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세상이 어지럽다. 사람들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할 일, 안 할 일을 다 한다. 정치는 혼란스럽고 범죄는 흉포해졌다. 올해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두 가지다. 첫째, 일상화된 성폭력 등 중범죄의 예방 및 해결이다. 문만 열어 놓으면 남의 집에 들어오고, 들어오기만 하면 죽이거나 욕보이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대처방법이 미지근하다. 세금으로 유지되는지를 모르는지 경찰, 검찰, 법원은 잠에서 덜 깬 것 같다. 정치인들도 옆집이 다 탄 뒤에야 무심한 이웃 사람처럼 “불이야!” 외친다. 


나주 성폭행 장소인 영산대교 밑으로 내려가는 경사지. (경향신문DB)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여주소서”라는 대사를 써준 텔레비전 드라마 작가들에게도 오늘의 사태에 약간의 책임이 있을까? 현실에서는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범인들은 술이나 사회적 불평등을 서둘러 핑계로 삼는다. 법의 심판도 “죽을죄를 지었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 살려 놓고 보자”는 쪽이어서 사형은 아주 오래전 일이다. 이유는? 국가 이미지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허망한 말이 들린다. 지나친 걱정일까? 피해자를 대신해서 형벌을 가해야 할 국가가 다른 나라들의 눈치를 보는 바람에 참다못한 가족이 직접 나선다면? 유죄이겠지. 그렇다면 직무 태만을 범한 국가는 죄가 없는 것인가? 사형 미집행이 범죄의 만연을 통해 누구의 아내나 남편이나 아이를 죽음이나 평생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면 누구를 위한 이미지 관리일까? 이미지 관리란 맨 얼굴을 숨기는 화장이 아닌가? 피 흘리는 얼굴을 화장으로 숨길 필요가 있는 것일까?


둘째,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도 후보자들의 중심 전략은 정책 대결이 아닌 이미지 정치가 될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마음이 하는 일이고 마음에서는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기 마련이다. 대통령을 뽑는 일도 정책 대결이나 능력 검증보다는 이상화(理想化)에 달려 있다. 좋은 이미지는 이상화와 쉽게 연결된다. 




그러니 내 이미지는 좋게 하고 남의 것은 깎아내려야 한다. 약점을 캐고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집요하게 물고 넘어지고 파급효과 강화에는 기자회견을 쓴다. 장터에서 악수하고 농민들과 사진 찍는다. 모든 것을 최대한 이용한다. 인터넷, 페이스북, 트위터. 신문과 방송은 결정적이다. 기회만 주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개그맨과 웃고 떠들며 인간적인 이미지를 전달한다. 남녀 불문하고 화장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복장에도 색의 조화가 주는 심리적 영향을 활용한다. 말소리도 다듬어서 좋은 이미지를 주도록 한다. 음성학을 전공한 이비인후과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의 이미지를 보수-진보, 확고함-유약함, 따뜻함-냉정함의 축으로 받아들이므로 보수는 진보적임을, 고집이 세면 융통성이 있음을, 냉정한 표정이면 따뜻한 면을 보여주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이미지는 진실이기도, 거짓이기도 하다. 독일 젊은이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와서 자신들을 굶긴 무능한 아버지를 혐오하던 차에 힘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위장해 나타난 히틀러를 미친 듯이 반겼다. 그 중 다수는 히틀러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지도자 선택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지금 한쪽에서 성폭행을 당해도 정의를 구현할 대책이 마땅치 않고 다른쪽에서는 대권을 얻기 위해 이미지를 포장하느라 여념이 없는 세상이다. 이미지를 내세우는 사람은 대중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쉽게 얻는 것이 중요하지 범죄의 고통에 시달리는 소수의 희생자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차기 대통령이 되려고 나선 후보자들이 흉포한 범죄의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정책 수립 그리고 실천 능력은 “허(虛)”일까, “실(實)”일까. 이미지를 털어내면 그 뒤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다. 어떤 후보자도 대선 전에는 사형제도에 대한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숨길 것이다. 올해 우리는 정치권이 제공하는 이미지의 잔치를 정말 정신을 차리고 잘 읽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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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검은 색안경으로 감시의 눈빛을 감추는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검은 색안경을 멋 내기 위해서도 아무나 낮밤으로 쓴다. 낮에는 감기 환자, 밤에는 도둑이나 강도 정도였는데 요즘 산책로에서는 햇빛과 먼지를 피하기 위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자신의 정체를 가리는 일은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물리적 공간을 넘어 사이버 공간으로 확대됐다. 대한민국의 사이버 공간에서도 “감출 수 없게 할 것인가, 감추게 놓아둘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의 논쟁이 이루어진 바 있고, 2007년에는 사회적 폐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인터넷 실명제’(이하 실명제)가 도입됐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이 제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인터넷 실명제 도입부터 위헌 결정까지 (경향신문DB)


