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경향시선'에 해당되는 글 232건

  1. 2017.02.27 습작생
  2. 2017.02.20 산책자
  3. 2017.02.13 전주
  4. 2017.02.06 두 번째 달 보내기
  5. 2017.01.23 부끄러운 계산
  6. 2017.01.16 농부
  7. 2017.01.09 물방울 둘의 경주
  8. 2016.12.26
  9. 2016.12.19 기도-4·19 순국학도 위령제에 부치는 노래
  10. 2016.12.12 ‘옛날이야기’
  11. 2016.12.05 한 청년의 초상
  12. 2016.11.28 책을 받고
  13. 2016.11.21 ‘옥수수밭에서’
  14. 2016.11.14 ‘사람들’
  15. 2016.11.08 ‘죄책감’
  16. 2016.10.31 흔들
  17. 2016.10.24 ‘소리’
  18. 2016.10.17 ‘어떻게 알았는지’
  19. 2016.10.10 새벽에 걷기
  20. 2016.09.26 ‘염소 씨의 외출’

책을 책꽂이에 꽂는 일이 먼저이고요,

책꽂이의 책을 가지런히 하는 게 그 다음입니다.

책꽂이가 좁아 책을 책상 모서리에 쌓아올려야 하고요.

연필을 깎다 보니 손이 더러워졌죠.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촛불을 밝히는 일이 먼저이고요,

흘러내리는 촛농이 굳기를 기다리는 일이 그 다음입니다.

촛불이 만들어주는 그림자에 흰 종이를 내어 보여주지요.

그림자가 잠드는 때를 기다립니다.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잡동사니를 정돈합니다. 필통, 수첩, 만년필,

저금통장, 동전, 묵은 교통카드, 영수증, 알약, 사진 여러 장…….

사진을 보다가 눈이 움푹 들어가 버렸네요. 움푹 팬 눈이

우물이 되었고요. 그 우물 속으로 누가 두레박을 타고 내려옵니다.

오디오를 켜는 일이 먼저이고요, 음악을 듣는 게

그 다음입니다.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모은 여자가

허공에 떠 있습니다. 수학시험에 못 푼 문제들이

꼬리를 뭅니다. 도대체 이 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 박덕규(1958~)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 쓴다면서 왜 자꾸 딴짓을 하니? 자질구레한 할 일이 그렇게도 많니? 시가 안 오니 이 일 저 일 핑계만 늘어나니?

영국 시인 엘리엇은, 시인이 마음속에 움트고 있는 무엇이 있을 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 말을 발견할 때까지는 자기가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표현해야 할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지 않는 척 시치미 떼고 기다리는 중이다. 겉으로야 한가하고 태연해 보이겠지만 안으로는 얼마나 애태우고 있을까.

그래서 몇 번이나 책상은 깨끗해지고 책은 가지런해지고 서랍은 잘 정돈이 되었구나. 이제 시가 오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 안 왔니? 다시 책과 책상과 서랍을 어지럽혀 줄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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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

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공원에 들어선다 우는 아이의 입엔 뼈가 물려 있다

1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언덕을 오른다 노파의 몸을 박차고 나온 뼈들이 경쾌한 음을 내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노파의 발걸음이 거벼워진다 유모차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라고 노파는 생각한다

3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상점 거리를 걷는다 쇼윈도우에 노파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목 없는 마네킹 위로 노파의 얼굴이 붙었다 떨어지고 붙었다 떨어진다 그 시간 악기점 주인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손가락은 몸의 구멍을 막느라고 분주하다

4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집을 나선다 이곳엔 마땅히 벽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방이 벽이다

45분 전, 테이블 위에는 자궁처럼 부푼 빵이 놓여 있다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다 시간은 여전히 창틀을 넘어가고 있다     

- 안희연(1986~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노파는 아직도 산책 중이야. 오늘은 늘 다니던 산책로를 살짝 벗어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로 가본 거야. 45분 후에는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수 있다는 듯이. 목숨이 몸에서 빠져나와 길가에 굴러떨어지고 벤치에 담겨져도 노파는 느끼지 못했을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든 공원은 한산하고 호젓하니까. 나뭇잎 지던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졌을 뿐이니까. “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고 말할 때, 생명을 치워버려야 할 물건처럼 말할 때,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안심하라는 듯 말할 때, 타인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모두가 바빠서 주위를 돌아볼 틈도 죽을 틈도 없다. 이 시는 현상에 감춰진 사건들을 시간의 역순으로 복기해 본다. 한 물건이 생명이었던 때를 상상해 본다. 죽었는지도 모르는 한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것, 그것이 시가 애도하는 방법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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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는 다리가 넷

나는 다리가 둘

 

나는 걷고

탁자는 걷지 않고

 

새는 다리가 둘이다

새는 날아다니고

 

너는 다리가 둘

탁자는 다리가 넷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 거야

아니면 없을 거야

다리가 넷 달린 개 한 마리가

총총총 앞을 지나고

 

이 모든 일을 알고도 탁자는 가만히 있다

 - 황인찬(1988~ )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물음이 있다. 왜 나는 다리가 둘이고 탁자는 넷인가.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는 궁금증이 있다. 왜 나는 걷고 탁자는 걷지 않을까. 나는 왜 이것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정말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궁금증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먹고사는 일을 궁리하거나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기에도 바빠서 궁금해질 틈이 없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궁금증은 다 쓸모없는 일이 된다.

