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에 해당되는 글 140건

  1. 2009.10.06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독자들의 다양한 반응 (2)
  2. 2009.10.06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미국식 자본주의 대안 모색 ‘10개월 대장정’ (2)
  3. 2009.10.06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어떤 내용이 담겼나 (2)
  4. 2009.09.29 6부-(3) 문제는 정치다: ‘복지국가’의 자부심 ‘한 표’면 충분했다 (2)
  5. 2009.09.29 6부-(3) 문제는 정치다: 정치로 풀자 (2)
  6. 2009.09.29 6부-(3) 문제는 정치다: 선거제도만 바꿔도 따뜻한 사회 열린다 (2)
  7. 2009.09.29 6부-(3) 문제는 정치다: 정당가입 7%·무당층 40%… 비정치적인 한국인
  8. 2009.09.29 6부-(3) 문제는 정치다: ‘노조 조직률’ 높은 국가일수록 소득불평등 낮아 (2)
  9. 2009.09.29 6부-(3) 문제는 정치다: 음식점 운영 박선운씨 “투표 안 하는 딸 뭐라 못해” (2)
  10. 2009.09.27 6부-(2) 문제는 정치다: 시장은 해답이 아니다
  11. 2009.09.23 6부-(2) 문제는 정치다: '국가의 귀환' (2)
  12. 2009.09.23 6부-(2) 문제는 정치다: ‘불평등 한국’ 정치를 바꿔라 (2)
  13. 2009.09.21 6부-(1) 문제는 정치다: 보통사람의 행복 위협하는 ‘시장 과잉, 한국’ (2)
  14. 2009.09.21 6부-(1) 문제는 정치다: 세계는 지금, 폴라니를 주목한다 (2)
  15. 2009.09.15 5부-(4)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관치경제·시장만능 두 얼굴 한국, 제3의 길을 가라 (2)
  16. 2009.09.15 5부-(4)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국가를 개조하라
  17. 2009.09.15 5부-(4)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대안 모델 찾기…진보는 ‘토론중’ (2)
  18. 2009.09.10 5부-(3)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하나의 라틴아메리카’ 190년 꿈, 10년 만에 눈앞에 (2)
  19. 2009.09.10 5부-(3)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지역연합을 구축하라
  20. 2009.09.10 5부-(3)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못믿을 달러’ 지역통화 앞다퉈 추진 (2)

유희진기자 worldhj@kyunghyang.com

ㆍ파생상품 원리 분석“어렵다” “줄치며 봤다”
ㆍ세자매 출산비용 비교 댓글만 1000여개 설전

기획이 연재되던 지난 1년 동안 많은 독자들은 댓글과 e메일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보내왔다.

당시 각종 펀드로 큰 손해를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털어 놓는 하소연은 “은행에서 펀드에 가입했다가 노후자금을 날렸는데 내가 날린 돈이 누구의 배를 불린 건지 모르겠다. 은행은 자기들도 손해를 봤다고 한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돈은 어디로 갔는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돈이 증발해버린 것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는 이가 없었던 현실이 잘 드러났다.

1부 무너지는 시장 만능신화에서 4~5회에 걸쳐 금융상품의 이면을 분석하고, 파생상품의 원리를 설명하는 기사를 본 독자들의 반응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를 잘 못하겠다”는 호소, “줄치면서 여러번 읽었다. 많은 공부가 됐다”는 반응까지 다양했다. 아이디 ‘제인’을 쓰는 한 네티즌은 “이제 파생상품이 뭔지 감이 온다. 일종의 허수에 근거한 상품 개발로 실물경제가 아닌 확률에 투자를 하는 것”이라면서 “상품에 대해 아는 사람이면 몰라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할 일은 못된다”고 밝혔다. “복잡한 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상품을 판 사람들을 처벌할 수는 없느냐”라고 문의하는 전화도 여러 통이었다.




금융위기의 본질에 대해 분석했던 1부를 마무리하는 토론회에는 많은 시민이 몰렸다. 일부는 자리가 없어 돌아가기도 했고, 질문과 토론에 경쟁적으로 참여하며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 ‘금융위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 했다.

가장 논쟁적이었던 기사는 3부 ‘미국 모델, 그 파국적 종말’의 1회로 나간 ‘의료민영화’였다. 미국, 이탈리아, 한국에서 각각 출산을 경험한 세자매의 출산 비용을 비교한 기사를 보고 네티즌은 1000여개의 댓글을 달며 설전을 벌였다. 마침 ‘영리병원’ 허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던 때였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진료비가 저렇게 비쌀 수 있느냐”는 의구심부터, 미국에서 치료 받고 비싼 돈을 지불했던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의료민영화는 안된다”고 의견을 밝히는 이도 있었다. 반면 자신을 의사라고 밝힌 한 독자는 기자에게 e메일을 보내 “정부가 규제를 가해 정당한 의료비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충실하게 미국 모델을 좇아온 한국에서 다른 사회는 가능할까라는 고민으로 기획했던 4부 ‘다른 사회를 상상한다’ 편에서 북유럽과 한국 현실을 비교한 기사를 본 독자들의 반응은 부러움 반 자조 반이었다. ‘따라가지 못할 꿈의 국가’ ‘복지 선진국가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차이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댓글도 적지 않았다. 아이디 ‘냐하하’는 “결국 본인 스스로가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가는 데 일조한거다. 투표만 잘해도 어느 정도 개선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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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이로사기자 soo43@kyunghyang.com

ㆍ원고지 2500장 분량 전례없는 초대형 기획
ㆍ아이슬란드·미국·북유럽 생생한 현장취재

지난해 9월15일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파산이 불러들인 세계 금융 위기는 30여년간 세계 경제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이념에 균열을 일으켰다. 경향신문은 이 같은 지구적 변화를 주목해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9월까지 연중기획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를 연재했다.

이 시리즈는 그동안 세계 경제의 주류였던 신자유주의 현상을 진단하고 대안을 찾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정확히 10개월에 걸쳐 총 44회가 연재됐으며, 매회 전면 2개면 혹은 3개면을 차지했다. 전체 기사량은 98개면 전면 분량이며, 200자 원고지로 계산하면 약 2500장에 달했다.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이 넘는다. 한국 언론 사상 유례없는 대형 기획이었다.

정태인 경제평론가,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홍종학 경원대 교수, 김윤태 고려대 교수,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기획위원으로, 30명의 각계 전문가들은 기고를 통해 특집 기획에 참여했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싱가포르·필리핀 등 7개국 10명의 해외 통신원도 취재 및 보도에 참여했다.
8명으로 구성된 경향신문 특별 취재팀 외에 특파원과 노동, 복지, 교육, 환경, 건설, 산업, 금융 담당 기자도 분야별로 기여를 했다.


취재팀은 금융 위기의 실상과 대안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직접 현장을 찾았다. 지난 연말 금융위기 직후 아이슬란드와 미국 뉴욕·로스앤젤레스를 취재했으며 올 여름에는 ‘북유럽식 사민주의’로 신자유주의 대안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스웨덴·덴마크·핀란드 3개국을 찾아 노동, 교육, 의료 모델의 실체를 소개했다.

경제전문가인 토르올브르 마티아손 아이슬란드 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미국 월스트리트 채권 판매상품 판매인 코크네티, ‘서브프라임’ 피해로 온 가족이 길거리로 나앉은 미국의 마리사츠 루세로 등은 금융위기의 현장을 실감나게 증언했다. 덴마크의 도축공 초븐 렝스, 스웨덴 장애인 멀린 베른트, 핀란드의 고등학생 요한나 투오미넨 등 북유럽 시민들은 경향신문 독자들에게 ‘다른 삶의 방식’을 소개했다. 시리즈가 연재되는 동안 공식 인터뷰를 통해 지면에 등장한 취재원만 42명에 달한다.


1년 남짓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취재팀은 40여권의 서적과 100여건의 논문·보고서, 수많은 기사와 블로그 등을 뒤적였다. 시리즈 전체에 걸쳐 가장 보편적으로 참고한 서적은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 로버트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세계화와 그 불만> 등이다. 이들은 공히 세계금융위기를 가져온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극을 예견했다.

세계금융위기의 근원인 금융권력 생성의 원리와 세계 금융시스템을 파악하는데도 많은 서적들을 참고했다. ‘검은 백조’ 개념을 내세워 미 월가의 허상을 파헤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 한국 경제를 냉철히 분석하고 전망한 인터넷 경제 논객 SDE의 <공황 전야>가 그 예이다. 복잡한 금융수학 공식과 금융상품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선 모토야마 요시히코의 <금융권력-글로벌 경제와 리스크 비즈니스>와 같은 경제전문 서적은 물론 <수학과 현대금융사회> <알면 신나는 파생상품 이야기> 등 대중용 저서도 참고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금융수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과 수학 공식을 놓고 며칠간 씨름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 쓰쓰미 미카의 <빈곤대국 아메리카>, 나오미 울프의 <미국의 종말>, 찰스 모리스의 <미국은 왜 신용불량 국가가 되었을까?> 등을 참조했다. 미셸 아글리에타의 <세계자본주의의 무질서>, 월든 벨로의 <탈 세계화>, 배리 아이켄 그린의 <글로벌 불균형> 등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를 지적한 저작들과 <신자유주의 대안론>이 특집 기획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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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기자

지난해 11월27일부터 올해 1월19일까지 진행된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1부 ‘무너지는 시장 만능신화’에서는 금융위기 ‘폭탄’을 맞은 현장 모습을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세계금융의 ‘허브’를 꿈꾸다 무너진 아이슬란드와 금융위기의 진원지 미국을 현지 취재했고, 통신원들을 통해 영국·프랑스·독일 등의 상황도 전했다. 또 파생 상품과 키코 등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기 쉽게 풀이했다.

2부 ‘폭주기관차에 올라탄 한국’3부 ‘미국 모델, 그 파국적 종말’을 통해서는 ‘미국식 시장만능주의’가 우리사회와 전 세계에 끼친 해악을 분석했다.

7월에 시작된 4부 ‘다른 사회를 상상한다’ 편은 사민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스웨덴과 덴마크, 핀란드인의 삶을 소개하며 ‘신자유주의’ 대안을 모색했다. 5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편은 여러 전문가들을 통해 다양한 신자유주의 극복 방안과 대안을 제시했다. 정태인 경제평론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했고,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는 유럽연합(EU)에 필적할 수 있는 ‘동아시아 지역연합’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6부 ‘문제는 정치다’ 편은 장기 기획을 마무리하는 순서로 ‘정치가 문제의 근원이자 해결책’임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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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기자 soo43@kyunghyang.com

ㆍ2020년 한국사회 상상



정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경향신문은 머지않은 미래에 정치적 선택을 통해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그려봤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다. 순진한 발상도 아니다.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갔던 다른 나라들의 사례가 그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집권한 유럽의 우파 정권들은 ‘좌파정책’을 흡수해 다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았는데 이것이 꼭 남의 일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 2020년 5월24일 출근길의 김현수씨(50)의 표정은 밝았다. 한살배기 늦둥이 아들 시현이가 새벽까지 잠을 안자고 속을 썩였지만 전혀 힘든 줄 모르고 집을 나섰다. 김씨는 서울 강동구에 있는 제과공장에서 25년째 일하고 있다. 직책은 주임. 설탕과 밀가루를 투입하는 공정에서 주로 일한다. 출근시간은 오전 7시다. 대부분의 동료들보다 이른 편이다. 작업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오후 3시가 되면 퇴근한다. 마무리는 오후에 출근하는 동료가 담당한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사원이던 시절 김씨는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 10시간 넘게 일했다. 일감이 몰리면 주말에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언제나 빠듯했다. 첫째딸 효진이(18)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하고, 둘째딸 현진이(15)가 다니는 어린이집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아내 이명희씨(45)가 봉제공장에서 일을 해 교육비에 보탰지만 은행 잔액은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김씨의 삶은 10년 만에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어울릴 만큼 바뀌었다. 김씨는 “삶의 질을 바꾸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며 “그냥 나 같은 서민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은 후보가 있었고, 그 후보에게 표를 던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 복지국가의 시작
변화는 그 해 투표장에서 시작되었다. 총선에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해였다. 후보 개인이 아니라 정당의 노선과 정책, 그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살펴보고 여러 정당 가운데 한 정당을 골라 투표를 한다. 정당은 정체성이 모호하던 과거와 달리 자기 노선을 분명히 제시했고, 그 결과 보수 일색의 정당 사이에 작은 진보정당이 장식품처럼 놓여 있는 과거 낡은 정당 구조는 깨지고, 노선별로 분명히 분화된 새로운 정당 구조가 형성되었다. 어느 쪽에 투표를 해도 오십보 백보인 과거 상황과는 다른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정당들이 등장하자, 바닥권이던 투표율은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물론 김씨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김씨는 “진보 정당들의 공약이 마음에 들기는 했는데, ‘저게 실현 가능한 것인지’ ‘저대로 하다가는 나라 망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며 “그러나 이번 한번만 눈 딱 감고 믿어보지 하는 생각에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그 해 뜨거운 참여 열기로 진보와 중도 노선의 정당들은 총선에서 대거 약진했다. 국민들이 어떤 계기로 그런 선택이 이루어졌는지 전문가 사이에서도 아직 논란이 분분하다. 어쨌든 우파를 제외한 정당간 연정이 구성되었고, ‘복지국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도출되었다.

