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첩

도장을 어디다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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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을 어디다 띄웠는지 유리창을 어디다 달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


손바닥에 적기를 잊어버려
연인도 바다도 다 그냥 지나쳤다
발꿈치에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새 구두가
약국도 그냥 지나쳤다


시간도 적는 걸 잊자 한 달 내내
양파가 짓물렀다
토끼똥이 한가득씩 어깨로 쏟아졌다


때론 살아 있다는 것도 깜박 잊어버려
살지 않기로 한다


다만 슬픔만은 어디에 적어 두지 않아도
목공소 같은 몇만 번의 저녁과
갓 낳은 계란 같은
눈물 자국을
어디에고 남기고 또 남긴다


자주 다니던 지하철도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한참 가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아, 1호선에는 동대문운동장역이 없구나! 머리와 발이 다 외웠다고 생각하고 습관이 이끌어주는 대로 편하게 갔다가는 손발이 고생하기 십상이다. 지갑을 집에 두고 나왔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에야 재킷을 바꿔 입고 나왔다는 게 생각난다. 약속은 겹치거나 지나친 후에야 확인되곤 한다. 밀려오는 일과 빠르고 복잡한 일상을 다 담기에는 뇌의 용량이 턱없이 작은 것 같다.

사는 것조차 잊어버려 살지 않기로 하다니! 얼마나 유쾌한 농담인가. 나를 들들 볶아대는 삶에 대한 얼마나 귀엽고 소심한 복수인가.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허점을 비틀고 꼬아서 놀지 않으면 삶이 무심코 주는 그 많은 자잘한 좌절을 어찌 다 감당하겠는가.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 브레이크를 걸고 잠깐이라도 웃지 않으면 어찌 숨 한번 시원하게 쉬겠는가. 짜증과 스트레스를 필사적으로 웃음과 카타르시스로 만드는 시가 가끔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김기택 시인 | 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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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나도 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모르겠는데요. 남들이 줄 끝에 서기에 나도 섰어요. 무슨 줄인가요? 잘 몰라요. 얼마나 기다리게 될까요? 글쎄요. 몇몇 여자들이 뭔가를 들고 가면서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90%라고 하지요? 왜 그렇게 한대요? 모르겠어요. 저는 처음인데요. 몇 시간 기다렸어요? 무작정 서 있었어요. 오가는 말들의 저 끝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를 안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네요.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이 누구인지, 무안할 정도로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기다릴 거예요?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무엇인데요? 글쎄, 기다려봐야 알 것 같아요. 그의 이름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에게 손을 흔들었던가 싶었다. 그때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왜요? 끝났어요? 300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네요. 무엇이었는데요? 앞쪽에서 누군가 물었다. 코끼리 삼겹살 아니었나요?


△ 아파트 청약 접수 현장에서, 전광판이 뜨거운 증권회사에서, 끝내주게 맛있다는 맛집에서, 꽉 막힌 주말도로에서 나도 저 긴 줄에 끼어 기다린 적이 있다. 이 줄에서 빠지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 휩쓸려갔다가 나중엔 왜 기다리는지 잊어버리고 기다린 시간과 인내심이 아까워 기다리기도 했고, 기다림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해서 기다리기도 했다. 이 맹목성과 저돌성과 욕망과 불안이 이렇게 재미있는 코미디인지 몰랐다. 이 우화는 아주 현실적이어서 내 불안과 두려움이 다 들키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삶, 남들과 다른 삶, 이 길이 맞는다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삶은 불안하다. 묻지 마 줄서기, 남들이 가는 길 무작정 따라가기, 대세에 묻어가기는 가장 편한 선택이 된다. 의심하고 묻는 일은 낭비가 된다. 그런 고민할 시간에 한 발이라도 먼저 가서 줄 서는 게 득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줄을 잘 설까. 대단한 선진 국민의 질서요, 엄청난 자발성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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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

큰누나가 시골집에 늙은 부모 둘만 사는 것이 보기에 적적했는지 기르던 강아지를 차에 싣고 왔다 몇 달을 어르고 달래도 눈이 오목한 강아지는 제 머리를 주지 않아 늙은 부모는 보송보송한 머리통 한번 쓰다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문간 옆에 쭈그리고 앉아 냉이를 다듬는데 가랑이 사이로 강아지가 쑥, 기어들어오더라 에그머니나, 어머니 가슴이 미어지더라 데려온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 하고 부르는 그 소리가 들렸다 한다 식구가 되기 위한 꼭 그만큼의 여물어진 시간과 눈짓, 오늘도 제 마음 다 준 강아지는 배를 걷어차여도 어머니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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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민(1968~)


