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배철현의 심연'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6.05.27 사유
  2. 2016.05.12 인내
  3. 2016.03.31 [배철현의 심연]오만(傲慢)
  4. 2016.03.23 [배철현의 심연]순간(瞬間)
  5. 2016.03.03 멘토
  6. 2016.02.18 일본의 신화 속 물고기 ‘고이’ 이야기
  7. 2016.02.04 또 다른 나
  8. 2016.01.21
  9. 2016.01.07 잘라내기
  10. 2015.12.24 [배철현의 심연]빛의 축제
  11. 2015.12.10 관조
  12. 2015.11.26 섬세한 침묵의 소리
  13. 2015.11.12 [배철현의 심연]영웅, 심연을 본 자
  14. 2015.10.29 열정
  15. 2015.10.15 두 갈래 길
  16. 2015.10.02 어두운 숲속
  17. 2015.09.03 유디스티라의 개
  18. 2015.08.20 착함
  19. 2015.08.02 새끼 거북이의 임시 치아
  20. 2015.07.19 현관(玄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나는 내 생각의 가감 없는 표현이다. 나의 얼굴, 몸가짐, 내가 처한 환경과 운명은 내 생각 그대로의 표현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내 생각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미래는 마치 조각가 앞에 놓여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최초의 커다란 돌덩이다.

나는 형태가 없는 돌덩이와 같은 미래를 내가 원하는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두 손에 정과 망치를 들고 마음속에 그려놓은 생각을 조각하기 위해, 쓸데없는 군더더기 돌들을 과감히 덜어내고 정교하게 쪼아내기 시작한다.

‘나의 미래’라는 조각품은 남들과 비교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을 때 빛이 날 것이다. 생각은 내 손에 쥐여 있는 정과 망치를 통해 어제까지 내가 알게 모르게 습득한 구태의연함을 쪼아버리는 작업이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여 내 생각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마술이다. 그러면, 내가 만들어낼 조각품의 청사진은 무엇인가? 내 손에 들려 있는 정을 부단히 움직이게 하는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며칠 전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무심코 들렀다. 그곳에서 한국조각의 걸작이라고 여겨지는 ‘반가사유상’을 보았다. ‘반가사유’는 내게 익숙하지만 그 의미가 아직도 아련해, 이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빙하시대 크로마뇽인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처럼 어두컴컴한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가운데 한국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국보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이 마주 보며 10m 정도 떨어져 서로 무심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 불상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 이 불상을 제작한 6세기 삼국시대 무명의 조각가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토록 묘한 조각 작품을 만들었을까? 거의 천오백년이 지난 오늘, 왜 이 불상 앞에서 숙연해지는 것인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금동반가사유상 앞에서 모든 것들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불상 전면으로 가 그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불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자신의 심연으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불상 주위를 한 바퀴 돌았지만, 불상은 태초부터 이런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처럼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신기하게 나의 부산한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않는 것 같기고 하고…. 기분이 묘했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왼쪽)과 83호 반가사유상._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불상은 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 둥근 의자 위 방석에 앉아 있었다. 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올려 얹은 자세다. 그래서 ‘반가(半跏)’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평평한 바닥에 결좌 자세로 허리를 90도로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지 않는가? 불상은 한쪽 다리만 다른 쪽 다리에 올리고 왼쪽 발은 족좌 위에 올렸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오른쪽 다리의 발바닥, 특히 엄지발가락 밑에 상당히 두툼하게 부풀어오른 부분이다. 붓다는 참선을 통해 해탈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탐닉한 것이 아니라 인간 군상들과 함께 먼지가 나고 고통이 가득한 세계 안에서 발이 붓도록 돌아다니신 것 아닐까!

불상의 왼손은 그런 발을 어루만지듯이 가볍게 올려놓은 오른발 복숭아뼈를 살포시 감싸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뺨에 살짝 대며 심오한 생각에 잠겨 ‘사유’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사유(思惟)라는 한자를 보면 심오한 의미를 훔쳐볼 수 있다. 생각 사(思)자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마음 심(心) 위에 있는 글자가 ‘밭 전(田)’이 아니라 한자의 뇌(腦) 글자의 오른쪽 아래 등장하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오히려 생각의 대상은 뇌 속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만나는 일상이라고 생각한다. 농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터전인 ‘밭’인 것처럼, 생각의 대상도 ‘밭’과 같은 일상이 아닐까! 나를 더 나은 나로 변화시키는 현장은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며 집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이며 책이다. 그 일상이 때로는 귀찮고 피하고 싶지만, 붓다의 왼손처럼 그 지치고 퉁퉁 부은 왼발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닐까?

예수는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다”라고 단언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매일매일 만나는 삶의 터전, 냄새나고 파리와 모기가 날리는 곳이다. 다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 안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는 훈련이 바로 생각이 아닐까?

‘사유’란 단어의 ‘유(惟)’자도 신비하다. ‘유(惟)’의 오른편에 있는 한자는 ‘송골매’나 ‘최고’를 의미하는 추(추)자다. 생각한다는 것은 송골매의 눈으로 나를 보는 연습, 가장 높은 경지에서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조하는 것이 아닌가. 서양 전통에서 ‘묵상’을 의미하는 단어인 ‘컨템플레이션(contemplation)’도 ‘자신의 모습을 독수리의 눈으로 찍어본다’는 의미다.

내가 응시해야 할 대상은 내가 처해 있는 현재 삶의 터전을 극락이라고, 지금 여기서 송골매의 눈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닐까? 컴컴한 전시실을 나오려고 했다. 뒤에서 반가사유상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그 불상이 나에게 미소(微笑)를 짓는 것이 아닌가.

내가 서 있는 이 장소와 시간이 나의 사유의 대상이며, 그것을 나를 위한 천국으로 만들려고 결심할 때, 신은 우리에게 미소를 선물한다.


배철현 ㅣ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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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분야에서 존경받는 일인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일가를 이루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행복한 임무를 발견하고 정진할 때, 우리를 좌절시키고 포기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임계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재능이면서, 결심이자 단호한 의지다.

이것은 소위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구분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즐기는 사람만이 건너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 바로 인내(忍耐)다.

거의 30년 전 나는 한 언어에 매료되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기록한 고전 히브리어다. 나는 그 당시 어두운 숲속을 헤매며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었다.

내 몸과 정신, 그리고 영혼까지 송두리째 앗아갈 정도로 매력적인 그 무엇. 그것이 바로 고전 히브리어였다. 이 언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수업 첫 시간은 좌절 그 자체였다. 글자 모양, 소리, 단어와 문장, 발음. 이 모든 것이 너무 생소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 언어가 내 일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이 언어를 사랑할 수 있는가? 내 전략은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우선 내 일과는 이 언어 공부가 전부였다. 이 언어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 점점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3년 정도 공부하니, 이제 고전 히브리어가 내게 말을 걸어왔고, 문장의 단어와 단어 사이에 공간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남들이 들어가 볼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가져다주는 선물이 바로 인내다. 아마도 사랑과 인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분할 수 없는 신비한 합일(合一)이다.

인내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최고의 덕목이다. 인간에겐 특별한 취미가 있는데, 자신의 신체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스포츠다. 그런 경기들 중 단연 돋보이는 극한 스포츠가 ‘마라톤’이다. 4년마다 열리는 국제 스포츠 경기인 올림픽의 꽃은 맨 마지막에 거행되는 ‘마라톤 경기’다.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가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1위로 결승 테이프를 끊고 있다_연합뉴스

마라톤 경기는 모호한 매력이 있다. 뛰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환희와 재미를 선사한다. 42.195㎞를 일정한 속도로 뛰어가는 한 사람의 영웅적인 모습. 그의 모습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인내를 찬양한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과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은 인내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이라고 묵묵히 그리고 감동적으로 외친다.

인간은 왜 이렇게 자학하는가? 인내가 인간 승리의 표상인가? 달리기 선수들은 특별한 엑스터시 경험을 말한다. 대부분 이 경험을 신뢰하고 자신들이 직접 경험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도달하면,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고 쉽게 즐기며 달릴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한다.

이 기분이 진짜일까? 진짜라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장거리 전문 선수들 중 일부는 자신이 기절할 정도로 달려 완주한 후, 평온함을 느꼈으며 심지어는 행복감에 젖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영어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 최근 과학자들은 극도의 인내를 요구하는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 선수의 뇌에서 기분을 전환시키는 화학성분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화학성분을 엔도르핀이라고 부른다. 장거리 달리기와 유사한 격렬한 운동을 하는 선수들의 뇌, 특히 변연계와 전두엽 부분에서 엔도르핀이 감지되었다. 이 부분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3번과 같은 감동적인 음악을 들었을 때도 활성화된다. ‘러너스 하이’는 인내에 따른 혜택이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저마다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몰입되어 자연의 흐름에 따라, 천재지변이 있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순간에 눈부시게 자기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 꽃들이 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금기와 같은 두 가지다. 다른 꽃들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을 그것들과 비교하는 일이다. 아니, 태생적으로 부러움과 비교는 그들의 삶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행복한 천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깊이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성찰을 통해 찾았다면, 그 일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전념하면 되지 않을까? 우리 교육은 언제부터인가 부러움과 비교에서 시작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러너스 하이’를 통한 자신만의 사명을 알고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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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신을 가만히 관조하며 내가 가야 할 미래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곳으로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러나 내가 그 거룩한 여정으로 떠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쌓이는 것이 있다. 내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나에게 겹겹이 달라붙는다. 이 괴물의 이름은 오만(傲慢)이다. 오만은 자신에게 유일한 최선의 삶을 구가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기원전 16세기, 그리스 남동쪽 에게해의 섬 테라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산 폭발이 발생했다. 수백m 화산재가 쌓이고 해일이 발생해 미노스 섬과 미케네 섬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명이 자취를 감췄다. 이때 생긴 섬이 휴양지로 유명한 산토리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생산해 정교한 해상무역망을 구축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 폭발로 하루아침에 상권이 무너지면서 그리스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 서서히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문명인 철기문화와 기마문화로 무장해 팔레스타인을 장악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들을 ‘펠레세트’라고 불렀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어원이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는 구약성서에 ‘블레셋’으로 번역됐다. 블레셋은 기원전 13세기 터키 지역의 히타이트 문명, 시리아 지역의 우가리트 문명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오늘날 이스라엘 해변에 다섯 도시를 구축해 거주했다. 이 혼란을 틈타 등장한 국가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있다. 다윗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우울증을 악기 연주로 덜어주던 악사로 시작했다. 그는 동시에 용감한 용병이었다. 당시 블레셋엔 무시무시한 장군이 있었다. 거인 장군 골리앗이다. 다윗은 골리앗과 일대일 대결에서 승리하며 일약 스타가 되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다윗은 왕이 된 후, 블레셋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12지파로 나뉘었던 이스라엘인들을 하나로 묶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그는 12지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미지의 땅인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해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일개 용병으로 시작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에게 어김없이 찾아온 괴물이 있다. 바로 오만이다. 이 오만은 그를 게으르게 만들었다.

얀 마시스의 '다비드와 바세바'(1562). 다비드(다윗)는 바세바의 나면인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죽게 하고 바세바와 결혼했다. 이교활한 결합으로 제혜의 왕 솔로몬이 탄생했다.


오만은 비극적 인간의 첫 단추다.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혜택이나 특권을 스스로 성취했다고 착각하는 마음이다. 그리스어로는 ‘휴브리스(hubris)’다. 휴브리스는 자신의 초심을 잃고 난 뒤, 반드시 따라오는 극도의 자만심이자 과도한 확신이다. 사람이 휴브리스라는 병에 걸리면, 곧 장님이 된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해야 할 현실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그리스어로 ‘아테’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장님성’이다. 자신 앞에 다가온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병이다.

다윗은 이제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다. 야전사령관으로 잔뼈가 굵은 다윗이 자신이 할 일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하 요압에게 전권을 맡긴다. 요압은 다윗을 대신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암몬과 모압과 전쟁을 치른다. 이 위임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윗은 깨닫지 못한다. 그는 예루살렘 궁전에서 지중해의 쾌적한 날씨를 홀로 빈둥빈둥 즐기고 있었다.

