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콜롬비아는 커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남미 성장을 주도하는 국가로 지난 6월 OECD에 37번째 가입했음은 잘 알려지지 않았죠.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성장은 2016년 오랜 내전을 끝내고서야 가능했습니다. 내전은 폭력과 심해지는 빈부격차로 신음하던 농민들이 자위대를 구성하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초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으로 성장했죠. 길고 긴 내전이 이어졌고 20만명 넘는 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휴전 시도도 있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무장해제였습니다. 정부로서는 당연한 요구였지만 반군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무력은 이들을 정부가 심각하게 대화할 수밖에 없는 상대로 만든 바로 그것이니까요. 무력해제 후 정부가 말을 바꿀 수 있으니 협상은 어려울 수밖에요.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9월20일 (출처:경향신문DB)

콜롬비아의 산토스 정부는 혁명군에게 공간과 시간을 내줬습니다. 여기서 반군은 제한적 활동을 이어가며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지 지켜봤습니다. 동시에 반군이 콜롬비아 사회에 참여할 기회도 주어졌죠. 이런 점진적 방식 덕에 2016년 평화협정이 가능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들이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산토스 대통령의 후임자인 두케 대통령이었죠. 평화협상을 재검토하겠다고 공언한 그가 대통령이 되자 옛 혁명군들은 들썩이기 시작했죠. 전 혁명군 지도자 몇몇은 조직 재건에 나서고 있습니다. 내전의 기운이 다시 꿈틀대는 상황입니다.

북한의 사정도 콜롬비아 무장혁명군과 아주 다르지 않습니다. 평화를 원하지만 북한도 핵무기를 쉽게 내줄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하는 이유가 북한 핵무기가 이제 미국을 위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그러니 핵무기를 포기하는 순간, 북한은 대화 상대로의 전략적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핵화 이후의 미국을 믿을 수 있을까요? 불안할 수밖에요. 협상이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산토스 정부가 그랬듯이, 미국과 한국도 북한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을 줘야죠. 북한은 단계적으로 핵을 포기하고, 한국과 미국도 이에 맞는 조치를 하나씩 취해나가야 합니다. 비핵화 이후에도 우리가 공존의 길을 함께 걸으리라는 확신을 줘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평양 정상회담은 의미가 깊습니다.

동·서해선 철도·도로 연결,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정상화, 서해경제공동특구와 동해관광공동특구 조성 등 다방면 협력 강화 조치와 비무장지대의 확대, 비행금지구역 설정, 해상기동훈련 중지 등 군사 부문의 협약 모두 북한의 염려를 덜 수 있는 중요한 기재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복병은 한국에도 있습니다. 바로 자유한국당입니다. 이들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대북정책에 발맞춰왔습니다. 평화와 안정보다는 북한 핵무기 제거에 초점을 맞춰왔죠. 긴장 고조는 2017년 한반도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반북 멸공 이데올로기를 태생적 근간으로 하는 이들로서 사태 해결보다는 극한 대결을 추구한 결과였죠.

촛불정국에 꿇은 무릎도 잠시, 이들은 다시 2018년 평화 분위기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4월 판문점 회담 당시 당대표는 “위장평화쇼” “김정은이 불러준 대로 받아적은 것” 등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심지어 “다음 대통령은 아마 김정은이 되려는지 모르겠다”며 그들의 속내를 내보였죠. 원내대표는 ‘4·27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안’ 처리도 단칼에 거절했고 이번에는 “평양에서 점심으로 무엇을 드셨는지 모르지만 심각한 오류에 빠졌다”며 억지와 심술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답은 뻔합니다. 남북 인민이 다 같이 환영하는 오늘의 성과가 개성공단 닫히듯 황당하게 사라질 테죠. 우리는 다시 전쟁 위협과 외세 놀음에 휘둘리게 될 겁니다. 촛불혁명에도, 6월 지방선거에서도 정신을 못 차린 사람들이니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겠죠. 우리의 안위를 위해서 당장 항의 편지라도 써야 합니다.

다음 국회의원 선거는 2020년 4월15일. 앞으로 570여일 남았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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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을 상습적으로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연극연출가 이윤택씨(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가 1심에서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는 “이번 사건은 이씨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고, 소중한 꿈을 이루기 위해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들의 처지를 악용한 것”이라며 공소사실 대부분을 유죄로 판단했다. 이씨가 받고 있는 범죄 혐의가 무겁기도 하거니와, 기소 후에도 반성은커녕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해왔다는 점에서 당연한 판결이다.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으로 수사가 이뤄져 기소된 유명인사 가운데 첫 실형 사례라는 의미도 있다.

극단 단원들을 상습 성추행한 혐의(유사강간치상)로 구속기소된 연극연출가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오후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법원은 이 전 감독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하고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와 10년 동안의 취업제한을 명령했다. 연합뉴스

양형 못지않게 주목되는 것은 판결 내용이다. 재판부는 기존 성폭력 사건 판결과 달리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토대로 유무죄를 판단했다. 재판부는 ‘폭행·협박이 없었으니 강제추행이 아니다’라는 이씨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상황과 그(추행) 행위가 이뤄진 과정에 비춰볼 때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인 만큼 강제추행에 해당한다고 봤다. 또한 이씨 주장대로 설사 연기지도였다 하더라도 피해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가해자의 물리적 강압이나 피해자의 적극적 문제제기가 없었다 해도 성폭력 범죄가 성립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성폭력 당시 입은 상해를 넘어 우울증 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상해 범주에 포함시켜 유사강간치상 혐의를 인정한 것도 진일보한 대목이다.

이번 판결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온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투 운동은 일상 속 성차별 구조를 깨부수고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려는 변혁의 흐름이다. 재판부가 미투 운동의 이 같은 취지를 이해하고, 기울어진 권력구조에 의한 폭력을 세심하게 짚어낸 점을 높이 평가한다. 향후 유사한 성폭력 사건 심리에서도 중요한 선례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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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기억나는 얼굴이 있다. 순수하고 해맑은 평양 소녀의 얼굴. 까마득해라. 20년도 더 지난 일. 기자 출신 사진작가 임종진 샘이랑 가끔 만나곤 했는데, 북한에 다녀온 사진들을 교회에서도 전시하고 싶었다. 남녘 아재 아짐들이 평생 처음 소박한 북한 보통사람들 얼굴을 보게 되었다. “아그덜도 순허고 이삐요잉.” 뿔난 사람들은 없다는 걸 새삼 확인했던 전시였다.

우리 모두는 한때, 아니 지금도 김광석의 노래를 사랑한다.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그간 잊힌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날들이다. 잔뜩 찌푸린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본다. 광장에 함께했던 가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청중들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흐린 가을 하늘에 쓴 노래 편지였다. 이쪽 사람들은 이 말을 자주 한다. “조을라고 안 그라요.” “아따 조을라고 그라재.” 궂긴 일, 아픈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조을라고, 조을라고…. 곧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비나리를 한다.

한때 이런 제목의 책이 유행이었지. 거꾸로 읽기, 삐딱하게 보기, 급기야 ‘오랑캐로 살기’가 나오자 앗~ 이제 그만. 세상이 요지경으로 돌아가자 저항과 반항의 시대는 불길처럼 타올랐다. 지나고 보면, ‘조을라고’ 좋아지려고 그랬던 게다.

구름도 쉬어가는 땅. 북에선 개마고원, 남에선 진안고원. ‘조을라고’ 폭염이 괴로웠어라. 바람이 살랑살랑, 구름은 둥실둥실. 광산이나 산판 벌목공들이 산 위에서 땀을 식힌다. 계단밭에는 짚으로 죽을 쑤어 먹은 소들이 보인다. 소녀가 입은 치마처럼 푸른 하늘 아래 염소가 뛰논다. 빨간 목도리 같은 홍시와 능금밭. 흐린 날에는 우산을 들고 나가는 것처럼 당신이 내 곁에 있어만 준다면 겨울이 와도 끄떡없으리. 손 저리도록 감사납고 뼈아픈 일 닥친 대도 기억하세요. 좋아지려고 그런다고. 어금니를 물고 참고 견디다보면 그렁그렁해진 당신의 눈에 무지개가 피어난다. 눈뿌리가 아득해도 머잖아 좋은 날 꼭 보리라 믿으며, ‘조을라고 조을라고’를 반복해본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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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총천연색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을 생중계하는 TV는 평양 거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였다. 연도를 메운 한반도기와 꽃술, 초록 가로수, 높다란 빌딩은 청량한 가을 하늘과 대비를 이뤘다. 뚜껑 없는 차에 올라 시가지 카퍼레이드를 한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의 발전이 놀랍다”고 말했다. TV에 비친 평양은 계획 신도시이다. 한국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섰다. 그러나 오래전 평양은 고대 왕조의 수도였다. 수천 년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였다. 전쟁은 도시의 역사까지 앗아갔다. 평양에서 온전한 유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시가지에서는 더욱 그렇다.

