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본 임화의 작품 <一九二七작코·반젯틔의 命日>는 읽어 내려가기조차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한자어는 한자어대로 난해하고, 구미에서 막 건너온 외국어 고유명사는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도 난삽하기 그지없다. 말풀이부터 해보아야 할 판이다.

먼저 이 까다로운 한자 흐리다” “구름이 끼다의 뜻이며, “명일命日은 곧 기일忌日이다.

작코반제티는 오늘날의 한국어 문법상의 표기법에 따르면 니콜라스 사코Nicolas Sacco와 바르톨로메 반제티Bartolome Vanxetti이다. 이탈리아 출신 구두 수선공 사코와 생선 장수 반제티는 고국에서의 생활고를 견딜 길이 없었다.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이민자로서 평범한 일상을 지냈으나 19204월 미국 매사추세츠의 한 제화 공장에서 일어난 살인강도 용의자로 체포된다. 회계 담당자와 공장 수위가 총에 맞아 숨지고 종업원들의 급료가 탈취당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일이 이렇게 크고 끔찍했는데도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하는 증인, 증거가 나왔어도 법원은 요지부동이었다. 사코와 반제티는 살인강도로 몰린 채 햇수로 8년이나 구금되어 있다가 192749일 메사추세츠 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3823일 전기의자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두 사람의 경우는 곧잘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린다. 이들에 대한 동정, 미국 법원을 향한 항의는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임화의 시 <一九二七작코·반젯틔의 命日>에 나오는 제1의 동지에서 제8의 동지에 이르는 항의는 그저 좌익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에 한하지 않았다. 불의를 참지 못한 많은 미국 시민들이 항의를 조직했고 이사도라 덩컨 같은 유명인도 구명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일기는 흐렸다. 사코와 반제티는 미국과 세계의 구명운동을 뒤로 하고 잔뜩 구름 껴 답답한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조선 시인 임화에게도 비상한 인상을 심어 주어 이와 같은 작품을 낳게 했다. 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전기” “발전들은 사코와 반제티가 전기의자에서 목숨이 끊긴 사실과 잇닿아 있다. 발표 지면 <예술운동>의 부기에 따르면, 임화가 이 시를 탈고한 때는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되고 닷새가 지난 1927828일이다.

또 하나 문맥을 세심히 따라갈 부분이 있다. “-가 각각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Ruxemburg, 1871~1919)를 가리킨다는 점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우경화, 전쟁 예산을 통과시킨 행태(1차세계대전 전비) 들에 반기를 들고 새로이 스파르타쿠스 단을 결성해 결국 독일공산당으로 발전시킨 비타협적인 운동가, 조직가다. 이들은 의회 안에 안주한 독일사회민주당과 결별했으며 노동자-병사소비에트를 정점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하다 1919115(추정) 독일 군부와 손잡은 극우파 민병대에 의해 학살당하고 만다앞서 소개한 시행의 뒤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2인터내슈낼은
드듸어 兩同志救命아메리카위원회의 전세계 노동자의 쩌너랠 스트라익의 희망을 謀叛하였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힘이 아니다
푸로레타리아의 조직이 아니다
룸펜 인테리켄차의 허울조운 逃避窟이다.

우리들은 새롭은 힘과 계획을 가지고 戰場에로 가자
우리는 작코, 반젯틔를 죽인 電氣發電者가 아니냐

[중략]

그러고 우리들은 發電을 하자
우리의 戰列의 새로운 힘을 보내기 위하야
동모여 그놈들의게 생명을 도적맞인 우리들의 사랑하는 前衛
조금도 염려는 말어라
뒤에는 무수한 우리가 있지 않느냐
가장 위대한 세계 푸로레타리아트의 조직이
_임화, <一九二七작코·반젯틔의 命日>에서


2인터내셔널은 초기 사회주의운동 명망가들이 대거 참여한 사회주의 정당 협의 기구이다. 1차세계대전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목숨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도 분열시켰다. 2인터내셔널은 파행 끝에 1919년 부활하지만 러시아공산당이 주도해 19193월에 결성된 제3인터내셔널 곧 코민테른에 의해 격렬한 공격을 받는다. 당시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배신자로 비난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진영을 압도해 나갔는데 임화의 시구는 이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임화는 일찍부터 영화에 눈뜰 정도로 감각이 있었고, 사코와 반제티 운명의 날과 별로 시차가 많이 나지 않는 창작을 할 만한 감각도 있었다. 이 시를 쓸 무렵, 임화는 변변한 공산주의 운동 경험이 없는 식민지 무명 시인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구와 빡테리아’>에서 보듯 거칠 게 없었다. 임화는 전위前衛운운하며 제3인터내셔널에 기대 1”에서 8”에 이르는 국제연대를 줄줄이 호명했다. 거칠 게 없었고 겁날 게 없었다. 그 감 그대로, 임화는 시 <우리 오빠와 화로><현해탄>으로 달려갔다. 평론은 전위적인 만큼의 극좌 방향으로 길을 잡고 달려갔다. 임화는 박영희를 젖히고 김기진을 젖혔다. 당시 임화보다 선명하고 붉은 이론전을 펼친 투사는 없었다. 그러나 임화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평론가 유종호의 글을 빌린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신문으로 전해지는 외국의 사례를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은 시의 계기가 지식인의 관념 속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우리의 현실에서 직접 촉발된 것이 아니고 풍문을 통해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어떤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직접성의 결여는 일본의 당대 극좌파 논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임화의 실천비평에서도 엿보이는 한계라 할 수 있다.”

<一九二七작코·반젯틔의 命日>에 부친 문단이지만 임화의 활동 전체, 글 전체를 들여다볼 때에도 떠올릴 만한 글이 아닐까 한다. 치고 나간 것 자체가 장쾌한 노릇이라고 한다면 다음 의논은 어떻게 이어야 할까. 임화는 서둔 만큼 빈 구석도 많았고 풍문 너머의 1차 자료에 육박하는 지적 성실을 갖추지 못했다.
그는 내실 없이 허둥대다 결국 일제가 주는 정보에 갇혀 일제에 부역했고 해방공간의 남북한에서 기회주의로 의심받을 만한 행태를 보였다.

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을 재판해 임화를 비롯한 남로당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의 야비하고도 저열한 놀음은 그것대로 욕을 먹어 마땅하지만 임화의 1941년 이후 행적을 어찌 상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연구자들이 애써 작성한 임화 연보를 들여다보며 몇 번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을 지었다 무너뜨린다. 임화의 돌진, 과속, 허둥지둥 들에서 시대의 어떤 징후가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아서다. 뭔가에 지펴 막 시작하던 임화의 진정은, 얼마간 시간이 흐른 1938, 절창 <현해탄> 머리의 두 연에 이렇게 집약된다.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치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_임화, <현해탄>
에서

어린 사슴에게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사슴들은 거친 들로 달려갔다. 이때까지만의 연대기가, 연보가 상쾌한 문학사가 있다. 한국 문학사의 많은 인물이,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인물이 그런 연대기를 남겼다. []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 왔다. 오른쪽이 사코, 왼쪽이 반제티.
*“쩌너랠 스트라익제너럴 스트라이크general strike” 총파업을 말한다. 1920~1940년대 저널리즘에 보이는 쩨네스트” “쩨네-스트들도 제너럴 스트라이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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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임화의 전기 자료는 참으로 특이하다. 임화는 18세 이후 저널리즘에 글을 남기면서부터, 그 자료 자체만 전기 자료로 남긴 인물이다. 그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 지인의 회고조차 거의 없다.


임화는
18세 이후 저널리즘에 발표한 글 자체가 본격적인 이력서, 연대기 자료, 전기 자료가 되는 글쟁이다. 그가 스스로 말한 자신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자료는 일체 모아 봐야 다음 두 조각이 전부인 듯하다.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어머니 슬하에 나는 행복된 소년이었습니다. 20세 전후의 청년시대 중학교를 5년급에 집어던지고 난 지 2년 후 어머니도 돌아가고 자산도 파하고 나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서울 거리를 정신나간 사람처럼 헤매였습니다. 괴로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강한 행복에 불탔습니다.
_<삼천리문학>, 19381월호에서


열아홉 살 때 가정의 파산과 더불어 그의 평화한 감상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_“어떤 청년의 참회”, <문장>, 1940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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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는 “1908년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4, 5세 때 아버지가 소기업을 경영하여 17, 8세 때까지 소시민의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났/“1921년부터 경성시에 있는 보성중학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문학에 흥미를 느껴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진술을 남기기도 했다(이 재판의 결과 임화는 이승엽, 이강국 등 친박헌영-남로당 세력과 함께 사형당한다).

소략한 자료를 보면
, 임화는 선대의 출신이야 어떻든 유년 이후 청년기 직전까지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낸 듯하다. 보성중학교에서는 후일 남로당 선전 및 조직의 맹장이 된 이강국, 시인 이상, 평론가 이헌구 들이 동기였고 시인 김기림, 평론가 김환태, 카프 이론 투쟁을 선도했던 평론가 조중곤 들이 1년 후배였다.

이후 집안의 파산을 맞은 임화는 192517세쯤 졸업 직전에 학교를 자퇴한 듯하다. 어머니가 돌아간 때도 이 즈음인 듯하다. 그러나 임화는 집안이고 학교고 간에 무언가에 지펴 있었다. “나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서울 거리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매였습니다. 괴로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강한 행복에 불탔습니다라는 회고에서 보이는 정신 나간 사람의 행복이란 표현이 참으로 의미심장하거니와 임화는 그때 이미 표현인정투쟁에 지핀 정도를 지나 불타고 있었을 것이다.

임화는
1926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본격적인 글 생산을 시작한다. 1926년 열여덟 살 때의 시는 유치했지만 평론 <근대문학사에 나타난 연애> <위기에 임한 조선영화계> 두 편은 심상찮다. 임화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근대와 연애를 서술 항목으로 포착할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예술/산업/오락 어느 면에서나 당대 최신 형식이자 갈래인 영화를 이미 노려보고 있었다. 이후 임화는 1928년 영화 <유랑> <혼가> 들에서 주연 배우를 맡았고, 19431월부터 194412월까지 조선영화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근무하면서는 <조선영화연감> <조선영화발달사> 편집을 맡았다. 이렇듯 임화는 문학 부문뿐만 아니라 영화 부문에서도 평론, 연기, 자료 정리를 두루 맡아 해내며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그의 시는 1927년부터 꽃피기 시작한다. “임화林和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와 겹친다. 임화는 이 무렵 다다이즘 시를 쓰는 한편 카프에 가입했고 무산계급문학에 대한 관심을 본격화한다. 앞서 소개한 <지구와 빡테리아’>와 함께 이 시기 임화 창작 경향을 대표하는 시 <一九二七: 작코·반젯틔의 命日>를 몇 구절 보자. “다다이즘시라, 다다이즘의 난해 분위기를 맛보시라고 발표 당시의 표기를 살렸다. 어휘 및 한자 풀이는 다음 글에서 부기하겠다. 

