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네 명의 청춘이 가슴 벅차 하고 있었다. 3800㎞의 남아프리카를 종단하는 11일간의 자동차 여행, 주인공은 24세 박보검, 27세 고경표, 31세 동갑 안재홍과 류준열이었다. 최근 종영된 tvN <꽃보다 청춘 아프리카> 이야기다.

출연료 받고 비행기 타고 아프리카에 가서 많은 스태프가 보는 가운데 배낭여행 방송을 찍었으니 또래는 물론 아줌마·아저씨 시청자도 부럽기 짝이 없다. <응답하라 1988>로 막 스타가 되고 선물 같은 해외여행까지 마치고 귀국하면 매니저와 팬들과 빼곡한 일정이 기다리니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그들은 여행 내내 활짝 웃거나 울컥하면서 “감사하다”를 연발했다. 툭하면 “감사하다”를 격하게 합창하는 네 명의 청춘이 나오는 TV 앞에서 나는 ‘심쿵’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 것은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에 펼쳐진 모래언덕과 잠비아와 짐바브웨를 가르는 빅토리아 폭포의 경이로운 화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디션 천 번 보자”며 별별 알바를 전전한 류준열처럼 바닥에서 인기 배우에 오른 그들 청춘의 눈빛과 고백 때문이었다. “나도 후회 없이 사는 청춘이고 싶다”고 평범한 욕망을 드러낸 박보검과 “(빅토리아 폭포) 이걸 같이 봤으니 영원히 남는 거야”라며 흥분한 안재홍에 이은 고경표의 말이 압권이었다. “(나는) 많이 흔들리는 사람인데 (이번 여행으로) 내진 설계가 됐다”며 앞으로는 숱하게 “흔들려도 무너지진 않을 것 같다”는 앳되고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가장 심쿵했고 짠했다.

짠한 것은 그들이 각자 경비로 받은 게 하필 88만원인 것과도 무관치 않았다. 9년 전 <88만원 세대>는 대졸자 비정규직 20대의 월 평균소득을 88만원으로 정리하며 짱돌을 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월 88만원의 청년은 일본 시코쿠 섬의 행자처럼 스펙 쌓기와 멘토 찾기의 미로 속에서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저마다의 ‘88난민’이 되어 있다. 이제는 모 금융회사의 사외이사들이 받은 작년 평균 시급 88만원과 극단의 합을 이룬 청년의 월 88만원은 그 얇은 생존의 실감마저 놓아버린다. 그런 88만원을 들고 남아프리카 11일 여정의 종착점에서 “사랑합니다! 사랑하세요!”를 외치고 번지 점프를 하는 청춘 류준열의 빛나는 하강을 지켜보자니 심쿵하고 짠하면서 확 깼다.


그렇게 가슴 벅찬 거기 그들처럼 지금 여기 청년들도 “후회 없이 사는 청춘”이 되려면 어디서 길을 찾아야 할까. “많이 흔들리는” 청년이고 “오디션 천 번”의 현실이지만 “무너지진 않을” 청춘으로 단련되는 “내진 설계”를 갖추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유명인이 안되어도 방송에 나오지 않아도 남아프리카 거기가 아니어도 서너 명의 청년들이 뭉쳐서 그런 11일을 보낼 수만 있다면 가슴 벅찬 청춘을 경험하지 못할 청년이 과연 있을까. 문제는 그럴 수 있는 돈과 시간이다.

청년의 월 88만원에 모 사외이사의 시급 88만원(남아프리카에 가는 항공료의 절반 수준)을 합친 돈과 11일의 자유 시간을 매년 청년 보장으로 운영하는 사회쯤 되면 언제 어디서든 남아프리카보다 더 벅찬 가슴을 느끼는 청춘의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저렇게 사고를 치는 그들의 방식이 부럽고 젊음이 부럽더라”는 나영석 PD의 말대로 청춘은 한사코 그렇게 만들어진다. 정답을 찾고 성취를 이뤄 청춘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문제를 외부에 일으키고 저질러봤기 때문에 문제를 발견할 줄 아는 내면의 뿌리가 생기면서 청춘은 완성된다.

그들 청춘의 구호 “감사하다”는 말은 문제를 만들어서 자신의 문제를 대면해본 청년이 선물 같은 기회를 만날 때 실패의 기억조차 복되게 돌아보면서 하게 되는 탄성이다. 주목받지 못한 삶이었어도 지금껏 존재해왔다는 사실만으로 지지받는 경험을 하게 되면 “감사하다”고 말하는 청춘이 된다. 그렇게 해서 모든 청년은 청춘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돈과 시간이다. 해법은 기본소득(시민임금)에 있지 싶다. 스위스는 올 6월 국민투표를 하고 핀란드는 내년에 시범사업을 하며 네덜란드는 지방정부들이 방식을 검토한다.

브루킹스연구소는 미국이 기본소득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라고 했고 영국왕립예술협회는 연간 630만원의 기본소득 모델(25~65세)을 제안해 올 4월부터 시행되는 생활임금 시급 1만2000원과 함께 결과가 주목된다.

우리의 경우 녹색당의 총선 공약에만 기본소득이 있으나 다음 선거엔 더 많은 정당의 공약이 될 것이다. 기존의 노동 및 고용시장은 붕괴되는 반면 알파고의 일자리 잠식은 곧 닥칠 일이라서 보수·진보 정당을 불문하고 기본소득 정책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올 7월 서울에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가 열린다. 세계 각지의 기본소득 정책들이 소개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청년들이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기본소득을 다오” 하며 합창해야 한다. 하여 돈과 시간이 주어지는 새집에서 청년은 청춘이 되고 노인은 품위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기본소득과 함께라면 청춘의 나라는 곧 노인의 나라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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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빈센트 반 고흐는 구두 그림을 여러 점 남겼다. 목이 긴 구두나 짧은 구두를 포함해 구두만 그린 그림이 일곱 점이나 된다. 그릇이나 물병과 더불어 정물화로 그린 구두 그림도 두 점 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끈이 달린 낡은 구두’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리라. 늙은 농부의 얼굴처럼 굵은 주름이 잡힌 구두는 끈이 풀어진 채 늘어져 있고 왼쪽 구두의 목은 접혀 있다. 해바라기 같은 화려한 작품에 가려 관심을 끌지 못하던 구두 그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려진 지 50년이나 지나서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고흐의 구두 이야기를 하면서 이 낡은 구두가 단번에 인문학의 화두로 부상한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이가 미국의 미술사학자 샤피로다. 하이데거가 아무런 검증도 없이 ‘끈이 달린 낡은 구두’를 농부, 또는 농부의 아내 것이라고 단정지은 것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 논쟁에 데리다가 가세하면서 고흐의 구두는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인 구두로 바뀐다.

그림으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한 이는 하이데거나 데리다뿐 아니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 ‘라스 메니나(시녀들)’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문구로 유명한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미지의 배반’을 분석했다. 이 밖에도 <판단력 비판> <미학 강의>란 저서에서 각각 자신의 미학을 펼친 칸트와 헤겔을 비롯해 수많은 철학자가 그림으로 철학과 미학을 설명했다.

2. 철학자들이 철학에 그림을 끌어들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은 딱딱한 철학을 쉽게 만든다는 이점 때문일 수 있다. 예술이라는 점에서 소설이나 시와도 닮은 회화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면 논증적이고 난해한 철학의 이해가 쉬워진다. 게다가 회화는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의무감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작가나 철학자에게는 현실에 대한 입장을 요구하지만 화가에게는 이를 면제해 주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현실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사물을 순수하고 자유롭게 바라보고 표현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화가다.

철학자들이 그림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림으로 펼치는 세상에 대한 자유롭고 순수한 성찰이 이들의 사유를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공동체의 철학 수업에 화가나 예술학 전공자들이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인문학을 깃발로 내세운 여러 공동체가 다투어 회화반을 만드는 것도 단순히 대상을 그럴싸하게 재현해내는 기능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언어로만 설명하던 사유를 시각으로 드러내며 이를 확장하거나 전복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물론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사물의 재현이라는, 기초도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창의력과 영감을 마비시키는 입시교육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다. 대학이 제 역할을 포기한 시대, 자유를 추구하는 건 인문학 공동체를 개설한 취지와도 맞닿아 있다.

3. “각각의 대학은 최대한 학문의 순수 이념과 마주할 때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고독과 자유야말로 이곳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19세기 초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창립을 주도한 빌헬름 폰 훔볼트의 말이다. 이 대학을 설립할 당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의 비상시국이었다. 패배의 원인을 군사력의 차이가 아닌, 경직되고 시대에 뒤진 국가 체제에서 찾은 프로이센의 지성인들은 이를 교육 개혁을 통한 사회 개혁의 기회로 여겼다. 그렇다고 이들의 관심은 당장의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는 과학 기술력이나 산학 협력에 있지 않았다. 예술과 문학을 통해 자유롭고 조화로운 영혼을 길러내는 것이 이들의 교육 이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유였다. 개개인의 능력을 균형 잡힌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의 모든 통제가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무르익은 지금, 대학에 훔볼트의 이상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자본이 국가 권력을 조종해 대학의 학문과 자유가 시시각각 질식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은 대학의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교수들에게 “가장 고통스럽게 목을 쳐줄 것”이라고 했던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의 e메일이다.

박범훈 전 청와대 교육 문화수석의 각종 비리 의혹과 관련해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이 15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들어서다 중앙대 학생들에게 카네이션을 받고 있다. (출처 : 경향DB)


보다 충격적인 일도 벌어졌다. 검찰로 출두하는 박 전 이사장에게 학생들이 뛰어들어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사랑한다고 외친 것이다. 교수들의 목을 치겠다는 이사장을 학생들이 사랑한다? 얼마 전 도하 언론에 보도된 이 한 장의 사진이야말로 ‘이제 대학의 자유는 끝났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폭로하는 이미지일지 모른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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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박용성

1. 다윈의 <종의 기원>,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주역>, <논어>, <맹자>, <장자>, <아함경>,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마르크스의 <자본론>, 푸코의 <감시와 처벌>….

서울대 추천도서 100선 중 일부다. 또 다른 대학의 추천도서에는 뉴턴의 <프린키피아>,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헤겔의 <정신현상학>,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같은 책들도 보인다.

내가 무지한 탓인가. 여기에 적힌 책 가운데 제대로 읽은 것은 거의 없다. 물론 읽기를 시도한 책은 많다. 하지만 <종의 기원>은 지루해서, <괴델, 에셔, 바흐>는 어려워서 포기했다. <아함경>은 일부만 읽었을 뿐, 그 방대한 양에 질려 전체를 읽을 엄두도 못 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은 하이데거, 헤겔의 저작들과 더불어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애물단지다. <프린키피아>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 책을 샀을까 생각하는 책 중 하나다.

도대체 책을 추천한 이들은 <아함경> 하나 읽는 데만 몇 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철학 전공자도 힘겨워하는 칸트나 헤겔,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대학 4년 다니는 동안 수필집 읽듯이 읽으라는 것일까.

2. 공동체 개설 이후 꾸준히 늘어나던 강좌와 세미나 참여자 수가 최근 주춤해졌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먹고살기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공부에 대한 관심이 옅어졌을 수도 있다.

이른바 인문학 열풍을 타고 정부와 지자체가 인문학을 지원하고 각급 도서관, 문화원, 복지관 등이 다투어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무료로 하는 강좌와 강의·세미나를 이끄는 학자의 사례비와 공간 임대료 등을 참여자가 부담해야 하는 인문학 공동체의 강좌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비슷한 인문학 공동체도 많이 생겨났다. 서울 마포 일원에서 인문학 강좌를 하는 단체만 꼽아도 한 손이 모자랄 정도다. 당초 크지 않았던 파이가 더 잘게 쪼개진 것이다.

