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무관심 속에 치러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선거에서 유력 차기 대권후보 문재인은 신승(辛勝)하였으나 당내 최고지위는 물론 대중노출 측면에서도 유리한 지위를 확보했고, 호남 맹주 박지원은 문재인 견제세력을 총집결시키면서 세를 과시했으며, 1980년대 반독재학생운동의 지도자 이인영은 고투(苦鬪)하며 존재감을 유지했다. 그러나 과열되기 마련인 선거과정의 공방은 각 후보 및 지지자 사이에 깊은 감정의 골을 남겼다.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이 지적했던, 당을 분열시키고 지도부를 무력화하는 ‘악마’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번 선거결과는 이 정당이 김대중, 노무현, 김근태의 정신을 따르는 정당임을 재확인해주었고, 각 세력의 지분은 대략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었다. 이제 세 후보 및 맹렬 지지자들은 세 분 고인이 자신들에게 무슨 요청을 하고 있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움직여야 한다. 현 상황이 어떠한가. “이명박근혜” 보수정권의 민낯과 밑천이 다 드러났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하는 ‘세계언론자유지수’가 계속 하락하여 “문제 있는 수준”이 되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판은 불허하고 소통은 거부하는 ‘남조선 최고 존엄’이 되었다. 집권세력은 대한민국을 “이승만과 박정희만의 나라”로 만들면서, 반대자를 억압하거나 무력화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는 할 의사가 없고, 경제활성화는 할 능력이 없다. 뽑아 올리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득권 유지와 확장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다. 내세우는 정책은 하나같이 서민과 중산층의 주머니를 털어 ‘사회귀족’을 챙겨주는 정책이다. 그 결과 국민의 절대다수는 ‘을’ 또는 ‘장그래’가 되어 불안과 걱정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새누리당 지지율은 새정치연합 지지율을 계속 10~20%가량 앞서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졌지만,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야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 셈이다. 그사이 새누리당은 ‘탈박’에 시동 걸고 있다. 박근혜 정권 실정의 반사이익으로 정권이 야당에 넘어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가 1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시작 발언은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필자는 2016년과 2017년 권력교체를 희망한다. 야당이 집권을 한다 해도 ‘천국’이 오진 않겠지만, ‘지옥’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에. 여기서 제1야당의 대표가 된 문재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경제민주화, 그리고 소득, 일자리, 복지를 중시하는 성장이라는 노선의 얼개는 잡힌 것 같다. 이제 본인이 공언한 정당 혁신을 실현해야 한다. 투명하고 계량 가능한 공천 기준과 절차를 사전에 확정하여 적대적 계파 대결과 불승복의 악순환을 원천봉쇄해야 한다. 영국 노동당의 경험에 따라, 시민참여를 보장하고 고무시키는 체제를 만들어 당의 기반을 확대·강화해야 한다. 사실 이는 현대 정당이 갖추어야 할 기본의 문제이다. 새누리당이 먼저 실천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정당 혁신 없이 총선 승리는 없다. 총선 승리 없으면 문재인은 없다. 그러면 문재인은 무엇을 결단해야 하는가. ‘육참골단(肉斬骨斷)’이다. “자신의 살을 베어 내주어야 상대의 뼈를 끊을 수 있다.” 만약 문 대표가 ‘살’을 챙기다가는 자신도 죽고, 당도 죽고, 범진보도 죽을 것이다. 그 결과 수구기득권의 ‘뼈’가 끊어지기는커녕 더 튼튼해질 것이다.

문재인 자신이 ‘친노’ 해체에 나서야 한다. ‘노무현 정신’에 충실한 ‘친노’라면 당의 혁신과 정권 교체를 위한 거름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낮추며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문재인을 앞에 내세우고 그 뒤에서 과실(果實)을 따려는 마음을 죽여야 한다. ‘친노’로 분류되지 않는 지도자와 그 지지 세력을 존중하고, 그 마음을 읽어야 한다. 새정치연합은 애초부터 중도진보와 중도보수의 연합정당 아니던가.

‘친노’건, ‘반노’건, ‘비노’건 모두 불쏘시개를 자처하고 자신을 태울 때 희망과 신뢰가 만들어질 것이다. 노선과 정책 논쟁은 필요하지만, 폐쇄적 계파 의식·문화와 분열의 프레임은 사라져야 한다. 누구도 진리를 독점하고 있지 않다. 확보하고 있는 진리의 양과 질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버려야 얻는다. 비워야 채워진다. 잘라내야 자라난다. 나눠야 커진다.

※이제 ‘밥과 법’을 마무리합니다. 올해 ‘긴 호흡’을 유지하며 써야 할 법학서가 있기에 대중매체에 글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밥’을 먹는 세상, 제대로 ‘법’이 서는 세상을 위한 노력은 미력이나마 계속할 것입니다. 그간 졸고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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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주 교수가 <정치의 이동>에서 지적했듯이 한국 사회에서 “능력이 정의다”라는 ‘메리토크라시’(능력자 지배체제) 신봉자가 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 재화가 ‘능력’에 따라 분배되고 있지 않음은 외면하거나 은폐하고 있다. 조현아를 비롯하여 각종 물의를 일으키는 재벌 3세들이 ‘능력’이 확인되어 그 자리에 올라 재화의 핵심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결정·유지되는 ‘사회귀족’의 위세는 막강하다. ‘정치귀족’은 표를 위해 발품이라도 팔아야 하며 ‘법복귀족’은 공부라도 해야 하지만 ‘사회귀족’은 태어나는 순간 ‘슈퍼 갑’이 되며 그 지위는 대대손손 유지된다. 이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키기는커녕 자신의 지위와 부를 유지·확장하기 위해 범법을 일삼는 경우도 많은데 그래도 처벌은 가볍다. ‘정치귀족’이나 ‘법복귀족’들이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을 내걸며 이들의 눈치를 보거나 구명(救命)에 나서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경제범죄를 엄벌하는 미국 등 다른 자본주의 나라는 벌써 경제가 망해야 했다. 매우 드물지만, 능력 있고 절도 있는 ‘계몽귀족’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사회귀족’과 달리 사회구성원의 압도적 다수는 일자리, 방 한 칸, 자식 교육 등을 평생 걱정하며 살아야 한다. ‘사회귀족’의 행태에 불만을 느끼지만 뚜렷한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으니, 분노를 삭이며 자기 앞가림하기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사회귀족’이 지배하는 회사에 들어가는 경우는 바로 ‘사회노예’가 된다. 자신과 가족의 밥줄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는 점점 불의(不義)는 잘 참고 불이익은 못 참는 존재가 되고 있다. 거악(巨惡) 앞에서는 침묵하거나 눈치보고 소악(小惡) 앞에서는 흥분하고 거품을 무는 존재가 되고 있다. 요컨대 ‘속물’이 된 것이다! 백욱인 교수는 <속물과 잉여>에서 통렬히 꼬집었다. “재산과 지위를 축적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그러나 정작 자기 주체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없다. 위선자와 졸부 중에 많았으나 이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할 만큼 대세가 되었다. 계산에 매우 치밀하고 자기 소유와 관련된 사안에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을 보인다.” 내 속에도 이러한 속물이 살고 있음을 고백한다.

