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경(銅鏡)

깨진 기왓장을 주워 주머니에 넣으면, 그 속에서 비닐에 덮여 자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다. 콧대와 턱이 뿌연 비닐과 뒤엉켜, 툭 건드리면 바삭 부서질 것 같다. 팔딱팔딱, 손가락 사이로 심장 소리가 뛰어올랐다. 모든 소리들이 긴 줄에 매달려 그네를 탔다. 녹색의 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나는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반짝였다. 깜박깜박, 수많은 눈동자가 길을 물었다. 그네는 삐걱거리며 보랏빛 옷만 남겼다. 깊은 숲길에 안개가 뿌옇고, 여인은 안개를 덮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손을 베인다. 스윽.

- 이재훈 (1972~ )

 

시는 언어 속에 내장된 사유가 좀 더 극단적으로 외침이 된 형태이다. 이 때문에 몇몇 시인들은 언어가 생성되기 이전에 감각된 어떤 질감을 전략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것을 초능력으로 비한다면,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일 수 있겠다. 사이코메트리란 사물 속에 잠재되어 있는 혼을 계측하여 해석하는 능력인데, 대개 이재훈의 시가 성립되는 방식이 그렇다.

깨진 기왓장을 자신의 주머니 속에 취했을 뿐인데 발화자는 기왓장과 함께 살다간 여인을 손의 촉감만으로 재구성한다. 손끝으로 뭉개진 얼굴을 지나 그네를 타고 노니는 소리의 운동성을 느끼고 잃어버린 신발, 보랏빛 옷의 감촉까지. 여인을 둘러싼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주머니 속에서 종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오래된 거울에서 살다간 이미 지워져버린 삶의 기록들이자 주변의 역사들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생애의 파편들이다.

그가 자주 태초의 시공간을 자신의 언어 속에 안착시키고, 소멸해간 것들을 호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근대 시스템이 가진 폭력을 자신의 초능력으로 일격에 무너뜨리고, 또 회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픈 줄도 모르고 살다가 그의 시를 읽는다. 그에게는 시원(始原)이 있고, 자주 나의 손을 베이게 해 왜 아픈지 또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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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브레이크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운수회사에 찾아갔어

12톤 트럭 몰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다 갔다 하면

제법 돈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나이는 몇이냐

결혼은 했느냐

아이는 있느냐

사장님의 질문에 척척 대답하고 나니

25톤 트럭은 영 못 몰 거라네

마누라 있고 애도 있고 해서 버는 김에

확 벌어야겠는데

어째서 그러냐고 물었더니

거저 180은 밟아줘야 수지가 맞는데

조심성이 생겨서 그럴 수야 있겠는가

100만 넘어도 발바닥이 올라가니

처자식이 브레이크야, 브레이크

이러더구먼

지금은 5톤 트럭 몰고

가까운 데나 조심조심 왔다 갔다하고 있지


- 하상만(1973~ )


일러스트 김상민

브레이크가 강력해야 자동차가 안전하듯 인생의 브레이크가 튼튼해야 삶이 안전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브레이크와 후진이 없기를 기도하지만, 살다보면 브레이크나 후진 페달을 밟아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인생은 속도전이 아니다. 잠시, 잠시, 브레이크를 지긋이 밟아줘야 한다. 버려야 얻고, 멈춰서야 나아가는 게 세상 사는 이치다. “버는 김에/ 확 벌어야겠다”는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 한다’는 말과 한 말이다. ‘액셀러레이터는 밟을 수 있을 때 힘껏 밟아줘야 한다’는 말과는 근친이다. 사람이든 자동차든 달릴 수 있을 때 달려줘야 충전이 되고 엔진도 탄력을 받아 길이 나는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브레이크 없이 단지 액셀러레이터에 내맡겨진, 아니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다. “제법 돈이 되”기에 “거저 180을 밟아”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불행하다.

‘처자식’이 내 인생의 브레이크라니! 액셀러레이터에 내몰린 인생에서 ‘처자식’ 있어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고 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다니, 그러니, 인생 운전에서 ‘처자식’은 신의 한수랄밖에!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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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의 연보


한 번도 우리를 부숴본 적 없었다


명자나무는 스스로를 찔러 꽃을 피우고 아버지는 채찍처럼 이름을 휘둘러 나를 키웠다 이름은 상처와 같아서 소리 내어 부를 때마다 피가 흐른다


내 탓이 아니었다 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수리 나무 밑 어두운 우리, 머리 위에서는 내내 마른 잎사귀들이 울었다 내일은 없었다 그건 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과거의 한때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웃고 있다 내일은 어떨까 그것이 내 일이다


우리는 서로 밤마다 멀어졌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견디는 법 그러나 그것은 어제의 일, 이따금 바람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등을 후빈다 색깔 없는 구름들이 우리를 지키고 마른 잎사귀들이 우리를 덮고 우리는 흙이 되고 우리는 서로를 가두고 우리는 우리의 전부가 되고 우리는, 우리는 목 놓아 운다


뒤꿈치를 들자 가파른 자갈들이 굴러떨어진다 나는 오늘에서 어제를 지운다 그것이 내일이다 날마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운다 그것이 내 일이다 내일이었다 