시는, “다리가 넷 달린 개 한 마리”가 앞을 지날 때, 뭔가 중요한 물음도 네 개의 다리를 달고 지나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전혀 중요할 것 같지 않은 물음들, 너무나 하찮아서 물어볼 가치가 없을 것 같은 물음들에게 어린이처럼 다가간다. 궁금해지기 위해, 물음 같지 않은 물음에서 근본적인 물음을 발견하기 위해, 기꺼이 어린이가 된다. 모든 사물, 모든 현상이 무한한 신비를 품고 있었던 어린 시절은 어디로 갔나. 그 신비를 단번에 알아보고 끊임없이 질문해대던 내 안의 어린이는 어디로 갔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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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 그늘 언덕

가장 유순한 흙부터 녹기 시작하고

쓱쓱 손바닥을 비비면

엄지 끄트머리 갈라졌던 굳은살도 보들해진다

 

감감무소식 너의 곁에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던 내 곁으로

새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천천히

흐르고

돌아온다

무거웠던 왼발, 오른발, 걸었더니

아침 골목길이 움직인다

가방 멘 아이들이 지나가고

일터로 가는 사람은 첫 담배에 불을 당긴다

 

하루에 하나씩

손가락을 모두 활짝 펼치고 나면

열릴 것이다

3월의 맨 윗단추가

 

 - 배성희(1959~)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아니 벌써! 정유년 새해도 두 번째 달이다. 먹고사는 일과 걱정거리에 끌려다니는 사이에, 소설보다 재미있고 드라마보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뉴스에 정신 팔려 있는 사이에, 슬쩍 1월 지나고 2월이라니! 영하 10도 밑을 후벼 파는 맹추위와 눈보라가 한창인데, 입춘 지나 곧 우수라니!

살을 에는 바람에 숨어 오는 희미한 봄기운이 콧구멍에서 느껴질 것 같다. 우리 코보다 일찍 봄 냄새를 맡은 나무들은 얼었던 수액을 녹이며 가지 속에서 움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땅 밑에서도 봄기운은 조금씩 얼음을 녹이며 아지랑이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옷이 무겁게 느껴지고 몸 어딘가가 근질근질하다면 그건 봄기운이 시킨 짓일 것이다. 추운 아침 출근길에 “무거웠던 왼발, 오른발, 걸었더니/ 아침 골목길이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추위에 곱은 열 손가락을 하루에 하나씩 펴면, 또 3월이다. 머리는 몰라도 피와 살은 봄기운을 감지하고 기지개 켜는 봄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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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숨길 필요 없는

가까운 벗 나의

온갖 부끄러움 속속들이 아는 친구

또 한 명이 떠나갔다 그렇다면

나의 부끄러움 그만큼 가려지고

가려진 만큼 줄어들었나

아니다

이제는 그가 알고 있던 몫까지

나 혼자 간직하게 되었다

내 몫의 부끄러움만 오히려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기억의 핏줄 속을 흐르며

눈감아도 망막에 떠오르는

침묵해도 귓속에 들려오는 그리고

지워버릴 수 없는

부끄러움이 속으로 쌓여

나이테를 늘리며

하루 또 하루

나를 살아가게 하는가

 - 김광규(1941~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나이 들수록 남에게 잘못한 것, 내 양심에 거스른 것, 후회할 일들은 점점 커지는 거구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나를 누르고 숨통을 조이는 거구나. 남에게 다 털어놓아서, 손찌검 받아서, 반성하고 후회해서 내게서 떠나보낸 것들이야 점점 잊히겠지만, 용케 잘 감추고 아닌 척했던 잘못들과 온갖 음흉한 생각들은 점점 자라나서, 이젠 감출 만큼 감추고 속일 만큼 속였으니 제발 마음속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나를 괴롭히겠구나. 그러니 이 추하고 흉측한 비밀을 어디에 어떻게 쌓아둔단 말인가.

