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세월호 참사를 또 한번 외면했다. 국회 사무처는 오는 29·30일에 열리는 2차 세월호청문회 장소로 국회 회의장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요청을 거절했다. 사무처는 ‘국회청사 회의장 등 사용 내규’를 들어 “국회가 주관하는 국제회의 등 공식행사, 교섭단체가 국회 운영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 등에만 쓸 수 있다”며 사용 불가 방침을 최근 특조위에 통보했다.

▶[기타뉴스] 세월호 유가족들이 또 삭발·단식을 한 이유

국회 결정은 특조위의 성격과 ‘민의의 전당’이란 국회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다. 특조위는 국회가 통과시킨 세월호특별법에 근거해 구성된 기구다. 이 특조위 위원 17명 중 10명은 여야가 5명씩 추천해 선출했다. 이처럼 특조위는 조직과 인적 구성의 뿌리를 국회에 두고 있다. 특조위가 이번에 시행하고자 하는 청문회 역시 세월호특별법에 근거한다. 이렇게 보면 ‘특조위’의 ‘청문회’는 국회가 입법한 바에 따라 열리는 일종의 ‘공식행사’로 볼 수 있다. 국회 사무처의 판단은 내규의 자구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한 것이다. 국회가 이렇게까지 경직되게 판단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특조위는 지난해 12월 서울YWCA 대강당에서 1차 청문회를 열었다. 특별법에 근거한 기구인 특조위의 청문회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고, 공간도 너무나 협소했다.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_경향DB


현재 국회의 각종 회의실은 4·13 총선을 앞두고 텅텅 비어 있다. 공천 경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회의실을 들락거릴 정도로 여유로운 국회의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특조위 청문회가 열려도 국회 운영과 관리엔 문제될 소지가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사무처는 특조위 요청을 단박에 거부했다. 이쯤되면 세월호 참사 2주기에 임박해 열리는 총선을 앞두고, 세월호 참사가 이슈로 부각되는 것을 우려한 정치적 판단이라는 의심마저 든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있지만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은 여전히 광화문 광장과 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청문회마저 거리에서 열려야 하는가.


허남설 | 사회부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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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자 한겨레에 쓰신 ‘영남패권주의와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논지에 십분 공감하면서, 영남패권주의(영패)에 대해 제가 지닌 생각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영패의 고착은 세 단계를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에서의 영남 패권 확립입니다. 두 정권의 이양기에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영패의 폭력성과 무관치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노태우 정권 시절의 3당합당입니다. 이것은 유권자들이 짜놓은 정치지형을 정치엘리트들이 인위적으로 뒤바꿔 호남을 고립시킨 사건입니다. 전통적으로 리버럴 세력권이었던 부산·경남(PK)이 3당합당을 통해 대구·경북(TK)과 합체해 수구화했습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흔히 놓치고 있는 계기인데, 노무현 정권의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시도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노무현 정권은 영패의 완화에 이바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무리한 셈입니다.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관적 선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민주당 분당에 이은 한나라당과의 연정 시도를 통해 노무현 정권은 한국의 영패를 디폴트값으로 만들었습니다. 보기에 따라선 앞의 두 단계에 견줘 세 번째 단계가 더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영패의 공고화를 위해 호남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두 번째 단계까지의 영패만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영패의 정치적 구현체를 새누리당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선생님의 글에 반발한 것은 전통적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문재인 의원 지지자들이었지요. 선생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의원을 영남패권주의자라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소위 친노 세력이 ‘영남패권주의’라는 말 자체에 심하게 반발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저는 2002년에 쓴 ‘신분제로서의 지역주의-극우 멘털리티의 한국적 작동양상’이라는 글에서 TK를 정점으로 한 한국의 지역주의 질서가 일종의 신분제이고,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가 극우 이데올로기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영남패권주의가 인종주의적 성격, 더 나아가 파시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글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위한 일종의 선전글을 겸하고 있었고, 그래서 선생님의 한겨레 기고문과 마찬가지로 TK-새누리 계열의 패권주의를 겨누는 데서 멈췄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글은 노무현 후보와 그 둘레세력에 대한 제 호감과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가를 드러냈습니다. 저는 노무현 후보가 집권 이후 영패에 투항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튀니지 출신의 유대인 작가 알베르 메미가 정의한 인종주의, 즉 “어떤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또는 상상적인 차이들을, 공격자에게는 유리하고 피해자에게는 불리하도록 결정적으로 일반화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호남을 포함한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영남사람들의 지역주의, 곧 영남패권주의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 대다수 논자들이 영호남 지역주의라고 부르는, 그러나 마땅히 영남패권주의라 불려야 할 이 이데올로기는 인종주의입니다. 사실 호남지역주의라는 말에도 어폐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월하다고 가정되는 인종이 뒤처진다고 가정되는 인종에게 갖는 태도와 감정을 인종주의(racism)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유럽계 미국인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갖는 차별 정서를 인종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발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유럽계 미국인에게 갖는 정당한 분노와 저항을 인종주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남성이 여성에게 갖는 우월적 지위와 태도를 성차별주의(sexism)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발로 여성이 남성에 대해 수행하는 저항운동을 성차별주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종주의든 성차별주의든 적극적 가치를 체현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집단이 소극적 가치를 체현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집단을 대하는 패권적 태도를 가리킬 뿐, 그 거꾸로는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남과 호남(을 포함한 다른 지역들)의 관계에서, 그들 사이에 어떤 적대적 감정과 태도가 있다고 할 때, 지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남의 지역주의뿐입니다. 인종주의가 백인우월주의이고, 성차별주의가 남성우월주의이듯, 한국의 지역주의는 영남우월주의, 곧 영남패권주의인 것입니다.

제가 영패를 극우 이데올로기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고결하고 순수한 피에 대한 집착이고, 거기서 비롯된 배제의 욕망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피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패는 극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지역은 곧장 피로 환원됩니다. 그것이 상상된 혈연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호남사람과 영남사람의 결혼은 다소 별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결혼이 결렬됐을 때, 그것은 주로 ‘전라도 핏줄’ ‘전라도 씨’에 대한 경상도 쪽 부모들의 거부감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영패는 전형적 극우 이데올로기인 파시즘과 많은 특징을 나눠 지녔습니다. 우선 영패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늘 편견에 노출돼 있습니다. 영남사람이 지녔다고 선전되는 긍정적 특질들과 호남사람이 지녔다고 선전되는 바로 그만큼의 부정적 특질들은, 독일 제3제국의 권력자들이 소위 아리안족에게 자의적으로 부여한 수많은 긍정적 특질들, 그리고 유대인에게 들씌운 수많은 부정적 특질들과 대칭을 이룹니다. 영패는 영남사람과 다른 지역 주민집단 사이의 평등을, 곧 인간의 평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합니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지도자 원리가 도출됩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사람들 사이에는 그리고 집단들 사이에는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우열의 차이가 있으므로 지도해야 할 사람이나 집단, 지도받아야 할 사람이나 집단은 정해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지도해야 할 지역집단은 영남입니다. 그 영남을 정점으로 한 지역적-인종적 위계질서의 맨 아래에 호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영남사람들의 정서가 과도하게 적대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자연적’ 위계질서를 그것이 뒤집어놓았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독일 제3제국에서 유대인이 집권한 것입니다!

영패는 영남의 정치엘리트들이 바탕을 마련한 것이지만, 그것은 이내 거의 모든 영남사람들에게 파고들었습니다. 영남은 한국의 지역-인종 카스트에서 맨 윗자리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지금 심리적으로 고귀한 신분이 돼 있는 영남사람 대부분이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 노예의 후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얄궂은 일입니다. 그러나 전통적 신분제가 무너지고 역사의 변덕에 힘입어 영남이 정치적·경제적 최고권력자들의 분만실이 되자, 영남인들은 내적으로 융화돼 집단적으로 고귀한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상상된 신분질서 속에서 자족감을 누리며 다른 지역에 물리적 패권을 행사합니다. 요컨대 영패는 인종주의이자 파시즘입니다. 그리고 이 영남파시즘을 실천하는 주체는 새누리당만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이래의 민주당 계열 정당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호남에 기생하는 영남파시스트입니다.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 이전에 있습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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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당신의 근황을 전해주지 않으니 당신의 요즘 형편이 더욱 궁금합니다. 당신의 트위터는 2014년 12월24일에 멈춰져 있군요. 헌법재판소(헌재)가 통합진보당(통진당)의 해산을 결정한 지 닷새 뒤입니다. 통진당 해산은 그보다 두 해 전 치러진 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텔레비전 토론에서 당신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세차게 몰아세웠을 때 이미 결정된 것이었을까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직후, 저는 통진당의 ‘종북주의’와 ‘위헌성’을 묻는 한 인터뷰어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좀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 “통진당 구성원들 가운데 종북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있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나 통진당은 엄연한 합법정당이고, 더구나 원내정당입니다. 만약에 통진당이 대한민국 헌법이 정한 민주적 기본질서를 어기고 있는 정당이라는 판단이 선다면, 정부가 헌재에 통진당의 해산심판을 청구하면 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헌재도 통진당을 위헌정당이라 판단할 것 같지 않습니다. 통진당이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합니까? 복수정당제와 선거제도를 부정합니까? 의회제도와 권력분립을 부정합니까?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정합니까? 그 당 구성원들 개개인의 생각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통진당이 그런 민주적 기본질서를 공개적으로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정당해산심판이 청구되더라도, 헌재는 이것을 기각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두 해도 지나지 않아, 제가 박근혜 정권의 몰상식을 과소평가하고 헌재의 양식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 또렷해졌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법무부는 그 해 11월5일 헌재에 통진당 해산심판을 청구했고, 박근혜씨의 대통령 당선 2주기인 그 이듬해 12월19일 헌재는 인용 8, 기각 1이라는 압도적 다수의견으로 통진당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저는 이 판결이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뿌리째 뽑아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헌재는 법의 지배를 외면하고, 여론재판을, 그러니까 일종의 인민재판을 한 것입니다. 정권이 통진당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을 뿐만 아니라, 세간에도 통진당은 종북정당이라는 인식이 넓게 퍼져있었습니다. 헌재는 이 여론에 편승한 정치재판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정치재판이 시작된 것은 법무부가 긴급 안건으로 상정한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건’을 국무회의가 심의·의결한 2013년 11월5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작은 2012년 4월11일 치러진 제19대 총선 직후 벌어진 통진당의 내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분당으로 마무리된 그 내분의 전말을 되돌아보면 입이 씁쓸합니다. 내분의 씨앗이 된 부정경선 논란에 불을 붙인 것이 스스로 부정경선을 저지른 옛 국민참여당(국참) 계열 당원이었다는 것도, 당신이 이끄는 소위 당권파에게만 부정경선 책임을 온전히 뒤집어씌운 국참당 계열이 거의 모든 언론의 십자포화 지원을 받아 부정경선 논란을 종북논란으로 바꿔치기해 당권파를 여론에서 고립시킨 것도, 결국 국참계와 옛 진보신당계가 탈당을 해 진보정의당(지금의 정의당)을 만들면서 자파 비례대표 의원들의 직을 유지하기 위해 소위 ‘셀프제명’을 한 것도 죄다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국참계와 언론이 저지른 종북몰이에다가 중앙위원회에서의 폭력사태가 포개지면서, 여론은 통진당 내분 사태를 ‘사악한 이정희 대 정의로운 유시민’의 구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통진당에 씌워진 부정경선의 올가미와 종북의 올가미 가운데 더 힘이 셌던 것은 후자였습니다. 당권파 역시 부정경선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은 당신도 인정할 테지만, 그 혐의를 오로지 당권파에게 씌운 것도 모자라 당신과 당신의 동지들을 종북으로 모는 전략으로 제 몸의 때를 씻어내려 시도한 국참계의 술수는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통진당에 짙게 드리워진 종북 이미지는 뒷날 헌법재판관들이 비겁하게도 법의 지배 대신 인민재판을 선택한 동력의 일부가 되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저는 지금 통진당 해산과정을 법치주의와 거리가 먼 인민재판으로 만든 것은 박근혜 정권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선정적 언론과, 한때 당신과 한 둥지에 있던 지금의 정의당 사람들이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말하자면 당신과 당신의 동지들은 법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이스태블리시먼트(Establishment)의 비토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 박멸해야 할 병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진당 해산을 통해서 대한민국은 일단 그 멸균에 성공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위생처리한 대가로 우리는 법의 지배라는, 민주공화국의 커다란 원칙을 훼손해 버렸습니다. 통진당 해산은 대한민국 헌재 역사의 가장 커다란 치욕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거나 방치한 우리는 민주공화국의 시민 자격을 그 순간 잃었습니다. 통진당 해산이 결정됐을 때 당신이 느꼈을 공적 절망감에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번도 통진당 지지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저는 “통진당 구성원들 가운데 종북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의 북한 체제를 고금동서 최악의 전체주의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체제는 절대악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허물어지거나 바뀌어야 할 체제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절대악에 너그러운 사람들을 품고 있던 통진당이 위헌정당이 아니라고 제가 주장한 것은, 통진당 안의 그 세력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일탈자들의 최소 수준, 곧 잔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 세력이 통진당의 정책에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 미미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북 체제에 너그러운 사람들이 통진당의 다수파라고 제가 판단했다면, 그 당이 북한과 협력해 대한민국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혁명정당이라고 판단했다면, 저는 당연히 통진당이 위헌정당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저는 결코 당신이 종북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을 다소 열정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는 평화통일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사람들에게 오해의 빌미를 준 것도 사실입니다. 6·25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묻는 사상경찰의 수준 낮은 질문에 ‘남침’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지 못한 당신이 안타깝습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그 전쟁이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수정주의가 하나의 학문적 견해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적 사상경찰들을 포함해 대한민국 시민 대다수가 당신에게 듣고 싶어 했던 것은 복합적 성격을 지닌 그 ‘한국전쟁’의 ‘기원’이 아니라, 남과 북 사이의 전면적 전쟁을 시작한 것이 어느 쪽이냐였을 뿐입니다.

당신이 열정적 민족주의자로서 북의 동포들에게 깊은 연대감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대감은 북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인권과 복지에 대한 관심으로 발현해야 합니다. 물론 북한 동포들의 인권 신장을 위한 접근에는 여러 길이 있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당신의 견해가 주류 반북주의자들의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의 동포들에 대한 당신의 연대감이 최악의 전체주의 왕조 체제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발현한다면 당신은 남쪽의 악이 싫어서 북쪽의 더 큰 악을 보듬어 안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런 의미의 민족주의자는 아니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문득 그립습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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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1.24 20:23:46 수정 : 2016.01.24 20:29:03

1992년 10월 직업적 이유로 라이프치히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라이프치히 중앙역의 웅장함과 우아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요. 역사(驛舍)를 나오니 오른쪽으로 아스토리아 호텔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저는 ASTORIA라는 글자 뭉치를 보며 크리스토프 하인의 어떤 소설을 떠올렸고, 그 연상의 행로는 크리스타 볼프나 슈테판 하임 같은, 그 무렵 한국에서 읽히기 시작한 동독 출신 작가들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괴테거리를 따라 내려가니 라이프치히 대학이 보였습니다. 유럽의 대학들이 흔히 그렇듯, 라이프치히 대학도 캠퍼스라기보다는 그저 건물들이더군요.

저는 그 대학 건물들을 둘러보며 철학자 빌헬름 분트와 에른스트 블로흐,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구스타프 헤르츠 등 이 학교에서 가르쳤던 지성사의 거장들을 떠올렸습니다. 또 라이프니츠와 괴테를 비롯해, 작곡가 슈만과 바그너, 철학자 니체 같은 이 학교의 유명한 학생들도 떠올렸습니다. 저는 한때 언어학도였던 터라, 라이프치히 대학이 19세기 역사비교언어학의 둥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년문법학파라는 이름으로 한 세대를 풍미하던, 그러나 앞서 거론한 사람들보다는 덜 알려진, 헤르만 파울과 카를 부르크만 같은 이 학교의 언어학자들도 떠올렸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재학할 때 카를 마르크스 대학이라고 불렸던 당신의 모교를 둘러보면서도, 저는 당신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그즈음, 통일된 독일의 헬무트 콜 내각에서 여성청년부 장관으로 일하고 있었지요.

그로부터 여덟 해 뒤인 2000년 당신은 야당으로 물러난 기민련의 대표가 되었고, 그보다 다섯 해 뒤인 2005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정 파트너를 바꿔가며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비교 대상이 되기를 매우 꺼리실 테지만,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집권기간 11년6개월을 곧 넘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장기 여성 최고권력자가 될 참입니다. 아니 남자까지를 포함해도, 12년을 집권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추월할 것이 분명하고, 운이 좋다면 14년을 집권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까지 제칠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장기 최고권력자가 되는 셈입니다. 대통령과 총리를 오락가락하는 푸틴의 러시아를 온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면 말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여자입니다. 어쩌면 남자를 포함해도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일지 모릅니다. 임기를 한 해 남겨놓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나 국내외에 정적들이 수두룩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나 일종의 집단지도 체제인 중국의 시진핑 주석의 실제적 힘이 당신보다 약할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독일의 총리를 넘어서 유럽연합의 총리입니다. 한때 유럽연합은 프랑스와 독일의 양두마차 체제로 굴러갔지만, 이제 프랑스의 힘은 독일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습니다.