- ‘하루의 연보’ 부분, 김선재(1971~ )



△ 스스로를 찔러 꽃을 피워야만 하는 꽃나무가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제 살을 찌르고, 찢어서 향기를 내야 한다니. 다치고 아프고 나서야만 가능해지는 ‘나’라니! 그렇다면 시인의 하루는 아마도 아픈 자리에서만 열리는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나’보다 ‘우리’라는 공동체가 열리고 있는 것은 과연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명자나무의 꽃이 피기까지, 그렇게 향내가 그윽해지기까지 시의 발화자는 잎사귀들이 울고 있는 지금-이곳을 견지하고 있다. 왜 우리에게는 아파야만 열릴 수 있는 내일이 있고, 우선 아파보라는 충고만 있는가. 때문에 우리는 견디는 주체여야만 하고, 싸워야 하는 주체여야만 했다. 생각하기 싫더라도 생각한다. 감각하기 싫어도 감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것이 질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일”이 왜 “내 일”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이곳을 견디기 위해서 내 일을 내일처럼, 내일을 내 일처럼 살아야만 했다.

김선재가 시인으로서 이곳을 “견디는 법”이 아직도 그리워진다. 그렇게 “슬퍼도 살아야 하는 것은”(<얼룩의 탄생> 뒤표지 글) 우리는 ‘어떤 것’을 피가 나도록 아직 더 불러 봐야 하기 때문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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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도박


낙엽더미 큰돈처럼 싸들고

눈시울 붉어져

문 밖 뚝 떨어진 날씨와 싸우는 목소리

흰 서리가 자주 창을 막고

뿌연 고통 너머

잡지 못하는 손목이 아프다는 전갈

아직 흔들리는 문고리……

12월이 오면 더는 못 견디고 말겠지

문도 얼고

겨울 흰 눈에 얹혀 수의처럼 사라지겠지


가을의 도박……


- 김경미(1959~ )



가을에는 뭐든 걸고 싶다. 벽공(碧空)과 흰 구름에게, 싸늘한 떠돌이 바람에게, 고단한 낙엽의 발목에게, 추파(秋波)에게, 첫서리에게, 무엇이든 걸고 싶어진다. 그러나 가을에 거는 것들은 날리기 마련이다. 12월이 오면 더는 못 견디고 얼어버릴 테니. 뚝 떨어진 날씨와 흰 서리가 가을의 판돈을 까먹을 테고, 싸들고 온 ‘낙엽더미 큰돈’도 흰 눈에 얹혀 수의처럼 사라질 테니. ‘뚝 떨어진 날씨’ ‘싸우는 목소리’ ‘잡지 못하는 손목’, 그리고 ‘흔들리는 문고리’…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눈시울 붉어’지는 ‘뿌연 고통’을 시인은 묘사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짐작해볼 뿐이다. 하루를 사는 게 도박이다. 한 사람을 만나고 한 사람과 헤어지는 게 도박이고, 한 의자와 한 문을 지키는 게 도박이고, 한 삶을 살아내는 게 도박이다. 전력투구해야 하는 세상 모든 게 도박이다.


“일수 빚처럼 매일 한 번씩 찾아오는/ 노을과/ 우울”(‘부엌에 대하여’)이랬거니, 밀려오는 가을 노을은 밀린 일수 빚만 같고, 시적시적 늘어가는 가을 우울은 느는 대출이자만 같다. 그러니 가을이면 뭐든 걸고 싶어지는 것이리라. 오래전 낙엽을 ‘망명정부의 지폐’라 했던 시인이 있었거늘, 뒹구는 저것들, 쌓이는 저것들 오늘은 죄다 판돈만 같다. 도처에 쓸쓸한 낙엽들 수북하다. 에이, 어디로든 들고 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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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 옛길

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보며 얼마나 오래 발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되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붓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 안도현(1961~ )

 

미래가 꼭 지금보다 아름다운 자리에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미래’라는 말 속에 ‘진보’나 ‘진화’와 같은 의미가 숨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그런 착각이 가능하려면 좀 더 나은 현실이 자꾸만 우리를 견인해가야 하는데, 지금 여기 2013년의 파국과 안부는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

아무래도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가파른 벼랑 위에 겨우 나 있는 길처럼, 아슬아슬한 길일 것이다. 어딘가로 닿으려는 발자국이 쌓이고 쌓여 만든 길, 그러나 겨우 벼랑 곁에 길 하나밖에 낼 수 없는 느리고 힘겨운 길. 우리는 그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길을 역사를 통해 만들었고 다가올 역사들에 다시 또 물려줘야 한다. 불길한 이곳의 광경을 끝끝내 지켜보고 말겠다는 벼랑의 눈꺼풀처럼, 그렇게 지독한 절벽 끝에 길을 내고 홀로 가는 시인의 정념처럼, 싸워야 할 것은 싸우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아야 한다. 역사 속에서 늘 우리에게는 행사당한 억압이 있었고, 행동하는 예술가도 있었다. 지금 우리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제 자신의 언어를 포기함으로써 더 지독하게 시인이 된,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 들판은 초록인데, 나는 붉은 눈으로 운다.” (<북항> 시인의 말 )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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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판매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黃金) 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 최승호(1954~ ) 부분

