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나라가 시끄럽다. 물론 이번엔 사안의 심각성과 스케일이 다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땅에서 바람 잘 날이 아예 사라져 버린 듯하다. 오늘은 어떤 뉴스가 이 나라를 흔드느냐가 문제이지, 오늘도 엄청난 소식이 있을지 없을지는 관건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소용돌이는 생활이 되고, 진짜 생활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말이야 민생이 먼저라지만 당장 눈앞의 불끄기 바쁜 것이 거의 1년에 365일이다. 인간의 삶과 생활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그렇다면 다른 생물들은? 자연은? 이들에게도 관심의 차례는 과연 돌아올까?

국정농단 사건으로 온 나라가 난리통을 겪는 동안, 한반도로부터 아주 먼 곳에서, 오늘의 핫이슈와 아주 먼 문제로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바로 제66회 국제포경위원회(IWC)가 슬로베니아 포트로즈에서 10월20일부터 10월28일까지 개최된 것이다. 이 판국에 웬 고래? 그렇다. 이 판국에야말로 고래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고래를 생각하는, 아니 자연과 생명에 눈을 돌리는 ‘판국’이란 도무지 생겨나질 않는다. 오히려 ‘판’이 만들어지지 않는 문제들, 언론과 대중이 놓치고 있지만 엄연히 중차대한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논의하는 것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국제포경위원회의 이름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고래 잡자는 모임인가? 1946년 설립된 이 위원회는 고래의 보전을 주목적으로 하며 효과적 보전을 바탕으로 한 엄중한 관리하의 포경만 허락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82년 모든 상업적 포경을 전면 금지한 것이 가장 주된 업적이다. 고등영장류와 비견될 정도로 지능이 높고, 정교한 사회구조를 이루며, 감정과 이타심을 가지고, 뭍에서 물로 돌아간 독특한 포유류인 고래를 살리자는 취지로 세계가 모인 자리다. 우리나라도 1978년부터 회원국이다. 그러나  이번 연례회의에서도 한국이 보여준 자세는 고래를 보호하자는 쪽과 거리가 멀다. 아니 올해도 국제포경사회에서 악명 높은 일본의 들러리 역할만 하고 있다.

일본은 그동안 ‘과학적 포경’이라는 해괴한 명분으로 매년 고래 수백마리를 잡아 국제적 원성을 샀는데 이런 고래잡이 과정을 엄격히 규제하는 결의안이 이번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물론 일본은 반대표를 던졌고, 우리 대표단은 기권했다. 또 남대서양에 인도와 러시아를 합친 면적의 고래보호구역을 만들자는 제안이 발의되었는데 이 역시 일본을 비롯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 포경 국가들의 반대에 의해 무산되었다. 만약 조금만 더 득표했다면 이미 조성된 인도양과 남대양 보호구역과 함께 실로 엄청난 규모의 안전한 고래 서식지가 만들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국은? 떡하니 반대표를 던졌다.         

실제로 해당 바다와 해안선이 인접한 나라들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가봉, 남아공이 발의를 하고 지지한 반면, 한국을 포함하여 이곳으로부터 수천㎞ 떨어진 국가들이 막은 것이다. 우리 대표단의 발언은 더욱 가관이다. 보호지역 설정을 열렬히 찬성한다는 호주 다음 차례에 기껏 한다는 말이, 보호지역이 어떻게 고래잡이를 허용할 것인지 근거가 충분치 않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보호하자는 곳에서 고래잡이 방안을 강구하라? 대체 무슨 희한한 모순어법인지.

동물원에서 지내다 고향 제주도 앞바다로 돌아간 제돌이. 불행히도 이는 한국이 고래를 대하는 자세의 상징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극단적으로 예외적인 케이스에 해당된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고래가 어망에 ‘우연히’ 걸리는 수가 다른 나라의 10배에 달하는 나라다. 이렇게 ‘우연히’ 잡힌 고래는 해경이 검사해서 작살 등에 의한 외상이 없는 경우 유통이 된다. 전국 50개에 달하는 고래식당들이 모두 이런 불확실한 납품 경로에 의존한다고 누가 믿겠는가? 실제로 지난 5월 밍크고래를 불법 포획·유통한 일당이 검거되고 40억원어치의 고래가 압수되었다. 작살은 의도이고 망은 우연이라는 이 단순하고 해괴한 논리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한국의 고래 혼획이 우연인가 의도인가를 조사한 거의 유일한 연구에 의하면 혼획 중 의도된 포획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와 함께 일본에서 불법 포획된 고기도 수입된다고 한다.        

법에 저촉되는지가 전부는 아니다. 울산의 고래관광 프로그램은 살아 있는 고래를 보러 나갔다가 뭍으로 돌아와 여지없이 고래고기를 먹는 것으로 귀결된다. 횟집 앞 어항을 보면서 식당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모양새인데, 고래관광이 고래 포획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국제적 관행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형국이다. 일본이라면 신경을 곤두세우는 한국이, 일본이 국제사회로부터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사안 중 하나인 고래에 관해서는 거의 한패로 묶인다는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우연히’ 망에 걸려 식탁에 오르는 다음 고래가 제돌이는 아닐지, 야생학교는 불안하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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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 수가 좀 많은 데다가 다들 역마살까지 있는 편이라 여기저기서 모아온 물건이 한데 모인 까닭이다. 웬만한 건 함부로 버리지 않는 습관도 여기에 한몫하였다. 그러다 보니 생기는 약간의 공간 부족이 문제이긴 하지만, 인과응보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긴다. 아무리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지만 사물도 나와 세월을 겪으며 소소한 역사와 이야기가 엮인 것인데 매몰차게 다루는 건 어쩐지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그래서 일 년 내내 꺼내보지도 않은 채 먼지만 쌓여가는 것들이 허다하지만, 이 ‘미련 덩어리’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오늘도 한 지붕 아래 같이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의미 없이 보관만 되고 있는 물건들과는 달리 특별한 기회를 만나 빛을 발하는 물건도 있다. 허름해진 이불이 훌륭한 덮개로 활용되고, 다 마신 와인의 코르크 마개는 서랍 손잡이로 둔갑하기도 한다. 안 버리고 모아놓은 온갖 크기와 모양의 상자 및 가방은 내가 필요로 하는 그 어떤 용도도 다 충족시켜줄 정도로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리본, 철사, 끈, 천, 종이 등의 자재는 물론, 수많은 종류의 통과 도구, 부속품과 공구가 모아져 있어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이 엄청난 물건의 목록을 정리하고 파악하는 역할을 하는 어머니는 우리 집의 ‘구글’이나 다름없다. 필요한 걸 어머니께 ‘검색’하면 거의 예외 없이 필요한 결과를 찾아서 내놓기 때문이다.

제 기능을 못 한 채 처박혀 있던 무언가가 우연한 기회에 차출되어 세상이 돌아가는 데에 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작은 기적과 같다. 혹시 몰라서 남겨 두었던 보잘것없는 작은 요소가 딱 필요할 때를 만나 톡톡히 제 역할을 할 때, 그때만 느낄 수 있는 묘미와 쏠쏠함이 있다. 가장 근본이 되는 심리는 아마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기쁨일 것이다. 버린다는 것, 그것은 차디찬 단절을 의미한다.

쓰레기통에 들어간 순간, 문명의 총화였던 하나의 물건은 순식간에 현대기술이나 자연의 원리로 처리 불가능한 이물질로 전락한다. 누군가의 기억 또는 손길이 미치는 곳에 여전히 있는 물건은 아직 죽지 않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비록 먼지 쌓이고 있지만 어디엔가 요긴하게 쓰일 가능성이 살아있는 것과 영원히 사라진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리고 우연의 사슬이 찰칵 소리를 내며 물건과 들어맞았을 때, 그 작은 가능성은 실현되어 이 허망한 우주 속에서 존재에 의미를 조금 더 실어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재활용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적 재활용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에 물건의 재활용은 말 그대로 다시 사용하는 행위였다. 오늘날처럼 물건을 재료별로 구분하여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건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종이, 플라스틱, 철, 유리 등의 소재로 인식함으로써 물건의 폐기는 체계화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금 잘 쓴다’는 재활용 본연의 의미도 어쩌면 폐기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건을 구성 물질로 환원하여 보는 시점은 결국 경제적 논리로 그 재활용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되고, 그 결과 심지어는 재활용이 오히려 환경에 나쁘다는 반직관적 결론에 이르기까지 한다. 가령 알루미늄은 광물을 캐내는 비용이 높아 재활용하기에 좋지만, 플라스틱은 유가 인하로 재활용이 오히려 더 비싸다는 식의 논리이다. 재활용이 재료공학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그동안 수거해 가던 물건을 더 이상 가져가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 얼마 전, 그동안 스티로폼을 수거하던 업체가 폐스티로폼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수거를 거부하거나 이런 종류의 물건을 아예 일반 쓰레기로 분류해달라고 요청한 일이 일어났다. 스티로폼 역시 유가 하락으로 인해 원래 재생원료로 가공하여 수출하던 것이 경제성이 떨어지면서 수거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어떤 플라스틱의 경우에는 이를 수거, 분류, 그리고 다시금 원료로 만드는 가공 과정에서 탄소가 더 많이 배출되기 때문에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분석도 있다. 물건의 재활용을 재료의 재활용으로만 보는 순간 당연히 그 물건은 원자재 거래시장의 원리에 따라 취급을 받게 되고 재활용 본연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나는 이사를 하면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 들었던 물건들, 그러나 형편상 이제는 헤어져야 할 물건들을 어찌해야 하나 골몰하게 되었다. 그냥 버리기엔 너무 멀쩡하고 아까운 것들이라 하나하나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 그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침 시골에 요양하러 가시는 장인·장모님이 필요하다며 식탁 세트를, 같이 온 삼촌이 탐난다며 선반과 바비큐 틀을, 후배는 거실 의자와 카펫을 각각 가져가거나 맡아주기로 했다. 또 뒷집에서 이사 나가는 아저씨는 세탁기를, 이사 들어오는 아저씨는 옷걸이와 부엌 도구를 시원하게 처리해주었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새 물건을 팔아야 할 업체들이 장사가 안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 보금자리를 찾아 제2의 삶을 시작할 정든 물건들을 생각하면, 야생학교는 뿌듯할 따름이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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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제2의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야생 영장류를 연구했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열대 우림이다. 이 나라의 도시, 특히 수도는 너무 복잡하고 정신없어서 정이 가지 않지만 인적이 드문 시골로 들어서기 시작하면 마음이 활짝 펴진다. 맑은 물, 시원한 공기, 순진무구한 사람들. 단순하고 소박한 삶들이 늘어선 좁은 길을 따라 숲을 향해 나아가면, 수년 전 야생동물 그리고 고독과 씨름하며 지내던 날들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는 것만 같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밀림. 그곳이 나는 늘 그립다.

얼마 전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았다. 오랜만에 조우한 현지 연구보조원과 얼싸안으며 옛이야기를 나누고, 숲속으로 들어가 긴팔원숭이 가족을 찾아 안부를 묻기도 했다.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들이 그곳에 여전히 잘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그저 고맙고 감개무량하다. 나무도, 개울도 여전히 푸르고 언제나처럼 넘실거렸다. 열대우림의 품 안에만 안겨 있으면 모든 게 평온하고 영속될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아직은 괜찮은 건가, 어느새 마음을 툭 내려놓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이곳에도 나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기름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팜유 지대이다. 이곳에서 내가 영장류 연구를 시작하던 10년 전만 하더라도 없었는데, 짧은 기간에 엄청난 규모의 팜유 농장이 국립공원 옆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팜유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식물성 유지로 세계 최대의 생산국이 바로 인도네시아이다. 예전에 인도네시아는 팜유를 소량 생산해 왔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해 1990년대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며 현재 약 2000만t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팜유는 과자, 아이스크림, 초콜릿, 라면 등 각종 식품은 물론 세제, 비누, 화장품 그리고 바이오연료에까지 쓰이는 범용성 원료이다. 다른 말로 하면, 슈퍼에서 장을 볼 때 팜유를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물론 우리나라도 주요 팜유 수입국으로 팜유 농장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궁금하다면 위에 열거된 품목에 해당하는 물건 아무거나 들어 뒷면을 살펴보라. 야자유, 야자경화유 등도 모두 팜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팜유를 먹고 있는 것이다.