# 복지가 먼저냐, 증세가 먼저냐. 사회적 합의는 있었지만 막상 복지국가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금 인상’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한국인들은 2008년 전 세계를 덮친 세계금융위기 등을 통해 ‘시장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학습했다. 또 시장을 보완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필수적이란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정부가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복지국가 목표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1년 내내 정치권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선복지 후증세’와 ‘선증세 후복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결국 공은 정부와 국회로 다시 넘어갔다. 정치 지도자의 결단, 정당의 지도력에 의해 전면적인 복지정책 도입으로 결론이 났다. 증세는 여론을 살펴가며 점진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연정에 참여한 각 정당들이 총선에서 공통적으로 내걸었던 ‘공교육 확대’ ‘노동시간 축소’ ‘공공의료 확대’ ‘정부의 책임보육’ 등이 정책으로 구체화됐다. 노동시간과 조건 등을 놓고는 정부, 노동계, 재계 사이에 역사적인 ‘사회적 대타협’도 성사됐다.

# 교육은 사회의 몫 김씨는 지난해 막내아들 시현이를 얻었다.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아내와 상의해 낳기로 했다. 최근 두 딸의 생활을 보며 “이런 환경에서는 아이를 더 낳아 키울 수도 있겠다”란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김씨의 두 딸 효진이와 현진이는 현재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닌다. 아이들은 누가 깨우지 않아도 아침에 먼저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한다. 학교 가기가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효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효진이는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싫어 떼를 썼다.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 학원까지 다녔다. 학원에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김씨는 “ ‘앞으로 입시 경쟁이 더 심해질텐데 불쌍해서 어떻게 보나’라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나 효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더 이상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효진이는 학교와 시립 도서관을 오가며 혼자 대입준비를 하고 있다. 2년 전부터 대학 제도가 전면적으로 개편된 덕분이다. 전국의 모든 국·공립대학은 현재 평준화 수순을 밟고 있다. 앞으로 정부의 교육 재정이 국·공립대학에 집중 투입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대학 입시 역시 바뀌었다. 여전히 경쟁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전과 같은 살인적인 경쟁은 아니다. 효진이는 “고등학교에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모두 획득한 터라 지금은 대학 역사학과에서 요구하는 에세이 준비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효진이가 역사 외에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효진이는 혼자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모두 수준이 꽤 높은 편이다. 학교 특강과 방송, 인터넷 무료강의 등을 통해 익힌 실력이다. 효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며 “역사 공부를 평생 이어가려면 외국어가 유용할 것 같아 혼자 익혔다”고 말했다.

# 경쟁없는 경쟁력을 꿈꾼다 정부의 국·공립대학 평준화안이 발표되자 교육계는 난리가 났다. 특히 사교육업계는 ‘패닉’에 빠졌다. 한 유력한 사교육업계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어떤 개혁을 하더라도, 우리 국민의 특성상 사교육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정부는 무한 경쟁의 교육에 진저리치는 수많은 시민들의 지지속에 개혁안을 추진했다. 정부는 국·공립대학 평준화안을 설명하면서, 초·중·고등학교 장기 개혁방안도 함께 발표했다. 사실상 교육 시스템 안에서는 불필요한 경쟁을 없애겠다는 ‘폭탄 선언’이었다.

김씨는 그때부터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김씨는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지만, 정부의 장기개혁안을 보고 신뢰가 생겼다”며 “나라도 먼저 실천하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둘째 현진이는 내년에 전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할 예정이다. 현진이의 장래희망은 자동차 레이서가 되어 한국인 최초로 F1 자동차경주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다. 현진이는 자동차 관련 학과에서 기초부터 다지고 싶어한다. 현진이는 “자동차에 대해서 확실히 안 다음에 운전을 배우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황당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고 말했다.

# 보육도 사회의 책임 지난해 11월 시현이를 낳은 이명희씨는 현재 육아휴직 중이다. 출산휴가를 마친 뒤 바로 휴직을 신청했다. 시현이의 돌잔치까지 치른 뒤 다시 직장에 복귀할 예정이다.

한국은 지난해부터 덴마크의 육아관련 휴가제도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산전·산후 휴가는 출산 전 4주, 출산 후 14주 해서 총 18주(126일)다. 물론 유급휴가이다. 자신이 받던 급료의 100%를 그대로 받을 수 있다. 유급 육아휴직은 아이가 8살 때까지 최대 50주를 쓸 수 있다. 산전·산후 휴가와 중복되는 기간을 제외하면 32주가 이에 해당한다. 이때는 소득 대체율이 60%가량으로 낮아진다.

이씨가 직장에 복귀하면 부부는 시현이를 집 근처에 있는 공공 탁아소에 맡길 예정이다. 공공 탁아소는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이들을 돌봐준다. 김씨가 오후 3시면 퇴근하기 때문에 시현이를 데리러 가는 시간은 충분하다. 공공 탁아소의 비용은 월 50만원이 채 안된다. 기저귀와 식사비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김씨는 “국가에서 보조금이 나오기 때문에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면서 “이런 계산이 다 됐으니까 아이를 낳은 것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 국민을 돌봐주는 국가 김씨 가족은 현재 송파구에 있는 112㎡(34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4년 전에 입주했다. 임대아파트 입주 신청을 꼭 5년 전에 했으니 입주까지 1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주거환경은 매우 만족스럽다. 그 전에 살던 20평대 전세 아파트에 비해 훨씬 더 삶에 여유가 생겼다.
김씨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내집마련은 꿈도 못꾸고 있었다. 전세계약이 2년에 한번 만료될 때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김씨와 부인 이씨의 수입으로는 집값은커녕 해마다 올라가는 전세보증금을 따라가기에도 모자랐다.

그러나 임대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김씨의 집 걱정은 사라졌다. 김씨 가족이 현재 살고 있는 정부 임대아파트의 임대료와 관리비는 민간업체에 비해 절반도 안된다. 전에 살던 집보다 시내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지기는 했지만 계약기간이 30년이나 되기 때문에 입주할 때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30년이면 두 딸은 물론 막내 시현이까지도 결혼시킬 수 있다. 김씨는 “가족수가 많으면 임대아파트에 우선권이 생긴다”며 “시현이가 큰 다음에 이사를 고려해봐야겠다”고 말했다.

오르는 전세금에 쫓겨 살 때나 지금이나 김씨 부부의 은행 통장에는 잔액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분명히 차이는 있다. 과거에 김씨 부부가 저축을 ‘못했다면’, 지금 김씨 부부는 저축을 ‘안한다’. 김씨는 “그동안 기를 쓰고 저축을 한 것은 노후와 교육에 대해 전혀 보장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제 노후와 교육을 국가에서 어느 정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저축보다 현재 삶의 질에 더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 이제 세금이 아깝지 않다 새 정부가 복지국가를 지향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김씨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데 도대체 누가 일을 하겠어’란 생각이 들었다. 줄줄이 증세 방안이 발표될 때는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렸다. 김씨는 “이전 정부로부터 혜택받은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부가 돈을 뜯어간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말했다.

이제 김씨의 생각은 바뀌었다. 김씨가 낸 세금이 바로 자신에게 몇 배의 혜택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뿐만 아니라 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의 인상효과도 보고 있다. 지난해 백혈병으로 큰 수술을 받은 김씨의 조카는 확대된 보험 범위 덕분에 경제적 위기없이 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 김씨는 “이제 정부를 신뢰한다”고 말했다.

# 결국 정치가 바꿨다 10년 전의 삶과 지금을 비교할 때 ‘무엇이 가장 달라졌는지’ 김씨는 자문했다. 김씨는 ‘여유’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는 “그때는 일과 허덕이는 일상에 내 삶이 끌려가는 꼴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나의 삶과 일의 주인이라는 느낌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되돌아보면 김씨의 삶을 바꾼 원동력은 정치였다. 김씨는 그 해 투표에서 매우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김씨는 “예전에는 나름의 애국심에 시민이 희생하더라도 국익을 위해 몸바치겠다는 후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정당을 선택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나와 내 가족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구하고, 아픈 사람들은 누구나 병원에 갈 수 있고, 한국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의식주 걱정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든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 시리즈 끝 >

▲특별취재팀

서의동 경제부 차장,조찬제 국제부 차장,김재중 문화부 기자,장관순·홍진수·송윤경 정치부 기자,이로사·유희진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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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ㆍ금융대란·민생파탄·청년실업… ‘투표의 결과’다



“멍청하긴, 문제는 경제야.”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이제는 전설이 된 빌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1992년 대선 구호다.

당시 부시 대통령, 즉 조지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에서 승리해 재선을 장담하며 기고만장해 있었다. 그러나 미국 경제는 죽어가고 있었다. 무명의 클린턴 후보는 이를 정확히 포착해 쟁점화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승리했고 민주당은 12년 만에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클린턴의 구호는 절반의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전쟁도, 경제도 아니고, 정치였다. 다시 말해, “멍청하긴, 문제는 정치다.” 물론 경제가 문제라는 클린턴의 주장은 맞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인식을 갖고 정책을, 경제를 바꾸는 것은 결국 정치다.

다시 말해, 경제가 문제임에도 이 문제는 방치하고 전쟁에나 몰두하고 있었던 부시의 정치, 공화당의 정치, 이 같은 정당과 지도자를 지지한 유권자 등 미국의 정치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권자들은 투표를 통해, 투표라는 정치행위를 통해, 미국 정치를 바꿔줬다. 만일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미국 정치를 바꿔주지 않았다면 “문제는 경제”라는 인식은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멍청하긴, 경제는 정치가 바꾼다”

최근 세계적으로 반신자유주의의 챔피언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베네수엘라다. 차베스 대통령은 80년대 말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식료품값 폭등에 분노해 일어난 민중봉기 진압작전에 군지휘관으로 투입되어 민중에게 총을 겨눠야 했다. 이에 절망해 92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해 감옥에 갔다. 출옥 후 선거혁명으로 노선을 바꿔 98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빈민에게 복지와 교육, 의료를 확대하는 등 반신자유주의의 진보노선을 추구했다.

그러자 보수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카리브해의 외딴 섬으로 유배시켰고 상공회의소장을 신임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빈민들은 거리로 달려나와 대통령궁을 포위했고 결국 차베스를 구해냈다. 국민들의 ‘거리의 정치’가 차베스와 반신자유주의 혁명을 살려낸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탄핵의 위험에 처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구해낸 것은 바로 거리로 달려나온 국민들이었다. 이 같은 ‘거리의 정치’의 힘은 ‘선거 정치’의 힘으로 이어져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세력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등 지지층에 반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사회적 양극화가 계속 심화됐고 이 같은 실정에 분노한 유권자들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묻지마 지지’를 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국민의 선택과 ‘밥 굶는 청소년’

부자들에 대한 감세로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 어렵게 획득한 민주적 권리들은 다시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남북관계는 냉전시대로 뒷걸음치고 있다.

얼마전 이명박 정부는 초·중·고등학교의 영어교육 예산을 늘리기 위해 무료급식 예산을 줄였다. 그 결과 점심을 굶는 학생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이 모두는 결국 2007년 대선에서 국민들이 투표한 결과, 나아가 기권한 정치행위의 결과이다. 국민들의 선택이 부자들의 더욱 두꺼워진 지갑과 밥 굶는 청소년들을 가져온 것이다.

70년대 후반, 하루종일 하는 예비군 소집훈련을 갔다. 쉬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예비군 훈련이라니”라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일어나 “자업자득이지. 너희들은 더 당해야 해”라며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그가 던진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김대중 후보가 예비군 없애겠다고 공약했는데, 너희들이 박정희 찍었잖아. 그래 놓고 왜 난리들이야?”

그렇다. 신자유주의도, 이에 따른 민생 파탄도, 월스트리트발 금융대란도, 강부자 정책도, 용산참사도, 88만원 세대로 표현되는 청년실업도 모두 정치의 결과이다. 정치의 핵심은 다양한 가치와 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정책 중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가치와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투표라는 국민들의 ‘선거의 정치’와 다양한 ‘거리의 정치’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를 가진 정치세력을 선택하고 지지하거나 압박해 간접적 방식으로 우리가 바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영어교육이냐, 밥 굶는 청소년이냐는 선택이다.

따라서 기권과 같은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적 허무주의는 사실상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삶의 조건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살행위’에 다름아니다. 정치가 우리의 미래와 삶의 기본조건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공기가 아무리 더러워도 우리가 숨을 쉬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정치도 더럽고 혐오스럽다고 우리가 이를 벗어나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정치를 통해 이를 살 만한 것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기권이라고? “멍청하긴, 문제는 정치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역사상 가장 큰 격차로 승리했다. 그러나 낮은 투표율 때문에 전체 유권자에 대해서는 매우 낮은 지지율로 승리했다. 구체적으로, 2002년 대선 때 70.8%였던 투표율이 63%로 급락해 전체 유권자의 30.5%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유권자 10명 중 7명이 이 대통령을 찍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2002년과 비교할 때 기권한 7.8%의 유권자들의 정확한 성향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민주당, 그리고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정당에 실망한 진보개혁세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기권하지 않았다면 대선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국민참여·선거제도·정당개혁 해법

결국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에 적극 나서야 한다. 나아가 가치나 정책과는 거리가 먼 지역주의적 투표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정치를 투표와 같은 ‘선거 정치’로 한정시켜서는 안 되며 촛불시위와 같은 ‘거리의 정치’도 중요하다. 그러나 광우병 촛불시위, 용산참사, 쌍용차, 언론법 등이 보여주듯이 거리의 정치로는 한계가 많다.

