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경향시선'에 해당되는 글 228건

  1. 2017.06.19 푸른 자전거
  2. 2017.06.12
  3. 2017.06.05 눈먼 여인
  4. 2017.05.29 아침 똥
  5. 2017.05.22 반쯤
  6. 2017.05.15 버릇
  7. 2017.05.08 걷는다
  8. 2017.05.02 망가진 침대
  9. 2017.04.24 바위
  10. 2017.04.17 트럭 같은 3
  11. 2017.04.10 봄에는 구멍이 많아진다
  12. 2017.04.03 소음들
  13. 2017.03.27 현등사 곤줄박이
  14. 2017.03.20 자세
  15. 2017.03.14 아들의 나비
  16. 2017.03.06 웃음 쿠폰이 경제에 미친 사소한 영향
  17. 2017.02.27 습작생
  18. 2017.02.20 산책자
  19. 2017.02.13 전주
  20. 2017.02.06 두 번째 달 보내기

어둠이 내릴 때 나는

저 커브 길을 펼 수도

구부릴 수도 있었지

저 커브 길 끝에

당신을 담을 수도 있었지

커브 길을 들어 올릴 수도

낭떠러지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지

당신이 내게 오는 길이

저 커브 길밖에 없었을 때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했지

커브 길 밖에서는 언제나

푸른 자전거 벨이 울렸지

 - 이윤학(1965~)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기다림이 길을 만든다. 기다림이 푸른 자전거 벨소리를 듣는다. 기다리다 지치면 길을 폈다가 구부리기도 하고 몇 번이나 길 끝에 그리운 사람을 담아보기도 한다. 기다리다 심통 나면 길을 들어 올렸다가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기다림은 고통스러운 희망에서 온다. 보고 싶은 사람, 간절히 바라는 삶이 끝내 오지 않아도 금방 나타날 것만 같아서 기다림을 그칠 수 없다. 길 끝에 고정된 눈을 거둘 수 없다. 포기할 수 없는 희망에 붙들려 다른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오지 않는 사람과 얼마나 많이 만나고 이야기하는가. 절망보다 잔인한 희망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다림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만나지 않아도 여러 번 만난 것 같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오지 않는 사람,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조차 살려내 만나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기다리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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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시선

나는 저 작디작은 손들을 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곤 한다

은행과 보험사와 증권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골목의 구멍가게를 지나칠 때

지친 나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나는 집으로 품고 가기 위해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알은체까지 하며

봉지에 적당히 담는 것이다

저것들이 눈을 활짝 열어주는 별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쁜 그림엽서쯤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 내 그림자를 키우지는 못하겠지만

정치 뉴스처럼 짜증스러운 하루를 보듬어주는

우리 집 현관문쯤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저것들의 눈빛이 있는 한

나는 꽤 깊은 밤까지

한그루의 나무를 심듯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것이다

꽝꽝 언 이 겨울 같은 세상살이에서

주택부금을 들 때와 같은 기대감을 품고

가장의 체면도 지킬 것이다 - 맹문재(1963~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바라보는 눈이 따뜻해지는 색을 갖고 있어서, 30촉 알전구처럼 겸손하게 밝아서, 귤은 골목길 구멍가게에 있어야 어울린다. 골목길이 환해지는데, 1000원짜리 몇 장으로도 부자가 되는데, 그래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지는데, 어찌 귤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귤 몇 개가 어찌 고단한 삶에 위안이 되겠는가. 그러나 빈손! 작정하고 잡으면 금방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일들! 늘 허전하고 따뜻한 것이 그리운 맨손! 그 손에는 위안이 되리라. 계란처럼 손에 꼭 쥐고 싶은 크기. 아이들 머리처럼 자꾸 쓰다듬어주고 싶은 동글동글한 모양. 똘똘한 아이의 눈망울처럼 맑고 초롱초롱한 색깔. 한두 개쯤 덤으로 얹어주기에 알맞은 가격.

가까운 이들과 나눠먹고 싶은 마음을 어찌 알고, 귤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꼭 붙어 있는 것일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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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나의 두 눈을 향해 길이 자라났어요.

나는 그 길을 더 이상 알지 못해요.

이제는 모든 것이 나의 내면에서 아무 걱정 없이,

확실한 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어요.

병이 나아가는 사람처럼

감정들은 걷기를 즐기면서

나의 몸의 어두운 집을 이리저리 걷고 있어요.

(…)

나의 이마는 보고, 나의 손은 남의 손에 들린

시들을 읽었지요.