욕먹으면 그 당시엔 괴롭지만 매 먼저 맞은 사람처럼 마음은 개운해지는 것, 좋은 소리 많이 들으면 잠시 기분은 좋아지지만 갈수록 마음은 무거워지는 것, 다 이유가 있었구나. 존경 받고 칭찬 많이 들은 사람은, 그 존경과 칭찬에 가려진 그 수많은 부끄러움을 나중에 다 어떻게 처리하나. 맨종아리에 회초리로 때려줄 이가 없는 사람은 나중에 맞을 매를 어떻게 다 감당하나. 아, 늙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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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이랑에 씨 뿌려 가꾸는 나는

구름작목반 농부

호박 같은 구름 한 덩이 꿈 밖으로

궁굴려 나오는 궁리 중이다

 

눈 쌓인 논배미 아래 낮은 언덕길을

빵모자를 쓴 사람이 걸어간다

머리만 보인다

보는 사람 없는 이 틈에 공이나 굴려볼까

제 머리를 공 굴리듯 굴리고 간다

털실뭉치가 언덕을 굴러가는데

눈 하나 묻지 않는다

 

저 이는

햇빛과 바람과 하늘의 물꼬를 터

공중에 빚어 거는

호박작목반 농부다

 

누가 이 엄동에 추수를 하나

실한 알곡들

또다시 함박눈 내린다

 - 이선식(1954~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늘에 밭을 갈고 물알갱이를 심어 구름을 가꾸고 탐스러운 눈을 수확하는 ‘구름작목반 농부’를 상상해 본다. 시인은 비행기 창 너머로 광활하고 풍성한 구름밭을 보면서 게을러도 수확은 늘 풍성한 이 구름 농사 사업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상상만 해도 구름 농사는 풍년일 테고 한가로이 빈둥거려도 함박눈 수확은 넘칠 테니, 하, 과연 시인이 할 만한 노동이로다.

금년 겨울은 미세 먼지는 많고 눈은 적게 내리니 겨울 기분이 덜 나는 것 같다. 아이들처럼 동네 강아지들처럼 저절로 발이 깡충깡충 뛰어오르는 기분으로 함박눈을 맞고 싶다. 시인의 몽상과 상상력으로 빚은 눈, 좌절과 실망을 즐거운 유희로 바꾸는 연금술로 빚은 눈이라면 좋겠다. 구름을 일구고 함박눈을 거두는 농사는 돈은 안되지만 꿈은 노다지 아닌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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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욕실 거울에 물을 뿌리기에

뭐하는 거니 역정을 냈더니

엄마 이거 보세요

물방울들의 경주

 

거울 벽을 타고 뛰어내리는 물방울들을

얘가 1등 쟤가 2등

아이가 등수를 매기는 동안 나는

벌써 거울의 맨 아래 도달해

부서져버린 고인 물을 보아버렸다

 

나도 왕년엔 러브 스토리를 일곱 번 읽고

여덟 번 목 놓아 울 정도로 수많은

물방울들을 해방시켜왔는데

 

오늘 너의 시선은 거울에 달라붙은

맑고 또렷한 물방울이고

 

나의 시선은 이미 깊은 곳으로

스며들며 새로운 경주를 시작하는

오래된 물방울이지만

 

물방울들의 경주에 눈을 떼지 못한 채

거울 앞에 서 있는 지금

너와 나

새삼 닮아서 닿아 있는 물방울 둘이다

 - 성미정(1967~)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비 온 후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속 풍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작고 동그란 풍경을 거꾸로 매달고 있는 그 물방울은 상상의 세계를 엿보는 스크린이었다. 호기심 하나만으로도 물방울은 흥미진진한 그림이 되고 드라마가 되었으며, 먼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 되곤 했다.

아이의 호기심이 거울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신나는 달리기 경주로 만든다. 호기심은 무엇에든 활기를 불어넣어 사소한 것들을 신기한 것으로 만들고 별것 아닌 것들을 신나는 놀이로 만든다. 그 “맑고 또렷한 물방울” 같은 아이의 눈빛은 거울 맨 아래에 도달해 부서진 물방울을 보는 엄마의 시선과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그래도 엄마는 물방울 경주를 보면서 잠시 아이가 되는 게 싫지 않은 모양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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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시선

연필을 깎을 땐

숲이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린다

촛불만 봐도

아이 현란해, 방으로 들어가는

촌스러운 아가씨를

밤은 쓰다듬어 준다

달까지 가지를 뻗는 나무

그것은 구름의 다른 말

하얀 나무를 볼 때면

하늘에도 숲이 있다고 믿었다

눈이 쌓인 당신의 방 앞

마당에 세워 둔 그릇 가득

눈이 쌓일 때

나의 따뜻한 여인아

바쳐 드릴게요 이젠 잊고, 마시오

서로를 외롭게 바라보고

그리워도 연필을 깎지 말고

아이들과 누워

작고 희귀한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연필을 깎을 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해 주시오

