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아시아 전역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20㎞ 떨어진 공단지역에선 무장한 군대가 2주째 파업 중인 의류노동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전체 60만여명에 달하는 캄보디아 의류노동자 중 30만명이 이 파업에 참가해 도저히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최저임금을 두배로 인상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왔다. 캄보디아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최소 5명의 노동자들이 죽었고, 수백여명이 다쳤다.


한데 며칠 뒤 경악스러울 만한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다. 약진통상 등 한국 업체들이 참여하고 있는 캄보디아의류생산자협회가 이 의류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면서 임금이 인상될 경우 공장을 이전하겠다는 협박을 해왔으며, 그것이 이번 무력진압의 큰 원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미 언론 ‘글로벌포스트’는 “캄보디아 군대의 시위 진압에 한국이 배후조종했다”는 제목으로 캄보디아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무력진압에 나선 이유를 심층보도하기도 했다.


캄보디아의류생산자협회는 캄보디아노동조합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려는 등 국내에서 하던 온갖 나쁜 버릇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국내 언론들은 5명의 노동자가 죽었는데도 손실이 얼마니 하는 말만 떠들어댔다. 방글라데시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한국 수출가공공단 노동자들이 사장들의 임금삭감 조치에 항의하며 벌인 시위에 경찰이 발포해 스무살의 여성노동자가 사망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다친 것이다. 업체 중에선 ‘노스페이스’ 브랜드로 잘 알려진 영원무역도 있다.


캄보디아 의류제조업 노동자들이 기념집회에 참석해 기도하고 있다.(출처 :경향DB)


베트남에서도 건설플랜트 노동자 40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베트남 북부의 삼성전자 제2공장 신축현장에서 삼성 용역 경비가 작업시간에 지각한 노동자에게 폭력을 가해,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분노한 것이다. 많은 국내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의 찾아서 아시아 곳곳으로 ‘진출’했다. 또 많은 국내 자본가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임금을 올려달라는 요구를 하면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나가버릴 것이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 때문에 법정최저임금으로 장시간 일하는 많은 한국 노동자들이 생계를 보전하기 어려운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도 침묵하며 일해야 했다. 저임금-장시간 노동 체계가 아무 대안 없이 지속되는 이유다.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베트남에서 일고 있는 아시아 노동자들의 저항은 국내 노동자들과 동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바로 자본이 국경을 넘나들며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지난 주말 보신각 앞에선 2000여명의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캄보디아에 진출한 한국 자본가들과 캄보디아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가 있었다. 국내 이주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모였다. 이들은 고향의 동료 노동자들이 한국 자본의 탐욕과 캄보디아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죽어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어 버스를 전세 내거나 기차를 타고 서울로 모인 것이다.


자본시장의 변화는 더 이상 우리가 ‘시민’으로조차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캄보디아인들은 모국에서나 머나먼 이국땅에서나 온전히 ‘시민’으로 살기 어렵다. 그것은 국내에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내몰려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단결해 기업도, 정부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 스스로 ‘시민’이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거리로, 도심으로 나서고 있다. 그것은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먼 땅에 사는 불우한 이들의 문제로 보는 시혜적인 시선을 넘어 그 뜨거운 요청에 화답해야 하지 않을까? 폭력으로 얼룩진 새해 벽두, 평범한 사람들의 ‘글로벌’을 꿈꿔본다.


홍명교 |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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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디서 본 인터넷 명언 중에 이런 게 있다.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이 말은 요즘 젊은이들에 대해 오랜 시간 학교에서 함께 부대끼며 생각해 온 오찬호씨가 고민을 엮어 내놓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아직 내가 이십대였던 때,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나왔다. 또래 친구들과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한참 이야기할 때 그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88만원 세대>라는 책 제목에 일단 불쾌감을 표시하느라 우리가 장차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고민에 대한 동참도 거절했다. 그들의 말은 이랬다. 나는 88만원 받지 않을 거야! 물론 나는 네가 88만원보다 더 버는 문제와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나는 그렇게 안 살 거’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살게 될 애들은 어떡하느냐고 묻는 것도 무안했다. 어떤 사회현상에도 무조건 “나는…”이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 그 친구들에게 자기가 보는 세상에서 없는 사람은 그냥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친구들을 이기적이라고 금을 긋고 험담하는 것은 쉽지만 무언가 캄캄하고 질퍽하고 어둡고 커다란 그림자가 느껴졌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읽고 보니, 그 그림자는 ‘자기계발’이라는 음모였다.


그때의 내 친구들보다 연령대가 내려간 만큼 이 책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더욱 진화했을 것이다. 과연 정시가 아닌 수시나 지역균형 전형을 통해 대학에 들어온 동급생들을 ‘수시충’ ‘지균충’ 등으로 구분지어 부르는 것은 내가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지은이는 이러한 스산한 풍경들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기계발 강박으로 설명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자기계발은 무조건 돈이다. 미취업자는 취업에 관련된 스펙을, 취업자는 이직이나 승진에 유리한 스펙을 키움으로써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것만이 사회에서 온당하다고 승인하는 자기계발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용산참사로 죽어간 아버지들은 안타깝지만 그러니까 불안정하게 장사하는 직업을 택하지 않도록 젊었을 때 잘 하지 그랬는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 해고되면 다른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 라는 이들의 의문은 악의가 없는 진심이기 때문에 더욱 섬뜩하다. 이들은 남을 차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도 ‘내가 수능을 망쳐서…’라고 혼잣말 같은 변명을 할 뿐 자신에게 가해지는 차별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취업 등으로 당당히 차별할 수 있는 위치로 가게끔 목숨을 건다. 그렇다, 빈곤한 삶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그러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 네가 지금 이렇게 사는 건 다 너 때문이야, 라는 자기계발의 주문을 한계까지 투입받으며 자란 세대에게 다른 선택이 어디 있겠는가? 너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라고 계속 투입받으며 성장한 세대에게서 도대체 이건 틀렸다고 나서는 사람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가장 무서운 것은,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체념’이 습관화된다는 것이다.


차별이 자연스럽게 체념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신분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자기계발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는 인간의 모든 것을 ‘스펙’화하고 계량화한다. 짐짓 우리가 계수할 수 없는 ‘척’하면서 점잖게 구는 연령이나 학력, 성차별을 말아야 한다는 주장마저도 시장의 지배 아래 묵살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취업사이트에 33세 이하, 남, 대졸, 키 178㎝ 이상을 구한다는 구인 공고가 올라오면, 구세대들이나 분개하고 젊은 세대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것도 그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의 스펙 아닌가요? 성매매에 대해서도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살아남으려면 자기가 갖고 있는 인적 자원을 활용해야 하잖아요?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라는 주문을 뒤집지 않는 한, 디스토피아는 점점 생생한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자기계발의 세계에 결코 ‘우리’는 없기 때문이다.


김현진 |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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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모처럼 국민들과 ‘소통’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이미 우리는 그의 기자회견뿐 아니라 질의응답까지 모두 대본대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그가 내놓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국정 방향 및 현 정권의 인식 수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생각한다”고.


통일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반도의 통일은 경제적 재도약의 기회라고, 우리의 대통령께서는 친히 ‘대박’이라는 서민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우리에게 강렬한 지침을 선사하신 것이다. 대통령 가사라대, 통일은 대박이다.


이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현재 한국 경제가 난관에 부딪힌 것은 값싼 노동력이나 천연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경제란 어떤 단위 내에서 벌어지는 생산과 소비의 총합이다. 한국은 현재 생산력에 비해 내수시장의 소비력이 부족한 나라다. 값싼 노동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노동력이 너무 값싸기 때문에, 한국 경제는 성장동력을 잃었다. 사람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고 더 적은 시간 노동함으로써 남는 시간과 돈으로 소비를 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출산율이 높아진다. 그것은 남북통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생방송으로 “통일은 대박”이라고 선언해버린 탓에, 향후 북한 문제는 ‘대박 프레임’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헌화하는 북한 주민들(출처: 경향DB)


진보진영은 이렇게 또 한 번,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중요한 사안에 있어서, 주도권을 빼앗겼다. 우리에게 북한이라는 숙제가 지워져 있음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북한을 저렴한 노동력의 공급처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사실 박근혜 정부와 야권 일반의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진보진영에는 북한의 ‘김씨 왕조’를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 정부로 떠받들고 신성화하는 세력이 있었고, 그들과 맞서기 위해 북한 문제를 아예 처음부터 고려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던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전자는 현재 내란음모죄로 형사소송을, 헌법재판소에서 정당해산심판을 기다리는 상태이며, 후자는 정치적 구심점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다.


결국 한국의 정치세력 중 거의 대부분은 북한을 ‘잡아먹어야 할 돼지’쯤으로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인권 따위 신경 안 쓰고 함부로 부려먹을 수 있는, 빈 땅에 아파트와 빌딩을 짓고 높은 임대료를 받아내거나 건물의 시세차익을 노릴 수 있는, ‘북한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성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그런 대상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더하고 뺄 것 없이, 한국의 근대사 교육에서 가르치는 ‘사악한 일제’가 조선을 바라보던 그 눈빛 그대로이다.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원을 수탈하는 대상, 즉 식민지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한민족, 동포, 안타까운 우리 혈육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분단 7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힘을 잃어가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 정권에서 정당성을 찾는 시각은, 법원의 판결과는 무관하게, 역사적 오류임이 실증된 상태다. 문제는 그 외의 시선,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 남과 북의 거주민 모두에게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정책의 토대가 될 만한 사고방식이 아직 우리에게 개발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매우 통탄할 일이다. 때늦은 후회겠지만, 박 대통령의 입에서 ‘대박’이라는 말이 터져나오기 전에, 이른바 NL과의 싸움을 통해 진보진영은 바로 그것을 만들고 대비했어야 했다.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칼럼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진보적인 시각을 제시할 수는 없다. 문제는 북한을 바라보는 시장주의적 시각을 형성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북한이라는 ‘대박 시장’의 정보로부터 철저히 차단당해야 하는가? 북한 웹사이트는 여전히 접속이 불가능하다. ‘김정은 눈썹 반토막’ 따위가 과연 ‘대박 투자 정보’인가? 눈썹연필 공장이라도 차려야 하나?