나의 발은 발길에 와닿는 돌들과 이야기하고,

새들은 일상의 벽에서

나의 목소리를 가져가지요.

나는 이제 그렇게 아쉬운 게 없어요.

모든 색깔들은

소리와 냄새로 옮겨지니까요.

색깔들은 음향으로 한없이 아름답게

울립니다.

책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요?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요.

나는 거기에 무슨 말이 적혀있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가끔씩 그것을 살며시 되풀이해보지요.

그리고 마치 꽃송이처럼 두 눈을 꺾어가는 죽음도

나의 두 눈을 찾지는 못할 겁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김재혁 옮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불 좀 켜주세요! 불 좀! 나는 꿈속에서 외치곤 했어요/ 공간이 무너졌어요. 내 얼굴과 가슴에서/ 이 공간 좀 치워주세요.” “내가 없는데! 내가 없는데 도대체 낮이 있을 수 있나요?” 눈먼 후에 여인은 이렇게 절규했다. 그때 눈은 온 세상을 가두는 감옥이었을 것이다.

그 고통이 지나간 후, 눈 바깥으로 나 있던 길은 눈 안으로 들어와 자라고 뻗어간다. 촉감과 소리와 냄새가 시각으로 바뀌는 새로운 세상이 몸 안에서 펼쳐진다. 나무와 자연과 바람이 만든 책을 읽는 밝은 귀가 열린다. 보이는 것을 볼 수 없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예술은 어떻게 생겨나고 시는 왜 우리에게 오는가. 이 시에서 그 은유가 보일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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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싸는 똥은

어젯밤의 내 내력이다

그러니까 몸뚱이의 무늬다

무얼 먹었는지

무슨 말을 가졌는지

싸웠는지 하하 즐거웠는지

남김없이 보여준다

사랑과 폐허, 그리고 원망과 주저 등을

몸은 끙, 한마디로 말한다

쌓아두지 않는 게 몸의 운명인데

내가 지금껏 한 고백들, 선언들, 다짐들은

모두 무언가에 짓눌려 뱉어진 것이다

그리고 내 업이 되어버렸다

지금껏 그걸 모르고 살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똥은

아무 형식도 없이 쏟아진다

어젯밤에 술 취해 고성을 질렀던

핏대도 아프게 쏟아진다

귀 기울여보면

대체 무엇이 이보다 더 냄새나는 말인가

이 세상에

햇빛이 가닿은 우주 안에

 - 황규관(1968~)

일러서트_ 김상민 기자

오늘 배 속은 안녕하신가요? 아침마다 변기에서 똥이 인사를 건넨다. 매일 다른 색 바른 냄새로 다른 인사를 한다. 어제 먹은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았나 봐요. 과음해서 속이 들끓느라 몹시 괴로웠나요.

똥은 어제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 내 생활습관은 건강한지 내 생각은 건전한지 매일 확인해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아침마다 나에게만 살짝 귀띔해준다.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애태우지 말고 속 썩지 말고 스트레스 그만 받으라고.

더럽다고요? 냄새난다고요? 입에서 글에서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말들은 깨끗한가요? 똥이 그 말들처럼 남을 속이거나 해친 적 있나요? 더도 덜도 말고 똥처럼만 정직하다면 세상이 얼마나 향기로울까요.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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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의 햇살은 반쯤 누워오는 것 같다

반공일처럼

반쯤 놀다 오는 것 같다

종달새한테도 반쯤 울어라 헤살 부리는 것 같다

 

반쯤 오다 머문 데

나는 거기부터 햇살을 지고 나르자

 

반쯤은 내가 채우러 갈 토요일 오후의 외출.

 - 고운기(1961~)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토요일이 반공일이던 때가 있었다. 오전만 일해도 얼마나 여유가 있었던가. 빡빡한 일상, 정신없는 날들이지만, 토요일은 일도 반만 하고 공부도 반만 하고 생각도 반만 하고 고민도 반만 해도 되는 날이었다. 출근 복장도 반이면 되니까 넥타이 풀고 티셔츠에 운동화면 된다.

토요일 오전 시간은 오후에 대한 기대로 헐렁헐렁해진다. 초침과 초침 사이는 넓어지고 그 사이는 무엇을 할까 쓸모없어도 자유로운 생각들로 가득 찬다. 인생은 한없이 긴 것 같고, 세상은 넓은 것 같고,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아진다. 막상 오후가 되면 하릴없이 방바닥을 구르기가 십상이지만, 그래도 아직 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생각으로는 하루에 여러 곳을 여행하고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많은 계획들을 실행에 옮긴다.