속물이 되면 ‘귀족체제’가 요구하는 덕목을 내면화한다. 자신을 ‘귀족’과 동일시하며 ‘귀족체제’ 옹호에 앞장섬은 물론 ‘귀족’에게 당한 피해자를 공격하기까지 한다. 조직 내부 사람이 ‘귀족’의 불법이나 비리를 비판·공개하면 ‘충성심’이 없는 자 또는 ‘조직부적응자’로 몰아치고, 조직 바깥사람이 그러면 ‘빨갱이’로 매도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복서’는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부상을 당하자 바로 도살장으로 팔려나갔지만, 이러한 일이 자기에게 닥치기 전까지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상황은 답답하고 전망은 우울하지만 희망을 만드는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얼어붙은 얼음장 밑으로 봄을 준비하는 개울물은 쉼 없이 흐르고 있다. 새해를 맞이하여 두 사람의 절절한 토로를 떠올린다. 정치권력에 맞선 윤석열 검사의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권력에 맞선 박창진 사무장의 “나는 개가 아니다”. 각성한 주체에게 두려움은 없다. 윤 검사의 말, 청와대와 법무부와 검찰청 앞에 새겨야 한다. 박 사무장의 말, 전경련 앞에 새겨야 한다. 나아가 모두 초·중·고교 교과서에 넣어야 한다.

국정감사 참석한 윤석열 여주지청장 (출처 : 경향DB)


시민은 민주공화국의 원칙에 충성할 뿐이다. 선두에 날아가는 기러기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V자 대형으로 유지하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기러기 리더십’은 민주공화국의 리더십이 아니다. “여러 불충한 일로 대통령께 걱정을 끼쳤다”라고 반성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의 충성론 역시 민주공화국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자는 봉급을 위해 노동을 팔 뿐이지, 인격까지 파는 것은 아니다. 회사 밥을 먹는다고 그 회사 ‘오너’의 ‘개’가 되어야 한다면, 그 회사는 ‘동물농장’이다.

윤석열과 박창진이 되는 것, 쉽지 않다. 그러면 이효리를 따라 해보자.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손해배상을 당해 월급과 집을 빼앗긴 노동자들에게 이효리는 4만7000원의 ‘노란 봉투’를 보냈다. 또한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이창근, 김정욱 두 사람을 응원하기 위해,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되면 비키니 입고 춤이라도 추겠다고 약속했다. 새해 사회 곳곳에서 제2, 제3의 윤석열, 박창진, 이효리를 보고 싶다. 박노해의 시 구절처럼,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기에.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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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으로만 떠돌던 ‘십상시’의 국정농단의 일각이 공개되었다. 다름 아닌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보고서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폐하’는 사건의 핵심은 문건 유출이며, 이는 “국기문란”이므로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어명’을 내리신 후 “찌라시 얘기에 나라가 흔들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개탄하셨다. 그 ‘찌라시’를 만든 곳이 어디였는지 잠시 헷갈린다.

아, ‘군왕무오류’이니 ‘폐하’가 하는 일에 무슨 잘못이 있으리오. ‘군왕무치(君王無恥)’이니 ‘폐하’가 사과할 일이 뭐가 있으리오. 높은 안목과 식별력을 가진 ‘폐하’가 총애하고 신뢰하는 신하들에게는 무슨 허물이 있으리오. 모든 분란은 충성심 없는 ‘배신자’들과 이에 영합하는 언론과 무지몽매한 백성 때문이겠지!

‘친박 공신’과 ‘호위무사’들은 ‘폐하’와 ‘십상시’를 엄호하고 나섰다. 예컨대 김재원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문건의 60%는 사실이라고 발언한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의 “정신상태”를, 그리고 ‘폐하’의 수첩 지시를 공개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인간 됨됨이”를 공격하였다. 노회한 ‘도승지’ 김기춘은 ‘어심’을 잡기 위해 ‘십상시’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임기 2년 만에 발생한 권력암투와 이전투구가 목불인견이다. 그렇다면 ‘의금부’ 검찰이 ‘십상시’ 게이트를 제대로 수사할 것인가. 기대난망이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머리 숙이고 죽은 권력만 물어뜯는 습성은 바뀌지 않았다. 검찰은 ‘어명’의 취지를 받잡고 ‘십상시’의 중식당 회동 여부만 확인하여 사건을 마무리하고, 이들의 광범한 국정개입에 대한 수사는 덮어버릴 모양이다. 문건을 보도한 불경스러운 언론과 기자들은 혼을 낼 모양이고.

이 와중에 “실세는 청와대 진돗개”라는 썰렁한 유머를 날리며 ‘독락(獨樂)’하는 ‘폐하’에게 성찰이나 사과를 기대하진 않겠다. 그러나 존재하는 법은 시행해야 한다. ‘십상시’ 게이트는 2014년 여야 합의로 제정한 상설특별검사법이 규정한, 검찰 수사로는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이 확보되기 어려운 전형적 사건이다. 국회는 특별검사제 발동을 의결해야 한다. 그 이전이라도 ‘폐하’의 치마 뒤에 숨어 보신을 꾀하고 있는 자들이 조금의 애국심이 있다면 즉각 물러나야 할 것이다.

9일 서울 광화문앞에서 정의당 당원들이 내시복장을 한채 '정윤회 게이트'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편 ‘십상시’ 문제가 터지니 이명박 정권하에서 일어났던 ‘사자방’ 게이트가 묻히고 있다. ‘사자방’ 게이트가 무엇이었나? 4대강, 자원외교, 방위사업 등 국책사업을 통하여 약 100조원의 혈세가 날아간 사건이었다. ‘십상시’ 게이트가 대중적 흥미를 더 끌겠지만, 사안의 심각도는 ‘사자방’ 게이트가 훨씬 중대하다.

‘사자방’ 게이트의 뿌리를 파헤치는 것은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감사원도 인정한 졸속·부실 공사를 벌여 4대강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으로 막대한 혈세가 끊임없이 들어가는 거대한 ‘녹조 라테’ 저수지로 만들고 자신들은 막대한 이권을 챙긴 ‘국토참절범(國土斬截犯)’들을 어찌 그냥 두어야 한단 말인가. 한편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 자원외교를 정쟁으로 삼아 안타깝다”고 발언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글로벌 호갱님’으로 만든 자원외교야말로 국부를 대규모로 유출한 비리가 아니던가. 엄청난 나랏돈을 허공에 날리며 제 뱃속을 채운 ‘매국배(賣國輩)’들은 반드시 징치해야 한다.

그리고 입만 열면 국방과 안보를 떠들던 전·현직 최고위 장교들과 방위산업체가 서로 결탁하여 사적 이익을 위해 천문학적 예산을 낭비하며 국방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음이 드러났다. 이들이야말로 악질적·상습적 안보사범이 아닐 수 없다. 방위사업비리 합동수사단이 발족했지만, 미국 군수업체나 국내 재벌 방산업체 등 방산비리의 ‘범털’은 건드리지 않고 국내 중소업체 같은 ‘개털’만 잡을 모양새다.

