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도쿄대 한국연구센터와 언론학부가 공동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2세대 학자인 크라우스 오페 교수와 더불어 기조 발표를 했다. 그는 세계적인 정치사회학자이자 민주주의 이론가이다. 덕분에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문제들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다. 오페가 독일을 포함하는 선진민주주의 국가들의 경험을 토대로 말했던 것에 비해, 필자는 신생민주주의 국가로서 한국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말했다. 핵심은 필자가 ‘시민운동적 민주주의관’이라고 불렀던, 뉴미디어의 효능을 앞세운 운동 중심의 민주주의관과 그것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시각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 모두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이론가’로 평가되는 알렉스 드 토크빌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오페의 주제는 현대의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진단하면서 그에 대한 제도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한 실망 내지는 불만이 정치 불신과 냉소, 무관심 같은 반정치주의적 태도를 광범하게 불러오는 원천이 된다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은 ‘불만스러운 민주주의’와 그에 따른 탈정치화에 대한 민주적 투쟁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에서 이탈한 시민들을 어떻게 다시 정치영역으로 불러들여 적극적 참여자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오페가 토크빌의 이론을 끌어들였던 것은 이 대목에서였다. 즉 어떤 조건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계몽적인 시민, 즉 ‘이념형적 민주시민’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가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가 사용한 토크빌의 텍스트는 <미국에서의 민주주의>였다. 토크빌의 요점은 이런 것이다. 미국사회가 민주주의의 원리인 평등의 조건을 실현했을 때 시민들은 평등이 가져온 평범함을 공유하고 다수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수의 전제정’으로 퇴행할 수 있고, 시민들의 자유가 상실될 위험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자유를 실현코자 하는 시민들은 ‘자율적 결사체의 예술’을 통해 중앙집중화된 국가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자치 정부를 형성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토크빌이 볼 때 그 핵심은, 민주주의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풍습을 가능하게 하는 시민의 덕(德)에 있었다. 


소르본 대학 앞 광장 분수대에서 신문을 보며 의견을 나누는 두 학생 (경향DB)


여기에서 오페는 토크빌의 아이디어를 빌려 민주적 참여의 습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제도적 메커니즘을 발견하려 했다. 이 경우 공화주의적 전통에 따른 시민적 덕에 의존한다면, 시민에게 지나치게 도덕적 부담을 요구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시민의 참여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시민을 계몽적이게 할 수 있는 제도들을 그 자리에 대체한다는 발상이다. 오페는, 선거를 중심으로 한 정치참여만을 통해서는 시민들이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참여의 효능감을 가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정책결정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기존의 제도적 문제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에 대응하여 시민성을 확대하고, 정치적 행위의 ‘가능의 공간’을 여는 여러 형태의 제도개혁이 필요했다. 통치엘리트에 대한 책임(성)의 강화와 시민의 의사와 선호 표출이 가능한 다양한 형태의 정치참여 내지 정치과정에서의 시민참여가 확대·개방되어야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위한 제도의 도입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정당이나 정치인들에 의해 던져진 이슈들을 놓고 선거에서 찬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선호를 형성하는 최초 단계에서부터 이니셔티브를 시민들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민들이 선호를 형성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계몽된 시민이 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을 사례로 말하는 필자로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 또는 위험에 빠트리는 상황을 진단하는 것 자체부터 오페와 달랐다. 우리의 경우는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과 그로 인한 정치적 무관심 내지 정치참여로부터의 철회가 중심 문제가 아니다. 토크빌이 나쁜 사례로 삼았던 당시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중앙집중화된 국가권력과 허약한 자율적 결사체가 만들어낸 원자화된 개인이 마주 대하고 있는 상황, 즉 이 양자 간의 힘의 극심한 불균형 상태와 그것이 빚어내는 문제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강한 국가-허약한 시민사회 관계가 민주주의 발전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말한다. 따라서 처방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국가-시민사회 간의 비대칭적 힘의 관계를 더 균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시민사회를 강화하느냐, 어떻게 자율적 결사체를 강화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시민의 힘과 선호를 최대한 축약, 단순화해서 힘을 결집하고 조직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자 변화의 주체로서 좋은 정당을 만들고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오페의 문제의식이 시민참여의 확대와 그 효능에 두어진 사회학적 접근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때, 필자의 경우는 시민의 신념과 의사를 효과적으로 조직해서 정치적 동력을 창출하고 의미있는 결과를 만드는 것을 중시하는 정치적 접근에 가까웠다. 


(경향DB)


그러므로 토크빌의 텍스트 가운데 <미국에서의 민주주의> 못지않게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핵심 아이디어는, 민주화의 효과를 두 수준으로 나누어보는 것이다. 하나는 국가권력의 구조변화를 중심으로 한 통치체제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과 태도, 가치, 권위의 위계구조와 같은 사회의 변화이다. 이를 통해 토크빌은 혁명이 가져온 격변적 정치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과도한 성장과 짝을 이루는 권력의 중앙집중화가 변화되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혁명 이후 권력구조는 구체제와 높은 연속성을 유지할 뿐 아니라, 대중 참여를 통해 정책과 법이 결정되는 민주적 성격 자체가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국가관료체제를 더 비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프랑스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 프랑스국가에 대한 토크빌의 분석과 한국의 민주화를 전후로 한 시기 국가권력의 구조변화에서 높은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국가와 경제영역에서 재벌의 독점적 지위는, 각각 더 강력해졌다. 시민사회는 운동의 정치화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결과로 더 허약해졌다. 이 과정에서 결사체로서의 노동의 시민권이 배제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중추적 조직 기반이라 할 자율적 결사체의 허약함을 표징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의 권력구조를 그대로 둔 채 국가 밖에서 시민운동과 뉴미디어를 앞세우는 것만으로는 사회양극화와 노동소외를 개선하는 데 있어 이렇다 할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부여하는 모든 제도적 가능성을 소진시키면서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체제를 완성시킨 유럽에서는, 기존 민주주의의 제도적 경계를 확대하지 않고서는 시민적 참여의 동인을 끌어낼 수 없다. 그와는 달리 신생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적 조건에서는, 민주주의가 부여하는 제도적 자원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문제’(underutilization)가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더 핵심적인 요인이다. 시민참여의 열정과 에너지는 운동 형태로 또는 포퓰리즘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시민의 의사와 신념, 열정, 에너지들은 분산되고, 간헐적으로 표출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분산된 힘들은 압도적인 정치적 자원과 권력을 갖는 국가의 통제력 안으로, 또는 대기업의 경제적 자원의 수혜 범위 안으로 분자적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뭇 전통적인 민주주의 제도로서 정당을 발전시키고, 국가-시민사회 사이의 관계를 좀 더 대칭적이 되도록 하는 조건을 형성하는 데 있다. 결국 우리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전통적인 제도로서 정당의 역할을 강화시켜야 하고, 동시에 현재 서구민주주의 국가에서 탐색되고 있는 시민참여의 새로운 제도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오페와 필자 사이에 문제를 보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이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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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은 한 위대한 미국 대통령을 과거로부터 불러내어 오늘의 시점에서 그의 행적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여러 제도를 미국으로부터 가져왔기 때문에 제퍼슨이나 매디슨 같은 건국 1세대 지도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최근에는 복지국가와 노동문제가 한국 정치의 중심 이슈로 부상했기 때문에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링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정치가일까.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갈등이라는 배경이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되기는 어렵다. 그런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스필버그의 링컨은 우리가 링컨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좋은 대답을 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필요한 훌륭한 리더십의 모델이 아닐까 한다.


영화의 원작인 도리스 컨스 굿윈의 <팀 오브 라이벌스>(국내판 ‘권력의 조건’)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그의 민주당 대선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으로 발탁했다고 해서 이미 유명해진 바 있다. 링컨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했던 다른 세 명을 모두 국무, 재무, 법무라는 핵심부서 장관으로 불러들일 정도로 용기 있고, 개방적이고, 포섭적인 리더십을 보여 준 바 있다. ‘스필버그의 링컨’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점은, 링컨을 신비화 혹은 위인화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보다는 높은 도덕적 비전을 갖고 있지만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위조차 불사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1865년 1월의 어느 날, 전장에서 존경하는 대통령과 대면할 기회를 가졌던 흑인 병사가 1863년 11월에 있었던 게티즈버그 연설 내용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해 1865년 3월 두 번째 취임 연설을 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이 짧은 시간 구도 속에서 영화의 초점은 노예제 폐지를 명문화한 수정헌법 13조를 하원에서 통과시키는 입법 과정에 두어진다. 그렇지만 이 입법 과정의 배경이자 맥락은 어디까지나 전쟁 상황이었고, 수많은 사건들이 폭주했던 복합적인 국면이었다. 노예제의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것, 말하자면 도덕적 대의를 둘러싼 문제 사이의 선택이라면 오히려 쉽고 단순했을지 모른다. 


1863년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경향신문DB)


그러나 내전이 끝날 시점에서 즉각적인 평화와 노예제 종언은 상호 배타적인 선택지가 되고 말았다. 진행 중인 평화협상을 성사시켜 조기에 종전을 이룬다면 많은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만, 정작 전쟁의 목적이었던 노예제 폐지는 불분명해질 수 있었다. 아니면 종전 협상을 지연시키더라도 노예제 폐지를 고수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전쟁지휘자의 고독한 결단의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최선의 선택은 전쟁을 빨리 종결하여 인명피해를 줄이면서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를 너무 밀어붙이면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자신의 정당인 공화당 온건파로부터 반발을 불러오고, 그럴 경우 노예제 폐지를 위한 조치들은 실패로 돌아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링컨의 사려 깊음은 노예해방에 대한 최소정의적(minimalist) 접근, 즉 흑인 노예에 대한 ‘법적 평등’으로 목표 설정을 조정하는 데 있었다. 온건한 목표 설정은 그가 추구하는 연방의 유지라는 또 다른 목표와 충돌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수정 헌법 통과에 필요한 하원의원 재적 3분의 2를 확보하기 위해 제일 먼저 설득과 포섭의 대상이 되는 그룹은, 자신의 정당인 공화당 내 강경파였다. 흑인 노예에게 투표권을 포함해 모든 권리를 일시에 부여해야 한다는 강경파(maximalist)의 목소리가 커질 때, 보수파와 부동표의 반발을 불러올 것임은 당연한 이치이다. 가장 어려운 문제의 하나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도록 할 것이냐 하는 설득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에 대한 진심어린 설득과 동시에 링컨은 의석을 곧 잃게 될 레임덕 민주당 의원들을 상대로 공직이라는 미끼와 돈으로 매수하고, 반대자들을 협박하고 포섭해 나가는, 부도덕한 수단들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의 구도를 게티즈버그 연설과 재임 취임사 사이에 설정한 것은 그의 리더십의 발전적 전개를 보여 주기 위한 치밀한 기획으로 보인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죽음으로서 대의에 헌신한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자리에서 민주주의의 도덕적 이상과 대의를 다시 한번 천명하는 내용이었다. 재임 취임사는 전쟁이 종결되는 시점에서 스스로 전쟁을 평가하고, 종전 처리와 전후 복구 방향을 천명하는 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특히 패전한 남부연합주들에 엄격한 전후 처리를 요구하는 공화당 강경파에 반하여 링컨은, 전쟁의 참화를 가져온 한쪽 당사자로서 책임을 인정하고, 사랑과 포용으로 전쟁의 상처를 함께 복구해 나가자고 호소한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공화국의 분열 위기를 온건한 전후 복구정책으로 대응했던 링컨이 남부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한 급진파 청년에게 암살된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이자 정치의 비극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게티즈버그 연설과 재임 취임사를 짝을 이루게 한 영화의 구도는, 마키아벨리적 문제의식을 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권력의 문제와 관련해 성격이 아주 다른 두 측면에 대한 것인데, 하나는 ‘더러운 손’의 문제이다. 즉, 정치 영역에서 행위자가 목적 의지 내지 대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정의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부도덕한 수단의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스필버그의 링컨은 이 측면을 명징하게 드러내 보인다. 다른 하나는, 영화를 통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좀 더 큰 문제인데, 권력의 극단적 형태로서 폭력에 대한 것이다. 전쟁이 극단적 폭력의 전형적인 형태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표적인 진보파 정치철학자의 한 사람인 셸던 월린은 마키아벨리적 문제의 핵심을 ‘폭력의 경제학’이라고 정의한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이고 권력의 핵심을 폭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폭력을 부정하고 회피할 것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대면해 폭력을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작은 폭력으로 더 큰 폭력을 저지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아마 더 도덕적일 것이다.


