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초여름 대선 경선에 나온 야당의 한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주창했다. 이 때문에 설레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더 많은 돈을 욕망하느라 ‘삶을 삼킨 저녁’은 달라지지 않았다. 2년 전 가을 나는 이 지면에 ‘저녁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무연무업(無緣無業) 인구가 급증한 사회의 ‘넘쳐나는 저녁’엔 불안과 고독이 미세먼지처럼 가득했다. “완전히 다른 상상이 절실”하다고 글을 마쳤지만 돌아보면 상상은 태부족했다. 그러다 지난 5월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인 범죄가 벌어졌다. 5월28일엔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건을 접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내 감정과 생각은 곤두박질쳤다.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홀로 안전문을 수리하다 사망한 사람은 외주 정비업체에 입사한 지 8개월 된 19세 남성이었다. 경찰은 열차 통제의 책임을 가진 서울메트로 전자운영실, 현장 관리의 책임을 가진 역무실, 2인1조 수칙의 책임을 가진 외주업체를 조사해 죽음에 대한 “구조적 책임”을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수사를 통해 ‘죽음의 책임구조’가 가려진다 해도 장례를 미룬 가족과 지인에게 그의 19년에 걸친 ‘삶의 책임구조’는 하나도 밝혀지지 않는다. 부친에 따르면 늘 격무에 시달린 그는 “씻지도 못하고 집에 오면 바로 곯아떨어”졌어도 비번날에 고용승계 집회에 참석할 만큼 정규직의 꿈을 갖고 있었다. 퇴근 행렬이 시작되기 직전인 오후 5시57분에 숨진 그의 가방에선 여러 공구와 함께 뜯지 못한 컵라면이 나왔다.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사람은 23세 여성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를 주방용 식칼로 살해한 범인은 다른 주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34세 남성이었다.




이 사건은 여성혐오를 공론화한 추모운동과 정신질환자 관리 실태를 비롯해 공용화장실의 범죄 취약성까지 여러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중 범죄 원인을 두고 남성에게 만연한 여성혐오와 조현병자의 피해망상으로 쟁점이 형성됐지만 둘 다 ‘죽음의 책임구조’를 밝히는 차원이다. 친구와 주점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다 오전 1시7분에 화장실에 가서 살해당한 23세의 여성의 삶과, 0시33분부터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죽이기 위해 식칼을 들고 사회적 약자를 기다린 34세 남성의 삶, 그 ‘삶의 책임구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이렇듯 19세 비정규직 남성의 오후 5시57분, 23세 여대생의 오전 1시7분, 34세 범인 남성의 0시33분은 저녁에서 새벽에 걸쳐 구의역과 강남역 사이의 20분 남짓 거리를 두고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죽음의 책임이 알지 못하는 ‘너 때문’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주업체와 역무실과 전자운영실로 연결돼 있어도 알지 못하는 너와 나 사이에 들이닥친 불행의 표면적 인과만 밝힐 뿐 그 구조를 설계하고 만들고 관리하는 구조 운영자들은 늘 면죄됐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은 우리가 ‘삶의 책임구조’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관계로부터 면책되길 바라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괴물의 탄생에 합의하고는 나만 괴롭히지 않으면 된다고 착각했던 업보가 아니면 뭘까 싶다.

더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삶이라 믿는 동안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에서 ‘삶의 책임구조’는 실종됐다. 이렇게 ‘삶의 책임구조’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죽음의 책임구조’와도 무관해진 국가와 기업은 더 많은 권력과 돈을 취했을 뿐이다. ‘저녁을 방치하는 국가’와 ‘저녁을 주는 기업’만 작동된다면 삶과 죽음의 책임은 개인에게 외주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무책임의 구조를 운영하는 정치와 경제라면 일명 ‘칼퇴근법’을 제정한들 무너진 중산층과 하루벌이 서민의 저녁에는 삶이 깃들 수 없다.

5월30일 20대 국회가 시작됐다. 한 일간지는 “132개의 초심”이란 머리기사를 통해 초선 의원들의 입법 포부를 깨알같이 소개했다. 하나하나가 각종 비타민처럼 소중하나 모아놓으면 종합비타민 같아서 꼭 그것이어야 한다는 공감으로 다가오기 쉽지 않다. ‘저런 세상이 올 수 있구나’ 하는 큰 실감을 주는 정치가 무엇인지 뜻을 모아야 한다. 그러자면 예컨대 30대 재벌 269개사의 753조원이 넘는 사내보유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정치여야 한다. 경제활동의 이익이 조세회피처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공동체에서 순환하게끔 법과 제도를 바꾸는 정치여야 한다.

이렇게 희망의 정치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통해 대선을 맞이해야 한다. 강남역과 구의역을 잇는 젊은이와 시민들의 추모 행렬에 담긴 ‘삶의 연대구조’를 국가와 기업에도 ‘삶의 책임구조’로 강제하겠다고 공약하는 대선 후보가 나와야 한다. 그럴 때 국민은 행복한 저녁을 더 많이 상상할 수 있고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삶의 책임구조’를 함께 만들겠노라 행동할 수 있다. 다음 대선은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의 저녁에 달려 있다. 불과 1년7개월 뒤면 대선이다.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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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교수님이 소설책을 번역해서 보냈다. 역자가 둘이다. 그분은 원래 부부 교수님인데, 한 분은 영문학자, 한 분은 역사학자다. 두 분이 번역했겠거니 했는데, 역자 중 한 사람은 아드님이란다. 참으로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책을 훑어보니, 한 페이지는 인쇄가 되어 있고, 한 페이지는 인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파본이다. 서점에서 산 책이라면 당장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증받은 책을 파본이라며 돌려보내고 다시 새 책을 달라고 한다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래서 서가에 꽂아두고 내쳐 그냥 두었다. 뒤에 그 교수님을 만나 책을 보내주어 고맙다 하고 책의 상태가 그랬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새 책을 보내주겠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니 파본이니까 그냥 갖겠다고 우겼다. 왜냐? 이 책이 혹 아는가? 이 책이 뒷날 유명해져서 에러우표처럼 엄청난 값을 받게 될지? 하하!

파본일 수도 있다면서 책을 사면 꼭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겨가며 검토하는 분도 보았다. 자신이 못하면 학생을 시켜서라도 꼭 확인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깐깐할까 하고 생각했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과거 책들은 그럴 만도 했다. 인쇄나 제본 기술이 시원치 않았을 때 종종 인쇄되지 않은 페이지, 중복된 페이지, 없는 페이지가 드물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깐깐한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불구의 책을 파본이라 한다. 파본을 종종 경험하는 터이다.

한 번은 학교 앞 서점에서 책을 사서 붉은 색연필로 줄을 그으며 신나게 읽고 있는데, 어라, 갑자기 내용이 튄다.

전후를 꼼꼼히 훑어보니 몇 페이지가 빠졌다. 서점에 가지고 갔더니 두말 하지 않고 바꾸어준다. 또 책날개에 보면 ‘파본은 바꾸어드립니다’라고 적어두고 있으니 요즘은 파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정작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이빨 빠진 고서다.

서울의 모 대학 도서관에 꼭 필요한 책이 있어 중간에 사람을 넣어 복사를 부탁했다. 며칠을 기다리는데 아주 감질이 났다. 드디어 복사본이 도착했다. 허겁지겁 자료를 훑어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원했던 자료가 있는 책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10권 5책의 고서라면 10권은 내용상의 분류고, 5책은 형태상의 분류다. 그런데 내가 보고자 했던 것은 4책의 8권에 있는데, 4책이 없는 것이다. 목록에는 5책이 다 있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4책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같은 책을 소장하고 있는 다른 도서관과 접촉해서 복사를 했다. 그런데 이게 또 어찌된 일인가. 그쪽 사본에도 역시 내가 원하는 부분이 있는 책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책의 중요 부분을 안 사람이 빌린 뒤 반납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이가 빠진 책을 낙질본이라고 한다. 희한하게도 내가 보고자 하는 내용이 낙질 속에 있었던 경우가 자주 있었다. 박사과정 때도 도서관에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책이 있는 것을 알고 신청을 하면, 종종 망실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건 나만의 경험인가?

최근에는 고서가 아닌 책에서도 동일한 경험을 했다. 부산대 도서관에 <부산대학교 10년사>란 책이 있다. 나는 2005년 부산대학교 60년사를 편찬할 때 편찬위원으로 참가해서 한 꼭지를 썼다. 그때 교사자료관(校史資料館)에서 필요한 기본 자료를 건네주었다.

아주 간단한 것을 예로 들자면, 부산대학교 50년사, 40년사, 30년사, 20년사, 10년사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46~1956년의 10년간 역사를 정리한 10년사였다. 부등사판을 긁어 갱지에 인쇄한 이 책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도 흥미롭다. 해방 직후 부산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부산 시민들, 그리고 그야말로 적빈(赤貧)의 상황 속에서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선각(先覺)들, 좌우 대립, 6·25전쟁기의 전시대학(戰時大學) 등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특히 국가에서 국비를 지원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자금을 모아 국가에 헌납한 뒤 그것을 국비로 다시 내려주는 형식을 통해 부산대학교를 건립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어떤 유명한 기업인이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의 설립에 기부금을 내기로 약속했다가 지키지 않고 뒷날 선거에 나와 자신의 업적을 묻는 사람에게 부산대학교에 기부금을 냈노라고 거짓말한 것까지 적어 놓고 있다. 요컨대 지금처럼 예비취업생을 길러내는 대학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진지한 열정이 넘쳤던 대학의 모습을 <십년사>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무미건조한 계량적인 역사가 아닌 이야기체의 서술도 너무나 흥미로웠다.

<십년사>는 이미 부산사(釜山史)의 일부를 이루고 한편으로는 한국 대학사(大學史)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단 한 부밖에 없는 귀중한 책이기에 혹시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에 부본(副本)을 만들려고 했다.

책을 복사한 뒤 돌려주고 복사한 것을 대본으로 한글파일로 옮겼다. 깨끗이 교정을 보고 출력을 했더니, 아주 깔끔하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내줄 리 만무한 책이니 언젠가 형편이 돌아가면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주해를 달아 소량 제작하기로 하고, 몇몇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출력해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십년사>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여러 페이지가 누락된 파본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제본할 때 실수로 몇 페이지가 빠진 것 같았다. 은퇴하신 노교수님들에게 여쭈어보는 등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온전한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십년사>를 낸 것이 1956년이니 교수며 학생이 수백명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십년사>를 간행해도 얼마나 간행했을 것인가. 또 이런 책일수록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사라진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교사자료관에 있는 책이 유일한 것이다. 이럴 경우 다시 책을 찍는다 해도 빠진 부분을 채워 넣지 못하고 만다. 불구의 책이 되는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파본은 정말 더할 수 없는 형벌인 셈이다. 책 만드시는 분들에게 부탁하노니, 제발 파본만은 말아 주시기를!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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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친구가 나더러 자기들 모임에 좀 나와 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한다. 무슨 모임인가 물었더니 책읽기 모임이란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으로 마침 내가 쓴 책을 읽고 토론을 할 예정인데, 그 친구가 저자가 친구라고 했더니 모임에서 불러서 같이 얘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그 모임 역시 같은 자연과학 전공자의 모임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과 쪽 전공자들이 자연과학 쪽 지식을 결여하고 있듯,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대체로 인문학 쪽 관심이 희박하다. 같은 대학에 있지만 사실 딴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도 있다. 친구의 모임은 주로 인문학 서적을 읽고 있었다. 나 역시 교양 과학서에 손이 자주 가는 편이다. 어쨌든 그날 모임은 아주 즐거웠다.

