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한 달 만에 다시 안철수 교수에 관한 칼럼을 쓰게 됐다. <안철수의 생각> 출간과 <힐링캠프> 출연 이후 안철수 바람이 지난해에 이어 다시 한번 거세게 불고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칼럼들이 쏟아지고, 유력인사들과 여러 조직들이 공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안철수 현상’은 12월 대선으로 가는 길에 이제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상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현상에 담긴 의미는 과연 뭘까.


 지난해 나는 한 심포지엄에서 안철수 현상을 가리켜 ‘정치사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격’이라 이름지은 적이 있다. 그들만의 리그인 정치권에 대한 시민 다수의 불만이 ‘안철수’라는 이름에 담긴 소통과 참여의 열망으로 드러난 게 반격의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시민사회는 숨 가쁘게 변화하는데도 정치사회가 이를 쫓아가지 못하는 ‘정치 지체’ 현상이 안철수 현상의 배경을 이룬다. 그 결과 기성 정치를 거부하는 ‘탈정치화’와 새로운 정치를 희구하는 ‘재정치화’라는 상반된 경향이 안철수 현상에 공존한다. 안철수 현상을 이해하는 정치학적 코드다.


(경향신문DB)


어느 대선이든 향방을 결정하는 핵심 이슈는 경제다. 1997년 대선에선 외환위기 극복, 2002년에는 수도 이전으로 상징되는 균형발전, 2007년에는 ‘경제 살리기’가 이를 증거한다. 재벌개혁으로 대변되는 경제민주화가 올 대선에서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낙후된 지배구조, 재벌과 중소기업의 양극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면, 누가 포스트 신자유주의적(post-neoliberal) 경제민주화의 적임자일까. 여기에 공공성과 혁신을 앞세운 안철수의 기업 경영을 떠올리는 국민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 현상을 이해하는 경제학적 코드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문화를 특징짓는 흐름 중 하나는 ‘갈라파고스 현상’이다. 세대 간, 계급 간 문화적 거리가 멀어지고 하위문화의 독립성 및 고립성이 강화돼왔다. 인디문화, B급문화, 사이버문화, 7080문화 등은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이런 문화의 군도화(群島化)가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 속에 역전불가능하다면, 공감과 통합에 대한 문화적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수사적 담론이 아니라 공감과 통합을 위한 소통의 실천이다. 그리고 이 실천의 주체로 안철수가 존재한다. 안철수 현상을 이해하는 문화학적 코드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소통·참여·공공성·혁신·공감·통합이 안철수 현상의 주요 코드들을 이루고, 이 코드들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미래 가치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대선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과 구도이다. 새누리당 후보 대 민주당 후보로 경쟁할 경우 그 구도가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의 리턴매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면, 새누리당 후보 대 안철수로 경쟁할 경우 그 구도는 ‘과거 대 미래’로 짜일 가능성이 높다. 국면에 따른 지지율의 증감과 무관하게 안철수 현상이 계속 주목받아온, 보수 세력이 안철수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안철수가 과연 대선에 나서게 될지는 여전히 예단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의 생각>을 통해 그는 이제 국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조언과 비판을 듣고 싶다고 했다. 이런 안철수식 방식이 여의도식 문법 또는 정당정치 관행에 익숙한 이들에겐 적잖이 불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소통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안철수로서는 최종 선택을 하기 전에 당연하면서도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지난해부터 안철수 현상을 지켜보며 떠오른 이는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다. 아렌트는 다양한 의견 개진과 활발한 의사소통이 정치의 생명이라고 주장한다. 안철수 현상은 새로운 게 아니라 아주 오래된 미래, 정치 본래의 의미의 재발견이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정당정치의 위기이자 새로운 기회다. 안철수 현상이 일회적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우리 정치에서 소통과 참여의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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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이다. 동시에 언어는 정치의 집이기도 하다. 언어 또는 담론을 통해 정치가는 시민들의 열망을 대변하며 지지를 결집한다. 정치에서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 사례로 손학규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의 슬로건인 ‘저녁이 있는 삶’을 들 수 있다. 이 말은 위기의 벼랑에 내몰린 시민 다수의 소박한 희망을, 민생·복지·경제민주화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감성과 공감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지난 2007년 대선을 주도한 말은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슬로건인 ‘경제 살리기’였다. 경제 살리기는 복합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편에선 노무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보수적 비판을 겨냥하고, 다른 한편에선 2000년대 중반부터 유행한 ‘부자 되세요’의 정치적 열망을 담고 있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경제 살리기가 얼마나 허구였는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정치의 집으로서 언어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경제 살리기의 절정은 2008년 총선에서 나타난 ‘욕망의 정치’다. 욕망의 정치란 당시 뉴타운과 특목고 열풍으로 상징되는 투표 성향, 실현되기 어려운 욕망에 따른 투표 행위를 말한다.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의 기대에 표를 던지는 욕망의 정치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말한 바 있는 채워지기 어려운, 아니 채워질 수 없는 욕구를 표출하는 행위였다는 점에서 비극의 정치였다.

 

민주통합당 손학규 상임고문이 정책발표회를 갖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욕망의 정치가 가져온 사회적 결과다. 욕망의 정치는 가치보다 욕망, 공공성보다 사익성, 국가보다 시장을 특권화하는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정치의 전형이다. 이 욕망의 정치는 ‘경쟁에 의한, 경쟁을 위한, 경쟁의 시민사회’와 정확히 대응한다. 다른 이와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는 적응 압박은 시민사회 내 까닭 모를 불안과 공포를 강화시키고 일상화시킨다. 욕망의 정치가 가져온 개인적 내면 풍경이 다름 아닌 ‘멘붕(멘털 붕괴)의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멘붕이란 마음이 무너졌다는, 젊은이들의 어법으론 정신줄을 놓거나 바닥을 쳤다는 의미다. 멘붕이 우리 시민문화의 한 경향을 포착한 개념이라면, 그 원인을 물론 욕망의 정치에만 귀속시킬 순 없다. 외려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로 대변되는 화폐 및 신체에 대한 무한 숭배와 이에 따른 개인적 좌절이 멘붕의 사회적 원인일 것이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최근 불어온 ‘멘토 열풍’, ‘힐링 열풍’이 멘붕 현상과 정확히 짝한다는 점이다. 멘붕에서 힐링으로 가기 위해선 개인적 태도 변화와 사회적 구조 개혁이라는 이중의 과정이 요구된다. 최근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책이나 법륜 스님, 황창연 신부 강연에 대해 시민들의 관심이 높은 것은 이들의 말과 언어에 멘붕이 가져온 상처를 보듬는 개인적 태도 변화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구조적 개혁이다. 멘붕의 사회적 원인이 치열한 입시경쟁, 만성적 청년실업, 퇴출의 공포, 높은 사교육비, 불안한 노후에 있다면, 이를 구조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선 멘붕이 제대로 치유될 수 없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구축을 통해 이명박 정부에서 훼손된 공공성과 사회 정의를 회복할 수 있는 구조적 프로그램들을 제시하는 것이 현재 대선후보들에게 부여된 일차적인 과제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지배와 통치의 관점이 아닌 소통과 위로의 시각에서 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할 수 있는 공감의 언어다. 우리 정치에 이런 공감의 정치적 상상력이 결여돼 있다는 것은 나만의 판단이 아닐 것이다.

이 정치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첫 번째로 다룬 주제는 ‘우리를 구원할 사랑과 정치’였다. 멘붕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사랑의 회복과 정치의 복원이 요구된다. 비정한 권력투쟁을 넘어 따듯한 위로, 열린 소통,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 바로 이것이 욕망의 정치를 대체할 ‘힐링의 정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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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지난 2월 나는 이 시평에서 ‘문재인의 운명, 안철수의 선택’이라는 연속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대선을 5개월 앞둔 시점에서 문재인 민주당 고문과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선 자리와 갈 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다. 이유는 간명하다. 여전히 두 사람이 대선으로 가는 길에 야권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변화가 없지는 않았다. 4·11 총선 결과가 문 고문에겐 다소 불리한 정치적 조건을, 안 교수에겐 다소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형성했다. 총선은 진보결집 못지않게 중도통합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이런 국면은 중도층의 지지가 상대적으로 높은 안 교수에 대한 기대감을 상승시켰기 때문이다.