△ “식구가 되기 위한 꼭 그만큼의 여물어진 시간과 눈짓”이라는 구절에 자꾸 시선이 머문다. 새집에서 시간과 눈짓이 익을 때까지 강아지가 견뎌야 했을 두려움과 외로움의 ‘그늘’이 스며온다. 강아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저도 모르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무르익어 믿음으로 변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할머니가 아무리 걷어차도 할머니 가랑이 사이로 쑥 들어가고 싶어지는 행복한 순간을. 몸을 가지고 있는 한, 환경과 사회와 세상을 제 몸에 받아들이기까지 겪어야 하는 시간과 마음고생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낯선 사람이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기까지, 새 직장에 새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까지, 사람들 마음에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그늘’이 지나갔으리라. 그 어두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덤덤한 척하기도 했으리라. 무심히 웃고 있는 지금도 내가 모르는 마음 하나는 몰래 홀로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어느날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외로운 존재라는 걸, 자신의 삶에 마음에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무서운 영역이 있다는 걸, 타인이 두려워도 혼자서는 못 산다는 걸,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은 목숨 걸고 사랑을 찾아다니게 되어 있다는 걸.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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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다

채찍 휘두르라고
말 엉덩이가 포동포동한 게 아니다.

번쩍 잡아채라고
토끼 귀가 쫑긋한 게 아니다.

아니다.
꿀밤 맞으려고
내 머리가 단단한 게 아니다.

- 이정록(1964~ )


△ 중·고교 시절에 엉덩이와 머리는 늘 매에게 맡겨 놓고 지냈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때릴 곳을 찾으려면 엉덩이와 머리만큼 넉넉하고 믿음직한 자리가 없을 것이다. 몸의 다른 자리들은 때려서는 안될 수많은 이유와 핑계를 갖고 있는데, 엉덩이와 머리는 때리는 입장에서 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는 자리이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은 운동화로 머리를 때렸다. 고무라고 얕잡아 봤다가 돌로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때리는 기술의 발전을 실감했다. 맘껏 때려도 부상이나 후유증이 적으니 엉덩이와 머리는 얼마나 대견스럽겠는가. 머리와 엉덩이는 우리 몸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며 겸손한 자리인 것 같다.(주먹으로 머리를 맞으면 달기는커녕 아프기만 한데, 왜 ‘꿀밤’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이건 순전히 때리는 사람의 쾌감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제라도 매 맞는 머리들이 합심하여 ‘주먹밤’이나 ‘딱밤’ 같은 제 이름을 찾기 바란다.)

‘아니다’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양심적인 입들이 틀어 막히고 용감한 정의는 죽거나 갇히는 고초를 당했는가. 이 까칠하고 위험하고 사연이 많은 말을, 힘을 함부로 휘두르는 자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고 귀여운 어린이의 입으로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심술궂고 맛있는 어린이의 말로 세상의 어른과 선생들에게 따끔한 매를 줄 수 있을까. 이 동시는 듣는 이를 웃게 만들면서도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의 돌팔매처럼 야무지다. 엉덩이와 머리처럼 말과 토끼도 제 억울한 처지에 대해 발언할 기회가 없었을 텐데, 이번 기회에 시가 대변해 줘서 다행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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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

목판을 사서 페인트 칠을 하고 벽돌 몇 장씩을 포개어 책장을 꾸몄다. 윗장에는 시집, 중간장에는 전공, 맨 아랫장에는 저널이니 화집을 꽂았다. 책을 뽑을 때마다 책장은 아직 나처럼 흔들거린다. 그러나 책장은 모든 사람의 과거처럼 온 집안을 채우고 빛낸다.

어느 날 혼자 놀던 아이가 책장을 밀어 쓰러뜨렸다. 책장은 희망 없이 온 방에 흩어지고 전쟁의 뒤끝같이 무질서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가장 안전한 자세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나는 벽돌을 쌓고 책을 꽂아 다시 책장을 만들었다. 아이는 이후에도 몇 번 쓰러뜨리겠지. 나는 그때마다 열 번이고 정성껏 또 쌓을 것이다. 마침내 아이가 흔들리는 아빠를 알 때까지, 흔들리는 세상을 알 때까지.

- 마종기(1939~ )


△ 벽돌과 목판으로 쌓아 책을 뽑을 때마다 흔들리는 책장은 미국 이민자로 살면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시인의 삶과 내면 상태를 보는 것 같다. 쓰러지는 것, 포기하는 것, 그래서 갈등과 고민을 단번에 끊어버리는 것, 그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자세”이다. 그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의 쾌감은 달다. 할까와 말까 사이에 있을 때, 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그것을 단번에 무력화시킬 위협 사이에 있을 때,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해야 하는 이유보다 점점 늘어날 때, 그 유혹에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 이민자로 살게 되었고 조국으로 들어오려는 시도도 좌절되었던 시인은 마음으로는 여러 번 쓰러져보았을 것이다.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쓰러질 때마다 “열 번이고 정성껏 또 쌓을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흔들림과 쓰러질 가능성 위에 선 채, 곧 무너질 것 같은 불안과 긴장을 품고 있는 것이 삶이다. 평범해 보이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는 무너져본 자리에 남은 상처와 그것을 딛고 일어선 흔적이 있을 것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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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과