달포 뒤 그 친구가 전화를 걸어 다산(茶山)을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그런 방법은 없노라고 답하자, 이것저것 다산에 대해 물었다. 신통한 답은 아니지만 아는 대로 조금 주워섬기자 이내 ‘다산평전(茶山評傳)’ 같은 책은 없느냐고 물었다. 지금 같으면 박석무 선생이 쓴 <다산 정약용 평전>을 소개했을 터인데, 그때는 이 책이 나오기 한참 전이다. 없다고 하자, 그래? 그런 책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어떤 인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은데 접근할 방향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가 남긴 저작이나 연구서를 읽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게 또 쉽지 않다. 원저작이 어렵고 또 연구서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의 경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하겠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필요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평전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평전을 읽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 읽은 평전으로는 피터 싱어의 <헨리 스피라 평전,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가 있는데, 동물운동가 헨리 스피라의 생애를 통해 동물권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얻게 돼 엄청나게 고마웠다. 거슬러 올라가면 평전을 읽고 공부가 된 적이 적지 않다.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막스 갈로의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평전> 3부작을 읽고 비로소 혁명의 시대를 희미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스탈린 평전>도 러시아 혁명과 전체주의 체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요긴하였다.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는, <바쿠닌 평전> <엠마 골드만 평전>으로, 인도 독립사는 <간디 평전>으로, 또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암베드카르 평전>으로 읽었다. 문인, 예술가의 평전도 흥미롭기 짝이 없다. <파블로 네루다 평전> <자코메티 평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평전은 아마도 나의 뇌 속에 간직돼 있을 것이다. 읽다가 만 것도 있다. <케인즈 평전>은 읽다가 다른 책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끝을 내지 못했다. <헤겔 평전>은 너무 길고 난삽하여 3분의 1쯤 읽다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윌리엄 모리스, 미켈란젤로 평전은 아직 서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 학계나 문필계에서는 아직 평전을 쓰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근대 이후는 모르겠으되 조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야말로 평전의 황무지다. 조선 건국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정도전 같은 경우도 TV 연속극은 있지만 믿고 읽을 만한 평전이 없다. 세종대왕은 어떤가? 왕이라서 평전이 필요 없다고? 그렇지 않다. 왕이야말로 권력에 가려 평가의 왜곡이 일어나기 쉬우므로 엄정한 평전이 필요한 것이다. 이순신은 어떤가? 이순신의 전기는 대부분 거의 영웅서사시에 가깝다. 당대 사회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철저한 자료 비판을 통해 그의 내면까지 읽어내는 그런 평전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평전의 결핍은 상상외로 심각한 수준이다. 다산이라면 모두 대단한 학자인 줄 알지만, 최근에 박석무 선생의 <다산 정약용 평전> 외에는 믿고 읽을 수 있는 평전이 없다. 이 책으로 급한 대로 해갈(解渴)은 하게 되었지만 다산 같은 학문의 거인의 경우, 그의 학문 전체를 충실히 조망할 수 있는 ‘학자 다산’의 평전이 또 나왔으면 한다. 어디 다산뿐이겠는가? 박지원도, 박제가도, 이덕무도 모두 평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실 인물과 그의 생애, 업적을 평가하는 글은 한문학의 전통에서는 결코 드물지 않다. 아니, 오히려 풍성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쓰는 행장과 비문, 전(傳) 등이 그렇다. 이 중에는 지금 평전의 양에 걸맞게 아주 긴 것도 있다. 주자의 <장위공행장(張魏公行狀)>이란 작품은 한문책으로 220페이지, 전겸익의 <손승종행장(孫承宗行狀)>은 224페이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마도 책 두 권은 너끈히 나올 것이다. 물론 이렇게 긴 행장은 드문 것이고 또 행장은 인물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위주로 쓰인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를 하던 중국과 조선의 오랜 전통은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다. 오늘날 평전이란 행장과 비문, 전의 복합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볼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정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시간이 흐르면 읽을 만한 평전이 적지 않게 나올 것이다. 다만 간절히 바라노니, 제발 영웅서사시는 이제 그만 썼으면 한다.

나와 같은 과 교수로 있는 정출헌 교수는 평전과 연보에 관심이 많다. 정 교수는 점필재연구소 소장이기도 한데, 이 연구소에서 ‘연보와 평전’이란 제목으로 작은 잡지를 낸다(연구소에서는 <이완용 평전> 등 몇 종의 평전을 내기도 했다). 나 역시 거기에 몇 차례 원고를 싣기도 했는데, 이 잡지 평판이 아주 괜찮다. 광고 따위도 없고 모조리 읽을 만한 글로 채워졌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것인가!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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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인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면, 어떤 작품을 언제 썼더라, 이때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하는 의문이 든다. 꽤나 중요한 작품이어서 창작 연도를 꼭 알고 싶은데, 알 길이 없다. 이럴 때면 소상한 연보가 있었으면 한다. 물론 유명한 문인이라면 문집에 문인의 비문이나 행장 같은 것이 있어서 대충 그 사람의 생애는 알 수가 있다. 또 조금 더 유명한 인물로 벼슬을 했다면 <조선왕조실록>이라든가 <승정원일기> 같은 관찬 사료에 이름이 나온다. 이것으로 참고할 수도 있다. 그래도 좀 더 자세한 것을 원할 수도 있다. 또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명한 학자, 정치인이라면 문집 끝에 연보가 있다. 이 경우 해당 인물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만난 것 같다.

연보도 갖가지인데 내가 본 정말 상세한 연보는 <주자연보>다. 모두 4권인데, 약 600페이지쯤 된다. 우리 쪽이라면 송시열의 연보가 압권이다. 송시열은 워낙 주자를 절대적인 진리의 담지자로 알고 살았던 사람이고, 그의 제자들은 송시열을 꼭 주자처럼 섬겼다. 그래서 그의 문집도 <주자대전>을 따라 <송자대전>으로 만들었고, 그 권수도 체제도 <주자대전>을 따랐다. 이건 좀 건방진 일이라 정조 역시 그게 뭐냐고 비꼬았을 정도다.

어쨌건 <송자대전>의 송시열 연보는 <주자대전>을 본떠 양도 엄청나다. <송자대전>은 215권이고, 그 뒤에 부록이 19권, 습유가 9권, <송자대전> 속 습유 부록 2권, <송자대전> 수차가 13권이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고 할 것이다. 원래는 <송자대전>과 부록까지가 끝이다. 나머지는 뒤에 새로 찾아 추가한 것이다. 연보는 뒤로 갈수록 자세하다. 송시열이 죽는 해인 1689년의 경우 1월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날인 6월8일까지가 한 권 분량이다. 그런데 이 연보는 희한한 것이 송시열이 죽고 난 뒤 1787년 정조가 <대로사비>의 비문을 써서 내릴 때까지 거의 100년이 이어진다. 송시열은 죽었지만 그의 당파가 계속 정치권력을 장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송시열의 연보는 또 그가 노론의 영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한다. 예컨대 연보는 자신이 자연사하기 전에 사약을 받겠다면서 사약을 재촉하고 몸을 일으켜 단정히 앉은 채 약을 마시고 의연히 죽는 송시열을 그리고 있지만, 반대 당파의 기록은 어떻게 하든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계략을 쓰는 송시열을 그리고 있다. 송시열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연보도 있지만 그 내용이 판이하다. 송시열과 원수지간이었던 박세당·윤증의 연보는 동일한 사건이라도 당연히 의미 부여가 다르고 어떤 경우 사건의 구성 자체까지 다르다.


연보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 1차 자료가 된다. 이토록 중요한 것이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연보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예컨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학자는 당연히 다산 정약용이지만 현대에 만들어진 연보는 없다.

송재소 선생님이 최근 번역한 <사암선생연보>(창비, 2014)는 원래 후손 정규영이 작성한 것이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다산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섭렵하고 작품의 창작 연대까지 포괄한 그런 연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산뿐만 아니다. 실학자로 이름난 사람들, 박지원이라든가 박제가, 서유구 등은 모두 연보가 없다.

중국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연보가 작성되어 있다. 내 연구실에 있는 것만 해도 <완원연보> <염약거연보> <이지연보> 등 여럿이다. <이지연보>는 이지, 곧 이탁오를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중국은 ‘연보’가 아예 학문의 한 장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 쪽도 사정은 같다. 몇 해 전 부산대 일문과 오경환 교수와 연보를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나쓰메 소세키의 연보에 대해 듣고 연구실을 방문해 확인한 적이 있다. 아라 마사토란 비평가가 만든 <소세키 연구 연표>인데, 1867년 소세키가 태어난 해부터 1916년 사망할 때까지의 연표였다. 문제는 워낙 자세하여 하루를 오전·오후로 나누기까지 할 정도로 치밀하게 소세키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경환 교수도 아마 마사토는 소세키보다 소세키에 대해 더 많이 알았을 것이라고 하며 웃었다.

이야기가 약간 겉으로 새지만, 범인들도 연보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예컨대 마성린이란 사람을 보자. 마성린은 서리 신분이었다. <안화당사집>이란 필사본 문집을 남기고 있다. 이 문집은 18세기 서울 서리, 곧 경아전 사회의 동태를 아는 데 매우 요긴하다. 특히 이 문집 말미에 실린 <평생우락총록>이란 연보가 비상하게 중요하다. 마성린이 무슨 양반명문가도 아니고, 또 과거에 합격해서 화려한 벼슬을 거친 것도 아니고, 또 무슨 대단한 학자가 되어 학문적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고, 또 무슨 대단한 시인이나 산문작가가 되어 길이 남을 작품을 쓴 것도 아닌 다음에야 무슨 연보를 꾸밀 만한 것이 있으랴. 그런데 마성린은 이런 보통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그는 자신의 평생 즐겁고 기쁜 일, 걱정거리를 연보로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드물지만 좋은 연보가 있다. 정석태 선생이 엮은 <퇴계선생 연표 월일 조록>이 가장 상세하고 방대한 것이다. 이런 연보가 앞으로 많이 나왔으면 한다. 이런 책이 문화 발전의 증거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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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안다. 누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에 관한 정보를 자연스레 모으게 되는데, 주로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를 먼저 따진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면, 먼저 이렇게 묻는다. ‘어느 대학 나왔는데?’ 실제 학벌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을 정하는 카스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것이 모두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전근대 사회로 가면 약간 다르다. 사람을 만나 정보가 없다면, 먼저 그의 집안부터 알려고 든다. 그가 어떤 성씨이며 어떤 파에 속하는지, 또 그의 직계는 어떤 관직에 있었는지 등을 묻는다.

박지원이나 정약용처럼 유명한 사람이라면 소용이 없지만, 이름을 듣고 금방 감이 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족보를 찾아서 계보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족보를 보고 그 인물의 직계나 방계를 훑어보면 그 집안의 위상이 대개 짐작된다. 보통 조선시대 작가 연구의 기초적인 작업이다. 그런데 약간 허망한 경우도 있다. 족보에서 일껏 내가 찾는 이름이 나와서 순간 기뻐했는데, 맞추어보니 동명이인이다. 이럴 때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김천택(金天澤)이란 인물이 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이란 시조집을 엮은 사람이다. 원래 시조는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곧 노래가사다.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말 인물이 작가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대개 고려 말에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원래 노래인 데다 표기 수단이 없으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그걸 1728년 김천택이란 사람이 모아서 <청구영언>이란 책, 곧 노래가사집을 엮었다. 이토록 중요한 가집을 엮었으니, 그 편집자 김천택에게 국문학자들의 관심이 쏠릴 것은 당연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어떤 연구자가 족보를 뒤져 그 이름을 찾아냈다. 김천택이 광산김씨(光山金氏) 족보에 있었던 것이다. 김천택은 김춘택(金春澤)의 삼종제(三從弟)란다. 김춘택의 조부는 김만기(金萬基, 1633~1687)다. 김만기의 딸이 숙종의 첫 비(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다. 국구(國舅)인 것이다. 김만기의 동생이 곧 <서포만필>을 쓴 김만중이다. 김춘택의 작은할아버지인 것이다. 노론 중의 노론, 양반 중의 양반, 벌열 중의 벌열인 것이다. ‘광김(光金)’이라면 조선후기 벌열가의 대표인 것이다. 김천택이 이런 집안 사람이란다.

‘택’은 돌림자다. 김춘택이 있으면 ‘김천택’이 있음직하다. ‘천’이란 글자는 흔한 글자가 아니던가. 아무리 맞추어 보아도 김천택이 <청구영언>을 엮은 김천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천택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수장(金壽長)은 <해동가요>란 가집을 엮었는데, 거기에 김천택을 ‘포교’라고 써 놓았다. ‘광김’ 김천택이 ‘포교’라? 이건 조선시대 문화에 대한 상식이 있으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김천택이 ‘광김’이라는 학설은 학계에서 이제 수용되지 않는다.

족보라는 것은 대개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족보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대개 1423년에 간행된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를 조선 최초의 족보로 본다. 유교적 가부장제에 입각한 친족제가 성립하자 남성 사족의 혈통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족보를 만들어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양반 사회에서는 타인을 만났을 때 그가 어떤 집안 어떤 사람의 자손인가를 아는 것이 퍽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렇게 남의 집 족보에 대해 아는 것을 ‘보학(譜學)’이라 했고 이것을 행세하는 양반의 교양으로 알았던 것이다.

족보는 양반들만 만든다고 했다. 상민이나 노비는 족보가 있을 리 없다. 양반 외에 족보가 있는 축으로는 중인이 있다. 중인은 조선시대의 기술직을 맡은 신분이다. 외국어 통역을 맡은 역관, 의술을 담당하는 의관, 그 외 중앙의 관청에서 재정과 관련된 여러 회계를 다루는(그러니까 이들은 수학자이기도 하다) 계사(計士), 관상감에 소속되어 천문학을 공부해 역법(曆法)과 책력(冊曆)의 제작을 담당하는 천문학관, 도화서에서 국가와 왕실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화원(畵員) 등이 중인에 속한다. 물론 관상감에는 풍수지리학을 전공하는 지리학관, 인간의 운명과 길흉화복을 점치는 명과학관(命課學官)도 있지만 중요시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눈에 뜨일 정도의 세력을 형성한 것도 아니어서 중인을 말할 때 거론되는 적이 거의 없다. 이들 중 역관과 의관이 중인의 70~80%를 차지하므로 보통 의역중인(醫譯中人)이라 부른다. 또 의관과 역관, 천문학관은 비록 잡과(雜科)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어쨌건 과거를 통해 뽑는다. 계사와 화원은 취재라는 약식 시험으로 선발한다.

중인들은 의외로 추적하기 쉽다. 서울에만 있었던 신분이고 또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폐쇄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역과 시험을 치른 뒤에는 합격자의 명단을 기록한 <역과방목(譯科榜目)>을 낸다. 의관은 <의과방목(醫科榜目)>, 음양과는 <운과방목(雲科榜目)>, 계사는 <주학입격안(籌學入格案)>을 낸다. 이것을 보면 누가 어느 해에 어떤 잡과에 합격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합격자의 인적 사항, 곧 이름, 사조(四祖), 관향(貫鄕) 등을 기록해 놓는 것이다. 이들은 족보를 따로 만든다.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의원과 역관, 계사만 모아서 만든 족보이다. 서로 통혼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엮어서 한꺼번에 족보를 만든 것이다. 이 족보를 보면 중인들은 쉽게 추적할 수가 있다.

