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강신주 칼럼'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14.04.27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우리는 모두 세월호에 타고 있는 것 아닐까?
  2. 2014.04.13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밀양에도 봄은 찾아오는가?
  3. 2014.03.02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대학 신입생들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4. 2014.02.17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소수성이 긍정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5. 2014.02.03 민주주의를 감당하는 우리의 자세
  6. 2014.01.20 과감히 내닫는 아킬레스가 되자!
  7. 2014.01.06 새해엔 사회적 서정성을 높이자
  8. 2013.12.23 시대착오적 ‘철의 여성’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서글픔
  9. 2013.12.09 종교가 지배하는 나라, 절망에 사로잡힌 나라
  10. 2013.11.25 차라리 복지 정책을 폐기해야
  11. 2013.11.11 [사설]황찬현 후보자, 감사원 독립 지켜낼 자질 갖췄나
  12. 2013.11.11 치사한 사회에서 살 수밖에 없는 치사함
  13. 2013.10.28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이제 우리가 선생님들을 지킬 때다
  14. 2013.10.14 언론인의 새로운 표어, ‘끈덕지고 집요하게’
  15. 2013.09.29 누가 과거의 망령을 불러내는가?
  16. 2013.09.16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해야 할 때 (1)
  17. 2013.09.02 설악산, 여신으로 남을 것인가 매춘부로 만들 것인가
  18. 2013.08.19 누가 창조성과 창의성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가 (1)
  19. 2013.08.05 ‘미래완료 시제’에 갇힌 삶
  20. 2013.07.22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김선우 시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온 것은 4월18일 새벽이었다.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절망으로 가득한, 보는 사람마저 우울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4월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가 섬세하고 여린 그녀의 영혼을 갈래갈래 찢어버린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그녀는 17일 내내 곡기마저 끊었던 것 같다. 수많은 어린 생명들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으니, 어떻게 밥과 물이 입으로 들어오겠는가. 어떻게 붉고 노란 봄꽃과 푸르고 높은 하늘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해소할 길이 없는 슬픔과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분노, 그것이 그녀가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이유일 것이다. 무슨 말로 시인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녀와 통화를 마친 뒤, 한 달 전 광주광역시로 강연을 간 일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오후 2시쯤인가, 김포공항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탔다. 광주에는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강연을 마치고 6시간 뒤쯤 광주공항으로 갔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탑승을 마치고 좌석에 앉았을 때 깜짝 놀랐다. 6시간 전에 나를 광주에 내려준 바로 그 비행기에 다시 탔던 것이다. 내 독자이기도 한 스튜어디스 중 한 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일을 다 마치셨나 봐요.” “예, 이제 올라가려고요. 그런데 광주에 계속 있었던 거예요.” 스튜어디스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그 사이 4번 정도 비행을 했는데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세월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행기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종사와 승무원들의 피로도 피로지만, 그사이에 제대로 비행기 상태를 점검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아마 제대로 안전점검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돌아보면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항공사들이 생겼는가. 저가항공을 표방하는 작은 항공사들이 경쟁적으로 항공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도 치열한 경쟁, 그 전쟁터에 던져진 것이다. 거대 항공사든 소규모 항공사든 더 많은 승객을 더 많은 운항 횟수로 실어 날라야 한다. 신형 비행기보다 중고 비행기를 구매하는 것도 경쟁에서 이기는 하나의 좋은 방법으로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자유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자유가 부여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다. 세월호가 어떻게 서해를 다니게 되었는지 아는가. 2009년 이명박 정권은 선박의 선령 제한을 25년에서 30년으로 완화했다. 당연히 5년 정도 낡은 배를 더 몰 수 있으니, 해운 자본은 더 커다란 이익을 남길 수 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은 이렇게 선박의 선령을 5년 더 늘릴 경우 약 250억원 규모의 경제적 이익이 발생할 거라고 예측했다. 잊지 말자.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서는 우리 서민들의 안전은 일차적인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18년이나 일본에서 사용했던 세월호가 우리 이웃과 아이들을 태운 채 출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선박 수명에 대한 규제를 풀지만 않았다면, 2012년 해운 자본이 ‘나미노우에’라는 낡은 일본 배를 수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이나 그 정권으로부터 규제 완화라는 선물을 받은 자본가에게 인간과 관련된 소중한 가치들은 이윤을 얻으리라는 장밋빛 후광에 가려 뒷전에 처박힐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자본에 날개를 달아주는 규제 완화와 그로부터 촉발되는 자본 간의 경쟁 심화로 실현된다. 간단히 말해 규제가 완화되거나 경쟁 논리가 도입될 때, 우리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행되고 있다고 말하면 된다. 문제는 현 정권에서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멈출 줄 모른다는 데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비극적인 세월호 사건이 있기 1~2주 전에 현 정부가 전방위적인 규제 완화 정책을 천명한 사실을.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출처 :경향DB)



▲ “자본가에 날개 달아준 규제 완화… 서민들의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
신자유주의가 만든 세월호 참사… 대중교통 영역 규제는 강화해야”


최소한 서민들이 이용하는 기차, 비행기, 여객선과 같은 대중교통의 경우 자본의 이득을 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폐기되어야만 한다. 경쟁 심화와 규제 완화가 지속된다면, 언제든지 제2의 세월호가 KTX라는 형식으로 아니면 항공기라는 형식으로 반복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후약방문이지만, 이명박 정권이 자본의 이득이 아니라 서민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 선박의 제한 수명을 25년에서 20년으로 줄였다고 해보자. 과연 세월호 침몰과도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을까.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자본이 2년 동안 사용하려고 18년이나 된 낡은 배를 고가로 수입하려 하겠는가.

탑승객을 버리고 달아난 선장과 선원들은 비겁한 사람들이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득을 위해 승객들의 안전을 도외시하고 선박을 과도하게 개조한 자본가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분노가 세월호와 그 주변 사람들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없었다면 세월호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되는 핵심이니까 말이다. 진심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긍정하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 무고한 학생과 서민들의 목숨을 안타깝게 여긴다면, 현 정권은 사후적 처벌을 강화하는 미봉책이 아니라 자본에 대한 사전적 규제를 강화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현 정권이 규제 완화 정책을 재고하리라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까?

2014년 4월27일 새벽 현재, 세월호 참사로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우리 아이와 이웃들의 수가 115명이다. 그리고 이미 안타까운 주검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수는 187명에 이른다. 10만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사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리고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빌기 위해 안산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 이웃들은 아름답고 착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슬픔과 분노에만 빠져들지는 말자. 지금은 숙고와 결단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인간의 이름으로 폐기되어야만 한다! 세월호 참사가 수많은 비극들의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미 주검으로 돌아왔거나 아직 생사조차 확인할 길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피해 가족들과 김선우 시인처럼 슬픔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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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년이나 되었을까. 중국 한(漢)나라 시절 왕소군(王昭君)이란 궁녀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나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다지 강건하지 않았다. 주변 이민족들, 특히 흉노부족의 무력에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을 정도였다. 왕소군이 흉노부족에 반강제적으로 시집을 간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땅도 물도 낯설기만 한 흉노 땅에서 그녀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젠가 중국으로 돌아가리라 꿈꾸지만, 그 언젠가는 도래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탄식과 절망으로 시들어가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흉노 땅에도 봄은 찾아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서러운 땅에서도 어여쁜 꽃들은 속절없이 피어난다.

화려한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뽐내는 꽃들은 왕소군의 쓸쓸한 마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그녀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담겨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번역해보자. “어찌 대지에 화초가 없으랴만,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들판에 혹은 정원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보니 분명 봄은 찾아오긴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직 깊은 겨울, 찬바람이 휑하니 휘몰아치는 겨울밤이었다. 그녀는 가족을, 친구를, 옷을, 시냇가를, 나무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온기를 제공할 수 있는 게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봄이 왔다고 해도 봄으로 세상이 느껴질 리가 있는가.

왕소군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면, 그녀의 마음에도 봄볕이 찾아들어 봄을 봄으로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도 좋다.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 중 한 사람이라도 찾아온다면, 아니면 고향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라도 누군가가 보내준다면, 아주 잠시지만 그녀의 마음은 봄 햇살에 활짝 핀 봄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왕소군의 겨울처럼 차가운 마음 깊은 곳에 봄을 예감하는 작은 따뜻함이 숨어 있다고. 그녀가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이런 진정한 봄을 예감하는 따뜻함, 혹은 엄동설한이라도 봄을 품고 있는 여린 따뜻함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밀양(密陽)! 그렇다. ‘은밀한 볕’, ‘숨어 있는 따뜻함’! 바로 밀양이다.

왕소군이 흉노 땅에서 시 한 편을 우리에게 던졌듯이, 4월10일 내게 절절한 글 한 편이 밀양에서 올라왔다.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이 보낸 e메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꽃피는 새잎 돋는 좋은 시절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사이 밀양 송전탑 관련하여 뜬금없이 제 분노에 겨워 띄우는 소식들에 더러 황망하시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 저들 권력과 자본, 정확히는 한국전력이 주민들로 하여금 돈으로 전향을 강요하고 서로 싸우게 만드는 이 참담한 폭력은 갈수록 주민들을 옥죄어옵니다. 밀양은 지금 마지막 남은 4개 농성장을 지키는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호소는 단 하나도 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안 그대로 강행할 태세입니다. 물리력으로서만 말입니다.”

이계삼 사무국장의 이어지는 편지는 밀양의 긴박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이제 30개 마을 중에 한전과 합의를 하지 않은 마을은 다섯 곳만 남았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의 유혹과 공권력이 주는 공포감, 한마디로 당근과 채찍으로 한전은 마을 주민들의 연대를 와해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2013년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던 2900여명의 주민 중 이제 농성장을 지키는 주민은 200여명으로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제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전체 주민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수로 전락한 셈이다. 그래서일까, 한전과 경찰 측은 4월13일과 14일에 행정대집행을 공공연히 예고하고 나섰다고 한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출처: 경향DB)



▲ “돈의 유혹과 권력이 주는 공포… 송전탑 반대 주민 갈수록 줄어
인간적인 가치 지키려는 소망… 밀양 어르신에 연대의 손길을”


단순하다. 밀양에 강행되는 송전탑 건설은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와 2호기에서 생산된 전기를 공급하고 수급하려고 송전탑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력 생산과 수급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정부도 송전탑 건설 강행에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다. 송전탑 건설 강행에 자본과 권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자본과 권력은 송전탑 건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지속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재벌이 막대한 이득을 남긴다고 해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현재 200여명으로 축소되었지만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밀양의 어르신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지금 어르신들이 자본과 권력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 굳건히 서 있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권력과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적인 삶! 춘래불사춘의 밀양이 품고 있는 소망스러운 따뜻함은 바로 이것 아닌가. 자본주의, 민주주의, 생태주의 등등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저 예전처럼 소박하게 농사를 지으며 이웃들과 정을 나누고 싶은 어르신들의 마음만 생각하자. 어르신들의 소망이 관철될 때, 인간적 가치는 저절로 실현되는 셈이니까 말이다. 이제 권력과 자본에 의해 소수로 전락했지만 진정한 봄을 잊지 않고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왕소군의 처량함과 쓸쓸함이 중첩되어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왕소군을 찾아가 위로해주었다면, 혹은 그녀에게 편지 한 통이라도 보냈다면, 그녀는 덜 춥고 덜 외로웠을 것이다. 마음을 기울인 관심과 애정이 넘치는 연대! 어쩌면 밀양의 어르신들이 바라는 것은 이것 아닐까. 그렇지만 과연 밀양에도 봄은 찾아오는가.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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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대한 열풍이 가실 줄 모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왜 인문학에 대한 갈망이 그렇게 강해졌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곤 한다. 20대 초반, 혹은 대학생이었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 아니겠느냐고. 한마디로 지금처럼 속물이지 않았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안타깝게 그리워하는 것, 달리 말한다면 계속 속물로 타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30대에서부터 50대까지의 내면을 지배하는 인문학 열풍은 전혀 이해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속물은 모든 것을 이해관계로 재단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돌아보라! 회사 초년병에서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속물이 많은가. 이런 경향은 이해, 즉 이득과 손해를 유일한 가치 평가 기준으로 밀어붙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이해에 밝은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인정되는 기묘한 편견이 삶의 진실이라도 되는양 횡행하고 있기까지 한다. 그 결과 아름다움과 추함, 진실과 허위, 사랑과 미움, 아니면 정의와 부정의 등 다른 가치는 모욕받고 멸시된다.