당신은 신비한 사람입니다. 그 신비감이 당신의 매력을 강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막 연구자 생활을 시작한 양자물리학자가 정치로 방향을 튼 것도 그렇고, 동독 출신의 여성이 통일 독일의 최고권력자가 돼 이리 길게 집권하는 것도 그렇고, 공인으로서 사생활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사실 공인으로서의 사생활만이 아니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당신이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한 뒤에 보낸 35년의 세월도 봉인돼 있습니다. 당신이 동독으로 이주한 것은 1954년, 당신이 태어나고 몇 주 뒤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이기는 하지만, 서독의 어떤 젊은 목사가 목회활동을 하기 위해 동독으로 이주했다는 것이 분단국에 사는 저로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35년의 동독 생활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 물리학자가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연과학에 대한 당신의 갈증은 독일의 가장 뛰어난 화학자 가운데 한 사람일 당신의 남편이 채워주고 있겠지요. 당신이 뛰어난 물리학도였다는 건 알려져 있지만, 어쩌면 당신의 재능은 물리학보다도 정치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총리가 되기 전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권력의 매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예전 같으면 정치를 통해 뭔가를 이루는 묘미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이제는 상대로부터 뭔가를 빼앗는 맛이라고 말하고 싶네요”라고 너무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몇 해 뒤, 당신은 늘 당신을 깔보았던 사민당 출신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로부터 총리직을 빼앗았지요.

그러나 당신은 정치를 통해 많은 것을 이뤄냈습니다. 당신은 일본의 3·11 대지진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물리학자로서의 오랜 신념을 거두고 원자력발전소의 가동 기한 연장을 취소함으로써 독일의 에너지 정책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당신은 네타냐후가 집권한 뒤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냉각시키고 팔레스타인의 정치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한다는 뜻을 명확히 했지만, “독일 총리인 나에게 이스라엘의 안전은 결코 협상 대상이 아닙니다. 유대인 민주주의 국가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한 동참은 독일의 국가이성에 속합니다”라는 발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저지른 반인도 범죄를 끊임없이 참회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집무실 전화를 도청하는 우방국 지도자 오바마와, 당신이 개를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크림반도의 대통령 별장에서 당신 앞에 래브라도를 풀어놓은 푸틴 사이에서 유럽연합의 홀로서기를 시도해왔습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푸틴은 2006년의 그 사건에 대해 거듭 자신은 당신의 개 공포증을 몰랐다고 변명하더군요.

유로화를 지키려는 당신의 노력은 유럽연합 내부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을 히틀러로 묘사하는 일부 그리스 사람들을 포함해, 남유럽 국가들의 시민들에게 당신은 인기가 없습니다. 유럽연합에서 나가자는 여론이 우세한 영국도 결국 독일의 구심력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적이 없는 정치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정치인으로서 당신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시리아를 비롯해 분쟁지역에서 오는 난민을 최대 규모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분쟁에는 옛 식민주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원죄가 바탕에 깔려 있는 만큼, 그런 원죄가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같은 나라들보다 훨씬 덜한 독일이 난민들에게 이처럼 관대하다는 것은 독일이라는 나라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그 위대함은 “내가 조국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과도하게 높여진 위상의 조국이 아닙니다. 나는 독일이 형편없이 나쁘다거나 군계일학처럼 훌륭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케밥과 피자를 아주 좋아하고, 거리에서 만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훨씬 아름답다고 여기며, 스위스의 태양이 더 오래 빛을 비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당신의 발언에서 더 높은 차원을 얻습니다.

지난 세밑에 쾰른에서 난민들이 여성들에게 가한 성폭력과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독일 전역에 번지고 있는 반난민 시위 때문에 당신의 처지가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도 정치인인 만큼 반난민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나쁜 선택은 당신의 난민정책에 ‘컨트롤 알트 딜리트(Ctrl-Alt-Del)’를 누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독일과 유럽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은 호모사피엔스로서 저의 자부심이기 때문입니다. Ich bin stolz auf Sie, Frau Bundeskanzlerin!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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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현 정권 다섯 해는 제가 한 신문사의 논설위원으로 일하던 때와 거의 포개집니다. 그 시절은 당신의 정치역정 중 가장 화사한 시기였습니다. 당신은 여당 대표를 지냈고, 대통령 다음의 2인자로서 대한민국의 외교 안보 통일 정책을 관장했으며, 마침내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섰습니다. 그 전시기를 통해, 제가 그 신문이나 다른 지면에서 당신을 언급한 글 가운데 당신에게 호감을 표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소위 친노의 둥지 안에 있었을 때도, 당신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결별하고 대선 출정에 나선 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 다수가 당신에게서 이탈한 것이 틀림없는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나는 당신 대신에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투표했습니다.

제가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투표한 것은 그 당의 이념에 공감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정권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진 바에야, 소수정당에 제 한 표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 선택 때문에 제가 비판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박한 자유주의자로서 제가 당신에게 투표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는 했지만, 노 정권 5년 동안 당신은 저를 너무 실망시켰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 선거에서 당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친노 유권자들은 훨씬 더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합민주신당이 열린우리당을 계승한 정당임은 명확했으므로,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마땅히 당신을 지지했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 정권 5년 동안, 당신을 비판한 것만큼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대통령도 적잖이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극보수언론이 어이없는 이유로 청와대를 힐난할 때는, 과감히 나서서 대통령을 옹호했습니다. 실제로 제 글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옮겨 실어도 되겠느냐는 물음이 청와대로부터 와서 그러라고 말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를 번갈아 비판하고 방어하면서도, 당신을 한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는 것은 얄궂습니다. 더구나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는 제 언어는 때로 너무나 벼려져 있어서, 제 협량을 드러내는 듯도 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을 무시로 방어한 제가 당신에게는 왜 그리 모질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제 잠재의식에 당신이 제 동향인이라는 사실이 깔려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한때는 어떤 신문에서도 쓰지 못하던 ‘영남패권주의(영패)’라는 말이 이제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말이 태어난 것은 꽤 오래전이지만, ‘영패’는 좌우 보혁을 가로지르는 대한민국 주류사회에서 금기어였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불편한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도권 언론에서 이 말을 거침없이 사용한 사람은 저 말고 거의 없을 것입니다. 최근 이 말이 제도권 언론에 나풀거리게 된 것은 서남대 김욱 교수가 쓴 <아주 낯선 상식>이라는 책 덕분입니다. 이 책은 대한민국 사회에 미만한 영패를 분석하고 그것의 해소를 모색한 책입니다. 당초 이 책은 제도권 언론 카르텔의 의도적 무시 때문에 ‘금서 아닌 금서’가 될 뻔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책이 됐습니다.



제 판단에, 노무현 정권은 새누리당 정권과 영남패권주의를 공유했습니다. 제가 노 정권을 비판한 것은 삼성그룹에 기대는 그 정권의 계급적 성격이나 어설픈 외교 안보 정책 때문이기도 했지만, 핵심권력자들이 영남패권주의를 무람없이 추구하고 행사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존경받아 마땅할 점이 노 전 대통령에게는 많았습니다. 반면에 저는 그이가, 비록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영패주의자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노 전 대통령 처지에서 판단하자면, 고향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를 몰표로 지지한 호남 유권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고도 결국 그는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노 전 대통령의 욕망을 이해할 만한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달랐습니다. 당신은 고향에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고도 고향을 배신했습니다. 당신과 저의 동향인들은 2002년 대선 국면에서 당신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똑같이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노 전 대통령에게 똑같이 배신당했습니다. 똑같이 호남을 배신했지만, 제가 노 전 대통령보다 당신을 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신이 호남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 분당에 앞장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난닝구’라는 말이 태어났습니다. 이 ‘난닝구’라는 말은 당초 열린우리당에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에 남은 정치인들이나 그 지지자들을 가리켰지만, 이내 호남 사람 전체를 경멸적으로 가리키는 비하어로 뜻이 확장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정치의 참사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문단의 한 선배는, 이 ‘난닝구’라는 말의 탄생이 결국 노 전 대통령을 자살로까지 몰고 갔다고 말합니다. 그 판단이 옳든 그르든, 지금 야권의 온갖 분열과 무기력의 뿌리가 당신이 주도한 민주당 분당이었다는 것은 당신도 인정할 것입니다. 열린우리당에 따라가지 않은 민주당 사람들을 ‘잔민당’이라는 말로 경멸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오늘날 ‘민주당’이라는 이름에 그토록 애착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소극입니다.

당신은 마땅히 영남패권주의라 불러야 할 것을 지역주의 내지는 지역감정이라 부르며, 그것을 없애는 방법은 그것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라는 기묘한 처방을 내놓았습니다. 노 정권 초 당신이 ‘대구사랑모임’이라는 것을 만들었을 때, 저는 기함했습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의 군사반란 이후 대구는 애정결핍 상태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호남정권 아래서도 대구는 충분히 사랑받았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을 쓴 것은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민주당 계열 정당을 통합하자는 당신의 요청을 노 전 대통령이 거부한 이후입니다. 당신은 대선 국면에서 노 전 대통령과 갈라지고 나서야 영패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고, 노 전 대통령이 영패주의자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없다고 아무리 우겨도 있는 것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너무 늦게 영패의 울타리를 넘었습니다. 사실은 영패 서클에서 쫓겨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당신에게 살가운 말을 건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이 편지는 당신에 대한 질책을 되풀이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당신을 향해 겨눈 펜촉들이 너무 날카로웠음을 인정하고, 당신의 정치 일선 복귀를 권유하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제가 던진 말의 돌멩이들이 비례의 원칙을 깨고 너무 많았던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지금의 정치권은, 특히 위기에 놓인 야권은 당신의 경륜을 필요로 합니다. 그 경륜은 당신이 맡아온 고위 직책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정치권에서 때론 스스로 저지르고 때론 가슴 아리게 당한 배신의 염량세태에서도 축적되었을 것입니다. 영패에 협력했다가 영패에 핍박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영패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에 당신의 역량을 보태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대통령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통령이 되지 않고서도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고향에 틀어박혀서 고구마나 만지작거릴 때가 아닙니다. 나오십시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정치권입니다. 한때 당신이 상처를 줬던 고향을 위해서, 그리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재건을 위해서 나오십시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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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반세기도 전에, 저명한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은 ‘지구촌’이라는 말로 이 행성의 미래를 간추렸습니다. 역사적 사회주의가 가뭇없이 사라져 국경의 벽이 더 낮아진 1990년대 이후에는 ‘지구제국’이라는 은유도 나풀거립니다. 그 제국의 메트로폴리스가 바로 아메리카합중국입니다. 냉전 시기가 미소(美蘇)체제(Pax Russo-Americana)였다면, 포스트 냉전 시대는 미국체제(Pax Americana)입니다. 중국의 급작스러운 부상으로 미중체제(Pax Sino-Americana)라는 말이 더러 쓰이기도 하지만, 이 말은 심한 과장입니다.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을 추월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나, 군사력이나 문화적 헤게모니나 정치적 민주주의의 난숙도에서 중국을 미국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 미국인은 할리우드 영화와 CNN 뉴스와 맥도널드 햄버거와 코카콜라로 지구인의 취향을 지배합니다. 인류는 그가 어디에 살든 당신들의 나라와 관련을 끊을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지구제국의 운명, 인류의 운명은 워싱턴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프랑스 외무부 장관을 지냈던 위베르 베드린이 매우 적절히 명명했듯, 냉전 종식 뒤의 미국은 슈퍼파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하이퍼파워인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신들이 조지 부시 주니어 대신 앨 고어를 확고히 지지했다면, 그 뒤 이 행성의 역사는 사뭇 달라졌을 것입니다. 문명의 충돌이 설령 피할 수 없는 경로였다고 하더라도,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테러그룹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올해 말 대선을 앞두고 미국을 휘젓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현상이 우려스러운 것은 그래서입니다. 물론 저는 세계민주주의의 젖줄이라 할 당신들의 나라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그 모든 공적 비도덕성에 당신들 가운데 상당수가 환호하는 현실에 저는 지레 겁이 납니다.

트럼프는 지난해 6월 멕시코 이민자들을 마약사범이자 강간범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사실 출마 선언 전에도 트럼프는 자신이 인종주의자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미 2013년 그는 트위터에서 “대도시의 폭력범죄 대부분은 흑인과 히스패닉이 저지른다”고 했습니다. 대선 출마 선언 뒤 아이오와에서 가진 기자회견 도중엔 자신의 이민정책을 추궁하는 히스패닉계 기자 호르헤 라모스를 쫓아내버렸습니다. 아내가 히스패닉계여서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젭 부시에 대해선 “그는 아내 때문에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젭 부시는 미쳤다. 그가 멕시코말을 한다는 것에 누가 신경 쓰나. 여긴 미국이라고! 영어!”라고 조롱했습니다.

트럼프는 멕시코 정부가 의도적으로 범죄자들을 미국으로 보낸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멕시코 정부는 우리보다 훨씬 스마트하고, 날카롭고, 교활하다. 멕시코 정부가 악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는 것은 그들을 위해 돈을 쓰지 않기 위해서다. 그들을 돌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 히스패닉 이민자들을 범죄자, 특히 강간범이라고 낙인찍었지요. 그 발언의 진의를 CNN 기자가 묻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멕시코계 이민자를 비롯한 유색인 이민자들은 살인자들이자 강간범들이라고 다시 못박았습니다.



공화당 후보들의 첫 텔레비전 토론회 진행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폭스방송의 메건 켈리가 트럼프에게 과거의 여성혐오적 발언들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그녀의 질문이 우스꽝스럽고 근거도 없다며, “그녀의 눈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덧붙여, 켈리가 생리 중이어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는 식으로 대꾸했습니다. 트럼프에게 여성은 이민자들과 함께 늘 경멸과 조롱 대상이었습니다.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칼리 피오리나 공화당 대통령 예비후보의 외모를 노골적으로 비웃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보라. 누가 저 얼굴에 투표하겠는가. 저 얼굴을 우리 다음 대통령으로 상상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지요. 트럼프의 공격 대상은 마침내 장애인으로까지 번졌습니다. 관절만곡증을 앓는 뉴욕타임스의 서지 코발레스키 기자를 그가 기이한 몸짓 흉내로 비하하던 것을 당신들도 기억할 것입니다.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는 “미국의 많은 아랍인들이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된 후 환호했다”고 주장해 아랍계 미국인들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드디어 지난해 12월에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무슬림들의 미국 입국을 완전히 금지하겠다고 선언해 세계를 경악시켰습니다. 그의 이 발언엔 위헌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얄궂게도 그의 지지율은 더욱 치솟았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같은 극우 선동 막말꾼이 공화당 후보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지구제국의 메트로폴리스가 도덕적으로 극히 허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들도 살기가 팍팍한 모양이라고 저는 짐작합니다. ‘미국의 꿈’은 이제 사라져버렸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불만을 배출할 대상으로 인종적 성적 신체적 소수파를 고른 것은 프랑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발설한 ‘희생양’을 연상시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차별의식을 지닐 수 있습니다. 인격의 그런 부정적 측면을 완전히 씻어내는 것은 누구에게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지 않고 공적으로 발설하는 것은, 그리고 그런 공적 발설에 환호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제 차별주의에 대한 부끄러움을 잃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트럼프에 대한 열광적 지지가 특히 백인 남성 저소득층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염려스럽습니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인종의 도가니에서 백인 남성이라는 사실밖에 내세울 게 없는 일종의 ‘피해자’들입니다. 그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을 공격하는 대신 소수인종, 여성, 장애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 양극화에서 오는 경제적 불안과 무슬림 테러에 기인한 위기감을 미국 사회의 가장 약한 이들을 공격하며 쓰다듬고 있는 중입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트럼프는 대뜸 히틀러를 연상시킵니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 가운데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은 세계인들에게 우스꽝스러운 것 이상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유럽인들의 지지도, 아프리카인들의 지지도, 아시아인들의 지지도 아닌 제국의 메트로폴리스 거주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외교 문제나 경제 사회 문제를 무조건 “지금 정치인들이 멍청해서 +그렇다”는 말로 요약하고 “나는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사업을 해왔으므로 정치도 잘할 수 있다. 내가 하면 다 잘한다”고 우겨대는 선동가에게 당신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열광한다는 사실이 무섭습니다.

미국과 맥락이 고스란히 포개지지는 않지만, 이민과 테러가 중요한 원인이 돼 당신들 가운데 일부처럼 극우화하는 시민들을 보게 되는 나라로 프랑스가 있습니다. 지난해 파리 테러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프랑스 극우정당 민족전선은 집권 사회당과 제1야당 공화당을 집어삼킬 듯 보였습니다. 2차 결선 투표에서 사회당과 공화당의 연대로 민족전선이 패퇴하기는 했지만, 그 정당의 당수 마린 르펜은 내년 프랑스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유권자 네 사람 가운데 셋이 차기 대통령으로 사회당 소속의 현직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도, 공화당 소속의 전직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도 원하지 않는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최근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린 르펜이 대통령이 되는 프랑스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자리를 넘보는 미국이 훨씬 더 두렵습니다.

프랑스는 비록 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고만고만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 나라에서 극우정파가 힘을 떨치고 심지어 집권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류에게 치명적 위협이 되지는 않습니다. 작은 몸집으로 할 수 있는 악행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구제국의 메트로폴리스에서 극우정파가 힘을 떨친다면, 그것이 지금처럼 제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 인류에게 측량할 수 없는 재난을 불러옵니다. 당신들은 메트로폴리스 시민으로서 누리는 특권에 비례하는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원주민들의 학살과 노예 제도, 거듭된 정복전쟁으로 이뤄진 나라 만들기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미국은 결코 위대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기실 에이브러햄 링컨에서 로자 파크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국인들이 위대했습니다. 부디 당신들이 위대해지기 바랍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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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편지의 수신인으로 당신들을 불러낸 것은 올해에 총선이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총선도 총선이지만, 대한민국 정치시스템에 대한 제 근본적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제 당을 서로 달리하고 있지만, 당신들은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한 당의 울타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 당의 이름은 새정치민주연합이었고, 지금은 더불어민주당이라고 불립니다.