통일이 대박이라고 말하려면, 국민들이 스스로 북한을 알게 하라. 공정한 정보와 기회의 제공 없이 시장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대박’이라는 달콤한 환상을 제공하며, 한국인들의 탐욕을 들쑤신 채, 북한에 대한 정보를 틀어쥐고, 새로운 북풍을 기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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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새해가 밝았다. 직장인에게 1월은 연봉협상과 연말정산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매년 이때쯤 연말정산을 준비할 때마다 ‘국세청은 이 모든 정보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개인들에게 다시 서류를 내놓으라고 하는 걸까’ 궁금해지곤 한다. 


국세청에서 제공하는 간소화서비스로 카드명세서, 현금영수증, 기부금영수증, 의료비명세서, 보험내역서 등을 열심히 출력하고, 내역서를 적어 내려가다보면 멈칫, 하는 순간이 종종 생긴다. 고작(?) 더 낸 세금을 돌려받기 위해 나의 1년 지출 내역을 정부에 이렇게 시시콜콜 알려줘도 되는 걸까 싶어서 말이다. 물론 요 며칠 사이 세금이 쓰이는 용도를 보면, 이런 절차를 거쳐서라도 내가 낸 돈을 모두 돌려받고 싶은 심정이긴 하다.


파업을 한 노동자들을 잡겠다고 언론사 건물의 문을 뜯고 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개인적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내역을 압수수색해 들여다보는 공권력의 행태는 점입가경이다. “그런 데 쓰라고 세금 낸 거 아니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아닌 말로 손상된 집기에 대한 손해배상이라도 청구되면, 그 돈도 세금으로 물어줄 거 아닌가. (얼마 전에 ‘국민연금의 국가지급 보장’을 명시하지 않은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정부는 국민을 세입원이나 자판기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심달훈 국세청 법인납세국장이 연말정산 종합안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출처: 연합뉴스)



사실 국가가 세금을 써야 할 곳은 따로 있다. 경기도 마석이 그렇다. 가구전시장 90여개와 공장 400여개가 들어서 있는 마석가구공단에는 이주노동자들과 한센인, 공장주와 상인 등이 거주한다. 그런데 여기의 시설은 분교 1개와 소규모 마트 10여개, 식당 30여개뿐이란다. 병원, 약국 등은 고사하고 세탁소, 목욕탕, 지구대, 녹지공간, 산책로 등 편의시설도 전무하다. 마석은 그래서 행정시스템상으로는 한국일지 몰라도 일종의 자치구역이나 다름없다. 섬 여행가이자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인 강제윤 시인에 따르면 하루에 한 번 여객선이 들고나는 낙도, 통영의 수우도에는 아직도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 할머니인 40여명의 주민들은 응급상황이 아니면 내륙의 병원을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한 달에 한 번 병원선이 오기만을 목빠지게 기다린다. 병원은 고사하고 보건진료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이분들은 병원선만으로도 고맙다고 거듭거듭 감사해한단다. ‘외계의 행성’이 아니라 엄연히 대한민국이고, 2014년 현재 사람들이 엄연히 살고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사실 세금이란 건 이런 낙도에도 의사를 파견하고,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보건진료소를 짓고 제대로 운영되도록 하는 데 쓰여야 하는 게 아닐까. “바로 그런 오지의 의료서비스를 향상시키기 위해 원격진료를 도입하는 것”이란 소리는 하지 마시길.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얼굴 맞대고 손 한 번 잡아주며 약을 건네고 주사를 놔주는 일상적인 의료서비스이지, 작동도 어려운 최신 기기로만 이용할 수 있는 원격진료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지 않는 것이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라면, 국민으로 살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정부가 올해 과징금과 과태료 징수 목표액을 크게 늘렸고, 세제 개편안에 따르면 직장인은 물론 자영업자도 세금 부담이 크게 늘어난다는데…. 공연을 보고 감동받은 만큼 비용을 내는 방식으로 화제를 모았던 후불제 공연처럼, 세금도 정책 따라 후불제로 내면 어떨까. 누군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에 대한 나름의 저항법으로 정부가 바뀌기 전까지 과태료를 내지 않겠다고 하던데, 뭔가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고(故)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긴긴 겨울밤 사랑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어른들에게 집주인은 메밀묵을 쑤어 대접을 한단다. 하고많은 밤참 중에 왜 메밀묵인가 하면, 90% 이상이 물로 되어 있는 메밀묵을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요의가 느껴지기 마련이니 기왕이면 손님 대접도 하고 보리밭에 줄 거름도 얻자는 것이다. 손님들은 저마다 오줌을 눠주는 것으로 묵값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님을 대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보리밭에 줄 거름도 얻어내는 현명한 집주인, 기분좋게 얻어먹은 묵값을 내는 손님들을 닮을 수는 없을까. 사랑방에서 나눠먹는 메밀묵 같은 세금이라면, 얼마든지 낼 용의가 있는데 말이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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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에 따르면, 진보 진영은 국가를 너그러운 부모에, 보수 진영은 엄격한 아버지에 비유하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약자에게 너그러운 복지 정책을 선호하는 반면, 후자는 엄격한 법 집행과 질서에 방점을 둔다는 것이다. 과연 이 이론이 맞는 것인지, 무려 7000명이 넘는 직원들을 직위해제시켜 놓은 후, 최연혜 철도공사 사장은 파업 노동자들을 두고 “회초리를 든 어머니의 찢어지는 마음으로 직위해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철도파업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곰곰이 짚어보면, 박근혜 정부와 국토교통부, 최연혜 사장의 태도는 ‘엄격한 아버지’에서 한참 벗어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엄격한 아버지가 엄격한 것은 자식을 사랑하고 더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반면 국토부의 입김하에 철도공사가 수행하는 법인 분리는 철도공사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만성 적자를 더욱 증가하게 만들 뿐이다. 철도파업에 대응하는 정부는 눈물을 머금고 회초리를 든 엄격한 어머니가 아니다. 소금밥을 먹여가며 아이를 학대하고 죽게 만드는, 친권을 박탈당해 마땅한 아동학대범 어머니인 것이다.


정부는 철도공사의 방만한 운영으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었으므로 경쟁체제를 도입해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왜 철도공사가 적자를 면하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핵심은 기업들이 이용하는 화물열차의 운임이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멘트나 철광석, 석탄 등을 실어나르는 열차는 손익분기점에 턱없이 못 미치는 요금을 받고 있다. 마치 가정용 전기 요금을 올리면서도 대기업에는 산업용 전기를 헐값에 마구 퍼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도민영화 반대하며 운행 나서는 철도노동자(출처 :경향DB)


이렇듯 구조적으로 적자를 강요해놓고는, 많은 수의 신규 승객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서발 KTX를 따로 분리해, 안 그래도 적자를 끌어안고 있는 기존의 철도공사와 경쟁시키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연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적자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흑자가 날 만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따로 떼어준 채, ‘경쟁’을 하라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게다가 정부의 해명과 달리 수서발 KTX는 본질적으로 주식회사다. 이 때문에 정관을 개정하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국내 재벌 및 해외 투기 자본에 조각조각 팔려나갈 수밖에 없다.


정부의 정책을 등에 업은 철도공사는 스스로를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이익은 남에게 주고, 손해는 고스란히 떠안으며, 숙련된 기술자들을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다. 철도는 어차피 경쟁체제를 만들 수 없는, 자연독점이 성립하는 분야라는 것을 우리는 아무 경제학 원론 책이나 펼쳐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 원리’를 존중한다는 그들은 꼭 이럴 때에만 시장 원리를 모른 척한다. 세계적인 운영 능력을 자랑하지만 덩치가 부족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우리의 철도를, 또 한 번 반토막 내려고 덤벼든다. 그것이 바로 수서발 KTX의 법인 분리이며, 철도 민영화의 시작이다.


이러니 ‘엄격한 아버지’가 아니라, ‘학대하는 어머니’ 모델을 우리는 떠올릴 수밖에 없다. 철도공사 사장은 불과 1년 전 자신이 신문 칼럼에서 했던 말을 고스란히 뒤집고 민영화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 정부는 철도공사더러 적자를 해결하라면서 흑자 노선을 빼앗아가고 적자를 더욱 키울 것을 요구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민영화가 아니라는데 정부를 신뢰하지 않느냐’며 국민들을 다그치고, 검찰은 냉큼 철도노조 간부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다. 국민들은 잘해보겠다는데, 노동조합은 회사를 더욱 크고 강하게 만들고 싶다는데, 사장과 정부와 대통령이 나서서 발목을 잡고 있다.


