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우리가 만나는 곳. 단연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을 오랜만에 펼쳐 본다.

작가 그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화자 존이 리스본에서 늙은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 그 어머니는 이미 수년 전 돌아가신 분이다. 죽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망자와 만나는 그 장소에서 어머니는 존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화를 전망대의 승강기와 비교하며) 그런데 영화도 똑같은 것 같아, 존. 우리를 올렸다가 같은 자리에 다시 내려놓으니까. 그것도 사람들이 영화관에서 우는 이유 중 하나란다.”

지난 일요일 오전 영화관에 갔다. <귀향>을 보기 위해 갔다. 예전 같으면 서울이나 가야 볼 수 있는 화제의 저예산 독립영화. 근래 군 소재지마다 작은 영화관이 생겼는지 인터넷 검색창에 ‘귀향’을 치니 우리집에서 가까운 영화관이 무려 3곳이나 떴다. 평창시네마, 영월시네마, 제천시네마….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작은 시골 영화관에서 <귀향> 같은 귀한 영화를 볼 수 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난 이미 너무도 고무되어 승강기를 타고 에펠탑 위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마을마다 있는 복지회관을 리모델링했는지 1층은 웨딩홀이고, 2층은 영화관인 곳에 왔다. 평창군민으로서 평창군에 처음 생긴 영화관에 와서 그런지 영화관의 모든 것이 ‘리본 달린 일요일의 선물 상자’인 듯 사랑스럽다. 심지어 상영관이 2개고, 상영작이 무려 3개나 됐다. 팝콘을 산 할머니가 영감님 손을 잡고 <동주> 포스터 앞에 앉아 있다가 우리와 함께 <귀향> 상영관을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그 장소에 놓인 그 모든 상황이 그렇게 천국인 듯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내 영화가 시작되고 나는 꽃다운 처녀들이 겪는 끔찍한 지옥을 맛보고 말았다. 울었다.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열다섯, 혹은 열넷, 나비를 쫓던 순진무구한 처녀들이 짐승 같은 남자들에게 끝없이 끝없이 찢기고 밟히고 채찍질 당하다 이내 버려지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울지 않을 수 있는 강심장은 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행히도 아름다웠다. 참담한 아픔을 다룬다 해도 꽃다운 처녀들의 이야기이기에 감독은 그리도 아름다운 영상에 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남의 지옥불을 구경하는 관람자가 그렇듯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았다.

마치 살풀이하듯, 눈물과 통곡으로 토해내면 설움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얽매였던 마음도 풀리고 몸도 편해지는 식의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아버지가 열네살이나 먹은 딸아이를 지게에 태우고 덩실덩실 춤을 출 만큼 귀하게 자란 주인공 말고도 더 많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 땅에 있었을 테니까. 이미 돌아가셨든 아직 살아 계시든.

그 때문에 얼마 전 사이행성이라는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25년간의 수요일>이라는 책을 급하게 주문해서 읽었다. 그 안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가슴 뭉클하고 심지어 미소짓게 하는 희망의 이야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할머니들은 영화에서처럼 한때 아름다웠지만 전쟁의 폭력으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해진 여자가 아니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후,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어온 수요시위를 통해 어느덧 평화를 위한 투사이며 인권운동가가 된 할머니들의 이야기. 예컨대 이용수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용기 있을뿐더러 더없이 멋있고 사랑스러운 여자들이구나 생각했다.

“저는 이제 여러분의 힘을 받아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우리 후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저는 결사적으로 싸울 겁니다. 저는 아직 나이 젊습니다. 나이 88세 뭐 그리 많습니까? 활동하기 딱 좋은 나이입니다.” 멋있지 않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어느 여성인권운동가가 한 말이라고 해도 난 믿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아직도 진심어린 사죄를 하지 않은 가운데 세상을 떠나는 할머니들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47명이 생존해 있는 걸로 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말자. 그까짓 것 ‘10억엔 합의’에도 체념하지 말자. 88세에 비하면 우린 얼마나 새파랗게 젊은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탄생이다. “죽은 후에, 손상된 것들을 고칠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존 버거의 메시지가 그러하듯.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라고 했던….

<귀향>을 봤다면 이젠 <25년간의 수요일>을 기꺼이 사서 읽자. -인세가 전 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나비기금에 기부된다- 그러고 난 다음 수요시위에 나가 할머니들의 손을 잡아 드리자.

폐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던 강덕경 할머니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내가 아프다고 이렇게 쓰러져 있으면 일본은 내가 포기한 줄 알 거야. 가야겠어”라고 말하며 함박웃음으로 달려갔던 곳.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시위 공간. 평화와 희망이 나비처럼 날아드는 곳. 거기, 우리가 만나는 곳.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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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게 지내던 사이도 아닌데, 사실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데…, 문득문득 말을 건네고 싶은 친구가 있다. “잘 지내고 있죠? 어디서든 씩씩하게,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그러다 문득 걱정이 되어 그의 최신 안부를 찾아 인터넷을 뒤적인다. ‘김예슬 선언, 그 이후’라고 검색어를 넣고 이것저것 클릭해서 읽다가 다음 문장을 발견하고는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고려대 정문 앞에서 ‘대학 거부 선언’ 1인 시위를 벌였던 김예슬. 그는 현재 비영리 사회단체 ‘나눔문화’ 연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 <용기 있는 작은 돌멩이들의 외침, 김예슬 선언> 7쇄 인쇄 중.”

기쁜 일이다. 처음엔 너무도 뜨거웠지만 금방 잊혀질까 봐 걱정했더랬다. 나도 그 책을 읽었으니까.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선언 아래 담긴 스물다섯 살 여대생의 글들이 얼마나 칼날같이 예리하게 메아리치던지 한동안 가슴이 아픈 가운데 어디선가 둥둥둥 북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 ‘친구들을 넘어뜨리고 제치며 기뻐하는 우수한 경주마’로 살았다고 고백한 그녀였다. 그랬을 거다. 이름하여 SKY에, 그것도 최고 인기학과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그녀가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 구도 앞에서 ‘이제 아무리 스스로를 채찍질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며 기업을 위한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피 끓는 청춘답게 되바라진 용기를 봤나? 책 속에서만 본, 진정 젊은이다운 용기였다.

예컨대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나 체벌이 일상화된 교육현장에 염증을 느끼고 곧바로 그만둔 젊은 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야기…. 미국 정부가 흑인 노예제도와 영토 확장을 위해 멕시코 전쟁까지 일으켰다는 이유로 세금 내기를 거부했던 그가 아닌가? 그 때문에 감옥에 갔고 감옥에서 나와 <시민불복종> 선언을 썼던 그다.




난 김예슬 선언이 소로의 책처럼 우리 시대의 혁명적 고전이 되어 두고두고 읽히길 바랐다. 그래서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그 작은 책을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책을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조카에게 보내는 선물 봉투에 편지와 함께 넣어 보냈다.

너무 빠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조카 경서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미 자기만의 비전을 가지고 사업을 구상하여 그것을 실행에 옮긴 매우 신기한 아이가 아니던가? 처음엔 무슨 아이돌 밴드를 좀 과하게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초등학생이 팬 페이지를 만들어 관리하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자신과 같은 또래 팬들이 주문하는 스티커 상품까지 만들어 팔았다. 그 일 때문에 초등학생이 새벽까지 코피를 쏟으며 철야 작업을 하고 심지어 동생에게 아르바이트를 시킨다는 말을 듣고 처음엔 웃었다. 그러자 바쁜 언니를 돕고 있는 그 여동생이 이렇게 말했다.

“고모, 웃지 마세요. 언니는 나름 심각해요. 처음엔 아빠 혼자 너무 고생하신다고 자기도 돈을 벌어서 보탬이 되겠다고 시작한 거예요. 근데 벌써 1년째 주문이 계속 밀려 있어서 이제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대요. 고객과의 약속 때문에….”

그랬던 아이다. 각종 상하수도 설비는 기본이고 전기 공사, 방수 공사, 겨울철 동파 해결, 막힌 변기 뚫기 등 집수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존경스러울 정도로 성심껏 다루는 아빠를 사랑해서 밤이면 그 아빠의 발을 닦아주던 아이. 생긴 건 또 얼마나 예쁜지 배우 고현정의 어린 시절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아니다. 솔직히 대충 해도 잘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얼마 전 이렇게 선언하더란다.

“나 대학 안 갈래. 그거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대학 가야 훌륭하고 안 간다고 안 훌륭해지는 거 아니잖아. 아빠도 대학 안 나왔지만 훌륭하잖아. 대학 갈 돈으로 일찍 내 사업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그 돈으로 가족 여행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리하여 지금 그 가족이 장인과 장모, 처제에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지금 제주도에 있다. 제주도에서 내가 쓴 편지와 김예슬의 책을 다 같이 돌려 읽으며 회의 중일 것이다. 대학에 안 가겠다는 딸의 선언을 벌써부터 지지하고 응원하는 철부지 고모의 편지와 책을 본인에게 과연 줘도 될지, 안 될지.

우리 엄마 말이 그렇다. “너는 대학 나왔기 때문에 결코 알 수 없는 게 있어. 대학으로 신분을 가르는 이 한국 사회에서는.” 맞는 말이다. 따라서 난 내 편지와 김예슬의 책이 조카에게 전달되지 않아도 결코 속상해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늘 응원할 듯하다. 자기 생각과 의지가 분명한 내 조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심과 보호 아래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삶을 살든. 다만 김예슬과 그의 어린 후예들에게 전한다.

인간다운 삶의 빛을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당신은 이미 누구보다 강하다고. 처음에는 이런저런 그늘 아래 있겠지만, 그게 필수일 터이지만 결국 그 빛을 찾게 될 거라고. 당신을 당신만의 별로 인도하는 용기의 빛. 그러니 모두 힘을 내어 전진하자고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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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다닐 때 내 별명 중 하나는 ‘택배의 여왕’이었다. 마트 갈 시간이 없어 별의별 물건들을 다 인터넷으로 샀는데 집에서 택배 받을 사람이 없어서 주로 회사로 배달시켰다. 그런데 도시와 달리 엄청나게 한가한 시간에 놓인 공간으로 이사와서도 난 여전히 택배의 여왕으로 산다.

시골에는 없는 게 많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유리컵 몇 개, 혹은 쟁반 하나 사려고 원주까지 나가곤 했다. 왕복 두 시간 거리. 그 기름값이면 유리컵을 20개 더 사고도 남는다. 그래서 요즘은 뭐든지 다 인터넷으로 시킨다.

전경린 소설이었을 거다. 이웃의 쓰레기봉투를 뒤져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보를 캐내는 인물이 나왔던 소설인데, 그 소설집 제목이 <염소를 모는 여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매일매일의 영수증 일기 같은 걸 써서 그걸 책으로 묶어 낸 정신이라는 여자 작가도 있었다. 내가 산 물건이 나를 규정하고 내 삶의 공간을 구성하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재밌다. 내가 주문한 택배 물건들을 배달해주면서 택배 아저씨들은 나를 어떤 여자라고 생각할까?

“여자들이 보통 옷이나 화장품 같은 걸 배달시키잖아요. 그런데 이 여자는 현무암 돌덩이 한 팰릿을 시키더니 얼마 전에는 거지 발싸개 같은 중고 마루를 시켰더라고. 도대체 뭐하는 여자인지….”(경동 택배 아저씨) “황토는 그렇다 쳐. 석고랑 석회, 아마인유 같은 건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주문하는 건지 알 수가 없죠.”(한진 택배 아저씨) “그 여자, 말도 마세요. 얼마 전에는 대패 삼겹살이랑 족발을 시켜 먹던 걸요. 좀 게으른 여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CJ 택배 아저씨)

변명하자면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요즘은 라면, 쌀, 휴지, 세제 등 생필품들을 인터넷으로 구입하는 게 대세다. 대형 마트보다 싸고 선택의 폭이 넓을뿐더러 시간이 절약되기 때문이다. 인테리어 건축 자재처럼 덩치가 큰 물건은 물론 세탁기 거름망이나 똑딱단추처럼 작고 소소해서 어디서도 팔지 않는 걸 구입할 때도 인터넷만큼 요긴한 것은 없다. 심지어 고기나 야채처럼 신선도가 생명인 식품도 인터넷으로 구입하니 만족도가 의외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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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에서 살다 보니 가장 아쉬운 게 싱싱한 바다 먹거리들이다. 혹시 그것도 인터넷으로 살 수 있을까? 살 수 있다. 신안군 군수님이 직접 나서서 육질이 탱탱한 최상급 완도 광어와 전복을 전국 어디든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광고하는 시대니까. 하지만 온갖 물건을 인터넷과 택배로 구입하는 내가 꼽는 베스트 아이템은 따로 있다. 중고 오디오 기기들. 예전 같으면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팔았을 것 같은 옛날 오디오 기기들을 오디오 애호가들의 사랑방 같은 온라인 장터에서 샀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막상 받고 보니 감동이 밀려든다. 그다지 고가도 아닌 것을 얼마나 꼼꼼하게 포장해서 보내주는지 목이 메인다. 가격에 대비해 얼마나 훌륭한 기기들을 보내주는지 소리를 들으며 감동한다. 음악을, 소리의 작은 차이를 중요시하는 오디오쟁이들의 그 섬세한 열정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할까?

