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나는 퍽 한가하다. 어쩌다 닭과 계란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 이맘때 나도 늘 바빴다. 겨울이 오면서 조류인플루엔자(AI)와 구제역이 발생하면 이리저리 한마디 보태러 불려 다니곤 했다. 겨울이 오면 무구한 가축들이 ‘예방적 살처분’의 명분으로 땅속에 묻혔다. 그 장면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어 모자이크 처리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 올해 이런 참화를 겪지 않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살처분 현장에 투입된 요원들의 심리치료를 의무화하라는 권고를 했다. 죽이는 사람들의 고통도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동물 안락사’라는 새로운 죽음의 자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유명한 동물권단체인 ‘케어’의 대표가 구조한 동물들을 몰래 안락사시켜왔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동물보호단체에서 자행된 안락사 사건을 마주한 많은 이들이 경악 중이다. 어차피 먹히기 위해 고기로 길러지는 가축 살처분도 참담하건만 인간의 가족으로 길러졌던 동물들은 오죽할까. 

한 번도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 반려동물을 봐도 별다른 감정이 일지 않는다. 그런 나조차도 경악스럽다. 여러 언론사를 불러놓고 이루어진 구조 활동 장면이 나가면 후원자들이 늘어났다. 그런데 ‘구조쇼’였을 뿐이냐며 후원자들이 대거 이탈하고 있다. 당분간 케어의 박소연 대표에 대한 공분은 계속될 것이고 동물 안락사 문제는 큰 논쟁에 부쳐질 것이다. 사람들은 동물의 권리에 눈뜨기 시작했고, 이를 ‘오버’라고 힐난하지 않는다. 말 못하는 미물이라 하여 함부로 다루어도 된다 여긴다면 약자를 배척해도 된다는 말과 같다. 동물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사람도 귀하게 여기는 사회인 것만은 확신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계절 따라 철새들은 날아왔고, 도시 사람들은 인지를 하지 못하지만 꾸준히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발견되고 있다. 철새 도래지를 품고 있는 고장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그래서 철새가 도래하기 전부터 끊임없는 예찰과 선제적인 예방 조치로 닭과 오리 등 가금류에 바이러스가 옮겨가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왔다.

구제역도 마찬가지다. 발굽 동물들에게 예방접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라고 독려하고, 지자체는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 예방에 예비비를 끌어다 쓰면서까지 사전 예방에 사활을 걸었다. 오늘도 축산업 종사자들 휴대전화에는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 예방에 힘쓰라는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사건이 터지면 그제야 분노를 퍼붓고 질타하지만 지금과 같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축산 종사자와 관계자들은 발이 부르트도록 뛰고 있다.

동물을 기르고 죽이는 건 모두 인간의 일이다. 인간의 문제를 어쩌지 못한다면 비극은 반복된다. 이번 동물 안락사 사건은 박소연이라는 한 개인을 희대의 악녀로 만들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책임질 수 없지만 유행 따라 동물들을 키우고 쉽게 버린 데에 기인한다. 모든 생명을 다 책임지겠다는 것도 인간의 오만이다. 책임질 만큼만 구조했어야 맞다. 생명을 책임지고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강한 책임감을 요구해야 하지만 제도는 여전히 미미하고 노력도 부족하다. 이번에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에서 벌어진 살풍경을 보지 않게 된 건 결국 제도 정비와 인간의 노력이 조응했기 때문이다. 동물 문제는 곧 인간의 문제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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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충청북도에 물난리가 났다. 22년 만에 겪는 최악의 수해였다. 충북도의원 4명은 이 와중에 외유성 유럽 연수를 강행했다. 일행 중 한 명인 김학철 도의원은 비판하는 국민을 두고 “무슨 세월호부터도 그렇고, 국민들이 이상한, 제가 봤을 때는 뭐 레밍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사는, 집단행동하는 설치류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나그네쥐’로 불리는 레밍(lemming)은 개체 수가 늘어나면 집단으로 이동하는 습성을 지녔다. 선두를 따라 직선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절벽을 만나면 그대로 뛰어내려 줄줄이 바다나 호수에 빠져 죽기도 한다. 뚜렷한 주관 없이 맹목적으로 타인의 선택을 따라가는 집단적 편승 효과를 ‘레밍 신드롬’ ‘레밍 효과’라고 부르는 이유다. 김 의원은 국민이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 여론에 편승한다고 폄훼한 것이다. 온 나라의 공분을 산 그는 소속당인 자유한국당에서 제명됐다. 2018년 지방선거에도 출마하지 못했다.

“한국인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그를 따른다. 민주주의는 한국인에게 적합한 제도가 아니다.” 1980년 8월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가 시작될 무렵, 존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 한 말이다. ‘들쥐’를 언급한 까닭에 위컴은 국내에서 ‘레밍’ 발언의 원조로 알려졌다. 그런데 원문을 찾아보면 ‘field mice’라고 나온다. 문자 그대로 들쥐다. 물론 한국민을 깎아내렸다는 의미에선 레밍이나 들쥐나 다를 바 없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표가 17일 페이스북에 “황교안 레밍 신드롬으로 모처럼 한국당이 활기를 되찾아 반갑다”는 글을 올렸다. 황교안 전 총리가 한국당에 입당한 뒤 그를 따르는 ‘친황 그룹’이 형성되자 이를 ‘레밍 신드롬’에 비유한 것이다. 황 전 총리를 무조건 추종하다가 집단 자멸할 수도 있다는 경고음으로 해석됐다. 그는 글이 입방아에 오르자 ‘황교안 레밍 신드롬’이란 대목을 ‘황교안 전 총리 입당’으로 수정했다.

홍 전 대표는 김학철 전 도의원이 레밍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을 때 징계를 지시한 당 대표였다. 발언 당사자는 당에서 쫓아냈으되, 레밍이란 말은 뇌리에 새겨두었던 모양이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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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직장인들이 하루 동안 만나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얼마나 될까. 국가인권위원회는 우리나라 파견용역 비정규직이 346만명 정도 된다고 발표했다. 5명 중 1명은 간접고용 노동자라는 것이다. 아마 이 수치도 최소 규모로 봐야 한다. 통계에 포착되지 않는 간접고용은 더 많을 수 있다. 아침 출근길 아파트 집 앞에서 만나는 경비원은 파견 노동자다. 회사 건물 청소원도 용역 노동자다. 자주 가는 서점의 물류센터 직원도 하청 노동자다. 사무직이라고 해서 상황은 다르지 않다. 병원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수납창구 직원도 파견업체 소속이다. 그야말로 사회 전체가 거대한 비정규직의 바다와 같다.

간접고용 비정규직 실태는 충격적이다. 원청 근속기간 90.3개월, 고용업체 변경 횟수 2.4회,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월평균 급여차 90만원. 산재사고 사망률 7배. 간접고용 노동자의 고용불안과 차별 그리고 위험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차별은 어떨까.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은 법에나 있는 것이다. 동일 유사업무를 수행하는 정규직 임금을 간접고용 노동자가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 비정규직이 차별을 입증하는 것은 녹록지 않다. 심지어 E대형마트는 자사 156개 매장 중 3개를 분리 독립 법인으로 설립하여 법망을 피해가기까지 한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10년 동안 비정규직의 차별 접수는 평균 100건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5분의 1 정도만이 시정되었다. 제도의 실효성이 낮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일터에서의 비가시적인 차별은 헤아릴 수 없다. 부산의 A공장은 회사 셔틀버스 이용 시 협력업체 직원들은 뒷좌석에만 앉도록 공지했다. 경기도 B공장에서는 구내식당과 샤워실은 정규직 다음에나 이용할 수 있다. 심지어 서울의 C통신회사에서는 빌딩 내 카페조차 협력업체 직원들은 이용하지 못한다. 출입증 자체가 해당 층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견업체 소속이라는 이유다.

도대체 정상인 곳이 하나도 없다. 간접고용 노동자로 일하는 순간 차별과 배제가 시작된다. 스웨덴이나 프랑스는 차별이 아닌 균등대우 원칙을 기본권으로 한다. 영국(임금격차 보고서), 독일(임금공개법), 아이슬란드(동일임금인증제) 모두 평등권에 기반한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 11조 1항에서도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고,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헌법적 권리조차 침해받고 있다.