둘째,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를 통해 반인간적 신자유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유권자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표를 줄이고 민의가 제대로 정치에 반영될 수 있도록 독일식으로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현재의 선거제도 덕으로 한나라당은 2008년 총선에서 37.5%의 지지밖에 받지 못했으면서도 51.2%의 의석을 차지한 거대여당이 됐다. 반면에, 예를 들어, 2.98%를 얻어 독일식이면 9석을 배정받았을 진보신당은 한 석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과 헌법자문위원회는 비례대표를 없애고 상원을 만들겠다고 한다. 자다 일어나 봉창 두드린다고, 아닌 밤중에 웬 상원 타령인가?

셋째, 정당, 특히 제1 야당인 민주당이, 나아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이 변해야 한다. 민주당의 경우 단순한 반MB연대론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내세운 유훈정치를 넘어서 과거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성하고 민생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새로운 투표 블록을 만들어내야 한다. 친노신당 세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웨덴을 최고의 복지국가로 만든 것은 노동자, 농민의 연합에 의한 ‘복지의 정치’였다. 원래 미국의 민주당도 농업이 주산업인 남부 노예주들의 골보수 정당이었고 노예 해방의 링컨은 공화당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전통적인 지지기반 이외에도 국제경쟁력이 있는 첨단자본들과 새로운 정치세력인 노동자들을 포섭할 수 있는 진보적 프로그램으로 뉴딜연합을 만들어 민주당과 미국 정치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진보정당들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왜 반신자유주의적인 진보정당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인 한나라당을 지지했는가를 반성하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 문제는 단순히 반MB연합 같은 정당과 사회단체들 간의 상층부 연합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대중을 조직해 반신자유주의적인 풀뿌리 복지 블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는 자살을 하고 싶다면 기권을 하라. 그렇지 않다면, 투표를 하고 거리의 정치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권이라고? 멍청하긴, 문제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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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

ㆍ비례대표제 확대 등
ㆍ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힘있는 정책 정당 부재
ㆍ이념·가치에 투표할 때… 지역중심 정당구도 탈피

신자유주의 문제의 핵심은 그 체제가 사회경제적 약자를 양산하고 그들의 사회적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빼앗아간다는 데에 있다. 신자유주의화가 심화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소외의 고통을 받게 된다.
이들 대부분은 당당함을 버리고 비굴함을 택하라는 시장의 압력에 마지못해 굴복하곤 한다. 사회는 더 이상 따뜻한 공동체가 아니라 차가운 경쟁의 장에 불과할 뿐이다.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신자유주의 대안 체제는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빈곤과 소외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경제적 약자 계층에 대한 체계적인 배려가 제도화되어 궁극적으로는 약자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체제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배려의 제도화’는 정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대안 체제 마련은 결국 정치적 과제라는 의미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의 정치적 대리인 역할은 정당이 맡게 돼 있다. 의회를 포함한 정치권에서 이루어지는 배려의 제도화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주체는 사회경제적 약자집단이 아니라 그들을 대변하는 정당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대안 체제 건설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시민권 보호를 주업으로 하는 유력 정당의 존재를 요건으로 한다. 노동자, 소상공인, 도시빈민 등을 자신들의 ‘정치적 고객’으로 삼는 이념 혹은 정책 정당들이 포진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지금 상황의 우리나라에 신자유주의 대안 체제가 제대로 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배려의 제도화를 주도해갈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겸비한 이념이나 정책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군소정당에 불과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는 정치적 능력을 기대하기 어렵고, 정체성이 불분명한 민주당에는 당의 집단의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약자를 위한 정당으로 거듭날 리는 없다.

정확히 말해, 우리나라의 정당 구도는 아직 지역과 인물 중심의 전근대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 정당 구도를 이념과 정책 중심의 것으로 개혁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이 땅에 대안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


이론과 경험이 공히 증명하듯, 선거제도의 개혁은 정당 구도를 변화시킨다. 현행 소선거구 1위 대표제를 폐지하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전면 도입한 경우를 상정해보자. 유권자들은 이제 인물이 아닌 정당에 대해서만 투표한다. 선거 게임의 내용이 인물 경쟁에서 정당 경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들은 어떻게든 각 지역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후보를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던 과거의 행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지역주의나 금권 등을 활용한 특정 지역에서의 특정 인물 선전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승부는 소지역이 아니라 전국 수준에서, 인물 간이 아니라 정당 간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각 정당의 핵심 전략은 어떻게 여타 정당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느냐에 모아진다.

가장 안정적인 차별화 전략은 각 정당이 자기 고유의 이념, 정책 기조, 지향 가치 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의 정당 구도가 이념과 정책 중심으로 구조화돼 있는 이유다. 이 원리가 우리나라에만 적용이 안 될 이유는 전혀 없다. 즉 우리 선거제도를 비례성이 보장되는 것으로 개혁한다면 우리도 정당의 구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된 1980년대와 90년대에도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대다수 선진국들은 자기들 나름의 복지자본주의를 거의 원형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나라들이 예외 없이 비례성이 충분한 선거제도를 갖추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선거제도 덕에 이념 혹은 정책 정당들이 정치권 내에서 상당한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배려의 정치경제가 바로 그들에 의해 지속돼왔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식 ‘배려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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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사기자 ro@kyunghyang.com


ㆍ6부 - 문제는 정치다 (3) 정치로 풀자
ㆍ투표율 최저경신 행진…대의민주주의의 위기
ㆍ시민단체·노조 참여율도 10% 안팎 극히 저조



한국 사회에서 정치 이슈는 항상 뜨겁지만, 유권자 다수는 차갑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의 탈정치화 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 2008년 총선 투표율은 유례없이 50%에도 이르지 못했다. 지지 정당이 없는 ‘무당층’도 40% 이상을 기록한다. 시민단체나 노조활동 참여율도 극히 저조하다. 정치는 일상의 삶과 유리됐다.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꾸준히 하강 중이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선에선 63%를 기록했다. 역대 최저였다. 대선 투표율은 첫 직선을 실시한 1987년(89.2%) 이후 81.9%, 80.7%, 70.8%로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대선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2008년 4월 18대 총선 투표율은 46%에 불과했다. 17대(60.6%) 때에 비해 14%포인트 이상 감소한 수치로, 역시 역대 최저다. 투표율이 50%에도 못 미치는 이런 현상은 대의민주주의의 위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작은 선거’에 대한 무관심은 더하다. 95년 전면적 지방자치를 내세우면서 시작된 동시지방선거는 1회 68.4%, 2회 52.7%, 3회 48.9%로 줄곧 저조한 투표율을 면치 못했다. 2006년 네 번째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53.7%로, 간신히 절반을 넘겼다.

지난해 처음 실시한 직선 서울시교육감 선거 투표율은 15.5%에 불과했다. 올해 경기도교육감 선거의 경우 12.3%의 민망한 수치를 기록했다.


지방자치 시행 이후 주민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제도들도 별 반향을 얻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2000년 시작된 주민감사청구제는 일정 요건을 갖추면 주민들이 직접 지자체에 대한 감사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그러나 대전시와 제주도의 경우 이 제도가 마련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청구 사례가 없었다. 서울시(41건)를 제외하면 다른 시·도 역시 1~12건 정도다.

주민소환제 역시 비슷하다. 2007년 주민소환제 실시 이후, 실제 투표로 이어진 것은 2건에 불과하다. 지난 8월 김태환 제주지사에 대한 주민소환이 투표율 미달(11%)로 무산된 것을 포함, 2건 모두 ‘투표율 미달’로 부결됐다.


정당 정치는 제기능을 못 하고 있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무당층이 지속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 5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무당층은 45.4%다.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 지지율이 각각 21.5%, 20.8%다. 두 거대 정당의 지지율을 합쳐도 무당층보다 적다. 지난 1월 한 조사에선 60%를 넘기기도 했다.

정당 당원 활동도 미미하다. 우리 나라 유권자 중 정당에 가입한 이들의 비율은 약 7%다. 이 중 당비를 내는 당원은 11% 정도에 불과하다. 당비 납부자 수도 2006년 54만6300명에서 2007년 41만2500명으로 크게 줄었다.


노조 조직률은 지난해 말 기준 10.5%가량, 97년 이래 줄곧 10% 언저리를 오간다. 각종 시민단체 가입률도 11%에 불과하다. 정당정치든 생활정치든, 우리 사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무관심이 극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총체적 정치 무관심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분석은 ‘정치 불신’이다
. 많은 조사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 7월 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직업’ 가운데 최하위가 정치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자유기업원의 여론조사 결과 18대 국회는 국민 신뢰도가 가장 낮은 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의정활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60.5%)는 긍정적 평가(4%)의 15배에 달했다. 정부 신뢰도 역시 11%, 세계 최하 수준이다. ‘다수 정치인들이 부패됐다’고 보는 이들도 90%에 이른다.

2005년 국회운영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42%뿐이었고,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든 마찬가지라는 응답도 68%에 이르렀다. 정치 불신을 넘어 정치 혐오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도처에 넘친다.

정치 불신은 정치 무관심을 낳고, 정치 참여에 대한 무관심은 민주주의의 지반을 무르게 한다. 시민들이 투표와 생활정치에서 멀어질수록 정치는 ‘그들만의 잔치’가 된다. 리처드 스위프트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범한 시민들은 정치 과정에서 멀어지고 있고,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항구적인 정치 계급이다. 돈과 돈을 통제하는 사람들은 쉽게 민주적 정책 결정의 결과를 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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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진기자 worldhj@kyunghyang.com

200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연보에 따르면 2007년 기준소득 조사 결과 한국 상위 10%의 가계소득은 하위 10% 가구의 4.7배에 달한다. 하위 10% 가구가 월 100만원을 벌 때 상위 10% 가구는 470만원을 번다. OECD 평균인 4.2배를 웃도는 수치로 한국은 회원국들 중 7번째로 빈부격차가 심하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더 높은 4.85다.

반면 복지국가로 잘 알려진 북유럽 대표 국가들의 소득 10분위 배율은 덴마크가 2.72, 스웨덴은 2.79로 낮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걸까. 전 세계적으로 세계화가 진전되며 소득양극화는 하나의 추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마크나 스웨덴이 여전히 원만하게 임금 분배를 해나가는 이유는 노동조합이라는 완충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완충지대가 있으면 한국이나 미국에서처럼 기업들이 경제 불황으로 인한 손실을 곧바로 노동자에게 전가시켜 월급삭감, 구조조정 등으로 이익을 보전하는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없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면서 전 세계적으로 노조 조직률이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스웨덴과 덴마크·핀란드 등은 여전히 70%가 넘는 노조 조직률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동부가 실업기금을 관리하지만 이들 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이 실업급여를 관리한다. 실업급여 혜택을 받으려는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노조에 가입하게 돼 이는 높은 노조 조직률을 유지하는 근간이 됐다. 그때부터는 선순환이다.

높은 노조 조직률은 임금 및 단체협상에서 노동자의 협상력을 유지시켜주는 힘이 되고, 정부의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과 사회보장 제도까지 합세하면서 소득불평등은 자연스럽게 낮아졌다. 스웨덴의 소득 안전망은 높은 노조 조직률을 바탕으로 한 노조의 협상력과 정부의 바람직한 고용정책, 높은 사회복지지출 등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이들 국가는 단체교섭 적용률에서도 월등한 차이를 보인다. 단체교섭 적용률은 노조와 사업주가 단체교섭을 통해 단체 협약을 맺은 약정이 전체임금 노동자수에 미치는 적용률을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노조 조직률도 10.5%로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으로 단체교섭력 역시 12.5%밖에 안된다. 노조가 성과를 이뤄낸다고 해도 그 혜택은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반면 스웨덴과 핀란드는 92.5%, 덴마크는 82.5%로 높은 적용률을 보였다. 합리적인 임금과 적절한 노동조건에 대한 노동자의 개별적인 목소리가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물결로 노조 조직률이 감소해도, 여전히 노조가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시민들의 조직화 수준은 이같이 시민들의 삶의 수준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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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진기자


# 음식점 운영 박선운씨 “투표 안 하는 딸 뭐라 못해”

왜 정치는 일상의 삶과 유리됐을까. 종로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는 박선운씨(51)는 “내가 투표했던 사람이 대통령,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내가 투표한 사람이 되든 떨어지든 내가 처한 현실은 바뀌는 게 없고, 여론이 어떻든 미디어법처럼 법안을 강행처리하는 걸 보면 화가 난다”고 말했다.

박씨는 “투표권이 있는 두 딸이 선거날 놀러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투표한다고 해서 형편이 뭐 달라지겠냐라는 생각이 들어서 뭐라고 안한다.”고 말했다.


# 회사원 이재민씨 “구직·결혼해보니 한 표 중요”

회사원 이재민씨(30)는 투표권이 생긴 이래로 한 번도 선거 투표에 참여해본 적이 없다. 일반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최근 생각을 바꿨다. 취업하고, 결혼으로 새 살림을 꾸미면서 비정규직과 부동산 문제를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비정규직 문제나, 부자들을 위한 정책들, 그리고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때가 되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게 없다”며 “앞으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런 변화에 일조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 취업준비생 우모씨 “실망하면서도 희망 품게돼”

취업준비생 우모씨(26)도 “항상 정치에 실망하면서도 또 다시 정치에서 희망을 찾게 되는 것 같다”면서 “사람들이 정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불행하거나 불만이 생겼을 때 정치이야기를 하는 게 그 증거”라고 말했다.

