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인간적인

밤이 떠돌아 왔습니다. 인간은 헐벗은 몸 어둡고 웅크린 인간의 욕조 속으로 들어갑니다. 처음 물이 닿은 인간의 발가락 끝부터 쑥빛 비늘이 쑥쑥 돋습니다. 인간은 오랜만에 미끈거리는 감촉에 젖습니다.

인간은 두 다리보다 지느러미에 맞는 생물이야.

인간은 되뇝니다. 인간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인간은 목을 늘립니다. 늘어진 목과 머리는 여럿이 나눠먹을 수 있는 인간의 밥상을 두리번거리며 불어터진 먼지를 쓸고 인간의 욕실까지 흘러갑니다. 흘러온 얼굴이 인간의 지느러미를 따라 움직입니다. 인간은 아가미로 숨 쉬고 숨죽입니다.

인간의 호흡을 잃었구나, 인간.

인간의 표정이 백랍처럼 빛납니다. 인간의 목덜미가 납빛으로 찢어집니다. 점점 희미해지는 어린 인간이 찢어지는 인간 곁으로 와 앉습니다. 어린 인간은 자라나는 혀를 불규칙적으로 잘라내며 모처럼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발명하려고 합니다.

- ‘비인간적인’ 부분, 김현 (1986~ )

 

그럴듯한 합의를 이루기 위해 인간은 또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여야 했을까. 우리는 저주받은 제 삶의 하층부를 묵인하려고 ‘근대’라는 질병을 앓았고, 허용할 수 없는 현실로 스스로의 껍질을 내던졌다. 조각보다는 전체의 일부를, 새로운 탄생보다는 진화의 극단을 믿었다. 하지만 정말 진화하고 있었을까. 성장하고 있었을까.

김현은 인간이 다시 비늘을 갖고 퇴행하는 일련의 과정을 묘사하면서, 무슨 말이 이곳에 필요한지 어떤 호흡으로 이곳을 살아낼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이런 의지는 불편한 이곳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의이자 불가능과 싸우려는 집념이다. 이제 당신은 과거의 당신과 작별하고, 다른 문법과 삶을 겪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나 역시 변화의 순간마다 꼭 곁에 같이 있어주고 싶었다. “마음의 난민을 따라 얼룩”(‘목성에서의 9년’)이 진 듯이.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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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어두면
앞집 가게 옥외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내 방까지 닿는다

주워온 돌멩이에서 한 마을의 지도를 읽는다
밑줄 긋지 않고 한 권 책을 통과한다

너무 많은 생각에 가만히 골몰하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 온다

꿈이 끝나야 슬그머니 잠에서 빠져나오는 날들
꿈과 생의 틈새에 누워 미워하던 것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내 곁에 왔고 내 곁을 떠나간다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용서가 구름처럼 흘러간다
내일의 날씨가 되어간다
빈방에 옥수수처럼 누워서 - 김소연(1967~ )

 

슬픔이라는 말이 작동하기도 전에 온몸을 찾아오는 느낌을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바깥은 더 깊은 붉음으로 눈물을 길어올리고 있고, 좀처럼 해소가 되지 않는 마음의 질량은 자꾸만 무거워진다. 이렇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서 비명보다 더 곤혹스러운 비명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김소연의 화법을 찾아, 한 곁을 마련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대학가 어느 방음이 되지 않는 원룸 안에서 꿈을 꾸기도 전에 꿈을 지워야 하는 청년들과 하루의 삯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생애들을 생각해보면, 진정 밑줄도 없이 흐르는 세월로만 세상을 통과해내는 느낌이다. 해결이 되지 않는 이곳에 대해 골몰해 봐도 중앙의 질서들은 답변을 거부하고 곁에 있는 이웃의 이야기들만 순한 밀서처럼 들려오는 이곳이 우리의 방이 아닌가.

고독이나 아득함, 애도와 같은 말로 쉽사리 난처한 바깥을 지켜낼 수 없듯이, 김소연의 시에는 말할 수 없는 서늘함으로 말하고 싶은 통점들을 감추고 있다. 그래, 오늘만큼은 당신을 이해하지 않기로 하는 다짐으로 내일의 출구를 열어둬야겠다. “모두가 천만다행으로 불행해질 때까지 잘 살아보자.”(‘오, 바틀비’)

박성준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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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 김광규(1941∼ ) 부분

 

시는,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로 이어진다. 문민정부 세대에게 <응답하라 1994>가 있다면, 4·19세대에게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만남 그 이후는 이하동문이기에 이하생략이다. 회비를 내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배우자와 자식들의 안녕을 묻고, 주가와 물가를 걱정하고, 대출과 건강 정보를 공유하고, 정치인과 연예인을 씹으며 적잖은 술과 안주와 노래를 나눈 후 제 몫의 귀가전쟁을 치르며 헤어졌다. 넥타이(하이힐) 부대의 대동소이한 세밑 송년회 풍경들이다.

