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에 해당되는 글 59건

  1. 2015.08.24 배트맨의 집사
  2. 2015.08.03 청년 전쟁
  3. 2015.07.13 문화시민과 빨강 패턴
  4. 2015.06.22 포스트모던에의 질문
  5. 2015.06.01 사랑의 결핍
  6. 2015.05.11 아저씨 소리
  7. 2015.04.20 쓸모없는 예술
  8. 2015.03.30 그렇게 살지 마세요
  9. 2015.03.09 역사의 거울 앞에서
  10. 2015.02.16 88만원 세대와 88억 세대
  11. 2015.01.26 자유 없는 자유의 수렁
  12. 2015.01.05 분노를 조준하라
  13. 2014.11.24 나는 궁금하다
  14. 2014.11.03 지금 당장
  15. 2014.10.13 시나퍼의 그늘
  16. 2014.09.22 생활양식의 전투
  17. 2014.08.25 의리 의리 의리
  18. 2014.08.04 상상력, 체포 투옥 살해되다
  19. 2014.07.14 정치로부터의 유폐
  20. 2014.06.23 마음의 회복

현실은 갈수록 막막한데 현실을 변화할 방법이나 가능성은 보이지 않으니 ‘헬조선’이 괜한 말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30년 전에도 비슷한 양상이었던 것 같다. 군사독재가 물러날 가능성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함에 돌멩이나 화염병을 넘어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고민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수십만의 경찰과 군대를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그런데 그 철옹성 같던 군사독재가 결국 총 한 방 쏘지 않고 무너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회성원들이 다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게 완벽할 수 있는가.’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서양처럼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회의하고 냉소하던 사람들 중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자 체제는 거짓말처럼 싱겁게 무너져버렸다.

어느 사회나 그렇다. 지배 체제란 사회성원의 다수가 선택함으로써 유지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 같은 표현은 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사실이 아니다. 군사독재는 국민 다수의 선택으로 유지되었다. 제 이념이나 세계관에 의해 서든 체제에 속거나 기만당해서든 어떻든 말이다. 역사 속 어떤 포악한 체제도, 오늘 한국이라는 자본의 지옥도 마찬가지다.

이쯤 이야기하면 아마 ‘여전히 박근혜를 지지하는 우매한 사람들’이 떠올라 열불이 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지배 체제는 우매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우매한 사람들에게 열불을 내는 사람들의 선택으로 유지된다. 이 극악한 자본의 지옥은 보수라 일컬어지는 수구 기득권 세력과 진보라 일컬어지는 신흥 기득권 세력의 합작품이다.



진보는 체제의 일부다. 진보가 열망하는 건 체제 안에서의 헤게모니, 즉 정권이지 체제 변화는 아니다. 진보가 열중하는 건 대기업, 공공 부문 정규직 노동자의 삶이지 정규/비정규라는 노동계급 분리 지배 체제의 혁파는 아니다. 진보의 유일한 정치 활동은 모든 문제를 보수 탓으로 박근혜 패거리 탓으로 돌리며 인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진보 논객’ ‘진보 교수’ ‘진보 언론인’들이 그 선두에 서고, 걸핏하면 ‘빵에 갔던 이야기’를 들먹이는 전국 도처의 진보 아저씨들이 뒤를 받친다. 강준만은 ‘싸가지’를 말했지만 순수한 사기극일 뿐이다.

꽤 많은 인민들은 진즉 사기극을 알아챘다. 박근혜가 좋아서가 아니라 진보가 미워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보수나 진보나 결국 저희 좋으려고 하는 건 똑같은데 진보는 정의와 윤리를 독점한 양 설레발을 치니 빈정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분노가 뒤틀려 튀어나온 게 바로 ‘일베’다. 일베는 보수에 현혹된 청년들이 아니라 진보에 반발해 오른쪽으로 치닫게 된 청년들이다.

그런데도 진보는 박근혜를 지지하는 인민들을 우매하다 욕하고 일베를 ‘벌레들’이라 경멸을 퍼부으니, 인민의 반발도 더욱 늘어만 간다. 하는 짓으로 보면 이미 바닥을 쳤을 박근혜 지지율이 그렇지 않은 것도 그런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 아수라 속에서 1%의 왕국은 더욱 더 공고해진다. 진보는 늘 수구를 욕하지만, 현실에 미치는 실제 영향으로 말하자면 수구보다 더 수구가 된 지 오래다.

급진적 진보정치나 의미 있는 급진 세력은 대부분 수구적 진보에 흡수되거나 무기력한 상태다. 딱 하나의 가능성만 남은 듯하다. 청년들이다. 역설적이게도, 체제는 청년들의 급진성을 움 틔우고 양성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사회가 세습 엘리트 계층이 지배하는 신분 사회임에도 안정성을 유지하는 비결은 우수한 비엘리트 계층 청년들에게 쿼터를 주기 때문이다. 그걸 다 막아버리면 결국 터지게 되고 체제는 위험에 빠진다는 걸 그들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안다.

한국은 그걸 완전히 막아버린 상태다. 보수와 진보의 연합으로 말이다. 이대로라면 터질 수밖에 없다. 멘토 앞에서 청년들의 눈빛이 달라진 건 그 조짐 중 하나다. 물론 이런 현실이 급진성만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먼저 대다수의 무력한 상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일베의 출현은 그 반대편, ‘자생적 급진주의자 청년들’의 출현 또한 가능하다는 뜻이다. 도래할 청년들의 주제는 ‘최소한의 상식’이나 ‘언론 자유’가 아니라 ‘노동’과 ‘계급’일 것이다. 그런 개념들을 학습하거나 의식화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맹렬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성찰, 어느새 실제적 수구가 되어버린 자신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성찰하는 진보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의 역할 모델로 알프레드를 떠올려 본다. 연륜과 경험으로 주인공이 제 역할을 해내는 데 필요한 모든 채비를 하면서 또한 정중하게 자문하고 충고하는 배트맨의 집사이자 멘토, 알프레드 말이다. 혹여 주인공이 아니라서 불편한가. 괜찮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니던가.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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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의 옛글 여느 구석엔 권정생 선생과 조우한 순간이 적혀 있다. ‘너무나도 훌륭한 젊은 동화작가를 발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결과적으로 권정생은 이오덕보다 몇 해를 더 살았다.

하지만 평생 온몸에 퍼진 결핵과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하루 30분도 앉아 일하기 어려운 날이 많았지만, 한결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누구보다 맑고 강렬하게 사유했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언젠가 그의 안동집에서 한담을 나누던 그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까 뱀이 방에 들어왔어요.” “마당의 잡초를 그냥 두시니까 뱀이란 놈이 방 안과 밖을 구분 못한 모양이군요. 그런데 독사면 어쩌시려고요.” “독사는 방에 안 들어와요.” “그런가요.” 다녀와 그쪽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실소했다. 나는 그제서야 그의 말이 농담이었다는 사실과, 그 농담이 뭇 생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과 태도에 대한 조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식물을 모조리 잡초라 규정하고 없애버리는 인간의 태도란 생태의 관점에서 얼마나 가소로운가.

200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10억원이 넘는 돈이 남았다. 한국 아동문학에서 손꼽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는 인세 수입이 많았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헐어주곤 했음에도 거액이 남은 이유는 워낙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한 달 생활비에 대해서 5만원 설도 있고 10만원 설도 있다. 넉넉히 잡아도 20만원을 채 넘기진 않았을 것이다. 말년에 거동이 더욱 불편해진 그를 걱정한 지인이 소박하면서도 생활하기 편한 집을 한 채 지어준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불편하다’며 안동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불편은 세상이 지시하는 불편과는 다르거나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그는 늘 그런 불편들과 맞섰다.

그는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라 불리기도 한다. 그 말엔 사실 맹랑한 함의가 들어 있다. 권정생은 성자고 나는 인간이니 나는 절대로 권정생처럼 살진 않는다는 굳은 의지. 그럼에도 나는 그런 성자의 삶을 존경하고 따르려 노력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노골적 과시. 권정생은 그런 이중의식 역시 조소하곤 했다.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려 할 때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 반대 운동이 거셌다.

권정생은 ‘제국주의 전쟁 파병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넓은 아파트와 자동차를 갖는 게 삶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이상, 내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가 이라크에 날아가는 폭격기와 다를 게 뭔가.’

그를 성자라 찬미하는 사람들의 속내가 어떻든 그가 그렇게 불릴 만한 삶을 산 건 사실이다. 그런데 가정해 보자. 만일 그가 젊은 시절부터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고 서울에서 아등바등 애를 쓰다 결국 시골로 밀려났다면, 뱀이 방 안팎을 구분 못하는 남루한 오두막에서 한 달에 20만원도 못되는 돈으로 궁핍하게 살다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세상에 그보다 초라하고 불쌍한 인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성자라 불리며 존경받는다. 그 엄청난 격차에 인간의 삶이 갖는 중요한 이치와 힘이 담겨 있다.




청년들이 제 나라를 ‘헬 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 한국이 청년들에게만 지옥은 아니지만, 청년들에게 지옥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나라의 부를 대부분 점유한 부모 덕에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극소수 ‘귀족 청년’은 빼고 하는 이야기다.)

극우 언론들도 트집 잡지 않는 걸 보면 기성세대는 대체로 헬 조선이라는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다. 기성세대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청년들에게 훈계와 훈수를 늘어놓던 사람들이 비난받게 된 데 대한 학습효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변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좌우를 막론하고 헬 조선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거나 기득권에 기생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기성세대는 청년 현실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막되어 먹은 태도를 보이든 짐짓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든 다를 건 없다. 마찬가지로 기성세대를 ‘아프면 환자지 개XX야’라고 욕하든 ‘개념 아저씨’라 칭찬하든 달라지는 건 없다. 현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현실의 변화는 오로지 청년들 스스로 일어날 때, 헬 조선을 때려 부수려고 일어날 때 시작된다. 권정생은 그 지점에 의미 있는 교훈을 준다. 현재의 세상을 수용하며 그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 애쓰는 사람과, 다른 세상을 꿈꾸며 제 삶에서 꿈꾸는 세상의 편린들을 구현해내려 애쓰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힘을 갖는다는 교훈을.

현재 세상을 수용하는 한 현재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소연과 아우성은 기껏해야 동정과 무마 시도로 돌아올 뿐이다. 비정규직의 피폐한 삶을 외치고 최저임금 1만원의 당위성을 외쳐도 체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천연덕스럽게 비정규직을 늘리고 최저임금 동결안을 내놓는다.

청년들이 현재 세상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을 때, ‘나는 다른 세상을 원한다’고 선언하며 싸움을 시작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체제의 지배자들 얼굴에 불길한 징조와 공포가 드리워진다. 전쟁이 시작된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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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열아홉 살 먹은 남자)는 지난 4월 세월호 사고 1주년 즈음 거의 매일 광화문에 나가선 다음날 들어오거나 안 들어오곤 했다. 평소에도 주요한 집회나 시위에는 나가는 편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연유가 은근히 궁금했다. 얼마 후 둘이 만나 밥을 먹는데 자연스레 그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좀 신기한 게 있어요.”

“뭐가?”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였잖아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딱 지나니까 다 사라진 거예요. 외치고 싸우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유가족분들도 그대로 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탈학교다 보니까 친구들도 탈학교나 대안교육 이런 쪽이 많은데 그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이 대부분 진보적인 분들이거든요.”

“아무래도 그렇지.”

“내가 이야기를 안 해도 누구 아들이다, 그런 이야기가 결국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게 되게 싫었어요.”

“아빠 아들인 게 창피하다?”

“아뇨. 사람을 누구 아들이다,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우선 별로고요. 누구 아들이니 어떻게 자랐을 것이다, 그런 편견 같은 건 더 기분 나쁘고요.”

“나도 그런 오해를 받곤 해. 저 사람은 유별난 좌파니까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유별나게 사회의식을 주입시켰을 것이다. 학교도 그만두게 하고.”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잖아요. 아빠가 저나 누나한테 사회문제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한 기억조차 없거든요. 우리가 물어보면 그때나 대답해주는 정도?”

“그랬지.”

“아빠 따라 집회나 시위에 간 기억도 없어요. 아 딱 한 번 있다, 2008년 촛불시위 때.”

“그땐 정말 몇 달을 그러고 있으니까 한 번은 데리고 가야겠다 싶더라.”