속물은 전세 대신 월세를 받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당당히 읊조리지만, 그 결과 세입자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해지는지 고민하지는 않는다. 속물은 학연과 지연을 자신이 가진 당연한 자산이라고 떠벌리지만, 그것이 다수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의식을 안겨준다는 걸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속물은 자식을 위해 노력하며 그걸 사랑이라고 믿지만, 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치장하려는 자기 사랑이라는 걸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 속물은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목소리에 핏대를 세우지만, 이웃들과 후손들의 삶에는 기꺼이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면, 아름다움, 진실, 사랑 그리고 정의라는 가치는 항상 문화 콘텐츠나 혹은 자신을 미화하는 화장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한류니 창조경제니 하는 사생아적 개념의 탄생, 혹은 인문학적 가치들에 대한 모독은 바로 이럴 때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돌아보라! 대학시절 우리는 어떤 가치를 품고 살았는지. 이익보다는 아름다움, 진실, 사랑,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는가.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료나 기성 세대들을 조롱하지 않았는가. 인문학은 속물로 살지 않겠다는, 혹은 사적인 이해를 초월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 ‘속물’ 양성소가 되어버린 대학
그러나, 14학번이여 보여주어라
이익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여기서 잠시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엄청난 노력으로 보석을 정확히 감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보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그는 보석인지, 흔한 돌인지 구별하지 않고 행복하게 놀고 있는 어떤 꼬맹이를 보고 경악하게 된다. 이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 보석상은 귀한 것과 흔한 것이란 절대적인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광경을 보고 경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구분 없이 돌을 가지고 행복하게 노는 아이를 볼 때, 그는 자신이 천박하다고 느끼며 이 경악스러운 광경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보석상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귀한 돌인지 아니면 흔한 돌인지가 중요하지 않게 되면, 그는 직업을 잃을 것이다. 보석상이란 직업을 얻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보라.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보다는 어느 아이의 행복에 몰입할 수 있는 감수성은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보석상은 지금껏 망각하고 있던 행복을 되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석상이 되기 전, 그도 분명 어린아이일 때가 있었을 것이고, 당시 그도 지금 보고 있는 아이처럼 행복을 만끽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오로지 이해관계에 빠져버린 철저한 속물이 되어버렸다면, 그는 아이의 행복한 놀이를 무시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이에게 진지한 얼굴로 가르침을 전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 돌은 비싼 거니, 남에게 주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그 예쁜 돌은 흔한 돌이니 아무한테나 줘도 된다.” 아마 아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보석상을 쳐다보게 될 테지만. 불행히도 구제불능의 속물에다가 허영심의 노예였다면, 그는 아이를 야단쳐서 돌들의 가치를 강제로 주입하고는 아이의 행복을 산산이 짓밟아버릴 것이다. 행복에 젖은 채 놀이에 몰입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니 속물로 변해버린 자신을 반성하면서, 키에르케고르의 보석상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보석상과 같은 어른을 발견하기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인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자신과 같은 그런 사람을 만들 것이고, 속물은 자기와 같은 속물을 만들 것이다. 지금 학교는 속물 양산의 기계로 변한 지 오래다. 부모도, 선생도, 그리고 사회도 한 목소리로 이익이라는 자본주의 가치를 우리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심지어 지성의 산실이라는 대학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독립적이기 힘들었던 중·고등학교 시절, 외부에서 강요된 가치를 거부한다는 건 수월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학시절에서마저 이익과 해로움만이 유일한 가치 기준이라는 걸 수용한다면, 우리 젊은이들에게 행복은 그만큼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익 이외에, 아름다움, 진실, 사랑 그리고 정의라는 더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걸 배울 수 있는 제도적으로 주어진 거의 유일한 기회를 놓지 말고 꽉 잡아야 한다.

아무리 속물이 되어버린 선배들이 대학교를 이익이나 따지는 보석상 양성소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대학생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기성세대들이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익 이외에 다른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걸 삶으로 그리고 열정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아름다움에 젖어들고, 진실을 숙고하고, 사랑에 온몸을 던지며,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젊은이가 적어질수록 우리 미래는 어려울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기는커녕 무거운 짐을 지도록 하는 어느 선배의 노파심을 이해주기를. 14학번 파이팅!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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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사랑이다. 철학의 영어 표현인 필로소피에 이미 사랑을 뜻하는 ‘필로’가 들어 있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는 단지 철학자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국가도, 자본도, 관습도, 체제도 아니다. 철학자가 사랑하는 것은 ‘덧없고 사소한 것’이나 ‘쓸모없는 실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의 사랑이 싸구려 동정이라고는 오해하지는 말자. 철학자의 사랑은 ‘덧없고 사소한 것’을 영원하고 중요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 혹은 ‘쓸모없는 실존’을 가장 쓸모 있는 실존으로 격상시키려는 분투이기 때문이다. 만일 철학자의 사랑이 그 결실을 맺는다면, 덧없고 사소한 것들이나 쓸모없는 실존들을 자기 부정이 아니라 당당한 자기 긍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모든 진지한 철학자들이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있었던 꿈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했던 아도르노라는 철학자에게는 이것은 단순한 꿈이라기보다는 너무나도 절실한 소망이었다. 철학자로서의 절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인간에 대한 대량학살은 언제든지 다시 반복되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된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는 것, 그런 것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이 된다.” 그의 주저 <부정변증법>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도르노는 ‘절박함’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절박함이었을까? 기존 개념으로는 보호받지 못하는 것들은 언제든지 폭력에 노출되어 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항상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데 시급을 다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는 순간, ‘쓸모없는 실존들’은 글자 그대로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를 수 있으니까.


사소한 것을 사소하지 않게 만드는, 그리고 쓸모없는 것들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만 한다. 아감벤이 만든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반면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에는 어떻게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고 배제하는지, 그 은밀한 폭력의 논리를 폭로하는 개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왕따의 논리로 쉽게 설명될 수 있겠다. 왕따의 논리에는 누군가를 왕따로 만들지 않는다면, 자신이 왕따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 결국 누군가를 사소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자신은 중요하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 즉 왕따를 만든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생명이나 왕따의 논리를 우리 내면에 공포의 형식으로 각인시킴으로써 체제는 소수를 억압하도록 만드는 다수를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으로 아감벤이 우리 누구나 왕따의 논리에 개입될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을 보여주었다면, 생성과 긍정의 철학자답게 들뢰즈는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미래 사회를 결정하는 핵심 동력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그가 만든 소수성(minorite)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수성이라는 개념이 비록 지금은 소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결정하는 생성의 계기를 가리킨다. 지금 들뢰즈는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들이 새로운 미래 사회를 구성하는 동력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수성이라고 해서 정말로 수적으로 소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특정 시점 주어진 공동체에서 대표되지 않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들을 대표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개인들이 바로 진정한 소수성을 확보하고 있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한때 소수였던 여성이 그랬고, 한때 소수였던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성적 소수자 삶의 권리 주장한‘친구 사이’ 단체 발족 스무돌

소수성이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


여기서 우리는 직감하게 된다. 결국 벌거벗은 생명이 점차 소멸되는 과정, 혹은 소수성이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지만 벌거벗은 생명이 스스로 삶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들뢰즈의 의미에서 끈덕지게 소수성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민주주의에로의 길, 혹은 진보의 길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만일 외부에서 그들에게 삶의 권리와 발언권을 부여한다면, 외부에서는 필요에 따라 그것을 항상 다시 철회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스스로 얻은 것은 남이 빼앗기 힘들지만, 남이 준 것은 남에게 쉽게 빼앗기는 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1994년 2월7일 ‘친구 사이’라는 단체가 발족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 단체의 시작이 바로 성적 소수자 인권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기 때문이다.


체제에 훈육되어 작동하는 다수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성적 소수자들이 드디어 삶에의 권리와 삶에의 발언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서. 이제 성적 소수자들은 어떤 때는 서로에게 따뜻한 옷이, 또 어떤 때는 서로에게 튼튼한 갑옷이 되어주게 된 것이다. 20년 만에 우리 친구들은 더 이상 이제 벌거벗은 생명에 머물지 않고 당당히 소수성을 외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소수성이 공동체와 역사를 끌고 가는 추진력이 될 때, 당연히 체제는 다수의 반동적인 저항을 그만큼 더 강하게 조성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수를 너무나 미워할 필요는 없다. 단지 다수는 체제에 길들여진 자신의 삶을 절망적으로 정당화하고 있거나, 아니면 주체로 당당히 살려는 소수자의 삶을 질투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잊지 말자. 벌거벗은 생명들이 자신의 소수성을 견지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공동체에 당당히 발언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화려한 미사여구일 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수자들의 인권운동에 고마움을 피력해야만 한다. 소수성이 견지되지 않는 사회는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회일 테니까 말이다. 수많은 진지한 철학자와 진정한 인문학자들이 성적 소수자들의 활동에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끝으로 엄청난 고난과 고초 속에서도 마침내 성적 소수자 인권운동을 지금까지 성장시킨 관계자들의 용기와 지혜에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스무 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파이팅!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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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다. 선거를 통해 일시적이나마 권력을 획득한 대표자들이나 자본 집중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가들이 아니라면,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렇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독점이 아니라 분산을 지향하는 정치 이념이다. 군주제도나 독재정치가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군주나 독재자는 항상 권력을 국민들에게 나누어주기보다는 자신에게만 집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분업 논리가 와해되는 정도로 측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만 ‘지배자=피지배자’라는 현기증이 나는 역설적인 도식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점적 자본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우리 시대 대표자들이 가장 저주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의 임기 중에 벌어지는, 혹은 벌어질 수 있는 바로 집회와 시위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시민들의 정치적 행위, 즉 공동체에 대한 시민들의 발언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이제는 너저분하게 타성이 되어버린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양보해서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이 바로 그 대표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해묵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정치적 분업 논리에 다시 직면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무리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한다 해도, 결국 정치적 의사결정을 대표자만이 행사한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이념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일정 정도 민주주의 이념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선거 때만 국민들은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고, 대표자의 임기 동안 국민들은 정치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 어떻게 이것이 민주주의일 수 있겠는가? 헌법 전문 21조를 보면 다행히도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이념을 지향하고 있다. 네 개의 하부 조목으로 이루어진 헌법 전문 21조 중 처음 두 가지 조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그렇지만 대표자들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의 자유를 어떻게 해서든 제약하려고 안달이 나 있다. 당연한 일이다. 대표자가 대표자로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면, 피대표자들은 침묵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대표자들은 자신만이 정치적 주체이고 피대표자들은 정치적 객체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즉 집시법이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정신을 제한하려는 하위 법률의 쿠데타가 발생한 셈이다. ‘집시법’ 1조를 보면 이 법률의 목적이 명기되어 있다. “이 법은 적법한 집회(集會) 및 시위(示威)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어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인정한 헌법정신을 근본적으로 억압하는 조목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집시법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있는 곳에서 집회와 시위를 금한다는 내용(11조)과 집회와 시위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해 제약한다는 내용(12조, 13조, 그리고 14조)이다.

 

▲ “집시법 제한 시도 막아야만
‘치안’의 논리는 힘을 잃고
‘정치’가 숨을 쉴 수 있을 것”

전자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 대표자들이 얼마나 반민주적이고 권위적인 존재인지 자각하게 된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 대표자들이 어떻게 자기 앞에서 집회와 시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기염을 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민주주의를 입으로만 떠들고 실제로는 부정하는 이런 대표자들의 후안무치는 그냥 웃으면서 넘길 수 있다고 해도,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치안의 논리로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쉽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런 주장은 시민들을 이간시킴으로써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좌절시키는 교묘한 논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경찰이 집회 소음을 더 엄격하게 규제하려는 방향으로 법 정비를 시도하고 있다. 물론 집회에서 발생하는 소음으로 피해를 받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말이다.

이렇게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한다는 치안의 논리가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민주주의 이념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치안(police)과 정치(politic)를 구분하면서 민주주의 정치의 실종을 개탄했던 랑시에르의 절규가 우리 귀에 파고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정치에 관한 열 가지 테제>에서 그는 말한 적이 있다. “‘그냥 지나가시오! 여기에는 아무것도 볼 것 없어!’ 치안은 도로 위에 볼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거기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치안은 통행공간이 그저 통행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공간을 한 주체-인민, 노동자, 시민-가 드러나는 공간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정치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는 것, 곧 거기에서 할 것이 있고 볼 것이 있으며, 명명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랑시에르의 지적은 옳다. 그렇지만 정치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치안이 대신하고 있는 지금,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치안이 아니라 당당히 정치를 관철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직접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민주시민들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한 가지 있다. 때로 집회나 시위가 교통 불편을 초래하고, 심지어 시끄러운 소음마저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때 우리는 그런 많은 소소한 불편들을 기꺼이 감내해야만 한다. 아니 더 나아가 집회나 시위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항상 뜨거운 애정으로 경청하려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언젠가 순서가 바뀌어 우리가 그 장소에서 집회와 시위를 하게 될 때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럴 때 대표자들이 내세우는 치안의 논리는 힘을 잃고, 그만큼 민주주의가, 그리고 정치가 숨을 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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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역설을 아는가. 바람처럼 빠른 아킬레스도 자기보다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보다 100m 뒤에서 출발한다고 하자. 자! 경주가 시작되었다. 아킬레스가 100m를 달려 거북이가 있던 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거북이는 출발선에서부터 10m를 가고 있었다. 그 다음 아킬레스가 출발선에서부터 1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거북이는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11m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거북이는 아킬레스가 10m 달리는 동안 1m를 달렸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추론하면,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100m라는 구간, 10m라는 구간, 1m라는 구간, 10㎝라는 구간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해진 구간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순간,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에 주목하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제논의 역설로 우리는 아킬레스를 절망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네가 노력해도 너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도 없어. 그러니 달리기를 포기하는 것이 나은 게 아닐까.’ 뭐, 이런 논리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킬레스가 제논의 역설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가 없다. 왜냐고. 그는 절망에 사로잡혀 경주를 포기할 테니까 말이다. 뛰기만 하면 아주 가볍게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을 텐데, 뛰기를 포기하니 그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은 그래서 보수주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섹시한 논리일 수도 있다. ‘내가 이미 앞서 있다면,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앞지를 수 없어.’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체제나 보수주의자들은 제논처럼 자신들이 설정한 구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만 한다.

