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책 나누기 운동본부’의 M본부장을 만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곤 한다. 나보다 한참 손위의 그녀가 지난번엔 노랑머리 이번엔 빨간 머리, 팔색조처럼 매번 새로운 머리 모양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파격은 그뿐이 아니다. 격식을 갖추어 예식을 진행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에도 검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독특한 스타일이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독서운동을 벌이는 주 무대가 바로 병영이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지금까지 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군부대에 독서운동을 전개하고 총 76개의 병영도서관을 개관한 그녀는 가장 군을 잘 알고 사랑하는 민간인이라 할 만하다.

“본부장님은 참 용감하신 것 같아요. 빨간 머리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별’들과 어깨를 겨루고 기념사진을 찍으시니….”

존경심과 의아함이 뒤섞인 내 말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나를 보고 좀 놀라라고요. 저런 사람도, 저런 세상도 있다는 걸 알라고요. 군대가 얼마나 폐쇄적인 조직인 줄 아세요? 조금이라도 군을 변화시키려면 이런 충격 요법이라도 써야 해요.”

한동안 병영문화 개선사업에 동참해 연천의 포병부대, 서산의 공군부대, 김포의 해병대에서 문학 강연을 하고, ‘국방일보’와 병영잡지에 칼럼도 연재했다. 처음엔 심신이 너무도 건강해 신검에서 1급을 받을 것이 불 보듯 훤한 내 아들을 위해 군이라는 낯선 조직과 조금이라도 친해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를 통해 내가 만난 것은 ‘세상의 모든 아들’이었다.

한국인은 군인을 보는 관점에 따라 나이가 가늠된다. 군인이 아저씨로 보이면 어린이, 형이나 오빠로 보이면 청소년, 친구로 보이면 20대 초반, 동생으로 보이면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조카로 보이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 그리고 40대 중반부터는 군인이 아이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민통선을 지척에 둔 전방부대에 도착해 내가 만난 군인들은 영락없는 ‘아이’였다. 덩치만 컸지 하는 짓은 어설프기 그지없어 엄마의 맘을 졸이게 하는 아들, 엄마 앞에서는 불퉁대지만 그 호기로운 반항의 이면에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숨긴 아들, 그런 내 아들과 꼭 닮은 ‘아이’들이 군복을 입고 무거운 전투 장구를 멘 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때마침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따가운 햇살과 뽀얀 먼지 속에서 묵묵히 맡은 임무를 수행 중인 그들을 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문학 강연’에서 ‘문학’은 제쳐두고 내가 그들에게 당부한 말은 한마디였다.

“귀하디귀한 그대들이여, 어쩔 수 없는 어미의 심정으로 부탁하고 바라는 단 한 가지는 의무의 시간을 잘 보내고 부디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오라는 것뿐이다!”

신식 병영의 내무반 모습 (출처 : 경향DB)


그러하기에 나는 요즘 뉴스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마음이 아파 기사를 읽을 수도 없다.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루’는 게 아니라 군에 보낸 아들 때문에 부모 형제가 밤잠을 설치는 지경이다. 그래도 요즘 군대는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던 게 무참하고, 그 와중에도 병영문화 개선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훌륭한 장병들의 사기도 걱정스럽다. 기실 문제는 구조적인 것이다. 병영문화잡지 ‘HIM’에서 병사 108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군 생활이 힘든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단체생활과 통제생활의 고달픔’이었다. 병영에서 집단적인 생활을 하며 경험하는 일상적인 갈등과 충돌이 필연적이라면, 그것이 외부와 통제된 상황에서 은폐되고 왜곡될 때 ‘사고’가 터진다. 그동안 성역이거나 금기였던 징병제에 대한 생산적인 고민과 더불어 군 조직의 폐쇄성에 대한 재고가 절실하다. 사단장이 퇴임하고 연대장이 바뀌면 애써 만든 도서관이 다시 창고가 되어버리는 일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빨간 머리의 충격요법이라도 쓰려는 M본부장의 분투가 새삼 이해된다.

닫힌 세계에서 아이들이 죽는다. 열린 세계를 두려워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죽인다. 가족이라는 밀실에서 학대당해 죽고, 세월호라는 밀실에 갇혀 수장당하고, 군대라는 밀실에서 살해당한다. 미래를 위해 아이를 낳으라고 캠페인을 벌이는 대신 현재의 아이들이나 죽이지 말고 지키라는 말이 입 끝에서 간질거린다. 아무러한 환난과 위기에도 7시간 동안 꼭꼭 숨어있을 만큼 안전한 밀실은 어드메 있는지 몰라도, 폐쇄된 밀실에 창을 내고 문을 만들어 열지 않으면 황망한 죽음의 행렬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닫히면, 갇힌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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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병영

컴퓨터를 켜면 펼쳐지는 바탕화면에는 복숭아를 향해 한껏 입을 벌린 아기 사진이 배경으로 떠 있다. 평생 할 효도의 90퍼센트 이상을 한다는 그 짧은 시간의 황홀하도록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싱그러운 과육 냄새와 팔뚝을 타고 흐르던 단물까지도 여전히 생생한데, 내 곁에는 사진 속의 천사 대신 오늘 아침에도 까닭 모를 짜증과 심술을 부리다가 기어코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고 등교해버린 여드름투성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놈이 가장 예뻤던 때를 추억하며 참아야 하니라 되뇌고 되뇌는, 나는 그 이름도 처연한 ‘고3 엄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뺨따귀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으로 3월 모의고사와 4월 모의고사를 치렀다. 등급 컷을 확인하고, 원점수와 표준점수와 전국 백분위를 구분하고, 대학들이 장기짝 옮기듯 바꿔 내놓는 입시전형을 톺아보는 동안 봄날이 갔다. 중간고사와 6월 모의고사가 끝났다. 마지막 ‘내신 사수’를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쉽게 출제하라”는 권력자의 한마디에 변별력마저 상실한 모의고사에 망연자실했다. 이러구러 기말고사와 7월 모의고사가 지나고 여름방학이다. 수시 원서에 들어갈 자기소개서와 씨름하는 한편 정시에 대비해 끝까지 수능 준비를 게을리할 수 없다. 무언가에 몰린 것도, 홀린 것도 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학창 시절에도 시험기간의 긴장과 고독을 즐겼던 괴벽한 성미인지라 처음 해보는 ‘고3 엄마’ 노릇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하나, 내가 미처 몰랐던 문제가 있었다. 입시설명회를 쫓아다니고 보약을 지어대고 아이의 눈치를 보는 일보다 중요한 ‘고3 엄마’의 역할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입시설명회에 온 고3 학부모들 (출처 : 경향DB)


연초에 예상하기로 올해 수험생들의 가장 큰 ‘위기’는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가 아이들의 마음을 휘저었다. 대체 공부가 무슨 소용인가, 광장으로 달려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묻는 아이의 슬픔과 분노를 이해하는 일이 성적 관리보다 힘들었다. 중·고등과정을 사교육 없는 대안학교에서 보낸 아이가 악전고투로 입시를 준비하며 교육의 목적을 묻고 어른들의 위선을 성토할 때도 괴로웠다. 아이들은 시시때때로 흔들렸다. 그것이 바깥으로는 야금야금 일탈행동을 하거나 컴퓨터게임에 몰두하는 ‘현실도피’의 모습으로 나타날지언정, 결국 흔들림은 “왜 의미 없는 공부를 의무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얻지 못한 마음의 문제였다.

그리하여 아이러니하게도, ‘고3 엄마’는 어느 때보다 ‘학부모’가 아닌 ‘부모’로 살아야 마땅하다. 공부를 하기 싫다면 대학을 가야 할 이유와 배움의 의미에서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토론해야 한다. 아들아이는 고민 끝에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그 대답에 내심 안도했던가. 빗대기에 열없지만 주자(朱子) 역시 과거 공부가 인간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음에도 자식들이 과거를 보는 것은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주자도 어쩔 수 없을 만큼 과거의 위력은 대단했으니.

부모의 모순을 인정해야 아이의 고민도 이해할 수 있다. 광장과 독서실 사이에서 방황할 때에는 끝까지 그의 판단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나 또한 1987년 그 뜨겁던 여름에 고3을 보내며 ‘유예된 삶’에 절망했던 경험이 있기에. 여름방학 전 마지막 모의고사를 치르고, 아이와 함께 단원고 2학년 3반 17번 박예슬의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작의 많은 부분은 모작(模作)과 입시미술이었고, 그러하기에 더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박탈당한 것은 ‘재능’이라기보다 ‘일상’이다. 지극히 사소하고도 더없이 소중한. 아들아이는 한참을 말없이 영원히 고3이 될 수 없는 고2의 흔적을 바라보다가 돌아서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을 잊지 않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이십여 년 전에 겪고 다시 겪는 ‘고3’은 당황스럽고도 새삼스러운 시간이다. 현실이 적나라해지고, 욕망이 적나라해지고, 부모 자식의 관계가 적나라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고민과 대화가 깊어지는 마지막 기회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꼬박 석 달 남았다. 입시라는 기묘한 통과의례에 맞닥뜨린 모든 고3과 재수생과 N수생들의, 입시가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뛰어드는 용감한 친구들의, 그리고 다만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기에 괴로운 동병상련의 ‘고3 엄마’들의 건투를 빈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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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상을 당한 시인 J에게 문상을 갔다가 평론가 K선생을 만났다. 상갓집에서 조문객들끼리 하는 대화가 으레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한 속절없는 사설을 몇 마디 주고받다가, 문득 K선생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강화도에 볼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교훈이 ‘염치’인 학교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작가들이 저마다 모교의 ‘고리타분한’ 교훈들을 주워섬기는 가운데 그 ‘참신한’ 교훈이 한층 흥미로워졌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정말 있었다! 김포시 대곶면에 자리한 ‘대곶중학교’의 교훈이 바로 친애, 정성, 그리고 ‘염치’였다.

대체 누가 지은 교훈일까? 곱씹을수록 감탄스러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대곶중학교 홈페이지에 ‘염치’는 ‘결백하고 정직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말하자면 염치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를 차릴 줄 아는 체면과 동전의 양면이다. 흔하디흔한 ‘성실’, ‘근면’, 심지어 ‘순결’ 따위의 교훈은 기실 개인적인 양심이나 품성, 가치의 조항에 불과하다. 1차 집단인 가족이나 촌락의 가르침이 될 수 있을지언정 2차 집단인 학교에서 내세워 훈육할 만한 지침은 아닌 것이다. 사악한 자가 근면하고 성실하면 사회의 재앙이다. 여학교의 교훈으로 떡하니 계시된 순결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대한 폭력이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음을 가르치는 데 있어 ‘염치’만큼 중요한 덕목이 어디 있는가?

면면히 이어온 경험적 지혜가 함의된 속담에서 ‘염치’는 다양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염치없는 자는 낯짝과 뱃가죽이 소가죽보다 두껍다. 봉당을 빌려주면 안방까지 내달라고 우겨대고, 안뒷간에 똥 누고 안 아가씨더러 밑을 씻겨 달라고 덤벼든다. 고약한 노린내가 나는 놀래기 회라도 마다하지 않고 먹을 형국이다. 조상들은 이처럼 두려움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고 제 욕심만 차리려 덤비는 자를 꺼리어 멀리했다. 이 모두의 근원이 바로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몰염치다.

바야흐로 ‘염치’가 실종된 후안무치의 시대다. 어떤 악행과 실행보다도 번연히 제가 저지른 일 앞에서 뻔뻔스레 구는 철면피들이 더욱 놀랍다. 그렇다. 화가 나기에 앞서 놀랍다. 눈물이 흐르면 훔쳐 닦는 자연스러운 반응 대신 대놓고 드러내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발연기’를 하고, 그걸 놓칠세라 카메라는 ‘줌인’으로 재바르게 찍어댄다. 친자식들조차 내팽개치고 살아가던 사람이 지방교육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가 하면(단, 그 과정에서 의외로 발견된 ‘개인’은 놀라웠다. 달콤한 그녀는 오로지 제 근기로 혈연의 성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저희가 주장했던 직선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비교육적이기 그지없는 교육단체도 있다. 끝내는 조선총독부 총독으로나 어울릴 인사를 민주공화국의 총리 후보랍시고 들이대기까지 한다. 아, 보는 사람이 쪽팔리다. 어찌하여 부끄러움은 항상 그들이 아닌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가?

