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경향시선'에 해당되는 글 228건

  1. 2017.11.13 유령들
  2. 2017.11.06 허기
  3. 2017.10.30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
  4. 2017.10.23 저녁 일곱 시 이십 분쯤
  5. 2017.10.16 붉은 스웨터
  6. 2017.10.11 까자끼 자장가를 들으며
  7. 2017.10.11 별이 비치는 지붕
  8. 2017.09.25 달동네 아코디언
  9. 2017.09.18 무서워서 우리는
  10. 2017.09.11 요구
  11. 2017.09.04 시골길
  12. 2017.08.28 주소
  13. 2017.08.14 편지
  14. 2017.08.07 수평선
  15. 2017.07.31 이럴 때 내 몸은 그 문을 활짝 열어
  16. 2017.07.24 우리나라 악기
  17. 2017.07.17 방아깨비의 코
  18. 2017.07.10 뒷면
  19. 2017.07.03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20. 2017.06.26 나뭇잎을 사러 간다

커튼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비좁은 장롱 속에 들어가는 것은

더없이 쉬운 일이다

이불 밑에 납작하게 누워 있어도

피아노의자 아래 네 발로 기어들어가

새끼 고슴도치로 웅크려 있어도

금세 웃음소리를 찾아낼 수 있다

발코니 구석에서 은빛 물방울이 되고

유리창에 달라붙은 햇빛이 되고

발가락까지 오그린 투명한 숨소리가 되는 아이들

그렇게 아무리 숨어 있어도

가면을 몇 개씩 찾아 쓰고 있어도

얘들아 이 집에서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단다

물풀 같은 하얀 종아리가 다 자라고 나면

굳이 숨으려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너희들을 사라지게 할 거야

보이지 않게 만들 거야

다른 그 무엇이 될 수 없게 서류 속에 집어넣을 거야

그때까지만이라도 숨은 그림을 그려야지

유령과 싸워야지 커튼 뒤에서 장롱 속에서

 - 김태형(1970~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술래가 되어 어디 있는지 모르게 사라지는 즐거움. 그러다 갑자기 몸을 입고 나타나 사람들 놀래어 주는 즐거움. 숨고 싶은 마음과 들키고 싶은 마음 사이에 술래잡기의 재미가 있는 것 같다. 숨는 즐거움보다 들키는 즐거움이 더 크지 않을까. 들키는 순간의 놀람과 희열,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던 긴장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맛보고 싶어 유령도 되어 보고 투명인간도 되어보는 것 아닐까. 그러나 시인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겪을 슬픈 술래잡기를 예감한다. ‘나’라는 고유한 존재는 없어지고 명함이나 서류에 이름으로만 존재할 때,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될 때, 그래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술래 ‘나’를 찾아야 할 때,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두려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정신이 없을 그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셰익스피어, <리어왕>)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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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귀로 국수를 먹습니다 바람국수를요 바람이 키운 아이가 국수를 말고 있습니다 굶어죽은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고명으로 얹혔네요 누군가 어깨를 들먹이며 울먹이는 국수 흐느끼는 국수 한숨으로 울음으로 뜨거워진 국수를 먹습니다 내 안에 사는 허기라는 이름을 가진 짐승은 다리가 코끼리를 닮았고 대가리는 쥐를 닮은 놈이 배창새기가 흰고래수염만큼 커서 그 허기가 말도 못하여 저승 윗목에 부는 바람같이 막을 길이 없습니다 국수를 먹습니다 불치의 국수를 집 없는 국수를 문이 없어 꽉 막힌 국수를 팔다리 잘리고 몸뚱이로만 굴러다니는 불구의 국수를 - 조길성(1961~)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허기가 수십 년간 익을 대로 익어 국수가 되었네요. 바람결에서 국숫발을 뽑아 만든 국수. 먹지 않아도 후루룩후루룩 맛있는 소리가 나는 국수. 울음이 국물이 되고 “굶어죽은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고명으로” 얹힌 국수.

