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그랬다. 직업상 조지 나카시마나 핀 율, 한스 웨그너 같은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디자이너 가구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는 남자들을 주로 만났지만 나는 실상 그들보다는 나무 그 자체에 대해 잘 아는 남자가 더 좋았다. 자신의 직업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식물을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기회 닿는 대로 더 깊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남자. 그 때문에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지기도 하는 남자. 예컨대 격렬했던 오전 업무가 끝나고 동료들과 가벼운 산책 중에 모감주 나무 아래에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남자.

“옛날에 고려사를 보면 사신이 조공을 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져간 물품들이 비단·한지 등인데 그럼 중국에서 거꾸로 답례로 오는 것 속에 모감주 몇 말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 아, 그건 화살나무입니다. 가시가 있지요? 이런 식의 방어 기제가 있는 것들은 대체로 다 잎이 맛있습니다. 동물들이 다 좋아하지요.”

훌륭한 관광자원 역할을 하고 있는 전남 장성군 서삼면의 편백나무 조림지.

청와대 참모진과 경내 산책을 즐기던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다. 오죽하면 애칭이 ‘식물 박사’일까? 그러고보니 나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전문가를 두루 키우고, 이들에게만 방제 자격을 부여하자는 골자의 ‘나무의사’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그다. 또 지난 4월 남북의 두 정상이 함께 군사분계선에 65년 된 반송을 기념식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또 얼마나 가슴 뭉클해했던가?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사람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로 시작하는 김용준의 책 <근원수필> 생각이 난다. 세상에는 그게 매화나무든 감나무든 꽃나무 한 그루를 위대한 예술작품 못지않게 귀히 여기며 감상하는 ‘근원수필’적 인간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그런 부류를 매우 한가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하는 책.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자는 결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 대통령이 한가한가? 그처럼 더 중대한 일을 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또 있는가? 아무리 바빠도, 기꺼이 시간을 쪼개어 우리 삶의 뿌리라든가 인류의 ‘근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만큼은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세계가 극찬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유능함은 혹시 우리로서는 그 이름도 모를 식물들을 대하는 그의 지극한 태도와 관련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남자, 문재인>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문변’은 야생화 보기를 좋아했는데, 야생화 산행의 안내를 맡으면 인권변호사 일도 바쁠 텐데 더 좋은 산행의 결과물을 위해 하루 전날 미리 답사를 했다고 한다. 전날 답사를 통해 코스는 적정한지, 어떤 꽃이 피었고 어떤 나무들이 있는지, 그리고 내려와서 쉴 만한 곳은 마땅한지를 꼼꼼히 살폈다는 것. 다음날 야생화 탐방자들이 대만족인 것은 물론이었다고.

또한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의 저자 최수연씨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그는 꽃들 사이에 돋아난 별로 이롭지 않은 풀도 그냥 보지 않는다. 이 녀석들은 꽃과 꽃 사이에서 자라며 저 꽃들과도 연대를 한다고.”

그게 ‘외교 천재’ 문재인이 일하는 방식이다. 자신이 조금 더 수고롭더라도 상대를 조금 더 알뜰하게 살펴서 우리 모두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연대하기. 특유의 그 섬세하고 성실한 지성으로. 진실되게 감동적인 준비성과 그만의 인간적 온기를 담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재인의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 박정희도 녹화사업만큼은 잘했다. 박정희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1960년대부터 산림법을 제정해서 단계별로 사방조림(황폐한 산지에 나무를 심어 토양을 보존하고 지력을 유지) 운동을 열심히 전개한 덕분에 30년 만에 민둥산을 없앤 업적만큼은 높이 산다. 물론 그 또한 ‘산림의 성쇠가 국력의 성쇠와 비례한다’는 일념으로 국가 조림 사업에 앞장섰던 현신규 서울대 명예교수의 역할이 컸지만 여하튼 두 사람의 녹화사업은 미국이 놀랄 정도로 성공적이었고 둘 다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돼 있다.

하지만 그사이, 한국과 미국의 ‘주적’으로 고립되어 연료난과 식량난, 경제난에 빠져 살아온 북한엔 민둥산이 많아졌다. 많아도 너무 많다. 북한의 전체 면적 중 숲이 차지하는 비율이 74%인데 그중 32%가 황폐해졌다고 한다.

다행히 남북협력 1호 사업으로 북한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산림협력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대북 제재를 적용받지 않는 비정치적이며 비군사적인 사업이기에 무엇보다 먼저 추진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산림 녹화사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인가? 아무리 짧아도 30년이 걸리는 일이다. 게다가 무려 49억그루의 나무를 새로 심어야 하는데 북한에 ‘땔감’이 없어서 “아침에 심으면 저녁에 사라진다”는 얘기가 있다는 말을 어젯밤 경향신문 기사에서 읽고 무척 가슴 아팠다.

‘금 모으기’ 운동 같은 걸 생각한다. 누군가 ‘북한 민둥산에 심을 어린나무 한 그루 보내기’ 모금 운동 같은 걸 벌여주면 49억그루가 의외로 금방 모아질 것 같다, 물론이다. 내 몫으로 10그루쯤은 감당할 수 있다. 문재인 보유국의 국민으로서 기꺼이 그러고 싶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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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일이었다.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는 노르웨이의 서남부 해안도시 베르겐에서 수도 오슬로로 가는 기차 맨 앞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러곤 무려 7시간 동안이나 기차가 보여주는 창밖의 풍경을 담아 아무 편집 없이 ‘베르겐 기차 여행(Bergen Line)’이란 제목으로 내보냈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눈 덮인 풍경만 무료하게 계속 나오는 방송이었다. 그러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갈 때면 화면이 아예 깜깜했고 열차가 멈추었을 때는 그대로 정지 화면뿐이었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시청률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 무료하기 짝이 없는 프로그램을 ‘슬로 TV’라 명명하며 너무나 좋아했다. 실제로 시청률이 15%나 나왔다. 그러한 인기에 힘입어 거대한 크루즈 배가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을 항해하는 장면을 장장 134시간 동안 찍어서 내보낼 만큼 배포들이 커졌고.

tvN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에서 소지섭이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를 읽고 있는 모습.

물론 전 세계가 놀랐다. ‘시끄러운 바보상자’라고만 생각했던 TV가 그렇게 모험적으로 무료하고, 용기 있게 명상적이며, 또한 역동적으로 예술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도나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단히 부러웠다. 그렇게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고요하게 무료한’ 슬로 TV 방송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또 기꺼이 시청자로서 일상의 공기인 듯 그것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노르웨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화적인 성숙도와 풍토, 혹은 시민 정서 같은 것들이.

그런 면에서 나는 나영석 PD가 ‘심심한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한 tvN의 새로운 ‘예능 다큐’ <숲속의 작은 집>이 잘되길 바랐다. 전기와 수도, 가스마저 제한적인 ‘숲속의 작은 집’에서 소지섭과 박신혜가 각각의 실험자가 되어 ‘미니멀 라이프’를 체험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예능’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다큐’에 가까운 프로그램이라니, 나영석다운 발상이다. 심지어 나영석은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라는 부제까지 달아놓고 ‘관계’라는 예능의 가장 재미난 핵심 요소를 의도적으로 삭제해 버린 채 한 개인의 숲속 고립 생활에 집중한다.

그 덕에 모든 게 저절로 단순해진다. 박신혜나 소지섭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느라 식재료를 다듬거나 장작을 지피는 소소한 과정 하나하나에 모두 집중하게 되고 고즈넉한 제주의 풍광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 소리, 자연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시청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제 아무리 나영석이고 ‘시청률 안 나와도 되는 프로그램’이어서 신경 안 쓴다지만 과연 그럴까? 4월6일 3%대로 출발한 시청률이 4월 말 2%대로 떨어졌다가 다시 5월 말 1%대로 떨어진 데에 혹시 다음과 같은 외부 요인이 작용한 건 아닐까?

1. <숲속의 작은 집>은 야채 자르는 소리,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 보글보글 음식 익는 소리, 삭 비운 밥그릇 소리,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 빗소리 등에 귀를 기울인다. 박신혜의 말대로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을 듣는 듯한 프로그램. 하지만 4월27일 전 세계는 배석자 없이 진행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도보다리 산책 모습을 생중계로 보며 두 정상의 말소리가 배제된 채 새소리와 바람 소리 등의 현장음만 담긴 ‘세기의 ASMR 영상’ 그 절정을 경험해 버렸다. 절정을 경험하니 나머지는 ‘이류’ 같고 ‘아류’ 같다. ‘숲속의 작은 집’ ASMR도 당연히 이전만큼 신선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물론이고.

2. 자연친화적인 자발적 고립 상태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극장에서 본 지 얼마 안됐다. 한국판은 물론 일본판마저 보고 나서 <숲속의 작은 집>을 보면 확실히 뭔가 덜 무르익은 느낌. 영화와 다른 예능의 한계가 확실히 느껴지기도 하고.

3. 혼자가 편하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혼밥, 혼술, 나홀로여행 등이 유행했지만 사람들은 원래 태생적으로 홀로 고립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버지니아 대학의 티머시 윌슨 연구팀은 2014년<사이언스>를 통해 사람들은 오랜 시간 홀로 생각에 빠질 바에야 차라리 전기충격을 택한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4. 칼 융에 따르면 고독은 ‘중년의 임무’다. 일과 가정 꾸리기로 나를 잃었던 중년들이 “새로운 중심이 ‘자기’가 될 타이밍, 자기로 살아가는 평화, 변화를 통한 치유”를 위해 나이 들수록 고독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얘기.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 소지섭과 박신혜가 너무 젊었는지도 모른다.

5. 자발적 고립이든 고독이든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 듯 시끄러운 세상을 향해 조용히 방문을 닫는 거다. 예컨대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라면 대박 쳤을 테마. 그런데 지금은 도도한 시대의 흐름이 그런 고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은 다 함께 평화와 상생을 꿈꾸며 다 함께 연결되고 싶은 때라 나는 오늘도 열심히 신문을 읽고 팟캐스트를 듣고 유튜브를 뒤적인다. 그런 시대를 산다는 것에 환희를 느끼며.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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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시애틀 공항에 와 있다. 목적지는 알래스카. 한국에서 출발하는 알래스카행 직항 노선이 없기 때문에 시애틀에서 10시간 정도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다. 경유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곳이 잠 들기 싫을 만큼 매력적인 항구도시 시애틀이라는 사실은 예기치 않게 받은 ‘리본 달린 일요일의 선물상자’ 같은 느낌이다. 안타까운 점은 나의 모든 살아 있는 감각으로 시애틀이라는 도시를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겨우 반나절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면, 과연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겠는가?

10년 전 이맘때 나는 그런 행복한 고민 속에서 시애틀을 대표하는 작은 항구에 가서 물고기 요리를 사 먹었고 관광객이 거의 없는 평범한 동네를 산책하며 ‘시애틀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아주 조금 음미해 보았다.

짧지만 ‘나만의 시애틀’을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반나절이었다.

앗, 그런데 나만 좀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다른 일행들이 선택한 장소는 놀랍게도 스타벅스 1호점이었다! 나도 안다. 시애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앞에 문을 연 원두만을 판매하던 스타벅스가 커피 하나로 세계적인 주류 문화를 만들었고 그리하여 거대 기업이 되었다는 것. 하지만, So What? 기껏해야 그와 관련된 기념품 쪼가리 사는 데 돈을 더 내는 일밖에 없을 것 같은 스타벅스 1호점이 뭐라고, 그 귀한 시간에….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강원도 강릉에 위치한 커피숍 테라로사의 로스팅실에서 로스팅을 끝낸 원두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랬던 내가 최근 강릉의 최고 명소로 자리 잡았다는 테라로사 1호점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다. ‘와~, 주말이면 인근에 교통 체증이 일고 관광버스 타고 온 관광객과 함께 줄을 서서 커피를 사는 카페라고 하더니, 과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와볼 만하구나. 무슨 커피 매장이 웅장한 느낌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네. 그것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국적인 도시에 있는….’

언제부터인가 물건이나 음식을 파는 일개 상점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된 채 그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를 이끄는 역할을 해왔다. 미술관처럼 의미있게 개조되고, 하나의 공연이나 전시인 듯 연출되는가 하면 체험이라는 설렘까지 갖게 하는 상점 그 이상의 제3의 공간들 말이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에서 쇤브룬성 다음 가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은 스와로브스키의 크리스털 월드나 자동차의 모든 걸 체험할 수 있는 VW 아우토슈타트, 뉴욕의 허드슨 호텔, 베니스의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더블린의 기네스 하우스 같은 곳들이다.

예컨대 테라로사도 바로 그런 곳인데 더욱더 놀라운 건 테라로사는 렌조 피아노나 안도 다다오 같은 유명한 건축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은행원 출신의 바리스타로 알려진 테라로사 김용덕 대표가 직접 설계부터 시공 감독까지 도맡아 해냈다는 것.