온종일보다 길고 여유로웠던 반나절. 오후 내내 놀아도 아직 반이나 남아 있던 반나절. 한 주에 가장 힘든 월요일도 견디게 하는 반공일. 주 5일 근무를 하면서 시간은 더 많아졌건만 오히려 시간에 더 쫓기는 것 같다. 그 여유롭던 반은 어디로 갔을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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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서도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 박성우(1971~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렇게 귀여운 촌스러움이라면 좀 떳떳하게 촌스러워도 되지 않을까. 두메산골 고향은 그리워도 왜 촌스러운 것은 부끄러울까. 한국인인 건 자랑스러워도 왜 촌스러운 건 숨기고 싶을까. 왜 세련되지 못해서 안달했을까. 패션도 디자인도 유행도 성형도 촌스러움을 잘 가릴수록 비싸다. 내가 나처럼 안 보여야,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몰라야, 가격은 높아진다.

하지만 그 촌스러움은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서정주, ‘무등을 보며’) 아닌가. 아무렴, 우리 음식의 깊은 맛과 우리 사투리의 구수한 깊이를 다 알고 있는 그 날렵한 혓바닥을 일회용 냅킨에 비할 수는 없지. 참 용하기도 하다, 그 혓바닥. 모두가 열심히 숨기고 가리는 이 촌스러움의 매력을 이토록 유쾌하게 터뜨리다니.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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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급 시각장애 아버지 이온업(48) 씨가

일급 정신지체장애 아들 이기독(20) 군의 허리를

끈으로 동여매고 걷는다

넘어질 때면 무거운 머리부터 넘어지곤 하는 아들을

너펄너펄 걷게 하는 건

등뒤에서 아버지가 붙잡고 걷는 끈이다

새벽 우유배달하는 아버지는 새벽이라서 어둡고

지하방에 누워 있는 아들을 씻기고 먹이는 아버지는

지하라서 어둡지만

담벼락 밑 낮은 패랭이는 알고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끈에 묶여 걷는 까닭

아들이 툭툭 패랭이꽃을 더욱 멍들게 하는 까닭

아버지 신발 뒤축이 담벼락 쪽으로 닳아가는 까닭

걷는 게 온통 업(業)이고

걷는 게 기독(基督)이라는 걸

뱃속을 나와서도 끊지 못하는

질긴 탯줄이라는 걸

 

업이 기독을 앞세우고 걷는다

넘어진 꽃이 눈먼 뿌리를 뒤세우고 걷는다 - 정끝별(1964~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두 장애인에게 한 걸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아득한 거리인가. 이급 시각장애 아버지의 다리와 일급 정신지체장애 아들의 눈이 한 몸이 되어야 한 걸음이 생겨나지 않는가. 눈이 있어도 넘어지는 아들은 아버지의 발이 받쳐주고, 앞 못 보는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성한 눈이 길이 되어주지 않는가. 한 걸음에 바치는 이 지극한 정성에는 건강한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의 운동이 보인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지금 겪는 괴로움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서 온 필연적인 결과다. 그것을 업(業)이라 한다. 그 괴로움을 감당하고 선한 마음으로 좋은 일을 쌓아야 다음에 올 괴로움을 덜 수 있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거룩한 희생과 사랑의 가르침이다. 두 장애인의 걸음은 그 업과 죄를 온몸으로 받아 고행하고 속죄하는 수행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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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저것은 침대처럼 무겁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결정하자

저것은 망가진 침대

저것이 망가진 것뿐인데

나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침대를 옮기고 있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내 몸 위로 침대가 버려진다

내 몸에 이렇게 방이 많았나

방마다 망가진 침대가 들어앉는다

이렇게 좁은 입구를 뚫고

어떻게 네가 들어온 거니?

나는 어쩌자고 침대를 낳을 생각을 한 거니?

좁아터진 방마다 침대가 만삭이다

일요일에 해치울까?

엘리베이터는 아직 수리 중이다

신호등 앞에서만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은

줄곧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다

폭신한 구름다리를 들고 서 있는 골짜기들처럼

나는 무거워졌다 - 조말선(1965~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침대는 안방을 차지한 거대한 쓰레기가 된다. 그 무게가 짓눌러 갑자기 마음은 무거워지고 넓은 안방은 좁아터져 숨이 막힌다. 볼 때마다 거슬려 신경은 곤두서고 손발은 안달이 난다. 당장 쓰레기통에 처넣어야지, 결정하는 순간 마음은 바빠지고 정신은 사나워진다. 망가진 것은 침대일까 나일까?