이쯤 말하고 나면 눈치챘을 것이다. 어두운, 몹시 어두운 이면이 있다는 얘기가 나올 차례지 않은가. 물론이다. 문제는 팜유가 오늘날 동남아시아 산림 파괴와 야생동물 멸종의 가장 심각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팜유 농장은 경작지를 활용해 조성하지 않는다. 바로 열대우림의 세계를 침범해 전부 베고 불태운 전쟁터 같은 땅 위에 세워진 것이 팜유 농장이다. 인도네시아 팜유가 세계 공급량의 절반을 넘어서고, 말레이시아를 제치며 1위 생산국 자리를 탈환한 2000~2009년에는 약 34만㏊가 팜유에 할애됐다. 이 중 대부분은 저지대 산림이었다. 이때에만 서울 면적 5배가 넘는 숲이 사라진 셈이다. 그리고 이 참혹한 현상은 이 순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값싼 기름 때문에 죽어나가는 생물들과 생태계를 일일이 열거하기란 불가능하다. 팜유의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는 다름 아닌 오랑우탄이다. 잿더미의 숲 한중간에서 어쩔 줄 모른 채 고립된 오랑우탄의 모습은 이제 잘 알려진 팜유의 반대급부 이미지다. 서식지 파괴와 밀렵으로 그 개체수가 90% 이상 사라진 오랑우탄은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열대우림에서 그저 한 종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아직 못다 한 여러 종의 생물 그리고 그들 간의 복잡·미묘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은하계를 수놓을 만큼 많고 광대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멸종과 파괴에 대한 뉴스를 경제활동의 필수불가결한 부산물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이런 비극적인 정보의 나열이 조금이라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국제사회는 늦게나마 산림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기름을 생산하는 지속가능 팜유를 확대하고자 ‘지속가능한 팜유 라운드 테이블(RSPO)’이라는 기관을 설립해 인증제를 실시하고 있다. 팜유는 물론 이 제도가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아무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7월29일 국내 화장품 원료 분야에서는 첫 번째로 생활화학전문기업 KCI가 RSPO 인증을 받았다. 좋은 출발이긴 하나, 화장품 수출 3조원 시대를 연 나라로서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행보이다. 인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나머지 팜유 사용 업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의 속내는 한 가지다. 소비자들이 관심 없는데 뭘? 관심이 없었다면 당장 지금이라도 있게 하자고, 야생학교는 촉구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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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지금 이보다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 있을까. 열의 손아귀에 꽉 잡혀 꼼짝달싹도 못하며 연명하는 날들이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너무 더운 나머지 세상만사가 다 무가치해질 정도이다. 정치고, 경제고, 연예고, 스포츠고 다 필요 없다. 더워 죽겠는데 무슨. 밤이 되어도 전혀 쉴 틈을 주지 않는 더위에 헛되이 잠을 청해본다. 잤는지, 못 잤는지도 불분명한 몽롱한 정신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든다. 간신히 넘긴 하루. 하지만 오늘은 또 어쩐다냐. 사는 것이 참으로 힘들도다.

온도 몇 도의 차이가 이렇게 대단한 것이구나, 우리는 혀를 내두른다. 냉방된 공간을 산소통처럼 찾아다니는 나약한 육신을 내려다보면서, 아무리 고매하고 똑똑한 척을 해도 결국 하나의 생물일 뿐이구나, 우리는 탄식한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더위가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인 시선을 갖게 해준다. 더위는 우리를 한없이 솔직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더위를 통해서 우리는 지구인이 된다. 당장의 더위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것도 중요치 않음을 몸소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시대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현대의 삶이다. 신자유주의보다, 저성장보다, 테러리즘보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이의 피부에 완벽히 와 닿는 가장 심각한 전 지구적 이슈. 나와 무관하다며 모든 것을 무시해버려도 끝내 외면할 수 없는 궁극적인 생존의 문제. 바로 기후변화이다.

그렇다. 지겨워 죽겠지만, 바로 그 기후변화이다. 지겨운 이유는 하도 많이 들리기 때문이다. 많이 들리는 이유는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이유는 제대로 대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워 돌아가시겠는데 에어컨 켜지 말라는 헛소리냐? 혹자는 벌써부터 역정을 낸다. 정확히 그 말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범주의 말이긴 하다. 더위는 더 이상 단순 기상현상이 아니다. 날씨는 더 이상 인사치레의 주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기 시작한 유례없는 이 ‘열의 위력’은 문명의 총체가 그동안 쌓아올린 어마어마한 빚더미 쇼케이스의 서막이다. 하필 이 시점에 태어나 살고 있는 우리는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세대와 그 이후를 생각하면 오히려 얼마나 행운아인지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이 고통은 잠시 있다가 떠날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가면 갈수록 심해질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번 2016년 상반기는 역대 온도 기록을 모두 경신하였다. 그러니까 올해 1, 2, 3, 4, 5, 6월은 모두, 지구 역사상 있었던 모든 1, 2, 3, 4, 5, 6월보다 더운 달이었다. 미국 국립기후자료센터에 따르면 벌써 14개월 연속으로 기록경신 행진이 지속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달은 산업화 이전 평균치보다 1도 이상 높은 고온에 달할 정도로 올해 기후변화의 양상은 강력하다. 지난해 파리협약에서 도출된 목표치는 지구의 기온 상승을 2도 아래로 묶자는 것이었는데…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웠던 15년 중 14년이 2000년대에 일어났다. 참, 지금이 2016년이던가? 어떻게 봐도, 아니 안 보려고 해도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구가 위험하게, 정말로 위험하게 달궈지고 있다.

예전에는 뉴스로 들었던 것을 지금은 몸으로 느낀다. 나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전 세계가 이 순간 함께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충격이 아니다. 사실 이미 예상된 것이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충격이다.

전력수요 폭증으로 전력 예비율이 급감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누진세의 한시적 완화를 발표했다. 당장 더위와 전기세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국민에겐 반가운 소식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탄소배출 7위의 국가로서는 그야말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자세이다. 한국은 지난 20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탄소배출 증가 속도 1위의 불명예에 오른 나라이다. 다른 나라들은 탄소배출을 1인당 평균 7.2%로 줄일 때 우리는 110.8%로 늘리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

지구생태발자국네트워크라는 국제단체가 운영하는 ‘지구용량 초과의 날’이라는 것이 있다. 지구의 일 년 치 자원을 12월31일에 다 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데 실제로 소모되는 날을 측정하는 것이다. 지난해 8월13일이었던 것이 올해는 8월8일로 5일 앞당겨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은 지구가 3.3개가 필요한 수준의 생활을 하는 국가로 전체 4위에 올랐고, 면적 대비 자원 소비량은 전 세계에서 1위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에너지 사용량, 그리고 증가량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장 극심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더위 앞에서 우리는 더 늘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골드만 환경상을 받은 미카엘 크라빅 박사가 말하는 더위에 대응하는 도시 시스템의 변화와 같은 근본적인 대책에 대해서는 정부, 기업, 국민 모두 나 몰라라 한다. 빗물을 그냥 흘러 보내지 않고 도시에서 모으고 나무와 풀의 녹지대를 늘려 온도를 낮춰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는 에어컨을 어떻게 하면 더 틀까만을 골몰하고 있다. 한 나라가 이토록 ‘철면피’라는 사실이 이번 더위의 진짜 충격임을, 야생학교는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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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이 있는 날이면 난 언제나 즐거우면서도 기분이 찜찜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모임은 원래의 취지가 소외된 채 진행되다 끝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환영회라 모여도 아무도 환영하지 않고, 환송회라 모여도 아무도 환송하지 않는 자리를 보는 것이 싫었다. 물론 건배할 때 한두 마디로 왜 모였는지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누구는 고기 굽고, 누구는 술 마시고, 누구는 옆사람 하고만 떠드는 회식 자리에서 정작 모임의 근본적 목적은 쉬이 잊히는 것이었다. 잘 놀았으면 됐지 뭐, 혹자는 말한다. 너는 됐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이왕이면 나는 무엇을 왜 하는지에 충실하고 싶다.

스마트폰 게임 '포켓몬 고'

소외현상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너무나 일반적이라 제대로 인식조차 되지 않고 있다. 가령 애인이나 친구끼리 카페에서 만나 각자의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은 이제 흔한 광경이다. 이것이 만남인가? 물리적으로만 근접거리에 있되 각자 전혀 다른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도 만남으로 칠 정도로 단어의 정의를 후퇴시킨다면 더 이상 그 언어는 유용하지 않다. 사람들은 누구와 있어도, 어디를 가도, 자기 손에 쥔 검은 네모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경치의 변화, 지나치는 사람들, 건축물의 구조, 가로수의 미학 등은 이제 아예 피사체가 아니다. 그것이 검은 네모를 통해 조망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체 어떤 공간의 인테리어 자체가 왜 필요한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준에 우리는 이르렀다. 누구나 고개를 처박고 귀를 틀어막고 있는데 벽의 마감이나 조명, 음악, 실내장식 따위가 왜 중요한지. 환경디자인이나 공공디자인과 같은 분야의 존재가 무색할 지경이다.

사물의 껍데기에 눈길을 안 주는 것은 그래도 그나마 덜 심각하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본질의 소외이다. 내가 현재 있는 공간이나 사회적 상황이 경험의 중심으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는 전혀 무관한 콘텐츠가 채워지는 것이다. A를 만나면서 동시에 B와 문자하고, C와 카톡하고, D에 대응하는 것은 A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A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공원의 푸른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지나간 예능을 다시 보기 하는 것은 공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공원과 나무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말로 ‘멀티’라 부르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경험의 질적 퇴화 또는 경험의 피상화(皮相化)일 뿐이다. 결국 남는 것은 나와 검은 네모의 폐쇄회로뿐, 모든 것은 그저 통과해야 할 하나의 매트릭스, 스마트 세상이 작동하기에 필요한 기질(substrate)로 전락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고 해도 상대방은 이 말조차 듣지 못한다. 하늘과 햇빛은 그저 화면을 흐려 보이게 하는 거추장스러움일 뿐이다.

이 상황에서 쿵 하고 나타난 것이 ‘포켓몬 고’이다. 속초에 관해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없는 이들이 떼를 지어 속초로 향하고 있다. 엑스포공원에 ‘있다’는 괴물은 엄연히 화면에만 ‘있을’ 뿐인데도 그곳에 가야만 활성화되는 알고리즘 하나 때문에 정말로 ‘있다’라는 철학적인 실존을 부여받는다.

물론 어느 회사의 프로그래머들이 임의대로 정한 알고리즘이다. 그러나 게이머들에게 공간과 몬스터의 출연 간의 관계는 거의 자연의 신비에 해당되는 진리영역이다. 세상은, 이제 폰이 정하는 바에 따라 유의미 또는 무의미하다.

‘포켓몬 고’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증강현실’의 승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본질과 의미의 후퇴이다. 실록이 푸른 공원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예능만 보던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공원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세상을 차단하고 있지만 적어도 그 차단으로 인한 그와 세상 간의 관계는 정직하다. 바로 이 점에서 ‘포켓몬 고’의 사용자는 전혀 다르다. 비록 속초 땅을 밟고 있어도 그가 온 목적, 그가 보고자 하는 것, 그가 골목마다 마주하고 싶은 것의 일체는 속초와 무관하다. 그는 속초의 삼차원적 매질만을, 오직 그것만을 취하러 온 것이다.

한 공간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문화, 역사, 자연이 철저히 배제된 동기로 그 공간을 방문하는 초유의 사태인 것이다. 이보다 공간을, 아니 세상 전체를 극단적으로 대상화한 시도는 없다. 이는 성의 상품화 같은 기존 문제보다 더 진전된 심각한 대상화이다. 마치 자신의 애인을 애무할 때 상대방 육체의 물성만을 취하면서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상상으로 투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방문에 의해 매출이 오른 속초 상인들이나, 게임 때문에 들렀다가 속초도 구경하는 이도 있다는 말로 속초는 물론 공간과 경험의 본질을 모독하지 말라. 증강현실이 검은 네모의 ‘현실성’을 높이고, 그것을 투사시킨 현실을 ‘증강’시켰다고 말하지만, ‘증강’된 만큼 그 현실의 실체와 본질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도해야 한다. 오히려 증강현실로 인해 발생하는 것은 ‘소외현실’이다. 게이머들은 ‘포켓몬이 있다’라는 표시를 하염없이 찾아 서성인다. 만약 ‘있다’가 이런 것이라면, 야생학교는 차라리 ‘없고’ 싶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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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은 내게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었다. 한국에서 생태나 환경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고행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훨씬 개인적인 차원에서 겪은 고통의 나날들이었다. 지방에 사는 관계로 서울에 오면 부모님 댁에 묵으며 지내는데, 이곳은 우리 가족이 벌써 15년 이상 함께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오래 살다 보면 정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 그중에서도 나는 특별히 이 건물 앞뒤로 있는 좁은 띠의 녹지를 사랑했었다. 총 여섯 가구가 사는 일종의 빌라인 이 건물의 입구에는 소나무와 목련이 제법 울창했고, 뒤에는 상수리나무와 단풍나무 등이 다른 초목들과 함께 어우러져 내겐 각박한 도심 속 하나의 녹색 오아시스와 같았다.