 이제 갈망하던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고, 지난 5년간 시민의식 성숙에 따라 악성 댓글의 폐해는 사라질 것인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실명제 폐지를 덮어놓고 환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폐지에 대한 찬반 논리에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찬반 논란의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기분으로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이 본격적으로 보장되면 어떠할지를 읽어보려 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오래전에 인간의 마음을 무의식·전의식·의식이라는 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개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구조이론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이드·자아·초자아라고 하는 세 가지 기능이 섞여 있는데, 이드는 무의식적 충동들의 모임이 활동하는 것이고, 초자아는 양심·도덕·윤리·이상이 모여 움직이는 것이며, 자아는 이드·초자아·현실 사이에서 협상하고 조정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은 얼굴을 마스크로 가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감추는 것과 같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글을 써 올리는 행위와 연관이 되는데, 내가 누구인지를 남들이 알 수 없는 상태로 내 생각을 제약 없이 표현하는 이점을 가지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면서 사회적 통념이나 윤리·도덕에 비추어 편집, 삭제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익명으로 쓰는 글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충동을 훨씬 더 많이 포함하며 자아나 초자아보다는 이드가 주도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이제 성적·공격적 표현은 물론이고 논리성·합리성보다는 “내가 그렇다는데 왜 잔소리가 많아!”식의 막가는 글도 자주 읽게 될 것이다.


익명성의 세계에서는 기가 확 살아난 이드와 달리 초자아나 자아는 풀이 죽는다. 그렇게 되면 악성 댓글이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쓰기는 매우 쉬워진다. 익명으로 올리는 글에서는 “내 글을 읽는 남들이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지”라는 자의식이 있어야 움직이는 초자아가 힘이 빠지기 때문이다. 마치 방범용 폐쇄회로 TV가 없는 곳에서 범죄 행위가 훨씬 더 대담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자아의 입장에서도 초자아가 이미 무력해진 상태에서 홀로 이드의 움직임을 억제하면서 현실세계와 협상해서까지 글을 합리적이거나 점잖게 쓰려고 굳이 애를 쓸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성이 불러오는 사회적 폐해를 줄이려면 개인이 아닌 사회의 힘이 지속적으로, 체계적으로 필요하다. 개인의 초자아는 사회의 사법제도로 옮겨가고, 개인의 자아가 우리 사회의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의 사법적 판단이나 시민의식이 그 정도 수준으로 성숙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간의 경과를 살펴보면 별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익명성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다가 결국 어디인가 중간지점에서 자리를 잡을 것인데, 그 과정에서 사회적 폐해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가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익명의 접속과 무한 표현의 자유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독이 될 것인가, 약이 될 것인가? 출발 신호는 이미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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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말이라는 것이 묘하다. 멋있게 할 수도, 천하게 할 수도 있다. 말에서 사람의 품격이 배어 나오니 말을 제대로 잘하는 것은 중요하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중 하나가 정치인일 것이다. 정치인은 말로 자신을 유권자들에게 알린다. 


단순무식하게 보면 가장 유능한 정치인은 어떤 사람일까? 덕이 있는 사람일까, 정직한 사람일까, 화장실에 앉아서도 나라의 장래만을 걱정하는 사람일까? 유감스럽게도 말로 사람들을 아주 잘 속이는 사람일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말에는 욕(辱·욕설)이 포함된다. 욕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는 언어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욕하는 행위는 인간 본성의 일부일 것이다. 욕에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다. 욕 몇 마디로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는 것을 누구나 체험한다. 욕을 하는 행위가 집단의 정체성 유지와 단결 강화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 영국과의 경기에서 우리 감독이 선수들에게 쉬는 시간에 했다는 “…X도 아니지”라는 말은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었으니 욕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정치인이 하는 욕은 차원이 다르다. 언론 보도를 통한 파급효과가 나라 전체에, 때로는 다른 나라들에도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을 논란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영향력 있는 인물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할 수는 있겠으나, 정치인의 욕설은 나라와 정치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엉겁결에 당하고 상처를 입은 상대방은 대처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 불공정한 게임의 희생자가 되어 버린다. 더욱이 욕을 뱉은 사람이 욕먹은 사람에게 애매한 방식으로 유감을 표시하면서 말을 자꾸 바꿔 나가면 상대방은 정말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년' 표현 사과하라 (출처 :경향DB)


욕하고 욕먹는 상황은 이미 기술의 진보에 따라 가상공간으로 확대되었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치권이 구사할 언어 수준은 그리 품격이 높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일반적으로 욕을 잘하는 사람은 성격적으로 교묘하게 무엇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어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그런 사람에게는 욕먹는 사람이 정말 그 욕을 먹을 만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솜씨도 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위를 점하기 위한 욕 수준의 논평, 비방, 공격은 점점 교묘해지고 체계화될 것이다.