하지만 진심으로 덧붙이건대 나는 사실 인터넷 쇼핑 못지않게 시골 5일장도 좋아한다. 5일장을 도는 장돌뱅이 상인들이 익숙한 솜씨로 좌판을 펼치고, 인근 마을에서 보퉁이를 이고 지고 찾아온 할머니들이 갓 캔 푸성귀들을 펼치며 하나둘씩 자리를 잡는 곳. 산 오징어가 수족관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꿈틀대는 참문어가 즉석에서 삶아지기도 하는 곳. 그곳에 가면 늘 마음이 설렌다. 얼마나 좋은가? 사람 냄새 맡으며 북유럽 디자인이 아쉬울 것 없는 두툼한 덧버선을 4000원에 살 수 있고 들기름에 막 구워낸 김을 5000원에 3봉 살 수 있다는 게? 튀겨 먹고 구워 먹고 파스타에 넣어 먹기도 좋은 통통한 새우가 20마리에 1만원인 곳.

“지금까지 당신이 먹은 음식을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는 프랑스의 저명한 미식가가 있었다. 글쎄,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사랑하는 음악과 책, 그리고 구입하거나 만든 물건들로 채워진 삶의 공간을 보여주면 당신의 머리와 가슴 속을 그려볼 수 있다”고. 내가 만들고 있는 이 공간이 그런 곳이길 바란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로운 공존 속에서 주인장이 애장하는 사물들의 가치가 구석구석 느껴지는 곳. 아는 사람만 아는 그 공간의 개봉박두 신호를 조심스럽게 보낸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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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내리던 눈이 그쳤다. 삽 말고는 별다른 제설 장비가 없으니 별수 있나? 우리 손으로 마을 입구까지 눈을 치운다. 그렇지 않으면 한 걸음에 갈 수 있는 삼거리 매점도 왕복 두 시간을 걸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며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이웃집에 마실 가다가 자동차가 빙판에서 돌았다. 잘못하면 전복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기일발의 상황. 긴급출동 구난서비스를 불렀다. 불러 놓고 이웃집에 가서 삽을 빌려다가 얼음을 퍼냈다. 1시간30분 동안이나 얼음을 퍼내어 밭두렁에 버렸다. 빙판 위에서라면 ‘구난차’가 아니라 ‘구난차 할아버지’가 와도 소용없을 테니까.

퍼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독일에서는 벚꽃이 피었고, 러시아와 북유럽에서는 눈과 얼음이 거의 녹아내렸다는데, 우리 동네 겨울은 왜 아직 추운 거지?” 물론 예년에 비하면 확실히 덜 춥다. 눈도 적게 내렸고.

슈퍼 엘니뇨 현상으로 알프스에도 눈이 없다고 들었다. 눈이 없어서 반팔 차림으로 잔디 스키를 탄다니…. 79년 만에 가장 따뜻한 겨울을 맞아 모스크바에 있는 자연 아이스링크도 문을 못 열었고 핀란드 헬싱키의 겨울도 영상이라니 참 별꼴이다. 폭설 대신 토네이도와 물난리를 겪고 있는 도시들 소식까지 보태지면 우리 동네에 내려진 ‘대설주의보’가 되레 반갑다.물론 강원도도 나름대로 이상고온 현상을 겪고 있다. 기상 관측 이래 평균적으로 가장 높은 기온 속에서 빙어축제, 고드름축제 등 강원도의 겨울축제들이 취소됐고 스키장도 눈 부족으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도 비밀리에 비상 대책을 수립했다. 2018년 겨울을 위해 소치 때처럼 눈을 특수 단열재로 냉동시킨 후 재활용하는 ‘눈 저장 프로젝트’를 시행할 방침이라고. 걱정이다. 가뜩이나 돈이 없어 울상인 조직위가 눈 저장을 위한 추가 비용을 또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지금부터라도 집집마다 ‘금’을 모으듯 ‘눈’을 모아 김치냉장고에 보관했다가 평창올림픽조직위에 가져다 주어야 할까?


미 항공우주국(NASA)이 슈퍼 엘니뇨가 강타한 1997년 12월28일 지구와 올해 12월27일 위성으로 찍은 지구 모습_연합뉴스


프랑스 기상학자 다니엘 괴츠는 “앞으로 겨울철에 눈을 보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며 “미래에는 눈 내린 슬로프를 제공하기가 힘들겠다”고 말했다. 스웨덴 기상청은 “눈이 오는 날 수가 금세기 말쯤에는 최소 40일, 최대 80일이 줄어들 것”이라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눈’이 ‘금’이 되겠구나 싶다. 운이 좋아야 1년에 한두 번 눈 오는 풍경을 볼 수 있고, 운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눈을 모르고 산다고 생각하니 삭막하기 그지없다. 그런 우울한 미래를 생각하니 눈이 펑펑 내리다 못해 재난처럼 느껴지는 겨울 영화들이 문득 보고 싶다. 눈 덮인 평원이 한없이 펼쳐지는 <닥터 지바고>나 <러브 스토리> 같은 영화들. 유리 지바고와 그의 부인 토냐의 가족이 모스크바를 떠나 지방 영지로 향하는 겨울철 기차 여행은 전부 캐나다에서 찍은 걸로 안다. 그곳에는 아직 눈이 올까? 곱슬머리 남자와 털모자를 쓴 여자가 눈싸움하다가 눈을 막 퍼먹고는 웃음을 터뜨리는 <러브 스토리>의 로케이션 장소가 어디였더라? 뉴욕의 센트럴파크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언감생심, 20도가 넘는 영상 기온 속에서 반팔 입고 다닌다는 뉴욕 말이다.

아니다. 쓰고 보니 왠지 진부하다. 그보다는 스웨덴판 <렛미인> 같은 영화가 좋겠다. <렛미인>은 내가 사랑한 거의 유일한 공포영화였다. 호러영화도 이토록 그림처럼 아름답고 또 한 편의 시처럼 서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정도. 무엇보다 눈에 파묻힌 스웨덴의 겨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의 고요와 침묵이 좋았다. 인공적인 요소를 가미하지 않은 아날로그적인 소리와 침묵을 통해 세상의 온갖 소음에 묻혀버린 미세한 소리를 끌어들이고자 했던 감독의 연출력이 너무도 예술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이제 스웨덴에서조차 <렛미인>에서 보았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겨울 풍경을 볼 수 없게 됐다니 슬프다. 이제 눈이 내리면 ‘스밀라’처럼 느껴보리라. ‘눈이 내려앉은 하얀 들판’이 정말로 ‘어둠 속에서 육각형’을 이루는지 뚫어지게 봐야지. 마치 기적을 보듯.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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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 토머스의 시를 사랑한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고 노래하는 시다.

밥 딜런이 자신의 예술적 아버지로 삼을 정도로 사랑했던 시인 딜런 토머스가 1951년, 임종을 앞둔 부친을 위해 썼던 시다. 시인이 처한 그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 때문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꺼져감에 분노하라고 노래하는 격렬한 시정 때문일까?

나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에서 종종 자살하는 친구들 소식을 들어야만 하는 이 땅의 청춘들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그 시를 떠올렸다.

그렇다. 우리는 분노해야만 한다. 젊은 청년들에게 꿈과 미래를 빼앗고 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 나라의 암담한 현실에 대해서 분노해야만 한다.

물론 분노의 방식이 문제이다. 어떻게 분노할 것인가? 목표와 목적이 불분명한 분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폭발하는 분노조절장애나 다름이 없다.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이슬람국가(IS)식 테러도 일종의 분노의 표출일 테니까.

나는 일단 책을 선택했다. ‘한국 자본주의 Ⅱ,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의 불평등’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신작 <왜 분노해야 하는가>다.

장 교수는 먼저 ‘왜’에 방점을 찍는다. ‘재벌 100대 기업이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에 불과한 반면 중소기업은 무려 72%이다. 그런데 중소기업 임금은 대기업의 절반 수준이다. 1980년대 중소기업 임금이 대기업의 90%가 넘는 수준일 정도로 격차가 적었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임금 격차가 점점 확대된 거다. 그뿐인가? 예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런데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은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고용형태(일본과 한국에만 있는)를 만들어 낮은 임금을 지급할뿐더러 임의로 해고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은 고용을 창출하지 않는 초대기업이 순이익을 독차지하고 대다수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됐다.’ 그게 내가 읽은 ‘왜’의 핵심이다.



요즘 유행하는 ‘수저론’은 사실상 핵심을 흐리는 문제인 셈이다. 200년 이상 부를 축적한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지난 30년간의 소득 불평등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거다. 가진 게 별로 없어도 일한 만큼 제대로 분배된다면, 고작 질투심 때문에 자살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거다. 또한 장 교수는 불평등의 원인이 재산의 격차가 아니라 소득의 격차이므로 당연히 그 해법도 기존 논의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복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애초부터 잘못 작동하고 있는 원천적 분배를 두고 사후에 교정하는 재분배만으로는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맞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개봉한 노르웨이 영화 <사라짐의 순서: 지옥행 제설차>에서 듣고 한참을 웃은 대사가 생각난다.

“복지? 그런 건 노르웨이처럼 추운 나라에서 필요한 거고.” 우리나라처럼 애초부터 잘못 분배되고 있는 곳에서는 잘못된 걸 고치는 게 먼저인 거다.

좀 더 정확히 가계에 노동소득으로 분배되어야 할 몫을 재벌 대기업이 분배하지 않고 자기 곳간에 쌓아두고, 중소기업에 돌아가야 할 이익을 재벌 대기업이 차지하는 고용구조와 기업구조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복지 예산을 늘리는 재분배 확대만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말인가? 그게 이 책의 두 번째 방점이다. 재벌 대기업이 탐욕에 눈이 멀어 앞장서서 불평등한 나라를 만들었고 기성세대는 그걸 방치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맡겨두면 이 세상은 더욱더 암담해질 것이다. 미안하지만 청년세대가 나서야 한다는 게 장 교수의 결론이다. 다행스럽게도 장 교수가 청년 세대에게 제안하는 실천적 방안은 매우 구체적이다.

예컨대 인턴이나 비정규직 제도, 알바 최저임금, 주거비, 학력 차별처럼 20대가 ‘잉여’가 되고 30대가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가 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을 제기하여 사회적 이슈로 만들고, 자기 세대의 이익을 대표하는 시민단체 혹은 조직적 연대와 함께 기업과 정당을 압박하여 불평등이 개선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

장 교수는 단언한다. 한국 정치가 아무리 혐오스러워도 결국은 정치라고. ‘청년세대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 참여가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다. 그런 시시한 위안에 침을 뱉어야 한다.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해야 한다. 스스로 잘못된 세상을 고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청년들의 표를 얻고 싶은 정치인들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 그게 청춘이고 희망이라는 확신으로 장하성 교수의 책을 2권, 3권, 10권, 100권 사서 이 땅의 젊은이에게 강권하리라.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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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내가 사는 강원도 산간 지방에 올해 들어 첫눈이 왔다. 밖에 나가보니 온 세상이 하얗다. 그 모습을 보고 엄마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신다. “올 것이 왔구나. 큰일이다.”

눈이 오면 일이 많아지고 불편하다. 무엇보다 고립되지 않으려면 집집마다 필요한 만큼 알아서 척척 제설작업을 해야 한다. 그건 기본이다. 우리 집 같은 경우 설상가상으로 그 와중에 이사해야 한다. 옆구리 간격만큼 붙어 있는 헌 집에서 새집으로 옮겨 가는 이사라 일일이 우리 손으로 날라야 한다. 눈을 맞으며. 눈길 위를 종종걸음치며 책이며, LP며, 냄비며, 옷가지를 날라야 한다.

