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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4:30:02 미세플라스틱의 거대한 세계
  2. 2017.09.20 45억년
  3. 2017.08.23 포유동물의 사치스러움
  4. 2017.07.26 나무는 죽음을 품고 산다
  5. 2017.06.28 방광은 왜 거기에 있게 됐을까
  6. 2017.05.31 산소와 숨쉬기
  7. 2017.05.08 밥을 먹는다

인간의 평균 키보다 네다섯 배 정도 길기 때문에 우리의 구절양장 소화기관은 똬리 치듯 구부러져 있다. 입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최대한 흡수하려는 절박함이 고스란히 반영된 해부학이다. 사실 인간이 음식을 먹는 이유는 육안으로 식별 불가능한 우리의 작은 세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그들이 먹을 수 있게 아주 잘게 쪼개주어야만 세포가 살고 세포의 집합체인 우리도 산다. 단백질은 스무 종류의 개별 아미노산으로, 전분은 포도당으로 그리고 지방도 지방산으로 쪼개져야 비로소 소장에서 원활한 흡수가 가능해진다. 광어에서 온 단백질 정보와 감자에서 온 전분의 정보가 이런 기본 단위로 쪼개지지 않은 채 흡수되면 생명체는 곧바로 면역계를 출동시킨다. 해독되지 않은 날것 정보를 내가 아닌 ‘비아’(非我)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따라서 먹고 흡수하는 소화 행위는 곧 서로 다른 생명체에서 도달한 정보를 해체하고 개별화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해체할 수 없는 정보에 노출되는 일은 없을까?

물론 있다. 한때 호황을 누렸던 석탄 채굴장의 노동자들이 먹고 마셨던 탄가루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은 규제가 심하지만 내열성이 좋아 한때 건축 자재로 흔하게 사용되었던 규산염 섬유 결정인 석면도 인간의 폐나 소화기관에서 해체되지 않은 정보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몸에서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이런 날것 정보에 인간이 노출되면 오랜 잠복기를 거쳐 진폐증(asbestosis)이나 복막 중피종(mesothelioma)이라는 달갑지 않은 병이 찾아올 수 있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미세 먼지도 ‘인플라마좀’이라 불리는 면역 반응 복합체를 건드릴 가능성이 높다. 흔히 간과되긴 하지만 담배 연기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다. 이는 미국에서 담배 실험할 때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환경에서 온 것 말고 우리 몸에서 만들어져서 면역 반응을 부추기는 물질들도 많다. 이런 물질들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생체 물질이 과량으로 존재할 때 만들어질 가능성이 부쩍 커진다. 가령 혈중에 다량으로 떠돌던 포도당이 화학적으로 알부민 단백질에 달라붙어 생겨난 물질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현상은 당뇨병 환자에게서 쉽게 발생하리라 예측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과량일 때 날카로운 미세 칼날 결정을 만드는 콜레스테롤도, 통풍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알려진 요산 결정도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 

몸 안에서 만들어졌건 환경에서 유래했건 간에 우리는 이런 물질을 통틀어 위험 인자라고 부른다. 이 위험 인자라는 말은 세균이나 병원성 미생물에 대적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면역계가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근 들어 새로운 위험 인자가 등장했다. 바로 미세플라스틱이다. 죽은 가마우지 배에서 발견되는 플라스틱병이나 어구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미세플라스틱은 큰 플라스틱병들이 파도와 태양빛에 닳고 닳아 잘게 부서지다가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게 크기가 줄어든 것들이다. 감내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노,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미세플라스틱이 설탕과 꿀, 맥주 그리고 소금에서 발견된다는 논문도 최근 출간되었다. 심지어 각질을 제거하는 의약부외품에도 미세플라스틱이 존재한다. 해수면에서 증발된 수증기의 순환을 통해 혹은 버려진 플라스틱이 닳아 육지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된다. 

이렇듯 잠깐만 살펴보아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굴이나 홍합을 통해 우리가 섭취하는 미세플라스틱이 1만개라고 치고 그 양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자. 평균 크기가 1마이크로미터인 미세플라스틱 1만개를 죽 늘이면 10㎜가 된다. 1㎝다. 1년에 그 정도라니 무시할 만한 양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 미세플라스틱은 세포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인간 진화 역사에서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마시는 정수기 물에서도 미세플라스틱 조각이 발견된다니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굴러갈 것 같지는 않다.