뿌르죠아지의 XX
1918
이백만의 푸로레타리아를 웰탄 요새에서 XX
그놈들의 XX행위는 惡虐한 수단은
스팔타키스트의 용감한 투사
우리들의 ’, ‘를 빼앗었다.
세계의 가장 위대한 푸로레타리아 동모를
혁명가의 묘지로 몰아너었다.
그러나 강철같은 우리의 戰列
X人者그들의 暴虐도 궤멸케 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아즉도 그놈들은 완강하다
그놈들의 虛構手段
XX행위는 아즉도 地球의 도처에서 범행되어간다
1917태양이 도망간 해
세계의 우리들은 820地球發電報를 작성하였다.

1의 동지는 뉴욕 사크라멘트 등등지에서 수십층 死塔에 폭탄세례를 주었으며
제2의 동지는 휜랜드에서 살인자 米國의 상품에 대한 非買同盟을 조직하였고
3의 동지는 코펜하견에 아메리카 범죄자의 대사관을 습격하였으며
4의 동지는 암스텔담 궁전을 파괴하고 군대의 총 끝에 목숨을 던졌고
5의 동지는 파리에서 수백명 경관을 XX하고 다 달아났으며
6의 동지는 모쓰코바에서 치열한 제3인터내슈낼의 명령하에서 대시위운동을 일으키었고
7의 동지는 도쿄에서 XX의 대사관에 협박장을 던지고 갔으며
8의 동지는 스이스에서 지구의 강도 국제연맹본부를 습격하였다
(그때의 그놈들은 한장의 二白兩짜리 유리창이 깨여진 것을 탄식하였다눈물은 廉價)
오오 지금 세계의 도처에서 우리들의 동지는 그놈들의 폭압과 XX에 얼마나 장렬히 싸화가고 있는가
 
그러나
인류의 범죄자
역사의 도살자인
아메리카뿌르죠아의 정부는
사랑하는 우리의 동지
세계 무산자의 최대의 동모
작코, 반젯틔의 목숨을 빼엇었다
電氣
(푸로레타리아트의 發電하는 電氣)
_임화, <一九二七: 작코·반젯틔의 命日>에서



이 작품은 카프 도쿄 지부에서 발간한 <예술운동>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발표 당시 1927828일에 탈고한 것으로 부기되어 있다. [계속]

*사진은 1932년 첫 부인 이귀례와 함께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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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林和, 1908~1953.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스무 살에 이미 영화/연극/미술 평론을 시작해, 스물한 살에는 이미 프롤레타리아 문학론의 주요 논객이 되었으며, 대선배 김기진과 박영희의 문학론을 차례로 제압하고 조직 주도권을 장악해, 1932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KAPF) 서기장에 오른 임화의 얼굴이다.


임화는 19081013일 서울 낙산 아래, 그러니까 오늘날의 서울 동숭동에서 태어났다. 해방공간에서도 좌는 물론 우를 일정정도 포괄한 문학 조직 활동의 선편을 쥐고 있었지만 박헌영 노선에 따라 월북해 해주에서 남로당 활동(대남 공작을 포함한 활동이었는 듯)하는가 하면, 북의 중앙에서는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활동 등을 활발히 펼쳤다. 임화는 1950년 한국전쟁이 나고 북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고서야 다시 고향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의 마음을 그는 시에 이렇게 담았다.

남은
원쑤들이 멸망하는
전선의 우룃소리는
남으로 남으로 멀어가고

우리 공화국의 영광과
영웅적 인민군대의
위훈을 자랑하는
무수한 깃발들

수풀로 나부끼는
서울 거리는
나의 고향
잔등의 채찍을 맞으며
사랑한 우리들의 수도다.
_임화, <서울>에서

서울에 보기 드문 유의 아우라를 부여한 이 서울내기의 시작은 다다이즘에서 출발했다. 1927년 발표한 시 <지구와 빡테리아’>의 머리 부분을 보자. 이상의 <오감도> 못잖은 난해 시구다.

기압이저하하였다고 돌아가는철필을
도수가틀닌안경을쓴 관측소원은
대에다 쾌청이란백색기를내걸었다


그러나 이 시기 임화의 쓴 다다이즘 경향의 시는 그저 난해할 뿐만 아니라 시의 질 자체가 우수했다
. 그의 다다이즘 이력은 그 다음 이력에 모순 없이 녹아든다. 시의 전위-아방가르드가 계급투쟁의 전위-아방가르드로 옮아가는 풍경은 얼마든지 자연발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임화는 <지구와 빡테리아’>를 쓴 해인 1927년 카프에 가입해 아나키즘과 투쟁해 카프의 볼셰비키화를 주도한다. 이후 카프 서기장이 되기까지 문단의 선배들과 벌인 논전 또한 명도와 채도가 높은 선명성투쟁으로 장식되는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1928년에는 영화 <유랑流浪> <혼가昏家> 들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는 등 가장 현대적인 예술 갈래에도 끝없는 관심과 실천을 보였다. <우리의 소원>의 가사를 쓴 것으로 유명한 영화인 안석주는 영화배우 임화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떤 실없는 사람이 씨를 코레아 바레티노라고 별명을 지은 만큼 서양서 온 미남자 같은 미목수려의 청년시인이다. 어디나 그의 모습 중에서 도회인의 면영이 구김새없이 드러나지만 그의 창백한 혈색이라든지 그늘진 눈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중의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민하던 그때에 면영을 연상케 하는 때도 있다.
_조선일보, 1933121일자


안석주가 빌려온 바렌티노는 곧 무성영화 시대의 수퍼스타이자 최초의 아이돌 배우, 마초 배우, 남성 섹스심벌로 평가되는 이탈리아 출신 할리우드 영화배우 루돌프 발렌티노(1895~1926)이다. [계속]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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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金祐鎭, 1897~1926). 1920년대 그 누구보다도 뜨겁고 환한 문학 불꽃을 사르다 스스로 세상을 버린 김우진의 얼굴이다.


한국 희곡사-연극사 연구에서 우뚝한 업적을 남긴 연구자 유민영은 김우진에게 기성 문단을 훨씬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점에서는 유일한 극작가라는 평가를 부친 바 있지만, 김우진의 문학 활동은 오늘에 견주어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김우진은 1897년 전라남도 장성군 관아에서, 장성군수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규는 군수였을 뿐 아니라 대지주였고 슬하에 11남매를 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김우진에게는 집안의 적장자嫡長子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을 이끌어야 할 가부장의 의무가 있었다. 이는 숙명이었다. 이때 대지주의 가정이란 장원 곧 대농장의 머슴, 고용 들을 포함한 몹시 봉건적인 개념의 가정이었다.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김우진은 1915년 일본 큐슈의 구마모토농업학교熊本農業學校로 진학한다. 예비 대지주, 예비 농장주의 경영수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재학 중이던 1916년에는 경학원經學院 이사 정운남鄭雲南의 딸과 정점효鄭點孝 결혼했고 정점효 사이에서는 자녀 둘을 두었다.
대지주와 경학원 이사의 인연 맺기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경학원은 중세 국립대학인 성균관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등되면서 몸을 바꾸게 된 유교 교육 기관이다. 경학원은 철저하게 일제에 순응적인 곳이었고, 일관해서 봉건성을 유지한 곳이었다. 가부장 김성규는 아들에게 농장 경영수업을 시키는 한편 경학원 이사 집안과 혼인함으로써 봉건 가정의 안팎을 다졌다고 하겠다.

김우진은 그러나 이미 구마모토 시절부터 가부장 수업 바깥에서 취향을 드러내고 적성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구마모토 시절, 김우진은 본격적으로 시 습작을 시작했고 영어 우등생으로 영어 교사로부터 귀염을 받았다. 그리고 1919년 드디어 와세다 대학 예과를 거쳐 1920년 영문과에 들어간다. 1924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졸업논문으로 영문 논문 <Man and Superman: a Critical Study of its Philosophy>을 제출했다.

구마모토의 시 습작 시절을 거쳐, 김우진은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연극에 빠져들었다. 1920년에는 조명희, 홍해성, 고한승, 조춘광 등 한국 문학사-연극사 초기의 인물들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을 조직해 조선에서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희곡과 시의 창작 그리고 평론에도 몰두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졸업 후 1924년 목포로 귀향해서는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에 취임하는 등 집안일로 보이는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마르크스와 다눈치오와 스트린트베리와 버나드 쇼와 루이지 피란델로와 유진 오닐과 카렐 차펙을 읽으며 새로운 시대를 호흡하던 이 대지주의 아드님 겸 예비 가부장은 자신이 몸담은 가정과 사회 자체를 봉건의 질곡으로 여겼다. 쓴 글 곳곳에 드리운 답답함” “우울의 그림자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의 예고편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답답함” “우울에 지펴 그저 울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치고나갈 때는 치고나간 평론가였다.

예컨대 김우진은 1926년에 이미 유진 오닐의 대표작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 구성은 상당한 극적 발전을 갖추었다. 첫째로 <안나 크리스티>에 비해서 부자연한 곳이 없이 극히 자연스러운 기분으로 욕망의 쟁투가 불가피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점, 또 애비의 성격 및 액션이 균형을 얻어 놓은 점, 순실한 이벤의 성격이 죽은 어머니의 유령에서 벗어나 가지고 참사랑에 희생을 해가는 경로가 훌륭하게 좋다는 평을 부칠 만큼 앞서 나간 눈 밝은 평론가였다. 참고로 <느릅나무 밑의 욕망>1924년 초연작이다.
또한 로보트라는 아이콘을 만든 체코 극작가 카렐 차펙에 대한, 또 차펙을 낳은 체코 연극사에 대한 김우진의 평론은 체코의 현역 문학 연구자 즈뎅까 끌뢰슬로바가 차펙 학을 위해서라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인정한 바 있다.

새것에 대한 감식안에서도 김우진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김우진은 1926<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한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조선문학이 있은 지 약 10년이다. [중략] 10년의 조선문단 역사가 한편에서는 새 맹아를 가졌으면서도, 10년 전의 당시보다 지금은 늙어빠진 문인들의 압도에 그 맹아의 출현을 촉진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중략] 오늘의 새 인생관, 새 시대의식, 새 세계의 창조를 요구할 때, 이광수류의 공중누각의 이상주의가 만연함을 방관하고 있을 수가 있을까. [중략]

이광수의 인생에 대한 태도의 특색인 안이한 인도주의, 평범한 계몽기적 이상주의, 반동적인 예술상의 평범주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한 통찰의 부족으로부터 왔다. 더구나 그는 이러한 인생의 평범주의에 앉아서 오늘 조선문학도 그러한 평범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 평범이란 그의 말 속에는 다만 한가한 가정의 한가한 소일거리가 될 만한 문학이라야 영구 불변한 가치를 갖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중략]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인이 아니오, 재화(才華_화려한 재주)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오, 다만 내용, 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 들어가려는 생명력, 우둔하더라도 힘과 발효에 끓는 반발력, 넓은 벌판 위의 노래가 아니오, 한 곳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

_김우진,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그때까지 대중에게 이광수의 지위는
절대였다.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할 새것의 선도자였으니까. 그러나 김우진의 눈에 걸린 이광수의 후진성은 매장해 마땅할 그 무엇이었다.