혁신가는 자신이 있어야 할 시간과 장소를 헤아려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이 모압의 수도 랍바를 포위하면서 사선에 처해 있는데도, 예루살렘 궁전 위에서 목욕하고 있는 한 아름다운 여인을 염탐하는 졸장부로 전락한다. 그녀는 자신의 부하 군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다. 다윗은 밧세바를 궁궐로 데려와 향락의 시간을 가진 후, 임신시킨다. 다윗은 우리야를 최전선에 배치해 전사하게 만든다. 다윗은 스스로를 비극으로 몰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

다윗을 지켜본 예언자 나단은 다윗에게 비유로 말한다. “한 동네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겐 딸처럼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오자, 부자는 가난한 자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 도축해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분개하여 말했다. “그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자 나단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바로 그 부자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왕이 되었지만,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망각해 오만한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키고 밧세바 사이에서 난 아들은 죽고 만다. 오만에 빠져 장님이 되고 나면 찾아오는 불행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불행을 ‘네메시스(nemesis)’라고 부른다. ‘네메시스’란 흔히 복수라고 번역하는데, 그 근본적인 의미는 ‘내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그 어떤 것을 받는 것’이다. 나는 내가 누리는 이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이미 오만-장님성-불행이라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미로에 이미 걸려든 것이다. 내가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근신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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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갓 뽑은 따끈한 에티오피아산 커피는 나를 잠에서 서서히 깨운다. 그러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는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이내 식는다. 사람은 늙기 마련이고 영원할 것 같은 저 하늘의 별들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장렬히 빛을 내뿜으며 사라질 것이다.


우주 안에 괴물 중 괴물이 하나 있다. ‘시간’이다. 이 괴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시간은 날아간 화살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쏜살처럼 다가오는 미래를 추호도 모르면서 무방비상태로 매 순간 진입한다. 나에게 남겨진 것, 아니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과거’라는 기억뿐이다.

이 ‘과거’라는 기억은 20년 전이나 20분 전이나 현재의 시점에서 ‘순간’이란 점이 경이롭다. 워싱턴 어빙의 소설 <립 반 윙클>에서 주인공 립 반 윙클은 아내의 잔소리가 싫어 ‘울프’라는 개와 뉴욕 근처에 있는 카트스킬산 속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갔다. 그때는 영국 왕 조지3세가 미국을 다스리던 시절이다. 그는 산속에서 밀주를 마시며 나무 막대기를 세워놓고 ‘론 볼즈’(볼링)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잠이 들고 만다. 한참 잔 후, 어느 날 아침 햇살에 잠을 깨고 보니, 울프는 없어지고 들고 왔던 장총이 녹슬고 자신의 턱에는 턱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마을로 내려와 평소에 가던 여관에 가니 못 보던 국기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미국 성조기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다. 그가 잠깐 자는 동안 조지 워싱턴이 혁명을 일으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그는 이제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한순간에 20년을 자버렸다. 20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분명한 것은 20년이 금방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이 만나는 지점에서 존재한다. 순간이란 봄의 약동으로 싹이 트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찰나(刹那)다. 봄이 약동하면 잎과 꽃망울은 모든 찰나에 과격하면서도 거칠게 변화한다. 이 찰나의 순간에 식물은 자신의 색깔과 자기 몸의 구조를 다채롭게 변화시킨다. 만일 성능이 강력한 현미경으로 나무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면, 그 안 섬유질이 매 순간 변화하고 팽창하고 줄어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_경향DB

그리고 만물은 자신의 운명에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시들어버린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찰나에 그 현상과 본질이 변한다. 이 인식의 순간을 영어로 ‘moment’라 한다. 이 단어도 정지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라틴어 ‘momentum’은 ‘움직임/ 움직이는 힘/ 변화’ 혹은 ‘순간’이라는 의미다. 움직임을 구성하는 한 동작 한 동작이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한순간에 저만치 가버린다.

‘눈 깜짝할 사이’는 시간적인 경험이며 눈을 뜨고 감는 그 사이에 본다는 행위를 통해 그 순간에 사물을 인식한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런 순간을 또 다른 눈인 카메라 렌즈로 포착한다. 그는 눈과 렌즈와 마음이 하나가 되는 신비한 합일의 점에서 자신도 모르게 셔터를 누른다. 그는 이 순간을 ‘결정적 순간’이라 부른다. 그는 이 작지만 혁명적인 카메라를 통해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에 개입해 파괴하고 정지시켜, 일상을 거룩한 정지, 영원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을 그리스어로 ‘크로노스(chronos)’라고 부르고, 신이 개입하는 결정적이며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 영원한 시간을 그리스어로 ‘카이로스(kairos)’라고 부른다. 그는 오랜 기간 수련을 거쳐 셔터를 누를 ‘카이로스’를 직관으로 감지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다가설 때마다, 자신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사진은 직관, 몰입, 평온, 그리고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교육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는 하찮은 순간이 영원한 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동굴의 비유’에서 극적으로 보여준다. 입구가 빛으로 열려져 있는 동굴 안 깊은 곳에 어려서부터 다리와 목이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뒤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꼭두각시를 들고 그림자를 동굴 벽에 비추었다. 족쇄에 묶여 한 곳만 일생 보아왔던 이들은 인위적인 물건들의 그림자를 실재하는 물건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다 한 사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 그림자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결정한다. 그는 자신이 매달려온 안전장치인 족쇄를 부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순간에’ 일어나자신이 일생 동안 보았던 동굴 벽에서 눈을 뗀다. 그는 시선을 빛이 있는 쪽으로 돌려 걸어가 빛을 보기 위해 눈을 높이 든다. 이 모든 행동은 낯설고 어렵고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처음 보는 태양빛은 너무 눈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동력을 부사(副詞)로 표현했다. 고대 그리스어로 ‘엑사이프네스(exaiphnes)’는 흔히 ‘갑자기, 한순간에’라고 번역된다. 이 순간은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인 순간’처럼 타성과 게으름을 일깨워, 고정되어 있는 나의 시선을 돌려 빛을 향해 걸어 나가게 만든다. 자기 변화의 기초는 바로 이 모멘텀,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걸어가는 수련이다. 당신은 이 순간을 흘려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렵지만 이 순간에 집중해 자신만의 빛을 찾기 시작하면 어떨까요?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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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걷는 이 발걸음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그 목적지를 향해 일직선상에 있는가? 이 길은 나의 숭고한 여정의 필수불가결한 단계인가? 나는 아침마다 내가 디디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 거룩한 과정이며 동시에 목적지이길 기도한다. 스승이란 인생의 길 위에서 나의 최선을 촉구하는 존재다. 스승은 인격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그 길을 이미 묵묵히 걷고 있는 도반(道伴)이자 선각자다.

서양에선 스승을 ‘멘토(mentor)’라고 부른다. ‘멘토’라는 영어 단어는 1750년경부터 문학 작품에 등장해 오늘날까지 ‘스승, 조언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멘토’는 인도유럽어권에서 ‘생각하다’라는 의미인 ‘만(man)’의 사역형인 ‘멘(men)’에 ‘~하는 사람’이란 뜻의 어미인 tor를 첨가한 것이다. ‘멘토’를 직역하자면,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멘토는 ‘자기 자신의 본연의 의무를 성찰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순간을 사는 인간이 주위의 기대나 체면 때문에 부화뇌동하기 쉬운데, 멘토는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고 촉구하는 존재다.

멘토 이야기는 서양사상의 바이블이자 최소 소설인 <오디세이아>에 나온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750년경 기원전 12세기에 일어난 트로이전쟁에 관한 오래된 노래를 기록했다. 그리스인들이 이전에 사용하던 문자들, 즉 미노스섬의 선형문자 A나 미케네섬의 선형문자 B가 음절문자 형태이기 때문에 이 노래들을 기록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문자를 누가 만들었는가는 아직 논란거리지만, 아마도 호메로스는 페니키아 상인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페니키아 문자를 수용하고, 페니키아 자음 중 몇 개를 모음기호로 전환시켜 고대 그리스 알파벳을 만들고, 400년 이상 구전으로 내려온 노래를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라는 책으로 남겼다.

<일리아스>는 트로이전쟁 이야기이며 <오디세이아>는 트로이전쟁 후 집으로 돌아오는 ‘귀향’에 관한 이야기다. 서양에서 <일리아스>는 시의 원형이 되었고 <오디세이아>는 소설의 시조가 되었다. 아니 이 두 권의 책은 서양문명을 낳은 어머니다. <오디세이아>에서 참전했던 영웅들은 귀향했지만 한 명은 예외였다. 오디세우스다. 그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기엔 그가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 그리고 자신의 왕국이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오디세이아’는 호메로스의 작품 명이며 동시에 ‘인간의 고단한 삶의 과정과 여정’을 뜻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1891년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외눈박이 괴물인 폴뤼페무스 눈을 상하게 만들어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귀향하는 항해가 모질게 되었다. 오귀기아라는 섬에선 그 섬의 여신인 칼립소가 오디세우스와 사랑에 빠져 그를 7년 동안 섬을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 고향 이타카에서는 오디세우스가 20년 동안 돌아오지 않자, 이타카와 주변 섬들의 영주들은 페넬로페와 결혼해 이타카의 왕이 되려고 궁궐에서 매일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며 지내고 있었다. 텔레마코스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출정하기 전 태어난 아들로 이제 21살이 된 청년이었다. 그의 이름 ‘텔레마코스’는 그리스어로 ‘전쟁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란 의미다. 그는 20년 동안 고아와 다름없이 지냈다.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이타카의 왕이 될 수 없고, 어머니 페넬로페가 다른 영주들의 아내가 될 위험에 빠져 자신은 왕자에서 하찮은 존재가 될 상황이었다. 자립을 해 본 적이 없는 텔레마코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미지 ‘경계’로 자신을 밀어내는 용기였다.

멘토는 원래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원정을 떠날 때, 아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한 친구였다. 아직도 유약한 텔레마코스는 더 이상 자신에게 처한 딜레마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로 결단한다. 그는 혼자서 파도가 넘실대는 해변으로 가 무시무시한 회색 파도에 손을 씻으며 의미심장하게 외친다. “아테네 여신이여,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당신은 어제도 우리 집에 방문하셔서 행방이 묘연한 나의 아버지의 귀향에 관한 소식을 알기 위해 나에게 배를 타고 잿빛 심연 바다 위로 항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오디세이아> 2.262-4)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여신 아테네가 아버지 친구인 늙은 멘토로 변신해 말한다. “텔레마코스! 너에게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고귀한 용기가 스며있다면, 너는 바보도 비겁한 자도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말을 어긴 적도, 자신의 일을 미완성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네가 그를 찾아 나선다면, 너의 여정은 성공할 것이다.” 그 후,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안개가 자욱하고 큰 파도가 넘실대는 아드리안 바다로 나가 영웅 네스토의 섬 퓔로스와 영웅 메넬라우스의 섬 스파르타로 항해를 떠난다.

이 이야기에서 텔레마코스의 스승은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오랜 친구 멘토나 그로 변장한 여신 아테네인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텔레마코스의 스승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멘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독수리의 눈으로 꿰뚫어보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가서 손을 씻는 그 순간에 서서히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특별한 존재다. 이제 텔레마코스는 늙은 아버지 친구 멘토의 말을 통해서도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구태의연함과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안주하는 사람에겐 멘토가 찾아오지 않는다. 흉흉한 바다에 몸을 실어 인생의 항해를 떠나는 순간 멘토가 찾아온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롭게 조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신이 바로 멘토다. 당신은 그런 멘토가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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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설지만 신나는 삶의 여정을 떠나기는 쉽지 않다. 과거는 나를 안정과 편안으로 유혹하는 달콤한 구속복이다. 이 옷을 벗어 던지기 위해선 불편한 미지의 세계로 자신을 진입시켜야 한다.

어제 있는 그 상태로부터 자신을 강제로 이탈시키는 행위를 ‘엑스터시(ecstasy)’라고 부른다.

‘엑스터시’는 보통 무당이 경험하는 입신의 경지를 이르거나 마약의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 원래 의미는 ‘자신의 과거나 사회가 부여한 수동적인 상태(state)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려는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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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유일한 길을 가려고 결심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이 결심을 단단하게 여며주고 상기시켜주는 효과적인 도우미가 있다. 육체적 운동이다. 나는 28년 전, 한 멘토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주문했다.

“매일 아침 조깅하십시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공부하십시오.”

나는 이 조언의 심오한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그를 믿고 매일 아침 뛰기 시작했다. 내가 당시 살던 동네를 한 바퀴 완주하는 데 40분 정도 걸렸다.

