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경향시선'에 해당되는 글 254건

  1. 2017.12.26
  2. 2017.12.18 겨울나무
  3. 2017.12.11 배 나온 남자
  4. 2017.12.04 천적
  5. 2017.11.27 내심
  6. 2017.11.20 양치하는 노파
  7. 2017.11.13 유령들
  8. 2017.11.06 허기
  9. 2017.10.30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
  10. 2017.10.23 저녁 일곱 시 이십 분쯤
  11. 2017.10.16 붉은 스웨터
  12. 2017.10.11 까자끼 자장가를 들으며
  13. 2017.10.11 별이 비치는 지붕
  14. 2017.09.25 달동네 아코디언
  15. 2017.09.18 무서워서 우리는
  16. 2017.09.11 요구
  17. 2017.09.04 시골길
  18. 2017.08.28 주소
  19. 2017.08.14 편지
  20. 2017.08.07 수평선

일반 칼럼/경향시선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 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 정호승(1950~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번 박힌 곳에서 일생 동안 버티고 견디다가 구부러지면 본래의 반듯한 모습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못. 평생 육중한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고 견디는 일도 힘들지만, 녹슬고 구부러지는 일을 견디는 일은 그보다 훨씬 힘든가 보다. “더 이상 펴지지 않는” 그 몸의 경직성과 고집불통과 완고함. 우리는 그런 몸 안에서 살아야 하고 그 몸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못은 무게를 견디는 동안만 못이다. 구부러지기 전까지만 못이다. 온몸의 고통과 긴장으로 제가 박힌 곳의 무게를 감당하는 동안만 못이다. 벽에서 빠져나와 무게에서 해방되면 자유가 아니라 구부러지고 녹슨 몸이 온다. 행복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함께 사는 지혜에서 오는 것 아닐까?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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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해지면 강해지는구나

꽃도 버리고 이파리도 버리고 열매도 버리고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벌거숭이로

꽃눈과 잎눈을 꼭 다물면

바람이 날씬한 가지 사이를

그냥 지나가는구나

눈이 이불이어서

남은 바람도 막아 주는구나

머리는 땅에 처박고

다리는 하늘로 치켜들고

동상에 걸린 채로

햇살을 고드름으로 만드는

저 확고부동하고 단순한 명상의 자세 앞에

겨울도 마침내 주눅이 들어

겨울도 마침내 희망이구나

 - 차창룡(1966~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고행은 육체의 고통을 견뎌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수행이다.

몸을 괴롭게 하여 마음에 매달린 온갖 애착과 욕망을 끊어버리는 수행이다. 시인은 그 수행의 본보기를 겨울나무에게서 본다.

톱질 몇 번이면 쉽게 넘어가는 나무. 한 발짝도 움직일 줄 모르는 나무. 땔감이 되든 의자가 되든 사람이 가공하는 대로 물건이 되는 나무. 그 힘없고 하찮은 나무가 맨몸 하나로 강추위에 맞서고 있다. 찬바람 눈보라를 제 몸에 깊이 새기고 있다. 가혹한 추위를 꽃과 열매와 향기로 만드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나무는 해마다 고통이 어떻게 희망으로 바뀌는지 온몸으로 보여주는 수행의 경전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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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게 잘 먹는 것도 아니고

운동부족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날들을 배고픔에 시달렸고

어린 나이에 각종 일로 온몸 성한 곳이 없는데

이상하다 물만 먹어도 살이 오른다

 

밥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비굴하게 밥을 번 적은 없다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보다 술값을 더 지출한 게 사실이지만

큰맘 먹고 하는 외식도

고작해야 자장면이고 특별히 탕수육을 곁들인 날은

밤새 설사로 고생했다

 

굶은 기억이 살찌게 하나

슬픔이 배부르게 하나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얼마나 허겁지겁 살아냈는지

잊는다는 것이 병을 주었나

 

참는 것이 밥이었고

견디는 일이 국이었고

울며 걷던 길은 반찬으로 보였는데

배 나온 사람들을 보면

부황과 간경화로 먼저 간 식구들이 떠오른다

저, 좁은 땅 다 파먹고 말없이 누워있는

슬픈 무덤 덩어리들

 - 유용주(1960~)

 

