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18.02.07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내 잘못이 아니었다
  2. 2018.01.31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40년 전 일기의 주인공
  3. 2018.01.24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만홧가게와 웹툰회사의 차이
  4. 2018.01.17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부모와 자식, 두 개의 세상
  5. 2018.01.10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별처럼 반짝인 아이들
  6. 2018.01.04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공감을 잃은 아이들
  7. 2017.12.28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미얀마 친구들
  8. 2017.12.20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농성의 현장에서 함께 키운 아이들
  9. 2017.12.13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칠성 아파트의 ‘교양 아주머니’
  10. 2017.12.06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그의 추억 속 탄광촌
  11. 2017.11.29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서커스장 지붕 위의 사람
  12. 2017.11.22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인쇄소 골목 사람들
  13. 2017.11.08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이주 노동’보다 힘든 그리움
  14. 2017.11.01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쉰 살에 사진을 배운 ‘젊은 작가’
  15. 2017.10.25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깔깔 웃으며 아이들 돌보는 미화 수녀
  16. 2017.10.18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그 청년 다 컸네, 다 컸어
  17. 2017.10.11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애국가를 달달 외우는 베트남 소년
  18. 2017.09.27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곧 중학생이 될 장애아를 위해
  19. 2017.09.20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허리우드 실버극장의 노인들
  20. 2017.08.30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골목길 책방의 전속 가수들
우연히 여고생들이 독후감을 발표하는 자리에 있었다. 학생들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나온 학생은 성추행당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은 뒤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자로 살면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흔히 겪잖아요. 그런데 다들 그런 일이 여자 탓인 것처럼 말해요. 짧은 치마 입지 마라, 늦게 다니지 마라.”

그의 말에 스무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이 대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그들의 할머니가, 어머니가, 언니가 감내한 일이었으니까.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나는 딸에게 쉽게 말했다. 네 몸가짐을 잘하라고.

“그런데 그건 엘리베이터 안에서 배달되는 치킨 냄새가 좋아서 덥석 집어먹고는 치킨 탓을 하는 것과 똑같잖아요.”

그의 말에 아이들이 깔깔 웃었다. 치킨을 탈취한 자가 무죄라면 빵을 훔친 장발장은 무죄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치킨이 유죄인 것인가? 떠들썩한 아이들 속에서 나는 내 안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들을 마주해야 했다. 여고 시절 점을 봐주겠다면서 아이들의 귀밑머리를 넘겨 귀를 만지고 돌아다닌 미술 선생님과 버스 안에서 엉덩이를 만진 아저씨한테 나잇값을 하라고 소리친 친구한테 도리어 당돌하다고 혀를 찬 어른들과 차 안에서 머리를 기대고는 예전부터 네가 좋았다고 한 상사와 회식 자리에서 억지로 블루스를 추자고 한 거래처 부장과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의 뻔뻔하고 무례한 얼굴들. 불쾌하고 모멸감이 드는 기억들은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닌가 자책했던 기억들과 뒤엉킨 채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어 쉬 풀어헤쳐지지 않았다.

그때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잘못이 아닌 거잖아요. 나는 우리가 무슨 일을 겪더라도 당당하게 말하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맞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부끄럽게도 내가 너무 오래 살아보고 깨달은 것을 열여덟 살의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열여덟 살의 그도, 지금 세상과 싸우는 성추행 성폭행 피해자들도 모두 내게는 스승이다. 그들을 지지한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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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황학동 도깨비시장을 돌아다니다가 헌책을 부려놓은 곳에서 누렇게 빛바랜 일기장을 찾아냈다. 1977년에 발간된 한 어린이 잡지의 2월호 특별 부록인 ‘학습일기장’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빼곡했다. 겉표지는 떨어져 나가고, 떡제본 된 책등은 벌어져 나달대는 일기장이 어떻게 세상을 돌고 돌아 헌책 사이에 버젓이 끼어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본래 이런 일기장의 숙명은 땅속에 파묻는 김장김치처럼 책상 서랍에서 묵혀졌다가 골마지 낀 묵은 김치 퍼버리듯 버려져 어느 고물상 한 구석에서 불리고 갈아져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왕년의 삶은 꽤 괜찮았다고 믿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쪼그리고 앉아 건성으로 일기장을 들춰 보자 어디선가 달려온 가게 주인이 일기장 값을 두툼한 헌책보다 훨씬 비싸게 부르면서 말했다. 그런 건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고. 본래 남의 일기장을 구할 생각 따위는 없었던 나는 일기장 값을 치르고는 재빠르게 가방에 욱여넣었다. 주운 일기장을 판다는 것은 명백하게 불법 거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여년 전 내 또래였을 아이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싶은 호기심을 털어버리긴 어려웠다. 그의 일기는 담임선생님이 서울로 새마을 강습을 받으러 가서 교무 선생님이 체육 수업을 했다는 4월 봄날부터 시작된다. 그는 수업 시간에 떠들어 혼난 일이며, 피리를 사달라고 했더니 “네 할 일에 충실하지도 않은 녀석이 뭘 사달라고 하냐?”며 퉁바리를 준 아버지 얘기를 솔직하게 적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기의 끝을 늘 반성과 다짐으로 마무리했다.