오늘만은 예외로 조깅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수천가지다. 어제 피곤해서, 오전에 꼭 넘겨야 할 신문 글이 있어서 혹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 정당하고 달콤한 유혹이 나를 혼미하게 만든다. 내가 운동복과 운동화를 착용하고 뛰기 시작하면서도 발길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런 아침에 조깅하는 사람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인가? 10분 정도 뛰면 벌써 헐떡이고 내 자신을 꾸짖는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가? 내가 미쳤는가?” 이런 불평을 하다보면 다시 10분이 지난다. 조깅과 관련된 구절이 하나 있다.

“당신이 30초를 달릴 수 있다면, 당신은 마라톤도 완주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나는 이 상투적인 구절을 싫어한다. 30초가 아니라 10분이나 지났는데, 나는 지옥문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20분 정도 지나면 숨이 차고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내 머리는 외친다. “나는 달리기를 싫어한다.” 불평하면서 10분 정도 지나면, 내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에 진입한다.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탈출한’ 이 30분경을 좋아한다. 엑스터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 후 10분은 순간처럼 지나가면서 천상의 선물이 몸에 스며든다. 온몸에 샘솟는 땀, 근육의 미세한 떨림, 가파른 심장의 두근거림, 거칠게 헐떡이는 숨소리, 그리고 땀이 흐르는 얼굴에 가만히 드러나는 미소다. 내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나는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일본에서 남자 아이를 위한 고이노보리에 만드는 잉어모양 천으로 된 깃발 _경향DB


일본에 하늘로 날아간 물고기 신화가 있다. 이 물고기를 ‘고이’라고 부른다. 고이는 ‘잉어’를 의미하는 일본어이며 연못이나 어항에서 볼 수 있는 주황색 물고기다. 한 조그만 잉어가 불가능한 도전을 시도하기로 결심한다. 모든 수고들 중 가장 숭고한 행위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한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 강물을 거슬러 헤엄쳐 ‘갈 때까지 가보는 힘겨운 노력’이다.

고이는 매 순간 집중하고 몰입해야 한다. 한눈을 팔다간 자신도 모르게 한참 떠내려가 바다 입구까지 밀려간다. 강물에 몸을 실어 내려가는 다른 물고기들은 고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시류에 어울려 살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극복할 수 없는 강물을 대적한다는 말인가! 고이는 이런 말들을 들으면 못 들은 체하지만, 사실은 금방이라도 다른 물고기들처럼 강물에 몸을 맡기고 싶다.

그러나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고 싶었다. 고이는 뾰쪽한 돌에 부딪혀 피가 나고 다른 포식어류들의 공격에 노출되지만 이 강물의 원천(源泉)으로의 외로운 여행을 감행한다.

고이가 강물에서 만나는 장애물들과 자신의 마음에 생기는 부정적인 생각조차 자신을 매 순간 단련시켜 강하게 만든다. 강물의 상류로 가면 갈수록 물길이 거세지고 지세는 가파르게 변한다. 고이의 체력이 강해진 만큼, 고이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도 배 이상으로 어려워진다. 고이의 체력이 거의 고갈되었을 때, 고이를 완벽하게 좌절시킬 만한 장애물이 등장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90도로 세워진 폭포다. 하늘에서 쉬지 않고 퍼붓는 폭포수는 고이 몸을 거의 산산조각으로 찢을 수 있다. 고이는 망연자실한다. 도저히 거슬러 헤엄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이는 불가능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내가 비록 물고기지만, 물고기이기를 포기하겠다. 지느러미와 꼬리를 날개로 만들어 폭포 위로 날아가면 되지 않는가!” 고이의 자기믿음이 그 순간에 그를 한 마리 용으로 변모시켰다.

고이는 자신을 가차없이 떠내려 버리는 강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용이 되어 하늘을 훨훨 나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발밑에 아련하게 사라지는 폭포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당신은 시류에 떠내려가 피라미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신화를 찾아 용이 될 것인가?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매 순간 자기확신과 그 확신을 지켜내는 인내다.

자신의 신화를 구축하고 그 신화를 찾아 인내하는 자가 성공하는 자다. 내가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 어떤 것이 되도록, 지속적으로 유혹하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이 성공이 아닐까.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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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두 눈을 가지고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인간은 응시의 대상인 ‘밖’을 파편적이며 왜곡된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 시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불어나 자신을 지배하는 괴물이 된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괴물의 하수인이 되어 세상에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입힌다. 이 순간 응시의 대상은 ‘있는 그대로의 나’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덤덤하게 보는 것’이다. 그 대상을 자신의 구태의연함으로 보지 않고 생경하게 바라보기를 연습해야 한다. 일상과 구별된 나만의 시공간에서 나를 멀찌감치에서 관찰하기를 수련하다 보면, 그런 나를 적나라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런 행위가 회심(回心)이다.

내 안에는 ‘과거의 나’ 그리고 ‘과거의 나’가 고착화되고 있는 ‘현재의 나’, 혹은 ‘과거의 나’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미래의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 오래된 나, 원래의 나를 ‘첫번째 나’라고 부르자. ‘첫번째 나’는 흘러가버린 과거에 안주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지금 이 순간의 삶에까지 영향을 준다. 자기혁명(自己革命)은 이러한 나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그것으로부터 결별하려는 의지다. 우리는 대부분 매일 매일 버려야 할 오래된 자아를 벗어버리기보다는, 그것을 붙잡고 강화하려 한다. 배움이란 나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하려는 과정이다. 자아를 치장하고 강화하는 교육은 재미없는 세상을 구축할 뿐이다.

‘첫번째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심히 관찰하고 그 문제점을 절실히 느끼고 파괴하고자 하는 ‘또 다른 나’ ‘두 번째 나’가 필요하다. 이런 ‘또 다른 나’를 라틴어로 ‘알터 에고(alter ego)’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활동한 사상가인 키케로가 처음 사용했다. 그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시기에 등장한 정치철학자이며 문필가로 로마문명과 유럽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키케로는 흉금을 터놓고 무엇이든지 토로할 수 있는 친구 ‘앗티쿠스’가 있었다. 키케로는 그를 ‘알터 에고’, ‘또 다른 나’라고 불렀다.‘알터 에고’는 친구를 넘어서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의미하기도 한다. 문학작품과 심리학에서 차용되어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용어가 되었다. 문학작품에선 저자의 심리와 행동을 의도적으로 표현한 인물이다. 연극무대 위에선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의 심리와 몸짓을 연구하여 완벽하게 구현해야 할 대상이다. 배우는 부단히 연습하여 ‘또 다른 나’가 되어야 한다. 배우들은 ‘또 다른 나’에 몰입하기 위해 ‘가면’을 썼다. 자신의 몸짓과 목소리만으로 그 배역을 충분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 가면을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고, 후에 ‘사람’이란 의미의 영어단어 ‘person’이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는 ‘또 다른 나’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는 ‘첫번째 나’를 파괴시키는 괴물이다. 한 인물 안에서 선과 악이 끊임없이 투쟁한다. 하이드는 지킬 박사 안에 숨겨져 있는, 문명화된 세계를 경험하지 않아 어쩔 줄 모르는 ‘정신이상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만화로 시작하여 후에 영화로 만들어진 <슈퍼맨>에서 ‘또 다른 나’는 긍정적이다. 신문사 기자 클락 켄트는 진정한 자신을 감춘다. 그의 원래 이름은 ‘칼엘(Kal-El)’이다. ‘칼엘’은 고대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신의 목소리’다. 칼엘의 부모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크립톤’(비밀스러운 땅이란 의미)이란 은하계가 파괴되기 직전, 칼엘을 살리기 위해 그를 바구니에 넣고 은하계를 연결하는 공간인 상상의 나일강에 띄워 보낸다. 성서에 등장하는 모세의 탄생 이야기와 유사하다. 칼엘이 도착한 장소는 미국 캔자스주의 한 농가다. 그는 이 후미진 곳에서 평범한 소년으로 성장하지만, 그 흔한 햇빛의 세례를 받으며, 자신이 평범한 클락 켄트가 아니라 한 걸음에 높은 빌딩을 건너뛸 수 있는 ‘또 다른 나’ 슈퍼맨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햇빛은 누구에게나 내려오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이 거주한 장소와 시간을 넘어서는 영웅은 슈퍼맨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항상 관조하고 넘어설 때, 영웅이다.

내 삶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미국이란 미지의 땅에서 만난 인생 멘토와의 만남이었다. 그를 찾아가 물었다.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는 내게 덤덤하게 말했다. “Show yourself!” 번역하자면 “당신 자신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이다. 그가 원한 나의 모습은 그 앞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서 있는 ‘과거의 아’가 아니라, 나를 넘어선 ‘또 다른 나’였다. 그의 목소리는 내 영혼을 울리는 신의 소리와 같았다.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를 찾는 수행을 시작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또 다른 나’를 찾는 시간만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음력설이 진짜 새로운 해의 시작이다. 2015년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오래된 나를 과감히 버리고 ‘또 다른 나’를 찾는 여정을 새롭게 떠나고 싶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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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몫’이란 단어는 신비하다. 내게 맡겨진 절체절명의 임무이자 나만이 할 수 있고, 나의 개성이 마음껏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글자 모양으로 보아, 한글인 것 같고 추측하자면 ‘목숨’을 줄여서 간단하게 표현한 말인 것 같다. ‘몫’이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일생을 통해 추적해보고, 만일 그것을 발견한다면 정말 행복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과업이 아닐까? 나의 몫은 무엇인가? 내게 맡겨진 고유한 몫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유일한 몫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교육을 받고 자신의 힘으로 사고할 능력이 생기면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할 만한 일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배움의 길에 들어선다. 학교에선 우리하곤 상관없는 남 이야기만을 학습하기만 한다. 오늘날 미국을 정신적으로 독립시킨 19세기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무식이며 흉내 내는 것은 자살행위다”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인류는 이 몫을 추구하고 소중하게 여김으로써 문명을 구축했다. 기원전 3100년 아프리카 북동부 나일강을 중심으로 인류 최초의 문명이 등장했다. 이집트 문명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세상의 삶은 잠시라고 생각했다. 특히 파라오들은 죽은 후에 영원히 거주할 안식처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가정하는 인간의 상상력이 문명을 탄생시켰다. 기원전 2650년경 이집트 고왕국시대 파라오인 쿠푸는 자신이 영원히 안식할 피라미드 건설을 주문했다.

피라미드 건축의 총괄 책임자는 임호텝이다. 그는 재상이면서 수학자였다. 임호텝은 이집트 전역에서 하얀 석회암을 나일강을 이용해 배에 싣고 와 피라미드를 지었다. 오늘날 이집트 기자에 우뚝 선 세 개의 피라미드 중 중간에 있는 가장 높은 피라미드가 임호텝이 쿠푸왕을 위해 지은 것이다. 이 피라미드의 원래 높이는 147m, 정사각형 밑단은 230m이고 흰색 석회암 230만개가 사용됐다. 지금은 세월에 의해 빛이 바랬지만, 당시에는 강렬한 햇빛에 눈부시게 빛나는 거대한 보석과 같은 피라미드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떻게 이 피라미드는 4600년이 지난 지금도 원래 그 모습대로 서있는 것일까? 피라미드 앞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 스핑크스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인간을 응시하고 있다. 기원전 3200년경 처음으로 문자와 도시를 만들어 문명을 구축한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상류에 거주하던 누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건물을 지을 때 그 중심에 타조 깃털을 놓고 의례를 행하곤 했다. 이집트어 성각문자에서 타조 깃털 모양을 ‘마아트’라고 발음한다. ‘마아트’란 흔히 ‘정의, 진리, 조화, 질서, 법’ 등으로 번역된다. 유교의 도(道)나 힌두교의 르타(rta)처럼 우주 삼라만상의 운행 원칙과 같은 철학적인 개념이다.

임호텝은 울퉁불퉁한 모래사장 위에 하얀색 석회암을 230만개 올릴 셈이다. 이 바위들이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건재하게 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 있다. 바로 타조 깃털인 ‘마아트’를 그 무게 중심을 찾아 정확하고도 단호하게 놓는 의례다. ‘마아트’란 정사각형의 중심이 아니라 주어진 지형에서 가장 적당한 최적의 장소다. 임호텝이 발견한 그 유일한 장소는 230만개 바위들을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 역동적인 오메가 포인트다.