어제도 우리는, 돈을 내고 노래를 불렀다. “그 슬픔에 굴하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목청껏 불렀다. 강물 같은 노래를 잊지 않았기에 서로의 어깨를 겯고 울력했다.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가는 길,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들을 지나 ‘부끄럽지 않냐’며 채근하는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이렇게 흥얼거렸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정끝별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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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을 죽인 나


王을 죽인 내가 내 뒤의 무수한 나에게 외친다. “나는 王을 죽이지 않았다” “나는 王을 죽이지 않았다” 내 뒤에 무수한 내가 웃기 시작한다. 돌멩이 날아오는 대낮에 나는 王의 육체 속으로 도주한다. 王의 육체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는 허나 王에게 내 가슴의 젖을 준다. 王의 육체 속은 벌판이다. 냇물도 흐르지 않고 말라붙어 있을 뿐, 그 냇물을 뜯어내면서 나는 벌판에 입술을 댄다. 밖에서 무수한 내가 웃기 시작한다. 벌판에서 나는 하늘을 달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하늘, 하늘, 저 푸른 하늘은 끝끝내 없다.


- 이승훈(1942~ )



△ 굳이 무의식이라는 기표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 끝을 내가려가고 있는 치명적인 것들이 있다. 혁명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전복과 수복 사이에서 항복밖에 할 수 없는 모서리의 시편들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결백이라는 말을 다시 배워야 한다. 아직도 우리는 시가 싸워야 하는 ‘저 너머’를 위해 다시 살아온 날들을 기록해야만 한다. 가령 난처한 표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그 자리를 이승훈이라는 이름으로 교환해야 할 때가 있다. 사물을 입체적으로 양각화시키는 한 시인의 시선은 사물이 생기기도 전에 사물이려고 노력하며 발생했던 것들을 바라보는 폭풍이자 고독이다. 인간이 소유한 적이 없는 의식 속으로, 의식을 지탱하고 있는 의식의 심연 속으로, 부르지 못한 곳을 부르고 있는 혀를 본다. 그렇다면 그 혀는 이토록 외로울까. 아니 고통스러울까.


이승훈의 시가 지독하게 지독한 이유는 백색(白色)을 끝까지 들여다보려는 절규 때문이다. 이제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시인의 혀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든 누구도 그 혀를 뽑을 권리는 없다. 그것이 ‘현대’이자 그것이 ‘문학’이다. 내일의 ‘현대문학’은 달라질까.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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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동전 한 푼


사랑의 동전 한 푼

위대한 나라에 바칠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기쁘게 쓰일 곳은 별로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그대 아름다운 가슴을 꾸밀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바다에 던지는 하나의 돌이 될지라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내 맑은 눈물로 눈물로 씻어

내 마음의 빈 그릇에 담아

당신 앞에 드리리니……


사랑의 동전 한 푼

내 눈물의 곳집 안에 넣을 때,

이 세상의 모든 황금보다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더욱 풍성히 풍성하게 쓰이리니…….


- 김현승(1913∼1975)



△ ‘과부의 동전 한 푼’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가 개작한 시다. 어느 과부가 제 가진 전부였던 엽전 두 푼을 하나님께 바치자 예수께서 이르셨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3-4).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 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보석(寶石)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눌변(訥辯)의 시(詩)로”(‘감사’), 드리려고 드린, 드리기 위해 드린, 믿음과 사랑의 봉헌이었을 것이다. 빨간 구세군 자선냄비가 거리에 나서는 즈음이다. 어김없이 십 원, 오십 원, 백 원, 오백 원, 땡그랑땡그랑 동전들이 쌓일 것이다. 있으나 없으나 푼돈에 불과한 동전 한 푼,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언제나 변치 않는 온도를 지닌 어머니의 품안보다도/ 더욱 다수운”(‘감사하는 마음’) 위로와 힘이 될 사랑의 동전 한 푼. 한 푼 두 푼이 따스함으로 피어나고, 한 푼 두 푼이 뜨겁게 끓어 넘쳤으면 좋겠다. 한 그릇의 밥처럼, 한 냄비의 국처럼,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처럼!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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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력서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오은 (1982~ )

△ 기형도가 ‘오래된 서적’에서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라고 직관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출생이라는 사건 이외에 어떤 질서에 의해 다시 형성된 자아. 그러니까, 이력서에 칸을 채우기 위해 일렬로 늘어선 나는 나인가 내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서, 그런 근대의 상징 속에 부분이 ‘되기’ 위해서 나의 자랑을 겸손하게 정렬하고 나보다 나의 주변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몇 줄의 거짓말처럼”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될지”도 모르는 나를 중앙을 관장하는 그들에게 최대한 전시하기 위해 우리는 포장하고 몰입한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어떠한가. 당장 내일 문서를 열고나면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이지 않은가. 어떤 부분도 진보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나를 만나는 아침은 또 얼마나 가혹할 것인가.