△ 돈을 넣고 누르면 무엇이든 나온다. 돈만 넣으면 모든 것들이 자동으로 판매된다. 음료수, 스낵과 인스턴트식품, 책이나 기념품 따위의 온갖 일상용품, 유통이 쉬운 야채나 과일은 물론 광고나 뉴스 따위의 각종 디지털 콘텐츠까지도 나온다. 머지않아 사랑할 파트너뿐만 아니라 숭고한 자비와 구원도 나오게 될 여기는 자동판매기 천국이고, 자본의 오아시스이자 유토피아다. 돈은 자동화된 판매에 길들여진 습관화된 몸을 생산한다.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 버튼을 누르게 하는 자동화된 일상이 바로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돈의 원(ON)이고, 돈의 권능이고, 돈의 신(神)이다. 돈을 넣어야만 한 컵의 커피를 내주듯, 홍등을 내건 매춘부도 돈을 넣어야만 하룻밤의 쾌락을 내주고, 십자가를 높이 세운 황금교회마저도 돈을 넣어야만 축복과 구원의 다른 이름인 ‘신의 오렌지 주스’를 내준다.

어제 in-put한 돈으로 out-put되는 오늘이 성(盛)스럽고 성(性)스럽고 성(聖)스러운 ‘홍등의 아침’인 까닭이고, 우리가 바로 자동판매기에 사는 ‘바퀴벌레 일가’(‘바퀴벌레 一家’)와 다르지 않는 까닭이다. “자동판매기 앞에 혼자 서 있다. 옆에는 무구덩이만한 쓰레기통, 노란 싹이 돋지 않은 종이컵들이 던져져 있다”(‘자동판매기와의 이별’). 버려진 일회용 종이컵들이 쓰레기통에 쌓여 넘쳐난다. 자동화된 돈의 회로 속에서 소비된 후 버려지는 우리 욕망의 초상들이다. 자본의 사막이자 디스토피아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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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球)

나는 흰 빗자루를 들고 있다
성장하려는 고양이의 옆구리를 간질여
작은 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괴롭히고 있다
슬리퍼와 고아는 뒤축이 닳고
점박이 돌인 줄 알고 주웠던 알은 이불 속에서
자극을 주어도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는다
불안은 순결한 목소리로 숲 비둘기 흉내를 낸다
여자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일과를 마친 남자 선생들이 축구를 한다
공을 교실이 있는 어두운 건물로 굴러 들어가고
삼삼오오 모인 여학생이
잠시 공 없이 서 있는 남자 선생 구경을 한다
연못가 시계탑의 조각상은
무엇인가를 버티면서 전신의 힘을 발끝에 주고 있다
태양과 달이 아무렇게나 공중에 떠 있는 하루
비 그친 옥상에 방치된 새끼 고양이는
파리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

- 박판식(1973~ )

 

△ 어떤 정념도 정착할 수 없이 흘러가는 파국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에 정착하며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시라는 부력을 통해 자신의 끔찍함을 경험해야 한다면, 우선 시가 통로로 삼고 있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먼저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 시에서는 비둘기나 고양이의 이미지들이 불쑥 튀어나오고, 남자 선생들의 축구 장면과 삼삼오오 모인 여학생의 이미지가 어떤 서사적 결합이나 엉킴 없이 단순히 병치만 되고 있다. 다만 조각상이 “무엇인가를 버티면서 전신의 힘을 발끝에 주고 있다”는 정적인 장면과 내가 서 있는 수직의 사태가 만나고 있을 뿐이다. 공이 굴러가는 것처럼 다면화된 시선에 의해 비춰진 상과 정적인 수직 이미지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치의 전략으로 인해 ‘버틴다’라는, 움직임을 나타내되 움직이지 않으려는 동사가 낯설게도 도약하고 있다.

무엇을 그렇게 버티게 하고 싶었을까. 박판식은 움직이는 물상들을 통해 꿋꿋이 서 있는 또 다른 존재를 발견한다. 세계가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비추기 위해.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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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 가장



