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과학의 한귀퉁이'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8.07.04 도토리
  2. 2018.06.07 길가메시 프로젝트
  3. 2018.05.09 엄마가 물려준 미토콘드리아
  4. 2018.04.11 낮의 길이
  5. 2018.03.14 정온식물
  6. 2018.02.14 ‘바이러스 스나이퍼’ 크리스퍼
  7. 2017.12.20 코딱지
  8. 2017.11.22 미세플라스틱의 거대한 세계
  9. 2017.09.20 45억년
  10. 2017.08.23 포유동물의 사치스러움
  11. 2017.07.26 나무는 죽음을 품고 산다
  12. 2017.06.28 방광은 왜 거기에 있게 됐을까
  13. 2017.05.31 산소와 숨쉬기
  14. 2017.05.08 밥을 먹는다

속썩은풀이라고도 불리는 여러해살이 식물인 황금(黃芩)의 학명은 스쿠텔라리아 바이칼렌시스(Scutellaria bicalensis)다. 이 식물은 햇빛을 차단하는 화합물인 바이칼린(baicalin)을 만든다. 화학적으로 플라보노이드 계열의 물질인 바이칼린을 발음하는 순간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러시아의 바이칼 호숫가, 거대한 평원에서 거침없이 쏟아지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마주하는 자그마한 풀을 떠올린다. 파도에 실려 육상에 처음 들어왔던 식물의 조상들은 물속에서는 마주하지 못했던 과도한 양의 자외선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항산화제 화합물인 플라보노이드가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육상식물 대부분은 많든 적든 플라보노이드 화합물을 만든다. 너무 강한 햇빛은 식물 세포 내부의 유전 정보인 DNA나 효소 단백질을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약 3억6000만년 전 데본기 후반 혹은 석탄기 초기에 식물들은 플라보노이드를 만드는 생합성 경로를 바꾸어 지금껏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두 종류 화합물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중 하나는 리그닌(lignin)이다. 리그닌은 일종의 접착제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탄수화물 덩어리인 셀룰로오스를 붙잡아 강력한 세포벽을 만들었다. 그 강인한 화합물 덕에 나무고사리 등 양치류 식물은 곧추서서 태양을 향해 잎을 뻗어 올렸다. 급기야 이 나무들은 30m 넘게 자라났다. 하지만 리그닌이라는 화합물을 분해할 수 있는 세균이 아직 진화하지 못한 데다 뿌리마저 약했던 이들 양치식물은 분해되지 못한 채 땅속에 모두 묻혀버렸다. 먼 훗날 석탄으로 환생한 이 나무들은 현재 대기권으로 이산화탄소를 빠르게 돌려보내고 있다.

다른 한 종류의 화합물은 타닌(tannin)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언급한 플라보노이드 혹은 탄수화물을 구심점으로 삼아 분자량이 500에서 2만 돌턴에 이르는 거대한 화합물이 만들어졌다. 리그닌처럼 타닌도 주로 나무에 존재한다. 떫은 감, 밤 껍질 혹은 차에 풍부하게 들어 있다. 바나나 껍질에도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리그닌이 나무를 서 있게 했다면 타닌은 초식동물이나 그 밖의 곤충 혹은 곰팡이나 세균의 접근을 막는 일종의 기피제(deterrent) 역할을 했다. 타닌이 쓴맛을 내기 때문이다. 

화합물 안에 존재하는 많은 페놀기가 단백질이나 물과 강하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타닌은 수렴성이 있다고 말한다. 도토리를 먹은 말이 갑자기 죽거나 감을 먹은 다음날 배변이 힘든 이유는 동일하다. 이 화합물이 대장에서 물을 격리시켜 변을 굳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쓴맛은 식물을 먹잇감으로 삼는 모든 생명체에게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자연계에서 쓴맛은 곧 독성이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그래서 물고기와 같은 경골어류 또는 척추동물이 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 단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유충일 때 풀을 뜯어먹어야 하는 곤충도 쓴맛을 감지하는 단백질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감각기관이 아닌 우리 인간의 기도에서도 쓴맛 수용체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쓴맛 수용체 단백질이 공기 중으로 들어가는 먼지나 미세 플라스틱 입자를 쓴맛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맛에 관한 한 인간은 다소 가학적인 데가 있다. 매운 것도 쓴 것도 기꺼이 먹는다. 한방에서 쓴맛은 건위(健胃) 효과를 갖는다고 한다. 위를 건강하게 한다는 의미와 쓴맛이 합쳐져서 고미 건위제라는 말이 등장했다. 얼마 전 식당에 갔다가 돼지가 타닌이 풍부한 도토리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도토리를 먹도록 돼지를 방목해서 키우기 때문에 고기 맛이 좋다는 논조였다. 이들 돼지의 근육질 사이에 지방의 함량이 높다는 논문도 찾아 읽었다. 타닌 말고도 도토리에는 탄수화물과 지방이 풍부하다. 아마 도토리에 풍부한 지방이 돼지의 육질을 부드럽게 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돼지는 쓰디쓴 타닌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논문에 따르면 다른 종류의 풀과 함께 먹어 돼지가 타닌의 쓰고 수렴성이 있는 특성을 완화시켰다고 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돼지 말고 인간도 도토리를 먹는다. 다람쥐들도 습한 땅속에 도토리를 묻어 쓴맛을 줄인 다음 나중에 그것을 찾아 먹는다고 한다. 도토리의 영어 표기 acorn은 oak(신갈나무)와 corn(낟알)의 합성어다. 신갈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우리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전 세계적으로 북반구 온대지방에 넓게 퍼져 있다. <신갈나무>라는 책을 쓴 윌리엄 로건은 신갈나무와 초기 인류의 정착지가 ‘거의 일치한다’고 해석했다. 쉽게 말하면 도토리가 초기 인류의 중요한 식량원이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다른 곡물이 이를 대체하면서 지금은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도토리의 중요성은 현저하게 줄었다.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 캘리포니아 지역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도토리를 저장하고 가루를 내어 식량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도 우리처럼 여러 번 물에 우려내 도토리의 붉은 빛 타닌을 제거했다.

여름날 창밖으로 보이는 신갈나무가 올곧다. 가을이면 허리를 굽힌 사람들이 검은 봉지 안에 도토리 열매를 주워 모을 게다. 추운 날 배고픈 멧돼지는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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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1일 일본 남단인 가고시마현에 사는 한 노인이 별세했다. 그 사건이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이유는 죽기 직전까지 그 노인이 지구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19세기의 마지막 해인 1900년에 태어난 나비 다지마는 프랑스의 잔 칼망, 미국의 사라 나우스에 이어 인류 역사상 세 번째로 오래 살았던 사람이다. 말할 것도 없이 생몰 연도가 문서에 기록된 경우만 유효하다. 

나비 다지마는 117년 8개월을, 칼망은 122년 6개월, 나우스는 119년 2개월을 살았다. 모두 여성인 이들은 110년을 넘게 산 초장수(super-centenarian) 인간 집단에 속한다. 가장 오래 살았던 남성은 일본인인 기무라 지무에몬이며 116세를 살았다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기원전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쓴 수메르의 길가메시를 시작으로 중국의 진시황제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꿈꾸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사실만을 밝힐 수 있었다. 생물학에서 자주 발견되는 예외도 죽음을 비켜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도 수명을 늘리기를 꿈꾼다. 구글까지 나서서 500세 수명을 목표로 벌거숭이두더지쥐를 연구하고 있다. 보통 쥐의 수명이 2~3년임을 감안하면 30년을 넘게 사는 저 두더지쥐에 과학자들이 현혹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수명은 생물학적 한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의학과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더 연장할 수 있는 것일까?

지난 세기 인간의 기대 수명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증가했던 눈앞의 증거가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수명에 한계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생아 사망률을 극적으로 줄였던 공중 보건과 환경 위생의 개선에 힘입은 바가 컸다. 미국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대의 과학자들은 1968년 이후 41개국의 사망자 기록이 담긴 국제 수명 데이터베이스를 훑어서 인간의 수명에 어떤 패턴이 있는지 조사했다. 2016년 네이처에 실린 이들 논문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오래 사는 사람들의 수는 현재에 가까울수록 증가했지만 일정 시점에 이르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105세까지 산 사람들의 수는 늘었지만 123세까지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100살이 넘은 사람 1000명 중 하나가 110살 문턱을 넘는다고 한다. 오래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생물학적으로 장수와 관련된 유전자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의 실체를 찾아다닌다.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은 일본의 어느 지역을 찾아 거기 사는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체 돌연변이를 찾아냈던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나 역학 연구 결과는 인간의 최대 수명이 125세를 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여태껏 오래 살았던 사람 20명의 사진을 보면 우리는 쉽게 인간의 근육에 새겨진 세월의 파괴력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인간은 채워진 마개를 연 채 수돗물을 틀어 물을 채우고 있는 욕조에 비유할 수 있다. 수돗물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욕조 안의 물은 소용돌이를 멈추고 마침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저 간단없이 공급되는 수돗물을 우리는 업이라고도 하고 생물학적으로는 물질대사라 부른다. 인간은 입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물질대사를 통해 산소와 버무려 물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그 효율은 50%를 밑돈다. 열로 소모하는 영양분이 많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그것을 사용한다.