 -성동혁(1985~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나의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보낸 러브레터’라는 주석이 붙어 있는 연애시다. 연필 깎을 때 나무의 생살을 깎는 느낌, 칼로 맨살에 상처를 내는 느낌, 그래서 문명이 한 번도 범한 적 없는 자연의 처녀성을 짓밟는 느낌. 그 느낌이 연필에서 “숲이 슬피 우는 소리”를 끌고 온다. 연필 하나 깎는 데도 생명을 해치는 것 같은 연민과 슬픔 없이, 촛불만 봐도 순수한 밤의 처녀성이 훼손되는 것 같은 아픔 없이, 어떻게 한 여자를, 순결한 자연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성동혁 시인은, 연필 깎을 때, 몸 어딘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생살이 잘려나가는 것 같을 때, 온몸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생명 사랑의 시학을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나 보다. 그 감성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듯 시 쓰는 법을 익혔나 보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시적 감성과 연애의 감정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게 아닐까. 들리지 않는 자연의 깊은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재능은 멸치 하나 먹는 것조차 죄스러운 도덕적 감성에서 나온 게 아닐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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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 - 김수영(1921~1968)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김수영 시인은 4·19 혁명에서 ‘사랑을 만드는 기술’(‘사랑의 변주곡’)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소리치지 않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혁명하는 방법,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혁명은 “시를 쓰는 마음”,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다. 그것은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에 따른 순리이다. 사랑이 없는 정치를 사랑이 있는 정치로 바꾸려는 간절한 마음이 4·19 혁명을 이룬 동력이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 아니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이라고 김수영 시인은 말했다. 사랑이 있는 한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고도 노래했다. 탄핵 정국을 맞아 4·19 혁명을 이루어냈던 “어리석을 만치 소박”한 마음들을 생각한다. 소외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줄 사랑을 생각한다. 전 세계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수백만명의 질서 있는 촛불 집회가 조용하고 평화롭게 웅변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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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옛날이야기가 있어. 정작 옛날에는 들려주지 못했던 이야기. 오늘날에 와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된 이야기. 말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손이 날아와 입을 틀어막았다는 바로 그 이야기.

누구나 알지만 그 누구도 끝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 끝까지 가려던 사람들이 도중에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끝끝내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 되풀이되는 이야기.

입에서 입으로 몰래 전해지던 이야기. 날이 갈수록 점점 은밀해지는 이야기. 누구누구가 죽었을 때에야 희미하게 퍼지기 시작한 이야기. 점점 혐의가 짙어지는 이야기.

내일도 모레도, 네가 여기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살아 있을 이야기. 어떻게든 혼자 있을 이야기. 옛날처럼 멀고 훗날처럼 막연하지만 오늘도 진행되는 이야기. 지하에서 허공에서 더욱 생생한 옛날이야기.

여기 옛날이야기가 있어. 여기 아직 있어. 여기 아직 그대로 있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이야기. 입을 벌려도 차마 나오지 않는 이야기. 귀를 기울여도 답이 없는 이야기. 마찬가지 이야기. - 오은(1982~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에는 꼭 해야만 하는 말과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되는 금기가 충돌하고 있다. 근질근질한 말은 아무도 없는 대숲으로 가서 마음껏 외치지만 바람에 실려 세상에 퍼져나간다. <삼국유사> ‘경문대왕’조에 나오는 당나귀 귀 설화는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 여러 나라 설화에 퍼져 있고, 말 귀, 소 귀, 염소 귀, 뿔 등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아무리 감추고 억눌러도 말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다리와 날개를 달고 어디든 돌아다닌다. 바람과 소문만으로도 이야기는 여러 나라에서 수천년간 이어지는 생명력을 과시하는데, 이제 인터넷이라는 초고속 엔진까지 장착했으니 그 힘이 어떠하겠는가.

혼자만 알고 남에게는 하지 말라는 말, ‘카더라’가 붙은 온갖 말들은 억누를수록 더 많은 가지를 뻗고 변종을 낳으며 자란다. 사실과 허구의 차이를 넘어, 설화가 되고 노래가 되고 문학이 되고 현실이 된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궁금한 결말을 향해 답이 없는 세상을 향해 지금도 달리고 있다. 쉬쉬하는 말은 언제든 폭풍이 되어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다. 옛날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오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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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쇠파이프를 차에다 싣는다.

파이프를 실을 때 자신도 싣는 듯한 그의

표정은 무엇을 수렴하는가. 구원이다.

순수집중의 순간.

파이프의 인력(引力). 청년을 끌어당기는

파이프. 끌려들어가는 청년의 전부. 그

부분이 환하다. 안 꺼지는 조명. 그의

표정에 실려 있는 청년의 전부. 삶과도

같은 풍부함. 부동(不動)의 풍부함. 구원.