사회적 논쟁은 항상 반복된다. 국가가 새로운 정책을 결정할 때는 더욱 그렇다. 지난 20년 사이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거래비용 감소와 유연한 고용을 선호하는 자본의 특성상 간접고용은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 게다가 산업구조와 기술변화 과정에서 새로운 직업은 이전과 다른 비표준적인 고용계약을 맺고 있다. 앞으로 간접고용 비정규직 해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은 계속될 것 같다. 이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차별을 어떻게 줄여 나갈 것인지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무엇보다 “누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고, 몇 명인지, 어떤 차별을 받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행 300인 이상 대기업의 ‘고용형태 공시제’를 30인 이상 기업으로 확대해야 한다. 재벌 대기업의 무분별한 간접고용과 남용은 규제해야 한다. 특히 재벌 대기업이 문제다. 우리나라 10대 재벌 기업의 간접고용(29.3%)이 직접고용 비정규직(7.9%)보다 4배나 많다. 재벌 계열 거대기업일수록 사내하청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한편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임금 공시제’와 ‘동등-급여 프로그램 의무화’ 도입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누구나 일은 필요하다. 일자리를 갖는 것은 그 자체가 권리다. 그래서 일을 하는 사람은 법으로 보호받아야 하고, 일할 수 있는 권리와 일할 때의 권리가 모두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2019년 대한민국에서 간접고용 노동자의 권리는 보장받을 수 있을까. 기업들이 이야기하는 고용 유연성은 과연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까. 오히려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강조할 때 불법파견이나 위장도급은 막을 수 있나. 이런 물음에 그들은 답을 하지 않고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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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내란의 수괴, 전두환 전 대통령의 파렴치한 행태가 끝이 없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가 알츠하이머병을 이유로 첫 재판에 출석을 거부할 무렵 멀쩡히 골프를 치고 다닌 사실이 확인됐다. 아무런 문제없이 골프를 칠 수 있는 상태임에도 와병을 내세워 재판 출석을 기피해온 셈이다. 거짓말로 국민을 기망하며 역사의 법정에 서기를 거부해온 작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1월 18일 (출처:경향신문DB)

전씨는 2017년 4월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표현한 혐의(사자 명예훼손)로 기소돼 재판에 회부됐다. 이후 전씨 측은 재판 연기를 신청하고 광주에서 재판을 못 받겠다며 관할 법원을 옮겨달라고 우기는 등 재판을 지연시키더니, 지난해 8월 첫 재판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며 출석을 거부했다. 지난 7일 두번째 재판에도 역시 알츠하이머 증상 악화 등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전씨 측이 주장한 대로 “방금 한 일도 기억이 안되는 상태로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이를 닦는” 상황이라면 정상적으로 골프 라운딩을 할 수는 없다. 전씨는 지난달 6일에도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강원도에서 골프를 쳤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전씨가 지팡이나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걸어다니며 골프를 쳤고, 일행들과 대화도 활발히 할 만큼 건강해 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건강’을 이유로 재판을 거부해온 것은 결국 5·18 관련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작이었을 뿐이다.

전씨는 1980년 5월 광주 시민을 학살한 것과 관련해 1997년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사면으로 죗값을 채 치르지도 않았다. 전씨는 38년이 지나도록 광주 영령과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나 반성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1980년 ‘광주 학살’을 자행하며 권력을 찬탈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회고록을 쓰면서 광주 희생자들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했다. 전씨를 반드시 법정에 세워 헬기 사격 등 ‘광주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그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골프를 즐길 만큼 건강에 문제없는 게 확인된 만큼 다음 재판에도 출석을 거부한다면 이미 발부된 구인영장을 추상같이 집행해야 한다. 전씨에게도 역사와 광주 시민 앞에 속죄할 마지막 기회다. 성실히 재판에 임해 응당한 죗값을 치르는 것이 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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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방법원이 17일 임창의씨(99) 등 4·3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공판에서 청구인들에 대한 공소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공소기각이란 법원이 소송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심리를 하지 않고 소송을 종결하는 것이다. 이로써 4·3 당시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체포·구금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18명이 71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4·3 군사재판이 사법적으로 불법이라는 판단이 내려진 것은 처음으로, 이번 판결은 재심 청구인들은 물론 당시 재판에 의해 피해를 본 모든 수형인에 대한 공소기각이라는 의미가 있다.

청구인들이 겪은 고통은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이다. 이들은 4·3 당시 죄도 없는데 군경에 의해 끌려간 뒤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 등으로 징역 1~2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풀려난 이후에도 연좌제 때문에 가족들까지 숱한 불이익과 핍박을 받았다. 이들처럼 군사재판에 의해 4·3 수형인은 무려 2530명, 그중 상당수는 행방불명되거나 옥고로 이미 숨졌다.

2017년 생존 수형자 18명이 재심을 청구했을 때 과연 이들이 억울함을 풀 수 있겠느냐는 회의도 있었다. 재판 과정과 수형을 입증할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등은 없고 단지 그를 유추할 수형인명부 등 문서만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니 재판의 불법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점에서 법원이 “재심 요건에 미비하다고 청구인들이 신원을 회복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법관의 임무를 외면하는 결과가 된다”며 재심을 개시한 데 이어 이날 공소를 기각한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 공소사실도 특정되지 않고 법적 절차를 갖추지 않고 진행한 재판은 무효일 수밖에 없으며, 불법 체포·구금에 이어 고문 등으로 범죄를 조작한 것도 엄연히 인정되는 사실이다.

4·3은 지난해로 70주년을 넘겼지만 여전히 미해결 상태에 있다. 진상규명은 물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도 다 이뤄지지 못했다. 당장 재심을 청구하지 못한 생존자 10명의 억울함부터 풀어야 한다. 국회에 계류 중인 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도 처리해야 한다. 개정안은 ‘명예회복 및 보상’ 조항을 새로 두어 국가로 하여금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지체 없이 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이번 판결이 4·3의 온전한 해결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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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성과 직무 관련성이 없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김기정 서울서부지방법원장이 2016년 법원도서관장으로 있으면서 직원 친목 도모 명목으로 기업에서 금품·편의를 제공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김 법원장 측은 이렇게 반박했다. 지위를 이용한 적도 없고, 재판 업무도 맡지 않을 때라고 했다.

김 법원장은 야구경기 스카이박스 입장권, 영화 VIP시사 관람권, 글램핑장 이용권 등을 받았다. 주식, 고급차량, 현찰을 뇌물로 받아 큰 사회적 논란이 된 법조인들과 비교하면 수수 명목은 사소해 보일 수도 있다. ‘사소한 관행’은 인정해도 되는 것일까?  

고도의 윤리 의식은 법관에게 필수다. 외국의 잣대는 엄격하다. ‘각국 법관 징계 제도에 관한 연구’(사법정책연구원) 보고서는 미국 연방법원의 모범법관행동규범을 소개한다. 보고서는 법관 징계사유 행위로 “합리적 일반인의 관점에서 법관의 독립성·청렴성·공평성을 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선물·융자·유증·이익 기타 재산적 가치가 있는 물품을 수령하는 경우”도 든다.

캐나다 법관윤리원칙도 ‘청렴성’을 두고 “법관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지식인의 입장에서 볼 때 법관 자신의 행동이 비난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펴낸 ‘법관 윤리’를 보면, 법관이 친구 변호사 개업식에 본인의 소속 법원명과 직위를 적은 화분을 보내는 것도 제한했다. 판사와 변호사 간 유착 같은 오해를 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막았다. 

김 법원장은 ‘친구 호의를 받아 직원들에게 선의를 베푼’ 행위가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공무원, 그것도 고위 법관의 지위라서 받은 선물은 아닐까? ‘기업의 친구들’이 왜 자신에게 물질적 호의를 보였는지 성찰도 하지 못한 듯하다.

김 법원장의 수수는 ‘외관의 공정성’에 어긋난다. 바깥에서 바라봤을 때 공정해야 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금품·편의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는 법관을 신뢰할 수는 없다.

<이혜리 | 사회부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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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료가 올랐다. 같은 날 건강보험료와 함께 국민연금, 통신비가 통장에서 쑥 빠지니 타격감에 얼얼했다. 말일쯤 납부할 주거비 및 각종 공과금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기타소득 원천징수세율 상향(6.6%→8.8%) 소식도 마음을 어둡게 한다. 먹는 것 줄이고 입던 것만 입어도, 사람들과 ‘랜선’으로만 만나며 웬만하면 칩거한다 해도 기본으로 빠져나가는 비용은 줄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늘었다. ‘적게 벌고 적게 쓴다’는 삶의 기조를 유지하기에는 이미 기본으로 쓰이는 돈이 상당하다.