그러나 대의는 폭력의 사용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마키아벨리에게서는 해결되지 않는 질문으로 남는다. 링컨이 직면하는 노예제 폐지와 공화국의 통합이라는 문제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취할 수 없는 대의였음을 게티즈버그 연설은 상징한다. 반면 재임 취임사는 전쟁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전쟁이 아니고서는 성취할 수 없었던 목적을 이제는 정의와 평화를 중심으로 한 온화한 방법으로 성취하겠다는 것을 강조한다. 어느 면으로 보든, 스필버그의 링컨은 마키아벨리적인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를 새롭게 해석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통해서든 아니면 실제로든, 링컨을 마키아벨리주의자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차라리 링컨은, 정치인의 소명을 내면적 신념의 윤리와 현실 속에서 그 행위가 만들어 내는 결과에 책임지는 책임의 윤리를 동시에 강조했던 막스 베버의 정치 윤리론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링컨은 캘빈주의와 미국 북동부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을 사회경제적 기반으로 한 ‘양키-휘그당’ 전통에 기초한 도덕적 이상에 헌신했고, 그러한 이상은 노예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그에 따라 반노예제 휘그당의 대변자 역할을 일관되게 수행했다. 그는 도덕적 열망과 함께 강렬한 정치적 야망을 가졌지만 동시에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타협과 온건함, 그리고 사려 깊음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도덕적 이상과 현실정치를 결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 주면서, 그 양자를 결합하는 이상에 가장 가까이 갔던, 드물게 보는 정치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자 깊은 감동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만드는 두 번째 취임 연설을 뒤로하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한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주제로 한 영화를 통해 귀중한 정치교육 소재를 제공해 준 스필버그에게 마음속 깊이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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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새 정부 출범을 보면서, 나는 야권 입장에서 지난 선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여러 여론 조사에서 나타났듯이, 절반을 훨씬 넘는 유권자들이 정권교체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대선은 패배로 끝났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가 손짓했지만, 이를 자기 것으로 거머쥘 수 있었던 담대한 능력, 즉 비르투(virtu)는 없었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거 결과는 이념적 진보성, 민주 대 반민주, 진정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누가 더 실제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신뢰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경쟁, 즉 정당의 실력에 대한 평가가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대선이야말로 지극히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의 선거였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은 왜 좋은 정당(들)을 건설하고,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을 배출하는 데 실패했는가 하는 것은 비단 이번 선거 패배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난 시기 집권에 성공했을 때조차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하나의 성공모델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들은 민주진보파들이 정치와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그 특징적인 방법과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권력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권력을 부정하고 그에 저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자기 것으로 수용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에너지로 삼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권력은 권위주의적 힘의 원천이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정의이자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권력을 부패하고 타락한 사적 욕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치의 길을 우회하거나 회피하고자 했다. 권력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목적 의지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권력의 적극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는 민주진보파들 사이에서 별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정당정치 대신 시민정치를 앞세웠고, 정당조직보다 뉴미디어를 통한 네트워크의 형성과 온라인상의 소통 공간이 더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정치는 (만약 그것을 정치라고 생각한다면,)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공유하는 사회 집단들을 대표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정치를 낳을 뿐이다. 나아가서는 짧은 사이클로 변화하는 여론과 정서의 부침에 이끌리는 포퓰리즘 이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정치는 두 방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각성된 의식을 갖춘 시민들의 직접 참여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기존 정치를 대체하거나 새롭게 선도하려는 ‘영구적 운동론’의 방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가들이 좋은 정책대안을 만들어 정책과정에 투입하는 것이 정책결정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산출 중심의 기술합리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이다. 어느 쪽이든 이런 정치관 안에서는 정당과 리더십, 권력 수단을 통한 통치 기술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박근혜 후보 당선 확실, 침통한 민주당 (경향신문DB)


정치와 권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강한 한국의 지적 환경에서, 마키아벨리는 특히 민주진보파들에게 필요한 철학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권력의 긍정적 측면을 일깨우고, 어떤 정치인이 바람직한 목적 의지를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가치인가를 앞세우기보다 실제로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치는 ‘가능주의’(possibilism)의 정치 이론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앨버트 허시만이 말하듯이, 그것은 “결과를 만들어낼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중시한다. 


마키아벨리의 철학에 있어 이 가능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는, 마키아벨리 정치철학의 중심 아이디어로서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비르투라는 말이다. 비르투와 짝이 되는 포르투나라는 말이 운명 또는 기회라는 말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비르투는 용기, 위용, 추진력, 힘, 결단력, 에너지, 의지력 등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를 지닌다. 운명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지만, 비르투를 가진 리더십은 운명조차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말하자면 권력을 다루는 장인, 또는 정치적 리더로서의 자질이자 덕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르투는 도덕적 규범과 담론을 통해 그려진 이상적 정치 환경에서가 아니라, 현실 정치로부터 도덕과 이상을 분리시킨 연후에 나타나는 진짜 현실에서 발현돼야 할 정치인의 능력이다. 


정치는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면도 있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도덕적 감성과 충돌하는 권력의 어두운 악마성이 꿈틀거리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라면, 자신의 목적의지 내지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혐오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정치의 부정적 힘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 서야 하고 또 그것을 넘어 좋은 목적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의 효과를 위해 잔혹무비의 폭력을 승인하고 군주에게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교활함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통치에 필요하다고 해서 잔인함과 폭력, 교활함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수단을 필요로 할 만큼 긴요한 상황에서 실현돼야 할 높은 수준의 이상이나 목적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도덕하거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수반되는 대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수준에서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적 규범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진정으로 공익에 봉사하는 목적 의지가 있다. 정치는 그 둘의 변증법 내지 대차대조표로서 저울질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주인공인 체사레 보르자 이외에 그의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의 한 사람은 시라쿠사의 군주 아가토클레스이다. 두 사람 모두 잔혹무비의 폭력을 효과적이고도 경제적으로 사용했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크다. 보르자는 그의 행위가 비록 권력추구의 욕망에 의해 추동됐다 하더라도 공익의 증진을 가져왔던 반면, 아가토클레스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잔인한 폭군에 불과했다. 전자가 비르투를 가진 통치자라면, 후자는 대량학살의 범죄자 이상이 아니다. 통치자는 그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사용된 방법이 어떠하냐 하는 것보다, 그의 행위의 최종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점에서 철두철미하게 결과주의적인 것이 정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현실주의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인 ‘더러운 손’(dirty hands)의 문제와 연결된다. 정치지도자의 역할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정치가는 통상적 의미에서 명백히 부도덕한 행태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갖는) 정치가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도덕적 계율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한편으로 노예해방이라는 높은 비전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비도덕적 술수와 반대파들과의 뒷거래를 서슴지 않는 정치의 교활함을 가진 정치인 링컨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줘 화제가 됐다. 신화화된 링컨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히는 것임에 분명하겠지만, 마키아벨리를 이해한다면 그 점이야말로 링컨을 더 위대한 정치인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은 한국현대사의 중요 테마의 하나이다. 민중은 반란을 통해 통치 권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통치자가 될 수 없었고, 그들이 제기했던 문제는 기존 통치세력에 의해 수용되어 다뤄졌다. 문제제기 집단과 문제해결 집단의 괴리, 요구와 변화는 계속되지만, 돌아보면 기존 구조는 변함없이 건재한 상황을 뜻하는 수동혁명은 민주화 이후에도 되풀이되어 왔다. 이런 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유능한 정당, 유능한 정치지도자의 출현은 야권의 좋아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이 과제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우선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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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권력을 향한 치열한 대선 경쟁이 끝난 지금은 좀 더 원론적인 문제들을 되짚어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지적 자원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한다. 어떤 주제가 적합할지 생각하면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이라 할 <혁명 이후(After the Revolution)>라는 책이 떠올랐다.

애초 이 책은 로버트 달이 1970년 출판했는데, 책 제목에서 말하는 혁명이란 1960년대 미국의 반체제 운동을 지칭한다. 이 시기를 통해 급진파들이 이상화했던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이 책은 급진파 정치론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서로 평가되기도 한다. ‘좋은 사회에서의 권위’라는 책의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의 중심 주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왜 권위가 중요한지,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에 부응하는 권위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책의 첫머리에서 달은 당내 민주주의와 정당 개혁에 대해 말문을 연다.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의 기여는 다른 정당과의 경쟁을 통해 시민 다수의 의사와 이익을 더 잘 대변할 수 있는가에 있지 당내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하느냐에 있지 않다. 당내 민주주의는 전체 민주주의 발전에 비해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로베르트 미헬스의 ‘과두화의 철칙’에 대한 달의 비판은 통렬하다. 민주주의의 핵심을 정당 간 경쟁의 차원이 아니라, 정당 내의 민주주의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헬스의 말대로 정당 조직들이 필연적으로 과두화된다면 정당을 그렇게 만든 요소는 정부도 과두화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자체는 실현할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의 생각과 달리, 오히려 과두적이거나 강한 리더십을 갖는 정당이 당내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정당보다 더 좋은 정책대안을 만들고 이를 더 유능하게 실현할 수 있다.