우씨는 “취업이나 적은 월급으로 고민하는 친구들도 분명 꿈꾸는 세상이 있고, 진보정당에 투표해야 할까 하면서도 결국 이 한 표가 어떤 도움이 될지 허무해 한다”며 “그 한 표가 어떻게 의미있게 행사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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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ㆍ경제논리로 자기 이익만 지키는 ‘이기적 엘리트들’



지난 3월3일 한나라당 의원들이 야당 의원들의 금산분리 완화 법안 저지를 차단하기 위해
국회 정무위원장석을 둘러싼 가운데 김영선 정무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려 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우철훈기자



“행복한 가정은 대개 비슷하나 불행한 가정엔 제각기 다른 불행이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어구다. 경제는 이와 반대인 것 같다. 경제가 잘 돌아가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은 대개 비슷하니까 말이다.
물론 구체적인 위기의 양상이나 기술적인 원인은 위기마다 제각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제위기는 하나의 단순한 근본원인에서 비롯된다. 특권층에 의한 정치왜곡이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경제학 교수인 사이먼 존슨은 ‘조용한 쿠데타’라는 글에서 자고로 경제위기란 부와 권력을 가진 특권층이 좋은 시절에 과욕을 부리다가 지나치게 위험한 일들을 벌인 것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정부와 민간 부문의 엘리트들이 긴밀하게 얽힌 과두체제를 형성함으로써, 정부가 공공의 이익을 수호하기보다는 마치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처럼 과두체제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제어되지 않고 마구 벌어진 것이라고 진단한다.

존슨 교수의 말이 좀 과격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적어도 상당히 좌파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학자이겠거니 짐작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존슨 교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주류 중의 주류 경제학자이고, 무엇보다 2007년에서 2008년 사이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사람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 수많은 나라의 정부 관리들이 위기가 코앞에 닥쳐서 IMF를 찾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한 경험에서 그는 절제를 잃어버린 과두체제가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경제위기의 다양한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한 여러 가지 정교한 모델과 이론이 있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라는 것이다.

물론 과두 엘리트가 아닌 대중의 과욕도 문제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의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나 복부인들의 투기바람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문제는 정부가 정신차리고 있으면 금방 잡을 수 있다. 적절히 경기를 식히기만 해도 되고 좀더 정교한 정책을 구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두 엘리트들이 벌이는 도박판은 워낙 판이 큰 데다 이들이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파멸적인 위기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수술’ 대신 ‘마약’ 처방하는 정부

문제의 원인이 정치이니 문제의 해결책도 정치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경제위기에 경제적 해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과도한 욕심으로 밀고나가던 사업들을 정리하고 망가진 은행을 구조조정하는 등 경제의 수술이 필요하다. 직장을 잃고 가게 문을 닫는 등 죄도 없이 고통 받는 서민들을 위한 대책도 필요하다. 국제수지 등 거시경제적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도 필요하다. 이러한 경제해법들을 고안하는 것이 어려울 것은 없다.

문제는 정치다. 경제해법의 핵심은 구조조정이고, 이는 가장 힘 있는 자들이 피를 흘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두체제의 파트너로서 함께 좋은 시절을 즐기던 정부와 정치권의 엘리트가 민간 엘리트에게 칼을 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흔히 구조조정은 지연되고 국민 주머니를 털어 잘못된 사업에 뒷돈을 대주는 일들이 발생한다. 수술을 하기보다는 마약이나 투여하면서 버티는 것이다.



위기가 심각하지 않을 때는 마약 처방으로 넘길 수도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72년의 8·3조치였다. 재벌기업들의 채무부담을 국민 호주머니를 털어서 경감시켜 준 조치였다.

그러나 문제의 크기가 심각하고 외국의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그게 어렵다. 민주화가 되면 국민들도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수술이 지연될수록 환부는 더욱 곪아 들어간다. 97년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그래도 한국은 구조조정을 잘 했다고 평가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상은 구조조정의 지연으로 손실이 불필요하게 확대되었던 경험이 있다. 99년에 몰락한 대우그룹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김우중 회장의 로비에 의해 대우그룹의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바람에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 정부는 제2차 공적자금 조성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탈을 썼건 쓰지 않았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경제위기를 맞은 과두체제 정부가 하는 일은 국민세금으로 과두 엘리트들의 손실을 막아주면서 버텨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둑이 무너지고, 경제는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진다. 폭동이 일어나고 정권이 바뀌는 것도 예사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야 엘리트들에 대한 손실 부과와 책임추궁이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비로소 경제회복의 초석이 놓인다.


‘월가-워싱턴 통로’와 구제금융

사이먼 존슨은 자신이 보아온 개도국들의 위기와 미국의 금융위기에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한다. 금융엘리트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의회는 물론 언론과 학계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엄청난 과욕을 부리다가 위기를 자초했다. 절제를 잃은 과두체제가 낳은 경제위기, 바로 그것이었다.
 
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이 다른 나라와 같기만 할 수는 없다. 존슨은 미국이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 세계 최강인 것처럼 과두체제도 가장 발달해 있다고 한다. 적나라한 폭력과 부패로 유지되는 과두체제가 아니라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매우 정교하게 영향력과 이권의 교환관계가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월가-워싱턴 통로”라고 부른다.

미국이 남다른 점은 또 있다. 미국 달러가 세계의 기축통화라는 점이다. 그래서 미국은 통화위기로 IMF를 찾아갈 일이 없고, 금융위기가 닥쳐도 돈을 찍어 문제해결을 연기할 수 있는 여지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크다. 이른바 글로벌 불균형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심지어 국제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미국이 바로 문제의 진원지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는 기이한 현상도 벌어진다.

고도로 발달된 “월가-워싱턴 통로”와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미국 정부의 위기대응 방식을 결정했다. 타국이 위기에 처하면 IMF를 앞세워 강력한 긴축과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던 미국 정부가 자국의 위기 앞에서는 대대적인 경기부양과 관대한 구제금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돈을 뿌려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은 것은 결코 잘못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금융 과두엘리트들에게 손실을 최대한 부담시키고, 책임을 묻고, 과감한 구조조정과 개혁조치를 취하는 등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미국 정부는 금융권에 끌려다니면서 금융엘리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자금 지원만 계속하고 있다. 월가의 엘리트들이 정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오바마 정부도 과거 정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 그 결과는 뻔하다.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목숨을 부지한 금융기관들이 일반인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액수의 보너스 잔치를 벌이고, 위기가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고수익-고위험 상품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며, 재발 방지를 위한 금융개혁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의 실물경제는 실업과 소비침체에 짓눌려 아직도 어두운 터널을 헤매고 있는데, 골드만삭스는 올해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고 있다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소식도 들려온다. 이런 식으로 해서 과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아무리 미국이라도 마구 돈을 뿌린 후유증은 언젠가 나타날 수밖에 없고, 구조조정 없는 구제금융은 결국 더 큰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대공황보다 더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금산분리 완화’라는 시한폭탄

이와 유사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1년 전 우리 경제는 외화유동성 위기에 몰리고, 금융경색이 심화하면서 살얼음판을 기었다. 과도한 단기외채 누적, 부동산 투기 붐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건설업 부실과 가계부채 문제, 날로 심화되는 기업 양극화의 그늘에서 경쟁력을 잃어가는 중소기업 문제, 외형 경쟁에 빠져있던 은행들의 건전성 악화 등으로 경제가 곪아 있던 터에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쳐왔기 때문이다.

정부는 재정과 발권력을 총동원해 금융권과 실물부문을 지원했다. 금융시장 붕괴를 막아낸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빠르게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고 신나 하기엔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구조조정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생경제는 침체에 빠져 있고 양극화는 악화일로인데, 벌써 집값 거품이 재현되고 가계부채가 급증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이 뇌관을 제거하기는커녕 더욱 키우고 있는 셈이다.

그런 가운데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시중금리는 오르기 시작했다. 정부가 억지로 경기를 끌고 나가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진 미국과 유사하다. 그런데 한국은 미국보다 한 술 더 뜨고 있다. 미국은 그나마 오바마 대통령이 금융규제 강화안을 발표하고, 금융권과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선진금융 운운하며 금융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금산분리를 완화하는 것은 핵폭탄처럼 위험한 일이다.

우리가 97년의 외환위기를 비교적 빠르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공적자금 투입에 의한 금융구조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덕이다. 오랜 관치금융의 전통 탓도 있고 해서 구조조정에 저항할 만한 힘이 있는 금융 과두엘리트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산분리 완화는 결국 재벌이 은행을 포함한 금융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길로 이어진다. 이미 법 위에서 노는 것이 우리나라 재벌이다. 이들이 금융지배를 강화하게 되면 과연 누가 이들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금융 감독으로 제어한다는 말은 하지 말자. 미국에서도 금융엘리트는 감독을 무력화하지 않던가. 금산복합 과두엘리트의 탄생은 초대형 경제위기를 불러올 보증수표나 마찬가지다. 자유 시장경제를 한답시고 금융규제를 다 풀어버린 뒤 금산복합기업집단들의 거대한 투기 물결에 경제가 휩쓸려 내려갔던 80년대 초 칠레 등 남미 국가들의 비극이 한반도에서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정치논리와 경제학의 미래

흔히 경제는 경제논리로 풀어야지 정치논리가 개입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누구나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때 경제는 건전하게 돌아간다. 힘 있는 자가,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더욱 많은 것을 가져가는 경제는 발전하지 못한다. 경쟁과 혁신보다 로비와 부패에 의해 자원배분이 좌우되면 경제는 망가진다.

그러나 경제적 약자들에 대해 배려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도 정치논리라면 정치논리겠지만, 그건 사회통합과 인적 자원의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쟁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도 약자 보호는 필요하다.

경제가 정치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제를 잘 되게 하는 정치는 강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돕는 정치다. 여유가 있는 계층에게서 세금을 걷어 교육, 보건이나 인프라 등 사회적 효율성이 있는 곳에 투자하는 정치다. 이게 민주정치의 요체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 대체로 경제도 발전했다. 그런데 경제논리만 앞세우는 이들은 마치 경제와 정치가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들은 대개 강자들에 의한 천문학적인 왜곡은 못 본 체하고, 노동조합 등 약자들의 자구노력을 정치논리라고 공격한다.

강자에게 정부가 휘둘릴 때, 그 폐해는 약자들의 정치논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경제논리만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경제학자가 현실문제에 부딪히면서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변신한 예는 많다. 상아탑에만 있을 때는 미국 경제의 양극화가 기술변화의 결과라고 주장했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이 이제는 극우파가 공화당을 장악하고 정권을 잡아서 소수 부유층만을 위한 정책을 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한 예다. 스티글리츠와 바그와티 등이 자본거래 자유화나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대해 월가의 이익을 위해서 미국 정부와 IMF 등이 나서서 추진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비현실적인 가정에 입각해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고, 효율과 분배를 분리하는 경제학. 그러고는 정치와 분배는 논외로 한 채 경제논리와 효율성만을 따지는 경제학. 그래서 정치와 분배가 과두엘리트들에 의해 왜곡되어도 자유시장 찬양만을 늘어놓는 경제학. 이런 경제학은 이제 퇴장해야 한다. 누구보다 일찍이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설파한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유방임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자에 의한 시장 왜곡을 방지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정부의 역할이 건전한 시장경제 발달의 필요조건임을 강조했다.

한국 경제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 과두엘리트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민생과 미래를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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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사기자 ro@kyunghyang.com

ㆍ각국 정부 글로벌 위기후 ‘시장 교정’나서

지난해 8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국가의 귀환’을 전망했다. 시장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 심각한 글로벌 위기가 발생했고, 그 반성으로 국가가 경제무대에 복귀할 것이라는 예고였다. 실제로 위기 이후 ‘큰 정부’의 시대가 도래했다. 각국 정부는 앞다퉈 ‘시장 교정’에 나섰다. 특히 각 정부는 이번 위기의 주요 진원지인 금융권의 메커니즘을 손질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미국·유럽 고삐풀린 금융 감독강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14일 월가의 심장부인 페더럴홀 연설에서 “우리는 이번 위기의 핵심인 무모한 행동과 통제되지 않은 과잉 상태의 옛날로 돌아가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난 6월 발표한 ‘금융개혁안’ 처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시 천명한 것이다.
이번 개혁안은 대공황 이후 최대의 금융규제 시스템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골자는 고삐 풀린 금융권을 규제하는, ‘감독 강화’다. 금융감독협의회를 신설하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융부문 전반에 대한 감독권한도 대폭 강화했다. 또 부동산담보대출(모기지) 등 소비자들과 밀접한 금융상품을 감독하는 소비자금융보호청을 신설하고, 실패한 대형 금융회사들의 파산 절차가 쉽도록 그 권한을 정부에 부여했다.

유럽에선 영국이 금융개혁의 선봉에 섰다. 영국 재무부는 미국에 이어 지난 7월 금융시장개혁안을 발표했다. 재무부 장관을 의장으로 하는 금융안정위원회(CFS)를 신설하고, 금융감독원(FSA)의 제재 권한을 대폭 높이는 등 역시 금융감독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금융위기 당시 엄청난 자본을 투입해 비대해진 은행들에 대한 규제 강화 조치도 이어졌다.
영국의 로드 터너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2일 “대형 은행의 파산을 쉽게 하도록 하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위험한 금융기관들의 자기자본비율을 일반적인 건전성 수준보다 높이도록 강요할 권한을 갖게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금융업 종사자들의 성과급 상한제를 강력 주장하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최근 다른 나라 정상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보수 지급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금융안정위원회(FSB·모든 G20 국가들이 참여하는 금융시스템 관리감독기관) 2차 총회에선 ‘금융회사 보상원칙의 이행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금융회사들의 ‘보너스 잔치’에 제동을 건 것이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은행 등 금융회사들은 임직원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기에 앞서 독립적인 이사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미 의회도 올초 성과급 지급 제한 내용을 담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일본 하토야마 정부도 규제 착수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일본 역시 규제 개혁에 본격 착수할 전망이다. 하토야마 정부는 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주주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 도입을 약속했다. 또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관련 정보를 공개하도록 해 중소기업 대출을 확대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 6월 일본 금융청은 모든 대출업체의 등록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시행했다. 또 대출 규모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총량규제제도도 도입했다.