마아트는 피라미드 건축의 핵심일 뿐 아니라 인간 삶의 궁극적인 비밀이다.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는 사람이 죽은 후 영원한 사후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묘사한 책이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 파라오 세티 1세의 가축들을 관리하던 고관 휴네페르는 자신이 죽은 후 지하세계에 내려가 받는 심판과정을 정교하게 그렸다. 그는 자칼 머리를 한 시체 방부처리를 관장하는 신인 아누비스에 이끌려 심판대로 간다. 심판대의 오른편에선 문자의 신인 토트가 휴네페르가 살아생전에 한 생각, 말, 행동을 기록한 생명 책을 들고 읽고 있다. 토트신 밑에는 휴네페르를 잡아 먹으려는 괴물 암무트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가장 중요한 장면은 휴네페르와 토트신 사이에 있는 천칭이다. 천칭의 오른쪽 그릇에는 ‘마아트’가 올려져 있고 왼쪽 그릇에는 휴네페르의 심장이 올려져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에 그 사람의 모든 행위가 기록돼 있다고 생각했다. ‘마아트’와 ‘심장’이 저울질을 할 동안 휴네페르는 특별한 고백을 암송해야 한다. 이 고백은 42가지 부정 고백으로 “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나는 폭력으로 강도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훔치지 않았습니다” 등이다. 자신이 생전에 해야 할 운명적인 일을 찾으려면 우선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부차적인 일을 잘라내야 한다. 42가지를 암송하는 동안 ‘마아트’와 ‘심장’이 평형을 이뤄야 한다.

신이 휴네페르에게 물어본 내용은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느냐,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느냐, 명예를 가졌느냐와 같은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신이 꼭 행해야 할 마아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저절로 목숨을 바칠 정도로 몰입했는가?” ‘마아트’는 나에게 유일무이한 나의 몫이다. 당신의 마아트는 무엇입니까?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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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끓인 커피는 식기 마련이고 피라미드도 언젠가 무너질 것이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저 하늘의 별들도 수명이 다하면 장렬히 빛을 내뿜으며 사라질 것이다. 과학자들은 ‘지구’라는 별도 50억년 후엔 멈추거나 파괴될 것이라고 추측한다. 우주 안에 ‘시간’이라는 괴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시간은 활에서 당겨져 날아가고 있는 화살처럼 돌이킬 수가 없다. 과거로 돌아갈 줄 모르고 미래(未來)라고 부르는 미지의 경계를 향해 만물을 강제로 진입시킨다.

인간에게 남겨진 것은 ‘과거’라는 기억뿐이다. 이 ‘과거’라는 기억은 10년 전이나 하루 전이나, 혹은 이 글을 읽기 시작한 1분 전도 지금(至今)이라고 불리는 한순간(瞬間)일 뿐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이 만나는 지점에서 존재한다. 순간이란 봄의 약동으로 싹이 트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찰나(刹那)다. 흔히들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을 한다. 찰나는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하며,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찰나마다 생겼다 사라진다고 가르친다.

우주는 137억년 전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빅뱅이라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10만분의 1초의 찰나에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로부터 터져 해일처럼 사방에 퍼지더니 물질, 에너지, 공간과 시간으로 구성된 우주가 생성되었다. 빅뱅은 137억년 동안 수천억개 이상의 은하수를 우주에 수놓으며 계속 팽창한다.

왜 빅뱅이 일어났을까? 인간은 우주가 생성된 맨 처음을 저마다 상상해왔다. 여기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온 한 전쟁 피란민이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 지식인이자 사제였다. 그에게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이 건축했다는 예루살렘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신전이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천상의 장소라는 의미로 ‘시온’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농업의 순환에 맞추어 절기를 만들어 지킨다. 신은 1년 단위로 삼라만상을 열친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순식간에 지고 말았다.


기원전 6세기 어느 날,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침공한 뒤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유대 지식인은 깨달았다. 신은 장소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바빌론이라는 낯선 땅으로 잡혀와 하염없이 흘러가는 유프라테스 강을 한참 보았다. 매일 밤 어김없이 떠올라 검푸른 밤하늘을 수놓는 압도적이면서도 신비한 별들과 달에 넋을 잃었다. 이 천체들은 계절에 따라 가장 적절한 시간에 어김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우주의 처음을 상상했다. 그의 이야기는 성서의 첫 번째 책 ‘창세기’ 1장에 등장한다. “태초에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라고 흔히 번역한다. 이 첫 구절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처음이란 순간을 통해 신이 혼돈 상태의 우주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쳐내기 시작했다”라고. 혼돈에서 질서로,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질적인 변화는 ‘처음’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통해 가능하다. ‘처음’이란 이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상태로 진입하기 위한 경계의 찰나다. 이전에 습관적으로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과는 다른 충격적이면서도 압도적이어서 전율을 느끼게 하는 문지방이다. ‘처음’은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하는 137억년 전의 빅뱅과 같은 순간이다. ‘처음’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등장한다. 새로운 경험은 한순간의 경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37억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아직도 팽창하듯이 매순간 처음을 유지해야 한다.

처음이란 무엇인가? 작년과 다른 올해, 어제와 다른 오늘을 어떻게 내가 잡을 것인가? ‘창조하다’라는 단어를 피상적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다. 서양인들은 ‘창조하다’를 ‘점점 불어나다, 자라다’라는 의미를 지닌 ker-이란 어근에서 찾았다. 영어 ‘크리에이트(create)’, 라틴어 ‘크레아레(creare)’, 고전 그리스어 ‘크레초(kritzo)’ 모두 이 어근에서 파생했다. ‘창세기’ 1장을 저술한 유대학자는 ‘창조하다’를 ‘바라(bara)’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한다. ‘바라’라는 동사의 피상적이며 거친 의미는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이다. ‘창조하다’라는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히 제거하여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든다.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다.

그 유대 지식인은 양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선 일상에서 벗어나 그 일상을 새롭게 관조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일년 단위가 아니라 일주일 단위로, 일상으로부터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시키는 행위를 ‘안식일’이라고 부른다. 영어로 안식일을 뜻하는 ‘사바스(sabbath)’는 원래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본래 의미는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다”이다.

2016년이 벌써 7일이나 지났다. 하던 일을 멈추고 처음을 경험해야겠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이 내가 목숨을 바칠 만한 일인가? 아니라면 과감히 잘라내야겠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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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오전, 서울 구로구 천왕동에 위치한 서울남부교도소에선 특별한 수업이 진행된다. 서울대가 2013년부터 매년 두 번씩 10번에 걸쳐 40여명의 수용자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을 해왔다. 이 과정을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변화된 사람은 나다.

내가 사는 경기도 가평에서 이곳에 가려면 3시간 정도 걸린다. 나는 갈 때마다, 천상의 예루살렘에 가는 순례자처럼 마음이 설렌다. 수용자들은 10주간의 수업을 이수한 후, 선정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수료식에서 발표한다. 이번 학기엔 19세기 미국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 <자립>을 읽었다.

몇 주 전 거행한 수료식에서 독후감 발표가 있었다. 한 특별한 분은 139쪽 분량의 독후감을 제출했다. 수인복(囚人服)을 입은 40여명이 앉아 있고, 대표로 발표한 사람은 앞에 나와서 덤덤하게 말했다.

“어느 날 새벽, 교도소 창살에 걸린 샛별을 보았습니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그 별을 두 눈으로 처음 확인했습니다.” 그러곤 말을 잇지 못해 우리 모두 숙연해졌다. 그가 이제야 그 별을 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별은 누구나 아무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별이 아니다. 자신이라는 심연으로 감히 내려가 덤덤하게 자신을 관조할 때, 슬그머니 얼굴을 내미는 마음의 천사다. 자신을 거룩한 공간에 가둘 때, 자신 스스로 그런 공간을 마련해 수인(囚人)이 될 때, 자기 자신이라는 별을 발견할 수 있다.


밤같은 冬至아침 동짓날인 22일 서울지방에 짙은구름이 끼어상오8시가 넘어서도 어둠이 깔려있었다._꼉향DB


며칠 전 동지(冬至)가 지나갔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짧아진 날을 동지라 부른다. 태양은 하늘에 낮게 내려와 일출과 일몰 간격이 9시간 정도로 줄어든다. 이날만 지나면 밤이 짧아지고 낮은 길어질 것이다. 20만년 전에 등장한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에게 동지는 추위와 배고픔을 동반한 죽음 그 자체였다. 밤이 영원히 지속되고 태양은 다시 떠오르지 않고 어딘가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동지를 영어로 ‘솔스티스(solstice)’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태양(sol)이 서 있는 상태(stice)’다. 인류는 이날을 특별한 날로 정하고 정교한 의례를 행했다. 어둠, 추위,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동지가 물러나면, 빛, 따스함, 그리고 생명이 약동하기 때문이다.

동지는 절망과 희망이 현묘하게 섞인 죽음과 삶을 가르는 문지방이다. 호모사피엔스들은 이날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정교한 의례를 행했다. 그 의례가 ‘빛의 축제’다.

‘빛의 축제’는 특히 고대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꽃을 피웠다. 고대 페르시아에는 ‘미트라 종교’라는 것이 있었다. 온전한 삶을 산 사람들의 영혼은 마지막에 ‘친바트’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이 다리는 진실한 삶을 산 사람들에겐 점점 넓어져 찬란한 파라다이스로 이어지지만, 눈치와 체면으로 인생을 연명한 사람들에겐 점점 좁아져 어두운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이 다리 위에는 세 명의 재판관이 있다.

‘라슈누’, ‘스라오샤’, 그리고 ‘미트라’다. ‘라슈누’는 보통 ‘정의’라고 해석되지만, 본래 의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숙고를 통해 알고 거침없이 가는 지름길’이다. ‘스라오샤’도 ‘복종’이라고 흔히 번역되지만, ‘운명적인 삶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행위’다. 마지막으로 ‘미트라’는 ‘계약’이다. ‘미트라’의 깊은 의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구속할 정도로 절대적인 원칙’이다.

우리는 동지에 바로 이 ‘친바트’ 다리를 건너야 한다. 어둠과 추위가 영원할 것 같은 심연의 순간에 미트라 신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일 년 동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달아 알고 그 운명적인 삶을 자발적으로 살아왔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자기만의 삶의 문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고대 페르시아 종교에서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사제를 ‘마기(Magi)’라고 불렀다. 이들은 천체의 관찰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 바로 12월22일 동짓날이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복음서 중 <마태복음>에서 ‘마기’들이 등장한다. ‘마기’를 한국어로는 ‘동방박사’로 번역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탄생을 감지한 유일한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사제인 마기라고 말한다. 당시 유대인들도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 메시아를 자신들의 관습대로 예루살렘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다고 믿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는 예상과는 달리 베들레헴이라는 조그만 동네의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메시아는 우리가 예상하는 장소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 메시아를 알아보는 자도, 유대인들이 아니라, 전혀 상관이 없는 ‘낯선 자’인 페르시아 사제 마기다. 동방박사는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서울남부교도소의 한 수인처럼 하늘에서 항상 발견되길 바라는 샛별을 확인한 사람이다. 그 별은 밤이 가장 깊은 밤,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 안에서 심오하게 몰입할 때, 슬그머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의 별이다.

우리는 그 수인과 동방박사처럼 동짓날 새벽별을 볼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를 거룩한 경계 안에 가둘 자신이 있는가? 아니면 발 앞에 떨어진 먹잇감을 찾아 헤매거나 주위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고개를 들어 별을 본 적이 없는가? 우리가 우리에게 유일하고 독창적인 공간에 스스로 수인이 되어 과거의 자신을 살해하고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난다면, 하늘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가장 숭고한 별을 우리에게 선물하지 않을까?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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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른 아침에 호숫가로 산책을 시작했다. 쌀쌀한 날씨지만 불편함을 감수할 만한 즐거운 발걸음이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며 잔잔하게 요동치는 물결이 조용히 나를 부른다. 이 호수는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보이는 웅장한 천상의 거울이다. 마치 진귀한 남청색 비단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호수가 하늘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나는 가끔 그 거울 위에서 유영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이 호수는 언젠가부터 내 안에 숨어있던 영적인 보물을 발굴하여 조금씩 보여준다. 전통적인 철학이나 종교의 말들에선 찾을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내 마음속에 숨겨진 이런 신의 선물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일상이 강요하는 산만함과 진부함으로부터 나를 매일 아침 구원한다.

