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5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내세웠다. 여러모로 이 대선이 우리 정치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겼지만 그중에 하나가 민주당이 내건 구호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당시 이 구호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하에서 먹고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의 심금을 절절하게 울리는 슬로건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컨설턴트 런츠의 말을 빌리자면, 이 구호는 우리 선거사 최고의 ‘먹히는 말’(words that work)이라 할 수 있다.

2015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행그리(hangry)란 단어가 등록됐다. 행그리는 배고픈(hungry)과 화난(angry)이 합쳐져 ‘배가 고파 화가 난 상태’를 뜻하는 신조어다. 먹고살기 힘들고, 강자·승자독식에 짓눌리고, 정치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보통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이처럼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의 서민, 보통사람들이 바로 행그리 피플(hangry people)이다. 여기서 피플은 우리 헌법에 모든 권력의 원천으로 규정된 국민이다. 그 국민이 먹고사는 게 힘들어 외치고 있다. 나도 좀 살자!

잘못된 현실을 바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게 진보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변하고, 대표하는 게 진보다. 우연히 어떤 부모를 만났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지 않고, 각자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주어지도록 하자는 게 진보다. 진보는 어떻게 이 꿈을 실현했는가? 정치를 통해서다.

우리가 열망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도 진보세력의 정치적 기획이었다. 복지국가의 성패는 복지 ‘정책’(policy)이 아니라 복지 ‘정치’(politics)에 달려 있다. 달리 말하면, 진보는 정치적으로 유능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


새정치민주연합 유성엽,황주홍,문병호 의원이 탈당 선언 뒤 인사하고 있다._경향DB


대한민국의 진보는 무능하거나, 최소한 유능하지는 않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선거에서 늘 진다. 다수의 표를 얻는 쪽이 승리하는 게 민주정치다.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공심위상, 공성위하(攻心爲上 攻城爲下)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공략해야지 성을 공략하는 것은 틀렸다는 뜻이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상대의 잘못만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것은 ‘공성’의 전략이다. 대안을 가지고 설득하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것이 ‘공심’의 전략이다. 공성 전략으로 일관한 결과, 식상한 희망과 익숙한 패배였다.

둘째, 엉뚱한 곳에서 헤맨다. 서민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지 못한다. 우리 국민을 힘들고 슬프게 하는 것은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먹고사는 게 가장 우선이다. 진보가 여기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않으니 유권자가 표로서 호응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보수가 워낙 민생을 입에 달고 사니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민생은 원래 진보의 아젠다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 특혜가 아니라 형평, 반칙이 아니라 공정을 지향하는 것도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함이다.

보수의 민생과 진보의 민생은 다르다. 보수의 민생이 가진 것을 일부 양보하는 것이라면 진보의 민생은 당연한 권리다. 진보가 추구하는 복지(welfare)를 보수가 굳이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차이다. 보수는 더 많은 것을 내놓더라도 약자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으려 한다. 상황이 좋아지면 양보를 거둬들일 속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보는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권력을 부여하고자 한다. 힘이 있어야 자신의 몫을 찾고,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지국가를 말할 때에는 복지국가를 지탱하는 정치 시스템, 사회적 역학관계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서민의 삶이 힘드니 그들에게 좀 더 주자는 게 복지의 본령이 아니다.

유능한 진보라면 행그리 피플에게 호소하고, 그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각종 데이터를 보면 국민들이 화를 내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앵그리’의 이유를 충분히 살피지 않고 관성대로 정치·도덕적 이슈에 매달리면 안 된다.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헝그리’에 있다. 왜 보수정부 8년, 박근혜 정부 3년 동안 보통사람의 삶이 피폐해졌는지를 쟁점으로 삼아야 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지금 진보가 주목해야 할 국민은 모럴(moral) 피플, 리버럴(liberal) 피플이 아니라 행그리 피플이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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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을 계기로 우리 정치를 좀 찬찬히 돌아보면 좋겠다. 지금 야권의 유력한 대선주자라고 하는 문재인 대표, 박원순 시장, 안 전 대표 등은 모두 ‘불려 나온’ 사람들이다. 정치에 뜻을 품고, 정당에서 훈련받고, 선거를 통해 검증받으면서 대선주자의 반열에 오른 분들이 아니다. 시대가 그들을 호명하고 그들이 부응해 나왔지만 다른 한편 진보정당의 약화가 초래한 현상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정치는 매우 후지고 지질한데, 그 원인으로 진보정치의 무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진보정치의 무능은 진보정당의 약화에서 비롯됐다. 흔히 지적하듯, 진보는 정치보다 운동에 더 익숙하다. 그런데 보통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 나라들을 보면 예외 없이 정치가 동력이다. 결국 진보가 유능한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진보의 정치적 무능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되레 부담이 된다.

보통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를 복지국가라고 한다면, 복지국가는 한두 명의 리더에 의해서가 아니라 좋은 정당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물보다 정당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들 나라에서도 훌륭한 리더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정당 밖에서 길러지고, 정당을 부정하거나 위축시키면서 성장하지는 않았다. 정당이 이런 인물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 리더들은 정당을 더 강화시켰다. 정당을 통한 정치기획의 산물이 바로 약자들이 살기 편한 나라, 복지국가다.

안 전 대표의 탈당은 또 과연 누가 정치를 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권력의지를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하는 건 좋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든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다른 생각을 존중하면서, 정말 싫어서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싫은 사람과도 머리를 맞대 의논하고,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결론일지라도 더 큰 대의를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정치다. 차이를 인정하고 타협하는 게 정치의 본질 아니던가. 따라서 정치를 잘하는 것은 뛰어난 스펙이나 선의, 명성 등의 요인과는 전혀 상관없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13일 국회 정론관에서 탈당을 선언하기 앞서 기자회견문을 꺼내고 있다._경향DB


“중요한 것은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런 삶의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것을 내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 막스 베버의 이 통찰처럼 정치인은 들여다보고, 견뎌내고, 감당할 수 있는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이 때문에 정치에서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건 위험하다. 유권자로서 정치인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낡은 정치를 바꾸는 충격은 새로운 사람에 의해 과감한 도전에 의해 주어지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안 전 대표나 문 대표가 비싼 대가를 치르며 단단한 실력을 키워가는 도정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안 전 대표의 탈당으로 인해 문 대표와 안 전 대표 중 누구 책임이 더 큰지를 따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책임 산정이란 게 쉽게 따져질 일도 아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편이 갈리고, 네 편과 내 편으로 나뉘어 ‘네 탓’을 일삼으면 그거야말로 같이 죽는 길이다. 베버가 이런 말도 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해도 같이 사는 길을 고민·모색해야 한다. 그게 정치가 가진 힘이다. 지금은 차분한 대응이 최고의 전략이다.

안 전 대표의 탈당 소식을 들으면서 이런 말이 떠올랐다. ‘얻으려면 먼저 주라.’ <노자>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장욕탈지 필고여지(將欲奪之 必固與之), 나중에 얻으려면 먼저 주라는 뜻이다. 안 전 대표는 먼저 주었고, 게다가 줄 만큼 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맞는 생각이다. 하지만 받는 것도 다 때가 있다. 그때를 잘 분별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문 전 대표는 타이밍상 이번에 크게 주는 게 필요했다. 지난 대선 때 양보받은 빚을 이번 국면에서 갚았더라면 싸게 갚는 셈이다. 앞으로 두 사람이 ‘먼저 주는’ 정치를 펼쳐주길 소망한다.

정치는 있는 현실에서 시작되고, 바뀐 현실에서 다시 시작한다. 진보세력은 최악의 분열 앞에서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혼란 속에 새 질서가 탄생하고, 이 혼란은 윤리적 요청이 아니라 정치문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계기를 통해 진보정치가 더 유능해질 수도 있다. 아직, 희망은 있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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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5월30일,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의 전당대회가 있었다. 지금은 잊힌 이름이지만 당시에는 총재로 불리던 당의 리더를 뽑는 자리였다.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김영삼(YS)이 이철승을 물리치고 선출됐다. YS의 승리에는 김대중(DJ)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양김 간의 경쟁을 고려할 때 그들의 연대는 의외의 일이었다. 그 담대함이 결국 그해 10월 유신체제의 붕괴를 이끌어낸 셈이다.

1970년 9월에 있었던 당의 대선후보 선출에서 격돌한 이후 YS와 DJ는 필생의 라이벌이자 파트너로 한국 정치를 주도했다. 그들이 손을 잡고, 힘을 합칠 때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깊은 균열을 낸 1984년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도 양김이 협력해서 만들었고, 이 민추협이 주축이 돼서 만들어진 신한민주당은 이듬해 총선에서 관제야당체제를 혁파하는 성과를 일궈냈다. 1987년에 있었던 6월 항쟁도 두 사람이 단일대오를 형성했기에 가능했다.

양김의 갈등과 분열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97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양김은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대립하다 결국 군부에 틈을 열어주고 말았다. 그들이 그때 협력했더라면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엔 또 어떤가.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이후 그들은 또다시 분열로 나아갔다. 둘 다 선거에 출마했고, 결과는 노태우의 당선이었다. YS의 28.0%, DJ의 27.0%를 합치면 당선자인 노태우 후보의 36.6%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권력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 권력의지 때문에 누군가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기치를 들고, 세를 키워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혜택이 아니라 피해를 가져다주게 될 때에는 자제돼야 한다.

경쟁 당사자들에겐 이기고 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경쟁을 지켜보는 유권자들로선 승자가 누구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진영의 승리다. 무릇 경쟁의 때와 협력의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정치력이다. 따라서 정치인이라면, 그 중에서도 대선주자라면 마땅히 이 정치력을 가져야 한다.



문재인 대표의 해법은 문·안·박 연대이고, 안철수 의원의 그것은 전당대회를 통해 두 사람 간에 승부를 가리자는 것이다. 따지자면, 문·안·박 연대를 치밀하게 풀어내지 못하는 문 대표의 잘못도 적지 않다. 어쨌든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리더십 아니던가. 안철수 의원도 정치력 부재에 대한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의 요구는 문 대표 사퇴인데, 그가 직전 대표인 데다 경쟁자인 점을 감안하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자신도 보궐선거 패배에 책임지고 사퇴했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작은 선거에서의 패배 때문에 물러나는 건 옳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당해 본 입장이니 더 더욱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대로 가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총선에서 크게 패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오만과 독주도 새정치민주연합이 만만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중론이다. 따라서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은 새정치민주연합이 총선에서 본때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이런 열망으로 인해 대선주자들끼리 반목하고 분열하기보다는 힘을 합치고, 함께 혁신하기를 바란다. 전당대회 해법은 이 열망에 배치된다.

