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김산하의 야생학교'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5.04.01 [김산하의 야생학교]물고기, 고기가 아니라 ‘물살이’다
  2. 2015.03.04 교감? 강요된 스킨십!
  3. 2015.01.27 곰표·제비표·캥거루표… 동물들에게 물어보았나
  4. 2014.12.29 연말, 그것은 ‘나’의 계절
  5. 2014.11.26 [김산하의 야생학교]바다에서 물고기가 사라질까 걱정
  6. 2014.10.13 [김산하의 야생학교]수원청개구리를 굽어살피소서
  7. 2014.08.24 [김산하의 야생학교]반달곰과 멧돼지의 거주 기본권
  8. 2014.07.27 [김산하의 야생학교]닭 40만마리를 해치우는 ‘난리굿’을 축제라니
  9. 2014.07.02 [김산하의 야생학교]야생동물 인터넷 쇼핑
  10. 2014.04.28 [김산하의 야생학교]숲 옮기기의 위험성
  11. 2014.04.07 [김산하의 야생학교]귀찮은 존재가 된 자연과 사람
  12. 2014.03.12 [김산하의 야생학교]좀 시끄러워도 참으라고?
  13. 2014.02.12 [김산하의 야생학교]‘살처분 시대’에 대한 호소
  14. 2014.01.22 [김산하의 야생학교]빙판 위의 킬링필드 (1)
  15. 2014.01.01 ‘보온과 단열’은 기초 중의 기초
  16. 2013.12.11 [김산하의 야생학교]‘성형 아우성’의 고욕
  17. 2013.11.20 [김산하의 야생학교]사람과 생물 ‘먹고살기’의 다양성
  18. 2013.10.30 [김산하의 야생학교]19금 밥상
  19. 2013.10.09 [김산하의 야생학교]보이지 않는 건물, 훤히 보이는 무지
  20. 2013.09.11 [김산하의 야생학교]오빤 ‘자연 스타일’

도심의 빌딩숲에 폭 파묻혀 자동화된 세계 속에 사는 사람이라도 자연을 접하지 않고 지내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아니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고 또 만난다. 누구든 일상생활에서 동식물을 가장 자주 접하는 곳, 다름 아닌 바로 밥상이다. 산에서 뜯은 나물, 흙에서 자란 야채, 그리고 바다에서 건진 생선. 서식지로부터 그릇 위까지 긴 여행을 마친 여러 종의 생물이 하루에 세 번, 또는 그 이상, 우리와 마주한다. 웬만한 한국인의 식탁은 단일 먹거리가 아닌 최소한의 생물다양성이 나타나는 식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원재료가 연상이 잘 안되는 음식도 많다. 가공이 많이 된 식품일수록 원래의 모습과 멀어져서 실제 동식물과 만나는 듯한 느낌은 적어진다. 요즘 각광받는 홀 푸드(whole food)나 매크로바이오틱(macrobiotic) 식품은 건강을 위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무엇을 먹는지 제대로 인식하면서 먹게끔 해주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식탁을 좀만 달리 보면, 자연과 야생이 보이기도 한다.

개중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상에 올라오는 음식 중 가장 온전한 형태를 띠고 있어 그것이 자연으로부터 온 하나의 생물임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것. 바로 물고기이다. 잘라서 조리하기도 하지만, 머리부터 꼬리까지 고스란히 통째로 선보여지는 경우도 많다. 오늘날은 쌀이 나무에서 자란다고 생각하는 일명 ‘벼나무’ 세대가 사는 시대이지만, 제아무리 무관심한 이라도 눈앞의 생선구이를 보며, 젓가락으로 뼈를 바르며, 그것이 어딘가에서 잡아 올린 어떤 특정한 ‘놈’이라는 것을 안다. 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물고기는 이미 너무나도 음식물과 동격이 되어서이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조각이든 완전체이든, 물고기는 동물이 아닌 먹을거리로만 인식된다. 사람들은 돼지나 소 자체를 보며 맛있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고기조각이 아닌 살아 있는 형태로 가축을 만나면 커다란 눈망울이나 귀여운 몸동작에 이들도 생명이라는 깨달음에 정신이 환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류는 천연의 모습 그대로일 때에도 횟감일 뿐이고, 매운탕거리일 뿐이다.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인 것이다. 이름부터 수중(水中)에 있는 고기. 물고기. 밥의 신세. 찬밥신세.

봄이 막 고개를 들기 시작한 몇 주 전, 나는 한국의 민물고기와 평생을 함께해온 한 청년을 만났다. 우리는 멸종위기종 2급인 꾸구리와 돌상어를 조사하러 섬강을 향했다. 여주와 원주의 경계 부근,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 어딘가에 이 귀한 어류가 제법 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출발부터 심상치 않았다. 멸종위기를 알리기 위해 그가 설치해놓은 현수막은 며칠 전 불어닥친 강풍에 찢겨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잔해를 추스르자 강변 가까이에 주차된 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강 중간에 몇 명이 이미 배를 띄워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물이 쳐진 걸 봤었는데, 저 사람들 것인가?” 청년은 우려 섞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곧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평소에 잘 발견되던 곳도, 산소가 풍부한 여울에서도, 꾸구리는 몇 마리도 채 나오지 않았다. 대체 원인이 뭘까? 그때 강바닥을 헤집어놓은 듯한 퍽 넓은 지역을 발견했다. 얘기인즉슨, 소위 ‘오프로드’ 전용 4륜구동 자동차를 몰고 강안에까지 들어온 자국이란다. 아연실색하고 있을 때, 어부들은 망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13개까지 세고 그만두었다. 저편에서는 누군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낚시금지라고 적힌 낡은 표지판 하나가 덩그러니 강바람을 맞고 있었다.

'2014 서울빛초롱축제' 개막을 하루 앞둔 6일 밤 서울 청계천에 형형색색의 각종 등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출처 : 경향DB)


물고기는, 아니 어류는, 어느 생명 못지않게 신비로운 동물이다. 어류는 포식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몸 색깔을 주변과 맞출 줄 알고, 위급할 땐 죽은 척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어류의 성별이나 서열을 알아차리고, 과거의 라이벌이나 협력자를 기억하기도 한다. 또 기생충을 제거해줘서 ‘의사 물고기’ 역할을 하는 청소놀래기가 자기의 입속을 드나들도록 허락하고, 기생충이 아닌 살점을 뜯어먹는 ‘반칙’을 범하면 바로 ‘치료’를 중단해버린다. 눈이나 옆줄을 사용할 때 좌우 중 한쪽을 선호하는 이른바 ‘왼쪽잡이’나 ‘오른쪽잡이’ 물고기도 있다. 각종 굴, 은신처는 물론 수생식물을 엮어 건축을 할 줄도 알며, 세간의 편견과는 달리 어류의 기억력은 수일 또는 수주까지 미치기도 한다. 물론 고등한 행동양상을 나타내야지만 어엿한 생물로서의 지위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토록 오묘하고 멋진데도, 초장에 찍어먹을 재료 정도로만 치부되는 현 어류의 사회적, 문화적 지위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현상이다. 꾸구리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섬강은 어류학회가 발표한 2011년 논문에서도 서식지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된 곳이다. 그러나 과도한 어업행위와, 믿을 수 없이 파괴적인 취미활동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디 이곳 하나뿐이랴. 우선 이름부터라도 물고기를 더 이상 물고기라 부르지 말고, ‘물살이’로 재명명하길, 야생학교는 제언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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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저기도 망했네! 여긴 또 언제 바뀌었나? 길거리를 걷다 다반사로 터져 나오는 말이다.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추억의 장소가 되어주는 공간이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찌나 쉽게 망하고 생겨나고 또 망하는지, 요즘에는 어느 가게에 정 붙이기도 전에 간판이 내려져 있기 십상이다. 반면에 눈에 띄게 점점 많아지고 있는 곳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카페이다. 우리나라에 커피를 좋아하는 인구가 저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우후죽순 생겨나는 카페는, 주력 상품의 사회적 선호도와 무관한 또 한 가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카페가 누군가와 만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곳이라면, 카페의 증가로 사람들 간의 대화도 증가했을까? 저 수많은 마주 보는 의자들은 그곳에 앉은 이들로 하여금 더 원활한 의사소통과 더욱 깊은 교감을 가능케 하였을까? 말하자면 대화와 소통의 하드웨어는 증강된 셈인데, 과연 소프트웨어는 따라오고 있는지, 그것이 문제로다.

소통이라는 화두를 머릿속에 굴리다, 누군가 켜놓은 텔레비전에 화들짝 놀란다. 아니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동물과 아이들 사이의 ‘교감’을 표방한, 그 프로그램을 본 것이다. 바로 <슈퍼맨이 돌아왔다>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아이들이 어느 수족관에 가서 돌고래와 ‘친구’가 되는 내용인데, 돌고래들은 ‘환영인사’로 꼬마들을 ‘반기며’ 그들을 ‘마음에 들어’한다. 돌고래는 ‘함께 놀자’며 아이들과 ‘대화’하고, ‘완벽한 교감’을 나눈 나머지 뽀뽀까지 한다. 물론 이 모두 돌고래와 무관한 프로그램에서 내보낸 자막일 뿐이다. 물론 이 과정에 돌고래를 연구하는 과학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이 돌고래들은 야생에서 잡혀와 좁은 사육장 안에 갇힌 신세로, 자유의지에 의해 제작진 및 출연진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나? 혹자는 말한다. 어쩌다 한두 번 있는 일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거의 정기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동물과의 소위 ‘교감’을 핵심 주제로 삼아 방송을 제작해왔다. 교감의 대상도 기린, 사슴, 말, 펭귄, 물고기, 가오리, 오랑우탄 등 다양한데, 전부 인간이 인간 마음대로 부여한 감정 상태가 그 동물 본연의 것인 양 묘사하고 있다. 신체적 접촉이 동물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고, 사육사가 붙들어둔 상태에서 만지는 것조차 포함하여 모두 이 프로그램에서는 훌륭한 ‘교감’이다. 별로 해가 될 것 같지도 않은 자막 추임새는 바로 이런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물의 실제 상태와는 무관하게 마치 동물이 이 ‘교감’을 인정하는 듯한 인상으로 사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동물이 마치 너무 ‘짓궂거나’ 심지어는 윤리적으로 나쁜 행동을 한 것처럼 그리기도 한다. 오랑우탄 쇼에 간 한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오랑우탄이 가져가자 제작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과자 ‘뺏기’와 ‘강탈’이라고 지적한다. 마치 동물의 세계에 인간의 도덕이 적용되기라도 하는 것인 양 말이다. 동물이 무슨 짓을 하건, 어떤 상태이든 간에, 신과 같은 제작진이 붙이는 딱지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존재로 치부하고 있다.

서울대공원 돌고래쇼장에서 돌고래 재돌이와 사육사들이 동물행동풍부화 프래그램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교감은 서로 감응한다는 뜻이다. 동물들은 아이들과도, 제작진과도, 시청자와도 전혀 감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유롭고 싶을 뿐이다. 방해받고 싶지 않을 뿐이다. 오직 한쪽에서 느끼는 즐거움만을 바탕으로 상대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치부하는 것은 폭력이며, 이를 줄기차게, 일방적으로, 아름답게 포장하는 행위는 동물을 모르는 순진함과는 먼 뻔뻔하고 저속한 상업주의에 불과하다. 인간 사회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토록 분노하면서, 어째서 그 시퍼런 유사성을, 아니 그 근본적 동질성을, 눈치채지 못하는가?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범죄가 그것이다. 열이면 열, 가해한 쪽에서는 합의하에 이뤄진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교감’이었다는 뜻이다. 아니면 적어도 ‘싫어하진 않았다’는 식의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물론 피해자 쪽의 입장은 이보다 더 멀 수는 없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당한 폭력에 교감과 같은 단어가 쓰이는 것 자체에 몸서리가 쳐질 것이다.

동물은 말로 자기변호조차 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게다가 ‘교감’의 의무가 부여된 거의 모든 동물은 자연 서식지와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좁고, 인공적이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그중 어떤 곳, 특히 오랑우탄 쇼가 벌어지는 쥬쥬동물원은, 동물단체에 의해 고발까지 됐을 정도로, 동물의 감정이나 안녕 따위는 전혀 뒷전인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공간을 정당화시켜주는 듯한 측면도 이 프로그램의 무수한 문제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한편에서는 거짓되고 강요된 교감이 오락거리로 회자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동물이 마치 아무 감정도 없는 것으로 전제한 공장식 사육이 자행되고 있다.