그간 글을 쓰거나 워크숍이나 특강을 진행하는 등 ‘용병’으로 쓰이고 수당 받아 근근이 먹고살았다(기타소득 원천징수세율 상향 소식이 내게 큰일로 다가온 이유다). 돈을 벌 수 있는 제안이 끊이지 않고, 가늘고 길게나마 이어져 온 것은 운이 좋았기에 가능했고, 감사할 일이다. 

고마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만나자고 해서 그쪽 사무실까지 찾아갔는데 막상 상대가 뚜렷한 계획이 없던 적이 왕왕 있다. 마음 맞는 상대라면 의견 나누며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 문제는 어딘지 불쾌한 상대의 얄팍한 호기심만을 채워줬다는 직감을 안고 돌아온 날이다. 역시나 예감은 맞아들어 그런 만남은 일로 연결되지 않았다. 대충 툭 던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댓글이나 메시지 역시 실속 없을 확률이 높다. 주요 골자를 텍스트로 설명하는 성의를 보이지 않는 의뢰인은 신뢰하지 않는 편이 좋다. 신뢰감이 드는 상대와 충분히 대화가 오고간 일도 엎어질 수 있는 판국에…. 즉 일이 줄어들기는 쉬운데, 늘리기는 쉽지 않다. 

이런 현실을 인지하는 프리랜스 창작자는 특정 의뢰인의 선택을 받지 않아도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구조를 욕망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대중의 선택이 창작자에게 보상(광고 수익)으로 돌아가는 플랫폼을 불러왔다. 유튜브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대중의 선택으로 보상을 받는 환경 역시 녹록지 않다. ‘구독’과 ‘좋아요’가 곧 자원이며, 이는 적나라한 수치로 모두에게 공개된다. 이런 구조에서 채널을 ‘성장’시키기 위해 흔히 동원되는 전략은 선정적인 이미지의 전시와 속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 특정 진영 결집을 자극하는 화법이 되기 쉽다. 검색으로 유입되는 숫자를 늘리고, 같은 존재를 혐오하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낀 이들이 소속감마저 느끼며 팬덤을 형성하길 노리는 것이다. 유튜브 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콘텐츠가 활발히 유통되는 이유다. 

물론 이런 환경 속에서도 성실하지만 자기만의 리듬은 잃지 않는, 숙고 끝에 내놓는 의견과 따뜻한 감성으로 구독자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유튜버들이 있다. 존경하고 응원한다. 나는 아마 안될 것이다. 지나치게 경쟁 지향적이고 숨 가쁜 환경에서 쉽게 불행을 느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좀 더 가능성 있어 보이는 것은 웹소설 플랫폼이다. 독자들에게 편당 100원씩 받는 연재소설 중 나를 매료시킨 것이 있다. 비록 클리셰 범벅일지라도 건강한 메시지와 감동이 있었다. 철저히 기획하고 연구하며 문법을 습득한다면 나도 그런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프리랜서로서, 창작자로서 계속 생존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다 여기까지 왔다. 수단에 대해 골몰하다 보면 목적을 잊거나 방향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다시금 돌아본다. 나는 더는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직접 말하기로 마음먹었고, 널리 알려진 ‘진실’에 반례가 있음을 증언하고 싶었으며, 그 결과물이 흥미롭고 유쾌하며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많은 사람들에게 닿지 않더라도, 내가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몇 명에게라도 유익할 수 있다면 보람을 느꼈다. 이런 날들이 앞으로도 가능하기를 희망한다.

이게 개인의 몫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작자가 상업성에 혈안이 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공공이 제공한다면 서로 간의 오해를 해소하는 데 기여하는 콘텐츠들이 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고위 관료 나리의 옷깃을 붙들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기타소득 원천징수세율 높인 것, 사회안전망으로 되돌려줄 거지요? 지역가입자라 건강보험료 어마무시하게 내고 있어서 사보험 따로 안 들었는데, 훗날 이런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해줄 거죠?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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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0년경 중국에 살았던 양자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귀는 소리의 울림을 원한다. 귀에 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면 청각의 발달을 억누른다. 눈은 아름다움과 색깔을 보기를 원한다. 눈에 이것들을 보여주지 않으면 시각의 발달을 억누른다. (후략)” 읽고 놀랐다. 뇌과학적으로 완벽하게 타당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멀쩡한 눈과 귀를 가지고 태어나도 유아기에 충분한 시각 자극과 청각 자극을 경험하지 못하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된다. 경험을 통해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구조로 뇌 속 신경망이 다듬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화백

매일의 경험이 주는 피드백을 통해 뇌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며 변해간다. 그런 작은 변화들이 이어지다보면 어느 틈에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런 변화를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면 문화가 변한다. 학창시절에 좋아했던 연예인의 사진을 보고 촌스러움에 깜짝 놀라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협력과 경쟁의 강화학습

경험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성질은 신경계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이지만, 변화의 방향이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최대화할 수 있는 행동은 숙련시키고,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던 행동은 줄이는 방향으로 변해간다. 이를 강화학습이라고 한다. 강화학습은 인공지능과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분야인 기계학습의 한 부분이다. 

알파고는 하나의 행위자에게 강화학습을 시켜서 바둑을 두게 만든 경우다. 하지만 한 환경에서 여러 행위자를 학습시키는 상황도 고려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이해를 최대화하려는 개별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들과 어떻게 협력하고 경쟁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어떤 조건에서 어떤 행동이 더 많이 나타나는지 살펴봄으로써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통찰도 얻을 수 있다.

최근의 한 강화학습 연구에서는 여러 행위자가 사회적인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 실험에서는 두 행위자가 각자 최대한 많은 사과를 먹어야 했다. 각 행위자는 매회 사과를 모을 수도 있고, 상대 행위자를 빔으로 쏠 수 있었다. 상대가 쏜 빔을 피할 수도 있지만, 못 피하고 두 번 맞으면 일정 시간 동안 사과를 먹을 수 없었다. 행위자가 먹어서 사라진 사과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났다. 각자 노력하거나 경쟁자를 없애는 두 가지 전략이 가능한 상황인 셈이다. 연구자들은 사과가 천천히 자라고(환경이 풍족하지 못하고) 빔에 맞은 뒤 회복이 더딜 때(경쟁의 효과가 클 때), 상대방을 빔으로 공격하는 행동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먹고살기 각박한 상황에서 아귀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이나 인공지능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두 늑대가 각자 더 많은 사냥감을 얻어야 했다. 하지만 혼자 사냥할 때보다, 두 늑대 모두 사냥감으로부터 제한 반경 이내에 있을 때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각자 노력하거나 협력함으로써 성과를 높이는 두 가지 전략이 가능한 셈이다. 이 경우, 협력을 통한 보상이 클수록, 제한 반경이 커서 협력이 쉬울수록, 각자 행동하는 비율이 줄고 협력이 늘었다. 경쟁과 협력 중 어느 전략이 더 유리한 환경인가에 따라서 인공지능의 사회적인 행동도 달라진 셈이다. 이는 사회가 경쟁과 협력 중 어느 쪽을 더 포상하는지에 따라 사회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자들은 개인의 특성이 사회적인 행동 전략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살펴보았다. 실험 결과, 전략을 개선할 때 상대 행위자와의 경험을 더 풍부하게 반영할 수 있는 개인일수록 사과 모으기 게임에서는 덜 공격적이고, 늑대 사냥 게임에서는 더 협력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는 사과 모으기 게임에서 상대방의 빔 공격을 피하거나, 늑대 사냥 게임에서 상대와 협력하는 방법을 더 잘 습득할 수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늑대 사냥 게임에서는 다른 늑대를 찾은 뒤에 함께 움직이거나, 사냥감을 찾은 뒤에 다른 늑대를 기다리는 등 서로 다른 협력 방식이 있을 수 있어서 상호 간에 이를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결과는 경쟁적인 상대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키고, 어떻게 협력할지 구체적인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 경쟁을 줄이고 협력을 유도하는 데 중요함을 암시한다. 실제로 지나친 경쟁에 부정적인 측면이 많고 협력이 좋다고 머리로는 알지만, 자신을 지키면서도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선뜻 협력하려는 마음이 나지 않는다. 억지로 상대를 믿으려고 했다가 상대의 배신에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 세태만 탓할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협력을 위한 현실적인 모델도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 우리는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