게다가 커피 콩 한 알 생산되지 않는 강릉이 느닷없이 ‘커피의 도시’로 재탄생한 것도 알고 보면 테라로사의 공이 크다. 2002년 강릉에 커피 볶는 공장을 먼저 시작한 이후 커피 생두를 로스팅해 팔며 바리스타 교육도 병행했는데 그곳 테라로사에서 배운 문하생들이 잇달아 카페를 창업하면서 강릉이 커피의 고장으로 변신했다고. 게다가 전국 10개 지점에서 일하는 직원 200명을 모두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아파트 등 사택을 제공하는가 하면 해외 연수 비용에 자녀 대학 학비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커피전문점이라니 스타벅스가 부럽지 않겠구나 싶다.

솔직히 말하면, 아니 김정은 스타일로 말하면 “스타벅스, 이제 안되갔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예전엔 로스팅한 원두 커피 자체가 특별한 고급 음료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이제 모두들 집에서 저마다의 방식대로 원두 커피를 즐기고 있고 편의점에서 파는 1200원짜리 원두 커피가 제법 맛있어서 카페 갈 일이 점점 줄고 있다. 고속도로휴게소에서 어쩔 수 없이 할리스나 탐앤탐스 같은 매장에서 비싼 커피를 사야만 할 때가 오면 은근히 부아가 날 지경이다. 그러니까 학자금 대출이나 월세 걱정하는 젊은이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한 손에 쥐고 마치 명품 핸드백을 차고 다니는 기분을 느끼던 시대는 이제 확실히 끝났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그 정도 수준의 원두나 매장 인테리어 가지고는 가격 대비 가치를 못 느낄뿐더러 유행마저 지났다고 선언해도 좋을 지경이다.

그렇다. 이제 스타벅스의 시대는 가고 테라로사의 시대가 도래했다. 무엇보다 비싼 로열티를 내지 않아도 되는 토종브랜드라 반갑다. 더 반가운 건 ‘메이드 인 피렌체’처럼 ‘강릉’이라는 지역성으로 더 고급화할 줄 아는 세련된 자기 철학의 힘! 남의 힘 빌릴 거 없다. 남이 만들어 놓은 힘 있고 영향력 있는 거대한 무언가엔 기댈 필요 없다. 그냥 우리 스스로 만들면 된다. 테라로사의 발견에서 그것을 읽는다. 무엇보다 평화와 함께 올 남북의 거대한 경제협력 속에서 우리 모두 저마다의 ‘테라로사’를 일굴 수 있는 공정한 기회가 더 많은 지역성과 함께 더 자주 열릴 거라는 기대와 믿음. 그것에 건배!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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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극장가에 머물며 ‘장기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어떤 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시시한 영화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져서 한껏 풀이 죽은 취업준비생 신분의 젊은 처자가 고향 시골집에 내려가 제 손으로 밥을 챙겨 먹는다는 내용이 사실상 그 중심 이야기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식재료가 많지 않고 돈도 없지만 요리할 시간이 넘쳐난다. 여주인공이 주로 제 입에 들어갈 먹거리를 제 손으로 마련하여 요리를 하고, 남는 시간에 친구들과 한가롭게 노닥거리는 시간을 보내는데 영화는 계절과 함께 자연의 리듬으로 흘러가는 그 시간에 집중할 뿐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메가박스 제공

 

갈등이나 반전은 물론 이렇다 할 사건조차 거의 없다. 기껏해야 벼락 치는 밤 김태리가 연기하는 혜원이 이제 막 새 식구가 된 강아지 오구를 끌어 안고 잤다는 것 정도? 혹은 비바람에 벼 이삭이 넘어졌고 이모랑 같이 넘어진 벼 이삭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 정도? 그래서 허리가 좀 아팠다는 것 정도? 뭐 그 정도다.

그런데도 그토록 시시하고 밋밋한 영화에서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얻었다는 젊은 관객들의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영화 제목처럼 ‘작은 숲’의 ‘치유’를 받는 듯 작은 행복감 속에서 넘어지고 찌그러진 자존감을 일으켜 세우는 데 도움이 됐다는 이도 있고, 부상을 치료하고 다시금 전쟁터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의 원기를 회복하게 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나만의 케렌시아’가 따로 없었다는 이도 있다.

그렇다고 딱히 연출의 공을 높이 사고 싶은 마음은 미안하지만 많지 않다. 일본에서 먼저 만들어진 그 원작 영화에 비하여 조금 더 속도감 있고(두 편의 연작을 한 편으로 축약했으니 그 속도감은 당연한 거고) 내용이나 캐릭터의 이해도 측면에서 대중적 소구점이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딱 그만큼 다른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미학적 매력이랄까 개성도 반감됐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일본 영화에 비해서 보다 현실적인 아름다움의 김태리의 연기가 좋았지만 그 잔상이 의외로 오래가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소소하게 지속적인 만족감과 조용한 행복감을 주며 부드럽게 위무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원작 만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의 힘일 것이다.

1. 시골의 발견. 공부 못해서, 스펙 떨어져서 경쟁에서 낙오해도 괜찮다. 세상에는 낙오자가 도피하기 좋은 시골과 자연이라는 넉넉한 공간이 있더라.

2. 무언가를 사기 위해 직장을 구할 수도 있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내 손으로 직접 만들 수도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창조력을 발견하게 되는 곳이 바로 시골이다.

3. 시골에서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내가 사장이 되어 내 일을 할 수 있다. 당연히 불합격이나 해고당할 위험이 없다.

4. 포기가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포기를 통해 나 자신에게 좀 더 가까워지고 편안해질 수 있다.

5. 그렇다고 불행한 건 아니다. 되레 장 자크 루소가 <에밀>에서 주장했듯 ‘인간이 자연의 상태에 가깝게 있으면 능력과 욕망의 차이는 점점 더 적어지고 따라서 행복으로부터 그만큼 덜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6. 돈보다 시간이 많아지면 돈으로 사지 않아도 되는 보다 본질적인 것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정말 중요한 것, 불완전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7.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다. 특히 이 영화를 보며 행복감이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당신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고 보니 ‘케렌시아’라든가 ‘소확행’, ‘와비사비’, ‘혐핫’ 같은 2018년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라이프스타일 트렌드와 함께 설명하기에도 이보다 더 좋은 영화가 없겠다 싶다.

예컨대 투우장의 소에게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케렌시아가 필요하듯, 나날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도시인에게 영혼의 안식처이자 창조적 휴식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리틀 포레스트>를 상영하는 극장의 구석진 자리 하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케렌시아가 된다.

또한 하루키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 “그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 마시는 차갑게 얼린 맥주 한 잔 같은 것”이라고 했던 ‘소확행’의 자잘한 예들을 모으면 바로 이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된다.

그리고 와비사비가 진정 ‘부족함에서 만족을 얻는 삶의 방식’이고 ‘유행에 뒤처진 낡은 공간이나 물건에서, 혹은 평소 무심히 지나쳤거나 과소평가했던 순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리틀 포레스트>는 와비사비 라이프의 표본이다. 그리고 이른바 ‘핫 플레이스’를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좋아할 만한 영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더 늦기 전에 극장에 가보자. <리틀 포레스트>가 아직 그곳에 있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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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자고 일어나면 ‘미투’ 운동이 새롭게 호명하는 유명인사의 이름부터 살핀다. 하루를 시작할 때뿐만 아니라 하루를 마무리할 때도 ‘미투’와 함께하는 나날이라고 할까? 한반도의 햇빛 찬란한 평화 무드 속에서 미투라도 붙잡고 어떻게든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정치인 무리들이 있고 심지어 김어준의 표현대로 문재인 정부의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의도로 ‘공작’되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투 지지자이다. 그것도 아주 진실되고 열렬한 지지자.

설사 그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돈줄’로 자기 내부의 피해자들 입을 막고 상대편 내부를 부추기고 있다 해도 그렇다. 나는 오히려 민주당이 산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막강한 파괴력의 이 미투 운동을, 그동안 너무도 알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내부의 적들을 색출하여 모두 다 털어버리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이 나라가 힘없는 사람이 살기 좋은 더 공정하고 더 안전한 나라가 되길 바라기에 기꺼이 촛불을 들며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했던 ‘진짜 진보’와 그러는 척 연기하며 호시탐탐 그저 ‘꼴리는 대로’ 자기 권력을 행사하는 데(심지어 못되고 파렴치하게)에만 사실상 진심이 있었던 ‘가짜’를 구분하라고 민초가 다시금 만들어준 선물 같은 ‘절호의 기회’ 말이다.

그것도 지방선거 다음이 아니라 직전에. 일부러. 잘못된 후보들을 골라내어 ‘얼른’ 내다버리라고. 더 늦기 전에. 예컨대 수행비서의 성폭행 폭로 이후 2시간 만에 안희정 도지사를 제명시킨 것처럼 신속하게 얼른….

오프라 윈프리가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오랫동안 여성은 남성들의 권력에 맞서 진실을 이야기했지만 들어주는 곳도, 믿어주는 곳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Time is up)”라고 외칠 때 프랑스에서는 카트린 드뇌브가 성폭력은 범죄지만 ‘여성의 환심을 사려거나 유혹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라며 남성들에게 여성을 유혹할 자유를 허하라고 했다.

나는 정확히 그 두 여성의 말에 모두 지지한다. 그건 결코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카트린 드뇌브의 표현처럼 ‘우리는 성폭력과 적절하지 않은 유혹을 구분할 만큼 현명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가 설사 결혼한 남자라 하더라도 다른 여자를 좋아할 수 있고 도를 넘지 않는 방법으로 유혹할 수도 있다. 적어도 그걸 처벌하지 않을 만큼의 관용은 베풀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아닌가? 물론 저마다 다른 자기 내부의 도덕에 따라 그를 비난하거나 두둔하는 건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과의 개인적인 교류나 접촉을 아예 피한다’는 이른바 ‘펜스 룰’이 더욱더 확산될 수도 있다. “아내 이외의 여자와는 절대로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의 이름을 딴 이 규칙이 미투 운동의 확산 속에서 지금은 회식이나 출장에서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식으로 번지고 있다니, 걱정이다.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연애를 안 해서 문제인 시대다. 연애가 스펙 쌓기라는 이 시대의 의무 탓에 뒷전으로 밀려난 뒤로 혼술·혼밥 같은 쓸쓸한 트렌드가 대세인 한국 사회에서 미투 운동이 아예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과의 만남이나 접촉을 스스로 원천봉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면? 남성은 물론 여성,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이런 때 이윤택이나 김기덕 같은 끔찍하게 추악한 괴물에게 모욕당하고 상처 받은 우리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베니스는 물론 아카데미를 휩쓴 채 지금 개봉 중인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판타지 괴물 이야기를 잘 만드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냉소로 가득한 시대에 치유를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SF 로맨스 영화다.

물론 괴물이 등장한다. 심지어 연구소의 청소부이며 농아이며, 심지어 예쁘지도 않은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상처받은 괴물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영화는 잘난 자들, 엘리트들, 중요한 자들에게 그동안 실컷 농락당하고 더러워진 우리의 눈과 마음을 단박에 정화시키는 놀라운 마법을 발휘한다. 기원을 알 수 없는 ‘다름’을 극복하고, 언어의 장벽마저 무력화시키고,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그렇게 다른 둘이 황홀하게 하나가 되는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지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고 할까? 또 상하관계 안에서 행해지는 모욕적인 성추행과 달리 삶은 달걀 하나로도 전달할 수 있는 호감이 얼마나 로맨틱한 관계로 승화될 수 있는지 배우기 위해서도 이 영화를 봐야 한다. 무엇보다 그게 얼마나 아름답고 섹슈얼한지 당신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라도.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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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산타크루즈는 봄부터 여름까지 약 6개월간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리는 사막지대다. 바로 그곳에서 아내는 무용가로, 남편은 작곡가로 사는 부부가 있다. 미 서부지역에서는 꽤 알아주는 예술가 커플이다. 그런 그들이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첫 비가 내리면 듣는 음악이 있었다. 황병기의 ‘가을’이었다. 마치 축제일의 의식인 듯 지난 35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 곡을 들었다고, 무용가 아내가 자기 집에 황병기를 초대해서 얘기했다.

황병기는 그런 음악가였다. 국악이라는 한국인에게조차 낯선 미지의 음악을 전 세계적으로 두고두고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으로 만든 분. 그뿐 아니라 국악을 전대미문의 전위적인 실험 음악으로 안착시킨 진정한 ‘대가’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지금 방탄소년단의 글로벌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황병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경과 인종, 세대를 넘어 진지하고 성실한 예술가 집단 혹은 예술 애호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진심으로 교감하고 싶어 하는 세계적인 음악가가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고 계셨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럽다.