사람이 줄었거나 말거나 신록의 계절을 맞이하며 새로운 강의와 세미나를 위해 사람들과 머리를 맞댄다. 초점은 대학에서 해야 하나 외면한 강좌나 세미나, 정부나 지자체, 도서관에서는 인기가 없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대학에서 발표만 한 뒤 나 몰라라 팽개친 고전 강독도 포함돼 있다. 고전이 ‘누구나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를 받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혼자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인류의 지적 정화가 구절마다 배어 있고, 그것이 시대를 지날 때마다 새롭게 해석된다. 고전은 광대하고 심원한 사유의 바다를 건너는 가장 좋은 도구다.

박웅현의 메모들. 그는 수첩에, 수첩이 없으면 스마트폰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는다. (출처 : 경향DB)


3. 휴일 나들이를 할 때 자주 사패산 터널을 지난다. 입만 열면 생태, 환경 운운하며 터널 공사 반대하는 이들을 응원하다 터널이 생기자마자 누구보다도 터널을 자주 이용하는 아이러니라니.

돌아보면 터널이 생긴 뒤 몇 년이 지나도록 옛길을 돌아다닌 기억이 없다. 터널 공사 이후 고갯길을 아예 버리다시피한 건 이곳뿐 아니다. 미시령, 조침령, 죽령, 이화령, 박달재….

긴 연휴 나들이길,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운전하다 어느 터널의 진입로를 지나쳤다. 정신을 차린 뒤 유턴을 하려다 그냥 고개를 넘었다. 천천히 차를 몰다보니 한때 자주 걸었던 산길, 내친김에 차를 세우고 그 길을 걸었다.

터널이 생긴 뒤 10여년이 되도록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이다.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키 큰 팥배나무 꽃 아래엔 철쭉, 애기똥풀, 각시붓꽃, 제비꽃, 현호색, 산괴불주머니, 개별꽃, 둥굴레 같은 봄꽃들만 한창이었다. 내가 목적지만 생각하며 어두운 터널을 달리는 사이, 이들은 숲속에서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공동체에 사람이 줄어든 김에 다시 초심을 떠올리며 돌아가기를 생각한다. <순수이성비판> 2년, <정신현상학> 1년, <주역>과 <장자> 원전 각 1년, <맹자집주> 8개월….

공동체에서 책을 읽으며 소요된 날들이다. 대학의 추천도서가 대학 4년 동안 읽으라는 책이라기보다 평생 읽어가야 할 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인문학은 속도보다 느림을, 목표를 향한 돌진보다 돌아감에 익숙한 공부다. 편익보다 의미를 생각하는 공부다. 천천히 공부하며 돌아가다 보면, 봄꽃들이 잔치를 벌이는 숲길과 조우하는 행운이 있기도 할 것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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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흐드러지게 필수록 아파오는 세월호의 기억 때문인가. 지난 1월에 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 빼어난 학자를 삼고초려해 개설한 강좌에도 정성들여 준비한 세미나에도 사람이 찾지 않는다. 북적대던 공동체가 더러 절간처럼 고요하다. 이러다 망하려나…. 사람이 줄어드니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에 대한 생각도 많아진다.

공동체에서 공부하며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던 한 청년이 어느 산별노조의 기관지를 만드는 곳으로 떠났다. 몇몇 진보 언론사의 최종 면접까지 갔던 글 잘 쓰고 심성 좋은 친구다. 노조야말로 글 잘 쓰고 능력 있는 친구가 필요하겠거니 하면서도 하필 그 청년인가 싶어 짠하다. 1980년대 노동현장에 청년을 보내는 느낌이 이랬을까. 이제 서른 안팎인 그 친구는, 어쩌면 1980년대보다 더 엄혹한 시기에 자신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간난과 신고를 짐작이나 할까.

공동체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난 학자가 여행지에서 글 한 편을 보내왔다. 제목은 ‘내 삶의 진정한 영웅, 한창기’.

“내 삶에 영웅이 있다면 고교 시절 이후의 로버트 프립과 브라이언 이노, 대학 시절 이후의 러셀과 사르트르, 존 케이지와 마르셀 뒤샹, 그리고 우리 것에 눈뜬 이십대 중반 이후의 김소희, 박동진, 황병기, 박경리, 김유정,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바로 한창기이다. 70년대 주변에서 늘 보았던 <뿌리 깊은 나무>가 그가 발행한 책이며, 바로 그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을 낸 사람이고, 바로 그가 훈민정음에서 따온 한글 서체를 만들어낸 사람이며, 바로 그가 뿌리 깊은 나무 민중구술 자서전을 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문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팝송과 서구 문학과 철학에 사로잡혀 살던 스스로가 20대 중반, 김소희의 판소리를 듣고 나서야 서구에 함몰돼 극한까지 갔던 소외의 바닥을 쳤던 사정이며, 그러면서도 33살의 나이에 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어떤 자세로 학문을 하며 살아왔으며, 또 살아갈 것인가를 적은 글이었다.

“소위 선진국에 가서 살아보면, 가령 15년 전에 이민을 와서 15년 전 한국말의 화석을 구사하면서 15년 전 자신의 인식 수준으로 바라보던 한국이 오늘의 한국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이민간 나라 사람들이 1등 시민, 자신이 2등 시민, 한국인들이 3등 시민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한국을 폄하하며 우월감에 젖어 사는 비극적 캐릭터들이 꽤 있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생각하며 한국인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확신하는 저 이방인들, 자기 전공에 파묻혀 인간을 못 보는 고상한 학자들, 자기 전공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신식민지의 전도사들. 자신이 대상화하는 사람들의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오직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저 어리석은 폭력적 군상들, 속물들. 그것이 바로 부정하고 싶은 경망스럽고도 고상한 속물로서의 내 모습이 아닌가?

‘자신이 대상화하는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고 오직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며 나만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여기 또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니 공동체 안팎에서 흔한, 작은 갈등이나 어려움에도 천박함과 비겁함의 끝자락을 드러내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강좌에 사람이 찾지 않아 보릿고개를 넘고 있는 이 시기야말로 공동체를 개설할 때의 초심이며 삶의 근원을 찬찬히 돌아보기에 좋은 때 아닌가.

대안연구공동체의 김종락 대표, 임상훈 연구위원, 이정우 파이데이아 학장, 유충현 연구위원이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를 정리하고 평가하는 좌담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멀리 산티아고 길에서 보내온 글을 읽으며 오랜만에 <특집 한창기>란 제목의 책을 뽑아들었다. 한창기는 몇 세대 앞선 선진적 언론 출판인이자 빼어난 문화비평가, 격조 높은 문화수집가, 전통 의식주의 파괴 없는 창조적 계승을 실천한 사람이었으나 나는 여기에 아득히 못 미친다. 그럼에도 공동체를 개설한 지 4년여, 그동안 어떤 대안을 모색하고 연구하고 실천해 왔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을 수 없다.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없이 그저 생존에만 급급해하진 않았는가.

공동체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던 청년과 학자는 목하 가시밭길을 자청했거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본다. 그 학자가 적었듯이, 주어진 상황을 피해 사람을 조롱하며 천리를 가는 것보다 그들과 더불어 한 걸음을 가는 것이 더 어렵고 소중하다. 우리에게 전선은 제도권 대학과 제도권 밖 인문학 공동체 사이에 있지 않다. 바로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다.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다시 꽃 피어나고 세월호로 아픈 봄, 공동체는 한산하다. 작은 씨앗 뿌리며 새롭게 길 찾아 나설 때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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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채의 방 이름을 볼 때마다 내 빈약한 상상력을 드러내는 것 같아 좀 민망하다. 크기와 위치에 따라 그냥 큰방, 골방, 작은방, 더 작은방이라고 이름 지은 탓이다. 이에 비해 퇴계실, 화담실, 다산실 등 한자 문패가 붙은 사랑채는 지적으로 느껴진다. 역시 철학자가 지은 이름은 다르다.

좌식으로 꾸며진 안채 골방에는 대체로 좌식에 맞는 공부 모임이 든다. 좌선과 함께 공부하는 <금강경> 강의, 라틴어로 성경 읽기, 희랍어로 <국가> 낭송하기, <장자> 읽기 등이 그것이다. 큰방이나 작은방에 드는 모임을 가르는 기준은 하나다. 참여자의 수에 따르는 것이다.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는 60~70개의 공부 모임 중에서 큰방에 드는 모임은 여섯 개. 경쟁률이 10 대 1이나 되니 큰방에 드는 공부 모임으로 인문학의 흐름이랄까, 유행을 감지할 수도 있다.

새해 들어 큰방에 작은 이변이 생겼다. 책 읽고 글 쓰고 토론하는 모임이 월요일 밤 큰방을 차지한 것이다. 이 모임이 시작된 지 2년여 만에 큰방에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공동체 공부 모임의 대부분이 특정 분야를 파고드는 것과 달리 이 모임의 책 읽기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문학, 역사, 정치와 경제, 철학, 문화예술은 물론이고 만화도 읽는다. 지난해 여름에는 바다를 주제로 한 책을 읽었고, 얼마 전에는 미국을 주제로 한 책들을 선정하기도 했다. 여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건 새해 들어 가벼운 책읽기와 글쓰기로 공부를 시작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모임이 큰방을 차지한 지 석 달이 채 못돼 다시 작은방으로 되돌아가야 할 위기에 몰렸다. 참여자가 줄어든 탓이다. 이를 두고 작심삼일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다. 매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건 의외로 어렵다.

돌아보면 공동체에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만큼 자주 생겨난 것도 드물다. 공동체의 공부가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만큼 철학 읽기 모임이 가장 활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시작된 지 4년이 다 되어가는 ‘서양고전철학 읽기’ 모임이다. 학생, 주부, 회사원, 공무원은 물론이고 의사, 한의사, 피아니스트, 회계사, 기자, PD, 학원 원장, 대학 강사 등이 다양하게 참여하는 이 모임에서 읽은 책의 양은 적지 않다. 전공자에게도 쉽지 않은 플라톤 대화편 전편을 비롯해 방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도 대부분 읽었다.

공동체에서 몇 년씩이나 이어가며 많은 책을 읽는 이런 모임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얼마 못가 흩어진 모임이 많고 오래 지속된 모임은 손꼽을 정도다. ‘러시아 장편 소설 읽기 결사’도 아쉬움이 남은 모임 중 하나다. 모임의 취지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령>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처럼 우리에게 익숙하나 실제로 읽은 사람은 드문 러시아 장편 소설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를 길잡이로, 격주마다 한 권씩의 책을 읽기로 한 이 모임의 시작은 창대했다. 첫 모임은 큰방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참여자가 10명 이하가 줄어들고 이것이 다시 4~5명으로 되는 것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모임이 1년여 지속되면서 계획했던 러시아 장편을 모두 읽고 막을 내린 것은 길잡이 선생과 몇몇 참여자의 열정 덕이다.

카뮈의 전작이나 밀란 쿤데라 전작 읽기처럼 러시아 장편 읽기에 훨씬 못 미치는 모임도 많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실제로 책 읽기 모임에 참여하는 한 직장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들어도 일주일에 평범한 책도 한 권 읽기가 버겁다고 했다. 여기에 글쓰기나 발제까지 포함되면 참여자들의 부담은 더 커진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에 책읽기 모임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3월 하순에 시작하는 <오뒷세이아> <일리아스> 같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같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을 소리 내어 읽는 모임도 그 중 하나다. 이들 작품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이슈로 우리 곁에 있는 심연’이다. 문제는 이들 고전을 혼자 읽는 게 만만찮다는 것이다. 이를 함께 읽고 토론하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지만, 이 못지않은 방점은 ‘소리 내어’ 읽는다는 것에 찍혀 있다. 그리스 비극은 배역에 맞춰 낭송하거나 합송하면 재미도, 느낌도 달라질 것이다.

한 겨울 서울 시청 도서관을 찾은 많은 시민들이 아이들과 함께 독서를 하며 휴일을 즐기고 있다. (출처 : 경향DB)


매주 특정한 요일을 책 읽는 날로 정한 뒤 이날 하루를 책과 더불어 지내는 모임도 계획하고 있다. 책 읽는 시간을 만들기가 익숙지 않거나 혼자 읽기가 쉽지 않은 이들이 아예 함께 모여서 책을 읽고 부담 없이 수다를 떨어보자는 것이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쓰기도 쉬워질 것이다.