정치인일수록 “정치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세련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북미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벌거벗은 욕’을 대놓고 하면 법과 규정에 따라 처벌 대상이 된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지나치게 관대하다. 특히 여성에 대한 언어적 비하가 있어도 우리 사회에서 별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는 현상은 아직 우리가, 심지어 여성들조차도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방증이다. 여성 국회의원들조차 정치적 입장에 이끌려 남녀평등이라는 사회의 근본가치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라리 희극적이다. 2012 런던올림픽 출전 때문에 본인과 가족에 대한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는 어떤 나라 여성 선수의 이미지가 대한민국 대선이 가는 길과 겹쳐 나타나는 것은 환상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말은 말로 끝나지 않는다. 말은 평소 지닌 생각의 표현이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선과 같은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특정 후보에 대해 뱉어진 상대편의 심한 말은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메시지를 알게 모르게 대중의 머리에 각인시키려는 전략이다. 차기 대통령이 되시려는 훌륭한 분들이나 그 주변인물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이 자신들과 다른 것만으로 차별받지 않는 국가라면, 욕설로 정치를 하는 행위는 철저하게 금지하고 위반한 사람은 법으로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논하기에 욕설의 품격은 너무나 비천하다. 칼이나 총이 아닌 혀끝으로도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일 수 있다. 나라의 미래인 아이들이 다 듣고 보고 있으니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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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요새 밤잠을 설치며 런던올림픽 게임 중계를 보며 환호하기도, 낙담하기도 하지만 올해 대한민국 최대의 이슈는 차기 대통령을 잘 뽑는 일이다. 그 일이야말로 국민 모두가 밤잠을 설치며 현명한 선택을 위해 애간장을 녹여야 할, 후손들의 장래가 걸린 최대 고민거리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도 나라의 힘이 아주 강하지 않고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스포츠 정신을 강조하는 올림픽에서조차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현실이 자꾸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들의 자질과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 중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대한민국의 승리를 이끌 진정한 프로를 뽑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후보들 중에서 프로정신이 부족한 사람을 솎아내는 일을 대선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꼭 해야 한다.


새누리 대통령 후보들, 처음 한자리에... (경향신문DB)


교수를 뽑는 일은 인성 외에 학력, 학위, 논문 실적을 보면 되니 비교적 간단하다. 정치인들의 주장은 현란해서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 모두 다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를 잘 안다고 강하게 말한다. 잘 안다고 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누구나 어떤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아는 바가 있다. 우리나라가 지금 겪고 있는, 앞으로 겪을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열거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 사이에는 쉽게 넘볼 수 없는 큰 격차가 있다.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시간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뜻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흔히 그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알고 있다는 믿음은 매우 위험하다. 알고 있다고 믿으면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애써 더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향신문DB)


전문가는 특정 분야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모든 분야를 다 잘 안다면 전문가라고 하기 어렵다. 자신들이 공부하고 활동해 온 특정 분야를 잘 아는 것은 좋은 일이고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서 멈추면 문제가 없는데, 성공한 전문가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은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생각이 전문적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세상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데도 자신들의 영역에서 써오던 틀로 다른 영역을 제대로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전문 분야조차도 전문가가 100% 꿰뚫고 있다고 말하기는 불가능한데 전문이 아닌 다른 분야를 어떻게 제대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을까?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해보니 전공과 관심 분야를 혼동하는 학생들이 가장 도와주기 힘들었다. 그런 학생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도 어렵게 한다.


(경향신문DB)


“세련된 한국 축구”가 런던올림픽 축구 예선에서 스위스를 이겼다.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적으로 세련된 분이 당선될까? 여기서 “정치적으로 세련되었다”는 것은 생각의 폭과 깊이를 충분히 넓고 깊게 유지하는 능력이 있음을 말한다. 세련된 정치인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 세련된 정치인은 자신에게 익숙하거나 편안한 것만을 되풀이하거나 고집하지 않으며 호기심이 많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자신의 것과 다르다고 불편해하면서 자신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세련된 정치인은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참여적 관찰자로서 자신의 생각을 검증하고 개선하려 한다. 자신의 생각을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 중립적인 자세 없이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일어날 수 없다. 잘못된 우월감은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 낸다.


올해 대선에 나서는 분들 중에서 누가 진정한 프로이고, 누가 그저 프로처럼 보이려는 아마추어일까?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현재 정치권 안에 있다고 무조건 프로이고, 밖에 있다고 무조건 아마추어라는 말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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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의대 교수·정신분석

 


런던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이 경쟁해서 올릴 성과에 국민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리 기업들의 공장에서는 오늘도 직원들이 세계 일류 제품들을 만들려고 땀 흘리고 있다. 오늘 밤에도 세계 유수 학술지에 발표할 논문을 위해 대한민국 연구원들은 밤새 실험에 매달릴 것이다. 모두 경쟁이다.

고통스럽지만 사람들은 경쟁에 뛰어들고 때론 즐긴다. 남보다 잘할 수 있으면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취를 통한 우월감은 개인이 노력해 이루는 결과물이지 국가가 제공해 줄 순 없다.

경쟁 없는 사회가 진정한 복지사회이자 낙원일까? 경쟁이 없는 사회가 아니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사회가 아마도 우리가 꿈꾸는 복지사회나 낙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유인원 조상 이래 문명을 세워 지금까지 발전시켜 온 인간에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세칭 일류 대학에 들어간 학생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부모에게 그 아이는 평생의 자랑거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이들을 부러워하면서 질시한다. 대학에 들어가는 일만이 삶에서 부딪치는 경쟁은 아니다. 세상은 경쟁으로 넘쳐난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오늘날 각종 고시나 자격시험 제도로 이어지고, 거기에 뽑히면 장래가 꽤 보장되니 치열한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정당에서 대표나 대선주자를 뽑는 경선, 대통령을 뽑는 대선도 치열한 경쟁의 공간이다.

