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한 해를 고요히 정리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기 위해 몇 주 전부터 담배를 끊고 술도 끊었다. 그리고 뜨개질을 시작했다. 왜 하필 뜨개질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잃어버린 시간’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정확히 시간이 만드는 아름다움으로 보상받고 싶은, 지난 20년간 술과 담배로 잃어버린 나의 애달픈 청춘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뜨개질에 대한 로망을 갖기 시작한 게. 서른다섯의 나는 유럽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스페인 발렌시아의 한 공원에서 뜨개질을 시작했다.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내 손에는 아라곤행 기차표가 들려 있었는데 기차는 다섯 시간 후에나 떠날 예정이었다. 그랬다. 내게는 숙취와 함께 견뎌야 하는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고 인근에는 시장도 있었다. 시장에는 알록달록 가지각색의 예쁜 털실들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가게 안에서는 동네 할머니들이 담소를 나누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그때 알았다. 술 마시는 여자보다는 뜨개질 하는 여자로 늙고 싶은, 나도 몰랐던 내 미래의 소망이 내 안에 잠자고 있었다는 걸.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을까? 안나 리사라는 핀란드 여자가 뜨다 만 털양말 사진을 봤다. 아마도 세 살 정도일 거라고 짐작되는 아이의 고사리 같은 발에 겨자색 털양말이 신겨져 있는데 한 발은 아직 미처 완성되지 않은 채 엄마의 세심한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실려 있는 책의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 결핍을 보여주는 어떤 아름다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랄까? 심지어 문득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면서 전시장에서 본 어떤 예술작품보다 더 아름답고, 더 숭고하고, 더 의미심장한 걸 보고 있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게 왜, 라고 물었다. 오늘날 물질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주로 예술품을 사고팔며 예술을 논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까? 전시장의 값비싼 미술품보다 안나 리사라는 핀란드 여자가 서툴게 손수 짠 털양말이 오히려 더 예술작품처럼 느껴진 이유 말이다.

예전에는 거의 모든 여자들이 손뜨개질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 풍요로운 시대에 지하철에서 손뜨개질 하는 여자가 있다면 여기저기서 그 구경거리를 찍고자 스마트폰 터지는 소리가 날 거다. 손을 움직여 뭔가 만드는 일의 가치를 대량 생산이 대신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만드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더 안타까운 건 그 잃어버린 능력을 아쉬워하는 이도 거의 없게 되었다는 거고.

설사 그걸 인식하고 있는 이가 있다 해도 슬픈 건 우리로 하여금 정신 없이 일하고 정신 없이 소비하게 만드는 이 물질문명이 우리에게서 뜨개질 할 수 있는 시간을 몽땅 빼앗아 버렸다는 거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누군가 미완성의 털양말 두 짝과 털뭉치를 전시장에 들여다 놓으면 뒤샹이나 요셉 보이스의 설치작품보다 더 의미심장한 예술품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

뜨개질 소품으로 꾸며진 겨울 인테리어 (출처 : 경향DB)


찾아보니 실제로 손뜨개를 전시장의 예술작품으로 승화하여 주목받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있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폴란드 작가 아가타 올렉(Agata Olek)과 얼마 전 한국에서 첫 전시를 연 핀란드 작가 아누 투오미넨. 작품 스타일이 다르고 스케일도 다르지만 그들이 만든 뜨개질 작품을 보고 있으면 색색의 실뭉치와 바늘로 인간의 손이 부릴 수 있는 마법에 고무되고 만다. 심지어 그 마법은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을 요구하기보다 시간과 겸손한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부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 더 설렜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뜨개질을 하고 있다. 알코올과 니코틴이 대부분 빠져 나간 육체와 맑은 정신으로 앉아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하고 있다. 해보니 알겠다. 왜 지난 소치 올림픽의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 경기 결승전에서 핀란드 선수단의 코치가 그 절체절명의 긴장된 순간에 뜨개질을 했는지. 두려움, 불안, 상처, 심지어 권태마저 치유되는 느낌이다. 게다가 무념무상의 명상 효과 때문인지 손발이 절여도 계속하게 될 만큼 중독적이다. 무해하고 건전할뿐더러 매우 창조적인 중독.

리스본에서 만나 내게 손뜨개로 만든 작은 브로치를 선물했던 덴마크 아가씨가 그랬다. ‘덴마크는 물론 핀란드나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뜨개질을 배운다’고. 그래, 뜨개질부터 배워보자. 저임금 저숙련 시대가 도래한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만드는 힘이다. 비용적인 면에서 가장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것. 누구나 적은 비용으로 작업장에 묶이지 않고 이동하면서 아무 때나 느긋하게 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뜨개질이니까.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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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12월 연말이었다. 휴대폰으로 이상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저는 지금 큰 배들이 있는 도시에서 길을 잃고, 많은 것을 잃고 헤매고 있어요.” 일 때문에 두어 번 만났고 서로 호감을 갖고 있는 남자에게 온 것이었는데, 처음엔 ‘다 큰 남자가 이런 감상적인 메시지를 잘도 보낸다’ 싶어 무시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급기야 자살 직전에 나에게 ‘도와달라’고 가느다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짜로 죽기라도 한다면 나는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시달리겠다 싶어서, 심사숙고해서 답변을 보냈다.

“알이 꽉 찬 꽃게찜을 드세요. 소주도 한잔 하고요. 그 다음엔 포만감 속에서 일단 자고 보는 거예요. ‘길’은 그 다음날 찾아도 되니까.” 마침 그 전 주에 안면도에 가서 제철 꽃게찜 한 접시가 주는, 그 기적 같은 만족감을 체험했던 터였다. 탐욕스럽게 꽃게 다리를 빨며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작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 이런 확실한 방법을 더 일찍 알았다면 지난여름 그 악당 때문에 폭우 속에서 울고불고 그따위 청승은 떨지 않았을 텐데. 꽃게만도 못한 망할 놈의 사랑, 차라리 몹쓸 병이나 들어라!”

하루키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 마시는 차갑게 얼린 맥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지금 바로 그런 느낌이다. 내 평생 이렇게 고된 하루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각오는 물론 울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내 손으로 집짓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심지어 우리에겐 건축주이며 시공자로서 밑바닥 일당 잡부 일까지 내 손으로 한다는 원칙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정말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연이틀째 무릎으로 기거나 누워서 질질 몸을 끌며 콘크리트 타설할 부분에 얼어붙은 눈과 얼음을 녹이고 걸레로 닦아내는 작업을 할 때였다. 때 이른 한파 속에서 낮에도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려웠다. 해지기 전에 이 작업을 못 끝낸다면? 다시금 눈이 온다면? 얼음 때문에 기껏 죽도록 고생해서 쳐놓은 콘크리트가 무너진다면? 조지 오웰이 탄광 광부로서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위건부두의 갱에 들어갔을 때도 이렇게 암담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심지어 우리는 해가 완전히 진 다음에도 쉬지 못하고 평창 시내에 가서 연탄을 사다가 콘크리트 타설 아래 불을 지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해냈다. 밤 9시 무렵 하루 종일 추위와 막노동에 시달린 몸을 욕조에 담그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전 중인 사라예보를 방문한 수전 손택에게 어느 중년 여성이 했다는 말도 떠올랐다. “목욕 못한 지 16개월이 되었어요. 그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샤워 후 늦은 저녁을 만들어 먹자 남편도 그제야 행복하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그래 이 맛이야.” 제철 꽃게 생각이 났지만 그 대신 집에서 만든 수제 돈가스에 차가운 막걸리 한 병을 내주자 남편이 했던 말이다. 돈이 없어서, 머리가 나빠서, 꼴에 자존감은 커서 몸이 좀 고생이지만 뭐 어떠냐 싶은 기분이었다. 격렬한 육체 노동 끝의 막걸리 한 잔의 맛은 하루키 같은 문단 권력자는 모르지 싶은 의기양양한 기분마저 드는 밤이었다. 심지어 땅콩 몇 알 때문에 화가 나서 뉴욕공항에서 수백명을 실은 비행기를 후진시켰다는 ‘월드챔피온 능력자’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에 대한 얘기를 나누자 육체를 고생시키는 우리의 무능력이 새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리턴' 사건 이후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바로 그 땅콩 _ 트위터 캡쳐


