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대는 정보화 시대이다. 정보화는 각종 지식-일상생활과 소비재에 대한 여러 정보 그리고 보다 학문적인 세계에 속하였던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쉬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정보 확대에 있어서의 근래의 특징은 정보들의 즉각적인 상호 교환이 용이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생활과 지식분야에서만 아니라 사회생활과 정치에서도 큰 의미를 가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정치의 핵심이 사회적 소통의 정책적 결정(結晶)에 있다고 보는 경우 정보 매체의 발달은 민주주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발달에도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일 네이버 문화재단이 지원하는 ‘열린 논단’에서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이재현 교수의 ‘디지털 세계와 사회: SNS와 소셜리티의 위기’라는 강연이 있었다. 이 교수의 강연은, 제목에 이미 시사되어 있는 대로, SNS로 대표되는 사회적 통신망의 발달이 사회적 소통의 영역 확대와 동시에 위기를 품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경고하였다. 이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은 비단 SNS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매체가 주도하는 여론 사회에서 또는 더 나아가 대중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일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보다 넓은 테두리를 염두에 두면서 이 교수가 지적하는 문제점 몇 개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이재현 교수의 분석에서 중요 개념은 ‘소셜의 소프트웨어화’이다. 쉽게 풀어 말해 본다면, 이것은 사람의 본래적인 사회성이 그것을 가동하는 장치-이 경우에는 컴퓨터 사용에 필요한 소프트웨어-에 의하여 규정 또는 규제된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 사용자는 컴퓨터에 내장되어 있는 이용 절차를 쫓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보다 두려운 것은 그것이 한정된 기계 장치를 넘어, 그것이 지배적인 관습이 되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행동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 규범에의 복종은 모든 사회화 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자발적’ 예속화는 SNS에서는 물론, 보다 일반적으로 매체의 지배 하에서 특히 심화되는 현상이다.)

(출처: 경향DB)


전자매체에 의하여 인간의 사회적 성격이 형성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물론 개인의 개인됨이 바뀌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SNS 이용자가 어떻게 본래의 자기로부터 다른 자기로 바뀌게 되는가는 쉽게 예시된다. 가령,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이용자는 ‘계량화’에 의하여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친구 수, 팔로워 수, 댓글 수, 좋아요 수, 태그 수’ 등을 자기의 존재를 규정하는 지표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객체화하는 것이고 진정한 주체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또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자 할 때에도, 일정한 항목과 양식에 맞는 것만을 메시지에 포함할 수 있다. 이번 강연에서 대상이 된 전자매체가 아니라도 매체에 전달되는 전기적(傳記的) 사실은 대체로 그렇게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 이력서와 같은 것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출신 학교, 관직 등으로 사람에게 상표를 부치는 것도 그러한 객체화의 일부인데, 이러한 주체의 객체적 전환은 관직을 절대적으로 중시했던 한국 사회에 오래 지속되어 온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전자매체에서 보는 단순한 메시지 전달의 강박도 자기 객체화 또는 자기소외를 촉진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SNS 사용자는 자신이나 주변에 일어난 사실을 이야기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것은 앞의 신분 명세를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반대의 요청인 것 같으면서도, 자아의 공허화라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요청받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큰 것만이 아니라 사소한 것까지 글로 전달하여 달라는 것이다. 작은 사건까지를 전하라는 것을 이재현 교수는 ‘미세 이벤트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 자기 이야기를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경우 이야기는 상투적인 공식을 빌리는 것이어서 사실의 진정한 내용이 상실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많은 자서전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자기가 만드는 것이나 밖에서 오는 것이나 파편적 정보의 누적은 인간을 파편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자아는 언어화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침묵의 반성에서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긴급한 소통의 요구는 침묵과 반성의 시간을 빼앗아 간다. (물론 진정한 주체로서의 자아 또는 진정한 자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아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찾아져야 하는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는 있다.)

‘소셜의 소프트웨어화’는 물론 개인을 넘어 사회 구성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소프트웨어의 작동을 위하여 따라야 하는 지시와 명령은 보다 더 넓은 영역에서 강제성을 가진 지시가 될 수 있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통 매체에는 메시지 전달을 요구하는 지시가 뜬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메시지를 띄우는 것은 저절로 심리적 강박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현 교수가 인용하는 보드리야르의 말로서, ‘강제된 교호성(사회성)’이 생겨나게 된다. 소통에 참가하는 것이 강제적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제성은, 이 교수의 설명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 참가하라는 지시이다. 그런데 이 강제성에는 정치적 강박이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민이나 국민으로서의 의무로서 표현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은,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사회 소통의 네트워크 참여를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실질적인 삶의 현실에 관계되는 것이든 아니든, 이념이나 당파 또는 다른 ‘관시’의 연줄로 타고 여러 가지 정보와 질문과 구호에 ‘응답’하라는 요구들도 쉽게 이러한 ‘강제된 사회성’의 내용이 된다.


그런데 전자 매체 또는 매체의 발달로 인하여 참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매체가 파악하는 사회가 반드시 사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자 매체 그리고 매체는 사회의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지구의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보도한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러나 선택된 사건으로 구성된 세계, 보도와 이미지에 의하여 평평해진 시공간이 참으로 사실의 시공간과 세계에 일치하는 것일 수는 없다. 더구나 그것이 나에게 또 나의 공동체에 의미 있는 체험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보드리야르가 드는 예로서, 충실한 보도의 경우에도 지도가 실제의 땅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미루어 볼 수 있는 일이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 외에도 여러 요인으로 가상의 세계가 탄생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대중매체라고 한다. 대중매체에 보도되는 것은 ‘(행동의) 의지나 대의(代議)가 의미를 갖고 판단이 작용하는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그러한 사건들과 이미지의 공간은 ‘전시대에 있어서 국민을 대변하기도 하고 연극 같기도 했던 정치 또는 공적 의견의 공간’과는 다른 것이다.’(영역 <보드리야르 문선>) 이것이 대중으로 하여금 많은 보도되는 사건들에 무감각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현대인은 가상의 세계에 산다. 그런데 가상을 벗어나서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는가? 보드리야르는 이 회귀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 오늘의 세계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과장된 이론화에서 나온 진단이라고 생각해볼 수는 있다. 이재현 교수가 인용하는 다른 저자들은 오늘의 사회성-가상현실이 되는 사회성은 ‘육체적 고통과 차별을 근간으로 하는 실재 세계로부터 벗어나 가상의 세계로 떠나라는 유혹’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 인용이 시사하는 것은 이론에서 벗어나 고통스러운 인간의 문제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것을 사회적 정치적 과제화가 되게 하는 데에는 고통 받는 본인을 넘어가는 이해-반드시 이념화는 아니라도 적어도 인간 조건에 대한 공감적 이해와 그에 대한 제도적 대책을 요구할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경고를 받아들인다면, 그 과정이 통념적인 개념화일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구성된 가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고통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은 이념의 오만을 넘어 인간의 현실에 대한 경건한 존중으로 찾아가야 하는 새로운 길일 수밖에 없다.

※ 2011년 8월부터 연재해 온 김우창 칼럼을 마칩니다. 칼럼을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보여준 김 교수께 사의를 표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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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상황이 아닌가 한다. 물론 관심의 쇠퇴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데모가 빈번하고 단식 투쟁이 벌어지고, 최근에는 비극 중에도 비극인 분신자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열렬한 구호들의 외침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치적 관심의 쇠퇴는 바로 격렬한 행동과 언어를 휘두르는 정치의 움직임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볼셰비키 혁명기에 레닌은 인민을 위하여 일어섰다는 혁명가가, 혁명이 인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혁명 그 자체를 본업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를 한 일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민주주의가 정치 운동에서 능률적인 민주적 절차로 자기 변신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데에서 오는 정치적 역기능을 지적한 일이 있다. 최 교수의 진단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제대로 작동하는 정당 정치의 확립이 중요하다. 국민의 입장-물론 계층적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국민의 입장을 바르게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정당이다.

물론 국민의 입장이라는 것도 자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석명(釋明)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몇 해 전의 미국 대통령 선거 직전에 뉴욕타임스에 두 가지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가 실렸다. 하나는 후보자 지지와 정책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급한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후자에 대한 답은, 돈 문제와 같은 것도 있었지만, 당장에 생각하고 있는 일들, 병 문제라든지, 물품을 구매하는 일이라든지, 어디를 급하게 가야 한다든지, 일상적인 작은 일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의 일상생활은 대체로는 이러한 사소한 일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에게 그리고 선거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보다는 공적인 문제이다. 국방과 같은 일 이외에 오늘의 사회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하부구조들--수도, 전기, 하수, 도로, 교통, 통신 등의 시설들이 공적인 관심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화가 진전되고 있는 오늘날, 국제적인 비교도-가령, 평균수명, 공권력의 부패도, 여성 사회진출, 진학률, 공기청정도 등의 국제적인 비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러한 지표들이 경제나 국제관계에서의 국가 위상뿐만이 아니라 국민의 정권 평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이나 환경문제는 정치적 열정을 불러내지는 못하면서도 가장 큰 공적인 관심사가 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포함하면서도, 역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람의 살림살이 문제들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살림의 문제에서, 위에 말한 잔일들보다는 더 중요한 항목들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큰 항목들이란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황을 이루는 일들이다. 그것은 옛날 식으로 생각하면, 의식주, 또는 구휼(救恤), 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여러 문제들, 또는 환과고독(鰥寡孤獨)의 괴로움에 관계된 일들이다. 전통적인 정책의 많은 것은 고통의 문제에 관계된다. 인생행로 전부를 포괄하는 생로병사는 사고(四苦), 또는 인생팔고(人生八苦) 중의 반이기도 하다. 이에 비슷한 오늘의 삶의 문제들은 출산, 육아, 교육, 직업, 의료, 노년 복지 등의 정책이 될 것이다. 이것들은 고(苦)의 주제들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꾼 것이라 할 것인데, 한발 더 나아가 요즘에 이야기되는 행복이나 안녕도 여기에 추가될 수 있다.

 

일러스트 김상민

정치의 기능은 지금 시점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생고를 완화하고 행복을 증대시키는 데에 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수단은 경제이다. 국민의 관점에서 그것은 고용이고 또 복지이다. 복지제도는 최소의 행복으로부터 탈락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을 보장하려는 제도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일관된 국가적 계획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의 실패는 이제 역사적 체험이 되었고 지금에 와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 되어 인생의 고락(苦樂) 문제도 적어도 당분간은 그 테두리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동력은 이익의 추구이다. 그것이 국부(國富)가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공동 과제의 수행을 개인 이익의 추구에 맡길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인다. 그러나 이익 추구의 체제 유지에도 공적 질서가 필요하고, 여기에 사회 전체의 생활 안정 문제가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빈부차도 포함된다. 그것은 사회정의 문제를 떠나서도 안정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익 사회에서도 그 전체의 질서를 위해서는 적어도 사회활동의 여러 부분-갈등과 모순을 포함하는 부분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조정이 필요하다. 여러 집단들 사이에 이익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의 방향과 정책의 우선순위에 차이가 없을 수가 없고, 사람의 일로 자체 모순을 산출하지 않고 지속되는 일은 없다. 사실 어떠한 체제에서든 삶의 안정 또는 풍요를 위해서는 복합적 요인들의 상호 조정이 있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조직은 그것의 결여로 하여 사회의 여러 문제를 놓치게 된다. 이것을 수용하는 경우, 사회 각 부분의 총화는 상호조정을 필요로 하는 복합 체계가 된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체제를 분석하고 조정하는 데에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수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체제에서의 정치는 정치가가 아니라 전문 지식을 쌓은 사람이 맡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삶의 문제 해결에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가 된 마당에서는 경제에 밝은 사람이 정치를 떠맡아야 할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러 관점을 종합하여 최선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철학적 능력이 좋은 정치가의 자격 요건이라는 예로부터의 생각은, 조금 더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문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치지도자를 선발하는 전문 고시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없다. 정치에 정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람의 일에 대한 바른 판단은 반드시 전문 지식이나 훈련에서 나오는 판단에 일치하지 않는다. 좋은 판단과 행동은 인간적 지혜, 현실에 대한 직관적 판단과 행동적 결단, 이러한 것들의 결합에서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 행동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인간 행동의 영역을 구성한다.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말하는 것도 그것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때 생겨나는 신나는 느낌, 해방감과 힘도 정치가 독자적인 인간 행위의 공간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의 핵심이 국민의 살림살이에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소통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지만, 사회적 필요와의 소통이야말로 정치에 주어진 오늘의 과제이다. 정치가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에 기초하여 사회적 소통을 얻어내려면, 문제에 대한 합리적 이해 또는 과학적 분석이 선행하여야 한다. 거기에서 정책이 나오고 정당의 존립 이유가 생겨난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정당의 타협도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정책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구체적인 정책안의 주고받음이 없이 어떤 타협이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복합적 이해와 그에서 나오는 정책 개발은 하나의 정치 행동으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소신을 약화시키고 집단열정의 달아오름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역설은, 사회의 살림 문제가 중요해진 시점에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또는 해결을 지향하는 정책안들을 내놓지 못한다면, 정치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군사정부에서 민주 정부로의 이행은 거의 전적으로 행동주의적 정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정치가 사회의 살림살이에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정치가 그 영향력을 회복하는 길은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방안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하여 우리 사회에서 암암리에 받아들이는 전제는 권력과 벼슬과 이권의 분배 기구라는 것이지만, 이 생각은 이제 조금씩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회 문제에 정치적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정치열의 감소를 무릅쓰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의 인간적 위엄과 삶의 진정한 가능성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연결된다. 정치 지도자는 여기에 봉사하는 윤리적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되고, 정치 참여는 국민에게도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된다. 그러면서 다른 방향에서 공공 행복의 활동이 증대될 수도 있다.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경쟁은 타매의 대상이 되지만, 사회 공간에서의 진정한 수월성의 추구는 그러한 행복의 하나이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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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여름 나는 네덜란드의 레이덴 대학에서 열리는 국제 비교문학대회에 참석하였다. 학회에 참석하는 일에서 틈을 내어 나는 데카르트가 머물렀던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17세기에 현대 서양철학을 새로 시작하게 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데카르트는 레이덴에 거주한 일이 있었다. 그는 사유의 실험으로서의 철학을 시작한 철학자이기도 하지만, 전쟁이나 여행을 통하여 쌓은 인생 경험도 적지 않았다. 독일에 있었던 전쟁에 참가한 이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철학, 수학, 천문학 등 여러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기 시작하였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원한 것은 인간의 여러 지식들을 논리나 수학으로 묶어 통일 과학을 고안해내는 것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이러한 분야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으나 30세를 조금 넘긴 다음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20여년을 그곳에 거주하면서, 프랑스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그가 파리를 떠난 동기는 분명치 않다. 그가 남긴 편지 등에서 미루어 그의 이주 결심은 명성과 더불어 번거로워지는 사회생활, 인간관계를 떠나, 조용하게 학문할 수 있는 환경을 찾고자 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달리는 갈릴레오의 지동설에 공감하고 있던 그는, 자신의 연구가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이주하였다고도 한다. 


지금은 그 이유도 거의 잊어버렸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데카르트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레이덴에서 그가 머물렀던 동네와 집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수소문을 해본 결과 그가 살고 있었던 곳은 라펜불그 가이고 번지는 21번지라고 하였다. 라펜불그 운하 옆 길을 따라 걸어 가다가 찾은 집은 평범한 연립주택 비슷한 빌딩이었는데, 입구에 “1640년 데카르트 거주지”라는 놋쇠 표가 붙어 있었다. 거리와 주소도 그렇지만, 그것은, 레이덴 시의 건물들이 그렇듯이 17세기로부터 계속 유지되어 온 집이었을 것으로 보였다. 데카르트는 이사를 자주하여 이 라펜불그의 집에서도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럽 도시 이미지(출처 :경향DB)


그런데 여기에서 데카르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철학자로서 그를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도시와 거리와 주소가 지금도 알아볼 수 있게 남아 있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는 점이다. 2005년에 데카르트의 전기를 쓴 한 저자는 자기가 찾았던 데카르트의 거주지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 곳을 들어보자면, 그가 전기를 쓰기 위하여 파리에서 세 들었던 아파트는 불튀부르 가의 1629년에 지은 빌딩 안에 있었는데, 데카르트는 그곳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에쿠프 가의 비슷한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쓰고 있다.


이런 것들을 다시 회상하는 것은 이번에 전국적으로 도로명과 주소를 고치겠다는 특이한 정부 정책 때문이다. 이제 그것이 시행된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시행하려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그에 대한 설명은 이미 나왔을 성싶다. 그러나 설명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앉아서 궁리해서는, 경비만 따져도왜 해야 하는지 짐작을 할 수 없는 것이 이 일이다. 발상은 아마 우리의 도로명이나 번지수가 불합리하다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로명 또는 동네 이름이 그런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번지 순서가 일정치 않은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것들은 합리적인가? 합리적이라 찾기가 쉬울 것인가?