평양은 고조선의 도읍이었다. 이름은 대동강변의 ‘평탄하고 넓은 땅(平壤)’에서 따왔다. 요동 벌판에 있던 고조선의 수도 평양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는 설도 있다. 대동강변의 평양이 고조선의 초기 수도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자 조선, 또는 고조선 후기의 수도는 평양이다. 기자는 평양에서 고대의 조세제도인 정전법을 실시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평양지도에는 정전제에 따라 토지를 구획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기자의 영향은 ‘기성(箕城·평양의 다른 이름)’, ‘기자궁’ 등에 남아 있다. 옛날 평양에는 버드나무가 많았다. 주민의 성격이 강하고 사나워 버드나무를 심어 부드럽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양을 류경(柳京)이라고도 한다. 류경호텔과 류경 정주영체육관, 버드나무 거리 등에 흔적이 남아 있다.

18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평양시내로 향하는 거리에 시민들이 꽃을 흔들며 문재인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다. 서성일기자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할 때, 평양은 별도(別都)로서 반도의 중심 도시 역할을 했다. 장수왕의 천도로 다시 수도가 되었다. 장수왕은 안학궁을 짓고 대성산성을 수축했다. 이때 평양성의 기틀이 만들어졌다. 평양 인근의 고구려 고분군과 동명왕릉은 이 시기의 유적들이다. 평양의 진산은 금수산이다. 모란봉으로도 불리는 산의 정상에 을밀대가 있다. 평양성을 지킨 고구려 을밀장군의 전설에서 딴 이름이다. ‘을밀대의 봄놀이’는 평양팔경의 첫째로 꼽힐 정도로 유명했다.

대동강 강물이 평양으로 흘러들면서 펼쳐놓은 섬은 능라도이다. 비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섬 중심부에 북한 최대의 종합경기장 ‘5·1경기장’이 있다. 문 대통령이 집단체조공연 ‘빛나는 조국’을 관람했던 곳이다. 대동강을 끼고 있는 평양은 누정의 도시이다. 부벽루, 연광정, 함벽정, 읍호루, 풍월루 등이 있었다. 많은 정자와 누대가 전란으로 사라졌다. 살아남은 정자 가운데 연광정과 부벽루가 가장 유명하다. 평양 내성에 붙어 있는 연광정에는 ‘천하제일강산’을 비롯해 크고 작은 현판과 주련이 걸려 있다. 대동강의 바위절벽 청류벽 위에 서 있는 부벽루는 평양의 대표 누정이다. 평양을 찾는 문인들은 반드시 이들 정자에 올라 시를 지었다. 부벽루에 걸려 있었다는 고려 문인 이색의 시 ‘부벽루에서’는 절창으로 꼽힌다. 조선시대 평안감사가 부임하면 이곳에서 환영 연회가 열렸다. 김홍도 등 여러 화가가 연회 모습을 ‘평안감사연회도’에 담아냈다. 일제강점기에 쓰인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의 무대도 대동강 부벽루이다.

풍류도시 평양은 조선시대에 손꼽히는 유람처였다. 조선시대 평양이 지방관의 부임지로 인기가 있었던 것은 대동강의 풍류 놀이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만들어졌다.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행단이나 한양으로 오는 명·청 사신들은 반드시 평양에서 하루나 이틀을 머물렀다. 각종 연행록에서 평양 일지는 빠지지 않는다. 명나라 사신 동월의 기행문 &lt;조선부&gt;는 평양의 산천과 풍속을 자세히 담고 있다. 단군이 평양에서 개국했다는 내용과 함께, 기자의 사당에 ‘고조선의 두 번째 시조’라고 쓰인 나무 신주를 모셨다는 등의 고조선의 사적을 기록한 게 인상적이다.

일제강점기에도 평양 여행은 인기였다. 지식인들은 고구려의 향수를 간직하고, 기독교와 서양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개화된 도시라는 평양의 매력에 끌렸다. 일본은 낙랑군의 옛터이고 청일전쟁 승전지라는 타율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평양 관광을 부추겼다. 막 개통된 경의선은 근대의 표상이 된 철도 여행을 자극했다. 박은식, 최남선, 이광수, 양주동은 여행기를 통해 평양의 과거와 미래를 그려냈다. 9월 평양공동선언에는 문화 및 예술분야의 교류 증진도 포함됐다. 앞서 문화재청은 오는 27일부터 개성 만월대를 공동 발굴한다고 발표했다. 정상 간의 합의로 남북 문화 교류 협력은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고구려 왕릉, 벽화, 누정 등 남북이 함께 연구하고 조사할 내용은 차고 넘친다. 역사 유산을 자랑하는 평양의 가능성은 무진장이다. 평양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역사문화 도시로 태어날 날도 머지않았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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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전 세계가 철도 부활시대를 알리면서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고 있고, 21세기 철도의 방향은 기술발전과 경영발전으로 나아가야 함에도 불구, 제자리걸음이다.

우리 KTX의 모체가 된 프랑스 테제베의 성공요인은 중간정착역의 폐지에 있다. 그러나 최근에 개통된 강릉 KTX를 보면, 서울역, 청량리역, 상봉역, 양평역, 만종역, 횡성역, 둔내역, 평창역, 진부역 그리고 강릉역에 도착한다. 당초 58분 만에 서울과 강릉을 연결시키겠다는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1시간40분이나 걸린다. 고속철이 아니라 ‘저속철’이다. 출퇴근시간을 포함해 일부 시간대에는 서울을 출발해 일부 역을 제외하고 강릉역에 올 수는 없는 걸까? 지금 강릉에서는 차라리 무궁화호 열차나 ITX 열차를 투입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서울∼강릉을 연결하는 경강선 KTX

더 이상한 건 시작역이 청량리역이라는 데 있다. 출발은 서울역에서 하는데, 서울역에서 승객을 태우지 않고 청량리까지 빈 차로 온다. 열차별로 시·종착역이 달라 고객의 혼동과 불편이 발생한다. KTX 강릉선 활성화를 위해 하행선 출발역을 서울역으로 일원화해야 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하루 평균 2만6000명이 강릉선을 이용했는데, 폐막 이후 9154명으로 급감했다. 특수 요인을 감안해도 수요가 너무 준 것은 비효율 때문이다.

강릉 KTX는 주말과 일부 시간대를 제외하곤 좌석 점유율이 저조하다. 코레일은 4인에 5만원짜리 티켓을 만들어 ‘덤핑판매’를 하는데, 이는 월정기권 이용자들의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1인당 편도 가격 1만2500원을 지불한 ‘넷이서 5만원’ 승객들을 위해 월정기권 승객은 한 달에 50만~60만원을 지불하고도 자리를 내주는 실정이다.

이번에 코레일이 내놓은 정기권 개선안을 보면 소비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있다. 정기권 이용객의 불만은 대학생들의 주중 수업일수를 고려해 주 5일치를 다 내지 않고 주 3일이나 주 4일치만 선택해 탈 수 있는 월정기권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11일권 등과 주말 이용 확대를 개선안으로 내놓은 것은 불통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열차의 강릉 도착시간도 문제가 있다. 출근시간대에 오전 8시3분과 오전 9시6분이 있다. 강릉은 지역이 넓지 않아 15분 정도면 시내 어디든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오전 8시30분에서 45분 사이에 도착시간을 맞추는 것이 정상인데, 관광열차용 시간표를 적용시킨 것이다. 주민들이 30년을 기다려 온 경강선 열차인데, 배차시간표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코레일은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철도운영사가 코레일과 SR 같은 2개의 회사로 이원화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원화로 차량운영의 비효율성 증가와 중복비용이 발생하는데, 국민들이 비싼 요금으로 이를 부담하고 있다고 본다. 국민편익 증진과 철도공공성 강화를 위해서는 코레일과 SR의 통합이 필요하다.

나아가 KTX 가격 인하는 좌석점유율을 제고하는 방향에서 도모하되, 공공성을 고려해 추진돼야 한다. 즉, 노인 등의 공공할인을 정기권을 포함한 다른 할인과 중복이 가능하게 하여 연령별 인구변화에 적극 대처할 필요가 있다. 또 프랑스처럼 KTX 예약 좌석권을 만들어 유효기간이 긴 기본 열차승차권과 별도로 운영하면 좌석점유율 제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홍창의 가톨릭관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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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업은 땔감 장사입니다. 이번 매서운 겨울 추위에 땔감을 지고 나르던 튼튼한 소가 갑자기 빙판에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조선 후기의 공문서 서식 모음이자 공문서 작성 참고서인 <유서필지(儒胥必知)>의 한 대목이다. 민원인은 “우러러 호소”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소를 잡게 해달라는 것이다. 관아는 다리 부러진 소는 잡되, 가죽은 관아에 바치고 고기는 팔아 송아지를 사라고 처분한다. 바로 뒤로 아픈 사람을 위해 소를 잡게 해달라는 청원서가 예시되어 있다. “의원은 ‘반드시 우황을 복용하고서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금(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의 세 가지 법은 실로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라 감히 우황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금은 소 도축 금지령이고, 주금은 금주령, 송금은 벌목 금지령이다.

전통사회에서 소는, 농업용 축력으로 우선 중요했다. 미식은 도축의 명분이 될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관혼상제 및 공인된 행사용 음식, 군대와 병자를 위한 특별식 또는 약용을 명분으로 소를 잡아 유통할 수 있었다. <유서필지>가 대변한 엄격한 우금은 명절을 앞두고는 풀렸다. 사람들은 명절에 자유로이 소고기를 사 맛나게 먹었다. 그 귀한 고기 한 점, 법의 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으리란 기대가 명절 분위기의 핵심이었을지 모른다. 으뜸가는 고기는 소고기였지만 안되면 닭이나 개라도 잡아 고기 냄새를 맡으려 들었다.