어라, 근데 이상하지 않나? 내 맘 속에 눈곱만큼도 걱정이 없다. 심지어 은근히 기대가 된다. 혹시 구들 때문인가? 역시나 구들 생각이 들자 돌연 마음이 훈훈해지고 그 어느 때보다 의기양양해지는 나를 느끼게 된다. 내가 뭘 믿고 그러는지 잘 아는 엄마가 말씀하신다.

“하기사 이제 누가 훔쳐 갈 수도 없는 저 엄청난 보석을 바닥에 깔고 살게 될 터인데 뭐가 걱정이냐? 그 방에 누워 있으니 세상만사 부러운 게 없더라. 머리는 시원하고 몸 안에는 뼛속 깊이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그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진짜 오리지널 토종 불 맛이지.”

미국 건축사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가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제국호텔 설계차 일본에 왔다가 부호 투자자 집에 마련된(사실상 경복궁에서 강탈해서 떼어다 놓은) 조선관에서 하룻밤 묶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온돌방은 푸근하다. 그 방에 들어가자 계절이 바뀌어 버렸다.” 그러면서 이렇게 격찬했다고 한다. “조선의 온돌이야말로 ‘마법의 방’이다.” 그리곤 그 마법을 미국에 돌아가 대중을 위한 주택설계에 적용했다. 조선의 온돌방에서 힌트를 얻어 뜨거운 물을 파이프로 흘려보내는 방식의 바닥 난방 시스템을 최초로 실현했던 인물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였다니, 놀랍고도 재밌다.

프랭크씨라고 해야 할지, 라이트씨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 양반도 확실히 불 맛을 좀 알았던 게 틀림없다.


세계 최초의 온돌마루 열차 코레일 '서해금열차'_경향DB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12년 6월 왕이 경상감사에게 전지를 내려 이씨 형제가 수분할 때 생기는 병을 막기 위해 온돌에 기거하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민간에서도 아이를 낳고는 뜨끈한 아랫목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그러니까 구들은 왕가 사대부부터 민가를 아우르는 우리네 전통 난방 방식이자 질병 치료의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였다는 말이다.

지난봄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잠시 스승으로 모셨던 구들문화원 오홍식 원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구들은 두한족열의 가장 이상적인 건강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난방 시스템일뿐더러 돌과 황토에서 생체 세포에 활력을 주는 원적외선까지 나와서 그 방에 있으면 행복한 기분이 듭니다.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행복 호르몬인 도파민과 엔도르핀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다. 구들만큼 경제적인 난방시스템은 더 이상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축열과 방열을 오랜 시간 유지하는 구들은 전도, 복사, 대류열을 모두 쓸 수 있는 고효율 시스템이죠. 한 번 불을 때면 24시간 정도 난방이 되는 것은 기본이고 필요에 따라서 며칠씩 온기가 식지 않는 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칠불사의 아짜방은 그 온기가 무려 100일이나 갔다고 하죠. 게다가 연료는 주변에 버려진 나무 자재들을 주워다가 때면 됩니다. 화목보일러는 5년, 태양열 시스템은 10년인데 구들은 반영구적이죠.”

‘내 손으로 만드는 황토구들방’ 수업을 들으며 여러 번 전율했다. 이렇게 이상적이고 훌륭한 난방시스템이 우리 고유의 것이라니…. 무엇보다 그 이상적인 적정 기술을 백성 모두가 평등하게 나누어 쓸 수 있다는 점에 감동했다.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유럽에서는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도 온돌을 몰라 벽난로에 장작을 때고 개나 고양이를 끼고 자야 할 정도로 춥게 지낸 반면 우리는 찢어지게 가난한 백성들도 온돌 덕에 추운 줄 모르고 지냈다는 거.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전 인류가 함께 누릴 만한 지복인 거다. 한식의 세계화로 미는 떡볶이 따위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 부부는 무려 두 달 동안이나 침실과 거실을 구들방으로 만드는 일에 온갖 공을 들였다. 다행히 초보 솜씨임에도 불이 잘 들어가고 온기가 제법 오래 유지된다. 다만 아쉬운 건 함께 구들 수업을 들은 동기들과 품앗이하지 못했다는 거다. 온기는 삶의 본질이다. 구들방의 그 천국 같은 온기도 나누면 더 커진다. 구현하기 더 쉬울뿐더러.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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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아파트먼트(L’appartement)라는 이름의 디자인 숍 앞을 지나가는 중이었고 그 쇼윈도에 눈길을 끄는 의자 두 개가 전시돼 있어 걸음을 멈추고 멍청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둘 다 제법 귀티가 나는 낡은 나무 의자인데 한 녀석은 방금 외과의사에게 다리 수술을 받은 듯 네온 그린 컬러의 플라스틱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녀석은 고장 난 엉덩이를 갈아치운 듯 역시 같은 소재의 새로운 엉덩이 받침대를 달고 있었다.

나는 형광색 플라스틱 보철물을 달고 있는 낡은 나무 의자가 뿜어내는 독특한 아우라에 이끌려 숍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 다리에 붙은 꼬리표를 살펴보니 ‘5.5 designer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프랑스의 젊은 디자이너 그룹이 만든 재활용 상품으로 의자 가격은 210유로이고 높이 조절이 가능한 버팀목 다리만은 125유로라고 쓰여 있었다.

“진지하면서도 유머를 아는 아주 괜찮은 친구들이죠.” 그 특별한 아파트먼트를 지키는 젊은 관리인에게 패션지 기자 명함을 내밀자 그가 5.5에 대한 몇 가지 재미난 사실을 알려주었다.

“파리에 있는 ‘ENSAAMA’라는 아트 스쿨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다섯 명의 친구들이 서로 의기투합해서 만든 팀이라 이름을 ‘5.5’라고 지은 모양인데, 그중 한 명이 밴드 뮤지션이 되겠다며 탈퇴했다고 하더군요. 암튼 중요한 건 스스로 ‘사물들의 치료(medicine of objects)’라고 명명한 그들의 디자인 전략인데, 얼마 전에는 ‘병원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바르셀로나까지 왕진을 왔더랬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들은 의사고, 또 환자를 가리지 않는다나요(웃음). 그러니까 부서지거나 고장 난 어떤 사물이라도 좋으니 환자들을 모아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몇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어떤 환자도 “세상 사람들아, 나 수술 받았어. 오늘 구멍 난 엉덩이를 새것으로 갈아치웠다고!”라고 광고할 것 같지 않은데 왜 갈색 나무에 여봐란듯이 튀는 컬러의 플라스틱 소재를 매치시킨 것일까?



“그들 말로는 그게 파리에서는 약국을 상징하는 색이며 소재라고 하더군요.”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싸디싼 플라스틱으로 만든 교체용 의자 다리 하나가 10만원이나 넘어야 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질문에 와타나베 준야의 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셔츠를 입은 아파트먼트 매니저는 당황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하기야 버려진 나뭇조각들을 모아 만든 피트 하인 이크(Piet Hein Eek)의 가구에 비하면 5.5는 비싼 축에도 못 낄 거다. 10여년 전 비록 책을 통해서였지만 피트 하인 이크의 가구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먼저 그 가격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그 가치와 철학에 놀랐다.

원목 그대로의 자연 형태에 충실한 조지 나카시마 혹은 조지 나카시마 풍의 가구가 최고인 줄 알던 때였다. 그런데 쓸모없이 버려진 조각 목재로 이렇게 고급스럽고 아름다우며 또 매우 실용적인 가구를 만들 수 있다니. 게다가 닳고 색이 바랜 나뭇조각들의 이 오묘한 조화라니! 심지어 ‘흠 없이 완전한 것에 대한 갈망에 반대하는 작업’이라니. 그 의도와 철학까지 남다르게 훌륭하지 않은가? 뒤통수와 심장을 함께 두드리는 아주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그렇기에 피트 하인 이크라는 생소한 네덜란드 남자 이름을 기꺼이 외우고 싶었다.

나로서는 5.5와 피트 하인 이크를 통해서 배운 게 너무도 많다. 버려지는 건축물 잔해, 폐목재, 낡고 고장 난 가구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서 재탄생시키면 남부럽지 않은 게 되는 것. 또한 믿을 수 없이 비싼 조지 나카시마 가구나 스칸디나비아 가구보다, ‘좋은 눈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굿 디자인’의 정수라는 것을 배웠달까?

덕분에 요즘 디자인계의 최고 화두라는 ‘업사이클링(up-cycling)’이 내 삶의 일부가 됐다. 상품 가치가 없다고 버려진 배추로 해마다 김장을 하는데 할 때마다 놀란다. “어쩜 어쩜 버려진 배추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작아서 그런가? 아님 못생겨서 그런가? 기형 배추가 더 맛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얼마 전에는 일명 ‘폐교 마루’라는 걸 깔았다. 30년, 40년 전에 초등학생들이 왁스질하며 윤을 냈을 것 같은 마루다. 설마 저런 걸 누가 돈 주고 살까 싶은 너무너무 낡아빠진, 일부는 썩고 너덜거리는 마루를 일부러 돈 주고 구해서 깔았다. 그런데 이렇게 흡족할 수가! 제 눈에 안경이겠지만, 내 눈에는 새것보다 더 고급스럽고 근사해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헤링본 마루가 부럽지 않다. 아니, 폐교 마루를 헤링본 스타일로 시공하면 더욱 근사할 것 같다. 내 스스로 발견하고 구현하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에 오늘도 내 가슴이 뛴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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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턴테이블이라고 할까? 아님 LP의 부활? 여하튼 LP 레코드와 턴테이블이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얼마 전 ‘뉴욕타임스’조차 관련 기사를 낸 걸 보면 그게 전 세계적인 분위기인 듯.

국내에서는 정확히 아이유를 시작으로 에피톤프로젝트, 김동률, 버스커버스커, 인피니트, 혁오, 브라운아이드소울과 나얼 등 젊은 가수들이 제작한 한정판 LP 앨범이 발매되자 10대들까지 LP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고가의 턴테이블 대신 LP 음악을 MP3 파일로 변환하는 기능까지 갖춘 휴대용 LP 플레이어 시장이 커졌고, 홍대와 강남, 이태원 등지의 LP바를 찾는 이들도 요즘 부쩍 많아졌다.

그 때문이겠지만 참 발 빠르다. 지난 5월 이태원에 뮤직라이브러리를 개관한 현대카드 말이다. 록,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LP 음반 1만여장을 보유한 채 방문객 누구나 직접 LP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꾸몄다고 하는데 역시 단박에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는 소식이다.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LP로 음악 듣는 재미에 대해서라면 나도 좀 안다. 무손실이든 고음질이든 여하튼 인터넷에 접속해서 쉽게 듣는 음악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LP판을 뒤적여 한 장 골라내고, 디스크를 꺼내 입으로 먼지를 후-우 불어 날린 후 살며시 트랙에 바늘을 내려놓는 재미. 턴테이블이 회전하고 아슬아슬하게 카트리지가 디스크 위를 스케이팅하면 아날로그 특유의 미세한 잡음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다. 바로 그 순간의 느낌. 뭐라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인 그 느낌.


LK:강렬한 레드 컬러가 돋보이는 CD 플레이어 겸용 턴테이블_경향DB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음원사이트에 접속하면 스트리밍 서비스를 실시간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LP로 음악 듣기란 얼마나 번거롭고 수고스러운가? 듣고 싶은 LP 한 장 골라내는 일조차 쉽지 않다. 게다가 그 한 장 한 장이 다 돈이다. 장르별로, 아티스트별로 잘 엄선된 고음질 음악 파일을 공짜로 수천곡씩 다운로드해 놓고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재생할 수 있는 시대에 LP도 턴테이블도 앰프도 스피커도, 심지어 바늘조차도 너무너무 돈이 많이 든다. 돈뿐 아니라 공간도, 시간도 많이 차지한다. 설사 돈이 많아도 마음의 여유는 물론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호사 취미. 예컨대 스티브 잡스에게나 어울리는 오만한 사치.

