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방문자

형사가 들어와 수갑을 채운다 당신을 살인죄로 체포하겠소 난 무죄요 도대체 왜 이럽니까? 형사는 긴급 체포영장을 내보이며 말한다 당신은 어젯밤 꿈속에서 한 여자를 살해했소 그 사체가 오늘 아침 강변에서 발견되었소 자신을 목격자라고 밝힌 한 아이가 나를 찾아왔소 저기 벤치에 앉아 있는 아이가 보이오? 저 벙어리 아이는 당신의 꿈속에서 왔다고 했소 자 경찰서로 갑시다 가면서 살인동기나 들어봅시다 난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꿈이오 그렇소 당신은 당신조차도 모르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오 그건 꿈이 아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이 피 묻은 칼과 현장 사진들을 보시오 아닙니다 모두가 조작된 게 분명합니다 형사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조용히 창을 연다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말한다 나도 이 불결한 꿈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오

- 함기석(1966~ )


△ 환상은 현실에서 조작하기 좋은 아름다움이지만, 환상 속에서 되레 현실을 꿈꾸는 일이란 당혹스러운 상징 질서들이 갖는 폭력을 예비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환상 속에 갇힌 시인의 ‘불결한 꿈’은 현실의 불편을 밀고하는 윤리적 더듬거림으로 읽어야겠다. 꿈속에서 저지른 죄를 벙어리 아이가 증언하고 있고, 꿈의 사건이 현실에서 재구성되어 꿈속의 행동을 빌미로 나를 구속하려고 한다. 나는 이 조작된 모든 것에서 무죄를 요구하고 싶지만 이 또한 하나의 꿈이라고 생각해보니, 그저 달관에 이르게 될 뿐이다.
때때로 시 너머에 있는 무엇을 시도하는 시인들이 있다. 그러나 너머의 영역이란 늘 시가 될 수 있는 자리들의 경계나 그 바깥을 요구한다는 데에 그치기 마련이다. 반시(反詩)가 지향하는 역동적 자율은 이미 시적 질서를 반하는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질서를 떠나기 위한 또 다른 질서이다. 언어의 극단에 닿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표현 불가능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세계가 있을까.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환상의 가능성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는 노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함기석의 시를 읽는다. 낯선 방문자처럼 다시, 함기석을.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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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팝니다, 연락주세요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콩팥을 팝니다 전화주세요,를 보다가
나도 내 장기를 팔아 노후를 준비하듯
우리나라를 조금씩 떼어서 해외로 수출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당겨쓴 카드빚과 텅 빈 통장을 생각하면
개인이 겪는 슬픔 따윈 아무것도 아닌
다수의 다수를 위한 두루마리화장지처럼
계속 풀려나오는
누군가의 슬픈 낙서 앞에서
나라가 있어야 개인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자
누가 나를 좀 팔아다오
나도 그에게로 가서
기꺼이 삼사만원의 현찰이 되어줄 테니

- 최금진(1970~ ) 부분


△ “아마존, 세상의 모든 것을 팝니다”라는 아마존닷컴의 카피는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명문장이다. 노동을 팔고 시간을 팔고 사랑을 팔고 신념을 팔고, 팔다팔다 더 이상 팔 게 없어서 결코 팔아서는 안되는 것들을 파는 세상은 안녕한가? 물뽕, 청산가리, 수면제, 대포폰, 대포통장, 권총, 필로폰…, 키워드만 치면 뭐든 다 사고팔 수가 있는 사회는 안녕한가? 매매 앞에 놓인 ‘불법’이 단지 수식에 불과한 이 시대는?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다. 상품에 불과하다. 급기야는 제 피를 팔고 제 장기를 팔아야 하는 개인을 그 사회와 국가는 책임지지 못한다. “나라가 있어야 개인이 있다”는 말이 허울 좋은 허구에 불과한 이유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를 조금씩 떼어서 해외로 수출할” 수밖에 없는, 돈 없는 나라의 안녕을 자본주의는 책임지지 못한다. 불평등과 매매가 만능인 시대를 걱정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니, 돈으로 사지 못할 게 없는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단 하나뿐이자 단 한번뿐인 “자신의 생으로 뭔가를 증명해야”만 한다. 이 신자유-자본주의 화장실 벽에 “제일 싼 血 팝니다,/ 자본주의 만세!”라고 쓰면서!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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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들

죽은 자작나무에서 버섯이 자라는 걸 본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은 말이 있어
손톱을 기르는 것처럼

육체가 조금씩 액체가 되고 수증기가 되고
말을 잃고 미세하게 돋아나는 불안을 얘기하자
나는 간신히 침묵이 떨어지는 순간을 본다

나의 이 불안이 누군가 죽음 이후에 심어놓은
미세한 균사체가 아닐까 의심될 즈음
나는 자꾸만 투명한 내장을 꺼내서
최후의 수분까지 증발시키려는 순간과 악수한다

왜일까 왜 그래야만 할까를 생각할 때
이미 난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 ‘침묵들’ 부분, 김원경(1980~ )