집 주변에 식물이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누구나 그것을 같은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나뭇잎이 제공하는 녹색 빛도 좋지만, 그 자연이 생태적인 관계망 속에서 기능하며 존재하는 자연인지 아닌지가 내게는 더 중요하다. 우리 집 주변의 나무들은 참새, 박새, 쇠박새, 멧비둘기, 어치, 까치, 오목눈이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오고 심지어는 번식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한 번은 멧비둘기 한 쌍이 막 둥지를 틀 때쯤, 누군가 위층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사다리차를 불렀고, 이때 발생한 소음으로 새들이 번식을 포기했던 적도 있다. 어쨌든 이렇게 작은 녹지도 우거진 덕에 도시 생태계의 일원들이 믿고 찾아오는 공간이었고, 이를 집안에서 지켜보는 나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함께함이 그저 좋았다. 밤에는 풀벌레소리가 은은했고, 한 번은 귀뚜라미 한 마리가 에어컨 관을 타고 들어와 방 안에서 울며 밤잠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자연을 원망한 적은 없다. 자연과의 공존을 원한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만 하는 거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소중한 오아시스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주민 중 누군가가 건물의 균열 및 누수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원인을 나무의 뿌리로 진단한 것이다. 신속하게 반상회가 열리고 바로 이튿날 일꾼들이 들이닥쳤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고 의심되는 모든 나무는 밑동째 베어졌고, 극형을 면한 몇 그루는 목숨만 겨우 남겨두는 수준으로 잘렸다. 순식간에 휑해진 땅 위에는 지난날의 푸름을 암시하는 잔해만 흩뿌려져 있었다. 나름 주민들과 언쟁도 벌이면서 막아보려고 했지만, 안전이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나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겁이 났다. 내가 사랑하던 자연의 파괴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안전의 문제를 일으킨다면 당연히 나무도 자를 수 있다. 그것이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정확한 근거도 없이, 항변하지 못하는 자연에 문제의 원인을 무작정 덮어씌운다는 것이다. 잔혹한 범죄자에게도 적용되는 무죄추정의 원칙은 자연에 전혀 허용되지 않는 셈이다. 정확히 어떤 나무가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에 대한 요구는 비용을 들어 쉽게 묵살된다.

건물 자체의 건축학적 하자도 같은 이유로 고려되지 않는다. 형편없이 잘린 나무를 두고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새순이 나온다며 마치 자연에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은 것처럼 정당화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어떤 생태적 고려도 없다. 비전문가가 내린 ‘모 아니면 도’ 식의 결정에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지만, 안전이라는 의제를 들이대는 순간 그 어떤 세심한 고려나 대안도 내팽개쳐지는 것이다.

인간의 안전이 도마에 오르는 순간 나머지 자연의 안전은 바로 폐기처분하는 것,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그것에 대한 좋은 사례가 얼마 전에 일어난 고릴라 사건이다. 미국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한 어린이가 부모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고릴라 우리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를 구하려고 동물원 측이 17살 수컷 고릴라인 하람베를 사살한 것이다. 마취 총을 쏠 경우 동물이 바로 쓰러지지 않고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몰라 그와 같은 결정을 했다고 한다. 그보다 전에는 한 청년이 자살하겠다며 사자 우리에 뛰어들어간 것을 구하기 위해 사자 두 마리를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동물원 규율을 어기고 동물의 공간을 침범해놓고서 총알은 동물이 맞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과 자연이 그 어떤 형태로 엮이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총구를 자연에 들이대겠다는 우리의 추악한 진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신의 서식지에서 멀쩡히 살고 있다가 잡혀 와, 오락의 대상으로 다뤄지다가, 선을 넘은 몇몇 때문에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된 자연. “당신의 애였다면 어쨌겠느냐?”라고 사람들을 말한다. 나의 애라는 마음가짐을 허한다면, 동시에 고릴라도 누군가의 소중한 고릴라라는 마음가짐도 똑같이 고려해야 한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고릴라를 자극시켰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관람자들을 제지한 상태에서 마취나 교환 등을 이용한 대안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인간의 안전 앞에서는 그 어떤 대안도 불필요하고 총구나 톱을 휘두르는 것이 답이라면 그 인간은 공존의 자격이 없다고, 야생학교는 단언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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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여행을 해보면 서로를 정말로 알게 된다고 한다. 좋았던 사이가 더 돈독해질 수도 있고, 괜찮았던 관계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진 채 돌아올 수도 있다. 한마디로 여행을 통해 관계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왜일까? 아마 해답은 여행이 함께 지내는 상황을 만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동안 동고동락하며 작은 것에서부터 집단적 의사결정을 하다 보면 이게 과연 될 관계인지 얼마간의 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물론 언제나 답이 명확하지는 않다. 어떤 때는 한 사람은 만족하며 싱글벙글하는 바로 그때 다른 누군가는 다시는 이 사람과 같이 떠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고 있기도 하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경우는 보통 한쪽에서 뭔가를 삭이고 있는 케이스이다.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속병만 앓고 있는 것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자기만 손해라는 거야 알지만 천성상 내 입장을 드러내지 못하는 성격. 누구든 살면서 한두 명쯤은 만나는 캐릭터이다. 보는 쪽에서는 답답하다. 아니 그럼 진작 말을 하든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쪽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공생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살핀다는 뜻이다. 비록 상대방이 선뜻 얘기하거나 티를 내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 구도가 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맥락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 문제를 이야기할 때이다. 함께 지구를 공유하는 동식물의 불가피한 침묵을 우리는 너무 무신경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당연한 사실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에 영향을 끼칠 때, 그 자연의 반응을 우리 본위대로 판단함으로써 별 문제가 없다고 아주 용이하게 자가진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나무를 무자비하게 가지치기 해버리고도 잎이 어디서든 돋아나기만 하면 괜찮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야생동물을 잡아 열악한 환경에 가둬도 죽지만 않으면 학대가 아니고, 밥 챙겨주고 재워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는 식이다. 말 못하는 동식물들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과학이 있긴 하지만, 누구나 과학자로서 이에 밝은 것도 아니고, 그조차도 생명체의 본심을 모두 드러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자 교만이다. 점점 자연을 침범하며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는 인간이 가장 조심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자연의 마음을 넘겨짚는 일이다. 자연과 공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민감하고 소심한 자연의 성격을 섬세하고 깊이 헤아리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이런 거창한 말이 일상과 무슨 관계냐고? 다음의 간단한 일화가 이 질문에 좋은 답을 제시해주리라 믿는다. 얼마 전, 어버이날에 일어난 일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한 후 인근 공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화도 할 겸 자연 속을 거니는 것처럼 좋은 식후 코스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곳은 바닥포장과 인공조경으로 된 무늬만 공원이 아니라, 옛 지형과 식생이 상당히 남아 있어 나름의 생태계가 어엿이 있는 진짜 공원이다.

느리고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우리는 걷기를 즐기며 작은 공터에 이르렀다. 정자와 벤치 두어 개,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자리 잡고 앉아 얼마 안 있을 때였다. 어치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와 내려앉았다. 그런데 어라, 목욕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작은 물길이 졸졸 흐르는 곳에서 어치는 첨벙 들어갔다가 정자 난간으로 올라오면서 적시기와 말리기를 반복했다. 기가 막힌 볼거리였다. 조금 있자 직박구리가 이 공개 목욕시연에 동참했다. 어치가 바깥에서 털 때 직박구리는 물에 몸을 담그며 둘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자연의 삶의 드라마를 눈앞에 펼쳐주고 있었다.

감동에 젖어 있을 그때, 어느 가족이 들이닥쳤다. 새가 목욕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할머니는 손자를 번쩍 들어 새를 향해 접근했다. “짹짹이가 목욕한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할머니는 목욕현장과 가장 가까운 징검다리 돌 위까지 가서 연신 짹짹이를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나 다를까, 새는 날아가 버렸다. 드라마는 끝이 났다. 에헴. 저기요, 그렇게 가까이 가셔서 새가 목욕을 그만두고 간 겁니다. 나는 보다 못해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그러고 돌아서는데 고성이 내 등을 때렸다. 그렇게 민감하게 굴지 말라고, 너만 새 아끼는 줄 아느냐고, 무슨 소란이라도 피웠느냐고, 새는 어차피 돌아온다고, 그들은 내게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매우 언짢은 모양이었다.

물론 듣는 나도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새의 마음이다. 편안히 목욕하다 갈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는 행동이 이 여린 ‘새가슴’에 대한 배려이다. 그 정도 방해하는 것 쯤이야 괜찮다고 함부로 넘겨짚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게다가 새를 잠시 방해한 것이 괜찮다면, 나의 잔소리한마디쯤도 괜찮아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은 새가슴끼리라면 더욱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생과 공존의 출발점이라고, 야생학교는 짹짹거린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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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뭐 먹으러 갈까?” 거리를 돌아다니는 친구, 동료, 연인들이 가장 자주 내놓는 말이다. 뭘 즐기려 해도 막상 먹는 것 외에는 별다른 거리가 없어 결국 밥으로 화제가 모아지는 것이 보통이다. 단둘이 다니는 커플은 종목에 대한 의사결정 구조가 확실한 편이다. 하지만 여러 명이 참여하는 회식은 살펴야 할 눈이 많다. 연장자가 일방적으로 정하거나 그날 따라 유난히 ‘땡기는’ 메뉴를 주저 없이 외치는 사람도 없진 않으나, 한국 문화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대세’가 형성되기를 바라며 함구하는 구성원들이 많다. 이리저리 배회하다 지치고 배고파지면 적당히 무난해 보이는 곳 앞에서 누군가가 제안한다. 그냥 여기 들어갈까? 드디어 결정에 도달한 기쁨에 모두들 아무 토 달지 않고 우르르 몰려 들어간다.

최대한 여러 사람이 좋아할 만한 음식으로 수렴하고자 하는 우리네 외식문화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할 것이다. 많게는 수십명에 이르는 군단이 한꺼번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연회석을 갖춘 식당이 우리에겐 일반적이지만 서양에서는 찾기 힘들다. 인원이 많을수록 식탁의 반대쪽 끝에 위치한 사람끼리는 말 한마디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같이 한 상에서 먹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취향과 식습관은 저마다 다르지만 오늘 함께 선정한 음식이라는 공통분모로 뭉치고 잠시나마 하나가 되는 사회적 기쁨을 누리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시 문화적 비교로 돌아가자면, 커피나 술 등의 음료로 미래의 만남을 기약하는 쪽이 서양이고, “언제 밥 한번 먹자”같이 식사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다. 심지어 언제 술 한잔 하자는 말로 대체한다 해도 그 속에 그득한 안주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라는 표현이 맛에 대한 가장 극찬인 걸 보면 우리 사회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 만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함께 나가서 먹다 보면 생기는 문제가 또 있다. 모임의 집단적 의사결정과 왁자지껄 속에 묻혀버린 소신과 삶의 철학이 있다. 바로 철저하게 채식하는 사람, 유란채식을 하는 사람, 해산물까지만 먹는 사람, 고기를 먹더라도 최소화하고자 하는 사람 등 다양한 군상이 여기에 무더기로 숨어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라면 다양한 식단의 옵션이 식당에 기본적으로 구비돼 있고, 식습관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으로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웬걸, 실상은 전혀 딴판이다. 고기, 그것도 어떤 요리 속에서 일부분을 담당하는 고기가 아니라, 정말 고기 덩어리 자체만을 탐닉하는 고기. 하드코어 고기 식단의 일색이다. 이 식당, 저 식당, 옆 식당 모두 고기가 주메뉴이다 못해 외식업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채식은커녕 고기에 찌드는 것을 피해가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거의 인구수만큼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치킨집과 온갖 다양한 고깃집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보다 건강하고 친환경적인 식사를 할 최소한의 권리는 없다. 특히 여러 명이 즐기는 ‘잔치성’ 회식일수록 고기의 위력은 압도적이다. 분위기 흐리지 말고 잠자코 먹기나 할 일이다.

