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인용 식탁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세 개의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사이.

우리는 짝이 맞지 않는다.
가능성이 많으니까 자꾸 멍이 들고 있다.

무엇을 생략해야만 우리는
허기를 느낄 수 있을까.

우리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면
어떤 종류의 사람처럼 보일까.

이웃집의 요리 냄새가 우리의 식탁으로 흘러든다.

우리는 손이 떨린다.
우리는 젓가락으로
열심히 밥을 먹어야 하는데.

- 신해욱(1974~)


△ 도무지 밝힐 수 없는 나를 밝히는 불가능한 행위가 시일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얼마나 초과되었는가. 나는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각각이 될 수 있는지 서로 간의 차이를 전시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식탁에 모여 있는 우리는 대체 몇 명이었을까. 구성원이 넷이라면 세 개의 젓가락은 넘치고, 둘이라면 한 벌이 남게 된다. 아니 주어진 젓가락 세 개라는 것은 어쩌면 짝이 맞는 한 벌과 짝이 맞지 않는 한 개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넘치거나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사태인 것인데, 이게 왜 문제인지도 명쾌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주어진 것’에 대한 불만이나 ‘주어진다는 것’에 대한 억압 같은 것들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보여지지 않는 중의적 정황 배치들 때문에 가능성이 생기고, 그 생략이나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허기진 상태나 멍이 든 상처 부위들을 진술하고 있다. 물론 그곳이 어디인지 영영 모르게 될 곳이겠지만, 결국 우리의 위치를 설정하게 되는 근거는 저 바깥 때문이다.

‘이웃집’이라는 타자들 때문에 우리가 생기고, 나를 소거한 당신들 때문에 ‘나’라는 현상이 겨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시에서 여백이란 것도 감추도록 작동하는 전략이나 여유가 아니라 감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알 수 없을 때까지 나를 묻는다. 알 수 없는 빈 곳, 그 미지 때문에 내가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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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의 생

창밖으로 검은 재가 흩날렸다
달에 대하여

경적 소리가 달을 때리고 있었다
그림자에 대하여

어느 정오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왜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냐고
그림자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개켜 넣을 수납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김없는 자정에는 발가벗고 뛰어다녔다

불을 끄고 누웠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밤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 신용목(1974~)


△ 일찍이 박태원이 구보씨를 내세워 ‘도시 산책자’의 모습을 형상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구보라는 행위태밖에 남아 있지 않는 익명성과 근대 체제 이후 인간을 쉬이 상투화시켜버리는 일상의 무거운 짐들은 인간을 인공의 일부로 사물화시킨다. 그러므로 도시를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은 고작 주어진 것들에 대해 관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향유적 존재, 소극적 주체로 전락되는 것이다.

아무 날 어느 어두운 밤,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한다. 속도에 대해서 생각한다. 만약 지금 이곳을 정지시킬 수 있다면 대체 어느 시점에서 세계의 불을 꺼야 할까. 여전히 도시의 달은 가로등이나 네온사인의 빛보다 흐리고 또 어딘가 먼 곳에서 속도에 복무하는 경적소리가 울린다. 잠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멈춰볼 의지도 없이, 쉼 없이 흘러가는 도시의 시간들. 공기는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재가 날리고 있고, 이곳은 불길이 끊이질 않는 지옥이다. 우리들의 그림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빛들 때문에 수차례 자신을 놓치면서 분열되고,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에서나 입고 다닐 바지처럼 그렇게 부채감으로 가득 찬 걸음걸이로 또 어디론가 흘러간다. 그러니 그리움이라는 느림의 정서 또한 ‘만약’을 설정하지 않으면 쉽게 고안해내기 힘든 형국이다.

신용목은 무엇인지 모를 모호한 억압들에 대해 만약을 설정한다. 그렇게 만약의 삶을 통해 현실의 억압에 대해서도, 억압에 대한 무반응성에 대해서도 모두 반성해보는 것이다. 이곳을 그저 지옥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설정을 통해 신의 존재나 거울의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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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저녁

아직 한 페이지의 저녁은 남아 있을 때
나는 말이 그립기도 한가봐
그러나 나는 말이 참 두렵기도 한가봐
그래 뜻 없는 소리로 몸 바꿀까도 생각하나봐
전화 벨소리나 무슨 문 두드리는 소리쯤으로
울려보고 싶은가봐
아무도 울음인 줄은 모르게
심심함을 애써 감추고 다급한 듯이
캄캄한 방을 두드리고 싶은가봐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쯤을
전화 벨소리로
울어보고 싶은가봐
다 퇴근하고 아무도 없을 시간
마음대로 휘젓다가
주인 없는 책상을
무뚝뚝하게 멈춘 회전의자를
담배가 꺾어져 누운 재떨이를
그 속의 식은 재를 집어보고 싶은가봐
손가락 끝에서 맥없이 빠져나가는
식은 시간의 재를 가만히
그러고서야 봄날 저녁은 가는가봐
봄날 저녁은 그렇게 가는 건가봐

- 최정례(1955~)


