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선례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한다. ‘시민혁명’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지만, 과연 사태가 이런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지 논의를 아껴둘 필요가 있다. 김수영의 시 구절처럼,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불현듯 오는 것이고 가시적인 힘들을 통해 항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혁명은 “밤에 지나간 배”처럼 조용히 온다. 혁명은 평소에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규정된 것들이 무한하게 분출하는 정황이기도 하다. 이런 혁명의 모양새에 비추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당장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방만 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분명 세계의 논리에 기입되어 있던 ‘혁명적 상황’이 귀환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한때 집회가 너무 비폭력에 집착해서 문제라는 이야기가 오르내렸지만, 비폭력이라고 해서 폭력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간디의 비폭력이 스탈린의 폭력보다 더 폭력적이라는 철학적 탐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200만명이 넘게 모인 집회가 비폭력으로 일관할 수 있었다는 것도 대단한 에너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후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민주주의의 논리를 구성하고 있는 ‘87년체제의 합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합의가 물질적 토대로 전환된 것이 ‘대통령 직선제’이다. 군사독재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 상징적으로 지목하자면 ‘넥타이 부대’가 연일 거리를 누비면서 외쳤던 구호가 바로 대통령 직선제였다. 말하자면 지금 상황은 87년체제의 합의를 번복하려는 극우의 반동을 밀어내는 ‘체제의 반발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로 표상되는 ‘평화적 정권교체’는 87년체제의 합의를 이행한 결과였지만, 이른바 ‘산업화세대’에 속하던 일부 극우세력은 이런 합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립되어 있었다면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이들에게 ‘합법적 권력’을 부여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적 선거절차였다. 여기에 박근혜라는 ‘미스터리한 존재’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 속았다고 보수 정치인들이 입을 모으고 있지만, 당시 그들에게 이 미스터리한 존재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선동을 종결 지을 ‘능력자’로 보였을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을 품을 수 있는 포퓰리즘의 아이콘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이 미스터리한 존재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박근혜라는 이름은 말라죽어가던 극우의 뿌리를 되살려낸 구세주의 그것이었다. 여기에 태만한 보수의 포퓰리즘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지난 4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후진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태는 극우조차도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 ‘합법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극단적 민주주의의 유물론을 보여준다. 경제만 살린다면 ‘독재자의 딸’도 국가수반에 임명할 수 있다는 이런 ‘포용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이 포용성은 그 반대에 있는 이들, 다시 말해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상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일반 노동자를 구분하고, 정치적인 유가족과 그렇지 않은 일반 유가족을 나누고, 운동권과 일반 시민을 갈라치는 태도가 극우 보수 연합의 경우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편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편향성을 극복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오히려 그에 반대하는 집단에 합법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은 증명한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집권 역시 이런 민주주의의 편향성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똑똑히 보여준다. 트럼프 같은 ‘백인 쓰레기’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민주주의일까. 이 질문은 2012년 우리에게 던져졌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백인들처럼 그때 우리도 이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분명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베 정권이 평화헌법을 개정하고자 했을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일본의 청년들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당시 그 청년들의 행동에 십분 찬동하더라도 냉정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과연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그 자유민주주의에 ‘자이니치’는 포함돼 있는가. 전후 일본이 보여온 태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행동에 나서는 이들이 명징한 신념과 대의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 자체가 이념적 방향을 공고하게 만드는 쪽이라고 봐야 한다.

 

탄핵이라는 명백한 목표가 있는 지금이 지나고 나면 현재 벌어진 상황은 다시 봉합될 것이다. 그때 우리에게 어떤 목표가 남게 될지 질문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잃어버린 10년’을 거론하면서 태평천하를 약속했던 보수의 의제가 10년도 가지 못하고 몰락했다. 이 칼럼 연재는 그 보수의 의제를 분석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제 또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동안 부족한 칼럼을 읽어주신 독자 제현에게 감사드린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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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현실이 호락호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통령에게 쏠려 있는 시선 덕분에 정작 중요한 문제가 부각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사태의 원인은 대통령 자신이다. 그러나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지금까지 대통령의 문제를 까맣게 몰랐다는 듯이 구는 보수 언론들이다. 반추해보면, 이상 징후는 취임 초기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인수위 시절부터 엇박자가 빈번했고, 외교 분야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세월호 정국에서 드러난 무능이나 대북정책에서 보여준 모순은 이 정부에 문제가 있고, 그 원인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이 대통령을 독대한 적이 없다는 발언은 충격적이라기보다 어이없는 일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이 정부를 구성했던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인지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침묵했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직접적으로 몰랐다고 하더라도 어렴풋이 짐작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만일 지금 앞다투어 고백하듯이 진짜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면 그 또한 책임 방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방치한 셈이다.

한때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면서 ‘좌파정부’가 망친 대한민국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보수들이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결코 망각의 강을 건널 수 없다. 말하자면, 지금 이 위기는 단순히 대통령 하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보수정권 재창출이라는 명분으로 대통령과 관련한 문제를 축소 또는 억압했다는 사실이 더욱 심각한 것이라고 하겠다.

대통령 일인의 권력에 국정이 좌우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개헌 논의가 나오는 배경도 이 때문이다. 대통령이 국민을 대표하고 의회가 경제적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기이한 제도는 87년 체제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국 정치 발전의 질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사태를 보고 있으면, 과연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역설적으로 대통령 일인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만들어온 주역이 정치인들 자신이 아닌지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순실이라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농락당했다는 억울함이 압도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조차 독대할 수 없는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이 침묵을 유지했던 배경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임명한 각료들과 국정을 논하지 않는 대통령의 행태가 ‘독특한 국정 스타일’로 여겨졌던 것일까. 오히려 그렇게 대통령이 무엇을 하든 자신들의 자리만 보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복지부동이 지금 사태를 만들어낸 복합적인 원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은 보수 정치 자체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유발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바꾸고, 대한민국 경제를 발전시키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보수 정치인들이 사실상 최순실 게이트를 막지 못했거나 오히려 방조했다는 사실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퇴진에 미온적이었던 야당 정치인들 역시 책임을 벗어나긴 어렵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기보다 정치공학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답답함은 여전하다는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혁명’이니 ‘봉기’를 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생각이다. 물론 새로운 정치세력은 쉽게 출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 필요한 것은 대통령 퇴진과 집권전략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전망이다.

이 전망은 그냥 얻어진다기보다, 사태를 사태 그대로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통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우화가 떠오른다. 서로 권력에 아부하던 그 신하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한 어린이의 솔직함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정치인의 권위는 진실에 대한 솔직한 태도에서 발생한다. 지금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대통령도 한때는 진솔한 태도로 인해 카리스마를 얻기도 했다.

분출하고 있는 시민의 요구가 또 다른 권력엘리트의 자리이동에 머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자유민주주의’라는 표상으로 굳어져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더욱 발본적으로 주장할 필요가 있다. 급진화된 시민의 주장만이 보수 정치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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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미국의 가수 밥 딜런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온갖 추측을 일순에 잠재운 놀라운 결론이었다. 1964년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가 공식적으로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것만큼이나 충격이었다. 이번 수상 결정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문학상’을 ‘가수’가 수상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음유시인을 예로 들면서 밥 딜런의 수상을 정당화했지만, 궁색한 논리일 뿐이다. 엄연히 오늘날 ‘문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고대의 시나 글과 다른 근대적인 글쓰기 체계이고, 수상 대상을 결정한 이들조차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문학’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어딘가 어색하다.

의도야 무엇이었든 스웨덴 한림원이 파격을 노렸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사실은 많은 것을 암시해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실 이번에 일어난 사건의 실마리는 이미 1964년 사르트르가 수상을 거부할 때 발표했던 ‘서한’에 감춰져 있다. 사르트르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수상 거부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사르트르는 작가로서 어떤 공식적인 명칭도 부여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표명한다. 작가는 오직 작가의 이름으로 불려야지 “노벨상 수상자 아무개”라는 식으로 불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기관이나 조직을 위해 작가라는 지위를 빌려주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었다. 그다음으로 사르트르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으로서 서방세계에서 주는 대표적인 문학상을 받을 경우,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 삼는 ‘우파들’에게 “잘못된 해석”을 유도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71세 때인 2012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AP연합뉴스

