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섶에서 쇳조각을 주워들자
주위 덩굴이 뿌리째 뽑혀 나왔다
이 쇳조각도
내년쯤엔 꽃망울 피우고 바람에 하느작거렸을 텐가
산길에 졸며 서 있는 전봇대
반은 나무가 되었다
두드려보면 오래 스민 수액이 찰랑거린다
딸애 머리에 들꽃을 꽂아주고도 모자라
토끼풀로 팔찌 발찌를 엮었다
사람이 꽃으로 피는 건 백년도 안 걸린다
산자락을 넘어선 바람이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물속을 헤엄친다
겨우 한나절 동안 이 별에서 생긴 일이다





“죽음이 저렇게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런던교를 가득 메우며 지나가는 인파를 보고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시 ‘황무지’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그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자 이렇게 묻는다. “자네 밀라에 해전 때 나와 같은 배에 있던 친구로군!/ 자네가 작년에 정원에 심었던 시체에선/ 싹이 트기 시작했던가? 올해도 꽃이 필까?” 그 많은 사람들이 백년도 안되어 풀꽃이나 나무와 한몸이 되다니!

사람이 죽어 꽃으로 피어나듯이 나무 전봇대도 썩으면 거름이 되어 꽃 피고 잎 다는 나무가 될 것이다. 쇳조각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분해되고 양분이 되어 풀꽃으로 돋아날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 모든 일이 “겨우 한나절 동안 이 별에서 생긴 일”이라고 했을까? 우주 공간에 시공간과 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듯이 이 지구별에도 생명과 죽음을 빨아들이고 지수화풍의 인연으로 뒤섞고 생사를 순환하게 하는 블랙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나절 동안 딸애와 산책하고 놀면서 그는 이 블랙홀의 힘을 느낀다. 상상 속에서는 이 모든 일들이 한나절 아니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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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위에 물 아래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수부(水夫)는 시체를 건지려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가
호수 밑바닥에 소리 없이 점점 불어나는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버려진 태아와 애벌레와
더러는 고양이도 개도 반죽된
개흙투성이 흙탕물 속에
신발짝, 깨진 플라스틱통, 비닐조각 따위를
먹고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갈수록 시체처럼 몸집이 불어나는 무덤을
본다 폐수의 독에 중독된 채
창자가 곪아가는 우울한 쇠우렁이를
물가에 발상했던 문명이
처리되지 않은 뒷구멍의 온갖 배설물과 함께
곪아가는 증거를

호수를 둘러싼 호텔과 산들의 경관에
취하면서 유원지를 향해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계절이다. 아름답고 재미있는 휴양지를 찾느라 분주할 때다. 즐거운 휴식을 위해 정말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불편하게 썩은 내부를, 구역질나는 환부를 투시경으로 보듯 불편하게 까발려서 보여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자연과 사회는, 삶과 현실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보면,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시는 고발이 아니라 질문이다. 왜 점점 아름다움이 많이 소비되는가. 왜 갈수록 디자인과 이미지가 중요해지는가. 왜 포장은 내용물에 비해 턱없이 커지고 화려해지는가. 왜 말은 그토록 매끄럽고 기름지며 많은 장식이 달리는가. 왜 갈수록 법은 정교해지고 제도는 복잡해지는가. 이 시는 이런 불편한 질문을 회피하고 편안하고 좋은 것만 보려는 이들에게 충격을 주는 몽둥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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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산

둥글게 휜 풀잎의 둥긂
둥긂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산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산 메아리 속으로
먼 훗날 살 집을
걸려 보낸다

둥글게 휜 풀잎의 둥긂
둥긂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




△ 혹독한 가뭄을 견디느라 잎이 마르거나 죽어가는 가로수들이 종종 보인다. 하지만 여름산의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다. 마른장마가 끝나 세수를 하고 난 듯 깨끗해진 여름산. 둥근 것들은 더 둥글어지고 푸른 것들은 더 푸르러지고 투명한 것들은 더 투명해진 여름산. 가뭄에 거칠어졌던 피부가 되살아나 매끈매끈해지는 느낌으로, 싱싱한 푸른빛으로, 바람에 살랑거리는 풀나무들이 대견하다. 제각기 휘어지고 구부러진 둥긂의 여유와 탄력을 누리는 잎들과 가지들이 더 사랑스럽다.