공부는 책읽기에서 출발한다. 공동체는 혼자 하기보다 함께하는 것이 좋다는 믿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혼자 읽는 ‘독서(獨書)’가 ‘독서(毒書)’가 되기까지야 하겠느냐만 함께 읽는 것의 장점은 많다.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려는가. 그럼, 읽고 토론하시라!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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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나 시인이 되기 위해 문예창작과에 갈 필요가 있을까. 그림이나 조각을 하기 위해 반드시 미술대학에 가야 하는 것일까. 혹시 문창과나 미술대학 등에서의 공부가 빼어난 예술가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그보다,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문학을 공부하고, 훌륭한 소설을 쓰기 위해 철학을 공부해 보는 건 어떨까.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피아노부터 배우는 것은….

예술이건 학문이건 관계없이 중요한 것은 지적 감수성과 상상력이라며 이를 강하게 자극하는 프로그램을 공동체에 제안한 이가 있다. 문학 철학 텍스트와 시각, 청각, 영상 텍스트를 한꺼번에 공부하며 소설가(지망생)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고, 화가(지망생)는 글을 쓰며, 철학 연구자는 춤을 추고 작곡을 하는 식의 프로그램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 해보기, 엉뚱한 짓 하기, 자신과 멀어지기….

실험을 제안한 이는 뜻밖에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공동체에서 아도르노, 하이데거, 벤야민 등의 철학 강의와 세미나에 참여하고 고급 독일어와 프랑스어, 일본어, 라틴어 등을 공부하는 학자다. 본업인 경제학자 못지않게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시각 예술가이기도 한 그는 문학과 역사, 예술비평 등과 관련한 글을 쓰고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대학교수인 그가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 이런 실험을 하는 것은 제도권 학교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전공은 무의미하고 문학과 철학, 역사와 언어와 예술의 가로지르기가 필요한데 학과와 전공 사이에 엄존하는 칸막이가 이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믿는다. 이 프로그램으로 철학과 대학원생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면 미술 전공자보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현대 미술은 시각 예술이 아니라 시각 철학이 된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이가 더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하고 음악을 공부한 이가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이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학문이나 예술은 더 깊고 넓어지리라 확신한다.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공부를 하며 자신과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지적 감수성과 상상력의 우물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 하는 실험은 하나 더 있다.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시작한 독일어 원서 읽기가 그것이다. 이 실험의 목표는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몇 주 만에 독일어를 익혀 발터 벤야민의 독일어판 <역사철학테제>를 강독하는 것. 단시일에 독일어를 배우는 이 실험은 엉뚱하게도 영어를 읽으며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어와 비교하면서 이탈리아어를 먼저 익힌 뒤, 이탈리아어와 영어판 <역사철학테제>를 독일어 텍스트와 비교해 가며 독해를 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두 외국어를 익히는 만큼 이 모임의 공부는 다소 과격하다. 단테의 <신곡>을 이탈리아어로 읽으면서 그 일부를 통째로 암송한다. 실제로 이 모임에서 공부하는 한 청년은 단 두 번의 강의로 이탈리아어를 술술 읽어 내더니 세 번째 강의를 듣고 난 뒤에는 <신곡> 지옥편 일부를 이탈리아어로 유창하게 암송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산스크리트어를 8차례 정도의 세미나로 익히는 실험도 제도권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실험 중 하나다. 이 실험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다 한국어와 산스크리트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 학습법을 거칠게나마 체계화한 이공계 연구원 출신 한 독학자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어찌 보면 황당해 보이는 <산스크리트어 금강경 직독직해> 세미나에 동참한 이는 모두 15명 안팎. 세미나가 끝날 즈음, 당초 참여자의 절반 이상이 중도 탈락했으나 남은 5, 6명은 산스크리트어로 <금강경>을 읽어냈다.

길담서원서 진행하는 <맨땅 일본어>도 제도권에서는 쉽지 않은 실험이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에 착안한 실험은 일본어 철자만 익힌 뒤 사전을 찾아가며 일본어로 된 인문학 책을 읽는 것이다. 텍스트를 통째로 암송해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익히는 공동체의 실험도 여러 단계와 방식으로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방식의 외국어 공부는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분명한 건 이 방법으로 외국어를 익히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고병권 ‘수유+너머 R’ 연구원(오른쪽부터) 등 한·일 인문학자들이 지난 30일 푸른역사아카데미 집담회에서 시위와 연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인문학이나 예술 공부에 속성은 없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그리고 빨리 이르는 길이다. 공동체에서 철학 고전 한 권을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공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데 안전한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절벽을 기어오르는 방법도 있다. 암벽 타기는 위험하고 쉽지 않지만, 길 걷기보다 큰 즐거움과 짜릿함을 선사한다. 어쩌면 공동체에서 진행 중인 여러 실험들도 인문학에서의 암벽 타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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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오후,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피아노 선율에 맞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공동체에 꾸려진 작은 합창단의 합창이다. 10명이 채 안되는 합창단 참여자는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다. 이들이 모인 것은 두 달 전, 처음 수줍어하며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던 이들은 이제 거침없이 노래를 부른다. 서투르게나마 화음도 맞춘다. 주말인데도 결석하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참여자의 만족도도 높다. 노래를 하다 보면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위로받고, 마음의 상처들이 알게 모르게 치유된다는 것이다. 특히 10대 아들과 같이 합창단에 참여하는 40대 엄마는 “사춘기가 되면서 멀어져 가던 아이와 함께 화음을 맞추며 마음까지 나눌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자리”라며 좋아한다.

그런가 하면 매주 화요일 낮, 공동체에서는 드로잉과 수채화 교실이 열린다. 여기에는 그림에 재능이 있으나 이를 펼치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재능이 없어 그림 그릴 엄두도 내지 못하던 사람도 있다. 처음엔 선 하나 똑바로 긋지 못하던 사람들이 불과 두세 달 뒤에 그린 그림을 보면 경이롭다. 전시를 하고 엽서를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합창단의 노래와 드로잉, 수채화반의 그림을 보며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내가 노래를 잘 못 부르고 그림을 못 그리는 건 재능이 없는 탓이 아니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예술 프로그램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것은 사진이다. 사진교실의 출발은 그리 떳떳하지 못했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만으로는 월세도 낼 수 없으니 뭔가 돈 되는 프로그램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마침 집집마다 DSLR 카메라가 보급되고, 모두가 스마트폰 카메라 하나씩은 가지고 다니는 세상 아닌가.

시작은 초라해도 멘토로 모여든 작가들은 대충대충 하지 않았다. 사진 찍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사진의 기본 원리에서 작품 사진에 이르기까지를 열정적으로 지도했다. 여기에다 인문학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프로그램은 알게 모르게 이들의 사진에 깊이를 더했다. 10개월여의 과정을 마치며 치르는 졸업 전시회는 참여자들의 사진을 몇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사진을 공부한 이들이 전시회를 열자 사람들이 놀랐다. 사진 공부 1년도 안되는 이들의 작품이 이렇게 좋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새해, 누구나 그렇듯이 공동체도 꿈을 꾼다. 역시 주류는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질적·양적으로 드높이고 이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돈이 되지 않아 포기했고, 도서관이나 백화점 문화교실에서는 인기가 없어 할 수 없는, 공동체만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길은 하나뿐이다. 편익과 경제성만 따지는 세상의 풍토와 상관없이 힘들어도 뚜벅뚜벅 길 걷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더하고 싶은 게 있다. 기왕 시작한 예술 프로그램을 보다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음악이나 사진을 포함한 미술, 영화, 건축, 문학, 목공 등을 감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연주하거나 제작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인문학 공동체에서 하는 예술 프로그램이 쉬울 리 없다. 인적 자원이 열악한데다 여건도 좋지 않다. 이 때문에 시 창작교실은 문을 열었다 1년도 되지 않아 문을 닫았고, 드로잉이나 수채화도 몇 년째 작은 동아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내 집은 내가 짓는다는 것을 모토로 문을 연 건축교실도 3년이 지나도록 걸음마 단계다. 합창단도 이제 겨우 시작했고, 재즈교실은 몇 년째 계획만 하고 있다. 초창기에 제법 인기를 모았던 목공교실도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 한 차례 시도해봤으나 다시 열지 못한 프로그램의 목록에는 영화 만들기도 있다. 이렇게 지지부진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하면서도 갈수록 강고해지는 믿음은 있다. 예술 프로그램이 인문학 공동체의 취지와 배치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썩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빼어난 인문학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 서교동의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수능을 마친 고3 수험생들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마련한 <놀이의 기술 - 고3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 (출처 : 경향DB)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 던져지는 질문은 예술을 향한 질문에도 유효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밥도 제대로 못 먹던 나라가 이 정도나마 살게 된 건 인문학이나 예술 덕분이 아니다. 돈벌이다. 이를 위한 부지런함과 실용 정신이다. 창조경제를 말하는 이들은 인문학과 예술도 돈벌이가 된다고 하지만, 기실은 돈벌이를 향한 마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더 크다. 쓸모도 없이 난해한 고전을 파고들거나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시나 소설을 읽으며 돈을 가볍게 여기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이 그렇듯이 예술에도 현실에 대한 비판과 성찰, 저항이 담겨 있다.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창조하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능력도 길러준다. 예술은,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 못지않게 세상과 사람을 더 진실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예술은 가장 빼어난 현실 비평이자 최고의 인문학이기도 하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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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강의하는 김재인 박사가 양손 가득 새 책을 들고 왔다. 자신이 번역한 <안티 오이디푸스>를 수강생 수에 맞춰 예약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들고 온 것이다. 교정 전의 번역 원고를 복사해 공부하던 수강생들이 새 책을 받아들고 반색했다. 누군가가 와인을 준비했고, 강의실이 잠시 새 책 사인회장으로 바뀌었다. 사인을 하는 김 박사의 표정도 아이처럼 밝았다. 그러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어 원서 500쪽, 한글본 700여쪽, 책을 번역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다지 않은가.

그러나 내막을 알고보면 마냥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다. 학술서로는 드물게 2000부를 찍은 이 책을 번역한 대가로 김 박사가 받을 인세는 세전 330만원. 그러니까 그 난해한 책을 10년에 걸쳐 번역하고 330만원을 번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은 초판을 2000부나 찍었다. 요즘 흔히 그렇듯이 500~1000부를 찍는 인문서의 번역자가 받는 대가는 그야말로 초라하다. 언어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해당 분야에 대한 고도의 학문적 역량 없이는 손도 댈 수 없는 책을 번역한 대가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학문적인 업적으로 평가해주는 것도 아니다. 한국연구재단과 대학 업적 평가에서 번역은 점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일부 인문서의 번역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내용이 번역을 거치고 나면 해독이 불가능한 암호문으로 바뀐다. 이런 와중에도 좋은 번역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일부 학자들의 학문적 소명감 덕분이다. 학술서 번역의 지난함은 학문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 논문에 비할 바 아니다. 오역의 위험은 상존하고 이는 경우에 따라 번역한 학자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이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문학 저서 집필의 경우도 비슷하다. 특히 대학교수들이 번역이나 저서 집필을 기피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의 학자들이라고 저간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번역이나 저서 집필에 나선다. 책 없는 인문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의 학자들이 책을 준비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강의와 세미나다. 강의를 바탕으로 준비되는 책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만도 여러 권이다. 당장 <안티 오이디푸스>를 강의하는 김재인 박사만 해도 강의 결과를 <안티 오이디푸스 주석서>로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모든 강의는 녹음돼 꼼꼼한 녹취록으로 만들어진다. 신익상 박사의 <현대 과학 산책> 강의도 책으로 쓰기 위해 녹취록으로 만들어졌고, <유마경> <미란다왕문경> <중론> 등을 가르친 명법 스님의 강의도 저서 집필을 위해 녹음되었다.