1930년에 런던에서 출판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고전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을 좋아한다. 겨우 ‘땅콩리턴’ 때문에 세상의 구경거리가 된 조현아씨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러셀의 충고를 옮겨보자면 이렇다. 1.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보다 과소평가하는 편이 행복을 느끼기 쉽다.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뜻밖의 성공에 놀란다. 2. 적당한 음식에 만족하는 사람이 낫다. 미식가는 인생이 제공하는 즐거움의 절반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고 푸념하는 까다로운 사람과 비슷하다. 3. 자신이 맡은 일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사람은 극단주의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극단주의적인 경향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삶과 우주 속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서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다. 즉 자기보다 큰 어떤 것에 유대감을 느끼며 자신이 우주의 작은 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

혹시 다 가졌는데도 행복하지 못해서 자꾸만 남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 이 대목에 방점을 찍어야 하실 듯.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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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오랜만에 가는 서울행. 옷장 앞에서 잠시 서성댄다. 뭘 입을까? <너라는 우주에 나를 부치다>라는 첫 소설을 낸 저자로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 처지라 가능하면 그 처지에 맞게 입고 싶었다. 실패한 연애를 하도 많이 해서 되레 천진해진 여자가 진짜 사랑을 찾아 겁도 없이 전진하는 로맨스 소설이니 원피스를 입어야 하지 않을까? 기왕이면 밝고 산뜻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걸로? 그런 생각으로 이것저것 입어본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 내키지 않는다. 그냥 평소 가장 즐겨 입는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최소한의 격식을 부여하는 의미에서 두툼한 회색 재킷을 걸쳤다. 그리곤 늦가을 일교차를 고려하여 사파리 코트를 하나 더 입을까 하다가 짐을 줄이는 차원에서 코트 대신 엄마가 짜 준 털목도리로 대신했다. 좋았다. 뭔가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이 나 스스로 편안했다. 심지어 무언가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느낌마저 드는 것이….

어쩌면 트렌드를 좀 의식했는지도 모르겠다. 놈코어(normcore)라는 신조어와 스티브 잡스라는 대표 아이콘을 앞세워 ‘일상적 평범함을 추구하는 패션이 무엇보다 더 스타일리시한 시대가 됐다’는 소식이 초고속 인터넷선이 안 깔린 나의 적막한 산골 마을에까지 전파된 요즘이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나타나지만 기껏 해봐야 신용카드 청구서만 가져다주는 우체부 아저씨 대하듯 어떤 트렌드이든 오면 오고 가면 가는가 보다 했지만 놈코어만큼 어딘지 좀 반가운 구석이 있었다. 베블런이 제기한 유행론의 핵심,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 짓기 위한 패션에 무심한 이들의 ‘반트렌드적 트렌드’가 바로 놈코어가 아닌가 싶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놈코어는 ‘다르지 않음’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태도”라 했던 뉴욕의 트렌드 예측 회사 케이-홀(K-Hole)의 설명에 이상하게 마음이 동요되고 있던 차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을 입구 가게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내 손엔 방금 끊은 분홍색 버스표가 들려 있다. 하루에 다섯 번밖에 없는 서울 가는 버스표. 그 버스표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누구나 ‘백운상회’ 할머니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긋하게 앉아 돋보기를 쓰고 손으로 날짜를 적어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처음엔 답답했지만 어느새 그 리듬에 익숙해진 나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며 내가 속한 시골 공동체의 아우라를 느낀다. 이제는 그 느낌이 내 몸에 잘 맞는 데님 팬츠처럼 편안하게 애틋하다.

패션 잡지에 있는 놈코어 패션


‘뉴욕 매거진’ 표현대로라면 놈코어는 ‘자신이 전 세계 70억 인구 중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들을 위한 패션’이다. 그런 차림으로 버스에 오른 나는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당신의 서쪽에서>. 뒤늦게 제주의 서쪽에 꽂힌 탁현민이 한동안 그곳에 내려가서 생계형 한량 낚시꾼처럼 살며 쓴 제주 찬가 에세이다.

잘 읽혔다. 제주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스스로 좀 더 아름다워진 기분이 든다는 마흔 줄의 남자 이야기가…. 심지어 애틋해서 매만지듯 읽었다. 그러다 몇몇 대목들을 읽으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내가 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건 서로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이며 가장 뜨거운 고백이다.” “누구든 자기가 선택한 것을 보며 살게 된다. 나는 이제 다만 아름다운 것만을 보려 한다. 어떻게든, 그렇게 살고 싶다.”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아름답다고 느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서울을 떠나간 여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며…. 아, 그랬구나. 이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구나. 대체 불가능한 어떤 특별한 한 사람, 어떤 특별한 한 장소에게 느끼는 사랑 이야기를 서로 다른 형식의 책으로 구현했지만 우리가 느끼는 분노와 좌절, 무기력, 해법은 결국 비슷한 것이구나, 생각했다.

탁현민은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고 썼지만 난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덧붙이고 싶다. 그건 아름다움이다. 그건 사랑이고 또 행복이다. SNS를 열면, TV를 켜면, 뉴스에 접속하면 우리를 한없이 무기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이 세상을 우리 모두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살아가야만 한다. 서로 독려해야만 한다. 우리 각자 계속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열광하고 무언가에 아름다움을 느끼며 계속 사랑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다. 어두운 밤의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나는 우리 모두가 “함께 있다”고 느낀다. 가방에 책이 두 권 더 있다. 표준을 뜻하는 ‘norm’과 핵심을 뜻하는 ‘core’의 합성어 놈코어를 처음 사용한 SF 대가 윌리엄 깁슨의 책 <뉴로맨서>와 평범한 부부의 매우 비범한 여행기 <한 달에 한 도시>. 트렌드와 SNS는 흘러간다. 하지만 책은 내 가방 안에 있다. 든든하다. 행복하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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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중이었다. 그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한마디도 놓치면 안될 것 같은 매우 중요한 전화였던 터라 자동차를 갓길에 세웠다. “네, 네. 그렇군요.” 안경을 쓴 채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주판알을 튀기고 있을 것 같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내 신용등급과 이런저런 부채 내용을 읊었고 나는 그 내용을 야단 맞는 학생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외국에서 송금되는 고정적인 수입이 저희 은행으로 들어오고 있어서 심사 과정에서 별 문제가 없으면 마이너스 통장은 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중요한 과정이 하나 남았는데, 혹시 지금 받아 적으실 수 있나요?” 나는 얼른 종이와 펜을 꺼내어 남자가 불러 주는 내용을 받아 적었다. ‘채·무·변·제·능·력·검·증’ 또박또박 적었다. 자신을 ○○은행 스마트뱅킹 대출 담당 심사관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불러주는 내용을…. 요는 마이너스 통장을 받으려면 부채 상환 능력을 검증 받아야 하는데 그 내용과 관련해서는 실무 담당자가 다시 전화를 할 거니까 잘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부터 또 전화를 기다렸다. 애타는 마음으로….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실무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매우 퉁명스러웠다. “심사관 하고 통화하셨죠? 그런데 왜 이게 저에게 다시 내려온 거죠?” “아, 글쎄요. 저한테 채무변제능력검증을 받아야 하는데 실무 담당자에게 설명 들으라고 하던데요?”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기다림의 시간.

저녁 무렵에야 기다리던 전화가 왔고 그 목소리에 하루의 피로가 담겨 있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쉬운 건 저희 은행 계열사 카드사에서 카드론 받으신 다음 바로 상환하는 겁니다. 바로 상환하면 이자는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중으로 받아보신 다음 얼마 나오는지, 이자가 얼마인가 저에게 알려주세요. 그 금액과 이자율에 따라 마이너스 통장 액수와 금리가 달라지거든요. 전화 번호 아시죠? S은행 스마트뱅킹 센터 1599-3576으로 전화하신 다음 1번 누르시면 됩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때 알아야만 했다. 중국 어디쯤에 있는 남자가 지금 돈이 필요한 한 멍청한 여자를 상대로 ‘보이스 피싱’ 중이라는 걸…. “참 눈 가리고 아웅 식이네요. 채무변제능력검증이라는 게….” 내가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묻자 남자가 대답했다. “계열사지만 실적 때문에 사실 경쟁관계에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편법을 쓰기도 하는데 그 사실에 대해선 그쪽 카드사 담당자에게는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세상에, 나 바보 맞다. 남자의 말을 들으며 요즘은 은행원들도 실적 때문에 야근을 하는구나, 하며 짠한 마음까지 들었으니…. 심지어 12.90%로 스피드론 1200만원을 받은 후 남자에게 득달같이 전화해서 알려줬다. 금액과 이자가 얼마나 나왔는지….