버려야지 생각하면 새 물건도 쓰레기가 된다. 취향이 맞지 않아서 유행이 조금 지나서 신상품이 나와서 생각이 바뀌어서 물건들은 무더기로 쓰레기가 된다. 물건들은 주인의 눈치를 본다. 언제 버려질지 몰라 벌벌 떤다. ‘우리 애’라고 부르던 강아지는 어느 날 유기견이 되고 가까운 친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몹쓸 놈이 된다. 산처럼 쌓였다가 매립되는 쓰레기, 섬이 되어 바다를 떠도는 쓰레기를 보라. 세상에! 저렇게 망가진 마음들이 많다니!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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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만히 들여다보라

아직 그 속에 갇힌 천둥소리 물소리 들리지 않는가

백만년 전 그 뜨거운 대지 속을 날아가던 잠자리의 날갯짓, 또 그 속을 흐르던 피들의 숨 가쁜 일어섬까지.

 

  2

발가락을 모으고

푸른 강물 흐르는 열 손가락을 모으고

온몸이 귀가 되거나

착한 눈빛이 되어

세상 죄 없는 것들의 이름과

아직 말이 되지 않아 또 죄 없는 것들의 이름을 하늘 가득 떠올렸다.

 

  3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바위 하나 내 살 속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숨 쉬지 않고 풀어놓은 숨이

먼지 같은 내 생을 자꾸만 둥글게 잡아당겼습니다.

 - 이승희(1965~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집에서 멀지 않은 오동근린공원에는 유난히 바위가 많다. 흔하디흔한 화강암과 꽃들이 서로 성질이 다른데도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한 뿌리에서 나온 것 같다. 꽃이 피면 바위는 완만한 곡선이 더욱 둥그러져서 제 단단한 성질을 버리고 따뜻한 빵이 되어 부풀어 오르는 듯하다. 땅 위에 커다란 빵이라도 솟은 듯 고양이나 까치들이 모여 떠날 줄 모른다. 바위에 엉덩이를 대고 있으면 그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몸으로 마음으로 스며들어 일어나기가 싫다.

바위도 아주 오래전에는 냇물이고 바람이고 나무이고 꽃이었을 것이다. 지층에 묻힌 기나긴 시간을 되감기하여 한정 없이 풀어놓으면, 바위가 되기 전의 강과 들과 거기 뛰놀던 온갖 짐승들이 뛰어나올지 모른다. 이 생명체들과 사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응고되어 바위가 되었을 것이다. “세상 죄 없는 것들의 이름과/ 아직 말이 되지 않아 또 죄 없는 것들의 이름”이 여전히 이 화석에 살고 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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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서 내렸다

나쁜 냄새

부품마다 나쁜 생각을 했나보다

 

꽃나무 옆에 한참 서 있었는데

꽃나무 밑동에서도 휘발유 냄새가 났다

 

시계를 보지 않는 이슬과 바람에게서도

시간을 보지 않는 시계에서도

끊임없이 겁나던 두려움에게서도

앞이 보이지 않던 눈물에게서도

먼 길을 함부로 달려온 트럭 냄새가 났다

 

꽃냄새가 되려고

국화가 되었다가

작약처럼 붉기도 했지만

 

나쁜 냄새는 휘발되지 않아

 

내 나쁜 생각 위에 뚫린 창문들을

자꾸 열어

 - 최문자(1943~ )

좋지 않은 생각을 하면 꽃에서도 휘발유 냄새가 나는구나. 나쁜 생각은 해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니 그 기운이 꽃향기조차 역하게 바꾸어 놓는구나. 갑자기 누군가가 몹시 싫어진다면, 늘 듣던 말이나 별것 아닌 행동이 오늘따라 몹시 거슬린다면, 늘 맛있게 먹던 단골집의 음식 맛이 형편없는 것 같다면,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면, 혹시 나의 생각에서 나쁜 기운이 나오는 건 아닌지 의심해볼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돋아나는 괴로운 기억이 몸과 마음을 들쑤신다면 어찌하랴. 어디서나 아무 때나 그 기억들이 덤벼들어 간신히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마음을 뒤흔들면 어찌하랴. 그 기억의 상처가 한 해에 감정이 가장 사치스러워지는 봄날의 꽃놀이조차 망쳐놓으면 어찌하랴. 착하게 산다고 해서,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산다고 해서, 그게 쉽게 아물겠는가. “나쁜 생각 위에 뚫린 창문들을 자꾸 열어” 좋은 기운이 들어오도록 자주 환기하는 수밖에…….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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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개와 혀가 튀어나오고

