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구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들 중 한 곳에 살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지구별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이 되고 있는 중이다. 가장 불행한 나라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은 지금 ‘인류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권했던’ 무지의 길을 가고 있다.

무지의 길은 ‘파괴적인 힘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하려고 그 힘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힘을 키우겠다는 발상’을 버리는 용기의 길이다. 헌법과 국정과 공직을 사유화해서 나라의 살림과 국민의 안녕을 파괴한 권력 엘리트 집단에 대해 국민은 오직 평화의 힘으로 질서 있게 응징하려고 어떤 괴물을 만날지 모르는 무지의 길을 밝히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고 있다.

이 무지의 길에 들어선 국민은 지난 6일 국회 청문회 증인석에 앉아 모르쇠로 일관하는 재벌 총수 9명을 지켜봤고 기업 조직과 기업인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기업의 정신은 애정을 알지 못하고, 탐욕이 아닌 욕구를 알지 못하고, 지역이나 개인에 대한 헌신을 알지 못하고, 공감이나 존경이나 감사를 알지 못하고, 중용이나 검약이나 자제를 알지 못한다’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웬델 베리의 경고가 옳다면, 돈으로 무한 권력을 행사하는 재벌은 ‘개인의 정신에서 탐욕과 노예근성 따위의 가장 나쁜 점과 약한 점을 정당화하고 부추기면서도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추호도 걱정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유령이다.

권력 엘리트 집단과 그 너머의 유령을 직면한 국민은 ‘파괴가 자행되는 진짜 이유’, 즉 ‘우리가 경제학의 두 가지 거짓말을 믿고 그에 맞춰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같이 직면하고 있다.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다.’ ‘우리 지역의 경제를 대기업에 넘겨주어도 괜찮다.’ 이 두 가지 거짓말 속에서 삶을 잃어버리고 나라를 도둑맞은 국민은 삶과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무지의 길을 걷고 있다. 이 무지의 길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겸손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과, 무제한의 욕망과 끝없는 결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형식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촛불과 함께 거듭 확인되는 점은 2016년 겨울의 ‘형식’이 1960년 4월 봄은 물론 1987년 6월 여름의 형식을 넘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현재 진행형으로서 결코 탄핵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작금의 이 형식은 바람이 불면 꺼질 것 같은 촛불을 함께 살리면서 가장 불행한 나라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제전이다.

이 경험을 통해 국민은 최종적으로 ‘우리의 존재 전체에 대한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된다. 국민이 직접 국가를 통치할 수 있고 선출되지 않은 모든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존재 전체’라는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담담하게 수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무지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다음의 이행이 일어난다. ‘소수가 소유한 나라’에서 ‘다수가 소유한 나라’로, ‘경제적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정부’로, ‘인간의 경제활동과 자연 세계의 조화’를 이루는 평화의 질서로 이행할 수 있다. 국민이 청와대와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거쳐 다시금 선거 투표소로 향한다면 그 단 하나의 이유는 국민 스스로 자신에 대한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다. 관건은 그런 이행을 제도화하고 내면화할 수 있는 결정적 형식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도 ‘거창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정직함에서 출발한다.

정직은 우리에게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알려주고 그 문제를 정확한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정직해야 ‘거창한 문제는 수없이 많은 작은 해답이 필요하다’는 것과 ‘해결책은 한 번에 농장 하나, 숲 하나, 땅 한 마지기를 치유하는 방식’ 외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 형식은 정치와 경제의 중앙 집중화 대신 지역 공동체와 지역 경제의 자립을 이루는 것, 새롭고 충격적일 정도의 지방자치와 주민자치를 실행하는 것이다. ‘적절한 규모라는 개념’과 ‘한계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국민이 직접 국가를 통치하고 민주주의로 삶을 영위하는 이 길을 가기 위해서 국민은 이 난국의 어느 끝에 선거 투표소로 가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다.

괴물과 유령의 파괴를 이기는 평화의 길은 무지의 길이자 정직의 길이다. 이 길에서 ‘우리는 책임질 수 있는 것 이상의 권력을 가져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국민은 누구일까.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쉽게 기뻐하지 않는 복잡한 사람이며 영웅도 백만장자도 아닐 것’이다. 바로 이 도시의 시민이고 우리 동네의 주민이다. 대통령과 전문가와 예술가는 그 일원일 뿐이다. 이상 모든 인용문은 웬델 베리의 <지식의 역습>에서 왔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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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민심과 국민 여론은 거듭 대통령의 하야다. 하지만 대통령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헌법을 무기로 대통령이 국민을 이기겠다고 작정했다는 뜻이다. 선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마지막 가능성으로 남았던 대통령의 정치는 완료됐으며 명예혁명과 망명을 운운했던 일각의 로망은 소멸했다. 남은 것은 국회의 정치와 시민의 정치다. 국회의 정치는 이제 외길로 보인다. 탄핵을 가결하고 헌법재판소로 가는 길, 대통령의 헌법과 국회의 헌법이 맞붙는 막다른 길이다. 반면 시민의 정치는 이 길과 함께 또 다른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사문화된 원칙을 되살려 엘리트 독과점 정치의 대의 민주제를 넘어서겠다는 국민혁명의 길이다.

날마다 특종과 속보와 가십성 뉴스가 홍수를 이루지만 국민은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지 않는다. 대통령의 하야를 마땅하게 여기는 민심은 하야한들 지난한 탄핵으로 간들 그다음이 마땅치 못한 이 난국을 냉정하고 차분하게 직시하고 있다. 국민은 마음속에서 대통령을 지웠기 때문이다. 진상 규명과 처벌은 응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무엇을 위해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들 것인가이다. 초겨울의 주말문화이자 저녁문화가 된 광장 행렬이 100만 촛불을 켜면 때맞춰 청와대 실내등이 꺼지고 경복궁과 북악산이 깜깜해지는 광경은 우연이 아니다. 낮과 밤, 평일과 주말을 교차하는 이 빛과 어둠의 대비는 국민 저마다의 간절한 ‘보디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거대한 ‘미디어 아트’다.

이 ‘국민예술’이 열망하는 국회의 정치는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의 4대 국정과제를 사사로운 먹잇감으로 갈취한 ‘비선 실세’의 공범들과 이들을 공권력으로 뒷바라지한 국가 시스템의 적폐를 대청소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 대표성이 현저히 떨어진 국회를 정당득표 연동 비례대표제를 통해 일신하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탄핵 정국을 경과하는 동안 국회의 정치가 보여줘야 할 기본이다. 이것을 실천하지 않고 대통령 선거로 가서 차기정부가 하겠노라 공약한들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민심은 안다. 51%로 당선된 대통령을 95%가 마음에서 버리게 된 국민의 자괴감은 더 이상 무력감이나 패배감이 아니라 새 판 짜기를 시작해야겠다는 집단지성의 장기전으로 가고 있다.

이 점에서 민심의 향배를 요약하면 이렇지 않을까 한다. 못 볼 것의 끝을 끝내 보았다, 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데까지 왔다, 그리고 이 몹쓸 사태를 단숨에 정리할 방법을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국회는 죄인의 심정으로 탄핵의 외길에서 입법, 행정, 사법, 헌법재판, 선거관리에 이르는 헌법기관 전체의 정상화를 위한 대장정에 그 어떤 지름길도 샛길도 없음을 직시하고 국가 대개조의 가시밭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라고 말이다. 이렇게 국민과 소통하며 탄핵 정국이 일단락되어야 대통령 선거가 의미를 갖는다.

시민의 정치는 국회의 정치를 견인하되 따로 가야 할 길이 있다. 그것은 100만 촛불이 부른 그 노래의 후렴구 그대로다. “후회 없이 꿈을 꾸겠다 말해요”이고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이다. 이 꿈을 계속 꾸고 싶어서 소설가 부희령은 “오래오래 광장을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거”라 믿지만 그러기 위해선 “촛불이 꺼지면 언제든지 옆 사람에게 붙여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강풍이 불고 한파가 와도 모일 수 있는 공간을 국민과 함께 만들 공적 주체는 누구일까. 이 난국에도 국민의 일상과 안전을 책임지는 최후의 헌법기관, 바로 전국 17개 광역 지방정부와 의회이며 228개 기초 지방정부와 의회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국민은 경험했다. 중앙권력의 갑질 횡포에 위축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지만 주민자치를 위해 깨알같이 많은 일을 해 왔으며 특히 위기 때 국민이 믿고 의지할 언덕이 되었던 공공이 누구였는지 말이다. 그 지방정부와 의회가 전국 각지에 한겨울의 촛불 민심을 환대하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시민의 정치는 겨울밤 내내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천일야화를 이어갈 것이다. 이 천일야화를 통해 헌법을 공부하고 민주주의 교과서를 집필하며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행복한 나라를 후회 없이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대중문화 평론가 황진미의 통찰대로 “허깨비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꿈꾸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정치가 갖는 힘이자 국민혁명을 만들어가는 길이다.

새로운 민주공화국이라면 국회의 정치와 시민의 정치를 연결하는 플랫폼은 대통령이나 중앙정부가 아니라 충분한 권력을 가진 지방자치의 각양각색 정치여야 할 것이다.

내년이면 6월 국민항쟁 30년이다. 그 사이에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까지 여섯 명의 대통령을 뽑았다. 국민이 원하는 바는 일곱번째 대통령을 뽑기 전에 헌법 제1조의 원칙이 살아 숨 쉬는 민주공화국을 맘껏 꿈꾸는 일이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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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잠든 밤 영화에 빠진 내게 아내는 불쑥 노트북을 내밀었다. 뭐야, 했는데 아내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동영상에선 “해방이화, 총장퇴진”의 앳된 함성이 울려퍼졌다. 학생은 죄 얼굴을 가렸는데 옷차림은 발랄했고 합창곡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다른 동영상에선 녹색 머플러를 두른 교수와 복면을 쓴 학생이 이산가족처럼 포옹하고 있었다. 그들 중 보라색 염색을 하고 눈가를 닦는 교수를 가리키며 아내는 울먹였다. “저분이 내 은사야.” 86일간의 이대 본관 점거농성은 그렇게 꼬리로 몸통을 흔들었다. “최순실 딸 부정입학 및 학사특혜 규탄”은 최순실 게이트의 뇌관으로 전 국민의 공분을 깨웠다.

아울러 이대 학생 시위는 ‘느린 민주주의’라는 쟁점을 남겼다. 이 작명은 시위대가 학교나 기자와 소통할 때 지도부나 대변인 없이 참여자의 전체 토론인 ‘만민공동회’의 서면 문답을 고수하면서 비롯됐다. 이 때문에 주류 언론과 일부 전문가는 ‘느린 민주주의’를 “지도부 부재 난맥상”과 “타협점 못 찾고 표류”로 표현하며 사태 해결의 걸림돌로 비판했다.

하나 ‘느린 민주주의’는 그 어떤 대의제도 못했던 ‘민주주의의 빠른 해결’을 경험했다. 미래라이프대학 추진은 폐지됐고 총장은 사퇴했으며 최순실은 국민 앞에 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 시위대의 ‘외부세력 배제’가 사회적 연대의 포기냐 새로운 운동 전략의 성공이냐라는 논쟁이 뒤따랐다. 나는 이런 양도일단의 해석이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시민 시위를 ‘불순분자의 사주’로 몰아 탄압하고 민형사 소송을 남발하는 공권력에 맞서 어떤 방어 수단을 선택할지가 이대 학생 시위의 고민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위자의 개인 신상이 털리지 않게 보호하여 다수의 참여를 유지하려는 선택과, 희생을 감수하는 소수의 선도적 행동으로 저만치 대오 앞으로 나아가는 제의(祭儀)적 선택은 다른 방식을 낳는다. 뒤의 선택이 각성된 정치적 주체에 의해 사회적 구조를 한꺼번에 문제로 삼는 선동의 언어이자 외부적 목표 지향이라면, 앞의 선택은 시위 참여자의 집단 무의식을 사회심리적 구조로 묶어내는 공감의 언어이자 내부적 응집 지향이다.

이 점에서 이대 사태는 정당성의 문제로 촉발됐지만 학생 시위의 조직화는 동기상의 문제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즉 이대 사태의 구조적 해법을 찾는 변증법적 사고와 이대 학생 시위대가 선택한 자급자족의 심리는 연결돼 있지만 따로 읽어야 한다. 후자에 주목한다면 이대 학생 시위가 던진 질문은 다른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로 선출된 대표가 도리어 선출한 국민을 무시하는 실태에 대한 부정이다. 51%가 49%를 배제하는 현실에 대한 반대다. 또한 그 민주주의가 위촉한 전문가의 위선에 대한 불신이다. 4대강과 가습기살균제와 농민 백남기 사망진단서까지 엄청난 결과를 불러내고도 그 폐해와 무관하게 고결한 전문가로 사는 그들에 대한 거부다.

이것이 우리가 물려준 대의 민주주의라면 이대 학생 시위는 무엇을 포기했거나 어떤 전략을 성공시켰기보다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과 착오로 되풀이하면서 미완의 질문을 남긴 것이다. 이 질문은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기’라고 할 수 있다.

이진순 선생의 신간 <듣도 보도 못한 정치>가 소개한 직접 민주주의의 사례들에 86일간의 이대 학생 시위를 추가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우리의 생활 민주주의를 탐구하고 실험해야 할 때다. 특히나 이대 학생 시위는 ‘경쟁을 내면화한 각자도생의 수저 세대’로 대상화됐던 청년의 몸부림이었기에 여기에 응답하는 일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영욕을 누리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부채이자 의무다.