훗날을 기약하는 백수 가장

지금 실업수당 받으러 집 나서는

젊은 뒷그림자가 유난히 검다


옆집 가장은

저도 모르게 튕겨져나오게 된 저기 저

정글게임장의 원리를 잘 모른다

아직도 닭 부리 쪼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세상에서

잘사는 법을 모른다

그저 오늘 거리에서 서성이는 겁먹은 젊은 눈동자가

겨울 날씨처럼 흐릿하다


훈기 찾아 제 입김 불어보지만

아내의 쪼그라든 스웨터처럼

허공에서 형편없이 오그라들었다는데

오늘 아침도 늦잠 자고 심신을 뒹구는 사이

둘째 아이는 학원까지 다녀와

자기 방문을 쾅, 닫았다는데

쾅, 마음마저 부서져버린 어제가 있었다는데


- 이사라(1953~ ) 부분




△ 한데 묶어 ‘백수(白手)’라 부르지만 일을 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무업자(無業者)나 무위도식족(族)과 실업자(失業者)는 다르다. 근로능력과 취업 의지가 있고, 퇴직 전 180일 이상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권고사직이나 계약만료 등의 사유로 퇴사한 실업자에 한해 국가는 ‘실업수당’을 지급한다. 요즘 들어 부쩍 옆집 가장과 마주치는 일이 잦다. 운동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채 엘리베이터에서, 카트를 밀다가 마트에서, 담배연기를 내뿜다가 아파트 모서리에서 어색한 인사를 건네오곤 한다. 다투는 소리도 가끔 들리는 게 어쩐지 심상치 않다. 아이들도 아직 고등학생들인데, 아내도 전업주부인데 주변머리가 허전한 그에게 남은 깝깝한 ‘훗날’이 단지 옆집 일만 같지 않다. 어딜 가나 어렵다는 말들뿐이다. 연체에 부채에 부도에 경매가 창궐하는 ‘정글게임장’에서 물러나 ‘일몰을 목에 감고 사라지는’ 옆집 가장들이 늘고 있다. 여기저기의 문들이 ‘쾅’ ‘쾅’ 닫히는 소리 요란해도 “햇빛 한줌, 물 몇 방울만 있으면/ 다시 살아나는 겨우살이처럼” 살아남았으면 한다.


정끝별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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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성

무관한 예화벌들이 눈 뜬다. 노동을 위한 생성. 우윳빛 겹눈 위로 그림자가 지나갈 때 검은 날개는 체제를 지배했다. 꽃과 집 사이를 오가며 지나는 계절. 꿀에 전 작업복을 버리듯 일벌 두셋이 바닥에서 식는다. 개미들의 환영이 파도처럼 밀려오길 바랐지만 실상 가다 막히는 좁은 시냇물에 불과했다.

- <전체성> 부분, 박희수(1986~ )

 

 

△ 총체가 불가능한 세계에 버려진 주체들의 외침으로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까. 이 시에서 벌이 일하는 모습은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노동 주체들의 알레고리일 것이다. 벌들에게 날아간다는 행위란 우선은 꿀을 모으기 위한 노동이며, 벌들의 노동이 가중될수록 이곳의 체제를 지배하는 논리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러나 또 벌들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꽃에서는 꿀을 캐는 노동을 하고 벌집에 와서도 ‘질서정연’하게 꿀을 챙겨놓기 위해 노동을 한다. 다시 말해, 벌은 안식이 없는 오직 노동을 위해 기관화된 몸이다.

그렇게 노동으로 자신의 생애를 기관화시켰던 일벌 “두셋이 바닥에서” 식어가고 있지만, 아무도 그들을 애도하지 않고 개미에 의해 분해되어 장례가 치러지지도 않는다. 그저 노동자들은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기관들이며 애도 없이 버려지는 ‘조각’들인 것이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시인은 이것을 ‘무관한 예화’라 했다. 아무런 자극을 줄 수 없는 개인의 사연이라는 것이다. 개별 노동자의 죽음은 그저 “좁은 시냇물”을 건널 때 느끼는 불편함일 뿐, 근대의 역사 속에서 어떤 자극이 되지 않는 하찮음이라, 우리는 그 광경을 관람할 때면 더 참혹해진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도 제 몸속에 하나같이 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유독 그 벌들의 독이 깊어 보인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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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掌篇)- 2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1921~1984)







△ 10전의 화폐가치를 가늠해보기 위해 1924년에 발표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읽는다.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십 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10전짜리 백통화가 있었고, 백통화 단위가 푼(닢)이었고, 80전이면 모주(탁주의 일종)에 설렁탕(당시 설렁탕은 귀하고 비싼 보양식이었다)을 살 수 있었나 보다. 운수좋은 날 구걸한 1전, 2전을 모아 10전으로 바꾸기를 두 번! 선물이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주기 마련이다. ‘균일상’에 불과하더라도 ‘태연하게’ 돈을 내고 밥을 사먹는 이 사소한 다반사(茶飯事)가, 문전박대에 배를 주리며 떠돌던 거지소녀의 오랜 꿈이었으리라. 올해는 ‘10전짜리 두 개’뿐이었으나 내년에는 세 개를 들고 와 셋이서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해는 세 사람의 생일에 맞춰 세 번쯤 와서 먹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배 고파서가 아니라 추억을 새기기 위해 먹으러 왔으면 좋겠다.


“참담한 나날을 사는 그 사람들을/ 눈물 지우는 어린것들을/ 이끌어 주리니/ 슬기로움을 안겨 주리니/ 기쁨 주리니”(‘내가 재벌이라면’) 하는 마음이었기에 시인에게는 ‘거지소녀’가 아닌 ‘어린 소녀’로 보였으리라. 긴 이야기와 커다란 울림을 담고 있는 손바닥만 한 장편(掌篇)의 시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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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눈물을 흘릴 때 내 얼굴은 할머니의 얼굴 같다


입술을 내밀 때 내 얼굴은 외증조할머니의 얼굴 같다

먼 옛날 할아버지가 집어던진 목침에 맞아 이마가

깨진 할머니의 얼굴이 어느 날 내 愛人의 얼굴에


가을, 붉은 단풍이 든다


- 신기섭(1979~2005)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위반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고, ‘언어의 초월’을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왜 새로움은 불행을 담보한 후에야 도약하는 관념이어야만 하는가. 울고 있을 때 표정이 할머니와 닮아 있고, 입술을 내밀 때, 그러니까 말을 하려는 찰나이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구애할 때의 표정이 외증조할머니를 닮아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정서와 의지는 할머니와 외증조할머니 같은 모계사회의 질서 속에서 발발된 것이고, 나는 그들의 표정을 조금씩 나눠 가진 뒤에야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나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의 자리가 없다. 어머니는 공백이다. 어머니 대신 애인이 있고, 그 애인의 얼굴에는 폭력으로 훼손당한 할머니의 표정이 있다.


