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세계지도를 들여다볼 때마다 내가 꿈꾸듯 가보고 싶었던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하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이다. 희망봉은 그 이름 때문에, 바이칼호는 초승달 닮은 그 모양 때문에 끌렸다.


희망봉은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 반도 끝에 위치한 곶의 이름이다. 인도양과 대서양을 가르는 기점이며,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할 때 희망의 징후로 삼았던 지표이다. 내가 그곳에 처음 간 것은 ‘6·29 선언’ 얼마쯤 후였던 것 같다. 87년의 ‘6월 항쟁’은 정말 대단한 불길이었다. 청년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와 깃발을 함께 들었고 함께 행진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학생, 남녀노소 시민들과 더불어 밀려나가던 그 뜨거운 함성이 아직 생생하다. 어떤 젊은 학생이 눈물과 콧물에 얼룩진 내 얼굴을 제 손수건으로 닦고 매주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먹밥을 만들어서 가지고 나온 어머니들도 있었다. 청년의 그 손수건, 어머니들의 그 주먹밥이 마흔두살 중년과 맞닥뜨리던 나의 ‘희망봉’이었다.

바이칼 호수에 간 것은 그보다 십 년쯤 후인 1996년 여름이었다. 남북으로 600킬로미터가 넘는 이 호수를 찾아갈 때 나는 우리의 고서 중 하나인 <삼성기(三聖記)>를 읽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역사 이전 우리 민족의 원조로 알려진 천제한님이 ‘천해(天海) 동방 파나류산 밑에 한님(환인·桓因)의 나라를 세운’ 바 있는데,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나 된다고 했다. 중종 때의 선비 이맥(李陌)도 <환국본기(桓國本紀)> 서두에서, 그 나라를 가리켜, ‘순리대로 잘 조화되어… 어려운 자를 일으키고 약자를 구제하여… 어긋나는 자 하나도 없었다’라고 썼다. 천해란 북해를 말하고 북해란 바이칼호를 이를진대, 이를테면 나는 우리 민족이 최초로 이상적인 나라를 세웠던 그곳, 바이칼 동쪽 땅에 오십대 중반 처음 발을 디딘 것이었다. 나는 이르쿠츠크를 거쳐 바이칼 한가운데 올혼섬까지 들어갔다.

서울집으로 전화를 건 게 화근이었다. “큰일 났어요. 딸애가요, 경찰한테 쫓겨 연대 과학관으로 들어갔는데요, 실험 기자재가 많아 잘못하면 과학관 전체가 폭발할는지도 모른대요!” 아내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민족의 시원을 따라 걸어볼 새도 없었다. 아비로서 딸조차 공권력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한다면 민족의 시원이 무슨 소용이랴. 나는 곧바로 귀국했다. 이른바, ‘연세대 사태’는 범민족대회에 참가하러 북에 갔던 한총련 학생의 귀환에 맞춰 열린 ‘통일축전’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건이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에도 과학관에 갇힌 수천명의 학생들을 1만2000여 경찰들이 물샐 틈 없이 에워싸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난 이대로 못 있어. 딸한테 갈 거야!” 전사처럼 머리를 질끈 묶어 맨 아내가 말했고, 나는 유구무언이었다.

어찌어찌, 경찰의 포위망을 따돌리고 들어갔을 때 과학관은 그야말로 만원이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수많은 학생들이 먹을 것 마실 것조차 단절된 채 격리돼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뜻밖에 밝아서 나는 먼저 놀랐다. 갇힌 자들의 절망과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토론하는 그룹도 있었고 게임하는 그룹도 있었다. 대학 1학년짜리 딸애는 시멘트 복도에서 신문지 한 장을 깔고 누워 있었다. 아내는 딸을 안고 우는데 딸애는 순하게 웃었다.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신문지 한 장으로 밤낮을 어찌 견디느냐는 제 엄마의 말에 대한 딸애의 대답이다. “엄마, 신문지 한 장이 어딘데. 돈 주고 팔라는 선배도 있어, 이 신문지!”

 

한총련 사태로 폐허가 된 연세대 교정을 정리하는 학생들 (출처 : 경향DB)

나이가 먹는 건지, 요즘은 자주 지금보다 더 고통받았던 시절을 생각한다. 못 먹어서 배고팠던 어릴 때, 절대빈곤의 사슬을 끊으라는 사회적 명령을 늘 받았던 젊은 시절, 그리고 정치 문화적 억압을 향한 저항의 불길 같은 대오를 갈팡질팡 지나쳐 온 중년, 혹은 장년의 나날들. 우리처럼 한 세대에 걸쳐 질풍노도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온 민족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어법적으로 말하자면, 그 고통, 그 변화, 그 굴곡들이 우리의 유일한 자원, 자기 갱신을 위한 에너지의 보고였다. 굴곡진 고비마다 정파와 세대와 지역을 넘어서서 최소한 ‘화염병’을 어디에 던져야 할는지 우리들은 그때 알고 있었고, 그래서 뜨겁게 공유했다. 대의를 믿는다며 ‘신문지 한 장’을 행운이라 여기던 사람들이 살았던 전설같은 시대였다.

그래서 나는 또 묻는다. 그 시절에 비해 무엇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잊혀진 세월호’를 보라. 억압은 그 프로그램이 정교해져서 어디에 대고 무엇을 외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부자는 되었으나 독식의 체제가 깊어졌으니 우리는 여전히 가난하고, 더불어 복 되자고 말은 많지만 우리는 더 뿔뿔이 흩어져 날로 지리멸렬, 고독할 뿐이지 않은가.

내가 정말 그리운 건 갱신을 향한 욕망들이 합쳐져 만드는 불길, 혹은 그것을 이끌어내는 마중 봉홧불 같은 것이다. 빌딩을 높이는 것, 인터넷 접속시간을 앞당기는 것, 경제지표의 상승을 발전이라고 예찬할 수는 없다.

본원적인 갱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불을 붙이지 않고 얻는 발전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맥은 앞서 인용한 <환국본기>에서 이르되, 우리 조상들이 바이칼 동쪽에 세웠던 ‘천제한님’의 나라는, ‘친하고 멀다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고, 윗사람 아랫사람이라 하여 층하를 두지 않았으며, 남자와 여자의 권리를 따로 하지 않았다’면서, ‘원망하거나 어긋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올 한 해, 경제지표의 상승만이 아니라, ‘원망하거나 어긋나는 자가 하나도 없는’ 나라에 대한 올곧은 지향과 이상의 속 뜨거운 복원을 사회 곳곳에서 보고 싶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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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논산집 거실에서 선물 받은 풍물북 한 면에 나는 이렇게 썼다. ‘從心所欲 不踰矩(종심소욕 불유구)’, 공자가 이르되 나이 칠십은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거야 쉰 살의 지천명(知天命), 예순의 이순(耳順) 경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일 뿐, 천명조차 깨닫지 못하고 늙는 대부분의 사람에겐 어림없는 꿈이 아니겠는가. 성희롱으로 재판에 부쳐진 전 국회의장님은 올해 나이 일흔일곱이다. 그래서 나는 풍물북 아래쪽에 이어서 이렇게 썼다.

“이제 겨우 일흔이 되었구나!”

‘겨우’라는 낱말에 나는 방점을 찍었다. 공자는 지금 같은 고령화 사회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노인 인구비율은 2010년 이후 두 자리 숫자로 진입해 빠르게 성장해 왔으며 2017년엔 14%를 넘길 것으로 예측된다. 2050년 세계의 노인 인구비율이 16.2%가 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38.2%가 되리라는 보고서를 본 적도 있다. 노인들을 상대로 한 앙케트 조사에서 노인을 몇 살로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70세’라고 응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던 것도 시사적이다. 하기야 65세-노인이란 것도 서구사회에서 전파된 근거 없는 기준을 따른 것이다. 노인에 대한 많은 고정관념, 이를테면 노인은 병주머니다, 노인은 우울하다, 노인은 기억력이 없다, 노인은 인자할 뿐이다, 라는 것도 일부 노인에겐 헛소리에 불과하다.

어떤 강연에서 세대간극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 한 청년이 통계청 자료를 들먹이면서 2030년이 되면 인구 3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게 되는데 그래도 사회가 무조건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느냐고 묻는다. ‘싸가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방적인 관계는 온당하지 않아요. 노인 자신도 자기를 스스로 돌보게 도와야지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앉아서 나이대접만 받기 바라는 어르신이 있다면 젊은 여러분이 당근과 채찍으로 가르치세요. 그분들이 어렸을 때의 여러분을 가르쳤듯이. 함께 살아야 하니까요.” 청년은 그러나 내 말을 얼른 수긍하지 않는 눈치였다. 노인과 젊은 자신 사이를 새누리당과 진보신당쯤으로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정책의 대부분이 노인과 노인이 아닌 사람들의 편 가르기 강화에만 기여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삽화다. 노인정책에서 제 대접을 수반하는 ‘일자리 창출’은 거의 회자되지 않는다. 일하고 싶은 ‘일흔 청춘’들까지도 ‘짐짝’으로 취급될 뿐이고, 그 태도는 정책 입안자나 그 정책 자체에 의해 재빨리 유포된다. 노인문제만 그런가. ‘생각하는 백성’이었던 우리들은 어느새 ‘생각’을 모조리 버리고 습관적으로 세상의 모든 걸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익숙해졌다. 세상엔 이미 갑과 을, 흡연자와 비흡연자, 보수와 진보, 청년과 노인밖에 없다. 정책, 혹은 정책의 주관자들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의 확장’을 줄기차게 가로막고 제 스스로의 편의만을 쫓아 ‘꼼수’로서의 담론을 확대재생산해 유포시킨 결과가 이렇다.