물론 이런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 소감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고, 다분히 당대의 급진적인 정치상황을 반영한 ‘과도한 제스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는 노벨 문학상의 딜레마를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퍼포먼스’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을 거부하는 사르트르의 ‘소감’이라기보다, 그가 제시한 노벨 문학상의 정체성이다.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이라는 것이 ‘세계문학’을 대상으로 ‘자유’라는 가치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방세계가 만들어낸 제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노벨 문학상에 감춰진 정치적 성격을 지적한 것이다. 사르트르도 지적하고 있지만 이 정치적 성격이란 것은 특별한 진영논리를 강화하거나 특정한 이념성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정치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르트르는 ‘세계문학’의 범주로서 노벨 문학상을 거론하고 있다. 말하자면, 기원이야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노벨 문학상은 1960년대 이후에 ‘세계문학’이라는 이상을 공유하는 이들을 통해 명분을 유지해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를 두고 몇 년간 논쟁이 펼쳐졌지만, 유럽이나 북미 문학상과 달리, 노벨 문학상은 특정한 언어권 문학이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언어권 문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분명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 으레 나왔던 푸념이 ‘번역’ 문제였지만 노벨 문학상이 포괄하는 ‘세계문학’은 단순하게 번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노벨 문학상은 기존의 ‘세계문학’,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문학시장’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발굴해서 새롭게 조명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에 딱히 특정 작가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었다고 해서 수상 대상에 오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세계문학’이다. 사르트르가 수상 거부 소감에서 밝히고 있듯이, 노벨 문학상이라는 ‘세계문학발굴제도’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동요하는 세계체제를 통합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이기도 했다. 사르트르도 스웨덴 한림원이 “부르주아적 기관”이기 때문에 이 상을 거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이 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역설적으로 노벨 문학상의 ‘세계성’ 때문이었다. 여전히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이 불타오르던 그 시절 사회주의자 사르트르에게 논란을 일으킬 상을 받느니, 거부하는 것이 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효과적이라고 판단할 법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 노벨 문학상은 ‘세계문학시장’에 들어오지 못한 다양한 ‘문학들’을 포섭하는 기능에 충실했다. 사르트르 같은 ‘사치’를 누릴 수 없었던 제3세계 작가들이 이 ‘발굴제도’를 통해 ‘세계문학시장’에 자신들의 문학을 선보이고 각광을 받는 일들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 밥 딜런의 수상 소식에서 읽히는 상황은 이런 노벨 문학상의 고유성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모종의 위기감을 읽어내는 것은 너무 과한 해석일까. 이미 작년부터 균열이 예감되었지만, 더 이상 노벨 문학상이 ‘세계문학시장’에서 권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조건도 이런 변화에 한몫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나는 이것이야말로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의 안과 밖이 무색해진 현재를 보여주는 장면들 중 하나라고 본다. 에릭 홉스봄이 지적하듯이,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세계체제의 산물이다. 때늦게 밥 딜런이 ‘세계문학의 무대’로 불려 나온 것은 그러므로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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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부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고, 외교안보 불안을 우려하는 국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정부는 강행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일방적으로 배치 지역으로 통고받은 성주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았다. 항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단호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24일 오전 경북 성주군 성주읍 한 아파트 옥상에 사드배치 반대를 주장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중국이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일축하면서 북한의 미사일로부터 남한을 지키기 위한 조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대통령 담화가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고 있는 사실관계는 이런 대통령의 자신감을 의구심에 빠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익숙한 ‘안보’ 논리를 내세웠지만 정작 사드는 수도권 방어용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미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비라는 보도가 설득력을 얻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완강하게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최초의 이유였던 북한의 미사일에 대응한다는 ‘안보’ 논리는 궁색해졌지만, 한반도의 전쟁 억지력을 담당하는 미군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상 한국의 ‘안보’는 전후 세계질서를 통해 형성된 것이고, 최근 학계의 연구가 뒷받침하듯이, 한국전쟁은 냉전의 결과라기보다 그 냉전을 본격화한 계기였다는 사실을 참조한다면, 미군을 통해 한반도의 안정을 보장받는다는 정부의 논리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방한한 프린스턴 대학의 존 아이켄베리 교수도 지적하듯이, 냉전을 통해 형성된 전후 세계질서라는 것은 ‘필요악’에 가까운 리바이어던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질서의 기원이 잘못되었고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도, 이 리바이어던을 해체한 뒤에 찾아올 혼란은 지금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런 주장을 ‘학문적’으로 반박하기는 쉽지만,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 주장을 뒤집을 만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선뜻 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발간된 <세계질서>라는 책에서 헨리 키신저는 미국을 “양가적인 강대국”이라고 칭하면서 21세기 세계질서의 재편에서 이런 예외적인 미국의 본성은 긍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키신저는 미국을 지키는 동맹국이나 다자관계의 지지나 요청이 없더라도 이 질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미국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키신저가 말하는 “미국적 가치의 본성”이라는 것에 대한 입장은 분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맹렬하게 몰아친 ‘트럼프 현상’이 이런 키신저의 생각에 반하는 다른 미국의 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후 세계질서를 지탱해온 “양가적 강대국”이 과연 앞으로도 지속가능할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사드 배치를 둘러싼 분란에서 한국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재편에 편승하는 것이 ‘국익’에 합당하다고 판단한 것이고, 그래서 사드 배치를 결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야당들 역시 이 문제에서 크게 이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가장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당사자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성주군민들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미군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을 찾다보니 성주가 지목된 것이겠지만, 이 상황이야말로 이른바 세계질서라는 명목으로 ‘지역’에 가해졌던 과거의 불행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아시아에서 벌어졌던 가혹한 동족상잔과 인종청소의 명분은 바로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발명된 반공주의였다. 반공주의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왜 반대하는가. 자본주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왜 자본주의를 지켜야 하는가. 공산주의는 비인간적이고 자본주의는 인간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지난 상황들을 보면, 자본주의 체제라고 해서 특별히 인간적이었다고 말하기 민망해진다. 한창 자본주의 개발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난무했던 폭력은 자본주의 체제 역시 공산주의 체제 못지않게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런 비인간성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한국의 후진성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질서의 경찰을 자처해온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근 사태들을 보면 이런 주장의 신빙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전후 세계질서의 문제는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양자택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어떤 체제든 보편을 가장한 ‘질서’는 언제나 ‘지역’의 희생을 강요한다. 이 ‘질서’는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연루되어 있다. 이 ‘사람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문제는 수면으로 떠오른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내 마당에 사드는 안돼”라는 ‘지역 주민’의 이기주의와 ‘국익’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상황은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지극히 거시적인 정치가 일상의 정치와 조우하고 있는 장면이다. 진정 한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까.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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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프로불평러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의미역을 가지고 쓰이긴 하지만, 대체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이를 일컬어 프로불평러라고 부르는 것 같다.

프로페셔널과 불평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영어식 조어로 만들어낸 이른바 언어파괴형 농담이라고 할 수 있다.

EU탈퇴 지지자들이 영국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농담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 말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2’ ‘쿨병’ ‘설명충같은 인터넷 용어들과 함께 특정 개인의 행동을 규범적으로 재단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말하자면, ‘프로불평러라는 말은 최근 인터넷에서 두드러진 현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인 셈이다. 과거에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이 규범 파괴의 장이었다면, 불과 10여년이 흐른 뒤에 이 장은 역설적으로 규범을 생산하고 강제하는 욕망 기계가 되었다.

아론 슈스터는 <쾌락의 곤경>이라는 책에서 불평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유태인 농담 하나를 들려준다. 러시아행 열차 칸에 한 여행자가 목마름을 호소하는 노인과 동승한다. 그 노인은 계속 아아, 목이 마르다고 소리친다. 그 소리를 견딜 수 없어 여행객은 노인의 목을 축여주기 위해 물을 사서 건넨다. 물을 마신 노인은 한동안 잠잠하지만, 계속 여행객의 눈치를 살피다가 갑자기 아아, 나는 목이 말랐어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이 농담이 보여주듯, ‘불평은 사적인 문제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기제라는 것이 슈스터의 주장이다. 이데올로기는 사적인 차원을 넘어선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의미한다. 농담에 등장하는 노인에게 중요한 것은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이었다기보다 그 목마름을 계속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목마름을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노인에게 지극한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평은 자기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설정하는 어머니가 바로 불평하는 존재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불평하는 존재프로불평러라고 부르고 조롱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기제인 불평을 사적인 성격이나 경향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냉소주의이다. 냉소주의는 이데올로기를 비웃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냉소주의는 계몽의 피로감에 따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믿는 이들이 그 계몽의 결과를 회의하는 자기부정이 냉소주의를 이루는 핵심 원리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변해야 할 것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냉소주의의 논리다.

과거 학생들이 시위라도 할라치면 이른바 어른들불평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높은 지위에 올라 그때 세상을 바꾸라고 조언하곤 했다.

물론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러한 주장 역시 냉소주의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평을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리면, 객관세계의 변화는 불평이라는 기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불평은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항상 구조적인 차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불평러라는 용어는 이런 의미에서 불평에 대한 냉소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불평이라는 쾌락을 멈출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불평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감히 불평하지 못할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불평자체라기보다, ‘불평할 수 있는 권리. 이 권리는 종종 권력과 동의어를 이룬다. 이른바 갑질은 이런 불평의 권리가 권력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모두는 불평할 수 있지만, 모두 다 마음대로 불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 평등주의는 이런 사각지대를 과소평가한다. 부자와 거지는 원칙적으로 평등하지만, 구걸을 금지했을 때 피해를 보는 것은 거지이지 부자가 아니다.

불평도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 우리 모두는 불평을 즐길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평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쥔 이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불평러는 불평등한 불평의 현실에 좌절한 이들이 만들어낸 풍자이다. 문제는 프로불평러라는 말이 전제하는 불평하지 말자라는 금지의 규범이라기보다, 그 규범 너머에 있는 불평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불평등한 현실일 것이다. ‘땅콩 회항이나 라면 상무처럼 감정노동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불평은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연 불평의 불평등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쾌락이 사실상 불평등한 조건의 산물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 불평등성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른바 주류 경제학의 논리다.