<혁명 이후>와 함께 1960년대 미국 운동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서로 평가되는 J. Q. 윌슨의 <아마추어 민주당 정치인(The Amateur Democrat)> 역시 개방형 경선제가 확대되기 이전의 구정당체제가 현실적으로 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음을 경험적 연구로 보여준다. 정치인을 권력을 추구하는 ‘전문 직업 정치인’과 원칙을 고수하는 ‘아마추어 정치인’의 두 유형으로 분류했을 때, 이른바 구정치인들이 개혁파들보다 더 좋은 결과를 냈다는 것이다. 개혁파들이 권위 해체와 민주적 원칙을 강조하면서 당 조직과 리더십을 약화시킨 결과, 정당 간 경쟁에서 당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전체 민주주의 발전에 해악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적 권위는 어떤 원리 내지 기준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 로버트 달은 세 가지 이론적 기초를 제시한다. 첫째는 개인적 선택(personal choice)의 기준이다. 각자 개개인이 권리와 자유를 주창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공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현대 정치철학의 출발점이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군가 폭력을 통해 질서를 잡든가, ‘고귀한 거짓말’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세뇌해 개인적 선택과 공공의 진리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해결책은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렵다. 루소는 공동체 내의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일정 규모 이상의 사회에서는 정치적으로 평등한 개개인이 모든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대표적인 민주적 결정 원리로서 다수결은 이로부터 도출된다. 문제는 다수결의 원리가 어떻게 개인적 선택의 기준과 사회적 존재로서 그 자신의 운명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주 소수자에 속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개인적 선택의 기준에서는 다수결의 원리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사와 전체의 의사가 합치되는 범위가 줄어들면서 만들어지는 소수자의 문제는 크기만이 아니라 강도의 문제도 있다. 평등한 개인들의 다수는 이해관계에 있어 질적으로 강도가 다른 사회집단 모두를 포괄할 수는 없다. 종교나 언어의 측면에서 항상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나, 사회경제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이익과 요구는 다수 지배의 정책과 강력하게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수지배의 원리는 소수자를 대표하는 여러 형태의 제도들, 예컨대 비토권의 부여, 상호보장, 협의주의, 코포라티즘과 적절하게 균형되고 조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는 능력(competence)의 기준이다. 민주화 이후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특히 정당과 지도자의 능력은 결정적이다. 개혁파들은 엘리트들이 능력에서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에 능력이 권위의 기준이 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달의 예리한 사고는 이런 논법을 수용하지 않는다. 만약 실제로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 통치자’가 지배하는 이성적 절대주의 내지 귀족주의적 엘리트 지배체제에 비해 본래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달의 해답은 이렇다. 능력의 기준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다. 국가를 포함해 어떤 결사체에서든 개인 구성원의 능력은 큰 차이가 없다. 개개인은 자신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최선의 심판관이다. 따라서 특정의 결사체 안에서 그들 스스로의 민주적 방식으로 능력의 기준을 결정할 수 있다. 또한 특정의 결사체가 민주적으로 결정할 능력의 기준이 있다고 해서 다른 결사체도 그 주장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이성적인 개인적 선택의 기준과 능력의 기준은 어느 것이 우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판단의 문제로 각자의 결사체에서 자율적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경제성 내지 절약(economy)의 기준이다. 경제성이 민주적 권위를 창출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는 까닭은 시간의 가치와 희소성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에서처럼 모든 시민들이 공직을 순번제로 담당하기 위해서는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유한계층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스의 민회나, 미국의 타운홀미팅처럼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이 함께 모여 결정에 필요한 사안을 논의하는 것은, 참여의 직접성을 담보할지 모르지만 그 자체로 매우 비효율적이다. 이 때문에 500인평의회를 두어 민회를 보좌하게 했고, 그 안에 상설기구인 50인 운영위원회와 한 명의 의장을 선출했다. 작은 공동체에서나 가능했던 민주주의가 근대의 대규모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귀족주의적인 대표 선출 방식인 선거제도를 수용하면서부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민주주의는 귀족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개혁파들은 효율성 내지 경제성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다. 그러나 이를 무시할 때 많은 비용을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적 가치와 시간의 경제성 사이에서 최적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가치만을 추구하는 과업보다 훨씬 덜 드라마틱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사에는 민주적 가치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중요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사적 생활과 공적 정치참여의 균형을 생각해야지,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에만 전념할 수는 없다.


한때 한국의 개혁파들은 위계적 힘의 작용을 특징으로 하는 권위가 마치 권위주의의 속성인 듯이 오해하면서, 권위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이해했다. 권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개혁파들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민주주의와 관련 제도에 대한 크고 작은 오해를 불러왔다. 국민참여경선제 등 당내 민주화를 목표로 했던 정당개혁이나, 지난 대선에서 중요 이슈가 되었던 ‘정치쇄신’의 모토는 편협한 민주주의관의 산물로 정치발전에 역행적 결과를 가져올 여지를 넓혔다. 

우리가 로버트 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해낼 수 있는 것은, 정치적 평등이 완벽하게 구현된 사회와 같은 이상주의적인 목표가 아니라, 개별 인간과 공동체로서의 사회 간의 상충하는 요소들을 최대한 잘 결합해서 좋은 민주적 권위와 제도를 발견해내고, 이를 통해 최적의 민주적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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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이번 대선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안철수 현상이었다. 무엇이 그 현상을 가능케 했나. 그것은 기존의 그 어떤 정당도 하지 않았던 문제를 제기한 때문이고, 그 점에서 안철수 현상은 기존 정당들의 실패가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안철수 현상은 기존의 국가 중심적이고 재벌 편향적인 성장정책하에서 누적돼 왔던 청년 문제가 표출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청년들의 사회경제적 생존 문제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실존적 고뇌와 위기에 진심으로 반응했고, 그것을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어 경제민주화, 복지, 교육, 노동 문제로 다뤄질 수 있게 했다. 물론 안철수에 대한 지지를 뒷받침했던 것은 청년세대만이 아니었다. 기존 정당들에 비판적인 유권자 집단 내지 스스로를 중도라고 정의하는 유권자들이 그를 지지했다. 이는 기존 정당들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절실하고도 중요한 문제를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적대하는 것으로 일관해 온, 이른바 정치적 양극화 내지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 빚은 결과이기도 하다.


(경향신문DB)


 안철수 현상은 두 주류 정당들이 적극적으로 대표하지 않았고 또 할 수 없었던 사회집단과 계층의 투표자들이 두 정당의 규모만큼이나 크다는 것을 실증했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보수-진보의 양대 블록을 기준으로 본다면, 주로 진보로 포함되는 민주당의 범위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오늘의 정치현실에서 안철수 현상은 기본적으로 야권의 문제로 나타났고 그만큼 민주당에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안철수가 퇴장한 다음, 그를 통해 대표되기를 원했고 그를 통해 분출되었던 커다란 정치적 에너지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무엇보다도 그 향배가 중요한 것은, 그간의 안철수 현상이 기존 정당체제 밖에서 발생해 하나의 대안 정당 내지 정치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향후 한국 정치의 미래는 정치적 양극화와 원심력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와 다원화된 사회적 요구를 대표할 정당체제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이 과제는 민주화 이후 진보적 개혁 세력을 하나의 폭넓은 대안 세력으로 결합하는 데 실패해 온 야권에 더욱 절실하다. 아마 이번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만 있었어도 야권 내 단일화를 둘러싼 불합리한 다툼과 분열의 상처는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감정적 분열의 가능성을 피하기 어려운 후보 단일화 문제에 매몰되는 대신 경제민주화나 재벌개혁 문제, 노동시장의 양극화, 복지 확대와 같은 중대 이슈를 둘러싼 비전과 정책 대안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야권 내부에서 경쟁하는 세력들 사이의 후보 조정 문제는, 중대 이슈를 둘러싸고 경쟁한 1차 투표의 결과에 따라 상당 정도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정당체제의 안정적 제도화의 길이 반드시 양당제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양당제는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미국으로 대표되는 오히려 아주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양당제는 강력한 국가 중심주의와 냉전반공주의, 재벌 중심적인 경제구조와 하층 배제적인 사회문화 등 한국 사회의 여러 특징과 맞물리면서, 정당 간 경쟁을 이념적 중간으로 수렴시키기보다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 또한 정치엘리트들이 적대적 상호의존 속에서 각자의 기득이익을 강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등의 부정적 측면도 크다. 그럴 경우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변화가 정당체제를 통해 넓게 대표되고 반영되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를 이렇게 본다면 기존 정당들과는 종류가 다른 새로운 외생정당의 출현을 통해 한국 정치가 좋아지는 경로는 여전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외생정당으로서의 잠재력을 보여준 안철수와 그의 지지 세력들이 향후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 문제는 대선 이후 최대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현시점에서는 대선 승리를 위해 야권의 최대 동원에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안철수의 미래 선택은 한국 정치의 중심 범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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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임기 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대선이 되면, 한국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나, 경제는 어떻게 하고 교육과 복지에는 어떤 청사진이 필요한가 하는 등의 큰 문제들이 제기되곤 한다. 그럴 때면 개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진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최근에는 진보-보수와 여-야를 초월해 사회 각계의 ‘원로’들이 모여 합동으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개헌이 지금 그렇게 필요한 것인가? 


우선 그 전에 원로들이 집단적 의사를 표명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말하고, 현실 정치를 계도할 사명감을 갖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원로들의 개헌 문제 제기는, 스스로 어떤 최선의 국가 목표를 상정하면서, 그에 비해 오늘의 정치와 제도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모든 제도의 근간인 헌법을 바꾸고 사회 구성원들의 행태를 그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야 원로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개헌을 제안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원로들의 집단적 정치 행위가 비단 개헌 문제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야권에서는 원로들이 모여 첨예한 정치적 사안마다 의견을 내왔고 최근에는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고 나서기도 한다. 도덕성과 지식, 지혜를 겸비한 원로들이 대중을 계도했던 19세기 서구의 의회주의 시기에서라면 몰라도, 충분히 교육받고 도덕적 자율성을 갖는 보통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현대의 대중민주주의에서 그러한 정치적 후견자들의 역할이 적절한 것인지, 나아가 정치발전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한 사회와 국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모색하고 정의하는 것은 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해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민주주의 역사는 시민이 쓰는 것이다. 그런 정치 밖에서 혹은 정치의 상위에서 정치를 이끌 최선의 대안을 알고 있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의 원리 위에 서 있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양립하기 어렵다.


민주정치의 발전을 위해 ‘정당을 바로 세우는 길’과 ‘헌법을 바로 세우는 길’ 사이의 선택을 해야 한다면, 필자는 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당은 정책을 입안하고 공직 후보를 선정하여, 시민과 정부를 연계하는 대표와 책임의 고리를 만드는, 민주주의의 중심 조직이자 메커니즘이다. 좋은 정당이 없다면 좋은 정치도, 좋은 민주주의도 없다. 


헌법이 잘돼서 정치가 잘 될 수 있다고 한다면, 해방 후 한국 정치가 최고로 좋았어야 했다. 최초의 한국 헌법은 당시 가장 좋은 민주주의 헌법이라고 할 미국 헌법과 독일-오스트리아 헌법의 좋은 점을 취합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헌법 1조는 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으로 시작했기에 그 헌법 아래에서 권위주의 통치도 없어야 했다.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헌법은 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권력을 조직하고 배분하는 경쟁의 기본 틀과 절차를 제공할 뿐, 그 자체가 좋은 정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몫이고, 민주주의에서 정치를 이끄는 것은 정당이다. 


현재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더 중요하게 논의돼야 할 것은, 있는 헌법도 지켜지지 않는 정치적, 사법적 현실이라 하겠다. 기존 헌법이 지켜지기만 해도 법 앞에 평등과 법의 지배가 상당 정도 실현될 수 있다. 재벌의 전횡과 대통령의 권력남용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인위적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 일이 선거 때마다 반복되지 않도록 하거나,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다양한 사회적 이익과 열정이 정치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도 있다. 대통령이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 권력과 책임을 분점하여 정당을 강화하는 환경을 만들 수도 있다. 지금 헌법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을 끝없이 열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원리와 가치가 확대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이고 그러한 경험을 축적해 가는 데 있지, 헌법 탓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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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극단적인 불확실성에 있다는 점이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후보가 결정되는 과정은 무정형적이고 불가예측적이다. 선거를 100일도 안 남겨 놓은 지금, 여전히 후보가 불확정적이라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병리적 측면을 반영한다. 앞으로 무슨 사태가 전개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한국정치이기 때문이다. 모든 후보들이 복지국가, 양극화 해소, 반값등록금, 재벌개혁,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는 현실이다. 보수적인 후보나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후보나 할 것 없이 같은 공약을 내세우는 선거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당 해체의 현상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당을 지배하는 것은 캠프다. 당이 후보를 지명하고 당의 후보가 정당 간 경쟁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캠프라는 이름으로 특정 후보자와 인적 집단이 당을 지배한다. 그러다보니 정당이 정부가 되고 책임 정치의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캠프가 청와대가 되고 정부가 되어 집권당조차 소외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임기 후반에 대통령의 인기가 없어지면 반대로 집권당이 나서서 정부와 거리를 둔다. 과거 노무현 정부 시기에 만들어진 이러한 패턴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집권당 후보가 아니라 야당 후보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마치 박근혜 캠프의 제1원칙은 ‘이명박 정부와 무관해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다면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해 시민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당선만 될 수 있다면 무슨 행동, 무슨 공약이든 다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의 선거는 책임으로부터 방면된 권력자를 뽑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그때 선출된 권력자는 막스 베버의 말대로, 특정 후보자 개인이 정당이라는 매개 없이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데마고그(demagogue) 이상일 수가 없고, 사실상 군주를 민주적으로 선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해서 데마고그가 정부가 된다면, 사적으로 가까운 측근과 전문가집단, 나아가 관료에게 의존하는 통치는 필연적이다. 