그날 밤 나는 영화 <아수라>를 보고 있었다. 정치인과 검찰과 경찰과 조폭과 용병이 서로 물고 뜯다가 장례식장에 모여 모두가 죽는 결말을 보긴 했지만 중간에 아내가 들이민 동영상을 보느라 나중에 다시 봤다. 작금의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나기 시작한 그들의 물고 뜯는 아수라장을 보면서 영화보다 더 소름이 끼쳤지만, ‘기승전검찰’로 귀결되는 이 나라의 대의 민주주의가 또 얼마나 허망할지를 지켜보는 시청자 국민의 노릇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스란히 숙제로 남는다. 이제라도 ‘민주화’ 훈장부터 떼고 ‘산업화’ 훈장도 마저 떼놓고 ‘듣도 보도 못한 민주주의’에 착수해야 내 앞에 놓인 그 숙제를 비로소 풀 수 있을 것 같다.

내 청춘의 한때 ‘한 사람의 열 걸음’과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놓고 친구들과 갑론을박을 벌였던 적이 있다. 어느샌가 ‘한 사람의 열 걸음’은 선한 의지든 악한 음모든 그것이 돈으로든 권력으로든 명예로든 기어코 나쁜 세상을 만든다고 알게 됐지만, 나는 여전히 착한 대표자와 봉사하는 전문가가 그래도 세상을 좋게 만든다고 여겼던 편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게 아니었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위한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도 착오도 해본 적 없이 ‘한 사람의 열 걸음’에 기대 묻어가려는 심보로는 이 아수라장을 벗어날 수 없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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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이제 우리의 생활이 되고 있다. ‘안전지대 한반도’라는 통념은 이미 깨졌다. 올여름부터 집중적이고도 연쇄적으로 겪는 폭염, 지진, 태풍, 원자력, 북핵의 문제는 더 이상 평소와 달랐던 천재나 인재의 경고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이라 불렀던 생활세계의 토대가 수시로 일거에 아수라장이 될 수 있다는 현실감이다. 올해의 남은 날들과 내년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재난의 생활화’라는 오늘보다 더 확실한 내일이다. 세월호,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와 함께 하늘과 바다와 땅의 재난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블랙홀 같은 트라우마로 내면화되고 있다. 더불어 드러난 문제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와 정치만이 아니다.

만약 한반도 전역으로 재난이 파급된다면, 그날을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왔고 어떻게 행동하며 폐허에서 어떤 관계 방식으로 살아갈지에 대해 우리가 무지, 무감하다는 사실이 진짜 문제다. 그날 며칠 전부터 지구촌 어딘가로 이동할 1%를 제외하면 여기 남는 우리는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삶을 진작 바꾸지 않는다면 공멸한다. 대재앙을 거쳐도 살아남았던 인류사의 모든 문명과 공동체의 시금석은 단 하나였다. 위기 속에서 여성과 노인, 장애인과 환자, 어린이와 젊은이부터 구하고 살아남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대한 영웅’이나 ‘모성애 많은 민족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생존과 지속을 위해 저장된 집단지성 덕분이다.

그 집단지성은 위기 때면 자동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위안의 장소’를 두고 ‘환대의 공간’을 운영하며 ‘격려의 관계’를 증진하는 생활세계의 안전망을 유지하고 있을 때 생사를 다투는 그 순간에도 발휘되는 현상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집단지성의 사례는 근자에도 있었다. 5년 전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 때였다.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 앞에서 정부와 도쿄전력이 진상 은폐와 책임 회피에 긍긍하는 동안 이재민에게 심신의 위안을 준 곳은 동네 편의점이었다. 공공의 구호가 미치지 못하는 그때 편의점에선 식수와 음식은 물론 화장실과 온수를 제공했고 전국 점포망을 통해 피해지역에 상품 공급량을 늘렸다.

편의점이 곧 재난 물류센터라는 집단지성의 기원은 21년 전 고베 대지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정부는 지진 발생 후 6시간 뒤에 대책본부를 꾸렸고 대책 발표엔 하루 넘게 걸렸으며 총리는 TV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반면 한 편의점 본사는 피해지역의 편의점 343개 중 272개 지점이 피해를 입었으나 사장과 직원 360명이 급파돼 별도 본부를 꾸리고 피해 점포를 3시간 만에 영업 재개시켰다. 지진으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 이 편의점은 24시간 영업하며 이재민에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제공했다. 이들은 대재난 앞에서 자신들이 이재민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베 대지진 이후 내각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총리는 사퇴했다. 반면 그 편의점은 도호쿠 대지진 발생 땐 재난 물류센터를 넘어 정보센터 역할까지 했다. 이렇게 일본인에게 편의점은 민간 기업이 만든 사회안전망이자 가장 신뢰받는 공공서비스 체계가 됐다. 편의점은 이제 물품을 사는 곳이자 위안과 환대와 격려를 경험하는 곳이다. 일본 지방정부들은 편의점과 재난 대비 협정을 맺었고 중앙 정부는 ‘재해 시 편의점 정보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역할을 미국 뉴욕에서는 공공도서관이 더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15년 전 9·11테러 때도, 4년 전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강타했을 때도 뉴욕 시민들은 도서관 홈페이지부터 찾고 이재민은 도서관에 가서 숙식을 제공받았다.

9·11테러 때 도서관 홈페이지는 공포를 조장하는 대중매체와 달랐다. 대피소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와 헌혈을 연결했고 소식이 끊긴 사람을 찾게 도와줬다. 또한 이슬람의 역사와 정치를 선입견 없이 이해하게 프로그램을 만들고 트라우마 치료와 상담을 제공했다. 평소에 뉴욕 공공도서관은 보건소이자 취업센터이고 창업교실이며 편의점이자 동주민센터이고 결혼식장이자 예술극장이다. 이러니 테러와 허리케인은 물론 영화 <투모로우>의 한파와 쓰나미에도 마지막 피난처는 공공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두 사람의 기금을 토대로 비영리단체가 시민 기금과 정부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우리는 어떤가. 편의점은 모르겠으나 민간이 만든 공공도서관으로는 수지의 느티나무도서관이 으뜸일 게다. 자치구와 마을이 협력해 만든 공공도서관으로는 은평의 구산동도서관마을이 있다. 자치구가 만든 공공도서관의 혁신 사례로는 성북의 10개 구립도서관이 있다. 이들 도서관의 공통점은 ‘도서관답지 않게’ 주민의 생활과 결합하며 집단지성의 공간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에는 구립 공공도서관만 123개가 있다. 작은 도서관은 905개가 있다. 이는 동주민센터와 투표소에는 못 미치나 그 다음으로 많은 수다. 우리 동네의 민주주의는 지금 이들 도서관에서 생활문화의 혁명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곳이 재난의 그날이 왔을 때 위안과 환대와 격려를 기대하며 찾는 우리 동네의 피난처였으면 좋겠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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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같았다. 끝날 줄 모르던 폭염에 감기를 견디며 빌빌대는데 문득 가을이 와 있었고, 회복됐다. 하나 추석 당일 재차 감기에 걸려 일주일을 흐느적댔다. 핑계를 구한 몽롱한 몸은 연휴 내내 TV와 지냈다. 무료 영화를 찾아 160개가 넘는 채널을 돌리는 족족 <집밥 백선생>과 <백종원의 3대천왕>과 <삼시세끼>와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먹방 프로그램이 무한 재방송 중이었다. 두 눈은 보면서 맛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식욕은 몸살로 무감각한, ‘심신분열의 거짓말’ 같은 상태였다. 이렇게 두세 시간을 멍해지다가 뉴스로 눈길을 돌리면 거짓말처럼 수십 년간 똑같은 추석 풍경이 화면에 있었다. 텅 빈 서울, 꽉 막힌 고속도로, 늙은 부모와 시골, 선물 꾸러미와 어린 자식을 양손에 끼고 환하게 웃는 가족이 거기 있었다.

거짓말 같았다. 한반도의 올해 여름은 1973년 관측 이래 최고의 기온과 최장의 폭염 일수를 남기고 물러났다. 4월 미 항공우주국의 발표대로 올해는 인류의 관측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가 됐고 내년이면 다시 ‘가장 뜨거운 해’가 될 것이다. 거짓말처럼 가을이 왔으나 추석을 앞두고 남쪽엔 지진이 일어났다.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인 5.8의 경주 지진을 전한 9월12일 속보 이후에도 일주일간 총 409회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뒤늦게 보도됐다. 역시 늦게 전해졌지만 북쪽은 8월 말부터 겪은 10호 태풍 라이언록의 영향으로 533명의 사망·실종자와 11만8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며 ‘해방 후 처음인 대재앙’을 공개했다.

무엇이 거짓말일까. 기록적인 폭염 뒤의 달콤한 추석 연휴가 누구에게나 있었던 것일까. 폭염 직후의 지진과 태풍은 연휴를 마무리할 무렵에나 삽입된 저들의 불행이었던 것일까. 누군가 이 지경을 두고 하늘이, 땅이, 바다가 진노했다고 한탄한다면 미쳤다고 해야 할까. 옛날이라면 벌써 제를 지냈을 것이고 왕은 속죄하고 백성은 기도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 민은 난을 일으켰고 왕은 변을 겪었다고 역사를 썼다. 극심한 가뭄에도 인디언의 제사가 통했던 까닭이 비가 내릴 때까지 속죄하고 기도하길 계속했기 때문이라는 전근대의 방식이 과연 근대 정부를 가진 우리의 방식보다 비과학적이거나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거짓말일까. 천재와 인재를 분별하는 근대 이후의 우리는 재난 일체에 대해 “나만 아니면 돼” 하는 무심한 시청자로 동일하다. 이런 자세로 남북의 스타일 차이를 쳐다볼 뿐이다. 북한 방식은 세계에 긴급지원을 요청하면서도 삽과 곡괭이와 맨손의 인민군이 붉은 깃발 아래 일사불란한 ‘피해복구 전투’에 임하는 사진 배포와 “김정은 동지가 보내주신 유압식 굴착기가 도착했다”는 TV 방영이다. 북쪽보다 훨씬 복잡한 남쪽은 다를까. 폭염에는 전기요금 ‘폭탄’ 논란과 한전의 막대한 흑자, 에어컨 판매 300만대 육박과 관련 주식 상승이라는 방식이다. 경주 지진에는 밀양 송전탑 사건 때 그랬고 성주 사드 배치 갈등에서 반복하듯 타 지역의 관망과 해당 지역의 반발을 나누어 ‘민생과 동떨어진 여야 정치권 대립’ 뉴스처럼 소비하는 방식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민족대명절에 민족대이동을 거쳐 상봉한 ‘정상가족’은 수십 년간 번번이 화기애애했던 것일까. 아니면 수시로 ‘분노대방출’의 일촉즉발을 간신히 틀어막고 뿔뿔이 흩어졌던 것일까. 이번에도 밥은 누가 짓고 전은 누가 부치고 설거지는 누가 했을까. 성적을 묻고 취직을 묻고 결혼을 묻고 출산을 묻는 일은 누가 했을까. 화투를 치고 술에 취하고 막말을 한 자는 누구였을까. 폭염엔 에어컨을 켜면 되고 지진은 경주와 경남일 뿐이고 태풍은 남쪽을 비켜갔으니 ‘한가위만 같아라’ 하고 방송 진행자처럼 웃는 자는 누구일까. 세월호와 메르스와 옥시의 희생자와 남은 가족에게는, 실업자와 취준생을 오가는 청년과 결혼 및 출산을 유보한 1인가구에게는 ‘똑같은 한가위’란 이미 없는데 나는 누구였을까.

에어컨과 전기요금과 원자력발전소는 결과가 아니라 폭염과 지진과 태풍의 더 큰 원인으로 줄줄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민주주의와 경제정의에 실패해서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대재난의 결과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고도 밀양과 성주와 경주가 아닌 여기에서 내 가족이 무탈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소박한 거짓말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거짓말이다. 그것도 내가 날마다 하는 거짓말이었다.

추석이 있었나 싶게 몽롱·나른했던 감기 몸살기의 연휴 넋두리를 마무리하자. 연휴가 끝나자 바로 회복된 나에게 “당신은 연휴 때만 아프더라” 하는 아내에게 사과하면서 대한민국의 남성 가부장 중년의 어떤 혼합체로 별일 없다는 듯 사는 나에게 그리고 북한의 연속적인 핵 도발과 대통령이 콕 집어 말한 ‘불순분자’에 대해 이제부턴 정신 차리고 살겠다는 뜻에서 옹알거리기만 했던 말을 여기 쓴다. 거짓말이야!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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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대가의 어록과 학계의 연구와 속세의 ‘썰’을 모아보면 대답은 태산보다 거대할 것이다. 난해하거나 자명하고 진중하거나 농담 같고 상투적이거나 발칙한 예술론의 백가쟁명에도 불구하고 바탕엔 ‘예술은 신성하고 고귀하다’는 18세기 부르주아 미학의 고정관념이 깔려 있다.

반면 소설가 한창훈에겐 이런 질문 자체가 ‘지랄’ 맞게 커서 문제다. 너무 커서 삶의 한계를 초월하는 질문은 감각과 정신을 헐벗게 만들기 쉬워서다. 하여 “문학 바깥에 있는 비문학이 더 중요하다”고 잘라 말하는 작가에겐 밥과 일과 놀이의 비예술 생활세계에서 빚어지는 희로애락을 경청하고 참여하며 기록하는 실천이 예술이다.