개기월식;
양팔을 벌리고 달의 테두리를 따라 걸었다
무표정의 뿔이 솟았다
모두 짙어질 때를 기다려 혼자 옅어졌다
눈과 눈의 먼 악수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와
겁에 질려 모두 먹어치웠다
성실한 마음;
층층계 모서리에 거미가 줄을 쳤다
빈 거미줄에 마른 나뭇잎이 걸린다
거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푸른 불꽃;
길게 혀를 빼물고 눈부시게
잔다
의자가 놓인 위치는 의자의 기분을 설명한다;
사물은 입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호감을 샀지만
인간은 사물을 사랑하므로
사물의 입을 찾아주었다

- 유계영(1985~)


삶에서 명쾌한 답이 존재한다면, 그 답을 위해 우리가 한 생애를 복무할 수밖에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본질과 현상, 절대와 상대, 필연과 우연 등등의 이분법적 사고 논리로 세계를 판단해 온 오랜 관습이나 이미 신화화된 것들이 그러하고, 그런 토대들을 거부하려는 ‘예외의 시각’들 또한 그렇다. 어떤 질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위한 혁명이란 혁명인 동시에 그 이전의 질서를 강하게 노출시킨다. 영원불변하는 진리나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 인간의 사유체계는 환경 위에 놓여 있는 것이고, 그 환경을 가장 예민하게 겪는 순간이나 반응 중 하나가 문학일 것이다.

이 시에서 개인의 기분이나 마음에 주목해서 세계를 읽어보겠다는 의지는 논리적으로 해명이 되지 않는 자리이기 때문에 빛이 난다. 움직이지 않는 거미에게서 성실을 발견하거나 입이 없는 의자에게서 낯선 목소리를 듣는 일은 어쩌면 아주 무용한 듯 보이지만, 그렇게 세계를 정지시키거나 느리게 하는 가운데에서 순간마다 탄생되는 혁명이 있고, 미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토록 난해한 ‘인과’는 유계영에게는 아주 절실한 ‘우연’인지도 모른다. 답을 물을 수 없는 곳의 매혹을 찾아, 그 미지를 찾아 오래 달려왔다. 헛된 진리에 대한 믿음보다 건강한 진보를 향한 의사결정이 우리를 바꿀 것이라 믿는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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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컵의 회화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 손미(1982~)


△ 사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사물의 화법을 구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봐야 한다. 사물의 겉이 아니라 속을 거닐고, 그 안에서 쉽사리 재현되지 않는 의문스러운 자신과 대면해보는 것. 이것이 사물을 통해 세계를 보는 방법이 아닐까.

여기에 무언가 담겨져 있는 컵이 있다. 컵에 담겨 있는 액체는 무엇일까. 피, 투명한 동물, 녹색 방울, 젖은 발자국 등으로 고정화되지 않고 분유되는 이미지들이 컵 속에 담겨 있을 법한 액체의 알리바이를 마련해주고 있지만, 사실 이 시에서 범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컵이 어떤 액체를 구속하고 있는 상태다. 더 범박하게 말하면, 고정된 윤곽이 없는 액체들에 테두리를 만들어주는 컵이란 억압이지만 그 억압으로 인해 시시각각 달라질 수 있는 ‘다른 몸들’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컵은 액체를 억압하는 동시에 보존하고 이동시킨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컵은 비우는 용도인가. 채우는 용도인가. 아마도 손미는 컵을 통해 비정형의 가능성을 강하게 노출시키려는 것 같다. 그러면서 스스로 액체성의 정념 주체가 되어 어떤 몸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이곳의 약속이 아니라 늘 다른 곳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보여준다.

스푼으로 내 몸에 담긴 생각 하나를 휘젓는다. 무너지고 훼손된 것들 속에서 잠시간의 희망이라도 기록할 수 있다면 내일은 좀 더 건강할 것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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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멍

세계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얼마나 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더 멀리 가버리는 새처럼

세계지도처럼 당당하게

비행기는 날고
구름이 피해가고

볕은 사람을 비추었다

숫자처럼 엉켜 있어
만져지는 허공을

해석되지 않는

세계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풍경에서는 세계가 틀림없이
멈춰서고

그래 그런 삶도 있겠지 싶은 골목으로

바람이 걸어 나갔다

- 유이우(1988~)


△ 설명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해보겠다는 과감한 선언이나 용기, 집착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혁명의 입구 앞에 서 있다.

유이우의 시가 그렇다. 통쾌하게 말하지 못함으로써 통쾌해져버리는 ‘없는 육체’를 갖게 되기 때문에, 그 없음에 대해 매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세계’라는 관념태를 주체로 설정한 이 시는 재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아를 호출한다. 여기서 세계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까. 세계는 자아의 다른 명명일 수도 있고, 바람 혹은 새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얼마만큼 온 것인지도 모를 때, 다만 멀리 왔다는 아득한 예감만으로 가득할 때, 그런 어리둥절하고 불안함 같은 곳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장소도 명명할 수 없고 나의 위치조차 분명히 해결되지 않을 때, 내 안에서 나를 불렀으되 내가 이미 바깥처럼 느껴질 때! 뭐라 쉽사리 형용할 수 없는 모든 마음의 진통을 우리는 이렇게 ‘구멍’이라 불러보면 어떨까.

