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경향시선'에 해당되는 글 220건

  1. 2017.04.24 바위
  2. 2017.04.17 트럭 같은 3
  3. 2017.04.10 봄에는 구멍이 많아진다
  4. 2017.04.03 소음들
  5. 2017.03.27 현등사 곤줄박이
  6. 2017.03.20 자세
  7. 2017.03.14 아들의 나비
  8. 2017.03.06 웃음 쿠폰이 경제에 미친 사소한 영향
  9. 2017.02.27 습작생
  10. 2017.02.20 산책자
  11. 2017.02.13 전주
  12. 2017.02.06 두 번째 달 보내기
  13. 2017.01.23 부끄러운 계산
  14. 2017.01.16 농부
  15. 2017.01.09 물방울 둘의 경주
  16. 2016.12.26
  17. 2016.12.19 기도-4·19 순국학도 위령제에 부치는 노래
  18. 2016.12.12 ‘옛날이야기’
  19. 2016.12.05 한 청년의 초상
  20. 2016.11.28 책을 받고

1

가만히 들여다보라

아직 그 속에 갇힌 천둥소리 물소리 들리지 않는가

백만년 전 그 뜨거운 대지 속을 날아가던 잠자리의 날갯짓, 또 그 속을 흐르던 피들의 숨 가쁜 일어섬까지.

 

  2

발가락을 모으고

푸른 강물 흐르는 열 손가락을 모으고

온몸이 귀가 되거나

착한 눈빛이 되어

세상 죄 없는 것들의 이름과

아직 말이 되지 않아 또 죄 없는 것들의 이름을 하늘 가득 떠올렸다.

 

  3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바위 하나 내 살 속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숨 쉬지 않고 풀어놓은 숨이

먼지 같은 내 생을 자꾸만 둥글게 잡아당겼습니다.

 - 이승희(1965~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집에서 멀지 않은 오동근린공원에는 유난히 바위가 많다. 흔하디흔한 화강암과 꽃들이 서로 성질이 다른데도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한 뿌리에서 나온 것 같다. 꽃이 피면 바위는 완만한 곡선이 더욱 둥그러져서 제 단단한 성질을 버리고 따뜻한 빵이 되어 부풀어 오르는 듯하다. 땅 위에 커다란 빵이라도 솟은 듯 고양이나 까치들이 모여 떠날 줄 모른다. 바위에 엉덩이를 대고 있으면 그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몸으로 마음으로 스며들어 일어나기가 싫다.

바위도 아주 오래전에는 냇물이고 바람이고 나무이고 꽃이었을 것이다. 지층에 묻힌 기나긴 시간을 되감기하여 한정 없이 풀어놓으면, 바위가 되기 전의 강과 들과 거기 뛰놀던 온갖 짐승들이 뛰어나올지 모른다. 이 생명체들과 사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응고되어 바위가 되었을 것이다. “세상 죄 없는 것들의 이름과/ 아직 말이 되지 않아 또 죄 없는 것들의 이름”이 여전히 이 화석에 살고 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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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서 내렸다

나쁜 냄새

부품마다 나쁜 생각을 했나보다

 

꽃나무 옆에 한참 서 있었는데

꽃나무 밑동에서도 휘발유 냄새가 났다

 

시계를 보지 않는 이슬과 바람에게서도

시간을 보지 않는 시계에서도

끊임없이 겁나던 두려움에게서도

앞이 보이지 않던 눈물에게서도

먼 길을 함부로 달려온 트럭 냄새가 났다

 

꽃냄새가 되려고

국화가 되었다가

작약처럼 붉기도 했지만

 

나쁜 냄새는 휘발되지 않아

 

내 나쁜 생각 위에 뚫린 창문들을

자꾸 열어

 - 최문자(1943~ )

좋지 않은 생각을 하면 꽃에서도 휘발유 냄새가 나는구나. 나쁜 생각은 해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니 그 기운이 꽃향기조차 역하게 바꾸어 놓는구나. 갑자기 누군가가 몹시 싫어진다면, 늘 듣던 말이나 별것 아닌 행동이 오늘따라 몹시 거슬린다면, 늘 맛있게 먹던 단골집의 음식 맛이 형편없는 것 같다면,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면, 혹시 나의 생각에서 나쁜 기운이 나오는 건 아닌지 의심해볼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돋아나는 괴로운 기억이 몸과 마음을 들쑤신다면 어찌하랴. 어디서나 아무 때나 그 기억들이 덤벼들어 간신히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마음을 뒤흔들면 어찌하랴. 그 기억의 상처가 한 해에 감정이 가장 사치스러워지는 봄날의 꽃놀이조차 망쳐놓으면 어찌하랴. 착하게 산다고 해서,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산다고 해서, 그게 쉽게 아물겠는가. “나쁜 생각 위에 뚫린 창문들을 자꾸 열어” 좋은 기운이 들어오도록 자주 환기하는 수밖에…….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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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개와 혀가 튀어나오고