얼마 전 법원은 “2012년 MBC 노조의 파업은 언론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정당성이 인정된다”며 사측이 파업 참가 노조원들에게 내린 해고 등의 징계는 모두 무효라고 판결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법원의 결정은 당연하다고 환호를 보냈다.

그렇지만 그건 순간적인 착각이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MBC 사측은 쿨하게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허탈함이 찾아드는 순간이다. 이제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그리고 헌법재판소로 이어지는 달리기 경주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지만 항상 힘 있는 측이 조금씩 앞서 가게 된다. “MBC는 정영하 전 위원장 등 해고자 6명에게 각각 2000만원, 38명의 정직자들에게는 각각 1000만원을 지급하라!”는 명령은 일순간 정지되고, 다음 단계의 경주는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국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해고자는 해고된 것이고 여전히 정직자는 정직된 것이다.

 

▲ “‘MBC 노조파업은 정당’ 하다는
당연한 판결에 ‘항소’ 하려는 사측
‘제논의 역설’ 현실에선 불가능
노동자들, 절망에 빠지는 일 없길”

아킬레스가 질 수밖에 없는, 혹은 아킬레스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경주는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아킬레스가 절망할 때까지 이 경주는 지속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허구가 이처럼 분명하게 자신의 맨얼굴을 보이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무한한 절차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뿐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끔찍한 일 아닌가.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헌법재판소라는 네 단계의 소송 절차가 만일 100단계의 소송 절차로 세분화된다면, 우리가 앞서 출발한 사람을 따라잡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앞서 출발한 사람들, 혹은 기득권자들은 자신을 추월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 수 있는 복잡한 절차들을 무한히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어쨌든 그렇게 상급법원에까지 이르는 절차들을 거치면서, MBC 노조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은 나이를 먹어갈 것이고 어쩌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처음에는 열광적으로 경주에 주목했던 사람들도 이제 심드렁해져서 다른 경주장에 몰려갈 것이다. 체제는 언제나 수많은 경주들을 새롭게 그리고 다양하게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주는 항상 체제가 마련한 절차에 대한 언제 끝날지 모를 고독한 싸움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최종적으로 해고자들과 정직자들이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절차나 정해진 구간을 통과한 다음 그들에게 남은 것은 돈 몇 푼이나 잘해야 너무나 달라진 회사의 한직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이걸 경주에서 혹은 소송에서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주를 치르느라 소비된 삶의 시간, 혹은 경주를 시작하느라 포기한 삶의 다른 기회들을 누가 다시 회복시켜줄 수 있다는 말인가.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 앞에서>(Vor dem Gesetrz)가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법으로 들어가겠다는 어떤 시골 사람을 가로막으며 문지기는 지금은 들어갈 수 없지만 나중에 들어갈 가능성은 있다고 말한다. 시골 사람은 문지기의 말을 듣고 법 앞에서 기다리다 지쳐 어느 사이엔가 늙어 죽어간다. 이때 문지기는 죽어가는 그의 귀에 말한다. “이곳에서는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너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 우리 주변에는 법이라는 절차에 들어갈 헛된 희망으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어차피 경주를 해봐야 지는 게임이라며 절망하며 무릎을 감싸 안고 울고 있는 이웃들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아킬레스처럼 과감하게 달리면 된다. 어느 사이엔가 주어진 구간도 지나치고 앞서간 거북이도 가볍게 추월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지금 이 순간 한 가지 사실만 명심하도록 하자. 절차에 포획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숨 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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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 강한 감정이 또 있을까. 사랑, 혹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죽음마저 불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예가 사랑에 빠지는 것, 혹은 자식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억압적인 주인이나 권위적인 부모에게는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노예나 자식은 외적인 권위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일체의 외적 권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혹은 자유의 힘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과거 권위적인 사회는 구성원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극히 꺼렸던 것이다. 노예는 주인이 원하는 짝과 결혼을 해야 하고, 자식도 부모가 정한 상대와 혼인을 해야만 했다.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등장했을 때 인류가 환호했던 것은 바로 자유연애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자유연애를 긍정하는 부르주아 시민사회에서 사랑은 마침내 밀실에 갇혀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사랑이 가진 공동체성, 혹은 공동체적 사랑은 그만큼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제 사랑은 카페나 가정에 갇혀버리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부르주아 시민사회 이전에 사랑은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예수의 사랑도, 공자의 인(仁)도, 그리고 싯다르타의 자비마저도 커플 사이의 사랑을 넘어서 공동체적 차원에서 외쳐지지 않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지배 전략을 직감할 수 있다.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산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깨알처럼 쪼개서 밀실이나 가정 내부의 협소한 범위로 해소시키려는 것! <일방통행로>에서 벤야민이 “부르주아적인 삶이란 사사로운 일들의 체제”라고 말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랑이어도 좋고 분노여도 좋고 동정이어도 좋다. 이제는 카페나 집에서 만나는 사사로운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감정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깨알 같은 공간에서 우리 감정들은 과잉에 가깝게 폭발하기 쉽다. 층간소음도 문제이고, 아이가 왕따를 당하거나 성적이 떨어져 우울한 모습도 문제이고, 부부 사이의 관계도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미 서울역의 풍경이 되어버린 노숙자의 비루한 모습에 대해서, 금융회사에 농락당한 서민들의 눈물에 대해서, 중학교 교과과정을 미리 배우려고 학원을 전전하는 우리 초등학교 학생들의 무거운 캐리어 가방에 대해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공권력의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우리의 감정이 대부분 흘러들어갈 때, 그보다 훨씬 더 넓은 공적 세계에 흘러들어갈 수 있는 감정이 얼마나 있겠는가.

노숙자에 대해, 금융회사의 농간에 대해, 교육제도에 대해,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에 대해, 지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슴 깊이 절절하게 공적인 문제에 감정이 폭발했느냐의 여부, 정말 진진하고 심각하게 그런 공적인 문제에 대해 아파했느냐의 여부이다.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서글픔으로, 때로는 열정이 가슴에 먹먹하게 차오르지 않았다면, 공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적인 분석은 그저 냉소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치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에 훈수라도 두는 것처럼 공적인 문제에 대한 절박함이 없다면, 우리의 지적인 분석이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침내 부르주아 시민사회는 우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셈이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의 감정은 이제 깨알처럼 쪼개진 사적 세계에만 흘러들어가게 훈육된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피폐된 공동체서 느낀 외로움
이씨가 몸과 함께 던진 화두
공동체의 ‘사랑’ 회복되기를”

2013년 12월31일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이남종씨만큼 공적인 문제에 대해 너무나 절박했고 진지했던 사람도 없었다. 공권력이 대선에 개입한 사건, 민주사회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범죄가 단죄되지 않은 채, 새해가 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졌던 그였다. 마치 새해가 되면 모든 것이 새롭게 포맷되기라도 할 것처럼 공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기만 우리들 때문에 그는 조바심마저 가지고 있었다. “많은 국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공권력의 대선개입은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개인적 일탈이든 책임져야 할 분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이상득, 최시중처럼 눈물 찔끔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던 그 양심이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이 아니길 바랍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으나 체감하는 공포와 결핍을 가져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이렇게 고(故) 이남종씨는 우리 곁을 헛헛하게 떠났다. 2014년의 새해가 깨알 같은 사적인 소망을 피력하는 자리가 아니라, 공동체적 소망이 나누어지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고가도로 분신 이남종의 유서 (경향DB)

모든 자살이 그렇듯이, 이남종씨의 분신자살에도 어떤 외로움의 정조가 깔려 있다. 공동체적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권력과 체제에 우리들이 제대로 맞섰다면, 이남종씨가 외로움을 느꼈을 리도 없고, 죽음으로써 민주주의가 능멸을 당하는 현장을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고발했을 리도 없다. 불행히도 고인이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공동체적 사랑, 혹은 공동체를 위한 사랑에 대한 감각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린 것 아닌가. 2014년 1월4일 고인의 영결식이 있던 날, 대다수의 유력 언론매체들은 공동체적 사랑을 갈망했고 우리에게 요구했던 고인을 또다시 외로움에 방치했다. 고인을 두 번 죽이는 만행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깨알 같은 사적인 감정만을 자극하는 뉴스들이 거대한 강물이 되어 흐를 때, 공동체에 대한 고인의 사랑과 명령이 어디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1992년에 출간된 시집 <희망의 나이>를 마무리하면서 시인 김정환은 말한 적이 있다. “사회성과 서정성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 정확히 말해 그것이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내게 시의 문제는 사회적 서정의 수준을 높이는 문제이다.” 이미 부르주아 사회는 공적인 영역에 냉소적인 지성만이 차갑게 작동하고, 사적인 영역에서만 강렬한 정서적 힘이 작동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당연히 이 두 영역의 분리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적 차원, 혹은 공동체적 사랑을 회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김정환은 단도직입적으로 ‘사회적 서정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다.

사회적 서정을 높이는 것, 올해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정말 공동체와 그 속에 살아갈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래서 이남종씨처럼 의롭지만 안타까운 죽음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려면, 남겨진 우리 모두의 가슴에 아로새길 과제는 바로 이것뿐이다. 사랑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사회적 서정의 수준을 높이자! 삼가 이남종씨의 명복을 빌며, 이제 ‘비상경보기’도 더 힘을 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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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인지라 지루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을 양해하시기를. 그건 자유민주주의라는 사생아적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생아적 개념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질적으로 상이한 원리들이 야합해서 탄생한 개념이니, 분명 자유민주주의는 사생아적 개념이다. 먼저 이 사생아를 낳은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 순서겠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긍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소비의 자유를 긍정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돈을 가진 자가 자기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다는 원리가 바로 자유주의이다. 결국 돈이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커다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진정한 주체가 사람이라기보다는 자본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주주총회를 예로 생각해보자. 한 사람이 50만주의 주식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 49만명이 각각 1주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주주총회는 50만주의 주식을 가진 이 한 사람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질 수밖에 없다. 분명 과반수의 원칙은 적용되기는 하지만, 그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다. 민주주의에서도 과반수의 의지에 따라 적용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체는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다. 대표자를 뽑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준다. 앞에서 주주총회를 좌지우지했던 그 한 사람은 선거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소액 주식을 가지고 있던 나머지 49만명이 선거에서 결정적인 힘을 행사할 테니까 말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사생아적인 것이다. 자유주의라는 원리를 통해 자본의 전능성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원리를 통해 인간의 전능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관철하려면 기묘한 역설이 하나 발생한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면 그 누구도 대통령 등 대표자로 선출되기 어렵다. 소수 자본가의 자유를 긍정한다고 선언한 입후보자가 있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를 대표자로 뽑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대표자가 된 다음에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면 그 누구도 대통령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다. 대통령을 포함한 국가기구는 세금으로 작동하는 조직이니, 국가기구는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는 소수의 자본가를 편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는 것은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약 잊은 청와대 (경향DB)

 

뒷간에 갈 적 마음이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는 속담이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속담이 또 있을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 노릇은 더럽게 힘든 일이다. 민주주의라는 원리에 따라 대통령이 되었지만, 자유주의 원리에 따라 대통령 노릇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벗고 자유주의라는 가면을 새로 쓸 때, 정상적인 인격의 소유자라면 고민이라도 하기 마련이다. 아니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자본가 계층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다수의 국민들에게 나누어줄까 고심하고 고뇌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될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압력에 나름대로 성실하게 저항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가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대통령과 정부는 오직 두 종류만 가능한 셈이다. 선거 때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대통령과 정부, 아니면 선거 때의 초심이야 아마추어와 같은 것이라며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리는 대통령과 정부, 그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는 후자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편적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모토로 제안되었던 화끈하고 실질적인 공약(公約)들을 하나둘 허공 속에 날리며, 세계사적으로 실패로 귀결되었던 자유주의 정책을 때늦게 관철시키려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의료, 교육, 철도, 금융까지 그 적용 범위도 폭넓고 그 시행도 동시다발적이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당연히 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저항은 불가피할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초심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치거나
초심이야 아마추어 같은 것이라며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리는…
오직 두 종류 대통령만 가능한 셈”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는 공약(公約)의 부담 때문인지, 박근혜 정부에서 ‘민영화’라는 용어는 금기어가 된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용어만 쓰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식으로 정부는 아주 강하고 집요하게 자유주의 정책을 구체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철도 부문에서 코레일 내에 자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고, 의료 부문에서 의료자본에 원격진료와 영리사업을 허용하려고 하며, 금융이나 교육 분야에서 외국 자본이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을 제대로 만들어주려고 한다. 물론 ‘민영화’라는 금기어 대신 정부는 ‘혁신’ ‘경쟁’ ‘소비자의 선택권’ ‘부가가치 창출’ 등등의 단어를 사용하기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런 미사여구만으로도 얼마나 박근혜 정부가 자유주의 이념에 편향되어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직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지겹게 들어왔던 용어들이 다시 등장하는 걸 보고 아연실색하는 것은 오직 나뿐일까. 이 모든 용어들은 자본의 자유, 혹은 자유주의를 위해 바쳐진 장미꽃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장미꽃의 향기에 취한 결과 우리는 1997년 이후 지금까지 15년 넘게 민주주의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묵과해왔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의 참담한 현실에 던져진 것 아닌가. 자본의 자유를 허용한 결과, 우리는 이제 공동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삶의 질이 하락해버린 환경에 살게 된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부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밑도 끝도 없는 궁핍으로 내던져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대통령, 그걸 확고하게 실천할 수 있는 대통령을 뽑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것 아닌가.