여러 인공지능 행위자의 강화학습에서는 학습 환경과 상대 행위자의 행동에 따라 피드백이 달라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이 피드백을 사람이 준다. 예를 들어 길을 가르쳐 주었다가 “도를 믿으십니까?”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경험은 나의 다음 행동에 영향을 준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최근에는 진짜 길을 물어보기도 어려워졌다. 서로에게 친절하기 힘든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이다. 반면에 친절을 악용한 것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은 부족했던지, “도를 믿으십니까?”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사람을 대하는 한 사람의 태도가 이후 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인 동시에 만 사람이다. 거대한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이 작고 무력하게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내가 주는 피드백, 상대가 주는 피드백의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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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목화꽃처럼 탐스러운 눈이 소르르 내렸다. 개울가 수렁논배미도 딱딱하게 얼어붙어 고두밥만큼 부풀었다. 성크름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햇살이 따뜻해설랑 눈은 아침나절에 녹아버렸다. 마당에 있는 바위옹두라지에 개가 앉아 털을 고르면서 해바라기를 즐겼다. 개처럼 사람들도 가만히 앉아 비루하고 추저분한 인생을 추스를 짬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염치도 부끄러움도 없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거나, 얼굴을 뺀질댄다거나, 괘꽝스러운 망언을 해대지는 않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자아를 성찰함으로써, 내면의 침잠으로부터 시가 나오게 되면 당신은 그 시를 들고나가 누구에게 어떠냐 물어보지 않게 되리라. 문예지에 작품을 보내 관심이나 평가를 요구하지도 않게 된다. 이미 당신의 글은 자랑스럽고 자연스러운 재화 즉 자기 생명의 한 편린, 한 생명의 노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 필연성에서 이루어진 모든 예술작품은 위대하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한 가지뿐. 자기 자신을 살아가며 당신 생명의 밑천으로 노래하라. 심연의 고독 속에 파고들라. 그러다보면 허깨비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 시를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보통사람 가운데 한 명인 자기로의 복귀도 나쁜 건 아니다. 차라리 그 길이 시인의 길인지도 모른다.”

평온한 바다에선 뱃사람이 배울 게 없다. 일상이 힘들면 힘든 대로, 이웃의 아픔과 눈물을 헤아리는 연민으로 글감을 삼으면 된다. 릴케는 더 말하기를 “글은 최종적으로 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매일 매 순간 습관처럼 쓰지 않으면 안된다. 미세먼지로 바깥출입이 어려운 때, 책을 더 읽고 글을 더 써본다면 좋겠다. 영화 <말모이>는 한글학회가 걸어온 길을 재미있게 담고 있다. 영화를 통해 엉덩이와 궁둥이 차이를 처음 알았다. 엉덩이와 궁둥이를 떡하니 붙이고서 우리말 신간을 한 권이라도 더 읽어야지 욕심 먹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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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는 국방백서에서 대체복무제를 둘러싼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용어 대신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라는 용어를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군에서 병역의무를 이행했거나 이행 중이거나 이행할 사람들이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국민적 우려를 고려했다고 한다. 국방부의 해명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오해의 가능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주목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의 여지를 두지 않기 위해 이 용어를 예민하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러나 ‘오해의 가능성’이란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문제의 미묘함을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실감했던 듯하다. 대체로 시골집들이 그랬듯이 우리 집에도 욕실이 없었다. 커다란 고무 함지가 나의 욕조였고 거기에 데운 물을 채운 뒤 몸을 담가 때를 불리면 어머니가 때수건으로 박박 밀어주곤 했다.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근 동안에는 즐겁지만 물이 식어 점점 차가워지고 때수건이 지난 자리가 벌겋게 달아오르면 그처럼 고역스러운 일도 없었다. 마음이 널을 뛴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2018년 11월 30일 오전 대구구치소에서 출소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마중 나온 가족과 포옹하고 있다. 법무부는 이날 양심적 병역거부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 57명을 가석방했다. 연합뉴스

그러다 언제부턴가 봄이 되면 수돗가에 나무로 틀을 짜서 부엌 벽과 맞닿은 부분을 제외한 삼면을 방수포로 가렸다. 평소에는 활짝 열려 있지만 접어 올린 방수포의 끝자락을 잡아 내리면 담장 밖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가려졌고 겨울이 되기 전까지 거기서 우리 식구는 등물을 하거나 목욕을 했다. 한여름이면 대낮에도 방수포만 내린 채 등물을 했고 그 작고 아늑하며 천장이 없는 터라 답답하지 않은 우리만의 욕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나는 즐거웠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점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절 시골마을에서 사내아이가 알몸도 아니고 그저 웃통을 벗고 등물을 하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던 터라 외려 유난을 떤다는 인상을 줄까 봐 꺼려지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슬쩍 내비치며 부모님께 물었더니 보이는 우리가 수치스러워서가 아니라 우연히 벌거벗은 우리를 본 누군가가 수치스러워하지 않도록 그렇게 한다는 거였다. 나는 이 설명이 인상적이었던 터라 오래 곱씹어 보았고 윤리의 요체 가운데 하나도 이런 형태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수치를 아는 자는 반드시 타인이 느끼게 될 수치를 고려한다는 것. 타인이 수치를 느끼게 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의 수치에만 골몰한다면 윤리적이라 일컬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오해의 가능성’은 ‘오해하지 않을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신의 수치에만 몰두하게 되면 타인의 수치를 무시하게 되는 것처럼. 국방부가 ‘오해의 가능성’만큼 ‘오해하지 않을 가능성’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고려했다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대신 이 용어를 두고 갈등이 생겨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모른 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복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일이 만약 수치스럽다면 왜 그런지 우리는 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군복무를 수행하는 일에 자긍심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방부는 온갖 비리를 척결하여 사병들에게 질 좋은 식사와 보급품을 제공해야 하고 지휘관은 부하를 종처럼 부리는 게 아니라 존중해야 하며 모든 군인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부여받아야 한다. 의문사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수사 과정부터 투명하게 공개되어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하고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병역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 감독해야 하며 부당한 청탁이 결코 통용될 수 없게 해야 한다. 마침내 군복무를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국토만을 방위하는 것이 아니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까지도 보호한다는 자긍심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그들이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 군복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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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고 미세먼지에 잠식당한 희뿌연 도시를 떠나면서, 남쪽에 닿으면 쨍하고 갈라질 것 같은 한겨울 쪽빛 하늘과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으려니 했다. 하지만 미세먼지는 이미 남쪽 해안 도시까지 밀고 들어와 하늘도 바다도 점유했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도시 끄트머리에 있는 항구도 출렁이는 바닷물도 무채색이었다. 미세먼지 아래서 우리는 공평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산다는 것을, 깔깔한 목구멍으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초미세먼지 경보가 내리건 말건 학교의 아이들은 활기찼다. 방학을 앞두고 학교는 일주일 내내 행사 중이라고 했다.

“옛날 같으면 방학 전에 애들한테 온종일 비디오만 틀어줬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다양한 체험 활동을 하고 있어요. 참 좋아졌지요.”

인근 대도시로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선생님은 나를 쉰 명쯤 되는 애들 앞에 세워놓고는 바쁘게 교실을 떠났다. 아이들은 밝고 기운이 넘쳤다. 중학생들이 으레 하는 엉뚱한 질문을 호기롭게 했고, 때때로 저희끼리 흥이 나서 떠들었다. 그날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는 공감과 경쟁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치열한 입시 경쟁을 얘기하면서 요즘 장안의 화제인 입시 경쟁 드라마에 비친 어른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거론했다. 아이들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크게 공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 애들의 부모님 대다수가 근처에 있는 공단에서 일하시는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집안 형편이 다 어렵지요. 그러다 보니 애들 학원 챙기기도 쉽지 않아요. 사실 아이들한테 무관심한 부모가 더 많아요.”