도로명주소 표지판(출처 :경향DB)


사람의 이름을 포함하여 모든 이름은 불합리하다. 그렇다고 우리 이름을 군번처럼 바꾸는 것이 합리적일까? 이름은 기억하여야 하고 기억을 통해서 구체적인 것들을 연상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독특한 사건들의 연쇄로 이루어지는 기억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이름에 - 사람의 이름이나 지역의 이름이나 - - 구체성을 부여한다. 집단만이 아니라 개인도 기억의 연쇄 속에서 정체성을 갖는다. 기억은 자기가 살던 동네를 포함한다. 위에 말한 레이덴의 거리나 파리의 거리도 그렇고 그 이름도 역사의 일부이다. 그것은 데카르트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유명 무명에 관계없이 거리는 기억과 추억과 역사의 일부이다.


길거리로서 가장 합리적인 원리에 가까운 것은 미국의 많은 도시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소변경을 기획한 사람들은 미국 도시와 같은 것을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가령 뉴욕처럼 길거리나 번지수가 일관된 숫자로 되어 있고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한 도로의 도시는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의 길거리에 대하여 기이한 논평을 한 일이 있다. 조금만 가면 벽에 부딪히는 듯한 유럽 도시의 길거리에 비하여 미국 도시의 길들은 일직선으로 똑바르고 곧장 고속도로로 연속될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 때문에 미국의 도시들은 가(假) 도시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 미국의 바둑판 길들은 미국의 자유의 상징이다. 그 자유란 함께하는 사회를 두고 대결하고 토의하고 협의하는 자유가 아니라 빠져 나갈 수 있는 자유이다. 미셸 푸코는 만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소감을 말한 일이 있다. 동성애자인 푸코는 사르트르가 말한 바와 같이 막힌 사회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빠져 나갈 수 있는 넓은 대륙의 자유를 생각한 것일 것이다.


벽에 막힌 길거리의 도시와 탁 트여 있는 합리적 도시 - 어느 쪽이 좋다고 골라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인간사가 그렇듯이 적절한 조화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의 도시는 다 같이 역사의 소산이다. 우리가 쓰는 동(洞)이란 동굴, 골짜기, 골과 같은 공간을 말한다. 영어의 ‘스트리트(street)’, 프랑스의 ‘뤼(rue)’는 길의 뜻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바로 ‘도로명’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지만, 거기에 많이 나오는 “길”이나 “로”도 고을이 아니라 도로가 중요한 지표가 된다는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이것이 반드시 일직선의 도로에 따른 지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원 생활을 한 일이 있다. 집을 나와서 대학으로 가자면, 꾸불꾸불하면서도 하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간다. 이 길의 이름은 수 차례 바뀐다. 가령, 같은 길인데도, 세인트 존스 대학 옆은 세인트 존스 스트리트, 트리니티 대학 옆은 트리니티 스트리트, 킹스 대학 옆은 킹스 파레이드이다. 이것은 이러한 대학들이 유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는 곳에 대한 체험이, 우리나 마찬가지로 직선이 아니라 공간이었다는 사실로 인한 것일 것이다.


영국을 말하자면, 영국은 역사를 존중하는 나라 - 어떤 때는 역사의 불합리한 타성에 매어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제일 알려진 교수의 하나는 스티븐 호킹 교수라고 할 수 있다. 몇 해 전에 은퇴한 그의 교수직 이름은 루카스 수학 교수(Lucasian Professor of Mathematics)였다. 17세기에 뉴턴도 같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전문분야는 물리학이다. 물리학이 수학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뉴턴에서 호킹에 이르는 사이에 물리학이나 수학 또는 다른 학문의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교수직의 이름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대학의 학장 명이나 정부 부처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는 영어의 철자법도 그에 비슷하게 국가에서 간여하지 않고 놓아두어도 저절로 관용이 성립하고 그것이 정서법으로 정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을 바꾸면 사실을 바꾼 것에 못지않게 큰일을 한 것처럼 느끼는 경향이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 - 유명한 소설의 제목이 되어 더욱 유명해진 - - 말에, “이름이 무엇이란 말인가?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고 그 향기가 다를 것인가?”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 우리는 “장미는 의미 없는 음절의 조합이다, 그러나 기억과 연상의 누적이 장미를 사실이 되게 한다 - 이러한 말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서 이름이나 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과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이 이름과 하나가 됨으로써, 이름은 사실의 무게를 얻는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약방문이라 할 수도 있지만,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다. 이왕에 그렇게 되었으니 주소로 옛것과 새것을 병용하는 것은 어떨까? 주소는 다시 말하여 사람의 고유한 이름과 같다. 아마 그 누적된 연관을 다 고쳐 나가는 것은 한이 없는 작업일 것이다. 주민등록도 그렇고, 토지대장도 그렇고, 외국과의 연락도 여기에 연결된다. 내비게이션에 연결된 GPS의 데이터베이스도 그렇다. (오늘과 같이 국제관계가 얽혀 있는 세상에서 주소를 고치는 것은 단순히 국내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또는 지구적 문제이다.) 보도되고 있는 여러 어려움만 보아도,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한다. 오래된 이름을 마음대로 고치면, 잃는 것은 많아도, 생기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건전한 관점일 것이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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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외신에 수단에서 최신 기술의 활용이 농업 생산에 큰 진보를 가져오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수로(水路)를 관리하고 가축의 건강을 점검하는 데에도 최신 기술이 활용되는 데, 특이한 것은 소들을 냉방이 된 우리에서 기른다는 것이다. 소들을 위해서나 환경을 위해서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은 과학 기술로 하여 일어나고 있는 전 지구적인 변화의 한 증표가 된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기이한 연결이기는 하지만, 만델라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반응이 전 세계적인 것도 세계화의 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과학 기술에 못지않게, 한 곳에서의 정치적 성공은 다른 곳에서도 곧 학습과 모방의 대상이 된다. 다만 그것은 보편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경우에 그렇다. 이미 많이 나온 논평에 하나를 더하는 불필요한 일이 되겠지만, 만델라가 온 세계에 보편적 울림을 갖는 정치지도자가 된 사정을 잠깐 생각해보기로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만델라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 극한적인 조건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승리를 가져 온 것은 물리적인 힘보다는 정치적 이상의 힘이었다. (물론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깊이 관계되는 이상이었다.)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이 혹독한 남아프리카의 백인 우월주의 통치는 무력 저항을 낳고 급기야는 온 나라를 내란 직전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만델라는 이 위태로운 상황을 역전시켜 평화적 해결로 이끌어 갔다.


정치 투쟁은 종종 폭력과 증오의 힘을 동원한다. 그리하여 악마와 손잡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정치라는 생각이 있다. 어쨌든 정치 투쟁은 그 나름의 열광을 낳는다. 그리고 모든 힘이 그러하듯이 정치적 열광 그리고 폭력은 장기 집권을 원한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에는 스티븐 핑커의 용어를 빌려 “우리 본성의 보다 착한 천사”가 숨어 있어 평화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소망은 너무 쉽게 드러나면 약자의 약점이 된다. 이 약할 수 있는 소망 또는 꿈을 뒷받침하는 것이 강인한 윤리적 의지이다. 이 윤리의 힘은 정치의 폭력에 맞서서 정치를 평화로 전환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만델라의 삶이 갖는 호소력은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면서도 강인한 투지로써 이 천사의 은밀한 꿈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준 데 있다.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입원해 있는 프리토리아의 병원 앞(출처 :경향DB)


그의 서거 후 다시 보도된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만델라의 높은 업적에 관하여 질문했다. 그것에 답하여 만델라는 큰 정치적 업적은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으며, 집단적 노력만이 그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의 민주화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희생적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돌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주의가 그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그 스스로도 노력을 더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발언은 만델라의 겸손한 자세를 나타낸 것이지만,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도 단순한 수사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발언은 대체로 수사적이라기보다는 정확하다는 인상을 준다.) 힘을 함께한 사람에는 아프리카국민연합(ANC)을 비롯하여 흑인의 인권과 남아프리카의 민주화를 위하여 노력한 그의 동료와 동지들이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그의 투쟁에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참여하였다. 거기에는 많은 남아프리카 작가들도 포함된다. 1991년에 노벨상을 받은 나딘 고디머는 반인종주의 투쟁에 동조하는 작품을 썼고 만델라가 종신 징역을 선고받은 재판에 나오기도 하였다. 2003년 노벨상 수상자인 J, M. 쿳시도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반인종분리주의와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만델라의 정치 투쟁은 보다 먼 곳에서도 지지를 얻었다. 2007년에 영국 의사당 앞 광장에 만델라 동상이 세워진 것은 그의 투쟁이 일으킨 공명(共鳴)의 외연(外延)을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못지않게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평화적 정치 수단의 유지였다. 무장 투쟁을 지휘한 일도 있으나 그는 무고한 사람이 다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보다 큰 원칙은 역시 평화적인 수단의 정치 투쟁이었다. 만델라는 종종 간디에 비교되지만, 간디의 ‘아힘사’의 규칙은 그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 만델라의 정책 목표의 하나는 화해였다. 이 목표를 위하여 설립한 것이 진실화해위원회이다. 그것은 인종분리주의 정치 하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의 당사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고백하게 하고 그에 대하여 사면을 주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비판--어떤 필자가 나열하는 바로는 “추방, 공포, 고문, 유기, 신체절단, 살인” 등을 묵살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불가능하게 하는 일이 이 위원회가 하는 일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화해의 정책이 정권의 평화적 이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이 없다.


화해를 원리로 하는 정치 행동 가운데에도 놀라운 것은 백인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데클레르크와의 상호협력이다. 민주선거를 통한 정권 이행은 그의 협조를 얻어 순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데클레르크는 인종주의적 정책에 동조한 일도 있지만, 그의 당에서도 ‘계몽파’에 속하여 민주주의 원칙을 받아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는 곧 인종분리주의 폐기, 만델라 석방, 민주 선거 등 인종주의를 청산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 그는 부통령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가 만델라와 나란히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어떤 논평은 만델라의 화해 정책이 그의 “능란한 정치 수완”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정략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윤리적 행동의 원칙은 정치만이 아니라 보다 신변적인 일들과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의 간수들을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하고 점심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의 기본적인 인간됨”을 인정하였다.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검사를 초대하여 점심을 같이 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와 함께 민주주의 이행을 협상한 데클레르크는 그가 전혀 원한을 품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모든 것이 정략적 계산의 표현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를 움직인 것은 모든 인간의 정신적 존엄성에 대한 깊은 신뢰였다.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소에토 지역에 그려진 넬슨 만델라의 초상(출처 :경향DB)


만델라가 세계를 감동시킨 지도자라고 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진실과 화해 정책이 정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는 것은 앞에 말한 대로이다. 만델라를 계승한 정부는 계속 부패와 불법으로 오염된 정부라는 비판을 받았다. 남아프리카는 세계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큰 나라이다. 백인이 독차지하고 있던 토지 가운데 30%를 흑인 소유로 옮기게 하겠다는 만델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직 흑인 소유의 토지는 3%에 불과하다고 한다.


필자는 2000년 8월에 남아프리카를 방문한 일이 있다. 짧은 기간에 돌아본 것이지만, 그렇게 수려한 산하와 정비된 도시가 세계 다른 곳에는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케이프타운 근교에 쌓여 있는 컨테이너들이 흑인들의 집이라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정비된 길거리임에도 도시에 걸어 다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늘 들었다. 택시 운전사는 총기를 차에 싣고 다녔다. (1999년에 출간된 쿳시의 소설 <치욕>은 반드시 정치가 주제가 되는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야기의 배경이 민주화 이후의 무법 사회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한 평자는 이 소설이 남아프리카를 ‘강간의 나라’로 그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러가지 보고를 종합하면, 지금도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백인이 독점하던 부유층에 진출한 흑인들이 적지 않으나, 사회구조는 별로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필자의 방문 이후 13년의 세월이 흘렸지만, 거리의 사정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큰 발전이 없는 데 대하여 만델라의 책임도 없지 않다는 소리도 높아진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지도자가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바른 정치 원칙과 윤리적 원리로 행동하는 정치 지도자를 갖는 것, 그것이 나라의 기초가 바르게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와 사회의 전체적인 발전은 그것을 계승하는 다양한 작업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최근에 데클레르크는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남아프리카에 기본적인 안정을 가져 온 것이 만델라 전 대통령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든 것이 잘될 수는 없다. 사람의 일에는 그것이 보이지는 않더라도, 드높은 이상의 부름에 따라 계속되는 쉼 없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정치가 쉼 없이 부풀리고 있는 싸움들이 그러한 노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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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최선의 정치체제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것이 차선책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러나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형태는 여러 가지이고, 그것은 나라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역사적 상황들로 하여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최근의 뉴스들에 나오는 사건들은 이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자주 지적되듯이 미국의 의회제도는 대결과 함께 협의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최근의 여러 일들로 보건대, 여야 양당 간의 관계는 거의 대결 일변도가 되어 간다. 그렇다고 타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의료제도를 조금 더 보편화하려는 소위 ‘오바마케어’(저가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시행을 방해하기 위한 전략으로 공화당은 예산안 통과를 지연시키고 정부 기능을 마비 상태에 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결국은 임시 예산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정부를 재가동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미국 내의 여러 평자들은 예산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 경제 정책들에서 양당 대결이 첨예화되고 사회적 균열이 커지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다.


196년만에 멈춰선 워싱턴 의사당 시계 (출처 :AP연합)


미국의 정치 상황에 대조를 이루는 것이 독일의 경우이다. 9월22일의 연방하원 선거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정당기독교민주연합(CDU)과 그 바이에른 주의 자매당 기독교사회연합(CSU)은 41.5%의 표를 얻고 과반수에 가까운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631석 중 과반수에서 5석이 모자라는 311석만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다른 정당과 연립하지 않으면 정부를 수립할 수 없게 되었다. 


CDU는 처음에 녹색당과 협상하였으나 이에 실패한 후, 26%를 득표한 사민당(SPD)과의 교섭을 시작하였다. 사민당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득표율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CDU와의 ‘대연립’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어서, 이번에 다시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불리한 일이라는 의견도 없지 않았으나, CDU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협상이 시작될 때의 보도를 보면, 첫 회의에서는 대표들의 표정이 밝고 상호신뢰의 말이 오고간 화기애애한 자리였다고 한다. 협상이 성공한다면, 크리스마스 전으로 내각이 구성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새로운 정부가 진수(進水)할 때까지는 현 정부가 그대로 그 권한을 행사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페어 슈타인브뤽 사민당 총리 후보와 악수 (출처 : AFP연합뉴스)


메르켈 정부는 말하자면 임시 수권 정부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한 정부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법이나 제도야 어찌 되었건, 파당적 심리가 정치의 추동력이 되는 사회에서는 이런 경우 정부는 반은 마비상태에 들어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문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내 특히, SPD 내에서 비판은 계속되고 언제라도 협상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들이 나온다. 그러나 협상은 계속되고 있고 또 협상 절차가 그렇게 복잡한데도 끈질기게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SPD의 경우, (이것은 당의 규칙이 당원의 적극적인 참여와 숙의(熟議)의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협상에서 열세에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협상은 투표로 229명으로 구성된 중견당원의 동의를 받아야 했고, 협상이 끝나면 그 결과를 47만 당원에 알려 찬반 의견을 물어야 한다. (조건은 20% 당원의 우편 응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상의 복잡성에 더하여, 정책 타협의 절차도 극히 까다로운 것으로 보인다. 절충안은 양당의 당원 70명으로 구성된 12개의 실무그룹이 토의해 내놓아야 한다.


연립정부가 성립한다면 그 안에서 소수파가 될 SPD는 당 정책의 많은 것에 대하여 CDU의 동의를 요구할 것이다. 그중 중요한 것은 노동 임금과 세금에 관한 것이다. SPD는 증세와 최저임금제를 주장한다. CDU는 증세에 반대하고 최저임금제의 실시를 주저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각 당의 기본 정책일 뿐만 아니라 선거공약이었다. 그러나 양보 없는 타협이 있을 수는 없다. 최종적인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증세는 보류되고 최소임금제는 수용된다는 방향으로 타협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합리적 논의이다. 양당은 당 정책에 대하여 그들 나름의 변론을 내놓고 있다. SPD의 주장대로 최저임금제 그리고 다른 사회복지 정책들을 위해서는 세수가 늘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 고액수입에 대한 증세, 금융거래세 도입 등이 필요하다. CDU는 증세에 반대하면서 그것은 기업 위축의 요인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에 따라 실업자도 늘어날 것이다. 또 최저임금제는 전반적으로 물가를 상승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의 수입의 실질적인 감소를 가져 올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서, 구동독 지역에서는 노동자의 4분의 1이 SPD가 제안하는 시간당 8.5유로 이하의 임금을 받고 있는데, 이 최저임금제가 채택되면 기업이 위축되고 실직자들이 늘어 날 것이다. CDU는 임금 조정은 기업과 노동조합의 상호협상에 맡기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SPD는 협상을 시작하면서 타협없이 고수할 정책으로 열 개의 정책을 내놓았는데, 증세와 최저임금제는 그 중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 그 외에도 임금의 남녀 평등, 인프라 정비와 교육투자, 재정긴축 정책의 완화,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 조건의 개선 등도 협상 대상에서 제외되는 정책에 포함된다. EU와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도 SPD가 중요한 것으로 내세우는 정책이다. 원전폐지 정책에는 양당이 합의했지만, 석탄에 의존하는 전력으로 이산화탄소 배출이 늘고 전기료가 상승하는 것에 고민은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 정책의 많은 것은 SPD의 사회민주주의 지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문제에서 그 지향이 일관되게 표현된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리고 CDU의 정책이 사회적 고려가 없는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동성애자의 평등권을 강화하자는 것은 SPD의 주장이지만, CDU도 그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외 정책에서, CDU에 비하여 SPD는 더 개방적이고 보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고, SPD가 이민자 가족의 이중국적을 인정하자는 제안은 그러한 입장의 표현이라고 하겠지만, 두 당은 다 같이 이민자의 통제를 엄격히 하는 데에 동의한다. CDU가 아동의 보육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법을 만들고 지금도 그것을 지속할 의도를 가지고 있으나, SPD는 그보다는 장애자 지원을 강화하고 지방자치체의 사회비용에 중앙정부의 보조를 늘릴 것을 주장한다. 