지난달 31일 별세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국악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으로 만들었다. Right Now Music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거장이나 대가로서의 허세가 없었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고 젊은이들에 대한 몰이해를 무슨 자신만의 특권인 양 휘두르는 옹고집 어른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가야금을 연주하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클래식은 물론 재즈나 포크, 심지어 노라조 같은 대중가요를 들으며 음악과 시대를 더 충실하게 가슴으로 껴안으려 한 분이었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자양분을 찾아 늘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진짜 어른. 그리하여 몇 해 전 새해 인사차 인터뷰를 청한 자리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연주자가 매일 연주 안 하면 안돼. 연주가 육체 행위라 그래. 스포츠하고 똑같은 거야. 김연아나 장미란이 한 달만 안 해봐. 못해. 육체 행위는 정직하거든. 그리고 속임수가 안 통해. 정신은 교활해서 거짓말도 하고, 사람도 속이고, 핑계도 대고 그러지. 게으름도 피우고 말이야. 그런 거 보면 육체가 정신보다 훨씬 신성하고, 더 위대한 거야.”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이제 정말 코앞에 두고 있는 선수들에게 보내는 이보다 더 울림이 있는 메시지가 있을 수 있을까? 내게는 이런 말처럼 들린다. “평양 올림픽 어쩌구 하는 말들은 신경 쓰지 마. 이념도 이념장사도 결국 교활한 정신의 산물이니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정직하고 신성한 육체의 힘을 보여줄 때라고. 육체로 세계를 감동시킬 때.”

서울대 법과대학 출신인 선생께 ‘안태근 성추행 사태’에 대한 한 말씀을 부탁드리면 뭐라고 답하실지도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법과대학 나온 사람이라서 하는 말인데 그걸 원시불능이라고 해. 원래 불가능한 거. 공부 좀 잘해서 그냥 저 잘난 맛에 사는 안하무인이라 다른 사람한테 결코 사과나 용서 구할 일이 있을 수 없어서 종교에 회귀한 척하는 거야. 그런 인간들은 평생 간증이나 하면서 살게 하면 돼.”

대신 자신을 두고두고 괴롭힌 성추행 사건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폭로하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낸 서지현 검사에게는 황병기 선생이 평소 가장 좋아했던 <채근담>의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다.

“바람이 대나무 밭에 불어. 그럼 대나무가 우수수 울지. 그 바람이 지나고 나면 대나무가 소리를 남기지 않아. 고요해지지. 사람의 마음도 어떤 일이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지나가고 나면 비워져. 완전히. 뭐를 가슴에 남겨둘 필요가 없어.”

그리고 <채근담>에 나오는 이 대목과 꼭 어울리는 황병기 선생의 음악을 서지현 검사에게 들려주고도 싶다. 세상의 그 어떤 음악보다 차갑고 고결하면서도 신선한 ‘비단길’이나 ‘침향무’ 같은 가야금 산조. 마치 대나무숲 한가운데에서 듣는 청명한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교교한 달빛 아래 흐르는 호수의 잔물결 같기도 한 음악, 슬픔으로 공명하며 상처 받은 우리 영혼을 우아하게 위로하는 음악.

“진짜 기쁨은 슬픔에서 나오는 거야. 슬픔을 뱃속에서부터 다 집어넣고 나오는 기쁨. 그게 진짜 기쁨이지. 물론, 슬픔이 슬픔으로만 끝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슬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괜히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너무 걱정도 하지 마. 그냥 현재에 살면 돼. 걱정이나 불안은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그건 유령 같은 거라고. 굳이 일부러 상대할 필요 없는 유령. 유령은 유령대로 지들끼리 살게 내버려 두면 되는 거고(웃음).”

선생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젊은이들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했던 것처럼 이제 고인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서 사시게 된 선생께 ‘안녕’이라고 인사드린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의 음악과 말씀을 듣게 되어 인간 후배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슬픔과 기쁨을 그동안 매우 품위 있게 누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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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의 최전선을 다루는 패션잡지에서 일하며 아이템이 떨어질 때마다 마치 구세주를 찾듯 종종 찾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마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으로 업계에서는 선수권대회에 나가도 좋을 만큼 ‘촉’이 빠르고 ‘입담’마저 ‘메달감’으로 통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이었다. 패션 피플 1세대답게 그의 정치적 성향은 사뭇 ‘조선일보’스러운 데가 있었고 잘 모르고 보면 그냥 ‘잘 늙지 않는 날라리’ 분위기였지만 내가 아는 그는 보기보다 훨씬 더 지성적인 동시에 인간적으로 순수하고 깊이라든가 진정성마저 있는 사람이라 나는 그를 기꺼이 ‘선생’으로 생각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LP판. 중고 판매 사이트 갈무리

그런 그가 몇 해 전에 매우 신선한 ‘새해 결심’을 했던 걸로 안다. 내가 패션지 기자 신분으로 맞은 거의 마지막 새해였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만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친구 최시영이랑 ‘새해부터는 아날로그를 하자’고 다짐했어. 그래서 새해 첫날 아침부터 의자 위에 눌어붙어서 그동안 못 들었던 LP를 실컷 들었다니까. 그중 가장 좋았던 게 마일스 데이비스의 <Bags Groove>였는데 그걸 듣고 있으니까 너무 좋아서 심지어 눈물이 나는 거야. 어느새 나도 속절없이 늙어버렸지만 내 앞에 이렇게 느긋한 방식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들이 점점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하니 늙는 게 나쁘지 않게 느껴지더라고. 그러다 죽어도 괜찮을 것 같고.”

생각해 보니 내게 이른바 ‘차 한 잔으로 부릴 수 있는 여백의 힘’을 알려준 것도 마선생이었다. 자동판매기에서 인스턴트 커피 나오는 시간도 지루해 좀이 쑤시는 종류의 인간이 바로 나였는데 그런 내가 어느 순간부터 잎녹차를 우려 마시고 있었다.

“난 말이야. 우리가 고요히 기다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도 직접 차를 우려 마셔야 한다고 생각해. 특히 이렇게 미친 듯이 바쁘게 사는 우리한텐 그런 게 꼭 필요해. 예컨대 티백이나 가루녹차 같은 것 말고 잎녹차를 끓여 마신다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거잖아. 그리고 그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과정을 통해 결국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거고.” 그의 얘기는 그것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순간’이기에 기꺼이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하고 마음에 드는 다완도 사고 기분 좋고 바스락거리는 좋은 찻잎도 사고 물도 끓이고 차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았다.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의 온갖 화려하고 세련된 곳들 있잖니. 그런 곳들에 내가 손댄 곳이 많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 중심에 있어 보았기 때문에 아는 거지. 그 중심에 있는, 그런 기분 같은 것의 공허함이랄까 뭐 그런 것들을. 그래서 나는 이제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일들,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아. 오히려 손으로 만져서 그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일들, 그래서 요즘 공예라든가 핸드메이드라든가 하는 보다 아날로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돼. 그게 직접적인 교류의 문제인 거잖니? 크건 작건 상관없이 일일이 내 손으로 직접 만져서 더 밀접해지고,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게 중요하단 생각이 들어.”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얼마나 놀랍도록 촉이 빠른 동시에 본질을 꿰뚫는 진실된 얘기가 아닌가 싶다.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하나둘 사라지다가 결국 공룡처럼 멸종하고 말 거라고 예상하던 소규모 동네서점이나 음반가게들이 다시 문을 열고 있다는 희소식을 전할 줄이야. 얼마나 가슴 뛰는 멋진 트렌드인가 싶다. 온 세상 음악을 클릭 한 번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음악을 손으로 고르고 구매하는 육체적 즐거움에 눈뜬 젊은이들이 새삼 비닐 레코드이거나 CD, 심지어 카세트테이프로 된 음반을 기꺼이 구매하고 있다는 뉴스를 전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줄이야. 야호!

아마존이 뉴욕 맨해튼에 오프라인 서점을 열었다는 소식이 먼저였지만 그보다 더 반가웠던 건 내 대학시절의 우상이었던 최인아 카피라이터가 강남에 동네서점을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기쁜 마음에 그 최인아 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책 <아날로그의 반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디지털에 둘러싸인 우리는 이제 좀 더 촉각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경험을 갈망한다. 우리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제품이나 서비스와 소통하기를 원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위해 기꺼이 웃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그리하여 세계는 지금 비트코인 광풍에 휩싸여 다양한 연령대의 폐인들을 양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새해엔 아날로그를 하자’고 결심하는 이들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후자다. 이미 수고롭게도 LP는 물론 CD와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고 동네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며 날이면 날마다 핸드드립 커피와 잎녹차를 마시고 있는 나는 새해엔 더 아날로그적인 인간이 되자 결심하며 다시금 필름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암실에서 현상하는 육체적 즐거움까지 누려볼 수 있을까 상상도 해 본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오감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육체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사실상 누구나 다 아날로그다. 그 사실이 난 기쁘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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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떠나온 옛 연인을 떠올리듯 카탈루냐를 생각한다. 그곳은 스페인에 속해 있지만, 스페인과 너무도 기질적으로 달랐던, 무엇보다 스페인 제국이 저지른 정복의 역사와 투우라는 잔인한 스포츠를 싫어했던, 뼛속 깊이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각인된, 도로 표지판에 카탈루냐어를 영어나 스페인어보다 먼저 쓸 만큼 자기만의 언어와 문화에 자부심이 컸던, 그 때문에 오랜 세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던 스페인 속의 비(非)스페인이라는 걸 이방인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각별한 여행지였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얼마나 시적이고 낭만적이고 유쾌하게 이방인에게 관대하던지, 또 건축과 공간을 다루는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그 감각은 또 얼마나 근사하던지, 안토니오 가우디와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의 후예들답게 누구 하나 평범한 사람들이 없는 듯 저마다 얼마나 사랑스럽게 예술적이던지(정말이지 카탈루냐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 주어진 하나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남달랐다) 그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카탈루냐 구석구석 내딛는 내 발소리와 사랑에 빠질 정도로 나는 그곳에 흠뻑 빠져 있었고 그곳에 속해 있는 나 자신을 좋아했다. 물론 내가 아는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와 그 일부 외곽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서 다른 곳 어디로도 가고 싶지가 않았다. 떠나기가 싫어서 두 달 하고도 하루를 살고 불법체류자로 분류되는 날이 되어서야 배를 타고 바르셀로나를 떠나 로마로 갔을 정도다.

그러다 몰타 여행 중에 만난 스페인 친구 ‘이시’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발렌시아를 거쳐 아라곤 지역으로 갔다. 아라곤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발렌시아의 어느 광장에서 느닷없이 털실과 바늘을 사다가 뜨개질을 시작했는데 그 별거 아닌 시간이 왜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했던 순간으로 두고두고 떠오르는지 생각했다. 어느 미용실 밖에서 아무 생각 없이 뚱보 여자가 이웃집 여자의 머리를 매만지는 걸 보며 ‘발렌시아의 미용사’로 사는 삶도 괜찮겠구나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무엇보다 험난하고 장엄한 아라곤의 산맥과 카스티야의 텅 빈 들판이 가진 무한한 매력을 스페인을 여행하는 자로서 경험할 수 있는 걸 보기 드문 축복으로 여길 수 있게 됐다.

그때 알았다. 스페인의 태양이 뜨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다 가볼 만하다는 걸. 가볼 만한 정도가 아니라 어디나 다 저마다 가진 고유의 매력으로 반짝거린다는 걸. 가장 스페인다운 도시라는 세비아, 그라나다, 코르도바, 말라가 같은 안달루시아 지방(세비아에서 작가 수업을 시작한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표현대로 ‘너무 부드럽고 관능적이어서 통속적이기까지’ 한 지역색)은 물론 리스본행 야간 열차를 타기 위해 잠깐 들른 수도 마드리드까지 모두 말이다.

그 때문에 오랜 세월 독립을 열망하며 스페인 중앙정부와 싸우는 카탈루냐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그들의 독립 의지를 응원하면서도 동시에 카탈루냐가 떨어져 나가면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상당 부분 그에 의지하던 스페인의 다른 지역은 어떻게 될까 동시에 걱정하게 된다.

그 때문일까? 중앙정부의 체포영장을 피해 벨기에로 도망간 바르셀로나 주지사 소식이나 그 이후 한껏 시들해졌다는 ‘카탈루냐의 독립 열기’에 대한 뉴스를 지면으로 접하면 실망하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안도하게 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사로잡힌다.

나처럼 역사상 유례 없는 재정위기 속에서 분리 갈등까지 심화된 스페인을 응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에게 인생의 이런저런 짐들을 내려놓고 천국에 가까운 곳에서 그저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몸안의 독소가 빠져나가는 걸 체험하게 되는 ‘느림과 치유의 여행 버라이어티’ tvN의 <윤식당>이 스페인으로 갔다는 소식이다.