△ 죽음의 사태는 경험이 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죽음 근처를 맴도는 어떤 기후들만 감지할 뿐, 죽음 그 자체를 겪어낼 수 없다. 다만 타자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죽음을 간접적으로 겪으며 애도를 통해 살아 있다는 전부를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애도 또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우리 시에서의 죽음 의식이란 어쩌면 보다 절실한 삶의 양식을 담보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은 나무에서 버섯이 자라고 있는 이미지를 죽음 이후의 ‘침묵’ 혹은 ‘할 말이 남아 있음’으로 짚어내는 시인의 직관은 망자의 메시지를 채록하려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나의 순간과 그 찰나들을 겪어내고 있는 산 것들의 감각을 읊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시인은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하고 죽음 이후 소멸하는 순간들과 악수를 해내는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생태계의 진화방식이 열등한 종을 소멸시키고,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것만 보존되는 것이라면 나는 생태 자체를 믿지 않겠다. ‘상생’의 반대말은 어느 한쪽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멸이거나 자멸이다. ‘침묵’이라는 아주 강하고 견고한 어조로, 다시 말하고 싶다. 침묵, 바로 그것이 가장 “세계에 대한 진지한 시술”(‘물의 진화’)이라고!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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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통장

시를 쓰니 세상에 빚 갚은 것이고
의지할 시를 자식처럼 키우니 저축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시시시(時視詩) 가득한 통장에
마이너스는 없다네

詩앗 뿌렸으니 세상에 보시하는 것이고
시 한섬 거두었으니 추수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시시시 가득 찬 통장에
마이너스는 없다네

하늘은 모든 것을 가져가고
시라는 씨앗 하나 남겨주었다네
그래서 시 통장에
시인이란 없다네

- 천양희(1942~ )



△ 일찍이 함민복 시인은 시 한 편을 ‘쌀 두 말’ 값으로, 시 70여편이 묶인 시집 한 권을 ‘국밥 한 그릇’ 값으로, 그 시집이 한 권 팔리면 시인에게 돌아오는 인세를 ‘굵은 소금 한 됫박’ 값으로 시의 실물거래가를 책정해놓은 바 있다. 몇날며칠을 끙끙대야 겨우 한 편 나오는 시만 써서는 도무지 밥 벌어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양희 시인은 “시 쓰는 일이 가장 죄 없는 일”이라서 시만 쓰며 시에 “순정을 바치고 운명을 걸”고 있다. “시가 밥 먹여주냐,고/ 시답잖게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업이 내 생업일까 싶다가도/ 생업이 실업이나 안되”(‘직업’)기를 바라는 때로 소심한, “원고료도 주지 않는 잡지에 시를 주면서/ 정신이 밥 먹여주는 세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빛나는 건 별과 시뿐이라고 생각하”(‘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는 대체로 당당한, 전업시인이다.

세상에 빚을 갚고 세상에 보시하기 위해 시를 쓴다니, 그 시들 세상에 바치는 이자이자 원금이고, 저금이자 시줏돈이겠다. 시를 의지할 자식처럼 키운다니, 그 시들 죄다 씨앗이자 열매겠다. 세상에 돌고 도는 그 흔한 돈이, 딱 시만 같았으면 좋겠다. 사람들 모두 가슴에 시 통장 하나씩 만들어 시시시 가득한 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시에 세상 답이 있더군”, “시인의 마음에 길이 있더군”이라 덕담해주셨던 한 어른의 말씀이 떠오른다. 돈돈돈 대신 시시시를!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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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宇宙의 숲

초겨울 밤하늘 오래 올려다보면 우주의 나이테가 보인다

태초에 신이 나무 몇 그루 베어 우주를 만들었다. 베어진 나무의 수관에서 터져 나온 물빛이 별이 되고 지금도 여기까지 흘러오는 것이리라. 나이테 하나 늘려갈 때마다 그 폭만큼 어둠을 품고 깊어진 나무의 나이를 걸고 신은 우주를 창조했으리라

목숨이 베어진 자리에서 다시 목숨이 태어나는 숲
목숨이 자라는 숲

새들이 이 땅의 나무 등걸 위를 날듯이 하늘의 나무 등걸 위를 날아간다
별들이 추위를 뚫고 이 땅의 나무 잎사귀에 도착한다
품어온 비밀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작은 원을 그리며 깃든다

- <宇宙의 숲> 부분, 김학중(1977~ )


△ 조금씩 지워지면서 다시 융기하는 세계가 있다. ‘지워짐’이 자라는 세계다. 우리가 눈을 통해 바라본 대상은 보이지 않는 바깥의 전부를 모두 용인하고 난 후에나 겨우 인지할 수 있는 오해들이다. 그렇듯 지금 이 자리에서 바라보고 조합해내는 우주는 명명하는 순간마다 ‘우주의 바깥’인 동시에 이곳에서의 작은 혁명이다.
김학중은 야심차다. 그는 그간 <창세기> 연작을 통해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공간을 확보하려고 ‘묵시록적 시각 이후의 세계’를 누차 보여준 바 있다. 이미 죽어 있는 미래와 손쓸 수 없는 이곳에서, 가만히 산 목숨들을 불러보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그에게서 우주란 나이테를 적을 수 있는 유한한 우주이며 각각의 주체들이 숲을 이루는 불가항력의 가능성으로 자라면서 지워지는 우주다.