이런 행태는 이제 모두 중단되어야 한다. 교감이라는 미명 뒤에 감춰진 강요된 스킨십이 사라질 때까지, 야생학교는 진군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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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새해가 밝았다. 아니 벌써 한 달이나 지나가버렸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살아보리라, 각오를 제대로 다지기도 전에 달력은 성급하게시리 한 장을 넘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무심한 진행에 그냥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이미 바쁜 일상이 올해에도 내 삶의 정권을 잡으려는 태세이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시간을 내어 신년의 포부와 소망을 정리해본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자연과 동식물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일. 이것이 야생학교의 목적이자 설립 취지다. 아직은 어엿한 건물을 갖춘 그런 물리적인 형태의 진짜 학교는 아니지만, 배움과 사색과 창조가 일어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학교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시험이나 입시 따위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모든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율학습이고, 숙제는 스스로 부과한 것 외에는 없는 곳. 그런 학교라면 세태가 어떻든 근본적이고 중요한 얘기들을 제대로 펼칠 수 있으리라. 어느 분야에서든 가장 낮은 우선순위가 부과되는 인간이 아닌 생명에 대해, 마치 그것이 가장 중차대한 대상인 양 다룰 수 있으리라. 적어도 야생학교에서라면 말이다.

그런데 혹자는 묻는다. 현대인에게 야생이 뭐가 중요하냐고? 도시인의 삶 대체 어디에 야생과 맞닿은 접점이 있느냐고. 저 먼 산속이나 국립공원에야 있겠지만 그거야 정부나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대다수와는 무관하지 않느냐고. 실제로 많은 이들의 집과 직장 사이의 왕복구간에 살아 숨쉬는 야생의 무엇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까치나 개미와 같은 이웃사촌도 야생이긴 하지만, 느낌이 전혀 다르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정말 ‘짐승다운’ 야생의 생물은 나의 주변에 없다.

그런데 잠깐. 분명히 없는데도 계속해서 보인다. 계속해서 들린다. 그림으로, 상징으로 우리 주변에 넘쳐흐른다. 팀의 마스코트로, 기업의 로고로, 브랜드의 이미지로, 야생생물은 끊임없이 회자되고 활용되고 있다. 특히 동물이 주를 이룬다. 곰표, 토끼표, 노루표, 캥거루표, 제비표 등 무척이나 다양한 업종에서 동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특정 회사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고 있다. 야구장에서는 사자와 호랑이와 곰과 독수리가 각축전을 벌이고, 온라인 세계에서는 새들의 입을 빌려 조잘대고 펭귄과 여우 브라우저로 인터넷을 검색한다. 실재하지 않는 대신, 야생동물은 상표로서 우리의 대다수와 매우 깊이 유관하다.


개, 돼지, 닭처럼 오래전부터 인간과 역사를 함께해온 가축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인간의 돌봄에 몸을 맡기며 야생성을 잃어버린 이 생물들은 인간의 일에 좀 쓰이더라도 크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야생동물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본 피해자들이다. 기업의 경제활동은 기본적으로 자연자원의 활용을 의미하고, 그 귀결은 아주 단순화하면 야생동물의 서식지 교란 또는 파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야생동물은 자신들의 안녕에 반하거나 최소한 무관한 기업의 상징으로 아주 흔히 사용되고 있다. 아무도 나서는 동물이 없어서 그렇지, 초상권 또는 저작권 침해, 명예훼손 등의 명목으로 충분히 고소할 만한 일이다. 대체 우리를 위해 해준 게 뭐 있냐면서 말이다.

해준 게 있는 기업도 있다. 야생동물의 이름 또는 형상을 기업의 간판으로 활용하면서 그 ‘사용 대가’로 그 동물의 보전활동에 기부하고 지원하는 사례가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럭셔리 차 브랜드 재규어를 들 수 있다. 1921년 세워진 이 회사는 원래 이름이 제비였다가 1947년 재규어로 공식 명명되었다. 재규어의 창립자는 이 동물의 힘과 기민함,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해 이 이름을 채택하게 되었다는데, 1980년대부터 재규어와 재규어 서식지의 보전에 힘써왔다. 중앙아메리카의 벨리즈, 코스타리카, 과테말라의 열대우림에서 활동하는 환경단체를 지원하며 재규어를 위한 각종 보전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벨리즈에서는 세계 유일의 재규어 보호지를 30배 확대해 무려 400㎢가 넘는 면적의 정글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인 퓨마도 좋은 예이다. 퓨마는 지속가능한 경영의 선두기업으로서 탄소 절감 등에 앞장서는 것은 물론, 아프리카 유엔환경기구와 함께 아프리카 잠비아의 사자와 라이베리아의 코끼리, 나이지리아의 고릴라 보호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확히 퓨마를 보호하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야생동물을 두루두루 보호하는 일에 나서는 다소 특이한 케이스다.

반면 럭셔리 보석 브랜드인 카르티에는 주는 것 없이 표범을 광고에 활용해서 반대 서명운동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야생동물을 ‘무상으로’ 활용하는 한국의 기업도 이 야생 로열티를 내야 하는 날이 그리 머지않았다. 잊혀진 야생 동식물의 권리를 찾는 2015년, 야생학교는 힘차게 출발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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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자락이 보인다. 움츠린 어깨, 빙빙 두른 목도리, 모락모락 입김. 시린 바람 속을 걷는 이들은 자신들이 향한 따뜻한 목적지를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한다. 세상만사의 다사다난함이 일단락되는 이 정기적 시점에 돌입하면 도시는 들뜨기 시작한다. 연말은 정정당당한 쉼과 축제를 의미하지 않던가. 다정한 이들과 모이기, 음식 마음껏 먹기, 흥겨움에 탐닉하기 등의 행위가 거의 의무화되는 이 시간이 있기에 일 년 동안의 고생과 인내를 뒤돌아보고 또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젠 쉬어라.

얼마나 보람차게 지난 12개월을 보냈는지는 천차만별이더라도 추위가 절정에 달하는 와중에 해가 바뀌는 이때를 맞이하는 이들은 모두 평등한 생존자들이 된다.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 어디냐. 축배를 들어야 마땅한 일이로다. 그래서 실제로 축배는 사방팔방에서 열심히 들리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잡혀 있는 송년회와 각종 모임, 파티와 가족 행사마다 ‘우리가 올해도 이렇게 함께 살아왔음’에 대한 축하가 울려 퍼진다. 때로는 좀 과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누가 탓을 하겠는가. 기념하지 않으며 사는 삶이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이렇게 한 살을 더 먹는구나. 그러니 이때만큼은 넓은 세상사이걸랑 잠시 잊고 다분히 협소한 ‘나’에 각자 집중한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연말, 그것은 ‘나의 계절’이다.

그래서 연말연시에는 사회적 의무감이나 대의적 공명심을 요구하는 ‘큰일’은 별로 벌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마무리 모드로 들어가 오로지 포근함과 따뜻함을 찾고 싶을 뿐인데 이때 괜스레 거창한 소리를 늘어놨다간 역효과만 보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좋은 게 좋고, 괜한 잔소리 따위는 삼가는 분위기가 압도하는 세상. 문명이 정한 일 년이라는 단위에 마침표를 찍는 이 시기는 그래서 보기에 따라 다른 어느 계절보다도 고달플 수가 있다. 아주 외롭고 고독할 수 있다. 내가 상대적으로 소외된 사회계층에 속해 있거나, 내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나의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서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유난히 힘든 한 해를 보냈거나, 나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연말연시의 기분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두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모두 여전히 ‘나’에 국한된 관점으로부터 비롯된 행복·불행이라는 측면에서 그 본질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연말연시가 가져다주는 보다 근본적인 힘듦은, ‘나’의 축제에 ‘세상’이 깡그리 잊힘을 목도해야 하는 것이다.


가게마다 진열된 예쁜 선물은 주는 이의 훈훈한 마음은 잘 담을진 모르지만, 그 마음도 전달되자마자 과한 포장 재료와 낭비된 종이는 한순간에 쓰레기로 둔갑시키는 것에는 무심하다. 식당과 주점은 평소보다 늦은 시각까지 주방을 돌리며 단체손님을 맞이하는 대목을 누리지만, 그 덕에 급증하는 엄청난 양의 음식 쓰레기와 도살되는 가축은 특히 지금 시기에는 논외의 대상이다. 날카로워진 추위에 좀 더 따듯함을 좇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눈에 띄게 그 수가 늘어난 모피코트는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동물들의 비명에 무감각한 차가움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준다. 호텔과 빌딩 앞을 수놓는 줄전구는 연말다운 분위기를 한껏 조성하는진 모르지만, 전선에 칭칭 감겨 전봇대로 전락해버린 애꿎은 나무들을 향한 따뜻한 눈길은 없다. 즐거운 연말인데, 이 무슨 분위기 못 맞추는 소리.

분위기? 지금 지구 전체의 분위기는 어떤가? 지난 12월14일 페루 리마에서 열린 제20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는 열띤 협상과 온갖 우여곡절 끝에 ‘기후행동에 관한 결정문’을 채택하였다. 이번 총회는 처음으로 모든 국가가 온실가스 감축에 참여하기로 한 점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관한 국제공조의 쾌거로 여겨지고 있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향후 지구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내년 파리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중요한 한 단계임은 분명하다. 총회에 참석한 당사국 대표들 또한 어렵사리 달성한 과업을 두고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연말에 축하할 일이 하나 는 셈이다. 깊어가는 밤을 밝히는 화려한 전등불과 연회장을 따뜻하게 달궈주는 난방장치, 끊임없이 재생되는 음악과 동영상.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배출된 탄소가 모락모락 대기로 떠오른다. 살기 위해, 만나서 얘기하기 위해,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하지만 나와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올해의 마지막 자리에서도 세상을 완전히 잊어서는 안된다. 축제에 초대받지 않은 자연, 그것이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추운 바깥을, 야생학교는 잊지 않는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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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실패한 친구가 내 앞에서 고개를 떨군다. 단숨에 비운 술잔을 힘없이 내려놓더니 이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쉰다. 휴우. 인생의 깊고 어두운 골짜기에 빠져버린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과연 뭐가 있을까. 그저 곁에 있어주면서 슬픔과 비통함을 온전히 나누어 경험하는 수밖에. 그래도 기나긴 그간의 사연과 뒷이야기를 다 듣고, 함께 아쉬워하고 분노한 끝에, 덧붙이는 고전적인 말이 하나 있다. “세상에 여자(또는 남자)가 어디 그 사람뿐이냐!” 오늘 밤의 하소연과 넋두리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잠언은 대체적으로 수긍을 받는다. 다 아는 얘기지만, 그리고 절대로 이 실연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친구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인다. 적어도 오늘 밤은 이렇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같은 의미의 영어 관용문은 다음과 같다. There are plenty more fish in the sea. 직역하면 ‘바다에는 아직도 물고기가 많다’라는 뜻이다. 광대한 바닷속 수많은 물고기만큼 이 세상엔 아직 만나지 못한 이성이 가득하니, 그대여 너무 걱정 말거라. 인류가 영원과 맞닿은 듯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없이 출렁이는 물결과 파도소리에서 위안을 찾았던 역사가 길고도 깊다. 그래, 낙심하지 말자. 저렇게 물고기가 많은데. 그리고 이는 수사적인 표현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바다에는 물고기가 가득했다. 옛날에는 그랬다. 산업어업(industrial fishing)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 떼가 보고되거나 잡히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하도 잡고, 잡고, 또 잡아서, 저토록 넓은 바다에 실제로 물고기가 동이 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느 정도일까? 국제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본 기구가 모니터링하고 있는 600개의 어장 중 지속가능하게 잡을 수 있는 양보다 덜 잡는 곳은 단 3%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탈탈 털리는 중이거나 이미 털렸다는 뜻이다. 전 세계 어장의 85%가량이 과도한 남획으로 고갈되었거나, 되고 있는 중이거나, 고갈 후 회복 중에 있다고 한다.