△ 이곳에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재의 사태는 결국 남아 있는 이들의 몫이며 ‘여기 없음’을 호명하기 위해서는 여기 남아 있음을 노출해야만 한다. 그러니 호명 자체에서 우리는 위치나 감정선들을 들킬 수밖에 없다. 이 시는 부재하는 것들을 호명해보는 시인의 관찰력이 돋보인다. 캄캄한 방에 전화를 수차례 하는 상황도 그렇고 빈 사무실을 관할하는 방식도 그렇다. “담배가 꺾어져 누운 재떨이”라든가 “무뚝뚝하게 멈춘 회전의자”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소고는 주인이 없는 책상을 드러내는 기표다. 즉 있는 사물을 통해 없는 대상을 추론해내는 직관들인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말 때문일까. 그저 목 놓아 울음으로 질문을 놓고 싶은 시인 특유의 곡진함 때문일까. 무엇이든 좋다. 시적 자아는 어떤 이유에서든 다가오는 봄의 계절감에 통해 슬픔으로 진입하고 있다. 물론 봄날에 쉽사리 만질 수 없는 슬픔에 관해서는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언제부턴가 물이라는 단어가 물이 아니고, 바다라는 공간이 바다가 아니다. 지난 봄, 공동의 내상을 겪고 난 이후 우리는 물과 바다의 의미역들을 다르게 보충하고 있다. 작가들은 바다의 쓰리고 아픈 장소감을 형상화해냈고, 광장은 최소한의 윤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들로 환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쓰린 봄의 기억에 복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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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애인의 마음을 나는 모르고

봄을 생각하는 마음은
봄을 지나
지는 꽃을 지나
멀리 애인을 지나
그의 뒷모습을 지나

빈 땅에 연못을 파고
그곳에 물을 채우는 마음이 아니라
그곳에 피는 연꽃의 마음이 아니라
바람을 모르는 물결의 마음이 아니라

멀리 애인의 마음을 나는 모르고

꽃잎을 힐끗 훔쳐보았을 뿐인데
꽃의 내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끓어오르는 나무들의 여름

- 이근화(1976~)


△ 결정지을 수 없는 모르는 마음 때문에 봄이 왔을까. 아니 모르기 위해서 우리는 봄이라는 계절을 필요로 했을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당도한 너무나 짧은 환절기는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이행의 마음을 가르친다. 질서가 되지 않고 의문이 되곤 하는 불안하지만 견고한 그런 마음들을 가르친다.

빈 땅을 파고 거기에 물을 채우고 연못에 제 살을 찌르면서 피어나는 연꽃을 띄워, 바람에 물결이 전율을 일으키는 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런 마음에 노력이 닿는 자리마다 홀릴 것이다. 하나 그것도 아니라고. 멀리 애인의 마음을 좀처럼 모르겠다고 말하는 시인의 고백을 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봄에 서둘러 꽃을 틔우고 나서 미리 여름을 준비하는 나무들의 마음처럼 섣부른 날씨의 환각을 봄이라 불러도 좋을까. 그렇게 모르는 내일들만 읽어내는 갸우뚱한 고백들 때문에 우리는 잘 알고 있는 낯선 자리에 반해서 또 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차례, 차례 나무들이 끓어오르고 꽃들이 열반에 들어 아무런 내용도 마음도 갖지 않았는데, 순하고 찬란한 햇빛들이 가득한 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로 앞에 두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멀리’ 두고 싶은 마음처럼, 우리는 읽어낼 수 없는 내일을 모르기 때문에 기다린다. 그저 무작정….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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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냥

메마른 나뭇가지 끝에 새가 앉아 있다 무리를 잃고 부리도 발톱도 둥근 머리 속에 파묻은 붉은 새 한 마리 어두워지는 저녁을 응시한다

일어나는 불꽃 타오르는 불길 검게 타들어가는 나무 위로 새가 날아간다 바닥에 떨어지는 재

인큐베이터 갓난아이가 가파른 숨을 쉬고 있다

- 송승환(1971~)


△ 사물 속에서 새로움을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사물에 관한 여러 약속들을 의심해보는 동안에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정합을 통해 세계를 보는 것이라 부정을 통해 인지해야만 하고 부정을 부정이라고 언술하는 것조차 부정하면서 사물을 읽어내야 한다.

이 시에서 타오르는 성냥의 형상은 나무 위에 올라앉은 새의 모습 혹은 솟대의 모습 등으로 상징됐다가 종국에는 이미지가 튀어올라 인큐베이터 안에 가파른 숨을 몰아쉬고 있는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환기된다. 물론 성냥과 갓난아이 숨소리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된 이미지들이 큰 무리 없이 미세하게 충돌하면서 와해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재가 되어버리는 성냥의 인화성과 태어나자마자 꺼질 듯한 생명을 붙들기 위해 다시 인공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운명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불꽃 속에서 날개를 발견하는 시인의 직관과 숨소리와 불길을 병치시키는 유연성이 독특해 보인다.