문 고문은 6월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문 고문의 슬로건은 ‘보통 사람이 주인인 우리나라 대통령’이다. 이를 위해 그는 정권교체·정치교체·시대교체를 내걸고, 4대 성장전략·경제민주화·강한 복지국가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김두관 경남지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민주당 안에선 문 고문, 김 지사, 손학규 전 대표의 3강 구도가 형성됐지만, 문 고문은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린다. 여기엔 더없이 인간적인 문 고문의 성품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적자(嫡子)라는 그의 정치적 위상이 크게 기여해 왔다.

문 고문이 박근혜 새누리당 전 대표와 대결한다면 현재로선 불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예상되는 대선 구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며, 다른 하나는 ‘보수적 미래 대 진보적 미래’의 대결이다. 문 고문이 대선 후보가 될 경우 ‘민주화된 박정희’에 대응하는 ‘미래지향적 노무현’을 어떻게 제시하고 설득할 것인가가 관건일 것이다. 여기서 미래지향적이란 노무현 정부의 미완의 과제인 양극화 해소와 복지국가 구축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함축한다.

 

문재인과 인철수 그래픽 ㅣ 출처:경향DB

총선 이후 안 교수의 행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선택을 심사숙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 교수가 봄학기가 진행 중인 6월 말까지 정치 참여를 선언할 수 없었던 것은 책임감을 중시하는 그의 성품을 생각할 때 공감할 수 있는 태도다. 지난해 9월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이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했듯 그는 여의도식 정치문법의 밖에 존재한다.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쌓이곤 있지만, 선택한 것에 철저히 책임지려 하는 안 교수의 태도는 말만 무성한 정치현실에선 외려 신선한 것일 수 있다.

안 교수가 시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는 것은 그의 삶에 있다. 대선 후보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게 시대정신이라면, 안철수연구소로 상징되는 혁신·공공성, 청춘콘서트로 상징되는 공감·소통의 삶을 통해 그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앞장 서 실천해 왔다. 최근 홍사덕 박근혜 캠프 선대위원장이 안 교수를 루이 나폴레옹과 비슷하다고 비판한 것은 대선 구도가 지나간 산업화 시대의 적자인 박근혜 대(對) 새로운 미래 시대의 주역인 안철수로 형성될 가능성에 대한 보수 세력의 두려움이 반영돼 있다.

안 교수가 정치 참여를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선택을 넘어선 이제 운명으로 봐야 한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넘어선 곳에 중도층과 2030세대를 대변하는 정치적 상징으로서 그는 위치한다. 바로 이 점에서 안 교수가 운명으로서의 정치에 대해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 야권과 어떤 정치적 연대를 모색할 것인가는 올 대선에서 진보개혁 세력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문 고문은 살아남은 자의 책무로서 운명을 넘어선 선택으로 나아갔다. 안 교수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선택을 넘어선 운명을 수용할 것인가를 고뇌하고 있다. 시간이 안 교수에게 많은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를 지나치게 압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야권에 중요한 것은 문 고문이 감행한 ‘선택의 운명’과 안 교수가 고뇌하는 ‘운명의 선택’의 생산적 결합이며, 바로 이것이 진보개혁 세력이 승리하는 방정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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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봄학기에 ‘진보와 보수’라는 교양강좌를 열었다. 500명이 넘는 학부생들이 신청한 만큼 나름 신경쓰면서 강의를 진행했다. 강좌 말미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이상돈 중앙대 교수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 강의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20대들의 정치적 감각이었다. 20대들은 대체로 진보적이긴 하지만 진보적 성향과 보수적 성향, 그리고 이념적 경향과 탈이념적 경향이 공존한다.

대선의 해를 맞이해 새삼 생각해보는 것은 이념의 역사다. 세계사회의 이념구도는 진보의 시대(1950년대~1970년대 중후반)와 보수의 시대(1980년대~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거쳐 새로운 전환의 시대에 들어와 있다. 미국·일본에는 진보적 정부가, 독일·영국에는 보수적 정부가 존재하는 현실을 지켜볼 때 어느 이념이 우세하다고 주장하긴 어렵다. 다만 보수가 내세운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한 만큼 정치적 국면은 진보에게 유리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에선 민주화 시대 이후 10년을 단위로 보수적 정부와 진보적 정부가 교체돼 왔다(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진보적 정부로 볼 수 없다면, 중도개혁 정부라고 봐도 좋다). 주목할 것은 정권교체에서 나타나는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이를 증거한다. 노무현 후보가 내건 ‘낡은 정치 청산’이나 이명박 후보가 내건 ‘경제 살리기’에 대한 국민 다수의 열망은 집권 말기에 모두 환멸로 귀결됐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이상돈 중앙대 교수, 김호기 연세대 교수 ㅣ 출처:경향DB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구적 흐름과 국내적 흐름이 갖는 유사점 및 차이점이다. 최근 지구적 흐름이 갖는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이다. 신자유주의는 위기가 분명한데, 유럽 경제위기가 보여주듯이 그 전망이 극히 불투명한 암중모색이 계속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적 사고다. 보수가 진보적 정책을 추진하고 진보가 보수적 정책을 수용하는 탈이념적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국내적 흐름은 사뭇 다르다. 후발 산업화 국가인 우리 사회는 뒤늦게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쳐 이제 복지국가 시대의 문턱 위에 올라서 있다. 선발 산업화 국가가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에 복지국가를 일궜다면, 우리 사회는 상이한 시대적 환경인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복지국가를 이뤄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를 특징짓는 것은 저성장 시대다. 제로성장에 가까운 구조적 강제 아래 지속가능한 재정정책과 시대적 요구로서의 복지정책 간의 최적 조합을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여기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계경제의 위기, 돌이키기 어려운 저출산·고령화 경향과 이와 연관된 노동시장의 변동,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참여민주주의 확산 및 문화의 군도화(群島化) 경향이 결합함으로써 우리 사회 이념지형은 보수 대 진보라는 정치적 대립의 이념화와 기존 구도로부터의 탈이념화가 동시에 진행돼 왔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이념과 탈이념의 이러한 이중 구도다. 문제는 포스트 신자유주의적 정책 콘텐츠를 마련하는 데 기존 이념 구도의 해법이 갖는 강점과 한계에 있다. 지구적 수준의 탈이념적 흐름과 국내적 수준의 복지국가 구축이라는 진보적 흐름 사이에 우리 사회는 놓여 있으며, 상반된 이 두 경향을 적극 고려한 국가전략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차기 정부는 또 한 번의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시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반을 둔 포스트 신자유주의 국가전략을 모색하는 시대정신 탐구가 역시 문제의 핵심이다.

대통령의 권력이 국민들로부터 위임된 만큼 대선 후보들은 국민들의 질문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 박근혜·정몽준·김문수든, 또 안철수·문재인·손학규·김두관이든 대통령을 꿈꾼다면 묻고 싶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우리 사회를 어디로 이끌려고 하는가. 새롭게 출범할 정부는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와 무엇이 다른가. 당신들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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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올 프로야구 열기가 남다르다. 여러 요인이 있는 듯하다. 박찬호, 이승엽, 김병현 등 해외파 선수들의 활약도 관심이거니와 선동열, 김기태, 김진욱 신임 감독들의 리더십도 화제다. 이 가운데 유독 내 시선을 끈 것은 넥센 히어로즈 김시진 감독의 리더십이다. 만년 하위팀인 넥센을 선두권에 진입시킴으로써 김 감독 리더십이 프로야구 안과 밖으로부터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다른 스포츠와 비교해 프로야구는 특히 감독의 역할이 중요하다. 투수 교체, 타순 조정, 작전 구사 등 감독의 전략·전술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기장 안에서의 리더십만 중요한 게 아니다. 원정 경기의 경우 프로야구는 장기간 감독과 선수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경기장 밖에서의 감독 리더십은 선수단 전체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김시진 감독의 리더십이 주목받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데 있다. 최근 한 조사에서 김 감독의 이른바 ‘어머니 리더십’은 대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은 리더십으로 꼽히기도 했다. 어머니 리더십은 다그치지 않고 선수 각자에게 고른 기회를 부여해 변화를 이끌어내는 지도력을 뜻한다. 올해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간 김 감독은 어머니 같은 자상함과 공정함으로 선수단을 통솔해 왔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김 감독 리더십에 담긴 자발성과 공정성이다. 선수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기보다 소통을 통해 자발성을 이끌어내고, 특정 선수를 편애하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줌으로써 실력을 극대화하는 게 김 감독 리더십의 특징을 이룬다. 리더십이 올바로 발휘되기 위해선 리더십과 짝을 이루는 팔로십이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리더의 결정에 동의하고 따르게 될 때 그 조직이 상당한 성과를 거둘 것은 분명하다.