하지만 금령은 금령일 뿐이다. 양반과 부자는 우금을 우회할 명분을 어떻게든 찾았다. 이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 김려(1766~1822)의 서사시 <고시위장원경처심씨작(古詩爲張遠卿妻沈氏作)>에는 김제의 백정 일가가 등장한다. 차곡차곡 부를 쌓아 큰아들은 읍내에 가게를 냈고, 막내아들은 푸줏간을 운영한다. 둘째는 양(소의 위)을 다루는 달인이었다. 도축에 따른 공임이 동전 스무 닢, 정형을 해주면 정형하면서 나온 고기에서 한 근을 떼어 받았다. 틈새의 정경을 김려는 이렇게 읊었다. “평소에는 백정을 사람으로 치지 않다가, 급하게 고기가 필요하면 은근히 부른다네.” 도축으로 모은 돈으로 백정 부자는 막내를 가르쳤다. 이 집 막내딸 방주는 네 살에 산수, 일곱 살에 한글, 아홉 살에 천자문을 배워 깨친다. 열 살이 되자 양반가 여성의 교양인 가사를 읊는 데 이른다. 소고기가 교양 있는 여성을 하나 길렀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다시 고기로 돌아오자. 당시 고기의 대명사는 소고기다. 백정 일의 중심도 소 도축, 발골, 정형, 유통에 있었다. 그런데 살코기만, 뚝 떼서는 장사를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소를 고기소로 키우지 않았으니 가장 부드러운 부위는 역시 양이라든지 갈비다. 배합사료의 시대가 아니니 고기의 결은 분명하고 단단하다. 그러니 전통 사회에서는 방주네 둘째 오빠의 예처럼, 양과 같은 내장을 잘 다루는 푸줏간이 인기가 있게 마련이다. 양뿐인가, 그 위로 천엽, 그 아래 창자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양은 국거리인가 하면, 삶아 무치면 일품요리가 되었다. 천엽은 으뜸가는 전감이었다. 염통, 허파, 간, 콩팥, 등골도 귀중한 식료였다. 꼬리는 깊은 맛을 내는 국물용으로 최고였다. 우족의 젤라틴은 고급 일품요리인 우족편으로 변신한다. 소머리고기뿐 아니라 골수까지 먹어치웠고, 사골과 온갖 부위가 어울린 설렁탕, 선지를 활용한 해장국도 한 마리 다 먹는 음식 상상력을 잘 보여준다.

갈비는 탕과 찜과 구이용으로 가장 인기 있는 부위였고, 등심살은 말하자면 가장 이른 시기의 불고기 부위이다. <규합총서>에는 등심살을 넓고 길게 저며 도톰하게 손질해 칼로 자근자근 두드려 잔금을 내, 꼬치에 꿰어 기름장에 주물러 굽는 설하멱적이 등장한다. 부드러움을 배가하고, 양념을 잘 배게 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소의 창자·선지, 소고기로도 순대를 만들었다. <주방문> 속 순대 제법은 이렇다. 소 살코기에 간장, 새우젓국, 후추를 쳐 삶는다. 소의 대창을 뒤집어 깨끗이 씻고, 선지가 엉기기 전에 밀가루와 물과 매운 양념을 섞어 대창에 넣어 삶는다. 방법마다, 오로지 붉은 정육만 떼 구이 일변도로 먹는 오늘날에 견주어 훨씬 풍부한 식생활이다. 어렵게 얻은 고기, 남김없이 잘 먹자는 시도 안에 풍성한 조리의 상상력이 넘실댄다. 명절 앞두고 연 소고기, 소고기 음식 관련 문헌에서 정말 확인할 것이 다만 옛날이야기가 아님이 새삼스럽다. 정말 눈에 차는 것은 잠복한 상상력이다. 옛사람들이 고기라는 식료에 들인 조리와 미각의 집중력이다. 오늘 발현시킬 만한 미각 감수성이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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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만에 오셨군요. 모니터링 데이터나 어제 받으신 건강검진 결과는 아주 좋아요. 물론 그걸로 모든 걸 알진 못합니다.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고 장기 활동과 호르몬 분비가 정상이라는 건 확인해주지만요.” 상담사가 성호와 태블릿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검사복을 제외한 옷과 장신구는 전부 벗어두고 오셨죠?” 성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담사가 책상 위의 제어판을 두드렸다. 작은 작동음이 들렸고, 검사실 문이 저절로 잠겼다.

“제 자격증은 언제든지 온라인에서 확인하실 수 있고요. 이 검사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각이 없는 CCTV로 완벽하게 녹화됩니다.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해서 녹화된 영상은 고객분께 지급된 암호키가 없으면 누구도 재생하거나 편집할 수 없습니다.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요. 그럼 팔과 다리에 힘을 빼시고 일어서서 검사복을 벗어주세요. 하나씩 해볼게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제 건강검진은 예전보다 훨씬 쉽고 편해졌다. 그보다는 몸의 일부처럼 작동하는 각종 전자장치들을 제거하는 과정이야말로 성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입을 자연스럽게 벌려주세요. 어디 보자, 우측 상악에 이너마이크가 있군요. 분리형이니 꺼낼게요. 좌측 어금니에 있는 구취 제거 약물 분사기도 분해할게요.” 신체 기구 상담사는 성호가 제출한 목록을 확인하며 익숙하게 지시했다. 귀를 드러내고 고개를 숙여라, 겨드랑이를 볼 수 있게 팔을 들어라, 양다리를 벌려라. 그럴 때마다 성호의 몸에 붙어 있던 전자장치가 하나씩 제거되었다. 성호의 목록에는 총 11개의 전자장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자, 이제 뇌파 채팅 중계기와 시각효과 부속품들을 몸에서 뗄 겁니다. 소통차단증후군은 없으시다고 하니 걱정 안 해도 되겠죠? 심하게 겁이 나거나 공황 상태가 올 것 같으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성호의 눈 위에 덮여 있는 전자렌즈에는 채팅창 여섯 개가 동시에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들이 동시에 사라지고 뇌파 채팅용 인터페이스 아이콘들까지 전부 자취를 감췄을 때, 온몸에서 식은땀이 스며나오고 턱이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 기절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 정도면 아주 양호한 편이에요. 요즘 워낙 여러 제품을 몸에 달다보니 사용자 본인도 잊는 경우가 있거든요. 확인 좀 해볼게요. 아, 역시 하나 더 남았군요. 제거하고 나서 목록에 추가해드릴 테니 저장해두세요. 자, 끕니다.”

갑자기, 세상이 활기를 잃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성호가 비틀거렸다. 검사실 안에 생물이라고는 상담사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의자와 책상과 검사장비가 모조리 죽었다는 생각이 성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너무나 적막한 세상 속에서 성호는 자신이 혼자라는 점을 더없이 강하게 자각했다.

상담사가 마지막으로 귀에서 뽑아낸 것은 24시간, 365일 힐링용 음악을 아주 작게 재생해 안정적으로 살아가게 해준다는 마이크로 수신 모듈이었다. “다 됐습니다. 자, 이쪽으로 누우세요. 전자장치들이 적법한지, 서로 간섭은 없는지 검사하려면 두 시간 정도 걸려요. 주무셔도 돼요. 제가 깨워드릴 테니까요. 검사복 입으시고 마음 편히 계세요.” 성호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깨끗한 침대 시트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켜쥔 채 몸을 눕혔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성호는 채팅 동반자 52명과, 힐링 음악과, 뉴스 채널과, 24시간 연예 방송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관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담사가 전자장치를 전부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다시 살아날 거라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첨단기술 상당수는 군용으로 개발되었거나, 군사기술 개발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전쟁이 인류 최악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개발 의도가 불순하긴 하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 삶에서 비중을 점점 늘려가는 인터넷도 근원을 따라가면 군용 통신망과 맞닿아 있다.

포스트 휴먼, 즉 첨단기술을 이용해 한계를 극복하거나 능력을 확장한 미래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정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영화, 과학 기사, 신제품 개발 소식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은 해볼 수 있다. 특히 신제품 개발 소식에 간간이 등장하는 군용 연구제품들이 좋은 단서가 되기도 한다. 최근 양손을 모두 쓸 수밖에 없는 극한상황, 이를테면 화재 진압이나 군사작전 시에 사용 가능한 전화가 선을 보였다. 통화용 마이크 부분은 입속 어금니에 걸친다. 외관으로 보아서는 착용 여부를 알 수 없고 대화에 방해가 되지도 않는다. 무선으로 연결된 수신부는 달팽이관과 연결되어 진동을 소리로 바꿔준다. 이 기기는 더욱더 작아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기기는 결국 몸에 부착되거나 몸 안으로 이식되지 않을까 싶다.