신기섭은 고아였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없던 불행한 시인은 어머니 대신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들에게서 어떤 근원의 표정을 찾으려고 애썼고, 그것은 가장 오래된 것이자 가장 새로운 것이었다. 가을에 단풍이 든 것처럼 원숙한 정서가 그런 원초적인 물음에 답을 달며 솟아난 것이다. 그리고 여기, 오직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눈이 있다. 슬픔만을 감지하는 새로운 눈!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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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병 이야기


그날 우리는 짐을 싸면서도 용병인 줄 몰랐다. 끗발이나 빽도 없는, 대가리 싹뚝 민 개망초 보병들이다. 야간 군용 트럭으로 잠입한 오음리 특수훈련장, 이른 기상나팔에 물구나무 선 참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아침 점호에 같이 고향을 본 후 힘차게 몇 개의 산을 넘었다. 이빨까지 덜덜거리는 상반신 겨울, 주는 대로 먹고, 찌르고, 던지고, 복종하는 훈련병. 정곡을 찌르는 기합에, 겨울 새떼들은 숨죽이며 날아올랐다. 하루 일당 1달러 80센트에 펄럭이는 성조기, 우리는 조국의 이름으로 낮은 포복을 하였다.*

오음리의 겨울은 이제 누구도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다. 생선에게 고양이를 맡기든 말든 죽은 시인도 죽은 척할 뿐이다.


*통킹만 사건(1964년)을 빌미로 미국의 베트남전이 시작됐다. 2005년 10월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밝혔다.


- 김종철(1947~ )


△ 1965년 10월에는 해군 청룡부대가, 11월에는 육군 맹호부대가 대통령과 국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베트남을

일러스트 : 김상민

향해 떠났다. 1973년까지 매년 평균 4만8000여명이 주둔했으며 5000여명의 전사자와 2만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지금껏 10만여명이 고엽제 피해로 고통을 받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단 한 줄 시를 위해/ 참전한다고 호기있게 쓴 편지”(‘빨간 팬티’)가 친구 손에 닿기도 전에, “GNP 103달러밖에 안 된 피죽도 먹기 힘들었던 그 당시, 미국과는 참전 수당으로 1인당 월 200달러 받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정부는 월 30∼40달러만 지급하고 국가경제 부흥 명목으로 차압”(‘슬픈 고엽제 노래’)해 ‘하루 일당 1달러 80센트’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된 파월장병들. “하늘에서 무심결 뿌려지는 물보라에 입 벌려 맛본 고엽제. 에디트 피아트의 ‘고엽’에 기도했던 우리는 슬픈 용병”(‘나라가 임하오시며’)이었던 그들에게 베트남전은 “생선에게 고양이를 맡겼”던 참극이었다. 돈의 전쟁이었다. 파월장병 훈련장이 있던 ‘오음리’(강원 화천군)는 잊고 싶은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1970년대 초, 라디오에서는 김추자가 경쾌한 목소리로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의 금의환향을 노래했으나 우리 동네에는 ‘월남’에서 돌아온 상이군인이나 생활불능자들이 더 많았던가?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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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마리 물고기

어린 시절 목도한 부모의 교합 장면은
지느러미를 잃은 두 마리 물고기가
진흙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 같았다
방은 어둡고 습했다
두 마리 물고기는 괴로워 보였고
오줌이 마려웠던 나는
조용한 가운데 모아지는 호흡 소리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낯선 움직임이
무언가 애달프단 생각 때문에타
버린 숲처럼, 쓸쓸한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오줌을 참았다
어쩌면 그때, 그 슬픈 몸부림을 빌려
동생이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 박연준(1980~ )

 

 


많은 시인들이 태생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만 어떤 시인은 태생의 질문 대신 ‘질투’를 던진다. 내가 태어난 것이 질투라니! 아이는 뜻하지 않게 부모의 교합 장면을 훔쳐보게 되었고, 어둡고 습하고 가난한 방에서 정을 나누고 있는 부모는 아름답기보다는 살려고 몸부림치는 물고기 같다. 그들은 지느러미를 잃었고, 진창에서 뒹굴고 있으며 무엇보다 물고기가 물을 잃었다. 그러니 그들은 지금 이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곧 죽어버릴 존재들이다. 아이는 또 어떠한가.

죽음을 예비한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그렇게 물이 사라진 세계가 나의 태생이라는 정해진 답을 알아차려야 하고, 왠지 모를 불안감을 감당해야만 한다. 부모와 괴로움을 연대하는 형태로 아이는 오줌을 참아야만 한다. 아니 오줌보다 또 무언가를 참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부모의 욕망은 동생이라는 또 다른 결과의 가능성으로 귀결되겠지만 아이는 그들처럼 욕망을 배설할 수도 없는 어떤 곤욕에 시달릴 것이다.