일러스트 : 김상민


염치없음, 그리하여 뻔뻔스러움은 결국 철저한 특권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아도취, 자기합리화, 안하무인의 행태는 철학자 아론 제임스가 지적한 대로 “모든 인간은 도덕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그들은 실로 특별하여 당당하다. 특혜는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의 불만 따윈 아랑곳없다. 자아도취와 자기 합리화는 그들의 ‘DNA’에 새겨진 불굴의 면역성이다. 그런데 그 특권의식을 뒷받침하는 건 다름 아닌 “진상은 호구가 만든다”는 사실이다. 일단 강단에서 마이크만 잡으면 사탄이 떠드는지 천사가 외치는지 가려 듣지도 않고 무조건 “아멘!”을 외치는 맹신자들과, 거지 코스프레를 하는 약탈자들에게 ‘불쌍해서’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은 그들이 마음껏 진상을 떨도록 만들어주는 ‘호갱님’에 다름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하고 배짱을 튕기는 파렴치한에게 “네가 누군지 안다!”고 똑바로 말해 줄 수 없는 한 이 끔찍한 ‘참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에서는 쓰레기가 배출된다. 하지만 쓰레기가 생기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쓰레기를 아무 데나 방치하고 심지어 투척하는 일은 범죄에 속한다. 깡통은 깡통끼리, 휴지는 휴지끼리 차곡차곡 분리수거하고 악취가 나면 탈취제라도 뿌려야 한다. 더러우면 숨거나 숨기기라도 해야 한다. 그게 중학생이라도 능히 알 만한 최소한의 ‘염치’다.


김별아 | 소설가 ywba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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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성장하는 자식에게 일종의 ‘허들’과 같다. 삶이라는 장애물 경주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허들이기에, 그것을 어떻게 뛰어넘느냐에 따라 완주하느냐 포기하느냐가 결정되고 기록이 달라지기도 한다. 부모의 낮은 허들을 가뜬히 뛰어넘고서야 세상의 높은 허들에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다. 지배와 통제를 포기한 낮은 허들이 자아존중감과 용기를 키워주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가 너무 높은 허들이 되어버리면 멈칫댈 수밖에 없다. 심지어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부모가 성취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자식의 비극이다. 그래서 조선조의 어느 현명한 아버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정승 자리에 오를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판서에서 행보를 멈췄다고 한다. 자신이 벼슬아치로서 닿을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면 자식이 도전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가 낮은 허들은커녕 높은 허들조차 아니고, 아예 두꺼운 벽이라면 어쩔 것인가? <독재자의 자식들>이라는 짐짓 자극적인 제목의 책은 이런 의문에 대한 씁쓸한 답을 담고 있다. 얼마 전 아들아이와 마주앉아 “악인들의 자식들은 왜 그리도 효자, 효녀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식탁에 펼쳐진 신문에는 사학비리로 구속되었던 옛 이사장의 아들이 20년 만에 새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비리재단의 대학에 화려하게 컴백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제법 머리가 굵었다고 시시때때로 대립각을 세워온 아들과 오랜만에 한목소리로 침을 튀겼다. 왜 악인의 자식들은 부모의 악행을 답습하는가? 어떻게 반항 한번 하지 않고 부모의 가치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들의 가족을 그토록 화목하게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세습 후계자 김정은이 열병식을 지켜보며 주석단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출처: AP연합뉴스)


기실 답은 간단하다. 그들의 가족은 식구로 통칭되는 밥상공동체를 넘어서 ‘이익집단’에 가깝다. 그들을 결합시키는 이해관계는 ‘돈’이다. 돈의 철학, 돈의 힘이 ‘가족애’의 원천인 셈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독재자’로 분류되는 이들의 자식들에게는 돈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작용한다. 아버지를 부정해도, 설령 긍정한다 해도 그들은 결국 아버지의 그늘에 갇혀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는 전쟁 중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자 전류가 흐르는 철책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기보다 ‘살해’에 가까운 이유는, 전쟁 전 유대인 약혼녀와의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와의 불화로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 아버지로부터 ‘총 하나 제대로 쏘지 못한다’며 힐책당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불명예스러운 포로가 되어버린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카스트로의 딸 알리나는 서방세계에 아버지의 만행을 폭로한 활동으로 유명하지만, 인터뷰나 연설을 시작할 때마다 “저는 피델 카스트로의 딸입니다”라고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모델이자 방송인이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는 끝내 독립된 개인일 수 없었던 것이다.

‘독재자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망령에 영혼을 사로잡힌 채, 일생을 통틀어 아버지의 권력으로부터 얻은 특혜보다 훨씬 중요하고 많은 것을 잃는다. 아비가 도살의 피 묻은 손으로 뺨을 어루만질 때 사랑스럽게 방긋 웃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무지하고 처절하게 무감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실로 마음 바탕이 황폐한 그들에게는 끈질긴 치료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절대권력은 무오류하거나 절대악이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라는 도식 때문에, 도도하고 의연한 허수아비로 추종받을지언정 이해받고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현대의 공주와 왕자는 개인의 불행이요, 사회의 재앙일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핵심 키워드이자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최초의 범죄는 ‘살부(殺父)’다. 이것은 패륜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통과의례와 자아의 독립을 뜻한다. 내 마음속의 거대한 아버지, 압도적인 아버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영웅이자 망령인 아버지를 지워야만 오롯한 나의 삶,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장애물 경주에서 부모라는 허들을 뛰어넘으면 그 결승점에는 부모보다 더 나은 삶, 전(前) 세대의 오류를 극복한 세계가 자리한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올라라!”라고 일갈했던 것도 스스로를 낮추어 다음 세대를 높이고자 했던 애정의 표현이었다. 사랑하면 낮아져야 한다. 높으면 기어올라서라도 넘어야 한다. 그 필사적이고 필수적인 과정이 없다면, 끝끝내 당당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영원히 겁먹은 어린아이로 살 수밖에 없으리라.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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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의 선진이신 극작가 신봉승 선생을 만나 점심을 먹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이 대표작인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을 집필할 당시 부족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남산 도서관 ‘앞’이었다고 한다. 드라마가 방영된 기간은 1983년부터 1990년까지인데, 1968년에 시작된 <조선왕조실록> 국역 간행 작업은 1993년에야 끝났기 때문이다. 1991년에 북한이 먼저 완역을 마치자 경쟁심에 불타오른 남한 정부가 급히 작업을 재촉한 터라 오역이 많았다는 뒷이야기는 제쳐 두고, 아무튼 자료를 해독하는 데 난항을 겪던 선생은 시시때때로 <조선왕조실록>을 품은 채 남산 비탈을 뛰어올랐단다. 도서관 ‘안’에서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도서관 ‘앞’에서 풀렸다. 남산 도서관 앞 나무그늘 아래서 바둑을 두고 계시던 흰 수염 훨훨 날리던 노옹들이 바로 그 해결사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네이티브(native)’로 한학을 익힌 노옹들은 선생이 내민 자료를 담배 몇 갑과 탁주 몇 사발에 척척 풀어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그 학 같고 신선 같던 ‘마지막 유학(幼學)’들은 더 이상 만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봉사 단청 구경하는 꼴로 까만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인 <승정원일기>를 노려보고 있다. 어쨌거나 국문학을 전공한 처지에 영어 원서보다 한문본을 읽기가 더 어려우니 민망하고 한심한 일이다. 혼자 꿍꿍대다 결국 출판사에 도움을 청해 한문학 전공자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또 며칠을 고스란히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 또한 역사 연구자들이 시달리는 ‘자료의 가난’을 체험하게 되었다. 전란과 식민 통치의 신산한 역사는 시대의 소중한 기록을 불태우고 흩어놓았다. 우리나라에 <사송유취> 한 종밖에 남아있지 않은 조선 전기 소송법서들은 임진왜란 시기에 강탈당해 일본 도쿄, 쓰쿠바, 나고야의 도서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고대사학자들을 고심하게 하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본 궁내성 도서관을 뒤져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름만 전해지던 기록물들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은 행운과 같은 우연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조선의 금지된 소설 <설공찬전>은 이문건의 일기책 <묵재일기>의 안쪽 면에 숨겨져 있다가 500년 만인 1996년 발견되었고, 18세기와 19세기 무신들의 생활사를 밝힌 <노상추일기>는 안강노씨 문중에서 국사편찬위원회에 자료를 제공해 2006년에 간행되었다. 사료, 그중에서도 서책이나 문서가 발견되면 많은 수수께끼들이 풀리고 또 다른 수수께끼들이 새로이 제기된다. 그것을 역사가들이 연구한다. 그리고 그들의 귀한 연구를 자료 삼아 소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이 창작된다.

전산화되어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여전히 톺아볼 구석이 많은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풍부한 사료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헤아려볼 수 없는 상황이 속상하기 그지없다. 1623년 인조 1년부터 1910년 순종 4년까지의 기록이 현존하는 <승정원일기>는 3242책, 2억4250만자에 달하는 단일 사료로서는 가장 방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국역된 부분은 고종과 인조 재위기, 그리고 영조 즉위년까지에 불과하다. 여태껏 해온 바대로의 인력과 예산이라면 대략 98년이 지나야 마무리되는 셈이다. 그러니 <승정원일기>는 내가 살아서 끝내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한류니 문화콘텐츠니 하여 그것을 써먹을(다시 말하면 ‘팔아먹을’)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부에서 뒤늦게 “예산을 줄 테니 10년 안에 끝내라”고 설레발을 쳤던 모양인데, 문제는 그동안 제대로 된 고전번역가를 키우는 데 아무런 투자도 관심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전문인력이 없는데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리가 있는가? 씨 뿌리고 물 한 번 주지 않으면서 과실 따먹을 궁리나 하는 꼴이다.

그 잘난 한식세계화 사업의 예산이 241억원이었다. 강을 살리기 위해 일단 죽여 버린 4대강 사업의 유지비용은 적게는 연간 6000억원에서 많게는 1조원, 심지어 2조원 이상까지 예상된다. 이미 때려먹은 헛돈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조선왕조실록> 영어 번역 사업이니 뭐니 하며 허튼짓을 하는 데는 두 발 두 손을 다 들겠다.

얕은 물에서 큰 고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역사는 가없이 깊은 물이다. 내가 살아생전 볼 수 없는 책을 언젠가 누군가 귀히 긴히 읽어주길, 그저 이리 맥없이 간절히 빌 뿐이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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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모어에 의하면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의 취침시간은 8시간이다. 그 정도의 잠이라야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삶이라는 축제를 가장 빛나게” 해줄 수 있고, 그런 단잠 속에서라야 찰스 디킨스가 읊조린 “부자와 거지를 계급에 관계없이 하나로 묶어주는” 꿈을 꿀 수가 있다. 식욕 그리고 성욕과 함께 수면욕은 인간의 3대 본능 중 하나다. 비록 그 때문에 인생의 3분의 1을 ‘낭비’한다고 투덜대는 악바리들이 없진 않지만, 달콤한 잠만큼 좋은 휴식은 없다.

그런데, 여기 잠 때문에 일터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2011년 5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성기업 아산공장의 투쟁은 밤잠을 좀 제대로 자자는,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절박한 요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올빼미’로 살았다. 혹독한 야간노동은 평균수명을 단축하는 미래의 위협을 넘어서 당장의 목숨을 앗아갔다. 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통근버스 안에서 수마에 사로잡힌 듯 죽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끌고 집에 돌아가 잠에 곯아떨어진 채 죽었다. 수면 부족과 피로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9년에서 2011년까지, 그렇게 돌연사와 자살로 세상을 등진 노동자들만 일곱 명이었고, 현장의 산재사고 또한 부지기수였다.

용의자 혹은 피의자에게 잠을 안 재우고 밤샘 조사를 계속하는 것은 고전적인 고문 방법 중 하나다. 인간은 사흘 이상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뉴런이 재생되지 못해 뇌기능이 떨어지고 결국 사망한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기 전에 눈알이 빠질 듯하고 입안이 헤어지는 극심한 고통 속에 이미 정신이 너덜너덜해져 미쳐버린다. 그러니 죄 없는 동료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 노동조합이 회사 측에 요구한 야간노동 철폐와 주간연속 2교대제는 노동자로서의 권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권리였다.

유성기업 고공농성장 (출처 :경향DB)


유성기업은 현재 자동차 부품 가공 분야에서 국내 1위 회사라고 한다. 아산공장, 영동공장, 대구공장, 남동공장에 이어 중국공장을 두고 있으며, 국내 계열사만 7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처럼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귀족 노동자’들이 자부심을 갖기는커녕 배부른 투쟁, 아니 투정을 하는 데 대해 회사 측은 직장폐쇄와 용역깡패의 테러, 어용노조를 통한 분열공작으로 맞섰다. 그런데 무슨 귀족이 깡패들의 대포차에 속수무책으로 치이나? 무자비한 폭력에 두개골이 함몰되고, 갈비뼈가 부서지고, 콧등이 주저앉나? 비닐하우스와 천막과 굴다리에서 풍찬노숙을 하나? 더더군다나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은, ‘올빼미’가 기어이 ‘개’가 되어버린 이야기이다.