안 의원은 자신의 신당을 만드느라 분주하신 걸로 압니다. 저는 올해 총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지금으로선 가늠도 못하겠습니다. 분열된 야당으로는 여당과 싸워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이 상식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선거의 역사를 볼 때 그것이 철칙은 아닙니다. 1988년 총선에서 야당은 분열돼 있었지만, 한국에서 여소야대가 처음 이뤄진 것은 그 총선에서입니다.



한 당에서 몹시 불편한 관계였던 당신들 가운데 어느 쪽의 잘못이 더 컸는지에 대한 판단은 삼가겠습니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크든, 당신들의 분열은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신들의 분열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그 분열을 재촉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 지지자들 사이의 적대감은 그들과 새누리당 지지자들 사이의 적대감보다 오히려 더 크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질 개연성을 크게 낮추고 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은 반드시 내년 대선에 출마할 것이고, 어쩌면 두 사람 다 출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권에서 또 다른 후보가 나설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4월 총선 결과에 크게 달려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대선 정국에서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고, 안 후보가 사퇴한 뒤에는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습니다. 안철수 후보를 지지한 것도,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것도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이 꼭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판단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안 후보를 지지한 것은 박근혜 후보의 청와대 입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안 후보뿐이라는 판단 때문이었고, 안 후보의 사퇴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거의 확신했음에도 제가 선호했던 어느 여성 노동자 후보가 아니라 문 후보에게 투표한 것은,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결국 제가 지녔던 비관적 확신은 현실화했고, 제가 바랐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의 딸이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대통령이 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뒤에 밝혀지기로는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가 개입했으니, 그것이 순수하게 민주주의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 개념을 흔쾌히 받아들이든 그러지 않든, 당신들은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당신들은 영남 출신이고, 제 판단에 문 의원은 영남패권주의를 꽤 표나게 실행해오셨습니다. 서남대 김욱 교수가 지난해 말 출간한 <아주 낯선 상식>(개마고원)이라는 책을 당신들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영남패권주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한국의 지역모순을 명쾌하게 파헤친 책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정치인들 모두가, 더 나아가 지식인들을 포함해서 되도록 많은 한국인이 이 책을 읽기 바랍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도 대한민국에 영남패권주의가, 지역모순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역모순은 대한민국 국가의 주요 모순입니다. 이 모순의 해소에 눈감는 개혁이나 진보담론은 죄다 거짓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사용되는 개혁이나 진보는 차별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향 출향을 싹 쓸어 모아도 영남인은 대한민국 인구의 반에 크게 못 미치지만,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패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1961년 이후 지금까지 55년 동안, 영남 출신 인사가 최고권력자로 군림한 기간은 50년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은 더 길어질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재벌 대부분은 영남 출신이거나 영남과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습니다.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기관과 재벌기업에서는 영남방언이 표준어 행세를 합니다. 이것은 극히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저는 당신들이 이런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적으로 바꾸는 데 진력해주기를 곡진한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영남패권주의의 소멸은 영남인들의 도덕적 성찰이나 너그러움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님을 저는 잘 압니다. 공평한 제도에 기반을 둔 물리적 강제가 없으면, 어떤 종류의 패권주의도 스스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야권이 분열돼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개헌저지선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야권이 합해서 100석을 얻지 못하면, 새누리당이 개헌을 통해서 영구집권을 꾀할 거라는 음모론이 나돕니다. 저는 반-새누리당 자유주의적 유권자로서,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선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선전을 하더라도, 저는 오히려 야권에서 개헌투쟁을 벌여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아주 낯선 상식>을 읽으며 굳히게 된 생각입니다. 지금의 변형된 대통령 중심제와 결합된 국회의원 단순다수대표제 아래에서는 영남패권주의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 제도가 승자독식 체제이고, 영남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개헌은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이고, 그 의원내각제 아래서의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입니다. 이 방향의 개헌은 영남패권주의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사표를 거의 완전히 없애서 표의 등가성을 이룰 수 있는 효과를 낳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크게 신장할 것입니다.

정당이 유권자들에게서 받은 지지율에 정확히 비례해 의석을 배분하는 독일식 비례대표제에는 당신들도 찬성하시리라 믿습니다. 집권당에만이 아니라 거대 야당에도 불리한 제도이지만, 저는 민주주의에 대한 당신들의 신념에 비추어 그리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는 당신들 두 사람 다에게 아마 맞갖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대통령 중심제 아래서의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던 제2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이 5·16 군사반란을 불러왔다는 경험에도 근거하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현행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유지하거나,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와 결선투표제로 개헌을 하자는 의견인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의원내각제를 견뎌낼 만큼은 넉넉히 근육을 키웠습니다.

게다가 현행 대통령 중심제든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든, 넓은 의미의 대통령 중심제는 독일식 비례대표제와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표의 등가성에 바탕을 두어 소수파의 원내진입을 보장하고 연립정부의 구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제 아래서는 원칙적으로 연립정부가 불가능합니다. 김대중 정권 전반기의 DJP연합이나 노무현 정권이 구상했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은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의 권한을 제도 바깥의 영역에서 나누거나 넘기는 것이었지, ‘제도적’ 연립정부는 아니었습니다. 대통령 중심제 아래서의 그런 ‘유사연정’은 대통령이 원하면 아무 때나 거두어들일 수 있는 불안정한 제도입니다. 게다가 대통령 중심제가 여소야대와 결합하면, 야당은 늘 대통령 탄핵소추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올 것은 자명합니다.

제6공화국 헌법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면서도, 저는 최근까지 견결한 호헌론자였습니다. 그 이유의 첫째는 개헌이라는 것이 1960년 4월혁명 직후나 1987년 6월항쟁 직후처럼 시민의 정치적 진출이 극적으로 활발해진 시기를 빼놓고는 예외 없이 집권세력의 권력연장을 위한 헌법개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수마발 국회의원들보다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대통령 중심제의 대통령이 더 높은 정치윤리를 지닐 것이라는 추론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6공화국 들어서 거의 모든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의 평균적 정치윤리보다는 더 높은 정치윤리를 지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명박 정권 들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박근혜 정권 들어서는 완전히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대통령 중심제 아래서의 대통령이 정치윤리에서 국회의원들보다 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오랜 호헌론을 접고 개헌론자로 전향했습니다. 저는 의원내각제 독일식 비례대표제로의 개헌을 원합니다. 이번 총선 이후 개헌 투쟁에 들어가든, 아니면 차기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개헌을 내세우든, 당신들이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의원내각제 아래서의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영남패권주의를 약화하거나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제7공화국을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다가가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하신년(謹賀新年)! 대한굴기(大韓 起)!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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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거의 다 갔구나. 그 해를 살아낸 사람들에겐 모든 해가 다사다난한 해이기 마련이지만, 올해는 특히 다사다난했던 것 같다. 세상에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훨씬 많았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시리아 내전과 파리 테러였고. 미국에서 무슨 테러 소식이 들릴 때면 제일 먼저 너랑 아침이 생각이 난단다. 이기적 걱정이지.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겠느냐마는.

엊저녁에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을 오랜만에 다시 읽다가 책갈피에 꽂혀 있는 영화 티켓을 한 장 발견했다. 지난해 너희 내외랑 부산영화제에서 본 <한 여름의 판타지아> 티켓이었어. 그게 그해 10월8일 오후 8시였고, 메가박스 해운대 2관이었네. 내 좌석 번호는 E7이었고. 영화 스토리는 벌써 가물가물한데 음악은 아주 생생해. 사실은 지난 6월에 한국에서 발매된 네 앨범을 사서 종종 듣고 있단다. 네 생각 하면서.

보고 싶은 민휘, 내 며느리!



며느리 이름을 부르는 게 우리 전통 법도는 아니다만, 글쎄, 편지에서라도 너를 ‘며늘아가’라든지 ‘아가’라고 부르는 걸 상상만 해도 어색해서 웃음이 터질 것 같으니, 내가 영 시아버지 체신이 아니구나. 사실은 네 시아빠, 더 나아가서는 그냥 아빠가 되고 싶은 게 내 욕심이다. 네 친정아버님이 경계하시겠구나. (큭큭) 너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내심 둘째가 딸이었으면 했단다. 그래서 아침이가 태어났을 때 조금 실망했어. 아침이가 자란 뒤 내가 주책없이 그 아이에게 더러 그런 말을 하면, 걔가 서운해하곤 했지. 딸 욕심은 아침이가 태어나고 한참 뒤에야 접었단다.

너랑 도탑게 정이 쌓이기도 전에 너희 내외가 뉴욕으로 간 게 아쉽다. 너희들이 ‘헬 조선’이 싫어 ‘탈-조선’을 꿈꾸며 태평양을 건너 도피한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에 속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의 원초적 본능이라 할 연애감정조차 억누르다 못해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한국에는 많지. 삼포세대가 오포세대를 거쳐 어느새 구포세대가 돼 버렸고, 언젠가부터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한다는 달관세대라는 말까지 들리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비록 아직 직장은 못 잡았지만 결혼하고도 공부할 수 있는 너희는 운이 좋은 사람들이야. 사실 네게 이런 말을 하기가 한편으로는 계면쩍기도 하다. 너희 세대의 힘듦은 내 또래의 세대적 이기심 탓이기도 하니 말이야. 젊은이들의 절망이 한국을 포함한 몇몇 나라만의 것인지 세계 보편적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보편적 현상이라면 인류의 미래는 정말 어둡구나.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없다는 건 그 공동체에 희망이 없다는 뜻이지.

너희는 ‘한국의 집’에서 혼례를 올리는 바람에 주례가 없었다만, 내가 더러 젊은이들 주례를 설 때 꼭 하는 말이 있단다. 결혼이라는 건 아내와 남편 두 사람만의 코뮤니즘이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네게 등을 돌린다 해도 아침이는 네 편이 돼야 해.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사람이 아침이에게 등을 돌린다 해도 너는 아침이 편이 돼야 해. 사실 사랑이 별게 아니라 그렇게 편들어주는 게 사랑이란다. 그리고 힘든 삶을 앞으로 밀쳐내는 힘은 결국 그런 사랑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너의 둘만의 코뮤니즘이, 그런 둘만의 이기주의가 공적 정의에 부합하기 바란다. 나는 너희가 한국인들이나 뉴욕시민들에게만큼 이 행성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에 관심을 지니기를 바라. 이라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참에 너희들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하기 바라. 그건 너희들이 세계시민이 되기 바란다는 말이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세계시민이면서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젊은이들이기를 바라. 너희들이 도피자들에 속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은 그런 뜻이었어.

너는 아직도 나를 좀 어렵게 여기는 것 같더라만, 나는 네가 딸처럼 느껴져. 그리고 네가 날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빠라고 불렀으면 더 좋겠어. 그렇지만 그걸 네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게다가 네가 날 아빠라고 부르면 분명히 네 친정아버님이 서운해하실 거야. (큭큭). 그래도 이 편지에서는 너를 딸이라 부르고 싶구나. 프랑스에서는 며느리를 ‘예쁜 딸(belle-fille)’이라고 부르지.

내 사랑하는 딸, 민휘!

너랑 아침이의 공부는 잘돼 가니? 뭘 공부하는지 나도 잘 모르는, 아침이보다는 네가 공부한다는 영화음악에 더 관심이 간다. 내 귀에 고전음악은 바흐를 넘어가면 소음으로 들려. 가벼운 음악을 좋아한다는 뜻인데, 영화음악 가운데 내 마음의 줄을 건드리는 게 많아. 대뜸 떠오르는 게 영화 <대부>와 <러브스토리>에 삽입된 음악들이야. <태양은 가득히> 테마음악도 좋아하고. 아, <부베의 연인> 테마음악도 좋다! 그러고 보니 내가 <졸업>이라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상당 부분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의 노래들 때문이야. 너도 잘 알지? ‘침묵의 소리’ ‘스카보로 시장’ ‘로빈슨 부인’ 같은 노래들. 한국 영화음악으론 뭐가 있을까? 대뜸 <별들의 고향>이 떠오르네. 그 영화의 테마음악만이 아니라 거기 삽입된 노래들 모두 이장희라는 분이 만든 걸로 알고 있어.

이장희 선생 얘길 하니까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아침이가 학부에서 단과대학 밴드부 활동을 했던 건 잘 알지? 그즈음 내가 아침이에게 이장희 선생의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거든. 그런데 이 친구는 이장희라는 이름도 모르는 거였어. 아무리 얼치기라도 음악을 한다는 친구가 말이야. 그때 나는 세대의 벽이라는 게 이렇게 높구나, 절감했단다. 하긴 80년대생인 아침이가 70년대 대중음악가들을 잘 모르듯이, 50년대생인 나도 90년대 이후 대중음악가들을 거의 모르지.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어린 가수들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너와 아침이가 서로 너나들이 하는 게 생각난다. 부부 사이의 호칭이야말로 세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다. 내 세대 사람들 가운데 좀 구식 스타일은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는 게 예사고, 좀 신식인 사람들은 나와 네 시어머니처럼 서로 애칭을 부르지. 네 둘째시고모는 남편을 형이라고 부르더구나. 그보다 아랫세대 새댁들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여자 쪽이 나이가 위인 경우엔 남편이 아내를 누나라 부르고. 나는 너희들이 나이차가 있으면서도 너나들이 하는 게 보기 좋다. 그건 너희들 관계가 민주주의적이라는 뜻이니까.

<졸업>이라는 영화를 주로 거기 나온 노래들 덕에 기억한다는 말도 했다만, 과거를 환기시키는 감각 중에 청각만 한 것은 없는 것 같아. 내가 93년 5월, 30대 젊은 기자였을 때 스페인에 취재를 간 적이 있어.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에서 그라나다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휴게소가 있었어. 거기서 밀크커피를 마시는데 ‘알람브라궁전의 회상’이 내내 흘러나오는 거야. 알람브라궁전은 너도 알다시피 이슬람교도들이 스페인에서 쫓겨나기 얼마 전 그라나다에 세운 크고 아름다운 궁전이지. 그 기타 연주곡을 그때 처음 들은 것도 아닌데, 그 뒤로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알람브라궁전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나는 그 궁전에 몇 차례 가봤단다), 그 휴게소가 생각나는 거야. 그 휴게소 풍경, 처음 그라나다에 가며 겪은 가슴 설렘, 그런 기억들이 되살아난다는 거지. 지금도 ‘알람브라궁전의 회상’을 들으면, 그 허름한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는 내가 떠올라.

민휘! 내 딸, meine Tochter!

너와 아침이가 뉴욕에서의 삶을 충분히 즐겼으면 해. 이 행성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가 뉴욕 아니니. 지구제국의 메트로폴리스가 미국이라면, 그 메트로폴리스의 다운타운이 뉴욕이니까. 너희들이 한국에 돌아올 때는, (물론 너희들이 언제 돌아올지, 또 돌아오더라도 완전히 귀국할지 삶의 터전을 한국 바깥의 다른 곳에 마련할지는 모르겠다만) 너희들 머릿속에 전공분야의 지식과 기량 이상으로 뉴욕이라는 도시가 담겨 있으면 좋겠어. 젊은 날에 머물렀던 이방의 기억은 나이 들어서 삶을 떠받치는 힘이 된단다. 내게는 파리의 기억이 바로 그래. 되풀이하는 말이다만, 그럼으로써 너희들이 한국인이자 세계시민이 되길 바라.

아침이가 잘 알아서 하리라 믿지만, 집일은 꼭 나눠서 하렴. 물론 한쪽이 바쁠 땐 상대편이 더 많은 일을 하는 거고. 과천의 친정 어른들께 자주 안부 여쭈렴. 네가 안부 여쭙는 것 이상으로 아침이도 그쪽 어른들께 자주 인사올리도록 네가 코치도 좀 하고.

너와 아침이는 물론 세상 모든 너희 세대 젊은이들에게 새해가 올해보다 더 살 만한 해가 되기를 빈다. 신을 믿지 않는 내가 누구한테 비는 걸까? 아마 기도의 힘은 많은 사람이 같은 것을 바랄 때 발현할 테다. 모두들 무엇보다도 부디 건강하기를! 딸! 사랑한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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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편지를 쓰기로 마음 정하기까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국내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미 편지를 쓴 것이 그 자체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제가 최근 읽은 <아주 낯선 상식>(김욱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라는 책이 인상 깊어서 당신을 수신자로 불러냈습니다. <아주 낯선 상식>은, ‘호남 없는 개혁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드러내듯, 영남패권주의를 정교하게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은 한 챕터를 지난해 광주 보선 때 당신이 치켜든 ‘호남정치’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짐작하시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당신에게 우호적입니다. 그러나 우호적이라는 것이 절대적 지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당신의 발언들에 기대어 ‘호남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본 뒤 다소 유보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당신의 ‘호남정치’라는 것에 ‘반영남패권주의’라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첫걸음임을 인정합니다. 저는 당신이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랍니다. 한 챕터가 당신에게 할애돼 있어서가 아니라, 이 책은 대한민국의 지역모순을 가장 심도 있게 분석하고, 비록 가망이 크지 않지만 그 해소 방식까지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배울 점이 많을 것입니다. 당신이 공부 천재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공부 천재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편지에서 <아주 낯선 상식>이라는 책의 주장을 요약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아주 낯선 상식>의 저자에게 동의하며, 당신이 내세운 ‘호남정치’라는 프레임이 전략적으로 그다지 현명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친노패권’ 프레임을 내걸고 ‘개혁 세력’ 내부의 영남패권주의자들과 싸우기로 했다면 그 효과가 더 컸을 것입니다.

당신은 옛 민주당에서 노무현 옹립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노무현 상임고문 주변에 원내 우군이 거의 없던 시절에, 당신은 ‘노무현 대통령’의 깃발을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세력을 결집해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선거일 저녁 출구조사에서 이미 ‘노무현 대통령’이 예견되기는 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이 확정되기까지 저는 계속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확정됐을 때 무교동의 낙지집으로 달려가 행복한 소주를 마셨습니다.

