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사랑을 만든다 애인은 못 만든다
밥으로 힘을 쓴다 힘 쓰고 나면 피로하다
밥으로 피로를 만들고 비관주의와 아카데미즘을 만든다
밥으로 빈대와 파렴치와 방범대원과 창녀를 만든다
밥으로 천국과 유곽과 꿈과 화장실을 만든다 피로하다 피로하다 심히 피로하다
밥으로 고통을 만든다 밥으로 시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으로 오르가즘에 오른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꿈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능변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희망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 이성복(1952~ )



“배고픔을 더는 견딜 수 없을 때면 입천장이 당긴다. 갓 잡은 토끼 가죽을 말릴 때처럼 누가 얼굴 피부를 아래로 팽팽하게 당기는 것 같다. 볼은 꺼지고 그 위로 창백한 솜털이 뒤덮는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읽으면 허기를 통해 밥의 진정한 위력이 느껴진다. “슈호프는 겉옷의 앞섶 호주머니에서 얼지 않게 흰 마스크에 싸놓았던 반원형의 빵 껍질을 꺼냈다. 그는 그것으로 정성스럽게 싹싹 훑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껍질에 묻어나온 죽 찌꺼기를 혀로 한 번 핥은 다음, 다시 그것으로 죽그릇을 닦았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역시 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느끼게 한다.

요즘은 굶는 사람이 없다지만 찬밥 먹는 사람과 더운밥 먹는 사람은 있다. 허겁지겁 때우는 밥이 있고 온갖 고명으로 장식한 밥이 있다. 밥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밥 때문에 생명을 빼앗기기도 한다. 어느 분야든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하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밥이었다. “밥은 희망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라는 말이 슬프게 다가온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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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행이 걸어간다 랄랄랄 시냇물 따라
3행이 걸어간다 겅중겅중 걸어간다
4행이 걸어간다 악기들과 걸어간다
5행이 걸어간다 콧노래 부르며 걸어간다
6행이 걸어간다 발 달린 가을도 걸어간다
7행이 걸어간다 하늘을 와삭와삭 베어먹으며
8행이 걸어간다 사과나무 걸어간다
9행이 걸어간다 포도나무 걸어간다
- 함기석(1966~ )




어린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경험하는 모든 것을 생동감 있고 재미있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어른들이 보기에 참 시시하고 별 볼 일 없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고 특별한 것이 된다. 너무 뻔해서 아무런 의문이 없을 것 같은 것도 아이들에게는 알고 싶은 것이 무궁무진한 의문이 되고 물음이 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구는 어른이 잃어버린 것, 어른이 다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글자들이 걸어가고 소풍 가는 놀이가 있는 이 시는 줄 서서 산으로 계곡으로 재잘거리고 노래 부르며 소풍 갔던 초등학교 때를 떠올리게 한다. 그 설렘과 행복이 글자가 되고 문장과 리듬이 되어 있다. 글자와 문장이 의미나 개념을 나타내려고 애쓰지 않으니, 저희들끼리 스스로 모여 놀며 시가 되고 있다. 어른에게 말은 기호이고 관념이지만 아이에게 말은 곧 사물이고 놀이다. 글자와 문장이 가는 곳으로 해바라기 꽃길과 시냇물과 발 달린 가을과 하늘, 과실나무들이 따라오지 않는가. 말하는 순간 허공에서 없어지는 말이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시인은 어른이 되어도 어린이를 잃지 않은 사람인가 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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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은 항상 얼굴뼈에 걸려 있는 돌이다,
만져본다, 태초의 시간이 얼굴에 걸어놓은 뼈를.
잎자루 같은 뼈가 두개골의 얼굴 속에 둥글게 내려와
너의 얼굴의 윤곽을 잡아준 턱뼈,
너는 비명을 지를 때 그 턱뼈를 아래로 내려뜨리며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인중 속의 뼈로 으르렁댄다
누가 너의 턱을 굵은 실로 꿰맸을까,
웃음이 터져 나오는 비통과 분노와 절망과 생존.
턱이 악어의 주어로서, 턱은 슬픈 감각의 영구치.
악어의 발바닥으로 얼굴을 만진다,
고갈되는 늪, 악어의 가뭄은 대체 누구의 나인가. -고형렬(1954~ )



‘악어의 주어’가 되는 턱을, 도망치는 동물을 단숨에 부수는 턱을, 악어는 어찌해야 할까. 물 위에 눈만 내놓고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사슴이나 누를 덮쳐 시뻘건 고깃덩이로 만드는 이 거역할 수 없는 천직을 악어는 어찌해야 할까. 악어에게 제 강력한 턱을 반성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왜 그렇게 생겨 먹었느냐고, 왜 그렇게 태어났느냐고, 따질 수 있을까. 생명을 부수고 찢는 턱의 명령을 어떻게 악어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수천만년 진화의 산물인 그 생김새와 습성을 반성할 수 없기 때문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악어는 악어다.