허기는 자라고 자라 아무리 먹어도 배불러지지 않는 커다란 배가 되었네요. 먹으면 먹을수록 더 배고파지는 위장이 되었네요. “다리가 코끼리를 닮았고 대가리는 쥐를 닮은 놈”, “배창새기가 흰고래수염만큼” 커다란 짐승이 되어 배를 채워달라고 끊임없이 보채네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는 막막하고도 넓은 백지를 시로 채우고 싶은 상상력이 되었네요. 그토록 몸에서 떨쳐내려고 애썼지만, 허기는 이제 없으면 살 수 없는 불치병이 되었네요.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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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 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져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길을 타 넘지 못하고, 도시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 이하석(1948~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뭇잎이 일으키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바람 무늬를 온몸으로 그리는 나뭇잎들을 보면 종종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쁨이 느껴진다. 알 수 없는 것들에서 무한한 호기심과 설렘이 일어난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설렘도 기쁨도 일어나지 않는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사물과 우리 몸 사이를 차단시킨다. 귀를 기울이면 사물과 자연에는 자기도 모르게 행복해지는 말, 저절로 가슴이 뛰는 말, 마음 세포가 깨어나는 말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경험한 적도 말한 적도 없는 생생한 이름들이 가득하다. 작가는 ‘이름 지어지지 않은 것 혹은 감히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사르트르)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를 느낄 때 모르는 것들 속에서 생동하는 신비를 즐길 수 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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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는 머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회사를 나오는데

수위는 으레

사람 목엔

머리가 붙어 있으려니

얼굴 없이 인사를 해도

안녕히 가시오

내일 봅시다

평화로운 제의를 한다

옆구리에 끼인 머리는

투구처럼 묵묵히

다시 쓰일 전쟁을 기다리며

다만 버릇이 된

불안의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데

가을 거리의 좌판에는

붉고 푸른 혹들이

그득히 쌓여 있다.

 - 이상희(1960~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종일 눈알과 머리를 혹사시키고 퇴근하면 잠시 머리통을 목에서 떼어내고 싶어진다. 아무것도 쳐다보기 싫은 눈알을 가방의 어둠 속에 깊숙이 넣어두고 머리통 없이 쉬고 싶어진다. 눈과 머리가 일하는 동안 하릴없이 의자에 붙어 있느라 답답했던 다리와 엉덩이도 갇혀 있던 집에서 나와 신나게 깡충거리는 강아지처럼 퇴근길을 마음껏 걷게 해주고 싶어진다.

사무원들의 두툼한 가방에는 서류나 소지품만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다음날 사용해야 할 머리통도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얼굴 없이 목과 눈 없이 인사를 해도 으레 “사람 목엔 머리가 붙어 있으려니” 여기고 받아주는 풍습이 있으니, 머리통을 떼어놓고 다닌다 해도 결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술 먹느라 밤늦도록 머리통을 목에 붙이고 있으면 다음날 일터에서 머리 없이 눈 없이 일해야 할 테니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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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올만 당기면 풀어질 듯

입을 막고 있어서 우리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몸속에 둔 실마리를 들키지 않을 것처럼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에 엮여서

두껍고 따뜻하고 촘촘한 사람이 되었지만

손가락이 닿으면 파르르 떨리는

 

스웨터의 물결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손끝에서 맥박이 섞이고

 

눈을 가만히 닫고 있으면

물려 입은 옷처럼 타인의 냄새가 난다

조심조심 숨소리를 헤아리는 호흡이 틀니처럼 박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재활용되고 있었던 걸까

깨끗이 빨아 입어도 낡은 슬픔뿐

 

(…)

 

어둠의 매듭이 묶이고 풀릴 때마다

핏물로 짠 스웨터가 몸속에서 뒤척거렸다

입을 닫아 주어도 잠들지 않았다

 

 - 이민하(1967~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실마리 하나만 풀어져도 전체가 주르르 풀리게 되어 있는 스웨터. 그 가느다란 실에 삶과 존재가 다 의지하고 있다니. 그러니 어머니는 자신의 붉은 핏물로 한 땀 한 땀 짠 어린 스웨터가 집 밖을 나서기만 하면, 차조심해라, 앞뒤 살펴라, 사람 조심해라 당부하는 것 아닌가. 어머니에게 받은 그 스웨터를 소중히 간직했다가 조금 풀어서 자식에게도 짜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가느다란 실은 스웨터로 짜기 전에는 목이 어디 뚫렸는지 팔이 어디 달렸는지 알 수 없는 실타래였다. 스웨터가 낡거나 해지기만을 기다리며, 그 실은 직물에서 해방되어 다시 헝클어진 실이나 둥근 덩어리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화장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는 올올이 실 모양을 닮은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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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자장가는 왜 이리 슬플까