전당대회, 특히 대선주자들이 격돌하는 전당대회는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당이 거당적 갈등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총선 공천을 앞둔 전당대회이니 편 가르기와 사생결단의 난투극은 불가피하다. 전당대회에선 현역 의원을 포함해 지역위원장들의 영향력이 크다. 당권 후보들은 이들에게 손 내밀 수밖에 없다. 이 거래 때문에 물갈이는 불가능해진다. 패자 쪽의 의원이나 지역위원장 중에서 솎아내고자 해도 정치보복으로 비쳐져 쉽지 않다.

문 대표와 안 의원은 서로 해법이 다르고, 양김만큼의 정치력도 없다. 총선 전 분당, 총선 뒤 붕괴를 막으려면 두 사람의 선택만 계속 쳐다봐선 안 된다.

이제는 당의 총의를 모으고, 두 사람이 따르도록 강제해야 한다. 이 역할을 국회의원들에게 맡길 수도 없다. 어떻게 해서든 물갈이되지 않으려는 이해 때문에 객관적일 수 없는 탓이다. 당 소속의 각급 선출직 공직자들, 전·현직 당직자 등이 모이는 ‘당원대회’를 개최하고, 여기서 각종 해법에 대한 끝장 토론 끝에 최종 결론을 내는 게 좋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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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개헌론이 불거지고 있다. 한동안 금기어이던 개헌이 다시 정치 아젠다로 등장하는 것부터가 변화다. 작년 10월 김무성 대표는 2015년 초 개헌 논의의 봇물이 터질 것이라고 했다가 청와대의 반발에 직면해 자신의 불찰이라며 사죄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즈음 국무회의를 통해 쐐기를 박았다. “개헌 논의 등 다른 곳으로 국가역량을 분산시킬 경우 또 다른 경제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친박 실세들이 개헌론을 꺼내는 것은 그 자체로 생뚱맞고 낯부끄러운 표변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이슈에 대한 여론의 광범위한 반발을 덮기 위해 민생 프레임을 가동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터에 이 무슨 눈치 없는 헛발질인가.

모양이 우습기는 하지만 속셈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떤 의도일까? 정치에선 흔히 어떤 주장의 내용보다 화자에 주목할 때 그 진의를 더 쉽고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개헌론과 관련해서도 누가 개헌 운운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하기 쉽다. 최근의 개헌론을 꺼낸 인물 중 주목할 만한 인물은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홍문종 새누리당 전 사무총장이다. 이들은 모두 자타가 공인하는 친박 실세들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속내를 정확하게 읽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이 개헌론을 봉인한 대통령의 지난 발언을 잊어버렸을 리 없다. 따라서 허튼소리로 치부할 게 아니다.

개헌론은 지금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변수다. 대선주자들 간의 경쟁구도 역시 백지상태로 바뀐다. 특히 홍문종 전 총장의 발언대로, 이원집정부제로 간다면 김무성 대표의 선두 위상(front runner)은 모래 위의 성이다. 내치를 담당하는 총리가 국회에서 선출된다면 그건 유력한 대선주자가 없는 친박 그룹의 불임성을 해결할 수 있는 묘수다. 결국 친박 실세들이 개헌론을 꺼내는 이유는 이렇다 할 친박 대선주자가 없는 데서 비롯된 초조함의 발로다. 무릇 대선에 나설 인물이 여의치 않은 계파는 존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가 G20에 참석하는 박근혜 대통령을 환송하고 있다._연합뉴스


구체적인 형태가 무엇이든 개헌의 골간은 대통령의 권력이 줄어드는 분권형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의회의 권력이 더 커지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선거의 차원으로 해석하면, 진보와 보수가 초박빙의 싸움을 펼치는 대선보다는 새누리당에 유리한 총선을 통해 국가권력의 향배와 몫을 정하자는 것이다. 사실 각종 선거 중에서 보수가 제일 두려워하는 선거가 대선이다. 대선에 너무 많은 ‘판돈’이 걸린 데다 승부도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이 부담을 줄이는 건 보수의 오래된 열망이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내각제를 염원해왔다. 내각제를 통해 일본의 보수처럼 안정적인 장기집권의 기반을 만들고 싶어 한다. 3당 합당도 이 염원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여권이 주도했기에 권력연장의 음모로 비쳐져 계속 실패했다. 그런데 이번엔 야당이 먼저, 게다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실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개헌에 적극적이다. 대통령 권력을 줄이고 자신들의 권력을 늘리고 싶은 탓이다. 호조건은 또 있다. 강력한 대선주자가 없다. 개헌에 제동을 걸 이른바 거부권 행사자(veto player)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개헌의 걸림돌은 박 대통령의 반대다. 이는 곧 대통령이 동의하기만 하면 개헌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관건은 박 대통령의 선택인데, 어떻게 할까? 총선이 끝나면 대통령도 OK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최근 박 대통령이 여권을 ‘박근혜 1인 체제’로 거칠게 재편하고, 물갈이에 나서는 걸 보면 그는 레임덕을 순리로 받아들이거나, 퇴임 후를 조용히 보낼 것 같지 않다. 끝까지 현실정치의 행위자로 운신하려는 ‘기운’마저 느껴진다. 이 때문에 그에게 개헌은 아주 강렬한 유혹이 될 수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보수가 장악한 상황 하에서 개헌은 야권과 진보에 불리하다. 개헌론이 내년 총선에서 보수를 대거 결집시킬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개헌으로 보수 우위를 제도화하려는 열망이 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총선에서 친박이 다수를 이루고, 새누리당이 크게 승리할지 여부가 1차 관건이다. 따라서 2016년 총선은 한국정치의 지형을 바꿀, ‘워털루 전투’에 비견될 만한 중대 선거(critical election)가 될 것이다. 이 성패에 문재인 대표, 안철수 전 대표, 박원순 시장 등 대선주자들의 명운, 나아가 새정치민주연합과 진보의 미래까지 걸려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 작은 다툼에 빠져 있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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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계절도 불쑥 등장하지 않고 미리 전갈을 보낸다. 흔히 봄의 전령은 개나리이고, 가을의 그것은 코스모스라고 한다. 문득 계절의 전령을 떠올린 것은 지난 10월28일에 있었던 재·보궐선거 결과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도 없었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탓에 언론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투표율(20.1%)도 너무 낮았다. 이 때문에 지나친 해석은 금물이나 나쁜 조짐의 기운이 드는 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10·28 재·보선이 내년 총선 결과를 알리는 전령이 아닐까?’

전국 24개 지역에서 치러진 이번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은 기초단체장(경남 고성) 1곳, 광역의원 7곳, 기초의원 7곳 등 총 15곳에서 승리한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광역의원 2곳에서 이기는 데 그쳤다.

광역의원 선거가 치러진 9곳에서 새누리당이 7곳을 이겼는데, 선거 전과 비교할 때 이는 새누리당이 수도권 4곳에서 새정치연합으로부터 의석을 뺏은 것이다. 14곳의 기초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과 무소속이 각각 7곳에서 승리했고, 새정치연합은 단 1곳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인천 부평과 경기 광명 등 당초 새정치연합이 강세인 지역에서조차 패했고, 문재인 대표의 지역구에서조차 졌다. 새정치연합 후보들이 3등을 한 곳도 적지 않다.

답을 찾아보기 전에 먼저 분명하게 짚고 갈 게 있다. 새누리당 지지층은 언제나 열심히 투표하고, 새정치연합 지지층은 마음이 움직일 때 투표한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전체 투표율이 낮으면 절대적으로 새누리당에 유리하다. 통상 재·보선은 여당의 무덤이라지만 착각이다. 새누리당이 야당일 때 각종 재·보선에서 승리한 탓에 이런 오해가 생겨났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여당일 때나 야당일 때나 늘 재·보선에서 강세였다. 그것은 새누리당이 투표장에 열심히 나가는 지지층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표율이 낮아도 너무 낮으니 이번 패배가 새정치연합에 별일 아닌 걸까? 아니다. 정당별 지지층의 특성 차이를 감안하면 새정치연합의 승리 문법은 분명하다. 대통령·정당 지지율에서 확인되는 40% 내외의 여권 지지층을 제외한 나머지 유권자들을 투표장에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슈나 인물, 또는 조직을 통해 그들에게 찍을 마음, 투표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이건 전적으로 새정치연합의 몫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_경향DB


무릇 정당이라면 어쩌다 부는 바람에만 기대선 안 된다. 10·28 재·보선은 새정치연합이 지지층 동원에 실패하는 차가운 현실을 뼈저리게 보여준다. 이대로 가면 새정치연합은 총선에서 참패(shellacking)를 넘어 붕괴(debacle)할 수도 있다.

이번 선거 결과만 놓고 보면 새정치연합은 수권정당은 고사하고 제1야당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찬반이 성패를 가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대여론이 더 많은 상황에서 졌다는 점도 고려는 해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조차 턱없이 밀렸다는 사실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국정화 반대 등 새정치연합은 유리한 분위기를 투표로 연결시키지 못했거나 못하고 있다. 새정치연합은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떨어져도 먹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정당, 선거치(選擧癡)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래선 하늘이 두 쪽 나도 못 이긴다.

강한 정당의 기본은 튼실한 풀뿌리 기반이다. 이게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인물을 가져도 헛일이다. 유권자와 소통할 수 있는 독자 채널이 없으면 부득불 언론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새정치연합은 앞장서서 풀뿌리 조직인 지구당을 없애버렸고, 적극적으로 당원들을 소외시켰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가하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집단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선거 준비를 못할 정도로 흔들어놓고, 선거에서 졌으니 물러나라고 한다. 선거에서 화끈하게 붙어볼 노력은커녕 책임론에 휩싸이지 않도록 보신하는 데 급급하다. 양쪽 모두 비겁하고, 좀스럽다.

유방이 한 왕조를 창업할 수 있게 만든 장량, 그가 선택한 신의 한 수는 한신을 별도 세력으로 풀어준 것이다. 유방의 휘하에서 벗어난 한신은 마음껏 항우를 유린했다. 광대한 땅과 군사를 거느리게 되면 한신이 독립할 우려가 있음에도 장량은 유방을 설득해 한신이 자유롭게 놀게 해줬다. 그래서 숱한 전투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이겼다. 지금 새정치연합엔 이처럼 담대한 전략이 필요하다. ‘장량’을 얻고, ‘한신’을 풀어주는 것, 이게 문재인 대표와 새정치연합이 할 일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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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수의 자랑은 역시 산업화다. 좀 길게 잡으면 무능한 선조 이후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가난 구제, 그걸 해낸 세력이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세력이다.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과 경제발전을 직접 체험한, 6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갖는 ‘세대효과’는 클 수밖에 없다. 이 산업화가 사회적 바탕이라면 보수의 정치적 기둥은 반공·반북이다. 이 반공·반북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강한 세대효과를 낳고 있다.