긴 꼬리가 스멀거리고

까맣게 부릅뜬 눈동자가 굴러 나와

알을 낳고

올챙이와 민들레로 피어나고

뱀으로 자라나고

수많은 꽃잎으로 퐁퐁퐁 터지는 구멍

강아지가 킁킁거리며

파헤칠 때

포르릉 뛰며 달아나는 아지랑이와 나비

목구멍이 간지러운 구멍

벌컥벌컥 달빛을 받아 마시는 구멍

빛이 먹고 싶었던 구멍

홀로 어두웠던 구멍

텃밭 가득

온몸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던 구멍

더 깊은 지하를 깨우는 구멍

혀뿌리까지 깨어난 구멍은

아주 오랫동안

잠들지 못할 것입니다

 - 장인수(1968~ )

봄에는 허파에서 밀어 올리는 숨이 힘차서 콧구멍까지도 넓어지는 것 같다. 그 숨을 감당하느라 심장도 빨라지는 것 같다. 관절은 왜 운동을 하지 않느냐며 우두둑 소리를 낸다. 땀이 나오려고 자꾸 피부를 간질인다. 봄은 겨울 동안 막혀 있던 구멍들이 뚫리고 열려서 마음껏 활동하는 놀이판이다. 그 구멍으로 간지러워 긁는 소리가 나오고 생명이 뿜어내는 비린내와 향기가 나온다. 구멍이 좁다고 꽃은 폭발하고 잎은 터진다. 올챙이는 우글거리고 기지개는 가팔라진다.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아스팔트와 시멘트는 여전히 흙을 눌러 구멍을 막고 있다. 고층빌딩이나 아파트 앞 작은 화단에서는 수많은 구멍들이 주둥이를 내놓고 숨 쉬려고 난리다. 보도에서는 풀들이 보도블록을 밀어올리고 그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고 들썩인다. 봄에 산을 오르는 일은 몸에 세포에 구멍을 뚫어주는 일이다. 꽃구경은 감정에 구멍을 뚫어주는 일이다. 산과 나무와 꽃에는 숨구멍 마음구멍이 천지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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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열한 시에 나는 소리들을 흡수하였다.

오전 열한 시에 나는 가능한 한 시끄러웠다.

창문을 열고 수많은 목소리가 되었다.

나는 음속으로 변형되었다.

네 안에 들어가서

삼십 초 동안의 기억이 되었다.

비 내리는 어머니의

썩어 가는 몸을 흘러갔다.

나는 소문이 흩어지는

무한한 형태가 되었다.

침묵하는

허무주의자들을 혐오하였다.

육식동물의

더러운 식욕이 되었다.

혈관 속을 지나가는 피와 피의

현란한 각도,

아이들이 자라는 소리,

우유가 상해가는 소리,

나는 무성영화 속의 주인공이

가장 크게 벌린 입이 되었다.

오전 열한 시에 귀를 막았다.

오전 열한 시에 눈을 닫았다.

나는 완벽하게 침묵하였다.

 - 이장욱(1968~ )

백색 소음. 늘 들리지만 들리는지 모르는 소음. 안 들리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고막을 울리고 몸에 흡수되는 소음. 그렇게 세상은 내 몸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타인은 내 몸과 섞인다. 그토록 증오하고 싫어하고 욕했던 이들은 내 몸에 들어와 내가 된다.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자라 아버지를 증오하던 아이는 그렇게 폭력적인 아버지가 된다. 내 몸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 집약된 일인칭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세상의 말이 된다. 내가 쓴 글은 이 세상이 내 몸과 입을 빌려서 한 말이 된다. 내 안으로 들어온 세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으로 들어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 내 목청은 하나지만 그 목소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아이들이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유가 상해가는 소리를 들으며, 입과 귀를 닫고 침묵한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듣든 말든 말하든 말든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맘대로 내뱉을 테니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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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산 현등사 보광전

기둥에 걸어놓은 목탁에

새가 깃들여 산다

 

목탁의 구멍으로 드나드는

곤줄박이 한 쌍의 비상이

경쾌하고 날렵하다

 

곤줄박이는 알 품고

새끼 기를 집이 맘에 들어

기꺼이 노래하고

 

새의 노래 듣는 스님은

새 날아간 자취 더듬듯

목탁에 손때 먹인 세월 되새긴다.