“그런데 심지어 그런 아빠 밑에서 자라서 얼마나 좋으냐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그의 말이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아이들에게 사람들의 짐작과 달랐다면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런데 아이가 열아홉이 되어 바로 그 일에 대해 ‘이젠 알 것 같다는 얼굴로’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빠가 너희 만나기 전에 진보 쪽 운동권 쪽 선배들의 아이들 몇을 봤는데 감탄을 했어. 사회문제에 관한 의식이 어지간한 운동권 대학생 수준을 넘는 거야.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좀 달라졌지.”

“알 것 같아요.”

“이상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야. 똑똑한 아이라 일컬어지며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자기밖에 모른다거나, 어른들이 감당하는 세계가 아닌 자신의 진짜 세계 안에선 오히려 이기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거야.”

“아빠는 누나나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 행동 같은 건 좀 빡빡하게 야단도 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사회의식이라는 게 재료가 있다는 걸 깨달았던 거지. 순수한 분노,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 자신이 본 걸 외면하지 않는 용기와 정열 같은 거 말이야. 그건 지식이나 이념 이전의 것이고, 자기가 감당하는 실제 삶에서 길러지는 거거든. 그런 재료가 성장하지 않는데 만날 집회나 시위에 데리고 다니고 사회 이야기를 들려주면 오히려 불균형 상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거지.”

“이번에 느낀 게 바로 그런 건데요. 진보적인 사람들이나 그 아이들이나 어떤 패턴 같은 게 있더라고요. 놀라울 만큼 비슷하게 행동하고 몰려다녀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서 외치고 싸우고 하더니 딱 그 시기가 지나니깐 미리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함께 사라져버리는 그런 거요. 그게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에도 혼자 들러보고 그래요. 며칠 전에 갔을 땐 지난번에 인사를 나누었던 아버지 한 분을 만났는데 내 손을 잡더니 와줘서 고맙다며 우셨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 어떤 장소에 나가는 걸로 너무 쉽게 ‘문화시민’의 자격을 얻는 것 같아요. 말이 좀 이상한데 하여튼요.”

나는 문화시민이라는 표현이 매우 날카롭다고 느꼈다. 세 해 전 그의 누나(그보다 세 살 위인)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당시 그녀는 또래 셋과 몇 주 동안 전국여행을 했다. 한층 건강해진 얼굴로 돌아와 여행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던 그녀가 말했다.

“이번 여행을 꾸린 선생님 덕에 지역에선 나름대로 진보적인 분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그분들 집에서 자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뭔가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비슷한 느낌?”

“그분들은 자신을 빨강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는데요. 나는 노랑으로 느껴졌어요.”

그녀의 말에 내가 어떻게 대꾸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한국의 진보는 대개 진보 코스프레하는 자유주의자들이야’ 식으로 삭막하게 말하진 않았다. 두 사람이 3년의 차이를 두고 같은 나이일 때 들려준 이야기들은 실은 연결되어 있다. 쉽게 문화시민의 자격을 얻는 거대한 빨강 패턴이 존재한다. 빨강으로 보이는 그 패턴은 실은 노랑이다. 패턴은 전 사회적 차원에서 빨강의 가능성과 내용을 노랑 수준으로 억지한다.

거대한 빨강 패턴. 그것이야말로 오늘 한국 사회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장벽인지도, 대다수 인민들이 진보에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 이유 역시 삶의 직관으로 그 장벽을 직시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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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집단적 분노와 비판이 늘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대상에 대한 빠르고 뜨거운 분노와 비판은 번번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해소되어버리곤 한다.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속도와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온도를 스스로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땅콩회항 사건에서 분노와 비판은 조현아 개인에게는 충분히 표현되었지만 조현아의 그런 행동을 만들어낸 노동 구조에는 닿지 못했다. ‘다 좋은데, 함부로 욕하진 말아주세요’가 애초의 목표이기라도 했던 걸까.

그런 면에서 신경숙 표절 논란은 이례적인 경우다. 창비와 문학동네, 특히 노회한 문화 권력 백낙청의 사기업임에도 마치 진보문학의 공공재인 양 위세등등하던 창비의 아우라를 박살내버렸으니 말이다.

대중은 그들이 특별할 게 없는 장사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즉시 빠르고 뜨겁게 존경을 철회했다. 정치와 노동 등의 영역에서 SNS의 폐해나 한계는 더 냉정하게 분석되고 토론되어야 하지만, 그 폐해나 한계가 모든 영역에서 전적이진 않다는 걸 확인하는 일이었다.

문화 권력에 대한 타격과 더불어 나타난 건 ‘언어의 역전’이다. 문학동네 편집위원 신형철이 신경숙의 표절에 대해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운율까지 맞추어 말했을 때 그 말은 평소처럼 세련되게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걸맞지 않은 화려한 옷차림 같다고 할까. 반면, 이번 표절 논란을 촉발한 소설가 이응준의 글은 세련된 문체는 아니었다. 문단에서 고립을 각오한 비장하고 지사적인, 어쩌면 그 스스로도 평소라면 어딘가 구식의 언어로 느껴졌을 만한 것이었다. 그 언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언어의 역전은 신경숙보다 20여년 아래인 비평가 한윤형의 데이트폭력 논란에서 좀 더 넓게 드러난다. 한윤형과 같은 노동당원이기도 한 음악가 단편선은 한윤형과 사적 친분이나 활동에 대한 존경과는 별개로 이 문제에 대한 당의 냉정하고 분명한 입장 표명을 촉구했다.


역시 노동당원이자 한윤형의 절친인 비평가 김민하는 “나는 그를 도울 것이다. 그 나름의 명성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니라 그가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조력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들의 언어는 평소보다 훨씬 더 소박했다. 이번 일에 대한 그들 세대 다른 사람들의 언어도 평소보다 훨씬 소박했다. 무례한 개신교도가 성경 구절을 들이밀듯 포스트모던 철학 용어가 들먹여지는 모습도, 난해하고 배배 꼬인 문화비평 언어가 괜스레 배치되는 모습도 없다.

다들 잠시 포스트모던을 접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언어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것을 되새기게 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소박하고 진솔한 언어를 사용하길 꺼림으로써 그에 대응하는 현실들을 놓쳐버린 게 아닐까.

포스트모던의 바람 이후 우리는 분노, 용기, 양심, 성찰, 수행 같은 것들과 그 언어들을 낡고 지적으로 둔한 것처럼 치부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들이 단순화하고 교조화할 때 인간의 삶의 복잡성을 생략하고 이런저런 비인간적 폭력을 만들어낸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해결은 폐기가 아니다. 인간의 지혜와 사회 디자인 가운데 폐기될 건 없다. 끝없이 수정하고 보완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포스트모던 바람은 그렇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 패망과 그 실체의 폭로 앞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 80년대 좌파들의 유력한 탈출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그들이 저주하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같았다. 초가지붕을 알록달록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새마을이라 부르듯, 그들은 근대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에서 탈근대 언어의 유행을 만들어냈다. 그 해악은 다음 세대 좌파들의 머리통과 언어에 새겨졌고,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의 부조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똑똑해 보이긴 하는데 존경심이 들진 않는다든가, 사회 변화에 대해 말하는데 정작 개인은 불안정해 보인다든가 같은 젊은 좌파 비평가들에 대한 모종의 공통된 인상은 그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 경향들이 데이트폭력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순 없다. 역시 노동당원으로 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인 비평가 박가분이 쓴 자기파탄적 해명 글(“천하의 ‘진보논객’ 박가분의 몹쓸 짓에 대한 의혹에 관한 저 자신의 입장”이라는 제목의)은 그런 관련성을 짙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언어의 역전은 그런 경향성과 함께 희망도 내포된 혼돈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꼰대질을 하려는 건 아니다. 한국적, 아니 새마을운동적 포스트모던의 원흉에다 이제 급진성은커녕 정권놀음에만 몰두하는 세대의 일원이 그럴 자격이나 있겠는가. 나는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김민하가 그 말에 자신을 포함시켰듯 우리도 자신을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의 조화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내 마음이 조화롭지 않은데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순 없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좌파는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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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편견과 주관성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스스로 사유하려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기대는 속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으로 산다는 건 끊임없이 누군가를 판단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런 한계와 모순을 최소화하는 일이다. 판단해야 하는 대상의 개인적 인격과 사회적 활동을 나누어 보는 건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일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 “그는 예술가로선 훌륭하지만 애인으로선 빵점이라 생각해.” 식으로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말에 대해 ‘이중적’이라 항의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대상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게 안 되는 사람을 흔히 ‘빠’라고 한다. 빠는 ‘열렬한 지지자’와 전혀 다르다. 근대 대의민주주의에서 지지자는 제 철학과 세계관을 특정한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통해 표현하는 정치적 주체다. ‘차이와 존중’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주체들은 나와 다른 지지와 지지자를 존중하는 의무를 갖는다. 어떤 정치인에 대한 내 지지가 존중되길 바란다면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한 다른 사람의 지지도 존중해야 한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을 비판할 권리는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병존한다. 근대 대의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런 지지와 지지자들로 가까스로 작동되는 정치 체제다.

빠는 대상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다. 빠는 단지 자기애를 대상에 투사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비판에 보이는 태도로 쉽게 드러난다.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대상에 대한 비판을 가급적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많이 불편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대상을 위한 길이며 대상을 욕되게 하지 않는 태도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는 대상에 대한 비판에 무작정 반발하며 증오감을 드러낸다. ‘나에 대한 모욕이자 공격’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빠는 대상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듯하지만, 대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애의 실체는 자기 존중의 부족, 열등감이다. 빠는 대상을 무작정 옹호하는 행동을 통해 제 열등감을 해소한다. 그래서 ‘빠’는 또한 ‘까’이기도 하다.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은 무조건 옹호(빠)하고 그 이상화를 방해하는 대상은 무조건 폄훼(까)하는 ‘분리 행동기제’는 경계성 인격장애 등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병증이기도 하다.


근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불거지는 빠는 역시 ‘노빠’일 것이다.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을 나누어 보길 거부하는, 대통령 노무현의 공과에 대한 어떤 비판과 토론도 거부한 채 무작정 ‘노짱’을 추앙하고 ‘그런 대통령은 또 없다’ 말하는 사람들이다. 노무현의 인간적 매력이 각별했던 만큼 인간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과 기억 앞에서 그들의 감정도 극단에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빠들은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주장한다.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없애고 싶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김대중이나 노무현 지지자들이 수구세력을 없애고 싶은 게 사실이듯 말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대한민국이라는 시궁창 속에서 고졸 학력으로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 과정과 세월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모멸과 고난에 맞닥뜨렸을지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노무현은 그런 모멸과 고난을 이겨내는 힘을 가진, 그럴수록 오히려 기개 있게 싸워 이겨내고야 마는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전직 대통령을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시절이 아니기에 노무현을 없애고 싶어 한 세력도 여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론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이다. 악화한 여론을 더 악화시켜 노무현을 궁지로 몰아넣은 건 바로 노빠들이다. 노무현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여러분의 마음은 잘 알지만, 이러는 건 오히려 나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일’이라는 요지의 글을 홈페이지에 남긴 적이 있다. 노빠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결국 부인과 형의 비리를 시인하고 한겨레에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는 사설이 실릴 만큼 궁지에 몰릴 즈음에도, 그들은 ‘생계형 비리’ 따위 강변이나 늘어놓을 따름이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노무현 지지자는 박근혜 지지자보다 나은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노빠와 박빠는 같은 병을 앓는 환우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비판이나 토론이 아닌 치료다. 지난 몇 해 동안 노빠가 한국 정치를 얼마나 퇴행시켜 왔으며, 그래서 애꿎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가에 대해 굳이 더 반복할 건 없을 것이다. 물론 노빠라고 다 같진 않다. 어떤 사회적 존중도 필요 없어 보이는 중증 노빠도 있지만, 지지자이되 여린 성정 탓에 노빠의 영역을 맴도는 사람들도 있다. 노빠를 이용해 제 이해를 도모하는 노빠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사랑의 결핍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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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 ‘껍데기’에만 매달려 떠드는
‘아저씨’들 소리에 잠식된 사회
누가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누구나 특별히 불쾌감을 느끼거나 거부감이 드는 소리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엔 ‘아저씨들 떠들어대는 소리’다. 아저씨들이 모이는 곳엔 되도록 가지 않으려 할 만큼 난 그 소리를 싫어한다. 동무들과 식당이나 술집을 고를 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 소리, 혹은 그 소리의 가능성 여부다. 그게 확인되면 제아무리 마음에 드는 게 많은 곳이라도 지체 없이 다른 곳을 찾는다. 아저씨들 떠들어대는 소리엔 개인이 뭉개진 집단, 수구 반동적 세계관, 권위와 아집, 애초에 있긴 했었나 싶은 윤리적 불감 등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악취들이 원액으로 담겨져 있다.