이 호수는 항상 내 곁에 있었는데, 내게 영감의 원천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그 호수를 ‘그저’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이 한 사람에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지만 다른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피카소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한 가지 연습을 의도적으로 시켰다. 비둘기 다리를 하루 종일 그리라는 주문이었다. 그 후 피카소는 비둘기 다리만 거의 일 년 동안 그리는 지겨운 시간을 보냈다. 이 인내의 시간이 피카소를 변화시켰다. 그는 이제 비둘기 다리를 수십 가지로 다르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보고 또 보는 것이 위대한 예술가들의 특징이다. 그런 관찰의 훈련을 통해 비둘기 다리가 위대한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반복과 인내는 천재의 어머니다.

이러한 관찰의 훈련을 ‘관조(觀照)’라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인간 삶의 최선이라고 말한다. 그리스어로 ‘쎄오리아’라고 부르는데 ‘이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theory는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 ‘이론’이란 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인내하며 볼 때 슬그머니 자신의 속 모습을 드러내는 그 어떤 것이다. 그리스문명과 서양문명의 기반은 비극경연이나 올림픽경기다. 여기에는 목적이 다른 세 부류 사람들이 있었다. 선수들이나 배우들은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참여하고, 경기와 연극을 주관하고 사람들은 경제적 이윤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류는 ‘관객(觀客)’이다. 그는 자발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경기나 연극을 자유롭게 ‘관조’한다. 그는 기꺼이 이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몰입한다.

관객이 관조하는 순간에 신기한 일을 경험한다. 자기 스스로가 경기에 참여한 운동선수와 배우가 된다. 관객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선 배우도 몰입한다. 배우는 관객과 자신의 몰입을 돕기 위해 얼굴을 한 물건으로 가린다. 이 물건을 ‘가면’이라고 부른다. 가면을 라틴어로 ‘페르소나’라고 부르며 인간이란 영어단어 person이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 배우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몸짓과 목소리만으로 극중 인물을 표현한다. 배우가 무아 상태에 진입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관객들도 한순간에 극중 배우가 되어, 배우의 희로애락을 동시에 느낀다. 결국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비극적인 상황에서 헤매고 있는 자기 자신들을 관조하고 있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 나 자신을 제3의 눈으로 가만히 보는 행위가 관조다.

우리에게 남겨진 최초의 비극은 기원전 472년에 첫 상연된 <페르시아인들>이다.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는 신화적인 내용이 아닌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었다. 기원전 480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쳐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기적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을 살라미스 해협에서 격퇴하였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이집트부터 인디아까지 23개 나라를 점령한 인류 최초의 세계제국이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재정적으로 후원한 인물을 ‘코레고스’라 불렀다. 코레고스는 무대장치 비용과 배우들의 월급 등 연극제작과 공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후원하는 사람이다. <페르시아인들>의 코레고스는 페리클레스다. 23살 페리클레스는 깊이 묵상했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조그만 도시가 아니라 그리스 문명과 더 나아가 세계문명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경쟁했던 디오니소스 극장._경향DB


페리클레스와 아이스퀼로스는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은 아테네 시민 한 명 한 명의 자주적이면서 자발적인 관조 수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기원전 472년 봄 아테네 시민들이 원형극장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살라미스 전쟁의 참전용사들이었다. 이들은 살라미스 전쟁 때 사용하던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들고 비장하게 앉았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감동적인 행렬이 있었다. 전사자들의 유족들이 죽은 자들의 투구와 방패를 들고 극장으로 들어와 관람석 맨 앞에 자리 잡았다.

관객들은 연극을 통해 자신들의 위대함을 확인하고 승리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스 최초의 비극인 <페르시아인들>에는 그리스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진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왕, 그의 어머니 아토사, 그리고 유령으로 등장하는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뿐이다. 아토사는 크세르크세스에게 페르시아 멸망의 이유를 ‘자만심’이라고 말한다. ‘자만심’은 자신을 깊이 되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옳다고 착각하여 행동하는 성급함이다. 자신을 깊이 보는 관조적인 삶을 살지 못하여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크세르크세스는 절규하며 울부짖는다.

아테네 관객들은 크세르크세스가 자신의 일가친척을 죽인 원수이지만, 무대에선 크세르크세스를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심지어 원수의 마음까지 헤아리게 되었다. 앞에서 조용히 앉아 연극을 관람하던 페리클레스는 조용히 자신에게 속삭인다. ‘이것이 그리스다.’ 관조를 집단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엔터테인먼트라고 한다. 그는 감동적이며 지적인 활동을 통해 아테네를 야만에서 문명으로 변화시켜 찬란한 서양문명의 어머니로 만들었다. 당신은 원수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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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마트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안에 인류가 지금까지 축적해온 모든 정보가 담겨져 있다.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으로 동서고금의 지식과 석학들의 지혜를 한순간에 살펴볼 수가 있다. 스마트 시대에 ‘깨어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잡다한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임무를 알아가는 여정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도 탐구대상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식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공부란 자기 자신의 심연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귀를 기울여 듣는 행위다. 우리의 귀는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듣고 그 욕망의 노예가 되어 기계적으로 살기 십상이다. 그런 자신을 자신만의 공간에서 응시하면 그 안에서 미세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수련을 통해 자신이 설탕 조각 하나를 열심히 쫓아가는 개미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대 이스라엘에 엘리야라는 예언자가 있었다. 당시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은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유능한 왕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동편에 위치한 아람의 나라를 정복해 영토를 확장하고 해상강국인 페니키아 출신 아내인 이세벨과 결혼하여 지중해 상권을 장악했다.

겉으로 보기엔 나라가 부유해진 것 같으나, 실제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었다. 당시 대부분 지식인들은 아합과 이세벨이 추진하는 배금주의의 노예가 되어 불의한 현상을 유지하는 선봉이 되었다.

이때 등장한 예언자가 엘리야다. 엘리야는 배금주의의 정신적이며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950명의 예언자들과 대결한다. 성서에서는 초자연적인 표현을 빌려 엘리아와 이들의 대결을 묘사한다. 그 안에 숨겨진 핵심은 950명의 부화뇌동하는 지식인들과 한 명의 지식인의 영적인 대결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 각자가 자신 마음속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보화는 남들의 기준이나 욕망을 좇아가는 집단적인 배금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자신만의 위대한 그 어떤 것을 발굴하라고 촉구한다. 이 촉구를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회개’다.

회개(悔改)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틀과 규율을 어겨서 그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아니다. 로마제국은 기원후 4세기말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만들어 이스라엘에서 시작한 예수운동을 로마종교로 만들려 시도하였다. 그들은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회개하라!’라는 예수의 명령을 ‘아기테 파이니텐티암(agite paenitentiam)’ 즉 ‘고해성사 하라’라고 아전인수 격으로 번역하였다. ‘회개하라’의 원래 의미는 ‘마음을 바꿔라’ 혹은 ‘당신 안에 숨어 있는 원래 마음을 발굴하라!’이다.


도봉구에 거주하던 함석헌 선생_경향DB


엘리야의 주장은 아합과 이세벨의 미움을 샀고, 이제 엘리야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밤낮 사십 일 동안 걸어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불모의 땅으로 들어간다. 그는 화산 분출로 이루어진 높다란 산에서 동굴을 발견해 그 안에서 잠을 청한다. 나름대로 일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했지만, 돌아온 것은 왕으로부터 살해 위협뿐이었다.

엘리야는 자신의 삶을 경계와 심연의 장소인 동굴에서 바라보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엘리야는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에 누워 있는 자신을 관찰한다. 그 순간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분명한 소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할 때, 서서히 들리기 시작하는 ‘내면의 소리’다.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수학으로 풀기 오래전에 들었던 영적인 소리와 유사한 소리가 아닐까?

엘리야는 이 마음 소리를 듣기 시작하자 다시 불평한다. “내가 일생을 ‘올바르게’ 살았는데…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그러자 그 마음 소리가 말한다. “나는 네가 찾는 신이다. 지금 네 앞에 내 모습을 드러내겠다. 산 위에 서서 나를 찾아보아라!”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 산을 쪼개고 지진을 일으키고 화산이 분출하여 큰 용암이 터졌으나 그 안에 신은 없었다. 그러나 불이 지나간 후에 ‘섬세한 침묵의 소리’가 들렸다. 엘리야는 바로 그 순간에 신이 바로 이 ‘섬세한 침묵의 소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이 경계의 심연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숨겨진 위대한 자신의 소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웅이 된 것이다.

‘섬세한 침묵의 소리’는 형용모순이다. 이 문구를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콜 더마마 닥까’다. ‘콜’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소리인데, 그 ‘소리’를 수식하는 형용사 ‘더마마’는 침묵이란 의미다. 엘리야는 ‘침묵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소리’를 수식하는 다른 형용사 ‘닥까’는 ‘섬세한, 정교한, 몰입을 통해서만 가능한’이란 의미다. 엘리야가 만난 신은 이것이다.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을 통해서 들은 자신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 신이 이제 자신의 거주 장소인 성소를 인간의 깊은 마음으로 이주한 것이다.

함석헌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세상의 냄새가 들어오지 않는. 은밀한 골방을 가졌는가? 그대 맘의 대문 은밀히 닫고, 세상 소리와 냄새 다 끊어 버린 후, 맑은 등잔 하나 가만히 밝혀 놓으면, 극진하신 임의 꿈같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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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의례가 있다. 골방에 들어가 가운데 자리 잡고 눈을 감고 반가좌를 틀고 앉는다. 그날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집중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상념으로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집중한다는 의미는 내 자신을 새로운 시점에서 가만히 들여다본다는 의미다. 내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쌓여 편견과 고집이 되어버린 내 에고를 벗겨야 한다.

이 무식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제와 똑같은 과거의 나, 죽은 나로 똑같은 삶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가보지 않은 내 마음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 바로 그날 해야 할 바를 깨닫게 된다. 이 심연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나만의 심연이다. 나는 이 임무를 대담하고 간결하며 거침없이 완수할 것이다. 사실 그 일을 마치지 않아도 좋다. 내가 그 과업을 노력하는 순간에 나는 이미 완수했기 때문이다.

이 심연의 존재를 알고 운명적인 여정을 시도하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인류는 기원전 1만년경 별들의 운행만큼 심오한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중동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처음으로 보리와 밀이 시절을 쫓아 곡식이 되어 자신들의 양식이 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던 인류의 조상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생활하기 시작한다. 봄에 파종하고 여름에 김을 매고 가을엔 추수한다. 그리고 겨울엔 자기가 사는 지역의 특산품들, 예를 들어 옷감이나 공예품을 만들어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중동지방에서 장거리 여행을 하며 저녁엔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과 달을 보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곤 했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당시 사막에서 장거리 대상 무역을 하던 사람들은 한 음유시인이 노래한 죽음을 극복한 한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름은 ‘길가메시’다. 인류 최초의 도시인 우룩(오늘날 이라크 남부도시 와르카)을 건설한 왕이다. ‘길가메시’라는 수메르어 이름의 의미는 “노인이 청년이 되었다”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신화로 기원전 2300년부터 그에 관한 여러 노래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더니 기원전 14세기경 한 사제이자 시인에 의해 3600행 정도의 노래로 고정되어 토판문서에 기록되었다. 이 시인의 이름은 ‘신-레케-우닌니’다. 그는 바빌로니아 사람이 아니다. 기원전 15세기경 바빌로니아를 침공하여 다스린 카사이트인이다. 우리는 아직 카사이트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인종인지 알지 못한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간의 두 가지 욕망을 다룬다. 하나는 명성, 권력 그리고 부에 대한 추구와 다른 하나는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영생에 대한 추구다. 서사시의 전반부는 신들에게 도전하여 우주 질서를 혼돈에 빠뜨린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인 길가메시는 자신의 친구이자 ‘제2의 자아’인 엔키두와 함께 신에게 도전한다. 이들은 신들의 거주지를 짓는 데 사용하는 백향목을 지키는 괴물 후와와를 살해하고, 전쟁의 여신인 이슈타르를 욕보이고, 하늘의 황소인 구갈라나를 살해한다. 길가메시는 신들이 가진 명성과 권력을 가진 듯 보였다.