 - 최두석(1955~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현등사 스님은 슬기롭기도 하지, 두드리는 스님이 없어도 스스로 맑은 소리를 내는 목탁을 절 기둥에 매달아 놓을 줄을 알았으니. 스님의 마음 씀씀이는 놀랍기도 하지, 목탁을 예불이나 염불 도구로만 쓰는 게 아니라 생명이 깃드는 집으로도 쓰고 있으니. 곤줄박이는 참으로 용하기도 하지, 제 울음을 허공에 떠도는 뭇 생명들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로 변화시키고 있으니. 법당에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선창하면 절 밖에서 새들이 그 소리를 떨리는 목청으로 받아 산으로 들로 거리로 보내겠구나. 스님의 목탁소리, 염불소리는 이제 새의 날개를 달고 새소리를 담아 탁한 세상 시끄러운 속세로 날아가 맑은 소리를 퍼뜨리겠구나. 현등사 신도들은 자거나 일하거나 다투다가도 새소리를 들으면 물고기처럼 눈 감지 말고 늘 깨어 정진하라는 목탁의 전언임을 알아듣고 마음을 가다듬겠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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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가 뭍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고, 그는 한 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다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 바다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 허연(1966~ )

북극곰은 어떻게 인내하는 법, 동물적인 욕망과 야생적인 본능을 다스리는 지혜, 겸손하게 기다리는 태도를 배웠을까. 그것은 혹독하고 냉혹한 북극의 자연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대대로 피와 살에 새겨진 교과서를 통해 배운 자세일 것이다. 그 자세는 수만 년 파도에 씻겨 반들반들해진 바위를 닮았다. 자연이 깎고 다듬은 작품 같다. 심장이 달린 만년설, 팔다리가 달린 얼음 같다.

오늘의 굶주림 뒤에는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 자원의 고갈을 부추긴 인간의 자연 개발이 북극의 빙산을 녹이고 북극곰의 삶의 터전을 없애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포클레인이 파헤치는 대로 순순히 제 순결한 살을 내어주는 땅처럼 북극곰은 그 굶주림과 죽음을 침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저 비극에서 고분고분하게 파괴되어 주지만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으로 돌아올 자연의 자세가 보인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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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나는 여태 구두끈을 제대로 묶을 줄 모른다

나비처럼 고리가 있고

잡아당기면 스르르 풀어지는 매듭처럼

순수한 세상이 어디 있을까

내 매듭은

잡아당겨도 풀리지 않는다

끊어질지언정

풀리지 않는 옹이들이

걸음을 지탱해왔던 것이다

오늘은 현관을 나서는데

구두끈이 풀렸다며

아들이 무릎을 꿇고 묶어주었다

제 엄마에게 배운 아들의 매듭은

예쁘고 편했다

일찍 들어오세요

버스 정류장까지 나비가 따라왔다


 - 전윤호(1964~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인은 늘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도, 왜 넥타이를 매거나 선물을 포장하듯 예쁘게 구두끈을 묶을 줄 모를까. 무엇에든 구속되고 고정되는 것을 싫어하는 심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구두끈을 맨다는 것은 일하러 출근한다는 것, 맨발이 제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제도와 예절과 규칙에 묶어놓는다는 것, 그리하여 제 안에 “풀리지 않는 옹이”를 박는다는 것. 그러니 무슨 흥이 나서 구속을 예쁘게 보이려고 애쓰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아빠를 위해 무릎 꿇은 아들을 통해 그 매듭이 나비가 되는 놀라운 광경을 본다. 끈에 묶여 있는데도 발에 나비 날개가 달려 날아갈 것 같다니! 구속을 날갯짓으로 만든 아들의 손길이 무거운 발걸음을 가볍게 들어 올린다. 출근하는 게 싫지가 않다. 묶여 있어도 편하고 즐겁고 자유로운 것, 그것이 사랑인가. 구두가 날개를 달았으니 오늘 저녁엔 뭔가 사 들고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겠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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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가족의 건강과 복지 증진을 위해 웃음 쿠폰을 발급했어요. 울적하거나 울먹할 때 가까운 인출기에서 뽑아 사용하면 되죠. 하지만 수산물 센터 김씨는 오징어 회 한 접시에 자신의 쿠폰을 끼워 팔았어요. 대형 할인점에 우유를 납품하는 박씨도 자신의 쿠폰을 사용해 왔고요. 부도덕한 상술이라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지만, 불법이랄 게 있나요. 뭐랄까, 그렇게밖에는 쿠폰을 쓸 수 없었나 보죠. 덕분에 여분의 웃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서, 밤새도록 웃을 수 있는 도시의 경계도 생겨났어요. 누구는 경계가 아니라 전선이라 말하지만, 그저 우리는 더 많이 웃을 수밖에요. 그래서 우르르 필드로 몰려 나가 에스까르고를 까며 꺄르르 웃었어요. 까르페디엠! 가끔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하죠. “너, 그 웃음 어디서 났니?” 뭘 하든 사업만 잘되는데 어떠려구요. 안 그래요, 코리아? - 송기영(1972~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경제가 어려워도 사회가 어지러워도 웃어야 한다고 한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을 일이 없어도 웃어야 한단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데, 웃는 낯에 침 뱉지 못한다는데, 웃음이 돈도 되는 세상인데, 어찌 아니 웃겠는가. 대인 관계의 윤활유요 정신건강에 보약인데 무한 리필까지 가능하니 안 웃으면 손해지. 정부에서 “가족의 건강과 복지 증진을 위해 웃음 쿠폰을 발급”했다니, 유효 기간 지나기 전에 어서 공짜 웃음을 사용해야지.