각설하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면 그의 묘지를 남몰래 내 가슴 속에 써왔다. 나를 버린 첫사랑의 그녀, 이념적 불화로 헤어진 선후배, 불공정한 사회구조에 따른 사소한 오해로 멀어진 친구, 자본주의적 환경 탓으로 결별한 이웃들이 내 가슴속 묘역에 잠들어 있다. 이상한 일은 나이가 드니 묘역에 잠들어 있던 그들이 때론 부스스 깨어나 묘지를 뚫고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슬비 오는 아침, 어느 굽잇길을 돌아드는 저녁, 성긴 꿈자리에서 불현듯 깨어난 한밤중, 나는 자주 묘지를 뚫고 나온 그들과 마주친다.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내 세대가 공유한 기억 속의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 그 명분과 실제 사이의 가짜논리들도 그러하다.

추억은 감미이거니와, 성찰은 힘이 된다. 내 경우, 나는 가슴속 묘지를 뚫고 나오는 그들을 내 나잇값에 맞춰 정성껏 영접한다. 기억에게 억압당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억압은커녕, 젊을 때보다 사려 깊이 볼 수 있는 넓이를 부여받은 걸 축복이라 여길 때도 있다. 그것들은 때로 자책감을 부르고, 때로 남은 생의 실천적 에너지로 내 안에 비축된다. 생이 남아 있는 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나를 자주 다독거린다. 나는 이제 ‘겨우’ 일흔이 됐으니까.

철거 잔해 위에서 누워있는 노인 (출처 : 경향DB)


달라져야 하는 것은 정책만이 아니다. 노인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떤 정책인들 효과는 반감될 게 뻔하다. 노인과 청년의 확실한 차이점은 기억의 총량과 그 편차이다. 이를테면 노인이 기억하는 가난은 일제, 분단, 굶주림, 추위 같은 것이고 청년이 기억하는 가난은 편의점 라면, 고급 빌라 옆의 지하셋방, 주류문화에서의 불평등-소외 같은 것이다. 노인의 머릿속엔 6·25, 새마을, 광주, 부동산투기 같은 게 들어있지만 청년의 머릿속엔 청바지, 원두커피, 아메리카, 인터넷, 갑을관계 등이 들어 있다. 그들은 각자 떨어진 채 서로 다른 자기 세대의 기억에 과도히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인다. 세계가 편의에 따라 그 기억 덩어리들을 끊임없이 부추기거나 과장-강화시키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유롭기가 더욱 어렵다.

기억을 이길 수만 있다면, 그 상처들을 사려 깊게 넘어설 수만 있다면 노인과 청년의 관계는 물론 심지어 갑과 을, 보수와 진보 사이에도 지금보다 더 합리적인 통로가 열릴 게 틀림없다. 성공했던 기억도, 상처와 불안으로 쌓인 기억도 넘어서야 자유롭다. 가령 ‘땅콩 회항’ 사건도 특권층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다.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또 어떤 기억들인가. 청년보다 노인이, 보통사람보다 지도자가 먼저 기억, 또는 기억 속의 달콤한 특혜, 쓰라린 상처들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는 게 좋다. 그래야 일방적 ‘불통’은 쓰러지고 수평적 ‘소통’은 일어서 보편화된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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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의 날 즈음에 공개된 미국 CIA의 고문 실태 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유용한 정보를 별로 얻어내지도 못’하면서 혐의자들을 감금, 잠 안 재우기나 물고문 등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 칭송되는 미국의 국가조직이 저지른 일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고문용어도 나왔다. 이를테면 ‘직장(直腸) 급식’ 같은 말. 항문으로 물이나 음식을 강제 주입해 조직이 찢어지거나 만성출혈, 탈장을 유도하는 고문방법이다.

고문으로 숨진 사람도 있었다. 피고문자 일부는 아무런 혐의조차 없는 민간인들이었다. 고문이 자행되던 당시의 미 대통령과 정보국 간부들은 ‘인간적인 심문방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정보를 얻고 있다면서 고문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사실을 인정했다. 놀랍고 또 끔찍하다.

우리에게 이런 폭력이 낯선 것은 아니다. 이른바 중앙정보부 시절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고문의 실태는 CIA의 실태를 훨씬 능가했을 정도였다. CIA가 적성국가의 국민을 상대로 자행한 것에 비해 우리의 중앙정보부는 정적이라는 이유로 자국민에게 고문을 일삼았다는 게 다르다면 다르다. 하기야 그것이 뭐, 단지 미국이나 우리만의 문제겠는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이성주의 철학적 전통이 가장 깊었던 독일인들이 선거로 만들어준 국가조직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였다. 일본이 명백한 역사적 범죄를 국가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걸 매일 보고 확인하는 것도 끔찍하긴 마찬가지다.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광범위한 폭력이 국가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폭력이 줄지 않는 게 국가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건 물론 아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폭력도 그렇다. 돈을 앞세운, 자본주의적 폭력의 창궐은 이미 도를 훨씬 넘었다. 문명의 외형적 발달과 상관없이 폭력적인 충동은 어찌된 노릇인지 개선될 기미를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일찍이 프로이트가 파괴의 정열-죽음의 본능이라고 명명한 바로 그것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욕망에 따라 상대편을 무조건 굴복시키고 싶은 그것. 아니 욕망이 있든 없든 약한 자를 무조건 해치고 싶은 사디스트적 공격충동인 그것. 오랜 이성중심주의 역사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의 본능은 왜 완화되지 않는가. 더 약한 자를 습관적으로 가해하려는 본능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포유동물 중 인간뿐이다.

이를테면 단지 ‘땅콩 회항’ 사건이나 아파트 경비원 폭행사건 등에서 보여지는 ‘갑질’로서의 잔인성, 의견과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 폭력적 비난을 일삼는 무절제한 공격성, 나와 얼굴색만 달라도 무조건 미워하는 더러운 배타성, 층간소음 등 하찮은 이유조차 참지 못하고 살인도 불사하는 극단의 분열성, ‘소수의견’이라 확인되면 무조건 짓밟고 내쫓아도 된다는 식의 파시즘적 편협성 등이 다 폭력충동에 따른 가해의 원형이다. 문제는 경제의 발전, 민주화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런 파괴적 충동이 줄기는커녕 더 내면화되거나 일상화하며 우리를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굴절된 현대사가 드리워준 어두운 심리적 배경과 그것을 조절하지 못하는, 조절은 고사하고 오히려 약육강식을 더 조장하는 세계사적인 사회-정치적 구조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지금의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아래 위 할 것 없이, 좌우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계속 폭력적인 ‘파괴의 정열’에 삶을 더욱 깊이 내맡길 가능성이 많다. 이런 충동은 지도층에 의해 날로 확대 재생산되는 형국이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 또한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이 구조에서 살아 견디려면 우리 모두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선근(善根)조차 무참히 버리고 공격적 파괴의 충동을 숙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내던져지는 주사위의 숫자에 따라 운명을 내맡길 수는 없다. 단지 생산성 제고를 통해 더 성능 좋은 몇몇 도구들을 얻는다고 해서 그걸 감히 발전이라고 믿을 정도로 인간이 본래 저급하다고 믿고 싶지도 않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겐 파괴의 정열-죽음의 본능 이외에 또 하나의 정열이 있는바, 삶의 정열-사랑의 본능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힘센 사람들의 ‘쌈박질’을 벤치마킹할 필요는 없다. 우리들에게 공격적인 충동을 강화시키려는 전략, 바꿔 말해 ‘폭력의 컨설팅’을 통해 제 몫을 챙기거나 기득권을 수성하려는 자들, 혹은 그 구조를 믿고 의지해서도 안 된다. 폭력의 조직적 컨설팅을 도모하는 온갖 명분에 속아 그 들러리가 되는 것은 더욱더 곤란하다.

아무리 신은미 콘서트가 종북을 종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번 폭발 사건은 지나친 폭력의 산물이었다. (출처 : 경향DB)


거의 매일 눈이 내리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눈발 속을 어린 송아지처럼 내달리고 싶은 유순한 삶의 정열이 폭력적 뉴스들 때문에 매일매일 참담하게 중절되는 2014년 연말이다. 예컨대 노동자 차광호씨는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여 구미공장 굴뚝에 오른 지 벌써 200일이 넘는다. 도심의 전광판 위에도, 쌍용자동차 굴뚝 위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있다. 노동자 몇 사람조차 지상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세상인데 신문·방송은 여전히 국회나 청와대 권력의 그림자놀이 생중계에만 바쁘다.