중인 족보로는 <성원록(姓源錄)>이라는 책이 있는데, 고맙게도 모 출판사에서 영인본을 냈다. 구입해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부지런히 보았다. 비전공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나는 이 책에서 꽤나 귀중한 정보를 얻곤 했다. 예컨대 신윤복은 그때까지 그 가계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성원록>을 보고 그가 저 유명한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申末舟)의 후손인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계통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서파일 가능성이 있었다. 어쨌거나 조선의 치밀한 족보 문화가 연구자에게 큰 편리를 제공하는 셈이니, 후손으로서 한편 고마운 마음이 든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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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감명 깊은 책은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무슨 고전 같은 것을 말하느냐고? 그건 아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책은 아마도 초·중·고 교과서일 것이다.

반박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교과서라니?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답할 분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꼽을 것이다. 불교 신자라면 불경을, 드물지만 이슬람교 신자라면 코란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작가의 소설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마도 일시적인 감명일 수는 있지만 당신을 ‘만든’ 책은 아닐 터이다. 가장 엄청난 책은 당신 자체, 혹은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만드는 책이다. 그 거룩한 책의 이름은 교과서다.

교과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교과서를 읽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터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국가권력을 업고 있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강제로 주입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선(善)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교육이 곧 사회적 성공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던 사회, 또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회적 특권에 속했던 전근대 사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한글을 깨치지 못한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친 뒤 내뱉는 감격을 전하며 배우는 것이야말로 ‘해방’과 ‘자유’임을 설파하기도 한다. 이것이 아마도 교육의 순수한 본래적 의의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국가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에서 본래적 의의는 희박한 그림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교육은 개인의 대뇌를 열고 교과서를 쑤셔 박는 행위이고, 학교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늘 은폐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교과서를 말로 되풀이하는 권위적 도구가 교사이며, 교과서를 확장한 것이 참고서이며, 교과서가 개인의 대뇌에 장착되어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 시험이다. 그 시험의 과정은 초·중·고 12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도 그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느냐고 덤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교과서만이 알고 있는지 강제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수능시험은 결국 교과서에 근원을 둔 지식들이 머릿속에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점검하여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로 개인의 서열을 정한다. 그 주홍색 서열이 이마에 한 번 찍히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카스트의 기호가 된다.

사람들은 왜 지금의 형태로 교과서가 세팅되어 있는지, 동일한 주제라면 다른 나라, 다른 사회의 교과서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곰곰 따져보면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것들이 모두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교과서는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진리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교과서와 지금 북한의 교과서, 대한민국의 교과서는 각각 다른 진리를 말하고 있다. 쿠바의 교과서와 미국의 교과서 역시 다를 것이다. 어느 교과서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나는 한국인이기에 오직 한국의 교과서를 진리로 수용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을 칠 때마다 영점을 받았으니 그의 대뇌에는 교과서가 장착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국사 교과서를 배우는 12년 동안 한국사의 세세한 국면은 아마 잊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동일한 과거의 기억을 공유한 한민족이라는 명령적 진술은 이미 깊이 머릿속에 침투하였다. 쉽게 지울 수도 없고, 쉽게 비판할 수도 없다. 이것은 거의 모든 교과서가 동일한 구실을 한다. 초·중·고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교과서에 의식화되면서, 한국인으로 성장한다. 한국인과 중국인, 미국인, 북한인은 그렇게 해서 각각 만들어진다. 요컨대 그것은 인간을 보다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제 국가에 충성하는 개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교과서를 충실히 대뇌에 복제한 사람, 곧 우수한 인재들은 뒷날 다시 그 교과서를 개량하여 보다 강력한 교과서를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교과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책이다. 감동이니 감명이니 하는 말과는 다른 차원에서 개인에게 깊이 각인되는 책인 것이다. 따라서 교과서를 엄밀히 분석해 보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교과서만큼 빨리 사라지는 책도 없을 것이다. 학년을 올라가면, 학교를 졸업하면 그냥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장착되었으니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이 교과서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거들떠보지 않게 된다.

과거 사회를 알기 위해서도 교과서만큼 중요한 책은 없다. 구한말의 교과서는 많지 않으니 학자들이 수습해서 영인본으로 제작해 놓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교과서를 정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교과서가 몇 종이었는지 또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의 신민들을 만들기 위해 어떤 담론을 주입시키려 했는지 아직 충분히 연구되어 있지 않다. 해방 이후로 넘어오면 사정이 더욱 딱하다. 초·중·고 교과서는 수천 종에 이를 것인데 모두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남아 있는 것만이라도 어디 한곳에 모으고 이미지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으로 제공했으면 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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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 입학 때, 그리고 직장에 들어갈 때 입학·입사 서류를 만들면 거기에는 반드시 취미란이 있었다. 적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공연히 적지 않으면 뭔가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 꼬박꼬박 채워 넣었다. 요즘도 그런 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서류를 만들어야 했던 때는 주로 70, 80년대라 먹고살기 바쁜 가난한 시절이었다. 무슨 취미를 기를 여유가 있단 말인가. 또 대학생 때는 ‘음주’ ‘흡연’이 취미였지만, 그것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제일 만만한 것이 ‘독서’였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이제는 담뱃값이 올라 흡연의 즐거움도 쉽게 누릴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어쨌거나 왜 남의 취미는 묻는단 말인가. 나는 취미란의 취미들이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지 지금도 모른다.

취미가 독서라면 이런 질문도 반드시 받았을 터이다.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도 상당히 곤란하다. 나는 책 읽기와 관련하여 지금도 ‘감명’이란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국어사전은 ‘감격하여 마음에 깊이 새김. 또는 새겨진 그 느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말 사람마다 그런 감격해 마지않아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그런 책이 있을 것인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도 대부분 없으리라 생각된다.

질문은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얼마 전에는 강연을 마친 뒤 “감동을 받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언제나 답할 말이 애매하다. 애써 머릿속을 뒤적여보지만 그런 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감동 받은 책이 없다니, 무언가 게으른 사람 같기도 하고, 성의 없는 책 읽기로 이제까지 살아온 것 같아서 약간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감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감동을 받은 적이, 그리하여 내 생에 큰 영향을 끼친 그런 감동이 있었는가 말이다. 그건 아마도 그런 질문을 받는 순간 머리에 그냥 떠오르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런 감동적인 순간은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도대체 왜 이런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가? ‘당신이 감명 깊었던 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내게만 던져진 것도 아니고, 요즘 새로 생긴 것도 아니다. 이 질문은 나의 어떤 정치적 성향을 알아내려는 불순한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찌 보면 우리는 책을 읽으면 무언가 감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식으로 변명하자니 마음이 한결 수월해진다.



사실 그렇게 뜨거운 감동을 받은 책은 없지만, 내게 약간의 영향을 끼쳐 기억하는 책은 있다. 물론 그것이 내 인생의 행로를 바꾸었다든지 하는 그런 책은 아니다. 또 이름만 대면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런 묵직한 고전도 아니다. 먼저 떠오르는 책은 중학교 3학년 때 본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이다. 소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랭클린이 17세에 가출하여 인쇄소 직공이 되어 거기서 책을 읽으며 스스로 지식을 쌓아나가고, 24세에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의 경영자가 되는 등의 과정은 중학교 꼬맹이에게는 찬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더 충격을 받았던 것은, 프랭클린의 엄격한 자기 관리였다. 자신의 도덕적 결함, 고쳐야 할 약점의 목록을 만들고 하루하루 반성하여 지키지 못한 경우 동그라미로 표시를 해 그 동그라미가 없어지도록 노력하는 프랭클린의 노력이 내게 희한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사회와 학교, 나라가 내게 박아 넣은 이상한 도덕률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전혀 없는 상태였으니, 프랭클린의 계획이야말로 나를 온전한 인간으로 이끄는 지침이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잠시 나는 그것을 흉내 내었다. 하지만 물어보나마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상하게도 비슷한 일은 반복되었다. 프랭클린에 대한 연모가 끝난 뒤 다시 유사한 책에 매료되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의 <준주성범(遵主聖範)>이 그것이었다. 프랭클린은 엄격한 청교도 쪽이었지만, 켐피스 쪽은 경건하기 짝이 없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준주성범>이 내 마음을 끌었다. 손바닥만 한 책을 한 동안 가지고 다니며 흉내를 내보려 했지만, 그 결과는 프랭클린의 <자서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 책으로 얻은 소득이 있다면, 내가 ‘경건’과는 아주 길이 다른 속된 삶을 사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소득은 절제하는 경건한 삶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뒤에 공부하는 길로 접어들면서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삶의 길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교가 동일하게 지향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교와 성리학 역시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깊은 성찰, 욕망의 절제 없이는 결코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적 종교일 뿐이고 제도화된 종교, 곧 교단을 형성한 제도적 종교는 그런 절제와 아무 관련이 없거나, 절제를 팔아서 돈과 권력을 향유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후로 종교 서적에서 무언가 느낌을 얻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감명 받은 책을 떠올릴 수 없게 된 것은 별로 아름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은 서문당의 문고본으로 읽었다. 1970년대 서문당의 문고본은 꽤나 좋았다. 값도 저렴하여 고등학생 신분으로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서가 맨 아래쪽 한쪽에는 그때 책 몇 권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남아 있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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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 중반을 지나면서 몸에 큰 고장이 났다. 한동안 병원신세를 진 것은 물론이다. 퇴원해서 집에서 요양하면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였다. 꼬박 1년 반을 집에서 보냈다. 의사 선생의 지시는 책을 보지 말고 무조건 쉬란다. 책을 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아예 볼 수가 없었다.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누워서 TV를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TV가 얼마나 볼 것이 없는지는 일주일 만에 뼈저리게 깨우쳤다. 어느 날 선배 교수님께서 경과가 어떠냐고 전화를 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너무나 무료하다고 했더니, 웃으시면서 비디오방에 가서 무협비디오나 빌려다가 보라고 하신다. 그냥 소일거리로 켜 놓고 있으란다.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생각도 말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데는 그만이라며 웃으며 하시는 말씀에 혹시나 싶어 아파트 상가에 있는 비디오가게로 가서 스무 개를 빌렸다. 가게 주인은 좋아라 하면서 30% 할인을 해 준단다.

돌아와 몇 편을 연속 상영했는데 얼마 안 가 볼 수가 없었다. 요즘의 막장드라마와 비슷했다. 아니 막장드라마 같은 중독성도 없었다. 빌려온 돈이 아깝지만 다시 무료한 시간으로 복귀했다. 무협비디오에 실패한 뒤 옛날 생각이 났다. 나 역시 무협소설을 꽤나 보았던 것이다. 주로 중학교 때였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군협지>란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읽은 책 중에는 <정협지> <비룡> <비호> 등이 떠오른다. 10년 전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군협지> 5권을 팔고 있었는데, 옛날 기억이 나 사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른이 되어서 무협소설을 본 것은 김용의 소설이 나오면서부터였다. 하도 신문지상에서 김용, 김용, <영웅문> <영웅문> 하니까, 궁금증이 나서였다. 그 시리즈 중 어떤 것을 읽었는데, 중간에 포복절도할 일이 있었다. 어떤 여주인공의 이름이 공손대낭(公孫大娘)이었는데, 다음 권을 보니 ‘공손 큰 아가씨’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대낭’을 ‘큰 아가씨’로 번역한 것이었다. 아마 책을 찢어 나누어 주고 번역을 시킨 뒤 거두어 모았을 것이다. 역자로 이름을 내 건 사람이 전체적으로 다시 문장을 다듬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게 귀찮아 팽개친 것이 아닌가 싶다. 공손대낭이라면 두보의 시 ‘관공손대랑제자무검기행(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에 나오는 무녀(舞女)로 꽤나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말이었다. 어쨌거나 ‘공손 큰 아가씨’가 나오고 난 뒤 책을 덮고 말았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이야기를 들자면, 무협소설은 어른의 판타지다. 미남미녀에 자신을 투사하고, 도저히 극복이 불가능할 위기도 우연에 의해서, 예컨대 동굴 속에서 비급을 얻어서 절세의 고수가 됨으로써 해결된다. 신체적 약점도 어떤 약을 먹고 내공이 갑자기 증진되며, 또 칼도 창도 꿰뚫을 수 없는 갑옷을 입고, 또 무엇이든 끊을 수 있는 칼과, 또 언제나 주인공을 돕는 탁월한 능력의 조력자들이 있다. 그를 사랑하는 미인은 항상 여럿이다. 이게 무협소설의 문법이다. 그야말로 판타지가 아닌가. 독자들은 잠시나마 그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가 현실의 고달픔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무협소설이라 해서 저급한 것은 없다. 판타지라면 톨킨의 <반지의 제왕>도 마찬가지다. 무협이란 제재 속에 결국 무엇을 담아 인간과 사회, 세계에 대한 어떤 통찰을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루쉰의 <중국소설사>에 의하면, 무협소설은 청대 의협소설의 후예다. 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마천이 <사기> <유협열전(遊俠列傳)>에서 형상화한 협객들, 곧 형가(荊軻)와 같은 사람과 만나게 된다. 협객은 강한 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 것을 덕목으로 삼되, 무(武) 곧 폭력을 그 방법으로 택한다. 유협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깡패다. 의리 있는 깡패,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서 폭력(절제된 폭력)을 쓰는 자다.