2003년 민주당의 소위 개혁파 의원들이 분당을 추진했을 때, 저는 한 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때 제가 민주당 분당을 격렬히 반대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주 낯선 상식>의 저자와 전북대 강준만 교수도 저처럼, 아니 저 이상으로 민주당 분당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분당이 이뤄졌을 때, 저는 ‘우리가 만든 노무현 정부’라는 프레임을 내걸며 호남 유권자들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분당 뒤 민주당이 한나라당을 이용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소추했다는 사실이 제게 영향을 끼쳐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탄핵소추 이전에도 저는 “가난한 부모가 창피하다며 집을 뛰쳐나갔다가 세상에서 따돌림당하는 자식을 거두어 보살피는 심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은 신당을 감싸 안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아주 낯선 상식>의 저자와 강준만 교수는 저와 달리 여전히 옛 민주당의 지지자로 남았고, 강준만 교수는 그 분당의 충격으로 한동안 정치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분당을 주도한 이들은 흔히 ‘천신정’이라 불립니다. 당신과 신기남, 정동영 세 사람의 성을 따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 분당 앞뒤로 신기남 의원이 “호남에서 표 떨어지는 소리가 나야 영남에서 표를 얻을 수 있다”며 제 고향 사람들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당시 한나라당의 비열한 선거전략을 고스란히 베낀 것입니다. 분당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습니다. 분당을 통한 개혁신당론의 핵심 아이디어가 힘센 새 친구를 얻기 위해 그 자가 싫어하는 옛 친구를 버리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비롯한 신당 추진파는 ‘망국적 지역주의’의 해소를 정치적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당신들이 그 거룩한 명분의 실현을 위해 고른 길은, 얄궂게도, 영남패권주의에 사실상 굴복하고 영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노무현 대통령은 방조하거나 북돋우거나 지휘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제1야당의 지지부진함과 내분의 뿌리가 바로 2003년의 민주당 분당이라는 것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분당 뒤에 뭘 크게 잘못했다기보다 분당 자체가 문제였던 겁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호남과 노무현 대통령 사이가 지금처럼 데면데면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분당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여당과 제1야당의 주류가 모두 영남패권주의 세력으로 채워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광주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와 대결하며 ‘호남정치’의 복원을 내세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소추의 반동으로 열린우리당은 과반의석을 얻었지만, 그 과반의석으로 노무현 정권이 무슨 업적을 이뤘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소위 4대 악법의 개폐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몽니에 휘둘려 흐지부지돼 버렸고, 노무현 대통령은 마침내 선거법 개정을 매개로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시도하다 박근혜 대표에게 거절당하는 망신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당의 원내대표를 지냈던 당신에게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장악한 친노세력에게 떠밀려나 당신이 광주에서 호남정치를 내세웠을 때, 나는 당신이 2003년 분당에 대해 사과할 줄 알았습니다. 호남 민심을 다독거리기 위해서였지만, 대통령 후보 시절의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도 호남 유권자들에게 분당을 사과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호남정치의 복원을 내세우는 당신이 그 분당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게 저는 의아합니다.

당신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노무현 정권에서 여당 원내대표와 법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당신의 과거를 부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2003년 민주당 분당을 사과하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의 ‘호남정치’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분당의 가장 참혹한 결과는 호남 유권자들을 친노 영남패권주의 세력의 인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호남 유권자들에게, 그리고 이 나라 민주주의 세력에게 깊이 사과해야 합니다. 당신이 주도한 그 분당 때문에, 호남 유권자들은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해야 했습니다. 선거 때마다 친노가 주류인 새정치연합에 몰표를 주지만, 새정치연합 주류는 영남패권주의를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호남 유권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입니다. <아주 낯선 상식>은 당신이 지난해 보선에서 당선한 직후 서울대 조국 교수가 했다는 이런 발언을 소개합니다. “내가 호남사람이라도 새정치연합을 안 찍는다. 돈 대주고, 힘 대주는데 의사결정에선 소외된다고 여긴다면 찍을 이유가 없다.”

조국 교수의 이 발언이야말로 독립적 주체의 냉철한 합리주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호남 유권자들은 이런 냉철한 합리주의를 실천하지 못해왔습니다. 이제 이 희비극적인 인질극을 끝내야 합니다. 이 인질극을 끝내는 데 당신이 이바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낯선 상식>의 저자는 ‘신성광주’가 ‘세속광주’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광주가 세속의 욕망을 발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 주장에 아무런 이의 없이 공감합니다. 호남 유권자들이 다른 지역 유권자들에 견줘 더 민주주의적이고 더 윤리적이어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굴레에서 호남은 벗어나야 합니다.

호남의 일당지배를 이제는 끝장내야 합니다. 호남은 모든 정당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정당들과 거래해야 합니다.

호남에 정당한 이익을 주겠다고 신실하게 약속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정당이라면, 그것이 새정치연합이든 진보정당이든 심지어 새누리당이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새누리당이 80년 광주학살의 주체인 전두환 민정당의 후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척결과 전두환·노태우 기소를 통해서,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적어도 상징적으로나마 5공과의 관련을 끊어냈기 때문입니다. 지역모순은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입니다. 지역모순을 모른 체하는 진보는 가짜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새누리당을 지지할 일이 결코 없겠지만,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제 동향인들을 이해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당신의 ‘호남정치’가 닫힌 정치가 아니라 열린 정치가 되기 바랍니다. 한국 정치의 정상화에 기여하기를 빕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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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당선이 확정된 2012년 12월19일 밤은 제게 악몽이었습니다. 저는 명륜동의 한 주점에서 이튿날 아침까지 술을 마셨고, 만취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거실 바닥에 몸을 내던졌습니다. 깨어보니 땅거미가 내려앉았더군요. 제 처 말로는 몇 번이나 깨워 안방으로 들여보내려 했지만 제가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어나서도 당신의 당선이 말 그대로 꿈이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낙선을 바랐습니다. 제가 자연인 박근혜에게 무슨 미움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될 경우, 한국 민주주의의 파괴자였던 당신 아버님이 역사적으로 복권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민주주의적 집권이 당신 아버님의 역사적 복권으로 해석되는 것은 당신이 그의 생물학적 딸이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당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어서입니다. 끔찍이 우울했던 그해 겨울에, 저는 당신에게 가장 먼 곳에 있고 싶어서 제주도에서 몇 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5·16도로’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당신 아버님의 질긴 흔적에 아연했습니다.



당신의 당선 확정 뒤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신은 순수하게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는 당신의 당선을 위해 거침없이 불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맞상대였던 후보는 당신의 당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성급하게 선언했고, 다만 대선에 간여했던 공무원들의 처벌만을 원했습니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당신의 당선을 정당화해주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집권 뒤 공무원들의 대선 간여를 파헤치려는 검찰총장의 사생활을 파헤쳐 그를 쫓아냈고,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 공무원들 가운데 몇몇은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이제 당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의 낙선을 바랐던 사람들 가운데는 당신이 실정을 거듭해 당신 아버님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달랐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당신 아버님에 대한 미움 때문에 당신의 실정을 바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훌륭한 대통령이 되길 바랐습니다. 그것이 제가 미워하는 당신 아버님의 명예를 회복하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당신의 화사한 민주주의 공약들이 지켜지기 바랐습니다. 당신 치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퇴행이 멈추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당신이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같은 지도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6월 시민항쟁이 탄생시킨 제6공화국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나날이 신장했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까지 이런 추세는 불가역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상처를 입었고, 당신 정권에서는 거의 반동이라 부를 만한 퇴행을 겪고 있습니다. 당신의 공약은 죄다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의 지표에서, 이 정권은 10년간의 민주당 정권에 견줘서는 물론이고 이명박 정권에 견줘서도 뒷걸음질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의 가장 큰 이유가 당신의 폐쇄적 리더십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앞선 정권들이 구축해 놓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를 수익 모델로 여겼다는 비판을 받은 이명박 정권도, 공영방송사를 사유화한 걸 빼놓고는, 대한민국 시스템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 정권 들어서는 국가의 의사결정구조가 사유화되었습니다. 어느 정권에서 청와대가 각 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에게 직접 전화를 해 자잘한 인사에까지 간여했습니까? 어느 정권에서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배신의 정치’ 운운함으로써 여당 원내대표를 쫓아냈습니까? 당신 정권에서 여당대표나 원내대표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당신 정권에서 장관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아, 스스로는 청년실업문제를 방치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청년실업 대책을 방해하는 일 정도는 장관이 할 수 있군요.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GDP(국내총생산)가 한 나라 경제의 모든 것을 압축해 보여주진 않을지라도, 당신 치하에서 GDP 성장률은 민주당 정권들에 견줘 사뭇 낮아졌습니다. 출산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애국이라고 당신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외쳐 봐야, 젊은이들에게는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육아를 할 여력이 없습니다. 청년실업률이 외환 위기 이래 처음으로 10%를 넘어섰습니다. 제6공화국의 성립 이래 역대 정권 첫 3년 동안 기록한 재정수지적자와 국가채무의 증가액이 당신 정권에서 모두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가계부채는 급증하고, 법정 최저임금 미달자도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기록 깨기 정권입니까?

물론 당신 정권이 모든 한국인에게 지옥인 것은 아닙니다. 중소제조업의 평균가동률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재벌 기업의 매출총액과 자산총액은 노무현 정권 말기에 견줘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제가 일일이 수치를 들이대지 않는 것은 당신이 수치 읽기에 약하리라는 짐작 때문입니다. 결례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쉬운 수치는 알려드리겠습니다.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RSF(국경 없는 기자회)가 해마다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네 해째 잇따라 내리막이었습니다. RSF가 지난 2월에 발표한 ‘2015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에 따르면, 한국은 전체 조사 대상 180개 나라 가운데 지난해 57위였고 올해 또 세 단계 떨어져 60위에 머물렀습니다. 미국의 국제 인권감시 단체인 프리덤하우스도 우리나라를 ‘언론 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낮추었습니다. 이 단체는 또 우리나라의 정치적 권리를 9년 만에 1등급에서 2등급으로 내렸습니다.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은 또 뭡니까?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 맞습니까?

인사의 영남 편중에 대해선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청와대를 정점으로 한 모든 권력기관에서 영남방언이 표준어가 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첫 삽을 뜬 영남패권주의를 당신이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선언한 당신이 통일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남과 북 사이에 가동하고 있는 항시적 라인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사소하다면 사소하달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말버릇도 문제입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라거나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라거나 “잘못된 역사를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라는 말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사람 잡는 선무당의 입에서나 나올 소리입니다. “규제는 암덩어리”라며 “기요틴에 보내야 한다”는 말은 국가원수의 기품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당신의 경제 민주화 공약을 완전히 뒤집은 말입니다.

그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가 터진 것입니다. 그 참극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완전한 방관자의 것이었습니다.

거론하기 민망한 일이지만, 지난해 4월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 때 당신이 답변할 순서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아래만 보고 있던 게 생각납니다. 어떤 남자가 “대통령님!” 하고 당신을 불렀고, 그제야 당신은 고개를 들었죠. 오바마는 “가여운 박 대통령께서 질문이 뭔지 잊으셨군요”라고 농담을 했고요. 도대체 기자회견 중에 무슨 딴생각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지난 10월의 한·미 공동 기자회견 때도 동문서답으로 기자들을 당황하게 했고요. 그런 걸 보는 한국인들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그러나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 당신의 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한마디 안 할 수 없군요.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들이 판단해야 한다”는 야당 대표 시절 당신의 말을 뒤집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당신의 가족사로 여긴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효녀입니다. 그러나 당신 방식의 효도는 대한민국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으로서 뭘 잘했나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 내용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써 봤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잘한 일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야당 하는 꼴은 어떻더냐고 당신은 반박할 수 있겠지요. 맞습니다. 지금 제1야당의 행태에도 칭찬해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격에 맞는 제1야당을 지녔고, 제1야당은 그들 격에 맞는 대통령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당신과 저의 조국을 ‘헬 조선’이라고 비하하는 것입니다.

밭은 스케줄 때문에 몸 상태가 늘 좋으시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전임 대통령의 국가장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을 항상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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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아홉 번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6년 전 작고하신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선생님도 백수를 넘기셨는데, 선생님도 그러시기를 빕니다. 지적 거장들의 장수는 동시대인들에게 복입니다. 특히 선생님처럼 나이와 더불어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 분의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 때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고 계신 백남기 선생님께 보내주신 위로와 서울 시민들에게 보내주신 연대의 메시지에 한국인으로서 감사드립니다.

한 세대 전에 돌아가신 장 폴 사르트르 선생님은 ‘지식인’을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하여 기존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라 정의했습니다. 물론 이 맥락에서 ‘남용’이라는 말은 긍정적 의미입니다. 그런 뜻의 지식인을 꼽으라면, 이 시대에 선생님을 앞설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선생님은 언어학과 언어철학, 인지과학 등에서 쌓으신 명성을 ‘남용’하여 기존 사회와 정치권력을 가차 없이 비판해 오셨습니다. 아니, 지식인의 책임을 거론하며 베트남전쟁을 매섭게 비판한 선생님의 첫 정치평론서 <미국의 힘과 새 지배계급>이 나온 것이 1960년대 말이니, 학자 촘스키와 지식인 촘스키는 선후를 가릴 것 없이 나란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독자들이 선생님을 소비하는 양상은 시간축을 따라가며 크게 달랐습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선생님의 한국인 독자들은 주로 영어학이나 일반언어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의 언어학 책들만 게걸스럽게 읽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1970년대 한복판에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들은 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시절 제가 처음 접한 선생님의 책은 프랑스어판 <통사구조론>이었습니다. 뒷날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그 책이 소위 ‘표준이론’의 고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언어학도로서 제가 읽은 선생님의 책도 언어학자 촘스키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통사이론의 양상들> <영어의 소리패턴> <데카르트 언어학> <언어에 관한 성찰> <지배와 결속에 대한 강의> 따위가 그즈음 제가 읽은 선생님 책들입니다. 1990년대 들어 늦은 나이에 프랑스에서 언어학 박사 과정을 밟으며 읽은 <최소주의 프로그램>이 제가 읽은 선생님의 마지막 언어학 책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표준이론에서 확대표준이론으로, 지배결속이론으로, 그리고 최소주의 프로그램 등으로 진화한 선생님의 변형생성문법을 고스란히 따라가며 촘스키를 읽은 것입니다. 선생님이 언어학자 이상의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생님의 정치 에세이에는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언어학을 전공하지 않는 여느 한국인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선생님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엄혹한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지식인 촘스키의 책은 소개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미주의는 곧 공산주의로 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선생님만큼 공산주의와 거리가 먼 좌파 지식인도 드물 텐데 말입니다.

한국 민주주의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던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인들의 촘스키 소비양상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한국의 촘스키 독자들은 일반언어학이나 영어학 세미나에 참가하는 대학원생들이 아니라 이제 일반인이 되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한국에 소개되지 못한 선생님의 정치학 저서들이 무더기로 번역되었습니다. 독서인이라면 누구나 촘스키를 거론할 만큼 선생님은 한국에서 대중적 지식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지식인 촘스키가 언어학자 촘스키를 덮어버렸습니다. 한국인 독자 대부분이 선생님을 언어학자로서가 아니라, 논객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소비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뒷날의 지성사학자들은 선생님을 사르트르적 의미의 지식인으로보다는 언어학자나 인지과학자로 기록할 것입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이룩한 소위 촘스키혁명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 선생님이 ‘체계’라는 이름으로 ‘구조’를 발견한 이래, 인문학의 가장 커다란 혁명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넓은 의미의 정치에 관해 쓴 책은 언어학에 대해 쓴 책 이상으로 많고 다양해서, 선생님의 이념적 위치를 확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데카르트에서 백과전서파로 이어지는 프랑스 이성주의와 계몽주의의 선 위에 선생님이 계시다는 것만 어렴풋이 가늠할 뿐입니다. 선생님은 냉전 시절 미국에 대한 가장 혹독한 비판자이셨으면서도, 그 못지않게 소비에트제국주의에 펜 끝을 겨누셨습니다. 선생님의 관심 영역은 너무나 넓습니다. 소위 ‘시사적’인 어떤 일도 선생님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선생님이 한때 자임하신 대로 선생님을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자(anarch

o-syndicalist:이하 AS)라고 부르겠습니다. 선생님의 AS는 역사적 사회주의에도 자본주의에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합니다.