아저씨는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남에 대해서도’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남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말한다. 아저씨들에게 그의 직업, 사회적 지위, 명성이나 지명도, 학벌, 집안 따위는 그 자체이며 그의 가치의 전부다. 콤플렉스의 향연이자 콤플렉스의 줄서기다.

남보다 한 칸이라도 앞에 있음을 확인하고 드러내려는 발악은 제 앞에 있는 존재에겐 비굴함으로, 제 뒤에 있는 존재에겐 가혹함으로 표현된다. 줄의 끄트머리에 있는, 제 껍데기를 툴툴 털어도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아저씨들은 남의 껍데기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들은 늘 ‘내가 누굴 안다’ ‘내가 누굴 만났다’고 말한다. 그마저도 안되면 ‘내가 누구와 통화했다’고 말한다.

아저씨는 고갈된 자의식, 말라붙은 영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최종 답변이다. 아저씨들 떠들어대는 소리보다 역겨운 건 없다. 한때 그 역겨움은 주로 보수적인 아저씨, 한줌의 기득권을 갖고 행세하는 아저씨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가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이 되고 보수와 적대적 공생 체제를 이루면서, 진보의 목표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정권 교체로 다시 한 번 저희 세상을 만들어보는 것으로 바뀌면서 역겨움은 진보의 것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무의미해졌다’는 말은 보수 아저씨와 진보 아저씨가 ‘개저씨’로 대통합된 사실에 관한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아저씨들의 문제다. 아저씨들이 사회라는 신체 구석구석에 덕지덕지 낀, 피를 더럽히고 핏줄을 막아 결국 뇌 어디에선가 터지게 만드는 기름덩어리다. 그러나 아저씨는 더 이상 ‘중년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경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저씨는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란 분절되지 않는 유기적 생명체이기에,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하나일 순 없듯 사회의 어떤 사람도 완전한 예외로 존재할 순 없다. 누구든 조금씩은 아저씨다. 이를테면 박근혜라는 여성은 이명박이라는 아저씨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아저씨임을 매일 소름끼치도록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박근혜가 ‘포스터 속의 흑인 농구선수’ 같은 사례라면 조금은 까다로운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한겨레에 김민기 선생의 인터뷰가 실렸다. 인터뷰를 잘 안 하는 분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말엔 역시 경청할 만한 대목이 많았다.

특히 ‘돈 안되는 일만 한다’는 그의 말은 그가 군사독재를 넘어 자본독재의 시절에도 여전히 ‘아저씨 아님’을 웅변했다. 그러나 그의 인터뷰에 감동하는 독자들은 대개 아저씨로 보였다. 그들은 그가 젊은 시절 막노동을 하고 농사를 짓고 공장에서 활동을 한 것에 새삼스레 감동했다. 그렇다면 그가 있기 전에도 그가 떠난 후에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두드러질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의 실체를 관념의 잣대로 벌목해버리는 것처럼 아저씨적인 건 없다.

아저씨의 핵심인 이른바 386의 대학 진학률은 20%가 채 안된다. 동세대의 다섯 중 하나일 뿐인 그들은 30년 이상 서로에게 학번을 질문함으로써 80%를 배제하며 살아왔다. 그들은 출발부터 아저씨였으며 ‘대다수 노동자 시민의 삶과 무관한 진보’는 신자유주의 이후의 비평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들에게 내포되었던 셈이다. 자신의 말, 자신화한 말을 하지 못하고 최신 유행하는 유럽 지식인의 말을 짜깁기해 번역후기 아닌 번역후기만 써대는 인문학자 아저씨는 또 어떤가. 그들의 충직한 후원자 노릇을 하는, 최근 수입된 어려운 개념어가 간간이 나와 주지 않는 글은 촌스러운 글이라 여기는 인문독자 아저씨는 또 어떤가. 대학 졸업생의 거개가 비정규나 알바인 걸 알면서도 아이를 밤 늦도록 학원으로 몰아대며 ‘내 아이는 시킬 수 있을 만큼 시키고 싶다’는 주문을 외우는 엄마 아저씨는 어떤가. ‘야당은 여당의 2중대에 불과하다’ 소리 높여 욕하다가도 결국은 정권 교체에만 목을 매는 민주 시민 아저씨는 또 어떤가.

아저씨들 떠들어대는 소리로 잠식되어버린 사회를 누가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여전히 내 껍데기가 아니라 나에 대해, 그의 껍데기가 아니라 그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 유일한 가능성일 것이다.

섣불리 희망을 말하려 들지 않지만, 근사하게 살긴 진즉에 글러버린 세상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아저씨가 되진 않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하는, 가만히 세련된 사람들 말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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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 쓸모만 강조하고 도구로 삼는 일
예술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히 목도한다


예나 지금이나 하드록을 주된 취향으로 클래식, 재즈, 국악 따위를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이지만 현대음악은 가까이한 적이 거의 없었다. 최근 테리 라일리,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 같은 미니멀 음악이나 올리비에 메시앙, 리게티, 크세나키스 등이 음악 듣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건 그런 나로선 이례적인 일이다.

나는 ‘좋은 글은 불편하다’라는 명제를 글의 가치에 대한 지표로 삼아왔다. 이 사악하고 기만적인 세계에서 불편함조차 없는 글이란, 체제를 미화하고 타성에 젖은 삶을 위무하는 아편일 뿐이다. 그런 생각이 어느 순간 음악 쪽에 이어졌고 조화로운 조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현대음악의 불편함에 대한 자발적 대면을 만들어냈다.

30여년 전 한 시기에 나는 국악에, 농악이나 민속악이 아닌 정악에 빠졌더랬다. 옛 지배계급의 수행음악이던 영산회상이나 왕을 위해 연주되던 음악들을 탐닉하고 배우러 다니는 건, 혁명과 계급의식에 한창 몰입한 좌익 청년에겐 어울리지 않았고, 참으로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쓸모없는 음악이 나에게 없었더라면 그 시간이 북이나 쇠를 배우는 좀 더 쓸모있는 시간으로 모두 대체되었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좌익 청년에게 쓸모없는, 전혀 좌익적이지 않은 그 음악은 좌익 청년이 오래도록 좌익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술이란 묘한 것이라서, 쓸모없음의 상태에서 그 본디 힘과 가치가 드러난다.

마크 로스코 전시에 나붙은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이라는 홍보 문구는 오늘이 예술의 쓸모가 얼마나 중시되는 세상인가를 보여준다. 문구에서 스티브 잡스는 더 이상 자본가가 아니라 예술가다. 예술가 스티브 잡스에게 예술적 창의성과 혁신적 태도는 기존의 세계가 아니라 기존의 산업과 충돌한다.


예술은 기존의 산업과 차원이 다른 부가가치와 이윤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다. 스티브 잡스는 또한 창의성과 혁신의 기반이 인문학이라고 설파하곤 했다. 왕의 말씀은 ‘CEO 인문학’ 등의 바람으로 이어지고, 잘나가는 광고 카피라이터들이 인문학 멘토를 자처하거나 심지어 ‘광고가 세상을 바꾼다’고 주장하는 희한한 장면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 풍경은 예술과 인문학이라는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장 의미있는 두 가지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기반으로 한다. 예술이 제 본디 힘과 가치를 가지는 조건은 쓸모가 아니라 ‘쓸모와의 거리’다. 인문학의 힘은 인문학적 사유와 통찰로 최대한의 쓸모를 뽑아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제 정신적 고양을 쓸모에만 바치거나 그런 태도에 함락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요약하자면 예술과 인문학은 인간이 돈 되는 일보다는 돈 안 되는 일을 위해 살도록, 돈이 아닌 다른 소중한 가치에 좀 더 정신을 팔고 용감하게 좇도록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 시민은 현실적 쓸모에 관련한 일은 노예에게 맡기고 철학이나 예술 같은 쓸모없는 일에 몰두하는 걸 인간적인 삶의 태도라 믿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되고 쓸모있는 일에만 제 시간과 능력을 바치는, 노예적 삶의 태도가 바람직한 삶의 태도로 대두되고, 자본주의의 후기에 이르러선 그런 삶의 태도로 무장한 노예들이 영웅으로 추앙되고 지배계급으로 군림한다. 급기야 예술과 인문학은 그런 노예적 삶의 효율과 경쟁력을 높이는 도구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그런 흐름을 충직하게 따르면서도 문화적 기지촌의 추레한 풍경들이 덧붙여진다. 로스코 전시에 맞춤책을 의뢰받은 스타 철학자는 ‘비정규노동자들이 이 전시를 보고 위로받길 바란다’는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급기야 전시장엔 ‘이건 단지 그림이 아니라 위로야!’ 윽박지르는 문구가 내걸린다. 스타 철학자는 책 의뢰를 받기 전엔 로스코를 몰랐다고 했다. 한 예술가에 대해 책을 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신체적/물리적 시간이 있는 법이다. 과문한 소재도 ‘구라’의 기술로 쓰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팔아먹을 수 있지만, 인문 정신이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런 쓸모를 거부하는, 쓸모없음의 영토에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태도다.

예술의 쓸모와 관련하여 근래 한국에서 가장 대대적인 위력을 발휘해온 건 한류다. 한류의 가치와 지향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건 문화적 수구꼴통으로 전락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한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풍경은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화려한 무대와 환호에 휩싸인 한류스타만이 아니다. 한류가 총력 동원된 지난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세계적 망신으로 끝났고, 바로 이 순간 좀 더 높은 임대수익을 위해 ‘테이크아웃 드로잉’이라는 근사한 예술 공간을 용역을 동원해 내쫓으려는 건물주는 다름 아닌 ‘문화대통령’ 싸이다.

예술의 쓸모를 강조하고 쓸모의 도구로 삼는 일이 예술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예술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삶이란 또한 얼마나 황폐한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목도한다. 오래전,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 ‘창의성과 혁신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걸 보여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와 애플이 바꾼 건 세상이 아니라 단지 이윤이었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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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져 가는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
‘아이들의 지옥’을 바꿔달라는
당부는 잊지 말아야 한다”


보름 후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해가 된다. 여전히 제대로 된 진실 규명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 사건 1심 재판부는 “복원력이 매우 안 좋은 배에 지나치게 많은 화물을 부실하게 실었는데, 사고 당일 변침을 시도하던 과정에서 조타 실수가 있었다”고 침몰 원인을 정리하지만 누구도 그게 침몰 원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한 사고 원인을 밝히려면 ‘세월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양 작업은 미루어지고 있다. 인양 작업을 미루는 힘과 사고 원인을 은폐하려는 힘은 같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업무와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힘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분야에서 이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구체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연안 여객선을 지자체에서 인수하여 공공 운영하는 방안 같은 것이다. 의미 있고 실효성 있는 방안이다. 그러나 그런 방안이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 사건이 온전히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월호 사건은 배의 문제였지만, 배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가 배의 문제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배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건 배 문제를 제외한 모든 문제가 남았다는 뜻일 뿐이다.

비난 여론이 한참일 때 박근혜씨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사과했다. 철저한 진실 규명과 피해자 가족들과의 성실한 소통도 약속했다. 그러나 여론이 어지간해지자 사과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박근혜씨의 행태가 사악하고 파렴치하다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가 박근혜씨의 태도를 바꿀 순 없었다. 박근혜씨의 태도는 내면에서 나온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여론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난 여론에 사과가 필요했듯 ‘이제 그만하자’는 여론에는 사과가 필요없었다.

비극적이고 불의한 사건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다. 그러나 시간은 어김없이 분노의 열기를 식히고 내 삶이 잠시 뒷전이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여론은 그렇게 변화한다. 어느 사회든 예외는 없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는 사회마다 다르며 속도가 느릴수록 성숙한 사회라 여겨진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가 그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른 편임을 보여주었다. 슬픔과 분노를 SNS에 도배하고 문화 예술 공연마저 불경한 짓이라 욕하던 사람들이 먹고 있는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리며 킬킬거리게 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지나칠 만큼 짧았다. 왜 그렇게 짧았으며 짧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박근혜의 ‘사라진 사과’와 함께 사라진 또 한 가지, 성찰이다.