산과 바다가 부르니 도시는 텅텅 비고 고속도로와 공항은 붐빌 것이다. 하지만 불황이 깊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푸른 바다와 맑은 계곡을 달력 그림처럼 쳐다봐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피서 갈 여유가 없더라도, 시장이나 일터나 지하철이나 복잡한 거리에서도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산 메아리 속”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마음에 “둥글게 휜 풀잎의 둥긂”을 불러올 수 있다면, 거기서 상상으로 지은 물소리, 바람소리, 매미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일상은 얼마나 풍요로워지고 넓어질 것인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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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의 합리적인 기준을 설정한다는 전제하에서 ○○해고제 도입은 바람직하다. … ○○해고제는 그간 대법원에서 일관되게 나오던 판례를 법제화한 것에 불과할 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일반해고 도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드는 논리와 많이 닮아 있는 위 얘기는 어디서 누가 한 말일까? 놀라지 마시라. 무려 19년 전인 1996년 12월5일, 노동관계법 토론회에서 당시 김영배 경총 상무가 ‘정리해고제’ 도입 필요성을 설명한 내용이다.

꼭 3주 뒤인 12월26일, 김영삼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새벽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자, 그렇다면 19년 전에 도입된 정리해고는 과연 대법원 판례를 단순히 법제화한 것에 불과했는가? 해고의 합리적 기준을 마련해 억울한 노동자들을 구제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안다. 정리해고라는 말도 잘 몰랐던 기업들조차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정리해고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 한마디에, 희망퇴직·권고사직으로 회사를 떠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19년 사이 김영배 상무는 경총의 상근 부회장으로 승진했지만, 수백만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사이 대법원 판례는 더 보수화되어 2002년에는 미래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리해고도 정당하다고 판시했고, 지난해 쌍용차 대법원 판결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며 칼자루를 기업에 완전히 쥐여주고 말았다. 정리해고 법제화 이후 해고의 기준은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해왔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공공부문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와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이 4일 국회 정론관에서 정부의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추진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_강윤중 기자




한국의 노사관계는 1996년 정리해고 도입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한국 사회는 ‘우울한 격변’을 겪지 않았던가. 평생직장이란 단어는 잊혀졌고, 비정규직·저임금·실업과 고용불안이 사회 전반을 휘감게 된다.

19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똑같은 거짓말을 듣는다. “취업규칙 관련 대법원 판례를 가이드라인으로 정하자는 것일 뿐인데 왜 호들갑이냐, 해고 기준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도 유리한 것 아니냐, 오히려 늘어가는 해고 관련 법적 분쟁을 줄여줄 것이다.”

이제 사기 좀 그만 치자. 이런 내용이 제도화되면 ‘일반해고’라는 말도 잘 몰랐던 사업장에서 직무평가를 핑계로 인력감축에 나설 게 분명하다. 그냥 쫓겨날래, 한 푼이라도 챙겨서 나갈래 이런 공포를 조장해 희망퇴직·명예퇴직도 성행할 것이다. 법적 분쟁이 줄어들기는커녕 일반해고 관련 소송은 늘어날 것이고, 법원에서 보수적인 판례 하나만 나와도 해고 기준을 더 완화하려고 덤빌 것이다.

취업규칙 변경 역시 임금피크제만을 노린 것이 아니다. 더 낮은 임금체계, 특히 직무·성과급과 연봉제 도입으로 연공급·호봉제라는 단어를 잊게 만드는 수단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라는 대법원 판례 문구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또다시 한국 사회를 ‘심각한 우울증’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가증스럽게도 정부는 이 모든 것이 청년실업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에코 세대’라 불리는 현재의 청년들은 부모 세대가 겪은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의 아픔을 함께 경험했다. 대법원 판례를 제도화하는 것일 뿐이며 해고의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거짓말을 ‘에코(메아리)’처럼 또다시 듣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와 에코 세대를 이간질하려는 농간에 맞서 분노의 화살은 다른 쪽을 향해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장·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 그때보다 수십, 수백 배의 이윤을 벌면서도 호시탐탐 해고와 비정규직을 늘리려는 자들 말이다. 임금피크제가 아니라 이윤피크제를 실시하라고, 그동안 벌어먹은 수백 조원의 이윤에 세금을 매기라고, 그 돈으로 공공부문부터 청년들에게 정규직 일자리를 제공하라고 말이다.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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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의 후원 아래
수평선으로부터 도움닫기를 해서
백만 번 뒤집혔다 천만 번 되살아나
이제 막 백사장으로 착지하는 파도를
한 인간이 무한을 고정시킨 시선으로
묵묵히 애무하는 순간의 영원이여―
심장이 장엄해지도록 그대
하늘 눈동자 열리는 소리 들리지 않느냐




△ 너울이 일어 물로 된 고분군이 내 앞에서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을 보았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모습은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를 시시각각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고 내 인생은 순간이었다. 바다는 볼 때마다 처음 보는 바다이다. 지난번에 봤기 때문에 싫증나는 바다란 없다. 어느 곳에서 보는 바다이건 생긴 건 똑같지만, 그 안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원시적인 힘, 쉬지 않고 출렁거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물결은 다 다르다.