2016년 한 해에만 인류는 3억2000만t의 플라스틱을 만들었다. 이 중 40%가 단순히 물건을 포장하기 위해 쓰였다. 1950년 이후 2015년까지 생산된 플라스틱 양은 모두 83억t이다. 그중 76%에 해당하는 약 63억t이 쓰레기로 폐기처분되었다. 재활용 비율은 고작 10%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현생 인류는 신속하게 분해할 기술이나 미생물도 없는 상태에서 플라스틱을 산처럼 쌓고 있다. 

바다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잇감을 쫓는 물고기는 배 안에 플라스틱, 미세플라스틱 가리지 않고 채워 넣는다. 잠시 후 생선 요리라는 이름의 미세플라스틱 ‘요리’가 우리 식탁에 오른다. 후식으로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용액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하늘에서는 미세플라스틱이 가을 단풍과 함께 떨어진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세포는 미세플라스틱을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하지만 그 세포의 집합체인 인간은 오늘도 플라스틱을 만들고 무심코 버린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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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가 생긴 지 45억년이 넘었다고 배운다. 얼추 100마이크로미터인 머리카락 한 올의 지름을 1년이라 치면 지구의 나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약 450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우리의 머리카락 45억개를 빈틈없이 잇대 세우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일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퇴하긴 했지만 한때 나와 동종업계 사람처럼 보였던 한 장관 후보자는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정도라고 ‘신앙적으로’ 주장했다. 여기저기 뒤져보니 1650년대 아일랜드의 주교 어셔(James Ussher)라는 사람이 성서를 꼼꼼히 해석한 뒤 지구가 기원전 4004년 10월23일에 탄생했다고 말했단다. 이 주장에 따르면 2017년인 현재 지구는 6021년에서 한 달 정도가 모자란 세월을 살았다. 앞의 비유를 적용해보면 지구의 나이는 머리카락 6000개가 나란히 선 거리, 6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이는 성인의 보폭보다 짧고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 있던 우물의 반지름 정도가 될까 말까 한 길이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45억년 정도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는 불편함이 책을 쓰는 계기였다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광물과 지구가 함께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지구 이야기>에는 지구의 나이를 캐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과학 혁명 시기에 지구의 나이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꼬리 달린 혜성을 발견하고 그것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에드먼드 핼리는 바닷물 속에 들어있는 소금의 총량과 강을 통해 매년 바다로 흘러드는 소금양을 측정하면 지구의 나이를 알 수 있다고 추론했다. 1715년의 일이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머금은 산성비가 대륙을 침식시켜 지각의 염분을 쓸고 바다로 갈 것이기에 이런 추론은 상당히 그럴싸하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 민물은 고사하고 바닷물에 녹아있는 소금의 양을 측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증명할 실험적 방법이 없다면 그 어떤 가설도 상상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던 5년 동안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를 탐독했던 다윈은 영국 남부 지역의 지질학적 변화가 얼추 3억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고 <종의 기원> 초판에서 한때나마 주장했다. ‘한때나마’라고 쓴 까닭은 <종의 기원> 3판에서 다윈이 슬며시 그 내용을 빼버렸기 때문이다. 극심했던 종교계의 반대로 인해 자신의 이론이 훼손될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켈빈 경도 지구 나이를 추산하는 데 합세했다. 하지만 그도 당대에 축적된 과학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지구를 먹여 살리는 태양이 수천만년 동안 꺾이지 않고 그 기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켈빈은 4억년에서 1억년으로 계속해서 지구의 나이를 줄여나가다가 최종적으로는 2400만년이라고 말했다. 1897년의 일이다. 20세기가 다 되었을 당시의 과학자들은 축적된 과학 지식과 인류의 이성에 기반을 둔 지구의 나이를 수천만년까지 늘려놓았다.