그러나 이 불평등성은 개선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불평의 지속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은 축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목마름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순 없다. 욕망의 정치가 가진 양가성을 어떻게 변화의 에너지로 만들 것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천명한 브렉시트사태는 이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때, 진보정치세력에게 닥쳐올 재난이 무엇일지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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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인줄만 알았던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트럼프를 미치광이 취급했던 이들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본선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트럼프 현상이 무시할 수 없는 상승력을 가진 실체적 열망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미국은 대체로 리버럴리즘과 보수주의가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온 국가이다. 급진주의를 배제한 보수 양당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보편 모델로서 추앙받아 왔다. 이런 자유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이 반파시즘 전선에 동참하면서 가치화되었고, 냉전시기를 통과하면서 확고한 ‘자유 진영’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트럼프 현상은 이렇게 미국 주도의 전후 세계 체제를 지탱해왔던 정치적 질서에 이상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이상 기류는 트럼프가 연일 내뱉는 ‘고립주의’라는 겉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사실상 그 뿌리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스크린에 덮여서 보이지 않았던 인종주의, 반지성주의, 백인우월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등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지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이런 극우주의 경향이 트럼프라는 프리즘을 통해 제 색채를 드러낸 것이다.

트럼프 현상의 본질은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심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의견을 대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완전한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주주의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 지명이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_AP연합뉴스

이런 판단은 이성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다. 트럼프의 캠페인이 혐오 정서를 부추기는 방식으로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시사한다. 트럼프 현상 역시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반민주주의가 세를 얻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1980년대 이후 미국은 하나의 미국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규범들을 만들어냈는데, 그중 하나가 ‘정치적 올바름’을 위한 문화운동이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는 차이를 존중하고 소수성을 옹호한다는 취지였지만, 일정 부분 ‘정치적 올바름’ 자체를 규범화해서 이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것을 모두 나쁜 것으로 규정해버리는 교조적 경향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리버럴리즘의 한계가 트럼프 현상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미국의 트럼프 현상은 공화당으로 대표돼 왔던 보수주의가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시 정부가 노골적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공화당은 정치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기독교 근본주의와 손을 잡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라크 침공을 십자군 원정에 비유했던 수사학은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경기침체는 공화당을 지지하던 중산층의 이탈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합리적 유권자’에 해당했던 이들이 이탈하면서 만들어진 공백을 채운 것은 이민자와 소수인종에 대해 불만을 품은 백인 노동자들이었다. 불법 이민자들과 소수인종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규범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쉽지 않았던 이들은 ‘국경 폐쇄’를 소리 높여 외치고, 남의 나라를 위해 미국의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트럼프가 자신들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대변해준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릿광대라고 하기에 트럼프의 제안은 구체적이다. 트럼프는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 “미국을 보호할 것이다” “우리는 유럽과 다른 길을 갈 것이다” 등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더불어 해외로 이전한 공장을 불러들여 생산직 일자리를 늘리고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겠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아 불법 이민을 근본적으로 막아서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파격적 주장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온 백인 노동자들에게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해 만에 하나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아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내세우는 ‘고립주의’는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게 만든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미국 우선주의는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입장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사실상 트럼프와 힐러리는 정책적인 측면에서 거의 변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든 힐러리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에게 모두 부담스러운 대통령들일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영향 못지않게 트럼프 현상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른바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 역시 트럼프 현상 같은 포퓰리즘에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이 현상은 진전일까 퇴행일까. 민주주의의 역설을 넘어선 민주주의를 고민할 때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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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끓던 4·13 총선이 끝났다. 여당 압승이 예측되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총선 전 이 지면에서 “이변을 기대한다”고 썼던 나의 예상은 맞았다. 그러나 나의 기대를 넘어선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클릭한 정의당을 제외하고 노동이나 환경 문제를 의제로 설정하는 ‘진보정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왜 ‘진보정당’은 유권자를 매혹하지 못하는 것일까. ‘진보정당’에 무관심한 유권자를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진보정당’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지금 현재 한국에서 ‘의회정치’라고 부르는 민주주의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번 투표는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말만 총선이지 실질적으로 차기 대권주자들의 ‘체력장’에 가까웠다. 유권자들은 권력교체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사분오열되었을망정 야권에 표를 몰아주었다. 박근혜 정부와 집권여당에 대한 반감이 선거제도를 통해 표출되었다는 진단은 그래서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총선 이후 추락하고 있는 대통령 지지율이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론은 여야의 대립구도에 주목해서 여소야대 정국의 탄생을 집중 보도했지만, 이번 총선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누가 여당이고 누가 야당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이다. 국민의당이야말로 바로 이 혼돈 상황의 의미를 말해주는 증거처럼 보인다.

분명 국민의당은 새누리당이든 더불어민주당이든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이 상황을 두고 과거 자민련과 국민의당을 빗대는 평가도 있지만, 초록이라고 다 똑같은 색은 아니다. 자민련과 국민의당이 얹혀 있는 정치적 지형도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번 총선은 정권교체에 대한 유권자의 마음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대통령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와 장기집권 음모론을 단숨에 날려버린 선거였다.

여하튼 유권자가 바란 것은 정권교체였고, 거기에 합당한 ‘인물’에게 표를 던져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중요했던 것은 정당이었다기보다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만들 정치인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국민의당 천정배, 안철수 공동대표가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_연합뉴스

선거 결과는 집권여당보다도 야당에 차기 ‘대통령감’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지만, 사태는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중요한 지표를 제공한 ‘부동층’의 향배가 여야 정권교체를 결정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 ‘부동층’에게 사실상 여야는 따로 없다는 점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 역시도 뚜렷한 이념이나 노선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겉으로는 ‘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진실은 서로 다른 정치인 개인의 역량들이 각축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라는 변수도 있지만, 역시나 이번 총선에서 ‘북풍’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여전히 진보적 의제는 선별적이나마 보수정치인들을 도드라지게 보이기 위한 장식으로 동원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적인 규범에 어긋나는 급진적인 의제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당해서 처음부터 배제될 것이다. 뚜렷한 의제의 방향이 없는 선거는 결국 역량 있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로 수렴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총선을 거치면서 정당은 표를 가졌지만, 정작 그 표를 받은 정치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정치인들의 관심사는 대체로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인지, 이 궁금증에 멈춰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차기 대권주자들 역시 차기 대통령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게임에 뛰어들 채비를 차리느라 분주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들처럼 자신들의 역량이 선거 결과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유권자들이 정당에 표를 던진 이유는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최선의 답을 찾은 결과일 뿐이다. 선거는 유권자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라지만, 정작 유권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 이외의 답을 말할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게다가 다수가 선택한 의제 이외에 다른 것은 비합리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일쑤다. 자유민주주의의 비밀은 이것이다. ‘진보정당’이 지금 정치구도에서 언제나 찬밥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선거가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답 내에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규칙은 새로운 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인 셈이다.

전 체코공화국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은 정치를 ‘불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실현하는 예술이 바로 정치라는 의미이다. 이런 정치의 예술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가는 예술가의 덕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하벨의 주장이었다. 그 덕목이란 지금 자신의 처지와 전체를 연결해서 생각함으로써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차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수의 재편이 가져온 새로운 국면이 그냥 ‘대통령 뽑기 게임’으로 끝나지 않기를 희망한다. 지리멸렬함에 빠져 있는 이 사회에 새로운 생각을 부여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출현할 수 있을지 관심 깊게 살펴볼 일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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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총선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여야의 구분이 따로 없다는 점인 것 같다. 여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있다. 선거라는 공간이 열리자마자 평소에 숨어 있던 긴장들이 모래알처럼 분열했다. 과거 같으면 민주 대 반민주로 나뉘어서 야당과 여당이 명분 싸움을 했겠지만, 이제는 야당이든 여당이든 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심판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 심판의 근거는 바로 경제이다. 야당이 경제 문제를 정부와 여당의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여당은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법안을 제때에 통과시켜주지 않은 야당의 책임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설득력으로 치자면 여당의 주장은 다소 억지스럽다. 여당 관계자들도 인정하듯이, 지금 현재 불거지고 있는 양극화나 청년실업 문제, 그리고 경제성장 둔화는 현 정부 들어 발생한 것이라기보다, 보수 집권 훨씬 이전부터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경제 문제에 관한 한 여야 모두 떳떳하게 자신들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종인 대표를 영입해서 “문제는 경제야”라는 오래된 빌 클린턴의 전략을 ‘재활용’하는 야당이 오히려 문제를 적절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절하게 문제를 파악했다고 해서 그 문제의 답이 선거결과로 주어질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경제 문제를 내세우면서 정치를 쓸모없는 과잉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이 보수였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야당의 ‘보수화’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더민주가 야성을 잃었고, 진보의 이념을 포기했다고 주장한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더민주가 집권하기 위해 야성을 되찾고 왼쪽으로 이념적 위치를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가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대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집권이지 야성과 이념일 수 없다. 이른바 ‘차악 선택론’은 한국 정치가 미개하거나 후진적이어서 발생한다기보다, 대의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가 일으키고 있는 반향은 ‘막말’보다도 이런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히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규범 때문에 발설하지 못했던 민감한 사안에 대해 마음껏 직설화법을 구사했다. 그의 직설화법은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을 초래할 정도로 파장을 일으켰다. 할리우드에서 진보적인 배우로 통했던 <델마와 루이스>의 주인공 수전 서랜던은 힐러리 클린턴과 트럼프가 대선에서 후보로 겨룰 경우 누구를 지지할지 질문하는 기자에게 선뜻 힐러리를 지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애매모호한 서랜던의 입장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트럼프가 외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나 미개한 국민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상식으로 통했지만, ‘정치 선진국’이라고 숭앙을 받던 그 미국 본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트럼프 현상’은 이런 상식을 거스르는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엘리트정치를 지향한다. 엘리트는 이른바 ‘검증된 전문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문성에 바탕을 둔 ‘상호 감시’의 기능을 담당하는 당사자가 바로 시민사회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았을 뿐, 시민사회 역시 ‘검증된 전문가’라는 점에서 정치집단과 대등한 지위에 놓인다. 정치집단과 경쟁하면서 감시기능을 수행하는 시민사회는 현대 정치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구성요소였다. 문제는 이 시민사회가 더 이상 감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경험이 정당정치로 진입하기 위한 경력으로 포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사실상 거대정당 이외의 정치는 정치적 의제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자유민주주의 정치 자체의 종언을 드러내는 징후인 것처럼 보인다.