민영화인가 아니면 민영화가 아닌가? 이건 쟁점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박근혜 정부가 이미 파산 선고가 내려진 때늦은 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점, 박근혜 대통령이 이미 죽은 영국의 대처 총리를 따라 ‘철의 여성’이란 코스프레를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코레일 내부에 수서발 KTX라는 자회사를 설립해서 혁신과 경쟁을 도모하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정책이다. 외국이나 국내의 거대 의료자본에 유리한 진료방법이나 영리사업을 허용하는 것도 모두 자유주의 정책이다. 우리 공동체를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지금 정부는 추진 중인 것이다. 자유주의의 전횡을 계속 묵과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진정한 쟁점이다. 도대체 얼마나 부익부빈익빈의 바닥에 이르러야, 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너무나 바닥에 내려가서 이제 올라갈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인가? 모를 일이다.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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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과학, 국어 시험 점수 잘 나오게 해주세요” “여자친구 생기게 해주세요” “그녀가 다시 내게 돌아오게 해주세요. 제발” “수시 추가 합격되게 해주세요” “로또 1등 되고 회사 진급시험 붙게 해주세요” “그녀하고 결혼하게 해주세요” 등등. 대충 보아도 10대나 20대, 잘해야 30대 초반 젊은이들의 소원은 이렇게 절절하기만 하다. 사찰 대웅전에 올릴 기와에 흰색으로 적은 글자일까, 아니면 어느 단체에서 마련한 소원 게시판에 붙인 포스트잇 내용일까. 아니다. 스마트폰으로 쓰고 또 읽을 수 있는 댓글의 내용이다.

우리 시간으로 12월8일 새벽 2시30분에 독일에서는 분데스리가 프로축구 경기가 하나 열렸다. 레버쿠젠과 도르트문트의 경기였다. 국가대표이기도 한 손흥민 선수가 골키퍼를 제치고 넣은 선제골인 동시에 결승골로 레버쿠젠은 도르트문트를 1-0으로 이겼다. 손흥민이 골을 넣은 극적인 순간부터 스마트폰에는 우리 젊은이들의 댓글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앞에 서술한 댓글들은 3000여 댓글 중 일부분이다. 아니 축구경기의 승패, 그리고 축구 국가대표 기대주 손흥민의 결승골이 자신들의 평소 소원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실소할 것이다.

교회에도, 사찰에도 다니지 않는 우리 젊은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종교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기적의 밥상이 펼쳐지자 우리 젊은이들은 거기에 자신도 숟가락을 하나 얹어 그 은총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받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행위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실 모든 종교는 기적적인 행복을 노골적으로 혹은 암암리에 약속하면서 탄생하는 법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기적은 한 번쯤 신도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든가, 아니면 죽을 때 붉은 피가 아닌 흰 피 정도는 흘려주어야 한다.

기적의 현장에서 우리는 누구나 그 기적을 경배한다. 지금 기적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는 분명 신적인 어떤 힘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신적인 힘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다. “제 아버지의 병도 낫게 해주세요” “아들이 입시에 성공하게 해주세요” “그녀와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등등. 한 계단씩 꾸준히 올라야 정상에 오를 수 있는 현실과는 달리, 종교는 한 번에 정상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약속한다. 스마트폰 세계에 조용히 들어온 우리 젊은이들의 종교행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노력하는 것만으로 소원을 이룰 전망이 확실하다면, 그들은 결코 그런 우스꽝스러운 종교행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 신적인 힘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소원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그들은 경기를 결정짓는 손흥민의 골을 보자마자, 자신의 소원을 경쟁적으로 외치게 된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손흥민 선수가 결승골을 넣자 댓글은 온통 자기 소원 빌기
어처구니없는 종교행위지만 얼마나 삶이 힘들기에…”

언젠가 마르크스는 <헤겔법철학 비판>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종교는 번민하는 자의 한숨이며 인정없는 세계의 심장인 동시에 정신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의 환상적인 행복인 종교를 폐기하는 것은 민중의 현실적인 행복을 요구하는 일이다. 민중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그리는 환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버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를 후광으로 하는 고통스러운 세계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종교를 아편으로 보면서 마르크스가 종교를 저주했다고 단순히 생각해서는 안된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하면 우리는 아편을 이용한다. 그 순간 고통은 잠시나마 사라지게 될 테니까. 이런 사람에게 “아편은 중독성이 있으니 끊으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마르크스는 그렇게 무자비한 사람, 혹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원칙론자는 아니었다. 아편을 끊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이 없어지면, 아편을 피울 이유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본능적으로 싫어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싫어한 것은 종교적 행위를 계속 하도록 만드는 우리 삶이 처한 현실적 조건이었다. 정말 몸이 아픈 사람에게 아편이 일시적인 도움을 주는 것처럼,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종교는 일시적인 위안을 준다. 역설적으로 말해 마르크스만큼 아편과도 같은 종교를 긍정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심지어 마르크스 본인도 노동자들의 힘든 투쟁과 그들의 고뇌에 종교적 아편을 처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들이 억압받지 않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역사는 당신들 편이라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던 노동자들의 고통에 <공산당 선언>만 한 아편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경쟁 교육에 휘둘리는 우리 아이들의 불안감, 과도한 학비에 아르바이트에 내몰리는 대학생들의 피곤함, 좁은 취업문,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주는 불안감들. 언제 정리해고를 당할지 모르는 직장인들의 공포감. 전세는 증발하고 월세만 늘어가 그나마 작은 소득마저도 허공으로 날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헛헛함. 정말로 우리 젊은이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지금 이 고통스러운 세계를 고쳐야만 한다. 육체적 고통이 없다면 아편이 필요없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세계가 사라진다면 종교적 행위도 불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이제 손흥민의 결승골에 댓글로 붙은 수천의 절절한 소원들, 간절한 기도를 쉽게 조롱하지는 말자. 그냥 단순하게 열심히 공부해서 기말고사를 잘 보라고, 올 수능에 실패했다면 재수해서 내년에 좋은 대학에 가라고, 열심히 돈을 모아서 집을 마련하라고, 버젓한 직장을 얻어서 사랑하는 여인에게 프러포즈를 하라며 정색하지는 말자. 이건 다리가 잘려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고통에 직면하라고 설교하는 것처럼 잔인한 일이다. 차라리 댓글이나 하나 더 달자. “이 모든 소원들이 다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이제 분노에 가득 찬 마음으로 돌아보자. ‘종교를 후광으로 하는 고통스러운 세계’를.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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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통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국가를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교환 시스템으로 사유하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 기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조금 길지만 가라타니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한다거나 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가의 원형이다.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함으로써 토지나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관개 등 공공사업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 결과 국가는 수탈의 기관으로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농민이 영주의 보호에 대한 답례로 연공(年貢)을 지불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의 책 <일본정신의 기원>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과거 왕조 시절에나 가능했던 이야기라고 쉽게 치부하지 말자. 지금도 이것은 어김없는 진실이니까 말이다. 의무라는 이름을 이루어지는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조용조(租庸調)로 상징되는 토지세와 노역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 아닌가. 세금을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는 자유, 혹은 군대를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란 국민들에게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과거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국가에서 납세나 병역의 의무는 수탈이라고 정의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납세나 병역은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국가기구에 의해 집행되기 때문이다. 과거보다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는 착시효과로 수탈이란 용어에 거부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압도적 힘에 의해 무엇인가를 빼앗긴다면, 그것이 수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기구는 국가에 포섭된 국민들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최소한 조세 저항이나 병역 기피를 막을 수 있는 우월한 힘이 없다면, 국가기구는 유지될 수조차 없으니까. 그렇지만 수탈만 계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문제는 수탈을 거듭하다보면 국가기구는 목숨을 내던지는 국민적 저항에 봉착하리라는 점이다. 어차피 계속 수탈당해 생존조차 어려워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국민은 봉기라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기구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수탈한 재화를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재분배해야만 한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뺏은 이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당신들의 삶을 위해서였다.”

국가기구는 수탈은 수단이고 재분배가 목적이라고 강변한다. 그렇지만 결국 국가기구의 최종 목적은 원활한 수탈, 구체적으로 말해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수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항상 재분배는 주로 다음 수탈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가라타니가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한다거나 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수탈당했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수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민들은 수탈의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재분배에 모든 시선을 집중한다. “그래. 비록 국가가 강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국가에 바치는 세금이나 병역은 모두 나 자신을 위한 거야.” 모욕당한 자유의지라는 상처를 후비지 않고 가볍게 은폐하는 자기 기만술인 셈이다.

과거 국가와 현대 국가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지금은 무력에 의해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에 의해 새로운 정권이 탄생한다. 당연히 현대 정권은 국민들에게 수탈자로서의 자기 본질을 감추고, 재분배자로서의 제스처를 더 강조할 수밖에 없다. 수탈당하는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어느 국민이 노골적인 수탈 의지를 표방하는 정권이나 아니면 재분배 의지가 별로 없는 정권을 선택할 것인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확고하게 재분배의 의지를 표방하는 정권에 자신의 표를 던지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정권이 ‘복지’를 키워드로 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막연히 산업을 육성한다거나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토대를 갖추겠다는 공약은 더 이상 먹혀들지도 않는다. 감각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복지여야만 국민들은 기꺼이 자신의 표를 내놓을 테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 “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닮은 논리
공공요금 인상·세금 짜내기로 수탈
서민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들지 말라”

정말 박근혜 정부는 공약 제시에 탁월했고, 그래서 집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을 주겠다는 정말 화끈하고 섹시한 공약은 이 점에서 상징적이라고 하겠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더 이상 자식들에게서 경제적 봉양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는 공약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이 아니라 현 정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철저하고 구체적인 복지 정책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모든 재분배는 결코 수탈한 양을 넘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것은 간단한 산수의 문제니까. 현 정부의 화끈한 복지 정책은 화끈한 수탈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가장 화끈하게 수탈하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것은 자본가나 고소득자들에게 증세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 이명박 정부의 부자 감세 정책을 철회하고, 과감하게 부자 증세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문제는 현 정부가 태생적으로 과거 정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현 정부는 부자 증세 정책을 실시할 의지도 그리고 그럴 생각도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미 화끈한 복지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은 이상, 현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복지 정책을 실천하고 있다는 제스처라도 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여기서도 간단한 산수문제만 풀면 된다. 자본가 계층에게 증세할 생각이 없다면, 대다수 서민들에게 수탈을 가중시키면 된다. 그렇지만 그 수탈은 결코 증세 형식이어서는 안된다. 재분배를 하겠다는 정부가 노골적으로 세금이란 형식으로 수탈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부자 증세도 안되고 대다수 서민에게 증세도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제스처뿐인 복지 정책이나마 실시할 수 있을까. 공공요금 인상, 세금 짜내기, 혹은 과태료 폭탄이 정답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탈 논리가 무엇인가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닮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개개인들이 아껴 쓰면 공공요금이 올라도 별다른 부담이 없을 것이라는 논리, 세금을 제대로 안 내는 사람들에게만 피해가 간다는 논리,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 교통규범만 지키면 과태료를 낼 필요가 없다는 논리. 지금 현 정부는 수탈로 생기는 손해를 모두 개인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우습지 않은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골고루 빼앗아 서민들에게 다시 복지로 재분배하겠다는 발상이. 그냥 이제는 부탁하고 싶다. 부자 증세를 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복지 정책을 폐기하라고. 이제 깨알 같은 수탈로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들지나 말라고.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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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감사원장부터 22대 양건 감사원장까지 헌법이 정한 4년 임기를 채운 감사원장은 7명뿐이다. 얼마나 감사원장이 정치바람에 휘둘렸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현 정부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보장”을 약속했던 양건 감사원장이 1년7개월의 임기를 남겨두고 사퇴했다. 청와대의 감사위원 인사개입, 4대강 사업 감사 결과를 둘러싼 정치적 외압 등이 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기된 감사원의 독립성 문제가 진행형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감사원은 정부의 예산 집행 적정성을 검증하는 회계검사, 행정기관 및 공무원의 위법·비위를 따지는 직무감찰의 권한을 가진 최고 사정기관이다. 감사원의 생명은 권력으로부터 독립이다. 감사원을 헌법기관으로 두고, 헌법이 감사원장 임기를 4년으로 명시한 것도 그 독립성을 보장키 위한 것이다. 감사원이 권력에 좌고우면하면 정부 예산 집행의 난맥이 제어되지 못하고, 공직 기강은 나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 감사원의 감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4대강 사업의 폭주와 부실, 원전비리 등은 통제·예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권력의 입맛에 맞추는 ‘해바라기 감사’가 어떠한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서류보는 감사원장 후보자 (출처 :경향DB)