밥뿐만 아니라 슬픔도 허기도 가난도 많이 먹으면 배가 나오는구나. 상처도 괴로움도 마음에 자꾸 쌓이면, 밥을 적게 먹어도, 밥 대신 물만 먹어도, 저절로 부어서 불편한 살이 되는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일들을 밥 먹듯이 참고 견디며 안으로 삭였는데도, 먹고 놀기만 해서 살찌고 배가 나왔다는 오해를 견뎌야 하는구나. 살도 배도 입이 없어 말은 못해도 할 말은 참 많을 것이다. 그 말을 생전에 다 하지 못하고 영영 떠난 이들의 무덤은 생전에 나왔던 배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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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차장에 들어선 차들은

죽음에 이르러서 자신의 천적을 알게 된다고 해요

차를 부숴본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을

살짝 알려드릴게요. 앞 유리를 부수고

보닛을 찌그러뜨릴 때쯤이면

태어나 그처럼 맞아본 적 없는 차들은

백미러를 보며 길을 그리워한대요

길이 방목해 키우던 그 시절

세상 그 어디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던 그때를

회상에 빠진 헤드라이트가 그렁거리는 순간

차의 숨통을 끊어주는 게 폐차장에서 하는 일이래요

그러면 찌그러진 차체에 천적의 무늬가 떠오른대요

길의 무늬가 소름 돋듯이 뜬대요

계기판의 주행거리가 단지

오랫동안 길에게 쫓겼다는 증거였던 거죠

질주를 충동질하는 길이

후미등을 흉내 낸

빨간 신호등으로 자신을 길들여왔던 거죠

먹지도 못 하는 깡통을 만들어내는 천적 따위는

천적 축에 못 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폐차를 해본 사람은 잊지 않는대요

언제나 길은 제 위를 달릴 새 차가 필요하단 걸 말이에요

 

은밀한 포식을 즐기고 있는 아스팔트 도로

그 혓바닥 위로 당신도 막 걸음을 옮기고 있군요 -김학중(1977~)

달릴수록 수명이 단축되니, 모든 길은 차를 잡아먹는 포식자인 것. 닳거나 낡은 부속품은 길이 차를 조금씩 갉아먹은 자국인 것. 좁고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하던 옛길은 넓고 평평하고 반듯한 고속화 도로가 되어 더 많은 차들이 더 빨리 남은 생명을 길 위에 던지도록 유혹한다. 마음껏 과속할 수 있는 도로는 속도의 진수성찬. 성능 좋은 차는 기꺼이 속도에 쫓기는 스릴을 즐기며 제 죽음을 재촉한다. 도로가 맛나게 포식한 차들이 폐차장에 쌓여 있다. 곧 부서지기를 기다리는 이 차들은 점점 더 빠르게 변화하는 삶에 적응하느라 앞뒤 안 보고 달리기만 한 우리의 자화상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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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 걷다가 어느 화원 앞이었다

화원이라는 말이 오랜만이어서

걸음이 느슨해지고

잘생긴 나무화분 있어 멈추었다

 

희박해지는 공기 탓이었나

금방이라도 모든 죄를 고백할 듯

창백하구나, 사람들

 

그 나무 이름이 인도 벵갈고무나무였지

 

그때 한 검은 사내가 나무 앞에 우뚝 선다

나는 조금 떨어져 서 있었기에

그에게 충분한 자리를 내줄 수 있었다

 

터번만 두르지 않았을 뿐

누가 봐도 그는 인도에서 가져온

오래된 침묵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넓은 나무 이파리를 만지고 만지더니

가던 길을 간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그도 나무도

와도 너무 와버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

 

사내의 몸에서 풍겼던 냄새 뭉치로

나무는 잠시 축축하다

(…)

 -이병률(1967~)

우리나라에 와서도 벵갈고무나무는 인도의 공기와 침묵을 주위에 퍼뜨리고 있구나. 화분 주위에 인도의 기운을 퍼뜨리며 살고 있구나. 낯선 땅에서 적응하고 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거리를 견디고 있지만, 인도의 기품을 잃지 않고 있구나. 그 힘이 한국에 온 인도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구나. 나무도 인도인도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내심’에서 오래오래 침묵으로 대화하고 있구나. 화분만 한 공간에서 인도의 역사만큼 길고도 오랜 이야기가 흐르고 있구나. 한국의 공기와 인도의 침묵도 함께 어우러지고 있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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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맨질한 마당에

