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찬사가 많다. 자본주의의 사악함을 비판하는 등 그의 발언과 행보는 충분히 그럴 만해 보인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한 인물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 꼴통’이라 비판받는 염수정씨의 추기경 임명에서 드러나듯 교황은 로마 가톨릭 체제라는 정치적 컨텍스트 안에서 작동하는 존재다. 인물보다는 그 개혁성 자체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걸 이끌어낸 요한 23세 교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요한 23세는 시쳇말로 ‘듣보잡’ 교황 후보였다. 개성이 강했던 전임 교황이 만들어낸 피로감에다 유력한 두 교황 후보의 각축전이 지속되자 가톨릭 지도부는 일종의 ‘징검다리’ 교황으로 요한 23세를 선출했다. 나이가 워낙 많아서(1958년 교황에 즉위했을 때 78살이었다) 어차피 교황을 오래 맡기도 어려웠고 특별한 개성을 가진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듣보잡 징검다리’ 교황이 가톨릭 역사를 뒤집어 놓는다. 요한 23세는 1959년 1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명한다.

4년의 준비를 거쳐 1962년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이라는 방대한 성과를 남겼다. 그중 몇 가지를 들면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라틴어로 봉헌되던 가톨릭 미사가 각 나라 언어로 봉헌되기 시작했다. 개신교에 대한 ‘열교’라는 멸시적 표현을 ‘분리된 형제’로 고쳤고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도 적시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인 책임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 변화가 남미의 해방신학 운동을 비롯, 가난하고 약한 인민들과 함께하는 교회에 힘을 실어준 건 물론이다. 한국의 정의구현사제단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교리의 면에서 혁신은 ‘교회 밖의 구원’을 인정한 것이다.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면, 다른 종교를 믿거나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의 사람들은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이런 논리가 얼마나 많은 야만과 제국주의 수탈의 빌미가 되었던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으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해도 하느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교회라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이다.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1963년 6월 선종한다. 보수세력은 후임 바오로 6세가 그 ‘경악할 만한 상황’을 종식하길 기대했지만 바오로 6세는 공의회를 지속하여 완료한다. 이후 30여년 동안 교황 이름은 ‘요한바오로’가 된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개혁정신을 이어받는 의미다. 2005년 ‘요한바오로’라는 이름을 떼고 즉위한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의 개혁 정신을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2013년 3월 자진 사임했고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의 개혁 정신을 잇고 있다.


▲ 교황 프란치스코 개인보다는 그를 이끌어낸 개혁성 주목해야
갱신 이끈 건 민주주의 아닌 ‘독재’… 실체적 민주화, 자본 통제에 달려


가톨릭의 거듭된 개혁적 갱신이 가능한 가장 결정적 이유는 ‘독재 체제’다. 만일 개신교처럼 민주주의 체제라면 제아무리 개혁적인 교황이 나와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개혁에 불만(은 물론 신학적 견해 차이를 넘어 냉혹한 이해관계를 둘러싼 것이다)을 억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오랫동안 독재 체제와 싸워 정치적 민주주의를 회복한 한국의 진지한 시민들에겐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에서 오늘 민주주의에 대한 유의미한 질문을 얻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는 독재가 물러나고 민주화가 되어 좋은 세상이 열렸는가? 대통령을 욕해도 죽진 않게 되었지만 새롭게 등장한 자본 독재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실체를 더욱 훼손해왔다. 학원 민주화의 열망은 대학이 모조리 기업으로 변신하는 걸로 귀결했다. 악취나는 한국 보수개신교 교회 문제도 결국 교회가 자본주의에 먹혀버린 현상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회든 교회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상충한다는 사실, 민주주의가 실체를 가지는가 여부는 자본주의의 통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예수는 이미 “하느님과 마몬을 동시에 섬길 순 없다”(마가 6:24)고 못을 박았다. 자본주의는 ‘공식적인 마몬의 체제’다.

자본주의의 사악함을 비판하는 교황은 괜스레, 우연찮게 출현한 게 아니다. 가톨릭의 개혁 정신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서 잦아들었고 앞서 언급한 베네딕토 16세 시기엔 ‘제3차 바티칸 공의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 여론이 결국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교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쁜 교회 때문에 신도들이 고통받는다는 말은 사실이되, 절반만 사실이다. 교회는 신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신도는 나쁜 교회를 만들며 심지어 하느님을 살해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구심이었던 칼 라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건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넘어 다른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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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지난 10여년 이상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동어반복을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한 이야기에 집중해왔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주도한 개혁세력이 진보를 참칭하고 대중의 눈과 귀를 막음으로써 좌파가 축소되고 사회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현실의 전모를 말하진 않는다. 그런 기만적인 상황만 아니었다면 좌파는 대중과 호흡하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행로를 걸을 수 있었을까? 차이는 있겠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적다.

좌파의 축소는 단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럽처럼 좌파가 융성했다가 축소되었는가 한국처럼 미처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는가의 차이가 있지만, 남미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좌파의 축소는 전지구적인 현상이다. 대중은 좌파의 이상과 가치, 즉 계급의식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극복과 사회주의적 전망, 인간해방의 신념 따위에 전처럼 호감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이전 시기의 좌파에 대한 반감이나 적의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이전 것이 역설적인 의미이라 해도 존중이라면 이젠 무시에 가깝다. 좌파는 어느새 제 이상이나 가치를 정색을 하고 말하려면 ‘낡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걸 감수해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 이것은 좌파만의 상황은 아니다. 우파는 제 이상과 가치들을 말하기 좋아졌는가? 국가, 충성, 명예 같은 것을 말한다는 건 이제 ‘재수없는 영감’으로 낙인찍히겠다는 뜻이다. ‘자유 시장이 낙원을 만든다’는 오랫동안 써먹던 설레발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정치 영역을 떠나 문학이나 예술도 마찬가지다. 작품에 어떤 이상이나 가치를 담는 것은 ‘철지난 작가’로 여겨지기 십상이며, 작가는 좌든 우든 제 세계관을 작품이 아니라 작가로서 행동 차원으로만 표현한다. 대학이 진리 탐구의 전당이라는 말은 대학이 더는 진리 탐구의 전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판하는 기사에서나 등장한다. 부모들은 더 이상 제 아이에게 ‘인생이란’ ‘사람이란’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다. 그런 이야기들이 아이를 ‘현실적 위험’에 빠트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속성, 인간의 삶을 완전히 포획하여 인간 정신과 영혼의 말단까지 재구성하는 악마적 속성은 모든 인간의 삶을 축소해 왔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수혜자인가 피해자인가마저 무관하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세상을 운영하는 1%는 예외일까? ‘플루토크라트’라 불리는 현대의 왕족인 그들은 이전 시기 어떤 지배계급보다 안락해 보인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들에겐 지배계급의 가장 중요한 특권인 ‘유한함’이 없다. 그들은 일을 노예나 노동자에게 맡기고 예술 감상이나 사랑 놀음을 구가하며 살아가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들 덕에 가난해진 그 어떤 사람보다 더 바쁘다. 완벽한 양육조건과 교육환경에서 키워지는 그들의 아이들은 부모의 얼굴조차 보기 어려운 ‘실제적 고아’다.


▲ “세월에 밀리고 투쟁현안에 치여 ‘미궁’에 빠져 축소되는 좌파들
쫓기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좌파란 무엇인가’ 첫 질문 해봐라”


좌파의 축소는 좌파만의 축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전체 인간의 전적인 축소 현상의 일부다. 전체가 축소된다는 건 변화의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기존의 권력과 기득권은 유지되어야 할 근거 없이도 유지되며(2008년 공황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건재해야 할 근거를 잃은 채 건재하다) 변화를 추구하는 좌파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좌파는 어떻게 다시 힘을 얻고 대중과 호흡할 수 있을까. 많은 진지한 좌파들이 그에 대해 고민하고 이런저런 노력과 시도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대중의 호감을 얻으려는 노력들, 노골적으로 말해서 좌파가 더 이상 낡은 사람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이런저런 궁리와 문화적 포장들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다. 그런 노력들이 대중의 일시적 호감(혹은 측은지심)을 만들어낼 순 있겠지만 전체 인간의 전적인 축소라는 문제의 본질을 건드릴 순 없다. 사람이란 어떤 문제로 고민하면 할수록 오히려 미궁에 빠져드는 속성이 있다. 그 문제의 본질을 잊게 되기 때문이다. 자나 깨나 교육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는 교육문제의 미궁에 빠지게 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자나 깨나 돈버는 일만 고민하는 사람은 돈의 미궁에 빠지게 된다.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에서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좌파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다. 좌파는 유독 자신들만 끝도 없이 축소되어 가는 듯한 세월에 떠밀리고 쏟아지는 투쟁 현안들에 치여 사느라 ‘좌파의 미궁’에 빠져버렸다. 오늘 좌파의 할 일은 쫓기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좌파는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을 하는 것이다. 좌파의 첫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간의 첫 질문에 닿을 수밖에 없다. 좌파의 첫 질문은 실은 인간의 첫 질문의 실천일 뿐이었다. 좌파와 좌파의 공간은 더 이상 누구도 하지 않는 인간의 첫 질문이 넘쳐나는 사람이자 공간이어야 한다. 모든 인간이 축소된 세상의 실마리는 누구도 하지 않는 인간의 첫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을 가능성이 높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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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씨의 ‘도둑맞은 메달’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정작 분노해야 할 제 삶과 관련한 현실 문제에는 분노하지 않는다는 개탄이 있다. 수긍이 가는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는 거꾸로 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김연아의 일에 분노하느라 현실 문제에 분노하지 않게 된 건 아니니 말이다. 사람들은 김연아가 메달을 도둑맞든 않든 현실 문제에 분노하지 않거나 분노했다. 이번 일은 오히려 ‘분노의 확인’이라 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분노하지 않는, 분노하는 법조차 아예 잊어버린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실은 얼마나 켜켜이 분노가 쌓였기에 김연아의 일에 저리 분노할까, 라고 말이다.


그 분노들은 ‘도둑맞은 메달’에 소용되지 않았다.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금세 수십만명이 참여할 만큼 열띠었음에도 ‘도둑맞은 메달’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연아의 마지막 경기는 이미 금메달인가 은메달인가를 따질 이유를 훌쩍 뛰어넘은 차원의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여왕의 퇴위식이었다. 김연아는 마지막 경기의 음악으로 존 레넌의 ‘이매진’을 선택했다. 10대 시절부터 한국 엘리트 체육의 영웅으로서 국가주의의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던 그가 국가는 물론 종교도 사적 소유도 어떤 강권적 지배도 우상도 없는 세상을 노래하는 아나키스트의 성가, 이상주의자의 성가를 선택한 것이다. 여왕의 퇴위식은 그렇게 영원한 여왕의 명예와 지위를 선포하는 의식이 되었다.