7월에 나온 그의 연작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한겨레출판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는 한 줄의 법조문만 가진 섬나라의 사람들을 그렸다. 이 소설을 읽으며 지랄 맞은 폭염을 견뎠고 지랄 맞지 않은 예술을 상상했다.

5년 전 1월이었다.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를 쪽지에 쓰며 “죄송합니다”를 반복한 32세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고독사했다. 한 해 뒤 정부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턱없이 작은 예산에 권리가 아닌 시혜처럼 주어진 예술인 복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여전한 가운데 ‘창작지원금 사업’ 수령자가 전국 2354명으로 집계됐다(2015년 12월10일 기준).

문제는 이 바늘구멍이 예술인 스스로 자격증명이라는 행정절차를 통과해야 하며 지원 기준도 사회공헌과 창작활동계획, 생계위기, 창작준비금 등으로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박인숙 새누리당 의원이 작년 국정감사에서 ‘창작준비 지원과 생계형 복지 지원 투 트랙 확대’를 주문하고 복잡한 증명 절차를 줄이라며 문화체육관광부와 보건복지부에 당부할 정도였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종사자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겠지만 사정이 이렇다면, 국가정책으로 예술인 복지를 말하는 노릇은 낯 뜨겁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월18일 서울시는 ‘서울예술인플랜’을 발표했다. 대표사업 3가지는 이렇다.

첫째는 예술인 공공임대주택을 현재 50호에서 1000호까지 늘리고, 낡은 아파트를 예술인 주거+창작 공간으로 재생해 낮은 월세로 장기 임대하며, 민간의 창작공간 300곳에 임차료를 지원하고 자치구 유휴공간 100곳을 공유형 창작공간으로 조성하겠다. 둘째는 사회적 예술 일자리 1만5000개를 만들고 예술인 표준 보수지침을 적용하겠다. 셋째는 청년과 신진 예술인을 위한 ‘최초예술지원’ 1000건과 같은 신규 사업들과 기존 사업을 묶어 “장애 없는 창작활동”을 지원하겠다.

서울시는 이외에도 넷째로 예술인 교육 확대 및 해외교류 지원과 다섯째로 대학로 서울연극센터를 ‘예술청’으로 증축해 기능을 전환한다는 것을 아울러 “5대 희망 의제”라고 포부를 밝혔다. 계획대로라면 서울에 사는 예술인의 복지는 한결 나아질 것 같다.

문제는 주거와 작업공간, 일자리, 창작, 교육과 해외교류 등의 지원을 제각기 공급하지 않고 지역이라는 터전에서 통합하는 전략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지원을 바탕으로 예술인들이 지역재생에 참여하며 주민과 공생하는 생태계를 스스로 만들게 하는 방향과 전망도 안 보인다. 이 점에서 ‘서울예술플랜’은 ‘쌀이나 김치를 구하는 예술인’의 지상에는 천착했어도 ‘신성하고 고귀한 예술’의 천상이라는 과거의 미학을 바꾸는 데로는 나가지 못했다.

해서 다시금 질문 앞에 선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지금 이 장소에서 나와 친구와 이웃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정부와 서울시의 예술인 복지정책 및 예술정책은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예술언어와, “정치적 공공성에 기여하는 ‘자기갱신’”의 예술경험과 “삶의 인간화를 실현하는” 예술실천은 일부 문화·예술인이나 소수파의 간절한 염원일 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미덕을 체질화하고 생활화하고 내면화하는 것 자체”의 접근법으로서 예술은 “한국 사회가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이건만 좁고 위태로우며 그 일은 지극히 예외적인 인간”이 걷는 예술의 길로 남아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그래서 기록적 폭염보다 지랄 맞다. ‘천상의 예술’은 이미 추락했는데 ‘예술의 지상’을 위한 서울시와 정부의 정책은 요원하다. 특히 ‘서울예술플랜’에 부족한 결정적 2%인 지역 생태계 구축의 전략 부재를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지랄 맞지 않은 예술이 지역 도처에 있는데도 말이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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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경력의 34세 연극배우인 그는 프리랜서였다가 2년 전 거리예술을 하는 극단에 들어갔고 1년 전 연극교실의 강사를 맡았다. 이 연극교실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참여 주민의 이야기를 가지고 창작극을 만든다, 주민이 연기를 익히는 것은 동네에서 자기 역할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 강사는 연극 교육이나 연습 시간보다 더 많은 일상을 참여 주민과 같이 보낸다, 강사배우와 주민배우는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 동일한 과제를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의 경계와 연결이 명확해야 한다, 취미 활동과 자신을 변화시키는 실천은 다른 것이다 등등. 과연 이 연극교실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강사인 그는, 두 살 연상의 주민배우와 지난 7월7일 결혼식을 올렸다. 주민배우를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보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에 신청한 배우자는 출판사 직원인 동네 주민이었다. 이 부부의 생업은 다르지만 둘의 인연은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서로의 모습”에 반하면서 비롯됐다. 작년에 시작된 성북구 미아리고개연극교실에서 만난 부부는 강사 13명과 주민 59명이 만나 형성된 간이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올해엔 미아리고개시민극단으로 발돋움했고 부부는 여전히 활약 중이다. 각자 살던 부모 집에서 성북동 신혼집으로 독립한 부부에게 달라진 것은 이뿐이 아닐 것이다. 결혼식 축가로 합창을 불러준 연극교실의 주민배우 동료들과 만들어가는 마을과 예술의 신세계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같은 연극교실의 또 다른 강사였던 경력 15년의 34세 연극배우는 오는 9월24일 결혼한다. 배우자는 여섯 살 연하의 초등학교 교사이며 성북구의 1인 가구였다. 배우자의 고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동선동에 신혼집을 차릴 예정이다. 배우자는 반복되는 생활에 지쳐갈 무렵 현수막을 보고 “저기 가면 뭘 배울까” 궁금해 신청했다.

연극교실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알고 지내게 된 것이 신기했던 배우자에게 강사는 “착실하게 살면서도 자기 뜻을 펼쳐나가는 삶”을 발견했고 거리공연 도중 청혼했다. 미아리고개시민극단의 동료이자 예비부부는 요즘 “예술가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사회 부적응자인가” 고민하고 극단 대표는 “가장 자유로우면서 가장 예의 반듯한 존재가 예술가란 생각은 안 해봤어?” 하며 토론을 벌인다.

공동체 예술을 하면서 유목민으로 살아온 45세의 극단 대표는 연극교실의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려 속속 잡히는 결혼 날짜들”을 지켜보다가 오랜 연애 끝에 동료 배우와 지난 5월29일 대학로에서 먼저 결혼식을 올렸다. 송경동 시인의 낭독과 김반장의 공연 속에서 양가와 동료 그리고 연극교실 주민배우들이 어우러진 연회극(宴會劇) 형식의 결혼식에서 이들 모두는 예술과 마을이 서로를 이끄는 어떤 공동체의 비현실을 체감했다.

그러나 5월의 햇살과 흰 차광막 아래 곡성과 제주에서 올라온 양가 어르신들과 젊은 하객들이 일제히 쓴 황금빛 밀짚모자의 물결을 바라보며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집단 실행한 그 거리와 시간은 분명 현실이었다.

물론 같은 연극교실 안에도 결혼과 다른 현실들이 훨씬 많다. 모 주민배우는 “연애가 목적이냐, 연극이 목적이냐” 따지고, 또 가장 먼저 연애를 한 31세 동갑의 강사 커플은 가장 먼저 헤어졌다. 주목할 것은 헤어진 연극배우 한 명이 석관동에서 어린이 연극교실을 진행하며 구립도서관을 마을극장으로 바꾸기 시작한 비현실이다. 그가 협업하는 새 극단 이름은 ‘너다워서 아름답다’인데 연고지가 없다가 월곡동과 석관동에서 ‘예술마을 만들기’에 참여하게 됐다. 성북구에선 정릉, 성북, 삼선, 동선, 돈암, 월곡, 석관동에서 ‘예술마을 만들기’를 진행한다. 여기엔 동 이름을 딴 여러 색깔의 연극교실이 작년 4개(주민 122명)에서 올해 6개(주민 145명)로 확산되고 있다.

‘예술마을 만들기’란 집단 지성과 감성의 기획인데 ‘예술을 통한 마을’과 ‘마을을 통한 예술’을 상상하며 장소와 주민 기반으로 비현실이 현실에 파종되고 비예술이 예술로 전이되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는 성북구 예술인과 기획자들의 개방적 네트워크인 ‘공유성북 원탁회의’에서 추진해왔고 ‘찾아가는 동복지센터’와 ‘협치서울’의 흐름과 결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마을과 예술의 중매를 통한 결혼식이 잇따랐던 것이다. 가난한 연극쟁이와 동네 주민의 결혼식으로 치달은 “이상한 분위기”는 비현실이라고 저만치 치워둔 사랑이 겁도 없이 현실 복판으로 걸어들어온 사건이었다.

올해부터 ‘공유성북 원탁회의’는 ‘우리동네 공동부양’이라 쓰고 ‘우동·공부’로 줄여 부르는 릴레이 학습을 시작했다. 사회적 경제, 도시 재생, 현대미술 등 3탄까지 진행됐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와 같은 꿈을 꾸면서 한편에선 “기도하고 일하고 읽어라”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칙대로 같이 염원하고 행동하고 공부하는 중이다. 수칙은 이어 말한다. “그러면 신께서 지체 없이 함께하시리라.” 아마도 예술의 신은 마을의 신일 것이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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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제19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해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8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70년이 되는 해이다. 이 70년의 세월 중 6·25 한국전쟁의 시기를 빼면 앞쪽 30여년은 군사독재의 국민총동원 산업화 체제였다. 이 체제는 ‘민주화’와 더불어 ‘세계화’라는 큰 파도에 휩쓸려 변화됐다. 시공간의 제약이 풀리자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만능의 욕망이 분출됐다. 이 뒤쪽 30여년을 ‘성취의 청년기’와 ‘축적의 중년기’로 보낸 세대는 지금 우리 사회의 장년과 노년이 됐다. 반면 이들 슬하에서 자란 당대의 청년과 중년은 풍요 속의 상실과 혐오를 되씹으며 나이를 먹는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위대한 유산’을 잘 정리하지 못하면, 향후 30여년은 무기력과 자괴감의 ‘위험한 청산’이 될 수 있다는 경보 단계는 이미 지났다. 차기 정부의 5년은 그 향배를 가를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선다.

ⓒ 경향신문

이 점에서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세계화의 원조국에서 부실한 민주주의가 어떻게 오작동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세계화가 밀어붙인 사회해체의 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구제할 공동체의 역량과 문화를 준비하지 못했을 때, 무능한 주류와 과격한 비주류는 책임도 못 질 한판 도박에 모두의 운명을 내던질 수 있다는 사실, 그것도 국민투표를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반하는 비극으로 말이다.

세계화의 대표적인 문제로 부상한 청장년의 생존 문제를 직시하는 대신 이민자 배척을 선동한 결과는 대영제국의 ‘독립기념일’을 자축하는 허탈한 희극이기도 했다. 이 희비극은 앵글로색슨족과 기타 인종, 소수 부자와 몰락한 중산층, 세금 안 내려는 기성세대와 낼 세금이 없는 청년세대, 대물림 엘리트와 미개한 대중으로 사회를 찢어놓고 폭력을 불러낸 세계화라는 이름의 기업독재와 그 극장정치의 민낯이다.

유럽경제공동체 잔류를 결정했던 1975년 영국의 국민투표가 2016년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하기까지 40여년이다. 2016년 6월23일의 브렉시트는 그 세월 동안 영국이 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사회적 출구의 좋은 원천들을 간과하고 나쁜 원천들에 휩쓸려 당도한 ‘마지막 선택’일지 모른다. 물론 ‘마지막’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영국과 유럽은 브렉시트의 교훈을 돌아보며 암중모색을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좋은 탈출이 무엇이어야 할지 대비해야 한다. ‘치킨게임’의 브렉시트와 다른 상생의 ‘코렉시트(Korexit)’를 맞이하려면 대한민국 건국 70년을 전후해 ‘탈(탈) 70년’의 방향을 잡고 이후 40년을 기획하면서 지역과 생활 단위의 작은 경제와 작은 정치라는 제방을 쌓아야 한다. 이 대안이 없다면 ‘헬조선’의 중앙집권제와 국민투표는 언제든 도박으로 흐를 수 있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방분권과 지방재정 확대를 위한 개헌 논의”를 시작하자고 주장했다. 앞서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청와대와 국회를 세종시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함께 행사되는 새로운 민주주의 운영체제”를 피력한 안희정 충남도지사도 같은 견해다. 중국 자본의 초고층 타워와 대규모 리조트 개발에 제동을 건 원희룡 제주도지사도 주민의 참여와 소득 증대를 고민했을 것이다. 이들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지역 현장에 입각한 지방 분권의 구상보다 앞서는 국가적 의제는 앞으로 없다고 생각한다.

지방자치를 통한 주민자치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중앙정부가 쏟아내는 국가적 현안과 이를 받아쓰는 중앙 미디어의 빅뉴스는 ‘나의 현실(actuality)’이 아니라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해’의 겁박이나 본말을 어지럽히는 탁한 소문일 뿐이다. 단적으로 사드(THAAD)의 한국 배치를 일방 통보한 미국 및 한국 정부와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결정하자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의 영국 전총리 같은 주장은 나의 현실이 아니다.