물고기의 감소 규모를 가장 실감하게 해주는 수치는 어획량의 감소이다. 19세기 말, 고기잡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어부들의 불만이 잦아지자 영국정부는 진상조사를 하기 위해 1889년부터 연도별 어획량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변화의 추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자료를 ‘어업동력’으로 환산해야 한다. 돛에 의지하던 옛날 배와 위성장치까지 동원한 오늘날의 거대 어선에 의해 잡히는 양을 수평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는 참담하다. 현재 단위 어업동력당 잡히는 물고기의 양은 120년 전의 6%라는 극히 초라한 수준이다. 비행기와 군사기술로 무장한 현대어선이, 보잉747 여객기 12대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초대형 저인망을 끌며 바다 바닥을 긁고 있지만, 단위 노력당 잡히는 양은 점점 줄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나와 상관이 없는 먼 바다의 얘기? 한때 가장 풍성한 어장 중 하나로 여겨졌던 북대서양 대구 어장은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1992년에 어업이 전면 금지되고 4만명 이상이 생업을 잃었다. 한국과는 무관한 다른 욕심쟁이 나라들의 얘기? 동대서양 가자미와 넙치, 지중해 및 흑해 청어, 남극해 빙어 등의 어장 고갈을 유발시킨 주요 국가로서 한국은 엄연히 등재되어 있다. 좀 있다가 없어지더라도 아직은 많겠지? 넓이가 75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북해 전체에 13살 이상이 되는 대구는 단 100마리만 남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통 연령이 높은 물고기가 활발한 번식활동을 함으로써 개체군을 늘리는 역할을 하기에 이 수치는 매우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더 이상 침묵하고, 외면하고, 모른 체할 수 없다. 우리에 의해, 지금, 그 수많은 물고기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잦은 어획으로 명태가 자취를 감춰 썰렁해진 거진항의 모습 (출처 : 경향DB)


당장 행동해도 모자랄 이때에도 우리 사회는 굼뜨기만 하다. 국내의 대표적인 참치업체들은 2012, 2013년 그린피스의 지속가능성 조사 결과 전부 하위 등급을 받았다. 업계 1위인 동원은 과도하게 어업능력을 증가시키고, 위조된 어업권으로 조업을 하는 등 2년 연속 최하위를 장식하기도 했다. ‘지속가능한 수산업을 위한 새로운 발견’이라는 주제로 수협중앙회가 2011년에 개최한 ‘제1회 수산미래포럼’에서는 바닷물고기의 감소를 걱정하는 발표는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늘어난 고래는 솎아내 주어야 한다’는 제목의 발표가 버젓이 이뤄졌다. 절망 속 희망의 한 줄기 빛도 있다. 지난 3일에 국내 최초로 지속가능한 수산물 인증(MSC)을 받은 이른바 ‘착한 참치’가 출시되었다.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바다와 ‘물생명’들의 평안을, 야생학교는 염려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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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윤 2월9일 아침, 정조대왕은 역사적인 수원화성 행차에 나섰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고, 동갑이었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에 성묘를 가기 위한 것이었다. 보통이면 이동하는 데 하루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지만, 노모의 건강을 염려한 왕은 여행을 이틀에 걸친 일정으로 잡았다. 악대의 연주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무려 6000명의 신하로 구성된 이 성대한 행렬은 완행으로 화성행궁을 향했다. 옷깃이 스치고 흙을 지르밟는 집합적 소리가 지그시 봄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햇살은 부드러웠다.

물론 이 마지막 두 문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분위기까지 알겠는가. 하지만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정조대왕 능행도(正祖大王 陵行圖)를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날의 정취를 상상하고 당시의 풍경을 재구성할 수 있다. 구경을 막지 말라는 정조의 지시 덕에 백성들이 행렬 양옆에 모여들었는데, 배경을 보면 드문드문 난 초가집들이 논밭이나 풍성한 수풀과 어우러져 있음이 잘 드러난다. 당연히 토지가 건물과 도로에 의해 압도된 요즘의 모습과는 너무도 멀다. 그래서 이러한 경관생태학적 근거를 들어, 비록 화가가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더라도, 이 행렬의 구경꾼 무리 속에는 새와 곤충, 크고 작은 들짐승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거의 확신하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예측해본다. 행차의 목격자 중 수원청개구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수원청개구리? 수원에 사는 청개구리? 언제부터 동네마다 구별해서 부르기로 했나? 아니다. 청개구리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별도의 종이다. 구라모토 미스루라 하는 일본 과학자에 의해 1980년대에 수원에서 처음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 유일하게 한국의 지명이 학명(Hyla suweonensis)에 반영된 개구리. 중국, 일본, 러시아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청개구리(Hyla japonica)와는 달리 전 세계를 통틀어 한국의 중서부 일대에서만 존재하는 희귀 양서류. 지금은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이 되어버린 신세. 수원청개구리.

녀석들이 행렬을 봤을 것이라는 상상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양력으로 3월 하순경에 해당되는 행차일은 실제로 이들이 한창 활동할 시기이다. 행차 이틀째인 10일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는데, 정조는 신하들을 비 맞히는 것을 미안해했지만 행차를 강행하였다. 흠뻑 젖은 논두렁과 밭두렁으로 기어 나온 구경꾼 중에 수원청개구리가 있었을 가능성은 제법 있다. 사실 이 개구리는 수원, 화성은 물론 파주, 시흥, 안성, 평택 등 경기도 일대에 두루 분포하기에 오가는 길에 한번쯤 지나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알았건 몰랐건 말이다.

그런데 모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수원청개구리는 청개구리와 외관상으로는 거의 똑같다. 전문가만이 볼 수 있는 미세한 형태학적 차이는 있지만 이 역시 완벽히 신뢰할 수 없어 정확한 종 동정은 DNA 분석에 의지한다. 단, 딱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소리이다. 수원청개구리가 내는 짝짓기용 울음소리는 일반 청개구리와 전혀 달라 누구나 훈련을 받으면 구별해낼 수 있다. 목소리는 다르지만 생김새가 같다는 이유로 존재조차 몰랐던 생물이다. 그래서 없어지고 있다는 조용하고 슬픈 사실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질 위기에 처하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로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인간의 시점에서 하는 말이다. 수원청개구리는 우리보다 훨씬 오래된 한반도의 주민이다. 청개구리와 진화적으로 분화한 시점인 약 700만년 전은 인간이 침팬지와 갈라지기 시작한 때이다. 한민족이 그들의 존재를 깨달은 지는 겨우 30여년이지만, 그들은 우리의 아둔한 인식과 무관하게 이 땅에 떡하니 있어왔다. 연못 등 자연 서식지의 파괴, 논 면적의 꾸준한 감소, 독성 농약의 사용, 도로에 의한 서식지 파편화 등 온갖 악재를 거치며 오늘날까지 힘겹게 명맥을 유지해온 생물이다.

하지만 이제는 힘에 부친다. 수원청개구리는 하필이면 유난히 개발에 취약한 종이다. 습지의 면적이 넓어야, 주변의 식생이 무성해야, 인간으로부터 멀어야 산다. 논둑 주변의 잡초를 바짝 베면 살기 힘들어질 정도로 ‘생태적 디테일’에 민감하다. 개구리 과학자 아마엘 볼체와 생명다양성재단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현재 국내 개체군의 크기는 총 742마리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대부분 여기저기 흩어져 고립된 개체들이다. 곧 닥칠지 모를 임진강 준설 사업은 수원청개구리 최대 서식지 중 하나인 파주 마정리와 사목리의 논에 흙을 부어 메우겠다고 한다. 한국만의 고유한 양서류이자, 경기도 역사의 산증인인 수원청개구리. 이들을 보호할 지혜로운 어명이 내려지길 야생학교는 아뢰는 바이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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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나. 우리는 그렇게 투덜거리곤 한다. 쥐꼬리만큼 벌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나 세금이나 때리기에 바쁘지. 그러다가 무슨 일로 외국에 나가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지곤 한다. 입국 순간부터 며칠 동안 머물 예정인지, 숙소는 어딘지 시시콜콜하게 다 밝혀야 하다니! 그냥 좀 계획 없이 놀다 가면 안되나? 자기 나라에 들어가 돈 쓰겠다는데도 출입 자체에 대해 빡빡하게 구는 그 태도가 못마땅하다. 지구인으로서 이 행성의 구석구석을 마음대로 밟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불쾌한 구석이 있다.

잠시 다녀가는 여행객과는 달리 상당 기간 체류해야 하는 유학생이나 해외 거주자는 이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어느 나라 땅에 그저 있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과 시간과 비용은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다. 내 나라에 있을 때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내가 이곳에 존재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당한 목적과 이를 달성할 요건을 구비한 자에게만 ‘있을 재(在)’의 특권이 주어진다.

그렇게 돈과 능력과 추천서로 겨우 증명하여 얻어낸 체류의 권리는 기껏해야 몇 년. 얼마 지나지 않아 연장의 시점이 다가오고, 행여나 지체되기라도 하면 가만히 앉은 상태에서 범법자가 된다. 그래도 떳떳이 입국을 한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다. 조국의 혹독한 실상을 피해 보다 나은 나라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많은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합법적 통로가 차단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밀입국을 시도한다. 2009년 발표된 프랑스 영화 <웰컴>은 생존과 이주를 둘러싼 고뇌를 잘 그려낸다. 주인공인 17세 이라크 소년은 새 삶과 사랑을 찾아 영국으로 밀입국해보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도버해협을 수영하기로 결심한다. 우연히 만난 수영 코치의 인간애 덕에 이 허황된 꿈은 실현될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일들이 보통 그렇듯,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먹고사는 걱정 이전의 존재 자체에 대한 걱정. 비단 인간만의 신세는 아니다. 아니 인간 외의 생명이야말로 이 문제에 가장 심하게, 밤낮없이 시달린다. 도시나 마을처럼 인간계에 살면서 ‘사서 고생하는’ 종은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자연이 주민인 나라, 즉 자연계에 살고 있는데도 불법 체류자 취급을 받는 동물들에 대한 얘기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개발이나 거주 등이 엄격히 제한된 국립공원과 같은 공간은, 말하자면 동식물이 ‘원주민’으로 살 수 있도록 법적으로 구획된 공간이다. 인간은 엄연한 ‘방문자’이다. 비자에 해당하는 입장권을 잘 보유하고 법에 해당하는 등산규칙을 잘 지킨다는 전제하에서만 체류가 허락된다. 이를 위반할 경우 ‘추방’될 수도 있다. 마음껏 정상에 오르고 “야호”를 외쳐도 좋다. 하지만 천하를 얻은 듯한 마음만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 뿐, 산의 시민권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의 동물 주민들은 괴롭다. 툭하면 등산로를 벗어나 온갖 샛길은 물론 입산금지지역까지 파고드는 등산객들로 생활에 극심한 방해를 받는다. 산나무나 산약초를 불법으로 채취하여 귀한 먹이자원이 줄어들고, 함부로 던진 담배꽁초가 일으킨 산불로 보금자리가 홀라당 타버린다. 사람에게 방해를 전혀 받지 않더라도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같이 투쟁해야 하는 야생 나라의 삶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소음과 쓰레기, 심지어는 사냥에까지 시달리며 ‘내 집’에서 사는 기분이란 어떠할까. 엄연히 방문하는 쪽은 인간인데도 ‘생태적 무법자’ 따위의 칭호가 붙는 대상은 이상하게도 동물 주민이다.

멧돼지의 경우 천적을 제거하여 개체군 조절체계를 망가뜨린 게 누군데, 우리는 그들의 번식에 불편해하며 가끔씩 민가로 내려오는 개체를 ‘불법 체류자’로 취급하기만 한다. 어렵사리 지리산에 복원시킨 반달가슴곰은 존속 가능한 개체군 수준에 겨우 가까워지려 하자, 기껏 풀어놓은 일부 개체를 다시 잡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역시 사람 때문이다. 깊은 산속 대피소에서 삼겹살 냄새가 솔솔 풍겨도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줄 그 어느 곰이 알겠는가. 자신의 보금자리 근처에서 발견한 배낭과 침낭 그리고 잔반통을 ‘습격’한 죄로 이 곰은 ‘자연적응 실패’라는 억울한 누명과 함께 포획당할 가능성에 처해버렸다. 정해진 길로만 다니면 곰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데도 말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곰 위치정보 2만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탐방로변 10m 이내에 머무르는 비율이 0.5%에 불과했다. 자기 집에서도 눈치를 보며 생존하는 이 동물들은, 공단의 복원기술부장 이배근 박사의 말마따나 상을 줘도 모자랄 판이다. 적어도 동물의 나라인 숲에서만이라도 이들의 행복추구권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야생학교는 변론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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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존은 다르다. 그래서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다. 숨은 붙어 있지만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을 때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는 삶을 원하지만 생존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원통하다는 마음도 담겨 있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인생이 충분하다면 왜 이런 호소가 나오겠는가. 사람은 빵 또는 밥만으로 살 수 없기에 뭔가 질적으로 나은 생활을 하게 될 때 비로소 사는 데 급급하지 않은, 진짜 사람답게 산다고 우리는 말한다.