무협소설이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여기에 대한 비평서도 있다. <무림백과>(양수중 저, 안동준·김영수 옮김, 서지원, 1993)가 그것인데, 무협소설의 역사, 특히 구무협(舊武俠)과 신무협의 차이, 무림의 문파, 무술, 무기 등에 대해서 소상히 정리해 놓았다. 또 하나는 진주교육대 송희복 교수가 쓴 <무협의 시대>(경성대출판부, 2008)인데 주로 1966~1976년 사이의 무협영화 계보와 영화의 주인공과 배우에 대해 상설한 것이다. 나는 이 두 책으로 무협소설과 무협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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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사회에서 약자를 착취하는 자들, 법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들(아니 법을 넘어 있는 자들), 주로 관료나 토호(土豪) 같은 자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때 민중은 유협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따라서 유협이 횡행하는 세상, 예컨대 <수호지>의 108명의 협객이 영웅으로 대접을 받는 세상은 분명 썩은 사회인 것이다. 아마도 내가 무협비디오를 보고 실망했던 것은, 그런 사회 현실에 대한 통찰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터이다.

한국의 무협소설은 아마도 <홍길동전>이 최초일 것이다. 물론 도술 운운하는 것이 무술은 아니지만, 무협소설의 무술이란 것도 사실 도술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실례되는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장길산> 같은 것도 무협소설의 기미가 있다. 김홍신의 <인간시장>도 현대판 무협소설로서 썩 괜찮은 작품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아직 읽을 만한, 한번 손에 쥐면 놓을 수가 없는 그런 흥미진진한 한국판 무협소설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세상이 이 모양이면 좋은 무협소설이 나올 만도 한데, 그러지 못하니 이 역시 작가의 가뭄인 셈인가.

사족. 무협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정파건 사파건 할 것 없이 고수가 아닌 졸개들을 죽일 때면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 졸개들은 늘 고수가 칼을 한번 휘두르거나 주먹을 휘두르면 그냥 쓰러져 죽곤 했다. 주인공은 언제나 인명의 귀중함, 의리 등을 들먹이고 있는데 정말 웃기는 일이다. 하기야 이렇게 따지고 들면 무협소설과 영화는 아예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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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박시백 선생의 만화 <조선왕조실록>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만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 적 만화를 보는 것은 마치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내놓고 보기에는 뭔가 좀 애매한 책이었다. 집안의 어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내가 만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 경우만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남들도 그랬던 것인지 지금도 모른다.

어른들이 싫어하거나 말거나 나는 만화 보기에 푹 빠진 아이였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는 박재동 선생의 부모님이 하던 만홧가게 ‘문예당’이 있었고, 그곳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어떤 유명한 분이 있으면 공연히 자신과 어떤 관계라고 엮는 습성이 있는데, 나 역시 그런 습성을 충만히 가지고 있다. 박재동 선생은 나와 절친한 친구의 형의 친구이다. 좀 복잡하지만 그렇다.

재작년인가, 박시백 선생이 그린 만화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서평을 써 달래서 써 주었더니 연말에 <실록> 간행을 기념하는 자리에 박시백 선생과 박재동 선생,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열렬한 팬임을 고백하는 이희재 선생 등이 모인다고 나에게 오라고 했다.

하지만 일정이 겹쳐 가지 못해 너무나 아쉬웠다. 박재동 선생의 <실크로드 여행기>와 이희재 선생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가지고 가서 사인을 받는 건데 정말 아쉬웠다.

각설하고, 문예당에는 지나간 만화 중에서 아주 좋은 만화를 따로 튼튼하게 묶어 두었다. 나는 그 책들을 보며 오후를 보내곤 했다.

지금도 그때 본 만화 하나는 또록또록하게 기억이 난다. 임창 선생의 <땡이의 사냥일기>던가? 동물의 습성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있어 재미와 함께 공부도 퍽 되었던 아주 유익한 책이었다. 자연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보다 이 책에서 동물에 대한 유익한 지식을 훨씬 많이 얻었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번지지만, 이희재 선생이 그린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J M 데 바스콘셀로스의 소설 원작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인공 제제와 뽀르뚜까의 형상은 이희재 선생의 붓끝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1994년에 이 책을 사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2학년이었다)에게 읽으라고 주었다.


며칠 뒤 어딜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같이 오는데, 아이는 그 책을 읽고 있었다. “아빠, 이 책은 재미있는데, 읽으면 이상하게 절로 눈물이 나요.” 아이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청년이 되었다. 아마 그 책과 눈물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 터이다. 아쉽게도 2권으로 된 그 책은 없어졌고 뒤에 양장본을 구입해 갖고 있다. <악동이> <아홉살 인생> <간판스타> 등도 구입했는데, 아마 서가 어디에 있을 것이다(<간판스타>의 리얼리즘이야말로 한국 만화의 새로운 경지다!).

대학교수가 만화를 즐겨본다니,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만, 나는 만화를 좋아한다. 너무나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짬이 나지 않아서 실컷 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일 뿐, 시간만 허락된다면 좋은 만화를 구해서 하루 종일 보고 싶다.

돌이켜보면 좋은 만화가 적지 않았다. 중학교 때 너무나 좋아했던 고우영! <수호지> <삼국지> <서유기> <십팔사략> <일지매> 등 수많은 작품이 있었지만, 나로서는 <수호지>가 단연 으뜸이다. 그것은 아마도 <수호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일 것이다. 근자에는 허영만, 강풀, 윤태호 등의 작품도 한때 꼬박꼬박 읽었다. <미생>은 연재할 때 한 회도 빠지지 않고 보았다. <미생>은 암울한 시대의 정직한 풍경이다! 나는 <미생>이 충실한 리얼리즘으로 끝나기를 고대한다.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 가장 묵직했던 것은 조 사코의 작품이었다. 그의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은 이스라엘의 억압, 학살에 의해 일그러지고 분쇄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 좌절의 삶, 기억을 그리고, 불러내고 있다. <안전지대 고라즈데>보다 보스니아 내전을 생생히 전하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최근에 번역된 <저널리즘>에서 그가 전한 인도 쿠시나가르의 불평등한 신분제, 가난에 몰려 죽음 직전에 있는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은, 명상과 신비의 대척점에 있는 인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르포와 만화가 어울린 <파멸의 시대 저항의 시대>처럼 미국 자본주의의 황폐함을 고발한 책도 없을 것이다. 아, 물론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말하면서 우리나라 작가 원혜진의 <아! 팔레스타인>을 말하지 않는다면 실례가 될 터이다. 이 책으로 우리도 좁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얻었다.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의 아나키즘과 스페인 내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아나키스트 안토니오 알타리바!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다.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자살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주체적 인간의 주체적 판단이다.

어떤 경우 나는 만화에서 쉽지만 깊이 있는 지식을 얻기도 했다. 장 피에르 필리외가 글을 쓰고 시릴 포메스가 그림을 그린 <아랍의 봄>에서 나는 2011년 일어났던 이른바 ‘아랍의 봄’의 이유와 경과에 대한 요령 있는 지식을 얻었다.

체르노빌의 사고를 다룬 <체르노빌>은 어떤가? 이 책만큼 체르노빌의 비극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책이 있을까? <맛의 달인>의 작가 카리야 테츠가 쓰고 슈가 사토가 그린 <일본인과 천황>은 일본 천황제의 역사와 허구성, 천황제가 일본인을 지배하고 있는 현재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한국 만화의 역사도 이제 짧지 않다. 훌륭한 젊은 만화가도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조 사코의 코믹 저널리즘, 알타리바의 그래픽 노블에 필적하는 작품은 드물지 않나 한다. 앞으로 깊이 있는 좋은 만화가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다. 앞으로 그런 작품을 읽는 안복(眼福)을 충만하게 누렸으면 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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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혹은 조선시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서가에게 둘도 없이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내력은 알 만한 사람이 다 알기에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이야말로 한국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책이라는 점을 강조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임진왜란 때 거의 모든 서적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도 <실록>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동경제국대학으로 1벌을 가져갔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6·25전쟁 때는 북한으로 또 1벌이 넘어갔다. 이건 한반도에 남아 있는 것이니, <실록>을 여러 곳에 흩어둔다는 원래의 취지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또 북한과 남한이 각각 번역본을 내었으니, 분단이란 비극이 없었다면, 두 벌의 번역본은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실록>은 펼쳐보면 새까만 한문이다. 원래 엄청나게 큰 책이지만, 아주 축소해서 현재 볼 수 있는 크기로 만들었다. 엄청나게 줄여 한 페이지에 원본 4페이지를 담아 놓았다. 그 빽빽한 한자의 숲을 보고 있으면, 뭔가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이 든다. 뭔가 저 속에는 조선시대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읽어보면 그냥 그런 사료다. 뭐, 어마어마한 내용은 없다. 아니, 세상 어디에도 그런 신비한 책은 없다.

<실록>은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사료 중의 사료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임병양란 이전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 홍문관의 거대한 장서고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고, 그 외 조선 전체의 갖가지 문헌 역시 같은 운명에 처했기 때문에 남은 문헌이 거의 없다. 문집도 얼마 되지 않는다. <고려사>를 엮었던 고려시대의 문헌 역시 모두 사라졌다. 이 때문에 조선전기에 관련된 그 무엇을 알려면 <실록>이 필수적이다. 조선 건국 이후 100년간, 그러니까 태조에서 성종 때까지의 <실록>은 고려시대 사회의 연속이기에 고려 사회를 짐작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500년 동안의 기록이니 <실록>은 시대에 따라 문체도 내용도 차이가 난다. 임진왜란 이전의 문체는 좀 순박하다고 할까 읽기가 편하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가면 문체가 꽤나 까다로워진다. 내용도 조선전기 <실록>에는 정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 풍습, 예술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조선후기 <실록>에는 정치, 곧 당쟁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양반사회가 달라진 것을 <실록>의 문체와 내용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실록>은 오직 사고(史庫)에만 있었기에 누구나 볼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영인본이 한 번 제작되었다. 실물을 본 적이 있는데, 원문 한 면을 한 페이지에 축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제작되었는지, 과연 <실록> 전체를 영인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러니 <실록>을 베끼는 사람도 있었다. 부산대학교 도서관에 따로 제작한 특별히 큰 원고지에 만년필로 베껴 쓴 <실록>이 50책이 소장되어 있다. 일본인 학자가 베낀 것이다. 옛날 문헌학을 전공하신 류탁일 선생님으로부터 그 일본인 학자의 이름을 들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돌아가신 선생님께 여쭈어볼 수도 없고!

<실록>을 학자들이 볼 수 있게 된 것은 1955년부터 1958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본을 찍어내면서부터였다. 원문 그대로 영인한 것이다. 이로 인해 보통의 학자들도 <실록>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비싼 것이 흠이었지만, 그래도 무리를 하면서까지 구입하였다. 이윽고 한문 원문에 끊어 읽는 점을 찍은 영인본이 나와 읽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른바 국학을 하는 분들, 한국사, 국문학 등을 연구하는 분들의 연구실에 가면 그야말로 새까만 <조선왕조실록>이 한 질씩 있었다.

교수님이 자리를 비울 적에 슬쩍 꺼내 펼쳐 보고는 나는 그 빽빽한 한문의 숲을 헤쳐나가는 교수님을 정말이지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분들은 그것을 모두 줄줄 읽는 줄 알았다. 하지만 비밀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분들은 드물었다. 그 책들은 대개 장식용이었다. 뭔가 있어 보이지 않는가? 보통의 학자들은 그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공부의 길로 접어든 이래 책값이 늘 궁했다. <실록>을 한 질 사고 싶었지만, 가난한 서생에게는 너무나 비싼 것이었다. 구파발의 어떤 고서점에 <실록> 한 질이 단정하게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물어보니, 몇십만원이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책이 눈에 선하다. 영인본을 다시 영인한 조잡한 형태의 영인본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값이 눅어 구입할까 했지만, 너무 종이가 나빠서 작은 글씨는 거의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북한에서 번역한 <실록>을 다시 영인해서 파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 책은 너무나 쉽게 풀어 써서 연구자가 이용하기에는 또 문제가 있었다.

나는 어떤 <실록>도 갖지 못하고 도서관 신세를 져야만 하였다. 박사논문을 쓸 때는 색인을 처음부터 훑어나가며 관계되는 용어를 검색해서 해당 부분의 원문을 복사해 내었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책으로 묶어 하나씩 읽어나갔다. 하지만 이 색인이 불완전한 것이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고 내가 놓치고 있는 자료가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떨었다.

학위논문을 쓰고 나서 남한에서 <실록>의 400권의 번역본이 완간되었고 곧 이어 디지털화되었다. 검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편리해졌다. 최근에는 인터넷에서도 번역문과 원문 모두를 제공한다. 누구라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실록>의 번역문과 원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실록>뿐인가?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도 <실록>과 함께 읽을 수 있다. 요즘에는 박시백의 만화로 그린 <조선왕조실록>까지 있으니, <실록> 보기가 이래저래 편해진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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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전서>의 존재, 그리고 청대 학자들의 저작이 조선후기 곧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본격적인 것은 18세기다.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조 문인들은 <사고전서>를 본 적은 없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고전서총목제요> <사고전서간명목록>을 통해서 그것이 거대한 총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본 적이 없는 책과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저술 형태는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다.