카나리아제도의 테네리페섬이라고 한다. 최근 한 인스타그램 블로거에 의해 공개된 뉴스에 의하면 나영석 사단의 <윤식당2>의 팀은 지금 한창 그곳에서 촬영 중이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을 상상해 본다. ‘테네리페섬 바닷가에 있는 매력적인 작은 도시’.

상상해 보건대 <윤식당>의 멤버들은 지속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폐기된 스페인의 오래된 낮잠(시에스타) 문화를 부활시켜 발리에서보다 더 여유를 부리고 있을 것 같다. 심지어 저녁 있는 삶은 기본이고 하루 다섯 번의 끼니를 즐기던 이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그곳은 음악과 춤, 미식, 격의 없는 대화를 사랑하는 멋진 낭만주의자들의 땅이다.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지 않는 적당한 노동과 여유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삶은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화산 폭발을 걱정해야 하는 발리는 물론 이래저래 심란하기 짝이 없는 나라 스페인 안에서도 가능하다는 걸 <윤식당>은 이번에도 유유자적 행복하게 보여줄 것이다. 게다가 당신들에게는 아무리 봐도 결코 싫증 나지 않게 우리를 품어 주는 위대한 자연과 문화유산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스페인이여, 카탈란이여! 힘내라!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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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윤식당

시골에서는 40대 젊은 여자가 흔치 않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많은 강원도 산골 같은 경우 자전거 타고 다니는 사람도 드물고 개 끌고 다니는 사람은 더더욱 흔치 않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젊은 여자가 나타나 개 두 마리를 끌고 다니는가 싶더니 이내 자전거를 타고 개를 끌고 다니는 일이 벌어졌다. 그게 그해 조용한 그 시골마을의 최대 사건이며 구경거리였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모두들 밭일하던 일손을 멈추고 기이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그 여자’를 바라봤다.

그 이후 우리 동네에서 나는 ‘개 끌고 다니는 여자’로 통하게 됐다. 무슨 체호프 소설의 주인공처럼 여전히 미스터리한 구석이 많은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라는 여자는…. 개를 데리고 아침저녁으로 마을을 산책한 지 4년이 지났건만 동네 아주머니는 아직도 4년째 같은 질문을 하신다. “근데 개는 왜 끌고 다니는 거래? 덩치가 산만 한 녀석들을…. 고생스럽게 뭐하러…. 게다가 두 마리씩이나…. 내가 당최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경기 용인시 기흥호수공원에 조성된 반려견 놀이터에서 반려견들이 뛰어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런 질문에 처음에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개의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맨날 끈에 묶여 있으면 답답하고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다행히 저도 산책을 좋아하고 개들도 좋아하니 같이 다니면 좋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아침저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심지어 마감이나 숙취로 몸과 마음이 괴로운 날이라도 개와 함께 산책하는 일을 웬만해서는 거르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우리 개들이 바뀌었다. 길에서 만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짖어대던 녀석들이 이제는 누구를 만나든 해맑게 웃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덕분에 요즘은 교대로 한 마리씩 풀어서 다니기에 이렇게 답변할 수 있게 됐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행복해서요. 개도 좋아하고, 걷는 것도 좋아해서 둘 다 같이 하니까 너무 좋아요.”

말하자면 나는 이른바 개를 사랑하는 애견인이다. 요즘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서 탈도 많고 말도 많은 문제의 애견인.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개의 문제라기보다는 반려인들의 문제라는 걸. 한마디로 개통령이라고 불리는 사람 말이 맞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나쁘거나 생각이 짧은, 혹은 이기적이거나 게으른 견주가 있을 뿐.”

고백하자면 나의 개도 무는 개였다. 갈색개 나무와 검정개 개울이 중에서 더 소심하고 더 겁이 많은 개울이가 사람을 두 번이나 물었다. 한 번은 택배 아저씨를 물었고 한 번은 세탁 세제를 팔러 온 방문판매원을 물었다. 그때 남편은 매정하게 사람 무는 개는 안된다며 안락사를 고민했고, 나는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울면서 사죄하고 만류했다.

그랬던 녀석이 지금은 얼마나 온순해졌는지 모른다. 심지어 이젠 맨날 보는 가족보다 새로운 얼굴의 손님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리 집을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과 잘 지낸다. 잘 모르는 자동차와 함께 손님이 도착하면 집으로 손님을 안내하고 고기를 굽거나 마당에서 공놀이하는 이들의 발치에 누워 있다가 함께 산책을 나간다. 처음엔 개가 무서워 자동차에서 내리기를 주저하던 아이들도 이내 개의 친구가 되어 단짝 친구인 듯 함께 놀다가 집에 돌아갈 때 개울이와 나무에게 편지를 써 놓고 갈 정도다. 개 때문에 집에 가기 싫다고 우는 아이들도 있는가 하면 개 때문에 부모를 졸라 다시 찾아오는 아이들도 있으니 홍보와 영업을 겸한 중독적인 매력의 ‘개부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셈이다.

나는 우리 개들을 이른바 학교에 보낸 일이 없다. 훈련사에게 특별 과외를 시키지도 않았다. 다만 집 안에 갇혀 살면서 인간의 방식과 규율만을 강요받는 현대의 개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키웠다. 개울이와 나무는 늑대의 후예다운 그들의 본성이나 행동방식을 충분히 존중받으며 컸다. 개의 마음으로 판단하건대 하루에 두 번, 세 번 산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야생에서 끈 없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줬고 그 때문에 마음고생이 크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둘 중 한 마리를 교대로 풀어 키울 수 있게 됐다.

물론 그 이후로도 산책은 계속됐고 사랑한다는 확신 아래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주 웃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때로는 울면서 걱정이나 슬픔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개와 인간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함께하는 삶의 행복감과 위안을 귀히 여겼고 그 행복감을 기꺼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두려움 없이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이 저절로 좋아졌다. 물론 시골이기에 가능했지만 시골이라도 개를 대부분 묶어 키운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환경보다는 네 발 달린 짐승답게 움직이고 뛰고 싶은 개의 본성과 욕구를 존중하는 마음과 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개와 인간이 보다 평화롭고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꼭 읽어야 하는 책 <당신의 몸짓은 개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개에겐 운동이 필요하다. (중략) 내가 보아 온 수많은 개의 행동상의 문제들이 권태로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개들을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게 하면서 동시에 더 많이 돌봐 줄 때 더 심각해지는 문제다.” 그게 바로 아파트에 살며 오늘날 회자되는 그런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그 프렌치불독과 진돗개가 가진 문제의 본질 아니었을까 싶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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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책읽기는 닮은 점이 많다. 그것은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시간 보내기이며 달콤한 휴식이며 동시에 재충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여행과 책읽기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다. 순식간에. 그리고 다른 세계로 이동한 우리는 잠시나마 우리가 떠나온 현실 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 때문에 얻게 되는 어마어마한 효과가 있다. 새로운 삶의 전망을 얻게 된다는 것. 독서와 여행을 통해 말이다.

세상에 여행과 독서의 힘으로 인생을 바꾼 수혜자 그룹이 있다면 나 자신이야말로 그 그룹의 중심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사표 쓸 각오로 받아낸 1년 무급 휴가로 여행과 독서를 병행한 덕이다. 틀림없이 그 덕이 맞다.

거대한 나무뿌리에 깔리다시피 한 타프롬 사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 경험 이후 한참을 헤매긴 했지만 결국 나는 잡지사 기자 생활을 접고 원하던 대로 가끔 글 쓰고 수시로 몸을 놀려 노동하는 시골의 민박업자가 됐다. 하루 두 번 개와 함께 시골길을 산책하며 더 이상 감옥 같은 마감과 야근은 내 것이 아니다 되뇌는데 그러면 그때마다 얼마나 심장 뻐근하게 행복한지 모른다.

바로 그 여행과 독서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 같은 걸까? 여권과 책만 챙기면 비행기 탈 준비가 다 된 것 같다. 대체로 여행가방 안에 무슨 책을 넣을지 고민하며 짐 싸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민한다. 이걸 넣을까? 아니 뺄까? 혹시 너무 무거울까? 빼면 나중에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까? 읽을 게 없어서 손가락 빨며? 혹시 너무 심심해서 태국어로 쓰여 있는 음료수 병에 붙은 성분 표시 안내문 같은 걸 읽게 되는 건 아닐까? 비행시간이 총 9시간이고 그중 공항에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반인데, 걱정하며…. 늘 그런 식이다, 비행기 타기 전까지.

그런 과정을 통해 간택받은 책은 총 6권. 그중 2권은 우리의 여행 목적지 앙코르와트에 대한 것이고, 남편과 나의 책이 각각 2권씩이었다. 그중 내가 고른 책은 LP에 이어 카세트테이프로 음악 듣기가 다시 유행하고 있는 지금의 포스트디지털시대를 이해하기 딱 좋은 책 <아날로그의 반격>(데이비드 색스, 2016년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과 주진우 기자의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저수지를 찾아라>.

그 책들과 함께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왔다. 인천공항이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이번 추석 연휴에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는데 우리는 바로 그 직전 여유롭기 그지없는 비수기에 여행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앙코르와트가 아닌가?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한 번도 활짝 꽃피워 보지 못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앙코르와트의 돌틈 속에 봉인하는 모습을 본 이래로 늘 그곳에 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남편과 나, 우리 두 사람이 꼽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첫 번째 여행지였다.

과연 좋았다. 컴퓨터도 포클레인도 없던 고대의 인간이 순수한 노동력만으로 그런 엄청난 보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인간이 가진 위대한 창조력과 신비를 느끼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1860년 밀림을 탐험하다 우연히 앙코르와트를 발견한 프랑스 식물학자 앙리 무오의 말처럼 이곳의 건축물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이 세운 것보다 더 장엄’하고, 거의 노예 상태에 가까웠을 수많은 도공들이 새긴 그 많은 조각품은 하나같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고 창조적이어서 미켈란젤로가 눈곱만큼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가져온 책도 어쩜 그리 앙코르와트와 안성맞춤이던지. <아날로그의 반격>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디지털이 줄 수 있는 것은 현실세계의 풍성함을 흉내 낸 모사에 불과하다.”

맞다. 아무리 실감나는 영화를 본들 알 수 있겠나? 컴퓨터 게임 같은 액션영화 <툼레이더>를 아무리 여러 번 본다 해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있겠나? 거대한 스퐁나무들이 뿌리를 내려 버려진 채 무너져 가고 있는 사원들을 움켜잡고 있는 현장 앞에 서 있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관능적인 그 많은 압사라 무희들의 부조작품을 실재하는 장소에서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경험하는 일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그렇다면 앙코르와트를 여행하는 내내 우리와 함께한 <이명박 추격기>는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처음엔 몰랐다. 내가 왜 하필 이 책을 들고 캄보디아에 왔는지. 그런데 여행하면서 알았다.

“앙코르 왕조의 수리야바르만 2세는 자신의 왕권을 신격화하기 위해 앙코르와트를 지었어. 신에 가까워지고 싶은 그의 야망이 건축과 예술을 집대성한 이런 걸작을 만들게 한 거지. 그런데 이명박은 돈에 대한 야망으로, 그것도 그와 그 주변 인물들만 벌 수 있는 돈을 위해서 국민의 대다수에게 엄청난 해악이 되는 4대강 사업을 했어. 수리야바르만은 인공저수지 위에 앙코르와트를 지었지만 이명박은 저수지에 돈을 감춰뒀지. 우리만의 앙코르와트를 지을 수도 있는 엄청난 돈이야. 그걸 찾아내야 해. 백년, 천년 뒤의 후대를 위해서도. 앙코르와트든 이집트든 세계 어디에 있든 주진우의 책 <이명박 추격기>를 사서 읽어야 하는 이유지.” 집에 돌아가면 3권 더, 아니 가능하면 더 많이 이 책을 사야겠다며 내가 남편에게 한 말이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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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충제 계란’ 파장 속에서 누구든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보건 당국이 독성화학물질을 만들어 내거나 사용하는 기업 혹은 농장과 결탁을 하고 있다면?” 누구든 했을 법한 질문이다. ‘양심’에 따라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언론이라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질문이었고. 영화 <공범자들>을 만든 최승호 PD가 집요하게 MB(이명박 전 대통령)를 잡고 늘어지며 하는 대사처럼 “언론이 질문을 못하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렇게 묻는 언론이 있었고 그 언론이 꼽은 최고의 전문가는 조심스럽게 ‘예스’나 다름없는 답을 내놓았다. 서울대 약학과 정진호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실에서 관리했다는 살충제 계란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현재 발표되고 있는 인체의 유해성에 대해서 급성독성이라는 게 뭐냐면 단기간 많은 양에 노출되는 거거든요. 그 시나리오가 자꾸만 유해하다 안 하다 하는데 사실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중략) 제 생각에는 정부 부처는 시끄러울 수 있는 문제를 피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니터링을 적극적으로 해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거든요.” 이해한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그의 사회적 위치와 상황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은 내게 분명히 “예스”라고 읽혔다.