수많은 시인들이 극에 닿으려고 노력을 하고 극에 닿는 순간 그 극의 거리는 다시 넓혀진다. 그렇게 닿을 수 없는 자리들의 혼미하고 환각적인 유혹 때문에 시인은 살아 있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이 세계가 영영 봉합되지 않기를 믿고 싶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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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숲에서의 짧은 키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너는 비행기를 타고 산맥을 넘었다

여러 해 동안 너는
밤의 열기
가볍고도 유쾌한 사랑

그러나 나는 아직
체리향이 든 해열제를 먹고 누워 있는
키 작은 아이

단풍 숲에서의 짧은 만남이 오기도 전에
내 안에서 솟아오른 불길이
산맥을 넘어

너의 입술을 모두 태워버린다

- 박상순(1962~)


△ 시가 다른 예술과 달리 물상들을 그려내는 데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미지를 다루는 데 있어 상상하는 무엇이든 가능한 배치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냉장고 안에서 기린이 기어 나와 바닷물을 핥다가 토스트 조각에 달라붙은 아침을 끓여 먹었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상상조차 문자 형상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박상순은 이런 불가능한 배치의 미학을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정신의 세계로 우리를 견인하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일까? 이 시에서는 화자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열병과 단풍이 든 풍경, 키스 직전이나 직후 입술이 갖는 붉은 이미지 혹은 불길이나 열기 같은 온도의 강도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시의 행간이 늘어나는 동안 아이였던 화자는 성인이 돼 아직 만나보지 못한 너의 입술을 모두 태워버린다. 시간의 배열도 뒤죽박죽이고 정서의 흐름도 일정한 규칙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듯하다. 한데 이런 것들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념의 형태가 아닐까. 관념이란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그 설명되지 않는 전부를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사랑, 슬픔, 그리움 따위 정도의 말로 축약하게 되는 것이 감정어가 갖는 관념성이 아닐까.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 시가 지금 여기에 쓰이고 있다. 그런 미래의 문법들을 오래 질투하고 있는 나를 보았던 적이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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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기

구름은 없었다. 기미도 없었다.
손잡이를 돌릴 때
스웨터를 벗을 때
몇 볼트인지 모를 전류가 몸을 통과할 때까지
몰랐다. 오늘이 얼마나 평온한지를.

나는 어떤 성질의 짐승일까.
그것도 모르면서 자주 쓸쓸했다.
키스 없이 나를 사랑하며
어중간한 전극 오갔다.
그냥 사랑해서 사랑하고 그냥 살기에 살아가며.

양극을 망설이며 서성이는 동안
나뭇가지는 수십 년을 번개처럼 꺾이며 제 길을 가고 있다.

- 백상웅(1980~)


△ 세계는 어떤 답변도 내려주지 않고 오직 우리가 그 세계의 비밀들을 언어로 표상할 뿐이다. 언어가 인간과 인간 간의 소통이라는 상투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의 세계를 인지하도록 하는 자율성의 원천이라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 진리를 죽이기도 하고 진리를 창조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사물을 다시 만드는 사람이다.

이 시는 건조한 겨울철에 우리가 종종 만나게 되는 정전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금속 물질의 손잡이에서 혹은 스웨터를 입고 벗을 때나 털 소재의 직물에서 마찰이 일어날 때. 정전기는 구름도 기미도 없이 일상에서 불꽃을 일으킨다. 그렇게 만나는 뜻밖의 불꽃은 시인으로 하여금 망설이는 자의 정념을 품게도 하고, 자기 스스로에게 ‘짐승’과 ‘사랑’ 사이를 묻는 질문을 내던지기도 한다. 이렇게 한 곳에 오래 은둔해 있던 정지된 힘이란 어쩌면 또 하나의 세계를 여는 모든 두근거림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런 부채감 없이도 오래 한 곳을 응시하고 머물러 보는 것. 그런 정지된 상념들을 통해 세계 바깥을 엿보고자 하는 시적 의지가 백상웅 시의 물상론은 아닐까.

언 땅이 조금씩 제 살을 풀어 부풀리는 동안 우리는 또 한 계절을 보내주고 말았다. 그 계절의 건널목 부근에서 “양극을 망설이며 서성이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제 안에 번개를 읽어내기 위해서.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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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

나는 물고기였으니

어머니가 살집을 다 발라내시면 드러나는
잃어버렸던 앙상한 열쇠였으니

물속에서 온몸을 비틀어
물의 금고를 열었던
열쇠의 형상을 한 물고기였으니

금고 속엔 물거품과 백지만 가득했으니

몸속에 꽁꽁 숨겨온 자물통 같은
어머니 자궁 속에 꽂힌,
한 늙은 극작가가 불행 속에 쓴
희극의 첫 막을 열었던 열쇠였으니

그리하여 여기 발밑에 버려진
오래된 극장의 열쇠였으니

-김중일(1977~)


△ 과도한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시대. 시인은 독특하고 유연한 지각 방식을 통해 이미지의 철학적 권위를 복귀시킨다. 대개 시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대립되는 것들이 갖는 저마다의 격차를 환기시키며 우리들의 사유 체계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한다. 여기서 시인은 존재의 재창조를 꿈꾸며, 그런 언어의 극단들을 통해 의미의 하층부를 드러낸다. 특히 이 시에서는 유사 이미지들의 조합과 교환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머리만 남겨두고 살을 발라낸 물고기의 모습은 열쇠의 형상과 닮아 있다. 즉 시인 스스로가 자처한 물고기란 제 몸에 열쇠 하나쯤 품고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라서, 바닷속을 헤엄쳐왔던 삶의 모든 운동성들이 “물의 금고”를 여는 고행의 과정이다. 바다, 물, 자궁과 같은 태초의 근원적 공간을 열어보고 말겠다는 시인의 굳은 의지들을 경유하고 나면, 늙은 극작가의 한 생애 희로애락이 담긴 서사극과 오래된 극장의 문을 여는 또 다른 열쇠가 탄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 시인 자신이 사용하는 말은 다른 세계의 무대를 여는 최초의 시도가 될 것이라 암시하고 있다. 언어가 경험을 초월하는 순간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그 경험하지 못한 과격한 혁명을 무작정 믿고 싶다. 언어 노동자가 갖는 그 불우한 희망에게 오늘도 미래를 맡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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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