문제는 산소다. 우리는 폐를 통해 들어온 산소를 다 쓰지 않는다. 그 증거는 적도 부근에서와 극지방 근처에서 정맥에 흐르는 혈액의 색이 다르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적도 부근에서 정맥혈의 색이 더 붉다. 심장으로 돌아오는 적혈구가 산소를 더 많이 싣고 있다는 뜻이고 이 말은 신체가 산소를 적게 소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는 반대로 추운 극지방에서는 산소를 알뜰히 써서 에너지뿐만 아니라 열도 생산해야 살 수 있다. 이런 관찰을 토대로 네덜란드 상선의 독일 의사 메이어는 열역학 법칙을 고안했다. 입으로 들어온 영양소가 지닌 에너지는 사람이 수행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나머지는 열로 변환되지만 총량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맥의 혈액 색깔에서 추론한 것이다. 대단한 상상력이다. 최근 나는 우리가 사용하는 산소의 양이 호흡한 총량의 2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인간은 이 사용하지 않은 80%의 산소도 덥히기 위해 애를 쓴다. 게다가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의 80%는 질소이다. 겨울에 우리는 저 질소도 덥혀서 공기 중으로 헛되이 내보낸다. 물리학자들은 저 헛된 노력을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표현한다. 물이 담긴 비커에 퍼지는 한 방울의 잉크 입자처럼 인간이 음식을 먹고 욕조의 소용돌이를 돌리는 한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다. 그 증가된 엔트로피는 120살 먹은 노인의 피부에 새겨진 주름으로, 또 그들을 굼뜨게 걷게 하는 근육의 퇴화로 이어진다. 하나 수명을 연장하려는 노력 한쪽에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으로 살아가는 20대의 팔뚝에 펼쳐질 100년의 세월은 또한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그러니 우리는 낭비되는 산소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입으로 들어가는 ‘수돗물’의 양을 줄일 일을 심각하게 고려할 때가 되었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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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달리 5월은 감정의 외출이 잦은 달이다. 어린이날에 이어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짬을 내 우리는 인간의 유전자 혹은 인류의 지식이 대물림되는 현장을 애써 기억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노력은 다소 소모적인 데가 없지는 않겠지만 삶의 고명이자 향신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물림은 ‘닮음’을 지속하는 과정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게 마련이다. 닮았다곤 해도 자식은 부모와 꼭 같지는 않다. 바로 이 ‘같지 않음’ 때문에 지구가 생물학적으로 다양성을 띠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 대물림의 주체는 세포다. 지구에 사는 75억이 넘는 인간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했다. 엄마로부터 하나, 아빠로부터 하나 이 두 개의 세포가 합쳐져 하나 된 세포인 수정란으로부터 인간은 발생을 시작한다. 한 개의 세포가 두 개가 되고 그것이 다시 네 개, 여덟 개… 이런 식으로 아홉 달이 지나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 탄생하게 된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한 세포가 두 개가 될 때에는 세포가 가진 가구 일습을 두 배로 불린 다음 그것을 공평하게 반으로 나누어 갖는다. 그렇게 세포는 서로 닮는다. 이제 나눠 갖는 세포의 가구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대물림을 얘기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유전자는 고이고이 포개져 핵 안에 보관된다. 이 유전자에 담긴 정보를 풀어 단백질 노동자를 만드는 장소는 소포체다. 단백질을 만들 때 쓰이는 에너지는 주로 미토콘드리아가 공급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미토콘드리아를 세포 내 발전소로 비유한다. 그것 외에도 단백질을 가공하는 골지체와 생체 물질의 재활용을 담당하는 리소좀이 있다.

이런 가구를 하나도 구비하지 못한 채 오직 산소만 운반하는 적혈구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세포 대부분은 저런 세포 소기관 가재도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 인간은 부모로부터 세 종류의 유전 정보를 물려받는다. 엄마와 아빠로부터 물려받는 각각 한 가지의 유전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토콘드리아도 자신만의 독특한 유전체를 가지고 당당하게 한몫 끼어든다. 바로 여기에 생물학의 가장 미묘한 수수께끼가 숨어있다. 미토콘드리아는 ‘불균등하게도’ 오직 모계를 통해서만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미토콘드리아는 난자를 통해서만 후대로 전달된다. 따라서 아들만 있는 엄마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체는 궁극적으로 진화의 무대에서 가뭇없이 사라진다.

왜 미토콘드리아가 문제가 될까? 그것은 인간이 물질과 에너지를 계속해서 공급해 주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체계이고 우리가 먹은 음식물은 최종적으로 미토콘드리아에서 화학적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전기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미토콘드리아의 위력을 능히 가늠할 수 있다. 앞에서 발전소에 비유했던 점을 떠올리면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미토콘드리아에서 평생 계속되는 에너지 생산 과정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미토콘드리아 안에 전자 고압선이 흐르기 때문이다. 피복이 벗겨진 채 운반되는 전기가 위험하듯 자리를 벗어난 미토콘드리아의 전자들은 세포 안팎의 단백질과 지질 혹은 유전자 가릴 것 없이 공격할 수 있다. 흔히 우리가 활성 산소라 부르는 것의 실체가 바로 궤도를 ‘벗어난’ 전자이다.

인간이 가진 수백 가지 세포 중 유일하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난자 안에는 미토콘드리아가 가득 들어차 있다. 자신의 유전자와 함께 엄마는 그 미토콘드리아를 자식에게 물려준다. 한 달에 한 번씩 난소를 나온 난자는 나팔관이라 불리는 길을 따라 움직인다. 중도에서 수정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자궁까지 오는 데 며칠이라는 시간이 더 걸린다. 머나먼 거리를 움직이지만 그동안 난자는 거의 에너지를 만들지 않는다. 앞에서 설명했듯 에너지를 만드는 동안 불가피하게 미토콘드리아 안에서 활성 산소가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자는 활성 산소가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공격하여 태아에게 심각한 손상을 입힐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대물림 방식을 채택했다.

그렇다면 나팔관을 따라 난자를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그것은 바로 섬모(纖毛·cilia)라 불리는 또 다른 세포 소기관의 움직임에서 나온다. 숨 쉴 때 공기에 섞여 들어오는 미세먼지를 붙잡아 점액과 함께 몸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 기도(氣道) 세포의 섬모이다. 마찬가지로 나팔관에서도 갈대 이삭처럼 늘어선 섬모가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난자를 이끌어 간다. 난자는 마치 가마에 탄 새색시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에너지 사용을 극소화하면서 행여나 미토콘드리아나 난자에 들어 있는 유전체가 다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렇게 금지옥엽처럼 고이 간수한 미토콘드리아를 물려받은 수정란은 아홉 달 동안 완결체로 자라난다. 분열하여 그 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에 난자에서 온 종잣돈 미토콘드리아는 태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안에서 쉼 없이 에너지를 만드는 평생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이렇게 일사불란한 한 방향 섬모의 움직임에 기댄 난자의 미동 없음을 기리어 인간들은 기꺼이 어버이날을 만들어 냈다. 하늘 푸른 5월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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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소생(蘇生)한다는 봄이다. 작년의 잎을 아직 매달고 있는 단풍나무도 새로이 자줏빛 잎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활짝 기지개를 펴는 식물과 달리 어떤 사람들은 봄에 아지랑이처럼 다소 무기력해진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춘곤증이라고 부르고 거기서 벗어나려 애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을 시나브로 지나 밤의 길이가 11시간 반보다 줄어들면 우리 뇌는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을 적게 만들어낸다. 밤의 길이가 긴 겨울에 멜라토닌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인간도 겨울에는 잠을 더 자는 게 생물학적으로 맞는 것 같다.

지구의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밤낮의 길이는 제각각이라 해도 하루의 길이는 24시간으로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 24시간을 주기로 인간의 생물학적 변화가 반복된다. 잠이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잠을 잘 때는 먹지 못하기 때문에 밤에는 소화를 담당하는 효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이런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하루의 활동 주기를 결정하는 사령부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뇌 시상하부, 시교차상핵이라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곳에 있다. 약 2만개의 신경세포가 여기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망막을 통해 들어온 빛의 세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른 동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마주하는 외부 환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빛이다. 이 사실은 인간의 망막에서 색을 감지하는 세포가 450만개인 반면 빛과 어둠을 감지하는 세포가 9000만개에 육박한다는 저 숫자의 엄정한 차이에서도 실감할 수 있다.