그건 꿈에서 왔기 때문이지

이루지 못한 꿈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전생에서 오는 것

세상이란 슬픈 곳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지

태어나기 전부터 알기 때문이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태반에서부터 빙글빙글 돌아가는 음반

바늘이 운명의 표면을 긁을 때 나는 소리

하늘의 별도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소멸한다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아기의 귀에 수면의 묘약을 흘러보내며 말하지

세상 같은 거 잊으라 잊으라

지구는 회전하고

세상의 모든 자장가는 그 회전축을 따라 돌고 있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 정철훈(1959~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러시아 가수가 불러도, 조수미가 불러도, 코사크 자장가(‘까자끼’는 ‘코사크’의 러시아어 발음)는 한결같이 슬프다. 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지만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아야 했던 코사크족의 애환이 이 자장가에 스며 있기 때문일까.

그 슬픈 곡조에는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나 전장에서 싸우다 죽을 아기의 운명에 대한 어머니의 깊은 연민과 애도가 있는 것 같다. 아기를 재우는 노래이면서 전쟁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의 영면을 기원하는 노래 같다. 가장 깊고 편안한 잠은 죽음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후 오래오래 잠들었다가 이제 막 아기로 환생한 청년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같기도 하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처럼 세상은 시끄럽고 네가 누운 곳은 누추하지만, 아가야, 필사적으로 편안하게 자거라. 자장 자장 자장,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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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장이 나빠 소화가 안되는 날은

배를 문지르며 고향으로 갑니다.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산골길

길 끝에 변소 하나

버섯처럼 기울어져 서 있고

그 안에 앉아 있는 어릴 적 나를 봅니다.

힘들어 찡그리며 쳐다보는 내 눈에

썩은 서까래 터진 지붕 틈새로

언뜻 나를 쏘아보던 밤하늘 별빛

독 안에서도 하얗게 내리깔리던 별빛.

겁에 질린 나는 얼른 뛰쳐나오고

밤이면 다시 그 근처를 얼씬 못하였습니다만

그 일로 내 마음 지붕도 그렇게 터져서

다른 곳은 다 고쳐도

그곳만은 꿰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라고

자라서도 또 망가진 변소 하나

몸속에 몰래 지어놓고 살았던가.

쭈그려 생각에 잠기거나

번뇌에 쫓기어 깊이 헤매는 밤이면

터진 몸의 지붕 틈새로

번뜩이며 나를 쏘아보던 별빛

고향 마을 뒷산 솔바람 소리

우주 저쪽의 몸짓까지 함께 묻어와

쏴쏴 나를 쓸며 다니는 소리.

 - 이성선(1941~2001)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눈비를 막지는 못해도 쏟아져 내리는 별빛은 마음껏 들어오는 허름한 지붕이 시인의 마음에 살고 있네요. 기억 속으로 우주를 끌고 들어온 별빛이 소화가 안되어 불편한 내장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네요. 어두운 마음으로 별빛이 터져 들어와, “다른 곳은 다 고쳐도/ 그곳만은 꿰맬 수” 없으니, 어디에 있더라도 그곳이 고향이고 유년이겠네요.

고개만 들면 물방울처럼 떨어질 것 같은 별이 보이는데, 눈비를 막느라 별빛까지 막아버린 지붕 아래에서 문을 꼭꼭 닫고 사느라 별을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추석날 밤에는 탁 트인 벌판에 나가 일 년 중에서 가장 둥글고 환한 달빛과 사과처럼 탐스럽게 익은 별빛을 눈동자에 실컷 묻혀보고 싶습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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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줄기 중계본동 비탈길을 오릅니다

좁아지고 넓어지고 늘어나고 줄어드는 길을 따라

발자국들이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연탄들도 뜨끈뜨끈하게 오르고 있습니다

손이 던지는 대로 연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가파르게 돌을 넘습니다

연탄 리어카는 난방관처럼 돌아다니면서

흩어지고 도망가는 길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각진 길의 주름이 접히고 펴집니다

발자국이 건반 같은 돌계단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까치발 구두를 신은 여자들이 휘어진

길을 다듬고 있습니다

돌은 냄새나는 도랑 위에 징검다리를 놓습니다

고드름도 등고선처럼 오르내립니다

주름으로 채워진 지붕이 눈보라에 주저앉았다가 일어섭니다

비바람이 두드리고 습기가 갉아먹습니다

처마에서 녹아드는 골함석이 이처럼 쑥쑥 빠집니다

까치들의 울음소리가 지붕의 골을 메웁니다

햇살이 빨대처럼 지붕을 빨아먹다가 구멍을 냅니다

뻥 뚫린 곳은 숨구멍입니다

(……)