긴 꼬리가 스멀거리고

까맣게 부릅뜬 눈동자가 굴러 나와

알을 낳고

올챙이와 민들레로 피어나고

뱀으로 자라나고

수많은 꽃잎으로 퐁퐁퐁 터지는 구멍

강아지가 킁킁거리며

파헤칠 때

포르릉 뛰며 달아나는 아지랑이와 나비

목구멍이 간지러운 구멍

벌컥벌컥 달빛을 받아 마시는 구멍

빛이 먹고 싶었던 구멍

홀로 어두웠던 구멍

텃밭 가득

온몸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던 구멍

더 깊은 지하를 깨우는 구멍

혀뿌리까지 깨어난 구멍은

아주 오랫동안

잠들지 못할 것입니다

 - 장인수(1968~ )

봄에는 허파에서 밀어 올리는 숨이 힘차서 콧구멍까지도 넓어지는 것 같다. 그 숨을 감당하느라 심장도 빨라지는 것 같다. 관절은 왜 운동을 하지 않느냐며 우두둑 소리를 낸다. 땀이 나오려고 자꾸 피부를 간질인다. 봄은 겨울 동안 막혀 있던 구멍들이 뚫리고 열려서 마음껏 활동하는 놀이판이다. 그 구멍으로 간지러워 긁는 소리가 나오고 생명이 뿜어내는 비린내와 향기가 나온다. 구멍이 좁다고 꽃은 폭발하고 잎은 터진다. 올챙이는 우글거리고 기지개는 가팔라진다.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아스팔트와 시멘트는 여전히 흙을 눌러 구멍을 막고 있다. 고층빌딩이나 아파트 앞 작은 화단에서는 수많은 구멍들이 주둥이를 내놓고 숨 쉬려고 난리다. 보도에서는 풀들이 보도블록을 밀어올리고 그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고 들썩인다. 봄에 산을 오르는 일은 몸에 세포에 구멍을 뚫어주는 일이다. 꽃구경은 감정에 구멍을 뚫어주는 일이다. 산과 나무와 꽃에는 숨구멍 마음구멍이 천지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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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열한 시에 나는 소리들을 흡수하였다.

오전 열한 시에 나는 가능한 한 시끄러웠다.

창문을 열고 수많은 목소리가 되었다.

나는 음속으로 변형되었다.

네 안에 들어가서

삼십 초 동안의 기억이 되었다.

비 내리는 어머니의

썩어 가는 몸을 흘러갔다.

나는 소문이 흩어지는

무한한 형태가 되었다.

침묵하는

허무주의자들을 혐오하였다.

육식동물의

더러운 식욕이 되었다.

혈관 속을 지나가는 피와 피의

현란한 각도,

아이들이 자라는 소리,

우유가 상해가는 소리,

나는 무성영화 속의 주인공이

가장 크게 벌린 입이 되었다.

오전 열한 시에 귀를 막았다.

오전 열한 시에 눈을 닫았다.

나는 완벽하게 침묵하였다.

 - 이장욱(1968~ )

백색 소음. 늘 들리지만 들리는지 모르는 소음. 안 들리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고막을 울리고 몸에 흡수되는 소음. 그렇게 세상은 내 몸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타인은 내 몸과 섞인다. 그토록 증오하고 싫어하고 욕했던 이들은 내 몸에 들어와 내가 된다.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자라 아버지를 증오하던 아이는 그렇게 폭력적인 아버지가 된다. 내 몸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 집약된 일인칭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세상의 말이 된다. 내가 쓴 글은 이 세상이 내 몸과 입을 빌려서 한 말이 된다. 내 안으로 들어온 세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으로 들어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 내 목청은 하나지만 그 목소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아이들이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유가 상해가는 소리를 들으며, 입과 귀를 닫고 침묵한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듣든 말든 말하든 말든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맘대로 내뱉을 테니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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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산 현등사 보광전

기둥에 걸어놓은 목탁에

새가 깃들여 산다

 

목탁의 구멍으로 드나드는

곤줄박이 한 쌍의 비상이

경쾌하고 날렵하다

 

곤줄박이는 알 품고

새끼 기를 집이 맘에 들어

기꺼이 노래하고

 

새의 노래 듣는 스님은

새 날아간 자취 더듬듯

목탁에 손때 먹인 세월 되새긴다.