스스로가 질서가 되지 않는 이상, 이곳의 상징 질서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이전까지 우리에게 오은은 전폭적인 말놀이의 방법론으로 기억되는 시인이었다. 새로 찾아온 오은의 시에서 자신의 질서가 느껴지는 이유는 정치성 때문이다. 시편 곳곳에 세상에 대한 좀 더 다른 인식이 돋보인다. 그런 직관을 나는 ‘미래’라고 부르고 싶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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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겠다고 찾아뵌 첫날

노동자고 월세방에 살며

더더욱 생활을 돌이켜 반성할 마음이 없다 하자

노기 띤 음성으로

음, 돈이 있어야 하네 돈이, 하셨다

그때 정말 돈이 한푼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단 한번도

내게 돈 이야기 하시지 않았다

자신도 죽을 때까지 방 한칸 없어

셋째딸네 집에서 여섯 달 누웠다 가셨다

가끔 욕창이 난 등 긁어주고

손 다리 주물러드리면 마냥 행복해하셨다


벽제 용미리 공동묘지에

봉분 없이 깨끗이 묻히셨다

십수년이 흘러 나는 아직도 생활을 반성하지 않고

전문 시위꾼으로 집회현장을 쫓아다니지만

가끔 그의 어조로 아내에게 조심스레 말하곤 한다

조금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젠 장인어른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송경동(1967~ ) 부분




‘삶과 시’ 하면 그 시는 있어 보이고 ‘일상과 시’ 해도 좀 있을 거 같아 보이는데, ‘생활과 시’ 하면 그 시는 어쩐지 없어 보인다. 혁명이나 투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빨치산 장인어른이나, 전문시위꾼 시인 사위는 생활과 불화한다. 생활 속 돈은 무소불위 권력이다. 김수영 시를 빌려 말하자면, 생활이 생활을 반성하지 않고 결혼과 월세방이 자신을 반성하지 않기에, 돈은 딴 데 있고 죽음은 예치지 않은 순간에 오고, 화해에 이르러서도 생활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 돈과 죽음 앞에서, 화해라는 이름으로, 생활과 결혼과 월세방이 스스로를 반성할 때까지 우리가 먼저 생활과 결혼과 월세방을 반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먼저 반성하지 않고도 화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는 수단이 목적으로 상승한 가장 완벽한 예가 돈이라 했다. 세상이 ‘신을 위하여’에서 ‘돈을 위하여’로 바뀌었다고 개탄한 이가 있는가 하면, 돈은 모든 것의 축소판이라 규정한 이도 있다. 세상을 지배하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결정하는 게 돈이다. 그 돈 앞에서 번번이 오그라들곤 하는 필부필부이기에 “음, 돈이 있어야 하”고, “조금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 뭐, ‘깨끗한’ 죽음 앞에서야 있거나 없거나 똑같겠지만.


정끝별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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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보라의 끝

구름의 그림자
연기처럼
서로를 끌어안을 때

당신을 배우려고 먼 바다를 건너왔어요
텅 빈 고층 빌딩들이 밤을 견디듯이

층계로 쏟아지는 유리구슬들
얼굴을 참는 얼굴
고백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핏속에서 사라지는
긴 지느러미

그림자가 엉켜있는 골목
손바닥들
서로의 세포에 대고 속삭인다

손등이 가려워요
파도를 끌어와 무릎을 덮을 때

조용한 사람과 더 조용한 사람이 동시에
입을 떼는 순간

  - 백은선 (1987~ )

 

△ 느낌이나 상황 같은 모호한 순간이 다시 모호한 순간으로 교환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시가 될 수 있을까. 눈보라가 치는 순간을 바라보던 시인은 눈이 내리는 풍경이나 눈발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구슬이 쏟아지는 상황이나 핏속에서 사라지는 지느러미, 그림자가 엉켜있는 골목들을 떠올린다. 물상과 물상의 만남, 뒤엉킴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리나 틈 같은 것들이 시인의 다채로운 감각으로 빛나고 있는 순간이다.

하나 달리 말하면 이것은 시인에게만 귀속되어 있는 모호한, 귀족적 예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딪히는 찰나들 사이에서 ‘따뜻한 끝’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발은 일제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한 목소리로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종국에는 소멸하는 눈발들도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연대하고 쌓여나갈 것이다.