앞으로는 담임선생님이 없어도 공부를 잘하겠다거나 다음부터는 몸을 깨끗하게 하겠다거나, 보다 명랑한 생활을 하겠다던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그 아이는 자신의 다짐대로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게다가 명랑한 어른이 되어서 지금도 밤마다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반성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나는 일기를 쓰지 않을뿐더러 내 잘못은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남한테는 ‘네 할 일을 충실히 하라’는 잔소리를 쉽게 하는 뻔뻔한 어른이 되어 버렸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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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만화의 계보는 쾨쾨한 냄새가 밴 동네 만홧가게에서 시작된다. 서로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아이들은 좁은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연신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겼다. 해 질 녘이면 아이들은 하나둘 빠져나가고, 남은 아이들 중 몇은 어머니한테 붙들려갔다. 나는 그 만홧가게에서 독고탁과 비둘기 합창을 뗐으며 숱한 순정만화들을 봤다. 그 시절 순정만화를 많이 본 여자아이들은 으레 공책 표지 뒷면에 간장종지처럼 큰 눈에 다이아몬드 같은 게 박힌 여자를 그리곤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은 온종일 눈 큰 여자를 그려냈다. 부지런히 손만 움직일 뿐 좀처럼 말을 하지 않던 그 아이는 나중에 만화가가 될 거라고 수줍게 말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만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만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봐온 친구 조카가 만화가가 되겠다고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열렬히 응원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탁월한 그림 솜씨를 발휘했으며, 재치 있고, 마음이 깊어 좋은 만화가가 될 거라고, 그의 가족들만큼이나 믿고 있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굳이 대학에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면서 휴학한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앉았을 적에는 이제나저제나 그의 만화를 기다렸다.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그가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는 거라면서 보여준 작품은 역시 훌륭했다.

“돈을 벌려면 웹툰을 안 할 수 없어요. 제가 원하는 만화를 만들 때까지는 뭐든 해야지요.”

그는 웹툰을 연재하면서 많이 부족하다고 부끄러워했지만, 나는 코인을 사서 틈틈이 그의 작품을 찾아봤다. 코인 값을 결제하면서 문득 누군가의 꿈과 수고로움에 대놓고 값을 매긴다는 게 좀 서글펐다. 그리고 그 서글픔은 최근 한 웹툰 연재 서비스업체가 작가들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체념으로 바뀌었다. 아, 우리는 창작의 기회를 돈으로 권력으로 관리하는 사회에 살고 있었지. 그런데도 나는 독자로서 오늘도 새벽까지 작업하며 고뇌했을 젊은 만화가가 원하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날을 기다린다. 부디 그는 체념 따위는 하지 않길 바라면서.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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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전쟁 때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와 피붙이 한 명 없는 땅에서 팔십 평생을 꿋꿋하게 살아왔다. 결혼하고 나서 세운 공장이 꽤 잘 되어서 자식들 남부러울 것 없이 먹이고 입혔다. 부인은 다락방에 네 딸 결혼시킬 때 싸줄 그릇이며 냄비를 착실하게 모았다. 혼자 부초처럼 떠돌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출세한 거였다. 그래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암에 걸린 부인은 다락방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그릇과 결혼하지 않은 딸들을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떴다. 그는 아무런 꿈 없이 공장과 집을 오갔다. 그는 변하지 않는데, 하던 일도 그대로인데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머리 굵은 자식들은 그가 말만 꺼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퉁바리를 줬다.

그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이 다른 것 같았다. 아이들이 뭐라 하든 그는 자신의 세상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아니 그럴 틈이 없었다. 공장 기계는 쉬지 않고 돌아갔으니까.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백발이 성성하고, 어깨 굽은 이가 서 있었다. 마음은 세월에 부대끼면서도 악착같이 버텼는데, 육신은 세월을 어겨내지 못했다. 그는 공장 경영을 자식에게 맡기고 공장 안을 기웃거리면서 일손을 도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물정 잘 아는 자식은 공장을 팔아버렸다.

자식들은 일도 할 만큼 했고, 땀도 흘릴 만큼 흘렸으니 느긋하게 쉬시라고 했다. 그도 그리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허리가 아프다 싶으면 무릎 관절이 쑤셔댔고, 몸이 괜찮다 싶으면 자꾸 기억이 흐릿해졌다. 그는 멈춘 기계가 얼마나 빠르게 녹스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몸도 하루하루 녹슬어 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해서 찾아오는 막내딸은 아버지 몸의 흘게가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러다 영영 못 일어나시겠구나. 딸은 눈시울을 붉히다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저리 힘든 몸으로 오래 사시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정말 밉더라고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내 부모와 내 이야기가 될 테고, 또 오래지 않아 나와 내 딸이 겪을 것이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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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차는 높은 건물이 비죽비죽 솟아있는 혁신도시를 빠져나가 휑하게 비어있는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벼를 베어낸 자리에 가지런히 남아있는 밑동에는 새파랗게 그루풀이 솟아나 있었다. 한겨울에도 땅 밑은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그 길을 달려 출퇴근한다는 이는 이곳에 좀비들만 산다고 말했다. 굳이 되묻지 않았는데도 그는 자꾸 대명천지에 좀비를 끄집어냈다. 창밖으로는 오래된 간판이 무심하게 걸려 있는 가게들이 보였다. 평일 대낮인데도 가게는 대개 문을 열지 않았고,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 동네들은 밤에나 어슬렁대는 그림자가 보이죠. 정말 좀비들이 사는 거죠.”

그가 말하는 좀비는 분명 밤마다 텅 비어있는 거리를 휘적휘적 돌아다니며 살지도 죽지도 못한 자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평생 논을 갈고 밭을 일구느라 곱은 손가락을 주무르면서 우두커니 TV 앞에 앉아 졸다 깨는 누군가의 잊힌 어머니, 아버지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도시로 나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 말하는가? 그게 누구든 산 자를 좀비라고 하는 게 거슬려 대꾸할 수 없었다.