세월호 사건은 돈 귀신 들린 세상과 그런 세상과 타협한 사회 성원이 만들어낸 필연적 비극이자, 거대하고 장기적인 비극의 신호탄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성찰도 터져나왔다.

‘아이를 더 이상 이렇게 키우지 않겠다’ ‘아이의 미래 행복을 핑계삼지 않고 지금 아이가 행복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결단들이 도처에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성찰이 사라진 자리는 사라진 다른 한 가지, 박근혜의 ‘사라진 사과’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졌다.

‘박근혜 비난’과 ‘박근혜 핑계’의 경계는 생각보다 얇았다. ‘사라진 사과’와 ‘사라진 성찰’은 연동했고 서로 의지했다. 둘은 잠시 브레이크가 걸렸던 돈 귀신 들린 세상의 재가동 신호였다. 둘은 실은 하나였다.

제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라 해도 시간은 어김없이 분노의 열기를 식힌다. 식혀진 분노는 오로지 성찰로만 지속된다. 성찰이 사라지면 분노도 사라지며 분노가 사라지면 진실은 묻힌다. 성찰은 진실을 밝히는 유일한 연료이며 가장 강력한 무기다. 성찰은 덮어놓고 ‘내 탓이오’를 외치는 게 아니다.

성찰은 사건을 만든 악의 총체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최악만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최악의 가장 큰 해악은 최악 자체가 아니라 최악 덕에 다른 악이 면책되는 것, 그래서 악의 총체성이 지워지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루도 끊이지 않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 수많은 비극적 사건 가운데 특정한 사건만이 사회적으로 사유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건의 규모가 크고 희생자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건의 원인이 사회적이며 해결 또한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은 그래서 사회적으로 사유되고 사회적으로 추모된다. 사회적 추모는 ‘억울하게 죽은 불쌍한 아이들’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추모는 시간에 씻겨 내릴 뿐 아무런 사회적 변화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추모는 그 아이들의 죽음이 우리 삶에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어야 한다.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를 잊지 마세요’는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아이들을 통해 하려는 말이다. 그 말엔 그 아이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려는, 그 아이들의 말을 우리의 필요와 편리에 맞게 편집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그렇게 살지 마세요’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바꿔달라는, 그래서 그 아이들이 떠나기 전에 이미 10대 사망 원인의 첫째가 자살이던 ‘아이들의 지옥’을 더 늦기 전에 바꿔달라는 당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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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위안부’ 토론과 논쟁 사이
맥락 생략된 텍스트 읽기 애석
상징체계가 주입한 습관 깼으면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토론과 논쟁에서 ‘텍스트는 컨텍스트(맥락)와 함께 읽어야 한다’는 텍스트 읽기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건 애석한 일이다. 맥락이 생략된 텍스트 읽기는 오독이나 악의적 왜곡에 이용된다. 특히 이 책처럼 민감한 사회적 주제를 담은 텍스트인 경우, 논쟁은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문화적 상징체계에 포획되어 버린다. 다들 진지하고 열띤 얼굴로 견해를 말하지만 실은 그 상징체계가 주입한 이런저런 주문을 암송할 뿐이다.

눈곱만큼이라도 유의미한 논쟁이 되려면 상징체계를 박차고 나가, 비로소 내 견해를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즉각적이고 단순명료한 반응과 판단을 의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가장 문제가 된 ‘매춘부’ ‘동지적 관계’ 등 텍스트 조각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책의 적확한 요약이 되기도 하고, 책에 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보수 세력은 오랜 권위주의 독재 시절을 통해 반일 정책을 표방하며 일본 극우세력과 야합하는 이중 전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름을 개탄하는 데 그치는 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문제는 ‘반일’이라는 개념 자체의 기만성에 있다. 일제 식민지 경험은 한국 민족과 일본 민족이 아니라 일본 지배계급과 한국 민중 사이의 일이었다. 일본 민중 역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했으며,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이해를 같이했다. 해방 후 지배계급으로 남은 그들은 모든 것을 민족 간의 문제로 은폐하고 기만했다.

그런 기만은 진보 세력에게도 답습된다. 한국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미 제국주의의 지배와 영향을 받게 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진보 세력 안에서 한국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사회’라 해석되곤 했다. 진보 운동은 ‘민족주의+진보(계급)’라는 모순적 상태를 지속해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계급이라는 ‘체’로 제대로 걸러내지 못함으로써 진보(계급)의 괴멸도 지속되었다. 조직노동(민주노총)이 비정규 불안정 노동이라는 노동자 계급의 보편적 현실을 외면하고, 진보정당이 분당과 합당을 반복하면서 지리멸렬해진 내적 원인도 결국 그것이다.

‘민족주의+진보’의 폐해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가는 ‘디아스포라’에 천착하는 재일 지식인 서경식이 박유하 비판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과, 한국의 진보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단호한 계급적 관점을 고수해온 박노자가 이 논쟁에서만은 ‘탈계급적’ 태도로 일관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박유하의 견해가 일본 우익에 봉사한다는 식의 비난과도 선을 긋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견해가 사회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우려하는 건 필요한 일이나, 반대와 금지의 근거로 삼는 건 파시스트의 방식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공극우 세력의 주요한 탄압 논리는 ‘북한에 봉사한다’였다.


<제국의 위안부>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위안부 문제 활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정대협의 활동은 ‘위안부 소녀상’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소녀상이 담은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은 사실관계와 문제의 본질을 동시에 거스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정녀든 창녀든 예수의 어머니이듯, 모든 생존 위안부는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에 부합하든 안 하든 위안부 문제의 피해자다. 일본의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에 대한 정대협의 부당한 태도는 위안부 운동이 생존 위안부를 위해 존재하는지, 생존 위안부들이 위안부 운동을 위해 존재하는지 되묻게 한다.

‘민족주의+진보’의 수렁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의 진보적 인텔리들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 당시, ‘민족 배신자’로 매도되면서도 ‘악의 평범성’을 설파하던 한나 아렌트를 상찬하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상찬이 지적 허세가 아니려면 온전하게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이 되어 봐야 한다. 아렌트는 일생의 벗들에게까지 절교당해야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아렌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박유하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지난 역사, 남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역사에선 쉽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거울 앞에서 성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친일 문제에 대해 단순명료한 태도를 보이는 나는, 독립이나 해방을 좇는 사람은 이미 ‘비현실적’이라 치부되던 일제강점기 후반부에 살았어도 같은 태도를 보였을까. 그것은 현재의 지배체제,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내 태도로 추정될 수 있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아이를 밤늦도록 학원을 돌게 한다면, 신자유주의의 다른 분파인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유일한 사회적 희망이라 생각한다면 그 태도는 허상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태도가 아니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문화적 상징체계가 만들어낸 습관일 뿐이다. 우리는 그 습관을 직시하고 해체해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가 처음으로 우리의 습관을 적확하게 비판하거나 해체하려 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즉 해체했어야 한다며 고마워할까, 아니면 아렌트 앞의 유대인들처럼 격렬하고 집단적인 반감을 보일까. 박유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 답을 보여준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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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렴치한·철딱서니들이 멘토로 군림
청년 앞엔 비정규직·알바만 기다려
지금의 시대는 처절한 계급시대


지난 몇 해 동안 한국에서 발간된 책 가운데 가장 파렴치한 책을 꼽는다면 단연 <아프니까 청춘이다>일 것이다. ‘청년의 지옥’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 청년에게 할 첫 번째 말은 ‘미안하다’여야 한다. 좀 더 사리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실을 바꾸자, 나도 함께하겠다’여야 한다. 그런데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게다가 저자 김난도는 이른바 소비 트렌드의 권위자로서 매년 ‘트렌드 코리아’라는 책을 내는 사람이고 고급호텔에 사장들을 모아놓고 올해의 장사거리에 관한 세미나와 특강을 하는 사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행태 자체를 비난할 건 없겠지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동시에 소비는커녕 생존 자체가 암담한 청년들에게 그런 설레발을 친다는 건 섬뜩한 일이다. 어찌됐든 그는 청년들의 멘토로 군림했고 제 책을 300만부 넘게 팔아치웠다.

다행스러운 건 청년들이 더는 그런 유의 설레발을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혜민이라는 중은 얼마 전 제 페이스북에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건 자기 중심이 없어서라느니 따위 이야기를 했다가 격렬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으로 큰돈을 벌고 유력한 문화자본가가 되었는데 이 또한 김난도의 것 못지않게 기막힌 책이다. 저야 미국 대학의 교수에 중이니 삶의 번민이나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멈추고 정리하면 되겠지만, 멈추고 싶어도 도무지 멈출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에게 그게 어디 할 말인가. 총각네 야채가게 사장 이영석은 몇 해 전 낸 책 <인생에 변명하지 마라>에 적은 ‘일을 가르쳐주는데 내가 돈을 받아야지 왜 주는가’ 따위의 내용이 새삼스레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언급한 세 책들이 근래 출판시장에서 가장 약진했다 평가받는 한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며, 이 사회를 한때 휘어잡은 어떤 정신적 파행을 드러낸다.

어찌됐든 광장에 세워져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모자랄 파렴치한과 철딱서니들이 청년들의 멘토로 군림하며 그 얇은 지갑을 터는 일은 어려워지고 있다. 청년들의 의식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디자이너 이상봉씨가 열정페이라는 이름의 노동 착취로 비난을 받고 사과를 한 건 물론, 조기숙씨는 갑질하는 고객 앞에서 무릎 꿇은 주차 알바 청년이 청년답지 못하다고 했다가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그런 변화들이 불과 1~2년 사이에 급격하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청년들은 더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감추고 분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 열거한 멘토들이 파렴치함을 넘어 사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부도덕한 사기행각으로 치부한 걸 넘어 청년들에게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도했든 안 했든 체제의 충직한 주구 노릇을 해왔고 그들의 영예와 안락은 그 대가였던 셈이다.


멘토 사기꾼들의 활약이 여의치 않아진 상황을 대체하는 신종 사기는 ‘세대론’이다.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란을 비롯, 현재 청년들의 현실을 장년세대와 대비하면서 마치 장년세대가 알맹이를 다 빼먹어 버렸기 때문에 청년세대엔 쭉정이만 남았다는 식의 논리가 득세하고 있다. 과잉생산에 의해 불황과 공황을 반복하는 자본주의 본연의 생리를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청년 현실은 세대 착취의 결과가 아니라 더욱 극악해진 한국 자본주의의 반영일 뿐이다.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20여년 동안 민주정권, 보수정권을 막론한 한국 경제정책의 뼈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였다.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경제가 살고 일자리도 창출되어 다 잘살게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실제로 만들어낸 현실은 ‘노동하기 나쁜 나라’다. 정규직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중심 틀로 하는 노동유연화 정책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순으로 조직력이 약한 노동 부문과 세대로 내려갈수록 모순을 강화했고 결국 노동의 출발점에 선 청년들 앞엔 비정규직과 알바만 기다리는 극단적 상황에 이르렀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현실은 기업의 두목들, 즉 몇몇 대기업 총수들이 정치도 법도 언론도 지배하는 사회의 왕이 된 것이다. 사회가 그 왕들의 의중에 의해 운영되면서 한국은 더욱 노동하기 나쁜 나라가 되고 있고 다시 그 극단에 청년들이 서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그 청년들은 전체 청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청년들이 모두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오해다. 한국 사회의 부의 편중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에 이르렀고 사회복지 공공부문 지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다. 한국의 한 해 예산은 350조원가량인데 최상위계층 1500명이 300조원의 자산을 독점하고 무리없이 세습한다.