그 ‘예스’라는 희미한 신호음과 함께 읽기 시작한 책이 있다. <죽음의 식탁>이라는 책이다. 마리 모니크 로뱅이라는 프랑스의 한 공영방송 기자 출신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지난 수십년간 암, 백혈병,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불임, 자가면역질환 등의 질병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이유를 조사하기 위해 프랑스, 독일, 미국, 인도, 칠레 등 10개국에서 50명의 과학자, 활동가, 규제기관 대표들과 인터뷰해서 쓴 책이다. 2년간의 방대한 조사와 끈질긴 추적 끝에 저자는 밭이나 농장에서 쓰는 농약, 살충제부터 식품에 들어가는 첨가제와 플라스틱 용기까지 우리 일상에 만연한 독성화학물질이 바로 그 많은 질병의 주요 원인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독성화학물질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에겐 발이 없고 마땅히 신을 만한 신발도 없고, 자동차가 없으며 차표도 물론 없다. 인간에게 가서 인간을 무너뜨리고 싶은 의지나 야망도 당연히 있을 리 없다. 다만 인간의 건강이나 환경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기업과 규제기관의 논리가 있을 뿐이고, 그 논리로 잘 먹고 잘사는 대기업과 과학자, 규제기관의 기만과 속임수가 있을 뿐이다. 그로 인해 세상은 어디나 구석구석 독성화학물질과 그로 인한 갖가지 질병이 만연한 곳이 됐고.

세상에, 그래도 아무 문제 없단다. 많이 먹으면 나쁘지만 안 죽을 만큼 조금씩 먹기 때문에 괜찮다는 논리다. 그게 ‘살충제 계란’에 대한 정부의 논리고, 대한의사협회의 논리다. 하지만 왜 정부와 전문가가 괜찮다고 하는 독극물의 ‘일일 섭취허용량’ 개념을 비웃으며 하등 이로울 것이 없는 미량의 독을 우리에게 허용하여 결국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소비자이고, 그 이익은 기업들이 가져가게” 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체계라고 했던 영국인 교수 에릭 밀스톤의 말이 계속 귓속에 쟁쟁하게 울리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당분간 계란 섭취를 피하는 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나는 물론 내 가족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재앙에 가까운 질병을 피할 수 있다면 앞으로 계속 안 먹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없다. 계란 하나 안 먹는다고 우리 일상에 만연된 그 많은 먹거리의 위험과 질병에서 면제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어떤 면에서 <죽음의 식탁>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던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이 처음 출간됐을 때 생각이 난다. 그때는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업형 농장의 횡포와 이를 숨기거나 묵인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도 컸지만 그보다는 동물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이전까지 인간의 식탁에 오르는 동물들이 사육되고 도축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상황에 처하는지 몰랐던지라 어마어마한 충격 속에서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육식을 값싸게 즐긴 나 자신을 반성하기에도 벅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 출간과 광우병 사태 이후 나 자신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 소비에 대해 생각했고 조금 더 비용을 치르더라도 유기농 혹은 친환경이라는 딱지가 붙은 먹거리를 선택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났지만, 친환경 인증에 대한 신뢰는 되레 조금씩 배신당했고 세상은 조금씩 더 나빠졌다.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유기농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한 나는 혼자 그렇게 산다고 상황이 나아질까 비관한다. 그 편이 제일 속 편하니까.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에 물어보고 싶다. 국민이 원한다면 농약이나 독극물에 가까운 화학약품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기업이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기꺼이 감수하는 등의 시스템적 개혁에 앞장설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토록 지지율이 높은 국민의 정부라면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 누구도 아닌 국민된 자격으로 물으니 국민에 의해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답하길 바란다, 오버.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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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저널리즘의 거장 마시모 비탈리(Massimo Vitali)가 찍은 사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인파로 장관을 이루는 해변 풍경이다.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름난 여름 해변 풍경 속에서 있을 수 있는 온갖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곳에 가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 동시에 그것이 나의 현실이 아니라 그저 남의 이야기이고 또 사진이라는 사실에 이상하게 안도하게 된다.

그보다 더 잔인한 작가도 있다. 여행이나 휴가에 대해 누구보다 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마틴 파(Martin Par)의 사진을 보면 안도감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해방감이 느껴진다.

천연기념물 제260호인 강원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백룡동굴. 경향신문 자료사진

진저리 칠 정도로 평범하고 재미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마틴 파는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에서 기가 막히게 재미난 사진을 뽑아내는 작가로 알려졌는데 특히 유명 관광지와 휴양지의 적나라한 사실 풍경 찍기가 그의 주특기다. 미안하게도 우리 관람객은 넘쳐나는 쓰레기통과 수영복 차림으로 매점 앞에 줄을 선 짜증난 얼굴들, 그 앞에서 빡빡 울다가 기껏 아이스크림(그것도 무더위 때문에 처량맞게 녹아내리고 있는 꼴의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담은 휴양지 사진을 보며 키득거리는 가운데 굉장한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 이런저런 이유로 여름휴가를 못 간 채 뜨겁게 달구어진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상 마틴 파의 사진만 한 선물이나 힐링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올여름 유럽의 에메랄드빛 해변에서 연일 40도를 넘는 이상 고온 현상으로 ‘힐링’은커녕 ‘럭셔리한 지옥의 맛’을 경험한 여행객들(특히 크로아티아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과 지중해 연안)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만약 그들이 여름휴가를 준비하며 관광업자들이 준비한 광고 사진이 아니라 마틴 파와 마시모 비탈리의 포토 저널리즘 사진을 봤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거기 갔을까 싶다. 아니 그보다 미국의 사상가 겸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쓴 글귀 몇 가지만 읽었어도 해외 휴가 여행은 애초에 꿈도 안 꿨을 것 같다.

예컨대, “여행은 어리석은 자의 낙원이다” “여행에 대한 맹신은 자기 문화의 결핍에서 나온다” 같은 강렬한 지침의 문구들 말이다. 여담이지만 마시모 비탈리도, 마틴 파도, 에머슨도 좋은 작가다.

좋은 작가란 ‘우리가 일상에서 잘 볼 수 없는 삶의 중요한 면들을 상기시켜야 한다’는 시인 워즈워스의 기준에서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일찍이 소로를 통해 에머슨을 알고 에머슨을 읽으며 그의 사상에 무릎을 꿇었던 나다. “여행이라는 미신에 매혹당하는 것은 자기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인간 내부에서 힘이 넘쳐 오르면 그는 자신의 의무 속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에머슨의 그와 같은 가르침을 읽으며 여행으로 잠시 한눈을 팔기보다 본질적으로 내 삶의 방향과 장소를 바꾸는 데 나의 모든 에너지와 열정, 시간을 쏟았다. 그로부터 7년쯤 지나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 것일까?

이제 다시 나도 여행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솟구친다. 해외 휴가 여행의 유혹이 슬금슬금 수시로 머리를 쳐드는 가운데 아이슬란드나 피렌체, 치앙마이, 프롬펜 등 남 몰래 동경하던 몇 개의 지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바람이 내 이름이라도 호출한 듯 설레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전처럼 저가항공편을 검색하지는 않는다. ‘저가’라고 덜컥 예약했다가 일찍 취소한다고 했는데도 날린 돈이 너무 많아 이제는 아예 저가항공 사이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 대신 하는 일이 있다. 강원도 지도 살펴보기! 구석구석! 차를 몰고 나가기! 그다음 돌아다니기! 구석구석!

덕분에 숨겨진 보석 같은 강원도를 많이 알게 됐다. 그중 제일의 보석을 소개하라면 나는 주저없이 백룡동굴을 꼽을 것이다. 종교와 자본이 만나 출중하게 눈부신 오대산 월정사나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올라가 관람할 수 있는 설악산, 잘 정비된 동해 바다에 최첨단의 트렌디함까지 갖춘 강릉과 경포대도 좋지만 자본으로 분칠할 수 없는 놀라움이나 신비감 면에서 백룡동굴이 앞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상 폭염을 피해 동굴만큼 시원한 피서지가 있을 수 없는데 백룡동굴은 탐사 인원이 제한되어 있고 동굴 내부의 훼손을 감추기 위한 인공조명이 거의 없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다. 아주 최근까지 일반 공개를 금지하며 천연 그대로 잘 보존한 세계적인 수준의 석회암 동굴이기 때문에 ‘관람’이 아니라 진짜로 ‘탐사’ 수준의 복장과 자세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동강을 따라 굽이굽이 가는 길 자체가 힐링이 되고 2시간 정도 걸리는 동굴 탐사는 한마디로 오감으로 체험하는 종합예술이고 신비다. 당연히 주말이나 여름휴가철에는 예약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곳이 됐으니 미리미리 챙겨두시길. 사전 예약은 필수고 9세 이하, 65세 이상의 제한 나이가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또한 비수기 평일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일종의 ‘행운아’이니 그 행운 놓치지 말라는 말도 덧붙인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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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 기간 동안 단칼에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 참 기뻤다. “입만 열면 4차 산업혁명 이야기하는 안철수는 4차 산업혁명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4차 산업혁명은 실업자를 대량생산하는 산업이다. 국가의 주도적 대비가 필요한 이유이다.” 얼마나 좋던지…. 안철수 후보가 자기만 잘 알고 있는 세계인 양 TV 토론에서 주야장천 ‘4차 산업혁명’ 얘기하는 게 참 듣기 싫던 차였는데 팟캐스트에서 도올 김용욱이 이렇게 속시원하게 발언해 주니 좋았다. 역시 ‘우리 시대 최고의 석학 도올다운 명석한 해석’이라며 박수를 쳤다.

그렇다. 누구의 발언이든 간에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있다.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이 로봇에게 일자리를 뺏긴 상황 속에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빈곤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상상하면 끔찍하다.

어린이들이 풀들을 바라보며 숲길을 걷고 있다. 자연은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생활 방식으로 둔화된 인간의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는 놀라운 회복력을 품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는 인간의 희망은 오히려 자연에 있을지 모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실제로 경제 전문가들은 2020년까지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1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긴다고 전망하는가 하면 모든 사람이 비정규직화되어 기업이 필요할 때 잠시 일을 하다가, 필요 없을 때는 집에서 실직 상태로 쉬는 현상이 계속될 수 있다는 암울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그 때문에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는 상황 속에 처해질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LBS(런던비즈니스스쿨)의 코스타스 마카 교수 같은 전문 석학은 “현재 18세인 아이들이 40세가 됐을 때는 평균적으로 10~14개의 직업을 거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아이들 키우는 부모들 걱정이 크다. 살던 대로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도대체 내 아이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환영받을 수 있는 창의융합형 인재로 어떻게 키운다는 말인가? 여기저기 뒤져봐도 뾰족한 해법이 안 보인다는 하소연 속에서 ‘내 아이 창의융합형 인재로 키우기’를 내 건 이런저런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걸로 안다. 하지만 진정 그런 책을 읽으면 문제가 해결될까? 혹시 그런 식의 제목을 내건 책들은 안철수식 말로만 하는 ‘새 정치’ 같은 게 아닐까?

내가 추천하는 책은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이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가 소개하듯 ‘자동 기계 같은 아이를 키우는 걸 막아주는 1인치 두께의 경고서’일 뿐만 아니라 미래 시대에 걸맞은 ‘창의성과 융합성이 뛰어난 행복한 인재 키우기’를 위한 ‘희망서’라고 나는 소개하고 싶다.

우리 세대 대부분은 자연에서 뛰놀면서 상상력의 축복을 받으며 자라났다. 하지만 오늘날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학교와 학원에 갔다가 그 나머지 시간엔 컴퓨터와 게임기, 텔레비전 앞에서 사는 세대(행복을 모두 남이나 기계에 맡겨버린다는 점에서)가 됐다.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은 바로 그 사태가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얼마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것인지 먼저 알려주는 책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연은 아주 작은 미물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 있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나 자신보다 거대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불완전하게 완전한 세계랄까? 그 속에서 아이는 편안하다. 노력하지 않고 무언가에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그 안에 있으면 정서장애가 있는 아이라도 금방 평정심을 되찾게 되고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자연계의 일부분으로서의 편안한 자존감과 호기심, 모험심을 갖게 된다.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은 자연이 가진 그 특별한 힘을 우리에게 다시금 강렬하게 환기시켜 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또한 자연은 어떤 것이라도 창조해낼 수 있는 원천 재료와 가능성이 넘쳐나는 곳이기에 그 속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아이는 스스로 자기 손으로 이것저것 융합해 보며 놀이하듯이 매우 창의적인 시도들을 해 볼 수도 있다는 점은 얼마나 또 희망적인가? 마치 알을 품은 에디슨이 나중에 전기를 발명할 생각을 하듯이 기존에 있던 것을 융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을 갖게 된다고 할까?