산업화를 일궈냄으로써 얻은 정당성은 IMF 경제위기로 무너졌다. 반면에 반공·반북 이념은 햇볕정책으로 흔들리긴 했지만 굳건하게 보수 정체성의 벼리로 남아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 보수의 헤게모니는 안보보수가 잡고 있다. 그럼에도 워낙 낡은 보수라 이 틀을 깨는 혁신의 시도는 불가피한 과제였다. 보통사람들에게 먹고사는 현실이 워낙 고단하고 힘든 탓에 보수도 복지나 경제민주화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7년 대선에서 줄·푸·세를 표방했던 박근혜가 2012년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터닝해야 할 정도로 서민의 삶은 피폐했다.

대한민국의 보수, 그것도 보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에 의해 복지와 경제민주화가 수용됐으니 개혁적 보수의 등장이 임박한 것으로 보였다. 하나 박근혜 대통령이 원래의 낡은 보수로 회귀하면서 개혁적 보수는 수세에 처했고, 박 대통령의 거듭된 실정을 계기로 다시 전면에 나서는 기회를 잡았으나 얼마 뒤 ‘제거’됐다. 박 대통령이 개혁적 보수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찍어냄으로써 낡은 보수는 대세가 됐다. 이로써 보수는 스스로 진화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유 전 대표가 쫓겨날 때에는 그래도 내부 저항이 있었다. 의원들이 한동안 버텼다. 합리성과 민주주의를 지향하고자 하는 보수의 퍼덕임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역사교과서 국정화 국면에서는 그런 움직임조차도 아예 없다. 낯 뜨거운 충성경쟁만 난무하고 있다. 보기 민망할 정도의 굴종이고, 지질하기 짝이 없는 영합이다. 새누리당은 TPP(Two Park Party), 즉 박정희·박근혜의 정당이 됐다. 이처럼 영혼 없는 보수, 경제를 살린다며 부동산을 들쑤시고 부채 늘리고 노동을 옥죄는 ‘허튼짓’밖에 못하는 보수가 집권하니 헬조선이고 망한민국인 것이다.

지금, 보수가 지질하다면 진보는 얕다.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 작년 4월16일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에 이어 국정화 문제에 대해서도 일차원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4대강 사업 때문에 환경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민생이 거덜 났다. 그럼에도 4대강 사업을 민생이슈로 풀어내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규탄하며 다그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쿠데타다. 민주화를 일궈낸 세력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방법이다.

국정화 이슈를 통해 박근혜 정부의 본질, 즉 반민생과 반서민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민생쿠데타의 측면을 부각시켜야 한다. 지난 13일자 워싱턴포스트 신문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박근혜 대통령 앞에 놓인 가장 큰 도전은 경제다. 경제실정이 아킬레스건이라는 얘기다. 이걸 숨기기 위한 것이든, 평소의 소신 때문이든 결과적으로 이 이슈 때문에 민생파탄이 가려질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이 아니라 박근혜 개인에 대한 찬반으로, 영남과 보수가 결집해 공고한 진영으로 움직이게 하는 프레임은 야권이나 진보에게 실익이 없다.

박 대통령의 다음 수순은 민생 살리기이다. 그러면서 야당의 반대를 정략으로 규정할 것이다. 이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고 부들부들 치를 떠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단호한 대응이 아니다. 시끄러운 소수가 아니라 분노하는 다수에게 눈높이 맞추고, 그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 분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대응이다. ‘나라 분열시키지 말고 민생 챙기고, 경제를 살리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여권의 덫이 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자신감을 갖는 원천은 투표율 높은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30~40%, 즉 100명 중 30~40명의 지지는 소수지만 모집단이 60~70명으로 줄어들 때에는 다수다. 따라서 나머지 60~70%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을 때 야당이 이길 수 있다. 식상한 대응으로는 이게 불가능하다. 야당이 총선에서 이기면 국정화를 저지할 수 있다. 지금 야당에 절실한 것은 투지와 더불어 바른 전략이다. 그래야 이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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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드는 의문이다. 아무리 ‘제왕적’이란 수식어가 붙는 대통령 권력이지만 최소한의 염치나 두려움도 없는 듯하다. 과거 왕들도 신하들이 통촉 운운하며 반대하면 대개 뜻을 접는다. 고집 피우고 마음대로 하다가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런데 21세기 민주사회의 대통령이 무서운 얼굴로 여당의 원내대표를 찍어내더니 이제는 당 대표까지 깔아뭉개고 있다. 기세로 보면 김무성 대표가 백기 투항해야 끝날 듯하다.

박 대통령이 저렇게 하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계산을 거론한다. 각론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총선 후 국정 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한다.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비록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국민참여경선으로 하자고 공약했지만 그것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총선 때마다 정당들은 예외 없이 물갈이 전략을 써와 유권자들이 당연하게 여긴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현역들에 대한 교체지수도 높다. 그러니 대통령으로선 현역의 재공천율이 높은 오픈프라이머리가 유해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누군가. 선거의 여왕 아니던가.

정치인의 모든 행위가 치밀한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건 합리적 오해다.

계산보다는 퍼스낼러티(personality) 때문에 어떤 선택과 판단, 그리고 그에 따른 행위가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 박 대통령의 행위도 퍼스낼러티의 관점에서 더 잘 이해되는 점이 있다. 키워드는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이다. 이를 곰곰이 곱씹어 봐야 한다. 보통 선거마다 이기는 사람이라고 새기지만 자나 깨나 오직 선거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선거 성패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이 대통령직에 있다면 그건 위험하다. 자칫 나라 살림이나 서민생활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박근혜 정부 때 생겨난 ‘헬조선’이란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컨설턴트 중 선거에서 승률이 높으면 흔히 천재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박 대통령에겐 여왕이란 호칭이 붙었다. 언론에서 왕이나 황태자 따위의 용어를 가끔 쓰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박 대통령이 실제로 자신을 왕으로 간주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 대통령은 헌법이나 법률, 그리고 다른 기관 등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개인이든 소수든 전횡하지 못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의 권력은 제약이 없다. 만약 박 대통령이 대통령과 왕 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또한 대단히 위험하다.



일국의 대통령이 여왕 마인드를 갖고 선거에 몰두하고 있으면 그 피해는 서민들에게 돌아간다.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정치적 권리를 통해 사회경제적인 몫을 정당하게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한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약자들이 정치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대통령이 힘으로 민주주의가 친서민 체제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면 보통사람들의 삶은 나빠지기 마련이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가지 않아야 할 ‘유신’의 길을 가고 있다.

대통령의 유신이 성공할까? 지금 박 대통령은 선거를 겨냥한 여러 포석과 조치를 취하고 있다. 50만이 넘는 병사들에게 특별휴가를 선물로 주고, 노동개혁과 청년희망펀드 등을 통해 젊은 층의 표심 잡기에 나서고 있다. 영남 지역과 나이 든 세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에다 젊은 표까지 흡수하면 여권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도가 된다. 게다가 야당의 만성적 부진까지 겹쳐 있으니 얼마나 자신만만하랴. 그럼에도 박 대통령의 유신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정부 들어서서 먹고살기가 더 힘들어졌다. 선거성패보다 민생 향상을, 여왕 마인드보다 서민 스타일을 원하는 것이 지금의 민심이다.

나폴레옹은 전쟁 승리를 통해 권력을 얻었고, 전쟁 패배로 쫓겨났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선거로 일어난 박 대통령이 선거로 무너질 수 있다. 그게 세상 이치다. 박 대통령이라고 해서 못난 야당 덕에 마냥 어부지리를 누릴 수는 없다. 야당이 혁신으로 유신에 대응한다면 성패는 명약관화하다. 박 대통령이 선거나 권력게임보다는 민생에 전념하라는 것이 국민 요구다. 8·25 남북합의 후 지지율이 20%포인트 비상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타협과 통합이 답이다. 그래야 나라도 살리고, 선거에도 도움이 된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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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은 합치는 것이고, 혁신은 바꾸는 것이다. 통합의 반대말은 분열이고, 혁신의 반대말은 수구다. 한국 정치사에서 야당이 주로 선택한 것은 통합이었다. 야권연대든 후보단일화든 그것은 모두 통합을 일컫는 말이다. 소선거구-단순다수제의 효과로 인해 선거가 주로 두 당의 게임이 되다 보니 분열한 쪽이 불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야권은 끊임없이 통합을 모색하는 것으로 위기나 수세를 돌파하곤 했다.

어느 세력이든 분열보다 통합을 선호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 통합이 혁신을 방기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이 그렇다. 통합을 핑계로 낡은 정당이 됐다. 이 때문에 통합의 효과도 이젠 거의 없다. 지난 총선에서 야권은 통합해 선거를 치렀으나 졌다. 새누리당이 40%대의 안정적 지지율을 보이는 한, 1 대 1 구도만 되면 야권이 이긴다는 계산은 착각이다. 야권 후보가 1명뿐이더라도 비새누리당 지지표를 결집시킬 명분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명분을 세우는 것이 혁신이다.

그런데 새정치연합이 혁신의 성패를 놓고 다투더니 이제는 혁신을 뒤로 물리고 통합에 주력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것 같다. 당내 중진모임을 대표해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혁신보다 통합이 중요하다.” 3선의 강기정 의원은 “혁신은 통합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문재인 대표도 정의당, 천정배 그룹과의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좋게 보면 혁신은 어느 정도 됐으니 통합으로 가자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혁신을 놓고 다투던 안철수 의원과 문재인 대표는 바보같이 혁신도 못하고, 남 좋은 일 시킨 꼴이다.

2012년의 총선과 대선, 그리고 숱한 재·보선에서 맥없이 패배한 원인도 혁신 부재, 즉 기성 질서를 고수하려는 수구적 태도 때문이었다. 천정배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신당 흐름이 생겨난 이유도 당이 혁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에 가장 긴요하고 시급한 과제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혁신이다. 어쩔 수 없이 혁신의 기치를 들긴 했지만 아직 혁신된 건 거의 없다.