이런 종류의 실패라면 실패는 거룩하다. 언어의 무능함을 재빠르게 발견하는 동시에 언어의 전능함의 위치를 꿈꾸는 시인의 직관이란, 어떤 점에서 무모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무모함으로 우리는 심지어 스스로를 매혹시키고, 제 우주를 저마다 각각 흔들며 살고 있다. 하나 살아있기에 이제 울어야겠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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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

버스비 900원
버스 타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百拜謝罪)하며 내는 돈

화장실 100원
오줌 눠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아들 고등학교 신입생 등록금 사십오만구천오백팔십원
학교 다녀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상갓집 부조금 3만원
살아 있어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공중전화 100원
말 전해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돼지고기 한 근(斤) 8000원
처먹어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서러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한(恨)이 있기 때문에

함소입지(含笑入地)할 수
있는 것이다

- 김영승(1959~)

사는(生) 일이 사죄를 사는(買) 일이란다. 버스비·등록금이 그렇고, 부조금·통화료·고기

값이 그렇단다. 일상에서 지불하는 모든 돈이 살아있음을 백배사죄하는 대가라면, 돈벌이는 살아있음의 백배사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웃음을 머금고 땅에 들어간다는 함소입지(含笑入地)란 안심하고 죽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살면서 지은 죄, 죄다 모으면 서러움이나 한이 될 법도 하다. 그러니 시시때때 백배사죄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함소입지할 만도 하겠다.
제목이 왜 ‘이방인’일까? 삶의 주인은 돈이고, 그 돈을 벌고 쓰는 우리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뜻일까? 백배사죄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방인 아닌 주인이 된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되었을 거라는 뜻일까? 먹고 자고 일하고 노닥거리는 일상 전체를 백배사죄해야 될 것만 같은 날들이다.

“보증금도 월세(月稅)도 없는/ 계약서도 영수증도 없는/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수도요금도 청소요금도 없는”(‘반성 569’), 돈으로 사야 할 것들이 없어서 이제는 백배사죄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이방인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으로 갔을 어린 영혼들을 기리며 살아남았음에 삼가 백배사죄하며 오늘도 돈을 낸다.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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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타주

우리는 우산을 들고 사자 우리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유치원생들이 노란색 우비를 맞춰 입고 돌아다녔고
우리는 우리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우리는 엄마를 모두가 엄마라 부르는 것과
사자는 하난데 사자를 부르는 이름이 모두 다르다는 게 싫었다

어쩜 우리를 쳐다보는 방향이 동시에 다를 수가 있지?

비교할 수 없을 때 우린 구분을 시작하지

너희와 우리, 우리와 우리 안의 사자가
영원히 마주볼 수 없는 이유를 알겠니?

지붕으론 비가 내렸고
벽으론 바람이 불었다

우리가 아닌 우리는 우리가 아닌 곳에 한참을 서 있었다

- 임경섭(1981~ )


질서 바깥의 사유는 어떤 식으로 찾아올까. 전체, 민족, 공동체 등등의 표상이 허상으로 밝혀진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공동으로 묶을 수 있는 윤곽이 있다면 애도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다. 굳이 랑시나 블랑쇼를 경유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있다. 지금 우리의 곁에는 참혹하게 떠나보낸 수많은 얼굴들이 있다.

임경섭은 불가능한 ‘우리’의 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언어유희를 통해 ‘우리’ 즉 ‘울타리’라는 질서 안에 함몰되어 있는 개별 주체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동시에 소환시킨다. 이 때문에 같은 사태를 경험한 (불가능한) ‘우리’들은 각각의 다른 상념과 감흥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이 지독한 현실의 좌표 위에 다시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안의 사자’를 ‘사자(死者)’로 읽어 보는 것도 이 시를 더 아프게 읽어내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여전히 얼굴들이 있다. 하나같이 소중하고, 이곳의 뿌리를 흔들 정도로 가혹한 결핍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통증으로 우리는 다시 살아야만 한다. 각자의 분열과 용해되어 있는 각각의 세계를 딛고, 더 치명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수많은 얼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맹목으로 위독해지고 싶은 요즘….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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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룡마을

얼씨구, 도 잡고 걸, 100원짜리 동전 내기에
이들은 점심도 굶고 해질녘까지 놀고들 있다.

꽃 피고 아지랑이 핀 봄날 누가 집에 앉아 있간디,
집에만 가면 밥맛 싹 달아나 부러, 최 영감이 한마디 한다.
오늘도 아내가 리어카를 끌고 바닷가에 나가
굴딱지 더미를 가득 실어와 손톱 닳도록
굴 까기에 여념이 없을 텐데 아예 아랑곳 않는 투다.

해가 지자 노인들은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아리랑 몇 대목을 따라 부르며 마지못해 일어선다.
동전을 제법 많이 따 호주머니가 두둑해진 최 영감은
집보다 ‘호박다방’에 가 목부터 축이자고 한다.
점심 굶은 일행은 먼저 붕어빵 가게로 몰려간다.
배가 고픈 길에 붕어빵을 열심히 나눠 먹는다.

저마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 맛 좋다고
젊은 마담에게 한마디씩 하는데 갑자기
문창 밖으로 낯익은 아낙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메, 남은 뼈 빠지게 굴 까는데,
영감 돈이 썩어나서 커피 사묵어?