초기에 법원의 중재로 폐쇄되었던 직장에 복귀했을 때, 노조원들은 회사 정문 앞에서 “나는 개다!”를 3번 복창해야 용역들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고 한다. 차마 듣는 귀를 의심하게 하는 ‘개 같은’ 이야기다. 이런 사연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홍종인 유성기업 아산공장 지회장과 이정훈 영동공장 지회장이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 옆 광고탑에 오른 진짜 이유를 알았다. 바람만 불어도 멀미가 난다는 그 어지럽고 뜨거운 자리에서 그들이 기어이 세상과 싸우는 바보를 자청한 까닭은 바로 ‘올빼미’도 ‘개’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청문회와 국정감사를 통해 부당노동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나 고용노동부에 고발까지 당했음에도 일말의 반성도 수치심도 없는 사측에 ‘사람’으로서 맞서기 위함이다.

살다 보면 치사하고 더러운 일을 수없이 겪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꺾이거나 구부러질 때도 있다. 때로 비굴하게 타협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에 나오는 것처럼, ‘모욕’은 마지막 뇌관이다. 문제는 다만 그것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 견디느냐 견디지 못하느냐 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 전국 30여곳에서 ‘희망버스’가 그들을 향해 출발한다. ‘올빼미’와 ‘개’는 모욕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마땅히 능멸을 견딘다. 하지만 ‘사람’은 모욕에 맞서 싸운다.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 새로운 사회운동의 등장을 의미하는 희망버스가 응원하는 대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고립된 약자들의 자살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척박한 세상에서,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을 품을 수 있고 희망을 전할 수 있다고 외치며 떠난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상 22미터 높이에서 ‘사람’으로 실존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희망버스의 엔진 소리만큼 아름다운 응원가는 다시없을 것이다. ‘사람’만이 ‘사람’을 위해 노래할 수 있으리니.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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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과연 심리학에서 말하는 ‘망각의 역현상’인지, 어제 일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주제에 이십삼년 전 그날이 그린 듯 생생하다. 그날은 어버이날이었다. 4월26일 사복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의 시신이 모교 병원의 영안실에 안치된 후, 얼결에 투쟁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학교를 지키며 열이틀째 철야농성을 하던 불효녀에게는 쇳덩이를 삼킨 듯 마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당연한 일상을 영위하기엔 부당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강경대가 죽고 사흘 뒤에 전남대 박승희가 분신했다. 박승희가 죽고 이틀 뒤에 안동대 김영균이 분신했다. 김영균이 죽은 이틀 뒤에 경원대 천세용이 분신했다. 다시 사흘 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고 목숨을 끊은 이들은 모두 나와 엇비슷한 연배의 스물서넛 살, 죽음을 껴안기엔 아직 창창한 젊음이었다.


다른 삶, 나은 세상을 위해 죽음을 매개로 싸운다는 건 참혹한 모순이었다. 아무리 유구한 신화를 들추어 불과 물의 정화를 말해도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강경대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칠 때마다 가슴에 절망의 검은 물이 배었다. 총학생회실에 비치된 팩시밀리는 사흘이 멀다 하고 ‘열사’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사진을 토해냈다. 그것들을 검은 테두리의 사진틀에 담아 도서관 앞에 마련한 분향소에 봉안했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불가해한 현실 속에서 그들을 ‘계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혼돈과 공포, 그해 5월의 ‘괴물’은 그 틈새를 음험하게 파고들었다.


구겨진 유인물과 쓰다만 플래카드가 쌓인 학생회실 한구석에서 집행부들과 조회를 하다가 비보를 들었다. 전민련 간사 김기설이 조금 전 로터리 건너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투신했다는 소식이었다. 순간적으로 나와 친구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어젯밤, 바로 몇 시간 전, 무슨 문건인가를 정리한다며 워드프로세서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를 보았던 것이다. 조금은 산만하고 우울해 보였던가? 아니, 우리 대부분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그의 깊은 고독을, 뒤이어 펼쳐질 비열한 날조극을.


처음에는 웃었다. 유서를 대필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황당해서. 그런데 상황이 조금씩 기묘해졌다. 세 사람만 우겨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더니, 공안 검찰의 압박 공세와 권력의 확성기가 되어버린 언론의 여론몰이 속에 그 황당한 ‘썰’은 어느새 ‘사건’이 되어 ‘사실’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이미 네안데르탈인 시대부터 ‘슬픔의 의식’으로 자리 잡았던 한 인간의 죽음이 조롱당하고 왜곡되는 일은 그토록 짧은 시간, 지극히 추상적인 증거만으로 가능했다.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 강기훈씨가 무죄선고를 받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경향DB)



그 일은 언제부터인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음모의 본질을 “고발한다!”고 외쳤던 작가 에밀 졸라는 한국에 없었다. 하필이면 어린이날, 동심과 백만 광년의 거리가 있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옛 시인의 일갈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예언처럼 ‘검은 유령’이 사건을 장악했다. 김기설은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서강대 본관 5층 옥상에 올라가 시너를 몸에 뿌리고 라이터 불을 붙인 뒤 16미터 아래 땅바닥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자살방조죄’로 판결 난 그날의 사건은 한 사람의 인생을 산산조각냈고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무참히 모욕했다. 전자는 그로부터 23년 동안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간난고초를 겪은 강기훈이요, 후자는 결국 결손가정 출신에 고등학교 중퇴자로서 스스로 ‘이타적 자살’을 할 자격조차 없다고 낙인찍힌 김기설이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서야 마침내 무죄 판결을 받고 기자회견을 하는 강기훈씨의 얼굴이 내게는 낯설다. 분노와 억울함으로 몸부림치던 청년은 잔인한 세월을 오직 진실에 의지해 견디는 동안 병든 초로의 오십객이 되었다. 그가 재판정에서 했던 최후진술 전문을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읽었다. 짐짓 담담한 문장의 행간에 꿍꿍 윽박은 23년의 분노와 슬픔과 회한이 숨 막히게 아팠다. 그의 소망대로 이제는 놓여나기를 빈다. 그는 말마따나 할 만큼 했다.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소박한 충고를, 상고니 뭐니 다시금 죄를 더하려는 이들이 부디 새겨듣길 바란다. 준엄한 시간의 법정은 누가 진정한 죄인인가를 마지막까지 판정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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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시절은 사람과 함께 간다. 철학자 들뢰즈와 가수 김광석이 떠났을 때 나는 젊은 날의 빛이 스러지는 것을 느꼈고, 그로부터 얼마 뒤 영화배우 장국영이 떠났을 때 마침내 소년과 소녀의 계절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적어도 수사 당국이 발표한 사인은 그랬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했던 나는 그들의 자기 살해를 좀처럼 믿을 수 없어서 분노했다. 이 먼지와 티끌의 진창 속에 나를 버려두고, 어떻게 자기들만 떠날 수 있나? 그것은 맥없이 흘러버린, 돌이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상실감과 배신감이기도 했다.


선배 정은 택시 운전수다. 그는 하루 12시간씩 일주일에 72시간을 ‘바퀴노동자’로 산다.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지에 ‘운행일지’라는 제목으로 올라오는 그의 일상을 엿보노라면 평지에서도 멀미가 난다. 새벽부터 겨울비 내리던 어느 날, 행신동에서 첫 손님을 불광동 서부터미널에 모시고, 녹번역에서 응암역에 갔다가, 응암역에서 서북병원, 병원에서 다시 응암역, 역에서 서대문구청, 구청에서 홍제역…. 


짙은 먹구름과 겨울비로 사위가 컴컴한 가운데 광화문에서 공덕역, 용강동에서 혜화동, 탑골에서 애오개역, 역에서 증권거래소, 마포 가든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 충정로에서 애오개, 국회에서 마포세무소, 다시 가든호텔에서 신촌 현대백화점, 백화점에서 홍제역, 무악재역에서 광화문 동화면세점, 정동에서 충정로…. 


숨 가쁜 오전이 지난 자리에 밀려온 허기를 돼지국밥 한 그릇으로 헐후히 달랜다. 1회 승차당 평균 운임 3000원 정도. 시간당 생산성 따위를 묻지 말라고 한다. 하루 종일 열나게 ‘뺑이’쳤으나 입금하고 가스비 내고 나니 겨우겨우 ‘똔똔’이란다. 허무의 극치, 그는 쓰게 웃는다.


사실 정은 예전에 시인이었고 지금도 시인이다. 하지만 택시를 몰기 전까지 누항에서 밥벌이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시가 교차로 신호를 무시하고 중앙선을 함부로 넘어 역주행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것을 자해적인 폭음과 폭주로 견뎠다. 하지만 ‘바퀴노동자’로 살아낸 지 4년 만에 그의 얼굴은 4년 전과 전혀 달라졌다. 담배를 끊고 술을 일주일에 한 번만 먹어서라고 하지만, 그동안의 지난한 노동이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를 변화시킨 것이 분명했다.


혼자 놀고 혼자 일하기에 익숙한 내가 가장 그리워하면서 가장 괴로워하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선배는 매 순간 낯선 사람이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치는 나날을 어찌 견디는가, 육체노동도 고단하지만 감정노동 또한 만만치 않잖은가 걱정하며 물으니, 그가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다. 


술에 얼근해져 시름을 객기로 울분을 시비로 터뜨리려는 취객을, 지름길 놔두고 돌아가는 게 아니냐며 쌍심지를 켜는 찰짜를, 세상의 별의별 일로 쌓인 설움을 별의별 생트집으로 풀어내려는 ‘진상’ 손님을 상대하는 그 나름의 비법이 있다는 게다. 그의 택시를 타면 어김없이 들을 수 있다. 


‘젖은 듯 보송보송하고/ 서걱서걱한 듯 촉촉하고/ 즐거움인 듯 아파하고/ 아픔인 듯 다독여 어루만지는’ 그 목소리. 김현식이면 어떨까 하니 철금성은 호불호가 갈려 잘못하면 시비가 붙는단다. 유재하는 괜찮지 않나 하니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단다. 


그래서 김광석, 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라졌지만 가객에게는 영원한 젊음을 곱씹으며 ‘신파인 듯, 아닌 듯/ 꿈인 듯, 아닌 듯’한 그 노래를 듣노라면 취객도 찰짜도 진상도 하나같이 조용해진다고 한다. 어쩌면 그 약속한 듯한 침묵은 각자의 지난 시절에 대한 애도이리라(작은따옴표 안에 정기복 시 ‘김광석’을 인용함).


가수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1'(1993/서울음반)(출처 :경향DB)


정은 구르고 구르는 일상을 ‘내 바퀴의 윤회, 윤회의 내 바퀴’라고 부른다. 고되고 위험한 노동인지라 성급함도 성냄도 다 비우고 조심조심 견딘다. 회사 택시의 한 달 만근은 26일, 하지만 삶의 생기를 찾고 성찰의 시간을 갖기 위해 빠듯한 시간을 쪼개어 일주일에 한 번씩 산에 오른다. 바퀴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백운대, 향로봉, 연주대, 형제봉에 올라 지난 실패와 여분의 희망을 곱씹으며 또다시 바퀴를 달릴 기력을 찾는다. 


그의 노동과 바퀴가 달아나는 시를 따라잡을 때, 그의 택시에서 함께 달리는 김광석도 잃어버린 시절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추억까지도, 어쩔 수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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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은화(銀花)로 뒤덮이고 며칠 지나 경북 안동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도산면 토계리 퇴계 종택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이육사 문학관에서 열린 낭독회에 초대받은 터였다. 문학관은 큰길에서도 한참을 골짜기로 파고들어 벽처나 다름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외진 곳까지 누가 시와 소설 낭독을 들으러 찾아와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행사가 열리는 강당이 꽉 차 있었다. 문학관이 주최하고 지역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벌이는 ‘이육사문학축전’이 10년째 거듭되다 보니 그만큼 ‘열성 팬’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한겨울 추운 밤의 마을방에 마을꾼들과 모여 앉은 듯, 마음이 낙낙해졌다.

함께 초대되어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안동까지 가는 길에 시인 손택수가 물었다.

“누이는 한국시 중에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뭐요?”