신기술과 필요성은 끊임없이 되먹임을 주고받는다. 필요성이 대두되면 기술이 충족시키고, 새 기술이 능력을 보여주면 없던 수요가 생긴다. 개인방송이 점점 늘어나고, 사회관계망서비스가 정말로 ‘사회’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현상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그 현상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장비는 아직까진 우리 몸 ‘바깥’에 있지만, 요구가 많다면 마침내 우리 몸 안에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 휴먼이 살아가는 모습과 그가 느끼는 유대감도 결국 기술과 존재 양식이 하나가 되어버리는 지점에 나란히 서지 않을까? 그러면 꿈같은 능력만 과장할 것이 아니라 새 부작용과 문제점까지도 새 기준으로 판단할 자세가 꼭 필요할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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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획책한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들은 국명을 ‘길리어드’라 바꾸고, 신정주의·전체주의·가부장제에 기반해 나라를 운영한다.

이곳에선 책이 사라진다. 화장품, 대중영화, 개성 있는 의상같이 쾌락을 주는 물건들도 찾을 수 없다. 공개처형이 부활해 가톨릭, 퀘이커 등 ‘이교도’의 시신이 거리에 내걸린다. 인간은 오직 신의 뜻, 혹은 신의 뜻이라고 가장된 국가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길리어드에서 특히 영향받은 건 여성들의 삶이다. 길리어드는 주변국들과의 오랜 전쟁, 환경 오염 등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 길리어드에는 소수의 남성 ‘사령관’과 그들의 아내가 있다. 아내는 대부분 불임이기에, 조금이라도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은 사령관의 집에 ‘시녀’로 배속된다. 시녀는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을 잊은 채 ‘오브프레드’(‘프레드’의), ‘오브글렌’(‘글렌’의)처럼 사령관의 성(姓)을 이름으로 받고, 사령관의 아이를 임신할 의무를 지닌다. 물론 이 섹스엔 조금의 쾌락도 개입되어선 안된다. 사령관과 시녀의 섹스는 지금껏 그 어느 소설이나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기괴하다. 아내가 침대 머리맡에 사지를 벌린 채 자리하면 시녀는 그 다리 사이에 눕는다. 아내는 시녀의 두 손을 잡아, 두 여자가 하나임을 보여준다. 두 여자 모두 옷을 차려입었고, 시녀는 속옷만 벗은 상태다. 사령관은 시녀의 하반신 쪽에 자리해 할 일을 한다. 세 번의 기간 내에 임신하지 못하면, 시녀는 다른 시녀로 대체된다.

오랫동안 서가에 꽂아두고 잊고 있던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1985년작 SF <시녀 이야기>를 마침내 읽은 건 하나의 단어, 하나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단어는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언급한 ‘출산주도성장’이다. 출산주도성장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대안으로, 아이를 낳으면 출산장려금 2000만원, 성년까지 1억원의 수당을 주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각종 복지 수당을 ‘포퓰리즘’이라며 반대하던 자유한국당이 입장을 바꿔 의아하고, ‘돈 주면 애 낳을 것’이라는 발상이 당황스럽다. 

이미지는 현실 세계에 나타난 ‘시녀’와 관련 있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시녀 이야기> 속 시녀의 의상을 입은 여성 시위대가 세계 곳곳에 출현했다. 이들은 텔레비전 속 시녀 의상 그대로, 빨간 외투에 하얀 두건을 썼다. ‘시녀 시위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 앞에 나타났고, 영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반대했다. 아일랜드와 아르헨티나에선 낙태권 관련 시위에 등장했다. 시녀들은 때로 정치인과 법률가들이 자리 잡은 의회의 방청석에 나타나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소설 속에 묘사된 대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침묵했으나, 검은 양복의 남성들 사이에 채도 높은 빨간 의상만으로도 눈에 띄었다. 여성 문제, 특히 낙태 관련 이슈를 제기하는 데 있어서 ‘시녀 복장’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됐다. 

지난달 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텔레비전 시리즈 ‘시녀 이야기’ 속 ‘시녀’ 복장을 한 시위대가 낙태권에 찬성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소설 <시녀 이야기> 속 아이 낳을 수 있는 여성은 ‘다리 둘 달린 자궁’이자 ‘아기를 담는 그릇’ 취급을 받고, 아이 낳을 수 없는 여성들은 ‘비여성’이라 불린다. 가임 여성은 워낙 적어 귀하게 여겨지지만, 그들은 인간이기에 귀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귀하다. 여성의 출산 능력은 여성 개인의 행복이나 의지가 아니라, 국가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된다. 일찌감치 애트우드는 ‘애 낳아서 애국하자’는 주장이 횡행하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상상하고 경고했다. 33년이 지나 들려온 ‘출산주도성장’이란 해괴한 어휘엔 <시녀 이야기> 풍의 끔찍한 세계관이 깔려 있다. 김성태 의원의 제안이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것이라 애써 이해한다 하더라도, ‘출산주도성장’이란 발상에는 그 어떤 여성도 국가경쟁력이나 경제성장을 생각하며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는 당연한 상식이 빠져 있다.

가녀리고 존귀한 생명의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즐겁고 보람있다. 부모의 단점과 장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와 함께 한 삶을 보내는 것은 우주의 순환을 체험하는 것처럼 경이로운 일이다. 젊은 여성과 남성들이 이 기쁨을 포기하지 않도록,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라의 일이다. 냉소적으로 말해, 젊은이들이 생명체의 근본 목적인 출산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회의 존속가치가 청산가치보다 크다고 할 수 있나.

붉은 복장의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낙태권 찬성론자는 말했다. “아이는 그 자체로 선물이지만, 자유롭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이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온전히 부모의 선택과 기쁨을 출발선으로 삼아야 한다. 국가는 빠져달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달라.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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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은 소란했다. 강은 곳곳에서 파헤쳐졌고,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내쫓겼다. 남쪽 바닷가 도시에서는 크레인에 오른 이가 몇 달째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싸우고 있었다. ‘철회’를 외치는 이들의 싸움은 절박했기에 쉬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강이든 철거하는 데는 이골이 난 이들은 철회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잃을 게 많았다.

그해 곳곳에서 벌어진 싸움은 더는 잃을 게 없는 이들과 잃을 게 많은 이들의 싸움이었다. 그러니 당장 내쫓긴 처지가 아니더라도 길에 함께 나서야 했다. 언젠가는 잃을 게 많은 이들이 나를, 내 가족을, 내 친구를, 내 이웃을 벼랑 끝으로 내몰 테니까.

그 여름, 어린이책 작가들이 길에 나서 겨우 한 일은 해고노동자 가족들에게 책을 보내주는 거였다. 책 한 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얼마나 무용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거라도 해야 우리가 함께 서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들은 모아온 책에 책을 받을 아이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적고 간단히 인사말을 썼다. 그때 해고노동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해줬다.

쌍용자동차 최종식 사장이 13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마련된 쌍용차 해고노동자 故 김주중씨 등 30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분향소에서 조문한 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족에게 보내는 책은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엄마나 아빠를 잃은 아이들이 있거든요.”

그의 말에 작가들은 모두 망연한 얼굴이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면서도 그가 남긴 가족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작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나 아빠를 따라온 아이의 책에 서명해줄 때 으레 엄마와 함께 읽으라고 적었다는 작가는 자신이 서명한 책들을 다시 들춰봤다. 한 작가는 말했다. 우리가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냐고.

며칠 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전원 복직 기사를 보면서 그해 여름이 떠올랐다. 세상은 해고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되돌려준 것으로 끝났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빼앗긴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아빠를, 엄마를, 가족을, 희망을 빼앗겼다. 그들의 깊은 아픔과 절망은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 시간을 철회할 수 없다면, 이제라도 책임은 져야 한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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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고위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를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한다. 어원은 닭의 볏(noblesse)과 계란의 노른자위(oblige)인데, 닭의 사명은 볏을 내세우는 데 있지 않고 계란을 낳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

2007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설립한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기부자들의 업종 분석 통계(2015년 기준)에 의하면 기업인 45.8%, 익명 포함 기타직종 29.4%, 전문직 12.9%, 자영업 4.5%, 법인·단체임원 3.5% 순으로 나타났다. 또 유가족이 고인의 이름으로 유산 일부를 기부하는 아름다운 기부사례도 있다.

빌게이츠. 로이터 연합뉴스

반면, 우리나라의 지도층인 정치인의 기부문화 참여도는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낮다. 영국의 경우 1·2차 세계대전 중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명문학교인 이튼 칼리지 출신 2000명이 전사했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인 앤드루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했다. 또 미국 기업가인 빌게이츠는 올해 5000여억원을 저소득층 학생들의 교육비로 통 큰 기부를 했다. 그들은 “권한이 채권이라면 기부는 채무다”라는 인식을 가진 사회지도층으로서 아름다운 기부의무를 다했다.

주먹을 쥐고 집게손가락을 앞으로 내밀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가슴을 향해 모으면 권총모양의 손가락이 된다. 이를 빗대어 한 가지라도 먼저 주면 네 가지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게 이른바 ‘권총의 법칙’이다. 청정한 일급수 정치문화의 젖줄인 정치후원금 기부를 유권자들로부터 바라기 전에 정치인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먼저 선행을 베푸는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진정한 나눔의 문화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심재훈 | 부산진구 초읍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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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 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 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問),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자네는 어느 대학을 나왔나?” “왜 아직도 취직을 못했나?”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인권 침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에 노출되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상대는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하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것이 평생의 화두여야 한다.