강연을 끝내고 나와서 만난 선생님은 여전히 뿌연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입시 경쟁에 신음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우리 사회 대부분의 아이들은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수천만원의 학습 코디네이터를 운운하는 ‘그들만의 리그’를 보면서 지레 겁먹고 주저앉을 수도 있다. 미세먼지가 쉽사리 걷히지 않는 남쪽 도시를 떠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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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성폭력(rape) 예방 교육을 할 때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 싫다고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성폭력 가해자의 대다수는 피해자와 아는 사람이고 어린이 성폭력은 더 비율이 높다(80%). 무엇보다, 압도적인 폭력 상황에서 “분명한 의사 표현”이 가능할까. 효과보다 역효과가 클 가능성이 높다.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잠재적 피해 집단을 대상으로 한 교육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오죽하면, 이런 방식을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절대로 아저씨를 쳐다보지 마라.” 아저씨라고 썼지만 가해자는 대개 아빠, 삼촌, 아빠 친구, 오빠, 교사, 의사, 경찰 등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이들이니, 모른 척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피해자에게 침묵이 강요되는 이유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 사회는 성폭력 범죄를 다룰 때 구조적 문제나 가해자의 행위보다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집착한다. 남성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여성은 그것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처럼 결정할 권리가 불평등한 상태에서, 합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폭력을 다루는 것은 애초부터 피해자에게 불리하다. 성폭력이 지속되는 이유다. 합의 상황의 복잡성을 다투는 성인 대상 성폭력에 비해, 어린이 성폭력은 사회의 공분을 사지만 생각만큼 제대로 처벌되지도 않는다. 피해 아동이 여러 명인 경우조차 사회(가족, 학교, 교회 등)는 가해자 편에 선다.

‘위계나 폭력 상황에서도 피해자는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은 피해자의 능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피해자가 운동선수이든 전문직 여성이든 어린이든,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성폭력 발생 원인은 남성 중심적 성문화에 있지, 피해자의 인구학적 특성(나이, 학력, 직업…)과는 무관하다. 성폭력도 다른 범죄처럼 가해자의 행위만 판단하면 된다.

조직 내 위계나 물리적 폭력의 정도에 따라 피해 내용이 다를 뿐, 성폭력의 본질은 위계와 결합된 성별 권력 관계다. 이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은 없다. 나의 생명과 생계 그리고 평생의 경력을 쥐고 있는 상대방과 어떻게 합의가 가능하단 말인가. 본디, 합의(consensus)는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끼리도 달성하기 어려운 지속적이고 끈질긴 협상 과정이다. “합의였지?”라는 비난 때문에 피해 여성은 분노 속에 침묵한다. 성폭력은 최고의 ‘암수(暗數) 범죄’가 될 수밖에 없다.

남성에게 성(sexuality)은 유용한 도구다. 갑이 남성이고 을이 여성일 때, 권력은 성폭력으로 행사된다. 모 종목의 기대주였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코치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낙태한 후 선수 생활을 포기한 사례만큼이나, 여자 선수를 지도하는 남성들이 룸살롱에 갈 필요가 없다는 ‘자랑’이 끔찍한 이유다.

이번 조재범씨의 경우는 온 국민이 “강력 처벌”을 바라며, 피해 여성을 응원하고 있다. 하지만 안희정씨 사건의 피해자, 미투를 한 검사도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세 사건은 피해 기간,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 성격은 다르지만 모두 위력에 의한 폭력이다.

하지만 여론은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고른’ 분노를 보이거나 옹호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판단 기준이 가해자의 폭력이 아니라 피해자의 대응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완벽한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만 인정한다. 완벽한 인간도 없는데, 완벽한 피해자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 잣대를 유독 여성에게만 요구한다. 피해 여성은 끊임없이 사건 자체는 물론, 자신의 모든 인생과 과거사를 검열당하고 변명하게 된다. 남성도 상사에게 구타당한 다음 날 ‘웃으며’ 출근하고, 자기를 때린 사람을 위해 맛집을 검색한다. 이것이 피해자가 동의한 증거인가?

체육계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조재범씨 사례는 전형적이다. 빙상연맹은 방관 정도가 아니라 범죄를 조직, 격려했다.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는 책임져야 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해결 의지다. 작년 이즈음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의 모델이 되었던 우리의 미투 운동을 생각해보자. 무엇이 달라졌는가?

강력한 처벌? 필요 없다. 합리적인 처벌을 바란다. 한국은 성폭력 관련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다. 2017년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이자 미시간주립대 의대 교수였던 래리 나사르는 150여명의 여자 선수들의 고발로 360년형에 처해졌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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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들과 함께 일본 도쿄대학에서 열린 학술행사에 갔다 왔다. 한·중·일 세 나라의 대표적인 대학의 하나라 할 성균관대, 칭화대, 도쿄대에서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하는 20~30대 신진 연구자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나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정치에 대한 학술 발표를 하고, 타국의 동세대인들과 친교도 하는 연례행사다. 올해에는 각국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도 참가해서 더 뜻깊었다. 도쿄대학의 유명한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 고모리 요이치 교수도 젊은 학자들을 위해 축사를 하고 특별 강연을 했다.

세 나라 학생들은 동아시아와 각국의 새로운 정치문화, 민족주의의 발현 양상, 일본의 기억정치, SNS를 통한 새로운 소통과 언어정치, 이주와 경계인, 그리고 젠더 구조의 변화 등에 대해 영어로 발표하고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 토론했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저절로 연구자로서의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부러워했다. 나는 30대 후반이 돼서야 처음으로 외국에서 열린 학회에 가서 발표를 했고 비슷한 분야의 외국인 학자와 대화해봤다. 그만큼 예전 한국의 학문 환경은 지금과 많이 달랐고 한국의 문화적·학문적 위상도 비교할 수 없이 낮았다.

또 나는 자연스럽게 저 젊은 학자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과연 앞으로 한국 사회는 이런 훌륭한 인문사회과학자들을 얼마나 새로 길러낼 수 있을까? 학생들이 이번에 도쿄대학에 와서 경험치를 쌓고 국제적인 역량을 높이는 데 든 비용은 국가가 지원한 인문역량강화사업에서 나왔다. 보람 있던 3년간의 이 사업은 2월에 완전 종료된다. 정말 우리의 인문사회과학 전공 대학생원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칭화대와 도쿄대의 동세대들과 계속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성장하고 활약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구절벽, 양극화, 포스트휴먼 같은 공동체의 새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융합적 지식을 생산해야 한다. 한류열풍 등 국제사회에서 날로 높아져가는 나라의 위상에 걸맞은 이상과 담론을 주조하고, 한국에 부여된 새 글로컬리티와 통일·화해 시대에 필요한 지적 실천의 주체를 양성해야 한다. 선배 및 아비 세대의 앎의 식민성을 극복하고 과거와는 다른 한반도에서 사유하고 교육하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그런데 이런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누가 부담하나? 한국 대학은 이상한 자멸충동에 빠져있어 이에 관해 단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어한다. 기업도 거의 내지 않는다. 단지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정부가 조금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16일부터 ‘강사제도 개선과 대학연구교육 공공성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세종시 교육부 앞에서 천막농성에 돌입한다. 엄동설한에 시민의 통행도 별로 없는 세종시에 천막을 차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상황이 급박하고, 문제해결의 열쇠를 일단 교육부가 갖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새 법 시행령 제정을 앞두고 대학들은 꼼수를 부리거나 문제를 등록금 인상으로 몰아가고 있다. 결국 피해는 학생과 학부모들, 그리고 전체 공동체에 돌아간다. 당장 인문사회과학·예술·글쓰기 강좌가 대폭 줄고 있다. 국제적으로 수준 높은 앎과 소통 능력이 인터넷 강좌와 콩나물시루 교실에서 길러질까?

내년 하반기 강사법의 시행을 앞두고 대학들이 미리 손을 쓰는 탓에, 이미 전국의 수많은 강사들이 해고되고 있다. 연세대 같은 학교에서도 기초 학문과 글쓰기를 가르치는 과목을 대폭 줄였다. 작은 대학들에서는 얼마나 많은 강사들과 비정규직 교수들이 일자리와 가르칠 기회를 잃었는지 잘 파악도 안된다.

이런 상황인데 누가 대학원에 와서 연구하고 교육하는 사람이 되려 할까? 흔히 이를 학문 ‘후속’ 세대 재생산 문제라지만, 대학원생부터 비정규직 교수까지의 연구자들은 바로 지금 학문 연구와 교육에 투입되고 있다. 그렇기에 ‘후속’이 아니라 학문 ‘현재’ 세대이다.

지금부터 약 6개월간의 정책과 싸움이 향후 수십년 한국 고등교육의 향배를 결정지을 것 같다. 단결밖에 길이 없는 듯한데, 억압과 파편화를 강요받아온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와 강사들은 지금도 침묵 속에 두려움과 모욕을 견디고만 있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는 광화문에도 함께 천막을 차려야 하는 거 아닐까?