도무지 해결되지 않은 세계 앞에서 다시, 세계가 자신을 바라본다. 내가 나를 바라본다. 지도나 질서 따위로 측량할 수 없는 바깥들에게, 그런 미래들에게 스스로를 투신하는 환한 구멍이 있다. 다른 세계의 입구가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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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인용 식탁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세 개의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사이.

우리는 짝이 맞지 않는다.
가능성이 많으니까 자꾸 멍이 들고 있다.

무엇을 생략해야만 우리는
허기를 느낄 수 있을까.

우리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면
어떤 종류의 사람처럼 보일까.

이웃집의 요리 냄새가 우리의 식탁으로 흘러든다.

우리는 손이 떨린다.
우리는 젓가락으로
열심히 밥을 먹어야 하는데.

- 신해욱(1974~)


△ 도무지 밝힐 수 없는 나를 밝히는 불가능한 행위가 시일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얼마나 초과되었는가. 나는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각각이 될 수 있는지 서로 간의 차이를 전시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식탁에 모여 있는 우리는 대체 몇 명이었을까. 구성원이 넷이라면 세 개의 젓가락은 넘치고, 둘이라면 한 벌이 남게 된다. 아니 주어진 젓가락 세 개라는 것은 어쩌면 짝이 맞는 한 벌과 짝이 맞지 않는 한 개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넘치거나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사태인 것인데, 이게 왜 문제인지도 명쾌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주어진 것’에 대한 불만이나 ‘주어진다는 것’에 대한 억압 같은 것들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보여지지 않는 중의적 정황 배치들 때문에 가능성이 생기고, 그 생략이나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허기진 상태나 멍이 든 상처 부위들을 진술하고 있다. 물론 그곳이 어디인지 영영 모르게 될 곳이겠지만, 결국 우리의 위치를 설정하게 되는 근거는 저 바깥 때문이다.

‘이웃집’이라는 타자들 때문에 우리가 생기고, 나를 소거한 당신들 때문에 ‘나’라는 현상이 겨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시에서 여백이란 것도 감추도록 작동하는 전략이나 여유가 아니라 감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알 수 없을 때까지 나를 묻는다. 알 수 없는 빈 곳, 그 미지 때문에 내가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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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의 생

창밖으로 검은 재가 흩날렸다
달에 대하여

경적 소리가 달을 때리고 있었다
그림자에 대하여

어느 정오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왜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냐고
그림자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개켜 넣을 수납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김없는 자정에는 발가벗고 뛰어다녔다

불을 끄고 누웠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밤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 신용목(1974~)


△ 일찍이 박태원이 구보씨를 내세워 ‘도시 산책자’의 모습을 형상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구보라는 행위태밖에 남아 있지 않는 익명성과 근대 체제 이후 인간을 쉬이 상투화시켜버리는 일상의 무거운 짐들은 인간을 인공의 일부로 사물화시킨다. 그러므로 도시를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은 고작 주어진 것들에 대해 관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향유적 존재, 소극적 주체로 전락되는 것이다.

아무 날 어느 어두운 밤,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한다. 속도에 대해서 생각한다. 만약 지금 이곳을 정지시킬 수 있다면 대체 어느 시점에서 세계의 불을 꺼야 할까. 여전히 도시의 달은 가로등이나 네온사인의 빛보다 흐리고 또 어딘가 먼 곳에서 속도에 복무하는 경적소리가 울린다. 잠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멈춰볼 의지도 없이, 쉼 없이 흘러가는 도시의 시간들. 공기는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재가 날리고 있고, 이곳은 불길이 끊이질 않는 지옥이다. 우리들의 그림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빛들 때문에 수차례 자신을 놓치면서 분열되고,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에서나 입고 다닐 바지처럼 그렇게 부채감으로 가득 찬 걸음걸이로 또 어디론가 흘러간다. 그러니 그리움이라는 느림의 정서 또한 ‘만약’을 설정하지 않으면 쉽게 고안해내기 힘든 형국이다.

신용목은 무엇인지 모를 모호한 억압들에 대해 만약을 설정한다. 그렇게 만약의 삶을 통해 현실의 억압에 대해서도, 억압에 대한 무반응성에 대해서도 모두 반성해보는 것이다. 이곳을 그저 지옥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설정을 통해 신의 존재나 거울의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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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저녁

아직 한 페이지의 저녁은 남아 있을 때
나는 말이 그립기도 한가봐
그러나 나는 말이 참 두렵기도 한가봐
그래 뜻 없는 소리로 몸 바꿀까도 생각하나봐
전화 벨소리나 무슨 문 두드리는 소리쯤으로
울려보고 싶은가봐
아무도 울음인 줄은 모르게
심심함을 애써 감추고 다급한 듯이
캄캄한 방을 두드리고 싶은가봐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쯤을
전화 벨소리로
울어보고 싶은가봐
다 퇴근하고 아무도 없을 시간
마음대로 휘젓다가
주인 없는 책상을
무뚝뚝하게 멈춘 회전의자를
담배가 꺾어져 누운 재떨이를
그 속의 식은 재를 집어보고 싶은가봐
손가락 끝에서 맥없이 빠져나가는
식은 시간의 재를 가만히
그러고서야 봄날 저녁은 가는가봐
봄날 저녁은 그렇게 가는 건가봐