그러나 신들은 길가메시의 엔키두를 병들어 죽게 한다. 길가메시는 이제 자신이 신들처럼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지하세계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는 우트나피시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영생의 비밀을 듣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선다. 그는 우트나피시팀을 만나기 위해서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건너 자기 자신이 죽어야 한다. 길가메시는 영생을 찾기 위해 자신이 죽기로 결심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로 여행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우트나피시팀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놀란다. 우트나피시팀이 자신과 너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영생을 찾아 목숨을 건 이 숭고한 여행에서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시인 신-레케-우닌니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한 에피소드를 첨가한다. 우트나피시팀은 길가메시에게 불로초(不老草)가 있는 장소를 알려준다. 페르시아만의 가장 깊은 장소에서 자라는 바다 식물이다. 길가메시는 진주를 캐내는 잠수부처럼 다리에 돌을 동여매고 누구도 여행하지 못한 바다의 멧부리, 심연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불로초를 따온다. 길가메시는 이제 자신이 왕으로 치리하는 우룩으로 돌아가 적당한 시간에 이 영생의 식물을 먹을 것이다. 우룩으로 가는 길은 더웠다. 그는 옷과 불로초를 놔두고 연못으로 들어가 목욕을 한다. 그때 어디에선가 뱀이 나와 불로초를 먹고 자신의 껍질만 남겨둔 채 사라져버렸다. 이 순간은 불멸을 찾아 나선 길가메시 여정의 끝이지만, 동시에 길가메시 불멸의 시작이다. 4000년이 지난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시인은 고대 바빌로니아어로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샤 나그바 임무루, 이시티 마티”(제1토판 1행). 이 문장을 번역하자면 “나라의 기초인 심연(나그바)을 본 자”이다. 영웅은 영생을 찾으려는 여정을 용감하게 시작하고 신에게 도전하고 자신의 심연을 본 사람이다. 시인은 다시 노래한다. “루크탐 일라캄-마 아니흐 슈프슈시”(제1토판 9행). 번역하자면 “그는 먼 길을 떠나 거의 죽을 뻔했지만, 오히려 새 힘을 얻었다.” 내가 감행해야 할 인생의 여정은 무엇인가? 나의 심연은 어디에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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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들까? 우주의 어떤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다른 모든 만물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던져진 환경, 특히 공간과 시간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는 부모와 사회, 국가라는 공간과 21세기라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날줄의 교차점이 만든 이념과 세계관 안에서 산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세계 안에서 편안해한다.

교육은 이 세계라는 알을 깨는 행위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편협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여 다른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핵심이다.

그래서 ‘교육하다’라는 영어 단어 educate를 보면 교육의 목적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운명에서 자신을 용감하게 ‘밖으로(e) 이끄는(duction)’ 행위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획일화된 도그마와 지식을 강제로 암기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교육은 자신의 편견을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이 껍데기를 깨고 자신의 편견을 제3의 눈을 통해 객관적이면서도 동시에 주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불편해 진입하고 싶지 않은 시공간으로 애써 진입하여 그 안에서 견디는 노력이 교육이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자기답게 만드는 여정의 첫 발걸음이다.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살았던 비극작가다. 그는 <안티고네>라는 비극 작품에서 새로운 자신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노력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고대 그리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니케스는 매년 번갈아가며 테베를 다스릴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에테오클레스가 한 해가 지나도 왕권을 내려놓지 않자, 폴뤼니케스는 그리스 다른 도시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일으킨다.

이 혈육전쟁에서 두 형제 모두 비극적으로 전사한다. 이때 이들의 삼촌인 크레온이 정권을 잡는다. 크레온은 왕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보장받기 위해, 선왕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를 성대하게 거행한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폴뤼니케스를 위한 장례는 불법으로 간주하고 금지시킨다. 그 어느 누구도 폴뤼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하거나 그를 위해 애도할 수 없다. 이 국법을 어기는 자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 두 형제에겐 두 명의 여동생,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오빠 폴뤼니케스의 시신 처리 방식에서 의견이 달랐다. 안티고네는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는 것은 인륜에 반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그를 매장하려 한다.

반면, 이스메네는 테베의 시민이라면 테베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안티고네는 말한다. “내가 내 어머니의 아들(오빠)을 매장하지 않은 채, 들판에서 그 시신을 썩게 만든다면, 그것은 내 일생의 고통이 될 거야.” 이스메네는 반박한다. “우리는 현명하게 행동해야 해. 또한 우리가 여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 우리가 남자와 경쟁해선 안돼.… 나는 권력자들에게 복종할 거야.”

안티고네는 의미심장하게 선포한다. “폴뤼니케스를 내 손으로 묻을 거야. 내가 이 행위로 죽는다 할지라도, 그 죽음이 내겐 영광이 되겠지. 너는 상관하지 마. 나는 이 무시무시한 일을 견딜 테니까.” 안티고네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인간이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이스메네에게 끼칠 악영향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다. 결국 안티고네는 이런 자신의 열정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안티고네의 말, ‘이 무시무시한 일을 견딜 테니까’라는 문장은 열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한다. 이 문장이 고대 그리스어로는 ‘파세인 토 데이논 투토’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문장을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 수 없는 이상한 현실을 자신의 본질로 수용하다”라고 번역하였다.

‘파세인’(pathein)에서 ‘열정’이라는 영어단어 passion이 유래했다. ‘열정’이란 자기 스스로 익숙하지 않은 현실에 능동적으로 용감하게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다. 열정이란 오히려 자기 스스로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들어가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위험한 모험이자 초인적인 용기다.



안티고네와 같은 한 여인이 있다. 현존하는 팝의 여왕이라 불리는 미국 여가수 레이디 가가다. 그녀는 어릴 때 자신의 꿈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제가 커서 뭐가 될지 몰랐어요. 그러나 저는 지나치게 용감해지고 싶었고 온 세상에 열정이 무엇인가를 항상 상기시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열정이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열정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녀는 지금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유일한 인간이 되어간다. 그녀는 ‘나는 이런 식으로 태어났지’라는 노래에서 외친다. “나는 나 나름대로 아름답지.

왜냐하면 신은 실수하지 않으니까. 나는 바른 길로 가고 있어. 나는 이런 식으로 태어났지!” 열정은 자기혁신의 첫걸음이다. 안티고네와 레이디 가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모든 것을 걸 만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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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결심했다. 오늘도 ‘나만의 전설(傳說)’을 만들겠다고. 그 전설은 나의 심연에서 건져낸 보물이다. 나를 흥분시키며 내가 반드시 가야 할 운명의 길이다. 내가 들어 올리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내가 원하는 여행의 과정이자 목적지이다. 그래서 이 걸음은 여유롭고 동시에 단호하다. 나만의 전설을 위해 매일 걷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그 여정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나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도 나만의 전설을 성취하기 위해 내가 고용한 트레이너일 뿐이다.

그런 걸음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있기 때문에 순교적이다. ‘순교자(殉敎者)’라는 영어 단어 ‘martyr’는 원래 고전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다음 두 가지다. 한 의미는 법정에서 ‘자신이 선택한 말이나 행동이 진리라고 증언하다’이며 다른 의미는 ‘숭고한 원칙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순교하다’이다.

그 순교자가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진리인지 아닌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 진리라고 스스로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자신하고 상관없는 도그마에 대해 무조건 동의하는 행위가 아니다. ‘믿다’라는 영어 단어 ‘belief’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lieben)을 헤아려 알고, 그것들을 삶의 우선순위로 놓고 지키려는 삶의 태도’다. 인생철학의 바탕은 자기믿음이다. 자기믿음이 없는 이유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라는 미국 시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은 가장 사랑받는 영시들 중 하나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시를 낭송하였지만, 최근에 새롭게 읽었다. 새로운 의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먼저 오 행씩 네 단락으로 구성된 시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두 길이 노란 숲에 갈라져 있었다. 두 길 모두 갈 수 없어 섭섭했다. 한 길을 가야 해 한참 서 있었다. 나는 볼 수 있는 데까지 내려다보았다. 그 길이 덤불로 굽어져 가는 곳까지.(1~5행)

나는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길 중 한 길을 택했다. 그 길이 아마도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풀이 많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내가 그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그곳으로 지나가는 것이 별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6~10행)

그날 아침, 내 앞에는 두 길이 있었다. 낙엽엔 발자국이 없었다. 아, 나는 그 첫 번째 길을 다른 날을 돌아오기 위해 남겨두었다. 그러나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기 때문에 내가 돌아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11~15행)

세월이 많이 흐른 후, 한숨 지며 말할 것이다. “두 길이 한 숲에 갈라져 있었지. 그리고 바로 내가 사람들이 덜 간 길을 택했지.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16~20행)

나는 이 시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인생에 대한 찬양시로 잘못 해석해 왔다.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덜 간 길’을 택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읽어보니 그것이 핵심이 아니다. 시인은 먼 훗날 우리에게 자신이 ‘사람들이 덜 간 길’을 선택했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가 과거에 두 갈래 길에 왔을 때, 두 길은 ‘똑같이 좋아 보였다’라고 회상한다. ‘사람들이 덜 간 길’은 사실은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길’ 중 하나일 뿐이다. 시인은 아마도 과거에 다른 길을 선택했을지라도, 미래에 그 길을 ‘사람들이 덜 간 길’이라고 확신하고 위안했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과거나 현재에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이 시는 남들이 선뜻 취하지 못할 길을 과감히 선택한 개인의 성공신화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선택한 삶이 최선이었다고 스스로 믿고 싶은 ‘자기기만’에 대한 위안이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심연의 묵상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는 순간이 거룩하다. 우리에게 진실한 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진실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기만은 천재성의 시작이며 후회 없는 삶의 나침판이다. ‘자기기만’은 보잘것없는 자신을 굉장한 자신으로 포장하여 남들에게 전시하려는 마음은 아니다. 우리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가는 여행은 숭고하며 감동이다. 왜냐하면 그 여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들도 자신들의 보물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슬람 신자들인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메카는 그들에게 자신들이 만들어야 할 전설의 진원지이자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상기하기 위해 메카를 향해 화살표 모양의 표식을 가지고 다닌다. 이 표식을 아랍어로 ‘키블라’(qibla)라고 부른다. 하루에 다섯 번씩, 자신의 마음의 시계를 돌아보고 풀린 마음의 태엽을 감아 자신과 메카를 일치시킨다. 온몸을 바닥에 붙여 오늘도 순교적이지만 숭고한 삶을 다짐한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조용히 헤아려본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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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그 길은 나에게 유일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가치 있다. 어느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그 길의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매일 아침 그날에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나만의 의례를 행한다. 골방에 들어가 가운데 자리 잡고 눈을 감고 반가좌를 틀고 앉는다. 그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몰입하지 않으면 상념에 빠져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깊은 생각의 심연으로 들어가면, 내가 그날에 행동으로 옮겨야 할 바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임무를 대담하고 간결하며 거침없이 마칠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내가 가야 하는 길은 어두운 숲속 건너편에 있다.

유럽 중세의 어두운 숲에서 나와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한 위대한 인물이 있었다. 이탈리아 시인인 단테다. 그는 원래 피렌체의 정치가였다. 1302년 그가 추방당한다. 그가 외교관으로 외국에 머무를 때, 정권이 바뀌면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귀향길에 오른다. 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랐다. 동료 추방자들과 혁명을 기획하고 심지어는 적들과 함께 반역을 꾀하지만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단테는 정치가로 이탈리아를 통일할 정치가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각 도시에서 사용하는 방언들을 통일하여 이탈리아 정신을 통일시킬 문필가로 거듭난다. 그는 이 추방의 기간을 통해 자신의 심연을 깊이 응시하여 위대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신곡>을 1308년부터 죽은 해인 1321년 사이에 저술한다. <신곡>은 추방과 소외라는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다.

<신곡>의 첫 부분인 <지옥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곳은 반듯한 길이 숨겨져 있는 장소다.” 단테는 이 첫 문장에서 대명사 ‘우리’와 ‘나’를 대비시킨다. 그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자신이 경험할 ‘지옥’으로 초대한다. 여기서 ‘나’는 1321년에 죽은 단테 자신을 말하지만, 그가 감행하려는 지옥여행은 그가 독자에게 바라는 우리 삶의 일부다. 단테는 이 숲속에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미로에 봉착해 있었다. ‘어두운 숲속’은 아직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는 숲이다. 1세기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도 <아이네아스>라는 책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은 검은 숲을 언급한다.


어거스틴도 <신의 도성이라는 책에서 로마제국의 멸망을 묘사하면서 이 장소를 ‘낯선 장소’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헤매는 광활한 장소이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운명을 찾아 ‘헤매는 숲’이 있다.

‘어두운 숲속’에는 ‘반듯한 길’이 숨어 있다. 단테는 그 숲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을 제 삼자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을 제2의 자아가 되어 낯선 자의 눈으로 관조한다. 자신 스스로 자신의 관찰자가 되어 숨소리조차 응시한다. 단테는 이 ‘어두운 숲속’에서 그림자처럼 자신을 인도하는 한 인물을 발견한다. 그 인물은 1세기 로마 작가 베르길리우스였다. 단테는 그를 통해 지옥에서 빠져나와 연옥과 천국으로 여행한다.