당연시되고 고착된 질문은 폭력이다. 가장 괴로운 질문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일 것이다. 고문이 대표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질문은, 가해자(피의자)에게 할 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경우다. 성폭력 범죄가 그것이다. 조사를 가장한 피해자 비난, 여론 재판…. 유아 성폭력이거나 가해자가 여러 명인 사건을 제외하곤(?) 피해자가 질문에 시달린다. 피해자는 목숨을 건 저항 여부나 거절이 얼마나 단호하고 절절했는지, 특히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 최대한 증명해야 한다.

1991년부터 성폭력특별법이 제정, 개정되는 과정에 참여해온 나는 전 충남도지사 사건을 통해 법정에서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7년이다. 게다가 올해 봄, 들불과도 같았던 미투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의 동의와 저항에 관한 질문은 집요하다.

이제는 동의, 저항 여부 자체가 쟁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에게 질문하자. 절도나 사기사건, 즉 다른 형사사건의 피해자에게 성폭력 피해자만큼 질문하는가? 아니, 사건 발생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일단, 법정은 가해 용의자에게 질문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궁금한 것이 너무 많고, 뭐든지 질문해도 된다는 권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아는 가정폭력 피해자는 40년 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환갑에 이르러 이혼 소송 중이다. 처음에는 데이트 폭력으로 시작됐다. 주변에서는 모두 결혼하면 나아진다, 아들이 있으면 그만둘 것이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아이가 결혼하고 손자를 보면… 결국 그녀는 스무 살에 만난 한 남성에게 평생을 구타당했다.

문제는 “고쳐진다”는 통념을 수용한 피해 여성이 남편의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등 상황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통념과 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왜 때린 사람과 결혼했느냐, 왜 경찰에 신고를 안 했느냐,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는데 왜 이제야 이혼하려고 하느냐, 혹시 다른 이유(돈,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피해 여성이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사자마다 다르고, 제3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는 이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운동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성별 권력관계는 더욱 그렇다.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노동을 시켰습니까? 왜 해외 업무에 동반했습니까? 왜 평소엔 여성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과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했습니까?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폭력과 관련한 질문 내용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시각에서 구성한 것이다. 위력의 행사가 자연스럽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가해자의 행동이 궁금하지 않다. 대신 피해자의 대응이 의문시될 뿐이다. 피해와 피해 이후의 심문. 약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법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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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장관님과 맞닿을 길이 없어 공개 청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해 정부예산에 예술인복지금고 100억원이 책정되었다는 소식에 너무 기뻤습니다. 예술인이 주인의식을 갖고 요구할 수 있는 금고가 생긴 것이라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예술인들은 창작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직장이 없는 베짱이 취급을 받아서 재직증명서도 없고, 고용보험도 없기에 제도권 안에서 실시되는 모든 서비스의 대상자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되었을 때 장애예술인들은 이제야 숨통이 트이겠구나 싶었지만 예술인증명제도라는 높은 벽이 가로막혀 있어서 가슴을 치며 돌아서야 했습니다. 우리들만의 법을 만들어야겠다 결심하고, 장애예술인지원법률을 2016년 11월에 발의하여 2017년 11월에 국회 교문위에서 공청회를 열었지만 그때 의원님들이 하나같이 장애예술인이 몇 명이며, 장애예술인 창작 활동의 수준을 신뢰할 수 없다는 지적을 하시어 피눈물을 흘리며 공청회장을 나왔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장애인예술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분들이니 평가 또한 야박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부터 장애예술인 창작 수준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일정 기준을 갖춘 장애예술인의 경력을 제시한 ‘장애예술인수첩’을 만들었습니다. 수첩에는 343명의 개인과 82개 장애인예술 단체에 대한 예술 활동이 기록돼 있는데 수첩 등재 장애예술인들을 분석하여 아주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장애예술인의 데뷔 방식은 공모입상이 62%로 정상적인 양태를 보였고, 비장애인들과 경쟁하는 일반공모도 56%나 되어 실력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대학졸업 학력 장애예술인이 50.4%로 2015년 예술인실태조사에 나타난 예술인의 대졸 학력 58.0%와 별 차이 없다는 것으로 설명이 될 듯합니다.

이제 장애예술인 인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박사학위 논문에 의하면 장애예술인을 적게는 1만여명 많게는 5만여명이라고 추산하였는데, 활동하고 있는 장애예술인은 1만여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수첩을 만들기 위해 적어도 1000여명과 통화를 하였는데 한동안 언론에서 주목을 받던 장애예술인들이 먹고살아야 하기에 활동을 접었다고 하면서 기회가 되면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며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바네스는 소수자 예술 활동이 주류 사회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장애예술인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희한테도 기회를 주십시오. 343명 모두 예술인증명제도로 예술인이라는 자존감을 갖게 해주십시오. 우리 장애예술인들에게도 발표의 기회를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장애예술인의 일자리 창출입니다.

<방귀희 |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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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집권이든, 연속집권이든 정권을 오래 갖고 싶어 하는 건 정당의 속성이겠다. 특히 집권당이 ‘잘 나갈 때’ 정권연장의 꿈은 구체성을 띠고 나타난다. ‘지리멸렬한 야당’은 그 꿈을 북돋는 자양이다.

박근혜 정권 초기 등등하던 집권당(새누리당)의 홍문종 사무총장은 “민주당 하는 꼴을 보니 저들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는가. 우리가 20년은 더 집권해야 한다”(2013년 10월)고 말했다. 대선 패배의 수렁에 빠져 있는 야당을 대놓고 ‘모욕’하며 장기집권론을 질렀다. 야당인 민주당은 격앙했다. “국민을 무지몽매하게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망상이며, 장기집권·유신독재의 부활 획책”이라고 반발했다. 당시 10년, 20년 집권을 운위하던 박근혜 정권의 처참한 몰락은 목도한 대로다. 새누리당은 이름까지 바꿔야 했다.

분명 환경은 다르지만, 이번에는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장기집권론을 외치고 있다. ‘20년 집권’을 기치로 여당 대표에 오른 이해찬 대표가 깃발을 들었다. 여의도 최고의 전략통으로 꼽히는 이 대표가 장기집권론의 ‘역풍’을 모를 리 없을 터이다. 명분도 분명하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으로 정책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불과 2, 3년 만에 뽑히는 걸 경험했다. 20년은 집권해야 정책이 뿌리 내려 정착이 된다.” 지지층에 보내는 메시지가 강렬하다. 이번에도 야당은 펄펄 뛴다. 자유한국당은 “국민에 대한 모욕이자, 영구집권의 길로 가고자 하는 야욕”이라고 비난한다. 여당발 장기집권론에 대한 야당의 반발 메뉴는 이리 닮았다.

20년도 모자랐는지 이번에는 ‘50년 집권론’이 나왔다. 이 대표는 민주당 창당 기념식에서 “앞으로 민주당이 대통령 열 분은 더 당선시켜야 한다”고 했다. 전략이야 따로 있겠지만, 이렇게 강도를 높여가며 장기집권을 강조·반복하는 것은, 유권자에 대한 무시로 비칠 수 있다. 정권의 연속집권은 국정의 결과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을 통해 가름되는 것이지, 구호와 플랜으로 이뤄질 게 아니다. 20년 집권을 말하기에 앞서 5년 더 재집권을 위해서라도 경제와 민생, 개혁 등에서 실력을 보이고 성취를 내는 게 먼저다. “골프하고 정치(선거)는 고개를 드는 순간 망한다”(박지원 의원)고 했다. 권력에 자만이 스며들 때가 가장 위험하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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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영화 <서치>를 보기로 한 날, 낡아 고장 난 휴대폰을 먼저 바꾸기로 했다가 기기 변경 중에 휴대폰에 들어 있는 데이터를 잃어버렸다. 즉흥적인 결정이라 백업을 미처 하지 못해서 변경할 기기만 골라두고 다음 날 다시 올까 잠깐 망설였으나 아무 문제없이 데이터를 모두 옮길 수 있다는 호언장담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사라진 데이터는, 모든 사라진 것들이 그렇듯 그중 가장 중요한 데이터이다. 물론 나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데이터인 줄을 사라지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그래서 그날은 저녁 내내 앓았다.

<서치>는 미국 한인 가정의 가장 데이빗 킴(존 조)이 실종된 딸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딸이 운전면허증을 위조했다는 경찰의 소식을 접한 데이빗이 위조 면허증을 보고 있다(오른쪽). 소니픽처스 제공

영화를 본 건 이틀이 지나서였다. 데이터 복구센터에 맡긴 저장장치마저 복구 불가라는 소식을 듣던 날, 오기로라도 그 영화를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서치>가 인터넷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던가. 실종된 딸을 데이터로 찾는 줄거리라던가. 내가 잃어버린 건 딸이 아니라 데이터였지만, 어째 내 심정에 맞장구라도 쳐줄 것 같아서 아이와 다시 극장으로 향했다. 마침 아이도 SNS에 부쩍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나이라 꼭 같이 봐야 할 것 같았다. (이후의 글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다.) 