(경향신문DB)


한국 정치의 이런 악순환 구조를 생각할 때,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문재인 후보가 “책임총리”, “정당책임정치”를 제시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비록 그것이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을 위한 전략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정부 운영 방향을 옳게 정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통령중심제의 특성이자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승자독식 원리는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권력 독점을 허용하는 문제가 있다. 강한 열정을 가진 추종자 집단을 가진 후보의 경우, 비록 그가 협소한 사회적 기반을 대표한다 하더라도 권력 장악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또 증오를 정치 동원에 활용할 수도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집권당은 제 역할을 못하게 되고 결국 내부로부터 해체와 무기력증을 앓게 될 수도 있다. 정당정치의 붕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안철수 현상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공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정치가 악순환을 끊고 새롭게 도약해야 한다면, 극단적인 불확실성을 줄이고 정치적 인과성과 예측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집권당과 정부 사이의 협력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것을 통해, 책임 정치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다행히 현행 헌법은 청와대 중심의 정부 운영이 아닌, 책임총리와 집권당이 의회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대통령 1인 중심의 통치가 갖는 과부하를 줄이고, 집권당을 정부 운영의 책임 있는 주체로 불러들이는 것이 헌법 정신에도 부합하고 또 정부 정책의 책임성을 튼튼히 할 수 있는 길이다. 이는 정당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집권당은 활력을 갖게 될 것이고, 야당 역시 예비 내각을 구성해 그에 상응하는 정책 능력을 발전시켜야만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기회를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정당의 정부가 되는 길을 개척하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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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대통령의 책임성 부재는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정치는 대표의 선출과 함께 선출된 대표가 그를 선출해준 투표자들에게 책임지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인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선거 때만이 아니라 선거와 선거 사이, 즉 평상시에도 선출된 통치자가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점을 강조했다. 선거 때만 민주주의가 있고 평상시에 없다면, 그것은 왕을 선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상시에도 책임정치가 구현되는 좋은 정부를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4년 중임제로 개헌하자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거제도를 바꾸자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정부형태를 아예 의회가 중심이 되는 내각제로 바꾸자고 한다. 제도는 언제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뒷날 우리가 어떤 제도를 선택하든 현재 시점에서 먼저 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하겠는데, 그것은 권력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익히고 실천하는 일이며, 이를 주도할 민주적 리더십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개헌은 그 자체로서도 넓은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제도를 바꾸어 정치를 좋게 만들려는 접근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의 규범과 원리를 실천하면서 “통치의 기예(art of government)”를 훈련하고 축적하는 것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간 숱하게 이루어진 제도개혁과 함께 정치발전을 위한 수많은 모델들이 난무하고 수많은 정치공학적 아이디어들이 짧은 사이클로 명멸한 뒤 만나게 된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현실이다. 현재의 제도적 틀 안에서 그리고 주어진 조건에서 정치발전을 도모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는 것 없이, 뭔가 우리의 정치현실 밖에서 새로운 대안을 들여오려는 것은 한계가 있다.


민주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한국정치는 “정당정치의 해체”로 특징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를 주도하는 것은 정당이라기보다는 정당 내 여러 캠프들이고, 결국 정부가 되는 것도 승자가 된 특정 캠프의 인적 집단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열린우리당 정부나 한나라당 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 정부로 호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집권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 캠프정부가 선거과정에서 공약했던 정책대안을 실현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동시에 임기를 마친 정부의 권력 행사와 정부 운영 결과를 누가 책임지는가의 문제도 모호해진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이번 대선에서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까?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바뀌었고, 당 지도부와 후보는 현 대통령에 대해 자신의 당 출신 대통령이 아닌 듯이 말한다. 그것은 새누리당만의 현상이 아니라 5년 전 민주당의 경우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임 정부에 대한 “회고적 평가”를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당의 연속성이 감춰진 속에서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는 계속해서 애매한 문제가 되고 있다. 


당정관계의 문제도 크다. 캠프정부에서는 자신의 인적 집단을 공직에 충원해야할 필요와 압력 때문에 당정분리를 지향한다. 새로이 선출된 대통령은 당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청와대를 만들고 당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하기 때문에, 기존의 당 리더십을 해체하고 당의 역학관계를 과격하게 재편성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러한 변화가 당을 허약하고 왜소하게 만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 후의 정당은 그 이전의 야당 때보다 오히려 허약해지고 지리멸렬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경향을 보였다. 당정 간의 정책조율과 원활한 소통의 필요성은 청와대가 아니라 주로 집권당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대통령의 소극성 때문에 실제로는 잘 진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당정관계는 대통령이 압도적 우위에 있는 현실적 권력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또는 최고 권력을 향유하는 대통령의 자만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한때는 견제되지 않는 강력한 대통령 권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자신의 정당으로부터 전혀 구속됨이 없이 당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으로 인해 제왕적 이미지는 더 강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당의 기반이 약한 대통령이 갖는 패러독스는, 제왕적이라 할 만큼 강력한 대통령에서 터무니없이 허약한 대통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정당과 거리를 둔다는 말은, 넓은 시민사회와의 소통은 그만두고라도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으로부터 괴리되고,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대통령들은 임기 중반도 안 돼서 갑자기 사회로부터 고립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했다. 임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정당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거리를 두었다. 임기 전반에 대통령은 “집권당 없는 대통령”이고자 여러 형태로 당의 영향력을 제어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에 이르러 그의 권력이 현저하게 약화될 때의 당정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당이 오히려 멀어지고자 한다. 대통령은 대선에 가까워오면서 오히려 당에 부담이 되고, 이제 당이 나서서 “대통령 없는 집권당”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이러한 청와대-집권당 관계는 대통령을 유능하고 좋게 만드는 데 있어서나, 정당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나 실패하게 된 원천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정당이 중심이 되는 책임 정부를 실천하기 위해 차기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이 정부를 구성할 때부터 정당의 적극적인 역할을 수용하는 책임 내각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국무총리와 내각 인사를 당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하거나 집권당의 주도권 속에서 선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할 때 당정협의는 단순히 당정 간에 의사소통 채널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의 구성과 운영을 담보하는 기본 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을 대표하는 내각은, 특정 정책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면서 선거 공약을 이행할 정책 수행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대통령과 더불어 당이 직접 정부를 운영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정당을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정당은 정부를 운영할 능력을 갖춘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하는 장(場)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일반 당원의 참여를 확장하고 신규 당원을 늘리면서 지역적·계층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고, 수많은 정당 활동가들로 하여금 공익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함과 동시에 그들이 정치경력을 일궈갈 수 있는 직업 훈련의 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향에서의 정당 발전은 ‘대표’ 개념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그동안 정당들은 여성, 노동, 청년, 시민운동 대표를 개별적으로 배려하는, 일종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대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대표를 뽑았다는 것과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당의 기반 강화는 특정의 사회계층이나 집단, 직업, 기능적 분야에 있어 이들 사회집단을 실제로 연계할 때 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당이 바로 설 때 당 밖의 관료나 정치지망생들 역시 이쪽저쪽 눈치 보며 신념을 저버린 줄서기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정당 안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와 과업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연쇄적으로 전개된다면, 대통령은 쇼윈도식의 메가 프로젝트를 졸속적으로 추진할 필요도 없고, 임기 말에 이르러 자신의 정당으로부터 버림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당 간의 경쟁 역시 상대를 상처주고 모욕주기에 모든 것을 거는 것에서 벗어나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정책대안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문제의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대선 후보 가운데 정당을 바로세우는 것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다. 대통령 개인의 사인화된 정부가 아니라 정당의 정부를 만드는 일은, 오늘의 한국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민주적 리더십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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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대통령 임기 말이 되면 정치권 어디에선가 헌법 개정 논의가 제기되고는 한다. 거기에는 두 방향에서의 동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헌법을 바꾸면 정치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라는 가정, 말하자면 헌법을 바로세우는 것이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해하는 법적·제도적 접근이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헌 논의라는 것이 대개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흔들어 뭔가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자원이나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단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초점은 언제나 대통령 임기를 늘리는 문제 아니면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하는 권력 관계에 맞춰져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법적 근간으로서 헌법을 이해하는 방법이 극히 협애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개헌 논의가 자주 제기된다는 것은, 민주정치의 실천이 그만큼 불안정한 기초 위에 서있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나 있는 헌법, 있는 제도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헌법을 바꾸자는 주장을 자주 하는 것은 더더욱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굳이 제도나 규칙을 바꿔 사태를 좋게 만들고자 한다면, 대통령제 임기를 단임제에서 중임제로 바꿀 것이냐 아니냐 혹은 대통령 중심제를 의회 중심제로 바꿀 것이냐 아니냐를 말하기 이전에,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국민의 대표를 뽑는 제도를 개선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책임 있는 접근이다. 이 점에서 최근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쟁자들이 후보선출 방식으로 결선투표제에 합의한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물론 민주당의 결선투표제는 아직 한 정당의 선거제도 이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민주당의 결선투표제는 앞으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총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제도 그 자체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학 이론에서나 다른 나라의 경험적 사례에 비추어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 대표적인 선거제도만 놓고 보더라도 단순다수제와 비례대표제는 각각 장단점을 나눠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마다 그들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제도를 선택하고 있으며 개선해야 할 과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양한 혼합형을 발전시켰다. 단순다수제의 변형이라 할 프랑스식 결선투표제와 비례대표제의 변형이라 할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 도입 공청회 l 출처:경향DB

1위 득표자를 곧바로 대표로 결정하는 단순다수제 대신 결선투표제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데는 그럴 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대통령 중심제와 제도적 상보성이 좋기 때문인데, 개헌과 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보다는 선거제도를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정치를 좋게 만들 수 있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결선투표제의 모델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우리와 같이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채택하고 있으면서 대선과 하원의원을 결선투표제를 통해 선출하는 프랑스라 하겠다. 우리 현실에서 특정의 선거제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오늘의 한국 정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우선적으로 필요한가 하는 판단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최대 문제는 여야 간 극단적인 적대감 내지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현상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할 합리적인 경쟁과 토론을 어렵게 하고, 특정 정당이나 세력에 대한 지지 강도가 강한 소수의 사람들이 정치를 지배하게 만든다. 이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정치 밖에서 제3의 대안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는데, 그로 인해 정치 안에서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사회적으로는 기존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구원자를 갈망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정치적 양극화를 완화하는 제도적 대안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단순다수제 방식으로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대표를 뽑는 현행의 소선거구제는 정치의 세계를 양분하는, 양극화된 경쟁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제도가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양당제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하기보다는 이른바 ‘진영 간 대립’을 강화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기존 정당 내지 정당체제가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러한 현상이 가져오는 정치적 압력은 부정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정당의 정체성을 상대에 대한 적대감에서 찾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가치·열정·전통이 서로 다른 소수 정당과 정치세력들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다원주의 발전을 억압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 결과는 양당제의 제도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당제의 발전도 아닌 것으로서, (이탈리아 출신 정치학자 지오반니 사르토리가 말하는) “양극화된 다원주의”(polarized pluralism)의 심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결선투표제에서 유권자들은 적어도 1차 투표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의 당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유권자들의 다양한 선호가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짐에 따라 작은 정당들도 대표될 수 있는 온건한 다당제 내지 정치적 다원주의가 허용될 수 있는 여지는 커진다. 이 점에서 귀도 타벨리니(Guido Tabellini)와 다른 두 명의 이탈리아 경제학자들이 이탈리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는 의미가 있다. 그들은 인구 1만5000명 이하에서 시행되는 단순다수제와 그 이상 선거구에서 시행되는 결선투표제를 비교 분석해, 단순다수제에 비해 결선투표제가 정치적 극단주의를 완화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의 발견은 한국에서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결선투표제는 약한 정당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도와준다. 동시에 2차 투표에서 자신들의 정책 대안을 큰 정당들과 협상을 통해 정치연합 내지 정책연합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정책 내용은, 이념적 슬로건이 아니라 현실에 보다 가까운 정책 대안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결선투표제는 오늘의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부정적 특징이라 할, 최고통치자 선발 과정에서의 공적 심의의 부실 현상,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결핍 현상을 개선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국가기구를 관장하고 그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엄청나게 크고 광범한 것에 비한다면, 통치자를 선출하는 과정과 방법은 너무나 허술하다. 후보를 정당이 선출한다하더라도 사실상 그것은 정당 내 (일종의 사적조직으로) 캠프가 주도한다. 당연히 누군가가 그 경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사실상 그 정당의 정부가 아닌 특정 캠프의 정부가 된다. 정당이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하는 역할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 정당 내부의 후보 검증과 평가 과정도 발전이 전혀 없다. 당 내에서 후보가 선출되는 과정뿐 아니라 그 이후 선거법이 허용하는 공식적인 선거운동 기간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짧다. 정치적 리더십의 형성과 평가 및 결정 과정이 이토록 짧은 극렬 드라마를 통해 이루어진다 할 때 그 위험성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여기에 인터넷 투표, 모바일 투표, 여론조사와 같은 방식이 결합될 때 그 위험성은 배가된다.