말할 것도 없이 외부의 비전문인으로서 이러한 세부 정책을 바르게 평가할 수는 없다.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세부 사항이 연립정부 협상에서 토의가 된다는 사실이다. (세부적이라는 것은 높이 살 만한 것이기도 하지만, 정부의 보다 섬세하고 유연한 현실적응력을 옭아매는 것일 수도 있다.) 놀라운 것은 자세한 정책적인 문제를 놓고 보수지향의 기독교민주당과 진보지향의 사회민주당이 자리를 함께하여, 협상하고 타협하고 합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 헌법은 독일연방을 ‘사회국가’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사회복지국가의 이상을 합하여 국가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다. 이 테두리가 두 정당의 합의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근본이 되는 것은 당을 넘어 나라 전체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당위라고 할 것이다. 거기로부터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적정한 수준의 인간적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고려도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하는 것은 오늘의 현실과의 관계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방편의 문제일 뿐이다. 이것은 조건들이 다르기는 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의 복지사회 지향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급속히 하나가 되는 세계에서 역사적 당위이다. (국토가 좁고 중앙집권의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 이것은 더욱 그렇다.) 사회적 고려가 없다면, 오바마케어의 문제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미트 롬니가 매사추세츠주의 지사였을 때 내놓은 의료보험제도에 비슷하다고 이야기된다. 


요즘 우리나라 정당과 매체에서 제일 많이 거론되는 것이 국정원 댓글 문제이다. 바로잡혀야 할 일의 문제가 제기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이 나아가야 할 진로에서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보다 높은 단계는 우리의 삶을 보다 인간적인 삶이 되게 하는 일이다. 크든 작든 한가지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정치적 충성심을 일관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한국인 특유의 성향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괴로웠던 과거사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 나름의 덕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 또는 자기정당성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국정원 문제와 같은 것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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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작고한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저서에 <우리나라를 이루어내기>(Achieving our Nation)란 것이 있다. 기발하다면 기발한 책 제목은 그 나름의 중요한 뜻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국가에도 정체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말할 것도 없이 로티의 의도는 미국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밝혀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을 정립함으로써 나라를 이루어내는 것은 미국에서보다도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요즘 우리 정치 현장의 뉴스들을 보면, 그다지 핵심적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사항들이 나라 전체를 흔들 정도의 분규와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을 본다. 이것은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불확실한 것, 또 모든 정치 행위가 이 정체성을 닦아내는 일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한 의식이 철저하다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기준을 가지게 되고 정체성을 위협하거나 그 구성에 크게 관계되지 않은 일들은 조금 더 조용한 논쟁의 대상이 될 뿐일 것이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이 서양에서 가장 먼저 자유, 평등, 우애(또는 행복의 추구)를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 이념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이념들이 한 번의 선언이나 법 또는 제도의 수립으로 국민 생활의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일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는 것이다. 


국가 정체성(일러스트 김상민)


로티 교수의 생각에 미국 민주주의의 목표들은 역사적으로 여러 사상가들에 의하여 여러 측면으로 또 되풀이하여 강조되었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실현되어야 할 이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로티 교수의 저서는 이러한 역사적 전통과 그것이 말하여 주는 미래의 희망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 미국 민주주의에서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실현되어야 할 것은 평등과 우애의 이상이다. 그는 미국의 정치 이념에서 자유는 평등과 하나가 되었거나 그것을 대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평등은 사회정의가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유대 없이 하나로서 생각할 수 있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로티 교수의 좌파적 해석에 사람들이 얼마나 동의할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의 대부분 우파들은 그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로티 교수는 “관조적” 또는 “이론적 좌파”라고 하여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이념적 진보주의자들도 이에 동의하지는 아니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그의 ‘공산주의 행동주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한 이론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로티 교수에게 이들의 진보주의는 이론가들의 개념놀이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사회정의와 사회혜택을 분명히 하고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실용적 좌파”의 생각과 행동이다. 그가 생각하는 실용적 진보주의의 사회 목표는 자본주의 내에서도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 여러 목표--빈곤의 고통 감소, 사회적 차별에서 유래하는 수모의 제거, 다양한 인간성 발전의 기회 확대 등이다.


<우리나라를 이루어내기>는 1998년에 출간된 것인데, 그 시점에서도 그러하지만, 그 후의 자본주의 전개가 반드시 그의 개선주의적 입장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로티 교수가 지나치게 이론적이라고 생각한 진보주의의 한 특징은 대체로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론 진보주의자들의 지나치게 이론적인 체계화가 현실에 어긋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지만, 바로 자본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체계성이 부분적 개혁을 도로아미타불이 되게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티 교수는 이에 답하여 개혁의 노력이 끊임없어야 하는 것은, 그가 다른 저서에서 강조한 바 있는 ‘우연성’이 현실의 특징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서 논하려는 것은 로티의 진보주의론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비친 바와 같이, 그의 저서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는 가르침--즉 사회가 하나의 국가로서 온전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지속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합의할 수 있는 정치 목표의 틀을 갖지 않는 사회가 적정한 삶의 질서를 발전시킬 수는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목표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적 윤리적 의식에 뒷받침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다. 이 의식은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사회를 생명 공동체로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한다. 로티 교수의 평등의 강조는 분명 인간의 윤리 의식에 이어진다. 그러나 그가 윤리의 중요성 자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별도로 강조될 필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에 보는 갈등과 투쟁의 사례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과제들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것이 사안의 경중을 가리게 하고 공동체적 일체성의 훼손을 주저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동지역 이슬람 국가의 혼란은 정치적인 합의 그리고 도덕적 생명 의식의 부재가 가져오는 참혹한 결과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무함마르 무르시 대통령 정권의 붕괴를 전후하여 이집트는 완전히 폭력의 혼돈 속에 빠져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건물이 불에 타고, 사회와 경제가 최저의 일상생활도 할 수 없는 마비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이 최근의 보도와 보고들의 내용이다. 


주한 이집트인 20여명이 1일 오전 서울 한남동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이집트 군부의 시위대 유혈진압을 규탄하고 있다.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출처 : 경향DB)


이 혼돈의 가장 큰 원인은 종교적 갈등이다. 이슬람주의, 이슬람주의 안에서도 수니와 시아파, 콥트 기독교, 세속주의 등 여러 종교적, 정신적 지향은 아(我)와 비아(非我)를 가르고, 이 가름은 비아의 박살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권력 투쟁, 사회적 경쟁의 동기도 중요하다. 혼돈을 기화로 하여 무의식에 쌓여 있던 증오가 그 분출구를 찾아 폭발하기도 한다. 여러 폭력사태 속에서 수십,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고문과 학살의 희생물이 되었지만, 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이유로 총기 협박을 받은 사람의 경우는 이러한 부정적 심리와 정치와 종교적 갈등이 범벅이 되어 나타난 기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르시 전 대통령은 근대 이집트 역사에서는 예외적으로 민주 선거에 의하여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그의 정권은 여러 가지 신앙과 가치의 차이를 하나의 관용의 질서 속에 포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이룩해 나갈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헌법이나 인사정책 등에서 그의 소속 단체인 ‘무슬림 형제동맹’의 가르침대로 정부를 이슬람 독재정권으로 전환할 의도를 드러내었다. 그것이 반대 시위, 반대의 반대 시위를 폭발하게 하고 이집트를 파괴와 살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게 했다.


민주주의는 다원적 가치를 포용하는 정치 체제이다. 그러나 다원적이라는 것은 하나로 존재하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 사회의 자기 정체성이 사회를 하나로서 확인하게 한다. 그러한 확인은 하나의 결단이라기보다는 그치지 않는 합의를 위한 노력에서 이루어진다. 


민주주의의 정치 원칙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과정의 일부이다. 물론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고 하여 갈등이 없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차이와 갈등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하나 갈등이 무조건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전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세부적인 문제로 인하여 유발되는 큰 갈등은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는 작고 큰 것을 넘어 일체성으로도 존재한다. 이것을 근원적인 차원에서 뒷받침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귀중함에 대한 도덕의식이다. 이것을 통하여 사회는 모든 사람의 삶을 존중하고 그 공동 번영을 약속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말은 한국인의 정치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성스러운 단어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가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것으로 정의하려는 역사는 그다지 길다고 할 수 없다. 이제 사회의 하나됨은 보다 구체적으로 추구되는 정체성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 정체성은 어떤 고정된 신앙개조(信仰箇條)라기보다는 사회 안에 진행되는 정치적·도덕적 추구의 심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이 “나라를 이루어내려는” 노력의 핵심을 이루어 마땅하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외경심을 갖는다. 이것이, 반드시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갈등과 투쟁을 조금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할 것을 희망해본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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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근착의 외지 하나에 영국 옥스퍼드대 티모시 가튼 애쉬 교수의 유럽연합의 미래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애쉬 교수는 원래 동유럽 전문가로서 동구 공산권 붕괴 시에 상황의 전개를 설명하는 여러 글들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글들은 보도이면서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유럽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쓰인 분석적인 것들이다. 그는 영국에서는 많지 않은 유럽주의자로서, 전에도 이 문제에 대하여 글들을 발표하였지만, 위에 언급한 글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많이 약화된 것으로 보이는 유럽의 연립 의식과 그 상황에 대하여 진단을 시도한 것이다. 유럽의 문제도 우리에게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세계화된 오늘의 상황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글을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가진 문제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애쉬 교수가 지적하는 것 하나는 어떤 정치공동체를 하나로 유지해 가는 데에는 정치나 경제에 못지않게 문화적인 요소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공동체에는 공동의 가치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는 이것을 시(詩)라는 말로 요약한다. 시가 있어 공동체는 하나가 된다. 그렇다고 애쉬 교수가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일치 또는 이념적 합의를 원하면서도, 이미 이루어져 있는 사실적 합의에 기초하는 것만으로라도, 유럽연합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으로 보인다.


유럽에서 연합의식이 적극적으로 이야기되지 못하는 것은 유럽에서의 독일의 특수한 위치에 관계된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경제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면서 역사의 죄인이다.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데에 독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리스 등 남부 유럽 나라들은 위기에서 구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전체적인 영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독일이 위기의 구출에 나선 것도 적극적인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유로지역의 동시 파산을 피하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 원조를 주기로 하면서 긴축정책을 요구하였을 때, 일부 그리스인들이 메르켈 총리를 히틀러에 비교한 구호와 포스터 등을 들고 나왔던 것은 과거사로 인하여 독일이 떠안게 되는 어려움을 단적으로 예시해준다. 어쨌든 독일은 유럽에서 패권을 쥐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늘 보여주어야 한다. 그 결과의 하나가, 개인적인 인품도 그렇다고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견지하는 ‘낮은 목소리의 점진적 실용주의 정책’이다. 그러나 애쉬 교수는 유럽의 통합을 위해서는 이러한 소극적인 정책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필요한 것은 경제 그리고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 기구이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유럽인의 마음속에 하나의 유럽이라는 꿈을 살려 나갈 수 있게 하는 시가 없는 것이 그에게는 아쉬운 것이다.


그리스 노동자들이 불에 탄 독일 국기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경향DB)


여기에서 시라고 하는 것은 패권주의 또는 바람몰이를 위한 이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애쉬의 생각으로는 메르켈 이전의 독일 지도자들의 경험과 그것을 넘어서는 이상 또는 이념에는 그러한 시가 들어 있었다.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총리와 같은 사람들은 전쟁이나 홀로코스트 또는 독재 등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일들이 되풀이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바탕을 둔 유럽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빌리 브란트 총리의 생각과 정책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인용된 브란트 총리의 말에 따르면, 독일인들이 희망하여야 하는 것은 ‘나라 안에서나 밖에서나 좋은 이웃들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국제 관계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이 그의 ‘동방정책’이다. 그는 이 정책의 기치 하에 동독과의 평화적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폴란드와 소련 등과의 화해를 추구하였다. 방법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발걸음의 정책’으로 조금씩 평화 관계를 구성해나가는 것이었다.


애쉬 교수는 그 관심이 주로 유럽연합의 문제에 있기 때문에 국내 문제에는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좋은 이웃’의 추구는 브란트 총리의 정부에서 국내 정책에도 그대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복지체제로써 사회적 화해를 다지고자 하였다. 그의 정부에 참여하였던 한 사람의 말로는 그의 재임 중 거의 일주일에 세 건 정도의 복지 법안이 각료회의와 연방의회에서 심의 통과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한 논평자의 평가로는 브란트 집권 후 독일은 세계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복지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물론 마음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내·국외의 화해 정책은 반드시 사회민주주의의 정치 신조만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을 주도한 것은 사회민주당(SDP)이었지만, 이것을 시행한 것은 보다 전통적인 자유주의를 정강의 기본으로 하는 자유민주당(FDP)이 참여한 두 정당의 연립 정부였다.


브란트 총리의 독일과 유럽의 미래를 위한 비전이 시적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중요한 부분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때 이루어진 잘못을 뉘우치는 것에 관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란트 자신은 나치의 등장과 함께 노르웨이 그리고 다시 스웨덴에 망명하고 노르웨이 시민으로서 반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범죄에 대하여 책임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과거사 문제에서 독일과 한국은 반대의 입장에 있다. 그러나 브란트 총리를 비롯하여 독일에서 볼 수 있는 철저한 화해의 정신은 우리가 익혀야할 매우 중요한 교훈이라 할 것이다. (그 인간적 성격은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를 방문하였을 때, 바르샤바 의거 기념비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던 사건에서 시적으로 표현된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총리 (출처: 경향DB)


한국은 그 국제 관계에서 독일과 같은 반성이 필요 없는 위치에 있다. 또 과거사에 미래의 평화적 비전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는 책임은 한국민이 져야 하는 것일 수 없다. 그렇다고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비전에 대한 절실한 필요 그리고 그 설득을 위한 한국의 사명이 사라지거나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시비 정사(正邪)를 가리고 책임을 밝히는 일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그것을 보다 큰 화해와 평화의 틀 안에 위치하게 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인간적 삶의 진실 속에 놓이는 것이 되고 마음 깊이에 공명하는 시적 호소력을 가질 것이다. 궁극적으로 화해는 시비를 초월한다. 우리의 근대사에는 이러한 테두리에서 생각되어야 할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인이 겪은 근대사의 다른 큰 재난의 하나는 6·25전쟁이다. 6·25에 대하여서도 책임 소재가 이야기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책임과 정당성의 문제보다도 비극 자체이다. 그러한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깨달음은 어떤 명분으로도 동족상잔(同族相殘)이 옹호될 수 없고, 나아가 폭력 수단 또는 테러 행위에 의한 권력 쟁탈이 허용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의 정치 논의는 주로 정당성의 시비에 집중된다. 그리하여 인간적 고통의 현실에 주의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한 현실 조건의 확보가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시비보다도 중요한 것이 삶의 구체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잊는 것이다.


국제 관계는 조금 더 복잡한 것이겠지만, 우리는 국내 정치에서도 삶의 현실에 대한 유연한 감성을 벗어난 정치 원리주의를 본다. 필요한 것은, 나라 밖에서도 그렇지만, 나라 안에서도 좋은 이웃들이 함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경제민주화 또는 복지제도의 확립 등은 단지 추상적인 이념이나 구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고 좋은 이웃으로 사는 데에 필요한 과제를 말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좋은 이웃을 위한 제도적 조건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든지 간에, 오늘날 여러 정당 간에, 기본적인 일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어떤 정당도 국민 또는 국민의 어떤 부분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스스로를 내세울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좋은 이웃들’을 확보하는 방법과 속도와 규모, 그리고 그에 필요한 경제적 조건 등의 이해에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번 선거에서 내건 정책들로 미루어 보아도, 그 차이가 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여야 간에 지속되는 격심한 갈등을 보면 그 원인은 반드시 정책상의 차이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정당 간의 관계는 독일의 사민당, 기독교민주연합, 자유민주당 등이 수시로 연립 내각을 구성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형태의 관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애쉬 교수는 그것이 사라졌음을 애석해 하는 것 같지만, 독일에는 아직도 사회의 기본 방향에 대한 시적(詩的) 일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여러 정당이 차이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시적 일치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할 것인가? 추상적인 구호라면 몰라도, 그러한 시가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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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경계선 문제는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 문제도 국민의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민주정치의 기초라고 한다면 간단히 넘겨 버릴 수 없는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다른 모든 국정의 과제들을 제치고 정치의 복판을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정국 경색은 정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소속 집단이 요구하는 집단행동과 이념과 구호의 광장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도 궁극적으로는 체험-개인적이기도 하고 집단적이기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이 쉽게 잊히고 만다.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의 죽음과 그를 사살한 조지 짐머먼에 대한 공판의 결과는 미국 사회에서 흑백 갈등을 재연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공판이 끝난 직후인 지난달 19일에 그의 소견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그 나름으로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짧으면서도 정치와 법에 대한 일정한 견해, 그리고 구체적인 체험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담고 있는 폭넓은 담론이었다. 미국의 국내 문제가 우리에게 큰 관심거리가 될 수는 없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이 우리의 정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 않나 싶다.


