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비극의 탄생>,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등 주요 인터넷 서점들은 하루 종일 과부하 상태더니, 저녁 무렵부턴 아예 접속조차 되지 않았다. 접속자가 갑자기 증가해 서버가 다운된 모양이었다.

도서정가제가 실시되기 전날인 20일의 풍경이었다. 매일이 이렇다면 저자, 출판사, 서점이 모두 콧노래를 부르겠지만, 이런 소동도 이날이 마지막이다. 유행 지난 옷가지를 팔아치울 때나 쓰던 ‘창고정리’ ‘폭탄세일’이란 말을 책 사면서 들을 줄이야. 이 소동 속에 살 사람도 사고 안 살 사람도 샀다. 며칠 뒤 독자에게 배송될 <순수이성비판>은 아마도 책장에 고이 모셔진 채 위풍당당함을 뽐내지 않을까. “그 책 언제 읽을 거냐”고 묻지는 말자. “읽어야 한다는 말은 많지만 정작 끝까지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이 고전의 오래된 정의다.

전날까지 반값 또는 그 이하로 할인 판매된 책들이 21일부터는 정가를 회복했다. 신간, 구간, 실용서, 참고서 등 예외가 없다. 가격, 쿠폰, 마일리지를 합해도 할인율은 15% 이내로 제한됐다. 이제 서점은 태풍이 쓸고간 뒤처럼 조용하다. 모두들 숨죽인 채 빼꼼히 창밖을 내다보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향후 6개월 정도는 책 판매량이 뚝 떨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도서정가제는 출판계의 오랜 염원이었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할인 경쟁 속에 모두들 지쳐 있었다. 작은 반칙은 큰 반칙을 불렀다. 모두 힘을 합해 자정했으면 좋았겠지만, 21세기의 혼탁한 시장에서 점잖은 선비님 말씀은 듣기 힘들었다. 이럴 때는 법·제도 정비가 우선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을 하루 앞둔 20일 서울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서 시민들이 도서정가제 시행 전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책들을 살펴보고 있다. 도서정가제는 출판사에서 결정한 가격보다 서점에서 더 싸게 팔 수 없도록 한 제도로 신·구간 상관없이 할인율이 15% 이내로 제한된다. (출처 : 경향DB)


도서정가제의 영향에 대해 솔직하게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우선 도서정가제는 인터넷 서점과 할인 경쟁을 할 수 없었던 동네서점을 살릴까. 그렇지 않다. 십수년 전 인터넷 서점이 등장한 이래 동네서점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동네엔 동네서점이 없고, 있다 해도 학생 참고서를 판매할 뿐이다. 독자의 책 소비 패턴은 대형 오프라인 서점 혹은 인터넷 서점으로 양분됐다. 동네서점을 이용하면 골목상권을 살리고 이웃도 도울 수 있겠지만, 소비자는 윤리가 아니라 편익을 따라 움직인다. 같은 가격이라도 독자는 수만종의 책을 세련되게 진열한 대형 오프라인 서점이나, 택배 기사가 책을 손에 쥐여주는 인터넷 서점을 이용할 것이다. 이제 동네서점엔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엔 없는 특별한 무엇이 필요하다. 손님과의 스킨십, 주인의 독특한 취향 표출, 머물기 편안한 분위기 등 무엇이든 좋다.

다음으로, 도서정가제는 ‘제2의 단통법’일까. 과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분석 결과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 책 가격은 평균 220원 상승한다. 220원 더 쓰기 싫어서 사고 싶었던 책을 안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할인율이 컸던 구간이나 실용서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큰 타격을 입겠지만, 지금까지 할인을 염두에 두고 가격을 책정했던 출판사들이 앞으로는 정가를 낮출 가능성도 있다.