악어가 돼서는 안 된다고, 애초에 사슴이나 토끼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충고하거나 악어 없는 평화로운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떨까. 자연 생태계의 질서를 훼손한 것은 악어의 턱이 아니라 인간이다. 경쟁사회, 계급사회를 더 살벌하게 만드는 우리 본능 속의 악어도 약한 자를 누르고 경쟁자를 밀어내며 충실하게 제 본분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개발과 발전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지구 생태계를 마음껏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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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자동차 보닛이 하얗게 스쳐가는데요
바람은 하늘을
비눗방울처럼 가벼이 치켜올리는데요
사람들은 마주 웃고 햇빛은 창창한데요
나는 얼른 나무 그늘에 숨었어요
나는 입을 꼭 다물었어요
(잇새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자꾸만 눈물이 흘렀어요
내 얼굴은 으깨어진 토마토
어두워지기 전에는 한 발짝도
예서 나를 끌어낼 수 없을 거예요


(웃음은 웃음을 늘게 하고
눈물은 흘릴수록 많아지는 것)


맨 처음 만날 때의 그를 생각해보았어요
그때의 그가 나를
이렇게 울게 할 수 있었을까요?
두번째는? 세번째는요?

- 황인숙(1958~ )




일 년 중 가장 맑고 푸른 가을날에 그늘에 숨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입을 꼭 다물어도 잇새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슬픔은 웬일일까요. 시의 가장 오래된 소재, 아무리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 소재, 오랜 세월 반복되었지만 한번도 지루한 적이 없었던 소재, 바로 사랑 때문이지요. 햇살이 아무리 맑으면 뭐해. 눈앞이 캄캄한 걸. 눈물이 다 가려버리는 걸.

이 사랑이 처음엔 어땠는지 아세요?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둘러보았죠./ 수줍은 제비꽃에 벗은 완두콩./ 그에게는 아무짝에 소용없는 것./ 그럼그럼 딸길 살까 바나날 살까?/ 아니면 익살맞은 쥐덫을 살까?/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둘러보았죠./ 한 쾌의 말린 뱀, 목에 늘인 할아범./ 아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 뽀골뽀골 미꾸라지 시든 오렌지/ 아니면 특제실크덤핑넥타이./ 아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황인숙, ‘시장에서’) 뭐든 보이는 것은 다 그이를 위한 선물이었죠. 발바닥은 늘 땅에서 일 센티쯤 떠 있었고, 얼굴에 그려진 웃음은 잘 때도 지워지지 않았죠. 그 웃는 얼굴이 어떻게 으깨진 토마토가 되었을까요.

봐도 또 보고 싶은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대 갈기고 싶은 낯짝으로 바꿔버리는 이 마술은 대체 뭐죠?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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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비 잠깐 다녀가신 뒤
물기 질척한 보도블록에 지렁이 두 분 뒹굴고 계십니다

한 분이 천천히 몸을 틀어
S?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한 분,
천천히 하반신을 구부려
L……
하십니다. 그렇게 천천히
U?
하시면
C……
하시고
J?
하시면,
O…… 하시고

쬐한 가을 햇살에
붉고 탱탱한 몸 시나브로 마르는 줄 모르고
그분들, 하염없이 동문서답 중이십니다

그사이, 볼일 급한 왕개미 두 분 지나가시고
어디선가 젖은 낙엽 한 분 날아와 척, 붙으십니다

아아, 그때, 우리
이목구비 있었습니까?
주둥이도 똥구멍도 있었습니까?

그 진창에서 도대체
당신은 몇 번이나 C 하시고
나는 또 몇 번이나 S 하셨던 겁니까?



우리 삶을 지렁이로 압축시켜 보니, 이런 코미디가 없구나. 지렁이들의 S, L, U, C, J, O의 동문서답 안에는 에스라인 하고 브이라인 하느라 삶은 안 보이는, 얼짱과 몸짱 하느라 다른 것은 안 보이는 우리 모습이 보이는구나. 이목구비 있고 대뇌 소뇌 있고 주둥이 똥구멍 있으니, 우리는 지렁이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서로 S 하고 L 하느라, U 하고 C 하느라, 좌 하고 우 하느라, 나 하고 너 하느라, 옳음 하고 그름 하느라, 핏대 올리고 목소리 높이고 삿대질하고 울고 웃는 사이, 왜 사는가 묻는 물음은 점점 멀어지고 가을 한 햇살에 한평생은 금방 마르는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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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가을 하늘에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들판을 달려가며 나는 딸아이에게 은근한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발가벗긴 닭에 수십 개 주삿바늘을 꽂아 염장한 닭이 그렇게 먹고 싶디? 치킨을 먹으러 읍내로 나가는 길이다. 그래도 담배보다 해로울라고요. 고스란히 돌아온 카운터펀치. 그런 걸 먹고 싶은 입맛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라고 말하는 순간 느껴질 괴리감. 서둘러 입을 닫는다. 하긴 치킨 절교 두 달이면 많이 참은 셈이다.