이미 국내 신문들에서도 보도한 바 있지만, 사건의 윤곽은 다음과 같다. 작년 2월26일 밤 플로리다주 샌퍼드의 한 동네-경비가 있고 출입이 통제되는-에서 편의점에 들러 일용품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17세의 흑인 고등학생 트레이본 마틴을 백인 방범 자원봉사단원 조지 짐머먼(29)이 사살하였다. 그의 말로는 수상하게 보이는 마틴을 자동차로 따라가다가 다시 차에서 내려 뒤를 쫓아가 조사하려는데 반항하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총을 발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건이 나기 전 짐머먼으로부터 수상한 사람을 추적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이 달려왔을 때 마틴은 이미 총에 맞아 풀 위에 쓰러져 있었다. 짐머먼은 그 자리에서 검거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방면되었다. 그리고 40일 이후에 구속되었지만, 이번에 무죄 판결로 자유인이 되었다. 무죄가 된 이유는 살인 의사를 입증하기가 어렵고 정당방위의 동기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트레이본 마틴(왼쪽)·조지 짐머먼 (AP연합)


인종주의적 판결이라고 규탄하는 소리가 미국 전역에서 높아지고 도처에서 시위가 벌어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백악관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은 큰 정치 문제가 되어가는 이 사건에 대하여, 특히 흑인 대통령으로서 발언이 없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백악관의 기자실에 나와서 직접 손으로 썼다는 원고를 대본으로 하여 그 소감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일단 비판과 시위 운동에 공감을 표하였다. 그것은 폭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그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플로리다의 재판은 판사나 검사 직책의 요구대로 진행되었고, 판사가 배심원들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하여 평결(評決)하게 한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판결의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의 입장은 법 절차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군중 시위의 정당성도 지지하는 양의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의 발언은 실정법과 정의가 서로 어긋날 때, 그것을 다같이 옹호하여야 하는 대통령의 입장을 교묘하게 지켜내는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의 설득력은 그 교묘한 언술이 아니라 미국인 모두가 관여되어 있는 체험과 역사를 상기하게 한 데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흑인으로서 자신의 체험을 언급하였다. 상처를 훈장처럼 내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그리고 미국인 일반의 양심을 자극할 수 있는 체험으로써 그것을 말한 것이었다. 트레이본 마틴의 비극적 죽음은 자신의 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35년 전의 자기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라는 말로 그는 연설을 시작하였다. 슈퍼마켓에 가면 점원이 뒤를 쫓고, 길을 건너면 멈추어 선 자동차에서 문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 바로 그 순간 타고 있던 여성이 핸드백을 단단히 쥐는 것을 보는 것-이런 일은 흑인이면 으레 겪게 되는 일이다-은 오바마 자신도 경험한 바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상적 경험보다 심각한 것은 물론 인종에 따라 법 적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사회가 이번 사건을 또 하나의 인종주의 사건으로 보고 분개하는 것은 그것을 그간에 쌓인 체험과 역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흑인들의 입장만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흑인들은 폭력의 희생자면서 폭력을 행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국 역사가 흑인에게 저질렀던 폭력에서 나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바로잡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흑인들도 자신들이 미국 사회의 완전한 일부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장된 항목을 나열하는 거대한 계획과 같은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거대한 정치 계획은 과도한 정치화 그리고 왜곡을 가져온다. 공평한 법의 처리 문제는 전통적으로 주와 지방 정부의 소관이다. 그러나 지방의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조처를 연방 전체로 확장해 나갈 수는 있다. 문제의 해결에는 정치가들의 담론보다도 오히려 가족, 교회, 직장에서의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 일리노이 의회에 몸담고 있었을 때 그는 길에서 단속의 대상이 되는 흑인 수를 통계적으로 기록하게 하는 법을 만든 일이 있다(이 법은 흑인이 부당하게 가두 검색의 대상이 되는 것을 억제하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이번 일에서 중요했던 ‘정당방위법’이 보다 인도적으로, 보다 정당하게 적용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도록 검찰총장에게 지시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인종차별 문제의 해결에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조처들이 효과적이라는 말을 하고 난 다음,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처우가 크게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말을 끝냈다. 이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겠다는 그의 뜻을 다짐하는 것이 연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그리고 미국인에게도-인상적인 것은 그의 연설이 길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포괄하고, 특히 흑인 차별의 체험적 현실에 대한 깊은 느낌을 환기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되풀이하건대,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미 이루어진 법집행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당한 것으로 항의하는 흑인 공동체의 정당성도 인정한다(물론 그것을 폭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위엄과 예절’을 가지고 행동한 마틴의 부모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보다 큰 목표에 의하여 지양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과제로 오바마 대통령이 내거는 것은 인종주의의 부당성을 교정하는 일이다. 그것을 그는 조용하게 체험과 역사를 잊지 않게 하며 설득하려 한 것이다.


트레이본을 위한 정의’의 촛불 (로이터 연합)


공평치 못한 제도를 바로잡는 일은 정치 기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제도가 생산해내는 인간적 고통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이다. 공감할 수 있는 체험적 현실을 잊지 않아야 정치적 합의가 가능해진다. 집단행동에 추상적 정강과 정책 그리고 구호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대결과 폭력은 있어도 해결은 얻지 못하는 정치 작전이 된다. 우리 현실에서는 삶의 체험적 현실을 깊은 공감과 동정으로 마음속에 느끼고 그것을 개념화하고 행동의 프로그램으로 이어갈 수 있는, 감성과 지성의 정치지도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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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론에도 보도되었지만, 얼마 전부터 미국에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일의 하나는 미국 국가안전국(NSA)의 젊은 직원이 그 비밀 활동을 폭로한 사건이다. 폭로내용은 국가안전국이 국민의 통신을 거의 무제한으로 사찰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설명에 정보누설자 에드워드 스노든의 개인적인 배경에 대한 조명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이 사건이 커다란 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 사건은 사건 자체의 중요성을 떠나서도, 일반적으로, 정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동력학의 복합성을 생각하게 한다.


공적 기구 안에서 체제를 벗어난 개인적인 결단은, 동기가 순정한 것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경우라도, 간단한 것일 수는 없다. 현재 스노든은 미국을 떠나 홍콩에 갔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가 에콰도르의 망명 허가를 기다리며 공항의 통과여객구역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 자체가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위키리크스를 만들어 근년에 정치 정보 폭로 문제를 크게 이슈화한 줄리언 어산지가 그의 홍콩 체재비 등을 부담하여 도와주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것은 그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지원을 받고 있다는 증표로 생각할 수 있다.


홍콩 시내 전광판에 나온 에드워드 스노든 (AP연합)


물론 핵심은 내부 폭로 행위가 제기하는 여러 공적인 문제들이다. 미국 정부 당국이 크게 반발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미국의 검찰당국은 스노든을 “공문서 절취(竊取)”, “국방관계 비밀문서 외부 누설” 등의 혐의로 고소하였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미국의 국론은 전체적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 소속의 보이너 하원의장은 스노든을 국사범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공화당뿐만 아니라 민주당 의원도 여럿이 동조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 공화당 의원은 수백만의 개인정보를 은밀히 빼가는 정부의 부당한 행위를 폭로한 스노든의 행위는 커다란 “공공 봉사”라고 했고, 또 다른 공화당 의원은, 그에 대한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해온 짓은 헌법 위반이라고 말하였다. 여론 조사에서 국민의 여론도 양분되어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의 ‘USA 투데이’의 여론 조사이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 49%가 스노든의 폭로가 중요한 공공 봉사 행위라고 생각한다고 한 데 대하여, 43%는 그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그를 법에 의하여 처리하여야 한다는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50% 대 38%였다. 오늘날 같이 단순화된 의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당한 행동은 정당한 행동이고 법은 법이라는-이러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로 생각된다.


현대국가는 법치국가(Rechtsstaat)이다. 그러나 법이 인간사 전부를 또 어떤 일의 인간적 의미 전부를 포괄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여러 구체적인 고려에 의한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 나온다. 사생활 보호는 근대 민주 국가의 주요 책임의 하나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국가는 국가의 안위를 책임져야 한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을 포함한 국제적인 인권단체 대변인들은 스노든을 지지하는 의견들을 표명하였다. 미국의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미국시민권연합(ACLU)은 ‘외국 정보 감시법’과 관계하여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법이 규정하는 바로는 정보당국이 특정한 통신회사로부터 이용자에 관한 자료를 제출하게 하려면, 담당 법정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허가 요청 내용을 밝히라는 것이 소송의 요점이다. 물론 그 배후의 생각은 무제한의 통신자료 사찰이 사생활 보호에 관한 헌법 규정들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스노든 문제에 대한 논란은 여론과 법-세부적인 법 절차와 헌법, 그리고 미국 건국 정신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헌법 정신 등의 개념을 주축으로 정리된다. 여러 사람의 의견에는 감시체제가 실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사실 자체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당국자들은 이 법이 주로 자국민이 아니라 외국인의 교신(交信)을 대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것이 국내 정치의 파당적 투쟁에 이용되었다는 혐의는 받지 않는 것 같다. 국가안전국장은 이 제도로 9·11 이후 50건 정도의 테러 사건이 방지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길게 되었지만, 이 사건을 생각해보는 것은 그것이 현재 우리 정치와 여론에 논란이 되는 화제에 평행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화제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에 들어 있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이다. 우선 문제되는 것은 국가 기밀문서가 그렇게 공표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직설적인 답은, 그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스노든의 경우에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유에스 투데이’ 여론 조사의 응답자들은 그의 행동의 긍정적인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일단 법적 처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모순된 답을 내놓았다. 위키리크스의 원조인 줄리언 어산지에 대해서도 비슷한 답이 나올 것이다. 우리처럼 투명성이 높지 않은 사회에서는 특히 법을 수호하는 것이 지상과제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표정굳은 남재준 국정원장 (경향DB)


그러나 일단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 스노든의 경우에서나 마찬가지로, 법의 저 너머에 비치는 중대한 문제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다. 회의록에 놀란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쟁점이 될 수 있는 안건들에 대하여 노 전 대통령이 거침없이 양보할 뜻을 표했다는 것을 놀라워한다. 양보 사항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NLL이다. 극단적인 해석은, 이것은 헌법에도 규정된 국토를 내놓겠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초연하게, NLL을 국경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고 물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소원이라고 말하는 통일은 바로 오늘의 국경을 넘어가자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는 지금의 경계선은 국경이 아니라 잠정적인 분계선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국경,’ ‘경계선’ 또는 ‘한계선’을 철폐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의 이상을 위하여 남북이 아무 준비 없이 경계선을 트고 하나가 되는 것이 통일을 의미할 수 있을까? 십중팔구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갈등을 풀어 놓는 일이 될 것이다. 이 혼란과 갈등은 군사적 성격을 갖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나,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는 곳에서 한 가지 현실적 대응책은 경계를 그어 놓는 일이다. 통일이 소원이라도 그것은 평화가 확보되고, 보다 나은 민족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 조심스럽게 접근되어야 하는 소원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치 일선의 밖에 서서, 이러한 생각들을 여기에 적는 것은 민망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정치는 언제나 일촉즉발의 갈등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에 모순된 선택들이 병존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정치에 갈등과 투쟁이 있는 것은 불가피하다. 좋게 보면, 싸움은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확신이 다른 데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확신에 대한 상세한 검토는 갈등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신 또는 이상이 같다고 하여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격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이상과 확신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현실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심사숙고된 정책이다.


그러나 이상 자체가 근원적으로 여러 차원-서로 모순된 여러 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치 싸움의 가장 깊은 요인이 된다. 모순의 선택, 선택의 모순이 겹치는 마당에서, 이상이 있고 숙고가 있다고 해서 현실적 해답이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희랍의 고전 비극들은 흔히 서로 모순되는, 그러면서 어느 쪽이나 버릴 수는 없는 가치들을 위하여 투쟁하고 충돌하는 드라마를 보여준다. 아곤이라고 부르는 이 투쟁은 해결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 심각성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깊이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해결을 위한 새로운 시도에 영향을 준다. 이 시도에는 삶의 진정성을 크게 손상하지 않는 한도에서 타협이 포함된다. 우리의 정치나 정치적 여론은 투쟁과 갈등의 수사로 가득하지만, 그것이 문제에 대한 심각하고 진지한 고민에서 나온다는 인상은 별로 주지 않는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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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성왕(聖王)의 길을 보여주려 한 것이지만, 임금이 아니라도 수신하는 사람에게 두루 해당되는 글들을 모으고 주석을 붙인 저작이다. 유학의 수신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과 함께 몸가짐을 단정히 갖는 일이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있기를 마치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라. 발가짐은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은 공손하게 하여야 하니,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蟻封)까지도 (밟지 않고) 돌아서 가라.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뵙듯 해야 하며,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안이하게 함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윤사순 역)


이러한 지침이 강조하는 조심스러움은, 왕조시대의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고리타분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일을 처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없어서 아니 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개미집 두덩도 밟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주자의 주석에 의하면, 말을 타고 달려가더라도 개미집을 피해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가진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조심스러운 행동에 대한 가르침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전 청와대 대변인의 행각에 대한 보도와 그에 대한 논란 때문이다. 그러나 성 문제, 부패, 폭력 등 여러 가지로 그와 비슷한 사건이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회의 정신 자산의 손상에 따라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들이라 할 것이다.



국가적인 공공임무를 맡은 사람의 행동이 신중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절차에 따라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의전(儀典) 절차, 프로토콜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깊은 정신적 수련을 거쳐서야 믿을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행동의 신중함은 마음을 바르게 갖는 데에 이어져 있고 또 바른 마음의 상태가 있어야 몸을 바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됐다. 앞에 인용한 경재잠(敬齋箴)의 경고에 따르면, 안과 밖에 “틈이 벌어지면, 사욕이 만 가지나 일어나”게 된다. 마음과 행동의 한결같음은 밖으로 또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적인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사사로운 삶에서도, 또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목적으로 유지돼야 한다. 유학의 전통에서, 남이 보거나 듣거나 관계없이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신독(愼獨)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보다 세속화된 현대에서 이러한 자세, 경(敬)이라고 부른 자세를 닦아야 한다는 주장이 참으로 옳은 것인가를 물을 수 있다. 그것은 전통 윤리--삼강오륜과 같은 윤리를 익히고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자세를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목적은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맞고 사회적 질서에 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근본 원리라는 것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적인 관점에서 편협하고 억압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몸을 바르게 하는 주재(主宰)로서 상제를 말한 것 자체가 억압적 질서를 시사한다.


그러나 되풀이하건대, 사람의 일에서 마음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가져야 할 때가 있고 사안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는 거죽은 어떻든 그에 대한 요구는 삶의 심각성에 비추어 불가피한 것으로,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삶의 기저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제의 어전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움직이라는 말은 그것을 표현하는 봉건시대의 비유일 뿐이다. 다른 전통에서도 윤리 사상가나 환경사상가들은 세계에 외경(畏敬)의 질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고 존중하는 것, 또 이해관계를 초월한 상호 신뢰가 성립하는 것은 이러한 기초가 있어서 가능해진다. 그것이 있음으로써 사람의 삶은 살 만한 질서 속에 유지된다.


칸트의 철학에서 실천적 행동 규범, 또는 윤리적 가치의 근거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탐구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에게 윤리 가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일치한다. 그런데 자유를 넘어가는 원리 없이 규범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은 도덕적 또는 정신적이라고 할 수 없는 욕망의 존재이기도 하다. 욕망은 대체로는 감각, 감정, 물질 그리고 그것에서 얻어지는 쾌락에 의해 자극된다. 또 욕망은 개인의 개인됨의 핵심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마음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개인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으로는 사람에게는 욕망과 감각적 쾌락 외에 도덕적 행위에서 얻는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을 위해 사람은 고통을 무릅쓰면서까지 도덕적 행위를 택한다.


그러나 도덕을 선택하는 경우라도 거기에서 얻는 기쁨을 위하여 또는 그것에 몰려서 도덕을 택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충동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다. 자유는 모든 충동의 강요나 밖으로부터 오는 강제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자유로우면서 보편적 원리에 따라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초월적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자유 속에서 도덕적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추상적 명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감정--사안에 따라 일어나고 또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되는 감정에 연결된다.