요즘처럼 경쟁 시대에 이게 웬 호사스러운 말인가 싶은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라. 정말로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지 않는지. 중요한 날엔 좀 근사한 데에서 식사하며 기념하고, 자주는 못 읽어도 어쩌다 기분이 동할 땐 미루던 책을 집어 몇 줄이라도 읽어본다.

내 직장과 커리어와 무관한 것인데도 말이다. 영화나 공연으로 굳어만 가는 감수성을 잠시나마 회복시켜보고, 새 옷 한 벌로 기분전환을 시도해보기도 한다. 강연장을 기웃거리고, 괜히 기부도 하고, 안 하던 봉사활동 기회도 찾아본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좀 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다. 정신을 고양시키고 싶은 동물이다.

그런데 잘 안 된다. 정말 원하는데도 환경이 받쳐주질 않는다. 갈 데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사실이다. 마음을 한 차원 더 성숙시켜줄 자유롭고, 아름다운 물리적 공간만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보듬고, 자극하고, 키워주는 정신적 환경도 없다. 옛날 옛적에는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요한 아침과 선비정신, 풍류와 강강술래의 나라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기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너무나도 어렵다. 정신은 잘 보이지 않고 말초적 감각만 눈에 띈다. 외출을 해보라. 식욕과 성욕, 그리고 소비욕의 코드를 꽂을 콘센트만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먹기에 대한 열기가 가장 기세등등하다. 어느새 문화가 깃들었던 것은 모두 먹을거리로 대체되었다. 아니, 이제는 먹을거리가 곧 문화라는 등식마저 성립한다. 모든 환송회도 환영회도 밥으로 시작해서 밥으로 끝나고, 모든 결혼식도 장례식도 식사가 핵심이다. 모든 동문회도 체육대회도 야유회도 식순(式順)보다 식순(食順)이 중요하다.


이 현상은 소위 말하는 ‘축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축제는 한 사회적 집단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드러내는 대표적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축제는 ‘단체로 뭔가를 먹는 행사’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얼핏 보면 축제라는 말 앞에 붙는 그 대상을 받드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을 마구 섭취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자리일 뿐이다. 물론 음식은 삶의 기초이다. 하지만 ‘식문화’라는 말처럼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에 따라 단순섭식이 될 수도 있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문화가 될 수도 있다. 은은한 도자기나 놋그릇에 소박하게 담겨 나오는 한정식에서 이런 문화가 엿보인다. 김밥의 색동 단면, 동치미에 띄운 어슷 썬 붉은 고추 한 조각에서 세련된 미학이 느껴진다. 시를 읊으며 주고받던 술잔, 곧게 앉은 자세로 하던 정자 위 식사엔 우리만의 멋이 있다. 먹을 때 먹더라도 멋있게 먹을 줄 알았던 한때 우리네 식문화에 비춰보면, 팔도강산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저잣거리로 만드는 이 오직 먹기를 위한 먹기는 도저히 문화라는 말을 붙이기가 힘들. 문화가 없는 식(食)인데 어찌 축제인가 의아할 따름이다.

식사의 문화적 측면이 혼란스러운 이때에 우리를 강타한 것이 바로 대구 ‘치맥’ 축제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리응원, 야식, 퇴근 후 한 잔의 정식 메뉴로 채택되면서 이곳은 닭튀김 냄새가 진동하는 땅이 되어버렸다. 알고 보면 ‘치와 맥’의 음식궁합이 안 좋다는 사실, 튀긴 음식과 지나친 육식의 건강상 문제, 매년 수억마리가 도축되는 공장식 축산 실태 및 이에 따른 윤리적 문제 등은 일단 차치하기로 하자. 안 그래도 차고 넘쳐나는 것이 치킨집인데, 그것의 초대형 블록버스터 버전이 탄생한 것이다. 한 기사의 제목대로 ‘40만명이 닭 40만마리를 해치우는’ 이 난리굿은 거의 닭에 대한 선전포고 수준이다. 끈적끈적한 기름과 맥주의 누런 바다에 해운대 인파처럼 모인 이 인해전술 닭 전쟁은 대구의 전통은 물론 아니요, 축제로 기릴 우리의 식문화도 아니다. 드라마 주인공의 한마디에 중국 사람들이 잠시 ‘치맥’을 좋아했다고 해서 한국이 김구가 말한 ‘아름다운 문화국가’에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느냐고, 흔히들 얘기한다. 그렇다면 돈벌이지, 문화는 결코 아니다. 축제라는 설레는 이름이 더 이상 천박해지지 않도록, ‘치맥’과 같은 합성어들이 제거된 식문화가 어서 돌아오기를, 야생학교는 염원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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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들려오는 힘찬 외침. “어서 오세요!”

그런데 사실은 그다지 힘차지도 않으며, 제대로 나를 향한 말도 아니다. 보통 손님을 보지도 않은 채 건네는 인사라, 받는 이도 화답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가게 내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도 빈약하기는 매한가지. 꼭 필요한 질문과 대답, 포장 및 결제에 관한 사항 외에는 할 말도 없다. 오히려 상업적 관계를 살짝이라도 벗어나는 대화를 시도했다간 수습이 불가한 어색함이 찾아올 수가 있다. 특히 남자 손님이 괜히 여자 직원에게 시도하는 몇 마디는 치근거림으로 오인되기 일쑤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수반되는 미묘함과 복잡성이 버겁게 느껴질 때, 차라리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이 제공하는 익명적 깔끔함이 편안하고 쾌적하다.

생활 속에서 온라인 세계가 비중이 급속도로 높아진 데에는 이런 사회적인 측면 말고도 여러 원인이 있지만, 오프라인 세계가 가져다주는 온갖 거추장스러움을 제거하고 싶은 현대인들의 마음도 분명히 큰 몫을 차지한다. 인터넷에서는 물건을 살 때에는 점원의 눈치를 볼 필요도, 부담에 눌려 서둘러 결정할 필요도 없다. 외출한답시고 차려 입을 것도 없이 그냥 추리닝 바람으로 몇 시간이고 눌러앉아 조목조목 끝없이 살펴도 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찾으러 사방팔방 뛰어다닐 것 없이, 검색 한 번이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바로 접속해서 원하는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진짜 만남에 수반되는 어색한 자기소개와 서투른 교제의 통과의례를 거치 않고도 ‘사회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터넷 쇼핑몰과 인터넷 카페가 완전 대세인 오늘날에선 이런 얘기조차 새삼스러울 뿐이다. 현실세계를 지칭할 때 ‘온라인이 아닌 상태’(오프라인)로 부르는 것만 봐도 인터넷 세상이 얼마나 중요해져 버렸는지 알 만하다.

하지만 인터넷 인간사의 신속함과 간편함 덕분에 생겨나는 새로운 문제들이 있다. 자살 카페나 성매매 채팅방, 도박 사이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잘 알려진 우리 사회의 이러한 그늘진 구석들은 여전히 큰 문제이지만 적어도 법의 테두리 안에 놓여 있어 규제를 받는다. 법률적 저촉을 떠나 이런 일들은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에 대놓고 벌일 수 있는 그런 활동들은 아니다.

그런데 생명경시와 자연파괴, 질병확산과 생물학대 등 온갖 심각한 문제를 유발함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제재는 물론 사회적 관심조차 얻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하나 있다. 바로 인터넷을 통한 야생동물 거래이다.



최근 ‘동물을 위한 행동’과 ‘슬픈과학자’라는 단체가 공동으로 조사한 <야생동물 개인 거래 및 사육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두 개의 주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거래된 야생동물은 2012년 11월부터 2013년 10월 사이에 무려 1만7573마리에 이른다. 하루에 약 48마리꼴로 매매가 이뤄진 셈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와 고양이 같은 일반 반려동물이 포함되지 않은 수치라는 점이다. 햄스터, 고슴도치, 토끼 등 비교적 ‘친근한’ 동물은 물론 프레리독, 페렛, 날다람쥐 등의 포유류 다수와 양서파충류, 어류, 곤충, 거미, 심지어는 연체동물까지 망라한 인터넷 쇼핑몰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멸종위기 종인 긴팔원숭이나 슬로로리스까지 매물이다. 많은 경우 거래가 성사되면 동물을 상자에 넣어 구멍 몇 개 뚫고 택배로 배송해버린다. 배송 도중 죽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단서가 거래 약정의 일부이다.

머나먼 땅에서 들여온 야생동물은 애완동물이 아니기에 제대로 된 사육방법도 없다. 대부분의 동물은 나이나 성별과 같은 기초정보도 제공되지 않은 채 보내진다. 엄연히 상자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생명이지만, 짐보다 더 짐짝 취급을 받는다. 아무나 거래에 참여할 수 있어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물을 구매한 아이들이 동물을 급히 처리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키우다 지겨워진 동물은 다른 동물로 바꾸는 물물교환도 빈번하다. 반드시 동물끼리 바꾸지 않아도 된다. 돈을 얹어서라도 키우던 고슴도치를 전자기기와 교환하길 희망한다는 글마저 올라온다.

법의 사각지대에 안전하게 자리 잡은 야생동물의 온라인 홈쇼핑은 클릭만으로 밀림의 생명체를 오토바이로 배달받는다. 국제적멸종위기종의 불법보유의 경우는 처벌이 가능하지만 몰래 방사해버리거나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다. 낯선 환경에서 갑자기 홀로 살 길을 찾아야 하는 동물은 반드시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불법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명에 대한 폭력적 속박, 착취와 유린은 설사 법이 현실을 따라가 주지 못한다 해도 절대로 용인될 수 없다. 이에 마땅히 우리는 분노하고, 야생학교는 고발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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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즐겁지만 또한 피곤하다. 나의 편안한 보금자리로부터 벗어나 어떤 낯섦과 마주하는 일은 의외로 힘이 드는 경험이다. 구경하려고 많이 걷다 보면 물론 더욱 그렇지만, 몸이 최대한 편안하도록 앉아서 돌아다녀도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녹초가 돼버린다. 매 끼니를 잘 먹고 평소보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도 마찬가지이다. 최고의 럭셔리 호텔에서 아무리 휴식에 탐닉한다 해도, 나만의 소박한 공간에서 쉬는 것만큼 에너지가 재충전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우리의 근접 환경과 엄청나게 다양한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들이마시는 물과 공기의 미세한 화학적 조성과 향기, 내가 걷는 길의 교통신호 체계와 공간구성, 내가 쓰는 언어의 문법과 어휘와 뉘앙스.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이 익숙한 세계의 시스템에 접속하여 정신적·물질적으로 원활한 대사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잘 돌아가던 이 모든 것들이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통신망을 검색하는 모바일 기기처럼 우리의 감각과 정신은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적응 및 훈련 모드에 돌입한다. 비행기가 멀리 옮겨다 준 몸이야 멀쩡하지만 실은 눈에 안 보이는 무수한 탯줄을 끊고 달아난 신세에 다름 아니다.