‘어두운 숲속’은 우리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갈 수련의 장소다. 이 숲에 들어서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아닌 척하던 것들, 체면이나 남들로부터의 기대와 같은 것들을 벗어던지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있어서 추호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일들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 저자이며 영국 최고 갑부가 된 조앤 롤링은 26살일 때 자신을 이렇게 덤덤하게 묘사한다. 자신은 이혼녀였으며 한 딸의 엄마였고 영국 런던 거리의 홈리스였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안에 갇혀 있었다. 그 터널이 얼마나 긴지, 그 끝에는 불빛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지옥’이었다. 그녀는 그 한가운데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과 사랑하는 딸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멋진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는 상상력과 오래된 타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의 ‘어두운 터널’은 그녀가 인생을 통해 이루어야 할 그녀만의 임무를 감지하는 에피파니의 순간이 되었다. 에피파니는 고대 그리스어로 ‘신이 자신의 모습을 찾는 자에게 드러내는 현현(顯顯)’이다. 그녀가 한없이 추락한 심연은 이제 단단한 바닥이 되어 그녀가 다시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발판이 되었다. ‘어두운 터널’은 조앤 롤링 안에 숨겨진 위대한 DNA를 발휘시키는 잔인하지만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보다 강한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관철시킬 끈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러한 자신의 발견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녀의 가장 훌륭한 자산이 되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실패가 두려워, 그 숲속에 들어가기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런 행위 자체가 실패이며 먼 훗날 그 여행을 감행하지 않는 자신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 거친 숲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장비가 있다. 그 장비는 자신을 흥분하게 만들어 자신의 전적인 열정을 요구하는 자신만의 미션이다. 우리가 언젠가 죽을 것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정말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죽음도 아깝지 않은 미션은 무엇인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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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객관적으로 ‘옳은 것’이 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도 반드시 옳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일부 몰지각한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기적’이며 ‘이타적인 행동’은 자신이 나중에 도움이나 인정을 받기 위한 ‘호혜적 이타주의’라고 치부해버린다. 만약 옳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고대 인도의 위대한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arata)’에 전설적인 유디스티라 왕과 그의 네 동생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디스티라, 비마, 아르주나, 나쿨라, 사하데바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한 여인 드라우파디와 결혼한다. 다섯 형제와 그들의 아내 드라우파디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준비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지상의 왕국을 버리고 천상으로 들어가기를 꿈꾼다. 그들은 먼저 히말라야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곳엔 하늘로 가는 마차가 숨겨져 있다.

가장 먼저 포기한 사람은 드라우파디다. 비마가 형 유디스티라에게 묻는다. “왜 드라우파디가 포기했지요?” 그러자 유디스티라는 추락하는 드라우파디를 보지도 않은 채 말한다. “그녀는 영웅 아르주나만 사랑했지. 덕스럽지 않아.” 드라우파디가 천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자신 앞에 가로놓인 작은 산을 정복해야만 했다. 그 산은 다섯 남편들 중 아르주나만 사랑한 정욕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덕(德)’으로 정복해야 하는데, 평상시 덕스럽지 않고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등산할 수 있는 다리 근육이 없었다.

그다음에 추락한 자는 사하데바다였다. 비마가 “그가 왜 추락했어요?”라고 묻자, 유디스티라는 떨어지는 사하데바다는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걸으며 말한다. “그는 자신이 똑똑하다는 자만심 때문에 추락했지.” 사하데바다는 자신이 이해한 사소한 지식을 최고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이 착각을 자만심(自慢心)이라 부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이유는 그가 자신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나쿨라가 추락했다. 비마가 다시 그가 떨어진 이유를 묻자 유디스티라는 이번에도 매정하게 대답한다. “그는 자신의 생김새를 감탄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추락했지.” 나쿨라는 자신이 가장 잘생겼다는 편견을 갖고 살았다.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주위 사람의 기준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파괴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에 아르주나가 추락한다. 비마가 슬픔에 잠겨 무엇이 그를 추락하게 만들었는지 묻자, 유디스티라는 꿈쩍도 하지 않고 걸으면서 말한다. “아르주나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서 추락했지.” 영웅은 완벽한 영웅이 되려고 매일 수련하는 길 위에 서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유디스티라와 비마만 남았다. 비마는 힘이 장사며 요리사이기도 했다. 유디스티라는 “너는 굶어 죽는 사람들을 생각하지도 않고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구나”라고 말한다. 비마도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추락한다.

유디스티라가 나무 밑에서 외로움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떨고 있었다.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줄곧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개는 아마도 인도에서 발견된 고유종인 ‘파리아(Pariah)’일 것이다. 이들은 함께 히말라야 정상에서 하늘로 가는 인드라의 전차를 찾아 헤맨다. 그들은 눈보라 치는 가파른 바위의 갈라진 틈, 가시덤불로 가로막힌 장소, 만물을 한순간에 삼키는 시커먼 늪지대를 샅샅이 뒤졌다. 어느덧, 유디스티라와 개는 형제가 되었다. 유디스티라가 먹을 것을 찾으면 개에게 주고, 개가 찾으면 유디스티라에게 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함께 굶었다. 이들의 외로움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했다.

개가 유디스티라를 쳐다보고 무엇을 발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인드라의 전차가 정박된 비밀의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둘은 함께 그곳으로 달려간다. 하늘로 가는 인드라의 전차가 그 위용을 드러낸다. 그들이 전차로 가까이 가려는 그 순간에, 전차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바로 인드라 신의 목소리다. 인드라 신은 숭고하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운 유디스티라와 그의 신복인 못생긴 개를 바라본다. 그는 유디스티라가 보여준 인내와 지혜, 그리고 개에 대한 배려를 찬양한다. “네가 마침내 도착했구나!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어서 내 전차를 타고 하늘로 가자!”

크리쉬나는 힌두 경전 '마하바라타' 등의 주인공으로 인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신 중의 하나다._경향DB


유디스티라와 개는 함께 인드라의 전차에 승선하려 한다. 바로 그때 인드라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막는다. “뭐하는 짓이냐! 개를 데리고는 절대 하늘로 갈 수 없다. 모든 존재가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다. 네 개는 늙고 야위었으며 쓸모없는데, 너는 왜 이 개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느냐? 내 하늘엔 신도 사람도 감히 갈 수 없는 곳인데. 저 개가 쉴 자리가 하늘엔 없다.” 유디스티라의 개는 멈춰 서서 그의 발 위에 머리를 조아린다.

유디스티라는 한참 동안 개를 바라보고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인드라 신에게 말한다. “죄송하지만 제 개가 같이 못 간다면 저는 뒤돌아 다시 산을 내려가겠습니다. 이 개는 저의 가장 충직한 동반자였습니다. 항상 저를 도왔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따랐습니다. 천상에서의 기쁨은 제가 개를 잃은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개는 제 아내나 동생들보다 더 낫습니다. 제 개가 하늘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면 저도 없는 것입니다.” 유디스티라는 자신이 힘들게 올라온 가파른 산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산 아래로 개와 함께 내려가기 시작한다.

인드라 신이 소리쳤다. “멈춰라! 유디스티라여! 나는 너처럼 고귀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개는 너의 인격의 근원인 ‘다르마(Dharma)’다. 이것이 너의 마지막 시험이었다. 너는 하늘로 올라갈 자격이 있다.” 그 순간, 개는 다르마 신으로 변신해 유디스티라를 축복해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의로움에 헌신하는 다르마! 그 근원이 바로 개였다. 유디스티라는 결국 인드라의 전차에 올라 승천한다.

개가 상징하는 ‘다르마’는 인간의 옳음이다. 그 길은 유디스티라가 산 정상에 오르기까지 보여준 용기, 지혜, 정의가 아니다. 자신의 양심이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내적인 훈련이자 원칙이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터무니없고 손해만 보는 자신 안에 숨겨진 양심적인 행동이 바로 하늘나라로 가는 전차에 올라탈 수 있는 차표다. 아니, 지상을 하늘나라로 만드는 힘이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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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작하기 직전, 나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민 가방 두 개를 들고 보스턴 로건공항에 도착한 뒤 기나긴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종교와 문명, 특히 그것들이 기록된 고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운 좋게 석유재벌 록펠러가 하버드대학에 지어준 기숙사에서 1년 동안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냈다. 새끼 거북이가 알에서 깨어나 1년 동안 생존하기 위해 바닷속 심연으로 들어가 미역줄기로 연명해야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이 기숙사는 4층 건물로 한 층에 스무 명이 거주한다. 중간에 부엌이 있어 각자 식사를 해결한다. 각 층에는 화장실과 샤워장을 공유하는 다섯 개 방이 한 유닛이다. 싫든 좋든 다섯 명이 1년간 함께 살아보라는 학교의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미국에 오기 전에 외국인을 거의 보질 못했는데, 내가 보기엔 기상천외한 사람들이 모였다. 내가 살 유닛의 다섯 명 프로필이다.

첫째는 미국인으로 한 대형 교회 목사인 키가 2m나 되는 흑인 스탠리, 둘째는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이슬람 수니파 이맘(사제)인 이브라힘, 셋째는 티베트 출신 불교 라마승으로 현재는 시카고대학 티베트어 교수인 느왕, 넷째는 무신론자로 현재는 FBI 암호 해독가로 일하는 존, 그리고 다섯째는 한국에서 다양한 종교를 접해보지도 못했고 배울 기회도 없어서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무식했던’ 나. 나는 이 네 명의 기숙사 동료들과 운명적으로 1년 동안 살아야 했다. 싫든 좋든.

지금 생각하면 이 기숙사 생활은 종교와 삶의 시각에 관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당시 나의 목표는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학점 받아서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외의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 전형적인 이기적 인간이었다. 처음 보는 여러 종류의 ‘다른’ 인간들, 특히 종교가 다를 뿐만 아니라 종교를 업(業)으로 삼는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이곳 생활이 가관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침시간 화장실과 샤워장 사용과 청소였다. 스탠리 목사가 화장실이나 샤워장을 사용하고 나면,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그 후에 2~3시간 동안은 아무도 감히 사용할 수 없었다.

나는 이 곤경을 빠져나갈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나는 일방적으로 나머지 네 명에게 기숙사 샤워실과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학교 헬스클럽에서 샤워를 해결할 테니 화장실 청소를 빼달라고 통보했다. 나머지 동료들이 어떻게 지내든 상관없이 그 상황을 피하고만 싶었다. 내 삶의 원동력은 ‘나-먼저’라는 이기심이었고, 그것만이 모든 일을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밤늦게 기숙사로 돌아온 후, 몰래 화장실을 가보곤 깜짝 놀랐다. 화장실과 샤워장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향까지 피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티베트에서 온 느왕 스님이 남모르게 청소를 하고 향을 피워놓았던 것이다. 그는 1년 내내 묵묵히 수행하듯 청소를 하고 향기로운 향을 피워놓았다. 나는 그를 보면서 붓다가 떠올랐다.


붓다가 열반한 쿠시나가르 열반당에 모셔진 6.1m짜리 열반상_경향DB



붓다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남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저 신비로운 종교 경험이나 금욕생활, 그리고 한계를 극복하는 자기증명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붓다는 해탈을 경험한 뒤에는 히말라야 산맥에서 홀로 유유자적하며 니르바나에 거하지 않았다. 그는 땀내가 나고 북적이는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사는 시장으로 돌아와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를 향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다른 사람의 불행을 경감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냈다. 그는 열반에 든 뒤 초월적 평화에 탐닉하려는 영적인 유혹에 빠질 뻔했지만, 남은 40년의 생을 길거리에서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바를 가르쳤다. 대승 불교에서 영웅은 ‘보디샤트바’ 즉 보살(菩薩)이다. 그는 깨달음의 직전에 열반의 희열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세상의 고통으로 돌아가기로, 사람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견디기로 결정한다. 1년 뒤 기숙사를 퇴거해야 했다. 무신론자 존이 할 말이 있다고 우리 모두를 불러 앉혔다. 그는 스탠리 목사나 이브라힘 이맘, 특히 내가 믿는 종교를 가짜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종교를 갖게 된다면 티베트 불교를 택하겠다고 말했다.