최근 여러 여론조사는 국민 70% 이상이 ‘사자방’ 게이트로 인한 혈세 낭비에 분노하며 국정조사를 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모자와 책임자 하나하나를 국회에 세워야 한다. 범죄증거가 드러난 자들은 법정에 세워야 한다. 근래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 저해 규제를 “우리가 쳐부술 원수”라고 명명하고 “단두대”로 보내야 한다면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의 ‘원수’는 국정농단을 일삼은 ‘십상시’ 세력과 나라를 말아먹은 ‘사자방’ 책임자들이며, 이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정치적·사법적 단두대에 올라야 할 것이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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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정권이 4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 등 ‘사자방’ 비리로 약 100조원의 혈세를 날렸음이 확인되었다. 30조원의 혈세가 들어간 4대강에는 지금도 해마다 5000억원의 유지비, 3200억원의 이자가 나가고 있다. 40조원이 들어간 자원외교는 ‘깡통’이었다. 수십배 부풀린 값을 주고 저급 무기를 사들이는 비리는 구조화·고질화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어디서 이를 벌충하여 재정위기를 타개하고 복지수요를 충족시키려는가.

새누리당 정권하에서 계속된 부자감세·친기업 정책 때문에 기업들의 사내유보율이 약 20%대이고 금액으로는 약 760조원이지만, 기업들은 투자와 고용창출에 소극적이다. 국내 10대 그룹 82개 상장사(금융사 제외)의 경우 사내유보율은 약 1700%대이며, 금액은 약 500조원에 달한다. 반면 근로자의 실질임금 상승률은 0.2%로 추락했다. 근로자들의 구매력이 사실상 없어졌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권은 부자증세는 없다고 한다. 지지층의 이반이 두려운 것이다. 토마 피케티가 주창하고 있는 누진적 부유세 부과나 빌 게이츠가 강조하는 상속세 강화 중 어느 것도 채택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정부는 작년 2월 소득세법 시행령을 고쳐 건설근로자의 퇴직공제금에 과세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작년 5만4967명으로부터 소득세 11억5400만원이 원천징수되었다. 건설업 특성상 사회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건설근로자에게 거의 유일한 노후보장인 퇴직공제금도 털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달 주민세, 재산세, 자동차세 인상안은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로 넘어갔다. 근래 준조세인 교통범칙금 건수와 액수도 폭증하고 있고, 내년부터는 여신·수신·외환을 제외한 금융서비스에도 부가가치세가 부과된다. 야금야금 서민증세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진행된 서민증세. 그 돈은 어디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조직적·제도적 “벼룩의 간 빼먹기”를 통해 확보한 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박근혜 정권의 ‘임기 중 예산 계획’에 대통령 대표공약이었던 누리과정(만 3~5세 공통교육과정), 초등 돌봄 교실, 고교 무상교육을 위한 재정이 0원으로 설정된 걸 보니, 여기로 가지는 않는다. 박근혜 후보는 “반값 등록금을 꼭 실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공약은 폐기되었다. 무상급식은 진보파 지자체장과 교육감들의 공약이었지 박 후보의 대선 공약이 아니었기에 지키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내년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예산은 올해 3배 규모인 403억원이 편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돈의 행방을 알겠다. 작년 한 해 동안 정부는 각종 보조금, 공공조달, 비과세 감면 등 예산 지출액 21조원, 대출과 보증 등 정책금융 지원액을 합쳐 126조원 이상을 대기업에 보태주었으니, 또 다른 종착지도 알겠다.

최근 김종대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소득 중심의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을 강조하며 용기 있게 밝힌 사실이 있다. 그는 연간 2300여만원의 연금소득과 집을 포함, 5억원이 넘는 재산이 있지만 피부양자 자격 상한선에 미달하기에 퇴임 후 건강보험료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 반면 서울 송파구 반지하 셋방에서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숨진 채 발견된 세 모녀는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매달 5만140원의 건강보험료를 내야 했다. 5만140원은 부자에게는 한 끼 밥값이겠지만, 빈자에게는 목숨값이다. ‘송파 세 모녀’ 같은 극빈층으로부터 꼬박꼬박 뽑아낸 돈은 김 이사장같이 충분한 자력이 있는 사람들의 공짜 진료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박근혜 정권은 ‘증세 없는 복지’ 운운하나 실상은 ‘복지 없는 서민증세’이다. 외관상 복지 시늉은 내야 하니, 서민층에게 앞에서 하나 주고는 뒤에서 두 개를 뺏고 있다. 현재 재정 상황에서 부자증세 없이는 ‘보편적 복지’는 물론 ‘선택적 복지’도 불가능함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집권세력이 노골적으로 친부자·친기업 정책을 밀어붙이는 사회에서 임금생활자로 산다는 것, 힘든 일이다. 직장을 잃는다는 것, 무간(無間)지옥에 떨어지는 격이다. 돈 없는 노인이 된다는 것, 고독사(孤獨死)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근래 출간된 책 제목으로 말하자면, “격차사회”의 바닥에 놓인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승자독식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은 “절벽사회”의 벼랑에 서게 된다. ‘승자’를 더 챙기고 ‘격차’를 더 벌리고 ‘절벽’을 더 가파르게 하는 정권을 보며 국가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세금은 누가 얼마나 왜 내야 하는가 등 원론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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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님 귀하.

저는 귀하의 대통령 당선에 반대했지만, 대선 후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깃발을 낚아챈 탁월한 능력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라”고 고언했습니다(동아일보 2013·2·4 ‘진보가 박근혜에게 말한다’ 인터뷰). 그러나 경제민주화, 노인 기초연금 20만원, 4대 중증질환 100% 국가책임, 의료비 본인부담 상한 50만원, 무상보육, 반값 대학등록금 등 대선공약은 줄줄이 파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식언(食言) 앞에서 ‘절반이라도 하겠지’라고 생각했던 순진한 자신을 탓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2012년 12월14일 “문재인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통령 비방하는 댓글 하나만 달아도, 컴퓨터 내놓으라고 폭력정치, 공포정치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분개하던 귀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최근 귀하의 “대통령 모독” 발언 이후 검경의 위헌적 형벌권 남용을 보니, 당시 발언은 타인의 이름을 빌린 자기예언이었더군요. 검찰은 주요 포털과 카카오톡 등에 대한 ‘사이버 사찰’을 벌였고, 경찰은 조능희 MBC PD의 리트윗 하나를 문제 삼아 유치장에 집어넣었습니다. ‘국가원수 모독죄’와 ‘유언비어 유포죄’라는 황당한 죄목으로 시민의 입을 막던 유신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시절입니다.

2014년 5월16일 세월호 유가족들과의 면담자리에서 “할 말 있으면 언제든 청와대로 찾아오라”고 위로했고, 5월19일 담화문 낭독 시 눈물을 흘리셨지요. 그런데 이후 유가족들과의 재면담은 거부하고 유가족들을 철저히 고립시키면서 세월호특별법 협상의 ‘가이드라인’을 지시하는 모습을 보니 ‘얼음공주’의 눈물은 몇 도였을지 궁금해졌습니다.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고 정치민주화를 심화시킬 생각이 귀하에게는 없음이, 친분 있다는 독일 메르켈 총리의 ‘엄마 리더십’을 발휘할 생각 역시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와중에 두 가지만은 실현하길 희망합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분권형 개헌입니다.

