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경향시선'에 해당되는 글 220건

  1. 2017.09.18 무서워서 우리는
  2. 2017.09.11 요구
  3. 2017.09.04 시골길
  4. 2017.08.28 주소
  5. 2017.08.14 편지
  6. 2017.08.07 수평선
  7. 2017.07.31 이럴 때 내 몸은 그 문을 활짝 열어
  8. 2017.07.24 우리나라 악기
  9. 2017.07.17 방아깨비의 코
  10. 2017.07.10 뒷면
  11. 2017.07.03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12. 2017.06.26 나뭇잎을 사러 간다
  13. 2017.06.19 푸른 자전거
  14. 2017.06.12
  15. 2017.06.05 눈먼 여인
  16. 2017.05.29 아침 똥
  17. 2017.05.22 반쯤
  18. 2017.05.15 버릇
  19. 2017.05.08 걷는다
  20. 2017.05.02 망가진 침대

우리는 소리를 줄여놓고 음악을 듣고

음악보다 더 큰 잡음을 듣고

뒷문 밖에서 시멘트 쪼가리 벌리고

풀이 지나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해충처럼 때 낀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숨어들고

탐스러운 거미줄을 망가뜨리고

부지런한 곤충들을 으깨어 죽이고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웃음이 나오면 재빨리 입을 다물고

이불 속에 까만 손을 집어넣고

금지된 것을 만지고

 

묵은 재 냄새가 나는 우리는

누가 잘못됐다는 말을 기다리고

죽은 우리를 누가 깨우러 올까 궁금해 하고

쥐처럼 눈동자를 빛내고

 - 김개미(1971~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소심하고 겁 많고 내성적인 사람들을 보면 나를 닮은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친근하다. 작은 일 하나라도 생기면 상상력으로 크게 부풀려서 미리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 대단치 않은 일을 당해도 심장은 알아서 철렁 내려앉고,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나오고, 다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열심히 후들거리는 사람들. 분위기가 이상하면 아무리 조용하게 숨을 쉬어도 제 숨소리가 폭풍처럼 들리는 사람들.

뭔가 일이 터질 것만 같아서 눈은 눈치 보는데 이력이 나고, 심장은 걸핏하면 쿵쿵 뛰고, 입은 들킬 일도 없는데 들킬까 봐 꽉 닫혀 있다.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다섯 번씩 열 번씩 눈동자를 굴려야 한다. 사람 많은 곳에서는 눈에 안 띄는 곳을 귀신 같이 골라 앉고 질문이 오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곳을 보는 척하는 데 능숙하다. 이런 모습을 남에게 들키는 건 창피한 일이지만 시에게 들키면 오히려 통쾌하고 즐겁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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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라는 도구가 있어 갈고리처럼 생겼는데, 왜 요구라고 부르는지 물었는데 자꾸

처음부터 있었다고 해. 사전에는 필요한 도구가 要具라는 거지. 이 요구로 무거운

생선궤짝을 찍어 당기면, 경험만 있음 할머니들도 거뜬히 배에서 언 선동오징어

60마리 상자를 옮기지. 이 요구는 길이가 30에서 50센티미터, 1미터 정도로 각각

다른데 그건 일꾼들마다 키와 몸이 다르니, 체형에 맞게 만든다고 해. 허리를

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 허리는 굽히지 말고 무릎만 굽히라고 그러는군. 그러고

보니 공판장이나 어시장에서 이 요구만큼 적절한 도구가 없더만. 이 요구로 자기 발등

이나 무릎을 한 번은 찍어야만 바다가 사람을 받아준다는군. 한번은 이 요구를 들고

바다에 바닷물을 받으러 갔어. 이 요구로 지난날을 모두 찍어버리려 했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물었어. 나는 누구냐고 나의 괴로움은 무엇이냐고. 처음부터 있었다고 해. - 성윤석(1966~)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펜을 들었던 손으로 손에 익지 않은 요구를 사용하는 일, 자신이 쓴 글이 자신을 괴롭히듯 요구가 제 발등을 찍는 일, 그 날카로운 도구로 지난날을 다 찍어버리고 싶은 충동, 그런 경험을 거치고 나서, 어느 날 시적 화자는 요구가 팔에 달린 또 하나의 팔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하지 않았을까? “나는 누구냐고 나의 괴로움은 무엇이냐고” 펜으로 그토록 간절하게 물었던 물음을, 머리와 글이 대답해 주지 않았던 물음을, 팔에 새로 돋은 요구가 대답해 주지 않았을까? 공기처럼 물처럼 “처음부터 있었다고”. 눈과 귀처럼 팔다리처럼 처음부터 몸에 달려 있었다고.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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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천천히 구름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시골길.