어제 실시된 황찬현 감사원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는 감사원의 독립성을 지켜내면서 추상같이 직무를 수행할 의지와 자질, 도덕성을 검증하는 자리여야 했다. 우선 도덕성 문제와 관련해 두 차례에 걸친 위장전입과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재직 시절 대학원 박사과정 편법 수강, 병역 기피, 장남 재산신고 축소 등 적잖은 의혹들이 제기됐다. 조각 당시 낙마한 고위공직 후보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심각성이 덜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최고 사정기관인 감사원을 이끌 수장으로서 요구되는 높은 도덕성에 비춰보면 가볍지 않다. 특히 명백한 불법인 두 차례의 위장전입에 대해 “자녀 출산을 위해” 등 석연치 않은 해명으로 일관한 것은 문제다. 황 후보자는 감사원의 독립성을 지켜낼 의지와 철학을 분명히 보여주지 못했다. 황 후보자는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문제와 재발 방지를 위한 감사원의 역할에 대해 “적절치 않다”거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앞서 황 후보자는 서면답변에서 5·16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군사정변으로 기술된 5·16 평가마저 회피하는 감사원장 후보자가 과연 권력으로부터 감사원의 독립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회는 오늘 이틀째 청문회에서 미진한 도덕성과 자질에 대한 보다 철저한 검증을 거쳐 황 후보자의 감사원장으로서 적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감사원의 독립성을 지켜낼 자질, 감사원장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성을 제대로 거르지 못하고 넘어가면 또다시 ‘정치 감사원’의 불행한 전철을 밟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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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학창시절, 계란말이는 가장 부유한 아이들이나 도시락 반찬으로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걸 얻어먹고 싶던 우리는 계란말이를 싸온 친구에게 도시락을 내밀곤 했다. 그때 그 친구는 무슨 유세라도 부리듯 계란말이를 줄듯 말듯 우리를 놀리곤 했다. 그럴 때 우리는 말하곤 했다. “치사빤쓰다.” ‘빤쓰’는 속옷을 가리키니 중요하지 않고, 문제는 치사의 뜻이다. 이 뜻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뒤였다.

이 말을 다시 들은 것은 6·25전쟁으로 자식들을 많이도 잃은 불행한 어느 할머니를 만났을 때였다. 인터뷰 말미에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할머니, 할머니에게 전쟁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러자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내게 전쟁은 참 치사한 거였소.”

조선시대 신문고라는 북이 있었다. 이방원이 왕위에 있을 때 백성들의 하소연을 듣기 위한 제도였다. 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북을 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영의정이던 사람이 신문고를 치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가솔들과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신문고를 치도록 했다. 한마디로 말해 신문고를 독점해버린 것이다. 힘없는 백성들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신문고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다. 분명 영의정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말할 것이다. “참, 치사한 사람이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기득권자가 때로 자신도 평범한 시민인 것처럼 행세를 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청와대가 국민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명목으로 소송을 건 적이 있다. 분명 명예훼손은 적절한 피해보상을 받아야 하는 범죄니, 청와대도 명예훼손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지만 참 치사한 일이다. 그리고 얼마 전 전직 서울경찰청장이 국정감사장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증인 선서를 거부한 적이 있다. 분명 일리가 가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것도 참 치사한 일이다. 치사한 것이 이 일뿐인가. 대재벌이 자신들의 치부를 건드렸다고 내거는 명예훼손 소송은 어떤가. 영세업자나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만 하다. 분명 맞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치사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법의 바탕에는 정의에 대한 감각이 깔려 있다. 정의란 공동체의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것이 깨어졌을 때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한손에는 저울을 그리고 한손에는 칼을 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동선이 위기에 빠지는 것은 항상 기득권자의 사사로운 욕망 때문이다. 하긴 힘이 있어야 공동체 전체를 위기에도 빠뜨릴 수 있는 법이니까. 소수의 기득권자의 욕망 추구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러니까 법은 근본적으로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그래서 전체 공동체의 공동선을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아니면 법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신문고를 치는 것과 법원에 소송하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억울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신문고를 칠 수 있고 누구든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누구든지’에는 사회적 기득권자나 권력자는 빠져야 한다. 그럼에도 기득권자나 권력자가 갑자기 자신이 빵집 아저씨나 청소부 아줌마라도 되는 듯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억울함을 호소할 때가 있다.

물론 신문고 제도나 법원에서 이러저러한 사람은 신문고를 칠 수 없고, 이러저러한 사람은 소송을 할 수가 없다고 명시화하지는 않는다. 왜 그랬을까. 정의를 알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말해줄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허점을 이용해 기득권자나 권력자가 소송을 일삼는다. 정말 이것만큼 치사한 일도 없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 “공동선의 와해는 가진 자의 사욕 탓
누구나 ‘신문고’ 울릴 수 있다지만
권력자·기득권자는 좀 빠져주시라”

식비를 아끼기 위해 회사 급식에 숟가락을 올린 사장은 치사한 사람이다. 나약한 학생들 앞에서 교권을 정열적으로 부르짖는 일부 선생님들도 치사한 사람이다. 선량한 다수 소액주주들의 피눈물 앞에서 자신도 피해를 보았다는 자본가도 치사한 사람이다. 쪼들린 가정을 위해 애쓰는 아내에게 피곤하다며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남편은 치사한 사람이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지금까지 동고동락해온 직원들을 정리해고라는 미명으로 거리에 내몰며 아직도 사장 의자에 앉아 있는 사장은 치사한 사람이다. 고용할당제 등 여성의 안정적 삶을 보장하려는 제도를 역차별이라고 침을 튀기는 남자들은 치사한 사람이다.

어느 공동체에서나 의사결정의 최고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의 덕목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도 약자라도 되는 양 권리를 외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전쟁터에 참여한 장수를 비유로 들어볼까. 장수는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리고 장수는 전쟁터를 떠날 때 가장 나중에 발을 떼야 한다. 기득권을 가질수록, 권력을 가질수록 권리는 없어져야 한다. 오직 공동체에 대한 의무만이 남을 뿐이다. 이것이 싫으면 장수에서, 대통령에서, 그리고 사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전쟁터에 부하들을 먼저 투입하고 제일 나중에 발을 내디디는 장수, 후퇴할 때 부하들보다 먼저 헬기에 타거나 배를 타는 장수, 정말 치사한 사람이다.

지금 우리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치사한 정부를 보고 있다. 복지를 공약했으면서도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약속을 어기는 것, 온갖 공공비용을 올리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가까운 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통합진보당 문제도, 법의 이름을 걸고 아예 당 자체를 해산하자고 헌법재판소에 하소연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치사함이지만, 이것도 넘어가자. 한번 치사하면 끝까지 치사할 수밖에 없는 일일까. 대선개입 의혹으로 공무원노조를 압수수색하는 진풍경마저 벌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공동체의 공동선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부정의의 막장은 소수 통합진보당이 펼칠 수도 없고, 힘없는 공무원노조가 연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건 국가정보원처럼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국가조직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이렇게 치사할까. 국가기관이 저지른 공동선 와해라는 범죄를 은폐하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소속 구성원의 재량으로 돌리는 것, 그리고 다른 사건을 통해 범죄를 희석시키려는 것도 국가기관 책임자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건 너무나 치사한 일이니까 말이다. 이렇게도 치사한 사회에서 치사하게 살아가는 우리도 언젠가 6·25를 치사하게 겪던 할머니처럼 나이를 지긋이 먹게 될 것이다. 그때 어느 젊은이가 우리에게 물어볼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2013년은 어떤 시절로 기억되시나요?”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때는 정말 치사한 시절이었어.” 제발 이런 말을 다시 반복하는 삶을 살지는 말자. 그 젊은이에게 “정의가 바로 세워졌던 찬란했던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우리는 살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치사한 사회에서 치사하게 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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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는 선생이기도 하다. 말과 행동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지만 동시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사람에게도 후회없는 삶을 살아내도록 도움을 주려 노력하니까 말이다. 기만과 허위에 가득 차 있는 생각을 비판하고 소망스러운 삶을 살아가도록 돕고 있으니, 분명 나는 선생이기도 하다. 가급적 학교에서 제안하는 강연은 빼놓지 않으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만사를 제쳐두고 가는 것은 선생님들이 요청한 강연이다. 선생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내게는 동료들이 부르는 것 같으니, 어떻게 그들의 강연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그 선생님들이 가르칠 학생들의 수를 생각해보면, 효율도 만점이다. 한 사람의 선생님이 변하면 수십 수백의 학생들도 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철학자는 항상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려야 한다. 허위와 편견을 깨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치열한 노력을 기대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산파술이라고 정의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아이를 낳을 때, 산모가 아파야 할까, 아니면 산파가 아파야 할까. 두말할 것도 없이 산모가 아파야 한다. 산파는 산모의 아픔을 돕고 아이를 순산하도록 돕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철학자로서 강연을 할 때, 나는 청중들을 아프게 한다. 아주 곤란스럽게 만들어버린다. 고민과 고뇌에 빠져야 청중들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자기만의 생각을 낳을 수 있다. 자기의 삶을 닮은 생각을 만든다는 과정은 여러 모로 자기 얼굴을 닮은 아이를 낳는 과정을 닮아 있으니까.

선생님들을 청중으로 하는 강연회에서, 나는 과격한 선택을 그분들에게 강요한다. “선생님이 될 것인가? 아니면 유괴범이 될 것인가?” 처음에 선생님들은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지만, 나의 설명을 듣고 곧 당혹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이를 볼모로 돈을 얻으려는 사람이 유괴범이고, 아이들의 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 선생님이라는 설명이 뒤따르니까. 곤혹감이 스치는 얼굴에서 선생님들이 느끼고 있는 서운함과 불만의 마음이 내 가슴에 그대로 전달된다. “저도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한 번 당신이 아이들을 가르쳐보세요. 선생님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교장과 교감, 혹은 상급부서에서 요구하는 행정 업무에 지치고, 선생님의 권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본 적이 있나요.” 왜 모를까,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으로 남고 싶은 그들의 열망을,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자꾸 자신들을 유괴범으로 만들고 있는 교육 환경에 대한 그들의 절망을.

1989년 5월28일 설립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즉 전교조는 절망적인 교육 환경을 극복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선생님이 되려는 열망을 실현시키려는 우리 선생님들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였다. “교직원의 권리 옹호와 교육 민주화, 참교육 운동 전개!” 물론 우리 선생님들이 주장했던 교직원의 권리, 즉 교권을 오해하지는 말자. 지금 학생 인권에 맞서 교권을 주장하는 일부 철없는 선생님들의 주장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니까. 권리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의 부당함에 맞서서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 선생님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참다운 선생님들이라면 한 번도 약한 학생들 앞에서 교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선생이기 이전에 인생의 선배로서 해서는 안되는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님들은 단지 직위상 상위에 있는 교장과 교육감, 나아가 교육당국에 대해 교권을 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마마보이는 자신의 아내를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교육당국에 휘둘리는 순간 선생님은 자신의 학생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 사랑 때문이었다. 일체의 정치적 외압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학생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1989년 이후 지금까지 전교조가 없었다면 정치권력과 교육관료들의 전횡으로부터 우리 선생님들이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었겠는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전교조는 선생님들의 자유로운 연대라는 점이다. 혼자의 힘으로 교사로서의 자긍심을 지킬 수 없으니 선생님들이 서로 뭉친 것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 “아이들 위해 힘겹게 만든 전교조
이 체제는 조용하게 와해 작업 중
선생님을 유괴범으로 만들 것인가”

전교조는 아이들을 제대로 사랑하려는 선생님들, 유괴범이 아니라 참다운 선생님으로 아이들 앞에 서겠다는 우리 선생님들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전교조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 권력과 체제로서는 전교조가 여간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나보다. 하긴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이념을 미래 세대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었을 테니까. 최근 체제는 자신의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국사 교과서를 채택하려는 후안무치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아마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청년 세대들에게까지 확장하려는 노골적인 야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교과서를 선택하는 것도, 그리고 어느 교과서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 선생님들이다. ‘교육 민주화’와 ‘참교육’을 옹호하는 전교조가 있는 한, 그들의 시도는 좌절되기 십상이다.

모든 후속 세대들에게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관철시키려면, 체제는 선생님들을 통제해야만 한다.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들려는 체제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체제는 선생님들의 교권을 조금씩 와해시키는 작업을 조용히 그렇지만 단호하게 추진한 지 오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선생님의 비정규직화일 것이다. 기간제 교사를 양산함으로써 체제는 선생님들이 아이를 사랑하기보다 교장과 교감, 혹은 교육당국의 눈치를 보도록 만들어버렸다.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기간제 선생님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하는 데 매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진보적 교육감이 일하고 있는 경기도마저 25%의 선생님이 비정규직일 정도로 사정은 심각하다.