- 노향림(1942~ ) 부분

△ 숱한 와룡마을 중 내가 아는 와룡마을은 산과 논밭에 이어 개펄과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

다를 간신히 빠져나온 용이 산을 오르다말고 드러누운 형상의 마을이라서 이름이 와룡(臥龍)이다. 80가구 남짓한 대부분이 60대 중반을 훌쩍 넘은 고령화 마을인데도, 바다일 반 농사일 반으로 사계절이 분주하다. 하나 그 분주함은 오롯이 할머니들 몫이다. 할머니들은 아침부터 “리어카를 끌고 바닷가에 나가” 손톱이 닳도록 굴을 까고, 할아버지들은 “팔각 정자”에서 동전내기 윷을 논다.
‘와룡’이라는 이름을 떠받들 듯 이 마을 남자들 아니 할아버지들은 빈둥빈둥 드러누워 산다. 한평생을 그리 노세, 노세 했었다는 듯, 늙어서까지 노는 품새가 참 호기롭다. 하나 품새와 사세는 다른 법. 세상은 ‘뼈 빠지게’ 돈을 번 자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법. “아내가 최의 귀때기를 잡고 끌고 나간 것은/ 잠깐이었다. 남은 노인들은 날마다 보는 풍경이라는 듯/ 커피를 마저 마신다 다방 안은 다시 조용하다.” 암만 봐도 이 다반사 풍경의 원인이 마을이름에 있지 싶다.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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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관들

태어나기 전부터 몸에 새겨진 습관은
내 몸에 살았던 타인의 흔적

말하는 시간이 말하려는 날들인가 도착한 곳이 닿으려던 곳인가 부르는 이름이 부르려는 당신인가

나는 타인의 누적
습관은 내가 나의 하인일 뿐이라는 증거

나를 반복하는 중이다
머무르는 자, 곧 추방될 자, 나는 나에게 패배할 것이다……

습관은
앞서 지나간 자들이 남긴 계율
나는 나를 번복하지 못한다

- 유병록(1982~ )


△ 우리는 어떤 시를 옹호해야 하는가. 때때로 우리에게 ‘좋은 시’라는 수사는 명명이 되자마자 신화가 되고 신화가 되고 나면 스타일이 되고 또 유행이 되고, 그런 좋은 시를 모방하는 과정이 마치 ‘잘 쓴 시’의 자리인 양, 우리를 왕왕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어떤 시도 완전체로 향하지는 않는다. 시는 완성이 아니라 미지이기 때문이다. 서정을 대하는 몇몇 오해들 속에서도 이런 굴절된 태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는 파편화된 자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겠다는 시인의 회복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습관은 ‘나’라는 잠재태가 퇴적되어 있는 동적 행위이다. 습관은 나일 수 없지만 나는 습관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습관이란 나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아닌 타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어떤 대물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태어나기 전부터 몸에 새겨진 습관은/ 내 몸에 살았던 타인의 흔적”과 같은 인식은 질서에 구속되어 있는 자아, 그 자체를 온전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이다.

서정은 지루한 자리가 아니다. 서정이 철저히 현재를 겨냥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미래를 모르고 반복하는 어법이라고 오해해서도 안된다. 나는 그런 가혹한 혁명을 읽고 있다. 그렇게 “수천수만번째의 나를 건너는 중이다”.(‘무릎으로 남은’)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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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나무 실업률

해마다 봄이면 벚나무들이
이 땅의 실업률을 잠시
낮추어줍니다

꽃에도 생계형으로 피는
꽃이 있어서
배곯는 소리를 잊지 못해 피어나는
꽃들이 있어서

겨우내 직업소개소를 찾아다니던 사람들이
벚나무 아래 노점을 차렸습니다
솜사탕 번데기 뻥튀기
벼라별 것들을 트럭에 다 옮겨싣고
여의도광장까지 하얗게 치밀어오르는 꽃들,

보다 보다 못해 벚나무들이 나선 것입니다
벚나무들이 전국 체인망을 가동시킨 것입니다

- 손택수(1970~ )


△ 꽃은 밥이 아니다. 꽃과 밥이 함께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화사한 봄꽃들이 배고픔을 기억

하는 까닭이다. 내가 먹어본 진달래 참꽃, 아카시아꽃, 밥태기꽃, 어린 삐비꽃, 감꽃들은 ‘배곯는 소리를 잊지 못해’ 달착지근하게 피어났었나보다. 봄꽃의 DNA가 보릿고개를 기억하나보다.
꽃들도 진화하거늘, 이제 벚나무 DNA는 실업률을 기억한다. 봄이 되었다고 일제히 피어나 온몸에 환한 불을 켜든 채 삐끼처럼 사람들을 호객하는 벚꽃과, 그 꽃그늘 아래 벌떼처럼 몰려드는 노점상들! ‘여의도광장까지 하얗게 치밀어오르며’ 하나가 된다. 봄벚나무가 다시 한번 살아보라고 노점의 파라솔을 쳐준다. 벚꽃도 노점도 죄다 생계형이다. 꽃피는 철이면 실업률이 잠시 낮아지는 까닭이다.