골짜기마다 산을 앉혀 보아도
어김없이 지는 해 아래
하루에도 천 개의 절벽이 생겨나고
만 마리의 이리가 질주하는 밀림이 태어난다

한 덩이의
빵을 구하기 위한 행렬은
오늘도 뱀처럼 길다
결국 빵 한 개를 위해
겨우 빵 한 개를 위해
그 아래 사는 일은 무엇인가

무한 평등의 낮과 밤
황금 밀밭에서
죄 없는 햇살을 받고 자란
꽃이지만 꽃 이상이고
별이지만 별 이상인
한 덩이의 흥망성쇠
우리를 미래로 건너가게 하는
빵!
시?

- 문정희(1947~)


△ 혁명은 과거의 질서들을 몰락시키고 과거의 관점으로 현재까지의 불경스러운 것들을 다시 신성화시키는 세속적 운동이다. 인식하고 있던 과거의 현상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정신적 억압 기제들의 가장 튼튼한 뿌리를 흔들어 늘 변화를 내재하려는 인간 본질의 정념을 담보로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개방화 작업이다.

이러한 점에서 혁명을 꿈꾸는 자와 시인의 언어가 거주하는 태초의 자리는 유사한 곳에서 실존한다. 이를테면 시인은 이미 의미로 규정된 상징태 곁에서 그 이상의 언어를 탄생시키는 데 복무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빵’의 상징이란 ‘자본’의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나 말미에서 별다른 대립이나 수사적 병치 없이, 빵과 시의 위치를 교환하며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시적 정념은 우리의 삶을 깨고 나오는 혁명과도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주의 사회로 이행하려는 혁명적 소용돌이가 짧은 행간 사이를 두고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골짜기마다 산을 앉혀보는 불가능한 상념 가운데에서도 절벽과 밀림밖에 탄생하지 못하는 이 참혹한 세계에 관해, 내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겨우’와 ‘결국’ 사이에서 더 이상 두리번거리지 않겠다. 꽃이나 별의 그 이상을 지켜보기 위해.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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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료탑

지도를 보며 찾아간 곳에는 없어진 건물이 있었다. 무엇을 결정하는 일은 시간 속에 허리가 잠겨 있게 한다.
누군가의 얼굴을 죽도록 때리는 꿈을 꾸었어. 너는 아침마다 침대 머리맡에서 꿈 이야기를 듣는다.
알람처럼
양털에 파묻힌 양의 얼굴
살아본 적 없는 시간은 일단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무릎 위에서 잠이 든 개처럼
미동 없이
밥을 먹기 전엔 기도를 잊지 않았다. 볕을 쬐며 살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너는 사라져 본 적 있는 외투로서.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건물에 간다.
뜨거운 볕이 잎을 망가뜨린다.

- 안미옥(1984~)


△ 생각을 하자 그 생각은 사라지고 생각을 했다는 과거만 남아 있을 때가 있다. 다시 기억을 호출해서 생각의 생각을 곱씹어 보아도 쉽사리 재현해낼 수 없는 과거의 망각들이다. 우리는 생각과 망각을 현재에 수없이 지불하며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를 보존한다. 멈추지 않아서 살고 있는 것이고 살아 있기에 생각의 형식 속에서 위태로운 것이다.

안미옥이 그려내는 세계는 희박하고 어리둥절하다. 무언가 있을 듯이 건축했다가 홀연 사라지게 하는 이런 아리송한 시적 공간은 그의 시를 읽는 동안에 우리들이 겪는 시점까지도 부유하게 만들어버린다. 재현과 혼돈이 겹치고 흘려보낸 물상들과 사유해낸 생각들이 교차하는 가운데에, 그저 뼈대만 남은 세계의 입구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미동”도 없고, “무엇을 결정”하라는 고압도 없다. 단지 “사라져 본 적이 있는 외투”를 걸친, 계속 줄어들고 있는 자아가 있을 뿐이다.

나 또한 “살아본 적이 없는 시간은 일단 망가졌다”고 중얼거려본다. 그 누군가를 더 오래 생각하는 방식으로 단 한 사람을 망각하는 절망을 배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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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춰버린 시계를 차고 나왔다

잊고 있던 꽃무늬 원피스가 잡혔다
어떻게 이런 걸 입고 다녔을까 의아해하다
의아한 옷들을 꺼내 입어봤다

죽어버리겠다며 식칼을 찾아 들었는데
내 손에 주걱이 잡혀 있던 것처럼
그 주걱으로 밥을 퍼먹던 것처럼

밥 먹었냐, 엄마의 안부전화를 끊고 나면
밥 말고 다른 얘기가 하고 싶어진다
나는 이제 아무거나 잘 먹는다

잊지 않으려고 포스트잇에 적었지만
검은콩, 면봉, 펑크린, 8일 3시 새절역, 33만원 월세 입금
포스트잇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렸다