우리가 이러는 사이 중국은 신의주, 평양, 개성을 잇는 고속도로 및 고속철도 개설권을 북한으로부터 따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국 철도의 덩치를 더 키워서 북한을 넘어 세계로 향하게 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의 ‘학대하는 어머니’들은 철도를 자본이 뜯어먹기 좋도록 토막 내버릴 심산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배계급은 늘 그래왔다. 이 나라를 작고 힘없이 끌려가는 노예 상태로 전락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려 들었다. 이번 철도파업은 그런 의미에서 철도노조만의 것이 아니다. ‘학대하는 어머니’를 이겨내기 위한 우리 모두의 싸움인 것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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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육상 계주선수로 뛰었고, 크게 애쓰지 않아도 체력장 등급이 꽤 높게 나왔으며, 3단 뜀틀이나 몸을 뒤틀어 넘는 높이뛰기도 제법 했다. 손목으로 배구공을 서브하는 스킬도 곧잘 익혀 따라하는 편이었다. 내가 예상한 대로 몸을 움직여 어떤 목표를 뛰어넘었을 때의 그 쾌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운동에 소질이 있으며 지금은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제든 내가 운동을 시작하기만 하면 다시 그때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에 차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었으니까.


그런데 땡, 전혀 아니었다. 착각이 깨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회사 체육대회 날 이어달리기 순서였다. ‘보란 듯이 빨리 들어오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자신있게 뛰기 시작했는데 어라?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젖 먹은 힘까지 짜내어 뛰어도 내가 앞서나가고 있지 않았다. 여자들끼리 뛰는 중이었는데도 생각과 달리 격차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심지어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다리가 후들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뛴 직후부터 꽤 오랫동안 온몸이 쑤시고 허벅지가 당기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사진제공: <허리베개 다이어트> (후쿠츠지 도시키 저, 시소북스)(출처: 경향DB)


그때 깨달았다. 학창 시절의 내가 운동신경은 좀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간단한 달리기마저 힘들어할 정도로 기초 체력이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과 등산 갔을 때 나 혼자 헉헉거리며 뒤로 처졌던 건 전날 마신 술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재미, 피구, 얼음땡 등 몸으로 하는 모든 운동과 놀이를 즐기던 초등학생이었지만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운동은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전형적인 여중·여고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왔기 때문이다.


남자 중·고등학교 운동장은 쉬는 시간마다 몰려나가 농구, 축구 등을 하며 뛰어다니는 학생들로 가득하다던데, 여자 고등학교는 전혀 다르다. 여고의 운동장은 일단 크지도 않을뿐더러 체육 시간을 제외하면 한산하기 그지없다. 


여고생들은 매점을 갈 때와 급식을 먹으러 갈 때 외에는 절대 뛰지 않는다.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쿠션을 껴안고, 슬리퍼를 끌고 다니면서, 친구와 팔짱을 끼고 어슬렁어슬렁 복도와 운동장을 거니는 것이 활동에 속한다. 가히 숨쉬기만이 운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엉덩이 무거운 여고생들에게 체육 시간은 어떻게든 뛰지 않을 핑계를 만들어야 하는 시간인 동시에 잘하는 몇몇 아이들을 구경하면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시간이었다. 


실제로 한국 여성의 대다수는 청소년기에 운동하는 습관을 전혀 만들지 못하므로 제대로 할 줄 아는 운동이 거의 없고, 운동이 충분히 즐거운 것이며, 자기 몸에 맞는 종류를 찾아 평생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 많은 여성들은 운동을 체력이나 건강 관리 대신 수많은 다이어트법 중 하나로 생각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른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줄넘기, 훌라후프, 덤벨 등 저비용 방법은 물론이고 ‘끊어놓으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다니겠지’란 얄팍한 계산으로 시작한 수영, 요가, 헬스 등도 무엇 하나 3개월 이상 지속한 적이 없다. 점심 먹고 배드민턴을 치려는 시도마저 흐지부지되자 실낱같던 의지도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운전을 시작해 출퇴근길의 알량한 걷기마저 하지 않게 되었다.


‘운동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퇴근길에 운동을 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만사 귀찮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 외에도 운동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생긴다. 봄에는 황사, 여름에는 더위와 장마, 겨울에는 추위에 미세먼지까지 사계절 내내 지속되는 이상기후도 좋은 핑계거리다. 


하지만 여성은 상대적으로 골다공증이나 근육량 부족의 위험이 높은 만큼 억지로라도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잔 근육이 많으면 기초 대사량이 높아서 쉽게 군살이 침범하지 않고, 근육량에 따라 중년이 되어도 살이 찌는 정도가 전혀 다르다고 하니 ‘나잇살’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운동은 필수인 셈이다. 해마다 연말연초가 되면 “이제 운동 좀 해야 하는데…”를 반복하는 나 같은 ‘운동맹’들을 위한 좋은 해법, 어디 없을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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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삼성전자 등 대형 가전업체들이 미국발 ‘블랙 프라이데이’ 역풍을 맞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국 최대 쇼핑시즌이 개막되는 블랙 프라이데이를 맞아 ‘해외직구족’(해외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직접구매하는 소비자들)의 구매 품목이 TV 등 대형 가전제품으로 확대되면서, 이들 제품의 국내 판매가격에 ‘폭리’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해외직구’를 통해 삼성전자 TV를 해외에서 구입하면 국내보다 최대 100만원가량 저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국내 소비자가 봉이냐”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시장 규모와 유통구조의 차이” 때문이라며 애써 국내 소비자 차별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아무리 유통업체가 가격결정을 하는 시스템이라 해도, 지금 같은 가격 차는 과도하다. 국내 소비자를 ‘봉’으로 알기 때문에 국내에서만 이런 비싼 가격으로 팔아치우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걷히지 않는 이유다.


삼성전자 TV 구입하는' 블랙프라이데이 '쇼핑객(출처 :경향DB)


한데 블랙 프라이데이가 아니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몇 년 전부터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비싼 가격이 논란이 되어왔다. 국내가 적게는 8%, 많게는 25%가량 미국보다 비싸다는 사실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런 격차를 ‘국내에만 있는 우수한 서비스와 방문수리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사실일까? 얼마 전 이런 의구심과 불만에 근거를 보태는 연구 보고서가 발표됐다. 노동자운동연구소의 ‘삼성전자의 부당한 AS이익구조, 소비자와 노동조합이 함께 바꾸자’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연 1조7000억원을 소비자의 주머니에서 가져왔다. 그런데 이 금액 중 삼성전자와 직접적인 도급관계에 있는 삼성전자서비스에 지불되는 금액은 6000억원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영업이익’으로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불어 삼성전자서비스 측은 무상수리 기간이 끝난 제품 수리에 별도로 수리비를 받는다. 지난해만 4000억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삼성전자서비스가 벌어들인 매출이 1조원 이상. 삼성전자서비스 사측은 이 중 3300억원만 108개 협력업체, 169개 센터에 돌려보냈다.


삼성전자는 애프터서비스(AS) 이중 도급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로 AS 업무 전체를 위탁했고, 삼성전자서비스는 다시 90% 이상의 수리 업무를 100여개의 도급업체에 위탁했다. AS요금을 삼성전자가 받아 위장도급 형태로 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AS를 총괄하는 삼성전자서비스는 서비스 노동 특성과 노동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도급단가를 책정해 저임금을 구조화했다. 수수료 지급방식도 일반적 임금체계에 맞지 않는 방식을 택해 도급업체가 마음대로 엔지니어 임금을 떼어먹을 수 있도록 했다. 현재 비슷한 업무에 종사하면서도 도급업체 노동자들의 임금은 원청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심지어 임금 책정방식도 일급이나 시급이 아닌 ‘분’급 방식으로 설계해 서비스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비용을 모두 노동자가 부담케 하고 있다. 제품군마다 표준수리시간(S/T)을 임의로 설정해 여기에 분당 225원이라는 임률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분급조차도 제대로 된 산출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동부 사업체노동력통계를 이용한 것인데 샘플 수가 50여개에 불과하다. 통계로서의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보다 훨씬 조사범위가 큰 통계청 경제총조사를 기준으로 하면 분당 281원이 나오는 것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임금 계산, 폭리, 열악한 노동조건이 구조화되고, 30대 젊은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과로로 죽고 노동조합 탄압으로 죽어가기까지 왜 아무런 제재가 취해지지 않았던 것일까?


삼성전자 앞 농성(출처: 경향DB)


무소불위의 권력 삼성공화국을 제어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삼성 자본을 제어하고 바꾸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 노력을 다했지만 자본의 바벨탑은 무너질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이런 바벨탑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체는 헌법이 보장한 ‘노동조합’이다. 삼성전자서비스 엔지니어들은 ‘삼성을 바꾸고 자신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노동조합을 만들었기에 삼성전자의 R급 부품 A급 둔갑, 소비자에 대한 폭리, 살인적 노동조건이 사회에 드러난 것이다. 


이제 소비자들이 삼성 노동자와 함께 이런 잘못된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나서야 하지 않을까? 오는 10일 출범하는 삼성노동인권지킴이에 시선이 끌린다.


홍명교 |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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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나는 군복을 입은 채 전해들었다. 입대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던, 논산훈련소를 거쳐 의정부에 있는 KTA(Katusa Training Academy)에서 훈련받고 있던 때의 일이었다. 몇십 미터 앞에 축소 표적지를 깔아두고 M16A를 쏘아대고 있을 무렵, 훈련소의 교관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DMB가 장착된 스마트폰을 꺼냈고, TV를 틀었으며, 그 속에 등장하는 속보를 나와 다른 훈련병들에게 전달해주었다.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했다고. 우리도 당장 역습을 해야지, ‘의도 파악’은 대체 왜 하고 있느냐고. 그는 중사 계급의 직업 군인이었다.