딴 거 시키면 되는 거 아니냐?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얘기다. 요즘은 전, 된장 또는 김치찌개, 만두, 볶음밥, 비빔밥, 빈대떡, 샐러드, 파스타 등 얼마든지 고기 없이 만들 수 있고 육류의 함유가 당연하지 않은 음식에도 대부분 고기가 들어간다. 심지어 야채김밥, 야채빵, 두부김치처럼 명확하게 채소로 된 이름의 음식마저 고기가 곁들여 나오기 일쑤다. 한마디로 ‘딴 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상추쌈만 씹어 먹는 것을 식사라고 우길 수는 없다. 채식하는 외국인을 대접하는 일은 거의 전투적 각오 또는 철저한 사전조사가 요구된다. 고깃집인지 모르고 채식 메뉴를 주문한 외국인에게 어느 식당 주인이 한 대답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고기 시키면 야채 많이 줍니다!” 지나친 육류 소비의 문제를 떠나서, 여럿이 외식을 할 때 고기를 잔뜩 먹지 않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 년 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세계 식단을 조사한 결과 지난 50년간 한국의 곡물 섭취는 절반이 줄어든 반면 육류는 6배나 증가했다.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한국 가구의 77%가 ‘외식=고기’로 여긴다고 한다. ‘고기 헤게모니’ 아래 삶의 다양성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선 채식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외국인들에게 듣곤 한다. 우리의 전통식단이 얼마나 야채를 잘 살리는지를 생각하면 통탄할 일이다. 살짝 데치는 나물무침, 시원하고 깔끔한 동치미, 온갖 종류의 두부요리, 풍부한 김치의 세계, 독특한 도토리묵, 장아찌, 무말랭이 등 무한한 반찬류, 비지찌개나 콩국수 등 헤아릴 수 없는 우리의 우수한 야채요리를 모르는 채 거리의 고깃집만 보며 이들은 발길을 돌리는 것이다. 슬기로운 채소 전문가에서 ‘고기 덕후’로 전락해버린 이 땅의 식문화에 반드시 다양성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야생학교는 외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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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고달프다. 내가 속한 사회와 내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부적응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태어나 살게 되었는데 가면 갈수록 나와 이 사회 간의 간극은 커져만 가고 있다. 그것을 매일 같이 목도하면서 생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회적인 동물인 하나의 영장류로서 어떤 그룹의 안정된 구성원으로 살고 싶은 심리는 우리의 내재된 본능이다. 동종의 개체들과 어울려 털 고르기도 하고 이도 잡아주면서 나도 이 무리의 어엿한 멤버임을 즐기는 것. 그것이 잘되지 않을 때 인간은 힘들다.

가령 고속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나는 타기 전부터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과연 얼마나 시끄러운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자리할지, 이번엔 몇 명이나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놓지 않고 연신 카톡 소리를 낼 것인지, 실내는 지나친 난방이나 냉방으로 힘들진 않을지 등등. 특히 내가 긴장하는 것은 커튼 치기이다. 햇볕받길 좋아하고 바깥 경치를 감상하고픈 나의 작은 소망은 보통 다른 승객들의 탑승 몇 초 안에 허물어진다. 어찌나 다들 태양을 그리도 싫어하는지, 빛이 비치면 잠시도 참지 못하고 당장 커튼을 닫아버린다. 마치 열대의 뙤약볕이라도 내리쬐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가리는 이 행위에 나는 정말이지 고통을 느낀다. 저 바깥세상의 풍경과 지구 생명 에너지의 근원인 태양에 대한 매몰참이 나를 비통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버스 앞쪽에 설치된 화면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에 비하면 약과이다. 어쩔 수 없이 앞을 향해 앉을 수밖에 없는 좌석배치는 고문과 같은 시청을 강요한다. 움직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개구리처럼 사람도 동물인지라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동영상에 눈길이 가게 마련이다. 방송·연예계로 대변되는 세계를 오롯이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 부적응의 핵심이다. 드라마, 토크쇼, 예능 등이 담긴 콘텐츠와 돌아가는 생리를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한 분야 전체에 대한 무모한 한 방을 날리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건 몰라도 자연을 대하는 몹시 그릇된 자세를 주된 내용으로 삼는 특정 프로그램이 있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펜이라는 칼날을 뽑아들기로 한 것이다.

버스에 앉아 억지로 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정글의 법칙>이다. 이미 전성기를 한참 넘긴 장수 프로라는 것쯤은 전혀 텔레비전을 안 보는 나도 아는 바이다. 하지만 이렇게 뒷북이라도 치지 않으면 정글에서 연구를 한 자로서의 소명을 배신하는 꼴이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글의 법칙>은 진짜 정글의 법칙과 완전히 무관하다. 오히려 정반대, 즉 이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반(反)정글’ 프로그램이다. 궁극적인 야생의 자연왕국인 정글을 감탄과 경외의 자세로 조심스레 접근하기는커녕, 시시껄렁한 게임과 가짜 서바이벌의 장으로 전락시키며 매회 정글을 유린하고 있다. 주된 관심사는 늘 ‘잡아먹을’ 거리이다. 이 프로의 제작진이 촬영지를 정할 때 유일하게 고집하는 기준으로 잡아먹을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생물다양성이 가장 우수한 천혜의 자연에서 불필요한 사냥, 채취, 훼손을 일삼으며, 하나하나가 긴 진화적 과정의 작품인 개성 어린 생물을 향해 그저 입맛만 다시는 수준의 내용으로 일관하는 이 프로는 정글을 논할 자격이 없다.

인도네시아 서부자바의 저산지대 열대우림에서 긴팔원숭이를 연구한 필자는 동물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는 과학적 연구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어려운 허가절차를 거쳤는지 모른다. 번거롭고 힘들었지만 마땅한 과정이다. 지구의 자연은 함부로 다뤄서는 안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무가치한 동물의 똥과 같은 물질조차 연구를 위해 채집 및 반출하기 위해서는 엄격하고 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만큼 어느 곳이든 자국의 자연자원은 소중한 것이다. 또한 정글은 보통 그 지역 주민의 생계와 밀접하게 관련된 곳으로, 심지어는 가난하고 헐벗어도 숲속의 생물을 함부로 취해서는 안되기에 당국과 많은 마찰이 빚어지기도 한다. 수많은 환경단체나 활동가들은 점점 사라져가는 정글 서식지와 희귀종을 구하기 위해 현장에서 땀 흘리며 개발 압력, 밀렵꾼, 그리고 무관심과 싸우고 있다. 정글은 지구의 허파이자 생명의 진원지로서 보전과 예찬의 대상이지, 연예인들의 캠핑장이나 요기거리가 아니다. ‘임자 없는’ 정글에 가서 멋대로 취해도 된다고 여기는 자세는 구닥다리 식민지사관의 연장에 불과한 사고방식이다. 자칭 ‘대장’이라는 김병만씨는 국립생태원의 명예홍보 대사로 위촉된 인사인 데도 불구하고 정글의 동물을 향해 화살을 쏘는 따위의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같은 연예인인데도 오스카 시상식에서 기후변화를 위해 싸우자고 외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이다. 지금이라도 이런 식의 정글의 법칙 따위는 치우라고, 야생학교는 요구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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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지하철 입구로 나오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고 있었다. 지면과 시선이 점점 가까워오자 왼쪽 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비둘기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무슨 볼 일이 있는지 녀석은 종종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동선은 느린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나의 궤적과 몇 초 후면 만나게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더럽고 징그럽다며 멸시당하는 불쌍한 비둘기를 놀라게 하기 싫었던 터라 나는 순간 멈칫 했다.

하지만 자동계단인지라 멈추지 못했고 비둘기와 정면충돌이 불가피한 순간이 다가왔다. 휙. 해결책은 간단했다. 마지막 순간에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비둘기는 ‘뒤로 돌아’ 동작을 신속하게 취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머쓱하게 그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양보하고 싶었는데.

하나의 공간을 두고 둘 이상의 생명체가 의도치 않게 ‘경쟁’하게 되는 이런 일은 너무도 흔해서 아예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도시에서 삶이란 서로 이리저리 피하면서 군상과 부대끼는 일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공간조차 힘들게 쟁취하고 지켜내야 하는 무엇이 된다.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겨우 서 있을 만한 한 뼘 남짓한 곳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을 안 해본 이는 없을 것이다. 우연히 같은 배를 탄 이들은 모두 각각의 자세와 점유 공간을 끝없이 미세 조정하며 도심 생태계라는 이 거대한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협조해야 한다. 우물쭈물하는 차 한 대 때문에 구간 전체가 정체되기도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공간 센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공간적 충돌을 최소화하고 우발적 공간 경쟁을 매끄럽게 해결하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구성원 각자의 민첩하고 섬세한 공간 감각이다.

비단 도심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수많은 생물이 한데 어우러져 사는 자연에서도 공간의 문제는 유효하다. 특히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열대우림에서 이 현상이 잘 나타난다. 정글의 식물들은 토양과 햇빛을 얻기 위해 끝없이 경쟁하고 그 결과로 수십미터 높이의 나무들에 의해 빽빽이 덮인 수관부가 형성된다. 나무 기둥 중간중간에는 착생식물이 어지럽게 붙어 자라 잎 사이로 새는 햇빛을 낚는다. 어쩌다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면 순식간에 생긴 정글의 구멍으로 쏟아지는 태양빛을 재료로 엄청난 식물의 생장 경주가 시작된다. 풍부한 식물들 사이에 사는 동물들도 공간에 예민하게 신경을 쓰며 밀림을 누빈다. 여기가 누군가의 영역은 아닌지 킁킁거리고, 보금자리에 딱 맞는 굴을 발견해도 일단 먼저 차지한 입주자가 없는지 조심스레 확인한다. 도시에 사는 우리처럼 야생동물들도 때로는 줄을 서기도 한다. 내가 연구를 했던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에서는 랑구르 원숭이가 맛있는 과일을 먹기 위해 먼저 나무에 들어간 긴팔원숭이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들어가곤 했다. 앞사람이 너무 오래 걸려 안절부절못하는 것까지 우리네와 닮았다.


수상(樹上)생활을 하는 긴팔원숭이는 한 마리가 앉으면 폭을 거의 다 차지하는 나뭇가지에서 일상을 보내다 보니 유달리 공간 감각이 좋다. 놀고 쉬고 털 고르면서 서로 건너뛰고 올라가고 넘어가고 하는 게 가관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좁은 공간에서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 보인다. 위로 넘어가도록 살짝 숙여주고, 지나가도록 옆으로 몸을 바짝 붙인다. 동물들에게도 공간 센스는 삶의 일부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공간은 점점 더 희귀한 자원이 되어가고 있다. 그럴수록 공간 센스는 더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의 출현이 도심 생태계에 정체와 혼란을 빚고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이어폰으로 틀어막은 귀와 화면에 고정된 눈, 현대인의 감각기관은 더 이상 열려 있지 않다. 앞뒤 좌우 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전혀 살피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공간의 부족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말의 동작도 하지 않는다. 걸을 때조차 눈을 뗄 수 없는 스마트폰 때문에 진행은 느리고 바쁜 사람은 뒤에서 발을 구른다. 내가 내 전화기 보겠다는데 무슨 죄인가? 혹자는 반문한다. 공간 센스를 발휘하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죄이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밀집된 곳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개인 각자의 미세한 공간 조정이라는 현대인의 의무를 내팽개치는 격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속으로 나의 감각기관을 폐쇄시킨다는 것은, 공공장소에서 거동이 불편한 자, 짐을 많이 든 사람, 시간이 부족한 누군가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도 같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물리적 실체를 갖는 것이며 공간을 점유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점유는 일시적이며 잠시의 차지에 대한 겸손한 자세와 긴밀한 협력 의지가 없는 이상 공간은 서식지가 아닌 격전지로 전락된다. 단순히 모여 있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함께 살기 위한 기본적 덕목인 공간 센스, 야생학교는 권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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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그랬는데요.