까맣게 잊어버린 검은콩이 냉장고에 있었다
썩은 내를 풍기는 검은콩엔 왜 싹이 돋아 있는지

이렇게 달콤한데, 중얼거리며
곰팡이 낀 잼을 식빵에 발라먹던 엄마처럼
이렇게 멀쩡한데, 중얼거리며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던 엄마처럼
죽고 싶다는 말이 솟구칠 때마다
밥을 퍼서 입에 넣었다

엄마도 나처럼 주걱을 잡았을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엄마는 매일 주걱부터 찾아야 했을 것이다

밥맛은 어째서 잊힌 적이 없는지
꽃들의 모가지가 일제히
햇빛을 향해 비틀리고 있었지
경이로움은 어째서 징그러운지

멈춰버린 시계를 또 차고 나왔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꽃 없는 꽃밭에 철퍼덕 앉아 보았다

- 임솔아(1987~)


불공정한 사회에서 꼭 불편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있다. 이곳이 잘못되었다고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고, 기형화된 사회에 겨우 권리를 요구해야 할 때다. 그러나 그 불편마저도 한낱 불안의 일종으로 처분해버리는 몰지각한 시각이 우리를 더 난처하게 한다.

정지하고 있는 것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삶의 질서를 직관해냈던 그의 데뷔작도 그러했고, 젊은 세대들이 처한 현실의 곤궁함을 자주 노출했던 그간의 시편들도 그러했다. 임솔아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공적 주체들의 목소리와 쓰리고 아픈 개인의 육성을 병치시켜놓음으로써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그 모든 폭력들을 음각시킨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칼을 드는 대신 주걱을 들게 되는 나의 행위태를 통해, 그래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상의 뜻하지 않는 선택들을 덤덤하게 고발하고 있다.

목숨은 사회였다. 아무래도 멀쩡하지 않고 달콤하지 않은, 주인 없는 생활들을 만져보면 다시 슬프다. 우리의 시계는 과연 어디로 움직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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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눈이 오고,
엄마가 나를 낳는다
(나는 커다랗게 잠을 잔다)
엄마랑 나랑 사이좋게 피를 흘린다
죽고 없는 여자들이 우중우중 모여든다
눈은 오고,
엄마는 나를 낳는다
나는 애인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준다
발가벗은 여자들이 우줄우줄 춤을 춘다
엄마를 입고 미끄러운 구두를 신었다
아무도 안 왔다
눈도 안 왔다

- 심민아(1986~ )


△ 대다수의 시인은 자신의 태생에 대해 쓰고 싶은 욕망들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들이 써내려가야 할 앞으로의 언어가 지금 이곳에 없는 ‘다른 언어’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알리바이를 서사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심민아가 인식하고 있는 독특하고 끔찍한 ‘생일’이 더 범상해 보이는 것이다.

이 시에서 도드라진 점은 애인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주는 행위와 발가벗은 여자들이 춤을 추는 이미지가 교차되는 부분처럼 감각적인 이미지의 병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마와 피를 사이좋게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여성 화자의 참혹함이나 미끄러운 구두를 신고 살아가는 삶의 폭력성, 또는 다시 ‘엄마를 입고’ 그녀가 살아온 질서대로 딸 또한 살 수밖에 없는 현실 순환의 논리가 더 아프게 읽힌다. 게다가 제가 태어나는 날 눈이 내렸다는 정보를 시 말미에서 뒤집으며, 나는 태어난 적도 없고 자신의 이 모든 삶이 환상이라고까지 시인은 발설해버리고 있다.

이 예민한 여성 발화자에게 탄생 자체를 전복할 만한 폭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사는 동안에 우리는 수많은 폭력들에 노출된다. 어떤 폭력의 경우 우리의 삶을 의심하게까지 하는 너무 강력한 벽일 때가 있다. 나는 모든 억압에 대해 저항할 수 있음에서 인간임을 느낀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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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상(外傷)

보리차 끓이는 동안엔 할 일이 많아진다. 일단 엄마부터 찾고, 집에 누워있는 사람 없으면 서 있는 사람은 나 혼자. 빈집에 주전자만 끓고 있다. 갈증이 난다. 냉장고엔 물이 없고 모락모락 혼자서 나는 김,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을 땐 손잡이가 잡고 싶어진다. 조금씩 열려 있는 문들마저 닫고 주전자 뚜껑만 반쯤 열어놓는다. 넘쳐흐르지 않게 파수꾼처럼 식탁에 앉아 숙제한다. 대합실 안 사람의 귀로 소리를 기다린다. 우는 소리 들리면 불을 끄고 밸브를 잠그면 된다. 다시 식어갈 때까지 잊고 있으면 된다. 보고 싶어서 갈증이 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물소리를 듣는다. 물의 인기척을 들으며 조금씩 자란다. 주인 없는 보리밭의 저녁이 오면 주전자를 창문 곁에 내놓고, 안개를 거둔다. 수증기가 지나자마자 나는 고소한 냄새, 주전자에 가라앉은 검은 보리알들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한 모금씩 말라간다. 아직 숙제가 남아 있고 단내와 탄내가 동시에 난다.

- 서윤후(1990~)


△ 기형도 시집 마지막 닫는 시를 생각해본다. ‘엄마 걱정’은 ‘부재하는 모성’과 ‘부채로 남은 윤리적 숙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던 당대 젊은이들의 고뇌를 형상화한다.