감자밭 감자가 시골 소년의 알통처럼

소리 없이 굵어가고,

명태 꼬리 두어 개 삐죽이 내민 짐 보퉁이를

시골 여인이 머리에 이고 가는 길.

 

길가 풀섶 둥지에서는 들새가

제 체온으로 데울 만큼의 알을 낳아

따스히 품고 있다.

달콤한 햇볕 아래서

보리앵두는 빨갛게 익어간다.

 

일부러 해찰을 하듯 날아다니며

나비는 풀꽃마다 꽃가루를 옮기고,

소나기를 머금은 구름은 머얼리서

느리게 천둥소리 피워 올린다.

 

신발을 벗어버린 내 맨발은

붉은 황토흙이다.

맨발 아래서 질긴 질경이풀처럼

생명 있는 것들이 꿈틀거린다.

 

내 뜨거운 손을 저무는 해에 얹으면

해 그림자 길게 깔리는 시골길

길 따라 내 삶도 천천히 익어간다.

 -이준관(1949~)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에서 햇볕과 풀냄새와 벌레 소리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종아리 걷고 고무신 신고 걸으면 다리에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어린 시절이 깨어날 것 같다. 그때 다니던 길들이 핏줄 따라 세차게 돌 것 같다. 하도 많이 다녀서 지도가 새겨진 발바닥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다 알고 있으리라.

어린 시절 다니던 길은 이제는 거의 바뀌었거나 없어졌다. 황토색이 눈을 씻어주고 풀냄새가 허파와 내장을 씻어주는 흙길. 들숨 날숨 한번에 몸속을 여러 번 돌고 나가는 오솔길. 지금은 기억에 남아 겨우 연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골길의 아름다움은 생생할수록 안타깝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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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집이 어딨죠? 기사가 물었던 때는 저녁 어스름이었다

하늘이 잠시 멈췄다

행인은 어둠을 향해 전등을 비추고

버드나무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저 나무에서 멀지 않아요

바로 앞에 골목이 하나 있는데

신이 꿈꾸는 것보다 푸른 정원을 끼고 있죠

사랑이 믿음과 정직의 깃털만큼 파란 곳이에요

골목 끝까지 가시면 청소년의 뒷골목이 나오는데

거기서 고독의 꽃 쪽으로 돌아서

꽃 두 발짝 앞 신화 속 영원의 샘물에 들르세요

맑고 깨끗한 두려움에 휩싸일 거예요

그 은밀한 공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빛의 둥지에서 새끼 새를 꺼내려고 소나무를 오르는

아이가 보일 거예요

그럼 걔한테 물어보세요

친구 집이 어딨니?

-소라브 세페리(Sohrab Sepehri, 1928~1980) 신견식 옮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행정구역이나 주소를 가리키는 말보다 땅과 공기와 나무의 느낌이 더 중요한 곳. 지도 대신 냄새로 소리로 촉감으로 길과 집을 찾는 곳. 말이 머리와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핏줄과 피부에서 나오는 곳. 구석구석 마을의 아주 은밀한 움직임과 활기도 온몸의 더듬이로 다 찾아내는 곳. 집과 골목과 정원에,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에, 신화가 살아 있는 곳.

이 마을에서는 아직도 나무나 새와 이야기하는 관습이 이어질 것 같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처럼 거리를 활보해서 보이지 않는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것 같다. 자연과 사물은 주민들의 느낌 속에서 다 살아 있어서 주민들의 몸짓과 말이 다 시가 될 것 같다. 길을 물으면 주소가 시가 되어 나오지 않는가. 그 순간 평범한 일상은 신화가 숨 쉬는 시공간으로 바뀌지 않는가.

이란 현대 시인들의 시를 묶은 <미친 듯 푸른 하늘을 보았다>에 실린 시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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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 아래 또렷한 조약돌들

당신이 보낸 편지의 글자들 같네.