이채로운 건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여왕’이라 부르면서도 동시에 ‘연아’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마치 친근한 아이를 부르듯 말이다. 물론 그 어느 한국인의 ‘연아’에도 하대의 뜻이 들어있진 않다. 10대 소녀 시절부터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연아’로 불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여왕이 된 후에도 변함없이 아니 더 광범위하게 ‘연아’로 불린다는 사실은 이채로운 일이다. 한국인들에게 김연아씨는 ‘여왕’이자 ‘연아’다. 여왕과 연아.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이 극명한 대비와 중첩 속에 오늘 한국인들의 삶이 만화경처럼 투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스물다섯에 제 분야에서 인류의 정점에 오르고 일생 동안 그 명예와 지위를 확보한 김연아의 삶은 오늘 한국인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몇 광년은 동떨어진 것이다. 오늘 스물다섯 한국인의 일반적 삶은 어떤 것인가. 복잡한 사회학적 통계나 자료를 들먹이는 대신 노래를 하나 떠올려보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20대를 넘기는, 더는 질풍노도의 청년이 아니게 된 사람의 애수와 회한을 담은 노래다. 꽤 오랫동안 그 노래를 부른 사람도 듣는 사람도 서른 즈음에 기막히다고 여겨온 노래다. 그런데 지금 서른 즈음인 누군가가 그 노래를 부르는 풍경을 상상해보면 어떤가. 어딘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늙은이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서른 즈음에’는 이제 마흔 즈음에나 어울릴 노래가 되었다. 오늘 한국에서 서른은 어른이 되고도 남은 나이임에도 실제론 어른이 될 수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서른이 그러한데 고작 스물다섯은 말해 뭣할까.



▲ 여왕을 ‘연아’라 부르는 한국인들
사회에 대한 분노 숨긴 채 살다가
‘도둑맞은 메달’에 대한 분노로
제 분노가 여전함을 확인하다


그들이 옛사람들보다, 김광석의 세대보다 게으르거나 철이 없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옛사람들보다 김광석의 세대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행여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할세라 사력을 다한다. 한국이라는 사회, 이 괴이한 자본주의 체제가 그들이 성장을 못하도록, 서른이 되어도 어른이 못 되도록 억누르고 짓누른다는 이야기다. 이 괴이한 체제에 한국인들이, 특히 그들보다 윗세대의 한국인들이 모두 납작 엎드려 있다. 촛불시위도 있고 나꼼수도 있고 부정선거 규탄도 있고 이런저런 역동적인 저항들이 지속되는데 무슨 소리냐고. 역동적인 저항의 풍경 역시 괴이한 자본주의 앞에는 납작 엎드려 있다. 이를테면 촛불을 들고 박근혜를 규탄하는 민주시민은 자정 즈음 슬그머니 휴대폰을 열고 제 아이가 학원에 다녀왔는지 확인한다. 규탄하는 그들은 또한 납작 엎드려 있다.

제 삶과 몇 광년은 동떨어진 여왕을 ‘연아’라 부르는 한국인들의 모습에 그 납작 엎드린 삶의 비루함과 비참이 투영되어 있다. 이 괴이한 사회를 살아내느라 켜켜이 쌓인 분노를 꽁꽁 숨긴 채 살아가는 그들은 김연아의 ‘도둑맞은 메달’에 대한 분노로 제 분노가 여전함을 확인한다. 스물다섯에 이미 이 현실에서 훌쩍 날아오른 여왕을 ‘연아’라고 부르길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훌쩍 날아오르고 싶은 제 꿈을 간직한다. 지사도 투사도 아니며 그저 살아내는 사람들이지만, 분노할 줄 모르며 분노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한 제아무리 도저하고 영웅적인 엘리트들이라 할지라도 눈곱만큼의 새로운 역사도 짓지 못한다는 사실을, 걸핏하면 개탄을 일삼는 조급증 걸린 엘리트들에게 슬쩍 내비친다. 친애하는 그들의 여왕, ‘연아’와 함께.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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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학)이 인간이 해내는 가장 멋진 일인 건 세상에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예술이 만들어내는 형상 중엔 ‘세상 자체’도 포함된다. 예술가(와 작가)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해야 할 세상을 그려낸다.

물론 새로운 세계의 형상을 그리는 건 예술가만이 아니다. 활동가와 정치가도 세계의 형상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전위성의 순서는 다르다. 정치가는 지금 당장, 단기간에 실현 가능한 세계의 형상에 집중한다. 그들이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건 그들 꿈의 제한성이 갖는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하다. 활동가는 정치가보다 더 꿈을 좇는다. 그러나 활동가의 임무는 꿈을 좇는 것보다는 꿈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데 있다. 예술가만이 그런 모든 제한을 벗어난 존재다. 예술가는 제 상상력으로 뭐든 그려낼 수 있다. 장기적인가 단기적인가, 이상적인가 현실적인가, 리얼리즘인가 문자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형식인가 따위는 상관이 없다. 요컨대, 예술가는 ‘무책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상의 형상을 그려내는 존재다. 예술가가 그려낸 새로운 세상의 형상은 활동가에게 정치가에게 그리고 모든 사회성원에게 공급된다.

예술가의 전위성은 한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여부의 지표다. 강력한 사회변화의 시기, 변혁 혹은 혁명 직전에 예술가의 전위성이 폭발하는 건 그래서다. 그런 시공간이 예술가에게 전위성을 부여하며 예술가의 전위성은 다시 그 시공간의 근원적 에너지원이 된다. 반면에 정체된 사회, 온갖 모순과 억압과 착취가 팽배함에도 그에 걸맞은 싸움은 없이 헛발질만 난무하는, 지배 계급의 안정성만 더해가는 오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예술가의 전위성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 사회에서 예술가는 활동가보다 더 후위에, 심지어 진보적 경향의 정치가보다 더 후위에서 군락지를 이루며 연명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예술가의 전위성이 도드라진 시기는 해방 공간과 1980년대라 할 수 있다. 그 중 1980년대는 현재의 예술계와 닿아 있다. 1980년대의 전위적 청년 예술가들이 바로 현재의 중견 예술가들이다. 사회의 가장 전위에서 제 신체를 내걸고 상상력을 폭발하던 그들은 이제 활동가는 고사하고 진보적인 정치가보다 더 후위에, 이른바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시민들’ 속에 식별 불가능한 형체로 섞여 있다. 그들은 종종 ‘1980년대 민중예술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의미있는 일이다.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경도되어 예술적 상상력을 정치 강령과 바꿔먹은 편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의 비판과 성찰은 현재의 전위성을 모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위성 자체를 폐기하기 위해, 그들이 ‘소싯적에 좀 했던 아저씨’로 행세하기 위해, 여전한 도덕적 우월감과 엘리트 의식으로 치장된 그들만의 군락지를 유지하기 위해 수행된다.

그러나 어떤 애석함도 전위성의 폐기가 오염된 강처럼 흐르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애석하진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 대선 직전 젊은 시인·소설가 137명은 ‘우리는 정권교체를 원합니다 - 그로써 자유의 영토가 한 뼘 더 자라나리라 믿습니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가 진보적인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약자의 신음에 더 잘 귀기울일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 답은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입니다.”

 


▲ “예술가의 본색은 상찬받는 착한 행동이 아니라
불온한 상상력으로 시대와 충돌하는 나쁜 행동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정권교체’란 지난 정권, 즉 노무현·김대중 정권으로 복원을 말한다. 두 정권이 과연 약자의 신음에 더 잘 귀기울였는가, 그럴 거라 기대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의 신망을 잃었는가라는 질문은 생략하기로 하자. 그러나 선언문은 소기의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137명의 작가들의 선언에 귀기울이거나 영향을 받을 사람 가운데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137명의 작가들이 긴급하고 비장한 얼굴로 선언한 건 단지 그들이 전위성을 잃은 작가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예술가들이 도달한 최근의 전위성은 ‘착한 행동’이다. 용산, 쌍용차, 강정을 비롯한 주요한 투쟁 현장에 얼마나 얼굴을 비치는가, 돕는가가 전위성의 표현이 된 것이다. 지지하고 돕기는커녕 빨갱이들이라 비난하는 이들에 비하면 상찬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본색은 ‘착한 행동’이 아니라 ‘나쁜 행동’에 있다. 예술가는 여기저기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상찬받으며, 의식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려는 중산층 인텔리의 속물근성에 봉사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불온한 상상력으로 오히려 누구도 함부로 상찬하기 어렵도록 불편을 행사하며, 현재의 세상과 포탄처럼 충돌하는 ‘나쁜 사람’이다.

앞서 ‘무책임한 상상력’이라는 표현은 음악가 정태춘의 말이다. 그는 예술의 전위성을 맹렬하게 체현하던 주요한 예술가 중 하나였지만 ‘소싯적에 좀 했던 아저씨’가 되길 거부했고, 예술의 전위성을 폐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예술 활동의 중단을 선택했다. 그의 고뇌와 ‘역설적 실천’은 지금 이 순간 ‘예술가는 세상과 어떻게 충돌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미지의 예술가들에게 참고가 된다. 미지의 예술가들에게, 그들의 무기가 될 무책임한 상상력에 경의를 보낸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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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과 반공의 역사를 미화한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채택했던 학교들이 격렬한 반대 여론에 결국 채택을 철회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걸까. 왜 우리는 ‘친일’과 ‘반공’의 역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일본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안 된다’ ‘공산주의를 반대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려는 걸까. 우리가 친일과 반공의 역사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그게 실은 민족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그리고 남한에서 소수의 지배세력이 대다수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역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 어떤 방식으로도 소수의 지배세력이 대다수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은 잘못이며, 그런 역사에 굴종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역사란 단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역사는 무엇인가. 현재의 지배세력, 현재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박근혜 정권인가. 물론 박근혜 정권이 반공독재의 충분한 자질을 가진 건 분명해 보이지만 ‘오너’는 그 배후에 있다. 더는 함부로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지만 우리 삶을 일제나 반공독재보다 더 속속들이, 가치관과 영혼까지도 지배하는 몸통은 말이다. 그것은 이건희나 정몽구 따위 재벌과 초국적 금융자본으로 대변되는, 자본이다.


현재 교과서의 경제 관련 부분은 철저하게 친자본적이다. 한국 교과서는 내용과 체계에서 미국 경제교육의 표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독일이나 유럽 교과서들이 노사관계를 자본과 노동의 계급 관계로 접근하는 반면 미국 교과서는 개인과 회사 간의 ‘자유로운 계약관계’로 본다. 한국 초등 교과서의 경제 관련 내용은 신자유주의를 국가의 토대로 하며 ‘국익’과 ‘시장 자유’를 절대화하고 경제발전·경제성장 지상주의를 강조한다. 그로 인한 빈부격차, 차별, 생태 환경 등의 문제는 외면하며 노동의 개념과 노동자 권리에 대한 내용은 없다시피 하다.


이를테면 초등 6학년 교과서엔 이런 내용들이 실려 있다. ‘개인과 기업들이 경제적 자유를 누리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게 우리 경제의 주요한 특징이다.’ ‘경쟁은 개인과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이익이 된다.’ ‘근로자의 불법 파업은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우리나라는 무역 규모가 크지만 무역 상대국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무역 상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다.’ 친자본적인 게 아니라 자본의 관점을 대놓고 주입하는 수준이다. 교과서뿐 아니다. 미국경제교육협의회(NCEE)의 한국판인 한국경제교육협회(KAEE·기획재정부 한국은행 한국소비자원 전경련 은행연합회 상공회의소 등이 지원함)를 비롯한 수많은 단체와 소년조선일보, 소년동아 등 온·오프라인 미디어에서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친자본적인 어린이 경제교육을 하고 있다.



▲ “자본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다면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세계관 담은

교과서를 만들어야만 한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사건은 역사 교육에 관한 소중한 승리가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 지배세력은 친일과 반공이라는 과거의 역사에선 밀렸지만, 현재의 역사와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역사에선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대다수 인민이,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다수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며 모든 걸 ‘자유로운 경쟁’의 결과이자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모자람으로 돌리며, 부자를 우러러보는 실패자로 살아가지 않을까.