그사이에도 사람들은 자꾸 허공으로 올라가거나 주검이 되어 지하에, 바다 밑에 가라앉는다. 허공에서, 캄캄한 바다 밑에서 성탄을 맞는 사람들에게, 세계의 구조적 폭력에 의해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정열-사랑의 본능을 나누는 데 인색한 사회를 민주-복지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

지도그룹이든 개인이든 간에, 2015년에 우리가 온 힘을 기울여 성취해야 할 것은 죽음의 정열-폭력적 충동의 완화라고 난 생각한다. 경제가 백 번 좋아져도 파괴적인 본능에 기대고 살면 황막한 사막으로서의 역사가 계속될 뿐이다. 국가주의-정파주의-자본주의적 폭력의 구조를 똑바로 인식하는 데서 새해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생명값을 증진시키려는 관용과 통합의 감각적 체험을 통해 반인간-반문화-반민주적 세계구조의 개종을 가슴에 새기는 2015년이기를. 삶의 정열-사랑의 본능에 오로지 복무해야 불안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를 얻는다. 그런 지향이야말로 민주사회의 마지막 꿈일 것이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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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살던 연무읍 들 동네의 초가는 환기구 같은 작은 창이 하나 있었는데 북향이었다. 바느질하던 어머니는 한겨울에도 곧잘 짜증스럽게 창호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강경으로 이사한 다음에 쓰던 방 역시 햇빛은 잘 들지 않았다. 한낮에 형광등을 켜놓고 책을 읽다가 전기료를 아끼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지청구 들은 적이 많았다. 비현실적인 자의식이 자라기 좋은 방이었다. 황홀한 젊은 날의 빛을 전혀 만날 수 없었다. 그 어두운 방에서 나는 우울의 숙주를 키워 내 영혼의 심지로 삼았다.

나의 소원은 더 밝은 곳으로 가는 일이었다. 나는 자나 깨나 넓고 밝은 터로 가고 싶었다. 속 좁은 사람이 된 게 모두 어두운 방 때문인 것 같았다. 좁은 들길-신작로-포장도로-하이웨이를 따라 대도시 서울로 살림터를 옮겼다. 보편적인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방살이 내내 좁고 어두운 방을 면하지는 못했다. 나는 보다 밝은 중심을 향한 원심력을 내 삶의 동력으로 삼았다. 동굴 속 같은 방으로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집’을 지은 지 벌써 30여년. 내 문패가 달릴 번듯한 집 한 채 짓고 싶었던 것은 서울로 옮긴 후의 오랜 꿈이었다. 나는 설계사에게 주문했다. “무조건 모든 방에 햇빛이 쫙 들게 해주세요.” 설계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크룸’도 있어야 쉴 수 있다고 했다. “필요 없어요. 내 아이들을 창 넓은 방에서 살게 하고 싶어요.”

그러나 나의 자의식이 빚어낸 꿈은 별로 효용성이 없었다. 아이들은 내 소망과 달리 한낮에도 주로 커튼을 치고 지냈다. “밝으면 집중이 안돼서 그래요.” 아이들은 말했다. 그제야 오랜 나의 우울이 창 없는 방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방이 싫어 많은 날들을 세상의 들판을 향해 열심히 걸어왔는데, 그것으로 자의식의 어두운 방에서 내가 자유로워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아팠다.

1992년 섣달, 나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용인의 외딴집으로 혼자 들어갔다. 데뷔하고 20년 만의 일이었다. 구심력을 내 삶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은 셈이었다. 쉽진 않았다. 세상의 트렌드를 거슬러 가는 길이었으므로 처음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조립식인 ‘용인집’ 거실엔 서쪽과 동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서쪽 창으론 자궁 속 같은 첩첩산중이 보였고 동쪽 창으론 불 밝은 도시로 이어진 포장도로가 보였다. 나는 서창-동창을 번갈아 내다보면서 종종 눈시울을 붉혔다. 구심력의 끝에 놓인 밀실과 원심력을 쫓아가는 광장 사이에서 나는 자주 몸이 찢어졌다. 평생 그래온 것 같았고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십 수 년 후, 논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나는 고향마을 앞의 벌판을 떠올렸다. 가을이면 논 가운데 짚단들을 높이 쌓아놓는 것이 그 무렵의 풍습이었다. 나락이 익어갈 때의 벌판은 풍요롭기 그지없었으나 정작 그 사이에 놓인 어린 내 실존은 늘 배가 고프고 등이 시렸다. 광장에서의 삶이 매양 그렇다는 걸 그때는 물론 눈치채지 못했다. 떠나고 싶었던 것은 그러므로 상대적 결핍으로 고단했던 나의 실존이 가리켜준 맹목의 방향이었다. 그 옛날 내가 정작 자주 쉰 곳은 짚단더미 속의 아늑한 동굴이었다. 그 속으로 기어들어 가서 달게 잠든 적도 많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먼저 떠올린 게 바로 그 짚단더미 속 동굴이었다. 그곳이야말로 어린 내게 유일한 ‘비밀’ 유일한 ‘밀실’이었으니까.

그러나 고향 들판에 그런 짚단더미는 남아 있지 않았다. 들쥐조차 들어갈 수 없도록 질긴 비닐로 포장된 짚단들이 몇 만 원짜리라는 패찰을 두르고 가을걷이 끝난 들판 여기저기 나뉘어 놓여 있는 걸 보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나는 깨달았다. 도시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짚단더미 속 나의 아늑했던 밀실은 완전히 해체, 이제 지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반세기의 삶은, 우리들 모두가 협력함으로써 날로 공고해져온 자본의 구조화를 통해 개개인의 ‘비밀’과 ‘밀실’이 낱낱이 까발려져 훼손되는 잔인한 과정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위아래 할 것 없이 세일즈맨이 되어 전보다 부자는 되었다지만, 비밀이 없고 밀실이 없는 세상에서 불러진 배를 과연 어디에 누일 것인가.

충남 논산 명재고택 (출처 : 경향DB)


세월호 이후 나는 새 소설을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자살률 세계 제일의 나라, 변방까지 시시각각 미치는 생산성 중심의 정치-사회-문화적 구조를 방어하지 못해 어디에 살든 나날이 불안한 환경에서, 끝내 바다에서 건져내지 못한 선생님과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면 소설은 써서 무엇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월호뿐인가. 날이 새면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뉴스를 들어야 하는바, 내 정서의 한가닥일망정 사과 씨처럼, 비밀의 방에 가두어놓을 재간이 없었다.

“모든 지도(direction)는 방향전환(re-direction)이다.”

존 듀이의 말이다.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하면 그 방향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삶의 주인인 각자가 지켜야 할 소중한 윤리성이거니와, 잘못된 우리의 방향을 용기 있게 바꿔가도록 선도하는 게 또한 지도력의 귀한 덕목일 터이다. 아직도 필요한 게 우수한 세일즈맨인가. 지배력을 강화하는 전략가인가. 빚을 아무리 져도 GDP만 올리면 된다는, 사회적 불안을 명분으로 모두를 일사불란하게 줄 세우면 된다는 식으로는 행복해질 방법이 없다.

이를테면 어제도 나는 “취임하자마자 41조원 규모의 재정정책을 과감히 내놓아…. 재·보궐선거에서 재미를 좀 봤다”는 부총리의 말씀을 들었고, 오늘도 나는 ‘사이버망명’을 야기한 ‘카톡사찰’ 파동을 넘어 수사기관이 휴대전화 감청을 좀 더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관련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뉴스를 듣는다. 아무런 비밀, 아무런 개인의 밀실도 없는 세상은 다만 황막할 뿐이다. 생산성을 위한 소프트웨어로서의 정책-전략이 아니라,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하드웨어로서의 참된 방향을 가리키는 지도자의 큰 손가락을 보고 싶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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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글날 아침, 논산시 건강관리센터 마당에 500여명이 모여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논산 시민들도 있었고 대전, 서울, 부산 등에서 온 독자들도 많았다. 논산의 아름다운 곳곳을 ‘작가와 독자’가 함께 걷는 행사 “소풍”의 첫날이었다. 내가 제안해 시작한 행사였다. 작년엔 5일을 함께 걸었는데 올해는 4일로 줄였다. 연두색 들은 정결하기 이를 데 없었고 계룡산 연봉들은 잡힐 듯 가까웠다. 인사말에서 나는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자’고 제안했다.

반야산 솔숲을 종단해 ‘은진미륵’의 관촉사에서 미륵세상의 의미를 되새기고, 성덕리 너른 들을 지나 계백의 혼이 숨 쉬는 탑정호에 도착하자 점심시간이었다. 제공된 도시락을 먹고 나면 호숫가를 따라 나의 집필실 마당까지 내처 걸을 터였다. 산과 들과 호수가 절묘하게 배합된 어여쁜 우리 땅이었다. 사람들은 모인 듯 흩어진 듯 걸었다. 낯선 사람끼리 손잡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이들까지 걸을수록 오히려 표정이 더욱 환해지는 게 참 보기 좋았다. 몇 백 미터 떨어진 학교에 등교할 때에도 부모들이 자동차로 데려다주는 세상이 아닌가. 애향심은 기실 고향땅을 걸었던 발바닥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논산에 내려가 터를 잡은 다음의 일이었다. 관념으로서의 그것보다 발바닥 감각에 축적된 애향심이 훨씬 힘 있다는 것을 그날 함께 걸었던 어린이들도 오랜 세월 후 선연히 느낄 것이었다.

'와초 박범신 문학제'에서 독자들과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는 박범신 작가. 와초 문학제는 그의 집필관이 있는 논산에서 2년째 독자와 만나고 함께 걷고 노래하는 축제다. (출처 : 경향DB)


나는 거의 매년 히말라야 트래킹을 다녀온다. 그때마다 내가 걷는 원칙은 그것,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는다’이다. 등산엔 보통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높이 오르는 데 가치의 방점을 찍는 등정주의 방법이 있고,(힐러리경이 에베레스트를 오른 뒤 산악계에선 거의 사라진 이 전근대적 등반방법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 홀로 높이 오르면 그만이라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출세지상주의적 삶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으로 남아있다.) 고유한 길을 선택해 타인과 장비의 도움을 최소화, 오로지 자신의 감각과 에너지에 의지하는 등로주의 방법이 있다. 젊은 산악인 박정헌-최강식의 ‘촐라체’ 등반과정을 모티브로 삼아 쓴 내 소설 “촐라체”는 바로 등로주의 등반을 지향하는 산악인들에게 바치는 나의 오마주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기술등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히말라야에 가면 빙하가 없는 곳을 따라 그냥 걸을 뿐이다. 이런 트래킹을 보통 ‘존재등반’이라 부른다.