정치가 순간의 열정과 급변하는 여론에 휘둘리는 현상은 이미 충분히 심화되었다. 이성적 논의를 위한 공적 공간을 이제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런 조건이라면 최고통치자를 잘못 뽑고 사후에 촛불을 들어야 하는 악순환은 계속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 결선투표제는 1차 선거결과를 통해 시민의 다양한 선호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를 기초로 모두가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고 보다 더 신중한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한 번의 결정이 갖는 위험을 줄이는 효과를 갖는다면 무한히 경박해진 “인스턴트 정치”를 보다 사려 깊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런 선거제도를 도입하고 확대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최소한 헌법을 바꾸는 무책임한 거대 도박판을 벌이는 일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이고 또 민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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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경향시민대학장·고려대 명예교수


지금의 민주당에는 두 개의 진보 노선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가 ‘민주 대 반민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진영 간 대립의 노선’이라면 다른 하나는 어떤 정부를 만들 것인지를 준비하는 ‘대안 정부 노선’이라 할 수 있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진영 간 대립노선은 반권위주의, 반부패, 반권력과 같이 도덕적 가치나 이념적 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상주의적 열정과 정조를 불러일으키고 ‘운동의 정치’를 되살리고자 하는 경향도 강한데, 그러다보니 이 노선은 자주 반정치의 태도와 정조를 동반한다. 또한 반엠비, 반박근혜, 반새누리당의 슬로건이 말하듯 적대적 대립의 축 내지 두 블록 간의 전선을 상정한다. 격렬한 언사를 동원해 상대를 공격하고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을 지향하기도 한다. ‘독재 회귀’, ‘신공안정국’ 등을 외치면서 보수정부가 권위주의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동원할 때도 많다. 이러한 노선은 상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얼마나 강하냐가 진정한 진보를 가늠하는 척도인 것처럼 인식되는 현상을 만든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민주당은, 그런 종류의 공격에 시간과 당의 에너지를 쓸 만큼 여유를 즐길 수 없다. 그런 노선을 지속하는 한, 당 체질의 정비를 통해 대안 정부로서 실력을 쌓는 일을 등한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하고 당력을 기울이는 데 있다. 이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유능함을 인정받고 신뢰를 얻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공익에도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선거 전략으로서도 더 효과적이다.

안타깝게도 4월 총선 이후 민주당은 지난 총선 전략이 왜 잘못되었나를 평가하고, 다가오는 대선에서는 어떤 전략으로 임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히려 총선 패배를 하루라도 빨리 잊고 싶어서였는지, 공격적 노선을 더 강화했고 그 경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추상화되고 도덕화된 반대담론이 강해질수록, 정치의 방법으로 일을 성사시키는 ‘진지한 정치’는 필요치 않게 된다. 뜨거운 열정의 동원에 몰두하는 정치는 실제의 사회 현실과 괴리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당연히 내용적으로 더 얄팍해지는 일은 불가피하다. 지난 총선의 가장 큰 특징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 축을 불러들여 야권연합을 성사시켰지만 기대했던 승리는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소외세력의 소리는 대표되지 못했고 노동 문제 역시 주요 이슈에서 배제됐다는 점일 것이다. 한·미 FTA 폐기, 재벌개혁, 보편적 복지 등 개혁적인 것을 넘어 급진적이기까지 했던 주장과 수사들이 소리 높여 외쳐졌던 것을 생각하면 커다란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진보적 슬로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통해 실천 가능한 아젠다로 설정되지도 못했다. 유권자들은 정치 슬로건을 단순히 선악으로만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러한 개혁 사안들을 야당이 실천할 능력과 진지함이 있는지를 점점 더 중시하기 시작했다. 지난 총선은 민주당이 집권당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수 시민들이 강한 의구심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대선을 앞둔 이 시점에서도 시민들이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민주당은 정부가 될 수 있는가?’에 있다. 민주당이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최장집 교수 강연, 2012 민주당의 과제 ㅣ 출처:경향DB

열린우리당 이후로 민주당은 작동 가능한 당내 권력구조를 제도화하고 리더십을 창출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했다. 그 결과 현재 민주당은 일정한 정치적 자원을 가진 여러 명의 개인과 세력이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파당들의 느슨한 집합체에 불과한 구조를 갖게 됐다. 선거 때 그것은 ‘캠프’가 된다. 이 캠프에 정당 안팎의 정치인, 정치지망자, 지식인, 전문가그룹들이 참여해 대선을 치르는 것이 오늘의 한국정치가 됐다. 정당의 공적 조직이 아니라, 캠프가 대통령을 만들고 청와대를 지배하고 정부를 주도한다. 이는 선거 이후 정부들이 한결같이 실망스러운 실적을 보이게 되는 것과 분명하고도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갖는다. 캠프 혹은 캠프 내 특정 팀이 구성한 청와대, 정부가 제대로 된 것일까? 나아가 그런 정부가 진보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

정당정치의 허약함은 지금도 계속해서 나쁜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그 가운데 하나는 대선 후보 선출이 계속해서 늦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빨라야 10월 늦으면 11월에 후보가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통령선거 캠페인은 길어야 두 달밖에 가능하지 않다. 누가 어떤 정부를 만들게 될지는 이 짧은 기간 동안에 판단되고 결정되어야 한다. 여론조사, 개방형국민경선, 모바일투표로 이어지는 후보 선출 방식의 변화 역시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도 정당의 역할을 필요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원이 아니라 정당의 역사와 이념, 노선과 무관한 일반 투표자들이 당의 공식 후보를 결정한다는 발상은, 부정적인 의미로 가히 혁명적이다. 이처럼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결핍현상은 점점 더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시민-투표자들은 좋은 대통령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의 기회를 충분히 향유하지 못한다. 엄청난 권력, 권한을 갖는 대통령을 우리는 너무나 즉흥적으로 선출한다. 그렇게 선출한 이후에는 합당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당의 기반 또한 약하다. 정당이 정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무관한 대통령, 정당과 무관한 정부가 되는 길이 급진적으로 넓어지고 있는 현상은 한국 민주주의의 적신호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기존의 진영 간 대립구도에 기초한 전투적 대결노선이 아니라 좋은 정당정부를 준비하는 노선이 강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이 가능할 수 있다.

첫째, 의제 설정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한국 정당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당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다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야당이 특히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어떤 정부가 될 것인지를 준비한다는 것은 경제운용에 대안을 갖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뜻한다. 야당도 유능하고 실력 있는 정부를 만들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여야 간 정치경쟁의 중심축을 이동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치와 열정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타협이 어려워 대결의 정치를 불러오는 민족문제 내지 이념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부터, 협상과 타협이 가능한 부의 분배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문제로 갈등 축을 이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집권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투입과 산출 측면에서 각각 당의 능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누구를 대표하나? 민주당이 허약한 가장 큰 이유는 사회경제적 기반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당 내부로 그에 상응하는 사회경제적 힘이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당사자 집단의 참여를 동반하는 투입측면이 강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채널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동시에 당의 산출측면의 능력이 또한 제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당의 선출직 대표와 비선출직 전문가그룹이 함께 정책을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실력을 조직화하고 집단화하는 노력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셋째, 당 리더십과 대선후보 선출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민주당은 그동안 권력, 권위의 분산을 통해 당의 중심성과 리더십의 해체를 목표로 한 제도 개혁을 추진해왔다. 일종의 자해적 정당개혁이라 하겠는데, 이는 민주주의와 정당의 역할을 잘못 이해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정당 조직이 약해지면, 정치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회경제적 약자 집단들의 참여와 대표성이 약해진다. 응당 행정 권력과 경제 권력을 견제할 힘도 약해진다. 현재와 같은 당의 구조를 리더십이 중심이 되어 일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모바일투표를 포함해 완전개방형 경선제를 도입하고자 하는 맹목적 주장들에 대해서도 견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지금도 약해서 문제인 정당의 정체성과 리더십을 더욱 해체시킨다. 모바일 기제에 친숙한 그룹이 과다대표되는 문제도 있다. 그렇게 되면 민주당이 대표하고 뿌리를 내려야 할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서 중산층과 서민 내지 소외계층과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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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경향시민대학 학장·고려대 명예교수


지난 칼럼(5월22일자 31면)에서 만났던 신용불량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구로구 궁동의 박영신씨(가명)는 현재 다섯 식구를 위한 최소한의 생계비 월 150만원의 절반인 70만~80만원의 수입으로 절대적인 마이너스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고,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증후군을 갖고 있는 큰아이로 인해 월 15만원의 장애수당만 받는다. 지난 총선 때는 선거운동 일을 봤고, 지금은 식당에서 일하는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왜 수입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지 않을까. 신용불량자라는 전력이 있기에 점포의 계산대나 콜센터 서비스와 같이 돈·신용과 관계된 일자리를 가질 수 없다. 신용카드도 만들지 못한다. 휴대폰도 갖지 못한다. 사실상 사회로부터 격리돼 있는 상태다.

신용불량자로서 사채업자들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그녀가 겪었던 경제적·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갖게 돼 좁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무일도 보기 어렵다. 또한 어린 자녀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장시간 집을 비우는 파출부 같은 것도 할 수 없다. 그녀가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실로 한정된 것이다. “나라에서 불법자로 찍히면 발목 꽉 잡혀 빼도박도 못하죠. 한번은 기회를 줘야 하는데…. 한순간 잘못한 것이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어요”라고 그녀가 말할 때, 회한과 항변이 교차하고 있었다.

청소일을 하는 최태일씨(가명)는 궁동의 박씨보다 상황이 나아 보였다. 박씨는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했을 때 장례비가 없어 시신을 병원에 기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씨는 가정형편이 좀 나아 가족들의 도움으로 부채의 급한 부분을 빨리 정리할 수 있었고, 어머니에 의탁해서 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아직 가정을 갖지 않은 건강한 청년으로 고된 노동일을 할 수 있었다. 최씨의 청소노동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돼서 이루어진다. 먼저 새벽에 나가 아침 9시까지 일한 뒤 집에 돌아와 한잠 잔다. 그리고 오후 4시 반에 나가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한 사이클이 끝난다. 그리고 하루를 쉬고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노동시간이 짜여 있다.