더불어 국가 학문·지식 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위정자들이나 적지 않은 시민이 대학원을 그저 학위를 따서 높은 학벌을 취득하는 데로 인식해왔다는 것은 이 나라의 큰 불행이다. 그래선지 대학원 교육을 위한 제대로 된 법과 정책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고급두뇌를 구제하고 또 활용할 국가박사 제도와 세계적인 고등 인문사회과학원의 설치가 필요하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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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 나는 일 중독에 가까운 타입이었다. 심지어 뭔가를 먹는 시간도 아까운 경우가 많았다. 내 주위에는 프로젝트를 끝내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주문한 음식을 배달받을 때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그 시간조차 아까워 며칠 것을 한꺼번에 주문한다고 해서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나는 ‘맛집’ 순례를 다닌다는 사람들을 선뜻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외할머니에 대한 그들의 추억에 관해 듣게 되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외할머니께서 해주시던 맛있는 음식이 지금도 가장 그립다고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 후 이러다가 나중에 아이들이 나에 대해 추억할 거라고는 라면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늦게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새삼 음식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화를 내기는 정말 어렵다. 얼마 전 한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가 하는 일 중 하나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합의점을 찾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다고 했다. 다들 자기네가 옳다고 서로 으르렁거리기 때문이라고. 고민 끝에 지인은 일단 그들을 소문난 맛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들이 앞에 놓이자 정말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지면서 비로소 대화에도 진척이 생기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지인의 초대로 정갈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음식을 먹으며 정말 음식이 살아 숨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내 생각을 표현했더니 그가 자신의 요리철학을 들려주었다. 그는 음식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선한 제철 재료, 간, 온도 그리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꼽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네 가지가 음식을 만들 때만 필요할까 싶었다. 삶이나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만 온도에 있어서만은 음식의 온도와 인간관계의 온도가 조금 다를 뿐. 흔히 음식은 ‘불맛’이라고 하는 것처럼, 뜨거운 음식은 뜨겁게, 찬 음식은 차게 먹어야 제 맛이 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가 너무 극명하면 문제가 생겨난다. 분노로 뜨겁다가 냉정함으로 차가워지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소비되는 에너지가 너무 많다. 요즘 날씨가 추워 보일러를 틀 때 집 안 온도를 늘 일정하게 맞추어 놓는 것이 에너지 손실이 가장 적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마음도 인간관계도 일정하게 적절한 온도를 유지할 때 우리는 에너지 손실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관계가 그처럼 적절하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관계일까? 아마도 오랜 친구와의 우정이 아닐까 싶다. 사실 정신의학적으로 연애는 스트레스에 해당한다. 일단 연애는 불에 데일 듯이 뜨겁기는 하지만 불안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과연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줄까 하는 의구심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연애다.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부디 내가 아닌 그가 나를 더 사랑하게 해주소서’ 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 연인의 마음이기도 하다. 어찌 하루하루가 스트레스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랜 우정에는 그런 스트레스가 없다. 맛으로 치면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담백한 맛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그런 친구와의 관계에는 언제 만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따라서 편안하다. 그리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친구는 서슴없이 손을 내밀며 우리 힘을 합쳐서 이 곤경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자는 희망을 준다. 즉, 깊은 우정에는 신뢰와 평안함 그리고 희망이 함께한다. 덕분에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일정한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해 나간다. 한마디로 에너지 손실도 가장 적은 관계인 것이다. 물론 그런 우정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나 인간관계에서 무엇보다도 ‘항상심(恒常心)’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한다면 반드시 그 보답이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양창순 |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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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국가의 어느 영문과 교수가 동료들과 ‘당연히 읽었을 것 같은 책 중에 읽지 않은 책’을 고백하는 게임을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교수는 게임을 이기려는 욕심에 <햄릿>을 안 읽었다고 솔직히 말했고,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읽지 못했다는 죄의식의 먼지가 두껍게 쌓인 목록이 누구에게나 있다. 나도 제법 긴 목록을 가지고 있는데,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같은 러시아 책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끔 ‘이 책들을 끝내 못 읽고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다가올 때면, ‘가진 것이 시간밖에 없는 늘그막에 읽으면 되지’ 하고 스스로 위안한다. 지난해 말에 문득 <닥터 지바고> 또한 20대에 영화로 본 적은 있으나, 책으로는 읽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며칠 후, 주말이면 찾아가는 도서관에서 책장이 너덜너덜한 책을 빌렸다. 조금씩 며칠간 읽다보니, 인상적인 몇 장면과 유명한 주제곡 외에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도 다시 보고 싶어졌다. 2018년이 저물어가는 어느 휴일 이른 새벽에, 거실 TV로 혼자 영화를 보았다. 무수한 사람들이 언급한 이 영화에 관해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바고는 낡은 체제에 대한 분노와 정의의 요청에 공감하지만, 혁명에 수반되는 비인간적 과정과 어쩐지 어긋난다. 혁명의 현실은 인간의 본성과 덜그럭거리고, 심지어 또 다른 압제가 되어 개인의 자유와 내면세계를 짓누른다. 그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끝나고도 아직 동이 트지 않는 아침에, 나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장대한 파도에 출렁거린 한 진실한 인간을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한다. 하지만 쉬이 잠들지 못한다.

이 영화를 젊어서 처음 만났을 때에는 메시지를 피상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사이 나이를 헛먹지 않았는지, 나는 지바고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마주한 현실과 그들의 선택을 마치 가까운 지인의 일처럼 느꼈다. 혁명가와 구체제 인물 그리고 시대에 적응해가는 영리한 현실주의자, 그사이에서 고뇌하는 섬세한 지식인은 매우 전형적인 설정일 수 있다. 그러나 삶의 길과 죽음의 골짜기가 수시로 갈라지는 혁명적 순간의 인간들을 유형화하자면, 달리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 영화를 보고나서 20년 이상 흘렀고, 그사이 인생에서 마주친 많은 인물과 사건들은 일종의 직관적 빅데이터가 되어 내 마음에 쌓여 있다. 이제는 굳이 유형을 나누어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지고 살아가는 몸짓들, 그들이 시간에 따라 무너지고 변해가는 모습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위대한 개혁의 초췌한 뒷모습과 피끓는 정치의 온갖 협잡은 또 어떠한가. 그토록 많은 혁명적 구호들이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거인처럼 보였던 인물들은 시간이라는 빙하에 서서히 침식되어 사라졌다. 

한반도에서 20세기 전반부를 젊은이로 살아간 사람 중에는 지바고 못지않게 난폭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들이 많았다. 20세기 뒷부분을 젊은이로 살아간 우리 세대는 예외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보다 덜 무시무시한 시대를 통과했다. 우리들이 선택한 사상과 행로가 생사를 가른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엇갈리는 여러 선택은 다양한 운명의 물줄기가 되어 흘러갔다. 어느 물줄기는 탁 트인 바다에 이르기도 하고, 아름다운 호수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물이 말라 사라지거나, 기껏해야 웅덩이로 남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직 진행 중인 그 세대의 선택들, 마주했거나 회피했던 일들의 결산보고서는 머지않아 아파트 1층 세대별 우편함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해 다시 일어난다. 가을에 이사한 아파트의 창문 너머로 멀리 보이는 남산의 한 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산한 겨울의 남산이 조금씩 밝아진다. 나는 삶과 역사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가는 안전한 중산층의 눈높이로 계속 남산을 바라본다. 복잡한 마음 한편으로 해가 뜬다.

나는 혁명의 와중에 의사로 일하던 지바고, 권력자에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총을 쏘는 젊은 라라, 라라와 재회하던 지바고, 딸을 잃어버린 지바고를 생각한다. 그리고 라라를 마지막으로 발견하고 따라가다가, 거리에서 병으로 쓰러지는 지바고를 떠올린다.

저마다의 생이 만나는 시대가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고 오솔길을 걷기도 한다. 나는 제 딴에는 힘겨웠으나, 시인이었던 의사의 험로에 비해 주말의 산책과 같았던 내 삶을 생각한다. 식어가는 피를 잉크 삼아 글을 남긴 보스테르나크의 냉동된 시간에 비해, 만년설을 눈요기하며 걷는 트레킹과 같았던 내 시간을 회상한다. 주어진 소임을 얼마나 해낸 것일까. 보잘것없지만 부끄러울 만큼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고나니, 해낸 것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언가 회피했거나 스스로에게 속은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까. 검색창에 ‘닥터 지바고’라고 치면, ‘TV 주치의 닥터 지바고의 다이어트 방법’이 모니터를 채우는 이 아이러니한 시대에, 무언가 해낼 방법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 세대가 가능성을 연 것만큼이나 많은 가능성을 닫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빨리 떠나야 하는 것일까.