- 최정례(1955~)


△ 이곳에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재의 사태는 결국 남아 있는 이들의 몫이며 ‘여기 없음’을 호명하기 위해서는 여기 남아 있음을 노출해야만 한다. 그러니 호명 자체에서 우리는 위치나 감정선들을 들킬 수밖에 없다. 이 시는 부재하는 것들을 호명해보는 시인의 관찰력이 돋보인다. 캄캄한 방에 전화를 수차례 하는 상황도 그렇고 빈 사무실을 관할하는 방식도 그렇다. “담배가 꺾어져 누운 재떨이”라든가 “무뚝뚝하게 멈춘 회전의자”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소고는 주인이 없는 책상을 드러내는 기표다. 즉 있는 사물을 통해 없는 대상을 추론해내는 직관들인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말 때문일까. 그저 목 놓아 울음으로 질문을 놓고 싶은 시인 특유의 곡진함 때문일까. 무엇이든 좋다. 시적 자아는 어떤 이유에서든 다가오는 봄의 계절감에 통해 슬픔으로 진입하고 있다. 물론 봄날에 쉽사리 만질 수 없는 슬픔에 관해서는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언제부턴가 물이라는 단어가 물이 아니고, 바다라는 공간이 바다가 아니다. 지난 봄, 공동의 내상을 겪고 난 이후 우리는 물과 바다의 의미역들을 다르게 보충하고 있다. 작가들은 바다의 쓰리고 아픈 장소감을 형상화해냈고, 광장은 최소한의 윤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들로 환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쓰린 봄의 기억에 복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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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애인의 마음을 나는 모르고

봄을 생각하는 마음은
봄을 지나
지는 꽃을 지나
멀리 애인을 지나
그의 뒷모습을 지나

빈 땅에 연못을 파고
그곳에 물을 채우는 마음이 아니라
그곳에 피는 연꽃의 마음이 아니라
바람을 모르는 물결의 마음이 아니라

멀리 애인의 마음을 나는 모르고

꽃잎을 힐끗 훔쳐보았을 뿐인데
꽃의 내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끓어오르는 나무들의 여름

- 이근화(1976~)


△ 결정지을 수 없는 모르는 마음 때문에 봄이 왔을까. 아니 모르기 위해서 우리는 봄이라는 계절을 필요로 했을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당도한 너무나 짧은 환절기는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이행의 마음을 가르친다. 질서가 되지 않고 의문이 되곤 하는 불안하지만 견고한 그런 마음들을 가르친다.

빈 땅을 파고 거기에 물을 채우고 연못에 제 살을 찌르면서 피어나는 연꽃을 띄워, 바람에 물결이 전율을 일으키는 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런 마음에 노력이 닿는 자리마다 홀릴 것이다. 하나 그것도 아니라고. 멀리 애인의 마음을 좀처럼 모르겠다고 말하는 시인의 고백을 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봄에 서둘러 꽃을 틔우고 나서 미리 여름을 준비하는 나무들의 마음처럼 섣부른 날씨의 환각을 봄이라 불러도 좋을까. 그렇게 모르는 내일들만 읽어내는 갸우뚱한 고백들 때문에 우리는 잘 알고 있는 낯선 자리에 반해서 또 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차례, 차례 나무들이 끓어오르고 꽃들이 열반에 들어 아무런 내용도 마음도 갖지 않았는데, 순하고 찬란한 햇빛들이 가득한 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로 앞에 두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멀리’ 두고 싶은 마음처럼, 우리는 읽어낼 수 없는 내일을 모르기 때문에 기다린다. 그저 무작정….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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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냥

메마른 나뭇가지 끝에 새가 앉아 있다 무리를 잃고 부리도 발톱도 둥근 머리 속에 파묻은 붉은 새 한 마리 어두워지는 저녁을 응시한다

일어나는 불꽃 타오르는 불길 검게 타들어가는 나무 위로 새가 날아간다 바닥에 떨어지는 재

인큐베이터 갓난아이가 가파른 숨을 쉬고 있다

- 송승환(1971~)


△ 사물 속에서 새로움을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사물에 관한 여러 약속들을 의심해보는 동안에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정합을 통해 세계를 보는 것이라 부정을 통해 인지해야만 하고 부정을 부정이라고 언술하는 것조차 부정하면서 사물을 읽어내야 한다.

이 시에서 타오르는 성냥의 형상은 나무 위에 올라앉은 새의 모습 혹은 솟대의 모습 등으로 상징됐다가 종국에는 이미지가 튀어올라 인큐베이터 안에 가파른 숨을 몰아쉬고 있는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환기된다. 물론 성냥과 갓난아이 숨소리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된 이미지들이 큰 무리 없이 미세하게 충돌하면서 와해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재가 되어버리는 성냥의 인화성과 태어나자마자 꺼질 듯한 생명을 붙들기 위해 다시 인공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운명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불꽃 속에서 날개를 발견하는 시인의 직관과 숨소리와 불길을 병치시키는 유연성이 독특해 보인다.