치킨을 먹는 행위는 치킨이란 언어를 먹는 것이다. 세상에는 치킨으로 가득하고 나의 치킨 언어에 대한 금기가 시작되었다. 스마트폰, 햄버거, SNS, 피자, 결혼식 가기, 인터넷뉴스, 카드 사용, 치킨, 예술가, 안부전화, 동창회. 금기는 끝도 없이 나열된다. 무슨 심오한 철학이나 특별한 동기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다고 말하는 게 속 편하지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대개는 난감하다는 것. 웨딩마치 뒤에 곧바로 한복으로 갈아입으려 허둥대는 신랑 신부를 보아야 하는 민망함, 그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동참해야 하는 수상한 동질감, 도무지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치킨의 똑같은 맛, 덕지덕지 달라붙은 지저분한 광고 사이로 읽어야 하는 인터넷뉴스의 허망함, 사물의 불편함을 보지 못하게 하는 스마트폰의 편리함, 시를 쓰고 싶은 게 아니라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시인들. 더 나열하다가는 사회적 자폐로 오인할 테니 그쯤 해두는 게 좋겠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익숙하지만 낯선 사물의 언어를 거부하는 초조감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낡은 언어에 익숙한 몸이 먼저 반응하는 탓이다. 물론 치킨이 통닭의 언어를 낚아챘을 때 통닭이 좌절했던 것처럼 나 역시 언제든 좌절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약간의 갈등과 불편을 감내한다면 더 이상 사회적 억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말이란 게 원래 그렇다. 언어는 언제나 사물을 뭉뚱그려 하나의 표상만 보여준다. 사물에 대한 선택과 포기는 언어에 대한 선택과 포기이다. 치킨을 멀리하면 치킨으로 표상된 언어와 결별하는 것이다. 언어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행위를 중지한 마당에 그 언어의 의미조차 속절없다. 버려야 할 언어가 너무 많아질 언제쯤 아예 입을 닫고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전에 이런 변명을 딸에게 들려주고 싶다. 언어에 익숙해지면 사물의 뒤쪽을 보는 눈을 닫아버리거든. 육회로 나온 고기가 냉동차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바로 그 고기라는 사실을 알고도 육회를 먹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세계관을 지닌 정치가가 제시하는 달콤한 정책에 맥없이 지지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지. 정치와 경제와 사회는 그것이 지시하는 말처럼 언제나 그렇게 굴러갈 거라고 믿게 되는 거지.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체념한 구조주의자가 되어버렸단다.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보수적인 편견이 몽땅 구조로 귀결되고 말듯이 제도와 구조의 견고한 틀이 생물학적 개인을 사회적 삶으로 분리시킨 바로 그 공간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이지. 거기서 빠져 나오려면 사물의 언어를 버릴 수밖에 없어. 치킨처럼 말이지.

그렇지만 가끔 외면했던 언어들과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인터넷에 접속해 뉴스를 확인해야 할 때, 누군가에게 안부전화를 걸어야 할 때, 동창들과 만나야 할 때, 그리고 지금처럼 치킨을 먹어야 할 때. 금기는 해체되고 관계가 살아나고 언어는 생각과 의식을 다시 규정한다.

묻고 따지고 의심하며 비판하고 분노하고 체념하는 일련의 과정이 다시 시작된다. 그랬다. 처음부터 언어의 금기는 느슨한 구속력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애써 마련한 금기의 언어조차 일상의 삶에 주어진 일탈의 짧은 만족을 위해 마련된 장치에 불과했다는 미심쩍은 사실이 다시 드러난다.

그날 작은 가게에 들어가 우리는 절인 무와 콜라를 앞에 두고 흐뭇한 표정으로 프라이드와 양념이 반씩 섞인 치킨을 먹었다.


김진송 | 목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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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커가는 아이의 치수에
맞춰 얼마나 많은 기다림을 짜고
풀어내고 짜고 풀어내고 하였던가


세월이 흘러도 그 집은 오래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언젠가 나도 그 앞을 지나가다 불빛에 들킨 적 있다
거기 문밖에 누가 와서 울고 있니?
희망이냐, 희망이냐


불빛은 미동도 없이
고요히 타오르고 있었다
뜨개질은 멈출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때의 그 나지막한 읊조림을 무어라 할까
창문의 그 꺼지지 않고 옹송그리는 그림자를
세상의 모든 여자들의 입술을 지나가는 그들의 노래를


공장에서 니트 원단을 공업용 재봉틀로 박으면 수천벌 니트 제품이 단숨에 쏟아지는데, 이런 세상에 한 코 한 코 느리게 손뜨개질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뜨개질은 너무 느려서 코바늘이 한 코, 한 코, 씨실과 날실을 엮는 동안은 그 실이 무엇이 될지 보이지 않는답니다. 모자나 장갑, 목도리나 스웨터는 상상 속에 있지요. 뜨개질하는 동안 연인은 상상 속에서 그 목도리를 수백번 둘러볼 것이고 자식은 스웨터를 수천번 입어 보겠지요. 느릴수록 그 즐거움은 더 길어진답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은 제동이 걸리고 제 리듬이 회복되겠죠. 그러는 사이 뜨개질하는 여자들의 노심초사와 전전반측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비극과 꿰매도 너덜너덜한 마음과 날뛰는 심장은 느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 편안한 리듬을 회복하겠지요.