울화가 터지든 짜증이 나든 잘 웃기만 하면 되는 저임금 감정노동에 일자리가 많이 있으니 실업자들을 웃음으로 내몰면 실업난 해소와 경제 회복에 적잖이 기여할 것이다. 웃음 근육과 마음의 움직임을 잘 분리하는 노하우, 표리부동을 세련되게 구사하는 테크닉을 다룬 실용서도 베스트셀러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교환가치만 강조한 웃음들 사이에서 소외된 우리의 슬픔과 외로움과 고독은 어디로 가지?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이 울음을 밀어 올리는데, 이 처치 곤란한 울음을 어디 가서 몰래 버리고 오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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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책꽂이에 꽂는 일이 먼저이고요,

책꽂이의 책을 가지런히 하는 게 그 다음입니다.

책꽂이가 좁아 책을 책상 모서리에 쌓아올려야 하고요.

연필을 깎다 보니 손이 더러워졌죠.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촛불을 밝히는 일이 먼저이고요,

흘러내리는 촛농이 굳기를 기다리는 일이 그 다음입니다.

촛불이 만들어주는 그림자에 흰 종이를 내어 보여주지요.

그림자가 잠드는 때를 기다립니다.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잡동사니를 정돈합니다. 필통, 수첩, 만년필,

저금통장, 동전, 묵은 교통카드, 영수증, 알약, 사진 여러 장…….

사진을 보다가 눈이 움푹 들어가 버렸네요. 움푹 팬 눈이

우물이 되었고요. 그 우물 속으로 누가 두레박을 타고 내려옵니다.

오디오를 켜는 일이 먼저이고요, 음악을 듣는 게

그 다음입니다.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모은 여자가

허공에 떠 있습니다. 수학시험에 못 푼 문제들이

꼬리를 뭅니다. 도대체 이 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 박덕규(1958~)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 쓴다면서 왜 자꾸 딴짓을 하니? 자질구레한 할 일이 그렇게도 많니? 시가 안 오니 이 일 저 일 핑계만 늘어나니?

영국 시인 엘리엇은, 시인이 마음속에 움트고 있는 무엇이 있을 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 말을 발견할 때까지는 자기가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표현해야 할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지 않는 척 시치미 떼고 기다리는 중이다. 겉으로야 한가하고 태연해 보이겠지만 안으로는 얼마나 애태우고 있을까.

그래서 몇 번이나 책상은 깨끗해지고 책은 가지런해지고 서랍은 잘 정돈이 되었구나. 이제 시가 오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 안 왔니? 다시 책과 책상과 서랍을 어지럽혀 줄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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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

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공원에 들어선다 우는 아이의 입엔 뼈가 물려 있다

1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언덕을 오른다 노파의 몸을 박차고 나온 뼈들이 경쾌한 음을 내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노파의 발걸음이 거벼워진다 유모차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라고 노파는 생각한다

3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상점 거리를 걷는다 쇼윈도우에 노파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목 없는 마네킹 위로 노파의 얼굴이 붙었다 떨어지고 붙었다 떨어진다 그 시간 악기점 주인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손가락은 몸의 구멍을 막느라고 분주하다

4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집을 나선다 이곳엔 마땅히 벽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방이 벽이다