트래킹을 시작하고 사나흘까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씩씩하다. 기분이 고양되어 낯선 사람들에게도 “나마스테!” “나마스테!” 네팔말로 소리쳐 인사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때까진 무리지어 있으므로 낯선 이들과 구분되는 ‘집단’의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단체 트래킹이 주를 이루는 우리나라 트래커들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그러나 4~5일쯤 지나고 해발 3000~4000m를 넘어가면 큰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나마스테!”도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 된다. 동행자들도 때로 멀리 떨어지고, 그래서 혼자 침묵으로 걷는 시간이 길어진다. 문명사회에서 가졌던 욕망들이 사실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거나, 사소한 일들에 대한 통절한 후회를 난데없이 만나며, 오래전 어느 길섶에 버린 첫 꿈 첫사랑 등이 현실감을 갖고 눈앞에 닥친다. 가끔은 너무 외로워 앞뒤 떨어져 걷고 있는 동행들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한다. “아, 나는 지금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구나!”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다. 내가 쓰러질 때 그들이 달려와 줄 거라는 상상은 놀라운 힘을 준다. ‘집단’이라는 느낌은 해체되고 진실로 ‘함께’ 있다는 위로만 남는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면서, 그러나 그 순간 오직 고유한 자신의 걸음새에서 주체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경험이다.

우리에겐 본래 등반개념이 없었다. 높은 산을 오로지 정복해야 한다면 ‘집단’을 이루어 효용성 중심으로 전략을 짜는 것이 미상불 나쁘지 않을 것이지만, 정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개별성을 존중하고 그러면서 만일의 경우 서로 도울 수 있는 거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집단은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생산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로 온 나라 사람들이 무장해온 지난 60여년, 우리가 배워 이제 거의 내면화 과정에까지 도달한 것은 ‘집단’이고 우리가 송두리째 유기하거나 잃어버린 것은 ‘함께’라는 생각이다.

세월호를 보라. 도망치는 선원들의 집단, 온당한 권리가 없는데도 눈 맞추고 배 맞추어 과적을 하도록 세월호에 ‘빨대’를 박은 기득권자들의 집단, 죽고 없는 한 종교단체 수장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해 책임을 모면하려는 집단, 집단, 집단들뿐이다. 집단이 아니라 ‘함께’ 살고자 했다면 세월호의 사람들 대부분을 살려냈을 게 틀림없다. 집단은 이익에 따라 끝없이 패를 나누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만 정상에 오르려고 한다. 개별성은 존중되지 않는다. 개별성을 존중하지 않으므로 진실한 ‘함께’도 없고 참된 위로도 얻을 수 없다. 이익에 따라 사람들을 집단화하는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그룹이 나라를 망친다. 국가주의조차 그렇다.

오래 함께 걷다 보면 동행자들로부터 내 존재가 얼마큼 떨어져 있으며 어떻게 함께 있는지 그 거리를 잴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이나 집단이데올로기에 편입돼 있으면 일시적인 안정감을 얻을지 몰라도 지속적인 안정을 얻지 못한다. 높이 오르는 게 장땡이 아니라 낮든 높든 내 봉우리를 성실히 가꾸어 그 고유성으로 이웃과 함께 있고자 하는 사회가 민주사회다. 나를 가두려는 수많은 ‘집단’으로부터 조용히 ‘독립만세’를 부르면 새 삶의 지평이 보일 거라고 믿는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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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일보 입사시험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시청까지 걸어가던 오래전의 어느 새벽이 떠오른다. 이십대 중반,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의 일이다. 정부가 주인인 신문이었지만 필기시험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시골청년’이었던 나는 한껏 고무돼 있었다. 밤기차로 올라와 새벽의 노점상에서 싸구려 토스트 한 조각을 사먹고 난 ‘청년’은 시청 앞까지 더듬더듬 걷는다. 섬뜩하게 추운 날씨다. “잘살아보세~”로 시작되는 새마을노래가 시청 앞 가로에 힘차게 울려 퍼지는 중이다. 최종 면접 과정만 남긴바, 순진하게도 청년은 ‘특별시’에서 말뚝 박고 ‘잘 살아볼’ 절호의 찬스를 맞았다고 상상한다.

간단하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면접은 거의 하루 종일 진행된다. 상식문답 코스, 영어면접 코스도 있다. 마지막이 사장 면접이다. 사장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청년은 자꾸 시계를 본다. ‘특별시’에서 머물면 돈이 더 들기 때문에 어떡하든 면접을 끝내고 다시 기차를 타고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밤새 기차를 탄 데다 아침, 점심을 대충 때웠을 뿐인 청년은 긴장과 피로와 공복감 때문에 거의 쓰러질 것 같다. 순서가 다가오자 잘 차려입은 사장 비서가 설명해준다. “안에 들어가면 백묵으로 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자리가 있는데요, 그 동그라미에 두 발을 대고 서서 사장님께 구십 도로 인사하세요. 꼭 그곳에 서야 돼요!”

사장실로 들어선 순간 눈에 확 들어온 것은 붉은 카펫이다. 청년으로선 세상에서 처음 보는 화려한 깔개이다. 수술이 부슬부슬 올라온 카펫이고, 그러므로 당연히 ‘동그라미’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64센티미터, 55킬로그램의 허약한 청년이다. “그 동그라미에 두 발을 대고.” 비서의 말이 계속 고막을 쾅쾅 울린다. 문제의 동그라미를 찾아 서지 않으면 입사시험에서 떨어질 거라는 강박에 청년의 걸음걸음이 자꾸 휘청댄다. 교실 한 칸은 됨직한 너른 사장실이다. 자신보다 앞선 면접자들이 이미 여러 번 밟고 섰으니 백묵으로 그려놓은 카펫 위의 동그라미가 제대로 남아 있을 리 만무하지만 청년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한순간 우렁우렁 말소리가 울린다. 누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라는 걸 청년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스톱모션이 되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청년의 가슴이 또다시 철렁 내려앉는다. 말한 사람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이 미처 대답을 못하자 두 번째 말이 정수리를 때린다. 말소리가 천상에서 내려오는 것 같다. 청년은 비로소 시선을 치켜들고 말의 주인을 간신히 찾아 올려다본다. 저 높은 곳, 육중한 책상 너머로 낯선 얼굴이 보인다. 사장님이다.

사장은 그가 서 있는 곳보다 최소한 예닐곱 계단을 올라간 자리에 앉아 있다. 사장실이 반으로 구획되어 있다는 걸 청년은 그제야 깨닫는다. 이를테면 직원이 결재서류를 가지고 사장실에 가면 일단 낮은 곳에 서서 높은 곳의 사장에게 차렷 자세로 절을 하고 난 다음 사장의 허락을 받아 예닐곱 계단을 올라간 뒤 결재를 받는 식이다. 사장의 두 번째 하문을 받고 나서야 흐릿해진 동그라미 두 개가 바로 발 앞에 있는 걸 청년은 발견한다. 그제야 동그라미가 보이는 게 너무도 억울하다. 사장의 하문에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치욕감 때문에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 청년은 다만 피가 배어나오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다.

나는 물론 그해 면접시험에서 낙방한다. 불안과 피로에 쩐 나는 그때 보나마나 새카매진 얼굴, 때꾼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광기의 세상에서 어떡하든 ‘특별시’에다가 삶의 끈을 비끄러매보자고 백묵으로 그린 동그라미를 찾아 갈팡질팡하는 ‘시골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사장의 머릿속에 지나간 것이 연민이었는지 혐오였는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사장이 나를 내려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든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오래 지날수록 더욱 공고해지는 것은 거의 지워진 동그라미를 찾아 우왕좌왕하는 젊의 나의 모습일 뿐이다. 특별시 시민이 되고 난 후에도 삶의 윤리성에 대한 마지노선으로 삼아 수없이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보아 온 모습이다. 마치 피에로를 연기하는 마임의 한 토막을 보는 듯하다. 문제는 그 주인공이 나이며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이다. 그 삽화를 떠올리면 언제나 얼굴이 붉어진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다.

신자유주의, 미국 모델 (출처 : 경향DB)


치욕감은 어떤 이에겐 자기 존재를 강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 문학을 나의 ‘유일한 주인’으로 삼도록 만들고 오로지 그 길로 가도록 추동해준 삽화의 하나다. 내 경우가 그렇다는 말이다. 누구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주인이 될 터이다. 자신의 길을 찾아 가지면 우왕좌왕하지 않게 되고 그러므로 강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치욕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방패요 명령으로부터 빠져나와 나를 드러내는 ‘존재의 나팔소리’라 할 수 있다. 불연속선의 반세기를 살아오면서 이만큼이라도 “나는 세상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다”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근거가 그것이다.