그렇다. 스티브 잡스는 디지털 선구자였지만 집에 돌아가면 LP판으로 음악을 듣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닐 영의 지적처럼 디지털로 구현되는 음악이 질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고 난 생각하지 않는다. 공짜로 공유할 수 있는 음악 파일 때문에 음악 산업이 무너졌지만 덕분에 돈 한 푼 없는 사람들도 수준 높은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점에서 음악이 돈 되는 산업에서 인류를 위한 축복으로 기꺼이 내려앉은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잡스는 뿌듯했을 거다. 하지만 아날로그적 소리의 질감, LP판 그 자체의 존재감, 그리고 판을 트는 수고롭지만 우아한 행위의 즐거움 때문에 본인은 집에서 LP를 틀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나저나 소니가 1979년 처음 선을 보였던 워크맨처럼 걸으면서도 들을 수 있는 LP 플레이어가 곧 출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Rocket&Wink라는 디자인 그룹이 만들고 있는 ‘물건’이라 그런지 디자인이 출중하게 복고적이면서도 산뜻하다. 물론 존재감 큰 ‘물건’과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의문이지만….

그보다는 나는 플로팅 레코드(Floating Record)에 베팅하겠다. 일반 플레이어와 달리 LP판을 세로 방향으로 세워서 재생하는 턴테이블이어서 마치 레코드판이 공중부양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인테리어 효과가 굉장하다. 참고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통해 자금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 관심 있는 분은 참여해 보실 것.

돌아온 LP 시대를 맞아 나도 모처럼 사고 싶은 것이 생겼다. 43년 만에 LP로 복각된 조용필의 진정한 데뷔 앨범. 1972년에 발표된 <스테레오 힛트 앨범>이라는 제목으로 무명 밴드에서 활동하다 막 데뷔한 스물두 살의 어리디 어린 조용필을 만날 수 있는 진귀한 앨범이다. LP로 재발매된 김현철 1집과 이소라 1집, 김광석 4집도 사고 싶다. 김광석 4집 LP는 희귀할뿐더러 찾는 사람도 많아서 50만원을 호가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4만원이면 살 수 있게 됐다. 아, 좋구나. 돈은 좀 들겠지만…. 그렇다. LP엔 ‘음악을 통한 시간의 감촉’뿐만 아니라 고고한 ‘돈의 감촉’마저 담겨 있다는 사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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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7월 중 서울을 빠져나간 인구는 101만2000여명. 그 중 22만9010명이 경기와 인천으로 이동했고 그 나머지는 더 멀리 강원도나 충청도(특히 원주와 충주. 제2영동고속도로와 중부내륙철도로 서울과의 접근성이 한 시간 안으로 개선될 예정인 도시), 혹은 경상도나 전라도 등으로 이동한 모양이다. 덕분에 지방의 전원주택을 찾는 인구가 급증한 가운데 부동산 중개인들이 팔고 싶어도 팔 집이 없어서 ‘매물 찾아 삼만리’에 나섰다.

그 때문인지 택배 아저씨들이 ‘오지’라고 꺼리는 이 산동네까지 와서 굳이 명함을 주고 가는 업자들이 부쩍 많아졌다. “집 안 파세요?” “안 판다고 했잖아요. 지난해에도, 올봄에도 물으셨고 그때마다 안 판다고 했는데 굳이 다시 와서 묻는 이유가 있나요?” 따지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자 부동산 중개인이 답했다. “그냥 와 봤어요. 찾는 사람은 많은데 매물이 하도 없어서…. 혹시라도 나중에 집을 파실 계획 있으면 연락 좀 주시라고요.” “네, 그럴게요.”

얼마 전에는 옆 동네에 사는 지인이 집 팔렸다는 소식과 함께 싱싱한 대하 한 보따리를 주며 자랑했다. “직거래라 어제 잔금 치르러 두 부부가 와서는 엄청난 양의 대하까지 선물로 주고 가더라. 중개수수료 없이 2억원에 팔았으니까 우리로서도 가격을 잘 받은 편이거든. 근데 그들한테도 그게 엄청 좋은 가격이었던 모양이야. 팔아줘서 고맙다며 생물 새우까지 사온 걸 보면….” 하기야 그새 너무 개발되긴 했지만 여하튼 자작나무숲 속에 지은 38평 신축 주택이고 심지어 마당과 밭으로 쓸 수 있는 땅이 무려 250평이나 딸려 있는 집이니 서울 살던 사람들은 좋아서 까무라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얼마 전 서울의 ‘미친 전셋값’이 이제 평균 3억원대로 올라섰다는 뉴스를 보고 얼마나 기겁했던가? 폭등한 전세금에 떠밀려 나온 ‘전세난민’도 안됐지만 더 저렴한 월세를 찾아 이동하는 ‘월세 유랑민’들은 더욱더 가련하다.

생각만으로도 앞이 깜깜하다. 도대체 은행 예금의 3배가 넘는 월세를 내고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심지어 그가 아직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한 20대의 비정규직 젊은이라면? 그런 이들에게 서울은 살길을 찾아 스스로를 방출해야만 하는 ‘팻 시티’(fat city·‘더할 수 없이 좋은 상태’라는 뜻과 달리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힘겨운 서민 루저들의 애환을 다룬 동명의 영화가 있다. 1972년 만들어진 존 휴스턴의 숨은 걸작으로 세대를 초월해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다.





그래서일까? 은퇴한 베이비부머와 40~50대 중장년층은 물론 대학을 갓 졸업한 20~30대 청년층의 상당수마저 일찌감치 귀촌에 뜻을 품고 탐색 중인 걸로 안다. 내가 만난 20대 중에는 ‘지상권’만 있는 저렴한 시골집만 알아본다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아가씨였다. 남편은커녕 남자친구도 없는 젊은 처자 몸으로 할아버지 혹은 아저씨들 틈 사이에서 ‘내 손으로 짓는 황토구들방’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너 셰프를 꿈꾸는 20대 후반의 잘생긴 훈남도 있었고, 결혼하면 신혼 생활을 시골집에서 시작하겠다는 젊은 커플도 있었다.

귀농·귀촌에 대한 막연한 로망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시골 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며 오싹할 정도로 마음껏 비웃어주는 마루야마 겐지 같은 작가도 있지만, (심지어 그의 말에 격하게 동감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여전히 ‘시골에 희망이 있다’고 믿고 있는 4년차 귀촌자다.

무엇보다 집값이 싸다. 요즘 무슨 새로운 트렌드라도 되는 양 귀촌 인구가 급속히 늘었다지만 시골엔 매매가 1억원도 안되는 살 만한 주택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발품을 판다면 전세나 월세를 구할 수도 있다.

예컨대 마을 중심가에 위치해 있는, 방 두 개에 주방 딸린 가게가 보증금 500만원에 월 30만원이라니 정말 싸지 않나?

집값과 임대료가 쌀 뿐만 아니라 내가 보기에 시골은 할 일도 많은 곳이다. 물론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도시에서처럼 그저 남들 하는 대로 편안함을 추구하며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시골은 별로 할 일 없고 벌어먹고 살 일은 더더욱 막막한 곳일 뿐이다.

하지만 “할 일이 왜 없어? 너무 많아서 탈이지” 하는 이들도 있다.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진취적으로 움직이며 때로는 혹독한 노동 속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의지가 강한 이들. 그런 이에게 시골은 발굴되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으로 꿈틀대는 일종의 보물섬이다.

세계적 투자가 짐 로저스도 지난해 서울대를 방문해 ‘지금이야말로 농업에 투자할 때’라고 했다. 시골은 그 어느 곳보다 그렇게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이들이 필요한 곳이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식량 부족 시대에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농업과 농촌의 가치를 스스로 재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활짝 열린 기회의 땅. 시골은 그런 곳이 아니며 또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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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뉴스 페이지를 열면 우울한 얘기투성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삼킨 28살 청년 노동자 이야기며, 부자 동네 강남이 세금은 제일 안 낸다는 통계, ‘오류투성이 국정 교과서’ 소식. 거기에 홈플러스 인수전에 뛰어들어 논란이 된 국민연금이 지난해 가장 많이 투자한 주식 종목은 삼성전자라는 뉴스까지 읽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가운데 순식간에 화가 솟구친다.

심지어 220억원을 들여 만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민족문화사전)에 친일부역자들이 독립운동가들로 둔갑해 있더라는 소식까지 더해지니 금방이라도 마음에 몹쓸 병이 날 것 같다. 그래, 그렇지. 그게 바로 ‘11년째 내내 자살률 1위’를 지킬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의 저력이라는 거지, 하며 남의 얘기인 듯 냉소하게 된다.

하지만 난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보다는 되레 ‘개 발바닥만 들여봐도 너무 좋아서 더럽게 오래 살고 싶다’고 했던 어느 노작가의 말을 곱씹으며 인생 구석구석을 가능하면 더 많이, 더 오래 음미하자는 주의다. 그 때문에 사실은 냉소랑도 별로 안 친하고 싶다. 우울증은 정신 건강에 나쁘고, 냉소는 두뇌 건강에 해롭다. 진짜다. 냉소적인 불신을 가진 사람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점심엔 뭘 해 먹을까 생각한다. 오징어랑 양배추, 청량고추 팍팍 썰어 넣고 매콤하게 끓인 해물짬뽕이 어떨까? 아니면 통새우와 마늘을 넣은 올리브 오일 파스타? 아니다. 얼마 전 평창군 농업기술센터에 갔다가 어느 책자에서 봤던 비빔국수 생각이 난다. 정확히 복숭아 열무김치 비빔소면. 평소 자주 해 먹던 열무김치 비빔국수 조리법에 인근 농가에서 생산된 복숭아 두 개만 보태면 된다. 복숭아 하나는 강판에 갈아서 양념장에 넣어주고, 다른 하나는 채 썰어 열무국수와 같이 설렁설렁 무쳐주면 된다. 이마에 땀이 나도록 육체노동을 하다가 문득 그 생각을 하니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입 안에 침도 고이고.

<런치 박스>라는 제목의 인도 영화가 생각난다. 잘못 배달된 도시락에 얽힌 사랑 영화였는데 특별히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영화 <런치박스>_경향DB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지옥철, 지옥버스를 타고 50년 가까운 세월을 아등바등 서서 출퇴근했다는 남자가 땅값이 올라서 묘지에 들어갈 관조차 세로로 맞추어야 한다며 푸념하는 대목이다. 죽어서도 앉거나 누울 수가 없는 거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오늘날 단테가 살고 있다면 <신곡>의 지옥편 개정판에 현대 대도시의 생활 양상을 집어넣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그릇의 음식이, 그리고 조그만 가능성을 품고 있는 한 조각의 사랑과 관심이 너나 할 것 없이 비참하고 비루한 우리의 일상을 보다 살 만한 것이 되도록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다는 거. 그게 바로 영화의 핵심이었던 것 같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도 생각난다. 물류 창고 같은 곳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봐서 주인공 이치코는 도시에서 흔해 빠진 변변찮은 청춘이다. 그런 그녀가 눈이 내리면 고립되기 십상인 첩첩산중 고향 마을로 돌아가 살기 위해 요리도 하고 농사도 짓는 이야기다. 그것도 혼자서. 그런데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쁘고 씩씩할 수가 없다. 심지어 연신 군침이 도는 가운데 고귀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학창 시절 갑자기 사라져버린 엄마. 그때부터 줄곧 혼자 요리하고 혼자 먹었던 모양인데 스스로를 위해 제철 재료를 마련하고 천천히 시간과 공을 들여 요리라는 과정에서 건강하고 단단한 자기애가 느껴진다고 할까? 심지어 돈 없는 청춘이 제 손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역시 판타지인가, 싶기도 했고.

<여행하는 나무>라는 책을 쓴 일본의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가 그랬다. 우리 인류에게는 ‘오늘 아침 신문에 무엇이 실려 있었고, 나의 친구는 누구이며, 누구에게 빚이 있고, 또 누구에게 얼마의 돈을 빌려줬는가를 잊어버릴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마음의 안식을 되찾을 수 있는 곳. 말하자면 마음의 고향 같은 곳 말이다.

모르겠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암담해 보여도 난 먹는 것 때문에도 자살하고 싶지 않다. 정확히 정성껏 요리해서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즐거움 때문에도 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특히 제철 식재료가 지천인 시골에서는 더욱 그렇다. 방금 전 수확이 끝난 이웃의 양배추밭에서 삶거나 튀겨 먹을 만한 새싹을 한 바구니 가득 따왔다. 그런가 하면 뒤뜰에는 해도 잘 안 드는 곳에 겨우 세 그루 심었을 뿐인데 얼마나 많은 꽈리 고추가 열렸는지 즐거운 비명이 흘러나올 정도다.

“이것 봐. 한 뼘 땅 뙈기가 완전 보물 창고라니까. 이렇게 많이 열렸다니. 이렇게 예쁘게 윤기 나는 꽈리 고추가! 오늘은 이걸로 뭘 해 먹을까?”