꽃이 피고 봄이 왔다는 것은 곧 낮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말이다. 햇볕이 더 강하고 더 오랫동안 내리쬐는 것이다. 이에 반응하여 우리의 신체는 체온이 올라가고 그에 따라 혈관이 확장된다. 5ℓ의 혈액이 돌아다니는 우리 혈관의 길이가 10만㎞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혈관이 아주 조금만 팽창해도 혈압은 떨어지게 된다. 그 결과 뇌로 가는 산소의 양도 줄어든다. 따라서 봄이 되면 몸이 나른하고 피곤한 춘곤증이 나타나는 것이다. 낮의 길이에 따라 신체가 반응하는 현상은 시차 적응과 비슷하다. 인간의 몸이 늘어난 햇빛에 적응하는 데 2~3주가 걸리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낮이 길어지면 우리 몸은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을 적게 만드는 대신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 좀 더 왕성하게 활동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빛을 찾아 나서고 활발하게 세로토닌을 만들어내면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 걸리기 쉬운 감염 질환도 피해갈 수 있다.

이렇듯 낮의 길이에 대응하여 행동이나 물질대사를 변화시키는 적응 방식은 동물,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곰팡이, 세균 등 지구상 거의 모든 생명체가 보편적으로 취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밤과 낮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광합성으로 귀결된다. 밤이 되면 식물도 광합성을 멈추고 동물처럼 산소를 소모하며 호흡한다. 밤이 되면 식물이건 동물이건 모두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내보낸다. 하지만 해가 뜨면 식물과 조류는 이산화탄소를 포도당으로 전환시키면서 부산물로 산소를 방출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소를 감히 ‘쓰레기’라고 부르는 사람을 볼 수는 없겠지만 과거 먼 옛날 산소가 독성 물질이었던 적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생명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얘기다. 따라서 낮에 만들어진 산소를 피하기 위해 세균들이 하루의 활동 주기(circadian rhythm)를 조절하는 ‘최초’의 체계를 발명했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사실 산소를 피하는 일은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는 천형과도 같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인간을 위시한 생명체들은 항산화제라는 물질을 만들어냈다. 항산화제에는 비타민 C와 같은 작은 물질이 있는 반면 단백질처럼 커다란 물질도 있다. 퍼록시리독신(peroxiredoxin)이라는 단백질은 광합성을 하는 남세균과 과일의 단맛을 좋아하는 초파리뿐만 아니라 쥐, 애기장대 등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에 존재하며 빛의 길이에 따라 24시간을 주기로 그 양이 변화한다. 빛과 어둠은 무척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 활동을 제어한다.

2017년 낮의 길이와 관련된 한 가지 흥미로운 연구가 ‘사이언스 중개 연구’라는 저널에 발표되었다. 낮에 입은 상처가 밤에 다친 상처보다 더 빨리 회복된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밤이 아니라 낮에 화상을 입은 사람의 피부가 더 빨리 회복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밤에 화상을 입은 사람의 상처가 회복되는 데 60%나 더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결과가 나온 까닭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수술을 하게 되는 경우라 해도 가능하면 낮에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가 곧바로 따라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새겨진 상처도 밝고 꽃이 피는 봄에 더 빨리 회복될 수 있을까? 생물학적으로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되기 시작할 테니까. 하지만 그것뿐일까? 4월16일이 다가온다. 노란 리본은 가시광선을 감지하는 우리 망막 안의 세포를 따라 뇌에 그 모습을 새긴다.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이 길어지는 그 바다를 우리는 지긋이 응시할 것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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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과히 정갈하지 않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다가 곰팡이에 된서리를 맞은 적이 있었다. 두피에 마늘즙이나 식초를 바른다거나 백열전등으로 지진다거나 하는 민간요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곰팡이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내 기억에 곰팡이는 ‘강한 적’이었다. 지구상에는 약 150만종의 곰팡이가 있다고 한다. 엄청난 숫자다. 그중 식물에 쉽게 침입하는 곰팡이는 27만종, 곤충에는 5만종 정도가 있다고 한다. 반면 포유동물에 질병을 일으키는 곰팡이의 숫자는 수백 종에 불과하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차이는 왜 생겨났을까? 우선 쉽게 면역계를 그 원인으로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면역계 외에도 포유동물은 곰팡이와 맞설 그럴싸한 나름의 전략을 수립했다. 바로 체온을 올리는 일이었다. 뉴욕 앨버트 아인슈타인 대학 카사드발 교수는 포유류가 섭씨 30~40도 사이에서 체온을 1도씩 올릴 때마다 곰팡이의 침입을 6%씩 저지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렇듯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은 에너지 예산 면에서 보자면 꽤나 소비적이지만 최소한 곰팡이를 퇴치하는 데는 안성맞춤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러면 곰팡이 퇴치 외에 정온성의 다른 이점은 없을까? 캘리포니아 대학 앨버트 베넷과 오리건 대학 존 루벤은 정온동물과 변온동물의 가장 큰 차이가 지구력에 있다고 보았다. 먹이를 쫓아가는 사자와 물속에서 눈만 내놓고 먹잇감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악어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이해될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포유동물과 닭 따위의 조류는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동물로 자신을 무장함으로써 살아가는 장소를 추운 곳까지 확장하고 근육을 빠르게 움직여 먹이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온도가 10도 올라갈 때 근육의 움직임이나 효소의 활성이 두 배로 증가한다는 점은 잘 알려진 생리학적 법칙이다. 물론 50도를 넘어가면 세포 일꾼인 단백질의 변성이 시작되므로 정온동물의 체온은 40도 근처에서 최적화된다. 근육에는 이동하는 데 쓰이는 가로무늬근도 있지만 소화기관이나 혈관을 움직이는 민무늬근도 있다. 정온성을 가진 생명체는 밤낮 할 것 없이 심장, 간을 포함한 소화기관 및 콩팥의 기능을 완벽하게 유지한다. 심장이 혈액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빠른 속도로 운반하는 동안 콩팥은 질소 노폐물을 몸 밖으로 신속하게 내보낸다. 흡수를 마친 소화기관은 간으로 영양소를 빠짐없이 보낸다. 정온동물 신체 기관의 이런 여러 장점들을 한데 모아보면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정온성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정온성을 선택한 동물은 전체 동물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150만 중에 조류 9000종, 포유동물 4500종을 제외한 나머지 99.9%의 동물은 주변 환경에 따라 체온이 변하는 변온성을 채택했다.

이렇게 보면 정온성은 생명체 진화 전 과정에서 극히 예외적인 드라마에 속한다. 그렇다면 일부 동물계에서 정온성은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을까? 과연 파충류인 공룡의 피는 차갑기만 했을까? 공룡을 연구한 최근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큰 육상 동물이었던 용반목(Sauropod) 공룡은 풀을 먹었다고 한다. 초식동물들이 흔히 겪는 문제는 탄소에 비해 질소의 섭취량이 적다는 점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질소를 섭취하려면 동물은 상대적으로 탄소가 풍부한 풀을 많이 먹어야 한다. 잠을 줄이면서까지 풀을 먹은 결과 동물의 몸에는 탄소가 과도하게 축적되었다. 이 축적된 탄소를 처리하기 위해 공룡들이 취한 방식은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는 몸집을 키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탄소를 태워서 열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주도한 리버풀의 존 무어스 대학 윌킨슨 박사는 체중에 비해 표면적이 상대적으로 넓은 몸집의 공룡 새끼들이 열을 내면서 탄소를 처리했다면 생존에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탄소를 태워 열을 내는 대사 체계가 야행성 포유류에서도 시작되었으리라고 과학자들은 짐작한다. 우리는 정온성이 포유동물과 조류에 국한해서 진화되었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생애 어느 순간 잠깐이라도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생명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어류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참치, 황새치, 악상어가 열을 내면서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눈 주변의 근육을 움직여 먹잇감을 정확히 포착한다. 비단뱀도 알을 낳고 부화하는 동안 몸의 열을 내 자신의 분신을 보호하려 든다. 심지어 식물도 생식하는 동안 에너지를 써서 열을 낸다. 바로 수분에 참여할 곤충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손난로’ 전략이다. 딱정벌레는 온도가 40도가 넘는 천남성과 식물들의 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씨를 성숙시키기 위해 연꽃도 열을 낸다.

경칩 지난 절기에 눈이 쌓인 산길을 걷다 마주치는 복수초(福壽草) 노란 꽃이나 변산 바람꽃도 열을 내 눈을 녹이고 안온하게 자리 잡는다. 남들보다 일찍 수분을 마치고 씨를 만들어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을 보고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루 꼬박 세끼를 먹고 100년을 향해 산다고 하는 인간은 무슨 아름다움을 바라 하루 종일 열을 낼까? 2018년 한국의 봄날, 쑥이며 민들레 앉은뱅이 풀들이 앞 다투어 돋을새김으로 고개를 내민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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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평균 70년을 산다면 그중 1년은 감기에 걸려 있다는 통계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햇수로 따지면 매년 약 닷새 좀 넘게, 일수로 따지면 매일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인 20분 남짓 우리가 감기에 골골하고 있는 셈이 된다. 평생 고뿔을 모르고 살았노라 곤댓짓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일 년에 한두 차례 감기를 명절 손님처럼 맞는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10%의 인류가 경험한다는 감기는 바이러스 때문에 발병한다. 우리처럼 온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에 감기에 취약하다. 날이 차가워진 까닭에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면역력이 떨어져서 쉽게 감기에 걸릴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계절에 따른 온도 차이가 크지 않은 적도 근처의 사람들은 감기에 잘 걸리지 않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홍콩에서는 작년에 감기 바이러스의 사촌격인 인플루엔자 감염으로 300명이 넘게 죽었다. 아열대 기후의 특징을 보이는 홍콩에서 여름 시즌인 5월에서 8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2006년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적도 근처의 사람들도 온대 지방인 미국 사람들 못지않게 감기에 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뉴욕에든 자바섬에든 바이러스는 늘 있는 것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면역력이 떨어진 인간을 골라서 바이러스가 습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온대 지방과 마찬가지로 적도 지역에서도 감기에 취약한 연령층은 U자 그래프를 그린다. 아주 어리거나 나이든 사람들의 면역력이 상대적으로 쉽게 약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면역계는 왜 감기 바이러스에 유독 취약한 것일까? 일주일 정도의 휴식과 따뜻한 콩나물국 말고 다른 처방은 없는 것일까?