다행히 차는 마을 끝에 있는 중학교에 닿았다. 학교를 안내하는 선생님은 옛날에는 무척 큰 학교였지만, 이제는 떠날 수 없는 아이들만 남았다고 했다. 그의 말속에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한 가련함이 묻어 나왔다. 그 또한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들은 말을 되풀이하는 듯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별 얘기도 아닌 얘기를 듣겠다고 강당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이들의 눈빛은 별처럼 반짝였다. 아이들은 당당하게 묻고 대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수요일 급식이 가장 맛있으니까 꼭 점심을 먹고 가라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모두 떠난 자리, 그루터기만 남아있을 것 같은 그곳에서 아이들은 싹을 틔우고, 힘차게 줄기를 뻗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 높은 건물 틈을 메우는 도시의 불빛은 쓸쓸해 보였다. 쫓기듯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긴 그림자를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 좀비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좀비 영화에서 좀비들이 맹활약하는 곳은 대개 도시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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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지낸다는 그는 급식실에 비빔 코너가 생긴 첫날, 밥을 간장에 비벼 먹어보고, 고추장에도 비벼 먹어보고, 주먹밥도 만들어 먹었다는 얘기를 사뭇 진지하게 했다. 생활하면서 겪은 우스운 이야기 공모에 응모한 글 중 하나였다. 비빔밥을 먹는 데 몰두한 그는 자신이 흔히 말하는 ‘급식충’이 된 것은 아닌가 자문하면서 글을 맺었다. 아마도 우스운 생활 글을 쓰려고 보니 밥을 비비는 데 심혈을 기울인 자신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나 보다. 또 다른 응모 글 중 하나는 모의고사 볼 때 답안지를 작성하고 깜박 졸았는데, 가위에 눌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혹여 답을 작성하지 않은 건 아닌지 두려웠다는 얘기였다. 글을 쓴 이는 시험 시간에 가위에 눌릴 정도로 잠에 취한 게 우스웠다고 적었다. 200여 편의 글들이 대개 이렇게 쓰는 이들은 생각할수록 우스웠을지 모르지만, 보는 이들은 그다지 우습지 않을 얘기들이었다.

“사실 아이들이 웃을 일이 별로 없을 거예요. 저는 오히려 응모한 글들을 보고 나름대로 재미있게 사는 애들이 있어서 위로가 되었어요.”

응모한 글을 함께 심사한 중학교 선생님은 학교에서 점점 따뜻한 웃음이 사라져 간다고 말했다. 자신이 교직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만 해도 온종일 떠들어서 목이 아파 기침을 하면 얼른 물 한 컵을 내주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도리어 아이들이 낄낄 웃는다며 씁쓸해했다.

“요즘 아이들 웃음 코드는 남을 놀리는 거예요. 남을 깎아내리고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웃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두는 선생님들도 많지요.”

선생님은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학교에는 다른 이 때문에 진심으로 웃지도 울지도 않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어른들만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공감’은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고 부딪치고 서로 마음을 교류하면서 훈련되는 감정이다. 무엇이든지 가르치려고만 드는 어른들과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경쟁자들만 만나야 하는 아이들이 ‘공감’을 잃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요즘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웃긴 추억이 하나도 없다는, 그래서 글을 쓰려고 웃긴 얘기를 찾아본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웃겼다는 한 학생의 글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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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은 소리로 기억된다. 미얀마라고 하면 양철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 소리를 듣는 게 참 좋았다는 미얀마 친구 때문이다. 그러면서 미얀마가 마치 옆 동네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고, 미얀마 사람을 만나면 괜히 반가워 알은체를 하고 싶었다. 거기 비가 자주 내린다지요? 비가 내리면 풀잎에 젤리 같은 빗방울이 맺힌다지요? 내 친구 아세요?

그는 내 친구의 이름을 듣자 잘 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20년을 넘게 살다가 미얀마로 돌아간 동화 작가였다. 그를 만난 곳은 그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출판기념회였다.

“어느 날 내 마음이 내게 말했어요.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어.”

스무 살의 청년이었던 그는 마흔이 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곱던 누나는 할머니가 되어 동생을 맞아줬다. 조카들은 삼촌이 다른 이주노동자들처럼 돈 좀 벌어서 집 한 채쯤은 지을 줄 알았다가 빈 가방을 들고 왔다는 걸 알고는 실망한 눈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사회단체에서 일했어요. 그러면서 미얀마 친구들과 힘을 모아 미얀마 난민들이 머무는 매솟 마을로 책이며 학용품을 보냈어요.”

그는 군사 정권의 탄압으로 미얀마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도, 공부할 수도 없는 게 눈에 밟혔다. 그래서 한국 친구들과 미얀마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펴내는 ‘따비에’ 모임을 만들었다. 따비에는 미얀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인데, 미얀마 사람들은 그 나무가 평화와 행복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한국 그림책을 미얀마 말로 번역해 책을 펴내는 데, 많은 분들이 도움을 줬어요. 그 일을 하면서 미얀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는 세상의 어른들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면서 선뜻 나선 친구들을 잊지 못한다. 그 친구들 덕분에 미얀마에 따비에 도서관을 지었다. 그는 책에 사인을 해주면서 한글로 ‘평화’를 적었다.

그의 ‘평화’가 미얀마와 세상에 비처럼 내리길, 새해에는 세상 모든 아이들이 평화롭길.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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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가 벌어진 그 참혹한 겨울을 보낸 뒤에야 높은 곳에 올라선 사람들이 보였다. 세상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은 자꾸 위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스스로 지은 망루에, 철탑에, 타워크레인에, 굴뚝에, 옥외광고판에, 세상은 위태롭게 쌓아 올린 바벨탑이었다. 단단히 딛고 서 있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내쫓긴 이들은 허공에 올라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는 난간에 제 몸을 묶고 소리쳤다. 여기 사람이 있다! 서울시청 앞 18m 철탑에 올라 9시간이나 고공농성을 한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도 똑같았다.

