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촛불 아래 펼쳐보는 한 폭의 그림이 있다.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가 그것이다. 오랫동안 화집의 복제본으로만 감상했는데, 지난해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원본을 확인했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누더기 옷에 거지꼴이고, 아버지는 움푹 팬 두 뺨에 백발이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는 몸을 숙여 두 팔로 아들의 두 어깨를 감싸 안고 있다. 그림에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폭을 양분하자면, 왼편에는 재회하는 부자의 모습이, 오른편에는 이들을 지켜보는 증인들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촛불에 의지해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부분은 바스러질 듯 늙은 아버지의 얼굴과 그 앞에 꿇어앉은 아들의 두 발이다. 아들의 한쪽 발은 신발이 신겨져 있고, 다른 한쪽은 벗겨져 있다. 나는 이 장면에서 두 마음을 헤아려 본다. 아들은 먼 곳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저 왔어요!’라고 외칠 수 없다. 문 밖에서 서성이다가 아버지의 모습과 마주치자 와락 달려들어 무릎 꿇는다. 그는 아버지의 상속을 챙겨 부모 형제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모든 것을 날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오래전 집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왔다. 부랑아 같기도 하고, 죄수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남루한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아들아!’ 부르며 달려가 끌어안는다. 이들의 재회 장면을 그린 것이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이다. 서로를 향해 누가 먼저 달려갔는지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아들의 참회도 아버지의 용서도 이심전심, 사랑 앞에서는 하나가 될 뿐이다.

매년 12월이면 함께하는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 옆에, 올해에는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산’을 펼쳐놓았다. 최근 영화의 전당에서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을 본 여파이다. 영화는 독학으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바탕으로 화풍을 개척한 폴 세잔과 그의 친구 에밀 졸라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한 사람은 그림으로, 또 한 사람은 소설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세상의 부조리와 싸워 빛을 밝힌 우직한 존재들이다. 이들의 출발점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를 만날 수 있듯이, 엑상프로방스에 가면 세잔의 아틀리에와 그의 지난한 고투의 현장인 ‘생트 빅투아르산’을 눈앞에서 경험할 수 있다.

미증유의 국정농단 사태 속에 가을도 겨울도 도둑맞았다. 도둑맞은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과 인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빼앗긴 자존감을 회복해줄 지혜와 위로가 절실하다. 행복은 본능의 영역이다. 나 자신과 가족, 친구들을 위한 따뜻하고 강인한 이야기, ‘탕아 돌아오다’이든, ‘생트 빅투아르산’이든 사랑에 관한 긴 이야기가 간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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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세 살의 카뮈는 ‘티파사에서의 결혼’에 이렇게 썼다.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들판이 캄캄해진다.”

카뮈는 정오라는 시간을 문학사에 새롭게 등재시킨 작가로 통한다. 신들이 내려와 살았다던 지중해안의 고대 페허, 그 위에 내리는 정오의 햇빛, 폭발하는 색채의 꽃들, 꽃들이 뿜어내는 현기증 나는 향기들, 그리고 사방에 펼쳐진 짙푸른 하늘과 바다.

여기에서 정오란 시간적인 의미인 동시에 공간적인 의미로 읽어야 한다. 시공간적인 자연현상인 동시에 감각들의 혼융, 또는 결혼으로 읽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그것을 말해준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알베르 카뮈, <결혼>, 김화영 옮김)

살아가면서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실내에 있다가 정오의 눈부신 햇빛 속으로 나아갈 때, 또는 영화관 로비의 환한 조명 아래에서 휘장을 제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 두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있지만 앞을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눈앞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뮈가 쓴 저 한 문장은 인류가 끊임없이 반복해온 익숙한 한 문장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눈앞을 가려온 낡은 커튼을 시원하게 찢어버리는 칼날 같은 경구가 된다.

카뮈가 스물 세 살 때 쓴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들판이 캄캄해진다”는 문장은 단편소설의 미학 원리인 현현(顯現·Epiphany·이피퍼니)과 맞닿아 있다. 이피퍼니는 프랑스처럼 가톨릭 국가에서 주현절(1월6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기리는 날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신성, 또는 찰나 속에 맞닥뜨리는 영원성을 뜻한다. 이것이 소설에 와서는, 어떤 복잡한 사태 앞에서 주인공이 겪는 극심한 갈등이 해소되는 지점, 혼란을 뚫고 본질과 마주치는 순간을 의미한다.

소설의 주인공 앞에는 언제나 쉽지 않은 길이 놓여 있게 마련이다. 주인공은 이런저런 함정과 우회로를 겪으며 나아가는데, 이때 주어지는 시련과 혼란의 강도에 따라 이피퍼니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혼란의 정점에서 보고야 마는 사태의 진실, 거기에 이피퍼니의 원리가 거울처럼 작동한다.

혁명과 사랑은 완성되는 순간, 변질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에 깃드는 방심이다. 지난가을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토요일마다 광장에 나가 탄핵안을 가결시킨 촛불집회가 끝이 아닌 시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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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겨울이 되었다. 토요일의 삶을 잃어버린 지 한 달 하고도 열흘, 그사이, 가을 산야는 속절없이 불타올랐고, 광장에는 진눈깨비 첫눈이 내렸다. 광장을 다시 찾았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낯모르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촛불을 들고 걸었으며,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어제 정오 수업에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들과 김탁환의 최근 소설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가 있었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장르적으로 ‘소설’로 분류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과 원전 사고를 겪은 구소련권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지역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200명의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 김관홍 민간 잠수사의 탄원서 내용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에 접근해간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소설은 픽션, 곧 지어낸 허구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지어낸다 해도, 현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당해낼 수 없는 경우, 곧 현실이 픽션을 압도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재난 참사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이것은 소설인가’,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이것이 인간인가’ 끊임없이 자문한다. 수많은 밤 이러한 질문들과 맞서며 혼신의 힘으로 써온 것이기에, 학생들의 발표는 뜨겁고, 감동적이다. 그들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온 사건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 한가운데로 육박해 들어오는 경험을 하고, 눈앞에 벌어진 사실 뒤에 은폐된 진실을 직시하고,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주시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절규하는 목소리들을 온몸으로 겪고 온 날 밤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가 추스르듯 촛불 하나 켜놓고 플로베르의 소설을 펼친다. 펠리시테라는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단순한 마음>이다. 단순한 마음이란, 삶에 바치는 소박한 마음, 인간을 대하는 순박한 마음이다. 소설사에서 대가로 추앙받는 플로베르가 말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주인공은 펠리시테라는 프랑스 북부 작은 포구 마을에 사는 가정부이다. 플로베르는 이 여성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녀는 착한 마음씨와 옳은 일에 헌신하는 뜨거운 정신의 소유자일 뿐, 털끝만큼도 사심(私心)을 거느리지 않은 견결한 여성이다. 그녀의 일생을 둘러싸고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음에도 읽어갈수록 인간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경험해서인지 깊은 여운이 남는다.