<사고전서>는 규모가 거대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어떤 원칙에 의해 다양한 종류의 책을 수합한 ‘총서’다. 이 총서라는 것이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예컨대 <한위총서(漢魏叢書)>란 책을 보자. 이 책은 중국 한나라, 위나라의 책을 모은 것이다. 왜냐? 이 시기의 책은 매우 희귀하다. 그러니 한곳에 모아 놓으면 보기 편리하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로 명·청대에 와서 거대한 규모의 총서를 만드는 일이 성행했다.

김창업(金昌業)이 형인 김창집을 따라 1713년 북경에 갔을 때 강희제는 <연감유함(淵鑑類函)> <전당시(全唐詩)> <패문운부(佩文韻府)> <고문연감(古文淵鑑)> 등 모두 370권을 하사한다. 이 책들은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설명하기 복잡하니 생략하고 <전당시>만 간단히 살펴보자. <전당시>는 1705년 강희제의 명으로 편찬된 당시(唐詩) 전집이다. 수록 시인은 2200명, 수록 작품은 4만8900편이다. 어떤가? 끔찍하지 않은가?

이렇게 명·청대에 와서 어떤 의도하에 다량의 자료(곧 책이다)를 총서의 형태로 집적하는 것이 유행했다. <사고전서>도 그런 총서 중 가장 사이즈가 큰 것일 뿐이다. 실제 ‘총서’란 이름을 달고 있는 책 중에서 조선조에 알려진 것만 대충 들어도 <야객총서(野客叢書)> <격치총서(格致叢書)> <당송총서(唐宋叢書)> <소대총서(昭代叢書)> <단궤총서> <기진재총서(奇晉齋叢書)>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총서’라는 이름을 달지 않았지만 책의 성격이 ‘총서’인 경우가 더 많다.

총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꽃에 관한 총서를 내고 싶다면, 가능한 한 광범위한 책을 읽고 거기서 꽃에 관한 자료만을 뽑아서 ‘백화총서(百花叢書)’라는 제목으로 엮을 수도 있다. 이런 총서류는 18세기 후반 조선에 엄청나게 유입되었던 것 같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위서(僞書)>, 곧 ‘가짜책’이란 이름의 문제를 출제한다. 핵심 구절을 들어보자.



‘또한 자칭 신서(新書)의 명가라는 자들은 잡가(雜家)·소설가(小說家)·총서가(叢書家)·예완가(藝玩家) 등이 열에 여덟아홉이다. 이런 책들이 심신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 것이며, 나라에 도움이 되겠느냐?’

아무것도 아닌 말 같지만, 음미해 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다. 당시 북경에서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책이란 것이 도대체 심신의 수양과 국가의 경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총서’도 비판의 대상에 올라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여러 문헌에서 자료를 잘라내어 어떤 주제하에 모으는 저술 형태 역시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정조 당시까지 조선 지식인의 저술 형태는 중국과 사뭇 달랐다. 일정한 주제를 정하고, 광범위한 자료를 집적하는 그런 형태의 저작은 없었던 것이다.

주로 성리학, 그것도 주자의 저술을 정밀하게 음미하거나, 아니면 그것들을 종으로 횡으로 다시 편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학문적인 내용이라고 해 보아야 편지에서 이루어지거나, 다른 사람의 문집에 붙이는 서발문 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명·청대 지식인들의 굉박한 저술, 그리고 <사고전서>와 같은 편집서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조선의 지식인도 총서를 기획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종채가 아버지 연암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모아 쓴 <과정록>을 보면, 연암은 중국과 조선의 문헌 가운데에서 조선과 외국의 교섭에 관련된 책자를 선발해 <삼한총서(三韓叢書)>란 거창한 총서를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연암은 실제 작업을 진행해 20, 30권 정도의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과정록>은 178종의 문헌 이름을 적어 두고 있다.

비슷한 기획은 이덕무도 시도한 바 있다. 이규경은 <소화총서변증설(小華叢書辨證說)>에서 조부인 이덕무가 이의준(李義準)과 서유구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경익(經翼)·별사(別士)·자여(子餘) 등 세 분야에 걸쳐 <소화총서>란 제목으로 조선 지식인들의 저술을 모으려 했다고 한다. 그 책에 들어갈 목록의 일부가 위의 <변증설>에 실려 있다. 물론 책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실제 이런 작업을 수행한 사람도 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걸려들어 시험조로 처벌을 받은 유일한 인물, 그러나 끝내 문체를 고치지 않았던 이옥(李鈺)의 절친 김려는 이옥의 작품을 거두어 모았다. 곧 그가 엮은 <담정총서(潭庭叢書)>에 이옥의 작품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것이다. <담정총서>의 ‘총서’ 역시 중국의 ‘총서’를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데 김려가 엮은 총서가 <담정총서>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조가 남긴 필기류 산문을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140권, 70책), <창가루외사(倉可樓外史)>(책수 미상), <광사(廣史)>(200책) 등으로 엮었다.

아마도 김려는 조선에 존재하는 모든 필기류 산문을 집대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고관외사>와 <창가루외사>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광사>는 일제강점기 시라토리 야스키치(白鳥安吉)에 의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관동대지진 때 재가 되고 말았다. 저주받을 일제여!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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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는 만리장성 같은 책이라, 도서관이 아니면 소장할 수 없다. 그런데 도서관에 소장된 것이라 해도 이용하기는 무척 어렵다. 왜냐? 어떤 작가의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색인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색인은 한자의 배열 방법이 한국과 달라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용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이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나 하나만이 아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으면 어떤 사람이 해결책을 낸다.

김쟁원이란 분은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 <사고전서 한글색인집>을 엮는다. 이 책을 나침반 삼아 저 만리장성에서 특정한 벽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만 <사고전서>가 디지털화되고 나서는 이 색인집의 위력도 사실 거의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조 이후 즉 18세기 후기 이후 조선 사람들은 <사고전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수입이 되지 않았으니, 아예 몰랐던 것인가? 이 물음은 <사고전서>의 이용에 편의를 제공하는 책과 또 관계가 있다.

정조 때 그 존재가 알려진 <사고전서>는 조선조 말까지 수입되지 않았다. 물론 <사고전서> 중 활자화된 극히 일부의 책은 수입되었지만, 그것으로 <사고전서> 전체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의 유수한 지식인들은 <사고전서>에 어떤 책이 실려 있는지는 알았다. <사고전서>가 워낙 거질의 책이다 보니, 그 책을 소개한 책이 또 있었던 것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와 <사고전서간명목록(四庫全書簡明目錄)>이란 책이다.

<사고전서>에 실린 책은 맨 앞부분에 ‘제요(提要)’가 있다. 곧 <사고전서>의 편찬자가 그 책의 저자, 의의, 가치, 이본 등에 대해서 해설한 것이다. 이를테면 요즘의 해제다. 이 제요만을 모은 책이 곧 <사고전서총목제요>다. 그런데 이 책 자체도 200권의 거질이다. 이것을 영인한 책도 있는데, 책은 불과 2권이지만 모두 1800페이지쯤 된다. 그런데 한 면에 원본의 10면 정도를 축소해서 집어넣었으니, 원본의 면수는 약 1만8000면쯤 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총목제요>조차 쉽게 볼 수 있는 책이 아니고 또 보기도 불편하다. 어디에 어떤 책의 ‘제요’가 실려 있는지도 쉽게 알 수 없다(현재 이 책의 영인본 뒤에는 검색할 수 있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색인이 붙어 있다). 이런 문제로 인해 따로 만든 것이 <사고전서간명목록>이다. 이것은 <총목제요>보다 훨씬 간략한 정보만을 담고 있다.



<총목제요>는 18세기 말 이후 조선에 아주 드문 책이었다. <총목제요>는 19세기의 실학자 서유구(1764~1845)가 숙부인 서형수에게 보내는 편지에 한 번 이름이 보일 뿐이다. 아마도 이 거질의 책을 소장한 사람은 아주 드물었을 것이다. <간명목록>은 상당히 많이 수입된 것 같다. 이규경의 <사고전서변증설(四庫全書辨證說)>에 의하면, 자신이 아는 것만으로도 서너 집은 된다는 것이었다. 정조가 총애했던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은 <서사고전서간명목록후(書四庫全書簡明目錄後)>라는 글에서 <간명목록>을 읽고 <사고전서>에 실린 저작들이 주자학에 반하는 성격을 띤다고 거친 목소리로 성토했으니, 그는 <사고전서>를 편찬한 주축들이 무언가 문제 있는 지식인임을 눈치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강남의 고증학자였음은 몰랐을 것이다.

<사고전서>는 한국학이나 동양학을 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축복이다. 과학사 분야를 보면, 마테오 리치 이후 서양인 선교사들이 북경에 와서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 천주교 등의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하는데, 이 책들이 조선후기 특히 18세기에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들이 조선후기 지식계와 사상계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천주교 신자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도 결국 이 서적들 때문이고, 신유사옥도 이 책들의 연장에 있다. 홍대용(洪大容)이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주장한 지전설(地轉說)도 모두 서양한역서와 유관한 것이다. 좀 더 나가자면 최한기(崔漢綺)의 온갖 저작도 한역서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상당히 곤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쉽게 말해 홍대용이 읽었던 서양한역서, 특히 그중 천문학서를 읽어보아야 홍대용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짐작할 것이 아닌가. 과거에는 이런 책들을 보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중국 대륙은 ‘중공’이었으니 오갈 수 없었고, 대만으로는 갈 수는 있었지만 해외여행 자체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알아주지도 않는 희귀한 분야의 연구에 필요한 서양한역서를 구하기 위해(그것이 대만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대만을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사고전서>는 그런 불편을 덜어주었다. <사고전서>에는 중요한 한역서학서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젠 자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볼 수가 없었다는 소리를 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나 역시 근래에 <사고전서>의 서양과학서를 볼 기회가 있었다. 사실 피하고 싶었지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리정온(數理精蘊)>이란 책이다. 이것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명으로 엮은 수학책이다. 마테오 리치 이후로 서양의 수학서가 한문으로 꽤 많이 번역되었는데, 그 최종판이 곧 <수리정온>이다. 이 책은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삼각비(삼각함수) 방정식 등을 소개하고 있다. 더 이상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문적인 것이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이 책을 검토해서 특정한 부분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거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강산이 세 번 정도 바뀌었다. 한문으로 쓴 기하학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수포자(수학포기자)는 아니었지만, 원래 오수자(수학증오자)였던 나로서는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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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말이 났으니 <사고전서(四庫全書)>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보자. 정조는 <사고전서>를 구하려다 <고금도서집성>을 구입했다. 정조가 어떻게 <사고전서>의 존재를 알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과연 <사고전서>의 규모를 알았는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사고전서>는 운반하기조차 쉽지 않은 거창한 총서이기 때문이다.

한 질의 <사고전서>는 그 자체로 도서관이다. 지금 영인본 <사고전서>에는 ‘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라는 이름이 책 앞에 붙어 있는데, 문연각이란 <사고전서>를 보관했던 건물이다. 엄청나게 큰 건물이니, 그 자체로 도서관인 것이다. <사고전서>가 얼마나 대단한 총서인가는 그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수록된 책은 약 3500종, 권수로는 8만권쯤 된다. 1741년 천하의 책을 모두 모으라는 건륭제의 명령이 내려졌고 1771년 그 작업을 담당할 관청인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이 만들어졌다. 중국 천하의 책을 북경으로 옮기고 그것을 읽고 <사고전서>에 넣을지 말지를 판단하고, 넣을 책을 베끼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 벌이 완성된 것은 1781년이었다. 앞서 정조가 <사고전서>를 구입하고자 사신을 보냈던 때가 1776년이니,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였다. 이어 열하(熱河)의 문진각(文津閣), 북경 원명원(圓明園)의 문원각(文源閣), 자금성의 문연각, 심양의 문소각(文溯閣)에 간직한 4벌, 그리고 민간의 3벌 등 모두 7벌이 만들어졌다.

이런 거창한 사업의 배경은 단 한 가지로 압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거대한 총서의 편집 의도를 헤아리기 바빴다. 무엇보다 청이 한인을 지배하게 되자, 한인들의 사상을 검열하기 위해 이 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그 결과 청 체제에 저촉이 될 만한 책들은 모두 솎아내 따로 목록을 만들었으니, 역시 설득력 있는 견해다. 한편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한인 지식인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거창한 지식사업을 벌였다는 견해도 있다. 지식인이란 책을 주어 놀게 하면 정신을 못 차리는 법이 아니던가. 수많은 책을 읽고 베끼는 과정에서 무슨 딴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사고전서> 이면에는 강남에서 발달한 고증학이 있다. 고증학자가 북경으로 진출해 거창한 총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양휘웅 옮김, 생각의나무, 2009)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궁금하면 이 책을 보시라. 어쨌거나 <사고전서>는 그것이 청인의 명령에 의한 것이든, 사상 통제의 결과물이든 현재 중국을 대표할 만한 거창한 문화재가 되었다.




내가 <사고전서>를 처음 본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서다. 연구원 쪽이 대만과 어떤 협정을 맺었는지 중국 책을 잔뜩 기증받았는데, 거기에 <사고전서>가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사이즈의 영인본이 서가를 한없이 채우고 있었다. 그 서가 앞에서 나는 문득 가보지도 않은 만리장성을 상상했다. 시간이 흐른 뒤 만리장성 위에 섰을 때 나는 다시 <사고전서>를 떠올렸고 나의 상상력이 그리 허망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사고전서>는 그런 책이다.