오늘과 같은 현실에서 아이에게 현재의 역사에 대해 올바로 가르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명박 박근혜는 물론 김대중 노무현 같은 개혁적 정권마저 별다를 수 없었을 만큼 전능한 자본 독재 치하에서 말이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친일을 옹호하는 사람을 비난한다. 그러나 일제 당시에, 특히 2차 대전 말기의 아비규환의 현실에서 친일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여겨졌고 일반적이었다. 오늘 우리는 반공을 주장하는 사람은 ‘극우꼴통’이라 비난하지만 반공독재가 한창이던 시절에 대부분의 사람은 ‘북한과 대치하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곤 했다.


과거의 역사에 올바르긴 쉽다. 그 역사엔 내가 살아가지 않고 삶의 이해관계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올바른 게 ‘상식’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역사에 올바르긴 어렵다. 내가 그 안에 끼어 살아가니 눈 밝혀 보기도 어렵고 갖은 이해관계와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지 잊어선 안 된다. 아이들이 이미 자본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공부하고 있다면 우리는 대다수 인민,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담은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검정교과서가 당장 어렵다면 대안교과서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 검정교과서가 되도록 싸워야 한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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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끼리 박근혜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끝없이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은 세상에 아무런, 눈곱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비판이되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해소’다. 그 대상이 ‘박근혜’든 ‘민영화’든 ‘밀양 송전탑’이든 마찬가지다. ‘유유상종의 공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이른바 진보 경향의 미디어는 그런 비판적 해소로 차고넘친다. 


민주노총 침탈이라는 박근혜 정부의 유례없는 만행은 우리를 비판적 해소라는 수월한 길로 더욱 유인한다. 이런 이야기가 마땅치 않게 느껴진다면, 2008년 촛불의 열정이 결국 어떻게 귀결했는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심판’의 열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되새겨보는 게 좋겠다. ‘비판적 해소’야말로 오늘 우리의 가장 강력한 적인지도 모른다.


◆ DJ·노 정부서 민영화 본격화했지만

박 정부 미워하는 이들 그 사실 인정하기 꺼려

이런 이중적 혹은 감상적 태도가

민영화 반대 싸움 ‘운동’ 아닌 ‘해소’로 만들어


일러스트 : 김상민


철도 민영화 반대 싸움은 많은 사람들을 비판적 해소의 문턱에 서게 한다. 철도 민영화와 관련한 사실관계들 때문이다. 철도 민영화는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철도를 4단계로 민영화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1단계는 철도의 시설부문과 운영부문 분리, 2단계는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전환, 3단계는 철도공사의 경영 개선, 4단계는 철도 운영에 민간 참여로 경쟁체제 수립. 이명박 정부는 철도 민영화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가 노무현 정부를 이어받아 4단계를 추진하고 있다. 2003년 철도노조 파업 때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아니라 노조 지도부를 위한 노동운동, 정치투쟁은 정부가 보호할 수 없다”며 법에 따른 엄정 대처를 천명했다. 같은 해 노무현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 지도부 검거를 위해 민주노총 건물 침탈을 시도했다. 이번과 다른 건 침탈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거리낌없이 전원 직위해제를 해버린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야당의 그런 원죄가 깔려 있다. 그들은 지난 대선을 통해 ‘노무현의 FTA와 이명박의 FTA는 다르다’식의 말이 ‘이미 이명박과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겐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합리적 사실’을 확인했다. 오늘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박근혜를 미워하는 만큼이나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박근혜의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지만 노무현의 철도 민영화와 관련한 사실관계를 인정하긴 꺼린다. 그들은 또한 김대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민영화를 반대하지만 한국에서 민영화가 본격화한 게 외환위기와 함께 집권한 김대중 정부에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역시 꺼린다. 그런 이중적인 혹은 감상적인 태도가 오늘 민영화 반대 싸움을 비판적 해소로 만드는 가장 주요한 힘이다.


민영화란 무엇인가. ‘공적 재산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the public property)라는 본디 말 그대로, 공적 서비스를 시장의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기 침체로 혹은 지나친 탐욕으로 장사를 해먹을 곳이 충분치 않아진 자본(재벌과 초국적 자본)이 공적 서비스 영역의 담을 무너트려 장사를 해먹으려는 작업이다. 포항제철(포스코), 한국통신(KT), 한국담배인삼공사(KT&G) 등 공공성이 덜한 곳들은 진즉 마무리되었지만 전기, 철도, 가스, 우편 그리고 의료보험 등 본격적인 노다지는 아직 남아 있다. 최후의 노다지를 차지하기 위해 자본은 무려 15년 동안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동원하고 조직해왔다. 여론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직접 민영화보다는 민·관 합작이나 자회사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우회해가며 말이다. 그런 치밀한 적과의 싸움에서 민영화 15년의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인정하기 꺼리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민영화 반대는 반드시 승리해야 할 싸움이다. 자본과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싸우는 절체절명의 전쟁이다. 자본이 승리한다면 자본의 지상천국이 만들어질 테지만 우리 삶과 아이들의 미래는 나락에 떨어진다.


철도 민영화 반대(출처 :경향DB)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과 관련한 비판적 해소가 단지 김대중,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민영화와 관련한 김대중, 노무현의 흠결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덮으려는 태도엔 우리의 흠결을 김대중, 노무현을 통해 덮으려는 욕구가 담겨 있다. 이미 우리의 삶이, 우리가 직접 운영하는 삶의 영역이 이론의 면에서나 실제의 면에서나 충분히 민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유신독재 시절에도 뛰어놀며 자라던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학원을 돌며 시들어가고,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냉혹한 교육 민영화론자들이다. 민영화가 ‘유신공주만의 악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민영화를 들여다보는 건 참 불편한 일이다. 그 불편함이 우리의 전열과 싸움을 괜스레 맥 빠지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우리의 분노가 다시 한 번 비판적 해소로 사라지지 않게 함으로써 승리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학가의 수많은 ‘안녕’ 대자보 속에 붙은 한 엄마의 대자보는 후자의 한 사례일 것이다. “너희들에게만은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는데…, 너를 키우면서 부끄럽게도 성적과 돈에 굴종하는 법을 가르쳤구나. 미안하다. 이제 너의 목소리에 박수를 보낸다. 82학번 너희들의 엄마가.”



엄마 학번의 대자보(출처 :경향DB)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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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사람들은 765㎸ 송전탑을 본 적이 없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송전탑은 154㎸, 크다 싶은 게 345㎸다. 765㎸ 송전탑은 높이만 95m이며 한수원 자료에 의하면 150m짜리도 있다. 20층 아파트 높이가 50m다. 한전은 밀양에 건설할 69개의 765㎸ 송전탑이 신고리 3호 핵발전소의 전력을 경북 지역에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북의 전력 자급률은 이미 충분하다. 밀양 송전탑은 핵발전소의 전력을 서울에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의 전력 자급률은 고작 4%다. 자급률이 100~400%에 이르는 지방에서 전력을 끌어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밀양에 765㎸ 송전탑을 세워야 하는 건 아니다. 기존 송전탑을 증량하는 방식으로 전력 공급은 가능하다. 765㎸ 송전선로 건설을 강행하는 건 신고리 5·6호 등 더 많은 핵발전소를 짓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 한전 스스로 밝힌 희한한 이유가 있다. 핵발전소 수출 계약을 맺은 아랍에미리트연합에 ‘2015년까지 신고리 3호 핵발전소가 가동되지 않으면 위약금을 물기로 했다’는 것이다.


서울 사람들이 전기를 너무 펑펑 써서 생긴 일이라는 말이 그르진 않지만 구분이 필요하다. 요즘 가정집에서 어디 전기를 펑펑 써대는가. 전기요금이 비쌀뿐더러 냉장고에 김치냉장고까지 지고 살아야 하는 도시 생활에선 자칫 할증이라도 맞을까봐 지난여름 같은 무더위에도 에어컨 한번 켜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마트나 백화점이나 극장 같은 곳은 불야성을 이룬다. 공장은 전기로 용광로까지 돌린다. 워낙 싸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미국이나 독일의 3분의 1 수준으로 생산원가에도 못 미친다. 밀양 송전탑은 자본의 이윤과 자본의 시장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한전은 송전탑이 인체에 주는 피해는 과학적 근거가 없고 전기설비기술 기준치인 전자파 833밀리가우스(mG) 이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국제비전리방사선보호위원회(ICNIRP)의 ‘단기간 고노출’ 기준치를 가져온 것이다. 송전탑 아래 주민들은 24시간 1년 내내 전자파에 노출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자파 3~4mG를 발암 가능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송전탑 1㎞ 이내의 집과 논은 재산 가치가 아예 사라진다. 평생 땀으로 일군 집과 논을 그렇게 빼앗기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송전탑으로 인한 인체 피해에 대한 과학적 논란은 실은 무망한 것이다.


밀양 송전탑 건설현장에 지은 움막과 손희경 할머니(출처 :경향DB)


지구온난화를 비롯, 매년 3% 이상 성장하지 않으면 고장이 나도록 되어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지구가 더는 양립할 수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핵발전은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지구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폭력이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와 사고 후의 범주도 없고 기한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은 핵발전의 어리석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핵발전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여전히 높지 않은 이유는 ‘핵발전은 싸다’는 선전 덕이다. 핵발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발전비용이 아니라 발전소 폐쇄비용과 핵폐기물 관리 및 사고 발생 시 처리비용이다. 그걸 제대로 계산하면 핵발전은 가장 비싼 발전 방식이다.



▲ “대도시와 대자본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송전탑은 평생 일군 집과 논밭을 짓밟는데

그래도 ‘연대’를 말하는 노인들을 보라”


일러스트 : 김상민


11월28일 고리 1호 핵발전소가 고장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한전의 주가는 떨어진 반면 재벌 계열 발전회사들의 주가는 즉시 올랐다. 현재 한전은 전기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구매한다. 민간 발전회사의 수익을 보장하는 독특한 구매방식 때문에 전력 공급에 문제가 생길수록 한전은 비싼값에 전기를 사야 한다. 지난해 3대 민간발전회사인 SK E&S, GS EPS, 포스코에너지의 영업이익은 8400억원이었다. 한국전력은 8179억원의 영업손실을 봤다. 원가에 못 미치는 전기요금과 보조금으로 기업이 얻은 이익은 2조8000억원에 이른다. 송전탑 사태도, 여름마다 불거지는 ‘블랙아웃’ 위기론도 결국 자본의 한판 놀음일 뿐이다.


7순의 노인들이 7년 동안 매일 산을 오른다. 노무현 정권에서 시작했는데 이명박을 거쳐 이제 박근혜 정권이다. 노인들이 한전 직원과 경찰과 용역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하는 건 일상이다. 해도 해도 안되니 할머니들이 나체시위도 했고 지난해 1월엔 할아버지 한 분이 분신하기까지 했다. ‘전력개발촉진법’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된다. 유신 말기인 1978년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 대통령이 만든 이 법은 사업 승인만 나면 도로법·하천법·수도법·농지법 등 19개 법령의 인·허가를 생략한다. 힘없는 서민의 재산권과 인권을 무시하는 ‘법 위의 법’이다.