2년 가까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강독하고 있는 진태원 박사는 <에티카> 번역 초고가 곧 강의 자료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강의하는 이종철 박사도 매 강의마다 자신이 번역한 초고를 들고 오는 학자다. 김주일 박사는 자신이 번역한 <유명한 철학자의 생애와 사상> 초고를 강독하며 고대 그리스 철학을 강의한다. 이는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강의하는 문병호 박사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강의에 번역 초고를 쓰는 것은 번역의 완성도와 가독성을 높이면서 강의 도중에 수렴한 의견을 주석 등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나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원전 대신 영문 번역본과 한글 번역 초고를 들고 강의에 참여하는 수강생들로서는 자신도 모르게 번역과 텍스트 생성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셈이다.

철학자 진태원 박사


강의 자료를 아예 저서의 초안으로 준비해오는 학자도 있다. 지난 2년 동안 <푸코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강의해온 심세광 박사는 매 강의마다 200자 원고지 100장 안팎에 이르는 저서 초고를 강의 자료로 배포했다. 강의 자료를 책의 초고로 준비하는 건 그가 새해부터 강의할 계획인 <비판적 삶을 위한 현대 사상의 거장들>도 마찬가지다. 니체와 프로이트,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보드리야르, 사르트르를 거쳐 알튀세르, 데리다, 들뢰즈, 푸코에 이르는 사상의 흐름을 다루는 그의 새 강의 기획은 또 한 권의 현대철학 입문서 기획이기도 하다.

사실, 강의나 세미나가 책의 집필로 이어지는 정황은 여타 인문학 공동체도 비슷하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영미현대철학> 등은 철학아카데미에서의 강의를 바탕으로 출간된 책이다. 연구 공간 ‘수유너머’가 강의와 세미나를 바탕으로 지난 10여년 동안 생산한 저서의 양과 질은 웬만한 인문대학을 훨씬 능가한다. 길담서원에서는 매회 주제를 변주해가며 진행하는 청소년 인문학 과정을 한 번씩 마칠 때마다 그 결과를 책으로 출판한다.

인문학 공동체 사람들 역시 돈을 주고받으며 강의와 세미나에 나오지만 참여 학자와 시민들은 단순한 지식 소매상이나 소비자가 아니다. 돈이나 업적으로는 계산이 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인문학 지식의 가장 중요한 생산자이기도 한 것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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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오랜만에, 대학을 찾았다. 1980년대식 초고속 일본어를 가르칠 학자를 찾아서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2박3일 만에 일본어 철자와 문법을 배우고 곧바로 원전을 읽었다. 철자와 필수 문법만 초고속으로 익힌 뒤 새까맣게 사전을 찾아가며 학습한 일본어 원전에 힘입어 운동권을 이끄는 이론가가 되고, 학자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익힌 일본어로 책을 번역한 이도 있고 도쿄 주재 특파원이 된 사람도 있다. 당시, 운동권 선배들에게 유통되던 전설의 일본어 문법을 정리해 책으로 펴내기도 했던 일문학자에게 물었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일본어를 공부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는 “물론”이라고 말하면서 덧붙였다. 엉성해 보이지만, 이 방법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일본어 학습법 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왜, 대학에서 그 방법으로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지금 대학에서는 제대로 된 공부가 불가능하다. 그건 일본어뿐 아니라 인문학 전반의 사정이 마찬가지다. 우리말로 가르치고 배워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들을 영어로 가르치는 것부터가 말이 되는가. 설상가상으로 학생들의 우리말 이해력이 모자라 조금만 어려운 개념어를 쓰면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을 위해 쉬운 우리말로 천천히 말하기도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무슨 고급 학문 교수가 가능한가. 공동체에서 1980년대 운동권식 일본어 학습법을 재현해 보자고 제안하자, 그는 반색했다.


2.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보에티우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홉스, 칸트,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 화이트헤드, 포퍼, 러셀, 벤야민, 하이데거, 아도르노, 래비나스, 라캉, 푸코, 들뢰즈, 지젝, <논어집주>, <맹자집주>, <도덕경>, <장자>, <주역>, 산스크리트어 <금강경>, 희랍어 <성경>…. 내가 속한 인문학 공동체에서 원전으로 공부하는 철학자, 사상가나 고전 중 일부다. 하다 보니 대부분 원전 강독의 형태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하자고 한 건 아니다. 학자들에게 “대학에서 안 하거나 못하는 교수법을 마음껏 실험해보시라”고 제안했더니, 이렇게 원전 강독이 많아졌다. 강독은 대부분 우리말 번역서로 진행되지만, 산스크리트어나 희랍어나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교재를 읽어가는 공부 모임도 없지 않다. 공동체에 산스크리트어,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한문 강좌들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이런 곳도 있느냐며 좋아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시작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리스 철학 읽기 모임부터 그렇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독은 1년8개월 만에 5분의3을 겨우 끝냈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한 번에 몇 페이지밖에 못 읽을 때도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매주 60페이지씩 강독해도 1년 이상이 걸린다. 이는 한문 원전으로 읽는 <논어집주>, <맹자집주>, <장자>, <주역> 같은 고전도 마찬가지다. 외국어 익히기도 어렵다. 중간 탈락자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를 밀어붙이는 것은 학자들이 “이 방법이 맞다”고 하기 때문이다.

3. 대안 철학대학원 과정 모집을 앞두고 학자들과 자주 머리를 맞댄다. 화두는 하나다. 가뜩이나 팍팍한 세상, 살아남기에도 급급한데 왜 쓸모도 없어 보이는 철학을, 인문학을 힘들여 공부해야 하는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여기서 공부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직업으로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라는 점부터가 그렇다. 공동체의 이런 저런 공부 모임 참여자는 주부와 학생, 연구자, 전문직 등을 포함해 거의 모든 직업을 망라한다. 직장인이 매주 정기적으로, 인문학 공동체를 찾아 돈도 안되는 것들을 공부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럼에도 이들이 공부해야 할 철학은, 인문학은 어떤 것인가.

철학 이론뿐 아니라 신화와 문학과 영화 텍스트 등등을 오가며, 지금 여기 우리의 일과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대안 대학원 과정 꾸리기에 고심하는 이유다. 철학의 체계적인 이해와 학습 못지않게 사유의 방법, 사유의 훈련에 치중하는 과정을 만들려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들과 철학하는 방법에서 시작하는 것은 대전제다. 기본을 반복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 이를 글쓰기로 드러내는 연습도 필수다. 분명한 것은, 제도권 대학원에서 오직 학위를 받기 위해 공부하는 형태는 정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철학은, 인문학은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을 벼리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일과 삶과 세상이 바뀐다. 이런 면에서 인문학처럼 실천적인 공부도 흔치 않다. 직업 연구자나 학생보다 주부와 직장인에게 인문학 공부가 더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이들이 공부의 길을 걷는 건 쉽지 않다. 길은 험한데 자주 깜깜한 밤이 찾아온다. 그래도 뚜벅뚜벅 먼 길 걷는 게 가능한 것은 같은 길 걸으며 옆에서 발소리를 내주는 동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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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다. 이 도시에 들른 김에 다시 브란덴부르크 문을 찾았다. 도쿄에 머무는 지인의 SNS 게시글을 읽고 나서다. 글 제목은 ‘일본은 여전히 패전 중’. 일본 서점가에 전시된 수많은 혐한국, 혐중국 서적을 보고 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적었다. 잃어버린 20년, 일본이 잃어버린 건 세계가 부러워하던 특유의 매뉴얼 뿐 아니다. 이제 이들은 그저 부지런하고 성실하면서, 천박한 장삿꾼일 뿐이다. 일본은 패전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아직도 패전중이다…. 댓글에는 누군가가 일본 도심 서점의 핵심 코너를 이런 책들로 가득 채운 사진도 올렸다.

일본의 현재가 서점에서 읽힌다면 독일의 현재는 브란덴부르크 문에 투영된다. 이 문 앞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베를린 교민들이 매월 셋째 토요일, 추모집회를 여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토요일,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상징하는 294켤레의 운동화를 모아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전시, 베를린 시민과 관광객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세월호 추모 집회가 아니더라도 의회와 총리 집무실, 미국, 영국, 러시아 대사관 등이 밀집한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은 독일의 중심이면서 전후 반성과 참회의 심장부다. 동서독 분단과 통독의 상징이기도 한 문 앞에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죄과가 사진으로 상설 전시되고 있다. 나치가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박해하거나 학살하는 사진들이다. 문 안 쪽으로 조금 더 간 운터덴린덴 거리의 한 건물에는 바르샤바의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사진이 내걸린 브란트 기념관이 나온다. 나치가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던 브란덴부르크 문 밖 6.17거리 중심에는 소련 전승 기념탑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문에서 남서쪽으로 몇 블록 걸어가면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실험적인 건축물로 이름난 유대 박물관이 나온다.

독일이 자신의 심장부에서 이렇게 오래도록 스스로 죄과를 공개하며 성찰하고 반성하게 하는 저력은 무엇일까. 내친 김에 유대 박물관까지 찾았다. 리베스킨트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거듭나게 한 건축 못지않게 박물관에서 관심을 끈 것은 관람객들의 면면이었다. 이곳을 찾은 이들이 초등생이나 중고생 단체 관람객이나 관광객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일 오후인데도 중고생에서 청년, 대학생, 중년, 노년들이 고루 박물관을 채우고 있었다. 한 무리의 청년들은 지하 복도 교차로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즉석 토론을 벌였다. 중고생을 데리고 온 교사는 나치의 만행이 담긴 사진 앞에서 당시 사진 속의 정황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알려지다시피 독일의 대학 진학률은 한국보다 낮다. 철학이나 역사학, 사회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은 역사와 전통과 역량을 자랑하지만, 이들 학과가 한국만큼 많은 것도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이 인문계 학과의 전유물이 아니라 상경계, 이공계, 문화예술계 학과 가릴 것 없이 모두 공부한다는 것이다. 비판과 성찰을 핵으로 하는 인문학의 생활화, 내가 유대 박물관에서 만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져오는 것은 장기적으로 국가와 사회, 그리고 시민들 개개인의 삶의 변화다.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인문학을 생각하다 (출처 : 경향DB)


독일이 패전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의 신뢰를 얻고 통독까지 일구어낸 상황은 차치하자. 최근 극명한 사례는 원전을 둘러싼 독일과 일본의 태도 차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이 사고와 직접 관련도 없는 독일이 핵에너지 제로를 선언하고 재생 에너지로 방향을 튼 반면 일본은 원자력 재가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아베 정권의 에너지 기본계획에서 원자력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일 뿐 아니라, 일본은 아랍에미리트연합, 베트남, 터키 등지에 원자로 수출을 강행하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일본인들이 아베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미 묵시론적인 재앙을 경험하고 있는 일본, 일본인은 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할까. 독일이 패전에서 벗어나게 한 힘도 인문학이고, 일본이 여전히 패전중인 것도 시민 사이에서 인문학이 무너진 탓이 아닐까.

요 며칠 사이, 언론에서는 대학 인문학 관련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이들 학과 졸업생의 취업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계 졸업생은 ‘구’십 퍼센트(%)가 ‘론(논)’다는 의미의 ‘인구론’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인문계 취업 잔혹사다.

탈출법은 없는가. 분명한 것은 한국학연구재단이 여러 프로젝트를 던져주며 젊은 인문학자들을 비정규직 논문 생산기계로 만드는 건 대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중장기 대안이다. 인문학의 저변을 확대해 이것이 대다수 사회 구성원의 일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초·중·고생은 물론이고 상경계건, 법학과건, 이공계, 문화예술 학과건 관계없이 인문학을 공부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 다수가 비판과 성찰을 핵으로 하는 인문학을 놓지 않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인문학이 인문계 학과나 인문학자만이 아닌, 우리 사회 모두를 위한 학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 위기면 나라와 시민의 삶이 위험해진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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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석 연휴가 지나고 있다. 긴 연휴, 귀성을 포기한 채 한가하게 보내면서도 마음이 가볍지 않다. 버릇처럼 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속도로 여기저기가 막히고, 서울서 부산, 광주까지 오가는 데 몇 시간이 더 걸린다는 말들이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모처럼 맞이하는 연휴, 장시간 긴장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라디오를 켤 때마다 귀경객을 위로하는 방송을 듣노라면, 연휴를 앞두고 나눈 “즐겁고 행복한 추석 보내시라”는 덕담들이 무색해진다.