학창시절에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뭔가를 잘못하다가 걸려서 선생님께 불려 나갈 때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던 변명이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의 옵션이 많지는 않다. 대충 둘러대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핵심 내용은 몰라서였다는 것이 된다. 만약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조금이라도 알면서 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간 큰일이다. 그것만큼 뻔뻔스럽고 반항적이고 틀려먹은 자세가 또 있을까! 가장 강력한 처벌을 받는 지름길일 뿐이다. 반드시 무지한 상태에서 저지른 것이어야만 좀 혼나더라도 넘어갈 수가 있다. 몰랐다고? 그래, 그럼 다음부터 잘해. 가봐.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잘못을 자랑이라도 하듯 너무 당당한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실은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낫다. 설사 안 좋은 일이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오히려 개선의 씨앗이 된다. 적어도 판단력은 똑바로 박혀 있으니 다음에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지함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너무 용인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일을 엉망으로 해놓고서도 무엇을 저질렀는지 보려고 하지도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뿐이다.

특히 그것이 나라 전체를 움직이는 국가 수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가령 수 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도로명 주소 사업은 우리의 주소 체계를 뒤바꾸어 놨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동(洞)’이 없어지고 대신 도로명이 생겨난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동과 도로는 전혀 위상이 달라, 동이 제거된 신(新)주소에는 정작 필요로 하는 지리정보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도로명은 극히 자세한 수준에서 길 찾기에는 도움을 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로 의사소통하는 지리적 단위는 도로보다 더 넓은 공간적 범위를 가리킨다. 어디 사느냐고 물었을 때 ‘구(區)’라고 답하기는 너무 넓고, 도로명을 말하기에는 너무 자세하다. 그 중간의 단위인 동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 지리적 ‘해상도’에 해당되는 지리적 단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소체계가 바뀐 후에도 동은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단순히 옛 주소를 고집해서가 아니다. 게다가 동(洞)은 한자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수원(水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나타내는 생태학적 유역 개념이 반영된 말이다.



동네 이름의 사회문화적 탄생과정을 무시하고 몇몇의 실무자들이 자의적으로 지은 새 도로명보다 훨씬 의미가 있다 하겠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주소는 가장 자주 쓰이는 단위만 달랑 빠진 채 주소의 사회문화적 체제와 합치되지 못한 상태로 둘 다 어정쩡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러고도 정부는 이를 어엿한 사업이라 부르며 뭔가를 했다고 여기고 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지조차 못한다.

지난해 말 파리 기후변화총회에서 우리 정부는 배출전망치 대비 온실가스 감축을 37% 선으로 정한 공약을 제출하였다. 이는 제출 전 30% 이하로 얘기되었던 것보다는 높은 편이었지만 네 개의 연구기관이 모여 만든 국제 기후분석 사이트인 ‘Climate Action Tracker(CAT)’는 이에 대해 ‘부적절(inadequate)’ 판정을 내렸다. 만약 다른 국가들도 한국 감축안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행동한다면 지구 기온을 2100년에 3~4도 상승시키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 온도상승이면 이미 지구는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다. 이미 CAT는 최종안 이전에 제시된 안 네 가지 모두에 대해서도 같은 등급을 내린 바 있다. 게다가 이 부적절한 최종 감축안마저 법적 강제력에 의한 실질적인 국내 배출량 감축보다 국제탄소시장의 거래를 통한 감축에 큰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국내 탄소 배출량을 2030년까지 두 배(1990년 대비) 증가시키는 것이 된다고 한다.

한 마디로 한국이 내놓은 감축안은 국제사회의 목표치인 섭씨 2도 이내 온도상승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의 새 수장으로 선출된 이회성 의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고립된 나라도 아닌데 책임 있는 사람조차도 기후변화체제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세계에서 현재 일곱번째로 많은 탄소배출량으로 기후변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나라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북극의 기온 상승에 따라 극지방의 찬 소용돌이 기류인 ‘폴라 보텍스(Polar vortex)’가 느려지면서 최강 한파를 맞아 고생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에도 “몰라서 그랬다”는 식의 무책임한 변명을 둘러댈 것인가.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데이터의 왕국을 자처하는 이 나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야생학교는 흔든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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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끝을 향하고 있다. 한 해 동안 펼쳐졌던 세상사의 드라마들은 각각의 줄거리를 모두 전개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부산함과 복잡함, 욕망과 긴장으로 줄곧 들떴던 이곳의 공기에 모처럼 차분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왁자지껄 연말 모임들은 떠들썩하게 밤을 밝히지만 송년의 행위가 끝난 이들의 이완된 눈동자와 어깨에는 고단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지금은 마지막을 기리는 축제 기간이다. 새 일일랑 벌이지 말고 옛일을 봉합하는 데 집중하는 시간이다. 끝을 응시하라. 여기까지 무사히 도달한 여정을 돌아보라. 생존에 안도하고 완주의 기쁨에 동참하라. 계절이 바뀌고 명절도 지나 정녕 새로운 시점이 도래할 때까지 숨고르며 이 말미의 평온함을 음미하라. 한 해가, 다사다난의 또 하나의 덩어리가, 막 떠나고 있다.

바깥 세계는 조용하다. 열두 달이라는 단위체계와 무관한 자연은 이 임의적인 시작과 끝에 반응하지 않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간의 세월을 돌아보는 것도 없다. 그저 어제처럼 오늘을, 운이 좋다면 내일을 살아갈 뿐이다. 신경 써야 할 것은 추워지는 날씨와 그에 따른 대책이다. 동면을 위해 피하지방은 충분히 비축했는지. 겨울깃으로 제대로 털갈이를 했는지. 아무래도 이제 먹이가 부족할 텐데 이 동네에서 과연 식량조달이 잘 될지. 그런데 가만 있자. 생각보다 날이 춥지 않네? 그러고 보니 벌써 몇 년째 이랬던 것 같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 자연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다.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 인간 세상의 시시콜콜함과 호들갑으로부터 한때 고귀하게 동떨어져 있었지만, 어느덧 저 직립 영장류 집단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자연.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저쪽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쪽에 대단한 영향을 준단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단다. 우리 모두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이란다.

생각해보면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일이다. 전 세계가 지구를 살리기 위해 모여 ‘지구 회의’를 열고, 어떻게 살릴지 힘을 합치기로 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제협력이나 지역발전 등을 주제로 한 그런 재미없는 회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지구를 함께 구하기로 결정한 엄청난 사건이란 말이다! 파리 기후변화협정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 즉 196개국이 전부 참여해서 도출해낸 인류의 결정이다. 그것도 담당 외교관 수준이 아닌,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급의 나라 지도자들이 직접 나선 사상 최대 규모의 세계 모임인 것이다. 국제정세에 무관심한 자, 또 하나의 무슨 총회일 뿐이겠지 하는 이, 기후변화라면 이제 식상한 사람,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하시는 분. 모두 이번만큼은 달리 봐야 한다. 처음으로 모든 국가가 의무를 지닌다. 잘사는 몇몇 선진국이 알아서 하고 우리는 하던 대로 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부유한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이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기로 한 초유의 합의다. 게다가 그냥 말로만이 아니다. 법적 구속력을 지닌 결정이다. 앞으로 5년마다 당사국들이 각자의 감축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도 확인한다. 목표치도 과감해졌다. 당초에 배출기준으로 잡았던 산업화 이전 시기 기준 섭씨 2도 상승에서 그 폭을 1.5도로 낮추었다. 좀 더 제대로 줄여보겠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이제는 진짜라는 의지가 반영된, 세계 역사상 최고의 외교적 쾌거가 일어난 것이다. 기후변화협정이 타결된 12월12일은 이제부터 우리의 새로운 희망의 12·12 사태이다.



더 이상의 외면은 있을 수 없다. 우리 일이 아닌 척은 지금 당장 끝내야 한다. 아무리 우리의 청년실업과 국가경제 저성장이 걱정스러워도 그건 우리 사정이다. 그 정도 사정 없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 나라들의 절대다수는 우리보다 훨씬 빈곤하다. 우리보다 어렵게 사는 대부분의 세상을 향해 ‘먹고살기’ 힘들다는 변명을 늘어놓는 파렴치함일랑 집어치워야 한다. 뭐가 어찌 됐든 한국은 경제규모 세계 14위, 탄소배출량은 무려 7위에 달한다. 이렇게 작은 나라가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최고성적 4위를 기록한 것을 그리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 작은 덩치가 배출하고 있는 압도적인 양의 탄소에 함구해서는 안된다. 이 태도는 이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상황은, 말하자면 1997년의 금모으기 운동에서 발휘되었던 전 국민적 노력의 최소한 수십배가 요구되는 시급한 수준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과 국토, 공장과 사무실, 정책과 제도에는 금모으기 노력의 채 100분의 1도 나타나지 않는다.

한 해의 끝자락이 지평선에 걸려 있다. 처음으로 전 세계가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전부 승자거나 전부 패자가 되는 최초의 싸움이다. 서로 싸워서 차지할 땅이나 자원도 아니요, 지켜야 할 국가나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삶과 역사 자체가 역설적으로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초유의 사태이다. 그리고 모든 개인과 모든 집단에 예외없이 역할이 주어지는 역사적 사명의 시간이다. 과거의 습관과 관성은 올해의 남은 하루까지만 그 잔재를 허락하자. 다음날은, 새로운 한 해라는 인위적 단위의 시작은, 진정으로 새 세상을 만들 때에만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실천과 기여의 새해 각오를, 야생학교는 품는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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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겨울이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아직 늦가을이라고 우길 거리가 약간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애매함이 사라진 명백한 겨울이다. 두꺼운 옷가지로 둘러 싸맨 사람들의 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들려온다. “왜 이렇게 추워?” 추위이든, 더위이든 날씨에 대한 반응은 ‘왜’로 시작되는 의문문이다. 이것은 우리 언어문화의 독특한 면 중 하나이다. 영어로는 좀 강조를 한다고 해도 “It’s so cold!” 정도이지, 왜라고 하늘에다 다그치지는 않는다. 모든 국민이 마치 대기과학에 비상한 관심이라도 있는 듯 기상현상의 원인을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 질문에 답을 구하는 이도, 진짜 질문의 의도를 가지고 내뱉는 이도 없다. 하지만 우리말의 이 버릇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정색하고 ‘왜’를 더 강하게 외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이토록 멀리 와버렸을까? 왜라는 의문사를 적용하고픈 궁극의 질문은 이것이다. 자연 자체로부터 하염없이 멀어졌음은 물론 삶의 모든 구성요소가 자연으로부터 급속히 이탈하고 있다. 네모난 아파트와 사무실을 오가며 눈은 스마트폰 화면에, 귀는 이어폰에 온종일 박힌 무수한 삶이 회색 도시를 배회한다. 엄청난 세기의 냉방이 바로 다음날 엄청난 세기의 난방으로 전환되는 도시의 수많은 공간은 모공마저 다 보일 만큼 밝은 조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난도질에 가까운 가지치기를 당한 가로수 위로는 거대한 간판들이 휘황찬란하다.

포장된 바닥에 간이 헬스장을 둔 곳을 공원이라 부르고, 자연이 차지한 모든 곳을 노는 땅이라 칭한다. 애꿎은 비둘기를 향한 비명이 진동하는 거리에는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만들어진 모피들이 즐비하다. 손님이 떠난 식탁은 잔반으로 가득하고, 종이컵 더미가 카페를 떠나지도 않고 수북이 쌓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줄기만큼 비닐 우산이 소비되고, 등산과 야영은 그저 장소를 옮긴 고기판, 술판이다.

법의 보호를 받던 강산은 하루아침에 해제조치되어 개발되고, 지역주민이 자기 고장 갈아엎기에 앞장선다. 자연을 갖고 놀고 소비하고 유린하는 TV 프로그램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모든 지역축제는 ‘축제’라는 단어 앞에 붙은 대상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행사일 뿐이다. 내 몸만 생각하는 소비자는 친환경 제품에는 무관심하며, 나라의 대표기업조차 지속가능한 경영에 투자하지 않는다. 빙산의 일각이다. 목록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멀리, 참으로 멀리 와버렸다.