서울대학교 정문 모습 ㅣ 출처:경향DB

 

세상이 이렇게 경쟁으로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양극화, 서열화와 관련된 모든 문제가 대학들 사이의 경쟁적 구도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싶어 한다. 모난 돌은 쉽게 정을 맞는 분위기에서 최근 서울대를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에서 일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정당의 대선 전략 중 하나라는 말이 들린다. 말은 복잡한데 서울대와 전국 국립대학들을 묶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공부를 시키고 연구를 하는 대학의 가치를 밖에서 보고 측정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대학을 다니던 시절 대의를 위해 소신 있게 학생의 길에서 벗어나신 분들이 다수 포함된 정치인들께서 매일 고리타분하게 공부하고 연구나 하는 교육기관인 대학들의 혁신적 구조조정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교육을 바로 세우는 것이 국가의 백년대계임을 절절하게 가슴으로 느끼고 계시기 때문일까?

경쟁을 흑백사고로 보면 이긴 사람과 진 사람만 보인다. 그런데 경쟁의 결과를 제대로 결산하려면 뒤에 선 사람이 경쟁 과정에서 얻고 배운 것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 또한 앞에 선 사람이 지고 가는 부담과 스트레스도 고려해야 한다.

경쟁에 지면 내 생각에도, 남의 생각에도 스스로 패배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자신을 경쟁구도 안에 넣고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경쟁이 불필요한 일들도 많다. 화가와 성악가가 노래하는 능력을 놓고 경쟁한다면 웃기는 일이 될 것이다. 변호사와 의사 중 누가 환자를 잘 치료할 수 있는지를 겨룬다면 말이 안되는 일이다.

대학의 서열화 문제는 통합이 아닌 공정한 경쟁으로 풀어야 한다. 대전의 카이스트, 포항의 포항공대가 이미 서울대 공과대학과 어깨를 겨루게 됐다면 지방대학들의 특성화를 지원할 문제이지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을 흉내 낼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교육경쟁력의 진짜 문제는 우리 대학들 중에 국제적으로 봐서 정을 맞을 만한 모난 돌이 아직 없다는 현실이다. 서울대조차도 세계 일류로 가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참고로 말하면 대한민국 국회는 서울대의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2010년 12월에 법인화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러니 그나마 어렵게 국가를 대표하는 고등교육기관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흔들 일이 절대 아니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매버리면 바늘은 바느질을 제대로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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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서울대 교수·정신분석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존 볼비의 업적은 ‘애착’에 관한 연구이다. ‘애착’이란 아이가 자기를 돌보고 키워주는 사람과 지속적이고 정서적이며, 행동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현상을 말한다.

애착이 잘 형성되게 하기 위해서는 아기가 원할 때 엄마 또는 같은 사람이 늘 곁에 있으면서 적절한 반응을 제때에 보여야 한다. 배가 고프면 먹여주고 아프면 안아주고 달래주어야 한다. 그러면 언제나 도움이 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믿음이 아기에게 생긴다. 그래야 아기가 외부 세계를 탐험할 호기심과 의욕을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애착이론은 지금 발달심리학적 연구뿐 아니라 소아, 청소년, 성인의 정신적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보육 지원 정책의 방향과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결혼은 안 하려 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면 국가가 사라질 위기가 오지 않는다는 법도 없으니 아이들을 잘 키우도록 국가가 도와야 한다. 거기까지는 옳다.

 

출처:경향DB

집에서 양육하는 아이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지 못하지만 보육시설로 옮기면 받을 수 있다고 하자. 전국의 보육시설에는 예약이 넘쳐나겠지만 언뜻 보면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 살이 안된 아이들을 집이 아닌 보육시설에서 주로 키우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애착관계가 불안정한 아이들을 많이 키워낼 위험이 크다. 아이와 부모들을 돕고자 하는 목적은 좋으나 너무 일찍 보육시설에 맡겨진 아이가 애착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서적·행동적 문제가 있는 국민으로 자란다면 부담은 가족과 국가에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애착 형성이 잘된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애착 형성이 불안정하게 된 사람은 자주 불안해하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이는 적어도 만 세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사람이 맡아 키워야 한다는 체계적 연구의 결과를 정책이 뒤집을 수는 없다. 여기서 ‘같은 사람’이란 엄마, 할머니, 또는 집에 같이 사는 아주머니 등이다. 물론 최상의 선택은 엄마가 직접 키우는 것이지만 그러기에는 삶이 너무 힘들고 복잡해졌다.

세 살 이내의 아이라도 보육시설에 보내면 지원금을 주고 집에 데리고 있으면 주지 않는 경우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보육시설에 보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익은 애착관계가 견고하게 형성되지 않고 흔들리게 될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 부모들만 지원금 때문에 세 살 이전의 아이들을 보육시설에 보내야 한다면 이는 사회 정의도 아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녀의 문제로 인해 더 형편이 어려운 부모를 만들어내는, 불공정 행위가 될 것이다.