지질학적 변화나 화석을 통해 드러난 증거는 지구의 역사가 다윈이나 지질학자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길다는 점을 암시했지만 그 사실을 증명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19세기 후반 지구의 나이를 추정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동위원소의 발견이다. 서랍 속 포장된 사진판 위에 우라늄 광석 덩어리를 던져두었던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은 나중에 사진판에서 빛에 노출된 듯 우라늄 광석의 흔적이 새겨진 모습을 발견했다. 베크렐에게 우라늄 광석을 받은 마리 퀴리는 특정한 암석이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성질을 방사능이라고 불렀다. 여세를 몰아 라듐, 폴로늄이라는 방사능 물질을 발견한 퀴리는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연거푸 받았다. 얼마 뒤 물리학자 러더퍼드는 방사능 원소가 붕괴되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 때문에 지구 내부가 뜨겁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게다가 그는 우라늄 원소가 납 원소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제 인류는 지구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과학적 기반을 한껏 다졌다. 20세기 초 우라늄 원석 연구를 파고든 러더퍼드는 그 암석이 7억년이 넘은 물체라고 발표했다. 21세기인 현재 우리는 우라늄 원소의 반감기가 약 45억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구 탄생 초기에 우라늄 원소가 100개 있었다면 지금은 50개 정도가 남았다는 뜻이다. 이는 우라늄 50개가 납 원소로 변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45억년이 지나 지금보다 태양의 온도가 더 떨어지게 되면 25개의 우라늄과 75개의 납 원소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 예측은 들어맞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50살이 넘은 나더러 사실은 당신이 49살에 태어났으니 고작 1년을 산 것에 불과하다고 속삭인대서 믿을 내가 아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과학적 질문이 설 자리는 비좁다. 지금껏 인류의 역사는 과학적 질문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온 기록이 아니었던가?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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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점화에 의한 가스 팽창이 피스톤을 움직이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터빈을 돌려 전깃불을 밝힌다. 연료가 계속 공급되고 상류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드는 한 자동차는 움직이고 터빈은 전기를 생산할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으며 다만 변환될 뿐이라고 말한다. 혹은 폭포 위의 물이 가진 위치 에너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화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두산 장백폭포처럼 그냥 아래로 떨어지는 물은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 자갈을 좀 더 아래쪽으로 밀어냈거나 아니면 지축을 흔들면서 지각을 구성하는 물질의 온도를 높였을 것이다. 아래로 떨어진 물이 폭포 위로 저절로 올라가지 못하듯이 터빈을 돌리지 못한 에너지도 다시 회수될 수는 없다. 이렇듯 유용한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되지 못한 것들은 필연적으로 낭비되어 흩어진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설명이 가능할까? 못할 리 없다. 우리말에 ‘밥심으로 일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음식물에 들어 있는 화학 에너지를 추출해서 일을 한다. 뛰고 생각하고 신문을 읽는 모든 행위들에 바로 이들 에너지가 사용된다. 우리는 음식물에 포함된 화학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받지 못하면 작동을 멈춰버리는 ‘비평형계’ 생명체일 뿐이다.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지구와 지구 위의 대부분의 생명체는 태양 에너지의 신세를 지고 있다. 우리가 먹는 밥이나 고기도 결국 태양에서 출발한 에너지가 전기화학적 변환을 거친 결과물에 불과하다. 태양빛이 미치지 않는 심해의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구 내부 에너지를 이용해서 살아가는 소수의 생명체는 물론 예외이다.

이제 우리 입으로 들어온 화학 에너지의 운명을 쫓아가 보자. 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밥만 먹는다고 가정해보자. 소화기관에서 소화되지 않고 몸 밖으로 나가는 10%를 제외한 90%의 밥 대부분은 포도당의 형태로 혈액에 들어온다. 혈액을 전신으로 순환시키는 심장 덕에 포도당은 신체 각 세포에 전달된다. 수십조개에 달하는 인체의 세포들은 포도당을 잘게 쪼개서 에너지를 회수한다. 생물학책에는 포도당 한 개로 38개의 ATP(아데노신 3인산) 분자를 만들 수 있다고 적혀 있다. ATP는 생명체의 에너지 통화라 불리는데 우리가 먹은 탄수화물은 ATP 형태로 전환되기 전에는 세포가 일을 수행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하지만 세포들은 실제 30개가 못되는 ATP 분자를 만들 뿐이다.