 - 정현종(1939~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1980년대에 가두시위를 하러 나가는 한 대학생의 모습을 포착한 것 같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려는 청년의 결연한 의지가 차에 무거운 쇠파이프 싣는 일을 가볍게 만든다. 고귀한 일에 제 젊음을 바친다는 그 신념이 팔다리에 신바람을 일으키니 청년이 파이프를 싣는 게 아니라 파이프가 청년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나’는 없고 오로지 에너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순수집중의 순간”.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내면에서는 들끓는 정중동의 폭발력. 이 순도 높은 열정이 청년의 전부를 파이프 속으로 끌어당긴다. 우리 안에는 ‘떨어져도 튀는 공’과 같은 탄력, ‘쓰러지는 법이 없이 둥근 공’과 같은 탄력이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 같지만 언제든 공처럼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인 생명의 탄력이 있기 때문이다(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 탄력에 도취되어 스스로 풍부해지고 충만해진 청년의 표정을 보라. 파이프와 청년 사이에서 빛나는 저 “안 꺼지는 조명”을 보라.

먹고사느라 지친 발걸음들을 저절로 광화문 앞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이 에너지는 무엇인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워 촛불을 들게 하는 이 자발적인 힘은 무엇인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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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지 못할 점자를

손끝으로 스치니

 

처음인 듯 두 눈은

모르는 풍경 속으로

 

2

단단한 물방울 점자.

소름 돋은 살갗 점자들

 

모르고 살아온 삶과

이토록 닮았구나

 - 조원규(1963~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물방울을 닮은 글자들. 종이 위에 “소름 돋은 살갗”처럼 오톨도톨 돋아나 있는 글자들. 자신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으로 만드는 점자 앞에서 시인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점자를 대하면 누구든 쓸모없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더듬어야 한다.

스스로 눈멀지 않으면, 문맹이 되지 않으면, 이 돋을새김 글자에 다가갈 수 없다. 눈은 멀리 볼 수 있지만 손가락 감촉은 한 치 앞밖에 볼 수 없다. 점자는 눈과 지식과 오만을 겸손하게 한다.

보는 자 앞에 손가락의 감촉만 있는 캄캄한 길. 손가락 끝을 지팡이처럼 잡고 발 앞을 두드리며 나아가야 하는 길. 나아갈 길을 찾는 이에게 점자는 바로 한 발 앞이 풀밭인지 벼랑인지, 보도블록인지 허방인지 알 수 없는 길을 펼쳐놓는다. 그래서 글이 우리가 절실하게 간구해온 물음을 제대로 대답해 주지 못했음을 깨닫게 한다. 알면 알수록 지식이 더 많은 모름과 질문만 주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고 헤맸던 길과 닮은 점자 앞에서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모르고 살아온 삶과/ 이토록 닮았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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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이 일여덟 마지기는 너끈하겠다 너무 맑아서 여차하면 살을 베일 것 같은 늦가을의 하늘 숫돌에 갈 듯 초록을 가으내 갈아내고, 겨우 남은 햇노란 줄거리며 햇노란 잎사귀가 햇노란 햇살을 받으며, 또 햇노랗게들 사각이며 지천이다 바람이 일 때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햐! 노을구름떼처럼 모였다가는 배돌며 또 싹 빠지는 그 햇노란 사각과 햇노란 사각의 찬란한 틈서리들을 보면, 그냥 국으로 숨만 쉬어도 한 상 뻐개지게 차려먹은 듯싶다

햇노란 옥수수밭에 싸락눈이 내린다 은단 같은 싸락눈이 바람이 일 때마다 이리저리 쟁반 기울어지듯 짜르르 짜르르 몰리더니, 햇노란 줄거리며 햇노란 잎사귀에 가서 일일이 부딪는다 싸릉싸릉 싸릉싸릉 청까지 튕기며, 아주 쬐끄맣고 투명한 그늘처럼 뛰어올라갔다가는 자빠지고 자빠졌다가는 또 허천나게들 부딪는데, 싸릉싸릉 튕기는 맵시가 비장 속까지 햇노랗게 기뻐 죽겠단다

 - 오태환(1960~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늦가을 보도 위로 넙치같이 생긴 플라타너스 낙엽들이 몰려다닌다. 밟으면 양철 우그러지는 소리가 난다. 비스킷 부서지는 소리도 난다. 생명을 다 놓아버리고 이제는 아까울 것이 없어 가볍고 상쾌한 소리다. 푸른 기운이 다 빠져나가 곧 가루가 될 낙엽들은 이미 흙이 되는 법을 다 익힌 것 같다.