혹자는 국민의식 부재라 탓하겠지만, 그 실종을 초래한 당사자는 나의 삶에서 유리된 유령 같은 중앙의 정치와 정부다. 지역이 국가 이슈가 되려면 영남권 신공항이나 국립한국문학관 유치를 둘러싼 지방정부 간 대결처럼 중앙의 간택을 바라며 극렬하게 떼를 쓸 때이다.

이조차 없던 일로 하겠다는 중앙정부의 통보 앞에서 주민자치 없는 지방자치의 토호 이기주의만 부각되고 남은 것은 주민의 열패와 상처다. 나의 문제를 이웃과 주민자치로 협의해 지방자치로 실현하고 그런 지역들이 모여 국가 미래를 계획하고 조정해 본 경험이 우리에게 없어서 그렇다.

그렇게 건국 70년이 쌓였다. 각종 최악의 불행지표가 오늘의 고초라면, 저출산의 인구절벽은 내일의 재앙이다. 어린이집부터 대학까지 폐교가 잇따르면 치안센터, 공중보건소, 동주민센터도 인원을 감축할 것이다. 그럼 우리 주변의 생활 터들도 폐점이 늘어난다. 생활권의 이런 문제들에 중앙의 정치와 정부로 대처할 수 있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없다. 그럼에도 권력을 독점한 중앙은 지방자치의 희미한 무늬조차 지우려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건국 70년, 2017년 대선을 놓고 주어진 ‘마지막 선택’의 전말이다. 요컨대 ‘탈 70년’의 ‘코렉시트’는 불가피하며 관건은 ‘정권을 교체하면 된다’가 아니라 지방분권으로 가는 ‘코렉시트’를 선택하는 데 있다. 세계화를 하지 않을 자유가 없었던 이 나라에서 세계화를 통제할 집단지성은 지방분권에서 나올 수 있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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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명의 청소년에게 진로강의를 했다. 나와 내 일터를 소개하고 강의를 했다. 세상을 알아가고 부모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것이 진로를 찾는 길이라는 요지였다.


질문에 답한 후 마무리 말을 했는데 질문자가 또 있었다. 담담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역문화재단은 뭐하는 데예요?”

순간 눈앞이 노래지면서 대답이라고 한 설명은 내 귀에도 “웱케쫘앆껴귀 꼮껴서꽛흐으”같이 들렸다. 말을 마칠 땐 “지금 뭔소리?” 안 하고 열심히 들어줘서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나 질문은 계속 따라다니며 물었다. 그런 대답 말고 진짜 응답을 해보라고. 돌아볼수록 그 청소년에게 미안해서 이 글을 쓴다.

‘살인적 노동시간’보다 긴 공부시간을 견뎌 대학에 가면 진로를 잃어버린 채 비정규직을 전전할 확률이 더 많은 청소년들 앞에서 진로강의를 한 나에게 “지역문화재단은 뭐하는 데예요?”라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지역문화재단이라는 데에서 일하는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하는 물음이었다. “나에게 (지역문화재단에서 일하는)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문화융성’을 천명하고 서울시장이 ‘예술 선언’을 준비하는 나라의 72개 지역문화재단 중 한 곳에서 일하는 나에게 그 청소년은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거기서 당신이 하는 일이 나하고 무슨 관계인가요?

그러니까 이 글은 나의 “웱케쫘앆껴귀~” 했던 상념을 정리하는 반성문이자 전국 지역문화재단 종사자들에게 “지금 뭔소리?” 하는지 돌아보자는 권고문이다.

지역문화재단의 역사는 이렇다. 1997년 경기문화재단 설립을 시작으로 2010년까지 매해 평균 3개씩 생겼다. 2011년 이후부터는 매해 평균 5개씩 생기는 추세이다. 이런 증가의 배경에는 2014년에 제정된 지역문화진흥법이 있다. 문화정책을 국가정책으로 삼은 문화예술진흥법이 나오고 32년이 지나 시행된 법이다. 민관이 함께 지역문화진흥법 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한 지 10년, 국회에서 입법 발의 폐기된 지 8년이 걸려 탄생한 법이다.

지역문화진흥법의 본격적인 구상은 2004년 6월 노무현 정부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문화의 비전-창의 한국’이 출발점이다. “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지역발전을 위한 핵심과제’가 지역의 문화진흥에 달려있다, 그 ‘선결과제는 지역의 문화역량 제고’이다, 이를 위해 국가-지역-주민의 바람직한 역할 정립이 필요하다”는 요지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지역문화진흥계획, 지역문화진흥기금, 지역문화재단 등을 명기한 지역문화진흥법이 나왔다. 너무 늦었다. 경기문화재단이 설립된 1997년 전후거나 2004년 무렵에는 나왔어야 했다. 지각생이라도 지역문화진흥을 제대로 추진하고 있다면 다행이나 현실은 안 그렇다.

법 시행 2년째지만 그 계획, 그 기금, 그 재단은 개점휴업이다. 중앙-광역-기초 지방정부의 전달체계는 아직 일방향이다. 바람직한 분담과 협력체계는 없다.

하여 날로 늘어나는 지역문화재단은 민법의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설립되어 지방재정법, 지방공기업법, 지방출자출연기관법,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라 프랑켄슈타인처럼 짜깁기된 정체성을 가진 채 자신이 누구며 부모가 누군지 세상을 향해 혼잣말처럼 방언을 중얼거리고 있다.

그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이미 문화와 예술은 창조경제, 공유경제, 사회적 경제는 물론 도시재생, 혁신교육, 마을만들기, 귀농귀촌 등 사회 모든 영역과 융합 진화했다.

이 사회적 작용 속에서 문화와 예술만 따로 추출해 진흥시켜야 할까? 가능하기는 할까? 문제는 지역문화재단 내부에도 있다. 짜깁기된 정체성 탓에 목적의식과 사명감보다는 행정 대행기관의 전문성 뒤에 숨어서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안정된 직장인의 문화, 그들만의 리그에 젖어 있다.

지역문화재단은 공무원, 대기업, 금융기관을 포함해 대략 400만명의 정규직 언저리에 있는 직장이다. 다수의 동년배 비정규직과 함께 동일업무에 종사하면서 신분 보장과 임금에 격차가 있는 직장이다. 잘 모르는 부모는 내 자식이 정부기관의 공무원인 줄 알고 안심하는 직장이다.

이 직장에서 지역주민의 삶의 질과 지역 발전에 헌신하는 태도와 담대한 기획이 나오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온갖 중간지원조직을 따로 두어 각기 부실 위험을 키우기보다 지역문화재단과 합쳐서 지역재단이자 교육재단으로서 문화재단을 강하게 만드는 길이다.

또 하나는 국가와 광역정부가 용단을 내려 지역문화재단의 정규직을 두 배로 키우고 청년과 청소년을 대거 고용하는 길이다. 예산이 부족해 사업을 못한다는 변명 대신 직접 주민을 만나 관계를 형성하고 주민자치를 앞당기는 일에 매진하면서 예술가도 주민으로 살도록 돕는 지역문화재단이 돼야 옳다.

글을 마치는 지금도 나는 “웱케쫘앆껴귀~”라고 쓰고 있는 것 같다. 반응은 “지금 뭔소리?”가 아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이 질문이 20대 국회와 교육문광위 의원들에게도 생생하게 들렸으면 좋겠다. “거기 뭐하는 데예요?” 나 하고 무슨 관계냐고 그 청소년이 묻고 있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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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초여름 대선 경선에 나온 야당의 한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주창했다. 이 때문에 설레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더 많은 돈을 욕망하느라 ‘삶을 삼킨 저녁’은 달라지지 않았다. 2년 전 가을 나는 이 지면에 ‘저녁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무연무업(無緣無業) 인구가 급증한 사회의 ‘넘쳐나는 저녁’엔 불안과 고독이 미세먼지처럼 가득했다. “완전히 다른 상상이 절실”하다고 글을 마쳤지만 돌아보면 상상은 태부족했다. 그러다 지난 5월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인 범죄가 벌어졌다. 5월28일엔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건을 접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내 감정과 생각은 곤두박질쳤다.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홀로 안전문을 수리하다 사망한 사람은 외주 정비업체에 입사한 지 8개월 된 19세 남성이었다. 경찰은 열차 통제의 책임을 가진 서울메트로 전자운영실, 현장 관리의 책임을 가진 역무실, 2인1조 수칙의 책임을 가진 외주업체를 조사해 죽음에 대한 “구조적 책임”을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수사를 통해 ‘죽음의 책임구조’가 가려진다 해도 장례를 미룬 가족과 지인에게 그의 19년에 걸친 ‘삶의 책임구조’는 하나도 밝혀지지 않는다. 부친에 따르면 늘 격무에 시달린 그는 “씻지도 못하고 집에 오면 바로 곯아떨어”졌어도 비번날에 고용승계 집회에 참석할 만큼 정규직의 꿈을 갖고 있었다. 퇴근 행렬이 시작되기 직전인 오후 5시57분에 숨진 그의 가방에선 여러 공구와 함께 뜯지 못한 컵라면이 나왔다.


SNS를 통해 모인 20대 여성들이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혐오 살인'이라는 항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_경향DB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사람은 23세 여성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를 주방용 식칼로 살해한 범인은 다른 주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34세 남성이었다.

이 사건은 여성혐오를 공론화한 추모운동과 정신질환자 관리 실태를 비롯해 공용화장실의 범죄 취약성까지 여러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중 범죄 원인을 두고 남성에게 만연한 여성혐오와 조현병자의 피해망상으로 쟁점이 형성됐지만 둘 다 ‘죽음의 책임구조’를 밝히는 차원이다. 친구와 주점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다 오전 1시7분에 화장실에 가서 살해당한 23세의 여성의 삶과, 0시33분부터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죽이기 위해 식칼을 들고 사회적 약자를 기다린 34세 남성의 삶, 그 ‘삶의 책임구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이렇듯 19세 비정규직 남성의 오후 5시57분, 23세 여대생의 오전 1시7분, 34세 범인 남성의 0시33분은 저녁에서 새벽에 걸쳐 구의역과 강남역 사이의 20분 남짓 거리를 두고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죽음의 책임이 알지 못하는 ‘너 때문’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주업체와 역무실과 전자운영실로 연결돼 있어도 알지 못하는 너와 나 사이에 들이닥친 불행의 표면적 인과만 밝힐 뿐 그 구조를 설계하고 만들고 관리하는 구조 운영자들은 늘 면죄됐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은 우리가 ‘삶의 책임구조’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관계로부터 면책되길 바라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괴물의 탄생에 합의하고는 나만 괴롭히지 않으면 된다고 착각했던 업보가 아니면 뭘까 싶다.

더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삶이라 믿는 동안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에서 ‘삶의 책임구조’는 실종됐다. 이렇게 ‘삶의 책임구조’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죽음의 책임구조’와도 무관해진 국가와 기업은 더 많은 권력과 돈을 취했을 뿐이다. ‘저녁을 방치하는 국가’와 ‘저녁을 주는 기업’만 작동된다면 삶과 죽음의 책임은 개인에게 외주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무책임의 구조를 운영하는 정치와 경제라면 일명 ‘칼퇴근법’을 제정한들 무너진 중산층과 하루벌이 서민의 저녁에는 삶이 깃들 수 없다.

5월30일 20대 국회가 시작됐다. 한 일간지는 “132개의 초심”이란 머리기사를 통해 초선 의원들의 입법 포부를 깨알같이 소개했다. 하나하나가 각종 비타민처럼 소중하나 모아놓으면 종합비타민 같아서 꼭 그것이어야 한다는 공감으로 다가오기 쉽지 않다. ‘저런 세상이 올 수 있구나’ 하는 큰 실감을 주는 정치가 무엇인지 뜻을 모아야 한다. 그러자면 예컨대 30대 재벌 269개사의 753조원이 넘는 사내보유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정치여야 한다. 경제활동의 이익이 조세회피처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공동체에서 순환하게끔 법과 제도를 바꾸는 정치여야 한다.

이렇게 희망의 정치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통해 대선을 맞이해야 한다. 강남역과 구의역을 잇는 젊은이와 시민들의 추모 행렬에 담긴 ‘삶의 연대구조’를 국가와 기업에도 ‘삶의 책임구조’로 강제하겠다고 공약하는 대선 후보가 나와야 한다. 그럴 때 국민은 행복한 저녁을 더 많이 상상할 수 있고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삶의 책임구조’를 함께 만들겠노라 행동할 수 있다. 다음 대선은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의 저녁에 달려 있다. 불과 1년7개월 뒤면 대선이다.



김종휘 ㅣ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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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10대 엄마는 남몰래 사내아이를 낳았다. 보모의 손을 전전한 아이는 2세에 양부모를 만났지만 관심을 받진 못했다. 외할머니가 8세까지 키우고 돌아가신 뒤 다시 양부모 손에 맡겨진 아이는 언제나 혼자였으나 외할머니의 독서와 양부모의 교양 덕에 영특한 소년으로 컸다. 초등학교만 나온 소년은 영화광이 됐고 15세에 영화클럽을 설립했다 망했다. 이때 진 빚을 갚으려고 양부의 타자기를 훔쳤고 양부의 신고로 수감됐다. 이후 짝사랑에 치이고 입대했으나 탈영했고 수감됐다. 불우하기 짝이 없는 이 청소년을 제자이자 양자처럼 보듬은 사람은 영화계 리더인 28세의 멘토였다. 멘토의 보증으로 풀려난 그는 돌봄과 후원으로 성장했다. 23세가 되자 그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란 비평을 발표했다.