45분 전, 테이블 위에는 자궁처럼 부푼 빵이 놓여 있다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다 시간은 여전히 창틀을 넘어가고 있다     

- 안희연(1986~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노파는 아직도 산책 중이야. 오늘은 늘 다니던 산책로를 살짝 벗어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로 가본 거야. 45분 후에는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수 있다는 듯이. 목숨이 몸에서 빠져나와 길가에 굴러떨어지고 벤치에 담겨져도 노파는 느끼지 못했을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든 공원은 한산하고 호젓하니까. 나뭇잎 지던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졌을 뿐이니까. “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고 말할 때, 생명을 치워버려야 할 물건처럼 말할 때,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안심하라는 듯 말할 때, 타인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모두가 바빠서 주위를 돌아볼 틈도 죽을 틈도 없다. 이 시는 현상에 감춰진 사건들을 시간의 역순으로 복기해 본다. 한 물건이 생명이었던 때를 상상해 본다. 죽었는지도 모르는 한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것, 그것이 시가 애도하는 방법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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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는 다리가 넷

나는 다리가 둘

 

나는 걷고

탁자는 걷지 않고

 

새는 다리가 둘이다

새는 날아다니고

 

너는 다리가 둘

탁자는 다리가 넷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 거야

아니면 없을 거야

다리가 넷 달린 개 한 마리가

총총총 앞을 지나고

 

이 모든 일을 알고도 탁자는 가만히 있다

 - 황인찬(1988~ )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물음이 있다. 왜 나는 다리가 둘이고 탁자는 넷인가.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는 궁금증이 있다. 왜 나는 걷고 탁자는 걷지 않을까. 나는 왜 이것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정말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궁금증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먹고사는 일을 궁리하거나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기에도 바빠서 궁금해질 틈이 없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궁금증은 다 쓸모없는 일이 된다.

시는, “다리가 넷 달린 개 한 마리”가 앞을 지날 때, 뭔가 중요한 물음도 네 개의 다리를 달고 지나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전혀 중요할 것 같지 않은 물음들, 너무나 하찮아서 물어볼 가치가 없을 것 같은 물음들에게 어린이처럼 다가간다. 궁금해지기 위해, 물음 같지 않은 물음에서 근본적인 물음을 발견하기 위해, 기꺼이 어린이가 된다. 모든 사물, 모든 현상이 무한한 신비를 품고 있었던 어린 시절은 어디로 갔나. 그 신비를 단번에 알아보고 끊임없이 질문해대던 내 안의 어린이는 어디로 갔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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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 그늘 언덕

가장 유순한 흙부터 녹기 시작하고

쓱쓱 손바닥을 비비면

엄지 끄트머리 갈라졌던 굳은살도 보들해진다

 

감감무소식 너의 곁에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던 내 곁으로

새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천천히

흐르고

돌아온다

무거웠던 왼발, 오른발, 걸었더니

아침 골목길이 움직인다

가방 멘 아이들이 지나가고

일터로 가는 사람은 첫 담배에 불을 당긴다

 

하루에 하나씩

손가락을 모두 활짝 펼치고 나면

열릴 것이다

3월의 맨 윗단추가

 

 - 배성희(1959~)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아니 벌써! 정유년 새해도 두 번째 달이다. 먹고사는 일과 걱정거리에 끌려다니는 사이에, 소설보다 재미있고 드라마보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뉴스에 정신 팔려 있는 사이에, 슬쩍 1월 지나고 2월이라니! 영하 10도 밑을 후벼 파는 맹추위와 눈보라가 한창인데, 입춘 지나 곧 우수라니!

살을 에는 바람에 숨어 오는 희미한 봄기운이 콧구멍에서 느껴질 것 같다. 우리 코보다 일찍 봄 냄새를 맡은 나무들은 얼었던 수액을 녹이며 가지 속에서 움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땅 밑에서도 봄기운은 조금씩 얼음을 녹이며 아지랑이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옷이 무겁게 느껴지고 몸 어딘가가 근질근질하다면 그건 봄기운이 시킨 짓일 것이다. 추운 아침 출근길에 “무거웠던 왼발, 오른발, 걸었더니/ 아침 골목길이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추위에 곱은 열 손가락을 하루에 하나씩 펴면, 또 3월이다. 머리는 몰라도 피와 살은 봄기운을 감지하고 기지개 켜는 봄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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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숨길 필요 없는