말라서 칼날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옥수수 잎사귀들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귀에 담아두고 음미해 본다. “햇노란”과 “사각사각”과 “싸릉싸릉”이 만드는, 외로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가을의 후일담을 듣는다. 사람의 귀가 없는 곳에 사는 차가운 소리. 칼날 같아서 세상의 소음을 베어내기에 좋은 소리. “그냥 국으로 숨만 쉬어도 한 상 뻐개지게 차려먹은 듯” 천지간에 충만한 소리다. 이 소리를 귀에 잘 쟁여두었다가 심심하거나 우울하거나 어지러우면 보약처럼 들어야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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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에게서 나왔다 예전에 나는 나로 가득 차 있었다

 

입안에서 우성이를 몇 개 꺼내 흔든다

사람들은 어떤 우성이를 좋아하지

 

우성이는 어둠이라고 부르는 곳에 살았다

그때는 우성이가 다를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미남일 필요조차

그러나 가장 다양한 우성이는 우성이었다

 

공기의 모양을 추측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이 서 있다

우성이가 사실인지 어리둥절하다

우성이를 만진다

우성이가 자신과 똑같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우성이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나는 내가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수십 수백만 개의 우성이가 떠오를 거라고 말했다 - 이우성(1980~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우성 시인 안에 이렇게 우성이가 많으니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겠다. 제 몸 안에 ‘수십 수백만 개의 우성이’가 있으나 생긴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이 제각각이니, 혼자 놀아도 죽을 때까지 지루하지 않겠다. 다투고 징징거리고 깔깔대고 쫑알대고 왁자지껄, 우당탕, 빽빽, 쉴 틈이 없는 어린이 놀이방처럼 이 우성이들과 일일이 다 놀아주고 싸움 말리고 울음 다독이다 보면 커피 마실 시간은커녕 밥 먹을 시간, 오줌 누러 갈 시간도 모자라겠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표정에서 내 안의 수십 수백만의 내가 보이고, 내 안에 숨어 있는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들키니, 사람들 사이에 비밀도 없겠다. 내가 꾼 꿈 얘기를 하면 이미 다른 사람이 다 꾸어버렸던 꿈. 내가 당한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예전에 다 겪었던 일. ‘그래 맞아, 내 얘기가 그 얘기라니깐.’ ‘어떻게 내 마음에 있는 얘기를 그렇게 족집게 집듯이 얘기할까.’ 서로 제 안에 있는 우성이를 신기한 듯 맞춰 보는 사람들. 내 안의 우성이들이 서로 저랑 놀아달라고 아우성인데, 오늘은 어떤 우성이랑 놀아볼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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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왔다

등을 구부리고 앉아 떡을 먹는데 등에 담(痰)처럼 박힌 느낌,

느낌을 보내려고 저 이화령의 병꽃나무를 바라보았으나

저기 붉은색에 버무려져 뜨겁게 파닥대는 느낌, 추억처럼

다시 돌아와 한 사람의 모습으로 커지는 느낌

; 그는

병든 사람이다 팔뚝의 주사 자국들은 미친 별자리 같다

등을 구부리고 한 그릇 국수를 말아먹은 그는

지금 내 등에 박힌 느낌, 그는 이빨이 다 빠졌고

안타깝게 이빨을 놓치는 잇몸 사이로 하얀 혀가

넌출같이 흐느끼는 소리 어두운 방에서 혼자

그는 죽은 사람이다 더러운 요에 덮여, 지금 이 봄날

담처럼 내 등에 박힌 몸, 점점 내 등은 구부러졌으나

저기 병꽃나무의 붉은 품속에서 잠깐 잠깐씩

하얗게 병꽃나무를 늙게 하는 봄볕같이

나를 따뜻하게 늙게 하는 죽은 몸, 죽은 환한 몸,

내 몸에 겹쳐졌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이 몸처럼 왔다 가는 것이었다 날마다

그렇게 끈질기게 나를 찾아오는 몸이 있다이제야 그 몸을 사랑하였다

 - 신기섭(1979~2005)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등을 웅크릴 때 등에 담이 박히듯 찾아오는 사람. 생전에 외딴 방에서 홀로 외롭게 앓다 죽은 사람. 웅크려서 등만 보이던 사람. 죽어서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사람이 등으로 오고 있다. 생전에 외면했던 외로움이 더 지독한 외로움이 되어 오고 있다. 타인의 외로움이 자신의 외로움이었음을 진저리치게 느끼게 하며 오고 있다. 죽음 앞에 홀로 선 지독한 외로움을 등과 등으로 나눈다.

등은 눈이 없고 코도 입도 없다. 심장은 등에서 두근거리지 않는다. 팔다리도 손도 앞으로 구부리지 뒤로 가지는 않는다. 등은 눈먼 방향이다. 팔과 가슴으로 체온으로 사랑과 정을 나누는 포옹과 달리 등과 등은 예리하게 박히는 외로움을 나눈다. 그 등에는 숨기고 싶은 치욕적인 삶의 내력이 표정보다 풍부하게 숨겨져 있을 것이다. 스물여섯 나이에 요절한 시인이 등으로 느낀 외로움의 깊이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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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을 다 그리고도 남는 꽃들

나비가 앉았다 간 뒤에도 마저 흔들리는

나비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서

애벌레 기어오르다가 슬몃 흘리고 간 애벌레

바람이 핥고 가고 햇볕이 남김없이

빨아들이고도 남는 햇볕

 