낚시의 묘미는 물고기와의 여유 있는 줄다리기라고 했던가? 남자는 다음날까지 계속 내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게 했다. 저녁 일곱 시 넘어 전화한 남자는 마이너스 통장이 3500만원까지 나왔으며 이자는 4.20%라고 했다. 남자는 그 희소식을 전하며 받은 카드론은 오늘 밤 중으로 상환해야 한다면서 카드사 야간콜센터 전화번호를 가르쳐줬다. 야간콜센터 남자에게서 상환을 위한 가상계좌번호를 받는 순간 알았다. 지금 남자의 낚시찌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남자는 낚시를 낚아챌 만반의 준비를 하며 미소짓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불현듯 하찮은 용량이긴 하지만 내게도 두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물고기가 여유 있게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는 유유히 몸을 뺐다.

정말 무서웠던 건 남자가 내 남편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며 그날 밤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계속 전화했다는 사실이다. 112에 ‘보이스 피싱 미수 사고’를 신고한 후 남편이 남자에게 전화해서 한바탕 욕을 퍼부은 직후였다. 그의 뻔뻔함에 몸이 떨려 왔다. 남편은 마지못해 사과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의 전화, 보이스 피싱 (출처 : 경향DB)


사과는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만이 아니다.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내 어리석음과 게으름 때문에 매우 치밀하게 일을 꾸민 남자가 무려 이틀 동안이나 헛공을 들였다. 그 점 사과한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돈이 필요하시면 은행에 가세요. 제 발로 은행에 가는 수고 정도는 하셔야죠. 전화로 모르는 사람이 내 편리를 봐준다고 하면 100프로 다 사기라는 거 잊지 마시고요.” 내 전화를 받은 112 담당 형사는 그렇게 훈계했다. 그의 말이 맞다. 우리의 신용정보는 대부분 다 털렸다. 그 신용정보 안에 당신을 낚아챌 수 있는 미끼의 내용이 담겨 있다. 편리할수록 의심하시라. 전화는 안된다. 그보다는 우리의 발이 더 믿을 만하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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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대 남성이 돌연사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이 나라에서 ‘중년 남성’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왠지 울적하다. 모든 것을 서열화하고 약육강식의 원리로 쉴새없이 찍어누르는 사회 속에서 알맞게 구겨지고 비굴해진 남자의 씁쓸한 모습. 하지만 그 살찌고 망가진 육체 안에 여전히 풋풋한 ‘소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문득 슬퍼진다.

앗, 그런데 그런 그들이 최근 느닷없이 출판계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오십대가 되면 감수성이 예민해진 남성들이 여성보다 소설이나 시집 같은 문학책을 더 많이 읽는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문학 중년’이라는 말까지 유행하고 있다니…. 매우 센티멘털하게 느껴지는 굿 뉴스여서 오랜 만에 가슴까지 설렜다. 심지어 혼자 신이 났다. 중년 남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의 리스트를 떠올리며….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은 레이먼드 챈들러. 석유회사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지만 ‘자기 내면에서 살고 있던 소년의 불꽃’이 저지른 일련의 실수 때문에 해고당한 후 실업자가 되어 비로소 소설을 썼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단연 첫 번째로 꼽고 싶다. 44세부터 쓰기 시작해서 51세가 돼서야 마침내 첫 장편 소설 <빅 슬립>을 출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대가가 된 그다. 무엇보다 그가 창조한 필립 말로라는 탐정이 너무도 매력적이다. 부패와 탐욕이 들끓는 시대의 욕망과 절망을 추적하는 외롭고 위험한 인물. 냉철하지만 감상적이고, 신랄할 정도로 지성적인 남자. 타락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가난했던 패배자. 하지만 그 영혼만큼은 결코 패배할 수 없는…. 그 남자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탐정 소설 <빅 슬립>이나 <안녕, 내 사랑>, 그리고 그를 창조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창작 비밀이 담긴 에세이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함께 추천한다.

두 번째 추천작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폴 고갱의 삶을 모델로 한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마흔에 집을 떠난다. 버젓한 사회적 지위를 지닌 증권 중개인이며 아내와 두 아이까지 거느린 사람이 마흔이 되어 느닷없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몰인정하게 처자식을 내팽개친다. 그리곤 세상 사람들이 비열하다고 욕해도 본인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승산 없는 도박처럼 보이는 일’이었겠지만 그 자신에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어떤 진실한 열정이 이끄는 일이었으니까. 천하의 악질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암처럼 자라고 있던 창조 본능’에 따라 화가가 된 남자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중년이라는 나이가 마치 ‘악의 꽃’처럼 매우 유혹적으로 느껴진다.

한 중년 신사의 독서 삼매경 (출처 : 경향DB)


세 번째는 언젠가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고 했던 분에게 추천하고 싶었던 책이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맞다, 얼마 전 제레미 아이언스가 그 주인공 역을 연기했던 동명의 영화 원작 소설. 라틴어 교사로 조용하고 정돈된 삶을 살던 한 남자가 수업을 하다 말고 ‘그냥’ 떠나버리는 이야기. 심지어 그는 가방조차 챙기지 않았다. 가방을 교실 탁자에 그대로 남겨둔 채 남자는 리스본으로 떠나 버린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포르투갈의 한 귀족이 쓴 책에 이끌려 저자가 침묵한 책 속의 비밀들을 파헤쳐 보고자 리스본으로 떠났을 때의 나이가…. 나라는 한 인간을 규정하던 직업, 관계, 도시, 나라 같은 매우 익숙한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에 종종 목이 멘다면 나이를 떠나 누구에게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정확히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것만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게 바로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라고 난 생각한다. 그 나머지 세계, 우리가 그 나이가 되도록 미처 경험하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를 엿보고 새로운 인생, 새로운 나에 대한 전망을 얻고자 하는 중년의 독서 말이다.

누구보다 중년의 위기와 그 가능성에 주목했던 심리학자 칼 융에 의하면 중년은 새로운 중심이 ‘자기’가 될 절호의 타이밍이며, ‘자기로 살아가는 평화’와 ‘변화를 통한 치유’를 모색할 때다. 무엇보다 중년에겐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자의든 타의든 경쟁 구도를 떨어져 나가 얼마간 체념한 자의 정신적 여유.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 경험에 의해 폭넓게 확장된 의식과 비전을 가지고 나 자신이 품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여유 말이다. 그러니 즐겁게 골라 보자. 무슨 책을 읽을지…. 자기계발서는 가련한 청년들에게나 던져주고 이제는 시집이나 소설을 읽을 때라는 거 잊지 마시고.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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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엄마 나이, 올해 71세다. 그런데 얼마 전 하시는 말씀이 찬란하게 놀라웠다. ‘지금 인생에서 절정의 행복을 느낀다’는…. 엄마의 고향은 전라북도 부안이다. 가난한 농촌 출신의 젊은 부부는 삶이, 무엇보다 자식들의 삶의 조건이 조금이라도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도시로 이주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 남편은 뿌리 뽑힌 수목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방황하다가 먼저 서둘러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막내딸이 아홉 살 되던 해였다. 그 이후 젊은 부안댁은 아이들을 혼자 키웠다. 남편도 없이 도시에서 세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건 온갖 설움과 수모, 육체적 고통을 수족인 듯 달고 살아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얼마나 악착스럽게 살았던지 남자 몫의 일당을 받기 위해서 벽돌 70장 얹은 지게도 졌다는 게 이제 와 무용담처럼 들려주는 엄마의 얘기다.

“외로움이니, 두려움이니 그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 감정은 내게 사치였어.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어린 새끼들을 굶길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엄마에게 물었다. “그래서 행복한 거야? 그렇게 키워낸 자식들이 이제 다들 그런 대로 먹고살 만하니까?”

“올해 니 오빠 막내까지 대학 보내고 나서 비로소 내 시간, 내 인생을 마음껏 누리게 됐으니까. 여행가듯 내 발로 시골 딸네 집 와서 이렇게 산으로 들로 실컷 쏘다니다 지치면 커피 한 잔 마시고 책을 읽고 낮잠을 잘 수 있다니…. 그냥 행복한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행복이라니까. 황혼의 행복…. 아주 황홀할 정도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가 얼마나 신선하게 빛나 보이던지…. 신비로울 정도였다. 누군가 엄마에게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문득 그날 엄마가 읽고 있던 책이 궁금해졌다. 강상중 선생의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TV가 없는 산골 딸네 집에서 너무도 심심해진 나머지 읽게 된 책. 엄마는 그 책을 읽다가 몇 번인가 돋보기를 내려 놓고 눈물을 찍어냈다.