그림자를 널어놓는다

빛바랜 칫솔을 물고

노파는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린다

거품을 문 입술은 지느러미보다 유연하다

칫솔이 움직일 때마다

헐렁한 소맷자락의 꽃들이 간들거린다

노파와 칫솔이 만드는 각도에 맞춰

마당 안의 사물들이 일제히 몸을 흔든다

마른 손등에 검버섯이 피어오르고

담 밑의 꽃봉오리가 조금씩 입을 벌린다

제 키를 훌쩍 넘는 그림자를 발끝에 달고

아이들이 달려나간다

양은대야 가득 경쾌하게

구름이 흘러간다

오래전 지붕 위로 던진 치아들이

뭉게뭉게 떠 간다

 -한세정(197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마당 구석에 있던 변소가 집 안으로 들어온 걸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우유가 종이 안에 담겨 있는 걸 본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마당도 담장도 길도 산도 구름도 모두 실내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아파트 베란다 바깥은 절벽이니 그럴 수밖에.

어린 시절엔 세수하러 나가면 개울이 밤새 맑은 물을 떠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먹을거리 놀거리가 없어도 눈앞에 펼쳐진 시야는 한없이 넓고 발걸음이 닿을 수 있는 거리는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흙이며 돌이며 풀이며 벌레 따위를 즐거운 놀이로 만드는 천재였다. 마당에서 양치하는 할머니는 이 모든 기억들이 살아 있는 놀이터이고 보물 잡동사니가 가득한 창고다. 그 추억에 로그인하면 어린 시절은 바로 현재가 되고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된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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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비좁은 장롱 속에 들어가는 것은

더없이 쉬운 일이다

이불 밑에 납작하게 누워 있어도

피아노의자 아래 네 발로 기어들어가

새끼 고슴도치로 웅크려 있어도

금세 웃음소리를 찾아낼 수 있다

발코니 구석에서 은빛 물방울이 되고

유리창에 달라붙은 햇빛이 되고

발가락까지 오그린 투명한 숨소리가 되는 아이들

그렇게 아무리 숨어 있어도

가면을 몇 개씩 찾아 쓰고 있어도

얘들아 이 집에서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단다

물풀 같은 하얀 종아리가 다 자라고 나면

굳이 숨으려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너희들을 사라지게 할 거야

보이지 않게 만들 거야

다른 그 무엇이 될 수 없게 서류 속에 집어넣을 거야

그때까지만이라도 숨은 그림을 그려야지

유령과 싸워야지 커튼 뒤에서 장롱 속에서

 - 김태형(1970~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술래가 되어 어디 있는지 모르게 사라지는 즐거움. 그러다 갑자기 몸을 입고 나타나 사람들 놀래어 주는 즐거움. 숨고 싶은 마음과 들키고 싶은 마음 사이에 술래잡기의 재미가 있는 것 같다. 숨는 즐거움보다 들키는 즐거움이 더 크지 않을까. 들키는 순간의 놀람과 희열,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던 긴장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맛보고 싶어 유령도 되어 보고 투명인간도 되어보는 것 아닐까. 그러나 시인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겪을 슬픈 술래잡기를 예감한다. ‘나’라는 고유한 존재는 없어지고 명함이나 서류에 이름으로만 존재할 때,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될 때, 그래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술래 ‘나’를 찾아야 할 때,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두려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정신이 없을 그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셰익스피어, <리어왕>)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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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귀로 국수를 먹습니다 바람국수를요 바람이 키운 아이가 국수를 말고 있습니다 굶어죽은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고명으로 얹혔네요 누군가 어깨를 들먹이며 울먹이는 국수 흐느끼는 국수 한숨으로 울음으로 뜨거워진 국수를 먹습니다 내 안에 사는 허기라는 이름을 가진 짐승은 다리가 코끼리를 닮았고 대가리는 쥐를 닮은 놈이 배창새기가 흰고래수염만큼 커서 그 허기가 말도 못하여 저승 윗목에 부는 바람같이 막을 길이 없습니다 국수를 먹습니다 불치의 국수를 집 없는 국수를 문이 없어 꽉 막힌 국수를 팔다리 잘리고 몸뚱이로만 굴러다니는 불구의 국수를 - 조길성(1961~)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허기가 수십 년간 익을 대로 익어 국수가 되었네요. 바람결에서 국숫발을 뽑아 만든 국수. 먹지 않아도 후루룩후루룩 맛있는 소리가 나는 국수. 울음이 국물이 되고 “굶어죽은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고명으로” 얹힌 국수.