기간제 교사는 정규직 선생님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교조에 가입할 수도 없다. 결국 전교조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고, 동시에 노쇠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권력과 교육관료들은 지금 전교조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것처럼 보인다. 하긴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우익 교과서, 그러니까 잘 먹고 잘살게 해주면 모든 것이 통용된다는 식으로 일본제국주의와 유신독재적 가치를 정당화하는 교과서도 노골적으로 지지할 정도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체제는 심각한 오판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전교조는 체제가 선물로 선생님들에게 하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선생님들이 치열하게 싸워서 얻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준 것은 쉽게 뺏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싸워서 얻은 것은 결코 쉽게 뺏을 수 없는 법이다. 어느 선생님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걱정하는 유괴범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수십명의 폭도들과도 싸울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우리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우리가 유괴범이 아니라 선생님으로 남으려는 선생님들의 싸움을 외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학교에 유괴범이 득실거리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선생님들의 외로운 싸움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우리가 선생님들을 지켜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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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힘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힘을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자. 힘은 권력이기도 하니까. 그래서일까, 모든 부모는 자식이 명문대에 가서 많은 것을 배우기를 원한다. 그들이 아는 것만큼 권력을 가질 테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노동이 육체노동보다 더 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는 이유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안다는 것은 권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동시에 권력을 지닌다는 것은 알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생각지도 못했을 온갖 비밀들을 대통령은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비밀들이 새나갈 때, 그만큼 권력도 새나가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 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백미는 아무래도 ‘아는 것’과 관련된다고 하겠다. <손자병법>에서도 쓰여 있지 않은가. ‘지피지기, 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독재자들이 언론 탄압과 검열에 사활을 걸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권력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안에 대해서는 더 노골적이다. 과거 독재시절 검열로 아예 신문 기사가 통으로 시커멓게 칠해져 나오는 사태, 혹은 동아일보의 경우 광고마저 중단시켜 신문사를 고사시키려는 만행은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같은 제도적 장치이든지, 아니면 언론사 사주를 친정부 인사로 임명하는 것과 같은 은밀한 방법을 동원하여, 권력은 국민들에게 알 권리 자체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물론 이런 야만적이고 반민주적인 책동은 권력의 부정의와 부패 정도에 따라 커지기 마련이다. 만일 언론사를 통제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권력이 아는 것을 독점할 수만 있다면, 권력은 신성불가침의 권좌에 앉게 될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제 검열과 탄압만으로 아는 것을 독점하거나 농단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해버렸다. 이제 모든 국민이 잠재적으로 기자인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진을 찍고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기사를 실시간으로 세계 어느 곳이나 전송할 수 있다. 그들이 손에서 떼려고 하지 않는 스마트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반정부 시위 현장에 공중파 방송국 기자들이나 유력 일간 신문기자들이 야유를 받거나 출입 제한을 당하는 볼썽사나운 풍경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오래다. 스마트폰으로 그들은 실시간으로 기사가 어떻게 쓰였는지 검색할 수 있고, 심지어 그 기사와 반대되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다른 시민의 트위터 등으로 손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아는 것을 독점하려는 권력으로부터 비밀을 빼내 국민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언론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민주언론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도 강한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국민의 스마트폰이 신문을 제작하고 신문을 구독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방송을 제작하고 방송을 보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신문사와 방송사는 없어도 그만인 셈이다. 돌아보라. 심지어 이제는 기자들이 개인 블로그나 SNS에 실려 있는 정보를 기사로 옮기기까지 하지 않는가. 권력과 체제 입장에서는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온 국민을 상대로 검열과 탄압을 시행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아는 것이 힘이다”. 체제가 어떻게 이 자명한 테제를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궁즉통’이라고 했던가. 곤궁하면 살 길을 찾게 되는 법이다. 이제 권력은 ‘알지 못하게 하는 방식’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떻게 모든 국민의 스마트폰을 검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권력은 묘수 하나를 마련했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알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신문사나 방송사든지 아니면 스마트폰의 블로그나 SNS든지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는 기사가 소개되면, 신속하게 수많은 기사들, 충분히 원초적이고 자극적이어서 국민의 시선을 충분히 끌만한 기사들을 신속하게 개개인의 스마트폰으로 합류시켜서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방식이다.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하도록 다른 수많은 현란한 것들을 보여주어 아이의 정신을 빼놓을 때 어머니들이 자주 쓰는 기법이기도 하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자극적 기사로 쟁점 희석에 맞서
그 쟁점들을 쓰고 또 쓰라
그것이 진정한 언론인의 척도다”

지금 심각한 문제로 온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의 문제점도 당시 이명박 정권 때에도 실시간으로 국민들에게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4대강 주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나 시민단체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어떻게 4대강이 녹차 라떼가 되어가고 있는지, 영상과 글로 이미 가상공간에 올려놓았다. 그렇지만 이 충격적인 기사는 권력과 권력에 직·간접적으로 지배되고 있던 언론사나 주요 포털사이트에 흘러넘친 다른 기사들, 유명 연예인의 스캔들도 좋고 해묵은 남북대립 기사도 좋고, 아니면 프로스포츠 관련 기사도 좋다. 녹차 라떼로 변질된 4대강으로부터 국민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것이라면, 체제나 보수 언론은 닥치는 대로 기사들을 가상 공간에 쏟아부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이 부각되는 것은 현 정권의 무엇을 가리기 위해 그런 것인지 의심해볼 만한 일이다.

신문과 방송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은 지금 심각한 자괴감에 빠져 있다. 가장 빠르고 신속하게 국민이 알아야만 하는 일을 기사나 방송으로 보내는 임무를 이미 스마트폰에 빼앗긴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종편방송과 수많은 인터넷 방송과 인터넷 신문이 생기면서, 참담한 생존 경쟁에 모든 언론사들이 내던져진 지 오래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국민의 시선을 하나라도 끌어들이기 위해서 계속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낼 수밖에 없다. 물론 팩트를 다루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제 언론인과 연예인의 차이가 무엇인지 헛갈린다는 자괴감이 도사리고 있다. 한때는 권력이 가장 두려워했던 기자가 이제는 사회적 쟁점을 희석시키는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붓는 자의반타의반 체제의 수호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권력이 독점하려는 ‘아는 것’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것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가 정말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을 희석시키는 시대다.

바로 이 지점이다. 이제 언론은 ‘신속하고 정확하게!’라는 표어를 버려야만 한다. 아무리 신속하고 정확해도 국민이 가진 스마트폰을 물리적으로 따라가기 힘드니까 말이다.

이제 민주언론을 표방하는 언론인이라면 새로운 표어로 무장해야만 한다. ‘끈덕지고 집요하게!’ 그렇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들의 급류에 휩쓸려갈 것 같은 중요한 기사를 그렇게 허망하게 쓸려가지 않도록 ‘끈덕지고 집요하게’ 붙잡아야만 한다. 켜켜이 쌓이는 새로운 기사들 속에 먼지를 털어내듯 우리 국민이 알아야만 하는 쟁점을 꺼내서 ‘끈덕지고 집요하게’ 기사를 쓰고 또 써야만 한다.

그렇다. 진정한 언론인의 능력은 그가 얼마나 ‘끈덕지고 집요했는지’에 의해서만 측정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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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후반부로 치닫고 있는 2013년이다. 그렇지만 아는가. 모든 사람들이 2013년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릴 필요는 없다. 주변을 살펴보라. 아직도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지 않은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유신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2013년을 조선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남존여비와 경로사상으로 무장하고 있을 것이다. 또 2013년을 일제강점기로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혼마치(本町)의 퇴폐적이고 냉소적인 소비문화를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2013년을 유신시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자의 눈치만 보면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 하고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도, 일제강점기도, 그리고 유신시대도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 이렇게 유령처럼 발호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유령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아들이 불행히도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하자. 불행 중 다행이랄까, 비행기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로 추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의 시신을 발견한 경우와 시신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 중 어느 것이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골적으로 물어보자면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 소식과 실종 소식 중 어느 것이 더 소망스러운 것일까. 순간적이나마 사랑하는 사람의 실종이 그의 사망보다 더 소망스러운 일이라고 대답할 가능성이 있다. 실종된 사람은 살아서 돌아올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다는 짧은 생각에서다.


새누리당 군사쿠테타 미화하지 마라 (출처 : 경향DB)


그렇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우리는 사망 소식보다 실종 소식이 남아있는 가족에게 더 큰 상처와 슬픔을 남겨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행기 사고가 2003년에 일어났다고 가정하자. 사망 소식을 접한 당시에 나머지 가족들은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상처가 그렇듯이, 정신적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비록 깊은 흉터는 남기겠지만 아물어가기 마련이다. 당연히 10년이 지난 2013년쯤 유족들은 나름대로 안정을 찾게 될 것이다. 반면 실종 소식은 유족들에게 사망 소식보다 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실종 소식을 접한 유족들이 결코 이사를 갈 수 없게 되리라는 점이다. 실종자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족들은 실종된 아들의 방마저도 그대로 유지하려 할 것이다. 언제든지 아들이 돌아오면 써야 되니, 청소도 매일 말끔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2003년에 실종된 아들은 2013년이 되었음에도 조금도 나이도 먹지 않은 채 남은 유족들과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유령이 탄생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남은 유족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개입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유령이 아닌가. 그래서일까, 동서양을 구분할 것도 없이 인류가 그렇게도 장례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장례 행사는 고인을 두 번 죽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고인의 죽음이 첫 번째의 죽음이라면, 유족의 마음에 남은 고인마저 떠나보내는 장례 행사는 고인에게 두 번째 죽음을 선고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마음에서 고인을 영영 떠나보내는 두 번째 죽음이 아닐까. 그래서 장례는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하는 절차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단을 마련하고 향을 지피고 조문객을 받으며 맞절을 하는 것은 마음에 남아 있는 고인을 떠나보내려는 유족들의 처절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출처 :경향DB)

▲ “과거를 제대로 청산 못해

우리 주변에 가득 찬 유령들을

무덤으로 돌려 보낼 퇴마사가 필요”


비행기 사고로 실종된 아들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첫 번째 죽음이 완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아들의 시신을 확인할 수 없으니, 유족들은 장례를 치를 수가 없다. 언제든지 문을 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아들의 실종 소식은 고인의 두 번째 죽음을 영원히 유보하도록 만드는 참담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아들과 함께 사는 꼴이니, 영락없이 유령과 함께하는 세월이 시작된 셈이다. 이제 남은 유족들은 2003년 실종 사고가 있던 그 날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족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사를 갈 수도 없고, 여행을 갈 수도 없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수도 없고, 맛난 것을 편안하게 먹을 수도 없다. 유족들에게 2004년도, 2005년도, 그리고 2013년도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삶은 실종 사고와 함께 방부 처리된 미라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하긴 유령과 함께 사니 어떻게 유족들의 표정이 잿빛을 띠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유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남존여비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조선시대의 유령이, 식민지 지식인의 냉소적 지성을 낳았던 일제강점기의 유령이, 그리고 전태일과 장준하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유신시대의 유령이 우리 주변 도처에서 배회하며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조선시대는, 일제강점기는, 그리고 유신시대는 이미 지나간 시대이고, 죽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 가지 소홀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그리고 유신시대에 대한 장례식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치를 수 없는 실종자는 유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나간 시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우리는 장례식을 이미 치렀다. 그럼에도 2013년 오늘 유령들처럼 과거 시대의 망령들이 우리의 삶을 잿빛으로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례식을 부정하면서 죽은 시대를 실종된 시대로 만들려는 세력들이 발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묘살이 시작한 고 장준하 선생 장남 호권씨 (출처 :경향DB)