김상중 저서 '살아야 하는 이유'


“아들이 죽었나봐. 극도의 신경증인지 우울증인지 뭐 그런 병에 걸려서 많이 아팠던 모양인데 그 때문에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다는구나. 자식이 그리 죽으면 얼마나 비통할까? 나라도 살기 싫어서 구태여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겠구나 싶어 절로 눈물이 났다.”

19세기 미국인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에는 행복이 ‘타인의 불행을 바라볼 때 생기는 일종의 안도감’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혹시 엄마가 일흔이 넘어 느낀다는 그 ‘절정의 행복’은 그런 안도감과 비슷한 것일까?

“말도 안돼. 이 나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목격했겠니? 그런 걸 보면 내 일인 듯 가슴이 아프지, 안도감이라니…. 그런 게 아니라, 뭐랄까. 난 못 배운 사람이잖니? 자식들한테 물려줄 재산도 없고. 살 날도 얼마 안 남았고. 그런데도 순간순간 사는 기쁨을 느끼는 내가 새삼 고마운 거지. 이런 삶도 하늘의 축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엄마와 함께 기억되는 그 인연 때문에도 나는 지난 봄부터 강상중 선생의 신작을 기다렸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소설이었다. 친구를 잃은 스무 살 대학생과 아들을 잃은 중년의 교수가 죽음과 삶에 관해 주고받는 편지로 구성된 소설. ‘죽는다는 건 무의미하게 그냥 사라지는 건지, 그렇게 죽을 거라면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인생에 살 의미가 있는지’ 묻는 청년의 편지에 소설 속 화자이며 작가 그 자신이기도 한 강 교수가 답한다. “사람이 사는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며 “과거는 그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가 죽었다 해도 분명히 존재했던 그만의 과거로 있는 거라고.

실제 아들의 죽음과 함께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수많은 죽음들을 목격하면서 그 많은 죽음을 이대로 잊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강 교수 자신의 체험담과 마음이 담긴 소설 <마음>을 읽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세월호와 함께 사라진 300여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했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는 과거로서 우리에게 전하는 유산이 무엇인지….

“내 어머니를 보렴. 시장에서 다라이 파는 여자의 고맙다 소리가 이상하게 가슴을 울린다며, 마당에 호박이 이렇게 예쁘게 열렸다며 좋아하는 내 어머니….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단다. 넌 그걸 발견해야 해. 살면서 그때그때, 그 장소에 있는…. 다른 사람들 말은 듣지 마. 특히 괴물 같은 국가나 기관에 종속된 어른들 말.”

죽은 내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다. 난 내 아버지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들을 통해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삶에 대한 더 많은 중요한 얘기를 들려준다’는 걸 알았다. 따라서 우리는 제대로 살기 위해 죽은 자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행히 죽은 자들은 책 속에 살아 있다. 귀 기울이면 그들이 응답한다. “새로운 세대는 마치 난파된 배를 버리듯이 지나간 세대가 벌여놓은 사업을 버리는 법이라오” 했던 소로처럼 말이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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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에로 연애소설’ 3부작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대해서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일반의 성도덕과 삐딱하게 대립하는 이 작품은 서로 속박하고 학대당하는 가운데 쾌감을 느끼는, ‘BDSM’이라는 은밀하고 괴이한 성생활을 중심으로 한 어느 남녀의 연애 이야기다. ‘BDSM(구속과 순종, 지배와 굴복,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뜻하는 약어)’이라는 단어가 낯설다면 그냥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뜻하는 약어 ‘SM’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여하튼 순결한 여대생이 돈 많은 부자 청년과 노예 계약을 맺고 결박당한 채 매를 맞으면서 쾌락을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하며 자아정체성을 찾는다는 이 소설이 <해리포터> 시리즈와 비슷한 속도로 많이 팔려서 영어권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다고 한다. 이해가 되나? 난 안 된다. 너무도 낯설고 기이해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실제로 그 책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사회학자가 있다. 얼마 전 출간된 에바 일루즈의 신작 <사랑은 왜 불안한가>는 일명 ‘엄마 포르노’라고 불리는 ‘그레이’ 시리즈가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는지 주목하며 현대인의 섹스와 애정 생활의 짐작하지 못했던 어떤 차원을 폭로한다.

에바 일루즈에 의하면 ‘그레이 시리즈’는 여성이 여성을 위해 쓴 소설이다. 그것도 아마추어 여성 작가가 인터넷 게시판에 평범한 여자들을 위해 쓴 소설. 이 때문에 사도마조히즘적 섹스를 전면에 내세운 에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 특히 어머니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인기를 누렸다. 그래서 ‘엄마 포르노’라고 한다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엄마들의 폭발적인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낸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에바 일루즈에 의하면 이 책은 포르노에 가까운 특성을 보여주면서도 우리가 익히 아는 통념 즉 전형적인 연애 소설적 요소를 모두 갖춘 러브스토리다.

무엇보다 남자 주인공 ‘그레이’가 평범한 여자들이 남성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 사랑 없이 오직 즐거움과 기분 전환을 위한 사도마조히즘적인 섹스를 선호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젊고 매력적인 데다가 무엇보다 막강한 경제력과 정력을 자랑하는 최상류층 남자다. 그런 남자가 모든 평범한 여자와 마찬가지로 내심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거나 충분할 정도로 특별하지도 않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여자 ‘아나’를 선택한다. 심지어 사랑 없이 시작한 가학과 피학의 변태적 섹스 게임이 처음엔 쾌락으로 그 다음엔 사랑으로 변한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오로지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섹스에만 집착하고 사랑을 기피하던 남자가 변한다. 한 여자에게 헌신하는 지극히 낭만적인 애인으로의 변신! ‘신데렐라’로 대표되는 진부할 정도로 흔해빠진 러브스토리라는 말이다! 다만 “빅토리아 시대의 남자가 자신의 연정을 시와 꽃다발로 증명했다면 ‘그레이 시리즈’에서는 남자가 연인에게 바이브레이터와 항문섹스, 그리고 헬리콥터 소풍으로 대신한다”고 에바 일루즈는 재치있게 폭로한다.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작가 E L 제임스가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출처 :AP연합뉴스)


한편 이 문제의 책은 포르노라기보다 ‘할리퀸’류의 전형적인 러브스토리이면서 ‘에로티시즘의 자기계발서’에 가깝다니 재밌다. ‘포르노’가 외로운 남성에게 성적 자극을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 책은 상대방이 섹스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끌어올릴 기발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독자들에게 매우 자세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란다. 일례로 이 책이 출간된 후 ‘눈가리개’나 ‘회초리’ ‘나를 묶어줘 세트’ 같은 성인용품 매출이 미국에서 급증했다. 심지어 소설에 나오는 모티브에 맞춘 특별한 옷차림과 호텔방을 찾는 마니아들이 있는가 하면 ‘그레이 시리즈’ 팬들을 위한 공식적 편집 음악 앨범까지 나왔단다.

흥미로운 건 저명한 여성 사회학자인 저자가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현대의 애정관계와 한없이 권태로운 성생활에 대한 대안, 혹은 처방전으로서 ‘놀이 혹은 유희로서의 사도마조히즘’을 권한다는 사실이다. ‘정상적 섹스관계가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얼룩지는 반면’ 고도로 형식화된 BDSM은 ‘파트너의 역할과 위상’을 확실히 설정해 줌으로써 오히려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한다고.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국내에서도 출판된 ‘그레이 시리즈’는 반응도 판매도 영 시원치 않았다. 왜일까? 오늘날 미국 인구의 5~10퍼센트 사람들이 사도마조히즘 섹스를 경험하고 있으며 사도마조히즘이 일종의 문화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진부해도 정상적인 섹스에서 되려 안정감을 느끼는 ‘미개한 국민’일 뿐이다.

에바 일루즈라는 여성 사회학자의 가장 신선한 주장은 ‘평등이 섹스 욕구를 퇴색시켰다’는 거다. 다시 말해서 남녀평등은 그다지 섹시하지 못하다는 지적. 동의한다. 그렇다고 굳이 민망한 것은 물론 돈 아깝게 성인용품 매장을 찾을 필요는 없을 터다. 오늘 밤 당장 아내든 연인이든 당신 옆에 누워 있는 여자의 눈을 땀에 젖은 당신의 손수건으로 가리고 손은 넥타이로 묶어보자. 그리고 명령하는 거다. “자, 말해. 내 옷을 찢고 날 정복해달라고.” 일종의 게임이며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로서의 섹스! 흠, 확실히 남녀평등보다는 섹시하게 느껴진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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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누구나 그럴 거라 믿는다. 요즘은 뭘 하든 세월호와 함께 바닷속에 잠긴 아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설거지를 하거나 정원 일을 하다가 문득문득 몸서리를 치기도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한다. 슬퍼하고 분노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욕이나 하며 넋 놓고 앉아 있는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고.