이제 실행할 타이밍에 또다시 통합을 앞세운 기득세력의 공세에 떠밀리는 형국이다. 사실 새정치연합에서 벌어지는 내부 다툼의 본질은 혁신 대 수구이다. 친노 대 비노 간의 대결은 겉모습일 뿐이다. 본질보다 겉모습이 부각된 데에는 문 대표의 책임이 크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이 문재인 대표에게 “혁신안 처리를 연기하고 재신임 여론조사도 취소해달라”는 내용의 발언을 하고 있다._경향DB



혁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기성질서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혁신은 당의 부정적 요소를 털어내는 것이다. 혁신하면 인적 교체, 즉 물갈이가 연상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또 물갈이라고 해서 다선 의원들을 대거 퇴출시키는 것도 아니다. 정당은 노·장·청이 긴장 속에 균형을 이뤄야 한다. 특히 야당은 대규모의 양적 물갈이가 아니라 질적 물갈이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현역 의원이라고 해서 지레 겁먹고 혁신을 거부할 게 아니라 실력으로 당당하게 평가받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옳다.

혁신에는 인적 물갈이뿐만 아니라 프레임, 행태, 전략에서의 혁신도 있다. 정치·도덕적 프레임으로는 진보를 표방한 정당이 이기기 어렵다. 민심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인데, 삶과 관련되지 않는 이유로 야당을 찍어 달라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떻게 해서든 사회경제적 프레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행태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안 된다’는 반대주의(anti-ism)로는 다수의 유권자들을 견인하기 어렵다. 민주정부 10년을 이미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형태로 반대해야 한다.

반대주의-반사이익으로 결코 이길 수 없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에 기초한 ‘싸가지’ 없는 반대와 폄훼가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면서 적실성 있는 대안으로 경쟁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능하지 못한 진보는 오히려 사회발전의 짐이다.

샤츠슈나이더의 말대로 “전략은 정치의 심장이다”. 새정치연합의 전략은 낡고 엉성하다. 지난 대선에서 충분히 확인됐듯이 세대 대결로는 이길 수 없다. 세대와 지역으로 보면 야권의 지지기반이 상대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이다. 야당이 집중할 균열은 계층 갈등이다. 정당이 아닌 운동선거에 대한 환상도 접어야 한다. 정당 중심으로 가고, 그 옆에 시민·사회세력이 서야 한다. 야권연대도 나눠먹기식이나 후보단일화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는 어렵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혁신을 통한 통합뿐이다. 혁신 없는 통합은 총선에서 궤멸적 타격을 초래할 것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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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대선과 관련해서만 보면 여권이 불리하다. 우선 선두주자인 김무성 대표의 문제다. 안정적 지지세를 보여주긴 하지만 확장성이 없다. 새누리당 지지층이나 보수성향의 유권자들 사이에선 유력주자이나 중도층이나 무당층에서 지지기반을 넓힐 가능성까진 아직 못 보여 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로서 보여준 승리전망(electability)에는 역부족이다. 박빙의 접전이 불가피한 게 대선이기에 심각한 약점이다.

새누리당이 대선과 관련해 직면한 더 큰 문제는 김무성 대표 외에 다른 주자들이 너무 약하다는 점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나 김문수 전 지사의 지지율은 너무 미미하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잠재적 폭발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나 아직 대선주자로서의 위상은 낮다. 문재인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의원 등 탄탄한 후보군을 형성하고 있는 야권에 비하면 상당한 열세다. 필승의 후보도 없고 후보군마저 약해 신경이 쓰이는데, 여기에 친박 후보가 하나도 없으니 박 대통령으로선 불안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전망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다음 대선 과정과 그 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본인 캐릭터가 그렇고, 충성도 높은 지지층을 가진 유일한 보수 정치인이기 때문이란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이 누군가를 대선주자로 육성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럼 누굴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있고, 최경환 부총리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반 총장은 박 대통령과 무관하게 이미 지지율 1위의 위상을 갖고 있어 박 대통령의 조력이 절실하지 않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최 부총리는 아직 깜냥이 안 된다는 게 중론이다.



활짝 웃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_경향DB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황교안 국무총리의 이름이 떠오른다. 요즘 황 총리는 뉴스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장관 때와 달리 아예 언론 노출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박 대통령이 황교안 카드를 선택했을 때 정치권에서 거는 기대는 상당했다. 그에 비춰보면 의아할 정도로 적은 노출에다 미미한 역할이다. 북한의 지뢰도발이나 노동개혁, 심지어 제2의 사정 드라이브에서도 그의 역할은 눈에 띄지 않는다. 부패척결을 주도하다가 역풍 맞는 이완구 전 총리를 타산지석으로 삼더라도 너무 약한 존재감이다.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정홍원 전 총리에 버금갈 정도다. 총리의 숙명 때문에 이럴 수도 있다. 게다가 박 대통령이 워낙 권력을 나누지 않는 스타일이기에 황 총리가 의도적으로 몸을 확 낮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무 예상과 달라 다른 ‘소설적 상상’을 자극한다. 황 총리가 현안으로부터 비켜서서 조용히 대선주자로서의 기반을 닦을 수 있도록 박 대통령이 시간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이인제 전 경기도지사를 ‘깜짝 놀랄 후보’로 육성한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주자군(群)이 너무 얕고, 친박 주자가 없다 보니 황 총리의 성장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는 있다. 기대대로 커주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다. 손해날 일이 없다. 대선주자군이 풍부해지면 현직 대통령에게 여러모로 좋다. 정권재창출의 확률이 올라가는 데다 여러 주자가 치열하게 경쟁하면 자신의 영향력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는 박 대통령의 골수 지지층은 약 30% 정도 된다. 만약 박 대통령이 황 총리를 육성하는 그림이 구체화되면 이들이 황 총리를 대선주자로 밀어 올리는 동력이 될 것이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케이스가 있긴 하나 무의미한 예다. 이 때문에 현직 대통령의 도움으로, 혹은 총리로서 성공해 대통령이 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도가 성공할지 여부가 아니다. 대선게임에 미칠 영향이다.

19대 대선의 객관적 조건도 새누리당에 불리하다. 보수정부 10년의 피로감에다 내세울 만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8·25 남북 합의로 인해 대박이 나긴 했지만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흔히 선거의 펀더멘털이라고 하는 경제는 계속 나빠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 박 대통령이 자신이 ‘만들어낸’ 대선주자와 함께 대선게임에 뛰어드는 구도는 여권에 치명적 해악이 될 것이다. 다음 대선의 키워드는 보수정부 10년의 공과를 넘어 박 대통령에 대한 찬반이 되고, 계파 간 난투극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누가 박 대통령을 제지할 수 있을까.

대저 새누리당의 최대 난제는 ‘박근혜 중독’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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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이름 때문에 생기는 오해가 적지 않다. 그중의 하나가 대통령제다. 대통령이 국정의 중심에 서는 제도가 대통령제이긴 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관계에서 입법부가 논리적으로 우위에 서는 게 대통령제다. 미국의 대통령이 의회를 압도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미국의 대통령은 여소야대가 아니더라도 의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 국회의원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법안제출권이 의원에게만 주어져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입법부가 제안한 법안에 대해 거부와 수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의제 설정자(agenda setter)가 입법부란 얘기다.

대통령제에서 입법부가 우위에 선다는 사실은 일반적 통념과 배치된다. “미국 정치체제는 대통령이 법안에 대해 수정을 가할 수 없고 거부권만 행사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미국 대통령은 법안에 대한 부분 거부권도 행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미국 주지사보다 약한 권한을 지닌 셈이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조지 체벨리스 교수의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대통령이 법안제출권도 가지고, 여당을 통해 입법부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으니 사정이 많이 다르다. 미국에 비해 대통령이 의회를 압도하는 현실을 감안해도 우리에게 ‘좋은 국회의원’ 하면 떠오르는 인물 하나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왜 없을까?

이런저런 이유가 있을 것이나 핵심적인 이유는 대통령은 강하고 의회는 약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행정부가 입법부를 압도하고 정당이 입법부를 옥죄니 의회가 의제 설정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유승민 파동에서 보듯 국회의원들은 ‘꼬붕’이나 졸개 역할에 만족한다. 그 결과 괜찮은 국회의원이라면 대통령이나 광역단체장을 꿈꾸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현실에서 대통령이나 광역단체장이 아니라 좋은 국회의원이 되고자 한다면 지질한 것일까?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모두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1명이고, 국회의원은 300명이다. 좋은 대통령보다 좋은 국회의원이 되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인 목표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 되는 길과 좋은 국회의원이 되는 길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둘 다 대표하고 책임지는 자리다. 처음부터 대통령 후보인 사람은 없거나 허상이다. 대통령직을 열망할수록 좋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


업무보고 받는 박근헤 대통령_경향DB


미국의 루스벨트가 뉴딜개혁을 추진하다 반대파의 저항에 막혀 옴짝달싹도 못할 때 그에게 출구를 열어준 것은 국회의원 로버트 와그너였다. 당시 상원의원이던 와그너가 제안한 노동법(이른바 ‘와그너법’)에 의해 뉴딜개혁은 교착상태에서 벗어나 성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좋은 국회의원은 빛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정치의 질을 결정하는 요인은 제도, 정당, 그리고 사람이다.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좋은 국회의원이 많아져야 정치가 좋아진다. 좋은 국회의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대통령 혼자서, 의회 다수의석을 가진 정당이라고 해서 세상을 다 바꿀 수는 없다. 국회의원들이 의제 설정자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다할 때 정치도 나아지고, 사회도 좋아진다. 국민들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 중에서 어떤 것을 정책화·입법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바로 아젠다 세팅이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좋은 의제 설정자가 된다는 건 곧 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가 막힘없이 골고루 대표된다는 의미이다.