허기는 자라고 자라 아무리 먹어도 배불러지지 않는 커다란 배가 되었네요. 먹으면 먹을수록 더 배고파지는 위장이 되었네요. “다리가 코끼리를 닮았고 대가리는 쥐를 닮은 놈”, “배창새기가 흰고래수염만큼” 커다란 짐승이 되어 배를 채워달라고 끊임없이 보채네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는 막막하고도 넓은 백지를 시로 채우고 싶은 상상력이 되었네요. 그토록 몸에서 떨쳐내려고 애썼지만, 허기는 이제 없으면 살 수 없는 불치병이 되었네요.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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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 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져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길을 타 넘지 못하고, 도시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 이하석(1948~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뭇잎이 일으키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바람 무늬를 온몸으로 그리는 나뭇잎들을 보면 종종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쁨이 느껴진다. 알 수 없는 것들에서 무한한 호기심과 설렘이 일어난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설렘도 기쁨도 일어나지 않는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사물과 우리 몸 사이를 차단시킨다. 귀를 기울이면 사물과 자연에는 자기도 모르게 행복해지는 말, 저절로 가슴이 뛰는 말, 마음 세포가 깨어나는 말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경험한 적도 말한 적도 없는 생생한 이름들이 가득하다. 작가는 ‘이름 지어지지 않은 것 혹은 감히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사르트르)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를 느낄 때 모르는 것들 속에서 생동하는 신비를 즐길 수 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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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는 머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회사를 나오는데

수위는 으레

사람 목엔

머리가 붙어 있으려니

얼굴 없이 인사를 해도

안녕히 가시오

내일 봅시다

평화로운 제의를 한다

옆구리에 끼인 머리는

투구처럼 묵묵히

다시 쓰일 전쟁을 기다리며

다만 버릇이 된

불안의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데

가을 거리의 좌판에는

붉고 푸른 혹들이

그득히 쌓여 있다.

 - 이상희(1960~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종일 눈알과 머리를 혹사시키고 퇴근하면 잠시 머리통을 목에서 떼어내고 싶어진다. 아무것도 쳐다보기 싫은 눈알을 가방의 어둠 속에 깊숙이 넣어두고 머리통 없이 쉬고 싶어진다. 눈과 머리가 일하는 동안 하릴없이 의자에 붙어 있느라 답답했던 다리와 엉덩이도 갇혀 있던 집에서 나와 신나게 깡충거리는 강아지처럼 퇴근길을 마음껏 걷게 해주고 싶어진다.

사무원들의 두툼한 가방에는 서류나 소지품만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다음날 사용해야 할 머리통도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얼굴 없이 목과 눈 없이 인사를 해도 으레 “사람 목엔 머리가 붙어 있으려니” 여기고 받아주는 풍습이 있으니, 머리통을 떼어놓고 다닌다 해도 결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술 먹느라 밤늦도록 머리통을 목에 붙이고 있으면 다음날 일터에서 머리 없이 눈 없이 일해야 할 테니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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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올만 당기면 풀어질 듯

입을 막고 있어서 우리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몸속에 둔 실마리를 들키지 않을 것처럼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에 엮여서

두껍고 따뜻하고 촘촘한 사람이 되었지만

손가락이 닿으면 파르르 떨리는

 

스웨터의 물결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손끝에서 맥박이 섞이고

 

눈을 가만히 닫고 있으면

물려 입은 옷처럼 타인의 냄새가 난다

조심조심 숨소리를 헤아리는 호흡이 틀니처럼 박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재활용되고 있었던 걸까

깨끗이 빨아 입어도 낡은 슬픔뿐

 

(…)

 

어둠의 매듭이 묶이고 풀릴 때마다

핏물로 짠 스웨터가 몸속에서 뒤척거렸다

입을 닫아 주어도 잠들지 않았다

 