종교는 흔히 신념 체계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종교에서는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습득된 행동이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믿는다’라는 영어 동사 believe의 의미는 ‘삶에 있어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lieve/Liebe)을 찾아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는 삶’이다. 성급한 종교 비교는 종교 간 우열을 매기고 자기 종교의 기준에서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제 그 ‘다름’을 ‘참아주는 행위(톨레랑스)’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경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한 종교만 옳다고 주장하는 처사는 지난 2000년 이상 면면히 흘러와 인류 역사를 바꾼 종교에 대한 모독이다. 각 종교는 나름대로 자기만의 독특한 상징 체계와 행동 양식이 있다. 이것들을 심도 있게 연구하다 보면 개별 종교에서 지향하는 ‘길’은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착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토브’인데 그 본래 의미는 ‘향기’다. 착함은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 그것을 인내를 가지고 지키는 행위다. 그리고 “상대방의 기준에서 내가 향기가 나는가?”를 질문하고 연습하는 삶이다. 티베트 스님 느왕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매일 청소했어?” 그가 말한다. “자신이 좋아해서.”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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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거북이는 다른 모든 생명들이 그러하듯 신비하기만 하다. 수십 개의 조그만 생명체가 모래 속에서 꿈틀거리며 위대한 생명을 시작한다. 태어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은 새끼 거북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아는 것처럼, 저 멀리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태양빛에 반사된 빛의 파장을 따라 바다를 향해 단호하고도 후회 없이 힘차게 나아간다. 새끼 거북이의 인생 여정은 어미 거북이에서부터 출발한다.

어미 거북이가 바다를 횡단해 자신의 고향 해안까지 헤엄쳐오는 여정은 매 순간 죽음과의 사투다. 호시탐탐 상어와 고래가 노리고 있고, 인간이라는 동물이 막강한 무기로 언제든 자신들을 포획해 죽일 수 있다. 어미 거북이는 바다의 파고가 제일 높은 날, 여름 중 가장 뜨거운 날, 거칠고 높은 파도를 가르며 2300㎞를 헤엄쳐 자신이 태어난 땅 해변에 도착한다. 5~6주 전에 임신한 알을 낳을 셈인 것이다. 이는 거북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므로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도착해 바닷물이 닿지 않도록 해안으로부터 수십m 떨어진 후미진 모래사장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다.

어미 거북이는 자신의 몸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게 30㎝ 정도 모래를 판 다음, 그 안에 들어가 머리만 모래사장 위로 삐죽 내놓고는 사방을 둘러본다.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해변이지만 모래사장 밑에서는 바쁜 발길질이 시작된다. 뒷지느러미로 더 깊은 구덩이를 파는 것이다. 비로소 거북이 알이 안주할 공간이 마련되면 어미 거북이는 그곳에 50~200개의 알을 낳는다. 알을 낳은 뒤 어미 거북이는 곧바로 모래로 둥지를 덮어놓는다. 맹금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점액이 마르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세 시간여 동안 이 모든 일을 마친 어미 거북이는 다시 바다로 간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뒤 후회 없이 다시 바다로 가는 것이다.

2개월 정도 지나면 모래 속에 낳아놓은 알들이 깨지기 시작한다. 신비롭게도 새끼 거북이는 알 속에서도 자기 생존을 위한 무기를 만든다. 그 무기는 ‘카벙클(carbuncle)’이라는 임시치아(臨時齒牙)다. 새끼들은 카벙클로 알의 내벽을 깨기 시작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이 자신의 자유를 억제한다면 스스로 자신만의 카벙클을 만들어야 한다. 이 벽을 깨지 못하면 새끼 거북이는 자신을 억누르고 규정하고 정의하는 환경이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다 빛 한번 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을 것이다.

새끼 거북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시작은 이제부터다. 알을 깨느라 카벙클이 부러져 피가 난 새끼 거북이를 맞이하는 것은 아빠 거북이도 엄마 거북이도 아니다. 어미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덮어놓고 간 30㎝가 넘는 두께의 모래다. 어미 거북이가 얼마나 단단하게 다져놓았는지 이 모래성은 웬만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새끼 거북이들이 이 모래를 뚫고 나오기까지는 3일에서 7일 정도가 걸린다. 새끼 거북이의 몸무게는 알을 깨고 나올 때에 비해 30% 정도 줄어든다.


바다거북_경향DB


새끼 거북이들은 섣불리 모래 표면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모래 위에서는 바다 갈매기, 독수리, 그리고 사람이라는 괴물들이 이들의 연약한 목숨을 한순간에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새끼 거북이들은 숨죽이고 때를 기다린다. 한밤중이 되면 새끼 거북이들은 운명의 질주를 시작한다. 한순간에 쏟아져 나온 새끼들은 ‘자석 컴퍼스’라는 본능적인 감지 장치에 따라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향해 일제히 움직인다. 이 과정은 바다에 도착하기 전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매우 위험한 순간이다. 그럼에도 새끼 거북이들은 바다라는 생명을 만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바다를 향해 질주한다.

저 높이에는 이러한 새끼 거북이의 행진을 응시하는 갈매기와 독수리가 있다. 아직도 촉촉한 새끼 거북이는 이들의 점심으로 제격이다. 갈매기와 독수리들이 쏜살처럼 하강한다. 신기하게도 그들의 돌진을 감지한 새끼 거북이들은 재빨리 자신들의 사지를 딱딱한 껍데기 안으로 집어넣는다. 갈매기와 독수리가 백사장에서 발견한 것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껍데기뿐이다. 새끼 거북이들은 본능적으로 생존력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이러한 자발적이며 순간적인 움직임이 없다면 살아남지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바다는 새끼 거북이에게 천국인 동시에 지옥이다.

새끼 거북이는 바다에 입수한 뒤 48시간 동안 미친 듯이 수영을 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다의 가장 밑바닥 심연(深淵)이다. 이곳에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큰 물고기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새끼 거북이의 인생을 시작한다. 바다거북의 첫 1년간 바다 생활을 관찰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시간은 ‘실종의 기간’이다. 이 1년을 홀로 살아남아야지 비로소 ‘거북이’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그 후 그들은 대개 떠다니는 미역에 몸을 실어 영양을 보충한다. 그리고 20년 정도가 지나면 짝짓기를 하고, 암 거북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는다. 새끼 거북이가 어른 거북이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확률은 0.1%다. 천 마리 중 한 마리만 생존하고 대부분은 이 기나긴 과정에서 죽는다.

나는 경계에 서 있다. 내가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그 안에서 알게 모르게 굳어진 세계관을 깨야 한다. 그 편하고 단단하고 나를 길러준 알이 이제는 나를 감금하여 죽게 만드는 무덤도 되기 때문이다. 나를 감싼 세상이 알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내 입안에서는 임시치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수많은 모래 중에 하나라는 절실한 깨달음이 나의 임시치아다. 연약하지만 이 치아로 편견, 상식, 전통, 흉내, 부러움이라는 알을 깨기 시작해야겠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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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어릴 때 방학이 되면 친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내려가 지냈다.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할머니의 땀과 사랑이 배어 있다. 할머니는 어린 손주에게 모든 것을 허용했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문지방 위에 서지 마라!” 할머니는 내가 문지방 위에 서면 집안으로 들어오는 복이 달아나고 귀신이 나를 잡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때만 되면 문지방 위에서 놀다 할머니한테 혼나던 기억이 난다.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장소가 있다. 내부를 외부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건물 내부로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기다린다. 이곳은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가물가물한’ 장소이기 때문에 현관(玄關)이라고 불렀다.

건축에서 현관이란 주택의 정면에 낸 출입구를 이른다. 지금은 일반집의 단순한 출입구나 신발을 벗어 놓는 장소로 그 뜻이 축소되었지만, 원래는 불교사찰의 첫 번째 문을 가리켰다. 불교에서 현관은 현묘(玄妙)한 도(道)로 들어가는 문으로 속세를 떠나 영원한 극락세계로 떠나기 위한 출발점이다. 현(玄)자는 원래 누에가 고치를 치기 위해서 자신의 입에서 실을 뽑는 행위와 누에가 고치 안에서 변신하여 나비가 되는 신비한 변화를 형상화한 단어이다. 누에는 몸을 8자로 움직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실을 뽑아낸다. 그 행위를 ‘작고 여리다’는 뜻으로 요(요)라 부른다. 이 지속적인 행위로 고치를 짓는 것을 현(玄)이라고 한다. 밖에서는 볼 수 없지만, 고치 안에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변신이 일어난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나비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누에가 나비가 되는 ‘가물가물’하게 나오는 과정을 현(玄)이라 한다.

라틴어로 문지방이나 현관을 의미하는 단어는 ‘리멘’(limen)이다. 리멘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힘든 기다림의 시간이며 장소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장소이지만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없다. 이곳은 떠나고 난 후에 그 진가를 인정받는 장소이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K 롤링_경향DB


해리 포터 시리즈 작가인 조앤 롤링은 20대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덤덤하게 말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혼하여 미혼모가 되었고 실업자였으며 홈리스였다. 그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터널 안에 갇혀 있었다.

그녀는 이 기간에 자신의 삶에 있어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척하기를 그만둔다. 그리고 자신에게 중요하고 절실한 일에 집중한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타인에게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인간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하여 새로운, 놀랍고 자신만의 거친 길을 찾는다.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은 살아있고, 사랑하는 딸이 있으며 오래된 타자기와 풍부한 상상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리멘’이라는 불안한 시간과 공간은 자신의 삶을 다시 건축하는 단단한 심연의 바닥이 된 것이다. 조앤 롤링은 누에로 남아있지 않고 리멘을 통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날게 되었다.

프랑스 인류학자 반 즈네프는 ‘리멘’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통과의례>라는 책을 저술했다.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려는 입문자(入門者)는 다음 세 단계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한다.

첫 번째 ‘분리’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과거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을 의도적으로 버리는 단계다.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세계와의 의도적인 단절이다. 이 단절을 ‘혁신’(革新)이라 부른다. ‘혁’(革)자는 갑골문에서 소의 가죽을 정교하게 벗겨 낸 모양으로 뿔, 몸통, 그리고 꼬리 부분이 한자에 남아있다. 자신이 안주하던 소 몸체에서 가죽을 정교한 칼로 벗겨 내야 한다. 특히 소가죽에 남아있는 기름이나 털을 제거해야만 그 가죽이 경직되지 않고 유연해질 수 있다. 이 과정을 무두질이라 부른다. 인간들은 구석기 시대부터 수렵-사냥을 통해 얻은 가죽에 기름을 바르거나 연기에 그을려 연하게 만들었다. 후에는 잿물에 가죽을 담가 털과 기름을 완전히 제거한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가차 없이 버리는 행위가 종교에서는 성기에 상처를 내는 할례, 혼돈을 상징하는 물에 자신의 몸을 담그는 세례와 같은 행위로 나타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전이’(轉移)와 ‘통합’의 단계다. 첫 번째 단계가 단시간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이 두 번째 단계인 전이는 리멘의 단계다. 오래된 자아를 소멸시키는 오랜 기간의 투쟁의 시간이고 세 번째는 조용히 다가오는 단계다. 자신의 몸에 밴 습관이나 행동을 제거하고 새로운 자아를 만드는 창조의 시간이다. 이 기간은 문지방 위에 서 있는 불안한 시간이다.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려는 입문자는 오래된 자아를 점점 소멸시키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여 새로운 자아를 점점 늘려 만들어 가는 단계다.

이 단계의 스승은 외부에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든 ‘시간’과 ‘공간’이다. 이 구별된 시간과 공간을 ‘고독’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 불안해하는 외로움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물인 고독이다. ‘고독’은 보통사람들을 위대한 성인이나 위인으로 탈바꿈시킨다. 일개 상인이었던 무함마드는 메카 외곽에 있는 히라 동굴에서 ‘자신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묵상하는’ 고독한 훈련을 통해 이슬람 종교를 창시하고 16억 인구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충분한 전이 단계에 거한 자가 자신도 모르게 들어서는 단계다. 이것을 ‘통합’의 단계라 부른다.

입문자는 자신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세 번째 단계인 통합 단계에 들어섰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는 타락하고 만다. 자신의 그런 오만이 그를 처음의 단계로 매정하게 보낼 것이다.

두 번째 리멘의 단계 아래서 유유자적하는 상태를 ‘서브라임’(sublime)이라 부른다.

‘서브라임’은 흔히 ‘숭고한’으로 번역되는데, 그 어원적인 의미는 ‘리멘’(limen) ‘아래서’(sub)이다.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숭고하다. 그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자이기에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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