‘힘없는 시골 노인들이니 저렇지 강남 사람들이면 저리 함부로 하겠는가.’ 전쟁터와 같은 밀양의 풍경을 보며 진지한 사람들은 한탄한다. 그러나 행여 그 노인들이 불쌍하다 여기거나 동정하는 건 금물이다. 그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연대의 정신을 이미 몸으로 구현하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산을 오르며 노인들은 말한다. “1000가구 사는 데서 10가구 사는 데로 송전탑을 옮기라 카면 잘못 아이가? 반대로 사람 많은 데가 전기 많이 쓴다고 거기 세우라는 것도 잘못된 기다. 이제는 송전탑이 우리 마을 피해 딴 데로 간다케도 싫다. 사람은 그래 사는 게 아이다. 나 혼자 살 수는 없는 기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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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해체하려는 박근혜가 무서워!” 친구의 문자 메시지에 장난기를 섞어 답한다. “주사파가 위험하다 생각하는 걸까 이정희에 대한 순수한 응징일까.” “순수한 응징! ㅎㅎ” “나름엔 얼마나 힘들겠어. 아버지 같았으면 간단하게 처리했을 텐데 민주화가 되어놔선 명분 만들어야지 여론 살펴야지. 공화정에서 살아가는 공주의 애환이랄까.” “얼씨구.” “농담을 늘어놓은 건 이명박을 통해 박근혜를 통해 정체성을 구성하는 우리의 습성이 못마땅해서야. 남 욕으로 우릴 정당화하는 것 그만하고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전망을 이야기하자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좌파가 ‘진보’의 이름으로 반이명박 운동에 참여하게 된 건 대략 이런 정조였을 게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보면서 정권이 바뀐다고 세상이 쉽게 바뀌는 건 아니구나 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을 보니까 정권에 따라선 세상이 완전히 망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 이명박은 충분한 악(惡)이었지만 동시에 추(醜)였기에 그의 말과 행태는 좌파들을 그야말로 환장하게 만들었다. ‘이명박이 한국 사회를 30년 전으로 만들었다’는 식의 말은 과장이었지만(물론 이명박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다. 그러나 사회를 30년 전으로 만들려면 ‘30년 전 수준의 국민’이 필요했다.) 그의 추악한 행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것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3년 6월6일 (출처 :경향DB)


여하튼 그렇게 거개의 좌파가 반이명박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명박에 치를 떨고 이명박 욕하기로 하루를 보내는 일이 거듭되면서 반이명박 운동은 자기 내용을 잃고 ‘이명박 욕하기 누가누가 잘하나’ 잔치가 되어갔고 운동의 주도권은 이명박에게 넘어갔다. 반이명박 운동의 열기는 전적으로 이명박이 얼마나 문제를 제공해주는가에 달리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명박이 반이명박 운동의 실질적 리더가 된 것이다. ‘모든 건 가카덕’이라는 김어준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복종은 존경의 태도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경멸의 태도로도,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반이명박 운동으로서 진보는 대략 세 단계로 무너졌다. 첫째, ‘이명박이 왜 당선되었는가’를 화두로 하는 사회적 성찰이 사라졌다.(누구든 이명박만 욕하면 손쉽게 정의와 진보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왜 성찰이 필요한가.) 둘째, 모든 사회 문제, 심지어 이전 자유주의 정권에서 그대로 이어져온 문제까지도 이명박 탓이 되면서 현실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분석이 사라졌다. 또한 모든 토론과 담론이 이명박 욕하기로 귀결하면서 모든 토론과 담론은 이명박 수준으로 하향평준화했다.(고작 이명박을 욕하는 데 무슨 진지한 토론과 담론이 필요한가.) 셋째, 그런 당연한 귀결로 진보의 다양하고 진지한 대안과 전망들이 사라졌다.(‘닥치고 정권교체’ 외엔 다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소리로 치부되었으니.)


그런 진보가 선거에서 이기긴 어려웠다. 진보 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에 투표한 대중에게 실망을 토로했지만 관점을 바꾸어, 대중은 왜 진보에 투표해야 했을까. 자신들의 10년 집권 역시 실망스럽긴 매한가지였던, 아무런 반성도 없이 오로지 이명박에 대한 대중의 반감만 이용하여 도덕적 우위와 희망을 말하는, ‘이명박 욕하기’를 ‘박근혜 욕하기’로 바꾸는 것 말곤 달라진 것도 전망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대중은 왜 투표했어야 할까. ‘이명박도 싫고 이명박 욕만 하는 놈들도 싫은’ 대중의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었을까.



일러스트 : 김상민

▲ ‘욕과 조롱의 잔치’에 빠진 진보는

지배체제가 그리도 바라던

‘진보의 이상적 죽음’ 문턱에 다다라


결국 오늘 진보에 남은 건 한 개의 앙상한 구호뿐이다. ‘최소한의 상식.’ 최소한의 상식이 위협받을 때 최소한의 상식을 지키는 건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상식을 말한다는 건 최소한의 상식부터 회복하자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것 말곤 내세울 게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오늘 진보는 최소한의 상식부터 회복하자고 말하지만 실은 그것 말곤 내세울 게 없다. 그런 진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적이 최소한의 상식을 파괴해주기만 기다리는 것이다. 진보는 지배체제가 바라는 ‘민주화 이후 진보의 이상적인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진보당, 전교조, 전공노… 다들 말하듯 박근혜 정권의 어두운 그림자가 심상치 않다. 여론을 살펴가며 계획한 바를 실행해나가는 치밀함과 과단성이 이명박과는 격이 다르다. 진보에 성찰과 자기 내용과 전망이 없다면, 이명박을 ‘쥐’라고 욕한다고 달라진 게 없었듯 박근혜를 ‘댓통령’이라 조롱하고 ‘독재자’라 욕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반이명박 운동이 ‘이미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에 머물렀듯 반박근혜 운동은 ‘이미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에 머물 것이다. 반이명박 운동의 실제 리더가 이명박이었듯 반박근혜 운동의 리더는 박근혜일 것이다. 욕하고 조롱하기야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욕하고 조롱하기 전에 차분한 질문이 필요하다. 진보는 박근혜와 싸우고 있는가 박근혜에 기생하고 있는가.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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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초·중·고를 다 다녔다. 온 나라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기억난다. 신동우라는 만화가가 그린, ‘백억불 수출 천불 소득’이면 다 행복하게 살게 된다고 적힌. 목표는 진즉 달성되었고 한국은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돈 벌러 오는 ‘부자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 시절보다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행복은커녕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출산율,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인 죽음의 사회다. 어찌 된 일일까. 여러 원인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주요한 것은 역시 ‘자본주의적 행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봉건사회는 사람의 사회적, 경제적 수준이 신분으로 정해졌기에 행복이 인생의 이유거나 목표일 건 없었다. ‘남보다 행복해지고 싶다’든가 ‘5년 후 지금보다 행복해야 한다’ 같은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든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균등의 사회’가 시작되면서 행복도 생겨났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실은 ‘새로운 신분사회’였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실은 신분 사회라는, 극단적 모순이 바로 자본주의에서의 삶을 비극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무한 반복되는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남과 내 행복을 비교하고(그래서 ‘내 행복’을 잃고) 미래의 행복만을 목표로(그래서 ‘오늘 행복’을 잃고) 살아간다.


자본주의이긴 하되 본연의 자유시장은 작동하지 않던, 독재 권력이 경제를 틀어쥐고 끌고나가던 시절 한국엔 그런 풍경은 만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행복’은 민주화가 되고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극단적 자유시장주의가 밀려들어오면서 본격화했다. 그 변화의 속도를 사람들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늘어만 가는 불안과 피로, 삶에 대한 허무와 회의에 어떤 이들은 삶을 포기했고, 대개는 아이 낳길 두려워한다. 아수라장 속에 태어난 아이들은 옛 아이들처럼 밥을 굶어서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자꾸만 스러져간다.


‘모든 한국인’의 현실은 아니다. 맨 꼭대기의 소수는 오히려 그 어떤 시절보다 안정적이다.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저희들끼린 박 터지게 싸우지만 그들 소수의 체제를 거스르는 법은 없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걱정은 사람들의 마음, 마음의 향방이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허무와 회의에 젖어버리면 뜯어먹을 게 없어지고, 만에 하나 허무와 회의가 방향을 틀어 ‘기왕 죽는 거 꿈틀하고 죽겠다’고 나오면 체제는 위기를 맞는다. 체제는 다양한 면역 장치들을 마련한다. 배울 만큼 배우고 사회의식도 있는 사람들에 대한 면역 장치는 체제의 특정한 흉물스러운 부분에 관심을 집중시켜 체제의 전모나 본질을 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5년 동안 한국 사회의 모든 사회적, 진보적 에너지를 ‘쥐잡기’에 쓸어 넣은 반이명박 운동이 그 예다.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청춘의 관리다. 그들을 순종적인 노예로 만드는가 체제 위협으로 만드는가가 체제의 미래를 결정한다. 청춘에 대한 대표적인 면역 장치는 ‘약’이다. ‘멘토’ ‘힐링’ ‘긍정의 힘’ 따위의 이름이 붙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안과 피로, 허무와 회의를 청춘 자신에게 돌리게 하는 진통제이자 마약. ‘김난도’라는 약장수를 보자. 그는 진작부터 ‘최고의 소비 트렌드 전문가’라 불려온 사람이다. 말하자면 그는 소비자학 전문가이되 소비자의 편이 아니라 자본의 편에 선 전문가다. 이 사람이 청춘들을 모아놓고 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 김난도·혜민 같은 소위 멘토들은

‘문제는 너’라며 그 대가를 챙긴다

기성세대로 해야 할 ‘사과’도 없이


오늘 한국 청춘들의 현실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어왔던 일반적 현실’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제대로 놀지도 못한 채 20년을 고생해 대학을 들어가 한해 천만원을 넘게 바쳐가며 천신만고 끝에 졸업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건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다. 유럽 같으면 폭동이 일어나고도 모자랄 현실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놓은 기성세대 중의 한 사람이, 게다가 경쟁의 승자이자 체제 안의 전문가로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이 청춘들에게 해야 할 첫 번째 말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나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일까 진심 어린 사과일까.


교보문고 힐링 서적 코너 (출처 : 경향DB)


김난도를 비롯한 멘토라 불리는 사람들이 경쟁의 승자, 혹은 체제 안의 전문가라는 사실은 모든 걸 말해준다. 박경철은 단지 시골의사가 아니라 ‘최고의 주식투자 전문가’이며 혜민은 단지 승려가 아니라 ‘하버드출신 미국교수’라는 사실을 말이다. 경쟁의 승자, 혹은 체제 안의 전문가로서 그들은 청춘들에게 말한다. ‘태도를 바꾸면 얼마든 나처럼 될 수 있어.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네 안에 있는 거야.’ 그들 앞에서 청춘들은 내가 게을렀다고, 내가 긍정적이지 않았다고, 내가 세상의 아름다운 면을 보지 않았다고 자책한다. 약장수들은 그 대가로 거액의 수입과 명성을 챙긴다. 아무리 막 나가는 장사꾼의 세상이라지만 참 맹랑한 약장수들인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근래 들어 기성세대 가운데 그 맹랑한 약장수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거나 꾸짖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안해할 줄 아는 어른들, 사과할 줄 아는 어른들이 말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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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행복한 세상’을 내건 어린이 잡지가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는 보기 어렵다는 모순은 창간 이래 고래가그랬어(이하 고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극심한 사회적 양극화 속에서 아이들은 학과 성적은 물론 문화적 환경에서도 해가 다르게 큰 격차를 보여 왔다. 2005년 어느 날 함께 고민을 나누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고래동무’라는 후원단체를 만들었다. “세상의 흐름을 당장 바꿀 순 없지만 고래만은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가보자. 부잣집 아이 중에 고래 못 보는 아이는 있어도 가난한 집 아이 중에 고래 못 보는 아이는 없게 하자.” 고래이모, 고래삼촌이라 불리는 후원자들은 2800여 곳의 공부방과 보육원 등에 고래를 보내고 있다. 한 곳 평균 30명이니 8만여 명의 아이들이 고래동무를 통해 고래를 받아보는 셈이다.