당시 교육받은 바에 따르면, 만약 그대로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훈련소의 병력은 일단 전부 어딘가로 옮기고,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긴긴 기간을 무조건 현역병으로 군에 복무를 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런 끔찍한 결과를 바라지 않았기에, 하염없이 북한의 ‘의도 파악’을 하며 즉각 보복성 공격을 가하지 않은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 


한·미동맹의 규약에 따라 미군들의 군복을 입고 있던 나는, 전쟁이 나면 이것보다 안전한 옷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편하게 군생활 하러 들어와서, 남들이 전방에서 포탄 맞고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보며, 기껏 한다는 게 나의 보직 걱정이었다는 부끄러움이 찾아온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의 일이었다.


신문 칼럼에 대고 무슨 개인적인 군대 추억을 늘어놓느냐는 불만이 서서히 독자 여러분으로부터 들려오는 듯하다. 그렇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군대 추억담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대한민국 남성 대부분이 공유하는, 말하자면 ‘기억의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설령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무너지고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당분간 대한민국의 군대는 징병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휴전선 이북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중국과의 국경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군대’는 여전히 존속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조금만 더 추억의 페이지를 넘겨보자. 전방에 위치한 미군 2사단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다른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늘 서먹서먹한 나와 달리 내 후임으로 들어온 어린 친구들은 미군들과 금세 잘 지냈고, 심지어 동두천 시내에 있는 목욕탕에도 같이 다녀왔다고 했다. 


그 미군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왜 한국인들은 군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손가락질하고 놀리는 거지? 미국에서는 군인을 보면 모두 고맙다고 하고, 도넛과 커피 등을 공짜로 주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대답했다. 한국은 1987년 이전까지 군인들이 통치하던 나라였거든. 그리고 모든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 가. 그래서 한국인들은 일단 군인들을 조롱하고 낮춰보지. 하지만 실은 군인들을 두려워하는 거야.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그냥 떠오르는 대로 최대한 쉽게 설명했을 뿐이기에, 대충 그 정도 대화를 마친 후 툭툭 털고 일어나 잔업을 하러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군사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는 자신감, 모든 남자들이 다 각자의 군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그 일상성과 하찮음 뒤에는, 아직도 극복되지 않은 군대에 대한 공포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인들을 믿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적극적으로 군대를 통제하고 끌어안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사고치지 않고 북한의 ‘거지떼’가 넘어오는 것을 막아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고, 대선개입 의혹은 국정원을 넘어 군 전체로 번져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추위에 떨며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고, 군 수뇌부 중 일부는 대선개입 의혹을 덮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것이다. 


1987년 이후 25년이 흘렀다. 이제는 더 이상 눈 돌리지 말고,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와, 군대와, 올바름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군대를 통제하는 것을 넘어, 군을 사회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소화해낼 수 있을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오늘의 위기를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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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하나의 테스트(?)가 있다. 일단 종이 한 장을 준비해 펜을 든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서 소중하게 만난 인연, 귀하게 여기는 사람 열 명의 이름을 써본다. 열 명을 다 썼다면 자신이 쓴 이름들을 살펴보고 다음 질문에 몇 개나 대답할 수 있는지 체크해보자. 


당신이 이름을 쓴 사람들 중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당신과 다른 수준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있는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은? 성(性)적 지향성이 다른 사람은? 국적이나 피부색이 다른 사람은? 인권활동가 류은숙의 책 <사람인 까닭에>에 나오는 테스트인데, 내가 동그라미 칠 수 있는 이름은 아무리 후하게 평가해도 1개를 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거나 꾸준히 만나는 사람 중에 소수자는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올해 새로운 일을 맡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기도 했다. 통계상으로는 분명 내가 사는 도시에도 꽤 많은 수의 이주자들이 살고 있다는데, 정작 나는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결혼이주여성이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너희는 택시비도 나라에서 내주니까 막 타고 다니는 거 아니냐. 나라에서 지원 많이 해줘서 좋겠다”며 내내 혼을 내더란다. 처음에는 그런 심한 말을 들으면 집에 와서 엉엉 울었지만, 그 여성은 이제 하도 많이 들어서 아무렇지도 않다며, 웃기까지 했다.


택시기사의 생각과 달리 한국인 엄마와 외국인 아빠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다문화가족 지원정책의 수혜자가 되기 힘들다. “그러게, 왜 못사는 나라 남자랑 결혼하느냐”는 노골적인 비난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다문화가정 사랑의 김장 (출처 :경향DB)


심지어 다문화 배경 청소년을 가르치는 학교의 한 선생님은 “우리가 이 아이들을 잘 교육해야 부모님이 걱정 없이 현장에서 일할 수 있고, 그래야 물건의 불량률이 떨어져서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해 나를 놀라게 했다. 


2006년 남북 대표단 회의가 열렸을 때, 북한은 남한의 인종적 혼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한강에는 단 한 방울의 잉크도 떨어져서는 안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단다. 우리는 아직도 이주민들을 단일민족이라는 한강에 떨어지는 몇 방울의 잉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다문화 배경의 다양한 분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요구사항은 “우리를 특별히 취급할 필요 없다. 일일이 해주지 않아도 된다”였다. 다문화 배경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지역아동센터의 선생님들의 조언도 비슷했다. 다문화 배경 아이들만을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같이 생활하고 노는 와중에 서로의 차이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아이에게 스마트폰 게임을 가르쳐주고 싶으면, 구글 번역기를 돌려 이야기를 나눈단다. 관건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와 관계이지, 방법의 문제는 아니다.


한 인기 미국 드라마에는 입양한 베트남 출신 딸을 좋은 유치원에 보내고 싶은 백인 게이 부부가 나온다. 처음에 떨어질까봐 긴장하던 이 부부는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 ‘소수인종의 아이를 입양한 게이 부모’라는 자신들의 처지가 다양성을 중시하는 유치원 입학 정책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기양양해진 이들은 당연히 붙을 것이라 생각하고 가장 원하는 유치원에 면접을 보러 가지만, 장애를 가진 다인종 레즈비언 커플이 입양한 흑인 아이를 만나 무릎을 꿇는다. 다양성의 차원에서 비교가 안되는 적수를 만난 셈인데, 코미디물인 이 드라마에서는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 정도로 끝났지만, 인상적이었다. 


지역균형·기회균등 선발로 뽑힌 학생을 ‘지균충’(지역균형선발의 약자 ‘지균’에 ‘벌레 충’ 자를 합쳐 폄하하는 단어)이나 ‘기균충’으로 비하하는 왕따 현상이 심각하다는 서울대의 현실과 비교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정희성 시인의 시처럼,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다. 앞의 테스트에서 적은 열 개의 이름 옆에 자신있게 동그라미 표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난다면, 어쩜 우리는 정원의 나무가 아니라 숲속의 나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당신과 나를 존재 그대로 인정할 때 숲이 만들어질 수 있을 테니까.


정지은 | 인천문화재단 직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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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즈음. 천안의 한 시골마을 길가에 낡고 찌그러진 흰색 카니발 차가 검게 그을린 채 발견되었다. 이 마을의 한 할머니가 차 안을 들여다보고 놀라 경찰에 신고했다.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른셋의 젊은 노동자가 차 안에서 연탄불을 피운 채 잠든 것이었다. 그는 삼성전자서비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결혼 전 자신보다 네 살 어린 아내와 자주 데이트를 하던 그 마을, 수백년 된 나무 아래가 그가 생을 마감한 마지막 자리였다. 그의 이름은 최종범. 우리는 이제 그를 ‘열사’라고 부른다. 짧았던 청년의 삶의 끝자락 100여일의 흔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때문이다.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죽어라 일만 했다. 하루에도 14시간씩 점심식사조차 거르며 주말도 없이 일만 했다. 에어컨 등 중수리 전담이었기에 온갖 건물 벽에, 난간에 매달려 목숨을 건 작업을 해야 하는 게 일상이었다. 여름 성수기에 월 400시간씩 피를 짜내며 돈을 벌어도 비수기 9개월은 카드 대출로 연명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처지는 최종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노동자들은 한 달 ‘빡세게’ 일해 먹고살면서 법에 보장된 제 권리조차 요구할 수 없는 현실에서 ‘노예’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노예가 달리 노예인가. 인정할 건 냉정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시장의 그물 안에 갇혀 있으니 우리는 모두 노예다.


故 최종범 노동자 영정들고 행진 (출처 :경향DB)


그런 그가 전국의 1500여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의도치 않았지만 그것은 삼성이라는 거대자본에 만들어진 최초의 대규모 민주노조였다. 대다수 언론이 주목하지 않을 때 그들은 역사를 만들었다. 최종범은 이날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노동조합 창립 출범식 자료집 인증샷과 함께 짧은 글을 올렸다. “우리에게 생긴 힘.”


그는 그 힘을 믿었지만, 법 위에 군림해온 삼성 자본이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권력에 이 힘이 묻히지 않길 바랐다. 유서에 동료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며 전태일 열사를 언급한 것, 그리고 부디 자신의 죽음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난 주말 삼성그룹 본사 앞에는 700여명의 삼성전자서비스 엔지니어들이 모여 동료를 죽음으로 내모는 삼성 자본에 당당하게 맞서 승리하겠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모두가 최종범”이라고 선언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노는 ‘차가운 분노’였다. ‘나’가 아닌 ‘모두’가 되는 선택, 그리고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분노가 그가 품었던 분노였다. 우리는 보통 뜨거운 분노 안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곤 한다. 그런 분노는 쉽게 휘발되기 쉬워 분노의 당사자를 쉽게 제풀에 지치게 만든다.