국회의원 개개인은 한 사회의 ‘부분’을 대표한다. 좋은 국회의원이라면 자신이 대표하고자 하는 그 부분을 잘 대표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이 대표하고자 하는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고, 그들의 이해와 선호를 정책·법안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또 서로 다른 부분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간에 경쟁이 불가피하므로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 건방 떨지도 주눅 들지도 말고 실력과 용기로 행정부를 견제하고, 공정과 청렴으로 시장의 폐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약자에게 따뜻하고, 강자에게 엄해야 한다. 이처럼 좋은 국회의원이 많아지면 보통사람의 삶도 좋아질 수밖에 없다. 하나 아쉽게도 좋은 국회의원이 잘 띄지 않는다. 과연 있기는 하려나. 국회의원직은 대통령이나 광역단체장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스펙이 아니다. 권력과 이권을 누리고자 무리 지어 부역하는 자리도 아니다. 대저 국민 삶의 파수꾼이다. 좋은 국회의원을 물으면 누군가의 이름이 금세 떠오르는 그 날을 기다려본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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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를 바꾸려면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입법부와 행정부에 집중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입법부를 구성하는 국회의원과 행정부를 이끄는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택된다. 나라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각각 차지하는 권력의 양과 질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행정부의 권력이 입법부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 여소야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입법부의 목소리가 커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대통령(행정부)이 더 많은 권력을 보유하고, 행사하는 것만큼은 엄연하다. 이것이 한국의 공식·비공식적 권력편제의 본질이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편에 서는 게 진보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을 개선하고, 그들에게 생존권·정치권·시민권·사회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진보의 역할이자 의무다. 진보가 이런 역할을 감당하려면 부득불 권력을 잡아야 한다. 특히 다른 무엇보다 행정권력을 장악해야 한다.회권력과 행정권력이 다 필요하지만 권력의 크기와 중요성을 감안하면 행정권력이 먼저다. 그래서 어떤 정당이 행정권력을 잡는 걸 두고 집권이라고 한다. 여야의 구분도 누가 행정권력을 장악하는지에 따른 것이다. 그만큼 행정권력을 잡는 건 정당·세력에게 무엇보다 앞서는 과제다. 그렇다고 해서 행정권력의 장악이 집권의 전부는 아니다. 넓게 보면, 입법부가 행사하는 권력이 만만찮기 때문에 의회권력을 장악하는 것도 집권의 일부다. 거의 모든 정책이 입법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정당 구성원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 국회의원이다. 이 국회의원들 중에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른바 대권의지를 가진 이들도 있긴 하지만 절대 소수다. 대다수는 국회의원으로서 재선(reelection)을 목표로 한다. 정당의 구성원 중에서 국회의원이 아닌 부분, 즉 당원이나 지지층 또는 당직자나 활동가 등은 집권이 근본적 목표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거나 총선에서의 승리를 특정 국회의원의 당락보다 더 중요시한다는 얘기다. 행정권력을 잡고, 의회 다수당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집단적 힘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도 집권하면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재선이 훨씬 사활적인 목표다. 정당 내에서 구성원들 간에 이해관계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새정치민주연합에 흔히 가해지는 비판이 과연 집권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들만 놓고 보면 집권의지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집권의지가 있다면 당연히 자신의 개인적 이해보다는 당익(黨益)을 앞세워야 하고, 하나의 팀으로서 당이 이기는 데 기여하는 것을 행보 선택의 잣대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정당이고, 강한 정당이다. 최근 새누리당에서는 다음 총선에서 출마하지 않겠다는 자발적 선언을 한 사람이 벌써 4명이다. 각각의 이유를 따지면 지질할지 몰라도 당의 신뢰를 높이는 데엔 기여한다. 그런데 새정치연합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문재인 대표의 부산 불출마는 희생이라 보기 어렵고, 불출마 의향을 밝힌 최재성 의원은 대충 얼버무린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_경향DB



새정치연합은 패배에 이골이 난 정당이다. 각각 두 번의 총선과 대선, 중간 중간의 보궐선거도 잇따라 패했다. 기업이 이 정도 적자라면 당연히 폐업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이면 총선 불출마 선언이 앞다퉈 나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웬걸? 이긴 정당에서는 불출마 선언이 줄을 잇는데, 지긋지긋하게 지는 정당에서는 불출마는 고사하고 오히려 출마를 위한 공천 다툼이 무성하다. 불출마도 아니고 좀 어려운 지역에 출마하면 어떠냐는 권유조차 손사래 치고, 핏대를 세운다. 이 당에서 집권의지는 찾아보기 힘들고, 재선 욕망만 온통 넘쳐난다.

정치에서 경험은 매우 소중하다. 경륜을 무시하고 새로움만 추구한 결과 새정치연합은 엉망이 됐다. 하나의 팀으로서 정당에는 노·장·청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이 때문에 다선이라고 모두 물러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물갈이가 능사도 아니다. 그간 숱하게 물갈이했지만 정치의 질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패의 사슬을 끊기 위해, 당원과 지지층의 분투를 촉구하기 위해 인적 쇄신은 불가피하다.

의원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집권에 헌신해야 할 때다. 의원이 아니어도 집권을 위해 할 일은 많다. 배지(badge)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나. 그들이 지금 집권을 갈망한다. 떠나는 그들의 아름다운 뒷모습에서 집권의 희망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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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동이 타깃이다. 친기업 노선의 다른 이름인 신자유주의는 반노동과 반정치를 기본으로 한다. 반노동은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반정치는 정치가 시장에 개입해 약자의 편을 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를 따르는 정부가 반노동의 정책, 즉 노동개혁을 아젠다로 꺼내는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 초반이고, 정부 출범 2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노동개혁 카드를 꺼내는 건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노동개혁은 자본-기업을 한편으로 하고, 노동-노조를 다른 한편으로 해서 벌이는 거대한 규모의 사회경제적 대결, 사회적 역관계와 경제질서의 근간을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끝날 프로젝트가 아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자원도 엄청 투입되어야 하는 대격전이다. 신자유주의 정권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대처 정부도 광부노조를 제압하는 데 많은 준비와 공을 들였다. 게다가 집권 초기에 했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타이밍이 부적절해 보이는데, 왜 박근혜 정부는 노동개혁을 선거 전 아젠다로 제기하는 것일까?

우선 드는 생각은 박근혜 대통령의 소신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냥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원칙과 소신이라는 이름하에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다.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찍어내는 과정에서 보듯 박 대통령은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개혁에 대한 타협을 시도했으나 노동계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제 힘으로 관철시킬 때라고 박 대통령이 판단했을 수 있다. 이 정부는 대통령이 정하면 그걸로 끝,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난 다음부터 노동개혁을 외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도리 2015년 7월 24일 _경향DB


다른 추론도 가능하다. 박 대통령이 선거용으로 이 아젠다를 꺼낼 수도 있다. 어차피 경제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 외부 환경도 좋지 않은 데다 경제팀, 나아가 정부 차원의 무능이 겹쳐져 민생경제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런 펀더멘털(기초여건)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다른 프레임으로 바꿔야 한다. 경제가 안 되는 핑곗거리를 찾아야 한다. 이런 필요성에 안성맞춤이 노동개혁이다. 노동자 해고를 쉽게 하고, 임금을 깎겠다고 하는 노동개혁은 노조의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노조는 파업이나 대규모 집회로 맞설 테고, 정부는 공권력으로 제압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대립의 수위는 계속 높아질 것이다.

10%에 불과한 노조조직률과 대기업의 정규직을 기반으로 하는 노조의 기본 특성을 고려하면 정부로선 해볼 만한 싸움이다. 노조·정규직 이기주의를 타깃으로 삼고, 다수의 비노조·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여기에 대항하도록 하는 노·노 갈등의 프레임은 저소득층을 동원하는 데 효과적이다. 사회적 긴장이 높아질수록 보수 성향의 지지층을 결집하기도 쉬워진다. 게다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분리하고, 노동개혁에 대한 이견 때문에 야권 연대도 삐걱거리게 되면 여권이 얻는 선거 이득도 크다.

정부의 실적에 대한 평가나 실정에 대한 심판 정서가 투표의 핵심 잣대가 되지 않도록 하는 수단으로 진영 대결만큼 좋은 게 없다. 진영으로 나뉘어 강하게 대립하면 특정 진영의 잘잘못은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지지층의 충성도와 결집도에서 거의 절대적 우위를 누리는 여권이니 진영 대결은 그들에게 유리한 지형이다. 진영 대결을 조성하는 데 가장 좋은 이슈가 노동과 북한이다. 따라서 정부와 여당이 노동개혁을 제기하는 것은 총선을 겨냥한 전략적 포석이라 할 수 있다. “표를 잃는” 개혁이란 김무성 대표의 말은 정치적 블러핑이다.

정치세력이 선거를 겨냥해 유리한 프레임을 가동하려는 것은 나쁜 짓이 아니다. 선거에서의 유불리는 이슈나 프레임을 선택할 때 첫 번째 기준이다. 정치나 선거에선 어떤 이슈를 제기하느냐, 제기된 이슈의 성격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여권의 의도와 달리 노동개혁은 야권의 대응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럼, 야권이 잘할 수 있을까? 익숙한 절망에 빠지거나 불편한 희망에 매달리는 건 부질없다. 승리의 욕망, 담대한 전략으로 돌파해야 한다. 사족!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돕는다고 하더라.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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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다운스 등 많은 정치학자들이 정당을 하나의 팀(team)에 비유한다. 선거란 경쟁 또는 승부에서 이겨야 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 팀에서 게임에 출전하는 선수를 후보라 할 수 있는데, 선수 선발의 잣대는 팀의 승리다.

어떤 선수 개인의 기록이나 화려한 플레이가 선수 선발의 잣대일 수는 없다. 경기력이 가장 좋은 팀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연고나 의리가 아니라 실력으로 선수를 뽑아야 한다. 자기 맘에 드는 선수만으로 좋은 팀을 구성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최고의 기량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좋은 팀이 되는 건 아니다. 스페인의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가 포지션별로 최고의 선수를 뽑아놔도 결과는 기대만큼 좋지 않았던 게 좋은 예다.

실력을 기준으로 뽑되 팀플레이가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이것을 잘한 감독이 2002년 월드컵 때의 히딩크이고,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이다. 히딩크나 퍼거슨은 개인적 연고나 의리 때문에 선수를 선택하지 않았다. 또 한 선수의 개인적 기량보다는 선수가 그 팀의 경기력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로 판단했다. 개인플레이하는 선수는 가차 없이 응징했다. 그래서 좋은 팀을 만들었고, 최고의 성적을 냈다.

그런데 어떤 선수가 팀에 필요한지는 전적으로 감독의 판단 영역이다. 골이나 어시스트 등으로 선수의 기량을 평가할 순 있지만 한 선수의 실력을 계량화하는 객관적 잣대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감독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좋은 성적이 나오면 그 판단이 옳고, 나쁜 성적이 나오면 틀린 게 된다.