애착관계가 불안정한 아이는 커가면서 부모에게 늘 매달리고 관심과 사랑을 지나치게 요구한다. 그런 아이들은 흔히 정신적 문제를 보인다. 정서가 불안정하고, 행동이 반항적이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과도하게 예민한 어른들은 어려서 애착 관계의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애착관계가 안정적이 되도록 키운 아이들은 커서 어려운 일들을 겪어도 잘 극복해서 가족이나 국가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존감이 높고 대인관계가 원만해서 직장에서 잘 지내고 결혼을 잘하고 아이들을 잘 키운다.

양육과 보육 모두 다 적절한 때가 있다. 세 살 이전의 아이는 안정적 애착을 위해 집에서 엄마와 지내고, 더 크면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보육시설에서 낮 시간을 보내야 한다.

건강한 국민이 있어야 건강한 국가가 있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에 대한 투자 전략은 현명하고 과학적이어야 한다. 주려면 집에서 키워도 당연히 지원금을 줘야 하고, 부모들도 세 살 이전까지는 힘들어도 아이를 집에서 키워야 한다. 잘못된 정책을 고집하면 국민이 국가에 느끼는 애착관계도 흔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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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조용필씨나 이미자씨가 대중가요 분야에 세운 업적이 대단하지만 국내에 있을 때 그들의 노래를 듣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미국 고속도로에서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찔끔 흐른다. 유럽의 거리에서 국내 대기업의 광고판을 보면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 같은 반가운 기분이 든다. 외국에서 잠시 잊고 있던 ‘우리나라’의 재발견이 작은 감동을 준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말들을 한다.

방송국 스튜디오 창에 ‘우리나라(O), 저희 나라(X)’라고 쓴 큰 쪽지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출연자 중에 그만큼 우리나라를 본의 아니게 낮추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이라면 때로는 남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국가는 함부로 낮출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나라를 높게 세워야 우리 모두 국제사회에서 고개 들고 살 수 있다. 그래서 ‘저희 나라’가 아니고 ‘우리나라’라고 해야 한다. 국민이라면 우리나라가 강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나라를 되찾은 후 태어났다. 그런 우리들은 나라 잃은 상태에서 태어났던 분들의 애환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우승한 손기정옹의 이야기를 비롯해 영화나 소설에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죄송하게도 피부에 닿기 어려운 간접 경험일 뿐이다.

무역 강국이 된 대한민국이 선진국 문턱에 거의 진입하기 직전이라고 하는데 아직 우리 자신이 우리나라를 받아들이는 형태와 정도는 각양각색이다. 외국의 저명인사, 예를 들어 유명 영화배우가 한국에 왔을 때 방송 인터뷰에서 자주 나오는 질문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그 배우가 평소 우리나라에 대단한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상업적 목적으로 그저 잠깐 다녀가는데 “한국을 좋아한다, 비빔밥이 맛있었다”는 말을 억지로 끌어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아공월드컵 나이지리아전에 앞서 선수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자존감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마음에서 에너지가 나와서 유지되는 자존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격려를 에너지로 써야만 지켜지는 자존감이다. 그 둘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존감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자꾸 묻는 것과 같은, 자신 없는 모습은 이제 자랑할 만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보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나라의 정체성을 잘 규정하고 닦는 것이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하다. 우선 국민 각자가 격을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면 그것이 모여 나라의 격이 올라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딱한 사정은 있겠지만 젊은 여성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성을 파는 행위나 남성들이 해외에 나가 성을 사는 충동적 행위는 우리 자신과 나라의 자존감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일상에 바쁜 국민들이 늘 나라를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가끔 나라의 정체성을 생각하도록 하는 방법이 태극기를 보여주거나 애국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국가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증진하기 위해 국기와 국가(國歌)를 활용하고 있다. 구체적 행위로 주요 행사에 모인 사람들은 국기에 경의를 표하고 국가를 부른다.

연구에 의하면 국기를 보여주는 것이 국민의 결속과 단합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 국가를 부르는 것도 같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의견의 양극화가 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를 뒤집으면 대한민국의 국가와 국기를 부정하는 말이나 행동은 국민의 단합을 방해하고 국민이 극단적인 형태로 분열되는 것을 교묘하게 조장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불현듯 궁금해지는 것은? 국가나 국기를 부정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다면 그들의 행위는 이런 모든 것을 알고 실천에 옮기고 있는 고도의 심리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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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혀는 말한다. 눈은 본다. 귀는 듣는다. 세 치 혀로 못할 말이 없다. 두 눈으로는 세상을 본다. 두 귀로는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 모든 것의 뒤에는 마음이 있다.

혀는 마음에 담은 것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술 먹은 상태에서는 평소 꺼리던 솔직한 이야기가 혀끝에 담겨 나온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다. 술의 영향으로 긴장이 풀어져서이다. 맨 정신으로 했다가는 큰일 날 이야기를 술 핑계로 풀어낼 수도 있겠다.