연세대 측에서 백양로 공사현장을 숲 사진으로 막아둔 모습 (출처 :경향DB)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 등 각각의 생물체를 개별적인 존재로 국한시키지 않고, 그것이 속한 세계와의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생태학적 관점이다. 죽은 동식물의 표본을 모아 종류에 따라 늘어놓는 고전적 자연사 박물관이나,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 고립된 울타리에 가두어 관찰하는 동물원은 과거에 자연을 대하던 자세이다. 동식물이 자생하는 물리적인 터전인 유형적 서식지는 물론, 복잡다단한 생태적 관계를 아우르는 무형적 서식지까지 고려하는 것이 오늘날의 자연관이다. 신체적 고통을 주지 않아도 자유를 제한하거나 사회적으로 차단시키는 감금형 또는 귀양살이를 하나의 처벌로 여겨온 인류사를 생각하면, 이런 맥락이 자연에까지 범위가 확대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생명에 대한 이러한 현대적 시각이 아직 사회 곳곳에 충분히 깃든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개발과 보존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 생기면, 문제가 되는 그 자연을 ‘옮기는’ 해괴한 해법이 태연하게 제시되고 있다. “개발지로 선정된 곳에 서식하는 나무 ○○그루를 옮겨심기로 결정했다.” 환경부나 산림청과 같은 관련당국으로부터 심심찮게 들리는 말이다. 마치 물건이라도 치우듯 ‘옮기기’는 간편하고 훌륭한 대안인 양 많은 국가과제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이런 조치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옮겨도 되는 건가?”이다. 기술적 어려움이나 법률적 가능 여부가 궁금한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차오르는 질문의 진짜 내용은 이것이다. “자연을 그런 식으로 다뤄도 되는 건가?”

실제로 생태학계에서 사람에 의한 동식물의 이주는 뜨거운 논란거리이다. 한 생물의 ‘이입(relocation)’은 그 생물을 보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이입지의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도 높다. 이입은 외래종 도입의 위험을 초래하고, 진화적 역사와 생태적 순환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논란조차 그대로 뒀다간 멸종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생물에 한해서 이뤄지고 있다. 멀쩡히 서 있는 산림지역을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 위해 대충 옆으로 치워버리는 일은 이입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옮겨심기’는 버젓한 생태학적 정책처럼 협상 테이블에 수시로 올라오고 있다. 생태학이 아니라 원예학의 눈으로 숲을 보는 수준이다. 옮겨 심는 과정에서 나무에 미치는 해악, 나무를 둘러싼 고유한 생태계 등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나무 몇 그루 살렸으니 된 것 아니냐는 식이다. 하지만 그조차 정말 살렸는지는 미지수이다. 인도 날곤다 지역에서는 2010년에 고속도로 확장공사의 일환으로 수령이 몇백 년에 이르는 나무 27그루를 옮겨 심었지만 모두 죽고 말았다. 예외적으로 허락된 옮겨심기가 성공하려면 이입지의 생태적 유사성, 이입기술의 적절성, 사후관리의 체계성 등의 까다로운 조건이 엄격히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나마도 영국의 통합자연보전위원회가 밝히는 것처럼 “이동은 원위치 보전(in situ conservation)이 가능한 한 절대로 수용 가능한 대안이 아님”을 전제로 이 모든 얘기가 이뤄져야 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옛말에 담긴 생태학적 의미가 깊다고, 야생학교는 되새긴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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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 전의 일이다. 아침 출근길에 나선 나의 아버지는 올림픽대교를 달리고 있었다. 동작대교로 넘어가는 곡선구간에 이르자 길 한가운데에 아주 작은 보행자들이 눈에 띄었다. 엄마 오리와 뒤따르는 4~5마리의 새끼들. 아마도 한강에 있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인지 종종걸음으로 이 위험천만한 도로를 건너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속도를 급히 줄이고 차를 최대한 비켜서 몰았기에 최악의 사고는 면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아슬아슬한 모면도 겨우 시작일 뿐, 그 방향 그대로 계속 갔다간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다. 과연 오리 가족이 저 무시무시한 왕복 8차선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운 좋게 살아서 그 고비를 넘겼던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넘어도, 넘어도 끝이 없는 거미줄 같은 도로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턱이 없다.

앞을 향해 돌진하는 데 바쁜 우리네 삶의 직진운동은 사실 무단횡단 조류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무조건 앞으로 갈 뿐이다. 오직 기계적인 전진만이 허락된 이 이상한 공간인 도로에 뭣 모르고 들어온 동물은 ‘이물질’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제거된다. 이들은 문명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일종의 ‘자연 불순물’에 불과하다. 대지를 촘촘히 수놓은 거미줄 같은 도로망은 어떻게든 최단 직선거리로 이동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물론 이 화려한 교통 인프라는 오직 인간만을 위한 왕도이다. 자연은, 멀리 돌아가야 한다. 아예 돌아다닐 생각을 말거나, 가뭄에 콩 나듯 놓인 좁다란 생태통로를 이용하라는 뜻이다. 우회할 생각이 없으면 죽음을 각오한 횡단을 감행해야 한다. 실제로 연간 약 1만마리 이상의 동물이 이 어리석은 도박을 시도하다가 로드킬(roadkill)을 당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꿩, 너구리, 구렁이, 두꺼비, 삵, 고라니 등 온갖 종이 해마다 ‘사망자’ 명단에 오른다. 도로에 가지 않는 동물은, 도로가 직접 찾아간다. 인간의 직진본능은 도롱뇽이야 뭐라 하건 천성산을 관통해야 직성이 풀린다. 돌아가라니? 천만의 말씀! 내 갈 길에 놓였다면 고목(古木)이라도 우리는 둘러갈 마음이 없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활강경기 예정지인 강원도 정선군 가리왕산의 나무 5만여그루는 스키 선수들이 내려갈 길을 터주기 위해 벌목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중에는 수령이 무려 600년에 이르는 주목도 포함되어 있지만, 올림픽은 인류 화합의 잔치이기에 자연은 초대 손님에서 제외되는 모양이다. 위대한 인간사를 전진시키는 과정에서 동식물 따위는 거치적거리는 부산물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어떤 경우라도 전진을 멈추지 않는 이 사회가, 길을 가로막아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블록버스터 영화 <어벤져스2>의 서울 촬영으로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교통통제 소식은 마치 민족의 명절처럼 환대받는 분위기이다. 마포대교, 강남대로, 청담대교 등 주요 교통요지가 거대 할리우드 자본의 사적인 용도로 점유되는데도 기꺼이 둘러가겠다는 이들이 즐비하다. 한때 한강의 대표적인 애물단지 사업으로 손꼽히던 세빛둥둥섬은 가상의 IT 연구소 역할이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명소가 되어버렸다. 영화 속 서울시의 카메오 출연은 기껏해야 로봇 악당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역할에 그치지만 ‘홍보’의 기쁨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은 경제적 산수에 무능한 사람처럼 취급받는다. 시민의 권리 운운하는 이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대략 이런 식이다. “너의 그 하찮은 불편 조금만 감수하면 4000억원의 홍보효과가 발생하는 걸 모르냐?” 허황되기 짝이 없는 이 금전적 계산법을 신봉하는 영화진흥위원회는 아예 30억원이라는 현금 ‘할인혜택’까지 제작진에게 갖다 바쳤다. 제대로 검증될 수도 없는 경제효과의 논리가 맞나 틀리나, 또는 그 정확한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핵심은 공공영역의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이 땅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존재와 그들의 삶이 부차적인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전혀 공익적인 성격이 아닌 일에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순순히 양보해야 하는 시민은 무소불위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활보하는 대로(大路)에 곁다리로 전락한다. 심지어 구경꾼의 역할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는 초라한 신세이다. 여기에 적은 제작비로 예술성을 추구하는 독립영화 종사자들이 느낄 분노와 절망은 감히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인간이 전진하는 데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자연, 그 로드킬의 상징성이 와 닿는 요즘이라고, 야생학교는 탄식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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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비좁을 대로 비좁아진 도시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주 약간의 프라이버시라도 얻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지하철 의자의 가장 끝자리는 적어도 한쪽은 누군가와 부대끼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모든 승객들의 제1지망 좌석이다. 버스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빈자리부터 골라 앉고, 일단 한 명씩 채워진 다음에 두 번째 착석 라운드가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원자 오비탈에 전자가 채워지는 방식을 설명한 훈트의 규칙과 닮아 학창 시절 화학시간에 자주 거론되는 예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거의 차이가 없는 옵션을 두고 벌이는 다소 우스운 경쟁이다. 하지만 인구과밀의 콩나물시루 속에 매일 산다고 해서 생명으로써 자존감과 존엄성 자체가 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타인과 수시로 개인 영역을 겹치게 됨으로써 의도치 않은 침범이 빈번해지고, 그로 인해 만인이 느끼는 속상함과 불쾌감은 온실가스만큼이나 왕성하게 생산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의 문제는 바로 가시적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진다. 말하자면 내가 자리에 먼저 앉은 이상 적어도 누군가 무턱대고 내 허벅지 위에 앉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100% 보장할 순 없지만 웬만해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소리에 관해서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원치 않는 음성신호가 제멋대로 내 청각기관 안을 헤집고 들어오는 일은 엄연히 개인의 고유영역을 침투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물리적 영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타인이 낸 소음이 내 귓바퀴에 닿을 때 ‘찰싹’ 하는 소리가 나지 않아서일까? 만약 소리를 손으로 만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셈이다. 옆 사람을 툭툭 건드리거나, 꼬집거나, 귀찮게 구는 일 정도는 예사. 지하철 한 칸에 탄 모든 사람들을 집단폭행하는 것과 진배없는 야만적 행위도 다반사이다. 게다가 소리의 크기 또는 강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본인들이 나서서 개인정보를 유출하질 않나, 조금도 듣고 싶지 않은 대화의 내용을 무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지향성 음향장비’ 시연회에서 참관하던 경찰과 취재진이 귀를 막고 있다.(출처: 경향DB)


대중교통수단에서는 그나마 소음이 당당한 문젯거리로 취급을 받는다. 층간소음, 실외기로 인한 소음 등도 제대로 해결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사회적 반응이 느릿느릿하게 일어나고는 있다. 그러나 진정한 소음의 사각지대가 하나 있다. 바로 길거리이다. 가장 심한 이동통신 매장을 비롯하여 술집, 화장품가게, 슈퍼, 심지어는 노래방까지 누군가의 그 부끄러운 가창실력을 버젓이 길가에 쏟아낸다. 분명히 임대한 공간 외에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이 상점들은 뻔뻔스럽게도 점포 바깥 공간도 자신의 소유로 여기고 있다. 길 쪽으로 온갖 소음을 내뿜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건 내 오디오 시스템을 이웃집 안방에다 설치해놓는 격이다. 보행자는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 소리공격을 온몸으로 받으며 걸어야 하는가? 외부를 향해 소리를 트는 모든 행위는 타인의 음성학적 공간에 대한 불법점거이다. 물론 점포 앞 공간 자체를 점유하는 일도 불법이다. 거리에 물건을 내놓거나 간판을 설치하는 일은 모두 불법적인 도로점용행위에 해당되는 단속대상이다. 이런 규칙이 조금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동네 한 바퀴만 돌고 와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제 공간도 그런데 소리까지 기대한다는 건 무리라고 결론짓기 쉽다. 바로 이럴 때 눈을 돌려야 하는 곳이 자연이다. 우리가 무시하고 있던 것의 중요성을 늘 일깨워주는 곳이지 않던가?

그리 대단치 않은 문제로 치부되어온 소음은 2000년대부터 생물체에게 미치는 심각한 악영향이 본격적으로 밝혀지면서 이젠 활발한 연구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가령 도심에 사는 박새는 주변의 시끄러운 교통상황 속에서 의사소통하기 위해서 평소보다 높은 주파수로 노래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여러 조류와 영장류, 고래, 설치류 등에서도 나타났다. 어떤 개구리는 차 지나가는 소리 때문에 이성의 짝짓기 노랫소리를 잘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초음파 대신 소리로 먹이를 포착하는 박쥐는 차량이 많은 도로를 피해 다녔고, 소음 때문에 포식자의 접근소리를 듣기 어려운 다람쥐들은 밥 먹다 말고 자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야 했다. 동물에서 경계행동의 증가란 여타 섭생 또는 번식행동의 감소를 의미한다. 소음은 땅 위에서만 진동하지 않는다. 석유 및 가스 탐사에 쓰이는 음파, 군사 작전용 초음파, 그리고 대형 선박이 지나가면서 내는 소리로 인해 수많은 고래들의 의사소통을 극심하게 방해함은 물론, 청력상실 심한 경우는 죽음에까지 내몰고 있다. 좀 시끄러워도 참으라고? 소음은 그 어느 환경오염 못지않게 심각한 현상이다. 이어폰을 꼽거나 눈살만 찌푸려서 될 일이 아니다.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다면, 소리도 마찬가지라고, 야생학교는 속삭인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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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세계는 분노하고 있다. 군위안부 강제동원이나 난징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아예 그런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에 우리는 아연실색한다.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반성의 결여만큼 사람들의 폭발적인 분노를 사는 일은 없다. 그런데 반인륜이라는 말이 사람 인(人)자를 쓰기 때문일까? 어쩌면 인간과 과거사에 치중한 나머지 지금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홀로코스트에도 우리는 충격적일 정도로 무덤덤해져 있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면 내 주장은 이미 증명된 셈이다. 이 참담한 광경을 얼마나 더 봐야 이에 응당한 분노를 느낄 것인가? 그저 행정적인 ‘처분’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당하는 이 대학살은, 이 시대의 가장 검은 비극이자 소위 문명이라 스스로를 부르는 이 사회의 가장 섬뜩한 위선이다.