가까운 벗 나의

온갖 부끄러움 속속들이 아는 친구

또 한 명이 떠나갔다 그렇다면

나의 부끄러움 그만큼 가려지고

가려진 만큼 줄어들었나

아니다

이제는 그가 알고 있던 몫까지

나 혼자 간직하게 되었다

내 몫의 부끄러움만 오히려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기억의 핏줄 속을 흐르며

눈감아도 망막에 떠오르는

침묵해도 귓속에 들려오는 그리고

지워버릴 수 없는

부끄러움이 속으로 쌓여

나이테를 늘리며

하루 또 하루

나를 살아가게 하는가

 - 김광규(1941~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나이 들수록 남에게 잘못한 것, 내 양심에 거스른 것, 후회할 일들은 점점 커지는 거구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나를 누르고 숨통을 조이는 거구나. 남에게 다 털어놓아서, 손찌검 받아서, 반성하고 후회해서 내게서 떠나보낸 것들이야 점점 잊히겠지만, 용케 잘 감추고 아닌 척했던 잘못들과 온갖 음흉한 생각들은 점점 자라나서, 이젠 감출 만큼 감추고 속일 만큼 속였으니 제발 마음속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나를 괴롭히겠구나. 그러니 이 추하고 흉측한 비밀을 어디에 어떻게 쌓아둔단 말인가.

욕먹으면 그 당시엔 괴롭지만 매 먼저 맞은 사람처럼 마음은 개운해지는 것, 좋은 소리 많이 들으면 잠시 기분은 좋아지지만 갈수록 마음은 무거워지는 것, 다 이유가 있었구나. 존경 받고 칭찬 많이 들은 사람은, 그 존경과 칭찬에 가려진 그 수많은 부끄러움을 나중에 다 어떻게 처리하나. 맨종아리에 회초리로 때려줄 이가 없는 사람은 나중에 맞을 매를 어떻게 다 감당하나. 아, 늙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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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이랑에 씨 뿌려 가꾸는 나는

구름작목반 농부

호박 같은 구름 한 덩이 꿈 밖으로

궁굴려 나오는 궁리 중이다

 

눈 쌓인 논배미 아래 낮은 언덕길을

빵모자를 쓴 사람이 걸어간다

머리만 보인다

보는 사람 없는 이 틈에 공이나 굴려볼까

제 머리를 공 굴리듯 굴리고 간다

털실뭉치가 언덕을 굴러가는데

눈 하나 묻지 않는다

 

저 이는

햇빛과 바람과 하늘의 물꼬를 터

공중에 빚어 거는

호박작목반 농부다

 

누가 이 엄동에 추수를 하나

실한 알곡들

또다시 함박눈 내린다

 - 이선식(1954~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늘에 밭을 갈고 물알갱이를 심어 구름을 가꾸고 탐스러운 눈을 수확하는 ‘구름작목반 농부’를 상상해 본다. 시인은 비행기 창 너머로 광활하고 풍성한 구름밭을 보면서 게을러도 수확은 늘 풍성한 이 구름 농사 사업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상상만 해도 구름 농사는 풍년일 테고 한가로이 빈둥거려도 함박눈 수확은 넘칠 테니, 하, 과연 시인이 할 만한 노동이로다.

금년 겨울은 미세 먼지는 많고 눈은 적게 내리니 겨울 기분이 덜 나는 것 같다. 아이들처럼 동네 강아지들처럼 저절로 발이 깡충깡충 뛰어오르는 기분으로 함박눈을 맞고 싶다. 시인의 몽상과 상상력으로 빚은 눈, 좌절과 실망을 즐거운 유희로 바꾸는 연금술로 빚은 눈이라면 좋겠다. 구름을 일구고 함박눈을 거두는 농사는 돈은 안되지만 꿈은 노다지 아닌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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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욕실 거울에 물을 뿌리기에

뭐하는 거니 역정을 냈더니

엄마 이거 보세요

물방울들의 경주

 

거울 벽을 타고 뛰어내리는 물방울들을

얘가 1등 쟤가 2등

아이가 등수를 매기는 동안 나는

벌써 거울의 맨 아래 도달해

부서져버린 고인 물을 보아버렸다

 

나도 왕년엔 러브 스토리를 일곱 번 읽고

여덟 번 목 놓아 울 정도로 수많은

물방울들을 해방시켜왔는데

 

오늘 너의 시선은 거울에 달라붙은

맑고 또렷한 물방울이고

 

나의 시선은 이미 깊은 곳으로

스며들며 새로운 경주를 시작하는

오래된 물방울이지만

 

물방울들의 경주에 눈을 떼지 못한 채

거울 앞에 서 있는 지금

너와 나

새삼 닮아서 닿아 있는 물방울 둘이다

 - 성미정(1967~)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비 온 후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속 풍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작고 동그란 풍경을 거꾸로 매달고 있는 그 물방울은 상상의 세계를 엿보는 스크린이었다. 호기심 하나만으로도 물방울은 흥미진진한 그림이 되고 드라마가 되었으며, 먼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 되곤 했다.