저는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도 남북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남북 간 정치적·군사적 긴장은 고조되었고 경제협력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2007년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서해 평화협력지대, 조선협력단지 건설, 직항로를 이용한 백두산 관광 등은 말도 꺼내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2010년 ‘5·24 조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변함이 없습니다. 돌파구가 필요합니다. 남북 평화공존과 경제협력은 남북 모두에 유리합니다. 귀하 스스로도 2014년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이라고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2014 세계지식포럼 개막식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는 박 대통령 (출처 : 경향DB)


북한의 ‘병영국가’ 체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관적 희망과 객관적 현실을 혼동하며 ‘북한 붕괴’의 주문을 외는 사이비 북한 전문가들과 거리를 두십시오. 남북정상회담은 다름 아닌 귀하의 아버지가 하려 했던 일입니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만나지 못했지만, 박근혜와 김정은은 만나야 합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성과입니다. 귀하가 결심하면 귀하의 핵심 지지기반인 극우반공세력도 순순히 동의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여야, 좌우를 막론하고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고 권력분점에 기초한 연합정치를 가능케 하는 권력구조를 만드는 것은 정파의 유불리를 넘어선 국민통합과 정치안정을 위한 주춧돌입니다. 물론 개헌 외에 51%가 100%를 가져가는 선거법 개정도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추진을 공약했던 귀하는 이제 개헌 논의를 ‘경제 블랙홀’이라며 반대합니다. 의회의 권한을 위협하는 월권적 반대입니다. 개헌 논의 자체를 처벌했던 유신 시절 긴급조치가 생각나더군요. ‘경제 살리기’는 개헌과 무관하게 임기 내내 추진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규제를 풀어서 경제를 살린다는, 실패가 입증된 신자유주의 정책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 경제를 살릴 수 있을지 극히 의문입니다. 개헌에도 ‘골든타임’이 있습니다. 내년 중에 마무리하지 않으면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 때문에 개헌은 무망(無望)해집니다. 과감한 결단을 내려 ‘분권형 대통령제’를 확립한 대통령이 되십시오. 대북정책의 전환과 분권형 개헌은 정파를 넘어선 국민적·시대적 과제입니다. 귀하의 업적으로 역사에 남을 일입니다. ‘각하’! ‘창조경제’ ‘국가 대개조’ 등 휘황찬란한 비전을 접고 이 둘에만 집중하십시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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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프란치스코 현상’이라 할 만하다. ‘파파 프란치스코’의 말씀과 행보, 눈빛과 손동작 하나하나가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육화(肉化)된 신앙의 진면목 앞에 종교를 넘어 거의 모든 시민은 감동을 받았다. “국민소득 3만달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엄청난 위세를 뽐내는 건물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며, 최고급 명품과 명차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활개치고 있지만, 그 뒷면에서는 가난, 불안, 소외, 억압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한국적 현상이자 세계적 현상을 교황은 직설화법으로 비판했다.

교황은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고 축원했고, “막대한 부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를 경고했다. 그리고 낮은 자세로 사회·경제적 약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껴안았다.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저파(低派)’였다.

힘과 돈을 가진 자들 중 교황의 이런 발언에 마음 불편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속으로 “종교인이 왜 정치발언이야!”, “남미 출신이라 ‘해방신학’에 물들었구먼!”이라며 툴툴거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반공권위주의 체제가 종료한 지 오래지만, 우리 사회에서 교황 정도의 발언을 한 사람은 여전히 ‘좌경용공’으로 낙인찍히고 공격받는다. 언제부터인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노선 외에는 모두 ‘종북좌빨’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정부, 기업, 언론 등도 모두 교황 방문을 환영했지만, 그의 비전과 제안은 외면했다. 아니 정반대로 움직였다. 교황은 취임 후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이며 불평등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경제적 문제”임을 계속 강조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는 암 덩어리”라고 선언했다. 이후 정부는 ‘경제 살리기’의 명분 아래 부동산 및 서비스업 규제 완화, 의료시장 영리화 등을 추진하고 있고, 보수언론은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 뒤에서 기업은 미소 짓고 있다. 대선 시기 써먹었던 ‘경제 민주화’ 깃발은 쓰레기통에 들어간 지 오래다. 박 대통령은 ‘율리아나’라는 가톨릭 세례명을 갖고 있지만, 그의 정치적 신념과 행동은 ‘프란치스코’의 정반대 편에 있다.

바티칸에서 온 선물 박근혜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청와대에서 선물 교환을 한 뒤, 교황이 선물한 바티칸의 전경이 그려진 액자를 감상하고 있다. _ 연합뉴스


한편 교황은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싸우라”고 강론했지만, 우리나라 유력 일간지가 교황 방한을 축하하며 뽑았던 기사 제목은 “돈이 도네요… 고마워요, 프란치스코”였다. 또한 교황은 “무한경쟁 사조에 맞서라”라고 강조했지만, 정부와 기업의 최상부는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제도와 문화를 찬미하고 있다.

교황은 세월호 유족, 쌍용차 해고노동자, 제주 강정마을 주민, 용산참사 피해자, 밀양 송전탑 건설지역 주민 등을 만나 위로했지만, 정부는 줄곧 이들을 배제하거나 억압해왔다.

‘파파 프란치스코’는 짧은 시간 내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추한 민낯을 드러냈고, 이윤과 욕망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 맹성(猛省)의 기회를 주었다. 그의 언행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며 깊고 넓은 파급력을 가질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필자도 ‘프란치스코주의자’는 되고 싶다.

그러나 그가 던진 문제를 해결할 주체는 역시 이 땅에 사는 우리다. ‘파파 프란치스코’를 찬미한다고 그가 지적한 대한민국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가 선택한 ‘쏘울’을 탄다고 바로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지 않는 것처럼. 또한 교황이 지적한 문제는 단지 신심(信心)과 기도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세속의 정치, 법,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의식 있는 사람들이 연대하여 세상의 모순과 부딪치며 끈질기게 노력할 때 세상은 조금씩 바뀐다. 교황 자신이 “공동선을 위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이기적”이라며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중립을 지켜야 하니 세월호 리본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답했음을 기억하자.

‘파파 프란치스코’를 칭송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실천이 없으면 ‘체 게바라’라는 기표(記標)가 그랬던 것처럼, ‘파파 프란치스코’는 ‘혁명성’이 사라진 또 다른 ‘문화상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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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배우 김보성의 음료광고로 ‘의리’라는 단어가 엄청난 인기다. 젊은이들은 “독도는 으리 땅” 식으로 사용하는 모든 단어에 ‘으리’를 넣는 패러디를 즐기고 있다. 의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신의·예의·도의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만이 아니라 세상의 바른 도리, 즉 ‘정의(正義)’를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공자가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말했을 때, 그 ‘의로움’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의리는 ‘유사(類似)혈족’ 보스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과 구성원의 맹목적 단결을 강조하는 덕목으로 변질됐다. 내란, 군사반란, 독재의 책임자 전두환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는 이유로 장세동은 “의리의 돌쇠”라고 불렸다. 조직폭력배도 이런 식의 의리를 강조하면서 조직을 탈퇴하거나 배신하는 사람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한다. 일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지역 또는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덮어놓고 뭉치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 또는 학교 출신을 불문곡직 배척한다. 정부나 기업 내부의 범죄나 비리의 장본인들은 이를 폭로하는 공익제보자들을 ‘배신자’로 비난하며 꼭 의리를 들먹인다.