이번 금융위기의 뇌관이 된 헤지펀드 등에 대한 규제도 이뤄지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위원회(EC)는 지난 3일 헤지펀드 및 사모투자펀드 규제안을 내놨다. 세계증권시장 감시문제를 협의하는 국제기구인 국제증권감독기구(IOSCO) 역시 금융위기 재발 방지를 위한 글로벌 차원의 헤지펀드 규제 기본지침을 지난 6월 발표했다.


스위스 은행들도 은닉계좌 공개키로

조세 피난처 국가들은 꼬리를 내리고 있다. 각국 정부가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높이는 취지에서 ‘조세 피난처와의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지난달 미 법무부와 미국인 고객 1만여명의 비밀계좌를 공개하기로 합의했다. 대표적 조세 피난처들도 사실상 은행 비밀주의를 포기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지난달 자국 은행에 은닉된 20억~30억파운드 규모의 영국인 비밀계좌 5000여개의 정보를 영국 정부에 넘겨주기로 했다. 지난 3월엔 케이맨제도, 버뮤다제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에 맞춰 자국 은행의 고객 정보 제공에 협력하겠다고 했다. 싱가포르는 지난 6월 조세 피난처 논란을 막기 위해 다른 국가들과 이중과세방지협정을 맺어 고객 정보 교환을 허용하도록 세법을 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각 국가들 사이에 이 같은 인식이 확산되자 국제 공조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24~25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3차 정상회의에서도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한 금융 규제 강화가 중점적으로 논의될 예정이다. G20 정상들은 지난 1, 2차 회의에서 다양한 금융시스템 규제 합의를 이끌어냈다. 유럽연합(EU) 역시 지난 5월 금융감독체계 개편안을 채택했다. 지난 17일엔 비공식 회의를 갖고 금융기관의 성과급 제한 규정을 G20 회의에서 밀어붙이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은 스스로 기능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많은 사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국가의 정치적 개입은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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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세|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ㆍ집권세력 성격따라 부의 향배 좌우
ㆍ다수가 원하는 정권·제도 실현돼야

시장의 생산과 결합한 민주주의는 평등할 수도 평등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치하기 나름에 따라 불평등 민주주의가 나타난다. 최근 미국의 경험연구는 공화당 집권 때보다 민주당 정부에서 사회적 양극화가 완화된다는 것을 제시하여 주목을 끌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사람들은 불평등이 과연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했다. 시장은 애덤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치의 손에 의해 규제된다. 또한 역사는 방치된 시장이 불평등을 조장하여 사회적 평화를 위협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최근의 잇단 금융시장의 실패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정치는 규제를 통해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의 향배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 불평등의 존재와 정도는 집권세력이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보수와 진보는 경제정책 면에서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전 한국 사회가 급속한 경제발전을 하는 동안에는 상대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안정기에 들면서 불평등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철문 틈으로 보이는 썰렁한 풍경의 국회의사당. 사회적 다수가 원하는 정치가 이뤄질 때 사회적 불평등 해결이 가능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회적 양극화는 정책상 보수정부에서 심화되기 쉽다. 정부 수립 이후 60년 동안 보수세력은 50년 집권한 반면 진보세력의 집권은 불과 10년에 불과하다.

10년을 맡았던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말로는 진보정치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 중산층·서민의 이익을 향상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었다. 한국 정치가 부패와 유착하고 나아가 고비용구조에 의지하면서 정치인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돈 많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기부금에 의존하는 정치인은 기부자의 이해를 외면할 수 없다. 결국 돈이 정치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정치는 부의 향배를 결정하기도 한다.
공공정책은 경제의 규모는 물론 부의 분배와 분포에도 결정적 영향을 준다. 공공정책의 방향은 집권정부의 정치적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 보수정부는 실업보다는 물가잡기 그리고 누진적 조세정책을 선호하는 반면 진보정부는 고용문제를 중시한다.
 
한국의 역대 정부는 정책면에서 진보적이기보다 보수적이었다. 가장 진보적으로 평가되는 노무현 대통령조차 정서적으로는 진보적이었으나 한나라당과의 연대를 공개적으로 요청할 정도로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많은 영향을 받은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소득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외환위기 이후 계속 악화돼왔다. 비정규직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오히려 정규직을 압도할 정도다. 장기간의 소득격차 확대가 중산층 감소를 초래해 90년 74.2%였던 도시가구 기준 중산층 비율은 2000년 68.5%에서 2008년 63.3%로 감소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진보정부를 자임했던 10년 동안에도 중산층이 감소했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다수가 원하는 정치가 실현되어야 한다. 문제의 해결은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해 자신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에 표를 던지는 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요인이 불평등의 정치를 고착시킨다. 평등의 정치를 세우려면 이 세 가지 요인을 제거 또는 완화해야 한다.

첫째, 사회적 다수를 점하는 계층을 위한 정치가 되려면 이들 다수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동원 역시 자원의 문제여서 돈 많은 사람들은 손쉽게 정보를 얻는 반면 중산층 이하 일반 대중은 투표에 필요한 정치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

둘째, 진보정치를 가로막는 것은 지난 20년 이상 응결된 지역주의다. 중산층과 서민들은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정당이 집권하면 경제적 형편이 나아질 텐데 왜 보수정당을 찍어왔는가? 지역주의 투표의 가장 큰 문제는 지지층에 대한 책임성이 없다는 점이다. 책임성이 취약한 지역주의 정당은 자신들을 지지해준 중산층과 서민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고 지역주의 기반을 공고하게 만드는 데만 관심을 둔다.

셋째, 현행 정치제도 역시 불평등의 정치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와 양당제, 대통령중심제 구도하에서 소수정당을 찍어봐야 사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중산층·서민 투표자는 지역주의의 포로로 전락한다. 소수정당의 존립을 허용하는 비례대표제가 도입된다면 서민의 투표는 보다 더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책정당으로 향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경제는 정치에 의해 견인된다. 정치의 승패는 선거에서 결정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차로 상대후보를 제압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그동안 너무 불평등했다. 이제는 보다 더 평등한 민주주의를 가질 때가 되었고, 평등의 정치를 여는 물꼬는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하는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이다. 이들의 원내 진입을 보장하는 정치제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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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


개인들에게 시장은 한편으로 기회이고, 다른 한편으로 위협이다. 시장이 난폭한 폭군이 될 수도 있고, 풍요를 가져 오는 구원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이미 18세기부터 이루어졌다. 초기 통제를 받지 않았던 폭군과 같은 시장은 결국 대규모 실업과 빈곤을 가져다 준 대공황을 불러일으켰다. 파국으로 치달은 고삐 풀린 시장은 결국 시장에 대한 규제를 초래했다.




오늘날에는 개인의 건강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시장도 적절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시장이 만병의 근원도 아니며 만병을 치료하는 특효약도 아니라는 현실적인 인식이 시장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이다. 그리하여 시장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 현대국가의 과제가 되었다.

유럽의 경우, 18세기 이래 오랜 자본주의 진화과정을 겪으면서, 시장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이 변화를 거듭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한국과 같은 신흥 산업국가들에서는 아직 시장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이 기능 차원에서나 비중 차원에서 적절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의 계획에 의해 산업화해왔기 때문에 국가의 개입은 아직도 생산 영역에 치우쳐 있다. 국가의 분배 개입은 미미한 수준이다.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 클럽 회원이 되었다. 제3세계 국가들과의 비교 대상이 아니라 OECD 국가들과 비교를 해야 하는 선택을 스스로 한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말은 선진국이 되고자 열망하는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진국의 기준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어떤 특정한 나라의 기준이 아니라 선진국 여러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회 속성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추어 들여다본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OECD 국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를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시장화된 사회
. 과잉 시장화라고 불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국가의 역할은 미미한 반면, 시장이 개인이나 가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OECD 국가들에 비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는 교육, 의료와 주택이다. 국민의 삶에서 이들 세 영역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이들 영역에 일정한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들 세 가지 영역에서 한국은 시장화의 정도가 가장 높은 나라다.

교육 영역을 보자.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5년 18~21세 인구 중 대학에 등록한 인구 비율은 65%로 그리스와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45%)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30% 내외에 그쳤다. 그런데 고등교육 비용은 대부분 부모가 부담한다. OECD 국가들 가운데 부모의 교육비 부담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전체 국내총생산(GDP)에서 정부의 고등교육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0.7%로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았다. 이는 OECD 평균 1.3%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대학에 들어가기 전 사교육비는 고등교육 통계에 고려되지도 않았다. 한국의 고등교육은 매우 낮은 공공성을 특징으로 한다.

의료의 경우도 비슷하다. 한국의 경우 의료 서비스가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재정만 의료보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의료 서비스의 공급과 재정 조달이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OECD 국가들에 비해 의료의 공공성이 낮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체 의료비 가운데 정부의 지출은 OECD 평균(73%)에 훨씬 못 미치는 55%에 불과하다. 가장 낮은 멕시코의 45%보다는 높지만, 유럽 선진국의 80%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수준이다.

주거도 삶의 질과 관련하여 중요한 요소이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관련한 정부의 역할은 적절한 수준의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주택 공급은 대부분 건설업체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공주택 비율도 대단히 낮다.
2002년 월드컵 대회에서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때문에 많이 알려진 네덜란드의 경우 공공주택 비율이 35%로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다. 유럽 대부분의 경우 15~18% 수준이다. 상대적으로 공공주택의 비율이 낮은 남유럽과 영어권의 경우 7% 미만이다. 공공주택 정책으로 유명한 싱가포르의 경우 85%가 공공주택에서 살고 있고, 홍콩의 경우에도 45% 정도의 주택이 공공임대주택이거나 정부 지원을 받는 주택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이들 나라는 주택 부족이 심각했기 때문에 공공주택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의 경우 공공주택은 5%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택이 시장 상품이 되어, 주택이 거주의 공간이 아니라 재테크의 수단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우리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무엇이 글로벌 스탠더드인지를 아무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글로벌 스탠더드로 내세우고 있다. 그 결과 합리적이고 성찰적인 논의가 사라지고, 아집과 무지에 기초한 우격다짐이 넘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과연 21세기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

모두 선진사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피부에 와닿는 선진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어렵고 추상적인 사회도 아니고 실체가 불분명한 막연한 모습의 사회도 아니다. 선진사회가 되는 것은 한국의 보통사람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개인이나 가족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시장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관리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국민의 삶의 안정을 위해 과잉 시장화된 삶의 영역을 줄이고, 정부의 역할을 늘려야 한다. 현대국가의 존재 이유는 바로 국민의 복지 증진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국민의 삶의 질과 관련하여 논의되어야 한다. 시장 과잉 사회에서 정부의 새로운 역할 정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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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진기자 worldhj@kyunghyang.com

ㆍ‘시장경제는 망상’ 지적한 경제인류학자
ㆍ‘국가·사회의 시장복속 결과’ 명확히 그려

 


칼 폴라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 대로 시장은 정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합리적인 질서를 스스로 유지하는 걸까.
 
헝가리 출신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1866~1964)는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저서 <거대한 전환>을 통해 “시장 스스로의 조정으로 재화의 생산과 분배의 질서를 유지하는 ‘자기조정 시장경제’는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라고 지적했다.

책 <거대한 전환>을 번역한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칼 폴라니의 핵심 주장은 시장경제의 비인간성이나 비합리성을 고발하려고 한 것보다 시장경제란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 균형을 유지하는 ‘자기조정 시장’ 논리는 국가를 배제한다. 이 논리는 시장 역시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자연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폴라니는 이런 주장이 시장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역사 연구를 통해 증명해나간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시장과 비슷한 전국적 시장을 탄생시킨 것은 16세기 이후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국가에 의해서였다. 중상주의를 신봉한 국가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길드의 폐쇄성을 깨고 보편적인 시장 창출에 앞장섰다. 시장의 보편화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자연적으로 탄생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개입 결과인 것이다.

그는 또한 최소 200년 전만 해도 시장경제가 보편적인 경제 형태가 아니라 ‘부수적인 존재’로 억압돼 왔다고 서술했다. 시장이 자유롭게 풀려나면 16세기 영국에서처럼 급속도로 인간과 자연을 파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폴라니가 제시하는 해결책의 방향은 카를 마르크스나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주장했던 시장경제를 없애거나 국가에 의한 적절한 개입 등으로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라는 하나의 실체를 발견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접근한다. 국가와 시장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지금처럼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국가와 사회를 시장의 부속물로 여길 때의 결과도 명확하게 그리고 있다. 폴라니는 국가와 사회가 시장에 복속되면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비극만 낳고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것이 최근 세계가 폴라니를 다시 주목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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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

작년 세계 경제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각국은 살길을 찾기에 바쁘다. 이번 금융위기는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이래 20여년간 승승장구해온 시장만능주의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레이건 이후 공화당 정권은 경제를 살린다면서 부동산 경기 부양, 금융업에 대한 투자 및 일자리 창출에 크게 의존했다. 그 수단은 규제완화, 부자 감세, 반노조라고 하는 전형적인 시장만능주의다. 미국은 이미 1920년대에 시장만능주의를 채택한 바 있고, 그 결과는 사상 유례없는 빈부격차와 대공황이었다.

레이건, 부시 부자에 의한 시장만능주의가 가져온 것 역시 사상 최대의 빈부격차와 경제위기라는 점에서 최근 상황은 역사의 반복이다. 위기 해결책을 놓고 논의가 분분하지만 그 기조는 뉴딜과 비슷하게 시장만능주의의 혁파,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 강화, 복지 확충을 통한 분배 개선이 될 것이다.