 

여야 대선주자들과 지도부의 모습 ㅣ 출처:경향DB

프로야구 이야기가 길어졌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정치사회의 리더십이다. 대선의 해를 맞이한 올해 대선 주자들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다.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신뢰와 원칙의 리더십으로, 안철수 서울대 교수는 소통과 혁신의 리더십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목요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는 통합의 리더십을, 어제 선언한 문재인 민주당 고문은 참여의 리더십을, 조만간 선언할 김두관 지사는 뚝심의 리더십을 상징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과연 어떤 정치적 리더십이 요구되는가에 있다. 그 리더십의 조건으로 나는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시대정신을 구현할 리더십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구축이 가장 중차대한 과제라면, 이 시대정신을 올바로 인식하고 추구할 수 있는 리더십이 중요하다.

둘째는 책임윤리의 리더십이다. 정치는 막스 베버가 강조하듯 선택이라기보다 소명이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실천하기 위해선 선과 악의 이분법에 기반을 둔 신념윤리를 넘어선 정책의 결과를 적극 감당하려는 책임윤리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셋째는 소통과 공감의 리더십이다. 오늘날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은 비가역적이며, 이는 개인주의의 확산을 강화시킨다. 민주주의의 기초가 개인의 자율과 책임에서 시작하는 한, 권위주의·국가주의에 맞설 자유주의·개인주의의 성숙을 위한 소통과 공감의 리더십은 더없이 중요하다.

‘어머니 리더십’ 김시진 감독의 장점은 집권에서 분권으로,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의 시대적 변화에 적극 대응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비정치 분야에선 이렇게 새로운 리더십이 각광받는데, 정작 정치·사회의 리더십은 여전히 빈곤하다. 정치적 리더십에 관한 국민 다수의 바람은 간단하다. 독선이 아니라 공감, 갈등이 아니라 통합, 정파적 이익이 아니라 국가적 이익, 그리고 임의적 해결이 아닌 제도적 처방을 중시하는 리더십이 바로 그것이다. 다가오는 대선에선 비전과 정책 경쟁 못지않게 리더십 대결이 치열하게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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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총선 이후 보수 우위의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당 지지율, 대선후보 적합도는 물론 이념구도 조사에서도 새누리당이 계속 이니셔티브를 행사하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총선 승리의 효과가 하나라면, ‘통합진보당 사태’가 다른 하나다. 통합진보당 사태와 ‘임수경 의원 사건’을 색깔론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의도가 분명한 과잉대응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이 비례대표 후보 선출의 부정에 있는 만큼 이에 대해 철저히 책임지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경향신문 DB)


정치란 본디 전략, 국면, 구조가 상호 작용하는 공간이다. 예기치 않은 ‘종북 논란’ 국면은 야권연대의 전략적 의의를 훼손시키고, 시대정신 교체라는 대선의 구조적 특징마저 희석시키고 있다. 종북 논란에서 주목할 것은 중도 무당층의 향방이다.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해군기지 건설 논쟁으로 이어지는 안보 국면에서 중도층이 보수적 안보관에 친화력을 느끼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려스러운 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담론의 현주소다. 구조적 시각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과제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이른바 ‘새판 짜기’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고용 없는 성장에서 일자리 창출 경제로 전환하며, 무엇보다 수명이 다한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을 개혁해야 할 엄중한 과제를 재벌개혁 및 보편적 복지정책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민주당의 전략은 국민 다수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런 일련의 흐름이 현재 민주당이 선 자리다.


지난주 월요일 민주당 국회 개원 워크숍이 마련한 강연에서 나는 새누리당의 대선후보로 확실시되는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최대치는 ‘민주적 박정희’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전 위원장이 경제민주화와 생애주기 맞춤형 복지를 양축으로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하는 ‘미래선택’을 강조하더라도 보수적 유권자들이 소망하는 미래는 발전국가 논리에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더한 ‘민주적 박정희 시대’일 것이다. 민주당에 이번 대선이 결코 쉽지 않은 승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 전 위원장과의 경쟁은 복지국가를 내건 박근혜 후보와의 경쟁인 동시에 산업화의 주역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제막식을 마친 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경향신문DB)


싸움이 어려울수록 우회해선 안된다. 대선의 본령은 시대정신 제시에 있다. ‘균형발전’을 내세운 2002년 노무현 후보와 ‘경제 살리기’를 앞세운 2007년 이명박 후보를 떠올려 보라. 대선에서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비전, 새로운 미래, 새로운 대한민국이다. 민주당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대정신이며, 민주당 대선후보는 민주주의·균형발전·한반도 평화라는 두 전직 대통령의 시대정신을 안고, 동시에 넘어서야 한다. 어떤 비전으로 ‘민주적 박정희’에 맞설 수 있을지 정직하게 말하면 걱정이 앞선다.


보수의 힘을 과장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과연 어떤 미래비전으로 시민 다수의 열망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할 수 있는가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목소리가 없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게 정치라는 메시지를 던진 바 있다.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해 목소리를 박탈당한 서민들과 목소리를 내지 않는 중도층을 대신해 민주당은 과연 어떤 목소리를 대변할 것인가. 그날 강연에서 나는 대선 승리를 위해 민주당에 요구되는 네 가지 과제를 조언했다. 비전에서 미래를 선점하고, 대선후보 경쟁력을 제고하며, 진보 결집과 중도 통합을 동시에 추구하고, 야권연대를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으로서의 미래비전이다.


지난주 토요일에 민주당은 이해찬 대표를 선출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출범시켰다. 이해찬 대표와 김한길 최고위원 등은 여러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러온, 진보와 중도를 아우르는 민주당의 정체성에 걸맞은 리더들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의 제시라는 민주당의 갈 길에 대한 신임 지도부의 리더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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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지요.” 시인 김수영이 쓴 ‘현대식 교량’의 한 구절이다. 다소 뜬금없이 이 구절을 말하는 것은 올 6월이 주는 의미 때문이다. 전공이 정치사회학인지라 1987년 6월에 대해 학생들과 더러 토론하게 되는데, 격의없이 6월항쟁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 시구를 자연 떠올리게 된다. 학생들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나 역시 1979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은사들로부터 1960년 4·19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지만, 19년이 지난 당시 열아홉 살의 나로서는 그 의미를 실감하기 어려웠다.



6.10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각 대학 학생들이 모여 앉아 있는 모습 (경향신문DB)



오는 일요일은 6·10항쟁의 25주년이 된다. 25년 전의 이번 주는 우리 현대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을 이룬 일주일이었다. 1972년 10월유신 이후 15년의 군사독재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향한 유토피아 에너지가 거침없이 분출하던 열정의 시간이었다. 민주화 시대를 연 6월항쟁은 25년이 흐른 현재 어떤 의미를 안겨주는 걸까. 민주화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프레임을 아우르는 ‘마스터 프레임(master frame)’이었다. 노동해방, 시장개혁, 복지강화, 양성평등, 환경보호, 인권증진, 그리고 평화공존 등의 프레임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구심력의 프레임이 다름 아닌 민주주의였다.


지난 25년의 민주화 과정은 명암이 분명한 시대였다. 6월항쟁의 가장 큰 성취는 ‘예외국가’에서 ‘정상국가’로의 전환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이뤄진 김영삼 정부의 군부 정치개입 차단, 김대중 정부의 수평적 정권 교체, 노무현 정부의 권력기관 민주화, 그리고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등은 그 성과들이었다. 금융실명제 도입,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호주제 철폐 등은 민주화가 가져다 준 또 다른 선물이었다.


하지만 빛 못지않게 그늘 또한 짙었던 게 민주화 시대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시작된 민주화 25년의 후반기는 신자유주의 시대였으며, 신자유주의는 사회양극화를 강화함으로써 분배구조가 악화되는 ‘민주화의 역설’을 가져왔다. 민주화가 성숙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경제민주화가 요구됐음에도 재벌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중소기업의 경쟁력 약화,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대, 청년실업의 구조화, 더하여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 기록, 물질만능주의·외모지상주의 등과 같은 시민문화 빈곤 등이 민주화 25년의 우울한 풍경을 이룬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25년이라는 한 순환의 문턱에서 관찰되는 기이한 현상들이다. 민간인 불법사찰, 권력의 방송 공공성 훼손, 그리고 비례대표 선출 부정 등은 우리 민주주의의 지반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증거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말의 독점, 권력의 독점, 자본의 독점에 맞서는 것에 있다. 보수든 진보든 지속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결국 말과 권력과 자본의 과두제적 철칙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지금 목도하고 있다.