많은 정치인들도 의리를 이렇게 왜곡해 사용한다. 2011년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일부 친이명박 직계 의원들은 이명박 대통령과의 의리를 내세우며 “이 대통령을 배신해선 안된다”고 강변했다. 2011년 당시 박근혜 의원은 서청원씨가 이끄는 친박 조직에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2013년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대선 이전 북방한계선 대화록을 입수했다는 발언을 유출한 사람으로 지목된 김재원 의원은, 김무성 의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저는 요즘 어떻게든 형님 잘 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 중… 앞으로도 형님께서 무엇이든 시키시는 대로 할 생각이오니 혹시 오해가 있으시면 꼭 풀어주시고 저를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서청원 의원은 “새누리당원은 위기 때 의리로 뭉친다”며 목청을 높였다.

의리의 선거, 앵벌-으리 (출처 : 경향DB)


의리는 “우리가 남이가?”를 실천하는 패거리주의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조직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불법을 자행하거나 은폐하는 것도 아니다. ‘정의 없는 의리’는 ‘유사조직폭력배’의 자기보호 규율에 불과하다.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발간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선 ‘정의 열풍’이 불었다. 샌델의 초청강연과 정의 관련 서적 발간이 잇따랐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의 수준은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예컨대 1997년 대선 시기 한나라당 후보에게 불법자금을 지원할 것을 모의·실행한 삼성 측 인사는 형사처벌에서 자유로워졌으나, 문제의 ‘삼성 X파일’을 공개한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 노회찬 의원은 2013년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2012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폭로한 장진수 주무관은 표창을 받기는커녕 증거인멸의 공범으로 취급돼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2012년 대선에서 국정원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선거개입이라는 헌정문란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반성은커녕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의리 경영”을 강조하던 “의리의 사나이” 한화 김승연 회장은 거액의 배임죄를 범한 것이 적발돼 처벌됐다. 25명이나 되는 노동자의 죽음과 116일 동안의 송전탑 고공농성을 불러온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는 회계조작에 기초한 부당한 것이었다고 서울고등법원이 판결했지만, 노동자들에 대한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은 철회되지 않았고, 정리해고자들의 복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가? ‘정의 열풍’이 법과 제도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리에서 정의를 삭제한 세력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년째 줄곧 의리를 외쳐온 김보성에게 대중이 갑자기 열광한 것은 진짜 의리가 사라진 현실에 대한 풍자와 경고 아닐까.

정의론 책이 많이 팔리고 읽힌다고 그 사회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으리, 으리”를 외친다고 정의가 구현되는 것도 역시 아니다. 7·30 재·보궐선거가 다가온다. 진짜 의리, 즉 ‘정의 있는 의리’를 지키고 실현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후보에게 한 표를 보태는 것이 정의의 시작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김보성은 말했다. “의리가 지나가면 정의를 하고 싶다. 정의가 있는 의리가 중요하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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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핵심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절대 충성했고 박근혜 대통령을 ‘여왕’처럼 옹위하며 기득권 수호에 여념이 없는 ‘종박(從朴) 훈구대신’들이 자리 잡고 있다. ‘왕당파’라 불러 마땅한 이들의 대표주자는 김기춘 비서실장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에 태어나 196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80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기에 ‘신386’으로 불리기도 한다.

육체적 연령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진보와 보수를 떠나 존경과 신뢰를 받는 어른은 반드시 필요하다. 영화계 원로인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은 1937년생으로 ‘신386’에 속한다. 그러나 영화계 안팎에서 김 위원장을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법대를 졸업한 공무원 출신으로, 정견이나 세대가 다른 사람들과도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포용하며, 겸허하고 소탈한 자세로 성실히 직무에 힘쓰는 사람이다. 김 위원장은 작년 76세의 나이에 직접 메가폰을 잡고 영화감독 데뷔를 하였던 바, ‘영원한 청년’의 진취성을 보여주었다.

반면 정치권의 ‘종박 훈구대신’들은 21세기 경제협력개발기구 소속 민주공화국을 1960~1970년대 개발독재 방식으로 끌고 가려 한다. ‘주군’에 대한 충성을 기준으로 ‘아군’과 ‘적군’을 가르고, 적에게는 온갖 딱지를 붙여 공격한다. 시대착오적 이념공세와 역겨운 지역감정 조장은 이들이 휘두르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다. 이들에게 국민은 민주공화국의 주권자가 아니라 통치의 대상이다. 이들에게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기관이 아니라 ‘여왕’을 보좌하는 ‘신하’일 뿐이다. 사실 이들과 ‘어버이연합’ 회원의 세계관은 표현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 본질에서는 동일하다. 근래 이들은 ‘일베’라는 정치적 손자를 얻게 되어 더욱 고무되어 있을 것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4년 6월24일


이러한 ‘종박 훈구대신’들은 여야를 떠나 한국 정치 발전의 걸림돌이다. 그런데 여당 국회의원들은 너무 조용하다. 국민이 뽑은 헌법기관들이 ‘여왕’과 ‘훈구대신’의 눈치와 심기를 살피는 데 급급하다. 여당 내 ‘보스’들에게는 기대난망이라고 하더라도, 초·재선 의원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장관 자리를 기대하는가? 다음 공천이 걱정되는가?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차출되어 도지사가 된 두 사람의 정치인이 있다. 즉 남경필과 원희룡. 이들은 당내 ‘보스’의 말에 순종하거나 청와대의 의중만 살피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나름 당파의 이익만이 아니라 국민의 눈총을 의식하며 발언하고 행보를 전개한 정치인이었다. 이들은 결국 국민을 보고 정치하는 사람이 큰다는 것을 보여준 예다. 이 두 사람이 중앙정치에서 빠진 상황에서 여당 내 이들을 대신하는 역할을 할 정치인을 기대한다.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보스’의 힘은 강하다. 정책과 노선의 차이보다는 공천과 정치자금 때문에 ‘보스’ 밑에 줄을 선다. ‘보스’가 꾸리는 계파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 목소리를 내는 국회의원들은 외롭고 힘들다. 이들의 당내 기득권 청산 주장은 화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견제와 질시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요컨대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 전까지 여야 각 정당은 혁신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지난 대선 시기 앞다투어 발표한 정당·정치혁신 공약을 지켜야 하는데,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여야 초·재선 의원 등 젊은 정치인들이 나서야 한다. 청와대, 훈구대신은 물론 당내 ‘보스’와도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 7·30 재·보궐선거에서도 당 안팎에서 젊고 유망한 신진기예들이 많이 출전해야 한다.

너무 젊다고? 1969년 김영삼 의원이 신민당의 대통령후보지명전 출마를 선언하며 ‘40대 기수론’을 선창했을 때 42세였다. 당시 당내 실력자 유진산 의원은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아이들이 무슨 대통령이냐”고 조롱했다. 1970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 의원이 선출되었을 때 45세였다. 현 영국 노동당의 당수는 에드 밀리반드인데,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 노선에 반대하며 좌파적 입장을 견지하였기에 “붉은 에드”라고 불렸다. 그가 2010년 블레어의 동지였던 친형 데이비드를 꺾고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을 때 39세였다. ‘온정적 보수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현 영국 총리는 보수당 소속 데이비드 카메론으로, 2010년 총리가 되었을 때 43세였다. 젊다고 걱정하지 말고 조로(早老)하지 않았는지를 걱정하라. 무게와 품위가 필요한 때라고? 유비의 ‘비육지탄(비肉之嘆)’, 즉 말 타고 전장을 달리지 않아 허벅지에 살이 쪘음을 탄식하며, 다시 말에 올라탈 때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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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실장님의 까마득한 대학 후배로, 많은 부족함에도 모교에서 형사법을 가르치고 있는 ‘백면서생(白面書生)’입니다.