정당을 팀에 비유하면, 당의 대표가 곧 감독이다. 주변의 평판이나 객관적 기록을 고려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표가 감독처럼 선수 선발의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정당에서는 이상하게도 대표의 공천권, 즉 감독의 선수 선발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 선수로 뛰어본 경험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선수 선발 권한을 준다. 이게 마치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완벽한 착각이다. 민주의 원리가 적용될 대상은 리더의 선출과정이지 그 리더의 권한과 역할이 아니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첫 혁신안 주요 내용_경향DB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위원회가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를 제안했는데, 우선 이 발상은 위험하다. 선출직 공직자의 실력이나 공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단언컨대, 누구나 동의하는 방법은 없다. 평가 방법이나 잣대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부터 물러설 수 없는 다툼의 대상이 될 것이다. 설사 그런 방법이 있고, 또 그걸 점수화해서 후보를 교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대안으로 나설 후보의 정치적 역량은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현역의원에 대한 평가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를 전원 외부인으로 구성하겠다는데, 이 또한 갈등의 외주화일 뿐이다. 내부인과 외부인으로 나누고, 내부인은 불순하고 외부인은 엄정하다는 구분은 일종의 자해적 기준이다. 정당이 스스로를 폄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현실정치의 동학을 잘 모르는 외부인이 어떤 정치인이 뭘 잘하고 뭘 잘못했는지를 적실성(relevancy) 있게 평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언론의 보도나 여론조사에 기댈 수밖에 없고, 외부인의 편견에 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후보 공천은 리더의 몫이다. 당의 대표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그걸 부정해서는 강한 정당, 이기는 팀이 되지 못한다. 샤츠슈나이더, 폴스비를 비롯해 정당을 연구한 전문가들이 민주주의는 정당 내(in parties)가 아니라 정당 간(between parties)에 존재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정당은 선거에서 이겨야 하는 팀이고, 그 팀의 스쿼드(squad) 구성은 감독인 대표의 권한이다. 선거 성패에 대해 책임도 당연히 대표의 몫이다. 이걸 전제로 해야 새정치민주연합은 좋은 정당이 될 수 있다. 물론, 대표가 마음대로 하는 임의공천은 안된다. 적절한 기준과 절차·과정도 없으면 사천일 따름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표의 ‘책임공천’ 원칙이다.

정당이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건 거짓이고, 옳지도 않다. 유권자를 대신해 좋은 후보를 선별해서 선거에 내놓는 일은 정당의 존재이유 중 하나다. 그걸 안 하겠다면 정당이 왜 필요하랴. 유권자는 거짓 수사에 속지 말고 제대로 된 공천을 요구해야 한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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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일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 때문에 국립중앙의료원을 방문했다. 여기서 박 대통령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때와 비교해 메르스의 정부 대응이 많이 뒤처진다는 세간의 비판을 직접 반박했다. “사스의 경우엔 중국이나 동남아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그런 질병 유입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이번 메르스는 내국인에 의해 그 어떤 질병이 유입된 후에 의료기관 내의 여러 접촉을 거쳐 감염이 계속되고 있다.” 양상이 다르니 정부 대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박 대통령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박 대통령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던 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 노 전 대통령이 2003년 사스 대응 때 너무 잘해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방역 모범국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반면 이번의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우리나라는 국제사회로부터 민폐국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다. 속이 상하고, 기분 나쁠 만하다.

사실 하나의 사례만을 놓고 대통령 리더십의 차이를 가늠하는 것은 무리다. 대중의 눈에 다 잘 못하는 대통령도 있고, 스스로 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론 다 못하는 대통령도, 다 잘한 대통령도 없다. 이런 비교는 보수 세력이 그동안 전가의 보도처럼 위기 때마다 휘둘렀던 ‘노무현 때리기’의 자연스러운 역풍이다. 그럼에도 누가 더 잘했느냐는 식의 편가르기식 접근은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 호오(好惡)의 태도나 진영논리에 매몰돼 냉정한 사태 인식과 책임 소재를 가려 버리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타고난 승부사(natural-born fighter)다. 국회법 개정과 관련해 물러설 조짐이 전혀 없다. 여야가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일부 양보하려 해도 대통령은 요지부동이다. 특히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메르스 사태에 직접 나서는 것에 대해서도 국민 혼란 운운하면서 공박했다. 그런 탓에 박 시장은 메르스와 싸우고, 박 대통령은 박 시장과 싸운다는 말까지 나왔다. 여기에 더해 전염병 대응을 놓고 노 전 대통령과 비교되는 것에 못마땅해했다. 좋게 말해 승부사이지 나쁘게 말하면 싸움꾼이다. 그가 누구든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현직 대통령이 생각이 다른 이들과 사사건건 싸우는 것은 민주주의에 해롭다. 인간적으로도 쪼잔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참 못난 대통령’이다.

메르스 책임 회피 정국 (출처 : 경향DB)


대통령은 책임을 지는 자리다. 미국의 33대 트루먼 대통령은 자기 책상에 놓여 있는 표찰에 이런 문구를 적어 놓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그는 물러날 때 더 멋진 말을 남겼다. “누가 됐든 대통령이라면 결정은 그의 몫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해 줄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대통령의 일이다.(The President- whoever he is- has to decide. He can’t pass the buck to anybody. No one else can do the deciding for him. That’s his job.)” 대통령이란 자리는 불가피하게 결정권을 행사하고, 그로 인한 책임을 감당해야만 하는 자리다.

2010년 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앞선 해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항공기 폭탄테러 미수 사건을 두고 남을 탓하지 않았다. “저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최종적인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저는 국가와 국민을 보호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제 책임입니다.” 미국 보수의 우상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깜짝 놀랄 발언을 했다. “작금의 위기상황에서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부가 문제입니다.” 레이건이 이처럼 정부가 문제라는 도발적 명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임 카터 대통령의 심각한 무능으로 인해 나라의 위기가 초래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중요하다. 대통령이 책임을 미루고, 싸움에 몰두하면 나라는 어지럽고, 국민은 힘들다. 싸움보다 일 그리고 남 탓보다 책임, 이건 대통령직의 의무다. 이 때문에 트루먼은 이런 말을 남겼다.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아예 맡지도 마세요.(If you can’t stand the heat, get out of the kitchen.)”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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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정치하는 사람을 정치인이라고 할까, 아니면 정치인이 하는 것이 정치일까? 정치하는 사람이 정치인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인이 모두 정치를 하는 건 아니다. 이름만 정치인일 뿐 실제 정치가 뭔지 모르거나 정치가 뒷전인 정치인이 많다. 우리 정치인의 문제 중 하나는 정치인이면서도 정작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치는 서로 생각과 이해가 다른 사람들이 기계적 등가성을 가지고 참여해 의사결정을 이뤄내는 기제다. 이 때문에 정치의 본질 중 하나는 타협이다. 자신이 아무리 옳다고 확신해도 정치 시스템에서는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상대가 옳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반정치적이다. 타협은 내가 틀렸다고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같이 가자는 공존의 선택이다. 정답이 아니라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정치문법의 핵심이다.

제도로 보면 입법부가 행정부보다는 태생적으로 민주적이다. 대통령은 1인이기 때문에, 또 대통령을 보좌하는 관료화된 행정부는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권위주의와 친화성(affinity)을 갖는다. 반면 의회는 다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부득불 조정하고 타협해야만 결정에 이른다. 민주적 절차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 기관은 서로 다른 속성, 즉 대통령은 통치하려 하고 의회는 정치하려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여당을 강하게 옥죄는 경우 의회는 위축되고 정치는 실종된다. 대통령이 여당을 통해 의회를 지배하게 되면 정치가 온전하게 구현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지금까지의 여당은 언제나 대통령의 뜻에 따르는 박수 부대, 거수기였다. 이런 잘못된 관행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게 바로 김무성·유승민 두 대표다. 놀랍게도 이들은 통치의 부품이기를 거부하고 정치의 주체이고자 한다. 그들은 역대 여당 지도부와 달리 대통령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청와대에 맞서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이들은 청와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연금 개혁에 대한 여야 합의안을 이끌어냈다. 여당 지도부가 대통령의 통치에 굴하지 않고 이처럼 맞서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해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진전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29일 국회에서 제333회 국회(임시회) 제3차 본회의를 마친 뒤 로텐더홀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최근 김무성 대표는 돋보이는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전야제와 기념식, 노무현 대통령 6주기 추도식에 여당 대표로서 참석했다. 홀대와 수모를 받았음에도 잘 버텨냈고, 이를 쟁점화하려는 욕망과 부추김을 이겨냈다. 그간 우리 정치에서 보기 힘들었던 통 큰 리더십, ‘정치하는’ 대표의 모습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공무원연금 개혁과 관련해 때론 청와대에 밀리는 듯했지만 결국 그는 소신껏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당 중심의 국정운영이라는 약속을 지킨 셈이다. 청와대의 집요한 반대를 뚫고 ‘결단하는’ 그의 리더십은 입법부의 행정부에 대한 견제·감시 역할을 복원시키고 있다.

김·유 두 대표의 독자 행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은 화가 많이 난 것으로 보인다. 국회가 시행령의 수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을 두고 청와대는 삼권분립 위반이란다. 오해라면 한심하고, 무지라면 찬란하다. 시행령이 그 근거가 되는 모법의 틀을 벗어나는 건 국회의 입법권 침해다. 삼권분립을 부정한 유신정권의 잔재다. 이런 점에서 이번 국회법 개정은 비정상의 정상화라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의 분노는 내년 총선을 겨냥한 권력투쟁의 성격도 있다. 이대로 가다간 내년 총선에서 친박의 도태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김·유 체제를 흔들어 자신의 개입력을 높이려는 시도다. 공안검사 출신의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의 선택도 사정 권력으로 총선 공천권을 놓지 않으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의회는 민주주의와 정치의 본령이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왕권을 제약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민주주의는 법치인데, 그 법의 제·개정은 의회의 고유 권한이다. 따라서 삼권분립 체계에서도 그 중심엔 의회가 있다. 오늘날의 대중민주주의, 복지민주주의를 일궈낸 견인차는 정당이다. 정당의 존재 없이 오늘날 민주주의는 설명할 수 없다. 경쟁적 정당체제를 통해 구성된 의회에서 타협하는 방식으로 민주적 의사결정을 이뤄내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요체다. 그런 점에서 김무성·유승민 두 대표의 정치 결단은 민주주의의 핵심축인 의회와 정당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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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잘나가는 정당은 없다.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가 있다. 유수한 정당일수록 처절한 몰락의 시기를 이겨낸 경험을 갖고 있다. 아픔이 사람을 성숙하게 하듯이, 패배는 정당을 진화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패배 후에 모든 정당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그야말로 와신하고 상담하면서 변하고 또 변해야 더 강한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어떤가?