ATP라는 에너지 통화로 변하지 못한 포도당의 에너지는 세포 내부의 물을 덥히는데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이나 새들은 자신들이 섭취한 영양소의 상당 부분을 열에너지로 바꾼다. 내연 기관의 온도가 올라 자동차 밖으로 흩어지는 것과 달리 포유동물은 한동안 열을 보존한다. 하지만 그 열은 어디에 보관될까? 생물학 교과서를 보면 우리 몸의 7할은 물이다. 생체 내에 포함되어 있는 여타 물질에 비해 물의 크기는 매우 작다. 따라서 순전히 분자의 숫자로만 따질 때 우리 몸은 거의 대부분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물이 가득 찬 풍선과 같은 육신이 내리누르는 중력을 오직 두 발로 서서 평생을 버티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비타민C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헝가리의 생화학자, 얼베르트 센트죄르지는 “생명은 고체의 장단에 맞춰 물이 추는 춤”이라고 말했다. 물을 제외한 인간의 육신 중 3할은 고체이고 그중 얼추 절반이 단백질이다. 물에 녹는 일부 단백질도 여기서는 의미상 고체 역할을 맡는다. 그렇다면 얼베르트 센트죄르지의 말은 “생명은 단백질의 장단에 맞춰 물이 추는 춤”으로 각색되고 생명은 “물이 추는 춤”이라는 말로 축약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물이 추는 춤의 핵심은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성에 있다. 물의 온도가 10도 올라가면 효소 단백질의 활성은 두 배 증가한다. 40도 근처에서 최대 효율을 나타내는 단백질은 그보다 10도 정도 높은 온도에서 계란 흰자처럼 변성된다. 차가운 토굴에서 나와 몸을 따뜻하게 덥히지 못한 도마뱀의 미오신 근육 단백질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파충류의 혈액, 즉 물도 춤을 추어야 하는 것이다. 변온동물인 이들 도마뱀은 태양을 향해 기꺼이 몸을 맡겨 체온을 높인 후에야 비로소 먹을 것을 찾아 나설 수 있다. 파충류들도 분명 물을 덥히겠지만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에 비해 훨씬 적은 양의 음식물을 입에 집어넣고 밤이 되면 기꺼이 체온을 떨어뜨린다. 반면 닭이 부산스레 모이를 쪼고 염소가 잠을 줄여가며 열 시간 넘게 풀을 씹는 이유는 바로 이들 몸을 구성하는 7할의 액체를 밤낮으로 데우기 위해서다. 그래야 아밀라아제와 셀룰라아제 효소가 전분이나 셀룰로오스를 효과적으로 분해하고 근육을 움직일 수 있다. 정온성을 확보한 동물들은 털로 몸을 치장한 뒤 온대지방을 지나 극지방까지 생활터전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극지방 가까운 곳에서 뱀에게 물리는 사건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껏 살펴보았듯 인간을 필두로 하는 포유동물은 양서류나 파충류 등의 변온성 동물에 비해 꽤나 사치스러운 삶의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 사치스러움은 정온성에서 극치를 선보인다. 체온만큼 기온이 상승하는 더운 여름날 에어컨을 틀어대며 자신의 환경을 10도 이상 낮추면서도 제 몸의 체온을 37도로 유지하기 위해 인간들은 계란이 열 개나 들어간 계란말이를 거침없이 먹는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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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이 노래했듯이 풀은 쉽사리 눕는다. 인간의 경험이 대뇌 피질의 신경세포 시냅스에 각인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풀과 나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경계가 다소 모호한 대나무(대나무는 볏과의 풀이다)와 담쟁이덩굴(나무다) 같은 식물을 논외로 치면 대부분의 풀은 한 해가 가기 전에 땅 위로 솟아난 부위인 줄기가 죽으면서 사라진다. 죽기 전에 풀은 서둘러 꽃을 피우고 많은 양의 씨를 주변 여기저기 퍼뜨려 놓아야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한 세대가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풀의 삶은 간소할 수밖에 없다. 반면 나무는 자신의 내부에 죽음을 안고 살아간다.