다시 토요일은 돌아오고, 올곧은 마음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나 가능한 걸까.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물러서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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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를 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 케냐에 있는 나크루 호수에 갔을 때이다. 그곳은 세계 홍학 서식지로 유명했다. 마사이 마라 초원에 사는 뭇 동물들을 만나고 나이로비로 향하던 길이었다.

홍학들이 고즈넉한 호숫가를 띠를 두른 듯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깃털들로 자욱한 호숫가를 걷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호수 저편, 초원 한가운데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코뿔소 가족이었다.

코뿔소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이오네스코의 연극 <코뿔소> 이후 20여년 만이었다. 나크루 호숫가 초원에서 본 코뿔소는 콧등에 한 줄로 뿔이 두 개 솟아난 아프리카 코뿔소였다. 그때까지 나는 뿔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인도 코뿔소인지 구별할 생각도 못했다. 코에 뿔이 나 있으면 다 같은 것이었다.

과천 서울동물원에서 열린 '먹방베스트 10' 행사에서 흰코뿔소가 과일을 먹고 있다. 연합뉴스

아프리카에서 코뿔소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마사이 청년들이 나무를 깎아 만든 코뿔소들을 구해 왔다. 서재 곳곳에 코뿔소들이 서 있다. 어떤 녀석은 뿔이 하나에다 갈색이고, 또 어떤 녀석은 뿔이 두 개에다 희고, 또 검다. 매일 녀석들과 마주하면서도 나는 이오네스코가 연극에 등장시킨 코뿔소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아시아 코뿔소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오네스코는 단지 현실에서는 맞닥트릴 수 없는 야수(野獸)의 순간적인 출몰에 코뿔소를 등장시킨 것뿐이다.

코뿔소 대신 카프카의 <변신>처럼 등껍질이 딱딱한 풍뎅이로 탈바꿈시키거나, 카뮈의 <페스트>처럼 오랑 사람들의 건강(삶)을 파괴시키는 병균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이오네스코는 단편소설로 <코뿔소>를 쓴 뒤, 연극으로 각색해서 무대에 올렸다. 평온하던 일상에 난데없이 코뿔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그 수가 점차 많아져, 그곳 사람들 수와 거의 같아진다. 인간이기를 끝까지 싸워 지킨,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코뿔소란 사람들의 다른 모습인 것. 카프카가 잠자를 풍뎅이로 변신시킨 것처럼, 이오네스코는 단 한 사람을 남기고 모든 사람들을 코뿔소로 집단 탈바꿈시켰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두렵고 소름끼치는 일이다. <코뿔소>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나치와 파시즘, 전쟁과 이산의 고통을 겪은 이오네스코의 부조리한 세계 인식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코뿔소>는 20세기 중반에 발표된 소설이자 부조리극이지만, 코뿔소적인 상황은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깊어가는 가을, 먼 곳에서 도착한 편지처럼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프랑스 전문 극단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온다는 것이다. 시월의 마지막은 연극 <코뿔소>와 함께 보낼 것이다. 이번엔 뿔이 하나인지 둘인지, 흰지 검은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아시아 코뿔소인지 알게 될까. 아무렴, 가을이 깊어간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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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하는 7일 동안, 국내외 작가들과 광화문의 한 숙소에 머물며 대학로를 오갔다. 점심 식사 후에는 국내외 작가 2명이 짝을 지어 독자들 앞에서 대화를 했고, 저녁 에는 자신의 문학작품을 다른 예술 장르로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서울국제작가축제를 통해 다시 확인한 사실은 한 사람의 작가는 하나의 독립된 행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행성을 알아보기 전까지 작동하는 것은 각자의 나라에 대한 선입견과 정체성이다. 시인 T J 제마와 처음으로 인사하면서 그녀의 나라 보츠와나를 상상하고, 소설가 퉁 웨이거와 마주하면서는 익숙한 듯 새로운 대만을 떠올리는 것이다. 콜롬비아, 아프가니스탄, 북아일랜드 등지에서 온 14명의 외국 작가들은 다채로운 상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중 부지불식중에 나를 사로잡곤 했던 작가들은 파리에서 온 알렉시스 베르노와 린다 마리아 바로스, 그리고 금희이다.

한국문학번역원 주최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한 소설가 김숨과 금희가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작가들의 수다' 행사를 함께 하고 있다. 연합뉴스

베르노와 바로스는 파리에서 온 시인들이다. 이들의 국적이 프랑스인데, 지금 나는 이들이 프랑스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파리에서 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베르노는 파리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계속 파리에서 살고 있는 순수 파리지앵이다. 바로스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파리로 건너와 교육을 받았고, 현재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이민자 출신이다. 바로스는 현재 파리 시단(詩壇)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녀는 1981년생의 젊은 시인이지만, 이미 프랑스 최고의 시문학상인 아폴리네르 상을 받았고, 6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베르노는 앙리 미쇼와 앙토냉 아르토를 추종하는 시인이자 영문 번역자로 첫 시집을 출간한 상태이다.

내가 베르노와 바로스를 눈여겨보게 된 것은 이들이 문학예술을 추동시키는 원천인 야생성을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접점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노는 부드러운 음색과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참가 작가들에게 파리지앵의 진면목을 보여주었고, 바로스는 예민한 성정 속에 매우 성실한 태도가 묘하게 공존하는 매혹적인 모습을 선사했다. 나는 바로스를 통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동향인 루마니아 출신의 에밀 시오랑과 미르시아 엘리아데, 외젠 이오네스코를 떠올렸다. 이들은 불가리아의 크리스테바, 아일랜드의 베케트, 러시아의 로맹 가리처럼 태생지를 떠나 파리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이방인들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20세기 파리의 문학예술은 초라했을 것이다.

바로스를 보며 내가 되돌아본 것은 한국 문학의 현주소다. 이번 참가자 중, 중국을 대표한 소설가 금희는 옌볜 출신으로 축제 기간 내내 주로 한국어를 구사했다. 그녀의 존재는 그동안 내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한국 문학의 순혈성, 아니 배타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축제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국 문학에서도 이제 바로스와 금희와 같은 강력한 이방인들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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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지진을 두 번 겪고 나니,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 같다. 멀고 가까움 없이 닥쳐온 지진 공포와 핵 위협에 매일 밤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눈을 감는다. 아침에 일어나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초목을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 일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순간순간 되새긴다. 태어나 겪어본 적 없는 공포와 위협이 삶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다보니, 정작 지금껏 동고동락하며 애면글면 끌어안고 있던 현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하찮아지고, 지나가지 않았음에도 지나가버린 것처럼 망연자실해진다. 체호프가 말했던가. 습관이란 일과 옷과 가구와 식구를 삼키고, 전쟁의 공포까지도 꿀꺽 삼켜버린다고. 예술만이 잃어버린 삶의 감각을 되찾게 해준다고. 예술은 무(無)에서 유(有)를 향한 처절한 작업. 폐허에 피어나는 꽃처럼, 예술은 어떤 형식으로든, 축제처럼, 계속되어야 한다.