엘리트정치를 당위적인 것으로 인준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명분은 전문가 집단의 상호 감시가 특정 집단의 독주를 막을 수 있다는 원칙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 시민사회의 감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원칙이 무력해질 때 트럼프 같은 정치인들이 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천 파동이니 야권 분열이니 온갖 부정적 수사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이번 선거만큼 상식을 뛰어넘는 양상을 드러낸 경우도 없었다. 예측불가능한 이변들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속출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것만이 자유민주주의가 만들어놓은 교착상태를 해결할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확인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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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이 한국에서도 화제다. 정가는 물론이고 장삼이사들에게도 관심거리이다. 그만큼 이변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국 대선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다. 힐러리도 관심을 끌 만한 정치인이긴 하지만, 샌더스와 트럼프가 일으킨 ‘바람’이 없었다면 이만큼 미국 대선이 먼 나라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게 흥미로운 것은 샌더스 ‘열풍’이라기보다 트럼프 ‘광풍’이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교육학자인 헨리 지루는 최근 한 방송과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어떤 정치인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의미심장한 논평을 남겼다. 트럼프의 태도나 성격을 거론하면서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다거나 히틀러와 다르지 않은 파시스트라고 자질 문제를 제기하지만, 여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트럼프를 지지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엄연히 미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지루의 발언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른바 전후 세계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경찰 노릇을 자임해온 미국의 한복판에서 식을 줄 모르고 끓어오르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참으로 자가당착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트럼프의 출현이 전혀 생뚱맞은 돌발 상황은 아니다. 트럼프의 지지율을 떠받치고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반지성주의라는 일부 지적이 있는데, 미국은 이 방면에서 본토라고 할 만하다.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지식인에 대한 불신과 반감에 기초해서 지적인 작업 전반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사회적 경향이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책에서 미국 반지성주의의 뿌리가 기독교 복음주의에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복음주의의 신생활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기존 성직자들을 ‘위선적인 집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오직 성서로 돌아가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호전적인 반지성주의 운동을 펼쳤다.

이처럼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지식인 자체를 좌파로 간주하고 견제하는 우파적인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독교 복음주의를 동력 삼아 미국 사회에 복류하고 있던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노골적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혐오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이런 정치 혐오에 기대어 자신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정치 혐오의 정도로 친다면, 한국도 미국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싶다.


흥미롭게도 한국의 몇몇 정치인들은 자신을 샌더스에 빗대어 언급하곤 했다. 이른바 정치혁신을 이끄는 새로운 ‘바람’의 주역이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리라. 그런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평소 한국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샌더스보다는 트럼프에 더 가까운 이들이 더 많은데 왜 이들은 샌더스에 자신들을 즐겨 비유하려고 했던 것일까. 한국 정치인들 중 트럼프와 자신을 비교하는 경우는 없었다. 한국 정치인들 중에 트럼프에 준하는 이는 없는 것일까.

얼마 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보수기독교계가 주최한 국회기도회에 참석해 기독교 교리를 들먹이면서 동성애법과 차별금지법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들이 밝힌 입장은 지금 미국 대선 캠페인에서 트럼프가 온갖 막말을 동원해서 부르짖는 내용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이다. 이들에게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 물어본다면 아마도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기독교계의 지지가 필요해서 그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본심이야 어떻든 이런 발언을 기독교계가 지지한다면, 한국에 만연한 극우주의의 온상이 기독교계라는 사실만은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트럼프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평소에 미국 사회에서 쉬쉬하고 있던 온갖 사안에 대한 ‘속 시원한 대책’을 내놓는다. 대개 이런 대책은 민주주의라는 원칙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복잡하고 피곤한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트럼프는 모든 미국인이 자기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아메리칸 드림을 자기 방식대로 약속한다. 과연 이런 트럼프가 자격 미달 정치인의 광기라고 볼 수 있을까.

한국의 정치현실을 돌아보면, 이런 ‘트럼프 현상’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치인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온갖 막말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본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국회에 입문하는 것을 ‘개인적 출세’라고 생각하는 것도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트럼프에 비기지 않고 샌더스나 힐러리에 겹쳐 보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트럼프 현상은 이미 한국의 정치가 실현하고 있는 ‘오래된 미래’이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보이는 모습이야 어떠하든 한국의 정치인들이 자신을 트럼프와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동기를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대중의 지지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용기’까지 우리 정치인들이 갖추기를 희망하는 것이 과한 욕심은 아닐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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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실을 빗대 부르는 ‘헬조선’ 또는 ‘지옥불반도’라는 말에서 어떤 정치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봇물을 이루는 것 같다. 바야흐로 선거철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시도가 성공적일 것이라고 섣불리 예단하기는 어렵다. 물론 통계적으로 청년이 야당에 투표할 확률이 높고, 지금 당장 코앞에 닥친 현실에 대한 불만이라면 무엇이든지 동원해야 하는 기성 정치권으로서 청년세대가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헬조선’ 현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용하는 것까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헬조선’이라는 말을 근거로 지금 사회에 대한 청년세대의 불만이 극에 달해서 마치 금방이라도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 같다는 진단은 어딘가 석연치 않을 뿐만 아니라 충분하지도 않다. 특히 ‘헬조선’을 ‘헤븐조선’으로 만들기 위해 청년들이 투표장에 가야 한다는 식으로 구태의연하게 늘어놓는 ‘어르신들’의 설교는 왜 지금 청년세대가 다른 수많은 비판적인 표현을 두고 한국의 현실을 비꼬아 ‘헬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는 기성세대의 오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이런 움직임은 사실상 청년세대를 대상화해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보다 선거에서 더 많은 표를 얻는 일이라면 결과야 어떻든 일단 지르고 보겠다는 얄팍한 속내를 드러내는 징후에 불과하다. 솔직히 ‘헬조선’이라는 말은 이런 가식적 제스처 자체를 조롱하는 표현에 가깝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에서 중요한 의미는 ‘헬’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 숨어 있다.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기성세대는 ‘헬’의 뜻을 되새기지만, 사실상 ‘헬조선’은 한국이 전근대적이었던 조선처럼 후져서 헬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칼럼니스트 박권일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헬조선’은 ‘미개’라는 말과 쌍을 이루는 말이다.

‘헬조선’에서 작동하고 있는 프레임은 ‘진보 대 보수’라기보다 ‘문명 대 미개’이다. 한때 한국에서 진보세력에 의해 보수세력은 ‘미개’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헬조선’에서 진보세력은 또 다른 ‘미개’로 분류되고 있을 뿐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과거의 냉소주의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냉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미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냉소주의라고 할 수 있다.

헬조선_경향DB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가 분석했듯이 현대의 냉소주의는 “계몽된 허위의식”이기 때문에 계몽의 전통 자체에 대한 불신을 포함하고 있다. 계몽의 이중성에 근거한 이런 냉소주의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허위라고 스스로 깨닫고 있기 때문에 지탱된다. 그러나 지금 유행하고 있는 ‘헬조선’의 논리는 이런 냉소주의의 역설을 한 번 더 뒤집어 놓은 것 같다.