추석 연휴가 즐거움 못지않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현실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남녀와 세대, 약자와 소수자 문제 등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전통 명절인 추석은, 가부장제로 상징되는 기성 권력에 무게중심이 쏠린 날이다. 이른바 명절 스트레스 증후군은 여성을 비롯한 약자와 소수자의 부담이 극적으로 증가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명절 스트레스와 궤를 같이하는 문제들은 일상 속에 널려 있다. 이는 인문학 공동체도 예외가 아니다.

2. 최근 여성 의대생이나 여성 법조인 비율의 폭발적인 증가에서 보듯 사회 각 분야에서 남녀 격차 해소, 나아가 역전을 드러내는 증거는 많다. 이런 모습은 인문학 공동체에서 두드러진다. 서양철학 공부 모임의 대부분은 물론이고, 유교 경전을 포함한 동양철학 공부 모임에서도 여성 참여자가 남성보다 많다. 특히 문화예술이나 글쓰기, 제2외국어 공부 모임에서는 남성을 찾기 힘들 정도다. 인문학에서 여성 우위는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표피적인 현상일 뿐이다. 가르치는 이의 대부분은 남성인 것이다. 살펴보면 여성도 일부 있으나 대부분 외국어나 문화예술 분야에 편중돼 있다. 난해한 철학 분야에서 여성 학자는 별로 없다. 여기에 텍스트의 생산까지 범위를 넓히면 남성 편중은 더욱 극심해진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서 남녀 불균등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여성이 고도의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학문에 부적합하다는 담론을 재생산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남성과 다르게 겪는 경험의 철학적인 성격이 무시되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이를테면 프로이트나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보자. 프로이트나 라캉이 여성이었다면 문외한이 봐도 남성 중심적인 이론을 만들었을 리 없다. 이뿐 아니다. 철학사를 수놓는 저 위대한 사상이나 철학 체계에서 여성이 설 자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의식의 근저에는 뒤틀린 유교 가부장제가 자리한다.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다시 일상을 시작하며, 내친김에 조금 더 나아가자. 이 땅의 노동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일하고, 학생들은 가장 장시간 공부한다. 그런데 왜 우린 갈수록 살기 힘들고 자살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가. 최근 세월호 참사나 군에서의 각종 사건, 사고들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음에도 진상규명과 대안 모색이 이리 더딘 이유는 무엇인가.


3. 비틀거리며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게 보기 민망함인가. 어쩌다 인문학 공동체를 시작했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는다. 답은 궁색하다. 거창한 꿈이나 명분을 가지고 시작한 게 아닌 까닭이다. 지금까지 목표는 살아남는 것, 공동체가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다행히 적잖은 즐거움과 보람도 있었다. 그런데 질문은 이렇게 얼버무리는 말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로 이어진다. 답도 간단하지 않다. 왜, 무엇을 위해 살아남아야 하느냐에 답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이고 신랄한 질문도 있다. 여유깨나 가진 이들의 허영기 어린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지적 호기심이나 허영심의 충족은 적잖은 이들에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중요한 동기다. 인문학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이들과 더불어 이런 동기야말로 공동체를 움직여가는 주요 동력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이야 뒤집어지건 말건 나 몰라라 하며 인문학 운운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의 삶이다. 연휴 뒤 공동체 학자들과 세월호 참사를 포함한 작금의 현실을 성찰, 진단, 분석하고, 대안을 찾기로 한 것은 공동체의 존재 근거를 돌아보고 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작업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성을 포함한 약자와 소수자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성찰에 있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차가운 바닷속에 버려둔 현실은 절망스럽지만, 절망이 없으면 인간은 현실을 돌아보지 않는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이를 팽개치는 것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게으른 정부와 정치권 못지않게 중대한 직무 유기일 수 있다. 우리에게 희망은 못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절망과 고통을 껴안고 난 뒤에나 가능하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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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문학, 특히 철학은 여유에서 비롯됐다. 춘추전국 시대, 살아남는 것 자체가 화두였던 상황에서 출발한 동양 철학은 그렇지도 않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한 철학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자유민 사이에서 시작됐다. 현상적인 것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근원을 묻는 것부터가 당장의 쓸모를 떠난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훌륭하게 살 수 있는가를 질문한 소크라테스도, 인간은 어떻게 탁월하게 살 수 있는가를 탐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갈급한 생존의 문제와 관계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여유 있는 사람의 공부인 것은 지금도 여전한지 모른다. 얼마 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 철학자가 대학과 인문학의 현실을 이야기하다 말했다. “두 딸이 인문계 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하는 것을 제가 절대 안 된다며 말렸습니다. 결국 두 딸은 법대에 진학했지요.” 그 학자가 딸의 인문계 학과 진학을 반대한 것은 인문학 동네에 정나미가 떨어져서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배가 고프다는 건 오래전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모르지 않았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이토록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얼마 전 한 공직 후보자가 일으킨 물의, 즉 제자 논문 표절이나 칼럼 대필 정도는 이 동네의 관행에 가깝다. 늘 보고 대하는 것이 그러니 그 후보자가 부끄럼도 모른 채 국회 청문회까지 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중견학자는 대학교수가 된 인문학자들을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외계인”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들에 따르면 인문학자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다. 먹을 것, 요컨대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되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다시피 하다 보니 이를 향한 이전투구가 벌어진다. 강자는 약자를 밟고 올라설 뿐, 여기서 정당함을 따질 여유는 없다.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출간된 만화 <자본론> 표지. 출간 며칠 만에 6000부가 팔렸다. _ 연합뉴스


2. 중요한 책과 재미있는 책은 다르다. 이를테면 판타지나 무협, 로맨스 같은 장르소설은 재미있는 경우는 많아도 중요한 책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는 사람에 따라 중요하기도, 재미있기도 한 책이다. 그러면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를 낳은 <주역>은 공자에게 어떤 책이었을까. 이 고사가 담긴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가 늦게 역(易)을 좋아하며 역을 (무수히) 읽어 (죽간을 맨) 가죽끈이 세 번 끊어졌다”라고 적혀 있다. 위편삼절도 모자라 공자는 말했다고 한다. 만약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을 더 준다면 나는 역의 문사(文辭)와 의리(義理)에 모두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공동체에서 가르치는 가난한 학자 중에도 그런 말을 하는 이가 드물지 않다. 대표적인 이가 <자본론>을 강의하는 학자다. 그는 어려서 책을 읽게 된 이래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대학 시절 만난 <자본론>처럼 재미있는 책은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자본론>을 읽으면서 인간과 사회, 세계에 대한 통찰을 얻은 것 못지않게 이 책이 “다른 어떤 책보다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두 딸의 인문학과 진학을 한사코 말렸다는 그 학자도 마찬가지다. 타의에 의해 대학교수 생활을 접고 번역과 집필에 학자로서의 삶을 건 그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사상가의 난해한 책이 “그리 오묘하고 맛있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딸에게 인문학과 대신 법과 진학을 강권하긴 했지만 학문하는 깊이와 감동으로 철학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먹을 것이 없어도 철학은 예나 지금이나 학문의 여왕이다. 그가 자신의 일을 회의하면서도 철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철학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3. 학자가 아니어도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이를테면 불교학자가 된 김윤수 변호사다. 저서와 번역서를 수십권이나 낸 그의 학문 생산은 일급학자를 능가한다. 40대 후반에 공부를 시작한 그에게 공부가 재미가 없었으면 이 일이 가능했을까. 그는 “판사, 변호사란 직업은 공부를 뒷받침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동체에도 이를 닮은 사람은 흔하다. 학생이나 연구자, 편집자처럼 자신의 일에 인문학이 필요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신의 일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평범한 중산층이 대부분이지만 가난한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 외제차를 탄 사람이나 대기업 CEO도 없지 않다.

이들이 밝히는, 인문학 공부의 이유는 “재미있으니까”이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철학서와 대결하는 것이 골프보다, 술자리보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공부는 쓸모와 무관하다. 목적 자체다. 돈과 권력 같은 목표만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이들이 무목적의 목적에서 숨 쉴 틈을 찾는 것일까.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건 절망뿐인 땅에서, 공부를 하며 희망의 기운을 읽어내는 것일까. 대학과 교수들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인문학이 이 정도나마 살아있는 것은 직업과는 무관한 이들의 쓸모없는 공부에 대한 재미 덕인지도 모른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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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동네에 새로 지은 교회는, 적어도 입지만으로는 하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나지막한 산을 등진 교회의 남쪽 정면은 연못이 있는 생태공원이다. 좌우에는 축구와 족구, 농구, 배드민턴, 게이트볼 등이 가능한 체육 시설이 있고, 연못가에는 문화마당이 조성되고 있다. 주택과도 거리가 떨어져 소음 민원에서도 자유롭다.

입지가 좋다보니 이 교회에서는 여러 행사가 열린다. 얼마 전 주말, 이 교회에 버스와 승용차 수백 대가 몰려들었다. 교회 정면에 연합 어린이 경연대회가 열린다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겉만 보던 교회의 건축이 궁금하던 차에 들렀다가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침 성경시험을 치르는 예배당을 둘러보다 진행자가 전하는 주의사항을 듣고서였다.

“시험 중에 고개를 들지 마세요. 남의 시험지를 보다 들키면 퇴장시킵니다. 남의 시험지를 보는 행위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짓입니다. 커닝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

이 땅에서 학교에 다녔으면 누구나 수없이 들었을 시험 전 긴장된 시간의 주의사항. 그런데 교회에서, 주말에, 경연대회라는 이름으로, 죄까지 거론하며 아이를 경쟁시키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일등 한 사람을 뽑기 위해 수많은 아이들을 경쟁시킨 뒤 대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일까. 이렇게 일등을 뽑기보다 아이들이 서로 도와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걸 하나님은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돌아보면 이런 경쟁은 여기뿐 아니다. 우리의 삶과 일 모든 것이 경쟁의 연속이다. 승리하는 이는 언제나 소수이고, 대부분은 패배자다. 우리는 낙오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2. 간혹, 내가 하는 일이 별스럽게 힘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꾸준히 드나들며 사람들과 어울려 공동체의 기둥으로 여겨지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출입을 끊을 때다. 이들이 공동체에 나오지 않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참여하는 공부 모임이 끝나는 경우도 있고 일이 바빠지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도 사람이 어울리다보니 인간 사이의 크고 작은 갈등이 없을 리 없다. 무엇보다 공동체는 학위를 주는 학교도, 자격증을 주는 학원도, 돈을 주는 직장도 아니다. 일에 밀리고, 약속에 밀리고, 피곤함에 밀린다. 조금만 싫증나도 참기 어렵다. 이곳에서의 공부가 즐겁거나 보람차지 않으면 굳이 나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얼마 전, 내가 속한 공부 모임의 한 참여자가 불참을 통보해 왔다. 함께하던 공부를 그만두겠다는 선언이었지만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쓸쓸하게, 그리하시라고 답할 수밖에. 그런데 몇 시간 뒤 그 참여자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다른 참여자의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불참을 번복했다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공부, 여러 가지로 돕겠다며 함께하자는데 차마 거절을 못하겠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소 쑥스러워 보이는 그 메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 마음이 여린 그는 공부가 힘들었다기보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자신의 공부만 챙기며 제각기 살길을 도모하는 그 분위기가 싫어서 이곳을 벗어나려 했구나. 이 일을 계기로 작은 회의를 열고 모임을 재정비했다. 서로 도움 주고, 도움 받는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공부는 외롭게 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할 수 있으면 함께하기 위해 애쓰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웃으며, 끝까지 가자는 것이었다.