경북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한 12일 오후 부산 해운대에 있는 최고 80층짜리 고층 건물이 휘청거리면서 주민들이 불안에 떨며 긴급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연합뉴스

며칠 후면, 전쟁의 포화 속에 의사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작가 모히브 제감을 만난다. 그는 26일부터 7일간 14개국 시인과 작가들이 ‘잊혀진, 잊히지 않는’이라는 주제로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벌이는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해 아프가니스탄의 삶에 대해 한국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체르노빌의 참사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의 역사를 채록한 다큐멘터리 소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처럼, 그 역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포화 속 사람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를 비롯 다양한 글쓰기로 전한다.

한 명의 작가가 쓴 한 편의 소설 작품이 뉴스 미디어를 통해 피상적으로 각인된 그 나라의 피폐한 인상을 깨고 속 깊게 공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모히브 제감과 같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소설가 할레드 호세이니이다. 그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들>을 읽어가다 보면, 폭격과 폭발로 점철된 무시무시한 그곳은 순박한 마음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창공에 힘껏 연을 날리는 소년들이 우정을 나누고 있었고, 초록의 아름다운 초목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환기하게 된다. 호세이니나 제감이 글쓰기로 때로 처절하게, 또 때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우리 앞에 소환하는 진실은 아프가니스탄만의 것이 아니다. 이번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하는 중남미 작가 산티아고 감보아의 콜롬비아도, 릴리 멘도자의 파나마도 있다. 감보아는 슬픈 목소리로 그러나 신랄하게 ‘밤의 기도’를 들려주고, 릴리 멘도자는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목소리로 “미래 따위는 없다, 지금의 연속이다”라고 외친다.

오늘 밤에는 또 어떤 땅울림이 우리를 덮칠 것인가. 무수히 많은 파괴와 균열 속에 ‘잊혀진’, 아니 ‘잊히지 않는’ 것들을 안고 우리를 찾아오는 모히브 제감의 목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친다. “무엇을 잊었는가? 아무것도 잊혀진 건 없다.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아무것도 소홀히 했던 건 없다. 다만 인간다움, 그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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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없고, 어머니 33세 농업, 할아버지 62세 어업, 삼촌 32세 선원, 재산 정도 하, 건우의 행복하지 못할 가정 환경에 많은 걸 묻진 않았다. 건우네 집은 조마이섬 위쪽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것은 50년 전에 발표된 김정한의 단편소설 <모래톱 이야기>의 일단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K중학생 건우의 담임선생님이다. 소설 속에서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으로 묘사되면서 조마이섬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현재 낙동강 하구 을숙도를 가리킨다. 당시 현지인들은 “강 하구에 모래가 밀려 만들어진 조그만 섬”으로 조마이섬이라 불렀다.

조마이섬뿐만이 아니라 건우 할아버지를 부르는 ‘갈밭새 영감’도 이곳의 생태 지리적인 환경 요소를 담고 있다. 그는 갈밭에서 요란하게 우는 새 같은 존재, 조마이섬 사람들의 터를 위협하는 자본가에 맞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 인물이다. 이 소설이 씌어지지 않았다면, 낙동강 하구의 독특한 모래 지형과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아름다운 삶의 언어를 어떻게 기억하고, 쓸 수 있겠는가.

부산으로 터를 옮겨온 이후, 일주일 중 대부분의 낮을 을숙도가 내려다보이는 승학산 기슭 창가에서 보낸다. 창 아래, 강변로 어름이 <모래톱 이야기>의 소년 건우가 나룻배를 타고 조마이섬에서 통학하던 갈대밭 나루터라는데,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숲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문우가 찾아오면, 을숙도 가까이, 강변로를 따라 하구 끝까지 내처 달려가는데, 그 끝은 다대포, 몰운대이다. 모래 포구가 드넓기로, 몰려오는 구름 형상이 비상하기로, 맑은 날 낙조가 황홀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몰운대 한쪽, 숨은 듯 자리 잡은 단골 횟집 할매집 마당가에 앉아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곤 하는데, 엊그제 주말에는 아미산 기슭 다대도서관으로 올라갔다. 몰운대와 다대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내가 다대도서관에 간 것은 진해 출신 소설가 김탁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최근 세월호 참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장편소설 <거짓말이다>를 출간했다. 지난 2년 반 동안 세월호 이야기는 시와 산문, 다큐멘터리로는 상당히 발표되었다. 그러나 소설은 이번 <거짓말이다>가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대도서관은 전국의 수많은 도서관들 중에서도 전망 좋은 열람실로 손꼽힌다. 주말이었으나, 작가를 만나기 위해 초등학생부터 중고생 그리고 백발의 어르신들까지 강연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 어떤 비극적 상황과 절망도 망각의 힘을 이길 수 없다. 망각과 대적하는 유일한 무기는 붓, 곧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는 소설 작품이다.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가 자취 없이 사라진 조마이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금 이곳으로 끊임없이 실어나르듯, 세월호의 소설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낙동강 하구에, <거짓말이다>를 감싸고 있는 다짐이 메아리친다. “뜨겁게 읽고, 차갑게 분노하라.”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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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자리>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한 글들을 산문집으로 출간하곤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주제의 같은 제목이 다시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에세이나 칼럼뿐만이 아니라 소설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글쟁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제에 천착한 브룩스와 워렌 같은 연구자들은,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 해도 평생 쓸 수 있는 주제는 둘 또는 셋이 전부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에게 어른에 대한 화두를 새삼 일깨워준 것은 최근 조용하게 회자되고 있는 성우제의 <딸깍 열어주다>이다. 이 책은 독특한 제목에 우선 눈길이 가고, 그 다음 표지 우측 상단 별처럼 박혀 있는 인물 사진들에 눈길이 멈춘다. 작가가 청소년기부터 인연을 맺어온 스승, 도반들인데, 불문학자 김화영, 황현산, 소설가 김훈 등 몇 분은 나도 지근거리에서 뵈어온 어른들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펼치자마자, 마치 함께 걸으며, 또는 마주 앉아서 추억담을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정겹고, 벅차다.

출처: 경향신문 DB


이국땅에서 새 삶을 개척하는 작가에게 아버지의 정으로 보듬어준 스승, 공부와 세상의 법칙과 가치를 일깨워준 스승, 인간에 대한 예의와 품위를 보여준 스승, 도전과 실천을 견인해준 스승, 성우제가 들려주는 ‘아홉 스승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나도 작가처럼 마음에 품고 있는 스승들과 그들을 향해 쓴 글들이 떠올랐다. 이어 문단의 스승이자 대선배인 박완서, 김윤식 선생님을 생각하며 단편소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동행>을 쓴 것, 대학 은사인 김치수 선생님을 생각하며 <프로방스 가는 길>을 쓴 것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내가 쓴 수많은 글들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기리는 추모의 형식,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호모 나랜스들이다. 리베카 솔닛이 <멀고도 가까운>에서 밝힌 대로, 이야기꾼의 재능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이야기의 힘은 쓰는 이든, 읽는 이든, 기본적으로 감정이입에서 나온다. 페르시아의 젊은 왕비 세헤라자데가 살인마 왕으로부터 천하루 동안 목숨을 연장해간 무기는 이야기다.         