읽으며, 극단을 꾸리며, 시대를 고민하며, 미국-영국-이탈리아-체코 작가들의 작업까지 두루 살폈던 김우진은 희곡 창작에서도 시대를 앞서나갔다. 가정사와 얽힌 자신의 고통을 아로새긴 희곡
<두더기 시인의 환멸>, 목포 유달산 아래 빈민굴 속 사창가를 드라마에 아로새긴 희곡 <이영녀>, 베르디 오페라의 패러디까지 포함한 전위적인 실험극 <난파>, 그리고 표현주의 실험극 <산돼지>에 이르기까지, 김우진은 가정과 사회의 질곡 아래서도 생명력과 반발력과 통곡하는 부르짖음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사력을 다하다 끝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최후 또한 극적이었다. 창작과 글쓰기에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1926, 날짜까지 부치면 192684, 김우진은 극단 생활 중 알게 된 당대 최고의 인기 연예인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한다. 둘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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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金起林, 1908~?), “모던뽀이” “모더니스트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시인 김기림의 얼굴이다.



김기림은 1920년대에는 니혼日本 대학 문학예술과에서, 1930년대에는 도호쿠東北 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했는데 졸업해 귀국한 뒤인 1930년과 1939년의 얼마간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이 사진은 1939년 조선일보 재직 당시에 찍은 듯하다.김기림의 시 쓰기, 시집 내기는 꾸준했다. 1934년 첫 시집 <태양의 풍속>을 펴낸 뒤, 1936년 시집 <기상도>, 1946년 시집 <바다와 나비>를 거쳐 1948년 마지막 시집이 된 <새노래> 들을 낼 때까지, 아무튼 시인 김기림은 꾸준히 쓰고 냈다. 하나 그에 대한 평가가 후한 것만은 아니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조동일 교수는 일찍이 김기림식 모더니즘 문학론 및 시 작품에 대해 현실 인식의 정당성은 문제삼지 않으면서 감각을 키우고자 하니 언어가 말초화되었던 것이라 했다. 또 시집 <기상도>에 대해서는 감각을 신선하게 하려는 시도가 지나쳐 무감각을 초래했다고 냉정하게 획을 그었다(<한국문학통사>[2]에서).

기실 김기림의 모더니즘은 불분명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조동일의 설명을 계속 빌리면, 김기림의 모더니즘은 서구시의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여서 동시대 문명의 인상을 서구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잡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기림은 서구화된 감각의 기교를 동원하는 거의 모든 추이가 착종혼합된 일본 문단의 유행을 수입하는 데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고민을 미봉하고 말았다. 아래 몇 작품에서 보이는 수사와 시어는 미봉의 예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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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의 옥상정원의 우리 속의 날개를 드리운 카나리아니히리스트처럼 눈을 감는다. 그는 사람들의 부르짖음과 그러고 그들의 일기에 대한 주식에 대한 서반아의 혁명에 대한 온갖 지꺼림에서 귀를 틀어막고 잠속으로 피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의 꿈이 대체 어데가 방황하고 있는가에 대하야는 아무도 생각해보려고 한 일이 없다.

_김기림, <옥상정원>에서(<태양의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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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빛 꽃을 심거서
남으로 타는 향수를 길으는
국경 가까운 정거장들.

_김기림, <따리아> 전문(<태양의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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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단여 오리다
선부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에게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입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_김기림, <세계의 아침>에서(<기상도>)


1945
년이 지나면서 쏟아낸 해방의 노래, 민주주의의 노래, 또는 <바다와 나비>와 같은 절창 들은 김기림 시 인생에서 오히려 예외에 속할지 모른다. 하나 이제사 김기림에게 야박하게 굴 생각이 없다. 김기림의 시 쓰기는 자신이 후원한 이상의 시 쓰기만큼이나 종작없었으나 그 종작없음은 모색기 한국어문사의 악전고투의 일면을 드러내는 창이기도 하니까. “한국어문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말 고생들 많았구나하는 실감을 주니까.

가령 그 모색과 실감이란 점에서는 김기림이 1931년에 발표한 희곡 <천국에서 왔다는 사나이>가 떠오르는 것이다. “: 일천구백삼십일년 이월(음력 섣달 그믐날)” “: 서울 시외로 설정한 이 희곡은 제1장에서 섣달그믐 빚 독촉에 시달리던 실직자 가장이 가족을 살해한 뒤 자살해, 2장에서는 목 없는 저승의 시체로 등장하고, 3장에서는 이승의 시체로 등장해 현실과 환상/현실과 초현실의 오가며 비극을 연출한다.

19291024일 미국 월스트리트의 주각가 대폭락하고, 그 여파가 일본에도 조선에도 여지없이 미친 그때도 해고는 살인이었다. 주인공은 왜 모가지 없이 천국으로 왔는가? 공장에서 잘린 모가지는 수습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목 없는 사나이의 대사]
불러서만 오나요. 마음에 있으면 오지. 돈 없고 먹을 것 없는데 그래도 섣달 그믐이라고 떡장수 온갖 빚쟁이는 다 모여드는구려. 그래 생각다 못해서 그만 나는 이 손으로 바로 이 손이외다, 아내와 어린 것들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그리고 내 손으로 내 목을 매어 죽었답니다.

[목 없는 사나이의 대사]
나으리 그런 게 아니라 내 모가지는 지금 서울 동양직조주식회사에 있답니다.

[목 없는 사나이의 대사]
이 업계내는 공전의 불경기가 몰려왔답니다. 물가는 끝없이 내려가나 돈은 귀하기 짝이 없이 되자 우리 회사 주인은 소위 산업합리화를 단행한다고 하고 우리들 직공 삼십명을 한꺼번에 목을 벴답니다.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값이 싼 우중에 팔리지 아니하니 일꾼을 줄인다는 게랍니다.

[목 없는 사나이의 대사]
 
국제노동국의 조사에 의지하면 전세계에는 나처럼 모가지 없는 사람이 일천일백팔십만명이나 된다고 하나 그 외에 이러저러하게 된 놈까지 합치면 이천만이 넘어요 글쎄.

[
목 없는 사나이의 대사]
 
금년 일년 동안의 세계 각나라 모가지 없는 사람들의 수효를 통계로 보면 저- 구라파의 오스트리아가 십구만일천명이고 독일이 삼백이십오만이천명이고 영국이 일백오십칠만구천명이고 이태리가 사십일만육천명이고 폴랜드가 이십이만삼천명이고 동양의 일본이 삼십육만일천명이랍니다. 그밖에도 차례에 빠지는 나라가 없답니다.



천국의 문지기는 안 그래도 천국이 만원이라며 목 없는 사나이의 입국을 사절한다. 천국의 문 앞에서 재회한 목 없는 사나이의 가족들은 지옥에서야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우? 배를 쫄쫄 조리는 것보다야 낫겠지하며 지옥으로라도 보내달라고 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옥도 만원이라며 지옥행조차 막는다.김기림이 발음하고 쓰고 고른 말은 카나리아’ ‘니히리스트’ ‘서반아’ ‘따리아’ ‘쥬네브뿐만이 아니었다. ‘해고주식회사산업합리화국제노동국불경기생산과잉또한 모더니스트 김기림이 선택한 말이었다. 물론 어느 쪽도 미봉인 채의 표현과 의미와 수사에 그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아쉬운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선 한국어문사는 선 김에 다시 한 번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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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鄭芝溶, 1902~?). 어느결에 독서와는 영영 인연을 끊어버린 아저씨나 아줌마라도, 내가 한국어와 무슨 상관이 있소, 정신으로 잘살고 있는 십대 껄렁패라도 그 이름만큼은 알고 있는 시인 정지용. 이 사진은 정지용이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이십대 말 또는 삼십대 초에 찍은 것으로 짐작된다.




아저씨아줌마에서부터 십대 껄렁패라도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된 데에는 그의 시 <향수>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노래와 교과서에 새겨진 대표적인 한국어문학사 유산 <향수>. 읽지 않고 넘어가면 섭섭하리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_정지용, <향수> 전문


나게는
작품성을 논할 능력과 자격이 없다. 그러나 감동에 대해 말하라면, “감동했다고 말하겠다. 또는 다음 예들이 있다.
 

얼골 하나 야
손바닥 둘 로
폭 가리지 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 만 하니
눈 감을 밖에.

_정지용, <호수 1> 전문

 

절정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박힌다. 바람이 차기도 함경도咸鏡道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팔월八月 한철엔 흩어진 성진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_정지용, <백록담>에서

아득한 옛날에, 상고할 길 없는 옛날에 한국어의 역사가 시작되고, 어느새 한국어를 이렇게 쓰고 살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어의 역사 안에서 한글이라는 문자의 역사까지 발생했다.
먼 옛날에 물려받아 오늘날 일상놀이문학예술교육출판언론행정 어느 분야에서든 널리 쓰게 된 말이 보다 세련되길 바라는 마음, 보다 깊이 있는 표현에 육박하길 바라는 마음은 지극히 당연해서 무슨 설명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정지용은 그 세련, 그 육박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더구나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민족어 사용조차를 허용치 않은 시대를 지나며 민족어를 다듬고 이만한 작품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들을 발굴해 문단에 올린 공 또한 기억해야 하리라.

제국주의 시대, 파시즘 시대에 그에게도 똥물이 튀었다. 앞서 이광수의 얼굴과 함께 문인투서사건을 소개했지만, 정지용은 창씨개명과 관련해 이광수의 집으로 비난 투서를 보냈다는 혐의를 받아 일제 경찰에 의해 구류를 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1939년 이광수를 회장으로 해 결성된 부일선전기관인 조선문인협회(1943년 조선문인보국회)에도 이름을 올려야 했다. 여기 이름을 올린 덕분에 종종 구설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 시대에 이름 빼앗기기는 어쩔 수 없는 똥물이었다. 적어도 정지용은 이광수나 김동환과 같은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는 휘문고보(해방 전)와 이화여대 및 서울대(해방 후)에서 교편을 잡으며, 몇몇 잡지사와 경향신문(해방 후 잠시 주간으로 재직)에서 활동하며, 평생을 오로지 타고난 교사로 글쟁이로 시인으로 살았을 뿐이다. 타고나기를 현장 활동가 체질이 아니었던 정지용은,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광기가 극에 달했을 때 그저 침잠해 있었을 뿐이다.

<시경>과 한시와 영문학 교양을 한껏 호흡하며 한국어에서 노닐던 이 시인은, 그러나 해방된 마당에서는 거센 말도 내뿜었다. 미소공위, 쌀 유통, 통일, 민족 반역자 숙청에 관련해서 말이 거세졌다. 아래는 그 한 예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온상이고 또 그들의 최후까지의 보루이었던 815 이전의 그들의 기구이 기구와 제도를 근본적으로 타도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오.
혁명을 거부하고 친일 민반도(民叛徒: 민족반역자패거리) 숙청을 할 도리 있거던 하여 보소.

_정지용, <민족반역자 숙청에 대하여> 전문

해방공간에서, 정지용은 합리적인 남북통일을 꿈꾸었던 듯하다. 정치적으로는 김구와 여운형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듯하다. 1946년에는 좌익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사단은 여기서 생겼다. 남한 정부는 정지용을 악질적인 사상검열조직인 보도연맹에 묶어버렸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나자, 한쪽의 주장에 따르면 19507월에 좌익계 제자들에 의해 납북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월북했다고도 한다.