실장님의 이력, 대단합니다. 1960년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 고시에 합격하여 1964년 검사가 된 후, 1979년 청와대 법률비서관을 거쳐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1988년, 1991년 연달아 역임했습니다. 보안사 세력과의 갈등으로 관운이 약해진 전두환 정권 시기를 빼고는, 박정희 정권 이후 지금까지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에도 요직을 거쳤고, 최근의 국정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여전한 신뢰를 받으며 사실상 ‘부통령’으로 국정운영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안대희 전 대법관이 국무총리로 지명되었지만, 그는 실장님이 검찰총장 시절 평검사 아니었습니까. 안 후보자는 “김 실장에 비하면 나는 발바닥이다. 우리 아이큐가 130~140 수준이라면 그분은 170대”라고 칭송하였더군요.

그런데 실장님의 화려한 경력 뒤에는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30대 초반 검사로, 박정희 영구집권을 보장하고 시민의 기본권 행사를 금압(禁壓)한 ‘유신헌법’ 초안 작업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1972년 12월 대검찰청이 발간한 ‘검찰’ 48호에 발표된 ‘유신헌법 해설’이라는 글, 기억나십니까. 실장님은 “유신헌법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며,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지지한다고 강변하였지요.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 유신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은 실장님 자기정체성의 핵심일 것입니다. 이는 육영수 여사 살해범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냈던 ‘공훈’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이 실장님에게 혈육적(血肉的) 신임을 주는 이유일 것입니다.

1974년 실장님은 35세에 유신체제의 폭압과 공작의 요새였던 중앙정보부의 대공수사국장이 되었습니다. 박근혜 정권하에서 공안검사 출신들이 곳곳의 요직에 발탁되는 것이 실장님의 이런 성향 및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장님 직할 친위부대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14대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92년 12월, 실장님은 전 법무부 장관으로 ‘초원복국집’에 부산 지역 주요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관권부정선거를 추진했습니다. 제19대 대선 국정원 선거개입의 원조 격인 범죄였습니다. 당시 실장님의 놀라운 발언 중 지금도 회자되는 최악의 지역감정 조장 발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아방’을 묶어세우고 ‘타방’은 쪼개고 찌르고 베는 냉혹한 정치전술은 계속되었습니다. 2004년 3월,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의 선봉에 서서 대통령의 목에 칼끝을 들이댔습니다. 탄핵이 실패한 이후에도 실장님은 2006년 12월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노무현은 사이코다”라는 발언을 하여 ‘적장’(敵將)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명했습니다. 최근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노무현 대통령을 수사한 우병우 전 대검수사기획관이 발탁된 이유가 짐작됩니다. 믿을 만한 ‘살수(殺手)’로 일찌감치 찍어두셨겠지요.

김기춘 비서실장이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 시작에 앞서 시계를 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출처 :경향DB)


지금 제 책상 위에는 <형법개정시론>(1984)이란 두꺼운 책이 놓여 있습니다. 실장님이 ‘5·16 장학금’을 받으며 쓴 서울대 박사논문을 출간한 책이지요. 학생 시절 이 책을 읽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과잉도덕화’되고 ‘과잉범죄화’된 형법을 비판하고 개정방향을 제시한 이 책은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실장님은 “시민사회의 질서원리는 최소한의 자유의 제약을 통하여 최대한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있다”(26쪽), “국가권력을 ‘절대적 정의의 집행자’가 아니라 오로지 ‘시민적 행복의 옹호자’로서 이해”(36쪽)한다고 썼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장님은 이 명제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윗분의 뜻”을 대대로 받들며 ‘연성(軟性) 유신체제’를 도모하고 있습니까?

박근혜 정권의 국정기조, 바뀌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실장님의 사퇴입니다. 실장님이 끌고 온 공안통치 방식으로는 대한민국은 물론 박근혜 정권도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실장님은 이미 박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1972년 유신헌법이 아니라 1987년 민주헌법의 정신에 충실한 대통령 비서실장과 참모진이 필요합니다. 간명히 말씀 드립니다. 실장님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물러나십시오. 후배의 직언이 무례하였더라도 혜량해주시길 바랍니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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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 밑에서 총리를 지낸 프랑수아 기조는 말했다. “스물에 공화파가 아닌 것은 심장이 없다는 증거이고, 서른에 공화파인 것은 머리가 없다는 증거이다.” 이 말은 프랑스 총리를 역임한 조르주 클레망소 등 여러 사람에 의해 사회주의자를 야유하는 말로 변형된다. “스무 살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다는 증거이고, 서른 살에 사회주의자인 것은 머리가 없다는 증거다.” 이 말은 우리나라 보수인사들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나도 스무 살 때는 그래봤다”는 경험론으로 사회 비판, 체제 비판에 대응하면서, 비판자들에 대하여 “아직도 철이 안 들었구나”라고 놀리는 것이다. 민주와 인권을 이야기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철부지 시절의 치기나 만용에 불과할까? 서른 이후부터는 정신 차리고 수구왕당파, 자본주의자, 체제옹호자가 되는 것이 철든 행태일까?

나이가 들어가면 마음도 변한다. 세상의 변화가 아득해 보이거나 변화가 싫어지고, 변화를 위한 외침과 행동도 과격하거나 미숙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최고라 생각하고 타인, 특히 젊은이의 고민과 상황을 외면하며 훈계를 일삼는다. 경청하고 소통하기보다는 비웃거나 호통치거나 잔소리한다. 젊은 시절 세상의 변화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뛰었더라도 추억담이나 영웅담으로만 간직하고, 역동하는 현실 앞에서는 “나도 다 해봤어. 그래봤자 세상은 안 변해. 세상은 쉬운 게 아냐”라며 주저앉는다. 다른 사람까지 주저앉힌다. 더 많은 돈이나 더 높은 자리를 위하여 생각을 180도 바꾸거나 이름을 팔기도 한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이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법과대학(원)에 입학하려 하는 학생들, 판사나 검사 혹은 변호사를 꿈꾸는 학생들을 면접장에서 만나보면 거의 다 “세상에 정의를 구현하고 싶다” “사익보다는 공익, 강자보다는 약자를 위해 일하겠다”고 한다. “나와 내 가족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공부하겠다”고 말하는 이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에는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데 앞장서는 법률가들을 많이 보게 된다.

지난 대선에서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범한 헌정문란 범죄가 발생했을 때, 정파적 이익에 눈이 먼 일부 법률가 또는 법률가 출신 정치인들은 이를 외면·옹호·호도하는 추태를 보였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하루 5억원짜리 ‘황제노역’ 판결은 판사와 검사의 짬짜미였음이 드러났다. 검찰은 형사사법체제의 근간을 흔든 국정원 대공수사팀의 간첩 증거조작의 ‘몸통’은 건드리지도 않고 ‘깃털’만 뽑았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4년 4월 15일 (출처 :경향DB)


나이가 들면 식견과 경험이 늘게 된다. 사람과 세상의 모순성과 복잡성도 이해하게 된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였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의 말, “낙원이란 인류 역사의 시작에도 없었고 마지막에도 없을 것이다”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민주주의와 정의의 원칙을 배신하게 하는 쪽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숙함과 무관한 자발적 굴종이다. 철드는 것이 아니라 썩는 것이다.