수많은 시인들이 극에 닿으려고 노력을 하고 극에 닿는 순간 그 극의 거리는 다시 넓혀진다. 그렇게 닿을 수 없는 자리들의 혼미하고 환각적인 유혹 때문에 시인은 살아 있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이 세계가 영영 봉합되지 않기를 믿고 싶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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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 단풍 숲에서의 짧은 키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너는 비행기를 타고 산맥을 넘었다

여러 해 동안 너는
밤의 열기
가볍고도 유쾌한 사랑

그러나 나는 아직
체리향이 든 해열제를 먹고 누워 있는
키 작은 아이

단풍 숲에서의 짧은 만남이 오기도 전에
내 안에서 솟아오른 불길이
산맥을 넘어

너의 입술을 모두 태워버린다

- 박상순(1962~)


△ 시가 다른 예술과 달리 물상들을 그려내는 데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미지를 다루는 데 있어 상상하는 무엇이든 가능한 배치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냉장고 안에서 기린이 기어 나와 바닷물을 핥다가 토스트 조각에 달라붙은 아침을 끓여 먹었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상상조차 문자 형상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박상순은 이런 불가능한 배치의 미학을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정신의 세계로 우리를 견인하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일까? 이 시에서는 화자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열병과 단풍이 든 풍경, 키스 직전이나 직후 입술이 갖는 붉은 이미지 혹은 불길이나 열기 같은 온도의 강도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시의 행간이 늘어나는 동안 아이였던 화자는 성인이 돼 아직 만나보지 못한 너의 입술을 모두 태워버린다. 시간의 배열도 뒤죽박죽이고 정서의 흐름도 일정한 규칙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듯하다. 한데 이런 것들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념의 형태가 아닐까. 관념이란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그 설명되지 않는 전부를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사랑, 슬픔, 그리움 따위 정도의 말로 축약하게 되는 것이 감정어가 갖는 관념성이 아닐까.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 시가 지금 여기에 쓰이고 있다. 그런 미래의 문법들을 오래 질투하고 있는 나를 보았던 적이 있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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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기

구름은 없었다. 기미도 없었다.
손잡이를 돌릴 때
스웨터를 벗을 때
몇 볼트인지 모를 전류가 몸을 통과할 때까지
몰랐다. 오늘이 얼마나 평온한지를.

나는 어떤 성질의 짐승일까.
그것도 모르면서 자주 쓸쓸했다.
키스 없이 나를 사랑하며
어중간한 전극 오갔다.
그냥 사랑해서 사랑하고 그냥 살기에 살아가며.

양극을 망설이며 서성이는 동안
나뭇가지는 수십 년을 번개처럼 꺾이며 제 길을 가고 있다.

- 백상웅(1980~)


△ 세계는 어떤 답변도 내려주지 않고 오직 우리가 그 세계의 비밀들을 언어로 표상할 뿐이다. 언어가 인간과 인간 간의 소통이라는 상투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의 세계를 인지하도록 하는 자율성의 원천이라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 진리를 죽이기도 하고 진리를 창조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사물을 다시 만드는 사람이다.

이 시는 건조한 겨울철에 우리가 종종 만나게 되는 정전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금속 물질의 손잡이에서 혹은 스웨터를 입고 벗을 때나 털 소재의 직물에서 마찰이 일어날 때. 정전기는 구름도 기미도 없이 일상에서 불꽃을 일으킨다. 그렇게 만나는 뜻밖의 불꽃은 시인으로 하여금 망설이는 자의 정념을 품게도 하고, 자기 스스로에게 ‘짐승’과 ‘사랑’ 사이를 묻는 질문을 내던지기도 한다. 이렇게 한 곳에 오래 은둔해 있던 정지된 힘이란 어쩌면 또 하나의 세계를 여는 모든 두근거림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런 부채감 없이도 오래 한 곳을 응시하고 머물러 보는 것. 그런 정지된 상념들을 통해 세계 바깥을 엿보고자 하는 시적 의지가 백상웅 시의 물상론은 아닐까.

언 땅이 조금씩 제 살을 풀어 부풀리는 동안 우리는 또 한 계절을 보내주고 말았다. 그 계절의 건널목 부근에서 “양극을 망설이며 서성이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제 안에 번개를 읽어내기 위해서.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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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

나는 물고기였으니

어머니가 살집을 다 발라내시면 드러나는
잃어버렸던 앙상한 열쇠였으니

물속에서 온몸을 비틀어
물의 금고를 열었던
열쇠의 형상을 한 물고기였으니

금고 속엔 물거품과 백지만 가득했으니

몸속에 꽁꽁 숨겨온 자물통 같은
어머니 자궁 속에 꽂힌,
한 늙은 극작가가 불행 속에 쓴
희극의 첫 막을 열었던 열쇠였으니

그리하여 여기 발밑에 버려진
오래된 극장의 열쇠였으니

-김중일(1977~)