뉴스를 조금만 눈여겨보면 바이러스는 사람뿐만 아니라 새들과 식물에도 거침없이 달려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물고기, 개구리, 악어도 사는 동안 한번쯤은 바이러스에 시달린다. 지금까지 나열한 생명체는 모두 눈에 보이지만 현미경으로나 보임직한 세균도 바이러스 때문에 흔히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다양한 바이러스 중에서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와 조류가 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들이 있다. 감기는 이미 얘기했고, 현대판 흑사병이라 불리는 에이즈, 소두(小頭)증을 유발한다는 지카, 해마다 갈마들며 조류 독감과 구제역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바이러스는 RNA라는 다소 불안정한 유전 물질의 돌연변이를 통해 끊임없이 변신하며 약물이나 백신에 대해 내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세균은 이런 RNA 바이러스에 상대적으로 강한 내성을 보인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세균은 쉽사리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다른 수단도 있겠지만 침입한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감지하고 제거하는, 크리스퍼(CRISPR)라 불리는 세균의 면역 담당 저격수가 한몫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스퍼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줄임말이다. 세균의 유전자 가위니까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자른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를 자를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 생물학의 묘미가 살아 숨 쉰다. 세균의 크리스퍼는 자르고자 하는 바이러스 유전자 표적에 지퍼를 채운 것처럼 착 달라붙는다. 그런 다음 크리스퍼와 팀을 이뤄 일하는 가위 단백질이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싹둑 잘라버린다. 스스로를 조립하지 못한 바이러스는 이제 더 이상 바이러스가 아니며 온전하게 살아서 세균 밖을 나갈 도리가 없다.

사실 크리스퍼의 단서를 짐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1987년 세균의 유전자를 비교 분석하던 일본의 연구진들이 크리스퍼의 존재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 정체가 밝혀진 것은 21세기에 접어든 뒤였다. 요구르트나 요플레와 같은 발효 유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균을 조사하던 덴마크의 대니스코 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체계가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내성을 갖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흥미로운 점은 크리스퍼가 과거 세균 집단에 무단 침입했던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채무기록처럼 꼼꼼히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세균은 자신을 한번 침입한 바이러스를 쉽사리 잊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면역계의 이러한 특성을 두고 적응성 면역이라고 칭한다.

이후 분자생물학자들이 크리스퍼의 파급력을 짐작하게 되면서 변방에 있던 세균의 면역 체계가 일약 유전공학의 총아로 떠올랐다. 마침내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인공적으로 합성하여 정확하고 빠르게 동물이나 식물의 특정 유전자 부위를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혈우병과 같은 유전 질환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게 될 것이다. 비계 대신 살코기가 듬뿍 든 ‘슈퍼’돼지를 만들 수도 있다. 곰팡이 감염에 강한 바나나도 곧 선보일 것이다. 크리스퍼는 이미 변화의 장도에 올랐다.

한편 과학자들은 크리스퍼가 본디 바이러스의 대항마로서 진화한 세균의 방어체계라는 점을 잊지 않고 그것을 난공불락의 감기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키는 데도 쓸 수 있으리라 궁리한다. 무작정 살처분에 맡기는 구제역과 조류 바이러스 감염 가축들도 곧 크리스퍼와 한번쯤 만나야 하지 않을까? 영하의 강추위가 한정 없이 길어지는 이 겨울, 나는 작고 작은 것들의 세상을 꿈꾼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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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 대기 중인 차 안에 홀로 있는 남성은 주로 코를 파면서 짧은 시간을 요긴하게 보낸다고 한다.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홀로 있는’과 ‘남성’에 찍힐 것 같다. 혼자 있을 때 코를 파는 일이 흔하고 그런 행위가 성별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중인환시(衆人環視) 중에 코를 파는 행동을 권장하는 사회는 없다. 그렇다면 들켰을 때 창피할 수도 있는 코 파는 행위가 사라지지 않고 인간 사회에 만연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최근 여러 국가의 과학자들이 모여 코 파기와 관련된 인간의 유전자가 있지 않을까 연구한 적이 있었다.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별 쓸데없는 연구를 다 한다고 지청구 먹기 딱 좋은 실험 소재다. 하지만 ‘우리 피부는 왜 밤에 더 가려울까?’와 같은 궁금증을 파헤쳐가는 동안 가려움을 매개하는 새로운 신경세포가 발견되기도 했으니 코딱지를 연구하다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미생물 세계의 장관을 접하지 말란 법도 없다. 유전자가 코를 파는 행위와 같은 형질을 결정한다고 하면 늘 그렇듯 ‘유전자 만능’에 관한 찬반 논쟁이 불거진다. 해석에 유의해야 한다면서 다국적 연구진은 코 파는 일이 콧구멍을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 ‘자연 선택된’ 행동이라고 말했다. 인류의 생존에 뭔가 이점이 있었다는 뜻이다. 가느다란 인간의 손가락과 마디가 코 파기에 적합하다는 따위의 다소 허무맹랑한 주장도 있지만 이는 논외로 치자. 그러나 콧구멍을 청결하게 하는 일이 카나비노이드(cannabinoid) 신호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데 대해선 솔깃한 느낌이 든다. 소량이나마 초콜릿에도 들어 있는 카나비노이드는 대마초의 주성분이며 우리 인간의 뇌에서도 작동하는 신경전달 물질이다. 우리 뇌 안의 보상 회로는 마약성 식물인 대마나 아편에서 발견되는 물질과 흡사한 화합물을 사용한다. 이런 연구 결과를 접하면 코 파는 행위가 탐닉적인 성격을 띨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닌 게 아니라 코 파기의 즐거움을 논한 책이 시중에 회자되기도 한다.

많지는 않지만 코 파기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다. 2001년 “흉내 낼 수 없거나 흉내 내면 안 되는” 연구 결과로 이그(Ig) 노벨상을 받은 인도의 안드라데와 스리하리는 청소년과 아이들 200명을 대상으로 코 파는 행위에 대해 조사했다. 결과에 따르면 코 파는 일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수행하는 매우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에 속한다. 하지만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연구하고 논문으로 발표하는 과학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코 파는 행위가 즐거움을 준다거나 가려운 데를 긁는 행위가 뇌의 행복 중추를 자극한다는 연구도 극히 최근에 수행된 일이다. 임상 정신의학 저널에 소개된 안드라데와 스리하리의 연구 결과 중 흥미로운 사실은 심지어 코딱지가 맛있다고 답했던 아이들이 4.5퍼센트나 된다고 꼭 집어 숫자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맛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나도 코딱지의 짭조름한 맛을 기억한다.

올해 초 동료로부터 코딱지를 먹는 일이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는 투의 얘기를 들었다. 얘기의 출처는 네이처에 나온 논문이었다. 내용은 방대하지만 결론은 으레 그렇듯 지극히 단순했다. 우리 코딱지에 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이 항생물질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토양에 사는 미생물이 항생물질을 만든다는 기존의 통념을 흔들어 놓았다. 흔히 우리는 인간 질병의 원인이라며, 눈에 보이지 않게 작은 미생물을 싸잡아 ‘공공의 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의 미생물은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일부 미생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유익한 생명체들이다. 요즘 들어 이들 미생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늘고 있다. 서점에 가면 10퍼센트 인간이니 우리 몸에 미생물이 너무 많다느니 하는 내용의 책을 쉽게 볼 수 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전체의 열 배 정도가 세균이고 그 무게는 무려 고기 ‘두 근 반’인 1.5킬로그램에 이른다. 이들 미생물 대부분은 대장(大腸)의 ‘주민’들이고 인간의 소화기관이 처리하지 못한 섬유질 등을 먹고 살면서 인간 영양소의 약 10퍼센트를 보상으로 제공한다. 그러나 북적거리는 그곳이 아니라도 우리 몸 곳곳에서 미생물은 꿋꿋이 살아간다. 한 올의 머리카락을 분간하지만 우리 눈이 세균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인가?