달은 늘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올려다보면 어느새 훌쩍 가 있지요. 뜨개질도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한참 있다 보면 조금씩 자라 있지요. 기억도 사랑도 아픔도 슬픔도 겉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열심히 움직인답니다. 내면의 상처도 그대로인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아무는 중이지요.

한 해에 가장 아름다운 보름달을 보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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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쥐가 나듯
방송원고를 이십년간 써댄
마누라 팔을 데리고가
식물학자한테 보여준다.


시 쓰다 말고 잠시 한눈판
이 손도 슬쩍 보여준다.


겨울나무들 영양제 꽂고 살고 있다.


죄송스런 이 손 식물원에 입원시킬까.


피로회복차 소주잔 들었던 이 손,
무거운 몸뚱이도 같이 들어올렸던
이 손, 마당에 내려놓고 싶다.


안구나 신장 따위 없는 겨울나무들
산소호흡기 매달고 사는 겨울나무들.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려 살고 있다.


시 쓰던 팔 내려놓을 곳,
눈 둘 바를 모르고, 멀뚱히 뜨고 있는
안구 기증할 곳이 보이지 않는다.




한 청년이 길을 가다가 무언가 떨어뜨린다. 지나가던 노인이 그것을 주워 청년을 부르지만 청년은 듣지 못한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이 있는 힘을 다해 느릿느릿 뛰어가 등을 칠 때까지 청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아무것도 듣지 않는 귀는 불안하다. 무엇으로든 즉시 채워지지 않는 침묵과 여백은 불안하다. 무언가 읽거나 보지 않는 눈은 불안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입은 불안하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 손은 불안하다. 스마트폰과 이어폰이 늘 붙어 있어야 하고 수다 떨 친구가 있어야 한다. 이목구비와 마음과 정신을 그토록 혹사하고도, 잠깐의 휴식은 벌 받는 것처럼 힘들고 불안하다.

아무 글도 쓰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잡거나 쥐지 않고, 나무는 온종일 전 생애를 공중에 팔을 든 채 서 있는데, 그렇게 팔을 들기만 하고도 많은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데, 이 눈, 이 머리, 이 팔, 이 마음은 왜 그렇지 못할까. 병이, 늙음이, 죽음이 강제로 내려놓아주기 전에, 먼저 자발적으로 내려놓을 수는 없을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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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는

누군가
나보다 먼저 다녀간
흔적이 있다

- 장경린(1957~ )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은 이미 누군가가 했던 말, 오늘 내가 했던 생각은 누군가의 머리와 마음을 거쳐 갔던 생각,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이미 수많은 마음과 근육이 하고 또 했던 행동이다. 어젯밤 내가 꾸었던 꿈은 누군가가 꾸었던 꿈이고, 지금도 누군가가 꾸고 있는 꿈이다. 그 말, 그 생각, 그 행동을 마치 나인 것처럼 다른 누군가가 또 하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몸을 거쳐 갔던 고민과 슬픔과 괴로움과 분노와 좌절이 지금 내 몸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아무리 참고 통제하려고 해도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내 몸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감정이나 욕망을 경험할 때,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때,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과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될 때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느낀다. 그는 내 안에서 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내 감정과 감각과 의식과 무의식을 활동시킨다. 아버지, 할아버지, 그 윗대조의 수많은 선조들이 그가 시키는 대로 해왔을 것이고 그들 또한 내 안의 타자가 되어 그러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단수가 아니라 일인칭 복수이다.

지금 도저히 출구가 없을 것 같은 이 고민은 이미 누군가가 분노하고 소리 지르며 경험했던 고민이며, 앞으로 누군가가 똑같이 울며 한숨 쉬며 하게 될 고민이다. 나와 같은 고민을 했거나 하게 될 누군가에게 연민과 위로를 보낸다.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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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섶에서 쇳조각을 주워들자
주위 덩굴이 뿌리째 뽑혀 나왔다
이 쇳조각도
내년쯤엔 꽃망울 피우고 바람에 하느작거렸을 텐가
산길에 졸며 서 있는 전봇대
반은 나무가 되었다
두드려보면 오래 스민 수액이 찰랑거린다
딸애 머리에 들꽃을 꽂아주고도 모자라
토끼풀로 팔찌 발찌를 엮었다
사람이 꽃으로 피는 건 백년도 안 걸린다
산자락을 넘어선 바람이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물속을 헤엄친다
겨우 한나절 동안 이 별에서 생긴 일이다





“죽음이 저렇게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런던교를 가득 메우며 지나가는 인파를 보고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시 ‘황무지’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그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자 이렇게 묻는다. “자네 밀라에 해전 때 나와 같은 배에 있던 친구로군!/ 자네가 작년에 정원에 심었던 시체에선/ 싹이 트기 시작했던가? 올해도 꽃이 필까?” 그 많은 사람들이 백년도 안되어 풀꽃이나 나무와 한몸이 되다니!