강물의 흐름에도 휩쓸려가지 않고

편안히 가라앉은 조약돌들

소근소근 속삭이듯 가지런한 글자들의 평온함

그러나 그중 몇 개의 조약돌은

물 밖으로 솟아올라 흐름을 거스르네,

세찬 리듬을 끊으며 내뱉는 글자 몇 개

그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겠죠,

그토록 자제하려 애써도

어느새 평온함을 딛고 삐져나와

세찬 물살을 가르는 저 돌들이

당신 가슴에 억지로 가라앉혀둔 말이었겠죠,

당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심장 속에 두근거리는. - 채호기(1957~)

금년 장마철엔 중부지방에 비가 제법 와서 계곡에는 바위를 끼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겠지요. 깨끗하게 씻긴 바위에 앉아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싶습니다. 찬 기운이 정강이에서 심장으로 정수리로 올라와 서늘하겠지요.

혀처럼 부드러운 물이 오랜 세월 동안 깎아 더없이 매끄러운 바위를 생각합니다. 칼이나 끌이 아니라 물줄기가 포옹과 애무로 깎은 바위에서는 핏줄과 살갗과 체온이 느껴지겠지요. 키스와 포옹으로 바위를 깎는 나직하고 간지러운 물소리는 지금도 들리겠지요.

한때 흙탕물을 일으키고 바위와 돌을 뒤집던 거친 물살은 지금 어디서 흐르고 있나요? 흰 거품을 일으키며 물살을 마구 튀어 오르게 하던 뾰족하고 모난 돌들은 어디로 갔나요? 깊은 주름과 울퉁불퉁한 수면으로 일렁거리던 물줄기는 이제 순해졌나요? 발음이 달리지 않아 침묵만 풍성한 바위의 말과 물의 문장에 귀 기울여 봅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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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빨랫줄 참 길게 눈부시다

태양을 널었다가

구름을 널었다가

오징어 떼를 널었다가

달밤이면 은빛으로 날아다니는 갈치 떼를 널었다가

옛날에는 귀신고래도 너끈하게 널었다는

그래도 아직 단 한 번 터진 적 없는

저 빨랫줄

한라산과 백두산이

가운데쯤 독도를 바지랑대로 세워놓고

이쪽, 저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주는

참 길게 눈부신

저, 한국의 쪽빛 빨랫줄

 -배한봉(1962~)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수평선으로 빨랫줄 한 번 잘 만들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빨랫줄에 옷을 널면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춤추며 잘도 말랐지. 그 줄이 한라산에서 독도 지나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한여름 햇빛을 받아 반짝이면서도 한 번도 탈색된 적이 없는 싱싱한 쪽빛 수평선을 떠올려본다. 그 반듯한 줄에 구름도 널고 일출과 노을도 너는 공상도 해본다.

수평선은 움직임 없는 한 줄 고요한 직선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쉬지 않고 수면을 들이받으며 출렁이고 뒤채는 격렬한 물결이다. 소리 지르고 포효하고 바위를 때려 제 몸을 부수는 파도이다. 그 티 없이 반듯한 직선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마음을 널면 눅눅한 기분이 때와 함께 날아가 자꾸 만지고 싶어지도록 뽀송뽀송해지겠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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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덥다

이럴 때 내 몸은 그 문을 활짝 열어

땀이란 놈을 내어 보낸다

땀은  그 속에서 오래도록 나오고 싶어

안달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 미세한 숨길 따라

갇혀 있던 그들이 크게 한번 숨쉬고 싶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살살 간질이며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무리들

흙속에 갇혀 있는 어린 풀줄기들 봄이 되면

쏙쏙 고갤 내어밀듯이

그래서 숲을 이루듯이

땀은 얇은 막을 만들어

포장지로 싸듯 몸을 휘감는다

안과 밖이 서로 바뀌는 순간이다

편안한 집 속에 나는 나의 몸을 맡긴다

이럴 때 우리 영혼은

그를 늘 싸안고 있는 몸에게 미안했던지

한번쯤 몸을 감싸고 싶어

땀을 보냈던 것일까

한번쯤 몸을 위해 밖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손진은(1959~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연일 후덥지근해서 조금만 걸으면 몸은 금방 뜨거워지고 끈적끈적해지고 옷은 피부에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안 떨어진다. 하지만 땀이 피부가 배설하는 오줌이라면 몸 안에 고이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오래 참았던 오줌을 누듯 땀을 흠뻑 흘리면, 피부는 불쾌해도 몸속은 시원하고 개운할 것이다.