정말이지 뭐라도 하고 싶다. 그래서 어떤 이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고, 또 어떤 이는 목숨 걸고 청와대 게시판에 실명으로 ‘이런 대통령 필요 없다’는 글을 올렸다.

5월11일 ‘뉴욕타임스’ 일요판에는 세월호 비극과 관련해 박근혜 정부의 무능력과 부패를 고발하는 전면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미국에 사는 교포 여성들이 ‘미시USA’라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서 기획하고 4000여명이 함께 돈까지 모아서 실현시킨 엄청난 금액의 매우 의미심장한 광고였다.

이 세상의 끔찍함과 절망감 앞에서 무기력해지면 안된다고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기력해지는 것을 원하는 자들이 있고, 그자들이 지금 우리를 지배하며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걸 모두들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이 사는 이 나라를 그들 손에 맡겨두어서는 안된다는 자각 말이다.

그런데 그 광고에 대한 새누리당의 반응이 재밌다.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에 의하면 미국에 사는 한국인 어머니들이 ‘세월호 비극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단다? 어쩜 발상들이 그리 똑같은지? 머리가 나쁜 건가? 사흘 전 새누리당 홍문종 사무총장이 했던 말과 똑같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일부 세력이 세월호 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선동하고 있다’는…. 그런데 이걸 어쩌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우려를 통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뭔지 알게 됐다고 할까? 거대한 이 국민적 슬픔과 분노의 힘을 정치화하기! 정치화해서 시민들 스스로 힘을 갖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못된 정치인들부터 몰아내기!!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신성한 주권의 힘으로!

속지 말고 쫄지도 말자. ‘정치’ 혹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는 결코 나쁜 말이 아니다. 진짜 ‘정치’는 결코 ‘밥그릇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편 가르기’가 아니고 ‘줄 서기’도 아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눈 가리고 아웅 하기’ 같은 기만적 시늉도 아니다. 이 잘못된 세상을 개선하고 싶은 열망을 지닌, ‘빽’ 없고 ‘줄’ 없고 ‘힘’ 없는 일개 개인들이 그 뜻을 모아 연대하고 세력화하여 국가적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총리나 국회의원 같은 이름으로 권력을 얻고 돈을 버는 직업적 정치인들 때문에 그 의미가 좁아지고 그 가치가 말할 수 없이 훼손된 정치가 아니라, ‘진흙 속에 연꽃 피워내기’ 같은 진짜 아름다운 정치 말이다.

1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618선거권을 위한 시민연대'소속 청소년들이 "가만히 있지 않으려는 작은 발걸음, 청소년 정치적 권리 선언"을 주제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홍도은 기자 hongdo@kyunghyang.com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 트위터에서 이런 명언을 봤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가장 큰 벌은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맞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세월호와 함께 심장이 아픈 그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열망을 담아낼 정치적 그릇이 없다는 거다. 대다수 시민들의 안전과 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과 정치인 말이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그걸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킬 정당과 국회의원들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여당은 물론 야당도 믿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여당은 물론 여당보다 더 떨어진 야당 지지율이 그 사태를 방증하고 있다. 도무지 믿을 만한 정치 집단이 없다는 것. 너무도 탐욕스럽거나 타협적이거나 무능하거나 다소 수상스럽거나 아니꼬운 고만고만한 정당이 있을 뿐.

그러던 며칠 전 마당에 생울타리용 사철나무를 심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우리에게는 ‘시민연대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0원짜리 사철나무 120그루가 모이면 듬직하고 아름다운 생울타리가 만들어진다. 그렇듯 시민 연대의 필요성을 느끼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지만 깨끗한 돈으로 정당 회비를 내고 스스로 이 나라의 기본적인 안전과 품위, 아름다움을 지켜내기 위한 한 그루의 사철나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 그릇이 되어줄 정당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요즘은 나 혼자 이런 꿈을 꾸고 있다. “정치적으로 자각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참여연대’와 함께 시민연대당을 만든다. 그러자 당비 내겠다는 시민 진성당원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든다. 이에 고무된 기존 정치인들이 이제야말로 정당과 지역, 이념, 온갖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활동을 해야만 하는 때가 왔다며 너도나도 자발적으로 자기 정당을 버리고 시민연대당으로 모여든다. 예컨대 박원순, 문재인, 박영선, 심상정, 이정희, 노회찬, 유시민, 문성근, 장하나, 김상곤, 김두관 같은 야당 정치인은 물론 새누리당의 혁신파 의원들까지 품은 사상 초유의 범국민적 거대 야당 시민연대당의 탄생!” 감히 그런 꿈을 꾼다. 물론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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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그러니까 19세기 초반 프랑스에 나이 든 여자들만 골라 사랑하는 드메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사랑은 언제나 열정적이었지만 사회적 관습에 부딪혀 언제나 보답받지 못했다. 어느날 청년이 천재적인 지성과 마성에 가까운 매력으로 수많은 남성들을 사로잡았던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쇼팽의 연상의 여인으로 유명한 그녀의 별명은 ‘쇼팽을 말려 죽인 늙은 암여우’였다)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사랑이 어디에 있기에 나에게 이토록 멀기만 한 겁니까?” 그녀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무심하게 “혹시 우물 속에 있을지 모르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드메는 사랑을 찾기 위해 당장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드메라는 청년은 금지된 사랑에 굴복하지 않고 사랑을 향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던졌고, 사람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연상의 여인과 연하의 남자가 사랑하는 것을 ‘드메 커플’이라고 불렀다.

요즘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JTBC 드라마 <밀회>의 김희애·유아인 커플 얘기다. 드메의 우물 투신사를 연상케 할 만큼 유아인이 연기하는 스무 살의 천재 피아니스트 ‘선재’는 김희애가 연기하는 마흔 살의 유부녀 ‘혜원’에게 푹 빠져 있다. 특히나 8회에서 선보인 첫 베드신이 압권이었다. 일명 ‘망봐주고 싶은 베드신’이라고 불리는….

남루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청년의 아파트에서 청년의 니트를 입고 있는 중년의 여자에게 청년이 홀릴 듯 말한다. “겁나 섹시해요.” 자신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무섭도록 솔직한 청년의 말이다. 여자도 이제 1백퍼센트 그 진심인 청년의 마음에 기꺼이 무너지고 싶은 모양이다. 살짝 나무라 듯 “그런데 그러고 서 있어?” 묻는다. 매우 시적인 움직임으로 카메라가 천천히 청년의 방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동안 카메라 저 뒤편에서 목소리만 들려온다. “저 잘 못할 수도 있어요.” “내가 너보다 못할지도 몰라.” “그건 내가 판단해요.”

삼십 대 중반부터였을 거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의 섹슈얼리티에 느닷없이 호기심을 품기 시작한 게. 물론 그건 정확히 어린 남자를 통해 성숙한 여자가 경험했을 열락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었겠지만. 여하튼 그때부터 나이 든 연상녀와 그보다 한참 어린 연하남(거의 소년에 가까운)의 ‘러브 어페어’를 다룬 영화들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청춘>이나 <쿵후 마스터>, <피아니스트>, <이투마마>, <알피>, <사랑니>, <책 읽어 주는 여자> 같은 영화들.

그 중 특별히 좋아했던 영화가 있다. 제인 버킨이 나오는 <쿵푸 마스터>로 국내에서는 <아무도 모르게>라는 제목으로 출시됐던 영화다. 한마디로 30대 중반의 이혼녀가 사춘기 딸의 남자 친구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딸의 남자 친구에게 푹 빠진 제인 버킨의 매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영화. 심지어 버킨의 친딸인 샤를로뜨 갱스부르가 엄마의 연적으로 출연하는 영화. 제인 버킨이 어린 딸에게 ‘솔베이지의 노래’를 나직하게 불러주는 장면(중학생 남자 아이마저도 친구 엄마에게 반하게 되는 장면).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문제 많은 이 커플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해 무인도로 도피 여행을 떠났을 때도 생각난다. 버킨이 미끌거리는 바다 미역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후, 14살 애인한테 묻는다. “나 예뻐?”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영혼이 떨린다. 제인 버킨의 그 순진한 사랑스러움에.