그러더니 망설이는 나를 앞질러 제 대답부터 냉큼 내놓는다.

“나는 한국 시사 백년에 최고의 시구는 육사의 그것이라 생각해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구름 5%, 먼지 3.5%, 나무 20%, 논 10%/ 강 10%, 새 5%, 바람 8%, 나비 2.55%, 먼지 1%/ 돌 15%, 노을 1.99%, 낮잠 11%, 달 2%’에 자기 시의 저작권이 있다는 손택수의 말마따나, 시적 은유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사물들을 잇는 일이다. 그러니 ‘강철’과 ‘무지개’를 과감하게 이어낸 이육사의 ‘절정’을 시대의 절창으로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강철과 무지개라… 버스 차창 밖에서 휙휙 쌩쌩 지나는 겨울 풍광을 배경으로 하여 그 이미지들을 곱씹어본다. 굳세고도 아련하고, 차갑고도 뜨겁다.

작가들은 애초에 백석이 읊었듯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시구에서 하나, ‘높고’라는 구절은 가끔 시대의 요철을 만나 덜그럭거린다. 근대문학 연구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친일 작품을 쓰지 않은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적극적으로 친일하던 최남선을 꾸짖은 것으로 알려진 정인보와 한용운을 비롯해 김영랑, 변영로, 오상순, 홍사용, 염상섭 등이 끝까지 매문(賣文)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회유와 협박을 받을 계제가 아니었던 청록파를 포함한 신진들을 제외하면 지조를 지킨 작가는 그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높기는커녕 낮고 너절하고 졸렬하게 시절에 굴복한 것이다.

 

일제시대 민족저항시인 이육사 (경향DB)

하지만 식민지시대의 문학사를 ‘굴종의 역사’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은 그 미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저항의 깃발을 곧추세웠던 날선 붓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표적인 항일문인으로 윤동주와 이육사를 떠올린다. 그런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와, 무장투쟁단체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베이징의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는 삶의 궤적이 다분히 상이하다. 윤동주가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시인일 뿐이었다면(본질적으로는 이야말로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이육사는 온몸으로 시를 쓴 행동주의자였다. 어쨌든 끝내 높기를 포기하지 않은 그들의 시는 공통적으로 강철처럼 단단하고 무지개처럼 아름답다. 강철로 된 무지개인 양 시리도록 맑다.

기실 작가들은 약한 존재다. 오로지 몰라서 덧씌운 판타지나 그럴듯하지 실생활에서는 도무지 궁상스럽고 쩨쩨하기 한량없다. 하지만 슬픔의 벗이 되기에는 그만한 조건이 다시없다. 슬픔은 작가의 눈을 적셔 세상을 촉촉하게 바라보도록 하고, 때로 그 슬픔은 메마른 세상을 적실 유일한 힘이 된다. 슬픔에 기대는 대신 권력에 기대어 보려, 달팽이나 지렁이처럼 순정하게 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알아서 부역의 진창을 기는 자들이 다시 문학을 능멸한다. 저희 입맛에 맞지 않는 작품을 내치며 작가들의 내밀한 슬픔마저 쥐락펴락하려 한다. 화가 나기에 앞서 우습다. 우습기보다는 차라리 슬프다. 그래서 훼절의 시대와 끝끝내 야합할 수 없었던 동주의 시는, 육사의 시는 그리도 간절히 슬픈가.

‘그리고 새벽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여지세’

이육사의 시 ‘파초’가 낭송되는 행사장에는 세 살 때 아버지와 영영 헤어진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인 이옥비 여사가 자리를 함께했다. 육사가 직접 지었다는 옥비라는 이름은 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자를 쓴다고 한다. 기름지지 말라고, 부유하지 말라고, 가난함을 기꺼워하며 담박하게 살아가라는 이름을 딸에게 지어준 시인의 강강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다가, 이내 숙연해진다.

시인의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몸서리쳐지는 우리의 겨울이 얼마나 이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그것이 강철로 된 무지개였다면, 우리도 굳세고 영롱해지지 못할 바 없다. 물방울처럼 맥없이 스러질 수 없는, 달면 더욱 뜨거워지고 치면 더욱 단단해지는 강철의 무지개.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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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면 자연스럽게 지난 일 년 동안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보게 된다.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성취와 좌절, 희망과 절망… 더하고 빼어 보면 가까스로 ‘제로’이거나 어쩔 수 없는 ‘마이너스’이기 십상이다. 오직 흔들림 없는 ‘플러스’ 항목은 맛도 없이 꾸역꾸역 먹는 나이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허겁지겁 모임 자리를 만들어 적자의 슬픔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끌벅적 확인코자 하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찰과상같이 쓰라린 쓸쓸함은 현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1616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숭하는 일에 명황제가 고명을 내린 것을 축하하며 실시한 증광시에서, 마흔두 살의 광해군은 사뭇 엉뚱한 책문(策問)을 내린다.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프랑스 대학입학시험 바칼로레아의 철학 문제가 “우리는 욕망을 해방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가?”라는 사실에 충격과 동시에 열패감을 느꼈던 일이 새삼스럽다. 정치, 사회, 역사, 예술, 철학…. 어느 분야라도 어울러 꿰뚫는 이 정도의 문제라면 ‘정답이 존재하는 질문만 한다’는 아시아적 교육의 특징이 굳이 ‘전통’은 아니었다는 증거로 삼을 만하다.


과거 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책시의 문제는 삶 그 자체에 대해 묻고 있다. 정답이 없는 삶의 문제에 최선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너른 날개를 한껏 펼치고 날아오르는 하늘은 더하고 빼는 셈속이 부질없는 공활한 삶이다. 이 뜬금없이 아름다운 시험에서 을과로 급제한 이명한은 삶을 이토록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은 것이다. 세월은 네 마리 말이 끌 듯 빠르게 지나쳐버리는 것이다. 또한 인생은 구렁텅이에 빠진 뱀과 같고, 백년 세월도 한순간에 훌쩍 지나간다. 그러나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는 않는다…이렇게 답안지를 척척 채워나간 이명한은 광해군보다 스무 살이 어린 스물두 살의 새파란 청춘이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나이가 삶의 원숙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음을 증명하듯, 이명한의 붓은 새뜻하고도 웅숭깊게 삶의 비밀을 묘파한다.


새해를 맞아 희망과 기대로 부풀어 오른다, 는 말은 차마 쓰지 못하겠다. 그건 어찌 되었거나 묵은 해가 알뜰한 흑자였던 사람들이나 쓸 수 있는 말일 테다. 개인적인 삶의 적자야 여차저차 숙명론까지 끌어들여 위로한다 하더라도, 진구렁에 빠지고 숯불에 타는 듯 괴로운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의 환란은 언어의 당의정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말을 부리고 말에 의지해 사는 작가에게 말의 혼란은 어떤 결락과 내핍보다 혹독하다. 정의를 말하려니 정의가 없다. 자유를 말하려니 자유가 없다. 행복을 말하려니 행복이 없다. 사랑을 말하려니 사랑이 없다. 이 총체적인 난국에 즈음하여 어디에 마음을 기대고 몸을 붙여 살아내야 하는가? 다시 사백 년 전의 옛사람에게 길을 묻는다. 그조차 당시 체제의 요구에 부응한 누군가가 원하는 ‘정답’에 불과할지 모르나, 나름의 모범답안에 귀를 기울여 본다.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을 이기는 방안으로 애늙은이 이명한이 내놓은 대책은 이러하다.


“세월은 이처럼 빨리 지나가고, 나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죽을 때가 되어서도 남들에게 칭송 받을 일을 하지 못함을 성인은 싫어했다. 살아서는 볼 만한 것이 없고 죽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면, 초목이 시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지한 후진을 가르쳐 인도하고, 터득한 학문을 힘써 실천하며, 등불을 밝혀 밤늦도록 꼿꼿이 앉아, 마음을 한 곳에 모으기를 일평생하자. 그렇게 하면 깊이 사색하고 반복해서 학습하게 되어, 장차 늙는 것도 모른 채 때가 되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니, 마음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집권기의 한가운데서 쇠락의 애수를 묻던 광해군은 그로부터 일곱 해 뒤 폭군의 낙인이 찍힌 채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명한은 인조반정 후 승승장구하여 대제학과 이조판서에 이른다. 역사는 엎치락뒤치락하며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의 운명을 갈라놓았지만, 지금 그들은 모두에게 공평한 죽음을 통해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변치 않는 시간 앞의 질문뿐이다.


완도 금당도의 그믐달이 뜬 아름다운 밤 풍경.(출처 :경향DB)


다분히 도학군자의 이상을 제시한 사백 년 전 이명한의 모범답안을 2013년의 끄트러기를 붙잡은 내 마음대로 고쳐 써 읽어본다.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삶에 치열하기를, 당장의 영광보다는 시간에 새겨질 명예를 기억하기를,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도로써의 공부를 중단하지 않기를, 아무러한 치욕이라도 견뎌내어 이 비열한 시절을 끝끝내 증언하기를… 스러져가는 지난날을 보내고 어김없이 다가올 내일을 기다리는 적자 인생의 동반자들과 함께 간절히 바라본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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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이름으로 문학의 자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입이 싸거나 귀가 얇거나 둘 다이거나, 결핍에 민감하고 외로움에 취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모든 작가가 각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지극히 개별적이라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작가가 하나의 세계다. 모두 달라야 마땅하고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이다. 그러하기에 백만 부를 파는 한 명의 작가보다 만 부를 파는 백 명의 작가가 절실하다. 한 개의 세계보다는 백 개의 세계가 풍요롭고 보배롭기 때문이다. 세계는 확장되는 가운데 깊어진다.

2013년 2분기를 기준으로 하루에 스물세 권에 달하는 소설이 출판되었다. 이천백두 개의 세계가 은밀하고 도도하게 열렸다. 하지만 그중에서 독자들과 폭넓게 만나는 기회를 가진 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최근 10년간 가계에서 지출한 ‘오락문화비(문화오락비가 아니다)’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그 까닭이 자명하다. 여행과 캠핑 등을 비롯한 (문화라기보다) ‘오락’에 더 가까운 활동들에 대한 지출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 역시 불황인 건 매한가지이지만 공연과 강습 따위의 문화 서비스 소비도 어느 정도는 상승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서적 구입비는 해를 거듭해 줄어들어 무려 31퍼센트가 감소했다.

언젠가 경영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매출’이 31퍼센트 감소하는 ‘산업’이 있다면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더니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입 모아 대답했다.“당장 접어야지요!”

당장 접어야 마땅한 것을 끝끝내 포기할 수 없기에, 오늘도 작가들은 글을 쓰고 출판사는 책을 펴낸다. 어찌어찌 소 뒷걸음질에 쥐를 잡는 식으로 ‘뜻밖의’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으리라는 한탕주의도 없지야 않겠지만, 대부분은 떠밀려 묻혀 버릴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으면 안되는 글이 있고 펴내지 않으면 안될 책이 있는 것이다.

 

원로 문인들, 문학나눔 사업 폐지 반대합니다. (경향DB)

동네 진입로 하나를 닦는 비용에 다름 아닌 40억원의 예산으로 한국 문학의 성과를 공유하고, 소외 지역과 계층의 문화적 격차를 해소하며, 출판과 창작을 진흥하고, 작가와 독자의 소통을 지원하는 거창한 사업을 조리차하던 ‘문학나눔’이 폐지된다는 소식에 문단 안팎이 들썩거린다. 보수와 진보(같은 걸 따지는 건 애당초 무의미하지만 어쨌거나 여러 부문에서 태도를 달리하던) 문학 단체들이 한목소리로 반발하고, 원로(라고 지칭되지만 ‘선배’라고 읽겠다. 작가는 나이와 무관하게 영원한 ‘젊음’이어야 마땅하니까) 작가들까지 기자회견장에 나섰다. 참으로 속속들이 들쑤셔 헤집는다. 통합이라는 이름의 통제가 그토록 소박한, 왜소하다시피 한 자구(自救)에까지 손을 뻗치는 것이다.