아무리 훌륭한 전자장비라도 인간의 모든 감각을 동시에 일깨워 줄 수 없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편의주의 혹은 전자화된 생활 방식에 둔화된 인간의 감각을 다시 일깨워 주는 놀라운 회복력이 자연 속에 있다. 게다가 컴퓨터로 못하는 일,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해야만 하는 고전적인 일들이 자연 속에는 널려 있다. 바로 그 속에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는 인간의 희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컴퓨터나 인공 지능 로봇이 못하는 일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셈이다.

그나저나 다시 안철수로 돌아가면 그 모든 저열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퇴행이 다 자기 잘못이라며 왜 구태여 정치계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는지 모르겠다. 걸핏하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리더라고 스스로 치켜세우던 그가 혹시 일자리를 잃게 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 그러게, 내 참…. 네팔까지는 못 가더라도 연구실을 뛰쳐나가 동네 야산에서라도 마음을 추스르고 치유를 얻고 비굴하지 않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어야지, 쯧쯧.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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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가장 경탄할 만한 상업 공간으로 라스베이거스의 베네치안호텔이 꼽혔다. 그곳은 라스베이거스의 다른 호텔들처럼 호화로울 뿐만 아니라 특유의 모방과 복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달해 있다. 베네치안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건축물과 장식을 거의 똑같이 옮겨 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진짜 베네치아는 아예 잊으라. 베네치안호텔이 한결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리알토 다리나 콘타리니 궁전은 물론 대운하와 곤돌라 사공의 노랫소리, 심지어 20m 높이의 성당 천장에 드리워진 베네치아의 엷은 보랏빛 하늘까지 옮겨 왔다. 이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넋이 나간 듯 “세상에 저게 왜 여기에 와 있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진짜 베네치아처럼 역한 냄새가 없어서 좋았다. 느닷없이 비가 와서 옷이 젖는 일도 없었다. 더러운 개가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일도 없다. 대신 사계절 가장 쾌적한 온도와 습도 속에서 인공의 호사스러움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어서 베네치아보다 낫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런데 베네치아를 똑같이 베낀 이 호텔이 가장 라스베이거스다운 곳으로 꼽힌 이유는 뭘까? 그건 모방 때문이다. 라스베이거스가 어머어마한 돈과 교활한 장삿속이 만든 허위의 모방 도시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낡은 고가에서 사람이 걷기 좋은 길로 새롭게 태어난 서울역고가 ‘서울로 7017’. ‘7017’은 서울역고가가 개통했던 1970년의 ‘70’과 보행길로 다시 태어난 2017년의 17’을 합쳐 만든 이름이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가짜 베네치아 호텔 같은 곳이 아직까지도 인기가 있을 리 없다고 장담해 본다. 나라면, 공짜이거나 엄청난 헐값이라면 모를까 제 돈 주고 가서 숙박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쇼핑센터 가듯 잠깐 놀러갈 수는 있겠다.) 왜냐하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놀라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때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러한 곳들이 죄다 한물간 퇴물처럼 느껴지는 때가 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유행이 지났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초’ 치기 싫어서 지나가는 말로 하지만 솔직히 걱정된다. 화산분화구나 오름 같은 가장 제주다운 절경을 모두 가져다 한자리에 모아둔다는 발상의 ‘제주 드림타워’의 미래가…. 야담이지만 말이다.

전 생애에 걸쳐 ‘매혹으로서의 대도시’에 대해 연구한 독보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이렇게 썼다.

“대중을 선도하는 것은 매번 최신의 것이지만 그것이 대중을 선도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는 가장 오래된 것, 이미 존재했던 것, 가장 친숙한 것의 매개를 통해 나타나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마치 발터 벤야민이 오늘날의 건축계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그 옛날에 미리미리 쓴 글 같다. 한때는 대중의 이목을 끌었지만 어느새 수명을 다해, 혹은 더 이상 인기가 없어서 낡고 부서진 채로 철거 대상이 된 옛날 건물이 새로운 용도와 이름으로 멋지게 개조되어 다시 살아나는 현상이 전 세계적인 트렌드가 됐다. 목하 한창 유행 중인 ‘재생 건축’ 말이다.

그 포문을 연 건 한강의 버려진 정수장을 재생시켜 만든 생태공원 선유도. 때는 2003년이었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시적인 장엄함에 압도되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공공건축물이 생겼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에 단박에 건축가 조성룡을 찾아가 인터뷰를 청했던 일이 새삼 떠오른다.

그 이후 1925년 일제강점기 지어진 서울역이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로 태어났고 숙박요금이 8000원이던 시절에 멈추어 폐허가 된 보안여관이 대안미술공간으로 거듭났다. 문래동의 철공소 골목은 아예 그 골목 전체가 젊은 예술인들이 주도하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부활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가보지 못했지만 고구마 전분 공장의 흔적이 드라마틱하게 남아 있는 제주도 카페 앤트러사이트의 성공 신화는 질투가 날 정도다. 윤동주 문학관으로 탈바꿈한 인왕산 수도가압장 건물과 미술관이 된 찜질방 얘기는 어떤가? 한 번쯤 다 가보고 싶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 김어준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나온 박원순 시장으로부터 서울역고가 보행길 ‘서울로 7017’ 개장 소식을 들었다. “아 그러니까 버려진 고가 철도를 공원화하여 성공한 뉴욕의 하이라인(Friends of the High Line)을 모방한 거구나, 그렇죠?” 하고 김어준이 즐거운 듯 놀렸고 박원순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아 모방 좀 하면 어때요? 그게 훌륭한 발상이고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이라면?”

맞다, 백번 맞는 말이다. 코코 샤넬도 모방했고 모방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복제는 사랑이다.” 사랑하면, 좋아 보이면 공공을 위해 모방할 수 있다. 그게 모방죄가 되지 않는 한도에서 말이다.

그리고 성공한 모방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 베낄 거면 진정 좋은 것을 베껴라. 두 번째, 유행 타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세 번째, 잘 베껴라. 네 번째, 원작을 뛰어넘겠다는 목표와 비전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서울시 스스로 어떤 답을 내릴지는 나도 모르겠다. 여하튼 응원한다, 계속 잘하실 것을.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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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인에게 최초의 노벨평화상이 주어진다면 이 여자가 받아야 마땅하다. 생존하는 세기의 ‘걸크러시’ 패티 스미스. 밥 딜런과 함께 2017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야 마땅했을 만큼 문학적인 재능이 남다른 음악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밥 딜런처럼 거만하지 않다. 애매모호한 가사로 심오한 척하지도 않는다. 성품은 강건하되 겸손하고 메시지는 한 편의 저항시인 듯 분명하되 아름답다.

그런 그녀가 2009년 생애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지산록페스티벌에서 부른 노래가 있다. 노래하는 저항 시인으로서의 삶을 밥 딜런처럼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 40년 인생을 대표하는 곡 ‘피플 해브 더 파워(People Have The Power)’.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그러니 “계속 꿈꾸고 희망하는 걸 멈추지 말라”고 주문하는 패티 스미스의 노래를 들으며 심장이 끓어올라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지만 사실은 속으로 울기도 했다.

지난 15일 서울 은정초등학교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사인을 받을 종이를 찾기 위해 다급하게 가방을 뒤지는 학생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왼쪽 사진). 해당 학생이 문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사인이 담긴 공책을 펼쳐 들고 웃고 있는 사진도 인터넷에 공개됐다.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페이스북 캡처

때는 그 꿈이, 그 희망이 너무도 요원해 보이던 이명박 정부 1주년 즈음이었다. 즐거운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후배 칼럼니스트 김현진이 이명박 정부 취임 100일을 맞아 음주 운전으로 먹은 벌점 100점을 사면받은 후 쓴 글조각을 읽고 낄낄대던 재미밖에 없었다. “내 벌점 돌려내라, 놈의 신세 따위 지고 싶지 않다, 적의 동정 따윈 필요 없다” 했던….

그랬다. 너무도 사사롭게 자기 이익을 알뜰하게 챙긴 이명박·박근혜 9년을 살며 즐거움이라고는 진정 그것밖에 없었다. ‘국민의 주권’으로 뽑은 ‘국민의 대표자’를 국민 스스로 미천한 동물 두 마리를 대동하여 놀려먹는 울적하기 짝이 없는 그 참담한 재미. 그것 말고는 아무런 공적 즐거움이 없는 시절이었다. 대통령 자격이 없는 잘못된 후보가 잘못된 언론의 눈가림 속에서 결국 대통령이 되는 나라가 싫어서 이민 갈 궁리를 하는가 하면 대통령이 나오는 뉴스라면 무조건 다 싫어서 TV를 끊고 신문마저 끊고 살던 때였다.

그런데 그 시절이 다 지나갔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꿈만 같다. 대통령 한 명 바꿨을 뿐인데, 심지어 며칠 안됐는데 이렇게 다를 수가…. 돈 한 푼 안 들이고 좋은 나라로 이민 간 것 이상이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는 물론 노르웨이나 핀란드마저도 부럽지 않다. 켄 로치나 아바스 키아로스타미풍의 멋진 로맨스 영화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대통령 뉴스를 찾아 듣거나 읽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나날이다.

그리하여 ‘후기 진실(post truth) 시대’ 사는 나는 오늘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유튜브 사설 뉴스를 본다. 대통령이 나오는 영국 영화 <러브 액추얼리>에 사랑스럽게 가난한 초등학생 아이가 나오는 이란 영화를 섞어 놓으면 이런 장면의 영화가 나오게 될까? 자기만 사인을 못 받게 될까봐 초조한 초등학생 아이가 가방에서 공책과 연필을 찾는 동안 기꺼이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는 대통령을 보게 될 줄을! 심지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쪼그려 앉아 있는 눈곱만큼도 권위의식 없이 듬직한 남자의 모습을 대한민국의 국민 된 자로서 보게 될 줄을…. 결코 ‘연출’이 아니라 자신의 살아온 ‘인생’으로, 지켜지지 않는 번지르르한 ‘말’이 아니라 오랜 시간 엄청나게 잘 준비된 진실한 ‘행동’으로 증명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에서 우리는 기꺼이 사랑과 자긍심을 느끼는 나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힘’ 안에서, 그 ‘힘’이 쌓이고 쌓여서 문재인이라는 대통령이 탄생한 거다. 답답하고 어눌하고 ‘권력욕’마저 없던 재수생 문재인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안철수와 함께 민주당 호남 의원들이 우르르 탈당했을 때부터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민주당 내부를 먼저 개혁하고 표창원이나 조응천 같은 참신한 외부 인사를 오랜 시간 공들여 끈기 있게 영입하는 문재인 당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난생처음으로 한 정당의 당원이 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자신의 금쪽같은 사생활을 반납하고 어이없이 무너져 버린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기꺼이 거리로 나온 촛불 시민들이 있었다. 사람의 에너지는 주고받으며 커진다. 매주 광장에서 촛불 시민들과 함께한 문재인은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힘으로 점점 더 막강하되 정의롭고, 막힘없이 따뜻한 리더로서의 자심감을 완벽하게 충전하게 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심지어 그 진정성은 의심하지 않지만 과연 적폐청산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조차 끌어안으며 통합할 수 있을지를 의심하며 끊임없이 이재명과 안희정을 곁눈질한 이들의 힘마저 흡수하여 더 유능하고 더 품이 큰 지도자로 거듭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기존의 정통 미디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중의 시대’는 거의 다 끝나가고 있다.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는 TV조선의 2049 시청률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정통 미디어가 감추는 진실의 이면을 서로를 공유하고 전파하고 학습하는 다중의 시대가 도래했고, 스스로 자신이 가진 ‘힘’을 인식하고 적극 행사하는 ‘시민 전성 시대’가 도래했다. 바로 그 다중과 시민이 9년간의 길고 긴 ‘대통령 스트레스 시대’를 ‘대통령 힐링 시대’로 산뜻하게 바꾼 것이다. 우리 모두 축하받아 마땅하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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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잘 알고 지낸다고 생각한 지인으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다. 지금껏 살면서 투표권을 행사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이번에도 자신은 투표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정치인들에 대한 우리 모두 공감할 만한 불신과 혐오감을 감안하더라도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너무도 당당한 그 태도에 말문이 막힐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어느새 오십의 나이였고 일하는 여자였다. 백화점의 이른바 명품 매장에서 일하는 용모 단정하고 야무진 성격의 꽃중년 여성. 산전수전 다 겪었을 것 같은 매니저급이었지만 ‘까칠한’ 부하 직원 때문에 때때로 울기도 하는 여자였다. 취향이랄까 가치관이랄까 뭐 그런 걸 공유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난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적어도 인간에 대한 예의도 있고 말 못하는 짐승에 대한 연민도 있는 깔끔한 성격의 ‘천생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예전 같으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정치적 무지를 무관심으로 포장하지 말아라. 그건 쿨한 게 아니라 부끄러운 거다”라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19일 앞둔 20일 후보자 벽보가 부착된 서울 종로구 이화동 예술가의 집 울타리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더 이상 정치적 태도, 혹은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야유하거나 조롱하고 싶지 않았다. 역사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이 그렇게 흘러가서는 안되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기가 왔고 그건 나 자신의 나이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오래 생각하고 싶었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경악할 만한 국민주권 우롱사태를 겪고도 아직도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놈이 그놈이다’ 하며 투표권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나의 이웃이고 나의 친구이고 나의 가족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내 나름대로 그 해법을 찾고 싶었다.