 - 이명우(1959~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달동네 골목길은 달동네 사람들의 삶처럼 굴곡은 많지만,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리듬을 타며 움직이는 맛이 있다.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늘어나고 줄어들며 넓어지고 좁아지며 걸음을 연주하는 음악이 있다. 직선과 속도가 없는 이 길을 지나가면, 관절이 쑤시는 무릎도 사연이 많은 이삿짐도 강추위를 견딜 무거운 연탄과 김장배추도 모두 가락은 슬프고 박자는 신나는 음악이 된다. 낡아가고 허름해지면서 이야기는 많아지고 애환은 깊어져서 길은 점점 더 구성진 노래가 된다. 늦은 밤이 되면 취기에 흥이 난 노래가 이 길처럼 마음껏 비틀거리며 갈지자로 구불거리며 올라올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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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리를 줄여놓고 음악을 듣고

음악보다 더 큰 잡음을 듣고

뒷문 밖에서 시멘트 쪼가리 벌리고

풀이 지나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해충처럼 때 낀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숨어들고

탐스러운 거미줄을 망가뜨리고

부지런한 곤충들을 으깨어 죽이고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웃음이 나오면 재빨리 입을 다물고

이불 속에 까만 손을 집어넣고

금지된 것을 만지고

 

묵은 재 냄새가 나는 우리는

누가 잘못됐다는 말을 기다리고

죽은 우리를 누가 깨우러 올까 궁금해 하고

쥐처럼 눈동자를 빛내고

 - 김개미(1971~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소심하고 겁 많고 내성적인 사람들을 보면 나를 닮은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친근하다. 작은 일 하나라도 생기면 상상력으로 크게 부풀려서 미리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 대단치 않은 일을 당해도 심장은 알아서 철렁 내려앉고,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나오고, 다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열심히 후들거리는 사람들. 분위기가 이상하면 아무리 조용하게 숨을 쉬어도 제 숨소리가 폭풍처럼 들리는 사람들.

뭔가 일이 터질 것만 같아서 눈은 눈치 보는데 이력이 나고, 심장은 걸핏하면 쿵쿵 뛰고, 입은 들킬 일도 없는데 들킬까 봐 꽉 닫혀 있다.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다섯 번씩 열 번씩 눈동자를 굴려야 한다. 사람 많은 곳에서는 눈에 안 띄는 곳을 귀신 같이 골라 앉고 질문이 오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곳을 보는 척하는 데 능숙하다. 이런 모습을 남에게 들키는 건 창피한 일이지만 시에게 들키면 오히려 통쾌하고 즐겁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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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라는 도구가 있어 갈고리처럼 생겼는데, 왜 요구라고 부르는지 물었는데 자꾸

처음부터 있었다고 해. 사전에는 필요한 도구가 要具라는 거지. 이 요구로 무거운

생선궤짝을 찍어 당기면, 경험만 있음 할머니들도 거뜬히 배에서 언 선동오징어

60마리 상자를 옮기지. 이 요구는 길이가 30에서 50센티미터, 1미터 정도로 각각

다른데 그건 일꾼들마다 키와 몸이 다르니, 체형에 맞게 만든다고 해. 허리를

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 허리는 굽히지 말고 무릎만 굽히라고 그러는군. 그러고

보니 공판장이나 어시장에서 이 요구만큼 적절한 도구가 없더만. 이 요구로 자기 발등

이나 무릎을 한 번은 찍어야만 바다가 사람을 받아준다는군. 한번은 이 요구를 들고

바다에 바닷물을 받으러 갔어. 이 요구로 지난날을 모두 찍어버리려 했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물었어. 나는 누구냐고 나의 괴로움은 무엇이냐고. 처음부터 있었다고 해. - 성윤석(1966~)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펜을 들었던 손으로 손에 익지 않은 요구를 사용하는 일, 자신이 쓴 글이 자신을 괴롭히듯 요구가 제 발등을 찍는 일, 그 날카로운 도구로 지난날을 다 찍어버리고 싶은 충동, 그런 경험을 거치고 나서, 어느 날 시적 화자는 요구가 팔에 달린 또 하나의 팔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하지 않았을까? “나는 누구냐고 나의 괴로움은 무엇이냐고” 펜으로 그토록 간절하게 물었던 물음을, 머리와 글이 대답해 주지 않았던 물음을, 팔에 새로 돋은 요구가 대답해 주지 않았을까? 공기처럼 물처럼 “처음부터 있었다고”. 눈과 귀처럼 팔다리처럼 처음부터 몸에 달려 있었다고.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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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천천히 구름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시골길.