사람이 죽어 꽃으로 피어나듯이 나무 전봇대도 썩으면 거름이 되어 꽃 피고 잎 다는 나무가 될 것이다. 쇳조각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분해되고 양분이 되어 풀꽃으로 돋아날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 모든 일이 “겨우 한나절 동안 이 별에서 생긴 일”이라고 했을까? 우주 공간에 시공간과 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듯이 이 지구별에도 생명과 죽음을 빨아들이고 지수화풍의 인연으로 뒤섞고 생사를 순환하게 하는 블랙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나절 동안 딸애와 산책하고 놀면서 그는 이 블랙홀의 힘을 느낀다. 상상 속에서는 이 모든 일들이 한나절 아니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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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위에 물 아래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수부(水夫)는 시체를 건지려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가
호수 밑바닥에 소리 없이 점점 불어나는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버려진 태아와 애벌레와
더러는 고양이도 개도 반죽된
개흙투성이 흙탕물 속에
신발짝, 깨진 플라스틱통, 비닐조각 따위를
먹고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갈수록 시체처럼 몸집이 불어나는 무덤을
본다 폐수의 독에 중독된 채
창자가 곪아가는 우울한 쇠우렁이를
물가에 발상했던 문명이
처리되지 않은 뒷구멍의 온갖 배설물과 함께
곪아가는 증거를

호수를 둘러싼 호텔과 산들의 경관에
취하면서 유원지를 향해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계절이다. 아름답고 재미있는 휴양지를 찾느라 분주할 때다. 즐거운 휴식을 위해 정말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불편하게 썩은 내부를, 구역질나는 환부를 투시경으로 보듯 불편하게 까발려서 보여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자연과 사회는, 삶과 현실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보면,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시는 고발이 아니라 질문이다. 왜 점점 아름다움이 많이 소비되는가. 왜 갈수록 디자인과 이미지가 중요해지는가. 왜 포장은 내용물에 비해 턱없이 커지고 화려해지는가. 왜 말은 그토록 매끄럽고 기름지며 많은 장식이 달리는가. 왜 갈수록 법은 정교해지고 제도는 복잡해지는가. 이 시는 이런 불편한 질문을 회피하고 편안하고 좋은 것만 보려는 이들에게 충격을 주는 몽둥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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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산

둥글게 휜 풀잎의 둥긂
둥긂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산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산 메아리 속으로
먼 훗날 살 집을
걸려 보낸다

둥글게 휜 풀잎의 둥긂
둥긂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




△ 혹독한 가뭄을 견디느라 잎이 마르거나 죽어가는 가로수들이 종종 보인다. 하지만 여름산의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다. 마른장마가 끝나 세수를 하고 난 듯 깨끗해진 여름산. 둥근 것들은 더 둥글어지고 푸른 것들은 더 푸르러지고 투명한 것들은 더 투명해진 여름산. 가뭄에 거칠어졌던 피부가 되살아나 매끈매끈해지는 느낌으로, 싱싱한 푸른빛으로, 바람에 살랑거리는 풀나무들이 대견하다. 제각기 휘어지고 구부러진 둥긂의 여유와 탄력을 누리는 잎들과 가지들이 더 사랑스럽다.

산과 바다가 부르니 도시는 텅텅 비고 고속도로와 공항은 붐빌 것이다. 하지만 불황이 깊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푸른 바다와 맑은 계곡을 달력 그림처럼 쳐다봐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피서 갈 여유가 없더라도, 시장이나 일터나 지하철이나 복잡한 거리에서도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산 메아리 속”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마음에 “둥글게 휜 풀잎의 둥긂”을 불러올 수 있다면, 거기서 상상으로 지은 물소리, 바람소리, 매미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일상은 얼마나 풍요로워지고 넓어질 것인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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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의 합리적인 기준을 설정한다는 전제하에서 ○○해고제 도입은 바람직하다. … ○○해고제는 그간 대법원에서 일관되게 나오던 판례를 법제화한 것에 불과할 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일반해고 도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드는 논리와 많이 닮아 있는 위 얘기는 어디서 누가 한 말일까? 놀라지 마시라. 무려 19년 전인 1996년 12월5일, 노동관계법 토론회에서 당시 김영배 경총 상무가 ‘정리해고제’ 도입 필요성을 설명한 내용이다.