미국 뺨칠 정도로 미국적인 한국경제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경제체제는 미국 뺨칠 정도로 미국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시장만능주의가 횡행한다.

이런 시장만능주의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부분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강요에 의해, 또 우리 내부에서 야금야금 세력을 확장해온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요구에 의해 지난 10년간 빠른 속도로 확산돼 왔다.

그러나 우리 경제체제가 시장만능주의 일색은 아니고, 시장만능주의적인 요소와 더불어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30년 정도 지속된 이른바 박정희 모델이라고 하는 관치경제의 잔재가 도처에 남아 있다.

이 모델은 30년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파쇼국가에서 채택되었고, 처음에는 상당히 성과가 좋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독재적인 이 모델은 처음 20~30년은 성과가 좋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비능률, 침체에 빠지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장·분배 모두 성공한 북구 사회민주주의

우리 경제는 이런 역사적 유산을 물려받아 한편에는 관치경제, 다른 한편에는 시장만능주의가 혼재되어 있는 기묘한 성격을 갖게 됐다. 즉 한국 경제는 야누스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물과 불처럼 상극인데, 공존하고 있으니 우리가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런 혼란 상태는 하루빨리 정리돼야 한다.

어떤 방향으로 정리돼야 할까? 박정희식 관치경제는 한때 승승장구했지만 이미 전성기를 지나 수명을 다했으니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시장만능주의는 이번에 미국의 경제위기로 이미 치부가 드러난 이상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국내에 시장만능주의 세력이 도처에 포진하여 시장만능주의를 전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은 물론 중요하지만 시장만능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면 우리에게 대안은 무엇인가?

세계 각국을 관찰해보면 관치경제와 시장만능주의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존립한 시장경제체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럽대륙형 자본주의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북구형 사회민주주의체제다. 둘은 시장을 방치하지 않고 조정을 가한다는 점, 복지국가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북구가 유럽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모든 중요한 사회서비스를 국가가 무료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좀더 좌파적이다.

한국 사람들은 좌파라 하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버릇이 있는데, 놀랍게도 지난 수십년간 세계의 경제성적표를 놓고 볼 때, 우등상을 받아야 할 나라는 북구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다. 혁신능력이 가장 뛰어나고 경제성장률이 영미형이나 유럽대륙에 비해 높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가 가장 평등하다.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몇 년 전 여론조사를 했을 때 우리 국민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나라도 북구형 사민주의국가였다.

그러나 우리의 토양은 과연 이 모델을 이식하기에 적합한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첫째, 우리 노조의 조직률이 12%밖에 안 되는 데다 조직 형태도 산별이 아니고 기업별 노조이다. 북구는 산별노조 형태이면서 노조 조직률이 70~80%나 된다. 강한 힘에 비례적으로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어서 좀체 파업과 같은 행동에 돌입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노조는 기업별 노조여서 시야가 좁고, 경제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적게 느낀다는 한계가 있다. 노조 간부들도 단기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다. 기업도 살고 나도 산다는 장기적 시야가 아니라 매년의 임금 인상에만 급급하는 단기실적주의에 빠져 지나친 투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이념에도 문제가 있다. 노조 중 일부는 사민주의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갖지 않고, 심지어 기회주의로 간주하는 경향조차 있다.


‘가지 않은 길’을 갈 용기는 있는가

둘째, 기업가들은 원래 보수적이지만 한국의 기업가들은 특히 보수적이다. 노사 대화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으며, 경영권·인사권에 대한 노동자들의 약간의 발언조차 허용하지 않는 전근대적 사고에 빠져 있는 기업가가 많다. 심지어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노동조합 자체를 아예 불순한 조직 또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간주하는 극우파적인 사고방식도 남아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북구와 같은 노사 대화와 그에 기초한 산업평화, 고숙련, 고생산성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일 것이다.

셋째, 정부의 성격으로 한국의 정부는 너무 보수적이다. 보수정부가 연이어 집권해왔으며, 사민주의 정당은 아예 정치에 발을 붙이기도 어렵다. 정부는 거의 항상 노동자보다는 기업가 편에 서 있으며, 노동자를 적대시하는 조치도 드물지 않다. 한국의 보수정당은 일본 자민당이나 미국 공화당처럼 부자 우대, 반노동자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넷째, 국민 의식이다.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북구형 사회를 희망하면서도 그런 사회를 위해 높은 세금을 내겠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아주 소극적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독재시절부터 내려온 반공 교육이 너무나 철저해 우리 머릿속에는 약간의 좌파적인 생각조차 배척하려는 편협함이 있다. 그래서 북구형 사민주의조차 생소한 것으로,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다섯째, 인구 문제다. 북구는 모두 인구가 적은 나라인데, 우리는 인구가 너무 많아서 이런 모델이 안 맞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많은 인구가 사민주의에 결정적 장애라고 볼 수는 없다. 인구 소국은 우리와 안 맞는다고 하면서 미국이나 일본 같은 인구 대국의 관행은 열심히 답습하려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이런 저런 제약 때문에 우리에게 북구 모델은 너무나 멀리에서 깜박이는 등불일 뿐이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중차대하다. 오래 누적된 관치경제의 폐단도 씻어내야 하지만 10년간 과잉수입된 시장만능주의의 병폐도 심각하다. 정치의 독재뿐 아니라 시장의 독재도 피해야 한다. 관치경제(정치 독재)도 시장만능주의(시장 독재)도 옳은 길이 아니다.

양쪽 늪을 피하면서 제3의 길로 가는 외나무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야 한다. 이 길을 통해서만 경제위기 극복이 가능하고,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 세계 최고기업인 핀란드의 노키아 회장 요르마 올릴라가 올해 3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북구형 모델이 자본주의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 관건은 ‘가지 않은 길’을 걸을 용기와 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일찍이 50년대에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 선생은 사민주의적 신념을 가졌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정통 공산주의자가 점차 생각을 바꾸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를 함께 해결할 만한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 모델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죽산 선생은 놀랄 만한 선견지명을 가졌던 인물이다. 옹졸한 이승만 정권이 59년 죽산 선생에게 억지로 간첩죄를 씌워 처형함으로써 그의 높은 뜻은 안타깝게도 푸른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 국민이 좌파에 대한 맹목적 두려움과 오해를 떨쳐내고, 과연 어떤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인지를 생각할 때가 왔다. 경직적 좌파, 독재적 좌파는 나쁘다. 이에 반해 북구에서 보는 인간적 좌파, 민주적 좌파는 전인미답의 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해왔다.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넘어 멀리 보자. 언제까지 우리 국민이 시장만능주의와 관치경제 사이에 협착돼 고생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죽산 선생이 가신 지 어언 50년, 여전히 시기상조라고 하면 언제 그런 때가 온단 말인가? 우리 민족은 아예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자기비하다. “원래 길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가면 길이 된다”고 한 루쉰의 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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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흥 아주대 교수·정치학 그래픽 | 윤여경기자

ㆍ보수가 복지를, 진보가 성장을 말하는 ‘합의정치’를
ㆍ한국형 사회모델을 만들자

권위주의에 의존하던 한국의 국가주도형 정치경제모델은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그 동력을 상실하더니 97년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난파했다. 현재 한국의 정치경제모델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정도로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채 이념적 갈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연 우리의 사회모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세계화로 중단된 서유럽 사회모델

시장은 사적 주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의 공간이자, 경쟁으로 인해 불평등이 발생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구에서 자본주의 시장은 경제적 이익과 자유를 추구하는 합리적 개인들, 즉 부르주아가 정치·사회 세력으로 성장하는 기반이었다. 시민사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국가의 절대주의 정치에 반기를 들었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로 사회세력들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공존하기보다는 이념적으로 대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통선거권이 부여되자 사회적 갈등이 ‘혁명전야’로 불릴 정도로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더구나 29년 대공황은 실업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켰다. 요컨대 서구사회는 정치적 자유, 사회적 불평등, 실업에 대한 공포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근대국가체제가 만들어낸 이율배반적인 현상으로 인해 이념적 갈등을 겪으며, 불확실성의 시대로 빠져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시장과 민주주의 정치는 복지국가의 틀 속에서 공존할 수 있었다. 이는 경제성장으로 완전고용을 실현하고, 동시에 사회복지 지출을 늘려 사회적 보호를 제도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장과 복지의 이러한 선순환이 실현되는 데에는 서유럽 특유의 사회모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서유럽 사회모델은 노·사·정이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사관계 관련 정책(주로 임금인상 억제를 위한 소득정책)에 합의하고 이를 실행하는 정치경제모델이다. 각국의 정치경제모델은 다양했으나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녔다. 국가는 임금인상 억제에 합의하도록 노사를 유도하는 소득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임금인상 억제에 대해서는 사회정책(실업보험, 연금, 산재보험 등)으로 보상했다.
이는 ‘정치적 교환’의 결과였다. 노동은 임금 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완전고용을, 자본은 사회정책을 지원하는 대신 산업평화와 투자여건의 개선을, 국가는 정책 형성 과정에 이익단체의 참여를 용인하는 대신 정통성과 사회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 복지국가는 70년대에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서유럽 사회모델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합의했던 목표를 실현한 이후에는 합의의 정치가 쇠퇴하고 갈등의 정치가 심화된다는 점이다. 60년대에 완전고용이 실현되자 거의 모든 국가의 산업별 또는 단위 노동조합은 임금인상 억제의 소득정책에 반대했다. 그 결과 노사갈등뿐 아니라 노노갈등도 심화되었다.
더구나 70년대에 각국 정부는 케인스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적 보호를 위한 지출을 급속히 늘렸다. 즉 사회정책에 대한 지출을 늘림으로써 시장의 수요를 자극하고 이를 통해 경제성장과 완전고용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 세계화가 심화되자 정부 지출에 의한 국내수요 관리가 더 이상 완전고용을 유도하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동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일부 강소국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네덜란드 모델, 덴마크 모델, 아일랜드 모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어떻게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가?



세계화 이후 서유럽 사회모델의 변화

서유럽 각국은 복지정책 전반을 재편함으로써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적응하고 있다. 재편의 핵심은 사회지출을 일방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출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데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지출은 늘리는 대신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지출은 줄이고 있다.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조기 은퇴, 산재 및 장애보험 수급조건의 완화, 실업보험 등을 일컫는다. 실업자들을 노동시장 밖에 묶어둠으로써 실업률을 낮추고자 하는 정책이다. 이 정책은 수요를 자극시킬 수는 있으나 사회지출의 증대를 수반한다.
반면에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직업훈련, 취업알선 등을 일컫는다. 노동시장 안에서 고용을 증대시켜 실업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웨덴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는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이들 국가는 생산부문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세계화에 대응하고 있다.

둘째, 사회적 대화의 내용이 확대되었다. 과거에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는 임금인상 억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세계화 이후 사회적 대화는 임금문제뿐 아니라 사회복지정책 전반을 다루고 있다. 덴마크의 노·사·정은 90년대 이후 ‘3자포럼’을 구성하여 임금협상뿐 아니라 질병 및 출산 보상, 연금, 직업훈련, 사회헌장 등 사회복지 이슈 전반을 논의하고 있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사회적 대화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었다. 이는 사회적 대화가 정당정치와 연계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매우 주요한 변화이다. 과거에는 이익집단의 조직률이 높고 조직도 중앙·집중화되어 있는 스칸디나비아 및 중북부 유럽에서 사회적 대화(사회 코포라티즘이라고도 불림)가 제도화된 정도가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도 정당의 참여와 중재로 사회적 대화가 성사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경우 이익집단의 조직률이 낮으며, 조직의 의사결정 구조도 분권화되어 있다. 특히 정당정치가 합의정치로 전환된 나라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선거 결과 이념적 성향이 서로 다른 정당들이 연합해야만 정권을 구성할 수 있을 때 합의정치가 일상화되며, 사회적 대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아일랜드의 예를 들어보자. 87년 선거 이후부터는 보수 성향의 아일랜드 전사당 또는 사민주의 노선의 아일랜드 연합당이 정치적 이념이 다른 군소 정당들과 연합해야만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노사갈등과 사회적 분열로 점철된 아일랜드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경제적 기적을 이룬 시점은 이처럼 모든 정당이 “연합 가능한 정당”이 되면서부터다.

마지막으로, 시장의 조정을 통해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은 생산과정에서 임금결정, 자금조달, 직업훈련, 타 기업과의 관계 설정 등을 수행한다. 이 업무를 시장의 경쟁에 맡기는 나라는 ‘자유시장경제’로, 노·사·정 간 조정에 맡기는 나라는 ‘조정시장경제’로 분류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자유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압박하고 있음에도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들은 조정시장경제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한 임금 조정이 대표적인 예이다.