“쫓겨난 지 1000일,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그들이 농성을 하는 공장 빈터에는 빛바랜 천막이 늘어서 있었다. 세상과 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들의 막사는 허술했지만, 제 몸으로 부딪쳐 싸워온 이들의 몸놀림은 가벼웠다. 오랫동안 단식 농성을 한 이는 천막 뒤에 있는 컨테이너 위에 걸터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작은 몸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지만,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희미하게 웃었다. 모든 것을 다 내놓고 싸운 적이 없는 사람은 그들이 무슨 힘으로 이리 오래 버티고 싸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는 틈틈이 아이들을 돌봤다. 컨테이너 하나는 아이들 공부방이었다. 엄마들은 싸우고,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은 그곳에서도 자라고 있었다.

그 아이들도 이제는 청년이 되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십 년의 세월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비정규 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만난 청년은 기륭전자 노조 조합원의 아들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암 투병을 하다 돌아가셨어요. 마석 모란공원에 계시지요.”

청년을 소개한 이가 슬그머니 일러준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병에 걸린 것을 한동안 감춘 채 싸움에 나섰던 조합원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청년의 해맑은 얼굴이 고마워서 자꾸 힐끔거렸다.

“내가 너 어릴 적부터 봐 왔는데, 모를 게 뭐가 있어?”

아이는 혼자 자란 게 아니었다.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 봐준 사람들…, 한겨울 낮 볕이 따사로웠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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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이 있는 도시에 아파트를 얻었다는 부모님 말씀에 우리 형제들은 텔레비전에서 본 아파트가 복닥복닥 서 있는 강남의 어딘가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삿짐 트럭은 식당과 술집이 늘어서 있는 복잡한 골목을 요령 있게 빠져나가 이층짜리 집이 서로 등을 붙이고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좁은 골목을 비틀비틀 올라가 비탈진 자드락에 덜렁 서 있는 4층짜리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한 동밖에 없는 아파트의 오른쪽 외벽에는 칠성아파트라고 씌어 있었다.

“여기 사이다 회사가 지은 거네.”

실없는 동생은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이다를 꽤 팔았을 텐데 아파트를 고작 이렇게 지었을까 싶었지만, 시골 친구들한테 새 주소를 불러주면서 사이다 회사의 그 칠성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아파트를 지은 사람 이름이 김칠성이란 걸 알게 된 뒤에도 친구들한테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 가족들은 생애 처음으로 살게 된 아파트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달랑 철문 하나에 의지해 안팎으로 나뉘는 것도, 여름이면 단수가 되어서 양동이를 들고 나가 물을 얻어오는 것도, 무엇보다 꼼지락만 하면 시끄럽다고 아래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위로 쫓아 올라왔다.

“어른들 어디 가셨나? 학생들이 공동생활하는 데 이렇게 떠들고 야단법석을 떨면 안 되지. 교양 없게….”

‘교양’이라는 낱말을 평소에 들어본 적도 없는 우리 형제들은 아주머니의 교양 있는 말투에 감탄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떠들 때마다 교양 아주머니 올라오시겠다면서 낄낄거렸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교양 아주머니와 친해지면서 더는 교양을 운운하는 날 선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머니는 계모임의 초대 회장인 교양 아주머니가 경위 바른 사람이라며 아주 좋아했다. 우리는 3년쯤 살고는 그곳을 떠났지만, 교양 아주머니는 지금껏 칠성아파트에 살고 있다. 여전히 칠성아파트 계모임에 나가는 어머니는 팔순 생신을 치른 회장님 허리가 구부정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고 보니 칠성아파트에 살았던 아주머니들은 모두 할머니가 되고, 아이들 또한 늙어가고 있다. 그래도 칠성아파트는 튼튼하게 버티고 있고, 그곳에 끝까지 남아 있는 교양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아직 카랑카랑하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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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에서 철암으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산모퉁이를 돌고 돌아 기차 건널목을 건너 이어진 길에는 간간이 짐을 실은 큰 트럭만 경적을 울리면서 내달렸다. 철암으로 들어가는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오래전에 시간이 멈춰 있었다.

한때 그러니까 탄광촌 개들은 입에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석탄 산업이 번성했던 시절에 철암은 태백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지만, 그 명성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철암역 맞은편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시장은 높은 건물이 제법 늘어서 있었는데, 철암천에 세운 기둥에 지탱하고 있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허술했다. 그곳이 밤마다 대낮처럼 환히 불을 밝힌 번화가였으며, 식당이고 술집이고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철암 미로마을에서 내려다본 탄광역사촌. 박민규 기자

텅 비어있는 시장과 달리 철암역은 아직 건재했다. 태백선의 시작이면서 끝인 그곳은 매끈한 긴 선로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그 선로 위로 화물 기차가 밤낮없이 드나들면서 전국에 석탄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기억 속에 탄광촌은 사북 사태와 갱도가 무너져 광부가 매몰되었다는 속보가 전해지는 어둡고 무거운 곳이다.

“사람들이 탄광촌에 살았다고 하면 다들 힘들게 살았구나 하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태백에서 자란 그는 겨울에 눈이 어른 키만큼 쌓인 날이면 오빠하고 집 밖으로 나가는 굴을 파면서 놀았다고 했다.