눈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이지만 넓은지, 깊은지, 흐려져 있는 창인지는 각자가 눈을 가꾸고 다듬은 수준에 따라 다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은 의심할 필요 없는 진실의 전부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눈 A가 본 것과 눈 B가 본 것의 차이가 마음먹은 바의 차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세상의 소리를 들으라고 열려 있는 귀 역시 들을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듣는 것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자신의 마음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성향인지라 듣는 내용과 맥락은 귀 A와 귀 B의 주인이 마음먹은 바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귀로 분명히 들은 것은 당연히 진실의 전부라고 믿는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정도언 교수 l 출처:경향DB

각자의 인생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에서 혀, 눈, 귀의 비중을 배분하는 형태가 달라진다. 제대로 살펴보거나 잘 듣기보다는 혀끝에 삶의 가치를 두는 사람은 무슨 말이나 일을 했든지 해명, 변명을 잘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요설(饒舌)이라는 단어도 생겼는데 흥미롭게도 사전에서 찾아보니 북한어로는 “말을 잘하는 혀”라는 의미로 나와 있다.

혀를 놀리기는 쉽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동과 인기몰이를 하는 재미도 있지만, 반면에 잘 듣고 제대로 보는 일은 지루한 일이다. 더욱이 잘 듣고 보다가 평소 자신이 지켜오던 신념이 흔들린다면 큰일이 될 것이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와 불안이 잠재되어 있는 입장이라면 남이 하는 다른 이야기를 잘 듣고 좁게 보던 세상을 넓게 보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에게 누군가가 나서서 “제대로 듣고 보세요!”라고 하면 일단 화를 버럭 내기 마련이다. 고착된 신념이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껴서이다.

말보다는 실천을 앞세우는 사람이 지도자로서는 바람직하지만 ‘말만 많은 세상’에서 대중의 점수를 따기에는 불리한 면이 없지 않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혀끝만 잘 놀려도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팽배하고 있는데 이들이 구사하는 수사법(修辭法)은 특징적으로 매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식이어서 녹음해 놓고 반복해 들으며 세밀한 분석을 하기 전에는 그 속에 담긴 참뜻을 파악하기 어렵다. 특정 사안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인지, 그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비켜가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안개 속에 빠져든다. 답답해진 사람들은 이들에게 점점 관심을 기울이고 신문·방송도 이들의 동정을 세세하게 보도하고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기 위해 애쓰니 정치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큰 방법이기도 하다. 납득하기 어려운 언행에 대해서는 무관심이 해결책인데 관심 쏟기를 통한 강화와 보상이 이루어지면서 그러한 언행이 오히려 증폭되고, 결국 기묘한 순환고리가 만들어져 지속되는 것이 현실이다.

흔히 생각하기에 신념이란 쉽게 변하면 안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고착되어 변화의 흐름에 경직된 신념은 더 이상 신념이 아닌 과거의 잔재물일 뿐이다. 태어나서 부모에게 의존하다가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를 거쳐 독립된 개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신념도 초기의 ‘확신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 진정한 신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고착된 신념은 그 개인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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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서울대 교수·정신분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억울하다고 한다. 가해자만 없으면 자신의 삶이 훨씬 평안하고 행복하며 장래성이 있다고 호소한다. 사람들이 피해자를 연민 어린 눈으로 보고 동정한다. 그러니 피해자를 혹시 비난하는 듯 들리는 말을 꺼내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정말 본격적으로 비판하면 근거가 있어도 다중의 비난이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하는 주장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늘 옳은가?

피해자와 달리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안전하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100% 그른가? 예를 들어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리다가 시비 끝에 다른 사람에게 맞아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도박을 하다가 돈을 잃은 사람은 피해자인가, 가족의 생계를 망친 가해자인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과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 사이에 중간적 견해를 갖는 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하는 피해자에게 그 사건이 일어난 경위를 듣고 피해자가 혹시라도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를 캐묻는다면 이는 매우 부적절한 일이 될 것이다.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캐묻는 사람을 공격하며 여론에 호소할 것이다. 다중의 정서는 피해자를 지지할 것이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자초지종도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어 그 사람이 다시 또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예측하고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학대 피해 노인들이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늘 사귀는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지내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그저 결백한가? 아니면 져야 할 책임의 양은 어느 정도일까? 쉽게 보면 피해자는 옳고 가해자는 그르지만 관계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피해자가 피동적으로 피해를 당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상황에 맞서 싸우거나 그 상황을 피할 방법은 있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이제는 피해와 가해의 상관관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진실을 밝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피해자들이 평생을 피해자로 살아가며 그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리고 비슷한 피해를 반복해서 입는 일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피해자로만 살아왔다면 이제는 자동적으로 피해자의 역할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고서 돌만을 탓하는 것과 같다. 길에 박혀 있는 돌을 못 본 자신의 잘못도 인정해야 피해자 역할에서 벗어나 거듭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힘든 일을 겪을 때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하며 우울증에 빠지라는 것은 아니다. 정신건강의 요체는 자신과 타인을 보는 시각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피해자 심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 추가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악의를 가진 교활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취약성을 쉽게 알아차린다. 당신을 조금만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음을 그가 일찍 간파한다는 말이다. 자신감이 없고 소심함은 행동에서 다 나타난다. 피해를 당한 후에도 입을 다물 것을 알기에 그들은 당신을 또 찾거나 다른 사람들을 물색한다.

더 늦기 전에 피해자가 피해를 당하게 된 경위를 스스로 돌이켜 보도록 돕는 행위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나쁜 짓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로 남으면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고 책임을 면할 수는 있겠으나 정신적 성장은 지연된다.