어디로 갈 건가. 민주주의는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등을 향해가는 부단한 과정이다. 동시에 활발한 소통 및 치열한 논쟁을 통해 불확실한 미래를 지속가능한 현실로 제도화하는 과정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민주화 시대가 지나가더라도 마스터 프레임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가장 소중한 가치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사회는 지금 ‘민주화에 대한 성찰적 민주화’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에 대면해 있다고 봐야 한다.


‘현대식 교량’으로 돌아가면, 김수영은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고,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고 말한다. 6월항쟁 25주년의 중간 결산은 200일도 채 남아 있지 않은 12월 대선에서 이뤄질 것이다. 민주화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소중한 가치인 만큼 누구도 독점할 순 없다. 하지만 민주화 시대를 연 진보개혁 세력이 이렇게 뜻 깊은 해에 새로운 역사를 주도하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 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적잖이 쓸쓸하다. 진보개혁 세력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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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총선 이후 이 시평에선 진보개혁 세력을 계속 다뤘다. 진보가 그만큼 위기에 처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정치가 진보만으로 이뤄질 순 없다. 이번에는 보수 세력을 주목하고자 한다.

총선에서 내가 새삼 느낀 것은 한국 보수의 힘이다. 새누리당이 이겼던 일차적 원인은 민주통합당의 실책에 있었다. 그러나 정치란 반사이익 이상의 것이다. 총선 국면에선 위기를 헤쳐 나가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리더십이 돋보였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비대위를 마감하고 황우여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다. 일각에선 박 위원장의 독주에 우려를 표하지만, 12월 대선으로 가는 도정에서 박 위원장이 이니셔티브를 잡은 것은 분명하다.

돌아보면 우리사회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 세력은 진보개혁 세력에 상대적 우위를 점해 왔다. 보수가 패배한 것은 1997년 대선의 ‘이인제 변수’와 2004년 총선의 ‘탄핵 국면’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 따른 결과였다. 진보개혁 세력이 보수 세력과 일대일로 대결해 승리한 것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경우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것도 박빙의 승리였다.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보수의 정체성 위기를 논하다’ 토론회 ㅣ 출처:경향DB

우리 이념구도를 보면 보수 대 진보의 지지율은 엇비슷하다. 그렇다면 보수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보수의 ‘진화’ 능력을 주목하고 싶다. 진화 능력이란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역량을 말한다. 지난 대선과 이번 총선은 적절한 사례다. 2007년 대선에서 보수 우위의 원동력은 노무현 정부의 낮은 지지율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민주화에 맞서 ‘선진화’를 제시하고, 이에 기반해 보수적 헤게모니를 확장시킨 것 또한 주목해야 한다.

선진화 담론이 일종의 ‘창조’ 전략이었다면, 이번 총선에서 보수가 구사한 것은 ‘모방’ 전략이었다.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커지자 선진화 담론을 과감히 버리고 야권이 제시하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보수 세력 역시 들고 나와 진보개혁 세력과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섬세한 유권자들은 무상급식을 반대한 정당이 고교 무상교육을 주장해 당황했을지 몰라도 보수의 변신은 놀라울 뿐이었다. 권력의지에도, 담론 영역에도 담대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였다.

문제는 보수의 전략이 언제나 거기까지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명박 정부보다 적절한 사례는 없다. ‘선진일류국가’, ‘창조적 실용주의’, ‘중도실용’ 등 이명박 정부가 제시한 담론들은 더없이 화려했지만, 집권을 마무리해 가야 할 현재 시점에서 정부의 성적표는 한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새누리당 지지율이 50%에 육박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엔 ‘박근혜’라는 분명한 대안의 존재가 중요하다. 보수 정치세력에 대한 보수적 시민들의 일관된 지지는 또 다른 요인이다. 보수 정당과 핵심 유권자들은 이익 공동체로서의 확고한 자기인식과 견고한 유대의식을 갖고 있다. 민주화 25년을 지나오면서 이런 자기인식과 유대의식의 경로의존성이 이미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보수의 힘에 담긴 빛과 그늘이다. 담론을 제시하고 시민들을 설득하는 정치적 기민성은 분명 보수의 장점이다. 그러나 보수 세력이 지지 그룹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보수의 딜레마다. 일단 선거에서 이겨야 할 절박감이 뻑적지근한 잔칫상을 차리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그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국민을 둘로 나눈 ‘두 국민(two nations)’의 대처 정부가 아니라, 둘로 나뉜 국민을 하나로 묶는 ‘한 국민(one nation)’의 디즈레일리 정부가 한국 보수가 가야 할 길이다.

누구는 내게 진보개혁 세력에 대한 걱정부터 하라고 말할지 모른다. 보수에 충고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수가 혁신할수록 그것은 경쟁이라는 정치의 속성을 고려할 때 결국 진보를 강화시킨다.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양 날개로 간다는 리영희 선생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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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비상대책위원회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새누리당은 5개월째 비대위 체제로 당을 운영해 왔고, 민주통합당도 어제 비대위원 명단을 발표했다. 통합진보당 역시 혁신비대위 구성을 예고했다.


무엇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걸까. 나는 사건사보다 국면사의 흐름을 주목하고 싶다. 최근 우리 정치의 상징적인 일은 지난해 9월의 ‘안철수 현상’이다. 안철수 현상에는 민주화 25년으로 가는 국면에서 우리 정치가 갖는 ‘대표성의 위기’가 반영돼 있다. 국민 다수의 의사를 대표하는 게 정치인데, 그 대표성이 발휘되지 않는 기성 정치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안철수’라는 고유명사이자 보통명사에 담겨 표출된 게 안철수 현상의 본질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경향신문DB)



 안철수 현상의 연장선에서 10월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됐다. 박 시장 당선의 원동력은 시민정치였다. 시민정치란 정당정치를 일방적으로 거부한 게 아니라 새로운 인물·비전·정책, 무엇보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정당을 혁신하려는 정치였다. 시민정치는 정당정치와 대립물이 아니다. 이름붙이자면 ‘시민적 정당정치’라 할 수 있는 이런 흐름은 민주화 25년을 맞이한 우리 사회가 열고 들어가야 할 정치의 문(門)이었다.


서울시장 보궐 선거 이후 시민들은 정치사회가 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정치사회는 문 저편으로 나간 게 아니라 문 이편에서 기득권, 짬짜미, 소통 부재를 고수해 시민들로부터 다시 멀어졌다.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선전한 이유 중 하나는 비대위를 출범시킴으로써 그나마 변화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 정작 시민적 정당정치를 일궈야 했던 야권은 시민 다수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한 채 여권의 과반 확보를 허용해야 했다.


문제는 총선 이후다. 총선 결과는 선거에서 패배한 야권에 쇄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야권은 여전히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지난주 단합이냐 담합이냐의 논란 끝에 박지원 원내대표를 선출했다. 지금 필요한 게 돌파력과 전투력의 리더십이라고 판단했겠지만, 계파를 넘어선 화합을 모색하고 시민적 공감을 일궈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더 심각하다. 비례대표 후보 경선 조작은 이념 문제를 넘어선 민주주의의 기본을 부정한 사건이다. 계파적 기득권을 둘러싼 논란 끝에 전국운영위원회는 현재의 대표단과 경선을 통해 선출된 비례대표 당선자 및 후보자 14명을 총사퇴시키기로 했다. 정당의 생명인 정당성이 치명적으로 훼손된 통합진보당의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국면사적 흐름에서 보면 이 우울한 풍경이 진보개혁 세력의 현주소다. 진보의 가치는 새로움과 변화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면 진보개혁 세력은 이미 낡은 것이 아닌가. 보수 세력과 비교해 정책들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 데도 당의 리더십과 운영방식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지 않은가. ‘괴물과 싸우는 이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은 바로 진보개혁 세력에게 주는 경구이지 않은가.