기성 영화들과 영화계를 신랄하게 부정한 비평 때문에 칸영화제 참석이 금지됐던 그는 26세에 결혼했고 장인의 배급영화들을 비판하다가 “그렇게 영화를 잘 알면 한번 만들어보지?” 하는 힐난에 영화를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영화가 1959년 칸영화제 공식경쟁 부문에서 기립박수를 받고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한 <400번의 구타>다. 당시 28세였던 그의 이름은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해 초겨울 그를 키운 정신적 양부이자 멘토 앙드레 바쟁이 41세로 숨을 거뒀다. 트뤼포 감독은 자신의 성장담을 투영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14세 소년 장 피에르 레오를 발굴했고 직접 키우고 가르쳤다. 자신이 겪고 성장한 대로 트뤼포 감독은 레오의 양부이자 멘토가 되었고 둘은 감독과 배우로 여러 편의 영화를 같이 만들었다.

‘400번의 매질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는 프랑스 속담에서 빌려왔다는 영화 제목대로 트뤼포 감독이 경험한 가족이란 애정이 사라진 관계고 학교란 훈육만 가득한 공간이다. 이런 세상에선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실”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이 세계를 어른들이 본다면 온갖 어리석은 짓들뿐이겠지만 아이들은 그 어리석음을 통해 문제를 일으키고 상처 입고 성장하면서 세상과 자신의 진실을 만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 영화 <400번의 구타>가 지난 4월13일 국내에서 처음 개봉됐다. 같은 날 정지우 감독의 신작 <4등>도 개봉됐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아프고 미안하면서 고맙고 대견한 마음의 동요를 평화롭게 다 받아주는 <4등>의 영화 포스터를 갖고 싶었을 것 같다.

영화 속 소년 준호는 포스터 문구대로 “난 수영이 좋은데 꼭 1등만 해야 해요?”라고 묻는다. 수영을 좋아하고 소질도 있어서 수영선수가 된 준호는 “야! 4등! 너 웃음이 나와?” 하고 화를 내는 엄마와 어른들 앞에선 만년 4등이자 40등과 같은 패자이며 400번의 구타를 통해서라도 기어코 1등에 올라야만 구제받을 수 있는 미완의 훈육 대상일 뿐이다. 그래도 수영이 좋아서 수영선수이길 원하는 준호 앞에 나타난 멘토는 1등의 폭력을 대물림하는 전 국가대표 선수다. 맞고 훈육 또 맞고 훈육 끝에 준호는 2등을 한다. 가족파티가 열린 그날 어린 동생이 말한다. “정말 맞고 하니까 잘한 거야? 예전엔 안 맞아서 맨날 4등 했던 거야, 형?”

정상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오늘의 행복을 빼앗는 부모 자식과 스승 제자라는 한국의 현재를 그린 <4등>은 탈가족과 탈학교의 위기 속에서 양부모와 멘토를 통해 자라고 또 그렇게 누군가의 가족과 스승이 되어 살았던 저 근대적 프랑스인의 고전 <400번의 구타>와 57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적 영화다. <4등>의 결말은 준호의 1등이지만 이 성취는 훈육 때문이 아니라 준호 스스로의 현실 직면을 통해서다. 초등학생 아이의 선택치고는 가혹하지만 준호는 수영선수로 살아남아 끝내 수영을 좋아하는 자신을 지킨다. 수영장의 푸른 물빛 가득한 포스터 하단에는 잠수한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슬며시 웃고 있는 준호의 얼굴이 투명한 기포를 한가득 올려 보내며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지상의 몰상식과 폭력을 떠나 숨을 참고 수중의 잠수를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준호의 모습에서 400번의 구타에도 4등의 행복을 즐길 줄 알았던 해맑고 성숙한 우리의 또 다른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성년의날 5월16일이다. 모 주간지는 특집으로 ‘성년이 된 발달장애인을 우리 사회는 맞을 준비가 됐나’를 실었다. 소방관이 되고 싶고, 요리사가 되고 싶고, 수영선수가 되고 싶은 발달장애 아동에게는 앙드레 바쟁과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스승이자 멘토가 절실하다. 영화 포스터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4등”이라고 쓰여 있다. 아이들이 숨을 참고 잠수해야만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수중만 아니라 지상의 햇볕을 쬐며 숨 쉬고 웃어야 할 그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어야 한다.

마침 성북 아리랑고개에 있는 아리랑씨네센터에서 <4등>과 <400번의 구타>를 같이 상영하고 있다. 이 오월이 가기 전에 꼭 보셨으면 좋겠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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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라 경제와 정치를 비롯해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경은 “어처구니없다”가 대세인 것 같다. 이 말은 작년 하반기에 특히 유명세를 탔다. 지난해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베테랑>의 대사 “어이가 없네” 때문이다. 영화에선 ‘어이’를 맷돌 손잡이로 설명하면서 ‘갑자기 손잡이가 빠져 맷돌을 못 돌리니… 황당하다’로 풀이했는데, 한편에선 ‘어처구니’라고 해야 옳다는 논란이 있었다.

하나 이는 기와지붕의 토우(土偶)다, 맷돌 위아래를 연결하는 암수 쇠붙이다 등 ‘어처구니’의 어원에 대한 민간의 여러 속설 중 하나일 뿐이다. 사전 정의로는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 기계, 물건’이란다. 이런 ‘어처구니’가 ‘없다’와 붙어서 어떤 연유로 “어이없다”는 뜻으로 사용됐는지는 모호하다.

아무튼 충격, 분노, 체념을 지나 허탈의 지경에 이르러 “어처구니없다”라고 할 때는 이성 정지와 감정 진공의 ‘멘털 붕괴’ 상태를 가리킨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을 지켜보는 세간의 심리도 ‘설마’ 하던 단계를 지나 이제는 “어처구니없다”에 이른 것 같다. 그래봐야 바둑 잘 두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일 뿐이고, 인간지능을 따라오려면 수십년이 걸린다는 ‘알파고의 아버지’ 허사비스의 위로도 있고, 인류의 초라함과 미래의 위대함을 동시에 느낀다는 정치인의 자기연민 같은 감상평도 있고, 알파고의 승리를 집단지성과 빅데이터를 만든 인간의 승리로 해석하는 희망고문 같은 논설도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폭풍 발전이 몰고올 일자리 소멸의 온갖 분석과 수치들은 논리정연하게도 암울하다.

근미래를 지배할 인공지능의 사회 예측은 온통 격변이다. 과학전문지, 대학연구소, 컨설팅업체, 조사기관은 말한다. 20년 안에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47%와 35%가, 14년 안에 지구촌에서 20억개가, 4년 안에 5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어떤 계산식이든 ‘인공지능 쓰나미’라 부를 만한 이 사태는 의료, 법률, 금융, 행정 같은 전문 노동에 종사해온 중산층의 대몰락과 불안정 노동사회의 보편화를 예고한다. 가뜩이나 고용절벽과 소득절벽에 처해 기진맥진한 우리 사회에서 알파고라는 이름은 이제 인간으로 태어난 운명을 “어처구니없다”로 만드는 유령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을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알파고라는 유령이!”라고 다시 썼을 것 같다.

그러나 문제가 정말 인공지능 그 자체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빠진 집단 착각과 함정이 무엇인지를 의심해봐야 할 때가 지금이다. 알파고를 “서구의 디지털 지능”으로 보고 “지금의 젊은이들은 생전에 터미네이터를 실제로 맞닥뜨리는 중세기술사회”에 직면할 터라서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아날로그, 즉 디지로그”를 믿자고 말하는 이어령 선생의 혜안도, “우리가 목격한 건 혹시 ‘알파고의 영혼’이었을까?”라고 물으며 “오히려 인공지능이 제한된 수준의 사회적 상호작용만 가능하다는 것”에 착안해 인공지능을 능가할 “신경과학과 뇌과학의 발전”에 주목하는 정재승 교수의 제안도 우리 사회가 우리 당대에 집단 착각과 함정에서 빠져나왔을 때라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경제 불평등 문제다. 경제민주화가 없다면 ‘10 대 90’에서 ‘1 대 99’로 1%의 1%의 1%에게 자본과 권력이 귀속되어 ‘0.01 대 99.99’ 너머로 무한질주하는 설국열차 맨 앞 칸의 인공지능을 소유한 그가 모두의 운명을 지배할 것이다. 700조원을 넘은 대기업 사내유보금과 600조원을 넘긴 국가채무와 1000조원 이상의 가계부채가 서로 관계없다는 듯 행동하는 우리의 집단 착각과 함정이 교정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의 혜택과 이익을 만인이 누릴 것이라는 낙관론은 사기극의 대사일 뿐이다.

하여 “어처구니없다”는 말을 앞으로는 “터무니 있다”로 바꾸어서 그 ‘터무니’의 재발견과 재구축에 공을 들여야 한다. 지난 11일 서울시와 각계가 공동 선언한 ‘경제민주화 특별시’는 공정한 경제 질서와 노동권 보장을 통해 지역의 경제생태계를 살리겠다는 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글로벌 경쟁과 대기업 문제에는 중앙정부와 국회의 역할이 크겠지만 지방정부와 지방의회가 지역의 중소기업, 소상공인, 소비자와 연대해 “터무니” 있는 상생과 선순환의 구조로 재조직하는 과제는 누가 시작하든 시급한 일이다.

“터무니 있는” 지역의 경제생태계 구축에는 아파트 연 관리비 총액 12조원의 부패를 해결할 아파트 민주주의를 위해 동별 대표자 선발에 모바일투표를 적용하는 과제도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고교 졸업생보다 훨씬 많은 대학 정원으로 수년 뒤부터 문을 닫아야 할 대학 문제도 인위적 전공 조정이 아니라 지역에서 해법을 찾는 자유학기제 같은 발상으로 풀어야 효과가 있다. 명사 ‘터무니’는 주춧돌이나 기둥을 세웠던 자리의 흔적이다. 즉 생활의 기본이자 중심인 ‘터무니’에 인공지능이 기여하는 길이 열려야 “어처구니없다”가 아닌 “터무니 있다”의 세상이 시작될 수 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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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12일 토요일이었다. 인천 연수경찰서에 전화가 걸려왔다. 오전 11시4분이었다. “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맨발로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 인천 연수동에 위치한 동네슈퍼 주인의 제보였다. 경찰이 발견한 “아이”는 키 120㎝와 몸무게 16㎏, 짧은 머리와 반바지 차림에 맨발의 왜소한 소녀였다. 경찰 발표와 취재 보도가 잇따랐다. 2년간 집에 감금되어 굶주림과 폭행에 시달린 소녀는 뒤로 묶인 양손의 노끈을 풀고 2층 세탁실 창문을 나와 가스배관을 타고 탈출했으며 배가 고파 동네슈퍼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소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맨발의 소녀가 등장하는 동네슈퍼의 CCTV 화면은 공포 영화였다. 넋 나간 소녀는 곧장 먹을 것을 찾아 가슴에 안고는 위태롭게 걸었다. 주인이 바닥에 박스를 깔아주자 그 위에 간신히 무릎 꿇고는 야윈 손으로 포장지를 뜯고 힘겹게 입에 넣기 시작했다.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 “고아원”이라고 답했던 소녀는 병원으로 옮긴 뒤 “집에 안 보낼게”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간 당한 학대를 털어놓았다. 6세로 오인됐던 소녀는 11세였고 부천에서 2학년 1학기까지 초등학교를 다니다 인천으로 이사온 다음 집에 감금되었다.

부친, 동거녀, 동거녀 친구, 애완견 두 마리와 함께 지냈으나 완전히 고립된 소녀는 갈비뼈 골절과 온갖 타박상과 영양 결핍을 작은 몸으로 견디다 그날 오전 그렇게 탈출했다. 이 사건의 충격은 친부의 아동 학대만이 아니었다. 진짜 충격은 소녀가 2년간 사라졌는데도 학교와 동사무소 누구도 행적을 몰랐다는 행정 공백이었다. 소녀를 신고한 동네슈퍼 주인을 비롯해 누구도 소녀를 알지 못했다는 이웃 관계의 절벽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부는 장기 결석 아동을 조사했고 그 결과 친부모의 아동 학대 살인 사건만 현재 세 건이 드러났다.

조사할수록 아동 학대와 실종 사건은 늘 것이다. 장애인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로 조사를 넓히면 사건은 대폭 증가할 것이다. 요컨대 11세 소녀의 이야기는 혈연 가족의 파탄사가 아니다. 국가와 공동체의 안전망이 무너진 상태에서 가족에게 전가된 아동의 운명이 그간 어찌 방치되고 은폐되었는지를 폭로하며 국가와 공동체를 고발한 사건이다. 부친 처벌을 원한다고 밝힌 소녀에게 검경 전담반은 더 많은 처벌을 발표하겠지만 그래서 학대가 줄어들까.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면 육아를 책임진다던 국가가 약속을 저버린 상황에서 응답은 지구촌 최하위 출산율이다.

정부는 5년간 200조원을 투입해 출산율을 높인다는 종합대책을 내놓지만, 아동과 청소년의 안전을 믿는 국민이 8명 중 1명에 불과한 사회에서 문제는 출산율이 아니다. ‘아동수출국’의 오명과 고아원 아동 증가에다 중증 질환 아동의 치료비를 TV 국민성금으로 때우는 나라에서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라니. 63만5000쌍의 불임 부부 중 정부 지원은 연평균 7.5%인 현실에서 “낳기만” 하라니, 이 무대책에 대한 하소연이 출산 포기다.