땀을 흘린다는 건 닫힌 문 안에서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놈들을 활짝 열어 내보내는 것이라고, 막혀 있던 숨을 열어 피부가 마음껏 숨쉬게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몸 안팎이 서로 바뀌는 거란다. 냉방을 한 실내에만 있는 건 땀을 몸 안에 가두는 것. 땀구멍을 활짝 열어 몸 안을 환기하자. 마음에 쌓인 노폐물도 땀에 실어 내보내자.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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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나무는 들은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한나절이면 피리가 된다. 가죽은 가슴 칠 일이 많아서 하룻저녁에 북이 된다. 나무는 저도 말 좀 해보자고 신새벽 골라 가야금이나 거문고가 된다. 쇠는 무시로 손들고 나오며 징이 되고 꽹과리가 된다. 쟁쟁쟁, 쇠한테 지고 싶지 않은 돌들이 편경이 된다.

 

2. 이 흙덩이는 뭐냐, 떡시루 같은!

저울추 같은!

(늙은 흙이 답한다) 오래전에 묻혔으나

썩지 않은 말들이 일어나 불속으로 간다,

눈 못 감는 혼백, 잠 없는 귀신들이

훈(壎)이 된다,

부(缶)가 된다.

 

공자님 앞이나

종묘로 가서 이쪽저쪽 잘 통하는

언어가 된다. - 윤제림(1960~)

편경이나 훈, 부 같은 악기를 만든 이들은 돌이나 흙에도 음악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바람이 들어갈 틈 없는 그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힘과 소리와 리듬을 찾아내고 귀를 기울였을까. 컴컴하고 꽉 막힌 돌 속의 음과 흙 속의 리듬을 어떻게 밝은 세상에 꺼냈을까.

오카리나처럼 흙을 구워 구멍을 뚫은 훈(壎)은 작은 항아리 모양의 주둥이에 바람을 불고 다섯개의 구멍으로 음을 조절하는 관악기이다. 흙 속에 숨어 있는 길들을 찾아 바람이 드나들 길을 만들고 음악이 마음껏 춤추게 한 이는 누구인가.

돌과 흙도 악기가 되니, 세상에 음악이 깃들지 않을 사물은 없겠구나. 땅속에 묻힌 이들이 다 하지 못한 말들, 육신은 썩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 말들도 무덤에서 나와 음이 되고 리듬이 되어 이승을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을 것이다. 그 말에 불길을 입히고 구멍을 뚫어 음악이 되게 하니 그 울림이 어떠하겠는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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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깨비의 코

새앙쥐의 코

메추리의 코

그 작은 코 보셨습니까?

 

뜸부기의 입

뻐꾸기의 입

종달이의 입

그 작은 입 보셨습니까?

 

비가 오면 이 작은 것들도

비에 젖습디다

방아깨비의 코

뻐꾸기의 입

 

(표현의 엄밀성, 그러니까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엄밀성을 기술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이 시가 씌어진 날은 내가 공허로 공치는 날.)

 

비오는 날, 비가 오면

내 작은 눈, 입, 코, 귀도 비에 젖습디다.

눈 위에 빗방울, 코 위에 빗방울.

 - 오규원(1941~2007)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방아깨비에게도 코가 있을까. 숨 쉬려면 코가 있어야겠지. 그러나 누가 그 사소한 게 궁금하다고 들여다보기나 할까. 방아깨비는 코가 있어도 없는 거나 다름없다.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 것,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인간 말고는, 인간이 이용하는 물건 말고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있으나마나 한 것이 감히 존재하려 하다니, 방아깨비의 코는 참 무례하구나.

하지만 비가 오면 사람만 맞는가? 인간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비조차 맞지 않는가? 아무리 볼품없고 쓸모없는 것이라도 비를 맞는다는 사실,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만이, 세상을 유용한 것과 유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누고 유용한 것만 보려는 인간만이,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할 뿐이다. 눈앞에 두고도 안 보이는 것, 눈앞에 있는데도 못 보는 것, 이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가 필요하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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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가 조여온다. 발소리가 팽팽하게 조여온다.

 

가로수의 조용함이 뾰족해진다. 가로수의 음영이 날카로워진다.

 

모퉁이에서 뒤돌아선다.

누구야, 왜 따라와. 밤길이 걱정이 되었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발끝에 엉겨 붙는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덥석 자라난다. 내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잠시 공원에 앉아 미끄럼틀을 바라본다. 미끄럼틀의 밝은 면은 비어 있다. 미끄럼틀의 어두운 면은 숨어 있다.