입속처럼 콧속에도 90종류가 넘는 미생물이 상주한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이 다르듯 이들 미생물의 구성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들의 코에는 루그더닌이라는 무척 생소한 이름의 항생제를 만드는 미생물이 산다고 한다. 여러 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이 물질은 항생제 내성을 가진 고약한 세균의 생육을 저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그더닌을 만드는 미생물을 보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병원성 세균에 대한 무기 하나를 더 가진 것이 아닐까? 혹시 우리 몸에 상주하는 세균은 우리 면역계의 일부일까? 질문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 답을 얻기 위한 연구도 지속되어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코딱지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물음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 안 작디작은 세계가 시나브로 그 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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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평균 키보다 네다섯 배 정도 길기 때문에 우리의 구절양장 소화기관은 똬리 치듯 구부러져 있다. 입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최대한 흡수하려는 절박함이 고스란히 반영된 해부학이다. 사실 인간이 음식을 먹는 이유는 육안으로 식별 불가능한 우리의 작은 세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그들이 먹을 수 있게 아주 잘게 쪼개주어야만 세포가 살고 세포의 집합체인 우리도 산다. 단백질은 스무 종류의 개별 아미노산으로, 전분은 포도당으로 그리고 지방도 지방산으로 쪼개져야 비로소 소장에서 원활한 흡수가 가능해진다. 광어에서 온 단백질 정보와 감자에서 온 전분의 정보가 이런 기본 단위로 쪼개지지 않은 채 흡수되면 생명체는 곧바로 면역계를 출동시킨다. 해독되지 않은 날것 정보를 내가 아닌 ‘비아’(非我)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따라서 먹고 흡수하는 소화 행위는 곧 서로 다른 생명체에서 도달한 정보를 해체하고 개별화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해체할 수 없는 정보에 노출되는 일은 없을까?

물론 있다. 한때 호황을 누렸던 석탄 채굴장의 노동자들이 먹고 마셨던 탄가루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은 규제가 심하지만 내열성이 좋아 한때 건축 자재로 흔하게 사용되었던 규산염 섬유 결정인 석면도 인간의 폐나 소화기관에서 해체되지 않은 정보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몸에서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이런 날것 정보에 인간이 노출되면 오랜 잠복기를 거쳐 진폐증(asbestosis)이나 복막 중피종(mesothelioma)이라는 달갑지 않은 병이 찾아올 수 있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미세 먼지도 ‘인플라마좀’이라 불리는 면역 반응 복합체를 건드릴 가능성이 높다. 흔히 간과되긴 하지만 담배 연기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다. 이는 미국에서 담배 실험할 때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환경에서 온 것 말고 우리 몸에서 만들어져서 면역 반응을 부추기는 물질들도 많다. 이런 물질들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생체 물질이 과량으로 존재할 때 만들어질 가능성이 부쩍 커진다. 가령 혈중에 다량으로 떠돌던 포도당이 화학적으로 알부민 단백질에 달라붙어 생겨난 물질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현상은 당뇨병 환자에게서 쉽게 발생하리라 예측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과량일 때 날카로운 미세 칼날 결정을 만드는 콜레스테롤도, 통풍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알려진 요산 결정도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 

몸 안에서 만들어졌건 환경에서 유래했건 간에 우리는 이런 물질을 통틀어 위험 인자라고 부른다. 이 위험 인자라는 말은 세균이나 병원성 미생물에 대적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면역계가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근 들어 새로운 위험 인자가 등장했다. 바로 미세플라스틱이다. 죽은 가마우지 배에서 발견되는 플라스틱병이나 어구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미세플라스틱은 큰 플라스틱병들이 파도와 태양빛에 닳고 닳아 잘게 부서지다가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게 크기가 줄어든 것들이다. 감내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노,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미세플라스틱이 설탕과 꿀, 맥주 그리고 소금에서 발견된다는 논문도 최근 출간되었다. 심지어 각질을 제거하는 의약부외품에도 미세플라스틱이 존재한다. 해수면에서 증발된 수증기의 순환을 통해 혹은 버려진 플라스틱이 닳아 육지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된다. 

이렇듯 잠깐만 살펴보아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굴이나 홍합을 통해 우리가 섭취하는 미세플라스틱이 1만개라고 치고 그 양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자. 평균 크기가 1마이크로미터인 미세플라스틱 1만개를 죽 늘이면 10㎜가 된다. 1㎝다. 1년에 그 정도라니 무시할 만한 양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 미세플라스틱은 세포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인간 진화 역사에서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마시는 정수기 물에서도 미세플라스틱 조각이 발견된다니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굴러갈 것 같지는 않다.

2016년 한 해에만 인류는 3억2000만t의 플라스틱을 만들었다. 이 중 40%가 단순히 물건을 포장하기 위해 쓰였다. 1950년 이후 2015년까지 생산된 플라스틱 양은 모두 83억t이다. 그중 76%에 해당하는 약 63억t이 쓰레기로 폐기처분되었다. 재활용 비율은 고작 10%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현생 인류는 신속하게 분해할 기술이나 미생물도 없는 상태에서 플라스틱을 산처럼 쌓고 있다. 

바다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잇감을 쫓는 물고기는 배 안에 플라스틱, 미세플라스틱 가리지 않고 채워 넣는다. 잠시 후 생선 요리라는 이름의 미세플라스틱 ‘요리’가 우리 식탁에 오른다. 후식으로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용액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하늘에서는 미세플라스틱이 가을 단풍과 함께 떨어진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세포는 미세플라스틱을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하지만 그 세포의 집합체인 인간은 오늘도 플라스틱을 만들고 무심코 버린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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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가 생긴 지 45억년이 넘었다고 배운다. 얼추 100마이크로미터인 머리카락 한 올의 지름을 1년이라 치면 지구의 나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약 450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우리의 머리카락 45억개를 빈틈없이 잇대 세우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일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퇴하긴 했지만 한때 나와 동종업계 사람처럼 보였던 한 장관 후보자는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정도라고 ‘신앙적으로’ 주장했다. 여기저기 뒤져보니 1650년대 아일랜드의 주교 어셔(James Ussher)라는 사람이 성서를 꼼꼼히 해석한 뒤 지구가 기원전 4004년 10월23일에 탄생했다고 말했단다. 이 주장에 따르면 2017년인 현재 지구는 6021년에서 한 달 정도가 모자란 세월을 살았다. 앞의 비유를 적용해보면 지구의 나이는 머리카락 6000개가 나란히 선 거리, 6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이는 성인의 보폭보다 짧고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 있던 우물의 반지름 정도가 될까 말까 한 길이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45억년 정도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는 불편함이 책을 쓰는 계기였다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광물과 지구가 함께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지구 이야기>에는 지구의 나이를 캐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과학 혁명 시기에 지구의 나이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꼬리 달린 혜성을 발견하고 그것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에드먼드 핼리는 바닷물 속에 들어있는 소금의 총량과 강을 통해 매년 바다로 흘러드는 소금양을 측정하면 지구의 나이를 알 수 있다고 추론했다. 1715년의 일이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머금은 산성비가 대륙을 침식시켜 지각의 염분을 쓸고 바다로 갈 것이기에 이런 추론은 상당히 그럴싸하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 민물은 고사하고 바닷물에 녹아있는 소금의 양을 측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증명할 실험적 방법이 없다면 그 어떤 가설도 상상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던 5년 동안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를 탐독했던 다윈은 영국 남부 지역의 지질학적 변화가 얼추 3억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고 <종의 기원> 초판에서 한때나마 주장했다. ‘한때나마’라고 쓴 까닭은 <종의 기원> 3판에서 다윈이 슬며시 그 내용을 빼버렸기 때문이다. 극심했던 종교계의 반대로 인해 자신의 이론이 훼손될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켈빈 경도 지구 나이를 추산하는 데 합세했다. 하지만 그도 당대에 축적된 과학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지구를 먹여 살리는 태양이 수천만년 동안 꺾이지 않고 그 기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켈빈은 4억년에서 1억년으로 계속해서 지구의 나이를 줄여나가다가 최종적으로는 2400만년이라고 말했다. 1897년의 일이다. 20세기가 다 되었을 당시의 과학자들은 축적된 과학 지식과 인류의 이성에 기반을 둔 지구의 나이를 수천만년까지 늘려놓았다.