풀과 나무는 둘 다 관다발 조직을 갖는다. 물이나 영양분이 들고 나는 통로인 관다발은 물관과 체관으로 구성된다. 뿌리를 통해 흡수된 물과 무기 염류는 안쪽의 물관을 지나 잎과 세포에 공급된다. 한편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포도당과 탄수화물은 물관의 바깥쪽에 있는 체관을 통해 저장되거나 세포의 에너지원이 된다. 이들 물관과 체관 사이에는 왕성하게 세포 분열을 하는 부름켜가 끼어 있다. 부름켜 세포는 안쪽으로 자라서는 물관을, 밖으로 자라서는 체관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와 같은 온대 지방에서는 부름켜의 활성이 계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 결과 나이테가 생긴다. 사실 나이테는 물관과 주로 관계가 있다. 봄여름 동안에 빠르게 자란 물관은 상대적으로 옅은 색이지만 가을에 더디게 자란 물관 부위는 짙은 동심원을 그리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나이테의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부름켜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이때 작년에 활동했던 물관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나무의 둥치를 굵게 만든다. 따라서 둥치 굵은 나무의 속은 더 이상 물관의 노릇을 하지 못하고 죽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맨 바깥쪽 물관만 살아 있는 나무는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잎으로 보내 광합성에 사용하게 한다. 2월 말에서 3월 초 고로쇠나무 수액을 받을 때 나무 표면에서 구멍의 깊이가 약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나무의 이런 해부학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부름켜의 바깥 부위인 체관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밖으로 밀려나 수피로 변하면서 최종적으로 인간의 피부처럼 떨어져 나간다.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분 다음날 나무 둥치 아래를 한번 살펴보라. 나무껍질이 우수수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때 물관이었다가 지금은 나무를 지탱하는 가운데 부위(심재)의 튼실함 덕에 높이 자라난 나무는 광합성을 왕성하게 수행하며 생태계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했다. 관다발 조직을 가진 식물은 4억2000만년 전인 데본기에 양치류 형태로 엄청나게 번성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인목(鱗木)과 나무고사리 등이 지구 표면을 수놓았다. 이때 지구는 대륙이 한데 모여 있었던 판게아 시절이었고 습지가 많았다. 이 습지에 쓰러진 거대한 나무고사리와 인목이 퇴적되면서 다량의 석탄이 만들어지게 된다. 바야흐로 석탄기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 지질학회에서는 석탄기를 전기인 미시시피기와 후기 펜실베이니아기로 나누어 구분한다. 지금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는 집의 지하에서 석탄이 나오면 주정부에 양도하겠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집을 살 수 있다. 석탄이 매장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광범위하게 석탄이 매장되기 위해서는 지질학뿐만 아니라 화학도 가세해야 했다. 나무의 목질소라고 불리는 리그닌(Lignin)이 진화한 것이다. 나무의 목질을 구성하는 세포벽은 포도당 다당류인 셀룰로오스와 방향족 수산화물의 중합체인 리그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탄기에는 이들 고분자 화합물을 분해할 수 있는 생태계가 아직 조성되지 않은 데다가 뿌리가 약한 양치류가 퇴적될 수 있는 지질학적 교란도 흔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광합성 과정에서 합성된 탄수화물이 이산화탄소로 연소되지 않고 고스란히 땅에 묻혔다. 그렇기에 석탄은 한때 지상의 삶을 영위했던 고대 식물의 아바타이며 그 주성분은 탄소이다.

하지만 고생대 이후부터는 나무의 고분자 물질을 분해할 수 있는 세균과 곰팡이, 곤충 등이 차근차근 진화해 나오면서 지구는 석탄기처럼 본격적으로 탄소가 매장될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했다. 탄소가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로 또 그 역순으로 순환되는 체계가 점차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화석 연료인 석탄은 석탄기에 거의 유일하게 다량으로 매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석탄은 땅속 깊은 곳에 퇴적된 채 수억 년의 세월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근대 산업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페름기 이후 축적되었다는 석유도 이 흐름에 가세했다. 4차 산업혁명이 세간의 화두인 현재 우리는 화석 연료가 고갈된 이후의 세상에 대해 다시 고민한다. 그러나 인류가 현재의 삶의 방식을 지속한다면 우리에게 답은 많지 않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바퀴를 무려 네 개나 가진 승용차로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할 때 우리는 약 80㎏의 이산화탄소를 대기권에 보탠다. 하지만 그동안 자동차는 단 1g의 산소도 만들지 못한다. 다만 과거에 쓰지 않았던 산소를 매우 빠른 속도로 소모할 뿐이다. <탄소의 시대>의 저자 에릭 로스턴은 연비 좋은 차로 수원과 서울을 왕복할 정도인 약 4ℓ 정도의 석유가 과거 식물 90여t에 해당한다고 일갈했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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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에 읽은 한 국내 문학상 수상작은 아픈 아내를 떠나보내는 중년 사내의 뒷모습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사내가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해 방광 비우기를 힘들어했다는 대목만 흐릿하게 기억난다. 방광에서 몸 밖으로 오줌을 내보내는 길목에 위치한 전립선이 부으면 마땅히 배설되어야 할 노폐물이 방광에 고일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광은 노폐물을 잠시 저장하는 창고에 불과한 것일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생명체가 물에 녹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나트륨이나 염소, 인과 같은 무기 염류를 논외로 치면 수용성 폐기물의 대부분은 요소와 암모니아다. 이들은 모두 질소를 함유하는 화합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소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장치가 동물 생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잠시 인체 생리학 교과서를 참고해보면 주로 요소의 형태로 배설되는 질소의 양은 하루 평균 10g 정도라고 한다. 굳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 몸은 “구관이 나가면 신관이 들어오리라”는 것을 기대한다. 6.25g의 단백질이 1g의 질소에 해당하기 때문에 10g의 질소를 벌충하려면 우리는 얼추 하루 평균 60g 정도의 ‘신관’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 소화 효소로 분해된 단백질은 스무개 아미노산의 형태로 우리 몸 안에 들어온다. 이 스무개 아미노산의 운명은 크게 세 가지로 갈린다. 우선 포도당처럼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거나 혹은 이산화탄소가 떨어져 나가면서 도파민이나 아드레날린 같은 신경 전달 물질로 전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역동적으로 순환되는 단백질의 구성 요소가 되는 비율이 가장 높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약 200종의 세포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 120일을 사는 적혈구도 있지만 소장의 상피세포는 3일을 넘기지 못한다. 간세포도 반년에서 일년 사이에 새것으로 교체된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간이 매일 새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그저 허언은 아닌 것이다. 또한 물을 제외하면 이들 세포 무게의 절반 가까이가 바로 단백질의 몫이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지는 동안 단백질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분해되는 것이다. 바로 그 역동성이 방광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질소 10g으로 나타난다.