1995102일치 통일신보에 정지용의 3남 정구인鄭求寅의 기고문이 실렸다. 당시 북에서 방송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정구인은, 기고문을 통해 정지용이 북으로 오던 중 소요산 기슭에서 미군의 비행기 기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또 정지용의 발걸음에 대해서는 남조선위정자들은 나의 아버지가 납북당했다는 악선전을 벌인다며 화를 냈다.

남한 주민으로 살면서, 2년이나 지나 남한 언론을 통해 통일신보 기고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지용의 장남 정구관鄭求寬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의 소식을 확인하니 꿈만 같다면서도 다만 동생의 기고문을 빌미로 새삼스레 월북설 등이 제기될까 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971011일치).

월북이나 납북이나 정지용 시어에는 없는 말이다. 북의 3남의 날선 수사, 남의 장남의 구차한 걱정이 어느 쪽이고 속상한 풍경을 지어낸다. 속상하고, 또 퍽이나 쓸쓸한 풍경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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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洙, 1892~미상), 한국 문학사에서 근대적 장편소설의 효시로 평가되는<무정無情>의 저자 춘원春園  이광수의 얼굴이다. 1932년 그의 나이 마흔하나에 찍은 사진에서, 얼굴에 초점을 두고 따냈다.
 


연구자 김윤식 교수는 <이광수와 그의 시대>(초판 전3권, 한길사, 1986/개정증보판 전2권, 솔, 1999)에서 <무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무정>은 우리 근대소설의 문을 연 작품이기에 문학사적인 의미에서 기념비적이며 작가 춘원의 전생애의 투영이기에 춘원의 모든 '문자행위' 중에서도 기념비적이 아닐 수 없다. <무정>은 시대를 그린 허구적 소설이지만 동시에 빈틈없고 정직한, 고아로 자라 교사에까지 이른 춘원의 '자서전'이다. 그 자서전은 그대로 당시 지식청년들의 자서전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_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2에서(한길사판)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총 126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연재 당시 이광수는 와세다대 재학생 신분이었다. 이광수는 <무정>을 연재하기 전인 1916년 이미 <매일신보>에 <대구에서> <동경잡신> 들을 기고한 바 있다.
이광수는 일찍이 진짜 힘있는 사람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1916년에는 매일신보 사장 아베 미쓰이를 만났으며, 1915년 제1차세계대전 탓에 중단했던 와세다대 수업을 잇게 된 것도 김성수의 후원 덕분이었다. 중학 과정을 위한 첫 일본 유학 또한 일진회 장학생으로 선발된 덕분에 가능했다. 

이광수가 대단한 집안 출신은 결코 아니다. 평안도 정주 산골짜기의, 완전히 몰락해 구차하기 그지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이 보잘것없는 가정마저 1902년 그의 나이 열한 살에 어머니, 아버지가 콜레라로 목숨을 잃으면서 완전히 망하고 만다. 김윤식 말한 "고아"는 이 연대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광수는 부모를 잃은 뒤 더 말을 보탤 것 없는 벌거벗은 빈곤과 외로움과 공포를 맛본 것이다.
이후 이광수는 오로지 비상한 머리 하나로 일진회 유학생과 오산학교 교사와 와세다대의 특대생을 거쳐 조선 청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소설 <무정>의 저자에 이른다. 이미 십대에, 낮은 수준에서나마 저널리즘, 교육, 집필을 경험한 데서 출발해 일생에 이르도록 8만 매가 넘는 원고를 쓰며 시인, 소설가, 기자, 잡지편집자, 교사, 언론경영인, 조직활동가 등으로 살다간 이광수. 
하지만 그의 연대기는 "왕성한 활동"보다는 "좌충우돌"을 떠오르게 한다. 이 좌충우돌 아래에는 부성 및 모성 부재가 낳은 심리적 진공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 야박한 해석일까. 이 진공이 이광수로 하여금 못난 생부모 조선을 그리 쉽게 버리게 만들었다면 지나치게 야비한 소리일까. 나아가 못난 부모 버린 자리에 번듯한 일본제국을 너무 쉬이 가져다 자리하게 했다면 또한 지나치게 야비한 해석일까.

이십대 초반부터, 이광수는 이미 식민지 조선을 낮출 대로 낮추고, 종주국 일본을 높일 대로 높이는 시각을 굳히고 있었다. 8만 매가 넘는 원고 쓰기는, 말하자면 실제로는 별로 하는 일이 공상을 거닐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는 필요할 때 언제나, 교사 및 저널리스트 훈련과 경험을 최대한 펼쳐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의 제거를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香山, 가미야)이라는 씨를 창설하였다...

...이제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지나인(중국인)과 혼동되는 성명을 가짐보다도 일본인과 혼동되는 씨명을 가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일본인이 되는 결심으로 씨를 향산(香山, 가미야)이라고 하고 명을 광랑(光郞, 미쓰로)이라고 하였다. 내 처자도 모조리 일본식 명으로 고쳤다. 이것은 충성의 일단으로 자신하는 까닭이다... 
_이광수, <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년 2월 20일에서(위 김윤식 저서에서 재인용)


창씨개명에 관한 일종의 해명인 이 기고문은, 참말이지 명확하게 창씨개명의 의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가 일생을 걸쳐 훈련한 학습지도의 깔끔함과 저널리즘 아티클의 명쾌함이 이렇게 살아 있다.

그의 아내 허영숙도 못잖았다. 이광수 일가의 창씨개명을 비난하는 투서가 집에 배달되자, 허영숙은 굳이 범인을 잡아달라는 고발을 경찰 당국에 넣었다. 이 사건으로 정지용, 최영수, 계용묵, 정비석 들이 체포되어 취조를 당하고, 또 구류를 살아야 했다.

제 머리, 제 재주로 벌거벗은 빈곤과 외로움과 공포를 뚫고 선생님 겸 지도자 겸 당대의 명사가 된 한 인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야박한 소리를 이미 늘어놓았으나 속이 아리다. <무정>이 한국 어학과 문학에 끼친 영향을 모른 체하는 쪽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래서 더 아리다는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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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洪命憙, 1888~1968), <임꺽정>의 저자로 유명한 벽초碧初 홍명희의 얼굴이다. 1930년대에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에서, 얼굴에 초점을 두고 따냈다.
홍명희는 10대를 지나서는 완전히 대머리가 된 듯하다. 그의 번대머리는 지인과 대중 사이에서 일종의 아이콘, 트레이드마크 노릇을 했다.


명문 풍산 홍씨의 후예인 홍명희는 188873일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안에서 전통적-정통적 한문-유학 교양을 익히며 자랐다. 더욱이 홍명희의 할아버지 홍승목, 아버지 홍범식 모두 정식으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과거 시험과 조정 출입과 중세 행정을 경험했으니 이름뿐만이 아닌 진짜배기 양반 출신인 셈이다.

홍명희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다섯 살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여덟 살에 <소학>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열다섯 살에 서울 중교의숙中橋義塾 입학해 신학문을 시작하기까지 상당한 수준의 한문-유학 교양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문을 어느 정도 깨친 뒤의 독서 목록에는 <삼국지> <동주열국지> <서한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껴 있다. 이 목록은 전통적인 교양인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도덕한 독서의 목록이지만 홍명희는 <삼국지>를 본 뒤 길래 소설 보기에 반하여” “어른 몰래”(<자서전>의 표현) 보았다고 한다.
<
임꺽정>에서, 일곱 등장인물이 저마다의 곡절과 사연을 지나 근거지로 모이는 줄거리를 떠올려 보라. 여기에 중앙정치의 타락에 따른 나라 전체의 혼란, 관권에 의한 피해대중 발생, 토호의 횡포, 무용 대결, 힘 대결, 배짱 대결, 머리싸움, 이중 첩자 들이 나오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어른들이 금한 독서가 나중 창작의 든든한 한 밑천이 아니었다고 하지 못하리라.

1905년 중교의숙을 졸업하고 잠깐 고향에 있던 홍명희는 1906년 열아홉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문일평, 이광수, 최남선 들과 교우하며 공부한다. 이 시기 홍명희는 우등생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러시아 문학과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에 푹 빠져 있었다. 러시아 문학이 얼마나 좋았는지 한때 문학 수업을 위한 러시아 유학을 목표로 러시아어 공부에 몰두하기도 한다. 무정부주의자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또한 이 시기의 목록에 껴 있다. 일본 문학, 예컨대 나쓰메 소세키, 시마자키 도오손 들의 작품도 탐독 대상이었다.

그러나 늦깎이 유학 생활은 스물셋에 끝난다. 1910년 경술년 829, 경술국치일 당일, 그의 아버지 금산군수 홍범식이 국치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금산 객사 뒤뜰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하자 큰 충격을 받은 홍명희는 바로 조선으로 돌아온다. 당시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약한 마음을 자애로 어루만져주고 약한 몸을 자애로 휩싸주던 우리 아버지가 합방 통에 돌아가셨다. 나는 온 세상이 별안간 칠통 속으로 들어간 듯 눈앞이 캄캄하였다. ... 나라가 망하고 집이 망하고 또 내 자신이 망하였으니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죽는 것이 가장 상책일 줄 믿으면서도 생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었다. 죽지 못하여 살려고 하니 고향이 싫고 고국이 싫었다. 멀리멀리 하늘 끝까지 방랑하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삼년을 지내는 동안에 겉으로 생활은 전과 같이 먹을 때 먹고 잘 때 자지만 속으로 감정은 전과 딴판 달라져서 모든 물건이 하치 않고 모든 사람이 밉살스럽고 모든 예법이 가소로웠다...”
 
_홍명희, <내가 겪은 합방 당시>, 서울신문, 1946827일치에서.

이 회상대로, 낙심할 대로 낙심해 있던 홍명희는 1912, 탈탈 털고 일어나 중국으로 떠난다. 중국에서는 박은식, 신규식, 정인보, 조소앙 들과 교류를 나누었으며 문일평, 이광수와 재회한다. 함께한 이들이 모두 저널리즘 또는 조직활동 어느 한 쪽에서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눈에 띤다.

19153월부터는 싱가포르로 가 191712월까지 싱가포르에서 지낸다. 싱가포르 체류는 화교 자본 및 중국 혁명파의 지원을 염두에 두고, 독립운동의 재정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모색의 일환으로 추정된다. 그가 싱가포르를 넘어 인도까지 방랑했다는 지인의 회고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1918년 홍명희는 잠깐의 상해와 북경 생활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듬해 1919년 기미년의 만세가 터지자 고향 괴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19204월까지 복역한다. 이후의 삶은, 해방 전까지는 반제국주의투쟁민족단일전선건설조선 문화 연구<임꺽정> 집필 들로 요약 될 것이요, 해방 이후는 단독정부수립반대운동남북통일운동 들로 요약될 것이다.