프랑스 언어학자 미추 로나와의 인터뷰집 <언어와 책임>의 한 대목에서, 선생님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프랑스의 일반 여론에 반박하며, 그 사건이 제기한 진짜 질문은 ‘닉슨이 제 정적들에게 사악한 수단들을 사용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희생자였느냐’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멍청한 닉슨이 힘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실수를 범해서 몰락했을 뿐이라는 거지요. 워터게이트 사건이 단지 지배계급 사이의 권력 다툼 양상이었을 뿐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는 선생님의 관찰에는 분명히 깊은 통찰이 있습니다. 반면에 공화당과 민주당을, 더 정확하게는 이 양대 정당의 정치엘리트들을 똑같이 비판하는 선생님의 논변에 저 같은 리버럴로서는 선뜻 공감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2000년 대선에서 ‘반-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조지 부시 주니어가 대통령으로 ‘선포’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다른 경로를 밟았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앨 고어가 대통령으로 ‘선포’되었다 하더라도 9·11은 일어날 수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고어라면 9·11의 반격을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마무리했을 공산이 큽니다. 부시와는 달리, 거짓된 정보와 호승심에 기대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오늘날 IS의 탄생까지 초래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녹색당 후보 랠프 네이더에 대한 투표가 공화당의 극보수주의자를 대통령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을 때 양식 있는 유권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미국인이 아닌 저에게도 골칫거리입니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지형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AS가 표현의 자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무정부주의는 국가의 간섭을 (이상적으로) 없애거나 (현실적으로) 최소화하는 것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일 제3제국 시절의 홀로코스트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로베르 포리송을 선생님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변호했을 때 많은 비판을 받으셨던 것처럼, 표현의 자유에 한계가 없느냐의 여부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안네의 일기>가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 의해 심하게 편집됐다는 사실을 밝혀내 마침내 그 책이 부녀의 공저로 인정되게 한 포리송의 공로는 물론 큽니다. 그러나 선생님도 부인하시지 않는 홀로코스트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포리송의 주장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되어야 하는지 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안네의 일기>가 거짓말이라는 것과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포리송에게 린치를 가한 일단의 유대인 테러 그룹은 물론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포리송을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린 프랑스 사법부, 포리송을 교수 자리에서 쫓아낸 대학까지 비판받아야 하는지 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리버태리언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AS를 자임하시는 한, 표현의 자유가 선생님께 성역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처럼 평범한 리버럴이 추종하기에는 선생님이 너무 래디컬한 분이시라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양대 정당 엘리트들을 무차별적으로 대할 것이냐, 또 표현의 자유에는 한계가 없느냐 여부는 미국이나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한국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거대 야당과 군소 야당들은 지리멸렬합니다. 한국 정부는 반동개혁의 흐름 속에서 한국 현대사를 주류 역사관과 동떨어진 단 하나의 수정주의적 관점으로 채색하기 위해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정권판(版) 수정주의가 홀로코스트 부인만큼 과격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정권의 강한 의지라는 점이 저를 걱정스럽게 합니다. 선생님께 몇 마디 투정을 부려본 것은 그래서입니다. 선생님의 언어로 다시 한번 축하의 말씀을 올립니다. Happy birthday to you, Sir. Many glad returns of the day!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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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있는 친구들이 저는 늘 부러웠습니다. 지지난달 ‘읽다 그리고 쓰다’라는 주제로 서울 장충동 현대문학관에서 열린 김윤식 선생님의 저서 특별전 첫날에 모인 제 또래 친구들도 저는 부러웠습니다. 그들에게는 김윤식이라는 큰 스승이 있습니다. 스승이 있다는 것은, 그 스승이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마음을 기댈 커다란 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제게는 그 나무가 없습니다. 그것은 제 교만함 탓이기도 하고, 평탄치 않았던 학창시절 탓이기도 합니다. 제 학창생활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되풀이했고, 전학이 잦았습니다. 대학 학부에서의 전공과 대학원에서의 전공이 다르기도 했습니다.

꼭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더라도,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석사과정에 다닐 때까지 제가 스친 수많은 교사들 가운데, 맘 편히 기댈 스승이 제겐 없었습니다. 간간이 저를 아끼던 분들도 계셨지만, 저는 그분들을 마음에 담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시절, 철학자 자크 데리다 선생님과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선생님, 역사학자 자크 르고프 선생님 같은 대가들의 세미나에 참여하며 제 지적 허영심을 채운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주재하신 세미나가 제게 지적 자양분이 되기는 했지만, 그분들을 스승이라 여기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분들은 전공이 저와 달랐을 뿐만 아니라, 저를 제자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공한 언어학 쪽에서는 학문으로나 인품으로나 저를 감화시킨 분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멋대로,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이따금 제게 던지신 따스한 몇 마디가 제 마음을 늘 데웠을 뿐만 아니라, 작가이자 기자로서 저는 선생님을 마음속 깊이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존경심은 선생님께서 이루신 글쓰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문필가로서 선생님이 지키신 지조와 기품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님 같은 ‘글의 검객’은 아니셨지만, 그래서 반체제 후진들의 환호를 독점하지는 않으셨지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글과 행동으로 지식인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나서지 않으시면서도 물러서지 않으시는 분, 온유하되 대범한 선비가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과 저의 연식 차가 크지 않아 제가 선생님을 자주 뵙고 사사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글을 통해 선생님을 사숙해 왔다는 것만도 제겐 큰 자랑거리입니다. 기자가 문인을 겸업하는 일이 예사였던 왜정시대와는 달리, 선생님께서 현직 언론인으로 계실 때만 해도 소설을 쓰는 기자는 드물었습니다. 저 자신 기자로서도 작가로서도 이뤄놓은 게 하잘것없어 선생님의 제자나 후진을 자처하는 것이 외람된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나무라신다 해도 저는 선생님의 제자를 참칭하고자 합니다.

유년기 이래로 도회적 감수성에 찌든 제가 선생님의 문체에 영향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의 문체가 늘 정답고 경이로웠습니다. 문체가 있는 작가만이 제대로 된 작가라면, 선생님은 한국 문단에서 매우 드문, 제대로 된 작가이십니다. 이 참람한 언어를 용서하십시오. 그렇지만 선생님처럼 텍스트만 보고도 그 작가를 짐작할 수 있는 스타일리스트는 우리 문단에 흔치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의식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문체는 전북 방언의 리듬 위에 슬며시 얹혀 있습니다. 돌아가신 이문구 선생님의 문체가 호서 방언의 리듬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선생님의 문장에서 전북 방언 어휘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문장은 전주평야를 흐르는 금강, 만경강, 동진강처럼, 전북 방언의 실미지근한 리듬으로 한국어의 평야를 살갑게 적시며 굽이굽이 흐릅니다. 거기에 의뭉스러운 풍자와 골계가 버무려집니다. 외가가 전주인 저는 그것을 또렷이 느낍니다.

얼마 전 선생님의 단편 <그들은 말했네>를 다시 읽으며, “도태당한 책들의 수런거림이 차츰 구호로 바뀌는 착각에 떨기도 했다. 남아있는 쟤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더란 말이냐. 입을 열기로 하면 우리도 할 말이 태산이다. 게으름뱅이 주인을 만나 일년 열두 달은 고사하고 수십 년 동안 내내 먼지만 뒤집어쓴 동료가 태반이다. 여자와 집은 가꾸기 나름이라는 말은, 이따금씩 우리 몸에 켜켜로 앉은 진애(塵埃, 우리도 당구 삼 년으로 유식하다)를 먼지떨이로 조심스레 털어준 이 댁 아주머니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입 밖에 내지 않겠다”라는 대목을 마주치고는, 바로 그 게으름뱅이 주인이자 ‘무식한 장서가’인 저는 킥킥댔습니다.

저는 글로나 사람 됨됨이로나 선생님 같은 지식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리되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지난 세기 80년대 후반 선생님께서 ‘신동아’에 연재하시던 ‘최일남이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가 기억납니다. 인터뷰이를 모욕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서 뽑아낼 것은 다 뽑아낸다는 점에서 선생님은 당대 제일의 인터뷰어셨습니다. ‘최일남이 만난 사람’은 한국 저널리즘 역사에서 인터뷰어의 이름을 앞세운 첫 인터뷰 시리즈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초창기 한겨레 기자였을 때, ‘사회평론’이라는 잡지에 ‘고종석이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느 후배가 “고 선배가 최일남 선생님급이 됐단 말이에요?”하고 제게 농담을 했더랬습니다. 후배는 저를 놀리느라 한 말이었지만, 저는 속으로 기꺼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지난해 9월 제 둘째아이 혼사 때 선생님께 청첩장을 올리기는 했지만, 선생님께서 직접 와 주시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와 주신 것만도 황감했지만, 피로연장에 선생님이 안 계신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나중에 그것이 선생님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수줍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 날의 죄송스러움을 되돌아보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하객들 가운데 가장 연로한 분이셨으니, 선생님을 사적으로 아는 후배 문인들이나 기자들도 선생님이 어려워 무람없이 다가가기가 힘들었을 걸로 짐작합니다. 비록 혼주로서 정신이 산란하기는 했으나, 제가 선생님을 직접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평론을 하는 정홍수군과 함께 그 얼마 뒤 선생님을 인사동의 한 식당에 모셨을 때, 선생님은 아직 연부역강할 때 글을 더 쓰라고 제 절필을 나무라셨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겠노라고 대답은 넙죽 했습니다만, 그때만 하더라도 제가 다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구차하게도 가정경제 형편 탓에 다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적잖이 겸연쩍었습니다. 세 해 전 절필 선언을 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세상에 할 말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었는데, 절필한 세 해 사이에도 세상에 대한 제 생각이 거의 바뀌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전에 했던 얘기를 소재만 바꾸어서 다시 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무참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권유가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글을 쓰지 않았던 세 해 동안 제게 다시 붓을 들라고 권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분들은 제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제 스승의 강권으로 다시 글을 쓰게 됐다고 둘러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지지난달 김윤식 선생님의 저서 특별전 첫날에 선생님을 뵈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그 연세가 되도록 떨쳐내지 못하신 ‘수줍음’ 때문에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계시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영 좋질 않았습니다. 그 자리의 주인공이셨던 김윤식 선생님 옆자리에 선생님께서 앉아계셨다면 모양이 참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도 뒤풀이 자리에서 선생님께서 와인도 드시고 또 건물 밖에 나가셔 담배도 피우시는 걸 보고, 선생님의 건강을 확인하게 돼 기뻤습니다. 제가 다시 글을 쓰기로 한 것을 선생님께서 치하해주신 것도 제게 큰 힘이 됐습니다. 그 날은 선생님께도, 김윤식 선생님께도 덕담을 들어서, 큰 횡재를 한 느낌이었습니다.

더러, 선생님께서 언론인 생활의 만년을 한겨레에서 보내지 않으셨다면 제가 선생님과 아무런 인연도 맺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한편으로는, 그래도 제가 문단과 언론계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마당인데, 선생님과 어찌 인연을 맺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칭 제자로서, 제가 스승께 무례하고 외람된 청을 하나 올리겠습니다. 연세가 있으시니 이제 긴 글을 쓰기 어려우시겠지만, 이따금 단장(斷章)이라도 쓰셔서 저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만경강이 흐르듯 굽이굽이 휘도는 선생님의 문체, 그 안에 깨알 같이 박힌 풍자와 골계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근간에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늘 강녕하소서.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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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이 낱말을 프랑스어로 받아줄지 모르겠지만, 저는 오래도록 뤼테토필(lutetophile)을 자임했습니다. 뤼테토필은 ‘파리애호가’라는 뜻으로 제가 만들어본 말입니다. 파리 센 강의 시테 섬과 그 둘레의 고대 취락공간을 일컬었던 루테티아(Lutetia)에 ‘애호가’라는 뜻의 접미사 ‘필’을 덧붙인 거지요. 라틴어 이름 루테티아의 프랑스어 형태 ‘뤼테스’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파리의 이명(異名)으로도 쓰입니다. 생미셸 대로(大路)에 자리잡은 ‘뤼테스’라는 카페-레스토랑에 가본 분도 많으실 겁니다.

1992년 가을부터 1998년 봄까지 저는 여러분의 도시에 살았습니다. 저널리즘 연수를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그 생기에 반해서 가족과 함께 그냥 눌러앉아 버린 겁니다. 1997년 말 한국에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원화(貨)의 값어치가 순식간에 반으로 동강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파리에서 허기진 산책자로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제가 파리에 산 시절은 제 30대 후반과 거의 포개집니다. 저는 그 시절을 제 삶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합니다. 파리는 제가 서울 다음으로 정을 준 도시이며, 서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서울은 너무 큰 도시여서, 예서 반세기를 산 제게도 낯선 구역이 많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도시 한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서너 시간이면 걸을 수 있는 도시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따금 파리의 북쪽 끝 포르트 드 클리냥쿠르에서 남쪽 끝 포르트 도를레앙까지 이리저리 해찰하며 걷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파리는 산책을 유혹하는 도시니까요. 제가 서울에서 길을 잃는 수는 있겠지만, 파리에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딱 20년 전 여름, 파리 지하철 생미셸 역에서 폭탄 테러로 다수의 사상자가 났었습니다. 저는 그때 꽤 놀랐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서울에서는 폭탄 테러라는 걸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얼마 뒤로도 지하철역과 백화점에서 폭탄 테러가 한두 차례 더 일어났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즈음 파리시는 거리의 휴지통을 죄다 밀봉했고, 지하철에선 주인 없는 가방을 신고하라는 방송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회상하는 파리는 안전한 도시였습니다. 서울만큼이나, 어쩌면 서울 이상으로 안전한 도시였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으슥한 거리를 걸어도 아무런 불안감을 느낄 수 없는 도시였습니다. 저는 종종 깊은 밤이나 새벽의 파리 거리를 하염없이 걷곤 했습니다. 짙은 어둠 속의 파리와 밝은 빛 아래의 파리가 어떻게 다른 느낌을 주는지는 제가 여러분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13일 밤의 동시 다발 대규모 테러에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저 역시 그 밤에 파리에 있었다면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프랑스 정부가 집회 금지 조처를 내렸는데도, 여러분은 그 이튿날부터 공화국 광장에 모여 “두렵지 않아!”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구호는 두려움 속에서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안간힘으로 들렸습니다. 광신도들의 폭탄과 총기 앞에서 대범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쪽 편의 테러리스트는 다른 쪽 편의 자유의 투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테러리스트가 중세의 기사도에 맞먹는 명예심을 지닌 시절도 있었습니다. 자유의 투사라는 직분에 충실한 테러리스트를 가장 실감나게 그린 것은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로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1905년 러시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삼았다는 이 작품은 폭력에 대해 엇갈린 관점을 지닌 테러리스트들을 등장시킵니다. 한쪽 끝에는 혁명이 시(詩)라고 생각하는 칼리야예프가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오직 폭탄만이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스테판이 있습니다. 칼리야예프는 “명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은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스테판은 “명예란 화려한 마차를 소유한 족속들만 누리는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작가가 칼리야예프 편에 선다는 것이 또렷해지지만, 카뮈는 스테판에게도 그 나름의 명예를 헌정합니다. 그는 “땅 위의 단 한 사람이라도 감옥에 있는 한, 자유는 내게 또 다른 감옥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고, 굶주리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명예롭지 않은 죽음도 기꺼이 택할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테러리스트는 자유의 투사가 지녀야 할 품격을 잊거나 잃었습니다. 이번 파리의 테러리스트에게 명예욕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명예심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좌절이나 수모와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참혹하게 살해했습니다. 2001년 9·11 테러리스트들이 서방의 가장 상징적인 곳을 목표물로 삼았다면, 이번 11·13 테러리스트들은 그저 가장 쉽게 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목표물로 삼았습니다. 어떤 언어의 마술로도 그들을 변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이번 11·13 테러를 겪은 프랑스의 젊은 세대를 ‘바타클랑세대’라고 명명했더군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바타클랑 콘서트홀의 이름을 따서 말입니다. 사실 희생자 대부분이 30대 아래의 젊은이들이라고 하니, 이 젊은 세대가 그렇게 불릴 만도 합니다. 젊은 시절 깊은 외상을 입은 이 세대는 68년 5월 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훨씬 깊게, 심성과 습속의 변화를 겪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여러분은 덜 불행한 사람입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시드니를 거쳐 뭄바이에 이르기까지 이 행성의 수많은 도시들이 기념물들을 삼색 빛깔로 치장하며 여러분을 위로했습니다. “나는 파리다(Je suis Paris)”라는 구호가 전 세계에 메아리쳤습니다. 언론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꽃과 촛불과 데생이 가득했습니다. 그것들은 슬픔의 상징이자 연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파리가, 프랑스가 세계인들에게 보급한 어떤 가치 덕분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자유, 평등, 연대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보편적 가치겠지요.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사람에게는 조국이 두 개라면서, 하나는 자기 조국이고 또 하나는 프랑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나라에 헌정된 가장 곡진한 찬사일 것입니다.

가자지구나 바그다드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파리나 보스턴에서 일어나면 전 세계적 애도의 대상이 됩니다. 누군가가 폭탄테러로 죽었을 때, 그가 다수로부터 애도의 헌화를 받느냐 못 받느냐는 그의 국적이 결정합니다. 그가 프랑스인이거나 미국인이라면 헌화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시리아인이라면 헌화를 받기는커녕 그의 이름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요즘 파리 참사 직후 개설된 En memoire@ParisVictims라는 트위터 계정을 통해 희생자들의 사진과 이력을 들여다보곤 합니다. 그리고 아린 가슴으로 그들을 애도합니다. 바그다드나 다마스쿠스에서 테러로 살해된 사람이라면, 제가 그런 방식으로 그들을 애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불공평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일상의 일은 뉴스가치가 없으니 기자들의 흥미를 끌 리가 없고, 애도든 분노든 어떤 분위기가 익으려면 기자들이 선정적 기사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는 전시(戰時)”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국가(IS)의 테러리스트들은 가장 야비한 싸울아비들입니다. 그들은 프랑스군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을 무차별로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테러가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그들의 호언이 허풍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 또는 다른 대륙의 도시도 IS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공습만으로 IS를 궤멸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서방국가들이나 러시아가 지상군을 투입해 IS를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몰아낸다고 해도, 그들은 리비아를 비롯한 다른 무슬림 국가에 둥지를 틀 수 있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듯, IS를 낳은 것은 조지 부시 주니어의 분별없는 이라크 침공입니다. 또 유럽을 비롯한 비-이슬람권 사회에서 무슬림에 대한 차별이 계속된다면, IS는 어디서나 새로운 자양분을 얻을 것입니다.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IS는 또 다른 이름으로 번성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인류의 마지막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당장, 솅겐협정이 휴지조각이 되고, 유럽행 비행기를 탈 때도 미국행 비행기를 탈 때처럼 번잡함을 감내해야 하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시민적 자유의 위축이 우려스럽습니다.