 

채무재조정과 신용회복 상담을 받으려는 서민들이 서울 명동 신용회복위원회에 들어서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필자가 최씨를 만난 날은 노동절이어서 “오늘은 쉬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자기는 쉬는 날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가 하루에 처리하는 쓰레기양이 1만가구에 이른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엄청난 양이다. 최씨는 월평균 220만~230만원의 임금을 받는데, 외주업체에 소속된 작업원들은 구청 소속의 작업원들에 비해 일은 더 힘들고, 받는 금액은 훨씬 적다고 말한다. 노동시장의 중심 제도인 파견법, 변형근로제는 인력장수들에게는 커다란 혜택이 돌아가지만 비정규직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제도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장재선씨(가명)는 신용불량자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편법에 대해 말한다. 신용불량자인 그 역시 통장에 자기 돈 넣고 찾는 체크아웃카드를 사용하는 것 말고는 은행거래를 할 수 없고, 휴대폰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남아 있는 편법은 구청 사회복지사가 된 딸 명의를 이용해 이를 피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명을 사용하는 수많은 신용불량자들이 자신들을 배제한 제도권 경제 안으로 들어와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헤어질 때 장씨는 조용조용한 인상과는 달리 “이곳 거마(거여·마천동) 지역은 서민 밀집지역이고, 사채업자나 일수업자들이 많아요. 국가는 재벌들 자회사인 금융회사들에 많은 대출도 해주는데, 없는 사람들은 고금리로 내몰고 있지요.”라며 강한 어조로 불만을 토로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궁동의 박씨가 “(인생이) 너무 어려서 시작해 너무 어려서 끝나 버린 것 같아요. 다시 일어나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해요. 하루 먹고 하루 살다가 결국 애들에게 대물림될 거예요”라고 했던 말은 커다란 여운을 남긴다. 경제적으로 박탈당한 그들에게 새겨진 ‘낙인’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관계가 어려워지는 이러한 조건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 참여의 권리, 즉 제레미 왈드론(Jeremy Waldron) 같은 법철학자들이 말하는 ‘권리 중의 권리’(the right of rights)마저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신용불량자 문제가 잘못된 정책으로 만들어진 문제이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어렵게 하는 것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어떤 도덕적 인식과 깊이 연관돼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과시적 허영심이나 자제력 없는 소비욕구 내지 도덕성의 결여와 같이 신용불량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생각을 말한다. 그로 인해 신용불량자 문제가 사회경제적 문제이자 정책결정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치적 문제라는 인식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제도권 밖에 이리저리 흩어져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 있는 신용불량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면서 정치적 이슈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금융 관련 문제는 복잡한 기술적 문제를 포괄하고 있어 전문가 아닌 보통사람들이 문제 해결 방안을 찾아내기도 어렵다. 다양한 성격의 광범위한 일반 소비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들을 공통의 정치적 요구를 갖는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조직해서 목소리를 갖게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 ‘1인 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민생연대’ 송태경 사무처장의 활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적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인터뷰한 박영신씨, 신영환씨는 모두 송 처장의 법률자문 덕분에 파산처리 과정에서 더 큰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필자가 송 처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영등포구 당산동의 조그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속초에서 상경한 한 여성 보험설계사 역시 송 처장으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송 처장이 누구도 하지 못하는 운동을 통해 여러 사람의 경제적 파탄을 경감시켜 주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다루고 도와줄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신용불량자들을 위한 정치적 대표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잘못된 이념적 급진주의에 의해 주도된 진보정치가 민중의 권익 증진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민주주의 그 자체에 해악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분명히 보고 있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신용불량자 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첫째는, 신용불량자 문제를 포함하여 금융정책을 실제로 다룰 수 있는 당의 제도와 조직체계를 조직하는 일이다. 이는 관련 이해당사자 집단, 예컨대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노동자, 복지수혜 대상자, 청년 등이 정책 이슈 제기에서 아젠다 형성, 정책 대안 마련에 이르기까지 보다 더 가까이 참여하거나 접맥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당 활동의 체계가 달라지는 문제를 말한다. 당의 조직과 역할은 시민의 실생활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업에 부응할 수 있도록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고서 진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실제 사태를 못 보게 만드는 역기능이 될 수 있다.

둘째는, 정책 이슈와 대안들이 이념적 거대담론으로부터 직접 도출되지 않아야 한다. 담론 내지 공론장에서의 논의는 추상 수준이 높은 관념성에서 벗어나, 사회경제적 문제를 실제로 다룰 수 있도록 구체화되고 현실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점에서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재벌개혁과 같은 포괄적이고 추상 수준이 높은 슬로건이나 언어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공허한 구호를 반복하는 것에 그치는 역효과를 갖는다. 추상적 언어가 꼭 필요하다면, 개별적이고 구체적 정책 대안들이 충분히 형성된 후에나 불러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안으로 민중을 속이기는 쉬우나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추상적 이념에 헌신하나 구체적 실천에는 관심이 없는, 진보의 이름을 딴 습관성 정치구호나 관성화된 행태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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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외국인노동자 문제는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일상 속 깊숙이 들어온 지 오래다. 공식통계만 보더라도 중국동포 47만명을 포함해 외국인체류자 142만, 장기체류자 100만, 외국인노동자 55만명에 이른다. 그 규모는 계속, 크게 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많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인과의 결혼이 증가함에 따라 ‘다문화주의’ 담론이 넘쳐나는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외국인노동자 문제의 실상은 어떠한가? 그들은 무엇을 원하고,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봐야 할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내가 처음 찾아간 곳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용수리에 있는 한 비닐하우스 농장이었다. 로즈마리, 제라늄, 페퍼민트 등 300여종의 허브식물을 재배해 가까이 위치한 송파지역 화원들과 양재동 꽃시장에 공급하는 이 농장의 작업은 베트남과 중국에서 온 대여섯 명의 노동자들이 전담했다. 베트남 중부 니얀시가 고향인 30대 후반의 하이는 거의 5년간 이곳에서만 일했다고 한다. 그는 농장 내 비닐하우스 가건물 숙소에 살면서 하루 열 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 쉰다. 이제는 상당한 기술자가 돼서 월 180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자신의 노동조건을 만족스러워하는 그에게 가장 바라는 것을 묻자, “한국에 법적으로 더 체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2010 세계 이주민의 날 한국대회’에 참가한 외국인 노동자들 I 출처:경향DB

베트남의 같은 지방에서 온 화라는 이름의 여성노동자는 체류한 지 3년째가 됐고 120만원을 받는데, 그녀의 바람도 같았다. 외국인노동자에게 허용된 법적 체류기간은 5년이고 이제 하이는 두 달이 남았다. 송금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족이 있기에 그는 이 두 달 안에 불법체류자로 일을 하느냐,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귀국하느냐 하는 진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한다. 같은 용수리에서 휴대폰과 카메라 부품제조 및 광택내는 일로 3차 하청공장을 운영하는 최길동 사장은 나를 안내해주면서, 엄격한 체류기간의 제한은 이 지역 외국인노동자들이 직면한 최대 문제라고 말한다. 중국동포 노동자들의 사정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옌지 화전시에서 왔다는 70대초반의 김영조 할머니는 12년 전 한국에 와 미나리공장에서 일했고, 이 농장에 온 지는 9년이 됐다고 하는데, 여권 체류기간이 십년이어서 다시 십년을 갱신했다고 한다. 농장이 식당보다 훨씬 일하기 좋다고 하는 김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 손녀 모두 중국에 살고 있지만, 형편이 허용하면 자신은 한국에 남아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날 인터뷰에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보통 한국 국적이 없는 모든 노동자를 외국인노동자라고 생각하지만, 합법적 취업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법적지위의 차이로 인해 중국동포 노동자와 그 밖에 외국인노동자들의 고용조건이 확연하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중국동포 노동자가 아닌 외국인노동자들은 5년 노동시한이라는 장벽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제도는, 법의 취지가 그것을 의도했든 안 했든, 이들을 법의 보호 밖으로 내모는 효과를 갖는다. 근로기준법 6조는 ‘국적’이 다르다고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국적의 노동자들에게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법 조항이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적용될 리 만무하다. 이러한 환경은 억압적인 고용관계와 더불어 임금체불, 산업재해, 구타, 차별, 성폭행과 같은 인권침해 문제를 불러왔다. 법의 영역 밖에서 고립무원에 처한 그들은 인권침해행위에 항의하는 권리주장이나 단체행동은 고사하고 불법체류 신분이 발각될까 두려워 행동을 극도로 자제하고 활동 공간을 좁게 한정한다. 이때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해 생살여탈권을 쥔 이 제도의 집행자가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다면, 상황은 최악이 될 수밖에 없다. 최 사장은 출입국관리소 사복경찰관들의 부정부패 사례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는 한 사람이 한 번에 500만원씩 3, 4개월 간격으로 정기적으로 뜯어가기도 했단다. 이러한 공직자비리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몸 바쳐 일한 고통스러운 노동의 대가를 빼앗는 반인륜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방문한 또 다른 곳은 가리봉동에 위치한 ‘지구촌사랑나눔’센터였다. 미취업 노동자와 숙소가 없는 남녀노동자들이 100명 넘게 먹고 자는 대규모 식당과 쉼터, 병든 노동자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 이들이 갈 수 있는 교회, 아이들 학습실, 노동상담과 취업소개 등 외국인노동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진짜 종합센터였다. 헤이룽장성 영안에서 온 계인숙 할머니는 김포에 있는 가방공장과 대전에서 식당일을 한 경력이 있고, 지린성 연길에서 온 김용철씨는 건설공사의 바닥미장일이 전문으로 여러 곳을 옮겨 다녔고 인천공항 확장공사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 한국에 온 이들은, 한때 불법노동자였으나 2004년 이후 재외동포법 개정, 방문취업제 도입 등의 제도변화에 힘입어 합법적으로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센터 내에 있는 중국동포교회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인 미샤는, 외국인 불법노동자의 가장 비극적인 사례가 아닐까 한다. 사마르칸트에 가까운 가르시가 고향이고,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둔 그는 지금은 40대 후반이지만 13년 전 젊은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원단공장, 미싱회사, 가축농장 등 여러 종류의 직장에서 월 20만~30만원밖에 못 받고 일했다고 한다. 그 사이 그는 불법노동자가 됐고, 어느 날 건설공사판 목수 일을 하던 중 당한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고관절을 다쳐 일을 못한 지 벌써 4년이 됐다고 한다. 결국 이곳 센터에 의탁해 기약 없이 살고 있는 신세가 됐다. 미샤는 서툰 한국말이지만 “외국인들은 너무 힘들어. 불법 무서워. 중국동포들은 지금 합법화됐어요”라며 탄식한다. 왜 수술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돈도 많이 들고,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 큰 수술이어서 무섭다고 말한다. 돈이 없어서도 그렇지만, 불심검문 때문에 건물 밖을 멀리 벗어나는 것도 무섭다고 한다. 목발을 짚고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이 센터를 운영하는 김해성 목사는 지난 20여년 동안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과 지위향상을 위해 헌신해 온 진정한 의미의 인권운동가였다. 한때는 외국인노동자의 90%가 불법이었고, 인권침해가 다반사여서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하더라도 김 목사를 필두로 여러 인권운동가들이 정부당국에 수없이 항의하고 탄원하고 이슈를 만들면서 경찰에 맞고, 구속 수감되는 희생이 있었다. 최소한의 인간애를 배워 나가는 데 이들 선각자들에게 빚진 바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과 사회보호 확대라는 면에서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는 게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최근 출간된 이세기 시인의 <이주, 그 먼 길>(후마니타스) 역시 외국인노동자들의 꿈과 현실 속에서 그걸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먼 길도 필요하다면 재촉해서 가야 할 것이다.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복지체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부가 할 일이다. 외국인노동자도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사관계가 개선돼야 한다. 그것은 사용자단체와 노조가 나설 일이다. 외국인노동자 보호입법도 필요하다.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피해서는 안된다. 어느 나라든 외국인노동자 유입을 개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일정한 제한이 없을 수 없겠지만, 고용주의 신원보증을 통해 고용허가를 연장해주는 제도를 도입할 수는 있다. 이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들은, 외국인노동자 청원을 전담 처리하는 지역노동위원회나 노동법원을 설치해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서비스부문이나 3D업종에서는 외국인노동자의 공급을 더 원하는 반면, 건설업에서는 내국인노동자의 고용기회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것 역시 업종별 고용쿼터제를 두거나 노조와 사용자단체 간의 협의를 통해 풀어갈 수 있다. 뭐든 안되는 것은 없다. 외국인노동자의 합법화를 위한 제도개선은 중요하다. 이 문제가 정책적 필요에서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도덕적 책임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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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 학장