철학적인 논리를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에게 도덕적 당위성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고, 그로써 자신의 삶이 사물의 큰 진리와 일치하게 되기를 원하는 충동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다만 현실에서 이것은 다른 감각적인 욕망 그리고 욕망의 이기주의와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이기주의의 인정이 근대적 인간 해방의 주요한 내용을 이룬다. 이 관점에서의 자유는 이기적 행복 추구의 자유이다. 이것이 경제적 번영의 기초가 된다. 그런데 그러한 추구들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조정한다고도 하지만, 그것을 일정한 질서 속에 유지하는 것은 법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 질서의 뒷받침 없이는 법은 그 경직성으로 인하여 참다운 인간의 질서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도덕적 질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자유주의는 강압적 도덕을 거부하면서도 도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국가의 난제 중 하나가 도덕의 문제가 된다.

서울 마포구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의 소개가 씌여진 벽면 (경향DB)


인문학이 번창한다. 욕망과 소유와 권력 투쟁의 인생에서 무언가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를 찾아보려는 소망이 사회 안에 부유(浮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도 실용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인문학이 번창하는 것은 대체로 대학의 정규과정을 벗어난 강좌와 같은 형식을 통하여서다. 대학 내에서는 실용적 이점의 압박이 너무나 크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문학은 흔히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고 광고나 상품의 디자인에 필요한 기술을 창조하는 데에 유용하다는 수사(修辭)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또는 그것은 처세의 학문으로 간주되어 세상을 헤쳐나가는 요령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으로, 소위 스펙을 쌓는 방법으로, 또는 집단 이념으로 자신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설정한다.


어느 때나 진정한 자유와 그 정신적 바탕을 찾는 일이 쉬울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특히 사회의 정신적 자산은 탕진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을 표방하는 여러 도덕적 수사도 그 진정성을 쉽게 믿기 어렵다. 공적 공간에서 공적 행동의 의전을 뚫고 하락하는 인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삶의 정신적 진실에 경외감을 가진--말하자면, 옛날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늘의 의미에서, 지경(持敬)하는 인물이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높은 도덕성을 지닌 인물이 보인다고 하여도 오늘과 같은 전략의 시대에 그러한 인물을 스펙으로 쌓아 이미지를 다듬어 가는 사람으로부터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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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간의 전쟁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나, 급박한 느낌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느낌이 단순한 피곤에서 오는 것인지,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바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도식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도 어느 정도는 우리 자신의 사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 위기와 관련해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는 간단하다. 그것은 전쟁, 특히 핵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지만, 그것을 정책집행자들에게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이게 할 방도가 없는 것이 문제다. 북쪽의 입장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이데올로기이다. 남쪽에서는 그것을 현실적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도덕적 당위로까지 올려서 생각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을 손익 계산과 전략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데에 익숙하다 보면, 삶에 작용하는 도덕적 당위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 북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이데올로기를 실감으로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도 우리 삶에 존재하는 깊이를 의식화하지 못하는 것에 관계되는 일인지 모른다. 유화책과 경제 이익의 제공이 북의 태도를 변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만으로 사태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정치에도 절대적인 가치와 목적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놓치는 일이다.


전쟁 도발 행위에 맞서는 대책은 군사적 억제책이다. 전쟁은 최종적으로 힘과 힘의 대결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승리를 목표로 한다. 승리는 미리 예상될 수 있어야 한다. 승산 없는 전쟁 도발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 강행을 선언하고, 미사일 발사 준비를 하고, 휴전협정의 무효를 선언하는 등, 그 동기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적어도 그 현실적인 움직임에 있어서, 전쟁 위협의 강도를 높여 간 것은 틀림이 없다. 여기에 대하여 B-25 비행, 미사일 요격 시스템의 배치, 핵 전함 이동 등 한·미·일의 대응 조치가 있었다. 이러한 억제책이 북의 전쟁 시위를 완화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틀리지 않은 생각일 것이다.


북한의 전쟁 위협을 지지하는 세력이 거의 없는 국제적 환경도 위기 완화의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미·일의 정부가 강하게 항의하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국민적 여론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도 전쟁 위협이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북한에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전쟁 위협에 부정적인 것은 보도된 바와 같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남북 간의 핵 충돌은 체르노빌의 핵폭발을 동화 속의 사건처럼 보이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국에서 별로 보도되지 않은 것은 피델 카스트로 쿠바 전 국가평의회의장의 반대 의견이다. 그는 쿠바가 북한의 우방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한반도의 핵전쟁 위험은 1962년 10월의 쿠바 핵 위기에 버금가는 일이라 말하고,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남북의 국민의 희생은 물론 세계 인민의 70%가 피해를 입게 될 것인데,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북한의 의무이고 정의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물론 미국에도 자제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카스트로가 지난 9개월 동안의 침묵을 깨고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에 발표한 것인데, 한반도 사태를 그만큼 심각하게 본 것이다. (그간의 침묵은 중요한 논의 공간을 함부로 차지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는 말하였다.)


北 김정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지도 (경향DB)


현실 군사력의 대비나 국제적 지지 가능성으로나 승산이 분명치 않다는 것은 결과의 확인 이전에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위협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 동기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하나는 그것이 새로 등극한 젊은 지도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인민의 단합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라는 것이다. 위기를 단합의 방편이 되게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정치 전략이다. 선군정치(先軍政治) 체제하에서, 새 지도자의 위치를 강화하는 데에 그러한 위기 전략이 특히 중요한 몫을 해낼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계산이다.


얼마 전 서울대 하영선 교수와 고려대 서진영 교수는 오늘의 위기상황을 토의하면서, 북의 국가정책 지표를 병진론(竝進論)으로 설명하였다. (조선일보 대담, 4월19일). 병진론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핵개발과 경제발전이 북의 정책의 두 축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토론에서 지적된 사항의 하나는 핵개발과 경제발전, 두 목표가 서로 모순된 것이라는 점이다.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북이 필요로 하는 외국의 투자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렵고 그것 없이는 경제발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하겠지만, 북의 시각에서는, 두 목표가 반드시 모순된 것만은 아닐 수 있을 것이다.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선결조건은 자주권을 튼튼히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핵을 포함한 군사력 강화가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있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문구는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북한의 불바다 웅변에는 군사력의 강화와 전쟁 준비가 미국과 한국의 전쟁 위협에 대한 대항 조처라는 주장이 들어있다. 그것은 별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들린다. 그러나 영국의 군사전문가 안드레아 버거는 서방의 관점과 다른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한·미 군사훈련이나 연습과 같은 것이 북한에는 전쟁 위협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북의 역사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버거의 설명으로는, 군사 연습을 가장한 병력 이동을 갑자기 현실로 바꾼 것이 북이 시작한 6·25 전쟁이다. 그리하여 미국도 북한의 과민성을 완화해볼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버거는 말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조처들이 북의 핵개발 시간을 벌어주는 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여튼 지난 1월에 북의 국방위원회 그리고 이어서 최고인민회의는 핵보유의 절대적인 필요를 나라의 명줄이 달린 문제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이것은 피침(被侵) 가능성에 대한 과민 반응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대책의 일부를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지도자의 존재와 관련하여 자주 쓰는 “존엄”이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말하자면, 절대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불가침의 성역 방어를 위한 군사 모험을 포기하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 한 가지 이념으로 굳어진 가치와 목적 이외에도 인간의 삶의 기초가 되는 다른 가치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설득할 도리가 있는 것일까? 현실적 효과를 당장에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쪽에서 정의하는 성스러움을 넘어가는 성스러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열림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것이 최소한으로 규정될 때 그러하다. 이 최소한은 생명의 귀중함이다. 그것을 집단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모든 것의 기초를 없애는 일이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아 카스트로의 우려도 이에 관한 것이다.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인정은 같은 민족의 삶, 모든 인간의 삶의 요구, 그리고 그 파괴의 무자비성에 대한 의식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어떤 삶이 존귀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쉬운 의견의 일치가 없겠지만, 최소한에 대한 일치 그리고 그 깨달음에 깊이가 있다면, 그것으로 향하는 길이 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의 위험은 우선 사실적 조처를 요구한다. 여러 이해관계의 거래와 심리전술적 고려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본은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인정이다. 비단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정치적 교환은 여러 다른 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근본적인 층이 있다. 여기에 발디딤을 확실히 하는 것은 현실 정책의 고려에 엄숙성을 부여한다. 이것을 현실 대책 속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적어도 이 차원을 함께 열어 보는 도리는 없는 것일까?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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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북한의 전쟁 위협은 거의 다른 문제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압박한다. 그러나 답변은 간단히 발견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 


화제를 돌려, 국내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회적인 과제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빈부 격차 문제이다. 이것은 상황이 그렇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심정에 절박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과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거에서도 여야 할 것 없이 이 문제는 급히 해결돼야 할 사안으로 크게 논해졌었다. 빈부 격차 또는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은 국내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격차가 심한 사회는 하나의 사회로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 


최근 조선일보 주최의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가 내건 주제에도 보다 균등한 부의 문제가 들어 있다. 발언자들 대부분이 세계적인 부유층의 인사 또는 금융업계의 대표자들이지만, 금융 혜택을 부유층으로부터 보다 널리 확대해서 사회적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발언이 많이 나왔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3월13일에 새로 선출된 로마 교황도 여러 가지로 빈부의 문제를 인류 전체가 풀어야 할 긴급한 과제라는 것을 취임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부상하게 하였다.


교황은 그 전부터 빈곤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교황 선출과 관련된 보도에는, 2007년에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그가 “재화의 불공평한 분배가 최악의 사회 상황을 만들어,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그것은 많은 우리 형제들에게 보다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한 것이 전해졌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첫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설교를 잘하는 것보다도 보통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활절 주일이 시작되는 성목요일인 지난 27일에 그는 로마 교외의 소년 교도소에 가서 수감 소년들의 발을 씻는 행사를 했다. 교황청에서 행하던 행사를 현실 세계에 가깝게 옮긴 것이다. 그는 설교에서 목자들이 괴롭고 피흘리고 눈이 멀고 악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 변방으로 갈 것을 호소했다.


그의 검소한 생활 습관도 여러 가지로 보도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로 있으면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고 교구 내의 작은 아파트에 거주한다거나 해외여행 시 비행기의 일반석을 탄다거나 하는 것들도 널리 이야기되었다. (교황 선출 이후 로마행 비행기의 왕복표 처리를 고민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것은 그의 선출이 가문 또는 개인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교황 피선 후 그는 제공된 승용차를 사양하고 공용버스로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 물건들을 정리했고 스스로 숙박비를 지불하고 숙소의 직원들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교황으로서도 사도궁전 외의 숙소에서 살며 다른 성직자들과 식사를 함께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생활양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그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거주지 근처의 신문 판매소 주인과 관계되는 일화이다. 그는 교황에 선출된 후 판매소 주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신문 배달을 중지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배달된 신문을 묶었던 고무줄을 모았다가 한 달에 한 번 판매소에 찾아가 그것을 돌려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일요일에는 직접 판매소에 와서 신문을 사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병자들이나 수감자들에게 차 대접을 하러 갔다.


새 교황의 자세는 베르골리오 대주교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선택한 프란치스코라는 칭호에 집약하여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성자인 성(聖)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선택한 것은 그가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기본 사명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말한다.


교황 프란치스코 선출 (경향DB)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빈곤의 문제를 단순히 빈부 격차나 평등한 분배의 문제와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하는 성자이다. 그의 관점에서, 빈곤은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인 삶의 조건이 아니라 적극적인 내용을 갖는다. 다른 수도단체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프란치스코회는 입회 시에 가난의 서약을 특히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탐욕을 없애려면 가난해야 한다. 가난은 필요한 삶의 자료들을 이웃 형제들과 나누는 데에, 그리고 정신적인 추구의 정진에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면서 또 그것은 금욕의 요구 이상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그 사치와 향락의 삶을 버리고 가난을 택하여 그에 따른 많은 괴로움과 아픔을 겪은 사람이지만, 그의 삶을 금욕과 고행의 삶이었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그는 꽃과 바람과 물을 사랑하고, 새들과 물고기에 설교하고, 해를 형제, 달을 자매라고 불렀다. 불도 형제였다. 자연물과의 소통은 그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었다. 그에게는 ‘완전한 행복’이 중요했고, 그것은 가난과 괴로움 속에서 행하는 봉사로써 얻어졌다. 그러나 고난의 봉사를 자신의 긍지로 삼자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겸허였다. 그것 없이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에 열릴 수가 없다. 그리고 참다운 사랑과 평화도 있을 수가 없다.


가난에 대한 이런 생각은 릴케의 초기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릴케에게 가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과 세계에 열리게 하고 자신의 내면의 깊이에 이어주는 매개자이다. 그의 흥미로운 관찰의 하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단지 돈이 없는 것이 가난이 아니다. 


물론 돈과 거짓이 판을 치는 현대의 도시에서 가난한 자는 쓰레기 속에 버려진 천 조각, 깨진 그릇 조각과 같아 ‘의지도 세계도 없는’ 존재이다. 도시의 삶은 모든 것을 그 안으로 빨아들이고 동물들을 찢어발기고 사람들을 불꽃 속에 탕진한다. 릴케의 가난의 시는 이에 대조되는 삶의 전형으로서 성 프란치스코를 찬양하는 것으로 끝난다.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통하여 소유와 시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친절과 사랑의 인간이 되고 경의와 기쁨과 지구의 아름다움에 열린 사람이 되었다. 그는 들판을 가며 형제가 된 꽃들과 말을 나누었다.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게서 기쁨을 얻었다.


그의 한없는 기쁜 마음은 아무리 작은 것도 놓치지 아니하였다. 그의 노래는 잊혀진 기억을 되돌아오게 하고 사람의 방에 평온을 가져 왔다. 그는 순결을 맹서한 수녀들의 마음을 샀고 그가 뿌린 씨앗은 자연 만물을 풍성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무명의 인간의 죽음처럼 가벼웠다. 릴케의 프란치스코 예찬은 이러한 한탄으로 끝난다--지금 이 ‘맑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가난한 사람은 이 ‘기뻐하는 자, 청춘의 힘에 넘치는 자’의 존재를 느끼지 않는 것인가? 어찌하여 이 ‘가난의 거대한 저녁별’은 뜨지 않는가? 프란치스코의 전설들을 담은 책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들>이 이름 지은 바대로, 릴케가 예찬한 가난도 ‘성스러운 가난’이었다.


그러나 가난을 넘어서 부를 얻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이다. 최소한의 부는 생존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부를 향한 욕망은 급기야 사회 안에 빈부 격차와 불평등을 격화하고 욕망들의 갈등, 정의의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하여 성스러운 가난의 이야기는, 빈부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있고 거기에 모든 존재를 돌보는 맑은 샘물이 흐르고 있음을 말한다. 양분된 세계에서 싸움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궁극적인 평화는 존재의 깊이에 흐르는 정신적 맑음의 원천에 이어짐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성스러운 가난의 우화가 전하는 것은 멀리에서 다가오는 이러한 예감이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은 궁핍이 아니라 어렵게 얻어내야 하는 과실이다. 그것이 사람을 이 열린 세계로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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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지난달 19일 제네바 유엔 군축회의에서 북의 대표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남에 대하여 “최종적인 파괴”를 말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핵폭탄 등의 대량파괴 무기가 말하여질 때에는, 대체로 전쟁 억제, 평화 수호와 관련하여 그것이 언급되는 것이 오늘의 세계 대세라고 할 것인데, 북은 그것을 전쟁 수단으로 활용할 의도를 단호하게 선언한 것이다. 


고 송욱 선생의 1950~1960년대의 생활고를 이야기하는 시에, 죽음에 임박한 여인이, 이승의 삶도 이미 저승의 삶과 다름이 없다고 하면서, “이승에서도 원자탄 그늘처럼/ 미안하고 불안하게 살아왔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이 시가 나왔을 때, 이 시의 풍자적 리얼리즘에 공감하면서도, “원자탄의 그늘” 아래 사는 것 같다는 표현은 조금 과장된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제 나라의 부는 크게 늘어났다고 하겠지만 , “원자탄의 그늘”은 현실이 되었다.



국내외에서 최근에 나오는 북핵에 대한 여러 설명 가운데,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의 아시아 정치 담당 편집국장인 페터 슈투름의 분석의 장점은 사건의 맥락을 간단, 명료하게 밝혀준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북은 핵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핵실험을 통해 여러 나라를 놀라게 한 것 그 자체가 북한의 소득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북한은 다른 나라의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핵으로 인해 동북아 지역이 불안정한 곳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북에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 무역이나 외교 관계에서 외부 세계와의 관계가 많지 않은 상태에서 고립의 심화도 별로 고통스러울 것이 없다. 강요된 고립은 열악한 인민의 경제에 대한 책임을 외세에 전가할 구실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체제의 정당성을 높여준다. “다수의 적”에 맞서는 당당한 “자존심” 또는 “명예의식”을 보여주면서 외부에서 오는 압력 일체를 거부하는 주권 수호가 북의 정치 행동의 지침이다.

북한 군인들이 3차 핵실험 성공 축하집회 (경향신문DB)


북한은 독자적인 자신의 논리를 따라 움직인다. 대부분의 나라가 갈등을 피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오늘의 정상 국가라고 한다면, 북한은 갈등에서 이점을 얻어내는 특이한 국가이다. 갈등을 도발하면 양보해야 할 한계 지점을 알게 된다. 6자회담은 상대방의 기본 입장을 확인하는 기회이다. 그것으로 미국과의 전쟁 위험은 계산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북의 전쟁 능력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의 관점은 취약한 경제에 비추어 전쟁 가능성을 크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북은 정치 지도부, 군 그리고 인민--이 세 부분이 독립된 경제 구역을 가지고 있다. “독립된 별(行星)”에 존재하는 군 경제는 다른 어떤 부분보다 강하여 독자적인 군사지원 능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은 경제력 전체가 뒷받침하지 못하는 전쟁이 오래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전쟁의 현실적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핵과 그것으로 조성되는 불안이 해결돼야 할 지상과제임에는 변함이 없다. 