백만년 전의 바다나 지금 바로 눈앞에서 보는 바다 또한 다르지 않다. 천만년 전에도 파도는 저 힘, 저 생동감, 저 동작으로 해안에 부딪치며 일어서고 흩어졌을 것이다. 생동하는 그 힘과 본능이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바다는 우리 앞에서 출렁이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백만 번 뒤집혔다 천만 번 되살아나/ 이제 막 백사장으로 착지하는 파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원시 세계를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기에 막힌 도로와 불편한 숙박을 감수하고라도 근육질 바다의 힘으로 더위를 씻고 싶지 않겠는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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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떠났으므로

네가 떠났으므로
네가 떠났으므로
꽃이 필 필요가 없다

네가 떠났으므로
해가 질 필요가 없다

네가 떠났으므로
눈물 흘릴 필요가 없다

네 눈으로 보았고
네 목소리로 말했고
네 마음으로 느꼈고
네 입맛으로 먹었고
네 말로 나는 살았다
네가 떠났으므로
나는 죽을 수도 없다

네가 떠났으므로
나는 이미 내가 아니기에

남은 건 다음 생이기에





△ 사별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연애시로구나. 다시는 너를 볼 수 없다는 것, 너를 만질 수 없다는 것,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 그 숨 막히는 안타까움이 사랑을 가장 뜨겁게 완성하는구나. 아무도 죽어가는 이의 마음으로 들어가 죽음을, 그 두려움과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 없다. 죽음은 깜깜한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혼자 겪어야 하는 일이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이 끔찍한 공간이 슬프게도 사랑의 순도를 가장 높이 끌어올린다. 살아남은 이들은, 그들의 사랑은, 죽을 수 없을 것 같고 숨 쉬고 있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혹독한 시간을 감당해야만 한다.

행사와 모임을 취소시키고 상점과 거리를 텅텅 비게 했던 메르스가 그 위력을 다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와 세월호가 지나간 자리같이, 메르스도 지나가면서 몸으로 죽은 이들과 함께 마음으로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 죽는 이들을 남겨 놓았다. 더 이상 꽃 피고 해가 뜰 필요 없는 날들을 남겨놓았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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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방울, 빗방울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 고층빌딩이나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간이 오그라들고 다리는 얼어붙는 것 같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으나 몸은 태어날 때부터 이 두려움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 한가운데로 던져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새겨져 있는지 모른다.

시인은 빗방울에서 모든 태어나는 것들이 겪는 낙하의 무게와 추락의 두려움을 본다. 정지해 있을 때, 가만히 있을 때 이 무게와 두려움은 그대로 나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움직일 때, 달릴 때, 집중하는 순간에는 사선의 가벼움으로 비껴간다. 낙하의 무게와 추락의 두려움을 가볍고 경쾌하게 비틀기. 수직을 수평으로 어긋나게 하여 일탈을 꿈꾸기. 그런 상상을 한다고 해서 삶과 현실이 바뀌겠는가.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조건, 그 크고 막막한 두려움을 비틀어 놀이로 만들고 노래로 부르면 즐거움이 생기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길 것이다. 가볍고 경쾌한 사선을 발견하는 눈썰미가 아름답다. 가뭄이 참 길다. 빗방울, 빗방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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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나무에게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걸어 나와라
피 흘려라
푸른 심장을 꺼내 보여다오
해마다 도로 젊어지는 비밀을
나처럼 언어로 노래해 봐
네 노래는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너무 아름답고 무성해 나의 시 속에 숨어 있는
슬픔보다 더 찬란해
땅속 깊은 곳에서 홀로
수액을 끌어올리며 부르던
그 노래를
오늘은 걸어 나와
나에게 좀 들려다오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 문명 이전의 사람들,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나무와 자연스럽게 대화했다고 한다. 나무를 베려 하면 나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태풍에 나무가 뽑힐 때는 밤새도록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꺾으면 아이의 팔을 꺾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무를 거꾸러뜨리는 것은 어머니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단다(제임스 프레이저, <황금가지>).

연을 자원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이 나무를 목재로 여긴 후 인간이 나무와 소통하는 능력은 사라졌다.

시인은 나무와 교감하고 그 말을 번역하는 사람이다. 옛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귀와 마음과 영혼을 조금이라도 회복해야 나무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나무의 말을 듣는 귀는 눈에도 있고 피부에도 있고 심장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다. 온몸으로 귀 기울여도 나무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사람이 나무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사람 속으로 들어와 말을 걸 때만 나무의 말이 들리게 된다.