그런데 초기엔 고래이모나 고래삼촌이 항의를 해오는 일이 잦았다. 통장에서 후원금은 꼬박꼬박 빠져나가는데 후원받는 아이들에게서 아무런 피드백도, 하다못해 엽서 한 장 없다는 것이다. 항의는 다른 후원에서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었다. 한국의 어린이 관련 자선단체들은 후원받는 아이들의 적극적인 피드백이 일반적이다. 한 유명 여행 작가가 한참 홍보에 나섰던 자선단체는 직접 결연 방식이 아닌데도 아이에게 엽서를 쓰게 해서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얼마나 불쌍한 아이로 보이게 하는가, 아이가 얼마나 감동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엽서를 쓰게 하는가는 단체의 실적을 가르는 일로 여겨진다. 전엔 자선 단체 홍보물에 등장하는 아이 사진이 ‘아사 직전의 불쌍한 아이’가 대세였지만 근래 들어선 ‘맑고 큰 눈을 가진 불쌍한 아이’가 대세라던가.


팝스타 샤키라가 콜롬비아 빈촌인 로마 델 페예에서 새로 짓는 학교 건물에 벽돌을 올려놓고 있다. (출처 :AP연합)


사람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인 만큼이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일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도움을 주는 사람과 다름없는 자존감과 존엄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감을 해치거나 씻기 어려운 상처를 줄 수 있다. 형제 사이든 친구 사이든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받았는데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움을 준 사람은 상대가 배은망덕하다고 여기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 과정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런데 자선 단체를 통한 후원자와 아이는 왜 그리 미소와 감동만 가득한 걸까. 왜 아이는 사진이 찍히고 엽서를 쓰면서도 전혀 자존심 상해하지도 상처받지도 않는 걸까. 외양과는 달리 인간적인 결합도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자존심 상할 일도 상처를 줄 일도 없을 만큼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굶는 아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먹을 것까지 이악스럽게 차지한 소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가 적절히 분배되고도 그리 많은 아이를 굶겨 죽일 수밖에 없는 나라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꼴을 갖춘 어린이 잡지와 책을 공부방이나 도서관 등 아이들이 모이는 공공시설에 더도 말고 한권씩 비치하는 건 한국에서 당장에라도 실현 가능한 일이다. 필요한 건 단지 제정신을 가진 정부와 정책뿐이다. (비록 우린 단 한 번도 그런 정부를 가져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출처: 경향DB)

▲ 자선을 아름답게 묘사할수록

불공정한 사회구조 은폐·영속화

자선의 목표는 ‘자선 필요없는 세상’


부모가 가난하든 부자든 제대로 교육받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는 건 아이가 가진 당연한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뿐인데 감동할 이유도 감사의 엽서를 쓸 이유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 권리를 나라에서 마련하는가, 나라가 신통치 않아서 후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마련하는가는 매우 다른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어른들끼리의 일일 뿐 아이들이 부담감을 갖거나 책임질 이유는 없다. 초기에 피드백과 관련해 항의를 해오기도 하던 고래이모, 삼촌들도 소통과 토론을 통해 이젠 그런 생각에 다들 공감하고 있다.


자선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냉소해선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 역시 몇 곳의 자선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지만, 요즘 같은 경제 상황에서 달마다 꼬박꼬박 제 벌이를 헐어 내는 일이 어디 쉽기만 한가. 그러나 자선은 그 자체로 완성된 해결책이 아니다. 자선은 불공정한 사회구조와 제정신이 아닌 문화정책을 바로 세우는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하는 동안 고통 받는 아이들을 위한 긴급한 임시방편이다. 자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름답지만 자선의 구조는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자선의 구조가 아름답게만 묘사될수록 그 자체로 완성된 해결책이라 여겨질수록 아이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아 가는 불공정한 구조와 정책은 은폐되며 영속화한다.


자선의 목적은 ‘자선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불쌍한 아이’를 돕는 이유는 불쌍한 아이를 돕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쌍한 아이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쌍한 아이’는 이미 그른 말이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우리가 미안해해야 할 아이가 있을 뿐.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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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이석기와 나는 동갑내기다. 만난 적은 없지만 우린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초·중·고를 다녔고 대학에 들어가선 그간 배운 것에 대한 회의와 반감에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접어든 사람들이다. 당시엔 주사파는 물론 반미도 없었다. 운동의 목표는 ‘미국 같은 자유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광주학살의 배후가 미국이라는 게 드러나고서야 운동은 미국이라는 성역을 넘어선다. 1985년 무렵 반미의 극단화한 형태로 김일성과 북한을 좇는 주체사상파(주사파)가 출현하면서 운동은 크게 둘로 나뉜다. 주사파와 엔엘(민족해방), 그리고 민족보다는 계급적인 문제를 천착하는 피디(민중민주).


 

정부의 "주사파발본색원" 정책에 따라 경찰청에 압수된 서울대 애국청년선봉대 대자보 (출처: 경향DB)



2000년 ‘의회를 통한 자본주의 극복’을 표방하는 피디 계열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진다. 민노당 초기에 주사파는 소수였지만 ‘특유의 생활력’으로 수년 만에 다수파가 되고 결국 당권을 장악한다. 2008년 민노당의 피디 계열은 ‘당권파의 전횡과 패권주의에 도저히 함께할 수 없다’며 진보신당을 만든다. 2011년 진보신당의 노회찬, 심상정 두 대표는 탈당해 민노당 당권파의 통합진보당에 합류한다. 그들의 희한한 행태는 ‘반이명박 연대’의 깃발 아래 덮이고 두 사람은 의회에 진출한다. 이석기와 주사파 동료들도 의회에 진출한다. 그 과정에서 ‘통진당 사태’가 일어난다. 운동권 내부에서나 통용되던 ‘경기동부’가 대중적 시사용어가 되고 ‘타락한 진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다. 노회찬, 심상정은 당권파를 비난하며 다시 정의당을 만든다.


그즈음, 민노당에도 참여하지 않고 현장에 남아 30년 이상 견결하게 활동해온 노동운동가 양규현이 고향에서 농사짓는 형으로부터 “동생도 이제 진보 그만하지”라는 충고를 받고 낙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와 같은 현장 활동가들이 그리 오랫동안 주사파의 실체에 대해 침묵해온 건 주사파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의견은 모조리 ‘종북’으로 몰아가는 극우세력 앞에서 자기모욕이기 때문이었다. 속깊음 덕분에 그들은 이제 주사파와 한통속으로 취급되고 낙심한다. 그들 개인의 낙심만은 아니다. 희망버스를 비롯한 수많은 삶의 투쟁현장에서 가장 주요하게 활동하는 그들이 꺾이면 결국 대다수 서민과 노동자의 삶이 꺾이는 것이다.


반면에 주사파와 함께 못하겠다며 신당을 만들었다가 다시 주사파와 결합해선 국회의원이 되고 여론이 악화되자 “비밀리에 활동해서 그런 사람들인지 몰랐다”고 발뺌하는 심상정이나, 주사파와의 결합을 반대한 진보신당 당원들을 ‘좌익소아병’이라 비난했다가 이젠 주사파를 ‘정신병자들’이라 비난하는 진중권 같은 딱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마땅한 비판과 평가를 받는가, 지금처럼 비판은커녕 오히려 양식 있는 진보정치인, 진보지식인으로 행세하는가는 전적으로 시민사회의 비판 능력에, 즉 우리에게 달려 있다.




(출처: 경향DB)


▲ 운동권의 역사와 족보 문제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사회문제

최소한의 사실관계는 드러나야


그와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갈 게 지난 25년 동안 한국의 진보진영을 휩쓸어온 ‘비판적 지지론’이다. 극우의 집권을 막기 위해 진보운동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의 자유주의 세력과 연합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지론은 주사파의 ‘인민연합’ 전술에 기반을 둔 것이다. 비판적 지지를 선택한 많은 사람들을 주사파에 놀아났다고 비난할 순 없다. ‘극우집권을 막는다’는 대의는 주사파의 기획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중요하다. 문제는 그 대의에 대한 맹목성이 더 중요한 대의, 진보운동과 진보정치의 자주성을 잊게 했고 결국 ‘반이명박 연대’의 깃발을 거치면서는 진보운동과 진보정치가 거의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주사파가 그런 맹목성의 폐해를 무릅쓰면서까지 인민연합 전술을 고수해온 건, 자신을 적대시하는 남한 극우세력의 집권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북한 체제의 의중과 관련돼 있다. 결국 이석기와 주사파는 언뜻 곤경에 처한 듯하지만, 그들의 30년 활동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를 한껏 비난하고 조롱하는 우리는 여전히 그의 영향력과 의도 아래 있는 셈이다.


일반적 차원에서, 모든 사람이 운동권의 역사와 족보를 알아야 할 이유는 물론 없다. 그러나 이 문제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됐고, 양규현과 심상정, 진중권 예에서 보듯 이 문제와 관련한 비판과 토론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전도되고 있다면 최소한의 사실관계는 드러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한 비판과 토론, 그리고 사회성원으로서 내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해괴한 수렁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통합진보당 유시민,조준호 공동대표가 경선에서 승리한 이정희,심상정 공동대표를 축하해주고 있다. (출처: 경향DB)


첨언 - ‘주사파 또라이들은 박멸해야 한다’는 식의 감정적 태도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진보진영 전체를 ‘종북’으로 몰아가려는 극우의 의도에 부응하는 것이며, 사상의 자유라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북한 체제를 존중하는 남한 사람이 주사파 말곤 없는데 굳이 박멸할 필요까지 있을까? 사상의 자유가 어색하다면 신앙의 자유 차원으로라도 주사파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이전 서독공산당(KPD, DKP)은 동독을 지지하는 ‘독일판 주사파’였다. 지지율은 1% 남짓이었으며 ‘비판적 지지’ 같은 특별한 폐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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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투쟁 현장엔 사람이 모이고 어떤 현장은 그렇지 않을까? 노동운동가 김혜진은 그에 관해 조심스러우면서도 예리한 견해를 낸 적이 있다. ‘동정의 대상이 되는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태 전 많은 사람이 연대한 홍대 청소노동자들의 경우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많은 사람에게 동정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반면에 정규직화 싸움을 벌이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엔 생각보다 연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귀족노동자가 되려 한다’는 식의 반감도 보인다. ‘현대자동차 정규직이 된다’는 건 많은 사람에게 동정이 아니라 ‘신분상승’으로 여겨진다.


공공노조와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이 부당해고를 알리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경향DB)


동정심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그건 연대가 아니라 적선일 것이다. 이런 현상이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요한 이유는 한국에 노동계급의 자긍심이 형성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민주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노동자는 언제나 빼앗기고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유럽 노동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본가보다 부유하진 않지만 자본가보다 더 정직하고 떳떳하게 살아간다는 노동계급의 자긍심은 형성되지 않았다. 결국 노동운동의 성패는 임금 인상에 집중되고 노동해방은 ‘자본가 못지않게 살아보는 것’이 됐다. 민주노동운동의 구심인 민주노총이 대공장 정규직 남성노동자의 이해를 위주로 하게 된 건 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연대가 아니라 적선, 질시의 태도가 만연한 것 역시 그에 조응한 현상일 뿐이다.