 - 이민하(1967~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실마리 하나만 풀어져도 전체가 주르르 풀리게 되어 있는 스웨터. 그 가느다란 실에 삶과 존재가 다 의지하고 있다니. 그러니 어머니는 자신의 붉은 핏물로 한 땀 한 땀 짠 어린 스웨터가 집 밖을 나서기만 하면, 차조심해라, 앞뒤 살펴라, 사람 조심해라 당부하는 것 아닌가. 어머니에게 받은 그 스웨터를 소중히 간직했다가 조금 풀어서 자식에게도 짜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가느다란 실은 스웨터로 짜기 전에는 목이 어디 뚫렸는지 팔이 어디 달렸는지 알 수 없는 실타래였다. 스웨터가 낡거나 해지기만을 기다리며, 그 실은 직물에서 해방되어 다시 헝클어진 실이나 둥근 덩어리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화장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는 올올이 실 모양을 닮은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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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자장가는 왜 이리 슬플까

그건 꿈에서 왔기 때문이지

이루지 못한 꿈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전생에서 오는 것

세상이란 슬픈 곳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지

태어나기 전부터 알기 때문이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태반에서부터 빙글빙글 돌아가는 음반

바늘이 운명의 표면을 긁을 때 나는 소리

하늘의 별도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소멸한다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아기의 귀에 수면의 묘약을 흘러보내며 말하지

세상 같은 거 잊으라 잊으라

지구는 회전하고

세상의 모든 자장가는 그 회전축을 따라 돌고 있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 정철훈(1959~ )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러시아 가수가 불러도, 조수미가 불러도, 코사크 자장가(‘까자끼’는 ‘코사크’의 러시아어 발음)는 한결같이 슬프다. 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지만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아야 했던 코사크족의 애환이 이 자장가에 스며 있기 때문일까.

그 슬픈 곡조에는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나 전장에서 싸우다 죽을 아기의 운명에 대한 어머니의 깊은 연민과 애도가 있는 것 같다. 아기를 재우는 노래이면서 전쟁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의 영면을 기원하는 노래 같다. 가장 깊고 편안한 잠은 죽음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후 오래오래 잠들었다가 이제 막 아기로 환생한 청년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같기도 하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처럼 세상은 시끄럽고 네가 누운 곳은 누추하지만, 아가야, 필사적으로 편안하게 자거라. 자장 자장 자장,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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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장이 나빠 소화가 안되는 날은

배를 문지르며 고향으로 갑니다.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산골길

길 끝에 변소 하나

버섯처럼 기울어져 서 있고

그 안에 앉아 있는 어릴 적 나를 봅니다.

힘들어 찡그리며 쳐다보는 내 눈에

썩은 서까래 터진 지붕 틈새로

언뜻 나를 쏘아보던 밤하늘 별빛

독 안에서도 하얗게 내리깔리던 별빛.

겁에 질린 나는 얼른 뛰쳐나오고

밤이면 다시 그 근처를 얼씬 못하였습니다만

그 일로 내 마음 지붕도 그렇게 터져서

다른 곳은 다 고쳐도

그곳만은 꿰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라고

자라서도 또 망가진 변소 하나

몸속에 몰래 지어놓고 살았던가.

쭈그려 생각에 잠기거나

번뇌에 쫓기어 깊이 헤매는 밤이면

터진 몸의 지붕 틈새로

번뜩이며 나를 쏘아보던 별빛

고향 마을 뒷산 솔바람 소리

우주 저쪽의 몸짓까지 함께 묻어와

쏴쏴 나를 쓸며 다니는 소리.

 - 이성선(1941~2001)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눈비를 막지는 못해도 쏟아져 내리는 별빛은 마음껏 들어오는 허름한 지붕이 시인의 마음에 살고 있네요. 기억 속으로 우주를 끌고 들어온 별빛이 소화가 안되어 불편한 내장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네요. 어두운 마음으로 별빛이 터져 들어와, “다른 곳은 다 고쳐도/ 그곳만은 꿰맬 수” 없으니, 어디에 있더라도 그곳이 고향이고 유년이겠네요.