나무를 가공하고 이용하는 자에게,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나무는 결코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붉은 피가 투명한 수액이 되고 붉은 심장이 ‘푸른 심장’이 되도록 사람이 나무만큼 낮아져야 나무는 비로소 말을 걸어오게 된다. 시보다 슬픈 가로수의 슬픔이 온몸에 들려오게 된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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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끝에 박힌 눈

깨진 유리컵에 베인 손가락
점자책을 더듬을 때 아파서
며칠째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내 손가락 끝에 박힌 눈

본 적 있다 이맘때쯤, 그 봄날
베인 상처를 파고드는 소독약에
자르르 퍼지는 통증처럼
한나절 봄비 내린 후
대지에 돋아나던 새싹들

그 푸른빛의 살점들
떠오르는 햇볕 한 줌이라도 더
부서지는 저녁놀 한 줌이라도 더
동공 속에 담으려다가 끝내는
두 눈처럼 꽉 닫혀버린 창문 밖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재잘대는 새들처럼
저마다 소리 내고 만져지는 건
그만큼 통증을 삼킨 상처다

거기서 솟아오른 살점들이다




△ 시각장애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눈이 손가락에 달린 사람이구나. 시력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손가락에 돋아나는 것이구나. 서른 살에 시력을 잃은 손병걸 시인은 손가락으로 책을 읽으며 시를 써왔다. 손가락의 눈에 점자 하나하나는 밤하늘의 별과 같아서 점자책을 펼치면 별들의 이야기가 와르르 쏟아져 ‘빛의 경전’이 된다고 그의 시는 말한다. 손가락 눈은 상상력을 달고 퍼져 나가 산과 나무, 꽃과 새, 물과 구름 등 세상의 온갖 ‘살점들’을 만지고 껴안는다. 닫힌 눈의 절망과 어둠의 통증을 겪어서 알고 있기에 손가락 눈은 세상의 상처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의 시 쓰기는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둠 속/ 비루한 생활의 문을 열고/ 빛나는 경전을 집필하는 것’이 된다. 시를 쓰며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고 할 만큼 그에게는 여유와 유머가 생겼다. “촉각은 제한적이지만 가식이 통하지 않는다. 손으로는 가짜 표정을 지을 수 없다. 촉각으로는 섣불리 전체를 판단할 수 없기에 항상 겸손해진다.” 다큐멘터리영화 <달팽이의 별>에 출연했던 시청각중복장애인 조영찬씨의 말이다. 만진 만큼만 보는 손가락 눈은 정직하고 겸손하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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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

드디어 몸은 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슬픔임을 나는 안다
손끝에서 실타래처럼 엉켰다가
다시 풀리는 말
두 손을 포갰다가 뒤집고
구부려 얼굴을 만졌다가는
가슴을 치는 말
나는 언제나 저 들리지 않는 몸의 말에 무릎 꿇어왔다
터질 듯 입 다문 말이 있어
대화를 포기하고
몸속으로 들어가 돌아눕는 말
몸은 이제 몸으로도 말하지 않는다
변명은 끝났다, 나는
갈라지고 끊어진 발음으로 새어나오지 않는 슬픔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몸을 쥐어짜서 마음의 눈빛들을 뽑아내고 싶은 자
마음을 쥐어짜서 붉은 혀의 목청을 꺼내고 싶은 자
울지 않는 슬픔은 믿을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저 발설되지 않는 몸의 말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도 귀로 듣지 못했다
내 심문이 불러내던 내 모든 수화들을
수화 속에 숨은 찢긴 마음,
자백이라곤 모르는
금간 진실들을


△ 초보 엄마는 갓난아기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어 쩔쩔 매는 일이 종종 있지요. 몸이 하는 말을 사람의 말로 해석하려니 힘들 수밖에 없지요. 대화할 때 상대방의 표정이나 억양 속에 숨겨진 말을 알아듣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알아듣기 힘든 말은 내 몸속에 있는 말이 아닐까요. 가족의 죽음이나 큰일을 겪을 때, 내 몸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내 안에서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 느낌, 그 실체에는 정확한 이름이 없지요. 슬픔이나 괴로움 같은 상투적인 이름을 붙이면 몸속의 생생한 사건들은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하지요.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게 고작이지요. 시인은 몸속에서 터져 나올 듯 안 나오는 그 말을 꺼내려는 사람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실체에게 이름 붙이려는 사람입니다. 침묵으로 몸짓 언어로 말하려 한다는 점에서 시는 ‘수화(手話)’에 가깝습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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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첩

도장을 어디다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광고
구름을 어디다 띄웠는지 유리창을 어디다 달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


손바닥에 적기를 잊어버려
연인도 바다도 다 그냥 지나쳤다
발꿈치에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새 구두가
약국도 그냥 지나쳤다