이번 테러의 희생자들을 마음 깊이 추모하면서 여러분에게 위로와 연대를 보냅니다. 누군가가 말했듯, IS 테러리스트들은 여러분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지만 단 한 가지만은 빼앗아가지 못했습니다. 삶의 기쁨 말입니다. 파리가 곧 생기를 되찾기 바랍니다. 아니 벌써 되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 꺼진 에펠탑이 다시 점등한 이상, 파리는 여전히 빛의 도시입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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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40년 전 11월이 생각납니다. 그 시절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라 부르지 않고 대학입학 예비고사(예비고사)라 불렀습니다. 대학입학 본고사 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비고사를 속어로는 그 첫음절의 로마글자를 따 ‘Y고사’라고도 불렀지요. 예비고사 성적이 대학입학에 끼치는 영향은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아예 없거나 매우 작았습니다. 그래도 예비고사를 치르고 나니, 한 고비는 넘겼다 싶어 마음 한구석이 조금 후련했습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은 1975년 11월의 나처럼 어떤 후련함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불안이 짙게 뒤섞여 있을 후련함을요. 대학입학 여부가 확실히 가려질 때까지 그 불안은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입니다.

서양처럼 학년도가 가을에 시작해서 대학입학 여부가 늦은 봄이나 여름에 결정된다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늦은 봄이나 여름의 싱그러움이 늦가을과 겨울의 을씨년스러움보다는 여러분 같은 입시생의 불안한 마음을 다습게 어루만져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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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개인사에서 대학입시만큼 중요한 일은 달리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나 교육은 계층이동의 경로입니다. 또는 그 반대로 계층고착의 경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처럼 결정적인 사회는 드물 것입니다. 한국은 10대 말에 특정한 방식으로 측정된 지적 성취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이 결정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 여러분이 지난주에 치른 수능의 점수입니다. 그 수능점수가 중요한 기준이 돼, 여러분은 어떤 대학에 들어가게 되거나 못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40년 전 처음 치른 예비고사가 수능과 다른 점이 거기 있습니다.



수능점수에는 여러분이 그간 쏟은 노력만이 아니라, 수능 당일의 몸 상태나 마음 상태 같은 우연적 요소도 꽤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우연적 요소보다 여러분의 수능점수에 더 많이 반영된 것은 여러분이 속한 사회계급일 것입니다. 경향적으로, 여러분이 부유한 집 출신이라면 노력에 견줘 수능점수가 높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지 못한 집 출신이라면 노력에 견줘 수능점수가 낮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만 해도 큰 불공평입니다. 소위 명문 대학들은 부유한 집 출신 학생들을 뽑을 가능성이 커지고, 이름이 덜 알려진 대학들은 부유하지 못한 집 출신 학생들을 뽑을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그런데도 한국 명문 대학들의 탐욕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시모집이라는 것을 통해서, 혹시라도 수능에서 조금 실패할 수 있을 부유한 집 출신 학생들, 또는 수학능력이 더 있다고 자신들이 판단한 학생들을 뽑습니다. 그들은 과학고나 외국어고 같은 특목고 학생들이 수능에서 조금 실패할 경우를 상정해 그 학생들을 ‘낚아챌’ 방법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정시에서조차 그렇습니다. 일부 사립대학이 수능점수나 논술성적이나 내신등급이 높은 일반고 학생들 대신에 그것들이 낮은 특목고 학생들을 뽑아 물의를 일으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목고 학생들은 대체로 부유한 집 자식들입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계급은 고스란히 상속됩니다.

그것은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프랑스 사회학자가 <재생산>이라는 책에서 세밀히 관찰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피에르 부르디외가 관찰 대상으로 삼은 프랑스만 하더라도 계급의 상속이 한국만큼 경직돼 있지는 않습니다. 교육의 대부분이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프랑스에도 소위 일류 고등교육기관들이 있습니다. 그랑드제콜이라고 부르는 이 직업학교들은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고등교육기관입니다. 이 학교들은 대학이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대학 위의 대학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그랑드제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에서 2년에 걸치는 준비반(프레파)을 거쳐야 합니다. 어차피 프랑스의 대학 대부분은 국립이어서 수업료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랑드제콜 학생들에게는 거기에 더해 정부가 생활비를 지급합니다. 그 대신 그들은 졸업한 뒤 일정 기간 자기 전공에 따라 공립학교 교사나 국공영 기업의 기술자, 과학자로 일해야 합니다. 그랑드제콜 출신들이 우대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학교들의 규모가 워낙 작다 보니 프랑스 사회에서 이 학교들에 못 들어갔다고 해서 패배자의 낙인이 찍히지는 않습니다. 평준화된 일반 대학을 졸업하고도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프랑스 자본주의는 한국 자본주의보다 난숙해 있지만, 학벌이 삶을 규정하는 정도는 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계급 재생산, 곧 계급 생식이 프랑스에선 한국에서보다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사립대학의 비싼 수업료로 유명한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비리그라 불리는 동부의 사립대학들이나 서부의 스탠퍼드 같은 대학엔 들어가기 어려운 만큼 졸업 뒤에 좋은 직장이 보장되기도 하지만, 주립대학을 나와도 살길이 막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립대학 중에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분교처럼 국제적 명성을 지닌 학교도 있습니다. 하버드대학 로스쿨에서 파산법을 가르친, 저명한 상법학자이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이름 없는 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이력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상위권 몇몇 대학의 규모가 너무 커서 이 학교들을 나오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학교 출신들이 강력한 ‘벌(閥)’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학벌’이라는 말이 한국처럼 꼭 들어맞는 사회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그랑드제콜을 졸업했다는 것, 미국에서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이라는 것은 성공의 징표지만, 그 학교들의 수가 많고 정원이 워낙 적어서 그 학교들을 못 나왔다고 해 패배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상위권 몇몇 대학의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 패배의 징표가 됩니다. 그리고 이 대학들이 정원을 줄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정원을 줄인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자기 학교 출신들의 힘을, ‘학벌’의 힘을 줄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일부는 그런 명문 공룡대학에 들어가 ‘벌’에 속하게 될 테고, 다수는 거기 못 들어가 ‘벌’에서 소외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교육부가 대학입시 제도를 고쳐 이런 계급 재생산의 부작용을 줄이고자 한다지만,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한국 사회의 학벌 문제는 대학입시 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앞서 얘기했듯, 10대 말 특정한 방식에 따라 측정된 지적 성취가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해 버린다는 것, 그 지적 성취는 짙게 계급을 반영한다는 것, 몇몇 명문 대학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 그리고 패자부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엄격한 대학 서열이라는 한국의 제도적 위계에서 몇몇 대학이 지니고 있는 자리의 화려함은 그 대학 졸업생들 개개인의 지적 능력에 대한 사회의 판단을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오염시키며 한국의 계급지형을 더욱 고착화할 것입니다.

너무 우울한 얘기만 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 ‘공부 잘하는’ 일부에게는 신나는 얘기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내 얘기를 우울하게 들은 분들에게 큰 위안이 되지는 않겠지만, 대학이 여러분에게 부여할 초기 조건이 예측가능한 인과관계로 여러분의 삶을 결정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대학입시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거기 버금가는 여러 차례의 분기점이 있을 것입니다. 세계가 그렇듯 삶도 카오스에 가깝습니다. 중국 베이징의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면 그 다음달 미국 뉴욕에서 폭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기상현상이 초기 조건에 민감하게 의존하기 때문에 장기적 기상예측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비유입니다. 여러분이 들어갈, 또는 들어가지 못할 대학이 장기적으로 여러분의 삶을 어떤 꼴로 빚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스스로 비하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비하당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합니다. 앞으로 남은 긴 삶 속에서 늘 자존감과 명예심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자존감이나 명예심은 자만심이나 명예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존감과 명예심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 잣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갑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입시경쟁의 패배자입니다. 게다가 예비고사를 세 차례나 봤습니다. 그러나 자존감과 명예심을 버리지 않으려고 늘 애써 왔습니다. 그 노력은 내 삶을 그럭저럭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며칠은 푹 쉬십시오. 대학입시까지 앞으로 남은 절차가 있겠지만, 여러분에게는 쉴 자격이 있습니다. 모두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바란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간 고생 많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제몫의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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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다리는 파리 센 강의 수많은 다리 가운데 별나게 매력적인 다리가 아닙니다. 알렉산드르3세 다리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새 다리(新橋, 퐁뇌프)처럼 젊은이들이 밀어를 나눌 움푹 파인 공간들이 있는 것도 아니며, 생미셀 다리처럼 파리의 멋진 스카이라인을 한눈에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처음 파리에 간 1992년 가을에 굳이 그 다리를 찾은 것은 순전히 당신의 그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 때문이었습니다. 막상 가서 보고는 실망했습니다. 다리의 북쪽 끝에 당신의 ‘미라보 다리’ 첫 연이 새겨져 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볼품없는 다리였습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미라보 다리는 오직 당신의 시 ‘미라보 다리’ 덕택에 어떤 위광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파리시(市)가 뒷날 거기에 당신의 시를 새겨 넣은 것도 그것을 노렸기 때문이겠지요. 그 다리 위에서 나는 그 시(詩)를 이어가며 당신과 화가 마리 로랑생의 연애를, 그리고 당신의 실연(失戀)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당신이 이 다리 위에서 바라보았던 파리에는, 에펠탑 말고는 다른 현대식 건물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그 다리 위에 처음 섰던 23년 전, 거기서 본 파리는 마치 신흥개발 도시 같았습니다. 남쪽 강안의 니코 호텔과 북쪽 강안의 라디오 프랑스 방송사 건물이, 그리고 북쪽으로 멀리 보이는 TF1 텔레비전 방송사 건물이 빚어내는, 파리답지 않은 차가운 풍경 때문이었습니다. 그 건물들은 아무런 미적 고려도 부여받지 못한 서울의 아파트 건물들 같았습니다. 아무튼 이리 볼품없는 다리 위에서 당신이 어떻게 그리 낭만적인 노래를 읊었는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당신의 아흔일곱 번째 기일입니다. 당신은 유럽인들이 ‘아주 커다란 전쟁’이라고 불렀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이틀 전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포병으로 참전한 당신은 두뇌에 관통상을 입어 그 당시로서는 몹시 위험한 개두수술을 받고서도 용케 살아남았지만, 그 총상에서 회복되던 중에 독감에 걸려 종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38세의 아직 젊은 당신의 삶을 앗아간 것은 그 1년여 사이에 전 세계에서 2000만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독감이었습니다. 중세유럽의 페스트에 버금갈 만하게 위협적인 독감이었다지요. 그 뒤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인한 독감이 국경을 넘어 퍼질 때면, 그 ‘신종’ 독감은 1918~1919년의 스페인독감에 비유되곤 합니다. 물론 스페인독감만 한 위력을 떨친 독감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총상의 회복기에 독감으로 죽었으니, 당신이 전사한 것인지 병사한 것인지 조금 모호하긴 합니다. 아무튼 당신은 참전의 대가로 프랑스 국적을 얻었고, 프랑스인으로 죽었습니다. 이방에서의 출생과 성장, 이방인의 피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진정한 조국으로 여기고 자부심을 가졌던 나라의 시민으로 죽은 것입니다.

당신이 죽은 나이에 나는 파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도시의 거리들을 끊임없이 걸었습니다. 걷다가 지치면 아무 카페에나 들러 신문을 읽거나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시간은 정지돼 있는 것 같았고,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나는 문득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자주 들렀을 몽파르나스와 몽마르트르는 내가 자주 걷던 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카페들의 외진 자리에 앉아 유리벽 너머로 몽파르나스대로나 테르트르광장을 내다보노라면, 그 카페들의 옛 고객들이 다시 살아나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환각이 일기도 했습니다. 그 고객들의 얼굴 가운데는 당연히 당신의 얼굴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비평가 마르셀 레몽에 따르면 당신은 “1905년께부터 1920년 사이에 프랑스 예술이 열어놓은 모든 길에 그 그림자를 드리운 시인”이고, 시인 앙드레 브르통에 따르면 “이 세상 최후의 시인”입니다. 그 말을 했을 때, 앙드레 브르통은 자신을 시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요? 당신은 화가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가 체현할 입체주의(큐비즘)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그 입체주의에서 가지쳐나갈 오르페우스주의(오르피슴)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또 당신은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슴)라는 말도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당신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였을 뿐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초현실주의의 주인공이라 할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의 첫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경의를 표하여, 수포와 나는 우리가 그 재량권을 획득하여 우리 친구들에게 지체 없이 이바지할 수 있게 된 이 순수한 표현의 새로운 양식을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라고 씁니다. 물론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가 당신의 초현실주의와 고스란히 포개졌던 것은 아닙니다. 브르통이 이어서 “오늘날에 이 낱말을 바꿀 필요는 없으나, 우리가 이 말에 부여하는 의미 폭이 아폴리네르의 의미 폭보다 일반적으로 우세하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브르통은 더 나아가 제라르 드 네르발이 <불꽃처녀들>의 헌사에서 사용한 ‘초자연주의’라는 말이 자신의 초현실주의에 더 가깝다는 것도 내비칩니다.

나는 초현실주의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 말에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서 앙드레 브르통을 거쳐 르네 마그리트에 이르기까지 스물은 넘겠지만, 나는 문학에서의 초현실주의와 조형예술을 비롯한 다른 장르에서의 초현실주의가 어떻게 얽히고 스며 있는지 자세히 모릅니다. 나는 그러나 당신이 작고한 뒤 1920년대부터 활짝 핀 초현실주의가 장르의 벽을 넘어 문인들과 화가들을 묶고, 저널리스트들과 예술향수자들을 아우르는 예술사의 진풍경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당신은 소위 ‘아름다운 시절(벨에포크)’을 살다 죽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외려 당신이 죽은 뒤의 1920년대 파리가 아름다운 시절로 다가옵니다. 내 상상 속 그 아름다운 시절의 주인공들은 프랑스인들만이 아니라 파리로 몰려든 많은 예술가들, 특히 ‘길 잃은 세대’라 불렸던 미국 예술가들도 포함합니다.

파리에 살 때, 내 아파트는 페르-라셰즈 묘지 근처에 있었습니다. 걸어서 10분 거리였습니다. 나는 그곳에 자주 들렀고, 당신의 무덤을 곧잘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 새겨진 당신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 시의 한 대목이 어슴푸레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결코 건드리지 못한 것/ 난 그걸 건드렸고 그걸 말했네// 아무도 그것에서 상상하지 못하는 것/ 난 모든 걸 캐냈네/ 그리고 난 여러 번 맛보았네/ 맛볼 수 없는 삶까지도/ 난 웃으며 죽을 수 있네.” 견자(見者)는 랭보가 아니라 당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신기한 것에 잘 홀리는 부박한 성격 탓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당신의 시집은 <칼리그람>입니다. 그러나 이 11월에는 ‘미라보 다리’가 실린 당신의 첫 번째 시집 <알코올>을 읽으며 황량한 계절을 보내볼까 합니다. 서울 날씨는 보통 파리 날씨보다 훨씬 사랑스럽지만, 11월은 서울도 파리와 비슷하게 을씨년스럽습니다. <알코올>을 읽기에 좋은 철입니다. 파리에 살 때 프랑스어판으로 <알코올>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허술한 프랑스어로는 당신의 그 시집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던 듯합니다. 마침 이제 내게는 한국어판 <알코올>이 있습니다. 그 시집을 한국어로 옮기고 세세한 미주(尾註)를 단 황현산씨는 당신에 대해, 그리고 초현실주의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역자 해설에서 황현산씨는 전쟁 중에 당신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던 한 여성에게 당신이 보낸 편지글의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나는 내 작품에 일곱 사람 이상의 애독자를 기대하지 않지만 그 일곱 사람의 성(性)과 국적이 다르고 신분이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내 시가 미국의 흑인 복서, 중국의 황후, 적국인 독일의 신문기자, 스페인의 화가, 프랑스의 양갓집 규수, 이탈리아의 젊은 농사꾼 여자, 인도에 파견된 영국 장교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이 내 바람입니다.”

이어서 황현산씨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일곱 사람 가운데 우리는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감수성과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흑인 복서로, 이탈리아의 젊은 농사꾼 여자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아폴리네르의 시에 들어 있다.”

나는 당신의 시집을 펼쳐, 독일의 신문기자가 되어, 첫 시 ‘변두리’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넌 이 낡은 세계가 지겹다// 양치기 처녀여 오 에펠탑이여 오늘 아침 다리들 저 양떼들이 메에 메에 운다// 너는 그리스 로마의 고대에 진저리가 난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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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1848년과 1968년을 세계혁명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인류역사를 통해 오로지 그 두 해만이 세계혁명의 해라고 못 박았지요. 그가 이렇게 썼을 때, 나는 이 저명한 역사학자에게서 투명한 지성 대신에 지적 나태와 과장된 상상력, 깜찍한 스토리텔링 재능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만일 실패한 혁명, 유산한 혁명, 혁명의 시도 따위를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해들을 혁명의 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기실 월러스틴도 그 두 ‘세계혁명’이 다 실패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둘 다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고 강변했지요.

그러나 언어를 엄밀하게 쓰기로 작정한 뒤, 월러스틴의 그 발언을 따져봅시다. 1848년의 실패한 혁명들은 모두 유럽에서 시도되었습니다. 미국인 월러스틴은 유럽을 세계와 등치하는 유럽중심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유럽을 세계와 등치할 수 없는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1848년을 세계혁명의 해라고 부르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월러스틴이 1848년에 칠해놓은 붉은 빛깔은 오로지 유럽에 한정된 것입니다.

게다가 혁명의 시도를 혁명이라 부르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우선 1848년을 봅시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 지역의 3월혁명은 봉건세력과 결탁한 부르주아지의 손에 진압됐습니다. 10년 넘어 계속된 영국의 차티스트운동은 1848년에도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가 로마 공화국을 건설했지만, 이탈리아가 통일된 것은 그보다 10년도 더 지나서였습니다.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덴마크에서의 혁명운동도 구체제에 의해 진압됐습니다. 오로지 프랑스의 2월혁명만이 1830년 7월 왕정체제를 끝장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티트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힘을 합쳐 공화정을 회복한 겁니다.