▲ “교회에서, 주말에, 경연대회라는 이름으로,
죄까지 거론하며 아이를 경쟁시키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일등 한 사람을 뽑기 위해 수많은 아이들을 경쟁시킨 뒤
대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일까.
이렇게 일등을 뽑기보다 아이들이 서로 도와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걸 하나님은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3. 조금씩 공동체의 이력이 쌓이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 게 있다. 역시 공부는 쉬운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어느 정도 인내가 필요한 공부 모임엔 함부로 참여를 권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대안 철학 대학원 과정이다. 기왕 하는 공부, 유행 따라 흔들리지 말고 좀 더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하자는 것이 이 과정의 취지다. 그래서 직장인이든, 문화예술 종사자든, 주부든 인문학적 베이스를 든든하게 연마하고, 자신의 삶과 일을 고양시키자는 것이다. 공동체로서는 대학이 포기한, 학문 연구와 교수의 자유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핵이기도 하다. 그런데 상당한 기간 동안, 매주 두세 차례씩 이곳에 나와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는 건 쉽지 않다. 사유의 즐거움, 공부의 기쁨이 몸에 익는 것에도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다. 공부를 생활의 우선순위로 놓기 위해서는 마음 만들기, 몸만들기가 필요하다. 몸과 마음이 공부를 즐기고, 좋아해야 하는 것이다. 그 전제는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상승, 또는 도약을 즐겁게 경험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리되는 건 아니다. 최근 이 대학원에 온 몇몇 입문자에게 책 읽고 글 쓰고 토론하는 강좌의 참여부터 권한 이유다. 이는 그동안 멀리했던 공부와 친해지며 자연스럽게 내공을 기르자는 것이지만, 내심 바라는 게 하나 더 있다. 좋은 길동무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닥쳐올 고비들을 함께 넘어가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하는 것이 낫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함께하면, 힘이 세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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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세월호 참사는 한낱 참사로만 기억될 것인가. 수많은 아이들을 차가운 바닷물에 내버려두고 도망친 지 50일, 참사를 불러왔던 문제들이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구조적 비리를 캐겠다던 수사는 오리무중이고 유병언은 뒷북수사를 피해 도피 중이다. 국정조사는 파행 중이고 ‘관피아’ 논란은 여전하다. KBS 성원들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공정방송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쓰리고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자들은 또 있었다.

“가난한 집 애들이 (…) 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천안함 사건 때는 국민이 조용하게 애도하며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왜 시끄러운지 이해를 못하겠다.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 흘릴 때 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백정이다.”

가난한 이들을 능멸한 망발의 주인공은 시정잡배, 또는 소수 신흥종교의 지도자가 아니다. 한국 최대 기독교 단체의 지도자다. 세월호 참사로 가슴을 치는 이들이 미개하다는 정치인 아들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며 망언 릴레이를 이어간 이도 그렇다. 강남 요지에 호화 교회를 신축하고 대학교수 신자만 헤아려도 800명이나 된다는 거대 교회의 담임 목사다. 문제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이런 발언이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온갖 비난에도 이들이 망발을 이어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학교수를 포함한 교인들이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한사코 지지하며 추종하는 것이다.

이미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이 땅의 많은 교회에 예수가 없다는 것을 자인한다.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은 왜곡됐고 예수의 가르침은 사라졌다. 성직자는 예수를 배반했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거대 교회일수록 예수를 담보로 교권의 아성을 쌓고 맹목적인 신앙만 부추긴다. 이런 교회에서 모시고 섬기는 것은 예수가 아니다. 돈과 권력이다.

알다시피 개신교는 마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발하면서 시작됐다. 그런데 예수를 팔아 장사를 하는 것은 오늘날 이 땅의 수많은 교회도 한가지다. 목사, 평신도 할 것 없이 신앙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교회 안에서 사랑과 나눔은 사라졌다. 목사들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려 하기보다 높이 앉아 섬김을 받으려 든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온전한 인간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무엇이 정말 중요하며,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함석헌 선생은 말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다. 이 땅의 미래조차 암울해진다.


내가 공부하는 공동체 프랑스어 반에 최근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신문기자로 일할 당시 취재차 만났던 신학자 김진 목사다. 국내 보수와 진보 신학교 모두에서 공부한 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그가 서울 도심에 명상수련원을 꾸린 것은 10년 전. 개신교에는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수행 문화를 살려보기 위해서였다. 그 뒤 명상수련원을 떠나 인도의 아쉬람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꾸렸던 그는, 그사이 더 깊어져 있었다.

그에 따르면 바른 기독교의 대안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예수의’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선결돼야 한다. ‘예수의’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녔던 믿음을 우리의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예수에 대한 공부, 예수가 실천했던 수행이 필요하다. 김 목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기독교 인문학 강좌와 기독교 명상수행을 기획한 이유다.

광의의 인문학을 기치로 출범한 뒤 공동체에서 공부해온 것은 철학이나 문화예술뿐 아니다. 좌선 수행과 함께하는 불교 경전, 유교의 사서(四書)와 노장 철학 공부도 공존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이든, 역사든, 종교든, 몸 공부든 모두 해보자는 것이다.

기독교 인문학 강좌에서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도덕경, 장자 등을 통해서 기독교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한편, 초대 교부들이 그리스 철학의 전통과 어떻게 만났는지를 공부한다. 물론 여기에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색도 포함돼 있다.

신학자, 역사학자, 동양철학자 등이 두루 참여하는 이 강좌가 일단락되는 대로 김 박사가 10년 전 시작했던 기독교 명상 수행 모임을 재개한다. 수행 터는 불교의 좌선 수행과 유교 경전, 그리고 노장 철학을 공부하는 바로 그 좌식 방이다. 못난 인간들의 욕심 탓에 멀어진 예수와 부처와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한자리에서 어우러지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통령이 눈물 흘릴 때 가만히 있는 바람에 ‘백정’이 되어버린 이들이 온몸으로 밝혀 드는 작은 등불이기도 하다. 어려워도 희망의 끈, 놓아서는 안된다며….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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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갓길, 공동체에서 공부하던 청년이 일하는 공방에 들렀다. 그 청년은 고용된 목수다. 출퇴근하는 자전거 핸들에 책 내용을 정리한 쪽지를 달고 다니며 공부를 놓지 않으려 애쓰는 청년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요즘 공부를 미뤄두고 공방에서 살다시피 한다. 단순 기능공에서 창조력을 지닌 장인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것이다.

여느 일이 그렇지 않으랴만 동서고금을 통해 목공만큼 인간 친화적인 일도 드물다. 목공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가구나 작품을 내 손으로 만드는 일이다. 머리를 쓰는 지식에 손발의 경험과 온몸의 힘을 조화시키며 전 과정에서 창의와 상상, 그리고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손재주가 없는 초보라도 뭔가를 창조하기 위해 나무를 매만지다 보면 어렵잖게 목공 삼매에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목수 아닌 사람이 목공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값비싼 공구도 그렇지만 목공이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는 건 더 어렵다. 찾아보면 목공교실 같은 것도 없지 않으나 대부분 간단한 가구 하나 만드는 일회성 교습으로 끝난다. 직업 목수가 아니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들어 목공 삼매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은 불가능한가. 가능하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면 간단해진다. 조합을 설립해 스스로 주인이 되는 공방을 만들자는 뜻도 여기에 있다. 이는 하기에 따라 취미 생활을 넘어선다. 전문 직업인의 전유물로 치부되는 일들을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로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상당수가 전문가의 영역을 건드리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건축이다. 지금까지 한 건축가가 이끌던 공부 모임엔 젊은 건축가 여럿이 선생으로 나선다. 주류 건축계에서 중요한 상까지 받은 전도유망한 건축가들이 한낱 작은 공동체가 개설한 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건축가가 아닌 사람도 건축을 보다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 동의하는 것이다.

흔히 집을 짓는다고 하면 땅 매입과 인허가에서 설계와 시공 등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떠올린다. 집 한 채 짓고 나면 10년은 늙는다며 손사래부터 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래도 건축 공부 모임에서는 건축가의 전유물처럼 돼 있는 건축을 즐겁게 공부한다. 중요한 건 집을 짓는 것에 앞서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나는 왜 집을 꿈꾸는가. 새로운 집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에 이르면 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삶 전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인문학의 정수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삶이라고는 모르는 건축가에게 고스란히 맡겨두고 돈만 건네면 되는가. 인문학 공동체에서 건축 공부를 하는 것은 돈으로 사는 집, 건축가의 작품을 위한 건축에서 사람을 위한 건축으로의 전환을 꿈꾸는 것과 통한다. 내가 살 집을 지으면서도 전문가가 주도했던 일들에 내가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자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건축의 큰 흐름을 바꾸는, 작은 움직임에 힘을 보태자는 것이다.

베르겐의 브리겐 거리의 아름다운 고건축물 (출처: 경향DB)


‘전문화의 야만’이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전문가가 아는 것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가 전부인 데다 그 분야에서마저 제대로 아는 것은 자신이 각별히 몰두하는 좁은 영역뿐이다. 문제는 20세기 초 이후 이런 전문가들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들이 권력과 돈만 좇으며 본질적인 것에 대한 성찰은 팽개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현대 문명이 최악의 잔혹함과 공격성, 어리석음을 드러낸 것도 알고 보면 한 분야만 알고 다른 모든 것에는 무지한 전문가 탓도 크다. 서울시에서 최악으로 꼽히는 건축물들이 하나같이 최고의 전문가들이 지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전성과 지속성, 경제성에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한사코 핵발전소를 지으려는 이들도, 단군 이래 최악의 삽질인 4대강 사업을 주도한 이들도 모두 전문가 집단 아닌가. 위기의 순간, 수백명의 귀한 생명보다 회사의 문책에 더 관심을 쏟은 세월호 선원들도 그렇다.

흔히 인문학 하면 철학, 문학, 역사, 문화예술 비평과 외국어 연구 등등을 칭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인문학은 허영기 많은 이들의 장신구, 또는 상품의 콘텐츠나 치장을 위한 도구 정도로 여겨진다. 근래의 인문학 열풍도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인문학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학문의 갈래를 넘어 모든 주제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 방식을 지향한다. 건축도, 기술도, 과학도 철학적, 성찰적으로 공부하면 인문학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식이 폭발하는 시기, 모든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분야든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면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성찰은 가능하다. 공동체에서의 공부는 지나치게 권력을 가진 현대 사회의 전문가들에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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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0대 중반의 우울 탓인가. 눈물이 잦아졌다. 대통령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우리 아이 살려 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엄마의 사진을 보며, 엄마의 비원에도 끝내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보며 숨이 막힌다. 자주 절망을 느낀다.

엊그제, 벌떡 일어나 그간 미루어 온 청년 인문학 결사(結社) 꾸리기에 나섰다. 그냥 ‘모임’이라고 하지 않고 ‘결사’란 한자어를 쓴 것에는 이유가 있다. 결사가 주는 어감대로, 조금 더 독하게 공부하기 위해서다. 이 결사에 이어 주부 공부 모임도 만들기로 하고 강의며 길잡이를 감당할 학자들과 머리를 맞댔다.

요 며칠,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참사에 넋을 잃고 있다 허둥대며 이런저런 공부 모임을 자꾸 서두른다.

청년 인문학 결사는 앞으로 1년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것에 미쳐보자는 공부 모임이다. 여러 고전과 신간들을 합쳐 100~150권쯤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적어도 100편 정도의 글은 써보자는 것이다. 아울러 같은 기간, 프랑스어, 독일어, 한문, 중국어, 일본어 등 영어를 제외한 2개 언어는 익히자는 것이 이 모임의 또 다른 목표다. 이를 위해 강좌와 세미나 등을 소화하는 데만 매주 10~15시간은 필요하다. 책 읽고 글 쓰고 생각하며 외국어 익히는 시간까지 합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공부해야 한다.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도 바쁜 청년들이 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아이를 잃고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부모를 보면서, 한가하게 공부나 하자는 것이 말이 되는가.