 

아무도 없는데 센서등이 켜지고 꺼진다. 고양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 임솔아(1987~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돌아서면 뒷면은 바로 앞면이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서, 알 수가 없어서, 앞면과 같은 길을 걸어도 뒷면은 어둡고 불안하다. 한 몸이지만 앞면과 뒷면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앞면에서 둥글고 편안한 것들은 뒷면에서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이 된다. 앞면에서 친숙한 나의 발소리는 뒷면에서 타인의 발소리가 되어 나를 해칠 듯 쫓아온다. 앞뒤가 같은 미끄럼틀도 “밝은 면은 비어 있”고 “어두운 면은 숨어 있다.”

눈 없고 얼굴 없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서, 뒷면은 늘 궁금하다. 우리의 내면은 밤에 골목길을 혼자 걸을 때의 뒷면을 닮은 것 같다. 불안과 두려움은 뒷면에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날 것 같다. 앞면에는 내가 알 것 같은 나가 가득한데, 뒷면에는 내가 모르는 나가 더 많은 것 같다. 뒷면은 눈이 멀어서, 온몸으로, 온몸의 느낌으로 늘 더듬거려야 한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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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엣 풀이라도 태웠으면!

 - 김소월(1902~1934)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철든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나 이별처럼 ‘가고 오지 못’하는 것들을 겪는 일, 가까운 이들과 갈라져서 뼛속 깊이 그 슬픔의 맛을 새기는 일인가. 따뜻하고 살갑던 관계도 “돌아서면 무심”해지고 냉랭해지는 일을 소름 돋도록 겪는 일인가. 잔머리 굴리는 데 능숙해지고 능글능글해지고 뻔뻔스러워져서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는 자신을 서글프게 바라보는 일인가.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소월의 내면에도 끝내 철들지 않으려는 아이가 있었나 보다. 이 소박한 갈망을 세상은 매몰차게 차버렸다. 산에 핀 꽃을 보며 ‘저만치 혼자서’ 살게 놔두지 않았다. 시인은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맘껏 들볶이고 시달리도록 되어 있나보다.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질수록, 자연과 절망적으로 단절될수록, 잃어버린 것들이 간절히 그리워질수록, 시는 아름다워지고 절절해지는 것인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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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들이 점점 커진다

샌들은 나무, 내 발은 나뭇잎, 큰 신이 벗겨지지 않는다

나는 두 그루의 나무를 신고 있다

바람이 좌판 빨강색 귀걸이를 만질 때

왼발이 꺼진 핸드폰 속 숫자를 누른다

햇살이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머리를 잡아당길 때

오른발이 칼 박물관의 칼의 ㄹ을 지우고 있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길이 흔들린다

 

나를 신고 가지를 뻗어가는 두 장의 지도

나뭇잎이 지도를 벗어나 휘날린다

나도 모르게 나의 발을 자른 걸까

벗지 못하는 DNA와 신지 못하는 DNA

오른발이 홈쇼핑의 글루코사민 광고를 보고

왼발이 아일랜드에 풍차를 세운다

나뭇잎아, 오래오래 아주 오래

공중에서 머물러라

오줌을 싼 이부자리 지도가 지워지기를 기다리던 그 시간처럼

샌들이 커진다 점점 커진다 - 박도희(1964~)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발가락이 다 나오는 샌들을 신고 걸으면 발이 나뭇잎이 되는 느낌. 발이 가지 위에서 파닥거리는 느낌. 발이 샌들을 벗어나 공중으로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 시인은 추리닝 바지를 입고 콩나물을 사러 가는 것 같지만, 실은 나뭇잎을 사러 가는 중이란다. 시인은 샌들을 직직 끌며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것 같지만, 실은 잎맥의 지도를 따라 하늘과 우주를 탐색하는 중이란다.