고개만 들면 물방울처럼 떨어질 것 같은 별이 보이는데, 눈비를 막느라 별빛까지 막아버린 지붕 아래에서 문을 꼭꼭 닫고 사느라 별을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추석날 밤에는 탁 트인 벌판에 나가 일 년 중에서 가장 둥글고 환한 달빛과 사과처럼 탐스럽게 익은 별빛을 눈동자에 실컷 묻혀보고 싶습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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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줄기 중계본동 비탈길을 오릅니다

좁아지고 넓어지고 늘어나고 줄어드는 길을 따라

발자국들이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연탄들도 뜨끈뜨끈하게 오르고 있습니다

손이 던지는 대로 연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가파르게 돌을 넘습니다

연탄 리어카는 난방관처럼 돌아다니면서

흩어지고 도망가는 길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각진 길의 주름이 접히고 펴집니다

발자국이 건반 같은 돌계단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까치발 구두를 신은 여자들이 휘어진

길을 다듬고 있습니다

돌은 냄새나는 도랑 위에 징검다리를 놓습니다

고드름도 등고선처럼 오르내립니다

주름으로 채워진 지붕이 눈보라에 주저앉았다가 일어섭니다

비바람이 두드리고 습기가 갉아먹습니다

처마에서 녹아드는 골함석이 이처럼 쑥쑥 빠집니다

까치들의 울음소리가 지붕의 골을 메웁니다

햇살이 빨대처럼 지붕을 빨아먹다가 구멍을 냅니다

뻥 뚫린 곳은 숨구멍입니다

(……)

 - 이명우(1959~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달동네 골목길은 달동네 사람들의 삶처럼 굴곡은 많지만,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리듬을 타며 움직이는 맛이 있다.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늘어나고 줄어들며 넓어지고 좁아지며 걸음을 연주하는 음악이 있다. 직선과 속도가 없는 이 길을 지나가면, 관절이 쑤시는 무릎도 사연이 많은 이삿짐도 강추위를 견딜 무거운 연탄과 김장배추도 모두 가락은 슬프고 박자는 신나는 음악이 된다. 낡아가고 허름해지면서 이야기는 많아지고 애환은 깊어져서 길은 점점 더 구성진 노래가 된다. 늦은 밤이 되면 취기에 흥이 난 노래가 이 길처럼 마음껏 비틀거리며 갈지자로 구불거리며 올라올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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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리를 줄여놓고 음악을 듣고

음악보다 더 큰 잡음을 듣고

뒷문 밖에서 시멘트 쪼가리 벌리고

풀이 지나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해충처럼 때 낀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숨어들고

탐스러운 거미줄을 망가뜨리고

부지런한 곤충들을 으깨어 죽이고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웃음이 나오면 재빨리 입을 다물고

이불 속에 까만 손을 집어넣고

금지된 것을 만지고

 

묵은 재 냄새가 나는 우리는

누가 잘못됐다는 말을 기다리고

죽은 우리를 누가 깨우러 올까 궁금해 하고

쥐처럼 눈동자를 빛내고

 - 김개미(1971~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소심하고 겁 많고 내성적인 사람들을 보면 나를 닮은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친근하다. 작은 일 하나라도 생기면 상상력으로 크게 부풀려서 미리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 대단치 않은 일을 당해도 심장은 알아서 철렁 내려앉고,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나오고, 다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열심히 후들거리는 사람들. 분위기가 이상하면 아무리 조용하게 숨을 쉬어도 제 숨소리가 폭풍처럼 들리는 사람들.

뭔가 일이 터질 것만 같아서 눈은 눈치 보는데 이력이 나고, 심장은 걸핏하면 쿵쿵 뛰고, 입은 들킬 일도 없는데 들킬까 봐 꽉 닫혀 있다.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다섯 번씩 열 번씩 눈동자를 굴려야 한다. 사람 많은 곳에서는 눈에 안 띄는 곳을 귀신 같이 골라 앉고 질문이 오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곳을 보는 척하는 데 능숙하다. 이런 모습을 남에게 들키는 건 창피한 일이지만 시에게 들키면 오히려 통쾌하고 즐겁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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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라는 도구가 있어 갈고리처럼 생겼는데, 왜 요구라고 부르는지 물었는데 자꾸

처음부터 있었다고 해. 사전에는 필요한 도구가 要具라는 거지. 이 요구로 무거운

생선궤짝을 찍어 당기면, 경험만 있음 할머니들도 거뜬히 배에서 언 선동오징어

60마리 상자를 옮기지. 이 요구는 길이가 30에서 50센티미터, 1미터 정도로 각각

다른데 그건 일꾼들마다 키와 몸이 다르니, 체형에 맞게 만든다고 해. 허리를

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 허리는 굽히지 말고 무릎만 굽히라고 그러는군. 그러고