범박하게 말하면, 박연준의 시는 이곳에서 솟아나는 질투로 시작한다. 아버지 세우기와 죽이기를 반복하고 그런 무능 곁에서 떠나기와 남아 있기를 반복했던 어미를 부정하는 ‘안티고네의 질투’가 박연준을 시인이게 하는 아픈 심연이다. “절망한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혼자 사진을 찍었다”(‘환절기’)고 고백하듯이.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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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값은 누가 내?



전화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전화기 액정 화면엔 입력해둔 사람의 이름 대신 특징이 떠오릅니다
( 출처: 경향DB)
학습지 선생님이 전화하면 시간 맞춰 오질 않아
영어 학원에서 전화 오면 숙제에 깔려 죽어
빼빼 마른 이모 전화는 야식 필수
고모는 감자 먹고 이빨 튼튼


할머니는 시기면 시기는 대로 혀
엄마 휴대전화는 잠자리보다 더 눈 많아
아빠 사무실 전화는 야근 없인 못 살아
아빠 휴대전화는 밖에서만 폭탄주 아홉 잔
……
얼마 전 바뀐 새로운 아빠 휴대전화 닉네임은
술값은 누가 내?


- 곽효환(1967~ ) 부분



△ 주먹 쥐고 일어서, 발로 차는 새, 달과 함께 걷다, 숨죽인 천둥, 길을 여는 바람, 아침에 따라가, 대지 위에 살았던 어떤 … 기억에 남는 인디언 이름들이다. 군더더기 없는 직관의 명명법이다. 태어난 끝자리 연도와 월과 일에 맞춰 조합한 내 인디언식 이름은 ‘웅크린 바람은 말이 없다’고, 딸은 ‘백색의 늑대를 쓰러뜨린 자’다. 시가 탄생하는 은유의 자리다. 
초원을 달리다 저무는 저녁 해를 바라보는 유목민의 얼굴색, 잘 구운 벽돌색, 암탉의 온기가 남은 아침 첫달걀색, 맛있게 탄 커피색! 교보생명 창립자가 광화문 빌딩, 연수원, 자동차 등에 주문했던 색깔이란다. 시인의 딸 ‘오학년 민경이’가 지은 닉네임들은 아빠가 다니는 회사 창립자의 명명법을 닮아 있다.

학습지 선생은 자꾸만 한발 뒤처져 있고 무한경쟁 시스템의 메카인 영어학원은 성마르게 의욕적이다. 부계는 활달하고 모계는 예민한가 보다. 엄마는 아이 교육에, 아빠는 회사생활에 열심 중이다. 돈에 눈떠가는 민경이의 관심은 아빠 술값의 출처다(엄마나 할머니의 말이었을지도!). 그런 민경이도 알까? 아빠 어릴 적 닉네임이 구멍가게 외상장부 속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혹은 ‘목장갑 네 켤레’(‘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였다는 것을.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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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위잠

수술만 잘되었다면
고장 난 엄마라도 가질 수 있었겠지
엄마의 똥을 닦으면 휴지엔
박하 향 웃음이 묻을까 먹물 같은 눈물이 묻을까
할머니의 똥을 치우고 손을 씻다가 죽은 엄마처럼
나도 엄마가 되었겠지 할머니가 되었겠지
마려운 줄도 모르고 내지른 줄도 모르고
실밥이 자꾸 비어져 나오는
항문이 꿰매진 인형이 되어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끝도 없는 자장가를 듣게 될까 부르게 될까
빈집 같은 몸속에 누워잠이 마려울 때마다 뒤척뒤척
머리를 열고 닫으며 혼자 누는 자장가
변기 뚜껑을 열고 닫듯관 뚜껑을 열고 닫듯

-이민하(1967~)

 

 

△ 환상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좀 더 참혹해졌기 때문이다. 자장가를 듣고 자란 아이가 자장가를 불러주는 엄마가 되고 그렇게 할머니를 수발하는 “고장 난 엄마”가 되고, 훗날 치매로 똥을 싸는 할머니가 되는 일대기를 생각해보자. 살아가는 동안,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 불편한 사이클은 추상이 아니라 생활이다. 이처럼 배설 욕구를 해결하지 못한 여성들의 삶이 생활이라면, 항문을 꿰매는 수술을 하고 있는 폭력 주체들은 누구란 말인가.

잠이 마렵다는 것은 꿈이 마렵다는 것이고, 꿈이 억압되었다는 것은 그냥 숨만 쉬고 살아 있으란 말과 무엇이 다른가. 때문에 억압된 꿈(잠)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열고 닫으며” 나는 나를 해방시켜야 하고, “관 뚜껑을 열고 닫듯”이 생사의 경계에서 질문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이민하의 환상은 전략을 위한 절충이라기보다는 꿈을 배설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읽힌다. 그렇게 도약하는 말의 진통을 다시금 들어 보자. “혀를 심장에까지 던지고”(‘모조 숲-숨’)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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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 김민정(1976∼ )

 

 