<철학의 위안>이란 책이 있다. 로마 후기 철학자 보에티우스가 쓴 책이다. 유력한 귀족 출신 정치가이자, 그리스의 지적 전통을 중세 서양에 전한 철학자로 승승장구하던 보에티우스는 만년에 실각, 투옥돼 처형됐다. <철학의 위안>은 승승장구하던 그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쓴 책이다. 인간의 삶이 예고도 없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며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때, 남겨지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을 코앞에 둔 그는 뼈를 파고드는 물음에 답을 찾으며 힘겹게 책을 써 내려간다.

2. 우울증은 뒤늦게 시작한 프랑스어 공부를 하는 중에도 수시로 찾아든다. 술과 스트레스와 게으름으로 찌든 50대의 몸과 머리를 마루타 삼아 프랑스어에 달려든 지 한 달여, 벌써 보람보다는 회한이 크다. 내가 속한 프랑스어 공부반의 기본은 암송이다. 샹송이든, 시든, 명문장이든 매주 일정 분량을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이다. 이렇게 암송으로 프랑스어를 온몸에 집어넣으면서 그 언어가 몸속에서 정렬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샹송과 명문 몇 편, 가까스로 외웠다 후딱 잊어버리기를 거듭하면서 작지만 성과는 없지 않다. 프랑스어가 익숙해진 것이다. 눈뜬 까막눈이었던 프랑스어가 더듬더듬 읽히는 것은 더 놀랍다. 프랑스어 <어린 왕자>가 사전 몇 차례 들추는 것으로 한 페이지씩 어렵잖게 넘어간다. 그사이 생각지도 않았던 일도 생겼다. 프랑스어를 들으려 애쓰다 보니 엉뚱스럽게 영어가 잘 들리는 것이다. 영어 읽기 또한 눈에 띄게 편해진 것은 처음 대하는 프랑스어를 해독하느라 애쓴 탓인가. 청년 인문학 결사에서 6개월마다 외국어 하나씩 익히자고 제안한 것도 이 작은 보람에 힘입어서다.


하지만 더 큰 건 역시 좌절감이다. 암기력이 참담할 정도로 쇠퇴한 것이다. 외우는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수십 번을 읽고 들어도 짧은 샹송 하나가 제대로 외워지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외운 것을 잊어버리는 속도 또한 금붕어 못지않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며 느끼는 보람보다 회한이 더 큰 것은 내 몸과 머리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것을 확인한 탓이다. 미안하다, 몸아. 들이붓는 술에 찌든 채 버려진 뇌세포들아….

3. 절망과 우울은 내 몸 아닌, 세상을 보아도 한 가지다. 사람보다 돈이 최고가 된 세상이다. 부동산 투기만 돈이 되는 것이 아니고 차갑고 캄캄한 바닷물에서 공포에 질린 생때같은 아이들의 생명도 돈으로 계산되는 세상이다. 정치적인 득실부터 따지는 세상이다. 재작년 말,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한 청년이 전화했다.

“이제, 공부라도 제대로 해야겠어요.”

이 청년의 제안으로 모여든 청년들이 함께 밥 지어 먹고 청소하며, 책 읽고, 글 쓰고, 토론하기를 1년여. 마지막 두 사람이 남아 명맥만 유지하던 이 모임이 얼마 전 모두 흩어졌다. 청년들이 하나, 둘 직장을 잡더니 이들마저 일터로 떠난 것이다.

진도 앞바다 참사를 보며 넋을 놓았다가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공부 모임을 꾸린 것은 이 청년의 전화가 생각나서다.

인문학은 왜 하는가. 세상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다. 아픈 이들과 더불어 아파하기 위해서고, 이런 세상을 만든 스스로를 성찰하기 위해서다. 미셸 푸코는 말했다. 지식인의 역할은 예언적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일들을 정확히 보는 것이라고. 자기 변형의 위험을 감수하고 본 것에 대해 발언하며 행동하는 것이라고.

이런 공부, 이런 인문학을 학문보다 돈을 더 생각하는 대학들이 버린 것은 당연하다. 공감 능력이라고는 찾을 길 없는 정부가 인문학 운운하는 것도 기만이다.

이들에게 인문학은 쓸데없다. 그럼에도 공동체가 공부 모임을 자꾸 만드는 것은 이런 때일수록 더 공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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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서 진행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강독이 세 번째 세션을 맞이한다. 이번 강독에서는 18~19세기 후세대 철학자에 의해 ‘극복된’ 전세대 철학자의 후세대 철학자에 대한 반응을 다룬다.

지젝에 따르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1787년에서 헤겔이 사망한 1831년까지 44년은 사유의 강도가 집중된 시기다. 인간의 사유가 정상적으로 발달했다면 수세기, 아니 수천년에 걸쳐 일어났을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면서 후세대에 ‘극복된’ 전세대 철학자는 후학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지젝은 후학에게 극복된 전세대 철학자가 후학에게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피는 것은 철학사를 다루는 가장 재미있고도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16강을 마치고 17강을 시작하는 강독이 이제 겨우 제3장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속도라면 전체 14장, 1800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을 모두 읽기 위해서는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아무리 빨리 가도 1년은 더 걸리는 대장정이다. 책 하나 읽는 데 1년이 더 걸리는 강의를 누가 견딜 수 있을까. 물론 긴 시간 강독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플라톤에서 바디우와 아감벤까지, 불교와 기독교, 공산주의와 양자물리학, 동물과 유령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을 넘나드는 지젝의 이 역작을 대충 읽어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장기 강좌로 치면 지난해 봄에 시작한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독은 더하다. 한 줄, 한 줄을 새롭게 번역하고, 개념 하나 하나를 따져가며 진행 중인 <에티카>의 진도는 전체 5부 중에서 이제 겨우 2부를 마무리하고 있는 정도다. 책을 다 읽기 위해서는 적어도 50강은 더 필요하다. 이는 최근 시작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강독도 마찬가지다. 10강에 걸쳐 주요 부분을 강독했으나 이것으로는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새롭게 찬찬히 읽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러니 전체를 45강으로 계획하고 진행 중인 <맹자집주> 강독이나 이와 비슷한 기간에 걸쳐 진행하고 있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는 그리 길지 않은 강의에 속한다. 전체를 24강으로 계획하고 최근 시작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은 단기 강좌라고 해도 된다.

아예 끝이 보이지 않는 강좌도 있다. 25강에 걸쳐 <유마경>과 <미란다왕문경>을 읽은 뒤 ‘중론’ 강의를 시작하는 불교경전 강독이 그렇다. 이 강독은 강의를 진행하는 스님의 지적 여정에 따라 유식, 불성론, 화엄, 선불교 등으로 끝없이 넓이와 깊이를 더해간다. 프랜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로크, 홉스 등 근대 철학자의 저작 읽기에서 시작한 근대철학 고전 강독도 끝을 생각하지 않은 강의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3~4주에 한 권씩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며 우리말로 번역된 주요 철학 고전은 모두 섭렵하자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서 시작해 소피스트와 플라톤을 거쳐 현재 아리스토텔레스 강독을 진행 중인 서양 고전철학 읽기는 끝이라도 보인다. 스토아학파나 중세 철학 정도에 이르면 책읽기가 일단락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얼마 전, 누군가 파이데이아 대학원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 지금까지 대학원 강좌를 몇 개 청강했는데, 이 강의에 대한 학점이 인정되는가? 대학원 수학 기간이 3년이라고 했는데, 필요에 따라 휴학을 하며 공부할 수는 없는가?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이곳에서 진행 중인 공부를 생각하니 답하기가 난감해졌다. 이곳의 대학원이란 것이 공부를 보다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하기 위한 장치일 뿐, 2~3년이면 ‘공부를 마치는’ 기존의 제도권 대학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파이데이아 대학원은 몇 학기 등록하며 학점 받고, 학점이 차면 졸업해서 공부를 마치는 곳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또는 선생이나 동료가 보기에 공부가 어느 정도 여물면 글을 쓰고 저서를 발표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도 있지만 공부는 끝없이 계속된다. 이는 학점이나 졸업, 진학이나 취업 등을 매개로 교수와 학생의 계약 관계를 맺고, 졸업을 하면 공부와는 결별하는 현 제도권 대학과는 다르다.

처음 장기 강좌를 시작할 땐 걱정도 없지 않았다. 강독에 참여하는 이들이 긴 시간의 강독을 견뎌낼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우였다. 이를테면 <에티카> 강독은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참여자가 처음보다 더 늘었다. 이는 시작한 지 2년 반이나 된 서양 고전철학 읽기도 마찬가지다. 이제 반년을 겨우 넘긴 정도지만 근대철학 고전읽기나 칸트 강독도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다. 재미있는 것은 공부를 함께하는 이들이 연령과 직업을 넘어 많은 것을 나누는 지기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엊그제 공동체에서 1년여 밥상을 함께하며 공부하던 한 청년이 취직해서 이곳을 떠났다. 손바닥을 마주치며 헤어질 땐 가슴이 텅 비는 듯했지만 나는 그가 영영 떠난 것이 아님을 안다.

열심히 일하다 공부 갈증을 느끼면 언제든 다시 공동체를 찾을 것이다. 우리의 공부는 주로 책을 매개로 하지만, 인생의 어떤 순간에만 반짝하다 마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걸쳐 지식과 기술, 경험과 우정을 나누며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공부다. 우리의 공부는 삶과 삶터를 의미있고 풍성하게 하려는, 평생에 걸친 즐거운 수행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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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0대, 생계에 바쁜 직장인이 새로운 외국어를 익힐 수 있을까. 공부를 업으로 하는 학자를 제외하면 사례는 매우 드물다.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건 고사하고 학창 시절, 어렵게 공부한 영어를 잊지 않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스트레스와 음주, 흡연 등으로 뇌세포조차 날로 퇴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50대인 나를 포함한 30~60대 직장인, 주부, 그리고 은퇴자들이 이번 주부터 프랑스어 익히기에 나선다. 참여자 대부분은 프랑스어 발음은커녕, 알파벳도 모른다.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프랑스어를 위해 떼어내기로 약속한 시간은 일주일에 최대 10시간, 자습만 치면 하루 평균 1시간 이내다. 주 1회 모임에 기간은 6개월, 프랑스어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쓰기를 제법 하는 것이 목표다. 이것이 가능할까?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회의적이다. 중·고교와 대학 10년은 물론이고, 그 뒤에도 공부해 온 영어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프랑스어를 익히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믿는 게 없지 않다. 암송이다.

여기, <무지한 스승>이란 책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교육에 대한 성찰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은 1818년 네덜란드로 망명한 조제프 자코토란 프랑스 학자가 루뱅 대학의 강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생은 네덜란드어를,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다. 자코토는 때마침 출간된 <텔레마코스의 모험> 프랑스-네덜란드어 대역판을 통역을 통해 소개하면서 이 책 제1장의 반을 쉼 없이 되풀이하고(암송하고), 그 뒷부분부터는 대역을 참고해 뜻만 익히라고 주문했다. 몇 주 뒤 그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읽은 내용 전부를 프랑스어로 쓰라고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문법 설명 한번 듣지 않은 학생들의 작문은 고급 프랑스어로, 완벽에 가까웠다.

물론 네덜란드 학생이 같은 언어권인 프랑스어를 익힌 것과 우리가 프랑스어를 익히는 것은 다르다. 그럼에도 자코토의 사례는 공부와 교육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특히 외국어 공부가 그렇다. 실제로 외국어로 된 책을 통째로 외웠더니 외국어가 들리고 말이 나오더라는 체험담은 많다. 문제는 내가 그걸 할 수 있느냐다.

달달 외우면 된다는 이야기야 많이 들었지만 누구나 그런 일이 가능한 수재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시간도 부족하다.

얼마 전부터 공동체에 ‘명문 암송 결사’란 이름의 모임을 만들고 재미있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 모임의 목표는 우리말과 한문,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 희랍어 등으로 된 명문장, 명시, 명대사, 명연설 등을 큰 소리로 암송하는 것이다.