“그들은 어쩌다 이 세상과 자신을 무관하게 여기며 자신의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을 되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과연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생각해 보면 15년 전의 나 자신이 그랬다. 정치에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했는지 여당과 야당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남자 친구에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박종필이 어느 당이냐”고 물었다. 그가 설마 하는 눈초리로 “혹시 정치 제일 오래 한 인간 김종필을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을 때조차 나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때 내 나이 서른이었는데 그 나이까지 여전히 마감을 핑계로 한 번도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고 내가 사는 동네의 국회의원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부끄럽기는커녕 당당했다.

그때 난 이렇게 항변했다. 우리에겐 민주주의 국가에 살면서 ‘선거하지 않을 권리’ 또한 있는 거라고. 보수든 진보든 결국 자기 밥그릇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시시한 인간들이 모여서 국민 핑계 대며 자기 잇속이나 챙기기 바쁜 정치판을 최소한 ‘인정해 주지는’ 않을 권리도 우리에겐 있는 거라고. 또한 우리가 정치에 무관심한 건 그만큼 정치에 관심 쏟아봐야 좋은 꼴 못 보고 열이나 받을 뿐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고. 어디 그뿐인가? 투표율이 높아진다고 해도 제대로 된 정치인을 뽑힐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며, 설사 제대로 된 정치인 몇이 국회로 간다 해도 이 웃기는 나라는 예전에 하던 대로 돌아갈 뿐이라고. 그렇게 냉소하며 나는 나의 ‘정치적 무지’ 혹은 ‘무관심’을 항변하며 쿨한 제스처를 취했고, 그 제스처에 얼마간 나 스스로 취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느 날 문득 깨지고 말았다. 나 자신이야말로 내 일 바쁘다는 이유로 내가 속한 집단의 논리에 갇혀 세상일에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있다가 선거철만 되면 느닷없이 멋진 냉소주의자 행세하며 자신의 무지하고도 무관심한 현실 인식, 혹은 현실 참여 태도를 스스로 합리화하기 바쁜 시시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마도 그 기반엔 사랑의 힘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제 막 깨어나고 있던 ‘의식 있는 시민의 힘’에 주목하고 있던 지나간 내 연인의 냉철한 비판이 어느 날 내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던 거다. ‘혹시 네가 정치에 무관심한 건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 아니냐’고. ‘그 누군가는 그래야만 자신을 비롯한 특수한 사람들의 이익만을 위한 정책을 제멋대로 펼칠 수 있을 테니까’ 했던.

그러고 보니 갑자기 ‘사드’라는 키워드가 섬광처럼 떠오른다. 사드는 우리가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거다. 이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됐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왜 합당한 ‘딜’도 없이 그걸 한반도에 설치하기로 합의해줬을까? 자기한테 무슨 이익이 있다고? 여하튼 그 때문에 이미 중국 정부의 경제 보복이 심화되고 있고 그 때문에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에서 ‘탈탈’ 빠졌고 그 때문에 백화점에서 일하는 당신의 일자리가 흔들흔들 불안해졌다는 걸 나의 이웃사촌인 그녀에게 ‘사랑’을 담아 넌지시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정치는 그렇게 당신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고, 그놈이 그놈인 것도 절대로 아니니, 안철수와 문재인을 비롯한 주요 대선주자들이 ‘사드’ 문제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무엇보다 먼저 체크해야 한다고. 그런 다음 함께 투표장에 갈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고.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과 함께 더 좋은 세상에서 살 고 싶기 때문이라고.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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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저마다의 분주함의 무게에 짓눌려 살고 있다. 쫓기듯 밥을 먹고 허둥지둥 회사에 가서 각자에게 주어진 그 많은 일을 한다. 그러다 문득 궁지에 몰리기도 한다. 그래도 숨을 곳이 전혀 없다고 느낀다. 의문도 든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토록 실속 없이 바쁘게…, 무의미하게….”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답이 없고 가슴만 답답하다. 그래도 꾸역꾸역 밥을 먹고 일을 한다, 미련하게…. 산다는 게 이렇게 지긋지긋한 것인가 하는 절망감에 몸서리치다가 삶을 막 대하고 싶은 ‘나쁜 생각’마저 하게 된다.

“에라, 이놈의 미련한 몸 교통사고라도 좀 나라. 그러면 병원에 실려 갈 테고, 그러면 한동안 맘 편히 쉴 수 있지 않겠나?” 뭐 그런…. 하지만 교통사고라는 ‘불운’도 아무에게나 생기는 일이 아니어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쳇바퀴를 굴리기 마련이다.

혹시 그 때문일까? 어떤 이들은 그러다 문득 덜컥 공황장애라는 병에 걸린다. 남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인데 본인만 혼자 어떤 상황 속에서 당장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 숨막힘, 어지럼, 식은땀, 가슴 두근거림, 혹은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은 무기력 등을 호소하는 증상. 내가 경험한바 공황장애는 일종의 교통사고다. 정확히 정신적 교통사고로 인한 불안과 공포 후유증이 마치 ‘장애’인 것처럼 계속되는 현상.

복잡한 도심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이 예기치 않게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을 안고 있듯 현대인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공포와 두려움, 무기력에 휩싸이는 공황장애는 흔한 병이 돼 버렸다. <내 마음이 지옥일 때>의 저자 이명수씨는 시 읽기를 통한 마음의 치유를 제안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런데 그런 장애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해’처럼 흔한 질병이 돼 버렸다. 어느새, 공황장애 10만명 시대가 열렸다. 연평균 15.8%씩 증가해서 2015년 한 해 동안 공황장애로 병원을 찾은 사람이 10만명을 넘어섰는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일에 대한 중압감과 스트레스가 가장 큰 40~50대였다고 한다. 특히 40대 같은 경우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공황장애라니 문득 놀라웠다.

내가 아는 한 40대는 인생의 최절정기이다. 이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한 자리씩 차지한 채 일의 숙련도 면에서 무르익는 시기다. 그런데 스트레스와 불안감으로 이런저런 병에 걸릴 확률이 가장 큰 세대이기도 하다. 왜 일까? 혹시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최장 시간 일하면서도 생산성은 낮고, 20대에게 미안할 만큼 월급은 높은데 스스로 느끼는 만족감은 낮기 때문일까? 여하튼 우리 사회의 중추라 할 수 있는 40대가 아프다. 치료하기 힘든 정신적 불치병을 앓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그토록 흔한 공황장애 환자에게 권하고 싶은 재미난 책을 발견했다. 마음 치유자 정혜신의 ‘영감’에 ‘힘’입어 심리기획자 이명수가 쓴 책 <내 마음이 지옥일 때>. 잠깐 읽었는데 대번에 이런 느낌을 받았다. “공황장애면 뭐 어때? 그냥 당신의 몸과 마음이 기우는 쪽으로 당신의 속도대로 가라는 신호에 불과한데. 그 신호를 따라 가다보면 ‘마음의 지옥’을 벗어나게 되니 되레 ‘축복’일 수도 있고. 물론 ‘부작용 없는 치유제’로서 시 읽기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이야.”

제목과 달리 그 내용이 그다지 묵직하거나 암울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방점은 놀랍게도 ‘재미’에 있었다. 한마디로 ‘시’를 좋아하는 심리학자가 시로써 ‘마음이 지옥’인 이들에게 치유적 메시지를 전한다는 의도의 책인데, 제 멋대로, 혹은 제 마음대로 시를 읽고 해석하는 심리학자의 글이 그가 꼽은 참신한 시와 함께 읽기가 매우 즐거웠다.

예컨대 ‘왼쪽으로 기운 것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나의 생이야. (중략) 몸이 기운 쪽이 내 중심이야. 기울지 않으면 중심도 없어’라는 이원 시인의 시 ‘영웅’에 저자 이명수는 맞장구치듯 이렇게 대꾸한다.

“(암 그렇고 말고요.) 자전거 처음 배울 때처럼 기우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넘어지지 않잖아요.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으라니 그러면 금방 잘못될 것 같지만 안 그렇잖아요.”

그건 바로 내가 선배로서 공황장애 환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너무 오랫동안 쫓기듯 허둥대며 일해서 그래요. 그만 내려와서 당신의 몸과 마음이 기우는 쪽으로 당신의 속도대로 천천히 가세요. 산다는 게 어차피 죽음을 향해 가는 일인데 좀 천천히 가면 어때요? 그게 옳지, 안 그래요?”

산다는 게 어떻게 지겨운 일이 될 수 있겠는가? 무서운 일도 아니다. 이렇게 멋진 시도 읽을 수 있는데….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천양희 ‘생각이 달라졌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 베란다 철창에 쪼그려앉아 햇빛을 쪼이는데// 지옥은 참 작기도 하지’(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산다는 건 크고 작은 ‘마음의 지옥’을 경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내 알게 된다. “자기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수갑을 채워놓고 불편하게 살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 많은 경우 지옥은 사라진다”는 걸. 하나하나 너무도 귀하게 읽히는 82편의 시와 함께 저자 이명수가 다다른 그런 깨달음에 이른다면 그건 분명 산다는 것의 축복이며 독서의 환희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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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41세의 노르웨이 여자를 알게 됐다. 서면을 통해 알게 된 그녀는 현재 방콕에 거주하며 전 세계를 여행하는 멋진 보헤미안이었다. 그런 그녀가 4월에 한국에 온다. 특별히 한국에 와야 하는 이유는 없다. 단지 인터넷을 통해서 강원도에 머물고 싶은 숙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놀랍게도 홀로 12박이나 머물며 컴퓨터로 일도 하고 충분한 휴식도 취할 거라고 했다.

그녀가 예약한 곳은 대체로는 4월까지 눈이 오는 곳이다. 늘씬하게 키가 큰 낙엽송 숲이 마치 집에 딸린 정원인 듯 인접한 강원도의 소박한 시골집. 그 풍경이 마치 자신의 고향 노르웨이처럼 애틋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자기 눈에는 그 민박집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보인다고 했다. ‘자연’적이고 쉴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고 ‘아취’랄까 ‘우아’랄까 뭔가 그런 취향이 가득 느껴지는 공간처럼 보인다고 했다. 정확히는 ‘테이스트풀(tasteful)’이라는 단어를 썼고 ‘휘글링(hyggling)’이라는 표현도 썼다.

대관령 양떼목장에서 바라본 강원도의 겨울 풍경. 경향신문 자료사진

마침 전 세계적인 연구 대상이 된 덴마크인들의 ‘휘게 라이프(Hygge Life)’에 나 또한 지대한 관심을 품고 있을 때였다. 냉소적으로 빈정대기 좋아하는 영국인들이 이제 막 대학생들에게 ‘휘게’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가디언 표현에 의하면 ‘휘게 혁명이 로마제국보다 더 빨리 세계를 점령하고 있다’는데 내 어찌 ‘휘게’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혹시나 평창올림픽을 치러야 하는 강원도가 보다 매력적인 겨울 여행지가 되기 위해서 적용할 만한 것들이 있을까 싶어서 냉큼 읽어 봤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손꼽히는 나라 덴마크에서 ‘행복의 비밀’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쓴 <휘게 라이프(Hygge Life)>라는 책을. 오, 다행히도 밑줄 긋고 싶은 내용이 너무도 많았다. 예컨대 강원도에서 식당이나 카페, 숙박업을 하는 사람들이 주목해야 할 이런 내용들.

“<론니 플래닛>에 소개되어 있듯이, 덴마크 사람들은 아늑한 분위기에 목숨을 건다. (…) 가격, 상품, 판촉활동 등은 다 잠꼬대일 뿐, 덴마크에서 장사의 승패를 가름하는 것은 오직 휘게뿐이다.”

아 그런가? 그렇다면 ‘휘게’란 무엇인가? 어떻게 ‘휘게’할 수 있는가? ‘higge’는 ‘웰빙’을 뜻하는 노르웨이어 단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 어원에서 시작하면 너무 광범위하니 영어로 접근해 보자. 번역하면 ‘코지니스(cosiness)’다. 안락함, 특히나 소박하게 운치 있는 안락함. 예컨대 벽난로 같은….