감자밭 감자가 시골 소년의 알통처럼

소리 없이 굵어가고,

명태 꼬리 두어 개 삐죽이 내민 짐 보퉁이를

시골 여인이 머리에 이고 가는 길.

 

길가 풀섶 둥지에서는 들새가

제 체온으로 데울 만큼의 알을 낳아

따스히 품고 있다.

달콤한 햇볕 아래서

보리앵두는 빨갛게 익어간다.

 

일부러 해찰을 하듯 날아다니며

나비는 풀꽃마다 꽃가루를 옮기고,

소나기를 머금은 구름은 머얼리서

느리게 천둥소리 피워 올린다.

 

신발을 벗어버린 내 맨발은

붉은 황토흙이다.

맨발 아래서 질긴 질경이풀처럼

생명 있는 것들이 꿈틀거린다.

 

내 뜨거운 손을 저무는 해에 얹으면

해 그림자 길게 깔리는 시골길

길 따라 내 삶도 천천히 익어간다.

 -이준관(1949~)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에서 햇볕과 풀냄새와 벌레 소리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종아리 걷고 고무신 신고 걸으면 다리에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어린 시절이 깨어날 것 같다. 그때 다니던 길들이 핏줄 따라 세차게 돌 것 같다. 하도 많이 다녀서 지도가 새겨진 발바닥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다 알고 있으리라.

어린 시절 다니던 길은 이제는 거의 바뀌었거나 없어졌다. 황토색이 눈을 씻어주고 풀냄새가 허파와 내장을 씻어주는 흙길. 들숨 날숨 한번에 몸속을 여러 번 돌고 나가는 오솔길. 지금은 기억에 남아 겨우 연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골길의 아름다움은 생생할수록 안타깝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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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집이 어딨죠? 기사가 물었던 때는 저녁 어스름이었다

하늘이 잠시 멈췄다

행인은 어둠을 향해 전등을 비추고

버드나무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저 나무에서 멀지 않아요

바로 앞에 골목이 하나 있는데

신이 꿈꾸는 것보다 푸른 정원을 끼고 있죠

사랑이 믿음과 정직의 깃털만큼 파란 곳이에요

골목 끝까지 가시면 청소년의 뒷골목이 나오는데

거기서 고독의 꽃 쪽으로 돌아서

꽃 두 발짝 앞 신화 속 영원의 샘물에 들르세요

맑고 깨끗한 두려움에 휩싸일 거예요

그 은밀한 공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빛의 둥지에서 새끼 새를 꺼내려고 소나무를 오르는

아이가 보일 거예요

그럼 걔한테 물어보세요

친구 집이 어딨니?

-소라브 세페리(Sohrab Sepehri, 1928~1980) 신견식 옮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행정구역이나 주소를 가리키는 말보다 땅과 공기와 나무의 느낌이 더 중요한 곳. 지도 대신 냄새로 소리로 촉감으로 길과 집을 찾는 곳. 말이 머리와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핏줄과 피부에서 나오는 곳. 구석구석 마을의 아주 은밀한 움직임과 활기도 온몸의 더듬이로 다 찾아내는 곳. 집과 골목과 정원에,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에, 신화가 살아 있는 곳.

이 마을에서는 아직도 나무나 새와 이야기하는 관습이 이어질 것 같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처럼 거리를 활보해서 보이지 않는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것 같다. 자연과 사물은 주민들의 느낌 속에서 다 살아 있어서 주민들의 몸짓과 말이 다 시가 될 것 같다. 길을 물으면 주소가 시가 되어 나오지 않는가. 그 순간 평범한 일상은 신화가 숨 쉬는 시공간으로 바뀌지 않는가.

이란 현대 시인들의 시를 묶은 <미친 듯 푸른 하늘을 보았다>에 실린 시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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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 아래 또렷한 조약돌들

당신이 보낸 편지의 글자들 같네.