<서치>는 알려진 간략한 줄거리로만 언급하면 아내를 잃고 혼자 딸을 키우는 아버지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실종된 딸을 찾는 이야기다. 딸이 실종된 후에야 자신의 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버지가 일차적으로 검색한 데이터는 딸의 수많은 SNS 계정들이다. 그 계정들을 통해 비로소 딸의 현실과 직면한 아버지가 비통해할 때, 나는 아이에게 닿을 길 없는 부모의 심정에 빙의 수준으로 공감을 했다. 그 안타까움이라니, 눈물과 콧물을 멈출 수가 없는데, 바로 옆에 앉아 영화를 보던, 인터넷과 SNS의 세계에 최근에야 발을 들여놓은 아이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인터넷 계정들이 그리 허술하게 털릴 수가 있다니!” 그리하여 영화의 감동에 기대, 내가 너를 감시하는 데 쓰지는 않을 터이니 만일을 대비해 네 계정의 비밀번호와 친구들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이야기는 차마 하지도 못했다. 아니다, 실은 했다. 아이는 못 들은 척했고, 나는 어쩐지 며느리에게 현관 비밀번호를 물어본 시어머니가 된 기분이라 스스로 무안해서 다 농담이었던 것처럼 허풍을 떨었다.

아이가 처음 SNS를 시작했을 때, 아이의 휴대폰을 엿본 적이 있다. 아이에게 쉽게 들켰다. 기기 작동법이 익숙하지 않아 훔쳐 본 내용도 없는데 검색 기록만 남았다. 기분 나빠하는 아이 앞에서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마음으로 변명과 사과를 거듭한 이후로는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해서 들여다보는 게 오히려 아이를 지레짐작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았다. 오해만 쌓일 게 뻔했다. 대신 자신의 계정은 안 보여주면서 엄마의 계정 속 내용은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지금은 쓰지 않는 오래된 나의 SNS 계정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육아일기처럼 쓰던 것들이니 내 것이되 아이 자신이 기억 못하는 아이의 일기이기도 하다. 내가 보일 수 있는 만큼을 보여주고, 아이가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보자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보이는 진심이 많을수록 아이도 나와 공유하는 진심이 많아질 거라는 기대도 물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 같은 유혹에 시달린 부모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의 세계를 쉽게 엿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영화 자체가 악몽이었다는 평도 있다. 영화가 말한 데이터는 그러나 내면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니 세계를 공유한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는 줄곧 인터넷을 검색하여 모든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 해결하지만, 그러나 영화의 중요한 갈등을 풀어준 건 온라인 속 정보가 아니라 동생이 전해준 한마디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딸이 삼촌인 동생에게 직접 드러낸 실재하는 말이기도 했다. 영화는 인터넷에 갇힌 세상을 그리지만, 그러나 진심은, 진실은 그 바깥에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고루한 진실이지만 그 진실을 믿는다. 휴대폰의 데이터는 복구할 수 없지만, 그날의 기억이 내 안에 여전히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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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토스카나 지방에 시에나라는 도시가 있다. 1995년 도시 전체가 유엔에서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될 정도로 토스카나 지역의 보석으로 불린다. 인구 5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시청을 중심으로 펼쳐진 광장은 연간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특히 시청 내부의 벽화는 14세기 서양 미술사 그 자체라 해도 좋을 정도의 걸작들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에서도 ‘9인의 정부’방이 흥미롭다. 한때 시에나 공화국을 통치했던 정부 이름을 인용한 이 방에 ‘좋은 정부’ ‘나쁜 정부’ 알레고리가 있다. 정의, 절제, 화합 등은 좋은 정부의 덕목으로, 폭정, 탐욕, 허영의 사회를 만드는 건 나쁜 정부의 모습으로 의인화했다. 그리고 ‘좋은 정부의 영향’을 활기찬 도심과 평화로운 농촌 모습으로 시각화했다.

엊그제 농민들이 여의도에서 집회를 하며 ‘밥 한 공기 가격 300원’ 보장을 주장했다. 올해는 향후 5년간 적용할 ‘쌀 목표가격’을 결정하는 해이다. 쌀 목표가격은 농가 최저소득 보장을 위해 지급하는 ‘변동직불금’의 기준금액으로, 5년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기준가격에 따라 결정된다. 농민들에게는 ‘5년간의 연봉’이 결정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현재의 80㎏ 기준 18만8000원은 2013년부터 적용된 가격이다. 농민들은 2017년 산지 쌀 가격이 1998년과 같다며, ‘정권이 4번 바뀌는 동안 밥 한 공기에 200원을 받으며 버텼다. 이제 한 공기 쌀값을 300원으로 올려달라’고 호소한다. 농민들의 주장대로라면 80㎏ 기준으로 24만원 정도다. 지난 13년간의 물가 및 생산비 상승률을 반영했다면 올해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농업은 매우 혼란스럽다. 쌀값만 문제가 아니다. 농업생산인구 감소로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위기 극복을 위한 백화제방의 처방이 제시되지만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합의 과정은 더디다. 워낙 누적된 문제가 많고, 사회·경제적 구조와 연계된 복잡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기가 맞는지, 위기라면 어떤 위기인지,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실태 파악이 먼저다.

특히 농업의 근간인 농지이용실태와 전업농가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 산업화와 개발시대를 거치며 많은 농지가 훼손되고 변용되었다. 또 농촌에 거주하는 이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거나 전업 농민인 것도 아니다. 축산업의 빠른 성장과 농업생산의 집약화로 환경이 악화하고, 농가의 농업외소득 의존도가 갈수록 커지는 등 농가소득구조가 바뀌고 있다.

농가의 양극화도 문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0년 이후 대농과 영세농이 증가하고 중농그룹의 비중은 크게 줄고 있다. 농축산물 판매액 기준으로는 연 3000만원 이상 농가와 500만원 미만 농가가 늘고, 나머지 구간은 줄었다. 가뜩이나 기본소득이 낮은 구조인데 그 내에서 다시 양극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어느 나라나 농업은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고, 농촌은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정보통신기술(ICT)과 인공지능 기술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에서도 농업·농촌의 역할은 작지 않다. 국민건강, 식량주권, 국토환경보전과 유지, 공동체의 전통과 역사성 등 사회문화적, 경제적 역할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농업정책은 개발연대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 아직도 생산성을 절대시하는 농업정책 모델이 작동 중이다.

농산물 공급이 부족하고 소비가 단순했던 시절 ‘산업’으로서의 농업정책의 타당성은 이미 약화되었다. 경쟁력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산업’을 농업정책의 유일한 비전으로 설정하는 한 지금의 복잡한 농업·농촌·농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은 199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지속한 농업구조조정의 미미한 성과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돈만 버는 농업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으로의 농정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농업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농민-국민 사이에 충분한 논의와 합의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처럼 정부 중심으로 중앙에서 아래로 관철하는 방식으로 될 일이 아니다.

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지금 우리 농업의 현실은 한국 자본주의 전개과정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한국 농업은 지난 고도성장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버텨왔다. 그에 비해 대기업은 큰 혜택을 입었다. 따라서 대기업은 농업·농민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이 2017년부터 조성하고 있는 농어촌 기금이 있다. 농어촌 개발 및 활성화, 농어촌 주민복지, 농수산물 생산·유통·판매 등에 사용할 기금이다. 1년에 1000억원씩, 10년간 총 1조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현재 출연금액은 475억원으로 목표액에 턱없이 모자란다. 그런데 기금 출연처를 보면 공공기관이 372억7763만원으로 약 98.6%를 차지하고, 대기업은 4억1090만원으로 전체의 1.1%에 불과하다. 과거 오랫동안 수혜를 본 수출 대기업들이 정작 기금 출연에는 인색하다는 것은 기금 조성 목적을 생각해 볼 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매년 가을추수가 끝나면 농민들은 또 다른 농사를 지으러 서울에 모인다. 농민 스스로 ‘아스팔트 농사’라 말하는 시위를 하기 위해서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지만 그들은 ‘아스팔트 농사’를 그렇게 매해 한다. 정부와 국회는 물론 국민에게 ‘우리도 있다고, 관심을 가져달라’는 절박한 소리로 들린다. 시에나 시청 벽화의 ‘좋은 정부’ 덕목은 ‘좋은 국민’의 덕목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약자나 소외계층을 보듬는 일은 정부의 역할도 크지만 국민의 관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농업은 국방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배워왔다. 그것은 세상이 빛의 속도로 바뀌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2007년에 일어난 세계자원전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정부와 국민 모두가 농업, 농민, 그리고 농촌의 어려운 현실에 배전의 관심을 갖도록 하자.

<정운찬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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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대작사건이 대법원까지 가게 됐다. 2016년 무명화가 송모씨가 2009년부터 조영남의 조수로 수년간 그림을 대신 그렸다고 폭로하자 검찰과 작품을 구매한 컬렉터가 조영남을 사기 혐의로 고소한 사건이다.