요새 정치권에도 자신이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분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들은 그만하면 자신이 결백한 쪽이므로 비판과 조치가 억울하다고 강변한다. 남들도 다 하는 짓이니 문제가 불거진 것은 단지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고 자신을 설득한다. 대한민국에는 피해자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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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다. 먹이고 씻기고 입히는 일이 힘들다. 집에만 주로 머물던 아이가 학교를 가면 부모가 할 일이 더 많아진다. 아이의 새 세상에는 다른 아이들, 선생님들, 친구의 엄마 아빠들은 물론이고 거리의 낯선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로 넘치는 학교 가는 길을 아이는 부지런히 갔다가 집으로 다시 온다. 오가는 길에서 아이는 집에서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조금씩 겪어가며 생각이 크고 감정이 풍부해진다. 아이가 학교를 간다는 것은 부모가 전적으로 맡아 키우는 아이에서 세상이 키우는 아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사춘기를 맞으면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아이에서 자기가 자기를 키우는 새로운 차원의 아이가 된다. 당연히 거기에 맞추어 부모도 달라져야 한다.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늘 아이를 곁에 두고 살아온 부모는 “내 아이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안다”고 확신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겪는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거나 알아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부모에게 아이는 작든 크든 늘 “잘 키워야 하는” 양육의 대상일 뿐이다. “스스로 잘 크기를 원하는” 아이와 “여전히 잘 키우기를 원하는” 부모는 충돌하거나 평행선을 달린다.

부모가 아이를 잘 키우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식이니까…, 과연 그것뿐일까? 부모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본다. 후회가 밀려온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을 하고 가슴을 친다. 불현듯 깨닫는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있다. 나는 못했지만 내 아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내가 그리 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부모는 아이에게 최상의 인생을 살기 위한 전략, 작전, 행동을 지시한다. 그러나 오늘이 더 즐겁고 행복해야 하는 아이는 아직 살아보지 않은 자신의 미래를 부모의 경험과 기대에만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서울 목동 학원가에서 학원 수강을 마친 학생들이 귀가하고 있다. l 출처:경향DB

부모가 보기에 아이의 저항은 답답하다. 저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자신의 대리만족 집념이 강박이고 무리라는 점을 깨닫고 고치기보다는 아이가 철없다고 생각하고 철들게 하는 방법으로 엄격한 관리와 훈육을 택해 밀고 나간다. 아이와 부모, 부모와 아이는 부딪친다. 아니면 숨겨진 갈등은 안에서 터져나올 시기를 꿈꾸며 자라난다. 학교폭력, 집단따돌림, 일탈, 가출, 비행, 범죄는 스스로 크려는 아이와 아직도 키우려는 부모가 부딪치며 떨어뜨리는 파편들이다.

삶의 경쟁에서 뒤처진 과거의 상처가 가끔 재발해서 힘든 부모가 있다면 자신의 아이와 다른 부모들의 아이들 간의 ‘세기의 대결’을 꿈꿀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아이는 ‘최종 병기’로 단련되어야 한다. 아이가 이기면 내가 이기는 것이다. 아이가 지면 내가 지는 것과 같다. 부모는 ‘내가 키운 아이가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입술을 깨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랜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공교육이 아니다. 학원이 주도하는 사교육도 아니다. 실상은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적어도 대학을 갈 때까지 아이를 가진 가정마다 부모가 주도해서 만들어내는, 낮밤으로 진행되는 가정식 교육이며 전쟁이다. 내신관리를 위한 공부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소규모 전투의 연속이라면 수능시험은 전면전이다. 외국 명문대학 진학에 성공하면 해외의 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부모는 지휘관이고 아이는 전투병이다.

오늘도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현재의 행복이 아닌 미래의 승리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근저당 설정된 삶을 여린 어깨로 힘들게 받들고 자정이 가까워서야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부모는 전장에 내보낸 병사의 귀환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아이가 집에 올 때까지 밤잠을 설친다. 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의 깊은 곳에는 부모의 좌절, 보상을 위한 노력, 대리만족의 기대, 실패에 대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들은 오늘도 찾아오지 않는 행복을 기다리며 학교에서 학원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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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어려서 낯가림을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이 아기에게 불쑥 얼굴을 내밀면 아기는 자지러지게 놀라 엄마 품으로 파고든다. 어린아이에게 낯가림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다.

나이가 든다고 어릴 적 낯가림하던 버릇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성숙되고 경험이 쌓이면 대개는 무난하게 넘어간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나 싫은 사람과 좋은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왜 싫을까, 왜 좋을까. 막상 물어보면 대답이 궁하다. 그저 그렇게 느낀다고 한다. 뚜렷한 이유 없이 싫어하거나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으니 묘하다. ‘먹여서 싫다는 사람 없다’고 사람은 자기를 챙겨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가까이에서 경험하면 싫어하던 사람도 좋아진다. 그래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고 두려움을 걷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어울리며 옆에서 그 사람을 겪어보는 것이다. 물론 위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멀리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진보와 보수단체 대표들이 10일 새해모임에 참석, 담소를 나누고 있다. I 출처:경향DB

낯가림이 꼭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종교, 사상, 이념, 취미, 음식 등에도 널리 적용된다. 따지고 보면 진보와 보수라는 틀도 그렇다. 소수의 사람들이 주도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반대편을 낯가림하도록 장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되는 선도 아닌 것을 마치 그런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런 경우는 보수, 저런 경우는 진보로 대처한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도 아닌데, 보수는 평생 보수, 진보는 평생 진보로 행세한다. 어떤 음식은 절대로 못 먹는다고 우기는 것, 국한문 병용과 한글 전용 사이의 갈등,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사이의 다툼 역시 일종의 낯가림이다.