실제로 벽난로는 휘게다. 그 말은 휘게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바로 ‘벽난로’라는 얘기다. 생활인으로서 하는 말이지만 난로는 매우 강원도스러운 아이템이다. 거실을 근사하게 꾸미기 위한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라 살기 위해, 혹은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해 난로를 사용하는 가정이 강원도엔 매우 많다. 벽난로가 사치스럽게 느껴진다면 장작난로라고 해도 상관없다. 화려할수록 덜 휘겔리하다고 하였으니 좀 더 검박하게 아궁이에 불을 때는 구들난방장치도 좋다. 

중요한 건 눈앞에서 장작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작은 불똥을 튀기며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특유의 나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거다. 장작불이 만드는 그 특유의 시청각 안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돌연 느긋해진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파자마 같은 편한 옷을 입고 그 불빛을 보고 있는 사람들끼리 강한 유대감마저 생긴다.

덴마크에서 ‘휘게 라이프’를 위해 벽난로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애용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양초다. 촛불이라면 우리에게도 너무도 의미심장한 무기가 아닌가? 평화롭게 혁명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무기. 물론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내겐 너무 소중한 사업장 혹은 집을 전소시킬 위험이 있으니까.

그 때문에 나는 보다 휘겔리한 장소 꾸미기를 위해서 집안 구석구석 작은 램프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조명기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덴마크 사람들처럼 폴 헤닝센의 고급한 램프를 구입할 수도 있지만 그 밖에도 선택의 폭이 무지 많다. 여전히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트렌드의 중심에 있는 ‘북유럽 디자인’이라는 검색어만 넣으면 인터넷에 부담 없는 가격의 멋진 조명기구가 얼마나 많은지 말도 못한다.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형광등을 주광색에서 전등색으로 바꾸기만 해도 달라진다. 집안 전체가 금세 휘겔리해진다. 진짜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조도를 낮추어야 한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덴마크인들의 행복의 원천 ‘휘게’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특히 평창 동계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강원도 안에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하얗게 눈이 내린 산과 들, 깨끗한 산 공기, 맑은 물. 마음 편하게 어울리는 이들이 함께 스키나 썰매를 타고 통나무집에 머물며 바비큐 파티를 하고 늦은 밤 장작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면 그게 바로 최상의 ‘휘게’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원도가 좀 더 휘겔리해지려면 바꾸어야 할 것이 많다. 먼저 삶의 공간을 구석구석 누추하게 명명백백 밝혀주는 주광색 형광등을 떼어내자. 조도를 낮출수록, 빛의 웅덩이가 구석구석 많아질수록 휘겔리해진다. 양철 깡통이라도 좋으니 보다 많은 장작난로를 설치하자. 의자 위에 따뜻해 보이는 담요를 걸쳐두자. 평창올림픽시장 옆 빵집 ‘브레드 메밀’이 그러하듯이 갓 구운 빵 냄새를 풍기자. 강원도의 산과 나무를 연상시키는 소박하고 단순한 나무 가구를 공간 안에 들이자. 하다 못해 산에서 잔가지나 솔방울을 주워다 놓자. 

무엇보다 보기 싫은 ‘스뎅’ 밥그릇이나 플라스틱 그릇을 내다버리고 먹고 마시는 일에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는 도자기 제품을 쓰자. 그 모든 것이 생각처럼 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다. 결단코.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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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할 때마다 이재명을 찾아보거나 듣는다. 그게 요즘 내 취미가 됐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최대 수혜자로 떠오른 이재명의 ‘핵사이다’ 발언. 유튜브에 많고 많은 것 중에 하나를 골라 보거나 듣고 있으면 역시나 가슴이 뻥 뚫린다. 국가를 철저하게 모독하고 국민을 개·돼지로 우롱한 자들이 아무리 뻔뻔한 거짓말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도,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청문회와 국회가 아무리 지지부진 시들해 보여도 이재명을 통해 보면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된다.

예컨대 “돌 맞아도 할 얘긴 해야겠습니다”라는 부제와 함께 올라온 이재명의 경북 구미 거리강연 동영상을 한 번 보시라. 이 모든 것이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박정희 때문이라는 뼈아픈 자각 속에서 이제 정말 그를 떠나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게 된다. 이재명은 어마어마한 박정희 동상이 세워진 도시 구미에서 감히 이렇게 말한다.

“시민들의 피 같은 세금으로 산 사람도 살기 힘든데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꺼내 기념하는데 그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사실은 박정희 덕이 아니라, 그 당시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전략적으로 한국의 경제를 키워준 것인데 그 많은 돈을 박정희 기념사업에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 돈이면 성남시 같은 복지를 무려 10년 동안이나 할 수 있는 돈인데 말입니다.”

불과 몇 달 전 유튜브를 통해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볼 때만 해도 몰랐다. 유력한 대선 후보가 박정희의 고향에 가서 박정희 신화를 정면으로 짓밟는 얘기를 감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할 수 있을 줄은….

다행히도 내게는 기회가 있었다. 수구 기득권 세력이 지배하는 언론이 아무리 방해해도 <백년전쟁>과 ‘프레이저’ 보고서에 실린 박정희의 진실을 엿볼 수 있는 기회.

‘미국과 한국 관계’를 조사하던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1978년 발행한 ‘프레이저 보고서’에 의하면 박정희는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뇌물로 관계자를 매수하고, 각종 이권사업을 기업들에 나눠주는 대가로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스위스은행으로 보내고, 미국의 파격적 지원과 지도에 의한 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을 자신의 공으로 돌린 ‘뱀’ 같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스네이크 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미국 의회가 발행한 보고서에 그렇게 적혀 있어도 우리는 그런 얘기를 공공연하게 할 수 없었다. ‘유사 박정희’인 이명박이 집권하고 뒤이어 ‘진짜 박정희 유전자’인 박근혜마저 집권한, 놀랍도록 잘 속는 나라의 국민이었으니까. 그런데 박정희의 유산이며 비극인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고 우리는 시원스럽게도 이렇게 외치는 정치인을 갖게 됐다.

“법과 안보를 지키려고 하는 보수를 존중하되 그 속에 숨어 있는 강도, 깡패, 사기꾼, 도둑들을 잡아서 감방에 보냅시다. 매국, 친일, 독재, 부패로 기세등등한 세력을 이제 작살을 냅시다. 이거 안 하니까 정의가 없고 희망이 없는 겁니다. 부당한 세력이 기득권이 되어 이 사회 구성원의 기회를 다 뺏으니까. 바로 지금이 최대의 기회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염원했지만 한 번도 이룩하지 못한 나라,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과 복지가 살아 있는 진정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 대한민국을 이제라도 바로 세우기 위한 기회! 그 기회를 위해 끝까지 함께합시다, 구미 시민 여러분!”

예전의 나는 참 어리석었다.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무조건 선을 그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연인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같은 고속 성장을 위해 박정희 같은 독재가 필요악이었다”고 믿고 있던 그 남자에게 소리쳤다. “위대한 아버지 수령님 덕분에 고깃국에 쌀밥을 먹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자신이 세뇌당한 줄도 모르는 불쌍한 북한 주민처럼?” 이재명을 알고 나서 그랬던 나 자신을 반성할 수 있게 됐다. 성남시 복지를 방해하려는 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하던 이재명 시장의 발언 덕이었다.

“상대방에게 판단을 요구하면 안됩니다. 이런 판단을 해라, 저런 판단을 해라, 나를 지지하라, 저쪽을 비판해라. 그런 건 무의미합니다. 판단을 요구하는 순간에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대신 정보를 전달해 주면 됩니다. 그럼 스스로 판단하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그냥 전달만 해 주면 된다는 얘기 아닌가? 시원한 ‘핵사이다 이재명’을 누군가에게 전달만 하면 된다. 그냥 손가락 하나로. 톡~. “어머 아직 박정희 좋아하세요? 그럼 이거 한 번 보세요. 톡~.” 그럼 얼굴 붉히며 싸울 필요가 없다. 적이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동지가 될 수도 있다. 헌법을 수호하는 진정 공정하고 평화롭고 희망찬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유형으로든 무형으로든 ‘촛불’을 들고 ‘정보’를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오랫동안 염원했지만 너무도 멀게만 느껴진 그 꿈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가뿐하고 분명하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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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실상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대중음악인이 웬 문학상, 그것도 천하의 노벨 문학상을?” 하고 놀랄 법도 한데 놀라기는커녕 “음, 언젠가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말았다. 스웨덴 한림원이 노렸듯이 논란을 일으킬 만한 파격은 파격이되, 아는 사람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다소 ‘뻔한 파격’이었다고 할까?

내가 아는바 미국에는 일찍이 ‘딜런학(Dylanology)’이라는 학문이 있었다. 이 학문은 1960년대 전성기를 누린 ‘밥 딜런’이라는 뮤지션의 가사와 철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보다 지적으로 ‘으쓱’하고픈 대중문화인, 혹은 대중문화 애호가를 위한 것이며 그쪽 방면에서 밥벌이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 같은 것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밥 딜런은 실제로 대학의 정식 커리큘럼으로 등장한 최초의 대중음악인이었으며, 그를 존 업다이크나 셰익스피어에 비견하며 노벨 문학상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일찍부터 진지하게 검토됐다.

물론 그건 ‘세상을 바꾼 가장 뛰어난 대중문화 1위’라는 거창하기 짝이 없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만큼 밥 딜런의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이 엄청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쓴 가사가 마치 무슨 프랑스 상징주의 시처럼 매우 그럴듯하게 난해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밥 딜런을 좋아한다고 하면 그냥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를 좋아하는 범인의 취향 그 이상의 무엇, 보다 심오하고 지적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밥 딜런을 유독 대단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한편 그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준비한 2016년 노벨상 수상 축하연은 물론 시상식조차 불참한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생각했다. 게다가 다른 심각한 이유가 아니라 단지 ‘선약’ 때문이라니 얼마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시원한 대답인가? 역시 밥 딜런이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밥 딜런다운 것인가? 내가 아는 밥 딜런은 나 자신을 속박하는 타인의 기대를 가차 없이 걷어차는 인물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 대상이 가족이었던 십대부터. 예술을 정신적 타락으로 치부하는 유대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시집을 읽고 노래를 부르다 못해 아예 아버지를 갈아 치운 인물이라고 할까? 실제로 좋아하던 시인 토머스 딜런의 성을 따서 이름을 ‘로버트 짐머먼’에서 밥 딜런으로 바꾸는가 하면, 우디 거슬리라는 포크 가수를 좋아해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고백이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에 써 있다.

‘노래하는 저항 시인’으로 추앙받기 시작하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중을 위한 저항 시인으로 살았던 건 아주 잠깐뿐이었고, 그 이후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가두는 그와 같은 수식어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저항’이라기보다는 ‘배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1965년 5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무대가 그 정점이었다. 밥 딜런은 느닷없이 통기타를 버리고 처음으로 전기기타를 들고나와 야유하는 관객들을 향해 ‘나는 너희 거짓말쟁이들을 믿지 않는다’며 악기를 부술 듯이 연주하고 공연을 끝까지 마쳤다. 나는 진정 반했다. 밥 딜런이라는 예술적인 반항아에게. 한마디로 그는 한바탕의 소란과 배신으로 신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건 지금도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밥 딜런을 잘 담아낸 영화가 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이 만든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다. 자신이 흠모하는 문화적 취향을 향해 계속 변화하고 변형하는 존재, 하나의 밥 딜런을 죽이고 다른 밥 딜런으로서 새 삶을 사는 존재인 그에게 집중하는 영화답게 ‘당신이 생각하는 밥 딜런은 거기 없다’는 뜻의 제목이 달렸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노벨 문학상 그까짓 것 주면 받겠지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밥 딜런의 문학적 재능이나 성취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는 바이런과 셸리와 롱펠로와 에드거 앨런 포와 랭보의 시를 사랑한 청년이었다. 그 덕분에 노래하는 훌륭한 시인이 되었다. 그의 노랫말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소설보다 혹은 랭보의 시보다 못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예컨대 굳이 지적인 해석이 필요 없고 그저 글자 그대로 느껴지는 정서만으로 멜로디와 함께 지상의 그 어떤 시보다 더 멀리 공명하는 이런 노랫말들.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기분이 어때/ 집 없이 사는 것이/ 알아주는 사람 없이/ 구르는 돌처럼 사는 것이?”

밥 딜런에게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안긴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바람만이 그 대답을 알지(Blowing in the wind)’와 ‘구르는 돌같이(Like a rolling stone)’의 후렴 가사다. 문득 그의 노래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사는 우리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밤이다. ‘저녁의 제국이 모래로 돌아가버렸음’을 우리 모두가 누누이 전하고 있건만 비몽사몽 약에 취해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도 밥 딜런을 보내고 싶은 밤이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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