몇 해 전 문학나눔의 ‘우수문학도서’ 소설 부문 심의위원으로 오십여 편의 응모작 중 십여 편을 선정한 적이 있다. 푼수없는 깜냥에 동료 작가들의 작품을 감히 ‘심사’한다는 사실이 민망했지만,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다른 세계를 엿보다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뜻깊었던 것은 선정된 우수문학도서들이 독자와 만나는 방식이었다. 자극적이고 유혹적인 오락의 호객 소리에 빼앗긴 독자들을 직접 찾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도서 구입 예산이 부족해 책장이 비어 있는 작은 도서관으로, 학교를 마치고 갈 곳이라곤 학원이 아니면 피시방밖에 없는 청소년들을 위한 방과 후 아카데미로, 마음을 다쳐 앓는 환자들을 위한 정신건강센터로, 어린 몸을 기댈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보육원으로…. 문학은 더 이상 맥없이 기다리지 않고 온몸을 밀어 찾아갔다. 그곳에서 벗이 되고 청량제가 되고 치유약이 되어 본디의 쓰임새로 알뜰히 쓰였다.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난해 말부터 ‘한국작가회의’가 발표한 성명서와 선언서 등이 십여 건을 넘어섰다. “조금이라도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을 바란다”는 작가 137인의 선언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것에 대한 항의를 시발로 밀양 송전탑 공사, 국가정보원 개혁,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일련의 사태에 이르기까지 한 달에 한 건 이상 입장을 표명했다. 김수영의 시처럼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이기를 기꺼워하며 보아주는 이 없이도 기어이 꽃을 피우는 작가들, 그리고 그들의 존재 가치인 문학이 그 모든 일들의 주동자이자 배후였다.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개판이다, 라고 말하자니 귀엽고 천진한 개들에게 미안한 지경이다. 하지만 이 괴악한 ‘복고(復古)’로 조성된 정국이 옛것처럼 공포로 느껴지기보다 차라리 혐오스럽고 짜증스러운 것을 보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세상은 달라졌고 시대는 돌이킬 수 없다. 모든 것이 극에 다다르면 튕겨져 되돌아가는 물극즉반(物極則反)의 이치를 곱씹는다. 짓밟고 짓이긴다고 없어지랴. 다만 시와 소설 대신 성명서를 써야 하는 작가들의 손끝과 그 갈피짬에 사라져가는 세계가 아플 뿐이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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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교문의 쇠창살을 부여잡고 자꾸 내 눈을 맞추려 애쓰던 엄마를 외면하고 돌아서 낯선 강의실에 몸을 부렸다. 그리고 12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 혹은 관성으로 묵묵히 시험을 보았다. 점심으로 싸간 햄버거는 오래오래 씹다가 아무것도 소화시킬 수 없을 듯한 체증에 그대로 뱉었다. 긴장만큼 비린 육즙과 불안처럼 흥건한 노린내가 마지막 시간까지 코끝과 입안에서 맴돌았다. 아무도 모르게 내내 헛구역을 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모질게 추웠던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이론’에 따르면 무작위의 기억은 그것을 접한 19분 후에 41.8%, 63분 후에 55.8%, 31일째 78.9% 사라진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19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58.2%, 63분 후의 44.2%, 한 달이 지나도 남아 있는 21.1%는 무엇일까? 25년이 넘도록 잊히지 않는 기억이란 어떤 의미 혹은 상처의 흔적일까?

 

수능 앞둔 학부모의 간절한 기도 (경향DB)

닷새가 지나면 또다시 그날이다. 25년이 흘러도 그날 치른 시험에서 유독 풀리지 않았던 문제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25년이 지나도 닫힌 교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들과 소화불량에 걸린 아이들은 판박이로 재현된다. 남의 일이 아니다. 당장 내년이면 나도 차가운 쇠창살을 홈켜잡은 채 홀로 돌아서는 아이의 뒤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봐야 할 것이다.

공부가 있으니 시험이 있다. 공부의 시작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를 깨닫는 것이니, 여태껏 배운 것을 점검하고 실력을 평가하는 절차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65만명이 한날한시에 머리를 싸매고 오직 하나뿐인 정답을 찾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괴이하다. 게다가 괴로운 것은, 그처럼 노골적으로 수치화된 점수가 인생의 출발점에 선 아이들을 오래도록 추운 겨울날에 묶어두고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10월 초에는 수학능력평가를 한 달 앞두고 마지막 모의고사가 치러졌다. 전통적(?)으로, 10월 모의고사는 쉽게 출제된다는 속설이 있다. 재수생들이 치지 않는 시험이라 재학생들의 등급이 나아지니 ‘자살방지용 모의고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에 조삼모사라 해도 당장 성적표에 찍혀 나오는 등급이 조금이라도 높으면 그 뭉근한 위로에 기대어 남은 시간을 버텨낼 수 있다고 한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시대의 유머에는 성적의 부침에 죽고 사는, 죽어버리고만 싶은 수험생들의 마음이 배어난다.

나는 또한 기억한다. 시험을 전후로 어김없이 들려오던 비극의 소문. ‘성적을 비관하여’ 짧은 생애를 스스로 마감했다는, 얼굴은 모르지만 내 친구들과 닮았음이 분명한 어느 아이의 이야기. 그마저 25년을 거슬러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음에 공포를 느낀다. 그들이 ‘패배자’이고 우리가 ‘승리자’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일 뿐이다.

25년 전에는 어른들을 비난하고 세상을 원망했지만, 그럴 권리가 충분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화시킬 수 없는 세상에 무력감과 열패감을 느낀다.

기실 대학에 가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대학 정원이 수험생의 수를 넘어선 마당에 누구나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 하지만 경쟁주의, 서열주의, 학벌주의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어간다. 누구나 갈 수 있기 때문에 아무나 갈 수 없는 대학에 대한 선호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기절 놀이를 한다. 한껏 숨을 참은 채로 목을 누르고 가슴을 압박해 일시적인 기절 상태에 빠진다. 뇌로 이어지는 혈액 순환을 가로막아 저산소증을 유발하고 뇌세포를 파괴시킬 수 있는 위험한 장난을 즐기며, 어른들의 눈을 피해 삶보다 더 쉬운 듯만 보이는 죽음을 엿본다.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띵하고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 찌릿하다. 그래도 소질이든 능력이든 흥미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달리는 무의미한 고통보다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 고통이 차라리 재미있다.

악순환의 쳇바퀴가 어디까지 굴러갈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대입시험은 온 나라를 들썩일 만큼 중요한 행사다. 그러나 아이들의 예상과 세상의 주장만큼 그 시험 하나가 앞으로 펼쳐질 삶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삶에는 세 가지가 없다. 비밀, 공짜, 그리고 정답. 시험의 정답은 있을지언정 삶의 정답은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닷새 후의 시험도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시험 중의 하나로 즐겁기까진 못해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것을 먼저 겪은 이들이 할 일은 찰떡과 초콜릿보다 쫀득쫀득한 격려와 달콤한 위로를 보내는 것뿐이다. 소설가 전경린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리자면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의 후원을 받는 작은 별같이 힘껏 반짝’이기를, 언젠가의 우리를 닮은 그들을 위해 가만히 소망한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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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이라는 책 제목이 있지만, ‘지금 알고 있는 걸 (당연히) 그때도 알았던’ 일이 있다. 최소한의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의도된, 방기된, 무책임한 욕망이 무지를 가장했을 뿐이다. 멀쩡한 강바닥을 파헤쳐 ‘공구리’를 치고 얻을 게 무엇인가. 삽질 한 번에 밥 한 술이라도 얻어먹을 욕심이 아니라면 상하좌우, 남녀노소, 이 땅에서 나고 죽고 새끼 치고 살아갈 모든 숨붙이에게 백해무익한 헛짓이었다.

캄캄한 방구석에서 나라를 근심하는 노나라 아낙처럼, 나는 홀로 분개하여 “4대강 살리기인지 뭔지를 하려거든 차라리 바벨탑을 지어라!”는 괴악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넉넉한 터를 잡아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으면 ‘그들’이 그토록 열렬히 주장하는 ‘경제 효과’가 충분히 발생할 만했다.

 

(경향DB)

그러면 그 어이없는 상승의 시도가 끝내 무모했음이 밝혀진 뒤라도 흉물스러운 욕망을 증명하는 기념물로 보존가치를 얻지 않았겠는가. 탑을 건설하는데 있어 벌어질 논쟁이라 해봤자 원추형으로 할까 장방형으로 할까, 기단을 몇 층이나 올릴까 하는 것일 테니 ‘국론 분열’ 따위야 일어날 턱이 없지 않은가. 전 세계에서 전인미답의 어리석음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어 에펠탑보다 더 유명한 관광 상품이 되지는 않았겠는가. 차라리, 숫제, 오히려 바벨탑을 지었더라면 멸종위기종이 폐사되고, 문화재가 훼손되고, 농지가 감소하고, 수질이 오염되고 홍수 피해가 증가하는 일은 생겨날 리 없지 않았겠는가.

알면서도 당하는 일이라 더욱 기막혔다. 환경단체, 시민단체, 학계, 종교계, 문화예술계…. 양심을 넘어서 정신이 있는 모든 이들이 반대를 하는데도 그들은 불도저를 앞세워 밀어붙였다. 그것에 깔아뭉개진 뭇 생명의 신음소리를 견디지 못한 문수 스님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소신공양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지금은 정비랍시고 시멘트라도 바르고 조경이랍시고 묘목이라도 옮겨 심어서 그 정도지, 공사가 한창이던 때의 현장은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참경이었다. 깎고 파헤치고 들쑤셔놓은 자연의 환부 앞에서 죄스러워 쩔쩔 매며 신기(神氣) 없이도 예지하였다. 밀봉된 상자가 열리면 검은 새 떼가 하늘을 뒤덮고, 털어서 먼지 정도가 아닌 방사능 분진이 매캐하게 피어오르고, 세상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거나 이럴 줄 몰랐다는 악다구니가 넘칠 것이라고. 사십 평생 종교와 별 상관없이 살아온 주제에 간절히 기도라도 하고 싶어졌다. 굴착기가 하루 종일 골을 파고, 덤프트럭이 밤마다 방 안에서 레이싱을 하며, 흙먼지가 방향제처럼 코끝에서 맴돌고, 카드뮴과 비소와 납으로 양념한 요리가 제공되는, (어쩌면, ‘그들’에겐 천국 같은) 지옥이 꼭 마련되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럼에도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제 와 그 쓸데없고 어이없는 일에 들어간 엄청난 비용이면 무어무어 좋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할 수 있었으리라 주워섬기는 건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나 마찬가지다. 마음 같아서는 광화문우체국 앞 혜정교 터에 세발솥을 걸고 혈세를 탕진한 탐관들을 팽형(烹刑)이라도 하자고 주장하고 싶으나, 실로 그들은 명예형에 다름 아닌 그것으로 찜 쪄 죽일 만큼의 명예도 없는 인사들이다. 번연히 저질러진 담합과 비리와 포흠과 착복을 심판하는 일은 법의 몫이로되, 매년 2400억원에서 1조원까지 추산되는 유지관리비와 더불어 돈으로 셈할 수 없는 자연의 훼손에 대한 대책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구해야 마땅하다.

4대강을 살린답시고 일단 죽이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도시계획과 환경공학의 전문가들은 ‘국내외의 댐(보) 폭파 기술 수준, 비용, 잔해처리, 폭파 전후의 생태계 변화’ 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미 지출됐기에 회수가 불가능한 ‘매몰 비용’에 연연하기보다는 보를 전면 철거하는 편이 비용 측면에서 더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신화 속의 바벨탑은 인간의 오만을 보다 못한 신이 폭풍과 번개로 내리치면서 붕괴되었다. 막히고 고이고 왜곡된 채 가까스로 흐르는 강들이 머잖아 가해올 역습은 폭풍보다 거세고 번개보다 날카로울 것이다. 거대한 물그릇이 되어버린 강을 따라 생태계의 파괴와 수질 오염을 넘어서 문화와 역사가 파괴되는 징후가 이미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어차피 무너질 바벨탑이라면 손발을 놓고 그 파탄을 기다리느니 하루바삐 폭파작전에 착수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몇 해 전 기차를 타고 낙동강 현장을 지날 때 차창 너머로 보았던 구호가 뇌리에 선연하다. ‘낙동강 살리기는 생명 살리기’, ‘4대강 살리기로 녹색 선진한국 창조’, ‘4대강은 녹색 성장의 첫걸음’…. 하긴 ‘녹조라떼’도 녹색은 녹색이다. 기어이 진짜로, 이제 정말로 죽어가는 4대강을 살리는 바벨탑 폭파작전이 긴급하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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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코미디언 아니타 렌프로가 로시니의 오페라 <윌리엄 텔 서곡>을 익살스럽게 개사한 일명 ‘엄마송(William Tell Momisms)’은 가히 전 세계 엄마들의 ‘숙명’인 ‘잔소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일어나라, 세수하라, 숙제 챙겨라, 전문가들이 강조한 대로 아침은 꼭 먹어야지…. 일상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말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내 말을 듣고는 있니, 식탁에서 문자질 말고, 오늘 컴퓨터 시간은 끝났어, 물건 좀 제자리에 놓으렴…. 매일의 실랑이가 고스란히 재현된다. 압권은 엄마가 이럴 수밖에 없는 까닭을 해명, 아니 합리화하는 대목이다. 네 친구들이 죽으면 너도 따라 죽을 테냐, 한 번만 더 말하면 천 번도 훌쩍 넘겠다, 네가 나이가 들면 지금 내 말들을 고맙게 여기게 될 게다…. 그리하여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내일도 오늘과 같은 잔소리가 변함없이 반복되리라는 확인이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는 엄마니까! 마더, 마미, 에미, 어무이니까!