1968년 역시 세계혁명의 해라 부를 수 없습니다. 1968년에는 유럽 바깥에서도 혁명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968년 유럽과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목격한 것은 가장 후하게 평가해도 유산한 혁명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이 유럽 바깥으로 퍼져나간 것도 베트남 전쟁 덕분입니다. 월러스틴이 세계혁명이라고 부르는 1968년 사태는 크게 보아 반전 평화운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그럴싸한 혁명의 구호가 휘날린 것뿐이었지요. 마르크스, 마오쩌둥, 마르쿠제 이 3M의 깃발을 내걸며 ‘위대한 거부’를 외치던 서독 학생들은 자본주의체제에 작게도 틈을 내지 못했습니다.

1848년과 마찬가지로 1968년에도 가장 화려한 스펙터클을 보여준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당신이 다니던 파리 서부 낭테르대학(파리10대학)에서 시작된 이 반정부 시위는 프랑스 전역으로 번지며 자본주의와 물신주의를 넘는 새로운 세상을 외쳤고, 역사에 남을 멋들어진 선동구호를 생산해 냈습니다.

예컨대 “금지를 금지하라” “파괴는 창조의 열정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굶주림은 참아도 권태로움은 못 참는다” “선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따위의 구호입니다. 그런데 그 구호들이 어떻게 세계를 흔들어놓았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당신보다 10년 이상 아래인 내 세대의 어떤 이들에게조차 68년 5월 프랑스는 신비의 베일을 쓰고 다가옵니다. 금지를 금지하라는 구호로 드골 정권에 반기를 든 그 ‘혁명’은 당신이 이끈 낭테르 대학 학생들이 시작했지만 이내 노동자들에게 번졌고, 처음에는 이 ‘혁명’에 반대했던 프랑스 공산당마저 거기 가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1968년 5월이 프랑스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상상’합니다. 그 ‘혁명’이 드골을 하야시키지 못했지만, 프랑스와 서유럽의 습속의 변화, 집단적 아비튀스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68세대라는 명칭은 그 ‘혁명’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이든 단순히 참여적 관찰을 했던 사람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훈장입니다.

그러나 1968년 5월이 기성체제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1990년대 중반에 공개된 미국 CIA 문서에 따르면 프랑스에 산재해 있던 미국 스파이들은 5월폭동이 프랑스 자본주의를 결코 흔들 수 없으리라고 올바르게 관찰했습니다. 그들은 1968년 5월을 그저 ‘작은 소란’으로 보았습니다. 그 소란 속의 온갖 혁명적 구호들이 결코 프랑스 자본주의 체제에 상처를 낼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려 그들은 유럽 반미주의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드골이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을 고소하게 여겼을 따름이지요.

그 소란이 가라앉은 이듬해 4월, 드골이 지방행정개혁과 상원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자신의 신임과 결부시키고 국민투표에서 져 하야한 것을 두고, 5월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석하는 역사학자들도 있습니다. 나는 거기에 선뜻 동의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어떤 기술적 쟁점에 반대한 것이지, 드골에게 반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프랑스 좌파에게 1968년 5월은 1871년 파리코뮌 이래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5월을 상징하는 사람이 당신입니다. 그 폭동의 전 과정에 당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신의 이름이 허명일 가능성의 문을 엽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를 떠올리듯,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을 떠올리듯, 우리는 68년 5월 프랑스에서 대뜸 다니엘 콘-벤디트라는 이름을 떠올립니다. 낭테르대학에서 당신이 선동적 연설을 하지 않았다면, 68년 5월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시위가 라탱구역의 소르본대학으로, 노동계로, 공산당으로 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정부 측에서 흘리자, 시위자들은 “우리는 모두 독일계 유대인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5월22일 당신이 ‘선동적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독일로 추방된 뒤에도 5월은 계속됐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68년 5월의 엔진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당신을 68년 5월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합니다. ‘붉은 다니(Dany le Rouge)’라는 당신의 별명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물세 살 먹은 ‘붉은 다니’의 붉음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68년 5월에 나부끼던 그 숱한 구호 중에서 당신이 체현하고 있던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당신의 ‘붉음’은 프리섹스, 기숙사에서의 남녀동거, 더 나아가 아동성애에 대한 관용 정도였습니다. 월러스틴이 세계혁명의 해라고 불렀던 1968년이 결코 세계혁명의 해가 아니었듯, 군중들이 ‘붉은 다니’라고 불렀던 당신은 사실 붉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이 프랑스와 독일 이중국적자였는데도, 프랑스 정부는 1990년대까지 당신의 프랑스 입국을 막았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상징성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탄창이 빈 적의 총에 겁먹은 병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이미 위험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붉은 다니’였을 때조차 위험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이의 거의 모든 이념들에 발을 걸치며 동요를 거듭했고, 그래서 친구들과 적들을 수시로 바꾸었습니다. 1984년 당신은 독일 녹색당에 가입하면서 ‘녹색 다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붉은 다니’가 붉지 않았듯, ‘녹색 다니’도 푸르러 보이진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 노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중국적자인 점을 충분히 이용해 당신은 독일 녹색당과 프랑스 녹색당을 오가며 유럽의회 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2004년 당신이 로마에서 유럽 녹색당 창당을 주도했을 때, 당신은 유럽 녹색정치의 확고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녹색정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의 언어는 늘 좌우로 과격하지만, 당신의 실천은 출판사나 서점을 운영하는 것, 유럽의회를 드나드는 것, 반권위주의적 유치원을 운영하는 것뿐입니다. 그 반권위주의적 유치원이라는 것도 당신이 삼켰다 뱉었다 하는 아동성애에 대한 관용 때문에 어쩐지 께름칙합니다.

당신의 녹색정치가 생태정치에서 여성정치로, LGBT정치로, 기본소득 정치로 확장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신의 녹색정치가 무지개 정치로 확장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신이 시장자본주의를 예찬하지 않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개입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의 발언들에서 어떤 일관성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아마 ‘적록색맹’의 팸플릿 저자로 삶을 마칠 것입니다. 당신이 1988년에 프랑스어로 쓴 <우리는 혁명을 너무 간절히 사랑했다>는 68년 5월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차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사랑한 혁명이란, 성적 분방함 말고는, 도대체 무엇이었던가요? 적록혁명은 적어도 그 이상의 것입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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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당신의 서른여섯 번째 기일입니다. 당신이 불귀의 객이 된 것을 알게 된 어느 가을 이른 아침에 제가 슬펐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은 기쁘고 후련했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부당하게 죽이고 가두고 다치게 한 많은 이들에게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 안에는 한 움큼의 불안이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불안은 북한이 남침한다거나 하는 그런 허황한 상상이 낳은 불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군이 대한민국 땅에 버티고 있는데, 북한이 이성을 잃지 않는 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지요.

다만, 당신이 시민불복종에 무릎 꿇고 권좌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궁정쿠데타 시도에 의해 귀천(歸天)한 것이 꺼림칙했습니다. 물론 그 어설픈 시도의 주도자는 즉각 체포돼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만, 저는 당신의 부하 군인들에 대한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시민혁명이 당신을 끌어내렸다면, 당신을 따르던 육군 소장들의 정치적 야심이 활활 타오를 기회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길게 보자면 당신의 죽음은 그해 여름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과 가을의 김영삼 신민당 총재 국회의원직 제명, 그리고 그에 따른 부마항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유신체제를 극적으로 직접 끝장낸 것은 당신 심복의 총알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불안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제 불안은 가장 나쁜 형태로 실현돼, 군사독재정권은 8년간 더 연장되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어떻든, 당신은 헌정을 파괴해 집권한 군인독재자였습니다.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동안 당신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북한과 연계해 간첩으로 몰아 죽이거나 가두거나 다치게 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귀환한 납북어부들을 포함해 아무런 정치활동을 하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정치적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한 시인의 표현대로, 당신의 집권기 대한민국은 ‘겨울공화국’이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前文)에서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반역자라는 뜻입니다. 당신 따님의 뜻에 따라 곧 만들어진다는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 당신이 어떻게 묘사되든, 저 빛나는 6월 시민혁명이 분만한 제6공화국 헌법 아래서 당신은 한낱 대한민국의 반역자일 뿐입니다. 당신에게는 그 반역을 역사의 노둣돌로 삼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5·16 군사반란을 반겼던 지식인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민주당 정권의 무능에 넌더리가 났던 참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탐욕이 그 가능성을 없애버렸습니다.

당신이 거느렸던 두 공화국 가운데 앞의 공화국, 다시 말해 제3공화국도 군사독재체제이기는 했습니다. 정치공작과 고문과 불법체포가 일상적인 사회였습니다. 당신은 소위 4대 의혹사건이라 불리는 부정부패를 통해 민주공화당을 만들었고, 그 정당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한때 남로당원이었던 터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주공화당의 창당 방식은 공산주의자들의 점 조직 행태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당신은 반란 이후 많은 반란동지들을 숙청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교수대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1969년 3선개헌과 1972년 유신쿠데타로 영구집권의 길을 열지만 않았더라면, 지금 역사는 당신을 사뭇 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유신이라는 이름의 친위쿠데타로 당신이 급조한 제4공화국은, 당신이 작고한 뒤 남도(南道)를 적신 핏물 속에서 솟아난 제5공화국과 함께, 한국 현대정치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반란 이후에 수많은 식언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스스로 만든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중임만 하고 물러났다면, 1971년 선거에서 당신의 민주공화당이 집권을 했든, 그 시기의 제1야당 신민당이 집권을 했든,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서서히 회생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 악마의 주술을 걸고 있는 지역주의(사실은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이 이룩한 압축성장이 당신의 지도력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얄궂게도, 이들은 시장에 정부가 간섭하는 데 경기를 일으키는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당신의 계획경제에 극도의 증오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습니다. 당신 덕분이든 그 시대 한국인들의 고단한 노동 덕분이든, 당신이 집권한 동안 한국 경제의 규모는 크게 불어났습니다. 당신보다 더 심한 독재를 하고도 제 나라 경제를 망쳐놓은 사람들을 저는 압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 견줘 당신은 덜 비판받아야 하는 걸까요? 당신이 4년 임기 두 번만 채우고 물러났다면, 한국 경제는 이내 활기를 잃었을까요?

1971년 대선에서 당신은 대통령을 단 한 번만 더 하겠다며 다시는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식언의 대명사인 당신도 그 약속만은 지켰습니다. 다만 아주 괴상한 방식으로, 즉 대통령 직선제를 아예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지켰지요. 당신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섬겼고,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황제 푸이를 섬겼고, 해방 뒤에는 남로당에 가입해 잠시 박헌영(과 김일성)을 섬겼고, 동지들을 팔아 전향하고 나서는 이승만을 섬겼습니다. 장면을 섬겼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군사반란 계획이 4월혁명 이전에 세워졌다는 것은 이제 다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이런저런 권력자들을 섬기며 출세의 길을 달리다가, 당신은 마침내 군사반란을 통해 최고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청렴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반란 직후에 터진 부정부패 사건들은 그만두고라도, 당신이 청렴했다면 지금 당신의 자녀들이 지니고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청렴한 대통령이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당신이 굳이 부패할 필요가 있었는지요? 대한민국의 실질적 주권자가 국민이 아니라 당신이었는데, 비록 북한보다는 정도가 덜했지만 당신 치하의 대한민국은 일종의 가산국가였는데, 당신이 부패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당신의 사유물이었으니까요.

놀랍게도, 당신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 다음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다음의 셋 가운데 하나거나 둘이거나 셋 모두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실제로 당신이 존경받을 만한 권력자였을 가능성입니다. 저는 여기엔 무게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둘째는 당신이 장기집권하는 동안 박정희족(族)을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박아놓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은덕을 입은 그들의 자식들은 이제 군복 대신에 우아한 연미복을 입고, 군부대가 아니라 파티장이나 학술회장이나 언론사에서 당신의 치적을 선전하느라 바쁩니다. 셋째는 당신의 죽음이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고꾸라뜨린 이에 대한 원망이 큽니다.

당신이 시민혁명에 밀려 권좌에서 내려왔다면, 평범한 삶을 살다가 고종명했다면, 박정희 신드롬이 이리 거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신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상과 포개집니다. 그이의 죽음은 당신의 죽음보다 더 비극적이었고,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정치적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한동안 하나로 묶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의 방식이 그의 삶에 대한 평가를 이런 식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아직 이성이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당신과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에는 그런 식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대통령이 나오지 않기 바랍니다.

당신이 작고한 이튿날, 대학생이었던 저는 당신의 따님이 뒷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기기묘묘한 파동방정식을 통해 그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보지 못했지만, 당신에게는 친손자가 넷이나 있습니다. 당신의 따님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이 마당에, 당신의 손자가 미래의 어느 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도 이젠 말 못하겠습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의 견고함은 결국 당신에 대한 지지의 견고함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신과 같은 독재자가 아니듯, 당신의 손자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독재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 걸출한 정치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나이 탓에 제가 그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것을 절대 볼 수 없다는 사실만이 제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의 기일에 당신을 추도할 수 없는 현실이 제게도 편치만은 않습니다. 그 세상에서는 안빈낙도하시기를 빕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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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윌리엄 개스는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두고 “소외, 부조리, 권태, 공허, 퇴폐, 역사의 포악성, 변화의 비속함, 고통으로서의 의식, 질병으로서의 이성이라는 근대적 주제들에 대한 철학적 로맨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멋진 수사를 줄여 말하면, 선생님이 염세주의자라는 뜻일 겁니다. 기실 선생님의 도저한 염세주의(때때로 모순을 드러내면서도 결국은 회의주의를 거쳐서 허무주의에 이르고야 마는 그 염세주의)는 선생님의 글 곳곳에서 읽힙니다. 선생님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골칫거리의 시작이었고 그래서 늘 절망의 꼭대기에서 살았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20대의 선생님이 염세주의에 허우적대는 걸 보신 선생님의 어머니가 “네가 이렇게 불행해할 줄 알았다면 너를 낙태했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생님은 그 염세주의의 끝간데를 상품화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여러 언어로 번역돼 지금도 수많은 독자를 매혹합니다. 그 독자들 가운데 선생님만 한 염세주의자는 많지 않겠지만, 그들 다수는 선생님의 염세주의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거나 아이스크림처럼 소비합니다. 선생님은 자주 삶의 무의미와 비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무의미와 비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외려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산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자살이라는 보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삶의 무의미와 비참이 정녕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자살해버리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튼 그 자살이라는 보험에 기대어 선생님은 삶의 무의미와 비참을 견뎌냈고, 고종명하셨습니다. 향년 84는 장수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그리 박한 세월은 아닙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그 지독한 염세주의가 혹시 제스처는 아니었나 의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선생님께는 억울한 말이겠지요.

뒷날 뉘우치시긴 했지만, 젊은 시절의 선생님은 파시스트였습니다. 조국 루마니아의 극우민족주의 단체 철위대에 가입하셨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만큼 호감이 가고 존경할 만한 동시대 정치인은 없다”는 망언까지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가까운 친구인 종교학자 미르차 엘리아데 선생님이나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 선생님도 젊은 시절 그 극단적 민족주의 둘레를 어슬렁댔지요. 물론 선생님과 친구분들은 장년에 들어 그 폭력의 철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친구분들과 달리 선생님은 극단적 허무주의로 돌아섰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과 삶에 대한 선생님의 절망이 근본적이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폭력을 통해서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면 그쪽에 선생님의 몸을 걸 수도 있었겠지만, 선생님께는 그런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겠지요.

어쩌면 그 염세주의는 선생님이 대부분의 삶을 이방인으로 사셨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언젠가 “나는 이방인이다. 파리 경찰국의 형사에게도, 신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라고 말씀하셨지요. 물론 선생님이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으셨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한편으로, 젊은 시절 선생님을 유혹했던 파시즘과 장년 이후 선생님의 상표가 된 염세주의, 허무주의에는 어떤 친연성이 있다는 의심도 해봅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극도로 탐미적인 문체와 세계인식 때문입니다. 선정적 방식으로 자살한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보여주었듯, 극도의 탐미주의는 파시즘과 허무주의 양쪽으로 통로를 내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것은 선생님의 이념을 시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프랑스 소설가 생-존 페르스는 선생님을 “폴 발레리의 죽음 이래 우리 언어에 명예를 준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20세기 프랑스문학사의 꼭대기에 있는 산문가로 평가됩니다. 프랑스어가 선생님의 모국어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선생님은 부쿠레슈티 대학 재학 시절에는 루마니아어로 글을 쓰셨고, 베를린 대학 유학 시절에는 독일어로 글을 쓰셨으며, 스물여섯 살에 부쿠레슈티 프랑스문화원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에 와서 정착하고 얼마 뒤부터는 오직 프랑스어로만 글을 쓰셨습니다. 선생님이 모국어인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를 작업 언어로 선택하게 된 계기는 선생님의 술회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날 노르망디의 디에프(저도 여러 번 가본 도시입니다. 바닷가의 깎아지른 듯한 그 절벽들이란!)의 한 여관에서 말라르메의 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선생님은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선생님의 모국어에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읽어줄 사람이 많은’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결심을 지키셨습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쓰면서 그 언어로 쓰인 문학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선생님의 친구들인 이오네스코 선생님이나 엘리아데 선생님, 그리고 영어로 글을 쓰다가 프랑스어로 작업 언어를 바꾼 사뮈엘 베케트 선생님이나 폴란드어를 버리고 오직 영어로만 글을 쓰신 조지프 콘래드 선생님 같은 분들이 드문드문 있긴 하지만, 저는 그 경지가 상상되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젊은 시절 저는 영어로 글을 써보기도 했고, 스페인어나 프랑스어로 글을 써보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그 언어들 가운데 하나를 작업 언어로 삼겠다는 야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헛된 바람이었다는 것이 이내 드러났습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쓸 때, 저는 제 생각을 그 언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제게 허락한 생각들만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제가 그 언어들을 너무 늦게 다루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허황한 꿈을 접고 제 모국어인 한국어로만 글을 씁니다. 선생님의 과장된 표현을 빌리면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제 모국어로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느 언어보다 한국어를 사랑하는 저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제 책이 되도록 많이 읽히길 바라는 저에게는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문득, 선생님이 반세기쯤 뒤늦게 태어나 저와 동세대인이 되었다면, 선생님이 고른 작업 언어가 프랑스어가 아니라 영어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글을 쓰실 무렵에 이미 프랑스어의 위세는 영어에 뒤지고 있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영어는 다른 어떤 언어의 도전도 받고 있지 않는 국제보조어가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보통화(표준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보다 훨씬 적고,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보다도 약간 적지만, 영어의 위세는 보통화나 스페인어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영어 사용국이 아닌 모든 나라에서, 모국어 다음에 배우는 제2언어는 거의 예외 없이 영어입니다. 선생님이 글을 쓰기 시작하셨던 무렵의 유럽처럼 프랑스어나 독일어가 아닙니다.