조정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도모하는 주요 수단이다. 예를 들면 사회적 대화로 임금인상 억제를 조정하고 국가가 이를 사회정책으로 보상하는 것이다. 조정체제 자체(‘생산레짐’으로 불림)가 사회복지와 상호보완적일 수 있다. 기업은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경우 주주를 만족시키기 위해 단기에 이익을 낼 수 있는 서비스 및 금융 산업에 관심을 가지며 직업훈련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한다. 반면 정부 또는 은행의 조정에 의해 장기금융을 활용할 수 있는 기업은 자동차와 반도체처럼 장기투자가 요구되는 상품의 생산에 관심을 보이며 직업훈련에 적극 투자한다. 이때 사용자는 기술자들이 실직 후의 삶을 염려하지 않고 한 기업 또는 한 산업에 특화된 기술의 연마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실업보험정책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주는 교훈

영미형 자유시장경제체제는 우리 산업의 현실과 엇박자를 이루기 때문에 매력적인 대안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주요 산업이 장기투자와 기업 또는 산업 특화기술의 연마가 요구되는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등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와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우리 산업 현실과 친화적인 사회모델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시장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스스로 조정을 수행하는 제도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시장경제는 근대국가체제가 잡힌 이후에야 발달하기 시작했다. 칼 폴라니의 지적대로, 시장은 국가 및 사회와 제도적으로 맞물린 가운데 발전해왔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나라에 따라 맞물림의 정도는 다르다.
서유럽 사회모델은 시장에 대한 조정을 통해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 점이 자유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하되 시장의 실패자에게 잔여적 복지를 제공하는 영미형 신자유주의 정치경제모델과 다르다. 과거 한국이 채택했던 국가주도형 정치경제모델은 노동을 배제하고 사회복지를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가 권위주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사회모델이 보여주듯이, 민주화를 위해 시장에 대한 조정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국가는 지향하고자 하는 정치경제모델을 노동과 자본에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노·사·정 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했던 정부는 김대중 정부이다. 98년 2월에 노사정위원회와 정당은 90개에 달하는 이슈를 일괄하여 사회협약을 타결했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주도형 경제체제를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데 노사정위원회를 이용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한 조정이 필요하지 않은 정치경제체제로 이행하는 데 사회적 대화를 이용한 셈이다. 결국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99년 2월과 2005년 7월에 각각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노무현 정부는 성장과 분배를 주요 정책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양자가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가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이념논쟁만 불러일으켰다. 소득정책과 사회정책을 연계시켜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도모하는 서유럽 사회모델은 우리 사회에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합의정치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한국의 경우 노동조합 조직률이 10%를 약간 웃돌 정도로 매우 낮으며 의사결정구조도 분권화되어 있다. 그러나 유사한 조건을 가진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노동조합이 이념 성향이 다른 세력을 포용해야 하는 필요에 따라 합의식 의사결정의 구조를 채택하면서부터 사회적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또 특정 이념을 이슈로 삼아 사용자연합과 대립하지도 않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노동운동이 대립에서 타협으로 전환한 것은 가톨릭 노선과 사민주의 노선이 하나의 노동조합(FNV)으로 통합된 76년 이후부터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념적 지향이 다른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통합된다면 사회적 대화의 제도화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문제는 정치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2004년 17대 총선부터 이념적 소수에 속하는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남미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통령제 하에서 다당제는 합의정치의 제도화에 기여하기보다는 극단적 대립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내각책임제가 대안인가? 정당과 유권자를 연계하는 하부구조가 매우 취약한 우리 현실에서 내각책임제로 전환될 경우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현 시점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은 제도 개혁보다 상대방의 신뢰를 얻는 정치다. ‘닉슨 중국에 가다’의 논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수 정당인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수교했기 때문에 국민이 좌경화를 의심하지 않고 지지했다는 데에서 나온 개념이다. 덴마크와 네덜란드가 복지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친복지 정당인 사민당이 앞장섰기 때문이다. 보수당뿐 아니라 유권자들도 사민당의 조치에 신뢰를 보낸 것이다.

정치는 사적 이익과 공적 이념이 역동적으로 맞물리며 진행되는 현상이다. 전체를 위해 때로는 자신의 이념과 이익에 반대되는 대안을 선택하는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요원한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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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사기자 ro@kyunghyang.com




신자유주의에 맞선 진보진영의 대안 만들기는 참여정부 말기부터 시작됐다.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10년간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신보수파가 부상했다. 이에 진보진영 내에서 대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대안 논의를 위한 각종 토론회가 개최되었고, 진보 싱크탱크 간 연대도 활발히 일어났다.

대개 성장 개념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대안모델로 주목을 받은 것은 생태·평화·사회민주주의론(조희연 교수 등), 노동중심통일경제연방론(손석춘 등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사회연대국가론(민노당 진보정치연구소), 사회투자국가론(유시민·김연명·신광영 등), 복지국가혁명론(복지국가소사이어티), 신진보주의국가론(이정협·정건화 등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등이다.

생태·평화·사회민주주의론은 양극화 등 현 위기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서 찾는다.


이 때문에 일국적 차원을 넘어 국제적 차원의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핵심은 유럽형 사회민주주의다. 그러나 ‘국가주의와 성장주의의 한계에 갇혀 좌초한 20세기형 사민주의’가 아닌, ‘생태·평화주의를 접목한 이상주의적 사민주의’다. 장기적으로 사민주의적 대안은 동아시아 차원으로 확장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중심통일경제연방론은 서구 사민주의 자체에 비판적이다. 사민주의 역시 노동 주도성을 보장하지 않는 기존 자본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동 중심 경제’를 주장한다. 국가나 자본이 아닌 노동 주도형의 경제 시스템 재편이 경제성장을 이끈다는 것이다. 더불어 고비용의 분단체제를 극복해 한반도 경제권을 구축해야 도약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회연대국가론은 국가나 재벌이 아니라 지식노동자가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하이로드(high road)형 성장전략’을 내세운다. 지식노동자 양성을 위한 교육복지의 확충, 이를 위한 사회연대적 조세 신설 등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모두를 위한 성장’을 이루겠다는 전략이다.


이에 반해 사회투자국가론은 신자유주의 시장담론을 수용한다. 이들은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로 자본이나 토지가 아닌 인적 자본을 꼽는다. 이 때문에 ‘복지도 투자’라고 본다. 사회복지 정책과 경제성장 정책이 선순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지국가혁명론은 신보수주의자들의 ‘미국형 선진화’에 대항해 ‘북유럽형 선진화’를 주창한다. 증세에 대한 반발을 고려한 ‘선(先) 복지혜택, 후(後) 조세부담’과 중산층을 포함하는 보편주의적 복지의 원칙을 내세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진보주의국가론은 ‘신보수주의’에 대항해 ‘역동적 공공성이 작동하는 사회경제질서’를 말한다. 역동적 공공성이란 성장전략과 연대를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지 않는, 진보적 개념이다. 즉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의 긍정성과 부작용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며 ‘능동적 세계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대안 담론은 생산적 논의를 불러일으키지도, 구체적 결과로 심화되지도 못했다. 여전히 현실성을 놓고 토론 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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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ㆍ5부 -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3) 지역연합을 구축하라

지난 8월29일 아르헨티나 바릴로체에서 열린 남미국가연합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한 회원국 정상들. 정상들은 외국 영토에 대해 위협하거나 무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바릴로체(아르헨티나) | 연합뉴스




라틴아메리카도 유럽처럼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 수 있을까? 중남미 연합 시민이라는 신분증,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중남미 의회, 빈국과 경제위기 국가를 지원하는 중남미 은행, 지역 안보를 책임지는 중남미 안보기구 등을 갖게 될까?


중남미 국가들이 최근 10년처럼 자주 만난 적은 없다. 이 대륙 국가들은 자국 문제는 물론 인접국과의 갈등조차 늘 미국, 유럽 국가들과 만나서 풀려고 했다. 이웃 나라들과 머리를 맞대려 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난 10년간 중남미 정상들의 만남엔 늘 ‘미증유’ ‘전대미문’ ‘사상 초유’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가장 인상적인 만남은 2008년 12월 초의 라틴아메리카·카리브 정상회의였다. 브라질 정부의 초청으로 중남미 33개국 정상들이 모두 모여 이틀간의 토론 끝에 2010년에 독자적인 기구를 창설하자고 합의했다. 폐막 연설에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드디어 중남미 국가들이 힘을 모았다. 이제 그 누구에게도 굽실거릴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200년 전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라틴아메리카가 제2의 독립을 선언한 셈이다.

이 정상회의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참가국 리스트였다. 회의를 소집한 브라질 정부는 중남미 33개국 정상에게 일일이 초청장을 보냈다. 중미와 카리브해의 소국 정상들을 공수하기 위해 브라질 공군 소속 비행기까지 보냈다. 특히 1962년 이래 국제무대에서 사실상 추방된 쿠바를 부르기 위해 룰라 대통령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33개국 참여 2010년 독자기구 창설 합의
친미 콜롬비아에서 공산주의 쿠바까지 하나로

하지만 이 대륙 일이라면 오지랖 넓게 간섭해온 미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옛 식민지 종주국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초청되지 않았다. 회의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친미 우파 콜롬비아에서 공산주의 쿠바까지 모두 참가하는 중남미 통합기구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의는 중남미가 주도적으로 냉전시대를 종식시키는 출발점이 됐다. 먼저 중남미 정상들의 결정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반세기 동안의 쿠바 적대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시인했고, “우리 모두는 동등한 파트너”라는 대중남미 외교의 새로운 원칙을 천명했다. 미국이 주도해온 미주국가기구(OAS)는 47년 전에 취해진 쿠바의 회원국 지위 박탈 결정을 철회했다.

6월 말 온두라스에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는 미국 정부가 즉각 쿠데타 세력을 비난하고, 고강도 제재조치도 취했다.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과 한목소리로 쿠데타를 비난한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의 유일한 혈맹으로 남은 콜롬비아 우파 정부의 외교 태도도 바뀌었다. 마약조직, 좌익반군과 내전 중인 콜롬비아는 8월 중순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주변국들에 에콰도르 침공사건을 환기시켰다. 콜롬비아군과 미군은 2008년 초 게릴라 비밀기지를 공격한다며 에콰도르 영토를 침공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변국의 반대 기류가 심상치 않자 콜롬비아 우리베 대통령은 사흘간 남미 7개국을 전격적으로 순방했다. 이 대륙의 한 나라가 미국과의 군사협정 문제로 이웃 나라를 순방해 양해를 구한 것도 처음이었다.


최근 1년간 미주 대륙의 변화는 지난 10년간 전개된 중남미 통합운동의 정치적 결실이다. 그 10년간 중남미 주요 11개국에서 집권에 성공한 진보 정부들은 이 대륙이 오래도록 간직해온 통합의 꿈을 되살렸다. 19세기엔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유럽과 미국의 팽창주의에 맞서 라틴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을 세우려고 했다. 20세기엔 쿠바 혁명 지도자 체 게바라가 이 대륙에서 미 제국주의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21세기 초에 집권한 중남미 좌파들은 두 가지 목표를 내걸고 통합운동을 전개해왔다. 중남미 대륙을 ‘신자유주의의 실험실’로 전락시킨 미국과 국제금융기구로부터 경제적 주권을 되찾고, ‘미국의 뒤뜰’로 변해버린 중남미의 정치적 시민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통합의 대의에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통합의 방향을 놓고선 두 개의 노선이 경쟁해왔다. 선수를 친 것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였다. 2004년 말 베네수엘라와 쿠바는 미주자유무역지대에 맞서는 진보적 대안으로 미주볼리바르대안(ALBA)을 주창했다. 최근 미주볼리바르동맹(ALBA)으로 개명한 이 협정은 중남미 9개국이 참여하는 급진주의 좌파 블록으로 발전했다.

시장주의 원리와 달리 각국의 경제주권을 존중하고 빈곤 타파와 사회통합 등 사회 분야의 ‘연대 교류(Intercambio Solidario)’를 활성화하자는 것이 협정의 골자이다. 베네수엘라가 제공하는 석유에 대한 대가로 쿠바가 의료서비스로 상환하는 것이 ‘연대 교류’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사회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쿠바의 의료 및 교육 서비스가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에 전파됐다. 두 나라 모두 문맹 퇴치에 성공을 거두었고, 빈민지역의 의료서비스도 크게 개선됐다. 또한 고유가 시대에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가 에너지를 우대 가격으로 제공하여 참가국들의 에너지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또 이 블록은 초국적기업에 대응하는 초국적 공기업 창설에도 적극 나섰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는 2010년부터 공동화폐 수크레(Sucre)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경제위기가 외려 미 달러화의 수요를 급증시키는 달러 지배체제의 모순에 맞서겠다는 것이었다. 한편 2008년 5월에는 남아메리카 12개국이 모두 참여하는 통합기구인 남미국가연합(UNASUR)이 발족됐다. 남미 정상들이 지역 통합블록을 건설하자고 합의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그 4년간 지역 통합을 위한 백가쟁명의 토론이 전개됐고, 구체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2009년 3월엔 ‘남미판 안전보장이사회’인 남미방위이사회(Consejo de Defensa Suramericano)가 공식적으로 설치됐다. 에콰도르 침공사건 직후 룰라 대통령은 역내 분쟁을 조정하고 안보 협력을 강화할 기구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는데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또한 2009년 5월에는 남미은행(Banco del Sur)에 관한 운영협정이 체결돼 실질적인 가동을 앞두고 있다. 남미은행은 2년 전 7개국의 서명으로 설립되었는데, 향후 남미 12개국 전체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계획이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노릇을 수행해온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들의 역할을 대체할 남미의 독자적 금융기관을 창설하자는 차베스 대통령의 제안이 실현됐다. 남미공동통화제도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현재까지는 공동통화의 명칭도, 발행 시점도 공식화되지 않았다.


남미국가연합 출범 과정에서 브라질은 룰라 대통령의 통합외교력에 힘입어 역내 리더의 위치를 굳혔다. 룰라 대통령은 콜롬비아, 페루 등 우파 정부들과 미주볼리바르동맹 소속 국가들 사이를 중재하면서 국내 정치에서 무르익은 통합의 리더십을 과시했다. 또한 룰라 행정부는 부시 미국 정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통합운동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끌어냈다.