총선을 앞둔 지금, 필자는 두 가지 의문을 갖는다. 하나는 복지나 재벌개혁과는 달리 비정규직 문제는 왜 중대 쟁점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젊은 세대의 노동문제는 누가 대표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최근 나는 하급 서비스직 부문에서 시급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청년유니온’ 조합원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이종필씨는 피자 배달 일을 했다. 유사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은 높았지만 오토바이 사고 위험이 컸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고, 청년유니온 1기 조직팀장을 지냈다. 서유란씨는 해외 일자리를 찾기 위해 네일아트 기술을 배울 학원비를 충당하고자 대형마트 안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일을 하는 시급 노동자였다. 이번에 청년유니온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수민씨는 신용정보사의 정규직 직원이다. 월 120만~130만원의 급여로는 부족해 퇴근 후 집근처 커피가게에서 일주일에 4일, 저녁 8시에서 새벽 1시까지 월 40만~45만원의 추가 수입을 위해 일을 한다. 현재 청년유니온 홍보팀장이다. 대학 재학 시절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청년유니온 창설에 참여했던 김형근씨는 24시간 편의점에서 주 3일 밤 11시부터 아침 8시까지 야간근무를 했다. 현재 청년유니온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로부터 듣는 청년유니온 이야기는, 내게는 무척 생소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청년유니온 주최로 서울 서교동에서 열린 ‘청년자립토크쇼’ l 출처:경향DB

새로운 형태의 이 노동조합은 2010년 3월에 출범했다. 지금은 전국조직으로서 500여명의 회원이 있다. 취업의 어려움, 불안정한 고용조건, 불투명한 미래, 등록금 압박, 경쟁 가열화 등으로 촉발된 젊은 세대의 정치참여와 그로 인한 투표율 증가가 선거 지형을 크게 바꾸기 시작한 것은 2010년 6월 지방선거 때였다. 청년유니온의 시작은 그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거나 최소한 중첩된다. 그러한 정치변화를 그들이 선도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누구보다 먼저 행동에 나섰던 것은 분명하다. 이번 총선은 그러한 변화의 연장선에서 치러지게 되었고, 따라서 젊은 세대에 어떻게든 어필하려는 것이 한때 정당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책임 있는 정책적 대안보다 청년을 공천하는 것 그 자체에 매몰된 느낌을 받게 된다. 여전히 우리사회의 청년 노동문제는 아직 중대 정치 의제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청년유니온 역시 야당들의 비례대표 후보 선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결실을 얻지 못했다. 청년유니온은 이제 겨우 첫 번째 임원 임기를 마쳤고, 지난 2월 총회를 통해 2기 간부진을 선출한 아주 젊은 조직이다. 필자는 몇 가지 이유에서 이 새로운 신생 노동운동의 실험에 주목한다.

첫째,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과거와는 다른 방식을 발전시켰고, 두 운동 모두에서 질적 변화를 수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노동현장으로 이어져 사실상 한국 노동운동의 지도세력 및 지도이념을 만들어냈다.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대부분 교육받은 도시중산층의 배경을 가진 이들의 노동운동이 자신들의 실제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의 운동과 그들의 계급은 서로 분리된 것이었다. 따라서 실제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 내지 사회경제적 권리를 향상시키는 데 운동의 중심이 두어졌던 것이 아니라, “반제 민족해방” 또는 “사회주의 노동해방”의 이념에 “복무”하려 했다. 그것은 일종의 ‘중산층 급진주의’ 내지 ‘정서적 급진주의’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 유산은 ‘내용 없는 언어들의 공격성’이나 ‘진리를 독점한 듯 내세우는 도덕적 우월의식’ 등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앞 세대와는 달리, 청년유니온 조직자들이 운동을 조직하게 된 동인과 추진력은, 그들이 직면하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실제 생활경험으로부터 나온 자신과 동료들의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의 운동은 실제적이고 또 실용적이었다. 김형근씨는 “대졸자가 좋은 일자리를 갖는 것은 6%일 뿐이다. 그 가운데 정규직은 임금수준도 높고 노조도 있다. 반면 대부분의 청년들은 무권리 상태이다. 기존 노조의 벽은 높다. 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들의 조직이 필요했다”라고 말한다. 이종필씨는 “시간제 아르바이트, 학비조달, 취업 불안, 고용불안정, 저임금 문제들에 대해 당사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여론화, 의제화하는 것이 필요했다”라고 말한다. “당사자 스스로” 문제 해결자로 나선다는 말이 특별하게 들렸다.

둘째, 사업장에 기반을 둔 기존의 경직적 조직 형태가 아니라 온라인공간을 활용하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조직 형태가 가능해짐에 따라, 종래에는 조직하기 어려운 광범한 하급 서비스부문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조직화를 위한 별다른 자원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인터넷 매체라는 통신수단에 힘입어 전국적인 조직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임원 선출에서부터 의제에 관한 토의, 회원 간의 의사소통 등 많은 활동을 온라인공간에서 하고 있다. 운영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으니 조합비 부담도 낮다. 처음 한나라당 소속 서울시장이 노동법을 위배하면서까지 청년유니온에 노조신고필증을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은, 광범한 청년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청년유니온은 작은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하급 서비스부문 노동자들과 회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작년에는 유명한 커피전문점들을 상대로 수천만원의 주휴수당을 받아내, 수백명의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뒤늦게나마 체불된 임금의 한 부분을 돌려주는 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수민씨는 처음 인터넷을 통해 청년유니온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무료상담을 받으면서 근로기준법에 따른 주휴수당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최저임금이 영국의 절반도 안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희망을 크게 안 가졌는데 노조활동이 큰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 서유란씨는 청년유니온의 무료상담 덕분에 주휴수당과 가산수당을 받았다. 지금은 청년유니온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고 말한다.

셋째, 청년유니온 같은 세대노조의 발전은 민주주의에서 대표의 직접성을 확대하고, 정당으로 하여금 그들이 공약한 사회경제적 사안에 대해 책임성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밑으로부터의 시민 참여보다는 지식인과 전문가 엘리트집단의 참여만을 확대시켰다. 그러는 사이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하층배제적인 차별 구조는 개선되지 못했다. 민주화의 효과가 갖는 이런 계층적 편향성만큼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도 없다. 이런 조건에서 양극화된 노동시장의 문제를 집약하고 있는 신규 노동시장 진입자들의 권익과 의사를 대표할 수 있게 하는, 변화의 물꼬를 트는데 청년유니온의 기여가 결정적일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이들은 정치참여에 있어 상당히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고, 매우 유연하고 현실적이었다. 이념적 성향에서 다원적이며, 실용적인 관점에서 현실정치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음도 느낄 수 있었다. 김형근 사무국장은 경제민주화라는 포괄적인 테두리 안에서 파트타임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과 저임금 구조, 정규·비정규직 양극화, 고용불안정 문제를 개선하는 의제들을 꾸준히 밀고나갈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새누리당을 제외하고는 여러 다른 정당들과 연대할 준비가 돼 있고, 정치권 밖의 기존 노동운동은 물론 여러 다른 운동조직들, 시민단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를 추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민주화운동 시기 앞 세대의 노동운동에 비한다면, 이들 신세대들의 노동운동은 정치참여를 포함한 모든 문제에서 교조적이기보다는 훨씬 실천적이었다.

아직 맹아적 단계에 있기 때문에 청년유니온이 어떤 발전의 궤적을 그릴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 4인의 청년유니온 활동가를 통해 받은 인상은, 이념과 정파에 의해 계도된 과거의 노동운동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환상에 빠져 있지 않았고 철저하게 실제의 현실과 대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절제된 태도야말로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기에, 그들과의 짧은 만남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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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오늘의 농업·농민 문제를 생각하면 ‘극측반’(極則反)이라는 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극에 다다라 반전될 수밖에 없다는 뜻처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느낌 때문이다. 농업은 경제의 성공신화를 주도했던 제조업과 지식정보산업의 눈부신 발전과 정확히 반비례하면서 퇴행해왔다.
급속한 고령화와 인구감소, 농가부채 증가, 생산비중 축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식량자급률 등의 통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농촌이 이토록 피폐화된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 수 있을까? 농업의 붕괴 위에서 산업 발전이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농촌의 피폐와 농업의 붕괴는 방치되어 왔을까? 

농민들의 요구와 불만은 왜 정책으로 수용되지 못했을까? 농민이 지역적으로 산재해 있어 조직화되기 어렵다는 점도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정당체제가 노동자나 농민, 중소기업, 자영업자와 같은 생산자 집단들의 이익을 두고 경쟁하기보다 폐쇄적인 지역갈등 구도에 얽매어 있었다는 데 기인하는 바 크다. 지난 10년 동안만 해도 농업인구가 22%나 급감해 이제는 겨우 300만명밖에 안되는 열세 집단이 되었다는 점도 정당들이 그들에게 다가갈 유인을 줄이고 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단절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농업·농민 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대 문제로 다시 논의될 수 있게 될까? 