누군들 마음에 품은 스승 한두 분, 가슴 찡한 이야기 한두 편 없으랴. 다만 잊고 지냈을 뿐. 인생은 마라토너의 여정과 같다. 나는 인생길에 누리는 행복의 조건으로 고비마다 함께한 친구, 스승, 또는 어른의 있고 없음을 환기하곤 한다. 성우제가 <딸깍 열어주다>에 초대한 아홉 스승 이야기는 서랍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부치지 못한 편지들, 거기에 깃든 마음의 역사와 삶의 행로를 펼쳐보고 싶도록 부추기는 유쾌한 에너지로 충만하다. 긴긴 여름 끝자락, 폭풍우와 뙤약볕을 견뎌낸 붉은 열매 같은 책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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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구두 한 짝을 손에 들고 맨발로 미친 듯이 뛰었다. 다른 한 짝은 광장 어딘가에 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정문 쪽에서 학생들이 밀집한 광장으로 최루탄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학생들은 사방으로 몸을 날려 뛰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최루탄은 태양빛을 받아 까맣게 보였다. 내 눈에 그것은 새처럼 보였다. 까만 새들은 수십마리씩 떼로 날아와 광장에 떨어졌다. 이웃 학교에서는 한 청년이 그 새에 맞아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그를 애도하는 물결이 학교 안팎,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선뜻 광장으로 나서지 못하고 도서관 창가를 서성이던 나 같은 겁쟁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장은 사방으로 길이 통하는, 자유로운 곳이다. 그러나 그날 나는 광장 한가운데에서 두려움이 목까지 차올라 죽을 것 같았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대치 상황에서 까만 새떼들이 광장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순간 공포로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어디로든 뛰어야 했다. 멈추어 보니 후문 밖이었고, 구두 한 짝이 손에 들려 있었다. 왼쪽으로 가면 신촌, 또 다른 광장이 나왔고, 오른쪽으로 가면 광화문, 세상으로 이어지는 터널이 있었다. 나는 어설픈 패잔병처럼 구두 한 짝을 손에 들고 맨발로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터널은 길고, 어두웠다.

그날 이후, 나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무엇인가, 새들처럼, 하늘에서 움직이는 작고 까만 것들을 보면 맥박이 빨라졌고, 어디로 뛸까, 머리를 감싸고 두리번거렸다. 그 증세는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고 광화문에 있는 문예지 기자로 입사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세상에 그럭저럭 적응해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골목길을 느릿느릿 걸어 광화문 네거리로 빠져나오곤 했다. 골목 주점들의 불이 하나둘씩 켜지는 저물녘이면, 퇴근자들 발길만큼이나 가볍게 새들이 가로수 사이로 날아올랐다. 그러다가 그만 나뭇가지를 잘못 짚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새들도 있었다. 어느 날 내 앞에 그런 새가 한 마리 떨어져 죽었다. 그것은 나와는 무관한 듯했지만, 돌이켜보면 내 삶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를 온전히 바라볼 수 없었던 사람이 비단 나만이었을까.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나는 한 마리 새의 죽음을 생각하는 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새의 출발점은 광장이었고, 개인의 훼손된 마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것이 내 생애 첫 소설이자 등단작 <광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제목의 광장은 우리가 그때 불렀던 ‘민주광장’을 뜻했다. 매년 한두 번 모교의 그 광장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다 몇 년 동안 하얗게 잊었다. 까마득한 후배들이 그 광장을 되찾아 주었다. 부끄럽고, 고맙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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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주인공 소년 모모는 평생 양탄자를 팔며 세계를 떠돈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에밀 아자르는 소년의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사람 사이 사랑의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하밀 할아버지는 죽어가면서 니스로 향하는 꿈을 꾼다. 에밀 아자르는 자신의 마지막 소설인 <솔로몬 왕의 고뇌>에서도 주인공의 마지막 행선지로 니스를 지목한다.

‘트럭 테러’가 발생한 프랑스 니스 해변. AFP연합뉴스

니스는 어떤 곳인가. 유럽 여행자라면 한번쯤 꿈꾸는 휴양지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이곳은 북아프리카와 아랍,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흘러들어온 이민자들의 고달픈 삶이 얼룩진 애환의 항구이다. 이들의 신산한 삶과 자유의 꿈은 이곳 출신인 에밀 아자르와 르 클레지오의 소설들에 아로새겨져 있다. 에밀 아자르의 본명은 로만 카제프,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그는 열네 살 때 홀어머니를 따라 폴란드를 거쳐 니스에 정착한 난민 출신이다.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해서 소설을 썼는데,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두 이름으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쿠르상을 두 번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르 클레지오는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다. 그가 스물세 살 때 발표한 첫 소설 <조서>에는 바닷가 언덕의 빈집에 숨어든 아담 폴로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로 세상과 단절된 채, 언덕과 해변(영국인 산책로)을 떠도는 인물로 제시된다. ‘조서(調書)’조사한 사실을 적은 문서이다. 그러나 소설은 마치 폐쇄회로(CC)TV에 찍힌 장면을 기술하듯 아담 폴로라는 청년의 불안한 의식을 파편적으로 따라갈 뿐, 납득할 만한 진실은 밝히지 않는다.

로맹 가리의 자전소설 <새벽의 약속>은 이민자의 열악한 환경에서 아들이 올바르게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헌신한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이다. 어머니는 니스의 아비 없는 러시아 난민 소년에서 정의롭고 당당한 프랑스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성공해야 한다는 다짐을 아들에게 뼛속 깊이 확인시킨다.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들은 어머니의 뜻인 법대에 진학하는 한편, 자신의 꿈인 작가의 업()을 시작했고, 동시에 전쟁에 참전했는가 하면, 이후 세계를 무대로 평생 외교관이자 작가로 살았다.

지난 714일 혁명 기념일 밤의 테러를 기점으로 니스는 잔혹성의 시험대가 되었다. 어디까지가 사람의 영역인가. 아침에 깨어나기가 무섭게, 세계 곳곳에서 청년들이 갈 길을 잃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자폭하고, 파괴한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년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라는 질문이 메아리치는 요즘이다. 르 클레지오나 로맹 가리의 삶과 소설이 아무리 감동적이라 해도, 소설로 아프게 되새겨야 하는 진실은 그들로 족하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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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의 중세 고도(古道) 베로나는 셰익스피어의 연애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 여행자들은 베로나역에 내리면 도심의 아레나(원형극장)를 따라 에르베 광장 근처 줄리엣의 집으로 향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고백했던 이 집 발코니를 소재로 몇 해 전 <레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줄리엣의 발코니’라 불리는 이곳 벽에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메모들이 도배하다시피 빼곡히 붙어 있고, 매일 사랑에 빠진 이들의 편지가 날아든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애틋한 첫사랑의 고백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연들이다. 설레는 첫사랑이든, 쓰라린 실연이든 베로나는 사랑의 성지(聖地). 50년 전 불발된 첫사랑의 약속을 찾아 초로의 여인이 나타나기도 하고, 약혼 여행을 왔다가 헤어지고 이곳에서 미지의 편지들에 답장을 쓰며 머무는 작가 지망생이 등장하기도 한다.