꼭 3주 뒤인 12월26일, 김영삼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새벽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자, 그렇다면 19년 전에 도입된 정리해고는 과연 대법원 판례를 단순히 법제화한 것에 불과했는가? 해고의 합리적 기준을 마련해 억울한 노동자들을 구제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안다. 정리해고라는 말도 잘 몰랐던 기업들조차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정리해고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 한마디에, 희망퇴직·권고사직으로 회사를 떠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19년 사이 김영배 상무는 경총의 상근 부회장으로 승진했지만, 수백만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사이 대법원 판례는 더 보수화되어 2002년에는 미래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리해고도 정당하다고 판시했고, 지난해 쌍용차 대법원 판결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며 칼자루를 기업에 완전히 쥐여주고 말았다. 정리해고 법제화 이후 해고의 기준은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해왔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공공부문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와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이 4일 국회 정론관에서 정부의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추진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_강윤중 기자




한국의 노사관계는 1996년 정리해고 도입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한국 사회는 ‘우울한 격변’을 겪지 않았던가. 평생직장이란 단어는 잊혀졌고, 비정규직·저임금·실업과 고용불안이 사회 전반을 휘감게 된다.

19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똑같은 거짓말을 듣는다. “취업규칙 관련 대법원 판례를 가이드라인으로 정하자는 것일 뿐인데 왜 호들갑이냐, 해고 기준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도 유리한 것 아니냐, 오히려 늘어가는 해고 관련 법적 분쟁을 줄여줄 것이다.”

이제 사기 좀 그만 치자. 이런 내용이 제도화되면 ‘일반해고’라는 말도 잘 몰랐던 사업장에서 직무평가를 핑계로 인력감축에 나설 게 분명하다. 그냥 쫓겨날래, 한 푼이라도 챙겨서 나갈래 이런 공포를 조장해 희망퇴직·명예퇴직도 성행할 것이다. 법적 분쟁이 줄어들기는커녕 일반해고 관련 소송은 늘어날 것이고, 법원에서 보수적인 판례 하나만 나와도 해고 기준을 더 완화하려고 덤빌 것이다.

취업규칙 변경 역시 임금피크제만을 노린 것이 아니다. 더 낮은 임금체계, 특히 직무·성과급과 연봉제 도입으로 연공급·호봉제라는 단어를 잊게 만드는 수단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라는 대법원 판례 문구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또다시 한국 사회를 ‘심각한 우울증’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가증스럽게도 정부는 이 모든 것이 청년실업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에코 세대’라 불리는 현재의 청년들은 부모 세대가 겪은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의 아픔을 함께 경험했다. 대법원 판례를 제도화하는 것일 뿐이며 해고의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거짓말을 ‘에코(메아리)’처럼 또다시 듣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와 에코 세대를 이간질하려는 농간에 맞서 분노의 화살은 다른 쪽을 향해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장·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 그때보다 수십, 수백 배의 이윤을 벌면서도 호시탐탐 해고와 비정규직을 늘리려는 자들 말이다. 임금피크제가 아니라 이윤피크제를 실시하라고, 그동안 벌어먹은 수백 조원의 이윤에 세금을 매기라고, 그 돈으로 공공부문부터 청년들에게 정규직 일자리를 제공하라고 말이다.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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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의 후원 아래
수평선으로부터 도움닫기를 해서
백만 번 뒤집혔다 천만 번 되살아나
이제 막 백사장으로 착지하는 파도를
한 인간이 무한을 고정시킨 시선으로
묵묵히 애무하는 순간의 영원이여―
심장이 장엄해지도록 그대
하늘 눈동자 열리는 소리 들리지 않느냐




△ 너울이 일어 물로 된 고분군이 내 앞에서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을 보았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모습은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를 시시각각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고 내 인생은 순간이었다. 바다는 볼 때마다 처음 보는 바다이다. 지난번에 봤기 때문에 싫증나는 바다란 없다. 어느 곳에서 보는 바다이건 생긴 건 똑같지만, 그 안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원시적인 힘, 쉬지 않고 출렁거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물결은 다 다르다.

백만년 전의 바다나 지금 바로 눈앞에서 보는 바다 또한 다르지 않다. 천만년 전에도 파도는 저 힘, 저 생동감, 저 동작으로 해안에 부딪치며 일어서고 흩어졌을 것이다. 생동하는 그 힘과 본능이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바다는 우리 앞에서 출렁이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백만 번 뒤집혔다 천만 번 되살아나/ 이제 막 백사장으로 착지하는 파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원시 세계를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기에 막힌 도로와 불편한 숙박을 감수하고라도 근육질 바다의 힘으로 더위를 씻고 싶지 않겠는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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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떠났으므로

네가 떠났으므로
네가 떠났으므로
꽃이 필 필요가 없다

네가 떠났으므로
해가 질 필요가 없다

네가 떠났으므로
눈물 흘릴 필요가 없다

네 눈으로 보았고
네 목소리로 말했고
네 마음으로 느꼈고
네 입맛으로 먹었고
네 말로 나는 살았다
네가 떠났으므로
나는 죽을 수도 없다

네가 떠났으므로
나는 이미 내가 아니기에

남은 건 다음 생이기에





△ 사별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연애시로구나. 다시는 너를 볼 수 없다는 것, 너를 만질 수 없다는 것,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 그 숨 막히는 안타까움이 사랑을 가장 뜨겁게 완성하는구나. 아무도 죽어가는 이의 마음으로 들어가 죽음을, 그 두려움과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 없다. 죽음은 깜깜한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혼자 겪어야 하는 일이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이 끔찍한 공간이 슬프게도 사랑의 순도를 가장 높이 끌어올린다. 살아남은 이들은, 그들의 사랑은, 죽을 수 없을 것 같고 숨 쉬고 있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혹독한 시간을 감당해야만 한다.