△ 과도한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시대. 시인은 독특하고 유연한 지각 방식을 통해 이미지의 철학적 권위를 복귀시킨다. 대개 시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대립되는 것들이 갖는 저마다의 격차를 환기시키며 우리들의 사유 체계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한다. 여기서 시인은 존재의 재창조를 꿈꾸며, 그런 언어의 극단들을 통해 의미의 하층부를 드러낸다. 특히 이 시에서는 유사 이미지들의 조합과 교환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머리만 남겨두고 살을 발라낸 물고기의 모습은 열쇠의 형상과 닮아 있다. 즉 시인 스스로가 자처한 물고기란 제 몸에 열쇠 하나쯤 품고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라서, 바닷속을 헤엄쳐왔던 삶의 모든 운동성들이 “물의 금고”를 여는 고행의 과정이다. 바다, 물, 자궁과 같은 태초의 근원적 공간을 열어보고 말겠다는 시인의 굳은 의지들을 경유하고 나면, 늙은 극작가의 한 생애 희로애락이 담긴 서사극과 오래된 극장의 문을 여는 또 다른 열쇠가 탄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 시인 자신이 사용하는 말은 다른 세계의 무대를 여는 최초의 시도가 될 것이라 암시하고 있다. 언어가 경험을 초월하는 순간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그 경험하지 못한 과격한 혁명을 무작정 믿고 싶다. 언어 노동자가 갖는 그 불우한 희망에게 오늘도 미래를 맡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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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

골짜기마다 산을 앉혀 보아도
어김없이 지는 해 아래
하루에도 천 개의 절벽이 생겨나고
만 마리의 이리가 질주하는 밀림이 태어난다

한 덩이의
빵을 구하기 위한 행렬은
오늘도 뱀처럼 길다
결국 빵 한 개를 위해
겨우 빵 한 개를 위해
그 아래 사는 일은 무엇인가

무한 평등의 낮과 밤
황금 밀밭에서
죄 없는 햇살을 받고 자란
꽃이지만 꽃 이상이고
별이지만 별 이상인
한 덩이의 흥망성쇠
우리를 미래로 건너가게 하는
빵!
시?

- 문정희(1947~)


△ 혁명은 과거의 질서들을 몰락시키고 과거의 관점으로 현재까지의 불경스러운 것들을 다시 신성화시키는 세속적 운동이다. 인식하고 있던 과거의 현상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정신적 억압 기제들의 가장 튼튼한 뿌리를 흔들어 늘 변화를 내재하려는 인간 본질의 정념을 담보로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개방화 작업이다.

이러한 점에서 혁명을 꿈꾸는 자와 시인의 언어가 거주하는 태초의 자리는 유사한 곳에서 실존한다. 이를테면 시인은 이미 의미로 규정된 상징태 곁에서 그 이상의 언어를 탄생시키는 데 복무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빵’의 상징이란 ‘자본’의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나 말미에서 별다른 대립이나 수사적 병치 없이, 빵과 시의 위치를 교환하며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시적 정념은 우리의 삶을 깨고 나오는 혁명과도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주의 사회로 이행하려는 혁명적 소용돌이가 짧은 행간 사이를 두고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골짜기마다 산을 앉혀보는 불가능한 상념 가운데에서도 절벽과 밀림밖에 탄생하지 못하는 이 참혹한 세계에 관해, 내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겨우’와 ‘결국’ 사이에서 더 이상 두리번거리지 않겠다. 꽃이나 별의 그 이상을 지켜보기 위해.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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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료탑

지도를 보며 찾아간 곳에는 없어진 건물이 있었다. 무엇을 결정하는 일은 시간 속에 허리가 잠겨 있게 한다.
누군가의 얼굴을 죽도록 때리는 꿈을 꾸었어. 너는 아침마다 침대 머리맡에서 꿈 이야기를 듣는다.
알람처럼
양털에 파묻힌 양의 얼굴
살아본 적 없는 시간은 일단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무릎 위에서 잠이 든 개처럼
미동 없이
밥을 먹기 전엔 기도를 잊지 않았다. 볕을 쬐며 살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너는 사라져 본 적 있는 외투로서.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건물에 간다.
뜨거운 볕이 잎을 망가뜨린다.

- 안미옥(1984~)


△ 생각을 하자 그 생각은 사라지고 생각을 했다는 과거만 남아 있을 때가 있다. 다시 기억을 호출해서 생각의 생각을 곱씹어 보아도 쉽사리 재현해낼 수 없는 과거의 망각들이다. 우리는 생각과 망각을 현재에 수없이 지불하며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를 보존한다. 멈추지 않아서 살고 있는 것이고 살아 있기에 생각의 형식 속에서 위태로운 것이다.

안미옥이 그려내는 세계는 희박하고 어리둥절하다. 무언가 있을 듯이 건축했다가 홀연 사라지게 하는 이런 아리송한 시적 공간은 그의 시를 읽는 동안에 우리들이 겪는 시점까지도 부유하게 만들어버린다. 재현과 혼돈이 겹치고 흘려보낸 물상들과 사유해낸 생각들이 교차하는 가운데에, 그저 뼈대만 남은 세계의 입구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미동”도 없고, “무엇을 결정”하라는 고압도 없다. 단지 “사라져 본 적이 있는 외투”를 걸친, 계속 줄어들고 있는 자아가 있을 뿐이다.