‘읽었을 것 같지만 읽지 않은 책’의 목록에 하나씩 줄을 긋는 것으로 소일하는 어느 날엔가, 나는 살아온 세월을 한 번쯤 총괄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나는 생을 슬쩍 비켜갔다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에 사로잡힐 것인가. 아니면 무사했던 삶에 안도하며, 설원의 썰매가 아닌 자율주행차를 타고 강바람이라도 쐬러 갈 것인가.

<조광희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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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구성이 정교해서 놀라고 묘사가 독특해서 놀란다. 이야기는 비극적이지만, 비극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날카로운 빛살이 있다. 그 빛살은 우리에게 쏟아지면서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다. 신분 제도와 가부장제 등 크고 굳건한 것 앞에서 개개인은 작고 허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모여 사는 작은 것들이 없는 한, 큰 것의 의미도 사라진다.

큰 것 앞에서는 으레 압도당하고 고개 숙이게 되고 몸을 낮추게 된다. 관습과 종교 앞에서 우리는 위축된다. 큰 것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믿음 없이 축적이 불가능하다. 믿음은 편견으로 둔갑해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기도 하고 때때로 폭력이 되기도 한다. 사랑을 가로막기도 하고 원하는 곳에 발 들일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은 큰 것 앞에서 하릴없이 무너져 내린다. 큰 것을 꿈꾸고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사는 삶이 빡빡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늘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작은 것을 보면 우리는 다가가고 그것과 교감하기 위해 마음을 열어젖힌다.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보면 들여다보게 된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개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나무 아래서 나뭇잎과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속에서 어떤 것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쓸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순간의 중심에 있었던 나는 안다. 그게 얼마나 충만한 경험이었는지, 그 순간의 전후에 나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작은 것들의 반짝임처럼, 그 반짝임이 모이고 모여 일어나는 기적처럼.

얼마 전에 김현 시인을 만났다. 그는 매해 새해 계획을 세우곤 하는데, 작년의 계획을 듣는 순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늦잠을 더 자주 자고, 야식을 종종 먹고, 줄넘기를 하다 중도에 포기하고, 마감 같은 거 일주일씩은 늦을 것, 짝꿍에게는 더 징징대고 인간관계는 더 복잡해질 것. 그러니까 마음을 다해 대충 살 것.” 그리고 그는 작년 계획의 상당수를 달성했다고 했다. 현장에서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잠들기 전에 그 계획들이 자꾸 떠올랐다. 거창하지 않지만,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사람임을 자각하는 순간들은 다 저기에 있었다.

그는 작은 것들이 가져다주는 활력을 아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작은 계획을 달성했을 때 찾아오는 기쁨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줄넘기를 하는 것도 계획이지만, 그것을 하다 중도에 포기하는 것도 계획이다. 어떤 일을 진득하게 수행하는 것도 사람이지만, 싫증을 느끼거나 끈기가 부족해서 그 일을 그만두는 것도 사람이다. 그는 사람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며 사람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일상에서 해낼 수 있는 것들을 계획으로 삼는 일은 거창하지는 않아도 근사하다. 스스로를 긍정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김현 시인의 계획을 곱씹으며 나는 올해 나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병상에 있는 아빠와 자주 눈 마주치기, 엄마가 지치지 않게 옆에서 웃겨드리기, 친구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기꺼이 축하하고 슬픈 일이 생기면 마음 다해 위로하기, 매일 나만의 한 시간을 만들기, 지역에 있는 독립서점에 찾아가기, 새로운 길로 산책하기, 틈틈이 메모하기, 작고 여리고 하늘하늘한 것들을 눈여겨보기, 그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항목들을 적고 나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떤 계획은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안다. 그 시간들이 나를 생생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안다.

책을 읽다가 밑줄이 그어진 부분을 발견했다. “너무나 명백히 있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명백한 것들 앞에서 사람들은 의심하기를 멈춘다. 당연한 것은 자극이 되지 못하므로. 그러나 스스로가 명백해지는 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 순간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이따금이라서 더욱 소중한 순간을, 항상이라서 지나치기 쉬운 순간을 심신에 열심히 새겨야겠다. 작은 것들이 내 삶의 물꼬를 터주는 상상을 해본다.

작고 여리고 하늘하늘한 것들을 통해 내년 이맘때쯤 나는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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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대거리 붙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자면 옆에서 다독이며 말립니다. “네가 참아.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댔잖아. 무시해.” 씩씩 참으며 에이! 돌아서는데 귓등에 들립니다. “원, 별 거지 같은 게.” “거지? 너 말 다했냐!” “야야, 그만, 그만해! 그쪽도 그만하고 가세요.” “으휴, 내가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 “뭐, 똥? 지금 나더러 똥이랬냐?” 결국 멱살잡이 드잡이하다 경찰차 타고 지구대 망신살만 뻗칩니다. 그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지 계속됐으면 주먹다짐으로 피도 봤을지 모르지요.

참는 건 안팎의 압력, 두 가지로 나뉩니다. 웃음을 참고 방귀를 참고 욕구를 참고 화도 참는 것을 참을 인(忍)이라 하고, 손 시린 걸 참고 더위를 참고 고통을 참고 모욕도 참는 것을 견딜 내(耐)라 합니다. 둘이 합쳐 인내지요. 견디는 건 내성(耐性)이 생겨 그럭저럭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을 참는 건 그리 쉽지 않지요. 서로가 또는 스스로가 자극해서 한도 끝도 없이 커져 탱천(撑天)까지 하는 게 분기(憤氣)고 노기(怒氣)입니다. 그쯤 되면 눈 돌아갑니다. 눈동자 뒤로 넘어갈 즈음이면 뵈는 게 없습니다. 그때가 바로 ‘욱!’입니다. 참을 인(忍)자는 마음 심(心) 위에 칼날 인(刃)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못 참고 가슴 벌렁거리다간 스스로 베이고 다친다는 뜻이지요. 그럼에도 못 참고, 다시 또 못 참으면 끝끝내 누군가를 찌르고야 말 겁니다.

어느 인디언 부족은 화가 풀릴 때까지 한 방향으로 콱콱 걷는다죠. 그러다 화 풀린 지점에서 막대기 하나 꽂고 온다는군요. 그럼 다음에는 저번 막대기 기준으로 제3자의 눈으로 이번엔 얼마나 화났나도 알고요. 무작정 참기만 하면 화병 납니다. 화를 달리 풀 의식(儀式) 하나쯤 마련하면 좋을 겁니다. 욱! 대신 Oops! 더 화나면 Ooops!! 못 견뎌 못 참은 화는 내가 키웁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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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지나칩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걷다가 섰다가 타다가 섰다가 또다시 걷다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좀 더 오래 가는 블루투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 도착해야 하는 삶이 좀 지루하다고 생각하다가, 간판을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어떤 간판이 있나 위아래로 두리번거립니다. 귀에서 ‘일상으로의 초대’가 흘러나오면 득템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문득 생각합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누군가를 기다리겠구나.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같은 일을 시작하겠구나. 그리고 생각합니다. 저 간판이 삶이구나.

간판 아래서 울고, 웃고, 서로 격려하고, 무언가를 희망하며 부대껴 온 시간들. 처음 가게를 열며 어떤 이름을 붙일지, 어떤 글씨로 쓸지 고민하던 시간들. 이 모든 것이 일상이면서 일상 아닌 특별한 일처럼 다가왔던 시간들.

삶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난 삶을 위해 뭘 했나, 또 나는 지금 살아가고는 있는 건가?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또 이러네 하고 피식 웃고는, 그러니까 삶이지, 라고 하면서 스스로 답까지 해 버립니다.

곧이어 서생의 문제의식만 또 꺼내 드는구나, 푸념을 합니다. 내 처지로 치열하고 애달픈 삶의 현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나, 조금이라도 삶이 던지는 현실 의식을 가질 자격이 있나? 또 질문이 이어집니다. 역시 형이상학적입니다. 어릴 적 옆에서 보기만 했던, 그래서 곁눈질로만 인식했던 간접 체험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간판을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하셨던 그분.