바람이 통하는 샌들을 신고 걸으면 샌들 위에서 두 그루 나무가 자라는 느낌. 머리카락마다 일어나는 수만 개의 잎이 바람을 받아 파도 소리를 내는 느낌. 발바닥 밑에서 올라온 수액으로부터 땅속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듣는 느낌. 읽은 책과 검색한 스마트폰 정보도 나이테에 저장되는 느낌. 해외로 여행하지는 못해도 발은 상상력을 달고 세상 어느 곳이든 다 다닐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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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릴 때 나는

저 커브 길을 펼 수도

구부릴 수도 있었지

저 커브 길 끝에

당신을 담을 수도 있었지

커브 길을 들어 올릴 수도

낭떠러지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지

당신이 내게 오는 길이

저 커브 길밖에 없었을 때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했지

커브 길 밖에서는 언제나

푸른 자전거 벨이 울렸지

 - 이윤학(1965~)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기다림이 길을 만든다. 기다림이 푸른 자전거 벨소리를 듣는다. 기다리다 지치면 길을 폈다가 구부리기도 하고 몇 번이나 길 끝에 그리운 사람을 담아보기도 한다. 기다리다 심통 나면 길을 들어 올렸다가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기다림은 고통스러운 희망에서 온다. 보고 싶은 사람, 간절히 바라는 삶이 끝내 오지 않아도 금방 나타날 것만 같아서 기다림을 그칠 수 없다. 길 끝에 고정된 눈을 거둘 수 없다. 포기할 수 없는 희망에 붙들려 다른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오지 않는 사람과 얼마나 많이 만나고 이야기하는가. 절망보다 잔인한 희망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다림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만나지 않아도 여러 번 만난 것 같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오지 않는 사람,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조차 살려내 만나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기다리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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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시선

나는 저 작디작은 손들을 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곤 한다

은행과 보험사와 증권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골목의 구멍가게를 지나칠 때

지친 나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나는 집으로 품고 가기 위해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알은체까지 하며

봉지에 적당히 담는 것이다

저것들이 눈을 활짝 열어주는 별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쁜 그림엽서쯤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 내 그림자를 키우지는 못하겠지만

정치 뉴스처럼 짜증스러운 하루를 보듬어주는

우리 집 현관문쯤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저것들의 눈빛이 있는 한

나는 꽤 깊은 밤까지

한그루의 나무를 심듯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것이다

꽝꽝 언 이 겨울 같은 세상살이에서

주택부금을 들 때와 같은 기대감을 품고

가장의 체면도 지킬 것이다 - 맹문재(1963~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바라보는 눈이 따뜻해지는 색을 갖고 있어서, 30촉 알전구처럼 겸손하게 밝아서, 귤은 골목길 구멍가게에 있어야 어울린다. 골목길이 환해지는데, 1000원짜리 몇 장으로도 부자가 되는데, 그래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지는데, 어찌 귤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귤 몇 개가 어찌 고단한 삶에 위안이 되겠는가. 그러나 빈손! 작정하고 잡으면 금방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일들! 늘 허전하고 따뜻한 것이 그리운 맨손! 그 손에는 위안이 되리라. 계란처럼 손에 꼭 쥐고 싶은 크기. 아이들 머리처럼 자꾸 쓰다듬어주고 싶은 동글동글한 모양. 똘똘한 아이의 눈망울처럼 맑고 초롱초롱한 색깔. 한두 개쯤 덤으로 얹어주기에 알맞은 가격.

가까운 이들과 나눠먹고 싶은 마음을 어찌 알고, 귤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꼭 붙어 있는 것일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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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나의 두 눈을 향해 길이 자라났어요.

나는 그 길을 더 이상 알지 못해요.

이제는 모든 것이 나의 내면에서 아무 걱정 없이,

확실한 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어요.

병이 나아가는 사람처럼

감정들은 걷기를 즐기면서

나의 몸의 어두운 집을 이리저리 걷고 있어요.

(…)

나의 이마는 보고, 나의 손은 남의 손에 들린

시들을 읽었지요.

나의 발은 발길에 와닿는 돌들과 이야기하고,

새들은 일상의 벽에서

나의 목소리를 가져가지요.

나는 이제 그렇게 아쉬운 게 없어요.

모든 색깔들은

소리와 냄새로 옮겨지니까요.

색깔들은 음향으로 한없이 아름답게

울립니다.

책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요?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요.

나는 거기에 무슨 말이 적혀있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가끔씩 그것을 살며시 되풀이해보지요.

그리고 마치 꽃송이처럼 두 눈을 꺾어가는 죽음도

나의 두 눈을 찾지는 못할 겁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김재혁 옮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불 좀 켜주세요! 불 좀! 나는 꿈속에서 외치곤 했어요/ 공간이 무너졌어요. 내 얼굴과 가슴에서/ 이 공간 좀 치워주세요.” “내가 없는데! 내가 없는데 도대체 낮이 있을 수 있나요?” 눈먼 후에 여인은 이렇게 절규했다. 그때 눈은 온 세상을 가두는 감옥이었을 것이다.