 - 최두석(1955~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현등사 스님은 슬기롭기도 하지, 두드리는 스님이 없어도 스스로 맑은 소리를 내는 목탁을 절 기둥에 매달아 놓을 줄을 알았으니. 스님의 마음 씀씀이는 놀랍기도 하지, 목탁을 예불이나 염불 도구로만 쓰는 게 아니라 생명이 깃드는 집으로도 쓰고 있으니. 곤줄박이는 참으로 용하기도 하지, 제 울음을 허공에 떠도는 뭇 생명들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로 변화시키고 있으니. 법당에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선창하면 절 밖에서 새들이 그 소리를 떨리는 목청으로 받아 산으로 들로 거리로 보내겠구나. 스님의 목탁소리, 염불소리는 이제 새의 날개를 달고 새소리를 담아 탁한 세상 시끄러운 속세로 날아가 맑은 소리를 퍼뜨리겠구나. 현등사 신도들은 자거나 일하거나 다투다가도 새소리를 들으면 물고기처럼 눈 감지 말고 늘 깨어 정진하라는 목탁의 전언임을 알아듣고 마음을 가다듬겠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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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가 뭍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고, 그는 한 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다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 바다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 허연(1966~ )

북극곰은 어떻게 인내하는 법, 동물적인 욕망과 야생적인 본능을 다스리는 지혜, 겸손하게 기다리는 태도를 배웠을까. 그것은 혹독하고 냉혹한 북극의 자연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대대로 피와 살에 새겨진 교과서를 통해 배운 자세일 것이다. 그 자세는 수만 년 파도에 씻겨 반들반들해진 바위를 닮았다. 자연이 깎고 다듬은 작품 같다. 심장이 달린 만년설, 팔다리가 달린 얼음 같다.

오늘의 굶주림 뒤에는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 자원의 고갈을 부추긴 인간의 자연 개발이 북극의 빙산을 녹이고 북극곰의 삶의 터전을 없애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포클레인이 파헤치는 대로 순순히 제 순결한 살을 내어주는 땅처럼 북극곰은 그 굶주림과 죽음을 침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저 비극에서 고분고분하게 파괴되어 주지만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으로 돌아올 자연의 자세가 보인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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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나는 여태 구두끈을 제대로 묶을 줄 모른다

나비처럼 고리가 있고

잡아당기면 스르르 풀어지는 매듭처럼

순수한 세상이 어디 있을까

내 매듭은

잡아당겨도 풀리지 않는다

끊어질지언정

풀리지 않는 옹이들이

걸음을 지탱해왔던 것이다

오늘은 현관을 나서는데

구두끈이 풀렸다며

아들이 무릎을 꿇고 묶어주었다

제 엄마에게 배운 아들의 매듭은

예쁘고 편했다

일찍 들어오세요

버스 정류장까지 나비가 따라왔다


 - 전윤호(1964~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인은 늘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도, 왜 넥타이를 매거나 선물을 포장하듯 예쁘게 구두끈을 묶을 줄 모를까. 무엇에든 구속되고 고정되는 것을 싫어하는 심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구두끈을 맨다는 것은 일하러 출근한다는 것, 맨발이 제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제도와 예절과 규칙에 묶어놓는다는 것, 그리하여 제 안에 “풀리지 않는 옹이”를 박는다는 것. 그러니 무슨 흥이 나서 구속을 예쁘게 보이려고 애쓰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아빠를 위해 무릎 꿇은 아들을 통해 그 매듭이 나비가 되는 놀라운 광경을 본다. 끈에 묶여 있는데도 발에 나비 날개가 달려 날아갈 것 같다니! 구속을 날갯짓으로 만든 아들의 손길이 무거운 발걸음을 가볍게 들어 올린다. 출근하는 게 싫지가 않다. 묶여 있어도 편하고 즐겁고 자유로운 것, 그것이 사랑인가. 구두가 날개를 달았으니 오늘 저녁엔 뭔가 사 들고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겠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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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가족의 건강과 복지 증진을 위해 웃음 쿠폰을 발급했어요. 울적하거나 울먹할 때 가까운 인출기에서 뽑아 사용하면 되죠. 하지만 수산물 센터 김씨는 오징어 회 한 접시에 자신의 쿠폰을 끼워 팔았어요. 대형 할인점에 우유를 납품하는 박씨도 자신의 쿠폰을 사용해 왔고요. 부도덕한 상술이라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지만, 불법이랄 게 있나요. 뭐랄까, 그렇게밖에는 쿠폰을 쓸 수 없었나 보죠. 덕분에 여분의 웃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서, 밤새도록 웃을 수 있는 도시의 경계도 생겨났어요. 누구는 경계가 아니라 전선이라 말하지만, 그저 우리는 더 많이 웃을 수밖에요. 그래서 우르르 필드로 몰려 나가 에스까르고를 까며 꺄르르 웃었어요. 까르페디엠! 가끔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하죠. “너, 그 웃음 어디서 났니?” 뭘 하든 사업만 잘되는데 어떠려구요. 안 그래요, 코리아? - 송기영(1972~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경제가 어려워도 사회가 어지러워도 웃어야 한다고 한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을 일이 없어도 웃어야 한단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데, 웃는 낯에 침 뱉지 못한다는데, 웃음이 돈도 되는 세상인데, 어찌 아니 웃겠는가. 대인 관계의 윤활유요 정신건강에 보약인데 무한 리필까지 가능하니 안 웃으면 손해지. 정부에서 “가족의 건강과 복지 증진을 위해 웃음 쿠폰을 발급”했다니, 유효 기간 지나기 전에 어서 공짜 웃음을 사용해야지.