“벚나무들이 전국 체인망을 가동시”켰다니, 봄은 산수유분과, 진달래분과, 개나리분과, 목련분과 등 전국꽃나무체인연합회 총회? 꽃나무당의 전당대회? 꽃나무노조의 춘투(春鬪)? 솜사탕, 번데기, 뻥튀기뿐 아니라 “벼라별 것들을 트럭에 다 옮겨싣고” 온 생업도 꽃등 아래 제철 만났다. 꽃들은 제 흥에 겨워 터져나고, 누군가는 꽃구경에 봄바람 들고, 또 누군가는 꽃그늘에 생업의 좌판을 펼쳐 놓는 것, 봄날이란 그런 것이다.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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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적인 삶

당신은 나를 향해 몸을 벌려요 나는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어느새 내 얼굴은 녹색이 되어요 당신이 몸을 벌리면 파르르 서리 낀 창이 흔들려요 방 전체가 하얀 서리들로 가득 차요 밤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고, 당신의 벌어진 몸에선 노래가 흘러나와요 나는 이 노래를 알고 있지만 아무리 불러도 첫 소절로만 돌아갈 뿐이에요 나는 이 노래의 끄트머리에 뱀과 쥐들, 개와 파리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노래를 움키고 당신의 푸른 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요 온갖 은유를 만져요 제발 나를 안아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 제발 나를 안아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 당신은 사려 깊은 장님이 되어 내 손을 빼내어 당신의 입안으로 넣어요 아직 나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는데 당신의 입안에서 내 손이 사라져

- 김안(1977~ )


△ 어디서부터 우리는 쓸 수 있을까. 말할 수 있을까. 가만히 주변을 살핀다. 파편과 파괴, 불연속, 포스트 총체성의 시대…. 과연 여기서 단 하나의 정념으로 ‘다른 공간’을 확보해낼 수는 있는 걸까. 어쩌면 시 쓰는 일이란, 잘 만들어진 항아리를 빚는 행위라기보다는 세상에 없는 단 하나의 항아리를 빚으면서 늘 그 항아리를 깨뜨릴 준비를 취하는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어떤 시도, 어떤 문학도 신화가 되어서는 안되며 늘 관계와 과정밖에 남아 있지 않은 미완성의 완성 상태에 도달해 있어야만 이곳의 억압과 참혹을 애도해낼 수 있다.
이 시는 일종의 자서나 참회록으로 읽힌다. 현실 공간에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시적 상태에 진입해가는 고민의 생태를 보여주고 있다. 문학적 당위와 두근거림, 배회의 순간들을 일종의 에로스적 알레고리를 통해 김안은 구체화한다. 서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나는 어쩌면 우리에게 윤곽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적 자아’를 끝끝내 바라보겠다는 의지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미래에 대해 반성하고 고민하는 ‘과정’만을 쓸 수 있는 자신을 핍진하게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혁명이 필요한 세계라도 혁명은 아예 오지 않거나 더디게 온다. 때때로 각자의 선택된 미래들보다 현실을 살아내야 할 그 자리와 질서 때문에, 우리는 늘 곁이 그립고 앞이 아프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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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나는 어느덧 세상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형제도 계산 따라 움직이고
마누라도 친구도 계산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게 싫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너 없이는 하루가 움직이지 않았고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 박용하(1963~ )


△ 돈 가는 데 사람 간다. 돈 가는 데 시간 간다. 돈 없이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고 하루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과 돈은 어긋나기 마련이라는 말도, 사람 나고 돈 났다거나 돈이 거짓말한다는 말도 다 옛말이다. “애용할 수 있는 것은/ 사고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칼이 그렇고 방아쇠가 그렇고/ 버튼이 그렇고 핸들이 그렇고/ 돈이 그렇고 음경이 그렇다/ 사고치지 않으려면 손이 없어야 한다”(‘하찮은 빨래집게가’). 사람은 돈을 따라 가고, 돈이 사람을 내고 돈을 쥔 손이 거짓말을 한다. 오늘날 돈 잃은 세상이란 더 이상 사람 살 곳이 못된다.
돈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과 사회를 주조한다. 돈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한패여야 하는 인간을 차가운 계산기로 만들곤 한다. 돈에 관해서라면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부모형제는 물론 마누라나 친구도 버리게 만든다. 돈이 사람을 울리고 돈이 사람을 속인다. 마술사에게 조종당하는 뱀처럼 너나없이 돈의 최면에 들린 사람들에게 돈은, 정말 마술사처럼 그 모든 것과 자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그 모든 것에로의 자유’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나는 두개골로 말하지 않고 돈으로 말하는가”(‘질문’)라고. 왜 우리는 사람으로 말하지 않고 돈으로 말하는가라고.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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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의 조건

사과를 깎는다. 사과를 비롯하여 사과 아닌 곳에서 머무는 사과들이 서로 미끄러진다. 소문이 나돌고 있다. 여러 개의 바구니들이 불확실하게 겹쳐진다. 번개 속으로 들어가 번개를 싫어해요.

밤과 낮이 오지 않는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더 강한 사실이다. 사과들은 쉽게 움직이는 것이다. 사과들은 쉽게 풀린다. 아직도 사과가 남아 있다고 믿는 손이 홀로 사과를 깎는다. 손의 형상이 나타나면 비로소 손 위에 떠오르는 사과들 사과의 뒤틀린 연산 사과가 들고 있는

없는 지름

- 이수명 (1965~ )


△ 참혹하다. 관계만 남고 대상은 사라진다. 수많은 관계들 때문에 겨우 대상이 생겨났듯이, 존재를 인식하는 일은 매우 의존적이다. 사과 또한 그렇다. 사과가 아닌 것들을 수없이 배반하고 모두 지워내고 나서야 희박한 사과의 가능성만 승인할 수 있을 뿐, 사과는 스스로 사과가 되기 힘겹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과의 뒤틀린 연산” 속에 진입해야만 그제야 사과를 겨우 볼 수 있다.
그런 뒤틀림! 그것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시가 탄생하는 순간이자, 다시 건설될 미지의 세계로 가는 진입로가 아닐까. 이수명의 시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는 부재이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써 내려간 우주다. 여기서 우리는 왕왕 말이 되기 이전의 혀로 돌아가서 아무런 감정도 알 수 없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는 무중력의 세계를 겪게 된다.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운, 없음의 세계인 것이다.