여기에 출산장려금을 늘리고 출산율이 높은 지자체에 인센티브를 준다는 정부의 발상은 아전인수다. 1월29일 당정협의 자리에 참석한 경제 4단체 대표들의 발언은 더하다. 저출산 극복을 위해 ‘노동개혁’과 ‘노동유연성’을 강화해서 기업에 부담은 줄이고 혜택은 늘리라는 딴청이다. 누리과정 보육대란, 높은 사교육비와 대학등록금, 취업난과 주거난까지 사방을 지뢰밭으로 만들어놓고 11세 소녀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학대 부모 처벌뿐이라면 너무 뻔뻔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시청자들이 소녀에게 성금을 보내는 것 말고는 없단 말인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밝혔듯 성인의 97.5%가 정부의 저출산 대책을 효과 없다고 느낀다면 종합대책은 전면 혁신되어야 한다. 혁신은 갖은 방법과 수단을 열거하고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정의할 때 시작된다. 이렇게 재정의하면 문제는 아동이 태어나서 자라기에 나쁜 사회 자체다. 해법은 아동이 태어나서 자라기에 좋은 사회로 도시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 도시라야 부모는 물론 장애인, 노인에게도 좋은 사회를 만든다. 작년 9월15일 아동친화도시 지방정부추진협의회가 출범했다. 유네스코와 함께하는 협의회에는 27개 지자체가 참여했다.

아동친화도시란 무엇인가. 미혼모라서 혼자 낳고 엄마라서 혼자 기르고 가족이라서 자녀를 도맡는 도시가 아니다. 정부와 학교와 마을이 함께 사회적 양육에 나서는 아동친화를 도시 가치의 첫째로 꼽는 사회다. 11세 소녀에게 절실한 터전은 이런 도시다. 이런 도시라면 저출산 문제의 매듭도 풀린다. 5년간 200조원의 종합대책을 이렇게 혁신한다면 앞서 열거한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아동 학대의 반대말은 자녀 사랑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우리 모두의 아동친화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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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긴 해도 만지거나 잡을 수 없는 것이 그림자다. 느낌이 들긴 해도 보거나 알 수 없는 것이 유령이다. 그림자와 유령이 배회하는 세계에서는 정체불명과 실체 없음의 풍문이 지배한다. 불과 두 해 전이었다. 세월호의 침몰을 똑똑히 보았지만 그 원인과 책임은 그림자처럼 잡을 수 없었다. 한 해 전이었다. 메르스의 공포에 지독히 떨었지만 그 경로와 전모는 유령처럼 볼 수 없었다. 이렇듯 우리는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가상현실의 수상한 세월을 살고 있다.

두 달 열흘 남긴 선거가 그렇다. 교과서, 위안부, 핵, 사드, 누리과정, 청년수당 등 역사의 기억과 공동체의 안전 그리고 삶의 수준은 한없이 누추해졌다. 이런 사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운명과 우리 아이의 미래를 밝혀야 할 선거는 “그림자와 유령의 싸움”이 되어 있다. 이 말은 작년에 개봉한 <분노의 질주 7>에 나온 대사다. 영화는 카레이서 주인공들의 활극으로 관객의 눈길을 붙잡지만 싸움의 구도는 “그림자와 유령”이 기획한다. 신출귀몰하는 전직 암살 특수부대원은 사적 복수의 괴력을 발휘하고, 신원 모를 정부조직의 최고 책임자는 전지전능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 싸움에서 엑스트라 군상은 속속 죽어나간다.

이번 선거에서 “그림자와 유령”은 무엇일까. 51 대 49의 여야 기반이 콘크리트라는 전제, 야당 분열은 곧 필패라는 구도, 지역과 세대 대결 및 투표율이 변수라는 상식이다. “그림자와 유령”이 연출한 선거에서 언론이 제공하는 화제는 카레이서 출마자들의 활극이다.

이어 승자 독식의 전국지도 색칠이 끝나면 언론은 투표 결과의 배경을 국민의 정치 환멸로 단정한다. 그럼 우리는 ‘일상으로 복귀’해서 엑스트라 유권자의 그 권리가 선거에서 얼마나 속절없는지 한탄하다가 언론이 불러준 대로 행인 1과 2의 정치 환멸이라는 대사를 보잘것없이 읊조리고 퇴장한다.



20대 총선의 나에게 다_경향DB


“그림자와 유령”의 선거 각본은 이렇게 반복되면서 유권자의 그 유권(有權), “권리 있음”이 사전적 정의와 다르다는 것을, 즉 ‘국민에게 권리와 권력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락시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담대한 선언은 4, 5년에 하루뿐인 선거인 투표로 이체된다.

그러나 4, 5년씩 누적된 환멸의 몸이 단 하루의 투표로 희망의 마음을 되살릴 수는 없다. 해서 선거철마다 “그림자와 유령의 싸움”은 할리우드를 뺨치는 저들만의 활극이 된다.

그 기획을 “그림자와 유령”한테서 찾아오길 원한다면 국민이 직접 기획해야 한다. 4, 5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년, 매월, 매주 참여하고 결정하고 투표하기를 거듭할 때 국민 주권을 국민 기획으로 실현하는 길이 열린다. 단언컨대 그 출발은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내 손으로 뽑는 것만이 아니라, 아니 그것에 선행해서 내가 사는 우리 동네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투표하는 일상의 행동이다. 이 점에서 서울시가 작년부터 시작한 ‘찾아가는 동 복지’ 정책은 헌법 제1조 제1항과 제2항에 화답하는 정직한 발상이다.

이 정책의 초점은 동사무소를 마을센터로 만드는 민관 협치에 있다. 작년엔 서울시 4개 구가 했다. 성북구는 월곡2동과 길음1동이 했다. 올해엔 서울시 17개 구에서 하고 계속 늘어날 추세다. 무엇을 하는가. 동 단위로 전 세대에 안내문을 보내고 자발적 추천으로 마을계획단을 꾸린다. 이들은 동사무소를 카페나 도서관처럼 사용하면서 마을 조사를 하고 3인 이상이면 제출할 수 있는 마을계획을 모집한다. 그 후 추첨과 숙의 민주제를 결합한 총회를 열고 투표한다. 결정된 마을계획은 예산 배정과 함께 실행에 들어간다.

주민 기획과 주민 주권을 실천하는 이런 담대한 도전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고 성패를 말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 이런 노력이 없다면 인구절벽, 재정절벽, 고용절벽에 처한 이 땅에서 더는 정의와 자유의 민주주의를 논하기 어렵다. 주민 주권의 뿌리를 살려 시민과 국민의 주권을 강화하는 하방주권(下方主權)의 흐름이 만들어지면 국가의 대의 민주주의도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도 이제는 중앙의 국가와 재벌에서 지역과 마을로 하방해야 성장할 수 있다.

하방주권과 하방성장은 “그림자와 유령의 싸움”판에 행인 1과 2이기를 멈추고 국민 스스로 국민 주권이라는 행복을 기획하는 길이다. 예의 영화에서 “그림자와 유령”은 “신의 눈”이라는 해킹 프로그램을 독차지하려고 싸운다. 휴대폰과 CCTV와 위성을 연결해서 순식간에 표적을 찾는 “신의 눈”은 그러나 프로그램이기 전에 우리 동네의 친밀한 이웃 관계를 기획하는 ‘근린 협치’여야 한다. 맞은편 집에 수저가 몇 개고 아이는 누구며 어디가 아픈지 알고 지내는 동네에서는 “그림자와 유령”이 발붙일 데가 없다. 안전을 바란다면 마을 만들기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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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때 화가라는 멋진 직업을 포기”한 이가 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다른 직업을 찾아 “비행기 조종”과 “지리”를 배웠고, 세계를 날아다녔으나 “진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이 혼자 살아오던 끝”에 사건을 겪었다. “여섯 해 전”의 비행 중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것이다. 그곳에서 열흘을 보낸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픈 풍경”을 그렸다. “어린 왕자가 이 땅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림. 어린 왕자는 여섯 개 별을 거쳐 지구별에 당도해 꼬박 한 해를 여행했다. 그 마지막 열흘간 둘은 친구가 됐다.

황현산 선생의 번역으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접한 게 근 25년 만이다. 처음 읽었을 때나 지금이나 민망한 궁금증은 같다. 어린 왕자와 비행사는 몇 살일까? “삶을 이해하고 있”다면 “숫자 같은 것이야 우습다” 여기고 “상자를 꿰뚫고 그 속에 있는 양을 볼 줄”은커녕 화자가 비꼰 대로 “그 앤 나이가 몇이지?” 묻는 어른 행세지 싶었다. 그래도 궁금했다. 본문엔 어린 왕자 그림이 22회 나온다. 이를 두고 비행사는 “영 딴판”이라거나 “너무 크고 너무 작다”고도 썼으나 엉성한 듯 강렬한 그림에 빠진 난 ‘음, 어린 아이네’ 하고 퉁쳤다.

반면 비행사가 생텍쥐페리라고 믿었던 나는 “여섯 해 전”의 단서를 이번에 연보에서 찾았다. “파리~사이공 간 비행시간 신기록”을 위해 비행한 그가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 5일 동안 사경을 헤매며 걸은 뒤, 한 대상에게 발견되어 극적으로 구조”된 때가 35세다. 사하라 사막 동부에 떨어진 이때라면 글을 쓰고 책이 나온 42~43세의 6년 전과 안 맞았다. 화가이길 포기한 여섯 살이 생생해서 6년 전으로 각색하고 5일간의 사막 체험 역시 열흘을 채우고도 남았을 터라 그리 됐겠지, 하고 또 퉁쳤다. 그러고서 35세의 그 무렵 나에게 온 “한 아이”를 회상했다. 묻는 것엔 “대답하지 않으면”서 “별들이 아름다운 것”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속삭여준 어린 왕자를 떠올리려 했다. 하나 나는 “그 애가 누구인지 여러분은 잘 알리라”던 “여러분”이 아니었고 “그때는 친절을 베풀어 달라”던 “그때”와 “친절”도 몰랐다. 나는 어린 왕자가 다녀간 여섯 개 별의 “우둔한 어른들”이자 지구별의 전철수나 장사꾼 또는 “정원 하나에 이렇게 똑 닮은” 5000송이 장미꽃이었다.



다행히 나는 여섯 해 전에 어린 왕자를 만났다. 아이가 우리 부부에게 오던 열 달의 여행 중엔 “서두르지 말고 바로 별 아래에서 잠시 기다리라”는 비행사의 충고를 따랐다. 그러자 아이가 다가오는 순간 “그 애가 누구인지” “알리라”던 “여러분”이 되었다. 이 기적은 우리 아이가 어린 왕자이기 때문이다. 태어나 세 번의 심장 수술과 한 번의 심장 정지를 겪고 지적 장애 판정을 받은 어린 왕자는 과연 누구에게 장애가 있는가를 알려주며 “바로 여기”에 있다. 선생은 어린 왕자가 여우를 통해 ‘길들인다’를 배운 뒤 “뱀에게 물리기로 결심”하는 “극단적으로 과격한 귀향의 방법”을 통해 “제 별로 갔다”고 썼다. 나는 이 대목을 “사랑으로만 권태를 치료할 수 있을 때” 우리 아이가 같은 방법으로 “제 별”에서 ‘지구별의 우리에게 왔다’로 읽었다. 마침 아이가 여섯 살이다. “멋진 직업”을 포기할 때라서 여우의 ‘길들인다’에 조바심이 났으나 선생의 글 덕에 진정됐다.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니 “긴 시간을 거쳐 공들여 만들어”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우둔한” 나에겐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잇값도 못하는 주제’의 어른은 반드시 불시착해야 하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은 철새들에게 연결된 줄을 잡고 날아가야 한다. 44세의 생텍쥐페리는 “마지막 정찰 임무”차 비행하다 적군의 정찰기라는 뱀을 통해 “제 별로 갔”을 것이다. 훗날 독일군 비행사는 자신이 그를 격추시켰으며 <어린 왕자>의 애독자인 자신은 그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작년엔 할리우드가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를 흥행시켰다. 나의 어린 왕자 이야기는 무엇일지 궁리하다가 “멋진 직업”부터 되찾아야겠구나, 하고 책장을 덮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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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대담한 청년들이 있다. 단체 시흥청년아티스트를 만든 청년 10인이다. 김광수 대표(23)를 비롯한 이들은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끌 소셜 아티스트’라는 미션을 걸고 작년 11월 출범했다. 청년 10인은 지구 살리기 거리캠페인, 가로수길 모니터링, 세월호를 기억하는 벚꽃길 축제 등의 주민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또래 청년의 고민과 활동욕구(237명)를 조사하고 대학생 아르바이트 혁신 워크숍(130명)을 진행하며 청년정책을 구상했다. 그러더니 올 8월 청년기본조례안을 만들어 시흥시에 냈다. 이후 마트, 등산로, 행사장에서 주민과 일대일로 소통하며 주민청구 서명을 받은 기간이 약 3개월이다.

‘우리 청년의 문제는 우리가 풀 테니 도와 달라’는 진솔한 행동은 동네 어른들의 신뢰와 지지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일파만파의 감동과 기적이 일어났다. 주민청구의 문턱인 유권자 2%의 갑절이 넘는 1만4373명이 서명했고 김광수 청년 명의로 대표발의됐다.