강물의 흐름에도 휩쓸려가지 않고

편안히 가라앉은 조약돌들

소근소근 속삭이듯 가지런한 글자들의 평온함

그러나 그중 몇 개의 조약돌은

물 밖으로 솟아올라 흐름을 거스르네,

세찬 리듬을 끊으며 내뱉는 글자 몇 개

그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겠죠,

그토록 자제하려 애써도

어느새 평온함을 딛고 삐져나와

세찬 물살을 가르는 저 돌들이

당신 가슴에 억지로 가라앉혀둔 말이었겠죠,

당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심장 속에 두근거리는. - 채호기(1957~)

금년 장마철엔 중부지방에 비가 제법 와서 계곡에는 바위를 끼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겠지요. 깨끗하게 씻긴 바위에 앉아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싶습니다. 찬 기운이 정강이에서 심장으로 정수리로 올라와 서늘하겠지요.

혀처럼 부드러운 물이 오랜 세월 동안 깎아 더없이 매끄러운 바위를 생각합니다. 칼이나 끌이 아니라 물줄기가 포옹과 애무로 깎은 바위에서는 핏줄과 살갗과 체온이 느껴지겠지요. 키스와 포옹으로 바위를 깎는 나직하고 간지러운 물소리는 지금도 들리겠지요.

한때 흙탕물을 일으키고 바위와 돌을 뒤집던 거친 물살은 지금 어디서 흐르고 있나요? 흰 거품을 일으키며 물살을 마구 튀어 오르게 하던 뾰족하고 모난 돌들은 어디로 갔나요? 깊은 주름과 울퉁불퉁한 수면으로 일렁거리던 물줄기는 이제 순해졌나요? 발음이 달리지 않아 침묵만 풍성한 바위의 말과 물의 문장에 귀 기울여 봅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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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빨랫줄 참 길게 눈부시다

태양을 널었다가

구름을 널었다가

오징어 떼를 널었다가

달밤이면 은빛으로 날아다니는 갈치 떼를 널었다가

옛날에는 귀신고래도 너끈하게 널었다는

그래도 아직 단 한 번 터진 적 없는

저 빨랫줄

한라산과 백두산이

가운데쯤 독도를 바지랑대로 세워놓고

이쪽, 저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주는

참 길게 눈부신

저, 한국의 쪽빛 빨랫줄

 -배한봉(1962~)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수평선으로 빨랫줄 한 번 잘 만들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빨랫줄에 옷을 널면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춤추며 잘도 말랐지. 그 줄이 한라산에서 독도 지나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한여름 햇빛을 받아 반짝이면서도 한 번도 탈색된 적이 없는 싱싱한 쪽빛 수평선을 떠올려본다. 그 반듯한 줄에 구름도 널고 일출과 노을도 너는 공상도 해본다.

수평선은 움직임 없는 한 줄 고요한 직선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쉬지 않고 수면을 들이받으며 출렁이고 뒤채는 격렬한 물결이다. 소리 지르고 포효하고 바위를 때려 제 몸을 부수는 파도이다. 그 티 없이 반듯한 직선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마음을 널면 눅눅한 기분이 때와 함께 날아가 자꾸 만지고 싶어지도록 뽀송뽀송해지겠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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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덥다

이럴 때 내 몸은 그 문을 활짝 열어

땀이란 놈을 내어 보낸다

땀은  그 속에서 오래도록 나오고 싶어

안달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 미세한 숨길 따라

갇혀 있던 그들이 크게 한번 숨쉬고 싶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살살 간질이며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무리들

흙속에 갇혀 있는 어린 풀줄기들 봄이 되면

쏙쏙 고갤 내어밀듯이

그래서 숲을 이루듯이

땀은 얇은 막을 만들어

포장지로 싸듯 몸을 휘감는다

안과 밖이 서로 바뀌는 순간이다

편안한 집 속에 나는 나의 몸을 맡긴다

이럴 때 우리 영혼은

그를 늘 싸안고 있는 몸에게 미안했던지

한번쯤 몸을 감싸고 싶어

땀을 보냈던 것일까

한번쯤 몸을 위해 밖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손진은(1959~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연일 후덥지근해서 조금만 걸으면 몸은 금방 뜨거워지고 끈적끈적해지고 옷은 피부에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안 떨어진다. 하지만 땀이 피부가 배설하는 오줌이라면 몸 안에 고이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오래 참았던 오줌을 누듯 땀을 흠뻑 흘리면, 피부는 불쾌해도 몸속은 시원하고 개운할 것이다.