영화 '아무도 모르게'의 한장면 (출처 :경향DB)


제인 버킨이 사랑한 상대는 부모와 떨어져 사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였다. 좀 외롭고 조숙한 아이. 쿵푸 마스터라는 비디오 게임을 즐겨하고, 콘돔에 물을 부어 아이들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장난꾸러기 중학생. 슬프게도 녀석이 게임을 완전히 마스터할 무렵에는 그들의 사랑도 끝나게 되는데, 영화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녀석이 담배를 꼬나물고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보면 가슴이 무너진다. “어떤 돈 많은 여자를 사귀었는데 말야. 가슴도 납작하고 늙어서 차 버렸어.” 애통한 마음마저 들었다. 저 어린 것이 벌써 정복과 복종이라는 남성적 질서 안에 편입되어 사랑을 비루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구나, 하고 말이다.

소년이 오직 사랑을 위한 순수한 존재일 수 있는 건, 래퍼 에미넴의 표현을 빌리자면 ‘페니스는 짧아지고 고환이 커지기 직전’까지 일뿐이다. 그리고 나면 책임과 권위의 족쇄에 갇히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그는 앞뒤 안 가리고 순수하게 사랑만 할 수 있는 열정적인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하지만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언제나 사랑을 원한다. 사랑은 여자의 전 생애를 아우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걸 깜빡 했던 거다. 언제나 사랑을 원했지만, 악마의 속삭임에 돈과 지위와 서열과 스펙에 따랐던 그 이율배반적인 면 때문에 여자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짓과 기만에 찬 것이 되고 말았다. 많은 아름다운 여자들이 의사와 변호사를 선택하고, 그리고 매우 부유한 여자들조차 자신보다 돈이 더 많고 지위도 더 높은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너무도 당연한 세상에서 자신이 무엇보다 사랑을, 사랑의 순수를 원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그 순수한 기쁨을 되찾고 싶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여자가 두려운 것은 세상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랑에 대한 배신이니까.

근대 성 이론은 소년들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사랑의 감정에 대해 강박적이고 감정적으로 절제하지 못하는 여자들의 성향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지혜와 충만한 정신, 에고를 어루만져 주는 어머니 같은 너그러움까지 지닌 중년 여성에게 끌리는 젊은 남자와 부과 권력이 있다 해도 사랑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중년 여성의 결합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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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명세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메시지를 원한다면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쳐라.” 그 말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메시지보다 우선하는 건 스타일이라는 말이다.

자기만의 양식과 관점, 태도. 그게 스타일(Style)이다. 그리고 훌륭한 감독은 저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이명세의 영화는 감독 타이틀을 지운다 해도 영화적 스타일만 보고 그게 누구의 작품인지 눈 밝은 관객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베를린>과 <설국열차>의 감독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라면 아무리 눈 밝은 독자라도 그 감독을 가려낼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외국 자본(특히 할리우드)이 끼어들면 감독 저마다 스타일이 조금 옅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좋아한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가장 돋보이는 감독이다. 어떤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든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할까? <로얄 터넌바움>부터 <다즐링 주식회사> <문라이즈 킹덤>까지 대단히 미학적이며 유희적인 그 특유의 스타일에 난 늘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준다니 궁금해죽겠다.

하지만 그걸 보자고 만사 제쳐두고 서울에 갈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내가 사는 강원도 평창에서 서울까지는 왔다 갔다 무려 4~5시간 거리다) 그 대신 부다페스트에 대한 회상에 젖어본다. 영화에서는 주브로브카공화국이라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를 만들었다. 20세기에 접어들기 전에 급부상하기 시작한 동유럽의 온천 도시, 주브로브카. 영화 타이틀이 증명하는바 틀림없이 부다페스트에서 영감 받은 도시다.

사실 부다페스트만큼 천연 온천수로 축복받은 도시가 없다. 그 역사는 무려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역사상 ‘온천 냄새’를 가장 잘 맡았던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부다페스트에서 온천수를 발견했다. 당시 로마인들이 세웠다는 아퀸쿰이라는 이름의 ‘물의 도시’는 지금은 거의 지명이나 거리 이름으로만 남아 있고, 부다페스트의 온천이 지금과 같은 황금기를 맞게 된 배후에는 역설적으로 150년간 오스만튀르크의 지배가 있었다. 로마인 못지않은 목욕 문화를 가졌던 터키인들은 그들만의 개성이 듬뿍 담긴 새 목욕탕을 건설했는데 그중 몇몇은 아직도 성업 중이라 그 오래된 신비와 역사 속에 누구나 몸을 담글 수 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출처: 경향DB)


관광객들에게는 무슨 근대 왕궁처럼 보이는 세체니와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아르누보 스타일의 온천장 호텔 겔레르트가 가장 인기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키렐리와 루다스를 더 좋아했다.

키렐리 같은 경우 16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부다페스트에 남아 있는 오스트만튀르크 시대의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이다. 19세기 초까지 이 욕장의 소유주가 왕족이어서 ‘왕의 온천’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요금이 겨우 1만원 안팎이다. 가장 오래된 온천답게 모든 것이 ‘구식’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안내원이 탈의실로 안내해주고 손님이 보는 앞에서 두 개의 열쇠로 꼼꼼하게 잠근 후 하얀색 분필로 나무 문 위에 사용자가 있음을 표시하는 모습 같은 것. 욕탕 내부는 더욱 클래식하다. 욕탕에 누우면 정교한 8각형으로 장식된 천장이 보이고 손바닥만 한 원형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신비롭게 물 위에 반짝이는 걸 음미할 수 있다.

오랜 기간 리모델링을 거쳐 최근에 다시 개장한 루다스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온천장이었다. 만병통치약이라며 온천수를 그냥 막 마시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수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실내 분위기도 황홀하다. 높은 돔 천장과 그 천장을 장식하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연출하는 빛의 향연. 가슴이 드러나는 모양의 하얀색 가운을 입고 머리로 폭포수를 맞는 여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에로틱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어느 계절에나 근사한 부다페스트의 온천장들이 그립다. 지금 이 순간, 루다스온천장에 앉아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돔 천장을 올려다보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해본다. 다시 헝가리에 간다면 호수 온천으로 알려진 헤비즈에도 가보리라. 그리고 헝가리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열렬히 마시고 흠뻑 취하리라. 그래도 괜찮다. 몸 안의 독소를 가장 우아하고 관능적인 방법으로 제거할 수 있는 유서 깊은 온천장에 언제라도 몸을 적실 수 있으니.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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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수의 금메달 소식을 듣고 갑자기 미켈란젤리의 피아노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원래 불현듯 떠오르는 충동대로 움직이는 매우 경박한 성격의 인간인지라 단박에 목표물을 찾아 돌진한다. 


‘BBC Legends’ 시리즈로 나온 <michelangeli> 앨범. 한때 정말 마르고 닳도록 듣던 앨범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2번과 4번, 드뷔시의 이미지 중 ‘Hommage a Rameau’,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등 총 5곡의 피아노 솔로 연주곡이 실린 앨범인데 그중에서 한 곡을 골라 내 멋대로 빅토르 안에게 바칠 셈이다. 도대체 무슨 의도냐고?


미켈란젤리는 이탈리아 태생이다.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무결점의 완벽주의를 지향했던 천재 피아니스트다. 천재라는 표현에 그 누구도 딴죽을 걸 수 없었던 것이 그는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한 뒤 6년간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으며, 나치를 혐오해서 공군에 자원입대한 공군조종사이며, 카레이서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피아노 한 대를 철저하게 분해하여 다시 완벽하게 조립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연주자였다니, 말 다했지. 그런가하면 녹음할 때든, 공연할 때든 단 한번의 미스 터치도 허용하지 않는 무결점의 명료한 연주(거기에 섬세함과 우아함을 겸비한)를 지향했는데 유별난 것은 전용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닐 정도였다고. 그만큼 자기 피아노를 분신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조국 이탈리아가 미켈란젤리를 감히 욕보였다. 분신 같은 피아노 두 대를 압류하고 집과 현금까지 뺏어 갔다. 그것도 미켈란젤리의 전속계약사인 BDM 레코드 회사가 파산했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거의 깡패질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사실상 국가가 마피아였다. 이에 불 같은 성격의 미켈란젤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스위스로 망명해 버린 후 이탈리아라면 평생 이를 갈고 살았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공연장에 이탈리아인들의 입장을 불허했으며 주최 측이 그 룰을 어기면 아예 공연을 취소해버렸다. 이 부분에서 ‘뒤끝 작열’이라며 미켈란젤리를 속 좁은 인간 취급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나는 그를 옹호한다. 기질적으로 이탈리아인과 무척이나 달랐던 그는 오스트리아로 연주여행을 갈 때마다 한번도 거주한 적 없는 그 나라를 ‘우리나라(My Country)’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개인의 인권과 개성을 존중한 세계주의자였고 또 자유주의자였다.