싸우는 노동자들은 과연 동정의 대상이거나 질시의 대상일까. 오히려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은 물론 우리 삶과 우리 아이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기면 내 삶도 그만큼 진전되며 그들이 밀리면 결국 내 삶도 곧 밀리게 된다. 내가 안정적인 정규직이니 그 싸움이 무관해 보인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노동 현실이 나빠지면 전체 노동의 교섭력이 약해지고 결국 나도 정리해고의 칼날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전문직이라 자부한다 해도 다를 건 없다. 또한 비정규직이 많아진다는 건 연령이 낮을수록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기도 하니 내 아이는 십중팔구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 역시 다행히 정년을 다 마친다 해도 여유롭게 노년을 보내는 게 아니라 더는 일할 수 없을 때까지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게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쪼개서 무력화하려는 자본의 ‘분리지배 전략’이기에 상위 1%가 아니라면 이 구조에서 예외가 될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일제에 대항해 싸우느라 풍찬노숙하며 다치고 죽어간 독립운동가들을 ‘불쌍한 사람들’이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모두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싸우는 노동자들 역시 우리가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할, 존경해야 할 사람들이다. 심지어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처럼 제 문제만 생각하면 타결 기회가 있었음에도 특수고용직 노동자 전체의 현실을 위해 이기기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경우는 ‘우리 시대의 의인’이라 상찬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 “‘노동자의 싸움’은 모두를 위한 것

나도 ‘쌍용차대회’ 조직위원이 돼

‘연대’의 힘으로 세상을 바꿔보자”


몇 해 전에 철수한 프랑스 기업 까르푸 경영진이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보인 야만적인 행태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이 프랑스에서는 상상도 못할 행동을 한국에서 한 이유가 무엇일까. 톨레랑스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프랑스 안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일까? 자본의 이윤추구와 무한증식 욕망은 어디든 다르지 않다. 다른 건 프랑스 노동자들은 연대하지만 한국 노동자들은 연대하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온 나라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을 테지만, 한국에선 남의 일처럼 외면하거나 연대가 아닌 적선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발레오전장, 파카한일유압, 포레시아, 보워터코리아, 보쉬전장, 컨티넨탈, 3M 등 근래 몇 년 새 외국 투자기업들이 싸우는 노동자에게 보이는 야만적 행태는 우리에게 연대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해준다.


마침, 제대로 된 연대를 실행해볼 기회가 있다. 24일 오후 4시 서울역 광장에서 ‘쌍용차 범국민대회’가 열리는데, 1만명의 조직위원을 모은다. 권위주의 문화에 익숙하다면 1만명이나 되는 조직위원이 무슨 놈의 조직위원인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만명의 조직위원은 우리 모두가 조직위원이라는, 이 싸움이 더는 남의 일이 아니며 동정의 대상도 질시의 대상도 아닌 내 문제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당신이 생산직이든 사무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노동자라면, 혹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1만명 중 한 사람이 되시길. 그래서 적선의 세상을 연대의 세상으로 바꾸는 초석이 되시길. 1만명의 조직위원, 멋지지 않은가?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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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왜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는 걸까요.” 화기애애하던 질의응답 시간이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밥을 굶어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아이들은 왜 살아야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철학을 갖는다는 게 뭘까. 인간과 세계에 대해, 삶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길 멈추지 않으며 나름의 관점과 태도를 갖는 것일 게다. 그리고 현실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더라도 그 관점과 태도에 기대어 사람 꼴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일 게다. 그렇게 볼 때 옛사람들은, 아니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다들 삶의 철학자였다. 철학교사였다. 그들은 아이에게 늘 예사로 말하곤 했다. “혼자만 잘살면 뭐해, 함께 살아야지.”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일도 좋지만 놀 줄도 알아야지.” “동무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해.” “미물도 함부로 해치는 게 아니다.” “사람이 너무 탐욕 부리면 죄받는다.” 등등.


별스러울 게 없어 보이면서도 참 정연한 철학들이었다. 그리고 참 무서운 가르침들이었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셀 수 없이 반복되는 그 가르침이 사람 꼴의 하한선을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사람임을 되새길 줄 알며, 이기적 욕망을 공동의 가치로 견제할 줄 알며, 소박하고 정직한 삶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보다 못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런 사람들이 이웃과 마을을 이루고 정이 흐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물론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다 훌륭하진 않았다. 윗사람에 대한 무작정한 순종을 강조하거나 여자는 남자의 보조적 존재라는 따위의 생각은 얼마나 모자란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인간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억압하는 전근대적 습속이라 지목했고 열심히 내다 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자유롭지도 주체적이지도 않을까. 예전엔 어지간히 탐욕을 부리며 살아가는 사람조차도 아이에게 가르치던 삶의 철학을 왜 우리는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조차도 가르치길 두려워할까.


자본주의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최대의 사람이 최대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공리주의의 기치 아래 모든 사람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저와 제 새끼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늘 불안하고 늘 피 터지는 세상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이상 삶의 철학자도 철학교사도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되면 살기 좋아질 줄로만 알던 우리가, 민주화와 함께 도착한 본격적인 자본주의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내몰리면서 철학을 지켜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정이 어떻든 ‘밥을 굶어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라는 철학이 사라짐으로써 우리의 삶은 밥을 굶을 때보다 더 초라해졌다.


▲ ‘밥을 굶어도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이런 간단한 철학이 사라지면서

밥을 굶을 때보다 삶은 더 초라해졌다


삶의 철학자들이 사라진 자리는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시대의 정언명령이 들어섰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철학 책과 철학 강좌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 책과 강좌들은 우리가 불편을 무릅쓰고 삶과 세계와 대면하는 일을 외국철학자의 이름이나 개념을 외우는 일로 대신하게 해준다. 간혹 그걸 넘어서는 “이게 다 자본주의 탓”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정언명령 앞에선 어김없이 멈춘다. 멈추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그 철학 책과 철학 강좌가 철학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면 더는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 책과 철학 강좌는 ‘철학 공부’가 아니라 ‘철학 청소’를 소임으로 하게 됐다.


옛 사람들은 철학 책이나 강좌 없이도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들의 부모가 이웃들이 모두 삶의 철학자들이었으니. 그들과 눈을 맞추며 대화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철학공부였으니. 마을 사람들은 움직이는 철학 책들이며 마을은 살아 숨쉬는 철학도서관이자 철학학교였으니. 오늘 아이들에게도 부모와 이웃과 마을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교사도 철학도서관도 학교도 아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건 인간의 성장이 아니라 성공에 관한 것들이다. 아이들은 사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자라난다. 아이들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인지라 제 삶과 세계에 대한 답답함과 막막함에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우리는 한목소리로 그들의 입을 막는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 그 아이들 중 몇몇은 답답함과 막막함에 기진해 스러져간다. 그 아이들에게 우리가 정색을 하고 ‘생명은 소중한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말한들 울림이 있을까.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철학의 복원이다. 우리가 삶의 철학자가 되고 철학교사가 되고 손잡고 철학도서관과 철학학교를 이루는 것이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어른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현실이 어렵더라도 사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길 멈추어선 안 된다고 아이들에게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그럴 의무가 있다. 기억하겠지만, 우리가 그 아이들을 세상에 나오게 했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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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거랑 방학 때랑 똑같은 거 같아. 방학 때도 오전에 학원가고 공부하고 해야 해.” “솔직히 말하면 방학 때보다 학교 가는 게 나은 거 같아. 학교에서는 여유롭게 친구들이랑 이야기 나눌 수도 있는데 방학 때는 그런 게 어려우니까.” “있으나마나야. 방학이라고 맘대로 놀 수 있는 것도 아니고.”(고래가그랬어 116호 ‘고래토론’에서)


방학을 앞둔 4학년 아이들의 토론이다. ‘신나는 방학’이라는 고전적 표현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있으나마나한 방학’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니 마음이 답답했다. 만일 이런 상황이 동네에서 딱 한 집의 일이라고 가정을 해보자. 30년 전처럼 말이다. 그럼 동네 사람들이 그 집 부모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미쳤다’ ‘애를 잡는다’고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안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온 동네가 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다. 지금 아이들이 30년 전 아이들과 달리 방학이 있으나마나해도 무방한 체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다르지 않다. 그저 온 동네가 다하는 일이기 때문에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손가락질은 오히려 그런 대열에 끼지 않은 부모들이 받는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는 학과 성적에만 몰두하지 않으려는 부모들이 꽤 된다. 특히 진보적인 경향의 부모들은 그런 경우가 훨씬 많다. 다양한 체험과 공부를 중시하며 아이를 데리고 들로 산으로 다니느라 학교에 빠지는 일도 잦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면 부모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하나둘씩 빠져나간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 적이 민망한 얼굴로 말하며 말이다. 그러나 그 수는 곧 역전된다. 다수가 된 빠져나간 부모들은 몇 안되는 남은 부모들을 ‘비현실적’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비현실적이다’ ‘아직도 저러고 있다니’ ‘아이를 희생시킨다’ 등등.


그 ‘현실’은 결국 대학입시다. 그런데 이게 좀 묘한 현실이다. 30년 전처럼 대학 진학률이 20퍼센트가 채 못 되던 시절엔 대학을 나왔다는 건 꽤 ‘현실적’ 변별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대학에 가지 않는 아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을 막 졸업한 청년이 만나는 일반적인 현실은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다. 그런데 고작 이걸 위해 엄마는 30, 40대를 다 바치고 아빠는 사교육비를 대느라 등골이 휘며 아이는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10대의 낭만도 누리지 못한 채 시들어가는 게 현실적인 걸까.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도록 도우면서 일찌감치 아이 적성에 맞게 소박하지만 자존감을 지키며 먹고살아갈 길을 준비하는 게 더 현실적일까. 그러나 다들 말한다. ‘대학을 나와도 안 되는데 대학도 안 나오면 어떡하나.’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 현실을 직시하는 건 비현실적이라 

손가락질 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세상의 희망은 되레 그들에게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현실적’이라는 게 무엇이며 ‘비현실적’이라는 게 무엇인지 되새겨볼 만하다. 오늘 ‘현실적’이라는 말은 현실이 주는 불안감에 짓눌려 현실에 눈을 감은 다수가 자신을 설명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그 다수가 현실을 여전히 직시하려는 소수에게 느끼는 불편함을 지레 공격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아이들 교육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진보적인 부모들 이야기를 했으니 그들의 정치 의식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20년 이상 진보적인 시민들은 대선 시기가 되면 노동이나 계급적 의제를 중시하는 진보정치의 독자성이 중요하다는 견해와 일단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에 연대해야 한다는 견해로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리고 정치적 견해는 전자이면서 고심 끝에 후자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적이 민망한 얼굴로 ‘현실이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선 그런 선택이 절대다수가 되면서 더욱 위기에 빠진 진보정치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비현실적’이며 ‘낡고 교조적’인 사람이라 손가락질 받았다.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는 노동과 계급적 의제를 무시해도 좋은 사회가 되었는가. 오히려 더 강조해도 모자랄 사회가 되지 않았던가. 노동과 계급적 의제가 정치에서 소거될수록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방학이 있으나마나라고 말할 지경인 교육이 지속되면 우리 사회는 공멸한다는 것, 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 그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은 ‘현실적’이라 일컬어진다.


이런 극단적 혼미함 속에서 현명함을 회복하는 좋은 방법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다. 역사에서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대개 지금 우리와는 달리 주로 현실의 기득권 세력이 이상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말이었고 이상주의자들은 그걸 명예롭게 생각하곤 했다. 비현실적인 것, 지금과 다른 현실이야말로 그들의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현실적 소망들은 하나씩 엄연한 현실이 됐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니 평등이니 민주주의 절차니 하는 것들이 다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가 ‘비현실적’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 파시즘에 사로잡힌 세상처럼 말이다. 우리는 또한 그런 세상의 희망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라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에게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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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쇼스타코비치 5번을 꺼내 듣다 현실 사회주의 생각을 했다. ‘인민이 주인인 나라’를 표방하다가 인민에 의해 무너진 사회.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채만수처럼 ‘스탈린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소련이 미국보다 못한 사회였는가’라며 결기를 보이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한때 현실 사회주의의 전도사였고 여전히 만날 마르크스주의를 말하면서도 현실적 결론은 ‘안철수처럼 어눌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인 이아무개까진 아니더라도 나같은 1980년대 운동권들은 대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굴절된 비굴함이 있다. 그 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한껏 경도되었던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과, 낡고 비현실적인 좌파로 보이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비굴함.