세계화 시대에 한국인과 외국인을 자꾸 나누는 것도 결국 낯가림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저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지 그 사람이 꼭 한국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문제이지 태어난 나라가 문제가 아닌 것을 시시비비하는 것은 두려움이나 시기심의 표현일 뿐이다.

누가 나를 싫어한다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 애써도 효과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싫고 좋은 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의 영역이므로. 어차피 세상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관심 없는 사람도 다 있다고 받아들이자.

누가 나를 계속 싫어한다면 쾌감을 느끼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니 쾌감에 젖으려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무시하는 것이 좋다. 그가 나를 좋아하도록 내가 애쓰는 모습은 그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게 된다. 그는 증폭되는 쾌감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도 나를 끈질기게 싫어할 것이다.

만약 그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나도 좋아할 만한 사람임을 보여주면 된다. 그렇게 보여주었는데도 믿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가까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요약하면, 가학적인 사람들을 반대로 괴롭히는 최상의 방법은 그들에게 기쁨의 원천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평안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가 내게 퍼붓는 비난과 욕설은 사실 그의 마음에 쌓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것들이 순간적으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마치 집안의 쓰레기를 집 밖에 버리면서 자기 집은 깨끗하다고 우기는 것과 같으니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신경 쓸 시간에 차라리 나를 좋아할 사람들을 더 많이 사귀는 것이 낫다. 세상에는 작은 친절에도 감동해서 좋은 친구로 꾸준히 남을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은 복통을 오래 앓도록 그냥 내버려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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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 서울대 교수·정신분석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이해하는 입장에서 느끼는 허탈감과 무력감이 내 어깨에 걸려 무게를 더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을 스스로 등지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들의 선택에 동의할 수는 없다. 자살이 가진 허상의 위험은 자살을 마치 자신의 의지의 선택인 것같이 보이게 하는 것이다. 자살의 실상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의 선택에 자아가 굴복하는 것이다.

세상은 살아내기가 만만하지 않다. 순탄한 삶보다는 암초에 부딪히고 마음과 몸에서 피를 흘리는 경험이 더 흔하다. 사람이 그렇게 살다보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마음에 차오른다. 그 유혹이 임계점을 넘으면 자살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자살은 자기를 자기가 직접 파괴하는 행위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죽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논리적 모순이자 자기변명이다. 진정 내가 나를 위한다면 이유가 어떻든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차라리 죽는 것과 살아남는 것의 장단점을 평생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이 인간적이다.

죽을 수 있다면 살 수 있다. 그러니 자기파괴적인 충동에 무릎을 꿇기 전에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첫째, 내가 죽고자 하는 일이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둘째, 내가 죽음으로써 그에게, 세상에 복수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 과연 죽음으로써 해결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남을 위해서, 높은 가치를 위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죽는 것이라면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이들을 우리는 의사, 열사, 순교자 또는 애국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부른다.
이러한 죽음조차도 심리학적 관점에서 엄격하게 보면 자살이고 자기파괴 행위다. 그 죽음에 사회적 가치를 부여했을 뿐이다. 남을 위해 죽는 경우도 그러하니 그냥 개인적인 이유로 자신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는 행위는 가치가 있는 일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으로써 복수한다고 한다. 과연 내가 죽음으로써 그에게, 세상에 복수할 수 있는가? 결론은 명백하다. 복수는 가능하지 않다. 내가 죽어도 그는, 세상은 나를 너무나 쉽게 잊을 것이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죽음을 통한 복수는 가능하지 않다. 복수하려면 살아서 해야 한다. 물론 자기파괴가 없는 순이익 100%의 복수는 가능하지 않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그러한 결정을 쉽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신중한, 균형 잡힌 결정이었을까? 자살을 자아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자기파괴적 충동이 지나치게 강하게 의식의 세계로 올라오는 것을 자아가 막지 못해서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자기를 파괴했거나, 초자아의 비판과 질책이 너무 거세 자아가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다가 그 결과로 자살을 했거나, 자아의 힘이 너무 약해 무의식의 충동도, 초자아의 압력도, 현실 세계의 거센 바람도 다 막아내기 힘들어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그 압력들을 해소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살 풍조의 거센 바람을 순풍으로 바꾸어 사람들이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사회가 되려면 자살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심층 진단과 예방적·치료적 행동이 필요하다. 어떤 특정 조직만의 문제로 여기고 제도 몇 가지를 바꾸어서는 효과를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포기해 버리는 인간 심성의 취약점을 고쳐내는 국가적인 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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