이제는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책값이 낮아지면 책을 사서 읽을 것인가. ‘싼 맛에 책 읽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당장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을 관찰해봤다. 같은 칸에 탄 40여명 중 신문 읽는 사람이 5명 정도, 나머지는 스마트폰을 보거나 자거나 멍하니 있었다. 종이책 읽는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사람들의 생활습관은 변하고 있다. 문명과 기술의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옛 습관을 회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흘러간 강물을 되돌리려는 시도와 같다. 책은 인류 지식문화의 보고다. 책에는 가격을 올리거나 내리는 잔재주를 넘어, 문명의 전환에 대한 근본적 성찰, 구태를 일거에 무너뜨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출판인들은 그 길을 찾아내야 한다.


백승찬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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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대법원은 2009년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이 적법하다는 판단을 내놨다. 아스팔트에서, 농성장에서, 법정에서 5년 넘게 싸워온 153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바람 찬 거리에서 다시 기약없는 싸움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 5년간 25명의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삶의 기반이 통째로 무너져내린 극한의 상황에서도 쌍용차 해고자들이 2000일 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언제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와 가족과 동료의 삶의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들의 마음을 밝히던 희망의 불빛을 야멸차게 꺼버렸다. 승리의 전망은 흐릿해졌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 별의별 것과 싸워왔는데 잘 모르겠다, 이제는. 남은 해고자를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조정실장인 이창근씨가 대법원 선고 직후 한 말은 이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막막함, 절망의 깊이를 보여준다.

대법원의 판결문에 적힌 언어는 짧고, 단순하고, 건조하다. “정리해고를 단행할 만한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가 있었다” “예상매출 추정이 합리적이고 객관적 가정을 기초로 한 것이라면 그 추정이 다소 보수적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합리성을 인정해야 한다” “기업 운영에 필요한 인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잉여인력은 몇 명인지 등은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나열돼 있다. 2심을 뒤엎는 판결이라면 2심과 달리 판단한 구체적 근거를 제시할 법도 한데, 판결문을 눈 씻고 뒤져봐도 없다. 대법원의 권위에 기댄 친기업·반노동 가이드라인, 또는 ‘사법적 판단’보다 ‘정치적 결단’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대법원의 판결이 있던 날은 공교롭게도 전태일 열사 44주기였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열사가 제 몸을 불사른 지 44년이 지났지만 오늘 노동이 처한 상황은 춥고 엄혹하다. 정리해고에 맞서, 비정규직 처지에 절망해 목숨을 버리는 노동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평화시장 ‘시다’의 눈물은 의류업계 인턴의 눈물이 돼 오늘도 마를 날이 없다. 파리 같은 목숨에 중노동·저임금이 서러워 노조 좀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가 재계약을 거부당하거나 회사가 폐업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얼마인가. 한 번 찍히면 업계에 소문이 돌아 영영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까봐 숨죽이며 일하는 인턴은 또 얼마인가.

13일 대법원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에 대한 무효확인소송에 대해 '해고는 유효하다'는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판결 후 대법원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저 참혹한 독재 시절에는 그래도 희망이란 게 있었다. 민주화가 되고 민주노조가 만들어지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때 ‘노동’이라는 어휘에는 ‘불온’과 ‘천대’의 어감과 함께 어떤 ‘신성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노동’은 경멸의 언어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해악 중 하나는 ‘노조’를 악마화했다는 데 있다. 비정규직을 외면했다고 정규직 노조를 욕하면서, 정작 비정규직과의 연대에 헌신적인 노조 간부나 활동가는 ‘외부세력’이라고 비난한다. 이런저런 구실을 둘러댈 뿐 이들이 말하고 싶은 바는 하나다. ‘노조는 싫다’는 것이다. 이들 역시 비정규직이나 저소득층의 고단한 삶을 위무하지만 온정주의의 수인한계는 분명하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에 머물 때는 너그럽지만 ‘권리의 주체’로 나서는 순간 온갖 공격이 가해진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법원의 판결도 이런 시류를 반영한 것일 터이다.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는 노동자이고, 어떤 권리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의 상황이 엄혹하다는 건 노조 바깥에 있는 90%의 노동자를 권리의 주체로 묶어세우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사회적 의제가 됐다는 의미다. 절망이 깊을수록 먼 미래를 내다보고 첫걸음을 떼야 한다. 다시 문제는 ‘조직화’다.