△ 잘못 든 길이 새로운 길을 인도하기도, 잘못 읽은 글자가 새로운 의미를 개진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새롭게, 그것의 내면을 듣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처음의 발굴자가 된다. 막차는 연착되고 플랫폼 위에서 노숙자는 발톱을 깎고 있다. 군용 점퍼 아래 달랑 걸친 팬티가 무방비로 헐렁하다. 그런 그가 딱 ‘삼백 원’만을 구걸하며 자신의 커피 취향을 고수한다. “더러운 팬티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 낡은 팬티를 구차해하기보다/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을 걱정하는 데서부터/ 시라는 것을// 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던 걸까?”(시집 뒤표지 글) 엽기발랄시치미가 주특기인 시인은 노숙자의 추위를, 그에 대한 연민과 연대를 이렇게 엉뚱생뚱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이 시를 마음이 가닿는 대로, 읽고 싶은 대로 읽어도 좋겠다. 그러니까 나는 ‘굽슬’을 ‘굽실’로, ‘안내시스템’을 ‘아내시스템’으로 읽었다. ‘이 죽이는’을 ‘이죽이는’으로, ‘점퍼’를 ‘범퍼’로, ‘연착’을 ‘연락’으로 읽을 뻔했다. 나도 처음, 느끼기 시작한 것일까? 시인이, 삼백 원을 더해 네스카페를 뽑아다 준 것처럼,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는 이성부의 시 구절을 떠올린 것처럼, 하여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는 것처럼, ‘처음, 느끼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우린 시인이 된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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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의 노래


나는 ‘목숨을 구하는 약이라도 되는 듯 네 이름을 혀 위에 올려놔 본다’라고 문자를 보낸다 곧 너는 ‘그럼 내가 약장수네?’라고 슬며시 피하는 답신을 보낸다 그러곤 우리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사라져가는 생명을 응시하듯 각자의 반짝이는 창문 앞에서 희미하게 웃는다 따라오지 마, 이곳은 죽는 길 그러면서 너는 벼랑 위를 사뿐사뿐 건너간다 나는 너와 계속 장난칠 수 있게 벼랑에 부딪치는 햇빛도 바람도 소나기도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네가 풀섶에서 우연히 찾아내고 기뻐하는 새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죽을 몸, 어서 네 가족들에게 돌아가 멍멍개야! 그러면서 너는 내 앞발을 붙잡고 쎄쎄쎄 해 준 뒤, 쫑긋한 두 귀 사이를 여러 번 쓰다듬어 준다 이제 됐지? 입을 열면 할 말은 나오지 않고 그저 낑낑거리는 네발짐승의 목소리 꼬리는 이 동물의 몸에 붙은 습관대로 만날 때나 이별할 때나 다른 표현을 모른 채 똑같이 흔들리는데, 너는 태양 속에서 마개를 연 환타 한 병 같은 미소를 남기고, 벼랑 뒤로 사라진다


- 서동욱(1969~ )


아무래도 사랑은 고독을 동반하는 정서이다. 진실로 고독한 사람은 종종 자신의 존재가 둘로 나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하는데, 그것은 자기 속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기 자신을 보는 일과 같다. 나에게서 빠져나온 꽤나 멀어진 ‘다른 나’, 그런 ‘타자’를 발견해내는 일이 고독이 아닐까. 나는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다가가고 싶고, 떨어지고 싶으면서도 매혹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몰입하기 위해 고독을 택했던 것처럼, 현현하는 누군가에게 나를 투사하는 일이 사랑인 것이다. 때문에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수 있고, 타인이 나의 목숨이자 벼랑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가능하려면 우선 나는 나와 이별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홀린 듯 복수주체가 돼야만 하고, 정인(情人)의 창문에 부딪치는 “햇빛도 바람도 소나기도” 모두 될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렇듯 사랑은 ‘되기’의 생성 질서를 가지면서도 온전히 나를 포기하고 마는 고독이다. 우리는 또 어떤 고독에 나를 양보하며 질서를 깨야 할까. 이별이란 말 안에 나의 실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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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우리는 우록에서 놀았다


(출처: 경향DB)


십만 원이면 사슴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

우록에 갔다 동네 테니스회 야유회 날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쭈그리고 앉은 사내들 운명적