아이의 호기심이 거울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신나는 달리기 경주로 만든다. 호기심은 무엇에든 활기를 불어넣어 사소한 것들을 신기한 것으로 만들고 별것 아닌 것들을 신나는 놀이로 만든다. 그 “맑고 또렷한 물방울” 같은 아이의 눈빛은 거울 맨 아래에 도달해 부서진 물방울을 보는 엄마의 시선과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그래도 엄마는 물방울 경주를 보면서 잠시 아이가 되는 게 싫지 않은 모양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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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시선

연필을 깎을 땐

숲이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린다

촛불만 봐도

아이 현란해, 방으로 들어가는

촌스러운 아가씨를

밤은 쓰다듬어 준다

달까지 가지를 뻗는 나무

그것은 구름의 다른 말

하얀 나무를 볼 때면

하늘에도 숲이 있다고 믿었다

눈이 쌓인 당신의 방 앞

마당에 세워 둔 그릇 가득

눈이 쌓일 때

나의 따뜻한 여인아

바쳐 드릴게요 이젠 잊고, 마시오

서로를 외롭게 바라보고

그리워도 연필을 깎지 말고

아이들과 누워

작고 희귀한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연필을 깎을 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해 주시오

 -성동혁(1985~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나의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보낸 러브레터’라는 주석이 붙어 있는 연애시다. 연필 깎을 때 나무의 생살을 깎는 느낌, 칼로 맨살에 상처를 내는 느낌, 그래서 문명이 한 번도 범한 적 없는 자연의 처녀성을 짓밟는 느낌. 그 느낌이 연필에서 “숲이 슬피 우는 소리”를 끌고 온다. 연필 하나 깎는 데도 생명을 해치는 것 같은 연민과 슬픔 없이, 촛불만 봐도 순수한 밤의 처녀성이 훼손되는 것 같은 아픔 없이, 어떻게 한 여자를, 순결한 자연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성동혁 시인은, 연필 깎을 때, 몸 어딘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생살이 잘려나가는 것 같을 때, 온몸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생명 사랑의 시학을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나 보다. 그 감성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듯 시 쓰는 법을 익혔나 보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시적 감성과 연애의 감정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게 아닐까. 들리지 않는 자연의 깊은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재능은 멸치 하나 먹는 것조차 죄스러운 도덕적 감성에서 나온 게 아닐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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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 - 김수영(1921~1968)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김수영 시인은 4·19 혁명에서 ‘사랑을 만드는 기술’(‘사랑의 변주곡’)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소리치지 않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혁명하는 방법,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혁명은 “시를 쓰는 마음”,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다. 그것은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에 따른 순리이다. 사랑이 없는 정치를 사랑이 있는 정치로 바꾸려는 간절한 마음이 4·19 혁명을 이룬 동력이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 아니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이라고 김수영 시인은 말했다. 사랑이 있는 한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고도 노래했다. 탄핵 정국을 맞아 4·19 혁명을 이루어냈던 “어리석을 만치 소박”한 마음들을 생각한다. 소외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줄 사랑을 생각한다. 전 세계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수백만명의 질서 있는 촛불 집회가 조용하고 평화롭게 웅변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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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옛날이야기가 있어. 정작 옛날에는 들려주지 못했던 이야기. 오늘날에 와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된 이야기. 말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손이 날아와 입을 틀어막았다는 바로 그 이야기.

누구나 알지만 그 누구도 끝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 끝까지 가려던 사람들이 도중에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끝끝내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 되풀이되는 이야기.

입에서 입으로 몰래 전해지던 이야기. 날이 갈수록 점점 은밀해지는 이야기. 누구누구가 죽었을 때에야 희미하게 퍼지기 시작한 이야기. 점점 혐의가 짙어지는 이야기.

내일도 모레도, 네가 여기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살아 있을 이야기. 어떻게든 혼자 있을 이야기. 옛날처럼 멀고 훗날처럼 막연하지만 오늘도 진행되는 이야기. 지하에서 허공에서 더욱 생생한 옛날이야기.