아무리 광적인 독서가라 할지라도 <사고전서> 전체를 읽을 수는 없다. 또한 전공자가 아니라면, 어지간한 애서가라 할지라도 <사고전서>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한문으로 쓰인 데다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도 많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자처럼 전공이 한문학이면 이 책을 정말 불가피하게 보아야 할 경우가 생긴다. 십수년 전 어떤 책을 집필하고 있을 때다. 명나라 문인 왕세정의 문집을 볼 필요가 있었다. 그가 남긴 글 속에서 어떤 어휘를 찾고, 그 어휘가 담긴 글을 찾아 읽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는 책을 쓸 수가 없었다. 왕세정이 남긴 글을 읽어보면 될 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게 간단치 않다.

왕세정은 저술을 많이 남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문학, 비평, 예술,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엄청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을 소개한 책이 문고본 1권이다. <사고전서> 외에 이 사람의 문집을 볼 수 있는 데가 없다. 도서관에 가서 확인했더니 끔찍한 양이었다. 열댓 권이나 되는 무거운 책을 혼자 들고 올 수가 없어 학생들의 손을 빌려 겨우 연구실로 끌고 왔다. 이제부터 보는 것이 일이다. 하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가도 내가 찾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약 2만면을 세 번이나 훑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없었다. 물론 헛수고만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왕세정에 대해 꽤나 많이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책을 내고 난 뒤다. <사고전서>가 디지털화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즉시 구해서 검색해 보니, 내가 원했던 바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와 관련해 다시 떠오른 생각! 책을 읽으며 내가 원하는 내용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 <사고전서>는 어마어마한 책이다 보니, 내가 찾고자 하는 책이 영인본 몇 권에 실려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도 일이었다. 어떤 분이 노고를 거듭해 <사고전서>에서 책을 찾는 색인을 만들었고 그것을 이용했지만, 그 책이 나오기 전에는 책 자체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사고전서>의 디지털화로 이제 <사고전서>를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많은 자료가 검색된다는 데 있다. 이게 연구자에게 엄청난 작업량을 던져준다. 또한 검색된 자료는 원래의 컨텍스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어떤 맥락에 있는 자료인 줄을 모른다. 그러니 어떨 때는 <사고전서>가 한국에 없던 시절, 디지털화하지 않았던 시절의 책 읽기의 우매한 노동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곤 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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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19세기의 ‘자매문기(自賣文記)’란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부모의 장례를 치르느라 빌려 쓴 돈을 갚기 위해 자신과 딸을 얼마의 돈을 받고 누구에게 노비로 판다는 문서였다. 이 문서를 본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람이 자신을 팔다니! 또 부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빚을 낼 수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관(冠)·혼(婚)·상(喪)·제(祭) 등 유가의 의례(儀禮)가 산 사람을 노비로 만들 정도로 압력이 되었던 사회가 눈에 선연히 보이는 듯했다. 도대체 사람이 예를 위해 존재하는가, 예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고문서 중에 ‘고풍(古風)’이란 것이 있다. 조선시대에 중앙에서 지방으로 가는 현감·군수 등 지방관의 자리는 360개쯤 된다. 그들이 발령을 받을 때 대궐 안에 있는 발령에 관계된 문서를 꾸민 말단 관료들에게 팁을 주는 것이 관례다. ‘고풍’이란 문서는 그 돈을 보내고 받은 영수증이다. 지방관은 쉴 새 없이 교체되니, 말단 관료들은 지방관보다 수입이 짭짤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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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렇게 돈을 보낸 지방관들은 부임 뒤 돈을 벌충하기 위해 틀림없이 백성을 쥐어짰을 것이다. 이처럼 한 장의 고문서는 다른 어떤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정확한 사회상을 온전히 드러낸다.

조선은 문서의 나라였다. 토지문서, 호적문서, 관청 간의 행정문서 등 국가 경영은 문서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지금 엄청나게 많은 문서가 남아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대학이나 연구기관, 예컨대 한국학중앙연구원 같은 곳에서 열심히 모으고 자료집을 내기도 하지만, 아마 그것은 실재했던 고문서의 100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고문서의 99%는 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의 도서관은 고문서를 풍부하게 소장하고 있고, 또 그런 고문서만 소장·관리하는 기관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그런 고문서만을 모아서 제공하는 기관이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학생들을 데리고 가을이면 답사를 간다. 졸업할 때까지 3차례 참여해야 하고 돌아오면 보고서를 써서 내야 학점이 나간다. 전국을 4권역으로 나누어 다니니,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면 어지간한 유적지는 거의 보는 셈이다.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도 즐겨 찾는 곳이다. 18세기 말부터 조선을 흔든 천주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 배론으로 가서 황사영(黃嗣永)이 숨어 ‘백서(帛書)’를 쓴 곳을 보았다. ‘백서’는 비단에 쓴 글이다. ‘백서’ 복제본을 파는가 싶어 물었으나 없었다. 예전에 샀던 복제본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다시 구입하려 했던 것이다.




‘백서’의 내용과 중요성은 여기서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관심이 있는 것은 ‘백서’가 발견된 내력이다. ‘백서’는 원래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문초하던 관서인 의금부(義禁府)에 있던 것이다. 황사영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기에 ‘백서’ 역시 증거물로 의금부에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1894년 갑오경장으로 조선의 관제가 완전히 바뀌자 당연히 의금부도 없어졌고, 의금부 문서도 소용없는 물건이 되었다. 그래서 문서를 폐기하던 중 좀 유별난 문서가 하나 보였다. 곧 ‘백서’다. 이것이 결국 천주교 관계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결국은 로마교황청까지 흘러갔다.

고문서가 허망하게 폐기된 것은 의금부만이 아니었다. 전근대의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고, 국가와 사회의 제도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었으니 과거 관청의 문서들이야말로 한 푼어치의 값도 없는 것이었다. 폐지로 팔린들 누구 하나 아까워하지 않았다. 호적, 토지문서 등 사회경제사의 기본 자료가 되는 문서들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 날 사라지고 만 것이다. 조선이 식민지가 되지 않고 국민국가로의 전환이 순탄하게 이루어졌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실제 일어나고 만 것이다.

또 광복이 되고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남은 문서와 전적은 제대로 보존될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단은 전쟁을 낳았고, 그 전쟁은 문서와 전적에 거대한 재앙이 되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던 곳을 탈출하는 판에 어찌 책이며 낡은 문서를 챙긴단 말인가. 피란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문서며 책이 모두 사라졌다. 1910년 식민지가 되었을 때보다 더한 재앙이었다. 이어지는 세월 역시 만만치 않았다. 1950년대, 1960년대 먹고살기 팍팍한 시절 책은 뒷전이었다. 수많은 책과 문서가 종이 재생공장으로 사라진 것이다.

서울의 모 대학 도서관에 기생관안(妓生官案)이란 한 쪽짜리 문서가 있다. 어떤 고을의 기생 이름을 모아놓은 문서였다. 지방관아에서 기녀를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 같았다. 평소 여성사에 관심이 있기에 이 문서가 보고 싶었다. 그 대학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에 중간에 사람을 넣어 문서를 복사하려 했지만, 뭐 귀중본이라나 뭐라나 안 된다고 했다. 귀찮은 것이겠지! 또 그게 귀중본인 이유도 모르겠지! 이런 거절은 워낙 많이 당해본 터라, 별로 섭섭하지도 않았다.

요즘 말끝마다 문화 콘텐츠니 콘텐츠 사업이니 하는데 정작 그 결과물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만, 실상 많은 사업은 그냥 돈 나눠먹기 경연장 같다. 엉뚱한 곳에 나라 예산 퍼붓지 말고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고문서나 한곳에 모아 분류하고, 스캔해서 인터넷에 올려주면 좋겠다.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말이다. 그런 작업이 선행되어야 좋은 문화 콘텐츠가 개발될 것이 아닌가.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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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개항 이후 근대가 시작되면서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전근대의 학문과 사상에서 찾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전근대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에는 ‘구학(舊學)’이라고 불렀다. 구학을 버리고 근대적 지식과 사상을 배워야 하는 것이 시대의 책무가 되었다.

신학이 필연이라면 구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이지기도 하였다. 차분히 정리할 여유가 없었다. 대세는 신학이었고 구학은 조선을 정체시킨 주범으로 매도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구학을 담은 서적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또 한편 일본 등 외국으로 반출되었던 것이다.

구한말의 우국적 계몽신문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12월18일·19일·20일 3일에 걸쳐 ‘구서간행론(舊書刊行論)’이란 사설을 실어 고서를 수습, 보존하는 한편, 가치 있는 구서적을 간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글은 신채호가 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글의 서두에서 서적이란 한 나라의 인심, 풍속, 정치, 실업, 문화, 무력을 산출하는 ‘생식기’이며 역대 성현, 영웅, 고인(高人), 지사, 충신, 의협을 본떠서 모사한 ‘사진첩’으로 정의하고, 영국의 부와 독일의 강함을 만든 것은 금전과 광산, 창과 대포가 아닌 서적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서적을 간행, 광포(廣布)하는 사람은 ‘일대 공신’이다. 따라서 신서적을 광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구서적을 광포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신서적이 출현하려면 구서적을 수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 필요한 신서적이란 무엇인가. “반드시 한국의 풍속과 학술에 있어서 고유한 특질을 발휘하며, 서구에서 전래된 새 이상, 새 학설을 조입(調入)하여 국민의 심리를 활현(活現)하는 것”이 그것이다. 외국의 신서적을 수입하기도 바쁜데 왜 구서를 수습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신서적을 만들기 위한 토대를 이루는 것이 바로 구서적이기 때문이다. 또 외국의 신서적은 오늘이 아니라도 수입할 수 있지만, 구서는 오늘 수습하지 않으면 뒷날 다시 수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자신의 판단으로는 한국은 출판의 주체가 전할 만한 서적은 출판해서 전하지 않고, 전할 필요가 없는 책만 출판해 전했기 때문에 한국의 서적계가 빈약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그 이유 다섯 가지를 든다. 첫째, 학계의 독재. 주자학에 어긋나는 사상을 이단사설(異端邪說),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고, 저자를 죽이고 자손을 금고(禁錮)했기에 새 진리가 있어도 외부로 공간하지 못했다. 둘째, 가족주의. 자신의 직계 선조가 아닐 경우 아무리 훌륭한 저작이 있어도 간행하지 않는다. 셋째, 중국 숭배주의. 본국의 좋은 서적이 있어도 간행하지 않는다. 넷째, 맹목적 고인 추수주의. 고인을 따르기만 하므로 새로운 학설이 나온들 책으로 간행하지 않는다. 다섯째,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발명한 것이지만, 저작권의 개념이 없어 출판의 상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저작은 초고로만 남고 간행되지 않았다. 이상의 다섯 가지 이유로 전할 만한 한국의 저작이 거의 멸종 지경에 이르렀다.

신채호는 박지원의 <연암집>, 정약용의 <여유당전집>,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조야집요(朝野輯要)> 등이 여전히 초본의 상태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자신이 우연히 본 책으로 이중환의 <택리지>, 최강(崔岡)이란 사람이 소개한 ‘삼국 이래 외국을 물리친 명장의 사적을 상세히 기록한’ <이십사걸전(二十四傑傳)>, 남장희(南章熙)란 사람이 소장한 한국의 고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등의 지도를 그린 산수명화 2권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간행된 서적도 너무나 희소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징비록>, <동국이상국집>은 도쿄의 서사(書肆)에서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만 서울에서는 1, 2종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구서적의 수집가 역시 일본인이다. 경화세족(京華世族) 가문에서는 신서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구서적을 경시, 천시하여 ‘구름’처럼 팔아먹고 있고, 그 책이 서점에 나오면 즉시 구입하는 자는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놀랍고 애석한 바는 이런 책이 서포에 나온 뒤에 한국이 사서 보는 경우는 절대로 없고, 저 시끌벅적 팔아치우는 사람은 대판아(大阪兒)가 아니면 살마객(薩摩客)이며, 견양씨(犬養氏)가 아니면 반총랑(飯塚郞)이라, 무릇 한국 역사 및 선철(先哲)의 유집(遺集)이라 하면, 한 권 좀 먹은 책에 황금을 어지러이 던지니, 그런즉 몇 년을 지나면 한국의 문헌은 모두 일본인의 손바닥으로 들어갈 것이니, 오호라! 오사카(大阪)와 사쓰마(薩摩)의 일본인 수중으로 한국의 구서적이 넘어간다. 한국의 서적이 외국으로 모두 건너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신채호는 그 결과 후세의 한국인은 선민(先民)을 우러러 존경할 수도, 조국을 존중할 수도, ‘독립의 자존심’을 만들 수 없으리라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 구서를 보전하여 후인에게 물려주는 사람은 곧 일대의 명성(明星)이며 만세의 목탁”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 일을 할 사람은 학부(學部)의 술에 취해 꿈꾸는 듯한 관리도 아니고, 귀족 가문의 비루한 사내도 아닌 각처의 서점 주인이고, 그들이 구서를 수습하여 유용한 신서를 간행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앞날에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다. “금일에 구서가 죄다 없어지면 4000년 문명의 땅을 쓴 듯 없어지리니, 급급하다, 구서의 보존의 도(道)여!” 하지만 신채호의 열변에도 수많은 책이 일본으로 흘러나갔던 사정은 이미 앞서 말한 바 있다. 가슴이 쓰리구나!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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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이 지면에서 일제의 조선 책 모으기에 대해 간단히 썼는데, 검토해야 할 자료가 더 있다. 일단 다음 자료를 읽어보자. ‘촌구(村句)씨의 선친 경성(京城) 수서(蒐書)항’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급히 귀가하여 여장을 차리고, 있는 돈을 모두 가지고 한걸음에 경성에 왔다.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인이 경영하는 ‘고본옥(古本屋)’을 내리 훑었다. 촌구씨가 착목(着目)한 것은 주로 고간(古刊) 당본(唐本)이었다. 그 가운데는 송판(宋版)의 <육신주문선(六臣註文選)>이 있었다. 이러한 것에는 조선의 ‘고본옥’은 전연 눈을 뜨지 못하였는지 61책 송판이 겨우 3원 남짓. 이 금액으로 입수했으니 꿈같은 이야기이다. 당본의 옛것은 거의 1책 6전 정도로 살 수 있었고, 조선본보다 비교적 비쌌다.”