참여자들의 희망이야 글쓰기, 말하기, 외국어 공부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겠지만 내 목표는 단순했다. 늘 오락가락하는 명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어 즐기며 뇌세포의 퇴화 속도나 늦춰 보자는 것이었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처음에는 짧은 한시 2수를 암송하는 것에 그쳤다. 참여자 모두 암송에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모임을 거듭할수록 가속이 붙었고, 이젠 모일 때마다 처음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을 암송한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암송은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암송이야말로 학습뿐 아니라 논리와 창의, 상상의 보고라는 것이다. 암송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이 셌다. 문법 설명 한번 듣지 않은 학생들이 암송으로, 문법을 유추하며 고급 프랑스어 작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무엇보다 ‘함께하는’ 암송은 재미가 있었다. 시작한 지 석 달도 안 돼 우수수 중도 탈락하는 제2외국어 익히기에 암송을 활용하자고 바람을 잡은 이유다.

사실 동서양의 인문학은 모두 암송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천자문을 뗐다는 것은 천자문을 외울 수 있는 것을 뜻했고, 사서삼경을 읽었다는 것은 사서삼경을 암송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경전이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는 불경은 말할 것도 없고, 베다와 성경, 호메로스의 시를 포함한 인류의 위대한 고전들은 모두 암송으로 구전돼 온 것들이다. 인문학이란 것도 알고 보면 암송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어진 뒤 나의 상상과 철학이 보태어져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한 것들이다. 하지만 암송은 주입식 교육의 원흉으로 지목받은 것에 이어 터치 한 번으로 온갖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이 되면서 자취가 사라지다시피 했다. 오죽하면 노래방에 가지 않으면 노래 한곡 부르지 못하게 되었을까.

하기야 공동체의 암송 모임에도 부작용이 없진 않았다. 이백이나 도연명의 시를 합송하다 흥을 못 이겨 가진 과도한 술자리가 그것이다. 독일어, 프랑스어 암송도 부작용이 없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어 명문장들을 꽤 암송해도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뭐, 그래도 좋다. 하루 1시간 정도의 노력으로, 샹송 몇 곡을 멋들어지게 부르고,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 카뮈, 사르트르 같은 대가들의 명문장과 명대사, 명연설문 들을 프랑스어로 줄줄 외울 수 있다면 그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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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대통령은 힘이 세다. 박근혜 대통령이 창조경제와 문화 융성의 핵심으로 인문학 진흥을 강조한 것이 불과 몇 달 전. 벌써 관련 예산까지 확보된 모양이다. 예산 집행을 앞둔 교육, 문화 부처와 산하기관들의 움직임이 변두리 인문학 공동체에서도 감지된다. 시민들과 어울려 인문학 공동체를 꾸리는 나로서는 이른바 인문학 열풍에 더해 운 좋으면 수혜자가 될지 모를 예산까지 준비되고 있는 셈이다.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시비를 거는 것은 인문학 진흥이 싫어서가 아니다. 뿌리와 줄기는 그대로 두고 곁가지만 건드리는 것에 마음이 쓰여서다. 알다시피 인문학의 본류는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지자체나 대학 밖 인문학 단체의 일회성 시민 강좌가 아니다. 중요한 건 대학이다. 대학 인문학과는 그렇다 치더라도 교양 강좌만 잘 이루어져도 인문학 진흥이라는 국책 과제의 상당 부분이 해소된다. 다행히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인 나라가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개 대학에서 교양 과목은 수강생 20명이 안되면 폐강된다. 70~80명은 기본이고 100~200명을 모아놓고 강연식으로 이루어지는 강의도 많다. 이런 곳에서 인문학에 필수적인 글쓰기며 토론 같은 것들이 가능할 리 없다. 게다가 한 학기 16주 강의에서 개강과 종강,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축제 등을 빼면 강의가 가능한 일수는 10주를 겨우 넘는다. 교양 과목 공부에 필요한 폭넓은 책읽기, 글쓰기는 고사하고 교재 한 권 달랑 들고 다니다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일부에만 손때를 묻힌 채 학기를 마치는 것이다. 


그 일차 원인은 대학의 지상 과제가 되다시피 한 경쟁력 때문이다. 대학 경쟁력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학생들의 취업률과 교수들의 논문이다. 그런데 교양 교육은 여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과 교수 모두 전례 없이 바쁜데도 대학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대학 인문학 공동화는 우리의 삶과 사회의 퇴행으로도 연결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요컨대 대학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대학이 자본에 완전히 복속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 일이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덕분에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도 할 일이 생겼으니 이 사태를 고마워해야 할까. 대안연구공동체가 최근 본격 실험을 시작한 ‘인문학 교실’은 대학이 안 하거나 못하는 것들을 우리가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다. 철학을 기둥으로 하는 이 교실에서 강의 못지않게 중시하는 것이 있다. 인문학의 생명이라 할 읽고 쓰고 말하기, 즉 토론이다. 여기서 읽을 책은 철학, 문학, 역사와 문화 예술 등 이른바 전통 인문학의 영역뿐만 아니다.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을 포함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는 것도 포괄한다. 그동안 공동체가 효율적인 제2외국어 학습을 위해 암송을 비롯한 다양한 실험을 계속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어든, 프랑스어든, 독일어든, 한문이든 몇 달 배웠으면 해당 언어로 책은 읽게 하자는 것이다.


청년 인문학캠프(출처 :경향DB)


그러고 보니 인문학의 개념 자체에도 시빗거리가 없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파이데이아’에 연원을 두고, 라틴어 ‘후마니타스’로 번역된 인문학은 본래 문학, 역사, 철학을 핵으로 하는 학문의 갈래가 아니다.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를 소거한 뒤, 남은 분야가 인문학인 것도 아니다. 시민 교양 교육의 뜻을 지닌 파이데이아는 종합적,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의 모든 주제를 포함한다. 따라서 수학, 물리학, 생물학도 종합적, 철학적으로 공부할 때는 인문학에 속하나 문학, 역사, 철학도 전문학자의 방식으로 탐구할 때는 인문학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문학의 목표도 문학, 역사, 철학 전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학문 분야를 토론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고 전문가의 주장에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철학이다. 학문과 삶의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면서 삶과 사회에 방향을 제시할 지혜를 닦는 공부가 철학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보루로 파이데이아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20세기 이후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전문가의 야만’을 완화하고 치유할 유력한 처방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말했듯이 인문학이 창조경제와 문화 융성에 도움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인문학의 효용은 인간다운 삶과 민주주의의 이상을 향한 끝없는 도전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기만과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다른 세상을 꿈꾸는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힘이 센 대통령이 꿈꾸는 인문학이 여기까지도 생각하는 것일까.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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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가난한 선비의 빈손으로 오십시오.”

길담서원 서원지기 박성준 선생이 얼마 전 보낸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다. 1월10일, 새로 이사한 옥인동 길담서원에서 집들이를 한단다. 집들이에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을 초청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도 연다고 한다. 오로지 개발과 성장만 좇던 이 땅에서 자발적 가난을 역설해 온 김종철 선생은 좋은 삶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길담서원은 책방과 찻집, 음악과 미술이 있는 공부와 문화 공간이다. 청소년 인문학교실, 철학 공방, 바느질 인문학, 책읽기,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원서 읽기 등 여러 공부 모임이 열린다. 작은 음악회와 전시회, 강연회도 개최된다. 2008년 문을 연 통인동 길담서원이 이사를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몇 달 전 늦여름이었다. 지하철 경복궁역 주변 서촌의 상권이 활성화하면서 임대료가 폭등하자 건물주가 아예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길담서원으로서는 위기였지만 머잖아 이는 변화와 도약의 계기가 됐다. 새집 찾기에서 이사와 집 꾸미기, 비품 구입 등의 모든 과정에 구성원들을 참여시키면서 손님이었던 이들이 명실상부한 주인으로 바뀌었다. 집 꾸미기에 필요한 비용도 이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해결했다. 대부분 5만원에서 10만원의 많지 않은 돈을 냈지만 100만원이나 200만원, 500만원을 낸 사람도 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개발·성장만 좇던 우리
불편을 받아들여야 가능

덕분에 40명도 들어가기 힘들던 책방 겸 메인 홀은 8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커졌다. 하나뿐이던 공부방도 3개로 늘어났다. 집을 이리 번듯하게 꾸며 놓았으니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진 것도 당연하다. 서원지기가 내놓은 기획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서당(書堂)이다. 훈장이 있는 서당에서 서생들은 철학과 글쓰기, 한문, 프랑스어, 역사 등을 필수로 공부하되, 암송과 체득을 기본으로 하는 전통 공부법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1인1책 쓰기를 목표로 글쓰기 학교를 만들겠다는 꿈도 야무지다. 기왕 진행 중인 여러 공부 모임도 더 활발해질 것이 분명하다.

새해맞이에 분주한 건 길담서원뿐 아니다. 마포구 서교동의 다중지성의정원은 새해 첫 학기 강좌와 세미나를 가을 학기보다 배 가까이 늘렸다. 남산강학원도 매주 두 차례씩 모여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대중지성 프로젝트를 비롯해 청년 인문학 캠프와 고전읽기 강좌 등을 잇달아 시작한다. 푸른역사아카데미, 철학아카데미, 수유너머N, 참여연대아카데미느티나무 등에서도 새 강좌 소식이 속속 전해진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새해 새롭게 시작하는 강좌, 세미나도 스무 개가 훨씬 넘는다. 이 중 상당수는 대안 대학원인 파이데이아 대학원 커리큘럼으로 생긴 강좌지만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한 책읽기와 철학 입문 프로그램도 있다. 문화 예술 강좌와 인문 외국어 강좌, 라틴어, 희랍어로 경전읽기 모임도 조금씩 확대되고 있다. 기왕 진행 중인 강좌, 세미나까지 합치면 매일 10개 이상의 공부 모임이 열리는 셈이다.

새 강좌, 세미나가 생기면서 새로운 얼굴도 늘어나고 있다. 홈스쿨링을 하는 10대에서 대학생, 대학원생, 주부, 정년퇴임하는 언론인, 해당 분야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70대 노학자에 이르기까지 연령과 직업도 각양각색이다. 이미 단행본을 몇 권 낸 중견 비평가가 있는가 하면 인문학엔 문외한인 의사도 있다. 이 척박한 시대, 이들이 나이와 직업과 계층을 넘어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 되었다는 건 어찌 보면 기적에 가깝다. 공동체의 인터넷 카페에서 개강을 앞둔 강좌와 세미나의 공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니 글귀 하나가 들어온다.

“시는 어차피 무용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가 불모의 세계에 유용한 결과물을 내놓는 식으로 세상과 거짓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모의 세계가 지닌 불모성을 ‘무용한’ 예술적 형식으로 드러내는 정직한 시적 자의식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일이다.”

공동체에서 시 창작 교실을 여는 젊은 시인이 어느 비평가의 글을 빌려 쓴 강의 취지 중 일부다. 그렇다면 인문학도 무용한 것? 그럴지도 모른다. 시가 그렇듯이 인문학에서도 중요한 것은 불모의 세계에 유용한 결과물을 내놓겠다며 세상과 거짓 화해하는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과 창조경제 인문학, 표심 관리용 지자체 인문학, 기업형 인간의 자기계발 인문학에 편승해 인문학도 밥이 된다고 억지를 쓰는 것도 아니다. 불모의 세계가 지닌 불모성을 드러내는 정직한 자의식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일, 시인이 밑줄을 그은 이 불온함이야말로 작금의 인문학 공부에서 새겨야 할, 핵심 경구에 가깝다.

어렵사리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한 강좌를 열어 이른바 진보의 역설, 자유의 역설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악의 평범성, 무사유의 죄를 이야기한 한나 아렌트의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정직하게 대면하기 위함이다. 참여자 수가 많지 않아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반 일리치 읽기도 이와 거리가 멀지 않다.

목구멍이 포도청 운운하며 자기변명과 합리화에 급급해온 우리에게 진실은 불편하고 아프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며 느끼는 아픔 없이 다른 세상 꿈꾸기는 가능하지 않다. 김종철 선생이 길담서원에서 이야기할 좋은 삶이란 것도 결국 불편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제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는 더 많이 불편하고 아파하라는 말과도 통한다. 아무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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