여기 옛날이야기가 있어. 여기 아직 있어. 여기 아직 그대로 있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이야기. 입을 벌려도 차마 나오지 않는 이야기. 귀를 기울여도 답이 없는 이야기. 마찬가지 이야기. - 오은(1982~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에는 꼭 해야만 하는 말과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되는 금기가 충돌하고 있다. 근질근질한 말은 아무도 없는 대숲으로 가서 마음껏 외치지만 바람에 실려 세상에 퍼져나간다. <삼국유사> ‘경문대왕’조에 나오는 당나귀 귀 설화는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 여러 나라 설화에 퍼져 있고, 말 귀, 소 귀, 염소 귀, 뿔 등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아무리 감추고 억눌러도 말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다리와 날개를 달고 어디든 돌아다닌다. 바람과 소문만으로도 이야기는 여러 나라에서 수천년간 이어지는 생명력을 과시하는데, 이제 인터넷이라는 초고속 엔진까지 장착했으니 그 힘이 어떠하겠는가.

혼자만 알고 남에게는 하지 말라는 말, ‘카더라’가 붙은 온갖 말들은 억누를수록 더 많은 가지를 뻗고 변종을 낳으며 자란다. 사실과 허구의 차이를 넘어, 설화가 되고 노래가 되고 문학이 되고 현실이 된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궁금한 결말을 향해 답이 없는 세상을 향해 지금도 달리고 있다. 쉬쉬하는 말은 언제든 폭풍이 되어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다. 옛날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오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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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쇠파이프를 차에다 싣는다.

파이프를 실을 때 자신도 싣는 듯한 그의

표정은 무엇을 수렴하는가. 구원이다.

순수집중의 순간.

파이프의 인력(引力). 청년을 끌어당기는

파이프. 끌려들어가는 청년의 전부. 그

부분이 환하다. 안 꺼지는 조명. 그의

표정에 실려 있는 청년의 전부. 삶과도

같은 풍부함. 부동(不動)의 풍부함. 구원.

 - 정현종(1939~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1980년대에 가두시위를 하러 나가는 한 대학생의 모습을 포착한 것 같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려는 청년의 결연한 의지가 차에 무거운 쇠파이프 싣는 일을 가볍게 만든다. 고귀한 일에 제 젊음을 바친다는 그 신념이 팔다리에 신바람을 일으키니 청년이 파이프를 싣는 게 아니라 파이프가 청년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나’는 없고 오로지 에너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순수집중의 순간”.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내면에서는 들끓는 정중동의 폭발력. 이 순도 높은 열정이 청년의 전부를 파이프 속으로 끌어당긴다. 우리 안에는 ‘떨어져도 튀는 공’과 같은 탄력, ‘쓰러지는 법이 없이 둥근 공’과 같은 탄력이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 같지만 언제든 공처럼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인 생명의 탄력이 있기 때문이다(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 탄력에 도취되어 스스로 풍부해지고 충만해진 청년의 표정을 보라. 파이프와 청년 사이에서 빛나는 저 “안 꺼지는 조명”을 보라.

먹고사느라 지친 발걸음들을 저절로 광화문 앞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이 에너지는 무엇인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워 촛불을 들게 하는 이 자발적인 힘은 무엇인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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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지 못할 점자를

손끝으로 스치니

 

처음인 듯 두 눈은

모르는 풍경 속으로

 

2

단단한 물방울 점자.

소름 돋은 살갗 점자들

 

모르고 살아온 삶과

이토록 닮았구나

 - 조원규(1963~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물방울을 닮은 글자들. 종이 위에 “소름 돋은 살갗”처럼 오톨도톨 돋아나 있는 글자들. 자신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으로 만드는 점자 앞에서 시인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점자를 대하면 누구든 쓸모없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더듬어야 한다.

스스로 눈멀지 않으면, 문맹이 되지 않으면, 이 돋을새김 글자에 다가갈 수 없다. 눈은 멀리 볼 수 있지만 손가락 감촉은 한 치 앞밖에 볼 수 없다. 점자는 눈과 지식과 오만을 겸손하게 한다.

보는 자 앞에 손가락의 감촉만 있는 캄캄한 길. 손가락 끝을 지팡이처럼 잡고 발 앞을 두드리며 나아가야 하는 길. 나아갈 길을 찾는 이에게 점자는 바로 한 발 앞이 풀밭인지 벼랑인지, 보도블록인지 허방인지 알 수 없는 길을 펼쳐놓는다. 그래서 글이 우리가 절실하게 간구해온 물음을 제대로 대답해 주지 못했음을 깨닫게 한다. 알면 알수록 지식이 더 많은 모름과 질문만 주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고 헤맸던 길과 닮은 점자 앞에서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모르고 살아온 삶과/ 이토록 닮았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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