나라가 자연을 등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연을 등지기 때문이다. 전원 풍경을 머금으며 자란 세대는 줄고 있고, 클릭과 터치로 사는 세대는 늘고 있다. 논두렁과 골목을 탐방하며 자라던 자가, 화면과 게임에 오감을 바치며 성장하고 있다. 자연은 낯설고 불결하고 불편할 뿐인 이들이 대다수인 세상을 향해, 우리 사회는 끈 놓친 풍선처럼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래서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의 저자 리처드 루브는 환경파괴보다 훨씬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아이-자연 연결고리의 파괴를 경고한다. 이를 일컬어 자연결핍장애라고 진단하는 이 용어의 장애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그렇다. 자연과의 단절은 하나의 장애이다.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이 근본적 장애로 인해 언젠가 우리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때가 올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칼럼니스트 조지 몽비오의 말처럼 “자연과의 연결 끈을 잃은 아이들은 결국 자연을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덮고서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지만 좀 뛰고 싶었다. 번민을 좀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쓰레기 더미 중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아기 고양이이다. 가까이 가자 털을 파르르 세우고 침을 뱉는다. 경계행동이다. 순간 차량 한 대가 고양이 앞을 간신히 지나간다. 저러다 죽겠구나. 하지만 저렇게 사납게 구는데 도와줄 수가 없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곧 닥쳐올 죽음의 암운이 이 싸늘한 길 위에 깔리는 듯했다. 탁탁 발소리 허연 입김. 부스럭 소리에 흠칫 놀란다. 너구리 한 마리가 잠깐 나왔다가 덤불로 뛰어든다. 저 녀석은 과연 괜찮을까. 수세에 몰린 자연을 둘러싼 상념으로 나의 어스름녘 조깅심리는 그리 편안하지가 않다.

길은 둘러 둘러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녀석이 무참히 깔려 식어가는 걸 보게 될 것인가. 휴우. 그때 기둥 너머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야옹아 이리 와! 거기 있으면 다쳐!” 남학생 두 명이 어디선가 박스를 구해 고양이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주저하던 고양이는 상자 안으로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맺힌 눈물에 야경이 아른거렸다. 나는 그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어린 고양이를 구해줘서. 그리고 나의 희망을 구해줘서.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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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휴가를 맞이해서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 그 여정 속에서 나는 자리 앞에 비치된 잡지를 하나 펴든다. 이국적인 꿈의 행선지가 소개된 기사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언젠가 나도 저곳에 가보겠지 야무진 다짐을 해보기도 한다. 광고조차 탐독하며 음미하지만, 한 가지에서 늘 눈살이 찌푸려진다. 뭔고 하니, 한국에 대한 글이나 사진의 비현실성을 마주했을 때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여유와 풍류가 넘치는 문화와 사회, 전통과 현대의 자연스러운 조화, 잘 보존된 태곳적 자연 등등. 이건 현재 내 나라의 얘기가 아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대표성을 지닌 묘사는 분명히 아니다. 굳이 추한 면을 내세울 것도 없지만, 줄기차게 우리의 극히 일부분이나 과거만을 추려서 선전할 노릇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내 잡지를 덮고 만다.

휴우. 우리는 누군가. 오늘날 한국이라는 실체를 구성하는 우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나는 자문해본다. 어차피 도착하려면 시간도 한참 남았고 특별히 할 일도 없다. 세 가지 특징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첫 번째는 미래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보다 미래가 중요한 사람들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인생의 모든 시기는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잘 쓰였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고등학교는 대학교를 위해 완전히 복속되는 기간이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고등학생으로서의 ‘생활’이란 없다. 대학의 준비단계로서만 정의될 뿐이다. 대학은 잠시 ‘대학생활’이라는 시기를 갖지만, 곧 취직을 위해 헌납된다. 어렵사리 취직에 성공해도 현재를 즐길 여유는 없다. 승진하려면 지금 더 성과를 내야 하고 또 다가올 결혼 준비에 오늘 박차를 가해야 한다. 결혼 후에는 출산, 출산 후에는 교육, 교육의 두 번째 바퀴가 시작된다. 그리고 노후. 자동차나 부동산을 살 때에도 나중에 팔 때의 가치가 구매결정에 1순위 기준으로 작용한다. 미래의 그림자가 너무 큰 나머지 현재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압도적인 미래의 나라.

두 번째는 연결이다. 예부터도 사돈의 팔촌까지 일일이 촌수를 세어가며 사람들 간의 연결과 관계에 유난히 민감했던 우리이다. 평균 3.6명을 거치면 모두가 아는 사이라는 우리는 오래된 혈연, 지연, 학연의 관습과 더불어 지금은 통신망에 대한 열성과 집착이 우리 사회의 연결망을 더욱 촘촘하고 세게 조이고 있다. 모든 국민은 자신의 통신 단말기에 고개를 처박고 하루를 보내며, 차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인터넷 콘텐츠를 매일 산소처럼 소비하며 산다. 연인들은 상호 간의 연결 상태를 아예 끊는 법이 없이 깨어 있는 시간은 거의 모두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는다. 안테나나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에 들어서면 마치 공기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듯한 공포와 불안감에 떨며 모두들 어머니 품과 같은 전파신호를 찾는 데 여념이 없다. 해외로 나갈 때에도 로밍이나 데이터는 필수이고, 어디서 뭘 하든 그 활동은 페이스북에 올려야 완성된다. 물 샐 틈 없는 연결의 나라.



세 번째는 변화이다. 한국에서 나오는 광고의 절대다수는 “아직도 ○○을 하고 계십니까?”로 소비자를 훈계, 설득, 협박한다. 멀쩡히 사용하고 있던 물건이나 서비스라 하더라도 가만히 옛것에 머물러 있다면 이미 구시대적인 것이다. 국가의 슬로건인 ‘다이내믹 코리아’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상점과 건물은 생겨졌다 없어졌다 하고, 공사에 시달리지 않는 동네가 없다. 다시 뜯고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성미에 안 차는지, 얼굴이나 몸매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유행의 엄청난 진행 속도는 웬만한 대상, 표현, 양식을 금세 구닥다리로 만들어버리고 다음 타깃으로 옮긴다. “한창 떠들썩하더니 이젠 쑥 들어갔네!”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변화의 쳇바퀴 속에서 모두가 달리고 있다. 몰아치는 변화의 나라.

공교롭게도 지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이다.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처한 지구를 구하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덕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오늘을 벗어나 후손들에게 물려줄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나와 인간은 자연과 생태계의 커다란 그물망에 모두 연결된 상호 의존적인 신세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수습 불가능해지기 전에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전 세계의 지구와 환경을 걱정하는 모든 활동가와 단체는 이 세 가지를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우리가 지구를 구하는 데 제격인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니다. 미래와 연결과 변화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우리인데, 유독 지구와 환경을 위해서는 입 딱 씻고 이 세 가지 특징을 전혀 발휘하지 않는다. 사상 최악의 중부지방 가뭄으로 주요 용수원인 보령댐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충남의 8지역이 절수에 들어갔지만 지하수를 끌어 쓸 생각만 했지, 근본적인 원인인 기후변화에는 여전히 나 몰라라 한다. 정말 눈을 감고 그냥 이대로 갈 것인가, 경제라는 핑계로 근본적인 무(無)대응을 합리화할 것인가. 야생학교는 심려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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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과 계통의 대학원을 다니던 동생이 자주 늘어놓던 푸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 중 하나는 고가(高價)의 분석 장비가 잘 돌아가는지 살피는 일이었는데, 그저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두 가지 기본적인 단추를 조작하거나 계기판을 보면서 혹시 문제가 일어나면 전문 기사에게 연락을 돌리는 일 정도였다. 보통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 때문에 그야말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딘가에 불이 켜지면, 무의미한 존재로서의 오랜 침묵을 깨고 기계를 돌보는 역할을 잠시 발휘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 어떤 능력이나 기술과 무관한, 그저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역할일 뿐이었다.

내 동생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기분을 잘 안다. 너무나도 단순한 노동을 하는 그 지루함과 무료함과 비참함. 나 대신 기계를 쓰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상황을 인지하며 변화를 지각하는 생물이기에 그에 따른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그 어떤 정교한 첨단기계도 능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의 발전과 생산비용의 감소로 나는 언젠가 기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일들이 자동화됨으로써 일자리가 사라지기도 한 세상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는 생물만이 가진 인지 및 판단능력이 요긴하게 쓰이는 곳으로, 비록 그 생물한테는 지극히 단순한 일일지라도 기계에 맡기기엔 어렵거나, 부적절하거나, 못 미더운 일들에는 사람이 배치되고 있다. 하다못해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렇더라도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에겐 고욕이다. 자신이 생명으로서 보유한 감각기관의 섬세함과 민감함은 이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의미 있고 보람된 일에 이 나의 생리기능들이 동원될 수만 있다면!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생물의 오장육부는 불만족에 꿈틀거린다. 멍하니 계기판을 바라보거나, 무슨 스위치를 내렸다 올렸다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지 않은가.


진도개로 유명한 진도. 그래서인지 진도에는 개가 많다._경향DB



그래서 그저 성능 좋은 기계 수준의 노동력으로 취급받을 때 인간은 심히 괴롭다. 자동응답시스템 대신에 전화 받는 일만 맡은 자가 미치겠다는 이유는 일이 반복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의 기본적인 ‘생체작용’이 노동으로써 착취당하고, 나의 존재가 나의 ‘생리’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귀가 있으니 전화벨을 듣고, 손이 있으니 수화기를 들고, 입이 있으니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게 죄인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는 인간만이 아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동식물들이 자신의 평생을 바쳐 인간에게 서비스하다가 이 세상을 떠났고 또 떠나고 있다. 모든 생물은 어차피 누군가의 먹이다. 물론 어떻게 먹이가 되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여기서의 문제는 갈 때 가더라도, 그들의 원초적인 생리가 착취의 대상이 되고, 더 살려면 살수록 더 착취된다는 데에 있다.

가령 집 앞에 줄로 묶어놓은 개는 개의 본성 때문에 외부로부터 접근하는 모든 ‘낌새’를 향해 짖는다. 개의 기본적인 생리인 이 경계행동이 집을 침입자로부터 지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경보기능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감각이 더 살아있는 개일수록 더 잘 짖고 따라서 더 잘 지킨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그 개의 줄은 풀어지지도 길어지지도 않는다.

식구의 한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어딘가에 묶여 길러지는 모든 개는 자신의 생명활동 자체가 경보시스템으로서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좁은 새장에 가둔 새는 노래기능을, 열악한 수조 안에 갇힌 물고기는 관상기능을 착취당하고 있다. 할 게 아무것도 없는 새장 속 카나리아는 열심히 울어보기라도 한다. 그러나 울기 때문에 새장의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행해지는 가마우지 낚시는 생리적 착취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사례이다. 고기잡이 귀신인 가마우지는 신나게 물속으로 뛰어들어 먹잇감을 잡지만, 이상하게 삼킬 수가 없다. 주인이 목을 줄로 조여놨기 때문이다. 꿀꺽하지 못한 물고기는 고스란히 주인의 바구니에 쌓이지만 바보 같은 가마우지는 이 짓을 반복해서 할 뿐이다. 자신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이 낯선 현대사회에서도 생리적 착취는 매일, 대규모로 자행된다. 횟집 앞 수조에는 온갖 종류의 생선, 갑각류, 연체동물이 물건처럼 포개져 있다. 왜 죽이지 않고 저렇게 두는가? 바로 그들의 목숨이 그들의 유통수단이기 때문이다. 싱싱함이 생명인 해산물은 가까스로 숨이 붙어 있도록 두면 죽어서 썩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물고기와 오징어와 대게의 호흡활동 자체가 저장기능으로서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진나라 때 차윤이 비단주머니에 수십마리의 반딧불을 모아 그 빛으로 글을 읽었다 하여 그 고생과 보람을 가리켜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반딧불들 역시 발광(發光)기능이 착취된 것 아닌가? 그래도 그 시절에는 자유로운 반딧불이라도 많았으리라. 아니 글을 다 읽은 다음 다 풀어줬을 거야. 야생학교는 믿고 싶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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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사는 집 앞에는 작은 녹지가 하나 있다. 제대로 된 마당이라고 할 수는 없는, 몇 그루의 나무와 관목으로 꾸며진 얇은 녹색 띠에 불과하다. 조경업자들이 인공적인 시각과 방법으로 조성한 녹지가 다 그렇듯, 이렇다 할 생물이 발붙이고 살 만한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이들이 있고, 그중에서도 내가 애타게 기다리는 방문자가 있다.