행사와 모임을 취소시키고 상점과 거리를 텅텅 비게 했던 메르스가 그 위력을 다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와 세월호가 지나간 자리같이, 메르스도 지나가면서 몸으로 죽은 이들과 함께 마음으로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 죽는 이들을 남겨 놓았다. 더 이상 꽃 피고 해가 뜰 필요 없는 날들을 남겨놓았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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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방울, 빗방울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 고층빌딩이나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간이 오그라들고 다리는 얼어붙는 것 같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으나 몸은 태어날 때부터 이 두려움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 한가운데로 던져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새겨져 있는지 모른다.

시인은 빗방울에서 모든 태어나는 것들이 겪는 낙하의 무게와 추락의 두려움을 본다. 정지해 있을 때, 가만히 있을 때 이 무게와 두려움은 그대로 나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움직일 때, 달릴 때, 집중하는 순간에는 사선의 가벼움으로 비껴간다. 낙하의 무게와 추락의 두려움을 가볍고 경쾌하게 비틀기. 수직을 수평으로 어긋나게 하여 일탈을 꿈꾸기. 그런 상상을 한다고 해서 삶과 현실이 바뀌겠는가.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조건, 그 크고 막막한 두려움을 비틀어 놀이로 만들고 노래로 부르면 즐거움이 생기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길 것이다. 가볍고 경쾌한 사선을 발견하는 눈썰미가 아름답다. 가뭄이 참 길다. 빗방울, 빗방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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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나무에게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걸어 나와라
피 흘려라
푸른 심장을 꺼내 보여다오
해마다 도로 젊어지는 비밀을
나처럼 언어로 노래해 봐
네 노래는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너무 아름답고 무성해 나의 시 속에 숨어 있는
슬픔보다 더 찬란해
땅속 깊은 곳에서 홀로
수액을 끌어올리며 부르던
그 노래를
오늘은 걸어 나와
나에게 좀 들려다오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 문명 이전의 사람들,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나무와 자연스럽게 대화했다고 한다. 나무를 베려 하면 나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태풍에 나무가 뽑힐 때는 밤새도록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꺾으면 아이의 팔을 꺾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무를 거꾸러뜨리는 것은 어머니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단다(제임스 프레이저, <황금가지>).

연을 자원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이 나무를 목재로 여긴 후 인간이 나무와 소통하는 능력은 사라졌다.

시인은 나무와 교감하고 그 말을 번역하는 사람이다. 옛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귀와 마음과 영혼을 조금이라도 회복해야 나무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나무의 말을 듣는 귀는 눈에도 있고 피부에도 있고 심장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다. 온몸으로 귀 기울여도 나무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사람이 나무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사람 속으로 들어와 말을 걸 때만 나무의 말이 들리게 된다.

나무를 가공하고 이용하는 자에게,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나무는 결코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붉은 피가 투명한 수액이 되고 붉은 심장이 ‘푸른 심장’이 되도록 사람이 나무만큼 낮아져야 나무는 비로소 말을 걸어오게 된다. 시보다 슬픈 가로수의 슬픔이 온몸에 들려오게 된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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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끝에 박힌 눈

깨진 유리컵에 베인 손가락
점자책을 더듬을 때 아파서
며칠째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내 손가락 끝에 박힌 눈

본 적 있다 이맘때쯤, 그 봄날
베인 상처를 파고드는 소독약에
자르르 퍼지는 통증처럼
한나절 봄비 내린 후
대지에 돋아나던 새싹들

그 푸른빛의 살점들
떠오르는 햇볕 한 줌이라도 더
부서지는 저녁놀 한 줌이라도 더
동공 속에 담으려다가 끝내는
두 눈처럼 꽉 닫혀버린 창문 밖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재잘대는 새들처럼
저마다 소리 내고 만져지는 건
그만큼 통증을 삼킨 상처다