살랑살랑 나뭇잎을 흔들고

떨어지는 나뭇잎; 모두가 여기 있고

아무도 밟지 않은 이 연기를 타고 올라간다

 

다 자란 뒤에도 더 자라는 뱀이 기어간다


 - 김언(1973~ )

눈앞에서 한 마리 나비가 날아갈 때, 보는 사람의 내부에서도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간다. 눈앞의 나비가 사라져도 기억 속에서 그 나비는 계속 날아간다. 나뭇가지에 피어난 밝은 전구 같던 목련도 지난봄에 벌써 졌지만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환한 불을 켜고 있다.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인도 나에게 종종 말을 건네거나 웃곤 한다. 기억이 너무 생생하면 나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얼떨결에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기도 한다. 과거의 일은 기억에 나타나는 순간 현재진행형이 되고 새로 태어나는 경험이 된다.

그 기억은 나에게 묻는다, 이미 떨어져 사라진 꽃이 진짜인지, 기억 속에서 지금 피어나고 있는 꽃이 진짜인지. 시인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꽃에게 생명을 부여하려는 사람이다. 죽은 뒤에도 계속 말을 하는 사람에게, 사건이 지난 뒤에도 아직 진행되는 사건에게, 숨 쉬는 육체를 부여하려는 사람이다. 이별이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살아있는 기억과 허구가 진짜일 수도 있으니까. 답답한 현실이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는 벽 안에서도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는 상상의 산과 들과 바다가 진짜일 수도 있으니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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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를 걷다 보면

여름의 주머니를 뒤지는 소리들,

딱따구리는 제 골머리가 터지도록

나무의 속에다 딱딱한 공허를 털어놓고

날아가던 구름은 귀를 열고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나무들은 발가락으로 땅속을 헤집고

안 보는 듯 슬쩍 남의 허벅지를 훔쳐본다,

가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낙엽송들,

땀에 묻어나는 진하게 꿍친 생각들,

민들레는 고양이 눈을 노랗게 뜨고

 

입을 오므려 동그랗게 야옹 소리를 내고

돌멩이는 바람에 몸을 비비며

발꿈치를 돋운다.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

무수한 소리들 사이로 전류가 흘러

세상의 정적에 불이 들어온다,

수첩을 꺼내 든 나무들 소리를 끼적거린다.

 - 김재혁(1959~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혼자 호젓하게 산책길을 걷는데도 시인은 몹시 바쁘고 흥겨운가 보다. 걱정거리와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어린이가 되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 산책자는 어린이처럼 온몸이 감각 덩어리가 된다. 오감은 주변의 모든 풍경을 빨판처럼 빨아들일 준비를 한다. 그러면 온몸은 사물의 작은 움직임에도 활발하게 반응하면서 함께 놀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무나 풀, 구름과 새는 비밀을 가득 품은 주머니가 되어 손을 넣어 뒤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에 의하면, 발로 걷는 것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이다. 걸으면 침묵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풍요로운 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귀를 한껏 열면 고요 속에는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서로 어울리며 놀고 있는가. 이 소리의 축제에서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조차 소음이 아니라 흥을 돋우는 전류가 되어 산책로를 환히 밝힌다. 이 감각의 향연, 호기심의 축제에서 어찌 시가 나오지 않으랴.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몫을 하고 싶어한다’고 니체도 말하지 않았는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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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았는지

들킨 적 없이 들켜버린 나

집사람이 어느 날 느닷없이

내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네가 잘났다고 쓰는 시라는 것

보나마나 쪼잔한 것들이지

별수 있나 좁쌀영감탱이

순간,

쪼잖지도 않게 돋은 내 혓바닥이 아리다

사실 나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게 없는

집사람이긴 하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장담하건대, 시 근처는 물론이고

글과 담을 쌓고 살면서도

역시 집사람은 내 아픈 곳을

정확하게 건드리는 명수다

벌렁, 뒤로 나자빠지겠다

가끔 뜨끔뜨끔하다가

지금처럼 한 방 맞고 나자빠지는 내가

나의 시다


 - 정대구(1936~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인의 아내에 의하면 ‘손에 흙 안 묻히는 일들은 일도 아니다 거지발싸개다’ ‘밤새워 쓰는 시 나부랭이는 휴지 쪼가리에 불과하다’(‘위대한 김연복 여사’). 시인들은 뜨끔하겠다. 흙도 안 파고 땀도 안 흘리고 손바닥에 굳은살도 안 박이고 상상으로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힘든 척하며 지금껏 안 들키고 잘 버텨왔는데, 정직하고 건강한 노동 앞에서 그 ‘쪼잔한’ 작업이 다 들통났으니 말이다. 창작의 고통이 꾀병이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말이다. 쌀 한 톨, 콩 한 쪽도 못 만드는 시를 갖고 어떻게 밥값을 하란 말인가.