어느 정당이든 위기에 처하면 당내의 일부 세력이나 그룹이 새로운 기치를 내걸고 혁신을 요구하고 나선다. 1970년대 초의 ‘40대 기수론’이 대표적인 예다.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 노선도 정통 마르크시즘의 실패에 따른 혁신 차원에서 시작됐다. 클린턴 대통령을 낳은 미국 민주당의 DLC, 영국 노동당의 현대화파도 당내 분파에 의한 혁신 성공의 사례들이다. 이런 혁신운동을 주창하는 그룹이 새정치연합 내부에는 없다. 친노-비노 간의 식상한 지분 갈등이나 일부 당내 서클의 당권투쟁 개입은 혁신운동이라기보다 이권운동에 다름 아니다.

맥락상 지금 혁신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하는 세력은 486그룹이다. 그런데 이들은 4·29 참패 이후에도 침묵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 2000년 총선부터 출마하기 시작했다. 출마 횟수만 4번이니 이들의 정치이력도 제법 상당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냉정하게 따지면 정치세력으로서 486은 무기력하다. 민주화운동의 보상 차원으로 국회의원직을 얻은 것에 만족할 뿐 복지·평화 시대를 여는 신세력으로서의 소명감, 결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의 티파티(Tea party)처럼 조직화된 당원들이 혁신을 주도하는 길도 난망하다. 새정치연합 당원 정체성의 평균, 즉 호남 출신에 자영업을 하는 평균연령 58세의 당원들이 조직화된 소수로 등장해 당을 혁신할 기동성과 참신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런 경험도 없고, 그들을 이끌 리더도 없다. 이 당의 가장 활동적인 시끄러운 그룹은 인터넷과 SNS에서 활동하는 일부 누리꾼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싸가지 없음, 즉 ‘무싸’ 정신만 북돋울 뿐 당의 건강한 활력을 제고하는 쪽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심하게 말하면 이들은 천박한 진보, 막말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깡통진보를 육성하고 있다. 요컨대 이들은 당의 역량을 키우기보다 약화시키고 있고,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티어파티(Tear party)다.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정치추진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새정치추진위원회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새정치연합으로 하여금 보통사람의 열망을 대변하고, 그들의 삶을 책임지는 정당으로 거듭나게 하는 혁신의 동력은 두 가지다. 하나는 대중성을 갖춘 유력 대선주자들의 정치연합이다. 문재인 대표, 안철수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이 혁신연대를 이루는 것이다. 3자 연대로 낡은 인물들을 솎아내고 당을 신선한 정당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다른 하나는 기초자치단체장들의 궐기다. 수원·고양·성남·부천 등 인구 100만 안팎의 도시에서 재선에 성공한 기초자치단체장들은 국회의원들의 정치독점과 계파정치의 폐해를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 중 상당수는 조직을 결성해 혁신운동을 전개하려 한다.

기초자치단체장들의 혁신운동은 이제 막 시작되는 단계이다. 하지만 이는 여의도 밖에서, 그것도 삶의 현장을 누비는 기초행정의 책임자들이 낡은 정치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들의 혁신운동은 지난 전당대회에서 기초단체장의 대표를 최고위원에 당선시키려 한 시도의 연장선상이다. 진보정치의 성패는 보통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의제화·이슈화하고, 그들을 정치적 지지로 묶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기초단체장들의 궐기는 새정치연합을 제대로 된 진보정당으로 탈바꿈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권력정치가 아니라 기초단체장들의 민생정치는 그 자체로서 새정치연합을 새롭게 만드는 힘찬 동력이 될 수 있다.

기초단체장들 중에서 이재명 성남시장과 염태영 수원시장은 민생정치의 상징이다. 서로 다른 스타일로 낡은 정치의 밑동을 허물고 있다. 조용한 염 시장이나 우렁찬 이 시장이나 지향하는 바는 같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을 챙기는 진보정치다.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유능한 행정가를 넘어 우리 정치가 지향해야 하는 민생정치, 즉 먹고사는 문제를 능숙하게 풀어내는 정치의 실례다. 이들의 도전이 새정치연합을 ‘지는 정당’으로 전락하게 하는 기득권의 앙시앵 레짐을 혁파하고, 진보의 새 시대를 여는 추동력이 되면 좋겠다. 분투를 기대한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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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민주연합에는 세 가지가 없다. 새정치도 없고, 민주도 없고, 연합도 없다. 새정치란 낡은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한편 무엇보다 보통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중심 의제로 삼는 정치다.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이런 새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민주도 없다. 정당에서 ‘민’은 당원이고 지지자다. 그런데 중요한 대목마다 다수를 이루는 이들은 소외되고 있는 반면 소수의 국회의원들만이 ‘주’로서 모든 의사결정을 독점하고 있다. 이건 명백히 반민주적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여러 정치세력의 연합체다. 가까운 과거만을 반추하더라도, 2011년에 박원순이, 2014년엔 안철수가 합류했다. 박원순으로 상징되는 시민운동 세력과 안철수로 상징되는 제3세력이 합쳐져서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그런데, 당명에 빗대자면 새정치세력과 민주세력 간의 연합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다. 지방선거 전에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안철수 세력과의 1 대 1 통합으로 구원받고선 작년 7·30 재·보궐선거 패배로 안철수 의원이 대표직에서 물러나자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공당으로선 무책임한 행위다. 그러니 새정치민주연합에 연합이 없다고 할 수밖에.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세 후보가 있다. 대권후보로서 문재인 대표, 안철수 의원, 박원순 시장을 일컫는 말이다. 진보진영에는 이상한 낙관주의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2017년 대선 필승론이다. 보수정권 10년이라 바뀔 때가 됐고, 새누리당의 후보군이 마이너리그라면 새정치민주연합은 메이저리그라는 게 그 이유다. 여론조사를 보면, 야권 후보들이 여권 후보들에 비해 강세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야권 후보들의 우위가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게다가 핵심 지지층의 투표율 격차나, 지역기반의 덩치 차이 등을 감안하면 여론조사에서의 미세한 우세는 그야말로 허망한 착시다.

부동의 1위,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던 안철수 의원의 대선후보 지지율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한때의 추억이 됐다. 지방선거 후 대안으로 부상하던 박원순 시장의 지지율도 푹 꺾여 이제는 그저 그런 수준이다.

안철수-박원순에 이어 다시 문재인 대표가 부상했지만 4·29 보궐선거 완패 이후 하락세로 돌아섰다. 인천 서구·강화을을 제외하고 야권의 텃밭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그것도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라는 절대 호재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힘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맥없이 졌다. 지지율 하락보다 이처럼 당 대표로서 강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 게 더 뼈아픈 대목이다. 안철수-박원순-문재인이 차례로 무너진 탓에 문·안·박의 동반 강세는 옛말이고 동반 하락이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자칫 동반 하락이 동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 대표의 리더십 약화가 기정사실로 굳어지면 안 그래도 총선 공천 때문에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당내 계파주의가 극성을 부릴 것이다. 자칫 문 대표가 식물대표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공천 물갈이 없이 예의 그 식상한 인물들이 정권심판론·야권연대에 기대는 낡은 정치가 다시 득세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총선 패배다. 다른 길도 있다. 문·안·박이 연대해 혁신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사람도 바꾸고, 정책도 손질하고, 행태도 일신해야 한다.

당의 유력한 대선후보 셋이 동맹을 맺어 혁신을 도모한다면 당내 전선은 계파 대결이 아니라 수구 대 혁신의 대결이 된다. 이렇게 해서 총선에서 승리하면 문·안·박의 대선 경쟁력은 동반 상승하게 될 것이다. 동반 몰락은 셋 중 누구라도 패배하는 길이라면 동반 상승은 누가 됐든 이기는 길이다.

동반 몰락이냐 상승이냐의 키는 일단 문재인 대표에게 주어져 있다. 그가 계파주의에 안주해 기존 질서를 온존하고, 그 속에서 ‘안전하게’ 대선후보가 되고자 하면 그는 ‘무난하게’ 패배하게 될 것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1일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마당에서 열린 5.1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해 물을 마시고 있다. (출처 : 경향DB)


반대로 총선 승리를 위해 당내 기존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안철수·박원순과 손잡고 당을 혁신해 당원·지지자들의 열의를 끌어낸다면 총선 후 경쟁은 치열해지겠지만 대선 승리는 더 확실해진다. 새정치, 민주, 연합 등 이 3가지를 복원하는 것이 4·29 보궐선거 패배에 가장 확실하게 책임지는 것이다.

안철수·박원순도 나 몰라라 해선 안 된다. 문 대표의 몰락이 곧 자신들의 기회는 아니다. 동반 몰락으로 이어질 뿐이다. 대선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이 목표라면 지금은 문·안·박 혁신연대로 총선 승리를 이뤄내야 한다. 경쟁은 그 다음 일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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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치부패다. 차떼기다 뭐다 해서 그만큼의 홍역과 대가를 치르고도 아직 정치부패는 남아 있는 모양이다. 성완종 게이트든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든 이번 사태는 누가 얼마나, 왜 돈을 받았는지에 대한 규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야 간의 정치적 유불리로 국한되지도 않는다. 성역 없이 파헤쳐서 엄벌에 처해야 한다. 하지만 강력한 사후처벌만으로는 부패를 막기 어렵다. 효과적인 사전 제어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엄정한 수사와 단호한 처벌만을 요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부패는 우리 정치에서 계속 반복되는가?

“정치하는 사람은 권력을 추구한다.” 베버의 이 말대로 정치는 불가피하게 권력을 다룰 수밖에 없다. 권력을 다루다 보니 그 권력을 활용해 부당한 이익을 쉽고 편하게 얻고자 하는 ‘지대추구’(rent seeking) 행위에 유혹당하기 쉽다. 유혹에 안 넘어가야 하지만 권력을 가진 터에 유혹이 있으면 부패할 가능성은 늘 있기 마련이다. 견물생심 아니던가. 정치인이 부패하지 않도록 사전에 제어하려면 몇 가지가 중요하다. 먼저 검찰·경찰과 법원 등 사정권력의 정상화가 필수적이다. 차별과 부패는 공생관계다. 사정권력이 공정하게 집행된다면, 즉 권력이 있다고 해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게 확실하면 정치부패는 줄어들 것이다.

정치부패는 불공정 경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권력자와의 인연에 따라 경쟁의 결과가 달라진다면 누구라도 부패할 인센티브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실력이 아니라 연고에 따라 경쟁의 성패가 달라지면 실력을 키우기보다 연고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건 당연하다. 강자가 곧 승자가 되는 강자독점, 승자가 혼자 다 먹는 승자독식은 부패의 인센티브로 작용한다. 경쟁의 대가가 패자에겐 너무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공정성도 높여야 하고, 나아가 경쟁을 완화하는 한편 경쟁의 결과에 따라 주어지는 대가의 격차도 낮춰야 한다.