올해는 민주화 25년을 맞이한 해다. 민주화를 주도해온 것은 보수 세력이라기보다 진보개혁 세력이다. 진보개혁 세력이 지금 지쳐 있다. 진보개혁 세력을 지지해온 시민들은 크게 상심해 있다. 문재인,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김두관, 유시민 가운데 누가 대선 후보가 되더라도, 안철수 교수를 영입해 후보로 내세우더라도 12월 대선에서 보수 세력과 제대로 경쟁할 수 있을지 더없이 우려스럽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길게 봐야 한다. 임시 처방으론 현재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대표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낡은 정치와 결별하고 시민적 정당정치로 나가야 한다. 소통을 활성화하고, 새로운 리더 발굴을 통해 세대교체를 이루고, 무엇보다 중산층과 노동계급을 삶의 위기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승부해야 한다. 전당대회든 중앙위원회든 기회는 남아 있다. 진보개혁 세력을 지지해온 시민들은 위로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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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총선이 끝난 후 처음으로 시평을 쓴다. 먼저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진보개혁 세력을 응원하고 지지한 분들에게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한 것은 지도력과 전략 부재에 기인한 것이지만, 난맥상을 드러낸 공천에도 명백한 책임이 있으며, 이에 대해 나 역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총선 결과가 나온 직후 떠올랐던 이들은 공정방송 실현을 위해 파업 중인 방송가 후배들이었다. 총선 결과가 달랐더라면 새로운 변화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여의도 벚꽃들이 춤추며 날리는데, 방송 현장이 아닌 파업 현장을 지켜야 하는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고 시려온다.


총선 결과에서 더없이 아쉬운 것은 여권의 과반 달성이 주는 함의다. 총선에 부여된 역사적 과제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할 진보적 입법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의 마련이었다. 새누리당 역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내세웠지만, 대선마저 승리한다면 재벌개혁과 재정개혁은 찻잔 속의 미풍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뿐만이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풀기 위한 노동시장개혁, 사법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검찰개혁,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방송·통신개혁도 그 미래가 이제는 불투명해진 것으로 보인다.

 

총선 좌담회에 참석한 최정표, 도정일 , 김호기, 윤평중 교수 I 출처:경향DB

안타까운 것은 분명한 패배인데도 불구하고 야권이 패배한 것만은 아니라는 논리로 총선을 평가하려는 일각의 흐름이다. 총선의 평가 기준은 2008년 총선 결과가 아니라 총선의 전초전인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야권에 대해 높은 지지를 보여준 민심이 돼야 한다. 결과를 결과로써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그 결과가 개별 정치세력에 주는 정치적 함의를 고려해 해석하려는 것은 유권자들을 두 번 실망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총선 이후 진행되는 노선 논쟁이다. 한편에선 총선 실패가 ‘좌클릭’에 따른 중도 세력의 이탈에 있기 때문에 중도강화를 강조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진보강화를 제시한다. 나 역시 총선 평가토론에서 중도층의 이탈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좌클릭을 일방적으로 비판한 건 아니었다. 민주통합당의 노선에 대해선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시각을 구별해야 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민주통합당의 좌클릭은 우리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부조응 관계를 고려할 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민주통합당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내걸음으로써 시민사회의 이념구도에 제대로 대응하는 진보와 중도를 포괄하는 ‘중도진보’ 정당으로서의 자리매김을 이제서야 했다고 봐야 한다.

미시적 시각에서 민주통합당이 잘못한 것은 진보세력을 결집하는 ‘갈라치기’(칼 로브)와 중도세력을 설득하는 중간층 ‘끌어안기’(딕 모리스)를 결합했어야 하는 전략의 부재에 있는 것이지, 당의 정체성을 좌클릭한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를 거치면서 민주통합당은 모호한 중도개혁 정당에서 분명한 중도진보 정당으로 거듭났다.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을 위한 정당이라는 정치적 정체성을 명확히 하되, 시민 다수가 공감할 구체적 정책대안 제시라는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는 이중과제는 중도진보를 지향하는 정당에는 감당해야 할 숙명이라고 봐야 한다.

총선이 끝난 며칠 후 저녁 늦게 신문사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총선 결과가 1987년 대선 결과와 비슷한 느낌을 안겨준다고 말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 또한 컸기 때문이리라. 집으로 가기 전, 혼자 경희궁에 잠시 들렀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벚꽃들이 춤추며 날리고 있었다. “꽃이 피면 같이 웃자던 알뜰한 그 맹세”, 옛가요 ‘봄날은 간다’의 한 구절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다. 그래, 봄날이 이렇게 지나가더라도 그래도 기운을 내야 한다고, 기운을 내기 위해선 제대로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무심히 날리는 벚꽃 그늘 아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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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결국 총선을 이렇게 눈앞에 두게 됐다. 만감이 교차한다. 돌아보면 이번 총선은 2008년 촛불집회부터 기다려온 것 같다. 이후 지나온 4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지방선거, 희망버스와 안철수 현상 등이 진행됐으며, 이 과정 속에 우리 사회는 변화했고 진화해 왔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은 우리 사회를 또 하나의 새로운 시험대 위에 세워두고 있다.


총선의 의미를 나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찾고 싶다. 이 질문은 촛불집회에서 이미 주어졌다. 투표로써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가 주인인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국민은 국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촛불을 들어 국가에 항의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이 자명한 민주주의 원리를 이명박 정부가 거부했다는 데 있다. 오히려 정부는 촛불의 배후를 찾기 위해 민간인을 불법으로 사찰함으로써 우리 민주주의를 군부권위주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한국청년연대·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등 청년단체 회원들이 26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2012 청년유권자 네트워크’ 발족 기자회견을 열고 2030 세대의 투표참여 운동 등 사업목표를 밝히고 있다. (경향신문DB)


민주주의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인식과 감수성은 뭐라 평가하기 정말 난감하다. 어느 나라이건 민주화가 진행되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확산된다. 우리사회의 경우 1990년대 초반 신세대의 등장과 함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강화돼 왔으며, 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에도 이런 탈(脫)물질주의 경향은 꾸준히 확대돼 왔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말과 표현의 자유는 이 못지않게 소중한 가치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빵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지만) 민간인 불법사찰, 방송사 장악, 철지난 색깔론 구사 등 권위주의 시대의 통치를 강화했다. 이런 낡은 지배방식 아래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핵안보정상회의를 성대히 개최한들 이 행사들이 국민들에게 무슨 의미를 안겨줄 수 있었겠는가.


이명박 정부의 집권 초기 ‘민주주의 후퇴’가 논란이 됐을 때 학계 내에선 이 주장이 현실을 과장한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정당정치가 정상화돼 있지 않아서 그렇지 절차적 민주주의는 나름대로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지난 4년을 돌아볼 때 우리 민주주의는 현저히 후퇴했다. 방송사 파업들은 단적인 증거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선 국가권력을 감시하는 공론장의 기능이 더없이 중요하다. 언론 본연의 역할을 회복하려는 방송사 파업들은 우리 사회 공론장이 놓인 서글프고도 위태로운 자리를 생생히 보여준다.


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민주주의 사회에선 보수든 진보든 국가에게 부여된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유지하는,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너무도 당연한 의무다. 개인의 자유를 훼손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국민은 그 국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듣기만 해야지 말하긴 어려운, 어떤 흔적이라도 남겨선 안될 두려움을 동원하는 자기 검열의 사회라면, 이는 명백히 민주공화국의 부정이다.


선거란 본디 입법과 행정을 담당하는 국가를 선택하는 절차다. 그 두 개의 국가 중 입법의 국가를 선택하는 총선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번 총선이 갖는 일차적인 의미는 ‘입법부의 복원’에 있다. 헌법재판소, 법원, 검찰 등이 주연을 맡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에서 투표로 권력을 위임받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정치의 진정한 주역이 되는 민주주의의 복원, 정상국가로의 귀환이 총선에 부여된 역사적 과제다.


자, 이제 열리는 선택의 시간에 당신은 누구에게, 무엇에 소중한 한 표를 던지겠는가.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에는 중립이 없다.” 지난 30여년간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내내 고민해 온 김수영 시의 한 구절이다. 이분법의 논리는 위험하다. 그러나 선거는 ‘선택’이다. 민주주의가 결코 포기해선 안될 선이라면, 나는 그 민주주의에 소중한 한 표를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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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지난 금요일 총선 후보 등록이 마감됐다. 본격 선거 국면이 열렸건만 분위기는 그렇게 달아오르지 않는 듯하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선 열기가 뜨거웠다. ‘안철수 현상’, 정당후보와 시민후보의 대결, ‘나꼼수 돌풍’이 중첩되면서 ‘닥치고 정치’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총선이 16일밖에 남아 있지 않는데, 아직은 미풍 정도만이 느껴진다.