울화가 터지든 짜증이 나든 잘 웃기만 하면 되는 저임금 감정노동에 일자리가 많이 있으니 실업자들을 웃음으로 내몰면 실업난 해소와 경제 회복에 적잖이 기여할 것이다. 웃음 근육과 마음의 움직임을 잘 분리하는 노하우, 표리부동을 세련되게 구사하는 테크닉을 다룬 실용서도 베스트셀러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교환가치만 강조한 웃음들 사이에서 소외된 우리의 슬픔과 외로움과 고독은 어디로 가지?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이 울음을 밀어 올리는데, 이 처치 곤란한 울음을 어디 가서 몰래 버리고 오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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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책꽂이에 꽂는 일이 먼저이고요,

책꽂이의 책을 가지런히 하는 게 그 다음입니다.

책꽂이가 좁아 책을 책상 모서리에 쌓아올려야 하고요.

연필을 깎다 보니 손이 더러워졌죠.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촛불을 밝히는 일이 먼저이고요,

흘러내리는 촛농이 굳기를 기다리는 일이 그 다음입니다.

촛불이 만들어주는 그림자에 흰 종이를 내어 보여주지요.

그림자가 잠드는 때를 기다립니다.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잡동사니를 정돈합니다. 필통, 수첩, 만년필,

저금통장, 동전, 묵은 교통카드, 영수증, 알약, 사진 여러 장…….

사진을 보다가 눈이 움푹 들어가 버렸네요. 움푹 팬 눈이

우물이 되었고요. 그 우물 속으로 누가 두레박을 타고 내려옵니다.

오디오를 켜는 일이 먼저이고요, 음악을 듣는 게

그 다음입니다.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모은 여자가

허공에 떠 있습니다. 수학시험에 못 푼 문제들이

꼬리를 뭅니다. 도대체 이 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 박덕규(1958~)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 쓴다면서 왜 자꾸 딴짓을 하니? 자질구레한 할 일이 그렇게도 많니? 시가 안 오니 이 일 저 일 핑계만 늘어나니?

영국 시인 엘리엇은, 시인이 마음속에 움트고 있는 무엇이 있을 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 말을 발견할 때까지는 자기가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표현해야 할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지 않는 척 시치미 떼고 기다리는 중이다. 겉으로야 한가하고 태연해 보이겠지만 안으로는 얼마나 애태우고 있을까.

그래서 몇 번이나 책상은 깨끗해지고 책은 가지런해지고 서랍은 잘 정돈이 되었구나. 이제 시가 오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 안 왔니? 다시 책과 책상과 서랍을 어지럽혀 줄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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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

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공원에 들어선다 우는 아이의 입엔 뼈가 물려 있다

1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언덕을 오른다 노파의 몸을 박차고 나온 뼈들이 경쾌한 음을 내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노파의 발걸음이 거벼워진다 유모차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라고 노파는 생각한다

3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상점 거리를 걷는다 쇼윈도우에 노파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목 없는 마네킹 위로 노파의 얼굴이 붙었다 떨어지고 붙었다 떨어진다 그 시간 악기점 주인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손가락은 몸의 구멍을 막느라고 분주하다