김경의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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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일이다. 한 항공사 상무가 신인류로 떠오른 젯셋(jet-set)족에 대해 얘기하며 이런 말을 했다. “2~3년 전만 해도 ‘여행=여름휴가’였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1년 내내 여행 중입니다. 둘 중 하나인 겁니다. 여행하고 있거나 여행 준비를 하고 있거나.”

그때만 해도 나 역시 굳이 분류하자면 젯셋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1950년대 말 제트 비행기가 출현했을 때, 이걸 타고서 세계 각국을 유람 다니던 부유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년 내내 어느 때고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으로서의 젯셋족으로. 여하튼 그때만 해도 누구나 젯셋족을 꿈꿀 수 있었고 세상은 그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낙관적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종종 젯셋족을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같은 기사가 잡지나 신문에 실리는 걸 종종 본다. 그걸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이제 좀 유행이 지났어. 그렇지 않아?”라고 조소하던 칼 라거펠트 생각도 나고.

어떤 인문학자가 ‘진정한 사치가 젯셋에서 트랙팩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라고 했는데 진짜 그렇게 돼버렸다. 자연 속에서 잠시나마 인간답게 머물며 보다 소박하게 먹고 단순하게 자고 싶은 이들의 캠핑 트렌드가 무섭게 번지더니 이제는 그것조차도 번거롭고 피곤하고 식상해진 것일까?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이라는 인식 아래 금쪽 같은 여름휴가를 빈둥빈둥 집에서 보내겠다고 선포하는 ‘스테이케이션족’들의 숫자가…. 거의 과반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2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 일대가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_연합뉴스


‘스테이케이션’은 2015년 만들어진 신조어다. ‘머무르다’는 뜻의 ‘스테이(stay)’와 휴가를 뜻하는 ‘베케이션(vacation)’을 합성해서 만든 새로운 단어. 물론 새로 이름 지어졌다고 그 존재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다. 짧게는 집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 ‘홈캉스족’의 일원이었던 그들이고 더 멀리는 자기들만의 동굴 속에 머물며 자족하던 원시 인류의 후예인 그들이다.

젯셋족에서 원시 인류로 거슬러 올라가니 누군가는 이 사태를 불황이 가져온 우리의 불운이며 퇴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루소가 썼듯이 세계의 역사가 야만에서 출발해 도시 문명으로 진보해온 게 결코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기는 했지만 우리의 요구가 매우 정확하고 단순했던 원시시대의 자연인 상태로부터 우리 영혼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이 시대의 풍요로운 생활방식들에 선망을 느끼는 상태로 퇴보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선사인들은 여행이나 쇼핑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몰랐고 신문이나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쉽게 파악하고 또 자족했을 거라고 루소는 추측하고, 나는 무릎을 친다.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의 정직한 고백이 그렇다. 그렇게 많은 곳을 여행했고,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며, 그렇게 많은 물건을 사들였는데 그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낀 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특히 여행이라면 남부럽지 않을 만큼 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면 더 행복할 것 같았기에, 과연 그런지 내 몸으로 경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비용을 치르고 나서야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고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파스칼의 이 경구가 부적처럼 나부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신의 방 안에서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없다는 한 가지 사실에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축하받아 마땅하다. 이제 우리 모두 여행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나 자기 집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쉴 수 있게 됐다는 사실 말이다. 젊은 직장인들 중심이긴 하지만 이제 그 절반이 휴가를 집에서 조용하게, 그것도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니 얼마나 고무적인가? 아무나 자주 할 수 없는 여행 관광객으로서 허겁지겁 세상을 헤매는 대신, 내 집에 앉아 내가 가진 것들을 음미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휴식이고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아는 최고의 휴식은 아무 걱정 없이 자는 거다. 시체놀이 하듯 자는 거다. 그동안 유능하고 쓸모있는 인간 행세를 하느라 몸과 마음이 그토록 지쳤으니 최대한 무능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보는 시간, 그게 휴식이다. 그렇게 자다 자다 지치면 배를 채우고 책을 좀 읽거나 산보를 하다가 밤이 되면 영화를 틀어놓고 또 자는 거다. 물론 그래도 괜찮다.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밖에 없다는 에머슨의 말을 기억하자.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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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일이다. 아파트 임대료조차 내기 힘들었던 30대 남자가 자기 집 아파트 거실에 에어베드 3개를 깔고 숙박객들에게 잠자리와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민박사업을 시작했다. 그 수입이 제법 쏠쏠했던 모양이다. 마음 맞는 파트너들과 함께 아예 회사를 차렸다. 숙박업에 공유경제를 결합시킨 회사 에어비앤비. 2008년 창업 초기에는 1억5000만원이 없어서 7번이나 투자 유치에 실패했던 회사가 지금은 투자자들로부터 무려 200억달러(약 22조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는 공룡 기업으로 성장했다. 메리어트와 하얏트를 제치고 1위인 힐튼을 위협하는 공룡.

하기사 시골에 사는 나 같은 여자도 여행 욕구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면 에어비앤비에 들어가 개인 숙박 시설부터 찾아보게 됐다. 호텔과 달리 에어비앤비에 등록된 민박집에는 저마다 다른 집주인들의 취향과 개성, 그리고 지역색을 품은 특유의 어떤 정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위한 여행이 아니고, 여행이 진실로 시야를 넓히고 공감대를 확대하며 쳇바퀴 도는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면 그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 때문이지 장소 때문은 아닐 거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나 똑같은 범세계적인 호텔에 머물면서 자기 나라에서 알고 지냈던 동료 여행객들과 어울리는 여행의 효과는 아닐 거라는 얘기다. 그 때문에 에어비앤비가 대세가 된 거고.

여하튼 그 덕분에 별이 몇 개가 됐든 기존의 호텔이나 호스텔은 이제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에어비앤비가 연결해주는 개인 민박집의 위력이 얼마나 기세등등한지 전 세계 호텔들이 엄청난 위기감 속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형편이다.

예컨대 요즘 유럽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포시텔’도 그런 위기감 속에서 탄생된 새로운 여행 트렌드가 아닐까 싶다. 일반 호스텔보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숙박환경을 제공하되 가격은 호텔보다 저렴한 게 특징이어서, ‘우아한’ 혹은 ‘상류층’이라는 의미를 지닌 ‘포시(Posh)’와 ‘호스텔(Hostel)’을 합쳐 ‘포시텔(Poshtel)’이라고 불린다는 곳 말이다. 부티크 호텔 못지않은 디자인 감각을 자랑하는 객실에 조식은 물론 석식까지 제공하는 레스토랑이 있는가 하면 공동 주방과 서재,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한다는데 숙박료는 일반 호스텔보다 약간 더 비싼 수준이란다. 심지어 현지의 가정과 제휴해 가정집에서의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서비스까지 갖춘 곳도 있고.

하지만 표준화된 호텔이면 어떻고 싸구려 호스텔이면 어떤가? 그것도 나쁘지 않다. 여행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건 여하튼 좋은 일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누군가 켜놓은 텔레비전 소리,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수시로 ‘까톡’거리는 카톡이며 문자메시지, 페이스북, 트위터의 알림 소리. 무엇보다 우리가 쉬는 걸 절대 못 봐주겠다는 듯 수시로 달려드는 주변의 요구들! 그리고 그 많은 온갖 걱정거리들. 그렇게 우리의 정신과 신경을 갉아먹는 것들을 피해서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에 굳이 피곤하게도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요즘 들어 여행할 여유가 통 없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위안은 있다. 여행만 갈 수 있다면, 낯선 도시의 안락한 호텔에 머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소망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썼듯,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행복’은 사실상 매우 짧다. 중요한 건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준비 없이 걷기 서대문구 안산자락길_경향DB



여행할 수 없지만 걸을 수는 있다. 걷는 건 여행하는 것 못지않게 좋은 일이다. 특히나 마음이 괴로울 때나 울적할 때 혹은 스트레스가 목젖까지 차오를 때 하염없이 걸으면 신기하게도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이 문득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매우 가볍게 느껴진다. 심지어 콧노래까지 나온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 걷다 보면 또 다른 시각, 후각, 청각들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임상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이 우울증 환자들에게 가만히 있지 말고 무조건 몸을 움직이라고 충고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노라면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아주 멋진 아이디어가 불쑥 튀어나온다. 가장 신선하고 멋진 착상은 혹시 머리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안 내 발바닥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장이 아니라, 주로 걸으면서 가장 좋은 사색의 결과를 얻었다는 철학자 루소도 이런 말을 했다. “내 머리는 내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그 때문에 이렇게 장담해 본다. 에어비앤비를 탄생시킨 브라이언 체스키는 7년 전 아파트 임대료를 걱정하는 처지라 감히 여행할 수 없었다고. 그 갈증과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고자 하염없이 걸었을 거라고. 그러다 불쑥 아이디어가 발바닥에 솟구쳤다고.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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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도 샌프란시스코 시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여름 내내 일요일 오후면 ‘스턴그로브 음악 축제’에 갈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 시민 말이다. 그들처럼 초여름 저녁 나무 그늘 풀밭에 모포를 깔고 싶었다.

파란 하늘 아래 비스듬히 누워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바흐나 모차르트, 혹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듣는 거다. 100여년 전에 심어진 유칼립투스와 레드우드가 빽빽이 들어선 숲속 한복판에서 울려퍼지는 천상의 소리들.

그러나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되는…. 손에 맥주나 와인이 들려 있다면 더 좋겠지? 음악을 들으며 아예 잠들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모포보다는 텐트가 낫지 않나?… 해봐야 소용없지만 그냥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한여름 밤의 음악 축제.

아, 그런데 이게 무슨 행운이란 말인가? 이번 주말, 우리 동네에서 클래식 음악 축제가 열린다.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에 전교생 모두 오케스트라 단원인 초등학교가 있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은데, 그 학교 앞마당에서 클래식 축제가 펼쳐진다니….

현대차 정몽구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하는 ‘예술세상 마을프로젝트’의 주요 프로그램인 계촌 클래식 축제. 더구나 정명화가 함께하는 축제다.




연극배우 출신의 계촌 이장님이 말씀하셨다. “정명화가 얼마나 대단한 첼리스트입니까. 그분이 그냥 참여 정도가 아니라 한예종 음악원 출신의 연주자들이랑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니까요.”

계촌초등학교 전교생으로 구성된 별빛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좋겠다. 올해뿐 아니라 앞으로 3년간, 어쩌면 더 길게 그 쟁쟁한 선배 연주자들에게 매주 1회씩 지도를 받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무대에도 설 예정이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그 파랗게 예쁜 친구들이 이번 축제에서는 어떤 곡을 연주할까? 지난해 ‘한여름 밤의 음악회’에서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헝가리안 무곡 5번’ ‘윌리엄 텔 서곡’ 등을 들려줬던 그들이다. 계촌을 상징하는 음악 ‘송어’나 별빛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주 연주하는 곡 ‘위풍당당 행진곡’은 어떨까?

얼마 전 학교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던 곡이 뭐였더라? 제목은 잘 모르겠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곡 같았다. 아담한 시골 정경 속에서 춤추듯 울려퍼지는 음표들이 굉장히 예뻐서 어쩐지 목이 메는 느낌이었다. 혹시 그 곡을 다시 듣게 될까?

시골에는 없는 게 너무 많다. 책방이나 도서관, 미술관이 없는 것은 물론 카페나 베이커리, PC방조차 없다. 영화 한 편 보기 위해 극장에 가려면 자동차로 왕복 2시간을 달려야 한다. 문화적 결핍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공백 상태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예술 황무지.

하지만 결핍이나 공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계촌초등학교 같은 경우 강릉시교향악단 창단 멤버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권오이 교장과 원주리코더교육연구회 회장이었던 이경우 교사)’에 의해 시골 학교 학생들이 처음으로 악기를 배우고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클래식 공연의 주역이 된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 ‘결핍’에서 되레 ‘꿈’과 ‘낭만’을 발견하고 ‘부재’에서 새로운 문화적 에너지를 만들어낸 내 이웃의 누군가들. 그들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

7월10일부터 12일까지 평창군 방림면 ‘계수나무마을’ 계촌에서 클래식 축제가 열린다. 시골 축제치고는 라인업이 굉장하다. 한국 클래식계의 새로운 바이올린 여제 신지아, ‘젊은 거장’의 대열에 들어선 실력파 피아니스트 김태형, 각종 국제콩쿠르를 휩쓴 ‘첼로 영재’ 여윤수를 비롯해 세종문화회관 세종유스오케스트라, 서울심포니브라스, 강릉소년소녀합창단 등이 계촌 별빛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

참고로 여건상 마을에 오기 힘든 클래식 마니아들을 위해 마을 현지와 서울을 연결해 공연 실황을 온라인 중계한다는 소식도 전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유행에 집착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우리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음악이나 풍경은 매우 영속적이고 고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런 점에서 시골 마을과 클래식 음악은 아주 잘 어울린다. 밭 갈던 농부와 그의 아내, 인근 펜션에 놀러 온 도시인 가족이 함께 어울려 음악의 환희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축제의 날. 그날을 위해 난 모처럼 원피스를 꺼내 입으려고 한다.