다시 한번 두 법률가의 이름을 떠올린다.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 윤석열 전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이다. 경찰과 검찰 내부의 다수는 청와대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알아서 기었지만, 이 두 사람은 헌정문란범죄를 은폐·축소하려는 세력과 끝까지 맞섰다. 그리고 인사상 큰 불이익을 받았다. 이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들인가.

유신 말기 서울대에서 해직되었던 한완상 선생(전 통일부총리)은 1978년 <민중과 지식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다 같이 약삭빠른 기능인간이 되기보다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보자. 밝은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보자.”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철든 체하지 말자고. 배운 자와 가진 자들의 다수가 잘못 철이 들어 문제가 되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철들기를 거부하자고.

그래, 우리 모두 ‘철부지’가 되자! ‘머리’와 ‘심장’ 모두를 가지고, 비그포르스가 말한 ‘잠정적 유토피아’ 즉, “철두철미 ‘현재’로부터 생겨나고 또 ‘현재’에 발 딛고 있는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바보짓’을 계속하자. 이런 ‘바보짓’이 계속될 때 비로소 헌법정신은 살아 움직이고 정의는 실현된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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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하버드대에서 “나도 하버드생이야”(I, too, am Harvard) 운동이 전개되어 미국 대학가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2학년생 기미코 마쓰다-로렌스는 일부 백인 학생들로부터 “글은 읽을 줄 아느냐?”라는 모욕을 받은 후 이 운동을 시작하였다. 하버드대의 흑인 학생들은 지적 능력이 모자라지만 ‘적극적 차별시정정책’(affirmative action) 덕에 입학했을 것이라는 편견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이 정책은 대학 신입생 선발에서 역사적·사회적으로 소수자·약자였던 계급·계층·집단에 대하여 일정한 우대를 하는 것으로 1961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실시되었고, 대학의 창의성과 다양성 강화 및 사회통합 신장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백인 상류층 등 주류집단 소속 학생이나 학부모 중 일부는 ‘역차별’이라며 반발했다. 과거 공화당 지지자들은 이 정책이 없었으면 오바마는 컬럼비아 대학과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대학학력고사(SAT) 성적 등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의 골간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이 정책으로 뽑힌 학생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기회 안에서 최고를 이룬 학생들이었고, 졸업 후 각 분야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마쓰다-로렌스가 겪은 일과 유사한 사건이 서울대에서도 발생하였다. 작년 서울대의 학생 인터넷 커뮤니티인 ‘스누라이프’에 ‘지역·기회균형선발’ 출신 학생을 비하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지역·기회균형선발은 농어촌 등 서울 외의 지역 고교, 저소득 가구, 탈북가정 등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우수한 성과를 거둔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다. 문제의 글을 올린 학생은 동료 친구를 ‘지균충(蟲)’ ‘기균충(蟲)’으로 부르며 비하했다. 서울대 교수로서 부끄럽다. 동료들의 사회·경제적 환경과 대학의 역할 중 하나인 사회통합을 무시하고 입학 시 성적만으로 동료를 평가하는 태도는 ‘반(反)지성’ 그 자체다. 이 글을 올린 학생이 비(非)서울대 학생이나 고교졸업자는 어떻게 취급할까 생각하니 더 참담해졌다.

고교 졸업 시 성적우수자들의 재능과 노력은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하지만, 학문 연구와 지도자 육성이라는 역할을 갖는 대학은 학생 선발 시 성적 외에 다른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 학문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다양한 계급, 계층, 집단의 경험, 이익, 꿈,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학문이 될 리 없다. 대학이 성적우수자들만의 ‘동종교배’ 집단으로 변질될 때 그 대학 출신이 사회통합을 이루어낼 지도자로 성장할 리 없다. 대학은 계층상승을 보장하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큰 공부’를 통하여 ‘큰 사람’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큰 사람’이 되려면 ‘너른 가슴’과 ‘따뜻한 가슴’이 필수적이다. 대학이 고교 졸업 시 우수성적을 뽐내는 데 급급한 학생들이 모여 ‘실력’보다는 ‘연고’를 쌓는 장소로 전락한다면 재앙 중의 재앙이다.


미국 최고 명문 사립대 중의 하나인 애머스트 대학의 앤서니 마르크스 총장은 SAT 과외를 받는 부유층 학생과 그 시간에 ‘세븐 일레븐’에서 일해야 하는 학생을 같은 기준으로 볼 수는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명문대)는 실력과 기회와 재능에 기초한 체제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위로부터 3분의 2의 학생이 상위 4분위에서 오고 오직 5%의 학생만 하위 4분위에서 온다면, 우리는 확장되고 있는 경제적 격차를 해결하는 방책의 일부가 아니라 경제적 격차라는 문제의 일부이다.”

지역·기회균형선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지역·기회균형선발 학생의 환경에 처해있었다면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낼 수 있었겠느냐고, 지역·기회균형선발 학생이 당신의 환경에서 살았더라면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낼 수 있었겠느냐고. 그리고 지역·기회균형선발로 선발된 학생의 ‘행운’이 부러우면 현재 누리고 있는 환경을 지역·기회균형선발 학생의 환경과 교환할 의향이 있느냐고.

지역·기회균형선발로 뽑힌 학생들의 입학 시기 성적은 특목고나 강남 명문고 출신이 많은 수시·특기선발 학생의 성적보다 못하다. 그러나 전자의 사회·경제적 환경을 고려할 때 전자의 성적은 충분히 우수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자의 졸업 시 성적은 후자의 졸업 시 성적보다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역·기회균형선발 출신 학생들의 맹활약을 기대하며 또한 믿는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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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황 권고’에서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질타해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규제였던 것처럼, 오늘날 사람을 죽이고 있는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도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적 살인을 하지 말라”가 현대 사회의 새로운 십계명이라는 말씀이다.


‘경제적 살인’을 일삼는 ‘새로운 독재’ 체제의 정점에는 재벌이 있다. 이들은 최고·최강의 경제권력자들로 명실상부한 ‘사회귀족’이다. 생래적(生來的) 비교우위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은 경제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군사독재가 무너져 정치권력은 5년마다 바뀌지만, 경제권력의 ‘새로운 독재’는 변함이 없다. 너무 심한 경제범죄가 들통나 가끔씩 총수가 감옥에 가지만, 그의 영향력은 수감 전후 큰 차이 없이 견고하게 유지된다. 총수를 수사·기소한 검사, 판결을 내린 판사가 사건 종결 후 종종 총수의 변호인으로 변신한다. 최고위 공무원들은 속속 재벌 임원으로 합류해 대정부 로비에 앞장선다. 정당, 언론, 심지어 학계도 ‘새로운 독재’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거나 영합한다.


경제적 살인의 주된 피해자는 ‘호모 파베르’(노동하는 인간)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직업병, 자살 등으로 죽고 있다. 최근 개봉된 화제작 <또 하나의 약속>은 ‘경제적 살인범’에 의해 ‘피살’된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속 재벌회사 인사관리팀장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20대 초반 백혈병에 걸려 숨진 여성노동자의 아버지를 비웃으며 이렇게 내뱉었다.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이죠.”