자유주의 세계화가 살갗을 벗기고 피를 졸이는 세상에서 이것이 내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를 얻고 그에 의탁해 사는 일은 낙타를 타고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 먹고살 만해도 때로 한없이 쓸쓸하고 때로 벼랑 끝을 걷는 것처럼 불안한 것은 한 존재로서의 고유성, 그것을 버렸거나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는 것이 인생이다. 고유한 꿈이 없다면 전체로서의 자유도 없다. 고유한 가치를 통해 글로벌 체제가 부추기는 욕망의 아우성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참자유일 것이다. 그래서 늙어가는 요즘도 나는 자주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곤 한다.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백묵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거기 서라고 명령하는 자에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거야!”

어쩐 일인지 최근엔 부쩍 더 현재진행형으로 그날의 삽화가 생각난다.


박범신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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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소설 같다” 하거나,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 “소설 쓰냐” “소설 쓰고 있네!” 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혹시 기억하시는가.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적 이야기보다 앞서가던 시대의 풍경이다. 하지만 그런 풍경은 이제 전설에 편입돼가고 있는 중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독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의 작가들은 현실의 이야기에 독을 조금 타서 더 극적으로 그려냈다면 오늘의 작가들은 독한 현실의 이야기에 물을 타 중화시켜 쓰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 쓰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렇게 작가를 비난할 것이다. “에이, 아무리 소설이지만 그런 뻥이 어디 있어!”

예컨대 근래 일어난 “포천 고무통 살인사건” “시의원 살인교사사건” “유병언 변사사건” “병영 내 집단폭행에 따른 사망사건” “세월호유가족에 대한 무차별적 인격모독” 등이 그러하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면 그 작가를 신뢰하겠는가. 일찍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반인륜적 일들이 자고나면 벌어지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싱크홀 위를 걸어가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반세기 넘게 야수적인 헌신으로 일궈낸 우리의 번영이라는 것이 지상 위엔 번쩍거리는 황금의 빌딩들을 다투어 세우면서, 그러나 바로 그 발밑엔 아수라의 거대 싱크홀을 만들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불안하고 두렵다. 지금 내 발밑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싱크홀만 해도 무서운데, 지도층이나 우리 개개인들이 여전히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짐짓 모른 체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무섭다. 가령 ‘세월호 정국’을 겨냥해 “이대로 가면 우리는 저성장에 주저앉고 말 것이다”라는 식으로 공공연히 단언하는 고위관료의 국민에 대한 불호령이 그렇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명백한 협박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불안해져서 세월호유가족을 왕따 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저성장만 극복하면 모두 행복해지는가. 위에 열거한 반윤리적 사건들이 ‘가난’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수많은 ‘독한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전 국민을 약육강식의 글로벌경제체제에 굴복시켜 줄 세우기 위한 지도층의 애국적 가짜모드는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 우리는 오랫동안 ‘반공’과 ‘생산성 제고’에 의해 오로지 협박받아왔으며 그로 인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길 포기, 삶의 질을 송두리째 희생해온 전력을 갖고 있다. 당신들이 가리키는 물질주의를 좇아 살다가 본성과 달리 우리 스스로 부모형제, 이웃을 버리고, 나아가 다른 지역 다른 정파 다른 계급을 오직 적으로 치부하는 못된 습관에 소속되고 만 것이 현재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이런 식의 자학적 욕망을 계속 따라가는 길 끝에 과연 행복한 미래, 품위 있는 삶이 있기는 있느냐고 묻고 싶다.

교황께서 먼 동방의 나라로 와 우리 모두에게 충고한 한마디가 오늘도 가슴에 사무친다. “물질주의를 벗어나라!” 그 말이 사무치게 들리는 것은, 국민을 행복하게 해야 할 책무를 앞장서서 지고가기로 자원한 지도층은 물론 그들에게 붙어 과실 한 접시라도 얻고자 한 우리 모두를 겨냥한 말이라는 걸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교황에게 몰려든 백만 인파에게서 들린 것은 ‘신음’과 ‘비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비’에게 일러바치러 가는 수많은 아이들 같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이는 본래 우리의 ‘아비’가 아니다. 이 땅의 아비들이 제 자식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이 땅의 아비들이 제 후손들에게 행복해지는 길을 일러주지 않기 때문에 먼 곳에서 날아온 다른 아비에게 달려가 우리는 무릎 꿇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이에게 바란 게 ‘세월호사건’이나 기타 갖가지 현안의 ‘해결’이었겠는가. 단지 더 부자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겠는가.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따뜻한 ‘격려’와 ‘위로’였을 것이다. 높은 제단에서 스스로 내려온 이가 진실로 상처받은 우리들의 손을 잡는 따뜻한 제의. 모든 존재는 스스로 자신을 빛나게 할 윤리적 책무와 함께 제 자신을 갱신시킬 본원적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전제조건은 격려와 위로이다. 이미 약육강식의 글로벌경제체제에 너무 깊숙이 이입됐으므로, 그리하여 우리들 자신은 행복으로 가기 위해 삶의 방향을 담대히 수정할 여지를 거의 빼앗겼으므로, 더 넓고 깊은 품을 가진 ‘아비’의 가슴에 기대어 위로받고 그 위로와 격려를 통해 용기를 내고 싶은 것이 지금 우리들 삶의 현주소다. ‘경제’ 어쩌고, 한사코 우기면서 짐짓 ‘남의 다리’를 긁는 전술은 질린다. 진정으로 우리를 위로함으로써 신뢰할 수 있는 ‘아비’를 만난다면 우리는 언제든 아침햇빛을 만난 어린 송아지처럼 다시 일터를 향해 뛰어갈 수 있다. ‘신명’이라는 에스컬레이터가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발성이 없다면 모든 정책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국민의 3분의 2가 정치인이나 지도자들을 믿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등학생의 48%가 10억원을 얻는다면 기꺼이 감옥에 가도 좋다고 대답하는 나라에서 정부주도의 성장정책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동안에도 세계 유례없이 열심히 살아온 우리들이다. 진실한 위로와 신뢰와 나눔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해 계속 성장하자는 말인가.

가을이다. 한가위도 오고 있다. ‘만월’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 사랑하는 이 앞에 서서 상대편을 만월이라고 우러르는 건 옳지만 더 많은 걸 가진 이들이 ‘이것이야말로 만월’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건 옳지 않다. 보이는 반면이 꽉 차 있을 때도 달의 절반인 그 이면은 춥고 어둡기 때문이다. 그늘을 먼저 보는 것이 지도자의 몫이고 책임이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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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집필실에서 서울 본가까지는 차가 밀리지 않을 때 승용차로 보통 2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전장이 180킬로미터쯤 된다. 지난 가을엔 태안반도 천리포수목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차가 밀리지 않았으나 그곳까지 대략 2시간30분여가 소요되었다. 같은 충남이고 거리도 더 가까운데 서울보다 오히려 더 오래 걸렸다. 몇 년 전 완공된 당진-대전간 고속도로가 없었으면 아마 4시간 이상 걸렸을 것이다.

지역 안에서도 형편은 다르지 않다. 모든 도로는 한결같이 행정소재지를 향해 뚫려 있다. 대도시와 대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최우선이다. 이는 내 집 앞-이웃 마을을 잇는 도로 포장사업부터 시행했다고 알려진 대만과 비교된다. 이웃마을에 가는 것보다 소재지에 가는 게 훨씬 더 빠른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게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풍경이다. ‘박정희식’ 빠른 성장을 성취한 개발 이데올로기의 본색이 그렇다. 비유컨대, 모든 문화-존재에게 무차별로 서열을 메겨 ‘중심’이라 부르는 것들에게 종(從)으로 줄 세우는 한편, 횡(橫)으로 연대를 이루어야 할 이웃 공동체는 낱낱이 나누고 갈라서 팽개침으로써 계속 ‘중심-중앙’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친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 바로 우리의 ‘성장’이라는 것이다. 반인간적 반문화적 성장의 결과는 공동체의 완전한 해체-결절이며, 또 결과는 당연히 행복지수의 답보-추락이다. 90년대 초반보다 GDP가 세 배나 성장했는데 국민행복지수(GNH)는 거의 똑같은 수준이라는 통계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런 질문과 마주친다.

행복해질 수 없다면 왜 돈은 벌어야 하는가.

아무리 일해도 부자가 될뿐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일을 당장 그만두어야 옳다. 국가가 우리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권면하는 건 단지 GDP를 올려 세계에서 몇 번째 ‘경제대국’이라는 허세와 권위를 위한 속임수일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경제대국’의 덕은 몇몇 권력자나 몇몇 재벌가에게 대부분 편입될 게 뻔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일할 뿐 앞으로도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향한 글로벌 경제의 최종지향이 그렇다. ‘복지’라는 말이 있지만 그 역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가령, 돌보는 사람이 없는 독거노인에겐 평균적으로 3~4명의 장성한 자식이 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늙은 부모를 팽개친 그 자식들에게 일찍이 부모보다 돈이 더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결사적으로 가르친 것도 글로벌경제체제와 그 추종자들이다.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기적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그들 앞에서 20만 원을 준다는 둥, 10만 원을 준다는 둥 갈팡질팡, 생색을 내는 것 자체가 낯부끄럽다. 20만 원을 다 나누어 주어도 생활비로는 어림없다. 앞으로 노인문제는 더 악화될 것이고 국가는 그로인해 고통 받을 게 확실하다. 3~4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반만이라도 부모를 돌보는 사람으로 길러냈다면 국가가 훨씬 평안했을 것이다. 돈-행복의 등식으로 유혹해 자식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놓은 국가가 받아야할 당연한 앙갚음이다. 노인문제만 그렇겠는가. 앞으로 국가의 ‘참화’가 될지도 모르는 ‘복지’야말로 중심-지역, 부자-빈자, 보수-진보 등으로 한사코 나누면서 공동체를 깡그리 부수어온 글로벌경제체제-그 추종자들이 스스로 불러온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채 생산성의 무한추구밖에 관심이 없다. 생산성의 제고만이 그들에게 ‘떡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관피아’ ‘철피아’ ‘해피아’라고 말해지는 것들의 실체이기도 하다.