진보에 대한 확신이 남아 있지 않은 이 시대의 절망 곁에서 가파른 마음의 숨을 불러다가 다시금 몇몇 이름들을 불러본다. 당신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이 부딪혀 사라지고 겨우 어떤 흔적들만 남아서,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 없기 때문에 있는, 있기 때문에 혹은 없는.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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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밥천국에서

김밥들이 가지 않는 불신지옥도 있을까
버려진 몸들답게 김밥들은 금방 쉰다
시금치는 시큼해지고 맛살은 맛이 살짝 갔지
계란은 처음부터 중국산이야

마음이 가난해도 천오백원은 있어야
천국이 저희 것이다

천국에 대한 약속은
단무지처럼 아무 데서나 달고
썰기 전의 김밥처럼 크고 두툼하고 음란하지
나는 태평천국의 난이
김밥에 질린 세월에 대한 반란이라 생각한다

너희들은 참 태평도 하다
여전히 천국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복장 터진다는 말은 김밥의 옆구리에서 배웠을 것이다
소풍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속담도
쉰 김밥이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 권혁웅(1967~) 부분


손쉽게 먹히는 한 ‘끼니’가 되기 위해 ‘멍석말이’에, ‘잘게 토막난’ 채 ‘육시당한 몸’으로 누군가의 깜깜한 뱃속에 들어가 허기를 채워주는 김밥들의 소명의식은 얼마나 거룩한 순교주의인가. 원조, 야채, 김치, 계란말이, 치즈, 참치, 소고기, 샐러드, 누드, ‘모듬’…. 김밥들의 순교 메뉴가 빼곡하다. 이런 곳을 어찌 ‘천국’이라 이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축제에 정성이 곁들여졌던 특별식 엄마 김밥이 자본화되어 ‘나라’와 ‘천국’을 지향하면서 역설적으로 허기를 때우는 가장 손쉬운 일용잡식이 되었다. 자신을 키운 건 팔할이 ‘김밥천국’이었다는, ‘김밥천국’에서 엄마 손맛을 익혔다는 ‘천오백원’짜리 “김밥에 질린” 사람들에게 하루하루는 “깨소금이 데코레이션을 감당하는 나라”를 향한 고군분투의 날들이자 “자기들끼리만 고소한 그 나라 바깥의/ 불신지옥”을 통과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쉬고’ ‘시큼해지고’ ‘맛이 살짝 간’ ‘복장 터진’ ‘질린 세월’들이었을 것이다.

‘김가네’와는 별 인연 없이 살았고, ‘압구정김밥’이나 ‘마약김밥’은 아직 먹어보지를 못했고, ‘김밥나라’나 ‘김밥천국’은 이름에 담긴 거대담론 때문에 부담스러웠던 내게는 어릴 적 놀던 동네 이름이 들어간 ‘종로김밥’이 정겹다. 사천원짜리 ‘모듬’김밥 하나면 든든하기까지 하다!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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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진

수백 개의 뼈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흘러갔던 바퀴가
다시 나를 향해 달려오나
끊어진 철로처럼 누워
불안한 진동을 감지하는 바닥인가
이 순간 나는 유신론자 아니 유물론자 아니 아무 것도 아니
다만 닥닥 부딪치는 이빨을 소유한 자
그러나 나의 떨림에도 근원은 있다
차가운 내 살 속에도 자갈과 모래처럼, 또 나뭇잎처럼 켜켜이 쌓인 사람들이 있다
지붕 없이 이빨도 없이 새들은 벌써 이곳을 떠나고
뒤틀려 열리지 않는 문짝 속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는 휘어져 버린 시간
당신의 밤은 무사한가
오늘은 기차처럼 몸을 떨고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고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모든 사물이 제자리로 가기 위해 흔들린다, 는 생각
숨 쉴 때마다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바닥
나무뿌리 같은 혈관들이 살갗으로 불거져 나온다
나를 떠난 것과 나에게 떠밀려 온 것
사이에서, 나는 뜨거워진다
온몸에서 문이 열리고 있다

- 김지녀 (1978~ )



여진은 본진이 발생하는 진원지와는 늘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니 여진이 다가오는 속도나 강도, 그 횟수도 예측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지금 이곳에 떨림이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혹은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끔찍함에 사로잡혀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 왜 당신을 사랑하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렇다. 이런 질문의 경우, 명확한 답이 소명될 때 까닭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문을 걸어 잠근다.