‘386’의 추레한 감상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오늘 현실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본연의 이상과 거리가 있는 사회였다는 생각은 일반적인 것에 가깝다. 2008년 미국발 공황 이후 마르크스를 다시 읽는 일련의 사회주의 붐에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재평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도 그 반영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그런 부정 일변도의 관점이 빠트린, 혹은 놓치는 것들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진정한 사회주의였는가 아닌가, 아니면 얼마나 아니었는가를 떠나 현실 사회주의라는 존재가 자본주의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에 대해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실 사회주의는 그 자체론 결코 좋은 게 아니었지만 자본주의 체제엔 매우 좋은 것이었다.


케인스주의니 유럽식 복지시스템이니 하는 수정된 자본주의는 현실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구현되기 어려웠다. 유럽식 복지시스템이 그걸 주창한 사람들과 사회의 원만한 합의(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나! 하는)에 의해 구현되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거나 사실의 껍질일 뿐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강력하게 존재했고 그 힘, 즉 강력한 왼쪽의 힘이 자본주의 사회를 ‘아직 사회주의로 넘어가지 않은 사회’로 재규정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수정을 견인해낸 것이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의 지배자들은 노동자 인민들이 온통 빨간물이 들어 자칫 사회주의로 넘어가느니 ‘계급 타협’을 해서라도 체제 유지를 선택했다.


현실 사회주의라는 왼쪽의 힘이 사라지자 수정된 자본주의들이 퇴조하고 ‘자유로운 시장’이라는 오른쪽의 힘이 패권을 장악하면서 지구라는 행성은 유례없는 야만의 상태로 돌입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옥이다. 북유럽을 비롯해 여전히 심각한 야만의 상태는 아니라는 사회들은 모두 스스로의 왼쪽의 힘을 가진 사회들, 다시 말해 강력한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을 가진 사회들이다.



▲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이 거의 괴멸

왼쪽의 힘이 없는 한국사회는

자본왕국·재벌천국을 벗어날 수 없다


오늘 한국 사회는 정치는 물론 사회문화 전 분야에서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놈의 사회가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없다. 박근혜 보수 정권이나 지리멸렬하는 민주당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왼쪽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몇 해 동안 ‘반이명박 연대’라 불린 선거전술을 통해 그나마 있던 주요한 왼쪽의 힘인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은 거의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일단 급한 불을 끄는 데 힘을 모으면서 장기적으로 내 살림을 챙긴다는 반이명박 연대의 대의는 급한 불도 못 끄고 제 집만 몽땅 태워버린 것이다.


문재인이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복지나 노동의 면에서 그리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문재인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세력이 더 이상 그들을 강제하고 견인하는 왼쪽의 힘이 없는데 왜 제 이념을 넘어서는 정책을 구현한단 말인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문재인의 패배에 낙심하는 진보는 차고 넘쳤지만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의 괴멸에 낙심하는 진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을 짓는 데 어떻게든 인생의 한 구석을 할애한 사람들이 말이다. 이쯤 되면 오늘 한국의 진보는 뭔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게 아닐까. 물론 현실에 대한 견해는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의 진보세력 대부분이 어떤 거대한 홀림에 의해 변하는 줄도 모른 채 변해가는 건 파국의 징후다.


심각한 세 공동대표 (경향DB)


왼쪽의 힘이 필요하다고 해서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을 무작정 미화할 건 없다. 한국의 조직노동, 즉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의 조직이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조직이라는 비판을 받던 참이고 진보정당은 평범한 인민보다는 인텔리의 정당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왼쪽의 힘이 없는 한국 사회는 자본의 왕국, 재벌 천국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왼쪽의 힘이 없는 한 박근혜 대통령인가 문재인 혹은 안철수 대통령인가는 MBC와 KBS의 사장이 누가 되는가 이상의 차이를 보이기 어렵다. 왼쪽의 힘이 없는 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은 ‘상식이 통하는 자본의 왕국’일 것이다. 우리는 과연 왼쪽의 힘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막막한 이야기지만 희망을 찾는 길엔 피할 수 없는 선택도 있는 법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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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라는 곳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을 심각하게 왜곡·폄훼하고 심지어 희생자들 사진을 음식에까지 비유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일베의 행태에 분노하는 건 시민의 상식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한 분노에 머물러선 안된다. 일베에 분노하며 일베만큼만 생각해선 안된다. 역사는 악의에 의해서만 왜곡되는 게 아니라 게으른 선의에 의해서 더 많이 왜곡된다.


역사 속에서 저항적 사건은 대개 처음엔 체제에 의해 금지되거나 불온시되면서 일부 저항세력에게서만 존중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존중은 일반화하고 공식화한다. 물론 그 사회가 느리게라도 진보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일부의 존중이 일반적이고 공식적 존중으로 변화함으로써 그 사건은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건에 담긴 정신은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저항적 사건의 정신은 체제 내로 수용되면서, 기념일과 기념관과 기념묘역이 생기면서 박제화하는 속성이 있다. 역사에 대해 냉철한 편인 프랑스인들이 파리 코뮨전사의 벽을 그리 소박한 상태로 두는 것도 그런 맥락에 닿아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행사에서 부르는가 못 부르는가, 5·18 민중항쟁을 인정하는가 모독하는가는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정신이 살아있는가와 5·18 민중항쟁의 정신이 오늘 현실에 살아있는가다. 박제된 역사는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을 밝히고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일 수 있다.


5·18 민중항쟁의 저항정신은 대개 둘로 볼 수 있다. 독재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려 한 저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계급투쟁과 이상주의적 공동체 건설의 면모를 보인 저항. 그것은 흔히 ‘수습파’의 정신과 ‘항쟁파’의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진보적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회복 운동이던 한국의 사회운동이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변혁운동으로 발전한 것 역시 바로 광주에서의 미국 역할에 대한 각성과 항쟁파의 역사 덕이었다.


독재가 물러나고 옛 저항세력이 체제 내로 진입해 옛 독재세력과 경쟁하거나 심지어 집권하는 수준에 이르자 5·18의 정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체제 안의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된 옛 저항세력은 5·18의 정신에서도 자신들의 현실에 부합하는 부분만 취사선택했다. 항쟁파의 정신은 슬그머니 잊혀지고 수습파의 정신만 강조되기 시작했다. 오늘의 광주, 지금 여기의 항쟁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던 5·18은 어느새 잘 차려입은 정치인들의 헌화 행렬에 더 어울리는 역사가 되어갔다. 



▲ 청년들이 극우의 우물을 찾는 건

보수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희망을 못 만들어내기 때문


오늘날 일베 사태와 관련한 논란이 역사를 모독하는 사람들과 역사를 박제로 만든 사람들의 논란의 경향을 보이는 건 그 자연스러운 귀결인 셈이다. 더욱 애석한 것은 일베의 몰상식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진보세력의 집권놀음을 위한 정치 선동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베 사태는 보수정권 6년 동안 청년들이 극우적 경향에 물들었음을 보여준다”는 식의 주장이 바로 그런 경우다. 보수정권 6년에 청년들이 영향을 받았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청년들이 ‘이명박의 치명적인 매력’에 대거 홀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이명박과 그 패거리의 풍모는 보수로 갈 젊은이도 막아세울 만큼 낡고 악취 나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권도 아직은 딱히 나은 게 없다.


극우가 자본주의의 자식이라는 것, 한 사회가 심화하는 착취 구조와 반복되는 불황·공황이라는 자본주의적 모순에 갇혀 아무런 출구를 찾지 못할 때 극우의 우물을 찾는 청년들이 생겨난다는 건 상식적인 이야기다. 물론 한국의 기존, 장년층 극우는 전쟁과 분단이라는 특별한 역사에 기인한 바 크지만 일베 사태에서 보이는 자생적, 청년 극우는 그 전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의 처지를 보라.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조리 입시에 바치고 한 해에 1000만원을 넘는 등록금에 시달리며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면 비정규 노동과 아르바이트가 기다린다.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 북유럽에도 있는 극우 청년들이 여태 없었다는 건 오히려 희한하고 감사한 일일 수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근혜 대통령 (경향DB)


청년들이 극우의 우물을 찾는 건 보수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희망은커녕 이 상황을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그걸 ‘신자유주의’라 부르든, ‘재벌 왕국’ 혹은 ‘부자의 천국’이라 부르든 이 상황이 진보정권 10년과 보수정권 6년의 변함없는 행진 덕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진보가 지난 6년 동안 한 거라곤 모든 문제를 보수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진보라 여기는 기성세대가 청년들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보수 정권 6년의 영향” 따위 속이 빤한 정치 선동이 아니라 ‘깊은 성찰’이다. 그게 청년들이 제가 살아온 사회를 사랑하게 할 수 있게 만드는 첫걸음이자 박제된 5·18의 역사에 숨길을 불어넣는 일이다. 일베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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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은 집권 초기를 빼고는 줄곧 지지율이 낮은 편이었다. 서민대중의 편에 서는 정치를 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은 신자유주의니 따위 개념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갈수록 고단하고 불안해져만 가는 삶을 통해 기대는 환멸로 바뀌어갔다. 신자유주의라 불렀건 안 불렀건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의 500만 표차 압승은 그 환멸의 폭발이었던 셈이다.


집권 후반기에 이르자 지지율은 더욱 가파르게 낮아졌다. 그리고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이 형과 부인이 한 일을 시인하면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노 전 대통령이 눈엣가시였던 보수 언론은 얼싸 좋아라였지만 진보 언론도 다르진 않았다. 이를테면 다음날 한겨레는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한겨레와 경향은 입을 모아 ‘친노세력이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열흘 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그 모든 상황은 급반전된다.


‘이명박이 얼마나 괴롭혔으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가’의 측은지심으로 출발한 여론은 ‘얼마나 좋은 대통령이었는가’로, 그리고 이내 ‘민주주의와 진보의 순교자’로 변화했다. ‘친노세력의 재기불능’을 선언했던 진보 언론은 친노세력이 “폐족되는 멸문지화를 당했고” “덩달아 정을 맞았다”며 제 선언을 번복했다. ‘민주주의의 기수’로 부활한 친노세력은 빠른 속도로 ‘진보정권 교체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노 전 대통령과 친노세력에 대한 평가의 급반전에 사실적 인과관계는 없었다. 상반된 평가 사이에 있었던 일은 오직 하나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뿐이었다. 매우 특별하게 여겨질 만한 이 현상은 오늘 한국의 대중이 대통령이나 정권에 대한 평가에서 매우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런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태도가 적절한 현실적 분별력을 만나지 못할 때 심각한 사회적 왜곡과 해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회는 위험 속으로 치달리거나 정직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쳇바퀴 속에 갇히게 된다.