바로 둥지를 틀러 오는 새들이다. 오목눈이들은 그저 놀다 가기만 하고, 어치 한 쌍이 집을 보러 왔다가 마음에 썩 안 차는지 연락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멧비둘기 부부가 찾아왔다. 거실 창문 바로 앞 나무에서 조류 새댁의 움직임이 점점 부산해지더니, 며칠 후에는 둥지의 기틀 같은 것이 나무 깊숙한 곳에 만들어졌다. 새들이 이사를 온 것이었다! 나는 새들의 마음이 바뀔세라 창문 주변에 함부로 다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위층으로 이사를 왔다. 사다리차가 오더니 나무 사이를 벌려놓고 기계음을 내며 가구를 날랐다. 멧비둘기 신혼집이 있는 바로 그 나무를 건든 것은 아니었다. 짐 운반도 하루 안에 마무리되었다.

몇 그루 건너서 벌어지는 몇 시간의 작업이었음에도, 그날 새들은 떠났다. 둥지를 버린 채.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도시 조류인 멧비둘기조차 그해의 번식을 포기할 만큼 사다리차의 왕복운동은 불편했던 것이다. 사람이 이사온 날이 바로 동물이 이사를 간 날이었다.

자연은 죽더라도 천천히 죽는다. 개발이 닥친 숲에 갑자기 사체가 나뒹구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점점 좁은 면적에 몰리게 되고, 번식률이 떨어지면서 개체군이 서서히 감소한다. 여기에 질병이나 자연재해 등의 우연적 사고가 발생하고, 서식지 부족으로 다 자란 개체들이 독립을 하지 못해 경쟁이 치열해진다. 영양 섭취 활동이 어려워지고 그럴수록 번식은 뒷전으로 밀린다. 개체군은 더욱 줄어든다. 어느새 동종(同種)을 만나기가 어려워진다. 외로운 이들이 터덜터덜 걷다가 하나둘 픽픽 쓰러진다. 마지막 개체마저. 멸종이 찾아온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국립공원에 한 번도 허가되지 않았던 케이블카를, 이 땅의 가장 깊은 산 중 하나에 세우도록 승인되었다는 비보(悲報)가 울려퍼진 8월28일은 역사에 남을 생태적 국치일이다. 차라리 외세에 의해 우리의 것을 침탈당했을 때는 슬퍼할 자격이라도 있다. 스스로 천연보호구역,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국립공원,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백두대간보호지역 등 5개씩이나 보호구역으로 지정해놓고서 뒤엎은 자가 무슨 낯으로 눈물을 흘리겠나. 그저 한없이 치욕적일 뿐이다.

산양에게 붙인 멸종위기야생동물 1급이라는 초라한 딱지는 어린이나 외국인이 보면 어쩌나 두렵고 수치스러운 우리의 추한 민낯이다. 이미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산양 서식지의 심장부에 쳐들어가는 바로 그 결정을 내리면서, 그 조건으로 “산양 문제 추가 조사 및 멸종위기종 보호대책 수립”을 내세우는 자기모순이 부끄러운 줄 모르는 뻔뻔함. 행동권역이 0.88㎢에 불과한 설악산 산양에게 이동통로와 서식지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무식하고 폭력적인 억지. 거기에다 지리산과 함양군 등 10여곳에서 추진하는 케이블카 사업의 물꼬를 터준 국립공원위원회. 이번 결정에 찬성, 유보 및 기권 표를 던진 위원회 소속 17인은 이 땅의 생명과 생태 역사의 반역자들이다.

설악산 케이블카 논란은 개발과 보전 간의 대립 이슈가 아니다. 국토의 5~6%에 불과한 국립공원은 다른 데는 지지고 볶더라도 여기만큼은 자연에 맡겨두기로 우리가 결정한 공간이다. 겨우 벼룩의 간을 떼어주고도, 이젠 그것마저 손대겠다는 것은 넘지 말아야 하는 마지막 선을 넘는 행위요, 반(反)생명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히는 행위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케이블카 설치가 노인 및 장애인 등 교통약자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오류이다. 그들보다 훨씬 약자인, 단순히 교통이 문제가 아닌 생존 차원의 약자인 동식물의 권리가 우선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국립공원이다. 게다가 ‘인간의 볼 권리’라는 미명하에 자연의 희생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는 바로 동물원의 기초 논리와 일치한다. 누구나 아프리카에 갈 수 없기에 기린과 사자를 잡아와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에는 통했는지 모르지만, 세계 최초로 동물원 없는 국가가 탄생하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는 이미 폐기된 논리다.

설악산 개발 문제는 양양군 주민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오류이다. 산양, 담비, 삵, 하늘다람쥐 등 진짜 설악산 주민, 설악산 본인보다 중요한 당사자는 없다. 또한 설악산 국립공원은 한 지자체의 관할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는 물론 세계의 유산이다. 자신의 영토 내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문화재를 깨부숴 팔아먹는 이슬람국가(IS)의 만행을 국제사회가 입을 모아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화가 정선이 오늘날 다시 태어나 산수화를 그린다면 능선에 케이블카를 덧칠해야 할 판이다. 허망하고, 부끄럽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야생학교는 흐느낀다.


김산하 | 야생학교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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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이 젊음으로 넘실거린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산과 계곡과 바다에 모습을 드러낸 젊은이들이 유독 눈에 띈다. 건강한 신체, 지치지 않는 에너지, 넘치는 기상. 뭣이 그리도 즐거운지 자기들끼리 뒹굴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특히 부모님 슬하를 벗어나 어엿한 성인으로서 친구끼리 여행 온 20대 대학생들의 자유로움은 청춘을 몸으로 보여준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나도 한때는 저랬지. 좋을 때다. 이렇게 사람 구경하며 과거를 반추해보는 것도 피서의 한 가지 맛. 어느덧 상념은 추억 속을 거닐고 있다.

가만 있자. 맞아 그랬지. 히히히. 하지만 그 시절이라 해도 모두 좋은 기억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힘들었던 때도 많다. 학기말 시험공부, 취직과 결혼 걱정, 산더미 같던 리포트…. 참, 이제는 그런 거 다 벗어나서 다행이다. 안도의 미소를 지어본다.

하지만 정녕 모두 벗어난 것일까? 웬만한 통과의례는 다 해치웠는지 몰라도 한 가지는 끝까지 따라와 절대로 떨쳐버릴 수 없다. 뭔고 하니 바로 리포트이다. 어디서 뭘 하든, 기안이나 보고서 등 과거 리포트에 준하는 각종 문서 작성의 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분야는 달라도 결국 활자화된 문서로 의사소통하며 업무를 진행하는 것만은 모두 마찬가지가 아닌가. 글로 의미를 확정하고 전달하는 행위는 시간을 초월한 가장 본질적 행위 중 하나이다.

그래서 대학생 때 리포트를 쓰며 연마했던 각종 기술은 평생 쓰인다. 온갖 테크닉이 있겠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말이 되는 말을 쓰는 것이다. 방금 타자 친 그 문장을 읽고 나서 그것이 비문인지 아닌지, 시제와 앞뒤 호응은 맞는지, 따지고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미의 측면에서 문장의 기초 논리가 성립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는 면적이 작아서 공간이 여유롭다”와 같은 문장을 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기계적인 오류는 없어 보이는 문장이라도 의미론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면 논리를 구성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한다.

직관적으로 말이 안되는 문장을 굳이 삽입하려 한다면, 그것은 별도의 설명 또는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 명확하고, 당연하고, 근본적인 규칙이다. 그리고 이 규칙은 모든 종류의 글쓰기와 말하기에서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생태 및 환경 분야에 관한 발언이나 기사를 보면 이런 기본조차 대단히 심각하게 위배한 사례들이 즐비하다. 말 못하는 자연이 관련되어서 함부로 대하는 것일까? 그저 실수로 보아 넘기기엔 그 의도마저 불순하게 느껴져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가령 7월9일 기사에, ‘정부가 메르스 사태로 인한 외국인 관광객 감소 대책의 하나로 전국 산 70% 정상에 골프장과 호텔, 레스토랑 등을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했다. 전염병에 의한 감소라며? 그렇다면 당연히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 그 사태에 대한 대책이 아닌가? 어엿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산을 깎아 골프장을 짓게 한다는 문장의 뒷부분은 앞부분에 의해 조금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같은 기사 말미에 ‘기획재정부는 인구감소로 사람들이 산에 많이 가지 않으면서 산길이 사라지는 등 산이 되레 황폐해져 사람이 많이 찾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산길이 없어지는 것이 산의 황폐화라니! 이것은 마치 머리숱이 적어지는 것을 머리의 황폐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연이 울창해지는 현상을 황폐화로 본다면 출입이 금지된 보호림이나 복원사업 따위는 다 뭐란 말인가? 이런 논리에 따르면 비무장지대(DMZ)야말로 가장 황폐화된 곳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 민둥산이 안 보이면 혀를 차야 할 지경이다.

비슷한 사례를 찾는 것은 쉽다. 주남저수지의 일부인 산남저수지에 30억원을 들여 낚시터를 만든다는 계획을 다룬 7월10일 기사에서는 창원시 관계자가 ‘산남저수지에는 오리 몇 마리 있고, 두루미 이런 게 안 옵니다. 서로 윈윈하고 살아야 되죠’라고 하고 있다. 안 그래도 급속도로 감소하고 있는 서식지가 바로 습지다.

국제 습지협약인 람사르협약에 엄연히 등재된 주남저수지와 완전히 한몸인 저수지. 생물이 별로 살고 있지 않다는 말도 물론 사실이 아니지만, 마치 ‘오리 몇 마리’는 고려의 대상도 아니라는 뉘앙스. 게다가 자연서식지에 대한 개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윈윈이라는 해괴망측한 표현의 사용. 이런 발언을 한 사람은 졸업장을 모조리 압수하고 학교를 처음부터 다시 다니게 해야 한다. 자신의 터전에 수백개의 낚시 바늘이 들어오는데, 약간이라도 새에게 ‘윈’인 상황은 없다.

지면의 부족으로 예를 끝도 없이 들 순 없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을 여기에 포함하지 않고서는 이 컬렉션이 완성될 수 없다. 약 2년 전 그는 ‘녹조가 생기는 건 수질이 나아졌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쓰레기통에서 썩고 있는 저 음식은 점점 먹기 좋아지는 것이구나. 녹조는 강이 내뱉는 가래 정도인가 보구나. 이 정도로 모든 것을 엎어도 되는 거면 말이 무슨 소용인가. 허탈한 쓴웃음만, 야생학교는 짓는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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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여름이다. 바야흐로 휴가의 계절이 도래하고 우리는 떠남을 상상한다. 고운 모래 위로 부서지는 에메랄드빛 파도, 솟아오르는 열기에 나부끼는 넓은 야자수 이파리. 아, 인생 뭐 있나. 그저 이렇게 즐기면 될 것을. 그래서 여행사들의 여름 상품은 바다의 낭만을 담은 사진과 그림으로 가득하게 꾸며진다. 말이 필요없는 것이 바로 이미지의 힘. 알록달록한 색의 비치파라솔, 시원한 열대과일 칵테일, 멋진 선글라스와 이글거리는 태양. 그래 떠나자. 열심히 일한 나.

단숨에 흥과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거기에 진실이 담겨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특히 공간에 관한 이미지일수록, 어딘가에 저 그림과 비견되는 해수욕장이 진짜로 존재하고, 내가 잘만 찾으면 바로 저런 곳에서 올여름을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나를 흥분시킨다.

그래서 정말로 생각했던 이상과 부합하는 장면을 마주치면 우리는 ‘그림 같다’고 표현한다. 세상을 편집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왜곡’이 불가피한 것이 그림이지만, 그럼에도 세상과의 상당한 수준의 합치가 일어날 때 그 감동은 배가된다. 반면에 가장 감흥이 적고 심지어는 불편할 때는 그림과 현실이 완벽히 서로 유리될 때이다. 일부러 이런 효과를 노린 현대미술 작품을 제외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통 내가 속한 이 세상과 현실을 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둔감해진 것일까.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미지가 우리의 실상과 한없이 멀어졌는데도 이 불합치에 대한 알아차림이 적거나 아예 없다. 아이들의 그림이 좋은 예이다. 한국의 어린이는 집을 그리라면 여전히 세모꼴의 빨간 지붕을 그리지만, 실제로 사는 곳은 거의 대부분 직사각형 모양의 아파트이다. 본 대로, 있는 그대로 그리는 대신, 사회적 기호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도시 아이가 보는 가장 흔한 나무인 가로수는 수형을 온전히 유지한 생물이 아니다. 가지가 수도 없이 잘리고 잘려, 흉측하게 아문 상처의 흔적이 즐비한 거의 불구의 나무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크레파스는 둥그런 모양으로 잎을 풍성하게 틔운 나무를 그려낸다. 아이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놀이동산, 길, 자동차 등을 찬찬히 뜯어보면 하나같이 현실과 상당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그 괴리감이 가장 압도적인 사례를 꼽으라면, 단연 연못이다. 둥근 타원형 하나 그려 파랗게 칠하고, 속에 물고기와 개구리를, 옆에 강아지풀과 부들을 그려 표현하던 연못. 웬만한 동화책과 아이들 그림에 지금도 단골로 등장하지만 현실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찾아볼 수 없는 곳. 아동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담한 수중생태계의 신비를 간직한 자연 연못은 습지의 무차별 파괴로 인해 거의 완벽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정확히 타원형 연못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연못을 포함해, 땅은 땅이되 물을 머금고 있어 늘 젖은 땅인 습지(濕地) 일반에 관한 얘기다.