그리고 12월18일 시흥시의회는 이들이 발의한 청년기본조례 원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10인의 청년이 지역 유권자의 4%를 서명 조직함으로써 김윤식 시흥시장과 윤태학 시의회 의장은 주민자치의 새로운 역사를 쓴 공동주역의 영예를 누렸다. 이 모든 일이 10인의 청년으로부터 시작돼 1년여 만에 일어났다.

돌아보면 이들처럼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뿐 아니라 가슴과 발을 움직인 10인의 감동이 없었으며 지역 유권자 4%의 기적을 만들어본 시도가 없었던 것이다. 지역의 청년, 주민, 정부, 의회가 동의한 조례도 놀랍다. 청년위원회와 협의체의 설치·운영은 물론 정책의 초점이 청년의 참여와 실행 주도에 맞춰져 있다.

지난 11월에 개최된 2차 공청회 ‘대담한 청년과의 대담’에서도 이들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청년 스스로 문제 해결의 주체로 성장하기 위한 육성·지원”과 “지역 기반의 청년 자립을 위한 청년정책 수립”이다.


2020 서울형 청년보장제도_경향DB



서울시는 2년 전부터 청년유니온과 민달팽이유니온 등 청년단체와 협약을 맺고 청년기본조례를 준비했다. 이 과정을 거쳐 작년 11월 서울시의회 의원 34명이 공동 발의한 청년기본조례가 올해 1월 제정됐다. 정부의 청년고용촉진특별법이 일자리 숫자에 연연하고 청년발전기본법이 소관 위원회에 정체된 상황에서 서울시 조례의 탄생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청년문제를 종합적으로 풀기 위한 법적 모델이 된 최초의 청년 자치법규이자, 청년 당사자가 지방정부 및 의회와의 거버넌스를 통해 조례안을 만든 최초 사례다. 시흥시의 감동과 기적은 이런 토대 위에서 상상되고 실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1월 서울시는 조례에 따라 2020 청년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활동(설자리), 노동(일자리), 주거(살자리), 공간(놀자리)의 4개 분야 20개 정책으로 구성된 기본계획의 하나가 요즘 연일 화제인 청년수당이다. 내년 시범 시행될 청년수당의 요지는 이렇다.

서울 거주 만 19~29세의 정기소득이 없는 미취업 청년(사회 밖 청년)이 대상이고, 공익 활동이나 자기주도 활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자본)를 쌓겠다는 계획서를 제출하면, 심사를 통해 3000명을 선정해 월 50만원씩 최대 6개월간 청년 활동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서울시의 청년수당이 경기도의 청년통장, 성남시의 청년배당과 더불어 무상급식, 무상보육에 이은 정책 이슈로 급부상한 데에는 원인이 있다. 청년문제가 ‘흙수저의 헬조선’이라는 화약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은 정부가 서울시의 청년수당을 반대하며 지방교부세를 삭감할 수 있다는 ‘징벌적 예산 편성’을 예고하면서다. 논쟁은 청년수당이 복지인가 아닌가 또는 정부의 취업지원정책과 같은가 다른가에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본질은 지방자치의 일선 현장에서 합의된 청년정책이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어도 괜찮은가 하는 점이다.

덩달아 청년수당, 통장, 배당이 각기 무엇이며 어찌 다른지를 공부하는 청년과 부모가 늘었다는 소리도 들리지만, 추세는 시흥시의 청년과 주민처럼 10인의 감동이 4%의 기적을 만드는 데까지 저만치 앞서 있다. 일례로 고양시에서도 청년 주도로 주민발의가 모색되고 성북구청은 청년지원조례를 추진 중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청년의 물밑 진격이 수면 위로 속속 상륙할 것이다. 이 풀뿌리 흐름을 과거의 정부 일방주의 관행으로 막는다면, 그것은 지역 청년과 주민이 스스로 일궈 나가는 지방자치의 감동과 기적, 그 ‘국민행복’의 국정기조를 정부가 부인하는 꼴이다.

청년수당은 물론 통장과 배당, 정부의 취업 패키지와 희망펀드를 다 합해도 이미 주저앉은 청년에겐 힘겹다. 일, 주거, 공동체의 문제가 함께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문제는 터진다. 희망의 시작은 청년의 자조활동이며 여기에 지역 주민이 지방자치로 응답하는 것이다. 대기업이 1~2년차 신입사원의 목까지 치기 시작한 상황에서 취업이 곧 만사형통은 아니다. 이런 때일수록 청년자조의 대담한 희망이 활짝 꽃피우게끔 정부가 지방자치의 노력을 응원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청년도 ‘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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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말하는 ‘인간등급표’를 보면 부모의 자산과 소득에 따라 자녀 등급이 분류된다. 자산 20억원과 연소득 2억원 윗선은 ‘금수저’, 자산 5억원과 연소득 5500만원 아래는 ‘흙수저’ 등급이다. ‘은수저’와 ‘동수저’는 그 사이다. 이렇게 화폐 단위와 수저 등급을 연결시킨 현실 감각은 금, 은, 동, 흙의 재료 차이만 가리키지 않는다. 그 수저로 떠먹는 생활세계에서 뚜렷한 재질적 격차를 실감한다는 뜻일 게다. 진학, 취업, 결혼, 출산, 여가, 노후 등 생애 전반의 격차에 대해 일본 고베에서 창의적인 공동체를 운영하는 우치다 타츠루는 이렇게 통찰했다.

“‘금테를 두르고 태어난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무수한 후원자들로 이뤄진 네트워크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이익은 주로 자기결정을 포기한 대가로 받은 것들이며, 그들이 속한 ‘강자 연합’이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 그가 무릅쓰는 리스크는 집단 전체가 방어해준다.”(<하류지향>, 2013, 민들레) 그는 목적어 ‘risk’를 취하는 동사 ‘hedge’와 ‘take’의 차이에 주목했다. 그 중 ‘위험을 낮추다(hedge risks)’란 “이해관계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어서 “작업량이 늘어나 귀찮기”는 하나 “치명적인 실패”나 “고립”을 미리 피해가는 ‘금수저의 전략’이다.

그럼 ‘위험을 떠안다(take a risk)’는 뭘까? “획득한 이익을 공유할 동료”나 “어려울 때 지원해줄 사람”이 없는, 즉 “상부상조 조직에 속”하지 않거나 못한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오직 “자기결정”에 매달려서 ‘대박의 성공’ 아니면 ‘쪽박의 몰락’이라는 “자기책임”이 전부다. 여기서 통용되는 원리는 흑 아니면 백, 홀수 아니면 짝수의 양자택일이다. 로또 1등 당첨을 바라며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을 선택하는 ‘흙수저의 운명’은 기실 ‘동수저의 동경’이자 ‘은수저의 욕망’이다. 이 세계엔 폭격과 지뢰가 천지인 벌판을 각자 뛰어서 ‘당첨되든가 죽든가’ 복불복만 있다.

프랑스의 실천적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금수저’와 ‘흙수저’를 접했다면 문화자본의 획득 과정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가 말한 문화자본은 명품 갤러리와 재래시장의 소비 차이가 아니라, 비평적 안목과 풍부한 지식과 섬세한 감각을 좌우하는 사회적 관계의 격차다. 한마디로 내가 속한 이해관계자, 후원자, 상부상조 조직, 네트워크의 두께와 깊이가 문화자본이다. 하여 이들 “집단 전체”가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모두가 ‘risks’에서 자유로워지는 ‘우리의 연합’이 문화자본이다. 이 세계에선 “자기결정”이 줄어들고 “자기책임”도 낮춰진다.

이 둘의 격차를 현대 인문학의 선구자 얼 쇼리스는 이렇게 단언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먹쥔 한 손을 올리며 말하고 있다 _경향DB


“여러분은 지금까지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여러분은 배우지 않았어요.”(<인문학은 자유다>, 2014, 현암사) “여러분”은 “자기결정과 자기책임” 아래 홀로 ‘위험을 떠안는’ 사람이다. “인문학”은 독서든 대화든 서로 환대하며 너에게서 나의 자리를 인정받는 사회적 관계다. 이것이 없는 “여러분”은 아직도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의 벼랑을 향하느라 “여러분을 공격하는 무력에 대응”하는 법은 물론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법”, 즉 문화자본에 무지하고 무감해진다.

우치다가 볼 때 ‘금수저의 전략’은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의 성원들만 누리는 “혜택”을 만든다. 우선은 여러 위험들(risks)에서 한꺼번에 벗어나 안전하게 살아남는다. 해서 각자는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볼 수 있다. 반대로 ‘흙수저의 운명’은 저마다 낱낱의 위험(a risk)을 모두 감당해야 하므로 결국 백전백패로 수렴된다. 요컨대 예의 ‘인간등급표’를 부모의 경제적 계층 차이로 환원해서는 이해도 안되고 해법도 없다.

‘인간등급’의 재질적 차이에 대해 사회학자 에드워드 로이스는 지난 40년간 미국 사회를 분석하면서 그 원인을 “철저히 경제 바깥”인 “권력의 문제”로 진단했다.(<가난이 조종되고 있다>, 명태, 2015) 흙, 동, 은이 ‘금수저’에게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주”는 것이 문제라는 그에겐 “정치권력을 획득”하라는 주문이 논리적이다. 같은 이유로 기성세대는 청년에게 투표에 참여하고 정당에 가입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정녕 그 힘이 투표와 정당 선택 이전에 청년들의 생활세계 어디에서 어떤 관계로 비롯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청년들은 무엇보다 지역에서 이해관계자, 후원자, 상부상조 조직, 네트워크라는 문화자본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 여러 방편이 지방분권과 마을자치의 영역에서 생기고 있다. 청년의 문화자본은 국가나 대도시보다 마을에서 만들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에서 ‘흙수저’가 ‘동수저’ 및 ‘은수저’와 공유했던 문화자본이 2015년 지금 쌍문동에서 다시 만들어질 때다. 후기 근대의 마을은 결단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청년들의 문화자본으로 만드는 마을이다. 여기 생활세계에 청년의 ‘인간등급’과 정치권력의 새로운 만남이 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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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공기처럼 너무 익숙해서 딱히 자각 증세가 없을 만큼 우리 일상에 녹아든 생활 감정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빠르지 않습니다”는 선행교육 사설학원의 흔한 광고 문구다. 아무리 빨라도 빠르지 않다는 이 공황 상태는 부모에게 정상이다. ‘MADE WITH 100% PASSION’은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유니폼 등짝에 큼직하니 박힌 서비스 강령이다. 99%도 모자라 100%의 완전한 열정을 요구받는 시급 5580원의 알바에게 몰염치한 이 무례는 왕이 된 소비자에게 상식이다. 어느 대기업 그룹의 홍보 제목은 단 한 줄 “바다는 쉬는 법이 없다”는 문장이다. 쉼 자체가 부정되는 이 극한의 과로 예찬은 정규직을 갈망하는 취준생의 소망이자 생존이 목적인 월급쟁이의 기본이다.

빠른들 더 빨라야 하고 심신을 완전 연소해야 하며 휴식일랑 애초에 없는 생활이라면 식민지 노예라도 못한다. 그러나 이 불능을 가능하다고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생활세계의 내부 식민지화’다. 하버마스는 근대 시민의 생활세계(life-world)에서 비롯된 국가 관료와 시장 화폐의 체계(system)가 시민의 생활을 내부로부터 식민지화(the inner colonization)한다고 보았다. 해서 공황이 정상이고 무례가 상식이며 과로가 기본인 사회가 등장한다. 이 뒤집힌 가치를 대표하는 생활 구호가 ‘무한 리필’이다. 음식 소화부터 지구 자원까지 무한할 수 없는 한도의 제약을 무시하고 끝내 소진하는 방식으로 치닫는 생활이 어찌 가능할까.

견딜 수 있는 한 가능하다. 예컨대 환상을 좇을 때는 자신을 속여서 견딜 수 있다. 취기가 오를 때는 자신을 잊어서 견딜 수 있다. 하나 ‘부자 되세요’의 허구가 드러나고 ‘대-한민국’의 약효가 떨어진 뒤엔 어찌 견딜 수 있을까. 마냥 견디기도 한다. 독존의 아집도 탈존의 초월도 아니고 소멸되는 순간까지 잔존하는 것이다. 체념과 순응, 혐오와 연민의 쳇바퀴를 돌리는 이 잔존의 생활양식은 ‘내부 식민지화’의 궁극일 수 있다. 그럼 여기가 끝이다. 파국이 도래하는 여기에서 잉여의 전환이 시작되려면 생활세계와 체계가 각기 탈바꿈을 시도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경향신문 11월6일자 칼럼에 실린 안병진 교수의 심경과 만난다.

‘이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산뜻한 해법’이 없다는 탄식인데 누군들 떡하니 있을까. 하나 ‘어렴풋한 방향’이라며 그가 꼽은 두 가지는 잉여의 전환을 이끄는 예민한 감각이다. 하나는 ‘과거의 인식 및 태도와 급진적 단절’을 하는 것인데 국가와 시장 체계의 언어와 심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이다. 또 하나는 ‘계획적인 작은 실험을 성공’시키는 것으로 생활세계의 내 몸과 감정을 바꾸는 일이다. 이 둘은 하나다. 자신을 속이거나 잊어서 체계를 견디는 상태에서 벗어나겠다면, 그냥 견디는 잔존과 나부터 생활의 일각을 변모시키는 실천은 양자택일의 문제다. 그 어중간한 조합이 있으리라 관망하지 않고 살아 버릇하는 것은 생각의 힘일 것이다.