두 번이나 낙마사태를 겪은 뒤 ‘세월호’ 책임을 지고 그만두기로 기정사실화된 총리를 유임시킨다는 발표를 접했을 때 국민의 한사람으로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세월호참사의 가장 참담한 절정이었다. 과장해 비유컨대, ‘너희들이 계속 시비를 걸면 다른 세월호도 실종시켜 버릴 거야!’라는 말이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여전히 11명이나 되는 사람이 바다 밑에 남아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어버이들의 사랑이 폭풍우 속의 바다 밑에 내려가 있지만, 정부의 ‘책임’은 완전 실종되고 남은 것은 정적들 간의 전략적인 ‘밀당’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깨닫는다.

모든 제자들은 청출어람하고 모든 자식들은 부모의 협소한 도량을 넘어서야 세상의 앞날이 환해진다. 우리의 국민행복지수는 글로벌경제체제의 그 전략에 여전히 저당 잡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지도자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마를 기대고 울어야 할 넓은 품이다. 굳센 신념에 따른 넓은 품이야말로 민주사회의 참된 지도력일 터이다. 모든 제자-자식들이 압축성장의 신화를 써온 아버지 세대의 전략을 극복하기는커녕 더 옹졸하게 그 가치 그 전략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그리하여 오로지 ‘적’들을 쓰러뜨리고나가 나 홀로 정상에서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계속 고단하게 살수밖에 없다.

GDP로 집약되는 가치에 온 국민이 열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집단들의 자의식이 부른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불과하다. 그 호가호위가 오늘도 우리를 긍정적인 삶의 자리에서 부정적이며 자학적인 삶의 자리로 내려가도록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생명은 수평적 유대의 에너지를 먹고 자란다. 진도앞바다에서, 밀양에서, 제주에서, 평택에서, 또 어디어디에서 나는 오늘도 수평적 유대를 죽이는 국가적인 ‘폭력’을 매일 본다. 가슴이 찢어진다. 단지 폭력에 당하는 자들에게 대한 인간주의적 연민 때문만이 아니라, 나와 내 이웃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어갈 그 자식들에게도 그만큼 희망의 싹이 잘리는 것을 매일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체제의 명령에 순응적으로 살아오다가 우리 모두는 어느덧 돈 때문에 우리 자신을 착취하는 자학적인 삶의 방식에까지 이르렀다. 생산성으로 포장된, 우리에 의한 우리 자신에의 착취를 그만둬야한다고 가르치는 품 넓은 지도자-지도력이 진정 그립다.


박범신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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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나는 시골의 어느 여자 중·고교에서 ‘전임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수업과 담임 등 업무에선 정규직 교사와 하나도 다르지 않지만 월급만은 정규직 교사의 반절 정도를 받는, 이를테면 비정규직 교사였다. 수업시수도 아주 많았는데, 더 힘든 것은 정규수업 이외 자율학습 감독이었다. 말만 ‘자율’일 뿐 모든 학생들이 자율학습비까지 강제적으로 따로 내면서, 교사와 함께 학교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내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교장은 도내에서도 소문난 제왕적 교장이었다. 군부독재의 폭압적 권위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모든 조직의 수장은 당연히 절대적 권력자로 군림했는데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침조회에서 교장이 국가시책을 소홀히 하는 교사를 나무랄 때 “선생놈들이…” 하는 거친 표현을 입에 담아도 항의하는 교사가 전혀 없을 정도였다. 교사들은 “가슴에 맷돌이 얹힌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예닐곱 명의 교사들과 특히 가까워서 퇴근 후면 후미진 막걸리집에서 자주 어울렸다. 자리는 늘 무거웠다. 화제는 교장에게 인격적 대우를 못 받는 것보다 자율학습비문제에 자주 머물렀다. 자율학습비는 전액 감독교사들에게 제공하도록 교육청 방침에 나와 있었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교사들이 받는 수당은 학생들이 내는 자율학습비의 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머지는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절대빈곤의 시대였다. 나 같은 총각선생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아이들을 두셋씩 학교에 보내야 되는 늙은 교사들은 막걸리값도 변변히 내놓을 형편이 되지 않았다. 삶은 늘 캄캄했고 교사로서의 소신도 가질 수 없었다. 군부독재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 교과내용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교장은 반공과 개발의 전도사를 자임했다. 교육감으로까지 거론되는 힘 있는 교장에게 감히 문제제기를 할 대찬 교사는 없었다.

나는 그때 겨우 20대 중반이었다. 작가를 꿈꾸던 그 무렵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내성적인 청년이었지만 젊었으므로 순정한 영혼을 갖고 있었다. 그 순정이야말로 ‘불온’이요 ‘오욕’이었다. 예의 “선생놈들이…”로 시작된 교장의 추상같은 훈화가 끝난 다음 내가 불쑥 손을 들었다. 동료교사들의 쌓이고 쌓여온 울분에 밀려 거의 저절로 들려진 손이었다. 교장은 물론 수십명의 교사들의 눈길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발언권조차 없는 것으로 치부되던 ‘전임강사’가 손을 들고 일어났으니 미상불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율학습비에 대해 물었다. 식은땀이 났다. 자율학습비 용도가 불분명하니 이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꼴이었다. 교장의 얼굴은 노기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신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고 간주한 교장이 “저놈 뭐얏!” 소리쳤고, 펜대인가 잉크스탠드인가 그런 것이 교무실 한가운데로 날아왔으며, 동시에 주위에 있던 몇몇 교사들이 나의 양팔을 붙잡아 복도로 끌고 나왔다.

교장실로 오라는 교장의 분부를 전달받은 것은 1교시 수업이 시작된 직후, ‘정규직 교사’의 꿈이 단번에 날아갔다는 걸 막 깨닫고 있을 때였다. 정규직 교사가 못 돼도 동료교사들이 정당하게 자율학습비를 받게 된다면 그것도 보람찬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고 나는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찾아간 내게 돌아온 것은 삿대질과 불호령뿐이었다. 교장은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했다. ‘아비’와 같은 당신에게 불손하게 대드는 것은 교사의 자질문제만이 아니라 “가정교육”의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가정교육”에서 나의 혈기가 비정상적으로 터졌다. 나는 울분을 참지 못해 교장실 유리창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난동이었다. 교장은 도망가고 서무과 직원들이 쫓아와 나를 붙잡았다. 양손은 피투성이였다. 경찰차가 들이닥쳤다. 나는 붙잡혀 폭력교사로 파출소까지 곧 압송됐다.

두 시간쯤 후에 교장이 파출소로 찾아왔다. 교장은 나를 방면시켜 중국집으로 데려가 요리를 사주며 회유했다. 교육감이 되는 게 꿈이었던 교장은 나를 파출소에서 연행해 가도록 조치한 후에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교장은 젊은 혈기가 “좋다”고 나를 칭찬하면서 다음 학기엔 꼭 정식교사로 발령받게 힘써 줄 테니 그리 알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아비’와 같은 교장에게 사과했다. 그 후 자율학습비가 제대로 잘 지급됐었던가. 그걸로 좌우간 사건은 봉합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모든 선생들이 나를 기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늘 함께 둘러앉아 울분을 나누었던 동료교사들이 나를 피하는데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정식교사의 꿈을 내박치면서까지 문제의 발언을 한 것은 오로지 그들의 울분을 차라리 젊은 내가 짊어져가자는 것이었는데, 칭찬받기는커녕 일제히 ‘왕따’시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교 안에선 물론 학교 밖에서조차 아무도 나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이듬해 나는 한 시골중학교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교장은 어쨌든 당신의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그러나 사랑했던 동료교사들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는 너무도 선연했다. 그런 어림에 어부지리처럼 얻은 정식교사직을 계속하는 일이 비굴하게 느껴졌다. 한 달 만에 정식교사직을 때려치우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생활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고통스러운 굽이굽이마다 함께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교사들이 자주 떠올랐다. 상처가 깊어서 적도 아군도 믿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들의 죄는 약하다는 것. 나하고 계속 친하게 지내다가 불이익을 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정서적인 상처는 동료들에게서 받았으나 그들과 나를 이간질시킨 핵심은 교장의 나쁜 권력에 있었다는 걸 아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런 권력에 국가개조를 맡기지 않았다