과거 망령들을 불러내는 어두운 세력들이 장례식을 치른 적이 없다고 설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미풍양속은 죽지 않았다고,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자본주의는 죽지 않았다고, 유신시대의 개발독재는 아직 살아있다고, 그들은 앞다투어 주문을 외우고 있다. 이미 죽은 것들을 그들은 실종된 것들로 만들려는 것이다. 유령을 불러내는 그들의 주문은 효과가 있었나보다. 도처에 그들이 불러낸 유령들에 씌인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니 말이다. 역차별을 운운하며 과거 남존여비로 회귀하려는 사람들, 일제강점기가 우리를 개화시켰다며 자본주의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 유신시대 개발독재의 참담함을 경제적 풍요로 퉁치려는 사람들. 돌아보라. 정계, 학계, 재계, 그리고 언론계는 이미 유령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우리는 2013년을 떠돌고 있는 유령들을 다시 무덤으로 되돌려 보내는 퇴마사가 되어야만 한다. 이를 소홀히 한다면, 우리 누구도 2013년을 살아낼 수도, 그리고 2014년을 맞이할 수도 없을 테니까.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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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가본 적이 있는가. 이곳을 방문한 누구라도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유혹에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조선시대 왕릉을 압도하는 규모에 놀라 부러움도 피력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집트가 너무 멀다면, 가까운 중국에라도 가본 적은 있는가. 중국에서 누구나 한번쯤은 만리장성에 발을 디디게 될 것이다. 끝도 없이 산을 따라 펼쳐진 만리장성을 보면서 중국 문명의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되어 북한산에 남아 있는 산성이 초라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해외에 나갈 여유가 없다면, 서울 경복궁에라도 들러 보라. 엄청난 규모의 궁궐이 위엄을 뽐내고 서 있을 것이다. 피라미드도 만리장성도 그리고 경복궁의 웅장함에 매료되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그렇다. 우리는 지배자의 시선으로 피라미드나 만리장성, 혹은 경복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이라도 깊게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피라미드를 만들려고 무거운 돌을 나르며 피땀을 흘리는 노예들의 모습, 만리장성을 만드는 데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에 지쳐 쓰러져갔던 수십만의 사람들, 혹은 농사를 접고 강제로 경복궁 창건과 복원에 동원되었던 우리 조상들. 그 참담한 장면이 떠오르는가. 이것이 떠오를 때, 우리는 마침내 인문주의적으로 역사를 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피라미드, 만리장성, 그리고 경복궁을 배경으로 V자를 그으며 해맑은 얼굴로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피라미드의 기단부, 만리장성의 성벽, 그리고 경복궁의 외벽에서 과거 억압받던 사람들의 고통의 단말마가 울리는데, 어떻게 순진한 관광객으로 머물 수 있다는 말인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 그리고 문화의 기록 자체가 야만성을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전승의 과정 역시 야만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시대 가장 탁월한 지성 발터 벤야민의 말이다. 그렇다. 피라미드도 야만이고, 만리장성도 야만이고, 경복궁도 야만이다. 그러니 그것에 대한 모든 기록, 역사도 야만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당연한 일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지 않던 피땀과 유골을 토대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건축물을 역사의 위대한 유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전한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야만이 아닐 수 있는가. 아니 기만이라고 해도 좋을 일이다. 역사가의 선전에 속아 거대한 건축물에 경의를 바칠 때, 우리는 자신도 괴로운 피땀을 흘려야 하는 운명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야만을 문명으로 포장하는 역사가를 경계하자. 그들의 기만에 속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참혹했던 것인지 망각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이런 핏빛으로 점철되고 단말마의 미명이 음습하게 울리는 유물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이럴 때 드디어 지구상에는 황제와 파라오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파라오나 황제가 지배하는 왕조시대가 아니라고 반문하지는 말자. 단지 지금은 그런 인격적 지배자가 아니라 인격성을 넘어서는 더 강한 지배자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무서움이다. 전자본주의 시대나 자본주의 시대가 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사례 하나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 동원된 노예들 중 어느 누구도 화려한 피라미드에서 안식에 들지 못했다. 그곳은 오직 파라오만이 쉴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화려한 주상복합건물을 만든 노동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그곳에 거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직 돈을 많이 가진 사람만이 아무런 수고도 없이 그곳에 거주할 수 있을 뿐이다. 채찍질이란 직접적인 폭력만이 억압일 수는 없다. 사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든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이 더 야비하고 기만적인 억압일 수도 있으니까.

 

일러스트 김상민

▲ 피라미드·만리장성·유신독재…
웅장함 뒤에 가려진 피와 땀
문명으로 포장된 야만에 경계를

물론 전자본주의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전자에서의 복종이 ‘강제적 복종’이었다면 후자에서의 복종은 ‘자발적 복종’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복종’에서 ‘자발’에 방점이 찍히는 순간, 우리 시대가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착시효과가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과거 사회가 폭력적일 수는 있었어도 더 정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예는 항상 도망갈 궁리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이미 길들여진 우리는 도망갈 궁리는커녕 어떻게 하면 노동자가 될지를 더 고민하고 있다. 채찍질이 없으면 태업을 하던 노예들, 그리고 해고될까봐 야근도 서슴지 않는 우리들.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상황인지.

지금은 피라미드에서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을 보고 거대한 빌딩에서 만리장성을 읽어낼 감수성이 필요한 시대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의 선조들과 우리의 동료들의 피땀과 굴욕을 읽어내야만 한다. 벤야민이 역사철학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술회하면서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본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니 더 자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피라미드, 만리장성, 그리고 경복궁을 이루는 돌들을 아주 세게 손바닥으로 쓸면서 그 거대한 건축물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마찰 때문에 손바닥이 얼얼하고 심지어는 진물이 생기고 마침내 피가 흐를 때, 우리는 지금껏 인간이 겪었던 오욕의 역사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역사, 그러니까 자유와 정의를 긍정하는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지금 치열하게 전개되는 우리의 역사 교과서 논쟁을 보았다면 벤야민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분명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장탄사를 내뱉었을 것이다. 팩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논쟁의 핵심일 수는 없다. 억압이 존재했던 시대에 그것이 왕조이든 독재이든 혹은 자본에 의해서든 팩트란 어차피 지배의 흔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논쟁은 역사관의 논쟁일 수밖에 없다. 일체의 부당한 억압과 지배를 부정하며 민주주의를 꿈꾸는 인문주의적 시선의 역사관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타율적이든 자발적이든 거대한 동원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화려한 역사적 팩트들을 긍정하면서 승자에게 손을 들어주는 역사관을 가질 것인가. 전자가 바로 진보적 역사관이라면 바로 후자가 보수적 역사관이다.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일제 강점기나 혹은 유신시절에 아무리 세련된 문물들이 범람했을지라도 심지어 그것들이 그 시절 유물의 99%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해야만 한다”. 그 모든 세련된 문물들은 결국 제국주의를 위해, 혹은 독재자를 위해, 아니면 자본주의를 위해 바쳐진 기념비일 테니까 말이다. 피라미드에서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대 건축물이 인류의 유산이라는 장밋빛 주장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나 유신 시절의 모든 자본주의적 산물들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인간들의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 피비린내를 희석시키려는 보수적인 역사관이 지금 심각할 정도로 발호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설 <1984>에서 조지 오웰도 우리에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고.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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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덕! 보통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다. 2009년 9월18일 지리산의 주봉 천왕봉에는 낯선 풍경이 연출되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91세의 이병덕 할아버지를 포함한 다섯 명으로 구성된 노인 등정대가 천왕봉 정상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복 차림에 나무 지팡이를 짚고 정상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신선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죽기 전에 지리산 천왕봉 한번 가보자!” 젊은이들마저 헉헉거리게 만드는 천왕봉 등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노인 등정대는 아홉 시간의 사투 끝에 정상에 섰던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천왕봉에 등정하려는 우리 할아버지들의 의지에는 ‘스스로의 걸음으로’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 할아버지들은 스스로의 걸음으로 천왕봉에 오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아들과 손주 등에 업혀 천왕봉에 오를 수도 있었다. 혹은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가볍게 착륙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건 ‘스스로의 걸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다른 것에 의지하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는 제대로 된 희열이 발생할 수는 없다. 자신의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야만 한다. 자기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마침내 정상에 이를 때에만 우리 내면은 주체할 수 없는 희열로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는 법이니까.

우리 할아버지들뿐만 아니라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말하지 않고도 안다. 정상에 오른 희열은 사실 겉모습일 뿐, 진정한 희열은 자신을 극복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정복의 대상은 항상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지리산 근처 함양 출신이지만 나는 설악산을 사랑한다. 설악산이 지리산보다 나를 훨씬 더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설악산 정상 대청봉에서 일출을 보려면 새벽 일찍 탐방로가 열리자마자 오색 약수터를 서둘러 출발해야 한다. 정말 동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출을 제대로 맞이하려면, 가파른 등산로를 오를 때 쉴 생각은 아예 포기해야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해가 뜨기 직전 대청봉에 올랐던 적이 있는가. 그곳에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동해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던 적이 있는가. 아직도 나는 서서히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는 태양을 보았던 대청봉에서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대청봉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스스로의 걸음으로’ 대청봉에 이른 사람들, 방금 떠오르고 있는 태양빛에 구릿빛을 띠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설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설악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설악산은 동해 바다의 일출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도 아니다. 차라리 설악산은 구도의 장소에 가까울 것이다. 세상살이에 대한 일체의 고뇌도 가파른 설악산은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거칠게 호흡할 때, 고뇌가 우리를 지배할 여력도 우리를 좌지우지할 여지도 없으니까. 그래서 설악산은 좌절과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기꺼이 구원해줄 것이다. 그러나 설악산은 우리 마음만 다스려주는 것이 아니다. 설악산은 우리 몸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기도 한다. 대청봉에 오르는 시간이 길어지거나 혹은 도중에 더 많이 쉬게 되었을 때, 우리는 허허로운 마음으로 자신이 약해졌거나 혹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악산에 오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진리에 이르려는 구도자의 치열한 수행을 닮아 있다. 자신과 직면하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구도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대청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광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대청봉에 펼쳐진 아찔한 설악산의 장관과 멀리 보이는 일망무제의 동해는 지금까지 치열했던 구도행위의 완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청봉의 풍광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 풍광에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이기고 떼었던 발걸음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청봉에 올랐던 사람들이 풍광이 너무나 근사하다는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헬리콥터나 다른 수단으로 별다른 노력도 없이 대청봉에 올라서는 결코 그 풍광을 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 “양양 오색에 케이블카 설치 추진


설악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후손 ‘산행의 희열’ 잃을까 두렵다”

 

지금 설악산에는 케이블카가 있기는 하다. 권금성에까지 이르는 케이블카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설악산의 진정한 묘미를 아는 사람들, 아니 산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권금성 근처를 아예 피하고 있다. ‘스스로의 걸음’이 아니라면 산에 오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에 산행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쉽게 오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에 직면하기 어려운 법이다. 산의 가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급적 힘든 코스로 산에 오르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건 그만큼 아무런 도움이 없이 고독하게 자신에 직면하려는 열망 때문은 아닐는지.

 

나 이외에도 설악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지금 양양 오색에서 시도되고 있는 케이블카 설치 소식 때문이다. 이미 대청봉에 오르며 너무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우리들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느꼈던 희열을 더 이상 후손들이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권금성으로 가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대청봉에 가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케이블카 설치가 환경을 훼손하는지, 아니면 환경을 보호하는지 여부를 두고 다양한 논의들이 펼쳐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설악산, 혹은 등산이 가진 인문학적 가치를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설악산을 돈 몇 푼으로 쉽게 살 수 있는 매춘부로 만들지 말자. 우리의 엄청난 구애행위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도도한 여신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우리를 위해서나 후손들을 위해서 말이다.

 

갑자기 가수 양희은이 불러 유명한 ‘한계령’이란 노래 선율이 떠오른다. 허허롭게 대청봉에 내려올 때,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달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네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앞으로 이 노래를 지금처럼 부를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병덕 할아버지는 지금 설악산을 필두로 지리산과 같은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아이고. 진작 케이블카가 있었으면 천왕봉 오르는 것이 그만큼 쉬웠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셨을까. 아니면 “산은 스스로 올라야 맛이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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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잘 아는 것과 무엇인가를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쉽게 확인되는 일 아닌가. 노골적으로 물어볼까. 지금 당신의 배우자에 대해 아는 것을 연애 시절에도 알았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결혼했겠는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법이다. 사람에 대해서만 그럴까. 아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는 누구보다 게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산이나 등산 장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포괄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카프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카프카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시시콜콜한 삶에도 정통하게 될 것이다. 아마 그는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도 몇 번이고 방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자.


다양한 게임과 그것의 작동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반드시 게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단순히 게임 업체에 다니고 있기에 그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등산 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은 등산 장비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가 산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그는 생계를 위해 등산 장비 사용법을 숙지해두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의 작품과 그의 생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카프카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독문과 교수로서 강의를 위해 카프카를 요령껏 정리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얻게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잘 알게 된다는 교훈이다.


(경향DB)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병폐는 앎과 사랑 사이의 관계를 거꾸로 알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수학을 예로 들어볼까. 선행학습이든 뭐든 수학을 열심히 가르쳐서 그걸 잘 하게 되면 아이들이 수학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 아이는 나중에 수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되어 괴델과 같은 경천동지할 공리를 발견하는 학자로 자랄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오직 수학과 그것이 열어놓은 수적 세계를 사랑하는 학생만이 제2의 괴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교육은 아이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찾아주는 것으로 시작되어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만일 아이들이 사랑하는 것을 찾는다면,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것을 알아갈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을 찾는 순간, 아이들은 제2의 괴델도, 제2의 맥스웰도, 제2의 글렌 굴드도, 제2의 카프카, 그러니까 독창적인 지성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한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좋은 부모를 만났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부모는 아이가 사랑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옆에서 끈덕지게 지켜봐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학 때처럼 여유가 있을 때, 아이는 다양한 곳과 다양한 것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름방학 때 이 가족이 지리산에 올라간 것이 결정적이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를 보고 아이는 우주에 매료됐던 것이다. 마침내 아이는 사랑하는 것을 찾은 것이다. 이후 아이는 천체 망원경도 사고, 인터넷에서 자료도 검색하고, 가끔은 어려운 천문학 책도 구해 끙끙거리며 보게 될 것이다. 당연히 이 아이의 전공은 천문학이 될 것이다. 별을 그리고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가 어떻게 천문학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침내 그는 대학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게 됐다. 첫 강의에서 그는 무슨 말로 자신의 입을 뗐을까. “여러분! 은하수를 본 적이 있나요? 멋지죠.” 