시간도 적는 걸 잊자 한 달 내내
양파가 짓물렀다
토끼똥이 한가득씩 어깨로 쏟아졌다


때론 살아 있다는 것도 깜박 잊어버려
살지 않기로 한다


다만 슬픔만은 어디에 적어 두지 않아도
목공소 같은 몇만 번의 저녁과
갓 낳은 계란 같은
눈물 자국을
어디에고 남기고 또 남긴다


자주 다니던 지하철도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한참 가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아, 1호선에는 동대문운동장역이 없구나! 머리와 발이 다 외웠다고 생각하고 습관이 이끌어주는 대로 편하게 갔다가는 손발이 고생하기 십상이다. 지갑을 집에 두고 나왔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에야 재킷을 바꿔 입고 나왔다는 게 생각난다. 약속은 겹치거나 지나친 후에야 확인되곤 한다. 밀려오는 일과 빠르고 복잡한 일상을 다 담기에는 뇌의 용량이 턱없이 작은 것 같다.

사는 것조차 잊어버려 살지 않기로 하다니! 얼마나 유쾌한 농담인가. 나를 들들 볶아대는 삶에 대한 얼마나 귀엽고 소심한 복수인가.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허점을 비틀고 꼬아서 놀지 않으면 삶이 무심코 주는 그 많은 자잘한 좌절을 어찌 다 감당하겠는가.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 브레이크를 걸고 잠깐이라도 웃지 않으면 어찌 숨 한번 시원하게 쉬겠는가. 짜증과 스트레스를 필사적으로 웃음과 카타르시스로 만드는 시가 가끔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김기택 시인 | 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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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나도 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모르겠는데요. 남들이 줄 끝에 서기에 나도 섰어요. 무슨 줄인가요? 잘 몰라요. 얼마나 기다리게 될까요? 글쎄요. 몇몇 여자들이 뭔가를 들고 가면서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90%라고 하지요? 왜 그렇게 한대요? 모르겠어요. 저는 처음인데요. 몇 시간 기다렸어요? 무작정 서 있었어요. 오가는 말들의 저 끝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를 안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네요.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이 누구인지, 무안할 정도로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기다릴 거예요?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무엇인데요? 글쎄, 기다려봐야 알 것 같아요. 그의 이름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에게 손을 흔들었던가 싶었다. 그때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왜요? 끝났어요? 300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네요. 무엇이었는데요? 앞쪽에서 누군가 물었다. 코끼리 삼겹살 아니었나요?


△ 아파트 청약 접수 현장에서, 전광판이 뜨거운 증권회사에서, 끝내주게 맛있다는 맛집에서, 꽉 막힌 주말도로에서 나도 저 긴 줄에 끼어 기다린 적이 있다. 이 줄에서 빠지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 휩쓸려갔다가 나중엔 왜 기다리는지 잊어버리고 기다린 시간과 인내심이 아까워 기다리기도 했고, 기다림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해서 기다리기도 했다. 이 맹목성과 저돌성과 욕망과 불안이 이렇게 재미있는 코미디인지 몰랐다. 이 우화는 아주 현실적이어서 내 불안과 두려움이 다 들키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삶, 남들과 다른 삶, 이 길이 맞는다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삶은 불안하다. 묻지 마 줄서기, 남들이 가는 길 무작정 따라가기, 대세에 묻어가기는 가장 편한 선택이 된다. 의심하고 묻는 일은 낭비가 된다. 그런 고민할 시간에 한 발이라도 먼저 가서 줄 서는 게 득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줄을 잘 설까. 대단한 선진 국민의 질서요, 엄청난 자발성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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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

큰누나가 시골집에 늙은 부모 둘만 사는 것이 보기에 적적했는지 기르던 강아지를 차에 싣고 왔다 몇 달을 어르고 달래도 눈이 오목한 강아지는 제 머리를 주지 않아 늙은 부모는 보송보송한 머리통 한번 쓰다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문간 옆에 쭈그리고 앉아 냉이를 다듬는데 가랑이 사이로 강아지가 쑥, 기어들어오더라 에그머니나, 어머니 가슴이 미어지더라 데려온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 하고 부르는 그 소리가 들렸다 한다 식구가 되기 위한 꼭 그만큼의 여물어진 시간과 눈짓, 오늘도 제 마음 다 준 강아지는 배를 걷어차여도 어머니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광고

- 고영민(1968~)


△ “식구가 되기 위한 꼭 그만큼의 여물어진 시간과 눈짓”이라는 구절에 자꾸 시선이 머문다. 새집에서 시간과 눈짓이 익을 때까지 강아지가 견뎌야 했을 두려움과 외로움의 ‘그늘’이 스며온다. 강아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저도 모르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무르익어 믿음으로 변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할머니가 아무리 걷어차도 할머니 가랑이 사이로 쑥 들어가고 싶어지는 행복한 순간을. 몸을 가지고 있는 한, 환경과 사회와 세상을 제 몸에 받아들이기까지 겪어야 하는 시간과 마음고생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낯선 사람이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기까지, 새 직장에 새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까지, 사람들 마음에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그늘’이 지나갔으리라. 그 어두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덤덤한 척하기도 했으리라. 무심히 웃고 있는 지금도 내가 모르는 마음 하나는 몰래 홀로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어느날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외로운 존재라는 걸, 자신의 삶에 마음에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무서운 영역이 있다는 걸, 타인이 두려워도 혼자서는 못 산다는 걸,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은 목숨 걸고 사랑을 찾아다니게 되어 있다는 걸.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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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다

채찍 휘두르라고
말 엉덩이가 포동포동한 게 아니다.