“눈이 오면 우리 동네 애들이 모두 다라를 들고나와서 그걸 썰매처럼 타고 다녔어요. 얼마나 재미났는지 몰라요.”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탄광촌은 시커먼 석탄 가루나 흩날리는 곳이 아니었다. 그를 통해 들은 그곳의 봄꽃은 아름다웠으며, 여름은 낮잠 자기 좋을 만큼 서늘하고, 일찍 찾아오는 겨울은 더없이 즐거웠다. 모든 삶이 그렇듯이 그곳의 삶도 비극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그는 언젠가 어린 시절 뛰놀았던 탄광촌의 모습을 담은 그림책을 펴낼 거라고 했다.

내가 본 쓸쓸한 철암이, 탄광촌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찬 신나는 곳으로 되살아나길 기다린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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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텔레비전마저도 동네에 한두 대밖에 없던 시절, 삼류 유랑극단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약을 팔기 전에 검은 망토를 두른 이수일과 입술을 빨갛게 칠한 심순애가 등장하는 어설픈 신파극을 보여줬다. 그것도 재미있다고 밤마다 동네 사람들은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부리나케 공터로 몰려나왔다. 초등학교 때 살던 소도시에서는 여름이면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서커스단이 들어왔는데, 그곳을 지날 때면 말똥 냄새가 났다. 그 서커스단 구경 값이 꽤 되어서 말을 타고 뭘 하는지 끝내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 서커스는 명절 때마다 방송에서 보여준 외국 서커스단의 묘기였다. 공중그네를 타고 날아다니거나, 장대 꼭대기에서 끈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거나, 채찍으로 호랑이를 고양이 다루듯 하는 것을 어찌나 많이 봤는지 지금도 실제로 서커스단을 구경한 것처럼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나라 서커스단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동춘 서커스단 사진집을 통해서였다. 그 책에 담긴 사진에는 무대에 나서서 온갖 기이한 재주를 부리는 모습이 아니라 서커스 단원들의 무대 뒤 삶이 담겨져 있었다.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하는 어린 단원들과 화장하는 중국 기예단 소녀들의 모습은 생경했다. 카메라 렌즈는 서커스단 깊숙이 들어가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적은 짧은 글은 진솔했다. 마치 서커스단원 중 한 사람이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사진집을 낸 작가는 서커스에 매료되어 카메라를 들고 서커스단을 따라다녔다는 여학생이었다. 그는 몇 년 동안 서커스단을 사진에 담느라 학교도 그만뒀다고 했다. 그의 열정이 궁금했다. 출판사에 문의해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는 외국에서 사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두어 번 메일을 주고받은 뒤 내가 보낸 책에 그는 피아노 연주가 담긴 시디를 답으로 보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라고 했다. 서커스 공연장 매각을 반대하며 천막 꼭대기에 올라가 농성하는 이의 기사를 보면서 그가 떠올랐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으려나. 그나저나 날 추운데 고공 농성하는 이는 괜찮으려나.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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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면 인쇄기가 밤낮없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마주 오는 사람이 어깨를 옆으로 꺾어야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을지로와 충무로의 겨울은 분주했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달력 70%를 찍어낸다는 그곳은 가을부터 대목이었다. 밤새 뜬 눈으로 인쇄기를 돌린 인쇄공들이 푸석한 얼굴로 새벽길을 나서면 리어카를 끈 노인들이 골목을 휘저으면서 검은 필름을 수거해 갔다. 필름 속에 새겨져 있던 글씨를 지우고 닦아내서 은을 추출한다고 했다. 필름은 은이 되고, 종이는 돈이 되던 그곳의 전성기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인쇄소 한구석에서 납으로 된 활자를 뽑던 문선공들이 사라지고 사식기로 활자를 한 자 한 자 찍어낼 때만 해도 인쇄 밥을 먹던 사람들은 지구에 종말이 오지 않는 한 인쇄기는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면서 디지털이 어쩌고 저쩌고 할 적에도 온종일 필름을 들고 쏘다닌 사람들은 밤이면 골뱅이 가게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술을 마셨다.

젊은 시절 잘 나가던 사진작가였다는 그는 자비를 들여 사진 전문지를 만들었다. 타블로이드판 4쪽짜리 신문은 격월간이었다. 그는 종이 쪼가리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원고를 들고 활자를 찍어주는 사식 사무실과 조판을 해주는 사무실을 직접 찾아다녔다. 간혹 오랫동안 그를 봐 온 편집 기획사 사장들이 자청해서 신문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가 굽은 어깨에 메고 다니는 낡은 가죽 가방에는 늘 신문 몇 부와 원고를 적은 종이가 비죽 나와 있었다. 나는 몇 번 그의 신문을 만들었는데, 그가 쓴 원고는 사진 전문가들이나 알 법한 얘기라서 지루하고 어려웠다. 구독자도 없는 이런 신문을 왜 만드는 걸까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는 때맞춰 원고를 들고 왔고, 인쇄가 늦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상심했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된 뒤로도 인쇄소 골목에서 종종 그를 마주쳤다. 그의 등은 더 굽었고 백발은 숱이 줄어 엉성해졌어도 설핏 본 그의 글씨는 여전히 옹골찼다.

이제 인쇄소 골목에서 그를 볼 리 만무하고, 그를 보면서 안쓰러워하던 인쇄소 골목 사람들도 태반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썰렁한 인쇄소 골목을 걸어가다 보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옛날 사람들 모두 안녕하신지….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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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일하는 아저씨가 여럿 있었다. 어른들이 ‘사우디에 갔다’는 말끝에 붙이는 형용사에는 대개 안쓰러움이 담겨있었다. 어른들의 오가는 말속에 ‘사우디’는 달걀을 도로 위에 깨트리면 지글지글 익어버리는 뜨거운 태양과 온종일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모래바람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 나라 이름을 들을 때마다 모래바람을 뒤집어쓴 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파이프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무튼 뜨거운 사막에서 땀 흘린 이들은 집으로 돈을 부쳐서 모래바람은 집이 되고 텔레비전이 되고 냉장고가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라고 하면 석유와 잘 나가는 축구팀 하나쯤 사는 건 일도 아닌 거부를 떠올릴 테고, 어른들은 가물가물한 못 먹던 시절 얘기를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한테는 잊힌 아니 잊으려고 하는 고달픈 ‘이주 노동’은 지구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김포에 있는 공장에서 몇 년째 일하고 있는 청년은 방글라데시에서 왔다. 다카에서 한참 들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산다는 그의 ‘이주 노동’은 마치 품앗이와 같다.