생과 사. 대체 누구의 소관인가. 콜로세움 한 중간에서 헐떡이는 검투사를 보며 엄지를 위로 치켜세울 것인지 아래로 내릴 것인지 결정하는 로마 황제의 모습. 과연 우리는 그 시대에 비해 발전된 역사 속에서 살고 있는가. 적어도 로마 황제는 한 번에 한 사람씩을 ‘살처분’했다. 반경 3㎞ 안의 모든 개체를 숙청하는 따위의 만행은 그 악명 높은 칼리굴라도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당국은 사태가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 한다. 그런데 재앙은 이미 도래하지 않았는가? 아니, 멀쩡한 닭과 오리 수십만 마리를 우리 손으로 생매장한 것이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이 재앙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고병원성 바이러스가 발생하고 퍼지도록 한 것도, 무고한 가금류를 대량살상하기로 한 결정과 집행도, 모두 인간이다. 이 사태에서 불가항력적 요소를 찾으려는 시늉으로 책임을 면해보려는 시도일랑 생각도 말자. 저승사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수도권 첫 AI 의심 닭 예방적 살처분(출처: 경향DB)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이 정도로 강력해지고 지구적으로 창궐하게 된 압도적인 주원인이 공장식 축산과 유통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자연 상태의 조류 개체군은 유전적 조성이 다양해서 한 가지 바이러스에 몰살당할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오직 알과 고기의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인공선택된 양계장의 포로들은 유전적으로 너무나 취약해서 병원성 물질의 침투에 속수무책이다. 날개를 제대로 펼 수조차 없는 공간에 평생을 살며 운동부족에 시달린 이들의 면역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저항성이 없고, 이를 억지로 얼버무리기 위해 투여되는 각종 항생제와 호르몬제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환자나 다름없는 이들은 서로 격리되긴커녕 완전 밀착·밀집된 채 서로의 배설물에 뒤범벅이 되어 그 삶 같지도 않은 삶을 잠시 누린다. 


이런 맥락에서 1996년 고병원성 H5N1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된 곳이 위생 상태와 사육조건이 매우 열악한 중국 남동부와 아시아 지역의 가금농장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가금의 공장식 축산의 열렬한 선도국가 중 하나인 한국은 조류독감이 처음 발생한 2003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500만 마리의 가금류에게 매립사형을 선고하는 경기(驚氣) 반응을 일으켰지만, 이 중 실제로 감염된 개체는 121마리에 불과했다. 대체 이게 어떤 의미에서 ‘대책’이란 말인가? 정신이 혼미해진다. 벼룩이 왜 생기는 것인지는 완전히 잊은 채, 초가삼간은 물론 나라 전체를 태우고서도 스스로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고 있다. 마땅히 ‘처분’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건 닭이나 오리가 아니다.


우리의 경악스러운 뻔뻔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폐사한 가창오리 몇 마리에서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검출되자마자 온 나라는 철새를 범조(犯鳥)로 지목하고 거의 선전포고에 가까운 대응태세를 갖추고 있다. 오히려 야생조류가 가축들로부터 감염될 수 있다는 가장 기초적인 생각조차 막무가내로 거부할 것인가? 세계 각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책임전가’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2007년 영국조류학회지 ‘아이비스(Ibis)’에 조류독감의 확산과 야생조류의 역할에 대한 리뷰논문이 발표되었다. 


야생 철새도 바이러스를 옮길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병의 양상은 철새의 이주패턴과는 잘 상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금 유통 및 수출입과 같은 인간 상업행위의 시공간적 분포와 강하게 일치한다고 이 연구는 결론지었다. 야생조류가 독감의 전파에 기여한다고 해도 국지적인 수준이며, 전 지구적인 판데믹(pandemic) 유행병을 초래한 명백한 주체는 인간과 축산경제이다. 


이제 제발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치우자. 아무렇지도 않게 치킨을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축의 사육환경은 혁신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가격상승은 수용되어야 한다. 기존의 축산 시스템으론 안된다고, 지구가 호소에 호소를 거듭하고 있다. 이 목소리마저 땅에 묻어버리는 일은 하지 말자. 야생학교는 호소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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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에서 아직도 곤충 채집이 가능하던 시절, 우리는 포충망을 메고 공원을 탐험하며 여치, 땅강아지, 풍뎅이 등을 잡곤 했다. 일부는 집에 데려가 키우기도 하고 일부는 좀 보다가 그 자리에서 놔주었다. 돌이켜보면 멀쩡히 잘 사는 녀석을 괜스레 잡아와 좁은 수조 안에서 여생을 보내게 한 일들이 무척 죄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그런 종류의 취미를 모두 그만두었고, 자유를 누리는 생물을 관찰하는 재미만을 추구하기로 했다.

한때 동물에게 못할 짓을 하던 나였지만, 그것도 주변의 몇몇 아이들에 비하면 매우 신사적인 편이었다. 손가락으로 잠자리의 머리를 튕겨 날리고, 나뭇가지로 송충이 꼬치를 만들고, 개미굴에 약을 붓고 기어 나오는 족족 눌러 죽이던 아이들의 잔인무도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그렇게 특이한 경험은 아니다. 얘기를 해보면 누구나 이런 기억이 하나쯤은 있다. 어린애야 뭘 잘 모른다고 치자. 어쩌면 매일 컴퓨터 게임에만 매달리는 것보단 차라리 벌레라도 괴롭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른이, 심지어는 한 집안의 가장이 자연을 유린, 착취, 포획, 살상하는 재미에 폭 빠져 지낼 때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여기서 키워드는 재미다. 즐거움을 누리는 방식이 어떤지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수준과 품격이 결정된다. 영화에 나오는 악당은 주인공을 괴롭히는 희열에 껄껄대고, 그것을 보는 관객은 분노한다.

“누구라도 즐거우면 된 거 아니냐”며 극장을 나오는 이는 없다. 기분만 좋다고 해서 ‘장땡’이 아니라, 그 기쁨이 과연 정당하고 자연스러운지가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꽁꽁 언 강에 수십만명이 시위대처럼 몰려 있다. 망치나 전기톱, 날카로운 낚싯바늘과 같은 장비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목적은 단 한 가지. 얼음 아래 요놈을 어떻게 좀 낚아볼까. 뭣도 모르는 물고기들은 위에서 벌어지는 불안한 북적거림이 심상치가 않다. 비밀 대피소에 숨어 독일군의 구둣발 소리를 들으며 제발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유대인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상상해본다.

이내 엄청난 수의 낚싯바늘과 어망이 차가운 물밑으로 내려진다. 휘릭. 한 마리가 잡혀 끌려 올라간다. 수면 위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곧 옆에서도 즐거운 비명이 하늘을 가른다. 그 옆에서도. 저기서도. 정말로 물 반, 고기 반 상황이라는 믿기지 않는 낚시 낙원의 환희에 빠진 군중은 추위도 까맣게 잊은 채 산천어를 향한 욕망을 이글이글 불태운다.

 

화천 산천어축제 오픈 (출처 :경향DB)

잡힌 고기는 실제로 바로 불 위에서 익혀지고, 그러기가 무섭게 입속으로 사라진다. 미국 CNN방송이 꼽은 세계 7대 겨울철 불가사의 중 하나인 강원 화천의 산천어축제장 모습이다. 짐작컨대 ‘불가사의’라는 말 속에 함의된 냉소를 알아차리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고요한 산골짜기를 뒤흔들어 놓는 이 얼음판 아수라장이 가져다주는 인문학적 충격을 차치하고라도 문제는 이미 산적해 있다. 축제를 위해 화천천의 바닥을 굴착기로 긁어내고, 빙판을 인조적으로 만들기 위한 물막이 공사로 하천의 수중생태계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청정 자연을 표방하면서도 양식으로 기른 물고기로 채우는 것도 모자라, 부족분을 일본산 잡종으로 메우면서 외래종을 대량으로 강에 유입시켰다. 포식성이 강한 이 종은 열목어 등 토종 민물고기를 잡아먹어 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다. 산천어 말고도 조용히 겨울을 나려는 다른 수중생물들이 어떤 고욕을 감내해야 하는지는 설명이 불필요하다.

하지만 핵심은 여전히 재미다. 어째서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방식은 이토록 파괴적이어야 하는가? 꼭 자연을 취하고, 득하고, 내 것으로 삼아야만 쾌감이 느껴지나? 점잖게 관조하고 음미하며 자연의 안녕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도 지루한가?


세계적으로 친환경적인 생태관광 산업은 관광시장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고, 그냥 보는 행위(잡아먹는 것이 아닌) 자체가 핵심적 재미인 탐조활동은 미국, 유럽, 일본에서 이미 굳건히 자리 잡은 취미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움직임은 발견된다.

그러나 아직도 대세는 한 마리라도 잡아야 직성이 풀리고, 초장에 찍어 먹어야 비로소 흡족해한다. 하지만 그 어떤 말로 미화해도 이 빙판 위의 킬링필드가 집단적 살육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모두가 사냥에 혈안이 된 현장을 ‘축제’라 부르는 것이 극소수에게만 이상하게 들리는 것인지, 야생학교는 어리둥절하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sanhaki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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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주 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이 내뱉어진 단어를 집계해본다면 아마 ‘추워’가 단연 1위가 아닐까. 이사갈 때 유리잔이 깨지지 않도록 감싸듯이, 칭칭 둘러매어 완전무장한 이들의 깊숙이 숨겨진 얼굴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모자와 장갑, 내복과 문풍지로 달성하고자 하는 단열과 보온은 겨울철의 기본 대응책이다. 외부 기후와 관계없이 체온을 한결같이 유지해야 하는 정온동물의 운명은 어쩌면 이리도 가혹한가. 안에서 아무리 덥게 해놔도 밖에 나가자마자 추위를 타는 이 신체가 야속하기만 하다.


가만, 동물이라고 했겠다. 나만 따뜻하면 그만인 수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의 세상을 헤아려본다. 잔뜩 껴입고 난방기 바로 옆에 앉은 나도 오들오들 떠는데, 대체 밖의 녀석들은 어떻게 이 모진 겨울을 나는 것일까. 산책하러 나온 강아지들도 스웨터 하나씩 걸치고 있는 마당에, 야생동물이라고 해서 추위불감증인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땅속에 굴을 파거나 나무에 구멍을 내고 들어가 있겠지, 하면서 염려한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사이에 눈이 내린다. 아침 해에 빛나는 새하얀 세상은 완전무결하게 아름답다. 소복이 쌓인 모습이 꼭 솜털이불 같아 괜히 더 따뜻해 보이지만, 실제로 만지면 얼마나 차가운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눈은 그저 비유적으로만 이불 같은 것이 아니다. 활용할 줄 아는 생물에게 눈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환경을 제공한다. 눈은 열전도율이 낮은 물질로서 흙 위에 쌓이면 눈 바로 아래의 지열을 유지시켜주는 훌륭한 단열재 역할을 한다. 이러면 바깥보다 소폭 따뜻한 눈 아래층에는 수증기가 생성되고, 이는 승화작용에 의해 위쪽으로 확산된다. 눈 표면에서 찬 공기와 만난 수증기는 압축되고 응결되어 단단해지고, 이렇게 됨으로써 단열효과는 배가된다. 이러한 수분의 수직이동은 점차 아래쪽에 공간을 만들게 되는데, 바로 여기가 여러 동물의 겨울철 보금자리가 되는 곳이다. 온갖 들쥐, 뒤쥐 등의 설치류와 곤충, 거미 등의 무척추동물이 이곳에 머물며 식물의 뿌리껍질 등을 갉아먹으면서 겨울을 나고, 포식자들은 이들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며 위에서 덮치거나 직접 들어가 사냥해서 추운 계절을 연명한다. 땅에서 생활하는 뇌조 등은 물론, 참새와 같은 새도 직접 눈 속을 파고 들어가 밤을 지내기도 한다. 북극곰도 눈으로 된 굴속에 5~6개월씩 틀어박혀 새끼를 키운다. 기온이 영하 50도에 이르는 극한적 추위에도 이 눈 속의 은신처는 0도 정도로 유지된다. 우리 기준에서야 여전히 추울지 몰라도, 야생 동물들에겐 버틸 만한 거처이다.