나 또한 “살아본 적이 없는 시간은 일단 망가졌다”고 중얼거려본다. 그 누군가를 더 오래 생각하는 방식으로 단 한 사람을 망각하는 절망을 배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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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춰버린 시계를 차고 나왔다

잊고 있던 꽃무늬 원피스가 잡혔다
어떻게 이런 걸 입고 다녔을까 의아해하다
의아한 옷들을 꺼내 입어봤다

죽어버리겠다며 식칼을 찾아 들었는데
내 손에 주걱이 잡혀 있던 것처럼
그 주걱으로 밥을 퍼먹던 것처럼

밥 먹었냐, 엄마의 안부전화를 끊고 나면
밥 말고 다른 얘기가 하고 싶어진다
나는 이제 아무거나 잘 먹는다

잊지 않으려고 포스트잇에 적었지만
검은콩, 면봉, 펑크린, 8일 3시 새절역, 33만원 월세 입금
포스트잇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렸다

까맣게 잊어버린 검은콩이 냉장고에 있었다
썩은 내를 풍기는 검은콩엔 왜 싹이 돋아 있는지

이렇게 달콤한데, 중얼거리며
곰팡이 낀 잼을 식빵에 발라먹던 엄마처럼
이렇게 멀쩡한데, 중얼거리며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던 엄마처럼
죽고 싶다는 말이 솟구칠 때마다
밥을 퍼서 입에 넣었다

엄마도 나처럼 주걱을 잡았을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엄마는 매일 주걱부터 찾아야 했을 것이다

밥맛은 어째서 잊힌 적이 없는지
꽃들의 모가지가 일제히
햇빛을 향해 비틀리고 있었지
경이로움은 어째서 징그러운지

멈춰버린 시계를 또 차고 나왔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꽃 없는 꽃밭에 철퍼덕 앉아 보았다

- 임솔아(1987~)


불공정한 사회에서 꼭 불편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있다. 이곳이 잘못되었다고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고, 기형화된 사회에 겨우 권리를 요구해야 할 때다. 그러나 그 불편마저도 한낱 불안의 일종으로 처분해버리는 몰지각한 시각이 우리를 더 난처하게 한다.

정지하고 있는 것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삶의 질서를 직관해냈던 그의 데뷔작도 그러했고, 젊은 세대들이 처한 현실의 곤궁함을 자주 노출했던 그간의 시편들도 그러했다. 임솔아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공적 주체들의 목소리와 쓰리고 아픈 개인의 육성을 병치시켜놓음으로써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그 모든 폭력들을 음각시킨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칼을 드는 대신 주걱을 들게 되는 나의 행위태를 통해, 그래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상의 뜻하지 않는 선택들을 덤덤하게 고발하고 있다.

목숨은 사회였다. 아무래도 멀쩡하지 않고 달콤하지 않은, 주인 없는 생활들을 만져보면 다시 슬프다. 우리의 시계는 과연 어디로 움직이고 있을까.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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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눈이 오고,
엄마가 나를 낳는다
(나는 커다랗게 잠을 잔다)
엄마랑 나랑 사이좋게 피를 흘린다
죽고 없는 여자들이 우중우중 모여든다
눈은 오고,
엄마는 나를 낳는다
나는 애인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준다
발가벗은 여자들이 우줄우줄 춤을 춘다
엄마를 입고 미끄러운 구두를 신었다
아무도 안 왔다
눈도 안 왔다

- 심민아(1986~ )


△ 대다수의 시인은 자신의 태생에 대해 쓰고 싶은 욕망들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들이 써내려가야 할 앞으로의 언어가 지금 이곳에 없는 ‘다른 언어’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알리바이를 서사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심민아가 인식하고 있는 독특하고 끔찍한 ‘생일’이 더 범상해 보이는 것이다.

이 시에서 도드라진 점은 애인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주는 행위와 발가벗은 여자들이 춤을 추는 이미지가 교차되는 부분처럼 감각적인 이미지의 병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마와 피를 사이좋게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여성 화자의 참혹함이나 미끄러운 구두를 신고 살아가는 삶의 폭력성, 또는 다시 ‘엄마를 입고’ 그녀가 살아온 질서대로 딸 또한 살 수밖에 없는 현실 순환의 논리가 더 아프게 읽힌다. 게다가 제가 태어나는 날 눈이 내렸다는 정보를 시 말미에서 뒤집으며, 나는 태어난 적도 없고 자신의 이 모든 삶이 환상이라고까지 시인은 발설해버리고 있다.

이 예민한 여성 발화자에게 탄생 자체를 전복할 만한 폭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사는 동안에 우리는 수많은 폭력들에 노출된다. 어떤 폭력의 경우 우리의 삶을 의심하게까지 하는 너무 강력한 벽일 때가 있다. 나는 모든 억압에 대해 저항할 수 있음에서 인간임을 느낀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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