베로나에서 인상적인 곳은 단연 줄리엣의 집이지만, 그보다 은밀하게 내 관심을 끈 곳은 줄리엣의 묘와 아레나 옆 고서점이었다. 줄리엣의 집을 방문하고, 반대편 아레나 길을 따라 기차역이 있는 남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다 보면 사이프러스나무로 에워싼 저택에 이르게 되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이 결혼식을 치른 수도원이다. 이 뜰 한쪽 지하에 줄리엣의 묘가 있다. 묘는 석개(石蓋)가 없는 석관묘이다. 지하는 석굴처럼 서늘하고, 한가운데 관 모양으로 자리잡은 붉은 석묘에는 속이 텅 빈 채, 순결과 변함없는 사랑을 뜻하는 흰 백합 꽃다발이 놓여 있다. 입구에 줄리엣의 묘라고 명기되어 있지만, 이곳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추정지일 뿐이다.

베로나에서 두 번 찾아간 곳은 줄리엣의 발코니도 그녀의 묘도 아닌 아레나 옆 서점이었다. 기차 시간에 맞춰서 역으로 가다가, 돌연 다시 아레나 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고서점은 입구에서부터 허물어질 듯 쌓아놓은 책들로 발 디딜 틈 없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 내가 구한 책은 이 지역 출신 화가들의 화집과 서점 건너편 식당 벽에 모사화로 재현해놓은 미국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화집이었다.

베로나에서 돌아온 지 몇 해가 흘렀다. 올해는 어디로든 떠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긴 여름날 오후, 아레나 옆 헌책방에서 구해온 화집을 펼쳐본다.

내일은 보수동 서점 골목으로 순례를 떠나야겠다. 육이오 동란기 잠시 둥지를 틀었던 화가들의 옛 부산 풍경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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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는 거리와 광장 못지않게 정원과 공원으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내가 처음 공원이라는 공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 몽소 공원에서라는 샹송을 들으면서이다. 옆 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이브 되퇴이유의 음성과 담백한 멜로디에 가본 적 없는 공원의 호수와 벤치, 하늘과 그 위를 날아가는 새들을 한가로이 스케치해보는 것이었다.

몽소 공원이 파리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모른 채, 노래 가사와 시적인 울림에 빠졌다면, 몽수리 공원은 김채원 소설을 읽으면서 꿈꾸게 되었다.

그녀의 <쪽배의 노래> <겨울의 환> <몽수리 공원에 내리는 가을> 등은 소설이 단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이야기 상품이 아니라 언어로 빚은 예술, 그 너머 경지임을 알게 해주었다.

몽소 공원은 파리 도심 샹젤리제 뒤편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고, 몽수리 공원은 파리 남쪽 교외 경계에 있다. 내가 처음 몽수리 공원에 간 것은 파리 첫 체류 시절인 이십대 후반의 어느 늦여름이다. 그곳으로 나를 이끈 것은 김채원의 아름다운 소설뿐만이 아니라, 불문학 전공 시인과 선배 번역자들로부터 날아온 우편엽서 속의 주소지였다. 그들은 엽서 말미에, ‘노르웨이관에서또는 멕시코관에서라고 써서 보냈다.

그곳은 몽수리 공원 건너편에 있는 파리 국제 학생기숙사 캠퍼스(Cite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현지 학생들 사이에서 시테라 불리는 곳이었다. 

시테를 방문하기 전까지 나는 왜 노르웨이관이고, ‘멕시코관인지, 그들은 어떤 형태이고, 어떤 규모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정문은 신전을 방불케 했고, 고목이 우거진 드넓은 정원에 저택(maison, )들이 한 채 한 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노르웨이, 독일, 멕시코, 베트남, 일본, 심지어 인구 2만여 명에 불과한 모나코까지 25개국의 이름들이 저택 앞에서 맞이했다. 건축물들은 자국의 전통과 현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고, 그 나라 학생들이 입주해 있었다. 안타깝게도 거기에 한국관은 없었다. 한국 유학생들이나 단기 체류 연구자들은 동가식서가숙 처지로 이들 나라의 빈방을 빌려 쓰는 형국이었다.

처음 시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현격하게 달랐다. 경탄과 아쉬움, 서글픔. 시테에 꼭 한국관이 있어야 하는 이유란 무엇일까. 그렇다고 없는 채로 있어야 하는 이유란 또 무엇일까. 세월이 흐르고, 파리를 드나들면서, 가끔 몽수리 공원과 시테에 들러 한국관을 짓는다면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곤 했다.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2017년이면, 시테에 26번째 국가관이 등장한다.

이름은 한국관(Maison de la Coree du Sud)이다.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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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 시즌이다. 이번 학기 스무 살 어름의 문학도들과 소설의 다양한 형상을 점검하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한 편의 짧은 소설로 창작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어문학과 학부 전공 수업이지만 한국어문학, 문예창작학, 국문학, 교육학, 철학생명윤리학, 사학, 경영학, 국제관광학까지 다채로운 전공 학생 50명이 참여했다.

이론과 창작실습을 통합한 새로운 형태의 수업을 개설하며, 처음엔 이 많은 인원으로 소설 창작까지 도모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땅을 개간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감행했다.

사람마다 고유한 얼굴 생김새가 있고, 눈빛이 있고, 음색이 있고, 화법이 있듯, 각자 자기만의 문장과 문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스무 살 어름의 문학도들이 처음 소설이라는 것을 쓰려고 할 때 봉착하는 것은 자기만의 특별한 경험(이야기)이 없거나, 매우 빈약하다는 깨달음이다. 이때 내가 제시하는 것이 ‘원체험’이다.

원체험이란 전쟁이나 보릿고개의 극빈, 육친의 죽음, 테러 등과 같은, 자신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닌, 외부에서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이다. 대부분 비극적이고, 말도 안되는 ‘부조리 상황’으로 트라우마를 남긴다.

함정임 동아대교수

나의 경우, 1980년대 대학 시절, 민주화의 상징인 집단의 광장과 거리, 그리고 개인의 밀실인 도서관과 소극장을 오가며 겪었던 공포와 죄의식이 있고, 그보다 더 심층적인 원체험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신산스러운 아픔이 있다.

내가 원체험을 꺼내놓자, 읽고 소비하기에만 치중했던 학생들이 백지 위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종강을 앞두고 모두 각자 한 편씩 소설을 완성했다. 원체험 쓰기는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상처 받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듬어 안아주는 행위와 같다.