촌구씨는 이들 송판이나 원판(元版)의 귀중본을 가지고 경성을 떠나 동경으로 돌아왔다. 동경에서는 <육신주문선>이 천 몇 백 원에 팔렸고, 세상에 볼 수 없었던 고판의 희귀서도 곧장 팔렸다. 이전보다 더 풍부한 자금을 준비해 가지고 재차 도선(渡鮮)하여 경성의 어느 한 서적상 재고품을 전부 사자고 할 정도의 배포있는 흥정을 했다. 그런데 만철(滿鐵)이 그 일을 듣고 “조선본은 만철에서 수집하고 싶으니 일절 손을 대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당본은 그대에게 일임하고 만철에서 일절 손을 대지 않겠다”고 타협을 해왔기에 응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촌구의 부친은 조선에 2진으로 진출한 고서상이었다. 이 사람은 고서를 팔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조선의 고서를 사기 위해 건너왔다. 이 자가 노린 것은 ‘고간 당본’, 곧 조선에 있는 중국본 서적이었다. 곧 그것은 당나라 때 판본이 아니라, 조선이 중국에서 수입한 중국 간행 서적을 말한다.

촌구의 아버지가 송판 <육신주문선>을 구입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대의 서적, 곧 송판본은 장서가들이 최고의 것으로 꼽는다. 교정과 글씨, 종이 모두 최고로 꼽는 것이다. 오죽 했으면 송판본 책을 손에 넣기 위해 애첩을 넘겨준 사람까지 있을까? 고려는 송과의 무역이 활발했으니 적지 않은 송판본이 수입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조선조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송판 자체에 대해 별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었다. 촌구의 아버지가 조선의 고서점이 전혀 그런 사실에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하면서 <육신주문선>을 3원에 사서 동경에서 천 몇 백 원에 팔았다고 하니, 그 당시 일본 고서상들에게 조선은 그야말로 ‘엘도라도’였고,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육신주문선> 등으로 500~600배나 되는 이문을 남긴 촌구의 아버지는 또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와서 한 서점의 재고 전체를 사려고 흥정을 했는데, 그때 만철의 만류로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만철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 ‘만주선후협약(滿洲善后協約)’에 근거해서 러시아가 남만주에서 가진 일체의 권리를 계승하고, 1907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해 러시아가 경영하던 철도의 일부, 곧 장춘(長春)에서 대련(大連)에 이르는 철도를 경영했다. 만철은 워낙 규모가 크고 방대한 사업을 벌여 중국의 동북 지역에 군림한 사실상의 식민지 국가였다.

1907년 만철 설립 당시 이사였던 동국제국대학교 교수 강송삼태랑(岡松參太郞)이 만철도조사부 도서실을 설립했는데, 여기서 중국의 고전, 일본어 도서, 서양서, 러시아어 자료를 정상적 구입(값을 치르고 구입하는 것), 특별 구입(계획적인 프로그램에 의한 구입), 기증, 권력을 이용한 강제적 ‘접수’ 등으로 광범위하게 축적하기 시작했다. 만철의 도서실은 1922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대련도서관(南滿洲鐵道株式會社大連圖書館)’이란 명칭을 얻었다. 만철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거기에는 방대한 규모의 한국 관계 자료도 남아 있다(이상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 관련 ‘만철(滿鐵)’ 자료목록집). 만철이 조선본을 수집하려 한다는 것은 이런 맥락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만철 같은 거대한 기관뿐만 아니라 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 같은 자는 권력을 이용해 책과 서화를 긁어모아 일본으로 반출했고,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같은 학자, 아사미 린따로(淺見倫太郞) 같은 변호사도 조선에서 책을 긁어모았다. 이들의 책은 모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마에마 교사쿠의 책은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의 서고에 들어가 있고,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책은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다. 아사미 린따로의 책은 뒷날 미쓰이(三井)물산에 넘겨졌고, 미쓰이 쪽은 다시 미국 버클리대학에 팔았다. 한국 학자들이 요즘도 가끔 방문하는 곳이다.

2006년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도야마(富山)대학 교수가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란 책을 냈다. 일본에 있는 한국본 서적을 모두 모아서 목록을 만든 것이다. 물론 작업의 결과가 모두 출판된 것은 아니다. 경(經)·사(史)·자(子)·집(集) 중 일본에 있는 모든 조선 문집의 목차를 정리한 것이다.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페이지의 거창한 책이다. 전체가 간행된다면 일본에 있는 한국 책의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목록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 학자의 집념도 알 만하다. 대한민국 학자가 이런 ‘짓’을 하면 연구성과 0%에 해당한다. 아마도 무능한 교수로 낙인이 찍혀 쫓겨날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 더하자면, 우리나라에 있는 고서의 전체 규모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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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책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일본에는 엄청난 분량의 한국 책이 있다. 천리대학의 책이 좋은 예다. 2006년 천리대학을 방문해 도서관 서고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방대한 분량의 한국 책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조선학’을 연구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수집본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도서관 측에서는 우리 방문객들에게 미리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지만, 정작 우리 측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책을 신청하는 바람에 귀중본은 보지 못했다. 이 도서관에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여 달랬더니, 보여준단다. 유리장 안에 얌전히 놓여 있는 ‘몽유도원도’를 보고 있자니, 옆에서 설명이 따른다. 원본은 아니고 복제본이란다. 다만 이 복제본도 워낙 정교해 원본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천리대학 도서관을 보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한국 고서가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하고 재삼 생각하게 되었다. 국회도서관에서 1968년에 낸 <한국고서종합목록>이 있는데, 한국과 일본, 미국 등에 있는 고서를 조사해 모은 책이다. 물론 실사를 한 것은 아니고, 기존의 도서목록을 종합한 것이다. 목록을 보면 일본에 건너간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데 놀라게 된다.

일본에 건너간 책에는 첫째 정상적 루트를 통한 것이 있다. 예컨대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 정부에서 하사한 것이 그것이다. 현재 일본 각지에 소장되어 있는 ‘대장경’을 위시한 불경은 그런 식으로 건너간 것이 대부분이다.

둘째, 임진왜란 때 약탈한 것이다. 전쟁 중에 허다한 책을 약탈해 가져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 궁내성 도서료(圖書寮)에 보관되어 있는 국보급의 조선 책들은 왜장 부전수가(浮田秀家)가 약탈해간 것이라고 한다.

셋째, 일제강점기에 반출한 책이 있다. 먼저 국가 권력을 동원해 반출한 것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의 경우는 그냥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했다. 확실한 약탈이다. 또 대금을 치르고 구입한 경우다. 일정한 금액을 지불했다고 하지만, 물정 어두운 조선 사람의 눈을 속여 책을 쓸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어떻게 조선의 책들을 헐값에 쓸어 담았는지 다음 자료를 보자. 일본인이 직접 내뱉은 말이다.



“나는 고본(古本) 매입의 목적으로 조선에 건너오기를 전후 두 차례 하였다. 첫 번째는 1912년 3월15일부터 27일간, 두 번째는 1923년 4월부터 90일간이다. 고본옥(古本屋)은 조선에 고본 매입을 위해 두 차례 다녀간 것. 1903년이 명고옥(名古屋)의 기중당(其中堂) 주인 삼포겸조(三浦兼助)가 선봉이고, 동경의 촌구(村口) 선친이 2진, 동경의 기부귀길(磯部龜吉)이 3진이고 그리고 고본옥이 넷째로 조선옥을 다녀간 것이다.

기중당의 <고려사(高麗史)> 매입 과정은 이렇다. 경성에 도착한 지 4일째 되는 날 중개인 고씨(高氏)가 와서 <고려사> 외 수점을 살 것을 권한다. 이 <고려사>는 대형의 호장본(豪裝本). 전 73책으로 500년이나 이전의 고려시대의 출판이다. 지금은 내각(內閣)에도, 타 대신가(大臣家)에도 없는 한국 무이(無二)의 진본(珍本)인 때문이라고 중개인은 바람을 넣는다.

그러나 방매인(放賣人)의 공능(功能)을 신용하기도 어렵거니와 동국의 학자 2, 3인에게 들어도 누구나 <고려사>는 희유(稀有)함을 보증하는 바로 입수하기 어려운 물품이라고 한결같은 회답에는 의의가 없다. 책 그 자체는 이미 보아 만족한 것, <고려사>를 다루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시가를 모르고, 73책의 고본이 250원(당시 쌀 20석 정도)이란 의외의 대금. (중략) 장사를 떠나 무조건 <고려사>를 사자. 대금에 불구하고 <고려사> 외 40, 50점 구입.

한남서림(翰南書林) 주인 백두용(白斗鏞)은 학식 있고 풍채 있는 학자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포은집(圃隱集)> 2책 1원50전, <이퇴계전집(李退溪全集)> 30책 18원 외 41책. 교동의 일호서림(一乎書林)에서 <역대사론(歷代史論)> 10책 3원50전, <두율비해(杜律批解)> 14책 5원60전 외 15책. 그리고 파고다공원 앞 광학서포(廣學書鋪)에서 <호씨춘추(胡氏春秋)> 10책 3원10전, <청음집(淸陰集)> 10책 4원50전 외 32책을 매입.

한성서화관에서 <구봉집(龜峯集)> 5책 1원75전. 한일서림(翰一書林), 모 고물점(古物店), 모 서림 등에서 각각 <공자통기(孔子通紀)>(70전) 샀다. 이밖에 <염락풍아(濂洛風雅)>(70전), <초사(楚辭)>(4책, 1원), <송재시집(松齋詩集)>(35전), <성령집(性靈集)>, <사명집(四溟集)>, <이태백집>, <정재집(定齋集)>, <풍고집(楓皐集)>, <백사집(白沙集)>, <두율방운(杜律方韻)>, <후산집(後山集)>’ 등을 사 가지고 귀향하였다.”

개인이 아니라 일본의 고서상들이 1903년부터 조선으로 건너와서 책을 구매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책을 수호하던 조선의 사족 체제는 끝장이 났고 사족 체제하에서 유의미한 책은 청산해야 할 유산이 되어 있었다. 과거의 체제, 문화를 지키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혹은 식민지가 되었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고, 이것은 과거의 것을 몰아서 폐기 처분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책과 문서는 이렇게 해서 헐값에 일본으로 건너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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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는 정말 방대한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자료가 허다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화춘정변증설(漢화春情辨證說)>, <화동기원변증설(華東妓源辨證說)>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동양의 포르노그래피 곧 춘화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담고 있다. 전자는 남녀의 성행위 조각상인 ‘춘의(春意)’가 인조 때 처음 조선에 수입되었다는 사실, 후자는 북경에서 수입된 춘화를 사대부들이 즐겨 감상한다는 사실 등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에 기반을 둬 윤리를 제일의적 가치로 삼았던 조선 사족사회의 이면(아니 지배계급의 리얼리티)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조선 지식인들이 접했을 가장 노골적인 소설인 <금병매>의 수입에 관한 자료도 이 책의 <소설변증설>이 유일하다. 약간 소개하자면 왕세정(王世貞)이 <금병매>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무근이라는 것, 그리고 조선에는 영조 을미년(영조11, 1775)에 영성부위(永城副尉) 신수(申綏)가 역관 이심(李諶)에게 북경에 가는 길에 은 1냥을 주어 사오게 했다고 하는 것도 <소설변증설>에만 보이는 것이다.

부위는 원래 군주(郡主)의 남편으로 의빈부의 정3품 벼슬이다. 군주는 왕세자와 정실 사이에서 난 딸이니, 결국 임금의 사위쯤 된다. 이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는 수가 많은 법이니, <금병매>의 소문을 듣고 구입하게 한 것도 대충 짐작할 만한 일이다. 신수가 구입한 <금병매>는 어떤 판본인지는 모르지만 20책이고 판각이 아주 정교했다고 한다.