지질학적 변화나 화석을 통해 드러난 증거는 지구의 역사가 다윈이나 지질학자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길다는 점을 암시했지만 그 사실을 증명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19세기 후반 지구의 나이를 추정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동위원소의 발견이다. 서랍 속 포장된 사진판 위에 우라늄 광석 덩어리를 던져두었던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은 나중에 사진판에서 빛에 노출된 듯 우라늄 광석의 흔적이 새겨진 모습을 발견했다. 베크렐에게 우라늄 광석을 받은 마리 퀴리는 특정한 암석이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성질을 방사능이라고 불렀다. 여세를 몰아 라듐, 폴로늄이라는 방사능 물질을 발견한 퀴리는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연거푸 받았다. 얼마 뒤 물리학자 러더퍼드는 방사능 원소가 붕괴되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 때문에 지구 내부가 뜨겁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게다가 그는 우라늄 원소가 납 원소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제 인류는 지구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과학적 기반을 한껏 다졌다. 20세기 초 우라늄 원석 연구를 파고든 러더퍼드는 그 암석이 7억년이 넘은 물체라고 발표했다. 21세기인 현재 우리는 우라늄 원소의 반감기가 약 45억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구 탄생 초기에 우라늄 원소가 100개 있었다면 지금은 50개 정도가 남았다는 뜻이다. 이는 우라늄 50개가 납 원소로 변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45억년이 지나 지금보다 태양의 온도가 더 떨어지게 되면 25개의 우라늄과 75개의 납 원소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 예측은 들어맞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50살이 넘은 나더러 사실은 당신이 49살에 태어났으니 고작 1년을 산 것에 불과하다고 속삭인대서 믿을 내가 아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과학적 질문이 설 자리는 비좁다. 지금껏 인류의 역사는 과학적 질문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온 기록이 아니었던가?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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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점화에 의한 가스 팽창이 피스톤을 움직이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터빈을 돌려 전깃불을 밝힌다. 연료가 계속 공급되고 상류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드는 한 자동차는 움직이고 터빈은 전기를 생산할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으며 다만 변환될 뿐이라고 말한다. 혹은 폭포 위의 물이 가진 위치 에너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화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두산 장백폭포처럼 그냥 아래로 떨어지는 물은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 자갈을 좀 더 아래쪽으로 밀어냈거나 아니면 지축을 흔들면서 지각을 구성하는 물질의 온도를 높였을 것이다. 아래로 떨어진 물이 폭포 위로 저절로 올라가지 못하듯이 터빈을 돌리지 못한 에너지도 다시 회수될 수는 없다. 이렇듯 유용한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되지 못한 것들은 필연적으로 낭비되어 흩어진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설명이 가능할까? 못할 리 없다. 우리말에 ‘밥심으로 일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음식물에 들어 있는 화학 에너지를 추출해서 일을 한다. 뛰고 생각하고 신문을 읽는 모든 행위들에 바로 이들 에너지가 사용된다. 우리는 음식물에 포함된 화학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받지 못하면 작동을 멈춰버리는 ‘비평형계’ 생명체일 뿐이다.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지구와 지구 위의 대부분의 생명체는 태양 에너지의 신세를 지고 있다. 우리가 먹는 밥이나 고기도 결국 태양에서 출발한 에너지가 전기화학적 변환을 거친 결과물에 불과하다. 태양빛이 미치지 않는 심해의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구 내부 에너지를 이용해서 살아가는 소수의 생명체는 물론 예외이다.

이제 우리 입으로 들어온 화학 에너지의 운명을 쫓아가 보자. 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밥만 먹는다고 가정해보자. 소화기관에서 소화되지 않고 몸 밖으로 나가는 10%를 제외한 90%의 밥 대부분은 포도당의 형태로 혈액에 들어온다. 혈액을 전신으로 순환시키는 심장 덕에 포도당은 신체 각 세포에 전달된다. 수십조개에 달하는 인체의 세포들은 포도당을 잘게 쪼개서 에너지를 회수한다. 생물학책에는 포도당 한 개로 38개의 ATP(아데노신 3인산) 분자를 만들 수 있다고 적혀 있다. ATP는 생명체의 에너지 통화라 불리는데 우리가 먹은 탄수화물은 ATP 형태로 전환되기 전에는 세포가 일을 수행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하지만 세포들은 실제 30개가 못되는 ATP 분자를 만들 뿐이다.

ATP라는 에너지 통화로 변하지 못한 포도당의 에너지는 세포 내부의 물을 덥히는데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이나 새들은 자신들이 섭취한 영양소의 상당 부분을 열에너지로 바꾼다. 내연 기관의 온도가 올라 자동차 밖으로 흩어지는 것과 달리 포유동물은 한동안 열을 보존한다. 하지만 그 열은 어디에 보관될까? 생물학 교과서를 보면 우리 몸의 7할은 물이다. 생체 내에 포함되어 있는 여타 물질에 비해 물의 크기는 매우 작다. 따라서 순전히 분자의 숫자로만 따질 때 우리 몸은 거의 대부분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물이 가득 찬 풍선과 같은 육신이 내리누르는 중력을 오직 두 발로 서서 평생을 버티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비타민C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헝가리의 생화학자, 얼베르트 센트죄르지는 “생명은 고체의 장단에 맞춰 물이 추는 춤”이라고 말했다. 물을 제외한 인간의 육신 중 3할은 고체이고 그중 얼추 절반이 단백질이다. 물에 녹는 일부 단백질도 여기서는 의미상 고체 역할을 맡는다. 그렇다면 얼베르트 센트죄르지의 말은 “생명은 단백질의 장단에 맞춰 물이 추는 춤”으로 각색되고 생명은 “물이 추는 춤”이라는 말로 축약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물이 추는 춤의 핵심은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성에 있다. 물의 온도가 10도 올라가면 효소 단백질의 활성은 두 배 증가한다. 40도 근처에서 최대 효율을 나타내는 단백질은 그보다 10도 정도 높은 온도에서 계란 흰자처럼 변성된다. 차가운 토굴에서 나와 몸을 따뜻하게 덥히지 못한 도마뱀의 미오신 근육 단백질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파충류의 혈액, 즉 물도 춤을 추어야 하는 것이다. 변온동물인 이들 도마뱀은 태양을 향해 기꺼이 몸을 맡겨 체온을 높인 후에야 비로소 먹을 것을 찾아 나설 수 있다. 파충류들도 분명 물을 덥히겠지만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에 비해 훨씬 적은 양의 음식물을 입에 집어넣고 밤이 되면 기꺼이 체온을 떨어뜨린다. 반면 닭이 부산스레 모이를 쪼고 염소가 잠을 줄여가며 열 시간 넘게 풀을 씹는 이유는 바로 이들 몸을 구성하는 7할의 액체를 밤낮으로 데우기 위해서다. 그래야 아밀라아제와 셀룰라아제 효소가 전분이나 셀룰로오스를 효과적으로 분해하고 근육을 움직일 수 있다. 정온성을 확보한 동물들은 털로 몸을 치장한 뒤 온대지방을 지나 극지방까지 생활터전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극지방 가까운 곳에서 뱀에게 물리는 사건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껏 살펴보았듯 인간을 필두로 하는 포유동물은 양서류나 파충류 등의 변온성 동물에 비해 꽤나 사치스러운 삶의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 사치스러움은 정온성에서 극치를 선보인다. 체온만큼 기온이 상승하는 더운 여름날 에어컨을 틀어대며 자신의 환경을 10도 이상 낮추면서도 제 몸의 체온을 37도로 유지하기 위해 인간들은 계란이 열 개나 들어간 계란말이를 거침없이 먹는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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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이 노래했듯이 풀은 쉽사리 눕는다. 인간의 경험이 대뇌 피질의 신경세포 시냅스에 각인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풀과 나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경계가 다소 모호한 대나무(대나무는 볏과의 풀이다)와 담쟁이덩굴(나무다) 같은 식물을 논외로 치면 대부분의 풀은 한 해가 가기 전에 땅 위로 솟아난 부위인 줄기가 죽으면서 사라진다. 죽기 전에 풀은 서둘러 꽃을 피우고 많은 양의 씨를 주변 여기저기 퍼뜨려 놓아야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한 세대가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풀의 삶은 간소할 수밖에 없다. 반면 나무는 자신의 내부에 죽음을 안고 살아간다.