김현에 의하면, 문학은 돈도 밥도 못 되므로 쓸모가 없다. 그러나 문학은 그 쓸모없음을 써먹는다. 돈이니 권력이니 하는 쓸모 있는 것들은 그 쓸모 있음의 억압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돈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만 그걸 얻으려면 거기에 매이게 된다. 문학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다. 그 자유가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인간다운 삶을 꿈꾸게 한다. 시인은 아내의 말에 급소를 한 방 맞고 나자빠졌는데, 그렇게 현실 앞에서 무력하게 패배하는 게 자신의 시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 패배는 불가능을 꿈꾸는 유쾌한 패배이기 때문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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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흉(凶凶) 같은 한자를 쳐다보는 일,

같아지는 일,

새벽이 되어서 새벽을

걷는 발에 육박할 것이다

 

나무가 바라보는 방향을 알 수 없어

나무는 걷는다

나무와 같아지는 일,

가로수가 많아서 길이 길어진다

 

세계좀비지도나 쳐다보는 일,

좀비는 못 되고 좀비 같아지는 일,

발이 낯설어지고 방향이 없어지고

그럴 때는 몸을 기울여봐

다른 새벽을 향해 엎드려봐

발자국들을 모으는 동안

보도블록에 앉아

 

더 먼 아스팔트를 바라보는 일,

아스팔트와 같아지는 일,

나는 저기를 걸을 것이다

저기, 짐승,

나의 발에서 태어나는 나의

짐승을 견딜 것이다

 - 박진성(1978~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만큼 크다! 매번 온 정신을 집중하여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모든 천체를 포함한 우주가 새로이 구축되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든다.’ 페르난도 페소아의 말처럼 새벽은 내가 보는 것만큼 커지고 내가 숨 쉬는 공기만큼 맑아지는 시간이다. “흉흉(凶凶) 같은 한자”를 보면 마음이 구덩이나 밀폐된 공간에 갇혀 답답해지고, 나무를 보면 “나무와 같아지는 일”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새벽은 하루의 첫 공기, 첫 햇빛으로 숨 쉬는 시간이다. 야근하고 들어와 아무것도 쳐다보기 싫은 눈이 되어 잠들거나 알코올에 찌든 폐로 잔 잠이 깨끗해져서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시간이다. 새벽은 걸어가는 “나의 발에서 태어나는 나의 짐승”이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하늘을 보면 드넓은 넓이만 한 하늘이 되고 녹조가 낀 강물을 보면 그대로 온몸이 폐수가 되는 시간이다.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시가 들어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몸에 슬어놓고 가는 시간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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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염소가 푸른 언덕을 끌고 간다 볼 때마다 산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어제의 산에 가서 염소를 찾는다 염소가 없다 눈과 머리가 여러 개가 되어 펄럭이지만 염소는 보이지 않는다 몇몇의 노인들은 풀밭 위에 잠시 내려와 놀던 구름을 따라간 것이라고 수군거린다

염소가 옮겨다 놓은 산이 심심하게 혼자 논다 빈 의자처럼 눈앞의 바다만 온종일 바라보다 한 뼘 더 허리가 굽어진다 노인이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던 의자에 가끔 담배 연기처럼 왔다 가는 사람이 있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오물오물 산등성이의 구름을 뜯어 먹고 있다 염소가 입안에서 굴리고 놀던 산을 뱉어놓고 슬그머니 해안 절벽 쪽으로 이동한다

낯선 산에 오른 사람들이 구름에 목줄을 매어 이건 쇠구슬처럼 부서지지 않는 염소라고 즐거워한다

- 홍일표(1958~)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인은 어린 시절 염소에게 풀을 먹이다가 산에서 잃어버린 적이 있었을까. 매어 놨어야 하는데 깜빡 잊었더니 염소는 더 맛있는 풀을 찾아 계속 돌아다니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염소 모양의 구름만 떠 있다. 그 한 마리 염소가 거대한 산을 옮기고 그 위치를 바꾼다. 염소의 행방을 찾느라 그의 눈이 산으로 언덕으로 산 넘어 바다로 계속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구름은 풀밭으로 내려와 염소가 되어 놀기도 한다. 염소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풍경이 나타나고 바뀌는 마술이 벌어진다.

사물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놀려대며 얼마나 자주 변신하고 도망가고 숨었다가 느닷없이 나타나는가. 호기심 많은 눈으로 보면 사물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변화한다. 매어 놓지 않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염소 같다. 구름에서 염소를 찾는 즐거운 숨바꼭질. 고삐 풀린 상상력. 죽은 노인의 담배 연기에서 살아있는 노인 찾기.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에서 변치 않는 형상과 이데아 찾기. 어떻게 “구름에 목줄을 매어” 놓을 수 있을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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