습지에 대한 변호는 모두 습지의 순기능과 효용을 피력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어떤 혜택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기능주의적 변명은 자연의 진정한 가치를 실추시킬 뿐이다. 순수한 아이가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대상이라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충분하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습지를 없애면서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김포공항습지가 그 좋은 예이다. 서울과 부천의 경계이자 김포공항 인근에 소재한 이 묵논습지에는 천연기념물 12종, 멸종위기 1급과 2급인 14종 등 법정보호 또는 관심생물이 총 27종이나 서식한다. 희귀한 맹꽁이, 금개구리, 무자치, 구렁이는 물론 최근 조사에서 심각한 멸종위기종인 수원청개구리도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활동 중인 학생 환경모임인 ‘뿌리와 새싹’이 2013년 신종으로 추정되는 거미를 발견해 학계에 알리기도 했다. 도시 인근임에도 풍부한 생물다양성을 자랑하는 이 습지를 두고 나오는 이야기는 우려한 대로이다. 골프장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국공항공사와 보일러로 유명한 기업이 함께 추진하는 골프장 사업으로 이 보물 같은, 아니 이미 천혜의 보물인 습지를 전부 메워버린다는 계획이다. 이 정도의 생태학적 범죄행위에 해당되는 사업조차 소위 환경영향평가를 떡하니 이수한 걸 보면 이 나라에 법체계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가 의문스럽다. 이 좁은 국토에 극히 소수만이 즐기는 컨트리클럽을 또 하나 추가한다는 것만으로도 황당한데, 이를 위해 희생당하는 생명과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생각하면 가히 충격적이다. 지금이라도 이 어이없는 기획이 무산되기를 기원하며, 마음속에 예쁜 연못 하나를, 야생학교는 그린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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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콜록콜록. 아차차. 해버리고 말았다. 후다닥. 황급히 몸을 피하는 이들의 몸동작엔 불쾌함이 배어 있다. 하얀 마스크 위로 굴리는 눈에는 원망이 이글거린다. 하필 왜 내 옆이람. 요즘 같은 메르스 시대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감히 기침을 터뜨리다니. 싸늘한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 눈을 깊이 내리깐다. 십 년 넘게 앓은, 낙타와 무관한 호흡기 지병이 있더라도 지금은 기침 불허(不許)의 세상이다. 잘못하다간 멋대로 나다니는 격리대상자와 같은 몰지각한 인사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이런 판국에 기침이라니.제 죄를 제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억울하다. 나를 잠재적 보균자로 오해하는 시선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모두들 불안할 법도 한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말 못할 나의 억울함은 이 문제의 바이러스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곳에 기인한다. 온 나라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이 질병의 출현 시점이 하필이면 초여름이라는 점. 바로 냉방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그렇다. 나의 기침은 여름날의 추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과도한 냉방이 어찌나 팽배한지 더운 날이라도 카디건 따위의 ‘보호 장비’를 잊지 말고 반드시 챙겨야 한다. 지하철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미치지 않는 구석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닌다. 버스에서는 에어컨 노즐을 아무리 잠가도 냉한 기운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어 반쯤 포기한 상태로 여정을 인내한다.



극장은 상영작이 뭐든 간에 납량특집과 같은 분위기이고, 은행은 돈을 실온에 보관하면 안 되는지 전체를 냉장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여전히 걷기에 좋고 쾌적한 바깥 날씨를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양태이다. 덕분에 나의 기관지는 따뜻한 계절에도 고생을 면치 못한다. 유전자 재조합으로 숙주와 진화적 군비 경쟁을 벌이는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냉방에 대한 집착과 중독으로 인해 나는 메르스 환자로 오인받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는 병이 아니라, 스스로 초래한 일이기에 할 말이 없다.

지금이 냉방 운운할 때냐고 혹자는 말한다. 나라 전체가 치명적인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시시콜콜한 걸 들먹이다니. 그러나 어느 한 가지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의제는 다 무시해도 되는 상황이란 없다. 당장 급한 것은 있으나 우선순위의 상위에 놓였다는 의미일 뿐, 목록의 아래에 있는 문제도 엄연히 중요한 사안이다. 동시다발적, 게다가 ‘시급성’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매일같이 사태가 급변하는 메르스에 대처하는 것도 시급하지만, 좀 더 큰 시간적 스케일에서 보면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에 대응하는 것도 어느 것 못지않게 시급하다. 단지 눈앞에 닥치지 않았을 뿐, 지금부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십 년 후에 재앙이 될 수 있는 일도 당장, 지금 당장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느끼는 온도가 다르다고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계절이 기준이다.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더운 계절이면 바깥보다 약간 덜 덥게, 추운 계절이면 바깥보다 약간 덜 춥게 실내 온도를 설정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하는 전 지구적 상황에서, 몇몇의 ‘온도 진상’ 손님 때문에 에너지를 더 사용하는 쪽으로 편향되어선 안 된다. 어차피 제각각인 ‘고객만족’이 아니라, ‘계절만족’ 냉난방이어야 한다.

이것은 절대로 개인적인 차원의 푸념이 아니다. 국가적인 일은 물론 지구적인 일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모든 나라는 오는 10월1일까지 각자의 자발적인 온실가스 감축공약 또는 INDC(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를 유엔에 제출해야 한다. 교토의정서의 효력이 끝나는 2020년부터 시작될 신(新)기후체제 하에서 각국이 스스로 감축의무를 정하는 것이다.

올해 12월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는 제출안을 바탕으로 최종 합의가 도출될 계획이다. 마감일 한참 전인 2월에 제일 먼저 제출한 스위스를 필두로 멕시코, 가봉, 에티오피아를 포함하여 현재 12개 나라가 제출을 완료한 상태이다. 애초부터 마감 직전인 9월까지 눈치작전을 펴기로 했던 한국은 거세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당초 계획을 앞당겨 며칠 전에 감축 목표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떡하니 내놓은 안은 놀랍게도 전 정권보다도 감축 목표량을 줄인 14~30%이다. 이 정도면 탄소배출량 세계 7위인 나라치고 거의 비협조 수준이다. 환경단체의 반발에 정부는 우리가 ‘개발도상국’이라는 변명을 내놓았다. 정부만이 아니다. 나라 어디를 돌아다녀도 탄소배출을 걱정하는 흔적일랑 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밝힌 등, 여기저기서 들리는 공회전, 극심한 벌목과 개간, 지나치게 추운 냉방이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가령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연간 전기료는 100억원이 넘고, 삼성가 자택 전기료는 월 3000만원이 넘는다. 한국 최고의 지성이 모인 곳과 한국 최고의 기업 총수의 에너지 사용 실태는 가히 상징적이다. 지금, 정말로 시급한 일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야생학교는 콜록거린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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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던 공간에 느닷없는 괴성이 울려퍼진다. 곧이어 고요함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온다. 실체가 애매했던 소음은 이제 분명한 언어로 구성된 고함소리라는 것이 확인된다. 누군가가 공공장소에서 고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몇 초만 들어보면 감이 온다. 소위 말하는 ‘진상 손님’이 또 출현했다는 사실을. 어디를 가도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식당, 카페, 마트, 버스, 지하철, 주차장, 심지어는 비행기까지, 서비스업이 존재하는 한 어디든 ‘진상’은 활개를 친다. 그들의 무례함과 뻔뻔함 때문에 서비스업계 종사자는 물론 일반 소비자마저 감정노동에 시달릴 판이다. 마치 천하의 중죄를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종업원을 닦아세우는 손님 때문에 불편했던 경험이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다. 막무가내의 행동 기저에 깔린 기본 논리가 실은 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냈으면 그에 응당한 권리는 반드시 100% 챙기겠다는 심리만큼 정당한 것이 또 있을까? 재화와 용역의 금전적 교환이라는 철칙 앞에선 그 어떠한 수모와 비애도 감수해야 마땅한 세상이다. 손님은 왕, 고객 만족은 최고의 가치. 닥치고 일이나 할지어다.

이와 같은 경제논리에 수긍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은 싫든 좋든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서비스업에 속해 있지만 속성이 전혀 다른 ‘노동계층’이 있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은, 뭣도 모르고 전시, 교육, 심지어는 쇼비즈(Show-biz) 영역에까지 그 노동력이 활용되고 있다. 물론 계약서에 사인을 한 적도 없고, 4대 보험의 혜택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잘살고 있다가 그저 재수 없게 잡혀와 주야장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이주노동자, 바로 동물이다. 그들의 대표적인 일터는 동물원이다. 임무는 간단하다. 그냥 살아 있으면 된다. 목숨 자체가 재화이자 용역인 셈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하면 해고당하지 않고 밥벌이는 할 수 있다. 자연 상태에서 이들은 다른 생물의 시선을 피하면서 사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잠재적인 포식자인 덩치가 큰 직립 생물이 노려보는 것을 달가워할 동물은 단 한 종도 없다.

하지만 이 업계에 종사하는 이상, 야생 동물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은닉과 프라이버시는 송두리째 내동댕이쳐야 한다.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입장료가 얼마인데. 게다가 만성 적자와 인력부족 그리고 전문성 부족에 시달리는 동물원들은 보통 이들의 근무조건이나 복지 향상에 할애할 여지가 없다. 정글 출신이든 사막 출신이든, 야생성이건 주행성이건 시멘트 바닥과 쇠창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집무실이 제공된다.

사회생활이나 결혼 등에 대한 자유가 없음도 물론이다. 마음에 안 맞는 상대라도 그나마 주어지면 운이 좋은 편이다. 홀로 쓸쓸하게 짧은 ‘수생(獸生)’을 마감하는 일이 허다한 곳이니 말이다. 이들의 경우는 감정노동이라기보다는 존재노동이라 불러야 더 적확하지 않을까. 죽지 못해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동물원이 죄다 똑같은 수준으로 열악한 것은 아니다. 걔중에는 좀 더 나은 환경과 관리방침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긴 하다. 그러나 발견되는 문제의 속성과 양상의 측면에서 보면 동물원 간의 수준 차이는 크지 않다.

민간동물원 안에 있는 원숭이 (출처 : 경향DB)


최근 동물보호단체 ‘동물을 위한 행동’에서 발간한 동물원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의 모든 민영 및 공영 동물원에서 생태적이지 못한 전시 환경, 정형행동의 만연, 부족한 행동풍부화, 비체계적인 개체수 조절, 예산 확보의 어려움 등의 문제가 일관되게 발견된다. 좁고, 낡고, 더럽고, 어둡고, 무료하고, 황량하고, 답답하고, 관람객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사육장이 아직도 너무 흔하다.

게다가 여러 동물원은 동물에게 무리한 ‘추가 근무’를 강요한다. 이른바 쇼에 차출되어 자신의 생태와 전혀 무관한 행동을 해야 하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마구잡이로 만져지도록 몸을 내맡겨야 한다. 어찌 보면 어쩔 수 없이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비견되는 신세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동물이 가두어져 산다는 것은, 동물이 자연에서 절대로 만나지 않고, 진화적으로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다. 잡아먹히면서 몸이 뜯기는 고통, 산불이나 용암에 몸이 타는 고통, 질병의 고통, 물에 빠지거나 질식하는 고통, 모두 자연계에 원래부터 존재하며, 지구 역사상 모든 동물이 겪어왔다.

그러나 한 공간에 가두어진 채 먹이는 계속 주어져 죽지 못하게 만드는 고통,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동물을 가둬 키우는 모든 행위는 실로 미안한 일이다. 그러니 이왕 키울 거면 잘해줘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당연한 사명이요 의무라고, 야생학교는 명심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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