룰라 정부의 통합 노선이 차베스 정부의 노선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차베스가 반미 친쿠바 노선에 동의하는 좌파 국가들의 강력한 이념 동맹을 구축하는 것에 진력하는 데 비해, 룰라는 좌파는 물론 우파 정부들까지 망라하는 지역 통합블록을 구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두 노선은 대립적이라기보다 상호보완적이다. 미주볼리바르동맹은 지역 통합블록을 반대하지 않고, 그 내부에서 좌파블록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중남미 통합운동은 내부에 여러 긴장관계를 내포하고 있지만 공동의 외교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중남미 국가들은 2005년 미주정상회의에서 미국이 주도해온 미주자유무역지대 구상을 좌초시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은 협상장에서 미국이 타국에 강요해온 농업보조금 철폐를 먼저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반면 차베스 대통령은 집회장에서 “미주자유무역지대는 중남미 민중에겐 사망선고”라고 역설했다.



경제적 주권·정치적 시민권 회복 노력

“이제 누구에게도 굽실거릴 필요가 없다”

처음으로 역내 분쟁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전례도 만들었다. 2008년 9월 남미국가연합은 볼리비아 정치 위기에 대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민주선거로 선출되고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얻은 모랄레스 정부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선언하고, 쿠데타나 분리주의 시도를 비판했으며, 모든 정치·사회 세력들에게 정치적 대결과 폭력 사태를 중단시킬 대화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남미 문제는 이제 외부의 개입이 아니라 남미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보여준 것이다.

중남미 통합운동이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산적하다. 그 중에는 단기간에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 경제통합 의제가 그렇다. 남미 4개국이 창설한 남미공동시장(Mercosur)의 경우 통합운동의 성장으로 참가 신청국들이 꾸준히 증가했지만, 역내 무역액 비중은 15%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역내 교류보다 유럽, 미국, 아시아 등 역외 교류가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또한 참가국의 경제력 격차도 심각하다. 브라질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이지만 파라과이는 104위의 경제빈국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소득 증대를 바탕으로 역내 교류를 꾸준히 증가시키지 않고선 경제 통합의 미래는 요원하다.

하나의 라틴아메리카로 가는 길에 숱한 장애물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회의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유럽에서 통합의 꿈이 현실이 되는 데 반세기가량 소요됐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는 190년의 몽상이 실현 가능한 이상으로 바뀌는 데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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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ㆍ새로운 ‘복지 자본주의’ 한·중·일이 뭉치면 가능하다

민주당이 총 의석의 64%를 차지한 일본의 국내정치 변화가 놀랍다. 어쩌면 앞으로 일본의 대외정책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차기 총리가 될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는 선거 전 여러 매체를 통해 자신과 민주당이 취할 정책기조를 미리 밝힘으로써 이미 그러한 변화를 예고한 바 있다. 관심을 끈 대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민당의 일본은 그동안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만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매몰돼 있었다.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 내수 중심의 ‘국민경제’ 발전과 복지 및 사회안전망의 충실에 만전을 기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공동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미국보다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여 지역 공동통화의 창설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공동체 형성 노력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하토야마의 포부대로라면 동아시아공동체 추진은 이제 일본의 국가 목표가 된다. 그런데 이 목표는 신자유주의 극복이라는 다른 목표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사실 일본 사회는 1990년대 초반 이후, 특히 고이즈미 정권(2001~2006) 하에서 급격히 진행된 신자유주의화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다. 분배와 평등의 가치가 지켜지던 과거의 ‘총중류사회’(모두가 중산층이라고 인식하는 사회)가 어느새 시장의 자유만이 존중되는 ‘격차사회’로 변한 것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더니 최근에는 결국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34%를 넘고 실업률 역시 사상 최악인 5.7%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회보장은 양과 질 모두 더 나빠졌다. 당연히 빈부격차는 심화됐다. 소수의 강자와 다수의 약자 간 갈등 상황은 이제 사회통합의 위기를 우려케 할 정도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화를 추진해온 자민당에 비난이 집중된 것은 사필귀정이었다.

일본의 신자유주의화는 미국 변수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레이건 정부 이후의 미국은 가령 80년대 중반의 ‘엔-달러 위원회’나 90년대 초의 ‘미·일 구조협의’ 등을 통해 자기식의 금융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체제를 일본에 이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일본이 신자유주의에 빠져들게 된 것은 상당 부분 그 이념의 확산을 주도한 미국의 영향 때문이란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90년대 초·중반의 ‘한·미금융정책협의’ 이후 급격한 금융 및 자본 시장 자유화 정책을 택하게 됐다. 그 졸속 개방에 기인한 바가 큰 97년의 외환위기 발생 이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앞세운 미국의 신자유주의화 압력에 더욱 취약해졌다. 그 압력은 이제 (만약 협정 내용 그대로 발효된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가해질 형국이다.

일본이나 한국만이 아니다. 동아시아와 중남미의 대다수 국가들도 특히 그들이 외환위기 등에 빠질 때면 어김없이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압력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됐다. 동유럽의 체제전환국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외가 있다면 오직 서유럽과 북유럽의 유럽연합(EU) 회원국들뿐이었다. 흔히 80년대 이후 (적어도 작년의 미국발 경제위기 이전까지는) 전 세계가 영미식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 혹은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수렴해갔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서유럽과 북유럽 중심의 EU식 경제통합을 간과하고 하는 얘기다.


이들 지역의 경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된 80년대와 90년대에도 영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들에서 (비록 과거에 비해 시장의 비중이 어느 정도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이 여전히 국가 및 사회의 개입이나 조정에 의해 영향 받는 이른바 ‘조정시장경제’ 체제가 거의 원형대로 유지되었다. EU는 바로 이러한 조정시장경제 국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통합체다. 이들 국가는 EU를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위한 안정적인 통상, 투자, 금융 및 통화 공간을 역내에 조성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역외 세력인 미국의 신자유주의 압력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유러피안 드림’의 요체인 복지 자본주의가 이 지역에서 지금까지도 건재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의 경제통합체로 뭉쳐 신자유주의의 침투를 관리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일본과 동아시아로 가보자. 민주당의 일본이 진정 신자유주의로부터의 탈피를 동아시아공동체의 추진과 연계하여 완수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EU식 경로를 밟아가겠다는 의미일 게다. 폐쇄국가가 아니라면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일본에도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지역과의 경제통합은 끊임없이 추구해가야 할 과제다. 기술의 발전과 거래비용의 감소 등에 따른 무역과 투자 영역 등에서의 경제통합 수요는 내부로부터 줄기차게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화를 지속케 하거나 촉진케 하는 경제통합만큼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 지금 일본의 입장이다. 과거 자민당의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다자주의 혹은 아·태경제협력체(APEC)와 같은 광역지역주의 틀에서의 경제통합을 도모해왔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일본 경제의 미국화 혹은 신자유주의화였다고 볼 수 있다. 경제통합은 참여국들의 경제 정책 및 제도, 종국에는 체제를 수렴하는 효과를 발생시키고 그 수렴은 많은 경우 상대적 대국의 것을 상대적 소국이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제 미국 주도가 아닌 새로운 틀에서의 경제통합을 모색해야 한다. 그 틀이 바로 동아시아 지역주의가 아니겠는가.


경제통합의 수요를 상당 부분 역내에서 채워간다면, 즉 동아시아 경제통합을 추진해간다면 민주당의 일본은 자신의 국내적 목표를 보다 더 유리한 환경에서 달성해갈 수 있다. 상기한 대로 일본은 이제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탈피하여 내수 중심의 신경제구조를 구축함과 동시에 삶의 질이 보장되는 나름의 복지사회를 건설해가고자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과거와 같이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통합 과정에 편승해서는 이루기 어려운 목표이지만, 지금부터 새로운 방식에 의해 주체적으로 추진해갈 수 있는 역내 국가들과의 경제통합 과정에서는 충분히 달성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역내 국가들과 협력하여 동아시아에서 이른바 ‘사회통합형 경제통합’을 진행시켜갈 수 있다. 경제통합의 수요는 일본뿐 아니라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 모두에서 부단히 증대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공동 수요에 부응하여 지역 경제통합을 발전시키되 그것이 개별 회원국의 사회통합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방식을 우리는 사회통합형 경제통합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방식은 필연적으로 각국의 복지 확충을 요구한다. 경제통합에 수반되게 마련인 구조조정 과정에서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사회안전망과 복지체계의 확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동아시아 각국의 경제체제는 약자 보호에 강한 유형, 즉 ‘복지 친화형’ 경제체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일본 스스로가 현재 원하고 있는 유형의 자본주의이기도 하다.


일본은 역내 최강의 경제대국이다. 따라서 지역 경제통합에 따른 역내 국가 간의 경제체제 수렴 과정에서도 최대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통합에서 수세적 위치에 머물러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인 것이다. 스스로가 먼저 복지자본주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할 경우, 그 노력과 병행하여 동아시아의 경제통합을 선도해갈 경우 일본은 그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각국의 복지 친화형 시장경제 체제 발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경제통합의 체제 수렴 효과는 결국 역내 최대 경제국인 일본의 체제를 중심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역내 국가들의 복지 확충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독일의 주도로 EU 회원국들이 공동 조성하여 역내의 빈곤 계층, 낙후 지역, 취약 산업 등을 위해 사용하는 ‘유럽구조기금’(European Structural Funds)은 좋은 예에 해당한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경제체제가 이렇게 복지 친화적으로 발전해갈 경우 동아시아의 소비경제는 지금보다 그 규모가 훨씬 커져갈 것이다. (재)분배 효과가 분명한 복지 및 사회안전망의 확충이 내수 확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소득 계층과 달리 저소득 계층의 가처분소득과 소비는 사회안전망의 강화와 복지 증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늘어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이 내부 격차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성장만이 아니라 복지와 분배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면 중산층이 두꺼워지고 낙후 지역의 구매력이 증가함으로써 중국의 (따라서 동아시아의) 소비재시장은 획기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은 물론 동남아와 동북아의 모든 국가들도 이같이 한다면, 동아시아의 (실질 및 잠재적) 경제력과 인구 규모를 감안할 때, 동아시아는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으로 발전할 것이 틀림없다. 잘만 하면 미국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 소비시장을 동아시아에 만들어냄으로써 안정적인 대안 통상 공간의 확보라는 지역 경제통합으로의 공동 유인이 역내 국가들 모두에 제공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사회통합형 경제통합을 발전시켜 가면 그와 궤를 같이 하며 일본의 자본주의 역시 새로운 유형의 것으로 발전해갈 수 있다. 요컨대 일본은 ‘탈미입아(脫美入亞)’적인 사회통합형 경제통합을 주도해감으로써 스스로의 체질을 개선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동아시아의 사회통합형 경제통합은 일본보다 우리 한국에 더 긴요한 것이다. 한국의 신자유주의화 속도는 일본보다 빠르다. 그 범위도 더 넓다. 사회적 손실 또한 더 크다. 양극화 정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고, 사회복지의 제공은 최저 수준이다. 한국 경제의 대외적 취약성은 97년의 외환위기와 금번의 금융위기로 충분히 드러났다. 그런데도 아직 미국 경제에 매달려 있다. 아니 오히려 그 경제와 통합까지 하려 들고 있다. 내수형 경제구조나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는 모색조차 안 하고 있다.


이제 변화를 꾀하고 있는 ‘신’일본과의 협력이 시급하다. 사회통합형 지역 경제통합은 일본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편 복지친화형 시장경제는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와도 상당한 교집합을 이룰 수 있다. 더구나 최근 중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내수와 복지 중심의 신경제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중국의 협력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중·일 3국의 협업이라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동아시아의 지역주의적 대안은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부디 한국이 중·일 사이의 교량역할을 담당함으로써 3국간 협력이 동아시아 전체의 사회통합형 경제통합으로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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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진수기자 soo43@kyunghyang.com 

 지난 6월7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등 걸프지역 산유국 4개국은 ‘걸프통화협정’에 서명했다. 유럽연합(EU)의 유로화 같은 역내 ‘단일통화’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서명한 4개국은 모두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들이다. 나머지 회원국인 아랍에미리트연합과 오만이 통화협정 참여를 일단 유보했지만 걸프회의는 지난해 이미 공동시장을 출범시킨 상태다. 걸프회의는 이르면 2010년에 단일통화를 만들어 유통시킨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지난해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각 지역의 경제블록들은 무역대금 결제시 달러화 대신 자국 통화를 사용하거나 새로운 통화를 만드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신용이 떨어진 달러화를 사용할 때 따라오는 ‘불안정성’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미에서 지역연합을 주도하고 있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이미 지난해 10월부터 무역대금 중 일부를 자국 통화로 결제하고 있다. 파라과이와 우루과이도 내년 말부터 자국 통화를 무역결제에 사용키로 했다. 칠레와 콜롬비아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 홍콩은 지난 7월부터 위안화로 무역결제를 하고 있다. 달러화나 유로화에 비하면 아직 미미한 수준이지만, 위안화는 조금씩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지난 7월6일 르완다와 부룬디가 동아프리카공동체(EAC) 관세동맹에 가입하면서 역내 단일통화 추진을 시작했다.


지역 경제블록들은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세계 금융위기를 교훈삼아 역내 단일통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 의존하고 있는 현 경제체제에서는 서구의 경제위기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다자간 무역협상이 큰 진전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변 국가들과의 교역에 더 큰 무게를 두겠다는 의미도 있다.


1999년 출범한 EU의 유로화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것도 나머지 경제블록 참가국들에 희망을 주고 있다. 유럽은 ‘공동시장’과 ‘경제통화동맹’을 거쳐 ‘완전 경제통합’으로 가고 있다. 2007년 12월 서명된 ‘리스본 조약’이 최종 비준되면 초국가적 정치공동체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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