이 시에서는 그와 유사한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고, 또 어떤 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드러낸다. 제시되고 있는 상황을 축약해보면 나에게는 우선 당장 마실 물이 없고 엄마가 없으며 손을 마주 잡아보고 싶은 타인이 없다. 이 때문에 화자가 있는 공간은 빈집임에도 불구하고 제 자신을 편히 누여 볼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무엇도 편치 않은 사태 속에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갈증으로 상징되는 지금 여기의 불편을 해갈하는 방법뿐일 텐데, 그러나 나는 종국에는 스스로가 만든 물속에서 단내와 탄내를 동시에 맛볼 수밖에 없는 무능한 개인일 뿐이다.

외상은 내상이다. 우리 시대에 젊은이들은 물, 어미, 관계 등등 인간의 근원적 질서를 스스로 찾아 해결해야 하는 난처함에 처해있다. 물잔 대신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 세계가 조금은 해갈되어 뚜렷해질 것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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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취의 시점

당신이 자궁에 두고 온 두 눈이라 이르면 나는 자궁에 두고 온 혀라 하겠습니다 캄캄하고 고요한 이력들이 뒤척이는 시트 위, 체취를 어루만지는 일을 자정이라 이르면 체취 사이에서 헝클어지던 고요를 정오라 하겠습니다 하여 당신이 차를 이르면 나는 초를 켜두겠습니다 이해는 체취를 잊고 문장을 잃는다 이르면 오해는 문장을 구해 체취를 기록한다 하겠습니다 당신이 바람을 아버지라 이르면 내가 꽃을 어머니라 부르겠습니다 아니, 파도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머문 시트 위에 써두겠습니다-닿을 수 없는 곳에서 파도는 떠밀려 오고 파도를 거스르며 지느러미는 자란다-하여 내내 거기서 흔들리겠습니다

- 박찬세(1979~ )


△ 어떤 시인들은 종종 언어를 의심한다. 언어 이전의 관념을 불러와 다시 저마다의 의미를 추가하고, 의미 이전의 정념들이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관심을 보인다. 이때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란 무능하고 결함이 많은 도구에 불가하다. 그러나 그런 열등한 언어들 때문에 말의 혁명, 의미의 미래에 이르는 게 되는 것 또한 시인이 말을 통해 획득한 특권이 아닌가.

이 시에서 박찬세는 몸에서 나는 냄새, 즉 체취가 가진 사전적 의미에 대해 다른 사전을 적는다. 체취라는 단어에서 숨어 있는 시간성을 발견하고, 당신과 나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오해들을 통해 냄새가 거느리고 있는 공간까지 확보시키고 있다. 주체와 타자는 그 간격을 좁힐 수 없는 다른 개체들이지만, 늘 우리로 포개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냄새의 섞임 때문이고, 서로의 체취가 태초의 사유들을 꺼내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우리’나 ‘사랑’, ‘당신’이란 단어에서 또한 체취의 시점이 있으며, 마음이든 육체든 서로 파도처럼 율동하고 흔들려 보겠다는 운동태가 우리를 다시 이곳에서 서로 어울려가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감정의 날카롭고 입체적인 면면들은 아무래도 습득되고 교육당한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고, 아는 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슬픔 또한 배워왔던 것이라서 왜 슬픈지 가르치지 않고 감각을 마비시키는 지금 이곳이 징그러워질 때가 있다. 내 슬픔이 무사한지 안부를 묻는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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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로잉

나는 지운다 나를
기계적으로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구름
흩어지기 위해서만 모이는
얼음 방울들의 차가움에 가까워지도록
인간의 울음이 발명된 후로
나의 수요일은 다가올 수요일들을 위해
복제된다 마음이
남아 있다는 말은
하나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다른 손자국이 포개진다는 이야기
오늘의 식탁 위에 다시 차려지는
내일의 식탁보 같은 하얀색
백지 위에 타이프라이터가 지나간 자리
남아 있는 소리들
위로 형성되는

- 하재연(1975~)


△ 대상보다 관계만 남아 있는 참혹한 이 세계에서 우리는 수동적으로 어떤 제도들에 복무해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의 개인 주체들은 희박해지고 점차 소멸해간다.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표현되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어떤 시들은 여백으로 분명한 목적을 만드는 것이다.

하재연의 시를 읽을 때 또한 그러하다.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동시에 또 무엇을 지우고 있는지가 분명히 보일 때가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란 권태로운 일상 속에 소모되는 이미지들이다. 백지 위에 무료한 타자 소리가 들리고, 시간은 무료해지고 있고 오늘은 반복되고 있다. 구름과 같은 자연물들 또한 작위적이고 인공적으로 조작되고 있는 끔찍한 세계다. 이 세계에서 시인은 나를 지우겠다는 진술을 통해 소멸해가고 있는 나의 위치를 복귀시킨다. 어제와 다를 것이 없는 오늘을 그려내고 있지만, 오늘을 그린다는 이유로 오늘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삶이라는 말이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라는 말과 다른 의미가 아니듯이, 어쩌면 우리는 권태로운 이곳을 하루하루 견디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권태가 정신을 모험으로 향하게 하는 촉진제라면 나는 그 권태를 사랑하겠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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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에