첼로 소리와 함께 초여름 저녁 어스름이 밀려올 때 가방 속에 숨겨 온 와인이나 맥주를 홀짝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클래식을 듣고 자란 우리 개들을 데려가면 혹시 동네 사람들이 욕할까? 뭐 어떤가? 축제일인데…. 도시의 대형 콘서트홀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소박한 환희가 그곳에 있으리라.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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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 ‘메르스’ 뉴스만 보고 듣고 사는 와중에 얼마 전 눈에 띄는 전혀 다른 뉴스가 있었다. ‘집 짓고 나면 10년 늙는다, 왜 그럴까?’라는 제목의 오마이뉴스 기사였다. 횟수로 3년째 집을 짓고 있는 와중이라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클릭해서 읽어봤다. 공감을 원했건만 공감은커녕 코웃음이 나오는 가운데 약간 비위마저 상하게 하는 뻔한 기사였다. 요는 ‘10년 늙기 싫으면 설계비 아까워하지 말고 설계는 설계자에게 맡기고, 시공도 직접 한다고 까불지 말고 전문 시공팀에 맡겨라, 그리고 맡겼으면 그들을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것. 뭔가 냄새 난다 싶어서 살펴보니 역시나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대표가 쓴 글이었다. 그나마 이런 댓글이 있어서 속이 후련했다.

“건축주가 짜증 나는 요소는 위의 다섯 가지가 아니다. 대충 비슷한 설계도 약간만 바꿔서 5000만원씩 받아내는 설계사가 첫 번째. 자잿값으로 원가의 2배씩 뜯어내는 시공. 돈만 뜯어내는 감리--- ㅋㅋㅋ. 정말이지 집을 두 채 세 채 짓는다면 직접 건축을 공부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다- ㅋㅋㅋ.”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다행히 우리에겐 전문가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뜯기고 싶어도 뜯길 만한 돈이 없었다. 대신 돈은 없지만 시간이 있었다. <조화로운 삶>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니어링 부부의 후예답게 스스로 자기 집을 짓겠다는 배짱도 있었고.

물론 끈기도 필요했다. 내게는 없고 내 남편에게만 있는 엄청난 자산, 끈기. 남편은 그 끈기로 무려 7개월 동안 혼자 4만장의 벽돌을 쌓아올려서 지금의 1층 구조를 완성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듯 미련한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문 벽돌공 둘과 그의 조수 네 사람이 2~3주, 길어도 4주면 쌓고도 남을 일을 1000만원도 안 되는 인건비를 아끼겠다고 그걸 혼자 쌓았으니…. 그 때문에 ‘고행에 가까운 개고생’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고생스럽지. 그런데 그게 어떤 면에서 그림 그리는 거랑 비슷해. 목표를 향해 하나씩 내 손으로 쌓아올리는 중독적인 재미가 있거든. 오체투지까지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명상 효과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을 의심할 필요가 없어. 스스로 아니까. 얼마나 꼼수 없이 튼튼한지.”

새들은 제 둥지를 스스로 마련하며 늘 노래를 부른다. 2층 목조 구조에 지붕 작업까지 마친 남편은 요즘 다시금 구들방을 위한 벽돌 작업을 하며 휴대폰으로 재즈나 블루스 음악을 듣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니 애덤스라는 블루스 가수가 부른 노랫말이 떠오른다. “당신이 흔들어보지 않는 한 무엇이 흔들릴지 결코 알 수 없지.”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직접 해보지 않고는 결코 안다고 할 수 없다. 이제야 알겠다. 왜 니어링 부부가 존 버로스라는 수필가의 말을 빌려 “살면서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는 자기가 살 집을 짓는 것이다”라고 했는지. 우리는 3년째 집을 지으며 수많은 희열(고통이 있기에 희열이 있다)을 느꼈다. 그 희열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있고.

‘어린이 창조학교’ 프로그램에 참가한 어린이가 집짓기 놀이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쯤에서 건축가들에게 묻고 싶다. 정녕 전문가만 집을 지을 수 있는 건지. 거미나 까치, 오소리처럼 인간이 제집을 스스로 짓던 때가 있었다. 그 대단한 창조력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스스로 자기 집을 짓는다는 건 그 사라진 창조력을 되찾는 엄청나게 재미난 일인데, 그 재밌는 걸 전부 전문가한테 맡겨두고 진정 돈만 잘 내면 해피한 건지. 학자이며 생활 예술가였던 니어링 부부는 그 어렵다는 돌집을 어떻게 열 채씩이나 짓고 100세 가까이 행복하게 살았는지. 그것도 스스로 곡기를 끊어서 죽어야 할 정도로 건강하게.

플래그라는 뉴욕의 건축가에게 영향받은 니어링 부부는 <조화로운 삶>에 이렇게 썼다. ‘보통의 머리에 경험도 재산도 별로 없는 사람일지라도 시간과 끈기, 마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수수하게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다.’

사실이다. 세상에는 자기 손으로 자기 집을 지은 수많은 아마추어 빌더들이 있다. 실용적이고 경제적이고 아름다울뿐더러 장인 정신이 깃든 핸드빌트 집. 1973년 여름에 출판되어 무려 42년 동안 30만부 이상이 팔린 <셀터>와 그 후속편 <행복한 집구경>이라는 책이 그 수많은 예를 증명한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숨어 있는 잠재적 창조력이 고무되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그와 함께 크리스 앤더슨의 <메이커스>라는 책도 추천한다. 단순 소비자의 한계에서 벗어난 그 시작부터 끝까지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제작자로 변신한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될 거라고 예고하는 책이다.

참고로 서점가에서 여전히 뜨거운 <1억원대 집짓기>라는 책은 추천하지 않겠다. 땅값, 토목공사비, 설계비, 건축 인허가비까지 포함시키면 1억원이 아니라 2억원, 3억원, 그 이상이 드는 비싼 집들이 태반이라 돈이 많지 않은 건축주는 되레 주눅 들기 십상이니까.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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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집짓기

▲ 밭두렁 돌로 화단 만들고
라일락·홍매화·나무수국 심었다
몇 평 안 되는 헐벗은 땅을
천국으로 바꿔놓는 ‘텃밭정원’


태초에 하느님이 정원을 만드셨다. 그곳은 이름하여 지상낙원의 원형, 에덴동산이라는 곳인데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가 분별없이 까부는 바람에 우리는 영원히 그곳에 갈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담과 이브를 원망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대신 인간은 손수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런 진리가 통용된다. ‘모든 정원은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와 닮았다.’

어떤 면에서 상상력을 좇아 살아 있는 자연의 일부분을 만들어내는 정원사의 일은 시인이나 화가의 일과도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열심히 정원을 가꾸었던 소설가 헤르만 헤세를 보며 그걸 알았다. 심지어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특히 늙은 그가 허름한 옷을 입고 꽃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잡초를 뽑는 사진을 보며 왜 이 모습이 내게 이토록 아련할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생각했다.<정원 일의 즐거움>이라는 그의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타샤 튜더도 그랬다. 그때 내 나이 서른둘이나 셋쯤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무려 아흔이 넘은 때였을 거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다 늙어빠진 이 할머니가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정원 때문이었을까? 정원에 관해서라면 결코 겸손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정원은 내가 지금껏 본 세상의 어떤 지상낙원보다 눈부셨다. 소녀처럼 단아한 몸매의 90세 노인이 직접 천을 짜서 만든 목가적인 옛날 여인의 옷을 입은 채 손에는 방금 전 강가에서 꺾어 온 듯한 갯버들을 수줍은 듯 들고 있는데, 그 모습이 하도 예뻐 보여서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한동안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심장의 떨림을 다 느낄 정도였다.

정원 일의 즐거움과 놀라움에 대해 얘기하는 헤르만 헤세와 타샤 튜더의 책을 읽으며 나도 꿈을 키웠다. 영국인들이 한탄한바 ‘손질할 정원 한 뼘도 없는 처지’였지만 언젠가 내 정원을 갖고 말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날이 오면 내 손끝이 녹색으로 물들 때까지 실컷 정원 일을 하리라 고대하며.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신이 좋아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닮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취향이 중요한 거고. <황야의 이리>도 좋아했지만 정원사로서의 헤르만 헤세를, 동화작가였지만 원예가로서의 타샤 튜더를 더 사랑했던 나는 요즘 정원 가꾸기에 매여 산다. 지난해 봄 동네 밭두렁에서 주워온 돌로 화단을 만들고 사철나무와 쥐똥나무, 조팝, 나무수국, 불두화, 라일락, 홍매화, 황매화 등을 심었는데 올해는 먹을거리로 활용할 수 있는 채소와 허브를 이런저런 꽃들과 함께 섞어 심고 있다.

이름하여 ‘텃밭 가든’(채소정원, 혹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여 ‘빅토리안 키친 가든’이라고도 한다) 콘셉트다. 정원 트렌드의 중심에 있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가 요즘 관상용 정원보다는 텃밭정원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미셸 오바마도 백악관의 정원을 텃밭으로 바꾸어버렸을 정도로 그 열풍이 대단한 걸로 안다.

“요즘은 직접 기른 농작물을 식탁에 올리는 운동, 이른바 ‘Farm to Table’ 혹은 ‘Garden to Kitchen’이라는 개념이 생겨나 급속히 번지고 있어. 그런데 정원에 왜 꼭 잔디를 심어야 하느냐고? 단지 보기 좋을 뿐. 관리하기 힘들고 쓸모도 없는데…. 대신 상추 옆에 금잔화를 심는 식으로 텃밭정원 만들고 보행로에는 자갈 깔고 민들레를 심을래. 당신 민들레 좋아하잖아. 먹을 수도 있고 꽃도 예쁘고 어떤 환경에서든 잘 자라고 잘 퍼지고.”

남편에게 그렇게 말하고 본보기로 동네 이곳저곳에서 민들레를 데려와 심었다. 그것만으로 성에 안 차서 아예 민들레 씨앗 1㎏을 사서 집 뒤 법면에 뿌리고 볏짚으로 덮었다. 그 다음 이런저런 고민 끝에 재활용 목재로 텃밭 프레임을 만든 후 갖가지 모종과 씨앗을 구입했다.

지금은 토마토를 심어 놓고 그 옆에 어떤 꽃을 심을지 고민 중이다. 토마토 열매와 잘 매치될 붉은색 꽃, 백일홍 레드가 좋을 것 같다. 아스파라가스 옆에는 레몬 벨가못이나 히솝을 심으리라. 청양고추와 양귀비, 루콜라와 피튜니아 화이트, 양상추와 베고니아, 당근과 채송화, 봄동과 백화 민들레…. 그런 식으로 모양과 색깔을 그려보며 짝을 지어본다. 그러면 가슴이 뛴다.

사람들은 몇 평 안되는 헐벗은 땅을 자신의 의지와 노고로 작은 천국으로 바꾸어 놓는다. 여름을 기대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꽃과 채소, 과일, 그리고 그것들의 색과 향기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보람찬 일인가? 각종 허브는 물론 청양고추와 호박, 오이에 로메인, 비트, 루콜라까지 갖가지 동서양의 채소가 가득한 작은 텃밭정원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손에 호미를 든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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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버 택시·에어비앤비 등
화두 된 공유경제 개념
점포·옷·집·농산물까지
현실 속 재능·자산 나누기


공유경제의 대표적 키워드가 된 우버와 에어비앤비가 세계적으로 연일 화제다. 요즘 인도에서도 스마트폰 앱을 이용한 우버의 차량 공유 서비스가 인도 특유의 삼륜차 오토릭샤에 응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우버가 불법이라니…. 공유경제를 내세우는 서울시의 ‘모순이다’ ‘퇴행이다’ 하며 여전히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다.