솔직히 난 이 놈의 나라가 싫다.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쪽 팔려 죽겠다. 이석기 판결을 두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주요 외신들의 기사를 보고 있으면 화딱지가 난다. 그러니 서세원같이 약삭빠른 자가 애국 노인들을 앞세워 ‘빨갱이를 몰아내자’며 <건국 대통령 이승만> 영화를 만들겠다고 큰소리 치는 거 아닌가? 아이고, 열 불 나. 그뿐인가? ‘자녀를 한 명밖에 안 낳은 사람은 반성하라’는 김무성 의원의 흰소리는 또 뭔가? 여당의 대표 의원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일개 개인에게 돌리는 수작 아닌가? 대통령은 한 수 더 뜬다. ‘의료자법인 설립 통해 많은 일자리 창출’이라니, 그거 의료영리화를 위한 ‘설레발’ 아닌가? 입에서 당장에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안현수가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따고 빙판에 키스하고 있다(출처: 연합뉴스)


“의료영리화 된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으니 진짜 그렇게 할 거면 내가 지금까지 낸 국민건강보험료와 국민연금 다 돌려줘. 지금까지 받은 보험 혜택 전부 까도 좋다. 그것만 돌려주면 이 나라를 떠나주마. 아주 아쌀하게!”


농담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유례없는 이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얼마든지 스스로 살고 싶은 곳에 정착할 수 있다. 자기가 살 곳을 스스로 결정하는 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하는 가장 극적인 방법이다. 국가든 체제든 회사든 조직이 우리에게 좌절감과 수치심을 안겨 주는 것도 모자라 욕보이고 배신하고 ‘물’ 먹인다면 적극적인 반항의 의미로 얼마든지 이민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조직은 힘이 세지만 대신 무겁다. 나라는 한 인간은 힘이 없지만 가볍다.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 그것이 ‘참을 수 없는’,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되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물론 리스크가 없는 건 아니다. ‘안현수현상’을 두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는 매우 위험한 성공 사례를 보여준다’고 쓴 트윗이 요 며칠 트위터상에서 아주 인기였는데 그 말이 맞다. 한국인이 러시아 국기를 가슴에 단 안현수를 뜨겁게 응원한 이유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의 대리만족과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현수가 아니다. 안현수가 아니기에 맨땅에 헤딩할 각오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에밀 시오랑처럼 모국어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며 자신과 외국어 사이의 메울 수 없는 틈 때문에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은가? 그렇담 용기를 내보자. 국민 귀한 줄 모르는 국가를 넘어서자. 어떤 식으로든.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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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김윤숙 기자로부터 집필 안내 메일을 받을 때마다 즐겁다. 일상에서 느끼는 이런저런 소회를 적은 글과 함께, 직접 찍은 사진까지 담아 보내는데 그게 마치 한 편의 짧은 포토 에세이를 보는 듯한 여운을 줄 때가 많다.

특히 이번 집필 안내 메일이 그러한데, 열 살 된 여 조카가 만들어 준 핸드 메이드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모니터를 두드리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보낸 준 글(‘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제 손이 아름다워 보일뿐더러 이 조그만 책상이 지구처럼 느껴집니다’)이 내게 일종의 영감을 줬다.

함께 공방에 다니며 가구 만들기를 배웠던 내 조카 생각이 났다. 언젠가 이 지면에도 썼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을 선물했더니 대학 못 가 삼수하고 있는 처지에 “청춘이 왜 아파요? 청춘은 즐거운 거예요” 했다던 녀석이다. 그 녀석이 얼마 전 내게 손수 만든 가구를 선물했다. 삼수 끝에 모 대학의 공모전 대상을 차지하며 결국 대학에 갔는데 그게 다 내 덕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저한테 만드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셨잖아요. 저에게 창조적인 능력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해 준 분한테 선물하고 싶어서 지난 학기 내내 틈나는 대로 만들어봤어요.” 솔직히 나 울었다. 조선시대 문갑을 응용한 현대적인 느낌의 책장을 손으로 쓸고 닦고 냄새 맡으며 그걸 만든 조카의 수천 번의 손길을 느끼고 또 느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저마다 물건을 구매하거나 얻기보다 스스로 만들어 쓸 줄 아는 능력을 얻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스스로 뭔가 창조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내 조카가 한 말이 있다. “저처럼 둔한 놈이 이런 걸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어요. 내내 열등생으로 살았던 제가 처음으로 자긍심이라는 걸 갖게 됐다고 할까요?”

 

(경향DB)

그 다음 자신이 만든 물건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결코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사랑하는 법’을 덤으로 얻게 될지도 모르고. 예컨대 전설의 영화배우이며 연애 박사였던 캐서린 햅번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경험적 지성 같은 걸 - ‘사랑은 당신이 받고자 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당신이 주고자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했던- 어슴푸레 터득하게 되는 거다.

세 번째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인간적인 온기를 품은 단순하고 소박한 물건의 아름다움과 진가에 눈뜨게 된다는 거다. “아직 숙련된 기술이나 예술적인 재능이 부족해서 될수록 단순하게 디자인했거든요. 처음엔 칸마다 서랍을 다 넣으려고 했는데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서 일단 서랍 없이 가져왔어요. 근데 작은 어머니가 그게 더 실용적이고 아름답다고 하시니 말할 수 없이 뿌듯하네요.” 내 조카가 했던 그 말에 내가 이렇게 답해줬던 기억이 난다. “Less and More, 덜어낼수록 풍요로워진다! 미술과 공예를 통합한 생활 예술 운동을 전개했던 윌리엄 모리스의 혁명적 구상이 결국 실패한 것도 실은 디자인이 너무 화려했기 때문이야. 화려하면 할수록 가격이 높아지니까. 보통 사람들이 실용적인 생활용품으로 쓰기에 지나치게 비싼 게 문제였지. 그 점 알아 두고.”

네 번째. 자기 손을 써서 일하는 타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 “예전에는 교수나 기업가, 혹은 영화배우 같은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는데, 요즘은 숙련된 기술의 장인들을 더 존경하게 됐어요.” 아무렴 그래야지. 학벌이나 재산, 혹은 인맥이 아니라 오랜 세월 정직하게 갈고 닦은 몸의 기술로 승부하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니까.

다섯 번째. 창조적인 부의 영역 안에서 누구보다 더 능동적으로 살 수도 있다는 점. “제가 암기력이 시원치 않아서 수학도 영어도 정말 못 했거든요. 그래서 남들처럼 성공한다거나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해 본 적도 없어요. 다만 내 손으로 가구를 만들 수 있고 그걸 구매한 누군가가 작은어머니처럼 애정을 갖고 사용해 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바로 그거다. 나날이 향상시킨 내 기술로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내 삶을 내 스스로 개척하며 살 수 있다는 자신감. 나아가 누구나가 단순히 소비자가 아닌 창조자로서 세계에 관여하며, 심지어 세상을 구하고 바꿀 수도 있다는 의지. 그게 바로 우리 시대 청춘들의 로망이어야만 미래에 비로소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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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가 생각난다. TV조선에서 2013년 최신 ‘등골 브레이커’는 여학생들의 ‘파우치 속 고가의 명품 화장품’이라며 수입 화장품을 쓰면 ‘엘프(리니지 게임에 등장한 늘씬한 미모의 종족)’고 고가의 국산 화장품을 쓰면 그냥 ‘인간’, 저가의 국산 화장품을 쓰면 ‘괴물’이라며 무슨 자료 사진까지 넣은 도표를 만들어 보여주는 화면을 보고는 부들부들 떨었던 기억이 난다. 조선 특유의 그 느글거리는 속물성에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을 느끼며.


<허영의 시장>을 쓴 영국 작가 윌리엄 새커리는 이미 그 옛날에 영국인이 높은 지위와 귀족계급에 매달리는 원인이 궁극적으로 언론에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이 매일 작위가 있는 사람과 유명한 사람이 존엄한 존재인 듯 보도하는데, 이는 결국 작위가 없는 사람들을 시시하다고 역설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강남의 어느 여학교 학생들 일부 경향을 보여주며 마치 그게 대세인 듯 일반화하는 TV조선의 위와 같은 뉴스 말이다. “이런 같잖은 기사들이 눈앞에 놓여 있으니 어떻게 속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새커리의 말이다.