대다수의 청년이 88만원 세대인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극소수의 청년은 88억원 세대이며 심지어 그 일부는 888억원 세대다. 88만원 세대 청년들은 ‘노동하기 나쁜 나라’의 직격탄을 맞은 청년들이고 88억원 세대 청년들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수혜를 입은 청년들이다. 현재 한국은 소수의 88억원 세대 청년들의 건재를 위해 대다수 청년들이 88만원 세대로 살아야만 하는 사회다. 청년 문제의 진실은 세대가 아니라 계급, 철저하고 처절한 계급적 참상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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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청년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What Would You Do?)라는 미국식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이 있다. 이따금 페이스북에 떠서 보곤 하는데 인종차별, 성소수자, 여성 외모의 대상화 등 꽤 사회적인 주제가 많다. 인상적인 건 설정된 부당한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매우 다수라는 점이다. 그중 일부는 저 사람이 과연 일반 시민인가, 혹시 짜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몸에 밴 논리정연하면서도 직관적인 언변을 구사한다.

미국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미국 사회의 선진국적 면모에 새삼 감동했다, 따위 싱거운 소릴 하려는 건 아니다. 오늘날 미국처럼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끝도 없는 사회가 있던가. 자본주의적 모순과 폐해가 노골적으로 집약된 사회이면서도 급진세력은 씨가 말라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평범한 미국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애국심과 제 나라에 대한 자긍심은, 지배계급의 이념 공작에 대다수 사회 성원들이 포섭된 사회라는 평가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프로그램에서 미국인들 역시 그런 미국의 일부일 뿐이라 여겨도 된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남는 어떤 불편함은 한국 사회의 풍경과 겹쳐져서다. 오늘 한국의 어지간한 시민들에게서 애국심이나 제 나라에 대한 자긍심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소수의 도둑들이 주인인 몹쓸 나라라는 분노와 비판이 폭발하고 있다. 그런데 저항적인 열기로 가득 찬 한국은 왜 미국보다 낫긴커녕 갈수록 캄캄한 아수라장인 걸까. 역시 모든 게 박근혜 일당 때문이고, 박근혜를 지지하는 우매한 사람들 때문인가. 사회를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하는 건 편한 일이지만, 아쉽게도 사회는 단 한번도 그렇게 단순했던 적이 없다.

한국 시민들에게 미국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어떤 결핍이라도 있는 걸까. 찬찬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그 분명한 것 하나는 ‘자유’일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자유민주주의는 부르주아를 위한 민주주의일 뿐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든 자유민주주의의 미덕을 믿는 사람이든,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사고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Liberal Democracy’를 옮긴 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유는 ‘리버티’(Liberty)가 아니라 ‘프리덤’(Freedom)에 편중되어 있다. 리버티와 프리덤은 똑같이 ‘자유’라 번역되지만 실은 다른 말이다.

한국어엔 리버티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리버티가 프리덤과 구분되어 이해되거나 시민의식 속에 제대로 뿌리내릴 기회도 없었다.

프리덤은 어떤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리버티는 사회 성원들이 서로에게 배분한 책임감을 수반한 자유다. 루소, 밀, 로크 등 근대적 민주주의를 설계한 사람들의 공통된 화두였던 그 자유다. 프리덤은 내 자유와 다른 사람의 자유가 부딪치고 침해될 수 있다. 그러나 리버티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공존하는 자유다. 리버티는 시민의 교양과 닿아 있다.


▲ “민주주의의 퇴행이 내면화된 한국
사고·토론·행동하는 자유의 결핍
그것이 애국심·자긍심 찾기 힘든 이유”


미국이 유럽과 같은 좌파의 씨가 말랐으면서도 완전한 지옥을 모면하는 비결은 리버티에 있다. 예의 프로그램에서 확인되듯 리버티는 상당수 미국인들의 삶과 의식에 배어 있고, 미국인들의 애국심과 자긍심도 무지한 국가주의도 있지만 ‘리버티로 구성된 나라’에 대한 것인 경우가 많으며, 그게 민주당이라는 리버럴을 한국의 민주당과는 다른 제법 진보적인 리버럴로 만드는 힘이다.

한국에서 리버티가 없는 것에는 단지 마땅한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한국 보수에게 자유는 ‘공산독재로부터 자유’에서 기인했고 여전히 그렇다. 한국 진보에게 자유는 ‘반공독재로부터 자유’에서 기인했고 여전히 그렇다. 둘 다 과거의 현실에 퇴행적으로 머물러 있다. 둘 다 정체성과 존재 가치를 스스로가 아니라 상대의 부정을 통해 만들어낸다. 둘은 서로 싸울 수 있을 뿐 제 나름의 사회를 구현할 능력은 확인된 바 없다. 보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일 뿐, 엘리트의 책임감이나 품위와 헌신 같은 건 개념조차 없다. 진보는 모든 걸 보수의 탓으로 돌리며 ‘인간이 저럴 수가 있는가’라고 시민들에게 하소연하는 데 능할 뿐 정작 자신들이 보수와 뭐가 다른지는 늘 우물거린다.

어느 사회보다 무성한 사회적 토론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보수의 자유로운 진보 까대기와 진보의 자유로운 보수 까대기를 제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보수 시민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종북 좌파’라 싸잡아 까대고 진보 시민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수구 꼴통’이라 싸잡아 까댄다.

‘보수와 진보는 적대적 공생 관계다’라는 비판은 둘의 생존 풍경을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그 허망하고 거대한 쳇바퀴에 휩쓸리지 않고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사람들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리고 자유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시민들은 그들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만든다. 자유가 비어 있다면,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도 자유 너머를 전망하는 노력도 소용없는 일이니.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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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 회항’ 사건과 관련한 대대적 분노에서 특기할 점은, 기장의 책임은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행기는 배와 함께 육상 운송수단과는 달리 목숨을 내맡기고 타는 운송수단이다. 기장과 선장의 책임과 권한은 버스 기사나 철도 기관사와 차원이 다르다. 비행기에서 승객 안전에 대한 책임과 권한은 전적으로 기장에게 있다. 기장은 그런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고도의 훈련과 경험을 쌓고 또 유지하며, 비행기 안에서 승객 안전과 관련한 제왕적 절대권력을 갖는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잘 알기에 ‘하늘을 나는 기계덩어리’에 비교적 편안한 얼굴로 목숨을 맡기는 것이다. 만일 기장이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지 않는다거나,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이를테면 만취했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회사 임원의 지시에 따라 비행기를 움직인다면 아무도 제정신으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것이다.

조현아씨는 비행기 안에서 기장에게 명령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조현아의 회항 요구는 단지 무시되거나 억지되어야 할 행동이며, 심한 경우 기내 난동일 뿐이다. 기장이 조현아의 난동을 명령으로 따른 이상, 그에겐 승객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 책임이 있다. 법적으로 말하면 ‘항공 안전과 보안에 관한 법규 위반 및 책임회피’의 책임이다. 대한항공이라는 회사의 전근대적 내부 상황으로 볼 때, 기장의 곤란한 처지를 공감하고 이해할 순 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을 얼마나 물을 것인가’의 문제이지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근거가 될 순 없다.

갑의 횡포에 지친 을들이 조현아의 행동에 분노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분노가 조현아의 비행 명령권을 전제하고 있다는 건 애석한 일이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분노의 외양을 한 존경’이기 때문이다. 을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조현아의 명령이 아니다. 조현아의 명령권은 부인되어야 한다. 을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조현아의 난동이다. 그리고 조현아의 난동이 명령이 되어버리는 구조, 즉 대한항공의 노동 현실이다.

10년가량 영업하다 2006년 철수한 프랑스 대형마트 까르푸는 ‘노조 탄압은 백화점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악명 높았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 앞에서 프랑스인 임원의 저급한 행동(조현아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행동은 그 임원 개인의 인격 문제였을까. 그럴 수도 있다. 워낙에 못되어먹은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런 못되어먹음을 멋대로 드러낼 수 있는 구조다. 프랑스에서였다면 그 임원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간 해당 노동자들은 물론 프랑스 전역의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프랑스의 구조에선 불가능한 게 한국의 구조에선 가능했던 것이다.

까르푸의 일은 노동계에서 꽤 논란이 되었지만 이번처럼 대대적인 대중적 분노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동안 을들의 분노나 분노의 연대가 많이 진전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분노가 여전히 구조가 아니라 못되어먹은 개인에게 머문다는 점에선 진전이 없어 보인다. 그런 분노가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일까. 못되어먹은 조현아를 감옥에 보내는 것, 앞으로 대한항공의 임원들이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들에게 반말과 욕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다른 재벌 사업장에서도 조금은 그런 영향을 받을 가능성. 정리하자면 일부 갑들의 매너가 달라질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 매너를 낳은 구조가 그대로라면 매너의 변화는 을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 “‘을’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조현아의 난동이 명령이 되어버리는 구조
즉 대한항공의 노동 현실이다”


갑과 을의 사회에서 을들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갑이 되는 것? 당해온 만큼 갑에게 되갚아주는 것? 당해온 만큼 되갚아주기까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 그것들은 모두 가능하지 않거나 소용없는 감정적 배설일 뿐이다. 의미있는 목표는 하나뿐이다. 갑도 을도 없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당장은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목표지만, 어쨌거나 그걸 목표로 연대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만 작더라도 실제적인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은 옛 구조 속의 나 또한 새롭게 바꾸는 일을 포함한다. 기장의 처지와 행동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과 기장의 책임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은 동시에 존재해야만 한다. 기장의 책임을 덮는 건 기장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그를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조현아에 분노하면서 그의 명령권을 인정하는 것이 조현아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분노의 외양을 한 존경이듯 말이다. 머슴 신세가 되어버린 을들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은 ‘나는 머슴이 아니다. 존엄을 가진 인간이다’라는 선언일 것이다. 조현아에 대한 분노는 ‘나는 머슴이다. 그러나 머슴이라고 함부로 욕하진 마라’에 머문다. 그게 지금 더도 덜도 아닌 한국 을들의 좌표다.

그럼에도 한국의 을들은 희망의 편린을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분노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에서 이런 비슷한 일로 당사자가 전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 흘리고 그 아비가 ‘자식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사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분노의 양만큼은 어느 사회와 비교해도 높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분노의 목표점만 제대로라면 구조를 바꿀 가능성도 어느 사회보다 높다는 말일 수 있다. 오늘 한국의 을들에게 필요한 구호는 ‘분노하라!’가 아니라 ‘분노를 조준하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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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가 “나라가 전체적으로 괴멸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라고 했다. 친구는 작은 출판사를 하는데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갈수록 자기가 누구인지 뭘 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모르는 듯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은데,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만 그런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친구는 ‘너무들 돈만 생각하며 살다 보니까’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비슷한 생각을 하던 처지라 말을 보탰다. “어딜 가나 다 그런 것 같아. 부모들만 보더라도 다들 교육문제 교육문제 하지만 교육이 뭔가에 대해 고민하는 부모는 거의 없지. 네 말마따나 영혼이 없는 부모랄까.”

너무들 돈만 생각하며 살다 보니까, 는 역시 신자유주의와 관련한 것일 게다. 그러나 발단은 박정희 시절로 올라간다. 일제 때 일본군 헌병이었고 해방 후 잠시 사회주의자였던 박정희는 제 이력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경제개발에 몰두했다. 극도로 생산력이 낮고 빈곤이 만연한 사회에서 경제개발이 갖는 미덕을 무작정 부인할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잘 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진행된 경제개발은 영혼의 개조작업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잘 산다’는 것의 의미와 ‘행복’의 의미를 돈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어냈다. 박정희의 ‘새마을’은 소박하고 인간적인 삶의 행복을 폐기한 마을이었다. 박정희의 사전 정지작업과 김대중 이후 줄기차게 진행된 신자유주의가 결국 한국을 영혼 없는 사람들의 나라로 만든 셈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박근혜에게 돌리고 저주를 퍼붓는 걸로 영혼 없음의 공허를 채우려 든다.

내 이야기를 좀 할까 싶다. 나 개인 이야기가 아니라 관련된 하나의 사례로서 말이다. 나는 종종 내가 사람들에게서 매우 비현실적인, 교조적이고 근본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아마도 반이명박 운동이 진보의 대세가 될 무렵 ‘이명박 반대는 당연하지만 또 다른 신자유주의 세력에게 봉사하는 건 경계한다’ 식의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미지가 강화되었던 것 같다. 그런 사회주의자가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그런 사회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체질이 아니랄까. 사회주의자란 사회구조와 인간의 행복의 관련성을 높게 보는 사람들 아닌가. 나는 여느 사람들에 비해서도 그 관련성을 높게 보는 편이 아니다. 행복을 찍어내기엔 인간이란 너무나도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상주의적 사회에 대한 굳센 믿음도 없다. 이상주의자의 시효는 이상주의적 사회가 만들어졌다고 선언되는 순간까지다. 그 순간부터 이상주의자의 역할은 이상주의적 사회의 훼손에 있다. 언제나 그렇다. 나는 이상주의적 사회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안에서 유동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상주의적 사회에 회의적인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를 봐도 현재 진행 중인 역사를 봐도 그렇고 인간은 구제불능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가진 동물이다. 인간과 비슷한 지적 능력을 가진 다른 종이 있어 그의 눈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보자. 한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종끼리 뜯어먹고 잡아먹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우아한 얼굴로 인문학과 예술과 구원과 심지어 미각을 말하는 동물을 말이다.