늘 우리를 흔들어 놓는 질문이되 해법이 마련될 수 없는 허무들이다. 그러니 심하게 흔들리고 나서야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여진의 통증처럼, 예측할 수 없는 찰나와 수없이 이별하며 우리는 마냥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지진계는 어디쯤에서 곡선을 그리고 있을까. “온몸에서 문이 열리고” 또 누군가 다시 나를 향해 달려온다. 오늘, 당신의 밤은 무사한가.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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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멀미


거제 외포항 동남쪽 3마일 지점에서 밤새 출렁거린 어부들이

희뿌연 김 속에서 허물어지는 몸을 맞대고

후루룩후루룩 돼지 비계를 건져 올린다

삶은 해삼처럼 졸아든 헛배가 조금 든든하고

잠이 찾아온다

살덩이 몇 점 없는 국물인데 이(齒) 사이에 어둑새벽이 낀다

바닷가 돈에는 지느러미가 있다

국밥집이나 술집이나 언니들의 거웃 사이로 요리조리 헤엄쳐 다니는 지느러미

침 퉤 발라서 풀어놓으면 알아서 정든 곳에 가서 깃든다

새벽을 쑤시면서 국밥집을 나오면

꽃게처럼 알록달록 화장을 하고 이동 커피숍이 길을 가로막는다

- 커피 한 잔 얼마지럴

- 천 원이에요 배 타고 가시려면 커피 한 잔 하셔야 되어요

그 여자 말씨 천 원이면 싸다 생각하며

불면(不眠)을 받는다 불면(不眠)이 움찔한다

하아, 요즘 육지에 오르면 땅이 이 난장이다

땅이 울고 땅이 기운다


- 박형권(1961~ ) 부분





△ “바닷가 돈에는 지느러미가 있다”니! “파도가 대구 아가미처럼 퍼덕이는” 새벽포구, 밥집을 따라 술집을 따라 이동 커피숍을 따라 ‘지느러미’를 단 돈들이 헤엄쳐 다닌다. 밤새 건져 올린 대구 한 상자를 경매부치고 “파래 같은 돈”을 세어본다. 후루룩후루룩, 허기가 채워지면 졸음이 찾아온다. 다시 배를 타고 귀가하려면 아직은 더 불면(不眠)이 필요하다. 경유 한 드럼을 다 채워 싣지 못하고 배에 오른다. 뱃사람에게 고향은 “파란 물 눈에 보이던” 바다다. 그런 바다는 땅에 올라와 돈으로 환산된다. 뱃사람에게 땅이란 지느러미 달린 돈이 새벽을 뒤흔드는 곳이다. 돈을 부르는 밥 냄새, 술 냄새, 여자 냄새가 얼크러진 생생한 현실이다. 바다의 수평선과 파도와 물엣것들은 일과 사랑과 돈으로 팔린다. 그러니 땅멀미란 돈멀미와 다르지 않다. “한 생애를 밀어 넣은 어업을 싣고 어찔어찔”(‘땅멀미’) 앓는, “오지게 걸려 떨어지지 않는” 한 세월의 멀미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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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珉


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깐깐해 보이는 스타킹을 신은 아이의 얼굴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끝이 하얗고 가지런하다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창밖은 때 이른 추위로 도무지 깜깜하고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는 것일까 그 애에게 붙여준 이름은 珉이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득한 오후만 떠오르고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


- 유희경(1979~ )





우연만큼 가연성이 강한 질서가 또 있을까. 막차시간 빽빽한 버스 안이어도 좋고, 낯선 곳에 홀로 여행을 와서 환기되는 어떤 흐느낌이어도 좋다. 옆에 선 여자아이를 가만히 관찰하다 버스 안에서 어깨가 쓸리고 부딪히고, 서로의 입김이 모르는 척 달라붙어 차창이 뿌옇게 달아오르기도 한다. 시인은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절대적인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개인이 앓는 외로움은 놀라운 친화력으로 타자를 오인하기도 하는데, 얼굴도 보지 못한 여자아이에게 일순간 사랑을 느끼고 이름을 붙여주고 기억을 하고 싶은 마음의 근거는, 자기가 느끼는 이 외로움의 통점을 스스로가 너무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결국에는 헤어진다. 사랑이라는 이 참혹한 감정은 이별을 종점에 두고 발발하는 화학작용이며, 그런 맥락에서 태어난다는 것 또한 죽음을 목적으로 한 사건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의 미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열리고 시작되어서 오직 과거의 영향 때문에 종결된다.


민정, 민서, 민주, 민희…. 민(珉)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자리에 우연히 불러본 미지의 당신들을 생각하는 밤. 시인의 불행이 하나의 미학을 건설할 수 있는 토대라면, 나는 기꺼이 그 불행들을 사랑하겠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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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장이 나달나달했다

말기 췌장암 선고를 받고도 괜찬타, 내사 마, 살 만큼 살았데이, 돌아앉아 안경 한 번 쓰윽 닦으시고는 디스 담배 피워 물던 아버지, 병원에 입원하신 뒤 항암 치료도 거부하고 모르핀만, 모르핀만 맞으셨는데 간성 혼수*에 빠질 때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지며 살려달라고, 서울 큰 병원에 옮겨달라고 울부짖으셨는데, 한 달 반 만에 참나무 둥치 같은 몸이 새뼈마냥 삭아 내렸는데, 어느 날 모처럼 죽 한 그릇 다 비우시더니, 남몰래 영안실에 내려갔다 오시더니 손짓으로 날 불러, 젖은 침대 시트 밑에서 더듬더듬 무얼 하나 꺼내 주시는 거였다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이었다

*간성(肝性) 혼수 : 간이 해독 작용을 못해 암환자들이 겪는 발작, 혼수상태.