긴급 사태에 대한 대비가 없을 수는 없지만, 하나의 필요는 더 넓은 관점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슈투름 국장의 분석과 같은 것은 그것을 위한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되풀이하건대, 그것은 오늘의 현실 논리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핵 개발은 북의 입장에서 볼 때,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 실질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쪽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완전한 이념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 주요 부분은 외부 세력의 간섭을 거부하는 주권 확립이라는 명제이다. 강력한 주권의 주장이 제국주의적 외세로부터 체제와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개발 전술을 정당화한다. 


마키아벨리즘은 흔히 폭력과 사사로운 이익을 자의적으로 조종하는 정치 술법을 말한다. 그러나 피상적인 마키아벨리즘의 이해가 놓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술수에 궁극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엄숙한 정치적 이념 또는 이상이라는 점이다. 여러 외국 전문가들의 관찰은 상호관계의 굴곡에 따라 들고남이 있기는 했지만, 핵개발은 북의 기본 정책으로 그 근본적 포기는 당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북핵 문제의 이해에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그 이념적 논리이다. 사람의 삶이 하나의 이념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다. 그러나 삶의 진리는 많은 경우 삶 전체에 흩어져 존재한다. 2차 대전 후 반핵 운동에 헌신한 버트런드 러셀은 핵전쟁의 위협에 당면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상대방을 핵전쟁을 통해서라도 타도돼야 할 악마의 체제라고 하는 주장들이 있었지만, 그는 이 대결에서 패배의 굴욕을 받아들이면서라도 인류 전체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많은 전통에서 집단 이상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가장 숭고한 인간 행위로 간주된다. 이에 대조하여, 러셀의 주장은 비열하고 허무주의적인 선택을 권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념을 초월해 사람의 삶에 널리 흩어져 있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명의 존엄성과 가능성과 신비를 최대의 가치로 긍정한다.


그러나 하나이면서 여럿인 진실을 어떻게 현실이 되게 할 것인가?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삶의 진실의 분산을 공동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제도들을 만드는 것이다. 문제의 국제적 분산은 그것을 위한 한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슈투름은 그의 다른 글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큰 약점으로 국가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역적 구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하여 중요한 국가 간의 의제는--독도, 조어도, 쿠릴열도, 과거 청산 등의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국내의 정치 투쟁과 민족주의 열풍에 휩쓸려 너무 쉽게 갈등의 원인으로 전락한다.


 2차 대전 이후의 유럽의 진화를 볼 때, 이 점에서 아시아 지역의 후진성은 부정할 수 없다. 북핵과 관련한 6자회담과 같은 것은 문제를 지역의 테두리에 삽입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절실한 것은 보다 다양한 의제와 접근을 허용하는 기구이다. 의제도 삶의 진실 위에 다양하게 분산돼야 한다. 그것이 공동 의식을 만들어낸다. 동서 냉전의 종결에 헬싱키 협약(1975)과 같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더러 지적된다. 미·소 등 동서 진영의 여러 국가는 이 협약에서 동서 간 긴장완화의 필요에 동의했다. 최종 규약은, 주권과 영토 존중, 국제간 분규의 평화적 해결 이외에 인권, 자유권, 사상과 신앙의 자유에 대한 합의를 포함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결국은 공산 세계의 민권 운동과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의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붕괴의 가능성을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치 체제를 넘어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집단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권리를 위한 윤리적 호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자는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에 참으로 뜻있는 협력기구가 존재하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제를 넘어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공동의식을 전제할 수 있어야 한다. 북·미 간 차원에서 좋은 증후들이 일어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중국의 지식인 120여명이 전국인민대표회의와 인민정치협상회의에 유엔 국제인권규약의 비준을 촉구하는 서한을 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것은 인권규약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말하고, “중국이 인권, 개인의 자유와 위엄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전체 사회가 야만과 증오의 사회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한다”고 하였다.(경향 2월28일자)


체제적 이념이나 민족주의적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이념들은 남북대결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데에 너무 좁은 바탕이 된다고 아니할 수 없다. 문제를 보다 넓은 국제적 복합 관계 그리고 보다 넓은 인간적 관심의 지평으로 열어 놓는 방도를 찾는 것은 요원하면서도 궁극적인 해결의 한 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러한 논의의 테두리들을 구축하는 것이 쉬운 일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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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최근 미국에 있었던 큰 사건은 코네티컷 주 뉴타운에 있었던 총기 난사 사건이다. 우리 신문들에도 보도된 바와 같이, 이것은 20세의 한 청년이 초등학교에 침입하여 20명의 어린이와 6명의 교사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범인은 학교에 침입하기 전 집에서 어머니를 살해하였고 자신도 자살로 사건을 마감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사건이면서, 우리 모두의 인간관을 어둡게 하는 일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를 포함하여, 어떤 종류의 인간 공동체 이념 그리고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반성을 요구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 크게 보도되었던 것은 2007년 버지니아공대에 재학 중이던 한국계 학생 조승희의 총기 난사로 32명이 살해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한 사건이었다. 미국의 각급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총기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미국에서 각종 총기에 의한 살인은 연평균 3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우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원인이 사회 자체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학 교내 총격사건 5주년 추모행사 (출처 :경향DB)



이번 사건은 다시 미국에서 총기 소유 문제를 국가적인 의제가 되게 하였다. 사건 직후 15만명이 청원서에 서명하여 무기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구하였고 오바마 대통령은 20여개의 행정명령을 발하여 총기 판매를 규제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다시 총기 판매와 소유 제한을 새로 규정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법안이 통과될 것인가 아닌가 그 전망은 분명치 않다.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이유로 총기 제조와 판매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무기업자들의 로비와 공화당의 많은 의원을 비롯한 보수정치인들의 반대가 말하여진다. 무기 소유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라는 것이 이들이 내거는 명분이다.


정치적 법률적인 문제를 떠나서 이번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나오고 있다. 제일 쉬운 설명은 범행 청년이 정신 장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가 사람들과 교섭을 싫어하는 비사교적인 성품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비교적 얌전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하나의 설명은 이번 사건이 미국의 문화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지의 한 논평자는 미국의 한 사학자 견해를 인용하면서, 이번 사건의 원인이 미국사회의 “군사화”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우려를 표현하였던, “군과 기업의 유착관계”, 계속되는 미국의 해외 전쟁, 국민들 사이에 일반화된 군사 애국주의, 영화나 컴퓨터 게임에서의 전쟁 살인 놀이--이러한 것들이 전체적으로 미국의 문화와 일반적 심리를 “군사화”한 결과 청소년이 자신의 문제를 총기와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평에 추가하여 생각할 것은 민주주의 이념 자체에도 그러한 군사주의를 배태할 요인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수주의 정치 여론이 무기 소유를 규정한 헌법 조항을 들고 나오는 것은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헌법 조항은 국민의 자기 방위권--자위권을 규정한 것이다. 이것은 외국의 침략에 대항해 국민이 민병대를 조직하고 국토를 방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만, 개인이나 집단이 타자에 대해 스스로를 방위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건국 초의 사정 또는 그 이전의 인민 자위권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이것은 국가에 대한 인민의 저항권을 규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무기 보유는 미국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민병대 의무를 갖는 국민 모두가 무기를 자기 집에 보관하는 스위스는 그 대표적인 예이고, 캐나다나 노르웨이도 무기 소유가 자유화되어 있다.) 넓게 살펴 볼 때, 개인의 무기 소유와 자기 방위의 권리가 국민 또는 인민의 자위권에 포함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특이한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데에 기초한다. 미국의 무기에 대한 헌법규정은 헌법 전체의 맥락에서 시민의 권리 규정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각자의 권리란 결국 각자의 생명과 행복 또는 이익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일정한 법질서 속에서만 가능하다. 한 사람의 생명권 또는 행복추구의 권리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갈등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적 이해관계, 그 갈등과 타협을 불가피한 사회 현실로 인정한다. (하나의 국가 목표에 모든 사람이 승복할 것을 요구하는 전체주의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현실만이 제도의 정신적 기반이 될 때, 그 사회는 곧 비인간적인 사회로 전락할 위험을 갖는다. 모든 인간사가 결국 힘의 대결 그리고 그 균형과 타협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을 원리로 하는 국제관계나 개인적인 심리가 “군사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앞에 언급한 독일의 논평자는 뉴턴 초등학교 총기난사와 같은 사건을 유발하는 심리적 동기를 설명하면서, 그 배경이 된 것은 세계의 모든 갈등과 증오와 원한과 소외가 총으로 해결될 수 있고 그로 인해 자신과 자신의 세계가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하는 문화라고 말한다.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정당성을 위해서는 투쟁과 승리만이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단순화된 민주주의의 이념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적 화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과 행복을 인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타협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남녀 간의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의 대상을 이상화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이상적 가능성, 즉 자기 안의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서도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주어진 대로의 삶을 넘어서 플라톤적 이상의 세계에로 향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비슷한 전환은 사회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타협은 단순히 이해관계의 타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유대감의 중요성은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이익의 집단화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관계를 진정으로 매개하는 것은 이해관계를 넘어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인정 그리고 보편적 윤리 세계에 대한 동참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화해는 인간존재의 이상적 가능성에 대한 열림으로 승화될 기회가 된다. 이러한 열림에 맞닿아 있음으로써 민주주의는 참으로 인간성 실현의 이상이 된다. 그러나 이익사회에서 상실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 더 나아가 사람과 환경의 일치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느낌이다.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오늘의 우리 사회에 이러한 높은 차원의 인간 이해가 존재할 자리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개인과 집단의 이익 차원에서만 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학교 교육에서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개인이나 국가 이익을 위한, “스펙” 쌓기 경쟁이 된다. 새 정부의, 총리 후보자 검증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그것을 도덕적 윤리적 문제로 간주하기보다는, 또 사회가 지켜 나가야 할 도덕적 투명성 문제로 보기보다는, 출사(出仕)에 요구되는 경력 관리, 이미지 관리의 문제로 보는 관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명분이야 어떤 이름으로 이야기되든,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이익과 전략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오늘의 문화적 상식이다. 그리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그러면서 너무나 쉽게 유혹에 빠지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라졌고, 물론 자비, 용서, 화해, 선의, 예의, 겸허, 검소 등 부드러운 덕성들은 감상주의의 부질없는 언술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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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우리 언론에도 보도된 일이 있는,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 이야기는 다시 한 번 되새겨볼 만하다. 외국 언론들에 보도된 것을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의 검소한 삶이다. 그는 대통령 궁에 사는 것을 거절하고 수도 몬테비데오 근처의 허름한 농장에 산다. 경호를 맡고 있는 것은 경관 두 명과 다리 하나를 잃어버려 세 발로 다니는 개 한 마리이다. 대통령의 월급은 우리 돈으로 1200만원을 조금 넘어 가지만, 생활비로 80만원을 제한 다음(이것이 우루과이의 평균 소득이다) 남은 돈은 자선사업에 기부한다. 법의 요구대로 공개된 재산은 원래 낡은 폭스바겐 한 대였으나 지금은 부인 소유 농장의 반을 함께 신고하여 2억2000만원 정도가 된다. 단임제이기 때문에 2014년에는 은퇴하게 되는데, 은퇴 후에는 연금을 받게 된다. 따라서 퇴임 후에도 생활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농장에서 채소와 꽃을 재배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은 그는 채식주의자다. 스스로 설명하여, “들고양이였는데 채식주의자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독재 정부에 대항하는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었던 과거를 생각하여 자신의 평화주의를 스스로 다짐하기 위한 결정이 아닌가 한다.


우루과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좌파 반군 지도자 출신인 호세 무히카 후보 (경향신문DB)


정치 모토의 하나가 ‘깨끗한 정부’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하나의 모토인 ‘일급국가 건설’은 그의 성향으로 보아 조금 해설을 요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검소한 삶은 그의 정치적 신조 그리고 도덕적 결단에 관계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는 스스로 설명하기를 익숙해 왔던 인생이 그런 것이고 그것은 자유로운 의사로 선택한 것이라 한다. 세상에서는 자기를 세계의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자기는 전혀 가난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정말 가난한 사람은 화려한 생활을 유지하느라고 노예처럼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6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UN 지속가능한 경제발전회의’에서는 대중 빈곤 해결의 주제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대중 빈곤을 없앤다는 계획은 지구 환경이 견뎌내지 못할 것이고, 물질적 추구에 쫓기는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무히카 대통령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절로 우리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 되겠는데,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와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우선 우루과이의 사회적 환경은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중에도 인구가 350만명이 안된다는 것은 가장 큰 차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할 성싶은 것만 생각하여도, 부럽게 여겨지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 무히카 대통령이 그렇게 돈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것은 우루과이에서는 돈이 없는 정치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와 돈의 연결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있다. 제일 부러운 것은 청렴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정치가의 요건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높았던 그에 대한 지지도가 하락한 것은 경제 등 현안 문제들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덕성에 못지않게 정치에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능력이다.


우리 형편과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 하나의 분명한 모델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의 삶이 정치 신조나 자선행위 때문에만 전범(典範)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성인이나 성군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하여 그 나름으로 건전한 판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가 사는 소박한 삶은 보통 사람도 선택할 수 있는 삶이다. 특히 연금제도가 확실하다면 그렇다. 무히카 대통령의 소박한 선택도 퇴직 후의 연금 때문에 안정성을 얻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그는 뚜렷한 전범적(典範的)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퇴임 대통령이 받는 연금 혜택은 우루과이 복지 제도의 일부를 이루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복지 문제를 생각해보면 그 대조가 흥미로울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우리 대통령 후보들의 주요 정책 제안에도 복지가 들어 있다. 보다 구체안의 제시가 요구되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이것이 당 소속에 관계없이 의제가 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히카 대통령의 리우 UN 회의 연설에는 대중으로 하여금 무조건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 들어 있다. 소비주의의 삶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빈곤에 대한 소비주의적 대책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 빈곤 대책--적절한 한계를 갖는 대책이 없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것은 그의 정치 철학의 핵심의 하나다. 그는 대통령 관저를 노숙자 숙소로 개방하겠다고 한 일이 있다. (물론 결국 정부는 다른 조처로서 관저의 개방을 대신하였다.)


우리의 복지 논쟁을 움직이고 있는 인간 철학은 무엇일까? 경제 발전과 그에 따른 부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불안이 사람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협한다면, 그것은 방치될 수 없는 일이다. 벌어지는 빈부 차는 사회 질서의 기초를 무너지게 한다. 이것은 어느 관점에서나 긴급한 조처를 요구한다. 그런데 대체로 우리에게 빈곤의 문제는 물질적 부의 분배 문제로 환원된다. 거기에서 인간의 도덕적 의무의 문제는 별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분배나 복지에 대한 제안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형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표를 위하여 필요하다. 그 외에도 정치적 타산은 정책 제안들을 날로 불려 간다. 무히카 대통령에게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은 원칙과 이상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이런 모호한 상태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후보자를 가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한다. 그러나 정책을 선택하면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다.


우리는 정치 지도자가 정치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여러 인간적인 의미에서도 지도자일 것을 바란다. 금년 초에 독일에서 전임 대통령이 물러가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때 이 칼럼에서도 그 사정을 소개한 바 있지만, 전임 대통령이 퇴임해야 했던 것은 약간의 불투명한 행적 때문이었다. 여러 당의 지도자 그리고 국민 여론이 강조한 것은 퇴임하게 된 불프 대통령이 대통령직의 도덕적 위엄을 손상했다는 것이었다. 여야 좌우 합의 위에 당선된 가우크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구체적인 정책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의 정치 원리--자유, 정의, 불우한 자에 대한 배려, 도덕적 책임 등으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원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이 민족 공동체라기보다는 가치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옛날 우리 대통령 선거에 등장했던 말을 빌려, 가우크 대통령의 의무는 ‘정신적인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과 총리의 이원 체제로 하여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 정치 문제는 총리의 책임이다. 대통령 선거는 그 목적을 위하여 선출된 연방회의에서 행해진다. 그것은 후보자를 정신적 전범의 관점에 집중하여 평가할 수 있게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한정되는 공공 공간은 후보자를 보다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우루과이의 대통령 선거가 직접선거인 것을 보면, 중요한 것은 제도에 못지않게 사회 전체의 정신 풍토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국민 정서의 여러 증거로 보아 독일은 대통령직의 존엄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판정하고 그것을 투표에 반영할 수 있는 정신 기율을 가진 사회로 보인다. 가우크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독일을 가치 공동체라고 한 것은 희망이면서 현실일 것이다.