현실적 분별력을 제공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과 언론이다.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서 대중이 사회문제에 대해 감상적인 태도에 머물러도 상관없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중이 사회문제에 대해 지식인이나 언론과 같은 수준의 현실적 분별력을 유지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간혹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과 같은 충격적인 상황에서 대중은 감상적이고 집단적인 흐름을 보이기도 한다. 그걸 견제하는 게 지식인과 언론, 특히 진보 지식인과 언론의 역할이다. 설사 욕을 들어먹고 오해를 사더라도 그 흐름이 사회적 해악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견제할 책임 말이다. 우리가 지식인이라는 말 앞에 ‘비판적’이라는 말을 붙이고, 언론이라는 말 앞에 ‘냉철한’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지식인과 언론이 대중의 집단적 흐름만 뒤쫓는다면

왜 굳이 그들이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는 참으로 간단치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008년 미국발 공황으로 30여년 동안 인류를 야만으로 몰아가던 신자유주의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러나 자본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손실은 사회화, 이윤은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더 심각한 파국을 만들어가고 있다. 막나가는 자본과 현실적 불안감에 내몰리는 대중 사이에서 좌파는 아직 또렷한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는 언제나 자본이나 노동 어느 한편이 우세하거나 불안하게 타협하는 것이었지만 자본과 노동이 공멸하는 묵시록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말마따나 “산사태”가 말이다.


그러나 그 몇 해 동안 한국의 지식인과 언론은 마치 한국은 그런 전 지구적 상황과는 무관하기라도 한 듯 ‘이명박 악마화’와 ‘노무현 미화’라는 공간 안에서만 부유해왔다. 노무현에 열광하다 비난하고 다시 이명박을 비난하며 노무현을 찬미하는 시계추 같은 진동 속에 비판적 지성이나 냉철한 현실인식의 자리는 없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환멸이 반드시 노무현 정권의 찬미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명박 정권이 나쁘지만 노무현 정권도 서민대중의 편에 서는 좋은 정권은 아니었다’는 진실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비판적이어야 할 지식인이 대중보다 더 감상적인 행태를 보이고, 냉철해야 할 언론이 대중의 집단적 흐름만 뒤쫓아 다닌다면 왜 굳이 지식인과 언론이 존재해야 하는가. ‘지식인의 죽음’ ‘흉기로서 언론’이라는 말이 오히려 마땅하지 않은가. 대중의 감상적 태도와 집단적 흐름을 견제하긴커녕 지식인과 언론이라는 서푼짜리 권위로 공인하는 형국이니 말이다. 고답적이고 지사적인 지식인상이나 언론의 사명을 되새길 건 없겠지만 지식인과 언론이 존재하는 한 최소한의 역할은 있는 법이다. ‘대중’이라 불리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묵묵히 제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가 작동되고 있듯 말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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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에서 진보적인 시민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문재인씨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막판까지 안철수씨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가’에 대해선 거의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였다. 박근혜씨다. 진보적인 시민들이 박근혜씨를 그토록 반대한 건 그가 단지 보수 후보인 걸 넘어 ‘독재자의 딸(이자 정치적 아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청년 시절 목숨 걸고 독재와 싸운 사람들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걸 인생의 모욕으로 여기는 건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일이 있었다. 독재자의 딸을 그토록 반대하는 진보적인 시민의 아이들이 독재자의 시절 아이들보다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독재자의 시절보다 잘 먹는다. 학교에서 체벌과 억압적 교육도 그 시절에 비해 많이 가셨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의 삶, 아이의 일상에서 자유와 인권은 독재자의 시절보다 못하거나 억압적이다. 아이의 행복과 조화로운 성장에 가장 결정적이라는 ‘놀기’의 면에서라면 독재자 시절보다 못한 걸 넘어 비참한 지경이다. 독재자의 시절에도 아이들을 오후 내내 뛰어놀았지만 이제 아이들은 뛰어놀기는커녕 오후 내내 혹은 밤늦도록 컨베이어 벨트 위의 부품처럼 학원을 돌며 시들어간다.


참 이상한 일 아닌가. 독재가 물러난 지 30여 년이고 대통령을 ‘쥐’라고 욕해도 잡혀가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며 많은 부모들이 그토록 독재자의 딸을 반대하는데, 아이들은 독재자의 시절보다 행복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역시 이명박과 박근혜 때문인가. 이명박과 박근혜의 군대와 경찰이 전국의 초등학교 교문을 지키고 있다가 하교하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실어 나르기라도 하는가. 바로 시민들이 제 아이들을 으르고 달래며 그러고 있지 않은가. 그들 중의 누구도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도 좋다고 말하지 않지만 하나같이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들이 말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현실에 반대하다 결국 멘붕에 빠지기까지 한 그들이 그토록 무기력한 현실은 무엇인가.


두 현실을 요약하면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을 게다. 권위주의는 민주화 이전 반세기 동안의 극우독재가 남긴 것이다. 새누리당, 조·중·동을 비롯한 이른바 ‘수구 기득권 세력’이 그 주인공이며, 그들은 여전히 가능만 하다면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조차 되돌리거나 거스르고 싶어 한다. 신자유주의는 민주화 이후 특히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흐름에 편입하면서 본격화했다. 신자유주의를 통해 삼성이나 현대자동차 같은 몇몇 대기업은 국제적인 기업이 되었지만 대다수 시민의 삶은 불안정해졌다. 양극화, 정리해고, 비정규노동, 청년실업,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출산율이 그 내용들이다.


아이들의 삶과 관련해서 권위주의는 체벌이나 억압적 교육의 잔재들로 남아 있다. 신자유주의는 교육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인적 자원) 생산과정으로 만들어, 독재자의 시절에도 오후 내내 뛰어놀던 아이들을 학원을 돌며 시들게 만들었다. 정권으로 보자면 권위주의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권 모두가 해당한다. 시민은 그에 대응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지지한 보수적인 시민은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모두 받아들인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지지한 진보적인 시민은 권위주의는 반대하되 신자유주의는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접고 산다면

우리가 외치는 진보는, 지키려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독재자의 딸을 반대하는 진보적인 시민의 아이들이 독재자 시절 아이들보다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 건 결국 그래서다. 진보적인 시민들은 체벌이나 억압적 교육 같은 권위주의 교육엔 단호히 반대하지만, 아이가 학원을 돌며 시들어가는 신자유주의 교육 상황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모습은 체벌과 억압적 교육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말하던 독재자 시절 시민과 수십년의 시차를 두고 빼닮았다.


미궁을 빠져나갈 열쇠 또한 그 빼닮음에 있다. 권위주의 교육은 어떻게 아이들에게서 물러났던가. 세상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하며 물러났던가. 일부 운동권의 몽상으로 여겨지던 권위주의 반대운동(민주화운동)에 시민이 참여하면서 권위주의도 권위주의 교육도 물러나지 않았던가. 신자유주의 교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부 비현실적 좌파의 몽상으로 여겨지는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에 시민이 참여할 때 비로소 물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 막막한 이야기다. 신자유주의라는 초유의 괴물 앞에서 누군들 막막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반세기에 걸친 독재와의 싸움은 덜 막막했던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사람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다. 손잡고 힘을 모은다면 말이다. 다 떠나서, 우린 자문할 수 있다. 오늘 독재자의 딸을 반대하는 우리가 적어도 독재자의 시절 시민보다는 나아야 할 게 아닌가. 우리 아이들이 독재자의 시절 아이들보다는 행복해야 할 게 아닌가. 우리가 그조차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접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외치는 진보는 우리가 지키려는 민주주의는 대체 무엇인가.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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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고래가 그랬어’는 지난해 5월부터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이라는 이름의 서명운동을 진행해 왔다. 내용은 이렇다. 


 1. 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합니다. 

2.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껏 놀기’입니다. 

3.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성공입니다. 

4.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해야 좋은 세상입니다. 

5. 교육은 상품성이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6. 대학은 선택이어야 합니다. 

7. 아이 인생의 주인은 아이입니다. 


내용 자체로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는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이야기들이다. 상식이 두려움이 되는 기막힌 상황이야말로 우리의 교육현실이다. 7약속운동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짓눌리는 부모들에게 반성을 강요하려는 게 아니다. 알다시피 오늘 이 시장주의 교육의 처참한 현실은 구제금융 사태 이후 세 정권에 걸쳐 15년 넘게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공세에 의한 것이다. 


내 아이를 근심하는 부모들이란 그 거대한 상황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그러나 부모들은 사회 현실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종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가진 주체적인 시민이다. 우리는 사회 현실과 사회성원은 유기적 관계라는 걸 되새길 수 있다. 나쁜 사회 현실은 사회성원들을 나쁘게 만들고(좋은 행동은 불리하거나 불안하므로) 나빠진 사회성원들은 다시 더 나쁜 사회 현실을 만들어 낸다. 오늘 한국 교육처럼 말이다. 7약속운동은 그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작은 노력이다.


7약속운동이 내용 자체로는 대체로 특별할 게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라 했지만 그중 하나는 좀 다르다. 4번 항목,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동자’라는 말이다. 그 말이 마음에 툭 걸려 참여가 꺼려진다는 분들이 꽤 있다. 7약속운동 강연을 해보면 질문 시간엔 꼭 그 이야기가 나온다. 두 달에 걸쳐 7약속운동 특집 기사를 진행한 경향신문 역시 협의를 해왔었다. 대중적인 운동이니 대중의 정서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협의에 응했지만 씁쓸함은 남았다. 조·중·동도 아니고 한국 제도언론 중에선 가장 진보적이라는 신문에서의 상황은 오늘 우리 사회의 속사정을 드러낸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노동자 삶이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캄캄할 수밖에 없다

덕수궁 천막농성 노동자를 외면한다면 그건

내 아이의 미래를 외면하는 일이다”


사실 노동자라는 말은 아무런 특별한 말이 아니지 않은가. 좌파의 말도, 우파의 말도 물론 아니다. 노동자의 편인가 아닌가로 좌파와 우파를 가를 순 있겠지만 노동자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여부와 이념은 무관하다. 성숙한 사회에선 좌우 막론하고 사용하는 중립적인 말이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말을 불편해하게 된 건 반세기 동안의 극우독재 덕이다. 극우독재는 ‘노동자’를 빨갱이의 말로 금지하고 ‘근로자’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제 극우독재가 물러가고 절차적 민주화를 시작한 지 30여년이 되었다. 40대 이하의 시민들은 극우독재의 잔재인 보수세력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라는 말을 꺼릴까. 단지 공포의 기억 때문일까.


열쇠는 말의 문제가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공자가 ‘정명(正名)’을 설파했듯 세상이 흐트러질 때는 말부터 흐트러지며 흐트러진 말은 흐트러진 세상을 드러낸다. 극우독재는 ‘노동자’를 ‘근로자’로 대체함으로써 보편적 권리의식을 가진 시민으로서 노동자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 노예로서 노동자로 대체했다. 우리는 당연히 노동자라는 말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말을 꺼린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삶이 여전히 정당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아이들의 삶이 정당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의 행복과 노동자의 행복은 엇나가는 법이 없다. 노동자가 살 만하다는 사회 중에서 한국처럼 아이들이 놀지도 못하고 밤늦도록 학원으로 내몰리는 사회가 있는가. 아이들이 정상범주의 교육환경에서 자라나는 사회 중에 노동자들이 한국처럼 단지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몇 년 동안 길바닥에서 지내고 고압송전탑을 오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사회가 있는가.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자가 고되게 일하는 생산직만 노동자라거나 나는 시민이지 노동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회가 있는가.


노동자의 삶이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캄캄할 수밖에 없다. 대개의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서 내 아이만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건 무엇보다 지금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건 무엇보다 현재 노동자의 현실을 바꾸어가는 것이다. 그런 노력에 연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시청 앞을 지나다 새삼 흐뭇한 얼굴로 ‘시장 하나 제대로 뽑았더니 참 좋구나’ 하는 우리가 그 시장이 일하는 건너편에서 단지 노동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6년째 천막농성을 한 노동자들은 외면한다면 그건 어느새 내 아이의 미래를 외면하는 일인 것이다. 좋은 세상이란,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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