소설은 자기 안에 억눌린 자아에게 귀를 기울이고, 숨을 터주는 것부터 출발한다. 차마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드러내놓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소설쓰기의 본질이 구원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원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민의 대상이 된다. 나의 원체험 쓰기로부터 세상의 아픔에 가닿을 수 있다. 소설이란, 때로 연민과 애도, 추모의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무고한 생명들이 무자비하게 희생당하고 있다. 마음이라는 것이 온전히 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기 위해, 이청준의 <자서전을 씁시다>라는 소설 제목처럼, 이 여름 소설 한 편씩 써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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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중국 문화대혁명 이후 찌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허삼관이라는 ‘피 파는(賣血) 사내’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 보여주는데,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허삼관이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요리를 하나씩 만들어주고, 아이들이 맛있게 받아먹는 장면이다. 피를 뽑아 팔아 생계를 꾸리는 가장(家長) 허삼관과 그 가족은 늘 가난에 시달리는 상황. 이 피 파는 사내가 허기진 채 잠자리에 누운 아이들을 위해 깜깜한 허공에 대고 말로 만들어주는 음식은 ‘홍소육(紅燒肉)’이다.

“고기가 익으면 꺼내서 식힌 다음 기름에 한 번 볶아서 간장을 넣고, 오향을 뿌리고, 황주를 살짝 넣고, 다시 물을 넣은 다음 약한 불로 천천히 곤다 이거야. 두 시간 정도 고아서 물이 거의 쫄았을 때쯤…. 자 홍소육이 다 됐습니다.”

허삼관은 아이들의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다(위화, <허삼관 매혈기>, 최용만 옮김, 푸른숲).

영국의 로알드 달은 <맛>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와인 마시는 법의 정석을 보여준다. 위화가 <허삼관 매혈기>로 격동의 중국 현대사와 변두리 삶의 인생담을 울리고 웃기며 질펀하게 들려준다면, 달은 <맛>으로 태연하게 연기하며 사는 사람들의 가면을 ‘내기’라는 극적인 장치를 만들어 통쾌하게 벗겨버린다. “냄새를 맡는 과정은 거의 일 분간 지속되었다. 이윽고 프랏은 눈을 뜨거나 머리를 움직이지 않고 잔을 입으로 내리더니, 내용물의 거의 반을 입에 넣었다. (중략) 포도주를 혀 아래에서 굴리더니 씹었다. 포도주가 빵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로 씹고 있었다.”(로알드 달, <맛>, 정영목 옮김, 강)


위화와 달이 맛을 둘러싼 짠하고 유쾌한 이야기로 독자의 애간장을 녹여준다면, 한국의 한강과 독일의 귄터 그라스는 유년기 특정한 음식 체험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는 트라우마를 드러내면서 치유(씻김)의 제의(祭儀)를 치러준다.

한국 작가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_연합뉴스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육식 거부의 삶을 단행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개를 매달고 동네를 돌고 돌면서 죽이는 과정에 죽어가는 개와 눈을 마주쳤던 기억과 그렇게 잔혹하게 죽여 만든 음식을 먹었던 원체험이 치명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거부와 거식이 변형적인 채식주의자로 그려졌다면, 그라스의 <양철북>은 주인공 오스카의 어머니가 해변에서 보았던 말머리 속에 들끓던 바닷장어와 그것을 잡아와 만든 바닷장어 요리가 뒤틀린 욕망의 매개물로 그로테스크하게 제시된다.

소설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통하는 장르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음식은 소설에서 그저 인물들을 식탁에 모이게 만드는 단발적인 역할에 그쳤다. 21세기 전후, 소설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인물의 욕망을 이끄는 서사의 핵심으로 음식의 비중이 커진 것이다. 유월, 초여름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작가들이 소설 속에 차린 특별한 음식들을 다채롭게 음미하기를 권한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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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낭보를 들었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어본이 영국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한강의 수상 소식은, 가치에 비해 늦기는 했지만, 한국 소설의 존재감과 번역 작업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안겨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상작 <채식주의자>는 3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집이다. 한국문학계에서 소설가가 1년에 문예지에 발표하는 단편소설의 최대치는 4편 정도, 대개는 2편 내외, 중편은 1편 정도이다. 소설가가 쉬지 않고 성실하게 작품을 쓰고 발표해서 한 권의 소설집을 출간하기까지는 3년 내외의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2004년 중편 <채식주의자>를 시작으로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 문예지에 발표됐고, 2007년 한 권으로 출간됐다.

소설은 자본주의에 적합한 속성을 지닌 문학 장르이다. 사상과 예술을 담는 고유한 서사 양식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상품으로서의 영향력이 크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소설, 그러니까 세계 소설 시장에서의 소설이란 대개 장편소설을 지칭한다. 한국 작가들은 그동안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에 치중해왔다. 신인 시절 단편 창작을 통해 문장력을 연마한 뒤, 중편과 장편으로의 확장을 도모하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한류의 흐름 속에 세계 소설 시장을 겨냥해 장편소설이 독려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17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시민이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_ 경향DB

소설가마다 세상을 표현하는 서사 감각과 호흡의 길이가 다르다. 소설가의 개인차뿐만 아니라 언어와 국가적 특성차를 고려해야 한다. 단편 미학에 적합한 소설가와 중편 양식에서 기량이 발휘되는 소설가가 따로 있다. 장편에서도 서사의 호흡과 규모에 따라 경장편과 장편, 대하장편으로 달라진다. 단편 작가로 오정희와 앨리스 먼로, 레이먼드 카버를 들 수 있고, 장편 작가로 천명관과 오르한 파묵, 대하장편 작가로 박경리와 레프 톨스토이 등을 들 수 있다. 중단편과 장편을 고루 운용하는 작가로는 황석영과 성석제 등이 있다.

21세기 인터넷 매체 환경이 보편화되면서 한 인간의 삶을 묵직하게 그려낸 중편 장르는 소멸되는 듯하다가 경장편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이행되고 있다.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비롯, <소년이 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 등은 중편과 경장편 양식을 겸하고 있다. 철학적인 사유 속에 시적인 문장들이 돋보이는 카뮈의 <이방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등이 같은 계열이다.

한강은 시인으로 데뷔해 소설에 집중해왔다. 시적인 감수성과 서정이 잡식의 힘센 소설 장르와 경합을 벌이면서 독특한 긴장과 여운을 창출해왔다.

소설가의 삶이란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지난한 작업의 연속이다. 한 편의 소설이 세상에 떨치는 가치는 현재와 미래, 무한대로 열려 있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출발점으로 그동안 축적해온 다양한 개성의 한국 소설들이 세계 독자와 유쾌하게 만나리라 기대한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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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이 가고, 오월이 와도 숨쉬기가 편치 않다. 최근 한국소설계에 유독 참사와 재앙, 애도의 서사가 많이 생산되는 이유를 묻는 일은 무의미하다.