최종범 열사가 품은 분노 역시 차가운 분노였다. 그는 동료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에 괴로웠고, 자신의 죽음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하는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메시지로 남겼다. 쉽게 휘발되지 않고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불씨 같은 것. 우리는 최종범 열사의 죽음을 부채감이나 무기력감으로 받아들여선 안된다. 그의 꿈에 대해 잊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 꿈의 메시지를 전하고 함께하자고 외쳐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이들의 몫 아니겠는가.


그것은 비단 삼성 제품 불매 운동이나 ‘사회적 책임 경영’ 등의 구호를 호출하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14조원을 마케팅 비용으로 쏟아부으며 도배하는 삼성전자의 ‘광고’들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진면목, 잔혹함과 ‘기업 살인’들을 가려 버리는가. 삼성전자는 사회적 논란이 지속될 때에는 계속 침묵하다가 다시 온갖 거짓말과 미사여구로 진실을 덮어버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때문에 자신을 버리며 삼성의 현실을 알리고자 했던 서른셋 젊은 노동자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그가 품었던 차가운 분노의 형식을 간파해야 한다. 그것은 삼성에서 일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스스로 단결해 싸울 때에만 삼성이 진정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민주노조’에 대한 꿈이다.


오늘은 43년 전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한 날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불씨는 아직도 살아 있다. 43년 전에 남긴 단 한 사람의 불씨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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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대선 패배는 선거 부정 때문이 아니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라 할지라도, 국정원과 기타 조직의 선거 개입이 없었다면 문재인이 이겼을 것이라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17대 대선에 비해 무려 12%나 솟구친 75%의 투표율을 보며 야권 지지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은 개표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것이 ‘잠자던 대학생들의 야권 표’가 아닌 ‘정치에 소외되어 있던 50대 이상의 여당 표’임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기업이라는 단 하나의 조직만을 남겨둔 채 그 나머지를 급속히 파괴했다. 우리는 기업 속에서 사장님과 직원이 되고, 기업 밖에서 소비자와 유권자가 될 뿐이다. 이렇게 불안에 빠진 파편화된 개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사회가 우경화된다는 말과 같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그리고 실용정부까지 한국의 집권 세력은 새로운 경제적 질서에 부합할 만한 새로운 사회적 구성 원리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유지하는 일에만 골몰해왔던 것이다. 18대 대선의 결과는 바로 그 일관된 정책 방향이 낳은 당연한 업보에 가깝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권력기관들의 선거개입은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심각하게 망가뜨리고 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국정원 직원들은 수백여개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아이디와 게시물을 삭제하는 식으로 증거를 은폐했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온라인상에서 여론을 ‘형성’하려 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최대한 꼬리를 자르고 말을 바꾸고 증거를 없애가며, 국민들의 관심이 멀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듯하다. 게다가 이 모든 난국이 진행되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끝없는 해외 순방길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성명서 관련 질문에 답하는 문재인의원 (출처 :경향DB)


그렇다면 현재 야권은, 2004년의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그랬듯이,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를 탄핵소추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대답은 부정적이다. 민주당은 박근혜를 탄핵해 그 권한을 정지시키고, 현재의 대선개입 문제를 검찰과 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가 판단하도록 사태를 이끌어갈 수 없다. 이것은 비단 그들이 무능해서뿐만이 아니라, 대통령을 탄핵소추할 수 있는 요건이 충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2004년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대통령 노무현은 그해 있을 총선을 앞두고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거나,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등, 선거법 위반의 혐의가 있는 발언들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내놓았다. 바로 그 발언들을 두고 선거관리위원회는 노무현이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판정을 내놓았고, 그로 인해 대통령 탄핵소추가 가능해졌다.


반면 지금은 그와 많이 다르다. 마치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직접 내렸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박근혜가 국정원 및 기타 조직을 이용해 선거에 개입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다.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높은 자리에서 혜택을 받을 사람이 직접 그 과정에 참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묘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 박근혜 캠프를 불법적으로 도청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박근혜 본인이 그런 식으로 선거법을 어겼다고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박근혜를 탄핵할 수 없다. 그가 직접적으로 선거에 불법 개입했음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직도 진행 중인 국정원 여론 개입 사건에 대한 확실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또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바로 그 ‘시민사회’ 자체가 거의 형해화되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마땅한 정치적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조직과 ‘실세’들이 알아서 충성하고 있는 가운데, 해외 순방이나 다니는 대통령을 어떻게 다시 정치의 현장으로 불러낼 것인가. 당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형해화되어 가는 ‘시민사회’를 재구성해, 정치가 단지 이권 다툼이 아닌 민주적 절차와 사회적 당위의 문제로 돌아오게 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노정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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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신문반·민속반 등 특활반을 이끄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탈춤·민요·노래·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 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교사, 자기 자리 청소 잘하는 교사….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 이후 문교부가 일선 교육청에 내려보낸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고 한다. 법외노조라는 길을 걷게 된 전교조의 현재 상황을 떠올리며 읽고 있자니, 두 가지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첫 풍경은 검찰 포토라인에 선 3선 현직 교육감의 모습이다. 교육청 직원들로부터 금품을 받고 각종 인사에 부정 개입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정을 드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해당 교육감은 검찰의 공소 사실을 모두 부인했고,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압수수색을 당하고 법정에 서는 와중에도 산하기관 직원 등에게 강연한 후 강사료를 받았다는 불미스러운 얘기도 들린다. 검찰은 학교 공사비 부풀리기 의혹에 대한 수사에도 착수한 상태다. 인사·뇌물비리 수사로 거의 6개월이 지나갔는데 수사가 끝나기는커녕 또 다른 수사를 받고 있으니 말 그대로 ‘검찰 수사로 시작해 수사로 끝나는’ 해인 셈이다. 지역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을 열고 해당 교육감의 사퇴와 구속 수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전교조 교사들 플래카드 시위 (경향DB)

그런데 이 모든 상황에도 교육부는 전국 16개 시·도 교육청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3년 시·도 교육청 평가’에서 이 도시의 교육청을 2위로 선정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평가 자체가 교육부 추진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는 교육청에 높은 점수를 주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이 평가 결과에 따라 1000억원 안팎의 특별교부금이 차등 배분된다고 한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제기된 비리 의혹이 아직 소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교부금이 과연 적재적소에 쓰일까 걱정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풍경은 교단에 서서 울먹이는 선생님과 훌쩍이는 아이들로 가득한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 교실이다. 울음을 참으며 마지막 인사를 하는 담임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을 잡아끌며 “이제 그만 됐다”며 나가자는 교감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학교를 떠났다. 고작 아홉 살,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는 졸지에 담임 선생님이 사라진 초유의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선생님은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했지만 함부로 물어봐서는 안됐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날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소곤거리며 선생님댁과 친구네에 번갈아 모였다가 전화기를 붙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 반은 학생 모두가 참여해 학급문집을 만들고, 다함께 노래를 부르는 신나고 즐거운 반이었다. 선생님은 늘 “누가 제일 잘했다”는 칭찬 대신 “모두 잘했다”는 칭찬을 잊지 않았다. 가장 공부 잘하는 아이를 지명해 반장으로 뽑는 대신 아이들을 불러 정견 발표를 한 후 투표로 반장을 선출했고, 공부를 잘하거나 집이 잘사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을 존중해 주셨다. 칭찬을 독차지하던 우등생들이 입을 삐죽거릴 정도로. 선생님은 전교조 조합원이었고, 단지 그 이유로 강제해직됐다. 1989년, 역사가 전교조 창립을 기록하던 그 해에 우리는 젊은 울보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그 울보 선생님은 바로 노미화 선생님이다. 감히 말하지만 노미화 선생님을 만난 건 내 학창 시절의 행운이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노미화 선생님처럼 열정 가득한 선생님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곳곳에서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 듯한 풍경이 보인다. 하지만 절망할 때는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20여년 전의 나처럼 선생님을 강제로 뺏기고 우는 아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앞서 그린 두 가지 풍경 중 어떤 풍경도 반복되지 않도록 모두의 노력과 응원이 필요한 때다. ‘교사도 학교가 두려운’ 이 시대에, 교사들의 손마저 놓아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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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정부가 이른바 ‘셧다운’에 돌입한 것은 지난 1일의 일이다. 이미 충분히 국내에도 보도되고 또 소개된 사건이지만 다시 한번 그 전모를 살펴보자. 오바마 대통령이 도입한 미국 건강보험 개혁안인 이른바 ‘오바마케어’(ACA)를 두고 공화당 강경파가 하원에서 반발했다. 상원은 민주당, 하원은 공화당이 우세한 탓에 하원에서 요구하는 법안 수정을 상원은 계속 거절했고, 대통령 또한 ‘오바마케어’를 무위로 돌리기 위한 공화당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공화당 강경파는 버티기 끝에 연방정부의 예산안을 10월1일까지도 통과시키지 않았고, 그리하여 미 연방정부 소속 공무원들은 본의 아닌 무급휴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의회와 정부가 첨예하게 대립한 결과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이 사건을 두고 ‘민주주의의 실패’ 등을 운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는 사태를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미 연방정부가 개점휴업 상태에 돌입하게 된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망가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너무 잘 작동해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방정부 폐쇄(셧다운) 첫날 우체국 (출처 :AP연합)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 영국 의회에서 웅변했던 원칙을 떠올려보자. ‘대표 없는 곳에 세금 또한 없다.’ 정답이다. 국민의 대표가 모여서 합의하에 세금을 걷고, 그것을 행정부에 넘기는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입법부다. 국회는 단지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거나 토를 잡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정부를 향해 돈자루를 쥐고, 자신들이 만든 법에 따라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을 행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국민의 대표다. 대표 없는 곳에는 세금도 없고, 세금 없는 곳에는 예산도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미 공화당 강경파를 두둔하거나 옹호하고 있지 않다. 다만, 정부가 문을 닫고 국립공원부터 백신 개발까지 온갖 중요한 연방정부의 사업들이 멈춰버렸음에도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궁극적으로는 법치주의의 원리를 곧이곧대로 행하고 있는 미국식 정치에 어떤 의미에서 감탄하고 있을 따름이다.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연방정부는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월급을 줄 수 없다. 월급을 줄 수 없으니 당연히 연방정부는 피고용인들을 일터로 억지로 불러내지도 못한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구분이 희미하고 그저 ‘나랏일’로 뭉뚱그리는 한국식 정서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장 국정이 마비되게 생겼는데 월급 좀 밀리는 게 대수인가? 하지만 법치주의의 원리를 놓고 보면, 월급을 주지 못하는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이 옳다. 공무원들 역시 월급 받는 만큼 일하기로 계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화당 강경파는 무모한 정치적 도박을 저질러가며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이곳과 저곳의 문화적, 정서적, 정치적 차이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제국을 운영하면서 만든 그 옛날의 법전에도 명시되어 있는,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근본적인 약속이 없다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모두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자. 지금도 정부는 법치주의를 내세워 힘 없는 사람들에게 법과 질서를 지키라고 강요하지만, 과연 자신들 스스로는 약속을 지키는가? 힘 없는 서민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행정부와 관료들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와의 약속마저도 헌신짝처럼 여기기 일쑤다. 이번 국정감사에 대해 기대감을 품지 못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 사회이므로, ‘높으신 분’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아니면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그만인 것이다.