파국의 국면에서는 단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과 주저하지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과 적극적으로 주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어떤 눈발이 되어 눕고 있을까. 서로 부딪히고만 있을까. 단지 그렇게 싸우고만 있을까. 아무래도 눈발의 목소리는 한 목소리다. 하얗게 그 끝이 서로를 부르고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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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방 멘 사람


나 젊어서 회사 다닐 때

우리 선생님 이따금씩 가방 메고 오셨지


중학교 시절 담임을 하셨는데 풍을 맞고

있는 재산 다 날리고는 커다란 가방 메고 다니셨지


처음에는 문학전집이나 백과사전을 가지고 다니시다가

몇해 지나면서 양말이나 은단을

나중에는 빈 가방 메고 다니셨지


한쪽 발을 끌며 먼 세상 걸어다니셨지


비 오다 그치고

여기저기 전깃불이 들어오는 저녁

커다란 가방 메고 가는 사람 보니

우리 선생님 생각난다


- 이상국(1946~ )





△ 어릴 적 미제 아줌마, 화장품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커다란 가방을 메고 가가호호를 방문하곤 했다. 시골에서 특산품을 이고 지고 메고 왔던 시골아줌마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세일즈맨들, 외판원, 방판원(방문판매원), 잡상인, 보따리 장사라 부른다. 나도 이 가방 저 가방을 메고 이 대학 저 대학 보따리 강사를 다녔던 적이 있다. 제 가방을 메고 발품을 파는 이들의 꿈은, 자신이 팔려는 것을 한 곳에서 파는 것일 게다. 가방을 메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삶에 입문한다. 메고 다니는 가방의 크기야말로 고단한 삶의 징표다. 중학교 선생님을 하다 풍을 맞은 ‘우리 선생님’이 ‘문학전집이나 백과사전’, ‘양말이나 은단’ 따위가 담긴 커다란 가방을 메고 한쪽 발을 끌며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팔았던 것은 자신의 과거였을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빈 가방’을 메고 다니며 팔았던 것은 자신의 미래였을 것이다. 그의 생이 커다란 가방 속처럼 어둑하다.


오늘도 우리는 스스로를 팔기 위해 처진 어깨에 제 가방을 메고 정글 세상으로 나아간다. “동서울터미널 늦은 포장마차에 들어가/ 이천원을 시주하고 한 그릇의 국수 공양(供養)을 받았다// (…) // 오늘밤에도 어딘가 가야 하는 거리의 도반(道伴)들이/ 더운 김 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국수 공양’). 이 공양의 힘으로 어깨에도 힘이 좀 들어갔으면 좋겠다. 모쪼록 두 발이라도 튼튼했으면 좋겠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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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銅鏡)

깨진 기왓장을 주워 주머니에 넣으면, 그 속에서 비닐에 덮여 자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다. 콧대와 턱이 뿌연 비닐과 뒤엉켜, 툭 건드리면 바삭 부서질 것 같다. 팔딱팔딱, 손가락 사이로 심장 소리가 뛰어올랐다. 모든 소리들이 긴 줄에 매달려 그네를 탔다. 녹색의 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나는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반짝였다. 깜박깜박, 수많은 눈동자가 길을 물었다. 그네는 삐걱거리며 보랏빛 옷만 남겼다. 깊은 숲길에 안개가 뿌옇고, 여인은 안개를 덮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손을 베인다. 스윽.

- 이재훈 (1972~ )

 

시는 언어 속에 내장된 사유가 좀 더 극단적으로 외침이 된 형태이다. 이 때문에 몇몇 시인들은 언어가 생성되기 이전에 감각된 어떤 질감을 전략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것을 초능력으로 비한다면,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일 수 있겠다. 사이코메트리란 사물 속에 잠재되어 있는 혼을 계측하여 해석하는 능력인데, 대개 이재훈의 시가 성립되는 방식이 그렇다.

깨진 기왓장을 자신의 주머니 속에 취했을 뿐인데 발화자는 기왓장과 함께 살다간 여인을 손의 촉감만으로 재구성한다. 손끝으로 뭉개진 얼굴을 지나 그네를 타고 노니는 소리의 운동성을 느끼고 잃어버린 신발, 보랏빛 옷의 감촉까지. 여인을 둘러싼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주머니 속에서 종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오래된 거울에서 살다간 이미 지워져버린 삶의 기록들이자 주변의 역사들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생애의 파편들이다.

그가 자주 태초의 시공간을 자신의 언어 속에 안착시키고, 소멸해간 것들을 호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근대 시스템이 가진 폭력을 자신의 초능력으로 일격에 무너뜨리고, 또 회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픈 줄도 모르고 살다가 그의 시를 읽는다. 그에게는 시원(始原)이 있고, 자주 나의 손을 베이게 해 왜 아픈지 또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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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브레이크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운수회사에 찾아갔어