[김용민의 그림마당]2014년 2월13일(출처 :경향DB)


1987년 헌법이 보장하는 대의민주주의의 틀을 빌려 사회귀족의 과두정이, 시장경제의 이름을 내걸고 족벌지배 자본주의가 자리 잡았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공화국을 세웠던 주권자들은 언제부터인가 이들 사회귀족을 선망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일자리를 만들고 국민을 먹여살리는 게 누군가”라며 ‘경제적 살인범’을 두둔하기도 한다. 이제 경제권력은 새로운 ‘황금 송아지’가 되었다.


한편 비즈니스의 ‘갑을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변질됐다. ‘을’로 통칭되는 사람들의 억울함과 고통은 이제 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섰다. 남양유업 사건으로 공론화된 비상식적인 갑을관계의 문제는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편의점, 대리점, 아르바이트, 비정규직, 하청업체 등에서 확인되는 갑을관계는 ‘사회적 노예제도’의 부활이다. 개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급이동이 어려워진 사회는 바로 고려시대 노비 만적이 규탄했던 “왕후장상의 씨”가 대대로 이어지는 사회다. 


일찍이 영국의 법사학자 헨리 메인은 “신분에서 계약으로”의 변화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의 핵심이라고 갈파했다. 그런데 21세기 현대 한국에서 ‘계약’의 형식을 빌려 재벌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가 되살아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과 반동은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우리가 적자생존,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원리를 신봉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로 전락해버린 탓이다. <또 하나의 약속> 주인공이 술 마시며 던진 이야기처럼, 우리가 스스로 뇌를 소화시켜 버린 멍게 신세가 된 탓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법적 보호를 박탈당한 채 ‘살(殺)처분’을 기다리는 ‘호모 사케르’(벌거벗겨진 생명)가 되고 말았다. 정글에서 약자의 고기를 확보한 소수의 승자는 잠시 승리감에 도취하지만, 이들도 끊임없는 경쟁과 축적의 노예가 되어 내면의 공허감에 시달린다.


[장도리]2014년 2월13일(출처: 경향DB)


올해 초 교황 프란치스코가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한 유경촌 신부는 “‘개인적 불의’를 뛰어넘어 ‘구조적 불의’의 해소를 통해 ‘의로운 사회 구조’ 건설을 실현하는 것이 사회 정의의 내용”이라고 말했다. 경제적 독재와 싸우고 의로운 사회 구조를 만들려면 가장 먼저 우리 속에서 타인의 고통과 억압에 공감하며 연대의 손을 내미는 ‘호모 엠파티쿠스’(공감하는 인간)를 깨워야 한다.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의로운 사회 구조를 추구하며 새로운 독재와 싸우는 ‘호모 레지스탕스’(저항하는 인간)를 호출해야 한다.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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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노동을 하며 삶을 꾸려간다. 육체노동이건 지식노동이건, 블루칼라건 화이트칼라건. 고졸자건 대학생이건 대부분의 청년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시민들은 ‘노동자’ 호칭을 꺼린다. 파업이 발생하면 불편해하거나 심지어 불온시하며 비난한다.

일전에 코레일 파업이 일어나자 정부와 보수언론은 ‘노동귀족’들이 돈 더 받으려고 파업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공기업의 방만한 운영은 개혁해야 한다. 공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질문 몇 개를 던져보자. 코레일의 적자는 노동자의 임금 탓이었나? 철도노동자가 19년 근속하여 평균 약 6300만원을 받으면 ‘귀족’이 되나? 바람직한 사회는 임금이 하향평준화되어 모든 노동자가 겨우 생계만 이어가는 ‘노동천민’이 되는 세상인가? 재벌 임원같이 연간 수십억원, 수백억원을 버는 진짜 ‘귀족’에 대해선 비난은커녕 당연시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왜 철도노동자의 연봉은 비난할까? 철도노동자 파업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파업하면 동조하면서 칭찬할까?

한편 중앙대에서 일하고 있는 미화노동자들이 비인격적 대우와 업무환경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가자, 중앙대 총학생회는 이 문제는 중앙대와 관계없는 하청업체의 일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파업으로 인한 중앙대의 ‘브랜드 가치’ 하락을 우려하면서. 이는 노동계약서에 중앙대 이름이 없으니 중앙대는 책임 없다는 전형적인 형식주의의 주장이었다. 조직의 브랜드를 위해서는 노동자의 인권은 부차화되어야 한다는 경영자 편중의 주장이었다. 미래의 노동자가 자신을 자본가 또는 경영자와 동일시하고 현재의 노동자의 외침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삶이 아무리 팍팍해졌어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이 이렇게 약해졌는가 싶어 씁쓸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합법적 파업’을 하기가 쉽지 않다. 대법원은 구조조정, 합병, 사업조직 통폐합, 정리해고 등은 ‘경영권’ 사항이기에 노동쟁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경영권’ 사항은 노동자의 지위와 근로조건에 즉각적이고 중대한 변화를 일으킴에도 말이다. 다수 선진국에서 실현되고 있는 노동자의 경영참여와 공동경영 등 ‘산업민주주의’는 교과서에만 있을 뿐이며, ‘경영권’을 건드리는 파업은 바로 불법이 된다.

 

호송차량에 오르는 철도노조 위원장(출처 :경향DB)

게다가 ‘경영권’을 건드리지 않는 파업도 범죄로 처벌된다. 특히 형법 제314조의 업무방해죄는 노동쟁의를 범죄화하는 핵심도구다. 헌법이 명시적으로 노동쟁의를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정시출퇴근하거나, 시간외근로를 거부하거나 집단조퇴·집단휴가를 사용하면 폭력, 파괴, 협박 등이 수반되지 않더라도 업무방해로 처벌된다. 노동쟁의권은 원래 노동자의 일방적 근로계약의 파기를 보장하는 것임에도, 노무제공 거부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면 또한 업무방해로 처벌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나라에서는 다 허용되는 쟁의 전술인데도 말이다. 그리하여 2007년 국제노동기구(ILO)와 2009년 11월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는 각각 업무방해죄 적용으로 노동자들의 파업권이 약화되며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노사관계의 형성이 막히고 있다고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파업노동자에게는 형사처벌에 더하여 수십억원, 수백억원의 손해배상과 가압류가 가해진다. 형사처벌은 몸으로 때우면 된다 치자. 그러나 월급, 예금, 집, 전세금 등을 다 빼앗아가는 민사소송은 생계의 뿌리를 잘라버린다. 그 결과 가장이 자살하고, 부부가 이혼하고, 아이들은 흩어진다. 중앙대의 경우 청소노동자들이 학내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대자보를 붙이면 100만원씩 지급하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바 있다. 이 모두 노동운동을 위축시키고 가정을 파괴하는 ‘돈 폭탄’이다. 이 ‘폭탄’을 맞은 노동자들은 어차피 망한다고 생각하고 격렬한 투쟁을 전개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파업권이 하위 법률인 형법과 민법으로 인하여 껍데기로 전락하고 있다. 이 문제는 사회의제화되어야 한다. ‘노동하는 인간’은 연대해야 한다. 파업은 남의 일이 아니다. 내 가족, 내 이웃 그리고 종국에는 내 자신의 일이다. 정치권은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 선거용 또는 창당용 친(親)노동 생색내기 코스프레는 그만두라. 노동자를 ‘임금노예’로 만드는 법제는 바꾸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친노동’ 사회는 못되더라도 ‘살(殺)노동’ 사회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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