통렬한 가사에 한바탕 웃었지만 왠지 뒷맛이 씁쓸하다. 잔소리의 폭포수 속에 ‘대화’는 없다. 교육학자들이 권고한 대로 “자, 이제부터 대화하자!”며 아이들을 붙잡아 앉혀보지만 나오는 말은 여전히 잔소리뿐이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대화’란 교훈과 훈계 그리고 설득이 멈춘 그 다음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너 잘되라고, 지금은 절대 모르겠지만 언젠가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고 하는 이야기라지만 조금만 머리가 굵은 아이라면 그 앞에서 금세 입을 잠가버린다. 그러면 답답해진 엄마는 또 다시 굼뜨고 게으르고 무계획적인 아이에게 잔소리를 퍼부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날로 심각해져가는 상황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작금의 학교는 ‘3무(無)’상태라고 일컬어진다. 무감각, 무절제 그리고 무감동.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잘 웃지 않는다. 화내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 제멋대로다. 비평준화 지역의 외곽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는 정원 40명으로 시작된 한 반이 학기가 끝날 무렵 22명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보며 절망을 느꼈다고한다. 그렇게 학교를 이탈한 아이들이 연간 6만여명에 이른다. 용케 ‘견뎌내어’ 대학에 진학해도 학습된 무기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성적 상위 1~2%에 들어야 간다는 의대에서조차 15%의 학생들을 ‘무동기 학생’으로 분류한다. 동기가 없으니 학문은 물론 삶에 대한 열정이 없다. 한번도 뜨거워본 적 없는 삶, 그것은 단지 생존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경향DB)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엄마의 사명과 숙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중 문득 실마리를 찾는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산행에 나선 길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들과 엄마의 산행’을 콘셉트로 한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까칠한 사춘기 아들을 카메라 앞에 세우는데 ‘미끼’가 된 것은 산행코스에 포함된 ‘노인봉’이었다. 아이는 백두대간 종주를 할 때 금지구간을 피하느라 놓친 오대산 노인봉을 종주가 끝난 지 두 해가 넘어가도록 아쉬움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봉우리 한 개를 밟지 못했으니 ‘진짜’ 종주가 아니라는 둥, 언젠가 혼자서라도 반드시 오르고야 말겠다는 둥, 평소와 다른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의 ‘덕후’ 기질이 못마땅했던 엄마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는데….

산을 오르며 보았다. 자기가 진짜 바라는 것을 향해 훨훨 날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카메라까지 앞질러 산길을 뛰어가는 아이에겐 잔소리가 필요치 않았다. 아이는 자신의 길을 너무 잘 알았다. 오랜만의 산행에 힘이 부치고 협찬 받은 등산화에 발이 아파 허덕이는 엄마를 기다려주고 밀어주며, 자연 속의 아이는 이미 옹골찬 젊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노인봉 정상에 서서 환희로 빛나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그 길이 무엇이든, 설령 험로거나 막다른 길일지라도, 아이가 진정으로 가고픈 곳으로 떠나보내야 마땅하리라고.

자연속에서 아이는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산 아래 세상에서는 약자가 된다. 입시, 학원, 스펙 따위의 각종 정보를 틀어쥔 엄마라는 강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엄마의 잔소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자연적이지 않은지, 기괴한 인위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어른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아이들의 심리학>에서 말하듯 “식물이 물과 햇빛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아이도 눈물과 두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붙잡아줄 어른이 필요”한 것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아아, 깨닫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워라! 아무리 다짐해도 산을 내려오는 순간부터 엄마의 숙명인 잔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등산화 벗어라, 가방 챙겨라, 손 씻어라…. 커다란 바위 같던 아이가 자갈처럼 쪼그라든다. 입을 다물어야 한다. 산을 타듯 검질기게 삶을 넘어야 한다. 엄마의 사명은 오로지 그것이리라.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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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학적으로 볼 때 나는 제자리에 정주하는 식물이 아니고 대지와 분리된 동물계의 일원임이 분명하다. 숙명적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괴테)라고도 했지만 그건 차원이 다른 격언일 것이다. 발을 꼼지락거리고 눈알을 굴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스스로도 좀 채신머리없어 보였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그러는 것보다 그러지 않는 것이 훨씬 윗길인 줄이야 진작 알았지만 이 버릇을 좀체 제압하지 못했다. 서두가 제법 거창해졌으나 별다른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연필 한 자루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추억을 들추기 위해 가끔 두리번거려도 좋다는 것을 말하려고 다소 장황하게 말머리를 잡은 셈이다. 


중국소설을 전공하는 분들의 모임인 중국학센터에서는 방학을 이용하여 오지여행을 떠난다. 일반 관광에서는 경험 못할 쏠쏠한 재미가 있어 나도 가끔 말석을 차지한다. 몇 해 전 처음 동행한 곳이 주자(朱子)의 발자취를 좇는 푸젠성 무이산 여행이었다. 과연 중국다운 중국제(製) 풍경. 일필휘지로 내갈긴 한자(漢字)를 그대로 빼박은 듯한 산수(山水). 그 자연의 호방한 풍경 앞에서 실컷 두리번거렸다. 호텔에 투숙한 뒤 낯선 방의 구조와 구비된 품목을 보면서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안내책자 옆에 놓인 필기구에 주목을 했다. 하룻밤 뜨내기손님에게 제공하는 그것의 품질이야 뭘 따지랴만 나중 시간이 흘러 수중에 남는 건 그 필기구와 그에 촉발되어 떠오르는 몇몇 기억들뿐일지도 모를 테니깐.


그런 이유로 필기구에 눈독을 들이는 편인데, 그때 무이산 근처에서 만난 필기구에 그만 혹, 하고 말았다. 그것은 허접스러운 연필이었다. 연필은 연필이되 나무에 흑연을 박아놓은 고래(古來)의 연필이 아니었다. 하얀 플라스틱의 몸체 끝에 흑연을 박아놓은 것이었다. 연필심은 새끼손톱보다 약간 짧았고 몸체는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길었다. 그래도 그 연필심이 닳을 때까지 쓸 수 있는 문장들은 공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똥이 나오는 볼펜이 아니라서 좋았고, 간단해서 좋았고, 볼품이 없어 좋았고, 일견 조잡해서 좋았다. 앞으로 그 연필 끝에 침 묻혀가며 할 수 있는 일들이 몇 가지 주르륵 엮어지기도 했다.


옆방에 부탁해서 몇 자루 더 챙겼다. 그러고도 욕심이 생겼다. 호텔을 나설 때 복도에서 청소하는 분들을 용케 만났다. 수건, 비누, 칫솔 등 각종 소모품들이 즐비한 카터에 연필통도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연필을 보여주며 웃었더니 마음씨 좋게 한 주먹 쥐여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그 연필은 애장품이 되었다. 멀리 꽃산행을 갈 때 꼭 챙기는 품목이다. 야생화 공부할 때 사진 찍는 게 마냥 능사는 아니라서 식물의 특징을 나름대로 그리면 오히려 관찰이 더 잘된다. 그럴 때 그 연필이 한몫을 톡톡히 담당한다.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우루무치에서 무장한 채 구보하고 있다.


지난달 중국학센터에서는 신장 위구르 지역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탐험하는 여행을 했다. 중국이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는 가장 서쪽을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떠나기 전 검색을 해보니 분리독립 운동으로 인한 긴장감이 팽팽하다고 했다. 우루무치에서 첫밤을 보내고 새벽에 일어나 무심코 창밖을 보니 호텔 건너편 어느 중학교 운동장에서 기이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갑차들이 주둔한 가운데 수십 명의 군인들이 진압훈련을 하고 있었다. 문득 기시감이 일어나고 가슴이 콱 막히는 듯했다. 두번째로 들른 사막도시 카스(喀什, 캬슈가르). 중국 공안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곳곳에서 번뜩였고 장갑차가 도심을 질주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여러 차례 검문을 당하기도 했다. 신덕상무주점(新德商務酒店)이라고 하는 호텔에 가서 여장을 풀고 두리번거릴 때 얼른 눈에 꽂히는 게 있었다. 중국 호텔의 필기구는 하나로 통일한 듯 그것은 예의 그 연필이 아니겠는가. 손잡이에 박힌 상호만 달랐다. 주자의 고향에서 본 것과 같은 조잡한, 볼품없는, 그러나 쓸모 있는, 참 밉지 않는 연필 한 자루. 그날 밤, 기름진 저녁을 먹고, 독한 백주를 들이켜고, 카스의 거리를 헤맨 뒤 알딸딸한 기분으로 침대 머리맡에 앉아, 흑연에 침 묻혀가며, 호텔 메모지에 갈긴 흔적을 여기에 옮겨본다.


타클라마칸 사막.


“멀구나. 아득하구나. 우리나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 보잘것없는 연필에, 침을 묻히며, 사각사각 글 쓰는 마음. 이 연필은 깎을 테두리 나무가 없다. 흑연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지금 굳이 침을, 고인 침을 기울여, 연필심에 묻히는 것은, 그 두꺼운 흑연을 녹이려는 뜻도 있거니와, 그냥 단맛, 쓴맛, 짠맛을 기억하며, 누구 말마따나, 그래도 그 모든 맛난 것들을 저 혼자 독차지하고 누린 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 위하여. 실제로 그렇게 혀를, 의례적인 단어와 말에 굳을 대로 굳어진 혀를 날카롭고 뾰족한 연필 끝으로 찌르자, 이역만리의 낯선 지방에서, 어린 시절의 많은 일들, 우리가 통과해낸 지독했던 날들이 사막에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구나! 타클라마칸 변방에서.”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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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잠시 수그러들고 먹구름이 옅게 흩어지던 어느 날 오후, 그는 교회 앞마당에 서서 잔잔한 남서풍에 실려오는 희미한 바다 비린내를 맡았다. 굵은 비가 쏟아진 직후의 바다 비린내는 거칠고 차갑다. 고기잡이배에서 막 내려서는 바닷사람의 냄새가 꼭 그렇다. 그의 교회가 있는 서천의 바닷가 마을에는 이제 그런 사람이 없다. 마을은 더 이상 바다에 기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리 기댈 곳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교회처럼. 혹은 그처럼.


파란 샌드위치 패널로 벽을 두르고 붉은 함석지붕을 올린 교회당에는 앞좌석의 등받이가 뒷좌석의 책받침대로 이어지는 긴 나무의자가 열 개씩 두 줄로 놓여 있고 그 중앙에는 가슴 높이의 작은 설교대가 있고 왼쪽에는 낡은 피아노가 있다. 그 외의 장식이나 기물은 하나도 없는 단출하고 작은 공간인데, 주일 예배시간에는 채 스무 명이 되지 않는 신도들이 띄엄띄엄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어 교회당은 넓어 보이기까지 한다.


신도들 대부분은 목사인 그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다. 농사가 생업인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난하고 더불어 교회와 그도 어쩔 수 없이 가난하다. 몇 해 전 사회복지사 자격을 딴 그의 아내는 남당지역아동센터에 일을 나가 돈을 번다. 서울에 있는 대학생 아들의 학비는 온전히 그녀의 몫이다.



그는 코끝에 조그만 돋보기안경을 걸친 채 거실 한 구석에 있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다음날 새벽기도 시간에 읽을 성경구절을 찾느라 가장자리가 닳고 닳은 까만 가죽표지의 성경책을 뒤적이며, 내가 마지막이겠지. 이 교회 목회자로는, 이라고 혼잣말처럼 희미하게 말했고, 식탁에 앉아서 아동센터 아이들의 두툼한 상담일지를 밤늦도록 정리하던 그의 아내는 아무 대꾸 없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그를 넘어서 아주 먼 곳을 향한 듯했다.