‘헬조선’은 ‘죽창’이라는 저항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허위를 방패로 삼는 냉소주의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자신의 삶에 닥친 조건들이 ‘노오력’만으로 극복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른바 ‘수저론’은 이런 불가항력적 물질성을 표현하는 수사라고 볼 수 있다. ‘헬조선’은 정치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헬조선’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문명’을 찾아서 ‘탈조선’하거나 아니면 ‘미개’를 끝까지 밀어붙인 ‘죽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헬조선’의 논리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아시아에서 빈번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근대화의 논리에서 ‘헬조선’과 유사한 사고방식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사회다윈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역사를 민족 간의 약육강식으로 설명했던 근대 아시아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조국은 말 그대로 ‘헬’이었다. 역사를 이렇게 진화의 문제로 파악하는 순간, 돌연 정치는 소멸하고 자연 상태의 생존경쟁만이 중심 문제로 남게 된다. 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오직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사실 정치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이런 ‘먹고사니즘’의 악무한일 것이다. 정치는 생존경쟁에 빠져 있는 삶을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계기이다. 지금 ‘헬조선’이라는 말에 들씌워져 있는 ‘문명 대 미개’라는 프레임을 ‘진보 대 보수’의 대결로 바꾸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과연 이런 ‘사건’이 이번 선거철에 일어날 수 있을까. 많은 것이 그 누구도 아닌 정치인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더 이상 국민을 탓하면서 수준 낮은 정치를 비난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이미 한국은 충분히 ‘헬’이다. 한국이 ‘헬’인 이유는 국민이 ‘미개’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더 이상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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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서울시민’을 대표한다는 어떤 분들이 박원순 시장을 ‘직권남용 및 공연음란 방조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고 한다. 고발 내용으로 적시되어 있는 ‘공연음란’이 무엇인지 봤더니 지난 6월28일 열린 ‘퀴어문화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서울광장은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활동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유로운 통행을 방해하거나 혐오감을 주는 행위, 영리를 목적으로 한 광고 및 판매 행위, 취사행위, 주류 반입 행위 등을 못하게 돼 있다”는 것이고, 문제의 퀴어문화제에서 “동성애자들은 실오라기 같은 팬티 하나만 착용한 채 전신을 노출하는 등 성적 수치심과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반하는 논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단 박 시장이 동성애와 관련해서 보수적인 입장을 천명했다는 것, 그리고 고발인들이 제기하는 ‘공연음란’의 현장에 리퍼트 미 대사를 비롯한 각국의 명사들이 참가해 축하했다는 것, 따라서 박 시장이 행사를 방조했다거나, 행사 주최자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 그냥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서 문제적인 지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어떤 배제의 논리를 보여주는 예증이기 때문이다.


퀴어축제 찾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_경향DB


이 배제의 논리는 다른 무엇도 아닌 혐오의 감정에 근거하고 있다. 혐오라고 해서 다 같은 감정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 또는 외국인 혐오는 동일한 감정에 기초하지 않는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가 기본적으로 민족국가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기동의 결과물이라면, 외국인 혐오는 민족국가 단위를 넘어선 국제화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한국처럼 여성 혐오자나 동성애 혐오자이면서 외국인에 대해 관대하거나, 반대로 여성과 동성애자에게 관대한 이들이 외국인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낼 수도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도 감정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여성 혐오가 다분히 상대방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경멸의 감정에 기초한다면, 동성애 혐오는 역겨운 감정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미국의 법철학자인 윌리엄 이언 밀러는 혐오의 정서 중에서도 경멸과 역겨움을 정치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정 작용으로 본다. 경멸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문제라고 한다면, 역겨움은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관용에 대한 저항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경멸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개인의 자격에 대한 비난에 동의하지만, 역겨움은 관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감정기제인 셈이다. 따라서 여성 혐오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일정하게 소멸할 수 있지만,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그 자체의 모순이 심화될수록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유럽에서 나치가 동성애 혐오를 정치적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박 시장을 고발한 ‘시민’이 내세운 논리는 그 무엇도 아닌 ‘시민의 권리’였다. 시민의 재산인 서울광장을 동성애자들에게 대여해 공연음란행위를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범법행위”를 방조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은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범법자들인 셈인데, 이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유는 간단하다. 범법자들로 규정하는 순간, 효과적으로 동성애자들을 ‘시민’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릇 범법이라는 것은 시민의 자격을 부여할 수 없는 행위이고, 따라서 시민의 자격을 지키지 못한 이들은 결코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범법자는 역겨움의 대상이지 깔보고 업신여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표면상 박 시장에 대한 공격이지만, 사실상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조직해내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김진호가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반공이라는 대의가 사라진 조건에서 동성애 반대는 기독교 극우세력을 다시 결집하게 만드는 정치적 기제로 활용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과정은 자유주의적 관용의 원칙을 전복시키기 위한 ‘역겨움의 정치’를 전면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공격 대상이 동성애자들이지만,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경멸의 대상이 점점 사라질수록 ‘역겨움의 정치’는 훨씬 다양한 양상으로 출현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역겨운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면, 누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극우정치는 이런 강요된 침묵에서 움트는 것일 터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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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혐오에 대해 불행의 원인을 없애버리려는 자아의 상태라고 설명했다. 혐오라는 것은 일시적인 마음 상태라기보다 특정 대상에 대한 일관된 성향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혐오의 문제는 혐오라는 감정 자체에 있다기보다 혐오하는 대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누가 ‘무엇’을 혐오하는지, 이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이 문제는 그 ‘무엇’을 결정하게 만드는 규범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규범은 어떤 것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누는 기준이고,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이 기준은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혐오나 동성애혐오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대체로 여성과 동성애자는 소수약자에 속한다는 전제에서 이런 합의는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합의가 자명한 만큼 합의된 것 내부에 맹점이 있을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혐오는 불행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열망의 산물이다.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없애려는 것은 당연한 심리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행복해지는 대신 상대방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때, 이런 혐오의 행위는 연대에 기반을 둔 사회 전체에 위기를 초래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혐오라는 감정 상태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마도 이 때문에 관용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미덕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일상에서 관용은 생각과 취향을 달리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일상의 차원을 벗어나서 정치적인 차원으로 넘어온다면 관용 역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규범으로 작동한다. ‘다름’을 관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이거나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규범화된 관용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일베를 중심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일베의 논리는 자신들의 호남혐오나 여성혐오를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난센스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런 현상들이 일베라는 특정 집단에 국한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상황은 사뭇 심각해진다.

이 문제를 ‘민주주의의 역습’이라거나 ‘우중정치’라고 개탄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관점 역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혐오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승자박의 논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민주주의를 객관적 조건으로 본다면, 지금 일베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소수약자에 대한 혐오조차도 관용해야 하는 극단적인 민주주의일 것이다. 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논리는 모든 사물을 공평한 차이로 환원시키는 형식적 평등주의이다.

앤디 워홀은 어디선가 자본주의의 평등은 부자든 가난뱅이든 코카콜라를 1달러에 사먹어야 하는 평등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진술은 절반만 맞다. 무엇이든 교환이 가능할 때, 말하자면, 그 무엇이 상품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평등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비밀이다. 교환되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해서 상품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이 평등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 유족 농성장 앞에 모인 일베 회원들이 '피자를 먹는 폭식투쟁'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이렇게 상품화로 포섭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불행과 같은 감정 상태일 것이다. 유명한 유태인의 농담을 상기해보자. 랍비와 부자가 교회에 들어가서 자신의 불행을 신에게 토로하면서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한다. 조금 있다가 가난뱅이가 들어와서 똑같이 신에게 자신의 불행을 호소하면서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부자가 랍비에게 귀엣말로 “가난뱅이 주제에 감히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고 비웃는다. 이 농담이 풍자하듯, 불행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불행은 사고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행의 원인을 박멸하려는 혐오의 감정도 평등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무엇을 왜 혐오하는지, 그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 판단의 기준은 평등주의 바깥에 있다.

일베 현상은 모든 혐오를 평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혐오나 동성애혐오나 호남혐오를 독재나 불평등에 대한 혐오와 같은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는 무기력한 민주주의의 문제이라기보다, 모든 가치를 동등한 상품의 차이로 환원함으로써 권력과 구조의 문제를 지워 버리는 형식적 평등주의에 대응할 논리가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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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은 정말 짜릿한 모험일 거야”라고 피터 팬은 말한다. 영국의 극작가 제임스 배리가 쓴 유명한 동화 <피터 팬>의 주인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모험에 빗대어 말하는 ‘어린이’ 피터 팬의 진실은 우리에게 그렇게 친숙하지 않다.

아무리 악당이라고 해도 사람의 팔을 잘라서 악어에게 던져준 것이나 후크를 사지로 몰아넣을 때 낄낄거리면서 사악한 미소를 짓는 것이나 동화에서 그려지는 피터 팬의 이미지가 천사 같아야 할 동심에 부합한다고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원작을 윤색해서 만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피터 팬은 결코 순진무구한 ‘어린이’로 등장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고 있던 세상 물정 모르는 웬디와 동생들을 꾀어내 가출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진실을 알고 나면 절대 환영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피터 팬이다. 그러나 이런 피터 팬이야말로 어른이 만들어낸 인물 중에서도 가장 ‘어린이’의 심리를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은 왜일까.

피터 팬은 순수한 동심을 표현하는 인물이라기보다 ‘어린이’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는 인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른의 시각으로 이해하는 ‘어린이’가 전부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터 팬은 동심의 진실을 엿보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어른은 이 진실을 엿보고 싶을 뿐,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의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른바 ‘잔혹동시’ 논란이 그것이다.