<금병매>는 사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 나 역시 읽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일에 쫓겨 읽을 짬을 내지 못하였다. 시간이 잔뜩 흘러 대학에 자리를 잡고 난 뒤 1993년인가 청년사 간행본으로 이 책의 서두를 읽다가 바쁜 일로 덮고 말았다. 뒤에 2003년에 안식년을 처음 얻었을 때 비로소 이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도판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는 남녀의 성행위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조선후기의 독자들 역시 이 도판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최음제와 섹스토이와 같은 것들도 있고, 동성애까지도 등장한다. 그러니 이 책은 골방에서는 열렬한(?) 애독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공식적인 비평의 자리에서는 결코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소설변증설>은 비판적인 평가로 청(淸)의 지식인 신함광(申涵光·1619~1677)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 신함광은 세상 사람들이 <금병매>가 인정(人情)을 잘 묘사한 것이 사마천의 <사기>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차라리 <사기>를 읽지 왜 <금병매>를 읽느냐는 것이다. 신광함을 만날 수 있다면, 한 마디 하고 싶다. “그걸 몰라서 묻느냐?” <금병매>는 도덕군자들에게 음란한 소설로 비난을 받았지만, 그렇다 해서 수준 낮은 포르노소설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사대기서에 끼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명대 지배계급의 타락상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수준 높은 사회소설이다. 신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처럼 진솔하게 드러낸 작품도 없을 것이다.

<금병매>를 읽으면서 한국에 성을 주제로 삼거나, 아니면 제재로 삼는 서사물이 없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없다. 물론 아주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다.

<촌담해이>,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어면순(禦眠楯)>, <어수신화(禦睡新話)> 등의 성을 제재로 삼은 짧은 서사물, 곧 색담(色談)들은 다수 있다. 다만 이 색담들은 대개 사람들 사이에서 구비전승되던 것들을 모은 것인데, 성의 문제를 정색을 하고 정면에서 다룬 것은 아니다. <금병매>와 같은 심각한 비판의식을 내장한 장편의 서사물이 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텍스트들은 다른 차원, 곧 조선조 사람의 성풍속과 성의식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몇 해 전 성균관대학교 안대회 교수가 <북상기(北廂記)>란 한문 희곡 한 편을 번역해 출판했는데, 상당히 ‘음란’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안 교수가 책을 보냈기에 성급한 마음으로 허겁지겁 읽었다. 아, 적잖이 실망이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음란’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사드(D.A.F. Sade) 후작 정도는 아예 상상도 못하겠지만, 적어도 <금병매>급을 기대했는데, <북상기>는 그냥 그저 그랬다. 참고로 말하자면, <북상기>는 <서상기(西廂記)>를 패러디한 것이다. <서상기>는 앵앵(鶯鶯)과 장생(張生)의 연애담을 그린 희곡으로서 중국은 물론 조선에도 널리 읽힌 고전이었다. 하지만 <북상기>는 그런 연애담도 아니다. 물론 <북상기>는 조선시대 기녀제도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있어 반갑기 짝이 없었다.

이야기가 어쩌다 보니,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시작하여 <북상기>까지 왔다. 따져보니 조선시대에는 음란한 소설을 창작하는 ‘음란서생’이 없었던 셈이다. <금병매>도 없고, 사드도 없는 이 역사는 괜찮은 역사인 것인가? 모를 일이다. 덧붙이자면 그런 책이 없는 사회라 해서 결코 정결(貞潔)한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겉으로 정결함을 내세우는 사회야말로 그 이면이 썩고 있을 것이다. 또 따지고 보면 음란은 일반 민중의 것은 아니다. 음란은 음란할 만한 여유가 있는 자들의 것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높은 양반들이 음란의 주체가 된다. 우리의 작가들에게 정중히 부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지배층의 성적 향락과 사치를 사실적으로 다룰 소설을 모쪼록 써서 이 시대의 리얼리즘을 성취해 주었으면 한다. 아마도 그 작품은 이 시대에 대한 충실한 증언이 될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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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지식인, 국어학자였던 권보상(權輔相)은 광교 근처에서 군밤을 사다가 포장지를 유심히 보았다. 뭔가 한자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심상한 종이쪽이 아닌 것 같았다. 군밤장수에게 돈을 치르고 포장지를 모두 사서 당시 조선의 고전을 간행하던 광문회(光文會)로 가져갔다. 광문회는 1910년 최남선이 민족의 고전을 수집하여 간행하고 염가로 보급하기 위해서 세운 단체였다. 당연히 광문회에는 고전에 해박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검토한 결과 군밤 포장지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책의 상당 부분은 이미 망실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 귀중한 책은 광문회에 보관되어 있다가 광문회 해산 때 최남선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본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쪽에서 한 벌을 베껴 소장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주연문장전산고>다.

이 책은 현재 필사본으로만 남아 있지만, 현대식 활자로 간행될 뻔하였다. 이 이야기를 잠시 해 보자. 운정(云丁) 김춘동 선생은 김수항(金壽恒, 1627~1689)의 11세 손으로 서울의 안동김씨 집안 출신이다. 해방 후 고려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의 중요 문헌을 번역한 한학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취(就)하여’란 글에서 자신과 <오주연문장전산고>와의 관계에 대해 소상히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을 읽어보자.

1937년 노구교(蘆溝橋)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938년 조선어 사용금지 일본어 상용, 1940년 창씨개명,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질식할 것만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어 있었던 김춘동은 1940년 설의식(薛義植)과 오문출판사(梧文出版社)를 설립했다. ‘우리 문화의 정리, 보급’이 목적이었다. 사실상 ‘배일(排日)’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용기가 필요한 위험천만한 사업이었다. 출판사를 차리고 간행해야 할 책을 물색했는데, 당시 이원조(李源朝)가 주관하고 있던 대동출판사에서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출판하려고 경성제국대학의 필사본을 다시 필사해 놓고 있었으나 비용 문제로 출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춘동은 값을 치르고 그 필사본을 입수했다. 하지만 그 필사본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김춘동은 한문 실력이 날로 저하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하여 이 책을 교열하고 구두점을 찍어 출판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원문이 엉망이었다. 필사할 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경성제대의 필사본과 대조했지만, 경성제대 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길은 최남선의 소장본과 대조하는 것뿐이었다. 최남선에게 몇 차례 부탁했지만, 책에 대해 인색하기 짝이 없었던 최남선은 ‘광문회에서 보관하고 있던 중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이규경이 읽었던 책의 원본을 경성제대와 보성전문, 연희전문의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교열했고 그 과정에서 능력 부족을 통감한 김춘동 등은 위당 정인보에게 간청해서 같이 혹한·혹서를 무릅쓰고 10책 분량의 구두점을 친 원고를 정리했다.

원고를 정리하던 중 희한한 사건도 있었다. 하루는 이모(李某)란 사람이 최남선이 가지고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의 초고이고, 경상북도 문경에 살고 있는 이규경의 먼 친척이 깨끗이 정리한 정본(正本)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정본을 빌리기는 어렵지만 그 동네를 찾아가 며칠 머물러 오류 많은 사본과 대조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김춘동은 상당한 돈을 건네고 교섭을 부탁했지만 이모는 돈만 받고 사라져 버렸다. 실제 그가 말한 주소지에는 그런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전시체제를 선포하고 노무동원령(勞務動員令)을 내리는 등 한국인을 압박하였다.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키자 1943년 김춘동은 그때까지 정리한 원고를 지형으로 뜨고 후일 간행을 기약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다. 김춘동은 ‘사서연역회(史書衍譯會)’를 만들어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번역하는 데 몰두하면서 설의식과 <오주연문장전산고> 쪽 작업을 계속하기로 하였지만, 설의식은 언론계에 투신하고 자신은 고려대학으로 옮기는 바람에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원래 동아일보 기자였던 설의식은 해방 후 같은 신문의 주필, 부사장을 지냈고, 이어 새한민보를 창간하는 등 언론활동으로 바빴던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 김춘동은 대구로 피란했고 거기서 설의식을 만났다. 설의식은 김춘동을 만나자 눈물을 흘리며 “선생의 노고도, 이 소오(小梧)의 사업도 다 귀어허지(歸於虛地)가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오주연문’이…?” 이것이 그들의 첫 대화였다. 설의식에 의하면 전쟁에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원고도, 지형도 모두 불길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공허감이 두 사람을 눌렀다. 최남선이 갖고 있던 <오주연문장전산고> 역시 전쟁 통에 재가 되고 말았다. 김춘동과 설의식은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간행에 착수하자고 다짐했지만, 설의식은 1954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간행은 영영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1968년 동국문화사에서 경성제국대학 소장본을 대본으로 하여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영인본을 만들었다. 김춘동은 그 오류투성이의 책을 보고 장탄식을 하였다. 1982년 명문당에서 다시 이 책을 영인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일부를 번역해 5책으로 간행했다. 지금은 이규경이 인용했던 모든 책을 샅샅이 찾아 원문을 교열해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이용하는 분들은 김춘동 선생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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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책을 이야기했는데, 사라질 뻔했다가 다시 살아난 책도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 그런 책이다.

먼저 책 제목부터 보자. 이 책 제목은 오주, 연문, 장전, 산고로 읽어야 한다. ‘오주’란 사람이 연문하여, 즉 문장을 부연하여, 장전, 곧 긴 부전지(附箋紙, 쪽지)를 붙인, 산고, 곧 이런저런 글이란 뜻이다. 내친김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읽어보자. 이건 ‘왕, 오천축국, 전’이다. 다섯 천축국에 간 기록이란 뜻이다.

각설하고, 그렇다면 ‘오주’는 누구인가.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다. 이규경이라면 대부분 모를 터이다. 하지만 이덕무(李德懋)의 손자라면 알 것이다. 이덕무는 요즘 ‘책 읽는 바보’로 잘 알려져 초등학생도 다 안다. 이덕무는 알다시피 18세기 후반의 인물로 박지원 그룹의 일원이다. 비록 서파(庶派)여서 관료로 출세는 할 수 없었지만, 서울의 양반사회에서 단정한 처신과 빼어난 문학적 역량으로 유명했고, 정조까지 알아주어 규장각에서 검서관(檢書官)으로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었다. 규장각의 벼슬은 정조 당시 최고로 명예로운 것이었다. 검서관이 잡직관(雜職官)이기는 하지만 역시 최고의 인재를 뽑았다.

이덕무는 치밀한 관찰에서 오는 탁월한 묘사와 섬세한 감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한문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박학으로도 당대에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산문과 박학은 누가 계승했던가? 아들 이광규(李光葵)인가. 이광규 역시 아버지를 이어 검서관을 지냈지만 문학과 학문에 성과를 올린 것 같지는 않다. 그에 관한 기록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광규의 아들, 곧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이 조부의 박학을 계승했다. 산문은 천품이 모자랐던 것인지 소식이 없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가능한 박학 쪽으로 이덕무를 계승한 증거가 바로 <오주연문장전산고>인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60권 60책의 필사본으로 천지편·인사편·경사편(經史篇)·시문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다루고 있는 주제, 곧 항목은 1417개다. 물론 이 책은 온전히 남은 것이 아니다.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상당 부분 망실되었으니, 이규경은 쉽게 말해 평생 1471편을 훨씬 넘는 논문을 쓴 것이다.

이 책의 맨 앞에 실린 글을 보자. ‘십이중천변증설(十二重天辨證說)’이다. ‘십이중천’은 조선후기에 한역 서양서를 통해 소개된, 우주가 모두 12겹으로 되어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구조를 말한다. <십이중천변증설>은 12중천설과 관련된 여러 문헌을 소개하고 그것의 타당성을 따지는 글이다. 이 형식 곧 ‘변증설’은 이 책 전체를 일관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변증설’이란 글 141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곧 ‘변증설’의 집합인 것이다. ‘변증’이란 따지고 증거를 들이댄다는 뜻이다. 아주 좋게 평가한다면 요즘의 논문인 것이다. 예컨대 ‘서사변증설(書肆辨證說)’이란 글을 보자. 서사는 서점이다. 서점이 무엇인지, 조선에 서점이 언제 출현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없어졌는지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 자신이 당대에 인지하거나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주제를 변증의 방식으로 다룬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자료를 다량 포함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金正浩), 19세기 최고의 학자인 최한기(崔漢綺) 등에 대한 정보 역시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19세기 중반까지 북경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최신의 서양지식을 온전히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없는 지식을 조직한 것일 뿐이라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학문적 방식과 주제 설정의 독특함,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정보는 결코 평가절하될 것이 아니다. 이런 박물학적이고 실증적인 지식은 조선조의 전통에서 극히 희귀한 것이다. 알다시피 조선조의 주류 학문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이 다루는 학문 영역은 방대하다. 그것은 인간의 저 미묘한 심성부터 윤리학, 예술학, 문학, 정치학, 경제학, 자연학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포괄한다.

하지만 그것의 주축은 어디까지나 이·기·심·성 등 지극히 추상적 언어로 이루어지는 관념학이다. 자연과 사물, 사회, 문화의 구체성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에 반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바로 그 구체성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규경 역시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의 학문’(名物度數之學)은 ‘성명(性命)과 의리를 주제로 하는 학문’(性命義理之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명물과 도수의 학문’은 18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곧 중국에서 전래된 고증학풍과 서양학의 영향을 제외하고는 이 책을 논할 수 없다.

이 어마어마한 양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쓸 때의 이규경을 상상해 보자. 일생의 시간은 거의 책 읽기에 소모했을 것이다. 친구와 어울려 술을 먹고 꽃놀이를 다니고 시를 짓고 엽관운동을 하는 일은 아마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늘 ‘변증설’의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것이 일이었을 것이다. 자료를 찾고 읽고 분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원고를 쓰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없는 책을 빌리려 다니기도 했을 것이다. 고단한 학자의 길을 외롭게 걸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원래 이 책이 사라질 뻔했다가 다시 살아났고 그 뒤 원본이 사라지고 사본만 남게 된 사연 등을 말하려 했는데, 책을 소개하느라 정작 그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원고를 달리 해서 말하는 수밖에!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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