▲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한’보다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을 생각해야
인간·사회에 회의적이어도 사회주의자
왜 이리 사회주의자가 적은 걸까”


나는 인간이 인간의 사회에 대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한’을 생각하기보다는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을 생각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고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들 역시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적은 사회 구조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큰 욕심 없이 그저 제 식구 건사하고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이 평생을 아등바등 살아야만 한다거나, 빈부 격차가 지나치게 커서 극소수의 안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힘들게 살아야만 한다거나, 아이들이 경쟁 때문에 제대로 뛰어놀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시들어가는 게 당연시된다거나 하는 사회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을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 인간의 일이다.

열거한 상황들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자본주의를 인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념은 둘뿐이다. 자본주의를 인정하는(보수적으로든 개혁적으로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혁명적으로든 합법적으로든) 사회주의(사민주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은 의식하든 않든 둘 중 하나에 속해 살아간다. 나는 사회주의적 교조에 투철하지 않고 이상주의적 사회에 대한 굳센 믿음도 없다. 그러나 나는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상황들을 (좀 더 나은) 자유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자다. 말하자면 나는 적어도 자유주의자일 순 없어서 사회주의자다. 나는 늘 궁금하다. 나처럼 인간과 사회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사회주의자인데 왜 이리 사회주의자가 적은 걸까. 전체의 괴멸과 영혼의 고갈을 체감하면서도 왜들 망설이는 걸까.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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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서평을 썼다. 게이츠는 피케티의 기본적인 문제의식들(부의 불평등이 심각해지면 경제적 동기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자본주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으며 이를 교정하기 위한 소득 재분배 정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에 동의한다. 그러나 게이츠는 현재 세계의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있다거나 부가 세습되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한다. 게이츠의 주장에서 눈에 띄는 건 자본에 대한 세금보다는 어떤 자본이냐, 즉 불로소득이나 상속에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게이츠가 가장 힘주어 말하는 건 사회적 재분배의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하고 있는 방법, 즉 기부라는 것이다. 게이츠를 비롯한 미국 부자들이 거액의 기부를 하는 일이 종종 화제가 된다. 미국에서 기부는 건국을 주도했던 청교도 정신을 기반으로 시작되어 일종의 사회분배 시스템의 기능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미국은 기부가 사회적 재분배의 바람직한 방법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회다. 미국은 여전히 개인기부가 전체 기부의 73%에 이르는 ‘기부 선진국’이지만, 모든 선진국 가운데 부의 편중이 가장 심각한 사회다.

사회적 재분배의 방법으로 기부의 가장 큰 결점은 부자의 선의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내면 좋고 안 내도 강제할 방법이 없는 방법이 바람직한 사회적 재분배의 방법이 될 순 없다. 긴급하고 특별한 상황에서 기부의 유용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부가 사회적 재분배의 주요한 방법이 되어버리면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기준에서 알량한 수준에 불과한 사회적 재분배를 과장하고 치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적 재분배를 차단하는 할리우드 쇼가 된다.

우직하고 집요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세습적 경향을 증명해냈다는 것 외에 피케티의 견해가 새로운 게 아니듯, 게이츠의 피케티 비판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부냐 세금이냐’로 요약되는 해묵은 논쟁이며, 미국식 자본주의와 유럽 사민주의 복지사회의 대립이기도 하다.

사민주의 복지사회 역시 자유 시장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시장에서 경쟁은 그 결과에서 격차를 만들 수밖에 없다. 격차가 없다면 누가 열심히 경쟁하겠는가. 주류경제학자들은 그런 격차가 결국 가장 공정하고 이상적인 부의 분배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격차가 경쟁의 출발점과 조건을 왜곡하면서 갈수록 더 큰 격차를 만들어낸다는 건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진 사실이다.

복지사회란 시장은 인정하되 시장에서의 격차가 삶의 격차로 직결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부자는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안 내면서, 복지 혜택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보편적으로 받는 방식으로 말이다.


▲ “피케티의 ‘부유세’와 빌 게이츠의 ‘기부’
유럽식 복지냐 미국식 자본주의냐의 논쟁
사민주의 복지가 진정 가야 할 길이라면
자유주의를 등지고 뛰쳐나와야”


알려진 대로 유럽 사민주의 복지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적잖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복지병’이니 뭐니 사민주의 전체가 쇠퇴했다는 우파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제3의 길’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사민주의도 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극복을 좇는 전투적인 사민주의도 있다. 규모는 다를 뿐 한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의 사민주의 세력의 상당수는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민주당이라는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투항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력과 선을 긋는 전투적 사민주의 세력이 있다.

부자들이 기부도 세금도 내려 하지 않는, 기부 미담의 주인공이 여전히 ‘평생 모은 돈을 쾌척하는 가난한 할머니’인, 세금에 대한 전향적인 의견과 토론은 즉시 ‘공산주의적 발상’으로 공격받는 사회에서 이런 논쟁은 해묵은 것이면서도 동시에 요원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폭주하는 자유주의와 또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회주의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럽식 사민주의 복지사회가 갈 길이라 말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복지사회를 말하는 게 어불성설이듯 민주당이, 혹은 민주당을 통해 복지사회를 말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그건 흔히 말하듯 그들의 정치윤리 문제도 정치인으로서 진정성 문제도 아니다. 그들의 세계관과 이념의 문제다. 사민주의는 ‘자유주의를 억지하는 현실적 사회주의 전략’인데 어떻게 자유주의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가.

유럽 복지사회가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민주의자들의 아이디어에 전체 사회가 감화되어 만들어졌다는 생각 역시 총체적이지 않다. 유럽 복지사회는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과 자본의 타협의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사민주의자들의 아이디어는 그 맥락에 결합되어 있다. 모든 사회에서 사민주의의 성장의 경로와 방법이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사회주의 세력조차 없는 사회에서, 즉 사민주의가 극좌인 사회에서 사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

진심으로 복지사회를 바란다면 몸을 일으켜 빠져나와야 한다. 정치적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사회주의 혹은 전투적 사민주의. 열정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길이 안 보인다’ 한탄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로선 둘 다 지나치게 세력이 약하지 않으냐고?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당신이 지금 당장 그 세력의 일원이 되어야 할 이유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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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은 다음카카오 경영진의 안이한 반응이 불을 붙인 면이 크다. 여기에서 안이함은 어떤 철학에 관한 게 아니다. IT산업 자본가가 기존 산업의 자본가와는 다른 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IT산업 자본가들의 선전에 포획된 결과다. IT산업은 단지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엘리트에 점유된 지식과 정보를 대중이 쉽게 접근하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에 공헌하는 어떤 숭고한 산업이라는 식의 선전 말이다. 그 선전은 굴뚝과 공장이 아닌 이른바 창의력과 혁신으로 대박을 친 신흥 부자들에 대한 대중의 선망과 결합하면서 다시 IT산업 자본가의 자아도취를 만들었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나 안철수를 시대의 지도자로 떠받드는 상황까지 갔으니 오죽할까.

IT산업은 과연 인간의 삶에 공헌했는가. IT산업은 오히려 인간의 삶에서 적정한 속도와 최소한의 여백을 소거해버림으로써 인간의 삶을 훨씬 더 각박하고 공허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IT산업은 모든 지식과 정보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다는 지식과 정보의 불감증을 만들어냄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정보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사유에서 멀어지게 했고 지식과 정보의 껍질만 허화하게 오가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 모든 상황을 IT산업 자본가들에게 들씌울 일은 아니다. 그러나 IT산업의 숭고함은 과장된 것이다. IT산업은 새로운 산업이되 다른 산업은 아니다. IT산업의 본질은 모든 산업이 그러하듯 철학이 아니라 이윤이다. 다음카카오 경영진의 안이함은 바로 그 안이함, 이윤에 대한 안이함, 즉 상인으로서 안이함이었다.

개인적으로, 카카오톡 논란과 관련하여 좀 더 인상적이었던 건 다음 창업자 이재웅씨의 견해다. 그는 SNS에서 이루어진 토론에서 말했다. “국가권력의 남용을 탓하지 않고 시민 혹은 기업을 탓하는 이런 자세는 정말 구태다. 예전에는 의식이 없다고 동료 학우들을 탓하던 바로 그런 어쭙잖은 엘리트 의식과 뭐가 다른가.” 앞의 말은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뒤의 말은 영 간단치 않다. 그 말엔 앞서 말한 IT산업 자본가의 과도한 자기도취와 함께 옛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오랜 피해의식이 담겨 있다. 예수의 비유가 떠오른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 즉 ‘새로운 세상’을 늘 비유로 설명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겨자씨의 비유’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할까, 혹은 무슨 비유로 그것을 표현할까? 겨자 씨앗과 같습니다. 그것이 땅에 뿌려질 때는 땅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작습니다. 그러나 뿌려지면 자라서 어떤 푸성귀보다도 크게 되어 큰 가지들을 뻗칩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됩니다.”(마가 4장 30~32)

겨자씨로 번역되었지만 우리가 아는 겨자와는 다른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 많던 ‘시나퍼’라는 변종 겨자다. 씨앗은 어떤 풀씨보다 작지만 자라면 3미터가 넘게 커지는 나무다. 예수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당대에는 언제나 작고 미약해보이지만 결국 그들의 헌신과 투쟁으로 이루어진 변화한 사회는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을 비현실적이라 냉소하던 사람들, 심지어 그들을 적대하던 사람들까지도 함께 누리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도 물론 그와 같다. IT산업 자본가는 그 각별한 수혜자들이다. 정치적 자유가 없었다면 그들이 검색 사업으로 번창했겠으며 이메일 사업으로 번창했겠는가.


▲ “다음카카오 경영진 안이한 대응
IT자본가의 자기도취·피해의식 담겨
민주화 수혜자인 IT자본가
‘사회적 성취’ 사유화하면 해악”


민주화운동을 한 게 벼슬이어선 안 된다. 제아무리 의미있는 사회적 성취라 해도 그 성취를 한 인물에 돌리면 그 성취는 사유화하게 된다. 사유화한 사회적 성취는 좀 더 심각한 사회적 해악을 만들어낸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이 아수라장이야말로 그 사례다. 민주화운동 이력을 훈장으로 정치는 물론 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 세력이 되어 두 번의 집권을 하며 사회를 신자유주의 아가리에 바침으로써 돈 귀신 들린 세상을 만든 사람들, 소박한 행복을 꿈꿀 뿐인 사람들의 삶을 궁지에 몰아넣고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며 살아가게 만든 사람들, 결국 이명박을 불러들이고 박근혜를 불러들이고도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이명박과 박근혜 욕하는 것일 뿐인 ‘진보’ 파렴치한들 말이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민주화 이후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바람에 맞서 다시 새로운 씨앗을 심고 가꾸며 살아온 사람들도 적지 않고 사회가 진즉 파국에 이르지 않은 것도 그들 덕이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인물이 아니라 행위에 집중해야 한다. 행위는 지금 이 순간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과거의 행위들이 그랬듯이 비현실적인 몽상이라는 평가와 냉소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러나 결국 그 행위들은 다시 크고 깊은 시나퍼의 그늘을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건 없다. 인간의 세계는 늘 그렇게 굴러왔고 또 그렇게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사회와 내 삶에 그런 행위의 맥락이 담겨 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건 무지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재웅씨만의 무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무지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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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노페 열풍’(노스페이스 패딩 열풍)이 있었다. 그즈음 노스페이스 창업주가 한국에서 실적이 좋은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국엔 산이 많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 산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는 제 상품이 한국 고등학생의 ‘비공식 교복’이라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고등학생들은 왜 그리 노페에 집착하고 또 안달했을까? 이런저런 사회문화적 분석을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옷에 관한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교사들에 따르면 MP3 플레이어(최근엔 스마트폰으로 통합된)에 기획사에서 만들어내는 유행 음악이 아닌 음악, 대중음악의 고전이나 인디음악 파일이 한 개라도 있는 아이는 반에서 하나가 채 안된다고 한다. 왜 그런 걸까? 역시 아이들에게 음악에 관한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취향이 없는 아이는 유행하는 것, 즉 남들이 하는 걸 따르게 되고, 따를 수 없을 때 심한 통증을 느낀다.