다시만난 김용판과 권은희 (출처 :경향DB)


한국의 법치주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하향식 법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정부나 국회의원, 혹은 대통령의 공약 뒤집기에 그저 손가락질이나 할 수밖에 없지만, 국가는 국민들이 ‘폴리스라인’ 같은 사소한 약속을 어기면 가혹한 응징을 한다. 우리 스스로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 꾸준히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팍타 순트 세르반다’가 모두의 상식이 되어야만, 우리도 그들을 ‘셧다운’시킬 수 있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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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이 있다. 내게는 헌책방이 그랬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난 일요일,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헌책방 거리를 순례하곤 했다. 마지막 코스인 단골 서점에 들어서면 아버지와 나는 각자의 구역으로 흩어졌다. 난로 위에 주전자가 놓여 있는 그 서점은 늘 따뜻했다. 내가 좋아하는 구역은 책이 양쪽으로 쌓여 있는 통로의 구석이었다. 체구가 작은 어린이가 들어가기에 맞춤한 자리는 아늑했다. 이 책, 저 책을 들춰보며 사달라고 할 책을 고르다가 읽고 싶은 책을 손에 들고 그 자리에 파묻히던 순간은 평온 그 자체였다. 헌책 냄새만 맡아도 마음이 편해지는 건 바로 그때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발을 디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교보문고에는 천장에 거울 같은 것이 가득 매달려 있었고 그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책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 막대 거울 하나하나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헌책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흥분과 경외감에 그 넓은 서점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 청계천6가 평화시장 중고서점(헌책방) 거리 (출처 :경향DB)

대학로의 소극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새로웠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서 어떻게 공연을 하지? 연극이 시작되자 바로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도, 소품으로 이리저리 바꿔가며 사용하는 좁은 공간도 신기했다. 


방송국 세트장을 처음 본 날은 어떤가? 화면에서 화려하기만 한 쇼의 녹화장은 실제로는 조악해 보이는 소품 투성이였다. 세트 촬영을 아는 것과 직접 그 공간을 보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쇼의 주인공처럼 보이던 가수들도 카메라의 줌인 없이는 우리와 다르지 않고 평범했다.


공간뿐만이 아니다. 화가 나혜석이 일제 식민지 시절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는 충격에 가까웠다. 기차를 타고 만주와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까지 여행이 가능했다니! 서울~부산에서 멈춰 있는 내 머릿속의 국경은 물론이고, 국경을 넘나들지 못하는 상상력의 한계가 부끄럽기만 했다.


어떤 것들은 한 번 접한 것만으로도 두 번 다시 잊지 못하게 된다. 래퍼 에미넴의 표현대로라면 ‘원 샷, 원 오퍼튜니티(one shot, one opportunity)’인데 꼭 비싸고 검증되고 유명한 콘텐츠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가수 루시드 폴은 언젠가 “어떨 때는 집에서 아주 거칠게 녹음한 초벌 녹음의 감동을, 이후에 최고의 연주자들과 녹음기사, 일류의 녹음실에서 아무리 다시 녹음해도 재현할 수 없음을 너무나 많이 경험”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말 그대로 찰나의 그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고 경험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을 바꾸는 순간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누가, 언제 그 순간을 경험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일 뿐.


일례로 내가 자란 도시에는 시립미술관이 없다. 버스 노선도에도, 길거리 표지판에도, 소풍 가는 곳에도 미술관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내게 미술관은 왠지 어렵고 낯선 데다 함부로 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처음 미술관에 가본 것은 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였고, 유료 전시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만약 헌책방처럼 가까이에 자주 드나들 수 있는 미술관이 있었다면, 혹은 내가 다니던 헌책방에 화려한 원서와 그림책이 가득했다면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미술관에서 교육을 한 번이라도 받은 아이들이라면 어떨까? 이 아이들은 미술관을 어려워하는 대신 자기가 물감 칠하며 뒹굴었던 공간, 티셔츠 입고 뛰어다니던 공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려와 “여기가 바로 엄마가 다섯 살 때 낙서하고 놀던 곳이야”라며 이야기해 줄 수도 있을 터이다. 미술관은 물론 좋은 예술작품을 만나는 곳이지만 아기자기한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도 충분히 멋지지 않은가?


내게 헌책방이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미술관은, 혹은 다른 그 어떤 공간이나 시설도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지금껏 어떤 시설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해왔다. 이제 그 공간 안팎에서 삶을 바꾸는 순간이 생길 수 있도록, 추억과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다른 상상력을 발휘할 때가 아닐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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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돼!”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이 남긴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만큼 삼성 자본의 ‘무노조 경영’을 상징하는 지표이다. 삼성 자본은 지금까지도 헌법에 위배되는 이 말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를 쓰고 있고, 대다수 국민들이 노동권을 지키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저해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김포의 제일제당 공장에서는 여성노동자 최저생계비 월 4만5000원에 한참 못미치는 월급 2만원을 받으며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인간 이하의 삶을 더는 견딜 수 없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노조 설립신고를 마치기 무섭게 이 여성노동자들은 조직폭력배들의 난동과 위원장 해고로 열흘 만에 신고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인정을 요구하는 근로자들의 삼성본관 점거농성 (출처 :경향DB)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노동자들의 노력은 고난으로 가득했지만 끊임없이 지속됐다. 1987년 창원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서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의 피 터지는 싸움이 있었다. 이후 삼성SDI, 삼성에스원, 삼성전자에서도 이런 움직임은 계속 있어왔다. 그러나 매번 납치와 감금,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탄압, 협박과 회유로 삼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건설과 인간다운 삶의 꿈을 유예시켜왔다.


그러던 중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에버랜드에서 2011년 7월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복수노조 설립이 가능해지면서 오랫동안 노동조합 설립을 갈망해온 에버랜드의 노동자들이 용기를 갖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역시나 그들에게도 무지막지한 탄압이 이어졌다. 회사 앞에서 노동조합 유인물을 뿌리는 것조차 폭력적으로 저지되는가 하면 각종 소송을 통해 노동자들의 숨통을 죄기도 했고, 달콤한 회유의 유혹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만든 노동자들의 굳은 의지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은 노동조합을 굳건히 지키는 힘이 되고 있다.


이렇게 길을 닦아놓았기에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도 대거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었다. 일군의 삼성 노동자들이 금속노조에 가입해 지회를 설립했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조를 갖고 골리앗 자본과 싸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만사가 단번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측은 여전히 사용자임을 부정하며 교섭을 회피하고 있고,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해선 표적감사를 동원해 개별적인 탄압을 강화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경북 칠곡센터의 한 젊은 노동자가 출근을 준비하다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하루에 15시간, 많을 땐 주 80시간까지 일해 왔으니 어찌 건강하게 일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아직 바꾸어야 할 것은 많다. 게다가 이런 채찍과 동시에 당근도 내밀고 있는데, 지난 9월30일 사측이 발표한 ‘협력사 상생 지원 방안’이 그것이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등으로 근로시간 위반 문제를 해결하고 각종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 그 골자다. 그러나 협력사 노동자들을 위해 지원하겠다는 삼성전자서비스 사측의 말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당당히 교섭에 응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해야 한다.


삼성전자서비스 협력노조 출범 (출처 : 경향DB)


얼마 전 수원에서는 의미 있는 시작을 알리는 토론회가 있었다. 세계 초일류 기업을 자처하면서도 무노조 경영, 불산 누출, 백혈병 반도체 공장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빼앗고 탄압해온 삼성 재벌의 노동권 탄압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애버랜드, 삼성SDI, 삼성중공업, 삼성전자서비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죽어간 백혈병 노동자들과 함께 싸워온 ‘반올림’ 활동가들이 모여 삼성이라는 골리앗 자본에 맞선 아름다운 싸움의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이 바뀌면 한국이 바뀌고, 한국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오는 12월10일 ‘삼성노동인권지킴이(Samsung Labor Watch)’라는 단체를 공식 출범해 한국과 아시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각종 노동탄압에 대해 다양한 시민들의 사회적 연대망을 구축하고 삼성 계열사와 하청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예정이다. 수십여년 지속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싸움은 기어이 고 이병철 회장의 눈에 흙을 퍼부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용기가 필요하다.