해방 전, 1920년대에 홍명희는 신사상연구회와 신사상연구회의 뒤를 이은 화요회(이상 사회주의 단체)의 주요 회원이었고, 조선에스페란토협회 회원이었고, 좌우가 함께한 민족전선인 신간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학술단체인 조선사정조사연구회의 결성에 참여하는가 하면 정몽주에 대한 논문을 쓰고, 김정희며 홍대용 저작의 교열을 맡기도 했다.

행방 후, 홍명희는 1948312일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김창숙 들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를 천명한 이른바 <7거두巨頭 성명>을 발표했고, 같은 해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참가했다가 그대로 북에 남는다. 서울에 있던 가족들은 8월에 삼팔선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 뒤 1948815일 대한민국 수립에 이어, 9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는 제1차 내각에서 박헌영, 김책과 함께 3인의 부수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내각 수상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김일성이다.

인민공화국에서의 이력은 1968년 돌아가 평양 교외의 애국열사릉에 묻힐 때까지 화려하게 이어졌다. 1952년에는 과학원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고, 1954~1955년 사이에는 <림꺽정>(북에서는 림꺽정이다)이 간행되었다. 1957년 제2차 내각에서는 6인의 부수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고, 1961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올랐다. 보통 조평통으로 줄여 부르며 남한에서 사갈시하는 그 위원회 말이다. 돌아가기 한 해 전인 1967년 여든 나이로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한때 남에서는 고유명사 홍명희를 복자覆字하고 <임꺽정>을 금서로 했다. 남한 정부로서는 해방 후 행적을 용납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해방 후 중도파 여운형뿐 아니라 우파의 거두 김구가 남에서 생명을 잇지 못한 사정, 무장투쟁의 맹장 김원봉이 일제 악질 경찰 출신인 남의 경찰에게 체포고문당한 끝에 결국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 중도합리주의 노선을 추구하던 허헌이 1948년 평양으로 갔다가 결국 남으로 넘어오지 않은 사정 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홍명희의 행적은 이들의 연대기와 잇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홍명희는 아들 홍기문과 맞담배질을 할 정도로 사람을 편히 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해학과 재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증언이 남아 있다.
홍명희는 190013세에 3년 연상인 여흥 민씨와 조혼해 16세에 장남 홍기문을, 23세에 차남 홍기무를 보았다. 홍명희와 여흥 민씨 사이에서는 김동리 <김연실전>의 블랙코메디가 여실히 증언한 바, “남성 유학생의 조혼 아내 버리고 신여성과 결혼하기따위는 없었다. 홍명희는 부인과 평생 금실이 좋았고 자제들 앞에서도 부인을 아끼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숙명여대 국문과 강영주 교수의 유족 면담에 따르면 차남 홍기무는 세상에 우리 어머니처럼 행복한 여자는 없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홍명희는 사회주의와 함께 국학을 연구한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한문과 한국어와 일본어와 러시아어와 에스페란토는 모순이나 길항을 이룰 일이 없었다. 앞서 본 연대기가 자연스레 드러내는 바지만, 신간회 조직과 지도에서 홍명희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그러나 해방 후 좌우대립과 민족분단과 전쟁 앞에서 홍명희는 남으로부터 버림받을 선택을 하고 말았다.

연대기는 연대기다. 이력서는 이력서다. 내게는 다만 아들과 맞담배질을 할 수 있는 인물, 조혼한 아내를 행복한 여자로 살게 한 인물, 해학과 재치로 기억된 인물의 저 깊은 눈과 앙다문 입이 새삼스럽다.

해방절을 품은 8월이 막 이우는 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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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공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9개조는 조선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국가형태로서 군주국을 천명한 흠정헌법적 성격을 가진 성문헌법”이다.
(http://www.ccourt.go.kr/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데이터베이스 가운데, <헌법재판소 20년사>에서)
이 9개조를 제정반포하기까지 역사의 흐름은 숨이 가쁘게 흘러 지나갔다.

1895년 을미년, 일본 깡패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민비를 살해했다. 얄궂게도 이 해 4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가 처형되었고, 11월 민비가 살해당했으며, 12월 30일 단발령이 내려져 온 조선이 들끓었다.
1896년 2월 11일에는 겁먹은 고종과 왕자들은 친러파 대신의 기획에 따라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나 숨는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고종과 왕자들은 1년 남짓 러시아공사관에 숨어 지냈다.
1897년 2월 20일 외국 공사관에 숨어 살던 고종과 왕자들이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다. 그 뒤 조야의 이런저런 의논이 있더니 10월 12일 고종이 원구단에서 황제에 즉위한다. 이로써 대한제국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한국국제>는 바로 이런 흐름 안에서 태어난 헌법(또는 헌법 성격의 포고)이다. 그 조문이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公認되온 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이니라.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유전즉오백년전래由前則五百年傳來하시고 유후항만세불변由後恒萬歲不變하오실 전제정치專制政治이니라.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립정체自立政體이니라.

제4조 대한국 신민臣民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侵損할 행위가 유有하면 기이행미행其已行未行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실失한 자로 인認할지니라.

제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옵시어 편제編制를 정하옵시고 계엄戒嚴·해엄解嚴을 명命하옵시니라.

제6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시어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效倣하사 국내법률도 개정하옵시고 대사·특사·감형·복권을 명하옵시나니 공법에 위謂한 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부부各府部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을 제정 혹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發하옵시나니 공법에 위謂한 바 자행치리自行治理이니라.

제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임면任免을 행하옵시고 작위 ·훈장 급及기타영전榮典을 수여 혹 체탈遞奪하옵시나니 공법에 위謂한 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유약국各有約國에 사신을 파송주찰派送駐紮케 하옵시고 선전宣戰·강화講和 급及제반약조諸般約條를 체결하옵시나니 공법에 위謂한 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



문장은 난삽하다. 지존무상의 존재인 대한국 황제 폐하에 대한 존대를 표시하는 조사며 선어말어미(“-온-” “-옵-” 등)가 조문 읽기조차 방해하고 있다. 이 난삽한 문장이 확인선언하고 있는 것은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돌아간 전제정이다.

제2조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정치는 “유전즉오백년전래由前則五百年傳” 곧 이전 조선 왕조 500년간 전해졌으며, “유후항만세불변由後恒萬歲不變” 곧 이 뒤로 영원토록 변치 않을 전제정이다. 이 전제정의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제3조에 따르면 대한제국 황제의 군권은 무한하다. 제국의 신민이 이를 침해한다면? 제4조가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제4조 대한국 신민臣民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侵損할 행위가 유有하면 기이행미행其已行未行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실失한 자로 인認할지니라.”

신민臣民, “신하된 인민”이라고 했다. 일본제국은 역내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만주인, 대만인, 베트남인, 필리핀인 들을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거느렸거니와, 신민, 언제 봐도 눈물겨운 말이다.
이하의 표현도 눈물겹다. 제국의 황제의 신하된 백성으로서 군주의 권력을 침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 행위가 구체적인 실제로 행해졌건 그러지 못했건 “대한제국 인민”에서 제외하겠다는 소리다. 이런 “배제의 수사”는 오늘까지도 우리와 함께하는 수사다―“빨갱이는 비국민非國民이다” “종북좌파는 대한민국을 떠나라.”

이하 제9조까지는, 온통 그 말과 뜻이, 입법-사법-행정-군통수-외교의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있음을 몇 겹으로 포개 말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다시금 펼친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1899년 이후 1948년에 이르러, 드디어 위와 같은 한국어 문장이 출현하기까지, 53년이 걸렸다.

“전제정치”가 “민주공화국”으로 바뀌고, “신민”이 “국민”으로 바뀌고, 나아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을 획득하기까지 정말 힘들게도 살아왔다.
대한국의 신민에게 얹힌 봉건제의 질곡, 황국신민에게 얹힌 제국주의의 질곡, 역시 황국신민으로서 전쟁범죄의 종범으로 동원되어 떠안은-피수탈자로서 떠안은 파시즘의 질곡을 지나 해방을 맞기까지 정말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우리 역사의 간난신고가 끝나지 않았음은 2011년 8월 24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무상급식 지원범위”에 관한 서울특별시 주민투표>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끝]

 
*사진: 모두들 알다시피 대한제국 고종황제 폐하이시다.
*<대한국국제> 속 “공법公法”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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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체는 민주공화국이다.
 
여러 단서를 붙이지 않을 수 없겠지만, 1945년 8월 15일이라는 한 매듭을 지나서야 한민족은 비로소 자유(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민주주의들을 호흡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을 계기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밑절미로 한 법치, 민주적 절차에 의한 권력 선출 들을 실현할 엄두를 내게 되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유보할 사항이 많지만, 해방은 기나긴 봉건 왕조 시대를 보낸 뒤, 지난한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어가는 속에서, 세계 인민과 국제적인 반파시즘 투쟁을 함께한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사진]_해방절 서대문형문소 앞. 구글 이미지에서 따왔음.

 
성균관대 사학과 정현백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 중등 역사 교과서는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이 수많은 선언을 낳았고, 그 선언 저마다가 자유/평등/박애/민주주의/보편적 인권 들을 일깨우는 내용을 지니고 있지만 이들 선언의 확인과 수사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인민대중 곧 “people”의 투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선언은, 선언 이후의 역사적 시공간이 이전과는 결코 같을 수 없음을 확인하는 언명이다. 그러나 선언만으로는 확인과 수사가 제시한 변화를 만들 수는 없다.

한민족이 맞은 해방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해방은 약속이자 기대이자 희망이었지만, 기대와 희망이 좌절되기까지는 금세였다. 게다가 66년 전의 해방은 결과적으로 분단과 전쟁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해방 앞에서 짐짓 고개를 외로 틀기도 한다.
그러나 해방의 약속, 해방의 기대, 해방의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많은 고민과 투쟁이 있었다.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고, 평화를 꿈꾸는 몸짓을 어찌 다만 헛되다고만 하겠는가.

프랑스대혁명의 그저 그런 선언이 시민 사이의 보편적인 약속으로, 법률로, 제도로 자리하고 작동하기까지, 역사는 다시 힘겨운 과정을 더 걸어야 했다. 선언을 쓴 먹이 채 마르기도 전에 반동이 찾아왔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길에 다시 흘린 피를 다만 허무와 환멸의 밑천으로만 삼는 태도에 쉬이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우리가 66년 전에 맞은 해방도 그럴 것이다. 귀 기울여 들으면, 66년 전의 해방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미완의 해방을 온전한 해방으로 되돌리는 노력을 해달라는 당부가 들려올 것만 같다.

2011년 8월 15일. 한껏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헌헌법을 펼친다.
조문 앞에 둔, 공포문 격인 헌법의 전문은 이렇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서기 1948년, 단기 4281년 7월 12일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전문이 이러하다. 제헌헙법 또한 삼일운동을 계기로 태어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확인하는 문장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향하는 국가의 정체(正體)-정체(政體)가 “민주독립국가”임을 천명한다.
이를 실행하는 밑절미는 “정의인도”와 “동포애” “민족의 단결”이다. 이어진 “사회적 폐습을 타파”가 의미심장하다.
봉건왕조와 제국주의 치하라는 반동의 시기를 어렵게 지나오는 동안 쌓인 폐습은 그때까지 온 민족을 질곡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양반 대 상민 대 천민의 차별은 엄존했다. 남녀의 불평등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지주소작제는 봉건적 폐습의 든든한 곳간이었다. 고등교육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아니 서민에게 중등교육도 힘들었다. 제국주의 통치는 관존민비의 심성을 한민족 전체에 각인했다. 오늘도 대한민국에 횡행하는 “행정부 사업 곧 무조건 적법에 합법” “경찰력 곧 법”이란 식의 막된 행태에는 일제 통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는 것이다.