언론에 소개된 동시들을 두고 10살 ‘어린이’가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에서 부모의 학대 혐의까지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고, 급기야 부모가 직접 나서서 출간 배경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긍정적인 의견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의견은 ‘엄마를 씹어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불쾌하다’는 성토에 가까웠다. 심지어 글쓴이의 ‘반사회성’을 거론하면서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등장했다. 이런 반응들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기 시작한 ‘정상성’의 규범을 여기에서 어렵지 않게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정상성’의 규범은 정상과 비정상을 분리해서 후자를 배제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과정은 과거에 인지되지 않았던 비정상적인 것을 규정함으로써 역으로 정상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비정상적인 것을 제거해버린다고 정상화가 자동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인류 역사에서 정상성이라는 말 자체가 불필요해졌을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고, 어떻게 보면 서로 공존하는 관계를 이룬다. 현실은 이렇듯 비정상성의 오염으로부터 정상성을 지켜냄으로써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다채로운 사물들이 서로 공존하는 세계이다.

문제가 된 '잔혹동시'가 수록된 시집 <솔로강아지>


‘잔혹동시’라는 용어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상적인 상상을 벗어난 10살 ‘어린이’의 시는 이미 ‘잔혹한 것’으로 단정되어 버린다. 공존하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해서 바라본다면, 우리의 판단은 쾌와 불쾌만을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특정한 사물을 쾌와 불쾌 둘 중 하나로 결정하게 만드는 ‘정상성’의 규범이다. 과연 이 규범은 특정 사회의 권력이나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 역설적으로 이 규범이야말로 특정 권력과 계급의 산물이 아닐까. ‘어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정상성’이라는 규범으로 재단해서 ‘보호해야 할 존재’로만 바라보려는 태도가 이번 ‘잔혹동시’ 논란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최소한 이번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불편한 진실은 어른들이 여전히 ‘어린이’를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딸의 시를 읽고 그토록 싫어하는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는 부모의 결단은 분명 훌륭한 행동이었다. 이런 행동이 사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출판이라는 공적인 차원으로 이행하자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갑자기 상황은 시를 쓴 ‘어린이’와 부모의 범위를 넘어서서 이제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단계로 넘어온 것이다. 피터 팬에 감춰져 있는 ‘잔인성’을 허용해왔던 우리 사회가 ‘잔혹동시’에 유독 민감한 까닭은 의미심장하다. 전자가 어른을 통해 ‘어린이’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후자는 ‘어린이’를 통해 어른에게 주어진 것이다. 순수한 동심’을 상상하는 어른에게 ‘잔혹동시’는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 환기시켜준다. 이 외설적인 진실을 우리 정상적인 어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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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트 주한 미 대사에게 자상을 입힌 김기종씨에게 경찰이 국가보안법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라고 언급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은 이 사건에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 않고, 한국 정부만 애가 달아 좌불안석하는 인상이다. 초임장교 임관식에 참가한 대통령은 재차 “어떤 외부의 방해에도 한·미관계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번 사건이 ‘외부의 방해’라는 묘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이적표현물 소지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분향소 설치 혐의 등을 언급하면서 김기종씨의 범행과 이른바 ‘종북세력’의 관계를 입증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논리의 허술함만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이번 사건을 개인의 단독범행이 아니라 한·미동맹을 반대하는 ‘종북세력’의 음모로 몰고 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사실상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다. 있다면 공안 분위기를 조성해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정부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정도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통령이 거듭 “한·미동맹은 굳건하다”는 식으로 발언하고, 경찰이 단독범행보다도 배후세력을 찾기 위해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나서는 모양새는 확신에 찬 것이라기보다, 어딘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있는 느낌이다. 솔직히 말해서 대통령이든 경찰이든, 김기종씨가 왜 주한 미 대사를 공격한 것인지 도통 이유를 가늠할 수 없기에 이런 식으로 대응을 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과거 같으면 이런 일은 분명한 이유를 가졌다. 대학생들이 미 문화원을 점령했던 1980년대를 상기해보자. 그때 대학생들은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의 책임을 미국에 묻는다는 확고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전시작전권을 가진 미국이 광주에서 벌어질 일을 몰랐을 리 없다는 논리적 추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기종씨의 범행은 겉으로 보기에 평화를 외치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었다. 명분은 한·미 연합훈련을 반대한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주한 미 대사를 공격 대상으로 삼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진정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군사훈련을 반대하겠다면 훨씬 더 상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아무리 다양한 관점에서 이유를 따져봐도 속 시원한 대답을 찾기 어렵다. 이렇게 알 수 없는 김기종씨를 ‘괴물’이나 ‘광인’으로 부르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다. ‘괴물’이나 ‘광인’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외부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과연 김기종씨는 ‘외부’에서 나타난 존재일까.

어쩌면 지금 대통령이 강조하는 ‘외부의 방해’나 경찰이 입증하려는 ‘종북세력’보다도, 이런 범행이 일어났음에도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김기종씨의 과거 이력 때문에 이 문제를 해묵은 이념대결로 몰고 가려는 시도는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변죽에 가깝다. 이념대결이라는 거짓 문제를 벗어나서 보면, 김기종씨의 행동은 예전에 신은미씨에게 폭발물을 던진 고등학생이나 페미니스트가 싫다고 IS에 가담한 김모군, 그리고 청와대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했던 강모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김기종씨의 나이 정도일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개인의 분노를 상징적인 대상에게 표출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대구 지하철과 숭례문 방화도 비슷한 맥락에 놓여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주최 조찬 강연회에서 김기종씨에게 습격을 당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앉았던 식탁에 피가 묻어 있다. _ 연합뉴스


소외되어 있는 개인은 자신의 경험에 포착되는 대상에게 사적인 불행의 원인을 쉽사리 돌린다. 앞서 지적한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대체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사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공통점을 갖는다. 껍데기만 남은 공허한 이념이 이런 논리적 비약을 돕는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자의 세계와 부유한 자의 세계로 나눠진 세상에서 정치는 둘을 통합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인데, 지금 한국에서 정치는 말 그대로 실종되어 있다. 문제는 이 위기를 인지하고 적절한 대책을 수립해야 할 정부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일 테다. 우발적 범행을 통해 갑자기 나타난 저들은 단순히 ‘괴물’이나 ‘광인’이 아니라, 해체된 우리 사회에 던져진 스핑크스의 질문들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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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서울의 도심을 지나다보면, 고시원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과거에 고시원은 사법시험을 비롯해서 ‘고시’라고 불리던 각종 국가시험을 준비하던 사설 공부방이었다. 이른바 한국이 ‘압축 성장’하던 시절에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가장 빠르게 타고 오를 수 있는 수단이 이른바 ‘고시’였다. 타고난 경제적 형편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출세해서 영광과 찬사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성취가 ‘고시 합격’이었고, 이런 까닭에 ‘고시생’이라는 신분은 현재의 곤궁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유예할 수 있는 훌륭한 보증이었다.

그러나 로스쿨 도입과 사법시험의 폐지가 논의되고 있는 요즘에 이런 고시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이제 고시원은 고시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비싼 주거비를 지불할 수 없는 이들이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일시적인 용도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주거형태로 고시원이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저소득 1인 가구를 위한 주택 공급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시원을 주거시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고시’가 고도성장의 꿈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고시원은 오히려 이 꿈의 종언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가. 열악하기 그지없지만, 그나마 고시원은 쪽방보다 나은 주거형태이다. 그래도 고시원은 경비원이든 공공근로이든 월세를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공간이다. 고시원조차도 사치스러운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아드는 곳이 바로 쪽방이다. 고시원과 쪽방은 종이 한 장보다도 얇은 경계로 나뉘어 있지만, 그 차이는 자못 크다. 자신의 노동력을 더 이상 팔 수 없을 때, 노숙인으로 전락하지 않고 개인의 삶을 마지막으로 영위할 수 있는 임계 지점이 바로 쪽방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시원과 쪽방은 전혀 다른 상징성을 갖는다. 고시원에 거주하려면 최소한 소득은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시원은 인근 도심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노동력을 팔아서 월세를 충당하고 생활도 영위한다. 이들에게 도시는 여전히 가능성의 공간이고 삶의 터전이다. 쪽방처럼 도심의 뒷전에 밀려난 공간이 아니라, 화려한 건물 틈새마다 초라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고시원이다. 이 건물들의 이름이 오늘날에도 고시원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적절하다. 간혹 고시텔이라는 명칭도 없지 않지만, 고시텔이든 고시원이든 결론적으로 신분상승의 꿈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도심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다.

고시원에서 사는 민철식씨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출처 : 경향DB)


고시원의 존재가 한국 도심에서 빈민가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진단도 있지만, 실제로 이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한 생각을 필요로 한다. 고시원이 궁극적으로 저소득 1인 가구를 위한 주거 공간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런 주거형태를 존재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1인 가구의 출현이다. 고시원에서 2인 이상 거주하면서 육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결코 근대적인 가족 구성에 적합한 공간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고시원이 이렇게 번창하게 된 것은 그만큼 1인 가구가 늘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때 단란한 가정을 꿈꾸던 중간계급의 붕괴를 건축이라는 실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고시원인 것이다.