4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집을 나선다 이곳엔 마땅히 벽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방이 벽이다

45분 전, 테이블 위에는 자궁처럼 부푼 빵이 놓여 있다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다 시간은 여전히 창틀을 넘어가고 있다     

- 안희연(1986~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노파는 아직도 산책 중이야. 오늘은 늘 다니던 산책로를 살짝 벗어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로 가본 거야. 45분 후에는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수 있다는 듯이. 목숨이 몸에서 빠져나와 길가에 굴러떨어지고 벤치에 담겨져도 노파는 느끼지 못했을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든 공원은 한산하고 호젓하니까. 나뭇잎 지던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졌을 뿐이니까. “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고 말할 때, 생명을 치워버려야 할 물건처럼 말할 때,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안심하라는 듯 말할 때, 타인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모두가 바빠서 주위를 돌아볼 틈도 죽을 틈도 없다. 이 시는 현상에 감춰진 사건들을 시간의 역순으로 복기해 본다. 한 물건이 생명이었던 때를 상상해 본다. 죽었는지도 모르는 한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것, 그것이 시가 애도하는 방법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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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는 다리가 넷

나는 다리가 둘

 

나는 걷고

탁자는 걷지 않고

 

새는 다리가 둘이다

새는 날아다니고

 

너는 다리가 둘

탁자는 다리가 넷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 거야

아니면 없을 거야

다리가 넷 달린 개 한 마리가

총총총 앞을 지나고

 

이 모든 일을 알고도 탁자는 가만히 있다

 - 황인찬(1988~ )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물음이 있다. 왜 나는 다리가 둘이고 탁자는 넷인가.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는 궁금증이 있다. 왜 나는 걷고 탁자는 걷지 않을까. 나는 왜 이것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정말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궁금증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먹고사는 일을 궁리하거나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기에도 바빠서 궁금해질 틈이 없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궁금증은 다 쓸모없는 일이 된다.

시는, “다리가 넷 달린 개 한 마리”가 앞을 지날 때, 뭔가 중요한 물음도 네 개의 다리를 달고 지나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전혀 중요할 것 같지 않은 물음들, 너무나 하찮아서 물어볼 가치가 없을 것 같은 물음들에게 어린이처럼 다가간다. 궁금해지기 위해, 물음 같지 않은 물음에서 근본적인 물음을 발견하기 위해, 기꺼이 어린이가 된다. 모든 사물, 모든 현상이 무한한 신비를 품고 있었던 어린 시절은 어디로 갔나. 그 신비를 단번에 알아보고 끊임없이 질문해대던 내 안의 어린이는 어디로 갔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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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 그늘 언덕

가장 유순한 흙부터 녹기 시작하고

쓱쓱 손바닥을 비비면

엄지 끄트머리 갈라졌던 굳은살도 보들해진다

 

감감무소식 너의 곁에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던 내 곁으로

새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천천히

흐르고

돌아온다

무거웠던 왼발, 오른발, 걸었더니

아침 골목길이 움직인다

가방 멘 아이들이 지나가고

일터로 가는 사람은 첫 담배에 불을 당긴다

 

하루에 하나씩

손가락을 모두 활짝 펼치고 나면

열릴 것이다

3월의 맨 윗단추가

 

 - 배성희(1959~)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아니 벌써! 정유년 새해도 두 번째 달이다. 먹고사는 일과 걱정거리에 끌려다니는 사이에, 소설보다 재미있고 드라마보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뉴스에 정신 팔려 있는 사이에, 슬쩍 1월 지나고 2월이라니! 영하 10도 밑을 후벼 파는 맹추위와 눈보라가 한창인데, 입춘 지나 곧 우수라니!

살을 에는 바람에 숨어 오는 희미한 봄기운이 콧구멍에서 느껴질 것 같다. 우리 코보다 일찍 봄 냄새를 맡은 나무들은 얼었던 수액을 녹이며 가지 속에서 움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땅 밑에서도 봄기운은 조금씩 얼음을 녹이며 아지랑이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옷이 무겁게 느껴지고 몸 어딘가가 근질근질하다면 그건 봄기운이 시킨 짓일 것이다. 추운 아침 출근길에 “무거웠던 왼발, 오른발, 걸었더니/ 아침 골목길이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추위에 곱은 열 손가락을 하루에 하나씩 펴면, 또 3월이다. 머리는 몰라도 피와 살은 봄기운을 감지하고 기지개 켜는 봄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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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