스코틀랜드 스털링의 동물원에서 팽귄이 눈사람의 당근 코를 빼려 안간힘을 쓰고있다(출처 :경향DB)


우리의 기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인간 신체의 모공 개수는 침팬지나 고릴라와 거의 같지만 대부분 피부 밑에 남기 때문에 보온엔 소용이 없다. ‘벌거벗은 유인원’으로 진화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옷가지와 외부 열원에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털을 사용하건 눈을 활용하건, 추위에 대응하는 원리는 같다. 찬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단열을 하고, 내부에서 형성된 열은 빠져나가지 않도록 보온을 한다. 놀라운 것은, 이 가장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겨울 생존의 법칙이 대한민국에서 내팽개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력난으로 인해 난방을 한 채 문을 열어놓는 가게들의 단속이 얼마 전부터 시작되었다. 시정 대상인 가게들마다 반응은 한 가지이다. “문을 닫으면 손님이 안 와요.” 이토록 어이없는 발언이 또 있을까. 첫째, 잠기지도 않은 문을 못 여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문을 닫아놔야 하는 카페와 식당은 텅 비어있어야 할 것 아닌가. 둘째, 소비 의사가 있는 사람 중에 문 열기 싫어서 구매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물건이 시원찮은 것이지 문이 가로막는 것이 아니다. 셋째, 손님이 안 온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올 사람은 오지만 그냥 흘러들어오는 사람까지 빠짐없이 건지고 싶은 욕심일 뿐이다. 넷째, 동문서답이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서 실시하는 것이지, 가게의 영업실적을 묻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함께 사는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자세이다. 다 같이 협조해서 보릿고개를 넘겨보려는 가족회의 자리에서 대뜸 “나는 배불리 먹을래”라고 얘기하는 뻔뻔스러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겨울은 추우니 문을 닫자. 초등학교에서도 가르칠 필요가 없는 이런 기초적인 명제마저 재확립되어야 하는 세상인가, 야생학교는 한탄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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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집을 나선다. 조금 춥긴 하지만 옷깃을 여미고 씩씩하게 걸으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해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와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빈다. 콩나물시루처럼 운반되는 것이 대단히 유쾌하진 않지만 대도시에 사는 이상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교통체증도 참을 만하다. 그런데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여지없이 나의 아침을 망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뭔고 하니 바로 성형수술 광고다. 불행히도 한국의 성형수술 메카인 서울 강남 및 압구정 일대를 자주 통과해야 하는 나로서는 매일 아침마다 이 저주스러운 기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곤욕을 치른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대문짝보다 훨씬 큰 광고판은 지하도 양쪽을 도배하고 그 기괴한 눈과 코를 내게 들이민다. 눈을 감아 시각정보를 차단하려 하면 버스의 음성광고가 고치라며, 뜯어 고치라며 나를 괴롭힌다. 이어폰을 꼽고 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나는 소음차단용 음악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고요하고 맑은 아침으로 하루를 열고 싶은 사람이다. 이곳이 모닝 캄(Morning Calm)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모두가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것인가? 지하철에서 눈을 둘 곳을 찾으며 나는 묻는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사회의 일부분으로 완전히 수용하기로 한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공공장소를 성형 홍보관으로 칠갑을 하겠는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양과 질의 성형 칭송 메시지가 우리의 일상을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의술로 얼굴을 고치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원래 세상에는 별의별 업종과 서비스가 있고, 사회가 분화될수록 이런 현상은 심해진다. 문제는 돈과 기술을 이용해서 인간 정체성의 핵심인 얼굴을 조작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지고, 너무나도 버젓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형외과 간판과 버스 광고(출처: 경향DB)


언제부터인가 성형은 인간의 당연한 관심사이자 생활영역인 것처럼 우리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성형 광고는 맛있는 음식이나 저렴한 통신요금, 꿈의 여행지를 알리는 광고와 동등한 위상을 누린다.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다소 ‘중립적’인 표현을 쓰던 것은 옛말, 오늘날의 성형 광고 문구는 온 국민을 마치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 듯 훈계하고, 훈육하고, 격려한다. 살과 뼈를 깎음으로써 ‘숨겨진 진정한 아름다움을 되찾으라’고 하며, 남을 질투할 시간에 주저 말고 ‘지금 행동하라’고 다그친다. 심지어는 성형 선생님의 ‘정성’을 부모님의 사랑과 스승님의 은혜와 동격으로 추앙하는 대담함까지 보인다.


얼굴 바꾸기가 이토록 가벼운 일이라면, 대체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하기나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원래를 변화시키는 것이 그토록 아무렇지 않다면 ‘진짜’와 ‘짜가’의 구분에는 왜 그리도 집착하는가? 외모지상주의에 찌든 사회를 탓하며 칼날에 몸을 맡기는 이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당당하기 위해’ 신체를 찰흙처럼 주무르는 것은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스포츠 선수의 약물투여, 학력위조, 허위광고를 지탄하는 데에는 여념이 없다. 술, 담배, 연애는 못하게 해도, 수험생의 노고를 성형 선물로 치하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식 사랑의 마음이란다.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X는 한때 백인처럼 머리를 펴기 위해 양잿물로 된 콩크라는 젤로 머리를 감았다. 하지만 훗날 그는 백인으로부터 받은 성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자신의 흑인 조상을 기리는 뜻에서 ‘X’라는 성을 채택했다. 자신의 기원과 정체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었다. 언젠가 성형 사실이 탄로날지도 모르는 불안함 때문에 성형을 주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고수하고, 나로 남고 싶은 마음이 이 성형 아우성에 불편해하는 것이다. 성형업계의 난잡한 메시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버리라는 말 하나로 귀결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강산, 있는 그대로의 풍경, 있는 그대로의 동네가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이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머리카락 하나조차도 소중히 여기며 당나라식 변발을 거부했던 우리의 정신은 대체 어디로 다 자취를 감추었는지 알 수 없다. 빠른 변화를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끝없는 자기부정을 심어준 것은 아닌지 돌아봄이 절실한 때이다. 적어도 나의 소박한 아침 등굣길 정도는 이런 무거운 상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야생학교는 소망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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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성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몰려든다. 커진 눈망울은 호기심을 충족하느라 여념이 없고, 들뜬 몸은 가만있질 못하고 왔다갔다 부산스럽다. 수족관이나 과학박물관, 생물체험관 같은 곳에서 주말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어쩔 수 없이 따라온 엄마, 아빠에게 연신 질문을 해대는 꼬마들은 답을 채 듣기도 전에 다음 칸으로 이동 중이다. 특히 공룡 뼈는 세대가 바뀌어도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구가한다. 사후에 이렇게 인정받을 줄을 꿈에나 알았을까, 공룡 녀석들이. 그런데 반나절 실컷 재미있게 놀다 가는 이 모습은, 한평생 일관되게 동물을 테마로 살아온 나에겐 가장 신기한 현상 중 하나이다.


애들이 공룡 따위에 열광하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것은 물론 아니다. 부모가 자식이 커서 되길 바라는 상과 무관하게, 어린 시절에는 늘 동물의 세계로 인도해준다는 사실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같은 현상을 반대로 말해서, 동물에 신이 나던 그 많던 애들이 커서 다 뭘 하고 있나 의아한 것이다. 사회적 정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이 아이들은 마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한 아이도 빠짐없이 그대로이지만 소위 말하자면 좀 더 ‘철’이 들었고, 좀 더 어른스러워진 것뿐이다. 한때의 유치한 관심사와 취미는 졸업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사람구실하기 위해서는 보다 심각한 분야에 몸을 맡길 줄 알아야 한다. 애나 어른이나 똑같이 갖고 있는 일종의 삶의 철학이다. 개중에는 이 대세에 적극 동참하지 않는 소수파도 있다. 하지만 이중에는 좀 더 나중의 시점에 전향하는 시한부 소수파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단연 먹고살기이다. 술자리마다 오가는 진솔한 대화에서 이 핵심어가 빠지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나도 먹고살아야지!” 가장 기초적인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데, 그저 연명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데, 여기에다 대고 뭐라고 할쏘냐. 생물의 대사와 생리에 대한 욕구는 정당화가 필요 없는 마땅함이다. 이토록 너무나도 근본적인 명제가 피어나는 이야기꽃마다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모두가 진짜로 음식 자체를 구하는 일이 그리도 고달픈 것인가? 


사실은 정반대이다. 최소한의 생존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에, 목숨만 부지하기는커녕 체면과 성공욕을 정당화하고자 할 때에, 먹고살기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굴지의 대기업 임원이나 고액연봉자의 노고도 다 먹고살기 위한 소행일 뿐이다. 판사, 변호사, 의사와 같은 전형적인 인기 전문직을 선택하는 이유도 순수하게 먹고살기 위해서란다. 남에게 인정받고 남보다 부유하게 살고자 하는 가장 세속적인 정신을 미화하기 위해, 최저임금 생활자나 노숙자가 절절하게 꺼낼 말을 가로챈 것이다.


중견 배우 양재원씨가 힘없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출처 :경향DB)


정말로 밥만 있으면 충분하고, 그것 하나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며 사는 동물을 생각하면 사람들의 이런 푸념은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끝도 없이 줄어드는 녹지에 매달려 점점 사각지대로 밀려난 동식물이야말로 말없이 생존권을 호소하고 있다. 사람살기도 힘든 세상에 웬 짐승까지 챙기나? 문제의 우선순위를 지적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가 다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동물의 차례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이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적어도 연봉과 승진, 스펙 따위의 고민을 먹고살기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공룡화석에 넋을 잃던 아이들이 이 기형적인 생존경쟁에서 조금만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 중 한두 명이라도 커서도 공룡과 관계된 일을 할 수 있다면, 이 땅의 직업다양성은 풍부해질 수 있다. 생물다양성이 높을수록 생태계가 건강한 것처럼, 사회도 여러 다른 삶과 직종이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을 때 발전한다. 인간사에 대해 무지한 동물학자의 망상만이 아니다. 최근 세계적 권위의 이코노미스트지는 한반도 특집 기사를 통해 한국의 성공은 깊지만 넓지 않다고 지적했다. 남한의 직업 수는 일본의 3분의 2, 미국의 38%에 불과하다고 한다. 좋아하던 것을 버리더라도 뱀의 머리보다 용의 꼬리를 고집하는 한국인들에게,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일침으로 이 기사는 말을 맺는다. 나름의 먹고살기에 혈안이 된 우리들이 곰곰이 반성해볼 만한 대목이다. 어쩌면 그토록 자주 입에 올리는 먹고살기가 정답인지도 모른다. 원래의 소박한 뜻에 맞게 삶을 단순하게 대하고 그에 흡족할 수 있다면, 실제로 모두가 함께 먹고살기 쉬워지지 않을까, 야생학교는 생각해본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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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켜면 화면 오른쪽 상단에 숫자가 떠 있는 걸 볼 수 있다. 프로그램에 담긴 선정성, 폭력성, 잔인성에 따라 시청이 가능한 최소 나이를 나타내주는 숫자다. 남세스러운 장면 잘못 봤다가 우리 애 이상한 짓 할라. 때려 부수는 거 자주 봤다가 우리 아이 성격 나빠질라. 자라나는 이 땅의 꿈나무들에게 가능한 한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마음이 담긴 정책으로, 그 효과에 대해선 회의적이더라도 그 취지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좋은 걸 보고 자라야 좋은 사람 되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식만큼은 더 나은 삶으로 끌어올리려는 전 국민적 교육열이, 이 나라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라 해도 아마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바마도 툭하면 한국의 교육정신을 들먹이는 걸 보면 세계적으로도 우리가 유난스러운 축에 속하는가 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상하게도 뭔가 먹을 때만 되면 교육에 대한 이런 섬세한 고려는 깡그리 사라진다. 식사예절이나 편식 교정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하나의 생명으로서 음식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얘기다. 식당 바깥에서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횟집 앞 수조의 물고기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아예 하나를 지목해서 “요놈으로 잡아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한다. 물고기가 몸을 돌릴 수조차 없이 꽉 찬 광경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대게와 광어가 물건처럼 포개져 쌓여 있지만 엄마 아빠는 싱글벙글하기만 한다. 고깃집 간판에는 닭, 돼지, 소가 각각 스스로의 살코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입맛을 다시며 엄지손가락을 자랑스럽게 세우고 있다. 먹히는 자가 맛있어 하는 이 괴기스러운 모순은 그저 하찮은 디테일로 식당을 선정하는 데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 건 물론이다.


