에서 딸은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렸다. 차분했다. 당연히 구조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 학생들의 모습만 보아도 그때 거기, 구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빠에게는 딸의 사진 가운데 가장 기쁜 사진과 가장 슬픈 사진이 있다 했는데 가장 슬픈 사진을 스마트폰 첫 화면에 담은 건, 어쩌다 잠시라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일까.

어떤 엄마는 자신에게 ‘전부였던 아이’를 말했다. 전부인 아이가 가고 나니 세상을 온통 다 잃은 듯하다 했다. 세상에 대고 아이를 자랑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이 흉볼까 나중에 더 크면 해야지, 미뤄두고 참았건만 그 자랑, 전부를 쏙 앗겼다.

다른 엄마는 ‘생일’을 말했다. 돌아온 딸의 생일, 너무 힘들었다 말하는데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실컷 울면 좀 나을까 싶지만, 어린 막내가 볼까 맘껏 울 수도 없었다. 한 해 365일 하루하루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304명이 세상에 왔던 하루하루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전율’이라 말했다. 딸을 잃은 딸은 부모 앞에서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가 잠든 추모공원을 찾아가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을 하면서 울었다.” 그러고도 눈물이 차고 넘치는 날이면 딸은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 눈이 퉁퉁 부은 채 출근했다.

할머니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그리움을 말했다. “17년을 살면서 식구들과 떨어져 지낸 게 길어야 하루 이틀이고, 그럴 때도 집에 오고 싶다고 그랬던 아이인데, 이렇게 오래 가족 곁을 떠나 얼마나 식구들이 보고 싶겠어요, 집에 오고 싶겠어요.” 언제든 왔다 가라고, 잠시라도 쉬었다 가라고 손녀의 방문을 늘 열어둔다. 책상도, 책상 위 컴퓨터도, 책꽂이의 책도, 좋아하던 기타도, 액자 속 사진도, 서랍장 안 즐겨 입던 초록빛 스웨터도 다 그대로다. 주인 없는 빈방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부르며 달려 들어올 듯한 방이다.

어느 엄마는 ‘이름’을 말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불러보고 싶다 했다. 2015년 3월30일 월요일 오후 7시39분,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맞은편 푸르메재단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간 엄마, 아빠들이 몇 번이고 외쳤다. “내 새끼 보고 싶다!” 마지막 외침 뒤에는 다들 목메어 울었다.

지난주 토요일, 이제까지 가로막혔던 청와대 가는 길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04명을 구하지 않은 책임만으로도, 진실을 규명하라는 이들을 외면한 것만으로도 대통령은 옳지 않다. 6차 촛불집회, 여기저기 광장이 된 곳에서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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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머리가 텅 빈 사람을 벌레에 빗대어 이르는 말로 ‘무뇌충’이 널리 쓰였다. 그 기세로 ‘무뇌충’은 국립국어원 신어사전에도 올랐다. ‘무뇌충’을 떠올려서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무뇌한’이란 말도 많이 쓰인다.

물론 ‘무뇌한’이란 말은 없다. 한데 소리가 정확히 ‘무뇌한’으로 난다. 그 때문인지 ‘무뇌한’으로 참 많이들 쓴다. 무엇을 잘 모를 때,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아님을 밝힐 때 흔히 하는 ‘~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데’ 대신 쓰는 말이다. ‘문외한’ 이야기다. ‘무뇌한’은 ‘문외한’의 잘못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문외한(門外漢)’은 본래 문(門) 밖(外)에 있는 사내(漢)를 뜻한다. 어느 집에서 왁자지껄한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밖에서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다. ‘문외한’은 집 안에서 벌어지는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다. 여기서 어떤 일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이란 의미가 생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일에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이란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외한’의 ‘한’은 ‘남자’ ‘사내’ ‘사람’을 뜻한다. ‘한’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와 관련된 사람’의 뜻을 더하는 말이다. 무뢰한(직업이 없이 불량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 아라한(성자), 인색한(인색한 사내), 파렴치한(뻔뻔한 사람), 호색한(여색을 밝히는 사람)의 ‘한’과 같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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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겨울이 되었다. 토요일의 삶을 잃어버린 지 한 달 하고도 열흘, 그사이, 가을 산야는 속절없이 불타올랐고, 광장에는 진눈깨비 첫눈이 내렸다. 광장을 다시 찾았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낯모르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촛불을 들고 걸었으며,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어제 정오 수업에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들과 김탁환의 최근 소설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가 있었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장르적으로 ‘소설’로 분류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과 원전 사고를 겪은 구소련권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지역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200명의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 김관홍 민간 잠수사의 탄원서 내용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에 접근해간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소설은 픽션, 곧 지어낸 허구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지어낸다 해도, 현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당해낼 수 없는 경우, 곧 현실이 픽션을 압도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재난 참사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이것은 소설인가’,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이것이 인간인가’ 끊임없이 자문한다. 수많은 밤 이러한 질문들과 맞서며 혼신의 힘으로 써온 것이기에, 학생들의 발표는 뜨겁고, 감동적이다. 그들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온 사건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 한가운데로 육박해 들어오는 경험을 하고, 눈앞에 벌어진 사실 뒤에 은폐된 진실을 직시하고,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주시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절규하는 목소리들을 온몸으로 겪고 온 날 밤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가 추스르듯 촛불 하나 켜놓고 플로베르의 소설을 펼친다. 펠리시테라는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단순한 마음>이다. 단순한 마음이란, 삶에 바치는 소박한 마음, 인간을 대하는 순박한 마음이다. 소설사에서 대가로 추앙받는 플로베르가 말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주인공은 펠리시테라는 프랑스 북부 작은 포구 마을에 사는 가정부이다. 플로베르는 이 여성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녀는 착한 마음씨와 옳은 일에 헌신하는 뜨거운 정신의 소유자일 뿐, 털끝만큼도 사심(私心)을 거느리지 않은 견결한 여성이다. 그녀의 일생을 둘러싸고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음에도 읽어갈수록 인간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경험해서인지 깊은 여운이 남는다.

다시 토요일은 돌아오고, 올곧은 마음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나 가능한 걸까.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물러서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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