그 고통이 지나간 후, 눈 바깥으로 나 있던 길은 눈 안으로 들어와 자라고 뻗어간다. 촉감과 소리와 냄새가 시각으로 바뀌는 새로운 세상이 몸 안에서 펼쳐진다. 나무와 자연과 바람이 만든 책을 읽는 밝은 귀가 열린다. 보이는 것을 볼 수 없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예술은 어떻게 생겨나고 시는 왜 우리에게 오는가. 이 시에서 그 은유가 보일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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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싸는 똥은

어젯밤의 내 내력이다

그러니까 몸뚱이의 무늬다

무얼 먹었는지

무슨 말을 가졌는지

싸웠는지 하하 즐거웠는지

남김없이 보여준다

사랑과 폐허, 그리고 원망과 주저 등을

몸은 끙, 한마디로 말한다

쌓아두지 않는 게 몸의 운명인데

내가 지금껏 한 고백들, 선언들, 다짐들은

모두 무언가에 짓눌려 뱉어진 것이다

그리고 내 업이 되어버렸다

지금껏 그걸 모르고 살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똥은

아무 형식도 없이 쏟아진다

어젯밤에 술 취해 고성을 질렀던

핏대도 아프게 쏟아진다

귀 기울여보면

대체 무엇이 이보다 더 냄새나는 말인가

이 세상에

햇빛이 가닿은 우주 안에

 - 황규관(1968~)

일러서트_ 김상민 기자

오늘 배 속은 안녕하신가요? 아침마다 변기에서 똥이 인사를 건넨다. 매일 다른 색 바른 냄새로 다른 인사를 한다. 어제 먹은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았나 봐요. 과음해서 속이 들끓느라 몹시 괴로웠나요.

똥은 어제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 내 생활습관은 건강한지 내 생각은 건전한지 매일 확인해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아침마다 나에게만 살짝 귀띔해준다.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애태우지 말고 속 썩지 말고 스트레스 그만 받으라고.

더럽다고요? 냄새난다고요? 입에서 글에서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말들은 깨끗한가요? 똥이 그 말들처럼 남을 속이거나 해친 적 있나요? 더도 덜도 말고 똥처럼만 정직하다면 세상이 얼마나 향기로울까요.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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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의 햇살은 반쯤 누워오는 것 같다

반공일처럼

반쯤 놀다 오는 것 같다

종달새한테도 반쯤 울어라 헤살 부리는 것 같다

 

반쯤 오다 머문 데

나는 거기부터 햇살을 지고 나르자

 

반쯤은 내가 채우러 갈 토요일 오후의 외출.

 - 고운기(1961~)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토요일이 반공일이던 때가 있었다. 오전만 일해도 얼마나 여유가 있었던가. 빡빡한 일상, 정신없는 날들이지만, 토요일은 일도 반만 하고 공부도 반만 하고 생각도 반만 하고 고민도 반만 해도 되는 날이었다. 출근 복장도 반이면 되니까 넥타이 풀고 티셔츠에 운동화면 된다.

토요일 오전 시간은 오후에 대한 기대로 헐렁헐렁해진다. 초침과 초침 사이는 넓어지고 그 사이는 무엇을 할까 쓸모없어도 자유로운 생각들로 가득 찬다. 인생은 한없이 긴 것 같고, 세상은 넓은 것 같고,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아진다. 막상 오후가 되면 하릴없이 방바닥을 구르기가 십상이지만, 그래도 아직 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생각으로는 하루에 여러 곳을 여행하고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많은 계획들을 실행에 옮긴다.

온종일보다 길고 여유로웠던 반나절. 오후 내내 놀아도 아직 반이나 남아 있던 반나절. 한 주에 가장 힘든 월요일도 견디게 하는 반공일. 주 5일 근무를 하면서 시간은 더 많아졌건만 오히려 시간에 더 쫓기는 것 같다. 그 여유롭던 반은 어디로 갔을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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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서도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 박성우(1971~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렇게 귀여운 촌스러움이라면 좀 떳떳하게 촌스러워도 되지 않을까. 두메산골 고향은 그리워도 왜 촌스러운 것은 부끄러울까. 한국인인 건 자랑스러워도 왜 촌스러운 건 숨기고 싶을까. 왜 세련되지 못해서 안달했을까. 패션도 디자인도 유행도 성형도 촌스러움을 잘 가릴수록 비싸다. 내가 나처럼 안 보여야,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몰라야, 가격은 높아진다.