질소를 순환하는 일이 포유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물고기는 질소가 한개 포함된 암모니아 형태로 노폐물을 처리한다. 암모니아는 독성이 있기 때문에 간에서 만들어지는 즉시 몸 밖으로 배출되어야 한다. 콩팥과 연결된 총배설강을 통해서다. 하지만 인간은 에너지를 써서 암모니아나 질소 노폐물을 요소로 바꿔버린다. 요소는 암모니아에 비해 독성이 적기도 하지만 질소가 두개 포함된 요소를 만드는 일은 또한 질소를 농축시키는 효과도 갖는다. 이런 방식으로 포유류는 물고기에 비해 노폐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을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 이는 육상에서 사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물고기와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따로 오줌을 싸지 않는다. 이들은 콩팥에서 요산을 만들어 소화기관으로 직접 보낸다. 따라서 방광도 없고 똥오줌의 구분도 없다. 나는데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닐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포유류는 무슨 이유로 거추장스러운 기관 하나를 더 만들어 무거운 물을 차고 다니게 되었을까? 정온성인 포유류의 체온 조절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방광이 발달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오줌을 질질 흘리고 다니면 포식자에게 노출될 위험이 클 것이기에 방광에 오줌을 보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은 방광이라는 중간 기착지 없이 콩팥이 외부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면 세균이나 기생충에 감염될 확률이 커질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면역계가 있는데 콩팥을 보호하기 위해 굳이 방광이라는 독립된 기관이 따로 존재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해부학자들도 있다. 요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 하는 정자가 다치지 않게 산성인 오줌을 보관할 필요가 있어서 방광이 발달했다는 가설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가설은 여성의 생식기관 해부학도 고려해야 일반화가 가능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방광을 그저 항문의 괄약근쯤으로 여겨 인간의 사회적 품위 유지를 위해 진화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지에 오줌을 지리지 않기 위해 수천만년 전부터 방광이 진화해 왔으리라고 믿기는 쉽지 않다. 또 개나 돼지, 아니 원숭이가 애써 오줌을 참으리라 기대하기도 힘들다. 1979년 벤틀리라는 미국의 과학자는 사막에 사는 포유동물이나 양서류가 체중에 비해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물을 저장하는 곳으로서 방광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저장된 무기 염류가 다시 혈액으로 흡수될 수 있기 때문에 방광이 삼투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이렇듯 방광에 대한 논의와 주장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방광은 물질대사 폐기물과 함께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하는 흥미로운 장소이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의 눈길이 좀체 닿지 않는 인기 없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여기저기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우려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한데 나는 방광이 왜 거기에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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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의 대대적 침공으로 인한 인류 멸망 직전의 순간, 학생 스무 명과 어른 한 명이 남아 있다. 1분이 지나지 않아 어른도 숨을 거둘 것이다. 장차 인류의 대를 이을 이 어린 친구들에게 어른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미국의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겠다고 자못 비장한 어투로 다짐했다. 맞는 말이다. 세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서로 충돌하는 100가지가 조금 넘는 원자로 구성되었다. 그 중 몇 가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금, 산소, 수소, 우라늄 등이 그런 원자들이다. 하지만 금이 있고 원자를 안다고 해서 어린 학생들이 전기를 만든다거나 곡식을 수확하지는 못하겠거니 생각하니 파인만의 저 ‘일갈’도 다소 맥 빠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마지막 남은 어른이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장 먹고사는 데 별 도움 안되지만 파인만처럼 나도 폼 재는 말 한마디쯤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명은 전자의 흐름일 뿐이다”라고. 사실 화학(chemistry)이 듬뿍 가미된 저런 말을 한 사람들은 꽤 많다. 비타민C를 발견해서 노벨상을 수상한 헝가리의 과학자 얼베르트 센트죄르지가 아마 처음일 것이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도 필시 저런 얘기를 했을 것이다. 전자는 원자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부품이다. 하지만 전자가 항상 원자에 붙박이로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잠시 원자를 떠날 수도 있고 다른 원자들과 공동으로 소유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전자가 움직이는 이유는 원자들도 잠시나마 안정을 꿈꾸기 때문이다. 전자를 잃어야 속 편한 원자가 있는 반면 기를 쓰고 전자를 갈구하는 원자도 있다. 전자를 대하는 원자들의 태도를 분류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고등학교 때 주기율표를 달달 외워야 했던 별로 달갑지 않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많겠지만 산소가 전자를 보면 사족을 못 쓴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녹이 슬었다는 말은 산소가 철에서 전자를 하나 뺏어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산소는 어디에서 왔을까? 화학적 과정을 통해 산소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전 지구를 녹슬게 만들고도 대기의 20%를 차지할 만큼 다량의 산소를 만든 것은 남세균이라 불리는 세균과 그의 친척인 조류 및 식물이다. 여기에 굳이 사족을 달자면 산소는 빅뱅이나 은하계의 탄생과 결부되지 않은 채 오롯이 생명체만이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원자다. 산소가 생명체의 존재 증명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식물이나 조류는 무엇을 가지고 산소를 만드는 것일까?