노페 열풍도 강남에선 통하지 않았단다. 어릴 적부터 노페보다 더 좋은 옷들을 구매해본 아이들에게 노페 열풍이란 촌스러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취향이라기보다는 소비 취향이다. 브랜드와 가격으로 표현되는 소비 취향은, 취향처럼 보이는 자본에 의한 ‘취향의 계열화’다. 그러나 주류 대중음악이 아닌 음악을 듣는 아이들이 가장 많은 곳 역시 강남이라는 사실은, 소비 취향의 기회와 취향 사이의 일정한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물론 대개의 아이들은 강남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취향이 없는 이유는 역시 어른들(부모들)에게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옷이나 음악뿐 아니라 삶의 여러 부문에서 나름의 취향을 가진 사람, 남의 기준이나 이목에 아랑곳않는 제 나름의 미감과 생활철학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정말 어렵다. 이를테면 돈에 대한 나름의 주관이나 철학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다들 ‘돈이 모자란다’고 생각할 뿐이다. 집이라는 게 삶에서 무엇이고 나에게 적당한 집은 어떤 것이며 집을 위해 인생을 얼마나 할애할 것인가 등에 대해 나름의 정리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내 집이 작은가 큰가, 싼 집인가 비싼 집인가를 생각할 뿐이다.

이런 상태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다. 훨씬 더 가난했고 생존이 숙제이던 시절의 사람들도 나름의 취향과 철학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때 말이다. “돈이 중요하지. 하지만 사람이 너무 탐욕 부리면 죄 받지.” 이 흔하디흔한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적 위엄을 지키는 삶의 비결을 묘파한다. “공부 열심히 해. 하지만 공부가 인생의 다는 아니야. 동무한테 양보할 줄 알고 잘 놀아야지.” 어지간한 어른이라면 예사롭게 하던 이 말엔 교육 철학의 정수가 담겨 있다.


▲ “옷도 음악도 취향이 없는 아이들
돈도 집에도 철학이 없는 부모들
생활양식 즉 ‘영혼의 성곽’ 쌓는 게
일상 속 ‘신자유주의와의 전투’다”


돈, 집, 직업, 아이 교육, 종교, 사랑 등 삶의 부문들에서 마련된 취향과 삶의 철학들이 모여 하나의 ‘생활양식’을 만들어낸다. 생활양식은 한 인간의 영적 성곽이다. 노페 점퍼를 두 벌 가진 아이가 못 가진 아이를 무시할 순 있지만 옷에 대한 나름의 취향을 가진 아이에겐 별 도리가 없다. 마당이 온통 잡초로 덮인 작고 초라한 시골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병든 노인을 누군들 측은히 여기지 않을까. 그러나 제 생활양식에 의거하여 바로 그렇게 살던 권정생을 측은히 여긴 사람은 없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삶이란 곧 생활양식이 파괴된 삶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걸 내맡기는 19세기 경제체제의 부활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극단적 개인주의와 물신주의로 개조하려는 강력한 영성운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이 낱낱이 흩어져 무한 경쟁을 벌임으로써 구원을 얻는, 또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설파하는 종교다. 한국인들은 1997년 이래 그 종교에 포획되었다. 이명박이라는 극단적 추(醜)와 박근혜라는 극단적 악(惡)에 분노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일상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생활양식은 24시간 내 영혼을 파고드는, 불안감과 경쟁 강박에 전전긍긍하게 하는 종교에 대한 면역체계다. 물론 신자유주의하에서 나름의 생활양식을 온전하게 마련하긴 어렵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내가 지금 당장 마련할 수 있는 생활양식의 범주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쓰고 있기에 그 자체로는 내 삶을 말단까지 장악하기 어렵다. 내가 나름의 생활양식을 가지려 하지 않음으로써 말단까지 장악되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역이용하여 나만의 생활양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

아이에게 제 삶과 관련한 취향들을 일찌감치 하나씩 길러주고 돈, 집, 직업, 교육 등 삶의 모든 부문에서 차근차근 나만의 생활양식을 만들어가는 일, 누구도 감히 내 삶의 가치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재단할 수 없는 영혼의 성곽을 쌓아가는 일은 일상에서 수행하는 신자유주의와의 전투다. 물론 일상의 전투만으로 신자유주의가 극복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전투가 없다면 사회적 차원, 좀 더 거대한 차원에서 전투도 없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체제이자 종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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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보성씨가 철 지난 마초풍 분장에 주먹을 치켜올리며 “남자는 의리!”를 외치기 시작한 건 꽤 된 일이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 웃긴 했으되 그 웃음에 존중은 적었던 것 같다. 차라리 조소의 맥락마저 보였다고 할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모습이 광고와 선거에 무수히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분명한 호감이 들어 있었다. 사회 정의도, 인간에 대한 신뢰도 깡그리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 투박한 의리 주장에 조소 대신 호감을 보이게 된 것이다.

물론 김보성의 의리를 포함, 의리라는 말은 얼마간 걸러질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의리라는 말은 대개 남성들의 인간관계에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현실적 이득을 도모하는 일을 뜻해왔다. 그러나 그건 의리가 아니라 ‘기리’다. 기리는 의리와 한자가 같은 일본말로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루스 베네딕트의 일본 문화 연구서 <국화와 칼>은 기리, 즉 일본식 의리를 아예 한 장으로 다루기도 한다.

의리(義理)란 본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뜻한다. 의리는 남성적인 말도 아니고 사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사적 관계에 불편이나 손실을 초래하더라도 원칙과 신념을 지키는 것, 눈앞의 이해득실을 넘어 대의를 따르는 것이 의리다. 의리라는 말에 정서적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많지만(나 역시 그렇다) 알고 보면 인간의 삶에서 의리만큼 귀한 것도 없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의리는 역사와 현실의 큰 흐름과 맥락을 읽게 해주며, 내가 누구인지와 뭘 하고 있는지를 또렷하게 밝혀준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의 행태는 정치에서 의리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세월호특별법의 두 번째 여야 합의안을 유족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광화문팀, 안산팀 등 네 개의 팀까지 만들어 작업했다. 매우 주도면밀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기획이었다.

물론 세월호 유가족도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인이니 정치인들의 ‘현실적 제안’에 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의사자 지정, 대학 특례입학 따위 회유책을 마다하고 ‘기소권과 수사권이 있는 특별법’으로 진실 규명에 집중하기로 했다. 의리를 선택한 것이다. 많은 시민이 그들을 단지 ‘불쌍한 사람들’로 여기지 않고 각별한 존중심을 보이는 이유도 그것이다.

의리를 선택한 사람의 마음을 한낱 정치적 기술로 흔들 순 없는 법이다. 그런데 왜 새정치연합은 이 당연한 이치를 모르고 되도 않는 뻘짓을 해댄 걸까. 그들의 정신세계가 이미 쓰레기통이기 때문이다. 의리가 실종된 정치, 정치적 기술과 타협과 조율은 단지 쓰레기일 뿐이다. 의리를 잃은 정치인은 민심을 읽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뭘 하는지조차 모른다.

박영선이 비대위원장 취임 일성으로“투쟁정당을 벗어나겠다” 말하고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 임종석과 이인영이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중도 노선으로 가야 한다” 말한 건 그 일단이다. 그들은 ‘새누리와 다른 게 뭐냐’ 항의하는 사람들 앞에서 매우 진지한 얼굴로 ‘새누리와 다른 게 문제’라고 대꾸한다.


▲ “‘인간이 마땅히 할 도리’가 의리
교황은 예수님에 대한 의리 좇고
김영오씨 단식은 딸에 대한 의리
정치인들은 민심에 의리 지켜야”


오늘 전 지구적으로 정치인의 의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교황이다. 교황이 정치인인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교황은 정치인 중의 정치인이다. 프란치스코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를테면 왜 교황은 강우일이 아니라 염수정을 추기경으로 임명했으며 기어코 꽃동네를 방문했을까.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교황이 속아서, 몰라서 그렇게 한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만일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교황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길 위의 신부’ 문정현이 교황이 될 수 없듯 프란치스코는 길 위의 신부가 될 수 없다. 프란치스코는 고도로 세련된 정치인이되, 예수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정치인이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교황이고 마몬의 세상이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교황이다.

한국 정치인들이 정치에서 의리가 무엇인가를 좀 더 쉽고 생생하게 배우고 싶다면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보면 된다. 그는 메말라가는 제 신체로 한국 정치에서 의리가 얼마나 바닥이 났는지, 민심이 얼마나 의리를 갈구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알다시피 그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금속노조 깃발마저 마다하고 어떤 정치적 기술이나 타협 조율도 거부한 채 오로지 억울하게 죽어간 딸에 대한 의리만 좇았다. 가장 비정치적인 선택으로 일관한 그는 역설적이게도 정치의 중심이 되어갔다.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지상의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치인에게 바라는 건 단지 의리다. 진정성이 담겨 있는가, 쇼인가를 꼬치꼬치 따지려들 여력도 없다. 그저 눈앞의 이해득실보다 대의를 좇는 정치인을 보며 구멍 뚫린 마음부터 달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멍청하고 멍청한 정치인들아, 민심을 얻고 싶다면 무슨 연합이니 타협이니 조율이니 쓰레기 정치 기술일랑 당장 걷어치우고 의리에 우직해라. 우직한 시늉이라도 해라. 극우 정치인이라면 국가에 대한 의리에, 자유주의 정치인이라면 시민에 대한 의리에, 진보 정치인이라면 민중에 대한 의리에.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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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너무 현실적이야’라는 말은 욕이었다. 낭만도 꿈도 이상도 없는, 당장 실현가능한 게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거나 매사를 이해득실로만 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그 말은 ‘그 사람은 한심한 속물이야’와 같았다. 이젠 ‘그 사람은 너무 현실적이야’라는 말은 욕이 아니다. 욕이다 아니다 이전에 그 말 자체가 사라졌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너무 현실적인’ 삶의 태도는 이제 한심한 것도 속물적인 것도 아닌 일반적인, 아니 필수적인 삶의 태도일 뿐이다.

흔히 사람은 현실과 이상 사이를 줄다리기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몸은 현실에 얽매여 있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게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라는 말엔 존경이 들어 있다.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나 ‘비현실적인 원칙주의자’라는 말엔 나는 저렇게 못 살지만 저런 사람이 있으니 세상은 희망이 있구나, 라는 뜻이 들어 있다. 오늘 한국에서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욕이다.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나 ‘비현실적인 원칙주의자’라는 말엔 명백한 경계와 혐오가 담겨 있다. 한국은 좀처럼 변화하기 어려운 사회로 접어든 셈이다. 현실은 오로지 ‘비현실적 상상’을 통해서만 변화하기 때문이다.

극우독재는 비현실적 상상을 철저히 억압했다. 감시하고 검열하고 금지하고 탄압했다. 비현실적 상상이 조직되고 행동이 될라치면 체포하고 투옥하고 살해했다. 그런 살벌한 시절이었음에도 ‘그 사람은 너무 현실적이야’가 욕이었던 것이다.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침묵으로 존중받았으며 바로 그래서 극우독재는 극복될 수 있었다.

오늘날 자본독재, 즉 신자유주의는 비현실적 상상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아예 거세한다.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하의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의 기업이 되어 끝없이 자기 계발과 경쟁으로 스러질 때까지 달려가며, 과잉 의욕과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에 포박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한국은 그런 경향이 다른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한 편이다.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는 싸움이 너무나 길고 고되었기 때문에 민주화만 되면 어떻게든 좋은 사회로 나아갈 거라는 낭만적 정서가 있었다. 정치적 자유와 함께 밀려들어올 시장 자유에 대한 경계의식이 없다시피 했고 결국 ‘국가부도’라는 쇼크와 함께 어떤 견제나 면역력도 없이 유례 없는 속도로 신자유주의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극우독재 세력이 아니라 민주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독재와 반독재, 보수와 진보 혹은 정치적 선과 악 같은 일반적 가치와 정서들이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가장 충직한 신자유주의적 신민으로 개조되었다.