그는 강둑을 걸어 다녔다 우린 멀었지만 숨소리를 들었다 물소리가 컸다

그는 강둑을 걸어 다녔다 오는 것인지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강둑을 걸어 다녔다 나는 강둑을 보고 있었다 물은 멀었지만 나는 젖었다

강둑을 걸어 다녔다 무른 손톱들이 나를 긁는다 단단한 몸이 젖어 뜯겨 나간다

첨벙첨벙 강둑을 걸어 다녔다 강둑이 없는 곳에서 강둑을 걸어 다녔다

강둑을 걷는다 호흡기에 입김이 찬다

- 성동혁(1985~ )


△ 죽음과 통증을 대등하게 견줄 수 있을까? 죽음에 가까운 통증이라는 말은 가능하겠지만, 통증에 가까운 죽음이란 불가능하다. 통증이 삶의 것이라면 죽음은 삶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을 감각하는 방식은 통증뿐이다. 죽음을 간접경험하게 되는 ‘남은 자’들이 고작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죽음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강둑’이라는 공간은 있으되 없는 공간으로 보인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성’이 희박해진 공간이다. 시를 뒤에서부터 읽어보면, 나는 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실에 누워 있다. 호흡기 표면에 가 닿고 있는 제 호흡의 축축해지는 습기를 느끼면서, 강둑을 걸어갔던 그를 떠올리거나 상상 속에서 강둑을 걷고 있는 나를 떠올린다.

여기서 나와 그는 병증의 상황 속에서 그 위치를 뒤바꾼다. 그는 나의 과거이자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기억이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강한 상징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스라이 강둑을 걷는 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의 행위태들을 뒤엉켜놓음으로써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걷고 있는 한 시인의 숨소리를 공간화시킨다. 이 때문에 이토록 조용한 어조로 쓴 시가 오히려 위급해 보이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경계 바깥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병명도 제대로 붙일 수 없는 참혹으로 다가와 있다. 나는 뿌연 안개 속에서 모르는 사람의 손을 오래 잡아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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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색과 분홍의 차이

겨울 노루귀 안에 몇 개의 방이 준비되어 있음을 아는지

흰색은 햇빛을 따라간 질서이지만 그 무채색마저 분홍과의 망설임에 속한다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 격렬함이다 노루귀는 흰 꽃잎에 무거운 추를 달았던 것, 분홍이 아니라도 무엇인가 노루귀를 건드렸다면 노루귀는 몇 세대를 거듭해서 다른 꽃을 피웠을 것이다 더욱이 분홍이라니! 분홍은 病의 깊이, 분홍은 육체가 생기기 시작한 겨울 숲이 울고 있는 흔적, 분홍은 또 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노루귀의 비밀이다

- 송재학(1955~)


△ 아름다운 시는 동사(動詞)로 읽힌다. 이때의 시는 움직이는 것이며 움직이려 하는 것이며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정물을 그리는 데에서도 다르지가 않다. 정지하고 있는 모든 순간에 대해 불가능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태도! 그것이 시가 발화되는 순간이자 언어가 인식을 도약해버리는 절정부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야생화에 대한 특유의 사색이 분홍과 흰색의 대조를 통해 구체화된다. 시인이 직관하고 있는 분홍이란 이곳을 벗어나려는 강렬한 저항인 동시에 이곳에 처한 병의 깊이를 가늠하려는 농도이며, 마음이 생기기도 전에 겨울에 내어준 울고 있었던 흔적들이다.

여기서 노루의 귀를 닮아서 노루귀라 이름 붙여진 꽃말을 생각해보면 그 운동력은 배가된다. 노루가 숲을 달리고 흰 귓속을 채워가는 수많은 소리들이 귓속에 “무거운 추”를 달고, 제 안에 숨겨둔 비밀스러운 방문 하나를 열어놓는 장면들을 생각해보자. 귀에 당도한 아픈 소식들 때문에 우리는 정지하고 있으면서도 공허한 어떤 흉터 부위를 자꾸만 만져볼 수밖에 없었다. 운동할 수밖에 없다. 분홍빛과 흰빛이 고루 포진되어 있는 꽃잎에는 숨은 향내처럼, 누구든 살아 있으라고 안부를 물으면서 말이다.

지난 한 해는 봄부터 일찍이 겨울이었다. 우리의 귀를 물들이는 포근한 소식이 당도하기를 바란다. 나는 언젠가 두꺼운 얼음 밑 부분에서 더 두꺼운 물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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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사이

너는 타오르는 잎을 보고 있었고 나는 너의 눈을 보고 있었다. 잎이 흔들린다. 네가 서 있는 하얀 벽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천천히. 위로 위로. 자라나듯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린다

백색의 슬픔을 기록하는 사람을 보았다

가지와 가지 사이에서

맞닿은 두 팔의 그림자. 넘치거나 모자라는 온기. 이웃의 창문을 탐하는 심정으로 너는 그늘을 쓰다듬는다. 벽은 번지고 이마는 물든다. 눈빛은 붉어지고 말이 쏟아지려는 찰나.

하늘이 깊어진다는 말

녹색과 녹색 사이에서

연약함이 자란다

- 이제니(1972~)


△ 과연 우리는 자라고 있을까. 성장하고 있을까. 한 해를 정리하면서 나무의 생장기를 가늠해본다. 천천히 중력을 거역하면서 자라고 있는 저 나무는 제 속에 나이테 하나쯤은 챙겨두었는지, 창밖에 나무를 보면서 어떤 연약함에 대해서도 또 생각해본다.