홍명교 |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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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모여 앉은 가족과 친척들은 종종 싸우기 마련이었다. 예전에는 명절날 만난 친척들끼리 정치 얘기로 목청을 높이다 경찰서 신세를 지거나 심지어 강력사건을 저지르기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언론들은 선동적인 기사와 헤드라인으로 불을 붙였다. 


가령 2000년 추석, 이제는 전설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1면 헤드라인을 다시 떠올려보자. “추석 분위기가 썰렁하다. 전국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라는 저 유명한 문구로 시작되는,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동아일보, 2000년 9월9일)가 바로 그것이다.


 

‘커피당’ 참가자들이 ‘며느리도 모르는 우리동네 8개 투표 후보 알기’ (출처 : 경향DB)

저렇게 선전과 선동이 담긴 신문을 읽고 고향집에 돌아가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가족’이 앉아 있다. 싸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인터넷이 기존 언론의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한 2000년대 초부터는 사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아버지, 이걸 좀 보시라고요!’라며 신문을 집어던지듯이, 당시에는 크고 무거웠던 컴퓨터와 모니터를 내던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의 명절은 그런 것이었다. ‘민심’이 모이는 날,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 날.


필자는 지역색이 강하지 않은 집안 출신으로, 사실 이렇게 화끈한 명절 풍경은 건너 들은 이야기를 조합한 것이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다. 그러니 만약 내가 이런 ‘정치적 명절’을 무슨 미풍양속처럼 회상한다면, 그것은 마치 영남 출신의 남성인 작가 이문열씨가 시집살이하다 죽은 여성의 입을 빌려 페미니즘을 비판한 소설 <선택>을 쓴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행동일 터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말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절이 조용해지면서 한국 정치도 그 역동성을 상실했다고.


정치가 ‘시끄러웠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당시에는 이른바 ‘지역감정’을 디디고 있긴 했지만 아무튼 개인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으며 그 실체를 유지하고 있는 정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당을 대표할 만한 인물들이 존재했고, 사회적 현안에 대한 그들 각자의 의견과 입장의 차이가 존재했다. 물론 ‘반김대중’ ‘반노무현’ ‘반이회창’ ‘반한나라당’ 등 온갖 ‘정서’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긴 했지만, 이 정당이 아닌 저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건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행동이었다.


오늘날의 모습은 그와 사뭇 다르다. 모든 정당이 입을 모아 중산층과 서민의 세 부담은 늘리지 않으면서 보편적 복지를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민주 정권’이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이에게 뼈저리게 가르쳐준 바, 특히 ‘서민’들이라면 거대 여당 대신 거대 야당을 찍어야 할 뾰족한 이유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교조는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고, 대기업 노동자들에게는 귀족노조라는 야유가 쏟아지지만 늘어가는 비정규직 비율을 줄이기 위한 근본적 대책은 그 누구도 제시하지 않는다. ‘경제’가 일종의 숙명론처럼 여겨지고 있는 판에 ‘정치’의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는 조용할 수가 없다. 정치는 시끄러울 때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공동의 목표를 합의해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0여년간, 특히 당시의 여권이며 오늘날의 야권을 구성하는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선거에서 질까봐 허둥지둥 단일화를 하고, 토론과 합의가 아닌 여론조사에 따라 후보를 정하고, 그나마도 부정 경선 및 결과에 대한 불복으로 얼룩져온 것이 최근의 정치다.


오늘날의 야권은 손님들이 짜장면과 짬뽕을 두고 싸운다고, 모든 메뉴를 짬짜면으로 통일시켜 버린 중국집처럼 보인다. 정치는 선택이며 갈등이고, 그 끝에 얻어지는 화해와 평화다. 


주인이 달력에 직접 쓴 대전 성심관의 메뉴표 (출처 :경향DB)


그러나 여당과 야당의 간극보다 야당 내 세력들의 차이가 오히려 도드라져 보이는 지금, 그 복잡한 내부 사정과 갈등으로 인해 정치는 국민들이 아닌 직업 정치인들만의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부터 조선일보의 검찰총장 몰아내기까지, 이 수많은 정치적 의제가 야권 내의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고 그리하여 추석 차례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지 못했다면, 차라리 시끄러운 파열음을 내며 갈라서는 편이 낫다. 이제,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달라는 말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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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뽀샵(포토샵)’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뽀사시’하게 만드는 기술이 핵심이었다. 그 핵심 기술은 이제 유행이 지났지만, 사진에서 약간의 보정은 필수 과정처럼 정착했다. 포토샵이 일상화되다 보니 어쩌다 마주치는 여권 사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보정 기술을 전혀 쓰지 않은 여권 사진의 내가 실제의 나와 가장 가까운 모습인데도 말이다. 사진뿐만이 아니다. 너무 흔해져 성형했다고 하기도 뭣한 쌍꺼풀 수술처럼 언어에도 ‘뽀샵’ 기술이 일상화된 느낌이다.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는 ‘정명(正名)’은 고사하고, 본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체’가 그 대표적인 예다. 완전체의 사전적 정의는 ‘완전히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완전체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엇인가가 완전히 결여된’ 사람을 지칭한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마음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진지한 대화나 교류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완전체를 이해하기 힘든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 내 의견과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이며 악으로 간주되기까지 하니 말이다. 지난주 열린 국내 최초 동성 결혼식에 인분과 된장을 섞어(심지어 먹어보기까지 한 후에) 투척한 기독교 신자(?)가 대표적인 예다.


 

결혼식장에 난입한 동성결혼 반대론자(출처: 경향DB)



영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외우게 되는 표현인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요 근래 대화를 나누다보면 한국어를 사용 중인데도 “I’m fine, Thank you, And you?”와 같은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종종 느끼곤 한다. 질문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답이 정해져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상대방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거나 원하는 대답과 다르게 말할 경우 가차없이 ‘소통 불가능’의 딱지가 붙는다. 이런 식의 비공식 발급 딱지는 꽤 여러 가지로 늘어났는데 특히 온라인상에서 소수자나 약자들에게 자주 발급된다. 예를 들어 얼굴색이 다른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법체류자’란 딱지를, 운전이 서툰 여성이면 ‘김여사’ 딱지를 붙이고 비난하는 식이다.


<개그콘서트>의 새 코너 ‘편하게 있어’는 어떤가? 이 코너는 직장 상사의 집에서 불편하게 머무는 부하 직원의 모습을 그리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편하게 있으라”고 하면서 구십이 훌쩍 넘은 상사의 아버지가 노구를 이끌고 알탕을 끓여온다거나, 상사의 해외 가족여행 티켓을 주면서 휴가를 다녀오라고 권한다.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편하게 있으라고 땀 흘리며 강권하는 상사의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불편하다. ‘편하게 있어’가 원래 문장의 뜻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는데,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반감은커녕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오용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이런 반응 자체가 이상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편하게 있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고 정말 편하게 앉아 있다가는 눈치 없고 사회생활 할 줄 모른다고 한 소리 들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사실 TV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언어의 불일치는 현실에서도 이미 충분하다.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던 재벌 회장부터 4대강을 녹차라떼로 만들어놓고 ‘녹색성장’을 말하던 정부, 전화를 걸면 대뜸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치는 상담원까지… 정직과 녹색, 그리고 사랑은 이렇게 쓰이라고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지 않은가.



남미 에콰도르 해안 도시의 동네 어부 아저씨들과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를 보고 신이난 덩헌 씨의 아들 한규 (출처: 경향DB)



그냥 웃고 넘어가는 대신 이제부터 나는 내 옆의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모 아니면 도, 맞거나 틀리거나로 서로를 단죄하고 평가하는 질문이 아니다. ‘생전처음 생각해 본다’는 귀여운 표정을 짓게 만드는, 말 그대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질문 말이다. 정혜윤 PD의 이야기를 예로 들자면 이런 식이다. 남쪽 해안의 어부에게 “가장 좋아하는 물고기가 뭐예요?”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이 생선 얼마예요?”를 물어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이리저리 돌려 해석할 필요 없는 날것의 대답을 듣게 될 테다. 누구도 보지 못했을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을 생생히 목격하는 순간을 함께하는 기쁨도 함께.



정지은 | 인천문화재단 직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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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영화 <숨바꼭질>에는 얼굴 없는 사람이 나온다. ‘센트럴캐슬’이란 호화찬란한 이름의 아파트단지에 사는 성공한 가장 성수(손현주)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도무지 그 얼굴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두꺼운 잠바를 입고 헬멧을 눌러쓴 채 고급 아파트 단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정체불명의 사람은 성수 내면의 근원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귀환, 그의 어린 시절로부터 비롯된 어떤 정신적 외상을 돌아보게 한다.


모름지기 대상의 실체를 알 수 없을 때 공포는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성수가 절대 알 리 없는 지방 소도시의 허름하고 낡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영화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어쩌면 이것은 관객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최종적으로 밝혀지는 연쇄 살인마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거꾸로 중산층 가장이 무엇을 공포로 느끼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영화가 갖는 이런 시선마저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임을 냉정하게 인정한다면 그리 성낼 일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사회’가 그들을 ‘바깥’으로 내몰며 ‘괴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 아니겠는가.