배추값 폭락 항의하는 농민들 (경향신문DB)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최근 나는 두 그룹의 농민운동 활동가들을 만났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이창학씨는 386세대로 그 세대 여러 청년들이 그러했듯 브나로드운동에 투신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처럼 직접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며 농민운동에 투신했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변혁적 전선 운동”을 지향했던 전농은 1990년대 중반 우루과이라운드와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할 때 농산물수입개방 반대투쟁의 전위부대로 정부 당국과 맞섰다.
흥미로운 것은, 지지하고 기대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뒤통수 맞는” 경험을 해야 했고, 자유무역협정(FTA) 반대투쟁에서 또다시 전위부대로 나서야 했다. 정부정책의 방향을 바꾼 것도 아니고 조직이 성장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전농의 싸움은 자기 소진적이었을지 모른다. 이창학씨 역시 “비판하고 반대하는 투쟁은 했지만 이슈를 선점하고 현실적 대안을 만들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투쟁이 완전히 무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농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예산을 지원하는 한편, 기술영농과 품종개량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축산, 과수, 낙농 등 분업화된 업종을 중심으로 품목단체들이 성장하게 된 것도 전농의 투쟁이 가져온 간접적 효과일지 모른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의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경향신문DB)

 

하지만 전농이 길고긴 고난의 역정을 거쳐 도달한 오늘의 상황은 기대한 바와는 너무나 다르다. 농민들의 경험담을 엮은 <농촌에서 온 편지>(한국농정, 2011)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동안의 모든 농촌정책은 실패했다. 그 실패는 고스란히 농민이 떠안아야 했다……그 고통의 세월을 떠안고 사는 사람들이 지금의 농민이다.” 다른 편지에서 한 농민은 “어쩌다 농업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회의다 모임이다, 많이도 다녀봤다. 엉뚱하게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고, 같은 농민에게 빨갱이 소리도 들어봤다……집사람은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농민운동 활동가들이 갖는 좌절감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두 번째로 만난 그룹은 지역농업네트워크운동, 협동조합운동, 농정연구와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는 지식인 내지 연구자 중심의 활동가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적인 목표는 영농은 물론 육아, 교육, 의료 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연계된 자립적인 지역이자 삶의 공간으로써 대안적인 농촌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모두 농민단체, 농협, 주민과 지자체 등 농촌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두루 참여하여 농민들의 요구와 이익을 대표하고 공적 문제를 결정하고 운영하는 협치(協治)의 체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중심기구로 농업회의소를 들었다. 그것은 시·군 단위의 지부로부터 상향식으로 조직되는 농민단체의 센터 역할도 하고, 지자체와 함께 대의기구로서 역할도 하면서, 농민을 위한 실질적 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말한다. 유럽 노사관계에서 말하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당사자와 공익대표가 함께 참여하는 협의 및 결정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협동조합 건설에 집중해 온 김기태 소장은, “농업계는 계속 닥쳐오는 통상정책의 변화에 대응할 여력이 없고, 전농이 싸움은 잘하지만 새로운 농업 문제에 대응할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안으로 그는 안전한 먹거리 공급과 식량안보의 관점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농촌과 도시, 농업계와 비농업계를 묶는 네트워크 형성을 주장했다.
지역농업네트워크운동을 주도하는 박영범 대표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 농업정책에 대한 올바른 이슈 제기, 대안적인 정책의 발굴을 통해 체계적으로 대응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항의와 투쟁 중심의 운동방식이나 품목단체의 이익집단 활동 모두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농정연구센터의 황수철 박사는 “농촌은 한번 망가지면 복원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업과 농촌이 지속가능한 토대, 말하자면 사회공동자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역시 우리의 농촌과 농업이 완전히 망가지기 직전상태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인상적인 것은 어떻게든 사태를 개선해 갈 수 있는 공동 결정의 영역을 찾고자 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농업이 우루과이라운드와 WTO 체제를 통해 개방 압력에 완전히 노출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농가소득도 60세 이하만 계상하면 도시평균가구소득보다 낮지 않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소득농업을 확대해 세계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기반과 주체형성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듯이, 농업은 단순한 1차 산업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가장 가깝게 결합되는 생산 활동의 영역이기도 하고, 식생활과 건강이라고 하는 인간 공동체의 재생산 기능을 담보하는 영역이다. 튼튼한 농업 없이 누구도 경제생활의 쾌적함을 향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농업문제는 생산자와 소비자, 농촌과 도시, 농업과 비농업 분야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국가적이고 국민적인 문제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누가 이 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와 농민운동 간의 엄청난 힘의 불균형을 생각할 때 과거 전농이 추구했던 변혁 노선이 성공하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농업연맹(AFBF)처럼 자신들을 대표하는 의원들을 움직여 정책을 만들 능력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대안적 농촌공동체를 지향하는 많은 아이디어들이 상당한 공감을 얻더라도, 누군가 그 길을 정치적으로 개척해주기 전에는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우루과이라운드로 쌀 수입개방 압력이 커지고 있던 시기, 일본 시코쿠 지방에 있는 고치현 농촌마을의 한 노쿄(農協) 지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그들은 매우 실천적인 이익집단으로서 쌀 개방에 대응하는 전략을 토의하고 있었다. 영농기술 제공부터 시장정보 및 금융지원과 같은 구체적인 사업도 진행했다. 집권 자민당은 노쿄와 강력한 연대를 구축하고 있었고 농민 이익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들이야말로 일본 보수주의가 갖는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농민을 가볍게 여기고 농촌을 해체하는 정책을 펴는 한국의 보수정당들과는 크게 대비를 이룬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약자와 소외세력을 보호하고 사회적 공존의 틀을 유지하는 데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정책의 결정과정은 관련 이해당사자 집단들의 참여가 배제되어 있다. 누가 이들의 요구를 조직하고, 이들의 이익을 대표하게 될까? 올해의 양대 선거에서 농민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정당 대안을 만나게 될까? 그리하여 농민·농촌 문제에 대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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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재벌대기업의 2세, 3세들이 제빵제과점, 커피숍, 순대사업을 비롯해 분식, 떡볶이에 이르기까지 돈 되는 데마다 무차별 진출하여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농협유통 등과 같은 대형 유통업체들이 재래시장을 밀어내면서 보통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해체하는 일 또한 더 널리, 더 공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에게 자유롭고 인간적인 경제생활의 공간은 얼마나 남아 있는가. 일본 도쿄를 방문할 때면 나는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갖곤 한다. 골목 상권이 살아있고 이웃과 더불어 경제생활을 하는 공간이 있어서다. 

그런 경제공간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도시의 주거환경 자체가 우리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큰 규모의 현대적 건물과 작은 옛 건물들이 공존하고, 드문드문 산재해 있는 아파트단지와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전통적인 단독주택들이 잘 조화를 이루면서, 뒷골목에는 자영업자들과 영세 상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기업소매점포에 관한 소매영업활동 조정법’이라는 긴 이름을 갖는 소매상보호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제정된 이래 법의 명칭이 달라지고, 여러 번 개정된 이 법 때문에 대형 마트들의 진출을 제한하고 주거지역의 재래식 영세소매상을 보호할 수 있었다. 

법의 제정과 개정을 주관했던 통산성(현재 경제산업성)은 상인, 소비자, 지자체의 공익대표를 참여시켜 장기간 논의하고 타협할 수 있는 협의기구를 두었다. 대형 마트나 대형 소매업체뿐 아니라 영세 상인들의 참여와 대표 역시 균형적으로 이루어진다. 대형매장이 들어설 때에는 한편으로 통산성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하고, 다른 한편 소매영업자들에게는 비토권이 주어진다. 법적 제도화를 통해 대기업과 영세 소상인들 사이에 일방적인 힘의 불균형을 방지한 것이야말로 일본 대도시의 생활환경과 경제활동을 인간미 있게 만든 토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균형적으로 고려하는 제도화의 전형적 원리는, 대기업과 중산층 그리고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공존할 수 있게 한 전후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원리가 일본의 자민당과 독일의 기민당이라고 하는 보수 정당의 주도로 실천되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어떨까?
 

출처 : 경향DB



필자가 방문한 마포구 공덕시장의 사례는, 대형마트의 등장과 전통시장의 쇠퇴 내지는 소멸이라는 일반적 현상의 단면을 잘 드러낸다. 바로 2주 전 공덕시장에서 불과 2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국내 최대 유통업체인 이마트공덕지점이 개장하면서, 그러한 우려는 본격적인 현실이 되었다. 나는 이곳 재래시장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진아 마포구의원의 안내로 ‘공덕시장상인회’와 ‘홍대걷고싶은거리 상인연합회’ 사람들을 포함해 여러 사람들을 공덕시장의 명소인 ‘청학동부침개’집에서 만났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필자는, 재래시장과 대형마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제정된 유통산업발전법의 실제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1997년 제정된 이래 여러 차례 개정이 있었지만 법의 논의, 심의, 개정 과정에서 중소영세상인들의 참여는 없었다. 

대형마트 진입이 규제되기 시작한 재작년 법개정 때, 대기업들의 로비로 인해 대형마트들이 들어올 수 있는 재래시장과의 거리제한이 500m로 규정되었다. 너무 가깝다는 비판 여론이 커지자, 작년 중반 거리제한이 겨우 1㎞로 늘었다고 한다. 2㎞도 부족하다고 보는 상인들 입장에서는, 졸속적이고 임시방편적인 개정이 아닐 수 없다. 공덕시장 근처의 이마트는 국회에서 이러한 거리제한 개정안이 통과되기 전에 건축허가를 받았다. 건축 후 점포개설 등록은 유통산업발전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였다. 법의 시행이 지자체의 조례규칙을 따르도록 되어 있고 그 규칙이 제정되기 전에 등록을 받았다고 하니 위법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입법 정신에 배치되는 점포개설 등록이 옳은 행정적 처분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상인회 사람들은 건축허가에서 점포개설 등록까지 “모든 일이 007작전하듯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은 재벌 유통업체와 마포구청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조를 지칭하며 “그들을 어떻게 당해”라는 말을 덧붙인다. 내가 상인회 간부들에게 왜 건설과정에서 문제삼지 못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가림막을 치고 공사를 해서 그냥 큰 건물이 들어서는 줄 알았지, 이마트인지는 몰랐다”고 말한다. 유통산업발전법이 만들어지고 시행자가 지방자치체로 지정됨에 따라 마포구의회는 지난해 이른바 ‘상생’조례를 제정했다. 조례에 따르면 구청장의 주관하에 대기업과 재래시장의 중소유통기업 대표들, 주민대표들이 참여하여 상생발전협의회를 운영하게 돼 있다. 그러나 상인회 간부들은 이러한 상생조례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결같이 불만을 토로한다. 

구청은 상인 보호는 고사하고, 상인회 대표들을 만나려 하지도 않는단다. 항의도 소용없었고, 구청장이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뀐 뒤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반대로 이마트의 개장이 재래시장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영세상점이나 대리점들의 매출은 절반으로 떨어지고, 시장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면서 식당들에는 손님이 격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설 대목에서도 청과물과 음식점 매출이 뚜렷이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상인들은 “이마트 직원 200명을 먹여 살리는 대신 4000명의 우리 상인 가족들의 생계가 위협받게 됐다”고 말한다. 주변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닌데, “처음에는 가격인하를 통해 고객을 불러 모으고 그래서 재래시장과 그 주변의 상점, 대리점들이 가격 경쟁을 포기하고 나아가 공덕시장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면 가격인상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자 이익도 시장경쟁의 효율성도 발휘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들의 말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맹점, 나아가 한국 경제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신자유주의 때문이자 경제에서 힘의 중심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옮겨갔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다시 국가 쪽으로 힘의 중심을 옮겨야 하고 정부 역할을 키워서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거대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체제로의 전환에 있으며, 이는 국가와 대기업의 유착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장경쟁의 이점 내지 시장효율성을 추구한다는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간 실제로 있었던 일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거대기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경쟁적 시장질서가 대기업 중심의 독점구조로 변화되었다는 데 있다. 

여론매체와 정부의 역할 역시 대기업의 이익에 부응하도록 변형되었다. 따라서 과거와 같이 ‘국가 대 시장’이라고 하는 이분법은 지금과 같은 경제체제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방해한다. 대기업은 시장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 모두로부터 독립해 있고 또 그들을 규제하는 제도적 실체가 되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대기업의 과도한 영향력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 이들에 의해 변형된 국가 관료제와 여론매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대기업의 독점적 영향력으로 인해 파괴된 시장경쟁과 효율성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 중소기업과 소매업체들의 경제적 활력을 복원시키는 일은 단순한 온정적 조치가 아니라 한국경제와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문제라는 것이다. 총선,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들 모두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중소기업과 소자영업자, 노동자와 같은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대표의 문제는 말하지 않는다. 

이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자율적 결사체를 강화할 수 있는 기반 없이, 대기업·정부관료·주류언론의 유착을 제어할 수 있을까? 사회적 힘의 관계를 더 넓게 다원화하는 작업 없이, 정당들이나 정치인들이 무정형의 여론매체 위를 둥둥 떠다니며 공허한 개혁 언술을 남발하는 것으로 과연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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