▲ “‘자경단식 상상력 제거 작업’ 결과
정치는 현실적인 것에 제한된다
아름다운 상상에 뒤덮인 현실
진보 소임은 비현실적 상상이다”


비현실적 상상력이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거세된 건 물론이다. 이제 한국인들은 상상하길 두려워하는 걸 넘어 상상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여전히 상상하는 사람은 ‘비현실적’이라는 혐오와 경멸의 낙인이 찍힌다. 상상을 조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인신이 체포·투옥·살해되진 않지만 상상력은 철저하게 체포·투옥·살해된다. 그런 ‘자경단식 상상력 제거 작업’과 정서 속에서 진보는 ‘상상하지 않는 진보’로 재조정된다. 비현실적 상상을 좀 더 섬세하게 제거하기 위한 ‘아름답고 희망적인’ 상상 간판들이 세워진다. ‘현실적 상상’은 실은 상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덮인 채 유일하게 온당한 상상으로 상찬된다.

정치는 그 상한선이 현실적인 것으로 엄격히 제한된다. 자본주의 극복이나 반(反) 신자유주의 투쟁과 대안 모색, 계급적 의제 같은 진보정치의 골간들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배척된다. 진보 정치의 소임은 비현실적인 것, 즉 ‘다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 즉 ‘최악을 막는 것’이 된다. 결국 ‘차악’이 최선의 정치가 된다. 물론 최악과 차악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버림으로써 진보정치는 존재 이유를 잃고 사회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공전하게 된다.

선거 부정과 세월호 학살 등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 최악의 세력은 심판은커녕 7·30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둔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세월호특별법 제정’이 막막해지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다.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시민들’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차악이 최악의 2중대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차악이 그런 노릇을 지속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차악을 욕하면서도 차악 이상은 절대 상상하지 않는 자신들 덕이라는 사실은 생략된다.

최악과 차악은 언제나 최악과 차악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결국 그것들이 견제되고 극복되며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가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시민들’이 비현실적 상상력을 회복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들에게 책임을 묻거나 비난하는 건 부당하다. 그들의 상상력이 거세된 건 그들의 선택이 아닌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사회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오로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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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를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라 기대하고 환호하던 많은 사람들이 안철수 얼굴만 보여도 욕을 한다. 이제 그들에게 안철수는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 아니라 낡은 정치의 화신이 되어버린 듯하다. 물론 기대는 실망으로 바뀔 수 있고 그 낙차에 따라 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이력이 전무한 안철수가 정치판에서 힘을 갖게 되고 저리 활개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기대와 환호 덕 아니었던가. ‘나의 관련성’을 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다. 심각한 정치적 성찰까진 아니어도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내가 어리석었다’ 정도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단지 ‘성찰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의 태도는 매우 열정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듯한 그들이 실은 ‘정치로부터 유폐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들의 태도는 전통적인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수십년 전 복덕방에 모여 앉아 “대중이가 말이야” “영삼이가 말이야” “박통이 말이야” 하며 ‘한국 정치를 운영하던’ 영감들을 빼닮았다. 권위주의 사회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권력들에 섬세하게 조아리며 식구들에나 군림하던 그들은 복덕방 장기판에 둘러앉아 세상의 모든 걸 꿰는 양 한국 정치의 막후 실력자라도 되는 양 허세를 부리곤 했다. 우스꽝스럽고 슬픈 풍경은 여전하다. 복덕방이 인터넷 공간으로, 장기판이 모니터와 키보드 혹은 스마트폰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은 유폐의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노무현은 기대와 환호로 출발했다. 그가 좋은 변호사였고 좋은 사람이긴 하나, 그와 그가 속한 정치세력의 이념으로 볼 때 서민 대중의 편에 서는 급진적인 대통령일 거라는 기대는 무리한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그런 대통령일 거라 확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대가 근거 없는 것임이 드러났을 때 제 확신을 되새기는 사람은 없었다. ‘노무현이 변했다’ ‘개혁의지가 후퇴했다’고 비난할 뿐이었다.

퇴임 후 그가 형과 부인의 비리를 시인하자 비난은 극에 달했다. 그날 한 ‘진보신문’의 사설 제목은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였다. 그러나 그의 비극적 죽음 후 모든 게 바뀐다. 노무현은 민주주의 순교자로 추앙되고 동시에 부활한다.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어!’라는 탄식은 ‘얼마나 좋은 대통령이었어!’로, 다시 ‘얼마나 좋은 정권이었어!’로 바뀐다. 문재인이니 유시민이니 노무현과 함께 몰락했던 친노세력이 일제히 되살아난 건 물론이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 그의 인간미를 새삼 되새기고 애도하는 건 품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개인에 대한 애도가 대통령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와 그 정권, 그리고 현존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평가를 전적으로 뒤집는 건 의식의 파탄일 뿐이다. 공화국의 시민 노릇을 하기엔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역시 정치로부터 유폐의 자연스러운 귀결일 뿐이다.


▲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이
기대 못미치면 냉소만 보내
‘정치는 내 삶’ 시민의식 절실”


정치로부터 유폐의 연원은 무엇일까. 연구자들의 좀 더 정교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한국 시민들이 ‘정치는 내 삶을 반영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조차 실제로 체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 중요한 뼈대일 것이다. 절차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진보정당이 약진하면서 잠시 기회가 오는 듯했지만 결국 이루어내지 못했다. 결국 정치로부터 유폐란 내 삶을 반영하지 않는 정치를 묵인하는 혹은 견뎌내는 한국 시민들의 의식적/무의식적 자구책인 셈이다. 한국 시민들에게 정치란 참여가 아니라 관람하는 것이라든가, 그들에게 정치란 과도하게 존재하면서 동시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분석은 오히려 피상적이다.

정치로부터 유폐되어 있기에 ‘역설적이게도’ 사소한 정치적 차이는 매우 의미 있는 차이가 된다. 이를테면 보수정치와 자유주의정치의 동맹체제로서 신자유주의 공세에 내몰려온 시민들에게 두 세력은 ‘차이가 없다’고 주장되어도 모자랄 것이지만, ‘매우 의미 있고 큰 차이’가 된다. 안철수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와 희망이 거대한 기대와 희망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을 무작정 냉소하고 개탄하긴 어렵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라는, 언제나 이상주의적 정치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정당정치를 주창한다는 노학자마저도 싱겁고 망신스럽게 휩쓸리는 지경 아닌가. 정치로부터 유폐는 차라리 한국의 ‘보편적인 정치문화’라 할 것이다.

한국 정치가 바뀌려면 이 ‘보편적인 정치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정치로부터 유폐를 스스로 해제하는 시민들로부터,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처음부터 차근차근 되새기는 시민들로부터 시작된다. ‘정치는 내 삶을 반영해야 한다’ ‘내 삶을 반영하지 않는 의미 있는 정치란 내 삶을 기만하고 동원하려는 함정이다’ ‘정치는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지금보다 낫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정치의 주인이며 정치와 정치인의 수준은 내 정치 수준의 반영이다’ 같은 생각들을 되새기는 시민들로부터 말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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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박근혜씨가 당선되고 한참 동안 한숨만 쉬었다. ‘멘붕’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렇긴 했지만, 그가 이른바 ‘비판적 지지’에 꽤 비판적인 급진적인 사람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의아한 데가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도 여전한 그에게 넌지시 연유를 물었다. “내가 만나는 환자들이 없는 사람들이잖아. 그런데 다들 박근혜를 찍었어. 자신의 삶을 배신했다고 할까. 그들을 보는 게 너무 힘들어. 자꾸 화가 나고.”

외과의사인 그가 일하는 병원이 있는 동네는 J시에서 가난한 축에 속한다. 그나마 그 동네에서도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대학병원으로 가니 그의 환자들은 그의 말마따나 거의 대부분 없는 사람들이다. 평소 그는 그들의 소박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언급하며 미소짓곤 했다. 그 미소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문재인을 찍으면 자신의 삶을 반영한 거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리 화가 나.”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박근혜를 찍는다는 건….” “그들은 너처럼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정치 토론을 하지도 않잖아. 뭘 근거로 투표할 것 같아.” “글쎄. 아무래도 보수화한 티브이 영향이 있을 테고 보수언론도 그렇고.” “자신의 식견이 부족하니 보수언론에 그대로 조종된다. 좀 오만한 생각 아닌가.” “넌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삶이지. 삶의 체험. 그들은 김대중 정권 때도 살아봤고 노무현 정권 때도 살아봤지. 그들도 이명박이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문재인의 희망이라는 말에도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어.” “보수가 좋은 게 아니라 진보가 싫은 거다. 듣고 보니 그렇군.”

지난 대선 당시에 ‘진보 놈들 꼴 보기 싫어서 박근혜 찍는다’는 식의 이야기가 하위계층에서 많았다. 그들의 반감은 자연스러운 데가 있다. 진보가 두 번이나 집권을 하는 동안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삶엔 별다른 게 없었는데,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비롯한 보수는 거의 악귀 취급을 하면서 자신들은 정의와 선의 세력인 양 구는, 정치라는 게 보수고 진보고 다 자기들 좋으라고 하는 거라는 걸 재확인해주었을 뿐이면서, 자신들을 선택하는 게 유일한 희망인 양 설레발치는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반감 말이다.

반감의 맥락은 일베 청년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명색이 청년인데 꿈꿀 수 없는, 그렇다고 부모 덕을 볼 형편도 못되는 구질구질하고 꽉 막힌 삶. 그런데 그런 내 삶을 반영한다 말하는 진보는 반영은커녕 나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자식들도 나와는 처지가 다르다.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지거나 외고, 특목고를 거쳐 일류대에 간다. 진보는 그렇게 누리고 살면서도 마치 악에 맞서 싸우는 저항세력이라도 되는 양 비장한 얼굴이다. 진보가 강조하는 ‘시민의 상식’을 거부하고 진보가 적대시하는 국가주의의 길로 극우의 길로 내달리는 건 진보 앞에서 내 자존감을 확보하는 한 방법이다.

진보는 그 청년들이 ‘연이은 보수정권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며 혀를 차거나, ‘일베충’이라 부르며 경멸한다. 그들이 벌레라면 왜 벌레가 되었는지에 대해선 말이 없다.


▲ 보수에 대한 반감에 기대어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진보
그들 스스로 마음까지 잃어


그런 진보가 다른 청년들을 보며 ‘청년이 살아있다!’고 상찬한 일이 지난해 있었다. 국정원 선거개입과 관련한 대학 총학생회의 연이은 시국선언. 그런데 시국선언이 있기 얼마 전 최저임금위원회에선 2014년 최저임금이 논의되고 있었다. 경총 등 자본 측 인상안은 ‘0원’이었다. 오늘 한국 청년들에게 최저임금만큼 보편적인 삶의 문제가 있을까? 그러나 시국선언에 최저임금 이야기는 아예 없었다. 상찬받은 시국선언이 주로 일류대학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알바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는 청년들의 일이었다는 걸 참고할 수 있다. 기성시민들이든 청년들이든 진보는 그렇게 없는 사람들의 삶과 명료하게 구별되어 있다.

30여년 전, 진보는 반체제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되고 20대를 넘기면서 주류사회로 편입하기 시작했다. 교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기자나 피디가 되고 학원원장이나 사장도 되면서 주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세력을 형성해갔다. 그들은 그들이 ‘수구 기득권 세력’이라 부르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신흥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결국 정권을 탄생시켰고 집권 10년 동안 그들의 기득권을 더욱 안정화했다. 없는 사람들 역시 그 10년 동안 그들을 체험했고, 그들이 한 일을 제 마음에 또렷이 새겼다.

물론 그들의 반감은 얼마간 편향되거나 과장된 것일 수 있다. 보수와의 차별성이 분명히 존재하고, 또 진보의 기득권이라는 것도 모든 진보가 고루 나눈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친 사람들에겐 다친 부분이 전부인 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보가 언젠가부터 진보의 정체성보다는 오로지 보수와의 비교로만 제 정체성을 확보하는 이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진보를 존중할 수 있는 건 진보 자신뿐일 것이다. 진보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얻는 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사적 삶에서 종종 깨우치듯, 마음을 잃은 이유를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마음을 다시 얻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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