12톤 트럭 몰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다 갔다 하면

제법 돈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나이는 몇이냐

결혼은 했느냐

아이는 있느냐

사장님의 질문에 척척 대답하고 나니

25톤 트럭은 영 못 몰 거라네

마누라 있고 애도 있고 해서 버는 김에

확 벌어야겠는데

어째서 그러냐고 물었더니

거저 180은 밟아줘야 수지가 맞는데

조심성이 생겨서 그럴 수야 있겠는가

100만 넘어도 발바닥이 올라가니

처자식이 브레이크야, 브레이크

이러더구먼

지금은 5톤 트럭 몰고

가까운 데나 조심조심 왔다 갔다하고 있지


- 하상만(1973~ )


일러스트 김상민

브레이크가 강력해야 자동차가 안전하듯 인생의 브레이크가 튼튼해야 삶이 안전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브레이크와 후진이 없기를 기도하지만, 살다보면 브레이크나 후진 페달을 밟아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인생은 속도전이 아니다. 잠시, 잠시, 브레이크를 지긋이 밟아줘야 한다. 버려야 얻고, 멈춰서야 나아가는 게 세상 사는 이치다. “버는 김에/ 확 벌어야겠다”는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 한다’는 말과 한 말이다. ‘액셀러레이터는 밟을 수 있을 때 힘껏 밟아줘야 한다’는 말과는 근친이다. 사람이든 자동차든 달릴 수 있을 때 달려줘야 충전이 되고 엔진도 탄력을 받아 길이 나는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브레이크 없이 단지 액셀러레이터에 내맡겨진, 아니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다. “제법 돈이 되”기에 “거저 180을 밟아”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불행하다.

‘처자식’이 내 인생의 브레이크라니! 액셀러레이터에 내몰린 인생에서 ‘처자식’ 있어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고 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다니, 그러니, 인생 운전에서 ‘처자식’은 신의 한수랄밖에!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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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의 연보


한 번도 우리를 부숴본 적 없었다


명자나무는 스스로를 찔러 꽃을 피우고 아버지는 채찍처럼 이름을 휘둘러 나를 키웠다 이름은 상처와 같아서 소리 내어 부를 때마다 피가 흐른다


내 탓이 아니었다 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수리 나무 밑 어두운 우리, 머리 위에서는 내내 마른 잎사귀들이 울었다 내일은 없었다 그건 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과거의 한때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웃고 있다 내일은 어떨까 그것이 내 일이다


우리는 서로 밤마다 멀어졌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견디는 법 그러나 그것은 어제의 일, 이따금 바람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등을 후빈다 색깔 없는 구름들이 우리를 지키고 마른 잎사귀들이 우리를 덮고 우리는 흙이 되고 우리는 서로를 가두고 우리는 우리의 전부가 되고 우리는, 우리는 목 놓아 운다


뒤꿈치를 들자 가파른 자갈들이 굴러떨어진다 나는 오늘에서 어제를 지운다 그것이 내일이다 날마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운다 그것이 내 일이다 내일이었다 

- ‘하루의 연보’ 부분, 김선재(1971~ )



△ 스스로를 찔러 꽃을 피워야만 하는 꽃나무가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제 살을 찌르고, 찢어서 향기를 내야 한다니. 다치고 아프고 나서야만 가능해지는 ‘나’라니! 그렇다면 시인의 하루는 아마도 아픈 자리에서만 열리는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나’보다 ‘우리’라는 공동체가 열리고 있는 것은 과연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명자나무의 꽃이 피기까지, 그렇게 향내가 그윽해지기까지 시의 발화자는 잎사귀들이 울고 있는 지금-이곳을 견지하고 있다. 왜 우리에게는 아파야만 열릴 수 있는 내일이 있고, 우선 아파보라는 충고만 있는가. 때문에 우리는 견디는 주체여야만 하고, 싸워야 하는 주체여야만 했다. 생각하기 싫더라도 생각한다. 감각하기 싫어도 감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것이 질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일”이 왜 “내 일”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이곳을 견디기 위해서 내 일을 내일처럼, 내일을 내 일처럼 살아야만 했다.

김선재가 시인으로서 이곳을 “견디는 법”이 아직도 그리워진다. 그렇게 “슬퍼도 살아야 하는 것은”(<얼룩의 탄생> 뒤표지 글) 우리는 ‘어떤 것’을 피가 나도록 아직 더 불러 봐야 하기 때문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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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도박


낙엽더미 큰돈처럼 싸들고

눈시울 붉어져

문 밖 뚝 떨어진 날씨와 싸우는 목소리

흰 서리가 자주 창을 막고

뿌연 고통 너머

잡지 못하는 손목이 아프다는 전갈

아직 흔들리는 문고리……

12월이 오면 더는 못 견디고 말겠지

문도 얼고

겨울 흰 눈에 얹혀 수의처럼 사라지겠지


가을의 도박……


- 김경미(1959~ )