바로 물(H2O)이다. 물은 수소와 산소라는 두 종류의 원자가 결합한 물질이다. 반농담조로 ‘일산화이수소’라 불리는 물에서 전자를 뽑아내는 쉽지 않은 일을 남세균은 그예 해냈다. 지구 전체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세균이 물에서 전자를 뽑아내는 장치를 발명해 낸 것이다. 이 세균은 나중에 조류나 식물의 세포 안에 들어와 한 식구가 된다. 생물학 교과서에서 세포의 내부공생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결과였다. 남세균의 도움으로 이제 조류나 식물도 물을 깨서 확보한 전자에 태양에서 도달한 에너지를 버무린 다음 곧이어 이산화탄소를 거의 모든 생명체의 주식인 포도당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광합성이라 불리는 이 과정의 불가피한 부산물이 산소(O2)였다. 우리는 식물이 만든 포도당과 산소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식물은 물을 깨서 산소를, 그와 동시에 이산화탄소를 고정해서 포도당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소와 포도당은 정확히 반대의 과정을 거쳐 원래 상태로 순환된다. 종속 영양 생명체 구성원인 우리 인간이 매일 수행하는 소화나 호흡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37조개의 세포는 주로 포도당을 깨서 그것의 원래 형태인 이산화탄소로 바꾸는 일을 수행한다. 이렇듯 질서 정연한 상태의 탄소인 포도당을 무질서한 이산화탄소 가스로 만드는 과정에서 확보한 에너지는 근육을 움직이거나 책을 보고 배운 사실을 기억하는 데 사용된다. 흔히 우리가 아데노신삼인산(ATP)이라고 부르는 에너지 통화(currency)가 이러한 활동을 매개한다. 한편 우리가 호흡한 산소는 세포 안에서 물을 만드는 데 쓰인다. 전자를 게걸스럽게 쫓아다닌 산소가 전자와 수소이온을 품어 결국 물이 되는 것이다. 물에서 나와 포도당에 안착한 전자는 우리가 에너지를 뽑아내는 과정에서 빠져나와 전자 전달계라 불리는 장치를 지나간다. 세포 내 발전소라고 하는 미토콘드리아에서 쉬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다. 전자 전달의 최종 결과물이 바로 ATP와 물이다. 이렇듯 물에서 나온 전자는 물로 되돌아간다. 물에서 물로 흐르는 전자, 그것이 생명이다.