- 전동균(1962~ )


아버지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무엇으로 끝나는가? 세상을 알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와 불화했다. 밥벌이를 시작하면 아버지를 이해했고 밥벌이에 좌절하면 아버지를 용서했다. 그리고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야 아버지와 화해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야 아버지를 사랑하게 됐다. 세상 모든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야 완성되는 존재다. 아버지를 이어 살아내면서 완성시켜야 하는 존재다. 

내 아버지도 그러셨다. 당뇨 판정을 받으시고도, 여한 없이 살 만큼 살았다, 먹던 대로 먹다가 갈란다, 하시고서는 병원도 싫다 약도 싫다시며, 반주(飯酒)도 담배도 단고기도 홍어도 다 드시다 가셨다. 180㎝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47㎏ 남짓이었다. 사이다와 요깡(양갱)을 드시고 싶다더니, 가뿐하게 뜨셨다. 채 다 못 쓰신 병원비 통장을 지금껏 가족 대소사에 쓰고 있다.

암종과의 거룩한 사투를 대변하고 있는 줄글 형태의 긴 문장은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이었다”로 수렴된다. 한평생이 ‘거룩한 허기’였을 터이니,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 겉장이 “새뼈마냥 삭아 내려” 나달나달할 만도 하다. “살과 뼈를 태우고/ 핏속의 암종도 다 태우고/ 반 평 흙집에 홀로 계신 아버지”의 추운 겨울이 걱정되어 “아버지 계신 쪽으로/ 슬쩍, 더운 국밥그릇을/ 옮겨놓는 아침”(‘서리가 내렸다’)이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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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멩이라는 이름 - 돌멩이에게


돌멩이가 돌멩이 밖으로 굴러나갈 때

그가 돌멩이! 부르니

돌멩이는 떨어뜨렸다

돌멩이답지 않은 것들을


너의 이름을 부르자, 그 자리에 꽃가루처럼 떨어지는 것들

너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너


그래서 돌멩이의 이름을 지우는 일

꽃을 꽃밭에 숨겨두듯이


그래서 돌멩이를 지키는 일

이름을 부르면

손에 쥐고 싶어지는 마음에 대하여

이름에 대답하면

위험에 빠지는 일에 대하여


그의 손에서, 돌멩이는 너무 뜨거워지고 너무 차가워지고

작은 심장을 멈출 테니


어쩔 수 없이 돌멩이! 부르고 나면

내가 한 짓을 고백해야지


-‘돌멩이라는 이름-돌멩이에게’ 부분, 이성미(1967~ )





△ 사라졌던 세계가 다시 시작된 것처럼 아주 놀라운 폭발력으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살아가고 있다. “돌멩이가 돌멩이 밖으로 굴러나갈 때”와 같이 우리는 가장 분명하고 가장 희미한 현실 속에서 서로를 함몰시킨다. 때문에 곁에 있는 당신을 불러주는 일이란 당신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당신의 바깥에 놓여 있는 전부를 묵인하겠다는 고백과도 같지 않을까. 그러므로 돌멩이! 라고 부르는 순간 돌멩이가 아니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름 붙여진 모든 것들을 영영 모르겠다는 각오로 ‘돌멩이의 위험’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이름을 쥐고 떠돌던 바람이 어떤 날 우리의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면, “너무 뜨거워지고 너무 차가워지고/ 작은 심장을 멈출” 만큼 삶의 조건들은 더 참혹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은 폭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곁을 떠나갔다. 나는 그런 부를 수 없는 이름들의 아픈 권리를 쥐고 여전히 살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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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그것은 바닷물 같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한 세기가 지났다

십세기의 마지막 가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93세로 세상을 뜨며 말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삼팔육 친구를 만났다.

한잔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

- 고두현(1963~ ) 


△ 쇼펜하우어는 평생 물려받은 재산으로 돈 걱정 없이 살았으나, “돈을 벌 수 있는 재능이 없다는 걸 알기에 쓰는 데 신중할 뿐”이라며 돈에 대해 인색했다. 그에게 돈이란 자유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원하면 원할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어지는 것이기에 돈을 기쁨으로 바꿀 줄 모른다면 돈에 바쳐진 인생은 무익하다고 했다. 

증권계의 위대한 유산, 주식투자의 원로이자 우상, 유럽 최고의 투자심리가…. 앙드레 코스톨라니에게 붙여진 수식들이다. 그의 숱한 저서와 강의들은 주식투자의 경전이 되었고 수훈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주식에 몰두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항상 돈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에게 돈이란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지근한 사랑으로는 돈에 대한 욕심을 채울 수 없기에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게 돈이지만, 그 돈을 다룰 때는 냉정해야 한다고 했다.

쇼펜하우어처럼 넉넉한 유산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코스톨라니처럼 돈을 뜨겁게 사랑하지도 못한 채 갱년기를 맞고 있는 ‘삼팔육’들은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나날이 힘겨워지는 밥벌이가, 보살펴야 할 가족이, 가장의 의무가 중력처럼 무겁다. 목을 축일수록 목마르고, 사랑할수록 마음만 무거워지나니, 느는 건 돈이 아닌 육두문자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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