왜일까. 그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거리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화두는 박원순 후보로 상징되는 시민정치였다. 시민정치의 부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안철수 현상이었다. 안철수 현상에 담긴 의미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었으며,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간격을 좁히는 시민 주도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문제는 이러한 간격이 다시 멀어졌다는 데 있다. 새로운 정치는 참신한 인물·비전·정책으로 실현될 수 있다. 보궐선거 결과, 여권에선 박근혜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했고, 야권에선 정당정치와 시민정치가 결합한 민주통합당이 등장했다. 여권과 야권은 인재 영입, 지역구 및 전국구 공천, 선거 정책 발표 등을 추진해 왔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성적표는 신통치 않아 보인다. 정치의 재건축을 요청했건만 재단장 수준에 그쳤다는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정당의 단기적 속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물의 영입, 비전 및 선거 프레임의 제시, 후보 선출 방식의 변화는 상당한 숙성 기간을 요구하는 사안들인데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안에 이를 해결하려 하니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두기가 처음부터 어려웠다. 여권의 경우 경제민주화를 내걸었건만 한낱 ‘선거용 수사’에 그쳤으며, 야권의 경우 국민경선이든 야권연대든 예견하지 못한 정치적 내상을 안게 됐다.

최근의 흐름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정치의 주체가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진보개혁세력의 경우 새로운 정치를 위한 시민 다수의 열망을 담은 비전과 프레임의 구축은 더없이 중요하다. 돌아보면 2004년 총선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심판’ 선거였으며, 2008년 총선은 뉴타운과 특목고로 대변되는 ‘욕망의 정치’ 선거였다. 그리고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참여와 연대로 상징되는 ‘시민정치’ 선거였다. 프레임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을 때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경쟁에서 최근 새누리당은 ‘이념 선거’의 프레임을 부각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 구도에서 총선이 치러지면 나름대로의 성과와 대선의 교두보가 마련될 것이다. 문제는 야권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 또한 작지 않은 게 야권의 상황이다. 하지만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이번 총선은 2010년 지방선거에 이어 전국적 단위에서 치러지는 두 번째 야권연대 선거다. 우리 정치지형을 고려할 때 진보개혁세력에게 야권연대는 불가피한 최선의 정치적 선택이다.

 

야권연대의 가치는 ‘연대 속의 차이’를 승인하면서도 ‘차이 속의 연대’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 일차적 목적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엄중한 심판에 있으며,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여는 진보적 정권의 창출에 있다. ‘이념 선거’에 맞서서 ‘연대 선거’, ‘심판 선거’, 무엇보다 중산층과 노동자계급 삶의 위기를 즉각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대안 선거’가 야권의 프레임이 돼야 한다.

오는 29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선거가 치러지는 4월11일 전날까지 총선은 절정에 도달할 것이다. 선거는 잠들어 있던 것들이 깨어나 모두 심판의 테이블 위에 오르는, 역사는 구조가 아니라 의지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생생히 체험하게 하는 순간이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빠른 때다. 야권의 일대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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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공천이 거의 마무리됐다. 지난주 경향신문 좌담을 통해 민주통합당 공천에 대한 개인적 소회를 밝혔지만, 아쉬움이 떨쳐지지 않는다. 막스 베버가 강조하듯 학문과 달리 정치에선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책임윤리가 중요하다. 공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책임윤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더없이 무거워진다.

공천 심사에 참여한 이로 말하기 어렵지만, 이번 총선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소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선거를 관통해 온 것은 심판론이다. 2007년 대선에서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은 정권 심판론이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치러진 1월만 하더라도 심판론에 따라 총선에서 야권의 압승이 예상됐다. 그런데 심판론이 최근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여야의 `정권 심판론' 발언 I 출처:경향DB


여기엔 여러 요인이 존재한다. 먼저 주목할 것은 새누리당의 전략이다. 새누리당은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동시에 선거 구도를 보수 대 진보의 대결로 몰아감으로써 심판론을 희석해 왔다. 진보적 시각에선 새누리당이 제시하는 경제민주화론과 복지국가론이 공허하지만, 중도적 시각에선 이명박 정권의 노선과는 다른 듯한 나름대로의 공감대를 만들어 왔다. 무엇보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이라는 대안의 존재는 보수적 유권자들의 결집 또한 가져 왔다.

민주통합당이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상실한 것은 또 다른 요인이다. (나 역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공천에 대한 비판 여론, 장점보다 단점이 드러난 국민경선, 뒤늦은 야권 단일화 등은 민주통합당에 대한 기대를 약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주도 해군기지, 박정희 정권 재평가 등이 주요 의제로 부상하면서 결과적으로 심판론이 약화됐다. FTA와 해군기지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결코 아니다. 전략의 측면에서 새누리당의 의제 전환이 상대적으로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심판론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이중적 의미에 있다. 하나는 ‘정권 심판론’이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의 노무현 정권 심판론, 이후 각종 재·보선에서의 이명박 정권 심판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때부터인가 ‘정부 심판론’도 작동해 왔다. 시장의 폭력에 무력한 정부의 역할을 심판하려는 시민 다수의 욕구는 기성 정부에 대한 비판을 낳았고, 이는 정부와 정당을 거부하는 정치, 곧 시민정치에 대한 열망을 폭발시켰다.

정부 심판론과 시민정치론은 모두 국가의 재구성을 요청한다. 경제민주화든 보편적 복지든 그것을 선도적으로 추진할 현실정치의 주체는 국가다.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공적 기구다. 이명박 정권 아래서 많은 시민들이 절망한 것은 국가의 사익성 추구이며, 새롭게 갈망해 온 것은 국가의 공공성 복구다. 더불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구조화된 경제위기는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국가의 귀환’을 요청해 왔다.

심판론이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선 정권 심판론과 정부 심판론이 생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양극화 심화부터 민주주의 후퇴에 이르기까지 정권에 대한 심판은 매우 중요한 의제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재정, 일자리, 재벌개혁 등을 포괄하는 정부 심판론, 다시 말해 새로운 정부 대안론을 구체화해야 한다. ‘대안이 없다’는 본래 신자유주의의 모토였다. 지구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와 과감히 결별해야 하는 현재, 국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대안을 담은 심판론의 진화가 이뤄져야 한다.

공천 심사를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착잡한 마음에 더러 펼쳐본 책이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다. 베버는 국가를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로 이해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공동체로서 국가의 위기다. 사회 공동체의 전체 이익을 위한 국가 공동체의 복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실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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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에 대한 기억은 2009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관한 좌담이 경향신문에 실린 날 아침 그는 전화를 걸어 내가 말한 ‘좌파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를 스스로 주장한 게 아니라 당시 좌우로부터의 비판에 대한 여담에 가까운 말이었다는 것이다. 단어 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 쓰는 태도는 그의 자상한 인품을 생각하게 했다.

SBS 토크쇼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 (경향신문DB)


지난해 봄 문재인은 내가 운영위원장으로 있는 복지국가민주주의싱크네트 출범식에서 축사를 했다. 그는 진보개혁세력이 재집권한다면 약자를 보호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참여민주주의, 균형발전, 동북아 평화·번영이라는 노무현 정부의 목표는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한 ‘지나간 미래’다. 이 미래를 일궈야 할 정치적 책임이 그의 책 제목처럼 문재인에겐 ‘운명’인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를 내가 주목한 것은 몇 년 전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이 베스트셀러에서 그는 삶과 기업운영에서 기본과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해 늦가을에는 처음으로 만나 양극화를 포함한 주요 사회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안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치라는 점이다. 가치는 욕망과 물질에 맞서는 정신과 규범의 지향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6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안철수재단(가칭) 설립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며 미소를 짓고 있다. (경향신문DB)


안철수의 생각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어렵다. 그는 2030세대 신인류를 대변한다. 좌파와 우파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는 생각은 역설적 개념인 ‘공동체적 개인주의’에 가깝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개인의 창의성이 존중받는 열린 공동체다. 그가 중시하는 건 정치라기보다는 사회다. 정치 참여가 핵심이 아니라 사회 발전에의 기여가 여전히 그에겐 소중한 가치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 문재인과 안철수가 주목받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이 새로운 인물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삶과 가치가 바로 시대정신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박정희의 시대정신이 물질적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에 있었다면, 노무현의 시대정신은 인간다운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었다. 소멸하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시민 다수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은 소통과 참여의 민주주의, 더불어 살 수 있는 경제민주화이며, 문재인과 안철수는 바로 이 시대정신에 가깝게 다가선 인물들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사회 자원의 배분을 최종 결정하는 영역이자 행위다. 이를 위해선 운명을 넘어선 의지, 선택을 넘어선 소명이 요구된다. ‘노무현의 친구’를 넘어서 정치적 독립을 획득하는 것이 문재인에게 부여된 과제다. 사석에서 나는 노무현을 안고 노무현을 넘어가야 한다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노무현의 시대정신에서 출발하되 국면사 변동에 대응하는 문재인의 비전을 당당하게 세울 때, 운명의 대행자가 아니라 의지의 프로메테우스가 될 때, 문재인은 진보개혁세력을 대표하는 정치가가 될 것이다.