사건의 핵심은 조영남이 조수를 고용한 이유다. 검찰은 (미술)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거래의 맥락에서 그가 조수를 왜 썼는지, 그것이 합당한지를 판단하고자 했고, 미술계는 미술사적 맥락에서 그가 조수를 고용한 이유와 그 합리성 혹은 불합리성을 가늠하려 했다. 그렇지만 어떤 맥락에서 판단하더라도, 그리고 그 결론이 조영남에게 책임이 있다고 내려지더라도 그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가수 조영남. 연합뉴스

미술시장에서 작품이 거래될 때 컬렉터들은 작품 제작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조영남이 이를 어겼으므로 그를 사법적으로 처벌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사실 고지 의무는 작품 판매를 중개한 갤러리와 화랑에도 있다. 따라서 상품 거래의 측면에서 그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가능은 하지만, 결코 조영남을 주범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조영남을 변호한 진중권은 그의 작품이 개념미술이라고 주장하며, 개념미술은 ‘개념’을 최상위에 두어 작품 제작을 타인에게 맡기기도 하므로 그에게 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수를 고용해 작품을 ‘대량생산’하는 앤디 워홀(워홀의 팝아트 역시 개념미술에 포함된다)의 작품 제작 방식과 조영남의 것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홀이 조수에게 작품 제작을 맡긴 것은 예술작품의 유일성, 원본성이 예술과 예술가를 신화화·신격화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워홀은 미술계를 비판하려는 의도(개념)를 전달하기 위해 조수 고용과 대리 작품 제작이라는 방식을 택했다. 즉 조수 고용과 작품 대리 제작은 개념의 일환이었다. 워홀과 조영남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조영남이 화투를 그렸는데, 그가 왜 화투를 차용했는지, 화투를 그리는 것과 조수를 쓰는 것이 어떤 연관을 가지며 궁극적으로 조영남이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비교해야 한다. 개념미술의 개념은 이 모든 것들의 총체다. 화투 그 자체는 개념미술의 개념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단순히 조수에게 “화투를 그리라”고 지시한 것을 개념미술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다.

또한 진중권은 개념미술가들이 작품의 제작을 대리로 맡겼고 이것이 현대에 관행으로 고착됐다며 조수 고용을 합리화하고자 했다. 개념미술가들이 오브제 자체를 대리 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념미술에서 실행(작품 제작)은 오브제 제작 과정은 물론이고 그것을 전시장에 배치, 설치, 전시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작가는 주어진 전시장의 상황이나 가변적인 전시장의 여건에 따라 애초의 구상을 변형하기도 했고, 사전에 결과물의 최종적 형태를 예상하며 오브제의 제작 주문을 맡겼다. 그러므로 진중권의 주장처럼 작품 제작을 기계적으로 아이디어와 실행으로 구분할 수 없다. 결국 조수 고용과 그 합당함은 미술사적 맥락에서도 충족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개념미술로 간주할 수 없다고 해도 이것이 사법적 처벌의 판단 근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

그렇지만 조영남을 사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전문미술인이 관행이라는 표현을 들먹이며 개인의 잘못을 면책하고자 미술사를 도구화한 것은 우려할 일이다. 또한 사회적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 ‘관행이므로 무죄’라는 결론은 사회적 공감을 끌어낼 수 없다. 또한 분명한 것은 사법적 처벌의 판단 근거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건 판단의 역할을 사법 권력에 위임하는 것은 추후 미술계에 예상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오경미 |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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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읽고 댓글을 하나 달았다.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현실 정체성은 직장인인 한 사람의 고민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진심이 담긴 열린 제안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한번 해봅시다”로 시작한 일은 100명이 넘는 규모의 콘퍼런스라는 큰 판으로 커졌다.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비슷한 고민을 키워오던 개인들이 ‘작당’해 만들어낸 프로젝트였기에 중단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협업하게 된 11명의 개인들은 구체적인 ‘개인의 시대’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9명의 연사를 초대했다. 딴짓으로 창업한 남의집프로젝트 문지기 김성용, 외신기자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변신한 최정윤, 자칭 ‘사이드프로젝트 중독자’라는 마케터 고재형, 벤처캐피털을 다니면서 맥주 편집숍을 운영 중인 김경민, 자기 강점을 찾고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낸 장영학, 하루 3줄 일기로 인생을 바꾼 <스몰 스텝>의 저자 박요철, 과거와 미래의 나에게 고마워하며 현재의 나에 충실히 살고 있는 전 대기업 직장인 이인규, 9번 회사를 옮긴 ‘프로 이직러’ 김대우, 기자를 그만두고 과학과 연결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이진주까지…. 일단 시작했으며, 나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다르게 움직여도 괜찮은, 그러면서 “딴짓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개인들이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지난 14일 열린 ‘평생직장 개뿔, 개인의 시대’ 콘퍼런스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금요일 오후 반차를 사용해야만 함께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도 100명 넘는 사람들이 함께했다. 날씨 좋은 불금의 오후 1시, 꽤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놀라우면서도 뿌듯했다. 나 자신을 포함해 ‘이 사람들은 오늘 무엇을 얻기 위해 여기에 왔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2018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과 ‘직장’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결로 전개 중이다. 공무원처럼 확실한 안정성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퇴사 학교’가 만들어질 정도로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요즘 직장인들은 조직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인싸(인싸이더)’ 대신 자발적인 ‘아싸(아웃싸이더)’를 택하면서까지 조직보다 자신의 성장을 원한다. ‘직장’에 다닌다고 자동으로 ‘직업’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날 콘퍼런스에서 “좋아하는 일로 꼭 밥을 벌어먹어야 하나요?”라는 질문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상반된 질문이 함께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날 연사들은 생존형 사이드 프로젝트 성공 노하우부터 딴짓을 잘한 짓이 되게 만드는 법까지 ‘꿀팁’을 아낌없이 풀어냈다. “한번에 3만개의 알을 낳는다는 개복치처럼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계속하라”는 주문과 함께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라며 백수를 강력 추천하기도 했다.

‘내 인생의 영화’ 혹은 ‘내 인생을 바꾼 책’이 사라진 불확실한 저성장의 시대, 반나절의 콘퍼런스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자신의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영감 혹은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던 한 연사의 말처럼, 앞서 시도한 개인들의 삶이 담긴 이야기가 다른 생각의 여지를 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잠재적 자영업자’인 직장인들에게는 “의미 없는 것을 잔뜩 하는 것이 인생”이며 “인생의 의미 없는 딴짓이라도 괜찮다”라는 메시지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이끄는 힘을 찾아내는 것, 직장이라는 울타리와 상관없이 나 자신이 어떻게 일할 때 가장 행복한지 찾아내는 것이다. 콘퍼런스는 끝났지만 더 많은 질문이 남았다. 나 역시 “어떻게 하면 가장 나답게 살 수 있을까?”란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분투해볼 계획이다. 평생직장 ‘개뿔’인 ‘개인의 시대’를 조금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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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교육 전문성에 교과교육 외에 비교과교육인 생활교육도 있다. 하지만 교사로서 생활교육을 할 때 위축감과 주저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교사의 교육적 지도를 주저하게 하는 법 중 하나는 학교폭력예방법이다. 가장 힘든 생활교육 사안은 학교폭력이다. 지속성·고의성·심각성 등의 요소를 갖춘 학교폭력 사안은 엄밀한 조사를 거쳐 잘못을 가리고 피해 학생의 상처가 최소화되도록 하고 재발 방지에 힘써야 한다. 학교에서는 일상적으로 학생 간 갈등이 일어나고 모든 갈등은 학교폭력에 포함될 수 있다. 학교폭력예방법에 따라 교사는 학교폭력의 예비·음모 등을 감지하고 인지했을 경우 신고의무가 있으나 적절히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올해 한 학생이 친구관계에서 갈등이 생겼다. 학생이 한 말이 왜곡돼 다른 학생들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을 듣고 화가 난 학생들이 해당 학생에게 욕설 메시지를 보냈다. 학교에서 할 일은 학생들이 갈등을 해결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교육적 경험을 주는 것이다. 학년부와 학생부가 협의해 보호자, 학생들과 함께 자리를 만들어 잘못 인정하기, 감정 나누기, 사과하기, 다짐하기 등을 했다. 학생들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상처 받은 학생은 자신의 상처를 말할 기회를 가졌다. 힘들어 하던 학생은 사과를 받아들이고 이후 밝은 표정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교사는 갈등 해소 모임 후 해결사안보고서를 작성해 학교폭력전담기구에 보고해야 한다. 저녁에 2시간 이상 이어진 모임이었지만 일이 잘 해결되어 안심했다. 만약 피해 학생 보호자에게 이 모임에 대해 언급했을 때 교사가 화해를 종용한다고 문제제기를 하면 그때부터 교사는 난감해진다. 위 경우에도 학생(학부모)이 자치위원회 개최를 요청하면 반드시 위원회를 개최해야 한다.

이런 갈등 해소 모임 없이 바로 학교폭력 처리절차를 밟을 수도 있다. 위험은 적고 업무담당자 외에는 편한 방법이다. 학교폭력 담당자는 바빠진다. 학교폭력전담기구 회의를 개최하고, 교사들은 경찰처럼 조사를 다시 하고 학교장과 교육청에 보고한다. 그리고 자치위원회를 열어 가해 학생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심의한다.