내려야 할 곳에 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걷다가 또 간판을 봅니다. 이 습관이 얼마나 갈지는 모릅니다. 생긴 지 얼마 안된 습관이기도 하고. 요새 출퇴근하는 거리 주변은 제법 사람이 많고, 빌딩이 많고, 골목도 좀 있고, 월세도 센 곳입니다. 정기적으로 여기저기 근무지를 옮겨 다니는 처지이다 보니 8년이나 이 근처에서 간헐적 근무를 했습니다. 모습은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바쁘게 어딘가로 향하고, 누군가와 인사하고, 휴대전화로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며 걷는 사람들. 부쩍 경비가 삼엄해지고, 거리에 항의성 문구가 늘고, 확성기 소리가 커졌다는 정도의 변화는 눈에 띕니다.

팍팍하다. 이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걷다 보면 느끼게 됩니다. 종종 다니던 식당 네 곳이 사라졌습니다. 한 곳은 작은 식당이었고, 한 곳은 중간 정도, 두 곳은 큰 식당이었습니다. 작은 식당 주인과는 음식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강원도 막된장. 나올 때면 등 뒤로 흐르던 또 오라는 말이 아직도 선한데. 어디서 또 간판을 달았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어릴 적 봤던 모습이나 지금 겪는 현상이 참 비슷하게 와 닿습니다. 건물은 그 자리인데 간판은 올랐다 내렸다 바뀌어 갑니다. 누군가 들여놨던 주방 기기들, 식기들, 식탁들, 의자들이 간판과 함께 명멸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순히 간판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바뀝니다. 이곳에 근무하면서 요새처럼 한꺼번에 식당이 문을 닫는 일은 없었습니다.

상인들은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서생의 문제의식으로 상인의 현실을 바라봐서 그런 건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문제의식이 시작이겠지만, 해법은 현실에 있고, 결국 답은 몸을 부대끼는 시장에서 찾아야 합니다. 꼭 현장을 방문하고, 이해 당사자들과 모여 협의하고, 원만히 협의가 이뤄지도록 공감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지속합니다.

글을 다듬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네요.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주책없이 배가 고프다. 그게 삶이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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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인권유린과 발포 책임자, 집단 학살 등을 밝히기 위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이제야 가동하게 됐다. ‘5·18진상규명특별법’이 지난해 2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돼 9월14일부터 시행됐지만, 자유한국당이 자기 몫 위원 3명의 추천을 미루면서 넉 달이나 출범이 지연됐다. 법원에서도 허위사실로 판명난, 허무맹랑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극우 논객 지만원씨 추천 논란 때문에 그랬다니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한국당이 애초 진상규명 의지가 있기나 한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당이 뒤늦게 추천한 위원에도 극우세력의 주장을 대변해온 인사들이 주로 포함돼 우려스럽다. ‘월간조선’ 기자 출신으로 현재 도서출판 ‘자유전선’ 대표인 이동욱씨는 1996년 월간조선 4월호에 ‘검증, 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과장’이란 제목으로 검찰의 5·18민주화운동 재수사 결과 관련 언론보도가 과장·왜곡됐다고 주장, 5·18 관련 단체로부터 공개 사과 요구를 받았다. 차기환 변호사는 계엄군에 희생된 시민을 ‘시위대의 칼빈 소총에 맞아 죽은’ 사람으로 가짜 선동질을 해온 인물이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에서 위원으로 활동했으나 “고의로 조사위 활동을 방해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세월호 유족들은 그를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까지 했었다. 이런 극우 인사들이 ‘5·18 진실’을 밝히는 대의에 충실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세월호 특별조사위 때처럼 사사건건 진행을 방해하고 정쟁으로 몰아갈 저의라면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규명을 필요로 하는 진상이 수두룩하다.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성고문 문제가 38년이 흘러서야 공론화된 것에서 보듯, 아직도 가려진 진실이 많다. 진상조사위의 규명 대상에는 1980년 5월 당시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보안사의 5·18 왜곡·조작, 최초 발포 책임자, 헬기사격 명령자, 집단 학살·암매장 등이 올라 있다. 이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혀내야 ‘북한군 개입설’ 등 광주정신을 유린하는 터무니없는 선동과 궤변도 뿌리 뽑을 수 있다.

38년이 지나서야 진상조사위를 꾸렸다는 것 자체가 참담한 일이다. 미진한 수사권 등으로 한계가 없지 않지만 최대 3년의 시간이 주어진 만큼 이번에야말로 묻혀진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 ‘5월 광주’의 정의가 바로 서는 길이 열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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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우리가 서로 만나 결혼한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25년 뒤에 헤어질 것을 알았더라도 우린 결혼했을 것이다. 우리는 부부로서 함께 멋진 삶을 살았으며 부모로서, 친구로서, 벤처 프로젝트 파트너로서, 모험을 추구하는 개인으로서 앞으로 멋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우리를 표현하는) 단어는 달라지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며 소중한 친구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인 제프 베이조스 부부의 이혼 발표는 이랬다. 세상에 이렇게 ‘쿨’한 이혼 선언이라니. 3만4000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인 제프 베이조스와 부인 매켄지 베이조스가 지난해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해 나란히 포즈를 취한 모습. 세계 최고 부호인 베이조스가 9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결혼 25년 만에 이혼을 선언해 부인과의 재산분할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세상에 쉬운 이혼은 없다. 베이조스 부부도 상상하지 못할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일부 언론은 베이조스의 불륜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쿨’한 발표를 한 데 대해 혹자는 말한다. 결국은 돈 아니겠느냐고. 아내 매켄지가 받을 수 있는 위자료로 70조원 얘기가 나온다. 천문학적인 돈을 가지면 친권과 양육권, 상대에 대한 감정적 앙금 등이 모두 치유될까.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은 치열하게 법정 다툼 중이다.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도 이혼소송 중이다. 70조원까지는 안되겠지만 이들의 위자료도 50억~80억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일반인이면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이다. 돈이 있다고 모두가 ‘쿨’한 이별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단 부부 사이뿐일까. 심지어 직장도 그렇다. 20년 근무하고 나가면서 회사와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화려하게 영입됐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기업 간 전략적 제휴도 끝이 아름다운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북유럽은 좀 다른 것 같다. 이혼도 우리보다는 일반적이고 해직도 쉬워 보인다. 북유럽 사람들이 특별히 마무리를 잘하는 성향이라서 그럴까? 그보다는 제도를 주목한다. 북유럽은 계약관계가 촘촘해 책임소재가 명확하고 복지가 잘 마련돼 있어 새로운 선택에 부담이 없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어렵다고 ‘동거’를 선택하는 그들이다. 상대와 헤어진다고 생활이 궁핍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동·육아수당을 받으면 부담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다. 직장도 마찬가지. 취업과 실직은 명시된 계약서를 따르고 설혹 직장을 잃어도 실업급여가 충분해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

심리적인 요소도 있다. 혜민 스님은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연애가 깨질 때 우아하게 헤어지는 사람은 없다”며 “나란 인간도 엄청 치사하구나, 아주 못됐구나를 깨달아야 다른 완벽하지 못한 사람을 봤을 때 쉽게 손가락질하지 않게 된다”고 썼다. 부족한 나와 그동안 살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면 생각보다 ‘쿨’한 이별을 할 수 있다. 부족한 나를 20년간 써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면 회사와도 우아한 이별이 가능할지 모른다.

인사철이다. 신문 한쪽에는 승진자 명단이 가득하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축하 인사가 쏟아지겠지만 그 자리를 지켰던 선임자의 얘기는 없다. 승진자 명단에도, 부서이동자 명단에도 없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따로 연락을 취해볼까 생각하다가도 행여 실례가 될까 싶어 망설여진다. 회사랑 ‘아름다운 이별’을 못했을까봐 그의 주변 동료들에게 묻기도 조심스럽다. 사라진 그들이 머지않은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묵직해진다.

‘이 회사에서 함께한 시간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던 일이라 생각한다. 저는 나가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나의 가족이다.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자.’ 나는, 당신은 떠날 때 ‘쿨’한 퇴직 인사를 남길 수 있을까. 헤어짐에도 기술이 필요할 텐데 어디서도 배운 적 없다. 그래서일까, 헤어짐은 여전히 낯설다. 우아한 이별은 더더욱.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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