번쩍 잡아채라고
토끼 귀가 쫑긋한 게 아니다.

아니다.
꿀밤 맞으려고
내 머리가 단단한 게 아니다.

- 이정록(1964~ )


△ 중·고교 시절에 엉덩이와 머리는 늘 매에게 맡겨 놓고 지냈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때릴 곳을 찾으려면 엉덩이와 머리만큼 넉넉하고 믿음직한 자리가 없을 것이다. 몸의 다른 자리들은 때려서는 안될 수많은 이유와 핑계를 갖고 있는데, 엉덩이와 머리는 때리는 입장에서 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는 자리이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은 운동화로 머리를 때렸다. 고무라고 얕잡아 봤다가 돌로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때리는 기술의 발전을 실감했다. 맘껏 때려도 부상이나 후유증이 적으니 엉덩이와 머리는 얼마나 대견스럽겠는가. 머리와 엉덩이는 우리 몸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며 겸손한 자리인 것 같다.(주먹으로 머리를 맞으면 달기는커녕 아프기만 한데, 왜 ‘꿀밤’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이건 순전히 때리는 사람의 쾌감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제라도 매 맞는 머리들이 합심하여 ‘주먹밤’이나 ‘딱밤’ 같은 제 이름을 찾기 바란다.)

‘아니다’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양심적인 입들이 틀어 막히고 용감한 정의는 죽거나 갇히는 고초를 당했는가. 이 까칠하고 위험하고 사연이 많은 말을, 힘을 함부로 휘두르는 자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고 귀여운 어린이의 입으로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심술궂고 맛있는 어린이의 말로 세상의 어른과 선생들에게 따끔한 매를 줄 수 있을까. 이 동시는 듣는 이를 웃게 만들면서도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의 돌팔매처럼 야무지다. 엉덩이와 머리처럼 말과 토끼도 제 억울한 처지에 대해 발언할 기회가 없었을 텐데, 이번 기회에 시가 대변해 줘서 다행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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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

목판을 사서 페인트 칠을 하고 벽돌 몇 장씩을 포개어 책장을 꾸몄다. 윗장에는 시집, 중간장에는 전공, 맨 아랫장에는 저널이니 화집을 꽂았다. 책을 뽑을 때마다 책장은 아직 나처럼 흔들거린다. 그러나 책장은 모든 사람의 과거처럼 온 집안을 채우고 빛낸다.

어느 날 혼자 놀던 아이가 책장을 밀어 쓰러뜨렸다. 책장은 희망 없이 온 방에 흩어지고 전쟁의 뒤끝같이 무질서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가장 안전한 자세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나는 벽돌을 쌓고 책을 꽂아 다시 책장을 만들었다. 아이는 이후에도 몇 번 쓰러뜨리겠지. 나는 그때마다 열 번이고 정성껏 또 쌓을 것이다. 마침내 아이가 흔들리는 아빠를 알 때까지, 흔들리는 세상을 알 때까지.

- 마종기(1939~ )


△ 벽돌과 목판으로 쌓아 책을 뽑을 때마다 흔들리는 책장은 미국 이민자로 살면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시인의 삶과 내면 상태를 보는 것 같다. 쓰러지는 것, 포기하는 것, 그래서 갈등과 고민을 단번에 끊어버리는 것, 그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자세”이다. 그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의 쾌감은 달다. 할까와 말까 사이에 있을 때, 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그것을 단번에 무력화시킬 위협 사이에 있을 때,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해야 하는 이유보다 점점 늘어날 때, 그 유혹에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 이민자로 살게 되었고 조국으로 들어오려는 시도도 좌절되었던 시인은 마음으로는 여러 번 쓰러져보았을 것이다.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쓰러질 때마다 “열 번이고 정성껏 또 쌓을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흔들림과 쓰러질 가능성 위에 선 채, 곧 무너질 것 같은 불안과 긴장을 품고 있는 것이 삶이다. 평범해 보이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는 무너져본 자리에 남은 상처와 그것을 딛고 일어선 흔적이 있을 것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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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과