성경책을 뒤적이던 손을 멈춘 그가 또다시 혼잣말처럼, 희미한 선로마저 오래전에 지워진 이름 없는 종착역 같은 곳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야. 어느 목회자가 이런 델 들어오겠어? 이 교회당도 오지 않을 목회자를 기다리다 결국 스스로 허물어지겠지. 세파를 이겨내는 건 아무것도 없어. 신앙도 예외는 아니지, 라고 조용하고 씁쓸하게 말하고는 집게손가락으로 성경구절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작은 소리로 읽어나갔고 그녀는 상담일지를 보던 시선을 그대로 두고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당신 같은 사람은… 아니 당신 같은 목회자는 아주 예외적이지요, 라고 건조한 바람 같은 낮은 목소리로 스쳐가듯 말했는데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잠깐 움찔하고 멈추었다가 다시 다음 구절을 짚어나갔고 그 구절들을 읽어나가는 그의 목소리는 끝마디가 조금씩 흔들렸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구절을 다 읽은 그는 코끝에 걸린 안경을 한 손으로 벗으며, 구원을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은 마치 영혼이 없는 존재처럼 뭔가를 좇아 마구 내달리고 있어. 이 말씀은 그래서 더 긴박하고 간절한 거겠지, 라고 말한 뒤 앉은뱅이책상을 향한 몸을 조금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식탁에 펼쳐진 상담일지에 뭔가를 기록하면서, 아마도 돈과 목숨이겠지요,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이라고 짧은 한숨을 섞어 가볍게 말하고는 그를 향해 눈을 들었고, 담담하고 흔들림 없는 그 눈동자는 텅 빈 스크린처럼 멀고 쓸쓸했다.


잠시 후 그녀는 머릿속 집요한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좌우로 조금 흔들고 나서 상담일지에 다시 시선을 돌리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도 예외는 아니에요, 라고 나직하지만 곱씹듯이 말했고, 그는 한 손에 안경을 든 채 그녀를 조금 심각한 눈빛으로 잠시 쳐다본 뒤 자신에게 다짐을 하듯, 육신에 양식이 필요하듯 영혼도 마찬가지야. 영혼의 양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끝없이 방황할 뿐이야. 난 그 양식을 전하는 사람이고, 라고 말했는데 그의 둔중한 목소리가 차분한 거실 공기를 어색하면서도 무겁게 흔들었고 그녀는 상담일지를 가만히 덮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소 높은 톤으로, 당신 삶은 그런 거겠죠. 당신 아닌 삶은 모두 어린 양들일 뿐이겠지요. 하지만 난 길 잃은 양이 아니에요, 라고 말했고 그 목소리는 흔들리는 거실 공기에 날카로움을 더했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난 내일 새벽에 봉독할 성경 말씀을 이야기했을 뿐이야. 당신을 탓한 게 아니야, 라고 말하며 화제를 돌렸는데 그것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흔들리는 시간을 뒤늦게 감지한 사람의 당황스러운 머뭇거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어제가 결혼 25주년 되는 날이었어요. 당신은 까맣게 잊고 있었겠지만. 물론 당신에게는 목회 25주년이 훨씬 더 소중한 날이겠지요. 지난 시간들이 당신에겐 축복받아 마땅할 목회의 날들이었겠지만 나에겐 어쨌든 살아내야 하는 삶 그 자체였어요. 목회자의 아내로 또 아이의 엄마로 말이죠. 그 시간들은 싸늘하게 등을 돌린 채 나를 거슬러 흐르는 침묵의 강물 같았어요. 매 순간 그걸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내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우린 서로에게서 멀리 어긋나 있어요, 라고 말했을 때 그의 깊게 주름 잡힌 눈두덩에는 미세한 떨림이 파르르 일었고 그는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아니야 당신이 아니었다면 목회는 단 하루를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당신과 함께 걸어온 길은 하나님 앞에서 확고해. 세상이 우리와 어긋나 있을 뿐이야, 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세상을 감당하는 건 늘 내 몫이었지요. 그건 나 자신을 배반하는 날들이기도 했고요, 라고 말했고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녀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오래된 생각을 말하듯 나직한 말투로, 결혼 25주년이 이렇게 아무런 바람 없이, 이렇게 메마르게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우리 삶은 어느 지점에서 사라진 걸까요? 그건 현실 앞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꿈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달아나는 꿈을 우리는 왜 잡으려 하지 않았을까요? 두려웠을까요? 창백하게 드러나는 진실이, 라고 말했다. 그는 손에 들었던 안경이 거실 바닥에 떨어진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굳은 자세로 할 말을 잃었고 그의 눈두덩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25년 전, 그의 첫 교회는 청양 백월산 기슭 산골마을의 밀알교회였다. 목회자가 없어 3년 동안 비어 있던 그 교회는 교회당이라기보다는 허물어져가는 집이었고 삭은 함석지붕에서 비가 샜고 밤에는 하얀 달빛이 천장을 통해 방 안으로 길게 스며들었다. 첫 새벽기도 시간, 신혼의 그와 아내가 교회 제일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그들 뒤로는 텅 빈 의자들뿐이었다. 그가 성경책을 펴고 성경구절을 읽으려는 순간, 맞잡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옆에 앉은 아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큰소리로 성경구절을 읽었고 아내는 기도시간 내내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세 번 더 교회를 옮겨다녔고 그 모두는 다른 목회자들이 꺼리는 작은 시골교회들이었다. 아내는 묵묵히 그를 따랐다.


장맛비가 다시 고개를 들던 다음날 새벽기도 시간, 그와 아내는 교회 제일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그들 뒤로는 팔순에 다가선 할머니 두 사람이 따로따로 앉았다. 그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한 뒤, 마가복음 8장 34절부터 35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라고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뒤 성경책으로 시선을 돌리던 중 아내의 무릎 위에 얌전히 놓인 손을 보았다. 그 손은 25년 전 첫 새벽기도 때의 그녀 손처럼 여전히 작고 연약했는데, 결혼반지가 사라진 허전하고 쓸쓸한 그 손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서글프고 아팠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결혼의 금반지를 끼워주었던 저 손에 하얀 은반지를 다시 끼워주고 싶다.




한승오 | 농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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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은 시나브로 어두워가지만 낮 동안 달궈진 ‘봄의 마을’ 광장의 시멘트는 여전히 후끈거립니다. 장마는 끝나고 더위는 말복을 향하여 밤에도 쉬지 않고 맹위를 떨칩니다. 바람 쐬러 나온 사람도 몇 보이지만 바람은 불지 않습니다. 


8시. 몇 안 되는 음식점도 파장을 준비하고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밤새 불 밝힐 24시간 편의점들이 슬슬 존재를 드러냅니다. 한여름 저녁 8시는 해 지는 시간이자 곧 잠들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인구 몇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소읍에서 촛불집회란 애당초 어울릴 일이 별로 없는 것이라 ‘국정원 규탄 민주주의 수호 서천군 촛불 문화제’는 불야성 서울 한복판의 그것과는 시공간, 즉 차원이 다른 무엇입니다.


서너 차례의 목요일 집회에 모인 사람은 30여명에서 100여명 수준. 매번 모일 때마다 ‘왜 우리는 더 많이 모이지 못할까’가 주제이고 ‘더 많이 모이는 방법’이 곧 전략과 전술이 되겠으나, 서울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영상이 머리 깊은 곳까지 박혀 있어서, 어떻게 하더라도 성에 차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절대로 기죽지 않는 것, 안 온 사람 찾지 않는 것, 모인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노는 것, 참가자에게 선착순으로 음식과 조용필 공연 티켓을 제공하여 안 오거나 늦게 온 사람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며 선진 집회 문화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경향DB)


앞에서 마이크 잡고 하는 이야기야 매번 거기서 거기. 여전히 풍전등화인 조국의 위기도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TV나 라디오나 팟캐스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는 정세분석을 이야기하는 사람만이 대개 연사로 나오는 것도 읍내처럼 뻔하고 답답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뻔하고 답답한 사람들끼리 마주 앉아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읍내 건물들 사이로 뜨는 초승달과 몇 개의 별이 훨씬 더 잘 보이게 마련인데 이때 비로소 촛불과 나 사이에 전류가 흐르며 본격적인 촛불집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분노로 시작했고 ‘이래도 되나?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하는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돈도 안 되는 자리에 일단은 이렇게 모였습니다. ‘정말 촛불로 세상을 바꿀 수 있어?’ ‘아니, 단 한 명에게라도 책임을 물을 수 있어? 촛불로?’ 하는 비웃음과 냉소에 맞서는 것이 첫 번째 관문입니다. 그럴 때 보라고 달도 뜨고 별도 뜨고 옆자리에는 나보다 더 한심해 보이는 인간들도 앉아 있는 것입니다. 도망가지 않고 꾸역꾸역 대답거리를 찾다가도 결국엔 ‘나를 걸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곳으로 몰리게 되는데, 나를 거는 것은 곧 결단의 문제입니다. 


가장 먼저는 옆에 있었으면 좋을 사람이 생각나고 곧이어 평소의 다짐들이 떠오릅니다. 내가 변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세상의 변화라는 것이 공염불이라는 깨달음까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이리 되면 ‘국정원 규탄’과 ‘민주주의 수호’는 결국 나의 수양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인데, 성급한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심지어 ‘금연’을 결심하는 악수를 두기도 하는 것입니다. 


작고 외지고 초라해서 ‘우리의 구호가 진실로 저들을 아프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위로 뜨겁게 달궈진 촛농 한 방울이 ‘뚝’ 하고 떨어집니다. ‘뭘 하기는 한 거니?’


궁색하게나마 문화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 준 트럼펫 청년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삑삑’ 하며 연주할 때보다 “잘 못 불러서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더 연습해서 오겠습니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더 행복해했고 더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젊은 부부를 따라온 아이들은 엄마 아빠 옆에 촛불을 들고 잠깐 앉아 있기도 했지만 이내 더 넓은 광장에서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행진이라도 해 보자는 과격파와 ‘그냥 해’ 하는 온건파의 갈등은 해묵은 것.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냥 그런 채로 평생 살아갈 것입니다. 100여명의 사람들을 서울 인구 비례로 따지면 5만명은 되겠다는 설레발도 잠시 재미있기는 하지만 100명은 100명일 뿐이고 누구에게는 100표일 뿐.


광장을 수놓은 촛불... (경향DB)


그러니 매번 욕먹을 사람 이름자나 바꾸는 혁명 따위는 서울광장에 모인 거대하고도 듬직한 물결에 맡기고, 물결이 아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여기, 8시면 불 꺼지는 변방의 몫, 세상이 우리에게 분담한 역할이 되겠습니다. 가령,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슈퍼맨인지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인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국가인지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인지 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답이야말로 촛불이 다한 후 알곡으로 남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가 국정원 규탄과 민주주의 수호인 줄만 알겠지만 촛불을 통한 인격수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관계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목표라고 농담 비슷하게 말할 때, 국가정보원에서는 알아듣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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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학가나 시위 현장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루어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그 노래를 신앙처럼 혼신을 다해 많이도 부른 것 같다.


대학시절에 활동했던 가톨릭학생회는 운동권이었고, 나는 인천의 야학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면서 시위와 집회에 쓸려다니고 있었다. 바람 같은 세월이었다. 열대어 수족관이 있는 다방에서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마치 독립운동가들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거리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군에 입대했는데, ‘삼민투’ ‘민민투’라는 말이 난무하던 시절 휴가 중에 옛 동료들과 만나 술을 마시는데, 이 친구들 말끝마다 “레닌 선생께서는…” 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이 형사들에게 목격되어 파출소로 끌려갔던 기억이 삼삼하다. 경찰은 나를 의식화 대상으로 보고 훈방시켰고, 그 친구들은 가택수색을 받았다. 몇 년 뒤에 만난 그 친구들은 졸업 후 당시 유행하던 증권회사로 적을 옮겼고, 나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운동권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참 씁쓸한 기억이다.


내가 복학한 해는 1987년. 그해 봄에 <미션>이란 영화를 보고 몸을 떨었다. ‘가브리엘의 오보에’라는 연주곡으로 유명해진 영화, 과라니족 원주민을 위해 투신하고, 결국 순교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회 사제들을 보고 “바로 저거다!” 하는 감탄을 연발했다. 해방신학은 내게 그렇게 왔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해방신학에 영감을 주었던 이 사람의 긴 이름을 주문처럼 외고,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성경처럼 읽었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각주에 실린 마누엘 신부의 이야기였다.