교육부가 올 9월 보급한 학교폭력 사안 처리 가이드북 유의사항에는 학교폭력 사안을 축소·은폐하거나 성급하게 화해를 종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학교폭력 처리 과정에서 피해 학생이나 가해 학생 측에 불만이 생길 수 있다. 민원이 생기면 학교폭력 은폐 여부를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소한 폭력이라도 신고한 것은 접수해야 한다.

관계중심 생활교육을 강조하지만 학교폭력이라고 인지되는 순간 학교에서 자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거의 없다. 교사가 중재할 권한은 없다. 중재를 해서 잘 해결되면 괜찮으나 중재가 잘 안되면 책임이 따른다. 자치위원회에 분쟁조정 절차가 있다. 그러나 자치위원회로 넘어가면 화해하기 어렵다. 경미한 사안과 심각한 사안을 구분하고 교육적 지도와 폭력에 대한 단호한 조치가 구분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현장의 의견을 들어 법 개정을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구조 안에서 혼자 고통받는 학생을 그냥 두면 물론 안된다. 그 미묘한 고통의 징후를 감지해 사전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교사와 또래 친구들이다. 결국 평화로운 공동체의 회복이 학교폭력을 줄일 수 있는 지속적이고 힘 있는 방법이다.

<손민아 | 경기 전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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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판에 차돌박이를 굽노라면 화강암에 점점이 줄줄이 박힌 차돌(석영)과 ‘인왕산 차돌을 씹어 먹더라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 속담이 떠오릅니다(직업병이지요). 이 속담은 자존심 상하고 불편해 처가살이는 남자가 할 게 아니라는 말과, 그럼에도 오죽하면 처가살이를 하겠냐 자조하는, 두 가지 뜻을 가집니다(경복궁 서쪽에 있는 인왕산은 바위산이고, 그 바위는 우리나라에 흔한 화강암입니다).

이 속담은 분명 조선 후기에 생겨났을 겁니다. 왜냐하면 조선 중기까지는 오히려 처가살이가 흔했으니까요. 이순신 장군도 처가살이 하면서 처가의 돈으로 무과 준비를 했고, 신사임당도 거의 친정살이를 했습니다. 당연히 그 남편은 강릉에서 처가살이를 했고요(사임당의 아버지는 처가살이가 가능한지를 보고 사윗감을 골랐다고 하죠).

그러다 임진·병자 연이은 전쟁을 겪으며 국토는 쑥대밭이 되고 양반들 위신은 추락합니다. 그래서 이를 회복하고자 유교체제를 더 강화하고 그 목적으로 중국 풍습들을 잔뜩 따라합니다. 중국처럼 여자는 시집에 와서 살아야 한다고 강권한 것도 이때부터지요. 그 대신 혼례를 처가에서 올리고 거기서 사흘 밤을 자는 걸로 사위가 장가들어 살던 걸 흉내만 냅니다. 그렇게 ‘장가가다’가 ‘시집가다’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곡식이 떨어져 당장 굶어 죽을 판입니다. 처가는 형편이 좀 나아 고개 숙이고 들어가면 딸자식이고 사위니 내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명색이 남잔데, 곧 죽어도 그리는 못하겠다고 버티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남자로서 차마 고개 숙이지 못할 마지막 자존심도 있겠지요. 하지만 자존심이 밥 먹여줘? 멸시와 굴욕을 차돌처럼 씹어 삼키며 연신 예예 합니다. 자존심 버리고도 당연한 듯 생색내지 않는 이는 ‘가족이란 진짜 자존심’을 묵묵히 지켜내는 사람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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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저녁이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듣기 좋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저절로 고개가 까딱였고, 발이 움직였고, 손가락이 다리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사람들이 흘끔흘끔 볼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음악이 사람을 움직이는 건 흔한 일이니까. 어쩌면 수십만~수백만년 전, 인류의 조상이 서툴게 직립 보행을 하던 시절부터 음악은 움직임과 함께 진화해 왔으니까.

■ 직립 보행과 발성

스티븐 미슨의 책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에 따르면, 직립 보행으로 해부 구조가 변하면서 발성의 진화를 촉진시켰을 수 있다고 한다. 네 발로 걸어다니는 동물들은 척수가 뇌 뒤쪽에서 머리 안쪽으로 간다. 하지만 직립 보행을 하면 척수가 뇌 아래쪽에서 머리 안으로 들어가야 해서 척수와 입 사이에 후두가 있을 공간이 줄어든다. 이 때문인지 현생 인류의 후두는 침팬지의 후두보다 훨씬 더 아래쪽에 있다. 이렇게 후두의 위치가 낮아지면 성도의 길이가 늘어나 성도가 만들어낼 수 있는 소리가 더 다양해진다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현생 인류는 여타 유인원들과 후두의 구조도 다르다. 침팬지와 같은 유인원은 나무를 타고 내릴 때 팔을 많이 사용한다. 이렇게 팔 힘을 사용하려면 흉곽 안쪽의 공기 압력이 팽팽하게 버티면서 지지대가 되어주는 편이 유리하다. 공을 던질 때 순간적으로 숨을 참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영장류들은 공기를 채워서 잠그기 좋게 두툼한 연골성 후두를 가지고 있다. 반면, 직립 보행 덕분에 흉곽의 공기압으로 팔 근육을 지탱할 필요가 덜한 인간의 성대는 막성 구조에 가깝다. 막성 후두는 두툼한 후두에 비해 더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말과 음악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인간의 특징이지만, 그 근간이 되는 발성은 직립 보행에 따른 변화에 ‘얻어걸린’ 쪽에 가까웠던 셈이다.

■ 음악과 리듬감 있는 움직임

직립 보행이 발성에 유리한 해부학적인 조건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음악도 직립 보행에 도움을 주었으리라고 추론된다. 늘 두 발로 걷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2족 보행은 사실 대단한 능력이다. 한 발이 공중에 떠 있을 때도 절묘하게 무게중심을 이동해서 균형을 잡아야 하고, 울퉁불퉁한 땅에서 걷거나 심지어 달릴 때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발목, 무릎, 엉덩이뿐만 아니라 팔다리까지 리듬감있게 잘 움직여야 한다. 의족을 사용하시는 분들의 곤란함을 보면, 2족 보행이 얼마나 정교한 일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음악은 이처럼 리듬감 있는 움직임과 함께 진화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올리버 색스의 책 <뮤지코필리아>에 따르면 신기하게도 인간은 박자와 리듬에 맞춰 자발적으로 움직이지만, 다른 영장류에게서는 이런 특징이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음악은 파킨슨병 환자들의 움직임을 도와주는 효과가 있다. 파킨슨병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이 느려지고 뻣뻣해지는 질환이다. 연구에 따르면, 매일 30분씩 3주간 보행 훈련만 한 파킨슨병 환자는 보행이 거의 개선되지 않았으나, 규칙적인 박자를 들으면서 보행 훈련을 한 집단은 보행 속도가 25%, 보폭이 12%, 시간당 보행 수가 10% 더 좋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훈련을 멈춘 뒤 향상되었던 능력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 결과는 움직임과 규칙적인 리듬에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올리버 색스도 신경계 질환으로 움직이기 어려워지거나 조화롭게 움직이지 못했던 환자들이 음악을 듣거나 상상했을 때 더 수월하게 움직인 사례들을 소개했다.

■ 박자를 전하는 저음

그런데 음악에 맞춰 절로 몸을 움직이게 하는 소리는 따로 있다고 한다. 주로 고음보다는 저음에 박자를 타기가 쉽다. 그래서인지 여러 악기가 사용된 연주에서는 대개 저음 악기가 박자를 담당하고, 고음 악기가 가락을 담당한다.

이 현상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사람들이 소리를 듣는 동안 뇌파를 측정한 연구가 있었다. 뇌파는 신경세포들의 전기적인 활동을 뇌 밖에서 측정한 것이다. 문이 닫힌 강당(뇌)에서 여러 사람(신경세포)이 북을 치는데 강당 밖에서 벽(두피)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들려준 박자와 일치하는 주파수의 뇌파가 강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이 경향은 소리가 고음일 때보다 저음일 때 더 두드러졌다고 한다. 이는 신경세포들의 활동이 어느 정도는 외부 소리에 맞춰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뇌파의 주파수가 고음보다 저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은 당김음이 없을 때보다는 당김음이 있을 때 두드러졌다. 이는 당김음이 없는 단조로운 소리보다 당김음이 변화를 더하는 소리를 더 집중해서 듣기 때문으로 추론된다. 실제로 뇌파의 주파수가 고음보다 저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은 사람들이 소리에 집중하지 않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가끔 예상을 어긋나는 소리가 더 재미있는 모양이다.

■ 함께 부르는 노래

좋아하는 노래를 혼자 들을 때도 좋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노래하면 더 좋다. 침팬지처럼 오랜 시간 동안 서로 털고르기를 해주지 않아도, 공연장에 모인 수만명이 단숨에 일체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책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에서는 함께 노래를 부르는 활동이 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비슷하게 만들고, 결속을 다지는 데 효과적이리라고 추론한다. 해질녘, 불가에 모여 앉은 집단 구성원들이 공동의 노래를 부르다가 하나둘씩 잠에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언젠가는 남쪽과 북쪽에서 따로 부르던 노래도 평화롭게 둘러앉아 함께 부를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송민령 |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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