풀과 나무는 둘 다 관다발 조직을 갖는다. 물이나 영양분이 들고 나는 통로인 관다발은 물관과 체관으로 구성된다. 뿌리를 통해 흡수된 물과 무기 염류는 안쪽의 물관을 지나 잎과 세포에 공급된다. 한편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포도당과 탄수화물은 물관의 바깥쪽에 있는 체관을 통해 저장되거나 세포의 에너지원이 된다. 이들 물관과 체관 사이에는 왕성하게 세포 분열을 하는 부름켜가 끼어 있다. 부름켜 세포는 안쪽으로 자라서는 물관을, 밖으로 자라서는 체관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와 같은 온대 지방에서는 부름켜의 활성이 계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 결과 나이테가 생긴다. 사실 나이테는 물관과 주로 관계가 있다. 봄여름 동안에 빠르게 자란 물관은 상대적으로 옅은 색이지만 가을에 더디게 자란 물관 부위는 짙은 동심원을 그리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나이테의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부름켜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이때 작년에 활동했던 물관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나무의 둥치를 굵게 만든다. 따라서 둥치 굵은 나무의 속은 더 이상 물관의 노릇을 하지 못하고 죽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맨 바깥쪽 물관만 살아 있는 나무는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잎으로 보내 광합성에 사용하게 한다. 2월 말에서 3월 초 고로쇠나무 수액을 받을 때 나무 표면에서 구멍의 깊이가 약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나무의 이런 해부학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부름켜의 바깥 부위인 체관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밖으로 밀려나 수피로 변하면서 최종적으로 인간의 피부처럼 떨어져 나간다.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분 다음날 나무 둥치 아래를 한번 살펴보라. 나무껍질이 우수수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때 물관이었다가 지금은 나무를 지탱하는 가운데 부위(심재)의 튼실함 덕에 높이 자라난 나무는 광합성을 왕성하게 수행하며 생태계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했다. 관다발 조직을 가진 식물은 4억2000만년 전인 데본기에 양치류 형태로 엄청나게 번성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인목(鱗木)과 나무고사리 등이 지구 표면을 수놓았다. 이때 지구는 대륙이 한데 모여 있었던 판게아 시절이었고 습지가 많았다. 이 습지에 쓰러진 거대한 나무고사리와 인목이 퇴적되면서 다량의 석탄이 만들어지게 된다. 바야흐로 석탄기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 지질학회에서는 석탄기를 전기인 미시시피기와 후기 펜실베이니아기로 나누어 구분한다. 지금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는 집의 지하에서 석탄이 나오면 주정부에 양도하겠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집을 살 수 있다. 석탄이 매장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광범위하게 석탄이 매장되기 위해서는 지질학뿐만 아니라 화학도 가세해야 했다. 나무의 목질소라고 불리는 리그닌(Lignin)이 진화한 것이다. 나무의 목질을 구성하는 세포벽은 포도당 다당류인 셀룰로오스와 방향족 수산화물의 중합체인 리그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탄기에는 이들 고분자 화합물을 분해할 수 있는 생태계가 아직 조성되지 않은 데다가 뿌리가 약한 양치류가 퇴적될 수 있는 지질학적 교란도 흔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광합성 과정에서 합성된 탄수화물이 이산화탄소로 연소되지 않고 고스란히 땅에 묻혔다. 그렇기에 석탄은 한때 지상의 삶을 영위했던 고대 식물의 아바타이며 그 주성분은 탄소이다.

하지만 고생대 이후부터는 나무의 고분자 물질을 분해할 수 있는 세균과 곰팡이, 곤충 등이 차근차근 진화해 나오면서 지구는 석탄기처럼 본격적으로 탄소가 매장될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했다. 탄소가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로 또 그 역순으로 순환되는 체계가 점차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화석 연료인 석탄은 석탄기에 거의 유일하게 다량으로 매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석탄은 땅속 깊은 곳에 퇴적된 채 수억 년의 세월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근대 산업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페름기 이후 축적되었다는 석유도 이 흐름에 가세했다. 4차 산업혁명이 세간의 화두인 현재 우리는 화석 연료가 고갈된 이후의 세상에 대해 다시 고민한다. 그러나 인류가 현재의 삶의 방식을 지속한다면 우리에게 답은 많지 않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바퀴를 무려 네 개나 가진 승용차로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할 때 우리는 약 80㎏의 이산화탄소를 대기권에 보탠다. 하지만 그동안 자동차는 단 1g의 산소도 만들지 못한다. 다만 과거에 쓰지 않았던 산소를 매우 빠른 속도로 소모할 뿐이다. <탄소의 시대>의 저자 에릭 로스턴은 연비 좋은 차로 수원과 서울을 왕복할 정도인 약 4ℓ 정도의 석유가 과거 식물 90여t에 해당한다고 일갈했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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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에 읽은 한 국내 문학상 수상작은 아픈 아내를 떠나보내는 중년 사내의 뒷모습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사내가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해 방광 비우기를 힘들어했다는 대목만 흐릿하게 기억난다. 방광에서 몸 밖으로 오줌을 내보내는 길목에 위치한 전립선이 부으면 마땅히 배설되어야 할 노폐물이 방광에 고일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광은 노폐물을 잠시 저장하는 창고에 불과한 것일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생명체가 물에 녹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나트륨이나 염소, 인과 같은 무기 염류를 논외로 치면 수용성 폐기물의 대부분은 요소와 암모니아다. 이들은 모두 질소를 함유하는 화합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소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장치가 동물 생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잠시 인체 생리학 교과서를 참고해보면 주로 요소의 형태로 배설되는 질소의 양은 하루 평균 10g 정도라고 한다. 굳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 몸은 “구관이 나가면 신관이 들어오리라”는 것을 기대한다. 6.25g의 단백질이 1g의 질소에 해당하기 때문에 10g의 질소를 벌충하려면 우리는 얼추 하루 평균 60g 정도의 ‘신관’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 소화 효소로 분해된 단백질은 스무개 아미노산의 형태로 우리 몸 안에 들어온다. 이 스무개 아미노산의 운명은 크게 세 가지로 갈린다. 우선 포도당처럼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거나 혹은 이산화탄소가 떨어져 나가면서 도파민이나 아드레날린 같은 신경 전달 물질로 전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역동적으로 순환되는 단백질의 구성 요소가 되는 비율이 가장 높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약 200종의 세포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 120일을 사는 적혈구도 있지만 소장의 상피세포는 3일을 넘기지 못한다. 간세포도 반년에서 일년 사이에 새것으로 교체된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간이 매일 새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그저 허언은 아닌 것이다. 또한 물을 제외하면 이들 세포 무게의 절반 가까이가 바로 단백질의 몫이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지는 동안 단백질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분해되는 것이다. 바로 그 역동성이 방광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질소 10g으로 나타난다.

질소를 순환하는 일이 포유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물고기는 질소가 한개 포함된 암모니아 형태로 노폐물을 처리한다. 암모니아는 독성이 있기 때문에 간에서 만들어지는 즉시 몸 밖으로 배출되어야 한다. 콩팥과 연결된 총배설강을 통해서다. 하지만 인간은 에너지를 써서 암모니아나 질소 노폐물을 요소로 바꿔버린다. 요소는 암모니아에 비해 독성이 적기도 하지만 질소가 두개 포함된 요소를 만드는 일은 또한 질소를 농축시키는 효과도 갖는다. 이런 방식으로 포유류는 물고기에 비해 노폐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을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 이는 육상에서 사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물고기와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따로 오줌을 싸지 않는다. 이들은 콩팥에서 요산을 만들어 소화기관으로 직접 보낸다. 따라서 방광도 없고 똥오줌의 구분도 없다. 나는데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닐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포유류는 무슨 이유로 거추장스러운 기관 하나를 더 만들어 무거운 물을 차고 다니게 되었을까? 정온성인 포유류의 체온 조절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방광이 발달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오줌을 질질 흘리고 다니면 포식자에게 노출될 위험이 클 것이기에 방광에 오줌을 보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은 방광이라는 중간 기착지 없이 콩팥이 외부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면 세균이나 기생충에 감염될 확률이 커질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면역계가 있는데 콩팥을 보호하기 위해 굳이 방광이라는 독립된 기관이 따로 존재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해부학자들도 있다. 요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 하는 정자가 다치지 않게 산성인 오줌을 보관할 필요가 있어서 방광이 발달했다는 가설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가설은 여성의 생식기관 해부학도 고려해야 일반화가 가능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방광을 그저 항문의 괄약근쯤으로 여겨 인간의 사회적 품위 유지를 위해 진화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지에 오줌을 지리지 않기 위해 수천만년 전부터 방광이 진화해 왔으리라고 믿기는 쉽지 않다. 또 개나 돼지, 아니 원숭이가 애써 오줌을 참으리라 기대하기도 힘들다. 1979년 벤틀리라는 미국의 과학자는 사막에 사는 포유동물이나 양서류가 체중에 비해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물을 저장하는 곳으로서 방광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저장된 무기 염류가 다시 혈액으로 흡수될 수 있기 때문에 방광이 삼투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이렇듯 방광에 대한 논의와 주장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방광은 물질대사 폐기물과 함께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하는 흥미로운 장소이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의 눈길이 좀체 닿지 않는 인기 없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여기저기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우려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한데 나는 방광이 왜 거기에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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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의 대대적 침공으로 인한 인류 멸망 직전의 순간, 학생 스무 명과 어른 한 명이 남아 있다. 1분이 지나지 않아 어른도 숨을 거둘 것이다. 장차 인류의 대를 이을 이 어린 친구들에게 어른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미국의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겠다고 자못 비장한 어투로 다짐했다. 맞는 말이다. 세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서로 충돌하는 100가지가 조금 넘는 원자로 구성되었다. 그 중 몇 가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금, 산소, 수소, 우라늄 등이 그런 원자들이다. 하지만 금이 있고 원자를 안다고 해서 어린 학생들이 전기를 만든다거나 곡식을 수확하지는 못하겠거니 생각하니 파인만의 저 ‘일갈’도 다소 맥 빠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마지막 남은 어른이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장 먹고사는 데 별 도움 안되지만 파인만처럼 나도 폼 재는 말 한마디쯤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명은 전자의 흐름일 뿐이다”라고. 사실 화학(chemistry)이 듬뿍 가미된 저런 말을 한 사람들은 꽤 많다. 비타민C를 발견해서 노벨상을 수상한 헝가리의 과학자 얼베르트 센트죄르지가 아마 처음일 것이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도 필시 저런 얘기를 했을 것이다. 전자는 원자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부품이다. 하지만 전자가 항상 원자에 붙박이로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잠시 원자를 떠날 수도 있고 다른 원자들과 공동으로 소유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전자가 움직이는 이유는 원자들도 잠시나마 안정을 꿈꾸기 때문이다. 전자를 잃어야 속 편한 원자가 있는 반면 기를 쓰고 전자를 갈구하는 원자도 있다. 전자를 대하는 원자들의 태도를 분류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고등학교 때 주기율표를 달달 외워야 했던 별로 달갑지 않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많겠지만 산소가 전자를 보면 사족을 못 쓴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녹이 슬었다는 말은 산소가 철에서 전자를 하나 뺏어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산소는 어디에서 왔을까? 화학적 과정을 통해 산소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전 지구를 녹슬게 만들고도 대기의 20%를 차지할 만큼 다량의 산소를 만든 것은 남세균이라 불리는 세균과 그의 친척인 조류 및 식물이다. 여기에 굳이 사족을 달자면 산소는 빅뱅이나 은하계의 탄생과 결부되지 않은 채 오롯이 생명체만이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원자다. 산소가 생명체의 존재 증명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식물이나 조류는 무엇을 가지고 산소를 만드는 것일까?