보니 공판장이나 어시장에서 이 요구만큼 적절한 도구가 없더만. 이 요구로 자기 발등

이나 무릎을 한 번은 찍어야만 바다가 사람을 받아준다는군. 한번은 이 요구를 들고

바다에 바닷물을 받으러 갔어. 이 요구로 지난날을 모두 찍어버리려 했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물었어. 나는 누구냐고 나의 괴로움은 무엇이냐고. 처음부터 있었다고 해. - 성윤석(1966~)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펜을 들었던 손으로 손에 익지 않은 요구를 사용하는 일, 자신이 쓴 글이 자신을 괴롭히듯 요구가 제 발등을 찍는 일, 그 날카로운 도구로 지난날을 다 찍어버리고 싶은 충동, 그런 경험을 거치고 나서, 어느 날 시적 화자는 요구가 팔에 달린 또 하나의 팔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하지 않았을까? “나는 누구냐고 나의 괴로움은 무엇이냐고” 펜으로 그토록 간절하게 물었던 물음을, 머리와 글이 대답해 주지 않았던 물음을, 팔에 새로 돋은 요구가 대답해 주지 않았을까? 공기처럼 물처럼 “처음부터 있었다고”. 눈과 귀처럼 팔다리처럼 처음부터 몸에 달려 있었다고.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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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천천히 구름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시골길.

감자밭 감자가 시골 소년의 알통처럼

소리 없이 굵어가고,

명태 꼬리 두어 개 삐죽이 내민 짐 보퉁이를

시골 여인이 머리에 이고 가는 길.

 

길가 풀섶 둥지에서는 들새가

제 체온으로 데울 만큼의 알을 낳아

따스히 품고 있다.

달콤한 햇볕 아래서

보리앵두는 빨갛게 익어간다.

 

일부러 해찰을 하듯 날아다니며

나비는 풀꽃마다 꽃가루를 옮기고,

소나기를 머금은 구름은 머얼리서

느리게 천둥소리 피워 올린다.

 

신발을 벗어버린 내 맨발은

붉은 황토흙이다.

맨발 아래서 질긴 질경이풀처럼

생명 있는 것들이 꿈틀거린다.

 

내 뜨거운 손을 저무는 해에 얹으면

해 그림자 길게 깔리는 시골길

길 따라 내 삶도 천천히 익어간다.

 -이준관(1949~)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에서 햇볕과 풀냄새와 벌레 소리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종아리 걷고 고무신 신고 걸으면 다리에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어린 시절이 깨어날 것 같다. 그때 다니던 길들이 핏줄 따라 세차게 돌 것 같다. 하도 많이 다녀서 지도가 새겨진 발바닥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다 알고 있으리라.

어린 시절 다니던 길은 이제는 거의 바뀌었거나 없어졌다. 황토색이 눈을 씻어주고 풀냄새가 허파와 내장을 씻어주는 흙길. 들숨 날숨 한번에 몸속을 여러 번 돌고 나가는 오솔길. 지금은 기억에 남아 겨우 연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골길의 아름다움은 생생할수록 안타깝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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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집이 어딨죠? 기사가 물었던 때는 저녁 어스름이었다

하늘이 잠시 멈췄다

행인은 어둠을 향해 전등을 비추고

버드나무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저 나무에서 멀지 않아요

바로 앞에 골목이 하나 있는데

신이 꿈꾸는 것보다 푸른 정원을 끼고 있죠

사랑이 믿음과 정직의 깃털만큼 파란 곳이에요

골목 끝까지 가시면 청소년의 뒷골목이 나오는데

거기서 고독의 꽃 쪽으로 돌아서

꽃 두 발짝 앞 신화 속 영원의 샘물에 들르세요

맑고 깨끗한 두려움에 휩싸일 거예요

그 은밀한 공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빛의 둥지에서 새끼 새를 꺼내려고 소나무를 오르는

아이가 보일 거예요

그럼 걔한테 물어보세요

친구 집이 어딨니?