가을에는 뭐든 걸고 싶다. 벽공(碧空)과 흰 구름에게, 싸늘한 떠돌이 바람에게, 고단한 낙엽의 발목에게, 추파(秋波)에게, 첫서리에게, 무엇이든 걸고 싶어진다. 그러나 가을에 거는 것들은 날리기 마련이다. 12월이 오면 더는 못 견디고 얼어버릴 테니. 뚝 떨어진 날씨와 흰 서리가 가을의 판돈을 까먹을 테고, 싸들고 온 ‘낙엽더미 큰돈’도 흰 눈에 얹혀 수의처럼 사라질 테니. ‘뚝 떨어진 날씨’ ‘싸우는 목소리’ ‘잡지 못하는 손목’, 그리고 ‘흔들리는 문고리’…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눈시울 붉어’지는 ‘뿌연 고통’을 시인은 묘사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짐작해볼 뿐이다. 하루를 사는 게 도박이다. 한 사람을 만나고 한 사람과 헤어지는 게 도박이고, 한 의자와 한 문을 지키는 게 도박이고, 한 삶을 살아내는 게 도박이다. 전력투구해야 하는 세상 모든 게 도박이다.


“일수 빚처럼 매일 한 번씩 찾아오는/ 노을과/ 우울”(‘부엌에 대하여’)이랬거니, 밀려오는 가을 노을은 밀린 일수 빚만 같고, 시적시적 늘어가는 가을 우울은 느는 대출이자만 같다. 그러니 가을이면 뭐든 걸고 싶어지는 것이리라. 오래전 낙엽을 ‘망명정부의 지폐’라 했던 시인이 있었거늘, 뒹구는 저것들, 쌓이는 저것들 오늘은 죄다 판돈만 같다. 도처에 쓸쓸한 낙엽들 수북하다. 에이, 어디로든 들고 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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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 옛길

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보며 얼마나 오래 발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되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붓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 안도현(1961~ )

 

미래가 꼭 지금보다 아름다운 자리에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미래’라는 말 속에 ‘진보’나 ‘진화’와 같은 의미가 숨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그런 착각이 가능하려면 좀 더 나은 현실이 자꾸만 우리를 견인해가야 하는데, 지금 여기 2013년의 파국과 안부는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

아무래도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가파른 벼랑 위에 겨우 나 있는 길처럼, 아슬아슬한 길일 것이다. 어딘가로 닿으려는 발자국이 쌓이고 쌓여 만든 길, 그러나 겨우 벼랑 곁에 길 하나밖에 낼 수 없는 느리고 힘겨운 길. 우리는 그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길을 역사를 통해 만들었고 다가올 역사들에 다시 또 물려줘야 한다. 불길한 이곳의 광경을 끝끝내 지켜보고 말겠다는 벼랑의 눈꺼풀처럼, 그렇게 지독한 절벽 끝에 길을 내고 홀로 가는 시인의 정념처럼, 싸워야 할 것은 싸우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아야 한다. 역사 속에서 늘 우리에게는 행사당한 억압이 있었고, 행동하는 예술가도 있었다. 지금 우리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제 자신의 언어를 포기함으로써 더 지독하게 시인이 된,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 들판은 초록인데, 나는 붉은 눈으로 운다.” (<북항> 시인의 말 )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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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판매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黃金) 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 최승호(1954~ ) 부분

△ 돈을 넣고 누르면 무엇이든 나온다. 돈만 넣으면 모든 것들이 자동으로 판매된다. 음료수, 스낵과 인스턴트식품, 책이나 기념품 따위의 온갖 일상용품, 유통이 쉬운 야채나 과일은 물론 광고나 뉴스 따위의 각종 디지털 콘텐츠까지도 나온다. 머지않아 사랑할 파트너뿐만 아니라 숭고한 자비와 구원도 나오게 될 여기는 자동판매기 천국이고, 자본의 오아시스이자 유토피아다. 돈은 자동화된 판매에 길들여진 습관화된 몸을 생산한다.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 버튼을 누르게 하는 자동화된 일상이 바로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돈의 원(ON)이고, 돈의 권능이고, 돈의 신(神)이다. 돈을 넣어야만 한 컵의 커피를 내주듯, 홍등을 내건 매춘부도 돈을 넣어야만 하룻밤의 쾌락을 내주고, 십자가를 높이 세운 황금교회마저도 돈을 넣어야만 축복과 구원의 다른 이름인 ‘신의 오렌지 주스’를 내준다.