올 초 나온 <심미주의>(2015, 김영사)에서 문광훈 교수는 인문학 공부와 예술 경험의 목표를 ‘삶의 자기양식화(self-stylization)’라고 했다. 이를 자기제어와 변형의 자기형성술이자 삶의 기술(an art of living)로 표현한 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분야의 미시적 세목에 충실”하자고 주문했다. 그때가 지금이며 ‘그 미시적 세목’이 생활세계의 자발성과 공동체성의 깊이를 복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생활세계는 국가(국민)나 도시(시민)가 아니라 우리 동네의 주민 관계를 재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실천’을 통한 ‘급진적 단절’의 열쇠가 지방분권과 마을자치 그리고 거버넌스에 있는 이유다.

그 ‘작은 실천’의 첫째는 면(面)을 늘리는 것이다. 안다, 기억한다, 친밀하다는 면식(面識)의 이웃이야말로 생활세계의 진짜 지식이다. 둘째는 정(井)을 만드는 것이다. 정도전이 인용한 맹자의 정전제(井田制)처럼 같이 파고 쓰고 지키는 공유의 우물이 많아져야 한다. 먹고 씻고 빨래하고 노래하는 ‘공유의 우물’(共井)이 살아나면 ‘사회의 형평’(公正)을 세울 법도 나올 것이다. 셋째는 생(生),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것이다. 생명을 얻으려면 사귈 시간과 사랑할 공간이 필요하다. 생명을 기르자면 돌봐줄 가족과 친구가 있고 다른 세계의 소식을 알려줄 손님이 있어야 한다.

나에겐 이 ‘작은 실험’이 견디는 힘이다. 내 생활을 마을자치의 세계와 융합하는 이 길이 어르신에겐 과거사일지 모르고 나 같은 중년에겐 뒤죽박죽 처신하는 현안이지만, 오늘의 청년에겐 아직까진 미지의 생활세계다. 마을자치를 통해 청년이 면식(face)과 공정(well)과 생명(life)의 문화를 일군다면 그 생활세계는 이미 다른 체계와 직면할 것이다. 이것이 안병진 교수의 말처럼 ‘보수 대 진보’의 퇴행적 구도가 아니라 ‘누가 더 대담하게 상상하고 누가 더 치열한가’를 경합하며 ‘과거 대 미래’의 좌표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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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도시 혁신의 선구자 찰스 랜드리는 10월 초 서울의 한 포럼에서 이렇게 발표를 마무리했다.

“기술은 비약적 발전을 이뤄왔다. 그러나 우리의 대의민주주의, 조직과 관리의 형태는 대체로 수백년간 제자리걸음을 했다. 이것이 바로 시민의 참여가 위축된 이유다. 시민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고 규정과 장려책을 보완해 공무원들이 최선을 다하게 함으로써 시민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여기엔 새로운 형식의 행정이 요구된다.”

객석에서 물었다. “새로운 형식의 행정”이 뭐냐고. 그는 “창의적 관료제”라고 말했다. 재차 질문이 나왔다. 그게 뭐냐고. 그는 답했다. “안됩니다. 왜냐하면~”이 아니라 “해봅시다. 그러자면~”이라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운동 시절에 이런 탄식을 한 바 있다. ‘새로운 것을 해보자 하면 공무원은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규정에 없고, 예산이 없고, 사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무원은 왜 그렇게 반응했을까. 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라는 규정이 없어서다. 취지를 살피면 기존 예산으로 할 수도 있지만 딱 그 이름으로 된 예산이 없어서다. 모든 사례엔 첫 시도가 있기 마련이지만 최초의 사례라는 위험 부담을 안기 싫어서다.

누구나 그렇듯 요청을 회피하고자 들면 “수백년간 제자리걸음”의 반복을 선택한다. 이렇게 되면 민선 지방자치가 25년에 이른다 한들 “대의민주주의, 조직과 관리”는 관선 시절의 형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 “해봅시다. 그러자면~”이라고 응답하는 “창의적 관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거두절미하고 그에게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어떤 리더십일까. 리더십 컨설턴트 리처드 레이더는 이렇게 요약했다. “있어야 할 곳에서, 선량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가 리더십이다. “~느낀다(I feel)”는 현재진행형 동사가 리더십이다. 이 동사가 수행하는 목표와 방식은 “있어야 할 곳”과 “선량한 사람들”과 “해야 할 일”의 조합이다. 시민의 참여 나아가 시민 자치가 우리의 정치와 공공이 가져야 할 존재 이유라면, 그 장소와 주체와 의무가 무엇인지는 마치 교과서에 실린 정답처럼 서울시와 25개 자치구 청사의 표어들에 빠짐없이 실려 있다.

영국 석학 찰스 랜드리가 청년들과 만나 도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_경향DB


문제는 “~느낀다”에 있다. 즉 “선량한 사람들과 함께” 느끼지 못해서다. 때로는 “선량한 사람들”이 배제되었다거나 이용당했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느낌은 정보를 덜 공유했거나 최소한의 정보만 공유한 채 민관 거버넌스를 실행하고 있다고 간주할 때 자주 발생한다.

그러나 시민이 체감하는 현실은 비약적 기술 발전과 더불어 더 많은 결정을 더 빨리 하는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공무원이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 ‘만들어 공급하는(make and supply)’ 결과로는 격차를 줄이기 어렵다. 이보다는 시민과 함께 ‘느끼고 반응하는(sense and respond)’ 과정에 초점을 둬야 어떤 결과든 기꺼이 책임을 나누려는 시민이 등장한다.

2년 전 한국행정학회는 중앙 및 지방 행정기관 300여곳의 민관 협치 의식을 조사했다. 결과에 따르면 “국민참여 형태의 8단계” 중에서 중앙부처 공무원은 5단계인 “숙의적 자문 형태”에 머물고 광역자치단체 공무원은 4단계인 “시민참여적 기획 형태”까지 주목했다. 반면 기초자치단체 공무원은 3단계인 “시민과 공동협력 형태”까지 높게 인식했다.

이 결과는 마을 단위의 시민 생활권과 행정이 얼마나 밀착했는가에 따른 차이로 보인다. 참고로 1단계는 “시민 직접통치 형태”, 2단계는 “시민에게 권한위임 형태”, 6단계는 “일시적 자문 형태”다. 7단계와 8단계는 “쌍방향 정보소통 형태”와 “일방향 정보소통 형태”다.

이처럼 민관 협치의 수준은 소통의 방향 자체보다 시민 참여의 형태에 달려 있다. “창의적 관료제”를 거버넌스 리더십으로 푼다면 그 출발점은 정보 공유와 그에 입각한 개방적 의사 결정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을 민관이 함께 경험하는 것만이 협치의 관계 역량을 성장시키는 유일한 길이지 싶다.

리처드 레이더는 예의 “~느낀다” 리더십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가 연결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누구인지(who we are)’와 ‘우리가 하는 것(what we do)’이라 했다. ‘내가 누구인지(who I am)’를 알게 되는 순간은 당신이 “해봅시다. 그러자면~” 하고 화답하는 것이 ‘당신이 하고 있는 일(what you do)’이 되었을 때이다.

그때 나는 우리의 정체성을 느끼면서 나를 긍정한다. 이것이 “창의적 관료”가 거버넌스 리더십을 발휘하는 시민도시다. 찰스 랜드리의 ‘시민도시’론은 “관료제의 수직적 통제가 관리하는 기계적 도시”가 아니라 “시민들의 수평적 소통과 자기학습이 추동하는 유기체 도시”다.

이런 도시엔 시민 리더십이 가득할 텐데 그것은 “해봅시다. 그러자면~” 하는 공무원들의 헌신에서 출발한다. 지방정부의 공무원들은 더 높은 협치 형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방자치에서 주민자치로의 전환기에 선 그들의 건투를 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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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화염병과 최루가스가 난무했던 대학가에 ‘환락의 거리’가 밀려온 때는 1990년대이다. 이 무렵부터 동네 선술집이 사라지고 록카페와 록호프가 들어서면서 ‘대학가인지 유흥가인지’ 같은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서점과 복사가게, 당구장과 다방, 빵집과 분식집이 자취를 감춘 것도 이때다. 경제 호황과 민주화의 축배를 동시에 치켜들던 시절이다.

2000년대에 신촌거리, 참살이길, 녹두거리 등 대학가는 커피전문점, 통신기기 판매점, 패스트푸드점, 화장품 매장 등 기업의 각종 브랜드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캠퍼스는 아예 기업명을 붙이며 대형화되고 기업 브랜드의 별별 편의시설이 캠퍼스를 점령한다. 덩달아 대학가 주변은 주상복합 쇼핑몰 같은 대형 개발붐이 뒤덮는다. 이로써 ‘환락의 거리’는 ‘기업의 거리’로 완성된다.

하여 특색 있던 대학가 거리는 획일화되고 창조적 문화는 퇴조하고 중소 상공인과 골목 경제는 몰락한다. 남은 것은 2008년 완공된 이화여대의 ECC 복합단지 같은 건축물이다. 축구장 8배 크기의 이 건물은 대학생의 학창 시간을 집어삼키고 인근 지역의 소비를 빨아들인다. 새로운 것은 건물을 구경하고 사진 찍고 쇼핑하는 중국인과 내국인 관광객이다. 이런 곳에서 4년 이상의 인생을 보내는 대학생에게 캠퍼스는 무엇을 배우는 공간이며 대학가는 어떤 관계를 경험하는 장소일까.

연세대 08학번 어떤 학생은 한 일간지의 인터뷰에서 “학생들이 대학가에 남다른 감정을 갖지 않는다”고 답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유독 올 상반기에 대학을 비판하는 신간이 쏟아진 것도 징후일지 모르겠다. 그중 여름에 나온 <대학의 위기> 저자 데버러 로드 교수는 “자격증 취득과 취업률에 대해 허세 수준을 넘어 거의 사기에 가까운 범죄를 저지르”는 곳이 대학이라고 고백했다.


그의 내부자 시각에 따르면 ‘위선에 찬 대학 기관과 교수’가 자발적으로 바뀌기란 “현실적으로 요원”하다. 역시 여름에 한국어판이 나온 <폐허의 대학> 저자 빌 레딩스는 한층 신랄하다. 과거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의 필요에 부응했던 대학은 이제 자본의 유행을 좇아 행정조직과 회계논리가 지배하는 기업체가 되었다고 진단한 그의 눈에 대학에 남은 것은 이것뿐이다. “한편으로는 불신에, 다른 한편으로는 텔레비전 복음주의에 직면”해 쇠퇴하는 교수의 권능 탄식.

‘비용과 효율을 따지며 수월성이라는 공허한 개념을 숭배하는 대학은 이미 폐허’라고 일갈한 그의 해법은 단순하지만 용기를 요한다. 먼저 폐허가 된 대학을 인정하고 다음엔 이 폐허에서 사유의 장소로 거듭나는 것이다. ‘폐허의 대학에서 폐허의 사유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두 대학의 사례를 소개하자. 9월23일 국민대는 서울연구원, 성북구청과 ‘캠퍼스 타운 조성을 위한 공동연구’ 3자 협약을 맺었다. 이 구상은 동네 주민의 문화예술 수요는 물론 동네의 육아, 청소년, 노인 문제 등을 국민대와 함께 마을공동체의 개념으로 풀어보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학 캠퍼스가 동네 주민의 배움터와 쉼터로 공유되고 학생과 교수는 캠퍼스를 나와 동네(정릉동)의 현안 해결을 공부 삼아 실천한다는 과감한 상상이다.



대학 캠퍼스_경향DB



9월19일에는 동덕여대 캠퍼스가 하루 동안 깜짝 변신을 했다. 교정 곳곳을 8개 기차역으로 설정해 동선을 만들고 32개 독서부스, 11개 행사, 2개 전시, 2개 공개강좌를 열었다.

올해 5회째인 성북 책모꼬지(북페스티벌)에 6322명이 참여했고 이 중 66%가 인근 월곡동·장위동·석관동 주민이었다. 동덕여대는 앞서 5월15일 성북문화재단과 협약을 맺고 대학의 자원과 역량을 지역과 공유하면서 마을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로 했는데 9월의 책모꼬지 지원은 그 첫 실천이었다. 주민 다수는 “이런 축제가 우리 동네 캠퍼스에서 많이 있으면 좋겠다”고 설문에 응답했다.


이들 사례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폐허의 대학에서 폐허의 사유를 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에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요약하면 ‘마을을 키우는 대학, 대학을 품은 마을’이다. 취업난의 공포에 짓눌린 청년들에겐 일자리뿐 아니라 온전한 사람자리도 절실하다. 그 자리는 소위 선진국에 있는 게 아니고 대학이 자리 잡은 우리 동네에 있다.

현재 서울에는 38개의 4년제 대학이 있다. 성북에는 7개의 4년제 대학이 있으며 이들 캠퍼스가 구 전체 면적의 약 7분의 1을 차지한다. 이들 대학이 우리 동네의 마을대학이 된다면 ‘투쟁의 거리’를 지나 ‘환락의 거리’와 ‘기업의 거리’라는 시행착오 끝에 세계적인 캠퍼스와 대학가로 거듭날 수 있다.

도시 혁신의 권위자 찰스 랜드리가 말했듯 “멍청한 도시가 과거의 성공을 재현하려고 버둥거릴 때” “자기성찰을 하고 실패에서 교훈을 얻으며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똑똑한 도시”는 지역 전체를 학습의 장으로 삼는 “학습도시”다. 이 길로 가자면 폐허의 대학을 인정하고 폐허의 사유를 시작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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