그런가 하면 세계적인 주택공유기업 에어비앤비가 쿠바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소식(덕분에 단박에 쿠바 여행을 계획하는 미국인들이 늘어났다고)과 함께 어떻게든 에어비앤비의 무서운 질주를 막고 싶은 기존의 호텔과 업계들이 세금 문제를 들고나오며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막기 어렵지 싶다. 자기 집을 여행자들에게 빌려주며 짭짤한 부수입을 챙기고 있는 개인들이 세금을 더 잘 낼 수 있도록 에어비앤비 측이 적극 협조하겠다는데 시비 걸기가 어렵지 않겠나?

여하튼 이런저런 불협화음이 있긴 하지만 우버와 에어비앤비로 대표되는 공유경제가 경제계의 최고 화두가 됐다. 그 때문일까? 제품이나 장소, 혹은 서비스 등을 혼자 점유하거나 독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나눠 쓰는 공유경제의 참신한 예가 요즘 우리 주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예컨대 서울 연남동의 ‘어쩌다 가게’라고 들어봤나? ‘공유의 가치’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소상공인들의 성지랄까? 그도 그럴 것이 마당 딸린 2층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어쩌다 가게’는 정원과 라운지 등을 서로 공유하는 8개의 숍과 작업실이 이웃하여 만든 복합 매장으로 일종의 ‘셰어 스토어(share store)’ 콘셉트로 탄생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 문화예술인 사이에서 한창 이슈가 됐던 ‘문화 백화현상’(임대료 상승으로 예술가적 소상인들이 떠나가고 기존의 개성 있는 문화가 점차 사라짐)에 대응하기 위해 ‘5년 월세 동결’이란 조건을 실현한 1호점으로서 갖는 의미가 크다고 한다.

주인이 무려 17명이나 되는 ‘요일 가게’라는 것도 있다. 인천 배다리에 있는 이 가게는 요일별로 공방, 극장, 그림수업, 사진 작업실, 손뜨개 공방, 디저트 카페 등을 운영하는 7명의 가게 주인이 있고 가게 벽면에 마련된 12개의 선반 역시 모두 주인이 다르다고. 이른바 ‘가게 인 가게’라고 하는 ‘12개의 선반’ 물건들은 요일별 가게 주인들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대신 팔아주기 때문에 선반 주인은 굳이 가게에 나올 필요가 없다. 대신 판매한 상품 가격의 10%는 요일 가게 주인의 몫으로 돌아간다고.


힘없는 청년 구직자들에게 힘내라며 정장 공유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영리단체도 있다. ‘열린 옷장’이라는 곳으로 2012년 7월, 직원 스스로 기증한 정장 9벌로 시작한 이 서비스는 현재 800벌 이상의 정장과 셔츠, 구두 등 200여점을 갖춘 곳으로 성장했다. 평소 이용자는 30~40명이지만 대기업 공채 시즌이 닥치면 하루 대여자가 70~80명이 넘을 정도여서 직원 9명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열린 옷장’을 관리해야 할 판이다.

서울의 전셋값, 월셋값이 기세등등하게 오르자 전·월세 주택을 공유하자는 취지의 사회적기업도 설립됐다. 수도권 18개 중·대형 주택을 통째로 빌려 카페형, 포토 스튜디오형, 영화관형, 오피스형 등 독특한 콘셉트로 개조해 재임대하는 ‘우주(woozoo)’라는 곳이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부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속으로 동경하게 된 시골 마을이 있다. 장흥과 괴산. 공통점이라면 취미 생활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마을이랄까?

전라남도 장흥에 가고 싶은 이유는 한 달에 한 번 귀농·귀촌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마실장’이라는 작은 장터가 열리기 때문이다. 외로운데 ‘마실 나가서 같이 어울리자’라는 의미의 마실이리라. 어떤 이는 텃밭에서 캔 작물을 들고나오고, 어떤 이는 우리밀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들어 나오고, 어떤 이는 이웃 마을 장인 할아버지에게 대나무 공예를 배우고, 어떤 이는 고양이 그림을 그려 팔고, 어떤 이는 팬플루트를 불고, 어떤 이는 노래를 부르는 시장. 자급자족하는 고졸한 시골살림이지만 그렇게 오순도순 다 같이 함께 나누는 즐거움에 싱글벙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시골 마을 작은 장터. 장터에서 뭐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자신도 평생 모르고 살았던 재능을 비로소 발견하게 됐다는 이들이 꽃보다 예뻐 보이는 곳.

한편 괴산에 가고 싶은 이유는 그곳에 탑골만화방이 있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에도 쾌락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귀촌한 예술가 양철모씨가 개인 주택에 지은 만화방이다. 시골 생활이 좀 심심했던 모양이다. 좀 더 재밌는 일을 도모하고자 ‘누구나 좋아하고’ ‘아무나 들러 쉴 수 있는’ 만화방을 만들었다니 한번 가보고 싶다. 19금 일본 만화가 있는 시골 만화방. 여러 종류의 젊은 사람들이 마당 평상에 둘러앉아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고, 악기를 배우고, ‘사다리 타기’ 게임을 한다니 전원풍의 쾌락이 너무도 살갑게 느껴진다. 하기야 혼자만 잘살면 뭐 하나? 재미도 없게…. 켄 로치 감독이 보여주었듯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위스키도 나눠 마셔야 더 맛있다. 뭉치고 나누면 더 커진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저마다의 자산과 재능, 가능성은….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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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만들고 돈 아끼는 재미에
대세가 된 ‘셀프 인테리어족’들
고가 브랜드·이케아 공세에도
DIY 등 관련시장 ‘저 홀로 호황’


오랜 경기침체 속에서 ‘셀프 인테리어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른바 ‘대세’가 된 모양이다. 인터넷 블로그와 참고 도서를 통해 그 사례들을 살펴보니 과연 대단했다.

단지 그 수만 많아진 게 아니다. 그 수준들이 너무 놀라워서 입이 벌어질 정도. 간단한 집수리나 가구 리폼은 기본이고, 침실·거실 인테리어와 달리 왠지 손대기 겁나는 주방과 욕실 개조까지 자기 손으로 직접 디자인하고 시공하는 솜씨들이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것도 홍대 앞이나 가로수길 카페 인테리어를 전문으로 하는 ‘인테리어계의 미다스의 손’ 비스름하다.

불황기의 소비자들이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스스로 망치와 톱을 들고 참신한 창조자들로 변신하고 있는 중이랄까? 영화 <지옥이 뭐가 나빠> 식으로 얘기하자면 ‘불황이 뭐가 나빠?’쯤 되겠다.

좋다. 나도 해보자. 이전 집주인 부부가 격렬한 다툼 끝에 남편이 사랑채 문을 도끼로 부수는 사태가 벌어졌던 걸로 안다. 그 ‘분노의 상처’를 성당 달력으로 살짝 봉합해 놓은 채 집을 팔았던 그들. 결국 그 가여운 문은 우리 몫이 됐다. 무엇보다 먼저 그 구멍 난 문에게 새 삶을 주고 싶었다. 기왕이면 예쁘고 상큼한 모습의 새 삶.

인터넷 검색창에 ‘방문 리폼’이라는 검색어를 넣자마자 신세계가 열렸다. 볼썽사납게 낡았거나 못 견디게 촌스러운 갈색 방문에 6~8㎜ 간격으로 자른 얇은 미송합판 패널을 덧붙이고 흰색 또는 파스텔톤의 화사한 페인트칠을 한 후 손잡이까지 바꾸니 인상이 180도 달라지는 게 아닌가. 흡사 성형외과 의사들의 도움으로 신데렐라로 변신한 추녀의 반전을 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 방문에 불투명유리창이 끼워진 창문을 만들어 다는 게 최신 트렌드인 듯싶었다. 욕심이 났지만 한편 나 같은 초보자가 저런 고난도 기술까지 넘보는 건 역시 지나친 ‘과욕’이 아닐까 싶어서 주눅도 들었다.


역시 골치가 아팠다. 방문에 창문 넣을 구멍을 만드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이에 삼나무 패널로 창틀 자리를 확보하고 그 중간에 나왕쫄대를 박은 후 유리를 넣은 다음 미송합판으로 가장자리를 액자 식으로 정리하라니…. 말이 쉽지 각각의 사이즈를 몇으로 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재단을 잘할 자신도 없고.

그런데 의외로 엄청나게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른바 반제품이라는 걸 주문하는 거다. 액자 식으로 재단한 창틀에 샤방샤방한 고방 유리나 아쿠아 무늬 유리를 끼워 파는 반제품을 파는 DIY 전문 쇼핑몰이 있었다.

이제 알겠다. 어떻게 해서 전문가 수준의 셀프 인테리어족이 대세가 됐는지…. 과거 전문가의 전유물이던 인테리어 시공법이 블로거들을 통해 사진과 함께 인터넷에 세세하게 공개되면서 관련 시장이 덩달아 비약적으로 섬세해졌달까? 예전에는 재료를 발품 팔며 직접 사러 다녀야 했지만 이제는 유통망 확대로 내가 원하는 수준의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예컨대 이제는 싱크대 교체 비용으로 몇 백만원씩 쓸 필요가 없다. 사이즈만 알려주면 이른바 인터넷 철물점이라는 곳에서 저마다의 사이즈에 맞게 최고급 원목(예컨대 물푸레나무)을 재단해서 싱크볼 넣을 구멍까지 깔끔하게 뚫어 택배로 보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목으로 싱크대 상판만 교체하고 문짝을 리폼해주면 주방 개조 비용을 70% 가까이 절감할 수 있다는 사실. 대폭 비용을 줄일 수 있을뿐더러 내 취향에 맞는 컬러와 재료를 사용해 상큼한 부엌으로 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개조할 수 있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셀프 인테리어족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중독적이라는 것. 리폼을 시작하면 다음 목표가 생기고 그 목표는 끝없이 늘어난다. 할수록 속도가 붙고 기술과 요령이 늘기 때문에 갈수록 재밌다. 돈 아끼는 재미, 스스로 만드는 재미, 나날이 늘어가는 손재주와 요령에 고무되어 몸이 고단해도 고단한 줄 모르고 몰입하게 된다. 그렇게 써버린 주말이 아깝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생산적으로 느껴진다. 텔레비전이나 스포츠, 영화 관람이라니? 그동안 시시한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아드레날린을 낭비했던 게 아닌가 싶어 애통한 생각마저 든다.

덕분에 주거용 인테리어 시장이 저 홀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마치 패션업계 SPA 브랜드 같다고 할까? 저렴한 가격에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디자인, 고가 브랜드 못지않게 감각적인 즐거움까지 선사해 불경기에도 소비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을 두루 갖추었다. 게다가 스스로 조립해서 사용하는 세계적인 저가 가구업체 이케아의 한국 상륙까지 보태지면서 셀프 인테리어의 유행이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물론 나도 이케아 광명점에 다녀왔다. 놀이동산 못지않게 즐거운 눈요기를 실컷 했다. 천만원대 주방 인테리어 쇼룸을 보면서 영감만 받고 국자 하나 사지 않았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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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암동에 맥주 파는 동네서점이 있다. 북바이북(Book By Book)이라는 곳으로 단지 책만 파는 동네서점도 흔치 않은데 이곳에서는 커피는 물론 맥주까지 판다. 집집마다 운 닿는 대로 조금씩 재개발이 진행 중인 주택가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으나 한 번 찾으면 ‘발견의 기쁨’을 두고두고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서점을 운영하는 젊은 처자들(자매)이 어찌나 상냥하고 예쁜지 송창식의 ‘담뱃가게 아가씨’라는 노래가 절로 생각날 정도다. 그뿐만이 아니다. 동네 총각들 설레게 하는 미모는 기본이고 책을 고르고 배열하고 홍보하는 감각과 취향까지 훌륭하다.

책을 파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자이자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애정이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는 곳이랄까? 심지어 66㎡(20평)도 채 안되는 조그만 공간에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북콘서트를 여는 배짱과 수완까지 겸비하고 있다. 덕분에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책과 음악으로 지친 영혼을 달래려는 이들의 작은 아지트이자 ‘상암동의 보석’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비유하자면 ‘서촌’을 띄운 제2의 ‘대오서점’인 셈이다.