한 20년 전부터 한국에선 영어공용어화론이 띄엄띄엄 일고 있습니다. 한국어와 함께 영어도 공용어로 지정해 어려서부터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일부 대학에서는 영어로 강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나 관행은 언어민족주의자들의 강한 저항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모국어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거의 모든 문인들의 숙명이니까요.

영어의 공용어화가 민족어들의 힘을 약화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어를 없앨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민족어에 대한 사랑을 뒷받침하는 민족주의가 쉬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민족주의 때문에 영어에 벽을 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지 않는다면, 많은 나라에서 ‘영어 갭’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영어를 배워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게 되고, 그 지식과 정보에 기대어 더 많은 부를 쌓을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영어를 배울 기회를 잃는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돼 끝내 가난할 것입니다. 제가 배운 민주주의는 이런 불평등을 용인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영어공용어화론을 펼치는 이 자리에, 작품생활 대부분을 프랑스어로 하신 선생님을 소환한 것이 송구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루마니아어로만 글을 쓰셨다면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남겼다 하더라도 그 이름이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에도 한국어로만 글을 쓰기 때문에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젊은 재능들이 수두룩합니다. 저는 가능하면 제 손녀 세대가, 늦어도 제 증손녀 세대가, 한국어와 함께 영어를 자유롭게 쓰기 바랍니다. 많은 논점을 누락시키고 제가 편 거친 영어공용어화론이 선생님에게 맞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되도록 널리 읽히기 위해서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쓰신 선생님은 제 마음의 일단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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뵌 지 꽤 됐습니다. 그간 제가 술 마시기를 게을리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따루주막엘 못 갔습니다. 딴지일보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로부터 따루씨가 김어준씨와 팟캐스트를 함께하신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따루씨를 검색해 보니 그간 활동이 대단하셨더군요. 방송출연과 집필, 특히 수많은 번역! 제가 절필하고 나서 세 해를 놀고먹는 동안에도 따루씨는 그렇게 열심히 사신 걸 알고 놀랐습니다. 따루씨를 따루주막의 ‘파트타임 주모(!)’로만 알고 있었으니, 제가 세상 소식에 이만저만 어두운 게 아니었습니다. 따루주막을 운영하는 것은 부업이고, 글쓰기와 방송 출연이 본업임을 알겠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클럽에 가입하셔도 될 듯합니다.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하실 때도 이미 대한민국의 셀럽이었지만요.

벌써 오래전에 논파된 이론이지만,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역사-비교언어학자들은 핀란드어와 한국어를 우랄-알타이어족이라는 한 어족으로 묶었습니다. 그들은 그러면서 핀란드와 헝가리, 터키, 몽골, 한국 사람들이 인종적으로 가까우리라고 추정했습니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이 역사-비교언어학자들의 학설을 좇아, 페르시아어로 투란이라 부르는 중앙아시아 어디쯤을 우랄-알타이어족의 본향(Urheimat)으로 추측했고, 아주 오래전 그 지역에서 우랄-알타이 조어(祖語)를 쓰고 살았으리라 상상한 사람들을 투란족(Turanid race)이라 불렀습니다. 그 투란족 일부는 서쪽으로 가 핀란드와 헝가리 등지에 정착했고, 다른 일부는 동쪽으로 가 몽골과 한반도 등지에 정착했다는 거지요. 이 이론에 따르면, 따루씨와 저는 아주 가까운 인종에 속합니다.



물론 투란족이라는 개념이나 우랄-알타이어족이라는 개념은 이제 폐기됐습니다. 우랄족과 알타이어족은 서로 다른 어족이라는 것이 확인됐고, 핀란드어와 헝가리어 등은 우랄족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다수설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그리고 따루씨도 썩 잘 구사하는 한국어는 당초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것이 다수설이었지만, 지금은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고아 언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부터 한 세기 전쯤 역사-비교언어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핀란드인과 한국인의 혈연적 친연성을 상상한 것은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그러나 핀란드인과 한국인이, 다시 말해 따루씨와 제가, 투란족이라는 한 인종에 속하든 그렇지 않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 무한한 우주의 한 행성에서, 더구나 한 도시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만 해도 따루씨와 저는, 불교식으로 말해, 이미 인연이 있는 거지요.

따루씨는 말하자면 이주노동자입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라고 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아주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따루씨는 지식노동자인 것입니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그가 설령 따루씨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이라고 하더라도, 대개는 육체노동에 종사합니다. 따루씨가 책을 쓰거나 방송 시사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일종의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따루씨가 핀란드 사람이라는 사실에 빚을 졌으리라 저는 짐작합니다. 핀란드라는 나라에 대한 한국인들의 호감이 작용한 거지요.

한국에 사는 핀란드인 따루씨를 생각하면 이산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유럽어로 디아스포라 말입니다. 따루씨도 알다시피, 디아스포라는 기원 전 6세기의 바빌론 유수 이래 본디 유대인들의 이산을 가리켰습니다. 기독교의 등장 이후에는, 예수에게 저주받은 어느 유대인의 신화가 퍼지면서, 영원히 방랑하는 유대인의 이미지가 생겨났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때부턴가 디아스포라는 민족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이산을 가리키게 됐습니다. 따루씨도 말하자면 이산자인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자발적 이산이긴 합니다만.

이산이라는 말에는 대체로 슬픈 정조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산은 대개 전쟁이나 혁명 같은 커다란 사변에 따라 불가피하게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혁명과 스페인 내전과 쿠바혁명과 이란혁명 뒤의 망명자들, 베트남 전쟁 종전 뒤의 보트 피플이 그런 예들입니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디아스포라가 뭘까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언젠가 소련 붕괴 뒤의 러시아인들이 세계 최대의 디아스포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설령 그 말이 맞을지라도, 그것이 비극성에선 그리 대단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이산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강제 이주된 것입니다. 유럽인들의 노예무역에 따른 강제 이주 말입니다. 따루씨의 조국 핀란드는 유럽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에 가담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저는 이 노예무역을 유럽인들이 인류에게 저지른 가장 커다란 범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최악의 이산이 아니더라도 이산은 대체로 불행으로 인식됩니다. ‘자이니치’라고 부르는 재일 한인들의 이산,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이산,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 한인들의 이산을 다행이라 여길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시리아 내전은 수많은 난민을 낳고 있고, 유럽 국가들의 국경은 유례없이 붐빕니다. 긴장된 붐빔입니다. 그 난민들도 이산을 겪는 거지요. 또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을 거쳐 궁극적으로 영국으로 가려는 불법 이민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산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기근에 떠밀려 영국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떠난 19세기 아일랜드인들도 이산을 경험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바깥에 산재해 있던 독일인들도 이산을 경험했습니다. 지난 세기 말과 이번 세기 초에는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도 이산을 경험했습니다. 흔히 로마니라고 불리는 집시들은 영원한 이산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이 중에서 행복한 이산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산이라는 말을 슬프게 만드는 것은 거기 뿌리뽑힘의 정조가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기필코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는 사람들에겐 타향에서의 삶이 편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고향에 대한 신화나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며, 언젠가 이뤄질 귀향을 꿈꿉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 세계화 시대에 이산은 하나의 보편적 생활양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따루씨도 자발적 이산자입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인도인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일도 흔합니다.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싼 생활비에 이끌려 필리핀과 동남아시아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질서는 국민국가 체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국민국가 체제 아래서는 자기 조국 바깥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외국인이 환대 받는 사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외국에서 사는 것, 그러니까 넓은 의미의 이산이 점점 흔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루씨나 저나, 핀란드인이나 한국인이기 이전에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국적과 성별을 떠나 개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산이 지금처럼 흔해진 세상에서, 개인주의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루씨도 아시다시피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개인주의자는 은자(隱者)가 아닙니다. 공심(公心)의 결여나 비사교성은 개인주의와 무관합니다. 독립된 개인주의자는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개인들과 연대합니다. 스마트폰과 태플릿 PC는 그들이 연결돼 있다는 표지입니다. 개인주의는 또 이기주의와도 무관합니다. 개인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자신의 자유가 멈춘다는 것을 아는 고전적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포함한 모든 집단주의는 르네 지라르가 속죄양이라고 불렀던, 또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라고 불렀던, 박해받는 주변인을 낳습니다. 그러나 이 행성 전체가 인류 개개인의 고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박해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난민 문제가 유럽을 뒤흔들어놓고 있고, 불법 이민자 문제가 내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지금, 이산의 보편화와 개인의 등장이라는 화두는 참으로 한가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외계 지성체의 침략을 받기 전엔 세계정부라는 것이 결코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비교적 균질적 문화를 지닌 유럽에서도 유럽연합이 기우뚱거리며 유럽합중국이 시야 바깥에 남아있는 걸 보면, 세계정부라는 것은 어쩌면 몽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발은 땅을 딛고 있더라도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어야 조금의 진보라도 이뤄진다는 믿음으로 따루씨께 이런 한가한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산이라는 말에서 슬픔을 걷어냅시다. 우리는 모두 이산자입니다. 근간에 따루주막으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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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러시아 어딘가에 있으리라 짐작은 합니다. 러시아 당국은 물론이고, 당신을 반역죄나 간첩죄로 기소하려 작심하고 있는 미국 정부도 당신이 어디 있는지 잘 알 것입니다. 당신이 비판한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다섯 개의 눈(Five Eyes)이 당신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요. 미국 정부는 당신의 소재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국으로서의 이미지, 러시아와의 관계 따위 때문에 당신을 그냥 놓아두고 있을 뿐입니다.

지지난해에 당신이 NSA와 Five Eyes의 전 세계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을 때, 당신 나라 정부의 부도덕함을 폭로하고 홍콩으로 피신했을 때,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에 망명했을 때,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당신의 나이였습니다.



당신은 내 큰아이보다 한 살 아래입니다.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가야 할 세월이 더 긴 사람입니다. 당신이 살아가야 할 세월은 가시밭길일 것입니다. 당신의 용감한 행동을 기린 로라 포이트러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티즌포(Citizenfour)>도, 내년 초에 개봉한다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스노든>도, 전 세계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날아드는 사면청원도 당신을 온전히는 자유롭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너무 젊은 나이에 정의를 안온과 바꾸었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관련된 군사 외교문서를 위키리크스에 전달한 탓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브래들리 매닝 일병(아, 그가 자신의 여성정체성을 선포했으니 이제 첼시 매닝이라고 해야 하겠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은 용기있고 정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극소수 진보언론을 제외한 서방언론 대부분이 당신에게 반역혐의를 걸어 십자포화를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극소수 진보언론마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고밀도(高密度) 감시사회’라는 의제를 시나브로 주변화하고 말았습니다. 젊은 당신의 싸움은 길어질 것이 틀림없고, 그 싸움에서 당신이 이기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흔히 FVEY라 부르는 Five Eyes는 당신도 잘 알다시피,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와 뉴질랜드와 영국과 미국을 아우르는 정보동맹입니다. 당신의 폭로에도, 미국을 주축으로 한 이 다섯 나라의 정보동맹은 굳건할 것입니다.

에슐론이든 프리즘이든, Five Eyes가 당신의 폭로로 개과천선을 하거나 치명상을 입어 민간인 감시 활동을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신이 이 나라 정보기관들의 불법활동을 폭로하고 쫓기는 몸이 된 뒤에도, NSA가 동맹국 시민들과 정부수반들을 계속 도청해 왔음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누군가가 풍자했듯,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첫 번째 대통령 후보 시절 써먹었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를 “우리는 감시합니다(Yes, we scan)”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이 세계 최고의 권력자가, 미국과 세계를 위해 많은 좋은 것을 이뤄낸 이 권력자가, 불행하게도 감시사회에 대한 감수성은 무딘 듯합니다.

1984년이 백남준씨의 경쾌한 비디오 아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시작했을 때,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묘사한 음산한 감시사회는 작가의 지나친 비관주의가 빚어낸 군걱정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웰은 옳았습니다. 옳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소설 <1984>는 묵시론적 예언처럼 소름을 돋게 합니다. <1984> 속의 감시국가 이름은 오세아니아입니다. 소설 속에서 오세아니아는 미국이 영국을 합병해서 만든 나라로 설정됩니다. 그런데 Five Eyes를 이루는 다섯 나라가 바로 그렇습니다. 오세아니아는 해양국가라는 뜻입니다.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은 밀접한 동맹관계에 있는 해양국가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해양국가들이, 이 ‘오세아니아’가, 밀접한 정보동맹을 구축해 제 나라들과 전 세계를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 속의 Five Eyes는 오웰의 <1984> 속 오세아니아와 섬뜩하게 일치합니다.

또 하나의 해양국 일본이 거기 포함되지 않은 것도 신기합니다. 인종 차이는 있으나, 일본은 미국에게 다른 네 나라만큼이나 가까운 동맹국입니다. 그런데도 정보동맹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습니다.

소설 <1984>에서 일본열도가 오세아니아가 아니라 이스트아시아에 포함돼 있듯 말입니다. 오웰이 귀신이라도 들렸던 것일까요?

당신의 용감한 내부 고발 덕분에, 우리들은 프라이버시가 거의 없어진 세상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프라이버시는 종말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듯합니다. 정부나 거대 기업에는 시민들의 프라이버시 세목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감시하고 통제합니다.

NSA를 중심으로 한 Five Eyes에게는 테러를 막는다는 커다란 명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감시체계 덕분에 우리가 좀 더 안전하게 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프라이버시가 가장 밀도 있는 자유의 공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체합니다. 거대 기업들 역시 감시체계가 정보 절도를 막는 데 효과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정보 절도를 막기 위해 정보를 절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들은 유리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1984> 속의 윈스턴 스미스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연방 대법원 판사를 지낸 루이스 브랜다이스라는 이를 당신도 아시겠지요. 자유주의적-진보적 판결들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법적으로 지원한 분입니다. 물론 그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추종하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초기 뉴딜 정책의 뼈대 노릇을 했던 전국산업부흥법이 입법권을 행정부에 부당위임했다는 이유 등으로 그 법에 위헌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그를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했을 때,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여론도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처럼 용기있고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브랜다이스 판사는 동료 올리버 웬델 홈스 판사와 함께 표현의 자유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기도 했지만, 이미 34세의 젊은 나이에 ‘하버드 법률 리뷰’지에 <프라이버시권(Right to privacy)>이라는 논문을 써 사생활이 인권임을 처음으로 명시한 법률가였습니다. 브랜다이스 판사에 따르면 프라이버시권은 자연권이었고, 홀로 남겨질 권리(right to be left alone)였고, 남의 관심을 받지 않을 권리였습니다. 브랜다이스 판사가 프라이버시권이라는 개념을 확립한 1890년엔 프라이버시가 인권이라는 생각을 법률가들 대부분이 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말의 브랜다이스 판사가 초첨단 IT 기기들의 힘으로 이뤄진 오늘날의 고밀도 감시사회를 예견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때 이미 사생활권이라는 것의 중요함을 인식했습니다. 브랜다이스 판사는 정보통신 기술이 아주 유치한 단계에 있던 그 시절에, 이미 권력과 자본이 개인들의 프라이버시를 해칠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에 해당하는 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 IT 기업에서 기계들을 사들여 민간인들을 감시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인 바 있습니다.

얄궂은 것은 당신의 망명지가 러시아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론 미국의 동맹국들이 당신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불가피하게 생긴 일입니다.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전용기에 당신이 몰래 탔다는 잘못된 정보를 입수하고, 프랑스와 포르투갈 정부에 압력을 가해 그 비행기가 그 나라들의 영공을 통과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당신을 체포하려는 미국 정부의 의지는 강했습니다. 결국 볼리비아 대통령은 오스트리아의 빈 공항에 착륙해 자기 비행기에 당신이 탑승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지요. 이것은 당신의 조국 미국이 그다지 우아한 외교를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치하의 러시아가 오바마 대통령 치하의 미국보다 훨씬 악화한 감시사회라는 것은 당신도 나도 인정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처지에 놓였다면, 더구나 내가 당신처럼 젊었다면, 나는 당신이 보여준 용기를 도저히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국 정부와, 더 넓게는 Five Eyes와 개인의 싸움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금으로선 또렷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쉽지는 않겠지만,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이기기 바랍니다. 경의를 표할 대상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프라이버시권이라는 것을 처음 생각해낸 위대한 법률가 루이스 브랜다이스입니다. 오늘은 그분의 74번째 기일입니다.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브랜다이스 판사에게 표하는 경의를 나와 나누기 바랍니다. 당신의 친구로서, 당신의 언어로 당신을 격려하는 걸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Hang in there, Ed!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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