개기월식;
양팔을 벌리고 달의 테두리를 따라 걸었다
무표정의 뿔이 솟았다
모두 짙어질 때를 기다려 혼자 옅어졌다
눈과 눈의 먼 악수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와
겁에 질려 모두 먹어치웠다
성실한 마음;
층층계 모서리에 거미가 줄을 쳤다
빈 거미줄에 마른 나뭇잎이 걸린다
거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푸른 불꽃;
길게 혀를 빼물고 눈부시게
잔다
의자가 놓인 위치는 의자의 기분을 설명한다;
사물은 입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호감을 샀지만
인간은 사물을 사랑하므로
사물의 입을 찾아주었다

- 유계영(1985~)


삶에서 명쾌한 답이 존재한다면, 그 답을 위해 우리가 한 생애를 복무할 수밖에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본질과 현상, 절대와 상대, 필연과 우연 등등의 이분법적 사고 논리로 세계를 판단해 온 오랜 관습이나 이미 신화화된 것들이 그러하고, 그런 토대들을 거부하려는 ‘예외의 시각’들 또한 그렇다. 어떤 질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위한 혁명이란 혁명인 동시에 그 이전의 질서를 강하게 노출시킨다. 영원불변하는 진리나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 인간의 사유체계는 환경 위에 놓여 있는 것이고, 그 환경을 가장 예민하게 겪는 순간이나 반응 중 하나가 문학일 것이다.

이 시에서 개인의 기분이나 마음에 주목해서 세계를 읽어보겠다는 의지는 논리적으로 해명이 되지 않는 자리이기 때문에 빛이 난다. 움직이지 않는 거미에게서 성실을 발견하거나 입이 없는 의자에게서 낯선 목소리를 듣는 일은 어쩌면 아주 무용한 듯 보이지만, 그렇게 세계를 정지시키거나 느리게 하는 가운데에서 순간마다 탄생되는 혁명이 있고, 미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토록 난해한 ‘인과’는 유계영에게는 아주 절실한 ‘우연’인지도 모른다. 답을 물을 수 없는 곳의 매혹을 찾아, 그 미지를 찾아 오래 달려왔다. 헛된 진리에 대한 믿음보다 건강한 진보를 향한 의사결정이 우리를 바꿀 것이라 믿는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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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컵의 회화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 손미(1982~)


△ 사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사물의 화법을 구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봐야 한다. 사물의 겉이 아니라 속을 거닐고, 그 안에서 쉽사리 재현되지 않는 의문스러운 자신과 대면해보는 것. 이것이 사물을 통해 세계를 보는 방법이 아닐까.

여기에 무언가 담겨져 있는 컵이 있다. 컵에 담겨 있는 액체는 무엇일까. 피, 투명한 동물, 녹색 방울, 젖은 발자국 등으로 고정화되지 않고 분유되는 이미지들이 컵 속에 담겨 있을 법한 액체의 알리바이를 마련해주고 있지만, 사실 이 시에서 범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컵이 어떤 액체를 구속하고 있는 상태다. 더 범박하게 말하면, 고정된 윤곽이 없는 액체들에 테두리를 만들어주는 컵이란 억압이지만 그 억압으로 인해 시시각각 달라질 수 있는 ‘다른 몸들’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컵은 액체를 억압하는 동시에 보존하고 이동시킨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컵은 비우는 용도인가. 채우는 용도인가. 아마도 손미는 컵을 통해 비정형의 가능성을 강하게 노출시키려는 것 같다. 그러면서 스스로 액체성의 정념 주체가 되어 어떤 몸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이곳의 약속이 아니라 늘 다른 곳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보여준다.

스푼으로 내 몸에 담긴 생각 하나를 휘젓는다. 무너지고 훼손된 것들 속에서 잠시간의 희망이라도 기록할 수 있다면 내일은 좀 더 건강할 것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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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멍

세계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얼마나 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더 멀리 가버리는 새처럼

세계지도처럼 당당하게

비행기는 날고
구름이 피해가고

볕은 사람을 비추었다

숫자처럼 엉켜 있어
만져지는 허공을

해석되지 않는

세계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풍경에서는 세계가 틀림없이
멈춰서고

그래 그런 삶도 있겠지 싶은 골목으로

바람이 걸어 나갔다

- 유이우(1988~)


△ 설명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해보겠다는 과감한 선언이나 용기, 집착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혁명의 입구 앞에 서 있다.