어제 in-put한 돈으로 out-put되는 오늘이 성(盛)스럽고 성(性)스럽고 성(聖)스러운 ‘홍등의 아침’인 까닭이고, 우리가 바로 자동판매기에 사는 ‘바퀴벌레 일가’(‘바퀴벌레 一家’)와 다르지 않는 까닭이다. “자동판매기 앞에 혼자 서 있다. 옆에는 무구덩이만한 쓰레기통, 노란 싹이 돋지 않은 종이컵들이 던져져 있다”(‘자동판매기와의 이별’). 버려진 일회용 종이컵들이 쓰레기통에 쌓여 넘쳐난다. 자동화된 돈의 회로 속에서 소비된 후 버려지는 우리 욕망의 초상들이다. 자본의 사막이자 디스토피아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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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球)

나는 흰 빗자루를 들고 있다
성장하려는 고양이의 옆구리를 간질여
작은 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괴롭히고 있다
슬리퍼와 고아는 뒤축이 닳고
점박이 돌인 줄 알고 주웠던 알은 이불 속에서
자극을 주어도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는다
불안은 순결한 목소리로 숲 비둘기 흉내를 낸다
여자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일과를 마친 남자 선생들이 축구를 한다
공을 교실이 있는 어두운 건물로 굴러 들어가고
삼삼오오 모인 여학생이
잠시 공 없이 서 있는 남자 선생 구경을 한다
연못가 시계탑의 조각상은
무엇인가를 버티면서 전신의 힘을 발끝에 주고 있다
태양과 달이 아무렇게나 공중에 떠 있는 하루
비 그친 옥상에 방치된 새끼 고양이는
파리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

- 박판식(1973~ )

 

△ 어떤 정념도 정착할 수 없이 흘러가는 파국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에 정착하며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시라는 부력을 통해 자신의 끔찍함을 경험해야 한다면, 우선 시가 통로로 삼고 있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먼저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 시에서는 비둘기나 고양이의 이미지들이 불쑥 튀어나오고, 남자 선생들의 축구 장면과 삼삼오오 모인 여학생의 이미지가 어떤 서사적 결합이나 엉킴 없이 단순히 병치만 되고 있다. 다만 조각상이 “무엇인가를 버티면서 전신의 힘을 발끝에 주고 있다”는 정적인 장면과 내가 서 있는 수직의 사태가 만나고 있을 뿐이다. 공이 굴러가는 것처럼 다면화된 시선에 의해 비춰진 상과 정적인 수직 이미지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치의 전략으로 인해 ‘버틴다’라는, 움직임을 나타내되 움직이지 않으려는 동사가 낯설게도 도약하고 있다.

무엇을 그렇게 버티게 하고 싶었을까. 박판식은 움직이는 물상들을 통해 꿋꿋이 서 있는 또 다른 존재를 발견한다. 세계가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비추기 위해.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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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 가장



훗날을 기약하는 백수 가장

지금 실업수당 받으러 집 나서는

젊은 뒷그림자가 유난히 검다


옆집 가장은

저도 모르게 튕겨져나오게 된 저기 저

정글게임장의 원리를 잘 모른다

아직도 닭 부리 쪼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세상에서

잘사는 법을 모른다

그저 오늘 거리에서 서성이는 겁먹은 젊은 눈동자가

겨울 날씨처럼 흐릿하다


훈기 찾아 제 입김 불어보지만

아내의 쪼그라든 스웨터처럼

허공에서 형편없이 오그라들었다는데

오늘 아침도 늦잠 자고 심신을 뒹구는 사이

둘째 아이는 학원까지 다녀와

자기 방문을 쾅, 닫았다는데

쾅, 마음마저 부서져버린 어제가 있었다는데


- 이사라(1953~ ) 부분




△ 한데 묶어 ‘백수(白手)’라 부르지만 일을 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무업자(無業者)나 무위도식족(族)과 실업자(失業者)는 다르다. 근로능력과 취업 의지가 있고, 퇴직 전 180일 이상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권고사직이나 계약만료 등의 사유로 퇴사한 실업자에 한해 국가는 ‘실업수당’을 지급한다. 요즘 들어 부쩍 옆집 가장과 마주치는 일이 잦다. 운동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채 엘리베이터에서, 카트를 밀다가 마트에서, 담배연기를 내뿜다가 아파트 모서리에서 어색한 인사를 건네오곤 한다. 다투는 소리도 가끔 들리는 게 어쩐지 심상치 않다. 아이들도 아직 고등학생들인데, 아내도 전업주부인데 주변머리가 허전한 그에게 남은 깝깝한 ‘훗날’이 단지 옆집 일만 같지 않다. 어딜 가나 어렵다는 말들뿐이다. 연체에 부채에 부도에 경매가 창궐하는 ‘정글게임장’에서 물러나 ‘일몰을 목에 감고 사라지는’ 옆집 가장들이 늘고 있다. 여기저기의 문들이 ‘쾅’ ‘쾅’ 닫히는 소리 요란해도 “햇빛 한줌, 물 몇 방울만 있으면/ 다시 살아나는 겨우살이처럼” 살아남았으면 한다.


정끝별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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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성

무관한 예화벌들이 눈 뜬다. 노동을 위한 생성. 우윳빛 겹눈 위로 그림자가 지나갈 때 검은 날개는 체제를 지배했다. 꽃과 집 사이를 오가며 지나는 계절. 꿀에 전 작업복을 버리듯 일벌 두셋이 바닥에서 식는다. 개미들의 환영이 파도처럼 밀려오길 바랐지만 실상 가다 막히는 좁은 시냇물에 불과했다.