8년 전인 2005년 여름, 프랑스 파리 외곽 방리유에서 발생한 대규모 청년 소요의 의미와 원인을 추적한 연구서 <공존의 기술>에서 공저자들은 공화주의를 자랑하는 프랑스 사회가 어느새 방리유의 청년들을 영원한 국외자들, ‘괴물’로 취급해왔음을 드러낸다. 프랑스에 포함돼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권리와 지위에서 배제된, 사회의 주변인·소수자·이방인인 그들을 이러한 포함 혹은 배제의 역설이라는 ‘공존의 기술’로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1년 런던 교외 지역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경찰의 총격으로 숨진 스물아홉 흑인 청년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 사태는 런던 중심가와 주위 도시들로 번져 일주일간 런던과 그 인근을 혼란에 빠뜨렸다. 장기적인 경기침체 속에서 빈곤의 늪에 빠진 청년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불만들이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에너지가 아니라 불만을 느끼는 이들의 파괴적인 폭동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정치의 부재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대안이 아니라 파괴를 낳고 있는 것이다.


폭동진압에 나선 영국 경찰관들이 토트넘에서 불타는 건물 앞에 서 있다. (출처 : 로이터연합)


실은 <숨바꼭질>을 보고 숭례문 방화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언론과 정부는 충격 속에서 문화재에 대해 아끼는 마음과 도심 치안의 강화를 강조했지만, 그 방화범이 도시 외곽의 철거민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도시 바깥에서 건설자본에 의해 살 곳을 빼앗긴 노인은 방화범이 되어 도시의 상징을 불태웠다. 마치 영화 <숨바꼭질> 속의 살인마가 빼앗긴 ‘집’에 대한 박탈감과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강박증적 히스테리로 ‘괴물’이 되었듯이 말이다. 물론 이는 지극히 극단적인 이야기다.


숭례문 방화 현장 검증에서 범인 채모씨가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화된 이후 우리는 삶의 불안정성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안정적인 직장과 주거권을 위해 사회적인 대안을 내놓고 행동하기보다는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뛰어들어야 했다. 사회운동이 불행한 삶의 대안이 되지 못하자 정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는 옷장 안에 숨어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영화는 아이가 어른들처럼 괴물이 되지는 않을까 불안한 예감을 지닌 채 끝난다.


이 땅의 노동자, 영세자영업자에게서 ‘희망’이라고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시대다. 경기침체와 전세대란은 익숙한 현실이 됐고 우리는 좀 더 고삐를 죄어 낮은 임금으로 더 오래 일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사회운동은 점점 몰락하고 있고, 자본의 착취는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숨바꼭질’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선 이들이 있다. 스스로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으로 뭉쳐 싸우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 케이블 비정규직, 다산콜센터, 골든브릿지, 유성기업, 보워터코리아 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도시의 불안은 빼앗긴 자들을 배제하고 바깥으로 내몰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찾고 착취의 세계를 끝낼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사라질 것이다.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시기, 이처럼 스스로 대안을 만들고 희망을 지키는 ‘공존의 기술’을 절박하게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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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허지웅씨가 “국정원 이슈는 문제지만 시국선언은 오버라고 생각”한다고 트위터에 글을 쓴 것은 8월18일 오후 9시24분의 일이었다. 그는 “지금의 촛불도 취미활동 이상의 충분한 당위를 찾을 수 없다”고 따끔한 비판을 내놓았다. 이 발언은 사건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보도를 사건하는 언론들에 의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경향DB)


여기서 우리는 저 발언 속에 몇 가지 전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국정원 이슈가 큰 문제다. 둘째, 그러나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국선언이나 촛불시위 등을 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셋째, 촛불시위는 한낱 취미생활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아니어야 한다. ‘촛불이 취미냐’라는 말이 유독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특히 세 번째 전제에 대해서는 허지웅씨와 그의 비판자들이 모두 확고한 동의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일단 국정원 이슈가 큰 문제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체 왜 국가 정보 기관이 일간베스트나 오늘의유머 같은 웹사이트에서 전직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리플이나 달고 있어야 하는지, 그것이 대북 심리전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심각한 문제다. 우리가 낸 세금이 특정 웹 서버의 저장 용량을 낭비하는 일에 소진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것이 대선 개입을 위한 정치공작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사태가 진척되지 않고 있을까? 대학생, 대학 교수, 기타 다양한 집단 및 개인들이 시국선언을 내놓고 있으며, 특히 최근의 폭염을 뚫고 촛불시위가 열리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는 감방의 여름이 겨울보다 훨씬 힘들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겨울에는 추우니까 다닥다닥 붙어있어도 괜찮고 오히려 서로 의지가 되지만,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짜증을 내고 다투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촛불을 켠 사람들이 좁은 간격으로 모여 앉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지금 벌어지는 촛불시위는 바로 그런 극기훈련의 현장이다.


문제는 그것이 단지 취미생활일 리가 없으며, 그렇게 끝나서도 안 된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놓고 보더라도 국정원 사건은 국가적 스캔들이다. 그런데 왜, 선량한 시민들이 이 무더운 여름날 더불어 숲이 되어 촛불까지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전혀 진전되지 않는가?


생각해보자. 어차피 새누리당과 국정원은 촛불시위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경찰 버스로 막아놓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민주당 또한, 실은 촛불시위에 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이유가 없다. 촛불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그들을 아무리 실망시킨다 한들, 이 더위를 뚫고 촛불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결국 민주당을 찍을 것이다.


(경향DB)


손 안에 들어온 새에게는 모이를 주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몇 차례에 걸친 정치공학적 선거 놀음을 통해 체계적으로 진보정당이 압살된 지금, 현재의 정치적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내부 갈등을 정리하고, 대안적 행보를 보여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촛불 시민’들은 ‘도로 민주당’ 할 텐데.


야당이 야성을 잃은 이유는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가 부른 것은 ‘밥그릇’을 뺏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촛불시위가 취미활동이냐는 말 자체에 분노하지 말고, 그것이 한낱 취미생활 이상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하는 진짜 원인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시라. 원세훈은 국정조사 자체를 우롱하고,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공개해도 직원 얼굴은 일급비밀이라고 우긴다. 이런 상황에서 어벙한 얼굴로 끌려다니며 ‘촛불 시민 여러분, 힘을 내주세요’라고 말하는 그들이야말로 촛불시위를 ‘취미생활’로 전락시키고 있다.


(경향DB)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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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팀장입니다. 고객님께서는 최저 이율로 최고 3000만원까지 30분 이내 통장 입금 가능합니다.” 일명 ‘스팸 문자의 여왕’으로 불리는 김미영 팀장님의 메시지다. 2011년 김미영 팀장이 30대 중반의 남자였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대출 문자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이 분은 1년간 총 100억원 상당의 대출을 중개해 7억7000만원의 이익을 챙겼다고 하는데 이 부당이익보다 현실의 김미영 팀장이 남성이라는 사실에 놀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외로울 때의 특효약으로 김미영 팀장 대신 홈쇼핑을 추천하는 사람도 있다. 약속 없는 주말에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입에 거미줄이 쳐지는 기분이 들 때 홈쇼핑만 한 위로는 없다는 것이다. 훈련받은 쇼호스트 특유의 ‘솔’톤 목소리로 빠르게 반복되는 멘트를, 그 사근사근하고 친절한 말투를 듣고 있다보면 부대끼던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가끔 목소리에 취해 있다가 쓸데없는 물품을 주문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효과는 만점이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괜히 마음이 헛헛할 때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는 거다. 시시한 질문을 한 후 상냥하고 친절한 언니의 목소리를 몇 분간 듣고 있노라면, 잠깐이지만 조금은 위안이 되곤 했다.


상담원의 모습 (경향DB)


이런 얘기를 하면 네가 ‘궁상떠느라’ 그런 거니, 연애를 하라고 하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결혼했거나 아이가 있거나 연애 중이라면 그 사람은 외롭지 않을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결혼이 외로움을 반드시 해소시켜 주지는 않으며 사실 재능, 금전적 성공, 명예, 존경 중 어느 하나도 주관적인 고독감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외로움은 배고픔이나 통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맞다. 우리 모두는 때때로, 혹은 자주 외롭다. 정호승 시인의 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인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터.


하지만 요즘은 외로움마저 외로울 틈이 없다. 자본은 외로움마저 트렌드화하거나 심각한 문제로 바꿔치기한 후 그때그때 다른 해결책을 판매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라는 책에 따르면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직장, 주거, 도덕, 사회 정책을 좌우하면서 세계 대부분의 지역이 만성적인 고립감을 부추기고 심화시키는 생활방식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한다. ‘늙은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젊은애들이 어머님, 어머님 해가며 싹싹하고 친절하게 대해준다’는 이유만으로 100만원짜리 옥장판을 구입하는 할머니 앞에서 “나이가 들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부도덕한 외판원에게 속아 넘어가기 쉽다”는 해석을 늘어놓는 건 주책에 가깝다.



“인간은 원자나 분자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라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은 어떤가? 이야기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있어야 가능한 종류의 것이지만 요즘은 새로운 예외가 생겼다. 바로 대화의 상대가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적 접촉의 대안으로 여성은 애완동물을, 남성은 컴퓨터를 선택하는 경향이 높으며, 타인에게 거부를 당하면 애완동물을 의인화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컴퓨터와 대화하는 프로그램인 채팅로봇 ‘심심이’의 카카오톡(카톡) 친구는 219만명이나 된다.



휴대폰부터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 e메일까지 연락수단이 다양해진 만큼 연락을 끊어버리는 ‘잠수 타기’도 쉬워졌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디지털 계정을 삭제하거나 답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글을 올리거나 사진을 바꿀 때마다 누군가의 댓글과 ‘좋아요’와 멘션과 문자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무엇이든 알려면, 심지어 우리 자신을 알려고 해도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C S 루이스의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김미영 팀장이 아니라.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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