김애란의 단편 ‘물속 골리앗’은 이렇게 시작한다.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비행운>, 창비) 이 소설은 철거의 폭력과 공포에 내몰린 재개발 공간과 한 달째 쏟아지는 폭우 상황에 고립된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애란의 또 다른 단편 ‘하루의 축’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기옥씨는 입을 크게 벌려 과자를 반쯤 베어 물었다. 처음에는 ‘아유 달어’ 하고 살짝 몸서리쳤지만, 곧 프랑스 전통 과자의 그윽하고 깊은 단맛, 부드럽고 바삭한 식감을 조심스레 음미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기옥씨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 기옥씨는 왠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지막하게 웅얼거렸다. ‘왜 이렇게 단가… 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비행운>, 창비)

김애란 작가 _경향DB

너무 달콤해서 소설의 화자 기옥씨를 몸서리치게 만든 것은 프랑스 전통 과자 마카롱이다. 기옥씨는 누구인가? 공항의 일용직 잡부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신산한 삶에 처해 있다. 이런 기옥씨의 일터에 누군가 ‘스무 가지가 넘는 색깔의 신선한 마카롱’을 놓고 간 것이다. 한 입 베어 문 마카롱은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기옥씨의 고달픔을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달콤하다. 기옥씨로서는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상할 수 없는 맛이다. 넋을 쏙 빼가듯 기옥씨의 미각을 사로잡은 달콤함은 독자에게 전달되면서 처절함으로, 이어 처연함으로 바뀐다.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김애란이라는 젊은 작가의 문장, 문장 속에 담긴 의식, 의식 속에 새겨진 세계(작품)을 엿보면 된다. 그녀가 호출해낸 인물들의 존재 방식은 2010년대 전후 한국 사회의 민낯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작가란, 그저 재미를 추구하는 오락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의 맥락 속에 인간의 존재론적인 질문과 흘러가는 시간에 맞서는 예술의 의미를 소설을 통해 던지는 존재이다. 뭇사람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어긋나고 응어리진 현실을 풀어주고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작가이고, 소설이다.

작가에게는 영매(靈媒)의 역할이, 소설에는 치유의 기능이 내재되어 있다. 여름의 문턱에서, 안부를 묻듯, 김애란의 소설 한자락 건네본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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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창작을 배운다고요? 네, 배웁니다!’ 이것은 프랑스 언론 매체 ‘뤼마니테(L’Humanite)’의 기사 제목이다. 필자는 ‘세계의 문예창작 현황’이라는 주제 아래 지난 주말 개최된 학술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던 중, 2012년 이후 프랑스의 대학에서 문학창작 전공을 개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취업률을 잣대로 2010년대를 기점으로 축소, 통합, 폐과의 수순을 밟고 있는 한국 문예창작학과의 흐름과는 대비되는 형국이어서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2013년 파리8대학에까지 개설되면서 문예창작 전공을 개설한 대학은 현재 4곳으로 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창작보다는 작품 분석과 토론에 치중해왔던 프랑스 대학 교육 전통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학창작을 배운다고요? 네, 배웁니다!’는 프랑스 대학에서 처음으로 문예창작 전공 졸업생이 배출된 시점에 맞춰 게재됐다(뤼마니테, 2014·6·25). 앞서 문학예술 전문 방송인 프랑스 퀼트르에서 문예창작 전공자들의 인터뷰를 연속 진행했다. 뤼마니테는 문학창작을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겨온 회의적 관점에도 이 전공을 찾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미국 소설을 즐겨 읽는 프랑스의 젊은 독자들을 통해 이유를 제시했다. 그들이 존경하는 미국 소설가들이 대학 문학창작학과에서 다각도로 글쓰기를 연마한 것과 그들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소설가

현대문학사의 선구자들인 플로베르와 보들레르를 비롯해 20세기 문학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프루스트, 사르트르, 카뮈 등은 프랑스 문학에 거점을 두고 있다. 이들은 10대 시절부터 문학 환경 속에 살면서 읽기와 쓰기, 발표를 지속해왔다. 반면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다민족 이주민 공동체인 미국의 경우, 대학에 문예창작 전공을 개설해 소설가를 배출해왔다. 레이먼드 카버, 줌파 라히리, 조너선 사프란 포어 등 미국을 넘어 세계 독자와 소통하는 소설가들이 수혜자들이다. 우리의 경우, 문예창작학과 역사가 60년(중앙대)이 넘고, 이문구, 오정희를 비롯해 편혜영, 이기호까지 많은 작가들이 문예창작 전공자들이다. 또한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조이스 캐럴 오츠, 피에르 바야르, 한강 같은 현역 소설가들이 대학에서 문예창작 강좌를 이끌고 있다.

한 편의 소설은 ‘모나리자’와 같은 예술작품이기도 하고, 스마트폰 같은 상품이기도 하다. 파급효과가 크고 빠른 대중문화가 한류라는 기관차의 선두를 이끌고 있다면, 문학은 느리지만 깊고 단단한 뿌리를 형성한다. 창작 환경의 지속적인 장려와 배려 없이 후세에게 전할 유산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문학 중심국의 자부심을 내려놓고, 변화하는 21세기 환경에 발맞추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프랑스 대학의 문학창작 전공 개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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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작가에게 모국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새삼 제기한다. 식민지나 이민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를 부모로 두었거나 직접 체험한 작가들의 경우, 언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북대서양의 섬나라 아일랜드는 800년 가까이 잉글랜드의 식민지배를 받은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일랜드 작가들의 경우, 민족어이자 모국어인 게일어가 아닌 식민지 제국 언어인 영어로 글을 써야 했고, 자국 문학사가 아닌 영국 문학사의 일원으로 세계 독자에게 소개되어 왔다.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 등이 그들이다.

조이스는 식민지 조국으로부터 스스로 유배의 길을 택해 문학을 조국으로 삼아 유럽 각국을 전전하며 소설 쓰기에 투신했다. 그 여정에 생산한 <율리시스>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독보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는 식민지 역사로 점철된 슬픈 아일랜드 출신 작가지만, 그들을 삼킨 ‘대영제국’이 국보로 여기는 셰익스피어가 평생 구사한 2만 단어를 능가하는 4만 단어 이상을 <율리시스>에 자유자재로 부려놓음으로써 식민지 언어 사용자로서의 한계를 통쾌하게 벗어던지는 아이로니컬한 장관을 연출했다.

고도를 기다리며_제공


조이스와 같은 아일랜드 출신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프랑스에 귀화해 이중 언어 사용자로 작품 활동을 했다. 기존의 언어관을 전복시키는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롯해 소설과 희곡들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썼고, 그것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또 다른 부조리극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도 베케트처럼 이중 언어 사용자였다. 그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프랑스에서, 청년기를 루마니아에서 보낸 뒤, 프랑스에 귀화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높였다. 이들은 정주(定住)를 거부하며 예술사를 빛낸 20세기의 이방인들이다. 이들의 새로운 일원으로 줌파 라히리를 놓을 수 있다.