나쁜 권력은 공동체를 말하면서 기실은 그 구성원들을 권력으로 낱낱이 갈라놓는다. 지난 반세기 우리에게 생긴 패악의 정파주의, 지역주의, 세대주의 가름을 누가 만들었는가. 싸워야 할 것은 우리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를 갈라놓는 나쁜 권력과의 싸움이다. ‘국가개조’를 한다는데 나쁜 권력의 카르텔이 해체되어 과연 정반합의 착한 융합에 이를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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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스무명이 넘는 우리의 아들딸과 이웃들이 수심 40미터 캄캄한 바다 밑에 있다. “달나라에도 가는 세상인데…” 하면서,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말고 내게 냅다 투가리 깨지는 소리를 한다. 가족을 책임져야 할 가장인데도 나는 유구무언이다. 어린 두 딸의 엄마가 된 딸애가 아이들을 안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앞으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가야 돼요!” 하고 역시 내게 볼통하게 묻는다. 아이들을 지켜야 할 아비인데도 나는 역시 유구무언이다. ‘아비’가 주역인 역사를 살아온 터,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그 말조차 할 염치가 없다. ‘가장’이자 ‘아비’인 사람들이 가족들을 지킬 수 없다면 무엇으로 역사는 지키고 무엇으로 나라는 지키겠는가.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세월호 속엔 지금 세상의 모든 아비, 모든 어미가 들어가 있다. 모든 형과 삼촌과 이모, 고모와 누나들도 들어가 있다. 그래서 지상의 세계는 지금 텅 비어 있다고 나는 느낀다. 선원들의 사이코패스적 이기심, 단 한 명의 생명조차 꺼내오지 못한 해경의 무능, 관료들의 갈팡질팡, ‘과거의 적폐’라고 말하는 최고통치자의 현실인식, 오로지 돈만 좇는 사업주와 그를 둘러싼 비리·부패의 카르텔을 이룬 이권그룹의 ‘빨대’들만 지상에 남아 책임을 모면하려고 이리저리 뛰는 형국이다. 이를테면 지상에 악착같이 붙어 있는 것은 여전히 돈을 절대군주로 모시는 기득권의 단단한 네트워크뿐이라는 느낌이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한참 전의 일이긴 하지만, 대통령께서 ‘통일은 대박’이라 하고 이어서 그 비속어를 자꾸 썼을 때, 영어로는 ‘잭팟’이라고 청와대가 나서 친절하게 설명까지 붙여주었을 때, 내가 느꼈던 불안감이 떠오른다. 잭팟은 다른 사람의 소소한 기회까지 몽땅 빼앗아 나 혼자 크게 한몫 챙기는 요행수로서의 성공을 뜻하는 말이다. 대통령이 앞장서 ‘나 홀로 욕망’을 드러내는 천박한 비속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한 속내엔 유권자이기도 한 우리들의 잠재적 심리 속에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잭팟의 로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도층에서 퍼뜨린 개발의 이데올로기를 좇으면서 우리들의 DNA에 은닉되어진 부끄러운 욕망이 대통령에 의해 더 이상 부끄러운 욕망이 아닌 것으로 객관화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모든 국민들은 오로지 돈만 좇는 ‘다 판다’의 사주가 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다 팔아치워 내 곳간을 채우면 성공이라는 집단무의식의 반영이다. 대통령의 ‘대박’이 국민의식으로서 ‘다 판다’로 전이되는 데는 어떤 성찰, 어떤 기다림도 필요없다. 다 함께 행복한 세상을 열어가야 할 공동체의 마지막 보루까지 깡그리 ‘돈’에 내맡기면서 얻는 반생명적 불모의 성공에 대한 지향이다.

슬픔은 오랜 세월에 걸쳐 몸속 가시가 되고 분노는 짧은 시간 안에 병이 된다. 당신이 그렇듯, 나 또한 그래서 요즘 계속 몸이 아프다. 눈물로 지울 수 있는 슬픔도 있고 눈물로 지울 수 없는 슬픔도 있다. 눈물로도 지울 수 없는 세월호의 슬픔은 아직 ‘가시’가 되지 않았는데 분노는 병이 된 지 벌써 한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이 분노가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월호에 갇힌 생명의 마지막 귀가까지가 아니라, 안전을 위한 갖가지 대책이 열거될 때까지가 아니라, 세월호를 둘러싼 책임소재가 가려지고 그들이 엄벌에 처해질 때까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라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고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포만에 따른 범죄적인 만족의 우상을 깨부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에 대한 속 깊은 비전을 회복할 때까지다.

혹시 세월호 선장처럼 도망친 적 없는가.

희생자들에 대한 조의에 앞서 아비이자 가장으로서 나는 내게 묻는다. 아니 대통령의 마음으로, 관료의 마음으로, 선장의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묻고 싶다. 슬픔과 분노를 시간에 의탁해 지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몸속 ‘가시’로 만들어 오래 간직해야 할 자문이다. 팽목항-안산-KBS-청와대로 이어지는 희생자 가족들의 행렬을 보면서 터무니없게도 나는 ‘나라 없는 백성’의 슬픔을 느낀다. 어떤 이는 정말 ‘나라가 없다’라고까지 느꼈을지 모른다.

16일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시민이 세월호 사고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인간 리본 만들기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 /김정근기자(출처: 경향DB)


그러나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보라, 여전히 공동체로서의 ‘우리들’이 있다. 슬픔과 분노를 공유하려는 긴 조문 행렬,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제 명줄을 걸고 기꺼이 바다로 뛰어드는 잠수사들이 있으며, 바닷속 수심 40미터 세월호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저들과 함께 갇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감동이고 희망이고 힘이다. 월드컵 때 환호와 진취의 기상으로 우리 모두가 일체감의 감동을 보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번엔 슬픔과 분노로 우리가 공동체로서의 강력한 연대감을 다 폐기처분하지 않았음을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왕과 신하들이 다 도망친 다음에도 의병대 등으로 합류해 누대에 걸쳐 나라를 지켜온 우리들이다.

슬픔과 분노와 무력증에 시달리면서도 시시때때 거리로 나가 아무나 붙잡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은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달나라에도 가는 세상인데 왜 바닷속 그들을 다 건지지 못하냐고 타박하는 아내에게, 엄마로서 앞으로 어떻게 내 아이들을 지켜가야 하느냐고 묻는 젊은 엄마인 딸에게 이윽고 내가 한 대답은 이것이다. “사랑한다!” 잘못된 구조에 관용을 베풀자는 게 아니다. 살아남은 자의 모든 슬픔 모든 안타까움 모든 분노를 모아서, 그 옹골찬 진심, 단합된 힘으로,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그렇다.

“사랑합니다!” 잘못된 세상을 변혁시키고 새 세상을 여는 힘은 돈이나 권력이나 나만의 성공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다는 걸 여전히 믿고 싶고, 또 믿기 때문이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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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온 산천에/ 종환(腫患)들이 떼지어 솟아/ 터진다/ 피고름이 터진다// 무섭다”

‘꽃’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쓴 시다. 봄이 일찍 도래했기 때문일까. 올봄의 꽃들은 피어나는 게 아니라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울안의 매화 산수유가 터지더니 호숫가를 따라 벚꽃들이 줄지어 터져 나오고, 건넛마을에서 앵두 자두 복숭아 배꽃 조팝나무 살구 등이 도미노로 줄지어 소리치고 나선다. 겨울의 혹한을 견뎌내느라 미상불 속새로 고열도 나고 통증도 참았을 터이다. 그러니 결과로서의 꽃이야 애오라지 부시고 고울망정, 그 과정으로서의 어둠 속에서야 잔인하고 피어린 고투(苦鬪)가 왜 없었겠는가. 저것은 분명 금기를 깨치고 터져 나오는 못 말릴 색정이요, 천상을 건들 만한 존재의 나팔소리인 것이다. 관념이 아니다. 실제적인 빅뱅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시도 나는 쓴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저 물로 살아야지/ 강물 되어야지/ 그대 꽃으로 피면/ 품고 흘러야지/ 먼 바다 끝으로 가서 기쁘게 하늘로 오르고/ 외로우면 새봄에 봄비로 내려/ 그대 정결한 이마/ 부드럽게 적셔야지/ 따뜻이 스며들어야지”

봄꽃들 때문에 바야흐로 내 감수성이 하늘을 찌른다.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누군들, 횡격막 아래 억눌러 감춰놓은 ‘시인’이 왜 없겠는가. 제 안에 억눌려 있던 ‘시인’이 참지 못하고 뛰쳐나와 꽃으로 피었다가 꽃비로 지거니와, 그러므로 그 상승과 추락 사이에서 내 슬픔은 냉큼 초월에까지 이른다. 상승과 추락의 단애가 봄이라 할 만하다. 활상(滑翔)의 여유를 즐길 사이도 없다. 피는 것은 꽃의 활생이요 지는 것은 꽃의 죽음이라, 그 사이가 가히 면도날이다. 바르도다.

삶은 말할 것도 없이 실제와 초월 사이에 있다.

세상은 오늘도 우리에게 크고 작은 ‘빨대’를 하나씩 들려주고 저기, 불안한 소비의 정글로 밤낮없이 몰아내는 중이다. 큰 ‘깔때기’를 가진 자들도 있다. 소설 <소금>에서 말한바, 자본주의체제는 ‘빨대와 깔때기의 거대한 네트워크’라고 할 것이다. 누구는 ‘빨대’를 들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동분서주하지만, 거대조직의 드높은 망루 위에 앉아 있는 누구는 다양한 정보망을 통해 ‘빨대’들을 낱낱이 내려다보며 보다 주둥이가 넓은 ‘깔때기’로 수천수만의 빨대를 일시에 빨아들인다. 국가조직, 다국적, 재벌 기업들이 그렇다. 먹이사슬이 절멸하면 안되기 때문에 ‘깔때기’로 빨아들인 것을 얼마큼 토해내야 오래, 그리고 보다 더 많이 확대 재생산해낼는지도 저들은 계산한다. 문화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정치가 명분을 대주니까 드높은 저들 망루의 안전성은 지속적으로 보장된다. 불과 반세기 전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정교한 프로그램이다. 바야흐로 지구인 모두가 생산성 제고의 노예가 된 세상이지 않은가.