바로 물(H2O)이다. 물은 수소와 산소라는 두 종류의 원자가 결합한 물질이다. 반농담조로 ‘일산화이수소’라 불리는 물에서 전자를 뽑아내는 쉽지 않은 일을 남세균은 그예 해냈다. 지구 전체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세균이 물에서 전자를 뽑아내는 장치를 발명해 낸 것이다. 이 세균은 나중에 조류나 식물의 세포 안에 들어와 한 식구가 된다. 생물학 교과서에서 세포의 내부공생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결과였다. 남세균의 도움으로 이제 조류나 식물도 물을 깨서 확보한 전자에 태양에서 도달한 에너지를 버무린 다음 곧이어 이산화탄소를 거의 모든 생명체의 주식인 포도당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광합성이라 불리는 이 과정의 불가피한 부산물이 산소(O2)였다. 우리는 식물이 만든 포도당과 산소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식물은 물을 깨서 산소를, 그와 동시에 이산화탄소를 고정해서 포도당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소와 포도당은 정확히 반대의 과정을 거쳐 원래 상태로 순환된다. 종속 영양 생명체 구성원인 우리 인간이 매일 수행하는 소화나 호흡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37조개의 세포는 주로 포도당을 깨서 그것의 원래 형태인 이산화탄소로 바꾸는 일을 수행한다. 이렇듯 질서 정연한 상태의 탄소인 포도당을 무질서한 이산화탄소 가스로 만드는 과정에서 확보한 에너지는 근육을 움직이거나 책을 보고 배운 사실을 기억하는 데 사용된다. 흔히 우리가 아데노신삼인산(ATP)이라고 부르는 에너지 통화(currency)가 이러한 활동을 매개한다. 한편 우리가 호흡한 산소는 세포 안에서 물을 만드는 데 쓰인다. 전자를 게걸스럽게 쫓아다닌 산소가 전자와 수소이온을 품어 결국 물이 되는 것이다. 물에서 나와 포도당에 안착한 전자는 우리가 에너지를 뽑아내는 과정에서 빠져나와 전자 전달계라 불리는 장치를 지나간다. 세포 내 발전소라고 하는 미토콘드리아에서 쉬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다. 전자 전달의 최종 결과물이 바로 ATP와 물이다. 이렇듯 물에서 나온 전자는 물로 되돌아간다. 물에서 물로 흐르는 전자, 그것이 생명이다.

<책읽기의 괴로움>이란 책에서 평론가 김현은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의 육성을 이렇게 우리에게 전달했다. “인간은 행복하게 숨 쉴 수 있도록 태어났다. 그러니 숨을 잘 쉬는 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이를 생물학으로 풀어보면 어떻게 될까? 세포 안 미토콘드리아 발전소에서 원활히 흐르는 전자가 안전하게 산소를 만나 물로 변하는 생물학! 이것이 곧 세포의 목표이자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행복한 숨쉬기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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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새로 돋은 세쿼이아 푸른 이파리가 눈에 어둡다. 등나무가 꽃을 매달고 은사시나무가 바람의 흐름에 이파리를 맡겼다. 봄 햇살에 몸이 가려워 잎이 돋아난다는 억지마저 수용할 만큼 연둣빛 봄 잎은 아름답다. 하지만 지금 식물의 잎에서는 아마 광합성 공장이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비록 온대지방의 겨울에는 광합성 공장이 가동을 멈추지만 아마존과 사하라 이남의 열대우림과 사바나에서 전 지구적 탄소 고정을 지속하는 덕분에 지구는 일 년에 약 100기가t이 넘는 양의 탄소를 고정한다. 탄소를 고정한다는 말은 식물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붙잡아 탄수화물을 만든다는 뜻이다. 우리는 식물이 고정한 탄소의 일부를 곡물의 형태로 소비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인류가 일 년에 소비하는 곡물의 양은 25억t이다. 여기에는 가축이 소비하는 곡물의 양도 포함되지만 그 곡물도 고기 형태로 인간의 소화기관에 들어온다고 치면 우리는 일 년에 일인당 약 230㎏의 곡물을 소비하는 셈이다.

광합성을 통해 고정한 곡물 혹은 곡물을 먹은 가축의 고기가 입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이를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고 부산물인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른바 ‘소화’라고 불리는 이런 생물학적 과정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입에서 항문에 이르기까지 음식물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 첫 번째 단계이고 다음 단계는 세포가 몸통 ‘안’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분해하는 과정이다. 비록 몸 안에 있는 듯 보이지만 혈관을 타고 전신에 공급되기 전까지 소화된 음식물은 여전히 세포 바깥에 있다. 따라서 소화기관의 빈 공간은 아직 밖이라고 간주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소화기관을 ‘내 안의 밖(Inner outside)’이라고 표현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삼킨 음식물들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약 30초 정도 입에서 씹은 음식물은 25㎝ 길이의 식도를 내려가 위에 도착한다. 소화효소와 뒤섞여 고르게 으깨진 죽 같은 음식물은 25㎝의 십이지장, 2.5m의 공장, 약 3m의 회장을 거치면서 한 방향의 움직임을 이어간다. 소장을 구성하는 십이지장, 공장, 회장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얼추 6m이다. 그러나 소장의 특징은 길이보다는 그 표면적에 있다. 소장에는 오돌토돌한 손가락 모양의 융모가 무수히 자리 잡고 있어서 표면적이 한정 없이 커진다. 어떤 사람들은 소장의 표면적이 거의 테니스장 넓이에 육박한다고 계산한다. 소장과 닿아 있는 대장은 길이(대략 2m)가 길어서가 아니라 통의 지름이 크기 때문에 대장이라 불린다. 대장에서는 소장에서 흡수되지 않은 거친 음식물을 할 수 있는 만큼 분해하고 나머지를 적당한 양의 물기가 포함된 대변으로 형상을 빚어 밖으로 내보낸다.

소장의 표면적이 넓은 까닭은 짐작하다시피 소화된 영양소를 남김없이 흡수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동물들과 비교했을 때 인간 소화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불을 이용해서 조리한 음식물을 다룬다는 사실이다. 이런 화식으로 인해 인간의 이나 턱은 작고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근육의 씹는 힘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변화는 뇌의 크기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추론하기도 한다. 화식이 음식물의 흡수를 촉진했다고 해서 소장의 표면적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이 사실은 인간이 진화해왔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음식물이 풍부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소장의 주름은 영양소가 흡수되지 않은 채 허투루 대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우리 몸의 생물학적 철저함이 자아낸 결과다.

한국 사람들이 먹는 곡물의 양이 앞에서 살펴본 인류 전체의 평균보다 적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양 말고 질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 입에 들어오는 음식물은 대개 이런저런 가공을 거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형 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의 진열대를 상상해보자. 약간 다른 시각에서 보면 가공한 음식물이란 곧 우리 소화기관이 해야 할 일을 대신했거나 아니면 소화기관의 부담을 한껏 덜어줄 부드럽고 달콤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거기에다 상대적으로 소화가 한결 쉬운 단백질이 주성분인 고기가 식단에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과거라면 생존에 유리했음에 분명한 테니스장 넓이의 철저함이 지금은 인류의 건강에 걸림돌이 된다고 힐난한다. 라면으로 대표되는 공장제 음식물이 인류의 역사에 대거 편입되면서 소화는 쉬워진 반면 흡수된 영양소는 적절한 노동으로 해소되지 못하면서 인류가 살찌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식품에 설탕세를 부과하면 비만 인구가 줄어든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인간의 소화기관은 아직 가공과 첨가물 식품 공학 및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적응 진화를 마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입으로 들어와 소화될 식재료의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있는 오월은 더욱 그렇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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