사회적 폐습 타파 뒤에 “민주주의 제제도”의 수립이 따라 나오는 것은 형식논리로 보나 상황논리로 보나 지극히 당연했다. 해방의 열기와 활기는 이만한 선언과 확인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수립한 “민주주의 제제도”는 무엇에 복무해야 할까. 또한 이어진 문장 그대로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고, 국민생활을 향상시키는 데서 제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식민지로서 제국주의 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 제국주의 하수인으로서 제국주의 전쟁범죄에 동원된 아픈 경험을 겪은 우리 민족의 시야는 밖으로도 향해야 할 것이다.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는 실감이 낳은 선언이자 확인이리라. 안으로 할 일과 밖으로 기억할 일을 분명히 한 뒤, 전문은 안전, 자유, 행복을 결의하면서 문단을 여미고 있다.

그렇다면 해방을 한 매듭으로 해 태어난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구체적인 조문은 전문과 어떻게 고리를 만들고 있을까?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헌헌법은 언제 들어도 가슴 벅찬, 오늘도 우리를 배신하고 있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렇다, 해방된 마당의 나라는 당연히 민주공화국이어야 했다. 이 민주공화국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조문 어디고 그 점을 확인하지 않는 데가 없다. 제5조에서 제8조에 이르는 조문은 한국어 역사에서도 처음 펼쳐 보이는 수사가 아닐까.

“제5조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

“제6조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

“제8조 모든 국민은 법률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일체 인정되지 아니하며 여하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하지 못한다. 훈장과 기타 영전의 수여는 오로지 그 받은 자의 영예에 한한 것이며 여하한 특권도 창설되지 아니한다.”


해방의 열기와 활기는 수사를 넘어서는 구체에서도 제 목소리를 냈다.

“제18조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내에서 보장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제84조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내에서 보장된다.”

“제85조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일정한 기간 그 개발 또는 이용을 특허하거나 또는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제86조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

“제87조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까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사영을 특허하거나 또는 그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하에 둔다.”



근로자에게는 자본가에 대해, 법률에 의해 이익 균점의 기회가 있다고 했다. 경제상 자유가 무제한일 수 없음도 천명했다. 국유와 국영과 공영에 확실한 지향이 있었다. 토지개혁, 곧 지주소작제 타파가 전제되어야 하는, 거의 혁명적인 변혁 또한 헌법이 확인한 바였다.

수많은 단서, 유보 조항, 주석이 붙어야 할 해방절이다. 그러나 이만한 선언과 확인을 이끌어낸 해방절이다. 그저 고개를 외로 꼬고 있기에 섭섭해 굳이 제헌헌법을 펼친다. 오늘은 2011년 8월 1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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彼若亦有一部靈悟. 豈不自羞. 若無靈覺. 驕蔑何益. 吾輩臭皮帒中. 裹得幾箇字. 不過稍多於人耳. 彼蟬噪於樹. 蚓鳴於竅. 亦安知非誦詩讀書之聲耶.
_연암 박지원, <초책에게 보냄[여초책與楚幘]> 원문 전문

영대정잉묵을 빌려 블로그에 다섯 차례 글을 올렸다. 오늘 영대정잉묵“6”을 더하고 다른 꼭지로 넘어가려 한다.
그리 생각하니 이 한 편의 척독 <초책에게 보냄>은 깊이 읽고, 읽은 흔적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초책이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 생각을 그대로 벋어, 짧으나 울림이 깊은 연암의 척독 한 편을 아주 천천히 한 줄 한 줄 읽어보도록 하겠다.


1. 足下無以靈覺機悟. 驕人而蔑物.

>
그대는 신령한 지각과 기민한 깨달음이 있다 하여 남에게 잘난 체하거나 다른 생물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족하足下: 대등한 상대에 대한 경칭이다. “그대쯤 말맛이 마침맞다.
-: 여기서는 금지사로 쓰였다.
-: 이유, 근거를 표시하는 전치사다. “靈覺機悟에 걸린다.
-영각靈覺: 말 그대로 신령한 지각으로 새기면 되겠다. 또는 <영대정잉묵>에 적잖이 보이는 불교어의 자취를 염두에 두면, “사물의 변화를 포착하는 통찰력 이 있는 지각으로 말뜻을 넓혀도 될 듯하다.
-기오機悟: 말 그대로 기민한 깨달음으로 새기면 되겠다. “에는 재치의 뜻이 있다. 미루면, “기민機敏이란 정서나 감성의 순발력이 민첩하다는 말이다. “대오각성大悟覺醒의 예에서 보듯 깨달음의 진폭이 몹시 큰 것이다.

2.彼若亦有一部靈悟. 豈不自羞. 若無靈覺. 驕蔑何益.

>
저들에게 만약 조금이나마 신령한 깨달음이 있다면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며, 만약 신령한 지각이 없다면 잘난 체하고 업신여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멸하익驕蔑何益: 이 문장에서 는 반어문을 만든다. “유익함의 뜻이다. “와 만나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무슨 소용인가라는 의미를 만들고 있다.

3. 吾輩臭皮帒中. 裹得幾箇字. 不過稍多於人耳.

>
우리는 냄새나는 가죽 부대 속에 몇 개의 글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 남들보다 조금 많은 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 글자 자체는 물건을 챙겨서 싸는 행위를 말한다. “裹得이라고 했으니 앞의 皮帒中에 이어져 지니고 있다로 풀면 되겠다.
-: “~따름이다” “~뿐이다하는 한정 종결문을 만드는 한정 종결사다.

4. 彼蟬噪於樹. 蚓鳴於竅. 亦安知非誦詩讀書之聲耶.

>
저 나무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굴고 구멍에서 지렁이가 우는 것이 또한 시를 낭송하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 매미/: 지렁이_매미가 시끄럽게 구는 데[]에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지렁이가 운다[]는 것은 매미 울음의 시끄러움에 대해 사람이 듣지 못할 정도의, 운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울음을 대조한 억양의 수사다. 곧 누구에게나 들리는 소리에서부터 미세해 들지 못할 정도의 소리를 아우른 것이다.
-~: “은 반어문을 이끄는 반어사이며 는 의문을 표시하는 의문사다. “는 명사 또는 명사구를 부정하는 부정사인데, 여기서는 명사구 시를 낭송하고 책을 읽는 소리誦詩讀書之聲를 부정한다.
-또한 시를 낭송하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반어했으니, 파고들면 어찌 장담/확신하겠습니까?” 하는 뜻으로 새기면 되겠다.


그대는 신령한 지각과 기민한 깨달음이 있다 하여 남에게 잘난 체하거나 다른 생물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저들에게 만약 조금이나마 신령한 깨달음이 있다면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며, 만약 신령한 지각이 없다면 잘난 체하고 업신여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냄새나는 가죽 부대 속에 몇 개의 글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 남들보다 조금 많은 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저 매미가 나무에서 시끄럽게 굴고 지렁이가 구멍에서 우는 것이 또한 시를 낭송하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어구 풀이 말고, 더 부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냄새나는 가죽 부대라는 말은 참말 쓸쓸하다.
이런 것이다. 연암은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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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 주신 문편(文編, 책으로 엮은 글)을 양치질하고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읽고 나서 말하오. 그대의 문장이 참 기발하오. 그러나 사물의 명칭에 차용이 많고, 인용이 딱 들어맞지 못하니 있으니 이 점이 옥에 티인가 하오. 그러니 노형을 위해 한마디 드리는 바요.
寄示文編. 漱口洗手. 莊讀以跪曰. 文章儘奇矣. 然名物多借. 引據未襯. 是爲圭瑕. 請爲老兄復之也.
_연암 박지원, <창애에게 답함[답창애答蒼厓]>에서

견줄 데 없이 정중하게 시작한 글이 어느새 바로 삼엄한 비평으로 접어들었다.
이 글은 연암이 당대의 문사로 유명했던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창애蒼厓”는 호)에게 보낸 척독, <창애에게 답함>의 첫 문단이다.

<영대정잉묵>에는 연암이 유한준에게 보낸 척독이 모두 아홉 편이나 실려 있다. 그 가운데는 이미 본 <창애에게 답함 3>처럼 신선한 발상과 참신한 표현이 어울린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윽한 우정을 담은 경우도 있다. 그리고 지금 보는 것처럼 문학과 창작에 관해서는 이처럼 직언을 사양치 않은 경우도 있다.

직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관호官號나 지명地名은 빌려다 써서는 아니 되오.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 사라고 외쳐 보시오. 하루 종일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장작 한 단 팔지 못할 것이오. 만일 제왕의 도읍지를 모두 “장안長安”이라 부르거나 역대의 삼공三公을 다 “승상丞相”이라 부른다면, 이름과 실제가 뒤죽박죽이 되어 도리어 속되고 비루하게 되고 마오.
官號地名. 不可相借. 擔柴而唱鹽. 雖終日行道. 不販一薪. 苟使皇居帝都. 皆稱長安. 歷代三公. 盡號丞相. 名實混淆. 還爲俚穢.
_연암 박지원, <창애에게 답함[답창애答蒼厓]>에서


그리고 <<맹자孟子>>를 인용해 “성은 모두가 함께 쓰는 것이지만 그 이름은 독자적인 것이며, 이는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문자는 모두가 함께 쓰는 것이지만 문장은 독자적인 것”임을 강조하며 척독을 여몄다.

곧다 못해 삼엄할 지경이다. 첫 문단 첫 문장에 “문편文編을 보았다” 했으니, 아마도 유한준은 이제까지 쓴 글 가운데 자못 자부심을 느낀 원고를 고르고 모아, 굳이 실로 꿰매 묶어 연암에게 보낸 모양이다. 한데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연암의 차남 박종채(朴宗采, 1780~1835)가 쓴 연암 일대기 <<과정록過庭錄>>에 따르면, 아버지(연암)의 친구 가운데 글을 잘한다는 소문은 났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 친구는 늘 아버지에게 유감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사이에 지방으로부터는 아버지가 오랑캐 복식을 하고 업무를 본다[胡服臨民]는 소문이 서울로 번지고, 아울러 <<열하일기>>에 대해서는 되놈의 연호를 사용한 글이라 하여 “노호지고虜胡之稿”라는 비난이 높아갔다. 이때 “글을 잘한다는 소문은 났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친구”란 바로 유한준이며, <<열하일기>> 비난 여론의 배후에도 유한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종채는 지금 보고 있는 <창애에게 답함>이 한때 우정으로 사귀었던 두 사람이 갈라선 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비평을 받으려 한 쪽이, 진심에서 나온 직언을 구부림 없이 받아들였으면 좋았겠지만 사람의 일이 늘 서로서로에게 좋은 쪽으로만 풀리는 법은 없다. 이후 연암은 유한준이 건 산송(山訟, 묏자리 다툼에 따른 소송)에 얽혀 많은 곤란을 당했다.
박종채는 일련의 소송 또한 유한준이 아버지 연암을 괴롭히고 불명예를 안기기 위해, 계획적으로 꾸민 억지 소송으로 보았다(박종채는 그렇게 썼다. 유한준 측의 반론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만 뭉뚱그린다).