이 시에서는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의 수런거림,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그늘과 가지 사이에 스며드는 햇살, 하늘 등과 같은 교차하는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너와 나 사이에서 돋아나는 중간의 영역들을 낯설게 엮어간다. 물론 여기서 시인은 바라본 대상들을 희박하게 하면서, 너나 나의 관계를 쓰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두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격차나 그 중간을 쓰겠다는 정념을 표출한다. “백색의 슬픔을 기록하는” 일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타자를 이해할 수 없듯이 양극 간의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는 중간의 슬픔들을 체화하려는 과정이 아닐까. 이파리를 틔우고 가지를 뻗고 또 열매를 맺는 증거로 우리는 아주 연약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언젠가, 흰 벽에서 나무 그늘보다 따사로운 손이 빠져나오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내일 그 손을 잡을 것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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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 나는 당신의, 돛

그러나 바람은 불지 않는다

녹물 흘리는 덫,

닻이 내려지고 눈물이

눈물의 심연에 정박하는 동안

당신이 붙들어 맨 돛

그러나 당신의 나는 덫

날아가는 덫 눈물 흘리는 닻

나는 떠밀려가고 돛을 밀며

떠내려가네 돛,

바람은 불지 않는다

덫이 사로잡은 구멍들

태양들,

검은 갈고리로 써 내려간 닻의 기록

덫의 첨단에서 미끄러지는

돛,

나는 당신의 기우뚱한 닻

그러나 바람도 불지 않는다

정박하는 돛 풀려나는 덫

말에 얽힌 몸의

닻, 나는 당신의,

- 주원익(1980~)


아무래도 금욕주의란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도달한 욕망을 내버려두고 단지 지켜보는 것이다. 타자의 발견 또한 어쩌면 나와 당신 사이의 간격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나 바깥에 있는 그 모두를 용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나는 타자를 통해, 나로부터 잘 알지 못하는 나를 엿보게 된다.

주원익은 나와 당신 사이의 관계를 덫, 돛, 닻이라는 언어의 미끄러짐을 통해 재설정한다. 덫은 짐승을 꾀어 잡는 기구이고, 닻은 배를 멈추게 하는 갈고리이며, 돛은 바람을 받아 배를 움직이게 하는 넓은 천이다. 덫과 닻은 대상의 운동성을 멈추게 하는 것이고, 돛은 바람의 조건만 된다면 정지되어 있는 존재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운동 가능태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누차 언술되며 나와 당신 사이 움직임의 가능성들을 정지시킨다. 여기서 덫, 닻, 돛 그 모두가 속박당한 기표로 변이하면서, 나는 당신을 욕망하지만 욕망할 수도 없는 “말에 얽힌 몸”의 상태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권태 속에서도 깨어날 수 있는 이유는 정신이 모험으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험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나 바깥에 놓인 당신 때문이다. 그 때문이라도 우리는 또 살아가야겠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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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마침표, 어머니 마침표, 내가 부르는 대로 엄마는 방바닥에 엎드려 글씨를 쓴다 연필을 쥔 검지가 작은 산 같다 나는 받침 없는 글자만 불렀다 공책 뒷장에 눌러쓴 자국이 점자처럼 새겨졌다

여름밤의 어둠은

빛을 밀어낸 지우개 가루

연필 끝을 깨물었을 때

연필심의 이상한 맛을 혀로 느끼듯이

엄마는 자기 이름을 쓰고는 천천히 지워버렸다 - 신미나(1978~ )


제 이름을 쥐고 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남의 삶을 받아쓰면서 어딘가의 일부나 부분이 되며 살아가는 여성 주체들이다. 이 시는 우선 개인의 서정적 정황을 경유하면서 ‘쓰는 것’과 ‘받아쓰는 것’ 사이의 대립된 상념들을 부각시킨다.


어머니는 한글을 모르고 나는 그런 어머니께 한글을 가르친다. 평생을 누군가의 마침표나 받침으로 살아가셨던 어머니는 방바닥에 엎드려 글씨를 배운다. 신미나는 어머니의 작은 글씨 속에서 억압당한 여성 주체의 삶을 읽고 어머니가 쥔 연필 끝에서 작은 산을 발견한다. 제 안의 밑도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점자 같은 세월들이 공책 뒷장에 꾹꾹 남아 있다. 이미 가혹한 가족로망스 속에서 희생당한 어머니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희생으로서 다시 신성화된 주체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그런 연민마저도 억압을 내재한 현실이라 직관하며 지금 여기의 어머니들이 감당해야 했던 폭력의 무게를 여린 서정으로 들춘다. 어머니가 자기 이름을 쓰고 천천히 지워버리는 행위를 통해 제 이름 하나 써보는 것조차 용기를 필요로 하는 바깥의 질서들을 고발한다.

다시 우리에게 연필이 쥐어져 있다. 어떤 삶의 기록도 써내려갈 수 없다면 쥐고 있던 연필 끝을 깨물자. 연필심의 짜릿한 맛을 혀끝으로 느끼며, 그 모든 기록들을 전복시키고 싶은 말의 기원을 보자. 빈 공책에 꾹꾹 눌린 상처들이 드러나 있다.


박성준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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