1인 가구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저소득이라는 경제문제였다. ‘압축 성장’을 구가하던 시절에 인생 역전을 꿈꾸기 위해 탄생했던 고시원이 이제 역전하기 어려운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악무한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저소득 1인 가구의 문제는 앞으로도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들에게 인생 역전을 다시 꿈꿀 수 있게 만들어줄 대책들을 정부는 지금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까. 그러나 기대는 금물인 것 같다. 집권 여당의 대표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개최한 제38회 전국 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 “복지 과잉으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지고, 나태가 만연하면 부정부패가 필연적으로 따라 온다”고 말했다.

한국은 복지 과잉을 걱정하기 전에 복지 과소를 먼저 해결해야 할 처지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은 한나라당 때부터 여당이 일관되게 주장해왔던 내용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안이한 인식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눈만 뜨면 성장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정작 그 성장의 원동력에 대해 등한한 것은 왜일까.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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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시사만평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성역 없는 풍자’를 날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주간지는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성역’에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종교지도자들도 포함시켰다. ‘성역 없는 풍자’는 근대 이후 계몽된 시민의 권리 중에서도 최상에 속하는 것이다. 일찍이 많은 사상가들이 앞다퉈 요구하고 옹호했던 권리가 바로 ‘표현의 자유’였고, 이 자유를 실현하고 있다는 척도로서 ‘성역 없는 풍자’에 대한 개인이나 사회의 개방성이 거론되곤 했다.

이런 관점에서 ‘표현의 자유’는 근대 문명의 원리로 간주되었고, 이를 억압하거나 배척하는 행위는 야만으로 규정되었다.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에 난입해서 만화가들을 살해한 알카에다를 자처하는 무장 괴한들의 행위를 야만이라고 부르는 서방 세계의 입장도 이런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모든 무장폭력은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는 일고의 가치도 없이 비판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샤를리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사망한 만화가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연대의 목소리는 테러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용인하지 못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차이는 미세하게 보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샤를리다”라는 구호는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가 일어난 그 원인을 드러내는 증상에 가깝다. 정작 이 구호에서 빠져 있는 것은 이번 테러를 촉발한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 “누가 샤를리인가”라는 질문이다. 과연 “내가 샤를리다”라는 구호에 무슬림은 포함될 수 있는가. 무슬림이 “샤를리”이고자 한다면, 그는 세속주의를 용인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내가 샤를리다”라고 주장하는 세속주의자가 무슬림을 “샤를리”로 인정하려면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샤를리 에브도가 평소에 주장해온 ‘성역 없는 풍자’는 이런 관용의 정신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었을까. 표현의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이 주간지는 ‘성역’에 대해 세속주의의 관점을 고수하는 입장에 더 가까웠다. 이 세속주의는 근본주의자에게 커다란 위협이었고, 따라서 주간지는 이슬람 세계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무슬림 무장단체들에 ‘눈엣가시’였다. 이런 위협이 현실적이었기에 문제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샤를리 에브도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던 것이다.

내부적인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계화는 이주노동자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냈다. 결과적으로 공존은 이제 선택 사항이라기보다 필수 사항이다. 이런 조건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근대적 원칙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모든 이들에게 허락되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지만, 일상에서 차별과 배제는 항상 일어난다. 그 까닭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권력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 같은 표현의 자유라고 해도 권력의 유무에 따라 결과는 각기 다르다.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7일 무장괴한들에게 살해당한 주간지 ‘샤를리 엡도’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사건이 발생한 건물 앞 광장에 모여 있다. 시민들이 표현의 자유를 공격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시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두렵지 않다”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_ AP연합


역사적으로 본다면,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권리였다. 권력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피곤한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우화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적 약자는 표현할 것이 있더라도 쉽게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인 장치였던 셈이다. 독일 철학자 칸트도 이런 맥락에서 이성을 공공적으로 사용하는 것, 쉽게 말해 언론과 학문의 자유는 무한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는 화폐가치처럼 모든 것을 동일한 가치로 나누어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약자의 목소리가 소외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한 권리이다. 이번에 발생한 프랑스의 비극은 오늘날 상식으로 굳어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생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이번 테러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관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층위를 가지고 있다. 한국 역시 이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극우주의자들이 피해자를 자처하면서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혐오감에 근거한 테러 행위를 ‘애국’이라고 치장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프랑스의 비극이 소극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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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무역의 질투심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무역이 국제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라고 제시한다. 인간의 합리성에 회의적이었던 흄은 경험적 지식의 축적을 신뢰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질투심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훌륭한 제도로 무역을 이해했다.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래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공정하게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시장의 정의였다. 정의야말로 개인의 경쟁을 파국에 다다르게 하지 않는 안전장치였다. 흄의 입장에서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도덕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보다 무역을 하는 것이 상호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을 때, 개인은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흄의 가설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흄의 말이지만, 요즘 듣더라도 크게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흄의 생각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시장경제의 원칙으로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흄의 정치론,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비정치의 정치론’은 경제를 정치의 목적으로 설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 냉전시대의 한국에서 흄의 생각은 경제발전으로 전쟁을 막자는 구호로 변주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북한체제에 승리하려면 ‘경제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경제발전’이라는 대의명분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실현을 위해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배반할 수 있는 예외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흄이 믿었던 무역의 호혜성은 실제로 개발독재라는 예외적 폭력을 통한 경제발전이 있어야 가능한 셈이다. 정치의 목적이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는 선에서 그쳐야한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일진대, 한국의 경우는 이런 원칙을 배반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

그동안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은 단순했다. 한국이 근대화를 완성하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진보든 보수든 공통적으로 믿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정상국가를, 또 다른 쪽에서는 선진국을 국가발전의 목표로 삼았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정상국가나 선진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경제발전’이었다. 여기에 위배되는 것은 쓸모없거나 아니면 낭비로 받아들여졌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소홀하게 취급받던 ‘민주주의’가 시장경제의 안착과 함께 중요하게 대두되었지만, 여전히 이런 분위기에 저항하는 잔재가 없어지지 않았다.

한강의 기적에서 불 수 있듯이, 한국은 근대화를 위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이를 저해하는 민주주의는 사장되거나 배척받기 일쑤였다. (출처 : 경향DB)


최근에 떳떳하게 극우단체라고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등장한 일군의 집단들은 과거 냉전시대에 위력을 발휘했던 독재에 대한 향수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얼핏 보기에 역사의 후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국가와 국가주의가 서로 분리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볼 수도 있다. 국가주의로부터 이탈한 국가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사회라는 집합을 통합하는 재현물이다. 이런 국가를 지탱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법이다. 독재자의 신민에서 법의 시민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시민과 비시민을 나누어서 전자의 안전을 위해 후자의 자유를 일정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합의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라는 하나의 합의점을 찾은 것 같다. 이 때문에 과거같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 엄청난 문제로 비화되곤 한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리턴’ 사건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예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만, 밖으로 알려지진 않았다. 그때는 통제를 할 수 있었지만, 이제 어렵다. 그 이유는 그만큼 ‘민주주의’의 감시기능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감시기능의 상당수는 시장을 통해 작동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라는 시장의 총아가 없었다면, 이번 일도 별문제 없이 지나갔을지 모른다. 이런 감시기능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종북사냥’을 부추겨서 시청률을 올리는 것도 시장의 논리이지만, 이번 고교생 테러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만일 그 행위가 시장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흄의 가설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면, 이 경험들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것이다.


이광택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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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는 신의 제왕인 제우스와 알크메네라는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의 존재로 그려진다.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의 저주를 받아서 헤라클레스는 취중에 자신의 자식들을 죽이고, 12개의 과업을 완수해야 비로소 죄를 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12개의 과업은 대체로 괴물과 야수를 퇴치하고 다른 지역의 권력자를 굴복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만 놓고 보면 별반 특별할 것이 없는 신화이다.

그러나 이 헤라클레스가 근대 서양에서 성장과 발전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흥미가 동한다. 눈썰미가 있는 여행객이라면, 서양의 저택이나 궁전 천장화에 그려져 있는 헤라클레스의 이미지를 종종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질투와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는 폭력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왜 이렇게 화려한 장식으로 다시 태어나서 기림을 받고 있는 것일까. 대체로 헤라클레스는 왕자를 교육하던 방에 그려져 있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18세에 님프로부터 쾌락과 미덕 둘 중에서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지 질문을 받는다. 쾌락을 선택하면 평생을 안락하게 살다가 죽을 것이고, 미덕을 선택하면 고난을 겪지만 나중에 불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장삼이사라면 쾌락을 선택하겠지만, 당연히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미덕을 선택한다. 그래서 불멸을 향한 그의 고난은 시작되었고, 신화의 끝이 그렇듯, 자신의 노력과 운명의 힘으로 마침내 하늘로 올라가서 별자리가 된다.

헤라클레스가 왜 서양에서 추앙받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세속의 쾌락을 등지고 불멸을 추구하는 자기계발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왕자라면 마땅히 헤라클레스처럼 쾌락보다도 미덕을 선택해서 장차 왕국을 부강하고 강인하게 만들어야 했다. 헤라클레스 같은 ‘진짜 사나이’가 왕자의 ‘멘토’라고 한다면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이런 바람을 담아서 왕은 아들의 방을 헤라클레스의 상징으로 도배를 했을 터이다.