이보다 더한 것은 식당 안에서 벌어지는 ‘자극적인’ 장면과 대화다. 산 새우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의 새우를 그 자리에서 껍질 벗겨 먹는데, 녀석들이 튀어 나가지 않도록 수건으로 덮어놓고 하나씩 잡아 꿈틀거리는 걸 그냥 초장에 찍어 잡순다고 한다. 펄펄 끓는 물에 산 채 넣는 경우도 있다. 살려고 바동거리는 새우들이 뚜껑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어른들은 그저 태평이다. 어떤 이들은 소금구이로 먹으라고 파는 새우를 굳이 산 채로 달라고 해서 까먹기도 한다. 토막이 되어 참기름을 더듬는 산 낙지는 너무나 정당하고 소중한 우리의 전통문화라 아예 논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미꾸라지가 끓는 물을 피해 두부 속으로 도망치도록 해서 만든다는 추어탕도 비슷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토록 대놓고 즐기는 살육의 현장에서는 오고가는 대화도 이에 걸맞게 엽기적이다. “새우는 살아서 톡톡 튀는 걸 먹어야 제맛이지!” “역시 갓 잡은 게 맛있어!” 모두 어린아이나 청소년이 쉽게 드나드는 식당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다. 애들 몰래 찾는 곰쓸개나 개소주까지 갈 것도 없다.


바다를 컨셉트로 꾸며진 신당창작아케이드 내 횟집들 (출처: 경향DB)


한손에 동물 인형을 쥐고, 평소에 <니모를 찾아서>를 즐겨 보던 어린아이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어젯밤 바다용궁 이야기책을 읽어주던 엄마 아빠의 인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살아있는 생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런 식생활과 태도는 벌어지는 매끼마다 아이들에게 생명을 대하는 그릇된 자세를 은연중에 가르친다. 나의 관점에서는 적나라한 포르노를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면서 성교육이 성공하길 바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국제학계에서는 물고기가 아픔을 느끼는지를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수백년 동안 이어져온 이 논쟁의 쟁점은 다음과 같다. 물고기도 아픔을 감지하는 신경조직을 어느 정도 갖고 있지만, 아픔에 대해 무의식적인 반사신경 반응을 보이는 것뿐인지, 아니면 진정 의식적으로 아픔을 인지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물고기도 아파한다는 진영은 단순 반사신경이 아닌 행동을 근거로 내세우고, 반대 진영은 물고기가 의식의 핵심인 전뇌피질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요 증거로 든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이런 논쟁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물고기의 아픔이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의식적 아픔과 동일해야 아픔으로서 유효한 것은 아니다. 어떤 저차원적인 신경생물학적 수준에서 벌어지든, 뭔가는 분명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부림을 치고 이리저리 비틀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그거면 된 거다. 과학자들의 입장정리와 상관없이, 물고기도 새우도 생명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생명 존중보다 중요한 교육은 없다. 섬뜩한 ‘19금 밥상’에서부터 교육은 시작된다고, 야생학교는 믿는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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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이다. 지금 이 순간 앉아서 이 글을 쓰는 대신, 마음먹기에 따라 나는 책상 위로 올라가 플라멩코 춤을 출 수도 있고, 느닷없이 춘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을 수도 있다. 순간마다 무한대로 열려 있는 삶의 옵션들 중에서 어떤 한 가지를 선택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보다시피, 춤과 여행을 잠시 접어두고 글쓰기를 하기로 결정한 데에 야생학교와의 약속이라고 하는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쩡한 옵션들 다 제치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선택을 할 경우에는 대체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핵심어는 ‘굳이’이다. 질문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띤다. “왜 ‘굳이’ x를 해야만 하는가?” 빈 공간 다 놔두고 통로를 막고 잡담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왜 ‘굳이’ 그곳에 서서 통행을 방해해야 하는 것인지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린다. 물론 관찰자가 모르는 이유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혼자만의 사적인 영역에서라면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생명과 관계된 것이라면 ‘굳이’ x를 하려는 쪽에서 설명과 설득의 부담을 지는 것이 당연하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세계 최초로 ‘보이지 않는 빌딩’이 세워진다는 소식이 국내외 언론을 통해 최근 보도됐다. ‘타워 인피니티’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표면에 LED 프로젝터와 카메라를 설치해서 주변의 풍경 영상을 실시간 투사함으로써 마치 건물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건물의 위치는 다른 모든 곳을 ‘굳이’ 제치고 인천공항 주변을 임지로 인천시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은 상태이다. 이른바 ‘투명 빌딩’에 비행기나 새가 충돌하지 않겠냐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일차적인 질문에, 담당 건축회사인 GDS 아키텍트의 찰스 위는 포브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비행기나 새는 건물을 투명하게 보진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한마디로 진짜 투명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정해진 몇 군데의 특정 지점에서만 투명하게 보이도록 설계된 데다가, 기존 비행기 항로상에 위치하고 있지 않아 안전상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타워 인피니티 조감도(출처 :경향DB)


이건 뭘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말씀이다. 특히 새에 대한 발언이 그렇다. 멀쩡히 보이는 건물에조차 새가 충돌해서 죽는 경우는 이미 심각한 생태적 문제이다. 미국에서만 한 해에 10억 마리의 새가 유리나 건축 구조물에 충돌하여 사망한다. 건물 충돌은 서식지 파괴 다음으로 인간의 영향으로 인한 조류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다. 새들은 투명 또는 반사 유리, 플라스틱 표면을 장애물로 인지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앉은 자리에서 1m 떨어진 유리로 돌진하기도 한다. 또한 새는 날 때 앞보다는 아래를 보는 경향이 있으며, 인간처럼 양안이 앞으로 배열되지 않고 삼차원 공간에서 움직임을 인지하도록 머리 양옆에 있어서, 이동 방향에 집중된 고해상도 시각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새들이 바보라서 부딪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지어놓은 괴물 같은 건물을 감당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 투명한 고층빌딩이라니?


진짜 투명하건, 특정 각도에서만 투명하건 간에, 시각정보의 감소는 부분적으로 이뤄지더라도 이동하는 새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인천지역은 중요한 철새도래지인 서해안 갯벌과 인접한 곳인 만큼 위험은 불 보듯이 아니라 불에 타듯 뜨겁고 뻔하다. 최첨단의 기술과 엄청난 자본을 들여, 공항 근처에 안 보이는 건물을 짓지만 안전하다고 하는 프로젝트. 이 사업이 안은 겹겹의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대목은 건축의 배경 ‘철학’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찰스 위는 경쟁률 높은 공모전을 통과하기 위해 고층건물에 흔히 요구되는 랜드 마크 개념을 뒤집었다고 한다. 더 ‘보이려고’ 하는 기존의 건물과 정반대로 오히려 ‘안 보이게’ 함으로써 랜드 마크의 개념을 재정의했다면서, 노자의 도덕경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보다 노자의 사상을 잘못 해석한 사례는 역사상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와 자연 관조를 강조한 도가사상은 이 흉측한 반생태적 구조물을 조금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노자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분명히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왜 ‘굳이’ 행(爲)하려 하는가? 야생학교도 함께 묻는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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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을 적시는 가을비가 임박한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가을이 서늘한 공기와 우수의 기운을 대동하고 머무는 것도 잠시, 좀 즐길라치면 금세 추워져 한겨울 속에 폭 빠져 있을 것이다. 


주섬주섬 옷장에 넣어두었던 스웨터와 외투를 꺼내본다. 묵혀둔 나프탈렌 냄새가 가시고 나면 두툼한 섬유의 보드라운 촉감에서 추운 날씨의 정취가 느껴진다. 시원하고 강렬한 색으로 꾸몄던 여름 맵시도 좋았지만, 따뜻하고 그윽한 분위기의 가을·겨울 패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과일처럼, 제철의 미가 있는 법이다.


 

가을꽃 심으며 즐거운 동심 (출처 :경향DB)



문제는 바람이다. 기후변화의 탓인지, 언제부터인가 바람이 부쩍 세져서 외출 준비를 할 때 반드시 감안해야 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머리를 잘 만지고 나와도 바람의 거친 손길에 헝클어져 엉망이 되어버린다. 왁스 한 통을 다 발라 머리카락을 거의 고형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은 이상 헤어스타일을 바람으로부터 온전하게 지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미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도시의 패셔니스타에게 자연의 이런 몰지각한 비협조는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젠장, 왜 이렇게 바람이 부는 거야?


그런데 갑자기 새 한 마리가 홀연히 나타난다. 한 점 흩트림도 없이 가지런한 깃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선명한 색상은 어디 하나도 하자가 없다. 


실내생활이라고는 한순간도 하지 않는 이놈의 짐승이 대체 무슨 수로 저렇게 완벽한 외모를 유지하는 걸까? 거친 날씨에 노출된 채 평생을 살면서도 마치 고급 신사복 같은 차림새를 늘 구사하는 이들의 모습은 신기하기만 하다. 


실제로 병들거나 다친 경우가 아니라면, 상태가 엉망인 동물을 보는 일은 거의 없다. 바깥에서 아무 데나 자는 녀석들인데 아침에는 머리라도 좀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머리가 아무렇게나 ‘떡 진’ 참새를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새든, 다람쥐든, 꿀벌이든, 모두 더할 나위 없는 단정한 차림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야생동물의 아름다움은 재료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득하게 되는 멋이지 추가적인 자원이 대거 동원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홍학의 화려한 분홍빛은 그들이 먹는 새우 등의 갑각류에서 저절로 얻는 색소이다. 인간에겐 마치 부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표범의 멋진 털은 정글 나뭇잎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도록 진화해온 그들의 유전적 자산이다. 물론 동물들도 자신을 꾸미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고양이과 또는 개과 동물은 열심히 털을 털고, 핥는 게 일이다. 영장류들은 틈만 나면 서로 털 고르기를 하고, 새들은 등 뒤쪽에 난 기름샘을 부리로 찍어 깃털에 발라 깨끗하게 관리한다. 하지만 전부 스스로의 힘을 조금 들여서 하는 ‘그루밍(grooming)’이지 온갖 외부 인프라와 물질의 투입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 어느 형형색색의 동물이라도 최소한의 자원으로 돌아가는 미(美)를 뽐낸다.


미국 베어 컨트리 야생동물 사파리 (출처 : 경향 DB)


그 다음부터 나올 얘기는 자명하다. 평생 거친 야외에 살아도 멋지기만 한 동물들 보기에 무색하게, 우리 인간은 아름다움과 위생이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자원을 소비하고도 솔직히 별로 예쁘지 않다.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온갖 화학 화장품으로 얼굴을 겹겹이 에워싸고, 거인의 머리카락을 다 감고도 남을 만한 양의 샴푸를 매일 하수구로 흘려보낸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모피를 버젓이 걸치고 멋이라며 활보하고, 아프리카의 가뭄에 대한 처절한 뉴스가 빗발쳐도 여전히 물을 물 쓰듯이 한다. 


모 여대의 학보사에서 수 년 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한 달 동안 학생 일인당 사용한 휴지의 양이 약 151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보통의 화장지 롤이 약 35미터인 걸 감안하면 어림잡아 매월 4~5통이 소비되는 셈이다. 학교에서 쓴 것만 이 정도이지 여기에 집에서 사용한 휴지, 카페나 식당에서 마구 뽑아 쓴 냅킨, 부엌에서 뜯겨져 나가는 키친롤 등등을 헤아리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자연의 폐허를 밟고 출퇴근, 등하교 하는 이들이 그리도 가꾼 나름의 ‘스타일’은, 덤불 속에서 지저귀는 새의 소박한 단아함에 비추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스타일은 엉뚱한 강남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스타일이라고, 야생학교는 믿는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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