땀을 흘린다는 건 닫힌 문 안에서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놈들을 활짝 열어 내보내는 것이라고, 막혀 있던 숨을 열어 피부가 마음껏 숨쉬게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몸 안팎이 서로 바뀌는 거란다. 냉방을 한 실내에만 있는 건 땀을 몸 안에 가두는 것. 땀구멍을 활짝 열어 몸 안을 환기하자. 마음에 쌓인 노폐물도 땀에 실어 내보내자.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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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나무는 들은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한나절이면 피리가 된다. 가죽은 가슴 칠 일이 많아서 하룻저녁에 북이 된다. 나무는 저도 말 좀 해보자고 신새벽 골라 가야금이나 거문고가 된다. 쇠는 무시로 손들고 나오며 징이 되고 꽹과리가 된다. 쟁쟁쟁, 쇠한테 지고 싶지 않은 돌들이 편경이 된다.

 

2. 이 흙덩이는 뭐냐, 떡시루 같은!

저울추 같은!

(늙은 흙이 답한다) 오래전에 묻혔으나

썩지 않은 말들이 일어나 불속으로 간다,

눈 못 감는 혼백, 잠 없는 귀신들이

훈(壎)이 된다,

부(缶)가 된다.

 

공자님 앞이나

종묘로 가서 이쪽저쪽 잘 통하는

언어가 된다. - 윤제림(1960~)

편경이나 훈, 부 같은 악기를 만든 이들은 돌이나 흙에도 음악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바람이 들어갈 틈 없는 그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힘과 소리와 리듬을 찾아내고 귀를 기울였을까. 컴컴하고 꽉 막힌 돌 속의 음과 흙 속의 리듬을 어떻게 밝은 세상에 꺼냈을까.

오카리나처럼 흙을 구워 구멍을 뚫은 훈(壎)은 작은 항아리 모양의 주둥이에 바람을 불고 다섯개의 구멍으로 음을 조절하는 관악기이다. 흙 속에 숨어 있는 길들을 찾아 바람이 드나들 길을 만들고 음악이 마음껏 춤추게 한 이는 누구인가.

돌과 흙도 악기가 되니, 세상에 음악이 깃들지 않을 사물은 없겠구나. 땅속에 묻힌 이들이 다 하지 못한 말들, 육신은 썩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 말들도 무덤에서 나와 음이 되고 리듬이 되어 이승을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을 것이다. 그 말에 불길을 입히고 구멍을 뚫어 음악이 되게 하니 그 울림이 어떠하겠는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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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깨비의 코

새앙쥐의 코

메추리의 코

그 작은 코 보셨습니까?

 

뜸부기의 입

뻐꾸기의 입

종달이의 입

그 작은 입 보셨습니까?

 

비가 오면 이 작은 것들도

비에 젖습디다

방아깨비의 코

뻐꾸기의 입

 

(표현의 엄밀성, 그러니까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엄밀성을 기술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이 시가 씌어진 날은 내가 공허로 공치는 날.)

 

비오는 날, 비가 오면

내 작은 눈, 입, 코, 귀도 비에 젖습디다.

눈 위에 빗방울, 코 위에 빗방울.

 - 오규원(1941~2007)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방아깨비에게도 코가 있을까. 숨 쉬려면 코가 있어야겠지. 그러나 누가 그 사소한 게 궁금하다고 들여다보기나 할까. 방아깨비는 코가 있어도 없는 거나 다름없다.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 것,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인간 말고는, 인간이 이용하는 물건 말고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있으나마나 한 것이 감히 존재하려 하다니, 방아깨비의 코는 참 무례하구나.

하지만 비가 오면 사람만 맞는가? 인간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비조차 맞지 않는가? 아무리 볼품없고 쓸모없는 것이라도 비를 맞는다는 사실,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만이, 세상을 유용한 것과 유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누고 유용한 것만 보려는 인간만이,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할 뿐이다. 눈앞에 두고도 안 보이는 것, 눈앞에 있는데도 못 보는 것, 이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가 필요하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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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가 조여온다. 발소리가 팽팽하게 조여온다.

 

가로수의 조용함이 뾰족해진다. 가로수의 음영이 날카로워진다.

 

모퉁이에서 뒤돌아선다.

누구야, 왜 따라와. 밤길이 걱정이 되었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발끝에 엉겨 붙는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덥석 자라난다. 내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잠시 공원에 앉아 미끄럼틀을 바라본다. 미끄럼틀의 밝은 면은 비어 있다. 미끄럼틀의 어두운 면은 숨어 있다.