안철수가 과연 정치를 선택할 것인지를 예견하긴 어렵다. 그에게 지금까지 가장 소중한 가치는 자신의 말처럼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기 전까지 동시대인과 건강한 가치를 지켜가며 살아가는 데 있다. 가치 실현의 수단으로 안철수가 심사숙고 끝에 정치를 선택한다면,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다. 소명은 정치가 난장판이더라도 정치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뜻한다.

자, 결론을 맺자. 누구는 올 대선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대 선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게 올 대선은 기억의 선거다. 2008년 촛불집회, 2009년 서울광장의 눈물, 2011년 희망버스의 기억 속에 치러질 선거다. 누가 진보개혁세력의 리더가 되든 그는 기억의 정치에서 미래의 정치로 가는 문을 열 의무를 안고 있다. 새로운 미래의 문을 활짝 여는 데 문재인의 의지와 안철수의 소명이 당당히 발휘되길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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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을 맡게 됐다. 그래서 이 시평에서 당분간 공천을 평가하긴 어렵다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싶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도 물론 쉬운 주제는 아니다. 선거의 해를 맞이해 두 인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문재인과 안철수가 그들이다. 그 동안 두 사람을 사석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특히 안철수와의 만남은 일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미리 밝히고 싶은 건 두 사람과의 대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언론의 입장에선 선거 향방을 결정짓는 사안을 보도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하지 않기로 한 약속은 지켜져야 하며, 기실 한국사회 분석과 전망을 공부하기 위해 만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문재인과 안철수가 선 자리와 갈 길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l 출처 :경향DB



사회학적으로 인간은, 특히 최종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정치가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 동시에 구조로부터 강제받는 존재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시각에서 보면 사건사와 사회사 속에 놓인 존재이기도 하다. 사건사 아래서 개인의 자유의지는 극대화되지만, 사회사 아래선 그에게 부여된 시대적 구속이 부각된다.

올 두 선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사회사다. 한 번 더 브로델로 돌아가면, 그는 사회사를 콩종크튀르(국면)의 역사라 이름짓고, 국면의 변화가 사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국면사적 시각에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두 원동력은 민주화와 세계화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87년체제’를 등장시켰다면, 세계화로부터의 강제가 ‘97년체제’를 낳았다. 민주화가 민주적 사회개혁을 위한 구심력으로 작용한 반면,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그 개혁에 한계를 부여하는 원심력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그래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등을 통해 세계화의 그늘을 제어하려 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부자 감세, 4대강 사업 등 신자유주의 토건정책에 전력투구해 왔다. 세계화의 원심력이 민주화의 구심력을 압도해 양극화를 포함한 신자유주의의 적폐가 가감 없이 드러난 것은 이명박 정부 아래서다. 중산층이 붕괴해 ‘1 대 99 사회’가 만들어지는 ‘현실적 폭력’은 물론 비정한 ‘해고’가 그럴싸한 ‘구조조정’이란 말로 둔갑하는 ‘상징적 폭력’의 이중적 폭력이 거침없이 행사돼 온 곳이 바로 우리 사회다.

신자유주의 국면의 암울한 현실 속에 놓인 개인은 자연 과거에의 그리움과 미래에의 기대를 동시에 갖게 된다. 한때 미워했으나 그래도 좋았던 시절로 추억되는 건 노무현 정부이며, 이중적 폭력으로 훼손된 인간다움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소망스러운 미래상이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이런 그리움과 기대에 짝하는, 고유명사이자 보통명사다. 문재인이 더없이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가장 노무현다운 정치가라면, 안철수는 불통과 안주에 맞서서 소통과 혁신의 변화를 예감하게 하는 다수 시민의 멘토다.

올 두 선거에서 문재인과 안철수가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가에겐 무엇보다 권력의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국면사가 요구하는 새로운 비전이다. 문재인은 경제민주화·검찰개혁·통일정책 등을 비전으로 내비춰 온 반면, 안철수는 청춘콘서트와 안철수연구소로 상징되는 사회적 소통과 경제적 혁신의 아이콘으로 인식되고 있다. 6월항쟁 25년이란 국면을 고려할 때 두 사람의 비전은 설득력을 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더 브로델로 돌아가면, 어느 사회이건 국면이 강제하는 힘이 약화되고 개인의 자유의지가 강화되는 순간이 도래한다. 선거는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이다. 정치의 역동성을 생각할 때 문재인과 안철수의 미래를 예단하긴 어렵다. 그러나 대선을 10개월 앞둔 현재, 문재인의 ‘운명’과 안철수의 ‘선택’에 좁게는 진보세력의 미래가, 넓게는 우리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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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지면을 통해 인사드립니다. 지난해 여기 경향신문에서 ‘이상돈·김호기의 대화’를 진행할 때는 다소 여유로우셨는데, 요즘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활동으로 무척 분주하시지요? ‘대화’를 책으로 묶어내면서 올해 우리 사회가 일대 정치적 격랑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어느새 선거의 블랙홀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사회 보수 세력의 선 자리와 갈 길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사회이건 보수나 진보가 그 사회 전체를 독점할 순 없습니다. 보수가 강조하는 자유·안정·성장·시장의 가치는 진보가 강조하는 평등·변화·분배·국가의 가치 못지않게 중요하며, 상황과 국면에 따라선 보수적 가치가 국가운영의 기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현실입니다. 선생님은 ‘대화’에서 이명박 정부를 “‘의혹’을 원죄처럼 안고 태어난 엽관(獵官) 정부”라고 혹평하셨지만, 일각에선 ‘선진일류국가’라는 슬로건에서 볼 수 있듯 우리 보수의 한결 성숙해진 모습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임기를 1년여 남긴 현재, 이명박 정부는 보수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수의 양대 축인 ‘시장적 보수’와 ‘안보적 보수’의 어떤 시각에서 보더라도 양극화 강화로 인한 사회통합의 고갈, 남북한 군사적 긴장 고조로 인한 한반도 평화 위기가 우리 사회의 선 자리입니다. 잇달아 발생한 권력형 비리들은 보수 정치세력의 도덕적 빈곤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위기의 보수를 구출하기 위해 등장한 한나라당 비대위의 활동입니다. 한 달여 전 비대위가 출범했을 때 기대한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경제민주화 조항’이라 불리는 헌법 119조2항을 만드신 김종인 선생님과 학문적 양심을 걸고 4대강 사업을 앞장 서 비판해 오신 선생님이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비대위위원장 역시 신자유주의에 대한 ‘규율’과 ‘생애주기 맞춤형 복지’를 강조해 오신 터라 잘하면 보수의 새로운 변신을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비대위 활동을 중간평가할 때 보수의 한계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됩니다. 보수든 진보든 혁신을 위해선 시민적 공감을 모을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데, 전체 숲이 아니라 개별 나무들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대국민 약속’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시민들이 기대하는 것은 상징적 제스처가 아니라 기득권계층의 실질적 양보를 구체화하는 비전 및 정책대안입니다.

우리 사회 보수가 대면한 최대의 과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고만 하는 수구(守舊)와 결별하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수는 전통을 존중하면서 점진적 사회개혁을 모색하는 것을 핵심 이념으로 합니다. 일찍이 부자와 빈자로 이뤄진 ‘두 국민’(two nations) 사회를 ‘한 국민’(one nation) 사회로 변화시키려고 했던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처럼 우리 보수 정치세력은 위기의 공동체를 구출하고 질 높은 사회통합을 일굴 수 있는 정치를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가 생산적 경쟁을 벌일 때 민주주의는 성숙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정치개혁은 정책과 인물의 혁신을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인간 불완전성의 존중이라는 보수적 가치에 걸맞게 시민에게는 겸손한 태도, 시장의 폭력에 맞서 국민 모두를 따듯이 안아줄 수 있는 재벌·노동시장·복지·교육 그리고 대외개방정책을 보여주고 이를 실천할 인물을 적극 발굴하는 게 보수가 갈 길입니다. 