빈민촌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살던 마누엘 신부는 어느날 스스로 이렇게 묻는다. ‘내가 사제가 아니었어도 이처럼 살았을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살았을까? 만일 복음서에서 예수가 명령했기 때문에 내가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면 나의 투신과 신앙은 불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사제복을 벗고, 그리스도교 신앙마저 포기한 채 무신론자로서 남은 생애를 빈민촌에서 살았다. 그런 마누엘 신부가 죽기 전에 이런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주님, 제가 무신론자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역설적 기도는 우리의 사랑이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내 사랑이 차올라서’ 사랑할 때에야 순정한 사랑임을 전해준다. 그에게 이제 상대방이 무신론자거나 이교도거나 아무런 걸림이 없다. 오직 ‘사랑 있음’만이 유일한 잣대가 된다.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에서 치셤 신부만큼이나 헌신적으로 병자를 도왔던 의사는 무신론자였다. 민중을 위해 사심 없이 투신할 수 있었던 수많은 ‘붉은 영웅’들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갈망해야 하는 것은 교리와 종교에 대한 순종적 태도보다는 ‘내 사랑의 크기’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권위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겸손하게 살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한사코 강조한 이유는 누가 뭐라 해도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이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의 한가운데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한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거기에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따뜻한 형제애와 너그러움, 겸손과 상호 보살핌이 있다”고 말한다.


교황의 고향인 라틴아메리카의 교회는 오랫동안 고난과 희망의 땅이었다. 1968년 메델린 주교회의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천명하고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 민중교회와 해방신학을 발전시키며 ‘정의로운 신앙’을 부추겼다. 1980년 군사정부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당하기 전 로메로 대주교는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다시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서 솟아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로메로처럼 수많은 사제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예언은 거듭됐다. 이를 두고 구티에레즈는 “예전에 가톨릭교회는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이유로 죽어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메로가 피살된 이유는 교회의 권리를 수호했기 때문이 아니라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지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강정마을 회장 발 씻어준 강우일 주교 (경향DB)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사제들이 제주 강정에서, 대한문 앞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에 항의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오든이란 시인은 “일생 동안 마치 쉬운 일처럼 어려운 일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운명처럼 가난한 노동자들을 선택하고, 고난 안에서 오히려 기쁨을 누리는 사제들이 있다면, 이들은 아마 교황의 친구가 되고, 예수와 더불어 기꺼이 빈민가를 산책할 것이다.



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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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국립극장에서 조금은 특이한 국악 공연을 즐겼다. 전석 초대의 행사였지만 출연자의 면면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공연이었다. 시내에서는 후덥지근했는데 남산 자락이라고 공기가 제법 삽상했다. 이번 공연은 탁월한 전통공연 기획자인 진옥섭 감독이 자신의 책 <노름마치>(문학동네)를 재출간하면서 마련한 무대였다. 노름마치란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 은어이다. 책에는 강호에 숨어 있던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발굴하기까지의 내력과 한껏 괄시받았던 그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흥과 멋이 두루 어울린 판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글뿐이랴. 입에 발통이라도 단 듯 말솜씨도 뛰어난 저자가 등장하자 분위기가 일순 후끈해졌다. “3분 이상 떠들면서 웃기지 못한다면 그건 죄악이여!” 특유의 재담을 펼치자 관객들도 여러 장단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김운태와 풍물패들이 길을 뚫었다. 갠지갯지 갠지갯지. 상모를 돌리고 꽹과리, 소고를 치며 무대에 오르자 공연장이 단박에 달아올랐다. 박경랑의 교방춤이 이어졌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내 안에 일렁이는 흥을 처리하고 있는데 한 가지 사실이 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 공연을 꿰뚫으며 주도하는 하나의 색깔이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그 색깔은 공연 시작을 알리는 김운태의 상모에서부터 드러났다. 그리고 박경랑이 교방춤을 출 때 치마 밑으로 슬짝살짝 드러나는 버선의 색깔. 


밀양북춤의 하용부가 등장했다. 그의 복장은 온통 이 색깔이었다. 머리에도 어깨에도 같은 색의 띠를 둘렀다. 북의 두드림 판도 같은 색깔이었다. 그는 무대가 비좁다는 듯 버선발로 이곳저곳을 휘잡으며 뛰어다녔다. 어느 순간 관객석 아주 가까이로 달려와 뚝 정지했다. 한껏 달아올라 손뼉을 더욱 힘껏 치는 사람들을 향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왁자하게 웃는 관객을 향해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그가 씩 웃었다. 그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빨의 색깔. 그 굵은 땀방울도 또한 같은 색깔. 


눈치챘겠지만 그 색깔은 하얀색이었다. 하얀색으로 시작해서 하얀색으로 이어지는 무대였다. 다음 순서는 이정희의 도살풀이춤이었다. 내 키의 두 배나 됨직한 흰 수건을 걸치고 소복 차림으로 그는 등장했다. 그가 공연하는 내내 처연한 혼불이 무대의 이곳저곳을 옮아다니는 듯했다. 


이정희가 도살풀이춤을 출 때 반주를 담당한 이는 통영에서 올라온 인간문화재 정영만의 구음 시나위였다. 징, 아쟁, 장구, 북, 해금, 대금. 무대 한쪽에 자리잡은 그이들은 한결같이 흰 한복이었다. 흰 버선을 신고 흰 띠를 머리에 둘렀다. 이들을 지휘하면서 서서 구음을 읊는 명인의 목소리에도 굳이 색깔을 부여한다면 흰색이 아닐까.


다음은 소리꾼 장사익의 무대였다. 그는 흰 모시한복에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고무신에 담긴 양말은 검은 색을 덮고도 남을 만큼 흰색이었다. 검은 신발 때문에 외려 더욱 하얗게 빛났다. 그가 부른 노래는 ‘찔레꽃’이었다. 흰옷으로 몸을 두르고 접신한 듯 얼굴을 약간 치켜들며, 흰자위를 살짝 보이며, 그 어떤 너머를 보는 눈빛에서 터져나오는 첫 소절.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장사익은 화끈한 무대와 휘황한 조명 아래에서 땀이 흐르자 손수건을 꺼냈다. 아주 곱게 핀 찔레꽃 한송이였다. 장사익의 노래가 나오자 눈가로 손을 가져가는 이가 여럿이었다. 아마도 눈물을 찍어낼 터. 눈물은 맑기도 짜기도 하지만 또한 희고도 하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운태가 다시 등장했다. 채상소고춤을 추는 순서였다. 중력을 이기면서 공중에서 타고 노는 자반뒤집기는 탄복을 금할 수 없는 기술이다. 잠깐 진옥섭이 물병을 가지고 나왔다. 다정한 두 동무 같았다. 숨을 고르는 김운태 곁에서 물을 마시면서 슬쩍 바닥에 한 모금을 흘렸다. 김운태가 그 물을 밟았다.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저항을 갖기 위해 맑은 물을 하얀 버선에 적시는 것이었다. 


내 좋아하는 국악으로 귀를 채우고 눈이 호강을 한 날. 오늘을 뭐라고 할까. 삼백 예순 다섯 날 중에도 날들의 노름마치가 있다면 단연 오늘 같은 날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피를 팔 듯 표를 판다고 한 저자였는데 부디 <노름마치>에 독자들의 손때가 많이 타기를! 공연장을 빠져나오면서 출판업자로서 빌어주었다.


국립극장 아래 장충동 할머니 족발집에서 뒤풀이한다는 전갈이 있었지만 낄 자리는 아니었다. 합석한다 해도 족발에 하얀 버선발이 겹치면서 뜯기도 송구스러울 것 같았다. 친구와 빈대떡 집으로 갔다. 무대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는 못했지만 나도 내 하루의 공연을 무사히 마친 야심한 시간. 그를 기념하듯 주전자를 기울이자 흰 막걸리가 콸콸콸 쏟아져 나왔다.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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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저수지를 배경으로 석양이 아름다운 서천군 벽오리 마을 입구에는 농산물 무인판매대가 있습니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검은 비닐봉지 등으로 정성껏 포장한 풋고추, 오이, 마늘, 양파, 계란 등을 매일 아침마다 진열하고 돌아섭니다. 누가 왔다 갔는지는 모르지만 물건과 돈은 대체로 일치하는 편이고 쪽지 메모들이 간혹 덤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작은 스티커에 주인이 써 놓은 손글씨가 가격입니다. 낮 동안은 새나 다람쥐만이 지나가다 가끔 쳐다볼 뿐입니다. 다만 돈 통만은 두꺼운 자물쇠로 꼭꼭 채워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신난 젊은 이장의 등쌀에 못 이겨 “팔리기야 하겠어. 재미로 좀 하다 말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재미로 좀 하다 보니’ 하루 매출이 평균 3만~4만원까지 늘게 되고 재수 좋은 주말에는 10만원 이상이 팔리기도 했습니다. 무인판매대에서 신뢰, 믿음이라는 가치를 읽고 확대 해석해 준 능동적 소비자와 내 밭에서 나오는 작물을 좋아해 줄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마을의 예견이 만나는 지점이 정확히 표현된 매출액입니다. 이어갈 만한 수준은 됐고, 마을이나 소비자나 모두 ‘좀 더 잘해 봅시다’ 하는 신호라고 생각했습니다. 유통 개혁을 넘어 유통 혁명이라는 농담도 있었지만 거기서부터는 유통을 잘 몰라서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의 잡담일 뿐입니다.

포스코 '무인가게' 편 CF, (경향 DB)


어느 정도의 손실은 감수할 수 있겠다는 마을 이장의 ‘통밥’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아주머니들의 용기로 일이 재미있게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올봄에는 원두막 모양의 제법 그럴듯한 매대도 마련했고, 마을 아주머니들은 그 앞에서 전지가위를 들고 테이프 커팅을 하며 활짝 웃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농산물 무인판매대의 최고가 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들기름이 없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소주병 하나에 1만원 정도 가격이지만, 한 병이 하루 매출의 30%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들기름 도난 사건은 신뢰와 믿음, 유통 개혁과 혁명, 이장의 ‘통밥’과 주민들의 용기에 커다란 균열을 내었고 재미를 잃어버린 아주머니들은 잠정 폐쇄를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남몰래 들기름을 가져가는 잽싼 눈과 손. 누가 들기름을 훔쳐갔는가? 궁금하지만, 너무 자세히 물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한 마을에 배정된 100개의 비료를 나누는 것과 비슷한 일이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한테 배정된 만큼의 비료를 가져가면 되는 것인데, 가장 늦게 가져가는 나로서는 해마다 정해진 양에 꼭 두 포대 모자라는 숫자를 가져가게 됩니다. 마지막에 없어진 비료 두 개는 누가 가져갔는가? 너무 자세히 캘 수는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CCTV라는 제도와 더 빠른 속도를 내는 방식으로 편입해 질문을 간단히 뛰어넘을 수도 있겠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묻지 않고, 남들처럼 하거나, 남들보다 빨리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빠른 속도로 살아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거나 우주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중간은 가는 것이거나 내 앞에 놓인 밥그릇 챙기는 것 정도라면 이것 또한 민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자세히 캘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나도 어디선가는 중간은 가기 위해서, 또는 내 앞에 놓인 밥그릇을 챙긴다는 마음으로, 누구의 피해가 될지 알면서도 들기름을 벌써 여러 병 가져갔거나 맨 뒷사람에게 비료 두 개의 손해를 입힌 경험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이미 지금의 속도로는 함께 사는 아주머니들의 작은 매대 하나 지켜 주지 못하고, 마을의 비료 하나 제대로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삶의 속도와 시공간까지도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세력들이 있어서 그들이 제시하는 평균에 맞추기 위해 오직 ‘더욱 힘차게’ 달려가는 일만 해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태 해 온 일이 그런 쳇바퀴 돌며 서로의 것이나 갉아먹어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매일매일 쳐다보는 인간과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FTA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이야기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들기름을 훔친 것이 결국 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포스코'무인가게' 편 CF, (경향DB)


무인판매대는 며칠 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특별히 대책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없어지는 들기름에 대해 까치밥이나 콩 세 알 심는 이치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다간 사람이 신선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웃 마을 친구로서 민망하게도 신뢰와 믿음을 이야기하거나 감히 개혁과 혁명을 얘기할 수는 없고, 그저 처음 시작한 아주머니들의 용기와 재미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싶을 뿐입니다. 잘되기가 힘들고 잘돼 봤자, 장강에 떨어지는 몇 번째 물방울이나 장성에 쌓인 몇 번째 돌덩이 정도 되겠지만, 삶은 ‘이겼냐 졌냐’ 또는 ‘얼만큼 이겼냐’ 따위의 치사한 것들을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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