“큰형은 오랫동안 사우디에서 일했어요. 형이 번 돈으로 내가 학교에 다니고, 우리 식구 다 먹고살았어요. 지금은 내가 해요.”

그의 서툰 한국말에서 ‘사우디’가 내 귀에 아주 선명하게 박히면서 청년의 까맣고 큰 눈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연대감과 같은 감정이었다. 우리는 모래바람 속에서 일한 이들을 통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청년은 형이 그랬듯이 월급을 죄다 집으로 보내고, 식비로 받는 20만원으로 생활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일하는 건 좋아요. 가족들이 보고 싶은 게 가장 힘들어요.”

그러고 보니 사우디아라비아에 몇 번씩 다녀온 우리 동네 아저씨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애들이 보고 싶어서 정말 또 나가고 싶지 않다고. 거친 모래바람보다 낯선 땅의 서먹함보다 쉼 없이 되풀이되는 노동보다 힘든 것은 여전히 그리움이었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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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에 이발소를 담은 사진집을 샀더랬다. 여름이면 길가에 수건을 내다 말리고, 겨울이면 창문 틈으로 빼놓은 연탄난로 배기통으로 연기가 품어져 나올 것 같은 오래된 이발소 앞에 흰 가운을 입고 서 있는 이발사들은 모두 멋쩍어하고 있었다. 이발소를 하면서 닭집도 하는, 그래서 이발소 간판에 닭이 떡하니 그려져 있는 사진은 잊히지 않았다. 작가는 그 사진에 이리 글을 달아놓았다. 이발소보다 닭집이 잘되는 것 같더라고. 나는 카메라 하나 들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녔을 호기로운 젊은 작가를 떠올리며 부러워했다.

전주에 일 보러 갔다가 틈이 생겨 사진 전시회를 찾아갔다. 전시관은 담장과 담장이 이어진 좁은 골목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지붕 낮은 집이었다. 페인트칠을 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옹색하지만 어린아이들 뛰어노는 데 부족할 것 없는 마당이 있고, 온 식구가 수박을 갈라먹었을 마루가 있고, 연탄을 쟁여 놓았을 광이 있었다. 그곳을 사진 전시관으로 꾸민 관장은 마치 오래전 그 집에서 장독대를 오르내리고 마당에 꽃을 심고 아이들을 길러냈을 것 같은 인자하면서도 단단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여러 권의 사진집을 가리키면서 수줍게 말했다.

“이게 이십년 동안 만들어낸 제 작품집이죠. 제가 쉰 살에 사진을 배웠어요.”

그가 가리킨 사진집들 틈에는 내 눈에 익숙한 이발소를 담은 사진집이 있었다. 그가 내가 부러워한 ‘젊은 작가’였던 것이다. 그는 사진을 배우고는 맨 먼저 배고픈 시절 ‘풍요’의 상징이었던 정미소가 쇠락해 가는 모습을 찍었다고 했다. 정미소 다음에는 이발소 그리고 구멍가게를 찾아다녔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카메라는 우리 기억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한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의 기억에서 차츰 잊히다가 끝내는 소멸할 것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과장되지도, 냉소적이지도 않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담하게 찍어낸 그의 사진이 곧 우리의 기억이 될 것이다. 그가 준 <근대화상회>를 며칠 동안 구경 다니며 즐거워하고 있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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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불쑥 나타난 건 이주민 한글학교 공부방 마당에 낙엽이 굴러다니고, 마당 텃밭에 키운 채소가 첫서리를 맞아서 시들부들해진 늦가을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공부방에 나와 어린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그는 공부방에 들어오는 아이들과 인사를 할 적마다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알려줬다.

“미화 수녀야. 미화 수녀라고 부르면 돼.”

안식년이라서 토요일마다 공부방 일을 돕기로 했다는 그는 안식년에 일하면 안식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말에 손뼉을 치면서 깔깔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낯섦이 저만치 물러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금방 그를 따랐다. 그는 투정 부리는 아이를 웃으면서 잘 달랬고, 장난감을 들이민 아이들하고는 아주 진지하게 놀아줬다. 간혹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는 필리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을 돌봤다고 했다. 척박한 오지에 제 손으로 학교를 짓고 밤낮없이 일하는 종교인의 경건한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생긴 일을 얘기할 때 그의 얼굴에는 역경을 묵묵히 이겨낸 수행자의 고단함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거기 애들이 얼마나 예쁘고 똘똘한지 몰라요. 애들하고 놀면서 필리핀 말 배울 때 정말 재미났어요. 아, 거기는 과일이 정말 맛있어요. 애들도 무척 보고 싶고, 과일도 생각나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이국땅에 슬금슬금 끼어들게 된다. 타갈로그 말을 하는 반짝거리는 아이들과 잘 익은 과일 냄새로 뒤덮인 거리와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그리고 깔깔 잘 웃는 미화 수녀가 있던 그곳이 바로 옆 동네일 것만 같다.

“안식년이 끝나면 다른 나라로 가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갈 거예요.”