정신 풍토, 제도, 어느 쪽 때문이든지, 우리 사회는 지금 ‘정신적 대통령’을 선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대중 영합적인 모든 수단--흑색선전, 막말, 흥미를 끄는 연출 등을 동원하여 표를 모으는 데에만 힘이 집중되는 것이 우리 선거다, 이러한 것들을 넘어 후보들의 정신 자세, 인간 이해, 도덕적 윤리적 원칙들을 짐작해내기는 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것을 모르고 정책들의 진정성을 평가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표를 던져야 할지 모른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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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지난 10월26일 한국인문학총연합회가 창립기념 행사를 가졌다. 이 연합회는 인문학 관계 학회들을 하나의 모임으로 엮어 보자는 것이다. 사실의 면밀한 조사 검토가 학문의 기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연구는 그 연구대상에 따라서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 분과적인 학문을 하나로 종합하는 것도 학문 연구의 중요한 과제이다. 학문은 궁극적으로 세계와 사람의 삶을 전체적으로 또 하나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 기획이다. 이번에 출발하는 연합회 구성에는 26개의 학회가 참가하였다.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등록된 학술단체는 2011년 현재 7621개에 이른다. 쪼개져 나간 학회들을 연합하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할 것이다.


발표된 ‘인문학 선언문’은, “인문학은 인간의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서, 과학조차 이 이야기의 일부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학문이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더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지만, 세계와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학문의 최종 목표의 하나인 것은 틀림이 없다. 지난번의 본 칼럼에서 한국 과학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를 소개하면서 필자가 지적한 것도 그러한 종합의 필요였다. 한편으로 종합은 장기적인 과학 발전을 위하여, 다른 한편으로 그 인간 복지에의 수렴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기술을 문학이나 철학의 반성적 사고에, 물론 더욱 넓혀서, 종합적 인문적 사고에 열리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경향신문DB)


그러나 단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쓸데없는 일일 수 있다. 인문학총연합회의 토론회에서 건국대의 성태용 교수는 “인문학, 쓸모 있다고 말하지 말자”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발표문의 요지는 유용한 것만을 찾는 세상에서 인문학은 절로 무용지물로 보일 수밖에 없는데, 쓸모가 없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것을 확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역설을 포함하는 주장이다. 성 교수는 어떤 나무가 쓸모가 없었기에 큰 그늘을 제공해주는 나무로 자라게 되었다는 장자의 우화를 인용하여, “쓸모없음의 큰 쓸모(無用之大用)”를 언급하였다. 성 교수의 정의에 의하면, 인문학은 쓸모가 없는 듯하면서, “성숙한 삶을 살게 해주는 학문”이다.


미국 프린스턴에 있는 고등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낸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의 글에는 성 교수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쓸모없는 것의 쓸모”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는 이 제목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쓸모없는 이론들에서 나온 발명들을 예로 들고 있다. 1939년에 쓰인 글이기 때문에 오래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맥스웰의 전기와 자기에 대한 쓸모없는 이론이 마르코니의 무선 통신과 같은 쓸모 있는 발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러한 것이 과학과 기술의 우회적인 연계의 예가 된다.


그렇다고 큰 쓸모가 나올 것을 기다려, 쓸모없는 것을 참고 너그럽게 보라는 것만은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학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자유로운 인간 정신이라는 점이다. 학문은 그 자체로써 삶의 보람을 이룬다. 이것은 과학에도 해당되지만, 시나 음악이나 그림 또는 다른 인문적 탐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것 없이 스스로 즐거운 삶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학문은 실용에 봉사한다. “증오가 휩쓸고 있는 세계에서도 사람은 ‘이득이 있든 없든’ 아름다움을 함양하고 지식을 쌓고 병을 고치고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는 일”을 한다. 물론 사회 경제 정치의 실제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일도 학문이 할 수 있는 일의 하나이다. 다만 그러한 실용적 기능은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플렉스너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유로운 정신을 존중하면서 고등과학원을 운영하고 아인슈타인, 수학자 헤르만 바일이나 폰노이만, 미술이론가 파놉스키 등의 자유로운 학문 생활을 뒷받침했다.


지금은 이러한 자유로운 학문의 이상은 미국에서도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무용(無用)과 대용(大用)은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곳에서 서로 넘나들게 마련이다. 급한 쓸모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쓸모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문제를 초연하게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거리를 두고 보아야 넓은 지평 안에서 해답의 여러 가능성을 찾아내고 문제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갈 사람을 구할 때도, 급한 가운데에도 느긋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자격 요건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을 쉽게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학문의 사명은 사회적으로 그러한 능력이 나올 수 있게 하는 지적 자산의 축적에 기여하고 그것을 일반적인 문화가 되게 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학계의 인사들이 후보자의 소위 ‘캠프’에 참여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다. 요즘에는 급한 현실 속의 발언만이 학문하는 자의 눈에 띄는 의무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보다 넓은 정신의 자유로운 탐구의 자율 구역도 그렇게 정의되는 쓸모에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경제민주화’는 이번 선거에서 핵심 안건으로 등장한 정책 지표이다. 그 방법 그리고 현실 요건의 관점에서 면밀하게 검토되어야 하는 사항들이 많을 것이다. 이것은 학계의 도움이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성숙한 삶’이라는 기준에서 경제민주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제민주화는 지극히 단순화하여 말하면, 소유의 평준화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숙한 삶’과의 관계에서 보다 복잡하게 말하면, 그것은 구김 없는 인간성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고, 증오와 원한이 아니라 상호존중의 윤리에 기초하는 사회를 위한 물질 질서를 구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기준은 정치를 맡겠다는 사람들의 현장적 사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마땅하다. 


정책의 논의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논의의 근본이 되는 것은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어떤 기초이다. 그 기초가 단단해야, 정책 토의는 파당적 갈등을 넘어 우리 삶에 대한 토의가 될 수 있다. 정책은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깊이에 대한 사회적 탐구에 그 뿌리를 갖는다. 정치지도자에게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정책만이 아니라 정책의 뒤에 있는 바 이 뿌리에서 나오는 인간적 삶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이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그의 인격이다. 이 인격이 주축이 되어 정책은 일관성을 얻고 동시에 상황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는 것이 된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로, 사람의 생사, 화복, 수명 그리고 일의 연월일을 귀신처럼 예언하는 신들린 무당이 있었다. 제자가 안내하여 호자(壺子)라는 현자의 관상을 보게 하였다. 무당은 그의 상을 보고 한번은 죽음이 임박했다고 하고, 그 다음은 병이 나아 생명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다음 번에 무당은 얼굴의 상이 변화가 심해서 관상을 볼 수 없다고 하면서 호자를 피해 달아나버렸다. 처음 호자는 무당에게 땅의 조짐을 보여주었고, 두 번째는 하늘과 땅의 조짐을 보여주었다. 무당은 이 조짐에 따라 점을 친 것이다. 호자가 세 번째 보여준 것은 표면적인 증상을 넘어 가는 본질적 실체였다. 그러나 무당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 우화의 뜻은 근본을 알지 못하고 표면적 증상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상적 증후가 아니면 무엇으로 세상 형편이나 추세를 판단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수시로 나타나고 없어지는 증후에 더하여 그 너머에 있는 사실의 근본에 또 존재론적 진리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노력을 버릴 수는 없다. 학문--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이 이러한 근본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학문의 근본이 그러한 근본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삶을 깊이 있게 하는 일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체제를 다스리는 법술(法術)을 고안하고 스스로 쓸모에 봉사하는 것이 학문의 전부라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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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최근 언론 매체에 크게 보도된 뉴스 하나는 국내외의 싸이 열풍이다. 싸이는 영국과 미국의 인기가수리스트에서 1등, 2등을 차지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고 있는 것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다. 9월 중순 경주의 국제 펜클럽 대회에 참가한 외국작가들은, 내가 만났을 때, 한결같이 한국의 발전상에 대해 감탄을 표현하였다. 작가들은 경주의 유적과 관리상태, 대회의 조직, 작가들의 발표가 좋았고 길거리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주마간산의 인상을 요약하는 잡담의 하나는 한국에서는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장바닥에서 음식을 사먹어도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밤 뒤흔든 강남스타일 (경향신문DB)


 얼마 전 미국의 ‘사이엔티픽 아메리칸’지는 한국 과학 연구 현황에 대한 평가를 담은 글들을 실었다. “2012년 세계 과학의 현재 상황”이라는 특별 보고에 의하면, 과학 수준에서 한국은 전체적으로 10대 과학 우수국에 들고, 세계 우수저널에 수록되는 논문 편수로 따지면, 순위에서 미국, 독일,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 캐나다에 이어 8번째가 된다. 이러한 연구와 관련하여 새로운 특허를 낸 숫자로는 (미국 특허상표국 집계) 한국 순위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번째가 되고, 독일, 대만, 캐나다, 프랑스, 영국, 중국, 이탈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그 뒤를 따른다.


눈에 띄는 것은 과학 연구가 미국과 서구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확산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려 있는 도표에는 비서구 국가로는 중국, 한국, 인도, 대만, 이스라엘, 싱가포르, 러시아, 홍콩, 브라질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기사 내용은, 한국과 같은 나라의 비약적 발전에 대한 언급도 있지만, 주로 중국과 인도에서의 과학 발전을 주목한다. 대체로 세계 전체를 통하여 과학 발전이 인류 역사의 어느 때보다도 가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재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다. 이것은 세계화의 한 부대 효과라고 할 것인데, 세계화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든지, 이 특집에 실린 글들은 적어도 과학 발전에 세계적 교류나 협동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론 물리학을 위한 중요 실험시설인, 제네바의 유럽 입자 물리연구소(CERN)가 운영하는 대형강입자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 인류의 에너지 문제 해결에 궁극적인 답을 기대하면서, 한국을 포함하여 일곱 나라가 발주한, 핵융합발전로(ITER)와 같은 것이 가시적인 국제 협력의 예가 될 것이다. 이 보고에 실린 인터뷰에 나온 영국왕립학회 회장 폴 너스는 DNA에 관계되는 연구로서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 분야에서 중국 학자들이 내놓는 자료들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학자들이 국경을 넘어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학문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총론을 쓴 존 섹스튼 뉴욕대 총장도 국제적 교류를 중요 요인으로 지적하면서, 르네상스 시기에 뛰어난 인재들이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로 두루 옮겨 다닌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학자들이 미국의 실리콘 밸리, 상하이, 런던, 뉴욕을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이 과학 발전에 큰 자극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통계에 의하면, 다른 나라의 집필자와 공동집필한 미국학자들의 논문들이 2006년에서 2008년까지 2년 사이에 12%에서 30%로 증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근년의 폭발적인 과학 발전은 오랜 문화적 축적에 기초하면서 교육이나 연구에 대한 재정적 정책적 지원이 있어서 가능해진 것이다. 위에 말한 펜클럽 회원들과의 만남에 동석했던 캐나다의 한 외교관은 한국의 교육 인적자원이 한국의 발전 요인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사이엔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중국의 국제적 진출을 다룬 글은 중국정부가 1990년대 이후 교육에 얼마나 많은 정책과 노력을 투자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결과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이 엄청나게 불어났고, 정부의 발전 정책의 수혜대상이 된 100개의 대학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상하이 자오퉁대학(交通大學) 교수가 공동집필한 이 보고는 정책적 지원을 얻지 못한 대학의 사정은 여전히 열악한 상태에 있고, ‘관시(關係)’라는 사적 인맥을 중시하는 문화, 정치와 관료제도의 경직성 등이 보다 정상적인 발전에 장해가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총체적인 업적에 있어서는 미국이 압도적이지만, 과학진흥의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독일의 대학들로 이야기된다. 저널리스트 슈테판 타일은 독일의 강점은 연구, 실용 기술 그리고 기업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이것이 독일로 하여금, 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튼튼한 경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독일의 직물산업은 새로운 기술과 물질의 개발을 통해서 중국과 같은 신흥 산업국가들의 도전을 이겨낼 수 있었다. 뮌헨 공과대학에서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하나는 로봇과 탄소섬유이다. 로봇은 사람의 손으로는 다룰 수 없는 미세한 탄소섬유를 집성할 수 있다. BMW 자동차회사는 탄소섬유로 이루어진 최경량의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이다. 칼스루헤 공과대학은 재생에너지를 저장하는 배터리를 제작하기 위한 나노기술과 신자료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드레스덴 공과대학은 전자 관계 회사들과 협동하여 현재의 전자기구가 사용하는 전기의 100분의 1 정도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전자회로를 개발하고 있다. 기업과 대학의 협동은 양 파트너의 직접적인 관계이기도 하지만, 막스플랑크 연구소 그리고 프라운호퍼와 같은 연구기관의 연합 관리 기구에 의하여 중개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연구 가운데에도 특히 이러한 연구기구들이 지원하는 연구는 단기적인 수확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결과를 허용하는 것이지만, 위의 글을 쓴 필자는, 독일의 과학기술 체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기업과 대학의 지나친 밀착이 현재의 필요에 얽매여 멀리 내다보는 연구를 어렵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다른 걱정은 기업에 밀착된, 그리고 단기적인 발전을 위한 과학 연구가 참으로 인간의 복지에 기여하는 것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소재 개발의 많은 것이 적어도 자원 우호적인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앞에 언급한 섹스튼 총장은 연구의 국제화는 저절로 기후변화, 식량 확보, 기타 인도주의적 과제들을 중요 안건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학발전을 보다 더 긴밀하게 인류 복지에 연결하는 일일 것이다. 한 필자는 학생들로 하여금 과학에 보다 적극적인 흥미를 가지게 하고 과학 발전의 창조적 도약을 위하여, 분과과학을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통합은 주로 과학과 사회과학의 통합을 말하는 것인데, 과학을 철학적 문학적 반성에 연결시키는 것은 그것을 보다 본질적인 인간적 의미를 향하여 열어 놓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문적 성찰 자체를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과학의 사실적 이론적 엄밀성에 열리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에 궁극적인 모태가 될 문화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과학에 대한 보고를 소개하는 것은 반드시 그것을 제대로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정치 사회 경제의 의제이다.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의 직무를 논하는 데에서도 그렇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최근의 한 칼럼에서 공화당의 미트 롬니 후보를 비판하면서, “대통령만 교체하면 경제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구체적인 정책은 제쳐 두고 자기가 대통령만 되면 만사가 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우리도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모든 것이 잘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크루그먼의 말을 좀 더 확대하여 보면, 정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장래는 대통령의 한 임기보다는 길게 생각되어야 하고, 대통령의 정책은 넓은 폭의 관심과 장기적인 발전의 방향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야 한다. 과학과 문화는 정책으로 촉진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의제화하는 매트릭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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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이화여대 석좌교수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 대통령 선거에 나서려는 여러 후보 지망자들의 정책들은 차이보다는 공유하고 있는 바가 두드러진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그것은 사회 현실에 부딪힘에 따라 또 정책을 맡는 지도자에 따라 천지의 차이로 다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두드러지는 것은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사회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성장 과실의 보다 공정한 분배 그리고 그것을 위한 체제의 정비가 다음 정권의 과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후보자들의 견해이기도 하지만, 두루 일반화된 생각이기도 하지 않나 한다. 많은 사람에게 한국사회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게 된 것이다. 맹렬하게 앞을 향하여 나아가다 보면, 일단 멈추고 몸을 추스르고 앞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둘러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활력과 피로 또는 기분의 리듬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사람의 삶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이데거의 대표 저작 제목은 <존재와 시간>이다. 여기의 존재와 시간은 더 일반화하여 공간과 시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 우주 만물의 존재에서 기본 축을 이루는 것이 공간과 시간 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물리 현상만이 아니라 사람의 삶에서도,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학교에 가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계절의 리듬에 따라 농사를 짓고 또는 하루하루 일하면서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는 것-이 모든 것은 시간의 리듬 속에 움직인다. 이러한 시간의 축에 더하여, 집, 동네, 고향, 도시, 나라 또는 학교 직장 등-이러한 것들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공간을 말한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시간을 나누어 쓰는 것보다도 어려운 것이 이러한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부족하고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부족한 것은 진정한 공간이다. 그리하여 공간은 사람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시간 속에 행하게 되는 사람의 일은 이 공간을 얻거나 보다 좋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는 사람에게 신비스럽게 드러나는 근원으로 생각되지만, 보통의 삶에서 느끼는 공간에 대한 향수도 이에 대한 작은 예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 어디에나 있는 것이 공간이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면 참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계속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 특히 현대 사회의 삶이다. 작업의 시간은 사람의 삶의 거의 모든 것이고, 일이 급하다보면 공간은 스쳐지나가는 시간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옛날 농업사회에서 일 하는 것은 익숙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이 삶의 신진대사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자신의 직장이 옛날의 토지에 비슷하게 삶의 유기적 총체의 일부가 되는 수는 많지 않다. 그것은 잘 알 필요도 없고 익숙해지지도 않는, 스쳐지나게 되는 정류장일 뿐이다. 그것은 영상물 속의 공간에 비슷하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저서에서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의, 즉 전체주의의 역사철학은 과정의 철학으로서, 역사나 사회 과정을 일정한 입장에서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의 삶--모든 사람의 삶을 동원할 수 있다는 철학인데, 그것은 과정에 빠져들어 존재의 경이로움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존재의 경이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전체주의만이 아니다. 모든 정치적인 동원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따라 ‘빨리 빨리’ 움직이면서 어떤 공간에도 머물지 못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루소가 교육을 논하면서 가졌던 고민의 하나는 어린이의 오늘의 행복과 미래를 지향하는 교육의 목표를 어떻게 적절하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 또는 성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은 공간에 체재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리고 성공의 그래프에서 모든 공간은 시간 속에 이루어지는 소득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다. 그래서 집과 땅은 부동산이 된다.