둘러싼 이야기는 뜻밖에 복잡하다. 그러나 문학론으로 돌아가면 연암의 관점은 한결같고 분명하다. 연암은 시대의 차이를 무시한 채 고전 속의 명칭이나 고사를 끌어대는 데 급급한 태도를 비판한 뒤, 시대가 드러나는 독창적인 표현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태도는 연암 약관에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를 관통한 문학 관점 및 방법론의 밑절미였다.

의고擬古적 방법론에 기울어 있던 유한준에게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 사라고 외쳐 보시오. 하루 종일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장작 한 단 팔지 못할 것이오”는 정말 뼈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연암이 굳이 “장안”에 “승상”까지 예시했다면 유한준 문편에 담긴 의고의 그림자가 얼마나 짙었을지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장안長安은 한나라 고조가 처음 도읍한 이래 전진前秦, 전조前趙, 후진後秦,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의 도읍이 되었던 곳이다. 그렇다고 “서울”을 “장안”으로 표현한들 서울에 다시 장안 역사의 더께며 시간의 깊이가 더해지겠는가.
아니다, 그건 우리 생각이고, 의고문가들은 진심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므로 그들은 “제왕의 도읍지를 모두 ‘장안長安’이라’ 부르고도 남았다. 장안은 장안 역사의 더께며 시간의 깊이로 빛나고, 서울은 서울 역사의 더께며 시간의 깊이로 빛남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또 “역대의 삼공三公을 다 ‘승상丞相’이라 부”른다니 한번 따져보겠다.
삼공이란 원래 군주를 보좌해 군정 및 대권을 장악한 최고위 관리를 말한다. 보통 으뜸-버금-딸림의 짜임으로 세 자리를 할애하므로 삼공이라 한다.
각각의 자리에 대한 명칭, 곧 관호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조선 시대 의정부의 삼정승인 영의정/좌의정/영의정이 삼공에 견줄 만한 예다.
승상은 중앙정권의 최고위직으로 황제를 도와 정무를 처리하는 으뜸 재상이다. 승상은 전국 시대 진秦이 처음 설치했다.
기원전 309년, 진秦의 무왕武王 2년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가 각각 좌승상, 우승상에 임명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승상”이 출현한다. 이후 진에서는 으뜸 재상으로 상국相國과 승상 두 자리가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한제국 초기의 으뜸 재상은 상국이었으나 곧 승상으로 바꾼다. 서한西漢은 승상을 대사도大司徒로 개칭했으며, 동한東漢 말에 다시 승상으로 개칭한다.
삼국 시대에서부터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승상의 개폐가 무상했다. 있던 적도 있고 없앴던 적도 있어 일정치 않았다는 말이다. 당과 송은 승상을 폐지했다. 나중에, 송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에 쫓겨 남송南宋을 세우고 나서, 남송 효종 때에 좌우승상이 부활한다. 중국에서는 이때부터 다시 재상을 일러 “승상”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제국도 좌우승상을 두었다. 그러나 명제국은 홍무제가 육부를 직할하느라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할 때 승상도 함께 없애버렸다. 이호예병형공의 정무를 챙길 심산이었으니, 권력의 층계참인 승상은 홍무제에게 거추장스런 제도이자 기구였던 것이다.
말의 꼬리가 긴 중국 역사 자료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이 정무와 관계가 없는, 관계官階에 지나지 않는 승상을 설치했다고 친절히 알려주고 있다. 이 꼬리 앞에서는 슬며시 웃음이 날 따름이다.

한마디 말이 담은 시간과 덩치가 꽤 된다. 의고문가들은 이 시간, 이 덩치의 어디를 살펴 도읍지는 다 장안이라 하고 삼공은 다 승상이라 할 수 있었을까.

아래 사진은 <<사기>>의 <육국연표六國年表>의 진 무왕 2년 부분이다. 사마천이 창안한 기전체 역사서의 한 틀인 연표의 얼개는 우리가 지금 잘 쓰고 있는 엑셀의 그것과 같다.
진 무왕 2년의 셀을 확인하시라! 연대와 함께 “처음 승상을 설치하다. 저리자, 감무가 승상이 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의고문가들은 한 명칭이나 제도의 연혁, 내력, 추이 들의 실상에 관심은 있었을까? 글쎄, 글쎄? 암만해도 없었을 것 같다. 없었기 때문에 관념의 명령에 따라 의고의 세계에 저돌猪突했으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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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정잉묵>은 새길 만한 경구의 밭이며, 기발한 수사의 밭이다.
연암은 때로 어린아이의 말이나 속담 따위를 활용해 이만한 경구와 수사를 만들어낸다. 또는 연암 특유의 문단 구성을 통해 장면이 극대화된 연극적인 경구와 수사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어린애들이 이런 노래를 부릅디다.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느니 바늘로 눈동자를 겨누는 게 낫다.”
또 이런 속담이 있지요.
“정승을 사귀려 말고 네 몸가짐부터 신중히 하라.”
그대는 아무쪼록 명심하시오. 차라리 약한 듯 보여도 굳센 편이 낫지 용감한 체할 뿐 뒤가 물러서는 아니 되오. 더구나 남의 힘[권세]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孺子謠曰. 揮斧擊空. 不如持鍼擬瞳. 且里諺有之. 无交三公. 淑愼爾躬. 足下其志之. 寧爲弱固. 不可勇脆. 而况外勢之不可恃者乎.
_연암 박지원, <중일에게 보냄 3[여중일지삼與中一之三]> 전문

이런 데 연암 척독의 매력이 있다. 연암은 당시의 여느 교양인과 마찬가지로 고전의 인용과 압축을 통한 수사를 충분히 발휘하며 누리며 살았다. 동시에 생활 속에서 만난 어린아이의 말, 당시의 속담 또한 고전과 같은 심급에서 수사의 밑천으로 보기 좋게, 아주 잘, 효과적으로 써먹었다.
큰 동작으로 붕붕 날을 떨쳐 허공을 치는 도끼와 급소를 노린 채 틈을 엿보고 있는 바늘의 대조는 어떤가?
친구가 정승이라고 “나”가 정승인가? 스스로의 형편은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데, “나 누구랑 친해”를 입에 달고 사는 얼간이 군상은 우리와 함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두 문단으로 앞을 다졌기에, “차라리 약한 듯 보여도 굳센 편이 낫지 용감한 체할 뿐 뒤가 물러서는 아니 되오[寧爲弱固. 不可勇脆]”의 다짐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척독의 상대 “중일”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마을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다가, 읽기를 싫어해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더니, 그 애가 이렇게 대꾸합디다.
“하늘을 보면 푸르디푸른데 ‘하늘 천天’이란 글자는 푸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읽기가 싫습니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蒼頡의 기를 죽이는 듯하오.
里中孺子爲授千字文. 呵其厭讀. 曰. 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此兒聰明. 餒煞蒼頡.
_연암 박지원, <창애에게 답함 3[답창애지삼答蒼厓之三]> 전문

이 척독의 상대 창애는 곧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창애蒼厓”는 호)이다. 유한준과 연암은 젊어서는 절친한 벗으로 지냈으나, 나중에 틀어졌다. <영대정잉묵>에 실려 있는 “창애에게 답함” 꼭지 가운데는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兪晩柱, 1755~1788)가 연암에게 글쓰기의 방법을 배우려 왔다가 언짢은 기색으로 돌아간 일을 기록한 척독도 있다.
둘 사이의 사연이 어떻게 되었든, 위 글을 읽고 나서 빙그레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앞서 “<영대정잉묵> 속으로_2”에서도 나는 “새” 대 글자 “조鳥”의 선명한 대비를 보았거니와, 여기서도 푸르디푸른 하늘 대 낱자일 뿐인 “천天”의 대비가 선명하다. 연암의 말대로 문자의 발명자로 회자되는 창힐의 기를 죽일 만한 한 장면이다.이 아이에게 “이놈아, 외우라면 외워!” 하고 회초리질을 하고 교과서를 읽혀야 할까? 오늘날의 교육자, 교사는 결코 그리 하지 않으리라.
아이가 말한 “푸르디푸른 하늘”을 살리되, 어떻게든 그 “푸르디푸른 하늘”에 “천天”까지 아울러 주기 위해 애쓰리라.


귀엣말일랑 듣지 말아야 할 것이며, 말이 샐까 경계하면서 하는 말일랑 하지 말아야 할 말이오. 남이 알까 두려운 일을 무엇 때문에 말하며, 무엇 때문에 듣는단 말이오?
말을 이미 해 놓고서도 다시 경계하는 것은 상대방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을 의심하고도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附耳之言. 勿聽焉. 戒洩之談. 勿言焉. 猶恐人知. 奈何言之. 奈何聽之. 旣言而復戒. 是疑人也. 疑人而言之. 是不智也.
_연암 박지원, <중옥에게 답함[답중옥答仲玉]> 전문

한국어로 다시 새기느라 그렇지, 원문은 몇 자만으로 딱 떨어진다.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 애초에 받지 말았어야 할 일에 대한 경구에는 이미 시공을 초월하는 바를 보이고도 남음이 있다.
“중옥”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골 사람이 서울 사람 흉내를 내 봤자 결국 촌놈이오. 비유하면 술 취한 사람이 아무리 정색을 해 봤자 하는 짓이란 죄다 술 취한 자의 행동일 뿐인 것과 같지요. 이걸 몰라서는 안 됩니다.
鄕人京態. 摠是鄕闇. 譬如醉客正色. 無非醉事. 不可不知.
_연암 박지원, <아무개에게 보냄 2[여모지지이與某之二]> 전문


아프게 사람 찌르는 비유다. “나 안 취했어”를 연발하는 취객... 나사못회전도 그런 취객을 지어내곤 했다. “몰라서는 안 되[不可不知]”겠지만, 반드시 알아야겠지만, 그런데, 알고서야 그 부끄러운 짓을 했겠는가.
연암이 쓴 “촌놈[鄕闇]”이란, “시골 사람[鄕人]”에만 한하지 않는다. 연암은 사상이라야 유학 가운데서도 성리학의 좁은 범위에만, 세상이라 해야 조선 강역 안에만 갇혀 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 갈 운명의 조선 지식인 모두를 “촌놈”으로 생각했다.
서울 가 본 놈하고 안 가 본 놈 싸우면 안 가 본이 이기게 마련이다. 이때 안 가 본 놈이 술까지 마시고 떨치고 나서면 어쩔 도리가 없다.

쓸쓸히 웃으며 <영대정잉묵>을 빠져 나온다. 이런 것이다. 연암은 다른 사람과 주고받을 때도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끝]

반남 박씨 집안에 전해오는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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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살펴볼 글은 연암이 경지에게 답한 세 번째 척독이다. <영대정잉묵>에 남아 전하는, 연암이 경지에게 보낸 척독은 이 글까지 해서 세 편이 전부다. 먼저 그 전문을 보자.