하지만 그 촌스러움은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서정주, ‘무등을 보며’) 아닌가. 아무렴, 우리 음식의 깊은 맛과 우리 사투리의 구수한 깊이를 다 알고 있는 그 날렵한 혓바닥을 일회용 냅킨에 비할 수는 없지. 참 용하기도 하다, 그 혓바닥. 모두가 열심히 숨기고 가리는 이 촌스러움의 매력을 이토록 유쾌하게 터뜨리다니.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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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급 시각장애 아버지 이온업(48) 씨가

일급 정신지체장애 아들 이기독(20) 군의 허리를

끈으로 동여매고 걷는다

넘어질 때면 무거운 머리부터 넘어지곤 하는 아들을

너펄너펄 걷게 하는 건

등뒤에서 아버지가 붙잡고 걷는 끈이다

새벽 우유배달하는 아버지는 새벽이라서 어둡고

지하방에 누워 있는 아들을 씻기고 먹이는 아버지는

지하라서 어둡지만

담벼락 밑 낮은 패랭이는 알고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끈에 묶여 걷는 까닭

아들이 툭툭 패랭이꽃을 더욱 멍들게 하는 까닭

아버지 신발 뒤축이 담벼락 쪽으로 닳아가는 까닭

걷는 게 온통 업(業)이고

걷는 게 기독(基督)이라는 걸

뱃속을 나와서도 끊지 못하는

질긴 탯줄이라는 걸

 

업이 기독을 앞세우고 걷는다

넘어진 꽃이 눈먼 뿌리를 뒤세우고 걷는다 - 정끝별(1964~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두 장애인에게 한 걸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아득한 거리인가. 이급 시각장애 아버지의 다리와 일급 정신지체장애 아들의 눈이 한 몸이 되어야 한 걸음이 생겨나지 않는가. 눈이 있어도 넘어지는 아들은 아버지의 발이 받쳐주고, 앞 못 보는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성한 눈이 길이 되어주지 않는가. 한 걸음에 바치는 이 지극한 정성에는 건강한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의 운동이 보인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지금 겪는 괴로움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서 온 필연적인 결과다. 그것을 업(業)이라 한다. 그 괴로움을 감당하고 선한 마음으로 좋은 일을 쌓아야 다음에 올 괴로움을 덜 수 있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거룩한 희생과 사랑의 가르침이다. 두 장애인의 걸음은 그 업과 죄를 온몸으로 받아 고행하고 속죄하는 수행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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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저것은 침대처럼 무겁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결정하자

저것은 망가진 침대

저것이 망가진 것뿐인데

나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침대를 옮기고 있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내 몸 위로 침대가 버려진다

내 몸에 이렇게 방이 많았나

방마다 망가진 침대가 들어앉는다

이렇게 좁은 입구를 뚫고

어떻게 네가 들어온 거니?

나는 어쩌자고 침대를 낳을 생각을 한 거니?

좁아터진 방마다 침대가 만삭이다

일요일에 해치울까?

엘리베이터는 아직 수리 중이다

신호등 앞에서만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은

줄곧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다

폭신한 구름다리를 들고 서 있는 골짜기들처럼

나는 무거워졌다 - 조말선(1965~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침대는 안방을 차지한 거대한 쓰레기가 된다. 그 무게가 짓눌러 갑자기 마음은 무거워지고 넓은 안방은 좁아터져 숨이 막힌다. 볼 때마다 거슬려 신경은 곤두서고 손발은 안달이 난다. 당장 쓰레기통에 처넣어야지, 결정하는 순간 마음은 바빠지고 정신은 사나워진다. 망가진 것은 침대일까 나일까?

버려야지 생각하면 새 물건도 쓰레기가 된다. 취향이 맞지 않아서 유행이 조금 지나서 신상품이 나와서 생각이 바뀌어서 물건들은 무더기로 쓰레기가 된다. 물건들은 주인의 눈치를 본다. 언제 버려질지 몰라 벌벌 떤다. ‘우리 애’라고 부르던 강아지는 어느 날 유기견이 되고 가까운 친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몹쓸 놈이 된다. 산처럼 쌓였다가 매립되는 쓰레기, 섬이 되어 바다를 떠도는 쓰레기를 보라. 세상에! 저렇게 망가진 마음들이 많다니!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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