서울 상암동 동네서점 북바이북 본점 외부 (출처 : 경향DB)


파리의 전설적인 영어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1919년 파리에 오픈한 것도 여성이었다. 선교사 아버지를 따라 파리에 온 미국인 여성 실비아 비치. 그녀 역시 단순히 책만 파는 서점 주인이 아니었다. 파리와 문학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겁도 없이 젊은 처자의 몸으로 서점을 연 그녀는 무명의 가난한 작가들에게 외상으로 책을 빌려주며 뜨거운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때문에 헤밍웨이나 앙드레 지드가 사랑한 서점으로서 전설을 쌓을 수 있었다. 심지어 실비아 비치는 일개 서점 주인의 몸으로 당시 풍기문란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던 제임스 조이스의 문제작 <율리시즈>를 출판하는 엄청난 일을 도모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서점 문을 닫게 됐지만 10년 후 미국인 방랑시인 조지 휘트먼에 의해 젊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책방 한쪽에 숙소까지 마련한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명맥이 계속 이어져 오늘날 파리의 중요한 관광 명소가 됐다.

인터넷 서점과 전자책에 밀려 서점이 대표적인 사양산업이 됐지만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정신을 잇는 동네서점들이 애틋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책 더미 속의 밤’을 마련하는 어느 서점처럼 말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강한 이 서점 주인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 서점에 침대 몇 개를 들여놓고 침대마다 작은 전등 하나씩을 놓아준다고 한다. 서점 문을 닫고 서점 주인은 집으로 가고 미리 신청한 사람들은 문 닫힌 서점 안에서 밤을 보낸다. 책들을 꺼내다 침대 옆에 쌓아두고 열심히 읽는다. 아침이 되어 서점 문을 다시 연 주인장은 밤 사이 파손된 책이 한 권도 없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는 얘기.

나는 사소하지만 잊을 수 없이 감동적인 그 얘기를 <제3의 공간>이라는 책에서 읽었다. 트렌드 분석가이며 무드 매니지먼트의 대가로 알려진 크리스티안 미쿤다가 쓴 책이다. 그에 의하면 1980년대에 들어 감각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마케팅이 등장하면서 대중들이 이용하는 상업 공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 호텔은 더 이상 잠만 자는 장소가 아니고 상점은 더 이상 물건만 파는 장소가 아닌 시대가 도래한 것. 기분 좋은 정서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곳, 재충전은 물론 잠시나마 영혼의 도피처로 삼을 수 있는 곳, 내 집도 아니고 일터도 아니지만 누구나 찾아갈 수 있는 곳. 심지어 관광 명소로서의 가치를 지닌 상점이나 호텔. 미쿤다는 그런 공간을 ‘제3의 공간’이라고 명명했다. 말하자면 진보적인 브랜드나 상점들은 이제 너나없이 단지 빨리 팔아치우려고 하는 대신 세련되게, 혹은 세심하게 연출된 공간에서 뭔가 체험할 만한 이야깃거리나 흔치 않은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고객들을 완전히 사로잡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거 낭패다. 북바이북의 자매 사장님 얘기(동생 김진양씨)를 들어보니 ‘마케팅 전략’을 운운하는 나 자신이 왠지 좀 멍청이처럼 느껴진다.

“아, 북콘서트요? 작으면 작은 대로 서점 운영 하면서 저희가 좋아하는 책의 저자도 만나고 작은 음악회도 열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뭐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거죠. 아버지께서 저희 북바이북의 ‘비밀요원’이 아니라 ‘비닐요원’으로 활동 중이세요. 책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버지가 집에서 입고되는 모든 책마다 비닐 포장을 하고 계시거든요. 그런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좋아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일을 위한 마음요.”

샤롯 브론테가 한 말이 떠오른다. ‘인간의 심장은 보물을 숨기고 있다’는. 그 보물을 귀히 여기며 누구에게든 기꺼이 손 내밀 수 있다면 스스로 보물이 되리.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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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라종일 선생님. 먼저 단 한번의 일면식도 없는 분에게 이렇듯 편지를 쓰게 된 경유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는 화제의 신간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이런저런 실패와 상처, 분노, 좌절로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30대의 젊은 여성 칼럼니스트 김현진이 자신이 발견한 구원의 노신사와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낸 책이지요. 그 노신사는 서울대를 나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주영대사와 주일대사, 대학총장,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거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서적 '가장 사소한 구원' (출처 : 경향DB)


처음엔 뭔가 살짝 아니꼽더군요. 제가 아는 김현진은 주류라든가 엘리트, 기득권들의 논리를 태연하게(심지어 유머를 섞어 매우 희극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젊고 도발적인 여성 작가인데, 그런 그녀가 책이 지독히 안 팔리는 ‘루저의 궁지’에 몰려 엘리트 중의 엘리트에게 ‘구원의 SOS’를 청한 것인가 싶어서 다소 굴욕적으로 느껴졌달까요? 읽어보기도 전에 말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굴욕에 대한 그러한 준비된 저항감이 슬그머니 무장해제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 무서운 일 없고, 우스운 일뿐이다.” ‘대부분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지낸’ 이들이 만들어 낸 무섭고도 우스운 일. “감옥은 권력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사람들이 함께 사는 모든 곳에 스스로 만든 감옥이, 그리고 그 안에 갇혀 무서워하고 무섭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현진 작가에게 보내는 선생님의 답장을 읽으며 시종일관 저 자신의 감옥을 느꼈습니다. 제 스스로 만든 우습고도 가련한 감옥 말입니다. 특히나 ‘일베’와 ‘서북청년단’에 대한 라종일 교수님의 의견을 읽을 땐 뼈아픈 반성이 느닷없이 몰려와 제 심장을 강타하는 느낌이었지요.

‘종북’이든 ‘일베’든 ‘일정한 명칭의 이름표’를 붙여 편리하게 분류하지 말고, 한 개인이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하셨던가요? 그 이야기를 읽고 일류가 됐건 이류가 됐건, 설사 삼류라 하더라도 글을 쓰는 자로서 나 자신이 얼마나 판에 박힌 단층적인 의견만을 추구하며 안일하게 살아왔는지 생각하니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한편 선생님께서 쓰신 앙드레 말로 이야기를 통해서 사소하지만 큰 위안과 용기도 얻었습니다. 작가로서 매우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드골 대통령 집권 시절에 문화부 장관까지 지낸 앙드레 말로의 업적이라는 것이 선생님이 보시기에 실상은 쓴웃음을 짓게 하는 허풍 혹은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일화 말입니다. “성공적인 사기꾼은 다른 사람을 속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자기 거짓말에 속는 사람”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렇다면 성공적인 작가보다는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진실된(‘스스로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하게 되더군요.

반면 감히 반발하고 싶었던 내용도 있었답니다. 무엇보다 먼저 묻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은 진정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인가요? 선생님 말씀처럼 사형 제도가 없어졌다거나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것만으로 이 세상을 진정 그렇게 낙관해도 좋은 것일까요? ‘혁명’과 ‘그 이후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그토록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의 의견이라 저로서는 더더욱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무자식 상팔자’가 아니라 ‘아이가 구원’이었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예로 들며 출산을 독려하던 부분도 그랬지요. 뭐랄까? 제게는 저마다 다른 개인차를 고려하지 않은 ‘일반화의 오류’처럼 읽혔습니다. 물론 제가 틀렸을 수도 있지요. 지난 밤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이란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학교에 신고 갈 운동화가 단 한 켤레밖에 없는 가난한 집안의 두 아이가 보여주는 눈물과 잔꾀가 얼마나 예쁜지, 비참한 현실을 느닷없이 ‘천국’으로 만드는 ‘구원’으로서의 아이들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으니까요. 혹시 안 보셨다면 꼭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슬프게 이런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천사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볼품없이 처량해진 루저로 만드는 것일까? 패배 의식에 젖은 채 나날이 시들어가고 있는 이 땅의 청춘들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왜 못나게 취직할 생각만 하는 것이냐? 남에게 직장을 만들어 줄 생각은 못하는가?” 격하게 공감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여전히 사람으로서 추구하는 가치의 문제보다 경제와 분배 문제에 몰두해 있는 것 같다. (…)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하셨지요. 그 마지막 추신에서 저처럼 아쉬움이나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독자가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공개적인 편지를 마칠까 합니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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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지나간 한 해를 고요히 정리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기 위해 몇 주 전부터 담배를 끊고 술도 끊었다. 그리고 뜨개질을 시작했다. 왜 하필 뜨개질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잃어버린 시간’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정확히 시간이 만드는 아름다움으로 보상받고 싶은, 지난 20년간 술과 담배로 잃어버린 나의 애달픈 청춘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뜨개질에 대한 로망을 갖기 시작한 게. 서른다섯의 나는 유럽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스페인 발렌시아의 한 공원에서 뜨개질을 시작했다.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내 손에는 아라곤행 기차표가 들려 있었는데 기차는 다섯 시간 후에나 떠날 예정이었다. 그랬다. 내게는 숙취와 함께 견뎌야 하는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고 인근에는 시장도 있었다. 시장에는 알록달록 가지각색의 예쁜 털실들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가게 안에서는 동네 할머니들이 담소를 나누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그때 알았다. 술 마시는 여자보다는 뜨개질 하는 여자로 늙고 싶은, 나도 몰랐던 내 미래의 소망이 내 안에 잠자고 있었다는 걸.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을까? 안나 리사라는 핀란드 여자가 뜨다 만 털양말 사진을 봤다. 아마도 세 살 정도일 거라고 짐작되는 아이의 고사리 같은 발에 겨자색 털양말이 신겨져 있는데 한 발은 아직 미처 완성되지 않은 채 엄마의 세심한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실려 있는 책의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 결핍을 보여주는 어떤 아름다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랄까? 심지어 문득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면서 전시장에서 본 어떤 예술작품보다 더 아름답고, 더 숭고하고, 더 의미심장한 걸 보고 있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게 왜, 라고 물었다. 오늘날 물질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주로 예술품을 사고팔며 예술을 논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까? 전시장의 값비싼 미술품보다 안나 리사라는 핀란드 여자가 서툴게 손수 짠 털양말이 오히려 더 예술작품처럼 느껴진 이유 말이다.

예전에는 거의 모든 여자들이 손뜨개질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 풍요로운 시대에 지하철에서 손뜨개질 하는 여자가 있다면 여기저기서 그 구경거리를 찍고자 스마트폰 터지는 소리가 날 거다. 손을 움직여 뭔가 만드는 일의 가치를 대량 생산이 대신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만드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더 안타까운 건 그 잃어버린 능력을 아쉬워하는 이도 거의 없게 되었다는 거고.

설사 그걸 인식하고 있는 이가 있다 해도 슬픈 건 우리로 하여금 정신 없이 일하고 정신 없이 소비하게 만드는 이 물질문명이 우리에게서 뜨개질 할 수 있는 시간을 몽땅 빼앗아 버렸다는 거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누군가 미완성의 털양말 두 짝과 털뭉치를 전시장에 들여다 놓으면 뒤샹이나 요셉 보이스의 설치작품보다 더 의미심장한 예술품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

뜨개질 소품으로 꾸며진 겨울 인테리어 (출처 : 경향DB)


찾아보니 실제로 손뜨개를 전시장의 예술작품으로 승화하여 주목받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있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폴란드 작가 아가타 올렉(Agata Olek)과 얼마 전 한국에서 첫 전시를 연 핀란드 작가 아누 투오미넨. 작품 스타일이 다르고 스케일도 다르지만 그들이 만든 뜨개질 작품을 보고 있으면 색색의 실뭉치와 바늘로 인간의 손이 부릴 수 있는 마법에 고무되고 만다. 심지어 그 마법은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을 요구하기보다 시간과 겸손한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부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 더 설렜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뜨개질을 하고 있다. 알코올과 니코틴이 대부분 빠져 나간 육체와 맑은 정신으로 앉아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하고 있다. 해보니 알겠다. 왜 지난 소치 올림픽의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 경기 결승전에서 핀란드 선수단의 코치가 그 절체절명의 긴장된 순간에 뜨개질을 했는지. 두려움, 불안, 상처, 심지어 권태마저 치유되는 느낌이다. 게다가 무념무상의 명상 효과 때문인지 손발이 절여도 계속하게 될 만큼 중독적이다. 무해하고 건전할뿐더러 매우 창조적인 중독.

리스본에서 만나 내게 손뜨개로 만든 작은 브로치를 선물했던 덴마크 아가씨가 그랬다. ‘덴마크는 물론 핀란드나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뜨개질을 배운다’고. 그래, 뜨개질부터 배워보자. 저임금 저숙련 시대가 도래한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만드는 힘이다. 비용적인 면에서 가장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것. 누구나 적은 비용으로 작업장에 묶이지 않고 이동하면서 아무 때나 느긋하게 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뜨개질이니까.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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