 

아무도 없는데 센서등이 켜지고 꺼진다. 고양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 임솔아(1987~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돌아서면 뒷면은 바로 앞면이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서, 알 수가 없어서, 앞면과 같은 길을 걸어도 뒷면은 어둡고 불안하다. 한 몸이지만 앞면과 뒷면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앞면에서 둥글고 편안한 것들은 뒷면에서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이 된다. 앞면에서 친숙한 나의 발소리는 뒷면에서 타인의 발소리가 되어 나를 해칠 듯 쫓아온다. 앞뒤가 같은 미끄럼틀도 “밝은 면은 비어 있”고 “어두운 면은 숨어 있다.”

눈 없고 얼굴 없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서, 뒷면은 늘 궁금하다. 우리의 내면은 밤에 골목길을 혼자 걸을 때의 뒷면을 닮은 것 같다. 불안과 두려움은 뒷면에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날 것 같다. 앞면에는 내가 알 것 같은 나가 가득한데, 뒷면에는 내가 모르는 나가 더 많은 것 같다. 뒷면은 눈이 멀어서, 온몸으로, 온몸의 느낌으로 늘 더듬거려야 한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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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엣 풀이라도 태웠으면!

 - 김소월(1902~1934)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철든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나 이별처럼 ‘가고 오지 못’하는 것들을 겪는 일, 가까운 이들과 갈라져서 뼛속 깊이 그 슬픔의 맛을 새기는 일인가. 따뜻하고 살갑던 관계도 “돌아서면 무심”해지고 냉랭해지는 일을 소름 돋도록 겪는 일인가. 잔머리 굴리는 데 능숙해지고 능글능글해지고 뻔뻔스러워져서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는 자신을 서글프게 바라보는 일인가.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소월의 내면에도 끝내 철들지 않으려는 아이가 있었나 보다. 이 소박한 갈망을 세상은 매몰차게 차버렸다. 산에 핀 꽃을 보며 ‘저만치 혼자서’ 살게 놔두지 않았다. 시인은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맘껏 들볶이고 시달리도록 되어 있나보다.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질수록, 자연과 절망적으로 단절될수록, 잃어버린 것들이 간절히 그리워질수록, 시는 아름다워지고 절절해지는 것인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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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들이 점점 커진다

샌들은 나무, 내 발은 나뭇잎, 큰 신이 벗겨지지 않는다

나는 두 그루의 나무를 신고 있다

바람이 좌판 빨강색 귀걸이를 만질 때

왼발이 꺼진 핸드폰 속 숫자를 누른다

햇살이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머리를 잡아당길 때

오른발이 칼 박물관의 칼의 ㄹ을 지우고 있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길이 흔들린다

 

나를 신고 가지를 뻗어가는 두 장의 지도

나뭇잎이 지도를 벗어나 휘날린다

나도 모르게 나의 발을 자른 걸까

벗지 못하는 DNA와 신지 못하는 DNA

오른발이 홈쇼핑의 글루코사민 광고를 보고

왼발이 아일랜드에 풍차를 세운다

나뭇잎아, 오래오래 아주 오래

공중에서 머물러라

오줌을 싼 이부자리 지도가 지워지기를 기다리던 그 시간처럼

샌들이 커진다 점점 커진다 - 박도희(1964~)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발가락이 다 나오는 샌들을 신고 걸으면 발이 나뭇잎이 되는 느낌. 발이 가지 위에서 파닥거리는 느낌. 발이 샌들을 벗어나 공중으로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 시인은 추리닝 바지를 입고 콩나물을 사러 가는 것 같지만, 실은 나뭇잎을 사러 가는 중이란다. 시인은 샌들을 직직 끌며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것 같지만, 실은 잎맥의 지도를 따라 하늘과 우주를 탐색하는 중이란다.

바람이 통하는 샌들을 신고 걸으면 샌들 위에서 두 그루 나무가 자라는 느낌. 머리카락마다 일어나는 수만 개의 잎이 바람을 받아 파도 소리를 내는 느낌. 발바닥 밑에서 올라온 수액으로부터 땅속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듣는 느낌. 읽은 책과 검색한 스마트폰 정보도 나이테에 저장되는 느낌. 해외로 여행하지는 못해도 발은 상상력을 달고 세상 어느 곳이든 다 다닐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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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