그가 곧 공부방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무척 아쉽다. 틈날 적마다 부엌으로 들어와서 요리를 제법 한다고 큰소리치고는 어설픈 칼질을 하던 그가, 공부방에 오지 못한 아이들을 보려고 집까지 찾아다니던 그가, 신의 존재를 물으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그가 오래오래 생각날 것 같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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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청년이 주춤주춤 내 옆으로 다가왔다. 15층에 사는 청년은 키가 큰 데다 덩치까지 있어서 옆으로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움찔하게 된다. 청년은 전화번호 여러 개가 적힌 쪽지를 내게 내밀면서 말했다.

“아줌마, 전화 좀 빌려주세요.”

청년은 내가 얼른 휴대폰을 내밀자 고개를 내저으면서 종이쪽지를 내 코앞에 바짝 갖다 댔다. 전화를 걸어달라는 거였다. 청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전화번호는 아빠라고 적혀 있었다. 청년은 아빠와 전화가 연결되자 큰소리로 물었다.

“어디예요? 왜 안 와요?”

서른 살이 넘었을 청년은 예닐곱 살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호기심이 생기면 상대방이 무안하도록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엉뚱한 참견을 한다. 처음에는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슬그머니 겁이 나서 딸한테는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지 말라고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 그 청년이 아파트 놀이터 후미진 곳에서 담배를 핀 중학생들을 혼내는 걸 봤다. 학생은 담배 피우면 안되는 거라고, 놀이터에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했다. 청년의 목소리는 제법 단호했고, 표정은 험악해 보이기도 했다. 중학생들은 지나가던 나를 보고는 이상한 아저씨가 괜히 시비라면서 편들어주기를 바랐지만, 나는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이 틀린 말을 하진 않아.”

그 일이 있은 뒤로 나는 청년의 큰 덩치가 덜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십 년이 넘도록 청년은 별일 없이 이웃으로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청년 대신 전화를 걸어준 날 밤 그의 어머니가 내 휴대폰으로 전화해서 고마워하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애가 어떻게 제 아버지 번호를 알려줬대요?”

내가 전화번호 적힌 종이를 들고 와 보여줬다는 말에 청년의 어머니는 놀라워했다.

“세상에 그걸 어떻게 들고 나갔데. 그럴 줄도 알고….”

아들을 대견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다른 아들을 키우느라 애면글면했을 어머니의 기뻐하는 목소리에 나도 괜히 흐뭇해서 콧노래가 나왔다. 그 청년 다 컸네, 다 컸어.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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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쌀국수를 먹을 때나 보는 고수가 밭에 졸졸 심어져 있었다. 한 평 남짓한 밭에 뿌리를 내린 고수는 새파랗게 잘 자라고 있었다. 그 옆에 다보록하게 자라고 있는 얼갈이배추 어린잎 같은 채소는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라우 무이 뚜이라고 했다.

집 뒤꼍 푸서리에 일군 손바닥만 한 밭을 보여준 아이는 좁은 두둑을 사분사분 걸었다. 아이는 네 살짜리 동생을 보느라 토요일마다 나오는 공부방을 빠졌다. 어쩌면 내내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아이는 혼자 귀화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벽에 바짝 붙여 놓은 매트리스 위에는 귀화시험 대비 참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베트남어와 한국어가 섞여 있는 참고서에는 여기저기 쪽지가 붙여져 있고, 밑줄도 그어져 있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나 보다고 했더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보려면 삼십만원을 내야 하는데, 두 번만 볼 수 있어요. 두 번 다 떨어지면 다시 돈을 내야 해요. 비싸요.”

한국에 온 지 일 년 좀 넘은 아이는 한글도, 한국말도 꽤 잘했다. 가장 어려운 게 한국 역사라는 아이는 한국의 맨 처음 나라 이름이 뭔지, 고려 다음에 어떤 나라가 세워졌는지도 척척 잘 맞혔다. 아이는 국민의 4대 의무에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았다. 4대 의무를 묻자 어른들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아이만 4대 의무를 정확하게 말했다.

“다 외워야 해요. 면접 보려면 애국가도 외워야 해요.”

한국 땅에서 몇십 년을 산 어른들은 애국가를 웅얼거렸지만, 가을 하늘 공활한데를 넘어서지 못했다. 귀화시험 보면 다 떨어질 판인 어른들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구두덜댔다. 귀화시험비가 너무 비싼 거 아니냐고. 고등학교 다니는 애가 그런 시험을 굳이 봐야 하냐고. 그 말에 아이는 배시시 웃었다.

아이를 두고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빌었다. 낯선 땅에 꿋꿋하게 뿌리를 내린 고수처럼, 라우 무이 뚜이처럼 아이도 이 땅에서 의연하게 잘 자라길. 그러려면 국민의 의무뿐만 아니라 국민의 권리도 제대로 알아야 할 텐데…. 참고서에 그게 있었나?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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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후배의 조카는 말간 얼굴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는 열세 살이지만, 몸이 더디게 자라고 있었다. 6학년 교실에서 아이의 친구들이 동생처럼 귀여워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안도했다. 친구들이 따돌리지 않고 어울리니 참 다행이구나. 가족들한테도 친구들에게도 사랑을 받아 아이가 저리 밝구나.

아이가 이제 중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후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때도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잘 지냈으니 중학교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제 엄마 옆에 붙어 앉아 맛있게 밥을 먹으면서 간혹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아이를 보면서 속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열세 살은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듯 내달려 하룻밤이 다르겠지만,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처럼 너울너울 움직이는 아이도 있는 거라고. 내가 사준 군것질거리를 받아 들고는 환하게 웃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막연히 제각기 다른 빛깔과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이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장밋빛 세상을 꿈꿨다. 아이가 헤어지면서 제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나를 꼭 끌어안아 줬을 때, 나는 아이의 작은 몸을 품고 아이가 지금처럼 구김살 없이 자라길 막연히 바랐다.