정제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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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 진짜 이거는 바꿔야 됩니다. 1심 2심 3심까지 가면 몇 년 걸리잖아요. 사장이야 오래 끌수록 좋겠지만 회사에서 잘린 노동자는 그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딥니까. 이것 좀 어떻게 해야 한다니까요 정말.”

지방의 한 노동조합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중년의 노동자가 수차례 반복했던 말이다. 해고의 부당함을 확신하고 있는 그에게 세상은 납득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부도덕한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비용을 줄이고 싶거나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직원들이 있다면, 해고하면 된다. 법은 부당한 해고를 못하도록 하지만 법이 최종적으로 부당성 여부를 판단하기까지는 해고 상태가 유지된다. 부당 해고가 아니라는 최종 판결이 나오면 좋고, 부당하다고 하면 그때 가서 복직시키면 된다. 욕먹는 것만 감수하면 크게 손해날 일이 없다. 물론 소송에는 돈이 들지만 인건비 절감액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반면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한 해고 노동자에게는 소송 비용 대기도 벅차기만 하다. 법은 평등하지만 판결을 받기까지의 부담은 평등하지 않다.

명진 스님은 최근 케이블 설치·수리 노동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회사가 어렵다며 나가라는 것은 굶어 죽으란 소리다. 예전처럼 농사짓는 시대도 아니고, 일이 세분화돼 있어서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1980년대 구로공단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은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이 사실상 봉쇄됐다. 20여년이 흘러 민주화되고 경제가 발전했다지만 2009년 해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택 바닥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어서” 일자리를 찾아 타지를 전전하다 쓸쓸한 죽음을 맞기도 했다.

오는 11일이면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2000일을 맞는다. 눈뜨면 절망인 날들을 2000번이나 견뎌냈다. 쓰러져 있는 이들은 수십억원의 손해배상 판결로 다시 한번 짓이겨졌고 동료와 그 가족들의 잇따른 부음은 가장 힘든 고통이었다. 아예 다 잊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고는 부당했기 때문에 버티며 싸웠다. 무엇보다 구조조정의 근거가 됐던 회계 자료들이 엉터리였다.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의 ‘해고 무효’ 판결에서 인정한 유형자산손상차손의 과대계상의 핵심이다. 쉽게 말하면, 향후 생산 설비(유형자산)에서 예상되는 매출이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해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회계에 반영했던 것이다. 기존 차종을 단종시키고 후속 신차는 개발하지 않는다는 전제다. 이 전제대로라면 회사를 접겠다는 의미여서 앞뒤가 맞지 않다. 회계는 숫자의 정확성이 생명인데 감사조서(감사보고서의 기초 자료)와 감사보고서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았다. 감사조서에는 작성한 회계사의 서명조차 없었다.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소송 최종 선고(13일)를 앞둔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무효판결'을 바라는 2천배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쌍용차 정리해고 2002일째인 오는 13일 대법원의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그동안 형극의 시간들을 살아냈던 것은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 이전에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함에 대한 가슴속 깊은 분노와 저항이 밑바탕이 됐을 것이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괜히 겨울이라고 답하곤 했다. 군대에 가서야 뼈저리게 느꼈다. 없는 사람들에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겨울 바람은 잔인하다. 그 바람은 몸을 지나 마음까지 얼어붙게 한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올해 겨울은 확실히 다를 것이다.