거기서 솟아오른 살점들이다




△ 시각장애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눈이 손가락에 달린 사람이구나. 시력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손가락에 돋아나는 것이구나. 서른 살에 시력을 잃은 손병걸 시인은 손가락으로 책을 읽으며 시를 써왔다. 손가락의 눈에 점자 하나하나는 밤하늘의 별과 같아서 점자책을 펼치면 별들의 이야기가 와르르 쏟아져 ‘빛의 경전’이 된다고 그의 시는 말한다. 손가락 눈은 상상력을 달고 퍼져 나가 산과 나무, 꽃과 새, 물과 구름 등 세상의 온갖 ‘살점들’을 만지고 껴안는다. 닫힌 눈의 절망과 어둠의 통증을 겪어서 알고 있기에 손가락 눈은 세상의 상처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의 시 쓰기는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둠 속/ 비루한 생활의 문을 열고/ 빛나는 경전을 집필하는 것’이 된다. 시를 쓰며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고 할 만큼 그에게는 여유와 유머가 생겼다. “촉각은 제한적이지만 가식이 통하지 않는다. 손으로는 가짜 표정을 지을 수 없다. 촉각으로는 섣불리 전체를 판단할 수 없기에 항상 겸손해진다.” 다큐멘터리영화 <달팽이의 별>에 출연했던 시청각중복장애인 조영찬씨의 말이다. 만진 만큼만 보는 손가락 눈은 정직하고 겸손하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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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

드디어 몸은 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슬픔임을 나는 안다
손끝에서 실타래처럼 엉켰다가
다시 풀리는 말
두 손을 포갰다가 뒤집고
구부려 얼굴을 만졌다가는
가슴을 치는 말
나는 언제나 저 들리지 않는 몸의 말에 무릎 꿇어왔다
터질 듯 입 다문 말이 있어
대화를 포기하고
몸속으로 들어가 돌아눕는 말
몸은 이제 몸으로도 말하지 않는다
변명은 끝났다, 나는
갈라지고 끊어진 발음으로 새어나오지 않는 슬픔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몸을 쥐어짜서 마음의 눈빛들을 뽑아내고 싶은 자
마음을 쥐어짜서 붉은 혀의 목청을 꺼내고 싶은 자
울지 않는 슬픔은 믿을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저 발설되지 않는 몸의 말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도 귀로 듣지 못했다
내 심문이 불러내던 내 모든 수화들을
수화 속에 숨은 찢긴 마음,
자백이라곤 모르는
금간 진실들을


△ 초보 엄마는 갓난아기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어 쩔쩔 매는 일이 종종 있지요. 몸이 하는 말을 사람의 말로 해석하려니 힘들 수밖에 없지요. 대화할 때 상대방의 표정이나 억양 속에 숨겨진 말을 알아듣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알아듣기 힘든 말은 내 몸속에 있는 말이 아닐까요. 가족의 죽음이나 큰일을 겪을 때, 내 몸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내 안에서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 느낌, 그 실체에는 정확한 이름이 없지요. 슬픔이나 괴로움 같은 상투적인 이름을 붙이면 몸속의 생생한 사건들은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하지요.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게 고작이지요. 시인은 몸속에서 터져 나올 듯 안 나오는 그 말을 꺼내려는 사람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실체에게 이름 붙이려는 사람입니다. 침묵으로 몸짓 언어로 말하려 한다는 점에서 시는 ‘수화(手話)’에 가깝습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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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첩

도장을 어디다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광고
구름을 어디다 띄웠는지 유리창을 어디다 달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


손바닥에 적기를 잊어버려
연인도 바다도 다 그냥 지나쳤다
발꿈치에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새 구두가
약국도 그냥 지나쳤다


시간도 적는 걸 잊자 한 달 내내
양파가 짓물렀다
토끼똥이 한가득씩 어깨로 쏟아졌다


때론 살아 있다는 것도 깜박 잊어버려
살지 않기로 한다


다만 슬픔만은 어디에 적어 두지 않아도
목공소 같은 몇만 번의 저녁과
갓 낳은 계란 같은
눈물 자국을
어디에고 남기고 또 남긴다


자주 다니던 지하철도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한참 가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아, 1호선에는 동대문운동장역이 없구나! 머리와 발이 다 외웠다고 생각하고 습관이 이끌어주는 대로 편하게 갔다가는 손발이 고생하기 십상이다. 지갑을 집에 두고 나왔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에야 재킷을 바꿔 입고 나왔다는 게 생각난다. 약속은 겹치거나 지나친 후에야 확인되곤 한다. 밀려오는 일과 빠르고 복잡한 일상을 다 담기에는 뇌의 용량이 턱없이 작은 것 같다.

사는 것조차 잊어버려 살지 않기로 하다니! 얼마나 유쾌한 농담인가. 나를 들들 볶아대는 삶에 대한 얼마나 귀엽고 소심한 복수인가.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허점을 비틀고 꼬아서 놀지 않으면 삶이 무심코 주는 그 많은 자잘한 좌절을 어찌 다 감당하겠는가.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 브레이크를 걸고 잠깐이라도 웃지 않으면 어찌 숨 한번 시원하게 쉬겠는가. 짜증과 스트레스를 필사적으로 웃음과 카타르시스로 만드는 시가 가끔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김기택 시인 | 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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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