(경향신문DB)


여기에 대하여 자연은 예로부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으로부터 소유와 권리를 분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심리적으로 또 자연산수의 관점에서, 옛날에는 자연을 향한 사람의 마음까지도 사회와 정치에 완전히 지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산수화가 말하여주는 것은 정치나 사회에 복무하라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그에 맞설 수 있는 존재의 차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조(花鳥)와 호접(胡蝶) 같은 자연물도 사람으로 하여금 복무의 시간으로부터 돌아갈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하였다.


사회를 공동체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생존을 뒷받침해주는 튼튼한 공간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오늘의 도시화는 공간을 물리적으로는 넓어지게 하지만, 안정된 생활의 공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뿔뿔이가 된 사람들이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찾고 인터넷으로 지인(知人)을 만들어 가는 곳이 현대적 도시 공간이다. 출세의 사다리를 찾고 그것을 올라가려는 것도 비슷하게 인위적 공간을 만들어보려는 몸부림이다. 복지제도가 튼튼해지고 사회적 유대가 공고해진다면 이 공간은 조금 더 안정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여러 외적인 복무로부터 완전히 풀어내주지는 못한다.


사회적 약자라는 말이 있다. 약자의 편을 들고 약자를 돌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것을 설득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에 중요한 지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공간은 그것을 넘어간다. 돈이 없고 권력이 없으면 약자인가? 약자라는 말 자체가 시체(時體)의 가치 기준을 받아들인 것이다. 릴케의 초기 시에는 어려운 사람들의 참상을 간단히 요약하려 한 시들이 있다. 이들 시에 관계하여 그는 한 편지에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일이 있다. 다른 사람의 형편을 개선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상황을 잘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인 스스로가 상상해낸 인물의 속셈을 알기도 어렵거늘, 자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타인이 이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가 자기 시에 그렸던 거지나 난쟁이는 자신의 마음에서 만들어낸 틀에 맞추어 주조(鑄造)해낸 것들이다. 이 틀의 자료는 그들의 신세를 바로잡자는 희망으로부터 추출된 것이 아니다. (물론 타자에 대한 공감이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시인은 그러한 의도 때문이 아니라 그들만의 개체적인 운명 그것을 기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를 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기림을 위한 시적 집중이 시인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진실에 이르게 한다. 두려운 것은 정상인이라는 규격에 맞추어 난쟁이의 키를 늘이고 거지를 부자가 되게 하겠다는, 새로 교정되는 세계이다-릴케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말은 보수 반동의 발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각자에게는 정치와 사회의 틀을 넘어, 그만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난쟁이를 잡아 뽑아 규격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거지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거지가 되기로 결정한 사람-무소유의 수도자가 아닌가?


우리 사회는 이제 공동체적 유대의 강화 필요성에 동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물론 여러 정책적 조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일로 고쳐 생각해볼 수 있다. 이제는 앞으로 바삐 나아가는 일보다도 사람이 편할 수 있는 공간-물리적, 사회적 그리고 초월적인 공간이 사람의 사람됨을 용이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된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다면, 이러한 공간의 마련에 그것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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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가까운 일본에 일어난 지진이나 백두산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뉴스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한 기초 위에 놓여 있는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삶이 자리하고 있는 지각판에 대한 걱정은 인간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불안에 가깝다. 환경 문제들은 천재보다는 인재라고 하겠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으로 자연이 재난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깝게 닥쳐드는 사회나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인 것이 오늘의 우리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뉴스 보도를 쫓아가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정, 부패, 독직, 폭력, 폭언의 사건들이 터져 나온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 거의 천재지변의 규모로 계속적인 충격을 가하는데, 이러고도 사회가 하나의 질서있는 총체로서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게 한다.

금융사기, 전·현직 고위 공무원, 공공기구의 장, 그 인척의 불법, 의료업자들의 탈세, 교육 행정자의 학교 자산 횡령, 교수들의 논문 표절, 학교폭력, 정치인들의 허위 진술 등등 사건이 끊이지 않는 날이 없다.

한 저축은행의 부실 운영으로 예금을 잃게 되는 예금자만 3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숫자로 계산되지 않아도 날마다 터져 나오는 여러 사건들의 피해 규모나 피해자의 수도 그에 못지않게 거대할 것이다. 피해당사자들의 괴로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번져 나가게 하는 불안과 불신은 사회 전체를 잠재적인 만인전쟁의 터가 되게 한다. 이것은 우리의 나날의 삶에서도 느끼는 것이다.

만인전쟁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낸 홉스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싸움에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능 때문만이 아니라, 부와 명성 또는 사회적 지위, 권력을 얻고자 하는 투쟁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부정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생각되는 아이러니는 최근의 국력 지표들이다. 최근에 어떤 보도들은 한국이 이제 20-50 클럽에 진입했고, 머지않아 30-50 클럽 가입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ㅣ 출처:경향 DB

20-50 클럽이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고 인구가 5000만을 넘는 경제 강국을 말하는 기묘한 용어이다. 한국은 개인 소득에서는 2만2000달러이나, 구매력의 관점에서는 이미 3만달러에 가깝고 수년 내로 일본을 앞지를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적절한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지표들이 반드시 환영할 만한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황당하게 큰 금액을 횡령하려다가 감옥에 가는 사람들은 경제성장이 만들어낸 부의 꿈에 들뜨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 또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거대한 ‘꿈’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어 있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또한 그러한 꿈은 공공이데올로기가 되어 가고 있다.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지금의 사회에서 경제적 명성은 모든 것의 척도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스스로를 팔 수 있게 다듬어 자산을 늘리고 명성을 얻어야 한다. 심지어 대학에서 학생이 배워야 하는 것도 어떻게 스스로를 유리하게 팔 것인가 하는 것을 궁리하는 것이 되어 간다. 판촉의 강박은, 허황된 꿈과 함께 불안, 폭력, 절망을 낳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열광과 광기에 의해 보상된다. 푹 빠지고, 반하고, 소비자를 사로잡는 것, 이러한 것들이 오늘의 문화 가치이다.

이러한 꿈속에 부침하는 삶이 지속 가능한 것일까? 삶의 난장 속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경쟁에서 탈락하여 빈곤과 수모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난 사람에게도 문제가 많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쉽게 의식되지 않을 뿐이다. 경제의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해도 그러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최근 한 글에서, 공평한 분배는 가진 자를 위해서도 경제의 필수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득의 상위권 집중은 결국 소비시장을 위축하게 하여 가진 자의 삶도 어렵게 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연수입이 2100만달러가 되는 롬니 미국 대통령 후보의 소비 총액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인데 대하여, 그 돈을 연봉 4만3400달러의 직장인 500인에게 나누어주면 그 돈은 결국 시장으로, 생산적 경제로 다시 투입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한 유엔 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용해 사회적 불평등은 얼마 안 있어 경제적 불안정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과에 대한 고려가 저절로 생겨날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경제 전체를 생각하는 경제학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즉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경제적 안정 또는 성장이라는 관점에만 한정되어도 충분한 것인가? 무한한 부의 추구--그리고 명성과 지위만을 생각하는 삶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고려하는 삶일까? 그것이 삶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이 의미있는 자아실현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저울질하는 중심을 잃지 않아야 그 자원은 참으로 원하는 삶의 수단이 될 것이다.

개인의 삶을 넘어, 나라의 삶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른 정치적 맥락에서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1차대전 직후의 시대적 혼란을 진단하는,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말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중심이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있다. 중심이 완전히 공허해진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회의 지각판이 계속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끄떡없이 가운데 버티면서 전체를 거머쥐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중심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른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정치 분쟁들은 이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중심을 가져야 사람은 자기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혼란의 시대일수록,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중심을 부여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마련이다. 여기에 관련된 것이 광신적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개인들을 연약한 고립으로부터 구하여 단단한 집단을 이룰 수 있게 한다.

이 집단은 절대 충성을 요구하고 배신자의 무자비한 박살을 명령한다. 이러한 집단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전체를 포괄하는 듯하면서, 반대되는 모든 것을 분리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성의 원리이면서 분열의 원리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정치 투쟁의 현장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중심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모든 성원, 모든 인간의 포용과 화합을 고려하고 존재 일체에 대한 존중으로 나아가는 원리이다. 세계의 근본 원리에 대한 모든 깊이 있는 가르침은 그것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전한다. “여기 한 가지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禪家龜鑑) 이것은 종교적 명상에서나 나올 수 있는 존재의 근본에 대한 어려운 설명이다. 그러나 정치 공동체를 뒷받침하는 중심도, 진정한 중심은 이데올로기나 파당성이나 광신으로 표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중심이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다. 법이나 정치는 사회의 외면적 제도에 불과하지만, 그 밑에는 최선의 경우, 인간 존재가 규범을 통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법은 인간의 (살인과 약탈을 포함한)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불과하고 폭력 없는 정치는 유혈 투쟁을 사술(詐術)로 위장하는 타협일 뿐이다. 법이나 정치가 인간적 제도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인간 존재의 규범성을 인정할 때이다. 이 규범성은 감성의 차원에서 다시 모든 것을 감싸는 삶의 전체의 신령스러움에 대한 느낌에 이어질 수 있다. 이 느낌은 일상적 삶에 스미고, 문화 그리고 학문적 사고의 바탕으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부와 명성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만인전쟁에서 삶의 중심은 공허한 것이 되고, 법, 정치, 사회관계 그리고 언어 담론은 자기정당화의 방법, 이권과 권력 투쟁의 수단이 된다. 다만 이것은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한--경제 발전과 민주주의의 백가쟁명을 포함하여--이 시점에서의 과도기 현상일 것이다--이렇게 생각하여 우리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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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프랑스에서는 대통령 결선 투표가 지난 일요일에 있었다. 이 글이 신문에 실릴 즈음에는 그 결과가 이미 알려져 있을 것이다. 지난 수요일에 있었던 TV 토론 후의 여론조사는 여야 두 후보의 지지율이 46.5% 대 53.5%라고 한다. 지지율이나 신문 논평들로 보아 사르코지 대통령이 낙선하고 올랑드 후보가 당선할 확률이 크다고 하겠다. 재임 중의 대통령이 재선되지 않은 것은 드문 일로서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했던 1981년 이후 처음이고, 올랑드 후보가 당선된다면, 사회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미테랑 대통령 퇴임 후 17년 만이라고 한다. 이번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그런 대로 안정돼 있던 정국의 교체를 요구할 만큼 프랑스인들의 위기의식이 커졌다는 말일 것이다.

유럽연합의 유로 구역에서 그래도 위기를 잘 버텨나가고 있는 것이 독일과 프랑스인데, 현시점에서 위기는 프랑스에도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성장이 느려지고, 실업자 수가 500만에 이른다고 한다.(TV토론에서 올랑드 후보가 이 숫자를 600만이라고 했다가 사르코지 대통령의 신랄한 교정을 받아야 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연초에 프랑스의 국가신용평가를 AAA에서 AA+로 내렸다. TV 토론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래도 프랑스의 형편이 그다지 나쁘지 않고 위기가 거의 지나갔다고 했다가 올랑드 후보에게 호된 공박을 받았다.

경제가 나빠지면 다른 모든 것들에서도 문제가 일어난다. 경제가 정치의 중심에 놓이지 않을 수 없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정책이 긴축을 기조로 하는데 대해, 올랑드 후보는 성장에 역점을 둬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느 쪽이나 자신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가령, 사르코지 대통령이 균형예산 달성을 2016년까지 하겠다는데 대해, 올랑드 후보는 그 기간을 2017년까지로 잡는다. 올랑드 후보는 6만명의 교사 증원을 포함해 일자리 창출을 급선무로 하겠다고 한다.(그 돈이 어디에서 나오느냐에 대해 경제학자들을 포함해 여러 군데에서 논란이 있었다.)

프랑스의 한 유권자가 대선 1차 투표 용지를 받고 있다. l 출처:경향DB

 

눈에 띄는 올랑드 후보의 제안 하나는 100만 유로 이상의 소득에 75%, 45만 유로 이상의 소득에 45%의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사르코지 대통령도 세금 기피를 위한 자본의 해외 이동을 규제하고, 부가세나 사회보험세 인상 등 세입 증가를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두 후보는 이러한 민생 경제 외에 EU 관계, EU 중앙은행 채권 문제, 대독 관계, 이민자 문제 등 많은 사항들을 토의와 정책의 과제로 내놓고 있다. 이러한 자세한 프로그램들은 국가의 필요와 국민의 생활 현실에 섬세하게 대응하려는 진지하고 현실적인 노력이라는 인상을 준다. 물론 입시 문제에 답하듯 문제를 만들고 정답을 내놓는 것이 지도자의 자격을 결정한다고 할 수는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면밀한 정책에 못지않게 말의 무게 속에 드러나는 사람의 무게이다.

수요일의 토론은 거친 전면대결의 인상을 주었지만, 그전의 여러 보도들에 의하면 올랑드 후보는 우리 식으로 표현해 ‘물렁팥죽’ 또는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인들이 기대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지 못한 경망한 사람으로 보였다고 한다. 영국 BBC의 해설은 출마를 결정할 무렵, 올랑드 후보는 자신에게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하나는 몸이 비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머를 너무 즐긴다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에 와서 체중을 줄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심각한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도 유머에 빠져드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영국 논평자들은 그에게 미스터 나이스(상냥한 사람) 또는 미스터 노말(보통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우왕좌왕씨(Mr Zigzag) 또는 반짝씨(Mr Bling-bling)라고 한다.

분명한 이슈 대결이 프랑스의 정치 풍토이고 유권자를 결정으로 이끄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의 현실에 관련된 분명한 정책의 제시인 만큼, 호인(好人)이라는 인상이 유권자들의 결심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올랑드 후보가 상승세를 타게 된 데에는 정책 이외에도 사람들이 그에게서 느끼는 인간적 친밀감이나 신뢰감이 작용한 것일 수 있다.

우리 정치에서는 분통을 터뜨리는 욕지거리, 막말, 비웃음, 사실 비틀기 등으로 사람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것이 정치 전술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감정적인 흥분 또는 무의식에 쌓인 억압의 배설과 같은 것이 긴 관점에서 정치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의 삶의 무게를 잘못 헤아리는 일이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삶의 현실의 무게이고,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해내는 언어이다. 이 설명은 다시, 그것이 갖는 인간적 의미로 인하여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깊은 인간 인식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라야 한다.

올랑드 후보가 이번의 TV 토론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의 분열주의에 대항해 자신은 국민과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봉공정신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격투 장면들은 그가 소문만큼 합리적이고 섬세하고 깊이있는 사람인가하는 데 대해 의심을 가지게 했을 수 있다. 마주 앉아 공을 치고받게 하는 짧은 대결형식의 탁상토론도 문제였지만, 대결의 격투장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정치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자라 바겐크네히트 독일 좌파당 부당수가 저서를 출간했는데, 그 일부 내용이 독일 신문에 소개됐다. 바겐크네히트 부당수는 동독의 공산당(통합 사회주의당) 당원이었다가, 지금은 좌파당의 국회의원이 된 정치인이다. 그는 대학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저서가 자본주의 비판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물이나 사례들이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간다는 점이다. 그의 관점에서는 2차대전 후의 새로운 유럽 이념은 ‘사회 시장 경제’였다. 이러한 유럽의 건설에 공헌한 인물에는 드골 대통령 그리고 독일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상이 포함된다.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기적’을 이끌었고 기회균등과 사회보장으로써 “모든 사람의 복지”를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닦았다.(바겐크네히트는 공산주의자로서 출발하였음에도 전후의 서구체제를 긍정적으로 본다.)

이러한 새로운 유럽의 이념의 바탕에는 유럽의 문화 전통--소포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전시대의 희랍 철학과 문학에서 비롯된, 그리고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쉴러, 데카르트, 헤겔 등에 의해 계승된 유럽의 정신문화가 있다고 한다. “모든 인간 사회 가운데에서도 희랍인들은 인간의 삶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라고. 괴테의 말을 바겐크네히트 여사는 기억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삶의 꿈’은 이제 주제가 아니다. ‘정신과 예술과 민주주의’가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제가 오늘의 인간의 관심사이다.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유럽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사랑, 사회유대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 등 인간의 최선의 특성들을 시들게 하고, 최악의 특성--소유욕, 이기심, 사회적 몰지각만을 막무가내로 자라나게 하는 사회는 인간의 이름에 값할 수 없다”--바겐크네히트 여사는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를 이렇게 비판하여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유럽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주장에 언급하는 것은 거기에 독창적인 통찰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은 아니다. 놀라운 것은 젊은 좌파 정치인이 사회와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이러한 깊은 문화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대통령 후보들이 적어도 TV 토론 등의 인상으로는, 최고의 문화의식, 윤리의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발언들은 공공성의 기준을 잃지 않은 정치공간에서 전개되는 정책 제안이다. 이제 대선을 향해 가면서 우리 정치 논쟁의 모양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적어도 정치공간의 위엄 손상을 방지하고 그 수준을 높게 유지하는 것이 지금의 시점에서 여야 좌우를 넘어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의무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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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