경향신문DB



지난해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여행은 제천 보광암에 머무시는 명진 스님을 찾아갔을 때였습니다. 그날 명진 스님은 ‘이단이 돼라’는 화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진보에게도 울림이 큰, 기존 관념과 관행에서 의연히 벗어나라는 이 화두야말로 지금 보수에게 가장 절실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월악산 깊은 계곡에도 진달래 피는 봄이 오면 함께 보광암으로 다시 한 번 소풍을 가시지요. 선생님의 건강과 건필, 그리고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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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새해가 열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만나는 이들마다 선거를 이야기한다. 정치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선거 못지않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1987년 6월항쟁의 25주년이다.

25년은 시간의 굵은 마디를 이룬다. 현재의 시점에서 6월항쟁을 바라보는 마음은 더없이 착잡하다. 절충적 시각에서 6월항쟁은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실패한 절반의 성공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면 6월항쟁은 ‘좌절된 시민혁명’에 가깝다. 후퇴하는 민주주의, 악화되는 분배구조, 분출하는 사회갈등이 6월항쟁의 현재 성적표다. 민주화 시대를 열었건만 그 주인인 시민 다수가 주변으로 내몰리고 소외되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먼저 1997년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를 지목할 수 있다. 4대 부문 구조조정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사회 양극화를 강화함으로써 ‘1 대 99 사회’를 만들어왔다. 더하여, 미래지향적 산업구조 개편에 전력투구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감세의 기득권 지키기, 4대강 개발의 토건사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준비 안된 개방 전략에만 몰두한 결과다.

6월항쟁의 그늘에 대한 책임을 신자유주의와 보수 세력에게만 떠넘길 순 없다. 이른바 ‘개혁세력’의 책임 또한 엄중하다. 남북 평화공존과 복지국가의 기본 설계 등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비정규직 및 청년실업 해결을 위한 ‘분배의 정치’와 양극화 해소 및 약자 보호를 위한 ‘재분배의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보기 어렵다.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갈망했던 6월항쟁 25년이 흐른 현재,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공화국의 위기’다. 공화국의 의의는 사적 이익에 앞서 공공성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문제는 아시아 민주화를 선도한 우리나라에서 정작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 원리인 배려·책임·정의의 가치들이 여지없이 부정되고 있는 현실이다. 절대권력의 그늘 아래 이뤄진 추악한 측근 비리, 헌정질서를 뒤흔든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디도스 공격,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통고받는 해고의 현실이 ‘보수 대 진보’의 복잡한 이념틀이 아닌 ‘상식 대 비상식’ ‘꼼수 대 정도(正道)’의 간명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곳이 바로 우리 사회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두 개의 선거를 통해 부여된 올해의 과제가 정권교체를 넘어 공화국의 질서를 재구축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선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새로운 재구성이 요구된다. 그 첫번째 시험대는 오는 15일에 치러지는 민주통합당 전당대회다. 민주통합당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현재의 지지가 일종의 조건부 지지라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환멸이라는 정치적 반사이익을 넘어서 공화국의 복원을 위한 ‘새로운 진보’의 국가 비전 및 정책을 보여줘야 한다.


민주통합당 전당대회 예비경선을 통과한 후보자들 l 출처 경향DB



이번에 선출될 지도부는 총선과 대선을 총괄할 중대 과제를 안고 있다. 모바일 투표를 신청한 시민들은 물론 진보적 시민들도 이번 주 진행되는 경선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 한·미 FTA·재벌·비정규직·복지·원전, 그리고 지역주의에 대한 개별 후보들의 정책 및 전략을 꼼꼼히 비교하고, 과연 누구에게 두 개의 선거 및 연합정치의 지휘를,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생산적 통합을 맡길지 지혜롭게 선택해야 한다. 리더십의 일대 혁신 없이 새로운 진보의 정치를 열 순 없다. 이번 전당대회가 위기의 ‘87년체제’를 과감히 뛰어넘을 정치적 첫 단추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해 말 이탈리아 피렌체를 잠시 들렀다. 알리기에리 단테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으로부터 추방됐지만, <신곡>을 통해 근대의 새로운 여명을 알렸다. ‘남들이 뭐라 하던 넌 너의 길을 가라.’ 단테의 메시지이자, 민주통합당에 전하고 싶은 말이다. 위기의 공화국을 구출하기 위해선 좌고우면(左顧右眄)해선 안된다. 부디 새로운 진보를 열기 위한 길을 당당히 걸어가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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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2011년 우리 사회를 돌아볼 때 먼저 떠오르는 말은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다. 티핑 포인트란 모든 게 한꺼번에 갑자기 변화하는 극적 순간을 말한다. 당연했던 게 부자연스러운 게 되고 낯선 게 외려 익숙해지는 지점, 그 티핑 포인트를 우리 사회는 막 지나고 있다.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문화제를 마친 후 풍등을 날리고 있다.| 김문석 기자 | 경향신문 DB

희망버스 행진, 안철수 현상, 나꼼수 돌풍은 구체적 증거다. 이 세 현상엔 노동, 정당, 공론장의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 우리 사회 모순의 핵심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 불신에 짜증과 분노가 더해지는 정당정치, 권력 비판이란 본연의 과제를 망각한 공론장이 현재의 자화상이라면, 달리는 희망버스, 아름다운 양보, 통쾌한 말의 잔치는 미래의 풍경이다.
 
티핑 포인트에 담긴 경영학적 함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인문학적 개념인 ‘국면사’(history of conjuncture)란 말을 써도 좋다. 국면사란 상이한 사건들을 포괄하는 이른바 시대정신의 역사다. 해방 이후 나라 만들기의 양축을 이룬 산업화 25년과 민주화 25년을 넘어 우리 사회는 새로운 국면의 문턱에 서 있다.

문제는 이 국면의 불확실성에 있다. 보라. 세계 최저를 다투는 출산율, 명문대 입학만을 향해 달리는 초·중·고 12년의 기나긴 레이스, 천문학적 등록금과 50%를 밑도는 고용률이 젊은 세대의 생애사를 이룬다. 그 다음에 펼쳐지는 것도 우울함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지는 못한다.직의 불안, 퇴출의 공포, 그리고 아무런 대책 없는 노후를 주조하는 기본 코드는 불안과 좌절과 분노다. 대체 언제부터 시민 다수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듯 ‘쓰레기가 되는 삶’을 느끼게 된 걸까. 우리 삶을 구원할 희망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다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정치의 중심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한 국가의 기본 구조가 경제와 사회로 이뤄져 있다면, 그것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은 게 바로 정치다. 그래서 자원과 가치의 합리적 배분이 정치의 기본 과제라고 가르친다. 문제는 우리 현실이다. 사회와 문화는 티핑 포인트를 지나고 있는데 정치는 여전히 철지난 과거의 시간에 안주해 있다.

내게 지난 한 해 가장 인상적인 정치적 사건은 9월6일 안철수 교수가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기자회견과 10월3일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된 야권후보 단일화 경선 과정이다. 안 교수의 아름다운 양보는 차가운 권력을 온기 있는 권력으로, 젊은 유권자들의 인증샷 놀이는 근엄한 정치행사를 신나는 축제마당으로 바꿨다. 낡음과 새로움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티핑 포인트의 순간들이다.

시민정치의 이러한 부상에 긍정적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최장집 교수가 강조하듯 정당은 여전히 중요하다. 시민정치에 담긴 포퓰리즘 성향이 소망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유권자의 다수를 이루는 2040세대가 정치 리더보다는 삶의 멘토에 더 친근감을 느끼는 현실이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이들에겐 낯설고 때론 불편할 수도 있다. 거의 모든 사안마다 쟁투적 구도를 이루는 상황에서 선뜻 어느 하나를 정치적으로 지혜롭게 선택하기도 어렵다.

시민정치의 등장에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정치 지체’ 현상이다. 시민들은 이미 저 멀리 앞서 있는데 좌우를 막론하고 정당들은 태평양에 외롭게 떠 있는 갈라파고스 군도와도 같다. 쇄신과 통합에 앞서 요구되는 것은 정직한 자기 성찰이다. 핵심은 간판 교체가 아니라 보수적 ‘강남당’, 중도진보적 ‘늙은당’, 진보적 ‘무기력당’과의 과감한 결별이라는 것을 여의도만 모르고 있다. 시민 다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스타일의 변신이 아니라 진정성의 태도와 콘텐츠의 혁신이다.
 
이제 한 주만 지나면 두 개의 선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월요일,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 삶에 의미 있는 건 정치와 사랑이라고 말한 게 문득 떠오른다. 오래전 한 시인은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주 먼 훗날 어느 숲 모퉁이에서 / 기억의 숲 속에서 / 문득 나타나 /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 우리를 구원해다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사랑과 정치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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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