유이우의 시가 그렇다. 통쾌하게 말하지 못함으로써 통쾌해져버리는 ‘없는 육체’를 갖게 되기 때문에, 그 없음에 대해 매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세계’라는 관념태를 주체로 설정한 이 시는 재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아를 호출한다. 여기서 세계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까. 세계는 자아의 다른 명명일 수도 있고, 바람 혹은 새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얼마만큼 온 것인지도 모를 때, 다만 멀리 왔다는 아득한 예감만으로 가득할 때, 그런 어리둥절하고 불안함 같은 곳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장소도 명명할 수 없고 나의 위치조차 분명히 해결되지 않을 때, 내 안에서 나를 불렀으되 내가 이미 바깥처럼 느껴질 때! 뭐라 쉽사리 형용할 수 없는 모든 마음의 진통을 우리는 이렇게 ‘구멍’이라 불러보면 어떨까.

도무지 해결되지 않은 세계 앞에서 다시, 세계가 자신을 바라본다. 내가 나를 바라본다. 지도나 질서 따위로 측량할 수 없는 바깥들에게, 그런 미래들에게 스스로를 투신하는 환한 구멍이 있다. 다른 세계의 입구가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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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인용 식탁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세 개의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사이.

우리는 짝이 맞지 않는다.
가능성이 많으니까 자꾸 멍이 들고 있다.

무엇을 생략해야만 우리는
허기를 느낄 수 있을까.

우리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면
어떤 종류의 사람처럼 보일까.

이웃집의 요리 냄새가 우리의 식탁으로 흘러든다.

우리는 손이 떨린다.
우리는 젓가락으로
열심히 밥을 먹어야 하는데.

- 신해욱(1974~)


△ 도무지 밝힐 수 없는 나를 밝히는 불가능한 행위가 시일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얼마나 초과되었는가. 나는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각각이 될 수 있는지 서로 간의 차이를 전시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식탁에 모여 있는 우리는 대체 몇 명이었을까. 구성원이 넷이라면 세 개의 젓가락은 넘치고, 둘이라면 한 벌이 남게 된다. 아니 주어진 젓가락 세 개라는 것은 어쩌면 짝이 맞는 한 벌과 짝이 맞지 않는 한 개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넘치거나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사태인 것인데, 이게 왜 문제인지도 명쾌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주어진 것’에 대한 불만이나 ‘주어진다는 것’에 대한 억압 같은 것들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보여지지 않는 중의적 정황 배치들 때문에 가능성이 생기고, 그 생략이나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허기진 상태나 멍이 든 상처 부위들을 진술하고 있다. 물론 그곳이 어디인지 영영 모르게 될 곳이겠지만, 결국 우리의 위치를 설정하게 되는 근거는 저 바깥 때문이다.

‘이웃집’이라는 타자들 때문에 우리가 생기고, 나를 소거한 당신들 때문에 ‘나’라는 현상이 겨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시에서 여백이란 것도 감추도록 작동하는 전략이나 여유가 아니라 감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알 수 없을 때까지 나를 묻는다. 알 수 없는 빈 곳, 그 미지 때문에 내가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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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의 생

창밖으로 검은 재가 흩날렸다
달에 대하여

경적 소리가 달을 때리고 있었다
그림자에 대하여

어느 정오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왜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냐고
그림자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개켜 넣을 수납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김없는 자정에는 발가벗고 뛰어다녔다

불을 끄고 누웠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밤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 신용목(1974~)


△ 일찍이 박태원이 구보씨를 내세워 ‘도시 산책자’의 모습을 형상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구보라는 행위태밖에 남아 있지 않는 익명성과 근대 체제 이후 인간을 쉬이 상투화시켜버리는 일상의 무거운 짐들은 인간을 인공의 일부로 사물화시킨다. 그러므로 도시를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은 고작 주어진 것들에 대해 관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향유적 존재, 소극적 주체로 전락되는 것이다.

아무 날 어느 어두운 밤,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한다. 속도에 대해서 생각한다. 만약 지금 이곳을 정지시킬 수 있다면 대체 어느 시점에서 세계의 불을 꺼야 할까. 여전히 도시의 달은 가로등이나 네온사인의 빛보다 흐리고 또 어딘가 먼 곳에서 속도에 복무하는 경적소리가 울린다. 잠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멈춰볼 의지도 없이, 쉼 없이 흘러가는 도시의 시간들. 공기는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재가 날리고 있고, 이곳은 불길이 끊이질 않는 지옥이다. 우리들의 그림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빛들 때문에 수차례 자신을 놓치면서 분열되고,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에서나 입고 다닐 바지처럼 그렇게 부채감으로 가득 찬 걸음걸이로 또 어디론가 흘러간다. 그러니 그리움이라는 느림의 정서 또한 ‘만약’을 설정하지 않으면 쉽게 고안해내기 힘든 형국이다.

신용목은 무엇인지 모를 모호한 억압들에 대해 만약을 설정한다. 그렇게 만약의 삶을 통해 현실의 억압에 대해서도, 억압에 대한 무반응성에 대해서도 모두 반성해보는 것이다. 이곳을 그저 지옥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설정을 통해 신의 존재나 거울의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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