‘캐몽’이 뭔가 했다. 2013년 교육계 최고의 신조어라기에, 처음엔 ‘코코몽’의 동생뻘쯤 되는 무슨 만화 캐릭터인가 했다. 아니다. 100만원, 혹은 200만원, 심지어 300만원이 넘는 초고가 패딩 브랜드 ‘캐나다구스’와 ‘몽클레어’를 합쳐 부르는 말로 ‘노스페이스’에 만족하던 학생들이 이제 모두 ‘캐몽’을 원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캐몽은 새로운 ‘등골 브레이커의 지존’인 셈이다.


몽클레어 패딩(출처 :경향DB)


‘캐몽’이 학생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회자된 건 지난해부터라고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설 연휴를 맞아 가족과 함께 청와대 인근 통인시장을 찾았는데, 그때 손녀가 입고 있던 옷이 몽클레어의 프리미엄 패딩이었던 것. 그 옷이 몽클레어라는 걸 누가 학생들에게 알려줬을까? 당연히 언론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너무도 존중하시는 대한민국 언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즐겨 입는다는 이탈리아 브랜드 ‘로로피아나’의 존재감을 부상시켜 매출을 급격히 올려준 것도 물론 대한민국 언론이었고.


그래 놓고는 학생들이 도대체 왜 이러냐고 전문가 집단에게 묻는 게 언론이다. 병 주고 약 주는 식이다. 하지만 내게는 작위도 없고 학위도 변변치 않고 돈도 명예도 없어서 언론이 내 의견 따위는 무시할 게 뻔하다. 그래서 또 하는 수 없이 나보다 영향력 있는 명사들의 의견에 기대게 된다.


그 유명하신 알랭 드 보통이 <불안>이란 책에 썼다. 언론의 문제에 대해서.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따라서 언론의 (그러한 속물적) 분위기가 그들의 사고를 결정해버리는데 그 수준은 위험할 정도다’라고. 그러면서 아주 화끈하게 외쳐주신다. ‘속물근성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는 신문을 타도하라!’ 어디 신문뿐이겠는가?


한편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캐몽’의 인기는 ‘자녀의 자부심이 떨어져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공감한다. 생각해 봐라. 아이들이 고가의 옷 말고 어떻게 자부심이라든가 자긍심 같은 걸 가질 수 있겠나?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소비 말고는 사실상 거의 아무것도 없는데.


얼마 전 다섯 살짜리 딸과 아홉 살짜리 아들을 둔 후배 가족이 내가 사는 강원도 평창 집에 놀러 왔다. 학교 가는 것보다 엄마랑 집에서 공부하는 게 훨씬 더 즐겁고 행복하다는 아들의 주장에 따라 후배 부부는 홈 스쿨링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 의견을 묻기에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만약 자녀가 있다면 학교에 가지 않을 자유를 줄 거야. 집에서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들으며 마음껏 빈둥거릴 자유 말이야. 그리고 필요하다면 빚을 내어 며칠, 몇 주, 몇 년이라도 여행할 자유를 주고 싶어.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는 교학사 따위의 교과서를 보지 않아도 될 자유. 어떠한 주입식 교육도 받지 않을 자유. 루소가 <에밀>에서 주장했듯 ‘틀에 찍어 낸 듯한 인간이 되지 않을 자유’ 말이야.”


유럽의 파시즘 시대를 예견한 ‘서머힐’의 창시자 닐의 교육관은 이런 것이었다. ‘행복한 사람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 자유의 증여는 곧 사랑의 증여다. 그리고 사랑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서머힐은 없다. 그 말은 온갖 말도 안 되는 교육 지침과 유행이 난무하며 종종 추하기까지 한 환경에서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부모 그 자신들뿐이라는 거다. 부모 스스로 자녀를 위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됐다는 것.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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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사람>을 쓴 커트 보네거트의 심정이 절절히 와 닿는 나날이다.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전 국민을 벼랑 끝으로 몰았던 부시 행정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이 ‘백만장자를 억만장자로 만들고 억만장자들을 조만장자로 만드는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마당에 ‘언론과 통신, 교육까지 모두 그들 손에 들어가’ 있어서 ‘우리는 나치에게 점령당한 폴란드 국민보다 나을 게 없는 신세가 되었다’.

바로 우리 얘기다. 가장 답답한 건 사람들이 매일매일 접하는 뉴스 매체인 TV와 신문이 우리를 철저하게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력에 도취된 미치광이 정치 집단이 철도와 의료를 대기업화하려고 온갖 꼼수를 다 부리고 있는데도 ‘조·중·동·매·종편’에서는 ‘장성택 3년상’ 치를 기세로 ‘남’의 집 얘기만 ‘열불나게’ 하고 있다. -이쯤에서 ‘저 종북 아닙니다’ 미리 도장을 받아두기 위해서 일부러 북한을 ‘남’이라 규정하는 바이다- 공영방송 KBS는 더 가관이다. 북한 얘기만 실컷 하다가 내일 날씨가 추워지니 블랙박스 켜고 주차하지 말란다. 그러고도 뻔뻔하게 수신료를 올리겠단다. 스마트폰과 PC 사용자들 몫까지 챙겨서. 환장할 노릇이다.

 

(경향DB)

그리하여 참다못한 사람들이 손으로 쓴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고 그 대자보 열풍을 트위터로 지켜보며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이 뜨거워진 요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개 대학생이 붙인 대자보 몇 장이 희망의 불씨가 되어 산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결코 희망이 없지 않다! 나도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되겠지’ 방관할 때가 아니다. 뭘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먼저 ‘부패한 정권은 모든 걸 민영화한다’고 했던 세계의 지성 노엄 촘스키에게 좀 더 배우고 내가 배운 걸 사람들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라는 책을 뒤적였다. ‘언론이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묻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거기에 이런 답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교육제도와 전문직 훈련 과정이라는 게 아주 정교한 여과장치입니다. 너무나 독립심이 강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거나,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솎아내지요. 언론은 ‘제도’를 무시하고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언론사 안에 있는 것을 커다란 역기능으로 보는 거지요.”

아, 알겠다. 국민들이 마땅히 알아야만 하는 권리를 무시할 만큼 언론이 망가진 건 결국 ‘밥그릇’ 문제였던 거다. 아무렴, 밥그릇은 소중하니까. 심지어 눈물 나게 숭고한 거라고 찬양하던 기자 출신의 유명 소설가도 있었다. 그분 때문에도 몇몇 언론인들이 나날이 용기백배 비겁해졌을 거라 추측한다. 이해한다. 동정한다.

그러다 문득 ‘고발뉴스’ 이상호 기자 생각이 났다. 원래는 MBC 기자였는데 정치권과 대기업의 비리를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취재하는 바람에 해고당한 남자. 그러나 조용히 찌그러져 있지 않고 저 홀로 인터넷 뉴스포털 ‘고발뉴스’를 만들어 이 시대의 진정한 기자 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용감한 남자. 갑자기 그의 밥그릇이 걱정됐다. 도대체 뭘 먹고 하시는지. 밥은 먹고 다니시는지. 찾아보니 고발뉴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금으로 운영되는데 정기회원이 5000명 넘으면 이상호 기자도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어떤 기사에 쓰여 있었다. 그걸 읽고 당장 고발뉴스 닷컴에 들어가 정기회원 등록하고 트위터에도 ‘이상호 기자님 우리 손으로 월급 줍시다’라는 글을 올렸다. ‘조세회피처 프로젝트’로 부활한 해직 언론인들의 매체 ‘뉴스타파’처럼 ‘고발뉴스’도 당신과 나의 가열찬 응원과 후원이 필요하다고.

그 다음 우리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 상을 받은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무수한 방법으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우리의 예술, 우리의 음악, 우리의 문학, 우리의 완강함, 우리의 기쁨, 우리의 명민함, 우리의 꾸밈 없는 활력을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믿도록 세뇌 받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말이다. …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마라. 우리는 많고 그들은 적다.

한참을 고민했다. 12월19일 촛불 시위에 참여할까? 나도 동네 노인정이나 슈퍼마켓 앞에 대자보를 붙일까? 그러다 아룬다티 로이의 윗글에 고무되어 인터넷에서 선별해낸 최신 뉴스에 내가 사랑하는 음악과 문학, 예술 속에 우리들의 이야기까지 담은 나만의 웹 매거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플립보드(Flipboard)라는 소셜 매거진 서비스를 이용하니 이틀 만에 무려 6가지 테마의 매거진을 만들 수 있었다. 놀라운 세상이다. 대자보라는 클래식한 시민 저항 운동에 트위터와 나만의 웹 매거진이라는 최신 무전기로 혁명도 이룰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빌어먹을 짓을 하고 있다. 그들이 망쳐 놓은 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 당신의 손끝에서부터 이루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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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