- <전체성> 부분, 박희수(1986~ )

 

 

△ 총체가 불가능한 세계에 버려진 주체들의 외침으로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까. 이 시에서 벌이 일하는 모습은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노동 주체들의 알레고리일 것이다. 벌들에게 날아간다는 행위란 우선은 꿀을 모으기 위한 노동이며, 벌들의 노동이 가중될수록 이곳의 체제를 지배하는 논리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러나 또 벌들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꽃에서는 꿀을 캐는 노동을 하고 벌집에 와서도 ‘질서정연’하게 꿀을 챙겨놓기 위해 노동을 한다. 다시 말해, 벌은 안식이 없는 오직 노동을 위해 기관화된 몸이다.

그렇게 노동으로 자신의 생애를 기관화시켰던 일벌 “두셋이 바닥에서” 식어가고 있지만, 아무도 그들을 애도하지 않고 개미에 의해 분해되어 장례가 치러지지도 않는다. 그저 노동자들은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기관들이며 애도 없이 버려지는 ‘조각’들인 것이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시인은 이것을 ‘무관한 예화’라 했다. 아무런 자극을 줄 수 없는 개인의 사연이라는 것이다. 개별 노동자의 죽음은 그저 “좁은 시냇물”을 건널 때 느끼는 불편함일 뿐, 근대의 역사 속에서 어떤 자극이 되지 않는 하찮음이라, 우리는 그 광경을 관람할 때면 더 참혹해진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도 제 몸속에 하나같이 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유독 그 벌들의 독이 깊어 보인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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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掌篇)- 2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1921~1984)







△ 10전의 화폐가치를 가늠해보기 위해 1924년에 발표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읽는다.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십 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10전짜리 백통화가 있었고, 백통화 단위가 푼(닢)이었고, 80전이면 모주(탁주의 일종)에 설렁탕(당시 설렁탕은 귀하고 비싼 보양식이었다)을 살 수 있었나 보다. 운수좋은 날 구걸한 1전, 2전을 모아 10전으로 바꾸기를 두 번! 선물이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주기 마련이다. ‘균일상’에 불과하더라도 ‘태연하게’ 돈을 내고 밥을 사먹는 이 사소한 다반사(茶飯事)가, 문전박대에 배를 주리며 떠돌던 거지소녀의 오랜 꿈이었으리라. 올해는 ‘10전짜리 두 개’뿐이었으나 내년에는 세 개를 들고 와 셋이서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해는 세 사람의 생일에 맞춰 세 번쯤 와서 먹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배 고파서가 아니라 추억을 새기기 위해 먹으러 왔으면 좋겠다.


“참담한 나날을 사는 그 사람들을/ 눈물 지우는 어린것들을/ 이끌어 주리니/ 슬기로움을 안겨 주리니/ 기쁨 주리니”(‘내가 재벌이라면’) 하는 마음이었기에 시인에게는 ‘거지소녀’가 아닌 ‘어린 소녀’로 보였으리라. 긴 이야기와 커다란 울림을 담고 있는 손바닥만 한 장편(掌篇)의 시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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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눈물을 흘릴 때 내 얼굴은 할머니의 얼굴 같다


입술을 내밀 때 내 얼굴은 외증조할머니의 얼굴 같다

먼 옛날 할아버지가 집어던진 목침에 맞아 이마가

깨진 할머니의 얼굴이 어느 날 내 愛人의 얼굴에


가을, 붉은 단풍이 든다


- 신기섭(1979~2005)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위반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고, ‘언어의 초월’을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왜 새로움은 불행을 담보한 후에야 도약하는 관념이어야만 하는가. 울고 있을 때 표정이 할머니와 닮아 있고, 입술을 내밀 때, 그러니까 말을 하려는 찰나이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구애할 때의 표정이 외증조할머니를 닮아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정서와 의지는 할머니와 외증조할머니 같은 모계사회의 질서 속에서 발발된 것이고, 나는 그들의 표정을 조금씩 나눠 가진 뒤에야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나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의 자리가 없다. 어머니는 공백이다. 어머니 대신 애인이 있고, 그 애인의 얼굴에는 폭력으로 훼손당한 할머니의 표정이 있다.


신기섭은 고아였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없던 불행한 시인은 어머니 대신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들에게서 어떤 근원의 표정을 찾으려고 애썼고, 그것은 가장 오래된 것이자 가장 새로운 것이었다. 가을에 단풍이 든 것처럼 원숙한 정서가 그런 원초적인 물음에 답을 달며 솟아난 것이다. 그리고 여기, 오직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눈이 있다. 슬픔만을 감지하는 새로운 눈!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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