검찰 관계자가 17일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정치권 금품 제공 의혹 사건과 관련한 자료들을 분석하고 있는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_ 연합뉴스


정치부패가 줄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정치구조다. 우리 정치는 일반 선거보다는 당내 공천 중심이다. 일반 선거에선 유권자가 서로 다른 정당의 후보들을 놓고 선택권을 행사한다. 당내 공천은 지도부나 실세가 선택권을 행사한다. 정치인이 유권자를 의식하게 만드는 정치구조라면 그들은 열심히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 하지만 정치인이 당내 권력자를 의식해야 하면 그의 구미를 맞추는 데 혈안이 된다. 패거리가 만들어지고, 계파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구조라면 공천도 일종의 지대에 다름 아니다. 지대를 둘러싼 먹이사슬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정경유착이다.

인물 중심의 정치나 선거를 조장하는 제도도 문제다. 정치의 주체가 정당이 될 수도 있고,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선거제도로 보면, 비례대표제는 정당 중심의 정치와 선거를 조장한다. 단순다수제, 특히 이른바 국민경선제(오픈 프라이머리)는 인물 중심 정치를 조장하는 대표적인 제도다. 그런데 인물 중심의 정치는 비용이 많이 든다. 믿을 건 자신뿐이고, 결국 각자도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물 중심의 정치가 극성을 부리는 미국에서 선거자금은 천문학적 규모다. 작년 중간선거에서 풀린 선거자금이 무려 40억달러(4조3000억원)다. 결국 인물 중심의 정치는 부패와 친화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정치부패를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부패의 양과 질을 현저하게 감소시킬 수는 있다. 부패는 무능의 다른 표현이다.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삶을 살피는 데 정치 에너지를 집중하게 하고, 그들 간의 경쟁을 치열하게 만드는 게 답이다. 정치부패를 개인의 심성이나 도덕적 의지에 맡겨놓지 말고 부패를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위를 쳐다보는 공천경쟁이 아니라 밑을 우러러보는 민심경쟁을 펼치도록 하면 부패는 줄어든다. 정치인이 권력의 마성에 정신을 잃지 않도록 제도로써 방벽을 쌓아야 한다. 다시 베버의 통찰이다. “비록 정치에 있어서 권력은 불가피한 수단이고 권력에 대한 야심은 모든 정치행위를 추동하는 힘 가운데 하나지만, 아니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벼락부자처럼 자신의 권력에 대해 허풍을 떨거나 권력감에 도취되어 허영에 참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순전히 권력 그 자체를 숭배하는 것보다 정치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게 하는 해로운 일은 없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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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소임은 갈등의 사회화에 있다. 사회화는 숱하게 많은 부분 갈등을 한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 제기하는 한편 그것을 개인적 부담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갈등, 또는 균열을 사회화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성격과 질, 힘의 관계 등이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누가 권력을 잡는지도 여기에 달려 있다. 어떤 갈등을 사회화해서 국가 의제로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이 정치세력의 실력을 가늠하는 첫번째 지표다.

등장한 갈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정치적 성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로 보느냐, 행정 실패로 보느냐에 따라 그 파장은 사뭇 다르다. 이렇듯 하나의 갈등을 어떻게 정의(define)하는지는 정치세력 간의 경쟁이나 선거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데 갈등을 대체(substitute)하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한 정치세력이 A 갈등을 의제화하려고 하면 다른 정치세력은 B 갈등을 의제화할 수도 있다. 어떤 갈등을 의제화할 것인지를 두고 정치세력 간에는 치열한 다툼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사실 선택된 갈등이 곧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은 안보(천안함)를, 새정치민주연합은 복지(무상급식)를 의제화하려고 경쟁한 것이 좋은 예다.

자신이 대표하고자 하는, 지지층에게 필요한 갈등을 의제화시켜내는 것이 정치세력의 일차적 과제라면 문재인 대표의 ‘유능한 경제정당론’은 적절한 선택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이라면 사회경제적 아젠다를 부각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다수를 점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계층적 이해관계를 잣대로 정치를 바라보고 선거에 참여하는 게 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선택된 의제들이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틀, 갈등구조, 아젠다 세팅을 프레임으로 부를 수 있다. 문 대표는 사회경제적 프레임을 선택했다. 성공할까?

일차적 관문은 4·29 재·보궐선거다. 이번 선거에서 문 대표는 3가지를 버렸다. 전략공천, 정권심판론, 야권연대가 그것이다. 그간 야당이라면 으레 들고 나온 전가의 보도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만약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당연히 이 3가지를 포기한 걸 두고 강한 반론이 제기되는 게 당연하다. 다음 총선 전략과 관련해 논쟁과 토론이 분분하게 일어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의제화와 이슈화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의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정치적 경쟁이나 선거에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안이한 판단이다.

의제화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갈등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면 이슈화는 그것을 중심으로 정치적 경쟁이 펼쳐지거나 대중적 호오(好惡)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지난 대선을 상기해 보면,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새정치연합은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초반에 의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기존의 태도를 바꿔 복지와 경제민주화 의제를 수용해버리자 이 의제는 선거의 쟁점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의제화에는 성공했으나 이슈화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의제화는 어떤 갈등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것이고, 이슈화는 갈등 해법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정치나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이슈화다. 간혹 의제화만으로 승리하기도 하지만 결정적 요인은 이슈화 여부다.

지난 대선 때 경제민주화 토론하는 새누리당 (출처 : 경향DB)


정치세력의 실력도 이슈화에서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문 대표는 이제 겨우 경제를 부각시키는 의제화에 성공했다. 성패는 이슈화 여부에 있다. 경제를 두고 새정치연합이 여당과 다른 차별화된 해법을 손에 잡히게 보여줘야 한다. 쉽고 간명한 쟁점으로 양자의 차이를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좋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지지층의 동원 및 확충에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반론도 강해지게 된다. 그들에게는 샤츠슈나이더의 이 충고가 답이다. “모든 패배한 정당·대의·이익은 기존의 노선을 따라 계속 싸움을 벌일 것인지 아니면 낡은 싸움을 포기하고 새로운 연합을 형성하고자 노력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가장 우려스러운 사태는 기존의 싸움을 계속하려는 완고한 소수파들이 어리석게도 낡은 갈등구조를 동결시켜 영원히 고립된 소수파로 남게 되는 경우이다.” 문 대표는 의제화를 넘어 이슈화로 승리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게 이기는 정치, 해내는 리더십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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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를 쓴 와타나베 이타루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격차를 벌리는 시스템입니다. 그런 문제를 조정하라고 정치가 있는 것이지만 결국 정치인들은 돈 많은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고 말죠. 저는 ‘정치가 그래도 뭔가 해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인 1표의 정치적 등가성에 기초해 1원 1표의 시장적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정치다. 와타나베의 충고에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 외에 격차를 해소할 다른 사회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문제는 정치다.

정치가 보통사람의 고단한 삶을 개선하는 데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그 정치의 효능이 체감되지 않을 때 정치는 잊히거나 거부된다. 민주정치와 선거의 경험이 쌓이면서 최근 정치를 ‘발견’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더불어 정치를 ‘부정’하는 움직임 역시 커지고 있다. 이 부정은 정치가 제 역할을 하거나 확장될 경우 손해를 보는 쪽이 주도한다.

따라서 진보가 치러야 할 첫 번째 싸움이 바로 대중이 정치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경제적 약자가 정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들의 주체적 자각이 아니라 진보 정당의 적극적 노력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보수는 사회경제적 이슈가 정치나 선거의 프레임으로 작동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사회경제적 프레임에 따르면 소수의 강자와 다수의 약자 간의 경쟁으로 유권자가 나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나 종교, 지역 등의 아젠다로 사회경제적 프레임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뉴딜체제라는 것도 사회경제적 약자들, 즉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된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 man)을 정치적 세력으로 묶어 이른바 ‘뉴딜연합’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대로 이 뉴딜체제의 해체는 보수가 문화나 도덕 이슈를 프레임으로 만들어 뉴딜의 사회경제적 프레임을 압도함으로써 가능했다.

보수는 복지체제의 사회경제적 효과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우회했다.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는 정부로부터 복지혜택을 받아 캐딜락을 몰고 다닌다는 한 흑인 여성을 복지여왕(welfare queen)으로 개념화했다. 이는 복지를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더 손해를 봤다는 주장이 아니라 복지의 부당한 수혜를 문제 삼는 문화적 접근이다. 민주당 대통령 시기가 공화당 대통령 시기에 비해 경제가 더 좋았다는 사실은 객관적 데이터에 의해 증명된다. 따라서 보수는 대놓고 진보의 사회경제적 실패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문화적 도덕적 프레임에 집착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3일 오후 관악구 신림동에서 고시촌 방문에 반대하는 한국청년연대 회원들과 관악 고시촌 1인 청년들이 피켓 시위대를 지나 청년 1인 가구 관련 타운홀 미팅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국의 보수도 이런 정치문법에 충실했다. 2012년의 총선·대선에서 복지나 경제민주화가 쟁점화되지 않게 만들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참패에서 보듯 복지 찬반으로 가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근 보수진영 일각에서 복지 찬반논쟁을 다시 들고 나오고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무상급식 중단이 대표적인 사례다. 2008년 대선에서 흑인 후보에게 패배한 뒤 2년 만에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대승할 정도로 강한 미국의 공화당조차도 저소득층과 노인 장애인을 위한 의료 프로그램인 메디케어(Medicare) 메디케이드((Medicaid)만큼은 손대지 못한다. 복지체험이 지닌 강력한 소구력 때문이다.

사실 새누리당의 선거 스트레스는 작지 않다. 경제적 성과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외교 안보도 시원찮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다. 보수정권 7년에 대한 피로감도 크다. 이런 약점을 메울 강력한 차기 대선주자도 없다. 어떻게 할까. 홍준표 지사가 선도한 복지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갈 수도 있고, 최근 시작한 사정 드라이브를 정치권으로 끌고 가 도덕성 논란을 조성할 수도 있다. 또 심상정 원내대표가 말한 용북(用北) 정치, 안보 이슈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다. 성과 없음을 숨기고 사회경제적 프레임의 작동을 막는 것이다.

관건은 야권의 대응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삶의 요건을 제공받아야 하는 권리가 T 마셜의 사회권(social right)이다. 쉽게 말해 ‘살 권리’라 할 수 있는데, 진보는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보수가 유혹하는 민주 프레임에 빠지지 않고, 사회경제적 프레임을 버텨내야 보통사람이 정치를 발견하고 자기 삶을 위해 투표에 나설 것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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