<책읽기의 괴로움>이란 책에서 평론가 김현은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의 육성을 이렇게 우리에게 전달했다. “인간은 행복하게 숨 쉴 수 있도록 태어났다. 그러니 숨을 잘 쉬는 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이를 생물학으로 풀어보면 어떻게 될까? 세포 안 미토콘드리아 발전소에서 원활히 흐르는 전자가 안전하게 산소를 만나 물로 변하는 생물학! 이것이 곧 세포의 목표이자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행복한 숨쉬기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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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새로 돋은 세쿼이아 푸른 이파리가 눈에 어둡다. 등나무가 꽃을 매달고 은사시나무가 바람의 흐름에 이파리를 맡겼다. 봄 햇살에 몸이 가려워 잎이 돋아난다는 억지마저 수용할 만큼 연둣빛 봄 잎은 아름답다. 하지만 지금 식물의 잎에서는 아마 광합성 공장이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비록 온대지방의 겨울에는 광합성 공장이 가동을 멈추지만 아마존과 사하라 이남의 열대우림과 사바나에서 전 지구적 탄소 고정을 지속하는 덕분에 지구는 일 년에 약 100기가t이 넘는 양의 탄소를 고정한다. 탄소를 고정한다는 말은 식물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붙잡아 탄수화물을 만든다는 뜻이다. 우리는 식물이 고정한 탄소의 일부를 곡물의 형태로 소비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인류가 일 년에 소비하는 곡물의 양은 25억t이다. 여기에는 가축이 소비하는 곡물의 양도 포함되지만 그 곡물도 고기 형태로 인간의 소화기관에 들어온다고 치면 우리는 일 년에 일인당 약 230㎏의 곡물을 소비하는 셈이다.

광합성을 통해 고정한 곡물 혹은 곡물을 먹은 가축의 고기가 입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이를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고 부산물인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른바 ‘소화’라고 불리는 이런 생물학적 과정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입에서 항문에 이르기까지 음식물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 첫 번째 단계이고 다음 단계는 세포가 몸통 ‘안’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분해하는 과정이다. 비록 몸 안에 있는 듯 보이지만 혈관을 타고 전신에 공급되기 전까지 소화된 음식물은 여전히 세포 바깥에 있다. 따라서 소화기관의 빈 공간은 아직 밖이라고 간주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소화기관을 ‘내 안의 밖(Inner outside)’이라고 표현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삼킨 음식물들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약 30초 정도 입에서 씹은 음식물은 25㎝ 길이의 식도를 내려가 위에 도착한다. 소화효소와 뒤섞여 고르게 으깨진 죽 같은 음식물은 25㎝의 십이지장, 2.5m의 공장, 약 3m의 회장을 거치면서 한 방향의 움직임을 이어간다. 소장을 구성하는 십이지장, 공장, 회장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얼추 6m이다. 그러나 소장의 특징은 길이보다는 그 표면적에 있다. 소장에는 오돌토돌한 손가락 모양의 융모가 무수히 자리 잡고 있어서 표면적이 한정 없이 커진다. 어떤 사람들은 소장의 표면적이 거의 테니스장 넓이에 육박한다고 계산한다. 소장과 닿아 있는 대장은 길이(대략 2m)가 길어서가 아니라 통의 지름이 크기 때문에 대장이라 불린다. 대장에서는 소장에서 흡수되지 않은 거친 음식물을 할 수 있는 만큼 분해하고 나머지를 적당한 양의 물기가 포함된 대변으로 형상을 빚어 밖으로 내보낸다.

소장의 표면적이 넓은 까닭은 짐작하다시피 소화된 영양소를 남김없이 흡수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동물들과 비교했을 때 인간 소화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불을 이용해서 조리한 음식물을 다룬다는 사실이다. 이런 화식으로 인해 인간의 이나 턱은 작고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근육의 씹는 힘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변화는 뇌의 크기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추론하기도 한다. 화식이 음식물의 흡수를 촉진했다고 해서 소장의 표면적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이 사실은 인간이 진화해왔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음식물이 풍부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소장의 주름은 영양소가 흡수되지 않은 채 허투루 대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우리 몸의 생물학적 철저함이 자아낸 결과다.

한국 사람들이 먹는 곡물의 양이 앞에서 살펴본 인류 전체의 평균보다 적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양 말고 질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 입에 들어오는 음식물은 대개 이런저런 가공을 거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형 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의 진열대를 상상해보자. 약간 다른 시각에서 보면 가공한 음식물이란 곧 우리 소화기관이 해야 할 일을 대신했거나 아니면 소화기관의 부담을 한껏 덜어줄 부드럽고 달콤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거기에다 상대적으로 소화가 한결 쉬운 단백질이 주성분인 고기가 식단에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과거라면 생존에 유리했음에 분명한 테니스장 넓이의 철저함이 지금은 인류의 건강에 걸림돌이 된다고 힐난한다. 라면으로 대표되는 공장제 음식물이 인류의 역사에 대거 편입되면서 소화는 쉬워진 반면 흡수된 영양소는 적절한 노동으로 해소되지 못하면서 인류가 살찌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식품에 설탕세를 부과하면 비만 인구가 줄어든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인간의 소화기관은 아직 가공과 첨가물 식품 공학 및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적응 진화를 마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입으로 들어와 소화될 식재료의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있는 오월은 더욱 그렇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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