줌파 라히리는 인도 벵골 출신의 부모 슬하에서 미 동부에서 성장했고, 영어를 모국어로 교육받았다. 보스턴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처음 소설을 접한 그녀는 이민자 가정의 현실을 진솔하고 담담한 문체로 쓰기 시작했고,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 등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소설 창작과 더불어 르네상스 연구를 20년 넘게 지속해온 줌파 라히리는 현재 로마에서 살고 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첫 책이다. 21편의 산문과 2편의 짧은 소설로 이루어진 얇고 단정한 책은 작가에게 모국어란 무엇인가, 곧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그녀가 작가로서의 명성과 권위를 안겨준 주된 언어인 영어와 모든 것이 영예롭게 주어지는 미국의 삶을 내려놓고, 로마로 옮기면서 밝힌 이유는 단 하나다. ‘창작자에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순간순간 뻗어나가는 봄의 생명력만큼이나 21세기 이방인 줌파 라히리의 작가적 모험이 신선하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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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클러리사 댈러웨이라는 런던 상류층 중년 여성이 화자인데, 울프는 클러리사의 30년 전과 후의 회고담 속에 전쟁 후유증으로 환각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의 이야기를 끼워서 끌고 간다. 그 결과 소설의 중심 화자는 클러리사지만 중간 중간 노출되는 셉티머스의 장면들로 인해 독자는 두 사람의 생애, 두 겹의 서사를 경험하게 된다. 클러리사는 고단한 하루를 보낸 지인들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파티를 여는 것을 본분으로 생각하고 사는 여자이고, 셉티머스는 매 순간 죽음의 유혹에 시달리는 청년이다.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가는 어느 하루, 클러리사는 파티에 집중하고, 셉티머스는 죽음을 단행한다. 울프는 이 둘을 런던이라는 한 공간 속에 대비시킴으로써 이 세상에 만연한 정상과 비정상,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을 위해 울프는 시간과 공간의 독특한 결합 방식을 선보이는데, 시간 몽타주와 공간 몽타주가 그것이다.

몽타주란 프랑스어로 ‘조립하다’ 또는 ‘편집하다’에서 파생된 용어다. 조립과 편집의 몽타주 기술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영화와 모더니즘 소설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다양한 분야의 실험을 거쳐 예술사의 중요한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버지니어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서 시간 몽타주는 대상이 공간 속에서 고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고, 의식이 시간 속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공간 몽타주는 시간이 고정되고, 공간 요소가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 클러리사가 저녁의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꽃을 사러 집을 나서 런던의 거리와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보고,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꽃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의식의 흐름 속에 30년 전의 추억과 현재의 상황이 교차하며 움직이는 것이 시간 몽타주이다. 반면 런던 북쪽 리젠트 공원에서 셉티머스가 공포스러운 환각증으로 헛것을 보며 시달리고 있을 때, 하늘에 제트기가 광고 문구를 뿌리며 날아가는 장면을 그곳과는 다른 장소인 런던 남쪽 빅맨 근처의 집 현관에서 클러리사가 바라보는 것이 공간 몽타주이다.

영화 '댈러웨이 부린'_경향DB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교직으로 진행된다. 2016년 3월은 유난히 시간의 속도와 공간의 층위가 긴밀하게 부각된 시기였다.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 칠일’, 천 단위의 AI(컴퓨터)들이 그만큼의 화살촉이 되어 오직 하나의 점을 향해 일사천리로 작동되는 냉정한 순간을 목격했고, 수천개의 판단이 응집된 그 한 점과 맞서는 한 인간의 고심과 결단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 칠일간, 내가 버지니어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서가에서 다시 꺼내본 것은 바둑돌 하나의 선택 속에 두 겹, 아니 그 이상의 몽타주들이 쏜살같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마지막 1초까지 집중하며 열광한 적이 언제였던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봄날은 왔고, 또 간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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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순간순간 자라나는 봄빛 속에 사진집을 펼쳐놓고 오며가며 바라본다. 더도 덜도 말고, 일기를 쓰듯 하루 한 장, 한 장면과 만난다. 사진 한 장에 누군가의 일생, 어느 골목의 역사, 어느 계절, 어느 하루의 흐름이 담겨 있다. 휴(休), 공(空), 하늘, 옛 동네, 구석, 인생, 산, 항구, 균형, 구름, 기다림, 무수함, 바다, 바위, 부처, 환희, 몸, 사라짐(滅). 이들은 사진집의 지향점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궁극의 리스트’이다.

‘궁극의 리스트’는 움베르토 에코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문학예술을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하면서 명명한 제목이다. <궁극의 리스트>를 위해 에코가 선택한 장면은 190컷, 고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20세기 앤디 워홀의 팝아트까지 아우른다. 에코의 방법론에 따라 다양한 궁극의 리스트가 가능하다. 소설을 매개로 나를 사로잡은 궁극의 리스트를 구성해볼 수 있다.

이 목록은 흥미롭게도 소설보다도 ‘나는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소설에서 나아가 그림, 영화, 공간(여행), 친구, 사랑 등으로 궁극의 리스트를 옮길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누군가의 궁극의 리스트는 그 사람의 삶(내공)과 욕망을 대변한다.

손가락에 담배를 들고 포즈를 취한 움베르토 에코._경향DB

‘휴(休)’에서 시작해서 ‘사라짐(滅)’까지, 18장의 목록으로 구성된 이 사진집 제목은 <요가, 하늘가에서>(눈빛)이다. 사진집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이상, 요가와 시(詩), 자연이 어우러진 향연이다. 서울 가회동, 전주 한옥마을, 서초동 주차장, 북촌 골목과 기와지붕, 경동시장, 전남 무안, 삼성동 코엑스, 삼척항 등. 전국 방방곡곡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틴 프로스트는 요가를 한다. 그 장면을 이스라엘 출신 포토그래퍼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이 흑백과 컬러로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마틴 프로스트는 다시 시로 썼다.

사진의 대상이자 시를 쓴 마틴 프로스트는 프랑스인으로 한국어와 영어, 일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전 파리 7대학 한국어과)이자 요가 교수(연세대)이다. 그녀의 요가와 시는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정신과 지혜의 산물이다. 그녀에 따르면 요가는 육체적 수련이다. 그러나 그것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정신적 혼란의 정지(停止)’이다. 곧 요가는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상업적으로 유행하는 체중 감량을 위해 본성을 해치며 고통스럽게 감행하는 다이어트 요가와 구별된다.

마틴 프로스트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풍경과 풍물에 반해 수시로 지방으로 향했고, 특히 강진의 쪽빛 하늘과 바다를 사랑해 파리에 한국의 청자정원 건립 사업을 도모하는 등 한국의 문화를 프랑스에 알리는 일로 평생을 살아왔다. <요가, 하늘가에서>는 내국인 못지않게, 아니 더 깊이 한국의 자연과 정서를 체득한 그녀의 다정다감하면서도 경이로운 장면들을 담고 있다. 요가와 시, 그리고 사진의 삼중주에 깃든 궁극의 리스트를 새봄의 메시지로 전한다.

“보이는 것 너머에 생각하지 못했던 고요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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