그대가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를 읽었다지만 그 글만을 읽었을 뿐, 그 마음은 미처 읽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고서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나 생각하고,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읽고서 고점리高漸離가 축(筑, 고대 현악기의 하나)을 켜던 장면이나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런 쯤은 늙은 서생들이 늘 해 대는 케케묵은 이야기입니다. 또한 “부엌에서 숟가락 얻었다”는 소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어린아이들이 나비 잡는 모습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내민 다리는 반쯤 꿇고, 뒤로 뺀 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 두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다가가는데,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나비가 그만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고, 어이없이 웃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입니다.
足下讀太史公. 讀其書. 未甞讀其心耳. 何也. 讀項羽思壁上觀戰. 讀刺客. 思漸離擊筑. 此老生陳談. 亦何異於廚下拾匙. 見小兒捕蝶. 可以得馬遷之心矣. 前股半跽. 後脚斜翹. 丫指以前手. 猶然疑蝶則去矣. 四顧無人. 哦然而笑. 將羞將怒. 此馬遷著書時也.
_<경지에게 답함 3[답경지지삼答京之之三]> 전문


첫 번째 척독에서 보았듯, 연암과 경지는 헤어지기가 아쉬워 1리나 서로 떨어지고도 딱 돌아서지 못할 정도의 우정을 나누는 사이이다. 한데 여기서는 경지가 <사기>를 읽고도 <사기> 행간에, 사마천의 마음속에 미처 육박하지 못했음을 신랄하다고 할 정도로 지적하고 있다.

<<사기>>는 연암의 글쓰기와 문학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고전이다. <<연암집>> <방경각외전> 속의, 소설을 방불케 하는 인물전의 원류를 <<사기>>의 열전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열하일기>> 곳곳에 드리운 ‘사마천의 그림자’는 고전은 고전으로 어떻게 이어지는가, 문학사는 문학사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일대장관이다. 연암의 창작론을 대표하는 글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또한 <<사기>>을 밑절미로 하고 있다.
이렇듯 연암은 <<사기>>를 깊이 읽었고, 유난히 좋아했다. 하여 나비 잡는 아이처럼 <<사기>>에 노닐었다. 노닐며 사마천의 “마음”을 헤아리곤 했다. 그러니 더욱 절친한 벗 경지가 <<사기>>를, 사마천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함이 섭섭했나 보다.

원문의 “족하足下”는 2인칭 대명사로 존경하는 상대에게 부치는 말이다. 연암은 경지에게 바로 “너 아직 <<사기>>를 제대로 읽지 못했군” 해놓고는 <항우본기>와 <자객열전>의 예를 끌어온다.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란 <<사기>> <항우본기> 속 거록에서 벌어진 전투의 한 장면이다.
진나라 시황제가 죽고 그 아들 호해가 뒤를 잇자 진제국은 분열한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사칭 및 참칭이 대부분이었지만 진제국 통일 이전의 옛 제후가 복고를 선언한다. 항우의 집안은 대대로 옛 초나라의 장군을 맡아왔다. 덕분에 항우는 다시 일어난 초나라의 군대에서 쉬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진나라 군대와의 전투에 소극적인 초나라 고급 지휘관을 제거하고 곧 병권까지 손에 넣는다. 그 뒤 항우는 초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장하를 건너 진나라 군대가 집결한 거록으로 진격한다. 항우가 지휘관을 제거하고, 강을 건너고, 전투하기까지, <항우본기>의 문단은 박진감이 넘친다.
장하를 건너고서 배를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 등 취사도구를 깨뜨리고, 병사들에게 3일치 식량만을 휴대하게 하고 진격할 때의 결기며 삼엄함이란 참말이지 읽는 이를 격발케 한다. 이어진 전투에서 항우가 이끈 초나라 군대는 함께 모인 제후군과 장수로 하여금,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자신의 진영에서 관망만 할 뿐이었다”의 상태로 몰아넣을 만큼 용맹했다.
바로 이 장면이다. 이 장면은 문자를 알고, <<사기>>를 아는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고점리가 축을 켜던 장면”은 어떤가. 자객 형가는 진시황을 죽여 연나라 태자 단의 원수를 대신 갚고자 한다. 형가가 이제 막 연나라와 진나라의 국경인 역수를 건널 즈음 이 일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흰 옷에 흰 모자를 쓰고 강가로 나와 형가를 전송한다. <<사기>>는 이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고점리는 축을 켜고 형가는 화답해 변치의 성조로 노래를 불렀다. 이때 듣는 이들 모두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형가가 또 앞으로 나오며 노래했다.

“바람 쓸쓸한데 역수가 차구나.
장사가 한 번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우조로 강개한 노래를 부르니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떴고 머리카락은 곤두서 모자를 찔렀다. 그때 형가는 수레를 타고 떠나며 끝내 돌아보지도 않았다.


기억하기 바란다. 연암이 <<열하일기>>의 첫 꼭지인 <도강록>, 그것도 그 첫날 기록에다 형가와 고점리의 일을 인용해 강 건너 청제국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마음을 은유했음을.
연암은 이제 막 압록강을 건너 미답의 땅으로 들어가는 연암의 심정을 한 자루 비수를 쥐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적국으로 떠나는 자객의 심정으로 은유했다. 그만큼 이 장면은 연암에게도 강렬한 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거록의 전투든, 역수에서의 도강이든 다만 거기에 “고착”되어 있을 뿐이라면, 연암이 보기에 글에, 글쓴이의 마음에 육박한 것이 아니다.
고착되어 “거록 전투 끝내주지?” “고점리 정말 강개하지 않냐?”에서 끝난 독서란 “부엌에서 숟가락 얻었다”는 속담처럼, 별일 아닌데 떠는 호들갑, 하나마나 한 소리에 이어질 따름이라는 말이다.

이하 아이가 나비 잡는 문단에 대해서는 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저 읽으며 빙그레 웃을 뿐.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고[四顧無人]”, 곧 “누구한테 이 쑥스러운 상황을 들킨 것도 아닌데”의 울림이 문득 삼삼하다.
“그 마음은 미처 읽지 못했습니다[未甞讀其心耳]” 또한 삼삼하다. 부정사 “미未”에는 “불不”이나 “불弗”과 달리 “시간”이 깃들어 있다. “미未”에 깃든 “아직 ~아니다”의 뜻을 새기며 위 문장을 다시 한 번 새기기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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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영대정잉묵>에는 연암이 경지에게 보낸 척독이 모두 세 편 남아 전한다. <영대정잉묵>의 편차상 경지에게 답한 첫 편지는 바로 앞 글 "<영대정잉묵> 속으로_1"에서 본 바와 같다.

다시, 바로 앞 글 말한 것처럼, “척독은 한마디로 “짧은 편지”이다.” 짧은 글로서, “전화기 없던 시대의 전화 통화였고, 인터넷망 없던 시대의 인스턴트 메신저 또는 트위터 또는 페이스북”이었다.

연안은 <영대정잉묵>에 부친 “자서”에서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온 글의 진솔함 및 주고받는 형식만이 담을 수 있는 표현상의 개성 들을 들어 척독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먼저 연암 자신이 척독마저 문학적 갈래로 소화한 ““척독가尺牘家”였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연암은 <영대정잉묵>의 “자서”에서 척독을 “봄날 숲속의 새소리, 난바다 신기루 속 보물, 연잎 위의 이슬, 초나라의 박옥[화씨지벽和氏之璧을 말함]” 들로 은유했다. 이런 데 비길 만한 수사에 품격마저 갖춘 척독을 남긴 이들에게는 “가家”를 허여해 “척독가”라는 호칭까지 마련했다. 다시 한 바퀴 도는 말이지만 먼저 연암 자신부터 “척독가”였다. 그렇다면 척독가 연암이, 척독 속에서 이룬 문장은 어땠는가. <영대정잉묵>에 수습된, 경지에게 보내는 두 번째 척독 속 한 줄을 보자.

경지에게서 어떤 편지가 왔기에 이런 답장을 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연암은 “문자나 글월로 표현되지 않는 문장”을 읽을 줄 모르는 엉성한 독서를 지적하는 데 뒤이어 이런 문장을 배치했다.
 

저 허공 속을 날고 우는 존재가 얼마나 생기가 발랄합니까. 그런데 싱겁게도 “새 조鳥” 한 글자로 뭉뚱그리고 말다니요. 그렇게 표현한다면 채색도 무시되는 것이고 그 모양과 소리도 빠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임에 나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긴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彼空裡飛鳴. 何等生意. 而寂寞以一鳥字抹摋. 沒郤彩色. 遺落容聲. 奚异乎赴社邨翁杖頭之物耶.
_<경지에게 답함 2[답경지지이答京之之二]>에서

“새 조鳥” 한 자는 그저 생물종 “새”의 관념을 환기할 뿐이다. 이 한 자만으로는 비상과 노래의 생기발랄을 담을 수 없다. 산란한 빛을 따라 시시각각 달리 보이는 새 몸 표면의 색채도 표현할 수 없다. 그 운동감도 드러낼 수 없다. 이는 프랑스 인상파 그림쟁이들의 눈과도 일맥상통한다.

비상도 노래도 채색도 아우트라인도 텍스처도 무시된[沒郤] 채, “새[鳥]” 딱 한 글자로만 추상화된 새라니. 이는 나라에서 노인에게 경로의 뜻으로 지급하는, 대가리에 비둘기 장식 조각한 지팡이에 고착된 비둘기상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고착이다. 생기, 시간에 따른 변화, 운동감 들이 제거된 채의 “고착.” 연암은 자신의 글에 추상적 고착이 없기를 바란 글쟁이였다.
이런 것이다. 연암은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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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연암집燕巖集>>의 한 꼭지인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은 연암과 연암 지인 사이의 척독尺牘을 모은 꼭지이다. 척독은 한마디로 짧은 편지이다. 짧게, 사실이나 정보나 감상이나 일상의 한순간 따위를 압축했기에 편지틀을 갖추느라 장황해진 격식 있는 서간문과는 또 다르다. 척독은 전화기 없던 시대의 전화 통화였고, 인터넷망 없던 시대의 인스턴트 메신저 또는 트위터 또는 페이스북이었다.

면무식한 사람들은 척독으로 안부를 묻고, 끽다나 음주나 회식을 위한 약속을 잡았다. 척독은 주고받는 이쪽저쪽 당사자가 공유하는 비망록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편 일상의 한순간이나 마음속의 한 조각이 압축될 때에, 척독은 필경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소용과 구실을 감당했다.

옛 기록에 흔히 보이는 동복童僕또는 동복僮僕이라 하는 어린 사내종은 척독을 주고받는 데 꼭 필요한 도구였다. 살림살이 복잡한 여염집 부인 곁의 계집종이며, 면무식한 사내들 상대하느라 면무식한 청루 기생 곁의 어린 계집종도 동복과 마찬가지로 하루에도 몇 번이고 척독을 품고 뛰었다. 오페라에서 흔히 보이는 쪽지 형태의 메시지message”는 일종의 서양식 척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