봄 같은 겨울이 될지, 아니면 더욱 혹독한 겨울이 될지는 11월13일 결정난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상식과 신뢰의 둑이 무너진 듯하다. 영혼을 잠식한다는 불안만 커져간다. 대법원의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만큼은 상식의 선을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박철응 정책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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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김제동씨의 만담에는 페이소스가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탁월한 공감능력이 바탕에 있는 듯하다. 지난 8월말 김씨는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상대로 토크콘서트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씨는 이런 말을 했다. 세월호 사고 이후 나온 숱한 말들 중 사람의 사람됨에 호소하는 가장 강력한 발언으로 생각되기에 다소 길지만 인용한다.

방송인 김제동씨가 지난 달 29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대통령의 결단과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 인근 서울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농성중인 유가족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제가 어렸을 때 촌에서 자라서 그 새끼 송아지를 먼저 팔면 어미소나 아빠소가 밤새도록 웁니다. 그냥 하루만 우는 것이 아니고, 일주일 열흘을 끊이지 않고 웁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고 막 끊어질 듯이 웁니다. 그러면 적어도 제 기억에는 새끼 소를 팔았던 우리 삼촌, 우리 동네 아저씨가 (울먹이면서) 이렇게 그 다음날 아침에 담배 하나 피워 물고 소죽을 더 정성껏 끓였고 영문도 몰랐지만 동네 아이들은 그 소 앞에 가서 지푸라기 들고 뭐라도 먹이려고 했어요.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고, 어떤 이웃도 어떤 사람도 저 소새끼 왜 우느냐고 하는 이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소에게도 짐승에게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그 소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요. 기한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슬픔이 멈추는 날까지 그때까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과 사회구성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건 공감과 진실이었다. 공감은 두 차원에 걸쳐 있다. 하나는 유가족의 슬픔을 내 슬픔에 가깝게 느끼고 배려하는 것이다. 위 발언으로 김씨가 말하려던 게 이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됨의 기초를 이루는 이런 성정을 연민이나 연대감이라고 달리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월호 참사가 곧 내 일이라는, 참사를 불러온 정치·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나도, 내 자식도 희생자가 될 수 있었고 언제고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구체적 실감이다. 유가족의 문제를 내 문제로, 사회구성원 모두의 문제로 확장하는 것이다.

진실의 효용 역시 두 가지로 나눠봄직하다. 첫째, 피해자 치유적 측면이다. 진실이 바탕이 됐을 때 유가족의 상처는 치유된다. 유가족에 대한 동료 시민의 연민은 유가족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진실규명으로 향하는 게 자연스럽다. 둘째, 시스템 치유적 측면이다. 진실을 토대로 잘못된 것을 모조리 뜯어고칠 때 비로소 사회는 참사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사회구성원 모두의 직접적인 삶의 문제이다.

공감과 진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 중 하나만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진실 규명에 소극적인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유가족에게 모질고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7시간의 진실’에 대해 침묵하고, 새누리당은 유가족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정치적 고통에 공감한다. 극우세력은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폭식투쟁’이니 뭐니 하는 저열한 퍼포먼스를 벌이고, 해방공간에서 백색테러로 악명을 떨친 서북청년단의 재건을 주장한다. 보수언론은 소위 ‘정치화된’ 유가족의 개인사를 침소봉대하며 ‘말 몽둥이’ ‘글 몽둥이’로 두들겨패는 데 여념이 없다. 유가족이 ‘정치적 행동’의 전면에 나선 것은 정부·여당이 진실 규명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세월호 문제의 가장 큰 책임자는 유가족이 아닌가 착각이 들 지경이다.

며칠 전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특별법에 대한 3차 합의안을 내놨다. 유가족의 의사는 그다지 반영되지 않았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유가족을 이긴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조성된 거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허물고 사회를 ‘내 편, 네 편’으로 찢어놓은 대가로 얻은 승리다. ‘참사 이후’ 한국 사회는 도리어 ‘참사 이전’보다 퇴행했다. 박 대통령은 승리했지만 한국 사회는 패배했다. 대통령이 참사 피해자인 유가족과 싸울 때부터 예고된 패배였다.


정제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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