차밭, 봄꽃이 어우러진 봄 풍경 (출처 :경향DB)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따라 우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만이 두통이라는 병을 갖고 있으며 사람만이 태어날 때 부여받은 삶의 유한성이 주는 슬픔을 이해한다. 인류문화를 지속적으로 진보시켜온 근원적인 에너지가 거기 있다. 실용적 세계의 진보에 욕망을 두면서, 동시에 그 실용 너머의 신비하고 한정 없는 초월적 세계를 보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 이를테면 사람만이 ‘시’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산성의 목표치를 제공해 오로지 그에 헌신하라는 ‘빨대와 깔때기’의 체제가 아무리 견고하고 거대해도, 끝내 우리들 가슴속에 숨겨진 ‘시’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본성이라고 부르는 영혼의 원자핵에 그것이 DNA로 내장돼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 것이 어찌 목숨뿐이겠는가. 사랑과 행복, 그리고 신의 옷깃을 잡고 싶은 갈망도 그러하다.

행복해지기 위해 소비가 지금 부족한가.

혹시 울지 못해, 화내지 못해,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 불행한 것은 아닌가. 눈물과 소리침과 키스가 바로 시일 터이다. 봄꽃의 발화와 그 정결한 낙화를 보라. 제 안에 분명히 실재하는 것들을 한사코 부정하며 가는 진군은 소비라는 이름의 화려한 재화의 감옥에 우리를 가둘 뿐이다. 육체도 영혼도 불완전한 것이 인간이다. 당신은 본래 ‘시인’이 아니었던가. 가장 감추기 어려운 것은 기침과 사랑에의 불꽃일 것이다. 그걸 한사코 감추라고 명령하는 생산성 제고는 행복을 위한 하나의 축에 불과하다. 그것을 행복의 전부라고 말하는 체제는 속임수로서의 전략을 가졌을 뿐 당신의 행복에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당신 가슴속에 깃든 ‘시인’을 멸절시키려는 체제엔 당연히 저항하는 게 옳다. 가슴속에 억눌러 숨긴 ‘시인’이야말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세계화라는 명패를 든 신자유주의의 ‘목줄’에 속이 뒤집혀 쓴 이런 시도 있다. “우리집 젊은 개는/ 어쩌다 목줄 풀어주면 아주 미친다/ 나는 너무 반듯하다/ 사랑하는 그 누구도 나의 목줄을 풀어주는 일 없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아주 미친다”

논산 외딴집에서 나는 늘 ‘영원’을 생각한다.

사람처럼 징글징글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그리운 것이 없다. 산하에 꽃이 가득하니 그리움은 나날이 키가 큰다.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쓴 내 졸시의 전문은 이렇다. “이제 아무도 순간을 버리면/ 영원을 얻는다고 믿지 않네 꿀벌들은/ 오늘도 은방울꽃 작은 향랑에 대롱을 박고// 황홀한 긴꼬리제비나비는 산초나무 어둔 가슴에/ 새똥 같은 알을 낳는다 누가/ 새똥 속에 영혼의 각성이 깃들여 있는 줄 알겠는가// 당신은 영원으로부터 와/ 내 영혼의 뜨락에 순간의 불씨를 놓고/ 지금 사랑이라고 부르네 프시케(Psyche)라고// 등이 가슴보다 어두운 당신”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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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직을 정년퇴임하던 날이었다. 밤이 깊을 때까지 나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창 너머 북악은 캄캄했다. 교수보다 작가가 본업인 걸 한번도 잊은 적이 없으므로 교수직의 정년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문제는 나이가 주는 자의식. 65세라니, 아주 낯선 느낌이었다. 나는 서재를 둘러보았다. 이만하면 가난한 젊은 날 꿈꾸던 서재에의 소망을 충분히 이루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하, 나는 이미 가난하지 않구나.

난데없이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웬일인지 비탄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거실이 있고 TV, 오디오, 자동차도 있으며 평생 동안 나의 충직한 시종처럼 살아온 아내도 있었다. 아내는 앞으로도 계속 밥을 짓고 빨래를 해줄 것이었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아이들 셋도 결혼해 분가했으니, 이제 서재에 들어 앉아 평생 꿈꾸던 대로 “오로지 소설 쓰기”로만 살면 될 터였다. 그런데 이 불안감은?

창조적인 에너지는 당연히 ‘내적분열’에서 나온다. 작가의 상상력은 더욱 그렇다. 작가는 자신이 사는 시대가 가장 위태롭다고 느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이웃의 삶이 벼랑길에 놓여 있다고 늘 생각한다. 객관과 주관, 집단과 개인, 광장과 밀실을 수시로 오가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상승과 추락,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왕래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내가 느낀 불안은 바로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부족함이 없는 것. 안온한 일상이 불러올지 모르는 부식(腐蝕)에의 공포. 이를테면 나는 앞으로 걸어갈 길이 보다 안전한 인도일지 모른다는 예감에 본능적으로 공포감을 느꼈던 셈이었다.

바로 그때, 하나의 처방이 전광석화처럼 떠올랐다. 이혼이었다. 아내와 나는 연애해서 결혼했고 애 셋을 낳아 기르면서 40여년을 비교적 무난히 함께 살아왔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로서의 욕망에 따른 갈등도 대부분 봉합됐으니 싸울 일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 혹은 동행자로 남은 인생 순하게 함께 걸어가면 될 것이었다. 그런 아내와 늘그막에 이혼한다면 그 여파는 만만하지 않을 터였다. 그것이 불러올 고통스러운 파동이 일파만파, 내 감수성 썩을 일 없이, 그 에너지로 계속 소설을 뜨겁게 쓸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래서 부리나케 침실로 내려갔다. 깊은 밤, 아내가 촉수 낮은 불빛 아래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 봐. 아무래도 우리, 이혼을 해야겠어! 그 말이 내 목울대에 걸려 있었다. 나는 아내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생의 무게가 얹힌 가면 같은 얼굴이었고, 또한 한없이 낯설었다. 연애하던 시절의 처녀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나 아내를 깨우려는 순간 난데없이 콧날이 시큰해졌다. 뭐랄까, 늙은 아내의 잠든 얼굴엔 40여년의 세월을 살면서, 함께 살아야 했기 때문에, 상실한 것들이 오롯이 깃들어 있었다. 그동안 얻은 것들도 없지 않을 텐데, 그런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잃어버린 청춘의 빛과 무위하게 낭비한 시간들, 함께 살아오느라 알게 모르게 어느 낯선 길가에 우리가 버려두고 온 젊은 날의 이상도 낱낱이 보였다.


나는 아내를 깨우지 못하고 서재로 올라왔다. 실패였다. 아직도 젊고 여전히 빛나는 아내라면 모를까, 누군가와 함께 사느라 잃어버린 것이 많은 늙은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 대신 아침 식탁에 마주 앉아서 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있잖아, 나 어디 먼 시골로 글방을 옮길까 하는데 이사할래?” 아내가 내 앞으로 굴비그릇을 옮겨주며 대답했다. “애들도 다 여기 있고, 나 시골로 아직 못 가. 환경을 바꾸고 싶다면 당신 혼자 왔다갔다 살아. 그건 오케이 할게.” 옳거니. 그것은 예상했던, 내가 원하던 대답이었다. 이 나이에 어느 먼 변방에서 라면이나 끓여먹으면서 혼자 고절하고 불편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나의 짐승 같은 감수성을 훼손하지 않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내가 논산으로 내려간 걸 두고 유유자적, 무위자연 등을 떠올리면서 나이가 들었으니 자연스럽게 존재론적 시간의 사이클을 따라 회향했다고 여길는지 모르지만 틀린 상상이다. 내게 아직 남은 불꽃이 있다면 여전히 가슴속에 도사린 단심으로서의 자기 갱신을 향한 욕망이다. 자기 갱신의 욕망이 있다면 늙었어도 청춘이요, 자기 갱신의 욕망이 없다면 젊었어도 이미 그는 늙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갱신이란 본원은 유지하되 자신을 둘러싼 삶의 조건과 양식을 과감하게 바꾸는 일종의 ‘나 홀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그렇다. 나는 평생 어떤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으며, 여러 방법을 동원해 ‘나 홀로 혁명’ 혹은 작가로서의 ‘자기 갱신에 대한 욕망’을 훼손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자기 갱신의 욕망이야말로 단독자로 살아야 하는 작가의 운명은 물론이고, 의미 있게 살고 싶은 한 존재로서의 삶을 떠받치는 큰 지렛대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의 일부 청년들은 예전과 달리 너무나 안전한 인도를 따라 걷는다. 그렇지 않은가. 자본주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많은 어른들도 그렇고, 정치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도 대부분 그러하다. 그들에게 최상의 행복은 자본이 주는 소비의 감미이거나 기득권의 전략적인 방어밖에 없다. 예컨대 여전히, “국정원”이나 “폐기처분된 공약” “선거공학” “대박” 등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어떤 이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대박!”이란 비속한 말로 자신의 이상을 설명한다.

내가 젊던 시절로부터 거의 반세기를 지나왔는데도 자동차가 좀 더 빨라지고 아파트가 좀 더 넓어진 것을 빼면 세상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자각과 만나면 숨이 탁 막힌다. 그럴 때 나는 호숫가 외딴집으로 가서 ‘마이웨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숨을 고른다. “이제 끝이 다가오는군/ 이제 마지막 커튼도 내 앞에 있어./ 나의 친구여, 확실하게 말해두지/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할 거야.” 나를 갱신시키려는 욕망으로 몸과 마음이 푹 퍼질지 모르는 늙어가는 나를 경계하고 싶기 때문이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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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