근대가 도래하면서 이런 헤라클레스의 상징성은 정치적 의미로 한 단계 더 격상한다. 탁월한 개인의 자기계발이라는 함의에서 국가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훨씬 집단적 맥락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이 아닌 다른 지역의 존재들은 헤라클레스의 12과업에 등장하는 괴물에 비유되곤 했다. 많은 괴물 중에서도 특히 히드라는 헤라클레스의 대척점에 놓여 있는 혼돈의 대명사였다.

히드라는 머리 하나를 자르면 두 개가 자라는 무시무시한 뱀이다. 서양의 계몽주의를 암시했던 헤라클레스와 대조적으로 히드라는 혼돈 그 자체를 지시하는 비합리성의 상징이자 서양의 성장을 위해서 없어져야 할 악의 화신이었다.

이처럼 헤라클레스는 본의 아니게 서양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상징 구실을 한 셈이다. 성장과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타자를 정복하고 제거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어두운 역사가 헤라클레스 신화에 추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헤라클레스라는 존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이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지만, 여전히 그 상징이 대변했던 성장의 신화는 12과업보다도 더 많은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헤라클레스 신화는 다른 모습으로 형상만 바꿔서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신화의 헤라클레스라기보다 현실에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혼돈의 원인으로 지목해서 퇴치 또는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 태도의 밑에 깔려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성장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다. 이런 믿음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헤라클레스를 흉내 내기에 급급한 근육질의 ‘영웅들’은 자신의 불멸만을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히드라로 규정하고 몽둥이를 휘두르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영웅이 아니라 불한당들이 지배하는 세계가 종국에 선사할 것은 불멸이라기보다 환멸일 것이다.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불멸일 수 있었던 까닭은 완력 때문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용기 덕분이었다. 이 용기는 자신의 믿음만을 옳다고 여기고 수많은 히드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의심하고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미덕일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을 이끌어 왔던 가치들을 시급히 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것이 진정한 헤라클레스의 용기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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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의 화제였던 MBC 드라마 <왔다! 장보리>가 막을 내렸다. 최종회의 시청률이 40%에 달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물론 이런 시청률이 특별하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드라마의 내용이 특출했다고 평가하기도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여하튼 <왔다! 장보리>는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드라마의 정체성은 연역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텔 레비전 드라마는 대중의 욕망을 드러내는 대중문화의 거울이다. 네덜란드 여성학자 이엔 앙은 <댈러스 보기>라는 저작을 통해 왜 네덜란드 여성들이 자신들의 처지와 동떨어진 통속적인 미국 부자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지, 이유를 분석했다. 원인은 부자보다도 여성이라는 성차에 있었다. 네덜란드 여성들은 미국 부자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드러난 미국 여성들의 처지에 공명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자의 이야기라고 해도 슬픔과 고통을 짊어진 당사자는 여성들이었고, 이런 여성 캐릭터에 여성 시청자들은 유대감을 발휘했다.

비 현실적인 ‘막장드라마’에 많은 시청자들이 호응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왔다! 장보리>도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요소, 다시 말해서, 출생의 비밀과 뒤바뀐 운명, 그리고 개연성 없는 플롯 전개로 인한 파격성이라는 전형적인 ‘막장드라마’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특히 관심의 초점을 받았던 ‘연민정’이라는 캐릭터는 그 이름에서 연상되듯이, 시청자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자체였다.

막 장드라마로 손쉽게 명명되었지만, 이 지점에서 <왔다! 장보리>는 한 편의 우화극으로 탈바꿈한다. 각각의 캐릭터는 입체적이라기보다 평면적으로 규범적인 가치를 대리한다. 너무 착한 장보리와 너무 악한 연민정이라는 이분법이 드라마를 밀고 가는 주요 갈등이었다. 그러나 이 갈등은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운명의 피해자인 장보리라는 캐릭터에 대해 시청자들은 피로감을 느꼈던 것이다. 시청자들이 긍정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부정적인 캐릭터에 더 마음을 쏟았던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절대적 악이 등장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용서와 화해로 공동체의 완성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왔다! 장보리>도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법칙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출세를 위해 온갖 범죄에 가담하는 캐릭터에 시청자들이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앙의 주장을 차용한다면, 연민정에 대한 시청자들의 공감은 ‘정서적 리얼리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이해하기는 하되, 그 방식이 공감의 정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은 왜 장보리보다도 연민정에게 더 정서적 친화성을 드러낸 것일까. 드 라마에서 출세를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연민정의 모습과 오직 개인의 능력 이외에 기댈 곳이 없는 자신의 모습이 오롯이 겹쳐 보였던 것은 아닐까. 텔레비전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상과 텔레비전 밖에서 자신이 겪는 현실 모두 극단적이라는 점에서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시청자들이 느꼈던 것은 아닐까.


보 통 대중문화에 대한 욕망은 솔직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막장드라마를 즐기면서도 우리는 종종 “내가 이런 드라마를 좋아하진 않지만, 심심풀이로 본다”고 말하곤 한다. “미신을 믿진 않지만, 재미있어서 본다”면서 타로 점을 보러 가는 심리랑 같다. 막장드라마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계속 시청률이 몰리는 까닭은 이런 심리작용 덕분일 것이다. 그 러나 막장드라마나 타로 점이 심심풀이나 재미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일부로 바뀐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직장을 잃은 이에게 로또 당첨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밖에 없다면, 더 이상 로또는 심심풀이나 재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 금까지 연민정과 같은 캐릭터는 현실에서 배제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무엇인가를 배제시키려면, 그것과 자신이 확연히 다른 세계에 속해야 한다. 그러나 더 이상 그 분리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몰락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정과 밀양과 후쿠시마를 다른 세계로 만들기는 쉬웠다. 그러나 세월호는 그 세계가 우리 모두의 세계였다는 것을 깨우쳐줬다. 이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가에 대한 요청을 국가의 재구성으로 바꾸지 않는 한, 이 불편한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을 뿐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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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만에 있는 아름다운 열대의 섬. 세계에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자급 공동체를 이루었다. 매일 하는 일은 해변에서 수영을 하거나 파티를 벌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도 누구 하나 야단치지 않는 완벽한 낙원이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상어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방치한다. 자신들의 낙원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젊은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비명을 지른다. 그러자 다른 젊은이들은 파티 분위기를 깬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친구를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에 유기해버린다.

대니 보일 감독이 영화로 만든 알렉스 갈런드의 베스트셀러 소설 <비치>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진정한 낙원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낙원에는 문자 그대로 불행이나 고통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갈런드의 소설은 그렇게 불행과 고통이 없는 낙원이 역설적으로 또 다른 지옥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진정한 낙원은 무엇일까. 남의 불행과 고통을 외면하거나 방치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는 곳이 낙원일까. 아니면, 그 불행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와 대책을 함께 내놓을 수 있는 곳이 낙원일까.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불행과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삶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불행과 고통을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불행과 고통의 실체를 인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일 터이다. 그것을 위해 근대 이후 인류는 민주주의 정치체를 발전시켜왔다. 불행과 고통을 사전에 차단하고 봉쇄해버리는 전체주의보다 사후에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훨씬 인간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불가항력적인 문제를 사후에 해결하기 위한 정교한 정치기술의 결과물이 정부체계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도 ‘민주화’ 이후에 이런 정치기술을 선진화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학습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난항을 겪고 있는 세월호특별법만을 보더라도 과연 한국에 제대로 된 정부의 기능이 있는지 삼척동자도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참사 현장인 진도 팽목항에 내려가서 유가족들에게 모든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하겠다고 장담한 장본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의 수장 대통령이었다. ‘해경 해체’라는 특단의 조처를 대국민담화로 발표하면서 눈물까지 보인 당사자도 바로 대통령이었다. 그런데도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책임 지고 해결하겠다던 대통령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갑자기 국무회의 발언을 통해 ‘삼권분립’에 위배되기 때문에 특별법은 자신이 관여하지 않겠고 밝혔다. 당연히 유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대통령 당신이 직접 해결해주겠다고 나섰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발을 빼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국민담화 도중 눈물을 흘리던 박근혜 대통령.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출처 : 경향DB)


교과서적으로 본다면, 대통령의 발언은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삼권분립 원칙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대통령 당신은 왜 참사 현장을 직접 찾았고, 온갖 해결책을 유가족 면담에서 손수 지시했는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다. 여당은 이제 와서 세월호 문제를 특정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지만, ‘순수 유가족’이라는 논법을 동원해 불순세력에 조종당하는 듯한 뉘앙스로 사안을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 이들은 정작 누구였던가. 원칙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삼권분립이나 사법체계라는 것은 왜 필요한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한 것이지 자신의 지지자들만 바라보는 정부와 여당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위한 핑계가 아니다.

지리멸렬한 야당의 위기를 정부와 여당이 이용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회피한다고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을 넘어선 공동체 자체의 문제이다. 대승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안이지 정세를 이용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계기로 삼을 순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낙원은 불행과 고통을 아예 원천봉쇄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불행과 고통을 제대로 처리하고 해결할 수 있을 때 도래한다. 정부와 여당은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반쪽의 지지율에 만족해서 손을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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