-소라브 세페리(Sohrab Sepehri, 1928~1980) 신견식 옮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행정구역이나 주소를 가리키는 말보다 땅과 공기와 나무의 느낌이 더 중요한 곳. 지도 대신 냄새로 소리로 촉감으로 길과 집을 찾는 곳. 말이 머리와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핏줄과 피부에서 나오는 곳. 구석구석 마을의 아주 은밀한 움직임과 활기도 온몸의 더듬이로 다 찾아내는 곳. 집과 골목과 정원에,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에, 신화가 살아 있는 곳.

이 마을에서는 아직도 나무나 새와 이야기하는 관습이 이어질 것 같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처럼 거리를 활보해서 보이지 않는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것 같다. 자연과 사물은 주민들의 느낌 속에서 다 살아 있어서 주민들의 몸짓과 말이 다 시가 될 것 같다. 길을 물으면 주소가 시가 되어 나오지 않는가. 그 순간 평범한 일상은 신화가 숨 쉬는 시공간으로 바뀌지 않는가.

이란 현대 시인들의 시를 묶은 <미친 듯 푸른 하늘을 보았다>에 실린 시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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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 아래 또렷한 조약돌들

당신이 보낸 편지의 글자들 같네.

강물의 흐름에도 휩쓸려가지 않고

편안히 가라앉은 조약돌들

소근소근 속삭이듯 가지런한 글자들의 평온함

그러나 그중 몇 개의 조약돌은

물 밖으로 솟아올라 흐름을 거스르네,

세찬 리듬을 끊으며 내뱉는 글자 몇 개

그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겠죠,

그토록 자제하려 애써도

어느새 평온함을 딛고 삐져나와

세찬 물살을 가르는 저 돌들이

당신 가슴에 억지로 가라앉혀둔 말이었겠죠,

당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심장 속에 두근거리는. - 채호기(1957~)

금년 장마철엔 중부지방에 비가 제법 와서 계곡에는 바위를 끼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겠지요. 깨끗하게 씻긴 바위에 앉아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싶습니다. 찬 기운이 정강이에서 심장으로 정수리로 올라와 서늘하겠지요.

혀처럼 부드러운 물이 오랜 세월 동안 깎아 더없이 매끄러운 바위를 생각합니다. 칼이나 끌이 아니라 물줄기가 포옹과 애무로 깎은 바위에서는 핏줄과 살갗과 체온이 느껴지겠지요. 키스와 포옹으로 바위를 깎는 나직하고 간지러운 물소리는 지금도 들리겠지요.

한때 흙탕물을 일으키고 바위와 돌을 뒤집던 거친 물살은 지금 어디서 흐르고 있나요? 흰 거품을 일으키며 물살을 마구 튀어 오르게 하던 뾰족하고 모난 돌들은 어디로 갔나요? 깊은 주름과 울퉁불퉁한 수면으로 일렁거리던 물줄기는 이제 순해졌나요? 발음이 달리지 않아 침묵만 풍성한 바위의 말과 물의 문장에 귀 기울여 봅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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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빨랫줄 참 길게 눈부시다

태양을 널었다가

구름을 널었다가

오징어 떼를 널었다가

달밤이면 은빛으로 날아다니는 갈치 떼를 널었다가

옛날에는 귀신고래도 너끈하게 널었다는

그래도 아직 단 한 번 터진 적 없는

저 빨랫줄

한라산과 백두산이

가운데쯤 독도를 바지랑대로 세워놓고

이쪽, 저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주는

참 길게 눈부신

저, 한국의 쪽빛 빨랫줄

 -배한봉(1962~)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수평선으로 빨랫줄 한 번 잘 만들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빨랫줄에 옷을 널면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춤추며 잘도 말랐지. 그 줄이 한라산에서 독도 지나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한여름 햇빛을 받아 반짝이면서도 한 번도 탈색된 적이 없는 싱싱한 쪽빛 수평선을 떠올려본다. 그 반듯한 줄에 구름도 널고 일출과 노을도 너는 공상도 해본다.

수평선은 움직임 없는 한 줄 고요한 직선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쉬지 않고 수면을 들이받으며 출렁이고 뒤채는 격렬한 물결이다. 소리 지르고 포효하고 바위를 때려 제 몸을 부수는 파도이다. 그 티 없이 반듯한 직선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마음을 널면 눅눅한 기분이 때와 함께 날아가 자꾸 만지고 싶어지도록 뽀송뽀송해지겠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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