다른 아이가 한 명 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사회가 변해 천문학을 공부해야 대기업에도 다니고 고위 공무원이 되는 시대에 그 아이가 살고 있다고 하자. 아마 부모들은 아이의 출세를 위해 천문학을 공부시키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선행학습도 시키고, 대학에서 개최한 천문학 캠프에도 아이를 데리고 가며, 부모로서의 열정을 활활 불태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아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부모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인지, 이 아이도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마침내 대학 교단에 서게 됐다. 강의를 시작할 때 그의 첫마디는 무엇일까. “여러분! 첫 페이지를 넘겨보세요. 거기에 우리가 한 학기 동안 다룰 전반적인 내용이 요약돼 있습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창조경제·창의인재 ‘구호’ 아래

온통 분주한 교육계의 헛발질…

독창적 지성인을 키우는 유일한 길은

아이가 ‘사랑하는 것’을 찾아주는 것”


별을 사랑했던 첫 번째 교수와 천문학에 정통한 두 번째 교수 중 누가 새로운 별을 발견할 것인가. 누가 우주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인가. 당연히 첫 번째 교수일 것이다. 그는 천문학자가 목적이 아니고, 교수 직위도 목적이 아니다. 그는 별과 우주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그는 시간만 나면 천체 망원경으로 우주와 그 속에 펼쳐진 별들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어떻게 새로운 별을 발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우주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이 나온다면, 그가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언제든지 새로운 별과 관련된 그의 글들은 독창적인 논문으로 학술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교수는 어떨까. 그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업적에 맞추기 위해 논문을 쓰고 학술지에 투고할 것이다. 물론 논문을 쓸 때, 그는 첫 번째 교수의 독창적인 논문을 인용하게 될 것이다.


창조경제니, 창의인재니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는 정권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교육계가 분주하다. 교육 과정에 새로운, 그래서 독창적으로 보이는 교과목을 둔다고 해서 독창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전공들을 가로지르는 융합 교육이 강화돼야 독창적인 지성인이 자라는 것도 아니다. 이건 모두 완전히 헛발질이다. 돌아보라. 지금은 대학의 붕괴가 중·고등학교의 붕괴로, 그리고 이어서 초등학교의 붕괴로 이어지는 시대다. 고등학교까지는 다양한 과목들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성적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한 아이의 적성을 규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과연 지금 우리 중·고등학교는 아이가 평생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진단평가 보는 초등학생들 (경향DB)


중·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과 대학원은 이제 사랑하는 한 가지 것만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사랑이 그렇지만, 천문학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학문을 돌볼 틈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전공이다. 이제 마음 놓고 천문학을, 문학을, 물리학을, 그리고 사회학을 사랑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2, 3개나 복수전공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융합형 인재를 키우려고 그러는 것인가. 모두가 헛소리일 뿐이다. 자본이 아니라 아이들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주는 것, 이것이 바로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앞 세대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다. 명심하자. 독창성은 사랑이란 척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이들이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찾도록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만일 찾았다면 그들의 사랑을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독창적인 지성인들을 키우는 유일한 방법이다.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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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이미지는 체제가 우리를 훈육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모든 훈육이 그렇지만 훈육을 통해 체제가 의도하는 것은 자발적 복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자발적 복종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채찍이나 당근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체제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배웠던 것이다. 어떤 노예도 당근이 없거나 채찍이 너무 가혹하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당근이 없어도 채찍이 가혹해도 도망갈 줄을 모른다. 오히려 당근과 채찍이 있는 곳으로 기꺼이 기어들어가려 한다. 직장에서 해고될 때, 우리는 다른 직장을 찾아 노동자의 삶을 영위하려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더 이상 감시할 필요가 없다. 자발적 복종의 시대에서 감시는 체제가 직접 하기보다는 지배되는 개개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예들을 감시하던 감시자가 이제 개개인의 내면에 이미지의 형태로 각인돼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발적 복종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은 체제가 원하는 것일 뿐이니까. 그래서 푸코가 이야기한 것처럼 훈육이 중요하다. 훈육이란 내면에 감시자를, 즉 특정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욕망의 이미지로, 이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염려의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이미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우리 내면에 각인시키도록 만든다.


욕망의 이미지는 자본주의가 상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차별의 이미지일 수도 있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훈육하도록 유혹하는 성장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명품 가방을 들고 있는 어느 모델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떠올려보자. 나도 저 가방을 들고 있으면 매력적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사기 힘든 명품 가방을 구입하는 순간, 우리는 저 섹시한 모델처럼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멋진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이것이 바로 차별의 이미지다. 차별의 이미지가 상품, 즉 대상과 관련된다면, 성장의 이미지는 우리 자신과 관련된다. 스티브 잡스의 이미지 혹은 젊은 나이에 학계에서 주목받는 학자의 이미지 등을 보면서, 스스로 그렇게 주목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성장의 이미지가 자기계발 의지를 작동시키는 이미지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명품가방 루이뷔통.


“나는 가질 수 있다” 혹은 “나는 될 수 있다”는 의지를 각인시키는 욕망의 이미지와 달리, 염려의 이미지는 과도한 부정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안 좋은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염려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이웃을 감시하는 폐쇄회로(CC)TV가 제공하는 이미지는 항상 이웃이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혹은 스스로 잘못 행동하면 타인이 자신을 범죄자로 지목할 수 있다는 염려를 낳을 수 있다. 혹은 유전공학의 도움을 받은 첨단 진단장치들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항상 자신이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만들기도 한다. 물론 진단을 통해 아무런 병적 징후도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의사는 우리에게 걱정스러운 듯이 말한다. “아직 질병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언젠가 질병이 등장할 수 있으니, 계속 몸상태를 관찰하도록 하지요.” 이 말을 듣고 우리가 질병에 걸릴 수도 있는 암담한 미래를 염려하지 않을 재주가 있겠는가.


일러스트 _ 김상민

▲ “노력이 미래의 결실을 약속하는

미래 시제는 차라리 행복

미래완료 시제에서 ‘결실’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막막하기만”


욕망의 이미지든 아니면 염려의 이미지든 체제가 만들어 우리에게 각인시킨 이미지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리의 내면에 특정한 미래를 꿈꾸거나 두려워하는 미래완료라는 시제를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특정한 시점에서부터 그것보다 더 미래인 ‘그 날(the day)’에 완료되는 시제가 바로 미래완료 시제다. 명품을 사는 날이 ‘그 날’일 수도 있고, 과장으로 혹은 부장으로 승진하는 날이 ‘그 날’일 수도 있다. 혹은 도둑이 들어 집 재산을 모두 털어가는 날이 ‘그 날’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말기암 진단이라고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는 날이 ‘그 날’일 수도 있다. 미래의 어떤 불특정한 시점이 중요하다. 취업하는 데 성공한 날일 수도 있고, 자기계발과 관련된 학원에 등록하는 날일 수도 있고, 사설 경비업체와 계약한 날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검게 그을린 삼겹살을 먹는 날일 수도 있다.


미래완료 시제는 미래 시제보다 우리를 현재가 아닌 미래에 더 살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다. 단순한 미래 시제라면 지금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우리는 가을에 풍년을 맞게 된다고 믿으면 된다. 현재의 노력이 미래의 결실을 약속하는 셈이다. 그나마 미래 시제가 지배하던 시절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행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래완료 시제에서 ‘그 날’은 여전히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막연하기만 하다. 성공과 승진은 학연과 지연이 같은 상사가 부임하는 어느 날에서부터 올 수도 있고, 자신에게 맞는 자기계발서를 서점에서 구하는 어느 날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혹은 말기암 진단을 받는 ‘그 날’은 회식자리에서 검게 그을린 삼겹살을 먹게 되는 어느 날에서 올 수도 있고, 경기 호황으로 야근이 빈번해질 어느 날에서 싹이 날 수도 있다.


미래완료 시제에서 우리는 ‘그 날’보다는 ‘그 날’과 현재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불특정한 어느 시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현재와 ‘그 날’을 설정한 것이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사실을 까먹게 되는 것도 다 미래 시제가 갖는 이런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불특정한 미래의 어느 시점을 포착하는지의 여부는 모두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게 된다. ‘불행히도 당신은 명문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군요’ ‘그 업체 말고 다른 경비업체를 골랐다면 되었을 것을’ ‘돈이 좀 들더라도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셨어야 했는데’ 등. 체제나 구조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느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예견된 ‘그 날’을 이루거나 미룰 수 있는 불특정한 미래의 어느 기회를 스스로 놓쳤다고 절망하면서 그들은 쓰러져갔던 것이다.


‘그 날’로 완성되는 그 불특정한 시점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욕망이나 염려를 강화시키는 것 아닌가. 여기서 욕망의 이미지인지 염려의 이미지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미래완료 시제를 낳는 이미지는 현재라는 시제를 증발시키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염려 사이에 우리를 던져 놓아 버린다는 점이다. 현재가 타자와 교류하는 시제라면, 미래완료는 파편화되어 고독하기만 한 내면, 혹은 관념만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 언제 올지 모를 ‘그 날’을 소망하고 염려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친구와 만나서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현재를 잡고 향유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미래완료 시제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가수 사이 (경향DB)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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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옛날 똘똘이라는 남자가 공룡을 한 마리 잡았다. 공룡을 잡아 마을로 돌아온 뒤, 그는 고기를 조금 잘라서 가족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미소가 절로 떠오르는 정말 훈훈한 풍경이다. 까마득한 원시시대에는 모두 마음이 너그러워 그랬던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경제체제로 정착되기 전, 그러니까 100여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 어느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다. 산불로 마을에 뛰어내려온 멧돼지 한 마리를 용감한 돌쇠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거대한 멧돼지여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돌쇠는 기꺼이 멧돼지를 골고루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원시시대의 똘똘이와 조선시대의 돌쇠가 자신이 애써 잡은 사냥감을 기꺼이 나누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맛있는 고기라고 해도 너무 많으면 혼자서는 결코 모두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써 잡은 공룡이나 멧돼지가 아까워도 다 먹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해서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 탐욕을 부려 보관하려고 하면 아마 집은 썩은 냄새가 풍기고 아울러 병균의 온상지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항상 싱싱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고, 노쇠한 사람도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냉장고가 문제였던 것이다.

004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 자, 지금 바로 냉장고를 열어보자. 보통 위가 냉동실이고 아래가 냉장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냉동실을 열어보자. 검은 비닐 봉투가 정체 모를 고기와 함께 붙어 얼어 있는 덩어리를 몇 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아니면 닭고기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심각한 것은 도대체 어느 시절 고기인지 아리송하다. 아니 어쩌면 매머드 고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냉동실에는 냉동만두가 더 냉동되어 방치돼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만두인지 돌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이다. 보통 이런 돌만두는 새로운 냉동만두를 넣으려다가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다음으로 냉장실을 열어보라. 공장에서 오래 보관해서 먹으라고 플라스틱에 담아 포장한 식품들로 가득할 것이다. 플라스틱에 담긴 생수병과 음료수, 병에 담긴 여러 저장식품들. 냉장실에 잘 보관하면 유통기한 정도는 하루 이틀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유통기한은 실온을 기준으로 하니까 말이다. 심지어 호박마저도 진공포장으로 채소 칸에 들어 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냉동실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 대형마트에서 사온 제품들 뒤편에 정체 모를 플라스틱들과 비닐 봉투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냉동실과 냉장실에서 정체 모를 봉투들,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식품들을 꺼내서 없앨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그걸 먹고 탈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한 일 아닌가. 음식물 쓰레기를 담는 종량제 봉투에 그것들을 모두 쓸어담아, 집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 투척한다. 다시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여니 한결 청결해 보인다. 그러나 왠지 허전하다. 냉장고가 비게 되면, 무엇인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즐거운 쇼핑 시간이다. 쾌적한 대형마트에서 가족들의 해맑은 웃음과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며 정말 싱싱한 포장식품들을 그득 사오면 되는데 말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혼자 다 먹을 수 없었던 원시시대

사냥감을 나눠먹던 풍경

대형마트와 냉장고 사이의 삶

자본주의가 인간을 위태롭게 한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처음 냉장고가 없어졌을 때, 몹시 불편할 것이다. 어떤 습관이라도 고치기는 무척 힘든 법이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재래시장에 들러 싱싱한 식품을 적당량 사서 바로 요리해서 먹는 생활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곧 냉장고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냉장고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냉장고와 대형마트는 공생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냉장고를 대량생산하는 거대한 산업자본,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거대 자본, 그리고 그곳에 진열된 식품들을 대량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산업자본이 도사리고 있다. 묘한 공생 관계 아닌가. 냉장고는 대량생산된 식품들을 전제하고 있고, 대량생산된 식품들은 냉장고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냉장고와 대형마트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던 우리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에 가족들의 건강, 이웃과의 공동체 생활, 생태, 재래시장 그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었고, 거대 자본은 그 덩치를 늘려갔던 것이다. 당연히 대량생산된 식품에는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한 인위적인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건강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과들도 냉장고에 저장하는 순간, 바구니에 담겨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기회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이웃과의 돈독한 관계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냉장고에 방치되어 있는 식품들은 오늘도 엄청나게 버려지고 있고, 동시에 대량생산을 위해 고기나 채소들에는 가혹한 생육 방법이나 유전자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생태 환경인들 무사하겠는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 그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절망한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거대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길들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 아닐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없애라! 한 번에 없앨 자신이 없다면, 냉장고의 용량이라도 줄여라! 가족 건강 문제, 생태 문제, 이웃 공동체 문제, 재래시장 문제가 그만큼 해결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 “여자가 여자에게 추천하는 속이 넓은 냉장고”의 유혹, “살고 먹고 사랑하는 데 필수적인 냉장고”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냉장고의 폐기, 혹은 냉장고 용량 축소!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는가!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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