얼마 뒤 후배는 조카의 안부를 전하면서 말했다. 장애 있는 아이들이 비장애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게 좋다는 말은 비장애인들이 장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관점은 아닐까, 조카에게도 정말 좋은 것일지 의문이 든다고.

“아무튼 이제는 조카에게 맞는 교육이 필요한데, 학교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막연하게 아이가 세상과 어우러지길 바란 걸 반성했다. ‘막연’에는 ‘어떻게’가 빠져 있다. ‘어떻게’를 빠트린 건 미필적 고의다. 아이가 넘어야 할 수많은 장애물을 외면한 것이다. ‘막연히 좋을 거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막연히 나쁠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보다 나을 수 없다. 장애인 학교를 지으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아우성치는 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가.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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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3가 지하철역에서 낙원상가로 가는 길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다. 식당들은 문 열 채비를 하고 있고, 땅콩과자를 파는 포장마차도 벌써 장사를 시작했다. 짐을 나르는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오가는 틈으로 노인들이 바삐 걸어 다녔다. 옛날 영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흰 양복에 흔히 백구두라 불리는 구두까지 갖춰 신은 노인을 마주치고는 문득 둘러보니 낙원상가 앞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허름한 4층 건물에는 1980년대에 흔히 있었던 의상실, 기원, 도장 파는 집이 있었고, 식당의 낡은 간판들은 언제부터 매달려 있었는지 감감해 보였다.

그 길모퉁이를 돌아 낙원상가 4층으로 올라가면 허리우드 실버극장이 있다. 영화 첫 상영 시간에 맞추려고 종종걸음쳤는데, 이미 10분이나 늦어버려 그냥 갈까 말까 망설이면서 극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보니 지각한 관람객이 꽤 많았다. 모두 노인들이었다. 한 노인은 영화표를 사면서 굳이 뒷자리를 달라고 했다. 표를 내주는 이는 영화가 시작되었으니 빈자리에 앉으시라고 해도 뒷자리에 앉아 좀 쉬려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극장 안에 들어가 보니 그럴 일이 아니었다. 앞이고 뒤고 빈자리가 많아서 어디든 앉을 수 있었다.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영화는 1960년대 만들었다는 흑백영화였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단조로운 색만큼이나 무료했다. 그런데도 내 앞에 앉은 노인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쉬려고 왔다던 노인은 어처구니없는 장면에서 가장 크게 웃었다. 졸다가 그 웃음소리에 잠이 깼다. 괜한 일에 화를 내고 헤어지려는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을 맥없이 따라가다 보니 오래전 텔레비전으로 보던 명화극장이 생각났다. 그때 본 영화들의 감동적인 장면들과 작은 창문으로 옆집 대추나무가 보이던 기와집과 그 숱한 밤의 풍경이 흑백 영상으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쩌면 그 극장에 앉아 있는 노인들은 영화가 아니라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과거를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진 뒤 주춤주춤 일어서는 노인들의 모습이 쌩쌩했다. 영화 보는 내내 크게 웃었던 노인은 팔을 휘저으며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아무래도 졸았던 건 나뿐인 듯했다. 그들의 과거 여행은 즐거웠던 것인가.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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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어느 동네 오래된 집이 복닥복닥 모여 있는 좁은 골목길에는 작은 책방이 하나 있다. 책방 주인은 처마 낮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 눌어붙은 낡은 식당 간판을 그대로 둔 채 그 옆에 책방 간판을 태연하게 걸어놓았다.

메뉴판과 숫자 큰 달력이 매달려 있었을 벽에 책장이 세워져 있는 데다 곰탕이 끓어오르고, 생선이 구워지고, 나물이 무쳐졌을 부뚜막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이곳은 식당이 아니라 책방이 맞다. 오래전에는 식당이었던 곳이 책방이 되고, 그곳에서는 노래를 부르다가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다는 세 사람의 음악 공연이 열렸다.

책이 진열되어 있던 큰 테이블을 치운 뒤 늘어놓은 의자에 옹기종기 앉은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 앞에 기타를 들고나와 선 이들은 노래처럼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 같은 노래를 했다. 책방 안에 가득 찬 그들의 목소리는 정말 아름다워서 행여 한마디라도 놓칠까 귀를 기울여야 했다. 셋이 여행을 하다가 만들었다는 노래를 듣던 한 친구는 자꾸 눈물을 훔쳤고, 또 다른 친구는 뒤에서 조용히 화음을 넣었다.

눈이 발개진 친구는 우연히 사게 된 헌 기타를 혼자 익히면서 더듬더듬 노래를 만들어 노래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그의 경력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그는 남쪽 도시 버스정류장 쉼터와 서울에 있는 책방 전속 가수이며, 시골 마을 카페의 주제곡을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날 그는 자청해서 제주도 작은 책방의 전속 가수가 되었다. 아마도 그의 두 친구도 저절로 책방 전속 가수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여름 저녁은 내내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했다. 좁은 골목길과 낮은 담벼락은 익숙한데 그곳에서 만난 이들의 삶은 낯설었다. 제주도가 좋아 눌러앉아서는 자기 손으로 식당을 고쳐 책방을 낸 이도, 기타 하나 들고 노래 여행을 다니는 이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세 친구는 노래로 이리 말하고 있었다. 낯설게 살아보라고, 그리 살아보니 괜찮더라고. 그래서 익숙하게만 살면서 낯선 것은 구경만 했던 나는 내내 가슴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나는 무엇부터 낯설게 살아야 할까.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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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