대어(大漁)를 꿈꾸는 유료 낚시터 지나, 빠듯한 외통수

길을 따라갔다 맑은 물 흐르는 시냇가에 봄풀을

뜯는 염소들 뾰족한 입에서 흰 이빨이 빛났다


마리당 이십만 원에 두 마리를 잡았다고 회장님

말씀하시자 모두들 기립 박수를 했다 미리 연락

받고 상 차려놓은 터라, 손 씻으러 수돗가에 갔다

비누와 수건이 놓여 있는 그곳에 아직 치우지 않은

식칼과 도마가 있었고 군데군데 염소 수육이 흩어져

있었다 수육의 살점이 성기 속살처럼 거무튀튀했다


- 이성복(1952∼ ) 부분




△ 산록(山麓·산기슭)의 신록(新綠)에 묻혀 우록(암사슴)과 더불어 우륵이 만들었다는 가야금이라도 뜯어야 할 것만 같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첩첩산중 ‘우록(友鹿, 사슴을 벗 삼다)’은 대구 인근의 계곡마을이다. 은거와 은둔, 신선과 도학(道學)의 기세가 등등했던 이곳은 백록고시원이 생기고 고향염소집이 생기더니 어느덧 돈과 도살 위에 꽃핀 음주가무와 노소동락(老少同樂)의 명소가 되었다. 십만 원이면 사슴피가 한 잔, 이십만 원이면 염소가 한 마리! 대어를 낚기 위한 유료 낚시터가 있고 성기 속살처럼 거무튀튀한 수육과 염소의 피냄새가 그득한 곳, 색(色)스럽고 육(肉)스러운 보양과 취흥의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여기가 어디냐고?/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여기가 어디냐고’) 물어야 할 곳이 되었다.  사슴 뛰놀던 심심산천의 우록은 말이 없고, 우록에서 놀던 우리는 우록의 살과 피로 불끈불끈하곤 한다. 자연의 신비와 현실의 적나라(赤裸裸)는 이렇게 한통속이기 십상이다. 생명과 욕망은 펄떡펄떡 살아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하나로 잇대져 있다. 우록처럼. 그러니 우록, 너무 환해 캄캄하니, “가지 마라,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가지 마라, 다시는 당신 못 돌아온다”(‘동곡엔 가지 마라’)!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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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 마氏

사람의 키가 작아진 왕국에서 태어난 그는

어둠의 성채에서 버섯처럼 차분한 살을 가진 여자와

깊은 구멍을 파기 시작했어

구멍의 끝에서 불꽃을 터뜨리고 최후의 버섯을 캤단다

마리슈퍼, 구멍 뚫린 마리오의 버섯

주인공이 변신하는 동안의 불문율을 지키러

사람들은 천장이 높은 마트로마트로간다간다간다간다

왕국 사람들의 키는 자꾸만 낡아 간단다


지금이다

어두운 구멍에서 쏘아 올린 버섯들을 봐라

잘생긴 마트가 사정하는 빛 사이로

굴욕보다 단단한 습지를 딛고 진열된

쌓인 먼지를 끌어안고 스스로 열을 내는

봉지 과자와 하우스 밀감과 물렁해진 껌들의

하이퍼바이오닉크리스탈에너지

그것을 감싸는 일수 대금과 명함판 대출 광고의

방어력증강붐붐매트릭스파워업

히어로를 향한 마리오의 변신은


- ‘슈퍼 마氏’ 부분, 서효인(1981~)




‘슈퍼마리오’라는 게임이 있다. 악당 쿠파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하기 위해 멜빵바지를 입은 이탈리아의 배관공 마리오가 동생 루이지와 겪는 여정을 게임으로 제작한 것이다. 서효인의 상상력은 아마 마리오 캐릭터가 배관공이라는 데서 착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임 스토리상 배관공이라는 직업 때문에 비밀스럽고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경로를 하수관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서효인은 마리오의 그런 직업을 노동자, 서민 계급이 겪는 어떤 곤욕으로 그린다. 시의 설정도 이채롭다. 슈퍼를 경영하는 마氏의 아들은 마리오이고, 마氏는 골목 상권까지 위협하는 대형마트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 대출 광고에 자주 눈이 가고, 슈퍼의 물품들은 먼지를 머금고 물렁해진다. ‘버섯’(=자본)을 제 힘으로 마련할 수 없는 슈퍼 주인은 제 아들을 결국에 또 노동자로 키울 것이고, 그렇게 가난은 대물림될 것이다. 이것이 소인국에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이다. 과연 소년 마리오는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시인은 돌파구가 없는 영세한 삶을 게임 속 정황과 교차시켜 이토록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아프지만, 아프지 않도록.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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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무렵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백했다

잘 익은 호박 같은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

빨래줄에 널린 빨래처럼 평안한 나의 사투리에는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나의 사투리에서 흙냄새가 나던 날들의 추석 무렵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의 할머니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다

이발사의 가위질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다

신문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 맹문재(1965~)


 


△ ‘처럼’으로 엮인 은유의 매듭이,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 순박한 환유의 두름이 우리를 무장해제시킨다. ‘흙냄새 나는 사투리’가 불러들이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 고향의 말은 어떻게 곰살스럽고 나긋해지고 있는가. 하늘은 청신하고 바람은 선량하다. 세상은 잘도 익어서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하다. 그 맛은 담백하고 냄새는 새뜻하고 소리는 구수하다. 사람들 눈꼬리 입꼬리가 한결 순해져 바라보는 시선 또한 멀고 깊다. 그러니, “대출이자는 푯대처럼 저 멀리에서/ 다시 손짓하고 있”(‘이자를 향해 달린다’)더라도 잠시 접어두자. “아파트 관리비며 도시가스비며 전기세며 아이들 학원비를/ 구호를 외치며 납부”(‘착지점, 이자’)해야 하더라도 그것들도 잠시 묻어두자.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조차도 네온사인 불빛에서 고향을 느끼는 추석 무렵이라 하지 않는가. 수구초심의 무렵이라 하지 않는가.


우리들 추석 무렵 또한 보름달만 같기를, 그 달빛을 마음의 랜턴 삼아 남은 한 해 비출 수 있기를, 얄따란 돈지갑도 덩달아 두둥실 두둑해지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시만 같기를!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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